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베덴보리는 AC.418에서 ‘마음의애정은천적이지만,그결과로나오는노래는영적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문장을 처음 읽으면 마음속의 감정은 모두 천적이고, 입 밖으로 나오는 노래는 모두 영적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번 번호의 문맥은 모든 인간의 감정과 노래를 무조건 천적이거나 영적인 것으로 분류하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기쁨이 마음의 즐거움을 낳고, 그 즐거움이 노래로 표현되는 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문장은 사랑에 속하는 천적인 것과 신앙에 속하는 영적인 것의 관계를 이해하도록 돕는 설명으로 읽어야 합니다.
그가 먼저 말하는 것은 천국의 기쁨입니다. 천국의 모든 기쁨은 마음의 즐거움을 낳고, 그 즐거움은 노래로 표현됩니다. 이어서 현악기는 그 노래를 본뜨고 더욱 고양합니다. 여기에는 마음의 애정에서 노래로, 노래에서 악기의 소리로 이어지는 관계가 있습니다. 노래와 악기는 마음의 애정과 아무 관련 없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애정에서 비롯된 즐거움을 표현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노래와 현악기를 영적인 것들의 표상으로 설명하는 이유도 이 관계에 있습니다.
이 설명은 앞서 야발과 유발을 구별한 내용과 이어집니다. 야발은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거기서 나오는 선들에 관한 교리를, 유발은 같은 교회의 영적인 것들에 관한 교리를 나타냅니다. 야발의 장막과 가축에 관한 기록 다음에 유발의 수금과 퉁소에 관한 기록이 나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두 기록을 통해 사랑에 속하는 천적인 것들과 신앙에 속하는 영적인 것들을 구별하여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노래가 영적이라는 말은 단순히 음악이 종교적 감정을 일으킨다는 뜻보다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그렇다고 모든 노래가 그 자체로 영적인 선을 지닌다는 뜻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노래한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의 마음에 어떤 사랑이 있는지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AC.418은 천국의 기쁨과 마음의 애정에서 비롯되는 노래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번호의 설명을 모든 음악이나 모든 감정에 그대로 적용하여, 노래하는 행위 자체를 영적인 상태의 증거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노래라는 외적 표현이 아니라, 그 표현이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사들의 합창을 통해서도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차이를 설명합니다. 천사들의 합창에는 천적인 합창과 영적인 합창이 있으며, 영적인 합창은 현악기의 소리에 비길 만한 특유의 음색으로 구별된다고 합니다. 이 경험담은 천국의 노래를 지상의 음악 이론으로 분석하라는 요청이 아닙니다.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구별이 천사들의 합창에서도 나타난다는 그의 증언입니다. 그는 그 구체적인 내용은 나중에 더 설명하겠다고 밝힙니다.
여기서 사랑과 신앙의 관계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사랑이 마음의 애정과 관련된다면, 신앙은 그 사랑과 무관하게 홀로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마음의 애정과 노래를 연결한 설명은 사랑과 신앙을 서로 떨어진 두 영역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돕습니다. 다만 이를 ‘사랑은언제나말이없고신앙은언제나소리로표현된다’는 식의 고정된 공식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이번 번호에서 노래는 사랑의 애정과 영적인 표현의 관계를 보여 주는 하나의 표상입니다.
성도들이 이 말씀을 읽으며 자신의 예배를 돌아볼 수도 있습니다. 찬송의 아름다움과 음악의 풍성함은 귀한 것이지만, 스베덴보리의 설명에서 노래의 출발점은 마음의 애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얼마나 아름답게 노래했는가만이 아니라, 그 노래가 어떤 사랑과 기쁨에서 비롯되었는지도 살펴보게 됩니다. 이것은 음악적 능력이 뛰어나야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마음의 애정과 그 표현이 서로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하자는 것입니다.
결국 ‘마음의애정은천적이고노래는영적’이라는 말은 사랑과 신앙을 분리하기 위한 설명이 아닙니다. 천국의 기쁨이 마음의 즐거움을 낳고, 그 즐거움이 노래와 악기의 소리로 표현되는 관계를 통해 두 가지의 구별과 연결을 보여 주는 설명입니다. 유발의 수금과 퉁소는 이러한 관계 안에서 신앙에 속하는 영적인 것들을 나타냅니다. 성도들은 이 말씀을 통해 신앙의 표현을 그 근원인 사랑과 함께 살펴보게 됩니다. (AC.418심화1)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창4:21)
AC.418
앞절은사랑에속하는천적인것들을다루었지만,이절은신앙에속하는영적인것들을다루며,이것들은‘수금과퉁소’(harpandorgan)로표현됩니다.수금과그와비슷한현악기들이신앙의영적인것들을의미한다는사실은여러가지점에서분명합니다.표상교회의예배에서이와비슷한악기들과노래는다른어떤것도아닌바로이러한것들을표상했습니다.이때문에노래하는사람들과악기를연주하는사람들이그렇게많았던것입니다.이러한표상의이유는천국의모든기쁨이마음의즐거움을낳고,이즐거움이노래로표현되며,그다음에는노래를본뜨고더욱고양하는현악기들로표현되기때문입니다.마음의모든애정에는노래를낳고,따라서노래와관련된것들을낳는성질이따릅니다.마음의애정은천적이지만,그결과로나오는노래는영적입니다.노래와그와비슷한것들이영적인것을나타낸다는사실은천사들의합창을통해제게분명해졌습니다.천사들의합창에는천적인것과영적인것,두종류가있습니다.영적천사들의합창은현악기의소리에비길만한,울림이있고노래하듯흐르는음색(sonocanoroalato)으로천적천사들의합창과쉽게구별됩니다.이에대해서는주님의신적자비로나중에말씀드리겠습니다.태고인들은천적인것을심장의영역에,영적인것을폐의영역에관련지었습니다.따라서노래하는목소리와그와비슷한것들처럼폐에속하는모든것,그리고그러한악기들의목소리나소리도폐의영역에관련지었습니다.그근거는심장과폐가사랑과신앙의결합과같은일종의결합을표상한다는데에만있지않았습니다.천적천사들은심장의영역에속하고,영적천사들은폐의영역에속하기때문이기도했습니다.이와같은것들이지금다루는구절에의미되어있다는사실은,이말씀이주님의말씀이라는점에서도알수있습니다.유발이수금과퉁소를연주하는사람들의조상이었다는것외에아무것도암시하지않는다면,이말씀에는생명이없을것이기때문입니다.또한그러한사실을아는것은누구에게도아무런유익이없습니다. The former verse treated of celestial things which are of love, but this verse treats of spiritual things which are of faith, and these are expressed by the “harpandorgan.” That by stringed instruments, such as harps and the like, are signified the spiritual things of faith is evident from many considerations. Similar instruments, and also the singing, in the worship of the representative church, represented nothing else, and it was on this account that there were so many singers and musicians, the cause of this representation being that all heavenly joy produces gladness of heart, which was expressed by singing, and in the next place by stringed instruments that emulated and exalted the singing. Every affection of the heart is attended with this: that it produces singing, and consequently what is connected with singing. The affection of the heart is celestial, but the consequent singing is spiritual. That singing and that which resembles it denote what is spiritual has been evident to me from the angelic choirs, which are of two kinds, celestial and spiritual. The spiritual choirs are easily distinguished from the celestial by their vibrant singing tone [sono canoro alato], comparable to the sound of stringed instruments, of which, by the Divine mercy of the Lord, we shall speak hereafter. The most ancient people referred what was celestial to the province of the heart, and what was spiritual to that of the lungs, and consequently to whatever pertains to the lungs, as do the singing voice and things like it, and therefore the voices or sounds of such instruments. The ground of this was not merely that the heart and lungs represent a kind of marriage, like that of love and faith, but also because the celestial angels belong to the province of the heart, and the spiritual angels to that of the lungs. That such things are meant in the passage before us, may also be known from the fact that this is the Word of the Lord, and that it would be destitute of life if nothing more were implied than that Jubal was the father of such as play upon the harp and the organ; nor is it of any use to anyone to know this.
해설
AC.418은 앞의 AC.417에서 제시한 유발의 속뜻을 본격적으로 설명합니다. 야발에 관한 앞 절이 사랑에 속하는 천적인 것들을 다루었다면, 유발에 관한 이 절은 신앙에 속하는 영적인 것들을 다룹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차이가 ‘수금과퉁소’(harpandorgan)라는 표현에 담겨 있다고 밝힙니다. 이 번호의 핵심은 악기의 종류를 분류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사랑의 애정이 어떻게 노래와 소리로 표현되며, 그 관계가 왜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지를 밝히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표상교회의 예배를 언급합니다. 그 예배에서 노래와 악기는 단순히 분위기를 돋우기 위한 장식이 아니라 영적인 것들을 표상했습니다. 그는 천국의 모든 기쁨이 마음의 즐거움을 낳고, 그 즐거움이 노래로 표현되며, 이어서 현악기가 그 노래를 본뜨고 더욱 고양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설명에서 중요한 것은 소리가 만들어지는 순서보다 그 소리의 근원입니다. 노래는 마음의 애정과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애정에서 비롯된 즐거움이 밖으로 표현되는 한 방식입니다.
