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007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참된 신앙의 중요한 기초다’
SL.IS.007 | 이슬람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참된 신앙의 중요한 기초다’ - 두려움과 사랑의 영적 질서
해설
이슬람에서 하나님을 경외(敬畏, reverence)하는 마음은 참된 신앙을 이루는 중요한 기초입니다. 이러한 경외와 깊이 연결되는 아랍어 개념이 ‘타크와’(taqwa)입니다. 타크와는 흔히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번역되지만, 단순히 형벌을 무서워하는 감정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의식하고 그분의 명령을 존중하며, 악을 경계하고 올바르게 살아가려는 경건함과 도덕적 책임까지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꾸란 3:102는 하나님을 마땅히 경외해야 한다고 가르치며, 49:13은 하나님 앞에서 가장 존귀한 사람이 가장 경건한 사람이라고 선언합니다. 특히 꾸란 2:177은 참된 의로움이 단순히 예배의 방향을 지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가난한 사람을 도우며 약속을 지키고 어려움 가운데 인내하는 삶과 관련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이슬람의 경외를 단순히 하나님의 형벌을 두려워하는 신앙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 안에는 하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자신의 욕망과 행동을 돌아보며, 선한 삶을 추구해야 한다는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서 한 가지 더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이 두려워서 그분을 거스르지 않는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의 뜻에 어긋나는 일을 피하는 것입니까?
성경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신앙의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잠1:7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선언하며, 잠8:13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또한 시111:10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경외는 하나님 앞에서 공포에 사로잡혀 판단과 의지를 잃어버리는 상태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이심을 인정하고, 그분의 거룩하심을 존중하며, 그분께 어긋나는 악을 멀리하는 태도입니다. 성경은 한편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가르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요일4:18은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라고 선언합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두려움의 성격을 구별하면 그 의미가 드러납니다. 형벌을 당할까 두려워하는 마음과 사랑하는 분을 거스르거나 그분에게서 받은 선을 해칠까 염려하는 마음은 같지 않습니다. 전자는 자기 자신이 당할 손해와 고통에 중심을 두지만, 후자는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과 그 사랑의 관계를 소중히 여깁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AC, 1749–1756) 3718항에서 두려움을 크게 두 종류로 구별합니다. 하나는 거룩하지 않은 두려움이고, 다른 하나는 거룩한 두려움(holy fear)입니다. 전자는 악인에게서 나타나는 두려움으로서 형벌이나 명예와 재산의 상실, 자신의 이익이 손상되는 일을 염려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반면 후자는 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두려움으로서 주님과 이웃에게 해를 끼치거나, 선과 진리를 손상시키는 일을 염려하는 마음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거룩한 두려움을 사랑에서 비롯되는 경외라고 설명합니다. 더 나아가 사랑에 거룩한 경외가 전혀 없다면 마치 소금이 빠진 음식처럼 그 사랑에 중요한 무엇이 결여된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경외는 사랑의 반대가 아니라 사랑 안에 있는 거룩한 조심스러움입니다. 사랑이 깊어질수록 상대를 잃을까 두려워하는 자기중심적인 불안은 줄어들지만, 그 사랑을 해치지 않으려는 마음은 오히려 깊어집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참된 경외의 본질은 형벌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사랑을 보호하려는 마음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같은 저작 5459항에서 예배의 상태에 따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의 성격도 달라진다고 설명합니다. 내적 예배가 없는 외적 예배에서는 두려움이 중심이 될 수 있지만, 영적 예배에서는 사랑과 거룩한 두려움이 함께하며, 천적 예배에서는 사랑과 거룩한 경외가 더욱 깊이 결합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단순히 두려움에서 사랑으로 교체된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이 변화함에 따라 두려움 자체의 성격이 달라진다는 뜻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벌이 두려워 악을 피하던 사람이 점차 악이 주님의 선과 진리를 거스르기 때문에 그것을 미워하게 되고, 마침내 선을 사랑하는 가운데 악을 피하게 됩니다. 이러한 변화가 거듭남(再生, regeneration)과 깊이 관련됩니다. 그러나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 언제나 무가치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직 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악의 결과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악을 멈추게 하는 외적 동기가 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두려움 자체가 참된 경외의 완성은 아닙니다. 주님은 인간이 두려움에 머무르지 않고 선을 이해하며 사랑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천국의 비밀’ 8925항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출20:20의 ‘하나님을 경외하여 범죄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는 말씀을 해설하면서, 거룩한 두려움은 사랑의 한 형태라고 설명합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부모와 자녀, 부부가 서로의 사랑을 해치는 일을 염려하는 마음과 같으며, 주님을 거스르거나 계명을 어기는 일을 피하려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경외는 하나님이 언제 자신을 벌하실지 몰라 불안해하는 상태가 아닙니다. 주님이 선 자체이시고 사랑 자체이시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분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소중히 여기는 상태입니다. 