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82.심화

 

2. 51:13, 16

 

13하늘을 펴고 땅의 기초를 정하고 너를 지은 자 여호와를 어찌하여 잊어버렸느냐 너를 멸하려고 준비하는 저 학대자의 분노를 어찌하여 항상 종일 두려워하느냐 학대자의 분노가 어디 있느냐, 16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고 내 손 그늘로 너를 덮었나니 이는 내가 하늘을 펴며 땅의 기초를 정하며 시온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말하기 위함이니라 (51:13, 16) Thou forgettest Jehovah thy maker, that stretcheth forth the heavens, and layeth the foundations of the earth; but I will put my words in thy mouth, and I will hide thee in the shadow of my hand, that I may stretch out the heaven, and lay the foundation of the earth (Isa. 51:13, 16).

 

 

이 구절 역시 Book of Isaiah의 문자만 보면 창조주 하나님을 잊은 이스라엘을 책망하고 다시 회복시키시는 말씀’이지만, Arcana Coelestia의 흐름 안에서 보면 훨씬 더 깊은,  인간 안에서 일어나는 새 창조(거듭남)’를 말하는 구절로 읽히게 됩니다.

 

먼저 하늘을 펴고 땅의 기초를 정하고’라는 표현은 단순히 우주 창조를 반복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안의 내적과 외적 질서를 세우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하늘’은 사람의 속 사람, 곧 의지와 사랑의 영역이고, ‘’은 겉 사람, 곧 삶과 행위의 영역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주님께서 인간 안에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 곧 새로운 의지와 삶의 기반을 세우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남의 핵심 구조입니다.

 

그런데 13절에서는 이 주님을 잊어버렸다’고 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기억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생명과 질서가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 결과로 학대자의 분노를 종일 두려워한다’고 하는데, 여기서 학대자’는 외적 상황이나 사람만을 뜻하기보다, 인간을 지배하려는 거짓과 악의 세력을 상징합니다. 주님을 바라보지 않을 때 사람은 자연스럽게 외적 힘들, 환경, 사람, 심지어 자기 생각에까지 지배당하며 두려움 속에 살게 됩니다.

 

반면 16절에서는 완전히 반대의 상태가 펼쳐집니다.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고’라는 것은 진리가 그 사람의 이해 안에 들어와 말과 삶으로 표현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내 손 그늘로 너를 덮었다’는 것은 주님의 능력과 보호 아래 두신다는 뜻인데, 이것은 단순한 보호를 넘어 주님의 질서 안에 놓여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다시 하늘을 펴며 땅의 기초를 정한다’고 반복되는데, 이것은 단순한 강조가 아니라 매우 중요한 구조를 보여 줍니다. 처음의 하늘과 땅’은 잊어버린 상태 속에서 흔들리는 질서이고, 뒤의 하늘과 땅’은 주님의 말씀과 보호 안에서 다시 세워지는 새로운 질서입니다. 즉, 같은 표현이지만 전자는 무너진 상태’, 후자는 재창조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마지막으로 시온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는 선언은 이 모든 과정의 결론입니다. ‘시온’은 주님에 대한 사랑의 교회를 의미하고, ‘내 백성’은 진리 안에서 주님께 속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인간 안에 하늘과 땅을 새롭게 세우시는 목적은, 그 사람을 참으로 주님의 것’이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정리하면, 이 구절은 창조주를 잊고 외적 두려움에 사로잡힌 상태’에서 주님의 말씀과 보호 안에서 내적과 외적 질서가 새롭게 세워지는 상태’로의 전환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전체 과정이 바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의 실제 내용입니다. 이렇게 보시면, 이사야의 말씀은 단순한 역사적 회복 예언이 아니라, 오늘 우리 각 사람 안에서 계속 일어나는 영적 현실로 살아나게 됩니다.

 

 

 

AC.82, 심화 1, ‘사13:12-13’

AC.82.심화 1. ‘사13:12-13’ 12내가 사람을 순금보다 희소하게 하며 인생을 오빌의 금보다 희귀하게 하리로다 13그러므로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맹렬히 노하는 날에 하늘을 진동시키며 땅을 흔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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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2.심화

 

1. 13:12-13

 

12내가 사람을 순금보다 희소하게 하며 인생을 오빌의 금보다 희귀하게 하리로다 13그러므로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맹렬히 노하는 날에 하늘을 진동시키며 땅을 흔들어 그 자리에서 떠나게 하리니 (13:12, 13) I will make a man more rare than solid gold, even a man than the precious gold of Ophir; therefore I will smite the heavens with terror, and the earth shall be shaken out of its place (Isa. 13:12–13).

 

 

이 구절은 사13의 문자적 의미만 보면 바벨론 심판의 강한 예언처럼 보이지만, AC.82에서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천적 인간의 희귀함’과 연결하여 해석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순금보다 희소하게 하며’라는 말은 단순히 인구가 줄어든다는 뜻이 아니라, ‘참된 인간, 곧 주님의 질서 안에 있는 인간 상태가 거의 사라진다’는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여기서 ‘순금’, ‘오빌의 금’은 단순한 물질적 가치가 아니라, 사랑의 가장 순수한 상태를 상징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 원리에 따르면 ‘’은 언제나 사랑, 특히 주님께 대한 사랑, 곧 천적 사랑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사람이 금보다 희귀하다’는 것은, 참된 인간됨, 곧 주님을 사랑하는 상태가 거의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드물어진다는 뜻입니다. 이 구절이 AC.82에서 인용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천적 인간, 곧 퍼셉션으로 선을 보는 인간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맥락과 정확히 맞물립니다.

 

이어지는 ‘하늘을 진동시키며 땅을 흔들어 그 자리에서 떠나게 하리니’라는 표현도 물리적 우주 붕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하늘’은 인간의 내적, 곧 의지와 사랑의 영역을, ‘’은 외적 삶과 행위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인간의 내적과 외적 질서가 무너지는 상태’, 곧 신앙과 삶 전체의 근본적인 붕괴를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참된 사랑이 사라질 때 인간 존재 전체가 흔들린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 구절은 단순한 심판의 위협이 아니라, ‘왜 천적 인간이 희귀해지는가’를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사랑이 식어가고, 퍼셉션이 사라지며, 그 결과 인간의 내적 하늘과 외적 땅이 함께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통해 ‘참된 인간 상태가 얼마나 귀하고, 또 얼마나 쉽게 사라질 수 있는가’를 강조합니다.