이어지는 ‘마음의애정은천적이지만,그결과로나오는노래는영적입니다’라는 문장은 이번 번호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서로 경쟁하는 두 상태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마음의 애정과 그 애정에서 나오는 노래의 관계를 통해,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의 관계를 보여 줍니다. 사랑의 애정이 그 근원에 있고, 그 애정이 표현되는 데에는 영적인 것이 관련됩니다. 따라서 유발이 신앙의 영적인 것들에 관한 교리를 의미한다는 설명은 앞서 야발이 사랑의 거룩한 것들에 관한 교리를 의미한다는 설명과 이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관계를 천사들의 합창에 관한 자신의 경험으로도 설명합니다. 그는 천적 천사들의 합창과 영적 천사들의 합창이 있으며, 영적 천사들의 합창은 현악기의 소리에 비길 만한 특유의 음색으로 구별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그가 전하는 것은 모든 천사의 노래가 같은 방식으로 들린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구별이 합창의 소리에서도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는 그 합창에 관해 나중에 더 말하겠다고 예고하므로, 이번 번호만으로 두 합창의 모든 차이를 상세히 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심장과 폐에 관한 설명은 이러한 관계를 한층 깊게 보여 줍니다. 태고인들은 천적인 것을 심장의 영역에, 영적인 것을 폐의 영역에 관련지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심장과 폐가 사랑과 신앙의 결합과 같은 일종의 결합을 표상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천적 천사들은 심장의 영역에, 영적 천사들은 폐의 영역에 속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노래하는 목소리와 악기의 소리가 폐의 영역에 관련된다는 설명은 단순한 신체 비유에 그치지 않습니다. 사랑과 신앙의 관계가 인간의 심장과 폐라는 표상, 그리고 천사들의 구별과 함께 제시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심장을 사랑, 폐를 신앙이라고 단순히 외우는 데 그쳐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것은 두 기관이 이루는 결합입니다. 심장과 폐는 서로 구별되지만 살아 있는 몸 안에서 함께 작용합니다. 마찬가지로 사랑과 신앙도 구별되지만, 그 관계를 끊어 놓은 채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이번 번호가 심장과 폐의 모든 생리적 기능을 세부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아니므로, 그 이상의 대응 관계를 임의로 확장하기보다는 스베덴보리가 직접 밝힌 사랑과 신앙의 결합에 주목하는 것이 좋습니다.
마지막 문단에서 스베덴보리는 왜 유발의 기록에 속뜻이 있어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유발이 악기 연주자들의 조상이었다는 역사적 정보만 남는다면, 그 사실을 아는 것이 누구에게 어떤 영적 유익을 주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는 문자적 기록을 무가치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에는 문자적 기록을 통해 전해지는 더 깊은 생명이 있다는 뜻입니다. 유발에 관한 짧은 기록도 사랑과 신앙의 관계를 밝히는 말씀으로 읽을 때, 단순한 문화사의 한 장면을 넘어 우리의 영적 삶과 연결됩니다.
결국 AC.418은 유발의 수금과 퉁소를 통해 신앙에 속하는 영적인 것들을 설명하면서, 그 영적인 것들이 사랑의 애정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마음의 애정이 노래로 표현되듯,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은 서로 구별되면서도 관계를 맺습니다. 성도들은 이 말씀을 통해 신앙을 사랑과 떨어진 지식으로 생각하지 않고, 사랑에서 비롯되는 영적인 삶의 표현과 함께 살펴보게 됩니다. (AC.418해설)
심화
1.‘마음의애정은천적이고노래는영적이라는말은무슨뜻인가?’
스베덴보리는 AC.418에서 ‘마음의애정은천적이지만,그결과로나오는노래는영적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문장을 처음 읽으면 마음속의 감정은 모두 천적이고, 입 밖으로 나오는 노래는 모두 영적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번 번호의 문맥은 모든 인간의 감정과 노래를 무조건 천적이거나 영적인 것으로 분류하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기쁨이 마음의 즐거움을 낳고, 그 즐거움이 노래로 표현되는 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문장은 사랑에 속하는 천적인 것과 신앙에 속하는 영적인 것의 관계를 이해하도록 돕는 설명으로 읽어야 합니다.
그가 먼저 말하는 것은 천국의 기쁨입니다. 천국의 모든 기쁨은 마음의 즐거움을 낳고, 그 즐거움은 노래로 표현됩니다. 이어서 현악기는 그 노래를 본뜨고 더욱 고양합니다. 여기에는 마음의 애정에서 노래로, 노래에서 악기의 소리로 이어지는 관계가 있습니다. 노래와 악기는 마음의 애정과 아무 관련 없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애정에서 비롯된 즐거움을 표현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노래와 현악기를 영적인 것들의 표상으로 설명하는 이유도 이 관계에 있습니다.
이 설명은 앞서 야발과 유발을 구별한 내용과 이어집니다. 야발은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거기서 나오는 선들에 관한 교리를, 유발은 같은 교회의 영적인 것들에 관한 교리를 나타냅니다. 야발의 장막과 가축에 관한 기록 다음에 유발의 수금과 퉁소에 관한 기록이 나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두 기록을 통해 사랑에 속하는 천적인 것들과 신앙에 속하는 영적인 것들을 구별하여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노래가 영적이라는 말은 단순히 음악이 종교적 감정을 일으킨다는 뜻보다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그렇다고 모든 노래가 그 자체로 영적인 선을 지닌다는 뜻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노래한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의 마음에 어떤 사랑이 있는지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AC.418은 천국의 기쁨과 마음의 애정에서 비롯되는 노래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번호의 설명을 모든 음악이나 모든 감정에 그대로 적용하여, 노래하는 행위 자체를 영적인 상태의 증거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노래라는 외적 표현이 아니라, 그 표현이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사들의 합창을 통해서도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차이를 설명합니다. 천사들의 합창에는 천적인 합창과 영적인 합창이 있으며, 영적인 합창은 현악기의 소리에 비길 만한 특유의 음색으로 구별된다고 합니다. 이 경험담은 천국의 노래를 지상의 음악 이론으로 분석하라는 요청이 아닙니다.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구별이 천사들의 합창에서도 나타난다는 그의 증언입니다. 그는 그 구체적인 내용은 나중에 더 설명하겠다고 밝힙니다.
여기서 사랑과 신앙의 관계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사랑이 마음의 애정과 관련된다면, 신앙은 그 사랑과 무관하게 홀로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마음의 애정과 노래를 연결한 설명은 사랑과 신앙을 서로 떨어진 두 영역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돕습니다. 다만 이를 ‘사랑은언제나말이없고신앙은언제나소리로표현된다’는 식의 고정된 공식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이번 번호에서 노래는 사랑의 애정과 영적인 표현의 관계를 보여 주는 하나의 표상입니다.
성도들이 이 말씀을 읽으며 자신의 예배를 돌아볼 수도 있습니다. 찬송의 아름다움과 음악의 풍성함은 귀한 것이지만, 스베덴보리의 설명에서 노래의 출발점은 마음의 애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얼마나 아름답게 노래했는가만이 아니라, 그 노래가 어떤 사랑과 기쁨에서 비롯되었는지도 살펴보게 됩니다. 이것은 음악적 능력이 뛰어나야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마음의 애정과 그 표현이 서로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하자는 것입니다.
결국 ‘마음의애정은천적이고노래는영적’이라는 말은 사랑과 신앙을 분리하기 위한 설명이 아닙니다. 천국의 기쁨이 마음의 즐거움을 낳고, 그 즐거움이 노래와 악기의 소리로 표현되는 관계를 통해 두 가지의 구별과 연결을 보여 주는 설명입니다. 유발의 수금과 퉁소는 이러한 관계 안에서 신앙에 속하는 영적인 것들을 나타냅니다. 성도들은 이 말씀을 통해 신앙의 표현을 그 근원인 사랑과 함께 살펴보게 됩니다. (AC.418심화1)
2.‘심장과폐는왜사랑과신앙의결합을표상하는가?’
