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415 심화 2, ‘렘6:3은 심판의 장면인데 왜 천적 교회의 상응을 설명하는 데 인용되었는가?’
AC.415 심화
2. ‘렘6:3은 심판의 장면인데 왜 천적 교회의 상응을 설명하는 데 인용되었는가?’
AC.415의 마지막 인용인 렘6:3은 앞서 나온 양 떼와 목초지의 말씀들과 분위기가 다릅니다. 렘23:3에서는 주님께서 흩어진 양 떼를 모으시고, 겔34:14에서는 좋은 꼴로 먹이십니다. 그러나 렘6장은 예루살렘을 향한 위협을 선포하는 문맥입니다. 그 가운데 목자들과 가축 떼가 ‘딸 시온’에게 와서 그 주위에 장막을 치고 각기 자기 자리를 차지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인용한 뒤 ‘딸 시온’은 천적 교회를 나타내며, ‘장막’과 ‘가축 떼’가 그 교회에 관하여 사용되는 표현이라고 설명합니다. 심판을 알리는 장면이 어떻게 사랑의 거룩한 것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을 밝히는 근거가 될 수 있습니까?
먼저 렘6:3의 문자적 문맥을 지워서는 안 됩니다. 이 장에서 예루살렘은 위협을 받고 있으며, 목자들이 양 떼를 데리고 와 장막을 치는 모습도 그 위협의 흐름 안에 놓여 있습니다. 따라서 이 장면을 ‘목자들이 시온을 보호하려고 모여들었다’거나 ‘가축 떼가 평화롭게 먹으므로 천국의 안식이 이루어졌다’고 풀이하면 본문의 방향이 바뀌어 버립니다. 말씀의 속뜻을 살핀다는 이유로 문자적 장면을 그 반대의 이야기로 고쳐 읽어서는 안 됩니다. 성도들이 실제 성경을 펼쳐 읽었을 때에도 설명이 본문과 충돌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에서 직접 밝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의 설명은 짧고 분명합니다. ‘딸 시온’은 천적 교회를 나타내며, ‘장막’과 ‘가축 떼’가 그 교회에 관하여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목자들의 정체를 선한 인도자로 풀이하지도 않고, 장막을 치는 행위를 교회의 보호라고 설명하지도 않으며, 각기 자기 자리를 차지하는 일을 천국에서 각자의 수용 능력에 따라 선을 받는 상태라고 풀이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AC.415를 해설하는 우리도 그가 직접 밝힌 범위를 먼저 지켜야 합니다.
이 구절이 인용된 이유를 이해하려면 AC.415의 질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증명하려는 것은 야발의 ‘가축’이 사랑의 거룩한 것에서 나오는 선을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를 위해 그는 말씀에서 가축과 그에 관련된 표현들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살펴왔습니다. 렘6:3에는 ‘딸 시온’, ‘장막’, ‘가축 떼’가 한 구절 안에 함께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적 교회를 나타내는 시온과 관련하여 장막과 가축 떼가 함께 언급된다는 점을 근거로 삼습니다. 그 구절의 문자적 장면 전체가 평화롭기 때문에 인용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사용된 표현들이 그의 논증과 관련되기 때문에 인용한 것입니다.
이것은 말씀의 속뜻을 읽을 때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어떤 구절에서 특정 표현의 속뜻을 밝힌다고 해서, 그 구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과 행동을 같은 방향의 긍정적인 뜻으로 풀이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렘6:3의 문자적 장면은 경고의 문맥에 그대로 두면서, 스베덴보리가 그 가운데서 주목한 ‘딸 시온’, ‘장막’, ‘가축 떼’의 관계를 살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장막은 사랑의 거룩한 것’이라는 설명만 붙들고 그 장막을 치는 모든 행동까지 거룩한 행위로 단정하면, 상응을 읽는 일이 본문을 이해하는 일이 아니라 본문 위에 다른 이야기를 덧씌우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기존 심화의 몇몇 설명은 수정되어야 합니다. ‘장막을 친다’는 것을 곧바로 ‘교회가 사랑 안에서 보호되고 질서를 이루는 상태’라고 하거나, ‘각기 그 처소에서 먹인다’는 것을 ‘각 사람이 자기 상태에 따라 선과 진리를 공급받는 것’이라고 한 부분이 그렇습니다. 그러한 설명이 다른 저작이나 다른 문맥에서 논의될 여지는 있더라도, AC.415는 이 구절을 그렇게 풀이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렘6장의 문자적 문맥까지 고려하면, 이 해석들을 이번 번호의 직접적인 결론으로 제시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말한 것과 우리가 더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을 구별하는 것이 충실한 해설의 출발점입니다.
그렇다고 렘6:3이 AC.415에서 어색하게 끼어든 인용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앞의 AC.414에서 장막의 의미를 밝힌 뒤, 이번 번호에서 가축의 의미를 밝히는 흐름을 생각하면 이 구절의 위치가 분명해집니다. 장막과 가축 떼가 천적 교회를 나타내는 시온과 관련하여 함께 등장한다는 사실은, 야발의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라는 표현을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장막은 사랑의 거룩한 것을, 가축은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을 나타냅니다. 렘6:3은 이 두 표현이 천적 교회와 관련하여 함께 사용되는 말씀의 한 사례로 제시된 것입니다.
성도들이 여기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상응의 낱말 뜻만이 아닙니다. 말씀의 속뜻을 읽을 때에는 먼저 문자적 문맥을 정직하게 살피고, 이어서 스베덴보리가 그 문맥에서 실제로 무엇을 풀이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직접 풀이하지 않은 부분을 그럴듯한 설명으로 채워 넣는 일은 신중해야 합니다. 렘6:3은 심판의 장면이라는 사실을 그대로 인정하면서도, 그 안에 등장하는 장막과 가축 떼가 AC.415의 논증에 어떤 근거를 제공하는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읽기가 말씀의 문자적 의미와 속뜻을 서로 경쟁시키지 않으면서 함께 존중하는 길입니다. (AC.415 심화 2)
AC.415, 창4:20, ‘가축의 조상은 왜 사랑의 거룩한 것에서 나오는 선을 뜻하는가?’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창4:20) AC.415‘가축의 조상’(father of cattle)이 사랑의 거룩한 것들에서 나오는 선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이 장 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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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5 심화 1, ‘우리와 목초지와 가축은 왜 사랑에서 나오는 선을 뜻하는가?’
AC.414 심화1. ‘우리와 목초지와 가축은 왜 사랑에서 나오는 선을 뜻하는가?’ AC.415에는 양 떼와 가축뿐 아니라 우리, 목초지, 떡, 밀, 기름, 새 포도주가 잇달아 등장합니다. 이 많은 표현을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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