 

목사님께서 보시기에 이 구절이 AC.82와 연결되는 핵심은 결국 이것입니다. ‘사람’이란 단순히 인간 종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결합된 상태의 인간’을 의미하며, 그 상태가 사라질 때 비로소 성경은 그것을 ‘금보다 더 희귀하다’고 표현한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읽으시면, 이사야의 강한 표현들이 단순한 역사적 예언을 넘어, 인간 내면의 영적 상태를 드러내는 말씀으로 살아나게 됩니다.

 

 

 

AC.82, 심화 2, ‘사51:13, 16’

AC.82.심화 2. ‘사51:13, 16’ 13하늘을 펴고 땅의 기초를 정하고 너를 지은 자 여호와를 어찌하여 잊어버렸느냐 너를 멸하려고 준비하는 저 학대자의 분노를 어찌하여 항상 종일 두려워하느냐 학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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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2, 창2: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AC.82-83)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And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 and all the army of them. (창2:1) AC.82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사람이 이제 영적 상태에 이르러(render) ‘여섯째 날’(the sixth day)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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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And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 and all the army of them. (2:1)

 

AC.82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사람이 이제 영적 상태에 이르러(render) 여섯째 날(the sixth day)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 하늘, heaven)은 그의 속 사람이고, ‘(, , earth) 그의 겉 사람입니다. ‘만물(the army of them)은 사랑과 신앙, 그리고 그에 속한 지식(knowledges)으로서, 앞서 큰 광명들과 별들이 의미했던 것들입니다. 속 사람을 하늘이라 하고, 겉 사람을 이라 한다는 것은, 이미 앞 장의 인용 구절들로부터 분명하며, 그에 더해 여기 이사야의 다음 구절들도 있습니다. By these words is meant that man is now rendered so far spiritual as to have become the “sixth day”; “heaven” is his internal man, and “earth” his external; “the army of them” are love, faith, and the knowledges thereof, which were previously signified by the great luminaries and the stars. That the internal man is called “heaven,” and the external “earth,” is evident from the passages of the Word already cited in the preceding chapter, to which may be added the following from Isaiah:

 

12내가 사람을 순금보다 희소하게 하며 인생을 오빌의 금보다 희귀하게 하리로다 13그러므로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맹렬히 노하는 날에 하늘을 진동시키며 땅을 흔들어 그 자리에서 떠나게 하리니 (13:12, 13) I will make a man more rare than solid gold, even a man than the precious gold of Ophir; therefore I will smite the heavens with terror, and the earth shall be shaken out of its place (Isa. 13:12–13).

 

13하늘을 펴고 땅의 기초를 정하고 너를 지은 자 여호와를 어찌하여 잊어버렸느냐 너를 멸하려고 준비하는 저 학대자의 분노를 어찌하여 항상 종일 두려워하느냐 학대자의 분노가 어디 있느냐, 16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고 내 손 그늘로 너를 덮었나니 이는 내가 하늘을 펴며 땅의 기초를 정하며 시온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말하기 위함이니라 (51:13, 16) Thou forgettest Jehovah thy maker, that stretcheth forth the heavens, and layeth the foundations of the earth; but I will put my words in thy mouth, and I will hide thee in the shadow of my hand, that I may stretch out the heaven, and lay the foundation of the earth (Isa. 51:13, 16).

 

이 말씀들로부터, ‘하늘 이 모두 사람에게 적용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비록 그것들이 주로 태고교회를 가리켜 언급된 것이지만, 말씀의 내적 의미는 그러한 성질(nature)을 지니고 있어서, 교회에 대해 한 말은 무엇이든 그 교회의 각 개별 지체에게도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교회가 아니라면, 결코 교회의 일부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사람이 주님의 성전이 아니라면, 성전이 의미하는 바, 곧 교회와 천국이 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태고교회를 가리켜 단수로 사람(man)이라고 합니다. From these words it is evident that both “heaven” and “earth” are predicated of man; for although they refer primarily to the most ancient church, yet the interiors of the Word are of such a nature that whatever is said of the church may also be said of every individual member of it, who, unless he were a church, could not possibly be a part of the church, just as he who is not a temple of the Lord cannot be what is signified by the temple, namely, the church and heaven. It is for this reason that the most ancient church is called “man,” in the singular number.

 

 

해설

 

이 글은 창세기 2장 해설의 한 정점을 이루는 문장입니다. AC.73부터 AC.81까지 ‘천적 인간’이라는 상태를 다양한 각도에서 펼쳐 보였다면, AC.82는 그 모든 설명을 다시 ‘2:1의 언어’로 되돌려 묶어 줍니다. 즉, 이 글은 앞선 모든 논의를 정리하면서 동시에, 창세기 1장의 창조 질서와 정확히 접속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여섯째 날’이라는 표현을 다시 불러옵니다. 이는 천적 상태 그 자체가 아니라, ‘영적 상태에 완전히 이른 단계’를 가리킵니다. 사람은 이 시점에서 더 이상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도 아니고, 막 형성 중인 불안정한 상태도 아닙니다. 그는 이제 영적 질서가 완성된 상태에 도달했습니다. 다시 말해, 진리와 선의 기본 구조가 속 사람과 겉 사람 안에 제대로 세워진 상태입니다. 이 여섯째 날 위에서만, 일곱째 날의 안식이 가능합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다시 한번 ‘하늘’과 ‘’을 사람 안의 구조로 해석합니다. ‘하늘’은 속 사람이고, ‘’은 겉 사람입니다. 이는 이미 창세기 1장에서 반복적으로 제시된 해석이지만, AC.82에서는 이 해석이 단순한 상응 설명을 넘어, ‘인간 존재 전체를 이해하는 원리’로 확장됩니다. 하늘과 땅은 우주의 공간이 아니라, 한 사람 안에 동시에 존재하는 두 차원입니다.

 

만물(the army of them)이 사랑과 신앙, 그리고 그에 속한 지식(knowledges)이라는 설명은 매우 중요합니다. 군대라는 말은 단순한 집합이 아니라, ‘질서 있게 배열된 힘들’을 뜻합니다. 사랑과 신앙, 그리고 그 지식은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는 정보나 감정이 아니라, 속 사람과 겉 사람 안에 각각 배치되어 서로 협력하는 요소들입니다. 앞서 큰 광명들과 별들로 표현되었던 것들이, 이제는 한 사람 안의 영적 구조로 명확히 자리 잡습니다.

