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에는 분명 복음의 중요한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입니다. 요한복음도 ‘영접하는자곧그이름을믿는자들에게는하나님의자녀가되는권세를주셨으니’(요1:12)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영접하는것’ 자체를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 문제는 ‘영접’의 의미를 어느 순간 드린 기도나 입술의 고백 하나로 축소하고, 그때부터 자신의 영원한 구원이 이미 확정되었다고 이해할 때 생깁니다. 성경에서 주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훨씬 더 깊고 삶 전체에 걸친 일입니다.
한국 개신교에서는 흔히 ‘예수님을마음속에영접하셨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주예수님, 저는죄인입니다. 예수님을나의구주로영접합니다’라고 기도했다면 그 날짜를 자신의 구원받은 날로 기억하기도 합니다. 그런 기도는 매우 귀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한 사람이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돌아서서 주님을 향하기 시작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특정한 형식의 ‘영접기도’를 한 번 했다는 사실 자체를 영원한 구원의 보증서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영접기도는 주님을 향한 삶의 ‘시작’이 될 수 있지만, 그 기도 자체가 거듭남(regeneration)의 전 과정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은 오히려 우리를 더 깊은 곳으로 데려갑니다. ‘나더러주여주여하는자마다다천국에들어갈것이아니요다만하늘에계신내아버지의뜻대로행하는자라야들어가리라’(마7:21). 여기에서 주님은 입술로 주님을 인정하는 것과 실제로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을 구별하십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다음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까지 행했다고 말합니다. 단순히 불신자들이 아닙니다. 주님의 이름을 알고 주님의 이름으로 종교적인 일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그들의 ‘삶’을 문제 삼으십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문제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구원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장부에서 죄인의 신분을 의인의 신분으로 바꾸어 놓으시는 외적 법적 선언에 그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실제로 사람을 변화시키십니다. 인간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악을 죄로 알고 피하며, 자신의 삶 속에서 선을 행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이 ‘거듭남’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영접한다’는 말도 결국 주님께서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나의 사랑과 생각, 행동을 새롭게 하시도록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의 유명한 말씀도 있습니다. ‘볼지어다내가문밖에서서두드리노니누구든지내음성을듣고문을열면내가그에게로들어가그와더불어먹고그는나와더불어먹으리라’(계3:20). 이 말씀도 흔히 영접기도의 근거로 사용됩니다. 그러나 원래 문맥을 보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대상은 예수를 전혀 모르는 불신자가 아니라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이미 자신을 신앙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문 밖에 주님께서 서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당히 의미심장합니다. ‘나는이미예수님을영접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도 주님께서는 여전히 문을 두드리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입술로는 주님을 영접했지만 삶의 어떤 방들은 여전히 열어 드리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믿습니다. 그러나돈문제는제가원하는대로하겠습니다. 주님은사랑합니다. 그러나저사람만은미워할권리가있습니다. 성경은믿습니다. 그러나내욕망을건드리는말씀은따르고싶지않습니다.’ 이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영접했다는 과거의 고백과 현재 내가 실제로 주님께 내어 드리고 있는 삶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생깁니다.
바로 여기에서 ‘프로프리움’(proprium)의 아주 미묘한 형태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나는30년전에예수님을영접했다. 그러므로나는구원받았다.’ 처음에는 주님을 의지하는 신앙고백이었던 것이 어느 순간 자기 자신이 소유한 ‘구원자격증’처럼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지, 어떤 악을 붙들고 있는지, 이웃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는 부차적인 문제가 됩니다. 심지어 삶이 주님의 말씀과 반대 방향으로 흘러가도 ‘그래도나는구원받은사람이야’라는 확신이 자기 성찰을 막을 수도 있습니다. 주님을 향했던 믿음이 역설적으로 자기 확신을 지키는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그러므로행위를많이해야구원받는다’는 말로 바꾸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선행을 쌓아 천국 입장권을 얻는 과정이 아닙니다. 선의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사람이 할 일은 주님께서 주시는 ‘자유’(freedom)와 ‘합리성’(rationality) 안에서 악을 죄로 알고 물리치며 주님께서 주시는 선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람은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지만, 참된 신앙 안에서는 그 힘과 선의 근원이 주님에게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냐행위냐’의 단순한 양자택일보다 ‘주님에게서받은믿음이실제삶에서어떤사랑과행위가되었는가’를 묻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야고보가 ‘행함이없는믿음은그자체가죽은것이라’(약2:17)고 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행위가 믿음에 추가되어 구원의 점수를 높여 주기 때문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믿음이라면 삶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사과나무가 사과를 맺는 것은 사과를 달아서 사과나무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그 생명이 나무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참으로 받아들인 믿음은 체어리티(charity), 곧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이 이웃을 향한 선과 유용한 일로 나타나는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영접했으니나는구원받은거아닌가?’라는 질문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과거형 ‘영접했으니’일지도 모릅니다. 성경적 신앙은 ‘언젠가주님을영접했는가?’뿐 아니라 ‘오늘도주님을영접하고있는가?’를 묻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내 미움을 보여 주실 때 그것을 내려놓는 것, 내 거짓을 드러내실 때 인정하는 것, 내 욕심과 교만을 말씀으로 비추실 때 돌이키는 것, 그리고 이웃에게 해야 할 선을 보여 주실 때 행하는 것, 이것 역시 주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접은 한 번의 사건인 동시에 일생에 걸친 과정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구원의 확신을 없애자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내가충분히거듭났나? 선행을충분히했나? 이정도면천국에갈수있나?’ 하며 끊임없이 자기 상태를 측정하는 것도 결국 시선이 주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머무는 또 다른 형태가 될 수 있습니다. 구원의 소망은 내가 몇 점짜리 그리스도인이 되었느냐에 있지 않고 나를 끝까지 거듭나게 하시는 주님께 있습니다. 다만 그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주님께서나를구원하실테니나는변하지않아도된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께서나를변화시키시는일을나는거부하지않겠다’는 신뢰를 포함합니다.
결국 질문은 ‘나는언제영접기도를했는가?’에서 한 걸음 더 깊어져야 합니다. ‘내가영접했다고고백한그주님께서지금내삶을실제로다스리고계시는가? 나는주님께서악이라고하시는것을악으로여기고있는가? 주님께서사랑하시는것을나도사랑하는사람이되어가고있는가?’입니다. 여기에서 구원은 과거 어느 날 받은 증명서가 아니라, 주님과의 살아 있는 결합이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영접했으니나는구원받은거아닌가?’라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을영접한것은구원의길에들어서는너무나귀한일입니다. 그러나주님을영접한다는것은한번입술로그분을받아들였다고고백하는데서끝나는것이아니라, 그분의선과진리를내삶안으로계속받아들이며그분이나를실제로변화시키시도록하는것입니다.’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참된영접은한번의기도로주님을내구원자로선언하는것에서끝나지않고, 일생의거듭남을통하여주님이내사랑과삶의주인이되시도록받아들이는것입니다.’
그리고 더 짧게 말한다면 이것이겠습니다. ‘구원은‘나는예수님을영접했다’는과거의기억보다,내가영접한주님께서지금나를어떤사람으로만들어가고계시는가의문제입니다.’
※오늘(2026/10/25)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9, ‘찬송하는소리있어’, 찬132, ‘주의영광빛나니’입니다.
오늘은창5절별 주석 그 세 번째, 15절로 20절, AC글 번호로는 510번에서 515번입니다. 먼저 창세기 본문입니다.
15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16야렛을 낳은 후 팔백삼십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7그는 팔백구십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18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19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0그는 구백육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창5:15-20)
이 말에는 앞의 경우와는 상당히 다른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이단이니까연을끊어도돼’가 관계를 끊을 성경적 근거를 찾는 쪽이라면, ‘이단이지만그래도나는내할도리는다하고싶은데그게잘안돼’는 관계를 지키고 싶지만 신앙의 차이와 감정의 상처 때문에 마음과 행동이 따라주지 않는 경우입니다. ‘스베덴보리의렌즈’로 보면 저는 오히려 이 두 번째 고민 속에 체어리티(charity)가 시작될 수 있는 중요한 지점이 있다고 봅니다. 아직 충분히 사랑하지 못하더라도 ‘그래도내가해야할선은하고싶다’는 의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먼저 ‘할도리’를 너무 감정적으로 이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댁이나 처가를 좋아해야만 도리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신앙에 동의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종교적인 이야기를 즐겁게 나눌 수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체어리티는 상대방에게 따뜻한 감정을 느끼는 것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체어리티는 실제 삶에서 선하고 올바른 것을 행하는 것과 깊이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불편해도 필요한 안부를 묻고, 아플 때 살피고, 부모로서 마땅히 받아야 할 존중을 드리고, 도움이 필요할 때 가능한 범위에서 돕고, 명절이나 중요한 가족 행사에서 해야 할 책임을 감당한다면 그것 역시 체어리티의 실제적인 모습이 될 수 있습니다.