AC.418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인들이 천적인 것을 심장의 영역에, 영적인 것을 폐의 영역에 관련지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근거로 두 가지를 제시합니다. 하나는 심장과 폐가 사랑과 신앙의 결합과 같은 일종의 결합을 표상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천적 천사들이 심장의 영역에, 영적 천사들이 폐의 영역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이 설명은 단순히 심장은 사랑, 폐는 신앙이라는 두 낱말의 대응 관계를 알려 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두 기관의 관계를 통해 사랑과 신앙의 관계를 살펴보게 합니다.
심장과 폐는 서로 다른 기관이지만 살아 있는 몸 안에서 함께 작용합니다. 심장은 혈액을 순환시키고, 폐는 호흡을 통해 혈액의 기체 교환에 관여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심장과 폐를 함께 언급하는 것은 이러한 두 기관의 결합을 사랑과 신앙의 결합을 이해하는 표상으로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설명을 현대 생리학의 세부 사항과 일대일로 연결하여 새로운 상응을 만들어 낼 필요는 없습니다. 이번 번호에서 직접 밝힌 것은 심장과 폐가 일종의 결합을 표상한다는 점입니다.
태고인들이 천적인 것을 심장의 영역에, 영적인 것을 폐의 영역에 관련지었다는 설명도 같은 흐름 안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노래하는 목소리와 그와 비슷한 것들이 폐에 속하는 것들과 관련된다고 말합니다. 노래하는 목소리가 호흡과 관계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왜 노래와 악기의 소리가 폐의 영역에 관련되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폐에서 나오는 모든 소리가 영적으로 선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는 신체 기관과 소리의 관계를 통해 영적인 것의 표상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천사들의 구별이 더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적 천사들이 심장의 영역에 속하고, 영적 천사들이 폐의 영역에 속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심장과 폐의 관계는 단순히 인간의 신체에서 발견되는 비유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의 설명에서는 천적 천사들과 영적 천사들의 구별도 이 관계와 연결됩니다. 다만 이번 번호는 천사들이 각 영역에 속한다는 사실을 밝힐 뿐, 그 영역의 모든 구조나 천사들의 구체적인 역할까지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러한 세부 사항은 관련 저작의 설명을 확인한 뒤 다루는 것이 좋습니다.
이 설명에서 특히 주의할 것은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구별을 곧바로 우열이나 단절로 이해하지 않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심장과 폐를 서로 떨어진 기관으로 제시하지 않고 결합을 이루는 기관으로 제시합니다. 사랑과 신앙도 서로 구별되지만, 이 번호에서는 그 결합이 강조됩니다. 따라서 심장은 중요하고 폐는 부차적이라는 식으로 단순화하거나, 반대로 두 기관이 함께 작용하므로 사랑과 신앙 사이에는 아무런 구별도 없다고 말하는 것은 모두 이번 번호의 설명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합니다.
앞서 스베덴보리는 마음의 애정이 천적이고 그 결과로 나오는 노래가 영적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심장과 폐의 관계는 그 설명을 다른 각도에서 보여 줍니다. 마음의 애정과 노래가 서로 무관하지 않듯이, 심장과 폐도 살아 있는 몸 안에서 관계를 맺습니다. 두 설명은 모두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구별되면서도 서로 관계를 맺는다는 점을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심장과 폐에 관한 문단은 노래와 악기에 관한 앞부분에서 갑자기 벗어난 이야기가 아닙니다. 유발이 의미하는 신앙의 영적인 것들을 설명하는 논증의 일부입니다.
성도들이 이 말씀을 자신의 신앙에 적용할 때에도 같은 구별이 필요합니다. 사랑을 말하면서 신앙의 진리와 선을 소홀히 여기거나, 신앙을 말하면서 사랑과의 관계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사랑과 신앙을 심장과 폐에 기계적으로 대입하여 자신의 영적 상태를 판정하려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번 번호가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은 살아 있는 결합의 중요성입니다. 신앙은 사랑과 무관한 독립된 지식으로 이해될 수 없으며, 사랑과 신앙의 관계는 말씀의 여러 표상을 통해 함께 살펴보아야 합니다.
결국 심장과 폐가 사랑과 신앙의 결합을 표상한다는 설명은 유발의 수금과 퉁소가 왜 영적인 것들을 나타내는지 이해하도록 돕습니다. 태고인들은 천적인 것을 심장의 영역에, 영적인 것을 폐의 영역에 관련지었고, 스베덴보리는 천적 천사들과 영적 천사들의 구별도 이 관계 안에서 설명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신체의 세부 구조에 새로운 의미를 덧붙이기보다, 사랑과 신앙이 구별되면서도 결합을 이룬다는 이번 번호의 중심을 붙들어야 합니다. (AC.418심화2)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And his brother’s name was Jubal; he was the father of everyone that playeth upon the harp and organ. (창4:21)
AC.417
‘그의아우의이름은유발이니’(hisbrother’snamewasJubal)는같은교회의영적인것들에관한교리를의미합니다.‘수금과퉁소를잡는모든자의조상’(fatherofeveryonethatplayethupontheharpandorgan)은신앙의진리들과선들을의미합니다. By “hisbrother’snamewasJubal” is signified the doctrine of the spiritual things of the same church; by the “fatherofeveryonethatplayethupontheharpandorgan” are signified the truths and goods of faith.
해설
AC.417은 야발에 이어 그의 아우 유발의 속뜻을 밝힙니다. 앞의 AC.412-416에서 야발은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거기서 나오는 선들에 관한 교리를 의미했습니다. 이제 유발은 ‘같은교회의영적인것들에관한교리’를 의미합니다. 두 형제는 서로 무관한 두 교회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같은 교회 안에서 구별되는 두 종류의 교리를 나타냅니다.
여기서 ‘같은교회’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야발과 유발은 모두 가인의 계보에 속하며, 스베덴보리는 두 사람을 설명하면서 사랑에 관한 교리와 신앙에 관한 교리를 구별합니다. 야발에게서는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들이 강조되고, 유발에게서는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이 강조됩니다. 따라서 이 구별은 사랑과 신앙을 서로 대립시키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같은 교회에 속한 교리들이 각각 무엇에 관한 것인지를 밝히는 것입니다.
유발에 관한 문자적 기록은 그가 ‘수금과퉁소를잡는모든자의조상’이었다고 말합니다(창4:21). 앞의 야발이 장막과 가축에 관한 표현으로 소개되었다면, 유발은 악기에 관한 표현으로 소개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차이를 단순한 직업이나 기술의 차이로만 읽지 않습니다. 야발의 장막과 가축이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거기서 나오는 선들을 나타내듯이, 유발의 수금과 퉁소는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을 나타냅니다.
이때 ‘영적인것들’과 ‘신앙의진리들과선들’의 관계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은 단순히 어떤 내용을 알고 있거나 그것이 참이라고 인정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신앙에는 진리뿐 아니라 선도 함께 언급됩니다. AC.417이 유발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신앙의진리들’이라고만 하지 않고 ‘신앙의진리들과선들’이라고 한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다만 이 번호는 그 진리들과 선들이 각각 어떤 세부적인 내용을 가리키는지까지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 구체적인 근거는 이어지는 번호에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또한 ‘수금과퉁소를잡는모든자의조상’이라는 표현을 유발이 인류 최초의 악기 연주자였다는 역사적 주장으로만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바로 앞의 AC.416에서 스베덴보리는 야발이 최초의 목축인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들어, ‘조상’이라는 표현의 속뜻에 주목하도록 했습니다. 유발에게서도 마찬가지로, 이 표현이 어떤 교리를 나타내는지를 살피는 것이 이번 해설의 중심입니다. 그렇다고 악기의 구조나 소리의 성질에 관한 세부적인 상응을 이 번호만으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야발과 유발을 함께 읽으면 두 형제의 관계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야발은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거기서 나오는 선들에 관한 교리를, 유발은 같은 교회의 영적인 것들에 관한 교리를 나타냅니다. 이 구별을 통해 우리는 말씀에서 사랑에 관한 것과 신앙에 관한 것이 각각 다른 표현으로 나타날 수 있음을 봅니다. 그러나 유발에게도 신앙의 ‘선들’이 함께 언급된다는 사실은, 신앙을 선과 무관한 지식으로 축소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일깨워 줍니다.
결국 AC.417은 유발의 이름과 악기에 관한 기록을 통해 같은 교회의 영적인 것들에 관한 교리를 밝힙니다. 야발의 장막과 가축에 이어 유발의 수금과 퉁소를 읽는 우리는, 말씀의 서로 다른 표현들이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신앙의 진리들 및 선들을 어떻게 구별하여 나타내는지 살펴보게 됩니다. 이 번호에서는 그 기본적인 구별을 분명히 붙들고, 수금과 퉁소가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하는 이유는 이어지는 설명을 통해 확인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AC.417해설)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창4:20)
AC.416
사랑의거룩한것들과거기서나오는선들이의미된다는사실은,야발이‘장막과가축의우리에거주한’(dweltintentsandinfoldsofcattle)사람들가운데최초가아니었다는점에서분명합니다.아담과하와의둘째아들아벨에대해서도그가‘양떼의목자’(ashepherdoftheflock)였다고말하기때문입니다.더욱이야발은가인의계보에서일곱번째에해당합니다. That the holy things of love and the derivative goods are signified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Jabal was not the first of those who “dweltintentsandinfoldsofcattle,” for it is said likewise of Abel, the second son of Adam and Eve, that he was “ashepherdoftheflock,” and Jabal was the seventh in the order of descent from Cain.
