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And Zillah, she also bare Tubal-Cain, an 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in brass and iron; and the sister of Tubal-Cain was Naamah. (창4:22)
AC.421
앞서말했듯이,‘씰라’(Zillah)는새교회의자연적인것들의어머니를의미합니다.‘놋과쇠로온갖기구를만드는자의스승’(aninstructorofeveryartificerinbrassandiron)인‘두발가인’(Tubal-Cain)은자연적선과진리에관한교리를의미합니다.여기서‘놋’(brass)은자연적선을,‘쇠’(iron)는자연적진리를뜻합니다.‘두발가인의누이’(thesisterofTubal-Cain)인‘나아마’(Naamah)는그와비슷한교회,곧그교회밖에있는자연적선과진리에관한교리를의미합니다. By “Zillah” is signified, as previously stated, the mother of the natural things of the new church; by “Tubal-Cain,aninstructorofeveryartificerinbrassandiron,” the doctrine of natural good and truth, “brass” denoting natural good, and “iron” natural truth. By “Naamah,thesisterofTubal-Cain” is signified a similar church, or the doctrine of natural good and truth outside of that church.
해설
AC.421은 창4:22에 등장하는 씰라와 두발가인, 나아마의 속뜻을 설명합니다. 앞서 야발과 유발을 통해 사랑의 천적인 것들과 신앙의 영적인 것들을 살펴보았다면, 이번에는 ‘자연적인것들’로 시선이 옮겨갑니다. 스베덴보리는 두발가인을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로 해석하고, 놋과 쇠가 각각 자연적 선과 자연적 진리를 나타낸다고 밝힙니다. 이로써 라멕의 자손들에 관한 기록은 교회의 서로 다른 측면을 설명하는 흐름을 이어갑니다.
먼저 ‘씰라’는 새 교회의 자연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자연적인 것들은 앞서 다룬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에 비해 사람의 외적인 삶과 관련된 차원을 가리킵니다. 다만 자연적이라는 말이 곧 악하거나 영적인 것과 무관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번 번호에서 자연적인 것들 안에도 선과 진리가 있음을 분명히 밝힙니다. 그러므로 자연적인 것을 단순히 극복하거나 버려야 할 대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두발가인’은 ‘놋과쇠로온갖기구를만드는자의스승’이라는 설명과 함께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를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로 해석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두발가인을 단순히 금속을 다루는 기술자로 풀이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창세기의 문자적 기록은 그가 놋과 쇠를 다루는 기술과 관련된 인물임을 말하지만, 스베덴보리는 그 기록의 속뜻에서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를 읽어 냅니다. ‘스승’이라는 표현 역시 이번 번호의 해석이 단순한 기술이나 물건이 아니라 교리에 관한 것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렇다면 자연적 선과 자연적 진리는 무엇입니까? 이번 번호는 두 개념의 구체적인 사례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놋과 쇠가 각각 무엇을 뜻하는지만 밝힙니다. 따라서 자연적 선을 특정한 선행 하나로, 자연적 진리를 특정한 지식 하나로 좁혀서는 안 됩니다. 우선 자연적인 차원에도 선과 진리의 구별이 있으며, 두발가인이 그 둘에 관한 교리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놋’은 자연적 선을, ‘쇠’는 자연적 진리를 뜻합니다. 두 금속은 문자적으로는 기구를 만드는 재료이지만, 속뜻에서는 자연적인 차원의 선과 진리를 구별하여 나타냅니다. 앞의 AC.419에서 수금과 퉁소가 각각 영적 진리와 영적 선을 나타냈던 것처럼, 이번 번호에서는 놋과 쇠가 자연적 선과 자연적 진리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악기와 금속의 의미를 하나의 기계적인 대응표로 만들기보다는, 각각의 말씀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밝힌 뜻을 따라 읽는 것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나아마’는 두발가인의 누이로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나아마가 ‘그와비슷한교회,곧그교회밖에있는자연적선과진리에관한교리’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그교회밖’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두발가인과 나아마가 모두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련되지만, 스베덴보리는 둘을 완전히 동일한 것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나아마는 앞서 말한 교회 밖에 있는, 그와 비슷한 교회 또는 교리를 나타냅니다. 다만 이번 번호만으로 그 교회가 역사적으로 어떤 집단인지, 왜 교회 밖에 있다고 표현하는지까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는 교회의 삶이 내적인 사랑과 신앙에 관한 가르침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연적인 차원에도 선과 진리가 있으며, 그것들에 관한 교리도 구별하여 설명합니다. 그렇다고 이번 번호가 자연적인 선과 진리만으로 거듭남이 완성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는 라멕의 자손들에 관한 기록이 교회의 어떤 측면을 나타내는지 밝히는 데 초점을 둡니다.
결국 AC.421의 핵심은 두발가인이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를, 놋과 쇠가 각각 자연적 선과 자연적 진리를 나타낸다는 사실입니다. 씰라는 새 교회의 자연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의미하고, 나아마는 그 교회 밖에 있는 비슷한 교회 또는 교리를 나타냅니다. 우리는 이 짧은 번호를 통해 자연적인 것들 역시 교회의 선과 진리에 관한 설명 안에 포함되어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AC.421해설)
AC.420에서 스베덴보리는 수금과 노래가 신앙에 속하는 것들과 그 지식들에 관련된다는 사실을 설명하면서 사23:16을 인용합니다. ‘수금을가지고성읍에두루다니며아름답게연주하고많은노래를불러서네가다시기억되게하라’는 말씀입니다. 앞서 인용된 시편들이 주님을 찬양하는 장면을 담고 있는 것과 달리, 이 구절은 이사야 23장의 두로에 관한 예언 안에 놓여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 문자적 문맥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사야 23장은 두로에 대한 경고와 예언을 담고 있습니다. 사23:15-16에서는 두로가 잊히는 기간에 관해 말한 뒤, 잊힌 음녀가 수금을 가지고 성읍을 돌아다니며 노래하여 다시 기억되게 하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문자적으로는 음녀가 노래를 통해 다시 사람들의 기억에 남으려는 장면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 수금과 노래가 등장한다고 해서, 그 장면 전체를 곧바로 거룩한 찬양이나 선한 예배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왜 이 구절을 인용했을까요? AC.420에서 그가 직접 밝힌 인용 목적은 ‘신앙에속하는것들과그지식들’에 관한 표현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는 여기서 두로에 관한 예언 전체를 해설하지도 않고, 잊힌 음녀가 의미하는 바를 상세히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수금과 노래가 신앙의 지식과 관련하여 사용되는 말씀의 한 사례로 이 구절을 제시합니다. 따라서 이 인용을 이해할 때에는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설명한 범위와 우리가 더 알고 싶은 내용을 구별해야 합니다.
