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5:22)

 

AC.519

 

그 당시에 태고교회와 그 뒤를 이은 교회들에서 퍼셉션의 대상이 되었던 것들로부터 교리를 구성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는 그러한 교리가 규범, 곧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진리인지를 알기 위한 규범으로 쓰이게 하려고 그런 건데, 이 일을 한 사람들을 가리켜 ‘에녹(Enoch)이라 하며, 이것이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였다(and Enoch walked with God)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구성한 교리를 또한 그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이는 ‘에녹’이라는 이름의 뜻이 ‘가르치다(instruct)라는 데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또한 이는 ‘동행하다(walk)라는 표현의 의미와, 그가 여호와가 아닌 하나님과 동행하였다(walked with God, not with Jehovah)라고 하는 사실에서도 분명해집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walk with God)은 신앙의 교리에 따라 가르치고, 또 살아가는 것을 뜻하지만, ‘여호와와 동행하는 것(walk with Jehovah)은 사랑의 삶(life)을 사는 것, 곧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무엇을 하든 그 동기가 ‘사랑하기 때문에’라는 것이지요. ‘동행하다(walk)라는 말은 살아가는 걸 의미하는 상용 표현으로, ‘율법 안에서 살아가다(walk in the law), ‘규례 안에서 살아가다(walk in the statutes), ‘진리 안에서 살아가다(walk in the truth)와 같은 표현이 그러합니다. ‘동행하다(walk)라는 표현은 본래 길과 관련된 말로서, 진리와 관련되며, 따라서 신앙이나 신앙의 교리와 관련됩니다. 성경에서 ‘동행하다(walking)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다음의 말씀들에서 어느 정도 분명해집니다. There were some at that time who framed doctrines from the things that had been matters of perception in the most ancient and succeeding churches, in order that such doctrine might serve as a rule whereby to know what was good and true: such persons were called “Enoch.” This is what is signified by the words, “and Enoch walked with God”; and so did they call that doctrine; which is likewise signified by the name “Enoch,” which means to “instruct.” The same is evident also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 expression to “walk,” and from the fact that he is said to have “walked with God,” not “with Jehovah”; to “walk with God” is to teach and live according to the doctrine of faith, but to “walk with Jehovah” is to live the life of love. To “walk” is a customary form of speaking that signifies to live, as to “walk in the law,” to “walk in the statutes,” to “walk in the truth.” To “walk” has reference properly to a way, which has relation to truth, consequently to faith, or the doctrine of faith. What is signified in the Word by “walking,” may in some measure appear from the following passages.

 

[2] 미가에서는 In Micah: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6:8) He hath showed thee, O man, what is good, and what doth Jehovah require of thee, but to do judgment and the love of mercy, and to humble thyself by walking with thy God? (Micah 6:8)

 

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walk with God)은 여기서 말씀하신 것들을 따라 사는 걸 뜻합니다. 다만 여기서는 ‘하나님과(with God)라고 되어 있고, 에녹에 대해서는 또한 ‘하나님으로부터(from with God)라는 의미를 지닌 다른 말이 쓰여, 그 표현이 다소 중의적으로 사용됩니다. 시편에서는 where to “walk with God” signifies to live according to the things here indicated; here, however, it is said “with God,” while of Enoch another word is used which signifies also “from with God,” so that the expression is ambiguous. In David: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56:13) Thou hast delivered my feet from impulsion, that I may walk before God in the light of the living, (Ps. 56:13)

 

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하나님 앞에 다니는 것(walk before God)은 신앙의 진리 안에서 동행하는 것을 뜻하며, 이것이 곧 ‘생명의 빛(light of the living)입니다. 이와 같이 이사야에서는 where to “walk before God” is to walk in the truth of faith, which is the “light of the living.” In like manner in Isaiah: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9:2) The people that walk in darkness see a great light. (Isa. 9:1)

 

라고 말합니다. 또 주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So the Lord says by Moses: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니라 (26:12) I will walk in the midst, and will be your God, and ye shall be my people, (Lev. 26:12)

 

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율법의 교리에 따라 사는 것을 뜻합니다. signifying that they should live according to the doctrine of the law.

 

[3] 예레미야에서는 In Jeremiah:

 

그들이 사랑하며 섬기며 뒤따르며 구하며 경배하던 해와 달과 하늘의 뭇별 아래에서 펼쳐지게 하리니 (8:2) They shall spread them before the sun, and the moon, and to the armies of the heavens, whom they have loved, and whom they have served, and after whom they have walked, and whom they have sought, (Jer. 8:2)

 

라고 말씀하시는데, 여기서는 사랑의 것들과 신앙의 것들이 분명히 구별됩니다. 사랑의 것들은 ‘사랑하며(loving)와 ‘섬기며(serving)로 표현되고, 신앙의 것들은 ‘뒤따르며(walking)와 ‘구하며(seeking)로 표현됩니다. 모든 예언서에서는 모든 표현이 정확하게 사용되며, 어느 한 용어도 다른 용어를 대신하여 쓰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말씀에서 ‘여호와와 동행하다(walk with Jehovah) 또는 ‘여호와 앞에서 행하다(before Jehovah)라는 것은 사랑의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where a manifest distinction is made between the things of love, and those of faith; the things of love being expressed by “loving” and “serving”; and those of faith by “walking” and “seeking.” In all the prophetical writings every expression is used with accuracy, nor is one term ever used in the place of another. But to “walk with Jehovah,” or “before Jehovah,” signifies, in the Word, to live the life of love.

 

 

해설

 

이 글은 ‘에녹’의 교회가 왜 태고교회 흐름 속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지를 매우 분명하게 밝혀 줍니다. 에녹의 교회는 퍼셉션 그 자체로 살아가던 교회가 아니라, ‘퍼셉션의 내용으로부터 교리를 구성하여 보존하려 했던 교회’였습니다. 퍼셉션이 점차 약화되면서,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진리인지를 즉각적으로 알 수 없게 되자, 그것을 대신할 규범이 필요해졌고, 그 결과 교리가 형성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교리를 단순한 인간적 산물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는 주님의 섭리 안에서 허락된 보존의 방식이었습니다. 에녹이라 불린 사람들은, 이전 교회들에서 살아 있던 퍼셉션의 내용을 붙잡아, 그것을 가르칠 수 있는 형태로 정리한 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에녹(Enoch)이라는 이름 자체가 ‘가르치다(instruct)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구분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다’와 ‘여호와와 동행하다’의 차이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신앙의 교리에 따라 살고 가르치는 것을 뜻합니다. 반면 여호와와 동행하는 것은 사랑의 삶, 곧 쓰임새의 삶을 직접 사는 것을 뜻합니다. 이 구분은 결코 사소하지 않습니다. 이는 교회의 중심이 퍼셉션과 사랑의 삶에서 교리와 신앙의 삶으로 이동했음을 보여 주는 결정적 표시입니다.

 

동행하다(walk)라는 표현 자체도 이 변화를 잘 드러냅니다. 동행은 길과 관련된 말이며, 길은 진리와 연결됩니다. 그래서 말씀에서 ‘동행하다’는 주로 신앙과 교리, 진리의 길을 따라 사는 것을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러 예언서의 구절들을 통해, 이 표현이 얼마나 일관되고 정확하게 사용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사랑과 관련된 표현과, 신앙과 관련된 표현이 결코 뒤섞여 쓰이지 않는다는 점이 특히 강조됩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글은 오늘날 교회의 현실을 깊이 비추는 거울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감정적 친밀감이나 개인적 체험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에녹의 교회가 보여 주는 동행은, ‘교리를 통해 신앙의 방향을 유지하는 삶’입니다. 이는 살아 있는 퍼셉션이 약해진 시대에, 신앙을 지키는 매우 현실적인 방식입니다.