해설
AC.416은 앞의 AC.412-415에서 밝힌 야발의 속뜻을 짧지만 중요한 논거로 뒷받침합니다. 야발이 ‘장막에거주하며가축을치는자의조상’으로 불린다고 해서, 그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장막을 짓거나 가축을 길렀다는 뜻으로만 읽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자체에 이미 기록된 아벨을 그 근거로 제시합니다.
창4:2에 따르면 아벨은 ‘양치는자’였습니다. 그런데 창4:20에 이르러 야발을 ‘장막에거주하며가축을치는자의조상’이라고 부릅니다. 두 기록을 단순한 직업의 발생 순서로만 읽으면 의문이 생깁니다. 아벨이 이미 양을 쳤는데, 어떻게 훨씬 뒤에 등장하는 야발이 가축을 치는 자들의 조상일 수 있겠습니까? AC.416은 바로 이 의문을 통해 독자가 문자적 기록에 담긴 속뜻을 살펴보도록 이끕니다.
스베덴보리는 야발이 가인의 계보에서 일곱 번째에 해당한다는 사실도 덧붙입니다. 아벨보다 뒤에 등장하는 인물이라는 점을 계보의 순서로 다시 확인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일곱이라는 숫자에 별도의 상응을 부여하는 것이 이번 번호의 논점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야발을 최초의 목축인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조상’이라는 표현은 무엇을 가리킵니까? 앞의 AC.412에서 스베덴보리는 야발이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거기서 나오는 선들에 관한 교리를 의미한다고 밝혔습니다. AC.414에서는 ‘장막’이 사랑의 거룩한 것을, AC.415에서는 ‘가축’이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을 나타낸다는 근거를 제시했습니다. 이번 번호는 야발에 관한 기록을 단순한 생업의 기원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아벨과의 비교를 통해 확인합니다.
아벨과 야발이 모두 목축과 관련된다고 해서 두 사람의 속뜻까지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앞서 아벨은 체어리티의 선과 관련하여 설명되었고, 야발은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거기서 나오는 선들에 관한 교리와 관련하여 설명되었습니다. 따라서 두 사람을 비교할 때에는 ‘누가먼저가축을쳤는가?’라는 질문에 머물지 않고, 스베덴보리가 각각의 기록에서 무엇을 밝히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이 번호는 말씀의 속뜻을 읽는 한 가지 중요한 방법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문자적 기록을 무시한 채 임의로 새로운 의미를 붙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창4:2의 아벨과 창4:20의 야발을 함께 읽고, 계보의 순서까지 확인하면서 문자적 기록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 표현에 주목합니다. 말씀의 한 구절을 다른 구절과 대조하여 읽는 일이 속뜻을 이해하는 출발점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AC.416의 핵심은 야발이 실제로 어떤 목축 기술을 처음 개발했는지를 밝히는 데 있지 않습니다. 아벨이 이미 양을 쳤다는 사실은 야발의 ‘조상’이라는 표현을 단순한 직업의 최초 창시자로만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앞의 번호들에서 밝혀진 장막과 가축의 속뜻을 따라, 야발이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들에 관한 교리를 나타낸다는 설명을 이해하게 됩니다. (AC.416해설)
AC.415의 마지막 인용인 렘6:3은 앞서 나온 양 떼와 목초지의 말씀들과 분위기가 다릅니다. 렘23:3에서는 주님께서 흩어진 양 떼를 모으시고, 겔34:14에서는 좋은 꼴로 먹이십니다. 그러나 렘6장은 예루살렘을 향한 위협을 선포하는 문맥입니다. 그 가운데 목자들과 가축 떼가 ‘딸시온’에게 와서 그 주위에 장막을 치고 각기 자기 자리를 차지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인용한 뒤 ‘딸시온’은 천적 교회를 나타내며, ‘장막’과 ‘가축떼’가 그 교회에 관하여 사용되는 표현이라고 설명합니다. 심판을 알리는 장면이 어떻게 사랑의 거룩한 것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을 밝히는 근거가 될 수 있습니까?
먼저 렘6:3의 문자적 문맥을 지워서는 안 됩니다. 이 장에서 예루살렘은 위협을 받고 있으며, 목자들이 양 떼를 데리고 와 장막을 치는 모습도 그 위협의 흐름 안에 놓여 있습니다. 따라서 이 장면을 ‘목자들이시온을보호하려고모여들었다’거나 ‘가축떼가평화롭게먹으므로천국의안식이이루어졌다’고 풀이하면 본문의 방향이 바뀌어 버립니다. 말씀의 속뜻을 살핀다는 이유로 문자적 장면을 그 반대의 이야기로 고쳐 읽어서는 안 됩니다. 성도들이 실제 성경을 펼쳐 읽었을 때에도 설명이 본문과 충돌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에서 직접 밝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의 설명은 짧고 분명합니다. ‘딸시온’은 천적 교회를 나타내며, ‘장막’과 ‘가축떼’가 그 교회에 관하여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목자들의 정체를 선한 인도자로 풀이하지도 않고, 장막을 치는 행위를 교회의 보호라고 설명하지도 않으며, 각기 자기 자리를 차지하는 일을 천국에서 각자의 수용 능력에 따라 선을 받는 상태라고 풀이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AC.415를 해설하는 우리도 그가 직접 밝힌 범위를 먼저 지켜야 합니다.
이 구절이 인용된 이유를 이해하려면 AC.415의 질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증명하려는 것은 야발의 ‘가축’이 사랑의 거룩한 것에서 나오는 선을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를 위해 그는 말씀에서 가축과 그에 관련된 표현들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살펴왔습니다. 렘6:3에는 ‘딸시온’, ‘장막’, ‘가축떼’가 한 구절 안에 함께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적 교회를 나타내는 시온과 관련하여 장막과 가축 떼가 함께 언급된다는 점을 근거로 삼습니다. 그 구절의 문자적 장면 전체가 평화롭기 때문에 인용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사용된 표현들이 그의 논증과 관련되기 때문에 인용한 것입니다.
이것은 말씀의 속뜻을 읽을 때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어떤 구절에서 특정 표현의 속뜻을 밝힌다고 해서, 그 구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과 행동을 같은 방향의 긍정적인 뜻으로 풀이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렘6:3의 문자적 장면은 경고의 문맥에 그대로 두면서, 스베덴보리가 그 가운데서 주목한 ‘딸시온’, ‘장막’, ‘가축떼’의 관계를 살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장막은사랑의거룩한것’이라는 설명만 붙들고 그 장막을 치는 모든 행동까지 거룩한 행위로 단정하면, 상응을 읽는 일이 본문을 이해하는 일이 아니라 본문 위에 다른 이야기를 덧씌우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기존 심화의 몇몇 설명은 수정되어야 합니다. ‘장막을친다’는 것을 곧바로 ‘교회가사랑안에서보호되고질서를이루는상태’라고 하거나, ‘각기그처소에서먹인다’는 것을 ‘각사람이자기상태에따라선과진리를공급받는것’이라고 한 부분이 그렇습니다. 그러한 설명이 다른 저작이나 다른 문맥에서 논의될 여지는 있더라도, AC.415는 이 구절을 그렇게 풀이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렘6장의 문자적 문맥까지 고려하면, 이 해석들을 이번 번호의 직접적인 결론으로 제시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말한 것과 우리가 더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을 구별하는 것이 충실한 해설의 출발점입니다.
그렇다고 렘6:3이 AC.415에서 어색하게 끼어든 인용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앞의 AC.414에서 장막의 의미를 밝힌 뒤, 이번 번호에서 가축의 의미를 밝히는 흐름을 생각하면 이 구절의 위치가 분명해집니다. 장막과 가축 떼가 천적 교회를 나타내는 시온과 관련하여 함께 등장한다는 사실은, 야발의 ‘장막에거주하며가축을치는자의조상’이라는 표현을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장막은 사랑의 거룩한 것을, 가축은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을 나타냅니다. 렘6:3은 이 두 표현이 천적 교회와 관련하여 함께 사용되는 말씀의 한 사례로 제시된 것입니다.
