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레6.심화4, ‘왜 제사장은 제물을 먹어야 했을까? - 거룩한 것을 자기 삶으로 삼는다는 것’
SW.레6.심화
4. ‘왜 제사장은 제물을 먹어야 했을까? - 거룩한 것을 자기 삶으로 삼는다는 것’
레6에는 현대 독자에게 조금 낯선 장면이 반복됩니다. 하나님께 드린 소제와 속죄제의 일부를 제사장이 먹습니다.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는데 왜 그 제물을 다시 사람이 먹는 것일까요? 단순히 제사장들의 생활을 위한 식량 공급 규정만으로 보면 이 반복되는 ‘먹음’의 영적 의미를 놓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부분을 매우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2177(창18:6)은 레6:13-17을 직접 인용하면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소제의 나머지를 먹는 것은 인간의 ‘상호성’과 ‘자기 것으로 삼음’을 표상하며, 그 결과 사랑과 체어리티를 통한 결합이 이루어진다고 설명합니다.
AC.2187(창18:8)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먹는 것’ 자체가 교통과 결합과 자기 것으로 삼음을 의미한다고 설명하면서 레6:16, 18, 26을 직접 열거합니다. 거룩한 제물을 먹는 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천적·영적 선을 받아들여 그것이 인간 안의 실제 생명이 되는 것을 표상한 것입니다.
여기서 ‘자기 것으로 삼음’은 선의 근원이 인간 자신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인간이 자유롭게 받아들여 마치 자기 의지에서 행하는 것처럼 살아가는 상태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이 밖에 놓인 교리로만 남아 있지 않고 내가 실제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읽고 ‘좋은 말씀이구나’라고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아직 먹은 것이 아닙니다. 용서하라는 말씀을 읽었다면 실제 용서하려고 싸우고, 정직하라는 말씀을 읽었다면 손해가 와도 정직을 선택하며,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읽었다면 실제 이웃의 필요를 돌아볼 때 비로소 그 진리가 삶의 일부가 됩니다.
그래서 제사장은 거룩한 것을 아무 곳에서나 먹지 않고 ‘거룩한 곳’, 곧 회막 뜰에서 먹습니다. 주님의 선을 자기 것으로 삼는 일은 proprium이 그것을 차지하는 일이 아니라 주님의 임재와 질서 안에서 받아들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선을 행하지만 그 선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듭남의 중요한 목표입니다. 주님의 진리가 계속 내 밖에 있는 명령으로만 남아 있으면 우리는 억지로 순종합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선과 결합하여 우리 안에 받아들여지면 어느 순간 그 일을 사랑해서 행하기 시작합니다. 밖에 있던 말씀이 안으로 들어와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레6에서 제사장이 제물을 먹는 장면은 제사의 부수적인 뒤처리가 아닙니다. 제단에서 주님께 드려진 것이 다시 인간에게 돌아와 인간의 생명이 되는 순간입니다. 거듭남은 악을 버리는 것으로만 완성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그것을 먹고, 자기 삶으로 삼고, 마침내 사랑과 체어리티로 살아가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SW.레6 심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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