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겨찾기/SL.PR 100선

PR.006. ‘선행을 강조하면 행위구원이다’

bygracetistory 2026. 11. 3. 18:14

SL.PR.006 | 개신교인의 무의식 속 오류와 뒤섞인 신앙 100선

 

‘선행을 강조하면 행위구원이다’ - 주님이 명하신 선한 삶을 왜 경계하게 되었는가?

 

해설

개신교 신앙생활에서 선행의 중요성을 강조하다 보면 뜻밖의 반응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선행을 강조하면 행위구원이 되는 것 아닙니까?’, ‘우리는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배웠습니다’, ‘착하게 사는 것으로 천국에 갈 수 있다면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 달리셨겠습니까?’라는 질문들입니다. 이러한 반응에는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진리를 지키려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경계심이 지나쳐 선행 자체를 강조하는 것까지 의심하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심각한 역설에 직면합니다. 주님께서는 이웃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라고 끊임없이 가르치셨는데, 정작 그분을 믿는 사람들이 선한 삶을 강조하는 일을 신학적으로 경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선행을 강조하는 것과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는 것은 과연 같은 일일까요? 그리고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참된 선행은 인간의 공로와 어떻게 구별되는 것일까요?

 

먼저 ‘행위구원’이라는 표현의 의미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개신교에서는 인간이 자신의 선행이나 율법 준수, 종교적 공로를 통해 구원을 획득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입장을 비판할 때 이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행위구원을 경계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행이 구원의 대가가 될 수 없다는 주장과 선행이 구원에 본질적인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 주장은 전혀 다릅니다. 실제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6장은 선행을 참되고 살아 있는 믿음의 열매와 증거라고 설명하며, 선을 행할 능력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에게서 온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엄밀한 개혁주의 신학 자체가 선행을 불필요하게 여기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이러한 교리적 구별이 신앙생활에서 단순화되면서 선행을 강조하는 설교까지 행위구원으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형성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공식 교리가 실제로 가르치는 내용과 그것이 신자들의 의식 속에서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지를 구별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이 문제를 살펴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주님께서는 마5:16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제자들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마7:21에서는 자신을 향해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고 가르치십니다. 또한 요14:15에서는 자신을 사랑한다면 자신의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시고, 마25:31-46에서는 굶주리고 목마르며 병들고 갇힌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강조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선한 삶을 단순히 신앙의 장식이나 선택적인 열매로 다루지 않으셨습니다. 야고보 역시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선언합니다(약2:17). 그러므로 선행을 강조한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행위구원이라고 비판한다면, 주님께서 직접 가르치신 말씀까지 같은 비판을 받아야 하는 모순이 생깁니다. 문제는 선행의 중요성을 인정하느냐가 아니라, 그 선행의 근원을 어디에 두고 어떤 목적으로 행하느냐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422–424항은 체어리티의 본질을 사람이 자신의 직무와 사업과 일에서 정의롭고 성실하게 행동하는 것과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이것은 선행에 관한 우리의 통상적인 이해를 크게 넓혀 줍니다. 많은 사람은 선행이라고 하면 가난한 사람을 돕고, 헌금을 드리며, 교회에서 봉사하거나 특별한 자선활동에 참여하는 일을 먼저 떠올립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를 그러한 특별한 활동에만 한정하지 않습니다. 고용주가 노동자를 정당하게 대우하고, 노동자가 자신의 일을 정직하게 수행하며, 공직자가 사적인 이익보다 공공의 선을 우선하고, 부모가 자녀를 사랑과 지혜로 돌보는 일상적인 삶 속에서도 체어리티는 나타납니다. 다만 여기에는 중요한 구별이 있습니다. 외적으로 정의롭고 성실하게 행동한다고 해서 그 행위가 언제나 영적인 체어리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TCR.424에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그 사람을 지배한다면, 겉으로는 성실하게 직무를 수행하더라도 내적으로는 참된 체어리티가 없을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외적인 행동뿐 아니라 그 행동을 이끄는 내적인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참된 선행과 자기 공로를 추구하는 행위는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스베덴보리는 TCR.439–442에서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사람이 자신의 선행을 공로로 여기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어떤 사람이 어려운 이웃을 도우면서 자신의 선행을 자랑하고 그 대가로 천국의 높은 자리를 기대한다면, 그의 행위에는 자기 사랑이 개입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다른 사람이 같은 일을 하면서 모든 선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인정하고 이웃에게 필요한 도움을 주는 일 자체를 기뻐한다면, 그 행위는 전혀 다른 내적 성격을 지닙니다. 더 나아가 스베덴보리는 TCR.435–438에서 체어리티의 첫 번째 일이 악을 멀리하는 것이며, 그다음이 이웃을 위해 선한 쓰임을 행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사람이 자신의 탐욕과 거짓과 불의를 그대로 사랑하면서 외적으로 자선을 베푼다고 해서 그 자선이 자동으로 영적인 선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먼저 자신의 악을 주님 앞에서 죄로 인정하고 그것을 멀리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악한 삶 위에 선행을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악을 멀리함으로써 주님의 선이 실제로 흐를 수 있는 삶을 이루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시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사람이 자신의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려고 노력한다면, 그것도 결국 자신의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는 것이 아닐까요? 스베덴보리의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 DP, 1764) 100–128항은 이 문제를 인간의 자유와 주님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악을 마치 스스로 제거하는 것처럼 노력해야 하지만, 실제로 악을 제거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여기서 ‘마치 스스로’라는 표현은 인간이 자신의 능력으로 선을 만들어 낸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자유와 합리성을 통해 역사하시므로, 인간도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실제로 행동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거짓말하는 습관을 가진 사람이 ‘나는 은혜로 구원받았으니 주님께서 언젠가 고쳐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계속 거짓말한다면, 그는 자신의 자유를 사용하여 악을 멀리해야 할 책임을 회피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신의 거짓을 죄로 인정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정직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한다면, 그는 주님의 구원하시는 역사에 협력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노력은 자기 공로로 구원을 획득하는 행위가 아니라, 주님의 선과 진리를 자신의 삶 안에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이러한 이해는 교회가 선행을 가르치고 평가하는 방식에도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선행과 헌신을 강조하면서 실제로는 헌금 액수, 전도 실적, 봉사 시간, 교회 행사 참여 횟수 등을 중심으로 신앙의 열심을 평가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활동이 모두 잘못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교회 공동체를 위해 시간과 재물을 드리는 일도 귀한 쓰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영적 성숙이나 구원의 공로를 평가하는 기준으로 사용된다면 선행의 본래 의미가 왜곡될 위험이 있습니다. 반대로 교회 밖에서 자신의 직업을 정직하게 수행하고, 가정에서 가족을 성실하게 돌보며,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삶이 특별한 종교적 활동이 아니라는 이유로 가볍게 여겨진다면, 그 역시 체어리티의 본질을 놓치는 것입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특정한 종교 활동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일상적인 삶 전체에서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자신에게 맡겨진 쓰임을 정의롭고 성실하게 수행할 때 나타납니다. 그 쓰임이 주님을 향한 신앙과 결합될 때 일상의 도덕적 삶은 영적인 생명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목회자가 선행을 가르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선행의 필요성을 약화시키는 일이 아니라, 그 근원과 목적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일입니다. ‘선을 많이 행해야 천국에 갈 자격을 얻는다’는 식으로 가르친다면 인간의 공로를 강조하는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므로 우리는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가르친다면, 이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주님께서는 요15:5에서 자신을 떠나서는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시면서도, 같은 장에서 제자들이 많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이 두 말씀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주님을 떠나서는 참된 영적 선을 행할 수 없지만, 주님과 결합하는 사람은 그분에게서 오는 생명으로 선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TCR.373–377에서 체어리티와 믿음이 선한 행위 안에서 함께 존재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행위는 믿음에 덧붙이는 외적인 장식이 아니라, 믿음과 사랑이 실제 삶에서 하나로 나타나는 자리입니다. 이때 선행을 강조하는 것은 주님의 은혜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은혜가 인간 안에서 실제로 열매 맺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결국 ‘선행을 강조하면 행위구원이다’라는 말에서 보존해야 할 진리는 인간이 자신의 선행이나 종교적 공로로 구원을 획득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진리를 지키겠다는 이유로 선행 자체를 의심하거나,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단지 자신을 믿는다고 고백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실제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 삶은 특별한 종교적 활동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만나는 사람에게 정직하게 말하고, 자신의 책임을 성실하게 수행하며, 약한 사람을 이용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으며, 자신의 이기심과 교만을 주님 앞에서 죄로 인정하는 일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삶은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얻기 위한 거래가 아니라, 천국의 생명이 지금 이 땅에서 우리 안에 형성되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은 ‘선행을 강조하면 행위구원이 되는가?’가 아니라, ‘내가 행하는 선의 근원은 누구이며, 나는 누구를 위해 그 선을 행하고 있는가?’입니다. 참된 선행은 은혜와 경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은혜가 인간의 생명 안에서 어떻게 살아 움직이는지를 보여 주는 가장 구체적인 자리입니다. (PR.006 해설)