 

이어서 스베덴보리는 이 해석이 자의적인 것이 아님을 보여 주기 위해, 이사야를 인용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사야의 이 구절들이 겉으로 보기에는 우주적 격변이나 역사적 심판을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사람 안의 변화로 읽습니다. ‘하늘을 진동시키며 땅을 흔들어’라는 말은, 한 사람 안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의 질서가 흔들리거나 새롭게 세워지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특히 사51의 말씀에서 ‘하늘을 펴고 땅의 기초를 정하고’라는 표현은 결정적입니다. 이는 창조의 언어이면서 동시에 ‘한 사람 안에서의 재창조’, 곧 거듭남의 언어입니다. 주님께서 ‘내 말을 네 입에 두고 내 손 그늘로 너를 덮었나니’라는 표현은, 외적 보호와 내적 인도를 동시에 뜻합니다. 이 모든 것이 결국 한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중요한 신학적 원리를 명확히 합니다. 성경에서 교회에 대해 말한 것은, 동시에 ‘각 사람에 대해 말한 것’이라는 원리입니다. 교회는 집단 이전에 상태이며, 그 상태는 반드시 개인 안에 존재해야 합니다. 사람이 교회가 아니라면, 그는 교회의 일부가 될 수 없다는 말은, 교회를 제도나 조직으로 환원하는 모든 사고를 근본에서부터 차단합니다.

 

이 비유를 설명하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성전(temple)의 예를 듭니다. 사람이 주님의 성전이 아니라면, 그가 어떻게 교회와 하늘, 곧 천국을 의미하는 성전이 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내적 실재에 대한 선언’입니다. 천국과 교회는 외부에 있는 어떤 공간이 아니라, 주님이 거하실 수 있는 사람 안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문장이 나옵니다. 태고교회를 단수로 ‘사람’(아담)이라 한 이유입니다. 이는 특정 인물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완전한 상태로서의 인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태고교회는 여러 개인의 집합이었지만, 그 내적 상태가 하나였기 때문에 단수로 불립니다. 이는 곧, 천국의 본질이 다수가 하나 안에서 일치하는 데 있음을 암시합니다.

 

AC.82는 이렇게 해서 창세기 1, 2장의 대주제를 다시 한번 정리합니다. 창조는 우주의 기원이 아니라, 인간의 형성에 관한 이야기이며, 하늘과 땅은 멀리 있는 차원이 아니라, 한 사람 안에 동시에 존재하는 두 세계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은, 한 사람이 ‘사람’이 되어 가는 이야기입니다.  

 

 

심화

 

1.13:12-13

 

 

AC.82, 심화 1, ‘사13:12-13’

AC.82.심화 1. ‘사13:12-13’ 12내가 사람을 순금보다 희소하게 하며 인생을 오빌의 금보다 희귀하게 하리로다 13그러므로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맹렬히 노하는 날에 하늘을 진동시키며 땅을 흔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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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3, 16

 

 

AC.82, 심화 2, ‘사51:13, 16’

AC.82.심화 2. ‘사51:13, 16’ 13하늘을 펴고 땅의 기초를 정하고 너를 지은 자 여호와를 어찌하여 잊어버렸느냐 너를 멸하려고 준비하는 저 학대자의 분노를 어찌하여 항상 종일 두려워하느냐 학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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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1, 창2:1-17 배경, '한 인간이 거쳐 갈 수 있는 세 가지 상태'

AC.81 이 장은 ‘천적 인간’에 대해 다루고 있으며, 앞의 장은 ‘죽은 상태에 있던 사람으로부터 형성된 영적 인간’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천적 인간, 영적 인간이 무엇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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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1

 

이 장은 천적 인간에 대해 다루고 있으며, 앞의 장은 죽은 상태에 있던 사람으로부터 형성된 영적 인간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천적 인간, 영적 인간이 무엇인지, 더 나아가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이 무엇인지조차 거의 다 모르는 상황이므로, 먼저 그 차이를 알 수 있도록 각각의 어떠함을 간략히 밝히는 것이 저에게 허락되었습니다. 첫째, 죽어 있는 사람, 즉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 겉으로는 살아있으나 주님과의 관계에서는 죽은 상태인 사람은 몸과 세상에 속한 것 외에는 참되고 선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바로 그것을 숭배합니다. 영적 인간은 영적이고 천적인 참과 선을 인정하지만, 그것을 사랑에서라기보다 신앙의 원리에서 인정하며, 그의 행위 역시 주로 그 신앙에서 나옵니다. 반면 천적 인간은 영적이고 천적인 참과 선을 믿고 또한 퍼셉션으로 알며,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 외에는 다른 신앙을 인정하지 않고, 그의 행위 또한 그 사랑에서 나옵니다. This chapter treats of the celestial man, as the preceding one did of the spiritual, who was formed out of a dead man. But as it is unknown at this day what the celestial man is, and scarcely what the spiritual man is, or a dead man, it is permitted me briefly to state the nature of each, that the difference may be known. First, then, a dead man acknowledges nothing to be true and good but what belongs to the body and the world, and this he adores. A spiritual man acknowledges spiritual and celestial truth and good; but he does so from a principle of faith, which is likewise the ground of his actions, and not so much from love. A celestial man believes and perceives spiritual and celestial truth and good, acknowledging no other faith than that which is from love, from which also he acts.

 

[2] 둘째, 죽어 있는 사람을 움직이는 목적은 오직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삶만을 향하며, 그러니까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 그 목적이 오직 육체적이고 세상적일 뿐이며, 그는 영원한 생명(, life)이 무엇인지도, 주님이 누구이신지도 알지 못하고, 혹 알더라도 믿지 않습니다. 영적 인간을 움직이는 목적은 영원한 생명을 향하고, 그로 인해 주님을 향합니다. 천적 인간을 움직이는 목적은 주님을 향하며, 그로 인해 주님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을 향합니다. Second: The ends which influence a dead man regard only corporeal and worldly life, nor does he know what eternal life is, or what the Lord is; or should he know, he does not believe. The ends which influence a spiritual man regard eternal life, and thereby the Lord. The ends which influence a celestial man regard the Lord, and thereby his kingdom and eternal life.

 

[3] 셋째, 죽어 있는 사람은 싸움, 그러니까 영적 전투 중에 있을 때 거의 항상 패하며, 싸움이 없을 때에도 악과 거짓이 그를 지배하여 그는 종이 됩니다. 그를 묶는 사슬은 외적인 것들로서, 곧 법에 대한 두려움, 생명과 재산, 이익, 그리고 명성을 잃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이런 것들이 아주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영적 인간은 싸움 가운데 있지만 항상 승리하며, 그를 붙드는 사슬은 내적인 것으로서, 양심의 사슬이라 불립니다. 천적 인간은 싸움 가운데 있지 않으며, 악과 거짓의 공격을 받을 때에도 그것들을 멸시하므로 정복자라 불립니다. 그는 겉으로 보기에 아무 사슬에도 묶여 있지 않으며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도 사슬이 있는데, 그것들은 드러나지 않는 사슬로서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입니다. Third: A dead man when in combat almost always yields, and when not in combat, evils and falsities have dominion over him, and he is a slave. His bonds are external, such as the fear of the law, of the loss of life, of wealth, of gain, and of the reputation which he values for their sake. The spiritual man is in combat, but is always victorious; the bonds by which he is restrained are internal, and are called the bonds of conscience. The celestial man is not in combat, and when assaulted by evils and falsities, he despises them, and is therefore called a conqueror. He is apparently restrained by no bonds, but is free. His bonds, which are not apparent, are perceptions of good and truth.

