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6.심화

5. 토기는 깨뜨리고 유기는 닦아 물로 씻어야 했을까?’

 

6:28은 문자로만 읽으면 위생 규정처럼 보입니다. 속죄제 고기를 토기에 삶았으면 그 그릇을 깨뜨리고, 유기에 삶았으면 그릇을 닦아 물로 씻으라고 합니다. 왜 하나는 아예 깨뜨려 버리고 다른 하나는 씻어서 다시 사용할 수 있게 했을까요?

 

놀랍게도 이 구절에는 스베덴보리의 매우 직접적인 해설이 있습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105(29:31)는 레6:28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토기는 선과 결합하지 않는 거짓을 의미하고, 유기는 안에 선이 있는 교리적인 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속죄제와 속건제의 고기를 그 안에서 삶는 것은 악과 거기에서 나오는 거짓으로부터 정결하게 되기 위한 준비를 의미한다고 밝힙니다.

 

이 설명에 따르면 왜 두 그릇의 처리가 달랐는지가 분명해집니다. 선과 결합하지 않는 거짓은 씻어서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깨뜨려야 합니다. 거짓 자체를 조금 깨끗하게 만들어 계속 가지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거짓은 버려야 합니다. 반면 유기가 나타내는 것은 선이 들어 있는 교리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버려야 할 것이 아니라 잘못 붙어 있는 것을 제거하고 정결하게 하여 다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 차이는 거듭남에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모든 과거의 생각과 종교적 지식을 다 버려야 거듭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똑같이 처리하지 않으십니다. 악과 결합되어 진리를 완전히 왜곡시키는 거짓은 깨뜨리십니다. 그러나 불완전하게 이해했을 뿐 그 안에 선을 향한 마음이 있고 진리를 받을 수 있는 교리는 씻고 바로잡아 사용하십니다.

 

AC.10105삶는다는 것 자체도 설명합니다. 고기를 삶는 것은 선을 삶에 사용하기 위해 교리의 진리들을 통해 준비하는 것을 의미하며, 물은 진리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유기를 닦고 물로 씻는 은 단순한 세척이 아니라 교리적인 것을 진리로 정결하게 하여 선한 삶에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매우 아름다운 표상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잘못 알고 있던 교리가 있다고 합시다. 그 안에 완전히 거짓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표현이 불완전하거나 이해가 부족했을 뿐 그 중심에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려는 선이 있었다면 모든 것을 파괴할 필요는 없습니다. 말씀의 물로 씻고, 거짓된 부분을 제거하고, 더 밝은 진리 안에서 다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토기와 유기의 차이는 사람을 판단하는 데도 조심성을 줍니다. 어떤 사람의 신앙 이해가 잘못되어 있다고 해서 그 사람 안의 모든 것을 토기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만이 그 안에 선이 있는지 아십니다. 선과 결합할 수 없는 거짓은 깨뜨리시지만, 선을 품고 있으면서 아직 불완전한 이해는 진리를 통해 정결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레6:28은 거듭남이 단순한 파괴가 아니라 분별의 과정임을 보여 줍니다. 무엇을 버려야 하고 무엇을 씻어야 하는지 구별하는 것입니다. 악과 결합된 거짓은 깨뜨리되, 선을 섬길 수 있는 것은 진리로 씻어 보존합니다. 토기는 깨뜨리고 유기는 물로 씻으라는 짧은 한 절 안에 주님께서 우리의 생각과 교리를 어떻게 정결하게 하시는가라는 놀라운 아르카나가 숨어 있습니다. (SW.6 심화 5)

 

 

 

SW.레6.심화4, ‘왜 제사장은 제물을 먹어야 했을까? - 거룩한 것을 자기 삶으로 삼는다는 것’

SW.레6.심화4. ‘왜 제사장은 제물을 먹어야 했을까? - 거룩한 것을 자기 삶으로 삼는다는 것’ 레6에는 현대 독자에게 조금 낯선 장면이 반복됩니다. 하나님께 드린 소제와 속죄제의 일부를 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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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제사장은 제물을 먹어야 했을까? - 거룩한 것을 자기 삶으로 삼는다는

 

6에는 현대 독자에게 조금 낯선 장면이 반복됩니다. 하나님께 드린 소제와 속죄제의 일부를 제사장이 먹습니다.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는데 왜 그 제물을 다시 사람이 먹는 것일까요? 단순히 제사장들의 생활을 위한 식량 공급 규정만으로 보면 이 반복되는 먹음의 영적 의미를 놓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부분을 매우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2177(18:6)은 레6:13-17을 직접 인용하면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소제의 나머지를 먹는 것은 인간의 상호성자기 것으로 삼음을 표상하며, 그 결과 사랑과 체어리티를 통한 결합이 이루어진다고 설명합니다.

 

AC.2187(18:8)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먹는 자체가 교통과 결합과 자기 것으로 삼음을 의미한다고 설명하면서 레6:16, 18, 26을 직접 열거합니다. 거룩한 제물을 먹는 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천적·영적 선을 받아들여 그것이 인간 안의 실제 생명이 되는 것을 표상한 것입니다.

 

여기서 자기 것으로 삼음은 선의 근원이 인간 자신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인간이 자유롭게 받아들여 마치 자기 의지에서 행하는 것처럼 살아가는 상태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이 밖에 놓인 교리로만 남아 있지 않고 내가 실제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읽고 좋은 말씀이구나라고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아직 먹은 것이 아닙니다. 용서하라는 말씀을 읽었다면 실제 용서하려고 싸우고, 정직하라는 말씀을 읽었다면 손해가 와도 정직을 선택하며,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읽었다면 실제 이웃의 필요를 돌아볼 때 비로소 그 진리가 삶의 일부가 됩니다.

 

그래서 제사장은 거룩한 것을 아무 곳에서나 먹지 않고 거룩한 ’, 곧 회막 뜰에서 먹습니다. 주님의 선을 자기 것으로 삼는 일은 proprium이 그것을 차지하는 일이 아니라 주님의 임재와 질서 안에서 받아들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선을 행하지만 그 선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듭남의 중요한 목표입니다. 주님의 진리가 계속 내 밖에 있는 명령으로만 남아 있으면 우리는 억지로 순종합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선과 결합하여 우리 안에 받아들여지면 어느 순간 그 일을 사랑해서 행하기 시작합니다. 밖에 있던 말씀이 안으로 들어와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레6에서 제사장이 제물을 먹는 장면은 제사의 부수적인 뒤처리가 아닙니다. 제단에서 주님께 드려진 것이 다시 인간에게 돌아와 인간의 생명이 되는 순간입니다. 거듭남은 악을 버리는 것으로만 완성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그것을 먹고, 자기 삶으로 삼고, 마침내 사랑과 체어리티로 살아가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SW.6 심화 4)

 

 

 

SW.레6.심화5, ‘왜 토기는 깨뜨리고 유기는 닦아 물로 씻어야 했을까?’

SW.레6.심화5. ‘왜 토기는 깨뜨리고 유기는 닦아 물로 씻어야 했을까?’ 레6:28은 문자로만 읽으면 위생 규정처럼 보입니다. 속죄제 고기를 토기에 삶았으면 그 그릇을 깨뜨리고, 유기에 삶았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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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레6.심화3, ‘왜 번제의 재까지 거룩하게 다루어야 했을까?’

