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곧 이스라엘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너희가 장래 일을 내게 물으며 또 내 아들들과 내 손으로 한 일에 관하여 내게 명령하려느냐12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으며 내가 내 손으로 하늘을 펴고 하늘의 모든 군대에게 명령하였노라,18대저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을 창조하신 이 그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땅을 지으시고 그것을 만드셨으며 그것을 견고하게 하시되 혼돈하게 창조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이 거주하게 그것을 지으셨으니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21너희는 알리며 진술하고 또 함께 의논하여 보라 이 일을 옛부터 듣게 한 자가 누구냐 이전부터 그것을 알게 한 자가 누구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나니 나는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사45:11-12, 18, 21)Thus hath said Jehovah the holy one of Israel,and his former,Seek ye signs of me,signs concerning my sons,and concerning the work of my hands command ye me.I have made the earth,and created man upon it;I,even my hands have stretched out the heavens,and all their army have I commanded.For thus hath said Jehovah that createth the heavens,God himself that formeth the earth and maketh it;he establisheth it,he created it not a void,he formed it to be inhabited;I am Jehovah and there is no God else besides me(Isa. 45:11–12, 18, 21).
이 구절은Book of Isaiah 45장의 말씀으로,AC.88의 문맥에서는 ‘거듭남과 안식의 모든 과정이 오직 주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가장 강하게 선언하는 대표 구절로 사용됩니다. 문자적으로는 ‘창조주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는 절대 선언이지만, 스베덴보리의 흐름 안에서는 이것이 곧 ‘인간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영적 재창조의 주체도 오직 주님뿐이다’라는 뜻으로 열립니다.
먼저 ‘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으며...하늘을 펴고...’라는 반복은 단순한 우주 창조의 회상이 아닙니다. 여기서 ‘하늘’은 사람의 속 사람, 곧 사랑과 의지의 영역이고, ‘땅’은 겉 사람, 곧 삶과 행위의 영역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주님이 인간 안에 내적,외적 질서를 세우신다’, 곧 거듭남을 이루신다는 뜻입니다.AC.82-85에서 계속 강조된 ‘여섯 날의 일과 일곱째 날의 안식은 모두 주님의 일’이라는 주제가 여기서 다시 확증됩니다.
이어지는 ‘혼돈하게 창조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이 거주하게 지으셨다’는 말씀은 매우 중요한데, 이것은 인간의 상태가 본래 ‘질서 있고 거할 수 있는 상태’, 곧 주님과 결합될 수 있는 상태로 지어졌다는 뜻입니다. ‘혼돈’은 질서가 무너진 상태, 곧 거듭남 이전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단순히 창조 목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은 인간을 결국 안식의 상태,곧 주님이 거하실 수 있는 상태로 이끄신다’는 선언입니다.
그리고 핵심은 반복되는 이 선언입니다.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이것은 단순한 유일신 사상이 아니라,AC의 문맥에서는 ‘거듭남의 모든 과정에서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즉, 싸움도, 이김도, 질서의 회복도, 안식도 모두 주님께 속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11절의 ‘내 아들들과 내 손으로 한 일에 관하여 내게 명령하려느냐’는 표현도 의미가 깊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마치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거나, 심지어 주님의 일까지 판단하고 지시하려는 상태를 책망하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 ‘거듭남의 일은 인간이 설계하고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주님이 이루시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시는 것입니다.
이 구절 전체를AC.88의 흐름 안에서 한 문장으로 묶으면 이렇게 정리됩니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것과 마찬가지로,인간 안의 새 하늘과 새 땅도 오직 주님이 이루신다.’ 그래서 앞에서 계속 목사님께서 질문하셨던 그 문제, 곧 왜 모든 것을 ‘주님이 하신다’고 하시는가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성경적 답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우리가 새로워지는 일은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창조하실 때와 똑같이 주님이 다시 지으시는 일입니다.’ 이렇게 보시면, 창조와 거듭남, 그리고 안식이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되면서AC.88의 의미가 매우 선명해집니다.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창2:2, 3)
AC.88
영적 인간이 천적 상태가 될 때,그를 가리켜‘하나님의 일’(work of God)이라고 합니다.이는 오직 주님께서 그를 위하여 싸우셨고,그를 창조하시고,형성하시며,만들어 주셨기 때문입니다.여기‘하나님이 그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셨다’(God finished his work on the seventh day)라고 하시고,또‘그의 하시던 모든 일에서 안식하셨다’(he rested from all his work)라고 하시는 등 두 번이나 반복하시는 것은 그래서입니다.선지자들에 의해서 사람은 여러 차례‘여호와의 손과 손가락의 일’(work of the hands and of the fingers of Jehovah)이라 불립니다.예를 들면 이사야에서,거듭난 사람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데를 보면 그렇습니다.When the spiritual man becomes celestial, he is called the “work of God,” because the Lord alone has fought for him, and has created, formed, and made him; and therefore it is here said, “God finished his work on the seventh day”; and twice, that “he rested from all his work.” By the prophets man is repeatedly called the “work of the hands and of the fingers of Jehovah”; as in Isaiah, speaking of the regenerate man:
11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곧 이스라엘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너희가 장래 일을 내게 물으며 또 내 아들들과 내 손으로 한 일에 관하여 내게 명령하려느냐12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으며 내가 내 손으로 하늘을 펴고 하늘의 모든 군대에게 명령하였노라,18대저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을 창조하신 이 그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땅을 지으시고 그것을 만드셨으며 그것을 견고하게 하시되 혼돈하게 창조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이 거주하게 그것을 지으셨으니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21너희는 알리며 진술하고 또 함께 의논하여 보라 이 일을 옛부터 듣게 한 자가 누구냐 이전부터 그것을 알게 한 자가 누구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나니 나는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사45:11-12, 18, 21)Thus hath said Jehovah the holy one of Israel,and his former,Seek ye signs of me,signs concerning my sons,and concerning the work of my hands command ye me.I have made the earth,and created man upon it;I,even my hands have stretched out the heavens,and all their army have I commanded.For thus hath said Jehovah that createth the heavens,God himself that formeth the earth and maketh it;he establisheth it,he created it not a void,he formed it to be inhabited;I am Jehovah and there is no God else besides me(Isa. 45:11–12, 18, 21).