 

 

해설

 

이 단락은 창세기 2장의 해설 가운데서도, 가장 교육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급진적인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상징을 풀지 않고, 은유를 쓰지 않으며, 곧바로 사람의 상태를 세 가지로 나누어 제시합니다.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A dead man), ‘영적 인간(The spiritual man), ‘천적 인간(The celestial man)입니다. 이는 인류를 세 부류로 나누기 위한 분류표가 아니라, ‘한 인간이 거쳐 갈 수 있는 세 가지 상태’를 질서 있게 드러내기 위한 설명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설명을 굳이 덧붙이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는 이미 이 시대에는 ‘천적 인간’이 무엇인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며, ‘영적 인간’조차도 제대로 이해되지 않고 있다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사실상 ‘죽은 상태’에 있다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하고 있음을 전제합니다. 그러므로 이 단락은 설명이 아니라, ‘인식의 눈을 열기 위한 조정’에 가깝습니다.

 

첫 번째 구분은 ‘무엇을 참과 선으로 인정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은 몸과 세상에 속한 것만을 참과 선으로 인정합니다. 여기에는 악의 의도가 전제되지 않습니다. 그는 단지 감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 세상에서 유용한 것만을 실제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는 그것을 ‘숭배’한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그것이 그의 삶의 중심이 됩니다.

 

영적 인간은 여기서 분명히 달라집니다. 그는 영적이고 천적인 참과 선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인정의 출발점은 ‘사랑’이 아니라 ‘신앙’입니다. 그는 이것이 옳다고 믿고, 그래서 그것을 따릅니다. 그의 행위는 신앙에 의해 유지됩니다. 이는 매우 귀하고 중요한 단계이지만, 여전히 중간 단계입니다.

 

천적 인간은 이 둘과 질적으로 다릅니다. 그는 영적이고 천적인 참과 선을 믿을 뿐 아니라, 그것을 퍼셉션합니다. 다시 말해, 그는 그것을 보듯이 압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 외에 다른 신앙이 없습니다. 믿음이 사랑을 앞서지 않고, 사랑 안에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행위는 의무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흐름입니다.

 

두 번째 구분은 ‘삶을 움직이는 목적’의 문제입니다.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의 목적은 오직 현세적 삶에 있습니다. 그는 영원한 생명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거나, 알더라도 그것을 실제로 여기지 않습니다. 주님 역시 개념으로는 알 수 있지만, 삶의 중심은 아닙니다.

 

영적 인간은 목적이 분명히 바뀝니다. 그는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고, 그로 인해 주님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목적의 최종점이 여전히 ‘영원한 생명’이라는 결과에 머무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반면 천적 인간은 목적 자체가 주님입니다. 그는 결과를 위해 주님을 향하지 않고, 주님을 향하기 때문에 결과가 따라옵니다. 그래서 그의 목적은 곧 주님의 나라이며, 영원한 생명은 그 자연스러운 열매입니다.

 

세 번째 구분은 가장 실제적이고도 날카롭습니다. ‘싸움과 자유’의 문제입니다.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은 싸움에서 거의 항상 패합니다. 설령 외적으로는 질서를 유지하는 것처럼 보여도, 내적으로는 악과 거짓이 그를 지배합니다. 그를 붙잡는 것은 법, 처벌, 손해, 체면 같은 외적 사슬입니다. 그는 자유로워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은 가장 많은 것에 매여 있습니다.

 

영적 인간은 싸움 가운데 있습니다. 그는 유혹과 갈등을 겪지만, 싸움 끝에 승리합니다. 그를 붙잡는 사슬은 더 이상 외적인 것이 아니라, 양심이라는 내적인 사슬입니다. 그는 자유롭지만, 동시에 책임을 집니다.

 

천적 인간은 여기서 다시 한 단계 올라섭니다. 그는 싸움 가운데 있지 않습니다. 악과 거짓이 다가오지만, 그것을 심각하게 상대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것들을 멸시합니다. 이는 무관심이 아니라, ‘이미 중심이 너무 분명하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그는 ‘정복자’라 불립니다.

 

겉으로 보면, 천적 인간은 아무 사슬에도 묶여 있지 않은 완전한 자유인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마지막에 매우 중요한 말을 덧붙입니다. 그에게도 사슬은 있습니다. 다만 그것은 드러나지 않는 사슬입니다. 그것은 법이나 두려움이 아니라,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입니다. 그는 선을 떠올리기 때문에 악을 의도하지 않고, 진리를 보기 때문에 거짓을 택하지 않습니다. 그의 자유는 방임이 아니라, ‘가장 깊은 질서 안에 있는 자유’입니다.

 

AC.81은 그래서 창세기 2장의 모든 내용을 하나의 인간 이해로 묶어 줍니다. 에덴동산, 생명나무, 네 강, 금지 명령, 안식일은 모두 ‘천적 인간’이라는 한 상태를 설명하기 위한 서로 다른 얼굴들입니다. 그리고 이 상태는 신화 속 인간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이 본래 지향하도록 창조된 상태’입니다.

 

이 글을 읽고 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묻게 됩니다. 나는 지금 어느 상태에 서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판단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는 단지, 길의 구조를 보여 줍니다.

 

 

 

AC.82, 창2: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AC.82-83)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And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 and all the army of them. (창2:1) AC.82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사람이 이제 영적 상태에 이르러(render) ‘여섯째 날’(the sixth day)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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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0, 창2:1-17 개요, '천적 인간은 오직 퍼셉션으로만 지식을 얻어야'(16-17절)

AC.80 그는 또한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퍼셉션을 통하여 무엇이 선하고 참된지를 아는 지식 얻는 것은 허락됩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얻어서는 안 되며, 감각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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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번역가들

 

저는 번역가들이 나무 = 퍼셉션이라는 걸 몰랐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했지요...

