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65

 

제가 말씀을 읽고 있을 때, 어떤 이들이 하늘의 첫 입구 뜰까지 들려 올라갔고, 그곳에서 저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는 말씀 속의 어떤 단어나 글자도 전혀 이해할 수 없고, 오직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로서 뜻해지는 것만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내적 의미가 너무도 아름답고, 연속의 질서가 너무도 완전하며, 그들의 마음을 깊이 감동시켜서, 그들은 그것을 ‘영광’(glory)이라고 불렀다고 하였습니다. Certain ones were taken up to the first entrance court of heaven, when I was reading the Word, and from there conversed with me. They said they could not there understand one whit of any word or letter therein, but only what was signified in the nearest interior sense, which they declared to be so beautiful, in such order of sequence, and so affecting them, that they called it glory.

 

 

해설

 

이 글은 AC.64의 내용을 경험적 차원에서 직접 증언하는 매우 중요한 대목입니다. 앞선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천사들은 문자적 의미를 전혀 알지 못한다’고 원리적으로 설명했는데, 여기서는 그 사실이 실제 영계의 경험 속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다시 말해, 교리가 아니라 체험의 보고입니다.

 

여기서 먼저 주목할 것은 ‘하늘의 첫 입구 뜰’(the first entrance court of heaven)이라는 표현입니다. 이는 최고천(最高天)도, 내천(內天)도 아닌, 비교적 낮은 단계의 하늘 영역을 가리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있는 이들조차 말씀의 문자나 글자를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는 천사적 인식이 얼마나 철저히 ‘의미 중심’인지 보여 줍니다. 인간에게는 단어가 의미로 가는 관문이지만, 천사에게는 의미만 있고 단어는 없습니다.

 

이들이 이해한다고 말한 것은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입니다. 이는 최심층(最深層)의 천적 의미라기보다, 문자 바로 안쪽에 있는 영적 의미를 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는 인간의 지성으로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답고 질서 정연하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연속의 질서’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내적 의미는 파편적인 상징들의 집합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살아 있는 흐름으로 이어진 구조라는 뜻입니다.

 

이 글에서 특히 인상적인 대목은, 그들이 그 내적 의미를 ‘영광’이라고 불렀다는 점입니다. 성경에서 ‘영광’은 단순한 찬란함이나 위엄이 아니라, 신적 진리가 사랑과 결합되어 드러나는 상태를 뜻합니다. 즉, 진리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사랑과 질서 속에서 완전하게 작동할 때, 그것이 ‘영광’입니다. 그들이 내적 의미를 영광이라고 부른 것은, 그 의미 안에서 주님의 신적 질서가 직접 체험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경험은 인간 독자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줍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을 때 집착하는 단어 하나, 문장 구조 하나는 천사적 차원에서는 거의 의미를 갖지 않습니다. 대신 그 말씀이 어떤 영적 상태를 말하고 있는지, 신앙과 사랑의 어떤 질서를 드러내는지가 전부입니다. 그래서 문자에 매달릴수록 오히려 의미에서 멀어질 수 있고, 의미를 향해 마음을 열수록 문자는 자연스럽게 그 역할을 다하게 됩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이 경험이 스베덴보리가 ‘말씀을 읽고 있을 때’ 일어났다는 사실입니다. 즉, 말씀은 인간이 읽는 순간에도 동시에 천사적 차원에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말씀은 단일한 텍스트이지만, 그 독자는 인간일 수도 있고 천사일 수도 있으며, 각자의 차원에 맞는 방식으로 동일한 말씀을 경험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말씀의 다층적 생명’입니다.

 

결국 이 글은 우리에게 하나의 방향을 제시합니다. 말씀을 문자로만 붙잡으려 하기보다, 그 안에서 질서와 흐름, 상태와 생명을 느끼려는 태도로 접근할 때, 비록 우리가 천사처럼 직접 내적 의미를 보지는 못하더라도, 그 방향을 향해 마음이 정렬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때 말씀은 점차 정보의 책이 아니라, 우리를 거듭남으로 이끄는 살아 있는 통로가 됩니다.

 

 

심화

 

1. ‘원어 연구’

 

위 AC.65 본문 중

 

‘그들은 그곳에서는 말씀 속의 어떤 단어나 글자도 전혀 이해할 수 없고, 오직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로서 뜻해지는 것만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라는 내용과, 위 해설 중

 

‘우리가 말씀을 읽을 때 집착하는 단어 하나, 문장 구조 하나는 천사적 차원에서는 거의 의미를 갖지 않습니다. 대신 그 말씀이 어떤 영적 상태를 말하고 있는지, 신앙과 사랑의 어떤 질서를 드러내는지가 전부입니다. 그래서 문자에 매달릴수록 오히려 의미에서 멀어질 수 있고, 의미를 향해 마음을 열수록 문자는 자연스럽게 그 역할을 다하게 됩니다.’

 

라는 내용으로 볼 때, 기독교, 개신교의 ‘원어 연구’를 어떻게 봐야 할까요? 어떤 이들은 히브리어, 헬라어 원어 연구에 평생을 바칠 정도로 자신을 쏟아부으며, 그 결과물들에 대해 은근히 어떤 자부심과 권위를 드러내곤 하지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AC.65의 관점에서 볼 때 ‘원어 연구’는 분명 유익한 도구이지만, 그것 자체가 말씀의 핵심에 도달하게 하는 길은 아니며, 오히려 잘못 붙들면 ‘문자에 머무는 또 하나의 방식’이 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필요하지만 중심은 아니다’가 가장 정확한 평가입니다.

 

먼저 왜 원어 연구가 필요한지부터 공정하게 보셔야 합니다.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통해 단어의 뉘앙스, 문맥, 표현의 범위를 더 정확히 파악할 수 있고, 번역에서 놓치기 쉬운 부분을 보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 의미 있는 일입니다. 특히 설교나 번역, 주해 작업에서는 도움이 됩니다. 이 점은 부정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AC.65가 말하는 지점은 완전히 다른 차원입니다. 천사들은 단어와 문장을 이해하지 않고 ‘의미 자체’를 지각합니다. 즉, ‘어떤 단어가 쓰였는가’가 아니라 ‘그 말씀이 어떤 상태와 질서를 말하는가’를 봅니다. 이 기준에서 보면, 원어 연구는 여전히 ‘문자 층위 안에서의 정밀 작업’입니다. 아무리 정교해도, 여전히 ‘겉층’을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가 생기는 지점은 여기입니다. 원어 연구가 ‘의미로 들어가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로 권위와 우월감을 형성하는 영역’이 될 때입니다. 그러면 사람은 ‘나는 이 단어의 진짜 뜻을 안다’는 데 머물고, 정작 그 말씀이 자기 삶과 상태를 어떻게 드러내는지는 놓치게 됩니다. 이때는 오히려 AC.65의 표현대로 ‘문자에 더 깊이 매달리는 상태’가 됩니다.

