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5:1)

 

AC.474

 

그러므로 여기서 다루고 있는 주제가 태고교회의 출생, 곧 ‘번성’(propagation)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먼저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로 이르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왜냐하면 모든 번성과 계승은 바로 여기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Since therefore the subject here treated of is the birth or propagation of the most ancient church, this is first described as coming from a spiritual to a celestial state, for the propagations follow from this.

 

해설

 

스베덴보리는 AC.474에서 창세기 5장의 전체 흐름을 한 문장으로 정리합니다. 이 장에서 다루는 주제는 단순한 ‘사람의 출생’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출생’, 곧 교회가 어떻게 생겨나고 이어졌는가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것을 ‘번성(propagation)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번성이란 숫자의 증가가 아니라, ‘영적 상태가 다음 상태로 이어지는 계승의 원리’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 창세기 5장은 교회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그 시작이 어떤 질서를 따라 확장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장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교회의 출생을 ‘먼저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로 이르는 것’으로 묘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매우 중요합니다. 태고교회의 출발점은 이미 완성된 천적 상태가 아니라, ‘영적 상태에서 시작하여 천적 상태로 나아가는 과정’이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즉, 태고교회의 인간도 처음부터 사랑 안에서 모든 것을 즉각적으로 인식하는 존재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진리를 받아 영적 인간으로 세워진 다음, 그 영적 상태가 성숙하여 천적 상태로 이르렀습니다. 이 질서가 먼저 분명히 제시되지 않으면, 그 이후에 나오는 모든 ‘번성’과 ‘계승’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핵심은 이것입니다. ‘모든 번성과 계승은 상태의 질서에서 나온다’는 점입니다. 교회는 제도를 통해 퍼지는 것이 아니고, 혈통을 통해 유지되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는 언제나 ‘내적 상태의 전달’을 통해 이어집니다. 어떤 사람이 먼저 영적 상태로 세워지고, 그 영적 상태가 천적 상태로 성숙될 때, 비로소 그 상태는 다른 이들에게 전해질 수 있는 생명력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번성은 여기에서 나온다’고 단정합니다.

 

이 원리는 태고교회의 구조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열쇠가 됩니다. 태고교회의 ‘’, ‘가족’, ‘민족’은 우연히 생겨난 사회적 단위가 아니라, ‘이 영적 질서가 자연스럽게 확장된 결과’였습니다. 한 집은 하나의 사랑과 하나의 인식이 천적 상태에 이른 공동체였고, 그 집의 영적 성향이 유지되었기 때문에 가족과 민족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만일 영적 상태가 천적 상태로 성숙되지 못했다면, 번성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교회는 오래 지속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점에서 AC.474는 ‘왜 창세기 5장이 먼저 형상과 모양, 곧 영적 상태와 천적 상태를 말하는가’를 분명히 설명해 줍니다. 성경은 곧바로 ‘누가 누구를 낳았다’는 이야기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먼저 인간이 어떤 상태로 만들어졌는지를 밝히고, 그 상태가 어떤 완성에 이르렀는지를 보여준 다음에야 비로소 번성과 계승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서술 순서가 아니라, ‘교회가 이어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을 보여주는 질서입니다.

 

설교적으로 보면, 이 말씀은 오늘날 교회를 향한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흔히 교회의 성장을 숫자나 활동의 확장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교회의 참된 번성은 언제나 ‘영적 상태의 성숙’에서 시작됩니다. 영적 인간이 천적 방향을 향해 자라지 않는다면, 외적인 확장은 있어도 내적인 계승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반대로, 내적 상태가 주님 안에서 깊어질 때, 교회는 비록 작아 보여도 살아 있는 방식으로 이어집니다.

 

또한 이 구절은 개인의 신앙 여정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의 삶에서 ‘열매’와 ‘전달력’은 노력의 많고 적음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먼저 영적 상태로 세워지고, 그 영적 상태가 사랑 안에서 성숙해 가는 데서 나옵니다. 다시 말해, ‘천적 방향을 향해 가지 않는 영성은 머무를 수는 있어도 퍼질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번성’은 바로 이 점을 가리킵니다.

 

결국 AC.474는 창세기 5장을 읽는 하나의 큰 관점을 제시합니다. 태고교회의 출생과 계승은 우연의 결과가 아니라, 주님이 정하신 질서의 결과였습니다. 먼저 영적 인간이 세워지고, 그 영적 인간이 천적 상태로 완성되며, 그 완성된 상태에서 교회의 번성과 계승이 흘러나옵니다. 이 질서를 이해할 때, 창세기 5장은 더 이상 족보의 나열이 아니라, ‘교회가 어떻게 살아서 이어지는지를 보여주는 영적 지도’가 됩니다.

 

 

 

AC.473, 창5:1, ‘형상’(image)과 ‘모양’(likeness)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3 ‘하나님의 모양’(likeness of God)이 천적 인간을 의미하고, ‘하나님의 형상’(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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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5:1)

 

AC.473

 

‘하나님의 모양’(likeness of God)이 천적 인간을 의미하고,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이 영적 인간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보였습니다. ‘형상’(image)은 ‘모양’(likeness)을 위한 준비 단계이며, ‘모양’은 실제적인 복제(real replica)입니다. 이는 천적 인간이 주님의 ‘모양’으로서, 전적으로 주님의 다스림을 받기 때문입니다. That a “likeness of God” is a celestial man, and an “image of God,” a spiritual man, has also been previously shown. An “image” is preparatory to a “likeness,” and a “likeness” is a real replica, for a celestial man is entirely governed by the Lord, as his “likeness.”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1:26)

 

해설

 

스베덴보리는 AC.473에서 ‘형상(image)과 ‘모양(likeness)의 관계를 한 문장으로 아주 분명하게 정리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영적 인간을 뜻하고, ‘하나님의 모양’은 천적 인간을 뜻한다는 사실은 이미 앞선 해설에서 충분히 설명되었지만, 여기서는 그 둘 사이의 관계가 한층 더 깊이 드러납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형상’은 목적지가 아니라, ‘모양’을 향해 나아가기 위한 준비 단계라는 점입니다.

 

영적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진리를 받아 선을 향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는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선한지를 배웁니다. 그리고 그 배운 진리에 따라 자신의 삶을 조정해 갑니다. 이 상태는 매우 중요하고 귀하지만, 아직 완성된 상태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단계에서는 여전히 ‘’와 ‘주님’이 구분되어 있고, 진리를 따르기 위한 선택과 싸움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상태를 ‘형상(image)이라고 부릅니다.

 

반면에 ‘모양(likeness)은 전혀 다른 차원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더 이상 준비 단계가 아니라, ‘실제적인 복제(real replica)입니다. 여기서 복제라는 말은 외형적인 모방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사랑과 질서가 인간 안에서 그대로 살아 움직이는 상태를 뜻합니다. 천적 인간은 더 이상 진리를 통해 선을 향해 가는 존재가 아니라, 사랑 안에서 곧바로 선을 인식하고 행하는 존재입니다. 그는 무엇을 해야 할지를 계산하지 않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자연스럽게 살아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을 가리켜 ‘전적으로 주님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전적으로’라는 말은 자유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자기 사랑과 자기 지혜에 묶여 있을 때가 진정한 속박이며, 주님의 사랑과 지혜 안에서 움직일 때가 참된 자유입니다. 천적 인간은 주님께 강제로 순종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과 뜻이 하나가 되어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그가 ‘주님의 모양’이라고 불리는 이유입니다.