SW.레6.심화3. ‘왜 번제의 재까지 거룩하게 다루어야 했을까?’ 번제가 모두 타고 나면 남는 것은 재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제사는 끝났고 재는 치워야 할 폐기물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레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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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번제의 재까지 거룩하게 다루어야 했을까?’

 

번제가 모두 타고 나면 남는 것은 재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제사는 끝났고 재는 치워야 할 폐기물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레6은 그 재를 처리하는 일까지 매우 세밀하게 규정합니다. 제사장은 세마포 긴 옷과 세마포 속바지를 입고 재를 제단 곁에 두었다가, 다시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그 재를 진영 바깥 정결한 으로 가져갑니다.

 

여기서 가장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세마포의 의미입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9959(28:42)는 세마포를 외적 진리, 곧 자연적 진리와 연결하면서 바로 레6:10-11의 이 장면을 직접 인용합니다. 제사장이 재를 처리할 때조차 세마포 옷을 입어야 했던 것은 이 마지막 외적 처리까지 진리의 질서 안에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본문은 재를 단순히 진영 에 버리라고 하지 않습니다. ‘진영 바깥 정결한 으로 가져가라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제물은 이미 불에 완전히 살라졌지만 그 결과물까지 아무렇게나 취급되지 않습니다. 제사가 끝난 뒤 남은 것에도 질서가 있는 것입니다.

 

다만 여기에서는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번에 확보한 스베덴보리 원전 가운데 레6자체를 직접적으로 세밀하게 풀이하는 강한 근거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재는 정확히 무엇을 상응한다고 하나의 공식으로 못 박지는 않겠습니다. 오히려 확실한 본문의 구조를 붙드는 편이 좋습니다. 거룩한 제사의 마지막 결과까지 정결한 질서 속에서 처리되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거듭남에도 좋은 통찰을 줍니다. 어떤 악과의 싸움이 끝났다고 해서 그 경험 전체를 무가치한 것으로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어떤 시험에서 건져 내셨다면 그 과정에서 배운 진리와 겸손, 자기 인식은 이후의 삶에 남습니다. 그러나 지나간 악 자체를 계속 붙잡고 살아갈 필요도 없습니다. 끝난 것은 끝난 자리로 옮겨야 합니다.

 

특히 다른 옷을 입고진영 밖으로 나가는 장면은 제단에서 봉사하는 일과 그 결과를 밖으로 옮기는 일이 서로 다른 외적 질서를 필요로 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모든 영적 경험을 같은 방식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각 상태에 맞는 질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번제의 재는 적어도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남깁니다. ‘주님께서 이미 태워 없애신 것을 나는 아직 제단 위에 붙들고 있지는 않은가?입니다. 회개한 죄를 끝없이 되씹고, 이미 지나간 실패를 자기 정체성으로 붙들고 있는 것은 정결의 완성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끝내신 것은 정결한 질서 가운데 제자리로 옮겨 놓고, 제단에서는 다시 새로운 불과 새로운 번제가 시작되어야 합니다. (SW.6 심화 3)

 

 

 

SW.레6.심화4, ‘왜 제사장은 제물을 먹어야 했을까? - 거룩한 것을 자기 삶으로 삼는다는 것’

SW.레6.심화4. ‘왜 제사장은 제물을 먹어야 했을까? - 거룩한 것을 자기 삶으로 삼는다는 것’ 레6에는 현대 독자에게 조금 낯선 장면이 반복됩니다. 하나님께 드린 소제와 속죄제의 일부를 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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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레6.심화2, ‘왜 제단의 불은 밤새도록, 끊임없이 꺼지지 않아야 했을까?’

SW.레6.심화2. ‘왜 제단의 불은 밤새도록, 끊임없이 꺼지지 않아야 했을까?’ 레6에서 가장 강렬하게 반복되는 명령은 ‘불을 끄지 말라’는 것입니다. 번제물은 밤새도록 제단 위에 있고, 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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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제단의 불은 밤새도록, 끊임없이 꺼지지 않아야 했을까?’

 

6에서 가장 강렬하게 반복되는 명령은 불을 끄지 말라는 것입니다. 번제물은 밤새도록 제단 위에 있고, 불은 아침까지 타고 있어야 합니다. 제사장은 아침마다 나무를 더 놓아야 하며, 13절에서는 마침내 불은 끊임이 없이 제단 위에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라고 선언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스베덴보리의 해설이 놀랄 만큼 직접적입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2177(18:6)은 레6:13-17을 직접 인용한 뒤, 제단에서 계속 타야 했던 불은 주님의 사랑, 영원하고 영속적인 주님의 자비를 표상했다고 설명합니다. AC.6832(3:2) 역시 레6:12-13을 직접 인용하면서 이 영속적인 불이 신적 사랑을 표상했다고 밝힙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처음부터 우리의 신앙 열심을 절대로 식히지 말라는 명령으로 읽으면 중심이 인간에게 옮겨집니다. 제단의 불이 가장 먼저 나타내는 것은 인간의 사랑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입니다. 꺼지지 않는 것은 우리의 감정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입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의 영적 상태는 끊임없이 변합니다. 뜨거울 때도 있고 차가울 때도 있으며, 밝은 아침 같은 때도 있고 긴 밤 같은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밤이 되었다고 제단의 불까지 꺼지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주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때에도 주님의 사랑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제사장은 아침마다나무를 불 위에 놓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영원하지만 인간에게는 날마다의 응답이 필요하다는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어제의 예배로 오늘을 살 수 없고, 십 년 전의 뜨거웠던 체험으로 오늘의 악을 이길 수도 없습니다. 매일 말씀 앞에 서고, 오늘 보이는 악을 피하며, 오늘 행할 선을 행해야 합니다.

 

그래서 거듭남에는 두 방향이 동시에 있습니다. 하나는 위에서 아래로 끊임없이 오는 주님의 사랑과 자비이고, 다른 하나는 그 사랑을 날마다 받아들이고 응답하는 인간의 자유입니다. 전자가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후자가 없다면 주님의 사랑은 우리 안에서 삶이 되지 못합니다.

 

결국 꺼지지 않는 은 레6 전체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훔친 것을 돌려주고, 악과 거짓에서 정결하게 되고, 주님의 선을 받아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있는 이유는 그 모든 과정 아래에서 주님의 사랑이 한순간도 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불이 꺼질 때조차 주님의 불은 꺼지지 않습니다. 거듭남은 바로 그 영원한 불에 날마다 다시 자신의 삶을 가져가는 과정입니다. (SW.6 심화 2)

 

 

 

SW.레6.심화3, ‘왜 번제의 재까지 거룩하게 다루어야 했을까?’

SW.레6.심화3. ‘왜 번제의 재까지 거룩하게 다루어야 했을까?’ 번제가 모두 타고 나면 남는 것은 재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제사는 끝났고 재는 치워야 할 폐기물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레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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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레6.심화1, ‘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기 전에 이웃에게 먼저 돌려주어야 했을까?’