 

이걸 아주 실제적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사랑’이라는 단어의 원어 의미를 깊이 연구합니다. 이것은 유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자기 삶에서 사랑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고민하지 않습니다. 이 경우 그는 ‘단어는 더 정확히 알지만, 의미에서는 더 멀어질 수 있는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원어를 전혀 모르지만, 말씀을 읽으며 ‘아, 내가 이렇게 살아야 하는구나’ 하고 실제로 변화됩니다. AC의 기준에서는 이 사람이 더 ‘말씀의 의미 안에 들어간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의 목적은 ‘정확한 해석’ 자체가 아니라 ‘사람의 변화와 결합’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원어 연구는 이렇게 자리 잡는 것이 가장 건강합니다. ‘문자를 더 정확히 이해하도록 돕는 보조 도구’로는 매우 유익하지만, ‘말씀의 본질에 이르게 하는 핵심 수단’으로는 과대평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이 삶과 연결되지 않으면 절반도 아닌 것입니다.

 

목회적으로 보면 이 균형이 매우 중요합니다. 원어를 아는 것은 도움이 되지만, 그것이 설교의 중심이 되면 청중은 ‘지식’은 듣지만, ‘변화’는 경험하지 못합니다. 반대로 의미와 상태를 중심으로 풀어 주면, 원어를 몰라도 말씀은 살아 움직입니다. 그래서 중심은 언제나 ‘의미—곧 신앙과 사랑의 질서’입니다.

 

그래서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원어 연구는 ‘문자를 더 정확히 보는 눈’을 주지만, 말씀의 핵심은 ‘그 의미가 삶 안에서 살아 움직이게 하는 것’입니다. 둘은 대립이 아니라, ‘도구와 목적’의 관계입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원어 연구는 유익한 도구이지만, 말씀의 핵심은 단어가 아니라 그 안의 영적 의미와 삶의 변화에 있으며, 그 중심을 놓치면 오히려 문자에 더 깊이 머무를 수 있습니다.’

 

 

2. ‘말씀’을 내적으로 경험하기

 

위 AC.65 본문 중

 

‘그 내적 의미가 너무도 아름답고, 연속의 질서가 너무도 완전하며, 그들의 마음을 깊이 감동시켜서, 그들은 그것을 ‘영광’(glory)이라고 불렀다’

 

라는 내용 말인데요, 책, ‘천국과 지옥’에도 이런 장면들이 여러 번 나오는 걸로 기억합니다. 정말 궁금합니다. 주님이 제게도 허락하셔서 저도 이런 걸 경험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AC.65와 ‘Heaven and Hell’에서 말하는 그 ‘영광’의 경험은 ‘특별한 환상이나 감각적 체험’을 주로 가리키기보다, ‘말씀의 내적 의미가 열리면서 주님과 진리가 실제로 인식되고, 그 안에서 깊은 감동과 확신이 생기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그것은 반드시 눈에 보이거나 들리는 형태로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부분은 ‘내면에서의 분명하고 살아 있는 깨달음’으로 주어집니다.

 

먼저 ‘영광’이라는 표현부터 정확히 보셔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영광’은 언제나 ‘신적 진리가 드러날 때의 빛’입니다. 즉, 단순히 아름답거나 감동적인 느낌이 아니라, ‘아, 이것이 주님의 뜻이구나’, ‘이 말씀이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이었구나’ 하고 확연히 보이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천사들이 그것을 ‘영광’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들이 어떤 환상을 보기 때문이 아니라, ‘진리가 완전한 질서와 연결 속에서 드러나는 것을 직접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목사님께서 느끼신 그 소망, ‘나도 이런 걸 경험하고 싶다’는 마음은 매우 자연스럽고, 사실 매우 귀한 방향입니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균형이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경험은 ‘보여 주기 위한 예외적 방식’이었고, 일반적인 길은 ‘그와 다른 방식의 동일한 본질’입니다. 다시 말해, 형태는 다르지만 본질은 이미 우리에게도 열려 있습니다.

 

그 본질이 무엇이냐 하면, ‘말씀을 읽다가 어느 순간 그 뜻이 열리면서, 그것이 단순한 글이 아니라 나를 향한 주님의 뜻으로 느껴지는 순간’입니다. 그때 오는 깊은 울림, 설명하기 어려운 확신, 그리고 마음이 정돈되는 느낌—바로 그것이 같은 계열의 경험입니다. 그것이 작고 조용할 수는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그 경험을 어떻게 하면 받을 수 있는가?’ AC의 흐름은 아주 분명합니다. ‘삶이 먼저 열려야, 의미가 열린다’입니다. 즉, 진리를 알고 그것을 따라 살려는 마음과 노력이 있을 때, 그다음에 그 진리가 더 깊이 열립니다. 그래서 단순히 ‘보여 달라’는 방향보다는, ‘이 말씀대로 살게 해 달라’는 방향이 더 직접적인 길입니다.

 

이걸 실제적으로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어떤 말씀을 읽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단순히 이해하려 하지 않고, ‘이걸 오늘 어떻게 살까’를 붙들고 살아 봅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 말씀이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의미’로 확 열리는 때가 옵니다. 그때 마음이 깊이 감동되고, 동시에 질서가 잡히는 느낌이 옵니다. 바로 그 순간이 ‘영광이 스치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목사님께 조심스럽게 드리면, ‘그런 경험을 하고 싶다’는 소망은 매우 좋은 것이지만, 그 방향을 ‘특별한 체험을 보게 해 달라’보다 ‘말씀의 의미 안에 살게 해 달라’로 두시면, 오히려 훨씬 더 실제적이고 깊은 방식으로 그 ‘영광’을 경험하시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경우는 그 문이 감각적으로까지 열렸던 것이고, 우리 대부분은 ‘의미와 삶의 결합’ 속에서 그 문이 열립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영광’의 본질은 같습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천사들이 말하는 ‘영광’은 특별한 어떤 장면보다 말씀의 내적 의미가 열려 주님을 실제로 인식하는 상태이며, 그 경험은 삶 속에서 말씀을 따라 살 때 우리에게도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주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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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아르카나가 없는 성경을 천사들이 읽을 때

 

그럼 아르카나가 없다 알려진 성경들, 곧 구약 룻기’, 역대서’, 욥기 등이나 신약 사도들의 서신서 등을 천사들이 읽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나요? 그러니까 천사들한테는 어떻게 보이나요? 읽을 수는 있나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아르카나(전면적인 속뜻의 연속 구조)가 없는 책들—예를 들면, ‘룻기’, ‘역대서’, ‘욥기’, 사도 서신들—도 천사들이 ‘읽을 수는’ 있지만, 그것이 곧바로 ‘말씀을 읽을 때처럼’ 하늘과 직접 연결되는 방식으로 작용하지는 않습니다. 즉, 읽히기는 하나 ‘같은 층위의 작용’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먼저 가장 중요한 구분을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천사들이 인간의 말을 이해하는 방식은 문자 그대로가 아니라 ‘의미’입니다. 인간이 글자를 읽으면, 그 안의 의미가 즉시 영적 의미로 변환되어 천사들에게 전달됩니다. 그런데 이때 ‘말씀’은 특별합니다. 그 이유는 그 문자 안에 ‘연속적인 속뜻(내적 의미)의 구조’가 있기 때문에, 인간이 읽을 때, 그 흐름이 그대로 천국까지 이어지고, 천사들은 그에 상응하는 깊은 진리를 즉시 지각합니다. 이것이 ‘말씀’의 고유한 성격입니다.

