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005,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거야. 삶과 행위는 구원과 관계없어’
SL.PR.005 | 개신교인의 무의식 속 오류와 뒤섞인 신앙 100선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거야. 삶과 행위는 구원과 관계없어’ - 믿음에서 삶을 떼어 놓을 때 사라지는 구원의 본질
해설
개신교 신앙에서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가르침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선행이나 공로로 구원을 얻을 수 없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하거나 종교적 행위를 통해 구원을 획득하려는 인간의 교만을 경계한다는 점에서 귀중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이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것이므로 삶과 행위는 구원과 관계없다’는 생각으로 발전한다면 문제는 전혀 달라집니다. 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실제로는 이웃을 미워하고, 자기 욕망을 위해 다른 사람을 해치며, 악을 죄로 여기지도 않는다면, 과연 그의 믿음은 그를 구원하는 참된 믿음일까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이 질문은 단순히 믿음과 행위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를 묻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믿음이란 무엇이며, 주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신다는 것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기독교 신앙의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먼저 이 명제를 개신교 전체의 공식 교리로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종교개혁 전통의 ‘오직 믿음’(sola fide)은 일반적으로 선행이 칭의의 근거나 공로가 될 수 없다는 뜻이지, 선행이 전혀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실제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1장 2항은 믿음이 칭의의 유일한 수단이지만,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 안에서 그 믿음은 홀로 있지 않고 다른 구원의 은혜들과 함께하며 사랑으로 역사한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제16장에서는 선행을 참되고 살아 있는 믿음의 열매와 증거라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삶과 행위는 구원과 관계없다’는 말은 엄밀한 개혁주의 교리를 그대로 표현한 것이라기보다, 칭의와 성화의 구별이 일상적인 신앙 언어 속에서 지나치게 단순화된 결과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스베덴보리와 종교개혁 신학 사이의 실제적인 차이도 남아 있습니다. 종교개혁 전통이 칭의를 설명할 때 믿음과 행위의 역할을 엄격하게 구별한다면, 스베덴보리는 참된 믿음 자체가 체어리티와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관심은 특정 교단을 잘못 이해하여 비판하는 데 있지 않고, 구원의 본질에서 믿음과 삶을 분리할 수 있는가를 살피는 데 있습니다.
이 문제의 출발점은 로마서 3장 28절입니다. 바울은 사람이 율법의 행위와 관계없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선언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 16절 역시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인간이 율법을 준수하거나 자신의 종교적 공로를 쌓아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 율법의 지위,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문맥을 함께 살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들을 읽으면서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지 않는다’는 가르침을 곧바로 ‘어떤 선한 행위도 구원과 관계없다’는 결론으로 확대하면, 바울의 의도를 지나치게 단순화하게 됩니다. 바울 자신도 갈라디아서 5장 6절에서 중요한 것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라고 말하며, 로마서 2장 6절로 7절에서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바울에게도 믿음은 단순한 지적 동의나 언어적 고백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참된 믿음은 새로운 생명과 관계되며, 그 생명은 실제 삶에서 나타납니다.
여기서 반드시 함께 읽어야 할 말씀이 야고보서 2장 14절로 26절입니다. 야고보는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행함이 없다면 그 믿음이 그를 구원할 수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특히 가난한 형제나 자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라고 말하는 사람의 예를 통해, 실제 사랑이 없는 믿음의 공허함을 드러냅니다. 이어 17절에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선언하고, 26절에서는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처럼 행함 없는 믿음도 죽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구원을 얻기 위해 선행의 점수를 쌓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믿음이라면 그 믿음 안에 실제로 살아 있는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웃의 고통을 보면서도 전혀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다른 사람을 해치는 일을 즐거워하면서도 자신에게 믿음이 있다고 주장한다면, 야고보는 그 믿음의 생명 자체를 질문합니다. 문제는 선행이라는 외적인 증거가 충분한가를 넘어, 선을 사랑하는 내적인 생명이 그 사람 안에 존재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새 예루살렘과 그 천적 교리’(New Jerusalem and Its Heavenly Doctrine) 108항은 이 문제를 매우 명료하게 설명합니다. 체어리티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믿음의 본질도 알 수 없으며, 체어리티가 없는 곳에는 믿음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체어리티와 믿음이 선과 진리처럼 하나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109항에서는 체어리티와 믿음의 관계를 인간의 의지와 이해에 비유합니다. 의지는 선을 받아들이고 이해는 진리를 받아들이는데, 두 능력이 함께 인간의 생명을 이루는 것처럼 체어리티와 믿음도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믿음이 먼저 생기고 그 결과로 선행이 뒤따라온다는 시간적 순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진리는 체어리티의 선과 결합될 때 비로소 살아 있는 믿음이 된다는 존재론적 설명입니다. 이해 속에만 머물러 있는 진리는 아직 그 사람의 생명이 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진리가 의지 안에 받아들여져 사랑의 대상이 되고, 그 사랑이 실제 삶에서 선한 행위로 나타날 때 비로소 그 진리는 인간의 내면에 살아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에게 체어리티가 없는 믿음은 다소 부족한 믿음이 아니라, 구원하는 믿음으로서의 본질을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336항에서 더욱 깊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믿음과 체어리티 가운데 어느 것이 먼저인가 하는 오래된 논쟁을 다루면서, 시간상으로는 믿음이 먼저이지만 목적상으로는 체어리티가 먼저라고 설명합니다. 