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28,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셔. 그러니 일어난 일은 모두 하나님의 뜻이야’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셔. 그러니 일어난 일은 모두 하나님의 뜻이야’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셔. 그러니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결국 하나님의 뜻이야.’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일수록 이런 말을 자연스럽게 할 때가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이라고 가르치며, 참새 한 마리조차 하나님의 돌보심 밖에 있지 않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연처럼 보이는 일 속에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주님께서 여전히 다스리고 계심을 신뢰하는 것은 매우 귀한 신앙입니다.
문제는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와 ‘일어난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직접 원하셨다’를 같은 뜻으로 만들어 버릴 때 생깁니다. 이 둘은 같지 않습니다. 만일 세상에서 일어난 모든 사건이 그대로 하나님의 뜻이라면 살인과 전쟁, 학대와 배신, 거짓과 착취까지도 하나님께서 원하신 일이 되어 버립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악을 행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시니 이것도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악을 금하시는 분이면서 동시에 그 악이 일어나기를 원하시는 분이라는 모순에 빠집니다.
성경은 악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악을 행하는 자가 되지 말고 선을 행하는 자가 되라’고 하며(요삼1:11), 야고보는 더욱 분명하게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고 말합니다(약1:13). 주님께서는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살인하고 간음하고 거짓말할 때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하지 말라고 명하신 일을 주님께서 동시에 하기를 원하셨다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를 이해하려면 ‘주님께서 뜻하시는 것’과 ‘주님께서 허용하시는 것’을 구별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에서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뜻하시는 것은 언제나 선입니다. 주님은 사람이 악에서 돌이켜 선을 선택하고, 진리를 받아들이며, 마침내 천국의 생명을 받아들일 수 있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자유가 있기 때문에 사람은 주님의 뜻을 거부하고 악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악을 원하시지는 않지만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시기 위해 일정 범위에서 그것을 허용하십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께서는 악을 아예 막아 버리지 않으실까요? 이것은 인간의 ‘자유’(freedom)와 ‘합리성’(rationality)에 관계됩니다. 사람이 선을 선택하려면 악을 선택할 가능성도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사람이 악을 선택하려 할 때마다 초자연적으로 손을 붙잡아 막으신다면, 겉으로는 악이 없는 세상이 될지 몰라도 인간은 자유롭게 선을 사랑하는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선을 강제로 행하는 것은 참된 선이 될 수 없으며, 사랑 역시 강요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천국으로 끌고 가는 기계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자유와 합리성 안에서 주님을 향할 수 있는 인간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주님의 허용이 방관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허용하신다’는 말을 ‘상관하지 않고 내버려 두신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적 허용은 신적 섭리 밖에 존재하는 별도의 영역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악을 선으로 바꾸어 악이 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악이 발생하는 상황에서도 그것이 가능한 한 더 큰 악으로 번지는 것을 제한하시고, 그 결과 속에서도 인간을 선으로 돌이키기 위해 끊임없이 역사하십니다. 악은 인간과 지옥에서 나오지만, 악을 제한하고 그 가운데서 선한 가능성을 보존하시는 것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요셉의 이야기가 이 차이를 잘 보여 줍니다. 형들은 요셉을 미워했고 그를 죽이려 했으며 결국 노예로 팔았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해 버리면 형들의 악한 선택까지 하나님께서 원하셨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나 훗날 요셉은 형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50:20). 형들이 의도한 것은 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은 선이었습니다. 같은 사건 안에서도 인간의 악한 의도와 하나님의 선한 섭리는 구별됩니다.
십자가는 이 문제를 가장 깊은 차원에서 보여 줍니다. 유다는 주님을 배신했고, 종교 지도자들은 거짓 증언을 이용했으며, 군병들은 주님을 조롱하고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들의 배신과 증오와 잔인함 자체를 ‘하나님의 선한 뜻’이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악은 악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행한 그 악조차 주님의 구원 역사를 무너뜨리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인간과 지옥의 가장 깊은 악을 맞아 그것을 이기시고 인류를 위한 구원의 길을 이루셨습니다. 여기에서 신적 섭리의 놀라운 깊이가 드러납니다. 주님은 악을 만들어 선을 이루시는 분이 아니라, 악이 일어나도 그것이 당신의 궁극적인 선을 좌절시키지 못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이 구별은 우리의 실제 삶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교통사고로 가족을 잃은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뜻이 있어서 데려가셨습니다’라고 말하거나, 범죄 피해자에게 ‘이 일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일어난 것입니다’라고 너무 쉽게 말하면 큰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특히 누군가의 악한 선택으로 고통받은 사람에게 그 악까지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말한다면, 피해자는 자신을 해친 사람뿐 아니라 하나님까지 두려워하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사건의 이유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너무 빨리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자연재해나 질병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진과 홍수, 암과 감염병, 갑작스러운 죽음이 발생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이것을 보내셨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자연계에는 주님께서 세우신 질서와 법칙이 있고, 그 자연적 질서 안에서 인간에게 고통스러운 일도 일어납니다. 또한 인간의 탐욕과 무책임, 폭력과 잘못된 판단 때문에 발생하는 고통도 있습니다. 모든 원인을 하나님의 직접적인 의지 하나로 환원하면 자연적인 원인과 인간의 책임을 지워 버릴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반대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전능하지 않으신가? 막으실 수 있는데도 허용하셨다면 결국 뜻하신 것과 같은 것 아닌가?’ 이것이 바로 이 문제에서 가장 어려운 지점입니다. 그러나 ‘막을 능력이 있음’과 ‘그 일을 원함’은 같지 않습니다. 부모가 성인이 된 자녀의 모든 잘못된 선택을 물리적으로 막을 능력이 없어서만 기다리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억지로 통제하는 것이 그 사람의 자유 자체를 파괴하기 때문에 고통스럽게 지켜보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물론 인간 부모와 주님의 섭리를 그대로 동일시할 수는 없지만, ‘허용 = 찬성’이 아니라는 점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것은 인간의 거듭남(regeneration)과 직접 연결됩니다. 주님의 목적은 단지 우리가 고통 없는 자연적 삶을 사는 데 있지 않습니다.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이 자유롭게 악을 거부하고 선을 선택하여 천국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적 섭리는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지 않는 방식으로 역사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께서 왜 당장 개입하지 않으시는가?’라고 묻지만, 주님의 섭리는 우리가 보는 한순간보다 인간의 영원한 삶 전체를 보고 움직입니다.