앞의 AC.419에서 수금은 영적 진리를 의미한다고 밝혔습니다. AC.420에서도 수금과 비파 같은 악기들이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에 관련된다고 설명합니다. 사23:16의 수금 역시 이러한 논의 안에서 인용됩니다. 그러나 수금이 진리와 관련된다고 해서 그것을 사용하는 인물이 반드시 참된 진리 안에 있다거나, 그가 부르는 노래가 반드시 선한 찬양이라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어떤 표현이 진리에 관한 지식과 관련된다는 사실과, 그 지식이 어떤 상태에서 사용되는가는 서로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기존 심화에서는 이 구절을 ‘잃어버린진리의지식들이다시회복되고기억되는과정’으로 설명했습니다. 이는 별도로 검토해 볼 수 있는 해석이지만, AC.420자체는 그와 같은 회복의 과정을 명시하지 않습니다. 특히 잊힌 음녀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예언의 문맥을 고려하면, ‘다시기억되게하라’는 말을 곧바로 영적인 회복으로 확정하는 데에는 추가적인 근거가 필요합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수금과 노래가 신앙의 지식과 관련된다는 인용 목적을 분명히 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구절은 말씀의 속뜻을 살필 때 문자적 문맥을 보존하는 일이 왜 중요한지도 보여 줍니다. 같은 악기라도 찬양 시편에 등장할 수 있고, 두로에 관한 경고의 말씀에 등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수금은진리’라는 대응 관계를 알고 있다고 해서 그 구절 전체의 뜻까지 자동으로 알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표현의 속뜻을 살피는 일과 그 표현이 놓인 문맥을 이해하는 일은 함께 이루어져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번 번호에서 밝힌 내용은 그중 수금과 노래가 신앙의 지식에 관련된다는 점입니다.
결국 사23:16은 AC.420의 다른 찬양 구절들과 달리, 경고와 예언의 문맥 안에서도 수금과 노래가 신앙의 지식에 관련된 표현으로 사용된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 구절을 인용한 이유는 수금과 노래의 속뜻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지, 잊힌 음녀의 모든 행동을 선한 예배로 바꾸어 읽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스베덴보리가 직접 밝힌 의미를 분명히 붙들면서, 두로와 음녀와 성읍의 더 자세한 속뜻은 해당 예언을 다루는 충분한 근거가 있을 때 살펴보아야 합니다. (AC.420심화3)
시150:3-5에는 나팔, 비파, 수금, 소고, 현악기, 퉁소, 제금 등 여러 악기가 연이어 등장합니다. 문자적으로는 다양한 악기를 사용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권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AC.420에서 이 말씀을 인용한 뒤, 이 악기들이 찬양의 대상이 된 신앙의 선들과 진리들을 나타낸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각각의 악기에 고유한 의미가 없다면 이렇게 많은 종류의 악기가 언급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덧붙입니다. 이번 심화의 출발점은 바로 이 설명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에서 표상적 예배에 사용된 악기들이 서로 다른 것을 나타냈다고 설명했습니다. 수금과 비파, 노래와 그와 비슷한 악기들은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을 찬양하는 데 사용되었고, 나팔과 같은 관악기들은 신앙의 거룩한 것들, 곧 천적인 것들을 찬양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시150편의 악기들을 모두 단순히 ‘찬양의기쁨’이라는 하나의 뜻으로만 묶으면,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악기들 사이의 구별을 놓치게 됩니다.
이번 번호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개별 의미도 있습니다. 앞의 AC.419는 수금이 영적 진리를, 퉁소가 영적 선을 의미한다고 밝힙니다. AC.420은 시149:3을 설명하면서 소고는 선을, 수금은 진리를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시150편에 등장하는 수금과 소고, 퉁소를 읽을 때에는 이러한 설명을 참고할 수 있습니다. 다만 악기가 언급되는 모든 구절에서 세부 의미가 언제나 완전히 동일한 방식으로 적용된다고 단정하기보다는, 각 구절의 문맥과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함께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제금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시150편에는 큰 소리 나는 제금과 즐거운 외침의 제금이 함께 등장합니다. 그러나 AC.420은 두 제금의 개별적인 속뜻을 밝히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각 악기에 고유한 의미가 있다고 말하면서도, 그 의미들은 적절한 곳에서 설명하겠다고 예고합니다. 그러므로 이번 번호만을 근거로 제금이 특정한 종류의 선이나 진리를 의미한다고 확정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뜻이 있다는 사실과 그 뜻을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은 구별해야 합니다.
또한 여러 악기가 함께 등장한다는 사실을 곧바로 천국의 완전한 합주에 관한 상세한 묘사로 바꿀 필요도 없습니다. AC.420의 마지막 문단은 천사들과 영들이 소리를 선과 진리의 차이에 따라 구별하고, 서로 일치하는 소리만 받아들인다고 말합니다. 이 설명은 악기의 소리와 영적인 것들 사이에 관계가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시150편의 각 악기가 천국의 어떤 공동체나 어떤 상태에 해당하는지까지 이 번호가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본문이 밝히는 범위 안에서 악기들의 다양성과 고유한 의미를 이해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예배에서 사용하는 악기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으로도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420은 오늘날 어떤 악기를 사용해야 한다거나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예배 규칙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것은 말씀에 기록된 악기들의 표상적 의미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근거로 특정 악기의 영적 우열을 정하거나, 악기의 종류만으로 예배의 진정성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외적 악기의 소리와 그것이 말씀 안에서 나타내는 영적인 의미를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결국 시150:3-5에 많은 악기가 등장하는 이유는, 스베덴보리의 설명에 따르면 각각의 악기가 신앙의 선과 진리에 관한 고유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이 번호는 그 모든 의미를 완전히 밝히지는 않지만, 말씀의 악기들을 의미 없는 반복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는 중요한 원칙을 제시합니다. 우리는 이미 밝혀진 수금과 소고와 퉁소의 의미를 붙들면서, 아직 설명되지 않은 악기들의 속뜻은 관련된 말씀과 저작의 근거를 확인할 때까지 열어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AC.420심화2)
시147:7은 ‘감사함으로여호와께응답하며수금으로우리하나님께찬송할지어다’라고 말합니다. 문자적으로 읽으면 같은 주님을 향한 감사와 찬양이 나란히 놓인 구절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AC.420에서 이 두 표현을 구별하여 설명합니다. ‘감사’는 신앙의 천적인 것들과 관련되므로 ‘여호와’가 언급되고, ‘수금으로찬송함’은 신앙의 영적인 것들과 관련되므로 ‘하나님’이 언급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짧은 구절에서도 그는 사용된 표현의 차이에 주목합니다.
