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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13, ‘시댁이, 처가가 이단이니까 연을 끊어도 돼. 요한이서에 보면 인사도 하지 말라고 했잖아’

bygracetistory 2026. 10. 23. 10:55

 

‘시댁이, 처가가 이단이니까 연을 끊어도 돼’ - 요한이서의 ‘인사도 하지 말라’는 말씀은 가족 절연을 명령하는가

 

‘시댁이, 처가가 이단이니까 연을 끊어도 돼. 요한이서에 보면 인사도 하지 말라고 했잖아.’ 실제로 요한이서 1장 10-11절은 상당히 강하게 들립니다.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라.’ 이 말씀만 떼어 놓으면 ‘잘못된 교리를 가진 사람과는 집안의 관계까지 끊어야 한다’는 결론이 가능해 보입니다. 특히 가족이나 시댁, 혹은 처가를 ‘이단’이라고 판단한 경우에는 이 말씀이 절연을 정당화하는 매우 강력한 근거처럼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이서 전체의 문맥과 성경의 다른 말씀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함께 놓고 보면 그렇게 단순하게 적용하기 어렵습니다.

 

먼저 요한이서가 경계하는 대상이 누구인지 보아야 합니다. 요한은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요이1:7)고 대상을 구체적으로 밝힙니다. 이어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9절), 그리고 바로 다음에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10절)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의 직접적인 상황은 단순히 ‘나와 교리가 다른 혈육, 혈연, 친척’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에 관한 거짓 가르침을 가지고 신앙공동체 안으로 들어와 그것을 전파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11절의 이유도 중요합니다.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라.’ 핵심은 사람과 인간적인 접촉을 했다는 사실 자체보다 그의 ‘악한 일’에 참여하고 그것을 지지하는 데 있습니다.

 

당시의 ‘집에 들인다’는 표현도 오늘날 누군가를 집에 잠깐 방문하게 하는 것과 완전히 동일하게 읽기는 어렵습니다. 초기 교회는 가정집을 중심으로 모였고 순회 교사와 전도자들이 신자들의 집에서 숙식을 제공받으며 가르쳤습니다. 그런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은 단순한 개인적 친절을 넘어 그의 사역을 후원하고 그에게 활동 기반을 제공하는 의미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요한의 명령에는 ‘거짓 교사를 교회의 교사로 받아들이고 그의 활동을 지원하지 말라’는 매우 실제적인 목적이 들어 있습니다. 오늘날의 표현으로 바꾸면 ‘거짓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의 사역을 교회가 공식적으로 받아들이고 후원하지 말라’에 훨씬 가깝습니다.

 

특히 ‘인사도 하지 말라’는 말씀을 ‘그러므로 그 사람과 인간관계를 완전히 끊어라’로 확대할 때는 성경 전체와 충돌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주님께서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4)고 하셨습니다. 바울도 불신자와 모든 관계를 끊으라는 뜻으로 자신의 말을 오해하지 말라고 설명하면서 ‘그리하려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고전5:10). 더구나 부모와 가족을 공경하고 돌보아야 한다는 말씀들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이서 한 구절을 근거로 ‘이단으로 판단되는 사람에게는 일반적인 인간적 사랑과 가족으로서의 모든 책임까지 중단해도 된다’는 보편적 원칙을 만들기는 어렵습니다.

 

여기에서 ‘교제’와 ‘동조’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그의 교리를 인정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족으로 만나고 안부를 묻고 어려울 때 돕는다고 해서 그의 신학적 주장을 승인하는 것도 아닙니다. 반대로 그 사람의 가르침이 잘못되었다고 판단된다고 해서 그 사람 자체를 미워하거나 가족관계에서 제거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거짓에 참여하지 않는 것’과 ‘그 사람에게 체어리티(charity)를 행하지 않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구별이 더욱 중요해집니다. 체어리티는 상대방이 믿는 모든 것을 옳다고 인정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상대방 안의 선을 사랑하고 그의 참된 유익, 궁극적으로는 영원한 유익을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잘못된 가르침에는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라고 분명히 말하면서도 그 사람에게 인간적인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교리가 틀렸으므로 그 사람에게는 사랑을 베풀 필요가 없다’고 한다면 진리를 지키려다가 체어리티를 잃는 역설이 생길 수 있습니다.