성도들이 여기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상응의 낱말 뜻만이 아닙니다. 말씀의 속뜻을 읽을 때에는 먼저 문자적 문맥을 정직하게 살피고, 이어서 스베덴보리가 그 문맥에서 실제로 무엇을 풀이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직접 풀이하지 않은 부분을 그럴듯한 설명으로 채워 넣는 일은 신중해야 합니다. 렘6:3은 심판의 장면이라는 사실을 그대로 인정하면서도, 그 안에 등장하는 장막과 가축 떼가 AC.415의 논증에 어떤 근거를 제공하는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읽기가 말씀의 문자적 의미와 속뜻을 서로 경쟁시키지 않으면서 함께 존중하는 길입니다. (AC.415심화2)
AC.415에는 양 떼와 가축뿐 아니라 우리, 목초지, 떡, 밀, 기름, 새 포도주가 잇달아 등장합니다. 이 많은 표현을 하나씩 외우려 하면 정작 스베덴보리가 밝히려는 중심을 놓치기 쉽습니다. 그가 이 구절들을 인용한 목적은 모든 농경·목축 용어의 뜻을 빠짐없이 정리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야발의 ‘가축’이 사랑의 거룩한 것에서 나오는 선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말씀에서 그와 관련된 표현들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통해 밝히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각 구절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풀이한 표현을 확인하고, 그 표현들이 공통으로 드러내는 관계를 살펴보는 것이 좋습니다.
렘23:3에서 주님은 흩어진 양 떼의 남은 자들을 모아 다시 그 우리로 돌아오게 하시고, 그들이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양 떼는 스스로 길을 찾아 돌아오는 것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모으고 돌아오게 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우리’가 사랑의 선과 관련된다는 근거로 인용합니다. 따라서 우리를 단순한 축사의 울타리로만 생각하기보다, 주님께서 양 떼를 돌아오게 하시는 말씀 안에서 그 의미를 살펴야 합니다. 다만 이 구절의 ‘남은자’를 곧바로 개인 안에 보존된 선과 진리라는 기술적 의미의 ‘리메인스’로 확정하는 것은 AC.415의 직접 설명을 넘어섭니다. 여기서는 흩어진 양 떼를 다시 모으시는 주님의 행위와 그들이 돌아가는 우리에 주목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겔34:14는 이 관계를 더욱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주님은 양 떼를 좋은 꼴로 먹이시고, 이스라엘의 높은 산에 그들의 우리가 있게 하시며, 좋은 우리에 눕게 하고 살진 꼴을 먹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에서 ‘우리’와 ‘목초지’가 사랑의 선들을 나타내고, ‘기름짐’도 그러한 선들에 관하여 사용되는 표현이라고 직접 밝힙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이해할 때에는 ‘우리는보호,목초지는진리의공급,눕는것은안식’이라는 식으로 각 낱말에 별도의 뜻을 먼저 붙일 필요가 없습니다. 좋은 우리와 좋은 꼴, 살진 목초지가 함께 묘사하는 풍성함을 살피면서, 스베덴보리가 그것들을 사랑의 선과 연결했다는 사실을 붙드는 것이 이번 번호에 더 충실한 읽기입니다.
사30:23에서는 땅의 소산으로 만든 떡이 풍성하고 기름지며, 가축이 넓은 초장에서 먹는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떡’이 천적인 것을, 가축이 먹는 ‘기름진것’이 거기서 나오는 선들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설명은 야발의 장막과 가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비교가 됩니다. 장막과 가축이 나란히 놓였을 때 장막이 사랑의 거룩한 것을, 가축이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을 나타내듯이, 이사야서에서도 천적인 것과 거기서 나오는 선이 함께 나타납니다. 다만 비·씨·땅·넓은 초장에 각각 세부적인 상응을 부여하고 그것들을 하나의 거듭남 단계로 연결하는 것은 AC.415가 직접 제시한 논증이 아닙니다. 그러한 해석은 다른 근거를 확인한 뒤 별도로 다루어야 합니다.
렘31:11-12에서는 밀과 새 포도주와 기름, 양 떼와 소 떼의 새끼들이 함께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밀’과 ‘기름’이 여호와의 거룩한 것을 묘사하고, ‘새포도주’와 ‘양떼와소떼의새끼들’이 거기서 나오는 선들을 묘사한다고 밝힙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단순히 곡식과 가축이 풍성하다는 사실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여호와의 거룩한 것과 거기서 나오는 선을 구별하여 설명한다는 점입니다. 기존 심화에서 새 포도주를 별도의 설명 없이 ‘영적선’이나 ‘그사랑에서나오는진리’로 확정하면, 이번 번호가 직접 제시한 구별과 어긋날 수 있습니다. AC.415에서는 그가 실제로 밝힌 범위, 곧 새 포도주가 여기서 거룩한 것에서 나오는 선들을 묘사한다는 설명을 우선해야 합니다.
이 네 구절을 함께 놓으면 우리와 목초지와 가축의 의미를 이해하는 길이 열립니다. 렘23:3에서는 흩어진 양 떼를 다시 모으시는 주님을, 겔34:14에서는 좋은 우리와 목초지에서 먹이시는 주님을 봅니다. 사30:23과 렘31:11-12에서는 천적인 것 또는 여호와의 거룩한 것과, 거기서 나오는 선이 함께 묘사됩니다. 이 말씀들은 모두 동일한 장면을 말하지는 않지만, AC.415에서는 사랑의 거룩한 것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의 관계를 밝히는 근거로 모입니다. 가축의 속뜻은 동물이라는 외형만 보고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가축이 말씀 안에서 무엇과 함께 등장하는지를 살필 때 더욱 분명해집니다.
여기서 ‘사랑이먼저이고선이그다음’이라는 말을 시간적인 순서로만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이 먼저 마음속에 사랑을 완성한 뒤에야 비로소 선을 행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AC.415가 강조하는 것은 선의 근원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이 선의 근원이므로, 선을 그 사랑과 분리하여 독립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사랑을 말하면서도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에는 관심이 없다면, 장막과 가축을 함께 놓은 말씀의 관계를 충분히 받아들이지 못한 셈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야발의 속뜻을 ‘사랑의거룩한것들과그사랑에서나오는선들에관한교리’라고 함께 설명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결국 우리와 목초지와 가축은 성도에게 외워야 할 상응 용어를 늘려 주기 위해 등장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사랑의 거룩한 것에서 나오는 선이 무엇인지를 말씀의 여러 장면을 통해 생각하게 합니다. 흩어진 양 떼를 모으시고 먹이시는 분은 주님이시며, 그분에게서 오는 사랑은 선의 근원입니다. 그러므로 야발의 ‘가축의조상’이라는 표현을 읽을 때에는 목축의 기원을 설명하는 문자적 기록을 인정하면서도, 그 속뜻에서 사랑과 선이 서로 분리되지 않는 질서를 보아야 합니다. (AC.415심화1)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창4:20)
AC.415
‘가축의조상’(fatherofcattle)이사랑의거룩한것들에서나오는선을의미한다는사실은,이장2절에관하여앞에서설명한내용으로부터분명해집니다.거기서는‘양떼를치는자’(shepherdoftheflock)가체어리티의선을의미한다는것을밝혔습니다.그러나여기서는‘목자’(shepherd)대신‘조상’(father)이라는말을,‘양떼’(flock)대신‘가축’(cattle)이라는말을사용합니다.그리고야발이‘조상’(father)이라고불리는‘가축’(cattle)이라는말은‘장막’(tent)바로뒤에나옵니다.이로부터그것이사랑의거룩한것에서나오는선을의미한다는사실이분명해집니다.또한여기서뜻하는것은가축을위한거처나우리,곧장막과가축우리에거주하는사람들의조상이라는것도알수있습니다.이러한표현들이사랑의천적인것들에서나오는선들을의미한다는사실은말씀의여러구절에서분명해집니다.예레미야서에는다음과같이기록되어있습니다. That by the “fatherofcattle” is signified the good that is derived from the holy things of love, is evident from what was shown above, at verse 2 of this chapter, where it was shown that a “shepherdoftheflock” signifies the good of charity. Here however the term “father” is employed instead of “shepherd,” and “cattle” instead of “flock”; and the word “cattle,” of which Jabal is said to be the “father,” follows immediately after “tent,” whence it is evident that it signifies the good that comes from the holy of love, and that there is meant a habitation or fold for cattle, or the father of them that dwell in tents and in folds for cattle. And that these expressions signify goods from the celestial things of love, is evident from various passages in the Word. As in Jeremiah:
여기서‘우리들’(folds)과‘목초지들’(pastures)은사랑의선들을나타내며,‘기름짐’(fatness)도그러한선들에관하여말하는표현입니다.이사야서에는다음과같이기록되어있습니다. where “folds” and “pastures” denote the goods of love, of which “fatness” is predicated. In Isaiah:
여기서‘떡’(bread)은천적인것을의미하고,가축이먹는‘기름진것’(fat)은거기서나오는선들을의미합니다.예레미야서에는다음과같이기록되어있습니다. where by “bread” is signified what is celestial, and by the “fat” whereon the cattle should feed, the goods thence derived. In Jeremiah:
여기서는‘밀’(wheat)과‘기름’(oil)으로여호와의거룩한것을,‘새포도주’(newwine)와‘양떼와소떼의새끼들’(sonsoftheflockandoftheherd),곧‘가축’(cattle)으로거기서나오는선들을묘사합니다.또다른곳에는다음과같이기록되어있습니다. where the holy of Jehovah is described by “wheat” and “oil,” and the goods derived from it by “newwine” and the “sonsoftheflockandoftheherd,” or of “cattle.” Again:
‘딸시온’(daughterofZion)은천적교회를나타내며,‘장막들’(tents)과‘가축떼들’(flocksofcattle)은그교회에관하여사용되는표현입니다. The “daughterofZion” denotes the celestial church, of which “tents” and “flocksofcattle” are predicated.
