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설교의 성경적 출발점은 사사기 3장 1절의 매우 인상적인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에게 ‘전쟁을 가르쳐 알게 하시려고’ 몇몇 민족을 남겨 두셨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 말씀에서 곧바로 ‘전쟁을 알아야 한다’는 명제를 끌어내고, 그것을 6·25전쟁과 대한민국의 안보 현실, 북한과 공산주의, 주한미군, 그리고 현재의 정치적 대결에 연결합니다. 이어 사사기 전체를 ‘번성→부패→징계→부르짖음→사사→회복→다시 번성’이라는 순환구조로 설명하고, 이것을 개인의 삶과 국가의 역사에 적용합니다. 설교의 성경적 골격 자체는 분명히 사사기의 중요한 특징 하나를 포착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사사기는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떠남, 압제당함, 부르짖음, 사사가 일어남, 구원받음, 다시 타락함이라는 반복 구조로 진행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사사기 3장의 ‘전쟁을 알게 하심’은 설교자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인간의 내면 깊숙한 곳을 가리킵니다. 말씀에 기록된 전쟁은 역사적으로 실제 있었던 전쟁이지만, 말씀의 속뜻에서 전쟁은 선과 악, 진리와 거짓 사이의 영적 싸움, 곧 시험을 표상합니다. 사람이 거듭나려면 반드시 이 싸움을 통과해야 합니다. 선이 무엇인지 알고 진리가 무엇인지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악한 욕망이 일어날 때 그것을 거절하고, 거짓된 생각이 밀려올 때 진리를 붙들며, 자기 뜻과 주님의 뜻이 충돌할 때 주님의 뜻을 선택하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전쟁을 배우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이번 본문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여호수아 시대에는 가나안 정복이 이루어졌지만, 모든 적이 완전히 제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민족들은 그대로 남겨졌습니다. 자연적 의미만 보면 ‘왜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완전히 제거하지 않으셨는가?’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러나 거듭남의 관점에서는 이것이 놀랍도록 정확한 인간의 영적 현실을 보여 줍니다. 사람이 처음 주님께 돌아왔다고 해서 자기 안의 모든 악한 성향이 단번에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씩 악을 보게 하시고, 싸우게 하시며, 이기게 하십니다. 아직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악은 당분간 잠잠하게 남겨 두십니다. 그것까지 한꺼번에 드러난다면 사람이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나안 족속을 남겨 두셨다’는 것은 주님께서 악을 좋아하셔서 보존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의 자유와 영적 성장을 위해, 시험이 단계적으로 진행되도록 허용하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지난 여호수아 설교에서 살펴본 ‘허용의 섭리’와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주님께서는 악을 뜻하시지 않지만, 악이 사람에게 드러나고 그것과 싸우는 과정까지 섭리 안에 사용하십니다. 사람이 자기 안에 어떤 악이 있는지도 모른다면 그것을 거절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시험은 악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 아니라 이미 숨어 있던 악이 드러나는 과정입니다.
이렇게 보면 사사기 3장 1절의 ‘전쟁을 알지 못한 자에게 전쟁을 알게 하려 하사’라는 말씀은 외부의 군사전쟁보다 먼저 영적 전쟁을 가리킵니다. 설교자가 ‘전쟁을 모르면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고 강하게 표현했는데, 그 표현을 영적으로 바꾸어 보면 오히려 깊은 진리가 됩니다. 거듭남을 진지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반드시 영적 싸움을 알게 됩니다. 자기애와 이웃 사랑이 충돌하고, 복수하고 싶은 마음과 용서해야 한다는 진리가 충돌하며, 탐욕과 정직이 충돌하고, 자기 지혜를 믿고 싶은 마음과 주님의 지혜를 의지해야 한다는 신앙이 충돌합니다. 이 싸움을 한 번도 경험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오히려 자신의 악을 아직 심각하게 대면하지 않았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에게 ‘영적 전쟁’은 매우 실제적입니다. 다만 그 적은 먼저 북한이나 공산주의자나 특정 정당의 사람이 아니라, 내 안에서 주님을 대적하는 악과 거짓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이번 설교와 ‘스베덴보리의 렌즈’ 사이에 중요한 갈림길이 나타납니다. 설교자는 성경의 ‘가나안 전쟁’을 거의 즉시 대한민국의 정치적·군사적 전쟁으로 옮겨 갑니다. 6·25전쟁, 북한, 주한미군, 특정 대통령과 정치세력, 광화문 집회가 계속해서 사사기의 ‘전쟁’과 겹쳐집니다. 그러나 말씀의 내적 의미는 방향이 반대입니다. 말씀은 밖의 적을 찾아내기 전에 내 안의 적을 찾아내도록 사람을 이끕니다.
이 원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말씀을 읽을 때 ‘블레셋 사람이 누구인가?’라고 물으며 오늘날의 어떤 정치세력이나 종교집단을 지목하기 시작하면, 말씀은 쉽게 타인을 공격하는 도구가 됩니다. 그러나 ‘내 안의 블레셋은 무엇인가?’라고 묻기 시작하면 말씀은 나를 회개시키는 거울이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성경 해석이 일관되게 후자를 택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말씀의 전쟁은 궁극적으로 한 사람의 영혼 안에서 벌어지는 주님의 나라와 지옥 사이의 싸움입니다.
설교자가 제시한 ‘사사기의 사이클’도 이 관점에서 읽으면 훨씬 깊어집니다. 설교에서는 ‘번성하면 부패한다’고 설명합니다. 사람이 잘되고 형편이 좋아지면 교만해지고, 심지어 ‘여자 하나 가지고 못 살고 바람을 피게 된다’는 매우 현실적이고 자극적인 예도 듭니다. 그러고 나면 하나님께서 ‘매를 때리시고’, 징계를 받은 사람이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시고 사사를 보내 회복시키며, 다시 번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반복되는 타락을 아주 쉽게 기억하게 만드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사기의 실제 영적 사이클은 단순한 ‘경제적 번성→도덕적 부패→재난→기도→경제적 회복’이 아닙니다. 더 정확하게 보면 ‘주님께서 주신 선과 진리→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여김→자기애와 세상 사랑의 지배→거짓과 악에 사로잡힘→자기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달음→주님께 도움을 구함→진리를 통한 구원→새로운 영적 자유’의 순환입니다.
여기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번성’의 의미입니다. 성경에서 번성이 언제나 돈이 많아지고 사업이 잘되고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말씀의 속뜻에서 번성과 증가는 선과 진리가 많아지는 것을 뜻합니다. 사람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지고, 이웃을 섬기는 기쁨이 늘어나며, 말씀을 이해하는 빛이 밝아지는 것이 진정한 번성입니다. 그러므로 ‘번성하는 상태에 계속 있으라’는 설교자의 권면을 영적으로 바꾸어 말하면 대단히 좋은 권면이 됩니다. ‘주님께 받은 선을 자기 것으로 돌리지 말고 계속 주님께 돌려드리라’는 것입니다.
사사기의 타락은 바로 여기서 시작됩니다. 이스라엘은 평안해지면 여호와를 잊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영적 생활에서도 반복됩니다. 시험 가운데 있을 때는 간절히 기도하지만 문제가 해결되면 자기 힘으로 해결한 것처럼 느낍니다. 은혜를 받을 때에는 ‘주님이 하셨습니다’라고 고백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선을 자기 성품과 능력으로 돌리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매우 중요하게 다루는 proprium의 문제입니다. 사람의 proprium은 주님께 받은 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고, 마침내 자기가 선하고 자기가 지혜롭다고 생각하려는 경향을 지닙니다.
따라서 ‘번성하면 부패한다’는 설교자의 관찰은 영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지점을 건드립니다. 그러나 문제는 번성 그 자체가 아닙니다. 선과 진리의 풍성함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내 것’으로 돌리는 순간입니다. 천사들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선과 지혜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 때문에 부패하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이 주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아주 가진 것이 적은 사람도 자기 것이 있다고 여기며 교만하면 부패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패의 원인은 풍요가 아니라 appropriation, 곧 주님의 것을 자기 것으로 취하는 데 있습니다.
설교에서는 이어 ‘부패하면 하나님이 때리신다’, ‘뒤지도록 맞는다’는 표현을 반복합니다. 성경의 문자에는 실제로 하나님의 진노와 징계가 그렇게 표현되는 곳이 많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구별을 합니다. 하나님은 실제로 분노하시거나 사람을 해치기 위해 매를 드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사랑 그 자체이며 자비 그 자체이십니다. 사람이 악에서 떠나지 않을 때 그 악 자체가 고통스러운 결과를 낳고, 주님께서는 그것을 허용하시면서도 가능한 한 사람을 구원 쪽으로 돌리십니다. 사람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이 때리셨다’고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사람이 주님의 질서에서 벗어난 결과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사사기의 이스라엘이 이방 민족에게 압제당하는 것도 같은 구조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악을 사랑하면 결국 그 악이 사람을 지배합니다. 처음에는 내가 욕망을 사용하는 것 같지만 나중에는 욕망이 나를 사용합니다. 처음에는 화를 필요할 때만 낸다고 생각하지만 나중에는 분노가 나를 끌고 갑니다. 처음에는 돈을 필요에 따라 추구하지만 나중에는 탐욕이 모든 판단을 지배합니다. 이것이 영적인 ‘이방 민족의 압제’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적에게 넘겨주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선택한 악이 마침내 그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이스라엘은 ‘부르짖습니다’. 설교자가 ‘부르짖음’을 강조하는 것은 사사기의 문자적 흐름을 잘 포착한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능력의 한계에 도달해서야 비로소 주님을 진실하게 찾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 힘으로 된다고 생각하는 동안은 주님의 도움을 입술로만 구할 수 있지만, 자신의 무능을 절실하게 깨닫게 되면 기도가 깊어집니다. 이 점에서 설교자가 ‘부르짖으라’고 반복하는 데는 목회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다만 ‘큰소리로 주여를 외치면 하나님께서 뜻을 바꾸신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합니다. 기도의 능력은 음량에 있지 않습니다. 통성기도도 진실한 기도가 될 수 있고, 아무 소리 없는 묵상기도도 진실한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소리의 크기가 아니라 의지의 방향입니다. 말없이 주님 앞에서 자신의 악을 인정하고 돌이키는 한 사람의 마음이 수천 명의 함성보다 더 깊은 기도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아무리 크게 ‘주여’를 외쳐도 자기 악을 그대로 사랑하고 있다면 그 외침 자체가 사람을 변화시키지는 않습니다.
또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신다’는 표현도 내적으로는 다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을 향한 주님의 뜻은 처음부터 끝까지 구원입니다. 변하는 것은 사람의 상태입니다. 사람이 주님을 등지고 있을 때에는 주님의 사랑이 심판처럼 느껴지고, 사람이 돌아서 주님을 향하면 같은 사랑이 자비와 평화로 경험됩니다. 태양이 방향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그늘에서 햇빛 쪽으로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회개할 때 ‘하나님의 마음이 바뀌었다’기보다 사람이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로 바뀌었다고 보는 것이 더 깊은 설명입니다.
사사기의 다음 단계는 ‘사사를 보내 주심’입니다. 설교에서는 이것을 ‘오늘날의 선지자’를 보내 주시는 것으로 설명하고, 선지자는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보는 사람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에도 구별이 필요합니다. 성경의 선지자의 본질은 미래 사건을 예언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선지자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말씀의 속뜻에서는 선지자가 ‘진리의 가르침’을 표상합니다. 그리고 사사는 그 진리에 따라 악과 거짓에서 사람을 해방시키는 주님의 구원 능력을 표상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부르짖을 때 주님께서 ‘사사를 보내신다’는 것은 반드시 어떤 카리스마적 지도자 한 사람을 보내신다는 뜻으로 좁혀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말씀 한 구절을 통해서도, 양심을 통해서도, 한 사람의 조용한 충고를 통해서도, 때로는 실패와 고난을 통해서도 사람에게 구원의 진리를 보내십니다. 핵심은 그 사람을 특정 지도자에게 의존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돌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 점은 이번 설교를 해설할 때 특별히 중요합니다. 예배 전 기도에서부터 특정 목회자를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라고 규정하고, 특정 날짜의 광화문 집회와 정치적 승리를 하나님의 뜻과 직접 연결합니다. 이어 설교 중에도 시대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세우신다는 말과 현재의 정치운동 지도력이 서로 가까이 놓입니다. 이 구조가 반복되면 회중에게는 자신도 모르게 ‘성경의 사사·선지자→오늘의 특정 지도자’라는 연결이 형성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바로 이 지점에서 매우 신중해야 합니다. 구약의 사사나 선지자의 표상을 오늘날 특정 개인에게 직접 이전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말씀의 표상은 먼저 주님 자신과, 주님에게서 나오는 선과 진리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인간 지도자는 언제나 오류가 있을 수 있고 자기애의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지도자라 해도 말씀의 ‘사사’나 ‘선지자’의 자리를 자신에게 직접 적용하기 시작하면, 사람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 사이의 경계가 흐려질 수 있습니다.
설교자가 ‘선지자는 앞으로 될 것을 미리 다 보는 사람’이라고 설명한 부분 역시 수정이 필요합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참된 예언은 미래의 정치 사건을 맞히는 능력보다 훨씬 깊습니다. 말씀은 ‘악을 계속 사랑하면 결국 그 악의 종이 된다’, ‘회개하면 주님께서 새로운 생명으로 인도하신다’, ‘자기 사랑의 마지막은 지옥이며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의 마지막은 천국이다’라는 영원한 미래를 보여 줍니다. 이것이 말씀의 예언적 성격입니다.
이번 설교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은 본문 자체가 놀랍도록 선명하게 ‘영적 전쟁’을 말할 수 있는 본문인데도, 그 전쟁이 거의 전부 정치적·군사적 전쟁으로 밖을 향해버린다는 점입니다. 사사기 3장 1절은 ‘전쟁을 알지 못한 세대에게 전쟁을 가르친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깊이 파고들었다면 ‘왜 거듭나는 사람에게 시험이 필요한가’, ‘왜 주님은 우리의 모든 악한 성향을 한꺼번에 없애주시지 않는가’, ‘왜 신앙생활을 오래해도 반복해서 같은 악과 싸우는가’, ‘시험 가운데 천사들과 악한 영들의 역할은 무엇인가’, ‘사람의 자유는 어떻게 보존되는가’ 같은 매우 깊은 영적 주제들이 펼쳐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설교에서는 이 놀라운 내적 전쟁이 6·25전쟁과 북한, 주한미군, 특정 정치인, 광화문 집회로 빠르게 치환됩니다. 정치와 국가 문제를 설교에서 전혀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정의와 자유, 국가의 평화와 국민의 안전 역시 이웃 사랑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영적 전쟁을 특정 정치세력과의 전쟁으로 동일시하는 순간, 신앙적으로 매우 위험한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내가 지지하는 편은 하나님의 군대가 되고, 반대편은 가나안 족속이나 마귀의 세력이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회개의 방향이 뒤집힙니다. ‘내 안의 무엇이 주님을 거역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저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거역하고 있는가?’를 묻게 됩니다. ‘내 안의 간첩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자기애와 탐욕과 거짓과 교만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외부의 실제 사람들에게만 적용하면 말씀은 자기 성찰의 거울에서 정치적 무기로 변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이번 설교에서는 정치적 상대를 향한 매우 강한 욕설과 모욕적 표현이 반복됩니다. 특정 인물을 향하여 ‘개자식’, ‘늙은 새끼’, ‘죽은 놈’ 등의 표현을 사용하고, 일부 정치인이나 공직자에게 극형이 필요하다는 발언까지 이어집니다. 이것을 단지 설교자의 독특한 화법이나 정치적 열정으로만 넘기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 설교의 본문이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영적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악과 싸우면서 내가 그 악과 같은 악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거짓과 싸우다가 증오에 빠지고, 불의와 싸우다가 모욕과 복수를 사랑하게 된다면, 외적으로는 적과 싸우고 있지만 내적으로는 그 적이 상징하는 악에게 패배하고 있는 셈입니다.
천국의 선은 악에 단호하면서도 사람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진리는 거짓을 분명히 드러내지만 사람의 인격을 파괴하는 데서 기쁨을 얻지 않습니다. 주님은 바리새인들을 매우 엄하게 책망하셨지만 그들의 영원한 멸망을 즐거워하신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도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향하여 용서를 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적 ‘전투성’은 증오가 강한 상태가 아니라, 악을 향해서는 타협하지 않으면서 사람을 향한 체어리티를 잃지 않는 상태입니다.
설교 중 ‘성경 전체가 다 정치로 되어 있다’, ‘아브라함도 위대한 정치가이고 모세도 정치가’라는 주장은 설교자의 정치신학을 아주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물론 성경에는 왕과 국가, 전쟁과 법, 사회질서와 권력이 많이 등장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의 지도자였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의 중심이 정치라고 하는 것은 말씀의 본질을 지나치게 외적 차원으로 제한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의 중심은 주님과 그분의 나라, 그리고 인간의 거듭남입니다. 국가와 왕, 전쟁과 평화도 결국 이 영적 실재를 표상하기 때문에 말씀에 들어 있습니다.
특히 모세는 말씀 자체 또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적 율법을 표상하는 인물입니다. 아브라함 역시 단순한 정치 지도자로 읽히지 않고, 가장 깊은 의미에서는 주님의 인성과 그 인성이 신성과 하나 되어 가는 과정과 관련됩니다. 그러므로 이 인물들을 곧바로 현대 정치 지도자의 모델로 읽는 것은 말씀의 깊이를 크게 줄일 수 있습니다.
설교 후반에 다시 등장하는 ‘천년왕국’도 같은 맥락에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설교자는 전천년·후천년·무천년설을 설명하면서 천년왕국을 매우 강조합니다. 지난 설교에서도 말했듯, ‘천년왕국을 죽은 뒤에만 기다리지 말고 이 땅에서부터 체험해야 한다’는 직관 자체에는 중요한 영적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요한계시록의 ‘천 년’을 문자적인 천 년짜리 정치 체제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완전하고 충만한 어떤 영적 상태를 표상합니다. 주님의 나라가 사람 안에 임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래서 ‘천년왕국’은 어느 정당이 집권하거나 어떤 국가 체제가 세워졌을 때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 안에서 주님이 왕이 되실 때 시작됩니다. 자기애가 내려가고 주님 사랑이 올라오며, 거짓이 물러가고 진리가 다스리며, 복수하고 싶은 욕망보다 용서와 정의가 우위를 차지할 때 그 사람 안에 주님의 나라가 임하기 시작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 이루는 공동체가 교회의 내적 모습이며, 궁극적으로 천국의 질서입니다.
이번 설교에서 반복되는 ‘회복’과 ‘번성’도 이 관점에서 새롭게 읽을 수 있습니다. 설교자는 ‘나를 회복시켜 주옵소서, 나를 번성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도록 인도합니다. 이것이 건강과 물질, 사회적 성공의 회복을 뜻한다면 신앙의 범위가 좁아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회복은 인간 안에 잃어버린 천국의 질서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했는데 용서할 수 있게 되는 것, 거짓말을 당연하게 여기던 사람이 진실을 사랑하게 되는 것, 자기 이익밖에 모르던 사람이 다른 사람의 선을 기뻐하게 되는 것, 이것이 진정한 회복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사사기의 사이클을 끝내는 길입니다. 사사기의 비극은 사이클이 계속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구원받고 또 타락하고, 부르짖고 또 구원받고, 다시 타락합니다. 사사기 마지막에 가면 상황은 더 악화됩니다.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는 결론에 이릅니다. 결국 인간 사사만으로는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더 깊은 구원이 필요합니다. 말씀 전체의 흐름으로 보면 이 반복은 궁극적으로 참된 구원자이신 주님을 기다리게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이것이 거듭남의 과정과도 닮았습니다. 사람은 한 번의 회개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반복해서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며, 더 깊은 악이 드러나고 또 싸웁니다. 그러나 정확히 같은 원을 무한히 도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 순종한다면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는 시험마다 조금씩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갑니다. 나선형으로 올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처음에는 외적인 행동의 악과 싸우고, 다음에는 생각의 거짓과 싸우며, 더 나아가 그 밑에 있는 자기애와 지배욕의 뿌리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사사기의 사이클은 절망의 사이클만은 아닙니다. 사람이 얼마나 쉽게 주님을 잊어버리는지를 보여 주는 동시에, 사람이 아무리 반복해서 넘어져도 진심으로 주님께 돌아오면 주님께서는 다시 구원의 길을 여신다는 자비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 부분에서 설교자가 반복해서 강조한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다시 회복시켜 주신다’는 메시지는 소중한 복음적 요소를 지닙니다. 다만 그것을 ‘큰소리로 기도하면 원하는 상황을 바꾸어 주신다’는 차원보다, ‘자기의 무능을 인정하고 주님께 돌아서면 주님께서 악의 속박에서 건져 주신다’는 차원으로 깊게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예배의 찬송과 통성기도에서도 상당한 생명력은 느껴집니다. 설교자가 ‘찬송은 곡조 있는 설교’라고 표현한 것도 기억할 만합니다. 실제로 찬송은 진리를 정서와 결합시켜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 전달하는 힘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음악과 노래는 정서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진리가 단지 머리에만 있을 때보다 사랑과 정서에 결합될 때 사람의 생명에 더 깊이 들어갑니다. 이런 면에서 이 예배가 지적인 강의에 머물지 않고 회중의 정서 전체를 움직이려 한다는 점은 분명한 특징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욱 분별이 필요합니다. 찬송과 통성기도로 마음이 강하게 고양된 직후 특정 정치적 주장과 집단행동이 하나님의 명령처럼 제시되면, 회중은 자신이 느끼는 종교적 감동과 특정 정치적 판단을 구분하기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강한 정서적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신다’, ‘하나님이 보내신 지도자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반드시 승리한다’는 표현이 반복될수록 그 위험은 커집니다. 영적 감동이 있다고 해서 그 감동과 함께 제시된 모든 인간적 판단까지 신적인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계속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 자유와 이성의 보존입니다. 주님은 사람을 강제로 믿게 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의 이성을 압도하고 자유를 빼앗는 방식으로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참된 신앙은 사람이 진리를 이해하고 자유롭게 받아들여 삶으로 선택할 때 그의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예배 역시 회중에게 강한 감동을 주면서 동시에 각자가 말씀 앞에서 자유롭게 생각하고 분별할 수 있는 공간을 남겨 주어야 합니다.
끝으로 이번 설교 전체에서 가장 아깝게 느껴지는 것은 설교자가 잡은 본문의 핵심 자체는 상당히 좋았다는 점입니다. ‘사사기는 사이클로 되어 있다’, ‘전쟁을 모르는 세대에게 전쟁을 가르친다’, ‘번성 가운데 부패하지 말아야 한다’, ‘징계 가운데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구원자를 세우시고 회복하신다’는 각각의 명제에는 깊이 발전시킬 수 있는 영적 씨앗들이 들어 있습니다. 자막에서도 설교자는 이 순환을 반복해서 ‘번성→부패→징계→부르짖음→사사→회복→번성’으로 요약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해 한 단계 더 안으로 들어가면, 이 사이클의 무대가 먼저 대한민국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이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전쟁은 내 안의 선과 악의 전쟁이며, 가나안 족속은 내 안에 남아 있는 악과 거짓이고, 압제는 내가 사랑한 악이 도리어 나를 지배하는 상태이며, 부르짖음은 자기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음을 인정하는 회개이고, 사사는 주님께로부터 오는 구원의 진리이며, 회복은 주님께서 내 의지와 이해성을 다시 질서 안으로 돌려놓으시는 거듭남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사사기는 정치적 전투의 교본보다 훨씬 더 무서운 책이 됩니다. 왜냐하면 적을 밖에서 찾을 수 없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공산주의자가 문제다’, ‘저 정치인이 문제다’, ‘저 세력이 문제다’라고 말하기 전에, 말씀은 ‘네 안에서 아직 정복되지 않은 가나안 족속은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다른 사람의 거짓에는 분노하면서 자신의 과장은 용납하고 있지는 않은지, 정치인의 교만은 비난하면서 자신의 영적 교만은 보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지, 나라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반대편 사람을 증오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묻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사사기 3장이 가르치는 가장 깊은 ‘전쟁을 아는 법’입니다. 영적 전쟁을 아는 사람은 적을 향해 가장 큰 소리를 지르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악의 움직임을 알아차리는 사람입니다. 강한 지도자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진리 앞에서 자신의 proprium을 내려놓는 사람입니다. 외부의 승리를 확신하는 사람이 아니라 시험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싸우신다는 사실을 믿고 자신은 선과 진리의 편에 서는 사람입니다.
