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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O.008.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모든 개념과 형상을 초월하신다’

bygracetistory 2026. 11. 6. 19:21

SL.EO.008 |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모든 개념과 형상을 초월하신다’ - 부정신학과 신적 인격의 문제

 

해설

동방정교회의 신학을 살펴보면 하나님에 관하여 끊임없이 강조하는 가르침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만들어 낸 모든 개념과 형상을 초월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이시며 지혜이시고, 전능하시며 전지하시고,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그분의 손과 얼굴, 눈과 음성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동방정교회는 이러한 표현들이 아무리 성경적이고 신앙적으로 중요하더라도 하나님의 무한하신 본질을 인간의 생각 속에 완전히 담아낼 수는 없다고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모든 피조물의 범주를 초월하시며, 인간의 언어와 관념으로 제한할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처음 접하면 하나님에 관하여 아무것도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는 뜻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교회가 의도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부정하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에 관하여 무엇을 안다고 말할 때, 인간이 이해한 그 내용과 하나님 자신의 무한한 실재를 동일시하지 않도록 경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적 개념과 형상을 초월하신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하나님을 마음속에 생각하며 기도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인간적인 형상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까? 그렇다면 성경이 하나님을 인간의 모습과 언어로 나타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본 사람이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신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바로 이 질문에서 동방정교회의 ‘부정신학’(apophatic theology)과 스베덴보리의 신적 인성에 관한 가르침이 중요한 만남과 차이를 드러냅니다.

 

동방정교회의 부정신학은 하나님께서 무엇이신지를 인간이 완전히 규정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출발합니다. 여기서 ‘부정’이란 하나님을 부인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에 관한 인간의 표현들이 지닌 유한성과 한계를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선하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선하시다는 말은 인간이 경험하는 선한 사람의 성품을 무한히 확대하면 하나님의 본질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선의 근원이시며, 피조물이 경험하는 선함을 무한히 초월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혜로우시다고 말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지혜는 제한된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형성되지만, 하나님의 지혜는 모든 지혜의 근원이므로 인간의 지성과 동일한 범주에 놓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동방정교회는 하나님께 관하여 긍정적으로 말하는 ‘긍정신학’(cataphatic theology)과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된 개념을 초월하신다고 말하는 부정신학을 함께 인정합니다. 긍정신학은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사랑과 선과 지혜와 거룩함을 고백하고, 부정신학은 그 고백을 인간의 유한한 관념으로 절대화하지 않도록 이끕니다. 따라서 부정신학의 목적은 하나님을 알 수 없는 추상적 존재로 남겨 두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이 만든 하나님에 관한 개념을 하나님 자신과 혼동하지 않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이 점에서 동방정교회의 가르침에는 인간이 자신의 지식과 이해를 지나치게 신뢰하지 말아야 한다는 중요한 신앙적 겸손이 담겨 있습니다.

 

