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4:1)

 

AC.339

 

앞의 세 장에서 아담과 그의 아내(man and his wife)가 태고교회를 의미한다는 사실은 충분히 밝혀졌으므로, 이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것을 인정한다면, 그 교회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잉태와 출생 역시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은 성격의 것이었음이 분명합니다. 태고인들에게는 이름을 붙이고, 그 이름으로 뭔가를 의미하게 하며, 그렇게 해서 계보를 구성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교회에 속한 것들은 서로 이런 관계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곧 자연적인 출생에서 하나가 다른 하나로부터 잉태되고 태어나는 것처럼, 교회에 속한 것들도 하나가 다른 하나로부터 잉태되고 태어납니다. 그러므로 말씀에서는 교회에 속한 것들을 잉태(conceptions), ‘출생(births), ‘자손(offspring), ‘갓난아이(infants), ‘어린아이(little ones), ‘아들(sons), ‘(daughters), ‘청년(young men) 등으로 부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말씀의 예언적 부분에는 이와 같은 표현들이 매우 많이 나옵니다. In the three foregoing chapters it has been sufficiently shown that by the “man and his wife” is signified the most ancient church, so that it cannot be doubted, and this being admitted, it is evident that the conception and the birth effected by that church were of the nature we have indicated. It was customary with the most ancient people to give names, and by names to signify things, and thus frame a genealogy. For the things of the church are related to each other in this way, one being conceived and born of another, as in generation. Hence it is common in the Word to call things of the church “conceptions,” “births,” “offspring,” “infants,” “little ones,” “sons,” “daughters,” “young men,” and so on. The prophetical parts of the Word abound in such expressions.

 

 

해설

 

AC.339는 앞으로 이어질 창4의 이름과 계보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매우 중요한 글입니다. 바로 앞 AC.338에서 스베덴보리는 ‘아담과 그의 아내’를 태고교회로, 그 교회의 ‘첫 번째 자손, 곧 처음 난 것’을 신앙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그 신앙이 사랑 안에 머물지 않고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상태를 ‘가인’으로 나타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태고교회가 어떻게 ‘잉태’하고 ‘낳으며’, 신앙이나 교리가 어떻게 그 교회의 ‘자손’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AC.339는 바로 이 문제를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태고인들은 어떤 영적 실재에 이름을 붙이고, 그 이름으로 그것의 성질을 나타내며, 서로에게서 생겨나는 것들을 마치 부모와 자녀처럼 연결하여 계보를 구성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계보’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가족 족보와 성격이 다릅니다. 자연적인 출생에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서 태어나듯, 교회 안에서도 하나의 교리와 신앙의 모습이 다른 것으로부터 생겨나고, 그것이 다시 또 다른 교리와 신앙의 모습을 낳습니다. 태고인들은 바로 이러한 영적인 발생과 파생의 관계를 ‘잉태’와 ‘출생’, ‘부모’와 ‘자녀’, 그리고 ‘계보’의 형식으로 표현했던 것입니다.

 

이 점은 창4의 이름들을 읽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창세기 초기 부분에 대해 제시한 설명에 따르면, 우리는 가인과 아벨, 에녹과 이랏, 므후야엘과 므드사엘, 라멕 등을 오늘날의 역사책에 등장하는 개인들의 연속적인 가족사처럼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 이름들은 태고교회 안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영적인 변화, 곧 교리와 신앙의 여러 모습에 붙여진 이름들입니다. 그러므로 창4의 계보를 읽으면서 가장 먼저 물어야 할 것은 ‘이 사람은 역사적으로 누구였는가?’가 아니라 ‘이 이름은 무엇을 나타내며, 이것은 앞의 것으로부터 어떻게 생겨났는가?’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실제 역사가 아니므로 단지 지어낸 비유일 뿐이다’라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그보다 훨씬 깊습니다. 역사적 인물들의 가족사를 기록한 것은 아니지만, 그 이름들이 나타내는 영적 현실은 실제였습니다. 태고교회 안에서 사랑과 신앙의 관계가 달라졌고, 하나의 교리가 다른 교리를 낳았으며, 어떤 교리는 점차 왜곡되어 여러 이단과 분파로 갈라졌습니다. 말씀은 이러한 실제적인 교회의 변화를 사람의 잉태와 출생, 이름과 계보라는 형식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실이 아닌 이야기에 영적인 뜻을 나중에 붙인 것’이라기보다, 영적인 사실을 이야기와 계보의 형식으로 기록한 것이라고 이해하는 편이 좋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잉태’와 ‘출생’이라는 표현의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어떤 교리나 신앙의 모습은 아무런 원인 없이 갑자기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사람들의 내면에서 어떤 생각이나 원리가 받아들여지고, 그것이 점차 하나의 확고한 관점이 되며, 마침내 교리와 가르침으로 밖에 나타납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생명이 잉태되어 자라다가 때가 되면 아이가 태어나는 것과 비슷합니다. 따라서 내적으로 어떤 새로운 생각과 원리가 형성되는 것은 ‘잉태’에, 그것이 교리와 삶의 형태로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은 ‘출생’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바로 앞 AC.338의 ‘가인의 분리’에 적용하면 더욱 잘 이해됩니다. 태고교회에는 본래 사랑 안에 신앙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신앙을 사랑 안에 있는 것으로 보지 않고,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하나의 새로운 원리가 ‘잉태’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원리가 점차 확고해져 하나의 교리와 신앙의 모습으로 나타났을 때 그것이 ‘가인’이라는 이름으로 표현됩니다. 다시 말해 ‘하와가 가인을 낳았다’는 것은 한 여인이 한 남자아이를 출산했다는 역사적 사건을 속뜻으로 다시 해석한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로부터 어떤 새로운 교리적 흐름이 생겨나는 것을 출생의 형식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태어난 ‘가인’은 다시 자기와 같은 성격의 것들을 낳습니다. 사랑에서 분리되어 독립적인 것이 된 신앙이라는 원리가 한 번 자리 잡으면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원리를 설명하고 정당화하기 위한 또 다른 생각들이 생기고, 거기에서 다시 새로운 교리들이 파생되며, 그것들이 계속 갈라지면서 여러 이단과 분파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인에게서 에녹이 나오고, 다시 이랏, 므후야엘, 므드사엘, 라멕으로 계보가 이어지는 것은 단순히 여러 세대에 걸쳐 자손들이 태어났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의 교리적 원리에서 다른 것들이 계속 파생되어 나가는 관계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AC.339는 우리가 앞서 창4와 창5를 읽으면서 중요하게 살펴본 문제에도 빛을 줍니다. 가인 계열과 셋 계열을 두 집안의 연대기처럼 놓고 ‘어느 집안이 먼저였는가?’, ‘가인 계열이 끝난 다음 셋 계열이 시작되었는가?’라고 읽으면 말씀의 관심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이 계보들은 태고교회 안에서 나타난 서로 다른 영적 흐름을 각각 보여 줍니다. 따라서 우리가 ‘가인 계열과 셋 계열이 나란히 이어진다’고 말할 때에도, 두 실제 가문이 역사적으로 같은 시기에 병존했다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태고교회 안에서 나타난 서로 다른 교리와 신앙의 흐름을 말씀이 각각의 계보라는 형식으로 보여 준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이어서 ‘잉태’, ‘출생’, ‘자손’, ‘갓난아이’, ‘어린아이’, ‘아들’, ‘’, ‘청년’ 같은 표현들을 열거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말씀에서 이러한 가족과 출생의 언어는 자연적인 가족관계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선과 진리가 어떻게 생겨나고 자라며, 서로 결합하여 또 다른 영적인 것을 낳는지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선지서에서도 ‘잉태하다’, ‘낳다’, ‘아들’, ‘’, ‘자녀’ 같은 표현들이 매우 자주 등장합니다. 자연적인 출생이 생명의 이어짐을 보여 주듯, 영적으로도 선과 진리, 또는 반대로 악과 거짓은 서로에게서 생겨나며 계속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영적 원리가 하나 있습니다. ‘하나의 원리는 혼자 머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참된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사랑으로 살아가면 그 진리에서 또 다른 선한 생각과 애정이 생겨나고, 그것들이 다시 선한 말과 행동을 낳습니다. 반대로 하나의 거짓된 원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기 안에서 정당화하기 시작하면 그 거짓을 유지하기 위해 또 다른 거짓이 필요해지고, 그것은 다시 다른 악과 거짓을 낳습니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잉태하고 낳는’ 것입니다.

 

바로 이 원리가 가인의 계보를 무겁게 만듭니다. AC.338에서 살펴본 시작은 매우 작아 보였습니다.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얼핏 보면 그리 심각해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AC.339는 우리에게 그 작은 원리가 혼자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그것은 자손을 낳습니다. 하나의 분리가 또 다른 분리를 낳고, 하나의 교리적 왜곡이 그것을 뒷받침하는 다른 왜곡을 낳으며, 그렇게 이어지다 보면 처음에는 작았던 변화가 마침내 전혀 다른 교회의 모습을 만들어 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4의 계보는 단순히 과거 태고교회에서 일어난 일을 보여 주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 각 사람 안에서도 이러한 ‘잉태’와 ‘출생’은 계속 일어납니다. 어떤 생각을 마음에 받아들이고 그것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그 생각은 또 다른 생각을 낳고, 그 생각들은 애정과 행동으로 이어지며, 결국 하나의 삶의 모습을 만들어 갑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마음 안에서도 날마다 어떤 ‘계보’가 만들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받아들인 하나의 진리가 내일의 선한 선택을 낳을 수도 있고, 오늘 허용한 하나의 거짓이 또 다른 자기 합리화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AC.339는 창4의 낯선 이름들을 읽기 위한 단순한 사전 설명이 아닙니다. 앞으로 가인의 계보를 읽을 때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하나의 중요한 열쇠입니다. 이름을 보면서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으로 표현된 교리와 신앙의 모습을 보고, 출생을 보면서 생물학적 혈통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무엇으로부터 생겨났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계보 전체를 통하여 하나의 영적 원리가 어떤 결과들을 계속 낳아 가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따라서 AC.339를 읽고 난 뒤 창4의 계보 앞에서 우리가 계속 던져야 할 질문은 이것일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으로부터 태어났으며, 또 무엇을 낳고 있는가?’ 이 질문을 붙들고 가인의 계보를 읽으면, 창4는 더 이상 낯선 고대 이름들의 목록이 아닙니다.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이 독립하기 시작한 작은 변화가 어떻게 하나의 교리가 되고, 그 교리가 다시 다른 교리들을 낳으며, 마침내 교회 전체의 모습을 바꾸어 가는지를 보여 주는 살아 있는 영적 계보가 됩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은 오늘 우리 안에서 어떤 생각과 사랑을 ‘잉태’하고 있으며, 그것이 장차 어떤 ‘자손’을 낳게 될 것인지를 돌아보게 하는 말씀이 됩니다.