지난 여호수아 설교가 ‘땅을 분배받는 것’이었다면 이번 사사기 설교는 그 땅을 받은 뒤 ‘그 땅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갔다고 거듭남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때부터 더 깊은 싸움이 시작됩니다. 주님께 받은 선과 진리를 계속 주님의 것으로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다시 자기 것으로 취하여 우상을 섬길 것인가 하는 싸움입니다.
그래서 이 설교에서 우리가 가져갈 가장 중요한 한 문장을 새롭게 만든다면, ‘전쟁을 알아야 한다’는 말을 이렇게 바꿀 수 있겠습니다. ‘거듭나는 사람은 자기 안에서 선과 악이 싸우는 영적 전쟁을 반드시 알게 되며, 그 싸움에서 자신의 힘이 아니라 주님의 선과 진리를 의지하여 싸워야 합니다.’
그리고 ‘사사기의 사이클’을 한 문장으로 다시 정리한다면 이렇습니다. ‘주님께 받은 선을 자기 것으로 돌릴 때 사람은 악의 지배 아래 들어가지만, 자신의 무능을 깨닫고 주님께 돌아서면 주님께서는 진리를 보내어 그를 다시 영적 자유와 선의 삶으로 회복시키십니다.’
※ 여기1강,2강...은 실제 사경회 일정표가 아닌,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 순서를 말합니다.
3강1부
‘영계의 구조와 실상’ - ‘익은 열매’와 사후 연단, 그리고 하나님의 끝까지 책임지심이라는 문제의식
3강은 앞선 2강의 ‘이기는 자’에 대한 가르침을 그대로 이어받으면서 시작합니다. 강사 목사님은 먼저 교회 시대의 이기는 자를 ‘이 땅에 사는 동안 광야 연단 과정을 다 받고 정결하게 되어 익은 열매가 된 성도’라고 다시 정리합니다. 과일이 익어야 농부가 거두어들이듯, 하나님의 나라 역시 ‘익은 열매’가 되어야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거룩함이 없이는 주를 보지 못하리라’는 말씀을 성화의 절대적인 요청으로 받아들입니다. 이 강의에서 구원은 단순히 ‘예수를 믿었다’는 신분의 변화에 머물지 않습니다. 실제 사람의 심령과 삶이 하나님의 생명에 합당하게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이 출발점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강사 목사님 자신이 이 ‘익은 열매’라는 말을 상당히 두려운 자기 질문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는 기도 중 ‘저를 익은 열매가 되게 해 주십시오’라고 고백하다가 목소리가 작아졌다고 솔직하게 말합니다. 이긴 자가 되려면 자기 자신뿐 아니라 소유에 대한 집착도 내려놓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주님께서 내려놓게 하실 뿐 아니라 그 자리에 더 귀한 것으로 채우시고, 포기할 힘도 주시지 않겠는가’라는 믿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이 장면은 이번 강의 전체의 분위기를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여기서 ‘이기는 자’는 처음부터 남의 영적 수준을 판정하기 위한 명칭이라기보다 ‘나는 과연 그 삶을 살고 있는가’를 자기 자신에게 묻는 엄중한 목표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알게 된 공용복 선생의 생애까지 조용히 배경에 두고 들으면 이 ‘익은 열매’라는 표현의 무게도 전보다 다르게 느껴집니다. 거의 온몸의 기능이 심각하게 제한된 상태에서 오랜 세월을 살아야 했던 사람에게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 ‘광야 연단을 통과한다’, ‘하나님의 생명이 내주하는 사람이 된다’는 말은 건강한 사람이 책상 위에서 구성한 수행 단계와는 다른 실존적 무게를 가졌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생애의 고난이 이 교리의 정확성을 자동으로 보증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이 가르침의 언어가 어디에서 형성되고 전달되어 왔는지를 알게 된 이상, 그 문장을 단순한 추상적 단계론으로만 읽는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특히 생전 공용복 선생의 육성을 기억하는 원로들에게 이런 문장은 실제 한 사람의 삶과 함께 들릴 수 있을 것입니다.
강의는 여기에서 하나의 매우 날카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요한계시록의 빌라델비아 교회에는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라’는 약속이 있고, 두아디라 교회에는 회개하지 않으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두 교회의 성도들은 약 1,900년 전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역사 마지막에 올 대환란을 그들에게 면제해 주거나 그 안에 들어가게 하겠다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강사 목사님은 이 문제를 그냥 지나가지 않고, 계시록의 교회들을 교회 시대 전체 성도의 표본으로 읽습니다. 빌라델비아에 주어진 약속은 교회 시대 전체의 ‘익은 열매’에게, 두아디라의 경고는 교회 시대 전체에서 회개하지 않는 성도들에게 적용된다고 설명합니다.
이 질문에서 강의의 ‘영계의 구조와 실상’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강사 목사님은 교회 시대의 모든 성도를 크게 두 부류로 봅니다. 하나는 이 땅에서 이미 익은 열매가 되어 대환란을 면하는 이긴 자들이고, 다른 하나는 아직 충분히 정결해지지 못하여 대환란 속에서 나머지 연단을 받아야 하는 성도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의 문제가 생깁니다. 대환란이 오기 훨씬 전에 죽은 수많은 성도들은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지상에서 광야 연단을 다 마치지 못했고, 그렇다고 역사 마지막의 대환란도 통과할 수 없다면, 그 사람들은 어떤 과정을 거쳐 천국에 들어가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강의가 내놓는 결론은 대담합니다. 하나님께서 대환란과 같은 성격의 연단 과정을 ‘영계에서도 은밀하게 운영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상에서 익은 열매가 되지 못한 성도는 죽은 뒤 영계의 중간 영역에 들어가 남은 연단을 받고, 거룩하게 되어 천국으로 들어간다고 설명합니다. 강사 목사님은 이것을 ‘이 땅에서 되지 않았으면 죽은 이후에도 한 차례 더’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로 받아들이며, 심지어 ‘영계에 대한 이 진리가 복음 중의 복음이 아닌가’라고 감격스럽게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사후 연단론의 밑바닥에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강한 신앙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점을 먼저 충분히 이해해야겠습니다. 이 강의가 중간 영역을 만든 이유를 단순히 ‘성경에 없는 사후 세계를 덧붙이기 위해서’라고만 보면 강의의 내적 논리를 놓칩니다. 강사 목사님이 풀려고 하는 문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자비를 동시에 지키는 것입니다. 거룩하지 않은 사람을 아무 변화 없이 ‘은혜의 캡슐’을 씌워 천국에 올려 보내는 방식은 하나님의 공의에 맞지 않는다고 보고, 동시에 이 땅에서 미완성된 성도를 하나님께서 버리신다고도 생각할 수 없으니, 사후의 정화와 연단을 통해 끝까지 책임지신다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실제 강의에서도 ‘은혜의 캡슐’을 씌워 ‘뿅 하고’ 천국에 들어간다는 식의 구원 이해를 매우 강하게 비판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보면 이 문제의식 자체는 상당히 귀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구원을 외적인 법정 선언 하나로 끝내지 않습니다.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은 그 사람의 실제 생명이 천국의 생명과 어울리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단지 ‘의롭다고 간주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천국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천국은 외부에서 들어갈 자격을 부여받는 장소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사랑 자체가 천국의 질서와 결합되어야 살 수 있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거룩하지 않은 사람에게 외적인 덮개만 씌워 천국에 넣을 수 없다’는 강의의 문제 제기는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깊게 만납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첫 번째 결정적인 갈림길도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사람이 죽자마자 즉시 최종적인 천국 또는 지옥에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먼저 천국과 지옥 사이의 ‘영들의 세계’(world of spirits)에 들어갑니다. 그곳에서 그의 외적인 상태가 벗겨지고 속사람의 실제 사랑이 드러나며, 선한 사람에게 남아 있던 거짓과 잘못된 습관이 정리되고, 필요한 경우 진리를 배우며, 마침내 자신의 지배적인 사랑과 일치하는 공동체로 들어갑니다. 겉으로만 보면 이번 강의가 말하는 ‘영계의 중간 영역’과 놀라울 정도로 가까워 보입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의 본질은 같지 않습니다. ‘핵심진리’에서는 지상에서 완성되지 못한 성화 자체가 사후에도 계속되어, 아직 충분히 거룩하지 못한 성도가 남은 연단을 받고 결국 익은 열매가 되는 것으로 봅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에게 사후의 ‘영들의 세계’는 지상에서 악을 지배적인 사랑으로 형성한 사람을 연단하여 선을 지배적인 사랑으로 바꾸는 ‘제2의 거듭남 장소’가 아닙니다. 사람의 근본적인 사랑의 방향은 자연계의 자유로운 삶 가운데 형성됩니다. 사후에는 그것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고, 선한 사람에게 아직 붙어 있는 이질적인 것들이 제거되는 것입니다.
이 차이는 매우 섬세하지만 구원론 전체를 가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주님과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하려고 살았지만 성격이 급하고 잘못된 종교 관념도 많이 가지고 죽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그에게 남아 있던 잘못된 관념과 외적인 결함이 사후에 벗겨질 수 있습니다. 천사들의 가르침을 받고 진리를 기쁘게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 ‘정화’입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과 세상을 최고의 목적으로 사랑하며 악을 기쁨으로 삼았던 사람이 죽은 뒤 고통스러운 연단을 충분히 받으면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근본적으로 바뀐다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이 강의에서 ‘사후 연단’이라는 말을 만날 때 ‘사후 정화’와 구별하여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정화는 이미 선을 향하고 있는 사람 안에서 그 선과 맞지 않는 것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반면 연단을 지상의 시험과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면, 아직 확정되지 않은 선택 가운데 사람의 새로운 의지가 형성되는 과정이라는 뜻이 강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연계의 삶을 바로 이 후자의 과정이 가능한 결정적인 세계로 봅니다. 이 세상은 천국에 들어가기 전 잠시 머무는 대기실이 아니라, 사람의 영원한 사랑이 자유롭게 형성되는 세계입니다.
그렇다고 이 강의가 자연계의 삶을 가볍게 여긴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강사 목사님은 이 땅에서 익은 열매가 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깁니다. ‘나중에 영계에서 하면 된다’고 안주하기보다 지금 연단을 받고 거룩해져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따라서 사후 연단론의 목적도 현세의 책임을 약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현세에서 미완성된 성도에게도 하나님의 구원 의지가 끝나지 않는다는 자비를 설명하려는 데 있습니다. 이 선한 의도는 충분히 존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하나님의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심’을 조금 다르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실제로 사람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자연계에서 살아가는 동안 수없이 많은 방식으로 선을 선택할 기회를 주시고, 리메인스를 보존하시며, 양심을 움직이시고, 진리를 만나게 하시며, 시험 가운데 힘을 주십니다. 그리고 사후에는 선을 사랑했지만 무지와 거짓과 외적인 결함이 남아 있는 사람을 놀라울 정도로 세심하게 준비시키십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인간의 자유를 무시하여 악을 사랑하는 사람을 고통으로 강제 개조하는 사랑은 아닙니다. 무한한 사랑이기 때문에 오히려 자유를 끝까지 보존하십니다.
여기에서 강사 목사님의 ‘이 땅에서 되지 않았으면 한 번 더’라는 표현과 스베덴보리의 자비 이해 사이에는 아주 중요한 차이가 생깁니다. 전자는 기회를 시간적으로 한 번 더 연장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설명하고, 후자는 주님께서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을 영원히 존중하시면서 그 선택 안에서 가능한 모든 선을 끝까지 이루시는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둘 다 하나님의 자비를 말하지만 자유를 이해하는 방식이 다릅니다.
강의는 이어 ‘요한계시록을 바르게 해석하려면 영계에 대한 지식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선언합니다. 계시록에는 영계에 관한 기록이 있지만 매우 부분적이므로, 영계의 구조와 환경을 모르면 계시록의 여러 장면을 충분히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번 강의를 ‘기초적 견해’, ‘심판대가 있고 영혼을 정화하는 영역’, ‘영계의 구체적인 실상’이라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 공부하겠다고 밝힙니다. 특히 두 번째, 곧 영혼을 정결하게 하는 중간 영역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강조합니다.
이 선언 역시 스베덴보리의 독자에게는 매우 흥미롭게 들립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요한계시록은 영계에서 실제로 본 형상들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한 가지가 더 필요합니다. 영계에 ‘무엇이 있는가’를 아는 것만으로 계시록의 속뜻이 열리는 것은 아닙니다. 영계에서 나타나는 모든 형상이 어떤 영적 상태와 ‘상응’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말과 용과 짐승, 해와 달, 별과 성, 강과 나무, 흰옷과 면류관은 단지 영계의 풍경을 사진처럼 기록한 것이 아니라 영적 실재가 상응을 통해 보이는 형상입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을 이해하려면 영계 지식이 필요하다’는 강의의 문장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이렇게 한 걸음 더 깊어질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이해하려면 영계의 질서와 상응을 알아야 한다.’ 영계 지식만 있고 상응이 없으면 계시록의 형상을 자연계 사물의 확대판처럼 이해할 위험이 있습니다. 반대로 상응을 알면 그 형상 하나하나가 인간의 사랑과 진리, 교회의 상태, 주님의 심판과 새 창조를 나타내는 살아 있는 말씀으로 열립니다.
강의는 이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를 크게 ‘물질계’와 ‘영계’로 구분합니다. 물질계에는 해와 달과 별, 지구와 산천초목, 육체를 가진 인간이 있고, 영계에는 하나님과 천사들, 죽은 인간의 영, 그리고 악한 영들이 살아간다고 설명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육체는 땅에 묻혀 소멸하지만 영혼은 영계에 들어가 계속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후 인간 이해는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가깝습니다. 죽음은 인간의 소멸이 아니라 자연적 육체를 벗는 과정이며, 사람은 사후에도 완전한 인간으로 생각하고 사랑하고 살아갑니다.
특히 강의는 영계를 ‘형체 없는 허공’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영계에도 자연계와 유사한 산천초목과 동식물, 여러 환경이 있으며, 천국에는 천국적인 평화와 아름다움이 있고 지옥에는 그 반대되는 어둡고 추악한 환경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다만 그것들은 자연계의 물질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와 매우 가까워 보입니다. 스베덴보리도 천국에서 집과 정원, 산과 강, 거리와 공동체를 묘사합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상응’이 결정적인 열쇠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의 아름다운 정원은 단순히 천사들이 쾌적하게 살도록 조성된 조경이 아닙니다. 그 정원은 그들의 지혜와 선한 애정에 상응하여 나타납니다. 집은 내적 상태에, 의복은 진리에, 빛은 지혜에, 열은 사랑에 상응합니다. 지옥의 추악한 환경도 하나님께서 악한 영을 괴롭히려고 일부러 만들어 놓은 고문 시설이 아니라 그들이 사랑하는 악과 거짓이 외적인 환경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영계는 내적인 것이 외적인 형상으로 드러나는 세계입니다.
이 원리를 알면 ‘영계의 구조’를 공부하는 목적도 달라집니다. 어디에 몇 층이 있고 어느 구역에 누가 들어가는지를 외우는 것보다, 왜 그러한 환경과 위치가 나타나는지를 묻게 됩니다. 그리고 그 질문은 결국 인간의 내면으로 돌아옵니다. ‘나는 어떤 천국 또는 어떤 지옥을 지금 내 안에 형성하고 있는가?’입니다. 영계의 장소는 사람의 사랑과 무관한 외부 주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3강의 첫머리에서 ‘익은 열매’와 ‘영계의 중간 영역’이 연결되는 이유도 더 분명해집니다. 강사 목사님에게 영계론은 죽은 뒤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채우는 부록이 아닙니다. ‘사람은 어떤 상태로 죽어야 하며, 아직 미완성된 성도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하시는가’라는 구원론적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그래서 영계의 구조 자체보다 ‘하나님의 백성을 끝까지 책임지시는 방식’을 설명하는 것이 더 깊은 관심입니다. 이 점을 알고 들으면 이후 등장하는 여러 영계 도표와 세부 설명도 단순한 초자연 지리학으로만 보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지금까지 알게 된 공용복 선생의 생애가 또 하나의 조용한 배경이 됩니다. 몸의 대부분이 자유롭지 않은 상태로 오래 살아간 사람에게 ‘육체를 벗은 뒤에도 인간은 살아 있으며, 영계에는 실제 삶이 있다’는 믿음은 단순한 신학의 한 장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체험과 교리의 모든 세부를 생애의 고난 때문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절박함을 이해한 뒤에야 체험과 해석을 차분히 구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3강의 해설에서는 특히 두 가지를 함께 붙들 필요가 있겠습니다. 하나는 ‘핵심진리’가 사후의 중간 영역을 통해 말하려는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이 땅에서 미완성되었다고 자기 백성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거룩함으로 이끄신다는 믿음입니다. 다른 하나는 스베덴보리가 자연계의 삶에 부여하는 결정적 의미입니다. 주님의 자비는 무한하지만 그 자비는 인간의 자유를 취소하지 않으며, 지상에서 형성된 지배적인 사랑을 사후에 고통으로 뒤집어 놓는 방식으로 역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둘을 대립적인 구호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질문을 더 깊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끝까지 책임지신다는 것은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가?’ ‘끝까지 사랑한다는 것은 인간의 선택을 무효로 만들 때까지 붙든다는 뜻인가, 아니면 인간이 참으로 자유로운 존재로 영원히 남도록 그의 자유를 끝까지 존중하면서 가능한 모든 구원의 길을 여신다는 뜻인가?’ 이 질문이 이후 3강 전체를 읽는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될 것입니다.
결국 3강 1부에서 가장 귀하게 남는 것은 ‘천국은 단순히 은혜의 캡슐을 씌워 들어가는 곳이 아니다’라는 강의의 진지한 문제의식입니다. 사람에게 실제 변화가 필요하고, 거룩함은 삶의 실재여야 하며,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실제로 천국의 생명에 맞는 사람으로 만들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도 이 요청을 약화시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구원은 반드시 거듭남이어야 한다고 더욱 강하게 말합니다.
그러나 그 거듭남을 어디에서, 어떻게, 무엇이 변하는 것으로 이해하느냐에서 차이가 시작됩니다. ‘핵심진리’는 지상에서 미완성된 성화의 과정을 사후 중간 영역까지 연장하고, 스베덴보리는 지상에서 형성된 지배적인 사랑이 사후에 드러나며 선한 사람에게 남은 이질적인 것들이 정화된다고 봅니다. 겉으로는 둘 다 ‘사후에 과정이 있다’고 말하지만 그 과정의 성격은 다릅니다.
이 차이를 분명히 붙들고 다음으로 넘어가면 이제 강의가 제시하는 ‘영계의 중간 영역’과 스베덴보리의 ‘영들의 세계’가 놀라울 정도로 비슷해 보이는 지점들을 하나씩 만날 수 있습니다. 동시에 ‘누가 그곳에 들어가는가’, ‘왜 그곳에 머무는가’, ‘거기에서 무엇이 변화될 수 있는가’를 살펴볼수록 두 체계의 가장 깊은 차이도 선명해질 것입니다. 3강 2부에서는 바로 그 ‘중간 영역’ 자체를 중심으로 들어가겠습니다.
3강2부
천국과 지옥 사이의 ‘중간 영역’ - 사후의 대기 장소인가, 인간의 참모습이 드러나는 세계인가
3강 2부에서 강사 목사님은 ‘영계의 구조’를 보다 구체적으로 펼쳐 보입니다. 큰 틀에서 보면 영계에는 천국과 지옥이 있고, 그 사이에 ‘중간 영역’이 존재합니다. 이 중간 영역은 단순히 죽은 사람들이 잠시 머무는 대기실이 아니라, 사후 인간의 상태가 드러나고 심판과 정결, 분리의 과정이 진행되는 매우 중요한 장소로 설명됩니다. 강사 목사님이 이번 강의에서 천국과 지옥 자체보다 오히려 이 ‘중간 영역’을 더 중요하게 다루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이 죽은 뒤 어디로 곧바로 들어가는가보다, 그 사람의 상태가 어떤 과정을 거쳐 드러나고 결정되는가가 더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은 스베덴보리의 ‘영들의 세계’와 매우 놀랍게 닮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천국과 지옥 사이에 하나의 중간 세계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사람이 육체를 벗으면 바로 최종 천국이나 최종 지옥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먼저 ‘영들의 세계’에 들어갑니다. 이곳은 천국도 아니고 지옥도 아니며, 사람이 자연계에서 형성해 온 실제 내적 상태가 점차 드러나는 곳입니다. 그래서 큰 구조만 놓고 보면 ‘핵심진리’의 중간 영역과 스베덴보리의 영들의 세계는 상당히 가까워 보입니다.
그러나 두 체계를 곧바로 같은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핵심진리’에서는 중간 영역이 상당 부분 ‘미완성된 성화를 사후에 계속하는 장소’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지상에서 충분히 연단받지 못한 성도는 이곳에서 나머지 정결을 받고, 그 과정을 통하여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상태가 된다고 봅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의 영들의 세계는 이미 지상에서 형성된 지배적인 사랑을 새롭게 바꾸는 장소가 아니라, 그 사랑이 가려짐 없이 드러나는 장소입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려면 ‘사후에 무엇이 변할 수 있는가’를 정확히 구별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사후에도 사람은 배울 수 있습니다. 잘못된 종교 관념을 가지고 있었던 선한 사람은 진리를 새롭게 배울 수 있고, 자연적인 성격과 습관 가운데 천국의 선과 맞지 않는 것들이 정리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악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사후의 고통과 훈련을 통하여 전혀 다른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과는 다릅니다. 사람의 근본적인 사랑의 방향은 자연계에서 형성되고, 사후에는 그 방향이 더욱 명료해집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영들의 세계는 매우 정확한 의미에서 ‘진실의 세계’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자연계에서는 사람의 속과 겉이 다를 수 있습니다. 속으로는 자기 명예와 이익을 사랑하면서도, 겉으로는 경건하고 친절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교회 직분이나 사회적 평판, 예절과 법 때문에 실제 내면과는 다른 모습을 유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후에는 그런 외적 가면이 점차 벗겨지고, 결국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사랑했는지가 드러납니다.
