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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O.005. ‘성령은 성부에게서 발출하신다’

bygracetistory 2026. 11. 6. 09:02

SL.EO.005 |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성령은 성부에게서 발출하신다’ - 필리오케 논쟁과 성령의 신적 근원

 

해설

동방정교회의 삼위일체 신학에서 성부의 군주성과 성자의 영원한 출생에 이어 반드시 살펴보아야 할 가르침은 ‘성령은 성부에게서 발출하신다’는 고백입니다. 성자가 성부에게서 영원히 나신다면, 성령은 성부에게서 영원히 발출하신다는 것이 동방정교회의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발출’(procession)은 어떤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거나, 한 존재가 자신의 일부를 떼어 내어 또 다른 존재를 만들어 낸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령은 성부에게서 비롯되시지만 성부보다 나중에 존재하기 시작한 분이 아니며, 성부와 성자보다 열등한 신적 존재도 아닙니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함께 영원하시고, 동일한 신적 본질을 완전하게 공유하시며, 동일한 영광과 예배를 받으시는 참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성자의 영원한 출생과 성령의 영원한 발출은 서로 다른 위격적 관계로 이해됩니다. 동방정교회는 그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인간의 언어와 이성으로 그 신비의 방식을 완전히 설명할 수는 없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이 교리는 기독교 역사에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오랫동안 갈등해 온 중요한 논쟁의 중심에 놓여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성부에게서만 발출하십니까, 아니면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출하십니까?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이 논쟁을 어떻게 이해합니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먼저 동방정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과 서방교회의 입장을 정확하게 구별한 다음, 스베덴보리가 제시하는 전혀 다른 신학적 관점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동방정교회의 성령 이해를 가장 명확하게 보여 주는 문헌은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와 연결되는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입니다. 이 신경은 성령을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고백하면서, 성부에게서 발출하시고 성부와 성자와 함께 예배와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라고 선언합니다. 이러한 고백의 중심에는 요15:26의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보혜사 곧 진리의 성령이 아버지에게서 나오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동방정교회는 이 말씀을 성령의 영원한 근원에 관한 중요한 계시로 이해합니다. 성부는 성자의 영원한 출생과 성령의 영원한 발출의 유일한 위격적 근원이시며, 성자와 성령은 각각 서로 다른 방식으로 성부에게서 비롯되지만 동일한 신성을 가지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부의 근원성은 신적 본질이 성부에게서 처음 만들어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또한 성부가 성령을 지배하거나 성령에게 명령을 내리는 상급자라는 뜻도 아닙니다. 정교회에서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함께 하나의 신적 의지와 역사하심을 공유하는 완전한 신적 위격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발출을 설명할 때에는 성부의 근원성뿐 아니라 성령의 완전한 신성과 영원성도 함께 인정해야 합니다. 이 점을 놓치면 정교회의 성령론을 성부에게 종속된 영적 능력에 관한 가르침으로 오해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갈라진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핵심에 ‘필리오케’(Filioque)라는 라틴어 표현이 있습니다. 이 말은 ‘그리고 성자로부터’라는 뜻입니다. 원래 381년 신경의 그리스어 본문은 성령이 성부에게서 발출하신다고 고백했지만, 서방교회에서는 시간이 흐르면서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출하신다는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6세기 무렵 서방의 일부 지역에서 신경에 첨가되었으며, 로마의 전례에서는 11세기에 받아들여졌습니다. 이후 이 문제는 동서교회의 중요한 신학적 갈등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논쟁을 단순히 성령의 출발점이 한 곳인가 두 곳인가 하는 문제로만 이해하면 그 깊이를 놓치게 됩니다. 동방정교회가 염려하는 것은 성부의 유일한 위격적 근원성이 훼손되는 일이며, 서방교회가 강조하는 것은 성부와 성자의 신적 일치와 성령의 발출에서 그 일치가 어떻게 드러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또한 필리오케 논쟁에는 신경의 원래 문구를 누가 어떤 권한으로 변경할 수 있는가 하는 교회론적 문제도 얽혀 있습니다. 따라서 이 논쟁은 단순히 단어 하나의 첨가를 둘러싼 언어적 다툼이 아니라, 삼위일체의 내적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교회의 신앙고백을 어떻게 보존할 것인가 하는 신학적 문제입니다.