오히려 ‘마음이내키지않는데하는선행은위선아닌가?’라는 생각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더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거듭남(regeneration)은 선한 감정이 완전히 생긴 다음 선을 행하는 과정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감정이 따라오지 않더라도 ‘이것이주님앞에서옳다’고 판단하여 행동하는 가운데 우리의 사랑 자체가 조금씩 변화합니다. 속에서는 ‘가기싫다’, ‘전화하기싫다’, ‘왜내가먼저해야하나’ 하는 마음이 올라오는데도 ‘그래도이것은내가해야할일이다’라고 판단하여 행한다면, 바로 앞에서 이야기했던 ‘합리성’(rationality)과 ‘자유’(freedom)가 작동하는 장면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자기 감정에 끌려가는 대신 무엇이 선한지를 보고 그것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참고 모든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 체어리티는 아닙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시댁이나 처가에서 ‘우리신앙을인정하라’, ‘우리예배나종교행위에참여하라’, ‘아이들에게도이것을가르치게하라’고 요구한다면 거절할 수 있습니다. 반복적으로 신앙을 조롱하거나 모욕한다면 ‘이런대화는더하지않겠습니다’라고 경계를 세울 수도 있습니다. 가족을 사랑하는 것과 그들의 신앙에 동조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앞서 요한이서를 살펴보면서 말씀드린 것처럼 ‘거짓과의연합을끊는것’과 ‘체어리티를끊는것’을 구별해야 합니다. ‘그신앙에는동의할수없습니다. 그러나부모님으로서제가해야할일은하겠습니다.’ 이 두 문장은 얼마든지 함께 성립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어려운 것은 바로 그다음입니다. 머리로는 ‘도리를해야한다’고 아는데 마음에서는 분노와 불쾌감과 억울함이 계속 올라오는 것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프로프리움’(proprium)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상대방에게 실제 잘못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모든 갈등을 ‘내가교만해서그렇다’고 자기 탓으로 돌릴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의 잘못이 분명하더라도 그 잘못을 붙잡고 ‘그러므로나는저사람에게선을행하지않아도된다’고 자신을 정당화하기 시작하면 상대방의 악이 어느 순간 내 안의 악을 정당화하는 재료가 됩니다. 그때부터 문제는 ‘그들이무엇을했는가?’만이 아니라 ‘그들의행동때문에지금내안에서무엇이자라고있는가?’가 됩니다.
바로 여기서 체어리티는 감정보다 깊어집니다. 상대방을 좋아하지 않아도 미워하지 않는 것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가까이 지내기 어렵더라도 필요한 선은 행할 수 있습니다. 신앙에는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사람으로서는 존중할 수 있습니다. 만나면 불편하더라도 일부러 모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관계를 어느 정도 제한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상대방의 불행을 바라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작은 차이처럼 보이지만 영적으로는 상당히 큰 차이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단지 ‘가족관계를유지했는가?’가 아니라 그 관계를 통하여 ‘내가어떤사랑의사람이되어가고있는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할도리를다한다’는 것을 ‘예전처럼친밀하게지내야한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가족관계에도 적절한 거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만남의 횟수를 줄이면서도 예의를 지킬 수 있고, 종교 이야기는 하지 않으면서 식사를 함께할 수 있으며, 중요한 일이 생겼을 때 도울 수도 있습니다. 전화 한 통, 병문안, 필요한 도움, 부모에 대한 기본적인 책임이 모두 가능합니다. ‘친밀함’과 ‘체어리티’는 반드시 같은 정도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어떤 관계에서는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선을 행하는 것이 오히려 더 지혜로운 체어리티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게잘안돼’라는 말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곧바로 신앙의 실패라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바로 그곳에서 거듭남의 싸움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정말 아무 갈등도 없는 사람에게 친절한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잘하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 신앙을 부정하거나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에게 ‘그래도내가해야할선은하겠습니다’라고 선택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주님께서 ‘너희원수를사랑하며너희를박해하는자를위하여기도하라’고 하신 말씀도 결국 감정적으로 원수를 좋아하라는 명령이라기보다, 상대의 악 때문에 나까지 악의 질서로 내려가지 말라는 말씀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더욱이 앞에서 살펴본 사울과 스데반을 생각하면 한 가지 중요한 태도가 더 생깁니다. 내가 상대방의 교리를 명백한 오류라고 판단하더라도 그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까지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의 사울 안에서 주님께서는 훗날의 바울을 보고 계실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나는정통이고저사람은이단이다’라고 확신하는 내 안에 사울의 종교적 프로프리움이 숨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리는 분별하되 사람의 영원한 상태는 주님께 남겨 두어야 합니다. 이것이 진리를 흐리지 않으면서도 체어리티를 잃지 않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도 조금 달라질 수 있습니다. ‘주님, 저사람들이잘못했으니변화시켜주십시오’만 기도하기보다 ‘주님, 제가거짓에는동조하지않으면서도사람에게해야할선은버리지않게해주십시오. 저들의잘못때문에제안에미움이지배적사랑(rulinglove)으로자리잡지않게해주십시오. 제가해야할것은하되할수없는것까지억지로떠맡지않게하시고, 어디까지사랑하고어디서경계를세워야하는지분별하게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상대방의 잘못을 없던 일로 만드는 기도가 아니라, 그 잘못 때문에 내 영혼까지 함께 흐트러지지 않도록 구하는 기도입니다.
어쩌면 이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기준은 ‘관계를얼마나많이유지했는가?’가 아닐 것입니다. ‘나는이관계안에서주님의사람으로행동했는가?’입니다. 때로는 찾아뵙는 것이 그 답일 수 있고, 때로는 거리를 두는 것이 답일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침묵해야 하고, 때로는 분명하게 ‘그것에는동의할수없습니다’라고 말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 상대방을 벌주기 위해 행동하지 않고, 선과 진리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 행동한다면 방향은 달라집니다.
그래서 ‘시댁이, 처가가이단이지만그래도나는내할도리는다하고싶은데그게잘안돼’라는 말은 이렇게 바꾸어 볼 수 있겠습니다. ‘나는그들의신앙에는동의할수없지만, 그것때문에내가사랑까지버리는사람이되고싶지는않습니다. 감정은아직따라오지않더라도주님앞에서내가해야할선은행하고싶습니다.’
저는 이 문장을 한 줄로 압축한다면 이렇게 하겠습니다. ‘체어리티는상대방의모든것을인정하는것이아니라, 인정할수없는것이있어도내가해야할선까지포기하지않는것입니다.’
그리고 앞의 요한이서 이야기와 연결하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거짓에는참여하지않되사람에게는선을행하는것, 경계는세우되미움으로절연하지않는것.’ 아마 바로 그 어려운 중간 지점에서 ‘선과진리의결합’이 실제 삶의 문제가 되는 것 같습니다.
‘시댁이, 처가가이단이니까연을끊어도돼. 요한이서에보면인사도하지말라고했잖아.’ 실제로 요한이서 1장 10-11절은 상당히 강하게 들립니다. ‘누구든지이교훈을가지지않고너희에게나아가거든그를집에들이지도말고인사도하지말라그에게인사하는자는그악한일에참여하는자임이라.’ 이 말씀만 떼어 놓으면 ‘잘못된교리를가진사람과는집안의관계까지끊어야한다’는 결론이 가능해 보입니다. 특히 가족이나 시댁, 혹은 처가를 ‘이단’이라고 판단한 경우에는 이 말씀이 절연을 정당화하는 매우 강력한 근거처럼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이서 전체의 문맥과 성경의 다른 말씀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렌즈’를 함께 놓고 보면 그렇게 단순하게 적용하기 어렵습니다.