SW.레6.심화1. ‘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기 전에 이웃에게 먼저 돌려주어야 했을까?’ 레6:1-7에서 가장 눈여겨볼 것은 범죄의 대상입니다. 맡긴 물건을 속이고, 도둑질하고, 착취하고, 잃어버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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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기 전에 이웃에게 먼저 돌려주어야 했을까?’

 

6:1-7에서 가장 눈여겨볼 것은 범죄의 대상입니다. 맡긴 물건을 속이고, 도둑질하고, 착취하고, 잃어버린 물건을 주워 놓고 부인한 것은 모두 이웃에게 행한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여호와께 신실하지 못하여 범죄한 것이라고 부르십니다. 이웃을 향한 부정직과 하나님을 향한 불신실이 분리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속건제의 순서가 의미심장합니다. 범죄한 사람은 훔친 것이나 착취한 것이나 맡은 것이나 주운 물건을 먼저 원주인에게 돌려주고 오분의 일을 더합니다. 그런 다음 숫양을 여호와께 속건제물로 가져갑니다. 본문은 실제 반환과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하나의 회개 안에 묶어 놓습니다.

 

이것은 레5에서 보았던 자복보상을 한층 더 구체화합니다. 하나님께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내가 부당하게 가지고 있는 것은 계속 가지고 있을 수 없습니다. 회개가 참되다면 가능한 곳에서는 외적 삶도 바뀌어야 합니다. 속에서 죄를 인정한 것이 겉에서는 반환과 보상이라는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과거의 잘못을 문자적으로 원상복구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일도 있고 상대를 찾을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회개의 방향입니다. 지금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이 있는데도 하나님께 용서받았으니 끝났다며 외면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화해가 이웃에 대한 책임을 지워 버리지 않습니다.

 

6은 그래서 예배를 매우 현실적으로 만듭니다. 제단 앞에서 거룩한 말을 하는 것과 장터와 집과 인간관계에서 정직하게 사는 것이 서로 다른 종교가 아닙니다. 맡긴 물건을 정직하게 돌려주고, 남의 것을 탐하지 않고, 손해를 입혔다면 가능한 만큼 회복하는 삶 자체가 체어리티의 문제입니다.

 

결국 속건제가 묻는 것은 이것입니다. ‘주님께 용서를 구하고 있는 가운데 아직 내가 이웃에게 돌려주어야 것이 남아 있지는 않은가?입니다. 있다면 회개는 그곳까지 내려가야 합니다. 주님께 드리는 예배와 이웃에게 행하는 체어리티가 하나가 될 때 속 사람에서 시작된 회개가 겉 사람의 삶까지 내려와 실제 거듭남이 됩니다. (SW.6 심화 1)

 

 

 

SW.레6.심화2, ‘왜 제단의 불은 밤새도록, 끊임없이 꺼지지 않아야 했을까?’

SW.레6.심화2. ‘왜 제단의 불은 밤새도록, 끊임없이 꺼지지 않아야 했을까?’ 레6에서 가장 강렬하게 반복되는 명령은 ‘불을 끄지 말라’는 것입니다. 번제물은 밤새도록 제단 위에 있고, 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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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레6, ‘제단의 불은 꺼지지 않게 하고 - 회복에서 영원한 사랑의 불로 이어지는 거듭남의 질서

※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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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스베덴보리를 통해 밝혀 주신 말씀의 상응과 속뜻, 그리고 인간의 거듭남의 질서에 비추어, 주님의 말씀 안에 이미 담겨 있는 선과 진리를 더욱 분명히 살피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작업의 시작과 중심과 마지막에 계시는 분은 언제나 주님이십니다.

 

 

SW.6, 제단의 불은 꺼지지 않게 하고 - 회복에서 영원한 사랑의 불로 이어지는 거듭남의 질서

 

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누구든지 여호와께 신실하지 못하여 범죄하되 이웃이 맡긴 물건이나 전당물을 속이거나 도둑질하거나 착취하고도 사실을 부인하거나 3남의 잃은 물건을 줍고도 사실을 부인하여 거짓 맹세하는 사람이 모든 중의 하나라도 행하여 범죄하면 4이는 죄를 범하였고 죄가 있는 자니 훔친 것이나 착취한 것이나 맡은 것이나 잃은 물건을 주운 것이나 5 거짓 맹세한 모든 물건을 돌려보내되 본래 물건에 오분의 일을 더하여 돌려보낼 것이니 죄가 드러나는 날에 임자에게 것이요 6그는 속건제물을 여호와께 가져갈지니 네가 지정한 가치대로 없는 숫양을 속건제물을 위하여 제사장에게로 끌고 것이요 7제사장은 여호와 앞에서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는 무슨 허물이든지 사함을 받으리라 8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9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명령하여 이르라 번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번제물은 아침까지 제단 위에 있는 석쇠 위에 두고 제단의 불이 위에서 꺼지지 않게 것이요 10제사장은 세마포 옷을 입고 세마포 속바지로 하체를 가리고 제단 위에서 불태운 번제의 재를 가져다가 제단 곁에 두고 11 옷을 벗고 다른 옷을 입고 재를 진영 바깥 정결한 곳으로 가져갈 것이요 12제단 위의 불은 항상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 제사장은 아침마다 나무를 위에서 태우고 번제물을 위에 벌여 놓고 화목제의 기름을 위에서 불사를지며 13불은 끊임이 없이 제단 위에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라 14소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아론의 자손은 그것을 제단 여호와 앞에 드리되 15 소제의 고운 가루 움큼과 기름과 소제물 위의 유향을 가져다가 기념물로 제단 위에서 불살라 여호와 앞에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고 16 나머지는 아론과 그의 자손이 먹되 누룩을 넣지 말고 거룩한 회막 뜰에서 먹을지니라 17그것에 누룩을 넣어 굽지 말라 이는 나의 화제물 중에서 내가 그들에게 주어 그들의 소득이 되게 하는 것이라 속죄제와 속건제 같이 지극히 거룩한즉 18아론 자손의 남자는 모두 이를 먹을지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물 중에서 대대로 그들의 영원한 소득이 됨이라 이를 만지는 자마다 거룩하리라 19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0아론과 그의 자손이 기름 부음을 받는 날에 여호와께 드릴 예물은 이러하니라 고운 가루 십분의 에바를 항상 드리는 소제물로 삼아 절반은 아침에, 절반은 저녁에 드리되 21그것을 기름으로 반죽하여 철판에 굽고 기름에 적셔 썰어서 소제로 여호와께 드려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라 22 소제는 아론의 자손 기름 부음을 받고 그를 이어 제사장 자가 드릴 것이요 영원한 규례로 여호와께 온전히 불사를 것이니 23제사장의 모든 소제물은 온전히 불사르고 먹지 말지니라 24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5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라 속죄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속죄제 제물은 지극히 거룩하니 여호와 번제물을 잡는 곳에서 속죄제 제물을 잡을 것이요 26죄를 위하여 제사 드리는 제사장이 그것을 먹되 회막 거룩한 곳에서 먹을 것이며 27 고기에 접촉하는 모든 자는 거룩할 것이며 피가 어떤 옷에든지 묻었으면 묻은 그것을 거룩한 곳에서 것이요 28 고기를 토기에 삶았으면 그릇을 깨뜨릴 것이요 유기에 삶았으면 그릇을 닦고 물에 씻을 것이며 29제사장인 남자는 모두 그것을 먹을지니 그것은 지극히 거룩하니라 30그러나 피를 가지고 회막에 들어가 성소에서 속죄하게 속죄제 제물의 고기는 먹지 못할지니 불사를지니라 (6)

