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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O.009.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동시에 거룩한 심판자이시다’

bygracetistory 2026. 11. 7. 07:54

SL.EO.009 |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동시에 거룩한 심판자이시다’ - 신적 사랑과 심판의 관계

 

해설

기독교 신앙에서 하나님에 관하여 가장 자주 듣는 두 가지 표현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와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심판자이시다’라는 고백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을 사랑하시며 죄인을 구원하기를 원하신다고 믿으면서도, 동시에 하나님께서 악을 미워하시고 죄인을 심판하시며 최후에는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신다고 배웁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가르침을 함께 생각하면 쉽게 해결하기 어려운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사랑 자체이시라면 어떻게 인간에게 진노하시며, 영원한 형벌을 선언하실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구원을 원하신다면 왜 어떤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고 어떤 사람은 지옥에 머무르게 됩니까? 흔히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하나님은 사랑이시지만 동시에 공의로우신 분이므로 죄를 반드시 벌하셔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만으로는 하나님의 사랑과 심판이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지 충분히 밝혀지지 않습니다.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마치 서로 다른 두 성품을 가지신 것처럼 생각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동방정교회는 이 문제를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자유,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의 임재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관점에서 깊이 다루어 왔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사랑이 의인에게는 기쁨으로, 악인에게는 고통으로 경험될 수 있다는 설명은 일반적인 형벌 중심의 하나님 이해와 상당히 다르게 들립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 역시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시므로 결코 분노하거나 복수하지 않으시며, 인간이 자신의 사랑과 삶의 상태에 따라 천국과 지옥을 선택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동방정교회의 사랑과 심판에 관한 가르침은 스베덴보리의 신학과 어디에서 만나며, 무엇이 다릅니까? 이 질문은 하나님의 본성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뿐 아니라, 인간의 구원과 영원한 운명에 관한 이해에도 깊이 연결됩니다.

 

