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창4:10)
AC.377
여기서‘땅’(ground)이분열또는이단을의미한다는것은‘밭’(field)이교리를의미한다는사실에서분명합니다.그러므로밭을그안에가지고있는‘땅’은분열을의미합니다.사람자신이‘땅’이며또한‘밭’입니다.이러한것들이사람안에심어지기때문입니다.사람은자기안에심어진것에따라그런사람이되기때문입니다.선들과진리들로부터는선하고참된사람이되고,악들과거짓들로부터는악하고거짓된사람이됩니다.어떤특정한교리나이단안에있는사람은그것으로부터이름을얻게됩니다.그러므로지금다루고있는구절에서도‘땅’이라는말은사람안에있는분열또는이단을나타내기위해사용됩니다. That the“ground”here signifies a schism or heresy,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a“field”signifies doctrine, and therefore the“ground,”having the field in it, is a schism.Man himself is the“ground,”and also the“field,”because these things are inseminated in him, for man is man from what is inseminated in him, a good and true man from goods and truths, an evil and false man from evils and falsities.He who is in any particular doctrine or heresy is named from it, and so in the passage before us the term“ground”is used to denote a schism or heresy in man.
해설
AC.377은 AC.373에서 짧게 제시했던 ‘땅(ground)은분열또는이단을의미한다’는 해석을 설명합니다. 창4:10에서 아벨의 피들이 ‘땅에서부터’ 주님께 부르짖는다고 했습니다. 앞의 AC.374-376에서 ‘피들’은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을, 그 ‘부르짖음’은 죄책의 고발을 의미한다는 것이 설명되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그 피들이 부르짖어 올라오는 ‘땅’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땅을 단순히 악이 벌어진 장소로 보지 않고 ‘분열또는이단’으로 해석합니다. 이것은 가인이 표상하는 것이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하여 하나의 교리적 원리로 만든 상태라는 지금까지의 흐름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첫 논리는 ‘밭’이 교리를 의미하므로 밭을 그 안에 가지고 있는 ‘땅’은 분열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앞의 AC.368에서 ‘들’ 또는 ‘밭’이 교리를 의미한다고 이미 설명했습니다. 밭은 씨가 뿌려지고 자라나는 곳입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씨는 선과 진리에 속한 것들이며, 그것들이 사람 안에서 받아들여지고 조직되는 교리적 영역이 밭으로 표상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밭을 품고 있는 더 근원적인 ‘땅’으로 시선이 옮겨갑니다. 가인의 문맥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본래의 결합에서 갈라지고 그 분리가 하나의 교리로 굳어졌으므로, 그 땅은 ‘분열또는이단’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AC.377의 설명은 여기서 한 단계 더 깊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자신이땅이며또한밭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이번 번호의 핵심 문장입니다. 교리는 인간 바깥에 존재하는 추상적인 명제들의 집합만이 아닙니다. 선과 진리 또는 악과 거짓이 실제로 심어지고 자라는 장소는 사람 자신입니다. 따라서 말씀에서 땅과 밭이 교회와 교리의 상태를 나타낼 수 있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러한 것들이 인간 안에서 받아들여지고 그의 생명의 일부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무엇인가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생각하고 사랑하고 의도하며, 마침내 삶으로 내보내는 살아 있는 땅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사람은자기안에심어진것에따라그런사람이된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선들과진리들로부터는선하고참된사람이되고,악들과거짓들로부터는악하고거짓된사람이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많은 지식을 접하면 그 지식대로 자동적으로 사람이 변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여기서 ‘심어진다’는 것은 무엇인가가 인간의 내면에 받아들여져 그의 생각과 의지와 삶의 일부가 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진리를 단순히 기억 속에 알고 있는 것과 그 진리를 인정하고 사랑하여 삶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거짓을 잠깐 듣거나 잘못 이해했다고 해서 곧바로 그 사람이 ‘거짓된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고 확증하며 그에 따라 살아갈 때 그것이 점차 그의 영적 성질을 형성합니다.
이 점에서 ‘심어진것’이라는 표현은 인간의 자유와도 연결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 안으로 들어오는 모든 생각과 감정이 곧바로 그 사람 자신인 것은 아닙니다. 여러 선한 생각과 악한 생각,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이 인간에게 제시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무엇을 받아들이고 자기 것으로 인정하며 의지와 행동으로 확증하느냐입니다. 그러므로 AC.377을 ‘나쁜생각이한번들어오면악한사람이된다’는 식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사람이 어떤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삶으로 만들고, 어떤 악과 거짓을 거부하거나 받아들여 굳히느냐에 따라 그의 내적 성질이 형성된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선과 진리의 실제 근원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인간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땅’입니다.
이것은 가인의 역사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돌아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가인의 문제는 어느 날 갑자기 아벨을 죽였다는 한 사건으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먼저 신앙을 체어리티와 구별하고, 이어 둘을 분리하며, 신앙을 체어리티보다 높이고,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해야 한다는 원리를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이 점차 하나의 교리가 되었고, 결국 체어리티에 속한 모든 것을 거부하는 데까지 나아갔습니다. 즉 하나의 거짓된 원리가 사람 안에 심어지고 확증되면서 그의 교리와 삶을 형성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벨의 피들이 부르짖는 ‘땅’은 단순한 흙이 아니라 그러한 분열이 자리 잡은 인간의 내적 상태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마지막 문장인 ‘어떤특정한교리나이단안에있는사람은그것으로부터이름을얻게된다’는 것도 이런 의미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인간은 자기가 받아들이고 확증하여 살아가는 교리적 성질에 따라 영적으로 특징지어집니다. 그래서 이 문맥에서는 그 사람 안에 있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열 또는 이단을 ‘땅’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이단’이라는 말을 오늘날 어떤 교단이나 종파에 붙이는 제도적 낙인으로 먼저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스베덴보리가 다루는 핵심은 살아 있는 전체 질서에서 어떤 진리를 떼어 내어 독립시키고, 그것을 다른 진리나 선과 대립시키며 절대화하는 영적·교리적 분열입니다. 가인의 경우에는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여 신앙이 홀로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고 만든 것이 바로 그 분열입니다.
이 때문에 AC.377은 교리의 중요성을 매우 깊은 차원에서 보여 줍니다. 교리는 단지 시험을 보기 위해 외우는 신학적 명제가 아닙니다. 사람이 무엇을 참되다고 받아들이느냐는 결국 그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영향을 줍니다. 그렇다고 ‘올바른교리만머리로정확히알면선한사람이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진리는 선과 결합되어야 합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겨야 하고, 진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진리가 삶에서 분리되면 가인의 문제가 다시 시작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선을 추구한다고 하면서 진리를 무시하면 무엇이 참된 선인지를 분별하기 어려워집니다. 그러므로 사람이라는 ‘땅’에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함께 심어지고 결합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히 ‘사람자신이땅이며또한밭이다’라는 말은 말씀을 읽는 우리의 태도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의 땅과 밭을 고대에 있었던 어떤 교회나 사람들의 상태로만 읽으면 우리는 그 말씀의 바깥에 서 있게 됩니다. 그러나 내가 바로 그 땅이고 밭이라면 질문이 달라집니다. ‘지금내안에는무엇이심어지고있는가?내가반복하여받아들이고확증하는생각은무엇인가?내가붙드는신앙의진리는실제로체어리티와결합되고있는가?아니면어떤진리를자기사랑을정당화하는수단으로사용하고있는가?’라는 질문이 됩니다. 말씀의 속뜻은 이렇게 역사적 표상에서 현재 인간의 거듭남으로 들어옵니다.
동시에 이 말씀은 희망도 줍니다. 사람이 ‘땅’이라는 것은 악과 거짓만 심어질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선과 진리도 심어질 수 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주님께서 끊임없이 선과 진리를 인간에게 주시고 심으시며,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이끄십니다. 거듭남은 사람이라는 땅이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주님의 도움으로 거부하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그것들이 자라고 결합하도록 하는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나는원래어떤땅인가?’라는 고정된 자기 규정보다 ‘나는지금무엇을받아들이고있으며,주님께서내안에심으시는것을어떻게받아들이고있는가?’입니다.
