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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005 ‘고통의 원인은 갈애와 집착에 있다’

bygracetistory 2026. 11. 4. 22:24

SL.BU.005 | 불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고통의 원인은 갈애와 집착에 있다’ - 집성제의 통찰과 인간을 지배하는 사랑의 문제

 

해설

인간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때 괴로워하지만, 원하는 것을 얻었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어렵게 얻은 것을 잃을까 두려워하고, 이미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며, 더 많은 것을 얻으려는 욕망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사람이나 재물뿐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명예, 지위와 신념까지도 놓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불교는 이러한 인간의 현실을 깊이 관찰하면서 고통의 원인을 외부 환경에서만 찾지 않습니다. 불교의 근본 교리인 ‘사성제’(四聖諦, cattāri ariyasaccāni), 곧 고통의 현실과 원인, 소멸, 그리고 그 소멸에 이르는 길에 관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 가운데 두 번째인 ‘집성제’(集聖諦, samudaya-sacca)는 고통이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설명합니다. 그 핵심에는 ‘갈애’(渴愛, taṇhā), 곧 만족을 얻으려는 목마름과, ‘집착’(執著, upādāna), 곧 어떤 대상이나 견해를 자기 것으로 굳게 붙잡으려는 태도가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불교가 단순히 인간에게 욕망이 있기 때문에 모든 고통이 발생한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이 변하는 것에 영원한 만족을 기대하고, 그것을 놓지 못하며, 자신의 존재와 행복을 거기에 의존시키는 과정이 문제입니다. 따라서 집성제는 단순한 금욕주의가 아니라 인간의 욕망이 어떻게 고통을 지속시키는지 밝히려는 가르침입니다.

 