 

 

해설

레위기 6장은 앞의 장들과 조금 다른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4에서는 죄를 깨닫는 ’, 5에서는 그것을 자복하는 보상하는 이 강조되었다면, 6:1-7에서는 그 보상이 아주 구체적인 이웃 관계 안으로 들어옵니다. 맡긴 물건을 속이고, 전당물을 부인하고, 도둑질하고, 착취하고, 남이 잃은 물건을 주워 놓고도 모른다고 하며, 거기에 거짓 맹세까지 하는 경우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성경이 이런 행동을 단순히 이웃에게 신실하지 못한 이라고 하지 않고 여호와께 신실하지 못하여 범죄한 것이라고 말한다는 점입니다. 이웃에게 행한 부정직이 곧 주님께 대한 범죄가 되는 것입니다. 체어리티와 예배를 분리할 수 없다는 사실이 제사의 법 한가운데서 드러납니다.

 

그래서 속건제의 순서도 중요합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먼저 훔치거나 착취하거나 맡아 두었던 물건을 돌려보내되 본래 물건에 오분의 일을 더하여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숫양을 속건제물로 여호와께 가져갑니다. 5에서 이미 보았듯이 속건제는 단순히 마음속에서 미안해하는 것으로 끝나는 회개가 아닙니다. 잘못으로 실제 손상이 생겼다면 가능한 범위에서 그것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제물을 가져가는 종교적 행위가 이웃에게 돌려주어야 할 것을 대신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이웃에게 바로잡을 것을 바로잡는 것과 주님 앞에서 속죄하는 것이 하나의 회개 안에 함께 들어 있습니다. 6은 그래서 매우 강하게 말합니다. 주님과의 관계를 바로잡으려 한다면 이웃과의 관계에서 내가 저지른 실제 불의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까지가 레5 후반의 속건제를 완성하는 부분이라면 8절부터는 시선이 크게 바뀝니다. 이제 누가 어떤 제물을 가져오는가보다 제사장이 그 제물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가 중심이 됩니다. 번제, 소제, 속죄제의 규례가 다시 나오지만 레1, 2, 4의 단순한 반복이 아닙니다. 앞에서는 제물을 가져오는 사람의 입장에서 제사를 보았다면 여기서는 제단과 제사장의 입장에서 그 제사가 어떻게 계속되고, 어떻게 거룩하게 다루어지며,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래서 레6은 레1-5에서 배운 제사의 의미를 한 단계 더 안쪽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중심에 9절로 13절의 이 있습니다. ‘제단의 불이 위에서 꺼지지 않게 것이요’, ‘제단 위의 불은 항상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 그리고 다시 불은 끊임이 없이 제단 위에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라.세 번이나 반복됩니다. 이 부분에는 매우 분명한 스베덴보리의 직접 해설이 있습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2177(18:6)은 레6:13-17을 직접 인용하면서 제단에서 계속 타고 있어야 했던 불은 주님의 사랑, 영원하고 영속적인 주님의 자비를 표상했다고 설명합니다. AC.6832(3:2)도 레6:12-13을 직접 인용하면서 제단 위의 영속적인 불이 신적 사랑 자체를 표상했다고 밝힙니다. 그러므로 이 불은 먼저 우리의 열심이 꺼지지 않아야 한다는 명령이 아닙니다. 인간의 사랑보다 먼저 꺼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을 향한 주님의 사랑과 자비입니다.

 

이것은 거듭남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의 영적 상태에는 아침과 저녁이 있고 뜨거울 때와 차가울 때가 있습니다. 어떤 날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충만하지만 어떤 날은 말씀을 읽는 것조차 힘들 수 있습니다. 만일 거듭남이 인간의 종교적 열심이라는 불에 달려 있다면 그 불은 오래전에 꺼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단의 불은 인간이 처음 만들어 내는 불이 아닙니다. 주님의 신적 사랑이 먼저 끊임없이 흐르고 있으며 인간은 매일 아침 그 불 위에 나무를 놓고 번제를 벌여 놓습니다. 그러므로 아침마다라는 말씀과 꺼지지 않는 이 함께 있는 것이 아름답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끊이지 않지만 인간은 날마다 새롭게 그 사랑에 응답해야 합니다. 거듭남은 한 번 뜨거워진 신앙으로 평생을 버티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흐르는 주님의 사랑을 매일 새롭게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과정입니다.

 

10절과 11절에서는 번제가 다 타고 남은 가 등장합니다. 제사장은 세마포 옷을 입고 재를 제단 곁에 두었다가, 다시 옷을 갈아입고 그 재를 진영 바깥 정결한 으로 가져갑니다. 여기에서도 세부를 함부로 상응시키지 않는 것이 중요하지만, 세마포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근거가 있습니다. AC.9959(28:42)는 세마포가 외적 또는 자연적 진리를 의미한다고 설명하면서 바로 레6:10-11의 제사장이 재를 치울 때 세마포 옷과 속바지를 입었던 규정을 직접 인용합니다. 따라서 제사의 마지막 남은 것까지 진리의 질서 아래 처리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재가 진영 으로 나가지만 아무 데나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정결한 으로 옮겨진다는 사실입니다. 제사가 끝났다고 해서 그 결과가 부정한 폐기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재 자체의 세부 의미에 대해서는 이번에 확보한 직접 원전보다 더 나아가 단정하지 않겠습니다.

 

14절로 18절의 소제 규례는 레2를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고운 가루와 기름과 유향의 일부를 제단에서 불사르고 나머지를 아론과 그의 자손이 거룩한 곳에서 먹습니다. 그런데 AC.2177은 이 본문을 직접 해설하면서 고운 가루는 체어리티의 영적인 것을, 기름은 체어리티의 천적인 것을, 유향은 그렇게 주님께 받아들여지는 것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한 움큼을 취하는 것은 온 힘과 온 영혼으로 사랑하는 것을, 누룩 없이 먹는 것은 순수하고 불결함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고 풀이합니다. 그리고 특히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남은 것을 먹는 것은 인간 편에서의 상호성자기 것으로 삼음을 표상하며, 그 결과 사랑과 체어리티를 통한 결합이 이루어진다고 설명합니다. 제물은 제단에서 사라져 버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주님께 드려진 선이 다시 인간에게 주어지고 인간의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레6에서 먹는다는 행동은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AC.2187(18:8)에서 거룩한 제물을 먹는 것은 교통, 결합, 자기 것으로 삼음을 의미한다고 설명하면서 레6:16, 18, 26을 직접 열거합니다. 제사장이 거룩한 것을 먹는 것은 단순히 제사장의 식량을 마련하기 위한 제도가 아니었습니다. 표상적으로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이 인간 안에 받아들여져 실제 생명의 일부가 되는 것을 나타냅니다. 진리를 듣기만 하는 것과 그 진리가 내가 살아가는 선이 되는 것은 다릅니다. 말씀을 이해하는 것과 그것을 먹어자기 삶으로 만드는 것도 다릅니다. 거듭남은 결국 주님의 선과 진리가 내 생각과 의지와 행동 안으로 들어와 나의 삶이 되는 과정입니다.

