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ord, and Its Spiritual or Internal Sense

 

From Arcana Coelest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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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필요성과 탁월성 The necessity and excellence of the Word.

 

자연의 빛으로는 주님에 관하여, 천국과 지옥에 관하여, 인간이 죽은 후의 생명에 관하여, 그리고 인간이 영적이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신적 진리들에 관하여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n. 8944, 10318–10320). 이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생각해 보면 분명해집니다. 곧 많은 사람들, 심지어 학식 있는 사람들까지도, 말씀이 있는 곳에서 태어나 그것에 의해 가르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것들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n. 10319). 인간이 천국을 위하여 태어났기 때문에 (n. 1775), 하늘로부터의 어떤 계시가 반드시 필요하였고, 그래서 세상의 모든 시대마다 계시가 있었습니다 (n. 2895). From the light of nature nothing is known concerning the Lord, concerning heaven and hell, concerning the life of man after death, nor concerning the Divine truths by which man acquires spiritual and eternal life (n. 8944, 10318, 10319, 10320). This may appear manifest from the consideration, that many, and among them men of learning, do not believe those things, although they are born where the Word is, and are thereby instructed concerning them (n. 10319). Therefore it was necessary that there should be some revelation from heaven because man was born for heaven (n. 1775). Therefore in every age of the world there has been a revelation (n. 2895).

 

이 지상에서 차례로 주어진 여러 종류의 계시에 대하여는 n.10355,10632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홍수 이전, 이른바 황금시대라 불리던 태고인들에게는 직접적인 계시(an immediate revelation)가 있었고, 그로부터 신적 진리(Divine truth)가 그들의 마음에 새겨졌습니다 (n. 2896). 홍수 이후에 존재하였던 고대 교회들에는 역사적이고 예언적인 말씀(a historical and prophetical Word)이 있었습니다 (n. 2686, 2897). 그 교회들에 관하여는 새 예루살렘과 그 천적 교리’(New Jerusalem and Its Heavenly Doctrine, n. 247)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 역사적 부분은 여호와의 전쟁들(the Wars of Jehovah)이라 하였고, 예언적 부분은 선포들(Enunciations)이라 하였습니다 (n. 2897). 그 말씀은 영감(inspiration)에 있어서 우리 말씀과 같았으나, 그 교회들에 맞게 조정되어 있었습니다 (n. 2897). 그 말씀은 모세에 의하여 언급되었으나 (n. 2686, 2897), 지금은 잃어버려졌습니다 (n. 2897). 또한 발람의 예언들(the prophecies of Balaam)에서 보이는 것처럼 다른 이들에게도 예언적 계시(Prophetical revelations)가 주어졌습니다 (n. 2898). Of the various kinds of revelation which have successively been made on this earth (n. 10355, 10632). To the most ancient men, who lived before the flood, whose time was called the golden age, there was an immediate revelation, and thence Divine truth was inscribed on their hearts (n. 2896). The ancient churches, which existed after the flood, had a historical and prophetical Word (n. 2686, 2897): concerning which churches see New Jerusalem and Its Heavenly Doctrine (n. 247). Its historical parts were called the Wars of Jehovah, and its prophetical parts, Enunciations (n. 2897). That Word as to inspiration was like our Word, but accommodated to those churches (n. 2897). It is mentioned by Moses (n. 2686, 2897). But that Word is lost (n. 2897). Prophetical revelations were also made to others, as appears from the prophecies of Balaam (n. 2898).

 

말씀은 그 모든 부분과 각각의 세부(particular part)에 이르기까지 신적(Divine)입니다 (n. 639, 680, 10321, 10637). 말씀은 점 하나와 획 하나(every point and iota)에 이르기까지 신적이며 거룩하다는 것이 경험을 통해 증명되었습니다 (n. 1349). 오늘날 말씀이 획 하나에 이르기까지 영감되었다고 설명되는 방식에 관하여는 n.1886에서 볼 수 있습니다. The Word is Divine in all and every particular part (n. 639, 680, 10321, 10637). The Word is Divine and holy as to every point and iota, from experience (n. 1349). How it is explained at this day that the Word is inspired as to every iota (n. 1886).

 

교회는 특별히 말씀이 있는 곳, 그리고 그 말씀을 통해 주님이 알려지고 신적 진리들이 계시되는 곳에 존재합니다 (n. 3857, 10761). 그러나 말씀이 있는 곳에서 태어나고, 그로 말미암아 주님이 알려지는 곳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곧 교회에 속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에 속하는 자들은 말씀에서 나온 진리들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거듭난 자들, 곧 그 안의 진리들에 따라 사는 자들, 따라서 사랑과 신앙의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 (n. 6637, 10143, 10153, 10578, 10645, 10829). The church is especially where the Word is, and where the Lord is thereby known, and Divine truths are revealed (n. 3857, 10761). But it does not follow from thence, that they are of the church, who are born where the Word is, and where the Lord is thereby known; but they who, by means of truths from the Word, are regenerated by the Lord, who are they who live according to the truths therein, consequently who lead a life of love and faith (n. 6637, 10143, 10153, 10578, 10645, 10829).

 

 

해설

 

이 글은 ‘백마’라는 상징 논의를 넘어, 왜 말씀이 반드시 필요한가라는 근본 문제로 나아갑니다. 자연의 빛, 곧 인간의 이성만으로는 주님, 천국, 사후 생명,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진리를 알 수 없다고 단정합니다. 이는 이성의 부정이 아니라, 이성의 한계 규정입니다. 인간은 천국을 위하여 태어났으나, 천국에 관한 지식은 하늘로부터 와야 합니다. 그러므로 계시는 선택이 아니라 필연입니다.

 

여기서 계시의 역사적 연속성이 제시됩니다. 태고교회에는 직접 계시가 있었고, 진리가 마음에 새겨졌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함에 따라 외적 말씀이 필요해졌고, 홍수 이후의 고대교회에는 역사적, 예언적 형태의 말씀이 주어졌습니다. 그 말씀이 지금은 사라졌다는 언급은, 계시가 한 번으로 끝나는 사건이 아니라 시대마다 주어졌음을 보여 줍니다. 이는 계시의 점진성과 섭리적 질서를 강조합니다.

 

말씀이 ‘점 하나와 획 하나까지’ 신적이라는 선언은 내적 의미 교리의 토대입니다. 만일 말씀의 일부만 신적이라면, 내적 의미도 부분적일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세부가 신적이라면, 모든 세부가 영적 의미를 지닙니다. 이는 문자 자체를 경시하지 않으면서도, 그 안에 무한한 깊이가 있음을 말합니다. 내적 의미는 문자와 분리된 다른 책이 아니라, 문자 속에 내재한 차원입니다.

 

교회의 정의도 재정의됩니다. 교회는 지리적 공간이나 제도적 조직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 주님이 알려지고 그 진리에 따라 사는 사람들의 상태입니다. 단순히 말씀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진리로 거듭나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백마’는 단지 이해의 상징이 아니라, 교회의 생명 조건입니다. 이해가 열릴 때 교회가 살아 있습니다.

 

이 글은 계시, 말씀, 교회, 거듭남을 하나의 구조로 연결합니다. 계시는 인간이 천국을 위해 태어났기 때문에 주어졌고, 말씀은 그 계시의 기록이며, 교회는 그 말씀에 따라 사는 자들의 공동체이며, 거듭남은 그 진리를 삶으로 실천하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탁월성은 단지 권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데 있습니다.

 

 

 

WH.5, ‘백마’(the White Horse),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the Arcana Coelestia)를 기록한 방식

말씀과 그 영적, 즉 내적 의미The Word and its spiritual or internal sense (sections 1–5) 5 ‘백마’(the White Horse)가 말씀의 영적 곧 내적 의미에 관한 이해를 뜻하기 때문에, 말씀과 그 내적 의미에 관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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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그 영적, 즉 내적 의미

The Word and its spiritual or internal sense (sections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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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the White Horse)가 말씀의 영적 곧 내적 의미에 관한 이해를 뜻하기 때문에, 말씀과 그 내적 의미에 관하여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the Arcana Coelestia)에서 밝혀진 몇 가지 사항들을 여기에 덧붙입니다. 왜냐하면 그 저작에서는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모든 내용이 말씀의 영적 곧 내적 의미에 따라 해설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Since “the White Horse” signifies the understanding of the Word as to its spiritual or internal sense, those particulars concerning the Word and that sense, which are shown in the Arcana Coelestia, are here subjoined: for in that work the whole contents of Genesis and Exodus are explained according to the spiritual or internal sense of the Word.

 

 

해설

 

이 글은 ‘백마’ 전체 구조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지금까지는 ‘말 = 이해’라는 상응을 성경과 영계의 표상으로 증명해 왔다면, 이제는 그 이해가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 주겠다는 선언입니다. 곧 ‘백마’는 단순한 상징 해설이 아니라, 이미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안에서 실천적으로 구현된 해석 방법의 이름입니다. 이해는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말씀 전체를 꿰뚫어 보는 실제적인 능력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절제된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는 새로운 체계를 제시한다고 말하지 않고, 이미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내적 의미로 해설한 작업을 참고하라고 말합니다. 이는 ‘백마’의 교리가 단지 상징적 주장에 그치지 않고, 방대한 본문 주해 작업 속에서 검증되었음을 암시합니다. 창세기와 출애굽기 전체가 영적 의미에 따라 설명될 수 있었다면, 말씀 전체도 동일한 법칙 아래 이해될 수 있다는 전제가 서 있습니다.

 

목회적으로 보아도 이 문장은 의미심장합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는 몇 구절에만 적용되는 특별한 비밀이 아니라, 성경 전반에 흐르는 질서라는 점을 밝히기 때문입니다. 이해가 백마라면,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는 그 말이 실제로 달린 길과 같습니다. 다시 말해, 백마는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말씀을 새롭게 읽는 방식 그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WH.5는 일종의 연결 고리입니다. 상징의 증명에서 실제 해석으로, 선언에서 실천으로 넘어가는 지점입니다. ‘백마’가 말씀의 내적 의미에 대한 이해라면, 이제 독자는 그 이해가 어떻게 본문 전체를 열어 가는지를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통해 확인하게 됩니다. 이는 교회의 마지막 때에 열릴 새 이해가 추상적 계시가 아니라, 구체적 본문 해석으로 나타난다는 점을 보여 주는 매우 간결하면서도 결정적인 문장입니다.