이 부분은 ‘핵심진리’가 강조해 온 ‘겉과 속의 일치’와 아주 깊은 접점을 가집니다. 지상에서부터 말하는 것과 사는 것, 신앙고백과 실제 성품, 외적인 경건과 속의 사랑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강조입니다. 왜냐하면 사후에는 어차피 겉과 속이 따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랫동안 같은 진리를 반복해서 듣고 삶에 새기려는 이 공동체의 훈련은, 단순히 지식을 축적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진리를 머리에만 두지 않고 실제 생명으로 만들려는 훈련이라면 말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대목에서 공용복 선생의 생애가 조용히 배경으로 작용합니다. 그의 제자들이 왜 ‘사는 그대로 말하고, 말하는 그대로 살라’는 식의 일치된 신앙을 그토록 중요하게 받아들였는지를 생각하면, 그 스승이 실제로 오랜 병상에서 보여 준 삶의 방식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생전 공용복 선생을 직접 기억하는 원로들에게 ‘핵심진리’의 문장이 단지 책의 문장이 아니라 육성처럼 들릴 수 있다는 점도 이런 해설의 온도를 달리하게 합니다. 다만 그것이 교리의 정확성을 자동으로 보증하지는 않으며, 삶의 진정성과 교리의 세부는 따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강의에서 중간 영역은 심판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심판’을 거대한 법정에 줄을 서서 판결을 받는 장면으로만 생각하면 충분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설명에 따르면 심판의 핵심은 ‘드러남’입니다.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사랑했는지가 드러나고, 그 사랑과 같은 공동체로 자연스럽게 이끌리는 것입니다. 선을 사랑하는 사람은 선한 영들과 함께 있을 때 자유롭고 평안하며, 악을 사랑하는 사람은 천국의 질서 안에서 불편함과 답답함을 느낍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천국이나 지옥에 임의적으로 배정하시는 것일까요?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을 선으로 이끄시지만, 사후에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따라 자기와 같은 곳으로 향합니다. 천국은 자기 사랑을 버리고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생명이 기쁨이 되는 곳이고, 지옥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지배적인 기쁨이 되는 곳입니다. 따라서 천국과 지옥은 단순히 ‘판결받아 보내지는 곳’이라기보다 자신이 형성한 사랑과 맞는 세계입니다.
이 점에서 ‘핵심진리’가 말하는 중간 영역도 한 단계 더 내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느 층에서 얼마 동안 연단받는가’보다 ‘그 사람의 실제 사랑이 무엇이었는가’가 더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예를 들어 평생 교회생활을 했지만 실제로는 자기 명예와 사람을 지배하는 기쁨을 가장 사랑했다면, 사후에 교회 경력 자체가 그 사람을 천국 사람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반대로 교리 지식은 부족했지만 양심에 따라 선하게 살고, 이웃의 유익을 진심으로 바랐던 사람이라면 그의 내면에는 천국적 사랑이 형성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천국은 상태가 같아야 들어갈 수 있는 나라’라는 말과 연결되는 지점입니다.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은 외적인 허가를 받아 문을 통과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사랑과 생명이 천국의 사랑과 질서에 맞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사후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종교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가’보다 ‘어떤 사랑이 내 생명의 중심이었는가’입니다.
이런 관점은 사후의 정화를 이해하는 데도 매우 중요합니다. 선한 사람도 죽을 때 완벽하지 않습니다. 잘못 배운 교리도 있고, 성격의 거친 부분도 있으며, 자연적인 습관과 편견도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근본 사랑이 주님과 이웃을 향하고 있다면 그런 외적인 결함은 사후에 정리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것이 ‘사후 준비’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악한 사람이 죽은 뒤 고통을 충분히 받으면 선한 사람으로 바뀐다고 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고통은 사랑을 강제로 바꿀 수 없습니다. 형벌이 두려워 악을 억제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곧 선을 사랑하는 마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시기 때문에 사람을 억지로 천국 사람이 되도록 만들지 않으십니다. 천국의 사랑은 자유롭게 받아들여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핵심진리’의 사후 연단론과 스베덴보리의 사후 정화론이 가장 분명하게 갈라집니다. ‘핵심진리’는 ‘이 땅에서 충분히 되지 못했다면 사후에도 더 변화될 수 있다’는 쪽에 무게를 둡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땅에서 형성된 사랑의 방향이 사후에 드러나고, 그 방향과 맞지 않는 외적인 것들이 정리된다’는 쪽에 무게를 둡니다. 둘 다 하나님의 자비를 말하지만, 자비가 인간의 자유와 어떤 관계를 맺는지를 다르게 이해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말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다시 표현하면, ‘주님은 자연계와 영계에서 인간에게 가능한 모든 선의 길을 끝까지 여시지만,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면서까지 그 사랑을 바꾸지는 않으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자비의 제한이 아니라 자비의 더 깊은 형태입니다. 인간을 참으로 인간답게 사랑한다는 것은 그를 자유로운 존재로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강의는 또한 중간 영역을 상층부·중간층·하층부 등으로 세분하여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구체적인 구조는 회중에게 사후 세계를 매우 실제적인 세계로 느끼게 합니다. ‘죽으면 막연한 영혼 상태가 된다’가 아니라, 실제로 장소가 있고 과정이 있으며, 이동과 분리와 준비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영계를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영들은 서로 만나고 대화하며, 집과 거리와 공동체가 있고, 천국과 지옥 사이에는 실제 중간 세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영계의 ‘공간’을 자연계의 공간처럼 이해하면 곧 어려움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영계의 공간은 본질적으로 ‘상태의 외관’입니다. 비슷한 사랑을 가진 영들은 서로 가까이 나타나고, 서로 다른 사랑을 가진 영들은 멀어져 보입니다. 위와 아래, 가까움과 멀어짐도 내적 상태의 차이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상층부’와 ‘하층부’를 단순히 지하 몇 층, 지상 몇 층처럼 물리적 위치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높은 곳’은 더 내적인 사랑과 지혜를, ‘낮은 곳’은 더 외적이거나 악한 상태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높이 자체가 영적 우월성을 만든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의 상태가 그렇게 보이게 하는 것입니다. 영계에서 장소는 상태를 따라옵니다. 이 점을 알면 중간 영역의 여러 층위도 ‘어디에 있느냐’보다 ‘어떤 상태에 있느냐’로 읽게 됩니다.
이것은 천국의 세 층을 이해할 때도 매우 중요합니다. 가장 내적인 천적 천국, 중간의 영적 천국, 가장 바깥의 자연적 천국은 단순히 상급이 많은 사람부터 차례로 배치된 계급표가 아닙니다. 각각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른 영적 상태입니다. 이런 차이는 다음 부분에서 더 본격적으로 다루게 되겠지만, 중간 영역을 이해할 때부터 이미 ‘공간보다 상태’라는 원리를 붙들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원리는 지옥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더 깊은 지옥은 단순히 더 무서운 형벌이 있는 곳이라기보다, 자기 사랑과 악이 더 깊이 지배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사람은 악한 사랑이 더 내적이고 더 강하게 자기 생명과 결합될수록 더 깊은 지옥과 결합합니다. 그러므로 영계의 지도를 보는 목적은 ‘나는 사후 어느 층으로 갈까’를 계산하는 데 있지 않고, ‘내 안의 사랑은 지금 어느 방향으로 깊어지고 있는가’를 보는 데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영계의 중간 영역’을 공부하는 일은 사실 사후의 호기심보다 현재의 삶을 위한 공부가 됩니다. 사람이 사후에 자기 참모습을 숨길 수 없다면, 지금부터 겉과 속의 간격을 줄여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도 정직한가, 칭찬이 없어도 선을 행할 수 있는가, 교회에서 하는 말과 가정에서의 태도가 같은가,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이용하고 있지 않은가를 살펴보게 됩니다.
이 지점은 공용복 선생의 제자 공동체를 생각할 때도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그분들을 가까이 접하면서 ‘마이크 앞에서 하는 말 그대로 살고, 사는 그대로 마이크 앞에서 말한다’는 인상을 받으셨다는 사실은 단순한 인품 평가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만일 정말 그렇게 겉과 속의 일치를 오래 훈련해 왔다면, 그것은 사후에 겉과 속이 하나가 되는 영계의 원리와 상당히 깊이 맞닿아 있습니다. 교리 체계가 스베덴보리와 다르더라도 실제 삶에서 이런 정직성과 일치가 나타난다면 그것은 충분히 귀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균형 하나를 얻습니다. ‘정확한 영계 지식을 가지고 있는가’와 ‘천국적 사랑을 실제로 살고 있는가’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영계 구조를 아주 정확하게 설명하면서도 자기 사랑이 강할 수 있고, 반대로 영계에 관한 지식은 부족하지만 주님과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을 결정하는 것은 후자입니다. 바른 지식은 중요하지만 생명을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3강의 여러 영계 도표를 살펴볼 때도 ‘이 지도가 정확한가’만 묻지 않겠습니다. 물론 정확성은 살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가르침이 사람을 어떤 삶으로 이끄는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만일 중간 영역에 대한 가르침이 사람에게 ‘죽은 뒤에도 기회가 있으니 지금은 괜찮다’는 안일함을 준다면 문제가 됩니다. 반대로 ‘죽은 뒤에는 겉과 속이 모두 드러나므로 지금부터 실제로 진실하게 살자’는 촉구가 된다면 귀한 기능을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 공동체의 흐름을 보면 후자의 의도가 훨씬 강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후 연단을 인정하면서도 계속해서 ‘이 땅에서 익은 열매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지금의 순종과 정결을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그러므로 사후 중간 영역론을 단순한 ‘두 번째 기회 교리’로만 정리하면 이 가르침의 실제 영성적 긴장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그 긴장을 더 단단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지금의 삶이 중요한 이유를 ‘사후 연단을 덜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이 자연계에서 영원한 지배적 사랑이 형성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영원을 결정하는 사랑이 자유 속에서 형성되는 특별한 세계입니다. 그래서 지금의 선택은 단지 나중의 훈련량을 줄이는 선택이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는지를 결정하는 선택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신앙생활을 더욱 진지하게 만들면서도 공포로 몰아가지 않습니다. 주님은 사람의 작은 선한 선택 하나도 사용하시고, 아직 부족하지만 선을 사랑하려는 마음을 붙드시며, 잘못된 관념을 나중에라도 가르쳐 바로잡으실 수 있습니다. 완전하지 않다고 버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어느 방향을 사랑하고 있는가입니다.
이 원리를 알면 ‘나는 아직 너무 부족하다’는 두려움도 조금 달라질 수 있습니다.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죽기 전에 모든 자연적 결함을 완벽하게 제거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선한 사람에게도 무지와 결점과 자연적 습관은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그가 그 악을 사랑하고 정당화하는가, 아니면 그것을 악으로 보고 버리고 싶어 하는가, 그리고 생명의 근본 방향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입니다.
이것은 ‘익은 열매’라는 표현을 더욱 건강하게 이해하도록 도와줍니다. 익은 열매가 ‘완전무결한 사람’을 뜻한다면 누구도 쉽게 자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지배적인 방향이 된 사람’이라고 이해하면 의미가 달라집니다. 아직 작은 흠은 있을 수 있지만 그 열매의 본질과 방향은 이미 분명합니다. 주님께서 사후에 제거하시는 것은 그 열매 자체를 다른 종류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붙어 있는 이질적인 것을 벗겨 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핵심진리’가 사랑하는 ‘익은 열매’라는 표현과 스베덴보리의 ‘지배적인 사랑’ 사이에도 하나의 좋은 다리가 생깁니다. 익음의 핵심을 ‘죄성의 흔적이 전혀 없음’보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이 생명의 중심이 됨’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 해석은 ‘핵심진리’의 실제 성화 의지를 살리면서도 영적 완벽주의와 자기등급 판정을 줄여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3강 2부의 핵심은 ‘중간 영역이 있느냐 없느냐’보다 더 깊은 질문입니다. ‘사후에 무엇이 드러나는가, 무엇이 정리되는가, 무엇은 이미 지상에서 형성되어 있어야 하는가’입니다. 이 세 질문을 구별하면 ‘핵심진리’와 스베덴보리가 어디에서 만나고 어디에서 갈라지는지가 매우 선명해집니다.
둘은 모두 죽음 이후에도 사람이 의식적이고 실제적인 인간으로 살아가며, 천국과 지옥 사이에 사후 과정이 있다는 점에서 만납니다. 선한 사람에게 준비와 정화가 있다는 점에서도 만납니다. 그러나 ‘핵심진리’는 그 과정을 지상에서 완성되지 못한 성화의 계속으로 폭넓게 이해하고, 스베덴보리는 지상에서 이미 형성된 지배적인 사랑이 드러나고 정돈되는 과정으로 봅니다.
이 차이는 앞으로 천국의 세 층과 지옥의 세 층, 심판대, 상층부와 하층부, 사후 제1 상태와 제2 상태를 살펴볼수록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특히 다음 3강 3부에서는 ‘핵심진리’가 천국과 지옥을 각각 여러 층으로 구분하고 그것을 ‘상급의 차등’과 연결하는 방식과, 스베덴보리가 세 천국을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이는 서로 다른 내적 정도’로 설명하는 방식을 나란히 살펴보겠습니다. 거기에서 ‘높은 천국’이 과연 더 많은 공로를 쌓은 사람이 올라가는 곳인지, 아니면 전혀 다른 의미의 ‘높음’인지가 중요한 주제가 될 것입니다.
3강3부
천국의 세 층과 지옥의 세 층 - 상급의 서열인가, 사랑의 서로 다른 내적 상태인가
이번 부분에서 강사 목사님은 영계의 구조를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하면서 천국이 세 층으로 구분된다고 말합니다. 강의에 따르면 주님에 대한 사랑이 가장 뜨겁고 강렬한 성도들은 3층 천국에 들어가고, 이웃 사랑이 더 강한 성도들은 2층 천국에 들어가며, 1층 천국은 그보다 낮은 상태의 성도들이 사는 곳으로 설명됩니다. 1층 안에서도 다시 주님 사랑이 강한 지역과 이웃 사랑이 강한 지역으로 나뉜다고 합니다. 또한 주님에 대한 사랑이 강할수록 하나님의 보좌에 더 가까워지고, 그에 따라 빛과 환경과 상급에도 차이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에서 먼저 눈여겨볼 것은 강의가 천국을 ‘사랑으로 충만한 나라’라고 규정한다는 점입니다. 천국을 단순히 고통이 없는 곳이나 좋은 환경을 누리는 곳으로만 설명하지 않고, 그 본질을 사랑과 연결합니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천국의 중심적인 두 사랑으로 본다는 점도 매우 중요합니다. 특히 3층 천국은 주님 사랑이 뜨거운 성도들이 사는 곳이고, 2층 천국은 이웃 사랑이 더 강한 성도들이 사는 곳이라고 설명하는데, 이 대목은 스베덴보리의 천국론을 아는 사람에게 상당히 익숙하게 들립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천국은 하나의 평면적인 세계가 아니라 세 천국으로 구분됩니다. 가장 내적인 천국은 천적 천국, 그 아래는 영적 천국, 가장 바깥은 자연적 천국입니다. 천적 천국의 중심 사랑은 주님 사랑이고, 영적 천국의 중심은 이웃 사랑, 곧 체어리티입니다. 따라서 ‘주님 사랑-이웃 사랑-세 천국’이라는 구조 자체만 보면 ‘핵심진리’와 스베덴보리 사이에는 매우 흥미로운 접점이 있습니다. 이 부분은 단순한 우연적 유사성으로 보기 어려울 만큼 가까운 표현들이 이어집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곧바로 ‘같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두 체계가 천국의 세 층을 나누는 기준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이기 때문입니다. 강의에서는 주님을 얼마나 뜨겁게 사랑했는가, 얼마나 주님의 인격을 닮았는가, 얼마나 선한 행실을 이루었는가에 따라 보좌와의 거리와 상급, 천국의 층위가 달라진다는 설명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즉 천국의 세 층이 어느 정도 ‘성화의 정도’와 ‘상급의 차등’으로 읽힙니다.
이 관점에는 분명 귀한 의도가 있습니다. 지상에서의 삶이 사후와 실제로 연결되어 있고, 모든 사람이 똑같은 상태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살았는가, 무엇을 사랑했는가, 실제로 어떤 선의 열매를 맺었는가가 사후 상태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신앙을 단순한 자격 취득으로 만들지 않고 실제 삶의 책임을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충분히 의미가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에게 세 천국은 ‘누가 더 많이 잘했는가’에 따라 차등 지급되는 상급의 계급표가 아닙니다. 가장 내적인 천적 천국과 영적 천국, 자연적 천국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내적 정도’가 서로 다른 상태입니다. 천적 천사는 사랑에서 곧바로 진리를 지각하고, 영적 천사는 진리를 통해 선을 받아들이며, 자연적 천사는 더 외적인 방식으로 선과 진리를 살아냅니다. 따라서 천국의 차이는 양적인 공로의 많고 적음보다 사랑과 지각의 ‘질적인 형태’에 더 가깝습니다.
이 차이는 ‘높다’와 ‘낮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강의에서는 주님의 보좌에 가까울수록 더 높은 천국이고, 더 밝으며, 더 큰 사랑과 상급을 누리는 것으로 설명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천국의 영들은 위와 아래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높이는 자연계의 물리적 고도나 영적 계급의 우월성을 뜻하지 않습니다. 영계의 공간은 상태에 따라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더 내적인 사랑과 지혜의 상태가 ‘높음’으로 보이고, 더 외적인 상태가 ‘낮음’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3층 천국의 천사가 2층 천국의 천사보다 ‘더 가치 있는 존재’라고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각 천사는 자신에게 맞는 천국적 상태 안에서 완전한 기쁨을 누립니다. 2층 천사가 3층 천국을 부러워하지도 않습니다. 그곳의 사랑과 지각 방식이 자신의 상태와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몸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눈이 손보다 더 높이 있다고 해서 손이 열등한 것이 아니고, 심장이 발보다 중요하다고 해서 발이 불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부분이 서로 다른 쓰임을 가지고 하나의 몸을 이룹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천국을 ‘가장 큰 사람’(Maximus Homo)으로 설명하는 이유와도 연결됩니다. 천국 전체는 하나의 인간 형상을 이루고, 각 공동체는 그 안의 서로 다른 기관과 기능에 상응합니다. 천사의 다양성은 경쟁적 서열이 아니라 서로 다른 쓰임의 질서입니다. 따라서 천국의 세 층 역시 ‘상급이 큰 사람과 작은 사람’이라는 관점보다 주님의 사랑과 지혜가 서로 다른 정도와 방식으로 받아들여지는 하나의 완전한 질서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강의에서 마리아와 마르다를 예로 들며 마리아는 주님 사랑이 더 강하고, 마르다는 이웃 사랑이 더 강하다고 설명하는 부분도 흥미롭습니다. 마리아는 주님 앞에 앉아 말씀을 듣는 것을 더 귀하게 여겼고, 마르다는 손님을 대접하는 일에 더 마음을 썼다는 차이를 천국의 사랑 유형과 연결합니다. 이 예는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쉽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조금 더 조심스럽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서로 경쟁하는 두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의 뜻이 이웃의 선을 사랑하는 것임을 알기 때문에 반드시 이웃 사랑으로 나아갑니다. 반대로 참된 이웃 사랑은 자기 인간적인 친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받아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주님 사랑과 연결됩니다. 두 사랑은 서로 떨어진 두 길이 아니라 한 신적 사랑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주님 사랑, 마르다는 이웃 사랑’이라는 구분을 절대적인 영적 등급으로 읽기보다, 서로 다른 애정과 쓰임의 강조점으로 읽는 것이 좋겠습니다. 말씀을 듣는 것과 섬기는 것,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과 그것을 쓰임으로 나타내는 것은 모두 필요합니다.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배제하면 온전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사랑하면서 실제 이웃을 섬기지 않는다면 사랑은 아직 삶이 되지 않은 것이고, 이웃을 섬기면서 그 사랑의 근원을 주님에게서 받지 않는다면 쉽게 자기 공로나 인간적 인정으로 흐를 수 있습니다.
강의는 이어 천국 전체에 하나님의 빛과 생명수가 흘러넘친다고 설명합니다. 생명수는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을 의미하며, 그 빛과 생명수가 3층과 2층을 거쳐 아래로 흘러내리면서 각 영역의 사랑의 성격과 상태를 이루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이 대목 역시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가까운 이미지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의 빛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적 진리이고, 천국의 열은 신적 사랑입니다. 천사들이 밝은 정도도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얼마나 받아들이는가와 관련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그 빛은 어떤 물질적 에너지처럼 위층을 통과하여 아래층으로 약해지면서 내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천국의 천사는 주님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생명과 사랑과 진리를 받으며, 동시에 천국 전체의 질서를 통해 간접적으로도 받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주님의 생명이 특정 계층의 소유물이 아니라 모든 천국에 충만하게 임한다는 것입니다. 강의 역시 ‘일부에만 빛과 생명수가 비치는 것이 아니라 천국 전체에 질서 있게 흘러간다’고 강조하는데, 이 부분은 좋은 균형입니다.
특히 강의는 3층 성도에게 하나님이 태양처럼 보이고, 2층 성도에게는 달처럼 보인다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영계론에는 이와 매우 흥미롭게 닿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는 천적 천국의 천사들에게 주님이 해로 나타나시고, 영적 천국의 천사들에게는 달처럼 나타나신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해는 주님의 신적 사랑을, 달은 신적 진리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 부분은 두 체계 사이의 접점 가운데서도 매우 눈에 띄는 대목입니다.
다만 그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실제로 3층 천국에서는 하나의 태양이 되고, 2층 천국에서는 물리적으로 다른 달이 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을 받아들이는 천사들의 상태에 따라 그분의 임재가 다르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천적 천사들은 신적 사랑을 더 직접적으로 받아들이므로 주님을 해로 보고, 영적 천사들은 신적 진리를 중심으로 받아들이므로 달처럼 봅니다. 외적 형상은 내적 상태의 상응입니다.
이 점을 붙들면 ‘보좌와의 거리’도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어떤 천사에게는 실제로 더 가까이 계시고 어떤 천사에게는 멀리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가까이 계십니다. 다만 각자가 그분의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정도에 따라 가까움과 멀어짐이 나타납니다. 따라서 주님과의 거리는 공간의 거리가 아니라 사랑의 거리입니다.
이 원리는 천국의 ‘상급’에도 매우 중요한 빛을 줍니다. 강의는 지상에서의 선한 행실과 주님 사랑이 사후의 상급과 연결된다고 강조합니다. 이것은 성경적으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의 참된 상급은 외부에서 지급되는 보너스나 더 좋은 자리와 권세가 아닙니다. 선을 사랑하고 행하는 데서 오는 기쁨 자체가 상급입니다. 천사가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고 그 사람의 행복을 보면서 기뻐하는 그 기쁨이 바로 천국적 상급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차이입니다. ‘내가 선하게 살았으니 더 높은 천국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오히려 자기 공로와 연결될 수 있습니다. 참된 천국적 선은 보상을 바라보고 행하지 않습니다. 선 자체를 사랑하기 때문에 선을 행합니다. 그 결과 사후에는 그 사랑이 더 자유롭게 펼쳐지고, 더 큰 쓰임을 수행하면서 더 깊은 기쁨을 누립니다. 따라서 상급은 선행 뒤에 덧붙는 무엇이라기보다 선한 사랑 자체 안에 이미 들어 있습니다.