 

그런데 ‘룻기’, ‘욥기’, 사도 서신 등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그 안에도 물론 선한 내용, 진리, 교훈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그것을 읽고 이해하면, 그 ‘의미’ 자체는 천사들에게 전달됩니다. 예를 들어 사랑, 인내, 신앙, 섭리 같은 내용은 천사들도 분명히 인식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말씀’처럼 한 절 한 절, 단어 하나하나까지 천국과 직접 연결된 상응 구조를 따라 깊은 속뜻으로 펼쳐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차이를 이렇게 정리하시면 가장 정확합니다. ‘말씀’은 읽는 순간 그 문자 자체가 하늘과 직접 연결되는 통로가 되고, ‘아르카나가 없는 책들’은 그 내용의 의미가 천사들에게 전달되기는 하지만, 그 자체가 통로 역할을 하지는 않습니다. 다시 말해, 전자는 ‘구조적으로 연결된 텍스트’이고, 후자는 ‘내용적으로 유익한 텍스트’입니다.

 

이걸 조금 더 실제적으로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사람이 창세기나 복음서를 읽으면, 그 안의 표현 하나하나가 천사들에게는 영적 의미로 살아 움직이며, 그 흐름이 그대로 천국과 연결됩니다. 반면 어떤 사람이 사도 바울의 서신을 읽으면, 그 안의 ‘신앙’, ‘사랑’, ‘’, ‘구원’ 같은 내용은 천사들에게 전달되어 기쁨과 공감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텍스트 자체가 동일한 방식으로 ‘속뜻의 연속 구조’를 펼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천사들이 읽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는 ‘, 의미를 통해 읽는다’가 답이고, ‘그들에게 어떻게 보이는가?’라는 질문에는 ‘내용은 이해되지만, 말씀처럼 깊은 상응 구조로 열리지는 않는다’가 답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목회적 균형이 하나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책은 쓸모 있고, 어떤 책은 쓸모 없다’는 구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각 책의 역할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말씀은 ‘주님과 직접 연결되는 통로’이고, 다른 성경책들은 ‘그 말씀을 이해하고 삶에 적용하도록 돕는 교훈과 증언’의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둘 다 필요하지만, 기능이 다릅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아르카나가 없는 성경도 천사들에게 의미로 전달되지만, 말씀처럼 문자 자체가 천국과 직접 연결되는 통로로 작용하지는 않습니다.’

 

 

 

AC.64, 심화 4, ‘말씀’(the Word)

AC.64.심화 4. ‘말씀’(the Word) AC를 보면, 보통, 아니 거의 ‘말씀’(the Word)이라고 하네요. ‘성경’이라 하지 않고 말입니다. 저 역시 ‘성경’ 66권 중 아르카나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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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4.심화

 

4. 말씀(the Word)

 

AC를 보면, 보통, 아니 거의 말씀(the Word)이라고 하네요. 성경이라 하지 않고 말입니다. 저 역시 성경 66권 중 아르카나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다는 걸 알고부터는 의도적으로 성경보다는 말씀을 쓰고 있습니다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AC에서 ‘성경’ 대신 ‘말씀(the Word)을 사용하는 것은 단순한 용어 선택이 아니라, ‘그 책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 자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책의 외형과 범위를 가리키는 말이라면, ‘말씀’은 ‘그 안에 실제로 주님이 임재하시고, 속뜻을 통해 살아 움직이는 신적 진리의 그릇’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의도적으로 거의 항상 ‘말씀’이라고 부릅니다.

 

먼저 왜 ‘성경’이라는 표현이 충분하지 않다고 보는지를 이해하셔야 합니다. ‘성경’은 기본적으로 ‘거룩한 책들의 집합’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AC의 관점에서는 모든 성경 66권이 동일한 방식으로 ‘주님과 직접 연결된 말씀’인 것은 아닙니다. 즉, 어떤 책들은 역사적, 교훈적 가치가 큰 반면, ‘속뜻이 전면적으로 연결된 구조’, 곧 주님과 천국과 직접적으로 상응하는 구조를 가진 책들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말씀’이라는 용어를 더 엄밀하게 사용합니다.

 

그래서 ‘말씀’이라는 말 속에는 세 가지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첫째, 주님 자신과의 직접적인 연결, 둘째, 문자 속에 감추어진 속뜻의 존재, 셋째, 그 속뜻을 통해 천국과 연결되는 구조입니다. 이 세 가지가 갖추어진 것을 스베덴보리는 ‘말씀’이라고 부릅니다. 단순히 종교적인 책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안에 실제로 주님의 생명이 흐르기 때문’입니다.

 

목사님께서 이미 감지하신 것처럼, ‘성경 66권 중 아르카나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다’는 인식 이후에 ‘말씀’이라는 표현을 선택하신 것은 매우 정확한 방향입니다. 왜냐하면 ‘아르카나가 있다’는 것은 곧 ‘속뜻이 있다’는 뜻이고, 속뜻이 있다는 것은 곧 ‘말씀’의 구조를 가진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경건한 표현이 아니라, ‘이 텍스트는 주님과 직접 연결된 텍스트다’라는 신학적 선언입니다. 천사들이 읽을 수 있는 성경인 것이지요. 그 안에 아르카나가 없는 성경은 천사들은 읽을 수 없습니다. 아니, 읽을 수는 있어도 방금 언급한 세 가지가 없어 주님의 생명을 느낄 수 없으며, 그래서 얼른 물러납니다.

 

이걸 목회적으로 보면 더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성경을 읽는다’고 하면 주로 ‘지식을 얻는다’는 느낌이 강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읽는다’고 하면, 그 안에서 ‘주님을 만난다’, ‘주님의 뜻이 나에게 온다’는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열립니다. 즉, 독서의 태도 자체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설교에서도 ‘말씀’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용어 이상의 역할을 합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말씀’이라는 표현이 ‘문자만이 아니라 그 안의 속뜻까지 포함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글자를 읽는 것이 아니라, ‘그 안의 뜻이 열리기를 구하며 읽는 것’이 됩니다. 바로 이 점에서 ‘말씀’이라는 표현은 AC 전체의 방향과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그래서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성경’은 책의 범주를 가리키는 말이고, ‘말씀’은 그중에서도 주님과 직접 연결되어 속뜻을 통해 살아 움직이는 신적 진리를 담은 텍스트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AC에서 말씀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성경의 다른 이름이 아니라, 주님과 직접 연결되고 속뜻을 통해 살아 작용하는 신적 진리의 그릇을 가리키는 신학적 용어입니다.’