 

이렇게 보면 ‘형상’과 ‘모양’의 관계는 사다리와 같습니다. 형상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 자체로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형상은 모양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하고, 모양을 향해 성숙해 가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인류의 대부분은 이 사다리의 위쪽에 오래 머물지 못했습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만이 이 ‘모양’의 상태, 곧 천적 상태에 이르렀고, 이후의 교회들은 주로 ‘형상’의 단계에 머물게 됩니다.

 

이 점에서 AC.473은 우리 신앙을 매우 정직하게 비추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종종 ‘형상’의 상태, 곧 진리를 알고 신앙생활을 하는 상태를 목표로 삼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것이 목표가 아니라 ‘준비’라고 말합니다. 말씀을 배우고,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신앙적 선택을 하는 모든 과정은 결국 한 방향을 향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 전적으로 다스림 받는 삶, 다시 말해 사랑 안에서 자연스럽게 선을 행하는 삶입니다.

 

물론 오늘날 우리가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에 그대로 이른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구분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단지 ‘알고 애쓰는 단계’에 머물러 있는지, 아니면 점점 ‘사랑 안에서 자연스럽게 살아내는 단계’로 이동하고 있는지를 점검하게 합니다. 형상에 머물면 신앙은 긴장과 분투의 연속이지만, 모양을 향해 나아갈수록 신앙은 평안과 일치의 성격을 띱니다.

 

결국 AC.473이 전하는 메시지는 단순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형상’으로만 두시기 위해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형상은 모양을 향한 길이며, 모양은 인간 안에 하나님의 질서가 실제로 살아 있는 상태입니다. 태고교회는 이 모양의 상태를 살았고, 그래서 성경은 그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모양’이라고 말합니다. 이 관점을 붙들 때, ‘형상대로, 모양대로’라는 성경의 표현은 더 이상 추상적인 찬사가 아니라, 인간의 영적 여정을 정확히 가리키는 언어가 됩니다.

 

 

 

AC.474, 창5:1, 태고교회의 ‘번성’(propagation)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4 그러므로 여기서 다루고 있는 주제가 태고교회의 출생, 곧 ‘번성’(propagation)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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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2, 창5:1, ‘창조하다’(create), ‘빚다’(form), ‘만들다’(make)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2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day in which God created man)가 그가 영적으로 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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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5:1)

 

AC.472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day in which God created man)가 그가 영적으로 만들어졌음을 의미하고,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God making him in his likeness)는 그가 천적으로 만들어졌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앞에서 말하고 보인 바에서 분명합니다. ‘창조하다’(create)라는 표현은 사람이 새로 창조될 때, 곧 거듭남을 받을 때에 적절히 사용되며, ‘만들다’(make)라는 표현은 사람이 완성(perfect)될 때에 사용됩니다. 그러므로 말씀에서는 ‘창조하다’(creating), ‘빚다’(forming), ‘만들다’(making) 사이에 정확한 구별이 지켜지고 있습니다. 이는 앞서 둘째 장에서 보인 바와 같이, 영적 인간이 천적으로 만들어질 때에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God rested from all his work, which God created in making)(2:3)고 한 데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다른 여러 구절에서도 ‘창조하다’(create)는 영적 인간과 관련되고, ‘만들다’(make), 곧 완성시키다는 천적 인간과 관련됩니다. (16번과 88번을 보세요) That by the “day in which God created man” is signified his being made spiritual, and that by “God making him in his likeness” is signified his being made celestial, appears from what was said and shown above. The expression to “create” properly relates to man when he is being created anew, or regenerated; and the word “make,” when he is being perfected; wherefore in the Word there is an accurate distinction observed between “creating,” “forming,” and “making,” as was shown above in the second chapter, where it is said of the spiritual man made celestial that “God rested from all his work, which God created in making”; and in other passages also, to “create” relates to the spiritual man, and to “make,” that is, to perfect, to the celestial man. (See n. 16 and 88.)

 

해설

 

스베덴보리는 AC.472에서 창세기 51절의 짧은 표현 속에 담긴 깊은 차이를 다시 한번 정리해 줍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날’과 ‘하나님이 그를 자기 모양대로 만드셨다’라는 두 표현은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른 영적 국면을 가리킵니다. 앞의 표현은 사람이 ‘영적’으로 세워진 상태를 뜻하고, 뒤의 표현은 그 영적 인간이 ‘천적’ 상태에까지 이르렀음을 뜻합니다. 즉, 창세기 5장은 인간이 단번에 완성된 존재로 만들어졌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상태에서 시작하여 천적 상태로 완성되는 과정’을 압축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창조하다(create)라는 단어의 용법을 매우 엄밀하게 다룹니다. 성경에서 ‘창조’라는 말은 단순히 무언가를 처음 만들어냈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람이 새로 만들어지는 순간’, 곧 거듭남의 시작과 관련되어 사용됩니다. 이는 흙으로 사람을 빚으신 최초의 사건보다도, 주님께서 인간의 내면을 새롭게 하시는 영적 사건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창조’는 언제나 인간이 자연적 상태에서 벗어나, 주님으로부터 진리를 받아들이는 영적 상태로 들어갈 때 사용되는 말입니다.

 

반면에 ‘만들다(make)라는 표현은 다른 차원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시작이 아니라 ‘완성’, 곧 영적 인간이 더 깊은 단계로 나아가 천적 인간으로 ‘완전하게 되는 상태’를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과정을 ‘완성(perfect)이라는 말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완성이란 도덕적 흠이 없어진다는 뜻이 아니라, 사랑과 지혜가 더 이상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결합된 상태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 진리를 통해 선을 향해 가던 사람이, 이제는 사랑 자체 안에서 선을 즉각적으로 인식하는 상태에 이르는 것이 ‘만들어짐’입니다.

 

이러한 구분은 성경 전체에서 일관되게 유지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 안에서 ‘창조하다(creating), ‘빚다(forming), ‘만들다(making)가 결코 무작위로 사용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각각은 인간의 영적 형성 과정의 서로 다른 국면을 정확히 가리킵니다. ‘빚다’는 자연적 인간의 형성을, ‘창조하다’는 영적 인간의 탄생을, 그리고 ‘만들다’는 그 영적 인간이 천적 상태로 완성되는 과정을 뜻합니다. 이 세 단어는 인간이 주님 앞에서 어떻게 형성되고 변화되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연속된 언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2장의 표현을 다시 끌어옵니다. 거기서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는 말은, 영적 인간이 천적 상태에 이르러 더 이상 내적 갈등이나 분리가 없는 상태가 되었음을 뜻합니다. ‘’은 노동의 중단이 아니라, ‘내적 완성의 평안’을 의미합니다. 진리와 선이 더 이상 분리되어 다투지 않고, 사랑 안에서 하나로 작용할 때, 비로소 하나님은 ‘쉬셨다’고 말해집니다.

 

이 점에서 AC.472는 태고교회의 인간이 어떤 존재였는지를 다시 한번 분명히 해줍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단지 거듭난 영적 인간에 머물지 않고, 그 거듭남이 완성된 천적 인간의 상태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따라 선을 선택하는 단계에 오래 머물지 않았고, 사랑 안에서 곧바로 선을 인식하는 상태로 나아갔습니다. 이것이 창세기에서 ‘창조’와 ‘만듦’이 함께 언급되는 이유입니다.