이러한 신학적 전통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하나가 8세기 신학자 다마스쿠스의 요한(John of Damascus)입니다. 그는 ‘정통신앙 해설’(An Exposition of the Orthodox Faith) 제1권 1장과 4장에서 하나님의 신성이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며, 하나님 자신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피조물이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전적인 무지 속에 남겨 두신 것은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영원하시고, 창조되지 않으셨으며, 선하시고, 지혜로우시고, 모든 것의 근원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이러한 지식이 하나님의 무한한 본질을 완전히 파악한 결과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몸이 없으시며, 공간의 경계 안에 갇히거나 물질적인 요소들로 구성된 존재가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빛이라고 부를 때 그 빛을 자연계의 물리적 광선과 동일시해서는 안 되며,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된 빛을 초월하신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하나님에 관한 모든 언어는 참된 계시를 전달할 수 있으면서도 동시에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더 깊은 실재를 가리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을 인간의 자연적 감각과 상상력으로 만들어 낸 우상과 구별하려는 중요한 의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마스쿠스의 요한은 동시에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인간의 눈에 보이셨다는 사실도 인정합니다. 그러므로 정교회의 부정신학을 하나님은 어떠한 방식으로도 자신을 나타내실 수 없다는 가르침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와 연결하여 동방정교회에서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 ‘성화상’(icon)입니다. 정교회 예배당에 들어가면 예수 그리스도와 마리아, 여러 성인의 모습을 나타낸 성화상들을 볼 수 있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든 형상을 초월하신다는 가르침과 모순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형상으로도 표현할 수 없다고 하면서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림으로 나타내고 그 앞에서 공경을 표시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정교회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신적 본질을 그림 속에 가두거나 묘사할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실제 인간으로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나타낼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787년 제2차 니케아 공의회는 성화상 공경에 관한 논쟁에서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중요한 근거로 제시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 분으로만 남아 계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제 인간으로 나타나셨으므로, 그분의 성육신을 시각적인 형상으로 증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교회는 성화상에 대한 공경과 하나님께만 드리는 예배를 구별하며, 성화상의 물질 자체를 하나님으로 숭배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정교회의 성화상 전통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부정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초월하시는 하나님께서 성육신을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셨다는 사실을 보존하려는 신앙적 표현입니다. 물론 성화상 공경이 신학적으로 정당한가 하는 문제는 별도의 검토가 필요하지만, 정교회가 인간의 형상으로 하나님의 무한한 본질을 완전히 표현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성경 역시 하나님께서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신다는 사실과 동시에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모습으로 자신을 나타내신다는 사실을 함께 증언합니다. 출33:20에서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사람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살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사55:8-9에서는 하나님의 생각과 길이 인간의 생각과 길보다 높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창1:26-27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기록하며, 창18장에서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세 사람의 모습 가운데 여호와의 임재가 증언됩니다. 또한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손과 눈, 얼굴과 팔에 관한 표현을 여러 차례 사용합니다. 이러한 표현들을 모두 자연계의 물질적 신체에 관한 설명으로 이해하면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제한하게 됩니다. 반대로 이러한 표현들이 단순히 인간의 상상력에서 만들어진 것이므로 하나님에 관한 참된 내용을 전달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면, 성경이 인간에게 말씀을 주신 목적을 이해하기 어렵게 됩니다. 특히 요1:18은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나 독생하신 하나님께서 그분을 나타내셨다고 증언하며, 요14:9에서는 주님께서 자신을 본 사람이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인간에게 나타나신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자연적 개념을 초월하시지만, 인간이 자신을 알 수 없도록 영원히 감추어 두신 분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그분과 결합할 수 있도록 자신을 계시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문제는 하나님을 어떤 형상으로든 생각해서는 안 되는가 하는 데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을 드러내신 방식을 어떻게 올바르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데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신학은 동방정교회의 부정신학과 중요한 공통점을 가지면서도 근본적인 차이를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 사랑과 지혜’(Divine Love and Wisdom, 1763) DLW.7-10에서 하나님은 공간 안에 존재하지 않으시며, 그분의 무한하심을 자연계의 시간과 공간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디에나 계시다는 것은 물질적 신체가 우주 전체에 퍼져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공간을 초월하시며, 그분의 신적 사랑과 지혜는 모든 피조물에게 생명을 공급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자연계의 한 장소에 거주하시거나 어떤 물질적인 형상 속에 갇혀 계신 분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 역시 동방정교회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자연적 관념을 하나님께 그대로 적용하는 일을 경계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형상을 