 

그러나 서방교회의 필리오케를 동방정교회가 비판하는 것처럼 반드시 두 개의 독립적인 신적 근원을 인정하는 교리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로마가톨릭의 정식 설명에서는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서 하나의 원리로 발출하시며, 성부와 성자가 각각 별도의 성령을 발생시키는 두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또한 동방정교회 역시 성령께서 성자를 통하여 세상에 보내심을 받으시며, 성자와 전혀 관계없이 활동하시는 분이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실제로 동방교회의 신학 전통에서는 성령이 성부에게서 나오시고 성자를 통하여 나타나신다는 표현이 중요하게 사용되어 왔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성령의 영원한 위격적 기원과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성령의 파송 및 역사하심을 구별하는 일입니다. 성령이 성자를 통하여 인간에게 보내심을 받으신다는 사실이 곧 성령의 영원한 위격적 근원이 성자에게도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동방정교회는 바로 이 구별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2003년 북미 정교회-가톨릭 신학 협의에서도 양측은 이 문제에서 서로의 입장을 지나치게 단순화하거나 왜곡해 온 점을 인정하고, 성령의 신성과 성령의 기원에 관한 문제를 더욱 정밀하게 구별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므로 필리오케 논쟁을 살필 때에도 동방정교회는 성자를 배제하고 서방교회는 성부와 성자를 두 하나님으로 만든다는 식의 단순한 설명을 피해야 합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이러한 구별이 왜 필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요15:26에서는 성령이 아버지에게서 나오신다고 말씀하시지만, 같은 구절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이 성령을 보내시겠다고도 말씀하십니다. 또한 요16:7에서는 주님께서 떠나가셔야 보혜사를 보내실 것이라고 하셨으며, 요16:13-15에서는 진리의 성령이 스스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주님의 것을 가지고 제자들에게 알리실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요20:22에서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구절들은 성령과 성부의 관계뿐 아니라 성령과 성자의 깊은 일치를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 말씀들을 어떤 신학적 구조에서 이해하는가에 따라 결론이 달라집니다. 동방정교회는 성령의 영원한 위격적 발출을 성부에게 돌리면서, 성자를 통한 파송과 계시의 역사도 인정합니다. 서방교회는 성부와 성자의 일치를 성령의 영원한 발출과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말씀들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세 영원한 신적 위격의 관계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그는 성령께서 주님에게서 나오시는 신적 진리이자 신적 역사하심이라는 관점에서 성경을 읽습니다. 따라서 같은 요한복음의 말씀을 인용하더라도 그 말씀에서 성령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근본적인 해석이 서로 다릅니다.

 