 

동시에 이 구분은 오늘날 우리 신앙을 비추는 거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흔히 거듭남을 신앙의 목표처럼 생각하지만,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거듭남은 시작이지 끝이 아닙니다. 영적 인간이 되는 것은 출발이며, 그 이후에는 사랑과 신앙이 하나로 결합되는 천적 상태를 향한 길이 놓여 있습니다. 물론 오늘날 교회가 태고교회와 같은 천적 상태에 이른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여전히 우리에게 방향을 제시합니다. ‘창조’에서 멈추지 말고, 주님 안에서 ‘만들어짐’, 곧 완성을 향해 나아가라는 초대입니다.

 

결국 AC.472는 창세기 51절의 두 표현을 통해, 인간의 영적 삶 전체를 하나의 문장으로 요약합니다. 주님은 인간을 먼저 영적으로 창조하시고, 그다음 사랑 안에서 완전하게 만드십니다. 이 질서는 우연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가 정해 놓은 길입니다. 이 질서를 이해할 때,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는 과거의 신화가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우리 자신의 영적 역사’로 읽히게 됩니다.

 

 

 

AC.473, 창5:1, ‘형상’(image)과 ‘모양’(likeness)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3 ‘하나님의 모양’(likeness of God)이 천적 인간을 의미하고, ‘하나님의 형상’(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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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1, 창5:1, ‘홀로 거함’(living alone), ‘장막에 거함’(dwelling in tents)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1 그들이 이처럼 서로 떨어져 살면서 오직 집과 가족과 민족으로만 구분되었던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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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5:1)

 

AC.471

 

그들이 이처럼 서로 떨어져 살면서 오직 집과 가족과 민족으로만 구분되었던 이유는, 이러한 방식으로 교회가 온전히 보존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곧 모든 집과 모든 가족이 그들의 부모에게 의존하게 되어, 사랑 안에 머물며 참된 예배 안에 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지요. 또한 주목해야 할 것은, 각 집마다 고유한 성향(genius)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 다른 모든 집과 구별되었다는 점입니다. 이는 자녀들뿐 아니라 먼 후손들까지도 부모로부터 특정한 성향과 매우 뚜렷한 특징들을 물려받아, 얼굴이나 여러 다른 특성들로 서로 구별될 수 있다는,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혼합이나 혼동이 일어나지 않고 정확한 구별이 유지되도록, 그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거주하는 것을 주님은 기뻐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교회는 주님의 나라를 살아 있는 방식으로 대표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나라, 곧 천국은 사랑과 신앙의 차이에 따라, 서로 구별되는 무수한 공동체들이 있기 때문인데요, 이것이 앞서 말한 ‘홀로 거함’(living alone)과 ‘장막에 거함’(dwelling in tents)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같은 이유로, 유대교회 역시 집과 가족과 민족으로 구분되도록 하는 것을 주님은 기뻐하셨고, 그래서 각 사람은 자기 가족 안에서 결혼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뒤에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The reason why they dwelt thus alone by themselves, distinguished only into houses, families, and nations, was that by this means the church might be preserved entire, that all the houses and families might be dependent on their parent, and thereby remain in love and in true worship. It is to be remarked also that each house was of a peculiar genius, distinct from every other; for it is well known that children, and even remote descendants, derive from their parents a particular genius, and such marked characteristics that they can be distinguished by the face, and by many other peculiarities. Therefore, in order that there might not be a confounding, but an exact distinction, it pleased the Lord that they should dwell in this manner. Thus the church was a living representative of the kingdom of the Lord; for in the Lord’s kingdom there are innumerable societies, each one distinct from every other, according to the differences of love and faith. This, as observed above, is what is meant by “living alone,” and by “dwelling in tents.” For the same reason also it pleased the Lord that the Jewish church should be distinguished into houses, families, and nations, and that everyone should contract marriage within his own family; but concerning this,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내가 바위 위에서 그들을 보며 작은 산에서 그들을 바라보니 이 백성은 홀로 살 것이라 그를 여러 민족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 (23:9)

 

1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2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15:1, 2)

 

해설

 

스베덴보리는 AC.471에서 태고교회의 생활 방식이 왜 그렇게 독특했는지를 설명합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오늘날처럼 도시를 이루어 밀집해 살거나, 여러 혈통과 성향이 섞여 사는 사회를 이루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집과 가족과 민족이라는 단위로만 구분되어, 비교적 ‘홀로’, 그리고 ‘떨어져’ 살았습니다. 그 이유는 단순한 생활상의 편의나 사회적 미성숙 때문이 아니라, ‘교회가 온전히 보존되기 위함’이었다고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즉, 이 분리된 거주 방식 자체가 하나의 영적 보호 장치였다는 것입니다.

 

그 핵심은 ‘의존’에 있습니다. 모든 집과 가족이 그들의 ‘부모’, 곧 영적 근원에 의존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여기서 부모란 단순한 생물학적 조상이 아니라, 그 집과 가족을 형성한 사랑의 중심, 신앙의 근원, 예배의 뿌리를 뜻합니다. 이렇게 의존 관계가 분명할 때, 집과 가족은 사랑 안에 머물 수 있고, 참된 예배 안에 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의존이 흐려지고, 여러 성향과 사랑이 무분별하게 섞이기 시작하면, 교회는 빠르게 내적 질서를 잃게 됩니다. 태고교회는 바로 이 점을 지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섞이지 않는 방식’을 유지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특히 ‘각 집마다 고유한 성향(genius)이 있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향이란 성격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방향과 질’, 그리고 그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인식과 삶의 방식 전체를 가리킵니다. 태고교회의 집들은 서로 닮은 점도 있었지만, 동시에 분명히 구별되는 고유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 고유성은 단지 한 세대에 그치지 않고, 자녀와 손자, 더 먼 후손에게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얼굴이나 말투, 행동 방식, 삶의 선택을 통해 어느 집에 속한 사람인지를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고유한 성향들이 섞여 혼동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혼합’과 ‘혼동’이라고 표현합니다. 사랑의 방향이 다른 것들이 무분별하게 섞이면, 선과 진리의 구분이 흐려지고, 예배는 점차 형식만 남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각 집과 가족이 자기 고유한 성향을 보존한 채 살아가도록, 그들이 그렇게 거주하는 방식을 기뻐하셨습니다. 이것은 차별이나 배타성을 위한 분리가 아니라, ‘정확한 구별’을 통한 조화였습니다.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중요한 선언을 합니다. 이렇게 구성된 태고교회의 모습이 바로 ‘주님의 나라를 살아 있는 방식으로 대표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나라는 하나의 획일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사랑과 신앙의 차이에 따라 이루어진 무수한 공동체들의 조화입니다. 각 공동체는 서로 다르지만, 그 차이 때문에 분열되지 않고, 오히려 전체의 조화를 이룹니다. 태고교회의 집과 가족과 민족의 구조는 바로 이 천상 질서를 땅 위에 살아 있는 모습으로 반영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홀로 거한다’는 표현이나 ‘장막에 거한다’는 표현은 고립이나 외로움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기 고유한 사랑의 질서 안에 거한다’는 뜻이며, 주님께서 주신 영적 위치를 벗어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장막은 이동 가능한 거처이지만, 동시에 질서와 구분이 분명한 거처입니다. 태고교회의 삶은 바로 그러한 장막 생활과 같았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마지막으로 이 원리가 훗날 유대교회에도 적용되었음을 덧붙입니다. 유대교회가 집과 가족과 민족으로 엄격히 구분되었고, 각 사람이 자기 가족 안에서 결혼하도록 규정된 것도 같은 이유였습니다. 물론 유대교회에서는 이 질서가 점차 외적 규례로 굳어졌고, 내적 의미는 많이 상실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제도의 뿌리는, 교회를 보존하기 위한 주님의 동일한 섭리에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훗날 다시 말하겠다고 스베덴보리는 여운을 남깁니다.