해설
AC.415는 야발에 관한 설명을 마무리하면서, 그가 왜 ‘가축의조상’이라고 불리는지를 밝힙니다. 앞의 AC.414에서는 ‘장막’이 사랑의 거룩한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말씀의 여러 구절로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장막 바로 뒤에 나오는 ‘가축’에 주목합니다. 창4:20에서 장막과 가축은 서로 무관한 두 가지 생업으로 나열된 것이 아닙니다. 장막이 사랑의 거룩한 것을 나타내고, 가축이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을 나타내기 때문에 두 표현이 함께 놓인 것입니다. 이 번호의 중심은 ‘가축이무엇을뜻하는가?’라는 질문뿐 아니라, ‘그선은어디에서나오는가?’라는 질문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창4:2의 아벨을 떠올리게 합니다. 아벨은 ‘양치는자’였고, 그 표현은 체어리티의 선을 의미한다고 앞에서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야발에 대해서는 ‘목자’ 대신 ‘조상’, ‘양떼’ 대신 ‘가축’이라는 말이 사용됩니다. 더구나 ‘가축’은 사랑의 거룩한 것을 나타내는 ‘장막’ 바로 뒤에 나옵니다. 따라서 두 인물을 단순히 ‘둘다가축을치므로같은뜻이다’라고 처리해서는 안 됩니다. 아벨의 경우에는 체어리티의 선이, 야발의 경우에는 장막이 나타내는 사랑의 거룩한 것에서 비롯되는 선이 강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표현과 그 배열을 함께 살펴 이러한 차이를 밝힙니다.
‘사랑에서나오는선’이라는 말은 사랑과 선을 서로 떨어진 두 가지로 생각하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여기서 사랑은 사람이 무엇을 진심으로 원하고 소중히 여기는가와 관계되며, 선은 그 사랑에서 비롯되는 좋은 것과 그에 따른 삶에 관계됩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 사랑에 따라 선을 원하고 행하도록 이끌립니다. 그러나 외적으로 좋은 일을 했다는 사실만으로 그 일의 내적인 근원까지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AC.415가 말하는 것은 모든 선행을 무조건 천적인 선이라고 부르자는 뜻이 아니라, 야발의 ‘가축’이 특별히 사랑의 거룩한 것에서 나오는 선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축의 속뜻을 알려면 그 앞에 놓인 장막의 의미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렘23:3에서 주님은 흩어진 양 떼의 남은 자들을 모아 다시 그 우리로 돌아오게 하시고, 그들이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겔34:14에서는 양 떼를 좋은 꼴로 먹이시고, 좋은 우리에 눕게 하시며, 살진 꼴을 먹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두 말씀을 통해 ‘우리’와 ‘목초지’가 사랑의 선들을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겔34:14의 ‘기름짐’도 그러한 선들에 관하여 사용되는 표현이라고 밝힙니다. 이 구절들에서 양 떼가 돌아오고 먹고 쉬는 모습은 주님께서 그들을 돌보시는 말씀과 함께 나타납니다. 따라서 우리는 단순한 울타리로, 목초지는 단순한 먹이의 장소로만 읽지 않고, 스베덴보리가 밝히는 사랑의 선과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사30:23과 렘31:11-12에서는 먹을 것과 가축이 함께 등장합니다. 이사야서는 땅의 소산으로 만든 풍성한 떡과 넓은 초장에서 먹는 가축을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떡’이 천적인 것을, 가축이 먹는 ‘기름진것’이 거기서 나오는 선들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예레미야서는 여호와께서 야곱을 구속하신 뒤 백성이 밀과 새 포도주와 기름, 양 떼와 소 떼의 새끼들을 위하여 모여들며 그 영혼이 물 댄 동산 같아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에서 ‘밀’과 ‘기름’으로 여호와의 거룩한 것을, ‘새포도주’와 ‘양떼와소떼의새끼들’로 거기서 나오는 선들을 설명합니다. 두 구절은 서로 다른 풍요의 모습을 그리지만, 이번 번호에서는 천적인 것과 그로부터 나오는 선의 관계를 밝히는 근거로 함께 사용됩니다.
마지막으로 렘6:3에서는 목자들과 가축 떼가 ‘딸시온’에게 와서 그 주위에 장막을 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딸시온’이 천적 교회를 나타내며, 그 교회에 관하여 ‘장막’과 ‘가축떼’라는 표현이 사용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본문의 문자적 문맥도 함께 기억해야 합니다. 렘6장은 예루살렘을 향한 위협을 선포하므로, 목자들이 장막을 치는 장면 자체를 평화로운 목축이나 천국의 안식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에서 직접 밝히는 것은 ‘딸시온’이 천적 교회를 나타내며, 그와 관련하여 ‘장막’과 ‘가축떼’라는 표현이 함께 사용된다는 점입니다. 말씀의 속뜻을 살피는 일은 문자적 문맥을 지우는 일이 아닙니다.
이제 AC.412-415의 흐름을 돌아보면 야발의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AC.412는 야발이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들에 관한 교리를 의미한다고 밝혔습니다. AC.413은 이 교리가 천적인 것에 속한다는 점을 설명했습니다. AC.414는 장막이 사랑의 거룩한 것을 나타내는 근거를 제시했고, 이번 AC.415는 가축이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을 나타내는 근거를 제시합니다. 그러므로 야발은 단순히 장막 생활과 목축을 시작한 사람이라는 문자적 기록을 넘어, 사랑의 거룩한 것과 거기서 나오는 선에 관한 교리를 나타냅니다. 성도들이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장막은사랑,가축은선’이라는 대응표만이 아닙니다. 선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그 근원으로 삼는다는 질서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장막과 가축을 함께 살펴보는 이유입니다. (AC.415해설)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 영상의 기본 설정은 흥미롭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IT 개발자로 살던 한 남자가 갑자기 수인들이 살아가는 원시 세계로 이동합니다. 그곳에서는 불을 피우는 기술조차 ‘샤먼’이라는 특별한 존재가 독점하고 있으며, 불씨가 꺼지면 다른 부족에게 많은 식량을 바치고 다시 얻어 와야 합니다. 질병이 생겨도 원인을 알지 못하고, 사냥은 주로 힘과 머릿수에 의존하며, 깨끗한 물과 배설물 처리 같은 기본적인 위생 개념조차 없습니다. 그런데 현대 문명의 지식을 가진 주인공이 등장하면서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그는 불을 직접 피우고, 열병을 치료하고, 창을 만들고, 사냥을 조직화하며, 물을 끓여 마시게 하고, 배설물과 쓰레기를 주거지에서 분리합니다. 한 사람이 가진 ‘지식’이 부족 전체의 생존 방식을 바꾸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지식의해방’입니다. 불을 피우는 방법은 원래 샤먼만 알고 있으며 그 지식은 후계자에게만 전수됩니다. 그러나 주인공은 그것을 모든 부족민에게 가르치겠다고 합니다. 이 장면은 의외로 상당히 좋은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지식을 권력의 근거로 독점하지 않고 공동체 전체의 유익을 위해 나누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지식 자체는 목적이 아닙니다. 모든 진리는 결국 삶을 향해야 하며, 더 정확히 말하면 ‘쓰임’(use)을 향해야 합니다. 