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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003. ‘진리는 하나이지만 지혜로운 사람들은 그것을 여러 이름으로 부른다’

bygracetistory 2026. 11. 8. 14:44

SL.HI.003 | 힌두교(Hinduism)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진리는 하나이지만 지혜로운 사람들은 그것을 여러 이름으로 부른다’ – 하나의 진리와 여러 종교, 그 일치와 차이

 

해설

힌두교(Hinduism)의 종교적 다양성을 설명할 때 가장 자주 인용되는 구절 가운데 하나가 ‘진리는 하나이지만 지혜로운 사람들은 그것을 여러 이름으로 부른다’는 말씀입니다. 이 표현은 고대 인도의 경전인 ‘리그베다’(Rigveda) 1.164.46에 나오는 ‘에캄 사드 비프라 바후다 바단티’(Ekam Sad Vipra Bahudha Vadanti)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여기서 ‘에캄’(ekam)은 하나, ‘사트’(sat)는 존재하는 것 또는 실재, ‘비프라’(vipra)는 지혜로운 사람이나 시인·제사장, ‘바후다’(bahudha)는 여러 방식으로, ‘바단티’(vadanti)는 말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엄밀하게는 ‘실재는 하나이지만 지혜로운 사람들은 그것을 여러 방식으로 말한다’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진리는 하나’라는 번역 역시 그 취지를 전달하지만, 원문의 ‘사트’가 단순히 참과 거짓을 판단하는 명제적 진리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와 실재를 가리킨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짧은 구절은 오늘날 힌두교가 다양한 신들과 종교적 전통의 공존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근거로 사용되며, 더 나아가 서로 다른 종교들이 궁극적으로 하나의 신성한 실재를 향하고 있다는 종교적 포용성의 근거로도 자주 인용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의 참된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이 등장한 원래의 문맥과 후대에 발전한 해석을 구별해야 합니다.

 

‘리그베다’ 1.164.46은 인드라(Indra), 미트라(Mitra), 바루나(Varuna), 아그니(Agni), 야마(Yama), 마타리슈반(Matarishvan) 등 여러 신성한 이름을 언급하면서 지혜로운 사람들이 하나의 실재를 여러 이름으로 부른다고 노래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 구절이 처음부터 기독교와 이슬람교와 불교를 비롯한 세계의 모든 종교가 동일한 진리를 가르친다고 선언한 문장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 구절은 고대 베다 종교의 신들과 우주적 질서를 이해하는 문맥 안에서 등장하였으며, 여러 신성한 이름과 그 배후의 하나됨에 관한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후대의 힌두교 사상가들은 이러한 표현을 더욱 넓게 해석하여, 다양한 신앙의 형태가 하나의 궁극적인 실재를 향할 수 있다는 종교철학적 주장으로 발전시켰습니다. 그러나 힌두교 내부에서도 이 구절의 의미를 동일하게 이해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전통은 여러 신들이 궁극적으로 하나의 브라만(Brahman)을 나타낸다고 이해하지만, 다른 전통은 인격적인 최고의 신이 여러 이름과 속성으로 불린다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에 나타난 하나됨을 곧바로 모든 신들의 본질적 동일성이나 모든 종교 교리의 동등성으로 확대하는 것은 원문 자체가 직접 말하는 범위를 넘어서는 해석입니다. 그럼에도 서로 다른 이름과 표현의 배후에 하나의 궁극적인 실재가 있을 수 있다는 문제를 제기한다는 점에서 이 구절은 종교의 본질을 탐구하는 중요한 출발점이 됩니다.

