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많이 하면 하나님께서 내 소원을 들어 주신다’

 

‘기도 많이 하면 하나님께서 내 소원을 들어 주신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이라면 매우 익숙한 말입니다. ‘기도하면 됩니다’, ‘끝까지 기도하세요’, ‘기도의 분량을 채우세요’, ‘하나님께 매달리면 반드시 응답하십니다’라는 권면도 자주 듣습니다. 실제로 성경은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가르칩니다. 주님께서는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7:7). 그러므로 간절히 기도하고 끈기 있게 주님을 찾는 것은 분명 귀한 신앙의 태도입니다.

 

문제는 ‘기도 많이 하면’과 ‘내 소원을 들어 주신다’ 사이에 우리가 어떤 인과관계를 만들어 놓느냐입니다. 자칫 기도의 양이 하나님의 결정을 움직이는 힘처럼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한 시간 기도했는데 응답이 없으면 세 시간을 기도하고, 일주일 기도했는데 이루어지지 않으면 사십 일을 기도하며, 많은 사람이 함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결국 마음을 바꾸실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기도는 주님과의 교제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사용하는 영적 수단이 되기 쉽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끈질긴 기도를 권하는 말씀도 있습니다. 눅18의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가 대표적입니다. 과부는 계속 찾아가 자신의 원한을 풀어 달라고 요청했고 결국 재판관은 그의 청을 들어줍니다. 그러나 이 비유를 ‘하나님도 계속 조르면 결국 들어주신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곤란합니다. 주님께서는 오히려 불의한 재판관과 하나님을 대조하십니다. 불의한 사람조차 끈질긴 호소를 듣는다면 하물며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의 부르짖음을 듣지 않으시겠느냐는 것입니다. 기도의 핵심은 하나님을 지치게 만드는 데 있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끝까지 그분을 향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에 관한 가장 중요한 장면 가운데 하나가 겟세마네입니다. 주님께서는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은 분명한 소원입니다. 고통을 앞두고 자신의 원함을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기도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이어집니다(마26:39).

 

이 한 문장 안에 기도의 본질이 거의 다 들어 있습니다. 기도는 원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아프면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고, 자녀의 문제가 해결되기를 기도할 수 있으며, 경제적인 어려움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취업, 결혼, 사업, 관계의 회복을 놓고 구체적으로 기도해도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이미 아시지만, 그 소원을 주님 앞에 가져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기도의 마지막에는 언제나 더 깊은 문이 하나 열려 있어야 합니다. ‘주님, 이것이 제가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알지 못하는 것이 있으니 제 뜻보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기도는 소원성취와 달라집니다. 소원성취의 중심에는 ‘내가 원하는 결과’가 있지만 기도의 중심에는 ‘주님’이 계십니다. 소원성취에서는 하나님이 내 목적을 이루어 주시는 수단이 되기 쉽지만, 참된 기도에서는 내가 원하는 것까지 주님 앞에 내려놓고 주님의 선하신 질서를 받아들이려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보면 이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주님의 신적 섭리는 인간의 순간적인 행복만을 목표로 하지 않고 그의 영원한 구원과 거듭남(regeneration)을 향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지금 당장 자기에게 무엇이 좋은지를 완전하게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돈이 생기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돈이 우리의 탐욕과 자기 사랑을 키울 수도 있습니다. 어떤 관계가 반드시 이루어져야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관계가 오히려 우리를 무너뜨릴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지금은 실패와 손실처럼 보이는 일이 훗날 우리를 더 큰 악에서 보호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고난은 모두 하나님께서 일부러 보내신 훈련이다’라고 단정해서도 안 됩니다. 여기에서도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허용하시는 것을 구별해야 합니다. 세상에는 인간의 악한 선택에서 생기는 고통도 있고, 자연계의 질서와 한계에서 발생하는 질병과 재난도 있으며, 다른 사람의 자유 때문에 우리가 겪게 되는 고통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 모든 악과 고통을 직접 만들어 보내신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허용된 것 안에서도 가능한 한 사람을 선으로 이끄시며, 영원한 것을 위하여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간절히 기도했는데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기도가 부족했다’고 결론 내릴 수 없습니다. 이것은 때때로 신앙인에게 매우 잔인한 말이 될 수 있습니다. 병든 가족을 위해 밤을 새워 기도했는데 결국 세상을 떠났다고 합시다. 그 사람에게 ‘조금만 더 믿고 기도했으면 나았을 텐데’라고 말한다면 남은 사람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죄책감을 씌울 수 있습니다. 기도의 응답 여부를 기도의 분량이나 믿음의 강도와 기계적으로 연결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도 자신의 ‘육체의 가시’를 놓고 주님께 세 번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받은 대답은 가시의 제거가 아니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고후12:9). 바울의 기도가 부족해서였을까요? 믿음이 약해서였을까요? 그렇게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는 분명히 구했고 주님께서는 응답하셨지만, 그 응답은 바울이 요청한 것과 다른 형태였습니다.

 

여기에서 ‘기도 응답’이라는 말 자체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흔히 내가 원한 일이 일어나면 ‘응답받았다’고 말하고, 일어나지 않으면 ‘아직 응답받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응답의 기준이 언제나 ‘내 소원이 이루어졌는가’가 됩니다. 주님께서 ‘그것은 네게 좋지 않다’고 하시는 것도 응답일 수 있고, ‘아직 아니다’도 응답일 수 있으며, 바울에게처럼 ‘그것을 없애 주는 대신 그것을 견딜 은혜를 주겠다’는 것도 응답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오래 기도해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모르시기 때문도 아니고, 하나님을 설득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도 아닙니다. 오히려 긴 기도 속에서 변화되는 쪽은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주님, 이것을 꼭 주십시오’라고 시작했던 기도가 어느 순간 ‘주님, 이것이 정말 제게 선한 것입니까?’로 바뀌고, 더 깊어지면 ‘주님, 제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선을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로 바뀔 수 있습니다. 기도가 소원을 주님께 관철하는 과정에서 주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으로 내가 변화되는 과정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유’(freedom)와 ‘합리성’(rationality)의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고 판단하고 선택하는 능력을 없애지 않으십니다. 기도했다고 해서 해야 할 일을 대신 해 주시는 것도 아닙니다. 취업을 위해 기도했다면 이력서를 써야 하고, 관계의 회복을 위해 기도했다면 사과해야 할 것이 있으면 사과해야 하며, 건강을 위해 기도했다면 필요한 치료와 생활의 변화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기도는 인간의 책임을 대신하는 마법이 아닙니다.

 

그래서 ‘기도했으니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 주시겠지’라는 태도와 참된 신뢰도 구별해야 합니다. 주님께 맡긴다는 것은 내가 할 일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자유와 합리성 안에서 성실하게 행하되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결과를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체념이 아니라 신뢰입니다.

 

여기에도 ‘프로프리움’(proprium)이 숨어들 수 있습니다. 아주 역설적이지만 기도를 많이 하면서도 자기 뜻을 더 강하게 붙들 수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오래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왜 안 들어 주시는가?’라는 생각 속에는 어느 순간 ‘내가 이 정도 기도했으니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해 주셔야 한다’는 거래의식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기도의 분량이 일종의 공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조차 자기 뜻을 관철하기 위한 수단이 됩니다.

 

참된 기도는 그 반대 방향으로 갑니다. 오래 기도할수록 ‘내 뜻대로 되어야 한다’는 마음이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는 나보다 더 멀리 보신다’는 신뢰가 깊어집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절대화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의 가장 깊은 열매는 반드시 ‘원하는 것을 얻는 것’만이 아니라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해도 주님을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주기도문도 이것을 잘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중심은 ‘내 소원이 이루어지이다’가 아니라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입니다(마6:10). 물론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는 간구도 있습니다. 필요한 것을 구합니다. 그러나 그 간구를 둘러싸고 있는 더 큰 질서는 주님의 이름, 주님의 나라, 주님의 뜻입니다. 우리의 필요가 주님의 뜻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기도를 많이 한다는 것은 분명 귀한 일입니다. 문제는 ‘얼마나 오래 기도했는가?’보다 그 기도를 통하여 ‘누구의 뜻을 구하게 되었는가?’입니다. 한 시간을 기도하고도 자기 뜻만 더욱 완강하게 붙들 수 있고, 짧게 ‘주님, 제가 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을 따르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면서 깊은 신뢰로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기도의 깊이는 반드시 시간의 길이와 비례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라는 약속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것을 하나님께 무엇이든 요구하면 그대로 받을 수 있다는 백지수표로 이해하기보다는, 주님을 향하여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사람에게 주님께서 참으로 필요한 선을 주신다는 약속으로 읽는 것이 더 온전합니다. 실제로 눅11의 병행 본문에서는 결론이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십니다(눅11:13). 가장 깊은 응답은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것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 많이 하면 하나님께서 내 소원을 들어 주신다’는 말에는 귀한 진리가 있습니다. 주님께 구해야 하고, 포기하지 않고 기도해야 하며, 우리의 가장 구체적인 필요와 소원까지 주님 앞에 가져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기도의 양이 충분하면 하나님께서 결국 내 뜻대로 해 주신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기도의 방향이 뒤집힙니다.

 

기도는 주님을 내 뜻으로 움직이는 기술이 아니라, 주님 앞에서 내 뜻이 정화되고 주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내가 변화되는 거룩한 관계입니다.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기도의 목적은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관철하는 데 있지 않고, 내가 원하는 것까지 주님께 아뢰면서 무엇이 참으로 선한지를 주님에게서 배우고 그분의 뜻을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글의 핵심을 더 짧게 표현한다면 이것이겠습니다.

 

‘기도를 많이 해서 주님의 뜻을 내 뜻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면서 내 뜻이 주님의 뜻을 향하여 움직이는 것입니다.’

 

겟세마네의 주님께서 그 모든 것을 한 문장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SL.22, ‘선행을 강조하면 행위구원인데...’

‘선행을 강조하면 행위구원인데...’ ‘선행을 강조하면 행위구원인데....’ 개신교 안에서는 상당히 민감하게 들리는 말입니다. 설교자가 ‘선을 행해야 합니다’,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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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행을 강조하면 행위구원인데...’

 

‘선행을 강조하면 행위구원인데....’ 개신교 안에서는 상당히 민감하게 들리는 말입니다. 설교자가 ‘선을 행해야 합니다’,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악을 버리고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라고 반복해서 강조하면 누군가는 금방 걱정합니다. ‘저러다가 행위구원으로 가는 것 아닌가?’ 특히 종교개혁 이후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을 중요하게 여겨 온 개신교 전통에서는 인간의 행위를 구원의 조건처럼 말하는 것에 강한 경계심이 있습니다. 그 경계심에는 분명 지켜야 할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선행을 쌓아서 하나님께 구원을 요구할 수 없습니다. ‘나는 평생 착하게 살았습니다’, ‘헌금도 많이 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도 도왔습니다’, ‘교회 봉사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나를 천국에 보내셔야 합니다’라고 말한다면 선행을 일종의 구원 대금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바울이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라고 한 말씀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자랑과 공로를 철저히 무너뜨립니다(엡2:8-9).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매우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선행으로 구원을 살 수 없다’는 것과 ‘그러므로 선행을 강조해서는 안 된다’라는 것은 전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전자는 인간의 공로를 부정하는 것이지만, 후자는 자칫 주님께서 끊임없이 명하신 선한 삶 자체를 약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행위구원을 피하려다가 어느 순간 ‘행위’를 피하게 되는 이상한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읽어 보면 선한 삶에 대한 요구는 결코 주변적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셨습니다(마5:16). 또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라고 하셨으며(마7:16),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신 뒤에는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라고 하셨습니다(눅10:37). 주님께서는 선을 행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행위구원이라고 걱정하지 않으셨습니다.

 

마태복음 25장은 더욱 직접적입니다. 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사람에게 마시게 하고, 나그네를 영접하고, 헐벗은 사람을 입히며, 병든 사람과 갇힌 사람을 돌본 일이 마지막 심판의 장면에 등장합니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마25:40). 만일 선행을 강조하는 것 자체가 행위구원이라면 이 말씀부터 설명하기 어려워집니다.

 

야고보는 더 대담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라고 말하고(약2:17),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라고까지 말합니다(약2:24). 이 구절 때문에 종교개혁 이후 많은 논쟁이 있었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성경 자체는 ‘행위’를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행위가 있느냐 없느냐만이 아니라 그 행위가 어디에서 나오며,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매우 유용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선한 행위를 구원의 대가로 보지 않습니다. 모든 참된 선의 근원은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서 독립적으로 발생한 순수한 선이 있어서 그것을 주님께 가져가고 ‘제가 이것을 했으니 상을 주십시오’라고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행하는 참된 선은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 실제 삶에서 표현한 것입니다.

 

따라서 문제는 ‘선을 행했는가’보다 ‘그 선을 누구의 것으로 여기고 있는가’입니다. 선을 행한 뒤 ‘내가 했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선하다. 나는 이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더 높은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프로프리움’(proprium)이 그 선을 자기 것으로 붙잡기 시작합니다. 겉으로는 선행이지만 그 안에 자기 의와 명예욕, 그리고 공로 의식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경계하는 공로적 선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해결책을 ‘그러니 선을 강조하지 말자’로 잡으면 이상해집니다. 자기 자랑이 생길 위험이 있으니 이웃을 돕지 말자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해결책은 선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선의 근원을 바로 아는 것입니다. 사람은 선을 실제로 행해야 합니다. 악을 죄로 알고 피해야 하고, 어려운 이웃을 도와야 하며, 자신의 직분과 책임 안에서 유용한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이 선의 능력과 근원은 주님에게서 온다’고 인정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매우 중요한 원리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은 마치 자기가 하는 것처럼(as if from self) 선을 행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대신 정직해 주시기를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내가 거짓말을 하지 않아야 하고, 내가 용서해야 하며, 내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행한 뒤에는 그 선의 근원과 능력이 자기에게 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자유롭게 내가 행하지만, 선 자체는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freedom)와 ‘합리성’(rationality)을 동시에 보존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꼭두각시처럼 선하게 만들지 않으십니다. 무엇이 선하고 참된지를 이해하고 합리적으로 판단하며, 그것을 자유롭게 선택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거듭남(regeneration)은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과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은 적극적으로 악과 싸우고 선을 행합니다. 다만 그 싸움에서 이길 힘과 선을 행할 능력이 궁극적으로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배워 갑니다.