먼저 요한이서가 경계하는 대상이 누구인지 보아야 합니다. 요한은 ‘미혹하는자가세상에많이나왔나니이는예수그리스도께서육체로오심을부인하는자라’(요이1:7)고 대상을 구체적으로 밝힙니다. 이어 ‘그리스도의교훈안에거하지아니하는자’(9절), 그리고 바로 다음에 ‘이교훈을가지지않고너희에게나아가거든’(10절)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의 직접적인 상황은 단순히 ‘나와교리가다른혈육,혈연,친척’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에 관한 거짓 가르침을 가지고 신앙공동체 안으로 들어와 그것을 전파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11절의 이유도 중요합니다. ‘그에게인사하는자는그악한일에참여하는자임이라.’ 핵심은 사람과 인간적인 접촉을 했다는 사실 자체보다 그의 ‘악한일’에 참여하고 그것을 지지하는 데 있습니다.
당시의 ‘집에들인다’는 표현도 오늘날 누군가를 집에 잠깐 방문하게 하는 것과 완전히 동일하게 읽기는 어렵습니다. 초기 교회는 가정집을 중심으로 모였고 순회 교사와 전도자들이 신자들의 집에서 숙식을 제공받으며 가르쳤습니다. 그런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은 단순한 개인적 친절을 넘어 그의 사역을 후원하고 그에게 활동 기반을 제공하는 의미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요한의 명령에는 ‘거짓교사를교회의교사로받아들이고그의활동을지원하지말라’는 매우 실제적인 목적이 들어 있습니다. 오늘날의 표현으로 바꾸면 ‘거짓가르침을전하는사람의사역을교회가공식적으로받아들이고후원하지말라’에 훨씬 가깝습니다.
특히 ‘인사도하지말라’는 말씀을 ‘그러므로그사람과인간관계를완전히끊어라’로 확대할 때는 성경 전체와 충돌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주님께서는 ‘너희원수를사랑하며너희를박해하는자를위하여기도하라’(마5:44)고 하셨습니다. 바울도 불신자와 모든 관계를 끊으라는 뜻으로 자신의 말을 오해하지 말라고 설명하면서 ‘그리하려면너희가세상밖으로나가야할것이라’고 했습니다(고전5:10). 더구나 부모와 가족을 공경하고 돌보아야 한다는 말씀들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이서 한 구절을 근거로 ‘이단으로판단되는사람에게는일반적인인간적사랑과가족으로서의모든책임까지중단해도된다’는 보편적 원칙을 만들기는 어렵습니다.
여기에서 ‘교제’와 ‘동조’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그의 교리를 인정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족으로 만나고 안부를 묻고 어려울 때 돕는다고 해서 그의 신학적 주장을 승인하는 것도 아닙니다. 반대로 그 사람의 가르침이 잘못되었다고 판단된다고 해서 그 사람 자체를 미워하거나 가족관계에서 제거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거짓에참여하지않는것’과 ‘그사람에게체어리티(charity)를행하지않는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구별이 더욱 중요해집니다. 체어리티는 상대방이 믿는 모든 것을 옳다고 인정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상대방 안의 선을 사랑하고 그의 참된 유익, 궁극적으로는 영원한 유익을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잘못된 가르침에는 ‘그것은진리가아니다’라고 분명히 말하면서도 그 사람에게 인간적인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교리가틀렸으므로그사람에게는사랑을베풀필요가없다’고 한다면 진리를 지키려다가 체어리티를 잃는 역설이 생길 수 있습니다.
더구나 ‘이단’이라는 판단 자체에도 주의가 필요합니다. 앞에서 사울과 스데반을 살펴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울은 자신이 하나님 편에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스데반과 그리스도인들이 위험한 잘못에 빠져 있다고 생각했고, 그들을 제거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다메섹 길에서 주님께서는 ‘네가어찌하여나를박해하느냐’(행9:4)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모든 이단 판정이 잘못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거짓 교리는 실제로 존재하며 분별해야 합니다. 그러나 ‘나는진리를가지고있고저사람은이단이다’라는 확신이 그 사람에게 무엇을 해도 된다는 허가증이 되는 순간, 사울의 이야기는 우리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됩니다.
특히 가족관계에서는 더욱 신중해야 합니다. ‘저사람의신앙을받아들일수없다’와 ‘그러므로저사람과가족으로서의관계도끊어야한다’ 사이에는 상당히 큰 거리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시댁의 종교적 가르침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 집의 종교활동에 참여하지 않을 수 있고, 자녀에게 그 교리를 가르치지 못하도록 경계를 세울 수도 있으며, 반복적인 개종 압박이나 모욕이 있다면 만남의 방식과 빈도를 조정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경계’입니다. 그러나 단지 ‘이단’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부모·자녀·형제의 인간적 관계 자체를 끊는 것을 요한이서 10절이 명령한다고 말한다면, 본문의 적용 범위를 상당히 넘어설 가능성이 큽니다.
물론 반대편의 극단도 피해야 합니다. ‘가족이니까무조건만나야한다’는 것도 성경적 원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실제 폭력이나 학대, 지속적인 모욕, 강압적인 종교행위, 자녀에게 심각한 해를 끼치는 행동이 있다면 적절한 거리를 두는 것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상당히 강한 관계 제한도 정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유는 ‘저들은이단이니까요한이서가절연하라고했다’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발생하는 악과 해로부터 자신과 가족을 보호하고 그 악에 참여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해야 합니다. ‘교리적불일치’와 ‘실제적인해악’을 구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더 깊이 들어가면 이 문제에는 ‘프로프리움’(proprium)의 위험도 있습니다. 종교적인 프로프리움은 ‘내가싫다’를 ‘하나님이싫어하신다’로, ‘나는만나고싶지않다’를 ‘성경이만나지말라고한다’로 바꾸어 표현할 수 있습니다. 물론 실제로 신앙 때문에 거리를 두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정말진리를지키기위해이관계를제한하는가, 아니면내불편함과분노와상처를하나님의명령으로정당화하고있는가?’ 이것은 상대방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적용해야 할 분별입니다.
그리고 바로 앞에서 살펴본 사울의 이야기가 여기서 다시 의미를 갖습니다. ‘사람들이너희를출교할뿐아니라때가이르면무릇너희를죽이는자가생각하기를이것이하나님을섬기는일이라하리라’(요16:2). 종교적 확신은 때로 인간에게 가장 강력한 정당화 장치가 됩니다. ‘하나님을위해서’라는 말이 붙으면 평소에는 하지 못할 냉혹한 행동까지 의로운 행동처럼 느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행동이 정말 주님의 뜻인지 판단할 때에는 ‘내가성경구절하나를가지고있는가?’뿐 아니라 그 해석이 말씀 전체의 선과 진리, 특히 주님의 사랑과 체어리티의 질서에 합하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요한이서의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일까요? 오히려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사랑이라는이름으로거짓까지받아들이지말라’는 경고입니다. 사람은 사랑하되 거짓을 후원하지 말고, 관계는 유지하더라도 악한 일에는 참여하지 말며, 체어리티를 행하되 진리를 희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과 ‘진리’가 결합되어야 한다는 스베덴보리의 원리와도 잘 맞습니다. 사랑만을 내세워 모든 거짓을 용인하는 것도 잘못이고, 진리를 내세워 사람을 미워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따라서 ‘시댁이, 처가가이단이니까연을끊어도돼. 요한이서에인사도하지말라고했잖아’라는 말에는 이렇게 답할 수 있겠습니다. ‘요한이서는거짓가르침을전하는사람의사역을받아들이고후원하여그의악한일에참여하지말라고경고하는말씀이지, 교리가다르다고판단되는가족과모든인간적·가족적관계를끊으라는일반적인절연명령으로읽기는어렵습니다.’
한 문장으로 더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요한은거짓과의연합을끊으라고했지, 체어리티까지끊으라고한것은아닙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렌즈’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진리를지킨다는이유로사랑을버리지말고, 사랑한다는이유로거짓을받아들이지도않는것, 바로그둘을함께지키는것이선과진리의결합입니다.’
사울(사도 바울의 회심 전 이름)은 하나님을 미워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일을 했습니다. 훗날 바울은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며 ‘나도나사렛예수의이름을대적하여많은일을행하여야될줄스스로생각하고’ 있었다고 고백합니다(행26:9). 이것은 대단히 무서운 말씀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거역하면서도 자신이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울에게는 ‘열심’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과거를 ‘열심으로는교회를박해하고’라고 표현합니다(빌3:6). 따라서 그의 문제는 신앙적 열심이 부족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열심이 너무 강했습니다. 문제는 그 열심이 참된 진리에 의해 인도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던 율법과 종교적 체계를 하나님과 동일시했고, 그것을 위협한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제거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그의 ‘하나님사랑’에는 진리에 대한 중대한 오류가 섞여 있었습니다.