 

이러한 사상에는 인간이 신성한 실재를 이해하는 방식이 자신의 역사와 문화와 언어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같은 하늘을 바라보면서도 사람들은 서로 다른 언어로 하늘을 부르며, 같은 자연 현상을 경험하면서도 서로 다른 개념으로 그것을 설명합니다. 종교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어떤 문화권에서는 신을 창조주와 통치자로 이해하고, 어떤 문화권에서는 생명의 근원이나 궁극적 실재로 설명하며, 어떤 전통에서는 신을 인격적인 사랑의 대상으로 예배합니다. 이러한 차이가 존재한다고 해서 모든 종교적 경험이 처음부터 거짓이라고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반드시 구별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동일한 실재를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것과 서로 다른 실재를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또한 동일한 대상을 가리킨다고 하더라도 그 대상의 본성과 인간과의 관계에 관한 설명이 모두 참된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 자체이신 분으로 이해하고, 다른 사람은 인간에게 고통을 주면서 자신의 분노를 만족시키는 분으로 이해한다고 해 보겠습니다. 두 사람이 모두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더라도 그들이 이해하는 하나님의 성품은 크게 다릅니다. 그러므로 이름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과 그 이름들이 담고 있는 모든 신학적 설명을 동일하게 승인하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종교적 표현의 다양성이 곧 진리의 상대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매우 중요한 분별의 기준을 제시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5-9에 걸쳐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진리가 종교의 근본적인 원리이며,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내면에 신성이 존재한다는 인식과 그 신성이 하나라는 인식을 흘려보내신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8번에서는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진리가 인간 영혼에 미치는 보편적인 신성의 인플럭스(influx)와 관계된다고 밝힙니다. 따라서 여러 민족과 문화권에서 신성한 존재를 인정하고 궁극적인 하나됨을 찾으려는 사상이 나타난다는 사실은 단순히 인간이 만들어 낸 종교적 상상력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에 따르면 모든 참된 선과 진리는 주님에게서 나오며, 인간이 어느 시대와 민족에 속해 있든 영적 생명을 받아들이는 근원은 동일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실재는 하나이지만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는 베다의 통찰에는 신성의 근원적인 하나됨을 향한 인식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곧바로 베다가 말하는 하나의 실재와 주님께서 계시하신 신성한 본성이 완전히 동일하다고 결론 내려서는 안 됩니다. 하나의 궁극적인 근원을 인정한다는 사실과 그 근원이 어떤 분이신지를 참되게 이해한다는 것은 서로 다른 단계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 차이는 신성의 인격성과 인간의 관계를 살펴볼 때 더욱 분명해집니다. 힌두교의 일부 철학 전통, 특히 불이일원론(Advaita Vedanta)은 궁극적인 브라만을 모든 구별을 초월하는 절대적 실재로 이해하며, 인간의 참된 자아인 아트만(Atman)과 브라만의 본질적 동일성을 강조합니다. 반면 비슈누파와 같은 여러 신애 전통에서는 신이 인간과 구별되는 인격적인 존재이며, 인간은 사랑과 헌신을 통해 신과 관계를 맺는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힌두교 안에서도 하나의 실재가 무엇이며 인간이 그 실재와 어떻게 관계를 맺는가에 관한 설명은 상당히 다릅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에서는 하나님이 막연한 우주적 원리나 인격을 초월한 추상적 존재로만 이해되지 않습니다. 주님은 신성한 사랑 자체이시며 신성한 지혜 자체이시고, 인간이 사랑하고 인식하며 결합할 수 있는 신성한 인간이십니다. 