 

여기에서 ‘행위구원’이라는 말을 좀 더 정확하게 사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선을 행해야 한다’고 말한다고 해서 곧 행위구원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자기 힘으로 선행을 쌓아 그 공로로 구원을 얻는다’라고 말할 때 행위구원 문제가 생깁니다. 이 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선행은 필요 없다’와 ‘선행에는 공로가 없다’도 전혀 다른 말입니다.

 

이 차이를 놓치면 이상한 역설이 생깁니다.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라고 아주 정확하게 고백하면서 실제 삶에서는 거짓과 탐욕과 미움과 음란을 계속 붙들어도, 선한 삶을 강조하는 사람보다 자신이 더 복음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해야 합니다’라는 설교를 듣고 ‘저건 복음이 아니라 율법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수없이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라고도 하셨습니다(요13:17).

 

사실 신앙이 살아 있는지를 확인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곳이 삶입니다. 사과나무가 살아 있는지는 ‘나는 사과나무입니다’라는 팻말로 확인하지 않습니다. 때가 되면 열매를 봅니다. 그렇다고 열매를 가지에 접착제로 붙인다고 나무가 살아나는 것도 아닙니다. 뿌리와 줄기에 생명이 있어야 열매가 나옵니다. 믿음과 선행도 이와 비슷합니다. 외적 선행을 많이 붙인다고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실제로 사람 안에 있다면 그 생명은 결국 어떤 형태로든 삶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래서 선행은 구원의 ‘가격’이 아니라 구원의 ‘열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열매는 단순히 나무가 살아 있다는 증거만이 아닙니다. 나무가 존재하는 목적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것은 그 사람이 자기 혼자 천국에 들어가 행복하게 살게 하기 위해서만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을 이웃에게 흘려보내며 선하고 유용한 일을 하는 사람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이것이 ‘체어리티’(charity)입니다. 체어리티는 단순히 돈을 기부하거나 불쌍한 사람을 돕는 좁은 의미의 자선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이 이웃과 공동체를 향하여 실제적인 선과 유용한 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바르게 돌보는 것, 직장에서 정직하게 책임을 다하는 것, 환자를 성실하게 치료하는 것, 학생을 진실하게 가르치는 것,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는 것, 때로는 상대에게 해로운 일을 단호하게 거절하는 것까지도 체어리티의 삶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에게 ‘믿음과 체어리티’는 서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를 보게 하고, 체어리티는 그것을 사랑하게 하며, 행위는 그 사랑을 실제 세계에서 구현합니다. 진리가 선과 결합하고, 선이 유용한 일(use, 쓰임새)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살아 있는 신앙입니다.

 

여기에서 종교개혁이 경계했던 공로주의와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선한 삶 사이의 차이도 분명해집니다. ‘내가 선을 행했으니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셔야 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내 행위에는 공로가 없으니 어떻게 살아도 구원과는 상관없다’는 생각도 버려야 합니다. 첫 번째는 인간의 선행을 주님보다 높이고, 두 번째는 주님께서 인간을 실제로 거듭나게 하시는 일을 약화시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장면은 이 점을 아름답게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섬김에 관한 교리를 설명하시는 데서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직접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그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라고 하셨습니다(요13:14). 참된 진리는 결국 행위로 내려옵니다. 사랑은 행동할 때 비로소 자연계 안에서 모습을 드러냅니다.

 

따라서 ‘선행을 강조하면 행위구원이야’라는 생각의 가장 큰 위험은 선과 행위를 신앙에서 밀어내 버릴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면 신앙은 머리에서 동의하는 교리가 되고, 구원은 그 교리를 믿었다는 신분이 되며, 실제 삶은 ‘가능하면 잘 살면 좋은 것’ 정도로 낮아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남은 사람의 생각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의지와 사랑, 그리고 삶을 변화시키는 주님의 역사입니다.

 

물론 여기에서도 완벽주의로 가서는 안 됩니다. 선행을 강조한다는 것이 ‘완벽하게 선하게 살아야 구원받는다’라는 뜻은 아닙니다. 거듭나는 사람도 넘어지고 실패합니다. 중요한 것은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악을 악이라고 인정하고, 그것을 정당화하지 않으며, 다시 주님께 도움을 구하고 선을 향하여 일어서는 것입니다. 선한 삶은 구원을 얻기 위한 시험 점수가 아니라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거듭남의 과정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아주 중요한 역설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참된 선을 행할수록 사람은 오히려 ‘내가 선하다’는 생각에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자기 안의 선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점점 더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내가 저 사람을 도왔다’고 생각하지만,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주님께서 내게 사랑할 마음과 도울 기회, 그리고 능력을 주셨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선행이 많아질수록 공로 의식이 커지는 것이 아니라 감사가 깊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국적 선과 공로적 선의 차이입니다.

 

그러므로 ‘행위구원’을 가장 정확하게 경계하는 방법은 선행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선을 힘껏 행하면서도 그 선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습니다. 그래야 은혜입니다’가 아니라 ‘나는 주님께서 명하신 선을 힘껏 행하겠습니다. 그러나 그 선의 능력과 공로를 내 것으로 주장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은혜’와 ‘행위’도 더 이상 경쟁하지 않습니다. 은혜는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이 선을 행할 수 있게 하는 모든 생명과 능력이 먼저 주님에게서 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 은혜를 자유롭게 받아 실제 삶에서 사용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아 이웃에게 흘려보내는 것, 그것이 체어리티이며 유용한 삶입니다.

 

따라서 ‘선행을 강조하면 행위구원이야’라는 말에는 중요한 경계심이 있지만, 그것을 지나치게 확대하면 오히려 성경이 강조하는 삶을 약화시킬 수 있습니다. 경계해야 할 것은 선행이 아니라 ‘공로 의식’입니다. 버려야 할 것은 행위가 아니라 ‘내 행위가 나를 구원한다’는 생각입니다.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선행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니지만,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님은 반드시 우리를 선을 사랑하고 행하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십니다.’

 

조금 더 날카롭게 말하면 이것이겠습니다.

 

‘행위구원의 반대말은 ‘행위 없음’이 아니라 ‘공로 없음’입니다.’

 

그리고 이번 글의 핵심을 가장 ‘스베덴보리의 렌즈’답게 표현한다면 이것이겠습니다.

 

‘선을 행하되 그것을 내 공로로 여기지 않는 것, 마치 내가 하는 것처럼 힘껏 행하되 모든 참된 선의 근원은 주님이심을 인정하는 것, 이것이 은혜와 삶이 만나는 자리입니다.’

 

 

 

SL.23, ‘기도 많이 하면 하나님께서 내 소원을 들어 주신다’

‘기도 많이 하면 하나님께서 내 소원을 들어 주신다’ ‘기도 많이 하면 하나님께서 내 소원을 들어 주신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이라면 매우 익숙한 말입니다. ‘기도하면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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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21,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거야. 삶과 행위는 부차적인 거고’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거야. 삶과 행위는 부차적인 거고’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거야. 삶과 행위는 부차적인 거고.’ 개신교 신앙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매우 자연스럽게 들리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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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거야. 삶과 행위는 부차적인 거고’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거야. 삶과 행위는 부차적인 거고.’ 개신교 신앙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매우 자연스럽게 들리는 말입니다. 바울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라고 말하고(롬3:28), 에베소서에는 더욱 분명하게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엡2:8-9). 그러므로 인간이 자기 선행을 쌓아 하나님께 구원의 대가를 지불한다는 생각은 분명 복음과 맞지 않습니다. 구원의 근원은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주님입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구원은 우리의 행위에 대한 대가가 아니다’라는 말과 ‘그러므로 사람이 어떻게 사느냐는 구원에서 부차적이다’라는 말은 같은 것일까요? 바로 여기에서 매우 큰 비약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인간의 공로를 부정한 것을 인간의 삶 자체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로 바꾸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믿음’은 구원을 얻는 결정적인 조건이 되고, 실제 삶은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 가능하면 잘 살아야 하는 일종의 후속 과정처럼 밀려납니다.

 

그런데 에베소서의 말씀도 9절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바로 다음 절은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라고 말합니다(엡2:10). 선한 행위 때문에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만, 구원하시는 주님의 역사는 사람을 선한 삶으로 이끕니다. 다시 말해 선한 행위는 구원을 사는 가격이 아니지만, 구원이 사람 안에서 실제로 역사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삶의 열매입니다.

 

야고보서는 더욱 직접적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라고 하고(약2:17),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라고까지 말합니다(약2:26). 야고보가 바울과 반대되는 또 다른 구원론을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인간이 자기 행위를 공로로 삼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주장하는 것을 거부하고, 야고보는 삶과 분리된 지적 신앙을 살아 있는 믿음이라고 부르는 것을 거부합니다. 서로 다른 오류를 겨냥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행위’라는 말을 조금 조심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행위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헌금, 봉사, 구제, 전도, 새벽기도 같은 종교적 활동을 먼저 떠올립니다. 그러면 ‘행위 구원’이라는 경계심이 곧바로 생깁니다. 그러나 성경과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더 근본적인 문제는 ‘내가 선행 몇 개를 했는가’가 아니라 ‘나는 어떤 사랑을 따라 살아가고 있는가’입니다. 삶과 행위는 그 사람 안에 무엇이 사랑으로 자리 잡고 있는지를 밖으로 나타냅니다.

 

주님께서는 나무와 열매의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라고 하셨고,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라고 하셨습니다(마7:16-17). 열매가 나무를 좋은 나무로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좋은 나무라면 그 생명이 결국 열매로 나타납니다. 마찬가지로 선한 행위를 많이 쌓아서 그 양으로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지만,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실제로 받아들인 사람이라면 그것이 언젠가는 삶의 열매로 나타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믿음과 체어리티(charity)를 분리하지 않습니다. 진리는 사람이 무엇이 선인지 볼 수 있도록 빛을 주고, 선은 그 진리를 실제 삶으로 옮깁니다. 믿음이 ‘무엇이 참인지 아는 것’에만 머물고 그 진리가 의지와 삶으로 내려가지 않는다면 아직 완전한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진리는 선을 향하고, 믿음은 체어리티를 향해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과 체어리티는 서로 경쟁하는 두 가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한 영적 생명의 두 측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아주 단순하게 말하면 ‘믿음은 선을 보는 눈이고, 체어리티는 그 선을 행하려는 마음이며, 행위는 그 마음이 실제 삶에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눈만 있고 걸어가지 않는다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눈 없이 무작정 걸어가는 것도 위험합니다. 진리 없는 선은 무엇이 참된 선인지 분별하기 어렵고, 선 없는 진리는 머릿속 지식으로 굳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선과 진리의 결합은 거듭남(regeneration)의 핵심 질서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보면 삶이 결코 부차적인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마지막 심판을 묘사하는 마태복음 25장에서 주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신앙고백의 문장을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굶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 헐벗은 자, 병든 자, 갇힌 자에게 어떻게 했는지를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라고 하십니다(마25:40). 그렇다고 이 말씀이 ‘선행 점수가 높은 사람이 천국에 간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 행위들을 통하여 그 사람 안에 어떤 사랑이 있었는지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도 반복되는 표현이 있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주님께서는 교회들의 교리만을 평가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실제 상태와 삶을 보십니다. 이것은 행위가 믿음과 경쟁하는 별도의 구원 수단이기 때문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사랑과 믿음이 보이는 삶에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행위는 내면과 무관하게 천국 입장권을 사는 공적이 아니라 내면의 사랑이 몸을 입은 모습입니다.

 

따라서 ‘믿음이냐 행위냐’라는 질문 자체가 어느 정도 잘못 설정된 질문일 수 있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 ‘심장이 중요합니까, 혈액순환이 중요합니까’라고 묻는 것과 비슷합니다. 둘을 분리하면 생명이 유지되지 않습니다. 참된 믿음은 삶으로 향하고, 참된 선행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로부터 나옵니다. 성경이 경계하는 것은 ‘행위’ 자체가 아니라 행위를 자기 공로로 소유하는 태도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프로프리움’(proprium)의 문제가 등장합니다. 인간은 선을 행하고 나면 ‘내가 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나는 이만큼 봉사했다’, ‘나는 이만큼 헌금했다’, ‘나는 평생 교회를 섬겼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착하게 살았다’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주님 앞에 자신의 공로처럼 내놓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행위 구원의 깊은 위험입니다. 그러나 해결책은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선을 힘껏 행하되 그 선의 근원과 능력이 주님에게서 왔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중요한 원리가 여기에서 빛을 발합니다. 사람은 마치 자기에게서 하는 것처럼 자유롭게 선을 선택하고 행해야 하지만, 실제 선의 근원은 주님이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와 ‘합리성’(rationality)을 없애지 않으면서 동시에 인간의 공로를 제거합니다. 나는 악을 죄로 알고 피해야 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해야 하며, 내가 해야 할 일을 실제로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이 선은 내 소유이며 이것 때문에 나는 구원받을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의 반대말이 ‘행위로 구원받는다’일 필요는 없습니다. 더 깊은 대안은 ‘살아 있는 믿음’입니다. 살아 있는 믿음은 주님을 신뢰하면서 주님께서 가르치신 것을 실제 삶으로 받아들입니다. 악을 죄로 알고 피하고, 용서해야 할 사람을 용서하려 애쓰고, 정직해야 할 때 정직을 선택하며, 자신의 책임을 감당하고, 이웃에게 필요한 선을 행합니다. 이 모든 것은 천국을 사기 위한 대가가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사람 안에서 열매 맺어 가는 과정입니다.

 

여기에서 ‘체어리티’가 중요합니다. 체어리티는 단순한 구제나 자선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이 이웃과 공동체를 향하여 실제적인 선과 유용한 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직장에서 맡은 일을 정직하게 하는 것, 가족에게 책임을 다하는 것,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것,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 때로는 상대에게 해로운 요구를 거절하는 것까지도 참된 선을 목적으로 한다면 체어리티의 영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신앙은 바로 이런 삶 속에서 몸을 얻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일까요? 정반대입니다. 믿음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진리를 모르면 무엇이 선인지 제대로 분별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목적은 단지 ‘내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믿게 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진리는 우리의 삶을 밝혀 악을 보게 하고, 선을 알게 하며, 주님께로 향하게 합니다. 믿음은 삶을 위한 진리입니다.