스베덴보리는 ‘주의 교리’(Doctrine of the Lord, 1763) DL.46에서 성령이 주님에게서 나오는 ‘발출하는 신성’(the Divine Proceeding)이며, 이것은 주님 자신이라고 명확하게 가르칩니다. 그는 마28:19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하신 말씀을 설명하면서, 주님 안에는 신적 삼위일체가 있다고 선언합니다. 성부는 근원적인 신성이시고, 성자는 그 신성이 취하시고 영화롭게 하신 신적 인성이시며, 성령은 그 한 분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역사하심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령이 주님과 분리되어 존재하는 또 하나의 신적 인격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인간의 영혼과 몸과 그에게서 나오는 활동에 비유합니다. 어떤 사람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그 사람 자신에게서 나오지만, 그렇다고 그 활동이 그 사람과 분리되어 존재하는 또 다른 인격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와 신적 역사하심은 주님과 분리된 다른 하나님이 아니라, 주님께서 자신의 사랑과 지혜를 피조물에게 전달하시는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비유를 근거로 성령이 단순한 비인격적 힘이나 자연적인 에너지에 불과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성령으로 의미되는 신적 역사하심은 바로 주님 자신의 신성에서 나오는 것이며, 그 근원이신 주님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1771) TCR.139-141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성령이 신적 삼위일체가 계시는 한 분 하나님, 곧 주 하나님 구원자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이며, 동시에 신적 능력과 역사하심이라고 가르칩니다. 특히 성령이 의미하는 신적 진리는 말씀과 깊이 연결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적 진리를 통하여 인간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고, 인간의 이해를 밝히시며, 악과 거짓을 분별하게 하시고,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도록 역사하십니다. 또한 TCR.142-145에서는 성령의 역사하심이 인간의 개혁과 거듭남, 새롭게 하심과 생명을 주심, 거룩하게 하심과 의롭다 하심, 악에서 깨끗하게 하심과 죄의 용서, 그리고 궁극적인 구원에 관계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성령은 한 분 하나님과 별도로 활동하는 또 다른 구원자가 아닙니다. 주님 자신이 신적 진리와 사랑으로 인간에게 역사하시며, 인간은 그 역사하심을 받아들임으로써 영적으로 변화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성령론은 단순히 성령이 어디에서 기원하는가 하는 문제에 머물지 않고, 주님께서 인간의 영혼 안에 어떻게 임하시며 거듭남을 이루시는가 하는 문제로 자연스럽게 나아갑니다. 이것은 성령의 발출을 영원한 세 위격의 관계로 이해하는 전통적인 삼위일체 신학과 구별되는 중요한 특징입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는 성령께서 성부에게서 나오신다는 성경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합니까? 그는 TCR.153-155에서 주님께서 성부로부터 자신 안에서 역사하시며, 그 반대가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성부와 성자의 관계는 영원부터 따로 존재하는 두 신적 인격의 관계가 아니라, 주님 안의 근원적인 신성과 그 신성이 취하시고 영화롭게 하신 신적 인성의 관계입니다. 성부는 영혼에 비유되는 근원적인 신성이시고, 성자는 그 신성과 하나를 이루는 신적 인성이시며, 성령은 그 신성과 신적 인성이 하나 되어 나타내시는 신적 역사하심입니다. 이러한 이해에서 성령이 성부에게서 나온다는 말씀과 주님께서 성령을 보내신다는 말씀은 서로 충돌하지 않습니다. 근원적인 신성에서 비롯되는 신적 역사하심이 주님의 신적 인성을 통하여 피조물에게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서로 분리된 두 신적 근원이 공동으로 성령을 발생시키는 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성부와 성자라는 두 영원한 위격 사이에서 성령이 발출하시는 정교회 또는 서방교회의 구조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도 아닙니다. 그의 설명에서는 성령의 발출을 논하기 전에 먼저 성부와 성자가 한 분 주님 안에서 어떤 관계를 이루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따라서 정교회와 서방교회의 필리오케 논쟁에 스베덴보리의 견해를 단순히 어느 한쪽의 입장으로 분류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는 논쟁의 근본적인 전제인 세 영원한 위격의 존재 자체를 다르게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또 하나의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는 성육신 이전에는 성령의 역사하심이 없었다고 가르칩니까? 그렇게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구약성경에도 하나님의 영이 사람들에게 임하시고, 선지자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며,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역사하는 장면들이 여러 차례 나타납니다. 창1:2에서는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셨다고 말씀하시며, 사61:1에서는 주 여호와의 영이 기름 부음 받은 이에게 임하셨다고 증언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성육신 이전부터 여호와 하나님의 신적 진리와 역사하심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는 주님께서 성육신하시고 자신의 인성을 영화롭게 하신 뒤에 성령의 역사하심이 새로운 방식으로 나타났다고 설명합니다. 요7:39에서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주어지지 않으셨다고 말씀하는 대목은 이러한 이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이 말씀을 성육신 이전에는 하나님의 영이나 신적 능력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신적 인성을 완성하신 뒤 인간에게 역사하시는 성령의 새로운 관계와 충만함을 가리키는 말씀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따라서 성령의 발출은 스베덴보리에게 신적 생명이 처음 생겨났다는 뜻이 아니라, 영원하신 주님께서 영화된 신적 인성을 통하여 인간과 결합하시며 자신의 신적 생명을 전달하시는 역사와 연결됩니다.