바로 여기서 앞서 이야기한 ‘나는하나님의자녀인데왜하나님은내편이아니실때가있지?’라는 질문과 놀랍게 연결됩니다. 스데반이 죽임당하던 그 순간 사울에게 물었다고 상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은누구편이십니까?’ 사울은 아마 자신 있게 ‘우리편’이라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편이고 스데반은 위험한 이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하늘이 열린 것을 본 사람은 사울이 아니라 스데반이었습니다. 스데반은 ‘보라하늘이열리고인자가하나님우편에서신것을보노라’(행7:56)고 말합니다. 사울이 ‘하나님의편’이라고 확신했던 바로 그 자리에서, 주님께서는 사울이 박해하는 사람과 함께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메섹 길에서 이 사실이 완전히 뒤집힙니다. 사울에게 나타나신 주님께서는 ‘사울아사울아네가어찌하여나를박해하느냐’고 하십니다(행9:4). 사울의 입장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을왜박해하느냐’가 아니라 ‘왜 ‘나’를 박해하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사울이 하나님을 위해 제거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 안에서 오히려 주님께서 박해받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것만큼 ‘종교적확신’과 ‘실제진리’가 얼마나 멀어질 수 있는지를 강렬하게 보여 주는 장면도 드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진실하게믿는다’는 것과 ‘진리를믿는다’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사울은 자신의 믿음에 진지했습니다. 그러나 진지함이 그 믿음의 내용을 자동으로 진리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사람은 거짓을 진심으로 믿을 수도 있습니다. 더구나 그 거짓에 종교적 열심이 결합하면 매우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나는하나님을사랑한다’는 확신 때문에 오히려 자신의 행동을 의심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울은 그때 이미 악한 사람이었고 지옥적인 ‘지배적사랑’(ruling love)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단정해야 할까요? 바로 여기에서도 조심해야 합니다. 이후의 바울을 보면 그의 내면에는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틀렸다는 사실이 드러났을 때 끝까지 자기 입장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난 뒤 자신의 세계 전체가 무너지는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자기가 평생 옳다고 믿었던 것을 내려놓고 자신이 박해하던 주님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차이입니다. ‘거짓을진리라고잘못믿었던사람’과 ‘거짓임을알면서도자기사랑때문에끝까지붙드는사람’은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울의 이야기는 인간의 ‘합리성’(rationality), 곧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를 이해하고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왜 중요한지도 보여 줍니다. 참된 신앙은 ‘나는확신한다’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혹시내가하나님을위한다고하면서실제로는내생각과내종교적체계를지키고있는것은아닌가?’라고 자신을 진리 앞에 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사울의 회심은 단순히 무신론자가 하나님을 믿게 된 사건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을 열렬히 믿던 사람이 ‘자기가믿고있던하나님에대한이해’가 무너지고 참된 주님을 새롭게 알아가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사울의 회심은 종교인에게 훨씬 더 무서운 회심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프로프리움’(proprium)의 문제도 깊이 숨어 있습니다. 종교적인 프로프리움은 세속적인 프로프리움보다 오히려 알아차리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내가옳다’가 ‘하나님이옳으시다’와 결합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내 생각에 반대하는 사람이 곧 하나님께 반대하는 사람처럼 보이고, 내 교리를 비판하는 사람이 진리를 공격하는 사람처럼 보이며, 심지어 상대방을 공격하면서도 그것을 ‘하나님을위한일’이라고 느낄 수 있습니다. 사울이 바로 그 지점까지 갔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너희를출교할뿐아니라때가이르면무릇너희를죽이는자가생각하기를이것이하나님을섬기는일이라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요16:2)은 그래서 섬뜩할 정도로 정확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부정하면서만 악을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위하여’라는 이름으로도 악을 행할 수 있습니다. 종교적 언어가 붙었다고 해서 그 행위가 선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그것이 주님의 선과 진리에 합하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사울의 이야기가 두려운 이야기로만 끝나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사울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네가어떻게감히내사람들을죽이느냐’며 즉시 심판하여 제거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가 보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을 보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사울은 눈이 멀었습니다. 이것은 문자적으로 실제 일어난 사건이면서 동시에 너무나 강렬한 영적 그림입니다. ‘나는누구보다잘본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비로소 ‘나는보지못하고있었다’는 자리로 내려갑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진짜 눈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거듭남(regeneration)의 중요한 한 모습일 것입니다. 거듭남은 언제나 ‘나쁜사람이착한사람이되는것’처럼 단순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나는하나님을잘알고있고, 나는하나님편이며, 나는옳은일을하고있다’고 확신하던 사람이 주님 앞에서 ‘내가틀릴수도있었습니다’라고 무너지는 과정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을 버리고 바울이 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하면서 붙들고 있던 거짓을 버림으로써 비로소 자신이 사랑한다고 말했던 하나님을 참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울의 이야기를 오늘 우리에게 적용할 때 가장 위험한 방식은 ‘저런사람이바로사울같은사람이다’라고 다른 사람을 지목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순간 우리는 다시 사울의 자리에 설 수도 있습니다. 이 말씀의 칼날은 먼저 나를 향해야 합니다. ‘나는주님을사랑한다고하면서내생각을사랑하고있지는않은가? 나는진리를지키는것인가, 아니면내가옳다는것을지키는것인가? 상대방의오류를분별하는것과상대방을미워하는것을혼동하고있지는않은가? 주님의이름으로내분노와적개심을정당화하고있지는않은가?’
이것은 ‘스베덴보리의렌즈’가 사람을 바라볼 때도 상당히 중요한 원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설교나 신학에서 명백한 오류를 발견했다면 오류는 오류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곧바로 ‘그러므로저사람의내면도악하다’로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사울조차 스데반의 죽음에 찬성하고 교회를 박해하던 바로 그 시절, 훗날 바울이 될 가능성을 주님께서는 이미 보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당시의 사울을 보지만 주님께서는 그 사람의 내면 깊은 곳과 앞으로 자유롭게 진리를 받아들일 가능성까지 보십니다.
결국 사울의 이야기는 ‘열심이있느냐?’보다 더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그열심은진리에의해인도되고있는가?’ 그리고 그보다 더 깊은 질문도 던집니다. ‘내가틀렸다는사실을주님께서보여주실때나는바뀔수있는가?’ 어쩌면 사울과 완고한 종교인을 가르는 결정적인 차이는 처음부터 오류가 없었느냐가 아니라, 진리가 찾아왔을 때 자신의 오류를 내려놓을 수 있었느냐에 있을 것입니다.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사울의가장무서운오류는하나님을사랑하지않았다는데있지않고, 하나님을사랑한다고믿으면서하나님이사랑하시는사람을박해했다는데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회심이 주는 희망까지 함께 붙인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주님께서는잘못된열심속에있던사울조차버리지않으시고, 그가자기확신보다진리를사랑하는사람이되도록눈을감기시고다시뜨게하셨습니다.’