동방정교회는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사랑이시라는 사실을 신앙의 중심에 둡니다. 요일4:8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선언하면서, 그 이유를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어 요일4:16에서도 하나님이 사랑이시며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거한다고 말씀합니다. 정교회는 이러한 성경의 증언을 단순히 하나님께서 때때로 사랑을 베푸신다는 의미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하나님께서 여러 상황에서 선택하시는 행동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과 본성에 속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이 선하게 행동할 때만 나타나는 보상도 아니며, 인간이 죄를 지었을 때 사라졌다가 회개하면 다시 생겨나는 감정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사랑이시며, 인간을 생명과 구원으로 이끄시기를 원하십니다. 미국 정교회(OCA)의 교리 해설 역시 하나님께서 사랑이시기 때문에 인간과 세상의 생명과 구원을 위하여 역사하신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사랑이란 인간이 원하는 것을 언제나 허락하시거나 악을 아무런 결과 없이 방치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참된 사랑은 인간이 악에서 벗어나 선과 진리 안에서 살아가도록 이끄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정교회는 하나님의 사랑과 거룩함, 자비와 정의를 서로 경쟁하는 별개의 성품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사랑 안에는 인간을 악에서 해방하시려는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심판은 하나님의 사랑과 무관하게 작용하는 별도의 신적 감정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 앞에서 자신의 실제 상태를 드러내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이러한 이해를 잘 보여 주는 것이 동방정교회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시리아의 이사악(Isaac of Nineveh)의 가르침입니다. 그는 지옥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완전히 제외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설명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사람에게 미치지만,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사람과 거부하는 사람이 경험하는 상태가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임재가 더없는 기쁨과 평화가 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자신의 악한 사랑에 머무르는 사람에게는 동일한 신적 임재가 고통스럽게 경험될 수 있습니다. 이사악은 이러한 고통을 사랑의 채찍이라는 강렬한 표현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사랑을 보내시고 다른 사람에게는 분노를 보내신다는 구조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동일하지만 그 사랑을 대하는 인간의 상태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미국 정교회의 ‘천국과 지옥’에 관한 교리 해설도 이러한 관점을 소개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가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낙원이지만 그분을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지옥으로 경험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을 근거로 동방정교회가 모든 심판과 형벌의 언어를 부정한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정교회의 예배와 성경 해석에는 여전히 최후의 심판과 영원한 생명, 정죄와 형벌에 관한 표현들이 존재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인간적인 분노와 복수의 감정만으로 설명하지 않으려는 깊은 신학적 흐름이 정교회 안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동방정교회는 하나님의 심판을 단순히 인간이 느끼는 주관적인 감정의 차이로만 이해합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정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것이라는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의 고백을 유지합니다. 또한 인간이 자신의 삶과 행위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마25:31-46에서 주님께서는 모든 민족이 인자 앞에 모이고,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별하듯 사람들이 구별되는 심판의 장면을 말씀하십니다. 이때 심판의 기준으로 제시되는 것은 단순히 어떤 교리적 명제를 정확하게 고백했는가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었는지,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것을 주었는지, 나그네를 영접하고 병든 사람과 갇힌 사람을 돌보았는지가 중요하게 나타납니다. 정교회는 이러한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이웃을 향한 사랑과 분리될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단순히 신앙에 관한 정답을 맞혔는지 확인하는 절차가 아니라, 인간이 어떤 사랑으로 살아왔으며 그 사랑이 실제 삶에서 어떻게 나타났는가를 드러내는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선행이 자신의 공로만으로 구원을 얻는 수단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정교회는 선행과 거룩한 삶 역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과 협력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이해합니다. 따라서 사랑과 심판의 관계는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자유, 그리고 삶의 실제적인 변화라는 문제와 함께 살펴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죄인을 사랑하신다는 사실과 동시에 죄에 대한 진노와 심판을 말씀합니다. 겔18:23에서 주 여호와께서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가 돌이켜 사는 것을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겔33:11에서도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며 악한 길에서 돌이켜 살기를 원하신다고 선언하십니다. 반면 롬2:5-6에서는 회개하지 않는 완고한 마음이 진노의 날에 임할 심판을 쌓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히12:29에서는 하나님을 소멸하는 불이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해석의 문제를 만납니다. 하나님께서 악인이 돌이켜 살기를 원하신다는 말씀과 악인에게 진노하신다는 말씀을 어떻게 함께 이해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죄인을 향한 사랑을 중단하시고 분노라는 반대 감정으로 돌아서신다는 뜻입니까? 아니면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가 악을 사랑하는 인간에게 심판으로 경험된다는 뜻입니까? 동방정교회의 여러 교부와 영성 전통은 이 문제를 후자의 관점에서 설명해 왔습니다. 그러나 정교회 안에서도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을 어떤 방식으로 해석할 것인가에 관하여 강조점이 완전히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진노는 모두 단순한 비유에 불과하다고 정교회 전체의 입장을 단정하거나, 반대로 정교회가 하나님을 인간처럼 분노하고 복수하시는 분으로 이해한다고 규정하는 일은 모두 피해야 합니다. 각 전통이 성경의 심판 언어를 어떻게 해석하는지 정확하게 살펴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은 더욱 분명한 신학적 구별을 제시합니다. 그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1771) TCR.256에서 성경의 문자적 의미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고 복수하시며 사람을 벌하시고 지옥으로 보내신다는 표현들이 나타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표현들을 하나님의 실제적인 내적 성품에 관한 직접적인 묘사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시며 자비 자체이시고 선 자체이시므로, 인간의 악한 감정에서 비롯되는 분노와 복수심을 가지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성경이 때때로 하나님께 악한 감정과 형벌의 원인을 돌리는 이유를 ‘진리의 외관’(appearances of truth)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인간이 경험하는 현상과 실제 영적인 원인이 항상 동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연계에서 우리는 해가 동쪽에서 떠올라 서쪽으로 움직인다고 말하지만, 이러한 표현이 실제로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는 뜻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악한 상태에 빠져 고통을 경험할 때에는 마치 하나님께서 자신을 벌하시고 분노하시는 것처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인간을 선으로 이끄시며, 악을 원하는 인간이 그 신적 생명을 잘못 받아들이기 때문에 고통과 심판이 나타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진노하신다는 성경의 표현은 인간의 경험에 따라 나타나는 외적인 진술로 이해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내적 본성이 실제로 분노와 복수로 변화한다는 교리를 세우는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단순한 관용이나 무조건적인 허용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분노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악을 선과 동일하게 취급하시거나 인간의 악행에 아무런 결과도 따르지 않도록 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에 인간이 악에 사로잡혀 자신과 이웃을 파괴하는 일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악은 인간을 참된 자유와 행복에서 멀어지게 하며, 악한 사랑에 머무르는 사람은 그 사랑에 상응하는 영적 상태를 형성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1758) HH.545-550에서 주님께서는 누구도 지옥으로 던져 넣지 않으시며, 악한 영 자신이 지옥으로 향한다고 설명합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천국으로 이끄시고 그들의 악을 멀리하시려 하지만, 악한 사랑을 자신의 생명으로 삼은 사람은 천국의 선과 진리를 견디기 어려워하며 자신과 비슷한 사랑을 가진 영들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지옥은 주님께서 인간에게 분노를 쏟아 붓기 위해 마련하신 형벌의 장소가 아니라, 악한 사랑이 스스로 선택하고 형성한 영적 삶의 상태와 공동체입니다. 그렇다고 지옥에서 일어나는 고통과 형벌이 단순히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지옥에도 실제적인 고통과 악의 억제를 위한 형벌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 고통과 형벌의 근원을 주님의 분노나 복수심에 두지 않고, 악 자체의 성질과 악한 영들 사이의 충돌 및 영적 질서의 보존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합니다.