 

 

그렇게 느끼신 이유가 충분히 이해됩니다. AC의 관점에 익숙해지면 ‘나무 = 퍼셉션’이라는 상응이 너무 분명하게 보이기 때문에, 왜 번역에서 그걸 살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 수 있습니다. 다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개역개정 번역자들이 그것을 ‘몰라서’라기보다, 애초에 번역의 기준과 목표가 스베덴보리식 내적 의미를 반영하는 데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시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성경 번역은 기본적으로 ‘원문이 문자적으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해석 틀 안에서 전달하는 작업입니다. 특히 개역개정은 Bible 번역 가운데서도 비교적 전통적이고 교회 공용성을 중시하는 번역이기 때문에, 특정 신학 체계, 곧 그것이 아무리 정교하더라도 그것을 반영하여 단어를 바꾸는 방식은 거의 취하지 않습니다. 만약 ‘나무’를 ‘퍼셉션’으로 옮긴다면, 그것은 번역이 아니라 이미 ‘해설’ 혹은 ‘해석’이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나무 = 퍼셉션’도 사실은 문자 자체의 의미가 아니라 ‘내적 의미에서의 상응(correspondence)’이라는 점입니다. 히브리어 원문에서 ‘나무’(עֵץ)는 문자적으로는 여전히 ‘나무’이고, 그것이 내적으로는 ‘퍼셉션’ 혹은 ‘사랑과 인식의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은 계시를 통해 밝혀진 해석입니다. 따라서 일반 번역자들의 입장에서는 그것을 본문 단어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주석이나 해설의 영역에 두는 것이 원칙에 맞는 접근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이렇게 정리하시면 더 균형이 맞습니다. 번역은 ‘나무’를 그대로 두는 것이 옳고, 해설에서는 ‘그 나무는 퍼셉션을 의미한다’라고 풀어 주는 것이 옳습니다. 이 두 층을 섞지 않는 것이 성경 해석 전통 전체의 기본 질서이기도 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실제로는 라틴어 본문에서 ‘arbor’(나무)라는 단어를 그대로 사용하면서, 그 의미를 해설에서 풀어냅니다.

 

다만 목사님께서 느끼신 통찰은 매우 중요한 방향을 짚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열매’로만 이해할 경우, 독자의 관심이 ‘행위’ 쪽으로 더 기울어질 수 있지만, ‘나무’를 의식하면 ‘그 근원, 곧 어떤 인식과 사랑의 상태인가’로 시선이 올라가기 때문입니다. 이 차이는 AC를 읽을 때 매우 큰 영향을 줍니다.

 

그래서 실제 목회나 강해에서는 이런 방식이 가장 유익합니다. 본문은 ‘나무’와 ‘열매’를 그대로 읽되, 그 속뜻으로 ‘이 나무는 어떤 퍼셉션을 의미하는가’를 풀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번역의 질서도 지키고, 동시에 내적 의미도 충분히 살아나게 됩니다.

 

결국 목사님께서 느끼신 그 아쉬움은 ‘틀렸다’의 문제가 아니라, ‘번역과 해설의 역할이 다르다’는 차이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시면 가장 정확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지금 목사님께서 하고 계신 AC 해설 작업의 의미가 더 또렷해진다고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AC.80, 창2:1-17 개요, '천적 인간은 오직 퍼셉션으로만 지식을 얻어야'(16-17절)

AC.80 그는 또한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퍼셉션을 통하여 무엇이 선하고 참된지를 아는 지식 얻는 것은 허락됩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얻어서는 안 되며, 감각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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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0, 심화 3, ‘열매’(창2:16-17)

AC.80.심화 3. ‘열매’(창2:16-17) 이 AC본문의 말씀인 창2:16-17을 보면,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And Jehovah God commanded the man, say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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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열매(2:16-17)

 

 AC본문의 말씀인 창2:16-17을 보면,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And Jehovah God commanded the man, saying, Of every tree of the garden eating thou mayest eat.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Bu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thou shalt not eat of it; for in the day that thou eatest thereof, dying thou shalt die.인데요, 분명 영어 표현은 tree of the garden’,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라 하여 우리말 번역인 열매는 없습니다. 한글 개역개정은 왜 이렇게 번역했을까요?

 

 

아주 예리하게 보신 부분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영어 성경의 ‘tree’를 우리말 개역개정이 ‘열매’로 옮긴 것은 원문을 틀리게 번역했다기보다, 히브리어 본문 안에 이미 포함된 표현 구조, 곧 ‘나무의 열매를 먹는다’는 관용적 결합을 한국어에서 더 자연스럽게 드러내기 위한 번역 선택이라고 보시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먼저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창2:16-17에는 실제로 ‘나무’와 ‘열매’가 함께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2:16은 ‘동산의 모든 나무로부터 먹을 수 있다’라는 구조인데, 여기서 ‘먹는다’는 동사와 결합될 때, 히브리어에서는 ‘나무’가 사실상 ‘그 나무의 열매’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리고 2:17에서도 ‘선악을 아는 나무로부터 먹지 말라’고 되어 있는데, 역시 문자 그대로는 ‘나무를 먹는다’가 아니라 ‘그 나무의 열매를 먹는다’는 뜻입니다. 즉, 원문 자체가 이미 ‘나무 = 그 나무의 열매를 포함한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영어 번역, 특히 전통적인 번역들은 이 구조를 비교적 직역에 가깝게 유지해서 ‘tree of the garden’,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라고 표현합니다. 하지만 영어에서도 실제 이해는 ‘그 나무의 열매를 먹는다’로 받아들입니다. 다만 영어는 이런 표현이 비교적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반면, 한국어에서는 ‘나무를 먹는다’라고 하면 문자적으로 들릴 가능성이 커서 어색함이 생깁니다. 그래서 개역개정은 의미를 분명히 하기 위해 ‘열매’를 명시적으로 드러낸 것입니다.

 

이 점에서 개역개정의 번역은 ‘의역’에 가까운 선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원문 구조를 그대로 옮기기보다, 독자가 오해 없이 의미를 이해하도록 ‘먹는 대상이 열매임’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현대 한국어 번역들은 이와 비슷한 방식을 취합니다.

 

그렇다면 AC의 관점에서는 이 차이가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스베덴보리의 해석에서는 ‘나무(tree)와 ‘열매(fruit)가 각각 상징적 의미를 갖습니다. ‘나무’는 어떤 종류의 사랑이나 인식 전체를, ‘열매’는 그것에서 나오는 삶의 결과나 행위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나무를 먹는다’는 표현은 내적으로 보면 ‘그 사랑과 인식 체계를 받아들인다’는 뜻이고, ‘열매를 먹는다’는 표현은 ‘그것에서 나온 것을 자신의 것으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보면, 영어 번역이 유지하는 ‘tree’ 중심 표현은 상징 구조를 더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장점이 있고, 한국어 번역의 ‘열매’ 표현은 실제 행위의 측면을 더 분명히 드러내는 장점이 있습니다. 어느 쪽이 옳다기보다, 강조점이 다르다고 보시면 됩니다.

