SW.7 심화 1, ‘왜 가난한 사람에게는 고운 가루 한 줌까지 속죄제가 될 수 있었을까?’
SW.7 심화
1. ‘왜 가난한 사람에게는 고운 가루 한 줌까지 속죄제가 될 수 있었을까?’
레5의 속죄제에서 가장 따뜻한 장면 가운데 하나는 제물이 사람의 형편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입니다. 형편이 되는 사람은 어린양이나 염소를 드리지만, ‘그의 힘이 어린 양을 바치는 데에 미치지 못하면’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것조차 감당할 수 없으면 고운 가루 십분의 일 에바를 가져오면 됩니다. 실제로 레5:7과 11은 경제적 능력에 따라 이 대체 제물을 명시합니다.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영적 원리가 보입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길은 인간이 가진 외적인 재산의 크기에 의해 결정되지 않습니다. 어린양을 드릴 수 없는 사람에게 비둘기의 길이 있고, 비둘기조차 드릴 수 없는 사람에게 고운 가루의 길이 있습니다. 제물의 외적 크기는 달라도 ‘제사장이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는 결론은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없는 것을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 사람이 실제로 가진 상태 안에서 당신께 돌아올 길을 열어 주시는 분입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833(창15:10)은 레5:7-8을 직접 인용하면서 속죄제에 사용된 비둘기 역시 제사의 상응 질서 안에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값싼 제물을 드린 사람의 예배가 값비싼 제물을 드린 사람보다 영적으로 열등하다고 읽어서는 안 됩니다. 각 제물은 서로 다른 영적 상태를 표상합니다. 중요한 것은 외적 가격이 아니라 그 사람이 주님 앞에서 실제로 응답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가장 놀라운 것은 마지막 단계입니다. 동물도 새도 없이 ‘고운 가루’만으로 속죄제가 됩니다. 이것은 레위기의 제사에서 피가 매우 중요하다고 해서 모든 개별 속죄제에 반드시 동물의 피가 있어야만 사함이 가능했다고 단순화할 수 없음을 본문 자체가 보여 주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레5:11-13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은 고운 가루를 가져오며, 제사장은 그것의 한 움큼을 제단에서 불사르고 그를 위하여 속죄하며, 본문은 똑같이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고 선언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속죄 이해와도 잘 어울립니다. 구원의 능력이 동물의 물질적 피 자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제사가 주님의 신적 구원 역사와 인간의 정결을 표상했기 때문입니다. 외적인 제물은 달라질 수 있지만 실제로 인간을 악과 거짓에서 정결하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가진 것이 적은 사람이라고 해서 주님의 정결과 사함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이 장면은 오늘 우리에게도 큰 위로가 됩니다. 우리는 때때로 주님께 나아가기 위해 무엇인가 충분히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이 더 좋아져야 하고, 마음이 더 깨끗해져야 하고, 기도도 더 잘해야 하며, 회개도 더 깊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회개는 완성된 사람이 주님께 가져가는 제물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완성해 가시도록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그분께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레5의 제물은 점점 작아지지만 사함은 작아지지 않습니다. 어린양을 가진 사람에게도 길이 있고, 비둘기밖에 없는 사람에게도 길이 있으며, 한 줌의 고운 가루밖에 없는 사람에게도 길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제물의 시장가격이 아니라 그 사람이 진실하게 악을 인정하고 주님께 돌아오는가입니다. 거듭남의 문턱에는 ‘이만큼 가진 사람만 들어올 수 있다’는 표지판이 없습니다. 가장 가난한 사람에게까지 정결과 사함의 길을 열어 놓으신 것이 레5의 아름다운 아르카나 가운데 하나입니다. (SW.7 레5 심화 1)
SW.7 심화 2, ‘왜 자복만으로 끝나지 않고 보상까지 해야 했을까?’
SW.7 심화2. ‘왜 자복만으로 끝나지 않고 보상까지 해야 했을까?’ 레5 전반부에는 ‘잘못하였노라 자복하고’라는 말씀이 나오지만 후반부의 속건제에 들어가면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bygrace.kr
SW.7, 레5, ‘잘못하였노라 자복하고 - 죄를 인정하는 데서 보상에 이르는 거듭남의 길’
※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
bygrac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