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104, 씨네마톡, ‘시티즌 비질란테’(Citizen Vigilante, 2026)
※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 영상을 보는 동안 마음이 불편한 까닭은 단순히 폭력적인 장면이 등장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더 불편한 것은 우리가 주인공의 행동을 어느 순간 ‘이해하게 된다’는 데 있습니다. 영화는 먼저 무고한 사람이 잔혹한 범죄의 희생자가 되고, 법과 제도가 피해자를 충분히 보호하지 못하며, 가해자들이 그 틈을 빠져나가는 상황을 보여 줍니다. 그러고는 비질란테를 등장시킵니다. 사람들은 그를 ‘쓰레기를 치우는 사람’, ‘무력한 사람들을 돕는 진짜 기사’라고 환호합니다. 여기서부터 이 작품은 관객에게 위험한 질문 하나를 건넵니다. ‘법이 정의를 실현하지 못한다면 누군가는 대신해야 하지 않는가?’
이 질문이 강력한 까닭은 그 출발점에 분명한 진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악은 악입니다. 강간과 살인, 폭력과 약탈을 ‘그 사람에게도 사정이 있었을 것’이라는 말로 희석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체어리티는 악을 선이라고 부르는 무조건적인 관용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정한 체어리티는 악이 계속해서 이웃을 해치지 못하도록 막는 일을 포함합니다. 사회의 법과 재판과 형벌도 이런 관점에서는 단순한 세속 제도가 아니라 공동선을 보호하기 위한 질서의 한 부분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피해자의 고통을 외면하면서 가해자를 무조건 용서하라고 말하는 렌즈가 아닙니다. 악을 악이라고 분명히 보고, 그것을 제어하고, 무고한 사람을 보호해야 합니다.
그래서 영화 중간의 피해자 장면은 특히 곤혹스럽습니다. 비질란테는 피해자에게 재판이 몇 년이나 걸릴 수 있고, 그동안 피해자가 자신이 당한 일을 계속 증언해야 하며, 판결이 어떻게 나올지도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그것이 당신이 원하는 정의입니까?’ 이어서 ‘정의를 원합니까?’라고 묻습니다.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쉽게 ‘그렇다면 저 사람이 처리하는 편이 낫지 않은가?’ 하는 마음으로 넘어갑니다. 바로 이것이 이 영화에서 가장 주의 깊게 보아야 할 지점입니다. ‘악에 대한 분노’와 ‘악인에 대한 증오’가 거의 구별되지 않는 지점까지 서로 가까이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이 둘은 결코 같은 것이 아닙니다. 악을 미워하는 것은 그 악 때문에 사람이 파괴되고 이웃이 고통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악인을 증오하면서 그의 고통과 파멸 자체에서 쾌감을 느끼기 시작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그 순간 중심은 더 이상 ‘이웃을 악에서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저 사람에게 고통을 돌려주는 것’으로 이동합니다. 정의의 외형을 하고 있지만 그 내면에는 복수의 쾌감이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 영화가 섬뜩한 것은 바로 이 변화가 매우 자연스럽게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무고한 사람을 보호합니다. 다음에는 범죄자를 응징합니다. 그러다가 경찰에게까지 ‘나를 방해하면 죽이겠다’고 말합니다. 정의를 집행한다고 시작한 사람이 어느 순간 자신이 무엇이 정의인지 결정하고, 누가 악인인지 판결하고, 형량까지 정하며, 마침내 자신을 막는 공권력까지 제거할 권한이 있다고 여기게 된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장면은 판사를 찾아가는 대목입니다. 비질란테는 미성년자를 집단 성폭행한 가해자들이 엄중한 처벌을 받지 않은 책임을 판사에게 묻습니다. 영화 속 판사는 이들의 범죄를 사회 통합의 실패와 연결하고 가해자들도 일종의 피해자라고 설명합니다. 그러자 비질란테는 그 판사를 피해자를 해친 사람들과 사실상 같은 편에 놓습니다. 관객의 분노를 극대화하도록 만들어진 장면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함정이 있습니다. 잘못된 판결을 비판하는 것과 ‘그러므로 내가 그 판사를 심판할 권리가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정의가 훼손되었다는 사실이 자동으로 개인에게 최종 심판권을 부여하지는 않습니다. 질서의 실패가 ‘나 자신이 질서가 되어도 된다’는 결론으로 이어지는 순간, 비질란테는 자기가 싸우던 악의 논리를 닮기 시작합니다.