결국 AC.377에서 ‘땅’이 분열 또는 이단을 의미하는 이유는 그 분열과 이단이 추상적인 교리책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 심어지고 그 사람의 영적 상태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 안에 받아들여진 선과 진리로부터 선하고 참된 사람이 되고, 받아들이고 확증한 악과 거짓으로부터 악하고 거짓된 사람이 됩니다. 가인의 ‘땅’은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열이 심어져 하나의 교리가 된 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벨의 피들이 바로 그 땅에서부터 부르짖습니다.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은 가인의 교리와 분리된 삶 밖에서 우연히 생긴 사건이 아니라, 그 분열이 사람 안에 뿌리내리고 열매를 맺은 결과였기 때문입니다.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창4:10)
AC.376
이로부터‘피들이부르짖는것’(cryingofbloods)은죄책의고발을의미한다는것이따라나옵니다.폭력을가하는자들은죄책이있는것으로여겨지기때문입니다.시편에서는다음과같습니다. From this it follows that the“cryingofbloods”signifies the accusation of guilt; for those who use violence are held guilty.As in David:
AC.376은 앞의 AC.373-375에서 전개된 설명을 아주 짧게 결론짓습니다. AC.373에서는 ‘피들의소리’가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을, ‘피들이부르짖는것’이 죄책의 고발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AC.374에서는 왜 ‘피들’이 체어리티에 대한 폭력을 뜻하는지를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피는 특히 미움을 의미하며, 미움은 체어리티와 반대되고 할 수만 있다면 이웃을 해치고 죽이려 하기 때문입니다. AC.375에서는 ‘부르짖는소리’라는 표현이 말씀에서 여러 상황에 사용되지만 창4:10에서는 특별히 고발을 의미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376은 이 둘을 결합합니다. 체어리티에 폭력을 가한 자에게는 죄책이 있으므로, 그 폭력을 뜻하는 ‘피들’이 부르짖는다는 것은 바로 그 죄책이 고발되고 드러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죄책의고발’이라는 표현은 마치 아벨의 피가 주님 앞에서 가인을 고소하여 주님께서 비로소 범인을 알아내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가인은 ‘내가알지못하나이다’라고 말했지만 주님께서 모르셨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말씀은 악 자체가 그 악을 행한 사람의 상태를 드러낸다는 사실을 ‘피들이부르짖는다’는 이미지로 표현합니다. 인간은 자기 행동을 변명하거나 부인할 수 있지만, 실제로 체어리티에 가한 폭력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바로 그 폭력 자체가 그 사람의 죄책을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부르짖음’과 ‘고발’은 주님께 정보를 전달하는 행위라기보다, 행해진 악의 본질과 책임이 영적 질서 안에서 드러나는 것을 뜻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짧은 번호에서 시34:21을 인용하는 이유도 분명합니다. ‘의인을미워하는자는죄책이있으리로다’라는 말씀은 바로 앞 AC.374에서 설명한 ‘미움’과 이번 AC.376의 ‘죄책’을 직접 연결합니다. AC.374에서 미움은 체어리티와 반대되며 마음으로 형제를 죽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시편은 의인을 ‘미워하는자’가 죄책이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 미움은 단순히 마음속에서 지나가는 불쾌한 감정이 아니라, 그것이 의지 안에서 받아들여지고 굳어져 이웃의 선을 해치려는 방향으로 나아갈 때 실제 영적 책임과 연결되는 악입니다. 이 구절은 ‘미움→체어리티에대한폭력→죄책’이라는 AC.374-376의 흐름을 뒷받침합니다.
겔22:4은 그 연결을 더욱 직접적으로 보여 줍니다. ‘네가흘린피로말미암아죄책이있게되었도다’라는 말씀에서는 ‘피’와 ‘죄책’이 한 문장 안에서 결합됩니다. 바로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창4:10의 ‘피들이부르짖는다’를 ‘죄책의고발’로 읽는 성경적 근거입니다. 피를 흘렸다는 것은 단지 외적인 살인 행위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앞의 설명에 따르면 미움과 무자비함과 거기서 솟아나는 여러 불의를 포함합니다. 그러므로 ‘피’가 있다는 것은 체어리티가 훼손되었다는 것이고, 그 피가 행위자에게 돌아가 죄책을 드러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균형도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폭력을가하는자들은죄책이있는것으로여겨진다’고 한다고 해서 외적으로 어떤 해로운 결과가 발생하기만 하면 언제나 동일한 정도의 영적 죄책이 있다는 뜻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영적인 죄책에는 인간의 의지와 자유, 알고도 선택한 악의 성질이 중요합니다. 이번 문맥에서 가인의 폭력은 우발적인 실수나 무지에서 나온 행동이 아닙니다. 앞에서 신앙을 체어리티와 분리하고,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해야 한다는 원리를 받아들이며, 마침내 체어리티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고 완전히 거부하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죄책은 그러한 내적 거부와 폭력의 결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피들의부르짖음’은 가인의 앞선 말과 강한 대조를 이룹니다. 가인은 ‘내가알지못하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자신과 아벨의 관계를 부인하고 ‘내가내아우를지키는자니이까?’라고 책임을 밀어냈습니다. 그러나 AC.372에서 보았듯이 신앙은 본래 체어리티의 ‘지키는자’, 곧 체어리티를 섬기는 것이어야 했습니다. 가인은 바로 그 질서를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AC.376에서는 그 거부와 폭력이 ‘죄책의고발’로 돌아옵니다. 책임을 부인한다고 책임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교리적으로 선언하더라도, 그 결과 체어리티가 훼손되었다면 그 결과 자체가 그 잘못을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AC.376은 ‘죄책’을 주님께서 밖에서 인간에게 덧씌우시는 어떤 것으로 보기보다 인간이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행한 악과 연결하여 읽게 합니다. 주님께서 가인에게 임의로 죄책을 만들어 부과하시는 것이 아니라, 가인이 아벨에게 가한 폭력 자체가 죄책을 드러냅니다. 앞의 AC.357에서 여호와의 진노가 실제로 주님 안에 있는 분노가 아니라 인간의 악한 상태에서 그렇게 나타나는 것이라고 했던 것과도 방향이 통합니다. 주님의 사랑과 자비가 악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의 질서를 거슬러 악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때 그 악에 따른 상태와 결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결국 AC.376은 매우 짧은 번호이지만 창4:10의 ‘피들의부르짖음’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완성합니다. 체어리티에 폭력이 가해졌고, 그 폭력에는 죄책이 있으며, 그러므로 그 ‘피들’이 부르짖는다는 것은 죄책이 고발되고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가인은 ‘알지못한다’고 말하지만 피들은 부르짖습니다. 인간은 자기 안의 미움과 악을 합리화하고 책임을 부인할 수 있지만, 주님의 질서 안에서는 체어리티에 가한 폭력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회개는 그 부르짖음을 억누르거나 변명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서 자기의 악을 악으로 인정하고 그것을 죄로 여겨 피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러나여기서는죄책의고발을의미합니다. In the present passage it denotes accusation.
해설
AC.375는 바로 앞 AC.373에서 ‘피들이부르짖는것’이 ‘죄책의고발’을 의미한다고 한 해석을 보충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부르짖는소리’라는 표현 자체가 언제나 죄책이나 고발을 뜻한다고 단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씀에서 ‘부르짖는소리’와 ‘부르짖음의소리’는 매우 넓게 사용되며, 소음이나 소동이나 혼란이 있을 때뿐 아니라 기쁜 일이 있을 때에도 사용된다고 먼저 밝힙니다. 그런 다음 ‘그러나여기서는죄책의고발을의미한다’고 범위를 한정합니다. 이것은 말씀의 상응과 속뜻을 읽는 데 매우 중요한 해석 원리를 보여 줍니다. 어떤 단어나 표현에 하나의 뜻을 기계적으로 대입하는 것이 아니라, 그 표현이 놓인 문맥과 그것이 결합하고 있는 다른 표상들을 함께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출32:17-18을 인용하는 이유는 ‘소리’가 반드시 한 종류의 영적 상태만을 가리키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모세와 여호수아가 산에서 내려올 때 진영에서 들려오는 큰 소리가 있었고, 여호수아는 그것을 싸우는 소리로 생각했지만 모세는 승리하거나 패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아니라 ‘노래하는소리’라고 말합니다. 즉 ‘소리’는 어떤 집단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강한 상태가 외적으로 드러나는 표현입니다. 그 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그 소리 자체만으로 결정되지 않고, 무엇 때문에 그 소리가 일어났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습1:9-10과 렘48:3에서는 소리가 재앙과 파괴와 혼란에 연결됩니다. 심판과 황폐의 상태가 ‘부르짖는소리’로 표현됩니다. 반면 사65:19에서는 정반대의 문맥이 나타납니다. 새롭게 된 예루살렘에서는 ‘우는소리와부르짖는소리가그가운데에서다시는들리지아니할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도 소리와 부르짖음은 어떤 내적 상태가 외부로 드러나는 것을 나타내지만, 그 구체적인 의미는 문맥에 따라 결정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이 네 구절을 인용하는 목적은 각각의 구절에 독립적인 새로운 교리를 붙이려는 것이 아니라, ‘소리’와 ‘부르짖음’이라는 표현이 말씀에서 여러 상태에 사용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4:10의 ‘네아우의핏소리가땅에서부터내게호소하느니라’에서 ‘부르짖는소리’가 죄책의 고발을 의미하는 이유도 단어 하나만 떼어 내서는 알 수 없습니다. 여기서 부르짖는 것은 바로 아벨의 ‘피들’입니다. 앞의 AC.374에서 보았듯이 ‘피들’은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 특히 미움과 그 미움에서 솟아나는 온갖 불의하고 가증한 것들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그 ‘피들’이 부르짖는다는 것은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이 그 자체로 죄책을 드러내고 고발한다는 뜻이 됩니다. 가인은 ‘내가알지못하나이다’라고 부인했지만, 그가 소멸시킨 아벨의 피들은 침묵하지 않습니다. 행해진 악의 영적 성질 자체가 그 죄책을 드러냅니다.
여기서 ‘고발’ 역시 주님께서 어떤 외부의 증언을 들어야 비로소 가인의 죄를 아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말씀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도록 그렇게 표현합니다. 주님 앞에서는 인간의 내적 상태가 이미 드러나 있으며,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은 그 자체의 결과와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피들의부르짖음’은 주님께 새로운 정보를 전달하는 고발이라기보다, 가인이 부인하고 감추려 한 악이 주님의 질서 안에서는 감추어질 수 없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인간은 말로 ‘알지못합니다’라고 할 수 있지만, 그가 사랑하고 의도하며 행한 것은 그의 영적 상태 안에 남아 있습니다.