초기불교의 ‘상윳따 니까야’(相應部, Saṃyutta Nikāya) 56.11에 수록된 ‘초전법륜경’(初轉法輪經, Dhammacakkappavattana Sutta)은 고통의 발생 원인으로 다시 태어남을 지속시키는 갈애를 제시하며, 이를 세 가지로 구별합니다. 첫째는 감각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는 ‘욕애’(欲愛, kāma-taṇhā)이고, 둘째는 존재하거나 계속 살아 있으려는 ‘유애’(有愛, bhava-taṇhā)이며, 셋째는 존재하지 않거나 소멸하기를 바라는 ‘무유애’(無有愛, vibhava-taṇhā)입니다. 이 구별은 갈애가 단순히 재물이나 쾌락을 탐하는 욕망에 한정되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인간은 즐거움을 붙잡으려 할 뿐 아니라 자기 존재를 영속시키려 하거나, 반대로 견디기 어려운 상태가 사라지기만을 바라면서 또 다른 집착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갈애를 삶의 모든 의욕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불교에는 수행과 선행을 향한 건전한 의욕을 뜻하는 ‘찬다’(chanda)라는 개념도 있으며, 깨달음을 위한 바른 노력은 오히려 중요한 수행의 요소입니다. 따라서 불교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무기력한 상태가 아닙니다. 고통을 지속시키는 갈애에서 벗어나 지혜와 자비에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갈애와 집착의 관계는 ‘연기’(緣起, paṭiccasamuppāda), 곧 현상들이 일정한 원인과 조건에 의존하여 생겨난다는 불교의 설명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상윳따 니까야’ 12.2는 감각적 접촉에서 느낌이 생기고,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집착을 조건으로 다시 존재의 형성과 태어남이 이어진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갈애는 대상을 향한 목마름이고, 집착은 그 대상을 더욱 강하게 붙잡아 자기 것으로 삼는 태도입니다. 불교는 집착을 감각적 쾌락에 대한 집착, 견해에 대한 집착, 특정한 계율과 의례가 그 자체로 해탈을 보장한다고 여기는 집착, 그리고 고정된 자아에 대한 견해를 붙잡는 집착으로 구별합니다. 이 가운데 특히 주목할 것은 자신의 생각과 종교적 신념에 대한 집착입니다. 재물이나 쾌락에 대한 욕망은 쉽게 알아차리면서도, 자신이 옳다는 확신과 남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사실은 깨닫지 못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불교가 모든 견해나 종교적 실천 자체를 버리라고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바른 견해와 바른 수행을 해탈의 길로 삼으면서도 그것을 자기 우월감이나 새로운 집착의 대상으로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한 갈애가 고통의 발생 원인이라는 설명은 모든 질병과 재난, 타인에게서 당하는 피해가 그 사람 자신의 욕망 때문에 일어났다는 뜻이 아닙니다. 집성제는 고통과 윤회를 지속시키는 근본적인 조건을 설명하는 것이지, 개별적인 불행의 책임을 피해자에게 돌리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이러한 불교의 통찰은 말씀에서 인간의 욕망과 사랑을 다루는 방식과 비교할 가치가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마6:19)고 말씀하셨고, 이어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21)고 하셨습니다. 이는 재물을 소유한다는 사실 자체보다 인간의 마음이 무엇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무엇을 삶의 목적으로 삼는가 하는 문제를 드러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AC, 1749–1756) 10284번에서 인간의 사랑과 의지가 그가 추구하는 목적을 결정하며, 자기 자신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는 사랑과 주님 및 이웃을 향한 사랑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랑 자체를 제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사랑 없이 살아갈 수 없으며, 무엇을 사랑하는가에 따라 그의 삶이 형성됩니다. 불교가 고통을 지속시키는 갈애와 집착을 경계한다면, 새 교회의 교리는 인간의 사랑이 어떤 대상을 향하고 어떤 질서 안에 놓여 있는지를 중요하게 다룹니다. 두 설명 모두 자기중심적인 욕망이 인간을 속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만납니다. 그러나 불교의 갈애와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사랑은 동일한 개념이 아니며, 갈애의 소멸을 곧바로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의 형성이라고 해석해서도 안 됩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려면 인간의 ‘프로프리움’(proprium)을 살펴야 합니다. 프로프리움은 인간이 자기에게 고유하게 속한다고 여기는 것을 가리키며, 특히 자신의 지혜와 능력, 선과 생명을 독립적으로 소유하고 있다고 여기는 자기중심적인 성향과 연결됩니다. 인간은 다른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하면서도 자신이 인정받기를 원할 수 있고, 진리를 말하면서도 자신의 우월함을 드러내려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종교적으로 겸손한 모습을 보이면서 마음속으로는 남보다 거룩하다는 생각을 품을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AC.5660에서 거듭나는 사람이 처음에는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지만, 마침내 자유롭게 주님의 인도를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주님에게서 주어지는 새로운 의지를 통하여 인간의 삶의 목적이 자기 자신과 세상에서 이웃과 공동체, 주님의 나라와 주님 자신을 향하도록 변화한다고 밝힙니다. 여기서 거듭남은 자기를 완전히 없애 버리는 일이 아니라, 자기중심적인 삶의 목적이 주님과 이웃을 향한 선한 목적으로 바뀌는 과정입니다. 불교의 집착 극복과 비교할 수 있는 부분이 있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참된 선과 진리의 근원을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찾는다는 점입니다. 또한 이 변화는 단순히 집착을 억누르는 심리적 훈련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는 영적 변화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욕망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겠습니까? 여기서 욕망을 무조건 억제하거나 모든 즐거움을 포기하는 것이 영적인 삶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가족을 사랑하고, 건강을 돌보며, 일을 통하여 생계를 유지하고, 정당한 기쁨을 누리는 것은 그 자체로 악이 아닙니다. 