 

동시에 이 글은 교리의 한계도 암시합니다. 교리는 생명을 대신할 수는 없지만, 생명이 사라지는 것을 막는 그릇이 될 수는 있습니다. 에녹의 교회는 바로 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퍼셉션이 직접 작동하던 시대는 지나가고 있었지만, 그 진리들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도록, 교리라는 형태로 다음 시대에 전해지도록 준비한 것입니다.

 

결국 AC.519는 에녹의 교회를 ‘보존의 교회’, ‘가르침의 교회’로 규정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말은, 신앙의 교리를 따라 살고 그것을 가르친다는 뜻이며, 이는 퍼셉션이 약화된 시대 속에서도 주님께서 교회의 생명을 이어 가시는 섭리의 한 방식이었습니다. 이 글은 교회 역사뿐 아니라, 오늘 우리의 신앙이 어디에 서 있는지를 성찰하게 만드는 깊은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AC.518, 창5: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C.518-519)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nd Enoch walked with God after he begat Methuselah three hundred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창5:22) AC.518 ‘하나님과 동행하며’(walk with 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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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nd Enoch walked with God after he begat Methuselah three hundred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5:22)

 

AC.518

 

‘하나님과 동행하며’(walk with God)는 신앙에 관한 교리를, ‘자녀들을 낳았으며’(begat sons and daughters)는 진리와 선에 관한 교리적인 것들을 의미합니다. To “walk with God” signifies doctrine concerning faith. That he “begat sons and daughters” signifies doctrinal matters concerning truths and goods.

 

 

해설

 

이 글은 ‘에녹(Enoch)이라는 교회가 지닌 성격을 아주 분명한 방향으로 규정해 줍니다. 여기서 핵심은, 이전 교회들처럼 퍼셉션 그 자체가 중심이 아니라, ‘교리(doctrine)가 중심으로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표현을 삶의 친밀함이나 경건의 정서로 읽기 쉽지만, 스베덴보리는 이를 신앙에 관한 교리로 해석합니다. 이는 에녹의 교회가 신앙의 내용을 ‘체계적으로 보존하고 전수하는 단계’에 이르렀음을 뜻합니다.

 

퍼셉션이 살아 있던 초기 태고교회에서는,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굳이 교리로 정리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퍼셉션, 곧 선과 진리에 관한 인식이 직접적이었기 때문이에요. 그냥 알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주님으로 말미암아서요. 그러나 퍼셉션이 점차 약화되면서 선과 진리에 관한 주님의 뜻을 알기가 어렵게 되었고, 이걸 그대로 두었다가는 교회의 생명이 사라질 위험이 커졌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교리가 필요해집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말이 교리를 뜻한다는 것은, 신앙이 더 이상 즉각적인 인식, 곧 퍼셉션이 아니라 ‘배워야 하고 지켜야 할 내용’으로 정리되기 시작했음을 보여 줍니다.

 

자녀들을 낳았다는 표현 역시 같은 흐름 안에 놓여 있습니다. 앞선 교회들에서는 자녀들이 퍼셉션된 진리와 선 자체를 가리켰다면, 여기서는 그것들이 ‘교리적 형태’로 나타납니다. 즉, 퍼셉션으로 그때그때 직접 인식하는 진리와 선이 아니라, 가르칠 수 있고 전달할 수 있는 교리로서의 진리와 선으로 말입니다.

 

이 점에서 에녹의 교회는 매우 중요한 전환점에 있습니다. 퍼셉션의 생명이 약해졌지만, 그 대신 교리를 통해 신앙의 핵심을 보존하려는 시도가 시작됩니다. 이것은 쇠퇴의 증거이면서 동시에 은혜의 방편입니다. 생명이 사라져 가는 상황 속에서, 주님께서는 교리를 통해 다음 시대를 위한 씨앗을 남기신 것입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글은 신앙의 두 가지 양식을 분명히 구분해 줍니다. 하나는 살아 있는 퍼셉션에 의해 이끌리는 신앙이고, 다른 하나는 교리를 통해 길을 찾는 신앙입니다. 천사들처럼 퍼셉션으로 하는 신앙생활이 계속 가능했다면 더 좋았겠지만, 전자가 사라졌다고 해서 후자가 무가치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점점 어두워져 가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는 에녹의 교회처럼, 교리는 다음 시대를 준비하는 유일한 ‘보존의 그릇’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모습도 이와 닮아 있어요. 많은 경우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말할 때, 마음의 느낌이나 개인적 체험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동행을 교리로 설명합니다. 이는 신앙이 감정이나 분위기에 머무르지 않고, 분명한 내용과 구조를 가져야 함을 일깨워 줍니다.

 

결국 AC.518은 에녹의 교회를 ‘교리의 교회’로 또렷하게 규정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교리 속에서 유지되고, 자녀들은 그 교리가 담고 있는 진리와 선입니다. 이 글은 퍼셉션이 약화된 시대에도, 주님께서 교리를 통해 신앙의 생명을 이어 가신다는 사실을 조용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AC.519, 창5:22, ‘하나님과 동행하며’(walk with God)의 속뜻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22) AC.519 그 당시에 태고교회와 그 뒤를 이은 교회들에서 퍼셉션의 대상이 되었던 것들로부터 교리를 구성한 사람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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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17, 창5:21, ‘에녹’(Enoch) 이야기를 시작하며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창5:21) AC.517 ‘에녹’(Enoch)이라 하는 교회의 퀄러티는 이어지는 절들에서 설명드리겠습니다. The quality of the church “Enoch” is described in the following ver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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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said, Let there be an expanse in the midst of the waters, and 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in the waters. And God made the expanse, and made a distinction between the waters which were under the expanse, and the waters which were above the expanse; and it was so. (1:6, 7)

 

AC.24

 

하나님의 영, 곧 주님의 자비가 참되고 선한 지식을 낮으로 이끌어 내시고, 첫 빛, 곧 주님이 계시며, 그분이 선 자체이시고 진리 자체이시며, 그분으로 말미암지 않는 선과 진리는 없는 그런 빛을 주신 후, 주님은 속 사람과 겉 사람, 곧 속 사람 안에 있는 지식과 겉 사람에 속한 기억 지식(2)을 구별하십니다. 속 사람을 ‘궁창’(expanse), 속 사람 안에 있는 지식을 ‘궁창 위의 물’(the waters above the expanse)이라 하며, 겉 사람의 기억 지식은 ‘궁창 아래의 물’(the waters beneath the expanse)이라 합니다. After the spirit of God, or the Lord’s mercy, has brought forth into day the knowledges of the true and of the good, and has given the first light, that the Lord is, that he is good itself, and truth itself, and that there is no good and truth but from him, he then makes a distinction between the internal man and the external, consequently between the knowledges [cognitiones] that are in the internal man, and the memory-knowledges [scientifica] that belong to the external man.2 The internal man is called an “expanse”; the knowledges which are in the internal man are called “the waters above the expanse”; and the memory-knowledges of the external man are called “the waters beneath the expanse.”

