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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18, ‘평생 착하게 살아도 예수님을 모르면 지옥 가’

bygracetistory 2026. 10. 25. 07:02

‘평생 착하게 살아도 예수님을 모르면 지옥 가’

 

‘평생 착하게 살아도 예수님을 모르면 지옥 가.’ 많은 개신교인이 별다른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말입니다. ‘예수 외에는 구원이 없다’는 성경의 분명한 선언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고(요14:6), 베드로도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고 선포했습니다(행4:12). 따라서 ‘예수님을 몰라도 착하게만 살면 구원받는다’고 말한다면 기독교 신앙의 중심을 놓치게 됩니다. 구원의 근원은 인간의 착함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매우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다’는 말과 ‘살아 있는 동안 예수라는 이름과 기독교 교리를 명시적으로 알지 못한 사람은 모두 지옥에 간다’는 말은 정말 같은 말일까요? 얼핏 보면 같은 말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전자는 ‘구원의 근원이 누구인가?’에 대한 대답이고, 후자는 ‘그 구원이 인간에게 어떤 방식으로 전달될 수 있는가?’에 대한 대답입니다.

 

예를 들어 기독교 복음이 전해지기 수백 년 전에 다른 대륙에서 살다 죽은 사람이 있다고 해 보겠습니다. 그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예수’라는 이름을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그에게는 성경도 없었고 교회도 없었으며 선교사도 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자기 종교와 양심을 따라 거짓말과 살인을 악으로 여기고, 부모를 공경하며, 어려운 이웃을 도우며, 자신이 알고 있는 선을 따라 성실하게 살려고 노력했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사람에게 ‘당신은 예수라는 이름을 알지 못했으므로 지옥에 갑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더 어려운 경우도 있습니다. 기독교를 들어 보기는 했지만 그에게 전달된 기독교가 심하게 왜곡되어 있었던 경우입니다. 그가 만난 그리스도인들이 잔혹하거나 탐욕스러웠고, 그들에게서 들은 하나님은 인간을 증오하고 다른 종교인을 모두 멸망시키는 신처럼 소개되었다고 해 보겠습니다. 그 사람이 그런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사실과, 주님 자신을 알고도 의도적으로 거부했다는 것을 동일하게 볼 수 있을까요? 인간은 겉으로 ‘그 사람은 예수를 믿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주님께서는 그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알고 있었고 무엇을 알 수 없었는지까지 보십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문제가 매우 분명해집니다. 구원은 오직 주님에게서 옵니다. 선의 근원도 주님이시고 진리의 근원도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선하게 살았다고 해서 그 자신의 도덕적 공로가 그를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그것을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그의 안에 있는 모든 참된 선의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햇빛을 받는 사람이 태양의 이름을 몰라도 빛은 태양에서 오는 것과 비슷합니다. 빛의 근원을 모른다는 사실 때문에 그 빛이 다른 곳에서 온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몰라도 착하게 살면 구원받는다’는 표현도 정확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자칫 ‘인간은 자기 선행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는 뜻으로 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님의 이름을 명시적으로 알지 못했더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진리를 따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며 살았다면, 그 선의 실제 근원은 자신이 알지 못했던 주님이며, 그런 사람은 사후에도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해야 합니다.

 

바울의 로마서에는 이 문제를 생각하게 하는 놀라운 구절이 있습니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롬2:14-15). 바울은 율법을 소유하고 있는가만 보지 않고, 그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빛 안에서 어떻게 살았는가를 말합니다. 이것이 곧 ‘착하면 자동 구원’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똑같은 외적 정보량만으로 심판하신다는 단순한 도식에는 신중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도 의미심장합니다(눅10:25-37). 제사장과 레위인은 종교적으로는 올바른 공동체 안에 있었지만 강도 만난 사람을 지나쳤습니다. 반면 유대인의 관점에서 종교적으로 바깥에 있던 사마리아인은 그 사람에게 실제로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누가 올바른 종교적 명칭을 가지고 있었느냐?’고 묻지 않으시고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교리의 중요성을 없애는 말씀이 아니라, 참된 진리가 결국 사랑과 체어리티(charity)의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는 더욱 놀랍습니다. 주님께서는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자에게 마시게 하고, 나그네를 영접하고, 헐벗은 자를 입히고, 병든 자와 갇힌 자를 돌본 사람들에게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마25:40). 그런데 그들은 놀라서 묻습니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나이까?’ 그들은 자신들이 주님께 그렇게 했다는 사실조차 몰랐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들이 이웃에게 행한 선을 자신에게 행한 것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이 대목은 ‘주님을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입으로 ‘예수님’을 정확하게 발음하는 것과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받아들이는 것이 언제나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 ‘주여, 주여’라고 부르면서도 주님의 뜻과 반대로 살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주님의 이름을 제대로 알 기회조차 없었지만 양심에 주어진 진리를 따라 악을 피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눈에는 전자가 ‘신자’이고 후자가 ‘불신자’일 수 있지만, 주님께서는 그보다 훨씬 깊은 곳을 보십니다.

