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23, ‘기도 많이 하면 하나님께서 내 소원을 들어 주신다’
‘기도 많이 하면 하나님께서 내 소원을 들어 주신다’
‘기도 많이 하면 하나님께서 내 소원을 들어 주신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이라면 매우 익숙한 말입니다. ‘기도하면 됩니다’, ‘끝까지 기도하세요’, ‘기도의 분량을 채우세요’, ‘하나님께 매달리면 반드시 응답하십니다’라는 권면도 자주 듣습니다. 실제로 성경은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가르칩니다. 주님께서는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7:7). 그러므로 간절히 기도하고 끈기 있게 주님을 찾는 것은 분명 귀한 신앙의 태도입니다.
문제는 ‘기도 많이 하면’과 ‘내 소원을 들어 주신다’ 사이에 우리가 어떤 인과관계를 만들어 놓느냐입니다. 자칫 기도의 양이 하나님의 결정을 움직이는 힘처럼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한 시간 기도했는데 응답이 없으면 세 시간을 기도하고, 일주일 기도했는데 이루어지지 않으면 사십 일을 기도하며, 많은 사람이 함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결국 마음을 바꾸실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기도는 주님과의 교제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사용하는 영적 수단이 되기 쉽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끈질긴 기도를 권하는 말씀도 있습니다. 눅18의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가 대표적입니다. 과부는 계속 찾아가 자신의 원한을 풀어 달라고 요청했고 결국 재판관은 그의 청을 들어줍니다. 그러나 이 비유를 ‘하나님도 계속 조르면 결국 들어주신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곤란합니다. 주님께서는 오히려 불의한 재판관과 하나님을 대조하십니다. 불의한 사람조차 끈질긴 호소를 듣는다면 하물며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의 부르짖음을 듣지 않으시겠느냐는 것입니다. 기도의 핵심은 하나님을 지치게 만드는 데 있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끝까지 그분을 향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에 관한 가장 중요한 장면 가운데 하나가 겟세마네입니다. 주님께서는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은 분명한 소원입니다. 고통을 앞두고 자신의 원함을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기도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이어집니다(마26:39).
이 한 문장 안에 기도의 본질이 거의 다 들어 있습니다. 기도는 원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아프면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고, 자녀의 문제가 해결되기를 기도할 수 있으며, 경제적인 어려움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취업, 결혼, 사업, 관계의 회복을 놓고 구체적으로 기도해도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이미 아시지만, 그 소원을 주님 앞에 가져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기도의 마지막에는 언제나 더 깊은 문이 하나 열려 있어야 합니다. ‘주님, 이것이 제가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알지 못하는 것이 있으니 제 뜻보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기도는 소원성취와 달라집니다. 소원성취의 중심에는 ‘내가 원하는 결과’가 있지만 기도의 중심에는 ‘주님’이 계십니다. 소원성취에서는 하나님이 내 목적을 이루어 주시는 수단이 되기 쉽지만, 참된 기도에서는 내가 원하는 것까지 주님 앞에 내려놓고 주님의 선하신 질서를 받아들이려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보면 이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주님의 신적 섭리는 인간의 순간적인 행복만을 목표로 하지 않고 그의 영원한 구원과 거듭남(regeneration)을 향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지금 당장 자기에게 무엇이 좋은지를 완전하게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돈이 생기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돈이 우리의 탐욕과 자기 사랑을 키울 수도 있습니다. 어떤 관계가 반드시 이루어져야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관계가 오히려 우리를 무너뜨릴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지금은 실패와 손실처럼 보이는 일이 훗날 우리를 더 큰 악에서 보호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고난은 모두 하나님께서 일부러 보내신 훈련이다’라고 단정해서도 안 됩니다. 여기에서도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허용하시는 것을 구별해야 합니다. 세상에는 인간의 악한 선택에서 생기는 고통도 있고, 자연계의 질서와 한계에서 발생하는 질병과 재난도 있으며, 다른 사람의 자유 때문에 우리가 겪게 되는 고통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 모든 악과 고통을 직접 만들어 보내신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허용된 것 안에서도 가능한 한 사람을 선으로 이끄시며, 영원한 것을 위하여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간절히 기도했는데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기도가 부족했다’고 결론 내릴 수 없습니다. 이것은 때때로 신앙인에게 매우 잔인한 말이 될 수 있습니다. 병든 가족을 위해 밤을 새워 기도했는데 결국 세상을 떠났다고 합시다. 그 사람에게 ‘조금만 더 믿고 기도했으면 나았을 텐데’라고 말한다면 남은 사람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죄책감을 씌울 수 있습니다. 기도의 응답 여부를 기도의 분량이나 믿음의 강도와 기계적으로 연결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도 자신의 ‘육체의 가시’를 놓고 주님께 세 번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받은 대답은 가시의 제거가 아니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고후12:9). 바울의 기도가 부족해서였을까요? 믿음이 약해서였을까요? 그렇게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는 분명히 구했고 주님께서는 응답하셨지만, 그 응답은 바울이 요청한 것과 다른 형태였습니다.
