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008. ‘하나님의 공의는 죄에 대한 형벌이 반드시 치러질 것을 요구한다’
SL.PR.008 | 개신교(Protestant)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하나님의 공의는 죄에 대한 형벌이 반드시 치러질 것을 요구한다’ - 하나님의 공의는 형벌의 집행인가, 무너진 신적 질서의 회복인가?
해설
개신교 신앙에서 하나님의 공의는 죄를 결코 묵과하지 않는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으로 이해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무한한 사랑으로 죄인을 용서하기 원하시지만, 동시에 완전한 공의를 지니신 분이므로 죄에 대한 형벌을 그냥 면제하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받아야 할 형벌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받으셨고, 그 형벌이 치러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죄인을 용서하실 수 있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이해는 많은 개신교 신자에게 십자가의 의미를 설명하는 가장 익숙한 방식입니다. 여기에는 죄가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니며, 인간의 악이 반드시 심각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설명을 조금 더 깊이 살펴보면 근본적인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용서하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누군가가 고통을 받고 형벌을 치러야 하는 것입니까? 만일 형벌이 치러지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용서하실 수 없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공의는 인간의 죄를 제거하고 그를 회복시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죄에 상응하는 고통이 반드시 발생해야 만족되는 것입니까?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전통적인 형벌대속론과 근본적으로 다른 구속 이해를 제시합니다. 그는 죄의 실제적인 결과와 신적 질서의 엄중함을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의 공의를 충족하기 위해 반드시 형벌이 집행되어야 한다는 전제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먼저 전통적인 개신교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8장 5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순종과 자기희생을 통해 성부의 공의를 충분히 만족시키셨다고 가르칩니다. 제11장 3항 역시 그리스도의 순종과 죽음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들의 죄의 빚을 완전히 갚고, 그들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충족했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이해는 일반적으로 ‘형벌대속론’(penal substitutionary atonement)이라고 불리는 구속론과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다만 형벌대속론이 개신교 전체의 유일한 속죄 이해는 아닙니다. 개신교 안에도 그리스도의 승리, 화해, 죄의 용서와 인간의 변화 등을 강조하는 여러 구속 이해가 존재합니다. 또한 정통적인 형벌대속론이 성부는 사랑이 없고 성자만 인간을 사랑한다고 가르치는 것도 아닙니다. 성부께서 사랑으로 성자를 보내셨으며, 성자께서 자발적으로 자신을 희생하셨다는 것이 그 신학의 중요한 전제입니다. 그러므로 이 교리를 단순히 분노한 아버지가 무고한 아들에게 형벌을 떠넘긴 이야기로만 소개한다면 실제 가르침을 왜곡하게 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여전히 중요한 문제가 남습니다. 성부와 성자의 사랑이 하나라고 인정하더라도, 인간을 용서하기 위해 형벌에 대한 만족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설명 자체가 과연 주님의 신적 사랑과 지혜에 부합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성경에는 죄와 형벌의 관계를 강조하는 말씀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롬6:23은 죄의 삯이 사망이라고 선언하며, 갈6:7은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히9:22는 율법에 따른 정결 예식의 문맥에서 피 흘림이 없으면 사함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죄가 실제적인 결과를 가져오며, 인간이 자신의 악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죄에 결과가 따른다는 가르침과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반드시 누군가를 처벌하셔야 한다는 주장은 구별해야 합니다. 특히 히9:22의 피 흘림에 관한 말씀을 모든 죄 사함에 형벌의 집행이 반드시 선행해야 한다는 보편적인 법칙으로 확대하려면, 구약의 제사제도와 그리스도의 희생을 해석하는 신학적 전제가 필요합니다. 반면 겔18:21-23에서는 악인이 자신의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율례를 지키면 살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시51:17 역시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가 상한 심령이라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하나님의 목적이 단순히 형벌을 집행하는 데 있지 않고, 인간이 악에서 돌아서 생명을 얻는 데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성경 전체를 살필 때 우리는 죄의 결과와 하나님의 용서, 제사의 의미와 인간의 회개를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115-117항은 구속의 본질을 매우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구속은 지옥들을 정복하고, 천국에 질서를 회복하며, 그 결과 새로운 영적 교회를 위한 길을 준비하신 주님의 신적 역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통적인 