 

그렇다면 선교와 복음 전도는 필요 없다는 말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참된 진리를 아는 것은 엄청난 축복입니다. 내가 행하는 선의 근원이 누구인지 알고, 주님을 인격적으로 알고, 말씀을 통하여 악과 선을 더 분명하게 분별하며, 자신의 힘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힘을 받아 거듭남(regeneration)의 길을 걸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단지 ‘예수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에게 천국 비밀번호를 알려 주는 일’이 아닙니다. 사람을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께 더 분명하게 연결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밝혀 주는 진리의 빛을 전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많이 받은 사람에게는 오히려 더 큰 책임이 생깁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알고, 성경을 가지고 있고, 평생 설교를 듣고, 선과 악에 관하여 많은 것을 배운 사람이 그 모든 진리를 알면서도 자기 사랑과 탐욕과 미움을 붙들고 살아간다면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니까’라는 명칭 자체가 그를 천국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주지는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라고 하셨습니다(마7:21). 많이 안다는 것은 특권인 동시에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갈 더 큰 기회와 책임을 받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점에서 ‘평생 착하게 살아도 예수님을 모르면 지옥 간다’는 말은 뜻밖에도 위험한 신앙적 안도감을 줄 수 있습니다. 나는 기독교인이며 예수님의 이름을 알고 있으므로 저 사람보다 안전하다고 생각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질문의 방향을 바꿉니다. ‘저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을 아느냐?’를 묻기 전에 ‘나는 예수님의 이름을 알면서 실제로 그분이 가르치신 선을 사랑하고 있는가?’를 묻게 합니다. 이름을 아는 것과 그 이름이 뜻하는 생명을 받아들이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종교가 똑같다는 결론으로 가서도 안 됩니다. 진리와 거짓의 차이는 실제로 중요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삶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 수 있고, 참된 진리는 사람이 선을 더 분명하게 보고 선택하도록 돕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진리를 중요하게 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태어난 문화와 종교 때문에 불완전한 진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과, 진리를 알면서 자기 욕망을 지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거짓을 선택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거짓을 알고 있는 상태’와 ‘거짓을 사랑하는 상태’를 구별해야 합니다.

 

사후세계에서도 이 차이는 중요합니다. 자연계에서 주님을 명시적으로 알지 못했지만 선을 사랑하며 양심을 따라 살아온 사람은 사후에 진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이미 선을 사랑하고 있다면 그 선과 조화를 이루는 진리를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결국 모든 천국의 중심에는 주님이 계시므로,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은 궁극적으로 주님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예수 없이도 구원받는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구원하시는 역사는 인간이 자연계에서 예수라는 이름을 명시적으로 알고 있었는가보다 훨씬 넓고 깊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서 참으로 아름다운 사실 하나가 드러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에게 그가 받을 수 없었던 것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아프리카의 어느 마을에서 태어난 사람, 기독교가 전해지기 전 시대에 살았던 사람, 기독교에 관하여 심각하게 왜곡된 모습만 접했던 사람과, 평생 성경을 읽고 복음을 들은 사람을 똑같은 외적 기준으로 재단하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는 각 사람이 어떤 빛을 받았으며, 그 빛 안에서 무엇을 자유롭게 선택했는지를 완전하게 아십니다. 이것이 인간의 판결과 주님의 심판이 다른 이유입니다.

 

결국 ‘평생 착하게 살아도 예수님을 모르면 지옥 가’라는 말에는 반드시 수정이 필요합니다. ‘예수님 없이도 착하게 살면 자기 선행으로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도 아니고, ‘예수라는 이름을 생전에 듣지 못했으니 아무리 선을 사랑했어도 지옥에 간다’는 것도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나 주님의 구원하시는 사랑은 인간이 태어난 시대와 나라와 종교적 환경보다 큽니다.

 

그래서 이 질문에는 이렇게 답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몰랐다고 해서 그 사람을 주님께서 모르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사람은 자기의 착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지만, 주님께서는 생전에 자신의 이름을 명시적으로 알 기회가 없었던 사람도 그가 받은 진리와 양심 안에서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시며 구원의 길로 이끄십니다.’

 

조금 더 ‘스베덴보리의 렌즈’답게 압축한다면 이것이겠습니다.

 

‘천국의 문을 여는 것은 ‘예수’라는 이름을 알고 있었느냐는 지식의 양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빛 안에서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얼마나 자유롭게 받아들였느냐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과 구원자는 오직 주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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