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21,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거야. 삶과 행위는 부차적인 거고’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거야. 삶과 행위는 부차적인 거고’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거야. 삶과 행위는 부차적인 거고.’ 개신교 신앙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매우 자연스럽게 들리는 말입니다. 바울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라고 말하고(롬3:28), 에베소서에는 더욱 분명하게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엡2:8-9). 그러므로 인간이 자기 선행을 쌓아 하나님께 구원의 대가를 지불한다는 생각은 분명 복음과 맞지 않습니다. 구원의 근원은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주님입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구원은 우리의 행위에 대한 대가가 아니다’라는 말과 ‘그러므로 사람이 어떻게 사느냐는 구원에서 부차적이다’라는 말은 같은 것일까요? 바로 여기에서 매우 큰 비약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인간의 공로를 부정한 것을 인간의 삶 자체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로 바꾸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믿음’은 구원을 얻는 결정적인 조건이 되고, 실제 삶은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 가능하면 잘 살아야 하는 일종의 후속 과정처럼 밀려납니다.
그런데 에베소서의 말씀도 9절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바로 다음 절은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라고 말합니다(엡2:10). 선한 행위 때문에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만, 구원하시는 주님의 역사는 사람을 선한 삶으로 이끕니다. 다시 말해 선한 행위는 구원을 사는 가격이 아니지만, 구원이 사람 안에서 실제로 역사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삶의 열매입니다.
야고보서는 더욱 직접적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라고 하고(약2:17),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라고까지 말합니다(약2:26). 야고보가 바울과 반대되는 또 다른 구원론을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인간이 자기 행위를 공로로 삼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주장하는 것을 거부하고, 야고보는 삶과 분리된 지적 신앙을 살아 있는 믿음이라고 부르는 것을 거부합니다. 서로 다른 오류를 겨냥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행위’라는 말을 조금 조심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행위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헌금, 봉사, 구제, 전도, 새벽기도 같은 종교적 활동을 먼저 떠올립니다. 그러면 ‘행위 구원’이라는 경계심이 곧바로 생깁니다. 그러나 성경과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더 근본적인 문제는 ‘내가 선행 몇 개를 했는가’가 아니라 ‘나는 어떤 사랑을 따라 살아가고 있는가’입니다. 삶과 행위는 그 사람 안에 무엇이 사랑으로 자리 잡고 있는지를 밖으로 나타냅니다.
주님께서는 나무와 열매의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라고 하셨고,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라고 하셨습니다(마7:16-17). 열매가 나무를 좋은 나무로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좋은 나무라면 그 생명이 결국 열매로 나타납니다. 마찬가지로 선한 행위를 많이 쌓아서 그 양으로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지만,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실제로 받아들인 사람이라면 그것이 언젠가는 삶의 열매로 나타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믿음과 체어리티(charity)를 분리하지 않습니다. 진리는 사람이 무엇이 선인지 볼 수 있도록 빛을 주고, 선은 그 진리를 실제 삶으로 옮깁니다. 믿음이 ‘무엇이 참인지 아는 것’에만 머물고 그 진리가 의지와 삶으로 내려가지 않는다면 아직 완전한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진리는 선을 향하고, 믿음은 체어리티를 향해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과 체어리티는 서로 경쟁하는 두 가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한 영적 생명의 두 측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아주 단순하게 말하면 ‘믿음은 선을 보는 눈이고, 체어리티는 그 선을 행하려는 마음이며, 행위는 그 마음이 실제 삶에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눈만 있고 걸어가지 않는다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눈 없이 무작정 걸어가는 것도 위험합니다. 진리 없는 선은 무엇이 참된 선인지 분별하기 어렵고, 선 없는 진리는 머릿속 지식으로 굳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선과 진리의 결합은 거듭남(regeneration)의 핵심 질서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보면 삶이 결코 부차적인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마지막 심판을 묘사하는 마태복음 25장에서 주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신앙고백의 문장을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굶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 헐벗은 자, 병든 자, 갇힌 자에게 어떻게 했는지를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라고 하십니다(마25:40). 그렇다고 이 말씀이 ‘선행 점수가 높은 사람이 천국에 간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 행위들을 통하여 그 사람 안에 어떤 사랑이 있었는지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도 반복되는 표현이 있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주님께서는 교회들의 교리만을 평가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실제 상태와 삶을 보십니다. 이것은 행위가 믿음과 경쟁하는 별도의 구원 수단이기 때문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사랑과 믿음이 보이는 삶에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행위는 내면과 무관하게 천국 입장권을 사는 공적이 아니라 내면의 사랑이 몸을 입은 모습입니다.