이 관점은 공용복 선생님의 생애를 생각할 때도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거의 전신의 기능이 제한된 삶이라면 외적으로 많은 활동과 업적을 쌓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만일 천국의 상급이 외적 활동량과 성취의 크기에 비례한다면 그런 사람은 매우 불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보시는 것이 그 행동의 외적 규모보다 그 안의 사랑과 의도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병상에 누워 기도하고 한 사람의 영혼을 위해 선을 바라는 작은 내적 행위도, 그 안의 사랑이 깊다면 영적으로 매우 큰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상급의 차등’을 이해할 때도 외적 업적의 차등보다 ‘사랑의 수용 능력의 차이’라고 보는 편이 좋겠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받아들인 사랑만큼 천국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컵과 항아리는 모두 가득 찰 수 있지만 담는 양은 다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느 하나가 덜 행복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각자의 상태 안에서 충만합니다. 천국에서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가져야 행복하다는 비교의 욕망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강의에서 ‘1층 성도들은 2층 성도보다 훨씬 부족하다’는 표현은 그래서 약간 보완해서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더 외적인 정도에 속한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열등하다’는 가치 판단으로 이해하면 천국의 질서를 너무 자연계의 경쟁 구조처럼 읽게 됩니다. 자연적 천국의 천사도 자기 상태에서는 완전한 천국의 기쁨을 누립니다. 그는 ‘나는 왜 3층 천사가 아니지?’라고 불평하지 않습니다. 그런 비교 자체가 천국적 사랑과 맞지 않습니다.
이 지점은 이 공동체의 영성에 대해서도 하나의 부드러운 경계가 될 수 있습니다. ‘이긴 자’, ‘처음 익은 열매’, ‘3층 천국’, ‘주님 보좌에 가까운 성도’ 같은 언어가 사람을 더 깊은 성화로 부르는 자극이 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 영적 등급을 측정하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언어가 되면 천국의 본질과 오히려 멀어질 위험이 있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나는 몇 층에 갈 것인가’보다 ‘나는 오늘 주님과 이웃에게 어떤 쓰임이 될 수 있는가’를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접한 시흥영성수련원의 실제 모습을 생각하면 이 점이 더욱 중요하게 느껴집니다. 이분들의 신앙에서 귀하게 보이는 것은 특별한 천국 등급을 주장하는 말보다, 오랜 세월 같은 가르침을 붙들면서 실제 삶과 말의 일치를 중요하게 여겨 왔다는 점입니다. 만일 그 열매가 실제 겸손과 정직, 섬김으로 나타난다면, 그것은 어떤 천국 층위를 입으로 설명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천국적 표지가 될 수 있습니다.
이제 지옥의 세 층으로 내려가면 ‘핵심진리’의 상벌 구조가 더 분명해집니다. 강의는 지옥도 천국과 마찬가지로 여러 층으로 나뉘고, 악을 더 깊이 행한 사람일수록 더 깊은 지옥으로 내려가 더 큰 형벌을 받는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악령의 도구가 된 거짓 선지자나 이단의 지도자처럼 다른 사람의 영혼을 해친 사람에게 더 무거운 책임이 있다고 보는 경향이 강합니다.
이 문제의식 자체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속이고 지배하여 그들의 삶과 신앙을 파괴한 악은 개인적인 약점과는 성격이 다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악에는 깊이와 종류가 있고, 악한 사랑이 더 내적으로 자기 생명과 결합될수록 더 깊은 지옥과 연결됩니다. 특히 종교와 진리를 이용하여 자기 권력과 명예를 추구하는 악은 매우 위험한 것으로 다뤄집니다.
그러나 지옥의 형벌을 ‘하나님께서 더 큰 죄를 지은 사람에게 더 강한 고통을 배정하신다’는 보복적 구조로만 이해하면 스베덴보리와는 달라집니다. 주님에게서는 형벌하려는 분노가 나오지 않습니다. 악한 영들은 자기 사랑과 지배욕에 따라 서로를 해치려 하고, 그 악이 통제되지 않으면 지옥 자체가 유지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형벌은 악을 억제하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결과로 나타납니다. 주님의 목적은 복수가 아니라 더 큰 악을 막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옥의 ‘깊이’도 형벌 강도의 등급표보다 악한 사랑의 내적 깊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어떤 사람이 외적으로 거친 악을 행했어도 그 안에 무지와 충동성이 많았을 수 있고, 반대로 외적으로 품위 있는 모습 속에서 냉정하게 다른 사람을 조종하고 파괴하는 악이 더 깊이 자리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만이 그 사람의 전체 의도와 자유의 정도를 아십니다. 그래서 인간이 다른 사람의 영적 지옥 ‘등급’을 쉽게 판정해서는 안 됩니다.
이 점에서 ‘행한 대로 갚으신다’는 말씀도 더 깊어집니다. 단순히 행동의 수를 세어 상과 벌을 배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반복해서 사랑하고 행한 것이 결국 자기 생명의 형태가 된다는 뜻입니다. 악을 반복하고 정당화하면 악은 점점 자기 사랑과 결합되고, 선을 반복하고 주님께 돌리면 선은 점점 새로운 의지의 생명이 됩니다. 사후에는 그 삶의 방향이 온전히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천국과 지옥의 층위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는 ‘상급과 형벌’보다 ‘사랑’입니다. 천국의 높이는 얼마나 많은 종교적 업적을 쌓았는가보다 사랑이 얼마나 내적으로 주님과 결합되어 있는가와 관계되고, 지옥의 깊이는 하나님이 얼마나 강하게 벌하시는가보다 자기 사랑과 악이 얼마나 깊이 생명을 지배하게 되었는가와 관계됩니다.
그리고 이 관점으로 보면 강의가 말하는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구분도 경쟁적 서열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천적 천국과 영적 천국은 서로 다른 사랑의 질서이지만 둘 다 주님에게서 옵니다. 주님 사랑은 이웃 사랑을 낳고, 이웃 사랑은 주님께 대한 사랑을 실제 쓰임으로 나타냅니다. 하나는 다른 하나의 경쟁자가 아닙니다. 천국 전체는 두 사랑이 완전한 질서 안에서 서로 결합된 하나의 생명입니다.
그래서 3강 3부에서 가장 귀하게 붙들 수 있는 것은 ‘천국은 사랑의 나라’라는 강의의 중심 직관입니다. 그 말을 한 걸음 더 깊게 하면 ‘천국의 층위는 사랑의 공로 서열이 아니라 사랑을 받아들이는 서로 다른 내적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상급’은 외부에서 지급되는 보상이 아니라 그 사랑 자체에서 오는 기쁨이며, 주님과의 ‘가까움’은 공간의 거리가 아니라 사랑의 상태입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나는 몇 층 천국에 갈까’라는 질문도 자연스럽게 다른 질문으로 바뀝니다. ‘나는 지금 어떤 사랑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실제 이웃의 선을 무시하고 있는가, 이웃을 돕는다고 하면서 자기 인정과 공로를 더 사랑하고 있는가, 아니면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이 실제 쓰임으로 흘러가고 있는가를 묻게 됩니다. 이 질문은 천국의 구조를 지식으로 아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런 기준으로 공용복 선생님과 그 제자들의 삶을 볼 때도 더 공정해집니다. ‘핵심진리’의 천국 구조가 스베덴보리와 얼마나 정확히 일치하는가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가르침을 수십 년 붙들어 온 결과 그들의 삶에서 실제로 어떤 사랑이 나타나고 있는지를 함께 보는 것입니다. 교리의 차이는 차이대로 분명히 살피되, 겉과 속의 일치와 실제 섬김이라는 선한 열매가 있다면 그것 역시 주님으로부터 오는 귀한 것을 인정해야겠습니다.
다음 3강 4부에서는 이제 천국과 지옥 사이의 ‘중간 영역’을 더 세밀하게 들어가겠습니다. 특히 강의가 중간 영역을 상층부·중간층·하층부로 나누고, 죽은 사람이 처음 들어가는 ‘중간층’, 이후 선한 영과 악한 영이 각각 상층부와 하층부로 분리되는 과정, 그리고 강의가 직접 스베덴보리의 ‘사후 제1 상태’와 ‘제2 상태’를 가져와 설명하는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바로 그곳에서 ‘핵심진리’가 스베덴보리의 사후 상태론을 실제로 얼마나 받아들였는지와, 동시에 그것을 자기 고유의 ‘연단’ 체계 안에서 어떻게 다르게 재구성했는지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3강4부
중간 영역의 상층부·중간층·하층부 - 사후의 ‘연단’과 스베덴보리의 ‘제1·제2 상태’는 같은 것인가
이제 3강은 ‘영계의 구조와 실상’ 가운데 강사 목사님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 부분으로 들어갑니다. 천국이 어떻고 지옥이 어떻다는 일반적인 설명보다, 그 사이에 있는 ‘중간 영역’에서 죽은 사람에게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밝히는 것이 이번 강의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강의는 이 중간 영역을 ‘상층부-중간층-하층부’로 구분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위와 아래는 ‘상층부’, ‘하층부’라고 부르면서 가운데는 ‘중간부’가 아니라 ‘중간층’이라고 부른다는 점입니다. 강사 목사님은 이것도 그냥 붙인 명칭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상층부와 하층부는 범위가 상당히 넓은 영역인 반면, 그 사이의 중간층은 상대적으로 좁은 일부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입니다.
이 설명 자체에서 먼저 느껴지는 것은 ‘핵심진리’가 영계를 매우 구체적인 질서를 가진 실제 세계로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죽은 사람은 막연한 영혼 상태로 떠돌다가 어느 날 천국이나 지옥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처음 도착하는 영역이 있고, 이후 상태에 따라 이동하는 방향이 있으며, 그 과정마다 일정한 역할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계를 단지 상징적으로만 생각하는 신앙과 상당히 다릅니다. ‘핵심진리’의 영계는 실제 생활세계이고, 인간은 사후에도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며, 그 생명에 맞는 과정과 환경을 경험합니다.
강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죽은 사람이 처음부터 상층부나 하층부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우선 ‘중간층’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일정한 과정 가운데 사람의 상태가 드러나면서, 선에 속한 사람들은 상층부 방향으로, 악에 속한 사람들은 하층부 방향으로 갈라집니다. 강사 목사님은 이를 ‘물과 기름처럼 갈라진다’고 표현합니다. 평소 악을 행하면서 그것을 좋아한 사람과 선을 좋아한 사람이 사후에는 더 이상 같은 상태에 머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놀랍게도 강사 목사님은 스베덴보리의 이름을 직접 언급합니다. 중간층을 스베덴보리가 ‘사후 제1 상태’라고 했으며, 죽은 사람이 처음 들어가 경험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합니다. 이어 선과 악이 분리되어 상층부와 하층부로 갈라지는 상태를 ‘사후 제2 상태’와 연결합니다.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대목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핵심진리’와 스베덴보리의 영계론 사이에서 발견한 유사성이 단순히 외부 관찰자의 비교만은 아니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이 강의에서는 스베덴보리의 사후 상태론을 알고 있으며, 그것을 자신의 영계 구조를 설명하는 자료로 직접 사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두 체계가 비슷하다’고만 말할 것이 아니라 ‘스베덴보리의 어떤 개념이 이 체계 안으로 들어왔고, 들어온 뒤 어떻게 달라졌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아주 흥미로운 일이 일어납니다. 외형적 구조는 상당히 비슷한데, 그 구조를 설명하는 구원론적 의미는 점점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사후의 첫 번째 상태는 ‘겉 사람의 상태’입니다. 사람이 육체를 벗었다고 해서 곧바로 지상에서의 모든 모습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지상에서 사용하던 말투와 습관, 기억, 사고방식, 사회적 태도가 상당 부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죽은 사람은 자신이 여전히 이전과 같은 사람이라고 느끼고, 처음에는 자기가 죽었다는 사실조차 쉽게 깨닫지 못할 수 있습니다. 다른 영들을 만나 대화하고, 주변 환경도 너무나 실제적이어서 자연계 생활의 연장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바로 이 상태에서는 겉으로 선해 보이는 사람과 실제로 선한 사람을 즉시 구별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자연계에서 형성된 외적인 인격이 아직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평생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경건한 사람으로 살았던 이는 사후에도 처음에는 비슷하게 말하고 행동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내적으로는 선하지만 외적인 성격이나 교육 때문에 거칠었던 사람도 처음에는 그 모습이 상당 부분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제1 상태는 아직 그 사람의 영원한 상태가 최종적으로 드러난 때가 아닙니다.
그러다가 겉 사람이 점차 벗겨지고 속사람이 자유롭게 활동하는 ‘제2 상태’로 들어갑니다. 이때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사랑했는지가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지상에서는 사회적 체면 때문에 친절했지만 속으로는 자기 명예와 지배를 사랑했던 사람이라면 그 외적 친절이 더 이상 오래 유지되지 않습니다. 반대로 지상에서는 여러 자연적 결함이 있었지만 속에서는 주님과 이웃을 사랑했던 사람이라면 그의 내적인 선이 더 자유롭게 드러납니다. 사후에는 결국 겉과 속이 하나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핵심진리’의 ‘물과 기름처럼 갈라진다’는 설명은 스베덴보리의 제2 상태와 매우 깊게 닿아 있습니다.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누군가의 자의적인 명령 때문에 억지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내적 사랑이 달라 함께 있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지상에서는 같은 교회에 다녔고, 같은 교리를 믿었고, 같은 직분을 가졌어도 사후에는 실제 사랑이 다르면 멀어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지상에서는 전혀 다른 문화와 종교 안에서 살았어도 선을 사랑하는 상태가 같다면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영계에서 ‘공간’이 왜 상태에 따라 달라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자연계에서는 사람의 내면이 달라도 같은 방에 앉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계에서는 비슷한 사랑을 가진 존재들이 가까이 모이고 서로 반대되는 사랑을 가진 존재들은 멀어집니다. 그래서 상층부로 ‘올라간다’, 하층부로 ‘내려간다’는 것도 본질적으로는 물리적인 엘리베이터 이동이 아니라 상태에 따른 분리입니다.
이 원리를 알면 강의의 중간층·상층부·하층부를 조금 다르게 볼 수 있습니다. ‘중간층은 사후 첫 번째 대기실, 상층부는 좋은 사람 훈련장, 하층부는 나쁜 사람 대기실’이라는 자연적인 지도에만 머물지 않고, 처음에는 아직 외적인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시간이 지나며 자기 실제 내적 상태에 따라 각각 선과 악의 방향으로 이동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는 ‘핵심진리’와 스베덴보리의 설명이 상당히 가까워집니다.
그런데 이제 상층부의 기능을 설명하기 시작하면 차이가 다시 커집니다. ‘핵심진리’에서는 중간 영역 상층부가 지상에서 연단을 충분히 마치지 못한 성도들이 ‘나머지 연단’을 받는 곳입니다. 강의는 매우 명확하게 이곳에서 연단을 받는 목적이 ‘정결케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점을 하나 덧붙입니다. 사후 중간 영역 상층부에서 아무리 연단을 받아도 ‘상급’은 없다는 것입니다. 상급은 육체를 가지고 지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만 받을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지금 말씀을 듣고 인내하며 순종하는 시간이 바로 ‘은혜의 시간’, ‘상급을 쌓는 기간’이라는 것입니다.
이 설명은 상당히 주목할 만합니다. 사후 연단을 인정하면서도 현세의 삶을 무의미하게 만들지 않으려는 장치이기 때문입니다. ‘죽어서도 연단을 받을 수 있다면 지금 대충 살다가 사후에 고치면 되지 않는가?’라는 질문이 당연히 생길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강의는 ‘사후에는 정결하게 될 수는 있지만 상급을 얻을 수 없다’고 답합니다. 따라서 지상생활은 여전히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그리고 이 대목에는 이 공동체의 신앙적 긴장이 잘 드러납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은 이 땅에서 미완성된 성도를 사후에도 포기하지 않는다’는 자비를 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니 지금이 훨씬 중요하다. 지금 주님께 순종하고 연단받으라’고 강조합니다. 즉 사후 연단론이 현세의 신앙을 느슨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흐르지 않도록 강하게 제어하고 있습니다.
이 의도는 충분히 존중할 수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왜 자연계의 삶이 결정적으로 중요한가’를 조금 다르게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지금이 중요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상급을 벌 수 있는 기간’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자연계가 인간의 지배적인 사랑이 자유로운 선택과 실제 행위를 통하여 형성될 수 있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이 인간 안에서 함께 만나고, 사람은 선과 악을 알고 자유롭게 선택하여 그것을 실제 행위 속에 확정합니다.
그러므로 자연계의 삶은 일종의 ‘상급 적립기간’이라기보다 ‘영원한 인격 형성의 기간’입니다. 지금 내가 반복해서 사랑하고 선택하고 행하는 것이 점차 내 생명이 됩니다. 사후에는 그것이 완전히 드러납니다. 이 때문에 자연계의 하루가 중요합니다. 죽어서 받을 상이 줄어들까 봐서가 아니라, 오늘의 자유로운 선택이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 가는지를 실제로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핵심진리’의 상층부와 스베덴보리의 선한 영들을 위한 사후 정화를 정확히 구별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선한 사람이 사후에 정화되는 과정이 분명히 있습니다. 지상에서 잘못 배운 거짓, 무지, 외적인 습관, 자연적인 결함이 제거되고, 천사들에게 가르침을 받아 자기에게 맞는 천국 공동체로 준비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후에는 아무 변화도 없다’고 말하는 것도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그러나 ‘무엇이 변하느냐’가 핵심입니다. 이미 선을 지배적인 사랑으로 가진 사람에게서 그 선과 맞지 않는 것을 제거하는 것과, 악을 지배적인 사랑으로 가진 사람이 고통스러운 연단을 통하여 선을 지배적인 사랑으로 새롭게 갖게 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앞의 것은 ‘정화’이고 뒤의 것은 사실상 새로운 ‘거듭남’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후자를 사후 과정의 본질로 보지 않습니다.
이 차이를 아주 쉽게 예를 들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평생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려고 했지만 성격이 매우 급하고 쉽게 화를 냈다고 해 보겠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분노를 옳다고 합리화하지 않았고, 화를 낼 때마다 후회하며 그것을 벗어나고 싶어 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그 급한 자연적 성격과 습관은 그의 지배적인 사랑 자체가 아닐 수 있습니다. 사후에는 그런 외적인 결함이 벗겨지고 속의 선한 사랑이 더 자유롭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평생 아주 부드럽고 친절했지만 그 목적이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자기 영향력을 키우는 데 있었다고 해 보겠습니다. 혼자 있을 때는 다른 사람을 경멸하고, 자기에게 이익이 되지 않으면 아무 관심도 없었으며, 선행조차 자기 명예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습니다. 사후에 이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겉의 친절을 더 강화하는 ‘연단’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친절이라는 외피가 벗겨지고 실제 자기 사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2 상태입니다.
따라서 사후 제2 상태는 사람을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만드는 과정이라기보다 ‘원래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완전히 드러내는 과정’입니다. 이것은 매우 엄숙합니다. 지상에서는 직분도, 교단도, 명성도, 사람들의 평가도 속사람을 가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후에는 그 모든 것이 영원히 유지될 수 없습니다. 결국 사람은 자기가 실제 사랑한 것이 됩니다.
이 지점에서 ‘핵심진리’가 오랫동안 강조해 온 ‘겉과 속의 일치’는 매우 귀하게 보입니다. 사람에게 사후 제2 상태가 있다는 것을 정말 믿는다면 가장 실제적인 준비는 영계 지도를 외우는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겉과 속의 간격을 줄이는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하는 말과 혼자 있을 때의 생각, 마이크 앞에서 하는 말과 일상에서의 삶, 예배 때의 신앙고백과 가정에서의 태도가 점점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 공동체를 가까이 접하면서 ‘마이크 앞에서 하는 말 그대로 살고, 사는 그대로 마이크 앞에서 말한다’는 인상을 받으셨다는 점은 바로 여기서 상당히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교리적으로 스베덴보리와 다른 부분이 있더라도, 실제 삶에서 겉과 속의 일치를 오랫동안 추구해 왔다면 그것은 사후 제2 상태의 원리와 매우 깊게 통합니다. 참된 신앙의 중요한 열매 하나가 바로 위선의 감소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겉과 속이 같다’는 것을 ‘마음속에 악한 생각 자체가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앞에서도 여러 번 살펴본 중요한 구별입니다. 사람에게 악한 생각과 충동이 들어오는 것 자체와 그것을 자기 의지로 받아들여 사랑하는 것은 다릅니다. 천국과 지옥에서 인플럭스가 들어오기 때문에 선한 사람에게도 자기와 맞지 않는 악한 생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즐거워하고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악으로 인식하고 거절하느냐입니다.
그래서 참된 ‘속과 겉의 일치’는 ‘내 안에는 악한 생각이 하나도 없다’고 말하는 상태가 아니라, 자신에게 악이 있음을 숨기지 않고 주님 앞에서 인정하며 그것을 삶으로 옮기지 않으려고 싸우는 정직한 상태일 수 있습니다. 오히려 자기가 완전히 정결하다고 확신하는 사람보다 자기 안의 악을 알고 주님의 자비를 더 필요로 하는 사람이 더 깊은 겸손 안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 관점은 공용복 선생님의 ‘병상의 증거자 공용복’에 기록된 ‘회의와 역경’도 다르게 보게 합니다. 한 사람에게 의심과 낙심, 질문과 내적 갈등이 있었다는 사실이 그를 덜 영적인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내면의 싸움을 감추지 않고 통과했다는 사실이 중요할 수 있습니다. ‘성화된 사람’은 한 번도 흔들리지 않는 인간이라기보다 흔들릴 때마다 다시 주님께 돌아가는 인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층부로 가면 강의와 스베덴보리의 접점이 다시 상당히 강해집니다. 강의는 하층부를 ‘지옥에 들어갈 준비를 하는 장소’라고 설명하면서, 스베덴보리가 이를 사후 제2 상태로 말했다고 직접 언급합니다. 선에 속한 사람과 악에 속한 사람이 분류되어, 선한 영은 상층부로, 악한 영은 하층부로 갈라진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 설명은 ‘하나님께서 지옥에 보낸다’는 단순한 그림보다 더 깊은 가능성을 열어 줍니다. 사람의 내적 상태가 드러나면서 자연스럽게 자기와 같은 사랑의 세계로 향한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악한 영은 천국에 들어갈 기회를 빼앗겨 마지못해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천국의 사랑과 질서를 견딜 수 없어 자기가 사랑하는 악을 자유롭게 행할 수 있는 공동체를 찾아갑니다. 천국을 싫어하기 때문에 지옥이 자기에게 더 편안하게 느껴지는 역설적인 상태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면 지옥을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집니다. 주님께서 악한 사람에게 복수하기 위해 만든 감옥이 아니라, 인간이 자유롭게 형성한 악한 사랑이 사후에 자기와 같은 상태를 찾아간 세계입니다. 물론 지옥에는 고통과 형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분노하여 고통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악한 사랑들이 서로를 지배하고 해치려 하기 때문에 생기는 결과이며, 더 큰 악을 막기 위해 질서의 제약이 가해지는 것입니다.
