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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003. ‘불교는 창조주 하나님을 전제하지 않고도 세계와 인간을 설명한다’

bygracetistory 2026. 11. 4. 15:27

SL.BU.003 | 불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불교는 창조주 하나님을 전제하지 않고도 세계와 인간을 설명한다’ - 연기의 질서와 모든 존재의 근원이신 주님

 

해설

기독교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는 말씀에서 세계와 인간의 기원을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우주와 자연, 인간의 생명은 스스로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는 세계와 인간을 설명하면서 이러한 창조주를 전제하지 않습니다. 불교에는 부처와 보살, 천상 존재들에 관한 다양한 가르침이 있지만, 세계 전체를 창조하고 모든 존재의 생명을 공급하는 유일한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개념은 일반적으로 그 교리의 출발점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불교가 세상은 아무런 원인 없이 우연히 생겨났다고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불교는 모든 현상이 일정한 원인과 조건에 의존하여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연기’(緣起, pratītyasamutpāda)의 원리를 강조합니다. 어떤 존재도 다른 조건과 완전히 독립하여 성립하지 않으며, 인간의 고통과 삶의 변화 역시 원인과 조건의 관계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를 단순히 ‘하나님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로만 설명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더 근본적인 차이는 세계와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 모든 생명의 궁극적인 근원, 그리고 인간이 그 근원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방식에 있습니다.

 

불교의 연기법은 흔히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는 말로 설명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떤 존재나 현상도 다른 조건과 관계없이 홀로 성립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초기불교의 ‘상윳따 니까야’(相應部, Saṃyutta Nikāya) 12.20은 부처가 세상에 출현하든 출현하지 않든 연기의 법칙은 성립하며, 부처는 그것을 깨닫고 설명한다고 가르칩니다. 특히 불교의 ‘십이연기’(十二緣起, twelve links of dependent origination)는 ‘무명’(無明, avidyā)에서 시작하여 행·식·명색 등의 조건적 관계를 거쳐 생·노사에 이르는 고통의 발생 구조를 설명합니다. 이것은 세계의 모든 현상을 단순한 기계적 인과관계로 환원하거나, 우주가 최초로 만들어진 순간을 설명하려는 이론과는 구별해야 합니다. 십이연기의 중요한 목적은 인간이 어떻게 ‘윤회’(輪廻, saṃsāra)와 고통에 묶이고, 그 조건을 어떻게 소멸하여 ‘해탈’(解脫, vimokṣa)에 이를 수 있는지를 밝히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불교가 연기를 통하여 세계와 인간을 설명한다는 것은 창조주 없이 우주의 최초 원인을 완전하게 규명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의 존재와 경험, 고통과 변화가 어떤 조건적 질서 안에서 일어나는지를 설명한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편이 정확합니다.

 

이러한 차이는 초기불교 경전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디가 니까야’(長部, Dīgha Nikāya) 1번에 해당하는 ‘범망경’(梵網經, Brahmajāla Sutta)은 자신을 모든 존재의 창조주라고 생각하는 범천(梵天, Brahmā)에 관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그 이야기에서 먼저 출현한 범천은 뒤이어 나타난 존재들을 보고 자신이 그들을 창조했다고 생각하며, 나중에 나타난 존재들 역시 그를 창조주로 오해합니다. 이는 초기불교가 창조주에 대한 특정한 주장을 어떻게 비판적으로 다루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다만 이 경전의 범천과 기독교의 창조주 하나님을 역사적·교리적으로 완전히 동일한 개념으로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맛지마 니까야’(中部, Majjhima Nikāya) 63번의 ‘소말룽키야경’(Cūḷamāluṅkya Sutta)에서 부처는 세계가 영원한지, 유한한지 등의 형이상학적 질문에 답하는 것보다 고통에서 벗어나는 수행이 시급하다는 점을 독화살의 비유로 설명합니다. 여기에는 불교의 중요한 특징이 드러납니다. 세계의 최초 원인을 밝히는 문제보다, 지금 인간이 겪는 고통과 그 소멸의 길을 아는 것이 더 절실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모든 불교 전통이 우주론에 무관심하다는 뜻은 아니지만, 초기불교가 무엇을 종교적 실천의 중심에 두었는지를 이해하게 합니다.