이로부터 새 창조,곧 거듭남은 오직 주님의 일임이 분명합니다. ‘창조하다’(create), ‘형성하다’(form), ‘만들다’(make)라는 표현들은 위의 구절에서‘하늘을 창조하신 이 그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땅을 지으시고 그것을 만드셨으며’(creating the heavens, forming the earth, and making it)라는 말씀처럼 구별되어 사용되었고,같은 이사야 다른 곳에서도 동일하게 구별되어 사용됩니다.예컨대,Hence it is evident that the new creation, or regeneration, is the work of the Lord alone. The expressions to “create,” to “form,” and to “make,” are employed quite distinctively, both in the above passage—“creating the heavens, forming the earth, and making it”—and in other places in the same prophet, as: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사43:7)Everyone that is called by my name,I have created him for my glory,I have formed him,yea,I have made him(Isa. 43:7),
이러한 구별은 창세기 앞 장과 본 장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며,여기 본문에서도‘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안식하시니라’(he rested from all his work which God in making created)라고 표현됩니다.내적 의미에서 이러한 표현들은 언제나 서로 구별된 뜻을 전달하며,주님을‘창조자’(creator), ‘지으신 이’(former), ‘만드시는 이’(maker)로 부르는 경우에도 동일합니다.and also in both the preceding and this chapter of Genesis; as in the passage before us: “he rested from all his work which God in making created.” In the internal sense this usage always conveys a distinct idea; and the case is the same where the Lord is called “creator,” “former,” or “maker.”
해설
이 글은 창세기2장의 안식이라는 주제를 다시 한번 더 깊은 중심으로 끌어당깁니다.AC.87이 싸움의 종식과 주님의 싸우심을 강조했다면,AC.88은 그 결과로서 ‘사람의 정체성 자체가 어떻게 바뀌는가’를 다룹니다. 천적 인간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한다는 말은, 그가 이제 자기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는 선언입니다. 이는 겸손의 표현이 아니라, 존재론적 진술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말합니다. ‘사람이 천적 상태에 이르는 과정에서 싸운 이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그 결과물 역시 사람의 공로가 아니라, 주님의 일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일’이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하신 어떤 외적 업적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 안에 이루신 상태’를 가리킵니다. 사람 자신이 곧 주님의 일이며, 주님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본문에서 ‘하나님이 그의 일을 마치셨다’는 말과 ‘그의 모든 일에서 쉬셨다’는 말이 반복됩니다. 반복은 강조가 아니라 구조를 드러냅니다. 주님의 일은 외부 세계의 창조가 아니라, 인간 안에서의 새 창조이며, 그 일이 마쳐질 때에 안식이 옵니다. 안식은 일이 끝났기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라, ‘일이 사람 안에서 완성되었기 때문에’ 옵니다.
이 점을 밝히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선지서들을 폭넓게 인용합니다. 사람을 ‘여호와의 손과 손가락의 일’이라 부르는 표현들은, 인간을 독립적 존재로 세우려는 사상과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특히 이사야에서 거듭난 사람을 가리켜 ‘내 손의 일’이라고 부르는 대목은, 거듭남이 자기 계발이나 도덕적 향상의 문제가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거듭남은 ‘새로운 창조 행위’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창조하다’, ‘형성하다’, ‘만들다’라는 세 동사가 구별되어 사용된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문학적 변주나 수사적 반복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는 이 세 표현이 각각 ‘서로 다른 내적 국면’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창조는 목적의 설정이고, 형성은 질서의 구성이며, 만들기는 실제 삶의 실현입니다. 이 구별은 창세기1–2장의 전 구조를 관통하는 핵심 원리입니다.
이사야의 구절에서 하늘을 창조하고, 땅을 형성하며, 그것을 거주하게 만들었다는 표현은, 우주에 대한 설명이면서 동시에 인간에 대한 설명입니다. 하늘과 땅은 사람 안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을 뜻하며, 거주하게 만든다는 것은 주님께서 그 안에 머무실 수 있는 상태로 만드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새 창조는 단지 새출발이 아니라, ‘주님이 거하실 처소가 다시 세워지는 일’입니다.
이 모든 논의는 한 결론으로 모입니다. 거듭남은 오직 주님의 일이라는 결론입니다. 인간은 동의하고 받아들이며 따르지만, 창조의 주체는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을 ‘창조자’, ‘형성자’, ‘만드시는 이’로 부르는 모든 표현은, 각각 다른 국면에서 동일한 진리를 가리킵니다. 인간의 구원은 인간의 작품이 아니라, 주님의 작품이라는 진리입니다.