 

 

 

WH.6, '말씀의 필요성과 탁월성'

The Word, and Its Spiritual or Internal Sense From Arcana Coelestia 6 말씀의 필요성과 탁월성 The necessity and excellence of the Word. 자연의 빛으로는 주님에 관하여, 천국과 지옥에 관하여, 인간이 죽은 후의 생명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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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4, '말, 병거 등 상응 지식은 인류 공통 유산'

말씀과 그 영적, 즉 내적 의미The Word and its spiritual or internal sense (sections 1–5) 4 ‘병거’(chariots)와 ‘말’(horses)이 이러한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은 고대 교회들에서는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왜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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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거(chariots)(horses)이 이러한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은 고대 교회들에서는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교회들은 표상 교회들(representative churches)이었고, 그들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는 상응과 표상의 학문(the science of correspondences and representations)이 모든 학문 중 으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이해를 뜻한다는 의미는 그 교회들로부터 주변의 지혜로운 이들, 심지어 그리스에 이르기까지 전해졌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지혜와 총명의 신(their God of wisdom and intelligence)을 태양에 두고 그것을 묘사할 때, 불의 병거와 네 마리의 불말을 그것에 돌렸습니다. 또한 바다의 신(the God of the sea)을 묘사할 때에는, 바다가 이해에서 나온 학문들(sciences derived from the understanding)을 뜻하기 때문에, 그에게도 말들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이해로부터 학문이 나오는 기원을 묘사할 때에는, 날개 달린 말을 그려, 그 말이 발굽으로 샘을 터뜨리고, 그 샘가에 학문들(the sciences)이라 불리는 아홉 처녀가 앉아 있는 모습으로 표현하였습니다. That such is the signification of “chariots” and “horses” was well known in the ancient churches; for those churches were representative churches, and with those who were in them, the science of correspondences and representations was the chief of all sciences. The signification of the horse, as being understanding, was derived by the wise round about, even to Greece, from those churches. Hence it was, when they would describe the sun, in which they placed their God of wisdom and intelligence, that they attributed to it a chariot and four horses of fire. And when they would describe the God of the sea, since by the sea were signified sciences derived from the understanding, that they also attributed horses to him. And when they would describe the origin of the sciences from the understanding, they represented it by a winged horse, which with its hoof broke open a fountain, at which sat nine virgins called the sciences.

 

이는 고대 교회들로부터 (the horse)은 이해를 뜻하고, ‘날개(wings)는 영적 진리를 뜻하며, ‘발굽(the hoof)은 이해에서 나온 학문적인 것을 뜻하고, ‘(a fountain)은 학문들이 흘러나오는 교리(doctrine from which sciences are derived)를 뜻한다는 지식을 전해 받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트로이 목마(the Trojan horse)로 불리는 것도 다른 의미가 아니라, 성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이해로 고안해 낸 인위적인 계책을 뜻합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고대인들에게서 전해진 방식에 따라 이해를 묘사할 때에는 날아다니는 말이나 페가수스로 형상화하는 것이 보통이며, 교리는 샘으로, 학문은 처녀들로 묘사합니다. 그러나 이 신비적 의미에서 이해를 뜻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더구나 이러한 상징들이 이방인들에게 고대 표상 교회들로부터 전해졌다는 사실은 더욱 알지 못합니다. For from the ancient churches they received the knowledge that “the horse” signifies the understanding; “wings,” spiritual truth; “the hoof,” what is scientific from the understanding; and “a fountain,” doctrine from which sciences are derived. Nor is anything else signified by “the Trojan horse,” than an artificial contrivance devised by their understanding for the purpose of destroying the walls. Even at this day, when the understanding is described after the manner received from those ancients, it is usual to figure it by a flying horse or Pegasus; so, likewise, doctrine is described by a fountain, and the sciences by virgins; but scarcely anyone knows that “the horse,” in the mystic sense, signifies the understanding; still less that those significatives were derived by the Gentiles from the ancient representative churches.

 

 

해설

 

이 글은 상응의 학문이 단지 성경 해석의 도구가 아니라, 인류 문명 전반에 영향을 미친 원형적 지식이었다는 점을 밝히는 대목입니다. 고대 교회는 자연과 영계 사이의 상응을 알고 있었고, 그 지식이 모든 학문의 기초였습니다. ‘말 = 이해’라는 상응은 그들 사이에서 자명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상징은 후대의 상상이 아니라, 잊혀진 지혜의 흔적입니다.

 

그리스 신화 속 태양신의 불병거와 네 말은 단순한 시적 장식이 아니라, 지혜와 총명의 근원이 하늘의 빛에서 나온다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태양은 사랑, 불은 그 열기, 말은 이해를 뜻합니다. 바다의 신에게 말이 귀속된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바다는 지식의 집합을 상징하며, 지식은 이해를 통해 정리됩니다. 그러므로 신화는 왜곡되었으나, 그 근저에는 상응의 잔재가 남아 있습니다.

 

날개 달린 말, 곧 페가수스가 발굽으로 샘을 터뜨리는 장면은 매우 깊은 상응을 담고 있습니다. 날개는 영적 진리, 말은 이해, 발굽은 이해의 제일 바깥 작용, 샘은 교리입니다. 곧 영적 진리로 상승한 이해가 교리의 원천을 열고, 그로부터 학문이 흘러나온다는 구조입니다. 아홉 처녀는 학문과 예술의 분화된 형태를 뜻합니다. 이는 고대 상응 지식이 신화적 상징으로 변형된 사례입니다.

 

트로이 목마 또한 이해로 고안된 계책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말이 단순한 전쟁 도구가 아니라, 전략적 지성을 상징하는 형상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이는 상응의 기억이 문화 속에 남아 있음을 보여 줍니다. 오늘날에도 이해를 날아오르는 말로, 교리를 샘으로, 학문을 처녀로 형상화하는 관습이 남아 있지만, 그 영적 기원은 거의 잊혔습니다.

 

이 글의 핵심은, 상응의 지식이 인류의 공통 유산이었다는 점입니다. 이방 문화의 상징도 근원적으로는 고대 표상 교회에서 유래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의미는 잊히고 형상만 남았습니다. 그러므로 ‘백마’의 교리는 새로운 발명이 아니라, 잃어버린 고대 지혜의 회복입니다. 이해는 언제나 말로, 교리는 병거로, 사랑은 불로 나타났습니다. 이것이 영계의 구조이며, 성경과 인류 문화 속에 동시에 흔적을 남긴 상응의 법칙입니다.

 

 

 

WH.3, 영계에서는 '이해'(the understanding)가 '말'(a horse)로 나타남

말씀과 그 영적, 즉 내적 의미The Word and its spiritual or internal sense (sections 1–5) 3 ‘말’(a horse)이 이해(the understanding)를 뜻하는 까닭은 다른 데서 온 것이 아니라, 영계의 표상들(the representatives in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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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horse)이 이해(the understanding)를 뜻하는 까닭은 다른 데서 온 것이 아니라, 영계의 표상들(the representatives in the spiritual world)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 세계에서는 말들이 자주 보이며, 말 위에 앉아 있는 사람들도 보이고, 또한 병거들도 보입니다. 거기서는 누구나 그것들이 지적이고 교리적인(intellectual and doctrinal) 것들을 뜻한다는 걸 압니다. 저는 어떤 이들이 자기 이해로부터 생각할(thinking from their understanding) , 그들이 마치 말을 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자주 관찰하였습니다. 그들의 사색(思索, meditation)이 다른 이들 앞에서 그렇게 표상되었으나, 그들 자신은 그것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That a horse signifies the understanding is from no other source than from the representatives in the spiritual world. In that world horses are frequently seen, and persons sitting upon horses, and also chariots; and there everyone knows that they signify intellectual and doctrinal things. I have often observed, when any were thinking from their understanding, that at such times they appeared as if riding on horses; their meditation was thus represented before others, they themselves not knowing it.

 

또한 그곳에는 교리의 진리(the truths of doctrine)에 관하여 이해로부터 생각하고 말하는 자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가 있습니다. 다른 이들이 그곳에 가까이 가면, 온 평원이 병거와 말들로 가득한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 광경을 보고 놀라는 새로 온 영들은, 그것이 그들의 지적 사유(intellectual thought)에서 비롯된 나타남임을 배우게 됩니다. 그 장소는 지성과 지혜의 모임(the assembly of the intelligent and the wise)이라 불립니다. There is also a place there, where many assemble who think and speak from the understanding concerning the truths of doctrine; and when others approach, they see the whole plain full of chariots and horses; and novitiate spirits, who wonder whence this is, are instructed that it is an appearance resulting from their intellectual thought. That place is called the assembly of the intelligent and the wise.

 

저는 또한 어떤 이들이 천국으로 들려 올라갈 때 밝은 말들과 불병거들(bright horses and chariots of fire)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그때 천국 교리의 진리들(the truths of heavenly doctrine) 안에서 가르침을 받아 지혜로워지고, 그렇게 천국으로 올려졌다는 표징(a sign)이었습니다. 그 광경을 보면서,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갈 때 사용된 불수레와 불말(왕하2:11, the chariot of fire and the horses of fire by which Elijah was taken up into heaven)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리고 엘리사의 사환이 눈이 열려 보았던 불말과 불병거(왕하6:17, the horses and chariots of fire)가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I have likewise seen bright horses and chariots of fire, when some were taken up into heaven, which was a sign that they were then instructed in the truths of heavenly doctrine, and became intelligent, and thus were taken up; on seeing which, it occurred to my mind, what is signified by “the chariot of fire and the horses of fire by which Elijah was taken up into heaven”; and what is signified by “the horses and chariots of fire” that were seen by the young man of Elisha, when his eyes were opened.

 

두 사람이 길을 가며 말하더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갈라놓고 엘리야가 회오리 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가더라 (왕하2:11)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왕하6:17)

 

 

해설

 

이 글은 매우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앞에서는 성경 구절을 통해 ‘말 = 이해’라는 상징을 증명했다면, 여기서는 그 근원을 영계의 실재에서 찾습니다. 곧 성경의 상징은 임의적 비유가 아니라, 영계에서 실제로 그렇게 보이는 표상에서 기원한다는 주장입니다. 영계에서는 사유와 애정이 외적 형상으로 나타납니다. 이해로 생각하는 이는 말 위에 있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은 이해의 상징이 아니라, 이해의 자연스러운 형상입니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그 표상이 본인은 모르는 사이에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는 영계가 인간의 내면 상태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세계임을 보여 줍니다. 인간은 자신의 사유가 어떻게 보이는지 알지 못하지만, 영계에서는 그것이 외형으로 나타납니다. 이해 중심의 사유는 말, 교리적 체계는 병거로 나타납니다. 병거는 구조화된 교리, 말은 그 교리를 움직이게 하는 이해입니다.

 

지성과 지혜의 모임’이라는 장소는 상징적이면서도 실제적인 영적 상태를 보여 줍니다. 진리를 탐구하는 자들의 공동체는 평원에 가득한 말과 병거로 나타납니다. 새로 온 영들이 그것을 보고 놀란다는 것은, 아직 영적 상응의 법칙을 모르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 장면은 성경 해석의 근거가 단순한 추론이 아니라, 영적 경험에 기초해 있음을 보여 줍니다.