 

이 때문에 ‘삶과 행위는 부차적’이라는 말은 생각보다 위험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신앙고백은 구원의 본질이고 삶은 그다음 문제라고 생각하면, 신앙과 삶 사이에 커다란 틈이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 물론 성질도 못 고쳤고, 사람을 미워하고, 돈 앞에서 거짓말도 하지만 그것은 성화의 문제이지 구원과는 별개다.’ 이런 식의 사고가 가능해집니다. 그러면 믿음은 거듭남을 촉진하는 진리가 아니라 거듭나지 않아도 안심할 수 있게 해 주는 방패가 됩니다.

 

이것은 앞서 살펴본 ‘한번 구원받으면 끝’이라는 생각과도 연결됩니다. 믿음을 삶에서 떼어 놓는 순간 구원은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과거 어느 시점에 무엇을 믿었다고 고백했는가’의 문제가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루시는 구원은 사람의 명칭만 바꾸는 일이 아니라 사람 자체를 변화시키는 일입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지배되던 사람을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그 변화는 완벽함을 뜻하지 않습니다. 거듭나는 사람도 넘어지고, 화를 내고, 잘못 판단하고, 죄를 짓습니다. 중요한 것은 ‘완벽하게 살았느냐’가 아니라 악을 발견했을 때 그것을 정당화하는가, 아니면 죄로 인정하고 주님께 돌아가 다시 싸우는가입니다. 한 번의 실패가 그 사람의 ‘지배적 사랑’(ruling love)을 결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악을 계속 사랑하고 정당화하면서 ‘그래도 나는 믿음으로 구원받았으니 괜찮다’고 한다면 믿음이 오히려 프로프리움을 보호하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과 행위를 이렇게 이해하면 바울과 야고보 사이의 긴장도 상당 부분 풀립니다. ‘내 선행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셔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에게는 바울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반대로 ‘나는 믿으니까 어떻게 살아도 구원에는 상관없다’고 말하는 사람에게는 야고보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하나는 인간의 공로를 무너뜨리고, 다른 하나는 삶 없는 신앙을 무너뜨립니다.

 

결국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믿음인가 행위인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를 믿고, 그 진리가 사랑이 되어, 사랑이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믿음은 체어리티와 결합하고, 체어리티는 행위와 유용한 일(use, 쓰임새) 속에서 실제가 됩니다. 이것이 선과 진리의 결합이며 거듭남의 삶입니다.

 

따라서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거야. 삶과 행위는 부차적인 거고’라는 말에는 매우 중요한 진리와 매우 위험한 비약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인간의 행위가 구원의 공로가 아니다’라는 앞부분은 붙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그러므로 삶은 구원 문제에서 부차적이다’라고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삶은 믿음의 경쟁자가 아니라 믿음이 살아 있는지를 드러내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선한 행위를 대가로 구원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에게서 구원받지만, 주님에게서 받은 참된 믿음은 반드시 체어리티와 결합하여 삶 속에서 선한 열매를 맺으려 합니다.’

 

그리고 이번 글의 핵심을 더 짧게 압축한다면 이것이겠습니다.

 

‘행위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님은 우리의 삶을 그대로 내버려 두시지도 않습니다.’

 

어쩌면 가장 ‘스베덴보리의 렌즈’다운 표현은 이것일 것입니다.

 

‘믿음과 삶 가운데 어느 것이 구원에 더 중요한지를 묻기보다, 삶으로 내려오지 않는 믿음을 과연 살아 있는 믿음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SL.22, ‘선행을 강조하면 행위구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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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20, ‘정통 교리를 믿으면 구원 받지만, 이단 교리를 믿으면 지옥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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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 교리를 믿으면 구원 받지만, 이단 교리를 믿으면 지옥 가’

 

‘정통 교리를 믿으면 구원받지만, 이단 교리를 믿으면 지옥 가.’ 개신교 안에서는 상당히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생각입니다. 실제로 교리는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믿느냐에 따라 신앙의 방향이 달라지고, 인간과 죄와 구원과 이웃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삶도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리는 아무래도 상관없고, 착하게만 살면 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거짓은 사람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 수 있으며, 진리는 사람이 선을 보고 그 선을 따라 살아가도록 밝혀 주는 빛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참된 교리는 구원에 중요하다’는 말과 ‘정통 교리를 가지고 있으면 구원받고 잘못된 교리를 가지고 있으면 지옥에 간다’는 말은 같은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전자는 진리의 중요성에 관한 말이지만, 후자는 자칫 구원을 일종의 ‘교리 시험’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죽은 뒤 주님 앞에서 신론, 기독론, 삼위일체론, 속죄론, 종말론에 관한 정답을 맞히면 천국에 들어가고, 몇 문제를 틀리면 지옥에 가는 것처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오히려 우리를 불편하게 합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여기 등장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주여 주여’라고 부르고,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했으며,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까지 행했다고 말합니다. 적어도 외적으로는 상당히 종교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들의 종교적 자기 인식보다 그들의 삶을 문제 삼으십니다.

 

이 점에서 사울은 매우 충격적인 사례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 스데반의 죽음에 찬성했던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이 하나님께 충성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 일에 찬성했습니다. 훗날 바울 자신도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많은 일을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고백합니다(행26:9). 그의 문제는 종교적 열심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진리라고 확신한 것이 실제 진리와 어긋나 있었다는 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더욱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사울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고 부르셨습니다(행9:4). 사울은 자신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박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너는 잘못된 교리를 믿었으므로 끝났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눈을 열어 주셨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먼저 그의 눈을 멀게 하심으로써 자신이 보고 있다고 믿었던 사람이 실제로는 보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셨고, 이후 다시 보게 하셨습니다.

 

이 장면은 ‘정통과 이단’의 문제를 생각할 때 매우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이 거짓을 진리라고 잘못 믿는 것과, 그것이 거짓임을 알면서도 자기 욕망을 지키기 위해 붙드는 것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태어난 가정과 사회와 종교적 환경에서 많은 것을 물려받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어떤 교리를 진리라고 배웠다면 그것을 의심하지 않고 평생 믿을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단지 그 사람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명제만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왜 그것을 믿었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빛 안에서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십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서 ‘거짓을 가지고 있는 것’과 ‘거짓을 사랑하는 것’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잘못된 것을 진리라고 믿고 있지만 마음으로는 선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 더 밝은 진리가 주어졌을 때 ‘내가 잘못 알고 있었구나’ 하며 기꺼이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매우 정확한 교리를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지위와 명예, 욕망을 지키기 위해 진리를 왜곡할 수 있습니다. 전자의 머릿속에는 거짓이 있지만 마음은 진리를 향해 열려 있을 수 있고, 후자의 머릿속에는 정통 교리가 있지만 마음은 진리를 이용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차이는 대단히 큽니다. 왜냐하면 사후세계에서는 인간이 가지고 있던 단순한 지식보다 그 지식을 무엇을 위해 사랑했는지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진리 자체와 선한 삶을 위해 사랑했던 사람은 잘못 알고 있던 부분이 있다면 그것을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그는 진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더 밝은 진리가 주어지면 기뻐합니다. 그러나 진리를 자기 우월감과 지배욕, 그리고 명예를 위해 사용했던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정통 교리조차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애초에 그가 사랑한 것은 진리가 아니라 진리를 소유한 ‘나’였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프로프리움’(proprium)이 종교 안으로 들어옵니다. 세속적인 프로프리움은 ‘내가 잘났다’고 말하지만, 종교적인 프로프리움은 훨씬 미묘합니다. ‘내가 옳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옳으신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자신이 이해한 것을 하나님 자신과 동일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내 교리에 반대한다’가 어느 순간 ‘하나님께 반대한다’가 되고, ‘내가 저 사람을 이단이라고 판단한다’가 ‘하나님께서 저 사람을 버리셨다’로 바뀝니다. 인간의 판단과 주님의 판단 사이의 경계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요16:2). 얼마나 두려운 말씀입니까. 사람을 죽이면서도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종교적 확신의 강도가 그 확신의 진실성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나는 진심으로 믿는다’와 ‘나는 진리를 믿는다’는 같은 말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단’이라는 구분 자체가 필요 없다는 뜻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교리는 분별해야 합니다. 주님이 누구신지,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선과 악이 무엇인지에 관한 거짓된 가르침은 실제로 사람을 해칠 수 있습니다. 사람의 탐욕과 음란, 지배욕을 정당화하는 교리라면 더욱 경계해야 합니다. 진리와 거짓의 차이를 없애 버리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무관심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 역시 모든 가르침이 똑같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무엇이 진리인지 더 깊이 분별하려는 작업입니다.

 

다만 ‘교리를 분별하는 것’과 ‘그 교리를 믿는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판결하는 것’을 구별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가르침은 성경과 맞지 않는다’, ‘이 부분은 거짓이라고 판단한다’, ‘이 가르침을 따라가면 이런 위험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그렇게 말해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곧바로 ‘그러므로 저 사람은 지옥 간다’고 넘어가면 우리는 교리의 분별에서 인간의 영원한 내면에 대한 심판으로 영역을 넘어간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를 대하는 태도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전통적 개신교의 기준으로 스베덴보리를 ‘이단’이라고 규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들이 스베덴보리를 이단이라고 하니 오히려 그들이 진짜 이단이다’라고 되받아친다면 똑같은 구조 안에 들어가 버립니다. 중요한 것은 이름표를 뒤집어 붙이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이 실제로 무엇을 말하는지 살피고, 그것이 성경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검토하며, 그 가르침이 사람을 주님께 더 가까이 가게 하는지, 악을 죄로 알고 피하게 하는지, 이웃을 사랑하고 체어리티(charity)를 행하게 하는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정통’이라는 말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통 교리를 소유하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진리는 빛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빛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그 빛 가운데 걷는 것은 다릅니다. 손에 등불을 들고 있으면서 정반대 방향으로 걸어갈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더 많은 진리를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더 큰 책임이 따릅니다. 무엇이 선인지 알면서 행하지 않고, 무엇이 악인지 알면서 의도적으로 행한다면 그 지식 자체가 사람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정통 교리를 가진 사람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나는 정통이므로 안전하다’는 생각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앞서 살펴본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으므로 안전하다’, ‘한번 구원받았으므로 안전하다’, ‘나는 교회 안에 있으므로 안전하다’와 놀랍도록 비슷합니다. 구원의 확신이 어느 순간 자기 성찰을 멈추게 하는 신분증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이단이고 나는 정통이다’라는 구분이 ‘그러므로 저 사람보다 나는 주님께 가깝다’는 결론으로 넘어가는 순간, 진리는 자신을 비추는 빛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재단하는 도구가 됩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훨씬 깊습니다. 어떤 사람이 무엇을 배울 기회를 가졌는지, 무엇을 진리라고 진실하게 믿었는지, 더 밝은 진리를 만났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려 했는지, 아니면 자기 사랑 때문에 거부했는지, 그리고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를 실제 삶에서 어떻게 사용했는지를 보십니다. 인간은 교리의 문장을 볼 수 있지만 주님께서는 그 교리를 품고 있는 사람의 사랑을 보십니다.

 

그렇다고 사랑만 있으면 진리는 필요 없다는 것도 아닙니다. 선은 진리를 필요로 하고 진리는 선을 향해야 합니다. 사랑만 강조하면서 무엇이 선인지 분별하지 않으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악을 허용할 수도 있고, 진리만 강조하면서 사랑을 잃으면 진리를 가지고 사람을 정죄하고 상처 입힐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끊임없이 말하는 선과 진리의 결합은 바로 이 지점에서 중요합니다. 참된 신앙은 ‘정확하게 아는 것’과 ‘선하게 사는 것’을 서로 떼어 놓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정통 교리를 믿으면 구원받지만, 이단 교리를 믿으면 지옥 가’라는 말에는 중요한 진리와 위험한 비약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진리는 분명 구원에 중요합니다. 그러나 진리를 소유한 것이 곧 구원을 소유한 것은 아닙니다. 거짓 역시 위험합니다. 그러나 잘못된 교리를 물려받았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인간이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결정적인 것은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진리와 선을 어떻게 받아들이며, 궁극적으로 무엇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형성되어 가느냐입니다.

 

그래서 질문은 ‘나는 정통인가, 저 사람은 이단인가?’에서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진리를 사랑하는가, 아니면 내가 옳다는 것을 사랑하는가?’입니다. 이 둘은 겉으로 매우 비슷해 보이지만 영적으로는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 틀렸다는 사실이 밝혀져도 진리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옳다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은 진리가 자기 생각을 무너뜨리면 진리와 싸우기 시작합니다. 사울이 다메섹 길에서 맞닥뜨린 것이 바로 이 경계였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진짜 이단’의 문제도 여기에서 다시 보아야 합니다. 가장 두려운 것은 어떤 교단의 이단 목록에 내 이름이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진리를 보여 주시는데도 내 욕망과 체면, 지위를 지키기 위해 그것을 거부하고, 내가 원하는 악을 선이라 부르며, 거짓을 진리라고 고집하는 상태입니다. 교리적 오류보다 더 깊은 곳에는 사랑의 왜곡이 있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질문에는 이렇게 답하고 싶습니다. ‘정통 교리는 구원의 귀중한 빛이지만 구원 그 자체는 아닙니다. 잘못된 교리는 사람을 어둡게 할 수 있지만, 그것을 잘못 배웠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을 지옥에 있다고 판결할 수도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사람이 무엇을 알고 있었는지만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선과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떤 사랑의 사람이 되었는지를 보십니다.’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정통 교리를 소유하는 것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를 받아들여 그 진리가 우리의 사랑과 삶을 변화시키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번 글의 핵심을 가장 날카롭게 압축한다면 이것이겠습니다.

 

‘주님 앞에서 더 중요한 질문은 나는 정통인가가 아니라 나는 진리를 사랑하는가, 아니면 내가 옳다는 것을 사랑하는가입니다.’