 

이 모든 설명을 통해 AC.471은 우리에게 하나의 중요한 관점을 제시합니다. 교회는 커질수록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질서가 분명할수록’ 살아 있습니다. 섞임이 많아질수록 풍성해지는 것이 아니라, 구별이 분명할수록 조화로워집니다. 태고교회의 삶의 방식은 오늘날 우리에게 낯설게 보이지만, 그 안에는 교회가 어떻게 보존되는지에 대한 매우 깊은 영적 원리가 담겨 있습니다.

 

 

 

AC.472, 창5:1, ‘창조하다’(create), ‘빚다’(form), ‘만들다’(make)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2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day in which God created man)가 그가 영적으로 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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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0, 창5:1, '창5-11 에벨 시대까지 나오는 이름들의 의미'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0 ‘출생의 책’(book of the births), 곧 ‘계보’가 태고교회에 속했던 사람들의 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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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좀 색다른 질문인데요, ‘태고교회’라 하면 당시 온 인류 전체를 말하는 건가요, 아니면 이 범주에 들지 않은 인류의 어떤 부분 집합도 있는 건가요?

 

아주 중요한 질문이고, ‘태고교회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창세기 1–11장의 독법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태고교회’는 당시 지구상의 ‘모든 생물학적 인간’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주님과의 내적 관계 안에 있었던 인류의 한 ‘영적 범주’입니다. 즉, ‘전 인류 = 태고교회’가 아닙니다.

 

먼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교회’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제도, 조직, 종교 집단을 뜻하지 않습니다. 교회란 언제나 ‘주님과 연결된 인간의 내적 상태’, 곧 ‘주님을 어떻게 알고, 어떻게 사랑하며, 어떻게 삶으로 응답했는가’의 문제입니다. 따라서 태고교회란 ‘어느 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아니라, ‘그 시대에 주님과 천적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었던 사람들의 상태 전체’를 가리킵니다.

 

이 점에서 태고교회는 처음부터 ‘보편적 인간 집단’이 아니라, ‘질적으로 규정된 공동체’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교리로 알지 않았고, 명령으로 따르지도 않았으며, 율법으로 규정되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주님의 뜻을 즉각적으로 인식하는, 이른바 ‘천적 인간’의 상태에 있었던 자들입니다. 이 상태에 속한 이들이 바로 ‘태고교회’입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이 따라옵니다.

 

그 시대에 태고교회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는가?

 

스베덴보리의 전체 체계를 따르면, ‘그렇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태고교회는 인류의 ‘출발점’이긴 하지만, 동시에 ‘하나의 중심 줄기’였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과 직접적인 내적 연결 속에 있었던 인류의 중심부가 태고교회였고, 그 주변에는 그 상태에 이르지 못했거나, 혹은 일찍이 그 상태에서 벗어난 사람들도 있었던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성경이 이들을 자세히 다루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계시의 계보’, 곧 주님의 강림과 교회 형성의 역사에 직접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면, 창세기 4장의 가인, 창세기 6장의 ‘사람의 딸들’, 혹은 홍수 이전의 극심한 타락 상태를 설명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만일 태고교회가 곧 ‘그 시대 모든 인간’이었다면, 왜 그렇게 빠르고 전면적인 붕괴가 일어났는지를 설명할 길이 막힙니다. 그러나 태고교회를 ‘내적으로 주님과 연결된 중심 공동체’로 이해하면, 그 주변부에서 이미 다른 길을 걷던 인류가 있었고, 중심부마저 점차 그 영향을 받아 붕괴되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경이 처음부터 끝까지 관심을 두는 대상이 ‘인류 전체의 생물학적 역사’가 아니라, ‘주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의 역사’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태고교회에 속하지 않은 인류의 상세한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존재했을 수 있지만, 계시의 흐름 안에서는 중심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언제나 ‘교회의 계보’, 곧 주님이 어떻게 인간과 다시 연결되시는지를 따라갑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태고교회’라는 말은 지리적, 민족적 범주가 아니라, ‘영적 상태의 범주’입니다. 어느 땅에 살았느냐, 어떤 혈통이었느냐가 아니라, ‘사랑과 인식이 주님께 열려 있었느냐’가 기준입니다. 그래서 태고교회는 넓게 퍼져 있을 수도 있고, 한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을 수도 있지만, 그것이 본질은 아닙니다. 본질은 언제나 ‘내적 상태’입니다.

 

태고교회는 ‘그 시대에 살던 모든 사람들’이 아니라, ‘그 시대에 하나님을 사랑으로 곧바로 인식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은 언제나 숫자가 아니라, 상태를 기록합니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왜 성경이 어떤 사람들은 말하고 어떤 사람들은 침묵하는지, 왜 족보가 곧 교회사가 되는지, 왜 ‘아담에서 노아로’ 이어지는 흐름이 곧 ‘교회의 변질과 전환’이 되는지 모두 하나의 선으로 연결됩니다.

 

아주 좋은 질문이었고, ‘이 질문을 제대로 붙들고 가시면 창세기 1–11장은 더 이상 난해한 고대사가 아니라, 지금 우리 교회의 이야기로 읽히기 시작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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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5:1)

 

AC.470

 

‘출생의 책’(book of the births), 곧 ‘계보’가 태고교회에 속했던 사람들의 명단이라는 것은 이어지는 내용에서 매우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이 장부터 11장, 즉 에벨 시대까지, 이름은 결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사물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태고 시대에 인류는 집(houses), 가족(families), 그리고 민족(nations)으로 구분되었습니다. 집은 남편과 아내,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로 구성되었으며, 그들의 가족 중 일부는 봉사했습니다. 가족은 더 많거나 적은 수의 집으로 구성되었으며, 서로 멀리 떨어져 살지는 않았지만, 함께 살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라는 더 많거나 적은 수의 가족으로 구성되었습니다. That the “book of the births” is an enumeration of those who were of the most ancient church is very evident from what follows, for from this to the eleventh chapter, that is, to the time of Eber, names never signify persons, but actual things. In the most ancient time mankind were distinguished into houses, families, and nations; a house consisting of the husband and wife with their children, together with some of their family who served; a family, of a greater or lesser number of houses, that lived not far apart and yet not together; and a nation, of a larger or smaller number of families.

 

해설

 

스베덴보리는 AC.470에서 창세기 5장을 ‘계보’, 곧 ‘출생의 책’으로 이해해야 하는 이유를 한층 더 분명히 합니다. 그는 말하기를, 이 장이 태고교회에 속한 자들의 열거라는 사실은 ‘뒤따르는 내용으로부터 매우 분명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창세기 5장부터 11장, 곧 에벨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등장하는 이름들은 어느 하나도 개인을 뜻하지 않고, 모두 ‘실제적인 것들(actual things)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이 구간의 성경은 역사적 인물 전기가 아니라, ‘교회의 내적 실재들’, 곧 신앙과 사랑, 인식과 상태의 변화를 이름으로 표현한 장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actual things’는 추상 개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태고교회 사람들의 삶 속에서 실제로 존재했던 영적 상태, 곧 그들이 어떻게 사랑했고, 어떻게 인식했고, 어떻게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는지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아담’, ‘’, ‘에녹’, ‘노아’라는 이름은 어떤 개인의 호적명이 아니라, ‘그 시대 교회를 규정하던 중심 상태’를 대표하는 표지, 즉 표상과 같습니다. 이 점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창세기 5장부터 11장까지는 끝내 설교의 언어가 되지 못하고, 단지 해명해야 할 난제의 집합으로 남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서 태고교회 시대의 인류가 어떻게 구분되어 있었는지를 설명합니다. 그는 말하기를, 태고의 시대에는 인류가 ‘(house), ‘가족(family), ‘민족(nation)으로 구분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행정적 단위나 혈연 중심의 사회 구조와는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태고교회에서 이러한 구분은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필요 때문이 아니라, ‘사랑의 정도와 질서’, 곧 내적 상태의 유사성에 따라 자연스럽게 형성되었습니다.