 

밝은 말들과 불병거는 천국 교리의 진리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상징합니다. ‘’은 사랑, ‘’은 이해, ‘병거’는 교리입니다. 그러므로 불말과 불병거는 사랑으로 생동하는 이해와 교리를 뜻합니다. 이것이 엘리야 승천 사건의 영적 의미와 연결됩니다. 엘리야는 말씀을 표상하였고, 불말과 불병거는 말씀의 이해와 교리 안에서 하늘로 올려짐을 뜻합니다.

 

엘리사의 사환이 눈이 열려 보았다는 표현은, 영적 시야의 개방을 뜻합니다. 눈이 열릴 때 비로소 불말과 불병거가 보입니다. 이는 이해가 열릴 때, 교리의 내적 생명이 보인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이 단락은 ‘백마’의 교리를 단지 성경 본문에서만이 아니라, 영계의 구조 자체에서 근거 짓는 매우 핵심적인 부분입니다. 말은 이해이며, 이해는 하늘의 빛을 운반하는 수단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내적 의미, 곧 속뜻이 열리는 것은 곧 인간 이해의 승격, 업그레이드를 뜻합니다.

 

 

 

WH.4, '말, 병거 등 상응 지식은 인류 공통 유산'

말씀과 그 영적, 즉 내적 의미The Word and its spiritual or internal sense (sections 1–5) 4 ‘병거’(chariots)와 ‘말’(horses)이 이러한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은 고대 교회들에서는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왜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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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2, ‘말’(a horse)은 이해(the understanding)를, ‘말 탄 자’(rider)는 지혜로운 사람(one who is intelligent

말씀과 그 영적, 즉 내적 의미The Word and its spiritual or internal sense (sections 1–5) 2 말씀의 예언서들에는 ‘말’이 매우 자주 언급되지만, 지금까지 ‘말’(a horse)이 이해(the understanding)를 뜻하고,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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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예언서들에는 이 매우 자주 언급되지만, 지금까지 (a horse)이 이해(the understanding)를 뜻하고,탄 자(rider)가 지혜로운 사람(one who is intelligent)을 뜻한다는 사실은 아무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아마도 이 영적 의미에서 그러한 것을 뜻하며, 따라서 말씀 안에서도 그러하다는 것이 이상하고 놀랍게 보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임은 말씀 안의 많은 구절들로부터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중 몇 가지만 여기에서 인용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의 예언에서 단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In the prophetical parts of the Word mention is very often made of the horse, but heretofore no one has known that “a horse” signifies the understanding, and his “rider” one who is intelligent; and this possibly, because it seems strange and wonderful, that by “a horse” such a thing should be meant in the spiritual sense, and thence in the Word. But nevertheless that it is so, may evidently appear from many passages therein; some of which only I will here adduce. In the prophecy of Israel, it is said of Dan:

 

17단은 길섶의 뱀이요 샛길의 독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를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18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49:17, 18) Dan is a serpent upon the way, an arrow-snake upon the highway, that biteth the horse’s heels, so that his rider shall fall backward (Gen. 49:17, 18).

 

이스라엘 지파 중 하나에 관한 이 예언이 무엇을 뜻하는지, ‘(a serpent)이 무엇을 뜻하고, ‘(a horse)과 그 탄 자(rider)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지 못하면 아무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그 안에 어떤 영적 의미가 들어 있음을 압니다. 각 표현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에서 이 예언을 해설한 곳(n. 6398–6401)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박국서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No one can understand what this prophecy concerning one of the tribes of Israel signifies unless he knows what is signified by “a serpent,” and what by “a horse” and his “rider”; everyone, however, knows that there is something spiritual involved therein; what therefore each expression signifies, may be seen in Arcana Coelestia (n. 6398–6401), where this prophecy is explained. In Habakkuk:

 

8여호와여 주께서 말을 타시며 구원의 병거를 모시오니 강들을 분히 여기심이니이까 강들을 노여워하심이니이까 바다를 향하여 성내심이니이까, 15주께서 말을 타시고 바다 곧 큰 물의 파도를 밟으셨나이다 (3:8, 15) O God, thou didst ride upon thy horses. Thy chariots are salvation. thou didst tread in the sea with thy horses (Hab. 3:8, 15).

 

여기서 말들(horses)이 영적인 것을 뜻함은 분명합니다.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언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다른 의미라면, ‘하나님이 그의 말들을 타신다(God rides upon his horses)거나 그의 말들로 바다를 밟으신다(and that he treads upon the sea with his horses)는 말이 무엇을 뜻하겠습니까? 스가랴서에서도 이와 같이 말합니다. That “horses” here signify what is spiritual, is evident, for they are said concerning God; in any other sense, what could be meant by saying that “God rides upon his horses, and that he treads upon the sea with his horses?” In like manner in Zechariah:

 

그 날에는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여호와의 전에 있는 모든 솥이 제단 앞 주발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14:20) In that day, there shall be upon the bells of the horses, holiness unto Jehovah (Zech. 14:20).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모든 말을 쳐서 놀라게 하며 그 탄 자를 쳐서 미치게 하되 유다 족속은 내가 돌보고 모든 민족의 말을 쳐서 눈이 멀게 하리니 (12:4) In that day, saith Jehovah, I will smite every horse with astonishment, and his rider with madness; and I will open mine eyes upon the house of Judah, and will smite every horse of the people with blindness (Zech. 12:4).

 

여기서는 교회의 황폐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데, 이는 더 이상 어떠한 진리의 이해도 남아 있지 않을 때 일어나는 상태입니다. 그 상태가 말과 그 탄 자(the horse and his rider)로 묘사됩니다. 만일 다른 의미라면, ‘모든 말을 놀라게 한다(smiting every horse with astonishment)거나 백성의 말을 눈멀게 한다(smiting the horse of the people with blindness)는 말이 교회와 무슨 관련이 있겠습니까? 욥기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It treats there of the vastation of the church, which takes place when there no longer remains the understanding of any truth; and which is described thus by “the horse and his rider”; what else could be the meaning of “smiting every horse with astonishment,” and of “smiting the horse of the people with blindness”? What has this to do with the church? In Job:

 

17이는 하나님이 지혜를 베풀지 아니하셨고 총명을 주지 아니함이라 18그러나 그것이 몸을 떨쳐 뛰어갈 때에는 말과 그 위에 탄 자를 우습게 여기느니라 19말의 힘을 네가 주었느냐 그 목에 흩날리는 갈기를 네가 입혔느냐 (39:17-19) God hath caused her to forget wisdom, neither hath he imparted to her intelligence: what time she lifteth up herself on high, she scorneth the horse and his rider (39:17–19 seq.).

 

여기서 (the horse)이 이해를 뜻함은 분명합니다. 다윗의 시편에서도 말하기를, That “the horse” here signifies the understanding, is manifestly evident. In like manner in David, where it is said:

 

왕은 진리와 온유와 공의를 위하여 왕의 위엄을 세우시고 병거에 오르소서 왕의 오른손이 왕에게 놀라운 일을 가르치리이다 (45:4) He rideth upon the word of truth (Ps. 45:4).

 

또한 다른 많은 구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나아가, 왜 엘리야와 엘리사가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the chariot of Israel and the horsemen thereof)이라 불렸는지, 또 왜 엘리사의 사환이 산에 불말과 불병거가 가득한 것을 보았는지(the boy of Elisha saw the mountain full of horses and chariots of fire), ‘병거(chariots)가 무엇을 뜻하고, ‘엘리야와 엘리사(Elijah and Elisha)가 무엇을 표상하였는지를 알지 못하면 아무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에게 And in many other passages. Moreover, who can know the reason why Elijah and Elisha were called “the chariot of Israel and the horsemen thereof”; and why “the boy of Elisha saw the mountain full of horses and chariots of fire”; except it be known what is signified by “chariots,” and what was represented by “Elijah and Elisha”? For Elisha said to Elijah:

 

11두 사람이 길을 가며 말하더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갈라놓고 엘리야가 회오리 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가더라 12엘리사가 보고 소리 지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하더니 다시 보이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엘리사가 자기의 옷을 잡아 둘로 찢고 (왕하2:11, 12) My father, my father, the chariot of Israel and the horsemen thereof (2 Kings 2:11, 12).

 

요아스 왕도 엘리사에게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And Joash the king said to Elisha:

 

엘리사가 죽을 병이 들매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가 그에게로 내려와 자기의 얼굴에 눈물을 흘리며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 하매 (왕하13:14) My father, my father, the chariot of Israel and the horsemen thereof (2 Kings 13:14).

 

그리고 엘리사의 사환에 대한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And, speaking of the boy of Elisha, it is said: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왕하6:17) Jehovah opened the eyes of the boy of Elisha, and he saw and behold the mountain was full of horses and chariots of fire round about Elisha (2 Kings 6:17).

 

엘리야와 엘리사가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the chariot of Israel and the horsemen thereof)이라 불린 이유는 그들이 주님을 말씀에 관하여 표상하였기(they both represented the Lord as to the Word) 때문이며, ‘병거(a chariot)는 말씀에서 나온 교리(doctrine from the Word), ‘마병’(horsemen)은 지성(intelligence)을 뜻합니다. 엘리야와 엘리사가 말씀에 관한 주님을 표상하였다는 것은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에서(n. 5247, 7643, 8029, 9327) 볼 수 있으며, ‘병거가 말씀에서 나온 교리를 뜻한다는 것도 그곳에서(n. 5321, 8215) 볼 수 있습니다. The reason why Elijah and Elisha were called “the chariot of Israel and the horsemen thereof” is that they both represented the Lord as to the Word, and “a chariot” signifies doctrine from the Word, and “horsemen” intelligence. That “Elijah” and “Elisha” represented the Lord as to the Word may be seen in Arcana Coelestia (n. 5247, 7643, 8029, 9327). And that “chariots” signify doctrine drawn from the Word (n. 5321, 8215).

 

 

해설

 

이 글은 ‘’이 이해를 뜻한다는 핵심 명제를 본격적으로 성경 전체에서 증명하기 시작하는 부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상징을 제안하는 것이 아니라, 예언서 전반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의 용례를 통해 일관된 영적 법칙이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 주려 합니다. ‘’은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인간의 지적 능력, 곧 진리를 파악하는 이해력을 표상합니다. 그리고 ‘그 탄 자’는 그 이해를 실제로 사용하는 지성적 주체를 뜻합니다.

 

창세기 49장에서 단에 대한 예언은 문자 그대로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입니다. 그러나 ‘’이 감각적 추론을, ‘말굽을 문다’는 것이 이해의 제일 바깥 부분을 공격하는 것을, ‘탄 자를 뒤로 떨어뜨린다’는 것이 지성을 전복시키는 상태를 뜻한다고 보면 그 영적 구조가 드러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성경의 난해함이 상징 체계의 부재가 아니라, 상징 체계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임을 암시합니다.