 

 

 

AC.64, 심화 5, ‘아르카나가 없는 성경을 천사들이 읽을 때’

AC.64.심화 5. ‘아르카나가 없는 성경을 천사들이 읽을 때’ 그럼 아르카나가 없다 알려진 성경들, 곧 구약 ‘룻기’, ‘역대서’, ‘욥기’ 등이나 신약 사도들의 서신서 등을 천사들이 읽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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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4, 심화 3, ‘속 사람’(internal man)

AC.64.심화 3. ‘속 사람’(internal man) ‘속 사람’(internal man)이 뭔가요? ‘영’, 또는 ‘영혼’을 말하는 건가요? 아니면 ‘마음’ 같은 건가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AC.64에서 말하는 ‘속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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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속 사람(internal man)

 

속 사람(internal man)이 뭔가요? ’, 또는 영혼을 말하는 건가요? 아니면 마음 같은 건가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AC.64에서 말하는 ‘속 사람(internal man)은 ‘영혼’이나 ‘마음’ 같은 하나의 요소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주님과 직접 연결되어 있으며, 그로부터 생각과 의지와 삶 전체를 이끄는 전체 구조의 안쪽 사람’입니다. 즉, 어떤 ‘부분’이 아니라 ‘한 층위의 인간 전체’입니다.

 

먼저 흔히 떠올리기 쉬운 개념들과 구분해 보겠습니다. ‘영혼’이라고 하면 보통 ‘몸과 대비되는 보이지 않는 본체’를 떠올리는데, 스베덴보리의 ‘속 사람’은 그것보다 더 ‘기능적이고 구조적인 개념’입니다. 또 ‘마음’이라고 하면 감정이나 생각을 떠올리기 쉬운데, 이것도 정확히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생각과 감정은 속 사람에도 있고, 겉 사람에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떻게 이해하면 가장 정확하냐 하면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사람은 두 겹으로 되어 있다속 사람과 겉 사람.’ 그리고 이 둘은 각각 ‘완전한 인간처럼 작동하는 두 층위’입니다. 속 사람은 주님과 연결되어 있고, 겉 사람은 세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속 사람은 ‘위로부터 받는 자리’이고, 겉 사람은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는 자리’입니다.

 

이제 AC.64의 문맥에서 보면 더 또렷해집니다. 거듭남이 일어날 때, 먼저 속 사람이 열립니다. 이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들어올 수 있는 통로가 열리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다음 그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합니다. 즉, 변화는 항상 ‘  ’으로 흐릅니다. 그래서 속 사람이 열리지 않으면, 겉 사람만 바꾸려 해도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걸 아주 실제적으로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겉 사람은 우리가 일상에서 드러내는 말, 행동, 습관, 반응입니다. 속 사람은 ‘왜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는가’를 결정하는 더 깊은 기준입니다. 예를 들어, 같은 ‘친절한 행동’을 해도, 겉으로는 똑같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속 사람이 열려 있는 경우에는 그것이 진심에서 나오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상황이나 계산에서 나올 수 있습니다. 이 차이를 만드는 곳이 바로 속 사람입니다.

 

그래서 ‘속 사람 = 영혼인가?’라고 물으시면, ‘부분적으로는 맞지만, 정확히는 더 넓은 개념’입니다. 왜냐하면 속 사람은 단순히 ‘존재하는 본체’가 아니라, ‘주님과 연결되어 작용하는 인간 전체의 안쪽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또 ‘속 사람 = 마음인가?’라고 하면, 이것도 ‘일부는 맞고, 전부는 아니다’입니다. 마음(생각과 감정)은 속 사람에도 있고, 겉 사람에도 있습니다. 차이는 ‘출처’입니다. 속 사람의 마음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과 선에 연결되어 있고, 겉 사람의 마음은 감각과 세상 경험에 더 직접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정확한 정의는 이렇게 됩니다. ‘속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들어오는 자리이며, 그로부터 겉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이끄는 안쪽 인간 전체입니다.’

 

이걸 한 문장으로 더 쉽게 풀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겉 사람은 내가 밖으로 사는 나이고, 속 사람은 내가 안에서부터 살아지는 나입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속 사람은 영혼이나 마음의 일부가 아니라, 주님과 연결되어 사람의 삶 전체를 안에서부터 이끄는 내적 인간 전체를 의미합니다.’

 

 

 

AC.64, 심화 2, ‘아르카나’(arcana)

AC.64.심화 2. ‘아르카나’(arcana) ‘아르카나’(arcana)가 뭔가요? ‘속뜻’(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을 말하는 건가요? ‘퍼셉션’(perception) 같은 건가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아르카나’(arc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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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아르카나(arcana)

 

아르카나(arcana)가 뭔가요? 속뜻(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을 말하는 건가요? 퍼셉션(perception) 같은 건가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아르카나(arcana)는 ‘속뜻(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동일한 말은 아니며, ‘퍼셉션(perception)과도 다릅니다. 가장 정확하게는 ‘말씀 안과 영계에 숨겨져 있는 신적 진리들, 곧 드러나지 않은 채 감추어져 있는 깊은 내용들’을 뜻합니다.

 

먼저 ‘arcana’라는 단어 자체부터 보겠습니다. 라틴어 ‘arcanum’의 복수형으로, 기본 의미는 ‘비밀들’, ‘숨겨진 것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비밀은 단순히 감춰진 정보가 아니라, ‘겉으로는 바로 보이지 않지만, 영적 의미에서 실제로 존재하고 작용하는 진리들’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저작 제목을 Arcana Coelestia, 곧 ‘천적 비밀들’이라고 붙였습니다.

 

이제 ‘속뜻’과의 관계를 보겠습니다. ‘속뜻’은 말씀을 읽을 때, 그 안에 담겨 있는 내적인 의미, 곧 문자 뒤에 숨겨진 영적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 속뜻 안에 담겨 있는 내용들이 바로 ‘아르카나’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정리하시면 가장 정확합니다. ‘속뜻은 구조이고, 아르카나는 그 구조 안에 담긴 내용입니다.’ ‘구조’를 ‘그릇’이라 해도 되겠습니다. 즉, 속뜻은 ‘말씀을 읽는 방식’이고, 아르카나는 ‘그렇게 읽었을 때, 드러나는 깊은 진리들’입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의 한 구절을 읽을 때, 겉으로는 역사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속뜻으로 들어가면, 그것이 인간의 거듭남 과정을 말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왜 이런 표현이 쓰였는가’, ‘이 순서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상징이 어떤 상태를 가리키는가’ 같은 것들이 밝혀지는데, 바로 그 각각이 ‘아르카나’입니다.