 

 

 

AC.338, 창4: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AC.338-340)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v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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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8.심화

 

2. 주님께서는 왜 가인의 분리를 처음부터 막지 않으셨을까?

 

AC.338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질문이 있습니다. 태고교회 안에서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따로 떼어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바라보기 시작했을 때, 주님께서는 이미 그 작은 변화가 장차 어디까지 갈 것인지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실제로 창4의 흐름을 따라가면 그 분리는 점점 깊어져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이고, 마침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곧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상태에까지 이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왜 처음 그런 움직임이 나타났을 때 좀 더 적극적으로 막지 않으셨을까요? 아직 작은 싹에 불과했을 때 그 방향을 돌려놓으셨다면 그렇게 심각한 결과까지 가지 않았을 것처럼 보입니다.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주님께서 그것을 ‘방치’하신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주님의 섭리에서 주님은 인간이 악과 거짓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무관심하게 바라보시는 분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선으로 이끄시고, 악을 억제하시며, 사람이 돌이킬 수 있도록 진리를 보여 주십니다. 다만 그 모든 일을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지 않는 방식으로 행하십니다. 그러므로 ‘왜 막지 않으셨는가?’라는 질문에는 ‘막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를 없애는 방식으로 막지 않으셨다’고 대답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자유 가운데서만 사랑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생각과 의지를 직접 통제하여 사랑에서 벗어나는 생각 자체가 생길 수 없도록 하셨다면, 겉으로는 태고교회의 아름다운 질서가 계속 유지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유지되는 사랑은 더 이상 인간이 자유롭게 받아들인 사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체어리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행동을 강제로 통제하여 선한 행동을 하게 할 수는 있지만, 강제로 이웃을 사랑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선한 행동을 하도록 프로그램된 인간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신의 삶으로 선택하는 인간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허용’이라는 스베덴보리의 중요한 개념이 나옵니다. 주님께서 악을 허용하신다는 것은 악을 원하시거나 승인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자유가 주어져 있는 한, 그 자유에는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가능성과 함께 그것을 거절할 가능성도 따라옵니다. 만일 잘못된 선택을 할 가능성 자체가 없다면 자유도 실제적인 자유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악을 뜻하시지 않으면서도 인간이 자유 가운데 잘못된 방향을 선택하는 것을 허용하십니다.

 

그러나 ‘허용’과 ‘방치’는 전혀 다릅니다. 방치는 ‘네 마음대로 하라’며 떠나는 것이지만, 주님의 허용 안에는 끊임없는 억제와 인도가 함께 있습니다. 사람이 악으로 향할 때에도 주님께서는 그 악이 가능한 한 더 멀리 진행되지 않도록 억제하시고, 남아 있는 선과 진리를 보호하시며, 그 사람이 다시 돌아설 수 있는 길을 계속 마련하십니다. 따라서 주님의 허용은 무관심한 허용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면서도 가능한 한 생명 쪽으로 이끄시는 섭리 안에서의 허용입니다.

 

실제로 창4의 가인 이야기에서도 주님께서는 가만히 계시지 않습니다. 가인의 분노가 일어나고 그의 안색이 변했을 때 주님께서는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4:7)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장면입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의 잘못된 방향을 알고 계셨고, 그가 더 멀리 가기 전에 다시 선으로 돌아오도록 부르셨습니다. AC.328에 따르면 체어리티는 신앙이 자신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삼고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이지만 않는다면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는 ‘신앙을 버려라’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신앙을 다시 선과 체어리티에 연결하라’라고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여기에서도 마지막 선택을 가인에게서 빼앗지 않으십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려 할 때 그의 의지를 강제로 정지시키거나, 그가 다른 생각을 할 수밖에 없도록 마음을 조종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주님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자유가 거듭남에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선을 보여 주시고, 진리로 깨우치시며, 악을 억제하시고, 양심을 통하여 경고하시며, 돌아올 길을 열어 두십니다. 그러나 인간이 그 선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마지막 자리까지 대신 차지하지는 않으십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이 자유를 잘못 사용했다고 해서 주님의 섭리가 실패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가인은 결국 아벨을 죽입니다. 속뜻으로 보면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다음에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에게 ‘’를 주어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십니다. 잘못된 상태에 있는 가인을 보호하신다는 것은 처음 읽을 때 상당히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AC.330은 그 이유를 분명히 밝힙니다. 훗날 바로 신앙으로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질 것이기 때문에 신앙에 속한 것 자체가 완전히 없어져서는 안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섭리가 인간의 방식과 다른 중요한 지점입니다. 우리는 어떤 것이 잘못되면 그것을 통째로 없애 버리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잘못된 것 안에서도 장차 구원에 사용될 수 있는 것을 보존하십니다. 가인으로 표현된 분리된 신앙은 잘못되었지만 ‘신앙’ 자체는 버리시지 않습니다. 인간이 사랑에서 떼어 낸 신앙을 주님께서는 훗날 다시 체어리티와 연결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실패 안에서도 다음 회복의 가능성을 남겨 두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흐름은 창3부터 계속 나타납니다. 인간이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에서 떨어졌을 때 주님께서는 인간을 없애지 않으시고, 그 상태에 맞는 새로운 구원의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생명나무에 함부로 접근하여 더 깊은 모독에 빠지지 않도록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로 길을 지키셨습니다. 그리고 창4에서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었을 때에도 신앙 자체를 없애지 않고 보존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태고교회의 옛 질서가 마침내 유지될 수 없게 되었을 때에도 인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노아’로 표상되는 새로운 교회를 위한 리메인스를 보존하셨습니다. 인간은 계속 주님의 질서를 무너뜨리지만, 주님께서는 그때마다 인간의 자유를 없애지 않으면서 남아 있는 것을 붙드시고 다음 구원의 길을 마련하십니다.

 

그러므로 ‘왜 주님께서는 가인의 분리를 처음부터 막지 않으셨는가?’라는 질문은 결국 더 근본적인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왜 주님께서는 인간을 애초에 잘못 선택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들지 않으셨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그 대답은 ‘사랑’에 있습니다. 인간이 주님과 결합하려면 주님을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어야 하며, 자유롭게 사랑하려면 사랑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어야 합니다. 악을 선택할 가능성을 완전히 제거하면서 선을 선택하는 자유만 남겨 두는 것은 실제적인 자유가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시되, 그 자유가 파멸로 향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안에서 역사하시고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선을 향해 이끄십니다.

 

이 점에서 주님의 섭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적극적인 개입’보다 훨씬 더 깊고 섬세합니다. 눈앞에서 기적을 일으켜 잘못된 길을 강제로 차단하는 것이 언제나 가장 큰 섭리는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이 자신의 자유와 이성으로 생각하고 선택할 수 있도록 하면서, 그 안에서 선한 애정을 일으키고 진리를 만나게 하며, 악의 결과를 통하여 스스로 깨닫게 하고, 다시 돌아설 기회를 마련하며, 심지어 잘못된 선택 이후에도 남아 있는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는 것이 주님의 섭리입니다. 사람에게는 때로 그것이 우연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인간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가운데 역사하시는 이러한 인도가 오히려 섭리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그래서 초신자의 눈으로 ‘주님께서 조금만 더 적극적으로 개입하셨으면 안 되었을까?’라고 묻는 것은 매우 좋은 질문입니다. 다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주님께서 개입하지 않으셨다’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개입하고 계셨습니다. 다만 인간이 더 이상 인간답게 자유롭게 사랑하고 선택할 수 없게 되는 방식으로 개입하지 않으셨습니다. 선을 보여 주시고, 경고하시고, 억제하시고, 돌아올 길을 열어 두셨으며, 인간이 끝내 잘못 선택했을 때조차 그 실패 속에서 구원에 사용할 수 있는 것을 보존하셨습니다.

 

결국 ‘방치’와 ‘섭리’의 차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방치는 인간을 내버려 두는 것이지만, 섭리는 인간의 자유를 끝까지 존중하면서도 한순간도 그를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이 가인이 될 자유까지 빼앗아 버리지는 않으셨지만, 가인이 다시 선으로 돌아올 수 있는 길도 끝까지 닫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그 길을 거절했을 때조차 다음 회복의 길을 준비하셨습니다. 주님의 섭리는 인간이 한 번도 넘어지지 않도록 모든 가능성을 제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시면서도 그가 넘어질 때마다 다시 생명을 향해 일어설 수 있는 길을 끝까지 마련하시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가인의 분리를 허용하시면서도 결코 인간을 방치하지 않으신 주님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338, 창4: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AC.338-340)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v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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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8, 심화 1, ‘가인’은 처음부터 ‘사랑에서 완전히 분리된 신앙’이었나?

AC.338.심화 1. ‘가인’은 처음부터 ‘사랑에서 완전히 분리된 신앙’이었나? AC.338을 읽다 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표현을 만나게 됩니다. 앞의 개요에서 스베덴보리는 ‘가인’을 분명히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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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8.심화

 

1. ‘가인은 처음부터 사랑에서 완전히 분리된 신앙이었나?

 

AC.338을 읽다 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표현을 만나게 됩니다. 앞의 개요에서 스베덴보리는 ‘가인’을 분명히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라고 설명했는데, 여기서는 태고교회의 ‘첫 번째 자손, 곧 처음 난 것’을 ‘신앙’이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가인은 단순히 신앙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 질문을 잘 살펴보면, 스베덴보리가 창4에서 단순히 두 종류의 신앙을 정적으로 대비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이 어떻게 점차 사랑에서 떨어져 나와 독립적인 것이 되고,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이르는지를 보여 주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먼저 태고교회에는 처음부터 신앙이 있었습니다. 다만 그들의 신앙은 오늘날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어떤 교리를 먼저 배우고 그것을 참이라고 믿는 방식의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가운데 주님으로부터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퍼셉션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신앙은 사랑과 나란히 놓여 있는 별개의 무엇이 아니라 사랑 안에 들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AC.337에서 스베덴보리가 그들이 사랑에 속한 것 외에는 다른 신앙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설명한 것도 바로 이런 뜻입니다. 신앙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신앙이 사랑 안에 살아 있었기 때문에 굳이 그것을 사랑에서 떼어 따로 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AC.338에서 아주 미세하지만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에게서 신앙이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인식되고 인정되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표현이 ‘a thing by itself’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갑자기 신앙을 버렸거나 거짓된 신앙을 만들어 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참된 신앙을 사랑과 구별하여 바라보고, 그것을 그 자체로 성립할 수 있는 하나의 것으로 여기기 시작했다는 데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이 ‘가인’의 출발입니다.