이 원리를 중간 영역 전체에 적용하면 ‘심판’의 의미가 아주 깊어집니다. 심판은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그 사람의 정보를 조사하여 ‘너는 좋은 사람이구나’, ‘너는 나쁜 사람이구나’ 하고 판단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주님은 이미 그 사람 전체를 알고 계십니다. 심판은 사람 자신이 더 이상 자기 실제 상태를 감출 수 없게 되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사후의 참된 심판은 ‘선고’ 이전에 ‘드러남’입니다. 이것은 어쩌면 법정의 판결보다 훨씬 엄숙합니다. 지상에서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알았는가가 아니라 내가 실제로 무엇을 사랑했는지가 완전히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선한 사람에게는 이것이 큰 해방이기도 합니다. 자연계에서 실수와 결점, 오해 때문에 충분히 드러나지 못했던 선한 내면이 이제 자유롭게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중간 영역의 상층부와 하층부는 양쪽 모두 ‘가면이 벗겨지는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한 사람에게서는 천국적 사랑을 방해하던 외적 거짓과 결함이 벗겨지고, 악한 사람에게서는 사람들 앞에서 유지하던 경건과 도덕의 가면이 벗겨집니다. 하나는 속에 있던 천국이 드러나고, 다른 하나는 속에 있던 지옥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강의에서 사용하는 ‘연단’이라는 말을 모두 똑같은 뜻으로 이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상에서의 연단은 실제 선택과 시험 가운데 새로운 의지가 형성되는 ‘거듭남의 연단’입니다. 사후 선한 영에게 일어나는 것은 이미 형성된 선과 맞지 않는 것을 제거하는 ‘정화’에 더 가깝습니다. 악한 영에게 일어나는 것은 위선과 외적 선이 벗겨져 실제 사랑이 드러나는 ‘폭로와 분리’입니다. 이 세 가지를 하나의 ‘연단’이라는 말 안에 넣으면 중요한 차이가 흐려질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핵심진리’의 체계 안에도 어쩌면 두 흐름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공용복 선생님의 성화론에서 강하게 나타나는 ‘지상에서 미완성된 사람을 사후에도 더 정결하게 하여 익은 열매로 만든다’는 흐름입니다. 다른 하나는 스베덴보리의 제1·제2 상태를 받아들이면서 ‘죽은 뒤 외적인 것이 벗겨지고 실제 선과 악이 드러나 분리된다’는 흐름입니다. 두 흐름은 얼핏 자연스럽게 결합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엄밀히 보면 서로 다른 구원론을 전제합니다.
전자는 ‘아직 무엇이 될 수 있는가’를 중심으로 보고, 후자는 ‘이미 무엇이 되었는가’를 중심으로 봅니다. 전자는 사후에도 성화의 근본 방향이 계속 형성될 수 있다고 보고, 후자는 지상에서 형성된 방향이 사후에 드러난다고 봅니다. 이 차이는 앞으로 강의가 사후 교육, 사상 개조, 영혼의 할례, 사후 회개를 설명할 때 더욱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그렇다고 이 차이를 지금부터 날카롭게 ‘모순’이라고 재단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 강의를 따라가면서 ‘핵심진리’가 두 흐름을 실제로 어떻게 결합하는지를 보는 것이 공정합니다. 특히 공용복 선생님과 제자들이 스베덴보리의 영계론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면서도 자신들이 오래 붙들어 온 ‘광야 연단-성화-익은 열매’라는 구조 안에서 그것을 재해석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현재 자료가 확실히 보여 주는 것은 강의가 스베덴보리의 ‘사후 제1 상태’와 ‘제2 상태’를 실제로 언급하며 중간 영역의 구조를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앞으로의 해설 태도에도 중요합니다. ‘공용복 선생님의 체계는 스베덴보리와 전혀 무관하다’고 해도 자료에 맞지 않고, 반대로 ‘스베덴보리의 영계론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라고 해도 맞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에게서 어떤 구조와 개념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기 고유의 성화·연단 체계 속에서 다시 배열한 것으로 보아야 더 정확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다시 공용복 선생님의 제자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들에게 ‘핵심진리’는 단순히 여러 출처에서 자료를 모아 만든 이론서가 아닙니다. 생전 스승의 말과 삶을 기억하면서 그가 정리한 큰 구원의 흐름을 충실하게 보존하려는 책입니다. 따라서 외부에서 ‘여기는 스베덴보리와 맞고 여기는 틀렸다’고 몇 줄로 잘라 말하면 그들이 실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놓칠 수 있습니다. 먼저 그 체계가 무엇을 지키려 했는지를 이해한 뒤, 더 넓은 빛에서 그 의미를 열어 주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 핵심은 여전히 ‘사람이 실제로 거룩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는 스베덴보리와 아주 깊이 만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그 거룩함을 ‘내 안의 모든 악한 proprium이 완전히 소멸된 상태’로 보지 않고, 악이 지배력을 잃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새로운 의지와 사랑이 사람의 생명을 다스리는 상태로 봅니다. 그러므로 사후에는 그 새로운 사랑이 더욱 자유롭게 드러나고, 그것과 맞지 않는 외적인 것이 벗겨집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중간 영역’을 공부하는 가장 실제적인 목적도 분명해집니다. 사후에 어떤 경로를 거치는지를 미리 외우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지금 내 안에서 무엇을 형성하고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입니다. 죽은 뒤 제2 상태에서 참모습이 드러난다면, 지금부터 주님의 도움으로 겉과 속이 같아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도 선을 선택하고, 마이크가 없어도 같은 사람이며, 신앙적 언어를 사용할 때와 가정에서 생활할 때의 사랑이 점점 하나가 되어 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사후 세계에 대한 지식은 현재를 더 진실하게 만드는 지식이 됩니다. 이것이 아니라면 아무리 정교한 영계 지도를 가지고 있어도 영적인 유익은 제한적입니다. 천국의 좌표를 정확히 아는 것보다 천국적 사랑을 실제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지금이 은혜의 시간’이라는 강사 목사님의 말도 한층 깊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것을 단지 ‘상급을 쌓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만 보지 않고, ‘주님께서 나의 자유를 통해 영원한 사랑을 형성해 가실 수 있는 이 특별한 자연계의 시간’이라고 이해하면 훨씬 깊어집니다. 오늘 내가 자유롭게 용서하고, 정직을 선택하고, 자기 욕망을 거절하며, 다른 사람에게 쓰임이 되는 한 번의 선택이 내 영원한 생명의 형태와 연결됩니다.
그래서 3강 4부에서 ‘핵심진리’와 스베덴보리가 가장 깊게 만나는 문장은 어쩌면 이것일 것입니다. ‘사후에는 사람의 참된 내면이 드러난다.’ 그리고 가장 크게 갈라지는 문장은 이것입니다. ‘그 사후 세계에서 사람의 지배적인 사랑 자체가 새롭게 바뀔 수 있는가.’ 전자의 질문에는 상당한 일치가 있고, 후자의 질문에서는 두 체계가 분명히 달라집니다.
이 차이를 끝까지 기억하면서 3강을 이어가면 좋겠습니다. 다음 5부에서는 ‘핵심진리’가 말하는 ‘교육받는 낙원’과 사후 교육을 살펴보겠습니다. 중간 영역의 연단을 마친 성도가 영혼의 할례를 받고 천국 생활을 준비하기 위해 교육받는다는 설명과, 스베덴보리에게 선한 영들이 사후에 실제로 천사들에게 교육을 받는다는 가르침이 다시 놀랍도록 가까이 만납니다. 그러나 역시 결정적인 질문은 하나입니다. ‘사후 교육은 사람의 생각을 고치는 것인가, 아니면 그의 지배적인 사랑까지 새롭게 만드는 것인가.’ 바로 그 지점에서 두 영계론의 차이가 한층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3강5부
‘교육받는 낙원’ - 사후에도 배움이 있는가, 그리고 무엇까지 바뀔 수 있는가
3강의 다섯 번째 부분에서는 중간 영역을 통과한 선한 영들이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머무는 곳으로 ‘교육받는 낙원’이 등장합니다. 강사 목사님은 이곳이 필요한 이유를 아주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지상에서 서로 다른 종교와 사상 안에 살았던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다고 해도, 그 상태 그대로 천국 생활에 완전히 익숙한 것은 아니므로 사후에 잘못된 사상을 고침받고 천국의 생활과 질서를 배울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교적 사상을 가졌던 사람들이 구원을 받아 영계에 들어오면 이곳에서 ‘사상을 개조하고’,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여러 생활을 배우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이 부분은 지금까지의 ‘핵심진리’ 영계론 가운데 스베덴보리와 다시 매우 가까워지는 대목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선한 영들이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실제로 ‘가르침’을 받는 상태가 있습니다. 지상에서 기독교 교리를 충분히 알지 못했던 사람, 다른 종교 안에서 양심적으로 살았던 사람, 잘못된 신학적 관념을 가졌지만 실제로는 선을 사랑했던 사람들은 사후에 진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들은 천사들의 가르침을 통해 자신이 살아온 선과 진리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깨닫고, 주님과 천국에 관한 더 참된 이해로 준비됩니다. 그러므로 ‘죽은 뒤에도 선한 사람에게 배움이 있다’는 큰 원리는 두 체계가 상당히 깊게 만나는 지점입니다.
여기에서 먼저 ‘다른 종교를 가졌던 사람도 천국을 위한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강의의 폭을 귀하게 볼 수 있습니다. 구원의 문제를 단순히 지상에서 어떤 교파의 정확한 교리 문장을 알고 있었느냐로 제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잘못된 종교 환경 속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그 책임을 모두 그 사람에게 돌리지 않고, 그 안에서도 선을 따라 살았던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사후에도 바로잡고 가르치실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점은 적어도 하나님의 구원을 교회 제도보다 넓게 보려는 방향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이 부분이 더욱 넓어집니다. 이방인이나 비기독교인이었다는 사실 자체가 천국을 막는 조건은 아닙니다. 자신이 알고 있던 종교 안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양심에 따라 선을 행했으며, 다른 사람에게 악을 행하지 않으려 했던 사람이라면 그의 내면에는 주님께서 받아들일 수 있는 선이 형성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사후에 참된 진리를 들려주었을 때 그는 그것을 자기 안의 선과 일치하는 것으로 알아보고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독교 지식을 가지고 있었는가’보다 ‘선을 사랑했는가’입니다.
따라서 ‘교육받는 낙원’이라는 개념 자체는 스베덴보리의 사후 교육과 매우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다만 이제부터 중요한 질문은 하나입니다. ‘그 교육이 무엇을 바꾸는가?’입니다. 강의는 이곳에서 ‘사상을 개조한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이 단순히 잘못된 생각과 종교적 오류를 바로잡는다는 뜻이라면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잘 맞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근본적인 사랑 자체를 사후 교육으로 바꾼다는 뜻까지 포함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사후의 가르침은 ‘악을 사랑하는 사람을 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학교’가 아닙니다. 이미 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진리를 알려 주는 학교에 가깝습니다. 사람은 잘못된 교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선한 마음으로 살 수 있습니다. 그 경우 사후에는 교리가 정정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과 세상을 최고의 것으로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데 기쁨을 느끼는 사람이 사후에 교리를 많이 배웠다고 해서 천국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식의 변화와 사랑의 변화는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구별을 예로 생각해 보면 매우 분명합니다. 어떤 사람이 지상에서 다른 종교 안에 태어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부모를 공경하며, 거짓말을 싫어하고, 어려운 사람을 돕고, 자기 양심을 따라 살았다고 해 보겠습니다. 이 사람의 신학적 지식에는 많은 부족함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을 사랑하는 내적 상태가 형성되어 있다면 사후에 천사들이 주님에 관한 진리를 가르칠 때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것이 교육입니다.
반대로 평생 정확한 기독교 교리를 배웠고 많은 설교를 들었지만, 실제로는 자기 명예와 지배를 가장 사랑했던 사람이 있다고 해 보겠습니다. 그 사람에게 부족한 것은 ‘교리 교육’이 아닙니다. 이미 많이 알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 지식이 삶의 선과 결합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후에 더 많은 지식을 넣어 준다고 해서 그 사람이 선한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차이를 모르면 ‘교육받는 낙원’이 인간의 지배적인 사랑까지 사후에 다시 설계할 수 있는 장소처럼 이해될 수 있습니다.
강의는 교육받는 낙원을 어떤 사람들에게는 ‘변두리’라고 부르기도 하고, 일부 심령과학자들은 다른 이름으로 불렀다고 소개합니다. 그리고 이곳이 천국의 가장 아래 입구 부근에 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공간의 그림을 먼저 보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왜 그런 위치로 보이는가’를 묻게 됩니다. 천국에 완전히 들어가기 전, 아직 배우고 준비되는 상태이기 때문에 ‘입구’나 ‘변두리’처럼 나타날 수 있습니다. 영계의 위치는 내적 상태에 상응하기 때문입니다.
강의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이 교육받는 낙원의 입구에 ‘영혼의 할례를 받는 장소’가 있다고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지상에서 익은 열매가 되지 못한 성도는 중간 영역에서 연단을 받고, 영혼의 할례를 받은 뒤에야 교육받는 낙원으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할례를 받은 사건을 모형으로 보면서, 모든 성도가 영적으로 할례를 받고 천국에 들어가야 한다고 해석합니다.
이 구조를 다시 정리하면 매우 선명합니다. ‘지상에서 미완성된 성도-중간 영역에서 연단-영혼의 할례-교육받는 낙원-천국 입성’입니다. 이 순서는 ‘핵심진리’의 사후 성화론을 거의 한눈에 보여 줍니다. 지상에서 부족했던 성화가 중간 영역에서 계속되고, 죄성이 처리되며, 그다음 잘못된 사상까지 바로잡힌 뒤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이 체계 안에서는 인간의 전 인격이 사후에도 상당히 적극적으로 변화되고 준비됩니다.
이 점에서 ‘핵심진리’가 하나님의 구원을 얼마나 철저하게 ‘사람을 실제 천국 사람으로 만드는 과정’으로 생각하는지가 다시 드러납니다. 단지 죽는 순간 법적으로 구원받은 신분을 확인하고 천국에 보내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성품과 생각과 생활까지 천국에 맞아야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 문제의식 자체는 매우 귀합니다. 천국은 사람이 실제로 천국적이지 않은데 외적 신분만으로 억지로 들어가 행복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도 이 점에서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단지 문을 통과하는 일이 아니라 천국의 사랑과 기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데서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에게 천국의 겸손과 상호 사랑은 오히려 고통스럽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천국은 장소 이전에 생명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그 생명의 핵심 방향이 언제 형성되는지를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지상의 자연계에서 자유롭게 살며 실제 행동으로 선택한 것들이 지배적인 사랑을 형성합니다. 사후 교육은 그 사랑과 어울리는 진리를 더 밝히는 일이지, 사랑의 방향 자체를 반대로 뒤집는 작업이 아닙니다. 그래서 교육받는 낙원이 있다면 그것은 ‘거듭남의 재시작 학교’보다 ‘천국을 위한 완성 교육’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강의에서 말하는 ‘사상 개조’라는 표현도 조금 더 섬세하게 만들 필요가 있음을 보여 줍니다. ‘사상’은 바뀔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잘못 알고 있던 것을 새롭게 배울 수 있습니다. 지상에서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사랑과 의지는 지식만으로 바뀌지 않습니다. 새로운 사실을 안다고 해서 곧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사후 교육을 지식과 인식의 정정으로 이해하면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지만, 그 교육 자체가 악한 의지를 선한 의지로 만든다고 보면 스베덴보리와 거리가 커집니다.
강의는 사상이 바뀌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교육기간이 길어질 수 있다고도 설명합니다. 이 점도 흥미롭습니다. 오랫동안 형성된 사고방식과 종교적 관념은 죽는 순간 자동으로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후에도 자기 기억과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전제가 들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이 점을 매우 분명하게 말합니다. 사람은 죽었다고 기억상실 상태가 되지 않습니다. 지상에서 배운 것과 생각했던 것들을 가지고 가며, 처음에는 그것을 토대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선한 사람에게는 한 가지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그는 진리를 알게 되면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자기 생각이 틀렸다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자기 체면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거짓을 붙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중심 사랑이 진리가 아니라 ‘자기 생각의 승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선 자체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후 교육의 기간을 결정하는 핵심도 단순히 머리가 좋은가 나쁜가보다 진리를 사랑하는 애정과 얼마나 결합되어 있는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대목은 지상 신앙생활에도 아주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고칠 수 있는 사람인가?’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하고 교리를 많이 배울수록 오히려 자기 생각을 고치기 더 어려워질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자기 정체성이 되고, 그것을 수정하는 것이 신앙 전체를 잃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국적 사람에게 진리는 자기 소유가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므로 더 밝은 진리를 만나면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점에서 오랜 세월 ‘핵심진리’를 충실히 보존하고 반복해 온 이 공동체의 제자적 태도에도 아주 부드러운 질문이 하나 따라올 수 있겠습니다. 스승의 가르침을 사사로이 변형하지 않으려는 충실성은 귀합니다. 특히 생전 공용복 선생님을 직접 기억하는 원로들에게는 그 문장 하나하나가 육성과 삶의 기억을 품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제자적 충실성은 스승의 문장을 절대화하는 것보다 그 스승이 찾고자 했던 주님의 진리를 끝까지 따라가는 데 있어야 할 것입니다. 더 큰 빛이 주어진다면 그것을 검토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마음 역시 진리에 대한 충실성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를 대하는 태도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문장을 많이 알고 있다고 해서 그것을 새로운 닫힌 교리 체계로 만들면 같은 문제가 생깁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증거하는 주님과 말씀의 질서가 중요합니다. 따라서 ‘핵심진리’를 스베덴보리로 채점하는 것이 아니라, 양쪽 모두를 통해 한 분 주님과 진리를 더 분명히 보는 것이 목적이어야 합니다.
강의는 교육받는 낙원에서 천국 생활도 배운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상당히 흥미로운 생각입니다. 천국을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영원한 휴식처로 생각하지 않고, 실제 생활과 질서가 있는 공동체로 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천국은 매우 활동적인 세계입니다. 천사들은 각자의 쓰임을 수행하며, 서로 사랑하고 가르치고 섬기고 공동체의 선을 위해 일합니다. 천국의 행복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데 있지 않고, 사랑하는 쓰임을 자유롭게 수행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천국 생활을 배운다’는 표현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다면 ‘천국의 예절이나 시설 사용법을 배운다’는 자연적인 그림보다, 자기에게 맞는 사랑과 쓰임의 질서로 준비된다는 뜻으로 깊어질 수 있습니다. 사람은 사후에 자기의 지배적인 사랑에 맞는 공동체로 들어가고, 그 공동체 안에서 자기에게 가장 맞는 쓰임을 수행합니다. 선한 사람에게는 이 쓰임 자체가 기쁨입니다.
여기에서 천국의 ‘쓰임’은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의 모든 것은 쓰임을 향합니다. 사랑은 쓰임으로 나타나고, 지혜는 그 쓰임을 어떻게 잘 행할지를 보여 줍니다. 천사들이 행복한 이유도 끊임없이 다른 존재의 선을 위해 유용하게 활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육받는 낙원에서 천국 생활을 준비한다는 것을 ‘어떤 쓰임 안에서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갈 것인가를 준비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매우 천국적인 의미가 됩니다.
이 관점에서는 지상생활 자체도 이미 천국 교육의 시작입니다. 우리는 지금 가정과 교회, 직업과 사회에서 각자 맡은 쓰임을 수행합니다. 그 일을 자기 명예와 이익만을 위해 하는지, 아니면 주님과 이웃의 선을 위해 행하는지가 영적 성질을 결정합니다. 천국의 쓰임은 죽은 뒤 갑자기 처음 배우는 완전히 낯선 활동이라기보다, 지상에서 사랑으로 행한 선한 쓰임이 더 순수하고 자유로운 형태로 계속되는 것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사후 교육을 생각할 때도 ‘죽은 뒤에 모든 것을 배우면 된다’는 식으로 현재를 가볍게 만들면 안 됩니다. 지상에서 이미 선한 쓰임을 사랑하는 사람이 사후에 그 사랑을 더 완전한 질서 속에서 펼치게 됩니다. 반대로 일평생 자기 자신만을 위해 모든 것을 사용한 사람이 사후 학교에서 천국의 봉사 과정을 이수한다고 해서 갑자기 이웃의 행복을 자기 기쁨으로 느끼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점에서 자연계의 삶은 다시 결정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이곳에서는 행동의 결과가 자연적 세계 안에 고정되고, 사람은 실제 선택의 책임을 경험하며, 선과 악을 자유롭게 행하면서 자기 사랑을 형성합니다. 사후 교육은 이 생애에서 만들어진 생명의 방향 위에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교육받는 낙원’의 존재가 현재의 거듭남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강의가 이곳 입구에 영혼의 할례를 배치한 이유도 그 나름의 논리가 있습니다. 먼저 죄성이 정리되지 않으면 천국의 진리를 제대로 교육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직관 자체는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 사랑을 붙든 채 진리를 배울 경우, 그 진리를 자기 이익을 위해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식은 사랑에 따라 사용됩니다. 선한 사랑에 들어가면 선을 위한 도구가 되지만 악한 사랑에 들어가면 오히려 악을 정당화하고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도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도 이 점을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천국의 진리는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선과 결합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후에 선한 영들에게 진리를 가르칠 때도 그들의 선한 애정에 맞추어 가르칩니다. 진리가 선 안으로 들어가야 생명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할례 후 교육’이라는 강의의 구조 안에는 ‘먼저 사랑의 질서가 바로 서고 그다음 진리가 그 사랑과 결합되어야 한다’는 귀한 직관이 어느 정도 들어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이것을 그렇게 시간적으로 완전히 분리된 두 단계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사랑과 진리는 서로 영향을 주면서 함께 거듭남을 이룹니다. 진리를 배우기 때문에 악을 보고 피할 수 있고, 악을 피하면서 선이 형성되기 때문에 더 깊은 진리를 받을 수 있습니다. ‘먼저 완전히 정결해지고 그다음 진리를 배운다’기보다, 진리와 선이 서로 교대로 결합하면서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이것은 ‘핵심진리’의 단계적 구조 전체에 대한 하나의 중요한 보완입니다. 단계는 이해를 돕는 데 매우 유익합니다. 애굽-광야-가나안, 연단-할례-생명과-천국이라는 구조는 신앙의 큰 흐름을 쉽게 보여 줍니다. 그러나 실제 거듭남은 그렇게 깔끔한 직선으로만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진리를 배우면서 새로운 악이 보이고, 그것을 거절하면서 더 깊은 선이 형성되고, 다시 그 선으로 더 깊은 진리를 이해하는 순환이 계속됩니다.
그래서 사람의 영적 성장은 ‘몇 단계까지 통과했는가’보다 ‘선과 진리가 얼마나 실제로 결합되고 있는가’를 보는 편이 안전합니다. 그리고 그 결합의 결과는 결국 삶의 쓰임과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더 오래 공부했는가보다 더 진실해졌는가, 더 많이 들었는가보다 더 사랑하게 되었는가, 더 높은 체험을 했는가보다 더 겸손하고 유용한 사람이 되었는가를 보게 됩니다.
공용복 선생님의 생애를 알고 난 뒤에는 이 부분도 조금 다르게 다가옵니다. 이분에게 ‘천국 생활’은 단지 죽은 뒤 더 편안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희망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육체적으로 거의 아무것도 자유롭게 할 수 없는 조건 속에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남기고, 자신의 신앙을 전하려 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삶은 쓰임이어야 한다’는 관점이 매우 실존적으로 다가옵니다. 외적 몸의 기능이 극도로 제한되어도 한 사람은 여전히 다른 사람에게 영적인 쓰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천국의 쓰임을 이해할 때도 귀한 사실입니다. 천국에서의 가치는 지상에서 얼마나 큰 일을 해냈는가로 측정되지 않습니다. 맡겨진 상태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을 다른 존재의 유익을 위해 사용했는가가 중요합니다. 몸이 건강하여 수많은 사람 앞에서 활동한 사람도 있고, 병상에서 몇 사람에게만 사랑과 진리를 전한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외적인 규모가 영적인 크기를 결정하지 않습니다.