초월하시므로 하나님을 형상 없이 생각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을 인간 형상으로 이해하는 것이 천국적인 하나님 관념의 핵심이라고 가르칩니다. DLW.11에서 그는 천국의 모든 천사가 하나님을 인간 형상으로 생각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연계의 인간처럼 유한한 육체를 가지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랑 자체이시며 지혜 자체이시고, 모든 인간적 생명의 원형이시기 때문에 가장 완전한 의미에서 인간이시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하나님을 인간의 형상으로 제한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형상 자체가 하나님의 신적 사랑과 지혜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을 밝히려는 것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하나님은 참으로 인간이시다’(God is very Man)는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간이라고 말할 때에는 육체를 가지고 태어나 성장하고 늙고 죽는 유한한 존재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하나님을 인간이라고 부를 때에는 이러한 자연적 인간의 한계를 하나님께 적용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DLW.285-289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이시라는 사실을 자연적인 공간과 시간의 관념에서 벗어나 이해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지혜 자체이시며,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이십니다. 사랑과 지혜는 아무런 주체도 없는 추상적인 성질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존재의 본질적인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사랑 자체이시며 지혜 자체이신 하나님은 모든 인간적인 것의 근원이시고, 피조된 인간은 그분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된 존재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닮은 것이지, 하나님께서 인간의 유한한 육체와 동일한 방식으로 존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인간 형상을 이루고, 천사들이 모두 완전한 인간 형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도 이러한 신적 질서와 연결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천국의 인간 형상이나 천사들의 인간 형상은 하나님과 별도로 존재하는 우주적 신체를 뜻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천국의 모든 천사에게 사랑과 지혜를 공급하시기 때문에 천국 전체가 인간의 형상과 상응하는 질서를 이룬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하나님의 인간 형상은 자연적인 육체의 형태가 아니라 신적 사랑과 지혜의 질서를 이해하는 근본적인 열쇠가 됩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관념은 왜 중요합니까? 그는 DLW.13에서 하나님에 대한 관념이 모든 종교적 생각의 중심에 있으며, 참된 하나님 관념이 없으면 천국과의 교통도 올바르게 이루어질 수 없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에 관한 모든 신학적 문제를 완전히 이해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자신의 기도와 예배에서 실제로 어떤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아무런 형상도 없는 무한한 공간이나 막연한 우주적 힘으로만 생각한다면, 인간의 생각은 분명한 인격적 대상을 향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고백하면서도 그 사랑을 누구에게서 받아들이는지 알 수 없다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점차 추상적인 관념에 머물 수 있습니다. 반면 하나님을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나타내신 한 분 하나님으로 생각한다면, 인간은 자신의 기도와 사랑을 분명한 대상에게 향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1771) TCR.787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보이는 하나님 안에 영혼이 몸 안에 있듯 계시며, 인간이 이처럼 나타나신 하나님을 통하여 그분과 상호적인 결합을 이룰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보이는 하나님은 단순히 자연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물질적 존재라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신적 인성 안에서 인간이 알아볼 수 있도록 자신을 나타내셨으며, 그분이 바로 우리가 알고 사랑하고 예배해야 할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참된 관념은 추상적인 신학적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주님과 실제로 결합하는 신앙의 중요한 토대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를 설명하면서 동방정교회가 하나님을 아무런 인격도 없는 추상적인 신적 원리로 이해한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동방정교회 역시 하나님을 살아 계신 인격적인 분으로 고백하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적 위격적 관계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하나님이시며 참사람이시고, 성육신을 통하여 하나님 자신을 인간에게 나타내셨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정교회의 부정신학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인격적 관계를 부정하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하나님을 자신의 유한한 관념 속에 가두지 않으면서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참된 친교를 이루도록 안내하는 가르침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와 동방정교회 사이에는 하나님의 인격적 일치를 이해하는 방식에서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정교회는 하나의 신적 본질 안에 영원히 구별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세 위격이 존재한다고 가르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하나님께서 본질에서뿐 아니라 인격에서도 한 분이시며, 성부는 주님 안의 근원적인 신성이시고, 성자는 그 신성이 취하시고 영화롭게 하신 신적 인성이시며, 성령은 그 한 분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역사하심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정교회가 하나님의 초월성과 세 위격의 실재를 함께 고백한다면,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인정하면서도 그분의 신적 인격적 단일성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드러난다고 강조합니다. 