 

정리하면, 개역개정이 ‘열매’를 넣은 것은 원문을 왜곡한 것이 아니라, 히브리어의 관용적 표현을 한국어 독자가 자연스럽게 이해하도록 풀어낸 번역입니다. 그리고 AC를 읽으실 때는 이 둘을 함께 보시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겉으로는 ‘열매를 먹는다’이지만, 속뜻으로는 ‘그 나무, 곧 어떤 사랑과 인식 자체를 받아들인다’는 의미까지 함께 보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AC.80, 심화 4, ‘번역가들’

AC.80.심화 4. ‘번역가들’ 저는 번역가들이 ‘나무 = 퍼셉션’이라는 걸 몰랐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했지요... 그렇게 느끼신 이유가 충분히 이해됩니다. AC의 관점에 익숙해지면 ‘나무 = 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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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0, 심화 2,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마19:24)

AC.80.심화 2.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마19:24) 또 하나, 위 해설 중,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이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 지식’(the things of sense and memory-knowledge [sensualia et scientifica])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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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19:24)

 

또 하나, 위 해설 중,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이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 지식(the things of sense and memory-knowledge [sensualia et scientifica])을 통해 신앙의 신비를 탐구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감각적인 것들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외적 경험의 세계이고, 기억 지식은 그 경험을 축적한 정보의 창고입니다. 이것들은 본래 삶을 지탱하는 데 필요한 것들이지만, 신앙의 신비를 판단하는 도구로 사용될 때는 치명적이 됩니다.’를 읽을 때, 주님 말씀,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19:24)가 생각났습니다.

 

 

목사님께서 연결하신 이 부분 역시 매우 정확한 방향의 통찰입니다. AC.80에서 말하는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 지식으로 신앙의 신비를 판단하려 한다’는 상태와, 주님의 말씀 마19:24의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말씀은, 겉으로는 전혀 다른 주제처럼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동일한 원리를 가리킵니다.

 

먼저 스베덴보리의 맥락을 보면, ‘감각적인 것들(sensualia)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가장 바깥층의 인식이며, ‘기억 지식(scientifica)은 그 감각 경험이 축적된 이해의 저장고입니다. 이 둘은 인간 삶에 필수적이지만, 문제는 이것들이 ‘위에서 아래로 봉사하는 도구’가 아니라 ‘위에 올라서 판단하는 기준’이 될 때입니다. 사람이 ‘보이는 것, 증명되는 것, 축적된 지식’만으로 신앙의 신비를 재단하려 하면, 결국 보이지 않는 것, 곧 영적 실재를 닫아버리게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치명적’인 지점입니다.

 

이제 주님의 ‘부자’ 말씀을 보면, 여기서의 부자는 단순히 돈이 많은 사람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적 관점에서 보면, ‘부자’는 자기 안에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여기는 상태’, 곧 지식, 경험, 판단력, 자기 확신으로 가득 찬 상태를 의미합니다. 특히 신앙 문제에 있어서 ‘나는 이미 알고 있다’, ‘나는 판단할 수 있다’는 상태가 강할수록, 그 사람은 오히려 더 닫히게 됩니다. 이 점에서 ‘감각과 기억 지식에 의지하는 상태’와 정확히 겹칩니다.

 

그래서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는 표현은, 단순한 과장이 아니라, ‘자기 충만한 상태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낙타가 짐을 잔뜩 싣고는 좁은 문을 통과할 수 없는 것처럼, 사람도 자기 지식과 자기 확신으로 가득 찬 상태에서는 영적 세계의 문, 곧 ‘겸손과 수용의 상태’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결국 내려놓아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두 내용을 하나로 묶으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감각과 기억 지식은 본래 ‘도구’인데, 그것을 ‘주인’으로 삼는 순간 사람은 영적 진리에 대해 닫히게 되고, 이것이 바로 주님이 말씀하신 ‘부자의 상태’입니다. 반대로 천적 인간은 감각과 지식을 사용하되, 그것에 의존하지 않고, 오히려 선을 먼저 사랑함으로써 진리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비워진 상태’로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균형 하나를 덧붙이자면, 스베덴보리는 결코 지식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식은 반드시 필요하며, 신앙을 위한 기초입니다. 다만 그 질서가 중요합니다. 지식이 ‘아래에서 위로 섬길 때’는 길을 열어 주지만, ‘위에 올라가 판단할 때’는 길을 막습니다. 그래서 문제는 ‘얼마나 많이 아느냐’가 아니라, ‘그 아는 것이 어떤 자리에서 작용하느냐’입니다.

 

목사님께서 떠올리신 이 연결은 결국 한 문장으로 이렇게 요약됩니다. ‘자기 것으로 가득 찬 사람은 들어갈 수 없고, 비워진 사람만이 들어간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말씀과 스베덴보리의 설명이 만나는 지점입니다.

 

 

 

AC.80, 심화 3, ‘열매’(창2:16-17)

AC.80.심화 3. ‘열매’(창2:16-17) 이 AC본문의 말씀인 창2:16-17을 보면,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And Jehovah God commanded the man, say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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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0, 심화 1,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마5:37)

AC.80.심화 1.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마5:37) 해설 중, ‘천적 인간은 ‘이것이 옳은가’를 따져 묻지 않고, ‘이것이 선하다’는 것을 봅니다.’를 읽었을 때, 주님 말씀, ‘오직 너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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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5:37)

 

해설 중, 천적 인간은 이것이 옳은가를 따져 묻지 않고, 이것이 선하다는 것을 봅니다.’를 읽었을 때, 주님 말씀,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5:37)가 생각났습니다.

 

 

목사님께서 연결하신 이 두 말씀은 매우 깊은 차원에서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AC.80에서 말하는 ‘천적 인간은 이것이 옳은가를 따지지 않고, 이것이 선하다는 것을 본다’는 표현은, 단순히 사고를 생략한다는 뜻이 아니라, ‘선이 곧 진리로 보이는 상태’, 곧 의지와 이해가 분리되지 않은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 마5:37의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는 말씀 역시 바로 그 동일한 상태를 요구하시는 말씀으로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상태의 인간은 먼저 ‘이게 맞나?’를 따져 묻고, 논리와 비교를 통해 옳고 그름을 판단합니다. 이것은 이해가 주도하는 상태이며, 영적 인간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은 그보다 더 깊은 상태에 있어서, 이미 선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것이 선한지에 대해 ‘본다’고 표현됩니다. 여기서 ‘본다’는 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의지 안에서 직관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맞는지 틀린지 따져야 할 필요’가 거의 없습니다. 선한 것은 곧 옳은 것이고, 옳은 것은 곧 선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라는 말씀은 바로 이 상태의 단순성과 일치를 요구하시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아직 분열된 상태에 있을 때는, 말이 길어지고 설명이 많아지며, 맹세나 강조가 필요해집니다. 그러나 내적 상태가 정직하고 단순할수록, 말은 짧아지고 분명해집니다. 왜냐하면 그 말이 단순한 의견이 아니라, 그 사람의 존재 상태에서 바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라는 말씀은, 단순히 말을 길게 하지 말라는 윤리적 권면이 아니라, ‘내적 분열에서 나오는 복잡함’을 경계하시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보면, AC.80의 천적 인간과 주님의 이 말씀은 같은 축 위에 있습니다. 하나는 교리적으로 설명한 것이고, 하나는 삶의 언어로 직접 주신 말씀입니다. 천적 인간은 ‘선을 보기 때문에 옳음을 아는 사람’이고, 주님은 그 상태를 ‘단순하고 일치된 말’로 나타내라고 하신 것입니다.