 

이 지점에서 동방정교회의 심판 이해와 스베덴보리의 가르침 사이에 매우 흥미로운 공통점을 발견합니다. 정교회의 이사악은 하나님의 사랑이 의인과 악인에게 모두 미치지만, 그것을 경험하는 방식은 인간의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고 천국으로 인도하시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지배적 사랑에 따라 그 신적 생명을 서로 다르게 받아들인다고 가르칩니다. 두 전통 모두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사랑을 보내시고 다른 사람에게는 악의적인 분노를 보내신다는 단순한 이분법을 넘어서는 설명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두 전통의 심판과 지옥에 관한 가르침 전체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동방정교회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죽은 자의 부활, 그리고 최후의 심판을 미래의 궁극적인 사건으로 고백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육체의 죽음 이후 영계에서 깨어나고, 자신의 내적 사랑이 점차 드러나면서 천국 또는 지옥의 삶으로 나아간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그가 말하는 최후의 심판은 지상의 모든 무덤이 열리고 물질적인 육체가 동시에 부활하는 사건이 아니라 영계에서 이루어지는 심판입니다. 따라서 두 전통이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수용을 강조한다는 사실은 중요하지만,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사후 상태와 심판의 시기 및 구조를 이해하는 방식은 상당히 다릅니다. 이러한 차이는 이후 EO.081-090에서 별도로 다루어야 할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악한 사람에게도 언제나 사랑으로 역사하신다면, 왜 악한 사람은 그 사랑을 기쁨으로 경험하지 못합니까? 스베덴보리는 이 문제를 인간의 ‘지배적 사랑’(ruling love)과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삶에서 반복적으로 선택하고 사랑한 것들을 통하여 점차 내적인 성격을 형성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고 선한 쓰임을 이루는 데 기쁨을 느끼지만, 다른 사람은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는 일이나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일, 자기 이익을 위해 타인을 이용하는 데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비슷한 행동을 하더라도 그것을 움직이는 내적인 사랑은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천국의 삶은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선한 애정으로 이루어지므로, 자신과 세상을 지배하려는 사랑에 사로잡힌 사람에게는 그러한 삶이 오히려 견디기 어려운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미워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자신의 사랑과 반대되는 영적 질서를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지옥의 고통은 이처럼 인간이 어떤 사랑을 자신의 생명으로 삼았는가 하는 문제와 깊이 연결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사람이 지금 분노하거나 이기적으로 행동한다고 해서 그 사람의 지배적 사랑과 영원한 운명을 곧바로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지상에서 거듭날 수 있으며,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악에서 돌이킬 기회를 계속 제공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배적 사랑에 관한 가르침은 다른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판정하는 도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사랑과 삶의 방향을 살피도록 하는 영적 경고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하나님의 심판은 단순히 죽은 뒤에 받는 최종적인 판결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은 살아 있는 동안에도 주님의 진리 앞에서 자신의 상태를 발견하고, 그 진리를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선택을 계속합니다. 요3:19-21에서 주님께서는 빛이 세상에 왔으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심판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갑작스럽게 적대적인 감정을 품으셨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빛이 나타났을 때 인간이 그 빛을 사랑하는가, 아니면 어둠을 더 사랑하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주님의 진리는 인간의 거짓을 드러내며, 주님의 선은 인간이 자기중심적인 사랑을 돌아보게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잘못이 드러날 때 회개하고 변화되기를 원하지만, 다른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보다 진리를 거부하고 자신을 정당화하려 할 수 있습니다. 이때 진리는 그 사람을 파괴하려는 적대적인 힘이 아니라 그를 살리기 위해 주어진 빛입니다. 그러나 그 빛을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진리가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것으로 경험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심판의 영적 의미를 생각할 때에는 주님께서 언제 인간을 벌하시기로 결정하시는가 하는 문제보다, 인간이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문제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심판은 주님의 사랑이 변하는 사건이 아니라 인간의 참된 사랑과 상태가 진리의 빛 앞에서 드러나는 일과 깊이 연결됩니다.