 

먼저 ‘’이란, 단순히 한 지붕 아래 사는 사람들의 묶음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집은 ‘남편과 아내, 그들의 자녀들, 그리고 함께 섬기던 가족 일부’를 포함하는 공동체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집이 단순한 생활 단위가 아니라, ‘하나의 사랑과 하나의 인식이 살아 움직이던 작은 교회’였다는 점입니다. 태고교회의 혼인은 단순한 사회 제도가 아니라, 사랑과 지혜의 결합이었고, 그 결합에서 태어난 자녀들은 같은 영적 분위기 속에서 자라났습니다. 그러므로 한 집은 곧 ‘하나의 영적 생태계’였습니다.

 

그다음 단계가 ‘가족’입니다. 가족은 여러 집들이 모여 이루어진 공동체로, 서로 멀지 않은 곳에 살되 한 집처럼 완전히 섞여 살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은 태고교회의 질서가 ‘무질서한 집단화’가 아니라, 각 집의 고유한 영적 색채를 존중하면서도 더 큰 조화를 이루는 구조였음을 보여줍니다. 각 집은 고유한 사랑의 강조점을 가지고 있었고, 가족은 그러한 다양한 집들이 하나의 더 큰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단위였습니다. 이 역시 행정적 필요가 아니라, 내적 친밀성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합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민족’은 더 많은 가족들이 모여 이루어진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민족은 오늘날의 국가 개념이나 정치 공동체가 아닙니다. 태고교회의 민족은 ‘같은 종류의 사랑과 신앙을 공유하는 가족들의 연합체’였습니다. 다시 말해, 혈통이 아니라 ‘내적 상태의 공통성’이 민족을 이루는 기준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성경에서 한 민족의 이름이 곧 하나의 영적 상태를 가리키게 되었고, 훗날 이스라엘 열두 지파 역시 이 구조 위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 모든 설명은 왜 창세기 5장부터 11장까지의 이름들이 개인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들’을 뜻하는지를 분명히 해줍니다. 태고교회에서는 개인보다 상태가 먼저였고, 사람은 자기 이름으로 기억되기보다, 자신이 속한 집과 가족, 민족의 영적 성격 속에서 이해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이름을 나열하는 것은 사람 수를 세려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상태가 어떻게 분화되고 확장되었는지를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결국 AC.470은 창세기 족보를 읽는 우리의 시선을 완전히 바꾸어 놓습니다. 성경은 ‘옛날에 이런 사람들이 살았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처음에는 이렇게 하나였고, 이렇게 다양해졌으며, 이렇게 구조를 이루어 갔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관점 위에서만, 창세기 5장과 11장 사이의 모든 이름들은 살아 있는 신앙의 언어가 됩니다. 그리고 이 언어는 오늘날 교회를 이해하는 데에도 여전히 유효한 기준을 제공합니다.

 

 

 

AC.469, 창5:1,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AC.469-474)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This is the book of the births of man. In the day that God created man, in the likeness of God made he him. (창5:1) AC.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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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This is the book of the births of man. In the day that God created man, in the likeness of God made he him. (5:1)

 

AC.469

 

‘계보’(book of the births)는 태고교회에 속했던 사람들을 열거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in the day that God created man)는 그가 영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in the likeness of God made he him)는 그가 천적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그것은 태고교회에 대한 설명입니다. The “book of the births” is an enumeration of those who were of the most ancient church; “in the day that God created man” denotes his being made spiritual; and “in the likeness of God made he him” signifies that he was made celestial: thus it is a description of the most ancient church.

 

해설

 

창세기 5장은 얼핏 보면 족보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는 AC.469에서 이 장의 성격을 분명히 규정합니다. ‘계보(book of the births)란 개별 인물들의 혈통 기록이 아니라, ‘태고교회에 속했던 자들의 상태가 어떻게 이어지고 변화해 갔는지를 열거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여기서 ‘출생’이란 육체적 탄생이 아니라, ‘새로운 영적 상태의 출현’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창세기 5장은 누가 누구의 아들이었는지를 말하려는 장이 아니라, ‘태고교회라는 하나의 교회가 어떤 영적 상태에서 시작하여 어떤 과정을 거쳐 쇠퇴와 전환에 이르렀는지를 보여주는 영적 연대기’입니다. 이 관점을 놓치면 이 장은 끝내 이해되지 않지만, 이 관점을 붙들면 창세기 5장은 성경 전체에서도 매우 깊은 교회론적 장이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서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in the day that God created man)라는 표현을 시간적 의미로 보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은 언제나 ‘상태’를 의미하며, 여기서 말하는 창조란 흙으로 사람을 빚으신 사건이 아니라, ‘사람이 영적 존재로 세워진 상태’, 곧 영적(spiritual) 인간이 되었음을 가리킵니다. 태고교회의 인간은 단순히 자연적 생명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진리를 받아 그것에 따라 사는 영적 인간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5장의 출발점은 인류의 생물학적 시작이 아니라, ‘교회의 영적 시작’, 다시 말해 인간이 참된 의미에서 인간이 된 상태의 시작입니다.

 

그러나 AC.469의 핵심은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in the likeness of God made he him)라는 말은 단지 영적 인간이 되었다는 뜻을 넘어서, ‘그가 천적(celestial) 인간이었다’는 뜻이라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영적 상태란 진리를 통해 선으로 인도받는 상태이지만, 천적 상태란 ‘사랑 자체 안에서 선을 곧바로 인식하는 상태’입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선과 진리를 배워서 알지 않았고, 교리를 통해 판단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사랑함으로써 무엇이 참이고 선한지를 즉각적으로 인식하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태고교회의 독특성이며, 이후 어떤 교회에서도 동일한 방식으로 회복되지 않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창세기 5장은 타락 이후의 인간사를 정리한 장이 아니라, ‘타락 이전 혹은 타락의 문턱에 있던 태고교회의 내적 구조를 보여주는 장’입니다. 각 이름은 한 개인이라기보다 교회의 한 국면을 나타내며, 장수는 그 상태가 교회 안에서 지속된 기간을 의미합니다. ‘낳았으며... 죽었더라’라는 반복 표현은 단순한 생사 기록이 아니라, ‘하나의 영적 상태가 끝나고 다음 상태로 넘어갔음을 알리는 표지’입니다. 에녹, 므두셀라, 라멕, 노아는 모두 이러한 흐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그 의미가 왜곡됩니다.

 

결국 AC.469는 창세기 5장을 읽는 하나의 결정적인 해석 원리를 제시합니다. ‘태고교회는 하나님을 믿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곧바로 인식하던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창세기 5장은 그 교회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떻게 그 천적 상태가 이어졌으며, 마침내 왜 새로운 교회가 필요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장입니다. 이 관점 위에서만 창세기 5장은 족보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가 압축된 영적 역사’로 읽히게 됩니다.