 

요약

선행을 강조하는 것 자체는 행위구원이 아닙니다. 인간이 자신의 선행과 공로로 구원을 획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류이지만,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는 일을 구원과 무관하게 여기는 것 역시 오류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참된 선행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이 인간의 자유와 합리성 안에 받아들여져 실제 삶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체어리티는 일상적인 직무와 관계 속에서 정의롭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과 깊이 연결되지만, 그 행위가 영적인 선이 되려면 주님을 인정하고 악을 죄로 여기며 멀리하는 내적인 삶이 함께해야 합니다. 따라서 참된 선행을 강조하는 것은 인간의 공로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의 실제적인 실현을 가르치는 일입니다.

 

 

 

PR.007. ‘칭의를 받았으면 내 내면이 실제로 얼마나 변화했는가는 구원과 별개의 문제다’

SL.PR.007 | 개신교인의 무의식 속 오류와 뒤섞인 신앙 100선 ‘칭의를 받았으면 내 내면이 실제로 얼마나 변화했는가는 구원과 별개의 문제다’ -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주님은 왜 그 내면까지 새

bygrace.kr

 

PR.005,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거야. 삶과 행위는 구원과 관계없어’

SL.PR.005 | 개신교인의 무의식 속 오류와 뒤섞인 신앙 100선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거야. 삶과 행위는 구원과 관계없어’ - 믿음에서 삶을 떼어 놓을 때 사라지는 구원의 본질 해설개신교 신앙에

bygrac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