 

 

 

SL.21,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거야. 삶과 행위는 부차적인 거고’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거야. 삶과 행위는 부차적인 거고’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거야. 삶과 행위는 부차적인 거고.’ 개신교 신앙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매우 자연스럽게 들리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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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19, ‘교회 안 다닌 사람은 결국 구원 받기 어려워’

‘교회 안 다닌 사람은 결국 구원 받기 어려워’ ‘교회 안 다닌 사람은 결국 구원받기 어려워.’ 오랫동안 교회생활을 해 온 사람이라면 이 말을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실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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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안 다닌 사람은 구원 받기 어려워’

 

‘교회 안 다닌 사람은 구원받기 어려워.’ 오랫동안 교회생활을 해 온 사람이라면 이 말을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교회는 신앙생활에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교회에서 말씀을 듣고, 예배드리고, 기도하며, 다른 신자들과 교제하고, 자신의 신앙을 점검합니다. 혼자서는 알기 어려웠던 성경의 진리를 배우고, 신앙 공동체 안에서 사랑과 섬김을 실제로 연습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다니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를 구별해야 합니다. ‘교회가 구원의 중요한 통로다’라는 말과 ‘교회에 출석하지 않은 사람은 구원받기 어렵다’는 말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더 나아가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은 구원에 가깝고,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은 지옥에 가깝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교회를 주님보다 앞세우는 뜻밖의 문제가 생깁니다. 구원하시는 분은 교회가 아니라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아도 ‘교회 안’과 ‘교회 밖’이라는 외적 경계만으로 사람의 영적 상태를 판단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대표적입니다(눅10:25-37). 제사장과 레위인은 당시 종교 제도의 중심에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말씀을 알고 예배와 가까이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지나갔습니다. 반대로 종교적으로는 경계 밖에 있다고 여겨지던 사마리아인은 가던 길을 멈추고 그 사람을 돌보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사장과 레위인의 종교적 신분을 들어 그들을 칭찬하지 않으시고, 실제로 자비를 행한 사람이 ‘이웃이 되어 준 자’임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의 질문을 던집니다. ‘교회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입니다. 교회의 목적이 사람을 단지 ‘교인’으로 만드는 데 있다면 교회 출석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목적이 말씀을 통하여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고, 악을 죄로 알고 피하게 하며, 선과 진리를 사랑하고 이웃에게 체어리티(charity)를 행하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는 데 있다면 교회는 목적 그 자체라기보다 주님께서 사람을 구원으로 이끄시는 매우 중요한 수단이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보면 ‘교회’라는 개념은 건물이나 교단 명부보다 훨씬 깊습니다. 교회의 본질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 받아들여지는 데 있습니다. 외적 교회가 있고 동시에 사람 안에 형성되는 내적 교회가 있습니다. 사람이 말씀의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삶으로 받아들여 선을 행할 때 그 사람 안에 교회의 본질적인 것이 형성됩니다. 따라서 일요일마다 예배당에 앉아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 안에 교회가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것은 상당히 엄중한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은 50년 동안 한 번도 주일예배를 빠지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성경도 많이 알고, 찬송가도 잘 부르며, 교회 직분도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평생 자기 이익만 추구하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며, 거짓과 탐욕을 죄라고 여기지 않고, 이웃에게 해야 할 선을 외면한다면 ‘50년 교회 출석’이라는 기록 자체가 그 사람을 천국적 사람으로 만들지는 못합니다. 교회 안에 오래 있었다는 것과 주님께서 그 사람 안에 교회를 이루셨다는 것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여러 사정으로 평생 교회에 제대로 다녀 보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좋은 교회를 만날 기회도 없었으며, 어쩌면 그가 만난 그리스도인들의 모습 때문에 교회에 좋지 않은 인상을 갖게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양심을 따라 거짓말과 부정을 피하려 했고, 가족을 책임지고, 어려운 이웃을 돕고, 자신이 알고 있는 선을 따라 살려고 애썼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에게 단지 ‘교회 출석 기록이 없으므로 당신은 주님에게서 멀리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앞서 살펴본 ‘평생 착하게 살아도 예수님을 모르면 지옥 가’라는 문제와 여기서 다시 만나게 됩니다. 구원의 근원은 인간의 착함이 아니라 오직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사람이 그 사실을 명시적으로 알고 있지 않더라도 그가 받아들이는 모든 참된 선과 진리의 근원은 주님입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교회라는 외적 통로를 충분히 경험하지 못했다고 해서 주님께서 그 사람에게 접근하실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섭리는 인간이 만들어 놓은 교단과 건물의 경계보다 훨씬 넓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를 안 다녀도 착하게만 살면 된다’는 말일까요? 여기서도 그렇게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착하게 사니까 교회 같은 것은 필요 없어’라는 생각 속에는 또 다른 ‘프로프리움’(proprium)이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내가 스스로 충분히 판단할 수 있으며, 나 자신의 선함만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기 욕망을 선이라고 착각하기도 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일을 정의라고 합리화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넘어서는 진리가 필요합니다. 말씀이 필요하고, 가르침이 필요하며, 공동체 안에서 자신을 비추어 볼 필요도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교회의 귀중함입니다. 건강한 교회는 ‘우리 안에 들어와야 구원받는다’고 사람을 붙잡는 곳이 아니라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자신을 목적지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가리켜야 합니다. 말씀을 가르치고, 사람이 자신의 악을 보도록 도우며, 회개와 거듭남(regeneration)의 길을 걷게 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유용한 일을 행하도록 길러 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구원의 주인이 아니라 구원을 이루시는 주님을 섬기는 도구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교회 안에 있는 사람에게 더 큰 책임이 있습니다. 교회 밖의 사람보다 구원받을 확률이 높다는 뜻이 아니라, 더 많은 진리를 받았다는 뜻입니다. 말씀을 매주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과 말씀을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던 사람을 주님께서 똑같은 외적 잣대로 판단하신다고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주님께서는 각 사람이 무엇을 알고 있었으며, 무엇을 알 수 있었고, 자신에게 주어진 빛 안에서 무엇을 자유롭게 선택했는지를 보십니다.

 

주님께서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고 말씀하신 것도 생각해 볼 만합니다(눅12:48). 교회에 오래 다녔다는 것은 단순히 구원에 유리한 경력을 많이 쌓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과 말씀과 선과 진리에 관하여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질문은 ‘나는 교회를 몇 년 다녔는가?’보다 ‘그동안 들은 말씀이 나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었는가?’가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매우 흥미로운 역전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흔히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을 ‘구원받은 사람’,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을 ‘구원받아야 할 사람’으로 구분합니다. 물론 복음을 전하고 사람을 교회로 초청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구분이 지나치게 굳어지면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지 않게 됩니다. ‘나는 이미 안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에게도 끊임없이 ‘회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주님께서 회개를 촉구하신 대상들도 세상 사람들이 아니라 교회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요? ‘저 사람은 아직 교회를 안 다니니 구원받기 어렵다’고 미리 판단하기보다 주님께서 그 사람의 삶 가운데 어떻게 역사하고 계시는지 인간은 다 알 수 없다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할 일은 그 사람을 겁주어 교회라는 울타리 안으로 데려오는 것보다, 우리의 삶을 통하여 그가 주님의 선하심을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을 만나면서 오히려 주님에게 가까워지고 싶어지게 만드는 것,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전도이겠습니까!

 

이것은 특히 교회가 상처의 장소가 된 사람들을 생각할 때 중요합니다. 교회 안에서 모욕을 당했거나, 권위주의적인 목회자를 만났거나,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강요와 정죄를 경험하여 교회를 떠난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예배당을 떠났다는 사실만으로 주님까지 떠났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상처 때문에 진리 자체까지 거부하게 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주님께서는 그 사람이 왜 떠났는지, 무엇을 경험했는지, 그 안에서 무엇을 여전히 찾고 있는지를 우리보다 훨씬 정확하게 아십니다.

 

반대로 교회를 떠난 자신의 선택을 언제나 정당화할 수도 없습니다. ‘교회에 상처받았으니 나는 이제 말씀도 공동체도 필요 없다’고 굳어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교회 안인가 밖인가’라는 위치만이 아닙니다. 나는 진리를 원하고 있는가, 악을 죄로 여기고 있는가,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받아들이고 있는가, 그리고 이웃을 향하여 체어리티를 행하는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입니다.

 

사후세계에서는 교적부도, 출석부도, 직분도 가져가지 못합니다. 장로였는지, 권사였는지, 집사였는지, 어느 교단에 속했는지가 그 자체로 천국의 신분이 되지 않습니다. 자연계에서 살아가는 동안 무엇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형성되었는지가 드러납니다. 교회생활이 참으로 귀한 것은 바로 그 삶을 통하여 주님께서 우리의 사랑을 변화시키시고,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도록 준비시키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회 안 다닌 사람은 결국 구원받기 어려워’라는 말에는 절반의 진리와 상당한 오해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교회와 말씀과 신앙 공동체 없이 혼자 신앙의 길을 걷는 것은 분명 쉽지 않습니다. 참된 교회는 인간에게 엄청난 영적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곧바로 ‘그러므로 교회에 다니지 않은 사람은 구원받기 어렵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구원은 교회 출석률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각 사람의 내면에서 이루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질문을 조금 바꾸어야 합니다. ‘교회를 다녔는가?’보다 더 깊은 질문은 ‘교회를 통하여 주님을 만났는가?’입니다. 그리고 교회를 다니는 사람에게는 한 가지 질문이 더 따라옵니다. ‘나는 수십 년 동안 교회를 다니면서 실제로 어떤 사람이 되었는가?’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교회는 구원의 주인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을 말씀과 선과 진리로 이끄시는 귀중한 통로이며, 교회 출석 자체가 사람을 구원하는 것도, 교회 밖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사람을 구원에서 제외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더 짧게 말한다면 이것이겠습니다.

 

‘주님께서 마지막에 물으시는 것은 너는 교회에 몇 년 다녔느냐가 아니라, 그 모든 빛을 받으며 너는 어떤 사랑의 사람이 되었느냐입니다.’

 

 

 

SL.20, ‘정통 교리를 믿으면 구원 받지만, 이단 교리를 믿으면 지옥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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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18, ‘평생 착하게 살아도 예수님을 모르면 지옥 가’

‘평생 착하게 살아도 예수님을 모르면 지옥 가’ ‘평생 착하게 살아도 예수님을 모르면 지옥 가.’ 많은 개신교인이 별다른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말입니다. ‘예수 외에는 구원이 없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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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착하게 살아도 예수님을 모르면 지옥 가’

 

‘평생 착하게 살아도 예수님을 모르면 지옥 가.’ 많은 개신교인이 별다른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말입니다. ‘예수 외에는 구원이 없다’는 성경의 분명한 선언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고(요14:6), 베드로도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고 선포했습니다(행4:12). 따라서 ‘예수님을 몰라도 착하게만 살면 구원받는다’고 말한다면 기독교 신앙의 중심을 놓치게 됩니다. 구원의 근원은 인간의 착함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매우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다’는 말과 ‘살아 있는 동안 예수라는 이름과 기독교 교리를 명시적으로 알지 못한 사람은 모두 지옥에 간다’는 말은 정말 같은 말일까요? 얼핏 보면 같은 말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전자는 ‘구원의 근원이 누구인가?’에 대한 대답이고, 후자는 ‘그 구원이 인간에게 어떤 방식으로 전달될 수 있는가?’에 대한 대답입니다.

 

예를 들어 기독교 복음이 전해지기 수백 년 전에 다른 대륙에서 살다 죽은 사람이 있다고 해 보겠습니다. 그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예수’라는 이름을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그에게는 성경도 없었고 교회도 없었으며 선교사도 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자기 종교와 양심을 따라 거짓말과 살인을 악으로 여기고, 부모를 공경하며, 어려운 이웃을 도우며, 자신이 알고 있는 선을 따라 성실하게 살려고 노력했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사람에게 ‘당신은 예수라는 이름을 알지 못했으므로 지옥에 갑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더 어려운 경우도 있습니다. 기독교를 들어 보기는 했지만 그에게 전달된 기독교가 심하게 왜곡되어 있었던 경우입니다. 그가 만난 그리스도인들이 잔혹하거나 탐욕스러웠고, 그들에게서 들은 하나님은 인간을 증오하고 다른 종교인을 모두 멸망시키는 신처럼 소개되었다고 해 보겠습니다. 그 사람이 그런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사실과, 주님 자신을 알고도 의도적으로 거부했다는 것을 동일하게 볼 수 있을까요? 인간은 겉으로 ‘그 사람은 예수를 믿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주님께서는 그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알고 있었고 무엇을 알 수 없었는지까지 보십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문제가 매우 분명해집니다. 구원은 오직 주님에게서 옵니다. 선의 근원도 주님이시고 진리의 근원도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선하게 살았다고 해서 그 자신의 도덕적 공로가 그를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그것을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그의 안에 있는 모든 참된 선의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햇빛을 받는 사람이 태양의 이름을 몰라도 빛은 태양에서 오는 것과 비슷합니다. 빛의 근원을 모른다는 사실 때문에 그 빛이 다른 곳에서 온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몰라도 착하게 살면 구원받는다’는 표현도 정확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자칫 ‘인간은 자기 선행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는 뜻으로 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님의 이름을 명시적으로 알지 못했더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진리를 따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며 살았다면, 그 선의 실제 근원은 자신이 알지 못했던 주님이며, 그런 사람은 사후에도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해야 합니다.

 

바울의 로마서에는 이 문제를 생각하게 하는 놀라운 구절이 있습니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롬2:14-15). 바울은 율법을 소유하고 있는가만 보지 않고, 그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빛 안에서 어떻게 살았는가를 말합니다. 이것이 곧 ‘착하면 자동 구원’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똑같은 외적 정보량만으로 심판하신다는 단순한 도식에는 신중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도 의미심장합니다(눅10:25-37). 제사장과 레위인은 종교적으로는 올바른 공동체 안에 있었지만 강도 만난 사람을 지나쳤습니다. 반면 유대인의 관점에서 종교적으로 바깥에 있던 사마리아인은 그 사람에게 실제로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누가 올바른 종교적 명칭을 가지고 있었느냐?’고 묻지 않으시고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교리의 중요성을 없애는 말씀이 아니라, 참된 진리가 결국 사랑과 체어리티(charity)의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는 더욱 놀랍습니다. 주님께서는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자에게 마시게 하고, 나그네를 영접하고, 헐벗은 자를 입히고, 병든 자와 갇힌 자를 돌본 사람들에게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마25:40). 그런데 그들은 놀라서 묻습니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나이까?’ 그들은 자신들이 주님께 그렇게 했다는 사실조차 몰랐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들이 이웃에게 행한 선을 자신에게 행한 것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이 대목은 ‘주님을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입으로 ‘예수님’을 정확하게 발음하는 것과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받아들이는 것이 언제나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 ‘주여, 주여’라고 부르면서도 주님의 뜻과 반대로 살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주님의 이름을 제대로 알 기회조차 없었지만 양심에 주어진 진리를 따라 악을 피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눈에는 전자가 ‘신자’이고 후자가 ‘불신자’일 수 있지만, 주님께서는 그보다 훨씬 깊은 곳을 보십니다.