문제는 이러한 것들을 다른 사람을 해치면서까지 얻으려 하거나, 자기의 행복과 우월함을 위한 최종 목적으로 삼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새 예루살렘을 위한 삶의 교리’(Doctrine of Life for the New Jerusalem, Life, 1763) 21–22번에서 인간이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할수록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행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악을 죄로 여긴다는 것은 단순히 자신에게 손해가 되거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에 어떤 행동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주님과 신적 질서에 반대되기 때문에 멀리한다는 뜻입니다. 또한 인간은 마치 자기 힘으로 악을 멀리하는 것처럼 노력해야 하지만, 실제로 그 악을 제거하고 선을 행할 능력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불교의 수행과 새 교회의 거듭남을 구별하는 중요한 지점입니다. 두 전통 모두 인간의 욕망을 무조건 따라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지만, 불교는 갈애와 무명의 소멸을 통한 ‘해탈’(解脫, vimutti)을 지향하는 반면, 새 교회의 교리는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하고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이는 거듭남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차이는 행복을 이해하는 방식에서도 드러납니다. 사람은 흔히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상태를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욕망을 조금도 거절하지 못하고, 남보다 더 많이 소유하거나 인정받지 못하면 견디지 못한다면, 그것은 참된 자유라기보다 욕망에 지배받는 상태일 수 있습니다. 불교는 갈애와 집착에서 벗어날수록 고통의 속박이 약해진다고 설명합니다. 이에 비해 스베덴보리가 밝힌 새 교회의 교리에서 참된 자유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에 따라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AC.5660은 주님의 인도를 받는 것이 참된 자유이며, 그 안에 평안과 행복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소유하고 얼마나 많은 즐거움을 누리는가보다, 어떤 사랑이 자신의 삶을 지배하는가가 더욱 중요합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삶의 최종 목적이 되면 인간은 끊임없이 비교하고 경쟁하며 불안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삶의 목적이 되면 재물과 능력, 지식과 사회적 지위도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이루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참된 변화는 욕망의 대상을 단순히 줄이는 데 그치지 않고 삶의 지배적인 사랑과 목적이 새롭게 되는 데 있습니다. 이 점에서 불교의 갈애 분석은 인간이 무엇에 사로잡혀 있는지 돌아보게 하는 유익한 통찰을 제공하지만, 새 교회의 교리는 그 자리에 어떤 사랑이 들어서야 하는지, 그리고 그 사랑이 누구에게서 오는지를 더욱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결국 ‘고통의 원인은 갈애와 집착에 있다’라는 명제는 불교의 집성제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가르침입니다. 인간이 변하는 것을 영원한 행복의 근거로 삼고, 자기의 욕망과 견해를 절대화하며, 붙잡을 수 없는 것을 끝까지 붙잡으려 할 때 고통이 깊어진다는 설명에는 분명한 통찰이 있습니다. 특히 재물과 쾌락뿐 아니라 자신의 지식과 신앙적 확신까지 집착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은 종교인에게도 중요한 성찰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불교의 갈애와 집착을 모든 욕망이나 사랑과 동일시해서는 안 되며, 모든 고난을 개인의 집착 때문에 발생한 결과로 해석해서도 안 됩니다. 말씀과 새 교회의 교리에 따르면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는 단지 원하는 것이 너무 많다는 사실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세상을 삶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자기의 것으로 여기려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욕망을 무조건 없애는 과정이 아니라, 악을 멀리하고 사랑의 질서가 새로워지는 과정입니다. 자신을 위한 사랑이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 아래 놓이고,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선한 쓰임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할 때 인간은 참된 자유와 평안을 경험하게 됩니다. 불교의 집성제가 인간이 무엇을 붙잡고 있기 때문에 괴로워하는지를 묻는다면, 말씀은 인간이 무엇을 가장 사랑하며 누구에게서 생명을 받아 살아가는지를 묻습니다. 참된 자유는 단순히 아무것에도 매이지 않는 데 있지 않고,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 안에서 선을 기쁘게 선택하며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BU.005 해설)

 

요약

갈애와 집착이 고통을 지속시키는 중요한 원인이라는 불교의 집성제는 인간의 욕망과 자기중심성을 깊이 통찰한 가르침입니다. 특히 감각적 쾌락뿐 아니라 존재에 대한 집착과 자신의 견해에 대한 집착까지 경계한다는 점에서 인정할 만한 진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가 모든 의욕이나 사랑을 제거하려 한다고 이해하거나, 모든 고난을 개인의 집착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됩니다. 새 교회의 교리에 따르면 인간의 영적 문제는 사랑 자체가 아니라 사랑의 대상과 질서에 있으며, 거듭남은 자기중심적인 사랑을 버리고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을 받아들이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갈애와 집착에 대한 불교의 통찰을 인정하되, 참된 자유와 행복의 근원은 인간의 자기 통제만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 그리고 그에 따라 새롭게 되는 삶에 있음을 구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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