먼저 ‘감사’(confession)는 이번 번호에서 신앙의 천적인 것들과 관련됩니다. 여기서 천적인 것들은 앞서 설명한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감사는 단순히 정해진 말을 입 밖으로 내는 행위로만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의 감사가 신앙의 천적인 것에 관련된다고 밝힙니다. 따라서 이 표현을 읽을 때에는 감사의 말 자체만이 아니라, 그 감사가 관련되는 사랑과 선의 측면을 함께 살펴보아야 합니다.
반면 ‘수금으로찬송함’은 신앙의 영적인 것들과 관련됩니다. AC.419에서 수금은 영적 진리를 의미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시147:7의 수금 찬양은 앞서 밝힌 악기의 속뜻과 이어집니다. 이 구절에는 감사와 수금 찬양이 함께 있지만, 스베덴보리는 둘을 같은 의미의 반복으로 보지 않습니다. 각각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에 관련되는 표현으로 구별합니다.
이 구별과 함께 ‘여호와’와 ‘하나님’이라는 이름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번 번호에서 감사와 관련하여 ‘여호와’가, 수금 찬양과 관련하여 ‘하나님’이 언급된다고 직접 말합니다. 다만 이것을 근거로 말씀의 모든 ‘여호와’와 ‘하나님’을 문맥과 관계없이 하나의 공식에 대입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는 시147:7의 두 표현이 왜 구별되어 사용되었는지에 관한 설명을 먼저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앞의 AC.418에서 스베덴보리는 마음의 애정이 천적이고 그 결과로 나오는 노래가 영적이라고 말했습니다. 시147:7에 관한 설명도 그 관계를 떠올리게 합니다. 감사가 신앙의 천적인 것과 관련되고, 수금 찬양이 신앙의 영적인 것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두 설명을 합쳐 감사는 언제나 내면에만 있고 찬양은 언제나 외면에만 있다는 식으로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번 번호에서 직접 제시된 것은 두 표현이 각각 어떤 것과 관련되는가 하는 구별입니다.
이 구절은 예배의 언어를 읽는 우리의 태도에도 도움을 줍니다. 감사와 찬송을 단순히 비슷한 종교적 표현으로 지나칠 수 있지만,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표현 하나하나가 고유한 의미를 지닌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일상적인 감사와 찬송을 엄격하게 분리하여 어느 한쪽만 천적이고 다른 쪽만 영적이라고 판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구절의 속뜻을 통해 사랑과 신앙에 속하는 것들이 말씀 안에서 구별되어 표현될 수 있음을 이해하면 됩니다.
결국 스베덴보리가 시147:7을 인용한 이유는 감사와 수금 찬양이 각각 신앙의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에 관련되며, 그에 따라 ‘여호와’와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사용되었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같은 주님을 향한 한 구절의 예배 안에서도 서로 다른 의미가 표현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사랑과 신앙의 구별을 살피면서도, 그 둘이 함께 주님께 향하는 예배의 문맥 안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됩니다. (AC.420심화1)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창4:21)
AC.420
말씀에는여러가지악기가언급되며,각악기에는저마다고유한의미가있습니다.이에대해서는주님의신적자비로적절한곳에서설명하겠습니다.그러나여기서는시편이말한것만을인용하겠습니다. In the Word mention is made of various instruments, each having its own signification, as will be shown, of the Lord’s Divine mercy, in its proper place; here however we shall adduce only what is said in David:
여기서‘장막’(tent)은천적인것을표현하고,‘즐거운외침’(shouting),‘노래함’(singing),‘찬송함’(singingpraises)은거기서나오는영적인것을표현합니다.또다른곳에서는다음과같이말합니다. where by “tent” is expressed what is celestial, and by “shouting,” “singing,” and “singingpraises,” what is spiritual thence derived. Again:
이말씀은신앙의진리들을나타내며,이러한것들이바로그진리들에관하여말해진것입니다. denoting the truths of faith, concerning which these things are said.
[2]영적인것들,곧신앙의진리들과선들은수금과비파,노래와그와비슷한악기들로찬양되었습니다.그러나신앙의거룩한것들,곧천적인것들은나팔과같은관악기들로찬양되었습니다.이때문에성전에서는그렇게많은악기가,또그렇게자주사용되었습니다.이는이주제나저주제를각각특정한악기로찬양하기위한것이었습니다.그결과악기들은그것들로찬양되는대상들을가리키는것으로받아들여지고이해되게되었습니다. Spiritual things, or the truths and goods of faith, were celebrated with the harp and psaltery, with singing and analogous instruments, but the holy or celestial things of faith were celebrated with wind instruments, such as trumpets and the like; and this was why so many instruments were used about the temple and so often, in order that this or that subject might be celebrated with certain instruments; and in consequence of this the instruments came to be taken and understood for the subjects that were celebrated with them.
‘감사’(confession)는신앙의천적인것들과관련되므로‘여호와’(Jehovah)가언급됩니다.반면‘수금으로찬송함’(singpraisesupontheharp)은신앙의영적인것들과관련되므로‘하나님’(God)이언급됩니다.또다른곳에서는다음과같이말합니다. “confession” has respect to the celestial things of faith, and therefore mention is made of “Jehovah”; and to “singpraisesupontheharp” has reference to the spiritual things of faith, wherefore “God” is spoken of. Again:
이악기들은찬양의대상이된신앙의선들과진리들을나타냅니다.각각의악기에고유한의미가없다면,이렇게많은종류의악기가여기에언급되었을것이라고생각해서는안됩니다.또다른곳에서는선과진리의지식들에관하여다음과같이말합니다. These instruments denote the goods and the truths of faith which were the subjects of praise; for let no one believe that so many different instruments would have been here mentioned unless each had a distinct signification. Again, referring to the knowledges of good and truth:
한가지언급할만한사실이있습니다.천사들과영들은소리들이선과진리에관련하여어떻게다른지에따라그소리들을구별합니다.노래와악기에서나는소리뿐아니라목소리도그렇게구별합니다.그리고서로일치하는소리만받아들입니다.이는소리들,따라서악기들의소리가선과진리의성질및본질과조화를이루게하기위한것입니다. It is worthy of mention that angels and spirits distinguish sounds according to their differences with respect to good and truth, not only those produced in singing and by instruments, but also those of voices; and they admit none but such as are in accord, so that there may be a concord of the sounds, and consequently of the instruments, with the nature and essence of the good and the true.