사람은 일반적으로 먼저 진리를 배우고 이해한 다음, 그 진리에 따라 선을 행하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겉으로 보면 믿음이 선행보다 먼저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배우는 궁극적인 목적은 그 진리를 삶으로 실현하여 선을 행하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집을 짓는 일에 비유합니다. 시간상으로는 기초를 놓고 벽을 세우며 지붕을 만드는 일이 먼저이지만, 집을 짓는 궁극적인 목적은 그 안에서 살아가기 위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의 진리를 배우는 것은 체어리티의 생명에 이르기 위한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선행보다 앞세울 수는 있어도, 선행과 무관한 독립적인 구원의 수단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진리를 아는 것이 목적이 되고 그 진리대로 살아가는 것이 부차적인 일이 되는 순간, 신앙의 수단과 목적이 뒤바뀌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더욱 깊이 살펴보아야 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행위’의 의미입니다. 행위는 단순히 눈에 보이는 행동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모든 행위에는 그 행위를 일으키는 의지와 사랑이 들어 있습니다. 같은 돈을 기부하더라도 어떤 사람은 이웃의 어려움을 진심으로 덜어 주고 싶어서 기부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은 자신의 명성을 높이기 위해 기부할 수 있습니다. 외적인 행동은 같지만 그 안에 있는 사랑은 다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471–476항에서 인간의 삶이 그의 사랑에 따라 형성되며, 행위에는 그 사람의 의지와 생각이 담겨 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인간의 행위를 보신다는 것은 단순히 외적인 행동의 숫자를 세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행위 안에 어떤 사랑이 있었고, 그 사랑이 어떠한 삶을 형성했는지를 보신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구원과 관련된 것은 행위의 외적인 양이 아니라, 선을 사랑하고 악을 멀리하려는 내적인 상태입니다. 그러나 그 내적인 상태는 실제 삶과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행위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행위는 사랑을 실현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선행이 중요하다는 가르침은 결국 행위구원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이 질문은 개신교 신자들이 스베덴보리의 구원론을 접할 때 가장 먼저 제기할 수 있는 반론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자신의 능력으로 선을 만들어 내거나 자신의 공로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모든 참된 선은 오직 주님에게서 옵니다. 인간이 스스로 선하다고 여기고 자신의 행위를 구원의 공로로 삼는다면, 오히려 그 안에는 자기 사랑과 ‘프로프리움’(proprium)이 개입합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이 자신의 의지와 행동 안에서 실제로 작용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 100–128항은 사람이 자신의 악을 마치 스스로 제거하는 것처럼 노력해야 하지만, 그 악을 실제로 제거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심을 설명합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자유와 책임이 동시에 들어 있습니다.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주님께서 자신을 변화시키실 때까지 기다려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노력으로 거듭남을 완성했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인간이 자유롭게 주님께 협력하는 바로 그 과정에서 주님의 신성한 능력이 역사합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와 선행을 강조하는 것은 은혜를 부정하는 일이 아니라, 은혜가 인간의 생명 안에서 어떻게 실제로 작용하는지를 설명하는 일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실제적인 사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오랫동안 교회에 다니고, 성경을 잘 알고, 구원의 확신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가족을 함부로 대하고, 직장에서 약한 사람을 괴롭히며, 자신에게 손해를 끼친 사람을 용서하지 않고, 자신의 탐욕과 교만을 조금도 문제 삼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나는 예수님을 믿으므로 구원받았다. 선행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다’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경우 우리는 그 사람의 최종적인 영적 상태를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되지만, 그의 신앙 이해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가 믿음이라고 부르는 것이 실제로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일인지, 아니면 자신의 삶을 바꾸지 않아도 된다는 종교적 안심을 얻는 일인지 살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7장 21절에서 자신을 향해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마태복음 25장 31절로 46절에서는 굶주린 사람을 먹이고,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것을 주며, 병든 사람과 갇힌 사람을 돌보는 일을 통해 마지막 심판의 장면을 보여 주십니다. 이 말씀들은 주님께서 인간의 종교적 고백만이 아니라 그 고백이 이웃을 향한 실제 사랑으로 나타나는지를 중요하게 여기신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그러나 반대편의 위험도 있습니다. 믿음과 삶의 결합을 강조하다 보면, 어느 순간 사람이 자신의 행위를 끊임없이 평가하면서 ‘나는 오늘 충분히 선하게 살았는가? 이 정도의 선행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가?’라는 불안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이것 역시 주님의 구원하시는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거듭남은 인간이 자신의 선행을 계산하여 합격점을 얻는 과정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내면을 변화시키시고, 그 사람이 점차 악을 미워하며 선을 사랑하도록 새롭게 하시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죄와 연약함을 발견하는 것은 절망해야 할 이유가 아니라 주님께 더욱 나아가야 할 이유입니다. 자신의 내면에 아직 이기심과 교만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것을 죄로 여기며 주님께 도움을 구하는 사람은 이미 자신의 삶을 돌아보지 않는 사람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선행을 쌓았는가가 아니라,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며 그 사랑이 어느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구원의 확신도 자신의 공로나 과거의 신앙고백에만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도 자신을 새롭게 하시는 주님의 사랑과 능력을 신뢰하는 데서 더욱 깊어져야 합니다.