 

하박국과 스가랴의 구절들은 더욱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말을 타신다’는 것은 문자적으로는 부적절한 표현입니다. 그러나 이해를 뜻한다고 보면, 주님께서 진리의 이해를 통해 역사하신다는 의미가 됩니다. 스가랴에서 ‘말을 치신다’거나 ‘눈멀게 하신다’는 것은 교회의 황폐, 곧 진리 이해의 상실을 묘사하는 상징입니다. 교회가 무너질 때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것은 외적 제도가 아니라, 진리에 대한 올바른 이해입니다.

 

욥기에서 ‘말과 그 탄 자를 비웃는다’는 표현은 이해와 지성을 경시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는 영적 교만이나 감각적 자만의 상태를 묘사합니다. 이해는 하늘로부터 오는 빛인데, 그것을 조롱하는 것은 빛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은 단순한 힘이 아니라, 하늘의 빛을 운반하는 기능을 합니다.

 

엘리야와 엘리사가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라 불린 것은 매우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병거는 교리, 말은 이해, 마병은 지성입니다. 두 선지자는 말씀을 대표하였고, 그러므로 그들을 병거와 마병이라 부른 것입니다. 엘리사의 사환이 본 불말과 불병거는 하늘의 보호를 상징할 뿐 아니라, 하늘의 교리와 이해가 주님의 종을 둘러싸고 있음을 뜻합니다.

 

이 모든 인용은 하나의 결론으로 모입니다. ‘’은 이해이며, 그 이해는 교회의 생명과 직결됩니다. 이해가 밝으면 교회가 살아 있고, 이해가 황폐하면 교회도 황폐합니다. 그러므로 ‘백마’의 계시는 단지 상징 해설이 아니라, 말씀의 내적 의미가 열림으로써 이해가 새롭게 회복되는 사건을 뜻합니다. 이는 교회의 회복과 직결되는 주제입니다.

 

 

 

WH.3, 영계에서는 '이해'(the understanding)가 '말'(a horse)로 나타남

말씀과 그 영적, 즉 내적 의미The Word and its spiritual or internal sense (sections 1–5) 3 ‘말’(a horse)이 이해(the understanding)를 뜻하는 까닭은 다른 데서 온 것이 아니라, 영계의 표상들(the representatives in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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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1, '말씀과 그 영적, 즉 내적 의미' (WH.1-5)

백마(白馬) The White Horse Mentioned in Revelation 19(1758, 1769) 말씀과 그 영적, 즉 내적 의미The Word and its spiritual or internal sense (sections 1–5) 1 ‘요한계시록’에서 말씀은 그 영적, 곧 내적 의미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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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白馬)

The White Horse Mentioned in Revelation 19

(1758, 1769)

 

 

말씀과 그 영적, 즉 내적 의미

The Word and its spiritual or internal sense (sections 1–5)

 

1

 

요한계시록에서 말씀은 그 영적, 곧 내적 의미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In the book of Revelation the Word is thus described as to its spiritual or internal sense:

 

11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12그 눈은 불꽃 같고 그 머리에는 많은 관들이 있고 또 이름 쓴 것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 13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14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16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19:11-14, 16) I saw heaven opened, and behold a white horse, and he that sat upon him was called faithful and true, and in justice he doth judge and make war. His eyes were as a flame of fire; and upon his head were many diadems; and he hath a name written that no one knew but he himself. And he was clothed with a vesture dipped in blood; and his name is called the Word of God. And the armies which were in the heavens followed him upon white horses, clothed in fine linen white and clean. And he hath upon his vesture and upon his thigh a name written, King of kings and Lord of lords (19:11–14, 16).

 

이 표현들 각각이 무엇을 포함하는지는 내적 의미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모든 표현은 어떤 점에서든 표상적이며 상징적입니다.하늘이 열렸다(heaven was opened)는 것, ‘백마(白馬, a white horse)가 있었다는 것, ‘그 위에 앉으신 이가 있었다(there was one sitting upon him)는 것, ‘의로 심판하고 싸운다(in justice he doth judge and make war)는 것, ‘그 눈이 불꽃 같다(his eyes were as a flame of fire)는 것, ‘그 머리 위에 많은 면류관이 있다(on his head were many diadems)는 것, ‘자기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이름이 있다(he had a name that no man knew but he himself)는 것, ‘피에 적신 옷을 입었다(he was clothed with a vesture dipped in blood)는 것, ‘하늘의 군대들이 백마를 타고 따른다(the armies which were in heaven followed him upon white horses)는 것,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었다(they were clothed in fine linen white and clean)는 것, ‘그 옷과 넓적다리에 이름이 기록되었다(on his vesture and on his thigh he had a name written)는 것 등은 모두 어떤 점에서든 표상적이며 상징적인 것입니다. 여기서 묘사된 것은 분명히 말씀(the Word)이며, 또한 말씀이신 주님이십니다. 왜냐하면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his name is called the Word of God)고 하였고, 이어서 그 옷과 그 넓적다리에 이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he hath on his vesture and on his thigh a name written, King of kings and Lord of lords)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No one can know what each of these expressions involves, except from the internal sense. It is manifest that every expression is in some respect representative and significative: as when it is said, that “heaven was opened”; that there was “a white horse”; that “there was one sitting upon him”; that “in justice he doth judge and make war”; that “his eyes were as a flame of fire”; that “on his head were many diadems”; that “he had a name that no man knew but he himself”; that “he was clothed with a vesture dipped in blood”; that “the armies which were in heaven followed him upon white horses”; that “they were clothed in fine linen white and clean”; and that “on his vesture and on his thigh he had a name written.” It is expressly said, that it is “the Word” which is here described, and the Lord who is the Word; for it is said, “his name is called the Word of God”; and afterwards, “he hath on his vesture and on his thigh a name written, King of kings and Lord of lords.”

 

각각의 표현을 해석해 보면, 여기서는 말씀이 그 영적 또는 내적 의미에 관하여 묘사되고 있음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하늘이 열렸다(heaven being opened)는 것은 말씀의 내적 의미가 하늘에서 보이며, 하늘이 열리는 자들에게는 세상에서도 보인다(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is seen in heaven, and thence by those in the world to whom heaven is opened)는 것을 표상하고 상징합니다. ‘(The horse),백마(a white horse)는 말씀의 내면에 관한 이해(the understanding of the Word as to its interiors)를 표상하며 상징합니다. ‘그 위에 앉으신 이(he that sat upon him)는 말씀에 관한 주님, 곧 말씀이신 주님(the Lord as to the Word, thus the Word)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his name is called the Word of God)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선으로부터는 충신, 그리고 의로 심판하시는(faithful and judging in justice) 분이라 불리시며, 진리로부터는 진실, 그리고 의로 싸우시는(true, and who maketh war in justice) 분이라 불리십니다. 주님 자신이 곧 의이시기 때문입니다. From the interpretation of each expression it evidently appears that the Word is here described as to its spiritual or internal sense. By “heaven being opened” is represented and signified that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is seen in heaven, and thence by those in the world to whom heaven is opened. “The horse,” which was white, represents and signifies the understanding of the Word as to its interiors; that this is the signification of “a white horse,” will be shown presently. That “he that sat upon him” is the Lord as to the Word, thus the Word, is manifest, for it is said, “his name is called the Word of God”; who, from good, is called “faithful and judging in justice”; and from truth, is called “true, and who maketh war in justice”; for the Lord himself is justice.

 

그의 눈이 불꽃 같다(his eyes, as a flame of fire)는 것은 그분의 신적 사랑의 신적 선으로부터 나오는 신적 진리(the Divine truth, from the Divine good of his Divine love)를 뜻합니다. ‘그 머리 위의 많은 면류관(The many diadems upon his head)은 신앙의 모든 선과 진리(all the goods and truths of faith)를 뜻합니다. ‘자기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이름이 있다(Having a name written that no one knew but he himself)는 것은 말씀의 내적 의미 안에 있는 그 본질과 성질이 주님과, 주님께서 계시해 주시는 자들 외에는 아무도 볼 수 없음(the quality of the Word in the internal sense is seen by no one but himself, and those to whom he reveals it)을 뜻합니다. ‘피에 적신 옷을 입었다(Clothed in a vesture dipped in blood)는 것은 문자적 말씀에 가해진 폭력(Word in the letter, to which violence has been offered)을 뜻합니다. ‘하늘의 군대들이 백마를 타고 따랐다(The armies in the heavens which followed him upon white horses)는 것은 말씀의 내면에 관한 이해 안에 있는 자들(those who are in the understanding of the Word as to its interiors)을 뜻합니다.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었다(Clothed in fine linen, white and clean)는 것은 선에서 나온 진리 안에 있는 같은 사람들(the same persons in truth from good)을 뜻합니다. ‘그 옷과 그 넓적다리에 이름이 기록되었다(Upon his vesture and upon his thigh a name written)는 것은 진리와 선, 그리고 그것들의 본질과 성질(truth and good, and their quality)을 뜻합니다. his eyes, as a flame of fire,” signify the Divine truth, from the Divine good of his Divine love. “The many diadems upon his head,” signify all the goods and truths of faith. “Having a name written that no one knew but he himself,” signifies that the quality of the Word in the internal sense is seen by no one but himself, and those to whom he reveals it. “Clothed in a vesture dipped in blood,” signifies the Word in the letter, to which violence has been offered. “The armies in the heavens which followed him upon white horses,” signify those who are in the understanding of the Word as to its interiors. “Clothed in fine linen, white and clean,” signify the same persons in truth from good. “Upon his vesture and upon his thigh a name written” signifies truth and good, and their quality.

 

이러한 세부 사항들과 그 장의 앞뒤에 있는 내용들로부터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교회의 마지막 때 즈음에 말씀의 영적 곧 내적 의미가 열릴 것이 그 안에서 예언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도 또한 그곳(19:17-21)에서 묘사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언급된 말들의 의미가 그러하다는 것을 이 자리에서 다시 증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에서 상세히 설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서 주님은 신적 진리이시기 때문에 말씀이심(the Lord is the Word because he is the Divine truth)이 밝혀져(n. 2533, 2803, 2884, 5272, 7835) 있습니다. 또한 말씀이 곧 신적 진리임(the Word is the Divine truth)도 설명되어(n. 4692, 5075, 9987) 있습니다. From these particulars, and from those which precede and follow in that chapter, it is evident, that therein is predicted that about the last time of the church the spiritual or internal sense of the Word would be opened; but what would come to pass at that time is also described there (verses 17–21). It is unnecessary to prove in this place that this is the signification of the words mentioned, as they are particularly explained in Arcana Coelestia, where it is shown that the Lord is the Word because he is the Divine truth (n. 2533, 2803, 2884, 5272, 7835). That the Word is the Divine truth (n. 4692, 5075, 9987).