 

이제 ‘퍼셉션’과의 차이를 보겠습니다. ‘퍼셉션’은 ‘무엇이 참인지, 무엇이 선한지를 직관적으로 아는 능력 또는 상태’입니다. 즉, ‘아는 방식’입니다. 반면 ‘아르카나’는 ‘알려지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둘의 관계는 이렇게 됩니다. ‘아르카나는 내용이고, 퍼셉션은 그것을 인식하는 방식입니다.’

 

조금 더 쉽게 풀면 이렇습니다.

 

아르카나  숨겨진 깊은 의미(내용)

속뜻  그 의미가 담겨 있는 구조(말씀의 내적 의미)

퍼셉션  그것을 알아보는 능력(인식 방식)

 

이걸 하나의 흐름으로 보면 더 또렷해집니다. 말씀을 속뜻으로 읽으면, 그 안에서 아르카나가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 아르카나를 퍼셉션으로 ‘느끼고 아는’ 것이 가장 깊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목사님 질문을 정확히 답하면 이렇게 됩니다. ‘아르카나는 속뜻 자체가 아니라, 속뜻 안에 담긴 신적 진리들의 내용이며, 퍼셉션은 그 내용을 직관적으로 인식하는 능력입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아르카나는 말씀 속에 감추어진 영적 진리들이고, 속뜻은 그것이 담긴 의미 구조이며, 퍼셉션은 그것을 직관적으로 아는 능력입니다.’

 

 

 

AC.64, 심화 3, ‘속 사람’(internal man)

AC.64.심화 3. ‘속 사람’(internal man) ‘속 사람’(internal man)이 뭔가요? ‘영’, 또는 ‘영혼’을 말하는 건가요? 아니면 ‘마음’ 같은 건가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AC.64에서 말하는 ‘속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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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4, 심화 1, ‘내적’(內的, internal)

AC.64.심화 1. ‘내적’(內的, internal) ‘내적’(內的, internal)이라는 게 뭔가요? 눈에 안 보이는 모든 건가요? 무슨 의미, 감동, 마음, 영혼 같은 건가요? ‘돈보다는 명예’라고 할 때, ‘명예’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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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4.심화

 

1. 내적(內的, internal)

 

내적(內的, internal)이라는 게 뭔가요? 눈에 안 보이는 모든 건가요? 무슨 의미, 감동, 마음, 영혼 같은 건가요? 돈보다는 명예라고 할 때, 명예 같은 건가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AC.64에서 말하는 ‘내적(internal)이라는 것은 단순히 ‘눈에 안 보이는 것’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주님과 직접 연결되어, 바깥의 생각과 행동을 실제로 이끌고 형성하는 중심의 층위’를 뜻합니다. 즉, ‘보이지 않는 것’이라는 범주가 아니라, ‘근원, 원인, 방향을 결정하는 안쪽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먼저 범위를 바로 잡는 것이 중요합니다. ‘눈에 안 보이는 것’이라고 해서 전부 내적인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상상, 계산, 기억, 계획 같은 것도 눈에는 안 보이지만, 이것들은 여전히 ‘외적(外的, outer, external), 혹은 ‘자연적 수준’에 속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여전히 감각과 세상 경험에 근거해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내적’은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도, 그보다 더 깊은 곳에서 ‘왜 그렇게 생각하고, 왜 그렇게 선택하는가’를 결정하는 층위입니다.

 

이걸 가장 정확하게 잡으려면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내적은 원인이고, 외적은 결과입니다.’ 사람의 말과 행동, 그리고 겉으로 드러나는 생각은 모두 결과입니다. 그 뒤에서 ‘무엇을 옳다고 보는가’, ‘무엇을 좋다고 여기는가’, ‘무엇을 따라 살고 싶은가’를 결정하는 그 중심이 바로 ‘내적’입니다.

 

이제 목사님께서 주신 예, ‘돈보다 명예’를 보겠습니다. 이건 흥미로운 예인데, 여기서 ‘명예’ 자체가 곧 내적인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명예도 여전히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느냐’라는 외적 기준에 속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이 ‘명예’로 바뀐 것일 수 있고, 여전히 바깥을 향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 사람이 ‘진짜로 옳은 것, 선한 것 자체를 사랑하기 때문에 명예를 선택한다’면, 그때는 그 선택의 근원이 내적입니다. 핵심은 대상이 아니라 ‘출발점’입니다.

 

이제 AC.64와 연결하면 훨씬 또렷해집니다. AC.64에서는 사람이 거듭나면 ‘내적인 것이 열리고, 그 내적인 것을 통해 주님과 연결되며, 그로부터 외적인 것이 질서 잡힌다’는 흐름이 나옵니다. 즉, 이전에는 외적인 것이 중심이었기 때문에, 생각과 행동이 그때그때 흔들렸지만, 이제는 내적인 중심이 열리면서 그 안에서 기준이 서고, 그 기준이 바깥을 이끕니다.

 

이걸 아주 실제적으로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이전에는 상황에 따라 반응이 달라집니다. 이익이 되면 이렇게 하고, 손해가 되면 저렇게 합니다. 그런데 내적인 것이 열리면, ‘이게 옳은가’라는 기준이 먼저 서고, 그 기준에 따라 행동이 나옵니다. 그래서 상황이 달라도 방향이 크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바로 이때 ‘내적이 외적을 이끄는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내적’을 가장 쉽게 정의하면 이렇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자리 잡아, 사람의 생각과 선택과 행동의 방향을 결정하는 중심의 자리’입니다. 그리고 ‘외적’은 그 내적에서 나온 것이 밖으로 드러난 모습입니다.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감정, 생각, 의미, 가치 같은 것들이 모두 내적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어디에서 나왔는가’, ‘무엇을 중심으로 움직이는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주님과 연결된 중심에서 나오는 것이면 내적이고, 감각과 세상 중심에서 나온 것이면 외적입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내적은 단순히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연결되어 사람의 삶 전체를 안에서부터 이끄는 중심의 층위입니다.’