따라서 ‘믿음이냐 행위냐’라는 질문 자체가 어느 정도 잘못 설정된 질문일 수 있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 ‘심장이 중요합니까, 혈액순환이 중요합니까’라고 묻는 것과 비슷합니다. 둘을 분리하면 생명이 유지되지 않습니다. 참된 믿음은 삶으로 향하고, 참된 선행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로부터 나옵니다. 성경이 경계하는 것은 ‘행위’ 자체가 아니라 행위를 자기 공로로 소유하는 태도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프로프리움’(proprium)의 문제가 등장합니다. 인간은 선을 행하고 나면 ‘내가 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나는 이만큼 봉사했다’, ‘나는 이만큼 헌금했다’, ‘나는 평생 교회를 섬겼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착하게 살았다’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주님 앞에 자신의 공로처럼 내놓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행위 구원의 깊은 위험입니다. 그러나 해결책은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선을 힘껏 행하되 그 선의 근원과 능력이 주님에게서 왔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중요한 원리가 여기에서 빛을 발합니다. 사람은 마치 자기에게서 하는 것처럼 자유롭게 선을 선택하고 행해야 하지만, 실제 선의 근원은 주님이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와 ‘합리성’(rationality)을 없애지 않으면서 동시에 인간의 공로를 제거합니다. 나는 악을 죄로 알고 피해야 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해야 하며, 내가 해야 할 일을 실제로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이 선은 내 소유이며 이것 때문에 나는 구원받을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의 반대말이 ‘행위로 구원받는다’일 필요는 없습니다. 더 깊은 대안은 ‘살아 있는 믿음’입니다. 살아 있는 믿음은 주님을 신뢰하면서 주님께서 가르치신 것을 실제 삶으로 받아들입니다. 악을 죄로 알고 피하고, 용서해야 할 사람을 용서하려 애쓰고, 정직해야 할 때 정직을 선택하며, 자신의 책임을 감당하고, 이웃에게 필요한 선을 행합니다. 이 모든 것은 천국을 사기 위한 대가가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사람 안에서 열매 맺어 가는 과정입니다.
여기에서 ‘체어리티’가 중요합니다. 체어리티는 단순한 구제나 자선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이 이웃과 공동체를 향하여 실제적인 선과 유용한 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직장에서 맡은 일을 정직하게 하는 것, 가족에게 책임을 다하는 것,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것,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 때로는 상대에게 해로운 요구를 거절하는 것까지도 참된 선을 목적으로 한다면 체어리티의 영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신앙은 바로 이런 삶 속에서 몸을 얻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일까요? 정반대입니다. 믿음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진리를 모르면 무엇이 선인지 제대로 분별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목적은 단지 ‘내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믿게 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진리는 우리의 삶을 밝혀 악을 보게 하고, 선을 알게 하며, 주님께로 향하게 합니다. 믿음은 삶을 위한 진리입니다.
이 때문에 ‘삶과 행위는 부차적’이라는 말은 생각보다 위험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신앙고백은 구원의 본질이고 삶은 그다음 문제라고 생각하면, 신앙과 삶 사이에 커다란 틈이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 물론 성질도 못 고쳤고, 사람을 미워하고, 돈 앞에서 거짓말도 하지만 그것은 성화의 문제이지 구원과는 별개다.’ 이런 식의 사고가 가능해집니다. 그러면 믿음은 거듭남을 촉진하는 진리가 아니라 거듭나지 않아도 안심할 수 있게 해 주는 방패가 됩니다.
이것은 앞서 살펴본 ‘한번 구원받으면 끝’이라는 생각과도 연결됩니다. 믿음을 삶에서 떼어 놓는 순간 구원은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과거 어느 시점에 무엇을 믿었다고 고백했는가’의 문제가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루시는 구원은 사람의 명칭만 바꾸는 일이 아니라 사람 자체를 변화시키는 일입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지배되던 사람을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그 변화는 완벽함을 뜻하지 않습니다. 거듭나는 사람도 넘어지고, 화를 내고, 잘못 판단하고, 죄를 짓습니다. 중요한 것은 ‘완벽하게 살았느냐’가 아니라 악을 발견했을 때 그것을 정당화하는가, 아니면 죄로 인정하고 주님께 돌아가 다시 싸우는가입니다. 한 번의 실패가 그 사람의 ‘지배적 사랑’(ruling love)을 결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악을 계속 사랑하고 정당화하면서 ‘그래도 나는 믿음으로 구원받았으니 괜찮다’고 한다면 믿음이 오히려 프로프리움을 보호하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과 행위를 이렇게 이해하면 바울과 야고보 사이의 긴장도 상당 부분 풀립니다. ‘내 선행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셔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에게는 바울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반대로 ‘나는 믿으니까 어떻게 살아도 구원에는 상관없다’고 말하는 사람에게는 야고보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하나는 인간의 공로를 무너뜨리고, 다른 하나는 삶 없는 신앙을 무너뜨립니다.
결국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믿음인가 행위인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를 믿고, 그 진리가 사랑이 되어, 사랑이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믿음은 체어리티와 결합하고, 체어리티는 행위와 유용한 일(use, 쓰임새) 속에서 실제가 됩니다. 이것이 선과 진리의 결합이며 거듭남의 삶입니다.
따라서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거야. 삶과 행위는 부차적인 거고’라는 말에는 매우 중요한 진리와 매우 위험한 비약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인간의 행위가 구원의 공로가 아니다’라는 앞부분은 붙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그러므로 삶은 구원 문제에서 부차적이다’라고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삶은 믿음의 경쟁자가 아니라 믿음이 살아 있는지를 드러내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선한 행위를 대가로 구원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에게서 구원받지만, 주님에게서 받은 참된 믿음은 반드시 체어리티와 결합하여 삶 속에서 선한 열매를 맺으려 합니다.’
그리고 이번 글의 핵심을 더 짧게 압축한다면 이것이겠습니다.
‘행위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님은 우리의 삶을 그대로 내버려 두시지도 않습니다.’
어쩌면 가장 ‘스베덴보리의 렌즈’다운 표현은 이것일 것입니다.
‘믿음과 삶 가운데 어느 것이 구원에 더 중요한지를 묻기보다, 삶으로 내려오지 않는 믿음을 과연 살아 있는 믿음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SL.20, ‘정통 교리를 믿으면 구원 받지만, 이단 교리를 믿으면 지옥 가’
‘정통 교리를 믿으면 구원 받지만, 이단 교리를 믿으면 지옥 가’ ‘정통 교리를 믿으면 구원받지만, 이단 교리를 믿으면 지옥 가.’ 개신교 안에서는 상당히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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