 

따라서 ‘신앙’과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차이를 너무 단순하게 두 종류의 신앙으로 나누어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AC.338이 보여 주는 것은 오히려 하나의 과정입니다. 처음에는 사랑 안에 신앙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신앙을 사랑과 별개의 것으로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이어 그 신앙이 점차 독립적인 지위를 갖게 되고, 마침내 사랑과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더 중요한 것으로 높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원리가 끝까지 진행되면 결국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상태, 곧 체어리티가 소멸되는 데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완성된 모습만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그 분리가 처음 시작되어 점차 진행되는 과정까지 함께 보여 주는 이름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차이는 부부의 관계로 생각하면 훨씬 쉽게 와닿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부부에게는 배려하고 존중하며 신의를 지키는 여러 원칙이 이미 사랑 안에 들어 있습니다. 굳이 ‘부부생활 준수 가이드 20가지’를 벽에 붙여 놓지 않아도 사랑하기 때문에 상대방을 존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배려하며, 사랑하기 때문에 서로에게 신실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부부가 서로 지켜야 할 사항들을 하나씩 따로 떼어 ‘부부생활 준수 가이드 20가지’로 정리했다고 합시다. 이것 자체가 곧 사랑의 파탄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서로 사랑하면서 필요에 따라 생활의 원칙을 정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입니다. 어느 순간 이 원칙들이 사랑과 별개로 독립적인 중요성을 갖기 시작합니다. ‘나는 20가지 가운데 19가지를 지켰으니 좋은 남편이다’, ‘당신은 14번을 어겼으니 잘못된 아내다’라고 판단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서로 사랑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 규칙만 제대로 지키면 좋은 부부다’라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본래 사랑을 표현하고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던 원칙이 오히려 사랑을 대신하게 됩니다. 원칙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사랑보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가인’의 문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구별’과 ‘분리’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신앙과 사랑을 구별하여 설명하는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닙니다. 오히려 오늘날의 우리는 그렇게 구별하여 배워야 합니다. 무엇이 신앙이고 무엇이 체어리티인지, 진리와 선은 어떤 관계인지 이해해야 합니다. 문제는 구별된 것을 서로 분리하는 데 있습니다. 신앙을 사랑과 구별하는 것과, 신앙이 사랑 없이도 참된 신앙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전자는 이해를 위한 구별이지만, 후자는 생명의 질서를 깨뜨리는 분리입니다.

 

이와 비슷한 모습을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서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자녀가 부모에게 ‘부모 자식 간에도 돈 계산은 분명해야 해요’라고 말했다고 해 보겠습니다. 이 말 자체만 떼어 놓고 보면 틀렸다고 할 수 없습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도 큰돈이 오가거나 재산에 관한 일이 있을 때에는 서로 오해하거나 마음 상하는 일이 없도록 분명히 해 두는 것이 오히려 지혜로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돈 계산을 분명히 한다’는 원칙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신앙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같은 말이라도 그것이 부모와 자식 사이의 사랑과 신뢰에서 떨어져 나와 관계를 규정하는 하나의 독립된 원리가 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본래 사랑과 감사, 신뢰와 돌봄이 먼저 있고, 돈에 관한 원칙도 그 사랑 안에서 서로를 보호하고 섬기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부모 자식 간에도 돈 계산은 분명해야 한다’는 원칙이 그 사랑에서 따로 떨어져 나와 관계의 앞자리를 차지한다면, 말 자체는 옳아도 듣는 사람은 무엇인가 ‘쎄한’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논리적으로 틀린 말이어서가 아니라, 본래 사랑 안에 있어야 할 것이 사랑에서 떨어져 나와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것’이 되어 가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계산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아니라, ‘계산이 사랑을 섬기고 있는가, 아니면 계산이 사랑과 독립하여 관계를 지배하기 시작했는가?’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훗날 서로 마음 상하지 않도록 계산을 분명히 하는 것과, 사랑과 상관없이 주고받은 것을 따져 관계를 규정하는 것은 겉으로는 비슷해 보여도 전혀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이 중요하다’, ‘교리는 정확해야 한다’, ‘진리와 거짓은 분별해야 한다’는 말은 모두 옳습니다. 그러나 그 신앙과 교리와 진리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섬기는 자리에서 벗어나 그 자체로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한다면, 바로 그때 우리는 ‘가인의 분리’가 시작되는 지점을 보게 됩니다.

 

이 점은 AC.337에서 스베덴보리가 ‘오늘날에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고 한 말과도 연결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사랑에서 신앙으로 나아갔지만, 이후의 인간은 그와 같은 퍼셉션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먼저 신앙의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따라 살아가면서 주님께서 그 신앙으로 체어리티를 심으시는 질서를 따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신앙을 교리로 배우고 명확하게 고백하는 것 자체를 ‘가인’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것은 오늘날 인간에게 필요한 거듭남의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신앙이 체어리티로 나아가지 않고, 사랑과 삶에서 분리된 채 ‘믿기만 하면 된다’, ‘교리를 바르게 알고 고백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머물 때입니다.

 

이렇게 보면 ‘가인’의 시작은 생각보다 훨씬 미세합니다. 처음부터 ‘사랑은 필요 없다’고 선언하면서 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것 하나를 전체의 질서에서 떼어 내는 데서 시작됩니다. 신앙은 참된 것이고 교리도 필요하며 진리를 고백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생명에서 떨어져 나와 독립적인 가치를 주장하기 시작하면, 참된 것 자체가 점차 잘못된 방향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이단이나 교리의 왜곡도 반드시 처음부터 명백한 거짓을 주장하면서 시작되는 것은 아닙니다. 참된 것 하나를 지나치게 높여 다른 진리들과의 살아 있는 관계를 끊어 버릴 때에도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AC.338 이후의 가인 이야기를 읽을 때에는 ‘분리의 진행 과정’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신앙이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인식됩니다. 이어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이고, 체어리티가 신앙의 성질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게 됩니다. 그러자 가인의 ‘분노’와 ‘안색이 변함’이 나타나고, 마침내 가인이 아벨을 죽입니다. 처음의 작은 분리가 마지막에는 체어리티의 소멸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창4는 바로 이 과정을 사람과 사건의 이야기로 보여 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AC.338은 가인의 타락이 완성된 모습을 보여 주는 글이라기보다, 그 타락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매우 중요한 글입니다. ‘가인’은 어느 날 갑자기 체어리티를 공격하면서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따로 떼어 바라보고, 그것을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인정한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작은 분리가 계속 진행되면서 신앙이 사랑보다 앞서고, 마침내 체어리티를 밀어내는 데까지 이른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게 하는 매우 실제적인 질문이기도 합니다. ‘내가 믿는 교리가 옳은가?’만 물어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교리가 내 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도 물어야 합니다. 내가 진리를 많이 알수록 주님 앞에서 더 겸손해지고, 다른 사람을 더 이해하고 사랑하며, 자신의 악을 더 잘 보고 버리게 된다면 그 진리는 체어리티와 결합하여 살아 있는 신앙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진리를 많이 알수록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며, 사랑보다 교리적 승리를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된다면, 아무리 그 교리 자체가 참되더라도 우리는 ‘가인의 분리’가 시작되는 지점을 경계해야 합니다.

 

결국 AC.338이 보여 주는 핵심은 ‘가인은 신앙이다’라는 단순한 등식이 아닙니다. ‘가인’은 본래 사랑 안에 있어야 할 신앙을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데서 출발합니다. 부부 사이의 원칙이 사랑을 섬길 때에는 관계를 보호하지만 사랑을 대신하기 시작하면 관계를 메마르게 하고, 부모와 자식 사이의 분명한 계산도 사랑을 섬길 때에는 서로를 보호하지만 사랑에서 독립하여 관계를 지배하기 시작하면 그 관계의 본래 질서를 바꾸어 버립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이 사랑을 섬기고 사랑 안에서 생명을 얻을 때에는 참된 신앙이지만, 사랑에서 떨어져 나와 스스로 완전한 것이 되려 할 때 ‘가인의 분리’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루시는 거듭남은 이렇게 분리된 것을 다시 결합하시는 역사입니다. 오늘날의 인간에게 먼저 신앙을 주시고, 그 신앙으로 체어리티를 심으시며, 마침내 우리가 알고 믿는 진리가 우리가 사랑하고 살아가는 선과 하나가 되게 하십니다. 그렇게 신앙이 다시 사랑 안에서 생명을 얻을 때, 신앙은 비로소 참된 신앙, 곧 신앙다운 신앙이 됩니다.

 

 

 

AC.338, 심화 2, 주님께서는 왜 ‘가인의 분리’를 처음부터 막지 않으셨을까?

