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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22, ‘선행을 강조하면 행위구원인데...’

bygracetistory 2026. 10. 26. 14:41

‘선행을 강조하면 행위구원인데...’

 

‘선행을 강조하면 행위구원인데....’ 개신교 안에서는 상당히 민감하게 들리는 말입니다. 설교자가 ‘선을 행해야 합니다’,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악을 버리고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라고 반복해서 강조하면 누군가는 금방 걱정합니다. ‘저러다가 행위구원으로 가는 것 아닌가?’ 특히 종교개혁 이후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을 중요하게 여겨 온 개신교 전통에서는 인간의 행위를 구원의 조건처럼 말하는 것에 강한 경계심이 있습니다. 그 경계심에는 분명 지켜야 할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선행을 쌓아서 하나님께 구원을 요구할 수 없습니다. ‘나는 평생 착하게 살았습니다’, ‘헌금도 많이 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도 도왔습니다’, ‘교회 봉사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나를 천국에 보내셔야 합니다’라고 말한다면 선행을 일종의 구원 대금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바울이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라고 한 말씀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자랑과 공로를 철저히 무너뜨립니다(엡2:8-9).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매우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선행으로 구원을 살 수 없다’는 것과 ‘그러므로 선행을 강조해서는 안 된다’라는 것은 전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전자는 인간의 공로를 부정하는 것이지만, 후자는 자칫 주님께서 끊임없이 명하신 선한 삶 자체를 약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행위구원을 피하려다가 어느 순간 ‘행위’를 피하게 되는 이상한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읽어 보면 선한 삶에 대한 요구는 결코 주변적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셨습니다(마5:16). 또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라고 하셨으며(마7:16),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신 뒤에는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라고 하셨습니다(눅10:37). 주님께서는 선을 행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행위구원이라고 걱정하지 않으셨습니다.

 

마태복음 25장은 더욱 직접적입니다. 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사람에게 마시게 하고, 나그네를 영접하고, 헐벗은 사람을 입히며, 병든 사람과 갇힌 사람을 돌본 일이 마지막 심판의 장면에 등장합니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마25:40). 만일 선행을 강조하는 것 자체가 행위구원이라면 이 말씀부터 설명하기 어려워집니다.

 

야고보는 더 대담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라고 말하고(약2:17),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라고까지 말합니다(약2:24). 이 구절 때문에 종교개혁 이후 많은 논쟁이 있었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성경 자체는 ‘행위’를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행위가 있느냐 없느냐만이 아니라 그 행위가 어디에서 나오며,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매우 유용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선한 행위를 구원의 대가로 보지 않습니다. 모든 참된 선의 근원은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서 독립적으로 발생한 순수한 선이 있어서 그것을 주님께 가져가고 ‘제가 이것을 했으니 상을 주십시오’라고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행하는 참된 선은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 실제 삶에서 표현한 것입니다.

 

따라서 문제는 ‘선을 행했는가’보다 ‘그 선을 누구의 것으로 여기고 있는가’입니다. 선을 행한 뒤 ‘내가 했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선하다. 나는 이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더 높은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프로프리움’(proprium)이 그 선을 자기 것으로 붙잡기 시작합니다. 겉으로는 선행이지만 그 안에 자기 의와 명예욕, 그리고 공로 의식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경계하는 공로적 선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해결책을 ‘그러니 선을 강조하지 말자’로 잡으면 이상해집니다. 자기 자랑이 생길 위험이 있으니 이웃을 돕지 말자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해결책은 선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선의 근원을 바로 아는 것입니다. 사람은 선을 실제로 행해야 합니다. 악을 죄로 알고 피해야 하고, 어려운 이웃을 도와야 하며, 자신의 직분과 책임 안에서 유용한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이 선의 능력과 근원은 주님에게서 온다’고 인정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매우 중요한 원리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은 마치 자기가 하는 것처럼(as if from self) 선을 행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대신 정직해 주시기를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내가 거짓말을 하지 않아야 하고, 내가 용서해야 하며, 내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행한 뒤에는 그 선의 근원과 능력이 자기에게 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자유롭게 내가 행하지만, 선 자체는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freedom)와 ‘합리성’(rationality)을 동시에 보존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꼭두각시처럼 선하게 만들지 않으십니다. 무엇이 선하고 참된지를 이해하고 합리적으로 판단하며, 그것을 자유롭게 선택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거듭남(regeneration)은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과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은 적극적으로 악과 싸우고 선을 행합니다. 다만 그 싸움에서 이길 힘과 선을 행할 능력이 궁극적으로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배워 갑니다.

 

여기에서 ‘행위구원’이라는 말을 좀 더 정확하게 사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선을 행해야 한다’고 말한다고 해서 곧 행위구원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자기 힘으로 선행을 쌓아 그 공로로 구원을 얻는다’라고 말할 때 행위구원 문제가 생깁니다. 이 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선행은 필요 없다’와 ‘선행에는 공로가 없다’도 전혀 다른 말입니다.

 

이 차이를 놓치면 이상한 역설이 생깁니다.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라고 아주 정확하게 고백하면서 실제 삶에서는 거짓과 탐욕과 미움과 음란을 계속 붙들어도, 선한 삶을 강조하는 사람보다 자신이 더 복음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해야 합니다’라는 설교를 듣고 ‘저건 복음이 아니라 율법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수없이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라고도 하셨습니다(요13:17).