형벌대속론과 구속을 이해하는 출발점부터 다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주님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에는 지옥의 세력이 점점 강해지면서 영계의 질서가 심각하게 무너지고 있었으며, 그 결과 인간이 자유롭게 진리를 받아들이고 거듭날 수 있는 길이 위협받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상태를 회복하시기 위해 직접 인성을 취하시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인성을 통해 지옥의 세력과 싸워 승리하시고, 천국의 질서를 회복하셨으며, 인간이 다시 구원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따라서 구속의 본질은 인간에게 내려져야 할 형벌을 대신 받아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인간을 사로잡고 있는 악의 세력을 이기시고, 무너진 영적 질서를 회복하여 인간이 주님의 선과 진리를 자유롭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시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구속은 법정에서 이루어지는 형벌의 이전보다 훨씬 넓은 영적 현실이며, 주님께서 직접 이루신 신적 승리의 역사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에서 주님께서 겪으신 극심한 고난과 죽음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스베덴보리는 TCR.126-131에서 십자가의 수난이 주님께서 겪으신 마지막 시험이며, 그 시험을 통하여 자신의 인성을 영화하시는 과정이 완성되었다고 가르칩니다. 그는 구속과 십자가의 수난을 서로 무관한 사건으로 분리하지 않지만, 십자가에서 고통을 받으신 행위 자체를 구속의 본질과 동일시하지도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지상에서 끊임없이 지옥의 세력과 싸우셨으며, 모든 시험에서 승리하셨습니다. 십자가는 그 싸움의 마지막이자 가장 극심한 시험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시험을 이기심으로써 어머니에게서 받은 인성에 속한 것을 완전히 벗으시고, 자신의 신성으로부터 나온 인성을 영화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의미는 성부께서 요구하신 형벌을 성자가 대신 받아 내셨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악의 모든 세력과 맞서 승리하시고, 신성과 인성이 완전히 하나가 되는 영화를 이루셨다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TCR.132-133에서 십자가의 수난을 구속 자체와 동일시하는 당시 교회의 가르침을 근본적인 오류로 비판합니다. 이는 십자가의 중요성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형벌의 대가 지불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주님의 승리와 영화라는 관점에서 이해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반드시 살펴보아야 할 것이 사53:5의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라는 말씀입니다. 전통적인 형벌대속론은 이 말씀을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으셨다는 중요한 근거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주님께서 인간의 죄악을 담당하셨다는 표현을 반드시 성부께서 인간에게 내리실 형벌을 성자에게 이전하셨다는 뜻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인성을 취하심으로써 인간을 사로잡고 있는 지옥의 세력과 직접 대면하셨으며, 그 세력의 공격과 시험을 실제로 감당하셨습니다. 또한 성경의 예언자들이 백성의 죄악을 상징적으로 담당했던 것처럼, 주님의 수난은 당시 사람들이 말씀과 신적 진리를 어떻게 거부하고 모독했는지를 드러내는 표상적 의미도 지닙니다(TCR.126-130). 따라서 그분이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다는 말은 죄의 결과와 악의 세력을 실제로 상대하시고 이기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러한 해석이 사53장의 문자적 표현에서 아무런 신학적 전제 없이 자동으로 도출되는 것은 아닙니다. 전통적인 형벌대속론과 스베덴보리의 구속론은 같은 성경 본문을 서로 다른 신학적 구조 속에서 이해합니다. 그 차이를 정직하게 인정하면서도, 십자가에서 주님께서 이루신 구원이 인간의 실제적인 악과 그 지배로부터의 해방과 관계된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형벌이 반드시 집행되지 않아도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뜻일까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그렇습니다. 다만 이것은 악의 결과가 사라진다거나 악인이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AC, 1749-1756) 696항은 악이 스스로 형벌을 가져오며, 악 안에 그 악에 대한 형벌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형벌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분노를 만족시키기 위해 외부에서 덧붙이시는 고통이 아닙니다. 악을 사랑하고 행하는 존재가 그 악으로 인해 스스로 들어가는 영적 상태와 그에 따른 결과입니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해치는 것을 즐거워하는 사람은 자신의 사랑을 통해 이미 천국의 사랑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살아갑니다. 그가 그러한 악을 계속 사랑한다면, 그 악은 그의 내면을 속박하고 다른 악한 존재들과 결합시키며 고통과 파괴를 가져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악한 영들이 서로에게 고통을 가하고 형벌을 경험하지만, 주님께서는 오히려 그 악이 무제한으로 확산되지 않도록 억제하시고 고통을 가능한 한 완화하신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신적 공의는 악에 상응하는 고통의 양을 반드시 채워야 하는 보복적 원리가 아닙니다. 악의 결과를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악을 제한하고 선을 보호하며, 가능한 모든 것을 올바른 질서 안으로 회복시키시는 신적 사랑과 지혜의 역사입니다.