 

동방정교회와 스베덴보리의 성령 이해를 비교할 때 또 하나 주의해야 할 것은 정교회가 성령을 단순히 추상적인 세 번째 신적 인격으로만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정교회는 성령께서 실제로 인간 안에 임하시고, 죄를 깨닫게 하시며, 거룩하게 하시고, 하나님과의 결합으로 인도하신다고 가르칩니다. 성령은 단순히 삼위일체의 구조를 완성하기 위한 논리적 요소가 아니라, 신자의 기도와 예배와 거룩한 삶에서 실제로 역사하시는 분입니다. 특히 동방정교회가 강조하는 ‘신화’(theosis)는 인간이 하나님의 본질 자체가 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창조되지 않은 신적 에너지에 참여함으로써 하나님과 결합해 가는 과정입니다. 이 과정에서 성령의 역사하심은 매우 중요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신적 사랑과 지혜를 인간에게 흘려보내시는 ‘인플럭스’(influx)를 통하여 인간의 의지와 이해에 역사하신다고 설명합니다. 두 전통 모두 인간이 자기 능력만으로 거룩해지거나 구원에 이를 수 없으며, 실제적인 신적 역사하심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가르친다는 점에서 만납니다. 그러나 정교회의 성령은 영원한 신적 위격이시며, 스베덴보리의 성령은 한 분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와 역사하심이라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구별됩니다. 또한 정교회의 창조되지 않은 신적 에너지와 스베덴보리의 인플럭스를 동일한 개념으로 취급해서도 안 됩니다. 이 두 개념의 관계는 이후 EO.006과 EO.007에서 더욱 정밀하게 검토할 문제입니다.

 

