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003, ‘한번 구원받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구원은 취소되지 않는다’
SL.PR.003 | 개신교인의 무의식 속 교리화된 오류 100선
‘한번 구원받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구원은 취소되지 않는다’ - 주님의 영원한 사랑과 인간의 자유를 혼동하다
개신교 신앙생활에서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는 말은 많은 신자에게 깊은 위로와 확신을 주는 표현입니다. 구원은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것이므로, 한번 구원받은 사람은 어떤 실패와 죄를 경험하더라도 최종적으로 구원을 잃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확신은 특히 자신의 연약함과 반복되는 죄 때문에 괴로워하는 신자들에게 큰 위안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한번 사랑하신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시며, 인간의 부족함 때문에 자신의 구원 약속을 철회하지 않으신다는 믿음에는 분명 귀중한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나는 이미 구원받았으므로 이후에 어떤 삶을 살더라도 천국에 가는 것은 확정되어 있다’고 생각한다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인간이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실제 상태를 구별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구원을 과거 어느 시점에 획득한 영원한 자격으로 이해하면, 성경이 그토록 강조하는 회개와 거듭남, 끝까지 주님 안에 거하는 삶은 구원의 본질이 아니라 부차적인 문제가 될 위험이 있습니다.
먼저 이 명제를 개신교 전체의 공식 교리로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개혁주의 전통은 흔히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이라고 부르는 교리를 가르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7장은 하나님께서 참으로 부르시고 거룩하게 하신 사람들은 은혜의 상태에서 완전히 또는 최종적으로 떨어져 나가지 않으며,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끝까지 보존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참된 신자도 심각한 죄에 빠지고 한동안 그 죄 가운데 머물 수 있으며, 그 결과 양심이 상하고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따라서 엄밀한 개혁주의 견인 교리는 ‘한때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했으니 이후에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는 무조건적인 면죄부와 동일하지 않습니다. 반면 웨슬리안·알미니안 전통은 하나님의 은혜가 언제나 먼저 역사하지만 인간은 그 은혜에 대한 응답을 거부하고 믿음에서 떠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결국 개신교 안에서도 구원의 영원한 보장에 관한 이해는 서로 다릅니다. 우리가 이 글에서 검토하려는 것은 이러한 교리적 차이를 무시한 채, ‘한번 구원받았으면 이후의 삶과 관계없이 모든 것이 확정되었다’고 받아들이는 신앙적 통념입니다.
성경에서 영원한 구원의 확신을 뒷받침하는 대표적인 말씀은 요한복음 10장 28절로 29절입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양들에게 영생을 주시며 그들을 자신의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로마서 8장 38절로 39절 역시 사망이나 생명이나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이 말씀들은 주님의 사랑과 구원하시는 능력이 인간의 연약함이나 세상의 위협보다 무한히 크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같은 요한복음 10장 27절에서 자신의 양들이 자신의 음성을 듣고 자신을 따르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요한복음 15장 4절로 6절에서는 자신 안에 거하라고 명하시며,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가르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양들을 지키시는 능력과 그 양들이 실제로 주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상태를 분리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는 진리와, 사람이 주님을 떠나는 삶을 선택할 수 있다는 문제는 같은 차원에서 다루어서는 안 됩니다.
히브리서 6장 4절로 6절과 10장 26절로 29절에는 한때 영적 은혜를 경험한 사람이라도 의도적으로 진리를 거스르고 악으로 돌아설 때 발생하는 심각한 위험이 경고되어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2장 20절로 22절 역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사람이 다시 그것에 얽매이는 상태를 경고합니다. 물론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이러한 본문들을 참된 중생자의 구원 상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지 않고, 외적으로 신앙에 참여했으나 참된 구원에 이르지 못한 사람에 관한 경고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반면 다른 개신교 전통에서는 실제 신자에게도 배교의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 주는 말씀으로 이해합니다. 이처럼 해석의 차이는 존재하지만, 어느 입장에서든 성경의 경고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약속은 회개와 순종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허가증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가도록 우리를 부르시는 말씀입니다.