 

목사님께서 이 연결을 떠올리신 것은 매우 중요한 통찰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신앙이 깊어질수록 복잡해지는가, 아니면 단순해지는가’라는 질문과도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처음에는 복잡해지지만, 결국은 다시 단순해집니다. 다만 그 단순함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의 단순함이 아니라, 모든 것을 통과한 뒤의 ‘일치된 단순함’입니다.

 

그래서 이 두 말씀을 함께 묶어 정리하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천적 인간은 ‘선을 보기 때문에 옳음을 안다’, 그리고 그 결과 그의 말은 ‘옳다, 아니라’처럼 단순하고 분명해진다. 이것이 바로 의지와 이해가 하나로 결합된 상태, 곧 주님 안에서의 참된 인간의 모습입니다.

 

 

 

AC.80, 심화 2,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마19:24)

AC.80.심화 2.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마19:24) 또 하나, 위 해설 중,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이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 지식’(the things of sense and memory-knowledge [sensualia et scientifica])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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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0, 창2:1-17 개요, '천적 인간은 오직 퍼셉션으로만 지식을 얻어야'(16-17절)

AC.80 그는 또한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퍼셉션을 통하여 무엇이 선하고 참된지를 아는 지식 얻는 것은 허락됩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얻어서는 안 되며, 감각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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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0

 

그는 또한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퍼셉션을 통하여 무엇이 선하고 참된지를 아는 지식 얻는 것은 허락됩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얻어서는 안 되며,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 지식(the things of sense and memory-knowledge [sensualia et scientifica])을 통하여 신앙의 신비들을 탐구해서도 안 됩니다. 그렇게 할 경우, 그의 천적 본성은 죽게 될 것입니다. (16-17) He is also permitted to acquire a knowledge of what is good and true by means of every perception from the Lord, but he must not do so from himself and the world, nor search into the mysteries of faith by means memory-knowledge [sensualia et scientifica]; which would cause the death of his celestial nature (verses 16–17).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2:16, 17)

 

해설

 

이 글은 에덴동산 이야기에서 가장 섬세하면서도 결정적인 경계선을 그어 줍니다. AC.79에서 천적 인간은 동산을 누리되 소유하지 않는다고 언급되었습니다. AC.80은 그 누림의 방식이 어디까지 허용되고, 어디서부터 무너지는지를 분명히 밝힙니다. 즉, 문제는 ‘아는 것’ 자체가 아니라, ‘어디, 그러니까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퍼셉션을 통하여 아는 건지, 아니면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 아는 건지’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이 선과 진리를 아는 지식 얻는 것 자체를 금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허락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나 그 허락에는 단 하나의 조건이 붙습니다. 그 지식은 반드시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을 통해서’ 얻어져야 한다는 조건입니다. 다시 말해, 천적 인간의 앎은 추론의 결과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주어지는 인식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선과 진리를 만들어 내지 않고, ‘받아 인식합니다’.

 

여기서 ‘퍼셉션’이라는 말이 다시 핵심으로 떠오릅니다. 퍼셉션은 자기 내부에서 조합해 낸 결론이 아니라, 선과 진리가 이미 살아 있는 상태에서 ‘직접적으로 인식되는 것’입니다. 천적 인간은 ‘이것이 옳은가’를 따져 묻지 않고, ‘이것이 선하다’는 것을 봅니다. 그의 앎은 판단 이전의 앎이며, 논증 이전의 확신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곧바로 경고합니다. 이 지식이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얻어질 때,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고 말입니다. 자기 자신과 세상은 곧 겉 사람의 출발점입니다. 거기에서 시작되는 앎은 필연적으로 ‘자기중심적 기준’을 낳습니다. 이때 선과 진리는 더 이상 주님의 것이 아니라, 판단의 대상이 되고, 평가의 대상이 됩니다.

 

이 경고는 더 구체적으로 이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이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 지식(the things of sense and memory-knowledge [sensualia et scientifica])을 통해 신앙의 신비를 탐구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감각적인 것들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외적 경험의 세계이고, 기억 지식은 그 경험을 축적한 정보의 창고입니다. 이것들은 본래 삶을 지탱하는 데 필요한 것들이지만, ‘신앙의 신비를 판단하는 도구로 사용될 때는 치명적’이 됩니다.

 

왜냐하면 신앙의 신비는 감각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은 보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살도록 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런데 감각과 기억 지식으로 신비를 재단하려는 순간, 인간은 주님 위에 서서 신앙을 해부하려 들게 됩니다. 이때 순서는 완전히 뒤집힙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이 아니라, 인간의 빛으로 주님을 비추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강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렇게 할 경우 ‘그의 천적 본성은 죽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는 도덕적 처벌을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천적 본성은 ‘관계의 상태’이기 때문에, 그 관계의 질서가 무너지면 자연스럽게 사라집니다. 사랑에서 나오는 앎이 아니라, 앎으로 사랑을 통제하려는 순간, 천적 상태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습니다.

 

이 글은 창2:16-17의 금지 명령을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이해하게 만듭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말은, 지식을 얻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출발점을 바꾸지 말라’는 뜻입니다. 선과 진리를 자기중심의 판단으로 다루기 시작하는 순간, 인간은 천적 상태에서 떨어져 나옵니다. 이는 한 번의 행동이 아니라, 앎의 방식이 바뀌는 사건입니다.

 

여기까지 오면, 에덴동산 이야기는 더 이상 도덕적 시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 인식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천적 인간은 모든 것을 알 수 있지만, 모든 방식으로 알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자유롭지만, 그 자유는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질서 안에 있을 때만 자유’입니다.