AC.338.심화 2. 주님께서는 왜 ‘가인의 분리’를 처음부터 막지 않으셨을까? AC.338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질문이 있습니다. 태고교회 안에서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따로 떼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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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8, 창4: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AC.338-340)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v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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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은 ‘이영길 수도사’라는 한 인물을 통해 수도의 완성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강문호 목사님은 전남 화순의 깊은 산속에서 오랫동안 홀로 수도하던 이영길 수도사를 찾아가 만났고, 그에게 함께 수도하며 가르쳐 달라고 요청했지만, 이영길 수도사는 ‘수도가 완성될 때까지 이곳을 떠나지 않겠다’고 답했다고 전합니다. 그리고 그가 말한 수도의 완성에는 두 가지 기준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자기 안의 ‘음란의 영’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자신의 죄와 주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으로 눈물이 나는 상태에 이르는 것입니다. 강 목사님은 이런 모습을 ‘수도사의 영성’으로 높이 평가하며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먼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이영길 수도사가 오랫동안 여성을 전혀 만나지 않고 살아왔음에도 ‘아직 내 속에서 음란의 영이 빠지지 않았다’고 고백했다는 대목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여기에는 외적 환경과 내적 상태가 서로 다르다는 통찰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성을 만나지 않는다고 음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유혹의 대상이 눈앞에서 사라졌다고 그 욕망 자체가 사라진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악이 외부 환경에 의해 만들어진다기보다 사람의 내적 사랑과 애정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멀리 떨어진 산속에 들어가 외적인 자극을 차단했다고 해서 내적인 악이 자동으로 제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십 년 넘게 여자를 보지 않았는데도 아직 내 안에 음란이 남아 있다’는 고백은 오히려 자기 상태를 정직하게 바라보려는 태도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음란의 영이 완전히 빠져야 수도가 완성된다’는 표현을 조금 다르게 설명했을 것입니다. 인간의 악한 욕망은 어떤 외적 영이 몸속에 들어왔다가 빠져나가는 물질 같은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사람의 악한 애정에는 지옥의 영들이 인플럭스를 주지만, 그들이 사람 안에 어떤 독립된 실체로 ‘들어앉아 있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어떤 악을 즐거워할 때, 그 악과 같은 사랑을 가진 영적 공동체와 연결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사람이 그 악을 죄로 인식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거절하기 시작하면 그 연결이 약해지고, 선한 영들과 천국의 인플럭스를 더 자유롭게 받을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문제의 핵심은 ‘음란의 영을 빼내는 것’이라기보다 자신의 음란한 욕망을 죄로 인정하고, 그것을 의지적으로 거절하며, 주님께서 주시는 순결한 사랑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은 단순한 억압과도 다릅니다. 어떤 욕망이 떠오르지 않도록 환경을 차단하는 것과 그 욕망 자체가 변화되는 것은 서로 다른 일입니다. 사람은 수도원에 들어가 외적 유혹을 거의 경험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그 악이 내면에 그대로 잠복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세상 한복판에 살면서도 그 욕망이 일어날 때마다 ‘이것은 주님의 질서에 반한다’고 인식하고 자유롭게 거절하는 과정을 반복하면, 점차 그 악의 즐거움 자체가 약해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것이 실제적인 영적 싸움입니다. 그러므로 이영길 수도사의 고백에서 귀하게 볼 부분은 ‘나는 이미 수도자가 되었으니 순결하다’고 스스로 완성된 사람처럼 여기지 않고, 오랜 수도생활 후에도 자기 안의 남은 악을 인정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그 악이 완전히 없어져야 수도가 완성된다’는 생각에는 한 가지 주의가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의 거듭남은 이 세상에서 한순간에 끝나는 완제품 같은 상태가 아닙니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거듭나며, 천국에 들어간 뒤에도 영원히 더 완전한 선과 지혜로 나아갑니다. 따라서 어느 날 ‘이제 내 안에는 음란도 없고 자기 사랑도 없고 모든 악이 사라졌으니 수도가 완성되었다’고 선언할 수 있는 종착점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영적으로 깊어질수록 사람은 자기 안에 얼마나 많은 proprium이 남아 있는지를 더 섬세하게 보게 됩니다. 그래서 참된 성숙은 ‘나는 완성되었다’는 확신보다 ‘주님 없이는 나는 아무 선도 행할 수 없다’는 인식의 깊어짐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두 번째 기준으로 제시된 것은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흐르는 상태입니다. 이영길 수도사는 자신이 본래 죄인이며, 예수님께서 자기 죄를 짊어지고 죽으셨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나오고, 그렇게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감격의 눈물이 흐르는 때가 수도의 완성이라고 말한 것으로 소개됩니다. 이러한 십자가 사랑과 감사 자체는 귀합니다. 사람이 자신의 죄와 주님의 구원을 깊이 느끼면서 마음이 녹아 눈물을 흘리는 것은 실제적인 종교적 체험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눈물이 난다는 현상 자체를 영적 완성의 기준으로 삼지는 않을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감정의 강도와 영적 상태의 깊이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면 쉽게 눈물을 흘리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분노와 지배욕과 자기 의를 버리지 못할 수 있고, 또 어떤 사람은 거의 눈물을 흘리지 않지만, 자신의 잘못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오랫동안 악을 피하며 이웃에게 선을 행할 수도 있습니다. 천국의 기준은 감정 표현의 강도가 아니라 지배적인 사랑과 실제 삶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생각하면 눈물이 나는가?’보다 더 깊은 질문은 ‘십자가를 생각한 결과 내가 악을 미워하게 되었는가, 이웃을 더 사랑하게 되었는가, 자기 뜻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을 따르게 되었는가?’입니다.

 

특히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주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벌하셔야 하는데 그 형벌을 예수님께 대신 내리셨다’는 단순한 형벌 대속의 구조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주님께서 지옥 전체와 마지막으로 싸우시고, 그것을 완전히 정복하신 가장 큰 시험이었으며, 동시에 당신의 인성을 완전히 신성하게 하신 과정의 마지막 단계였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깊이 묵상한다는 것은 ‘내가 받을 벌을 주님이 대신 받으셨다’는 감격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주님께서 우리를 악과 지옥의 세력에서 자유롭게 하시기 위해 어떤 싸움을 치르셨는지를 바라보고, 우리 역시 주님의 힘으로 자기 안의 악과 싸우는 삶으로 들어가는 것을 뜻합니다.

 

영상 중 강 목사님은 ‘우리는 모두 아담과 하와의 원죄로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는 취지로 설명합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상당한 수정이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아담의 죄가 후손에게 법적 죄책으로 전가되어 모든 사람이 그 죄 때문에 정죄된다는 전통적인 원죄론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유전되는 것은 조상의 죄책 자체가 아니라 악으로 기울어지는 성향, 곧 유전악입니다. 사람은 조상의 죄 때문에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에서 자유롭게 악을 사랑하고 선택하여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 때 그 악과 결합합니다. 따라서 아담과 하와의 범죄 때문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하나님 앞에서 법적으로 유죄가 되었다는 식의 설명은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와는 다릅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만일 인간의 근본 문제를 ‘아담이 저지른 죄의 형벌을 내가 대신 뒤집어쓴 것’으로 이해하면 구원도 그 법적 형벌을 누군가 대신 해결해 주는 구조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근본 문제를 실제적인 악의 사랑과 그로 인해 뒤틀린 삶에서 찾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구원 역시 단순히 죄책의 장부를 지우는 일이 아니라, 사람을 악의 권세에서 실제로 건져 내어 새로운 사랑과 새로운 삶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수도 역시 죄책감과 눈물을 극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의 사랑의 질서가 실제로 바뀌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영상에서 이영길 수도사가 산속에 자신의 무덤을 미리 파 놓고 ‘내가 죽으면 여기에 묻어 달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소개됩니다. 이것은 죽음을 기억하며 세상의 소유와 욕망을 내려놓으려는 수도 전통의 한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죽음을 기억하는 것은 삶의 우선순위를 바로잡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죽음 자체를 반복해서 바라보는 것이 영성의 목적은 아닙니다. 육체의 죽음은 인간 존재의 끝이 아니라 영계에서의 삶으로 넘어가는 문이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나는 언제 죽을 것인가?’가 아니라 ‘내가 죽은 뒤에도 그대로 가지고 갈 사랑은 지금 무엇인가?’입니다.

 

사람은 죽을 때 재산과 지위와 육체를 모두 남겨 두고 갑니다. 그러나 자신이 사랑한 것은 가지고 갑니다. 돈을 사랑했다면 그 사랑을 가지고 가고, 지배를 사랑했다면 그 욕망을 가지고 가며, 주님과 이웃을 사랑했다면 그 사랑 역시 가지고 갑니다. 그러므로 무덤을 파 놓고 바라보는 것보다 더 근본적인 죽음의 준비는 매일 자기 안의 악한 사랑을 살피는 것입니다. ‘오늘 죽어도 괜찮은가?’라는 질문은 결국 ‘지금 내 마음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가?’라는 질문이어야 합니다.

 

강 목사님은 이영길 수도사의 모습을 ‘사람 같지 않은 수도사의 모습’으로 묘사하며 큰 감동을 표현합니다. 깊은 산속에서 휴대전화조차 터지지 않는 곳에 십 년 넘게 홀로 머물고, 여성을 만나지 않으며, 자신의 무덤까지 준비해 놓고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삶은 분명 현대인의 눈에는 놀랍게 보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외적 극단성에 대한 감탄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버렸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사랑하게 되었는가입니다.

 

사람이 재산을 모두 버려도 ‘나는 모든 것을 버린 수도자’라는 자기 의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을 만나지 않아도 자기 생각을 사랑할 수 있고, 평생 독신으로 살아도 자기 우월감을 사랑할 수 있으며, 무덤을 파 놓고 죽음을 묵상하면서도 자신의 영성을 특별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재산을 가지고 가정을 이루며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그 모든 것을 주님께서 맡기신 것으로 알고, 자기 이익보다 이웃의 유익을 생각하며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금욕의 양은 영성의 높이를 측정하는 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영길 수도사의 수도생활을 낮추어 볼 이유도 없습니다. 오히려 이 영상에서 아름답게 읽을 수 있는 것은 오랫동안 수도했음에도 아직 자기 안에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다고 고백했다는 부분입니다. 만일 그 고백이 진실했다면, 그것은 자기 완성을 과시하는 말보다 훨씬 수도적입니다. 십 년을 수행한 뒤에도 ‘나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에는 자신의 내면을 진지하게 살피는 태도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식으로 말하면 사람이 거듭날수록 자신에게 있는 선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더 많이 보고, 자기 의보다 자신의 proprium이 얼마나 끈질긴지를 더 깊이 보게 됩니다.

 

다만 이 영상 전체에서 수도의 완성이 ‘음란의 욕망이 완전히 없어지고,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나는 상태’로 압축되는 것은 조금 아쉽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남은 인간 존재 전체에 관한 변화이기 때문입니다. 음란도 중요한 악이지만, 교만, 지배욕, 자기 공로, 복수심, 탐욕, 거짓, 타인을 업신여기는 마음 등도 모두 거듭남의 대상입니다. 어떤 사람이 성적 욕망에서는 매우 자유로워졌어도 사람을 지배하고 싶어 하는 욕망이 강하다면 아직 깊은 거듭남의 싸움이 남아 있습니다. 반대로 눈물은 거의 없지만,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며, 자신의 권리를 내려놓고 이웃의 유익을 위해 사는 사람에게는 매우 깊은 영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수도의 완성’은 특정 욕망 하나가 사라지거나 특정 감정이 끊임없이 나타나는 상태라기보다, 사람의 지배적인 사랑이 점점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옮겨 가는 과정이라고 표현하는 편이 스베덴보리의 관점에는 더 가깝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완전한 종착점이 없습니다. 인간은 영원히 주님으로부터 더 많은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에서도 천사들은 완성된 채 멈춰 있는 존재가 아니라 영원히 사랑과 지혜에서 자라갑니다.