 

17또 내가 보니 한 천사가 태양 안에 서서 공중에 나는 모든 새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와서 하나님의 큰 잔치에 모여 18왕들의 살과 장군들의 살과 장사들의 살과 말들과 그것을 탄 자들의 살과 자유인들이나 종들이나 작은 자나 큰 자나 모든 자의 살을 먹으라 하더라 19또 내가 보매 그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들의 군대들이 모여 그 말 탄 자와 그의 군대와 더불어 전쟁을 일으키다가 20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표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표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져지고 21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검에 죽으매 모든 새가 그들의 살로 배불리더라 (19:17-21)

 

주님께서 (, justice)이시기 때문에 말을 타신 이가 의로 심판하고 싸우신다(he who sat upon the horse in justice doth judge and make war)고 하신 것이며, 주님께서 라 불리시는 이유는 그분께서 자신의 능력으로 인류를 구원하셨기 때문임도 설명되어(n. 1813, 2025–2027, 9715, 9809, 10019, 10152) 있습니다. 또한 는 오직 주님께만 속한 공로(merit)임도 밝혀져(n. 9715, 9979) 있습니다. ‘그의 눈이 불꽃 같다(his eyes, as a flame of fire)는 것이 신적 사랑의 신적 선으로부터 나오는 신적 진리(the Divine truth from the Divine good of the Divine love)를 뜻한다는 것은, ‘(the eyes)이 이해와 신앙의 진리(the understanding and the truth of faith)를 상징하기(n. 2701, 4403–4421, 4523–4534, 6923, 9051, 10569) 때문이며, ‘불꽃(a flame of fire)이 사랑의 선(the good of love)을 상징하기(n. 934, 4906, 5215, 6314, 6832) 때문입니다. That because the Lord is justice, therefore it is said that “he who sat upon the horse in justice doth judge and make war”; and that the Lord is called “justice” for this reason, because of his own power he has saved the human race (n. 1813, 2025–2027, 9715, 9809, 10019, 10152). And that “justice” is the merit which belongs to the Lord alone (n. 9715, 9979). That “his eyes, as a flame of fire,” signify the Divine truth from the Divine good of the Divine love is that “the eyes” signify the understanding and the truth of faith (n. 2701, 4403–4421, 4523–4534, 6923, 9051, 10569); and “a flame of fire” signifies the good of love (n. 934, 4906, 5215, 6314, 6832).

 

그 머리 위의 면류관들(the diadems which were upon his head)이 신앙의 모든 선과 진리(all the goods and truths of faith)를 뜻한다는 것도 설명되어(n. 114, 3858, 6335, 6640, 9863, 9865, 9868, 9873, 9905) 있습니다. ‘자기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이름이 있다(he hath a name written which no one knew but he himself)는 것이 말씀의 내적 의미 안에 있는 그 본질과 성질이 주님과, 주님께서 계시해 주시는 자들 외에는 아무도 볼 수 없음(the quality of the Word in the internal sense is seen by no one but himself, and those to whom he reveals it)을 뜻한다는 것은, ‘이름(a name)이 어떤 것의 성질(the quality of a thing)을 상징하기(n. 144, 145, 1754, 1896, 2009, 2724, 3006, 3237, 3421, 6674, 9310) 때문입니다. ‘피에 적신 옷을 입었다(clothed in a vesture dipped in blood)는 것이 문자적 말씀에 가해진 폭력(the Word in the letter to which violence has been offered)을 뜻한다는 것은, ‘(a vesture)이 선을 입히는 진리(truth because it clothes good)를 상징하며(n. 1073, 2576, 5248, 5319, 5954, 9212, 9216, 9952, 10536), 특히 가장 바깥 진리, 곧 문자적 말씀(truth in the ultimates, thus the Word in the letter)을 뜻하기(n. 5248, 6918, 9158, 9212) 때문입니다. 또한 (blood)가 거짓이 진리에 가하는 폭력(violence offered to truth by falsity)을 뜻하기(n. 374, 1005, 4735, 5476, 9127) 때문입니다. That “the diadems which were upon his head” signify all the goods and truths of faith (n. 114, 3858, 6335, 6640, 9863, 9865, 9868, 9873, 9905). That “he hath a name written which no one knew but he himself” signifies that the quality of the Word in the internal sense is seen by no one but himself, and those to whom he reveals it, is that “a name” signifies the quality of a thing (n. 144, 145, 1754, 1896, 2009, 2724, 3006, 3237, 3421, 6674, 9310). That “clothed in a vesture dipped in blood” signifies the Word in the letter to which violence has been offered is that “a vesture” signifies truth because it clothes good (n. 1073, 2576, 5248, 5319, 5954, 9212, 9216, 9952, 10536); especially truth in the ultimates, thus the Word in the letter (n. 5248, 6918, 9158, 9212); and because “blood” signifies violence offered to truth by falsity (n. 374, 1005, 4735, 5476, 9127).

 

하늘의 군대들이 백마를 타고 그를 따랐다(the armies in heaven followed him upon white horses)는 것이 말씀의 내면에 관한 이해 안에 있는 자들(those who are in the understanding of the Word as to its interiors)을 뜻한다는 것은, ‘군대들(armies)이 하늘과 교회의 선과 진리 안에 있는 자들(those who are in the truths and goods of heaven and the church)을 상징하기(n. 3448, 7236, 7988, 8019) 때문입니다. ‘(a horse)이 이해(the understanding)를 상징한다는(n. 3217, 5321, 6125, 6400, 6531, 6534, 7024, 8146, 8318) 것도 설명되어 있으며, ‘흰색(white)이 하늘의 빛 안에 있는 진리, 곧 내적 진리(truth which is in the light of heaven, consequently interior truth)를 뜻한다는 것도 설명되어(n. 3301, 3993, 4007, 5319) 있습니다.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었다(clothed in fine linen white and clean)는 것이 같은 사람들이 선에서 나온 진리 안에 있음(the same persons in truth from good)을 뜻한다는 것은, ‘세마포(fine linen) 또는 아마포(linen)가 천적 기원에서 나온 진리, 곧 선에서 나온 진리(truth from a celestial origin, which is truth from good)를 상징하기(n. 5319, 9469) 때문입니다. That “the armies in heaven followed him upon white horses” signify those who are in the understanding of the Word as to its interiors is that “armies” signify those who are in the truths and goods of heaven and the church (n. 3448, 7236, 7988, 8019). And “a horse” signifies the understanding (n. 3217, 5321, 6125, 6400, 6531, 6534, 7024, 8146, 8318). And “white” signifies truth which is in the light of heaven, consequently interior truth (n. 3301, 3993, 4007, 5319). That “clothed in fine linen white and clean” signifies the same persons in truth from good is that “fine linen,” or “linen,” signifies truth from a celestial origin, which is truth from good (n. 5319, 9469).

 

그 옷과 그 넓적다리에 이름이 기록되었다(a name written upon the vesture and upon the thigh)는 것이 진리와 선, 그리고 그것들의 성질(truth and good, and their quality)을 뜻한다는 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a vesture)이 진리(truth), ‘이름(a name)이 성질(quality)을 상징하며, ‘넓적다리(the thigh)가 사랑의 선(the good of love)을 상징하기(n. 3021, 4277, 4280, 9961, 10485) 때문입니다. 만왕의 왕, 만주의 주(King of kings, and Lord of lords)는 주님을 신적 진리와 신적 선에 관하여 가리키는(the Lord as to the Divine truth and as to the Divine good) 표현입니다. 주님은 신적 진리로 말미암아(from the Divine truth)(King)이라 불리시며(n. 3009, 5068, 6148), 신적 선으로 말미암아(from the Divine good)(Lord)라 불리십니다(n. 4973, 9167, 9194). 그러므로 말씀의 영적 곧 내적 의미 안에 있는 말씀의 성질(the quality of the Word)이 어떠한지, 그리고 그 안에 영적이지 않은 표현이 하나도 없으며, 모든 표현이 곧 하늘과 교회에 속한 어떤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That “a name written upon the vesture and upon the thigh” signifies truth and good, and their quality, is that “a vesture” signifies truth, and “a name” quality, as observed above, and “the thigh” signifies the good of love (n. 3021, 4277, 4280, 9961, 10485). “King of kings, and Lord of lords,” is the Lord as to the Divine truth and as to the Divine good; the Lord is called “King” from the Divine truth (n. 3009, 5068, 6148). And he is called “Lord” from the Divine good (n. 4973, 9167, 9194). Hence it appears what is the quality of the Word in its spiritual or internal sense, and that there is no expression therein which does not signify something spiritual, that is, something of heaven and the church.

 

 

해설

 

이 긴 본문은 단순히 상징 하나하나를 풀이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영적 의미가 열리는 사건’이 교회의 역사 속에서 어떤 위치를 가지는지를 선언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요한계시록 19장의 환상이 곧 ‘교회의 마지막 때’와 직결되어 있음을 밝힙니다. 곧 외적 문자에 머물러 있던 교회가 그 생명을 상실해 갈 때, 주님께서 친히 말씀의 내적 의미를 여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늘이 열렸다’는 것은 단순한 환시가 아니라, 계시의 질서가 바뀌는 순간을 뜻합니다. 이제 하늘에서 보이던 것이 땅에서도 보이도록 허락되는 시점, 곧 계시의 새 단계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굳이 여기서 다시 증명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에서 충분히 증명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단순한 반복 회피가 아니라, 이 계시가 임의적 상상이나 신비주의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는 태도입니다. 모든 상징은 이미 창세기와 출애굽기 해설 속에서 일관되게 설명된 동일한 법칙에 따라 해석됩니다. ‘주님은 신적 진리이시므로 말씀이시다’, ‘말씀은 곧 신적 진리다’, ‘의는 주님께만 속한 공로다’라는 일련의 교리는 서로 분리된 개념이 아니라 하나의 중심 진리, 곧 주님 중심의 계시관으로 연결됩니다.

 

특별히 ‘의로 심판하고 싸우신다’는 구절은 매우 중요한 신학적 전환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는 인간의 도덕적 행위가 아니라, 주님께만 속한 구속의 공로를 뜻합니다. 주님은 자신의 능력으로 인류를 구원하셨기 때문에 ‘’라 불리십니다. 따라서 이 싸움은 인간의 싸움이 아니라, 신적 진리가 거짓과 맞서는 싸움입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가 열리는 것은 곧 이 신적 전쟁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교회의 마지막 때란 단순한 시간적 종말이 아니라, 진리가 가려지고 왜곡된 상태가 극에 달한 시점을 뜻합니다.