 

19절로 23절에는 또 하나 특이한 소제가 나옵니다. 아론과 그의 자손이 기름 부음을 받는 날에는 고운 가루 십분의 일 에바를 아침과 저녁으로 나누어 드리되, 이 제물은 제사장이 먹지 않고 온전히 불사르라고 합니다. AC.9993은 아론이 기름 부음을 받는 날 드리는 레6의 소제를 직접 언급하면서 누룩 없는 떡과 기름이 결합된 여러 형태가 천적 선의 서로 다른 층위를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는 모든 세부를 억지로 풀기보다 중요한 차이를 붙드는 것이 좋겠습니다. 일반 소제에서는 일부가 제사장에게 돌아가지만 제사장 자신을 위한 이 소제는 온전히 여호와께 돌려집니다. 주님께 봉사하는 직분 자체도 자기 소유가 될 수 없으며, 그것의 근원과 목적 전체가 주님께 있음을 보여 주는 매우 인상적인 규례입니다.

 

24절로 30절에서는 속죄제 규례가 다시 등장합니다. 여기서 반복되는 표현은 지극히 거룩하다입니다. 죄를 다루는 제물인데 왜 오히려 지극히 거룩하다고 부를까요? 스베덴보리는 정결이 단지 인간이 자기 악을 들여다보는 행위가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을 악과 거짓에서 실제로 건져 내시는 신적 역사라고 봅니다. AC.10132는 정결과 거듭남이 이노센스의 상태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속죄제와 속건제가 레6:17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지극히 거룩하다고 불렸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속죄제의 거룩함은 죄 자체가 거룩하다는 뜻이 아니라 죄를 제거하고 인간을 다시 주님의 질서 안으로 돌려놓으시는 주님의 정결케 하시는 역사가 거룩하다는 뜻입니다.

 

27절과 28절은 더욱 놀랍습니다. 속죄제의 고기에 접촉하는 것은 거룩하게 되고, 피가 옷에 묻으면 거룩한 곳에서 빨아야 하며, 고기를 토기에 삶았으면 그 그릇을 깨뜨리고 유기에 삶았으면 닦고 물로 씻어야 합니다. 여기에는 직접적인 원전이 있습니다. AC.10130(29:37)은 레6:18, 27을 직접 인용하면서 접촉은 교통과 전달과 받아들임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AC.10105(29:31)는 레6:28을 직접 인용하면서 토기는 선과 결합하지 않는 거짓, 유기는 선이 들어 있는 교리적인 을 의미한다고 풀이합니다. 속죄제의 고기를 삶는 것은 악과 거짓에서 정결하게 되기 위한 준비를 의미하므로, 선과 결합할 수 없는 거짓은 깨뜨려야하지만 선을 담고 있는 교리적인 것은 버리지 않고 닦고 물로 씻어정결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6의 가장 사소해 보이는 그릇 하나에도 거듭남의 놀라운 아르카나가 들어 있습니다.

 

마지막 30절에서는 속죄제 가운데서도 차이가 나타납니다. 어떤 속죄제는 제사장이 먹지만, 그 피를 회막 안 성소로 가지고 들어가 속죄한 제물은 먹지 않고 불살라야 합니다. 본문 자체가 이 둘을 분명히 구별합니다. 이것을 현재 확보한 원전 이상으로 세밀하게 상응시키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레6 전체에서 한 가지 원리는 분명합니다. 제사의 모든 것이 똑같은 방식으로 처리되지 않습니다. 무엇은 제단에서 불살라지고, 무엇은 제사장이 먹으며, 무엇은 씻고, 무엇은 깨뜨리고, 무엇은 성소로 들어가고, 무엇은 다시 불살라집니다. 거듭남 역시 모든 것을 무조건 버리는 과정이 아닙니다. 악과 결합된 거짓은 깨뜨려야 하지만 선을 섬길 수 있는 진리는 정결하게 하여 보존하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은 받아들여 자기 삶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래서 레6은 놀랍도록 역동적인 장입니다. 처음에는 훔친 것을 돌려보내라고 하고, 마지막에는 속죄제의 그릇 하나까지 어떻게 정결하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칩니다. 그 모든 과정의 한가운데에는 불은 끊임이 없이 제단 위에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못을 깨닫고, 자복하고, 돌려주고, 악과 거짓을 씻고,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삶으로 만들 수 있는 근원은 결국 우리의 의지력이 아닙니다. 꺼지지 않는 것은 우리의 열심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자비입니다. 그 영원한 불이 제단 위에 타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오늘도 다시 정결하게 되고, 다시 선을 받아들이며, 다시 이웃에게 바로 행하는 삶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레6이 보여 주는 거듭남의 질서입니다. (SW.6 해설)

 

심화

1.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기 전에 이웃에게 먼저 돌려주어야 했을까?’

 

SW.레6.심화1, ‘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기 전에 이웃에게 먼저 돌려주어야 했을까?’

SW.레6.심화1. ‘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기 전에 이웃에게 먼저 돌려주어야 했을까?’ 레6:1-7에서 가장 눈여겨볼 것은 범죄의 대상입니다. 맡긴 물건을 속이고, 도둑질하고, 착취하고, 잃어버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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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제단의 불은 밤새도록, 끊임없이 꺼지지 않아야 했을까?’

 

SW.레6.심화2, ‘왜 제단의 불은 밤새도록, 끊임없이 꺼지지 않아야 했을까?’

SW.레6.심화2. ‘왜 제단의 불은 밤새도록, 끊임없이 꺼지지 않아야 했을까?’ 레6에서 가장 강렬하게 반복되는 명령은 ‘불을 끄지 말라’는 것입니다. 번제물은 밤새도록 제단 위에 있고, 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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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번제의 재까지 거룩하게 다루어야 했을까?’

 

SW.레6.심화3, ‘왜 번제의 재까지 거룩하게 다루어야 했을까?’

SW.레6.심화3. ‘왜 번제의 재까지 거룩하게 다루어야 했을까?’ 번제가 모두 타고 나면 남는 것은 재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제사는 끝났고 재는 치워야 할 폐기물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레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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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제사장은 제물을 먹어야 했을까? - 거룩한 것을 자기 삶으로 삼는다는

 

SW.레6.심화4, ‘왜 제사장은 제물을 먹어야 했을까? - 거룩한 것을 자기 삶으로 삼는다는 것’

SW.레6.심화4. ‘왜 제사장은 제물을 먹어야 했을까? - 거룩한 것을 자기 삶으로 삼는다는 것’ 레6에는 현대 독자에게 조금 낯선 장면이 반복됩니다. 하나님께 드린 소제와 속죄제의 일부를 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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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토기는 깨뜨리고 유기는 닦아 물로 씻어야 했을까?’