 

이 영상은 수도가 단순한 외적 형식이 아니라 자기 내면과 싸우는 일이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귀합니다. 깊은 산속에 십 년 넘게 홀로 살았어도 자기 안의 음란을 문제 삼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더 깊이 사랑하고 싶어 하는 사람의 고백은 우리에게도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사람들의 눈에서 멀어졌을 때에도 같은 사람인가? 외적 환경이 바뀌었을 뿐인데 그것을 내적 변화로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내 안에 아직 남아 있는 악을 정직하게 보고 있는가?’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마지막에 다시 주님께 시선을 돌립니다. 수도의 목적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완벽한 수도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자기 힘으로 악을 제거할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 요구되는 것은 악을 죄로 인식하고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는 것처럼 최선을 다해 거절하되, 실제로 악을 이길 힘과 선을 행할 능력은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수도자는 자기 자신을 정화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서 자신을 정화하시도록 자유롭게 협력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그러므로 이 영상에서 말하는 ‘수도의 완성’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으로 다시 표현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수도의 완성은 어떤 욕망이 전혀 느껴지지 않거나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눈물을 흘리는 특별한 상태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의 악을 점점 더 정직하게 보고, 그것을 주님의 도움으로 거절하면서, 자기 사랑이 차지하던 자리에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점점 더 들어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이영길 수도사의 이야기에서 가장 오래 기억할 만한 장면은 어쩌면 깊은 산속 생활이나 미리 파 놓은 무덤보다 ‘십 년 넘게 수도했지만, 아직 내 안에 이것이 남아 있다’고 말하는 고백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참된 영성은 ‘나는 여기까지 왔다’고 자신을 바라보는 데서보다, ‘주님, 제 안에는 아직도 주님께서 고쳐 주셔야 할 것이 이렇게 많습니다’라고 고백하는 데서 더 깊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SY.50, 강문호 목사, ‘이스라엘 첫 수도원, 채리톤’ (20191208)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 영상은 ‘강문호 수도사 이야기 : 채널설립이유’라는 제목으로, 강문호 목사님이 앞으로 자신이 접한 수도사들의 삶과 수도원에 얽힌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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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vir], Jehovah(4:1)

 

AC.338

 

아담과 그의 아내 하와(man and Eve his wife)는 지금까지 밝혀진 것처럼 태고교회를 말합니다. 그 교회의 첫 번째 자손, 곧 처음 난 것을 신앙이라 하는데, 여기서는 그것을 가인(Cain)이라 합니다. 하와가 말한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I have gotten a man, Jehovah)라는 건,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한테 있어서는 신앙이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인식되고, 인정되었다는 말입니다. By the “man and Eve his wife” is signified the most ancient church, as has been made known; its first offspring, or firstborn, is faith, which is here called “Cain”; her saying “I have gotten a man, Jehovah,” signifies that with those called “Cain,” faith was recognized and acknowledged as a thing by itself.

 

 

해설

 

AC.338부터 스베덴보리는 창4:1의 각 표현을 본격적으로 풀이하기 시작합니다. 앞의 AC.324-337이 창4 전체의 개요였다면, 이제부터는 본문을 한 구절씩 따라가며 그 속뜻을 밝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아담과 그의 아내 하와’를 다시 개인으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아담과 하와’는 태고교회를, 그들에게서 태어난 ‘가인’은 그 교회 안에서 처음 생겨난 어떤 교리적 변화를 나타냅니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가인을 태고교회의 ‘첫 번째 자손, 곧 처음 난 것’이라고 하면서 그것을 ‘신앙’이라고 설명한다는 점입니다. 이것만 보면 조금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앞에서 가인을 계속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라고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가인을 단순히 ‘신앙’이라고 합니다. 이 차이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문제는 신앙 자체가 태어났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태고교회 안에도 당연히 신앙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신앙을 사랑 안에 있는 것으로 보지 않고, 사랑과 구별되는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데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AC.338의 핵심 표현인 ‘faith was recognized and acknowledged as a thing by itself’입니다. 이를 직역하면 ‘신앙이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인식되고 인정되었다’ 정도입니다. 그러나 우리말로 뜻을 풀면 ‘신앙을 사랑과 별개로 독립하여 존재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기기 시작했다’는 의미입니다. AC.337에서 살펴본 ‘가인의 분리’가 바로 여기에서 구체적으로 시작됩니다. 처음부터 누군가가 ‘사랑은 필요 없다’고 선언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 안에 들어 있던 신앙을 따로 바라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미세한 변화처럼 보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신앙은 본래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 안에 있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퍼셉션으로 알았으며, 그러므로 신앙을 사랑과 별개의 무엇으로 세울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사랑’과 ‘신앙’을 구별하여 바라보고, 신앙을 하나의 독립된 실재로 인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이 단계에서는 체어리티를 노골적으로 부정한 것은 아니지만, 바로 이 작은 분리에서 이후의 모든 문제가 시작될 가능성이 생긴 것입니다.

 

앞서 살펴본 ‘부부간 준수 사항’의 비유가 여기에도 잘 들어맞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부부에게 존중과 배려와 약속은 원래 사랑 안에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것들을 사랑에서 떼어 ‘부부생활 준수 사항’이라는 독립된 체계로 바라보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 자체가 당장 사랑을 없애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점차 독립적인 중요성을 갖고, 나중에는 ‘사랑이 없어도 이 규칙만 지키면 좋은 부부다’라는 데까지 나아간다면 본래의 질서는 완전히 뒤집힙니다. 가인의 시작 역시 이와 비슷합니다. 처음부터 체어리티를 죽인 것이 아니라, 신앙을 사랑에서 떼어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바라본 데서 시작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하와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는 말도 중요합니다. 영어 번역은 ‘I have gotten a man, Jehovah’라고 되어 있는데, 스베덴보리는 이 표현을 통하여 당시 사람들이 새롭게 나타난 신앙을 하나의 중요한 실재로 ‘인식하고 인정했다’는 것을 읽어 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들이 신앙을 거짓이라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참되고 중요한 것으로 인정했다는 점입니다. 가인의 위험성은 처음부터 명백한 거짓의 모습으로 등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참된 신앙에 속한 것을 굳이 사랑에서 떼어 내어 그 자체로 세운 데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단’이 어떻게 시작되는가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통찰을 줍니다. 이단은 언제나 처음부터 모든 진리를 부정하면서 시작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것 가운데 하나를 떼어 내어 전체보다 높이고, 본래 그것이 연결되어 있어야 할 다른 진리들과 분리하면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신앙은 참된 것입니다. 교리도 필요합니다. 진리를 알고 고백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하여 ‘이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만드는 순간, 참된 것이 오히려 교회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AC.338에서 ‘처음 난 것’이라는 표현도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가인이 시간적으로 태고교회에서 가장 먼저 나타난 한 개인이었다는 식으로만 이해하기보다, 태고교회로부터 처음 갈라져 나온 교리의 성격을 보여 주는 표현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우리가 앞에서 계속 확인했듯 창4와 창5의 계보를 단순한 시간표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관심은 ‘몇 년 뒤에 누가 태어났는가’가 아니라, 태고교회의 생명에서 어떤 교리의 흐름이 생겨났으며, 그것이 어떤 성격을 갖게 되었는가에 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신앙을 구별하는 것’과 ‘신앙을 분리하는 것’을 구별하는 일입니다. 사랑과 신앙을 개념적으로 구별하여 설명하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는 오히려 그렇게 해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337에서 스베덴보리도 오늘날에는 신앙이 먼저이고, 주님께서 그 신앙으로 체어리티를 심으신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구별된 신앙을 사랑 없이도 참된 신앙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여기는 데 있습니다. ‘구별’이 ‘분리’가 되고, 분리된 것이 마침내 자신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높일 때, 그것이 가인의 길이 됩니다.

 

따라서 AC.338은 가인의 타락이 이미 완성된 상태를 보여 주는 글이라기보다, 그 타락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변화였습니다. 사랑 안에 살아 있던 신앙을 따로 떼어 바라보고, 그것을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인정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작은 분리가 계속 진행되면,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이고, 마침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데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렇게 보면 AC.338은 우리에게도 상당히 날카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 믿는 것이 옳은가?’라는 질문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믿음이 ‘무엇과 연결되어 있는가?’도 물어야 합니다. 아무리 참된 교리라도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서 분리되어 자기 확신과 자기 우월성을 강화하는 데 사용된다면, 그 진리는 본래의 질서를 잃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신앙이 사람을 겸손하게 하고, 악을 버리게 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게 한다면, 그 신앙은 체어리티와 결합하면서 자신의 참된 생명을 찾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AC.338의 핵심은 ‘가인은 신앙이다’라는 데 있지 않습니다. ‘가인은 사랑 안에 있어야 할 신앙을 그 자체로 독립된 것으로 인정하기 시작한 상태다’라는 데 있습니다. 가인의 ‘분리’는 어느 날 갑자기 체어리티를 공격하면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본래 하나였던 것을 둘로 떼어 바라보는 작은 변화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 미세한 시작점에서부터 교회의 쇠퇴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이제 창4 본문을 따라 하나씩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심화

 

1. ‘가인은 처음부터 사랑에서 완전히 분리된 신앙이었나?

 

 

AC.338, 심화 1, ‘가인’은 처음부터 ‘사랑에서 완전히 분리된 신앙’이었나?

AC.338.심화 1. ‘가인’은 처음부터 ‘사랑에서 완전히 분리된 신앙’이었나? AC.338을 읽다 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표현을 만나게 됩니다. 앞의 개요에서 스베덴보리는 ‘가인’을 분명히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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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주님께서는 왜 가인의 분리를 처음부터 막지 않으셨을까?

 

 

AC.338, 심화 2, 주님께서는 왜 ‘가인의 분리’를 처음부터 막지 않으셨을까?

AC.338.심화 2. 주님께서는 왜 ‘가인의 분리’를 처음부터 막지 않으셨을까? AC.338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질문이 있습니다. 태고교회 안에서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따로 떼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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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9, 창4:1, ‘창4의 계보를 읽는 매우 중요한 해석 원리’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창4:1) AC.339 앞의 세 장에서 ‘아담과 그의 아내’(man and his wife)가 태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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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7, 창4, ‘배경’ - ‘참된 교회가 어떠했는지를 먼저 올바르게 이해해야 하는 이유’

AC.337 이 장은 태고교회의 퇴보, 곧 그 교리가 왜곡된 것과, 그 결과 생겨난 이단들과 분파들을 가인과 그의 후손들의 이름 아래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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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2026/08/16)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9, ‘하늘에 가득 찬 영광의 하나님’, 89, ‘샤론의 꽃 예수입니다.

 

오늘 4 절별 주석 시작 전 먼저 창4 전체 개요를 살피는 4 본문, 개요 및 배경시간으로 AC 글 번호로는 324번에서 337번입니다.  

 

먼저 본문입니다. 오늘은 전체 개요이므로 창4 전체를 봉독하겠습니다.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9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10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11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12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13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1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15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16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17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18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19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20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21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22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24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25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26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4)

 

제목은

 

가인과 아벨, 신앙과 체어리티에 관하여

 

이며, 다음은 오늘 범위인 AC.324-337 요약입니다.

 

가인과 아벨, 신앙과 체어리티에 관하여(AC.324-337)

 

AC.324-337은 창4에 기록된 가인과 아벨, 가인의 후손들, 그리고 셋과 에노스를 통하여 태고교회 안에서 신앙과 사랑의 관계가 어떻게 달라져 갔는지를 보여 줍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창4에 기록된 이름들을 반드시 기록된 순서 그대로 이어진 개인들의 역사나 교회의 시간표로만 읽지 않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이름들을 통하여 태고교회 안에서 나타난 여러 교리와 교회의 모습을 설명합니다. 따라서 가인으로 이어지는 흐름과 셋과 에노스로 이어지는 흐름은 하나가 완전히 끝난 뒤 다른 하나가 시작되었다고 보기보다, 태고교회 안에서 서로 구별되어 나타난 흐름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AC.324는 이 장 전체의 주제를 먼저 밝힙니다. 여기서는 교회로부터 분리되어 나온 교리들, 곧 이단들을 다루며, 또한 에노스라 불리는 새로운 교회를 다룹니다. 따라서 창4의 중심에는 처음부터 두 방향이 함께 놓여 있습니다. 하나는 참된 교회의 생명에서 벗어나 여러 이단과 분파로 갈라져 가는 흐름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께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결합을 다시 이루어 새로운 교회를 세워 가시는 흐름입니다.4의 여러 이름은 이러한 교회의 변화를 사람과 족보의 형식으로 보여 줍니다.