이러한 차이는 실제 신앙생활에서도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무엇으로 확인합니까? 어떤 사람은 강렬한 감정이나 특별한 은사, 방언과 예언, 신비로운 체험이 나타날 때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하신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성령께서 인간에게 역사하실 때 깊은 감동이나 깨달음이 동반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성령의 참된 역사하심을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요16:13에서 진리의 성령이 사람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고 말씀하셨다면, 성령의 역사하심은 무엇보다 인간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진리로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데서 확인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성령을 받는다는 것이 독립된 신적 인격 하나가 인간에게 들어와 특별한 능력을 부여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신적 진리로 인간의 이해를 밝히시고, 신적 사랑으로 인간의 의지를 변화시키시며, 악과 거짓에서 벗어나 선과 진리 안에 살아가도록 역사하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성령을 받았다고 고백하면서도 이웃을 미워하고, 자신의 욕망을 정당화하며, 진리를 이용하여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 한다면, 그 고백과 실제 삶 사이에는 깊은 불일치가 존재합니다. 반대로 특별한 종교적 체험을 내세우지 않더라도, 자신의 악을 인정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정직하게 살아가려는 사람에게서는 주님의 신적 역사하심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성령의 발출에 관한 오랜 논쟁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동방정교회와 서방교회는 성령의 영원한 기원과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두고 오랜 세월 논쟁해 왔습니다. 그 논쟁에는 신학적으로 결코 가볍게 다룰 수 없는 문제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고백을 어떻게 보존할 것인지, 성자와 성령의 완전한 신성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성경의 표현과 교회의 신학적 언어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지 하는 문제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이 깊어질수록 더욱 경계해야 할 것은 인간이 자신의 교리적 체계를 완전한 것으로 여기고, 다른 전통의 신자들을 쉽게 정죄하는 태도입니다. 정교회의 성령론에는 성부의 유일한 근원성과 성령의 참된 신성을 함께 보존하려는 중요한 신앙적 통찰이 있습니다. 서방교회의 필리오케에도 성부와 성자의 불가분한 일치를 강조하려는 신학적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두 전통의 출발점 자체를 다시 검토하여 성령을 한 분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역사하심으로 이해합니다. 이 세 관점을 비교할 때에는 각각의 가르침이 실제로 무엇을 주장하는지를 공정하게 살펴야 하며, 교리적 차이를 사람의 최종적인 영적 상태에 대한 판정으로 연결해서는 안 됩니다. 신학적 분별은 진리를 밝히기 위한 것이지, 자신의 지식을 근거로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성령은 성부에게서 발출하십니까? 동방정교회는 그렇다고 고백합니다. 성령은 성부에게서 영원히 발출하시는 참하나님이시며, 성부와 성자와 함께 동일한 신적 본질과 영광을 공유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 가르침에는 성령의 완전한 신성을 인정하면서 하나님의 유일한 근원을 보존하려는 중요한 신학적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성령의 발출을 성부와 성자라는 영원한 두 위격의 관계로 설명하는 것 자체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성부는 주님 안의 근원적인 신성이시고, 성자는 그 신성이 취하시고 영화롭게 하신 신적 인성이시며, 성령은 그 한 분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와 신적 역사하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령께서 성부에게서 나오신다는 말씀은 성부라는 별개의 신적 인격이 독립적인 또 하나의 신적 위격을 발생시키신다는 뜻으로 이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근원적인 신성에서 비롯되는 신적 생명이 주님의 신적 인성을 통하여 인간에게 전달되고, 그 신적 역사하심으로 인간이 진리를 깨닫고 악에서 벗어나 선과 사랑의 삶으로 거듭난다는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국 성령에 관한 참된 신앙은 성령의 영원한 기원을 설명하는 신학적 공식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성령으로 의미되는 주님의 신적 역사하심을 실제로 받아들이는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한 분 하나님으로 알고 사랑하며, 그분께서 밝혀 주시는 진리를 따라 자신의 악을 멀리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할 때, 성령의 역사하심은 더 이상 추상적인 교리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안에서 실제로 이루어지는 주님의 생명이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본 성령의 발출과 그 신앙적 의미입니다. (EO.005 해설)

 

요약

동방정교회는 성령께서 성부에게서 영원히 발출하시며, 성부와 성자와 동일한 신적 본질을 가지신 참하나님이라고 가르칩니다. 이는 성령의 신성과 성부의 유일한 위격적 근원성을 함께 보존하려는 고백입니다. 서방교회의 필리오케는 성령께서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출하신다는 표현으로, 성부와 성자의 신적 일치를 강조하지만, 동방정교회는 이를 성령의 영원한 기원과 성자를 통한 파송을 혼동할 수 있는 문제로 이해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논쟁의 전제인 세 영원한 신적 위격의 구조를 받아들이지 않고, 성부를 주님 안의 근원적인 신성, 성자를 영화된 신적 인성, 성령을 한 분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와 역사하심으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그의 관점에서 성령의 발출은 독립적인 세 번째 신적 인격의 기원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주님께서 자신의 신적 사랑과 지혜로 인간에게 역사하시는 방식과 연결됩니다. 두 전통은 인간의 구원과 거듭남에 신적 역사하심이 필수적이라는 점에서 만나지만, 성령의 존재 방식과 신적 근원에 대한 이해에서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결국 참된 신앙은 성령의 기원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데 머물지 않고, 주님께서 주시는 진리와 사랑을 받아들여 악을 멀리하고 이웃을 위한 선한 삶으로 나아가는 데서 완성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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