AC.88은 안식의 의미를 다시 한번 정제합니다. 안식은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내가 더 이상 나 자신을 만들려고 애쓰지 않는 상태’입니다. 그때 비로소 주님의 일이 내 안에서 온전히 드러나며, 나는 ‘하나님의 일’로서 쉬게 됩니다.
이 지점에서 안식은 종교적 개념이 아니라, 존재의 안정 상태가 됩니다. 그리고 그 안정은, 주님께서 하신 일에 대한 신뢰에서 비롯됩니다.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사43:7)Everyone that is called by my name,I have created him for my glory,I have formed him,yea,I have made him(Isa. 43:7),
이 구절, Book of Isaiah 43:7은 AC.88의 흐름에서 매우 핵심적인 선언입니다. 앞서 보신 사45의 말씀이 ‘모든 것이 주님께로부터 온다’는 원리를 말한다면, 이 구절은 ‘그 목적이 무엇인가’를 밝혀 줍니다.
먼저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라는 표현부터 보시면, 여기서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주님의 본성과 속성’, 곧 사랑과 진리 전체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말은 ‘주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 또는 ‘주님과 결합된 상태에 있는 자’를 가리킵니다. 단순히 겉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적으로 주님과 연결된 상태의 인간을 말합니다.
그다음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라는 부분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의 해석에서 ‘영광’(glory)은 언제나 ‘신적 진리의 빛’, 곧 진리가 드러나고 빛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인간이 창조된 목적은 주님의 진리가 그 안에서 드러나고 살아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단순히 존재하기 위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담고 표현하는 존재로 지어진 것입니다.
이어지는 ‘내가 지었고(formed) 내가 만들었느니라(made)’라는 반복도 의미가 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이중 표현을 단순한 강조로 보지 않고, 서로 다른 차원을 가리키는 것으로 봅니다. ‘형성하다’(formed)는 내적 인간, 곧 의지와 사랑의 영역을, ‘만들다’(made)는 외적 인간, 곧 삶과 행위의 영역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주님이 인간의 속과 겉, 내적과 외적 전체를 모두 지으신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 말씀은 AC.88의 주제와 정확히 맞물립니다. 곧, 인간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거듭남의 과정, 그러니까 싸움, 변화, 안식 등은 모두 주님의 창조와 같은 성격을 가지며, 그 목적은 ‘주님의 영광’, 곧 진리가 그 사람 안에서 살아 움직이게 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진리가 우리 안에서 드러나도록 지어진 존재입니다.’ 이 한 문장이 이사야 43:7과 AC.88의 핵심을 아주 선명하게 담아 줍니다.
AC.50본문에,‘사람은 자신이 천사들과 영들에 의해 주님의 다스림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데,그러나 실제로는 사람마다 적어도 두 영과 두 천사가 함께 있다는 사실입니다.영들을 통해 사람은 영계와 소통하고,천사들을 통해서는 천국과 소통하는 것이지요.’라는 내용이 나오며,이에 대해‘위AC.50본문에서 말하는‘사람마다 적어도 두 영과 두 천사가 함께 있다’에서,여기서 말하는‘두 영’은 악한 영들을 말하는 거지요?’라고 물었더니ChatGPT당신의 대답은, ‘결론부터 말씀드리면,네,이해하신 방향이 맞습니다.다만 조금 더 정확히 정리하면‘모든 사람에게는 항상 두 종류의 영적 존재,곧 악한 영들과 천사들이 함께 있으며,거듭남의 여부에 따라 이들의‘존재 여부’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주도권과 영향력의 방향’이 달라진다’는 것이 핵심입니다.그리고 여기서 말하는‘두 영’은 일반적으로‘악한 영들’을 가리키는 것이 맞습니다.’였습니다.그렇다면...여기AC.87본문에 나오는‘선한 영들’은 갑자기 어디서 등장하는 건가요?
아주 정확하고 깊이 있는 질문입니다. 이 부분은 한 번 정리해 두면 이후AC읽기가 훨씬 또렷해집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AC.50에서 말하는 ‘두 영’과AC.87에서 말하는 ‘선한 영들’은 서로 모순이 아니라, ‘같은‘영들’이라는 범주 안에서의 상태 차이와 역할 차이’를 다른 각도에서 말한 것입니다.
먼저 구조를 분명히 하면 이렇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기본 구도는 ‘사람은 영들의 세계와 천국,이 두 영역 모두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항상 영들(spirits)과 연결되고, 천사들(angels)과 연결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영들’이라는 말 자체가 꼭 ‘악한 영’만을 뜻하는 고정 용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영들(the world of spirits에 속한 존재들)’은 선한 상태의 영도 있고, 악한 상태의 영도 있습니다. 다만 일반적으로 인간의 자연적 의식과 더 가까운 층위에는 ‘아직 완전히 정화되지 않은 영들’, 곧 혼합된 상태 또는 악으로 기운 영들이 많기 때문에,AC.50에서는 설명을 단순화하여 ‘두 영’을 사실상 ‘악한 영들’ 쪽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그런데AC.87에서는 관점을 조금 더 넓혀서, ‘영들 가운데에도 선한 영들이 있다’는 사실을 함께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갑자기 새로 등장한 존재가 아니라, ‘원래부터 있던 범주를 다른 면에서 조명한 것’입니다.
이걸 조금 더 명확히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첫째, ‘천사’는 이미 거듭남이 완성된 존재들, 곧 천국에 속한 존재들입니다.