 

그렇다면 선교와 복음 전도는 필요 없다는 말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참된 진리를 아는 것은 엄청난 축복입니다. 내가 행하는 선의 근원이 누구인지 알고, 주님을 인격적으로 알고, 말씀을 통하여 악과 선을 더 분명하게 분별하며, 자신의 힘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힘을 받아 거듭남(regeneration)의 길을 걸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단지 ‘예수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에게 천국 비밀번호를 알려 주는 일’이 아닙니다. 사람을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께 더 분명하게 연결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밝혀 주는 진리의 빛을 전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많이 받은 사람에게는 오히려 더 큰 책임이 생깁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알고, 성경을 가지고 있고, 평생 설교를 듣고, 선과 악에 관하여 많은 것을 배운 사람이 그 모든 진리를 알면서도 자기 사랑과 탐욕과 미움을 붙들고 살아간다면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니까’라는 명칭 자체가 그를 천국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주지는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라고 하셨습니다(마7:21). 많이 안다는 것은 특권인 동시에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갈 더 큰 기회와 책임을 받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점에서 ‘평생 착하게 살아도 예수님을 모르면 지옥 간다’는 말은 뜻밖에도 위험한 신앙적 안도감을 줄 수 있습니다. 나는 기독교인이며 예수님의 이름을 알고 있으므로 저 사람보다 안전하다고 생각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질문의 방향을 바꿉니다. ‘저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을 아느냐?’를 묻기 전에 ‘나는 예수님의 이름을 알면서 실제로 그분이 가르치신 선을 사랑하고 있는가?’를 묻게 합니다. 이름을 아는 것과 그 이름이 뜻하는 생명을 받아들이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종교가 똑같다는 결론으로 가서도 안 됩니다. 진리와 거짓의 차이는 실제로 중요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삶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 수 있고, 참된 진리는 사람이 선을 더 분명하게 보고 선택하도록 돕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진리를 중요하게 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태어난 문화와 종교 때문에 불완전한 진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과, 진리를 알면서 자기 욕망을 지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거짓을 선택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거짓을 알고 있는 상태’와 ‘거짓을 사랑하는 상태’를 구별해야 합니다.

 

사후세계에서도 이 차이는 중요합니다. 자연계에서 주님을 명시적으로 알지 못했지만 선을 사랑하며 양심을 따라 살아온 사람은 사후에 진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이미 선을 사랑하고 있다면 그 선과 조화를 이루는 진리를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결국 모든 천국의 중심에는 주님이 계시므로,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은 궁극적으로 주님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예수 없이도 구원받는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구원하시는 역사는 인간이 자연계에서 예수라는 이름을 명시적으로 알고 있었는가보다 훨씬 넓고 깊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서 참으로 아름다운 사실 하나가 드러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에게 그가 받을 수 없었던 것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아프리카의 어느 마을에서 태어난 사람, 기독교가 전해지기 전 시대에 살았던 사람, 기독교에 관하여 심각하게 왜곡된 모습만 접했던 사람과, 평생 성경을 읽고 복음을 들은 사람을 똑같은 외적 기준으로 재단하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는 각 사람이 어떤 빛을 받았으며, 그 빛 안에서 무엇을 자유롭게 선택했는지를 완전하게 아십니다. 이것이 인간의 판결과 주님의 심판이 다른 이유입니다.

 

결국 ‘평생 착하게 살아도 예수님을 모르면 지옥 가’라는 말에는 반드시 수정이 필요합니다. ‘예수님 없이도 착하게 살면 자기 선행으로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도 아니고, ‘예수라는 이름을 생전에 듣지 못했으니 아무리 선을 사랑했어도 지옥에 간다’는 것도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나 주님의 구원하시는 사랑은 인간이 태어난 시대와 나라와 종교적 환경보다 큽니다.

 

그래서 이 질문에는 이렇게 답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몰랐다고 해서 그 사람을 주님께서 모르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사람은 자기의 착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지만, 주님께서는 생전에 자신의 이름을 명시적으로 알 기회가 없었던 사람도 그가 받은 진리와 양심 안에서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시며 구원의 길로 이끄십니다.’

 

조금 더 ‘스베덴보리의 렌즈’답게 압축한다면 이것이겠습니다.

 

‘천국의 문을 여는 것은 ‘예수’라는 이름을 알고 있었느냐는 지식의 양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빛 안에서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얼마나 자유롭게 받아들였느냐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과 구원자는 오직 주님이십니다.’

 

 

 

SL.19, ‘교회 안 다닌 사람은 결국 구원 받기 어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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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17, ‘임종 전에라도 예수 믿으면 천국 가’

‘임종 전에라도 예수 믿으면 천국 가는 거 아닌가.’ 많은 개신교인에게 이 질문의 답은 거의 당연하게 ‘그렇다’일 것입니다. 평생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거나 심지어 큰 죄를 지으며 살았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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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 직전에라도 예수 믿으면 천국 가’

 

‘임종 직전에라도 예수 믿으면 천국 가는 거 아닌가.’ 많은 개신교인에게 이 질문의 답은 거의 당연하게 ‘그렇다’일 것입니다. 평생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거나 심지어 큰 죄를 지으며 살았더라도 죽기 직전 진심으로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십자가에 달린 강도입니다. 그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 예수님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했고, 주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23:42-43). 그렇다면 이 본문이 ‘죽기 5분 전이라도 예수 믿으면 천국에 간다’는 교리를 확증하는 것일까요?

 

먼저 아주 중요한 것은 ‘임종 직전에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반대편의 또 다른 교리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구원은 인간이 정한 시간표에 갇히지 않습니다. 사람이 마지막 순간에 주님을 향하여 진실하게 돌아설 가능성을 우리가 부정할 수도 없습니다. 특히 우리는 어떤 사람의 내면에서 평생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겉으로는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살았던 것처럼 보여도 그 안에 어떤 선과 진리가 보존되어 있었는지, 마지막 순간 어떤 내적 변화가 일어났는지는 주님만 아십니다. 따라서 ‘너무 늦었다’고 인간이 선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전혀 다른 질문이 생깁니다. ‘마지막 순간 진실한 회심이 가능하다’는 것과 ‘평생 어떻게 살았든 죽기 직전에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면 자동으로 천국에 간다’는 것은 같은 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후자의 생각은 구원을 마치 임종 직전에 사용할 수 있는 마지막 비상카드처럼 만들어 버립니다. 평생 자기 사랑과 탐욕과 미움과 거짓을 사랑하며 살아도 마지막 순간 특정한 신앙고백만 하면 그 사람의 영원한 상태가 즉시 반전된다는 생각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보면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이 ‘지배적 사랑’(ruling love)입니다. 사람은 자연계에서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선택을 통하여 자신이 무엇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인지를 형성해 갑니다. 선을 알고도 계속 악을 선택하고, 그 악을 즐기고 정당화하며 반복한다면 그것은 점차 그 사람의 의지와 사랑의 일부가 됩니다. 반대로 넘어지고 실패하더라도 악을 죄로 여기며 주님께 도움을 구하고 다시 선을 향한다면 그 사람 안에서는 다른 방향의 사랑이 형성됩니다. 사후에 드러나는 것은 단순히 ‘마지막으로 무슨 말을 했는가?’가 아니라 자연계의 삶을 통하여 실제로 ‘어떤 사람이 되었는가?’입니다.

 

이 때문에 임종 직전의 회개를 생각할 때 ‘말’과 ‘내면의 변화’를 구별해야 합니다. 죽음이 눈앞에 다가오면 누구라도 두려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 살려 주세요’, ‘예수님 믿겠습니다’, ‘제 죄를 용서해 주세요’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 기도를 무가치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형벌을 피하고 싶어 하는 것과 악 자체를 미워하여 주님께 돌아서는 것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입술의 고백이 순간적으로 가능하다고 해서 수십 년 동안 자유롭게 형성해 온 사랑의 방향까지 반드시 그 순간 바뀌었다고 인간이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의 강도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우리는 그 사람의 전 생애를 모릅니다. 성경도 그의 생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마지막 장면뿐입니다. 그런데 그 짧은 장면에서도 한 가지 중요한 차이가 나타납니다. 다른 행악자는 예수님을 비방하며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하지만, 이 사람은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고 말합니다(눅23:39-41). 그는 자신의 악을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주님의 무죄함을 인정하며, 주님의 나라를 인정하고 자신을 주님께 맡깁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을 단순히 ‘마지막 순간에 예수 믿는다는 말 한마디를 해서 천국에 갔다’고 축소하면 오히려 본문에 나타난 강도의 내적 태도를 놓칠 수 있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그 강도의 내면을 완전히 알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위에서 그가 한 몇 마디만 듣지만 주님께서는 그의 전 생애와 내면을 보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신 말씀은 ‘누구든지 죽기 직전에 이와 비슷한 문장을 말하면 동일한 결과를 얻는다’는 구원 공식을 제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볼 수 없는 한 사람의 내면까지 완전히 아시는 주님께서 그 사람의 상태를 보시고 하신 말씀이라고 이해하는 편이 더 깊습니다.

 

이것은 포도원 품꾼의 비유와도 연결됩니다. 어떤 사람은 아침부터 일했고 어떤 사람은 거의 일이 끝날 무렵 들어왔지만 모두 한 데나리온을 받았습니다(마20:1-16). 주님의 은혜는 ‘너는 너무 늦었다’며 문을 닫지 않습니다. 인생의 황혼에 주님을 만난 사람이라고 해서 젊어서부터 신앙생활을 한 사람보다 구원에서 불리하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늦게 온 품꾼은 포도원 밖에 그대로 있으면서 품삯만 요구한 것이 아닙니다. 늦게라도 주인의 부름을 받고 포도원으로 들어왔습니다. 중요한 것은 ‘몇 시에 불렸느냐’만이 아니라 부름에 응답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문제는 회심의 ‘시각’보다 회심의 ‘실재’입니다. 열 살에 주님을 믿었다고 해서 자동으로 천국에 적합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여든 살에 주님을 알았다고 해서 너무 늦은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달력상의 날짜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입니다. 다만 자연계의 삶이 중요한 까닭은 바로 이곳에서 우리의 사랑이 선택과 행동을 통하여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기 전에만 믿으면 되지’라는 생각은 매우 위험합니다. 그것은 회개를 미래로 미루면서 오늘의 악을 계속 사랑해도 된다는 허가증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회개하면 되지’라는 생각에는 또 하나의 함정이 있습니다. 우리는 미래의 내가 무엇을 사랑하게 될지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악을 반복할수록 그 악은 습관이 되고, 습관은 성향이 되며, 성향은 점차 사랑의 일부가 됩니다. 젊어서 평생 자기만을 위해 살다가 죽기 직전에 마음속 스위치를 한 번 눌러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겠다고 계획할 수는 없습니다. 거듭남(regeneration)은 주님께서 인간의 자유와 ‘합리성’(rationality)을 보존하시면서 사람의 사랑과 삶의 질서를 변화시키시는 실제적인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그러면 임종 직전 회개는 가짜라는 말인가?’라는 반론도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그것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마지막 순간의 주님을 향한 돌이킴이 그 사람의 내면에 오래 보존되어 있던 선과 진리가 마지막에 드러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리메인스’(remains), 곧 주님께서 사람 안에 보존하시는 선과 진리의 상태를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눈에는 평생 하나님과 멀리 살았던 사람처럼 보여도 주님께서는 우리가 전혀 알지 못했던 내면의 역사를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임종의 회개를 가볍게 여겨서도 안 되고, 그것을 기계적인 구원 공식으로 만들어서도 안 됩니다.

 

이 원리는 앞서 이야기했던 자살한 사람의 장례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우리는 사람의 마지막 몇 분만 보고 그 사람의 영원한 상태를 판정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 행동 하나 때문에 ‘지옥에 갔다’고 단정해서도 안 되고, 마지막 고백 한마디 때문에 ‘틀림없이 천국에 갔다’고 단정해서도 안 됩니다. 두 경우 모두 인간이 볼 수 있는 마지막 장면 하나를 가지고 주님만이 보실 수 있는 한 사람의 전 생애와 내면을 판결하려는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마지막 순간은 중요하지만, 마지막 순간만이 그 사람 전체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할 때도 ‘지금 예수님을 영접하기만 하면 오늘 죽어도 천국 갑니다’라는 말만으로 구원을 설명하는 데에는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는 첫걸음이 될 수 있지만, 자칫 구원을 ‘죽은 뒤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자격 확보’로 축소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목적은 단지 죽은 뒤 우리의 위치를 지옥에서 천국으로 변경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여기서 우리를 악에서 건져 내시고, 우리의 사랑을 변화시키시며,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천국적인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십니다.

 

그래서 ‘임종 전에라도 예수 믿으면 천국 가는 거 아닌가?’라는 질문에는 두 가지를 동시에 대답해야 합니다. ‘아무리 늦어도 주님께 돌아가기에는 늦지 않습니다.’ 이것은 복음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러니 지금은 어떻게 살아도 되고 마지막에 믿으면 됩니다’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주님의 자비에는 ‘너무 늦었다’는 시간이 없지만, 그 자비를 핑계로 오늘의 거듭남을 미루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결국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몇 분 전까지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는가?’가 아닙니다. 그런 시간의 경계선을 찾는 것 자체가 구원을 너무 외적으로 이해한 질문일 수 있습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오늘 주님께서 나를 부르고 계실 때 나는 왜 내일로 미루는가?’입니다. 주님은 임종의 순간에도 사람을 사랑하시지만, 바로 지금도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마지막 순간에도 주님께 진실하게 돌아설 가능성을 인간이 닫을 수는 없지만, 마지막 순간의 신앙고백 하나가 평생 자유롭게 형성해 온 사랑과 삶에 관계없이 자동으로 천국을 보장한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강도를 생각하며 더 짧게 말한다면 이것이겠습니다. ‘주님의 자비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 없지만, 그렇다고 회개를 마지막 순간까지 미루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SL.18, ‘평생 착하게 살아도 예수님을 모르면 지옥 가’

‘평생 착하게 살아도 예수님을 모르면 지옥 가’ ‘평생 착하게 살아도 예수님을 모르면 지옥 가.’ 많은 개신교인이 별다른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말입니다. ‘예수 외에는 구원이 없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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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16, ‘한번 구원받으면 끝, 무슨 일이 있어도 구원은 유효한 거 아닌가’

‘한번 구원받으면 끝, 무슨 일이 있어도 구원은 유효한 거 아닌가.’ 이 말은 많은 개신교인에게 상당히 익숙합니다.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 혹은 영어로 ‘Once saved, always saved’라고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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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구원받으면 끝, 무슨 일이 있어도 구원은 받아’

 

‘한번 구원받으면 끝, 무슨 일이 있어도 구원은 유효한 거 아닌가.’ 이 말은 많은 개신교인에게 상당히 익숙합니다.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 혹은 영어로 ‘Once saved, always saved’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여기에는 매우 귀중한 신앙적 확신이 들어 있습니다. 구원이 인간의 변덕스러운 감정이나 매일의 성적표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며, 주님께서 한번 붙드신 사람을 쉽게 버리시는 분도 아니라는 믿음입니다. 실제로 주님께서는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0:28). 그러므로 신자가 죄를 지을 때마다 ‘오늘 구원을 잃었나? 다시 구원받아야 하나?’ 하며 공포 속에서 살아가는 것도 건강한 신앙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문제는 여기에서 아주 작은 문장 하나가 덧붙을 때 생깁니다. ‘그러므로 이후에 어떻게 살아도 구원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이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아무도 주님의 손에서 나를 빼앗을 수 없다’와 ‘내가 끝까지 악을 사랑하고 그것을 선택하며 살아도 천국에 간다’는 같은 말이 아닙니다. 전자는 주님의 신실하심에 관한 말이고, 후자는 인간의 자유와 거듭남을 사실상 무의미하게 만드는 말입니다.