‘나는하나님의자녀인데왜하나님은내편이아니실때가있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상당히 절실하게 생기는 질문입니다. 열심히 기도했는데 일이 내가 바라던 방향과 정반대로 흘러갈 때, 억울한 일을 당했는데도 상대방이 잘되고 내가 손해를 볼 때, 분명 좋은 뜻으로 시작했다고 생각했는데 길이 막힐 때 이런 생각이 듭니다. ‘나는하나님의자녀인데하나님은왜저사람을막아주시지않지? 왜내기도를들어주시지않지? 하나님이라면적어도내편은되어주셔야하는것아닌가?’ 그러나 ‘스베덴보리의렌즈’로 보면 여기에는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아주 쉽게 혼동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이나를사랑하신다’는 것과 ‘하나님이언제나내가원하는쪽을지지하신다’는 것은 전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여호수아 5장에는 이 문제를 놀랍도록 선명하게 보여 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여리고를 앞둔 여호수아가 칼을 든 존재를 만나 ‘너는우리를위하느냐우리의적들을위하느냐’고 묻습니다. 쉽게 말하면 ‘당신은우리편입니까, 저쪽편입니까?’라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뜻밖에도 ‘아니라나는여호와의군대대장으로지금왔느니라’입니다(수5:13-14). 여호수아는 ‘하나님이우리편인가?’를 물었지만, 질문의 방향 자체가 바뀝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하나님이내편인가?’가 아니라 ‘내가하나님의질서안에서있는가?’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어느 편에 서느냐에 따라 그쪽에 합류하시는 분이 아니라, 선과 진리 그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자녀’라는 말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 소원을 특별히 우선 처리해 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버지가 자녀를 정말 사랑한다면 자녀가 원하는 것을 무조건 들어주지 않는 것과 비슷합니다. 어린아이는 사탕을 더 달라고 하고 위험한 곳에도 가고 싶어 하지만, 부모는 때로 ‘안된다’고 합니다. 아이의 눈에는 그 순간 부모가 자기 편이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거절이 사랑일 수 있습니다. 주님의 섭리 역시 우리가 당장 원하는 행복보다 훨씬 더 깊은 것을 바라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주님의 섭리가 궁극적으로 향하는 것은 사람이 세상에서 원하는 모든 것을 얻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유 안에서 영원한 생명에 적합한 사람으로 거듭나도록 이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간절히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주님께서내편이아니시다’고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실제로 나에게 선한 것인지 나는 완전히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우리는 자신의 욕망을 ‘하나님의뜻’이라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이일이잘되어야하나님의영광이지’, ‘저사람이잘못했으니하나님께서반드시저사람을꺾으셔야해’, ‘나는옳으니까하나님께서내억울함을풀어주셔야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진실한 정의감과 함께 자기 사랑, 인정받고 싶은 욕망, 상대방이 패배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섞여 있을 수도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프로프리움’(proprium)은 신앙의 언어까지 사용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때때로 내가 원하는 ‘승리’를 주시는 것보다 내 안에 숨어 있는 것을 보게 하시는 쪽을 택하실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반드시 ‘하나님께서이사건을일으켜나를훈련시키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섭리론에서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악을 허용하시는 것을 구별해야 합니다. 인간의 자유 때문에 주님께서 허용하시는 고통과 악이 있으며, 주님께서 그 악 자체를 원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일단 허용된 상황 속에서도 주님은 끊임없이 사람을 선으로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어떤 실패나 고난을 당했다고 해서 ‘하나님이일부러이것을보내셨다’고 단정할 필요도 없고, 반대로 ‘하나님이나를버리셨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주님의 섭리는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방향으로 쉬지 않고 역사합니다.
여기서 ‘내편’이라는 말의 의미도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만일 ‘내편’이라는 것이 ‘내가옳든그르든나를지지해주는것’을 뜻한다면, 주님은 결코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편이 아니십니다. 내가 거짓을 말하면 상대방이 아무리 나쁜 사람이어도 주님께서 내 거짓을 진리라고 해주시지 않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미워하면서 ‘저사람은악인이니까하나님도내미움을인정하시겠지’라고 생각해도 주님께서는 미움을 선으로 바꾸어 주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사람의 편을 들어 진리를 바꾸시는 분이 아니라, 사람을 진리의 편으로 이끄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내편’이라는 말을 ‘나의영원한선을바라시고끝까지나를구원으로이끄시는분’이라는 뜻으로 사용한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주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철저하게 우리 편이십니다. 내가 잘못된 길을 선택할 때조차 즉시 버리지 않으시고, 나의 자유와 ‘합리성’, 곧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를 이해하고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보존하시면서 계속 돌아올 길을 마련하십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는 것보다 내가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때로는 바로 그것 때문에 주님이 내 편이 아닌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생각하면 이것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아이 둘이 싸우는데 한 아이가 부모에게 ‘엄마는누구편이야?’라고 묻는다면 좋은 부모는 무조건 자기 아이의 행동을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자기 아이가 잘못했다면 오히려 자기 아이를 바로잡습니다. 그렇다고 그 아이를 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너를사랑하기때문에네잘못까지사랑할수는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이것보다 훨씬 완전합니다. 주님은 ‘나’를 사랑하시지만 ‘내악’을 사랑하지 않으십니다. 나를 구원하기 원하시기 때문에 오히려 내가 붙들고 있는 악과 거짓에는 반대하십니다. 그래서 때로는 주님이 ‘나를반대하시는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사실은 주님께서 ‘내안의나를파괴하는것’을 반대하고 계시는 순간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기도의 의미도 바꾸어 놓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을내편으로끌어오는일’이 아닙니다. 내가 세운 계획을 하나님께 설명하고 승인을 받아내는 것도 아닙니다. 기도는 점점 내가 주님의 뜻과 질서에 맞추어지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겟세마네에서 보여 주신 기도의 질서는 깊습니다. ‘내원대로마시옵고아버지의원대로하옵소서’라는 고백은 자신의 뜻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자신의 뜻을 아버지의 뜻 아래 두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은 ‘하나님, 제편이되어주십시오’에서 조금씩 ‘주님, 제가주님의편에서게해주십시오’로 변화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앞에서 나눈 여러 질문과도 하나로 이어집니다. ‘나는하나님의자녀니까하나님이알아서하시겠지’, ‘나는전도를많이했으니구원받을거야’, ‘나는주님께헌신했으니큰상을받을거야’, ‘나는죽으면곧주님품에안기겠지’라는 말들에는 공통적으로 ‘나’를 중심으로 하나님을 바라볼 위험이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됨도, 전도도, 헌신도, 천국의 소망도 모두 귀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의 중심이 ‘주님께서나에게무엇을해주실것인가?’에 머물면 신앙의 중심에 여전히 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거듭남’(regeneration)은 그 중심이 서서히 바뀌어 가는 과정입니다. ‘주님께서내뜻을이루어주시는가?’에서 ‘나는주님의뜻을사랑하게되었는가?’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하나님의자녀인데왜하나님은내편이아니실때가있지?’라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언제나나를사랑하시지만, 언제나내욕망의편을드시는것은아닙니다. 오히려나를사랑하시기때문에내안의거짓과악에는반대하시며, 내가선과진리의편에서도록이끄십니다.’
조금 더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주님은내가옳기때문에내편이되시는분이아니라, 나를사랑하시기때문에내가옳은것의편에서도록이끄시는분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질문에서 가장 중요한 문장을 하나만 남긴다면 이것을 택하겠습니다. ‘신앙이깊어진다는것은하나님을내편으로만드는것이아니라, 내가점점하나님의편이되어가는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자녀’라는 말을 특권에서 거듭남으로, 보호받을 권리에서 아버지를 닮아 가는 삶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나는예수믿으니까죽은뒤눈을뜨면곧바로주님품에안겨있겠지.’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에게는 아주 자연스럽고 따뜻한 기대입니다. 그리고 이 말에는 분명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죽음은 주님에게서 떨어져 미지의 세계로 내던져지는 사건이 아니며, 주님의 섭리와 보호는 죽음의 순간에도 중단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묘사하는 사후의 깨어남을 따라가 보면, 이 표현은 조금 다듬을 필요가 있습니다. ‘죽자마자눈을뜨면예수님께서눈앞에서계시고, 내가그분의품에문자그대로안긴다’고 단정하기보다는, ‘사후의첫순간부터나는주님의보호와인도안에있다’고 말하는 편이 훨씬 정확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천국과지옥’(Heaven and Hell, 1758)에서 묘사하는 죽음 직후의 장면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육체의 기능이 멈춘 뒤에도 사람의 영은 살아 있으며, 천사들이 그 사람 곁에서 깨어남을 돕습니다. 처음에는 천적 천사들이 가까이하며 아주 평화로운 상태 속에서 그 사람을 보호하고, 이후 그의 상태가 변화함에 따라 다른 천사들과 영들이 함께합니다. 다시 말해 죽음 직후의 사람은 홀로 버려지지 않습니다. 자연계의 육체를 벗는 그 가장 낯선 순간부터 천국의 질서 안에서 세심하게 보호받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눈을뜨면주님품에있다’는 표현은 영적으로 매우 아름다운 진실을 담고 있습니다. 천사들이 사람을 보호한다고 해도 그 보호의 근원은 천사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구별이 하나 있습니다. ‘주님의품에있다’는 것과 ‘나는곧바로천국의최종거처에들어간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에는 ‘영들의세계’(world of spirits)가 있습니다. 이것은 천국과 지옥 사이에 있는 중간 상태이며, 사람이 자연계에서 형성한 자신의 진정한 내면이 드러나는 곳입니다. 죽었다고 해서 갑자기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억도 인격도 사랑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처음에는 자연계에서의 외적 모습과 상당히 비슷하지만, 점차 외면이 벗겨지고 그 사람의 실제 ‘지배적사랑’(ruling love)이 나타납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나는그리스도인이니까눈뜨면주님품에있겠지’라는 생각이 자칫 위험한 확신으로 변할 수도 있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나는전도를많이했으니구원받을거야’, ‘나는주님께헌신적으로살았으니큰상을받을거야’와 같은 원리입니다. 교회에 오래 다녔는지, 목회했는지, 성경을 많이 읽었는지, 주님의 이름을 얼마나 많이 불렀는지가 사후에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그 사람의 최종적 영적 상태를 대신하지는 못합니다. 결국 드러나는 것은 ‘나는실제로무엇을사랑하며살았는가?’입니다.