 

 

 

AC.470, 창5:1, '창5-11 에벨 시대까지 나오는 이름들의 의미'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0 ‘출생의 책’(book of the births), 곧 ‘계보’가 태고교회에 속했던 사람들의 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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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42, 창4:26, '태고교회 이단들의 뿌리와 그 심오함'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4:26) AC.442 위에서 설명한 이 장의 내용을 보면, 태고 시대에는 교회와 분리된 많은 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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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25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26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4:25, 26)

 

 

※ 오늘 부를 찬송가는 순서대로 찬301, ‘지금까지 지내온 것’과 찬554, ‘종소리 크게 울려라’입니다.

 

 

오늘은 올해 2025년 마지막 주일예배입니다. 방금 찬송가 301장 가사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처럼 찬양하게 되는 아침입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오늘 본문은 창세기 4장 마지막 단락으로 창세기 4장 관련 모두 다섯 번의 설교를 마치게 됩니다.

 

 

여러분, 살면서 사람이 가장 절망하는 순간은 언제일까요? 어떤 의욕 충만했던 시도가 처음 의도와는 달리 결국 크게 실패했을 때일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리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제 경우를 보면, 같은 말인데요, ‘앞이 캄캄하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히지?’ 했던 때인 것 같습니다. 지난 19809월, 고3 예비고사를 한 달 남겨두고 모친께서 교통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을 때가 그랬던 것 같고, 주님 일에 헌신하고자 멀쩡히 다니던 대기업을 나와 여러 해 동분서주하던 대형 교회에서 결국 권고사직을 당하던 때가 그랬던 것 같습니다. 세월이 흐른 지금은 고요한 심령으로 지난날들을 돌아보게 되고, 그 결과 지금 생각하면 무척 아쉬웠던 순간들, 그러니까 ‘아, 그때 내가 왜 그랬을까? 그보다는 이렇게 저렇게 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하는 장면들이지요, 곧 사소한 말 한마디, 소소한 대인관계, 크고 작은 선택들 가운데 참 지혜롭지 못했던 순간들이 수두룩함을, 그러니까 위 두 경우 말고도 지난날의 많은 막힘과 왜곡들 가운데 사실은 내가 자초한 측면들이 많음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전체적으로 보면, 주님은 그런 너무나 서투르게 살아온 저라는 사람의 일생을, 그러나 또한 기가 막히게 보살펴주셔서 오늘 이렇게 생의 마지막을 주님께 붙들려 오직 주님 일에 쓰임 받게 하심을 봅니다. 천방지축 어디서부터 손봐야 할지 모를 인생을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지금도 여전히 이루고 계심을 봅니다.

 

우리가 지난 4주에 걸쳐 살펴온 창세기 4장이 바로 그런 장입니다. 가인은 여호와 앞을 떠났고, 그의 계보는 점점 신앙과 체어리티에서 멀어졌습니다. 문명은 발전했지만, 사랑은 사라졌고, 라멕의 노래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모두 죽었음을 선언합니다. 다음과 같은 정신 나간 노래나 하고 말이지요.

 

23...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24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4:23, 24)

 

이쯤 되면 우리는 보통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서 끝이다. 사람은 변하지 않아. 사람은 고쳐쓰는 게 아니야...’ 주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으로서 오랜 세월 가인 계보를 돌보셨음에도 말이지요. 우리라면 그냥 다 포기하고 다시 새로 리셋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바로 이 지점에서 전혀 다른 문장을 시작합니다.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4:25)

 

이 문장은 조용하지만, 그러나 우리에게 말합니다. ‘주님은 아직 일을 끝내지 않으셨다. ‘황폐’(vastation)는 마지막 장이 아니다.’라고 말이지요.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볼 땐 정말 엉망진창이 된 가인 계보의 끝, 곧 하나의 장구한 교회 시대의 종말의 때에,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 사랑과 자비의 여호와이신 주님이 하시는 일을 다음 세 가지로 살피고자 합니다.

 

 

먼저, ‘셋’(Seth)은 잃어버린 체어리티를 회복하는 길, ‘다른 씨’, 곧 신앙이다 (25)

 

25절에서 하와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4:25)

 

많은 사람은 셋을 ‘아벨의 대체품’처럼 생각합니다. 위 말씀은 얼핏 그렇게도 읽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하와는 ‘대신에’라고는 하지만 ‘다른 씨’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아벨은 체어리티, 곧 사랑이었고,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것은, 교회 안에서 신앙이 사랑을 제거해 버린 상태를 뜻합니다. 그런데 셋은 그 사랑을 그대로 복제한 존재가 아닙니다. 셋은 황폐를 통과한 이후에도 주님께서 보존하신 씨, 곧 리메인스의 표상입니다.

 

큰 산불이 지나간 자리를 가 본 적이 있으신지요? 모든 것이 잿더미가 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 봄이 되면, 분명 아무도 뭘 뿌리거나 심지 않았는데도 거기서 풀들이, 그리고 새싹들이 조용히 올라옵니다. 그 풀들은, 그 싹들은 불에 타지 않고 땅속에 남아 있던 씨앗에서 나옵니다. 자주 뉴스에 나오는 강원도 산불처럼 말입니다. 사람들은 ‘다 끝났다’고 할 때, 땅은 이미 다음 계절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셋은 바로 그런 존재입니다. 가인의 계보가 겉으로 역사를 이끌고 갈 때, 셋의 계보는 눈에 띄지 않게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겉으로 드러나는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계보가 아닌, 드러나지 않게 숨겨오신, 그러나 잘 보존된 계보를 통해 일하십니다.

 

오늘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성공, 능력, 영향력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 안에 조용히 지켜 오신 ‘다른 씨’, 곧 아직 꺼지지 않은 신앙의 흔적이 다음 시작의 출발점이 됩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이런 씨가 잘 보관되어 오고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은 이 셋이라는 새로운 신앙을 통해 체어리티를 회복하실 것입니다.

 

 

둘째, 에노스(Enosh)는 셋을 통해 회복하게 된 체어리티를 모든 것, 곧 모든 신앙생활의 중심에 두는 새 교회이다 (26)

 

26절은 셋의 아들 에노스를 소개합니다. ‘에노스’는 셋이라는 신앙을 통해 회복된 체어리티를 그 중심에 두는 교회를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전환입니다.

 

태고교회 초기에는 인간이 사랑 안에서 진리를 즉각적으로 보는 지각, 곧 퍼셉션(perception)의 신앙을 살았습니다. 그때는 사실 신앙이 사랑과 분리될 수도 없는 개념이었지요. 그러나 그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로부터 분리되는 순간, 퍼셉션이 닫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인간은 스스로를 강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퍼셉션은 천국과, 그리고 천국을 통해 주님과 바로 연결되는 능력인데 이제 그 연결이 끊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에노스가 등장합니다. 이는 인간이 처음으로 이렇게 말하기 시작했음을 뜻합니다. ‘우리는 약하다. 우리는 스스로 설 수 없다.