AC.375는 짧지만 스베덴보리의 상응을 읽을 때 주의해야 할 중요한 점도 가르쳐 줍니다. ‘소리= 고발’, ‘부르짖음= 죄책’이라고 사전식으로 외워서는 안 됩니다. 같은 표현도 문맥에 따라 싸움이나 소동, 혼란, 슬픔, 기쁨 등 서로 다른 상태와 연결될 수 있습니다. 상응은 단어와 뜻을 일대일로 기계적으로 치환하는 암호표가 아니라, 말씀 전체의 연결과 그 안에서 표현되는 영적 상태를 함께 살피는 것입니다. AC.375에서 스베덴보리 자신이 ‘말씀에서는여러경우에사용되지만여기서는죄책의고발을의미한다’고 구별하는 것은 바로 이 점을 잘 보여 줍니다.
결국 AC.375의 핵심은 마지막 한 문장에 있습니다. ‘그러나여기서는죄책의고발을의미합니다.’ 창4:10에서는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체어리티에 폭력을 가하여 흘리게 된 ‘아벨의피들’이 부르짖고 있기 때문입니다. AC.373이 ‘피들의부르짖음= 죄책의고발’이라는 뜻을 먼저 제시하고, AC.374가 ‘피들’이 무엇인지 자세히 설명했다면, AC.375는 이제 ‘부르짖는소리’가 왜 이 문맥에서 고발이 되는지를 확인합니다. 가인은 자신의 책임을 부인하지만,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결과 자체가 그의 죄책을 드러냅니다.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창4:10)
AC.374
‘피들의소리’(voiceofbloods)가체어리티에폭력이가해졌음을의미한다는것은말씀의많은구절에서분명합니다.그구절들에서‘소리’(voice)는고발하는어떤것을,‘피’(blood)는온갖종류의죄,특히미움을의미합니다.누구든지자기형제를미워하는사람은마음으로그를죽이는것이기때문입니다.주님께서다음과같이가르치십니다. That the“voiceofbloods”signifies that violence had been done to charity is evident from many passages in the Word, in which“voice”denotes anything that accuses, and“blood”any kind of sin, and especially hatred; for whosoever bears hatred toward his brother, kills him in his heart; as the Lord teaches:
이말씀은미움의여러정도를의미합니다.미움은체어리티와반대되는것이며,할수만있다면어떤방식으로든죽입니다.손으로죽이지못하더라도영으로는죽이며,외적인제약에의해서만손으로행하는것이억제됩니다.그러므로모든미움은‘피’(blood)입니다.예레미야에서는다음과같습니다. by which words are meant the degrees of hatred.Hatred is contrary to charity, and kills in whatever way it can, if not with the hand, yet in spirit, and is withheld only by external restraints from the deed of the hand.Therefore all hatred is“blood,”as in Jeremiah:
[2] 그리고‘피’(blood)가미움을의미하므로,마찬가지로온갖종류의불의를의미합니다.미움은모든불의의근원이기때문입니다.호세아에서는다음과같습니다. And as hatred is denoted by“blood,”so likewise is every kind of iniquity, for hatred is the fountain of all iniquities.As in Hosea:
[3] 마지막때의무자비함과미움역시계시록에서는‘피’(blood)로묘사됩니다(계16:3-4). The unmercifulness and hatred of the last times are also described by“blood”in the Revelation (16:3, 4).
‘피들’(bloods)이복수형으로언급되는것은사랑에서모든선하고거룩한것들이솟아나오듯이,미움에서는모든불의하고가증한것들이솟아나오기때문입니다.그러므로이웃을미워하는사람은할수만있다면그를죽일것이며,실제로자기가할수있는모든방식으로그를죽입니다.이것이그에게폭력을가하는것이며,바로이것이여기서‘피들의소리’(voiceofbloods)가본래의미하는것입니다. “Bloods”are mentioned in the plural, because all unjust and abominable things gush forth from hatred, as all good and holy ones do from love.Therefore he who feels hatred toward his neighbor would murder him if he could, and indeed does murder him in any way he can; and this is to do violence to him, which is here properly signified by the“voiceofbloods.”
해설
AC.374는 바로 앞 AC.373에서 제시한 ‘피들의소리는체어리티에폭력이가해졌음을의미한다’는 해석을 말씀의 여러 구절을 통해 입증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의 논증을 따라가 보면 ‘피’의 속뜻이 단순히 살인이나 유혈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피’가 온갖 종류의 죄, 특히 ‘미움’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매우 분명합니다. ‘누구든지자기형제를미워하는사람은마음으로그를죽이는것이기때문입니다.’ 따라서 창4에서 가인이 아벨의 피를 흘린 사건은 속뜻에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사건이며, 그 뿌리에는 체어리티와 정반대되는 미움이 있습니다.
이것을 밝히기 위해 스베덴보리가 가장 먼저 인용하는 말씀이 마5:21-22입니다. 주님께서는 ‘살인하지말라’는 계명을 단순히 육체적인 살인 행위에만 한정하지 않으시고, 형제를 향한 분노와 멸시와 모욕의 내적 상태까지 들어가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미움의여러정도’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살인은 어느 날 갑자기 아무런 내적 원인 없이 손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먼저 시작됩니다. 체어리티가 이웃의 선을 바라는 사랑이라면 미움은 그 반대입니다. 이웃에게 선이 있기를 바라지 않고, 그의 선을 싫어하며, 더 나아가 그가 없어지기를 바라는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그러므로 외적인 살인이 실행되지 않았더라도 그 내적 의지 안에는 이미 살인의 본질이 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미움은할수만있다면어떤방식으로든죽인다’고 말하는 것도 바로 이 뜻입니다. 이것을 모든 순간적인 화나 불쾌감까지 곧바로 영적인 살인으로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에게는 자연적인 분노가 일어날 수 있고, 불의에 대한 정당한 분개도 있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이웃의 악을 미워하는 것과 이웃이라는 사람 자체를 미워하여 그의 선과 행복을 원하지 않는 상태를 구별하지 않은 채 모든 분노를 정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핵심은 이웃을 향한 악의가 의지 안에서 자리 잡아 그를 해치고 제거하기를 원하는 ‘미움’입니다. 외적인 법과 체면과 두려움 때문에 손으로 실행하지 않을 뿐, 기회가 주어지면 해치고 싶어 하는 의지가 있다면 그 미움 안에는 살인의 본질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모든미움은피’라고 말합니다. 렘2:33-34에서 옷단에 가난하고 죄 없는 자들의 피가 발견된다는 말씀은 바로 그러한 내적 악이 외적인 삶에 나타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어 호4:2-3에서는 거짓 맹세, 거짓말, 살인, 도둑질, 간음과 함께 ‘피가피를뒤잇는’ 상태가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피’가 미움뿐 아니라 ‘온갖종류의불의’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미움은모든불의의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체어리티가 이웃의 선을 원하여 여러 형태의 선한 행위로 흘러나오는 것처럼, 미움은 이웃의 선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여러 형태의 불의와 가증한 것으로 흘러나옵니다.
겔22장과 겔7:23을 인용하는 이유도 같습니다. ‘피흘린성읍’, ‘피흘리는죄가가득한땅’, ‘포악이가득한성읍’이라는 표현에서 피와 포악이 함께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히 실제 살인 사건의 통계로 읽는 것이 아니라 무자비함과 미움이 지배하는 영적 상태로 읽습니다. 체어리티가 사라지면 이웃은 더 이상 사랑하고 섬겨야 할 대상이 아니라 자기 욕망을 위해 이용하거나 방해가 되면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앞 AC.372의 ‘신앙은체어리티를섬겨야한다’는 질서와도 연결됩니다. 체어리티를 섬기기를 거부한 신앙은 결국 이웃을 향한 살아 있는 사랑을 잃고, 그 자리에 자기 사랑에서 나오는 무자비함과 미움이 들어설 수 있습니다.
애4:13-14와 사4:4, 사59:3역시 같은 논증 안에 있습니다.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이 의인의 피를 흘렸다는 것, 예루살렘의 피가 씻겨야 한다는 것, 손과 손가락이 피와 죄악으로 더러워졌다는 것은 ‘피’가 단순한 육체적 유혈보다 넓은 영적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특히 사4:4에서 주님께서 ‘예루살렘의피’를 씻으신다는 표현은 피가 제거되어야 할 죄악과 불의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 구절들은 각각 별개의 주제를 말하는 인용들이 아니라 ‘피=미움과거기서나오는불의’라는 하나의 상응을 여러 방향에서 입증하는 증거들입니다.
겔16:6, 22의 ‘피투성이가되어’라는 표현도 같은 맥락에서 인용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예루살렘의 가증한 것들을 ‘피들’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도 피는 한 가지 죄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여러 가증한 악들이 한꺼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AC.374마지막에서 ‘왜피가복수형bloods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이어집니다. 사랑에서 모든 선하고 거룩한 것들이 솟아 나오듯이 미움에서는 모든 불의하고 가증한 것들이 솟아 나오기 때문에 ‘피들’이라고 복수형으로 표현된다는 것입니다. AC.373에서는 이 복수형의 이유를 아직 설명하지 않았지만, 이제 AC.374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그 이유를 밝혀 줍니다.