 

사실 신앙이 살아 있는지를 확인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곳이 삶입니다. 사과나무가 살아 있는지는 ‘나는 사과나무입니다’라는 팻말로 확인하지 않습니다. 때가 되면 열매를 봅니다. 그렇다고 열매를 가지에 접착제로 붙인다고 나무가 살아나는 것도 아닙니다. 뿌리와 줄기에 생명이 있어야 열매가 나옵니다. 믿음과 선행도 이와 비슷합니다. 외적 선행을 많이 붙인다고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실제로 사람 안에 있다면 그 생명은 결국 어떤 형태로든 삶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래서 선행은 구원의 ‘가격’이 아니라 구원의 ‘열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열매는 단순히 나무가 살아 있다는 증거만이 아닙니다. 나무가 존재하는 목적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것은 그 사람이 자기 혼자 천국에 들어가 행복하게 살게 하기 위해서만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을 이웃에게 흘려보내며 선하고 유용한 일을 하는 사람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이것이 ‘체어리티’(charity)입니다. 체어리티는 단순히 돈을 기부하거나 불쌍한 사람을 돕는 좁은 의미의 자선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이 이웃과 공동체를 향하여 실제적인 선과 유용한 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바르게 돌보는 것, 직장에서 정직하게 책임을 다하는 것, 환자를 성실하게 치료하는 것, 학생을 진실하게 가르치는 것,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는 것, 때로는 상대에게 해로운 일을 단호하게 거절하는 것까지도 체어리티의 삶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에게 ‘믿음과 체어리티’는 서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를 보게 하고, 체어리티는 그것을 사랑하게 하며, 행위는 그 사랑을 실제 세계에서 구현합니다. 진리가 선과 결합하고, 선이 유용한 일(use, 쓰임새)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살아 있는 신앙입니다.

 

여기에서 종교개혁이 경계했던 공로주의와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선한 삶 사이의 차이도 분명해집니다. ‘내가 선을 행했으니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셔야 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내 행위에는 공로가 없으니 어떻게 살아도 구원과는 상관없다’는 생각도 버려야 합니다. 첫 번째는 인간의 선행을 주님보다 높이고, 두 번째는 주님께서 인간을 실제로 거듭나게 하시는 일을 약화시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장면은 이 점을 아름답게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섬김에 관한 교리를 설명하시는 데서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직접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그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라고 하셨습니다(요13:14). 참된 진리는 결국 행위로 내려옵니다. 사랑은 행동할 때 비로소 자연계 안에서 모습을 드러냅니다.

 

따라서 ‘선행을 강조하면 행위구원이야’라는 생각의 가장 큰 위험은 선과 행위를 신앙에서 밀어내 버릴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면 신앙은 머리에서 동의하는 교리가 되고, 구원은 그 교리를 믿었다는 신분이 되며, 실제 삶은 ‘가능하면 잘 살면 좋은 것’ 정도로 낮아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남은 사람의 생각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의지와 사랑, 그리고 삶을 변화시키는 주님의 역사입니다.

 

물론 여기에서도 완벽주의로 가서는 안 됩니다. 선행을 강조한다는 것이 ‘완벽하게 선하게 살아야 구원받는다’라는 뜻은 아닙니다. 거듭나는 사람도 넘어지고 실패합니다. 중요한 것은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악을 악이라고 인정하고, 그것을 정당화하지 않으며, 다시 주님께 도움을 구하고 선을 향하여 일어서는 것입니다. 선한 삶은 구원을 얻기 위한 시험 점수가 아니라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거듭남의 과정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아주 중요한 역설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참된 선을 행할수록 사람은 오히려 ‘내가 선하다’는 생각에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자기 안의 선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점점 더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내가 저 사람을 도왔다’고 생각하지만,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주님께서 내게 사랑할 마음과 도울 기회, 그리고 능력을 주셨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선행이 많아질수록 공로 의식이 커지는 것이 아니라 감사가 깊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국적 선과 공로적 선의 차이입니다.

 

그러므로 ‘행위구원’을 가장 정확하게 경계하는 방법은 선행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선을 힘껏 행하면서도 그 선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습니다. 그래야 은혜입니다’가 아니라 ‘나는 주님께서 명하신 선을 힘껏 행하겠습니다. 그러나 그 선의 능력과 공로를 내 것으로 주장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은혜’와 ‘행위’도 더 이상 경쟁하지 않습니다. 은혜는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이 선을 행할 수 있게 하는 모든 생명과 능력이 먼저 주님에게서 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 은혜를 자유롭게 받아 실제 삶에서 사용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아 이웃에게 흘려보내는 것, 그것이 체어리티이며 유용한 삶입니다.

 

따라서 ‘선행을 강조하면 행위구원이야’라는 말에는 중요한 경계심이 있지만, 그것을 지나치게 확대하면 오히려 성경이 강조하는 삶을 약화시킬 수 있습니다. 경계해야 할 것은 선행이 아니라 ‘공로 의식’입니다. 버려야 할 것은 행위가 아니라 ‘내 행위가 나를 구원한다’는 생각입니다.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선행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니지만,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님은 반드시 우리를 선을 사랑하고 행하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십니다.’

 

조금 더 날카롭게 말하면 이것이겠습니다.

 

‘행위구원의 반대말은 ‘행위 없음’이 아니라 ‘공로 없음’입니다.’

 

그리고 이번 글의 핵심을 가장 ‘스베덴보리의 렌즈’답게 표현한다면 이것이겠습니다.

 

‘선을 행하되 그것을 내 공로로 여기지 않는 것, 마치 내가 하는 것처럼 힘껏 행하되 모든 참된 선의 근원은 주님이심을 인정하는 것, 이것이 은혜와 삶이 만나는 자리입니다.’

 

 

 

SL.21,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거야. 삶과 행위는 부차적인 거고’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거야. 삶과 행위는 부차적인 거고’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거야. 삶과 행위는 부차적인 거고.’ 개신교 신앙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매우 자연스럽게 들리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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