해설
AC.420은 앞의 AC.418-419에서 설명한 악기의 속뜻을 말씀의 여러 구절을 통해 확인합니다. AC.419에서 스베덴보리는 수금이 영적 진리를, 퉁소가 영적 선을 의미한다고 밝혔습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그 설명을 한 악기에만 한정하지 않고, 말씀에 등장하는 여러 악기가 저마다 고유한 의미를 지닌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모든 악기의 뜻을 여기서 밝히려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 성경 구절을 인용하여 악기와 노래가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을 어떻게 나타내는지 보여 주는 것이 이번 번호의 중심입니다.
먼저 시27:6에서 ‘장막’은 천적인 것을, ‘즐거운외침’과 ‘노래함’과 ‘찬송함’은 거기서 나오는 영적인 것을 표현합니다. 앞서 야발의 장막이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관련되고, 유발의 악기가 신앙의 영적인 것들과 관련된다고 설명한 내용이 이 시편 안에서 함께 나타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장막과 노래가 단순히 예배 장소와 예배 행위를 가리키는 데 그치지 않고, 천적인 것과 거기서 나오는 영적인 것의 관계를 표현한다고 봅니다. 이어 인용한 시33:1-4에서는 수금과 열 줄 비파, 새 노래가 등장한 뒤 ‘여호와의말씀은정직하며그가행하시는모든일은진실하시도다’라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이 신앙의 진리들에 관한 말씀이라고 밝힙니다. 악기와 노래가 언급되는 문맥 자체가 말씀의 정직함과 주님이 행하시는 일의 진실함에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어서 스베덴보리는 표상적 예배에서 악기들이 구별되어 사용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은 수금과 비파, 노래와 그와 비슷한 악기들로 찬양되었고, 신앙의 거룩한 것들, 곧 천적인 것들은 나팔과 같은 관악기들로 찬양되었습니다. 성전에서 많은 악기가 사용된 것은 단순히 음악을 풍성하게 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찬양하는 대상에 따라 특정한 악기가 사용되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입니다. 그 결과 악기 자체가 그것으로 찬양되는 영적인 대상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이는 모든 악기가 같은 뜻을 지닌다는 말이 아니라, 서로 다른 악기들이 서로 다른 것을 표상한다는 뜻입니다.
시71:22-23은 이러한 설명을 다시 확인합니다. 비파와 수금으로 주님을 찬양하는 말씀 안에 ‘주의진리’가 직접 언급되기 때문입니다. 시147:7에서는 한층 세밀한 구별이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감사’가 신앙의 천적인 것들과 관련되므로 ‘여호와’가 언급되고, ‘수금으로찬송함’은 신앙의 영적인 것들과 관련되므로 ‘하나님’이 언급된다고 설명합니다. 같은 구절 안에서도 감사와 수금 찬양, 여호와와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닌다는 것입니다. 시149:3에서는 ‘소고’가 선을, ‘수금’이 진리를 의미한다고 직접 밝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악기들의 소리를 감상하여 의미를 추측하는 일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해당 말씀에서 구별하여 밝힌 선과 진리의 의미를 살피는 일입니다.
시150:3-5에는 나팔, 비파, 수금, 소고, 현악기, 퉁소, 제금 등 여러 악기가 연이어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각각에 고유한 의미가 없다면 이렇게 많은 종류의 악기가 말씀에 언급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번 번호에서 이 모든 악기의 개별 의미를 하나씩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앞에서 밝혀진 의미들을 바탕으로 이 시편이 신앙의 여러 선과 진리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이해하되, 아직 설명되지 않은 악기의 뜻까지 임의로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어지는 시43:3-4는 ‘주의빛과주의진리’로 시작하여 거룩한 산과 처소, 하나님의 제단과 수금 찬양으로 이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선과 진리의 지식들에 관한 구절로 인용합니다. 여기서는 수금이 등장하는 찬양이 주님의 빛과 진리에 의한 인도라는 문맥 안에 놓여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사23:16은 앞의 찬양 시편들과 성격이 다릅니다. 이사야 23장은 두로에 관한 예언이며, 인용된 구절은 잊힌 음녀에게 수금을 가지고 성읍을 돌아다니며 노래하라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도 신앙에 속하는 것들과 그 지식들에 관한 말씀으로 인용합니다. 따라서 수금과 노래가 등장한다고 해서 그 장면을 곧바로 선한 예배나 진리의 회복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이 구절이 여기서 사용된 이유는 수금과 노래가 신앙의 지식과 관련된 표현이라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해당 예언 전체의 속뜻을 설명하려면 두로와 음녀에 관한 문맥을 별도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의 인용에서는 진리와 선의 구별이 더욱 직접적으로 나타납니다. 계5:8에서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가진 ‘거문고’는 신앙의 진리들을, ‘향이가득한금대접’은 신앙의 선들을 의미한다고 스베덴보리는 밝힙니다. 같은 예배 장면 안에 진리와 선이 함께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어 시42:5와 시69:31을 통해 다윗이 악기 연주를 ‘찬송’과 ‘감사’라고 부르는 용례를 제시합니다. 계14:2-3에서는 하늘의 거문고 소리와 새 노래를, 계15:2에서는 유리 바닷가에 선 이들이 가진 하나님의 거문고를 인용합니다. 이 구절들은 앞서 설명한 현악기와 신앙의 진리 사이의 관계를 뒷받침합니다. 다만 이번 번호는 새 노래나 유리 바다의 세부적인 속뜻까지 풀어 주지는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천사들과 영들이 소리를 선과 진리의 차이에 따라 구별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노래와 악기 소리뿐 아니라 목소리도 구별하며, 서로 일치하는 소리만 받아들입니다. 소리와 악기가 선과 진리의 성질 및 본질에 조화를 이루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설명은 앞서 제시한 악기의 상응이 단순한 문학적 비유가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이해한 영계의 질서와도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다만 이 번호는 어떤 음높이나 악기 소리가 어떤 선과 진리에 해당하는지 구체적인 목록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지상의 음악을 듣고 사람의 영적 상태를 판정하는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결국 AC.420은 말씀의 악기들이 단순한 음악 도구 이상의 의미를 지니며, 각각 신앙의 선과 진리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여러 구절로 설명합니다. 시편의 장막과 노래는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관계를, 소고와 수금은 선과 진리의 구별을,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은 신앙의 진리와 선이 함께 나타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마지막의 천사와 영들에 관한 설명은 소리의 조화가 선과 진리의 성질과 관련된다는 점을 밝힙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찬양의 외적 소리만이 아니라, 그 찬양이 표현하는 사랑과 신앙, 선과 진리를 함께 살펴보게 됩니다. (AC.420해설)
AC.419에서 스베덴보리는 신앙에 관한 지식들이 진리와 선을 모두 포함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곧이어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은 천적인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두 문장을 함께 읽으면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신앙에 선이 이미 포함되어 있다면, 그 선대로 살아가는 일을 왜 다시 천적인 것으로 구별하는 것입니까? 이 질문을 이해하려면 먼저 스베덴보리가 ‘무엇이선한지이해하는일’과 ‘그선대로살아가는일’을 구별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사람은 무엇이 참된지 배울 수 있고, 무엇이 선한지도 배울 수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이해하고,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이 선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는 신앙에 관한 지식에 속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신앙의 지식들이 진리와 선을 모두 포함한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신앙은 참된 명제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선한 것이 무엇인지도 알려 줍니다.