 

AC.325-326에서 그 첫 번째 중요한 구별이 가인아벨로 나타납니다. 태고교회는 본래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부터 신앙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하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이렇게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가 가인이라 불렸습니다. 반면 이웃을 향한 사랑인 체어리티는 아벨이라 불렸습니다. 따라서 가인의 문제는 신앙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그것의 생명인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떼어 내어 독립적인 것으로 만든 데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이 드린 제사 역시 이러한 차이를 보여 줍니다.가인의 제물은 사랑과 분리된 신앙에서 나오는 예배를,아벨의 제물은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예배를 뜻합니다. 주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는 것은 외적인 예배의 형식보다 그 안에 있는 사랑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아무리 신앙을 고백하고 진리를 많이 알고 있더라도, 그것이 이웃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는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참된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AC.327-329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점차 어떤 성격을 띠게 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가인의 분노안색이 변함은 분리된 신앙의 상태가 악해졌음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가인에게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앞세우지 않고, 다시 선을 행하는 삶과 결합한다면 회복될 수 있음을 뜻합니다. 체어리티 역시 신앙을 없애려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함께하기를 원합니다. 문제는 신앙이 자신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세우고, 체어리티를 그 아래에 두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분리된 신앙이 끝내 자신을 체어리티보다 높이게 되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이는 속뜻으로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 체어리티보다 앞세운 사람들에게서 마침내 체어리티가 소멸되었음을 뜻합니다.아벨의 핏소리는 그렇게 소멸된 체어리티를 나타내며,땅으로부터 저주를 받음은 그 결과 교리가 왜곡된 것을,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됨은 거기서 비롯된 거짓과 악을 나타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잃으면 신앙 자신도 참된 생명을 잃고, 결국 방향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가인을 곧바로 없애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에게 를 주어 아무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십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섭리를 보여 줍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잘못된 것이지만, 신앙에 속한 것 자체까지 완전히 없어져서는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주님께서는 바로 신앙으로 사람 안에 체어리티를 다시 심으실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가인의 표는 분리된 신앙을 옳다고 인정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장차 회복을 위하여 신앙에 속한 것을 보존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나타냅니다.

 

이러한 가인의 흐름 안에서는 분리된 신앙의 교리가 계속 확대되고 여러 형태로 갈라집니다. 그 확대가 에녹으로, 거기에서 파생된 여러 이단들이 그 후손들의 이름으로 표현됩니다. 그리고 라멕이라 불리는 마지막 상태에 이르면 마침내 신앙에 속한 것조차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됩니다. 이어 아다와 씰라 및 그 자녀들로 표현되는 새로운 교회의 모습이 나타나며, 야발은 그 교회의 천적인 것들을, 유발은 영적인 것들을, 두발가인은 자연적인 것들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태고교회의 쇠퇴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선과 진리에 속한 것을 완전히 사라지게 하지 않으시고, 계속 새로운 형태로 보존하셨음을 보여 줍니다.

 

한편,4에는 이와 구별되는 또 하나의 중요한 교회의 흐름이 에노스로 나타납니다.은 주님께서 주신 새로운 신앙을 뜻하며,에노스는 그 신앙으로 체어리티가 심어진 교회를 뜻합니다. 따라서 셋과 에노스를 가인과 라멕의 역사가 모두 끝난 뒤에 비로소 등장한 후대의 교회라고 단순하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은 서로 다른 교리와 교회의 흐름을 각각의 이름과 계보 아래 보여 주고 있으며,5에서는 다시 셋으로 이어지는 계열을 별도로 전개합니다. 이렇게 보면 가인 계열과 셋 계열은 태고교회 안에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 흐름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두 계열 모두 결국 홍수로 표상되는 태고교회의 마지막 때를 향해 갑니다.

 

AC.337은 이러한 모든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다시 태고교회 본래의 모습으로 시선을 돌립니다. 무엇이 왜곡되었는지를 알려면 먼저 왜곡되기 전의 참된 질서를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태고교회는 천적 교회였으며,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에 속한 것 외에는 다른 신앙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사랑으로부터 주님에게서 신앙을 받았으며,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퍼셉션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신앙을 사랑과 별개의 것으로 말하기조차 원하지 않았습니다. 신앙이 없어서가 아니라 신앙이 이미 사랑 안에 살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시72을 인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는 사랑을,은 신앙을 상징합니다. 달이 스스로 빛나는 것이 아니라 해의 빛을 받아 비추듯, 태고교회의 신앙도 사랑으로부터 생명과 빛을 받았습니다.30:26달빛은 햇빛 같겠고라는 말씀 역시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여 마침내 하나의 생명이 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가인으로 표현된 최초의 왜곡은 신앙을 없앤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따로 떼어 독립적인 것으로 만든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AC.337은 오늘날의 사람에게 태고교회와 똑같은 질서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오늘날에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사랑으로부터 신앙으로 나아갔지만, 이후의 인간은 먼저 말씀을 통하여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인 뒤, 주님께서 그 신앙으로 체어리티를 심으시는 길을 걷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신앙을 배우고 고백하는 것 자체가 가인적인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신앙이 체어리티로 나아가지 않고, 사랑과 삶에서 분리된 채 그 자체로 구원의 전부라고 주장할 때입니다.

 

따라서 AC.324-337의 중심은 단순히 신앙보다 체어리티가 중요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더 깊은 핵심은 신앙과 체어리티가 서로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데 있습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으로부터 신앙이 나왔고, 이후의 인간에게는 신앙으로 체어리티가 심어지는 질서가 마련되었습니다. 방향은 달라졌지만, 주님의 목적은 같습니다. 사람이 알고 믿는 진리가 마침내 그가 사랑하고 살아가는 선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가인은 그 결합이 깨지는 모습을 보여 주고, 셋과 에노스는 주님께서 그 결합을 다시 이루어 가시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이 모든 흐름은 인간의 실패 가운데서도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고, 새로운 교회를 준비하시는 주님의 끊임없는 섭리를 보여 줍니다.

 

 

이상 요약을 마치고, 아래는 AC 본문, 해설 및 심화입니다.

 

 

AC.324, 창4, ‘창4 본문, 개요, 배경’(AC.324-337)

창4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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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5, 창4:1-2, ‘가인과 아벨’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v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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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6, 창4:3-5, ‘가인의 제물, 아벨의 제물’

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And at the end of days it came to pass that Cain brought of the fruit of the ground an offering to Jehovah. 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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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7, 창4:5-6,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And unto Cain and unto his offering he looked not, and Cain’s anger was kindled exceedingly, and his faces fell. 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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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8, 창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If thou doest well, art thou not exalted? And if thou doest not well,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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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9, 창4:8-9,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And Cain talked to Abel his brother; and it came to pass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hat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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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0, 창4:10-16, ‘창4:10-16 전체의 속뜻’

10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And he said, What hast thou done? The voice of thy brother’s bloods crieth to me from the ground. 11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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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1, 창4:17, ‘에녹’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And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and he was building a city, and 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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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2, 창4:18, ‘라멕’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창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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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3, 창4:19-22, ‘아다와 씰라, 야발, 유발, 두발가인’

19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And Lamech took unto him two wives; the name of the one was Adah, and the name of the other Zillah. 20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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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4, 창4:23-24, AC.333의 ‘그때’에 대한 설명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And Lame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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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5, 창4:25, ‘셋’(Seth)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And the man knew his wife again, and she bare a 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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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6, 창4:26, ‘에노스’(Enosh)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And to Seth, to him also there was born a son; and he called his name Enosh: then began they to call upon the name of 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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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7, 창4, ‘배경’ - ‘참된 교회가 어떠했는지를 먼저 올바르게 이해해야 하는 이유’

AC.337 이 장은 태고교회의 퇴보, 곧 그 교리가 왜곡된 것과, 그 결과 생겨난 이단들과 분파들을 가인과 그의 후손들의 이름 아래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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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AC 리딩 본문 전체는 여기까지이고, 이 가운데 보충 리딩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AC.337, 심화 2, 가인의 분리’에 대한 재미있는 비유

AC.337.심화 2. ‘가인의 분리’에 대한 재미있는 비유 가인이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했다는 말을 처음 접하면, 이것이 왜 그렇게 심각한 문제였는지 쉽게 와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신앙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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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4, 심화 2,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에게 폭력을 가한다?’

AC.334.심화 2.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에게 폭력을 가한다?’ AC.334의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모든 것이 소멸되고, 그것들에 폭력이 가해졌다’는 표현에서 ‘폭력을 가한다’는 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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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4, 심화 1, ‘창4와 창5는 나란히 진행된 두 계열 이야기’

AC.324.심화 1. ‘창4와 창5는 나란히 진행된 두 계열 이야기’ 좀 성급한 질문일 수 있지만, 그리고 이미 몇 차례 거듭 고민했던 질문이지만... 창4, 창5를 시간순으로 읽어야 하나요? 이런 질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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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다음 주부터는 창4 절별 주석 및 해설, 그리고 심화 리딩 시작합니다.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08-16(D1)

 

2664, 1, 창4.1, 2026-08-16(D1)-주일예배(창4, AC.324-337), ‘창4 본문, 개요 및 배경’.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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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8/09, 창3:24-4:1, AC.314-323), ‘사람이 영생에 들어간다는 것과 영으로 산다는 것’

※ 오늘(2026/08/09)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8, ‘거룩 거룩 거룩 전능하신 주님’, 찬88, ‘내 진정 사모하는’입니다. 오늘은 일종의 쉬어가는 주로 AC 글 번호로는 314번에서 323번입니다. AC 창3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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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7.심화

 

4. ‘30:26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일곱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 (30:26)

 

 

AC.337에서 스베덴보리가 사30:26을 인용한 이유는 바로 앞에서 인용한 시72의 ‘’와 ‘’의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시72에서 ‘’는 사랑을, ‘’은 신앙을 의미하며, 특히 ‘달이 다할 때까지’라는 말씀을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사랑이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사30:26의 ‘달빛은 햇빛 같겠고’는 바로 이 상태, 곧 신앙이 사랑과 분리된 채 따로 존재하지 않고 사랑과 하나가 되는 천적 질서를 매우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여기서 ‘달빛은 햇빛 같겠고’라는 말씀을 문자 그대로 빛의 밝기가 강해지는 현상으로만 읽어서는 AC.337에서 이 구절을 인용한 이유를 알기 어렵습니다. 속뜻으로 ‘’은 신앙을, ‘’는 사랑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달빛이 햇빛 같아진다’는 것은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마침내 사랑과 하나가 되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것이 바로 태고교회 천적 인간의 상태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사랑은 사랑이고, 신앙은 신앙’이라는 식의 분리가 없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가운데 무엇이 참인지 알았고, 그 사랑 안에서 진리를 지각했습니다.