이 문제를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구원의 의미 자체가 더욱 깊어집니다. 스베덴보리의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는 주님의 섭리가 지향하는 목적이 인간의 구원이며, 인간이 자유와 합리성 안에서 개혁되고 거듭나야 한다고 설명합니다(DP.71, 82–86). 여기서 구원이란 단순히 인간의 이름이 천국에 들어갈 사람들의 명단에 기록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의지와 이해가 주님에 의해 변화되고, 악을 사랑하던 사람이 선을 사랑하며, 거짓을 즐기던 사람이 진리를 기뻐하는 새로운 생명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인간의 내면에서 실제로 일어나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를 원하시지만, 인간의 자유를 제거하여 강제로 천국의 생명을 주입하지는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자유롭게 받아들이지 않은 사랑은 그 사람 자신의 사랑이 될 수 없고, 이해를 거치지 않은 진리는 그 사람의 생명과 결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구원은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부여하시는 외적인 신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선과 진리를 인간이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가운데 실제로 이루어지는 거듭남의 과정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을 만나게 됩니다. 주님께서 한번 시작하신 구원의 역사를 인간이 거부할 수도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주님은 결코 인간에 대한 구원의 뜻을 철회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으며, 주님은 모든 사람을 가능한 한 천국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끊임없이 역사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와 합리성은 구원의 첫 순간에만 허락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거듭나는 과정 전체에서 존중되어야 하는 인간의 본질적인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한때 진리를 받아들이고 선을 행하기 시작했더라도, 이후 자신의 자유로 악을 사랑하고 진리를 거부하는 방향으로 돌아설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 사람을 버리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자신의 삶을 통해 주님의 인도를 거스르는 방향을 선택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자유와 합리성 안에서 자신의 악을 마치 스스로 제거하는 것처럼 노력해야 하지만, 실제로 악을 제거하고 선을 주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라고 설명합니다(DP.100–128). 이것은 인간이 자신의 노력으로 구원을 획득한다는 뜻이 아니라, 구원하시는 주님의 역사를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과 분리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조심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구원을 단번에 획득한 뒤 잃어버릴 수 있는 물건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는 명제가 구원을 영구적인 소유물처럼 이해하는 위험을 지닌다면, 반대로 ‘죄를 지을 때마다 구원을 잃었다가 회개하면 다시 얻는다’는 생각 역시 구원의 본질을 오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순간에 구원을 소유했느냐가 아니라, 그 사람의 내면에서 어떤 사랑이 형성되고 있으며 그 사랑이 어떠한 삶을 만들어 내고 있느냐입니다. 사람이 악을 행했다고 해서 그 순간 곧바로 모든 영적 생명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거듭남은 오랜 시간에 걸쳐 진행되며, 그 과정에는 수많은 시험과 넘어짐, 회개와 회복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모든 과정에서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반복되는 연약함 때문에 자신의 구원이 매번 취소되는 것처럼 두려워할 필요도 없지만, 과거의 신앙고백 하나만을 근거로 자신의 현재 삶을 돌아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이 점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에 나타나는 지배적인 사랑의 가르침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죽은 뒤에도 지상에서 형성한 자신의 사랑과 그 사랑에서 비롯된 신앙을 지니고 살아간다고 설명합니다(HH.476). 특히 HH.477에서는 인간의 지배적인 사랑이 사후에도 계속되며, 그 사랑이 그의 영원한 삶의 방향을 결정한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지배적인 사랑이란 그 사람이 일시적으로 느끼는 감정이나 특정한 순간의 생각이 아니라, 그의 의지와 삶 전체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중심적인 사랑입니다. 어떤 사람이 입술로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 실제로는 자신만을 사랑하고 이웃을 지배하며 해치는 것을 즐거워한다면, 그 사람의 내면을 지배하는 것은 신앙고백의 내용이 아니라 그가 실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많은 실패와 연약함이 있더라도 악을 죄로 여기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선을 사랑하는 방향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서는 전혀 다른 내적 생명이 형성됩니다. 따라서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것은 단순히 어느 날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가졌는가가 아니라, 주님께서 그 사람 안에 이루어 가신 생명이 실제로 어떤 사랑으로 자리 잡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렇게 보면 ‘구원이 취소된다’는 표현 자체도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합니다. 취소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유효하다고 선언하신 구원을 인간의 잘못 때문에 나중에 철회하시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주님은 인간을 구원하기로 하셨다가 마음을 바꾸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과 구원하시는 뜻은 언제나 동일합니다. 문제는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내적 상태입니다. 마치 태양이 끊임없이 빛과 열을 보내지만 창문을 닫거나 빛을 가리는 쪽으로 돌아서면 그 빛과 열을 충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이러한 비유가 인간의 자유와 구원의 신비를 모두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주님께서 사랑을 거두시기 때문에 사람이 구원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그 사랑을 거부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생명을 형성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더욱 적절한 질문은 ‘한번 받은 구원이 취소될 수 있는가?’보다 ‘주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생명을 사람이 실제로 받아들이고 있는가?’입니다.