그러나 무엇이 선한지 아는 것과 실제로 그 선대로 살아가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가르침에 동의하면서도 정작 이웃을 대할 때에는 자신의 이익이나 감정만을 앞세울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에서도 이웃에게 선하게 대하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경우의 차이는 선에 관한 지식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가만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신앙이가르치는대로살아가는것은천적인것’이라고 구별한 이유를 이 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구별을 ‘신앙은지식에불과하고사랑만중요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AC.419는 신앙에 진리와 선이 모두 포함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를 이해하는 일은 그 자체로 신앙에 속하는 중요한 내용입니다. 다만 그러한 이해가 실제 삶과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신앙이 선을 가르친다는 사실과, 사람이 그 선대로 살아간다는 사실을 구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의 AC.418에서 스베덴보리는 마음의 애정이 천적이고 그 결과로 나오는 노래가 영적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신앙에 관한 지식이 진리와 선을 포함하지만, 그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것은 천적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두 번호는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관계를 서로 다른 각도에서 보여 줍니다. 앞에서는 애정과 그 표현의 관계를, 여기서는 신앙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일과 그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일을 설명합니다. 이 두 설명을 하나의 기계적인 공식으로 합치기보다는, 각각의 문맥에서 스베덴보리가 무엇을 구별하는지 살피는 것이 좋습니다.
이 구별은 신앙생활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데에도 도움이 됩니다. 어떤 교리를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귀한 일이지만, 그것만으로 그 교리가 자신의 삶이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실제 삶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이유로 진리와 선을 배우는 일을 가볍게 여겨서도 안 됩니다. 신앙은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 가르치며, 사람은 그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문제 앞에 서게 됩니다. AC.419는 이 두 가지를 혼동하지 않도록 돕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천적인 것이라는 설명을, 사람이 자신의 힘만으로 선을 실천하면 천적인 상태에 도달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전체적인 가르침에서 참된 선의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이번 번호 역시 인간의 독립적인 선행 능력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신앙에 관한 지식과 그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일을 구별하는 데 초점을 둡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읽을 때에는 선한 삶의 근원을 자신에게 돌리기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선을 받아들이는 문제를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결국 AC.419는 신앙의 선을 아는 것과 그 선대로 살아가는 것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신앙은 진리와 선을 모두 가르치지만, 그 가르침을 이해했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그 가르침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도들은 이 말씀을 통해 신앙의 지식을 소중히 여기면서도, 그 지식이 자신의 삶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살펴보게 됩니다. 신앙이 가르치는 선을 이해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주님을 의지하여 그 선대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AC.419심화1)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창4:21)
AC.419
천적인것들이사랑의거룩한것들과거기서나오는선들인것처럼,영적인것들은신앙의진리들과선들입니다.신앙에는무엇이참된것인지만이아니라무엇이선한것인지도이해하는일이속하기때문입니다.신앙에관한지식들은이둘을모두포함합니다.그러나신앙이가르치는대로살아가는것은천적인것입니다.신앙에는이두가지가모두포함되므로,그것들은수금과퉁소라는두악기로의미됩니다.수금은누구나알듯이현악기이므로영적진리를의미합니다.그러나퉁소는현악기와관악기의중간에해당하므로영적선을의미합니다. As celestial things are the holy things of love and the derivative goods, so spiritual things are the truths and goods of faith; for it belongs to faith to understand not only what is true, but also what is good. The knowledges of faith involve both. But to be such as faith teaches is celestial. As faith involves both of these, they are signified by two instruments, the harp and the organ. The harp, as everyone knows, is a stringed instrument, and therefore signifies spiritual truth; but the organ, being intermediate between a stringed instrument and a wind instrument, signifies spiritual good.
해설
AC.419는 앞의 AC.417-418에서 밝힌 유발의 속뜻을 한층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유발이 ‘수금과퉁소를잡는모든자의조상’이라고 불리는 것은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는 두 악기를 함께 언급한 이유를 밝히고, 수금과 퉁소가 각각 무엇을 나타내는지 구별합니다. 수금은 영적 진리를, 퉁소는 영적 선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유발의 기록은 신앙을 단순히 참된 것을 아는 일로만 이해하지 않도록 이끕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을 구별합니다. 천적인 것들은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거기서 나오는 선들이며, 영적인 것들은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입니다. 이는 앞서 야발과 유발을 구별한 설명과 이어집니다. 야발은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들에 관한 교리를, 유발은 같은 교회의 영적인 것들에 관한 교리를 나타냅니다. 두 형제의 기록을 함께 읽으면 사랑에 관한 교리와 신앙에 관한 교리가 각각 어떤 내용을 다루는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문장은 ‘신앙에는무엇이참된것인지만이아니라무엇이선한것인지도이해하는일이속한다’는 설명입니다. 우리는 신앙에 관한 지식이라고 하면 흔히 교리의 참과 거짓을 분별하는 일부터 떠올립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신앙에 관한 지식들이 참된 것과 선한 것을 모두 포함한다고 말합니다. 신앙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만이 아니라 무엇이 선한지도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내용을 이해하는 일에서 선에 관한 지식을 제외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곧이어 ‘신앙이가르치는대로살아가는것은천적인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문장은 신앙의 선을 이해하는 일과 실제로 선하게 살아가는 일을 구별합니다. 무엇이 선한지 알고 그것을 이해하는 일은 신앙에 속하지만, 그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것은 천적인 것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신앙의 선을 안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그 선을 삶에서 실현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앎과 삶을 구별하면서도, 신앙이 가르치는 선이 실제 삶과 무관한 지식으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점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제 수금과 퉁소라는 두 악기가 등장하는 이유가 분명해집니다. 신앙에 관한 지식들이 진리와 선을 모두 포함하기 때문에, 그것들이 두 악기로 의미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수금이 현악기이므로 영적 진리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반면 퉁소는 현악기와 관악기의 중간에 해당하므로 영적 선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이 악기 구분은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제시한 설명입니다. 따라서 현대 악기 분류에 맞추어 퉁소를 특정 악기로 확정하거나, 그 악기의 구조에서 새로운 상응을 만들어 내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앞의 AC.418에서는 마음의 애정이 천적이고 그 결과로 나오는 노래가 영적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번 번호는 그 설명을 이어받아 영적인 것 안에도 진리와 선이 함께 있음을 밝힙니다. 노래와 악기가 영적인 것을 나타낸다는 설명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수금과 퉁소가 각각 영적 진리와 영적 선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유발에 관한 짧은 기록은 신앙의 내용을 더욱 세밀하게 이해하도록 돕습니다.