마지막 집단 성폭행 가해자들을 찾아가는 장면은 이 문제를 극단까지 밀어붙입니다. 영화는 가해자들이 진정으로 뉘우치지 않았다는 정황을 일부러 제시합니다. 한 사람은 피해자가 옷을 그렇게 입었기 때문에 그런 일을 당했다는 취지의 말을 하고, 비질란테는 그 가족에게까지 책임을 추궁합니다. 결국 감옥을 피했던 사건 관련자들은 모두 죽습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분노가 치밀고 ‘저런 자들은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한다’고 느끼는 것 자체와, 그들이 고통받고 죽는 모습을 즐기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바로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관객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나는 지금 정의가 회복되기를 바라는가, 아니면 저 인간들이 처참하게 당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가?’ 두 마음은 겉으로 매우 비슷하지만 영적으로는 전혀 다른 근원에서 나올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심판은 인간의 복수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주님은 악인을 미워해서 지옥에 던지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흘러나오는 것은 오직 사랑과 선이며, 심판조차도 질서를 회복하고 선한 자들을 악에서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지옥의 형벌 역시 ‘당한 만큼 갚아 주시는’ 신적 보복이라기보다 악이 다른 존재를 무제한으로 해치지 못하도록 억제하는 질서와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인간 사회에서도 형벌의 정당성은 ‘저 사람이 얼마나 고통받아야 내 분이 풀리는가’가 아니라 ‘악을 어떻게 억제하고 무고한 이웃을 어떻게 보호하며 무너진 질서를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에 있어야 합니다. 똑같이 엄한 형벌이라도 그 내면의 목적은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체어리티를 단순한 ‘착함’이나 ‘봐주기’로 이해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는 어쩌면 비질란테만이 아닙니다. ‘그를 환호하는 사람들’이며, 더 깊이 들어가면 영화를 보면서 어느새 그를 응원하게 되는 ‘우리 자신’입니다. 작품 속 사람들은 ‘우리나라에도 저런 사람이 필요하다’고 환호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proprium은 기묘합니다. 처음에는 ‘무고한 사람을 보호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다음에는 ‘악인은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까지는 옳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한 걸음에서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고통을 주어도 된다’고 넘어갑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가 고통받는 것을 보니 속이 시원하다’가 됩니다. 이때 선과 진리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음에도 그 내면에는 이미 복수와 증오가 들어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옥적인 것은 언제나 처음부터 ‘나는 악이다’라고 말하며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나는 정의다’라는 얼굴을 하고 들어옵니다.
그렇다고 이 영화를 보고 ‘그러니 분노해서는 안 된다’고 결론 내려서도 안 됩니다. 그것 역시 너무 단순합니다. 무고한 아이가 성폭력을 당하고, 사람이 살해되고, 가해자가 피해자를 조롱하는데도 아무런 분노가 없다면 그것을 반드시 영적 성숙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에는 이웃을 파괴하는 악에 대한 거부가 있습니다. 문제는 그 거부가 어디를 향하느냐입니다. ‘악이 멈추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악한 사람이 파멸하기를 원하는가.’ 전자는 질서를 향하고 후자는 복수를 향할 수 있습니다. 물론 현실의 마음에서는 이 둘이 너무나 쉽게 섞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신의 분노를 정의라고 즉시 성별해서는 안 됩니다.
결국 ‘시티즌 비질란테’가 ‘스베덴보리의 렌즈’ 앞에서 던지는 질문은 ‘저 비질란테가 옳은가, 법원이 옳은가?’ 정도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훨씬 더 불편한 질문으로 돌아옵니다. ‘나는 악을 미워하는가, 아니면 악인을 미워하는가?’, ‘나는 피해자가 보호받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가해자가 고통받는 것을 보고 싶은가?’, ‘나는 정의를 원하는가, 아니면 정의라는 이름으로 나의 분노가 허락받기를 원하는가?’
이 구별 앞에서는 저 역시 쉽게 자신할 수 없습니다. 끔찍한 악행을 보면 마음이 흔들리고, 법이 그것을 제대로 막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면 분노가 일어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이 렌즈를 내려놓을 때가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이 들여다보아야 할 때인지도 모릅니다. 악을 선이라 하지 않되 악인을 향한 증오에 자신을 내어주지도 않고, 피해자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되 복수를 정의로 착각하지도 않으며, 필요한 형벌과 질서는 단호하게 세우되 인간의 최종적인 내면과 영원한 운명에 대한 심판은 주님께 남겨 두는 것, 그것이 이 잔혹하고 불편한 영화를 통과하며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가장 어려운 분별일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 영화가 보여 주는 가장 깊은 역설은 이것입니다. ‘악과 싸우는 동안, 그 악이 내 안으로 들어오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이 악을 처벌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싸움일지도 모릅니다.
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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