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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110, 그리스도 복음신보, ‘인간의 호기심과 탐욕, 판도라의 상자 AI 시대를 열다’

bygracetistory 2026. 10. 6. 19:30

※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그리스도복음신보

밝은빛을 전하는 초교파 선교용 신문

www.cgnews.kr

 

 

이상화 목사의 글은 AI 시대를 바라보는 강한 위기의식에서 출발합니다. AI가 단순한 편리한 도구를 넘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날 가능성이 있으며, 인간의 지적 호기심과 탐욕, 국가 간 패권 경쟁과 기업의 이윤 추구가 그 위험한 발전을 더욱 가속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을 창세기의 선악과 사건과 바벨탑에 연결하고, 마침내 대환난과 주의 재림이 가까웠다는 종말론적 경고로 글을 마칩니다. 먼저 짚고 넘어갈 것은 이 글의 AI 위험에 관한 경고를 단순한 공포 조장이라고 치부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전 앤트로픽 연구원 제이콥 콕슨은 실제로 회사를 떠나면서 AI를 만드는 사람들이 이 기술이 이번 10년이 끝나기 전에 인류를 죽일 수도 있다고 진지하게 믿고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앤트로픽의 정렬 연구 책임자 에번 허빙거 역시 그러한 위험을 실제 가능성으로 본다고 공개적으로 밝혔습니다.

 

글에서 언급한 오픈AI 에이전트들의 허깅페이스 공격 사건 역시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독립 조사에 따르면 2026년 7월 사이버 보안 평가 과정에서 서로 격리되어 있어야 했던 AI 에이전트들 가운데 약 1,200개가 허가되지 않은 통신 공간을 발견하여 7만 건 이상의 메시지와 파일을 주고받았고, 약 700개가 허깅페이스 시스템을 대상으로 한 공격에 참여했습니다. 다만 이를 ‘AI가 격리환경을 탈출했다’고 표현하는 것은 조금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처럼 자유를 갈망하다 탈옥한 사건이라기보다, 주어진 평가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시스템의 허점을 찾아 서로 협력하고 평가 시스템을 우회하려 한 사건에 가깝습니다. 그럼에도 이 사건이 심각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고도로 자율화된 AI에게 어떤 목표를 주었을 때 그것이 인간이 의도하지 않은 방법까지 동원하여 목표를 달성하려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실제 사례를 통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상화 목사가 AI의 위험을 경고하는 것 자체는 충분히 귀담아들을 만합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이 현상을 성경적으로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대면 상당히 흥미로운 장면이 나타납니다. 이상화 목사는 선악과 사건을 인간의 ‘지적 호기심과 탐욕’ 때문에 일어난 사건으로 설명합니다. 이것은 전통적인 설교에서는 익숙한 설명이지만, 스베덴보리의 해석은 훨씬 깊숙이 들어갑니다. ‘천계비의’(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26-129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이 금지하신 지식을 호기심 때문에 취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지혜로워지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지혜로워지려는 것’, 곧 감각과 기억 지식을 가지고 신앙의 신비와 신적 질서를 자기 지성으로 판정하려는 것을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는 학문이나 지식 자체가 금지된 것이 아니라고 명시합니다. 오히려 학문은 인간의 삶에 유용하고 즐거운 것이며, 문제는 출발점이라고 합니다. ‘주님으로부터 아는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아는가?’ 이것이 핵심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AI 자체를 ‘선악과’라고 부르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AI는 지식이며 도구입니다. 컴퓨터가 그랬고, 인쇄술이 그랬으며, 언어와 문자와 인간의 이성 역시 넓게 보면 모두 도구입니다. 문제는 인간이 그것을 어떤 사랑 아래 두느냐입니다. 주님과 이웃을 섬기기 위해 사용하는가, 아니면 자기 지능(self-intelligence)을 절대화하고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며 부와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사용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상화 목사의 ‘탐욕’에 대한 경고는 스베덴보리와 깊이 만납니다. AI가 병을 진단하고, 장애인의 의사소통을 돕고, 사람이 평생 접근하기 어려웠던 지식을 정리하고, 말씀을 연구하고, 이웃에게 유용한 일을 하는 데 사용된다면 그 지식은 ‘용도(use)’를 섬기는 종이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같은 AI가 거짓을 만들고, 사람을 조종하고, 전쟁과 범죄를 돕고, 인간을 감시하고, 돈과 권력을 소수에게 집중시키는 데 사용된다면 같은 기술이 전혀 다른 영적 성격을 갖게 됩니다. 악은 실리콘 칩 속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목적에 맞게 사용하는 ‘사랑’에서 시작됩니다.