이러한 이해는 죄 사함의 의미에서도 중요한 차이를 드러냅니다. 만일 하나님의 공의가 죄에 대한 형벌을 반드시 요구한다면, 용서는 그 형벌을 죄인 자신이 치르거나 다른 누군가가 대신 치른 뒤에야 가능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TCR.611-614에서 죄 사함을 인간이 거듭나는 만큼 악에서 물러나게 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죄가 제거된다는 것은 인간이 저지른 악이 존재 자체를 잃고 완전히 사라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인간을 악에서 물러나게 하시고, 그 악이 더 이상 그의 생명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선 안에 보존하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죄 사함은 단순히 죄에 대한 법적 책임이 다른 사람에게 이전되었다는 선언이 아니라, 인간이 실제로 악의 지배에서 벗어나 새로운 생명을 받아들이는 과정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용서하시기 위해 먼저 누군가를 처벌해야 하는 분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를 사랑하시고 악에서 구원하기 원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계속 악을 사랑하고 그것을 정당화한다면, 주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이 그의 내면에서 충분히 받아들여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회개는 하나님께서 형벌을 면제해 주시도록 설득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악을 죄로 인정하고 주님의 도움으로 그 악에서 돌아서는 일입니다. 주님의 용서는 변함없이 열려 있지만, 인간이 그 용서를 실제 생명으로 받아들이는 데에는 회개와 거듭남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공의를 이해할 때 또 하나 조심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형벌이 공의를 충족한다는 생각은 자칫 고통 자체를 도덕적으로 필요한 것으로 여기게 만들 수 있습니다. 누군가 잘못을 저질렀다면 반드시 그만큼 고통을 당해야 정의가 실현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 사회에서도 책임을 묻는 일과 고통을 목적으로 삼는 일은 구별해야 합니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정당한 법적 책임을 묻고, 피해자를 보호하며, 재발을 방지하는 일은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가해자가 고통을 당하는 것 자체가 정의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도 악은 제한되어야 하며 선한 사람들은 보호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목적은 보복의 만족이 아니라 질서의 보존과 가능한 선의 실현에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를 인간 사회의 법률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하나님의 공의를 자신의 분노와 복수심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특히 다른 사람이 고난을 당할 때 ‘그가 죄를 지었으니 하나님께서 형벌을 내리신 것’이라고 단정하는 태도는 매우 위험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내적 상태와 신적 섭리의 모든 과정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타인의 고통을 보며 형벌의 정당성을 추측하는 일이 아니라, 악을 분별하면서도 사람을 사랑하고 가능한 도움을 베푸는 일입니다.