 

SW.레6.심화5, ‘왜 토기는 깨뜨리고 유기는 닦아 물로 씻어야 했을까?’

SW.레6.심화5. ‘왜 토기는 깨뜨리고 유기는 닦아 물로 씻어야 했을까?’ 레6:28은 문자로만 읽으면 위생 규정처럼 보입니다. 속죄제 고기를 토기에 삶았으면 그 그릇을 깨뜨리고, 유기에 삶았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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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7, 레5, ‘잘못하였노라 자복하고 - 죄를 인정하는 데서 보상에 이르는 거듭남의 길’

※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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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5.심화

5. ‘모르고 지은 죄도 죄인가? - 무지와 이노센스, 그리고 책임의 문제

 

5:17은 읽는 사람을 멈추게 하는 말씀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여호와의 계명 하나를 부지중에 범하여도 허물이라 벌을 당할 것이니.알면서 고의로 계명을 어긴 것이 아니라 부지중에’, 곧 알지 못하고 범했는데도 왜 허물이라고 하는 것일까요? 이것만 떼어 읽으면 하나님께서 인간이 알지도 못했던 잘못까지 찾아내어 책임을 묻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원전을 함께 보면 이 문제는 훨씬 섬세하게 읽어야 합니다.

 

먼저 아주 중요한 원전이 있습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3519(27:9)는 제사에 사용되는 염소 새끼가 이노센스를 의미한다는 것을 설명하면서 레5:6을 직접 인용합니다. 그리고 실수로 범한 무지에서 비롯된 이며, 그 무지 안에는 이노센스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몰랐어도 죄는 죄니까 고의로 지은 죄와 똑같이 책임져야 한다고 단순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무지 속에 이노센스가 있는가를 함께 봅니다.

 

AC.9262(23:7)는 이 문제를 더욱 분명하게 해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신명기의 한 정결 의식을 해설하면서 어떤 악한 결과가 이노센스가 있는 무지에서 비롯된 경우에는 책임이 없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그 행위 자체가 잘못된 결과를 가져왔다는 사실과 그 사람에게 돌아가는 죄책을 구별합니다. 무지 속에 이노센스가 있었다면 그 행위는 악한 결과를 낳았더라도 그 사람의 의지에서 악을 선택하여 나온 것과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레5:17부지중에 범하여도 허물이라는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여기서 먼저 구별해야 할 것은 어떤 것이 객관적으로 신적 질서에 어긋나는가그것을 행한 사람에게 어느 정도의 죄책이 귀속되는가입니다. 인간이 모르고 독을 마셨다고 해서 독이 물로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르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해서 그 상처 자체가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어떤 악을 악인 줄 모르고 행했다고 해서 그것이 갑자기 선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적 질서에 어긋난 것은 여전히 바로잡혀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알면서 의도적으로 선택한 사람과 정말 모르고 행한 사람의 내적 상태까지 같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5 자체도 이 차이를 보여 줍니다. 2절과 3절에서는 어떤 사람이 부정한 것에 접촉했지만 부지중이었다가 나중에 그것을 깨닫는 상황이 나옵니다. 4절에서도 함부로 맹세한 일을 뒤늦게 깨닫습니다. 그리고 17절에서도 부지중이라는 표현이 반복됩니다. 중요한 전환점은 깨닫게 되는 입니다. 알지 못했던 때와 알고 난 뒤의 상태가 같지 않습니다. 알지 못했을 때에는 이노센스가 있을 수 있지만, 주님께서 말씀과 양심을 통해 그것을 보여 주신 뒤에도 계속 같은 악을 붙들고 있다면 더 이상 같은 의미의 무지라고 할 수 없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레5의 속죄제가 이해됩니다. 제사는 몰랐으니 너도 고의범과 똑같이 유죄다라고 정죄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직 알지 못하는 가운데 인간의 자연적 삶에 들어온 부정과 무질서를 주님께서 정결하게 하시는 길을 보여 줍니다. AC.3519가 실수로 범한 죄를 무지에서 비롯된 죄이며 안에 이노센스가 있다고 설명하면서 바로 레5의 속죄제를 연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노센스가 있는 무지는 주님께서 정결하게 하실 수 있는 상태입니다.

 

여기서 이노센스를 단순히 아무것도 몰랐으니 나는 잘못이 없다는 자기변명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노센스는 훨씬 깊은 상태입니다. 자기 자신에게서는 선과 진리가 나오지 않으며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하고 주님의 인도를 받으려는 상태입니다. AC.9262는 이노센스를 바로 이런 태도와 연결합니다. 그러므로 참된 이노센스가 있는 사람은 나는 몰랐으니까 책임 없어라고 버티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잘못을 알게 되었을 때 주님, 제가 몰랐습니다. 이제 보여 주셨으니 돌이키겠습니다라고 응답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거듭남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거듭남을 시작할 때 자기 안의 모든 악을 한꺼번에 알지 못합니다. 처음에는 아주 거친 악만 보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배우고 양심이 형성되며 주님의 빛이 더 깊이 들어올수록 이전에는 아무 문제도 없다고 생각했던 말과 행동, 동기와 욕망 속에서도 자기애와 세상 사랑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제는 몰랐던 것을 오늘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주님께서 어제의 무지를 이용해 우리를 정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오늘 보여 주심으로 오늘부터 그것에서 자유로워질 길을 여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레5:17알지 못하였을지라도 허물이라는 말씀은 두려움을 조장하기 위한 말씀이 아닙니다. 인간의 무지가 악을 선으로 바꾸지는 않는다는 엄중한 진리인 동시에, 아직 알지 못했던 잘못까지 주님께서 정결하게 하실 수 있다는 희망의 말씀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악에서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새롭게 발견되는 더 깊은 악과 거짓에서도 계속 정결하게 됩니다.

 

결국 문제는 몰랐는가, 알았는가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알게 어떻게 하는가?입니다. 무지 속에 이노센스가 있었다면 주님께서는 그것을 고의적인 악과 똑같이 여기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보여 주신 뒤에는 새로운 자유와 책임이 시작됩니다. 그때 그것을 인정하고 피하면 어제의 무지는 오늘의 거듭남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레5의 부지중의 죄는 인간을 꼼짝 못 하게 만드는 죄책의 교리가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영역까지 조금씩 비추시고 정결하게 하여 마침내 더 온전한 자유로 이끄시는 거듭남의 아르카나입니다. (SW.7 5 심화 5)

 

 

 

SW.7 심화 4, ‘왜 속죄제의 고운 가루에는 기름과 유향을 넣지 않았을까?’

SW.7 심화4. ‘왜 속죄제의 고운 가루에는 기름과 유향을 넣지 않았을까?’ 레5:11은 레2를 이미 읽은 사람이라면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레2의 소제에서는 고운 가루에 반드시 기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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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5.심화

4. ‘ 속죄제의 고운 가루에는 기름과 유향을 넣지 않았을까?