 

이러한 불교의 설명에는 인정할 만한 통찰이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힘으로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수많은 조건과 관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 들이마시는 공기, 다른 사람에게서 받는 도움, 배우고 익힌 지식까지도 독립적인 자기 소유라고만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행동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며, 어떤 선택은 새로운 고통의 원인이 되고 다른 선택은 그 고통을 줄이는 조건이 됩니다. 연기법이 강조하는 이러한 상호의존성은 인간의 오만과 자기중심성을 돌아보게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두 가지를 구별해야 합니다. 존재들이 서로 의존한다는 사실과, 그 모든 존재가 궁극적으로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하는 질문은 같은 문제가 아닙니다. 연기는 조건적 관계를 설명하지만, 그 관계 전체의 궁극적인 근원을 반드시 창조주에게서 찾지는 않습니다. 반면 말씀과 새 교회의 교리는 창조된 세계의 상호관계를 인정하면서도, 그 세계가 존재하고 유지되는 근원을 주님에게서 찾습니다. 따라서 불교의 연기와 기독교의 창조를 단순히 서로 반대되는 인과관계 이론으로 비교해서는 안 됩니다. 두 설명은 질문의 초점부터 다르며, 바로 그 차이에서 근본적인 신학적 논점이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 사랑과 지혜’(Divine Love and Wisdom, DLW, 1763) 52–59번에서 우주의 모든 것이 신적 사랑과 신적 지혜로부터 창조되었으며, 창조된 모든 것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존재라고 설명합니다. 특히 DLW.55는 우주가 절대적인 무에서 만들어졌다는 생각을 비판하면서, 모든 존재는 존재 자체이신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다고 밝힙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창조된 우주가 곧 하나님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DLW.56은 창조된 것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가 동일한 실체의 연속이 아니라, 서로 구별되는 존재 사이의 결합과 수용에 기초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세계는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지만 하나님 자신은 아니며, 인간은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지만 생명 자체는 아닙니다. 같은 저작 DLW.4에서도 스베덴보리는 주님만이 창조되지 않은 무한한 생명 자체이시고, 인간과 천사는 창조된 유한한 생명의 수용자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창조란 단순히 아득한 과거에 우주가 처음 만들어진 사건에 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창조된 모든 것이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는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불교의 연기법이 존재들의 조건적 관계를 설명한다면, 스베덴보리가 밝힌 창조의 질서는 그러한 모든 유한한 존재가 궁극적으로 주님의 신적 사랑과 지혜에 의존하고 있음을 설명합니다.

 