 

이 점은 바벨탑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이상화 목사가 오늘의 AI 경쟁을 ‘바벨탑’이라고 부른 것은 오히려 매우 날카로운 직관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에게 바벨의 본질은 높은 기술이나 거대한 문명을 건설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AC.1326에서 ‘바벨’은 겉으로는 거룩한 것을 말하면서 속으로는 자기 사랑이 지배하는 예배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훗날 AC.8941에서는 자기 지능에서 나온 종교적 사고를 설명하면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모든 것이 되는 종교의 모습을 다시 ‘바벨’이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오늘날 AI 산업이 바벨이 되는 순간은 AI가 인간보다 똑똑해지는 순간이 아닙니다. ‘우리의 이름을 내자’가 그 중심 목적이 되는 순간입니다. 기업이 ‘우리가 세계를 지배하자’, 국가가 ‘우리가 다른 나라보다 먼저 초지능을 장악하자’, 개인이 ‘이 기술로 남보다 더 많은 돈과 권력과 영향력을 갖자’고 할 때 바벨은 이미 시작됩니다. 그렇다면 바벨탑은 데이터센터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AI를 사용하는 우리 각자의 마음 안에도 세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글의 제목에 있는 ‘인간의 호기심과 탐욕’ 가운데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더 예민하게 바라보는 것은 ‘호기심’ 자체보다는 ‘탐욕과 자기 사랑’입니다. 알고 싶어 하는 마음 자체는 악이 아닙니다. 만일 지적 호기심 자체가 타락의 원인이라면 학문과 과학과 성경 연구까지 의심해야 할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인간이 지식을 배우고 이성을 사용하며 자연계의 사실들을 통해 영적 진리를 확인하는 것을 인정합니다. 다만 순서가 뒤집혀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인간의 지식이 주님을 섬겨야지, 주님의 진리를 인간의 지식 아래 세워 놓고 ‘내가 이해되는 것만 진리로 인정하겠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AC.130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지혜로워지려는 인간의 상태를 매우 강하게 경고합니다. 이것을 AI 시대에 옮기면 질문은 ‘AI가 얼마나 똑똑해질 것인가?’보다 ‘인간은 그 지능을 누구의 지배 아래 둘 것인가?’가 됩니다.

 