 

2. ‘지식’(knowledges, cognitiones)이란 우리가 실제로 알고 있는 것들을 뜻하는데, 예를 들면 우리가 ‘나는 단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안다’라고 말할 때의 그 앎입니다. 반면 ‘기억 지식’(memory-knowledges, scientifica)은 외적 기억 속에 들어 있는 것들로, 신학적인 것이든 그 밖의 것이든 온갖 종류가 대량으로 축적되어 있는 것들을 말합니다. 이 두 용어에 대한 스베덴보리 자신의 정확한 정의는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27번, 896번, 1486번, 2718번, 5212번을 보시고, 또 편집자의 서문 주해도 참고하세요. Knowledges [cognitiones] are what we really know, as when we say “I do not merely think so, I know it.” Memory-knowledges [scientifica] are what we have in the external memory—a vast accumulation of all kinds, theological and otherwise. For precise definitions of these words by Swedenborg himself, see Arcana Coelestia, n. 27, 896, 1486, 2718, 5212. See also the Reviser’s Prefatory Notes. [Reviser]

 

[2] 사람은 거듭남이 시작되기 전에는 속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며, 더욱이 그 성질과 상태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서로 구별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 속에 깊이 잠겨 있으며, 그 결과 속 사람에 속한 것들까지 그 안에 잠기게 하여, 서로 구별되는 것들을 혼란스럽고 어두운 하나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으라’(Let there be an expanse in the midst of the waters) 하시고, 그 다음에 ‘물과 물로 나뉘라’(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in the waters) 하시는 것입니다. 이후 나오는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라’(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which are under the expanse and the waters which are above the expanse)고는 아직은 아니고 말입니다. Man, before he is being regenerated, does not even know that any internal man exists, much less is he acquainted with its nature and quality. He supposes the internal and the external man to be not distinct from each other. For, being immersed in bodily and worldly things, he has also immersed in them the things that belong to his internal man, and has made of things that are distinct a confused and obscure unit. Therefore it is first said, “Let there be an expanse in the midst of the waters,” and then, “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in the waters”; but not, “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which are under the expanse and the waters which are above the expanse,” as is afterwards said in the next verses: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8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1:7, 8) And God made the expanse, and made a distinction between the waters which were under the expanse, and the waters which were above the expanse, and it was so. And God called the expanse heaven (Gen. 1:7–8).

 

[3] 따라서 사람이 거듭남의 과정에서 다음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은, 속 사람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속 사람 안에 있는 것들은 오직 주님께 속한 선과 진리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거듭남을 받는 동안, 그의 겉 사람은 여전히 자기가 행하는 선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자기가 말하는 진리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깁니다. 이런 실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국 이러한 자기 본성, 곧 이런 자신의 것들을 통해 주님에 의해 인도되어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먼저 궁창 아래의 물들의 구별이 언급되고, 그 다음에 궁창 위의 물들이 언급됩니다. 또한 이것은 천국의 아르카나인데, 사람은 감각의 착각이나 욕정과 같은 자기 자신의 것들에 의해서도 주님에 의해 참된 것과 선한 것들로 이끌리고 굽혀진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거듭남의 모든 움직임과 순간은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나 저녁에서 아침으로, 곧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또는 ‘땅’(earth)에서 ‘하늘’(heaven)로 진행되며, 이런 이유로 이제 궁창, 곧 속 사람을 가리켜 ‘하늘’(heaven)이라 하는 것입니다. The next thing therefore that man observes in the course of regeneration is that he begins to know that there is an internal man, or that the things which are in the internal man are goods and truths, which are of the Lord alone. Now as the external man, when being regenerated, is of such a nature that he still supposes the goods that he does to be done of himself, and the truths that he speaks to be spoken of himself, and whereas, being such, he is led by them of the Lord, as by things of his own, to do what is good and to speak what is true, therefore mention is first made of a distinction of the waters under the expanse, and afterwards of those above the expanse. It is also an arcanum of heaven, that man, by things of his own, as well by the fallacies of the senses as by cupidities, is led and bent by the Lord to things that are true and good, and thus that every movement and moment of regeneration,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proceeds from evening to morning, thus from the external man to the internal, or from “earth” to “heaven.” Therefore the expanse, or internal man, is now called “heaven.”

 

 

해설

 

이 글은 창세기 1장의 둘째 날, 곧 ‘궁창’의 창조가 인간 거듭남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가장 체계적으로 풀어 주는 핵심 본문입니다. 앞선 글들에서 주님의 자비가 리메인스(remains)를 품고, 빛이 처음 인식되기 시작했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내적 구조의 분화’, 곧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구별이 시작됩니다. 이것은 거듭남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질서를 분명히 합니다. 주님은 참되고 선한 지식을 ‘’으로 이끌어 내시고, 주님 자신이 선 자체이시며, 진리 자체이시고, 모든 선과 진리가 그분으로 말미암는, 그런 첫 빛을 주신 뒤에야, 비로소 속 사람과 겉 사람을 구별하십니다. 다시 말해, ‘구별은 빛 이후에만 가능’합니다. 빛이 없으면 모든 것이 섞여 있고, 구별은 혼란을 낳을 뿐입니다.

 

여기서 속 사람을 가리켜 ‘궁창(expanse)이라고 합니다. 궁창을 가리켜 위와 아래를 나누는 중간 영역이면서, 동시에 하늘이라고 하는데요, 이는 속 사람이라는 것이 단순히 마음의 깊은 층이라는 심리적 개념이 아니라, 주님의 선과 진리가 머무는 하늘의 영역임을 뜻합니다. 속 사람 안에 있는 지식은 ‘궁창 위의 물’이라 하고, 겉 사람의 기억 지식은 ‘궁창 아래의 물’이라 합니다. 이 구분은 지식의 내용 차이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근원의 차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거듭남 이전의 인간은 이 구별을 전혀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속 사람의 존재 자체를 모르고, 혹시 알아도 속 사람과 겉 사람은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 속에 깊이 잠겨 있고, 그 결과 속 사람의 것들까지도 동일한 차원으로 끌어내려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것들이 섞이면, 명확한 구별은 사라지고, 모든 것이 혼탁한 하나로 느껴집니다. 이것이 거듭남 이전 인간의 내면 상태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본문에서도 매우 섬세한 표현이 사용됩니다. 처음에는 ‘물 가운데 궁창이 있으라’라고만 하십니다. 곧바로 위와 아래의 물을 명확히 나누라고는 하지 않으시고요. 이는 사람이 처음에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을 어렴풋이 인식할 뿐, 그 안의 질서와 차이를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후에야 비로소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의 구별이 명확히 언급되는데, 이런 문장 순서 자체가 인간 거듭남의 실제 진행 순서를 그대로 반영합니다.