특히 ‘참된 기독교’ 170번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성한 삼위일체가 세 인격의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한 분 주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성의 구별되는 본질적 요소들을 가리킨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진리가 단순히 여러 종교의 신들을 하나의 추상적 실재로 통합하는 명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신성한 사랑과 지혜의 근원이 오직 한 분 주님이시며, 그분께서 인간을 구원하고 거듭나게 하신다는 구체적인 신앙의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여러 이름의 배후에 하나의 신성이 있다는 힌두교의 통찰은 존중할 수 있지만, 그 통찰만으로 성경이 계시하는 주님의 본성과 구원의 진리까지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고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이름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이 질문은 ‘진리는 하나이지만 지혜로운 사람들은 그것을 여러 이름으로 부른다’는 명제를 기독교의 관점에서 검토할 때 피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만약 주님께서 모든 참된 선과 진리의 유일한 근원이시라면, 주님의 이름을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은 그 선과 진리에서 제외되는 것입니까?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318번에서 그러한 결론을 분명히 경계합니다. 그는 기독교회 밖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주님과 성경을 알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주님의 보편적인 자비와 사랑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구원을 원하시며, 사람이 어느 민족과 종교적 환경에서 태어나는가에 따라 그를 처음부터 천국에서 배제하지 않으십니다. 이어서 319번에서는 인간 안에 천국이 형성되는 본질적인 조건을 신성을 인정하고 신성의 인도를 받는 삶과 연결합니다. 특히 신성을 향한 경외 때문에 선을 행하는 삶과 단순히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선을 행하는 삶은 외적으로 비슷해 보일지라도 내적으로 다를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주님께서 인간의 외적인 종교 명칭만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어떤 사랑과 의지로 살아가는가를 보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주님을 다른 이름으로 알고 있다고 하여 그가 받아들이는 모든 선과 진리가 반드시 거짓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이해하는 신의 본성과 교리가 모두 참되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여기서 반드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진리와 모든 종교가 동일하게 참되다는 주장은 서로 다르다는 점입니다. ‘천국과 지옥’ 308번에서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교회가 보편적이며, 신성을 인정하고 체어리티(charity)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주님의 교회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말씀을 통해 주님을 아는 교회를 인체의 심장과 폐에 비유하고, 말씀을 직접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그 몸의 다른 지체들에 비유합니다. 이 비유는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의 몸에는 서로 다른 기관들이 존재하지만 생명의 근원은 제각각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또한 모든 기관이 동일한 기능을 수행하는 것도 아닙니다. 심장과 폐가 다른 지체들에 생명이 전달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듯이, 주님의 말씀은 인간에게 신성한 진리가 전달되는 중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종교의 다양성은 주님의 섭리가 여러 민족과 문화 속에서 작용한다는 사실과 연결될 수 있지만, 그 다양성 자체가 모든 교리의 동등성을 입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비유에 따르면 참된 영적 생명은 서로 다른 종교적 환경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전달될 수 있지만, 그 근원은 여전히 주님이시며, 말씀을 통해 밝혀지는 진리는 그 생명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 특별한 역할을 합니다. 이러한 설명은 종교적 배타주의와 무분별한 종교 상대주의 사이에서 매우 중요한 분별의 기준이 됩니다.