이 점을 붙들면 ‘교육받는 낙원’을 마치 천국 입학을 위한 신학대학처럼 상상하지 않게 됩니다. 그것은 지식을 많이 채우는 곳이라기보다 선한 사랑이 참된 진리와 결합하여 자기에게 맞는 천국의 쓰임으로 준비되는 상태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의미에서는 ‘핵심진리’의 사후 교육론과 스베덴보리의 사후 가르침 사이에 매우 아름다운 접점이 생깁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가장 중요한 경계를 기억해야 합니다. 사후에는 ‘생각’이 고쳐질 수 있지만, 자연계에서 형성된 ‘지배적인 사랑’이 외부 교육으로 근본적으로 뒤집히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선을 사랑하지만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은 가르치면 기뻐합니다. 악을 사랑하면서 많은 진리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그 진리를 자기 악을 위해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후 구원의 핵심은 ‘얼마나 많이 배웠는가’보다 ‘무엇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는가’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육받는 낙원’에 대한 강의는 오히려 현재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는 지금도 수많은 설교와 책과 강의를 통해 계속 교육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지식이 실제로 사랑을 바꾸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진리를 더 많이 알수록 다른 사람을 더 쉽게 판단하게 되는가, 아니면 더 겸손해지고 이웃에게 더 유익한 사람이 되는가. 후자라야 교육이 천국적 생명과 결합된 것입니다.
특히 같은 ‘핵심진리’를 수십 번 반복해서 듣는 이 공동체에게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할 수 있습니다. 반복이 단지 동일한 사상을 더욱 단단하게 고정시키는 데 그친다면, 강의가 말하는 ‘사상 개조’의 역설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복할수록 자기 생각과 삶을 주님 앞에서 더 깊이 살피고, 스승에게서 받은 말씀이 실제 성품과 쓰임으로 내려간다면 그 반복은 생명의 교육이 됩니다. 그 차이는 지식의 양이 아니라 삶의 열매에서 나타납니다.
그리고 여기서 공용복 선생님의 제자들이 스승의 가르침에 개인적인 것을 함부로 섞지 않으려 한다는 모습도 다시 한 번 양면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받은 것을 충실히 보존하려는 겸손과 절제가 보입니다. 다른 한쪽에서는 어떤 신앙 전통이든 그 언어가 너무 굳어지면 더 깊은 진리를 만났을 때 수정하기 어려워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둘 사이의 균형은 매우 중요합니다. ‘함부로 바꾸지 않는 것’과 ‘주님의 더 밝은 진리에 열려 있는 것’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이 공동체에 제공할 수 있는 역할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당신들이 배운 것은 틀렸으니 버리라’가 아니라, 이미 붙들고 있는 선한 진리를 더 깊은 질서 속에서 다시 보게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후에도 교육이 있다’는 통찰을 그대로 존중하면서, 그 교육이 사랑의 방향을 새로 만드는 것인지 아니면 이미 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진리를 더 정확히 결합시키는 것인지 구별해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존의 신앙을 파괴하지 않고 더 정교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이런 방식이라면 스베덴보리의 가르침도 ‘외부에서 들이대는 낯선 신학’이 아니라 이미 경험하고 믿어 온 것 가운데 어디까지가 더 깊이 설명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렌즈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이번 해설 전체에서 가장 중요하게 지키려는 태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3강 5부에서 가장 귀하게 남는 문장은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도 가르침이 있다’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다음 문장이 더 중요합니다. ‘그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마음은 지상에서 형성된다.’ 진리를 사랑할 수 있는 애정, 자기 잘못을 인정할 수 있는 겸손, 선을 기뻐하는 마음은 단순한 지식 교육으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자연계에서 주님의 진리에 자유롭게 응답하며 살아가는 가운데 형성됩니다.
그러므로 사후의 ‘교육받는 낙원’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현재의 삶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현재의 삶에서 선을 사랑한 사람에게 주님께서 부족한 진리를 채워 주시고, 잘못된 것을 고쳐 주시며, 그 사람에게 가장 맞는 천국적 쓰임으로 인도하시는 자비의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도 살리고 하나님의 자비도 충분히 드러냅니다.
그리고 이 점에서 ‘핵심진리’가 말하려는 하나님의 끝까지 책임지심과 스베덴보리의 섭리도 다시 만납니다. 주님은 선을 사랑하는 사람을 무지 때문에 버리지 않으십니다. 잘못 배웠다고 버리지 않으시고, 완전하지 않다고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사람의 사랑을 강제로 바꾸지도 않으십니다. 그가 자유롭게 받아들인 선을 붙드시고, 거기에 필요한 진리를 더하여 천국의 생명으로 완성해 가십니다.
다음 3강 6부에서는 이 과정과 반대 방향에 있는 ‘사후 제2 상태’와 영체의 변화로 들어가겠습니다. 강의는 사람이 중간 영역에서 선을 사랑하며 정결해질수록 영체가 아름다워지고, 악을 좋아하고 행할수록 점점 추악해진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처음 사후에 나타나는 영체는 죽기 직전의 육체 모습과 상당히 비슷하지만, 이후 내적 상태에 따라 변화한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얼굴은 애정의 형상’이라는 영계의 원리와, 영계에서는 내적인 것이 외적인 모습으로 드러난다는 ‘상응’이 매우 선명하게 연결될 것입니다.
3강6부
사후의 영체와 ‘얼굴’ - 육체의 결함은 벗겨지고, 사랑의 상태는 모습으로 드러나는가
이번 부분에서 강사 목사님은 중간 영역의 구조를 설명하다가 아주 구체적인 질문으로 들어갑니다. ‘사람이 죽어 영계에 들어갔을 때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입니다. 강의는 먼저 인간의 육체가 살아 움직이는 것은 영혼 때문이며, 영이 육체를 떠나면 육체는 더 이상 느끼거나 활동하지 못하는 ‘껍데기’가 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죽음 이후에도 계속 살아가는 영혼과 영체가 중요하며, 영계에 대한 지식을 공부할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어 사후 처음 만나는 중간층에서 영혼의 형태와 크기, 외모가 어떠한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봅니다.
강의에 따르면 사람은 사후 첫 상태에서 대체로 죽기 직전의 외모를 가지고 나타납니다. 키가 작은 사람은 처음에는 작은 모습으로, 노년기에 죽은 사람은 처음에는 노인의 모습으로, 어린아이는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나타나며, 심지어 머리 모양까지 상당히 동일하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에서 강사 목사님이 말하려는 핵심은 ‘사람은 죽자마자 전혀 낯선 존재로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자신이라는 연속성이 보존된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사후 인간 이해와 상당히 가까운 방향을 갖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사람은 죽은 뒤에도 인간 형상으로 살아갑니다. 생각하고 기억하며 사랑하고 말하고 다른 존재와 관계를 맺습니다. 그래서 사후에 깨어난 사람은 처음에는 자신이 이전과 동일한 사람이라고 느끼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죽음은 인간 자체가 사라지는 사건이 아니라 자연적 육체를 벗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죽으면 희미한 영혼이나 연기 같은 존재가 된다’는 일반적인 상상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런데 강의는 바로 이어서 매우 중요한 이야기를 합니다. 자연계에서 사고나 질병 때문에 팔이나 다리를 잃었더라도, 사후에는 팔이나 다리가 없는 상태로 계속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팔이 없는 것은 육체의 문제이지 영혼의 결함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대목은 지금까지 올려주신 공용복 선생님의 생애를 알고 난 뒤에는 특별히 더 깊게 들립니다. 거의 온몸이 마비되어 육체의 자유를 극도로 제한받았던 사람에게 이 가르침은 단순한 사후 세계의 지식이 아니라 아주 절실한 복음처럼 들렸을 수도 있겠습니다. 육체가 거의 움직이지 못해도 속사람 자체가 마비된 것은 아니며, 죽음 이후에는 그 자연적 육체의 결함이 더 이상 인간을 붙들지 못한다는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와도 매우 깊게 만납니다. 육체는 영이 자연계에서 활동하기 위한 최외곽의 기관입니다. 따라서 자연적 기관의 손상 자체가 영의 손상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눈을 잃었다고 영적 시력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다리를 움직이지 못한다고 영혼의 이동 능력이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육체적 장애는 자연계의 조건입니다. 사람이 사후에 영적 몸으로 살아갈 때에는 자연적 육체의 손상 자체를 그대로 영원히 짊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장애와 질병을 신앙적으로 바라볼 때 매우 중요한 균형을 줍니다. 자연계에서 몸의 기능이 제한된 사람을 ‘어딘가 덜 온전한 인간’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의 본질은 육체의 기능 수준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육체의 고통과 장애가 실제 삶에서 얼마나 큰 어려움을 가져오는지를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그 제한이 인간의 영적 가치나 속사람의 온전성까지 규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공용복 선생님의 병상생활도 다시 다르게 보입니다. 거의 전신이 자유롭지 않았음에도 생각하고, 기도하고, 가르치고, 다른 사람의 영적 삶에 영향을 줄 수 있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육체와 속사람을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매우 강하게 보여 줍니다. 육체의 활동 반경은 극도로 좁아졌지만, 그 사람의 내적 사고와 사랑, 신앙의 활동 범위까지 같은 정도로 좁아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강의가 ‘처음에는 죽기 직전의 모습과 거의 똑같다’고 상당히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부분은 조금 세심하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사후 초기에는 지상에서의 자기 모습과 강한 연속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 몸의 참된 형상은 자연적 유전이나 나이 자체보다 그 사람의 내적 사랑과 사고의 상태와 더 깊이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죽을 때 80세였으니 영원히 80세 노인의 외모를 유지한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사후 과정이 진행되면서 내적인 상태가 외적 형상에 점점 더 자유롭게 나타납니다.
바로 이어지는 강의의 설명도 이 방향으로 갑니다. 강사 목사님은 중간 영역에서 천국에 들어갈 준비가 될수록 사람이 선을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면서 정결해지고, 그에 따라 영체의 외모도 점점 아름답게 바뀐다고 말합니다. 반대로 중간층에서 하층부 방향으로 내려가면서 악을 좋아하고 악을 행할수록 영체가 점점 악하고 추한 모습으로 변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부분은 ‘핵심진리’의 영계론 가운데 스베덴보리와 매우 강한 접점을 가진 대목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영계의 얼굴은 단순한 생물학적 얼굴이 아닙니다. 얼굴은 내적 애정의 형상입니다. 자연계에서는 사람이 표정을 조절하여 속마음을 숨길 수 있습니다. 화가 나도 웃을 수 있고, 미워하면서 친절한 얼굴을 만들 수도 있으며, 자기 이익을 노리면서 사랑하는 척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계에서는 속과 겉이 계속 분리되어 있을 수 없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의 내적 사랑과 애정이 얼굴과 몸짓에 그대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천사들이 아름다운 것은 하나님께서 ‘선한 사람들에게 더 좋은 외모를 상으로 주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의 사랑과 지혜 자체가 아름다운 형상으로 상응하여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름다움은 내적 선의 외적 형상입니다. 반대로 악한 영들이 추하게 보이는 것도 하나님께서 죄인을 벌하기 위해 일부러 흉측한 얼굴을 주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자기 사랑과 증오, 기만과 지배욕 같은 내적 악이 그에 맞는 외적 형상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강의가 ‘선을 사랑하고 악을 미워할수록 아름다워진다’고 설명하는 직관은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정결 훈련을 많이 받아 외모가 미용적으로 더 아름다워진다’는 방식으로 이해하기보다, ‘그 사람의 내적 선이 더 자유롭게 드러나면서 그 선과 상응하는 인간 형상이 나타난다’고 이해하는 편이 정확합니다. 아름다움은 보상이 아니라 상응입니다.
반대쪽도 마찬가지입니다. 강의는 하층부로 내려가 악을 좋아하고 행할수록 악한 형상으로 변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사후에도 계속 악을 행하여 새롭게 괴물이 되어 간다’고만 이해하면 약간의 문제가 생깁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더 핵심적인 것은 이미 지상에서 형성된 악한 사랑이 사후에 외적 가면을 벗고 자유롭게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즉 새로운 악이 처음 만들어지는 것보다 ‘숨겨져 있던 악이 모습을 얻는 것’에 가깝습니다.
이 구별은 앞에서 살펴본 ‘사후 제2 상태’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지상에서는 속과 겉을 다르게 유지할 수 있지만, 사후 제2 상태에서는 속사람이 드러납니다. 따라서 얼굴이 변한다는 것도 그 사람의 본질이 사후에 완전히 다른 것으로 새로 만들어진다는 뜻보다, 원래 지배적인 사랑이 점점 가림 없이 외부 형상으로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강의 후반에서는 지옥에 들어간 불신자의 영체가 ‘죄성의 종류에 따라’ 매우 다양하고 흉측한 모습으로 변형되어 있다고 설명하고, 계9장의 황충 같은 형상까지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이 부분에서도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한 가지 중요한 구별을 요구합니다. 요한계시록에 나타나는 황충이나 짐승의 형상을 곧바로 ‘지옥 영들의 실제 육체 생김새를 사진처럼 묘사한 것’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요한계시록의 동물과 괴물의 형상은 실제 영적 상태가 상응을 통해 나타난 것입니다. 황충, 용, 짐승, 뱀 같은 형상은 어떤 종류의 악과 거짓, 왜곡된 사고와 욕망을 표현합니다. 영계에서 실제 그런 형상을 볼 수 있다는 것과 그것을 자연계 동물의 해부학적 모습처럼 이해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보였다’는 것은 영적 실재가 형상으로 나타났다는 뜻이며, 그 형상이 무엇에 상응하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차이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계에 실제 반인반수 형태의 괴물들이 생물학적으로 살고 있다고 생각하게 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기록에서도 악한 영들이 천국의 빛에서 흉측한 형상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있지만, 그 형상의 본질은 그들의 악한 사랑입니다. 영계의 외형은 내적 상태의 언어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에게는 한 가지 매우 흥미로운 설명이 더 있습니다. 악한 영들이 자기들끼리 있고 자기 악의 거짓된 빛 안에 있을 때에는 반드시 자신들을 늘 흉측하게 느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천국의 빛, 곧 신적 진리의 빛이 비추면 그들의 실제 내적 상태에 상응하는 모습이 드러납니다. 이것은 악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보느냐와 신적 진리 안에서 실제로 어떠한가가 다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자연계에서도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자기 욕망 속에 깊이 빠져 있는 사람은 그것을 아름답고 정당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지배욕을 ‘지도력’이라고 부르고, 탐욕을 ‘성공 의지’라고 하며, 복수를 ‘정의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진리가 비추면 그 사랑의 실제 성질이 드러납니다. 영계에서는 이 내적 드러남이 외적 형상으로까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아름다움과 지옥의 추함은 미적인 취향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랑의 질서와 무질서가 형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선은 본질적으로 조화롭고 악은 본질적으로 왜곡되어 있기 때문에, 그 상태가 영계에서는 아름다움과 추함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얼굴’이라는 것은 매우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말씀의 속뜻에서도 ‘얼굴’은 인간의 내면, 특히 애정과 생각이 밖으로 나타나는 것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님의 ‘얼굴’을 구한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신적 외모를 보고 싶어 한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와 사랑, 그분의 임재를 구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서로 얼굴을 마주한다는 것도 내면이 서로 열리는 상태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후에 얼굴이 참된 애정의 형상이 된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상응입니다. 지상에서 감추었던 것이 영계에서는 얼굴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후 심판은 한편으로는 ‘얼굴을 되찾는 과정’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자연계에서 만들어 놓은 사회적 얼굴이 벗겨지고, 실제 속사람의 얼굴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이야기한 공용복 선생님의 제자 공동체와도 상당히 깊게 연결되는 부분입니다. ‘마이크 앞에서 하는 말 그대로 살고, 사는 그대로 마이크 앞에서 말한다’는 인상을 받으셨다는 것은 결국 ‘얼굴을 두 개 만들지 않는 삶’과 관련됩니다. 영계에서 언젠가 겉과 속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면, 거듭남의 중요한 목적 하나는 이 땅에서부터 그 간격을 줄여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주의점이 하나 있습니다. ‘겉과 속이 같다’는 것을 ‘모든 감정과 생각을 즉시 밖으로 표현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화가 나면 화를 그대로 쏟아내고, 싫으면 싫다고 말하는 것이 영적 정직은 아닙니다. 오히려 자연계에서는 겉 사람을 진리의 질서에 맞게 다스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속에서 악이 올라오더라도 그것을 말과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절제가 먼저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에서는 처음에 겉 사람을 진리에 맞추는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속에서는 화가 나지만 ‘사랑은 오래 참고’라는 진리 때문에 입을 다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것이 위선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속의 악을 옳다고 여기면서 겉으로만 선한 척하는 것은 위선이지만, 속의 악을 악으로 인정하고 그것에 따라 행동하지 않으려고 싸우는 것은 거듭남입니다. 시간이 흐르면 주님께서 속사람 자체를 변화시키시고, 처음에 억지로 참았던 선이 나중에는 자연스러운 사랑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겉과 속의 일치는 ‘속에서 느끼는 것을 모두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겉을 먼저 진리의 질서에 두고, 점차 속까지 그 진리와 하나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핵심진리’가 강조하는 연단과도 매우 잘 연결됩니다. 처음에는 참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참된 목표는 평생 억지로 참기만 하는 데 있지 않고, 결국 선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점을 알면 사후 영체의 아름다움도 훨씬 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름다워진다는 것은 ‘천국 입성 전에 외모를 예쁘게 고쳐 준다’는 뜻이 아니라, 지상에서 시작된 선의 사랑이 사후에 더 자유롭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자연계의 늙음과 질병, 장애, 유전적 외모가 그 사람의 영원한 형상을 결정하지 않습니다. 그의 영적 인간 형상을 결정하는 더 깊은 것은 사랑과 지혜입니다.
이 부분은 특히 육체적 질병과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 매우 아름다운 희망을 줄 수 있습니다. 자연계의 몸이 손상되었다고 해서 영원한 인간 형상까지 손상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공용복 선생님처럼 거의 온몸의 움직임이 심하게 제한되었던 사람도 사후에는 그 자연적 마비를 영원히 안고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영적 형상은 육체의 병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내적 생명에 의해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것을 ‘병든 육체는 하찮은 껍데기일 뿐이다’라는 식으로 너무 거칠게 말해서도 안 되겠습니다. 자연적 육체 역시 주님께서 주신 중요한 기관이며, 이 세상에서 거듭남과 쓰임을 수행하는 데 꼭 필요한 최종적인 형상입니다. 육체를 경멸하는 것이 영적 신앙은 아닙니다. 다만 육체를 인간의 전부로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강의에서 ‘육체는 껍데기’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도 바로 이 점에서 약간 보완해서 들으면 좋겠습니다. 죽은 뒤 남은 시신이 더 이상 인간 자신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맞는 방향입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동안의 몸은 단순히 버릴 껍질이 아니라 영이 자연계에서 생각과 사랑을 실제 행위로 나타내기 위해 사용하는 매우 중요한 기관입니다. 자연계에서의 삶이 결정적인 이유도 영적 선택이 이 육체를 통해 실제 행동으로 완결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자연계의 몸과 사후의 영체는 단절보다는 연속성과 차이를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은 사후에도 동일한 사람이고 인간 형상을 유지하지만, 자연적인 병과 상처와 노화에 매여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내적인 사랑과 지혜가 외적 형상에 더 온전히 나타납니다.
강의가 영체의 크기까지 자연계 체격과 상당히 동일하게 시작한다고 설명하는 부분도 이 연속성을 강조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역시 최종적인 본질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천국에서 인간의 형상은 혈통이나 민족적 골격의 크기보다 내적 상태와 공동체의 질서에 더 깊이 관련됩니다. 지상에서 키가 컸다고 사후에도 영원히 더 큰 천사가 되고, 키가 작았다고 더 작은 영적 존재로 고정되는 것은 천국의 핵심 질서가 아닙니다.
외적 육체의 비교가 사라진다는 점도 매우 중요합니다. 자연계에서는 젊음과 외모, 건강과 체격이 사람의 가치처럼 취급되기 쉽습니다. 영계에서는 이런 자연적 기준이 근본적으로 뒤집힙니다. 아름다움은 화장이나 유전적 조건이 아니라 사랑의 형상이 됩니다.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자연계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사람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지혜를 가장 순수하게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이것은 천국에 관한 매우 아름다운 관점입니다. 나이가 많았든, 육체가 병들었든, 자연적 외모 때문에 평생 상처받았든 그것이 영원한 모습의 기준이 되지 않습니다. 선한 사랑과 지혜가 형상이 되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천사들의 깊은 지혜와 순진함이 그들의 얼굴에 젊음과 아름다움으로 나타나는 것을 설명합니다. 천국에서 젊음은 생물학적 연령이 아니라 생명의 상태에 가까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강의가 ‘선해질수록 아름다워지고 악해질수록 추해진다’고 말한 부분은 표현을 조금 다듬으면 매우 깊은 영적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사후에 선행을 많이 해서 미모를 보상받는다’가 아니라 ‘사람의 지배적인 사랑이 외적 인간 형상에 상응하여 나타난다’입니다.
여기에서 3강 앞부분에서 반복해서 나타난 두 흐름도 다시 확인됩니다. ‘핵심진리’는 선한 영이 중간 영역에서 계속 연단되어 선을 더 사랑하고 악을 더 미워하면서 그 결과 외모가 아름다워진다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가운데 ‘선한 사람에게 붙어 있는 이질적인 것이 제거되면서 이미 형성된 선한 내면이 더욱 자유롭게 나타난다’는 쪽에 중심을 둡니다. 외적 현상은 비슷하게 설명될 수 있지만, 무엇이 근본적으로 새로 형성되는가에서는 여전히 차이가 있습니다.
반대로 악한 영의 경우에는 두 설명이 상당히 가까워집니다. 지상에서 숨겨 두었던 악한 내면이 사후에는 점점 드러나며, 그 악에 상응하는 외모와 환경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핵심진리’가 말하는 하층부에서의 추악한 변화는 스베덴보리의 ‘속사람이 드러나는 제2 상태’와 상당히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따라서 이번 3강 6부의 핵심은 단순히 ‘영체가 어떻게 생겼는가’가 아닙니다. 오히려 ‘영계에서는 인간의 내적인 것이 얼마나 외적인 것과 하나가 되는가’입니다. 자연계에서 우리는 몸과 말과 표정을 이용해 상당 부분 속을 숨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계에서는 사랑이 얼굴이 되고, 의도가 몸짓이 되며, 지배적인 애정이 환경과 공동체로 나타납니다. 영계는 내적 상태가 형상으로 드러나는 세계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거듭남 역시 ‘얼굴을 하나로 만들어 가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사람들 앞에서만 친절하지 않고 혼자 있을 때도 이웃의 선을 바라며, 설교할 때만 겸손하지 않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때도 자기 공로를 내려놓으며,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과 실제 선택이 점점 하나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다시 공용복 선생님과 그 제자들의 삶이 조용한 참고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영계 구조와 스베덴보리의 영계론이 완전히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 ‘겉과 속이 같은 삶’을 중요하게 여기고 실제 그렇게 살려 노력했다면, 바로 그 삶의 방향은 영계에서 내면과 외면이 일치한다는 원리와 매우 깊게 통합니다. 교리의 차이를 살피면서도 이런 실제 열매를 가볍게 지나치지 않는 것이 이번 보정 해설에서 중요하겠습니다.
3강 6부를 한 문장으로 묶는다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사후의 참된 얼굴은 자연계의 외모가 아니라 그 사람이 사랑한 것의 얼굴이다.’ 자연계의 질병과 장애는 영원한 인간 형상을 손상시키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유롭게 받아들여 생명으로 삼은 사랑은 사후에도 우리와 함께 갑니다. 그리고 그것이 결국 우리의 모습과 공동체와 세계를 형성합니다.
그렇다면 영체의 외모에 대한 강의는 단순한 사후 호기심을 넘어 매우 현재적인 질문을 남깁니다. ‘나는 지금 어떤 얼굴을 만들어 가고 있는가?’입니다. 거울에 비친 자연적 얼굴이 아니라 주님의 빛 가운데 드러날 속사람의 얼굴입니다. 그 얼굴은 성형이나 나이, 건강으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오늘 무엇을 사랑하고, 어떤 생각을 기쁘게 받아들이며, 어떤 행동을 자유롭게 반복하고 있는가에 의해 형성됩니다.