 

젊을 때는 신앙도 자신감으로 합니다. ‘기도하면 돼. 마음만 굳게 먹으면 되지’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인생을 조금 살아보면 알게 됩니다. 어떤 문제는 기도해도 즉시 풀리지 않고, 어떤 상처는 의지로는 감당되지 않는다는 걸 말입니다. 그때부터 비로소 사람은 명령하는 기도가 아닌, 간청하는 기도, 의탁하는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에노스의 신앙이 바로 그것입니다. 가인의 계보는 끝까지 자기 확신의 길을 갔습니다. 라멕은 살인을 노래하면서도 자신을 정당화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셋의 계보는 다릅니다. 이 계보는 연약함을 인정하는 자리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인정이 바로 다음 단계로 이어집니다.

 

에노스는 비록 천적 인간처럼 체어리티를 타고 나는 인간은 아니지만, 그래서 셋이라는 신앙을 통해 체어리티를 배워가지고 살아내야 하는 영적 인간이지만, 자기를 체어리티로부터 분리했던 가인들과는 달리 체어리티를 자기의 모든 신앙생활의 중심으로 삼는, 그래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인간입니다.

 

 

셋째, 그 결과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예배, 참된 예배가 재개, 회복되었다 (26)

 

26절 마지막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4:26)

 

이 말은 ‘그때부터 기도가 시작되었다’라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신앙의 방식이 바뀌었다는 선언입니다. 이전에는 인간이 사랑 안에서 진리를 보았다면, 이제는 보지 못하기 때문에 부릅니다. 확신해서가 아니라, 의지하기 때문에 부릅니다.

 

여기서 하나의 대비가 분명해집니다. 가인은 성을 쌓고 자기 이름을 남겼지만, 셋의 계보는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대비 말입니다.

 

오늘날에도 사람은 여전히 성을 쌓습니다. 경력, 성과, 명성, 업적, 심지어 신앙의 업적까지 쌓아 자신의 이름을 남기려 합니다. 그러나 기도는 그 반대입니다. 기도는 내 이름을 내려놓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행위입니다.

 

체어리티가 회복되면, 그리고 회복된 체어리티를 모든 신앙생활의 중심에 두면, 그때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예배, 그것이 바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예배요, 교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라멕은 그 신앙마저 부정한 상태를 표상합니다. 이 지점에 이르면, 더 이상 교회라고 부를 만한 내적 실체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외적 형식이나 기억 지식은 남아 있을지라도, 주님과의 내적 결합은 끊어진 상태이지요. 바로 이런 상태를 가리켜 스베덴보리는 ‘이전 교회가 소멸되었다’고 말합니다.

 

이전 교회가 이렇게 소멸된 후, 주님은 셋과 에노스로 표상된 새 교회를 일으키십니다. 이 교회는 신앙을 통해 체어리티를 회복하고, 체어리티를 신앙의 주된 것으로 삼습니다. 따라서 이 교회의 예배는 다시 여호와, 곧 사랑과 자비의 주를 향한 예배가 됩니다. 이때 성경은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고 말합니다. 이는 새 교회의 예배가 공식적으로 자리 잡았음을 알리는 선언입니다.

 

이러한 표현 방식은 성경 전반에서 반복됩니다. 어떤 상태가 끝나고, 전혀 다른 질서의 상태가 시작될 때, 성경은 종종 ‘그때 비로소’라는 표현을 씁니다. 이는 연대기의 표시가 아니라, 영적 시대의 구분선입니다.

 

오늘 본문은 오늘의 교회와 개인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형식은 남아 있으나 체어리티가 사라진 상태에서는, 예배가 계속되는 것처럼 보여도 내적으로는 예배가 중단된 상태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체어리티가 회복될 때, 성경적 의미에서의 예배는 다시 ‘시작’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감사합니다. 오늘 창4 마지막 시간, 비록 가인 계보의 이야기였지만, 그래서 내내 우울하고 어두웠지만, 그러나 주님은 가장 어두웠던 라멕의 때에 오히려 아다와 씰라를 일으켜 주님의 일, 즉 교회를 새롭게 하시고, 셋과 에노스로 이어지는 흐름으로 전에 잃어버렸던 아벨이라는 체어리티를 회복, 새 교회의 중심되게 하심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런 주님의 일하심을 오늘 우리도 잘 관찰하였사오니, 오, 주님! 우리 개개인에게도 올해에 이어 내년 2026년에도 동일하게 이런 일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주님을 찬양, 주님게 감사하오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설교

2025-12-28(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631, 24. 창4.5, 2025-12-28(D1)-주일예배(창4,25-26, AC.434-442),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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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예배(2025/12/25, 눅2:10, 11, 요1:9),'오늘 우리를 위하여 오신 참 빛 되신 주님'

오늘 우리를 위하여 오신 참 빛 되신 주님 10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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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5/12/21, 창4:16-24), '라멕과 그의 두 아내, 아다와 씰라'

라멕과 그의 두 아내, 아다와 씰라 16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17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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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4:26)

 

AC.442

 

위에서 설명한 이 장의 내용을 보면, 태고 시대에는 교회와 분리된 많은 교리와 이단이 있었고, 각각 이름이 있었으며, 이러한 교리와 이단을 분리한 것은 오늘날의 어떤 사상보다 훨씬 더 심오한 사상의 산물이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 당시 사람들의 천재성이 바로 그러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From the contents of this chapter as above explained, it is evident that in the most ancient time there were many doctrines and heresies separate from the church, each one of which had its name, which separate doctrines and heresies were the outcome of much more profound thought than any at the present day, because such was the genius of the men of that time.

 

해설

 

AC.442는 창세기 4장을 단락별로 해설한 뒤 제시되는 총괄적 결론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더 이상 개별 인물(가인, 아벨, 셋, 에노스 등)을 논하지 않고, 그 모든 서술의 배후에 놓인 시대 전체의 정신적 풍경을 조망합니다. 즉, 창세기 4장은 단일한 이단이나 한두 갈래의 오류를 다룬 이야기가 아니라, 태고교회 말기에 존재했던 다수의 분화된 교리들과 이단들의 전반적 상황을 요약한 장이라는 선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당시에는 교회와 분리된 많은 교리들과 이단들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소수의 이단 집단을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교회에서 파생된 수많은 사상적 분화, 곧 체어리티와 신앙의 관계를 각기 다르게 이해하고 해석한 다양한 교리적 노선들을 가리킵니다. 창세기 4장에 나열된 이름들, 그러니까 에녹, 이랏, 므후야엘, 므드사엘, 라멕 등은 모두 이런 분리된 교리적 흐름들에 붙여진 이름들입니다.

 

각 교리와 이단이 ‘자기 이름’을 가졌다는 사실은 중요합니다. 이름은 곧 정체성과 체계를 뜻합니다. 즉, 이들은 단순한 감정적 일탈이나 미숙한 오해가 아니라, 나름의 논리와 일관성을 갖춘 사상 체계였습니다. 태고 인류는 생각 없이 믿는 존재들이 아니었고, 오히려 오늘날보다 훨씬 깊이 사유하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지점에서 결정적인 말을 덧붙입니다.

 

이는 그 시대 사람들의 천재성(genius)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천재성은 지능의 높낮이가 아니라, 사유 방식의 깊이와 방향성을 뜻합니다. 태고 인류는 감각적, 외적 사고를 하기보다, 내적이고 직관적인 사유를 했습니다. 그들의 생각은 자연 현상을 넘어, 곧바로 영적, 상응적 의미로 향했습니다. 이런 천재성 때문에, 그들이 만들어 낸 교리와 이단 역시 표면적이고 단순한 주장이 아니라, 매우 깊은 사상적 구조를 갖추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점에서 오늘날과의 차이를 분명히 합니다. 오늘날의 교리적 분열이나 이단들은 대부분 기억 지식의 조합, 감정적 동기, 권력욕, 혹은 문자적 해석의 고집에서 나옵니다. 반면 태고 인류의 이단들은 지나치게 깊은 사유에서 비롯된 일탈이었습니다. 즉, 그들은 너무 많이 보고, 너무 깊이 생각했으나, 질서의 중심인 체어리티를 잃었기 때문에 분화되었습니다.