성도들이 이 말씀을 읽을 때에는 ‘나는무엇이참된지알고있는가?’라는 질문과 함께 ‘나는무엇이선한지도이해하고있는가?’라는 질문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천적인 것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진리와 선을 이해하는 일은 그 가르침을 삶에서 받아들이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다만 이번 번호는 앎에서 삶으로 나아가는 거듭남의 전 과정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에 관한 지식과 그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일을 구별하는 데 초점을 둡니다.
결국 AC.419의 핵심은 신앙에 진리와 선이 모두 포함된다는 사실, 그리고 그 진리와 선을 아는 일과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일이 구별된다는 사실입니다. 수금과 퉁소는 신앙의 두 측면을 나타내며, 유발은 이러한 영적인 것들에 관한 교리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신앙을 참된 것을 아는 데에만 한정하지 않고, 선을 이해하며 그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일까지 함께 살펴보게 됩니다. (AC.419해설)
AC.418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인들이 천적인 것을 심장의 영역에, 영적인 것을 폐의 영역에 관련지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근거로 두 가지를 제시합니다. 하나는 심장과 폐가 사랑과 신앙의 결합과 같은 일종의 결합을 표상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천적 천사들이 심장의 영역에, 영적 천사들이 폐의 영역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이 설명은 단순히 심장은 사랑, 폐는 신앙이라는 두 낱말의 대응 관계를 알려 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두 기관의 관계를 통해 사랑과 신앙의 관계를 살펴보게 합니다.
심장과 폐는 서로 다른 기관이지만 살아 있는 몸 안에서 함께 작용합니다. 심장은 혈액을 순환시키고, 폐는 호흡을 통해 혈액의 기체 교환에 관여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심장과 폐를 함께 언급하는 것은 이러한 두 기관의 결합을 사랑과 신앙의 결합을 이해하는 표상으로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설명을 현대 생리학의 세부 사항과 일대일로 연결하여 새로운 상응을 만들어 낼 필요는 없습니다. 이번 번호에서 직접 밝힌 것은 심장과 폐가 일종의 결합을 표상한다는 점입니다.
태고인들이 천적인 것을 심장의 영역에, 영적인 것을 폐의 영역에 관련지었다는 설명도 같은 흐름 안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노래하는 목소리와 그와 비슷한 것들이 폐에 속하는 것들과 관련된다고 말합니다. 노래하는 목소리가 호흡과 관계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왜 노래와 악기의 소리가 폐의 영역에 관련되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폐에서 나오는 모든 소리가 영적으로 선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는 신체 기관과 소리의 관계를 통해 영적인 것의 표상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천사들의 구별이 더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적 천사들이 심장의 영역에 속하고, 영적 천사들이 폐의 영역에 속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심장과 폐의 관계는 단순히 인간의 신체에서 발견되는 비유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의 설명에서는 천적 천사들과 영적 천사들의 구별도 이 관계와 연결됩니다. 다만 이번 번호는 천사들이 각 영역에 속한다는 사실을 밝힐 뿐, 그 영역의 모든 구조나 천사들의 구체적인 역할까지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러한 세부 사항은 관련 저작의 설명을 확인한 뒤 다루는 것이 좋습니다.
이 설명에서 특히 주의할 것은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구별을 곧바로 우열이나 단절로 이해하지 않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심장과 폐를 서로 떨어진 기관으로 제시하지 않고 결합을 이루는 기관으로 제시합니다. 사랑과 신앙도 서로 구별되지만, 이 번호에서는 그 결합이 강조됩니다. 따라서 심장은 중요하고 폐는 부차적이라는 식으로 단순화하거나, 반대로 두 기관이 함께 작용하므로 사랑과 신앙 사이에는 아무런 구별도 없다고 말하는 것은 모두 이번 번호의 설명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합니다.
앞서 스베덴보리는 마음의 애정이 천적이고 그 결과로 나오는 노래가 영적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심장과 폐의 관계는 그 설명을 다른 각도에서 보여 줍니다. 마음의 애정과 노래가 서로 무관하지 않듯이, 심장과 폐도 살아 있는 몸 안에서 관계를 맺습니다. 두 설명은 모두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구별되면서도 서로 관계를 맺는다는 점을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심장과 폐에 관한 문단은 노래와 악기에 관한 앞부분에서 갑자기 벗어난 이야기가 아닙니다. 유발이 의미하는 신앙의 영적인 것들을 설명하는 논증의 일부입니다.
성도들이 이 말씀을 자신의 신앙에 적용할 때에도 같은 구별이 필요합니다. 사랑을 말하면서 신앙의 진리와 선을 소홀히 여기거나, 신앙을 말하면서 사랑과의 관계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사랑과 신앙을 심장과 폐에 기계적으로 대입하여 자신의 영적 상태를 판정하려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번 번호가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은 살아 있는 결합의 중요성입니다. 신앙은 사랑과 무관한 독립된 지식으로 이해될 수 없으며, 사랑과 신앙의 관계는 말씀의 여러 표상을 통해 함께 살펴보아야 합니다.