이 문제는 결국 우리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이해하는가 하는 질문으로 돌아옵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죄에 대한 형벌이 반드시 치러져야 만족되는 원리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죄의 대가가 지불되기 전에는 용서하실 수 없는 분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주님의 사랑과 공의는 서로 다른 요구를 지닌 두 속성이 아닙니다. 주님은 사랑 자체이시며 동시에 지혜 자체이시고, 그분의 공의는 신적 사랑과 지혜가 모든 것을 올바른 질서 안으로 인도하시는 데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악을 선으로 인정하지 않으시며, 악이 다른 사람을 파괴하도록 무제한 허용하지도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분의 목적은 악인에게 고통을 가하여 자신의 공의를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그를 악에서 돌이켜 구원하고 선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 545-550항에서 스베덴보리가 주님께서는 누구도 지옥에 던져 넣지 않으신다고 가르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사랑한 악에 따라 지옥의 상태로 향하지만, 주님께서는 가능한 한 그를 그 악에서 돌이키고자 끊임없이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공의는 사랑이 중단되는 순간에 나타나는 또 하나의 신적 성향이 아니라, 사랑이 지혜와 결합하여 선을 보호하고 악을 제한하며 질서를 회복하시는 방식입니다.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죄에 대한 형벌이 반드시 치러질 것을 요구합니까? 전통적인 형벌대속론은 하나님의 완전한 공의가 죄의 형벌을 요구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형벌을 대신 담당하심으로써 인간을 위한 속죄를 이루셨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에는 죄의 심각성과 십자가의 중요성, 그리고 구원이 인간 자신의 공로에서 비롯되지 않는다는 귀중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의 공의를 충족하기 위해 누군가가 반드시 형벌을 받아야 한다는 전제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죄의 결과는 실제로 존재하지만, 그 결과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분노를 만족시키기 위해 부과하시는 고통이 아니라 악 자체가 가져오는 영적 결과입니다. 또한 주님의 십자가는 성부께서 요구하신 형벌을 대신 치르신 사건이 아니라, 지옥의 세력에 대한 마지막 승리와 인성의 영화가 완성된 사건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대신하여 형벌을 받아야만 용서할 수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을 악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직접 인성을 취하시고 모든 시험을 이기신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누가 내 죄에 대한 형벌을 대신 치렀는가?’에서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어떤 악에서 건져 내셨으며, 나는 그분의 구속을 통해 열린 길에서 실제로 악을 멀리하고 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거듭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신적 공의의 목적은 형벌의 완성이 아니라, 악의 지배가 제거되고 선과 진리의 질서가 회복되어 인간이 주님과 결합할 수 있게 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본 하나님의 공의와 형벌, 그리고 주님께서 이루신 구속의 참된 의미입니다. (PR.008 해설)
요약
전통적인 개신교의 형벌대속론은 하나님의 공의가 죄에 대한 형벌을 요구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그 형벌을 대신 받으심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를 충족하고 인간을 위한 속죄를 이루셨다고 가르칩니다. 이 가르침에는 죄가 실제적인 결과를 가져오며, 인간이 자신의 공로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해 반드시 형벌이 집행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참된 기독교’ TCR.115-117에 따르면 구속은 지옥의 세력을 정복하고 천국의 질서를 회복하여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마련하신 주님의 신적 역사입니다. 또한 TCR.126-133은 십자가의 수난을 구속의 본질과 동일시하지 않고, 주님의 마지막 시험과 인성의 영화가 완성된 사건으로 설명합니다. ‘천국의 비밀’ AC.696은 악 안에 그 악의 형벌이 있다고 가르치며, 주님께서는 형벌을 가하여 자신의 공의를 만족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악을 제한하고 고통을 가능한 한 완화하신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죄의 결과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과 하나님께서 반드시 누군가에게 형벌을 집행해야 한다는 주장은 구별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죄 사함은 형벌의 대가가 지불되었다는 선언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을 악의 지배에서 물러나게 하시고 선 안에 보존하시는 거듭남의 역사와 결합되어 있습니다(TCR.611-614). 결국 신적 공의는 고통의 대가를 요구하는 보복적 원리가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지혜가 악을 제한하고 선을 보호하며 무너진 영적 질서를 회복하시는 방식입니다. 십자가의 참된 의미도 형벌의 대리 집행보다 주님의 승리와 영화, 그리고 인간이 거듭날 수 있는 길을 여신 구속의 역사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PR.007. ‘하나님은 사랑이시지만 동시에 죄에 진노하시고 죄인을 심판하시는 분이시다’
SL.PR.007 | 개신교(Protestant)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하나님은 사랑이시지만 동시에 죄에 진노하시고 죄인을 심판하시는 분이시다’ - 하나님의 진노는 실제 감정인가, 인간의 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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