여기에서 ‘기도 응답’이라는 말 자체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흔히 내가 원한 일이 일어나면 ‘응답받았다’고 말하고, 일어나지 않으면 ‘아직 응답받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응답의 기준이 언제나 ‘내 소원이 이루어졌는가’가 됩니다. 주님께서 ‘그것은 네게 좋지 않다’고 하시는 것도 응답일 수 있고, ‘아직 아니다’도 응답일 수 있으며, 바울에게처럼 ‘그것을 없애 주는 대신 그것을 견딜 은혜를 주겠다’는 것도 응답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오래 기도해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모르시기 때문도 아니고, 하나님을 설득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도 아닙니다. 오히려 긴 기도 속에서 변화되는 쪽은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주님, 이것을 꼭 주십시오’라고 시작했던 기도가 어느 순간 ‘주님, 이것이 정말 제게 선한 것입니까?’로 바뀌고, 더 깊어지면 ‘주님, 제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선을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로 바뀔 수 있습니다. 기도가 소원을 주님께 관철하는 과정에서 주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으로 내가 변화되는 과정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유’(freedom)와 ‘합리성’(rationality)의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고 판단하고 선택하는 능력을 없애지 않으십니다. 기도했다고 해서 해야 할 일을 대신 해 주시는 것도 아닙니다. 취업을 위해 기도했다면 이력서를 써야 하고, 관계의 회복을 위해 기도했다면 사과해야 할 것이 있으면 사과해야 하며, 건강을 위해 기도했다면 필요한 치료와 생활의 변화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기도는 인간의 책임을 대신하는 마법이 아닙니다.
그래서 ‘기도했으니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 주시겠지’라는 태도와 참된 신뢰도 구별해야 합니다. 주님께 맡긴다는 것은 내가 할 일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자유와 합리성 안에서 성실하게 행하되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결과를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체념이 아니라 신뢰입니다.
여기에도 ‘프로프리움’(proprium)이 숨어들 수 있습니다. 아주 역설적이지만 기도를 많이 하면서도 자기 뜻을 더 강하게 붙들 수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오래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왜 안 들어 주시는가?’라는 생각 속에는 어느 순간 ‘내가 이 정도 기도했으니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해 주셔야 한다’는 거래의식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기도의 분량이 일종의 공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조차 자기 뜻을 관철하기 위한 수단이 됩니다.
참된 기도는 그 반대 방향으로 갑니다. 오래 기도할수록 ‘내 뜻대로 되어야 한다’는 마음이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는 나보다 더 멀리 보신다’는 신뢰가 깊어집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절대화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의 가장 깊은 열매는 반드시 ‘원하는 것을 얻는 것’만이 아니라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해도 주님을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주기도문도 이것을 잘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중심은 ‘내 소원이 이루어지이다’가 아니라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입니다(마6:10). 물론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는 간구도 있습니다. 필요한 것을 구합니다. 그러나 그 간구를 둘러싸고 있는 더 큰 질서는 주님의 이름, 주님의 나라, 주님의 뜻입니다. 우리의 필요가 주님의 뜻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기도를 많이 한다는 것은 분명 귀한 일입니다. 문제는 ‘얼마나 오래 기도했는가?’보다 그 기도를 통하여 ‘누구의 뜻을 구하게 되었는가?’입니다. 한 시간을 기도하고도 자기 뜻만 더욱 완강하게 붙들 수 있고, 짧게 ‘주님, 제가 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을 따르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면서 깊은 신뢰로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기도의 깊이는 반드시 시간의 길이와 비례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라는 약속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것을 하나님께 무엇이든 요구하면 그대로 받을 수 있다는 백지수표로 이해하기보다는, 주님을 향하여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사람에게 주님께서 참으로 필요한 선을 주신다는 약속으로 읽는 것이 더 온전합니다. 실제로 눅11의 병행 본문에서는 결론이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십니다(눅11:13). 가장 깊은 응답은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것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 많이 하면 하나님께서 내 소원을 들어 주신다’는 말에는 귀한 진리가 있습니다. 주님께 구해야 하고, 포기하지 않고 기도해야 하며, 우리의 가장 구체적인 필요와 소원까지 주님 앞에 가져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기도의 양이 충분하면 하나님께서 결국 내 뜻대로 해 주신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기도의 방향이 뒤집힙니다.
기도는 주님을 내 뜻으로 움직이는 기술이 아니라, 주님 앞에서 내 뜻이 정화되고 주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내가 변화되는 거룩한 관계입니다.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기도의 목적은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관철하는 데 있지 않고, 내가 원하는 것까지 주님께 아뢰면서 무엇이 참으로 선한지를 주님에게서 배우고 그분의 뜻을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글의 핵심을 더 짧게 표현한다면 이것이겠습니다.
‘기도를 많이 해서 주님의 뜻을 내 뜻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면서 내 뜻이 주님의 뜻을 향하여 움직이는 것입니다.’
겟세마네의 주님께서 그 모든 것을 한 문장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SL.22, ‘선행을 강조하면 행위구원인데...’
‘선행을 강조하면 행위구원인데...’ ‘선행을 강조하면 행위구원인데....’ 개신교 안에서는 상당히 민감하게 들리는 말입니다. 설교자가 ‘선을 행해야 합니다’,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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