 

성경에는 구원의 확신을 주는 말씀과 함께 놀라울 정도로 많은 ‘끝까지’, ‘거하라’, ‘열매를 맺으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셨고(마24:13),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고 하셨습니다(요15:4). 특히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에서 주님은 이미 가지로 불리는 사람들에게 ‘내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울도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했습니다(빌2:12). 이런 말씀들은 구원이 인간의 공로로 유지된다는 뜻은 아니지만, 적어도 구원을 어느 과거 시점에 취득한 뒤 금고에 넣어 둔 증서처럼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문제가 훨씬 선명해집니다. 구원은 어떤 사람의 법적 신분만 바뀌는 사건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이 실제로 천국에 적합한 사람이 되어 가는 ‘거듭남’(regeneration)의 과정입니다. 주님께서 인간 안에 선과 진리를 심으시고, 인간은 주님에게서 받은 ‘자유’(freedom)와 ‘합리성’(rationality) 안에서 악을 죄로 알고 피하며 선을 선택합니다. 그 과정을 통하여 사람의 사랑 자체가 점차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핵심을 ‘내 이름이 구원자 명단에 올라갔는가?’로 생각하기보다 ‘나는 주님께서 나를 거듭나게 하시는 일을 받아들이고 있는가?’라고 묻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구원을 취소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마치 어떤 날 인간이 큰 죄를 지으면 주님께서 ‘네 구원은 오늘부로 취소한다’고 선언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끊임없이 인간을 천국으로 이끄십니다. 문제는 인간에게 자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자유를 없애고 강제로 선하게 만드신다면 그것은 더 이상 사랑도, 선도, 천국도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주님을 향할 수도 있고 주님에게서 돌아설 수도 있으며, 선을 반복하여 선택할 수도 있고 악을 자신의 사랑으로 만들어 갈 수도 있습니다.

 

이 점에서 ‘한번 구원받았으니 끝’이라는 표현에는 뜻밖의 위험이 숨어 있습니다. 그것이 ‘주님은 나를 끝까지 붙드신다’는 신뢰라면 아름다운 고백입니다. 그러나 ‘그러므로 이제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도 상관없다’는 안전보장이 된다면 ‘프로프리움’(proprium)이 신앙의 언어를 이용하기 시작합니다. ‘나는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자기 규정이 현재 자신의 악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방패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움을 품고 살아도, 거짓을 일삼아도, 탐욕을 사랑해도, 다른 사람을 짓밟아도 ‘그래도 나는 30년 전에 예수님을 영접했고 구원받았다’고 한다면 구원의 확신이 오히려 회개를 막는 기묘한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큰 죄를 한 번 지으면 구원을 잃는 것일까요? 이것 역시 아닙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한 번의 범죄와 그 사람의 ‘지배적 사랑’(ruling love)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것도 주님께서 붙잡히신 결정적인 순간에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실패가 그의 전 존재를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통곡했고 다시 주님께 돌아왔습니다. 다윗의 경우처럼 성경에는 심각한 악에 빠진 사람들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한번 넘어졌는가?’만이 아니라 그 악을 사랑하고 정당화하며 자신의 삶으로 만들었는가, 아니면 그것을 죄로 깨닫고 주님께 돌아섰는가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잃는다’는 표현 자체도 조심해서 사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치 지갑에 넣어 둔 구원증을 실수로 떨어뜨리는 것처럼 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더 본질적인 질문은 ‘나는 구원을 가지고 있는가, 잃어버렸는가?’보다 ‘나는 지금 어느 방향으로 내 사랑을 형성하고 있는가?’입니다. 천국은 외적으로 배정되는 장소이기 전에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의 질서이며, 지옥 역시 외부에서 억지로 던져지는 형벌의 장소이기 전에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지배하는 삶의 질서와 연결됩니다. 결국 사후에 드러나는 것은 과거 어느 날 내가 받은 자격증이 아니라 자연계의 삶을 통하여 내가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형성한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의 확신’은 없어지는 것일까요?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확신의 근거가 바뀝니다. ‘나는 그날 영접기도를 했으므로 무슨 일을 해도 안전하다’가 아니라 ‘주님께서는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며 오늘도 나를 악에서 건져 선으로 이끄신다. 그러므로 나는 그분을 신뢰하며 오늘도 그 인도를 따르겠다’가 됩니다. 전자의 확신은 과거의 사건을 붙들지만, 후자의 확신은 살아 계신 주님을 붙듭니다.

 

여기에는 아주 아름다운 역설이 있습니다. 주님은 인간을 끝까지 붙드시지만 인간을 억지로 붙잡아 두시지는 않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지만 인간에게 주신 자유 역시 거두어 가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구원은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느냐, 사랑하지 않으시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주님은 언제나 구원을 원하십니다. 문제는 내가 그 사랑을 받아들이며 그분이 나를 변화시키시도록 허용하느냐입니다. 이것이 자유와 섭리가 만나는 자리입니다.

 

이 때문에 ‘끝까지 견디는 것’도 인간의 공로가 아닙니다. ‘나는 죽을 때까지 신앙을 잘 지켰으므로 구원받을 자격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거듭남 전체의 주체는 주님이십니다. 다만 주님께서는 인간을 돌이나 기계처럼 구원하지 않으시고, 인간이 자유롭게 주님의 선과 진리에 응답하도록 하십니다. 인간은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악과 싸우고 선을 행하지만, 그 싸움의 능력과 선의 근원이 주님에게 있음을 인정합니다.

 

따라서 ‘한번 구원받으면 끝, 무슨 일이 있어도 구원은 유효한 거 아닌가?’라는 질문에는 ‘주님의 사랑과 구원의 의지는 끝까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내가 이후 어떤 악을 사랑하며 살아도 상관없다는 보증을 뜻하지는 않습니다’라고 답할 수 있겠습니다. 주님께서는 구원을 취소하려고 인간의 실수를 기다리시는 분이 아니라 끝까지 인간을 구원하려 하시는 분입니다. 동시에 그분은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시므로, 인간이 일생 동안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선택하는가는 실제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내 구원은 아직 유효한가?’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오늘도 나를 구원하고 계실 때 나는 그분의 손길을 받아들이고 있는가?’입니다.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구원은 한번 발급받으면 어떤 삶을 살아도 효력이 유지되는 자격증이 아니라, 끝까지 우리를 붙드시는 주님을 자유롭게 받아들이며 실제로 천국에 적합한 사람으로 거듭나 가는 삶입니다.’

 

그리고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말을 꼭 살려서 표현한다면 저는 이렇게 바꾸고 싶습니다. ‘한번 구원하신 주님이 변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주님의 구원을 끝까지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의 거듭남입니다.’

 

 

 

SL.17, ‘임종 전에라도 예수 믿으면 천국 가’

‘임종 전에라도 예수 믿으면 천국 가는 거 아닌가.’ 많은 개신교인에게 이 질문의 답은 거의 당연하게 ‘그렇다’일 것입니다. 평생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거나 심지어 큰 죄를 지으며 살았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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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15, ‘예수님을 영접했으니 나는 구원받은 거 아닌가’

‘예수님을 영접했으니 나는 구원받은 거 아닌가’ - 한 번의 영접과 일생의 거듭남 이 말에는 분명 복음의 중요한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기독교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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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영접했으니 나는 구원받은 거 아닌가’ - 한 번의 영접과 일생의 거듭남

 

이 말에는 분명 복음의 중요한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입니다. 요한복음도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 자체를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 문제는 ‘영접’의 의미를 어느 순간 드린 기도나 입술의 고백 하나로 축소하고, 그때부터 자신의 영원한 구원이 이미 확정되었다고 이해할 때 생깁니다. 성경에서 주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훨씬 더 깊고 삶 전체에 걸친 일입니다.

 

한국 개신교에서는 흔히 ‘예수님을 마음속에 영접하셨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주 예수님, 저는 죄인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합니다’라고 기도했다면 그 날짜를 자신의 구원받은 날로 기억하기도 합니다. 그런 기도는 매우 귀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한 사람이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돌아서서 주님을 향하기 시작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특정한 형식의 ‘영접기도’를 한 번 했다는 사실 자체를 영원한 구원의 보증서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영접기도는 주님을 향한 삶의 ‘시작’이 될 수 있지만, 그 기도 자체가 거듭남(regeneration)의 전 과정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은 오히려 우리를 더 깊은 곳으로 데려갑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여기에서 주님은 입술로 주님을 인정하는 것과 실제로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을 구별하십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다음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까지 행했다고 말합니다. 단순히 불신자들이 아닙니다. 주님의 이름을 알고 주님의 이름으로 종교적인 일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그들의 ‘삶’을 문제 삼으십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문제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구원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장부에서 죄인의 신분을 의인의 신분으로 바꾸어 놓으시는 외적 법적 선언에 그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실제로 사람을 변화시키십니다. 인간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악을 죄로 알고 피하며, 자신의 삶 속에서 선을 행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이 ‘거듭남’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말도 결국 주님께서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나의 사랑과 생각, 행동을 새롭게 하시도록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의 유명한 말씀도 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이 말씀도 흔히 영접기도의 근거로 사용됩니다. 그러나 원래 문맥을 보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대상은 예수를 전혀 모르는 불신자가 아니라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이미 자신을 신앙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문 밖에 주님께서 서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당히 의미심장합니다. ‘나는 이미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도 주님께서는 여전히 문을 두드리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입술로는 주님을 영접했지만 삶의 어떤 방들은 여전히 열어 드리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믿습니다. 그러나 돈 문제는 제가 원하는 대로 하겠습니다. 주님은 사랑합니다. 그러나 저 사람만은 미워할 권리가 있습니다. 성경은 믿습니다. 그러나 내 욕망을 건드리는 말씀은 따르고 싶지 않습니다.’ 이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영접했다는 과거의 고백과 현재 내가 실제로 주님께 내어 드리고 있는 삶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생깁니다.

 

바로 여기에서 ‘프로프리움’(proprium)의 아주 미묘한 형태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나는 30년 전에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러므로 나는 구원받았다.’ 처음에는 주님을 의지하는 신앙고백이었던 것이 어느 순간 자기 자신이 소유한 ‘구원 자격증’처럼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지, 어떤 악을 붙들고 있는지, 이웃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는 부차적인 문제가 됩니다. 심지어 삶이 주님의 말씀과 반대 방향으로 흘러가도 ‘그래도 나는 구원받은 사람이야’라는 확신이 자기 성찰을 막을 수도 있습니다. 주님을 향했던 믿음이 역설적으로 자기 확신을 지키는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그러므로 행위를 많이 해야 구원받는다’는 말로 바꾸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선행을 쌓아 천국 입장권을 얻는 과정이 아닙니다. 선의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사람이 할 일은 주님께서 주시는 ‘자유’(freedom)와 ‘합리성’(rationality) 안에서 악을 죄로 알고 물리치며 주님께서 주시는 선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람은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지만, 참된 신앙 안에서는 그 힘과 선의 근원이 주님에게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냐 행위냐’의 단순한 양자택일보다 ‘주님에게서 받은 믿음이 실제 삶에서 어떤 사랑과 행위가 되었는가’를 묻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야고보가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2:17)고 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행위가 믿음에 추가되어 구원의 점수를 높여 주기 때문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믿음이라면 삶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사과나무가 사과를 맺는 것은 사과를 달아서 사과나무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그 생명이 나무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참으로 받아들인 믿음은 체어리티(charity), 곧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이 이웃을 향한 선과 유용한 일로 나타나는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영접했으니 나는 구원받은 거 아닌가?’라는 질문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과거형 ‘영접했으니’일지도 모릅니다. 성경적 신앙은 ‘언젠가 주님을 영접했는가?’뿐 아니라 ‘오늘도 주님을 영접하고 있는가?’를 묻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내 미움을 보여 주실 때 그것을 내려놓는 것, 내 거짓을 드러내실 때 인정하는 것, 내 욕심과 교만을 말씀으로 비추실 때 돌이키는 것, 그리고 이웃에게 해야 할 선을 보여 주실 때 행하는 것, 이것 역시 주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접은 한 번의 사건인 동시에 일생에 걸친 과정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구원의 확신을 없애자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내가 충분히 거듭났나? 선행을 충분히 했나? 이 정도면 천국에 갈 수 있나?’ 하며 끊임없이 자기 상태를 측정하는 것도 결국 시선이 주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머무는 또 다른 형태가 될 수 있습니다. 구원의 소망은 내가 몇 점짜리 그리스도인이 되었느냐에 있지 않고 나를 끝까지 거듭나게 하시는 주님께 있습니다. 다만 그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주님께서 나를 구원하실 테니 나는 변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변화시키시는 일을 나는 거부하지 않겠다’는 신뢰를 포함합니다.

 

결국 질문은 ‘나는 언제 영접기도를 했는가?’에서 한 걸음 더 깊어져야 합니다. ‘내가 영접했다고 고백한 그 주님께서 지금 내 삶을 실제로 다스리고 계시는가? 나는 주님께서 악이라고 하시는 것을 악으로 여기고 있는가?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을 나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입니다. 여기에서 구원은 과거 어느 날 받은 증명서가 아니라, 주님과의 살아 있는 결합이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영접했으니 나는 구원받은 거 아닌가?’라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것은 구원의 길에 들어서는 너무나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한 번 입술로 그분을 받아들였다고 고백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선과 진리를 내 삶 안으로 계속 받아들이며 그분이 나를 실제로 변화시키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참된 영접은 한 번의 기도로 주님을 내 구원자로 선언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일생의 거듭남을 통하여 주님이 내 사랑과 삶의 주인이 되시도록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짧게 말한다면 이것이겠습니다. ‘구원은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는 과거의 기억보다, 내가 영접한 주님께서 지금 나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어 가고 계시는가의 문제입니다.’