 

이 단계에서 사람은 중요한 인식을 하나 얻게 됩니다. 속 사람이 존재하며, 그 안에 있는 것들은 주님께 속한 선과 진리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겉 사람은 여전히 자기중심적입니다. 이 와중에도 그는 자기가 행하는 선을 자기에게서 나온 걸로 여기고, 자기가 말하는 진리도 자기 생각의 산물로 여깁니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한데,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문제 삼기보다는 오히려 ‘주님의 섭리의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주님은 사람이 여전히 자기 자신의 것이라고 느끼는 그 선과 진리를 통해서도, 사람을 실제로 선과 진리로 이끄십니다. 즉, 주님은 인간의 본성과 착각을 즉시 제거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것을 통로로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먼저 궁창 아래의 물, 곧 겉 사람의 지식과 활동이 언급되고, 그 다음에야 궁창 위의 물이 언급됩니다. 이는 인간의 경험 순서에 맞춘 주님의 배려, 신적 배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천국의 아르카나를 밝힙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의 것들, 곧 감각의 착각과 욕정에 의해서조차, 주님에 의해 참되고 선한 것들한테로 이끌리고 굽혀진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인간의 오류와 약함마저도 주님의 섭리 안에 있다는 뜻이지요. 물론 이것이 자기중심적 삶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지만, 거듭남의 실제 과정이 얼마나 점진적이고 주님의 인내로 가득한지를 보여 줍니다.

 

이 때문에 거듭남의 모든 움직임은 ‘저녁에서 아침으로’ 진행됩니다. 이는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방향성의 선언입니다.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땅에서 하늘로,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것이 주님의 불변의 방식입니다. 이 과정은 단번에 일어나지 않고, 수없이 반복되며 점점 더 깊어집니다.

 

그래서 마침내 궁창, 곧 속 사람은 ‘하늘’이라 불립니다. 이는 인간 안에 하늘이 세워졌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하늘과 연결될 수 있는 내적 영역이 열렸다는 뜻입니다. 이 하늘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주님이 질서와 자비로 세우신 것입니다. AC.24는 이처럼 거듭남의 구조적 중심을 밝혀 주며, 창세기 1장의 둘째 날이 단순한 우주론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재조직에 대한 계시임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AC.23, 창1:5, 말씀에 나오는 '날'(day)의 속뜻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창1:5) AC.23 말씀에서 ‘날’(day)이 시간 자체를 뜻하는 용례보다 더 흔한 것은 없습니다. 이사야에 보면, Nothing is more common in the Word than for “day” 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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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5:21)

 

AC.517

 

‘에녹’(Enoch)이라 하는 교회의 퀄러티는 이어지는 절들에서 설명드리겠습니다. The quality of the church “Enoch” is described in the following verses.

 

 

해설

 

이 문장은 새로운 내용을 제시하기보다, ‘독자의 시선을 앞으로 이끄는 표지판’ 역할을 합니다. 지금까지는 이름들을 통해 교회의 연속과 단계만을 간략히 언급해 왔다면, 여기서부터는 ‘에녹’의 교회가 지닌 고유한 성격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즉, 단순한 나열에서 벗어나 ‘질적인 설명’으로 전환된다는 신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굳이 이 문장을 따로 적어 둔 것은, ‘에녹’이 태고교회의 흐름 속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앞선 교회들은 비교적 자연스러운 쇠퇴의 연속선상에 놓여 있었지만, 에녹의 교회에서는 주님께서 어떤 것을 ‘보존하시는 섭리’가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래서 그는 성급히 설명하지 않고, 다음 절들에서 차분히 그 성격을 풀어 갈 준비를 합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문장은 말씀을 읽는 태도에 대한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어떤 대목에서는 서둘러 결론을 내리기보다, 이어질 설명을 기다리며 흐름을 따라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에녹의 교회는 그렇게 ‘기다리며 읽어야 하는’ 지점에 놓여 있다 할 수 있습니다.

 

결국 AC.517은 태고교회의 이야기 속에서 ‘에녹이라는 전환점이 시작됨을 알리는 예고’입니다. 다음 절들에서 퍼셉션이 어떻게 보존되고, 교회의 생명이 어떤 방식으로 이어지게 되는지가 본격적으로 밝혀질 것을 준비시키는 한 문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516, 창5:21,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AC.516-517)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And Enoch lived sixty and five years, and begat Methuselah. (창5:21) AC.516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에녹’(Enoch)은 일곱 번째 교회를, ‘므두셀라’(Methuselah)는 여덟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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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And Enoch lived sixty and five years, and begat Methuselah. (5:21)

 

AC.516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에녹’(Enoch)은 일곱 번째 교회를, ‘므두셀라’(Methuselah)는 여덟 번째 교회를 의미합니다. By “Enoch,” as before said, is signified a seventh church; and by “Methuselah” an eighth.

 

 

해설

 

이 글은 짧지만, 창세기 5장 전체를 꿰는 매우 중요한 분기점에 해당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에녹’과 ‘므두셀라’를 단순히 앞선 이름들과 같은 선상에 두지 않고, 명확하게 ‘교회의 단계’로 규정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에녹을 ‘일곱 번째 교회’로 지칭하는 것은, 그가 이전의 흐름과 질적으로 다른 상태임을 분명히 하는 선언입니다.

 

앞선 여섯 단계, 즉 아담에서 야렛까지의 흐름은 하나의 큰 방향성을 공유합니다. 그것은 ‘퍼셉션이 점점 외적이 되어 가는, 그러니까 흐릿해져 가는 과정’입니다. 주님과 직접 연결된 내적 인식에서 출발하여, 점차 인간의 자의식, 외적 지식, 형식적 경건, 외적 생활 중심의 신앙으로 이동해 가는 과정이지요. 이 흐름은 쇠퇴이지만, 동시에 섭리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 쇠퇴 자체를 막으시기보다, 그 안에서 무엇인가를 보존하십니다.

 

그 보존의 결정적 형태가 바로 ‘에녹’입니다. 그래서 에녹은 단순히 ‘야렛 다음에 나온 또 하나의 이름’이 아니라, 앞선 여섯 단계 전체를 수렴하고 정리하는 ‘별도의 교회’로 불립니다. 에녹은 ‘퍼셉션의 상태’라기보다, ‘퍼셉션이 사라진 시대 속에서 진리가 의식적으로 보존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더 이상 사람들 전체가 직관적으로 주님을 아는 시대는 아니지만, 그 대신 진리가 정리되고, 저장되고, 훗날을 위해 보관되는 단계입니다.

 

이 점에서 에녹은 이전 교회들과 결정적으로 다릅니다. 앞선 단계들은 모두 ‘살았고 죽었더라’로 끝납니다. 이는 그 상태들이 더 이상 살아 있는 교회로 지속되지 못했음을 뜻합니다. 그러나 에녹은 이후 본문에서 ‘죽었더라’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로 표현됩니다. 이것은 에녹이 ‘종결된 교회’가 아니라, ‘보존된 교회’임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감추어진 것입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곧바로 ‘므두셀라’를 여덟 번째 교회로 연결합니다. 이 역시 매우 중요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에녹을 특별한 예외처럼 생각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에녹에서 끝내지 않습니다. 에녹은 목적지가 아니라, 연결 고리입니다. 에녹이 진리를 ‘보존하는 교회’라면, 므두셀라는 그 보존된 진리가 실제 역사 속에서 ‘연장되고 지속되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므두셀라가 성경에서 가장 오래 산 인물로 기록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것은 생물학적 장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존된 진리가 가장 오랫동안 유지되었다’는 상응적 표현입니다. 즉, 에녹을 통해 저장된 진리의 ‘씨앗’이, 므두셀라라는 단계에서 장기간 인류 안에 남아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 진리의 연장은 결국 노아의 교회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볼 때 AC.516은 단순한 주석 문장이 아닙니다. 이 문장은 창세기 5장이 ‘쇠퇴의 기록’이 아니라, ‘보존의 역사’임을 선언하는 열쇠 문장입니다. 인간의 퍼셉션은 사라질 수 있지만, 주님의 섭리는 끊어지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직접 아는 교회가 끝날 때, 기억하는 교회를 일으키시고, 기억하는 교회가 위태로워질 때, 기록되고 보존되는 교회를 준비하십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말하면, 에녹과 므두셀라는 오늘 우리에게 매우 현실적인 위로를 줍니다. 우리가 더 이상 태고교회처럼 주님을 ‘자연스럽게’ 느끼지 못해도, 우리의 신앙이 형식적이고 외적으로 느껴져도, 주님께서는 그 시대에 맞는 방식으로 진리를 보존하십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이 에녹의 상태라면, 우리는 ‘느끼지는 못해도 지키기는 하는 신앙’의 자리에 서 있는 것이고, 므두셀라의 상태라면 ‘그 진리를 오래 견디며 다음 시대까지 넘겨주는 신앙’의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AC.515, 창5:19-20, ‘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육십이 세를 살