그리고 이 질문 앞에서는 누구도 외적인 조건 때문에 불리하지 않습니다. 병상의 사람도, 건강한 사람도, 몸이 자유로운 사람도, 심각한 장애를 가진 사람도 동일합니다. 천국의 아름다움은 육체의 완전성에서 시작되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얼마나 자유롭게 받아들였는가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공용복 선생님의 생애를 알고 이번 강의를 듣는 것은 오히려 강의가 말하는 ‘영체’와 ‘인간의 본질’을 더 절실하게 이해하게 하는 하나의 배경이 됩니다.
다음 3강 7부에서는 이러한 영체의 변화와 연결되어 강의가 말하는 ‘사후 연단의 고통’을 좀 더 깊게 살펴보겠습니다. ‘핵심진리’는 지상에서 마치지 못한 연단을 사후 중간 영역에서 받을 때 상당히 고통스럽다고 강조합니다. 그때 중요한 질문은 ‘그 고통이 사람의 지배적인 사랑을 새롭게 만드는가, 아니면 이미 선을 향한 사람에게 붙어 있는 이질적인 것을 벗겨 내는가’입니다.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vastation, 곧 사후의 ‘벗겨짐’과 ‘핵심진리’의 연단을 구별하면 두 사후관의 차이가 더욱 선명해질 것입니다.
3강7부
‘정화의 불’과 연옥의 역사 - 사후의 고통은 사람을 새롭게 만드는가, 아니면 이미 형성된 것을 벗겨 내는가
3강의 일곱 번째 부분에서는 지금까지 설명해 온 ‘중간 영역’이 기독교 역사 안에서 어떻게 이해되어 왔는지를 살펴보면서, 특히 ‘정화의 불’과 연옥 사상을 다룹니다. 강사 목사님은 중간 영역이라는 생각이 어느 날 가톨릭교회에 의해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초기의 ‘하데스’ 이해에서 시작하여 교부 시대를 거치며 점차 체계화되었고, 이후 중세교회에서 ‘연옥’이라는 교리적 형태로 발전했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종교개혁에 이르러 마틴 루터 역시 중간 영역이라는 생각 자체를 처음부터 전면 부정한 것이 아니라, 연옥 교리가 당시 교회 안에서 어떻게 악용되고 있었는지를 비판했다고 해설합니다. 강의는 이를 ‘제3의 처소’라는 표현과 연결하면서, 중간 영역에 대한 관념과 중세 연옥 교리의 역사적 발전을 하나의 흐름으로 이해하려 합니다.
여기서 먼저 강의의 의도를 정확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 목사님은 가톨릭의 연옥 교리를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후에 영혼이 정화되는 어떤 과정이 있다’는 최초의 문제의식과, 훗날 그 과정에 대사나 대원, 공덕의 보고와 같은 여러 제도적 설명이 덧붙은 것을 구별하려 합니다. 즉 ‘연옥은 전부 거짓이다’와 ‘중세 연옥 교리가 그대로 옳다’라는 두 극단 사이에서, 그 밑바닥에 있었던 ‘사후 정화’라는 생각만은 회복할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 태도는 앞에서 계속 보아 온 ‘핵심진리’의 특징과도 일치합니다. 전통적인 교리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그 안에 어떤 본래의 영적 진리가 있었는지를 찾아내고, 그것을 자신들의 ‘중간 영역-연단-정결-천국’이라는 큰 구조 안에 다시 배치하려 합니다.
특히 강의는 중세에 ‘정화의 불’이 본래 영혼을 정화하는 목적에서 벗어나, 특정 종교행위나 공덕에 의해 그 기간을 단축하거나 면제받을 수 있다는 방향으로 변질된 것을 문제 삼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이 기도하거나 어떤 종교적 공덕을 행하면 죽은 영혼이 중간 영역에서 받아야 할 정화를 면제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대해서도 강사 목사님은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분명히 선을 긋습니다. 다만 살아 있는 사람들이 중보기도를 해 준다면, 그 영혼이 힘을 얻어 중간 영역에서 연단을 더 적극적으로 받을 수는 있을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에서 이 강의가 유지하려는 두 가지 원리가 다시 보입니다. 하나는 ‘각 사람은 반드시 자기에게 필요한 정결의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는 공의이고, 다른 하나는 ‘그 과정에서도 사랑과 중보가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자비입니다.
이 지점에서는 조금 천천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핵심진리’가 사후 연단을 말하는 중심에는 형벌보다는 정화가 있습니다. 사람이 지상에서 아직 ‘익은 열매’가 되지 못했다면 사후에도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지 않고 정결하게 하여 천국에 들어가게 하신다는 것이 이 체계의 일관된 주장입니다. 앞서 강사 목사님은 중간 영역 상층부에서의 연단에는 ‘상급이 없다’고 설명했습니다. 지상에서 육체를 가지고 자유롭게 말씀에 순종하는 동안에는 상급이 있지만, 사후의 연단은 오직 정결을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의 ‘정화의 불’도 죄 값을 대신 지불하는 형벌이라기보다 아직 남아 있는 불순한 것을 제거하는 과정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강의가 연옥의 역사에서 살리려는 중심이 무엇인지 분명해집니다.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사람을 죽은 뒤 불 속에 넣어 죄 값을 받아 내신다’는 그림이 아니라, ‘천국에 맞지 않는 상태가 아직 남아 있다면 그것을 정화해야 한다’는 직관입니다. 그리고 이 직관 자체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전혀 낯선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사후에 모든 사람이 즉시 최종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니며, 선한 영에게도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제거되어야 할 것들이 있을 수 있다고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종교 관념, 자연적인 습관, 선한 내면과 아직 일치하지 않는 외적인 것들이 벗겨지고 정리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핵심진리’의 ‘연단’과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사후의 ‘벗겨짐’ 사이에 아주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고통 자체가 사람을 무엇으로 만드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강사 목사님이 다른 강의 부분에서 ‘연단’을 정의할 때에는 매우 명확합니다. 범죄하기 쉬운 환경 가운데 놓였을 때 죄를 범하지 않고 빛의 열매를 맺도록 훈련받는 것이 연단이라고 합니다. 모욕을 받았을 때 같이 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사람을 위해 중보하고, 자기에게 악을 행한 사람에게도 선으로 대할 수 있어야 실제 연단을 받은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지상에서의 거듭남을 설명할 때 매우 실제적이고 중요한 정의입니다.
왜냐하면 지상에서의 시험에는 실제 자유로운 선택이 있기 때문입니다. 화를 낼 수 있는데 화를 내지 않을 수 있고, 거짓말하면 이익을 얻을 수 있는데 진실을 선택할 수 있으며, 복수할 수 있는데 용서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런 선택이 반복되면서 사람 안에 새로운 의지가 형성됩니다. 처음에는 진리가 명령하기 때문에 억지로 선을 선택하지만, 주님의 도움 가운데 계속 순종하면 마침내 선 자체를 사랑하는 새로운 애정이 자리 잡기 시작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연단’은 단순한 고난이 아니라 실제 거듭남의 과정입니다.
그런데 이 지상의 연단 개념을 사후 세계에 그대로 가져가면 질문이 생깁니다. 사후에도 사람이 아직 근본적으로 결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선과 악 사이를 선택하며 새로운 지배적인 사랑을 형성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핵심진리’는 대체로 그렇다고 보는 방향입니다. 지상에서 다 이루지 못한 성화가 중간 영역 상층부에서도 계속되고, 그 과정을 통해 선을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게 되며, 결국 영혼의 할례를 받고 익은 열매가 되어 천국으로 들어간다는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는 이 부분이 달라집니다. 사후에도 변화가 있고, 정화가 있고, 가르침이 있으며, 때로는 고통스럽게 느껴질 수 있는 벗겨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자연계에서 형성되지 않았던 새로운 지배적인 사랑을 처음부터 만들어 내는 과정이 아닙니다. 이미 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그 선과 맞지 않는 것을 제거하고, 악을 사랑하는 사람에게서는 지상에서 유지하고 있던 외적인 선과 위선의 가면이 벗겨지는 과정입니다. 선한 사람은 더 온전히 선한 자기 자신으로, 악한 사람은 더 온전히 악한 자기 자신으로 드러납니다.
스베덴보리가 사용하는 vastation이라는 개념을 이곳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단순히 ‘황폐화’라는 어감으로만 읽으면 매우 부정적으로 들리지만, 사후 상태에서는 사람에게 붙어 있는 서로 맞지 않는 것들이 제거되는 과정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선한 사람에게는 그가 지상에서 잘못 알고 있었던 거짓과 자연적인 결함이 벗겨지고, 악한 사람에게는 겉으로 가지고 있던 선과 진리의 외관이 벗겨집니다. 그래서 그가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는지가 더욱 명료해집니다. 중요한 것은 이 과정이 ‘새로운 종류의 사람을 만들어 낸다’기보다 ‘실제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드러내고 순수하게 한다’는 데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상에서 성질이 급하고 때때로 화를 내었지만, 그 화를 옳다고 여기지 않고 늘 회개하며 실제로는 다른 사람의 선을 바랐던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사람 안에는 자연적인 거칠음과 습관이 많이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사후에 그런 것이 제거되는 과정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정화입니다. 그리고 그런 제거가 때로 불편하거나 고통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익숙한 것이 벗겨지는 것은 언제나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이 이 사람을 ‘악을 사랑하던 사람에서 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바꾸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생명의 방향은 선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반대로 평생 아주 친절하고 경건해 보였지만 실제로는 자기 명예와 지배를 가장 사랑했던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사후에 겪는 ‘벗겨짐’은 전혀 다른 성격을 갖습니다. 겉으로 유지하던 친절과 경건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고, 실제 속의 사랑이 드러납니다. 그것은 정화하여 천국 사람이 되게 하는 연단이 아니라 실제 내면을 드러내는 과정입니다. 이 차이를 놓치면 선한 영에게 일어나는 사후 정화와 악한 영에게 일어나는 사후 드러남을 모두 하나의 ‘연단’이라는 말로 묶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이번 부분에서 가장 중요한 구별 가운데 하나입니다. ‘고통’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고통의 영적 성격을 동일하게 볼 수 없습니다. 지상에서의 시험은 자유 속에서 새로운 선택을 하며 거듭남이 형성되는 고통일 수 있고, 선한 영에게 사후에 나타나는 고통은 이미 선과 결합할 수 없는 이질적인 것이 벗겨질 때의 불편일 수 있으며, 악한 영에게 나타나는 고통은 자기 악한 사랑이 다른 악들과 충돌하고 신적 질서에 의해 제한되면서 일어나는 결과일 수 있습니다. 겉으로 모두 ‘고통’이라고 할 수 있지만 영적인 원인과 목적은 다릅니다.
따라서 ‘정화의 불’이라는 표현도 상응으로 더 깊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말씀에서 ‘불’은 언제나 물리적인 불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좋은 의미에서는 주님의 신적 사랑을, 반대 의미에서는 자기 사랑과 탐욕의 불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사람이 어떤 불 가운데 있느냐는 결국 무엇을 사랑하느냐와 연결됩니다. 사후에 사람을 정화하는 것을 자연계의 화염 속에서 일정 기간 고통받는 것으로만 상상하면 영적인 의미를 자연적인 형벌 이미지로 좁힐 위험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주님의 신적 진리가 사람에게 비칠 때, 그 진리와 맞지 않는 것이 드러나고 분리되는 것을 더 중요하게 봅니다. 선한 사람에게는 그 빛이 해방의 빛이지만, 거짓과 악을 자기 생명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같은 빛이 고통스럽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주님이 다른 빛을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상태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태양빛이 건강한 눈에는 기쁨이지만 병든 눈에는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것과 어느 정도 비슷합니다.
이 점을 붙들면 ‘정화’가 하나님의 보복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더 분명해집니다. 하나님께서 ‘지상에서 아직 충분히 거룩해지지 않았으니 이제 고통을 주어 값을 치르게 하겠다’는 방식으로 행동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언제나 선과 구원을 향해 역사하십니다. 다만 사람 안에 주님의 질서와 맞지 않는 것이 있을 때 그것이 제거되는 과정이 사람의 상태에 따라 어렵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목적은 고통 자체가 아니라 자유와 질서입니다.
여기에서 공용복 선생님의 생애를 알고 있는 지금, ‘고통과 연단’을 더욱 조심스럽게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거의 온몸이 마비되어 오랜 세월을 병상에서 살아야 했던 한 사람의 삶이 이 공동체의 ‘연단’이라는 언어 뒤에 놓여 있다고 해서, 모든 고통을 곧 하나님께서 사람을 성화시키기 위해 직접 보내신 훈련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고통받는 사람에게 매우 무거운 신앙적 짐을 지울 수 있습니다. 병을 주시는 분과 병 가운데서도 사람을 붙드시는 분을 너무 쉽게 동일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신적 섭리에서는 ‘허용’이라는 구별이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은 악과 고통을 원하지 않으시지만 인간의 자유와 자연계의 질서 가운데 그것을 허용하시며, 허용된 것 안에서도 가능한 최대의 선을 끊임없이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이 병은 하나님께서 나를 깨뜨리려고 직접 주신 것이다’라고 단정하기보다, ‘이 병이라는 현실 속에서도 주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시며, 이것조차 나의 영원한 선을 위해 사용하실 수 있다’고 말하는 편이 주님의 사랑을 더 온전히 보존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공용복 선생님의 생애에서 가장 깊이 볼 것은 고통의 양이 아닐 것입니다. 거의 전신의 기능을 잃어 가는 고통 그 자체가 그분을 거룩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그 상황 가운데서 어떻게 하나님을 찾았고, 자신의 생명을 어떻게 이해했으며, 다른 사람의 영혼을 향한 관심을 어떻게 잃지 않았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고난은 환경이었고, 그 환경 가운데 이루어진 사랑과 선택이 영적인 내용이었습니다.
강의가 ‘연단’의 실질적인 기준으로 ‘범죄할 수 있는데 범죄하지 않고 선을 행하는 것’을 제시한다는 점은 그래서 다시 귀하게 보입니다. 단순히 ‘나는 병이 많으므로 많이 연단받았다’, ‘나는 어려운 가정에서 살았으므로 영적으로 높은 사람이다’라고 말할 수 없게 하기 때문입니다. 고난의 크기와 영적 성숙의 크기를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그 환경에서 자기 사랑을 따라 살았는가,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았는가가 중요합니다.
이 기준은 이 공동체 안에서 ‘연단’이라는 말을 너무 쉽게 사용하는 것에 대한 자기 경계이기도 합니다. 강사 목사님 자신도 ‘연단받고 있다’는 말을 쉽게 하면서 실제로는 죄성과 정욕에 따라 반응한다면 그것을 참된 연단이라고 할 수 없다고 지적합니다. 심지어 자기 영적 수준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을 경계합니다. 이것은 ‘익은 열매’, ‘이기는 자’, ‘영혼의 할례’ 같은 높은 단계의 언어가 영적 자기과시로 흐를 위험을 공동체 내부에서도 어느 정도 의식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 점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완덕’, ‘이기는 자’, ‘신인 합일’ 같은 언어는 사람을 실제 거룩함으로 촉구하는 매우 강한 힘을 가질 수 있지만, 동시에 ‘나는 이미 그 단계에 들어갔다’는 자기평가와 결합하면 매우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자기 선을 자기에게 돌리지 않는 겸손이 함께 깊어져야 합니다. 참으로 주님과 가까워질수록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은 선하지 않으며 모든 선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더 분명히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연단의 열매는 ‘나는 이제 많이 연단받았다’는 의식보다 오히려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 나타날 것입니다. 전보다 덜 쉽게 화를 내고, 자기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아도 덜 흔들리며, 상대의 실패를 즐기지 않고, 자기에게 상처 준 사람의 선까지 바랄 수 있으며, 자기 공로를 말하고 싶은 마음이 줄어드는 것입니다. 강의가 모욕한 사람을 위해 오히려 중보기도하는 모습을 연단의 열매로 예시하는 것도 바로 이런 방향입니다.
여기에서 ‘살아 있는 사람의 중보기도가 사후 영혼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라는 강의의 독특한 설명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강사 목사님은 그 기도가 정화의 과정을 ‘면제’하지는 못하지만, 영혼에게 힘을 주어 더 적극적으로 연단받게 할 가능성은 있다고 말합니다. 다만 이 부분은 현재 제공된 강의 자료만으로는 정확히 어떤 영계 원리와 체계적 근거에 의해 그렇게 설명하는지 충분히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해설에서도 이 주장을 더 확대하여 단정하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강의는 그렇게 이해한다’고 정확히 기록해 두는 정도가 공정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에서는 죽은 사람의 지배적인 사랑을 살아 있는 다른 사람의 기도나 공덕이 대신 바꾸어 주는 구조가 중심적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삶과 사랑을 가지고 사후에 들어가고, 그 상태에 따라 준비됩니다. 물론 모든 선한 기도는 주님께로 향하고 기도하는 사람 자신에게도 선한 영향을 미치며, 신적 섭리 안에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여러 쓰임에 기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기도가 다른 사람의 사후 정화 과정을 단축하거나 그 사람의 내적 상태를 직접 바꾼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데에는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히려 살아 있는 동안의 중보기도가 왜 그렇게 중요한지를 더 분명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아직 자연계에 있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사랑으로 권면하고, 용서하고, 필요한 도움을 주는 것은 그가 자유롭게 선을 선택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는 실제 쓰임이 될 수 있습니다. 자연계가 지배적인 사랑이 형성되는 특별한 세계라면, 지금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선한 환경을 만들어 주는 일이 더욱 중요해집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경회 공동체 자체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서로가 더 높은 단계에 도달했는지를 평가하기보다, 서로가 실제로 선을 선택하기 쉽도록 돕고, 실패했을 때 정죄보다 회복을 돕고, 진리를 삶으로 살아낼 수 있도록 서로를 붙드는 것이 더 천국적인 공동체의 모습일 것입니다. ‘연단’은 반드시 혼자 견디는 영적 고독훈련일 필요가 없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참아 주며 진리를 실천하는 것 자체가 매우 실제적인 시험과 거듭남의 환경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강의가 가정과 직장, 교회와 인간관계 자체를 모두 ‘광야’와 연결해 보는 방식에도 중요한 통찰이 있습니다. 실제 강의 다른 부분에서는 가정에서의 갈등, 직장에서의 어려움, 교회 안에서 만나는 여러 사람들까지 모두 연단의 환경이 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문제는 갈등이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가운데 내가 어떤 반응을 선택하는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현실적인 영성입니다.
다만 ‘그 사람을 하나님께서 나를 연단시키려고 일부러 보내셨다’는 식으로 모든 갈등을 곧바로 신적 계획의 직접적인 산물로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타인의 악은 그 사람의 자유로운 선택일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그 악을 원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상황 속에서도 내가 악으로 악을 갚지 않고 선을 선택하도록 힘을 주시며, 허용된 악으로부터 선을 이끌어 내실 수 있습니다. 이 차이는 작아 보이지만 하나님의 성품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보면 진짜 ‘정화의 불’은 결국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사람의 자기 사랑과 거짓을 드러내고 질서 있게 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사람을 고문하여 거룩하게 만들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신적 사랑과 진리를 끊임없이 주시고, 사람이 자유롭게 그것을 받아들일 때 그 빛과 열이 자기 사랑에 속한 것들을 드러내며, 사람은 그것을 주님의 도움으로 거절합니다. 거듭남의 고통은 주님의 사랑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랑에 저항하는 우리 proprium 때문에 생깁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불’의 이미지도 훨씬 복음적으로 바뀝니다. 불이 하나님께서 화가 나서 던지시는 형벌의 도구가 아니라, 주님의 사랑이 우리 안의 이질적인 것과 만날 때 경험되는 정화의 긴장일 수 있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것은 언제나 생명과 사랑이지만, 우리가 붙들고 있는 자기 사랑은 그것을 위협으로 경험할 수 있습니다. 자기 뜻을 내려놓는 것이 아프고, 자기 의를 포기하는 것이 아프며, 오래 사랑해 온 악을 버리는 것이 아픈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핵심진리’가 연단을 통하여 ‘익은 열매’가 된다고 말하는 것도 한 층 더 내적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익음은 고통의 양으로 측정되지 않습니다. 주님의 생명이 열매 안에 얼마나 자유롭게 나타나느냐입니다. 설익은 과일에 매를 많이 때린다고 익는 것이 아니듯, 사람에게 고난이 많다는 것 자체가 사람을 익게 하지 않습니다. 생명이 안에서 자라고 햇빛과 물을 받아야 열매가 익습니다. 영적으로도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자라고, 그 사람이 자유롭게 그것을 받아 삶으로 살아갈 때 익어 갑니다.
이 비유는 공용복 선생님의 삶을 바라보는 데도 좋은 균형을 줄 수 있습니다. 그의 삶이 귀한 것은 고통이 상상을 초월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고통 속에서도 어떤 생명이 자라났는지를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이 실제로 제자들에게까지 이어져 수십 년 후에도 사람들이 그분의 가르침을 펼쳐 놓고 자기 삶을 살피게 한다면, 적어도 그 생애가 공동체에 남긴 영향은 단순한 병상 고난 이상의 것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 존중 때문에 ‘핵심진리’의 모든 사후 연단 설명을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분이 평생 추구했던 것이 진리였다면, 가장 깊은 존중은 진리를 계속 더 정확하게 살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사후 상태론은 하나의 중요한 구별을 제공합니다. 지상의 시험과 사후의 정화는 모두 사람에게 불편하고 고통스럽게 느껴질 수 있지만 같은 과정이 아닙니다. 지상의 시험에서는 새로운 의지가 자유로운 선택 가운데 형성되고, 사후의 정화에서는 이미 형성된 선한 의지와 맞지 않는 것이 벗겨집니다.
이 구별이 선명해지면 사후 세계가 ‘한 번 더 기회를 주는 두 번째 지상’처럼 보이지 않게 됩니다. 동시에 ‘죽는 순간 모든 것이 기계적으로 끝나 아무런 준비도 변화도 없다’는 경직된 사후관에서도 벗어날 수 있습니다. 지상생활에는 독특하고 결정적인 역할이 있고, 사후에도 주님의 자비로운 준비와 가르침과 정화가 있습니다. 두 세계의 역할이 서로 다를 뿐입니다.
이 점은 현재의 삶을 더욱 귀하게 만듭니다. 지금은 단지 천국에서 받을 상을 적립하는 시간이 아니라, 선을 자유롭게 선택하면서 그것이 내 사랑이 되도록 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누군가 나를 모욕했을 때 그 사람을 미워하는 쪽과 선을 바라는 쪽 사이에서 실제로 선택할 수 있고, 그 선택이 내 생명의 방향을 조금씩 형성합니다. 그래서 강사 목사님이 ‘범죄하기 쉬운 환경에서 범죄하지 않는 것’을 연단의 핵심으로 강조한 것은 자연계에서의 거듭남을 매우 실제적으로 표현한 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이번 3강 7부에서 ‘정화의 불’을 둘러싼 가장 중요한 질문은 ‘얼마나 아픈가’가 아닙니다. ‘무엇이 정화되는가’입니다. 잘못된 생각과 외적 습관이 정화되는가, 아니면 지배적인 사랑 자체가 새롭게 만들어지는가. 전자라면 스베덴보리의 사후 정화와 상당히 만날 수 있고, 후자라면 두 체계는 분명 갈라집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질문은 ‘누가 사람을 정화하는가’입니다. 사람이 고통을 많이 견디어 스스로 정결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신적 사랑과 진리가 사람 안에 역사하고 사람이 자유롭게 그것에 협력할 때 정화가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도 고통 자체를 숭배해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 역시 ‘아프기 때문에 거룩한 것’이 아니라 자기 사랑을 버리고 주님의 사랑을 따르는 길이기 때문에 거룩합니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강의가 중세 연옥 교리의 변질을 비판하면서 ‘영혼의 정화’라는 본래 목적을 회복하려는 노력에는 충분히 의미가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정화를 ‘형벌의 불을 견디며 성화를 완성하는 과정’보다 ‘주님의 빛 가운데 사람의 참된 사랑이 드러나고 그 사랑과 맞지 않는 것이 벗겨지는 과정’으로 이해하게 합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도 함께 보존됩니다. 주님은 악을 선이라 부르지 않으시고 거짓을 진리라 부르지 않으십니다. 그렇다고 인간에게 고통을 주어 값을 받아 내시는 분도 아닙니다. 모든 사람을 선으로 인도하시고, 선을 자유롭게 받아들인 사람에게서 그것과 맞지 않는 것을 제거하시며, 인간이 선택한 사랑 자체를 끝까지 존중하십니다.