 

이 점은 AC.337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 ‘가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인은 바로 이 하나였던 것을 갈라놓았습니다. 태고교회에서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사랑으로부터 떼어 내어 독립된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사30:26의 ‘달빛은 햇빛 같겠고’가 보여 주는 것은 가인의 분리와 정확히 반대되는 상태입니다. 가인은 ‘’을 ‘’에서 떼어 놓았다면, 이사야의 말씀은 ‘달빛’이 다시 ‘햇빛’과 같아지는 상태를 보여 줍니다. 곧 신앙이 다시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특히 이 구절의 앞부분인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도 이 문맥에서 의미심장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AC.337에서 직접 이 부분을 세세하게 풀이하지는 않으므로 지나치게 확대해서는 안 되지만, 적어도 인용된 말씀 전체의 흐름은 ‘상처를 싸매심’, ‘고치심’, 그리고 ‘달빛이 햇빛 같아짐’을 하나의 회복의 그림으로 보여 줍니다. 분리되고 손상된 것이 주님으로 말미암아 다시 질서를 회복하는 모습입니다. AC.337의 주제인 사랑과 신앙의 관계를 생각하면 매우 잘 어울리는 말씀입니다.

 

이어지는 ‘햇빛은 일곱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도 주목할 만합니다. 말씀에서 ‘일곱’은 거룩함과 완전함을 나타내는 수로 자주 사용됩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단순히 햇빛의 광도가 물리적으로 일곱 배 강해진다는 뜻보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의 충만함과 그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완전한 질서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신앙이 더 밝아졌다’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면서 사랑 자체의 충만함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 살펴본 ‘부부간 준수 사항’의 비유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서로 깊이 사랑하는 부부에게 여러 원칙과 약속은 사랑과 떨어져 존재하지 않습니다.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존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배려하며, 사랑하기 때문에 약속을 지킵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준수 사항’이 사랑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원칙이 사랑 안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이것이 ‘달빛이 햇빛 같아지는’ 상태를 이해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됩니다. 신앙의 진리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하나가 되어 그 사랑을 표현하는 살아 있는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오늘날 우리의 거듭남과 연결되는 중요한 점도 있습니다. 우리는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처럼 처음부터 사랑에서 진리를 퍼셉션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AC.337이 분명히 말하듯 오늘날에는 신앙이 먼저이고, 주님께서 그 신앙으로 체어리티를 심으십니다. 처음에는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으므로 해야 한다’며 진리를 따라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처음에는 의무로 행하던 것을 점차 사랑해서 행하게 됩니다. ‘해야 하니까 하던 것’이 ‘하고 싶어서 하는 것’으로 변해 가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사30:26의 ‘달빛은 햇빛 같겠고’라는 말씀이 개인의 거듭남에도 매우 아름답게 와닿습니다. 처음에는 신앙으로 알고 믿었던 진리가 점차 사랑의 것이 되고, 마침내 그 사람의 의지와 삶이 됩니다. 예를 들어, 처음에는 ‘원수를 용서해야 한다’는 말씀을 진리이기 때문에 힘들게 순종하지만, 거듭남이 깊어지면서 실제로 그 사람의 선을 바라게 된다면, 신앙으로 받아들였던 진리가 체어리티의 생명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달빛’이 점차 ‘햇빛’과 같아지는 모습이라고 비유해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30:26 AC.337에서 단순한 보충 성구가 아닙니다. 시72에서 제시한 ‘해는 사랑, 달은 신앙’이라는 상응을 더욱 깊게 보여 주면서, 참된 신앙의 완성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신앙의 완성은 신앙이 독립적으로 더욱 강해지는 데 있지 않습니다.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여 사람이 믿는 진리가 곧 그가 사랑하고 살아가는 진리가 되는 데 있습니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가인’은 사랑과 신앙이 ‘갈라지는’ 방향을 보여 주고, 사30:26은 그 둘이 주님 안에서 다시 ‘하나가 되는’ 방향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가인의 분리를 설명하는 AC.337에서 이 말씀을 끌어온 것입니다. ‘달빛은 햇빛 같겠고’라는 짧은 한 구절 안에, 신앙이 사랑에서 생명을 얻고, 마침내 사랑과 하나가 되는 참된 교회의 질서가 압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AC.337, 창4, ‘배경’ - ‘참된 교회가 어떠했는지를 먼저 올바르게 이해해야 하는 이유’

AC.337 이 장은 태고교회의 퇴보, 곧 그 교리가 왜곡된 것과, 그 결과 생겨난 이단들과 분파들을 가인과 그의 후손들의 이름 아래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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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7, 심화 3, ‘시72:1, 3, 5,7’

AC.337.심화 3. ‘시72:1, 3, 5,7’ 1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공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 3의로 말미암아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리하리로다, 5그들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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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7.심화

 

3. ‘72:1, 3, 5,7

 

1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공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 3의로 말미암아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리하리로다, 5그들이 해가 있을 동안에도 주를 두려워하며 달이 있을 동안에도 대대로 그리하리로다, 7그의 날에 의인이 흥왕하여 평강의 풍성함이 달이 다할 때까지 이르리로다 (시72:1, 3, 5, 7) Give the king thy judgments, and thy righteousness to the king’s son. The mountains shall bring peace to the people, and the hills in righteousness. They shall fear thee with the sun, and toward the faces of the moon, generation of generations. In his days shall the righteous flourish, and abundance of peace, until there be no moon. (Ps. 72:1, 3, 5, 7)

 

 

AC.337에서 스베덴보리가 시72:1, 3, 5, 7을 인용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가인’으로 의미되는 신앙의 분리가 얼마나 심각한 일이었는지를 설명하기에 앞서, 그 분리가 일어나기 전 태고교회의 본래 질서가 어떠했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AC.337 첫머리에서 참된 교회가 어떠했는지를 알지 못하면 그 교리가 어떻게 왜곡되었는지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가인을 설명하기 전에 먼저 시72를 통하여 천적 인간의 본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 시편에서 핵심은 ‘’, ‘’, ‘산들’, ‘작은 산들’, 그리고 ‘평강’입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가 사랑을, ‘’이 신앙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이 이 인용의 중심입니다. 해는 스스로 빛을 내지만, 달은 해의 빛을 받아 비춥니다. 마찬가지로 태고교회에서 신앙은 사랑과 독립되어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부터 생명과 빛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먼저 주님을 사랑했고, 그 사랑 안에서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퍼셉션으로 알았습니다. 따라서 신앙은 사랑과 나란히 놓인 또 하나의 독립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랑 안에 신앙이 있었던 것입니다. 시72의 해와 달은 바로 이 질서를 보여 줍니다.

 

이런 점에서 ‘그들이 해가 있을 동안에도 주를 두려워하며 달이 있을 동안에도 대대로 그리하리로다’라는 말씀은 단순히 해와 달이 존재하는 오랜 세월을 뜻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속뜻으로 보면 사랑과 신앙이라는 교회의 두 핵심 요소가 나타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둘이 서로 독립된 두 원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태고교회에서는 ‘’가 중심입니다. 곧 사랑이 중심이고, ‘’인 신앙은 그 사랑으로부터 빛을 받습니다. 이것이 바로 ‘가인’이 나타나기 전 참된 교회의 질서입니다.

 

산들’과 ‘작은 산들’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들이 태고교회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말씀에서 높은 곳, 특히 산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연결됩니다. 그래서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의로 말미암아 그리하리로다’라는 말씀은 천적 교회의 중심이 사랑이었으며, 그 사랑에서 ‘평강’이 흘러나왔음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평강은 단순히 갈등이 없는 편안한 상태가 아니라, 사랑과 신앙, 선과 진리가 주님의 질서 안에서 하나를 이루는 내적 평화를 생각하게 합니다.

 

특히 ‘그의 날에 의인이 흥왕하여 평강의 풍성함이 달이 다할 때까지 이르리로다’라는 마지막 표현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달이 다할 때까지’라고 한 이유를 놀랍게도 ‘신앙이 사랑이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신앙이 없어져 버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이 사랑과 완전히 결합되어 더 이상 사랑과 떨어진 별개의 것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처음에는 ‘나는 이것이 진리라고 믿는다’고 하던 것이 마침내 ‘나는 이것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산다’는 생명의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신앙이 사랑 안에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바로 사30:26의 ‘달빛은 햇빛 같겠고’라는 말씀까지 연결합니다. 달이 상징하는 신앙의 빛이 해가 상징하는 사랑의 빛과 같아진다는 것은, 신앙과 사랑의 결합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결국 시72와 사30은 같은 천적 질서를 서로 다른 모습으로 보여 줍니다. 신앙의 최종 목적은 사랑과 떨어져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데 있지 않고, 사랑과 하나가 되어 삶 자체가 되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왜 이 구절이 ‘가인’을 설명하는 AC.337에 필요한지가 선명해집니다. ‘가인’은 바로 이 질서를 깨뜨렸습니다. 태고교회에서는 해와 달, 곧 사랑과 신앙이 하나의 질서 안에 있었는데, 가인으로 불린 사람들은 ‘’을 ‘’에서 떼어 내듯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했습니다. 더 나아가 분리된 신앙을 그 자체로 고백하기 시작했습니다. 따라서 가인의 문제는 단순히 어떤 잘못된 교리 하나를 새로 주장한 데 있지 않았습니다. 태고교회를 교회답게 하던 가장 근본적인 질서, 곧 ‘사랑으로부터 신앙이 나온다’는 질서를 뒤집은 데 있었습니다.