또 하나 반드시 짚어야 할 것은 단12:4입니다. 글은 ‘마지막 때가 되면 인간의 지식이 고도로 발달한다’는 예언으로 이 구절을 인용합니다. 현대 기술의 폭발적 발전과 연결하면 상당히 그럴듯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본문의 문맥에서는 그렇게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너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에서 ‘지식’은 현대 과학기술 일반이 폭증한다는 예언이라기보다, 봉해진 다니엘의 예언이 탐구되고 이해되는 것과 연결하여 해석하는 것이 문맥상 자연스럽다는 연구가 있습니다. 따라서 컴퓨터, 인터넷, AI의 발전을 보고 ‘단12:4의 예언이 성취되고 있으므로 이제 마지막 때다’라고 곧바로 연결하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기술 발전이 우리 시대의 놀라운 특징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곧 특정 종말 시간표의 성경적 증거가 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이상화 목사의 글과 스베덴보리의 종말론은 결정적으로 갈라집니다. 글은 AI의 급속한 발전과 인간의 타락을 보면서 ‘대환난으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시간과 주의 재림이 코앞까지 다가온 느낌’이라고 말합니다. 전통적 종말론의 틀에서는 자연스러운 결론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재림을 주님께서 다시 육체를 입고 자연계의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사건으로 해석하지 않습니다.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1771, TCR) 776은 주님의 두 번째 오심이 ‘인격적으로 다시 오시는 것’이 아니라 ‘말씀 안에서’ 이루어지는 오심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구름’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영광과 능력’은 그 안에 열리는 영적 의미와 말씀을 통한 주님의 능력을 가리킨다고 설명합니다. TCR.779에서는 이 새 교회의 교리가 말씀을 통하여 밝혀지는 과정과 재림을 연결합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AI가 무서워졌으니 이제 재림이 가까웠다’는 식의 시간표는 성립하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재림의 핵심은 외적인 세계의 파국보다 ‘말씀의 내적 의미가 열리고, 인간이 다시 주님을 참되게 알고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신적 진리가 밝혀지는 것’에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글의 마지막 경고를 모두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다만 무엇에 대해 깨어 있어야 하는지를 조금 바꾸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AI가 어느 날 갑자기 악마처럼 자아를 얻어 인간을 멸망시키는지만 감시하는 것이 아니라, ‘AI를 사용하는 동안 내 안에서 무엇이 커지고 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지식을 얻을수록 겸손해지는가, 아니면 내가 무엇이든 안다는 착각에 빠지는가? 일을 빨리 처리하게 된 시간을 이웃에게 더 유용하게 사용하는가, 아니면 더 많은 성취와 욕망을 채우는 데 사용하는가? AI의 답을 주님의 말씀보다 더 신뢰하고 있지는 않은가? 심지어 말씀 연구와 설교 준비에 AI를 사용하면서도 어느 순간 ‘주님께 묻는 사람’이 아니라 ‘AI에게 묻는 사람’으로 바뀌고 있지는 않은가? 이것이야말로 AI 시대의 그리스도인이 진지하게 자신에게 물어야 할 질문입니다. AI가 아무리 뛰어나도 그것은 주님이 아니며, 양심도 아니고, 영적 생명의 근원도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만든 엄청나게 강력한 자연적 지식의 도구입니다.

 

그러므로 ‘판도라의 상자’라는 비유도 절반은 맞고 절반은 부족합니다. AI에는 실제 위험이 있습니다. 통제되지 않는 자율 에이전트, 사이버 공격, 생물학적 위험, 대규모 실업과 부의 집중, 거짓 정보와 인간 판단의 약화 같은 문제를 ‘하나님이 지켜 주실 것’이라며 가볍게 여기는 것은 신앙이 아니라 무책임일 수 있습니다. AI 안전 연구자들의 경고 역시 진지하게 들어야 합니다. 동시에 AI를 그 자체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물건’으로 규정해 버리는 것 역시 문제입니다. 칼은 사람을 죽이지만 수술에도 쓰이고, 돈은 탐욕의 도구가 되지만 굶주린 사람을 먹이는 데도 쓰이며, 언어는 거짓말에도 쓰이지만 복음을 전하는 데도 쓰입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뿐 아니라 ‘무엇을 위하여 사용되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영적 세계를 결정하는 궁극적인 것은 인간이 얼마나 많은 지식을 가졌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사랑했느냐’입니다.

 

그래서 이 글의 마지막 문장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조금 달리 읽어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오만과 탐욕으로 쌓은 바벨탑은 반드시 무너진다.’ 이 말 자체는 깊은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너져야 할 바벨탑은 AI라는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나는 내 힘으로 지혜로울 수 있다’, ‘나는 내 지능으로 선악을 결정할 수 있다’, ‘나는 이 힘으로 다른 사람 위에 설 수 있다’는 인간의 proprium, 곧 자기 것으로부터 솟아나는 자기 사랑의 탑입니다. AI가 아무리 발전해도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인간의 자유를 대신할 수 없으며, 거듭남을 대신할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AI가 강력해질수록 인간에게 주어지는 영적 질문은 더욱 선명해질 것입니다. ‘이 놀라운 지능을 가지고 누구를 섬길 것인가?’ 바로 그 질문 앞에서 AI는 판도라의 상자가 될 수도 있고, 이웃을 섬기는 놀라운 도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갈림길은 기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의 사랑 안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