 

 

 

AC.64, 심화 2, ‘아르카나’(arcana)

AC.64.심화 2. ‘아르카나’(arcana) ‘아르카나’(arcana)가 뭔가요? ‘속뜻’(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을 말하는 건가요? ‘퍼셉션’(perception) 같은 건가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아르카나’(arc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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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4, 창1, '말씀의 내적 의미(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속뜻)'(AC.64-66)

AC.64 이것이 바로 말씀의 내적 의미(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속뜻)이며, 그 가장 참된 생명입니다. 이는 문자적 의미에서는 전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 안에 담긴 비밀(arcana)은 너무나 많아서,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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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4

 

이것이 바로 말씀의 내적 의미(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속뜻)이며, 그 가장 참된 생명입니다. 이는 문자적 의미에서는 전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 안에 담긴 비밀(arcana)은 너무나 많아서, 그것들을 모두 풀어내려면 수많은 책이 필요할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다만 극히 일부만 제시되었는데, 그것도 이 말씀이 거듭남을 다루고 있으며 ,그 거듭남이 외적 인간(the external man, 겉 사람)에서 내적 인간(the internal man, 속 사람)으로 나아간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는 것들뿐입니다. 천사들은 말씀을 이렇게 인식합니다. 그들은 문자 속에 있는 것들, 심지어 단어 하나의 가까운 의미조차도 전혀 알지 못합니다. 하물며 역사서와 예언서에 자주 등장하는 나라, 성읍, , 사람의 이름들은 더더욱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오직 그 말들과 이름들이 의미하는 것들만을 인식합니다. 그래서 낙원에 있는 아담을 보며 그들은 태고교회를 인식하지만, 그 교회 자체가 아니라 그 교회의 주님에 대한 신앙을 인식합니다. 노아를 통해서는 태고교회의 후손 가운데 남아 있던 교회, 곧 아브람 시대까지 이어진 교회를 인식합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는 그 개인을 전혀 인식하지 않고, 그가 대표, 표상한 구원하는 신앙을 인식합니다. 이와 같이 천사들은 말과 이름에서 완전히 벗어나, 오직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만을 인식합니다. This then is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its veriest life, which does not at all appear from the sense of the letter. But so many are its arcana that volumes would not suffice for the unfolding of them. A very few only are here set forth, and those such as may confirm the fact that regeneration is here treated of, and that this proceeds from the external man to the internal. It is thus that the angels perceive the Word. They know nothing at all of what is in the letter, not even the proximate meaning of a single word; still less do they know the names of the countries, cities, rivers, and persons, that occur so frequently in the historical and prophetical parts of the Word. They have an idea only of the things signified by the words and the names. Thus by Adam in paradise they perceive the most ancient church, yet not that church, but the faith in the Lord of that church. By Noah they perceive the church that remained with the descendants of the most ancient church, and that continued to the time of Abram. By Abraham they by no means perceive that individual, but a saving faith, which he represented; and so on. Thus they perceive spiritual and celestial things entirely apart from the words and names.

 

 

해설

 

이 글은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라틴 Arcana Coelestia, 영어 Secrets of Heaven, 天界秘義, 1749-1756, , 출 속뜻 주석, 10,837개 글)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핵심적인 선언 가운데 하나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내적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왜 그것이 말씀의 ‘가장 참된 생명’인지를 분명하게 밝힙니다. 중요한 점은, 내적 의미가 문자 의미에 덧붙여진 해석이 아니라, 문자 속에 생명처럼 깃들어 있는 차원이라는 것입니다. 문자는 겉모습이고, 내적 의미는 그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실체입니다.

 

이 글에서 반복해서 강조되는 것은, 내적 의미가 문자에서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내적 의미가 숨겨져 있다는 뜻이 아니라, 문자적 시선으로는 포착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문자 의미는 역사와 사건, 인물과 지명을 보여 주지만, 내적 의미는 상태와 질서, 신앙과 사랑의 변화를 보여 줍니다. 그래서 같은 본문을 읽고도, 인간은 역사로 읽고, 천사는 생명으로 읽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자신이 지금까지 설명한 내용이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이는 겸손한 수사가 아니라, 내적 의미의 구조 자체가 무한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주님 자신에게서 나왔고, 주님은 무한하시기 때문에, 그 안에 담긴 의미 역시 끝이 없습니다. 따라서 창세기 1장이 단지 창조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 거듭남의 전 과정을 담고 있다는 설명 역시, 그 무한한 의미 중 일부일 뿐입니다.

 

이 글의 중심 전환점은 ‘천사들은 말씀을 이렇게 인식한다’라는 문장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인간 독자에게 천사의 인식 방식을 직접 소개합니다. 천사들은 문자적 단어를 전혀 알지 못합니다. 이는 천사들이 무지해서가 아니라, 그 차원이 이미 문자를 초월해 있기 때문입니다. 천사에게 ‘아담’, ‘노아’, ‘아브라함’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각각 특정한 영적 상태와 교회의 국면을 가리키는 표지입니다.

 

예를 들어, 천사들이 ‘아담’을 인식할 때, 그들은 한 사람이나 한 시대를 떠올리지 않습니다. 그들은 태고교회가 가졌던 주님에 대한 신앙, 곧 사랑과 직접 결합된 신앙의 상태를 인식합니다. 마찬가지로 ‘노아’는 홍수 생존자의 이름이 아니라, 타락 이후에도 남아 있던 교회의 질서와 그 지속을 뜻합니다. ‘아브라함’ 역시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구원하는 신앙의 표상으로 인식됩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말씀의 인물 해석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성경 속 인물은 천사적 차원에서는 ‘누구’가 아니라 ‘무엇’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어떤 상태’이며 ‘어떤 신앙과 사랑의 질서’입니다. 그래서 천사들은 말과 이름에서 완전히 벗어나, 곧장 영적이고 천적인 실재를 봅니다.

 

이 글은 또한, 거듭남의 방향성을 다시 한번 확증합니다. 내적 의미가 말하는 거듭남은 언제나 외적 인간에서 내적 인간으로 나아갑니다. 문자 역시 외적 차원이고, 내적 의미는 내적 차원입니다. 인간이 문자를 통해 내적 의미로 나아갈 때, 그 사람의 거듭남 역시 같은 방향으로 진행됩니다. 이 점에서 말씀의 구조와 인간의 영적 성장 구조는 서로 정확히 맞물려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글은 독자에게 하나의 초대를 던집니다. 말씀을 더 이상 단지 ‘읽는 것’에 머무르지 말고, 그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영적 질서를 인식하라는 초대입니다. 문자에 집착하면 역사에 머물지만, 내적 의미로 들어가면 주님의 역사, 곧 인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창조와 거듭남의 생명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말씀은 더 이상 책이 아니라 ‘살아 있는 말씀’이 됩니다.