둘째, ‘영들’은 그보다 아래 단계, 곧 아직 완전히 확정되지 않은 상태, 또는 인간과 더 가까운 층위에 있는 존재들입니다. 이 ‘영들’ 안에는 선한 영들, 악한 영들이 모두 포함됩니다.
셋째, 인간과의 실제 관계를 보면, 악한 영들은 인간의 낮은 본성과 결합하려 하고, 선한 영들은 인간을 더 나은 상태로 이끄는 쪽에 서며, 천사들은 더 높은 차원에서 주님의 질서를 전달합니다.
그래서AC.50에서는 ‘두 영+두 천사’라는 틀로 간단히 설명하면서, 실제 체감되는 긴장 구조, 곧 악과의 싸움을 강조한 것이고,AC.87에서는 그 ‘영들’ 안에도 선한 측면이 있다는 것을 더 풀어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영들은 한 종류가 아니라,그 안에 선한 영과 악한 영이 함께 있으며,인간은 이 둘 사이의 영향 속에서 살고,그 위에서 천사들의 인도를 받는다.’
그래서 질문하신 ‘선한 영들이 어디서 갑자기 등장했는가?’에 대한 답은, ‘새로 등장한 것이 아니라,원래‘영들’이라는 범주 안에 포함되어 있었는데,AC.50에서는 악한 쪽이 강조되었고,AC.87에서는 선한 쪽까지 풀어 설명된 것’입니다.
이 구분이 잡히시면 이후AC에서 ‘영들’이라는 표현이 나올 때 훨씬 자유로워지십니다. 어떤 문맥에서는 거의 ‘악한 영들’처럼 쓰이고, 어떤 문맥에서는 ‘선한 영들’까지 포함하는 넓은 의미로 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전체 구조 위에 ‘천사들’이 놓여 있다고 보시면, 인간의 영적 환경이 입체적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창2:2, 3)
AC.87
천적 인간을‘안식일’(sabbath),곧‘쉼’(rest)이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그가 천적 상태가 될 때 싸움이 그치기 때문입니다.이때에는 악한 영들이 물러가고,선한 영들뿐 아니라 천적 천사들이 가까이 옵니다.이들이 함께 있을 때에는,악한 영들이 도저히 머물 수 없고 멀리 도망하게 됩니다.그리고 그 싸움은 사람이 스스로 한 것이 아니라,오직 주님께서 그 사람을 위하여 하신 것이므로,주님께서‘쉬셨다’(rested)고 합니다.Another reason why the celestial man is the “sabbath,” or “rest,” is that combat ceases when he becomes celestial. The evil spirits retire, and good ones approach, as well as celestial angels; and when these are present, evil spirits cannot possibly remain, but flee far away. And since it was not the man himself who carried on the combat, but the Lord alone for the man, it is said that the Lord “rested.”
해설
이 글은 안식의 본질을 다시 한번, 그러나 이번에는 ‘영계의 질서’라는 관점에서 명확히 드러냅니다. 앞선 글들에서 안식은 신앙과 사랑의 질서가 완성된 상태로 설명되었는데,AC.87에서는 그 결과가 영적 교통의 변화로 나타납니다. 즉, 안식은 단지 인간 내부의 심리적 평온이 아니라, ‘영계와의 관계 자체가 달라진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이 안식이라 불리는 이유를 ‘싸움의 종식’에서 찾습니다. 여기서 싸움이란, 앞서 반복적으로 언급되었던 유혹과 시험, 곧 악과 거짓이 사람의 의지와 이해를 차지하려는 시도를 말합니다. 영적 단계에서는 이 싸움이 필연적이며 지속적입니다. 그러나 천적 상태에 이르면, 그 싸움은 더 이상 중심을 차지하지 않습니다. 싸움이 끝났다는 것은, 더 이상 위협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질서가 이미 세워졌다는 뜻’입니다.
이 변화는 영계의 움직임으로 표현됩니다. 악한 영들은 물러가고, 선한 영들과 더 나아가 천적 천사들이 가까이 옵니다. 이는 천적 상태가 단지 ‘조금 더 선한 상태’가 아니라, ‘전혀 다른 교통의 영역’에 속함을 뜻합니다. 천적 천사들이 임재할 때에는, 악한 영들이 머물 수 없습니다. 이는 힘의 대결 때문이 아니라, 성질의 불일치 때문입니다. 그곳에는 더 이상 그들이 붙들 수 있는 공명점이 없습니다.
이 지점에서 매우 중요한 진술이 나옵니다. 싸움은 사람이 수행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람은 싸운다고 느끼지만, 실제로는 주님께서 그 사람을 위하여 싸우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스베덴보리 영적 인간학의 핵심 가운데 하나입니다. 유혹의 시간에 인간이 느끼는 긴장과 고통은 실제이지만, ‘결정적인 힘은 언제나 주님께 속해 있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저항하거나 동의하지 않는 것이며, 싸움 자체의 수행은 주님께서 담당하십니다.
그래서 안식은 인간의 성취가 아닙니다. 사람이 모든 싸움을 잘 해냈기 때문에 오는 보상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 싸움을 끝내신 결과’입니다. 이 때문에 ‘주님이 쉬셨다’는 표현이 사용됩니다. 이는 주님께서 활동을 중단하셨다는 뜻이 아니라, 더 이상 저항할 것이 없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인간 안에서 주님의 질서가 자리를 잡았기에, 주님의 일하심이 방해받지 않게 된 상태입니다.
