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008. ‘알라의 아름다운 이름들은 그분의 속성을 나타낸다’
SL.IS.008 | 이슬람(Islam)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알라의 아름다운 이름들은 그분의 속성을 나타낸다’ - 신적 이름과 신적 본질
해설
이슬람은 하나님께 아름다운 이름들이 있으며, 그 이름들은 하나님의 완전한 속성(屬性, attributes)을 나타낸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이름들을 ‘알아스마 알후스나’(al-asma al-husna), 곧 ‘가장 아름다운 이름들’이라고 부릅니다. 꾸란 7:180은 가장 아름다운 이름들이 하나님께 속하므로 그 이름들로 그분을 부르라고 가르치며, 17:110은 ‘알라’라고 부르든 ‘지극히 자비로우신 분’이라고 부르든 그분에게 아름다운 이름들이 속한다고 선언합니다. 꾸란 59:22–24에는 자비로우신 분, 거룩하신 분, 평화의 근원이신 분, 창조하시는 분, 형상을 주시는 분 등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이슬람에서 이러한 이름들은 서로 다른 신적 존재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한 분 하나님을 인간이 이해하고 경외할 수 있도록 그분의 여러 완전성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여기에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인정해야 할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이해되는 분이 아니라, 사랑과 자비와 지혜와 거룩함 등 그분의 신적 본성을 통하여 알려지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더 깊이 살펴보아야 할 질문은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것과 하나님 자신을 아는 것이 같은가, 그리고 여러 신적 속성은 하나님의 본질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슬람 전통에서는 하나님의 99가지 아름다운 이름이 특별히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사히흐 알부하리’(Sahih al-Bukhari) 2736에는 하나님께 99개의 이름이 있으며 이를 알고 헤아리는 사람이 낙원에 들어간다는 전승이 나옵니다. 다만 꾸란이 99개의 이름을 하나의 목록으로 제시하는 것은 아니며, 그 이름들의 구체적인 목록과 범위를 설명하는 방식에도 전승과 학파에 따른 차이가 있습니다. 또한 이 이름들을 안다는 것은 단순히 아랍어 명칭을 소리 내어 반복하는 행위만으로 환원되지 않습니다. 이슬람의 영적 전통에서는 그 이름들의 뜻을 묵상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자신이 허용된 범위에서 자비와 정의와 관대함을 실천하는 삶도 중요하게 여깁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을 자비로우신 분이라고 부르면서 이웃에게 잔인하게 행동하거나, 정의로우신 분이라고 고백하면서 불의를 행한다면, 그 이름을 안다는 고백과 실제 삶 사이에는 모순이 생깁니다. 따라서 아름다운 이름에 관한 이슬람의 신앙은 단순한 명칭의 수집이나 암송을 넘어,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이해하고 그분의 가르침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이름에 관한 가르침과 중요한 접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AC, 1749–1756) 2009항에서 말씀에 등장하는 ‘이름’(name)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그 존재의 성질(quality)을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주님의 이름은 그분에게 속한 모든 신적 성질, 곧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를 포함합니다. 영계에서는 어떤 존재를 단순한 이름이나 외적 명칭보다 그 존재의 내적 성질에 따라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같은 저작 2724항에서는 고대교회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을 단순히 특정한 명칭을 발음하는 행위로 이해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으며 그분을 예배하는 모든 것과 연결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예배의 내적 생명이 약해지고 외적 형식만 남자, 사람들은 이름 자체를 거룩하게 여기고 그 이름을 부르는 행위에 특별한 효력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름만을 예배하는 것은 참된 예배가 아니며, 그 이름이 나타내는 사랑과 신앙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따라서 이슬람의 아름다운 이름들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살펴볼 때에도 중요한 것은 이름의 수나 발음 자체가 아니라, 그 이름들이 어떤 신적 성질을 나타내며 인간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하나님의 속성과 본질(本質, essence)의 관계라는 문제가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 사랑과 지혜’(Divine Love and Wisdom, DLW, 1763) 28항에서 신적 본질 자체는 사랑과 지혜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36–38항에서는 하나님이 사랑 자체와 지혜 자체이시며, 사랑에서 선이 나오고 지혜에서 진리가 나온다고 가르칩니다. 이 가르침에 따르면 하나님의 자비와 정의, 거룩함과 선하심은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 하나님 안에서 때때로 경쟁하는 속성들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신적 사랑과 지혜라는 하나의 본질에 속하며, 인간이 하나님의 역사와 관계를 이해하는 여러 측면에서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자비로우신 분이라고 할 때에는 신적 사랑이 인간을 구원하려는 성질을 생각하게 되고, 지혜로우신 분이라고 할 때에는 그 사랑이 신적 진리와 질서에 따라 역사한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됩니다. 여러 이름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 안에 여러 독립된 본질이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점은 이슬람의 유일신 신앙과도 중요한 공통점을 가지지만, 그 이름들이 가리키는 신적 본질과 역사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에서는 신학적 차이가 남습니다.