19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0그는 구백육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Jared lived after he begat Enoch eight hundred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Jared were nine hund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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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0그는 구백육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Jared lived after he begat Enoch eight hundred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Jared were nine hundred sixty and two years, and he died. (5:19, 20)

 

AC.515

 

이 말씀의 의미 또한 앞서 나온 유사한 말씀들의 의미와 같습니다. 홍수 이전 사람들의 연령이 야렛의 경우 구백육십이(962) 년, 므두셀라의 경우 구백육십구(969) 년과 같이 그렇게까지 길었을 리 없다는 점은 누구에게나 분명해 보입니다. 특히 다음 장 셋째 절에서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는 대목에서, 주님의 신적 자비로 더 말씀드릴 내용들로부터는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해(years)의 숫자는 어떤 개인의 나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때와 상태들(times and states)을 의미합니다. The signification of these words also is similar to that of the like words above. That the ages of the antediluvians were not so great, as that of Jared nine hundred and sixty-two years, and that of Methuselah nine hundred and sixty-nine years, must appear to everyone, especially from what of the Lord’s Divine mercy will be said at verse 3 of the next chapter, where we read, “Their days shall be a hundred and twenty years”; so that the number of the years does not signify the age of any particular man, but the times and states of the church.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6:3)

 

 

해설

 

이 글은 다시 한번 창세기 5장의 연령 기록을 ‘문자 그대로 읽지 말아야 할 이유’를 분명히 짚어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논쟁적으로 말하지 않고, 상식에 호소합니다. 야렛이 구백육십이(962) 년을 살았고, 므두셀라가 구백육십구(969) 년을 살았다고 이해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이지요. 그는 이 점을 굳이 길게 변증하지 않습니다. 이미 앞에서 제시된 해석 원리가 충분히 작동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특히 다음 장에서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6:3)라는 말씀이 나온다는 점을 미리 언급하는 것은 매우 중요해요. 이것은 성경 자체가 문자적 연령 해석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만약 앞선 연령들이 실제 나이를 뜻한다면, 이 말씀은 설명하기 어려워집니다. 하지만 연령을 교회의 상태와 때로 읽으면, 오히려 두 본문은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여기서 다시 확인되는 핵심은 이것입니다. 창세기 5장에 나오는 해들의 숫자는 한 사람의 생물학적 수명을 기록하려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생명이 지속된 상태의 길이와 성격’을 말합니다. 오래 살았다는 표현은 생명이 오래 유지되었다는 뜻이지, 육체가 오래 버텼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야렛이나 므두셀라의 ‘장수(長壽)는 교회의 어떤 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되었음을 가리킵니다. 그것이 선하든, 점차 쇠퇴하든, 중요한 것은 그 상태가 한동안 유지되었다는 사실이에요. 숫자는 그 상태의 질과 지속성을 나타내는 언어입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설명은 신앙을 평가하는 기준에 대해 중요한 통찰을 줍니다. 우리는 종종 ‘얼마나 오래’라는 질문으로 신앙을 가늠하려 합니다. 신앙 연수가 길면 더 성숙할 것이라 기대하지요.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보다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그 시간 동안 어떤 상태가 유지되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같은 백 년이라도, 퍼셉션이 살아 있는 상태로 지낸 백 년과, 이미 생명이 약화된 상태로 지낸 백 년은 전혀 다릅니다. 창세기 5장의 숫자들은 바로 이 차이를 말하고자 합니다.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그 시간 속에 어떤 생명이 있었는가’가 본질입니다.

 

또한 이 글은 성경을 읽을 때 생기는 불필요한 논쟁을 조용히 정리해 줍니다. 연령의 역사적 정확성을 따지는 데 에너지를 쏟기보다, 그 연령이 가리키는 교회의 상태를 읽는 데 마음을 두라는 초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성경을 더 깊이 존중하는 방식으로 봅니다.

 

결국 AC.515는 앞서 반복해 온 원리를 다시 한번 단단히 고정합니다. 창세기 5장의 해와 연령들은 개인의 전기가 아니라, 교회의 생명사를 기록한 언어입니다. 이 관점을 붙들 때, 이 장은 더 이상 낯선 숫자의 나열이 아니라, 퍼셉션과 사랑의 생명이 어떻게 이어지고 약화되어 가는지를 보여 주는 깊은 기록으로 읽히게 됩니다.

 

 

 

AC.516, 창5:21,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AC.516-517)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And Enoch lived sixty and five years, and begat Methuselah. (창5:21) AC.516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에녹’(Enoch)은 일곱 번째 교회를, ‘므두셀라’(Methuselah)는 여덟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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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14, 창5:18, ‘마할랄렐과 에녹 사이에 있는 야렛’

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And Jared lived a hundred sixty and two years, and begat Enoch. (창5:18) AC.514 ‘야렛’(Jared)이라 하는 교회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서술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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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1:5)

 

AC.23

 

말씀에서 ‘날’(day)이 시간 자체를 뜻하는 용례보다 더 흔한 것은 없습니다. 이사야에 보면, Nothing is more common in the Word than for “day” to be used to denote time itself. As in Isaiah:

 

6너희는 애곡할지어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니 전능자에게서 멸망이 임할 것임이로다, 9보라 여호와의 날 곧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이르러 땅을 황폐하게 하며 그중에서 죄인들을 멸하리니, 13그러므로 나 만군의 여호와가 분하여 맹렬히 노하는 날에 하늘을 진동시키며 땅을 흔들어 그 자리에서 떠나게 하리니, 22그의 궁성에는 승냥이가 부르짖을 것이요 화려하던 궁전에는 들개가 울 것이라 그의 때가 가까우며 그의 날이 오래지 아니하리라 (13:6, 9, 13, 22) The day of Jehovah is at hand. Behold, the day of Jehovah cometh. I will shake the heavens, and the earth shall be shaken out of her place in the day of the wrath of mine anger. Her time is near to come, and her days shall not be prolonged (Isa. 13:6, 9, 13, 22).

 

7이것이 옛날에 건설된 너희 희락의 성 곧 그 백성이 자기 발로 먼 지방까지 가서 머물던 성읍이냐, 15그날부터 두로가 한 왕의 연한 같이 칠십 년 동안 잊어버린 바 되었다가 칠십 년이 찬 후에 두로는 기생의 노래 같이 될 것이라 (23:7, 15) Her antiquity is of ancient days. And it shall come to pass in that day that Tyre shall be forgotten seventy years, according to the days of one king (Isa. 23:7, 15).