이 대조는 매우 중요합니다. 한쪽에는 ‘사랑’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미움’이 있습니다. 사랑은 하나의 내적 근원이지만 거기에서 자비, 용서, 섬김, 정직, 인내, 선한 행위와 같은 수많은 선하고 거룩한 것들이 흘러나옵니다. 반대로 미움 역시 하나의 내적 근원이지만 거기에서 거짓, 모욕, 보복, 기만, 폭력, 무자비함과 같은 수많은 불의하고 가증한 것들이 흘러나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단수 ‘피’가 아니라 복수 ‘피들’이라는 표현에 주목합니다. 가인이 아벨에게 가한 폭력은 단 하나의 잘못으로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의 반대인 미움에서 흘러나오는 악의 전체 계열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계16:3-4을 인용하여 마지막 때의 무자비함과 미움 역시 ‘피’로 묘사된다고 하는 것도 이 원리를 말씀 전체에 연결하기 위해서입니다. 창세기의 가인과 아벨에서 시작된 ‘피’의 상응이 선지서에 나타나고 다시 계시록에까지 이어집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 창4:10의 아벨의 피는 고립된 고대 살인 사건의 이미지가 아니라, 체어리티가 파괴될 때 말씀 전체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영적 표상입니다. 사랑이 사라지고 미움이 지배할 때 그 결과는 ‘피’로 표현됩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선과 체어리티의 근원이 인간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사랑에서 모든 선하고 거룩한 것이 솟아 나온다고 할 때 그 사랑의 최초 근원은 인간의 proprium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인간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받아들이는 만큼 체어리티 안에 있게 되고, 그 체어리티에서 여러 선한 쓰임이 흘러나옵니다. 반대로 인간이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거부하고 자기 사랑을 중심에 놓을수록 이웃을 경쟁자나 방해물로 보기 쉬워지고, 그 상태가 굳어지면 미움과 거기서 나오는 여러 불의가 나타납니다. 따라서 사랑과 미움의 대조는 단순한 감정의 대조가 아니라 인간이 어떤 근원과 질서를 받아들이고 살아가느냐의 문제입니다.
이 점에서 AC.374는 앞의 가인 이야기를 더욱 내면으로 가져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는 쉽게 ‘나는사람을죽인적이없으므로이말씀은나와거리가멀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마5:21-22에서 계명을 마음의 상태까지 가져가십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 말씀을 통해 미움 자체가 체어리티에 대한 폭력임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은 단지 ‘나는누구에게물리적인폭력을행사했는가?’가 아니라 ‘내마음속에서누구의선을원하지않고있는가?누구의실패를기뻐하고있는가?누구를마음에서지워버리고싶은가?’가 됩니다. 다만 이런 자기 성찰도 다른 사람을 정죄하기 위한 잣대가 아니라 자기 안의 미움을 주님 앞에서 발견하고 피하기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결국 AC.374의 마지막 문장이 전체를 압축합니다. 이웃을 미워하는 사람은 할 수만 있다면 그를 죽이며, 실제로 자기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를 죽입니다. 이것이 이웃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이며, 바로 그것이 ‘피들의소리’가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벨의 피가 부르짖는다는 것은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이 주님의 질서 안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이고 ‘내가알지못하나이다’라고 했지만, 피들은 부르짖습니다. 체어리티를 거부하는 교리가 아무리 자신을 정당화해도 그 안에서 발생한 미움과 불의는 그 자체로 죄책을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은 단지 손으로 살인하지 않는 데 머무르지 않고, 주님께서 마음속의 미움까지 보게 하실 때 그것을 죄로 인정하고 피하며, 그 자리에 주님에게서 오는 체어리티가 자리 잡도록 하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And he said, What hast thou done? The voice of thy brother’s bloods crieth to me from the ground. (창4:10)
AC.373
‘네아우의피들의소리’(voiceofthybrother’sbloods)는체어리티에폭력이가해졌음을의미하고,‘피들이부르짖는것’(cryingofbloods)은죄책의고발을의미하며,‘땅’(ground)은분열또는이단을의미합니다. The“voiceofthybrother’sbloods”signifies that violence had been done to charity; the“cryingofbloods”is the accusation of guilt, and“ground”signifies a schism or heresy.
해설
AC.373은 창4:10의 ‘네아우의핏소리가땅에서부터내게호소하느니라’의 속뜻을 아주 압축적으로 제시합니다. 앞에서 가인은 아벨을 죽였고, 이어 ‘내가내아우를지키는자니이까?’라고 대답했습니다. 속뜻에서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고, 나아가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겨야 한다는 질서 자체를 거부한 것입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네아우의피들의소리가내게부르짖는다’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AC.373부터는 단순히 체어리티가 소멸되었다는 사실을 넘어, 그 소멸이 가져오는 죄책과 그 죄책이 드러나는 상태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먼저 ‘네아우의피들의소리’는 ‘체어리티에폭력이가해졌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아벨은 계속해서 체어리티를 표상하므로 아벨의 피는 단순히 육체적인 죽음의 흔적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것은 신앙이 체어리티를 분리하고 마침내 소멸시켰다는 것이며, 이제 흘려진 아벨의 피는 바로 그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을 나타냅니다. ‘폭력’이라는 표현은 중요합니다. 체어리티가 저절로 사라진 것이 아니라 신앙을 체어리티보다 높이고,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해야 한다는 가인의 교리적 원리가 결국 체어리티를 밀어내고 소멸시키는 데까지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벨의 피는 사랑과 체어리티의 질서가 침해되고 파괴된 결과를 보여 줍니다.
특히 원문이 ‘blood’가 아니라 ‘bloods’, 곧 복수형이라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만 AC.373자체는 아직 왜 복수형인지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피들의소리’가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을 의미한다고만 밝힙니다. 따라서 이 번호에서 복수형의 세부적인 상응을 미리 단정하여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번역에서는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붙들고 있는 복수형을 보존하고, 그 의미가 이어지는 번호들에서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따라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계속 지켜 온 원칙과도 맞습니다. 현재 번호가 직접 말하는 범위는 분명히 말하되, 뒤의 설명을 앞당겨 과도하게 넣지는 않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피들이부르짖는것’은 ‘죄책의고발’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마치 주님께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모르시다가 땅에 흘린 피의 소리를 듣고 범죄를 발견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부르짖음’은 이미 행해진 악 자체가 그 악의 성질과 죄책을 드러내는 것을 나타냅니다. 가인은 ‘내가알지못하나이다’라고 말했지만, 아벨의 피는 부르짖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행한 악을 부인하고 합리화하며 감추려 할 수 있지만, 영적 질서 안에서는 그 악이 실제로 무엇을 파괴했는지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은 그 자체로 죄책을 드러냅니다. 이런 의미에서 ‘피들의부르짖음’은 죄책의 고발입니다.
여기서 ‘고발’이라는 말을 주님께서 인간의 죄를 찾아내어 처벌할 근거를 모으신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큰 틀에서 주님은 인간을 파멸시키려는 분이 아니라 끊임없이 악에서 건져 선으로 이끄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자유 가운데 실제로 악을 선택하고 그것을 자신의 삶과 교리 안에 굳히면 그 악에는 그에 따른 결과가 있습니다. 그 결과가 드러나는 것을 말씀은 마치 피가 소리를 내어 하나님께 고발하는 것처럼 표현합니다. 따라서 ‘죄책의고발’은 변덕스러운 신적 분노가 새롭게 일어났다는 뜻이 아니라,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악의 실상이 더 이상 감추어질 수 없게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마지막으로 ‘땅’(ground)은 ‘분열또는이단’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앞에서부터 이어져 온 ‘ground’의 의미를 가인의 상태에 맞추어 읽어야 하는 대목입니다. 가인의 근본적인 문제는 신앙과 체어리티를 구별했다는 것 자체가 아니라, 둘을 분리하고 신앙을 체어리티보다 높여 마침내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해야 한다는 교리를 만든 데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땅’이 분열 또는 이단을 의미한다는 것은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이 단순히 한 사람의 개인적 감정이나 행동 안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시킨 교리적 토대 안에서 일어났음을 보여 줍니다. AC.370의 마지막 문장 ‘그들의교리는이와같이되었습니다’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여기서 ‘이단’이라는 표현 역시 오늘날의 교파적 의미로 성급하게 옮겨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AC.373이 말하는 ‘heresy’는 이 문맥에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살아 있는 결합에서 떨어져 나와 한 부분을 독립시키고 그것을 절대화하는 교리적 왜곡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특정 교단이나 사람에게 곧바로 ‘가인의이단’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 이 번호의 목적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자신이 어떤 진리 하나를 전체 질서에서 떼어 내어 절대화하고 있지는 않은지, 신앙의 정확성을 강조하면서 그 신앙의 생명인 체어리티를 밀어내고 있지는 않은지를 살피게 하는 말씀으로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AC.373은 이렇게 앞의 흐름을 세 단어로 압축합니다. ‘피들’, ‘부르짖음’, ‘땅’입니다. ‘피들’은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을, 그 ‘부르짖음’은 죄책의 고발을, ‘땅’은 그러한 폭력이 일어난 분열 또는 이단을 의미합니다. 앞에서는 가인의 교리가 ‘신앙이지배해야한다’고 주장했고, 그 결과 아벨이 죽었습니다. 이제 그 결과가 사라지지 않고 ‘피들의소리’가 되어 부르짖습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 수는 있어도, 그렇게 함으로써 생긴 영적 파괴까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결국 창4:10의 ‘네아우의핏소리가내게호소하느니라’는 말씀은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뒤에도 그 일이 주님 앞에서 감추어질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가인은 ‘내가알지못하나이다’라고 했지만 피들은 부르짖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교리와 논리로 체어리티를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 수 있고,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할 수도 있지만, 주님의 질서 안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하여 사랑을 훼손한 결과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참된 신앙은 아벨의 피를 흘리는 신앙이 아니라 아벨을 ‘아우’로 인정하고 그의 ‘지키는자’가 되는 신앙입니다. 곧 체어리티를 섬기고 보호하며, 그 안에서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얻는 신앙입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창4:9)
AC.372
‘지키는자’(keeper)가된다는것은섬기는것을의미합니다.유대교회에서‘문지기들’(doorkeepers)과‘문을지키는자들’(porters),곧문지방을지키는자들이그러했습니다.신앙이체어리티의‘지키는자’라고불리는것은신앙이체어리티를섬겨야하기때문입니다.그러나‘가인’이라하는교리의원리에따르면신앙이지배해야했으며,이는7절에서설명한바와같습니다. To be a“keeper”signifies to serve, like“doorkeepers”and“porters”(that is, the keepers of the threshold) in the Jewish church.Faith is called the“keeper”of charity, from the fact that it ought to serve it, but it was according to the principles of the doctrine called“Cain”that faith should rule, as was said in verse 7.