이러한 차이는 단순히 하나님을 묘사하는 언어의 차이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어떤 분으로 이해할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신론의 차이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형상과 스베덴보리의 ‘상응’(correspondence)에 관한 가르침을 함께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손과 얼굴과 눈과 발, 그리고 빛과 불과 구름에 관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러한 표현들을 모두 자연적인 의미로만 이해하면 하나님께서 물질적인 신체를 가지셨거나 자연계의 현상과 동일한 분이시라는 오해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상응 원리에 따르면 성경의 자연적 표현들 안에는 영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손은 신적 능력과 역사하심을, 하나님의 얼굴은 그분의 사랑과 자비의 임재를, 빛은 신적 진리를, 불은 문맥에 따라 신적 사랑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는 문맥과 속뜻에 따라 구별해야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자연적인 형상이 영적인 실재를 나타내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간적인 표현으로 말씀하신다는 이유만으로 그 표현들이 모두 부정확한 인간의 상상력이라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신적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자연적인 언어와 형상을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성경의 문자적 의미는 인간의 이해를 위해 주어진 외적인 옷과 같으며, 그 안에는 천국의 영적 의미와 주님의 신적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자연적인 형상으로 제한하는 일과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형상 속에서 영적인 진리를 발견하는 일은 전혀 다릅니다. 참된 성경 해석은 형상을 우상으로 만들지 않으면서도, 그 형상을 통하여 주님께서 나타내신 진리를 발견하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동방정교회의 성화상과 스베덴보리의 상응은 같은 원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정교회의 성화상은 성육신의 신학적 의미와 교회의 전례적 전통 속에서 이해됩니다. 성화상에 대한 공경은 그 물질 자체를 하나님으로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형상이 가리키는 원형을 향하는 행위로 설명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의 상응은 자연계의 대상과 현상들이 영계의 실재와 맺는 관계, 그리고 성경의 문자적 의미 안에 담긴 영적 의미를 설명하는 원리입니다. 따라서 두 전통 모두 눈에 보이는 형상이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실재를 가리킬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그 형상의 권위와 기능을 이해하는 방식은 다릅니다. 정교회가 성화상을 교회의 예배와 공경 안에서 사용하는 반면, 스베덴보리의 상응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영적으로 이해하고 자연계와 영계의 관계를 밝히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또한 상응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어떤 종교적 그림이나 조각이 예배의 대상으로 정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형상이 영적인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는 것과 그 형상에 종교적 공경을 드려야 한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정교회의 성화상 전통과 스베덴보리의 상응을 비교할 때에는 공통점만을 강조하여 두 개념을 동일시하지 말고, 각각의 신학적 목적과 역할을 구별해야 합니다. 이러한 문제는 이후 EO.057-059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다루게 될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신학적 차이가 실제 신앙생활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든 이해를 초월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하나님에 관하여 무엇을 분명하게 알고자 하는 노력 자체를 교만한 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자신이 성경과 교리를 충분히 공부했으므로 하나님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고 확신하며, 자신의 신학적 설명과 다른 생각을 모두 잘못된 것으로 단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태도는 모두 신중하게 검토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시지만, 인간이 자신을 알 수 없도록 감추어 두신 분은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참된 진리를 계시하셨다고 해서 인간이 하나님의 무한하심 전체를 자신의 지성으로 소유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동방정교회의 부정신학은 이러한 점에서 인간에게 신앙적 겸손을 가르칩니다.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은 그 겸손이 하나님에 대한 막연한 관념에 머물지 않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신 한 분 하나님을 참되게 알고 사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한 가지를 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에 관한 올바른 관념이 중요하다고 하여 그것이 곧 한 사람의 최종적인 영적 상태를 판단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어떤 교리를 받아들이게 되었는가는 그가 태어나고 자란 환경과 교육과 종교적 전통에 크게 영향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의 하나님 관념을 검토하고 그 안에 담긴 진리와 오류를 분별할 수는 있지만, 그 사람의 내면에 있는 사랑과 신앙의 최종적인 상태까지 자신이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결국 하나님에 대한 참된 이해는 우리의 삶에서 어떤 열매를 맺어야 합니까? 어떤 사람이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모든 개념을 초월하시는 분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자신의 생각과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자신의 신학적 지식을 자랑한다면 그의 고백은 아직 삶의 겸손으로 충분히 이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이 하나님은 인간 형상으로 자신을 나타내셨으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분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이해하면서도, 실제 삶에서는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을 정당화하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역시 자신이 아는 진리를 삶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인간의 영적 성숙은 진리를 얼마나 정교하게 이해하는가에 의해서만 결정되지 않습니다. 이해가 받아들인 진리가 의지의 사랑과 결합하고, 그 사랑이 실제적인 선한 쓰임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참되게 안다는 것은 하나님에 관한 올바른 설명을 소유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그분께서 사랑하시는 선을 사랑하고 그분께서 가르치시는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교만과 분노와 이기심을 버리려 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하나님 관념은 아직 자신의 내면을 충분히 변화시키지 못한 것입니다. 반대로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이웃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정직과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려는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를 실제 삶에 받아들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올바른 하나님 관념은 인간을 자신의 지식에 대한 확신으로 높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대한 겸손과 이웃 사랑으로 이끌어야 합니다.