 

더구나 ‘이단’이라는 판단 자체에도 주의가 필요합니다. 앞에서 사울과 스데반을 살펴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울은 자신이 하나님 편에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스데반과 그리스도인들이 위험한 잘못에 빠져 있다고 생각했고, 그들을 제거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다메섹 길에서 주님께서는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행9:4)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모든 이단 판정이 잘못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거짓 교리는 실제로 존재하며 분별해야 합니다. 그러나 ‘나는 진리를 가지고 있고 저 사람은 이단이다’라는 확신이 그 사람에게 무엇을 해도 된다는 허가증이 되는 순간, 사울의 이야기는 우리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됩니다.

 

특히 가족관계에서는 더욱 신중해야 합니다. ‘저 사람의 신앙을 받아들일 수 없다’와 ‘그러므로 저 사람과 가족으로서의 관계도 끊어야 한다’ 사이에는 상당히 큰 거리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시댁의 종교적 가르침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 집의 종교활동에 참여하지 않을 수 있고, 자녀에게 그 교리를 가르치지 못하도록 경계를 세울 수도 있으며, 반복적인 개종 압박이나 모욕이 있다면 만남의 방식과 빈도를 조정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경계’입니다. 그러나 단지 ‘이단’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부모·자녀·형제의 인간적 관계 자체를 끊는 것을 요한이서 10절이 명령한다고 말한다면, 본문의 적용 범위를 상당히 넘어설 가능성이 큽니다.

 

물론 반대편의 극단도 피해야 합니다. ‘가족이니까 무조건 만나야 한다’는 것도 성경적 원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실제 폭력이나 학대, 지속적인 모욕, 강압적인 종교행위, 자녀에게 심각한 해를 끼치는 행동이 있다면 적절한 거리를 두는 것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상당히 강한 관계 제한도 정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유는 ‘저들은 이단이니까 요한이서가 절연하라고 했다’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발생하는 악과 해로부터 자신과 가족을 보호하고 그 악에 참여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해야 합니다. ‘교리적 불일치’와 ‘실제적인 해악’을 구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더 깊이 들어가면 이 문제에는 ‘프로프리움’(proprium)의 위험도 있습니다. 종교적인 프로프리움은 ‘내가 싫다’를 ‘하나님이 싫어하신다’로, ‘나는 만나고 싶지 않다’를 ‘성경이 만나지 말라고 한다’로 바꾸어 표현할 수 있습니다. 물론 실제로 신앙 때문에 거리를 두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정말 진리를 지키기 위해 이 관계를 제한하는가, 아니면 내 불편함과 분노와 상처를 하나님의 명령으로 정당화하고 있는가?’ 이것은 상대방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적용해야 할 분별입니다.

 

그리고 바로 앞에서 살펴본 사울의 이야기가 여기서 다시 의미를 갖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요16:2). 종교적 확신은 때로 인간에게 가장 강력한 정당화 장치가 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라는 말이 붙으면 평소에는 하지 못할 냉혹한 행동까지 의로운 행동처럼 느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행동이 정말 주님의 뜻인지 판단할 때에는 ‘내가 성경 구절 하나를 가지고 있는가?’뿐 아니라 그 해석이 말씀 전체의 선과 진리, 특히 주님의 사랑과 체어리티의 질서에 합하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요한이서의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일까요? 오히려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거짓까지 받아들이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사람은 사랑하되 거짓을 후원하지 말고, 관계는 유지하더라도 악한 일에는 참여하지 말며, 체어리티를 행하되 진리를 희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과 ‘진리’가 결합되어야 한다는 스베덴보리의 원리와도 잘 맞습니다. 사랑만을 내세워 모든 거짓을 용인하는 것도 잘못이고, 진리를 내세워 사람을 미워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따라서 ‘시댁이, 처가가 이단이니까 연을 끊어도 돼. 요한이서에 인사도 하지 말라고 했잖아’라는 말에는 이렇게 답할 수 있겠습니다. ‘요한이서는 거짓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의 사역을 받아들이고 후원하여 그의 악한 일에 참여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말씀이지, 교리가 다르다고 판단되는 가족과 모든 인간적·가족적 관계를 끊으라는 일반적인 절연 명령으로 읽기는 어렵습니다.’

 

한 문장으로 더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요한은 거짓과의 연합을 끊으라고 했지, 체어리티까지 끊으라고 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진리를 지킨다는 이유로 사랑을 버리지 말고, 사랑한다는 이유로 거짓을 받아들이지도 않는 것, 바로 그 둘을 함께 지키는 것이 선과 진리의 결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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