해설
AC.372는 창4:9에서 가인이 한 말 가운데 ‘내가내아우를지키는자니이까?’의 ‘지키는자’(keeper)를 설명합니다. 바로 앞 AC.370에서 스베덴보리는 이 대답이 신앙이 체어리티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고 체어리티에 종속되기를 원하지 않았으며, 마침내 체어리티에 속한 모든 것을 거부했음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72에서는 왜 ‘지키는자’라는 말이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나타내는지를 설명합니다. 결론은 매우 분명합니다. ‘신앙이체어리티의지키는자라고불리는것은신앙이체어리티를섬겨야하기때문입니다.’ 따라서 가인의 질문은 단순히 ‘내가동생을보호할책임이있습니까?’라는 책임 회피를 넘어, 속뜻에서는 ‘왜신앙이체어리티를섬겨야합니까?’라는 영적 질서에 대한 거부가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지키는자’가 ‘섬기는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하면서 유대교회의 문지기들을 예로 듭니다. 문지기는 문이나 문지방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그는 집이나 성전 자체의 주인이 아니라 그곳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입니다. 그의 역할은 자신이 지키는 것을 대신하거나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온전히 기능하도록 섬기는 데 있습니다. 바로 이 이미지가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에 적용됩니다. 신앙은 체어리티의 ‘지키는자’입니다. 신앙의 진리들은 무엇이 선인지, 무엇이 악인지, 이웃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어떤 악을 죄로 여겨 피해야 하는지를 가르칩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은 체어리티를 보호하고 인도하며 체어리티가 삶에서 올바르게 나타나도록 섬깁니다.
여기서 ‘신앙은체어리티를섬긴다’는 말을 신앙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문지기가 집을 섬긴다고 해서 문지기의 역할이 불필요한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오히려 신앙의 진리가 없으면 인간은 자기가 선이라고 느끼는 것을 곧바로 참된 선이라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선한 의도만으로 무엇이 실제로 이웃에게 유익한지를 언제나 정확히 아는 것도 아닙니다. 진리는 사랑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밝혀 줍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가 신앙의 생명이라고 해서 진리가 불필요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기고, 체어리티는 신앙에 생명을 줍니다. 문제는 둘 가운데 하나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둘의 올바른 질서를 회복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앞의 창4:7, 특히 AC.361-365에서 살펴본 ‘주도권’의 문제와 정확히 이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거기서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하지만 신앙은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AC.372마지막에서 ‘이는7절에서설명한바와같습니다’라고 한 것은 바로 그 논의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AC.372를 이해하려면 ‘신앙과체어리티가운데어느것이먼저생기는가?’라는 시간적 순서보다 ‘둘이결합된뒤무엇이무엇을위해존재하는가?’라는 목적과 주도권의 질서를 보아야 합니다. 영적 인간의 거듭남에서는 진리를 먼저 배우고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로 인도되는 과정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최종적인 질서에서 신앙이 사랑을 지배하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는 선을 섬기며,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깁니다.
이 점은 방금 AC.371에서 살펴본 ‘신앙을통하여체어리티가주어졌다’는 말과도 잘 연결됩니다. 홍수 후 영적 인간에게서는 먼저 말씀과 계시된 진리를 배우고, 그것으로 양심이 형성되며,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로 인도되는 질서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신앙을통하여’ 체어리티가 주어진다고 해서 신앙이 체어리티의 근원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체어리티와 모든 선의 근원은 언제나 주님이십니다. 신앙은 주님께서 인간을 체어리티로 이끄시는 수단이 됩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체어리티를 섬긴다는 AC.372의 설명과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주어진다는 AC.371의 설명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함께 읽을 때 영적 인간의 질서가 더 선명해집니다. 진리가 먼저 의식에 들어올 수 있지만, 그 진리가 궁극적으로 섬기는 것은 선이며, 신앙이 살아 있게 되는 것은 체어리티 안에서입니다.
반대로 ‘가인’이라 하는 교리는 이 질서를 뒤집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의교리의원리에따르면신앙이지배해야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가인의 문제를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신앙을 사랑과 구별하여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생각하고, 그다음에는 사랑과 분리하며, 나중에는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기고, 마침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합니다. 그 결과 아벨, 곧 체어리티가 소멸됩니다. 그리고 아벨을 죽인 뒤에는 ‘내가내아우를지키는자니이까?’라고 말합니다. 결국 ‘나는체어리티를섬기지않겠다’는 선언입니다. 신앙이 자신의 올바른 기능을 거부하고 오히려 주인이 되려고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할 때 체어리티가 소멸되는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앙이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으면 사람이 무엇을 알고 있는가, 어떤 교리를 정확히 고백하는가, 어떤 진리를 다른 사람보다 더 잘 이해하는가가 신앙생활의 중심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면 진리가 사람을 사랑과 쓰임으로 인도하기보다 자기의 의로움과 우월성을 확인하는 수단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진리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라, 진리를 사용하는 사랑의 질서가 뒤집힌 것입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을 가졌다는 데 있지 않고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하여 그것이 체어리티를 지배하게 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키는자’라는 표현에는 단순한 보호 이상의 아름다운 질서가 담겨 있습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를 지킵니다. 이웃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악을 선이라고 부르지 않도록 진리가 체어리티를 지키고, 좋은 의도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잘못된 행동을 정당화하지 않도록 진리가 체어리티를 지킵니다. 또한 감정적인 호의만을 체어리티라고 착각하지 않도록 무엇이 이웃의 참된 선인지를 말씀의 진리가 밝혀 줍니다. 그러나 그렇게 진리가 체어리티를 지키는 목적은 진리가 왕좌에 앉기 위해서가 아니라 체어리티가 더 순수하고 지혜롭게 쓰임을 행하도록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앙은 체어리티의 ‘문지기’와 같습니다.
이 원리는 오늘날 교회와 개인의 신앙을 살피는 데도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교리가 정확하고 성경 지식이 많으며 신앙고백이 분명한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사람을 더 겸손하게 하고, 악을 죄로 여겨 피하게 하며, 이웃의 참된 선을 구하고, 맡겨진 쓰임을 성실하게 감당하도록 섬기지 않는다면 신앙과 체어리티의 질서를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반대로 체어리티를 강조한다는 이유로 진리를 가볍게 여기는 것도 올바른 질서는 아닙니다. 문지기가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문지기가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진리는 선을 섬기고,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기며, 선과 진리 모두의 근원과 주인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결국 AC.372는 가인의 ‘내가내아우를지키는자니이까?’라는 질문에 속뜻으로 매우 분명한 대답을 줍니다. ‘그렇다.신앙은체어리티의지키는자가되어야한다.’ 그러나 가인의 교리는 그 질서를 거부했습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기려 하지 않고 오히려 지배하려 했으며, 그 결과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습니다. 따라서 이 짧은 번호는 가인과 아벨 이야기 전체의 핵심을 다시 압축합니다. 참된 신앙의 위대함은 체어리티 위에 군림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로 체어리티를 지키고 섬기며,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 있는 신앙이 되는 데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창4:9)
AC.371
‘여호와께서말씀하심’(speakingofJehovah)으로태고교회사람들은퍼셉션을의미했습니다.그들은주님께서자신들에게지각하는능력을주셨다는것을알고있었기때문입니다.이퍼셉션은사랑이주된것이었던동안에만계속될수있었습니다.주님을향한사랑이그치고,그결과이웃을향한사랑도그치자퍼셉션은소멸되었습니다.그러나사랑이남아있는만큼퍼셉션도남아있었습니다.이퍼셉션의능력은태고교회에고유한것이었습니다.그러나홍수후사람들에게서처럼신앙이사랑에서분리되고신앙을통하여체어리티가주어지게되었을때에는양심이그뒤를이었습니다.양심역시딕테이트를주지만그방식은다르며,이에대해서는주님의신적자비로나중에말씀드리겠습니다.양심이딕테이트를줄때에도말씀에서는이와마찬가지로‘여호와께서말씀하신다’(Jehovahspeaks)고합니다.양심은계시된것들과지식들,그리고말씀으로부터형성되기때문입니다.말씀이말하거나딕테이트를줄때에는주님께서말씀하시는것입니다.그러므로오늘날에도양심이나신앙에관한일을말할때‘주님께서말씀하신다’(theLordsays)고하는것보다더흔한표현은없습니다. By the“speakingofJehovah”the most ancient people signified perception, for they knew that the Lord gave them the faculty to perceive.This perception could continue no longer than while love was the principal.When love to the Lord ceased, and consequently love toward the neighbor, perception perished; but insofar as love remained, perception remained.This perceptive faculty was proper to the most ancient church, but when faith became separated from love, as in the people after the flood, and charity was given through faith, then conscience succeeded, which also gives a dictate, but in a different way, of which, by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When conscience dictates, it is in like manner said in the Word that“Jehovahspeaks”; because conscience is formed from things revealed, and from knowledges, and from the Word; and when the Word speaks, or dictates, it is the Lord who speaks; hence nothing is more common, even at the present day, when referring to a matter of conscience, or of faith, than to say, “theLordsays.”