그렇다고 고통 앞에서 ‘다 하나님의 허용이니 받아들여라’라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허용의 교리는 고통받는 사람에게 체념을 강요하기 위한 교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악을 악이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게 해 주는 교리입니다. 학대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므로 벗어나야 하고, 폭력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므로 막아야 하며, 불의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므로 바로잡아야 합니다. 병이 생겼다면 치료해야 하고, 재난이 일어났다면 사람을 구조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여 악과 고통 앞에서 수동적으로 있는 것은 신적 섭리를 믿는 태도와 다릅니다.
여기에서 ‘체어리티’(charity)가 중요해집니다. 체어리티란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이 이웃을 향하여 실제적인 선과 유용한 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누군가 고통받고 있을 때 ‘이것도 하나님의 뜻일 거야’라고 설명하는 것보다 그 사람 곁에 서고, 필요한 도움을 주고, 악을 막으며, 가능한 선을 행하는 것이 훨씬 더 주님의 뜻에 가까울 수 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왜 하나님께서 이 일을 허락하셨을까?’를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상처를 싸매고 돌보았습니다(눅10:33-35).
또한 이 구별은 인간의 책임을 보존합니다. 만일 일어난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내가 저지른 잘못도 결국 하나님께서 뜻하신 일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회개의 근거가 약해집니다. ‘내가 화를 내고 상처를 주었지만 이것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일어난 일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악의 책임을 주님께 돌릴 수 없습니다. 악은 인간이 자신의 ‘프로프리움’(proprium)에서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거부할 때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란 자신의 악을 하나님의 섭리 뒤에 숨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악으로 인정하고 주님의 도움을 받아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신다’는 고백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 고백을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더 깊게 이해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직접 원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과 지옥의 어떤 악도 주님의 궁극적인 선한 목적을 완전히 무너뜨릴 수 없으며, 주님께서는 허용된 모든 상황 속에서도 가능한 한 인간을 선과 구원으로 이끌고 계신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고통스러운 일이 일어났을 때 ‘왜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뜻하셨을까?’라고 묻는 것보다 때로는 질문을 바꾸는 편이 좋습니다. ‘주님께서 이것을 원하셨는지는 내가 함부로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이미 일어난 이 상황 속에서 주님께서는 어떤 선을 이루기 원하시는가? 그리고 나는 지금 어떤 선을 행해야 하는가?’라고 묻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악을 하나님의 뜻으로 만들지 않으면서도 신적 섭리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게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균형입니다. 한쪽 극단에는 ‘세상일은 모두 우연이고 하나님은 아무것도 관여하지 않으신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다른 쪽 극단에는 ‘일어난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직접 계획하고 원하신 것이다’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신적 섭리는 이 두 극단 사이에서 훨씬 섬세하게 움직입니다.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섭리하시지만 악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인간의 자유를 허용하시지만 인간을 버려두시지 않습니다. 악을 허용하시지만 그 악이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시니 일어난 일은 모두 하나님의 뜻이다’라는 말에는 귀한 신앙고백과 위험한 오해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신다’는 고백은 붙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그러므로 일어난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원하셨다’고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신적 섭리 밖에서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일어난 모든 것을 주님께서 직접 뜻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조금 더 깊이 압축하면 이것이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악을 뜻하시지 않지만 인간의 자유 때문에 악을 허용하시며, 허용된 악 속에서도 끊임없이 그것을 제한하고 인간을 가능한 선과 구원으로 이끄십니다.’
그래서 신앙은 비극을 만날 때마다 ‘이것도 하나님의 뜻이야’라고 설명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때로는 왜 이런 일이 허용되었는지 모른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 악이 주님의 선보다 강하지는 않다’고 믿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가 바로 그것을 보여 줍니다. 인간은 가장 깊은 악을 행했지만, 그 악이 주님의 사랑을 패배시키지는 못했습니다.
신적 섭리를 믿는다는 것은 모든 사건을 하나님의 직접적인 뜻으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건도 주님의 선한 목적을 최종적으로 좌절시킬 수 없음을 믿는 것입니다.
SL.27, ‘좋은 일이 생겼어? 그럼 하나님께 복 받은 거고, 나쁜 일이 생겼어? 그럼 뭔가 잘못한 거
‘좋은 일이 생겼어? 그럼 하나님께 복 받은 거고, 나쁜 일이 생겼어? 그럼 뭔가 잘못한 거지’ ‘좋은 일이 생겼어? 하나님께 복 받은 거야. 그런데 자꾸 나쁜 일이 생겨? 뭔가 잘못한 게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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