또한 이러한 경외는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랑하는 것을 자유롭게 지키려는 내적 의지에서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형벌을 피하려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면 그의 행동은 외적으로 정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짓 자체가 이웃을 해치고 주님의 진리를 거스르는 악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미워한다면, 그의 정직은 더욱 깊은 영적 토대를 갖게 됩니다. 이처럼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룩한 경외는 악을 피하는 행위와 선을 사랑하는 내적 생명이 결합된 상태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슬람의 타크와에 담긴 진리와 그 신학적 한계를 구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식하며 악을 경계하고, 정의와 자비를 실천하며,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려는 마음은 참된 경외와 연결될 수 있는 중요한 선입니다. 특히 타크와를 단순한 종교적 복종이 아니라 양심과 선행을 포함하는 삶의 태도로 이해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가르침과 일정한 접점을 가집니다. 그러나 경외를 하나님이 내리실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나 외적 명령의 준수에만 머물게 한다면, 그 경외는 아직 사랑의 내적 상태에 충분히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이슬람 신앙 전체의 오류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슬람에도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자발적인 경건을 강조하는 깊은 영적 전통이 있으며, 기독교에서도 형벌에 대한 두려움과 종교적 의무감에 머무는 신앙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판단해야 할 것은 특정 종교에 속해 있다는 사실보다 그 경외가 실제로 어떤 사랑에서 비롯되며, 어떤 삶의 열매를 맺는가 하는 점입니다. 다만 하나님을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나타내신 분으로 이해하는가 하는 신학적 차이는 여전히 남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 주님을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으로 인정하고 사랑하는 것이 참된 경외의 충만한 기초라고 가르칩니다.
이 문제는 종교적 권위와 인간의 양심을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이유로 종교 지도자의 말을 무조건 따르거나, 자신의 양심과 합리적인 판단을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참된 경외와 구별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 DP, 1764) 71항에서 인간이 자유에 따라 이성적으로 행동하도록 하는 것이 신적 섭리의 법칙이라고 설명합니다. 주님은 인간을 강제로 복종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유와 합리성 안에서 선을 선택하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참된 경외는 분별을 금지하거나 인간을 공포로 억압하는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일수록 자신이 행하는 일이 과연 선한지, 이웃에게 유익한지, 주님의 계명에 합당한지를 더욱 진지하게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가 깊다고 하면서 이웃을 멸시하거나 자신과 신앙이 다른 사람을 함부로 정죄한다면, 그 경외가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는 데서 비롯되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참된 경외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만드는 동시에 이웃 앞에서도 자신의 교만과 지배욕을 경계하게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이웃을 해치지 않으려는 마음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참된 신앙의 중요한 기초다’라는 이슬람의 고백에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인정해야 할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경외의 완성은 하나님을 얼마나 무서워하는가에 있지 않고,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며 그분의 선과 진리를 소중히 여기는가에 있습니다. 처음에는 형벌이 두려워 악을 피할 수 있지만,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악을 피하는 이유는 달라져야 합니다. 악이 자신에게 불이익을 가져오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을 해치기 때문에 그것을 멀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거룩한 두려움과 경외의 본질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도 같은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무서워서 순종합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이 기뻐하시는 선을 행하고 그분의 사랑을 해치는 악을 피합니까? 우리는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 정직하게 살아갑니까, 아니면 정직과 진실 자체를 사랑하기 때문에 거짓을 피합니까? 참된 경외는 하나님을 두려운 존재로만 바라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사랑 자체이시며 선 자체이심을 깊이 깨닫게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 안에서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도록 이끕니다. 그러므로 경외는 사랑에 이르기 위한 일시적인 단계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깊어질수록 더욱 거룩해지는 신앙의 내적 태도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장 깊은 이유는 그분이 우리를 벌하실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의 모든 선과 생명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IS.007 해설)
요약
이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피하고 정의와 선행을 실천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은 중요한 진리입니다. 특히 타크와를 경건과 양심, 도덕적 책임을 포함하는 삶의 태도로 이해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가르침과 접점을 가집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참된 경외는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나 외적 의무의 준수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거룩한 경외는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랑을 해치는 악을 피하려는 마음이며,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두려움은 사랑 안에서 거룩한 경외로 변화됩니다. 따라서 이슬람의 경외 자체가 오류인 것은 아니며, 경외를 공포와 외적 복종에만 한정하는 이해가 영적 한계를 지닙니다. 참된 경외의 완성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선과 진리의 근원으로 인정하고, 그분의 사랑에 따라 악을 피하며 선을 행하는 삶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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