 

눈은 불꽃 같다’는 표현에서 스베덴보리는 이해와 사랑의 결합을 보여 줍니다. 눈은 이해, 불꽃은 사랑입니다. 진리는 사랑에서 나올 때만 살아 있습니다. 사랑 없는 진리는 차갑고, 진리 없는 사랑은 맹목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내적 의미란 단순한 교리 체계가 아니라, 신적 사랑에서 발하는 신적 진리의 빛입니다. 이것이 하늘의 빛이며, ‘흰색’이 상징하는 것입니다.

 

피에 적신 옷’은 교회 역사 전체를 압축하는 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문자적 말씀은 거룩하지만, 인간의 거짓 해석과 권력적 오용으로 인해 상처 입었습니다. 교리 논쟁, 문자주의, 왜곡된 교권은 말씀의 옷을 피로 물들였습니다. 그러나 그 옷을 입고 계신 분은 여전히 주님이십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말씀은 왜곡되었으나, 파괴되지 않았습니다. 내적 의미의 개방은 문자 폐기가 아니라 문자 회복입니다.

 

하늘의 군대’가 백마를 타고 따른다는 것은, 내적 의미가 열릴 때 그것을 이해하는 자들이 생겨난다는 뜻입니다. 군대는 진리와 선 안에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말은 이해입니다. 흰색은 하늘의 빛입니다. 곧 이해된 진리가 집단적으로 형성되는 것입니다. 이는 새 교회의 씨앗을 암시합니다. 개인적 깨달음이 아니라, 공동체적 차원의 새로운 이해입니다.

 

세마포’는 선에서 나온 진리를 뜻합니다. 진리가 선에서 나오지 않으면 교만과 분열을 낳지만, 선에서 나오면 순수하고 깨끗합니다. 그러므로 내적 의미를 이해하는 자의 표지는 지적 우월감이 아니라, 선에서 나온 진리의 삶입니다. 이는 매우 목회적인 기준입니다. 누가 내적 의미를 이해하는가를 판별하는 기준은 지식의 양이 아니라, 사랑에서 나온 진리의 상태입니다.

 

옷과 넓적다리에 기록된 이름’은 진리와 선, 그리고 그 본질을 뜻합니다. 넓적다리는 사랑의 선을 상징합니다. 진리와 선이 결합되어 있을 때, 주님은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 드러납니다. 왕은 신적 진리, 주는 신적 선입니다. 이것이 말씀의 본질입니다. 말씀은 단지 진리 모음이 아니라, 사랑과 결합된 진리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본문은 단 하나의 표현도 영적 의미 없이 존재하지 않음을 단정합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는 상징 몇 개의 조합이 아니라, 전체가 하나의 유기체처럼 연결된 하늘의 구조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문자로만 읽는 것은 껍질만 보는 것이고, 내적 의미가 열릴 때 비로소 그 생명과 질서가 보입니다. 이 선언은 단순한 해석 방법론이 아니라, 교회의 새 시대를 여는 신학적 선포입니다.

 

 

 

WH.2, ‘말’(a horse)은 이해(the understanding)를, ‘말 탄 자’(rider)는 지혜로운 사람(one who is intelligent

말씀과 그 영적, 즉 내적 의미The Word and its spiritual or internal sense (sections 1–5) 2 말씀의 예언서들에는 ‘말’이 매우 자주 언급되지만, 지금까지 ‘말’(a horse)이 이해(the understanding)를 뜻하고,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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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후 심판의 날은 세상 파괴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The destruction of the world is not meant by the day of the last judgment

 

5

 

말씀의 영적 의미(the spiritual sense of the Word)에 관해서는, 요한계시록에 언급된 백마(白馬, the white horse)에 관한 소저작을 보세요. Concerning the spiritual sense of the Word, see in the small work on the white horse mentioned in Revelation.

 

 

해설

 

LJ.5는 분량으로 보면 매우 짧지만, 내용상으로는 지금까지의 모든 논의를 지탱하는 핵심 전제를 독자에게 명확히 상기시킵니다. 스베덴보리는 ‘새 하늘’, ‘새 땅’, ‘창조’, ‘심판’에 대한 자신의 해석이 임의적이거나 상징적 상상에 근거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기 위해, 하나의 기준점으로 ‘말씀의 영적 의미’를 다시 호출합니다. 즉, 지금까지 제시된 모든 설명은 오직 영적 의미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 위에서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언급되는 ‘요한계시록에 나온 백마에 관한 소저작’은 스베덴보리의 독립 저작인 ‘The White Horse’(白馬)를 가리킵니다. 이 책에서 ‘백마’는 요한계시록 19장에 등장하는 상징으로, 말씀의 영적 의미가 다시 열리는 상태, 곧 참된 이해가 회복되는 것을 뜻합니다. 말은 이해를, 흰색은 진리를 의미하므로, 흰말, 곧 백마는 ‘정화된 이해’, ‘영적 진리로 밝아진 말씀 이해’를 상징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마지막 심판의 시대가 바로 이 백마의 시대라고 봅니다.

 

이 한 문장은 사실상 독자에게 하나의 선택을 요구합니다. 만일 영적 의미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LJ 전체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장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 의미가 실제로 존재하며, 주님에 의해 지금 이 시대에 열리고 있다고 받아들인다면, 지금까지 논의된 모든 내용은 놀라울 정도로 질서 있게 연결됩니다. 즉 마지막 심판은 우주적 파괴가 아니라 영적 세계의 정리이며, 새 하늘과 새 땅은 새로운 교회의 설립이고, 창조는 인간과 교회의 거듭남이라는 하나의 큰 흐름이 형성됩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더 이상 길게 설명하지 않고 ‘보라’고만 말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단순한 참고 문헌 안내가 아니라, 독자가 직접 그 전제를 충분히 숙지하지 않으면 이후 논의를 온전히 따라올 수 없다는 암묵적 경고에 가깝습니다. 다시 말해 LJ는 ‘영적 의미 입문서’가 아니라, 이미 그 기초를 이해한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심화 논의입니다.

 

목회적으로 보면 이 구절은 매우 정직한 태도를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주장을 단절된 계시처럼 제시하지 않고, 언제나 말씀 자체로 되돌아가도록 인도합니다. 마지막 심판, 최후의 심판을 이해하고 싶다면, 먼저 말씀을 어떻게 읽을 것인지가 정립되어야 합니다. 문자에 머물 것인가, 아니면 주님께서 열어 주시는 더 깊은 의미로 들어갈 것인가가 여기서 갈립니다.

 

따라서 LJ.5는 단순한 각주가 아니라, 지금까지의 논의를 지탱하는 ‘열쇠 안내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백마가 달리는 곳에서만, 마지막 심판은 공포의 종말이 아니라 질서의 회복과 교회의 새출발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LJ.4, ‘창조’(creating)의 속뜻

1. 최후의 심판 날이 세상 파괴를 의미하는 건 아니다 4 말씀의 영적 의미로 ‘창조하다’(to create)는 또한 형성하다(to form), 세우다(to establish), 거듭나게 하다(to regenerate)를 의미하는데요, 그러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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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후 심판의 날은 세상 파괴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The destruction of the world is not meant by the day of the last judgment

 

4

 

말씀의 영적 의미로 창조하다(to create)는 또한 형성하다(to form), 세우다(to establish), 거듭나게 하다(to regenerate)를 의미하는데요, 그러므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한다(creating a new heaven and a new earth)는 것은 하늘과 땅에 새 교회를 세운다는 뜻입니다. 이는 다음 구절들에서 분명히 나타납니다. To create” in the spiritual sense of the Word also signifies to form, to establish, and to regenerate; so by “creating a new heaven and a new earth” signifies to establish a new church in heaven and on earth, as may appear from the following passages:

 

이 일이 장래 세대를 위하여 기록되리니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 (102:18) The people who shall be created shall praise Jah (Ps. 102:18).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104:30) Thou sendest forth the spirit, they are created; and thou renewest the faces of the earth (Ps. 104:30).

 

1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7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43:1, 7) Thus said Jehovah, thy Creator, O Jacob, thy Former, O Israel, for I have redeemed thee, and I have called thee by thy name, thou art mine; everyone called by my name, and for my glory I have created, I have formed him, yea, I have made him (Isa. 43:1, 7, and in other places).

 

그러므로 인간의 새 창조(the new creation)란 그의 개혁을 의미합니다. 이는 사람이 새롭게 만들어지기 때문인데, 곧 자연적인 상태에서 영적 상태로 변화되는 것이지요. 따라서 새로운 피조물(a new creature)이란 개혁된 사람(a reformed man)을 뜻합니다. Hence it is, that “the new creation” of man is his reformation, since he is made anew, that is, from natural he is made spiritual; and hence it is that “a new creature” is a reformed man.60

 

60.창조하다(to create)는 새롭게 창조하는 것, 곧 개혁하고 거듭나게 하는 걸 의미합니다. To create” is to create anew, or to reform and regenerate (n. 16, 88, 10373, 10634).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한다(to create a new heaven and a new earth)는 것은 새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To create a new heaven and a new earth,” is to institute a new church (n. 10373). 창세기 첫 장에 나오는 하늘과 땅의 창조(the creation of heaven and earth) 역시 내적 의미, 즉 속뜻으로는 태고교회, 곧 가장 오래된 천적 교회의 설립이라는 말입니다. By “the creation of heaven and earth” in the first chapter of Genesis, in the internal sense, is described the institution of the celestial church, which was the most ancient church (n. 8891, 9942, 10545).

 

 

해설

 

LJ.4는 종말론 이해를 한층 더 깊은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글입니다. 지금까지 ‘하늘’과 ‘’이 교회를 뜻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면, 이제는 ‘창조’라는 단어 자체를 새롭게 해석합니다. 우리는 보통 창조를 무(無)에서의 물질적 생성으로 생각하지만, 스베덴보리에게 창조는 무엇보다 ‘영적 형성’입니다. 하나님은 우주를 단지 만드시기만 하는 분이 아니라 인간을 끊임없이 새롭게 빚으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신다고 말할 때, 그 핵심은 존재의 시작보다 ‘상태의 변화’에 있습니다.

 

특히 중요한 선언은 이것입니다. 자연적인 사람이 영적 인간으로 바뀌는 것이 곧 새 창조라는 점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 신학 전체를 관통하는 ‘거듭남’의 언어와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다시 말해 마지막 심판, 새 하늘, 새 땅이라는 거대한 표현들은 결국 한 인간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와 분리될 수 없습니다. 교회의 갱신은 개인의 갱신 없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먼저 사람을 새롭게 하시고, 그 새로워진 사람들로 교회를 세우십니다.