이것은 목회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어떤 신자가 오랫동안 교회에 다니면서도 반복적인 죄와 악한 습관 때문에 괴로워한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에게 ‘한번 구원받았으니 아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만 말한다면, 주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실제로 악을 멀리하도록 돕는 일을 소홀히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계속 그렇게 죄를 지으면 구원을 잃는다’고만 말한다면, 그는 주님의 사랑을 신뢰하기보다 자신의 구원 상태를 끊임없이 의심하며 두려움 속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어느 쪽도 충분한 목회적 돌봄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당신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말고 다시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자신의 악을 정직하게 살피고 그것을 죄로 인정하며, 주님의 힘으로 조금씩 그 악에서 벗어나십시오’라고 권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이러한 권면은 주님의 사랑을 축소하지 않으면서도 인간의 회개와 책임을 지워 버리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붙드신다는 진리는 우리가 그분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고 따르도록 격려하는 말씀이어야지, 그 손길을 외면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는 보증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으로 이 명제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가 주님을 어떤 분으로 이해하느냐에 있습니다. ‘한번 구원받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구원은 취소되지 않는다’는 말이 주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는 뜻이라면, 우리는 그 안에 담긴 진리를 존중해야 합니다. 주님은 인간의 실패 때문에 사랑을 거두시는 분이 아니며, 한때 죄에 빠졌다고 해서 돌아오는 사람을 거절하시는 분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 말이 인간이 이후에 무엇을 사랑하고 어떤 삶을 살든 그 내적 상태와 관계없이 천국의 생명을 영원히 보장받았다는 뜻이라면, 그것은 주님의 구원을 지나치게 외적인 것으로 이해한 결과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목적은 단지 우리가 죽은 뒤 천국이라는 장소에 들어가도록 허락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천국의 생명을 이루시고, 우리가 주님의 사랑과 지혜를 기쁘게 받아들이며 이웃을 사랑하는 존재가 되게 하시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구원의 확신은 과거에 어떤 종교적 결정을 내렸다는 사실에만 근거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도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새롭게 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신뢰하며, 그 사랑에 응답하여 살아가는 데서 더욱 깊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이미 확보했다고 생각하는 구원의 자격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를 구원하고 계시는 주님 자신입니다.
‘한번 구원받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구원은 취소되지 않는다’는 명제에는 주님의 사랑과 구원하시는 뜻이 변하지 않는다는 귀중한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신앙고백이나 회심 경험만으로 이후의 삶과 관계없이 영원한 구원이 확정된다고 이해한다면 오류가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구원은 인간의 내면에 주님의 선과 진리가 받아들여져 거듭남이 이루어지는 과정이며, 인간의 자유와 그 안에서 형성되는 지배적인 사랑을 제외하고 이해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버리지 않으시지만, 사람은 주님의 사랑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주님께서 구원을 취소하시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주님의 구원하시는 생명을 실제로 받아들이며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SL.PR.002, ‘영접기도를 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
SL.PR.002 | 개신교인의 무의식 속 교리화된 오류 100선 ‘영접기도를 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 ‘영접기도를 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 - 주님께 나아가는 길을 하나의 기도문에 가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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