 

‘날’(day)이 시간을 뜻하는 데 사용되기 때문에, 또한 그 시간의 상태를 뜻하는 데에도 사용됩니다. 예레미야에 보면, As “day” is used to denote time, it is also used to denote the state of that time, as in Jeremiah:

 

너희는 그를 칠 준비를 하라 일어나라 우리가 정오에 올라가자 아하 아깝다 날이 기울어 저녁 그늘이 길었구나 (6:4) Woe unto us, for the day is gone down, for the shadows of the evening are stretched out (Jer. 6:4).

 

20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능히 낮에 대한 나의 언약과 밤에 대한 나의 언약을 깨뜨려 주야로 그때를 잃게 할 수 있을진대, 25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주야와 맺은 언약이 없다든지 천지의 법칙을 내가 정하지 아니하였다면 (33:20, 25) If ye shall make vain my covenant of the day, and my covenant of the night, so that there be not day and night in their season (Jer. 33:20, also 25).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5:21) Renew our days, as of old (Lam. 5:21).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day)이라는 표현이 말씀에서 얼마나 폭넓고 깊게 사용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은 시간의 단위이지만, 말씀에서는 그보다 훨씬 넓은 의미를 지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이 단순히 하루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자주 사용된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이사야에서 반복되는 ‘여호와의 날’은 특정한 24시간을 뜻하지 않고, 주님의 심판과 섭리가 작동하는 한 시대 전체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은 사건이 일어나는 시점이 아니라, ‘주님의 역사 아래 놓인 기간’을 뜻합니다.

 

이사야의 인용에서 ‘그의 때(Her time)가 가까우며 그의 날(her days)이 오래지 아니하리라’라는 표현은, ‘’이 곧 ‘’와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이는 말씀에서 시간이 물리적 길이로 측정되지 않고, 상태와 목적에 따라 규정된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한 시대의 날들은 주님의 뜻이 성취되면 끝나고, 성취되지 않으면 연장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은 시계의 문제가 아니라 ‘섭리의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서 ‘’이 시간뿐 아니라 그 시간의 ‘상태’를 뜻하는 데에도 사용된다고 설명합니다. 예레미야의 ‘날이 기울어 저녁 그늘이 길었구나’라는 표현은, 하루가 끝나감을 말하는 동시에, 영적 상태가 어두워졌음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날의 기울어짐은 빛의 감소이며, 이는 곧 진리의 빛이 사라지고 있음을 뜻합니다. 저녁의 그림자들이 길어진다는 표현은, 거짓과 혼합이 점점 지배적인 상태가 되었음을 상징합니다.

 

예레미야 33장에서 말하는 ‘낮의 언약’과 ‘밤의 언약’ 역시 시간의 반복 질서를 넘어서, ‘영적 질서의 불변성’을 가리킵니다. 낮과 밤이 제때에 있는 것은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라, 주님께서 선과 진리, 그리고 인간의 상태 변화를 질서 있게 다스리고 계신다는 표지입니다. 만일 낮과 밤의 언약이 깨진다면, 그것은 곧 주님의 질서가 무너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표현은 거듭남의 질서 또한 주님의 언약 안에 있음을 암시합니다.

 

예레미야애가의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라는 기도는 특히 중요합니다. 여기서 ‘날들’은 단순한 과거의 시간들이 아니라, ‘과거의 영적 상태’, 곧 주님과 더 가까웠던 상태를 뜻합니다. 이 기도는 시간의 회귀를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상태의 회복을 구하는 간구입니다. 이는 AC.16에서 말한 ‘태고의 날들’과도 연결되며, 거듭남이란 언제나 ‘옛날’의 상태, 곧 주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로 돌아가는 것임을 보여 줍니다.

 

이 글은 창세기 1장의 ‘’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해석 원리를 제공합니다. 만일 ‘’을 문자적 시간으로만 이해한다면, 창조 이야기는 과거의 연대기적 기록으로 끝나게 됩니다. 그러나 ‘’을 시간과 상태를 함께 포괄하는 표현으로 이해하면, 창세기 1장의 여섯 날은 인간 거듭남의 여섯 상태로 자연스럽게 읽히게 됩니다. 이는 이미 AC.6에서 제시된 원리를, 말씀 전체의 용례를 통해 다시 확증하는 작업입니다.

 

결국 AC.23은 말씀의 언어가 시간 중심이 아니라 ‘상태 중심’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주님은 시계를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과 교회의 상태를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말씀에서 ‘오늘’, ‘그날’, ‘여호와의 날’, ‘옛날’이라는 표현들은 모두, 주님 앞에서의 영적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 인식을 가지고 말씀을 읽을 때, 성경은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상태를 비추는 살아 있는 거울이 됩니다.

 

 

 

AC.22, 창1:5,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AC.22-23)

5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 (창1:5) AC.22 이제 ‘저녁’(evening)이 무엇을 뜻하고 ‘아침’(morning)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분별할 수 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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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창세기 5장 두 번째 시간, 4절로 20절입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다.

 

4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5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6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7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8그는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9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10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1그는 구백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12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13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4그는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15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16야렛을 낳은 후 팔백삼십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7그는 팔백구십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18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19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0그는 구백육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5:4-20)

 

이 본문을

 

아담,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라는 제목으로 말씀 준비했습니다. 오늘 말씀에 주님이 빛을 비추셔서 이 시간 우리 영과 육이 활짝 열려 모두 들을 귀 만들어 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럼, 시작합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기독교인인 오늘 우리는 어떤 일에 대한, 어떤 상황에 대한 주님의 뜻을 어떻게 아나요? 보통은 기도 응답을 받기 위해 금식을 하거나 안수를 받거나, 아니면 여러 날 산에 올라 소위 산기도를 하거나 합니다. 성경 읽기도 하고, 목사님을 찾아가 상담을 하거나 무슨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이라는 책도 보고, 유튜브 등을 찾아보는 등 사안의 중요성이나 심각성에 따라 할 수 있는 모든 걸 합니다. 인생의 중요한 것들이지요, 보통 결혼에 대하여, 직장, 직업에 대하여, 거주지에 대하여 등 말입니다. 비슷한 노력을 비기독교인들은 점집을 찾거나 사주를 보는 등 저마다 자기들의 방식으로 애들을 씁니다. 왜들 이럴까요? 잘 모르겠어서이지요 주님의 뜻을 잘 모르겠어서 그러는 겁니다. 비기독교인들의 경우는 신의 뜻을 잘 모르겠어서라고 하겠네요. 이상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기독교인인데 왜 우리가 주님이라고 부르는 그 분의 뜻을 잘 모르는 걸까요?