이 단락은 안식에 대한 인간 중심적 오해를 단호하게 교정합니다. 안식은 내가 편안해졌다는 느낌이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가 안정되었다는 표지’입니다. 악한 영들이 물러가고 선한 영들과 천적 천사들이 가까이 온다는 말은, 인간의 내적 상태가 이제 하늘의 질서와 직접적으로 호응하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안식은 심리 상태가 아니라, 존재 상태입니다.
또한 이 설명은 천적 인간의 겸손을 자연스럽게 드러냅니다. 그가 안식에 이르렀다고 해서, 자신을 싸움의 승자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는 싸움이 끝났음을 알지만, 그 싸움의 공로를 자기에게 돌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선과 생명의 근원이 자신이 아니라 주님임을 퍼셉션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천적 인간의 내적 평화입니다.
AC.87은 결국 이렇게 말합니다. 안식은 악이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라, 악이 더 이상 머물 자리를 찾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에 오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 자리는 주님으로 채워졌고, 주님의 임재가 충만할 때, 싸움은 자연스럽게 끝납니다.
이 지점까지 오면, 안식일은 더 이상 계명의 항목이 아니라, ‘인간이 도달하도록 창조된 궁극의 상태’임이 분명해집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말해지는 ‘쉼’은, 가장 깊은 생명의 활동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가장 온전한 생명이 아무런 방해 없이 흐르는 상태입니다.
AC.86에서 말하는 ‘유대교회의 안식일 전통’은 단순히 ‘일주일에 하루 쉬는 종교적 관습’이 아니라, 원래는 매우 깊은 영적 의미를 담고 있었지만, 점차 외적 규례로만 남게 된 대표적인 사례로 제시됩니다. 이 흐름을 이해하시면, 왜 스베덴보리가 안식일을 그렇게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그 ‘외적 준수’ 자체에는 큰 의미를 두지 않는지 분명해집니다.
먼저 유대교회에서 안식일은 철저히 ‘거룩하게 구별된 날’이었습니다.Bible전체를 보아도 안식일 규례만큼 엄격하게 지켜진 계명은 드뭅니다. 불을 피우는 것, 일하는 것, 심지어 아주 사소한 행위까지 제한되었고, 이를 어기면 매우 중한 처벌이 따르기도 했습니다. 이런 강도 높은 규례는 단순한 종교적 열심 때문이 아니라, 안식일이 원래 ‘주님과의 결합’, 곧 가장 깊은 거룩함을 상징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의미를 지키기 위해 외적 형태라도 엄격히 보존된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서 ‘의미’는 잊히고 ‘형식’만 남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원래 안식일은 ‘사랑과 신앙이 하나가 되어 주님 안에서 평안에 들어가는 상태’를 의미했는데, 유대교회에서는 이것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날’이라는 외적 규칙으로 축소되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곧 ‘행동을 제한하는 것’으로 이해되었고, 그 내적 의미, 곧 주님 안에서의 안식은 거의 의식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 점에서 주님의 말씀과 행동이 이해됩니다. 복음서에서 주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고,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먹는 것을 허용하신 사건들은, 단순히 규례를 완화하신 것이 아니라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회복’하신 것입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억압하는 날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날이며, 형식이 아니라 상태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흐름을AC.86에서 짚습니다. 유대교회는 내적 의미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외적 형태를 통해서라도 그 거룩함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 규례가 그렇게까지 엄격해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상응의 형식은 남아 있지만,그 속뜻은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이것을 오늘 우리에게 적용하면 매우 중요한 통찰이 됩니다. 신앙생활에서 외적 형식은 필요하지만, 그것이 내적 의미와 연결되지 않을 때는 쉽게 형식주의로 흐를 수 있습니다. 반대로 내적 의미만 강조하고 외적 삶이 따르지 않으면, 그것 역시 균형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방향은 항상 이 둘을 연결하는 데 있습니다.
정리하면, ‘유대교회의 안식일 전통’은 원래 ‘주님 안에서의 안식’이라는 가장 깊은 영적 상태를 상징하는 것이었지만, 내적 의미가 사라지면서 외적 규례로만 남게 된 사례입니다. 그리고 주님과 스베덴보리는 이 외적 형식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겨 있던 본래의 의미를 다시 열어 주는 방향으로 인도하십니다. 이렇게 보시면AC.86의 의도가 아주 분명해집니다.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창2:2, 3)
AC.86
‘여섯째 날’(sixth day)이 된 영적 인간이 이제 천적 상태로 들어가기 시작할 때,곧 이 상태는 여기서 처음으로 다루어지는 상태인데,바로‘안식일 저녁’(eve of the sabbath)이라는 것으로,유대교회가 전통적으로 저녁부터 거룩하게 지켜온 안식일은 바로 이때를 표상하는 것입니다.천적 인간은 곧 말씀드릴‘아침’(morning)입니다.When the spiritual man, who has become the “sixth day,” is beginning to be celestial, which state is here first treated of, it is the “eve of the sabbath,” represented in the Jewish church by the keeping holy of the sabbath from the evening. The celestial man is the “morning” to be spoken of presently.