 

이러한 이해는 고난과 불행을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에도 중요한 영향을 줍니다. 어떤 사람이 갑작스러운 질병이나 사고를 당하거나, 가정과 직장에서 큰 어려움을 겪을 때 우리는 쉽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심판하셨거나 벌하셨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특히 그 사람에게 어떤 잘못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그 고난을 하나님의 직접적인 형벌이라고 단정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판단에는 매우 신중해야 합니다. 눅13:1-5에서 주님께서는 비극적인 죽음을 당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죄인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일을 겪은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며, 오히려 듣는 사람들 자신이 회개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요9:1-3에서도 날 때부터 맹인인 사람의 상태를 그 사람이나 부모의 죄 때문이라고 단정하는 제자들의 생각을 바로잡으십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자연계의 고난과 영적인 심판을 일대일로 연결하는 것은 신적 섭리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악과 고통을 원하시거나 그 자체를 즐기시는 분이 아니시며, 인간의 자유와 자연계의 질서 안에서 발생하는 여러 일들을 섭리로 다스리시면서 가능한 선을 이루도록 역사하십니다. 따라서 고난을 겪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그가 어떤 죄 때문에 벌을 받았는지 찾아내는 일이 아니라, 그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을 사랑으로 돌보고 실제적인 도움을 제공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가르침이 고통받는 이웃을 정죄하는 도구가 된다면, 우리는 그 가르침의 중심에 있는 신적 사랑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구별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므로 분노하거나 복수하지 않으신다는 가르침이 인간의 책임이나 정의의 필요성을 약화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심각한 피해를 주었다면, 그 행동은 반드시 바로잡아야 하며 피해자를 보호하고 공동체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적절한 조치도 필요합니다. 사랑은 악을 모른 체하는 태도가 아니며, 용서는 악한 행동을 선한 행동으로 바꾸어 부르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사랑은 피해자를 보호하고 악의 확산을 막으며, 악을 행한 사람에게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변화할 기회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작용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지옥에서 악한 영들의 행동이 아무런 제약 없이 허용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는 악이 다른 사람을 해치지 못하도록 제한되고 질서에 따라 억제되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과 심판을 함께 이해한다는 것은 악한 행동에 대한 모든 책임을 없앤다는 뜻이 아니라, 그 책임을 다루는 목적과 태도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다시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복수심에 사로잡혀 상대방의 고통을 즐기는 것과, 악을 막고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주님의 사랑을 본받으려는 사람이라면 악을 악이라고 분명히 말하면서도 그 악을 행한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을 자신이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진리를 분별하고 정의를 실천하되, 인간의 영원한 운명을 확정하는 일은 주님께 남겨 두어야 합니다.