 

이것을 앞서 살펴본 부부의 비유와 연결하면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배려하고 존중하던 부부가 어느 순간부터 사랑 자체보다 ‘부부간 준수 사항 20가지’를 따로 떼어 더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한 것과 비슷합니다. 준수 사항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본래 사랑 안에서 생명을 얻던 것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독립적인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한 것이 문제입니다. 시72는 바로 그 분리가 일어나기 전의 상태, 곧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이 하나였던 상태를 보여 주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 놓치지 말아야 할 표현이 ‘generation of generations’, 곧 ‘대대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홍수 이후의 교회들’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시72의 인용은 태고교회만 바라보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질서가 사라진 이후에도 주님의 목적은 여전히 같습니다. 인간의 상태가 달라져 이제는 먼저 신앙을 배우고 그 신앙으로 체어리티가 심어지는 질서가 필요해졌지만, 최종 목적은 여전히 신앙과 사랑의 결합입니다. 길은 달라졌지만, 주님께서 사람을 이끄시는 목적은 변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AC.337의 시72 인용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렇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설명하기 전에, 72의 해와 달, 산들과 평강을 통하여 태고교회에서 사랑과 신앙이 본래 하나였던 천적 질서를 먼저 보여 줍니다.’ 그래야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한 일이 왜 당시에는 그토록 엄청난 악으로 여겨졌는지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인용의 중심은 ‘해와 달’입니다. ‘’인 사랑이 먼저이고, ‘’인 신앙은 그 사랑으로부터 빛을 받습니다. 그리고 완성에서는 달이 해와 하나가 되듯 신앙이 사랑과 하나가 됩니다. ‘가인’은 바로 이 둘을 갈라놓은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시72는 단순히 천적 인간을 아름답게 묘사하기 위해 덧붙인 인용이 아니라, ‘가인의 분리’가 무엇을 깨뜨렸는지를 보여 주는 기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337, 심화 4, ‘사30:26’

AC.337.심화 4. ‘사30:26’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일곱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 (사30:26) AC.337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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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7, 심화 2, 가인의 분리’에 대한 재미있는 비유

AC.337.심화 2. ‘가인의 분리’에 대한 재미있는 비유 가인이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했다는 말을 처음 접하면, 이것이 왜 그렇게 심각한 문제였는지 쉽게 와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신앙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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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가인의 분리에 대한 재미있는 비유

 

가인이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했다는 말을 처음 접하면, 이것이 왜 그렇게 심각한 문제였는지 쉽게 와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신앙을 중요하게 여기고, 자신이 무엇을 믿는지 분명히 하는 것이 왜 잘못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부부관계에 한번 비유해 보면 조금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서로 깊이 사랑하는 부부가 있다고 해보겠습니다. 이들은 상대방을 존중하고, 어려울 때 서로 돕고, 함부로 상처 주는 말을 하지 않으며, 상대방의 기쁨을 자기 기쁨처럼 여깁니다. 그렇다고 이들이 매일 ‘부부간 준수 사항 20가지’를 확인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을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지가 이미 서로를 향한 사랑 안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규칙이 없어서가 아니라, 규칙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이미 사랑 안에서 살아 있는 것입니다.

 

태고교회의 사랑과 신앙의 관계도 이와 비슷했습니다. 그들은 먼저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했으며, 그 사랑 안에서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주님으로부터 퍼셉션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별개로 신앙을 따로 떼어 내어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이것이다’라고 명문화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신앙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이 사랑 안에서 살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들이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될까 하여 신앙을 따로 언급하기조차 원하지 않았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부가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보다 ‘부부간 준수 사항 20가지’를 더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했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제 서로의 마음보다 조항을 먼저 살피고, ‘나는 20개 가운데 19개를 지켰으니 좋은 남편이다’, ‘당신은 14번 조항을 어겼으니 잘못했다’며 서로를 판단합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조금 없어도 이 규칙만 제대로 지키면 좋은 부부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본래 하나였던 사랑과 규칙의 관계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사랑에서 나온 원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독립적인 것이 되고, 나중에는 오히려 그 원칙이 사랑보다 위에 서게 된 것입니다.

 

가인’의 시작도 이와 비슷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신앙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신앙은 본래 사랑 안에 있었고, 사랑에서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신앙을 사랑에서 떼어 내어 독립적인 것으로 만들고, 마침내 신앙 자체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세우면서 질서가 뒤집히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분리’처럼 보였지만, 그 분리가 계속되자 체어리티가 소멸되고, 교리가 왜곡되더니, 결국 라멕에 이르러서는 신앙과 체어리티에 폭력을 가하는 상태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이 비유에는 또 이런 반전도 있습니다. 사랑이 이미 많이 식어 버린 부부에게는 오히려 ‘서로 모욕하지 말자’, ‘상대방의 말을 끝까지 들어 주자’, ‘어려울 때 서로 돕자’와 같은 원칙을 다시 배우고, 의식적으로 지키는 것이 관계 회복의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마음에서 저절로 우러나오지 않더라도 그것이 옳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고, 그러한 삶을 계속하는 가운데 사랑이 다시 살아날 수도 있는 것이지요.

 

이것이 AC.337에서 스베덴보리가 ‘그러나 오늘날에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고 말하는 이유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됩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은 사랑에서 신앙으로 나아갔지만, 그 상태를 잃은 인간에게는 먼저 신앙의 진리를 배우고, 그것에 따라 살아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신앙으로 사람 안에 체어리티를 심으십니다. 따라서 오늘날은 신앙을 분명히 배우고 고백하는 것 자체가 ‘가인’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 신앙이 체어리티로 나아가지 않고 그 자체로 완결된 그 무엇이 될 때입니다.

 

이 비유를 통해 보면 가인과 셋의 차이도 더욱 선명해집니다. 가인이 사랑에서 떨어져 나와 자신을 앞세우는 신앙이라면, 셋은 다시 체어리티로 나아가는 신앙입니다. 부부관계에 비유하면, 사랑보다 규칙을 앞세우고, ‘규칙만 지키면 된다’고 하는 것이 전자의 모습이라면, 이미 약해진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 올바른 원칙을 배우고, 그것을 따라 살면서 다시 서로를 사랑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은 후자의 모습과 닮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규칙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그 규칙이 사랑에서 나와 사랑을 섬기고 있는가, 아니면 사랑에서 분리되어 그 자체가 목적이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태고교회에서는 신앙을 사랑과 분리한 일이 ‘엄청난 악’으로 여겨졌다는 것은 신앙이나 교리를 명문화하는 행위 자체가 악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본래 사랑 안에서 하나였던 신앙을 사랑 없이도 존재할 수 있는 독립적인 것으로 만들었다는 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사랑이 살아 있을 때에는 신앙이 그 사랑 안에서 생명을 얻고, 사랑이 무너진 뒤에는 주님께서 신앙으로 다시 체어리티를 심으십니다. 어느 경우든 목적은 같습니다. 신앙은 홀로서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와 결합하여 삶이 되기 위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가인의 분리’, 곧 ‘가인’이라는 ‘분리’를 이해할 때 놓치지 말아야 할 핵심입니다.

 

 

 

AC.337, 심화 3, ‘시72:1, 3, 5,7’

AC.337.심화 3. ‘시72:1, 3, 5,7’ 1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공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 3의로 말미암아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리하리로다, 5그들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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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7, 심화 1, 왜 태고교회에서는 ‘신앙을 따로 고백하는 것’조차 엄청난 악이었을까?

AC.337.심화 1. 왜 태고교회에서는 ‘신앙을 따로 고백하는 것’조차 엄청난 악이었을까? 이 질문은 AC.337을 읽으면서 반드시 한번 짚어볼 만합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신앙고백’이 오히려 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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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왜 태고교회에서는 신앙을 따로 고백하는 것조차 엄청난 악이었을까?

 

이 질문은 AC.337을 읽으면서 반드시 한번 짚어볼 만합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신앙고백’이 오히려 매우 중요한 일로 여겨집니다. 사도신경을 고백하고, 자신이 무엇을 믿는지를 분명하게 말하며, 올바른 교리를 지키는 것을 귀하게 여깁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에서는 ‘신앙을 따로 고백하는 것’이 교리의 왜곡이었고, 심지어 ‘엄청난 악’으로 여겨졌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신앙고백 역시 잘못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두 교회의 영적 상태와 거듭남의 질서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태고교회 사람에게 사랑과 신앙은 아직 분리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비유하자면, 오늘날 우리가 ‘나는 내 아이를 사랑한다’는 것과 ‘나는 내 아이가 소중하다고 믿는다’를 굳이 별개의 두 체계로 나누지 않는 것과 어느 정도 비슷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 가치를 알고 있으며, 그 앎은 사랑과 함께 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어느 순간부터 ‘사랑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 아이가 소중하다는 사실을 올바르게 믿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면, 무언가 근본적인 것이 뒤집힌 것입니다. 태고교회에서 신앙을 사랑과 분리한다는 것은 이보다 훨씬 깊은 차원에서 그러한 질서의 전도(顚倒, 뒤집힘)를 의미했습니다.

 

더구나 처음의 분리는 아주 작아 보였을 것입니다. ‘사랑을 버리자’고 선언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따로 떼어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세웠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곳에서 ‘가인’이 시작됩니다. 신앙이 사랑과 분리되어도 신앙일 수 있다는 생각이 가능해지고, 그다음에는 신앙이 사랑보다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가능해지며, 결국 체어리티가 없어도 올바른 신앙만 있으면 된다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습니다. AC.324-334에서 보았듯 그 끝은 체어리티의 소멸과 교리의 왜곡, 그리고 마침내 신앙과 체어리티에 폭력을 가하는 상태였습니다.

 

이 때문에 AC.337은 오늘날의 교회에도 매우 날카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태고교회 사람이 아니므로 먼저 진리를 배우고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신앙고백이나 교리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 자체가 가인적인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 신앙과 교리가 어디로 가고 있느냐입니다. 그것이 사람을 회개하게 하고, 자기 사랑을 낮추며,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삶으로 이끌고 있다면 신앙은 자신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고백이 정확하다는 사실 자체가 구원의 보증처럼 되고, 삶에서 체어리티가 사라져도 ‘나는 올바른 교리를 믿는다’는 사실로 자신을 정당화한다면 가인의 문제가 다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AC.337에서 말하는 태고교회의 타락은 먼 옛날 어느 교회의 특이한 사건만은 아닙니다. ‘사랑 안에 있어야 할 진리를 사랑에서 떼어 내어 그 진리 자체를 높이는 것’은 어느 시대의 교회에서도 반복될 수 있습니다. 교리가 사람을 주님과 이웃에게로 이끌기 위한 길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이 될 때, 신앙이 삶을 변화시키는 힘이 아니라 자신이 옳음을 증명하는 표지가 될 때, 우리는 가인의 문제를 우리 안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어제 함께 붙들었던 원리가 다시 매우 정확하게 들어맞습니다. ‘진리가 자기 입장을 섬기게 해서는 안 됩니다.’ 가인의 시작도 어쩌면 바로 그 질서의 미세한 전도에서 볼 수 있습니다. 진리와 신앙이 사랑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떨어져 나와 스스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참된 신앙은 자신을 높이지 않습니다. 사람을 체어리티로 데려가고, 체어리티 안에서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게 한 뒤, 마침내 자신도 그 사랑 안에서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그러므로 AC.337의 핵심은 ‘신앙보다 사랑이 중요하다’는 단순한 비교에 있지 않습니다. 더 깊은 핵심은 ‘신앙은 사랑과 분리될 때, 그 본래의 생명을 잃는다’는 데 있습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으로부터 신앙이 나왔고, 오늘날에는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집니다. 출발 순서는 달라졌지만, 목적은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진리가 선과 결합하고, 신앙이 체어리티와 결합하여, 마침내 사람이 알고 믿는 것이 그가 사랑하고 살아가는 것이 되도록 이끄십니다. 바로 그 결합이 교회를 교회답게 하고, 신앙을 신앙답게 하는 내적 생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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