결국 심장과 폐가 사랑과 신앙의 결합을 표상한다는 설명은 유발의 수금과 퉁소가 왜 영적인 것들을 나타내는지 이해하도록 돕습니다. 태고인들은 천적인 것을 심장의 영역에, 영적인 것을 폐의 영역에 관련지었고, 스베덴보리는 천적 천사들과 영적 천사들의 구별도 이 관계 안에서 설명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신체의 세부 구조에 새로운 의미를 덧붙이기보다, 사랑과 신앙이 구별되면서도 결합을 이룬다는 이번 번호의 중심을 붙들어야 합니다. (AC.418심화2)
스베덴보리는 AC.418에서 ‘마음의애정은천적이지만,그결과로나오는노래는영적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문장을 처음 읽으면 마음속의 감정은 모두 천적이고, 입 밖으로 나오는 노래는 모두 영적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번 번호의 문맥은 모든 인간의 감정과 노래를 무조건 천적이거나 영적인 것으로 분류하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기쁨이 마음의 즐거움을 낳고, 그 즐거움이 노래로 표현되는 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문장은 사랑에 속하는 천적인 것과 신앙에 속하는 영적인 것의 관계를 이해하도록 돕는 설명으로 읽어야 합니다.
그가 먼저 말하는 것은 천국의 기쁨입니다. 천국의 모든 기쁨은 마음의 즐거움을 낳고, 그 즐거움은 노래로 표현됩니다. 이어서 현악기는 그 노래를 본뜨고 더욱 고양합니다. 여기에는 마음의 애정에서 노래로, 노래에서 악기의 소리로 이어지는 관계가 있습니다. 노래와 악기는 마음의 애정과 아무 관련 없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애정에서 비롯된 즐거움을 표현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노래와 현악기를 영적인 것들의 표상으로 설명하는 이유도 이 관계에 있습니다.
이 설명은 앞서 야발과 유발을 구별한 내용과 이어집니다. 야발은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거기서 나오는 선들에 관한 교리를, 유발은 같은 교회의 영적인 것들에 관한 교리를 나타냅니다. 야발의 장막과 가축에 관한 기록 다음에 유발의 수금과 퉁소에 관한 기록이 나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두 기록을 통해 사랑에 속하는 천적인 것들과 신앙에 속하는 영적인 것들을 구별하여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노래가 영적이라는 말은 단순히 음악이 종교적 감정을 일으킨다는 뜻보다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그렇다고 모든 노래가 그 자체로 영적인 선을 지닌다는 뜻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노래한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의 마음에 어떤 사랑이 있는지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AC.418은 천국의 기쁨과 마음의 애정에서 비롯되는 노래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번호의 설명을 모든 음악이나 모든 감정에 그대로 적용하여, 노래하는 행위 자체를 영적인 상태의 증거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노래라는 외적 표현이 아니라, 그 표현이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사들의 합창을 통해서도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차이를 설명합니다. 천사들의 합창에는 천적인 합창과 영적인 합창이 있으며, 영적인 합창은 현악기의 소리에 비길 만한 특유의 음색으로 구별된다고 합니다. 이 경험담은 천국의 노래를 지상의 음악 이론으로 분석하라는 요청이 아닙니다.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구별이 천사들의 합창에서도 나타난다는 그의 증언입니다. 그는 그 구체적인 내용은 나중에 더 설명하겠다고 밝힙니다.
여기서 사랑과 신앙의 관계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사랑이 마음의 애정과 관련된다면, 신앙은 그 사랑과 무관하게 홀로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마음의 애정과 노래를 연결한 설명은 사랑과 신앙을 서로 떨어진 두 영역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돕습니다. 다만 이를 ‘사랑은언제나말이없고신앙은언제나소리로표현된다’는 식의 고정된 공식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이번 번호에서 노래는 사랑의 애정과 영적인 표현의 관계를 보여 주는 하나의 표상입니다.
성도들이 이 말씀을 읽으며 자신의 예배를 돌아볼 수도 있습니다. 찬송의 아름다움과 음악의 풍성함은 귀한 것이지만, 스베덴보리의 설명에서 노래의 출발점은 마음의 애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얼마나 아름답게 노래했는가만이 아니라, 그 노래가 어떤 사랑과 기쁨에서 비롯되었는지도 살펴보게 됩니다. 이것은 음악적 능력이 뛰어나야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마음의 애정과 그 표현이 서로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하자는 것입니다.
결국 ‘마음의애정은천적이고노래는영적’이라는 말은 사랑과 신앙을 분리하기 위한 설명이 아닙니다. 천국의 기쁨이 마음의 즐거움을 낳고, 그 즐거움이 노래와 악기의 소리로 표현되는 관계를 통해 두 가지의 구별과 연결을 보여 주는 설명입니다. 유발의 수금과 퉁소는 이러한 관계 안에서 신앙에 속하는 영적인 것들을 나타냅니다. 성도들은 이 말씀을 통해 신앙의 표현을 그 근원인 사랑과 함께 살펴보게 됩니다. (AC.418심화1)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창4:21)
AC.418
앞절은사랑에속하는천적인것들을다루었지만,이절은신앙에속하는영적인것들을다루며,이것들은‘수금과퉁소’(harpandorgan)로표현됩니다.수금과그와비슷한현악기들이신앙의영적인것들을의미한다는사실은여러가지점에서분명합니다.표상교회의예배에서이와비슷한악기들과노래는다른어떤것도아닌바로이러한것들을표상했습니다.이때문에노래하는사람들과악기를연주하는사람들이그렇게많았던것입니다.이러한표상의이유는천국의모든기쁨이마음의즐거움을낳고,이즐거움이노래로표현되며,그다음에는노래를본뜨고더욱고양하는현악기들로표현되기때문입니다.마음의모든애정에는노래를낳고,따라서노래와관련된것들을낳는성질이따릅니다.마음의애정은천적이지만,그결과로나오는노래는영적입니다.노래와그와비슷한것들이영적인것을나타낸다는사실은천사들의합창을통해제게분명해졌습니다.천사들의합창에는천적인것과영적인것,두종류가있습니다.영적천사들의합창은현악기의소리에비길만한,울림이있고노래하듯흐르는음색(sonocanoroalato)으로천적천사들의합창과쉽게구별됩니다.이에대해서는주님의신적자비로나중에말씀드리겠습니다.태고인들은천적인것을심장의영역에,영적인것을폐의영역에관련지었습니다.따라서노래하는목소리와그와비슷한것들처럼폐에속하는모든것,그리고그러한악기들의목소리나소리도폐의영역에관련지었습니다.그근거는심장과폐가사랑과신앙의결합과같은일종의결합을표상한다는데에만있지않았습니다.천적천사들은심장의영역에속하고,영적천사들은폐의영역에속하기때문이기도했습니다.이와같은것들이지금다루는구절에의미되어있다는사실은,이말씀이주님의말씀이라는점에서도알수있습니다.유발이수금과퉁소를연주하는사람들의조상이었다는것외에아무것도암시하지않는다면,이말씀에는생명이없을것이기때문입니다.또한그러한사실을아는것은누구에게도아무런유익이없습니다. The former verse treated of celestial things which are of love, but this verse treats of spiritual things which are of faith, and these are expressed by the “harpandorgan.” That by stringed instruments, such as harps and the like, are signified the spiritual things of faith is evident from many considerations. Similar instruments, and also the singing, in the worship of the representative church, represented nothing else, and it was on this account that there were so many singers and musicians, the cause of this representation being that all heavenly joy produces gladness of heart, which was expressed by singing, and in the next place by stringed instruments that emulated and exalted the singing. Every affection of the heart is attended with this: that it produces singing, and consequently what is connected with singing. The affection of the heart is celestial, but the consequent singing is spiritual. That singing and that which resembles it denote what is spiritual has been evident to me from the angelic choirs, which are of two kinds, celestial and spiritual. The spiritual choirs are easily distinguished from the celestial by their vibrant singing tone [sono canoro alato], comparable to the sound of stringed instruments, of which, by the Divine mercy of the Lord, we shall speak hereafter. The most ancient people referred what was celestial to the province of the heart, and what was spiritual to that of the lungs, and consequently to whatever pertains to the lungs, as do the singing voice and things like it, and therefore the voices or sounds of such instruments. The ground of this was not merely that the heart and lungs represent a kind of marriage, like that of love and faith, but also because the celestial angels belong to the province of the heart, and the spiritual angels to that of the lungs. That such things are meant in the passage before us, may also be known from the fact that this is the Word of the Lord, and that it would be destitute of life if nothing more were implied than that Jubal was the father of such as play upon the harp and the organ; nor is it of any use to anyone to know this.