그래서 사후세계에는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자연계에서는 자신을 매우 신앙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도 외적인 신앙의 껍질이 벗겨진 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자신의 지배적 사랑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세상에서 별로 주목받지 못했고 화려한 신앙 경력도 없었던 사람이 실제로는 양심에 따라 살고 악을 죄로 여겨 피하며 이웃에게 선을 행하기를 사랑했던 사람으로 드러날 수도 있습니다. 사후에는 ‘나는어떤사람이라고생각했는가?’보다 ‘나는실제로어떤사람이되어있었는가?’가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사후에 주님을 직접 만나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은 천국의 중심이며 천국 전체를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천사들은 모두 주님을 바라보고, 천국의 모든 선과 진리와 생명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따라서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은 단순히 아름다운 장소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질서를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여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께가까이간다’는 것도 공간적으로 몇 미터 앞에 계신 주님에게 가까이 가는 것보다 ‘내사랑이주님의사랑과얼마나조화를이루는가?’라는 상태의 문제입니다.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역설이 생깁니다. 주님께서는 사후에 갑자기 우리를 사랑하기 시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이미 우리를 붙들고 계십니다. 죽은 뒤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자연계에서 만들어 놓았던 수많은 외적인 것들이 벗겨지면서 ‘내가주님의사랑을얼마나받아들일수있는사람으로되어있는가?’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에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문제는 그 사랑을 받아들일 우리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주님품’이라는 표현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으면 더욱 깊어집니다. 주님의 품은 단순히 사후에 한 번 경험하는 포옹이라기보다 주님의 사랑과 보호와 질서 안에 거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것은 죽은 뒤에 처음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악을 죄로 여겨 피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유용한일’(use)을 기쁘게 행할 때 이미 주님의 품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거듭남’(regeneration)이란 어쩌면 사후에 주님 품에 안길 준비라기보다, 지금부터 그 품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되어 가는 과정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죽음의 순간을 두려워해야 할까요? 스베덴보리의 사후 묘사를 받아들인다면 오히려 상당한 위로가 있습니다. 죽음은 의식이 영원히 꺼지는 순간도 아니고, 영혼이 홀로 어둠 속으로 떨어지는 순간도 아닙니다. 자연계의 몸을 벗고 영적 감각이 열리면서 이미 자신을 둘러싸고 있었던 영계를 의식하기 시작하는 전환입니다. 그리고 그 깨어남 자체가 주님의 질서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죽을때내가혼자이면어떡하지?’라는 두려움에 대해서는 ‘혼자가아닙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만 ‘나는예수믿었으니눈뜨는순간모든것이끝났고천국행이확정되어있겠지’라고 생각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사후의 깨어남은 끝이라기보다 진실이 드러나는 시작입니다. 그곳에서는 교단도 직분도 평판도 종교적 이력도 우리의 내면을 가려 주지 못합니다. 내가 사랑한다고 말했던 주님을 실제로 사랑했는지, 내가 믿는다고 고백했던 진리를 실제 삶에서 받아들였는지, 체어리티(charity)가 내 삶 속에서 실제적인 선으로 나타났는지가 점점 분명해집니다.
그래서 ‘나는사후눈뜨면주님품에안겨있겠지?’라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하고 싶습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의순간에도주님의보호밖으로떨어지는것은아닙니다. 그러나주님의품은그리스도인이라는이름만으로자동배정되는자리가아니라, 우리가평생받아들인주님의사랑과선이결국우리자신의사랑이되어드러나는상태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죽어서눈을뜬다음주님품에안기는것만기다릴필요는없습니다.’ 지금 악을 하나씩 내려놓고, 진리를 받아들이고, 사람을 사랑하며, 자신의 자리에서 선한 ‘유용한일’을 행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주님의 품 안에서 살아가기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후에 전혀 낯선 주님을 처음 만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부터 사랑하고 따르던 주님을 더 분명한 세계에서 계속 따라가는 것입니다.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죽음뒤에중요한것은주님께서나를받아주실것인가가아니라, 언제나나를받아들이고계셨던주님의사랑을내가어떤사람으로살아가며받아들였는가입니다.’
‘나는주님께헌신적인삶을살았으니천국에서큰상을받을거야.’ 이 말은 ‘나는전도를많이했으니구원받을거야’보다 한 단계 더 미묘한 문제를 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 자체가 실제로 ‘상’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늘에서너희의상이큼이라’(마5:12)고 하셨고, ‘각사람이행한대로갚으리라’(마16:27)고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상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큰상’이 무엇이며, 내가 그것을 어떤 마음으로 기대하느냐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가장 먼저 구별해야 할 것은 ‘상’과 ‘공로’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여 충성스럽게 살고 이웃에게 선을 행한 삶에는 분명히 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주님께 무엇인가를 해드렸기 때문에 주님께서 그 대가를 지급하시는 방식의 상이 아닙니다. ‘나는평생목회했고, 이것도포기했고, 저것도희생했으며, 많은사람을섬겼으니다른사람보다더큰천국의몫을받아야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헌신은 어느새 주님과의 거래가 될 수 있습니다. 선행의 중심에 주님이 아니라 ‘나의공로’가 들어서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마태복음 20장의 포도원 품꾼 비유는 상당히 충격적입니다. 아침 일찍부터 일한 사람과 늦게 들어와 한 시간만 일한 사람이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받습니다. 먼저 온 사람들은 불평합니다. ‘나중온이사람들은한시간밖에일하지아니하였거늘그들을종일수고하며더위를견딘우리와같게하였나이다’(마20:12). 그들의 계산은 인간적으로는 충분히 이해됩니다. ‘나는더오래일했으므로더받아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계산법이 천국을 세상 임금체계처럼 바라보게 만듭니다. 주님과의 관계까지 ‘내가이만큼했으니주님도이만큼주셔야한다’는 방식으로 바꾸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천국에서 모든 사람의 상태가 완전히 똑같다는 뜻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에는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상태와 기능, 그리고 행복의 정도가 있습니다. 사람마다 자연계에서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인 정도가 다르고, 거듭남(regeneration)의 과정에서 형성된 사랑과 지혜의 그릇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국에서 ‘더큰사람’은 세상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더 높은 자리에 앉아 더 많은 특권을 누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과 이웃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더 기쁘게 섬길 수 있는 사람입니다. 천국의 위대함은 지배받는 사람의 수가 아니라 섬길 수 있는 사랑의 크기와 연결됩니다.
그래서 ‘큰상’의 의미 자체가 달라집니다. 천국의 상은 사랑과 선행 바깥에 별도로 붙는 보너스가 아닙니다. 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선을 행하는 것 자체가 기쁨이 됩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이웃에게 유익을 주는 것이 행복이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는 것이 기쁨입니다. 결국 주님께서 주시는 상은 ‘내가선을행했으니그대가로무엇을받는다’기보다, 주님께서 내 안에 형성하신 선한 사랑이 천국에서 아무 방해 없이 펼쳐지며 그 사랑 자체의 기쁨을 누리는 데 더 가깝습니다.
여기서 아주 흥미로운 역설이 생깁니다. 정말로 주님께 헌신한 사람일수록 ‘내가주님을위해이렇게많이했다’는 생각은 오히려 약해질 수 있습니다. 자신이 행한 선의 근원이 주님에게서 왔음을 점점 더 알기 때문입니다. ‘내가주님을위해평생희생했다’기보다 ‘주님께서평생나를붙드시고나를사용해주셨다’고 보게 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이 수십 년을 헌신한 사람이라도 한 사람은 그것을 자기 공로의 장부에 기록하고, 다른 사람은 그것을 주님께 받은 은혜로 기억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차이가 ‘프로프리움’(proprium)의 문제입니다.