 

 

심화

 

1.내적(內的, internal)

 

 

AC.64, 심화 1, ‘내적’(內的, internal)

AC.64.심화 1. ‘내적’(內的, internal) ‘내적’(內的, internal)이라는 게 뭔가요? 눈에 안 보이는 모든 건가요? 무슨 의미, 감동, 마음, 영혼 같은 건가요? ‘돈보다는 명예’라고 할 때, ‘명예’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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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아르카나(arcana)

 

 

AC.64, 심화 2, ‘아르카나’(arcana)

AC.64.심화 2. ‘아르카나’(arcana) ‘아르카나’(arcana)가 뭔가요? ‘속뜻’(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을 말하는 건가요? ‘퍼셉션’(perception) 같은 건가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아르카나’(arc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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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속 사람(internal man)

 

 

AC.64, 심화 3, ‘속 사람’(internal man)

AC.64.심화 3. ‘속 사람’(internal man) ‘속 사람’(internal man)이 뭔가요? ‘영’, 또는 ‘영혼’을 말하는 건가요? 아니면 ‘마음’ 같은 건가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AC.64에서 말하는 ‘속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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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말씀(the Word)

 

 

AC.64, 심화 4, ‘말씀’(the Word)

AC.64.심화 4. ‘말씀’(the Word) AC를 보면, 보통, 아니 거의 ‘말씀’(the Word)이라고 하네요. ‘성경’이라 하지 않고 말입니다. 저 역시 ‘성경’ 66권 중 아르카나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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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아르카나가 없는 성경을 천사들이 읽을 때

 

 

AC.64, 심화 5, ‘아르카나가 없는 성경을 천사들이 읽을 때’

AC.64.심화 5. ‘아르카나가 없는 성경을 천사들이 읽을 때’ 그럼 아르카나가 없다 알려진 성경들, 곧 구약 ‘룻기’, ‘역대서’, ‘욥기’ 등이나 신약 사도들의 서신서 등을 천사들이 읽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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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3, 창1:31, 여섯째 날의 상태, '심히 좋았더라'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1:31) AC.63 그동안 주님은 계속해서 인간을 위하여 악과 거짓에 맞서 싸우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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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3.심화

 

4. 하늘, 곧 천적 낙원으로 인도됨

 

 AC.63 본문 중, 인간은 하늘, 곧 천적 낙원으로 인도되는데 말인데요, 여기 하늘, 곧 천적 낙원의 의미가 뭔가요? 거듭남의 완성 단계까지 온 것일 뿐 아직 죽은 건 아닌데, 갑자기 인간은 하늘, 곧 천적 낙원으로 인도되는데라니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AC.63에서 말하는 하늘, 곧 천적 낙원으로 인도된다’는 것은 죽어서 실제 천국으로 들어간다’는 뜻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 그 사람 안에 천국의 상태, 특히 천적 상태가 형성되어 그 안에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즉, 장소 이동이 아니라 상태의 도달’입니다.

 

먼저 이 표현이 왜 낯설게 들리는지부터 짚어보면 분명해집니다. 우리는 하늘’이나 천국’을 들으면 자연스럽게 죽은 후 가는 곳’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서 하늘(heaven)은 무엇보다 먼저 상태’입니다.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질서 있게 작동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도 하늘 안에 있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20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17:20, 21)

 

이제 천적 낙원’이라는 표현을 보겠습니다. ‘천적’은 앞에서 계속 보신 것처럼 사랑이 중심이 된 상태’이고, ‘낙원(paradise)은 창세기 에덴동산처럼 질서와 기쁨과 평안이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천적 낙원’은 사람 안에서 사랑이 중심이 되어, 모든 것이 조화롭게 자리 잡고, 그 안에서 기쁨과 평안이 흐르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AC.63의 흐름을 그대로 연결하면 이렇게 됩니다. 여섯째 날까지는 싸움과 정리가 이루어지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이 끝나고, 신앙이 사랑과 결합되어 중심이 완전히 자리 잡으면, 이제 더 이상 싸움이 중심이 아니라 평안’이 중심이 됩니다. 바로 그 상태를 하늘’, ‘천적 낙원’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걸 실제적으로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이전에는 끊임없이 선택해야 했고, 마음속에서 갈등이 있었고, 흔들림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어떤 상황에서도 중심이 무너지지 않고, 자연스럽게 선한 방향으로 흐르며, 그 안에 깊은 안정과 기쁨이 있습니다. 더 이상 억지로 애쓰는 상태가 아니라, ‘그렇게 사는 것이 자연스러운 상태’입니다. 바로 그 상태가 하늘에 인도된 상태’입니다.

 

그래서 인도된다’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이것은 사람이 스스로 도달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를 그 상태로 이끄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상태는 이미 하늘과 연결된 상태’이기 때문에, 죽은 이후에는 자연스럽게 같은 상태의 실제 천국으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이 문장을 오해 없이 정확히 읽으면 이렇게 됩니다. ‘인간은 거듭남이 완성되어, 살아 있는 동안에도 그 안에 천적 상태가 형성되고, 그 상태 안에서 살게 되며, 그것이 곧 하늘, 곧 천적 낙원이다.’

 

한 줄로 정리하면, ‘AC.63 하늘, 곧 천적 낙원은 죽은 후의 장소가 아니라, 거듭남이 완성되어 사람 안에 형성되는 사랑 중심의 평안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AC.63, 심화 3,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

AC.63.심화 3.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 위 AC.63 본문 중, ‘여섯째 날의 끝에서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 선한 영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며’ 말인데요, 여기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의 의미가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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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3.심화

 

3.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

 

 AC.63 본문 중, 여섯째 날의 끝에서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 선한 영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며 말인데요, 여기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의 의미가 무엇인가요? 원래 늘 와있는 거 아닌가요? 그래야 균형 가운데 존재할 수 있다 읽은 것 같은데...

 

 

결론부터 분명히 말씀드리면, 여기서 ‘악한 영들이 떠나간다’는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거나 완전히 분리된다’는 뜻이 아니라, ‘지배권과 주도권을 잃고, 사람의 중심에서 물러난다’는 뜻입니다. 즉, 여전히 주변에는 있지만, 더 이상 그 사람을 끌고 가지는 못하는 상태입니다.

 

먼저 전제부터 다시 잡으면, 목사님께서 기억하신 것처럼 사람은 기본적으로 ‘영들의 세계와 연결된 상태’에 있고, 선한 영향과 악한 영향이 모두 관계합니다. 이 점은 거듭난 이후에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균형’이라는 말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런데 AC.63이 말하는 것은 ‘존재 여부’가 아니라 ‘통치 구조의 변화’입니다.

 

거듭나기 전이나 초기에는 악한 영들과 연결된 욕정과 거짓이 실제로 사람을 이끌고 있습니다. 그래서 생각과 감정이 그쪽에 쉽게 끌립니다. 이때는 말 그대로 ‘그들이 안에서 작용하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거듭남이 진행되어 여섯째 상태에 이르면, 중심이 바뀝니다. 이제는 선한 영들과 천사적 영향이 중심을 차지하고, 진리와 선이 사람을 이끕니다.