이날은 준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눅23:54)
해설
이 글은 매우 짧지만, 창세기2장의 안식 구조를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정밀하게 나누어 보여주는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적 상태를 단번에 도달하는 완성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 시작과 성숙을 ‘저녁’과 ‘아침’이라는 두 단계로 구분합니다.AC.86은 바로 그 첫 단계, 곧 ‘안식일 저녁’을 다룹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저녁’이 여전히 어둠의 상태를 뜻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창세기1장에서의 저녁은 혼돈이나 무지의 상태였지만, 여기서의 저녁은 전혀 다릅니다. 이는 이미 여섯째 날, 곧 영적 질서가 완성된 이후의 저녁입니다. 다시 말해, ‘빛을 충분히 경험한 뒤에 오는 저녁’이며, 안식을 향해 기울어지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를 ‘영적 인간이 천적으로 되기 시작하는 때’라고 설명합니다. 아직 완전한 천적 인간은 아니지만, 중심이 이미 이동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신앙이 앞서던 질서에서, 사랑이 점점 주된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하는 전이 상태입니다. 이 시점에서는 싸움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지만, 그 성격이 달라집니다. 더 이상 무엇이 옳은지를 두고 치열하게 다투기보다는, ‘어디에 머물 것인가’가 문제 됩니다.
이 상태가 유대교회에서 ‘저녁부터 안식일을 지키는 것’으로 표상되었다는 설명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안식일이 아침이 아니라 저녁부터 시작된다는 점은, 안식이 인간의 활동이나 성취로 시작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안식은 먼저 내려놓음에서 시작됩니다. 하루의 일이 끝나고, 더 이상 무언가를 이루려 하지 않을 때, 안식의 문이 열립니다.
이 ‘저녁’은 아직 빛이 완전히 드러난 상태는 아니지만, 더 이상 어둠으로 돌아가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기대가 깃든 저녁’입니다. 주님께서 안식 안에서 무엇을 이루실지를 기다리는 상태이며, 인간이 스스로를 멈추고 주님의 일하심을 허락하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 저녁은 두려움의 시간이 아니라, 조용한 전환의 시간입니다.
마지막 문장에서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을 ‘아침’이라고 부르겠다고 예고합니다. 이는 다음 단락들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어질 내용이지만, 이미 여기서 방향은 분명합니다. 저녁은 시작이고, 아침은 완성입니다. 저녁은 안식으로 들어가는 문턱이고, 아침은 안식 그 자체입니다.
이 구조를 통해 우리는 안식을 다시 배우게 됩니다. 안식은 단번에 주어지는 보상이 아니라, ‘천천히 밝아오는 상태’입니다. 먼저 저녁이 있고, 그다음에 아침이 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은,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으로 옮겨 가는 한 인간 안의 변화입니다.
AC.86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지금 나는 싸움의 한복판에 있는가, 아니면 이미 안식의 저녁에 들어서 있는가’ 그리고 그 질문 자체가, 이미 안식으로 향하고 있다는 신호일지도 모릅니다.
본문 중,‘천적 인간이‘일곱째 날’(seventh day)이며,그러므로 일곱째 날이 거룩하게 구별되어 안식일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는 사실은,지금까지 드러나지 않았던 아르카나(arcana)입니다.’말인데요,이런 글을 처음 접하시는 분들,그리고 초창기 저도 그랬습니다만,이런 걸 왜 성경에 드러내지 않으셨나요?100%온전히 드러냄,그러니까 상응 뜻 전달이 온전히는 어렵더라도 지금 이 정도만이라도 설명을 곁들이셨다면,지난 세월,그렇게 많은 역사적,교회사적 혼란은 좀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이건 그러니까 산길 자동차 도로를 좀 반듯하게 놓았더라면 옛날 기술로는 어렵더라도 그래도 최대한 그랬더라면 곡선 구간으로 인한 수많은 사고를 좀 방지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걸로도 비유할 수 있겠습니다.저는 오래전 이런 사실,그러니까 이런 아르카나가 숨겨져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고는 속에 분노가 좀 일더라구요...
목사님께서 느끼셨던 그 마음, 충분히 이해됩니다. ‘이렇게 중요한 걸 왜 처음부터 분명하게 밝혀 주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AC를 처음 접하는 거의 모든 분들이 한 번쯤은 깊이 통과하는 지점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전체 맥락에서 이 문제를 보면, 그것이 ‘감추어졌다’기보다 ‘인간의 상태에 맞게 덮여 있었다’는 쪽이 더 정확한 설명이 됩니다.
먼저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자유’ 때문입니다. 주님은 인간이 외적인 강제나 압도적인 증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여 사랑하고 받아들이기를 원하십니다. 만일 성경이 처음부터 끝까지 내적 의미를 완전히 드러낸 책이었다면, 그것은 단순한 계시를 넘어 ‘강한 설득력으로 인간을 압도하는 체계’가 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진리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부정할 수 없어서’ 받아들이게 되고, 그렇다면 이것은 참된 신앙, 곧 자유 속에서 형성되는 신앙이 아닙니다. 그래서 말씀은 겉으로는 누구나 읽을 수 있지만, 속뜻은 상태가 준비된 만큼만 열리도록 주어졌습니다.
둘째는 ‘수용 능력’의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류는 초기에는 퍼셉션으로 진리를 직접 아는 상태에 있었지만, 점점 그 상태를 잃고 외적 사고와 감각 중심으로 내려왔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내적 의미를 그대로 주면, 그것은 이해되지 않거나 오히려 왜곡될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을 ‘상응의 옷’으로 입히셔서, 각 시대와 각 사람의 상태에 맞게 읽히도록 하셨습니다. 어떤 이는 역사로, 어떤 이는 도덕으로, 그리고 준비된 이들은 영적 의미로 읽게 되는 구조입니다.