 

시편에서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라는 구절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백성이 아니라 ‘새 마음을 받은 백성’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찬양은 단순한 노래가 아니라 새 의지에서 흘러나오는 삶의 태도입니다. 따라서 참된 예배는 이미 창조의 열매입니다. 사람이 바뀌지 않은 채 예배만 반복된다면 그것은 아직 ‘창조 이전’의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라는 표현은 창조가 성령의 역사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영이 임할 때 인간의 내면 질서가 재구성되고, 그 결과 ‘지면’이 새로워집니다. 여기서 ‘’(地), 곧 땅은 다시 교회를 뜻하므로, 교회의 참된 쇄신은 제도 개편이 아니라 영의 흐름에서 시작됩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교회의 모든 깊은 부흥은 외적 전략보다 내적 각성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사야의 말씀에서 ‘내가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는 삼중 표현 역시 주목할 만합니다. 이는 영적 형성이 한 순간에 끝나는 사건이 아니라 점진적 과정임을 암시합니다. 주님은 인간을 단번에 완성하지 않으시고, 자유 속에서 서서히 빚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폭발적 체험이라기보다 평생에 걸친 창조입니다.

 

60이 밝히듯,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조차 내적 의미에서는 ‘태고교회의 설립’을 묘사합니다. 이것은 매우 놀라운 통찰입니다. 즉 성경의 첫 장부터 이미 하나님이 교회를 어떻게 세우시는지가 기록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빛이 있으라 하신 것은 진리가 밝혀지는 것이고, 물과 땅이 나뉘는 것은 내적 삶과 외적 삶의 질서가 세워지는 것이며, 인간 창조는 사랑과 지성을 갖춘 영적 존재의 탄생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보면 성경 전체는 반복해서 ‘창조 → 타락 → 재창조’의 리듬을 보여 줍니다.

 

목회적으로 이 글은 매우 강력한 방향을 제시합니다. 우리는 흔히 교회의 미래를 걱정하며 구조나 숫자를 먼저 생각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전혀 다른 곳을 가리킵니다. 주님이 지금도 사람들을 새롭게 창조하고 계신다면 교회의 미래는 이미 준비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위기는 종종 ‘창조의 전 단계’일 뿐입니다.

 

또 하나 깊이 묵상할 점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옛사람을 수리하지 않으시고 새 사람을 만드신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단순한 도덕 개선이 아니라 존재의 방향 전환입니다. 자기 사랑 중심에서 이웃 사랑 중심으로 이동할 때 우리는 실제로 ‘새 피조물’이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구원은 법적 선언이라기보다 존재론적 변화입니다. 사람이 실제로 달라지는 것입니다.

 

결국 LJ.4가 전하는 가장 따뜻한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창조는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마지막 심판 역시 이 창조 사역의 일부이며, 그 목적은 파괴가 아니라 새로움입니다. 주님은 낡은 교회를 끝내시는 분이 아니라, 언제나 더 깊이, 더 새롭게 교회를 세우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그 새 교회는 언제나 ‘새 사람이 된 이들’ 안에서 먼저 시작됩니다.

 

 

 

LJ.5, 먼저 ‘The White Horse’(白馬, 계19, 1758)부터 보기를

1. 최후 심판의 날은 세상 파괴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The destruction of the world is not meant by the day of the last judgment 5 말씀의 영적 의미(the spiritual sense of the Word)에 관해서는, 요한계시록에 언급된 ‘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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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J.3, 천사들은 '땅'(earth)을 어떤 의미로 읽는가

1. 최후의 심판 날이 세상 파괴를 의미하는 건 아니다 3 ‘새 땅’(the new earth)이 지상의 새 교회를 의미한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말씀에서 ‘땅’(ea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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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후 심판의 날은 세상 파괴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The destruction of the world is not meant by the day of the last judgment

 

3

 

새 땅(the new earth)이 지상의 새 교회를 의미한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말씀에서 (earth)을 읽을 때 자연적인 의미로서의 땅을 이해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은 교회를 의미합니다. 자연적 의미에서는 땅이 곧 땅이지만, 영적 의미에서는 교회입니다. 이는 영적 의미 안에 있는 사람들, 곧 천사들처럼 영적인 사람들은 말씀에서 (the earth)이 언급될 때 그 자체의 토지로 이해하지 않고 그곳에 있는 민족과 그들의 신적 예배(Divine worship)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earth)은 교회를 상징합니다. 이것이 그러함은 아래에 인용된 것처럼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에서 볼 수 있습니다.59 That by “the new earth” is meant a new church on earth, has hitherto been unknown, for everyone by “earth” in the Word has understood the earth, when yet by it is meant the church; in the natural sense, earth is the earth, but in the spiritual sense it is the church, because they who are in the spiritual sense, that is, who are spiritual, as the angels are, when “the earth” is named in the Word, do not understand the earth itself, but the nation which is there, and its Divine worship; hence it is that by “earth” is signified the church; that it is so, may be seen in Arcana Coelestia, as quoted below.59

 

이제 (earth [land])이 교회를 뜻한다는 것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도록 제가 말씀에서 한두 구절을 들어 보겠습니다. I will here adduce one or two passages from the Word, by which in some measure it may be comprehended, that “earth” [land] signifies the church:

 

18두려운 소리로 말미암아 도망하는 자는 함정에 빠지겠고 함정 속에서 올라오는 자는 올무에 걸리리니 이는 위에 있는 문이 열리고 땅의 기초가 진동함이라 19땅이 깨지고 깨지며 땅이 갈라지고 갈라지며 땅이 흔들리고 흔들리며 20땅이 취한 자 같이 비틀비틀하며 원두막같이 흔들리며 그 위의 죄악이 중하므로 떨어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리라 (24:18-20) The cataracts from on high were opened, and the foundations of the earth were shaken; in breaking, the earth is broken; in agitating, the earth is agitated; in reeling, the earth reels like a drunkard; it moves to and fro like a cottage; and heavy upon it is the transgression thereof (Isa. 24:18–20).

 

12내가 사람을 순금보다 희소하게 하며 인생을 오빌의 금보다 희귀하게 하리로다 13그러므로 나 만군의 여호와가 분하여 맹렬히 노하는 날에 하늘을 진동시키며 땅을 흔들어 그 자리에서 떠나게 하리니 (13:12, 13) I will cause a man to be more rare than pure gold; therefore I will remove the heaven, and the earth shall be removed out of her place, in the day of the fierce anger of Jehovah (Isa. 13:12, 13).

 

그 앞에서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떨며 해와 달이 캄캄하며 별들이 빛을 거두도다 (2:10) The earth was agitated before him, the heavens have trembled, the sun and the moon are become black, and the stars have withdrawn their splendor (Joel 2:10).

 

7이에 땅이 진동하고 산들의 터도 요동하였으니 그의 진노로 말미암음이로다 8그의 코에서 연기가 오르고 입에서 불이 나와 사름이여 그 불에 숯이 피었도다 (18:7, 8) The land was shaken and agitated, and the foundations of the mountains trembled and were shaken (Ps. 18:7, 8, and in many other places).

 

 

59. [References in this and the following notes are to the numbered sections of Arcana Coelestia.] 말씀에서 (earth)은 주님의 나라와 교회를 의미합니다. By “earth” (land) in the Word is signified the kingdom of the Lord and the church (n. 662, 1066, 1067, 1262, 1413, 1607, 2928, 3355, 4447, 4535, 5577, 8011, 9325, 9643). 특히 (earth)이 가나안 땅을 뜻하는 경우가 많은데, 태고의 시대부터 그곳에 교회가 존재했기 때문이며, 그래서 하늘 또한 하늘의 가나안(the heavenly Canaan)이라 불립니다. Chiefly for this reason, because by “earth” is meant the land of Canaan, and the church was there from the most ancient times, hence also it is that heaven is called the heavenly Canaan (n. 567, 3686, 4447, 4454, 4516, 4517, 5136, 6516, 9325, 9327). 영적 의미에서 (earth)은 그곳의 민족과 그들의 예배를 뜻하며, And because in the spiritual sense by “earth” is understood the nation which is there, and its worship (n. 1262). 따라서 교회에 속한 여러 요소를 상징합니다. Hence the “earth” signifies various things pertaining to the church (n. 620, 636, 1066, 2571, 3368, 3379, 3404, 8732).땅의 백성(the people of the earth)은 영적 교회에 속한 사람들을 의미하고, The people of the “earth” are they who are of the spiritual church (n. 2928).지진(an earthquake)은 교회의 상태 변화입니다. An earthquake” is a change of the state of the church (n. 3355).새 하늘과 새 땅(a new heaven and a new earth) 역시 교회를 뜻합니다. A new heaven and a new earth” signify the church (n. 1733, 1850, 2117, 2118, 3355, 4535, 10373). 홍수 이전의 태고교회와 홍수 이후의 고대교회가 모두 가나안에 있었으므로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was before the flood, and the ancient church, which was after the flood, were in the land of Canaan (n. 567, 3686, 4447, 4454, 4516, 4517, 5136, 6516, 9327). 그 땅의 모든 장소는 주님의 나라와 교회에 속한 것들을 표상하게 되었습니다. Thence all the places there became representative of such things as are in the Lord’s kingdom and in the church (n. 1585, 3686, 4447, 5136).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곳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고, 야곱의 후손 가운데 대표적 교회가 세워졌으며, 말씀의 최종적 의미 역시 그곳의 표상과 상징으로 구성되었습니다. Therefore Abraham was commanded to go thither, since with his posterity from Jacob, a representative church was to be instituted, and the Word written, the ultimate sense of which should consist of the representatives and significatives which were there (n. 3686, 4447, 5136, 6516). 그러므로 (earth)가나안 땅(the land of Canaan)은 교회를 의미합니다. Hence it is that by “earth” and by “the land of Canaan” is signified the church (n. 3038, 3481, 3705, 4447, 4517, 5757, 10559).

 

 

해설

 

LJ.3은 종말론 해석에서 결정적인 열쇠 하나를 제공합니다. ‘하늘’이 교회의 내적 차원을 뜻한다면, ‘’은 그 교회의 외적 구현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신앙이 실제 삶과 예배 속에서 어떻게 형태를 가지는가가 바로 ‘’입니다. 따라서 새 땅이 창조된다는 말은 새로운 제도나 새로운 행성이 생긴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 사회 안에 새로운 방식의 하나님 경배가 자리 잡는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종말을 우주 사건에서 ‘예배의 갱신’이라는 방향으로 완전히 전환시킵니다.

 

스베덴보리가 특히 강조하는 부분은 천사의 인식 방식입니다. 천사들은 ‘’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 흙이나 지형을 떠올리지 않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과 그들의 예배’를 떠올립니다. 이는 영적 사고가 언제나 관계와 상태를 중심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자연적 사고는 사물을 먼저 보지만, 영적 사고는 사랑과 신앙의 질서를 먼저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을 읽을 때도 점차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는 훈련을 하게 된다면 이미 우리의 이해가 천사적 방향으로 옮겨 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와 요엘, 시편에 등장하는 ‘땅의 흔들림’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읽혀야 합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대지진이지만, 영적으로는 교회의 기반이 흔들리는 사건입니다. 진리가 왜곡되고 사랑이 식어 갈 때 교회는 안정감을 잃습니다. 그때 말씀은 ‘땅이 비틀거린다’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시적 과장이 아니라 영적 상태를 묘사하는 정확한 언어입니다. 특히 ‘그 위에 그 죄악이 무겁다’는 표현은 교회를 무너뜨리는 진짜 원인이 외부 박해가 아니라 내부의 타락임을 보여 줍니다.