 

이 문제를 좀 더 깊이 살펴보면 종교의 다양성보다 더욱 근본적인 질문이 드러납니다. 그것은 인간이 진리를 어떤 목적으로 받아들이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이 ‘모든 종교는 결국 하나’라고 말하면서 다른 사람의 신앙을 존중하고 자신의 교만을 내려놓으며 이웃을 사랑한다면, 그 말에는 선한 삶으로 이어지는 의미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말을 하면서 참과 거짓의 구별을 포기하고, 서로 모순되는 주장까지 모두 옳다고 인정한다면, 그는 오히려 진리를 분별해야 할 인간의 책임을 회피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이 ‘참된 진리는 오직 하나’라고 고백하면서 자신의 신앙이 옳다는 이유로 다른 종교인을 멸시하고 미워한다면, 그는 진리의 유일성을 말하면서도 그 진리의 근원이신 주님의 사랑에서는 멀어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에서 선과 진리는 서로 결합되어야 합니다. 진리는 선을 향하여 나아가야 하며, 선은 진리를 통해 올바른 방향과 형식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안다는 것은 단순히 정확한 신학적 명제를 소유하는 일이 아닙니다. 진리가 인간의 이해 안에 들어온 다음 의지와 삶으로 이어져야 비로소 그 사람의 영적 생명에 실제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참된 종교적 성숙은 다른 사람의 믿음 안에 있는 진리를 발견할 줄 아는 겸손과, 그 안에 있는 오류를 분별할 줄 아는 지혜를 함께 요구합니다. 어느 하나만 강조하면 종교적 관용은 무분별한 상대주의가 되거나, 진리의 확신은 이웃을 정죄하는 교만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분별은 기독교인 자신에게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힌두교가 여러 신을 예배한다는 사실을 비판하면서 기독교는 오직 한 분 하나님을 믿는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참된 기독교’ 9번에서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입으로 고백하면서 실제 생각 속에서는 세 인격의 하나님을 각각 독립적인 신적 존재처럼 이해하는 문제를 지적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기독교의 삼위일체 신앙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의 신성한 삼위일체를 세 하나님에 대한 신앙처럼 이해하는 오류를 바로잡으려 한다는 점입니다. 결국 다른 종교의 신관을 비판하기 전에 기독교인 스스로 자신이 믿는 하나님을 얼마나 바르게 이해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또한 주님을 한 분 하나님으로 고백한다고 하면서도 실제 삶에서는 돈과 명예와 권력과 자기 자신을 가장 높은 자리에 두고 살아간다면, 그 사람은 입술로는 한 분 하나님을 인정하면서 마음으로는 다른 것을 섬기고 있는 셈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에서 예배의 진정성은 단순히 어떤 이름을 부르는가에 달려 있지 않고, 그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가장 사랑하며 어떤 삶을 살아가는가와 깊이 관계됩니다. 따라서 힌두교의 여러 신에 관한 논의는 기독교인에게도 자신의 예배와 사랑의 질서를 성찰하도록 요구합니다. 다른 사람의 신앙을 분별하는 기준이 자신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결국 ‘진리는 하나이지만 지혜로운 사람들은 그것을 여러 이름으로 부른다’는 명제에는 인간이 사용하는 이름과 표현을 넘어서는 궁극적인 진리의 하나됨을 향한 중요한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인간의 언어와 문화와 종교적 경험은 서로 다르지만, 모든 참된 선과 진리가 제각각 독립적인 근원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라는 관점에서 이 명제는 깊이 검토할 만합니다. 그러나 그 하나됨을 근거로 모든 종교의 신관과 인간관과 구원관이 동일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특히 브라만과 주님, 윤회와 부활, 해탈과 거듭남, 인간의 참된 자아와 주님으로부터 받는 영적 생명 사이에는 반드시 분별해야 할 본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모든 참된 선과 진리는 오직 주님에게서 나오며, 주님께서는 인간이 태어난 종교적 환경에 따라 자신의 사랑과 섭리를 제한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주님의 보편적인 사랑이 모든 종교의 가르침을 무조건 승인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러 종교 안에 나타나는 진리의 흔적을 존중하되 그 오류까지 진리라고 부르지 않아야 하며, 주님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지도 않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진리의 하나됨을 말하는 우리의 마음이 실제로 이웃을 향한 사랑과 겸손으로 이어지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참된 진리는 인간을 자기 확신과 교만 속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이신 주님께로 인도하며, 그분에게서 받은 사랑을 이웃에게 전하는 삶으로 이끕니다. 바로 여기에 여러 이름을 넘어 하나의 진리를 찾으려는 인간의 오래된 질문에 대하여, 성경과 주님께서 스베덴보리를 통해 밝혀 주신 계시의 빛이 제시하는 더욱 깊은 대답이 있습니다. (HI.003 해설)

 

요약

‘진리는 하나이지만 지혜로운 사람들은 그것을 여러 이름으로 부른다’는 명제는 ‘리그베다’ 1.164.46에서 비롯되었으며, 여러 신성한 이름의 배후에 하나의 궁극적인 실재가 있다는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이 처음부터 세계의 모든 종교가 동일한 진리를 가르친다고 선언한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에 따르면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모든 참된 선과 진리는 오직 주님에게서 나옵니다(TCR.5–9). 또한 주님의 자비와 섭리는 모든 민족과 종교에 미치므로, 주님의 이름을 알지 못하는 사람도 자신의 종교 안에서 신성을 인정하고 선한 삶을 살아간다면 구원의 가능성에서 제외되지 않습니다(HH.308, 318–319). 그러나 이러한 보편성은 모든 종교의 교리가 동일하게 참되다는 뜻이 아닙니다. 참된 종교적 분별은 여러 종교 안의 진리를 존중하면서도 오류를 구별하고, 무엇보다 그 진리가 인간을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의 삶으로 인도하는지를 살피는 데 있습니다. 진리는 하나이지만, 그 하나됨의 근원은 인간이 사용하는 여러 이름 자체가 아니라 신성한 사랑과 지혜의 근원이신 오직 한 분 주님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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