 

한편으로, 그런데 여러분, 좀 우스갯소리일 수도 있지만, 그럼 천국 천사들도 주님 뜻 알기 위해 우리처럼 금식기도 하고 그럴까요? 이건 질문 자체가 좀 이상하지요? 네, 맞습니다. 천사들은 지상에 사는 우리가 하는 이런 거 안 할 거 같아요. 아니, 안 합니다. 왜죠? 천사들은 주님의 뜻을 즉시, 그리고 또렷이 알기 때문입니다. 안 그러면 그건 천사가 아니지 않을까요? 네, 맞습니다. 천국의 천사들은 우리처럼 이런 거 안 합니다. 안 하고도 늘 주님의 뜻을 즉시, 그리고 또렷이 압니다. 그리고 우리와는 다르게 그들은 알게 된 그 주님의 뜻을 마음을 다해 즉시 기쁘고 즐겁게 실행에 옮깁니다. 그들이 주님의 뜻을 순종, 즉시 실행에 옮길수록 그만큼 더 그들은 더욱더 주님의 뜻을 더 잘 알게 됩니다. 그들은 100% 주님 뜻대로만 삽니다. 그것도 기쁘고 즐겁게 자원하여 삽니다. 천사들과 주님은 서로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쌍방은 내 것이 모두 네 것 되기를 진심으로 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천사들의 이런 차이는 어디서 오는 걸까요? 즉 천사들은 즉시 아는데 우리는 왜 모를까요? 이것이 바로 퍼셉션의 차이입니다. ‘퍼셉션(perception)이란, 어떤 일과 상황에 대한 주님의 뜻, 곧 그 일, 그 상황에 대한 그분의 선과 진리를 아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알게 된 주님의 선과 진리를 실천, 거기서 오는 기쁨과 즐거움 안에 머무르는 능력입니다. 어떤 일에 대한 주님의 뜻을 안다는 건, 그 일을 주님의 진리 안에서 실천하여 주님의 선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즉, 내가 이 일을 어떻게 해야 주님이 기뻐하실까? 내가 이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일까? 를 아는 것, 이것이 바로 주님의 뜻을 아는 것입니다.

 

13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5:13-16)

 

주님의 이 마태복음 말씀처럼 우리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며,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퍼셉션 능력입니다. 우리와 천사의 차이가 바로 이 차이입니다. 이 퍼셉션이라는 능력은 각 사람의 ‘착한 행실’만큼 생깁니다. 그리고 이 ‘착한 행실’은 세상 속에서, 그러니까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이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즉, 세상을 향해 주님의 빛을 비추며, 세상에 필요한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우리가 감당하면 할수록 주님은 우리에게 주님의 뜻을 천사들처럼 쉽게 알게 하십니다. 퍼셉션이 또렷해지는 것이지요. 우리와 천사들의 퍼셉션 차이는 바로 여기에서 오는 것입니다. 천사들은 주님 뜻을 알면 즉시 순종하는 반면, 우리는 그러지 않거든요. 저들은 주님 뜻 실천하는 일에 조금도 주저하거나 망설임이 없는데 우리는 안 그러거든요. 그래서 저들은 또렷하지만 우리는 희미하며, 저들은 생생하지만 우리는 흐릿한 것입니다. 이런 것이 퍼셉션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저 이름들의 순서는 바로 이 퍼셉션이 또렷한가, 흐릿한가의 순서입니다. 저 이름들, 그러니까 아담,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이라는 이름은, 그리고 뒤에 더 나오는 므두셀라, 라멕, 그리고 노아까지, 이 이름들은 사실은 어느 한 개인들의 이름이 아니라 해당 시대를 관통하던 퍼셉션의 이름들입니다. 즉 첫 사람 아담 시대를 이끌던 퍼셉션을 일컬어 ‘아담(Adam, 사람)이라 이름한 것이며, 이런 퍼셉션으로 살던 사람들을 가리켜 ‘아담’ 교회라고 하는 것이지요. ‘(Seth), ‘에노스(Enosh)도... 등등,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첫 교회인 아담의 퍼셉션만 제일 온전했고, 이후 갈수록 점점 더 모호하고 흐릿해져 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담으로 갈수록 퍼셉션은 온전하여 어떤 일에 대한 주님의 뜻을 즉시, 그리고 분명하게 알은 반면, 반대로 에녹, 므두셀라를 거쳐 라멕에 이르러서는 거의 사라졌다는 것이지요. 이 중 이 에녹은 특별한데, 이 에녹 이야기는 다음 주에 다룰 예정입니다. 기대해 주세요.

 

이런 퍼셉션의 온도차는 비유하자면, 한 가운데 씨앗이 있는 과일과도 같고, 방 한가운데 전구가 환하게 켜져 있는 것과도 같습니다. 과일의 중심으로 갈수록 근원이지만, 반대로 바깥 껍질 쪽으로 갈수록 근원에서 멀어지는 것과 같고, 방 한가운데로 갈수록 빛이 환하지만, 반대로 멀어질수록 빛이 흐릿해지는 것과도 같은 것처럼 말입니다. 천적 인간이요, 안식일이고, 일곱째 날이었던 아담으로 갈수록 퍼셉션은 온전한 반면, 반대로, 즉 후손, 후대로 갈수록 흐릿해진 이유는, 아담으로 갈수록 선과 진리는 하나, 곧 앎은 삶을 섬겼던 반면, 그 반대 순서로 갈수록 진리는 선에서 분리되어 앎이 삶을 누르고 머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신앙(faith)이 체어리티(charity)의 머리가 되었기 때문이지요. 원래대로라면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겨 체어리티가 입고 다니는 옷이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신앙은 단지 그릇일 뿐이고, 정작 중요한 건 거기 담긴 내용인 체어리티여야 하는데 말입니다.

 

세상 종말은 다른 게 아닙니다. 세상을 떠받치는 건 창조주이신 주님의 신성, 곧 주님의 선과 진리인데 이것이 남김없이 다 사라진 상태, 그래서 더 이상 퍼셉션이 없는, 완전히 끊긴 상태가 바로 끝, 곧 종말이요, 최후의 심판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는 한편으로는 새로운 시작입니다. 주님은 항상 각 교회 시대든, 한 국가, 한 개인이든 종말이 오기 전까지는 무슨 새로운 걸 시작하시지 않습니다. 완전히 황폐해져야, 그래서 완전히 자기를 비워내야 그 빈 그릇에 주님의 새것을 담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래 누가복음 둘째 아들 이야기는 바로 이 이야기입니다.

 

13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15:13-20)

 

우리는 우리의 무슨 신앙 연수와 상관없이 갈수록 주님의 선과 진리를 즉시, 그리고 생생하게 아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굳이 인생의 바닥까지 내려가서 깨닫지 말고 웬만하면 그런 무슨 조짐이 보이면 얼른 돌이켜 그 무한 루프, 그 끝없이 되풀이되는 그 악한 패턴에서 탈출하시기 바랍니다. 탈출이란, 위 누가복음 본문 맨 마지막 말씀처럼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 곧 주님을 찾는 것입니다. 내 생각, 내 판단, 내 선택 등 내가 끌어다 쓸 수 있는 모든 것이 다 바닥난 후, 드디어 주님을 찾는 것이지요. 이때 반드시 위 둘째 아들처럼 ‘스스로 돌이키는’ 시간, 곧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는 시간이 꼭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 말씀을 저는 오늘 설교로 여러분께 드리고 있지만, 사실은 지난날 제 얘기를 주님 앞에 말씀드리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설교

2026-01-11(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633, 26. 창5.2, 2026-01-11(D1)-주일예배(창5,4-20, AC.486-515), ‘아담,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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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1/04, 창5:1-3, 신년예배, 성찬), '창5 아담 계보의 속뜻'

2026년 첫 주일입니다. 보통은 신년 주일이라 하여 설교도 그에 맞게 준비하지만, 저희는 당분간 아주 특별한 절기 외에는 오직 이 AC에만 전념하기로 한 점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부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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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And Jared lived a hundred sixty and two years, and begat Enoch. (5:18)

 

AC.514

 

‘야렛’(Jared)이라 하는 교회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서술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성격은 앞에 있었던 ‘마할랄렐’(Mahalalel)이라는 교회와, 뒤에 이어질 ‘에녹’(Enoch)이라는 교회로부터 알 수 있는데, 야렛은 이 두 교회 사이에 위치한 중간 단계이기 때문입니다. Concerning the church called “Jared” nothing is related; but its character may be known from the church “Mahalalel” which preceded it, and the church “Enoch” which followed it, between which two it was intermediate.