 

 

 

SL.16, ‘한번 구원받으면 끝, 무슨 일이 있어도 구원은 유효한 거 아닌가’

‘한번 구원받으면 끝, 무슨 일이 있어도 구원은 유효한 거 아닌가.’ 이 말은 많은 개신교인에게 상당히 익숙합니다.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 혹은 영어로 ‘Once saved, always saved’라고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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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14, ‘시댁이, 처가가 이단이지만 그래도 나는 내 할 도리는 다하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돼’

‘시댁이, 처가가 이단이지만 그래도 나는 내 할 도리는 다하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돼’ - 진리를 지키면서 가족을 사랑한다는 것 이 말에는 앞의 경우와는 상당히 다른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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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2026/10/25)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9, ‘찬송하는 소리 있어’, 찬132, ‘주의 영광 빛나니’입니다.

 

오늘은 창5 절별 주석 그 세 번째, 15절로 20절, AC 글 번호로는 510번에서 515번입니다. 먼저 창세기 본문입니다.

 

 

15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16야렛을 낳은 후 팔백삼십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7그는 팔백구십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18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19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0그는 구백육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15-20)

 

 

제목은

 

마할랄렐, 야렛, 에녹

 

 

이며, 다음은 이 특별한 AC 본문 리딩 예배를 위한 ‘3분 요약’입니다.

 

오늘 리딩에 들어가기 전에, 지금까지의 큰 흐름을 잠깐 돌아보겠습니다. 우리는 스베덴보리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라틴 Arcana Coelestia, 영어 Secrets of Heaven, 天界秘義, 1749–1756,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속뜻 주석, 총 10,837개 글)를 따라 창세기의 문자적 의미를 존중하면서 그 속뜻을 함께 읽고 있습니다.

 

창1에서는 천지창조를 인간의 거듭남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여섯 날의 과정을 통하여 사람을 영적으로 거듭나게 하시고, 일곱째 날의 안식에 이르러 사랑으로 살아가는 천적 인간으로 이끄십니다.

 

창2에서는 에덴동산을 통하여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알아차리는 ‘퍼셉션’(perception)을 지녔으며, 신앙은 사랑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창3에서는 사람이 주님보다 자신의 감각과 ‘프로프리움’(proprium)을 신뢰하면서 이 질서가 무너졌습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인간이 더 깊은 파멸에 이르지 않도록 보호하시며 구원의 길을 보존하셨습니다.

 

창4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charity)의 관계를 살펴보았습니다. 가인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가인의 계열은 라멕에 이르러 황폐해졌지만, 주님께서는 ‘가인의 표’를 통하여 신앙 자체가 완전히 소멸하지 않도록 보존하셨습니다. 또한 셋과 에노스를 통하여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가 다시 이어지게 하셨습니다.

 

창5에서는 아담에서 노아까지의 족보가 단순한 개인들의 출생과 죽음이 아니라, 태고교회로부터 이어진 여러 교회의 계승과 상태 변화를 나타낸다는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최초의 태고교회에서 셋과 에노스, 게난으로 이어지면서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알아차리던 퍼셉션은 점차 덜 명료하고 더욱 일반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지난주에는 이러한 쇠퇴가 단지 인식 능력의 약화가 아니라, 사랑과 선한 쓰임의 생명이 약해지는 것과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마할랄렐과 야렛, 그리고 에녹으로 이어지는 계보를 읽습니다. 특히 마할랄렐 교회에서는 ‘쓰임에서 오는 기쁨보다 진리를 아는 기쁨을 더 좋아하는’ 변화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야렛을 거쳐 에녹에 이르러서는 이전 교회들이 퍼셉션했던 것들을 교리로 보존하여 후대에 전할 길이 준비됩니다.

 

오늘 특별히 기억할 것은 ‘진리를 아는 기쁨은 선을 행하는 기쁨을 섬겨야 하며, 인간의 내적 상태가 약해지는 가운데서도 주님께서는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고 다음 길을 준비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마음으로 오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다음은 오늘 리딩 범위인 AC.510-515 요약입니다.

 

지난주 우리는 창5:6-14, AC.496-509를 통하여 셋에서 에노스로, 에노스에서 게난으로, 다시 게난에서 마할랄렐로 이어지는 태고교회 후속 교회들의 계승을 살펴보았습니다. 최초의 태고교회는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직접 알아차리는 ‘퍼셉션’(perception)을 지닌 천적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후속 교회들에 이르면서 퍼셉션은 점차 덜 명료해지고 더욱 일반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변화를 열매나 씨앗의 가장 안쪽 알맹이에서 그것을 둘러싼 막으로 나아가는 것에 비유하였습니다. 그리고 AC.503에서는 퍼셉션의 생명이 단순히 선과 진리를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함으로써 생기는 행복과 기쁨’에 있다는 중요한 가르침을 배웠습니다.

 

오늘은 그다음 말씀인 창5:15-20, AC.510-515를 읽습니다. 여기에는 마할랄렐이 야렛을 낳고, 야렛이 다시 에녹을 낳는 계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름과 나이, 자녀들의 출생과 죽음이 반복됩니다. 그러나 속뜻으로는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쇠퇴하는 과정에서 사랑과 쓰임의 생명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으며, 주님께서 그 가운데서도 어떻게 선과 진리를 보존할 길을 마련하셨는지를 보여 줍니다.

 

먼저 15절은 ‘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라고 합니다. AC.510에 따르면 ‘마할랄렐’(Mahalalel)은 다섯 번째 교회를, ‘야렛’(Jared)은 여섯 번째 교회를 의미합니다. 최초의 ‘사람’ 교회로부터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을 거쳐 이제 야렛이라는 또 하나의 교회가 이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낳았다’는 것은 단순히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이 태어났다는 뜻이 아니라, 한 교회로부터 다음 교회가 이어져 나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계승은 앞선 교회의 상태가 다음 교회에 그대로 반복되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앞선 교회로부터 선과 진리가 이어지는 가운데서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내적 상태는 점차 달라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AC.511에서 마할랄렐 교회의 상태를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설명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퍼셉션 능력이 더욱 개별적이고 명료한 것에서 더욱 일반적이고 흐릿한 것이 되어 감에 따라 ‘사랑의 생명 또는 쓰임의 생명’도 마찬가지로 감소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랑의 생명 또는 쓰임의 생명이 어떠한가에 따라 퍼셉션 능력도 그러하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지난주 AC.503에서 배운 가르침을 더욱 깊이 이해하게 합니다. 퍼셉션은 사랑이나 쓰임과 별도로 존재하는 특별한 지적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이 선을 행하는 생명으로 살아 있을 때, 그 사랑과 선으로부터 무엇이 진리인지를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선으로부터 진리를 아는 것은 천적인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짧은 문장은 태고교회가 지녔던 천적 질서를 잘 보여 줍니다. 천적 인간은 먼저 진리를 많이 배운 뒤 그 진리를 통하여 선에 이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선을 사랑하는 생명이 먼저 있었으며, 그 선으로부터 무엇이 진리인지를 퍼셉션했습니다. 다시 말해 사랑과 선이 중심이고 진리는 그 사랑과 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최초의 태고교회가 지녔던 천적 생명의 질서였습니다.

 

그런데 마할랄렐 교회에 이르러 이 질서에 매우 미묘하면서도 중요한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AC.511은 마할랄렐 교회를 이루었던 사람들이 ‘쓰임에서 오는 기쁨보다 진리들에서 오는 기쁨을 더 좋아하는 상태’였다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사실을 저세상에서 그들과 같은 사람들을 경험함으로써 알게 되었다고 밝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들이 진리를 버리거나 거짓을 사랑한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진리를 알고 이해하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기쁨이 선을 행하고 이웃에게 쓰임이 되는 기쁨보다 앞서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겉으로 보면 매우 작은 변화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진리를 사랑하고 알아 가는 일은 분명 좋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적 질서에서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본래 진리는 선을 섬기고, 선은 사랑으로부터 나오며, 사랑은 실제 쓰임 가운데 생명이 됩니다. 그런데 진리를 아는 것 자체에서 얻는 기쁨이 그 진리로 선을 행하는 기쁨보다 더 커지면, 진리와 사랑 사이의 질서가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진리는 여전히 진리이지만 그것을 사랑하는 사람의 내적 상태가 변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경계하는 것은 ‘진리를 아는 기쁨’ 자체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더 사랑하는가’입니다. 진리를 배우는 목적이 주님을 더 깊이 알고, 무엇이 선인지 더 분명하게 이해하며, 이웃에게 더 지혜롭게 쓰임이 되기 위한 것이라면 그 기쁨은 선한 질서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아는 것 자체가 더 큰 목적이 되고 실제로 선을 행하는 일이 그 뒤로 밀려난다면, 진리가 사랑과 쓰임을 섬기는 본래의 질서는 약해지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변화는 퍼셉션이 왜 점차 흐려졌는지도 설명해 줍니다. 퍼셉션은 단순히 특별한 영적 감각이나 신비한 인식 능력이 아니라, 사랑과 선으로부터 진리를 알아보는 능력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쓰임의 생명이 약해지면 그 선으로부터 진리를 보는 능력도 함께 약해집니다. 마할랄렐 교회의 퍼셉션이 쇠퇴한 것은 단지 오랜 세월이 흘렀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무엇을 더 사랑하고 무엇에서 더 큰 기쁨을 느끼는가 하는 내적 질서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성경과 교리를 공부하는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말씀의 속뜻을 배우고, 상응을 이해하며,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깊이 공부하는 데서 큰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전에는 몰랐던 진리를 깨닫고 말씀의 깊은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앎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고 있는지는 살펴야 합니다. 진리를 더 많이 알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에서 만족하고 있는지, 아니면 그 진리로 인해 주님을 더 사랑하고 이웃에게 더 선한 쓰임이 되는 사람으로 변화하고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진리를 많이 안다고 해서 반드시 그만큼 사랑이 깊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상응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다고 해서 반드시 이웃을 더 따뜻하게 대하는 것도 아닙니다. 심지어 말씀에 관한 지식이 자신을 높이거나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진리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 진리를 대하는 우리의 사랑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진리를 주시는 목적은 단지 많은 것을 알게 하시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 진리를 통하여 선을 분별하고, 선을 사랑하며, 실제로 이웃에게 선한 쓰임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을 배우면서 끊임없이 돌아보아야 할 것은 ‘얼마나 많이 알게 되었는가?’뿐 아니라 ‘이 진리로 인해 나는 어떤 선을 더 사랑하게 되었으며, 누구에게 어떤 쓰임이 되고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이제 16절과 17절에서는 마할랄렐이 야렛을 낳은 뒤 팔백삼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고, 팔백구십오 세를 살고 죽었다고 합니다. AC.512는 이 말씀들의 의미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고 간단히 밝힙니다. 우리는 이미 ‘날들’과 ‘연수’가 교회의 때와 상태들을, ‘아들들과 딸들’이 그 교회에 속한 진리들과 선들을, ‘죽었다’는 말씀이 그 교회의 고유한 상태가 끝났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다만 같은 표현이 사용되더라도 각 교회가 지닌 진리와 선의 구체적인 어떠함은 그 교회의 내적 상태에 따라 달라집니다. 따라서 마할랄렐의 자녀들과 죽음 역시 앞서 AC.511에서 설명한 그 교회의 고유한 상태와 관련하여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서 마할랄렐이 죽었다는 것은 마할랄렐 교회를 특징짓던 상태가 끝났음을 의미하지만, 그것이 모든 선과 진리의 완전한 소멸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이미 마할랄렐로부터 야렛이라는 다음 교회가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창5에서 반복되는 ‘낳음’과 ‘죽음’은 한 교회의 상태가 다음 교회로 이어지는 과정과 그 고유한 상태가 끝나는 과정을 함께 보여 줍니다.

 

