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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116, ‘참된 이단’은 누구인가

bygracetistory 2026. 10. 20. 10:16

‘참된 이단’은 누구인가 - 교리의 경계보다 더 깊은 주님의 판단

 

기독교에서 ‘이단’이라는 말은 대개 ‘정통 교리에서 벗어난 사람이나 집단’을 뜻합니다.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구원론, 성경관 등 일정한 교리적 기준에서 벗어나면 이단으로 규정합니다. 교회가 공동체의 신앙을 보호하기 위해 교리적 경계를 세우는 일 자체는 필요합니다. 모든 가르침이 똑같이 참일 수는 없으며, 진리와 오류를 분별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더 깊은 질문이 생깁니다. ‘인간이 교리적으로 이단이라고 판정하는 것과 주님께서 한 사람의 영적 상태를 판단하시는 것은 같은 것인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그렇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어떤 사람이 잘못된 교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그 사람이 악한 사람이라는 것은 동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태어난 나라와 시대, 부모와 교회, 교육과 문화에 따라 서로 다른 종교적 지식을 접합니다. 어떤 사람은 상당히 정확한 교리를 배우고도 악하게 살아갈 수 있고, 어떤 사람은 불완전하거나 심지어 잘못된 교리를 배웠음에도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에 따라 양심적으로 선을 행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단순히 ‘무슨 교리를 알고 있었는가?’만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가 알고 있는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그것으로 어떻게 살았는가?’를 보십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구별이 생깁니다. ‘거짓을 믿는 것’과 ‘거짓을 사랑하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려서부터 잘못된 것을 진리라고 배웠다면 그는 그것을 진심으로 참이라고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마음이 선을 향하고 있다면 진리를 만나면서 잘못된 생각을 고칠 가능성이 있습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성경과 교리를 정확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욕망과 지위와 이익을 지키기 위해 진리를 왜곡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외적인 교리는 정통이어도 내면에서는 진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대목에서 ‘참된 이단’이라는 다소 역설적 표현이 의미를 갖기 시작합니다. 가장 위험한 이단은 단순히 어떤 교리 문장을 잘못 이해하는 것만이 아니라, ‘악을 선이라고 하고 거짓을 진리라고 하면서 그것을 자기 삶의 원리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진리를 알면서도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것을 비틀어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입술로는 정통 신앙을 고백하면서 삶으로는 그 신앙을 부정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도 이 역설이 반복해서 나타납니다. 주님께 가장 강한 책망을 받은 사람들이 언제나 ‘교리적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이방인’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말씀을 알고 율법을 가르치며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확신했던 종교 지도자들에게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바리새인이라는 특정 집단을 오늘날의 어떤 교단에 그대로 대입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훨씬 두려운 경고입니다. ‘진리를 많이 가지고 있는 것’과 ‘진리대로 사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7장 21절의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는 말씀은 이 문제를 매우 날카롭게 비춥니다. 여기서 ‘주여 주여’라고 부르는 사람은 적어도 외적으로는 주님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고백 자체를 최종 기준으로 삼지 않으십니다. 그가 주님의 뜻을 삶으로 받아들였는지를 보십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것은 ‘믿음’과 ‘체어리티’(charity)의 관계로 더욱 분명해집니다. 믿음이 체어리티와 분리되면 살아 있는 믿음이 될 수 없습니다. 진리는 선으로 이어져야 하고, 믿는 것은 살아내는 것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진리가 이웃을 향한 선과 ‘유용한 일’(use)로 나타나야 합니다. 아무리 정교한 교리 체계를 가지고 있어도 그것이 자기 우월감과 타인에 대한 멸시, 권력과 이익을 정당화하는 도구가 된다면 진리의 목적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그렇다고 ‘교리는 중요하지 않고 착하게만 살면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것도 스베덴보리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진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진리는 무엇이 선인지 보여 주고 선이 나아갈 방향을 밝혀 주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교리는 결국 삶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짓은 바로잡아야 합니다. 다만 ‘그 사람의 교리가 틀렸다’는 판단에서 ‘그러므로 그 사람은 악하며 지옥에 간다’는 판단으로 건너뛰어서는 안 됩니다. 전자는 우리가 어느 정도 검토할 수 있지만 후자는 그 사람의 내면을 아시는 주님의 영역입니다. 특히 이 원리를 스베덴보리 자신에게 적용해 보면 흥미롭습니다. 전통적 기독교의 기준에서 스베덴보리의 신학을 이단이라고 규정하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삼위일체 이해, 속죄론, 사후세계, 성경의 속뜻 등에 관한 그의 가르침이 전통적 교리 체계와 크게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스베덴보리를 이단이라고 하니 그들이야말로 진짜 이단이다’라고 맞받아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다운 태도가 아닐 것입니다. 똑같은 칼을 상대에게 돌려주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물어야 합니다. ‘무엇이 참인가? 이 가르침은 주님을 더 깊이 사랑하게 하는가? 말씀을 더 깊이 이해하게 하는가? 악을 죄로 보아 피하게 하는가? 이웃을 사랑하고 유용한 삶을 살게 하는가?’ 그리고 동시에 그 가르침이 실제로 말씀과 스베덴보리의 저작에 부합하는지도 엄밀하게 살펴야 합니다. 사람이나 집단에 먼저 이름표를 붙이기보다 진리와 삶의 열매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이단은 누구인가?’라는 질문도 결국 ‘누구’보다 ‘무엇’으로 바꾸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누가 이단인가?’보다 ‘무엇이 사람을 주님의 질서에서 벗어나게 하는가?’라고 묻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가장 깊은 차원의 이탈은 ‘교단 명부를 잘못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선을 알면서 악을 사랑하고, 진리를 알면서 자기 욕망을 위해 왜곡하며, 입으로 주님을 고백하면서 삶에서는 자기 자신을 주인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에서 삶이 갈라지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 질문에 대한 결론은 조금 역설적일 수 있습니다. ‘주님 앞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사람들이 나를 이단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진리를 안다고 하면서 그 진리대로 살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거짓을 진리인 줄 알고 붙드는 사람보다, 진리를 알면서도 자기 사랑을 위해 거짓으로 만드는 사람이 더 깊은 어둠에 있을 수 있습니다.’ 결국 주님께서는 교단의 이름표만 보시는 분이 아닙니다. 진리는 분별하되 사람의 최종적 내면은 주님께 남겨 두어야 합니다. 오류를 발견했다고 그 사람 안의 모든 선까지 부정하지 않고, 진리를 발견했다고 그 사람 안의 모든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는 것, 바로 그 지점이 ‘이단’이라는 매우 날카로운 말을 다룰 때 특히 필요한 ‘스베덴보리의 렌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