 

 

해설

 

이 글은 태고교회의 전개에서 ‘말해지지 않은, 즉 언급되지 않은 단계의 의미를 읽는 법’을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야렛의 교회에 대해 직접적인 설명을 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교회가 중요하지 않거나 비어 있는 단계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앞선 교회와 뒤따르는 교회 사이에 놓인 위치 자체가 그 성격을 드러낸다고 말해요.

 

야렛은 ‘마할랄렐’과 ‘에녹’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마할랄렐은 진리에서 오는 기쁨이 쓰임새에서 오는 기쁨보다 앞서기 시작한 단계였고, 에녹은 그 이후에 무엇인가가 특별히 보존되는 단계로 등장합니다. 이 두 상태 사이에 놓인 야렛은, 한쪽으로는 진리 중심의 경향이 더욱 굳어지고, 다른 한쪽으로는 퍼셉션의 보존이 필요해질 만큼 약화되는 ‘과도기적 상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가 교회 상태를 항상 ‘연속적인 흐름’ 속에서 본다는 사실입니다. 하나의 교회는 갑자기 생겨나거나 갑자기 사라지지 않습니다. 앞선 상태의 결과이면서 동시에 다음 상태의 원인이 됩니다. 그래서 야렛의 성격은 그 자체로 설명되지 않더라도, 앞뒤를 보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고 말하는 거예요.

 

이런 서술 방식은 독자에게 해석의 책임을 넘겨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은 읽기를 요구합니다. 이미 밝혀진 원리를 적용해 보라는 초대입니다. 마할랄렐에서 드러난 경향이 야렛에서 더 진행되었고, 그 결과 에녹이라는 보존의 단계가 필요해졌다는 흐름을 읽도록 이끕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대목은 교회 역사나 개인의 신앙 여정에서도 매우 현실적인 통찰을 제공합니다. 어떤 시기는 뚜렷한 특징이나 사건으로 기억되지 않을 수 있어요. 그러나 그 시기가 앞선 변화의 연장선에 있고, 이후의 중요한 전환을 준비하는 자리라면, 결코 의미 없는 시간이 아닙니다.

 

야렛의 교회는 바로 그런 상태를 상징합니다. 눈에 띄는 새로운 특징은 없지만, 이전의 변화가 누적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직전의 긴장과 무게를 품고 있는 시기입니다. 이때는 생명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방향이 이미 결정되고 그 결과가 서서히 드러나고 있는 중간 지점이라고 할 수 있어요.

 

결국 AC.514는 언급되지 않은 것을 통해 말하는 구절입니다. 직접적인 설명이 없다는 사실 자체가, 교회 상태의 연속성과 점진성을 더 강하게 증언합니다. 야렛은 독립된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앞선 마할랄렐과 뒤이은 에녹 사이의 흐름 속에서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중간 단계였다는 것이지요.

 

 

 

AC.515, 창5:19-20, ‘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육십이 세를 살

19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0그는 구백육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Jared lived after he begat Enoch eight hundred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Jared were nine hund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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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13, 창5:18, ‘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AC.513-514)

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And Jared lived a hundred sixty and two years, and begat Enoch. (창5:18) AC.513 ‘야렛’(Jared)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여섯 번째 교회를, ‘에녹’(Enoch)은 일곱 번째 교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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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And Jared lived a hundred sixty and two years, and begat Enoch. (5:18)

 

AC.513

 

‘야렛’(Jared)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여섯 번째 교회를, ‘에녹’(Enoch)은 일곱 번째 교회를 의미합니다. By “Jared,” as before said, is signified a sixth church; by “Enoch” a seventh.

 

 

해설

 

이 글은 매우 간결하지만, 태고교회의 전개가 ‘여섯 번째에서 일곱 번째 단계로 넘어가는 분기점’에 이르렀음을 알리는 표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도 개인의 이야기를 하지 않고, 오직 교회의 상태만을 지목합니다. 이는 독자가 이미 ‘이름 = 교회 상태’라는 해석 원리를 충분히 익혔다는 전제 위에서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에요.

 

야렛(Jared)으로 상징되는 여섯 번째 교회는, 퍼셉션이 상당히 일반화되어 외적 구조와 매개에 크게 의존하는 단계였습니다. 여전히 태고교회의 흐름 안에 있지만, 중심의 생명은 더 두꺼운 외피 속에 감싸져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어요. 이 단계까지는 아직 퍼셉션의 잔존이 분명히 남아 있습니다.

 

여기서 ‘에녹(Enoch)으로 상징되는 일곱 번째 교회가 등장합니다. 이 이름의 등장은 이후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지요. 에녹은 곧 ‘보존’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즉, 퍼셉션이 계속 약화되는 흐름 속에서 주님께서 어떤 것을 ‘따로 보존하시는 단계’가 시작된다는 암시가 여기서 처음 주어집니다.

 

이렇게 보면 AC.513은 단순한 목록의 연장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말기에 접어들며 ‘질적인 전환을 예고하는 글’입니다. 여섯 번째에서 일곱 번째로 넘어가면서, 교회는 더 이상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생명의 흐름만으로 유지되기 어려운 지점에 이릅니다. 그래서 이후에는 ‘자연스러운 전승’이 아니라 ‘의도적인 보존’이라는 방식이 등장하게 됩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전환은 신앙 공동체나 개인의 신앙 여정에서도 익숙하게 발견됩니다. 어떤 단계까지는 살아 있는 인식과 전통이 자연스럽게 이어지지만, 어느 지점에 이르면 그것을 그대로 두면 사라질 수밖에 없는 순간이 옵니다. 그때 필요한 것은 새로움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을 지키는, 즉 보존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에녹’의 등장은 쇠퇴의 신호이면서 동시에 은혜의 신호입니다. 퍼셉션이 약해졌기 때문에 보존이 필요해졌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주님께서 특별한 방식으로 개입하신다는 뜻이기도 해요. 이 점을 염두에 두면, 곧 이어질 에녹에 대한 설명이 훨씬 깊이 있게 읽히게 됩니다.

 

결국 AC.513은 태고교회의 연속성 안에서, 단순한 다음 단계의 언급을 넘어, ‘보존의 섭리가 시작되는 문턱’을 가리키는 글입니다. 짧지만, 이후 전개 전체의 방향을 미리 보여 주는 중요한 이정표라고 할 수 있어요.

 

 

 

AC.514, 창5:18, ‘마할랄렐과 에녹 사이에 있는 야렛’

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And Jared lived a hundred sixty and two years, and begat Enoch. (창5:18) AC.514 ‘야렛’(Jared)이라 하는 교회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서술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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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12, 창5:16-17, ‘같은 표현이 반복되는 이유’

16야렛을 낳은 후 팔백삼십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7그는 팔백구십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Mahalalel lived after he begat Jared eight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Mah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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