 

이러한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마음속에 그리고 있는가 하는 질문으로 다시 이어집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자신이 죄를 지을 때마다 화를 내시고, 자신이 충분히 회개하지 않으면 언제든 형벌을 내리실 수 있는 두려운 심판자로 생각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무조건 자신을 이해하시고 자신의 모든 선택을 용납하시는 분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관념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결과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무한히 사랑하시지만 악을 선이라고 부르지 않으시며, 인간이 악 안에 머무르는 것을 진정한 행복이라고 인정하지도 않으십니다. 동시에 주님께서는 인간의 잘못을 발견할 때마다 분노로 돌아서시는 분이 아니라, 그 잘못에서 벗어나도록 끊임없이 생명과 진리를 공급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두려워한다는 것도 단순히 형벌이 무서워 벌을 피하려는 태도에서 더 깊은 의미로 나아가야 합니다. 참된 경외는 주님의 사랑을 거스르는 악을 경계하고, 그분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를 잃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발전해야 합니다. 이때 회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향해 품으신 분노를 누그러뜨리는 수단이 아니라, 자신이 붙잡고 있는 악을 버리고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됩니다. 기도 역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억지로 돌려놓으려는 행위가 아니라, 언제나 자신을 사랑하시는 주님께 돌아가 그분의 뜻을 따를 힘과 지혜를 구하는 일이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심판을 이해하는 방식이 실제 신앙생활을 변화시키는 중요한 지점입니다.

 

이제 처음의 고백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동시에 거룩한 심판자이십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 고백을 하나님 안에 사랑과 분노라는 서로 반대되는 두 성품이 존재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동방정교회는 하나님께서 사랑이시며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심판하신다고 고백하면서, 특히 여러 교부의 가르침을 통하여 동일한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의 내적 상태에 따라 기쁨이나 고통으로 경험될 수 있다는 깊은 통찰을 제시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시므로 실제로 인간적인 분노나 복수심을 품으실 수 없으며, 주님께서는 누구도 지옥으로 던져 넣지 않으신다고 명확하게 가르칩니다. 심판은 주님의 사랑이 변화하여 악한 사람을 향한 적대적인 의지로 바뀌는 일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사랑과 삶으로 형성한 영적 상태가 주님의 진리 앞에서 드러나는 일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심판자이시라는 사실은 그분이 사랑이시라는 사실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심판을 참되게 이해하려면 먼저 그분의 변하지 않는 신적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이 가르침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형벌을 두려워하는 신앙을 넘어, 악이 우리 자신과 이웃을 파괴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악에서 돌이키는 신앙으로 나아가도록 이끕니다. 또한 다른 사람의 불행을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쉽게 단정하지 않고, 악을 분별하면서도 사람의 최종적인 영적 상태는 주님께 맡기며, 자신은 사랑과 진리 안에서 살아가도록 부름받았음을 기억하게 합니다. 결국 참된 신앙은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심판하시는 하나님 사이에서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일이 아닙니다. 사랑 자체이신 주님께서 언제나 인간을 선과 생명으로 이끄신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분의 진리 앞에서 자신의 악을 버리며, 이웃을 향한 사랑과 선한 쓰임을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본 신적 사랑과 심판의 참된 관계입니다. (EO.009 해설)

 

요약

동방정교회는 하나님께서 사랑이시면서 동시에 거룩한 심판자이시라고 고백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그분의 사랑과 분리하여 이해하지 않으려는 중요한 신학적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시리아의 이사악을 비롯한 교부들의 가르침에서는 동일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의인에게는 기쁨으로, 거부하는 악인에게는 고통으로 경험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시므로 인간적인 분노와 복수심을 가지실 수 없으며, 성경에서 하나님께 진노와 형벌을 돌리는 표현들은 인간의 경험에 따른 진리의 외관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누구도 지옥으로 던져 넣지 않으시며, 인간이 자신의 지배적 사랑과 삶의 상태에 따라 천국 또는 지옥의 삶으로 나아간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두 전통은 하나님의 사랑이 변하지 않는다는 점과 인간이 그 사랑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가 중요하다는 점에서 만나지만, 최후의 심판과 사후 세계의 구조를 이해하는 방식에서는 차이를 보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심판은 하나님의 사랑이 분노로 바뀌는 사건이 아니라, 주님의 진리 앞에서 인간의 참된 사랑과 영적 상태가 드러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고난이나 다른 사람의 불행을 하나님의 직접적인 형벌로 단정하지 말고,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하며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참된 신앙은 심판을 두려워하는 데 머물지 않고, 사랑 자체이신 주님을 신뢰하면서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을 실천하는 데서 완성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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