 

깊이 있음과 바름은 다르다’, 이 문장은 중요한 경고를 담고 있습니다. 깊이 있는 사유가 곧 참됨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태고 인류의 이단들은 오늘날보다 훨씬 깊었지만, 그 깊이는 체어리티와 결합되지 않을 때 오히려 분열을 낳았습니다. 이는 지성의 오만에 대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신앙과 사유가 아무리 정교해도, 체어리티가 중심을 잃으면 그것은 교회가 아니라 교리적 파편이 됩니다.

 

AC.442는 왜 이런 교리적 분화를 사람의 계보로 기록했는지도 암시합니다. 태고 인류는 추상 개념을 추상으로 표현하지 않고, 살아 있는 이야기와 인물의 계보로 배열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이는 그들에게 사상이 단순한 개념이 아니라, 생명처럼 태어나고 증식하는 현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리는 ‘낳고’, ‘자라고’, ‘죽이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AC.442는 오늘의 독자에게 중요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첫째, 교리의 깊이 자체를 절대화하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둘째, 교회의 분열은 언제나 사랑, 즉 체어리티의 중심을 잃을 때 시작된다는 사실입니다. 셋째, 성경의 고대 이야기는 미숙한 시대의 산물이 아니라, 오늘날보다 훨씬 깊은 영적 사유의 기록이라는 점입니다.

 

AC.442의 핵심은 이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태고교회의 이단들은 단순해서가 아니라, 너무 깊이 생각했기 때문에 생겨났으며, 그 깊이가 체어리티와 결합되지 않았을 때 교회에서 분리되었다.

 

이로써 창세기 4장은 단순한 ‘최초의 살인 이야기’가 아니라, 인류 사유사의 첫 대분화, 곧 신앙과 사랑의 관계가 어떻게 무너지고 다시 회복의 길을 찾는가를 보여주는 장으로 완결됩니다.

 

 

 

AC.441, 창4:26,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처음이 아니라 재개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4:26) AC.441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일이 이때에 시작되지 않았다는 것은, 다른 어떤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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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4:26)

 

AC.441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일이 이때에 시작되지 않았다는 것은, 다른 어떤 교회보다도 주님을 더욱 경배하고 숭배했던 태고교회에 관해 위에서 이미 언급한 것과, 아벨이 양 떼의 첫 새끼를 제물로 드렸다는 사실에서 충분히 분명해집니다. 따라서 이 구절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calling upon the name of Jehovah)는 것은 ‘가인’(Cain)과 ‘라멕’(Lamech)이라 불리는 자들에 의해 이전 교회가 소멸된 후에 등장한 새 교회의 예배를 의미하는 것 말고는 아무 다른 의미가 없습니다. That the invocation of the name of Jehovah did not commence at this time is sufficiently evident from what has already been said above in regard to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more than any other adored and worshiped the Lord; and also from the fact that Abel brought an offering of the firstlings of the flock; so that in this passage by “calling upon the name of Jehovah” nothing else is signified than the worship of the new church, after the former church had been extinguished by those who are called “Cain” and “Lamech.”

 

해설

 

AC.441의 출발점은 분명합니다. 창4:26의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는 말은, 역사적으로 그 시점에 처음 예배가 시작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충분히 오해될 수 있음을 알기에, 먼저 단호하게 부정합니다. 태고교회는 그 어떤 교회보다도 주님을 깊이 사랑하고 예배했던 교회였으며, 따라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예배’가 이때 처음 시작되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 증거로 스베덴보리는 두 가지를 듭니다. 첫째, 태고교회 자체가 사랑에 근거한 예배를 드렸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사랑에서 진리를 지각했고, 삶 전체가 예배에 가까웠습니다. 둘째, 아벨의 제사입니다. 아벨이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드렸다는 것은, 이미 체어리티에서 나온 참된 예배가 존재했음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창4:26의 표현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예배의 시작 시점으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 본문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는 말은 시간적 최초가 아니라, 질적, 교회적 전환점을 뜻합니다. 즉, 이전의 교회가 완전히 무너진 뒤, 새 교회가 공식적으로 등장하여 참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음을 선언하는 표현입니다. 이 말은 ‘다시 시작되었다’는 뜻이지, ‘처음 시작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AC.441은 이 점을 매우 중요하게 다룹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예배’가 새롭게 언급되는 이유는, 이전 교회가 이미 소멸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소멸은 자연재해나 외적 파괴가 아니라, 영적 소멸입니다. 가인과 라멕으로 표상된 흐름, 즉, 신앙이 체어리티와 분리되고, 마침내 신앙마저 부정되는 상태 속에서 이전 교회는 내적으로 죽었습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라멕은 그 신앙마저 부정한 상태를 표상합니다. 이 지점에 이르면, 더 이상 교회라고 부를 만한 내적 실체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외적 형식이나 기억 지식은 남아 있을지라도, 주님과의 내적 결합은 끊어진 상태입니다. 바로 이런 상태를 가리켜 스베덴보리는 ‘이전 교회가 소멸되었다’고 말합니다.

 

이전 교회가 이렇게 소멸된 후, 주님은 셋과 에노스로 표상된 새 교회를 일으키십니다. 이 교회는 신앙을 통해 체어리티를 회복하고, 체어리티를 신앙의 주된 것으로 삼습니다. 따라서 이 교회의 예배는 다시 여호와, 곧 사랑과 자비의 주를 향한 예배가 됩니다. 이때 성경은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고 말합니다. 이는 새 교회의 예배가 공식적으로 자리 잡았음을 알리는 선언입니다.

 

이러한 표현 방식은 성경 전반에서 반복됩니다. 어떤 상태가 끝나고, 전혀 다른 질서의 상태가 시작될 때, 성경은 종종 ‘그때 비로소’라는 표현을 씁니다. 이는 연대기의 표시가 아니라, 영적 시대의 구분선입니다. AC.441은 바로 이 서술 방식을 해명해 줍니다.

 

이 해설은 오늘의 교회와 개인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형식은 남아 있으나 체어리티가 사라진 상태에서는, 예배가 계속되는 것처럼 보여도 내적으로는 예배가 중단된 상태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체어리티가 회복될 때, 성경적 의미에서의 예배는 다시 ‘시작’됩니다. AC.441은 이 점을 분명히 가르칩니다.

 

AC.441의 요지는 분명합니다.

 

4:26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는 말은 예배의 역사적 최초가 아니라, 이전 교회가 소멸된 뒤 새 교회의 예배가 다시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선언이다.

 

이로써 창세기 4장은, 교회의 붕괴와 보존, 그리고 체어리티에 기초한 예배의 재개라는 완결된 구조로 마무리됩니다.

 

 

 

AC.442, 창4:26, '태고교회 이단들의 뿌리와 그 심오함'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4:26) AC.442 위에서 설명한 이 장의 내용을 보면, 태고 시대에는 교회와 분리된 많은 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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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40, 창4:26,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4:26) AC.440 방금 인용한 말씀이 그 교회의 예배가 체어리티에서 비롯되었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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