셋째는 ‘보존’이라는 목적입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데, 말씀의 속뜻이 직접 드러나면 그것은 쉽게 논쟁의 대상이 되고, 인간의 지식과 논리 속에서 변형될 위험이 큽니다. 그러나 상응의 형태로 감추어져 있을 때는, 겉뜻이 일종의 보호막이 되어 본질이 손상되지 않고 보존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점 때문에 말씀이 이런 형태로 주어졌다고 설명합니다. 겉은 누구나 접근할 수 있지만, 속은 함부로 훼손될 수 없도록 말입니다.
그렇다면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혼란을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부분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여기서 중요한 전환이 하나 있습니다. 성경의 목적은 ‘혼란을 최소화하는 설명서’라기보다, ‘각 사람의 상태를 드러내고, 그 상태 안에서 주님께로 이끄는 통로’입니다. 그래서 같은 말씀을 읽어도 어떤 이는 생명을 얻고, 어떤 이는 오히려 걸려 넘어집니다. 이것이 문제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인간의 내적 상태를 드러내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만약 모든 것이 한 가지 의미로만, 누구나 동일하게 이해되도록 주어졌다면, 이런 ‘내적 분별’ 자체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금 목사님께서 보고 계신 이 사실 자체가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이제는 그 속뜻을 밝히는 것이 허락된 때’라고. 다시 말해, 과거에는 덮여 있었던 것이지만, 지금은 인류의 상태가 어느 정도 준비되었기 때문에 열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과거의 ‘감추어짐’은 실패가 아니라 과정이고, 지금의 ‘열림’은 그 과정의 결실입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느끼신 그 분노도 사실은 자연스러운 반응이지만,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이렇게 바뀔 수 있습니다. ‘왜 숨기셨는가’에서 ‘어떻게 이렇게 보존하시고,지금 나에게까지 전해지게 하셨는가’로 시선이 옮겨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같은 사실이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옵니다.
정리하면, 아르카나가 처음부터 드러나지 않았던 것은 인간을 혼란스럽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를 지키고, 각 시대의 상태에 맞게 수용되도록 하며, 동시에 진리를 손상 없이 보존하기 위한 주님의 질서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것이 열리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오히려 그 긴 과정이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증거라고 보실 수 있습니다.
13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14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사58:13, 14)If thou bring back thy foot from the sabbath,so that thou doest not thy desire in the day of my holiness,and callest the things of the sabbath delights to the holy of Jehovah,honorable;and shalt honor it,not doing thine own ways,nor finding thine own desire,nor speaking a word;then shalt thou be delightful to Jehovah,and I will cause thee to be borne over the lofty things of the earth,and will feed thee with the heritage of Jacob(Isa. 58:13–14).
이 구절, 사58:13-14은AC.85에서 말하는 ‘안식의 상태’가 실제로 어떤 것인지, 그리고 그 상태에 들어가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매우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문자적으로는 ‘안식일을 잘 지키라’는 권면이지만, 속뜻으로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주님 안에 거하는 상태’로 들어가는 길을 말합니다.
먼저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이라는 부분을 보시면, 반복해서 ‘네 것’을 내려놓으라는 요구가 나옵니다. ‘네 길’, ‘네 오락(기쁨)’, ‘네 말’ 등, 이것들은 모두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삶’을 상징합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으로 하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의지와 생각’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단순히 행동을 제한하라는 것이 아니라, ‘삶의 중심을 자기로부터 주님께로 옮기라’는 요청입니다. 이것이 안식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그다음 ‘안식일을 즐거운 날이라,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라’는 말씀은 매우 중요합니다. 안식은 억지로 지키는 규칙이 아니라 ‘기쁨으로 경험되는 상태’라는 뜻입니다. 곧, 자기 것을 내려놓는 것이 손해나 억압이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은 기쁨으로 바뀌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바로 앞에서 보신 ‘싸움 이후의 안식’입니다. 처음에는 내려놓는 것이 싸움이지만, 그 상태가 자리 잡으면 그것이 곧 기쁨이 됩니다.
그리고 결과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로 이어집니다. 여기서 ‘여호와 안에서’라는 표현이 핵심입니다. 더 이상 자기 안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결합 안에서 기쁨을 얻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바로 천적 인간의 상태이며, 사랑과 신앙이 하나가 된 상태입니다.
이어지는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는 단순한 높임이 아니라, 더 높은 차원의 삶, 곧 더 내적이고 더 자유로운 상태로 들어감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는 것은 주님의 교회적 유산, 곧 선과 진리의 풍성함 안에서 살아가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AC.85와 연결하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여섯 날 동안은 ‘내 길,내 기쁨,내 말’을 중심으로 살던 상태에서 그것을 내려놓는 싸움이 있고, 일곱째 날에는 ‘주님 안에서의 기쁨’으로 바뀌는 안식이 옵니다. 그리고 그 안식은 단순한 쉼이 아니라, 더 높은 생명과 더 깊은 기쁨으로 들어가는 상태입니다.
‘안식은 아무것도 안 하는 날이 아니라,내 것이 내려가고 주님의 것이 자리 잡아 기쁨이 바뀌는 상태입니다.’