그러한 차이는 특히 하나님의 권능과 심판을 나타내는 이름들에서 드러납니다. 꾸란에는 자비와 용서의 이름뿐 아니라 절대적 권능과 주권, 심판과 위엄을 나타내는 이름들도 등장합니다. 이슬람은 이러한 이름들을 모두 하나님의 완전성에 속한 것으로 이해하며, 자비와 정의가 신적 본성에 함께 있음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신적 권능은 신적 사랑과 지혜에서 분리되어 작용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사랑 자체이시므로 누구에게도 악을 행하시거나 보복을 즐기시는 분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벌하시는 것처럼 나타나는 표현도 주님의 실제 본성과 인간이 악을 사랑하여 경험하는 결과를 구별하여 이해해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이름을 해석할 때에도 인간적인 분노와 지배욕, 보복심을 무한하게 확대하여 하나님의 속성으로 돌려서는 안 됩니다. 다만 이러한 구별이 이슬람의 권능과 심판에 관한 모든 해석을 인간적인 보복의 관념으로 환원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슬람 안에서도 하나님의 속성을 피조물의 감정이나 행동과 동일시하지 않으려는 신학적 전통이 존재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이름을 사용하느냐보다 그 이름을 통하여 어떤 하나님을 이해하고 예배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 문제는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한다는 성경의 가르침과도 연결됩니다. 주님은 마6:9에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비밀’ 2724항에서 이 말씀의 이름이 단순한 발음이나 명칭이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는 사랑과 신앙의 모든 것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요17:26에서 주님이 아버지의 이름을 사람들에게 알리셨다고 말씀하신 것도 단순히 이전에 알려지지 않았던 호칭을 가르쳐 주셨다는 의미로 한정할 수 없습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셨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그 계시의 충만함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납니다. 주님은 하나님에 관한 여러 진리를 전달하신 예언자에 머무르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인성을 입고 나타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참된 의미에서 주님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라는 이름을 알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신적 사랑과 지혜이신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그분의 계명에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는 이슬람의 아름다운 이름에 담긴 진리를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의 본성을 온전히 알기 위해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가 결정적이라는 스베덴보리의 신학적 입장을 보여 줍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지식과 참된 신앙의 삶은 구별되면서도 분리될 수 없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사랑이시며 자비로우시고 정의로우시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이웃을 미워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을 행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속성에 관한 체계적인 지식이 충분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정직하게 살고 어려운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전자는 이름을 알면서도 그 이름의 내적 성질을 삶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상태이며, 후자는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에 따라 선을 실천하려는 상태입니다. 물론 선한 행위의 궁극적인 근원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묵상하는 일은 단순한 지식의 증가나 종교적 만족에 머무르지 않고, 주님의 선과 진리를 실제 삶에서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특히 이름을 많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자신의 영적 우월성으로 삼거나, 자신이 사용하는 신적 명칭만이 참된 신앙의 증거라고 생각한다면 오히려 이름의 본질을 놓칠 위험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인간이 자랑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이 나타내는 신적 사랑과 진리를 알고 받아들이도록 주어진 것입니다.
결국 ‘알라의 아름다운 이름들은 그분의 속성을 나타낸다’는 이슬람의 고백에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 이름으로 불리시더라도 한 분이시며, 그 이름들은 인간이 그분의 자비와 거룩함과 지혜를 이해하고 경외하도록 돕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름에서 본질로, 지식에서 사랑으로, 외적 예배에서 내적 생명으로 나아가도록 우리를 인도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나타내며, 그 이름을 참되게 아는 것은 그분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삶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연결됩니다. 이러한 관점은 기독교인 자신에게도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예배하면서 실제로는 그분의 사랑과 진리를 거스르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자비로우시다고 고백하면서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고, 하나님이 진리이시라고 고백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진리를 왜곡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참된 신앙은 하나님의 이름을 얼마나 많이 아는가보다 그 이름이 나타내는 신적 성질을 얼마나 사랑하고 받아들이는가에서 드러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그 모든 신적 사랑과 지혜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이 문항이 남기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나는 하나님의 이름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가 아니라, ‘나는 그 이름이 나타내는 하나님을 얼마나 참되게 알고 사랑하며, 그분의 선과 진리를 내 삶에서 실천하고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IS.008 해설)
요약
이슬람이 하나님의 아름다운 이름들이 그분의 속성을 나타내며, 인간은 그 이름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고 경외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은 중요한 진리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말씀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그분의 성질과 그분을 향한 사랑과 신앙의 모든 것을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름을 암송하거나 속성에 관한 지식을 소유하는 것 자체가 참된 신앙의 완성은 아닙니다. 또한 신적 속성들은 서로 분리된 독립적인 본질이 아니라 신적 사랑과 지혜 안에서 하나를 이룹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본성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계시되며, 그분의 이름을 참되게 아는 것은 그분을 사랑하고 악을 피하며 선을 행하는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따라서 이슬람의 아름다운 이름에 관한 신앙 자체가 오류인 것은 아니지만, 그 이름들의 신적 본질을 이해하는 방식과 성육신하신 주님에 대한 인식에서는 중요한 교리적 차이가 존재합니다.
IS.007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참된 신앙의 중요한 기초다’
SL.IS.007 | 이슬람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참된 신앙의 중요한 기초다’ - 두려움과 사랑의 영적 질서 해설이슬람에서 하나님을 경외(敬畏, reverence)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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