 

5:11은 레2를 이미 읽은 사람이라면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2의 소제에서는 고운 가루에 반드시 기름을 붓고 유향을 놓았습니다. 그런데 레5에서는 형편이 어려워 비둘기조차 드릴 수 없는 사람이 고운 가루 십분의 일 에바를 속죄제로 가져오도록 하면서 정반대로 명령합니다. ‘이는 속죄제인즉 위에 기름을 붓지 말며 유향을 놓지 말고.같은 고운 가루인데 왜 소제에서는 기름과 유향을 더하고, 속죄제에서는 그것들을 의도적으로 빼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는 놀랍게도 스베덴보리가 거의 그대로 답한 대목이 있습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137(29:40)은 여러 소제의 규정을 설명하다가 레5:11을 직접 인용합니다. 그리고 죄와 허물을 위한 제사의 소제에는 십분의 일 에바의 고운 가루를 사용하되 위에 기름이나 유향을 두지 않았다고 한 뒤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기름은 사랑의 선을, ‘유향은 그 선에 속한 진리를 의미하지만, 속죄제와 속건제는 악과 거기에서 나오는 거짓으로부터의 정결과 속죄를 의미하기 때문에, 그것들이 선 및 선에서 나오는 진리와 섞여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레5:11을 직접 다루는 원전이므로 이 부분의 상응은 매우 확실합니다.

 

이 설명을 이해하려면 레2를 잠시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2에서 고운 가루와 기름과 유향은 함께 있었습니다. 고운 가루는 선에서 나오는 진리와 연결되고, 기름은 사랑의 선을, 유향은 그 선에서 나오는 진리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소제는 주님께서 주신 선과 진리가 인간의 삶 안에서 결합되어 예배와 쓰임으로 나타나는 아름다운 상태를 보여 주었습니다. 거기에서는 기름과 유향이 빠질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들이 함께 있어야 소제가 나타내는 영적 상태가 온전히 표현됩니다.

 

그러나 레5의 상황은 다릅니다. 지금 인간은 이미 선과 진리가 조화롭게 결합된 상태를 표현하려고 제단 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안에서 악과 거짓이 드러났고 그것으로부터 정결하게 되어야 하는 상태에 있습니다. 그래서 같은 고운 가루를 가져오지만 거기에 기름과 유향을 넣지 않습니다. 이것은 사람에게 사랑의 선과 진리가 전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 이 제사가 표상하는 중심 사건이 선과 진리의 결합이 아니라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정결이라는 뜻입니다. 제사의 재료는 같아도 제사의 목적과 계열이 달라지면 상응의 배열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이 레위기의 상응을 읽는 데 매우 중요한 원칙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흔히 기름 = 사랑’, ‘유향 = 진리’, ‘고운 가루 = 진리와 같이 대응표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기계적으로 대입하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상응은 그렇게 단순한 암호풀이가 아닙니다. 무엇이 무엇과 함께 있는지, 어떤 제사 안에 놓여 있는지, 그 제사가 전체적으로 무엇을 표상하는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AC.10137의 설명이 바로 그 좋은 예입니다. 기름과 유향 자체는 선한 것을 표상하지만, 속죄제에서는 바로 그 선한 것들을 넣지 않는 까지 의미가 있습니다. 악과 거짓을 정결하게 하는 과정과 이미 정결해진 선과 진리의 상태를 뒤섞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거듭남에서도 매우 실제적입니다. 자기 안에서 악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 너무 빨리 그것을 좋은 것으로 포장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화를 내고도 정의를 위한 분노였다고 하고, 사람을 지배하려 하고도 사람을 사랑해서 그랬다고 하며, 인정받으려는 욕망을 주님의 영광을 위한 열심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악을 악 그대로 보지 못합니다. 속죄제의 고운 가루에 기름과 유향을 넣지 않는 장면은 영적으로 이런 혼합을 경계하는 모습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금 정결해야 할 것은 먼저 정결해야 합니다. 악을 선이라고 부르거나 거짓을 좋은 의도라고 포장하지 않고 주님의 빛 앞에서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레2와 레5의 차이는 매우 아름답습니다. 2에서는 고운 가루에 기름을 붓고 유향을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선과 진리가 결합되어 주님께 드려지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레5에서는 기름을 붓지 말며 유향을 놓지 말라고 하십니다. 지금은 악과 거짓으로부터 정결하게 되는 일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거듭남을 통해 이루어지는 선과 진리의 결합을 보여 주고, 다른 하나는 그 결합을 방해하는 악과 거짓을 제거하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서로 반대되는 제사가 아니라 거듭남이라는 하나의 큰 역사 안에서 서로 다른 일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왜 레위기의 그토록 사소해 보이는 규정 하나까지 함부로 지나칠 수 없는지를 보여 줍니다. ‘기름을 넣는다기름을 넣지 않는다’, ‘유향을 놓는다유향을 놓지 않는다의 차이 안에 인간의 거듭남에서 정결결합을 구별하는 아르카나가 숨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악과 거짓을 선과 진리로 위장하지 않고 드러내어 정결하게 하시며, 그렇게 깨끗하게 된 자리에서 비로소 선과 진리가 참으로 결합되게 하십니다. 5:11의 비어 있는 고운 가루는 그래서 결핍의 표상이 아니라, 거듭남의 질서를 정확하게 보여 주는 제물입니다. (SW.7 5 심화 4)

 

 

 

SW.7 심화 5, ‘모르고 지은 죄도 죄인가? - 무지와 이노센스, 그리고 책임의 문제’

SW.7 심화5. ‘모르고 지은 죄도 죄인가? - 무지와 이노센스, 그리고 책임의 문제’ 레5:17은 읽는 사람을 멈추게 하는 말씀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를 부지중에 범하여도 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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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7 심화 3, ‘죄를 깨닫고 자복한다는 것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할까?’

SW.7 심화3. ‘죄를 깨닫고 자복한다는 것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할까?’ 레4와 레5를 이어 읽으면 매우 중요한 변화가 보입니다. 레4에서 반복되는 말은 ‘그가 범한 죄를 깨달으면’이고, 레5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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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죄를 깨닫고 자복한다는 것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할까?’

 

4와 레5를 이어 읽으면 매우 중요한 변화가 보입니다. 4에서 반복되는 말은 그가 범한 죄를 깨달으면이고, 5에 들어오면 잘못하였노라 자복하고가 더해집니다. 깨달음에서 자복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성경 본문 자체도 죄를 인식한 뒤 그것을 고백하도록 명시합니다.