무엇을 많이 아느냐보다 그것을 가지고 누구를 살리고 무엇을 유익하게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불 피우는 지식이 한 사람의 신비한 권위를 높이는 데 사용될 때 그것은 권력이 되지만, 부족 전체가 혹한을 견디게 하는 데 사용될 때 그것은 쓰임이 됩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주인공이 공동체를 강하게 만드는 방식입니다. 처음 부족민들은 강함을 거의 육체적인 힘으로 이해합니다. 강한 종족은 큰 짐승을 잡고, 많은 전사를 가진 부족은 더 많은 먹이를 차지합니다. 그러나 주인공은 전혀 다른 원리를 가르칩니다. ‘정보를수집하라. 환경을이용하라. 퇴로를확보하라. 각자의장점을살려라. 무기를개선하라. 역할을나누어라.’ 특히 ‘너희가약했던게아니라사냥방식이잘못됐던거였어’라는 대목은 이 이야기 전체를 압축하는 문장처럼 들립니다. 힘이 부족해서 패배하는 것이 아니라 질서와 지혜가 없어서 힘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천국의 질서와도 묘하게 접점이 있습니다. 천국 역시 모두가 똑같은 능력을 가진 사회가 아니라 서로 다른 기능과 쓰임을 가진 존재들이 하나의 목적 아래 조화를 이루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렌즈’를 조금 더 깊이 들이대야 합니다. 이 콘텐츠에서 문명 발전의 방향은 거의 일관되게 ‘더많이알고, 더효율적으로생산하고, 더강한무기를만들고, 더잘조직하고, 더강한부족이되는것’으로 향합니다. 그래서 보다 강한 적을 물리치고 영토를 확보하며, 식량을 저장하고, 방어벽과 초소를 세우고, 다른 부족보다 우월한 생존 체계를 갖추는 과정이 곧 ‘진보’로 그려집니다. 여기에서 목사님이 느끼신 중국적 색채도 어느 정도 이해됩니다. 다만 이것을 곧바로 ‘중화사상’이라고 단정하기보다는, ‘혼란한주변세계를뛰어난지식과질서를가진중심인물이조직하고교화하여더큰질서안으로편입시킨다’는 서사 구조에 주목하는 편이 정확하겠습니다. 중국 역사문화에서 오래 반복되어 온 ‘문명과주변’, ‘질서와혼란’, ‘교화와편입’의 상상력과 닮은 부분이 분명히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특히 주인공은 단순히 좋은 아이디어를 하나씩 제공하는 조언자가 아닙니다. 시간이 갈수록 그는 ‘무엇이옳은지를아는사람’이 되고, 공동체는 그가 제시하는 방식을 받아들일수록 강해집니다. 처음에는 ‘저사람말이맞을까?’라고 의심하던 이들이 결국 그의 지식과 성과를 경험하면서 그를 신뢰하고 따르게 됩니다. 여기에는 매우 오래된 인간의 꿈이 숨어 있습니다. ‘현명하고유능한한사람이올바른지식으로공동체를이끈다면세상은훨씬좋아질것이다.’ 이것은 중국만의 생각도 아닙니다. 플라톤의 철인정치에서 현대의 기술관료주의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끊임없이 품어 온 꿈입니다. 문제는 스베덴보리에게 인간 사회의 근본 문제는 ‘지식부족’이 아니라 ‘사랑의질서가뒤집힌것’이라는 데 있습니다. 인간은 무엇이 좋은지 몰라서만 악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와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보다 위에 있기 때문에 자신이 아는 진리마저 자기 목적을 위해 사용합니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가장 조심해서 보아야 할 것은 바로 ‘지식→문명→힘→선’이라는 연결입니다. 깨끗한 물을 마시게 하고, 병자를 치료하고, 식량을 저장하고, 혹한에서 살아남을 집을 짓는 것은 분명 좋은 쓰임입니다. 반면 더 치명적인 창을 만들고, 독을 이용하고, 더 효과적으로 적을 죽이고, 더 넓은 영역을 확보하는 능력 역시 동일한 ‘지식’에서 나옵니다. 지식은 그 자체로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을 움직이는 사랑이 무엇인가에 따라 천국적인 쓰임이 될 수도 있고 지옥적인 도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지성과 지혜의 차이도 바로 여기에서 드러납니다. 많이 아는 사람이 반드시 지혜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진리를 사용하고, 그 진리로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끼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이 점에서 저는 오히려 이 중국 AI 이야기가 의도하지 않은 중요한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고 봅니다. 주인공이 부족에게 불을 주고, 의술을 주고, 무기를 주고, 위생을 주고, 조직을 주고, 정착지를 주었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그는 그들에게 ‘더좋은사람’이 되는 법도 주었을까요? 기술이 발전하면 시기와 탐욕도 사라질까요? 식량이 풍부해지면 이웃 부족을 사랑하게 될까요? 무기가 강해지면 그것을 약자를 보호하는 데만 사용할까요? 바로 이 지점에서 자연적 문명과 영적 거듭남은 갈라집니다. 외적인 삶은 놀라울 정도로 문명화되었는데 내면은 여전히 지배욕과 소유욕과 자기 우월감에 붙들려 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외적으로는 매우 소박하게 살아도 이웃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처럼 기뻐하는 사람은 천국의 질서에 훨씬 가까울 수 있습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렌즈’로 이 작품을 보면 문명의 진정한 척도 자체가 달라집니다. ‘얼마나강한부족인가?’가 아니라 ‘그힘을무엇을위해사용하는가?’입니다. ‘얼마나많은지식을가졌는가?’가 아니라 ‘그지식이누구를살리는가?’입니다. ‘얼마나잘조직되어있는가?’가 아니라 ‘그질서의중심에자기집단의우월함이있는가, 아니면공동의선과이웃에대한사랑이있는가?’입니다. 주인공이 불 피우는 방법을 독점하지 않고 모두에게 가르쳐 주는 순간에는 천국적인 원리가 비칩니다. 병든 사람을 살리고, 부족원 가운데 단 한 명도 다치지 않기를 바라며 사냥법을 개선하는 순간에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지식과 기술이 ‘우리부족을가장강하게만드는것’으로 중심을 옮기는 순간, 같은 지식 안으로 인간의 proprium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어쩌면 그래서 이 작품은 단순한 중국식 문명 우월 판타지로만 읽기에는 조금 아깝습니다. 그 안에는 인간 문명의 오래된 모순이 압축되어 있습니다. 불을 발견한 인간은 추위를 이겼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의 집을 불태울 수도 있게 되었고, 금속을 다루게 된 인간은 농기구와 칼을 동시에 만들었으며, 현대 과학은 질병을 치료하는 기술과 대량살상 기술을 함께 만들어 냈습니다. 결국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더많은지식’ 자체가 아닙니다. 지식을 움직이는 사랑이 바뀌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은 바로 그 중심의 변화입니다. ‘나와우리를위해무엇을더가질것인가’에서 ‘주님께받은것을가지고누구에게어떤쓰임이될것인가’로 삶의 중심이 이동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영상을 보면서 느껴지는 ‘중화사상’의 흔적보다 더 근원적인 것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중국인의 문제라기보다 인간 proprium의 보편적인 꿈입니다. ‘내가더많이알고, 더강해지고, 더잘조직하면세상을바로잡을수있다’는 꿈입니다. 주님은 그것보다 훨씬 깊은 곳을 보십니다. 세상을 바꾸기 전에 사랑의 방향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식이 많아지는 것이 문명의 시작이라면, 그 지식을 자기 자신보다 이웃의 행복을 위해 기꺼이 사용하는 것은 천국의 시작입니다. 이 콘텐츠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어쩌면 거대한 짐승을 쓰러뜨리는 순간이 아니라, 한 사람이 자신이 알고 있는 ‘불피우는법’을 더 이상 자기만의 힘으로 붙잡지 않고 모두에게 가르쳐 주겠다고 말하는 순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으로는직접피우면되니까불씨를얻으려고음식을바칠필요없어.’ 바로 그때 지식은 권력에서 쓰임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이가진불은누구를따뜻하게하고있는가?’