주님께서 ‘이와같이너희도명령받은것을다행한후에이르기를우리는무익한종이라우리가하여야할일을한것뿐이라할지니라’(눅17:10)고 말씀하신 것도 이런 관점에서 깊이 읽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아무 가치도 없다는 자기비하를 요구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선을 행하고 난 뒤 그것을 자기 공로로 소유하지 말라는 말씀에 가깝습니다. ‘내가이렇게했으니받을권리가있다’가 아니라 ‘이일을할수있었던것자체가주님께받은은혜였다’는 태도입니다.
그렇다면 ‘각사람이행한대로갚으리라’는 말씀과 모순되지 않을까요? 오히려 정확하게 연결됩니다. 우리의 행위는 내면의 사랑이 현실에서 형태를 취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단순히 선행 횟수를 세시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 속에서 어떤 사랑이 형성되었는지를 보십니다. 평생 헌신적인 일을 많이 했더라도 그 중심에 명예욕과 지배욕, 그리고 자기 의가 있었다면 외적 헌신과 내적 상태가 다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세상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평범한 사람이 가족을 돌보고 자신의 직업에 정직하며 이웃에게 필요한 선을 행하면서 주님 앞에서 깊은 거듭남을 이루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큰상’과 앞에서 살펴본 ‘지배적사랑’(ruling love)은 서로 연결됩니다. 사람이 영계에 가지고 가는 것은 ‘나는몇년목회했다’, ‘몇명을전도했다’, ‘얼마를헌금했다’, ‘얼마나많은것을포기했다’는 공적 목록이 아닙니다. 그런 삶을 살아가는 동안 주님께서 그 사람 안에 형성하신 사랑을 가지고 갑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성격과 깊이에 따라 천국에서 자신에게 가장 알맞은 공동체와 ‘유용한일’(use)을 발견하고, 거기에서 자신의 사랑과 상응하는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실제로 사람마다 천국의 기쁨을 받아들이는 정도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질문에는 매우 섬세한 대답이 필요합니다. ‘주님께헌신적인삶을살았으니큰상이있다’는 말 자체를 무조건 틀렸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성경도 상을 말합니다. 그러나 ‘내가이만큼헌신했으니남보다더큰대우를받을자격이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미 천국의 상을 세상의 보상체계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참된 천국의 상은 다른 사람보다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이 사랑하고 더 자유롭게 선을 행하며 더 큰 기쁨으로 주님의 ‘유용한일’에 참여할 수 있는 상태라고 보는 편이 스베덴보리의 천국관에 훨씬 가깝습니다.
어쩌면 천국의 상에는 이런 놀라운 역설이 있습니다. ‘상을받기위해선을행하는사람은아직상을자기것으로바라보지만, 선자체를사랑하여행하는사람은이미그선안에서상을맛보기시작합니다.’ 천국에 가서 갑자기 상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가운데 천국의 기쁨이 이미 사람 안에서 형성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주님께헌신적인삶을살았으니큰상을받을거야’라는 말은 이렇게 바꾸어 보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평생나를사용해주셨다면그것자체가은혜입니다. 내가행한선가운데참으로선한것은주님에게서온것이며, 내가바라는상은남보다높은자리가아니라주님을더욱사랑하고더욱유용하게섬길수있는기쁨입니다.’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천국의큰상은내가주님께많이해드린대가가아니라, 주님께서내안에더큰사랑과더큰유용함의기쁨을형성하신것입니다.’
그리고 앞선 글들과 함께 놓으면 하나의 흐름이 보입니다. ‘부자는재산때문에구원받거나멸망하지않습니다. 전도자는전도실적때문에구원받지않습니다. 헌신한사람도헌신의공로때문에큰상을받는것이아닙니다.’ 결국 남는 질문은 하나입니다. ‘그 모든 것을 하면서 내 안에 어떤 ‘지배적사랑’(ruling love)이 형성되었는가?’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외적인 종교적 성취보다 더 깊이 들여다보게 하는 지점입니다.
‘나는하나님의자녀니까하나님이알아서하시겠지.’ 얼핏 들으면 매우 믿음 좋은 말처럼 들립니다. 실제로 이 말 안에는 귀한 진리도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과 미래가 궁극적으로 주님 손에 있으며, 모든 것을 자신의 힘으로 통제하려 하지 않고 주님의 섭리를 신뢰하는 것은 신앙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렌즈’로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이 말은 전혀 다른 두 방향으로 갈라질 수 있습니다. 하나는 참된 신뢰이고, 다른 하나는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책임을 주님께 떠넘기는 ‘영적방임’입니다.
주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나는아무것도하지않아도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섭리론에서 매우 중요한 원리 가운데 하나는 사람이 ‘자기힘으로하는것처럼’ 생각하고 선택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 능력과 선의 근원은 주님에게서 오지만, 사람에게는 마치 그것이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처럼 느껴지는 자유(freedom)와 합리성(rationality), 그러니까 ‘무엇이옳은지를이해하고판단할수있는능력’인 합리성과 ‘그렇게 이해한 것을 스스로 선택하여 행할 수 있는 능력’인 자유가 주어져 있습니다. 바로 그 자유 안에서 악을 거절하고 선을 선택할 때 주님께서 사람 안에서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하신다’와 ‘나는아무것도하지않는다’는 같은 말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경제적으로 어려워졌는데 ‘나는하나님의자녀니까하나님께서알아서먹여주시겠지’ 하면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지 않는다면 그것을 곧 믿음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건강에 문제가 있는데 필요한 치료와 생활관리는 하지 않으면서 ‘주님께맡겼다’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가 자녀의 문제를 발견하고도 ‘하나님께서알아서키우시겠지’ 하며 부모로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섭리를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맡겨진 ‘유용한일’(use), 곧 자신의 ‘쓰임새’를 방기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섭리는 인간의 책임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역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책임 있는 선택과 행동을 섭리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영적 문제에서는 이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나는예수믿고하나님의자녀가되었으니까결국천국에는가겠지’라는 생각이 악을 살펴보고 회개하며 거듭나는 삶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자녀’라는 신분을 일종의 영적 안전보장처럼 생각한다면 앞서 살펴본 ‘영접기도만하면구원받는가?’라는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입으로 주님을 영접했다고 고백하거나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그 고백이 실제 삶에서 주님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도 ‘나더러주여주여하는자마다다천국에들어갈것이아니요’(마7:2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거듭남’(regeneration)은 그래서 매우 역동적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강제로 천국 사람으로 만들지 않으십니다. 사람에게 진리를 보여 주시고 선을 행할 능력을 주시며 끊임없이 이끄시지만, 사람은 자신의 자유 안에서 그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내가 거짓말하려는 마음을 발견했다면 ‘주님께서언젠가고쳐주시겠지’라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죄임을 인정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면서 실제로 거짓말하지 않으려고 싸워야 합니다. 미움과 탐욕, 음란과 교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싸움에서 사람이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는 것처럼 최선을 다할 때, 실제로 악을 이길 힘을 공급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여기서 ‘프로프리움’(proprium)에 관한 절묘한 역설이 생깁니다. 사람은 자기 힘만 믿어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자기에게 아무 역할도 없는 것처럼 행동해서도 안 됩니다. ‘내가했다’고 생각하면 자기 의에 빠지고, ‘주님이하시니까나는아무것도안해도된다’고 생각하면 영적 나태에 빠집니다. 바른 질서는 ‘나는최선을다해행하되, 선을행할수있었던모든능력이주님에게서왔음을인정하는것’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반복해서 말하는 ‘자기에게서하는것처럼하되그것이주님에게서온것임을인정하는’ 삶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알아서하신다’는 말은 언제 참된 신앙고백이 될까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한 뒤 결과를 주님께 맡길 때입니다. 진실하게 판단하고, 필요한 행동을 하고, 책임을 다하고, 기도하며 최선을 다했지만 결과는 내가 통제할 수 없을 때 ‘이제는주님께맡깁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체념이 아니라 섭리에 대한 신뢰입니다. 내가 해야 할 것과 주님께 맡겨야 할 것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하나님이알아서하시겠지’라는 말도 내면에서는 정반대일 수 있습니다. ‘나는하기싫으니하나님이하시겠지’라면 책임 회피가 될 수 있지만, ‘나는주님앞에서오늘해야할일을다하겠습니다. 그러나결과까지내가붙잡으려하지않고주님의섭리를신뢰하겠습니다’라면 매우 건강한 신앙이 됩니다. 외적으로는 비슷한 말인데 그 안의 사랑과 의지가 다른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의자녀’라는 말 자체도 특권보다 관계와 닮음의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이 ‘하나님이무슨일이든내뜻대로처리해주신다’는 의미라면 하나님을 아버지라기보다 보호막처럼 이용하는 셈이 됩니다. 참된 자녀 됨은 아버지의 성품을 닮아 가는 데 있습니다. 주님에게서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악을 죄로 여겨 피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자신의 자리에서 유용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자녀니까아무렇게나살아도하나님이책임지시겠지’가 아니라 ‘하나님의자녀이기때문에아버지의뜻을따라살고싶다’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섭리에 관한 매우 중요한 균형으로 이어집니다. ‘내가할수있는것은내가하고, 할수없는것은하나님께맡긴다’고만 말해도 아직 조금 부족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는 ‘내가할수있다고느끼는것조차사실주님께서능력을주셔서가능한것이지만, 주님은내가그것을내힘으로하는것처럼자유롭게행하기를원하신다’고 말해야 더욱 정확합니다. 인간의 자유와 주님의 섭리는 경쟁관계가 아닙니다. 인간이 자유롭게 선을 선택하는 바로 그 안에서 주님의 섭리가 역사합니다.