해설
AC.371은 지금까지 태고교회와 가인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계속 부딪혀 온 ‘퍼셉션과양심은어떻게다른가?’라는 문제를 스베덴보리 자신이 매우 명료하게 정리하는 중요한 단락입니다. 특히 바로 앞 AC.370에서 ‘여호와께서가인에게말씀하셨다’는 것을 ‘내면에서오는어떤퍼셉션’이라고 했는데, 이제 왜 ‘여호와께서말씀하신다’는 표현이 퍼셉션을 의미할 수 있는지 설명합니다. 동시에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사라진 뒤 왜 양심이 그 뒤를 잇게 되었으며, 양심을 통해서도 ‘주님께서말씀하신다’고 표현할 수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따라서 AC.371은 단순한 한 구절의 어휘 풀이를 넘어, 태고교회와 홍수 후 고대교회의 내적 영적 구조가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 주는 핵심 단락입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여호와께서말씀하심’이 퍼셉션을 의미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자신들에게 ‘지각하는능력’을 주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퍼셉션은 단순한 직감이나 느낌이 아닙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은 주님을 향한 사랑 안에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랑으로부터 무엇이 선이고 참된지를 내적으로 지각했습니다. 먼저 어떤 교리를 외부에서 배운 뒤 그것이 옳은지 논리적으로 판단하여 선을 행하는 방식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 자체가 그들의 내면을 질서 있게 하고 있었으므로 그 사랑 안에서 선과 진리를 지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여호와께서말씀하셨다’는 것은 반드시 외부에서 들려오는 음성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 안에서 무엇이 선이고 참된지를 내적으로 지각하는 것을 의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이 퍼셉션의 조건을 매우 분명하게 밝힙니다. ‘이퍼셉션은사랑이주된것이었던동안에만계속될수있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핵심입니다. 퍼셉션은 인간이 독립적으로 소유한 초자연적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그들의 생명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주님의 선물이었습니다. 따라서 사랑이 사라지면 퍼셉션도 유지될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을향한사랑이그치고,그결과이웃을향한사랑도그치자퍼셉션은소멸되었다’고 말합니다. 반대로 ‘사랑이남아있는만큼퍼셉션도남아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태고교회의 쇠퇴를 이해하는 중요한 원리입니다. 퍼셉션이 어느 날 갑자기 주님에 의해 회수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사랑에서 멀어진 만큼 사랑으로부터 오는 퍼셉션도 함께 약해지고 소멸된 것입니다.
이 설명은 가인의 계열을 이해하는 데 특히 중요합니다. 가인은 태고교회와 전혀 관계없는 후대의 교회를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 안에서 신앙이 사랑과 분리되어 가는 상태를 표상합니다. 그러므로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에게 태고교회 전성기의 순수한 퍼셉션이 온전히 있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퍼셉션이 처음부터 완전히 사라졌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AC.371이 ‘사랑이남아있는만큼퍼셉션도남아있었다’고 직접 말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AC.370에서 스베덴보리가 ‘acertainperceptivityfromwithin’, 곧 ‘내면에서오는어떤퍼셉션’이라고 표현한 이유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가인의 상태에서는 사랑이 크게 훼손되고 체어리티가 소멸되어 가고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퍼셉션의 흔적까지 한순간에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AC.371은 결정적인 역사적·영적 전환을 설명합니다. ‘이퍼셉션의능력은태고교회에고유한것이었습니다.그러나홍수후사람들에게서처럼신앙이사랑에서분리되고신앙을통하여체어리티가주어지게되었을때에는양심이그뒤를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계속 구별해 온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과 홍수 후 고대교회의 영적 인간 사이의 차이입니다. 태고교회의 질서는 사랑이 먼저이고 그 사랑 안에서 신앙과 진리를 지각하는 질서였습니다. 그러나 그 상태가 상실된 뒤에는 인간이 먼저 진리를 배우고 받아들이며,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가면서 체어리티로 인도되는 새로운 질서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내적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말해 주는 것이 양심입니다.
그렇다고 양심이 퍼셉션의 낮은 복제품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양심역시딕테이트를주지만그방식은다르다’고 명시합니다. 퍼셉션과 양심은 모두 인간에게 내적으로 무엇인가를 알려 준다는 점에서는 비슷해 보이지만 그 근거와 작용 방식이 다릅니다. 퍼셉션은 사랑의 선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지각하는 태고교회의 천적 방식이고, 양심은 계시된 진리와 신앙의 지식, 특히 말씀으로부터 형성되어 무엇을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내적으로 말해 주는 영적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내안에서어떤강한느낌이든다’는 것을 모두 퍼셉션이나 양심이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특히 양심은 개인의 주관적인 감정 자체가 아니라 사람이 참되다고 받아들인 선과 진리를 토대로 형성됩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양심은계시된것들과지식들,그리고말씀으로부터형성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장입니다. 양심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완성된 형태로 가지고 있는 독립적인 내적 음성이 아닙니다. 무엇이 선이고 참된지를 배우고 받아들이며 그것을 삶의 기준으로 삼는 가운데 형성됩니다. 특히 말씀으로부터 받은 진리가 인간의 내면에 자리 잡고 그 진리에 반하는 일을 하려고 할 때 내적으로 제지하고, 그 진리에 따라 행하려 할 때 이끄는 것이 양심의 작용입니다. 따라서 잘못된 것을 진리라고 확신하면 왜곡된 양심이 형성될 가능성도 있으며, 참된 양심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진리를 배우는 것과 그 진리에 따라 살려는 의지가 함께 중요합니다.
이제 ‘여호와께서말씀하신다’는 표현이 왜 양심에도 사용될 수 있는지가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이말하거나딕테이트를줄때에는주님께서말씀하시는것’이라고 합니다. 양심이 말씀과 계시된 진리로부터 형성되어 있다면, 그 양심을 통하여 말씀의 진리가 인간에게 내적으로 말할 때 그 근원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태고교회에서는 퍼셉션을 두고 ‘여호와께서말씀하셨다’고 할 수 있었고, 후대의 영적 인간에게서는 말씀으로 형성된 양심의 딕테이트를 두고도 ‘주님께서말씀하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표현은 같지만 내적 방식은 다릅니다.
이 설명은 바로 앞 AC.359-360에서 생겼던 난제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그곳에서 스베덴보리는 가인에게 ‘여호와께서말씀하셨다’는 것을 ‘consciencedictated’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당시 가인이 태고교회 문맥에 있으므로 이것을 곧바로 홍수 후 고대교회의 완성된 양심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고 조심했습니다. AC.371은 그 조심스러운 태도가 필요했음을 확인해 주면서도 한 가지를 더 밝혀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퍼셉션과 양심의 차이를 분명히 알고 있으며 바로 이 단락에서 직접 구별합니다. 따라서 AC.359-360의 ‘conscience’를 단순한 실수라고 보거나 임의로 ‘perception’으로 고칠 이유는 없습니다. 반대로 그것만을 근거로 가인에게 후대 영적 인간과 동일한 양심이 있었다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AC.370-371이 보여 주듯 가인의 시대는 사랑과 함께 퍼셉션이 쇠퇴해 가는 과정 안에 있으며, 스베덴보리는 그 내적 딕테이트를 설명하면서 문맥에 따라 퍼셉션과 양심에 관련된 표현을 사용합니다. 정확한 관계를 본문 이상으로 체계화하기보다 그가 직접 밝힌 구별을 보존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AC.371은 또한 거듭남의 질서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태고교회 사람들처럼 사랑으로부터 직접 선과 진리를 퍼셉션하는 상태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배우고, 진리를 이해하고, 그것을 삶의 기준으로 받아들이며, 주님께서 그 진리를 통하여 우리의 양심을 형성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말씀에이렇게기록되어있기때문에이것을해야한다’는 외적인 순종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에 따라 살면서 주님께서 그 진리를 선과 결합시키시면, 점차 단순히 규칙을 지키는 데서 벗어나 선 자체를 사랑하고 행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신앙을통하여체어리티가주어진다’는 말도 신앙 자체가 체어리티의 근원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모든 사랑과 선의 근원은 오직 주님이시며, 신앙의 진리는 인간이 그 사랑과 선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주님께서 사용하시는 수단입니다.
