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115, ‘예수님 영접 기도’를 안 하면 구원 못 받나
‘예수님 영접 기도’를 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하는가 - 기도문이 아니라 삶으로 받아들이는 주님
한국 개신교회에서는 오랫동안 ‘예수님을 영접했습니까?’라는 질문과 함께 일정한 형식의 ‘영접 기도’를 구원의 중요한 순간으로 가르쳐 왔습니다. ‘주 예수님, 저는 죄인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믿습니다. 지금 예수님을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합니다’와 같은 기도를 드리고 나면 ‘이제 구원받았습니다’라고 확신시켜 주는 방식입니다. 이 기도는 한 사람이 의식적으로 주님께 마음을 돌이키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귀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도를 했는가, 하지 않았는가?’를 사람의 영원한 구원을 결정하는 조건으로 삼는 것은 성경적으로도,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우선 성경 어디에도 특정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영접 기도’를 해야 구원받는다는 명령은 없습니다. 흔히 근거로 드는 말씀 가운데 하나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영접한다’는 것은 특정한 기도문을 한 번 따라 읽는 행위를 뜻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믿고 받아들이는 삶 전체를 가리킵니다. 또 요한계시록 3장 20절의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이라는 말씀도 자주 영접 기도에 사용되지만, 원래 문맥에서는 불신자에게 전도하면서 예수님을 마음속에 초청하라고 가르치는 구절이라기보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시는 말씀입니다.
로마서 10장 9절의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는 말씀 역시 입으로 일정한 공식을 발음하면 그 순간 법적으로 구원이 확정된다는 뜻으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서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명제가 사실이라고 인정하는 지적 동의에 머물지 않습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을 따르고,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며, 그 말씀대로 살아가려는 삶과 연결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중요한 차이를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믿음은 사랑과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사람을 구원하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참된 믿음은 체어리티(charity), 곧 이웃 사랑과 결합되어야 하며, 그 사랑은 실제 삶의 행위로 나타나야 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입으로 ‘예수님을 영접합니다’라고 말하는 한순간의 사건보다 훨씬 깊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악을 죄로 여기기 때문에 피하며,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면서 우리의 의지와 이해가 점차 주님께 열리는 것이 실제적인 영접입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어떤 사람이 어린 시절 집회에서 영접 기도를 정확하게 따라 했다고 해 보겠습니다. 그러나 이후 평생 다른 사람을 속이고 이용하면서도 그것을 악이라고 여기지 않고, 자기 욕망대로 사는 것을 사랑했습니다. 그렇다면 수십 년 전에 했던 몇 분간의 영접 기도가 그 사람의 현재 내면과 상관없이 천국을 보장하는 일종의 ‘구원 증서’가 될 수 있을까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의 사후 상태를 결정하는 것은 과거 어느 순간에 발음했던 문장이 아니라, 자유롭게 살아오면서 자신 안에 형성한 ‘지배적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영접 기도’를 한 번도 배워 본 적 없다고 해 보겠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에 따라 양심적으로 살았고, 거짓과 불의를 악으로 여기며 피하려 했으며, 다른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삶을 사랑했습니다. 단지 어느 전도집회에서 정해진 영접 기도를 따라 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주님께서 그를 ‘너는 나를 영접하는 문장을 말하지 않았으므로 구원받을 수 없다’고 하신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구원 역사는 교회의 외적 경계보다 훨씬 넓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빛 안에서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살아가려 했는가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표현 자체가 잘못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주 좋은 표현입니다. 문제는 ‘영접’을 지나치게 한순간의 의식으로 축소하는 데 있습니다. 주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그분을 단지 마음속으로 ‘초청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분이 우리의 삶을 다스리시도록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나의 생각보다 주님의 진리가 옳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라도 악이라면 버리겠습니다. 내가 싫어하더라도 선이라면 행하겠습니다.’ 이것이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영접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거듭남’(regeneration)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거듭남은 어느 날 한 번의 기도로 완성되는 사건이 아니라 일생에 걸쳐 진행되는 과정입니다. 사람이 악을 발견하고, 그것을 죄로 인정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려 할 때 주님께서는 그 사람의 내면을 조금씩 새롭게 하십니다. 이 과정에서 사람은 점점 자기 ‘프로프리움’(proprium)을 의지하는 삶에서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삶으로 옮겨 갑니다. 이것이 훨씬 본질적인 의미의 ‘주님을 영접함’입니다.
그렇다고 회심의 순간이나 신앙고백을 가볍게 여길 필요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영접 기도를 드린 그날이 실제로 인생의 방향이 바뀐 중요한 순간일 수 있습니다. 진심으로 주님께 돌아서며 ‘이제부터 주님을 따르겠습니다’라고 고백했다면 그것은 귀한 시작입니다. 다만 ‘시작’과 ‘완성’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씨앗을 심은 날이 중요하지만 씨앗을 심었다는 사실만으로 열매가 이미 맺힌 것은 아닙니다. 그 고백이 이후의 삶에서 자라나야 합니다.
더 나아가 이 문제는 ‘그러면 예수님의 이름을 전혀 들어 보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라는 훨씬 큰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만일 ‘예수’라는 이름을 알고 특정한 방식으로 그분을 고백하는 것이 구원의 절대적인 형식 조건이라면, 역사상 복음을 접할 기회 자체가 없었던 수많은 사람의 운명이라는 매우 어려운 문제가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문제에 대해 상당히 분명한 답을 제시합니다. 주님은 모든 인류의 하나님이시며, 교회 밖에 태어난 사람이라도 자신이 알고 있는 종교의 가르침과 양심에 따라 선하게 살고 진리를 받아들일 마음을 가진 사람은 구원받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그 사람이 사후에 참된 진리를 배우고 주님을 알아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수 없이도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구원은 오직 주님에게서 오지만, 주님의 구원 역사를 인간이 만든 외적 절차, 그러니까 종교적 절차 안에 가두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예수님 영접 기도를 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하는가?’라는 질문에는 ‘그렇지 않다’고 답할 수 있습니다. 영접 기도는 신앙의 아름답고 의미 있는 표현이 될 수 있지만 구원을 작동시키는 주문이나 천국 입장권은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나는 과거에 영접 기도를 했는가?’가 아니라 ‘나는 지금 주님을 영접하며 살고 있는가?’입니다.
결국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입술로 한 번 문을 열었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문을 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문은 한 번 열고 끝나는 문이라기보다 우리의 삶 속에서 계속 열려야 하는 문입니다. 진리를 받아들일 때, 악을 죄이기 때문에 피할 때, 이웃에게 선을 행할 때, 자기 뜻보다 주님의 뜻을 앞세울 때 우리는 실제로 주님을 영접합니다.
그러므로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구원은 영접 기도를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주님을 믿고 그분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삶으로 살아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참된 영접은 한 번의 기도가 아니라 일생에 걸친 거듭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