AC.414의 마지막 부분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 사람들이 장막에서 거룩한 예배를 드렸으며, 이를 기억하게 하는 절기로 초막절이 제정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레23:42-43은 이스라엘 자손이 초막에 거주해야 하는 이유를 분명히 밝힙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 그들을 초막에 거주하게 하셨다는 사실을 대대로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초막절은 출애굽과 광야 생활을 기억하는 절기입니까, 아니면 태고교회의 사랑의 예배를 기억하는 절기입니까? 이 질문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와 스베덴보리가 밝히는 표상적 의미를 어떻게 함께 읽을 것인가 하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먼저 레위기가 직접 밝히는 초막절의 기념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땅의 소산을 거두어들인 뒤 초막절을 지켰으며, 일정 기간 초막에 거주했습니다. 레23:42-43은 그 이유를 출애굽 때의 초막 생활을 기억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초막절의 문자적 의미를 분명히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받아들인다는 이유로 ‘초막절은사실출애굽과관계가없다’거나 ‘레위기가밝힌기념이유는겉으로만내세운설명이다’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역사와 절기의 규례는 그 자체로 존중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는 왜 태고교회를 말합니까? AC.414에서 그는 초막절의 문자적 제정 이유를 다시 설명하기보다, ‘장막’이라는 표상이 지닌 더 오래된 의미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태고교회 사람들은 각자의 가족 안에서 살면서 장막에서 거룩한 예배를 드렸습니다. 장막은 그 사랑의 예배와 연결되어 천적인 것과 사랑의 거룩한 것을 표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후대의 이스라엘 백성이 초막에 거주하는 절기를 지킬 때, 그 행위는 출애굽의 역사를 기억하는 동시에 장막이 오래전부터 지녀 온 거룩한 의미와도 연결될 수 있습니다. 하나의 표상에 문자적 역사와 속뜻이 함께 있다는 설명입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려면 ‘무엇을기념하라고명령하셨는가?’와 ‘그기념에사용된장막은무엇을표상하는가?’를 나누어 생각하면 도움이 됩니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레위기가 직접 답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나온 뒤 초막에 거주했던 일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AC.414가 답합니다. 장막은 태고교회의 거룩한 예배와 연결되어 사랑의 거룩한 것을 표상한다는 것입니다. 두 대답은 서로 다른 층위의 질문에 대한 것이므로, 하나를 인정하기 위해 다른 하나를 부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함께 인용한 신16:13도 이 관계를 살피는 데 도움이 됩니다. 이 말씀은 타작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출을 거두어들인 뒤 초막절을 지키라고 명령합니다. 레23:39역시 땅의 소산을 거두어들인 뒤 절기를 지키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초막절에는 광야 생활을 기억하는 일뿐 아니라 수확을 마친 뒤 주님 앞에서 절기를 지키는 일도 함께 들어 있습니다. 다만 AC.414는 타작마당이나 포도주 틀의 세부적인 속뜻을 여기서 풀이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심화에서는 그 물건들에 새로운 상응을 임의로 부여하기보다, 초막절이 출애굽의 기억과 수확의 기쁨을 함께 지닌 절기라는 문자적 문맥을 확인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호12:9에서 주님은 다시 장막에 거주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구절도 AC.414가 초막절과 장막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인용한 본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장막 생활이 단지 과거의 불편한 생활 방식으로만 언급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말씀은 장막에 거주하는 모습을 다시 불러오며,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표현들을 사랑의 거룩한 것에 관한 장막의 의미와 연결합니다. 그러나 호세아서의 구체적인 역사적 문맥과 AC.414가 밝히는 속뜻을 구별하여 읽어야 합니다. 이 한 구절만으로 태고교회의 모든 예배 방식이나 초막절의 세부 규례를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목회적으로 중요한 질문은 ‘오늘우리도초막에서살아야더거룩한예배를드릴수있습니까?’ 하는 것입니다. AC.414의 설명은 그런 결론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장막의 재료나 생활 방식 자체가 거룩함을 만들어 낸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장막이 사랑의 거룩한 것을 표상한다는 것은 그 장막과 연결된 예배의 내적인 의미를 살피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초막절을 읽는 성도는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주님의 역사를 기억하면서, 그 기억이 가리키는 주님의 사랑과 거룩함을 함께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외적인 절기의 형식을 그대로 되풀이하는 것과 그 절기가 나타내는 거룩한 것을 삶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결국 초막절의 문자적 기념 내용은 출애굽과 광야의 초막 생활이며, 스베덴보리가 AC.414에서 밝히는 표상적 의미는 장막에 담긴 태고교회의 사랑의 예배와 연결됩니다. 이 두 의미는 서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문자적 역사를 통해 주님의 인도하심을 기억하고, 장막의 속뜻을 통해 그분에게서 오는 사랑의 거룩함을 생각하게 합니다. 초막절을 읽으며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어느시대의장막이더중요합니까?’라는 선택이 아니라, 말씀의 역사 속에서도 그 속뜻 안에서도 사람을 주님께로 이끄시는 분이 누구신가 하는 질문입니다. (AC.414심화2)
AC.414를 읽으면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장막과 성막과 성전이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말하면서도, 고대에는 장막에서 예배를 드렸고 그 장막이 모독되기 시작하자 성막이 세워졌으며, 그 후에는 성전이 세워졌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세 가지가 같은 의미를 지닌다는 것은 무엇이며, 예배의 장소가 바뀌어야 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질문을 풀려면 ‘무엇을표상하는가?’와 ‘어떤역사적상태에서사용되었는가?’를 구별해야 합니다.
먼저 같은 의미를 지닌다는 것은 세 건축물이 문자적으로 동일하다거나, 그 안에서 행해진 예배의 모든 절차가 같다는 뜻이 아닙니다. 장막은 가족이 거주할 수 있는 처소이고,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생활 가운데 세워진 예배의 처소이며, 성전은 이후에 세워진 건축물입니다. 이 차이는 문자적인 역사에서 그대로 인정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공통된 의미는 이 서로 다른 처소들이 모두 주님에게 속한 거룩함을 표상한다는 데 있습니다. 외적인 형태는 달라져도 그 형태가 가리키는 거룩함의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장막이 사랑의 거룩한 것을 표상하게 된 이유를 태고교회의 예배에서 찾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각자의 가족 안에서 살며 장막에서 거룩한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여기서 장막은 단지 비바람을 막아 주는 생활 도구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삶과 예배가 이루어지는 처소였고, 스베덴보리는 그 예배를 사랑의 거룩함과 연결합니다. 따라서 장막의 의미를 이해할 때에는 천막이라는 물건 자체보다, 그 안에서 주님을 향하여 드려졌던 예배와 그 예배에 속한 사랑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AC.414는 사람들이 장막에서 불경한 예배를 행하며 그것을 모독하기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장막이라는물건이더러워졌으므로하나님께서더좋은건물을요구하셨다’는 식으로 이해하지 않는 것입니다. 문제는 천막의 재료나 구조가 아니라 예배의 상태에 있었습니다. 거룩한 예배를 위해 사용되던 처소가 그와 반대되는 예배에도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와 관련하여 성막이 세워지고, 그 후에는 성전이 세워졌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예배 장소의 변화가 단순한 건축 기술의 발전만으로 설명될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그렇다면 성막과 성전은 장막보다 더 높은 수준의 거룩함을 지닌 것입니까? AC.414는 오히려 태고교회의 장막이 후에 모독된 성전보다 더 거룩하게 여겨졌다고 말합니다. 이 대목은 매우 중요합니다. 건물이 더 크고 견고해졌다는 사실이 그 안에서 드리는 예배까지 더 거룩해졌다는 증거는 아니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태고교회의 장막을 특별히 언급하는 이유는 그 장막이 연결되어 있던 사랑의 예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장막·성막·성전의 순서를 외적인 규모나 화려함에 따라 영적 우열을 매기는 순서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시27:4-6은 이 세 표현의 공통된 의미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근거입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집에 살기를 구하고 성전에서 주님을 사모하며, 환난 날에는 초막과 장막 안에서 보호받고 장막에서 제사를 드리겠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에는 여러 이름의 거룩한 처소가 등장하지만, 다윗이 구하는 중심은 하나입니다. 그는 주님 가까이에 머물며 그분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그분의 보호 안에서 예배드리기를 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러한 문맥을 통해 장막과 성막과 성전이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설명합니다. 각각의 건축물을 따로 떼어 놓고 이름만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무엇을 구하고 누구에게 나아가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AC.414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가장 높은 의미에서 주님께서 그분의 인성의 본질에 관하여 장막이시며 성막이시고 성전이시라고 말합니다. 이 설명에 이르면 세 처소가 공통으로 가리키는 중심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거룩함은 장막이나 성막이나 성전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거룩함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그분을 표상하는 처소가 거룩한 의미를 지니는 것입니다. 또한 천적 사람을 주님의 장막이나 성전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 사람이 독립적으로 거룩해졌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거룩함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장막과 성막과 성전은 역사적으로 서로 다른 처소이고, 그것들이 사용된 예배의 상태도 같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밝히는 속뜻에서 그 처소들은 모두 주님과 그분에게서 오는 거룩함을 표상한다는 공통점을 지닙니다. 따라서 ‘같은의미’라는 말은 역사적 차이를 지우는 말이 아니며, ‘서로다른시대에세워졌다’는 사실도 그 공통된 속뜻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성도들이 이 말씀에서 붙들어야 할 것은 어느 시대의 건물이 가장 거룩했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예배가 외적인 처소에 머무르지 않고 그 처소가 가리키는 주님과 그분의 사랑을 향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AC.414심화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