 

이제 처음의 고백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모든 개념과 형상을 초월하십니까? 그렇습니다. 동방정교회의 이 가르침에는 인간이 결코 잃어버려서는 안 될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한하시며, 피조물인 인간이 자신의 유한한 관념과 상상력으로 그분의 본질 전체를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진리가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참된 형상도 없으시며 인간이 그분을 분명하게 생각할 수도 없다는 주장으로 확대된다면 문제가 생깁니다. 실제로 동방정교회 자체도 이러한 결론을 내리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을 참되게 나타내셨다고 고백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여기에서 더욱 근본적인 가르침을 제시합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인간의 형상으로 자신을 드러내신 분이 아니라, 모든 인간적인 것의 신적 원형이신 참된 인간이시며, 그 한 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신적 인성을 완전하게 나타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든 개념을 초월하신다는 사실과 하나님을 인간 형상으로 참되게 생각할 수 있다는 사실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든 분명한 관념이 아니라, 하나님을 자연계의 유한한 인간처럼 생각하거나 자신이 만든 관념 속에 가두려는 태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신 한 분 하나님을 참되게 알고 사랑하며, 그분의 신적 사랑과 지혜가 우리의 의지와 이해 안에 흘러들어와 실제 삶의 선으로 열매 맺도록 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참되게 아는 일은 하나님의 무한하심 앞에서 겸손해지는 것과 그분께서 자신을 나타내신 신적 인성을 바라보는 일이 함께 이루어질 때 온전한 방향을 찾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관념은 그분을 인간의 생각 안에 가두는 관념이 아니라, 인간의 생각과 사랑을 그분께로 이끄는 관념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본 하나님의 초월성과 신적 인격의 문제입니다. (EO.008 해설)

 

요약

동방정교회는 하나님께서 인간이 만들어 낸 모든 개념과 형상을 초월하시므로, 인간은 하나님의 무한한 본질을 자신의 언어와 지성으로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부정신학에는 하나님을 인간의 유한한 관념 속에 가두지 않으려는 참된 겸손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정교회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인식이나 인격적 관계를 부정하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셨다고 고백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하나님께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무한하신 분임을 인정하지만, 하나님을 형상 없는 추상적인 실재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사랑 자체이시며 지혜 자체이신 참된 인간이시고, 모든 인간적인 것의 신적 원형이시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화된 신적 인성으로 자신을 나타내셨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두 전통은 하나님의 초월성과 인간의 유한성을 함께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참된 관념과 신적 인격의 일치를 설명하는 방식에서는 차이를 보입니다. 특히 스베덴보리에게 하나님을 인간 형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자연적인 육체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신 신적 사랑과 지혜를 한 분 하나님으로 알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결국 참된 신앙은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인정하는 겸손과 하나님을 분명하게 알고 사랑하는 신앙을 함께 보존하며, 그분께 받은 진리를 실제 삶의 선과 이웃 사랑으로 실천하는 데서 완성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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