해설
AC.418은 앞의 AC.417에서 제시한 유발의 속뜻을 본격적으로 설명합니다. 야발에 관한 앞 절이 사랑에 속하는 천적인 것들을 다루었다면, 유발에 관한 이 절은 신앙에 속하는 영적인 것들을 다룹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차이가 ‘수금과퉁소’(harpandorgan)라는 표현에 담겨 있다고 밝힙니다. 이 번호의 핵심은 악기의 종류를 분류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사랑의 애정이 어떻게 노래와 소리로 표현되며, 그 관계가 왜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지를 밝히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표상교회의 예배를 언급합니다. 그 예배에서 노래와 악기는 단순히 분위기를 돋우기 위한 장식이 아니라 영적인 것들을 표상했습니다. 그는 천국의 모든 기쁨이 마음의 즐거움을 낳고, 그 즐거움이 노래로 표현되며, 이어서 현악기가 그 노래를 본뜨고 더욱 고양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설명에서 중요한 것은 소리가 만들어지는 순서보다 그 소리의 근원입니다. 노래는 마음의 애정과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애정에서 비롯된 즐거움이 밖으로 표현되는 한 방식입니다.
이어지는 ‘마음의애정은천적이지만,그결과로나오는노래는영적입니다’라는 문장은 이번 번호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서로 경쟁하는 두 상태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마음의 애정과 그 애정에서 나오는 노래의 관계를 통해,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의 관계를 보여 줍니다. 사랑의 애정이 그 근원에 있고, 그 애정이 표현되는 데에는 영적인 것이 관련됩니다. 따라서 유발이 신앙의 영적인 것들에 관한 교리를 의미한다는 설명은 앞서 야발이 사랑의 거룩한 것들에 관한 교리를 의미한다는 설명과 이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관계를 천사들의 합창에 관한 자신의 경험으로도 설명합니다. 그는 천적 천사들의 합창과 영적 천사들의 합창이 있으며, 영적 천사들의 합창은 현악기의 소리에 비길 만한 특유의 음색으로 구별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그가 전하는 것은 모든 천사의 노래가 같은 방식으로 들린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구별이 합창의 소리에서도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는 그 합창에 관해 나중에 더 말하겠다고 예고하므로, 이번 번호만으로 두 합창의 모든 차이를 상세히 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심장과 폐에 관한 설명은 이러한 관계를 한층 깊게 보여 줍니다. 태고인들은 천적인 것을 심장의 영역에, 영적인 것을 폐의 영역에 관련지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심장과 폐가 사랑과 신앙의 결합과 같은 일종의 결합을 표상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천적 천사들은 심장의 영역에, 영적 천사들은 폐의 영역에 속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노래하는 목소리와 악기의 소리가 폐의 영역에 관련된다는 설명은 단순한 신체 비유에 그치지 않습니다. 사랑과 신앙의 관계가 인간의 심장과 폐라는 표상, 그리고 천사들의 구별과 함께 제시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심장을 사랑, 폐를 신앙이라고 단순히 외우는 데 그쳐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것은 두 기관이 이루는 결합입니다. 심장과 폐는 서로 구별되지만 살아 있는 몸 안에서 함께 작용합니다. 마찬가지로 사랑과 신앙도 구별되지만, 그 관계를 끊어 놓은 채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이번 번호가 심장과 폐의 모든 생리적 기능을 세부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아니므로, 그 이상의 대응 관계를 임의로 확장하기보다는 스베덴보리가 직접 밝힌 사랑과 신앙의 결합에 주목하는 것이 좋습니다.
마지막 문단에서 스베덴보리는 왜 유발의 기록에 속뜻이 있어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유발이 악기 연주자들의 조상이었다는 역사적 정보만 남는다면, 그 사실을 아는 것이 누구에게 어떤 영적 유익을 주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는 문자적 기록을 무가치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에는 문자적 기록을 통해 전해지는 더 깊은 생명이 있다는 뜻입니다. 유발에 관한 짧은 기록도 사랑과 신앙의 관계를 밝히는 말씀으로 읽을 때, 단순한 문화사의 한 장면을 넘어 우리의 영적 삶과 연결됩니다.
결국 AC.418은 유발의 수금과 퉁소를 통해 신앙에 속하는 영적인 것들을 설명하면서, 그 영적인 것들이 사랑의 애정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마음의 애정이 노래로 표현되듯,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은 서로 구별되면서도 관계를 맺습니다. 성도들은 이 말씀을 통해 신앙을 사랑과 떨어진 지식으로 생각하지 않고, 사랑에서 비롯되는 영적인 삶의 표현과 함께 살펴보게 됩니다. (AC.418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