여기서 ‘인플럭스’(influx), 곧 주님에게서 생명과 선과 진리가 끊임없이 흘러들어 온다는 개념이 중요해집니다.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처럼 느끼지만, 그 생명의 근원까지 자기 안에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따라 그의 생각과 사랑, 행동의 상태가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 DP, 1764) 3번에서 우주와 그 안의 모든 것이 신적 지혜를 통하여 신적 사랑으로부터 창조되었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DP.324는 창조의 목적이 인간이 신적인 것을 받아들여 주님과 결합하고 영원히 살아가는 데 있음을 밝힙니다. 이는 인간을 창조주의 뜻대로 움직이는 수동적인 도구로 이해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은 인간에게 자유와 합리성을 주시고, 인간이 마치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하는 것처럼 살아가도록 섭리하십니다. 그러면서도 인간의 참된 생명과 선과 진리의 근원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따라서 새 교회의 교리에서 창조와 섭리, 거듭남은 서로 분리된 주제가 아닙니다. 주님은 인간을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계속해서 생명을 공급하시며, 인간이 그 생명을 자유롭게 받아들여 천국의 삶을 이루도록 인도하십니다. 불교에서도 인간의 행위와 수행이 새로운 조건을 형성한다는 점을 강조하지만, 그 과정의 궁극적인 근원을 인격적 창조주와의 결합에서 찾지는 않는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 차이는 인간의 고통과 악을 이해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불교는 고통의 발생을 ‘갈애’(渴愛, taṇhā), 무명, 집착과 여러 조건의 관계 속에서 설명하며, 그 조건을 변화시키는 수행을 강조합니다. 반면 새 교회의 교리는 인간이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으면서도 그것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여기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보다 앞세울 때 악이 생겨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프로프리움’(proprium)은 인간이 자기에게 고유하게 속한다고 여기는 자아적 성향을 가리키며, 특히 그것을 선과 진리의 독립적인 근원으로 삼을 때 문제가 됩니다.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AC) 210번은 인간이 자신에게서 생명이 나오는 것처럼 여기며 자기의 것에 이끌리는 상태와 관련된 중요한 설명을 담고 있습니다. 불교의 무명과 새 교회의 프로프리움은 모두 인간의 자기중심적인 착각을 성찰하게 한다는 점에서 비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개념을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불교는 고통을 지속시키는 무명과 집착을 소멸하는 데 초점을 두고, 새 교회의 교리는 인간이 자신의 생명과 선의 근원을 주님에게서 인정하고 그분의 질서에 따라 거듭나는 데 초점을 둡니다. 그렇다고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는 불교인은 반드시 이기적이며, 창조주를 고백하는 기독교인은 반드시 선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실제 삶에서 무엇을 사랑하고 어떤 선을 행하는가는 종교적 명칭만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결국 ‘불교는 창조주 하나님을 전제하지 않고도 세계와 인간을 설명한다’라는 명제는 불교의 기본적인 세계관을 이해하는 데 대체로 타당합니다. 불교는 창조주를 전제하지 않으면서도 연기와 업, 윤회와 수행을 통하여 인간의 존재와 고통, 변화의 질서를 설명합니다. 이 가운데 모든 존재가 서로 의존하며 인간의 행동에도 원인과 결과가 따른다는 통찰은 존중할 만합니다. 그러나 그 설명이 곧 우주와 생명의 궁극적인 근원까지 완전히 해명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새 교회의 교리에 따르면 모든 창조된 존재는 주님의 신적 사랑과 지혜로부터 비롯되며, 인간은 지금도 그분에게서 생명을 받아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두 전통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세계 안에 원인과 조건이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 모든 존재와 질서의 궁극적인 근원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불교의 연기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서로 의존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겸손과 책임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의 빛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인간은 다른 존재에게 의존할 뿐 아니라 생명 자체이신 주님에게서 모든 선과 진리를 받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참된 겸손은 자신이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하여, 자신의 생명과 사랑과 지혜가 궁극적으로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 더욱 깊어집니다. (BU.003 해설)

 

요약

불교가 창조주 하나님을 전제하지 않고 연기와 업 등의 원리를 통하여 세계와 인간을 설명한다는 명제는 대체로 타당합니다. 존재들이 서로 의존하며 행위에는 결과가 따른다는 통찰에도 인정할 만한 진리가 있습니다. 다만 불교의 연기를 우주의 최초 원인에 관한 완결된 설명으로 이해하거나,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불교가 모든 원인과 질서를 부정한다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새 교회의 교리에 따르면 세계와 인간은 주님의 신적 사랑과 지혜로부터 창조되었으며, 모든 참된 생명과 선과 진리는 지금도 주님에게서 비롯됩니다. 따라서 존재들의 조건적 관계를 인정하면서도, 그 모든 존재의 궁극적인 근원이 주님이심을 분명하게 구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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