마지막 문장은 오늘날 신앙생활과 직접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양심이나 신앙에 관한 일을 말할 때 ‘주님께서말씀하신다’고 하는 것이 지금도 매우 흔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마음속에 떠오르는 모든 생각을 곧바로 ‘주님이내게말씀하셨다’고 신성화해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AC.371은 그 반대의 기준을 줍니다. 양심은 ‘계시된것들과지식들,그리고말씀으로부터형성’됩니다. 그러므로 어떤 내적 음성이나 확신이 정말 주님의 진리와 연결되어 있는지를 말씀에 비추어 살펴야 합니다. 자기 욕망이나 두려움이나 proprium에서 나온 생각을 주님의 음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위험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근거는 인간 자신의 주관적 확신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이며, 오늘날 우리에게 그 중심적인 토대는 말씀입니다.
결국 AC.371은 ‘여호와께서말씀하신다’는 한 표현 속에 서로 다른 두 시대의 영적 질서를 보여 줍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이 주된 것이었고, 그 사랑으로부터 퍼셉션이 있었습니다. 사랑이 사라진 만큼 퍼셉션도 사라졌습니다. 홍수 후에는 인간의 상태가 달라졌고, 말씀과 계시된 진리로부터 형성되는 양심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 퍼셉션도 양심도 인간 자신의 독립적인 능력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을 선과 진리로 이끄시는 방식입니다. 다만 그 방식이 서로 다릅니다. 이 차이를 붙들면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고대교회의 양심을 혼동하지 않으면서도, 두 경우 모두에서 왜 말씀은 ‘여호와께서말씀하셨다’고 표현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And Jehovah said unto Cain,Where is Abel thy brother?And he said,I know not,am I my brother’s keeper? (창4:9)
AC.370
‘여호와께서가인에게말씀하셨다’(JehovahsaiduntoCain)는것은체어리티,곧‘아우아벨’(brotherAbel)에관하여그들에게어떤딕테이트를주는,내면에서오는어떤퍼셉션(acertainperceptivityfromwithin)을의미합니다.가인의대답인‘내가알지못하나이다내가내아우를지키는자니이까?’(Iknownot,amImybrother’skeeper?)는신앙이체어리티를아무것도아닌것으로여겼으며,체어리티에종속되기를원하지않았고,그결과신앙이체어리티에속한모든것을완전히거부했음을의미합니다.그들의교리는이와같이되었습니다. “JehovahsaiduntoCain”signifies a certain perceptivity from within that gave them a dictate concerning charity or the“brotherAbel.” Cain’s reply, “Iknownot,amImybrother’skeeper?”signifies that faith considered charity as nothing, and was unwilling to be subservient to it, consequently that faith altogether rejected everything of charity.Such did their doctrine become.
해설
AC.370은 창4:9의 ‘여호와께서가인에게이르시되네아우아벨이어디있느냐’와 가인의 대답 ‘내가알지못하나이다내가내아우를지키는자니이까’를 설명합니다. 앞의 창4:6-8에서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이 체어리티와의 올바른 질서를 거부하다가 마침내 아벨을 죽이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이제 아벨이 죽은 뒤 주님께서는 가인에게 ‘네아우아벨이어디있느냐’고 물으십니다. 문자적으로는 살인한 가인에게 아벨의 행방을 묻는 장면이지만, 속뜻에서는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신앙에게 다시 ‘체어리티는어디에있는가?’라고 묻는 장면입니다. 그러므로 AC.370은 앞의 가인과 아벨 이야기를 한 단계 더 깊은 교리적 상태로 끌고 갑니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여호와께서가인에게말씀하셨다’에 대한 설명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체어리티,곧아우아벨에관하여그들에게어떤딕테이트를주는,내면에서오는어떤퍼셉션’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우리가 살펴본 AC.359-360과 함께 읽으면 특히 흥미롭습니다. 거기서는 ‘여호와께서가인에게말씀하셨다’를 ‘consciencedictated’, 곧 ‘양심이말해주었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acertainperceptivityfromwithin’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 자신이 이 가인 계열의 내적 경고를 설명하면서 ‘양심’과 ‘퍼셉션’에 관련된 표현을 모두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두 용어의 교리적 구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에게 특징적인 것은 사랑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지각하는 퍼셉션이고, 홍수 후 고대교회의 영적 인간에게 특징적인 것은 배운 진리와 선으로부터 형성되는 양심입니다. 그러므로 AC.370의 표현은 가인 계열에게 후대 고대교회의 양심이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는 증거로 읽기보다, 태고교회의 질서가 크게 훼손된 상태에서도 체어리티에 관하여 내면에서 무엇인가를 알리고 지시하는 퍼셉션이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안전합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아벨은 이미 죽었습니다. 속뜻으로는 체어리티가 소멸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여호와께서가인에게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체어리티를 거부했다고 해서 주님께서 즉시 그를 완전히 버리시는 것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내면에서는 여전히 ‘아벨이어디있느냐’, 곧 ‘체어리티는어디에있느냐’는 딕테이트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모르셔서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를 알 수 있도록 내면에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앞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이기 전에도 주님께서 ‘네가분하여함은어찌됨이며안색이변함은어찌됨이냐’고 말씀하셨듯이, 체어리티를 실제로 소멸시킨 뒤에도 주님의 말씀은 계속됩니다. 인간의 상태가 변한다고 해서 주님의 사랑과 자비가 먼저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가인의 대답은 이제 그들의 상태가 얼마나 깊이 굳어졌는지를 보여 줍니다. ‘내가알지못하나이다내가내아우를지키는자니이까?’ 스베덴보리는 이 짧은 대답을 세 단계로 풉니다. 첫째, 신앙이 체어리티를 ‘아무것도아닌것으로여겼습니다.’ 둘째, 신앙은 체어리티에 ‘종속되기를원하지않았습니다.’ 셋째, 그 결과 신앙은 ‘체어리티에속한모든것을완전히거부했습니다.’ 앞의 번호들에서 진행되어 온 가인의 타락이 여기에서 하나의 완성된 교리적 태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신앙과 체어리티를 구별하는 데서 시작했지만, 신앙을 사랑에서 독립된 것으로 여기면서 둘의 분리가 생겼고, 그 결과 체어리티 없는 행위와 예배가 나타났습니다. 이어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주도권을 가지려 했고, 마침내 아벨을 죽였습니다.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내가왜아벨을지켜야하는가?’라고 말합니다. 체어리티 자체를 신앙과 무관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여기서 ‘체어리티에종속되기를원하지않았다’는 표현은 특별히 주의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체어리티가 신앙을 억압하거나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열등하여 없어져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과 체어리티가 결합될 때 각각의 기능이 온전해진다는 뜻입니다. 신앙의 진리는 무엇이 선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밝혀 주지만, 그 진리를 사랑하고 실제로 행하게 하는 생명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체어리티 아래 있다는 것은 신앙이 체어리티를 섬기며 그것을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앞의 AC.361-365에서 스베덴보리가 강조했듯이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면 질서가 뒤집힙니다.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야 하며, 체어리티는 신앙을 통하여 자신이 어떻게 선을 행해야 하는지를 알아갑니다. 둘은 서로를 필요로 하지만 그 생명의 근원과 주도권은 사랑과 체어리티에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내아우를지키는자니이까?’라는 말은 단순한 책임 회피보다 훨씬 깊은 뜻을 갖습니다. 가인은 아벨을 ‘아우’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신앙과 체어리티가 본래 서로 완전히 무관한 두 실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씀의 문자 자체가 보존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둘은 ‘형제’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이제 ‘내가그를지켜야하는가?’라고 묻습니다. 속뜻으로 읽으면 ‘신앙이왜체어리티를돌보아야하는가?신앙이체어리티와무슨상관이있는가?’라는 말이 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신앙은 자기 존재의 목적을 잃어버립니다. 신앙의 모든 진리는 궁극적으로 인간을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인도하고, 악을 죄로 여겨 피하며, 선을 실제 삶으로 행하게 하기 위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선언한다면 자신에게 생명을 주는 목적과 결합을 거부하는 셈입니다.
마지막의 ‘그들의교리는이와같이되었습니다’라는 한 문장도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가인이라는 한 개인이 순간적으로 거짓말하고 책임을 회피했다는 심리적 설명에 머물지 않습니다.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의 ‘교리’가 이렇게 되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지만, 그것이 반복되고 확증되면서 하나의 교리가 되었습니다. 신앙을 그 자체로 구원의 본질적인 것으로 높이고, 체어리티를 부차적인 것으로 낮추며, 마침내 체어리티에 속한 것을 신앙에 불필요한 것으로 여기는 체계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벨을죽였다’는 것은 단지 사람들이 이웃 사랑을 잘 실천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체어리티가 신앙의 생명이라는 사실 자체를 교리적으로 거부하기에 이른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교리가 왜 중요한지도 역으로 보여 줍니다. 교리는 단순히 머릿속에 저장된 신학적 문장이 아닙니다. 무엇을 본질적인 것으로 여기느냐에 따라 사람의 사랑과 삶의 방향도 영향을 받습니다. 체어리티를 신앙의 생명으로 인정하는 교리는 사람이 ‘내가믿는진리가어떻게이웃의선으로나타나야하는가?’를 묻게 합니다. 반대로 체어리티를 신앙과 무관한 것으로 만드는 교리는 결국 ‘내가내아우를지키는자니이까?’라는 태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을 오늘날 특정 교파나 특정 신학적 표어를 가진 모든 사람에게 기계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다루는 것은 신앙이 실제로 사랑과 삶에서 분리되어 체어리티를 무가치한 것으로 만드는 내적 원리입니다. 사람의 실제 영적 상태는 그가 사용하는 교리적 명칭만이 아니라 그가 무엇을 사랑하고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AC.370의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을 함께 놓으면 더욱 깊은 대비가 나타납니다. 한쪽에서는 내면으로부터 ‘아벨이어디있느냐’는 퍼셉션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다른 한쪽에서는 그들이 ‘내가내아우를지키는자니이까?’라고 대답하는 교리를 만들어 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내적 딕테이트와 인간이 스스로 확증한 교리가 서로 맞서는 것입니다. 내면에서는 체어리티가 신앙의 생명임을 알리고 있는데, 인간은 신앙이 체어리티 아래 있기를 거부하는 교리를 세웁니다. 따라서 가인의 문제는 단순히 진리를 몰랐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체어리티에 관한 어떤 내적 퍼셉션이 있었음에도 그것을 거부하고 반대되는 것을 교리로 굳혔다는 데 있습니다.