이 문제는 교회의 설교와 양육에도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만일 교회가 구원의 확신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삶의 변화와 체어리티를 부차적인 문제로 취급한다면, 성도들은 교리를 정확히 알고 신앙고백을 바르게 하는 것을 신앙생활의 중심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교회가 선행과 봉사만을 강조하면서 주님께서 모든 선의 근원이심을 충분히 가르치지 않는다면, 성도들은 자신의 헌신과 공로를 통해 구원을 확보하려는 또 다른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믿음과 행위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일이 아닙니다. 믿음은 주님께서 누구이신지, 무엇이 선하고 참된 것인지를 배우고 받아들이는 것이며, 체어리티는 그 진리가 사랑이 되어 실제 삶에서 작용하는 것입니다. 이 둘은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새 예루살렘과 그 천적 교리’ 243항에서 교리는 교회를 이루는 데 필요하지만, 교리만으로 인간 안에 교회가 성립하지는 않으며 그 교리에 따른 삶이 있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결국 교회의 본질은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그 진리를 통해 주님의 사랑이 사람들의 삶 안에서 실현되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 문제를 주님 자신의 가르침으로 돌아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14장 15절에서 자신을 사랑한다면 자신의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시고, 같은 장 21절에서는 자신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가르치십니다.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영적 질서가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단지 그분에 관하여 올바른 생각을 갖거나 감정적으로 깊은 애정을 느끼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분이 선하다고 말씀하신 것을 선으로 받아들이고, 악하다고 말씀하신 것을 악으로 인정하며, 자신의 삶을 그 말씀에 따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것이므로 삶과 행위는 관계없다는 생각은 결국 주님을 믿는 것과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분리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믿음과 사랑이 분리된 사람을 만들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진리를 알고, 그 진리를 사랑하며, 마침내 그 사랑으로 살아가는 새로운 생명을 얻도록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질문은 ‘나는 믿음으로 구원받는가, 행위로 구원받는가?’라는 양자택일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나의 믿음은 실제로 주님을 향하고 있는가? 내가 알고 있는 진리가 내 사랑을 변화시키고 있는가? 그 사랑이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으로 나타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구원은 믿음이라는 이름의 종교적 자격이 아니라, 믿음과 체어리티가 하나가 되어 살아 움직이는 천국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PR.005 해설)
요약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다’는 말에는 인간이 자기 공로나 행위로 구원을 획득할 수 없으며, 구원의 근원은 오직 주님의 은혜라는 귀중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러므로 삶과 행위는 구원과 관계없다’는 결론으로 나아가면 오류가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참된 믿음은 체어리티와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으며, 진리는 선과 결합될 때 인간의 실제 생명이 됩니다. 선행은 구원을 구매하는 공로가 아니지만, 주님에게서 오는 선이 인간 안에 받아들여져 삶으로 나타나는 본질적인 자리입니다. 따라서 믿음과 삶의 관계는 구원의 원인과 부차적인 결과라는 구별만으로 충분히 설명되지 않습니다. 참된 구원은 주님께서 인간 안에 믿음과 체어리티를 결합하시고 새로운 사랑의 생명을 이루어 가시는 과정입니다.
PR.004, ‘죽기 직전에라도 예수님 믿는다고 하면 천국 간다’
SL.PR.004 | 개신교인의 무의식 속 오류와 뒤섞인 신앙 100선 ‘죽기 직전에라도 예수님 믿는다고 하면 천국 간다’ - 마지막 고백이 평생의 사랑을 바꿀 수 있는가? 개신교 신앙생활에서 흔히 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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