이제 18절은 ‘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라고 합니다. AC.513에 따르면 야렛은 여섯 번째 교회를, ‘에녹’(Enoch)은 일곱 번째 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에녹은 지금까지의 교회 계승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앞선 교회들에서는 퍼셉션이 어떻게 점차 쇠퇴했는가가 중심이었다면, 에녹에 이르러서는 그 퍼셉션으로부터 나온 것들이 어떻게 후대를 위하여 보존되는가 하는 새로운 문제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미 창5의 개요인 AC.464에서 에녹의 역할을 미리 밝혔습니다. 태고교회와 그 뒤를 이은 교회들이 퍼셉션했던 것들을 모아 교리로 만들었던 이들이 있었으며, 이것이 ‘에녹’이라는 이름으로 의미되었다는 것입니다. 최초의 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을 사랑하고 선을 사랑하는 생명 안에서 무엇이 진리인지를 직접 퍼셉션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자신들이 퍼셉션한 진리를 따로 모아 교리로 정리하고, 그것을 배워서 진리를 알아 가는 방식이 중심적인 역할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후속 교회들에서 퍼셉션이 점차 흐려지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이전처럼 선으로부터 진리를 직접 퍼셉션할 수 없는 상태가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앞선 교회들이 퍼셉션했던 선과 진리는 어떻게 되어야 하겠습니까? 그것들이 함께 사라져 버린다면 후대의 사람들은 무엇을 통하여 진리를 배울 수 있겠습니까? 바로 이러한 변화의 흐름 속에서 에녹의 역할이 나타납니다. 이전 교회들이 퍼셉션했던 것들을 모아 교리로 만들고 후대를 위하여 보존하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여전히 퍼셉션이 있었으므로 이러한 교리가 실제로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훗날 그것을 필요로 할 사람들을 위하여 보존되었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을 보여 줍니다. 지금까지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과 선 안에서 진리를 직접 퍼셉션하는 것이 중심이었다면, 이제는 그 퍼셉션으로부터 나온 진리를 교리로 보존하여 전달할 필요가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다만 에녹을 곧바로 훗날 노아로 시작되는 영적 교회와 동일하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에녹 역시 태고교회 시대의 계승 안에 있는 교회입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퍼셉션이 쇠퇴하는 가운데 이전에 퍼셉션된 진리들이 후대를 위해 보존될 길이 마련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AC.514에서 스베덴보리는 야렛 교회에 관하여 매우 흥미로운 설명을 덧붙입니다. 야렛이라는 교회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그 교회의 어떠함은 앞선 마할랄렐과 뒤따르는 에녹을 통하여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야렛이 이 두 교회 사이의 ‘중간 상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창5의 교회들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입니다. 마할랄렐에서는 쓰임에서 오는 기쁨보다 진리들에서 오는 기쁨을 더 좋아하는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에녹에서는 이전에 퍼셉션되었던 것들을 교리로 모아 보존하는 움직임이 나타납니다. 야렛은 바로 이 두 상태 사이에 놓여 있었습니다. 따라서 야렛을 이해하려면 그 이름만 따로 떼어 어떤 독립적인 특징을 찾으려 하기보다, 마할랄렐에서 에녹으로 이어지는 전체적인 변화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야렛 교회가 이미 교리를 만들기 시작했다거나 특정한 제도를 갖추고 있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AC.514는 그런 구체적인 내용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야렛이 마할랄렐과 에녹 사이의 중간 상태에 있었으며,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쇠퇴하는 과정과 그것이 교리로 보존되는 과정 사이에서 하나의 연결 고리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의 변화가 단절된 사건들의 반복이 아니라 서로 연결된 상태들의 연속임을 보게 됩니다. 앞선 교회로부터 다음 교회가 이어지고, 그 과정에서 사랑과 퍼셉션의 상태가 달라지며, 마침내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진리가 보존되는 단계에 이릅니다. 이것은 인간의 내적 상태가 변화하는 동안에도 주님께서 다음 시대에 필요한 것을 준비하고 계셨음을 보여 줍니다. 인간이 처음의 퍼셉션을 유지하지 못하게 된다고 해서 주님께서 그들을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에 맞추어 선과 진리를 보존할 길을 마련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19절과 20절에서는 야렛이 에녹을 낳은 뒤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고, 구백육십이 세를 살고 죽었다고 합니다. AC.515는 여기서 앞서 설명한 ‘날들’과 ‘연수’의 의미를 다시 확인하면서, 홍수 이전 사람들의 매우 긴 수명이라는 문제를 직접 다룹니다. 스베덴보리는 홍수 이전 사람들의 나이가 야렛의 구백육십이 세나 므두셀라의 구백육십구 세처럼 그렇게 많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다음 장 3절에 나오는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는 말씀을 함께 제시합니다.

 

이것은 창5의 계보를 읽는 스베덴보리의 관점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그는 이 장에 나오는 이름들과 연수를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개인의 생애나 수명 기록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사람’,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은 각각 교회를 의미하며, 그들에게 연결된 ‘날들’과 ‘연수’ 역시 그 교회들의 때와 상태들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야렛이 구백육십이 세를 살았다는 말씀의 중심은 한 개인이 실제로 962년을 살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야렛으로 표현된 교회의 때와 상태가 말씀의 숫자를 통하여 나타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창6:3의 백이십 년을 함께 언급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창5에서는 구백 년이 넘는 수명이 반복되지만, 바로 다음 장에서는 인간의 날이 백이십 년이라고 기록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숫자들을 모두 단순한 생물학적 수명으로 읽지 않고, 교회의 때와 상태를 나타내는 말씀으로 이해합니다. 다만 이것이 각 숫자에 어떤 구체적인 의미가 있는지를 우리가 임의로 계산하거나 추정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AC.515가 분명하게 밝히는 것은 이 연수들이 특정 개인의 실제 나이가 아니라 교회의 때와 상태들을 의미한다는 원칙입니다.

 

그렇다면 창5의 이름들이 각각 교회를 의미하고 연수도 실제 수명이 아니라면, 창세기 초반은 역사적 실재와 아무 관계가 없는 이야기라는 뜻일까요? 여기에는 신중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해석에서 창세기 초반의 계보는 현대적인 연대기나 전기 자료처럼 개인들의 생애를 기록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 안에 표현된 교회의 영적 상태와 변화까지 아무런 실재가 없는 허구라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이러한 문자적 서술 안에서 태고교회와 그 뒤를 이은 교회들의 영적 역사를 읽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속뜻을 읽는다는 것은 성경의 문자를 무시하거나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문자 안에 담긴 내적 의미를 읽는 것입니다. ‘야렛이 구백육십이 세를 살았다’는 말씀에서 단순히 그 숫자가 실제 수명인지 아닌지를 논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주님께서 그 말씀을 통하여 어떤 교회의 상태를 계시하고 계시는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이렇게 읽을 때 창5는 기이할 만큼 오래 살았던 사람들의 족보가 아니라, 태고교회로부터 이어진 여러 교회가 어떻게 서로 다른 내적 상태를 거치며 변화해 갔는지를 보여 주는 영적 역사가 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연수들이 자연적인 시간보다 교회의 때와 상태를 의미한다고 해서, 이 여러 교회가 실제 역사 속에서 얼마 동안 존속했는지, 또는 서로 어느 정도 같은 시대에 존재했는지까지 알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AC.515가 밝히는 것은 숫자의 속뜻이지 각 교회의 구체적인 역사적 존속 기간이나 공존 기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창5의 숫자로 여러 교회의 역사적 연대표를 만들어 내기보다, 그 숫자들을 통하여 말씀께서 드러내시는 교회의 상태를 이해하는 데 집중해야 합니다.

 

이렇게 오늘의 AC.510-515를 하나로 모아 보면, 창5의 계보에는 세 가지 중요한 흐름이 나타납니다.

 

첫째는 ‘사랑과 쓰임의 질서 변화’입니다. 마할랄렐 교회에 이르러 진리를 아는 기쁨이 쓰임에서 오는 기쁨보다 앞서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진리를 버린 상태가 아니라, 진리가 섬겨야 할 사랑과 쓰임보다 진리 자체에서 얻는 기쁨을 더 좋아하게 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내적 질서의 변화와 함께 퍼셉션도 더욱 일반적이고 흐릿한 것이 되어 갔습니다.

 

둘째는 ‘퍼셉션의 쇠퇴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교리적 보존’입니다. 마할랄렐에서 야렛으로, 야렛에서 에녹으로 이어지는 동안 교회의 상태는 계속 변화하였습니다. 특히 야렛은 마할랄렐과 에녹 사이의 중간 상태였으며, 에녹에 이르러서는 이전 교회들이 퍼셉션했던 것들을 교리로 만들어 후대를 위하여 보존하는 일이 나타납니다. 인간이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진리를 직접 퍼셉션할 수 없게 되는 가운데서도, 그 진리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도록 보존될 길이 준비된 것입니다.

 

셋째는 ‘교회의 때와 상태를 통하여 드러나는 영적 역사’입니다. 마할랄렐의 팔백구십오 세와 야렛의 구백육십이 세는 단순한 개인의 수명 기록이 아니라 각각의 교회가 지닌 때와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창5의 계보를 이해할 때 중요한 것은 누가 몇 년을 살았는가보다 각 교회가 어떤 선과 진리를 지니고 있었으며, 그 내적 상태가 어떻게 달라졌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흐름을 함께 바라보면 오늘 말씀을 통하여 주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도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인간은 처음의 천적 상태를 계속 유지하지 못했습니다. 사랑과 쓰임의 생명은 점차 감소하였고, 그 사랑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직접 알아차리는 퍼셉션도 약해졌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인간의 상태가 달라졌다고 해서 선과 진리의 근원이기를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달라진 것은 주님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바로 그 달라진 상태를 아시고 다음 길을 준비하셨습니다. 퍼셉션이 쇠퇴하는 가운데서도 이전 교회들이 받았던 선과 진리가 후대에 전달될 수 있도록 보존의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이것이 에녹의 등장을 통하여 드러나는 주님의 섭리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처음의 완전한 상태를 잃어버렸다고 해서 곧바로 버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인간이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없게 될 때에도, 변화된 상태에 맞추어 그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준비하시는 분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의 신앙에도 중요한 가르침을 줍니다. 우리는 태고교회와 같은 퍼셉션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오늘도 말씀과 진리를 통하여 우리를 인도하시며, 우리가 그 진리를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실제 삶에서 행하도록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특별한 영적 능력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미 주신 진리를 올바르게 사랑하고 그 진리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의 속뜻을 공부하고 교리를 배우는 목적도 여기에 있습니다. 더 많은 지식을 쌓는 것 자체가 마지막 목적이 아니라, 그 진리를 통하여 주님을 더욱 깊이 알고 이웃을 더욱 사랑하며 선한 쓰임을 이루는 것입니다. 진리를 아는 기쁨이 선을 행하는 기쁨으로 이어지고, 우리가 받은 사랑이 실제 삶에서 이웃을 위한 쓰임으로 나타날 때, 그 진리는 우리 안에서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자신의 신앙을 한 가지 질문 앞에 세워 보아야 합니다. ‘나는 진리를 아는 기쁨과 그 진리로 선을 행하는 기쁨 가운데 무엇을 더 사랑하고 있는가?’ 진리를 배우고 이해하는 기쁨은 귀합니다. 그러나 그 기쁨이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마할랄렐 교회에서 나타난 질서의 변화를 자신의 안에서도 돌아보아야 합니다. 반대로 우리가 진리를 배울수록 더 겸손해지고, 더 자비로워지며, 작은 일에서도 이웃에게 선한 쓰임이 되기를 기뻐한다면 그 진리는 본래의 목적을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적 상태가 약해지는 때에도 주님을 향한 소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언제나 같은 열심과 명료함을 유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의 상태를 아시며, 그 상태에 맞추어 계속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이전처럼 분명하게 보지 못할 때에도 말씀을 통하여 진리를 주시고, 그 진리가 다시 사랑과 선한 쓰임으로 이어질 길을 열어 주십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쇠퇴하는 가운데서도 교리를 통하여 진리를 보존할 길을 준비하셨던 주님께서는 오늘도 인간의 연약함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창5:15-20은 단순히 마할랄렐과 야렛과 에녹이라는 이름이 이어지는 족보가 아닙니다. 그 속뜻으로는 인간의 사랑과 퍼셉션이 어떻게 변해 갔으며, 그 변화 속에서도 주님께서 어떻게 선과 진리를 보존하셨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참된 신앙의 생명이 어디에 있는지도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진리를 많이 아는 것 자체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이 그 진리와 결합되어 실제로 선한 쓰임을 이루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창5:15-20, AC.510-515를 통하여 우리가 배우는 말씀입니다. ‘진리를 아는 기쁨은 선을 행하는 기쁨을 섬겨야 하며, 인간의 내적 상태가 달라지고 약해지는 가운데서도 주님께서는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고 그 상태에 맞는 다음 길을 준비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주시는 진리를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그 사랑을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으로 나타내며, 우리의 모든 변화 가운데서도 변함없이 역사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신뢰하며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이상 요약을 마치고, 아래는 AC 본문, 해설 및 심화입니다.

 

 

AC.510, 창5:15, ‘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AC.510-511)

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And Mahalalel lived sixty and five years, and begat Jared. (창5:15) AC.510 ‘마할랄렐’(Mahalalel)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다섯 번째 교회를 의미하고, ‘야렛’(Jared)은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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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11, 창5:15, ‘마할랄렐’(Mahalalel)이라 하는 교회의 상태

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창5:15) AC.511 퍼셉션의 능력이 감소하여, 더 개별적이고 분명하던 상태에서 더 일반적이고 어두운 상태로 바뀌어 간 것처럼, 사랑의 생명 곧 쓰임새의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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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12, 창5:16-17, ‘같은 표현이 반복되는 이유’

16야렛을 낳은 후 팔백삼십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7그는 팔백구십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Mahalalel lived after he begat Jared eight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Mah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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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13, 창5:18, ‘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AC.513-514)

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And Jared lived a hundred sixty and two years, and begat Enoch. (창5:18) AC.513 ‘야렛’(Jared)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여섯 번째 교회를, ‘에녹’(Enoch)은 일곱 번째 교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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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14, 창5:18, ‘마할랄렐과 에녹 사이에 있는 야렛’

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And Jared lived a hundred sixty and two years, and begat Enoch. (창5:18) AC.514 ‘야렛’(Jared)이라 하는 교회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서술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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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15, 창5:19-20, ‘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육십이 세를 살

19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0그는 구백육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Jared lived after he begat Enoch eight hundred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Jared were nine hund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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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AC 리딩 본문 전체는 여기까지이고, 아래는 오늘 범위 창5:15-20, AC.510-515 중 리딩 필독 두 편 링크입니다. 혹시 몹시 바쁘신 분들은 꼭 이 링크들만이라도 읽으시기 바랍니다.

 

 

AC.511, 창5:15, ‘마할랄렐’(Mahalalel)이라 하는 교회의 상태

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창5:15) AC.511 퍼셉션의 능력이 감소하여, 더 개별적이고 분명하던 상태에서 더 일반적이고 어두운 상태로 바뀌어 간 것처럼, 사랑의 생명 곧 쓰임새의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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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15, 창5:19-20, ‘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육십이 세를 살

19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0그는 구백육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Jared lived after he begat Enoch eight hundred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Jared were nine hund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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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이며, 다음은 다음 주(20261101, 성찬) 리딩 본문(창5:21-24, AC.516-522) 소개입니다.

 

다음 주에는 창5:21-24, AC.516-522를 통하여 ‘에녹’(Enoch) 교회의 특별한 역할을 살펴보겠습니다. 에녹은 태고교회와 그 뒤를 이은 교회들이 퍼셉션했던 것들을 모아 교리로 만들고, 후대를 위하여 보존하는 일을 나타냅니다. 특히 성경은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고 기록합니다. 다음 주에는 이 특별한 표현의 속뜻을 살펴보면서, 퍼셉션이 점차 사라져 가는 가운데 주님께서 어떻게 진리를 보존하셨는지, 그리고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네, 이상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10-25(D1)

 

2674, 3, 창5.3, 2026-10-25(D1)-주일예배(창5,15-20, AC.510-515), ‘마할랄렐, 야렛, 에녹’.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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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10/18, 창5:6-14, AC.496-509), ‘흐려지는 퍼셉션, 변함없는 주님의 섭리’

※ 오늘(2026/10/18)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8, ‘성도들아 찬양하자’, 찬131, ‘다 나와 찬송부르세’입니다. 오늘은 창5 절별 주석 그 두 번째, 6절로 14절, AC 글 번호로는 496번에서 509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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