 

그러나 죄를 깨닫는 자복하는 은 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기 잘못을 알아도 그것을 자기 죄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가 말을 심하게 것은 맞지만 사람이 먼저 시작했다’, ‘내가 거짓말한 것은 맞지만 상황상 어쩔 없었다’, ‘내가 화낸 것은 맞지만 그것은 정의로운 분노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악을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자복은 이 방어를 내려놓는 데서 시작합니다. ‘ 사람이 무엇을 했는가보다 먼저 나는 주님 앞에서 무엇을 했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을 무조건 비난하는 자기혐오와 다릅니다. 오히려 매우 정확한 자기 인식입니다. 내가 하지 않은 죄까지 내 것으로 짊어질 필요는 없지만 내가 실제로 행한 악은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지 않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회개 교리에서 이것은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회개는 죄를 입술로 열거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인간은 자기 삶을 살피고, 악을 발견하고, 그것을 죄라고 인정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실제로 그 악을 피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자복의 진실성은 결국 다음 삶에서 드러납니다. 같은 상황이 다시 왔을 때 이전과 다른 선택을 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죄를 깨닫게 되는 순간은 두려운 순간이면서 동시에 은혜의 순간입니다. 주님께서 인간에게 악을 보여 주시는 목적은 그 사람을 절망시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악은 피할 수 없지만 보이기 시작한 악은 주님의 도움을 받아 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듭남이 진행될수록 자기 자신이 점점 더 완벽해 보이기보다 오히려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미세한 자기애와 세상 사랑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빛이 밝아졌기 때문에 먼지가 더 잘 보이는 것입니다.

 

5는 바로 그 순간에 자복하라고 합니다. 숨기지 말고, 다른 이름을 붙이지 말고, 남의 탓으로 돌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미움이면 미움이라고, 거짓이면 거짓이라고, 지배욕이면 지배욕이라고 주님 앞에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것을 피하려는 실제 싸움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자복은 저는 형편없는 죄인입니다라는 막연한 자기비하보다 훨씬 구체적입니다. ‘주님, 저는 사람을 미워하고 있습니다’, ‘제가 인정받고 싶은 마음 때문에 일을 했습니다’, ‘제가 손해 보기 싫어서 진실을 숨겼습니다처럼 말씀의 빛에서 발견된 실제 악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가 구체적일수록 무엇을 피해야 하는지도 구체적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레5 후반의 속건제가 보여 주듯 자복은 마침내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내가 잘못한 것을 인정했다면 가능한 경우 바로잡습니다. 그래서 레5에는 매우 아름다운 하나의 흐름이 있습니다. ‘깨닫는다 자복한다 피한다 바로잡는다.이것은 죄책감의 계단이 아니라 자유의 계단입니다. 한 단계씩 올라갈수록 악은 인간을 붙잡을 힘을 잃고 주님의 선과 진리가 그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죄를 깨닫는 것은 거듭남의 실패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죄를 전혀 보지 못하는 것이 더 위험합니다. 주님께서 보여 주신 것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잘못하였노라자복하며, 그 악을 죄로 여겨 피하고, 가능한 것은 바로잡을 때 인간은 실제로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5의 자복은 입술에서 끝나는 고백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돌리는 고백입니다. (SW.7 5 심화 3)

 

 

 

SW.7 심화 4, ‘왜 속죄제의 고운 가루에는 기름과 유향을 넣지 않았을까?’

SW.7 심화4. ‘왜 속죄제의 고운 가루에는 기름과 유향을 넣지 않았을까?’ 레5:11은 레2를 이미 읽은 사람이라면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레2의 소제에서는 고운 가루에 반드시 기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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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7 심화 2, ‘왜 자복만으로 끝나지 않고 보상까지 해야 했을까?’

SW.7 심화2. ‘왜 자복만으로 끝나지 않고 보상까지 해야 했을까?’ 레5 전반부에는 ‘잘못하였노라 자복하고’라는 말씀이 나오지만 후반부의 속건제에 들어가면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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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자복만으로 끝나지 않고 보상까지 해야 했을까?’

 

5 전반부에는 잘못하였노라 자복하고라는 말씀이 나오지만 후반부의 속건제에 들어가면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성물에 잘못을 범한 사람은 그 잘못을 보상하고 거기에 오분의 일을 더하여제사장에게 주어야 합니다. 실제 손상이 발생했다면 실제 회복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회개를 마음의 상태로만 생각하면 우리는 내가 잘못했다는 것을 깨달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으니 끝났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나의 악이 다른 사람이나 어떤 질서에 실제 손상을 입혔다면 그 결과는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훔친 물건은 여전히 상대에게 없고, 거짓말로 훼손된 명예는 여전히 손상되어 있으며, 내가 회피한 책임은 누군가가 대신 짊어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실한 회개는 가능한 경우 그 손상을 바로잡는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이 점에서 속건제는 매우 실제적인 거듭남의 제사입니다. 회개가 진실한지는 감정의 강도만으로 알 수 없습니다. 때로는 눈물을 많이 흘리고 죄책감을 크게 느끼면서도 실제 행동은 하나도 바뀌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감정 표현은 크지 않아도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고 돌려줄 것을 돌려주며 다시 같은 악을 행하지 않도록 삶을 바꾸는 사람이 있습니다. 5의 속건제는 후자의 방향을 가리킵니다.

 

특히 오분의 일을 더하여라는 말씀이 흥미롭습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649(6:15)는 레5:16을 직접 인용하면서 보상 후 더해지는 오분의 일을 말씀에서 다섯이 어떤 것 또는 조금을 의미하는 사례와 연결합니다. 그리고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1757-1759, AE) 548(9:5)은 레5:16을 비롯하여 율법에서 오분의 일을 더하도록 한 여러 경우를 직접 열거하면서, 양과 관련된 이 오분의 충분한 만큼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규정을 단순한 고대의 벌금제도로만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잘못을 대충 덮어 두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로잡기에 충분하도록 회복하려는 태도와 연결하여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을 모든 잘못에는 반드시 20퍼센트를 갚아야 한다는 식으로 오늘날 문자적으로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상응의 핵심은 숫자를 현대의 계산식으로 옮기는 데 있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회개가 최소한의 면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과했으니 됐지’, ‘원금은 돌려줬으니 됐지가 아니라 내가 일으킨 손상을 진실하게 바라보고 가능한 범위에서 충분히 바로잡으려는 마음입니다.

 

물론 모든 손상을 되돌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에게 직접 사과할 수 없을 수도 있고, 오래전의 말 한마디가 남긴 상처를 완전히 없앨 수도 없습니다. 이런 경우 회개가 불가능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선을 찾는 것입니다. 같은 악을 반복하지 않고, 비슷한 상황에서 이제는 진실을 선택하며, 과거에 해쳤던 종류의 이웃을 이제는 돕는 방향으로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불가능한 과거 복원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자유 안에서 삶의 방향이 실제로 바뀌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레5에서 자복보상은 서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자복은 속의 인정이고 보상은 가능한 경우 그 인정이 겉의 삶으로 내려온 것입니다. 속 사람에서 내가 잘못했습니다라고 인정한 것이 겉 사람의 행동에서는 그러므로 내가 바로잡겠습니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계속 살펴보고 있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결합입니다.

 

5의 속건제는 우리에게 아주 간단하지만 피하기 어려운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 용서를 구한 가운데 아직 내가 바로잡을 있는 것이 남아 있는가?입니다. 있다면 회개는 거기까지 가야 합니다. 주님의 사함은 책임으로부터 도망치게 하는 은혜가 아니라, 진실을 직면하고 가능한 것을 바로잡으며 새로운 삶을 시작할 힘을 주시는 은혜입니다. ‘잘못하였노라 자복하고에서 시작된 회개가 잘못을 보상하되에까지 이르는 것, 그것이 레5가 보여 주는 살아 있는 거듭남의 모습입니다. (SW.7 5 심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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