 

이때 ‘악한 영들이 떠난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그들이 더 이상 ‘안쪽에서 주도적으로 작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밖으로 밀려난 상태’, ‘접촉은 가능하지만, 지배는 못하는 상태’입니다. 마치 이전에는 집 안 중심에 있던 것이, 이제는 문밖으로 밀려나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걸 아주 실제적으로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이전에는 어떤 욕정이나 감정이 올라오면 그대로 생각을 지배하고 행동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것이 올라오더라도, 그것이 중심을 차지하지 못하고, ‘이건 아니다’라는 더 깊은 기준 아래에서 걸러집니다. 즉, 여전히 유혹은 느끼지만, 그 유혹이 나를 움직이지는 못하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떠나간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떠남’은 공간적 이동이 아니라 ‘상태의 변화’입니다. ‘안에 있음  밖에 있음’, ‘지배함  영향만 있음’으로 바뀐 것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이 상태에서도 완전히 시험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만 시험의 성격이 달라집니다. 이전에는 쉽게 넘어가던 것이 이제는 중심을 건드리지 못하고, 더 외적인 수준에서 스쳐 지나가거나 약하게 작용합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평안이 유지됩니다. 이것이 여섯째 날 이후, 곧 일곱째 날의 안식으로 이어지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악한 영들이 떠난다’는 것은 그들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사람의 중심에서 작용하지 못하고, 주변적이고 외적인 수준으로 밀려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악한 영들의 떠남은 존재의 소멸이 아니라, 지배권을 잃고 중심에서 물러나는 상태를 뜻합니다.’

 

 

 

AC.63, 심화 4, ‘하늘, 곧 천적 낙원으로 인도됨’

AC.63.심화 4. ‘하늘, 곧 천적 낙원으로 인도됨’ 위 AC.63 본문 중, ‘인간은 하늘, 곧 천적 낙원으로 인도되는데’ 말인데요, 여기 ‘하늘, 곧 천적 낙원’의 의미가 뭔가요? 거듭남의 완성 단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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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3, 심화 2, ‘주님은 쉬지 않으십니다’

AC.63.심화 2. ‘주님은 쉬지 않으십니다’ 위 AC.63 본문 중, ‘그동안 주님은 계속해서 인간을 위하여 악과 거짓에 맞서 싸우시며, 여러 싸움을 통해 그를 진리와 선 안에 굳게 세우십니다. 이 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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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3.심화

 

2. 주님은 쉬지 않으십니다

 

 AC.63 본문 중,

 

그동안 주님은 계속해서 인간을 위하여 악과 거짓에 맞서 싸우시며, 여러 싸움을 통해 그를 진리와 선 안에 굳게 세우십니다. 이 싸움의 시간은 곧 주님께서 역사하시는 시간이며, 그래서 예언자들 가운데서는 거듭난 인간을 하나님의 손가락의 일(the work of the fingers of God)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리고 사랑이 주된 원리가 되어 작용하기 전까지 주님은 쉬지 않으십니다.’

 

를 읽다가 문득 다음 복음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63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64그 신성모독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니 그들이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고 65어떤 사람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고 주먹으로 치며 이르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고 하인들은 손바닥으로 치더라 (14:63-65)

 

그러니까 주님은 위와 같은 상황에서도 저들을 위하여 저 AC.63 본문 내용의 일을 하신 거잖아요? 그뿐 아니라 제 경우에도 정말 부끄러운, 정말 그동안 살아오면서 주님 앞에 고갤 들 수 없는 순간들, 장면들이 많았는데, 그때에도 주님은... ... 정말... 무슨 말을 못하겠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목사님께서 느끼신 그 통찰이 바로 AC.63이 말하려는 중심입니다. ‘주님은 사람이 가장 어둡고, 가장 거스르고, 심지어 주님을 거부하는 순간에도 그 사람을 향한 구원의 일을 멈추지 않으신다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14:63-65의 그 장면은 단순히 인간의 악함을 보여 주는 사건이 아니라, 동시에 ‘그 악함 한가운데서도 멈추지 않는 주님의 역사’를 드러내는 장면입니다. 사람들은 침을 뱉고, 때리고, 조롱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을 향해 무엇을 하시고 계셨는가 하면, 바로 AC.63에서 말하는 그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곧 ‘그들의 악과 거짓에 맞서 싸우시며, 그들 안에 있는 선과 진리를 위해 여전히 역사하고 계신 상태’입니다.

 

이게 왜 그렇게 중요한가 하면, 우리는 보통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잘할 때는 주님이 함께하시고,내가 무너질 때는 주님이 떠나신다.’ 그런데 AC의 관점은 정반대입니다. 사람이 가장 어둡고, 가장 왜곡되고, 가장 주님과 멀어진 것처럼 보이는 바로 그때가 오히려 ‘주님이 가장 깊이 싸우고 계신 시간’입니다. 사람은 거부하고 있지만, 주님은 그 거부를 뚫고 여전히 일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 직전의 장면은 단순히 ‘인간의 죄’가 아니라, ‘인간의 죄가 끝까지 드러나는 자리에서도 끝까지 멈추지 않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향해 손을 들고 있지만, 주님은 그들을 향해 여전히 구원의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이것이 AC.63의 ‘주님은 쉬지 않으신다’는 말의 실제 모습입니다.

 

이제 목사님께서 이어서 말씀하신 자신의 이야기, ‘정말 부끄러운 순간들’—바로 거기서 이 말씀이 더 깊어집니다. 우리는 그런 순간을 떠올리면 보통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때 나는 주님과 완전히 멀어져 있었다.’ 그러나 AC의 시선에서는 이렇게 봅니다. ‘그때 나는 가장 멀어져 있었지만, 주님은 가장 가까이에서 일하고 계셨다.’

 

왜냐하면 주님은 ‘사람이 잘할 때만 함께하시는 분’이 아니라, ‘사람이 무너질 때에도 그를 놓지 않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설 수 없을 때, 그때가 주님이 더 깊이 일하실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 싸움은 주님의 일’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은 그 싸움의 전부를 알지도, 감당하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지금 느끼신 그 감정—말이 막히는 그 자리—그것이 사실은 매우 중요한 영적 인식입니다. ‘나는 그때 주님을 향해 있지 않았지만, 주님은 나를 향해 계셨다’는 깨달음입니다. 이것이 단순한 죄책감이 아니라, ‘은혜에 대한 인식’으로 바뀔 때, 그 사람 안에 사랑이 자리 잡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이 장면을 이렇게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그들이 주님을 때리고 있을 때에도, 주님은 그들을 위해 싸우고 계셨다.’ 그리고 ‘내가 가장 부끄러웠던 그때에도, 주님은 나를 위해 같은 일을 하고 계셨다.’

 

이것이 바로 AC.63의 핵심입니다. 주님의 역사는 우리의 상태에 따라 시작되고 멈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상태와 상관없이 계속됩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나중에야 알아보게 될 뿐입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주님은 우리가 가장 멀어져 있던 순간에도 우리를 향한 구원의 일을 멈추지 않으셨고, 바로 그때에도 우리를 위해 싸우고 계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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