그들이 여호와의 산에서 떠나 삼 일 길을 갈 때에 여호와의 언약궤가 그 삼 일 길에 앞서가며 그들의 쉴 곳을 찾았고(민10:33)
이 구절, 민10:33은AC.85의 흐름에서 매우 깊은 의미를 갖는 말씀입니다. 문자로는 ‘언약궤가 앞서가며 쉴 곳을 찾았다’는 광야 행군 장면이지만, 속뜻으로는 ‘주님이 인간 안에서 먼저 길을 여시고,결국 안식의 상태로 인도하신다’는 전체 구조를 보여 줍니다.
먼저 ‘여호와의 언약궤’는 단순한 성물이 아니라, 주님의 임재 자체, 곧 주님의 신적 진리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궤가 앞서간다’는 것은 인간이 먼저 길을 찾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먼저 가시며 길을 여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거듭남의 길을 간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열려 있는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앞에서 다룬 ‘여호와여 일어나소서’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싸움에서도 주님이 먼저이시고, 길에서도 주님이 먼저이십니다.
그다음 ‘삼 일 길’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성경에서 ‘삼 일’은 단순한 시간 길이가 아니라, ‘완전한 한 과정’, 또는 ‘상태의 충만한 전환’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님의 부활이 ‘사흘 만에’ 이루어졌다는 것도 같은 구조입니다. 따라서 여기서의 ‘삼 일 길’은 단순한 이동 거리가 아니라, ‘어떤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넘어가는 하나의 완결된 과정’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목적이 ‘그들의 쉴 곳을 찾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이것이AC.85의 핵심과 직접 연결됩니다. 여섯 날의 싸움과 과정을 지나, 결국 도달하는 것은 ‘안식’, 곧 주님 안에서의 평안입니다. 중요한 점은, 그 ‘쉴 곳’을 사람이 찾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스스로 평안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그 사람에게 맞는 상태, 곧 그 사람이 안식할 수 있는 영적 질서를 마련하신다는 뜻입니다.
이 구절 전체를 하나로 보면 이렇게 정리됩니다. ‘주님이 먼저 앞서가시며,한 과정을 온전히 지나게 하시고,마침내 그 사람 안에 안식할 자리를 마련하신다.’ 이것이 바로 거듭남의 길이며,AC.85가 말하는 ‘안식일의 상태’로 나아가는 실제 과정입니다.
목사님께서 앞에서 질문하셨던 ‘왜 모든 것을 주님의 일이라고 하시는가’라는 질문도 여기서 다시 풀립니다. 길을 여시는 분도, 싸우시는 분도, 그리고 마침내 쉴 곳을 마련하시는 분도 모두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그 과정 안에서 걷고, 싸우고, 누리지만, 전체를 보면 그것은 ‘언약궤가 앞서가는 여정’, 곧 주님의 인도하심의 역사입니다.
35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말하되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가 주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하였고36궤가 쉴 때에는 말하되 여호와여 이스라엘 종족들에게로 돌아오소서하였더라(민10:35, 36)Rise up,Jehovah,and let thine enemies be scattered,and let them that hate thee flee before thy faces.And when it rested,he said,Return,Jehovah,unto the ten thousands of the thousands of Israel(Num. 10:35–36).
이 구절은 민10:35-36인데,AC.85의 문맥에서 보면 ‘여섯 날의 싸움과 일곱째 날의 안식’이라는 구조를 매우 생생하게 보여 주는 대표적인 말씀입니다. 문자로는 언약궤가 이동할 때와 멈출 때 모세가 외친 기도이지만, 속뜻으로는 ‘주님이 우리 안에서 싸우실 때의 상태’와 ‘그 싸움이 끝나고 평안에 들어갈 때의 상태’를 나란히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먼저 ‘궤가 떠날 때’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라는 부분은, 거듭남 과정에서 반복되는 ‘영적 싸움’, 곧 유혹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대적’, ‘주를 미워하는 자’는 외부의 사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거짓과 악, 그리고 그것들과 결합된 영적 세력을 의미합니다. 중요한 점은, 이 싸움에서 모세가 ‘우리가 싸우겠습니다’라고 하지 않고, ‘여호와여 일어나사...’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즉, 싸움의 주체가 인간이 아니라 주님이심을 분명히 합니다. 이것이 바로 앞에서 계속 보셨던 ‘his work’, 곧 주님의 일입니다. 인간은 그 싸움에 참여하지만, 실제로 악과 거짓을 흩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반대로 ‘궤가 쉴 때’의 ‘여호와여 돌아오소서’라는 말씀은, 싸움이 멈추고 질서가 자리 잡는 상태, 곧 안식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돌아오소서’는 주님이 멀리 계셨다가 다시 오신다는 뜻이 아니라, 싸움 가운데서 다소 가려졌던 주님의 임재가 다시 분명하게 인식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수만 수천’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질서 있게 정돈된 선과 진리의 충만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곧, 내적과 외적, 속과 겉이 조화를 이루며 하나로 정리된 상태입니다.
이 두 구절을 하나로 보면 아주 분명한 흐름이 드러납니다. ‘떠날 때-싸움-주님이 일어나심’, 그리고 ‘쉴 때-평안-주님이 거하심’입니다. 이것이 바로 창세기의 여섯 날과 일곱째 날, 곧 ‘싸움의 상태’와 ‘안식의 상태’의 반복 구조입니다. 그래서AC.85는 이 말씀을 통해 ‘안식은 싸움이 끝난 뒤에 오는 것이며,그 싸움과 안식 모두가 주님의 일이다’라는 것을 다시 확인해 줍니다.
‘우리가 싸울 때도 주님이 싸우시고,우리가 쉴 때도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그래서 우리의 전 과정이 주님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