따라서 ‘나는하나님의자녀니까하나님이알아서하시겠지’라는 말은 절반은 매우 아름답고 절반은 매우 위험합니다. ‘하나님의자녀이므로주님의섭리를신뢰한다’는 부분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그러므로나는아무것도하지않아도된다’가 붙는 순간 신뢰가 방임으로 변합니다. 참된 신앙은 ‘주님께맡긴다’는 말로 책임을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오늘 자신에게 맡겨진 책임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것입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섭리를믿는다는것은아무것도하지않고하나님이알아서하시기를기다리는것이아니라, 주님에게서힘을받아내가해야할일을다한뒤내가통제할수없는결과를주님께맡기는것입니다.’
그리고 조금 더 스베덴보리답게 압축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모든것을자기힘으로하는것처럼행해야하지만, 모든선한능력이주님에게서온것임을인정해야합니다.’ 바로 이 두 문장 사이에 ‘하나님이알아서하시겠지’라는 말이 참된 신뢰가 될 것인지, 영적 방임이 될 것인지를 가르는 경계가 있습니다.
‘한번부모와자녀가되었으면영원히부모와자녀인가? 형제자매는영원히형제자매인가?’ 이 질문은 사후세계와 천국을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우리는 가족을 너무나 중요한 관계로 경험하기 때문에 천국에서도 지금의 가족관계가 그대로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대답은 ‘혈연이라는사실은사라지지않지만, 혈연관계가영원한관계를결정하지는않는다’에 가깝습니다.
자연계에서 혈연은 매우 중요합니다. 부모와 자녀, 형제자매라는 관계는 우연히 붙은 이름표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서로 사랑하고 돌보며 책임을 배우도록 주어진 질서입니다. 특히 부모가 어린 자녀를 사랑하고 보호하는 사랑에는 주님의 섭리가 깊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이 혈연을 하찮게 여긴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자연계에서 가족에게 맡겨진 책임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은 체어리티(charity)의 중요한 형태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영계에 들어가면 관계를 결정하는 원리가 달라집니다. 자연계에서는 ‘누구에게서태어났는가?’가 가족을 결정하지만, 영계에서는 ‘무엇을사랑하는가?’가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결정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천국 공동체는 혈통이나 국적, 혹은 지상 소속에 따라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비슷한 사랑과 선을 가진 사람들이 주님의 질서에 따라 결합하여 이루어집니다. 결국 자연적 친족관계보다 ‘영적친화성’이 더 근본적 관계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 원리를 아주 분명하게 보여 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주님께 ‘보소서당신의어머니와동생들이밖에서찾나이다’라고 했을 때 주님께서는 ‘누가내어머니이며내동생들이냐’고 물으신 뒤, ‘누구든지하늘에계신내아버지의뜻대로하는자가내형제요자매요어머니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2:47-50). 이것은 육신의 가족을 무시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혈연보다 더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같은 선과 진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영적 친족관계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부자지간이었다고 해서 영원히 ‘아버지는위, 아들은아래’라는 관계가 유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연계에서 아버지는 아들을 낳고 양육했지만, 아들도 성인이 되고 두 사람 모두 영계에 들어가면 각각 독립된 영적 인간입니다. 그때는 ‘누가누구의아버지였는가?’보다 각 사람이 어떤 ‘지배적사랑’(ruling love)을 형성했는지가 더 중요해집니다. 두 사람이 서로 비슷한 천국적 사랑을 가지고 있다면 매우 가까이 지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적 사랑이 크게 다르다면 혈연이라는 이유만으로 영원히 같은 공동체에서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형제자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형제이지만, 영계에서는 두 사람의 내적 사랑이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은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선택하고 다른 사람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자신의 지배적 사랑으로 만들었다면, 자연적 혈연이 그 영적 차이를 없앨 수 없습니다. 천국에 있는 사람이 ‘내동생이지옥에있으니나도그곳에서함께살아야한다’고 할 수도 없고, 반대로 혈연 때문에 지옥의 사람이 천국 공동체에 머무를 수도 없습니다. 각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삶과 상응하는 곳으로 갑니다.
그러면 천국에 간 사람이 지옥에 간 가족 때문에 영원히 슬퍼하지 않을까 하는 문제가 곧 따라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별도의 주제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천국의 행복이 기억상실에서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지상에서의 혈연적 애착 때문에 천국에서 영원히 고통받는 것도 아닙니다. 사후에는 사람과 관계를 바라보는 기준 자체가 자연적 혈연에서 영적 선과 주님의 질서로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은 ‘천국에간부모는지옥에간자녀때문에슬퍼하지않는가?’라는 질문으로 따로 다루면 상당히 깊은 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사후에 가족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에서는 사람은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잃어버리는 존재가 아닙니다. 지상에서 알던 사람들을 만나고 알아보는 과정이 있으며, 가족이나 친지들도 다시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재회’와 ‘영원한결합’이 같은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만나서 서로를 알아볼 수 있다는 것과 영원히 같은 공동체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각 사람의 내면이 드러나고, 서로의 사랑이 조화를 이루는 사람들은 가까워지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서로 다른 곳으로 향합니다.
이 원리를 생각하면 주님께서 자연계의 가족을 왜 그렇게 중요하게 주셨는지도 새롭게 보입니다. 가족은 영원히 유지해야 할 하나의 혈연집단이라기보다, 우리가 사랑과 책임, 희생과 용서와 돌봄을 배우도록 주어진 매우 중요한 ‘거듭남’(regeneration)의 자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소유하기 위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한 독립된 영혼이 주님을 향하여 성장하도록 돌봅니다. 자녀 역시 부모에게 영원히 종속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자연계의 가족관계는 영적인 사랑을 배우는 매우 중요한 학교인 셈입니다.
그래서 ‘한번혈연이면영원히혈연인가?’라는 질문에는 두 층위로 답해야 합니다. ‘그사람이내아버지였고, 내어머니였고, 내아들이었고, 내딸이었다는지상의역사는없어지지않습니다.’ 그러나 ‘그혈연관계가영원히우리의관계를결정하는가?’라고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영원한 세계에서 사람들을 결합시키는 것은 피가 아니라 사랑이며, 더 정확히 말하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함께 사랑하는 내적 조화입니다.
어쩌면 이것을 가장 간결하게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자연계에서는혈연이우리를가족으로만나게하지만, 영계에서는사랑이우리를영원히함께있게합니다.’
그리고 이 원리는 가족을 가볍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귀하게 만듭니다. 지금 부모와 자녀이고 부부이며 형제자매라는 이유만으로 영원한 결합이 자동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서로를 사랑하고 선을 행하며 함께 주님을 향해 살아가는 가운데 자연적 가족관계가 ‘영적인관계’로 깊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경우는 지상에서 가족이었던 사람들이 단지 혈연 때문에 다시 모이는 것이 아니라, 서로 비슷한 천국적 사랑을 이루었기 때문에 영계에서도 서로 가까운 사람들이 되는 경우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