 

AC.80은 그래서 아주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말합니다. 신앙의 신비는 파헤쳐질 대상이 아니라, ‘그렇게 살아야 할 대상’이라고 말입니다. 감각과 기억 지식이 제자리를 지킬 때, 그것들은 삶을 돕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왕좌에 앉는 순간, 천적인 생명은 숨을 쉬지 못하게 됩니다.  

 

 

심화

 

1.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5:37)

 

 

AC.80, 심화 1,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마5:37)

AC.80.심화 1.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마5:37) 해설 중, ‘천적 인간은 ‘이것이 옳은가’를 따져 묻지 않고, ‘이것이 선하다’는 것을 봅니다.’를 읽었을 때, 주님 말씀, ‘오직 너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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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19:24)

 

 

AC.80, 심화 2,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마19:24)

AC.80.심화 2.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마19:24) 또 하나, 위 해설 중,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이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 지식’(the things of sense and memory-knowledge [sensualia et scientifica])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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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열매(2:16-17)

 

 

AC.80, 심화 3, ‘열매’(창2:16-17)

AC.80.심화 3. ‘열매’(창2:16-17) 이 AC본문의 말씀인 창2:16-17을 보면,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And Jehovah God commanded the man, say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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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번역가들

 

 

AC.80, 심화 4, ‘번역가들’

AC.80.심화 4. ‘번역가들’ 저는 번역가들이 ‘나무 = 퍼셉션’이라는 걸 몰랐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했지요... 그렇게 느끼신 이유가 충분히 이해됩니다. AC의 관점에 익숙해지면 ‘나무 = 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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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1, 창2:1-17 배경, '한 인간이 거쳐 갈 수 있는 세 가지 상태'

AC.81 이 장은 ‘천적 인간’에 대해 다루고 있으며, 앞의 장은 ‘죽은 상태에 있던 사람으로부터 형성된 영적 인간’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천적 인간, 영적 인간이 무엇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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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9, 창2:1-17 개요, '경작하며 지킴, 천적 인간의 상태'(15절)

AC.79 천적 인간은 이러한 동산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 동산은 주님의 것이므로, 이 사람은 이 모든 것을 누리는 것은 허락되지만, 그것들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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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9

 

천적 인간은 이러한 동산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 동산은 주님의 것이므로, 이 사람은 이 모든 것을 누리는 것은 허락되지만, 그것들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15) The celestial man is such a garden. But as the garden is the Lord’s, it is permitted this man to enjoy all these things, and yet not to possess them as his own (verse 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2:15)

 

해설

 

이 글은 지금까지 전개된 에덴동산의 모든 이미지와 구조를 하나의 핵심 원리로 수렴시키는 매우 중요한 문장입니다. AC.77 AC.78에서 천적 인간의 지성과 지혜가 얼마나 풍성하고 질서 있게 묘사되었는지를 생각해 보면, AC.79는 그 풍성함이 어디까지 허용되는지를 정확히 짚어 줍니다. 천적 인간은 동산과 같지만, 그는 그 동산의 주인이 아닙니다. 바로 이 지점이 천적 상태의 본질을 결정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을 ‘동산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고, ‘동산과 같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그 사람의 내적 상태 자체가 에덴의 질서와 일치해 있음을 뜻합니다. 그의 지성은 동산처럼 살아 있고, 그의 지혜는 강처럼 흐르며, 그의 지식과 이성은 질서 있게 자라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그의 공로나 성취의 결과가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마련하신 동산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의 결과입니다.

 

여기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말은 ‘그러나 그 동산은 주님의 것이다’라는 선언입니다. 이 문장은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을 가르는 가장 미세하면서도 본질적인 경계선에 해당합니다. 영적 인간은 진리를 알고, 선을 행하면서도 여전히 그것들을 ‘내가 선택했고, 내가 지켰고, 내가 이루었다’고 느끼기 쉽습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은 그렇게 느끼지 않습니다. 그는 모든 것이 주님께로부터 왔으며, 지금도 주님께 속해 있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인식하는 상태’에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정교한 표현을 씁니다. ‘누리는 것은 허락되지만, 소유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천적 인간은 지혜를 누립니다. 그는 선과 진리 안에서 살며, 그 안에서 깊은 기쁨과 자유를 경험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이 차이는 겉으로 보면 미묘해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하늘과 땅만큼 큽니다.

 

이 ‘소유하지 않음’은 결핍이나 박탈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천적 인간은 소유하지 않기 때문에 자유롭습니다. 만약 그것을 자기 것이라고 붙잡는 순간, 그는 그 동산을 지키기 위해 애써야 하고, 잃을까 두려워해야 하며, 스스로를 중심에 두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의 것임을 아는 순간, 그는 돌보는 자로서 살게 되고, 주님께서 돌보신다는 평안 안에 머무르게 됩니다. 이것이 곧 ‘일곱째 날의 안식’입니다.

 

이 글은 인간의 자아 개념을 근본에서부터 재정의합니다. 우리는 흔히 ‘내 믿음’, ‘내 신앙’, ‘내 이해’, ‘내 깨달음’이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사용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그 말들은 아직 영적 단계의 언어입니다. 천적 단계에서는 그런 언어 자체가 점점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모든 선과 진리, 지혜와 생명이 ‘주님께 속해 있음이 너무나 자명해지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글은 창2:15의 ‘동산을 경작하며 지킨다’는 말씀을 이해하는 열쇠를 제공합니다. 경작하고 지킨다는 것은 소유권을 행사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맡겨진 것을 사랑으로 돌본다는 뜻입니다. 천적 인간은 동산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애쓰지 않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주신 질서 안에 머무르기 때문에, 그 질서 자체가 동산을 지켜 줍니다. 그의 역할은 지배가 아니라 ‘동참’입니다.

 

이 지점에서 AC.79는 우리에게 매우 실제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주신 것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그것이 지식이든, 이해이든, 신앙이든, 혹은 어떤 영적 통찰이든, 우리는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적 상태란,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아무것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는 상태’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 글은 에덴의 평화로운 풍경 속에, 아주 조용하지만 결정적인 원리를 심어 둡니다. 주님의 것을 주님의 것으로 둘 때, 인간은 비로소 가장 풍성하게 누릴 수 있다는 원리입니다. 소유하려는 순간 줄어들고, 맡길 때 충만해지는 이 역설이 바로 천적인 삶의 비밀입니다.

 

 

 

AC.78, 창2:1-17 개요, '네 강, 천적 인간의 속 사람과 겉 사람'(10-14절)

AC.78 지혜(Wisdom)는 동산 가운데 있는 강을 의미합니다. 그로부터 네 강이 나뉘어 나오는데, 첫째는 선과 진리(good and truth)입니다. 둘째는 모든 선과 진리, 곧 사랑과 신앙에 관한 지식(knowledge [cog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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