결국 AC.370은 창4:9의 질문을 우리에게도 돌려놓습니다. ‘네아우아벨이어디있느냐?’ 이것은 단지 가인에게 죽은 동생의 행방을 묻는 질문이 아니라,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사람에게 ‘그신앙안에서체어리티는어디에있는가?’라고 묻는 질문이 됩니다. 우리가 알고 고백하는 진리가 실제로 이웃의 참된 선을 구하게 하는지, 우리의 신앙이 사랑과 자비와 쓰임의 삶으로 이어지는지, 아니면 신앙의 정확성을 주장하면서 체어리티를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지는 않은지를 돌아보게 합니다. 참된 신앙은 ‘내가내아우를지키는자니이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신앙은 체어리티와 분리되어 홀로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 안에서 비로소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오늘(2026/09/06)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2, ‘다함께주를경배하세’, 찬230, ‘우리의참되신구주시니’, 찬92, ‘위에계신나의친구’입니다.
오늘은창4절별 주석 그 세 번째, 6절로 8절, AC글 번호로는 359번에서 369번입니다. 먼저 본문입니다.
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창4:6-8)
제목은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이며, 다음은오늘부터 시작하는 ‘3분요약’입니다. 새로 오신 분들, 그리고 기존 성도 모두를 위한, 지난 2월부터 시작한 이 특별한 주일예배를 위한, 그 흐름과 문맥을 잊지 않기 위한 시간입니다.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8)
AC.369
그러므로‘가인이그의아우아벨을쳐죽였다.그들이함께들에있을때에’(CainroseupagainsthisbrotherAbel,andslewhim,whentheywereinthefieldtogether)라는말씀은,신앙과체어리티가둘다신앙의교리에서나온것이라할지라도사랑에서분리된신앙은체어리티를중요하지않게여기고,그로말미암아결국체어리티를소멸시킬수밖에없었음을뜻합니다.이것은오늘날체어리티의행위가없어도오직신앙만으로구원받는다고주장하는사람들의경우와같습니다.그들은사랑이없으면신앙이구원하지못한다는것을알고입술로고백하면서도,바로‘오직신앙만으로구원받는다’는그전제자체로체어리티를소멸시키고있기때문입니다. From this then it follows that the words“CainroseupagainsthisbrotherAbel,andslewhim,whentheywereinthefieldtogether,”denote that while both faith and charity were from the doctrine of faith, yet faith separate from love could not but disregard and thereby extinguish charity;as is the case at the present day with those who maintain that faith alone saves, without a work of charity, for in this very supposition they extinguish charity, although they know and confess with their lips that faith is not saving unless there is love.
해설
AC.369는 앞의 여러 단락에서 하나씩 설명해 온 상응을 창4:8의 한 장면 안에 다시 모아 줍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형제’는 본래 서로 결합되어야 하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들’은 교리, 곧 신앙과 체어리티의 교리에 속한 것들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가인이그의아우아벨을쳐죽였다.그들이함께들에있을때에’라는 말씀은 단순히 한 형제가 다른 형제를 죽인 사건을 넘어,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교리의 영역에서 자기 형제인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여기서 특별히 눈여겨볼 것은 스베덴보리가 ‘신앙과체어리티가둘다신앙의교리에서나온것’이라고 말한다는 점입니다. 가인과 아벨은 처음부터 전혀 관계없는 두 원리가 아니었습니다. AC.367에서 이미 보았듯이 둘은 모두 ‘교회의자손’이며 형제입니다. 참된 교리 안에는 신앙도 있고 체어리티도 있습니다. 진리를 믿는 것과 그 진리에 따라 선을 행하는 것은 본래 하나의 교회적 삶 안에서 함께 있어야 합니다. 문제는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자기 자신을 독립적인 구원의 원리로 세울 때 시작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사용하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먼저 체어리티를 ‘중요하지않게여긴다’(disregard)고 합니다. 처음부터 ‘체어리티는필요없다’고 노골적으로 부정하는 것만이 문제인 것은 아닙니다. 신앙을 구원의 본질적인 것으로 세우고 체어리티를 그 뒤에 따라오는 부차적인 것으로 밀어내는 순간 이미 질서가 뒤집히기 시작합니다. AC.365에서 보았듯이 신앙이 주도권을 가지려 하는 동안에는 참된 신앙이 아니며, 체어리티가 주도할 때 비로소 신앙이 됩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에 덧붙이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신앙에 생명을 주는 본질적인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가인이아벨을죽였다’는 말씀의 깊은 의미입니다.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것은 단순히 체어리티의 위치를 조금 낮추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로말미암아결국체어리티를소멸시킨다’고 말합니다.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채 구원하는 신앙으로 세워지면, 사람이 실제로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사는가는 구원의 본질에서 점차 밀려나게 됩니다. 입술로는 사랑과 선한 삶이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교리의 구조 자체가 그것들을 구원의 본질에서 제외한다면 체어리티는 실제 삶에서 점점 생명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AC.369후반은 스베덴보리 당시의 기독교를 향한 매우 직접적인 비판으로 이어집니다. 그는 ‘체어리티의행위가없어도오직신앙만으로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가인의 상태와 연결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비판하는 것은 신앙 자체가 아닙니다. 오히려 앞에서 계속 보았듯이 신앙과 체어리티는 형제이며 둘 다 교회의 자손입니다. 문제는 ‘신앙만으로’라는 분리입니다. 신앙을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떼어 내어 그것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만드는 순간, 신앙은 자기 생명의 근원과 분리됩니다.
더욱 날카로운 것은 그들이 체어리티의 필요성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들도 ‘사랑이없으면신앙이구원하지못한다’는 것을 알고 입술로 고백한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교리적으로는 ‘사랑도중요합니다’, ‘선한삶도필요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구원은오직신앙만으로받는다’고 전제한다면, 사랑과 체어리티는 결국 구원의 본질 밖으로 밀려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문제 삼는 것은 바로 이 내적인 모순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특정 교파의 교리 문구를 공격하기 위한 설명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가인은 하나의 역사적 교리 논쟁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하려는 영적 경향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나는오직신앙만을주장하지않으니가인과관계없다’고 쉽게 지나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것, 올바른 교리를 고백하는 것, AC의 속뜻을 이해하는 것을 실제 사랑과 삶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한다면 같은 질서의 전도가 우리 안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특히 AC를 읽는 우리에게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경고가 됩니다. 말씀의 속뜻과 상응을 많이 알고,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아르카나를 이해한다고 해서 그것 자체가 영적 생명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러한 지식 때문에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은 진리를 알고 있다고 여기고, 그 지식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며, 실제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을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게 된다면 바로 그 교리의 ‘들’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높은 진리라 할지라도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면 겨울의 빛이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를 소멸시키지 않고 살립니다. 진리를 알수록 주님을 더 사랑하게 되고,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더 분명히 보게 되며, 이웃을 더 지혜롭게 사랑하고 실제 쓰임을 행하게 된다면 신앙과 체어리티는 형제로 함께 있는 것입니다. 신앙은 체어리티에게서 생명을 받고, 체어리티는 신앙의 진리를 통하여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배우며, 둘은 하나의 삶 안에서 결합됩니다.
따라서 AC.369에서 가장 무서운 말은 어쩌면 ‘죽였다’보다 그 앞의 ‘중요하지않게여겼다’일 수 있습니다. 체어리티의 소멸은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사랑보다 신앙을 조금 더 본질적인 것으로 여기고, 다음에는 체어리티를 신앙 뒤에 따라오는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며, 마침내는 체어리티가 없어도 신앙 자체가 사람을 구원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AC.338부터 이어져 온 가인의 길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이 먼저 그 자체로 어떤 것으로 구별되고, 점차 사랑에서 분리되고, 체어리티 없는 행위와 예배를 낳으며,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고, 마침내 자기 형제 아벨을 소멸시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우리에게 ‘당신은신앙을가지고있는가?’만을 묻지 않습니다. 오히려 ‘당신의신앙안에서아벨은살아있는가?’라고 묻습니다. 내가 믿고 고백하는 진리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살아 움직이고 있는지, 아니면 입술로는 체어리티를 인정하면서 실제로는 그것을 신앙보다 덜 중요한 것으로 밀어내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참된 신앙은 자기 형제를 죽이지 않습니다. 체어리티와 함께 살며,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그리고 그 체어리티의 궁극적인 근원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모든 선과 사랑의 근원이신 주님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