 

59에서 가나안이 강조되는 이유도 매우 중요합니다. 가나안은 단순한 고대 지명이 아니라 ‘교회가 자리 잡을 수 있는 영적 환경’을 상징합니다. 태고교회와 고대교회가 그곳에 있었다는 설명은 역사적 정보라기보다 표상적 의미를 드러냅니다. 즉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참된 결합이 가능한 상태가 바로 ‘가나안’입니다. 그래서 천국이 ‘하늘의 가나안’이라 불린다는 말은, 천국 자체가 완전한 교회라는 뜻이 됩니다.

 

여기서 설교적으로 깊은 통찰이 나옵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고 서로를 어떻게 사랑하느냐가 교회의 실제 토양입니다. 토양이 병들면 아무리 조직이 커도 교회는 흔들립니다. 반대로 토양이 건강하면 작은 공동체라도 이미 새 땅 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지진 = 교회의 상태 변화’라는 대응입니다. 우리는 흔들림을 두려워하지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흔들림은 종종 갱신의 전조입니다. 오래된 구조가 무너지지 않으면 새로운 구조가 세워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위기 자체를 종말로 해석하기보다, 주님이 더 깊은 교회를 준비하시는 과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목회적으로 매우 큰 소망을 제공합니다.

 

결국 LJ.3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어떤 땅 위에 서 있는가?’ 만일 내 신앙이 습관과 형식 위에만 서 있다면 작은 충격에도 흔들릴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과 진리 위에 서 있다면 이미 새 땅의 시민입니다. 종말은 먼 미래가 아니라, 사랑이 새로워질 때마다 시작됩니다.

 

이 절을 전체 흐름 속에서 보면 점점 더 분명해지는 사실이 있습니다. 마지막 심판의 목적은 파괴가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 곧 새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교회를 버리지 않으시며, 낡은 형태가 끝날 때마다 더 깊은 형태를 준비하십니다. 그러므로 종말론의 중심 정서는 공포가 아니라 재창조입니다.

 

 

 

LJ.4, ‘창조’(creating)의 속뜻

1. 최후의 심판 날이 세상 파괴를 의미하는 건 아니다 4 말씀의 영적 의미로 ‘창조하다’(to create)는 또한 형성하다(to form), 세우다(to establish), 거듭나게 하다(to regenerate)를 의미하는데요, 그러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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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J.2, '새 하늘', '처음 하늘'의 속뜻

1. 최후의 심판 날이 세상 파괴를 의미하는 건 아니다 2 말씀에서 하늘과 땅의 파괴가 언급되는 구절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The passages in the Word, in which mention is made of the destruction of heaven and earth, 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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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후 심판의 날은 세상 파괴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The destruction of the world is not meant by the day of the last judgment

 

2

 

말씀에서 하늘과 땅의 파괴가 언급되는 구절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The passages in the Word, in which mention is made of the destruction of heaven and earth, are the following:

 

너희는 하늘로 눈을 들며 그 아래의 땅을 살피라 하늘이 연기같이 사라지고 땅이 옷같이 해어지며 거기에 사는 자들이 하루살이 같이 죽으려니와 나의 구원은 영원히 있고 나의 공의는 폐하여지지 아니하리라 (51:6) Lift up your eyes to heaven, and look upon the earth beneath; the heavens are about to perish like smoke, and the earth shall wax old like a garment (Isa. 51:6).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65:17) Behold, I am about to create new heavens, and a new earth; neither shall the former things be remembered (Isa. 65:17).

 

내가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는 것 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66:22) I will make new heavens and a new earth (Isa. 66:22).

 

13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설익은 열매가 떨어지는 것같이 땅에 떨어지며 14하늘은 두루마리가 말리는 것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겨지매 (6:13, 14) The stars of heaven have fallen to the earth, and heaven has departed like a book rolled together (Rev. 6:13, 14).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20:11) I saw a great throne, and one sitting thereon, from whose face the earth and the heaven fled away, and their place was not found (Rev. 20:11).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1:1) I saw a new heaven and a new earth, for the first heaven and the first earth had passed away (Rev. 21:1).

 

이 구절들에서 새 하늘(a new heaven)이란, 보이는 하늘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인류가 모여 있는 하늘 자체를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교회가 시작된 이래 살아온 모든 인류로부터 하나의 하늘이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곳에 있던 존재들은 천사들이 아니라 여러 종교에 속한 영들이었습니다. 이 하늘이 바로 사라질 걸로 말하는 처음 하늘(the first heaven)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그러했는지는 뒤에서 특별히 설명될 것이며, 여기서는 단지 사라질 처음 하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여 주는 데 필요한 만큼만 말합니다. 조금이라도 밝아진 이성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여기서 말하는 것이 별이 있는 물리적 하늘, 곧 이처럼 광대한 창조의 궁창이 아니라 천사들과 영들이 있는 영적 의미의 하늘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In these passages, by “a new heaven” is not meant the visible heaven, but heaven itself where the human race is collected; for a heaven was formed from all the human race, who had lived since the commencement of the Christian church; but they who were there were not angels, but spirits of various religions; this heaven is meant by “the first heaven” which was to perish; but how this was, shall be specially declared in what follows; here is related only so much as serves to show what is meant by “the first heaven” which was to perish. Everyone even who thinks from a somewhat enlightened reason, may perceive, that it is not the starry heaven, the so immense firmament of creation, which is here meant, but that it is heaven in the spiritual sense, where angels and spirits are.

 

 

해설

 

LJ.2는 성경 인용으로 시작되는데, 이는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종말론을 개인적 계시가 아니라 ‘말씀 전체와 일치하는 해석’으로 제시하려 한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그는 먼저 독자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종말 구절들을 한꺼번에 모아 놓습니다. 별이 떨어지고, 하늘이 말려 사라지고, 땅이 도망하는 장면은 문자적으로 읽으면 우주적 붕괴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에서 그는 해석의 방향을 돌립니다. 문제는 구절이 아니라 ‘어떤 차원에서 읽느냐’입니다. 문자 차원에서는 천문학적 재난이지만, 영적 차원에서는 교회의 구조가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가 세워지는 사건입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 등장합니다. 곧 ‘처음 하늘’입니다. 많은 독자들이 천국은 완성된 곳이며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스베덴보리는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영적 세계에도 질서가 있으며, 그 질서는 인간 역사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기독교 시대 이후 죽은 사람들이 영계에 들어오면서 일종의 공동체가 형성되었는데, 그 공동체가 반드시 참된 천국은 아니었습니다. 그 안에는 다양한 종교적 배경과 불완전한 이해를 지닌 영들이 섞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처음 하늘’은 최종적으로 정화되기 전의 과도기적 하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설명은 마지막 심판을 완전히 새로운 빛에서 보게 합니다. 심판은 물질 우주를 향한 하나님의 분노가 아니라, 영적 세계의 ‘정리와 재배치’입니다. 진정으로 천사적 사랑을 가진 영들과 그렇지 않은 영들이 분리되어야만 참된 천국이 세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교회 역사 속에서 개혁이 일어나는 원리와도 비슷합니다. 겉으로는 같은 공동체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내적 기준에 따라 구분이 일어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 거대한 영적 개혁을 ‘마지막 심판’이라고 부릅니다.

 

또 하나 눈여겨볼 점은 ‘조금이라도 밝아진 이성’이라는 표현입니다. 그는 맹목적 신앙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성 자체가 올바르게 비추어지면 문자 그대로의 우주 파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누구나 깨달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는 신앙과 이성이 대립하지 않는다는 그의 일관된 사상을 보여 줍니다. 참된 이성은 계시에 적대하지 않고, 오히려 계시의 깊이를 이해하도록 돕습니다.

 

목회적으로 보면 이 구절은 종말 공포를 크게 약화시킵니다. 하늘이 무너질까 두려워하기보다, ‘나는 어떤 하늘에 속해 있는가?’를 묻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하늘은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사랑의 상태입니다. 따라서 처음 하늘이 지나간다는 말은 거짓된 결합, 외적 신앙만으로 이루어진 공동체가 더 이상 유지되지 못함을 뜻합니다. 결국 남는 것은 사랑과 진리로 결합된 공동체입니다.

 

또한 이 본문은 교회를 바라보는 시야를 크게 확장합니다. 교회는 지상에만 있는 조직이 아니라 하늘과 연결된 살아 있는 몸입니다. 인간이 죽음 이후에도 그 공동체에 계속 참여한다면, 교회의 질은 단순히 제도나 숫자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진짜 기준은 ‘얼마나 천국과 같은 사랑이 그 안에 있는가’입니다. 이런 관점은 설교에서 매우 강력한 메시지가 됩니다. 교회를 지키는 것은 건물을 지키는 일이 아니라 천국의 성품을 지키는 일입니다.

 

더 깊이 들어가면, LJ.2는 독자에게 해석의 습관 자체를 바꾸라고 요청합니다. 별이 떨어진다는 표현을 볼 때마다 물리적 사건을 상상하는 대신, ‘어떤 영적 질서가 흔들리고 있는가’를 묻게 합니다. 이렇게 읽기 시작하면 성경은 더 이상 과거의 기록이나 미래의 재난 예고가 아니라, 지금도 계속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계시가 됩니다.

 

결국 이 절이 전달하는 조용하지만 강력한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우주를 파괴하시는 분이 아니라 질서를 새롭게 하시는 분입니다. 사라지는 것은 창조가 아니라 왜곡된 구조이며, 지나가는 것은 존재 자체가 아니라 참사랑과 어긋난 결합입니다. 그러므로 ‘처음 하늘이 지나간다’는 말 속에는 파괴보다 희망이 더 많이 들어있습니다. 그것은 더 순수한 천국이 가까워졌다는 신호이기 때문입니다.

 

 

 

LJ.3, 천사들은 '땅'(earth)을 어떤 의미로 읽는가

1. 최후의 심판 날이 세상 파괴를 의미하는 건 아니다 3 ‘새 땅’(the new earth)이 지상의 새 교회를 의미한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말씀에서 ‘땅’(ea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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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J.1, '최후의 심판 날이 세상 파괴를 의미하는 건 아니다' (LJ.1-5)

최후의 심판 Last Judgment (1758) 1. 최후의 심판 날이 세상 파괴를 의미하는 건 아니다 The destruction of the world is not meant by the day of the last judgment 1 영적 의미를 알지 못한 사람들은 마지막 심판의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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