따라서 3강 7부를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사후의 정화는 지상에서 형성되지 않은 천국적 사랑을 고통으로 새로 만들어 내는 과정이라기보다, 이미 주님을 향해 형성된 사랑이 온전히 드러나도록 그 사랑과 맞지 않는 것을 벗겨 내는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사후 상태론에 더 가깝습니다.’
그리고 이 구별은 오히려 ‘핵심진리’가 그렇게 소중히 여기는 현재의 연단을 더욱 중요하게 만듭니다. 사람의 사랑이 실제로 형성되는 곳이 바로 지금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서 내 앞에 놓인 작은 선택들이 단순한 일상의 사건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방향을 형성하는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광야’를 피해야 할 저주라고만 볼 필요도 없지만, 고통 자체를 거룩하게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광야에서 누구의 생명을 받아 어떻게 살아가는가입니다.
다음 3강 8부에서는 강의가 다시 영계의 ‘환경’으로 시선을 옮기면서 매우 독특한 주장을 펼칩니다. 시대가 변하면서 입신 체험자들이 영계에서 아파트와 자동차, 도로와 현대적인 문물을 보게 된 것을 근거로 ‘영계의 문명도 자연계의 문명 발전에 따라 발전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에서는 ‘핵심진리’의 영계를 실제적 생활세계로 보는 직관과 스베덴보리의 영계가 다시 가까이 만나지만, ‘왜 영계에 집과 거리와 여러 사물이 나타나는가’를 설명하는 근본 원리에서는 ‘문명 발전’과 ‘상응’이라는 매우 중요한 차이가 드러날 것입니다.
3강8부
영계도 ‘문명 발전’을 하는가 - 아파트와 자동차가 있는 천국, 그리고 ‘상응’으로 다시 보는 영계의 환경
이번 부분에서 강사 목사님은 ‘영계의 구조와 실상’ 가운데서도 상당히 독특하고 흥미로운 주장을 꺼냅니다. 앞에서는 영계에도 자연계와 비슷하게 산천초목과 동식물이 있고, 천국에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환경이, 지옥에는 어둡고 추악한 환경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다만 그것들은 자연계의 물질이 아니라 영적인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강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연계의 물질문명이 발달하는 것처럼 영계의 환경도 발달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강사 목사님 자신도 처음 이 내용을 들었을 때 ‘천국이 완성된 세계가 아니라 발전한다고?’ 하며 상당히 이상하게 느꼈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합니다.
그 근거로 제시되는 것이 시대별 입신 체험자들의 증언입니다. 강의에 따르면 수백 년 전에 영계를 보았다고 증언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던 당시의 생활환경과 문명 수준에 가까운 모습을 이야기했는데, 현대의 체험자들의 증언에는 이전 시대에 없던 아파트, 텔레비전, 자동차, 고속도로 같은 것이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사람들의 천국 간증에는 이런 현대 문명이 없는데 왜 오늘날의 간증에는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영계의 환경 역시 자연계 문명의 발전과 더불어 발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에서 강의가 제시하는 논리는 나름대로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지상 인간의 두뇌와 기술을 통하여 물질문명을 발전시키시고, 그 시대의 문명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사후 영계에 들어가게 되면 그들이 살기에 적합한 환경도 영계에 조성하신다는 것입니다. 현대 문명에서 살던 사람이 사후에 조선 시대와 같은 환경의 영계에 들어간다면 상당히 불편하고 적응하기 어려울 것이지만, 조선 시대 사람이 현대적인 환경에 들어오는 것은 오히려 적응할 수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자연계 문명을 먼저 발전시키신 뒤 그것을 바탕으로 영계의 환경도 발전시키신다는 설명입니다.
강의는 여기서 더 나아가 천국의 처소도 태초부터 완제품처럼 전부 만들어져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천국에 들어갈 영혼들을 먼저 준비하시고, 그들이 들어가 살아갈 영계의 처소도 하나님께서 계속 만들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신 창조주께서는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새로운 것을 만드실 수 있으므로, 시대의 변화에 맞춰 영계 환경을 조성하시는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는 논리입니다. 이 설명 안에는 ‘천국은 살아 있는 세계이지 과거 어느 한 시대에 정지된 박물관이 아니다’라는 매우 생생한 직관이 들어 있습니다.
이 부분을 곧바로 이상한 이야기라고 밀어내기보다 먼저 그 문제의식을 충분히 따라가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실제로 천국을 생각할 때 많은 그리스도인이 무의식적으로 성경 시대의 풍경을 영원한 천국의 모습으로 상상하기 쉽습니다.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고대식 건물과 금길 사이를 걷고, 아무런 생활 변화 없이 영원히 찬송만 하는 정적인 세계를 떠올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사후에도 인간이고 공동체를 이루며 실제 생활을 한다면, ‘천국은 인간의 살아 있는 세계인가, 아니면 어느 한 시대의 생활양식이 영원히 고정된 세계인가’라는 강의의 질문 자체는 충분히 생각해 볼 가치가 있습니다.
더욱이 공용복 선생님이 거의 온몸의 기능을 잃어 가는 병상에서 오랜 세월을 살았다는 사실을 알고 이 대목을 들으면, 이 공동체가 왜 영계를 막연한 추상세계가 아니라 ‘실제로 사람이 살아가는 세계’로 그토록 구체적으로 말하려 했는지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육체의 활동 세계가 극도로 제한된 사람에게 사후 세계는 관념적인 ‘영혼의 안식처’ 정도로만 머물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사후에도 인간이 인간으로 살아가며, 생활하고, 관계를 맺고, 실제 환경 가운데 존재한다는 믿음은 상당히 절실한 의미를 가졌을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생애적 배경이 ‘영계에 실제 자동차가 있다’는 세부 주장을 증명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왜 이 문제를 그토록 구체적으로 다루었는지를 이해하게 해 주는 배경은 됩니다.
그리고 ‘영계가 실제 인간의 생활세계다’라는 큰 출발점에서는 스베덴보리 역시 이 강의와 매우 가까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천국은 형체 없는 의식만 떠다니는 세계가 아닙니다. 그곳에는 인간 형상을 가진 천사들이 있고, 공동체와 집, 길과 광장, 정원과 숲, 산과 강, 의복과 여러 생활환경이 있습니다. 천사들은 서로 대화하며 쓰임을 수행하고, 지식을 배우며, 다른 존재를 섬기고, 자기 공동체의 삶을 살아갑니다. 이런 의미에서 ‘영계에도 실제 생활환경이 있다’는 강의의 전제는 스베덴보리의 영계론과 상당히 잘 만납니다.
그러나 ‘왜 그런 환경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들어가면 두 설명 사이에 매우 중요한 차이가 나타납니다. ‘핵심진리’의 이번 설명에서는 자연계의 인간이 먼저 새로운 문명을 개발하고, 그 문명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영계로 들어오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영계에도 그것과 유사한 환경을 마련하시는 방향이 강합니다. 말하자면 ‘자연계 문명의 발전 → 영계 환경의 발전’이라는 흐름입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에게 영계의 집과 거리와 정원과 여러 형상은 자연계 문명을 복제한 것이 아니라, 그곳에 사는 영과 천사의 내적인 사랑과 생각이 ‘상응’에 의해 외적인 형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차이는 매우 큽니다. 영계에서 집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핵심진리’의 설명을 자연적으로 받아들이면 인간이 지상에서 집이라는 생활공간을 발전시켜 왔기 때문에 영계에도 그 시대 사람에게 맞는 집이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천사의 집은 단지 비와 추위를 피하기 위한 주거 시설이 아닙니다. 그 집의 형태와 아름다움, 내부의 질서 자체가 그 천사의 내적 선과 지혜, 그가 속한 공동체의 사랑과 쓰임에 상응합니다. 외적 환경이 내적 상태의 표현인 것입니다.
정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천국에 아름다운 꽃과 나무가 있는 이유가 천사들에게 자연계의 좋은 관광지를 재현해 주기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꽃과 나무와 열매는 그곳 천사들의 선한 애정과 지혜, 진리에 대한 인식과 그 결실에 상응하여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환경은 인간의 심리적 편안함을 위한 장식물이기 전에 내적 세계가 외적으로 보이는 형상입니다.
이것이 ‘상응’의 핵심입니다. 영계에서는 속의 것이 밖으로 나타납니다. 앞 6부에서 사람의 얼굴이 그 사람의 사랑과 애정의 형상이 된다고 살펴보았는데, 그 원리가 환경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사람의 사랑이 얼굴이 되고, 그 사랑과 지혜가 집과 정원과 주변 세계에도 상응하여 나타납니다. 그래서 영계는 ‘내가 사는 세계’이면서 동시에 놀라운 의미에서 ‘내 안의 세계가 밖으로 드러나는 세계’입니다.
그렇다면 현대의 어떤 영계 체험자가 ‘자동차’나 ‘고속도로’를 보았다고 증언한다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핵심진리’의 이번 설명은 비교적 직접적입니다. 현대 문명에서 자동차와 고속도로가 만들어졌고 현대인이 그것에 익숙하기 때문에 영계에도 그에 해당하는 환경이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먼저 다른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 사람이 실제로 본 형상은 무엇을 나타내고 있었는가?’입니다.
영계에서 ‘이동’은 특히 중요합니다. 자연계에서는 내가 대전에서 서울로 가려면 실제 공간을 자동차나 기차로 통과해야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영계에서 공간은 근본적으로 상태에 따라 나타납니다. 서로 비슷한 사랑과 생각을 가진 존재들은 가까이 나타나고, 상태가 다른 존재들은 멀리 떨어져 보입니다. 영의 생각과 애정의 상태가 변하면 장소가 바뀌는 것처럼 경험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영계에서 어떤 이동수단과 비슷한 형상이 나타났다면, 자연계 자동차와 동일한 기계가 이동에 꼭 필요해서 존재한다고 단정하기 전에 그 형상이 어떤 상태 변화와 쓰임에 상응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와도 같은 원리입니다. 요한이 영계에서 말과 병거, 검과 성, 강과 나무, 보좌와 면류관을 실제로 보았다고 해서 그것들이 자연계의 군마와 쇠붙이와 석조 건축물을 그대로 복제한 것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가 본 것은 실제 영적 형상이지만, 그 형상은 동시에 내적인 영적 실재에 상응합니다. 따라서 ‘실제로 보았다’와 ‘자연계와 똑같은 물건이다’는 같은 말이 아닙니다.
바로 이 구별이 현대의 입신 간증을 판단할 때에도 매우 중요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천국에서 ‘자동차 같은 것’을 보았다고 증언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 체험을 곧바로 거짓이라고 할 필요도 없고, 반대로 ‘그러므로 천국에 내연기관이나 전기차가 실제 도로교통법에 따라 운행되고 있다’고 결론 내릴 필요도 없습니다. 그 사람이 영적인 형상을 자기 자연계의 기억과 개념으로 인식하고 표현했을 가능성도 생각해야 합니다. 영적 형상을 자연적 언어로 전달하는 순간 체험자의 기억과 문화적 틀이 개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생각하면 왜 시대별 영계 체험에 서로 다른 생활상이 나타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영계 문명이 실제로 시대별로 기술 발전을 한다’는 설명 외에 다른 가능성이 생깁니다. 고대인이 빠른 이동과 관련된 영적 형상을 경험했다면 그것을 말이나 병거에 가까운 모습으로 인식하고 설명했을 수 있고, 현대인은 유사한 영적 상태를 자동차나 고속도로의 이미지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해석 가능성이지 개별 체험을 전부 그렇게 단정하자는 뜻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현대적 물건이 간증에 등장한다 → 영계가 자연계 기술을 따라 발전한다’는 결론 사이에는 해석해야 할 한 단계가 더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훨씬 근본적인 세계관의 차이가 있습니다. ‘핵심진리’의 이번 설명에서는 지상의 물질문명이 일종의 영계 문명 발전의 모델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지식과 기술을 통해 자연계의 문물을 먼저 발전시키시고, 그것을 바탕으로 영계 환경도 발전시키신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론에서는 관계가 오히려 반대 방향에서 시작됩니다. 자연계는 영계와 완전히 독립된 세계가 아니라, 영적인 원인이 자연적인 결과와 최종 형상으로 내려오는 질서 안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연계에 나무가 먼저 생겼고 하나님께서 그 나무를 보고 천국에도 비슷한 나무를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나무라는 자연적 형상 자체가 생명과 성장, 지식과 지각 같은 영적 실재에 상응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말씀에서도 나무가 사람과 교회, 지식과 지혜를 표상할 수 있습니다. 물과 강, 해와 달, 금과 은, 산과 골짜기 역시 같은 원리입니다. 자연계가 영계에 모델을 제공하기 전에, 자연계 자체가 영적인 질서를 최종적으로 표현하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천국에는 발전이 없는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여기에서는 ‘발전’이라는 말을 정확히 구별해야겠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천국은 결코 정지된 세계가 아닙니다. 천사들은 영원히 사랑과 지혜에서 완전해져 갑니다. 주님은 무한하시고 피조물은 유한하므로, 천사는 영원히 주님의 사랑과 지혜를 더 깊이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천국에는 놀라운 의미의 영원한 진보가 있습니다.
다만 그 진보의 중심이 ‘마차 시대에서 자동차 시대, 자동차 시대에서 더 첨단 교통수단 시대’라는 기술문명 발전에 있지 않습니다. 천국의 참된 진보는 사랑과 지혜, 그리고 쓰임의 진보입니다. 주님을 더 깊이 사랑하고, 서로의 선을 더 기뻐하며, 더 지혜롭게 쓰임을 수행하는 방향으로 영원히 완전해집니다. 그리고 그 내적 상태가 변하면 그에 상응하는 외적 환경도 더욱 아름답고 풍성하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외적 환경의 변화가 전혀 없다는 뜻이 아니라, 변화의 원인이 기술적 발명보다 내적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차이는 상당히 중요합니다. ‘핵심진리’에서는 현대인이 현대식 환경에 더 잘 적응할 수 있으므로 영계도 현대적으로 바뀐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천국에서 사람을 서로 결합시키는 가장 중요한 것은 문화적 익숙함이 아니라 사랑의 상태입니다. 조선 시대에 살았던 사람과 21세기를 살았던 사람이 주님과 이웃을 향한 같은 종류의 선한 애정을 가졌다면, 자연계에서는 수백 년의 문화적 거리가 있어도 영계에서는 매우 가까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같은 시대, 같은 나라, 같은 교회에서 수십 년 함께 살았어도 실제 사랑이 다르면 사후에는 멀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대인이 조선 시대 천국에 가면 불편하지 않겠는가?’라는 강사 목사님의 질문에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약간 다른 답을 할 수 있습니다. 영계에서 진정한 적응을 결정하는 것은 생활기기의 세대 차이보다 사랑과 생각의 조화입니다. 더구나 영계의 외적 환경 자체가 그 사람의 상태에 상응하여 나타난다면, 천사가 자기 내적 상태와 전혀 맞지 않는 시대착오적 생활공간에 억지로 배치될 이유도 없습니다.
강의가 ‘천국의 처소를 하나님께서 지금도 계속 만들고 계신다’고 설명하는 부분도 이런 관점에서 다시 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하나님께서 일종의 천국 건설현장에서 미래 입주자를 위해 아파트 단지를 계속 증축하신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새로운 천국 공동체가 형성되고 천사들의 상태와 쓰임이 달라지면 그에 상응하는 환경이 함께 나타납니다. 처소는 그 사람과 공동체의 내적 상태와 분리된 독립 건축물이 아닙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요14의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라는 말씀도 풍성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천국에 미리 지어진 무수한 객실이 있다는 의미에만 머무르지 않고, 주님의 나라에는 셀 수 없이 다양한 종류의 선과 사랑, 쓰임의 상태가 있으며 각 사람에게 합당한 천국적 삶이 있다는 뜻으로도 깊어질 수 있습니다. 천국의 다양성은 획일적인 한 생활양식 속에서 모두 똑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무수한 다양성이 완전한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쓰임’이 다시 중요해집니다. 강의는 뒤이어 자연계의 모든 문명을 영계에 그대로 옮기는 것은 아니며, 천국에 필요하고 선하게 사용될 수 있는 것만 있다고 설명합니다. 싸움이 없으므로 무기가 필요 없고, 질병과 부상이 없다면 자연계에서 사용하는 의료기구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는 식입니다. 이 생각에는 ‘천국의 모든 것은 목적과 필요에 따라 존재한다’는 좋은 직관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천국에서도 모든 것은 쓰임과 연결됩니다. 천국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쓰임의 질서입니다. 다만 ‘필요’라는 말 역시 자연계보다 깊게 이해해야 합니다. 천국의 꽃은 천사가 심심해서 감상할 장식물이 필요하기 때문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집도 비바람을 막아야 해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천사들의 내적 사랑과 지혜와 쓰임에 상응하여 나타나는 형상입니다. 따라서 천국의 모든 외적인 것에는 그 안쪽에 영적 의미와 쓰임이 있습니다.
이 관점은 공용복 선생님의 병상생활과도 뜻밖에 연결됩니다. 자연계에서는 어떤 사람이 몸을 얼마나 자유롭게 움직이고 얼마나 많은 도구를 사용할 수 있는지가 생활의 가능성을 크게 좌우합니다. 그러나 영계에서 사람의 삶을 결정하는 것은 그런 자연적 기능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공용복 선생님처럼 육체의 대부분이 자유롭지 않았던 사람도 사후에는 자연계에서 잃었던 기능을 ‘최신식 천국 시설’로 보상받는다는 정도보다 훨씬 깊은 자유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영적 몸 자체가 더 이상 자연적 마비에 묶여 있지 않고, 그의 내적 사랑과 쓰임에 맞는 세계에서 살아가는 자유입니다.
이것은 천국을 ‘지상에서 못 누린 것을 더 좋은 버전으로 보상받는 곳’으로만 생각하지 않게 합니다. 물론 천국에는 자연계와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행복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행복의 본질은 지상에서 없었던 고급 주택과 자동차와 편의시설을 무한히 제공받는 데 있지 않습니다. 천국의 행복은 주님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며 자기에게 맞는 쓰임을 자유롭게 수행하는 데 있습니다. 외적인 아름다움은 그 내적 행복에 상응하여 따라오는 것입니다.
이 점은 이번 강의의 ‘영계 문명 발전론’을 비판하기 위한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안에 있는 소중한 직관을 더 깊게 가져가려는 것입니다. 강의가 지키고 싶어 하는 것은 ‘천국은 살아 있는 인간들의 실제 세계이며, 인간에게 낯설고 무의미한 죽은 공간이 아니다’라는 믿음입니다. 이 직관은 충분히 귀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천국을 자연계보다 오히려 더 생생하고 실제적인 세계로 증언합니다.
다만 ‘그 실제성이 무엇에서 나오는가’를 설명하는 원리가 다릅니다. ‘핵심진리’에서는 인간이 익숙한 자연계 생활문명이 영계에도 반영되는 쪽으로 설명하고, 스베덴보리는 영적인 사랑과 지혜가 상응에 따라 외적인 생활세계로 나타난다고 설명합니다. 전자는 ‘자연계 문명 → 영계 환경’의 방향이 강하고, 후자는 ‘영적 상태 → 영계 형상’, 그리고 더 근원적으로는 ‘영적 원인 → 자연적 결과’라는 방향을 갖습니다.
이 차이를 알면 영계 체험을 대하는 태도도 보다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누군가 ‘천국에서 이런 건물을 보았다’, ‘이런 자동차를 보았다’, ‘이런 도로를 보았다’고 간증하더라도 즉시 믿거나 즉시 부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먼저 그 체험을 존중하여 듣되, ‘그 형상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체험자가 자기 자연계의 개념으로 그것을 어떻게 표현했을 가능성이 있는가’, ‘그 체험의 결과가 주님과 이웃 사랑으로 이어지는가’를 함께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체험 자체와 체험에 대한 해석을 구별하는 원칙이 여기에서도 필요합니다.
이 원칙은 공용복 선생님의 여러 영계 체험을 앞으로 다룰 때에도 특별히 중요하겠습니다. 그분이 무엇을 경험했다고 증언했는지는 함부로 부정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보았다’는 사실과 ‘그러므로 영계의 객관적 구조는 반드시 이러하다’는 교리적 해석 사이에는 구별이 필요합니다. ‘병상의 증거자 공용복’을 통해 이제 우리는 그 체험이 형성된 삶의 깊은 자리까지 어느 정도 알게 되었으므로, 이전보다 더 존중하면서도 동시에 더 정확하게 이 구별을 지킬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스베덴보리 자신을 읽을 때도 필요합니다. 그의 영계 기록에 18세기 유럽과 비슷해 보이는 집과 거리, 의복과 생활상이 등장한다고 해서 천국이 영원히 18세기 스톡홀름의 확대판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의 상응론에 따르면 중요한 것은 그 외적 형상들이 어떤 내적 상태에 상응하는가입니다. 그의 영계 기록에서 ‘무엇을 보았는가’만 모아 읽고 ‘왜 그렇게 보였는가’를 놓치면 스베덴보리 역시 단순한 영계 여행작가로 만들어 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강의의 ‘아파트, 텔레비전, 자동차, 고속도로가 있는 영계’ 이야기는 오히려 매우 좋은 질문을 하나 던져 줍니다. ‘천국은 자연계의 더 발전된 버전인가?’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겉으로는 자연계와 매우 비슷한 인간 생활세계가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전혀 다른 질서에 의해 존재한다’고 답할 수 있겠습니다. 그곳의 실제성은 물질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영적 실재에서 오고, 그곳의 아름다움은 기술적 편리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지혜의 상응에서 옵니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천국의 진보’라는 말을 아예 버릴 필요도 없습니다. 오히려 훨씬 더 놀라운 의미로 살릴 수 있습니다. 천국은 영원히 진보하는 세계입니다. 천사들은 영원히 주님을 더 깊이 사랑하고 더 지혜로워지며, 더 완전한 쓰임으로 들어갑니다. 그 진보에는 끝이 없습니다. 유한한 존재가 무한하신 주님의 사랑과 지혜를 다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천국은 과거 어느 시점에 완성된 뒤 아무 변화도 없는 정지된 세계도 아니고, 지상 기술문명이 발명하는 것을 뒤따라 업그레이드하는 세계만도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영원히 사랑과 지혜와 쓰임에서 완전해져 가는 살아 있는 세계입니다. 그리고 그 내적 진보에 상응하여 천국의 환경 역시 살아 있는 아름다움으로 끊임없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 차이는 작은 것 같지만 신앙의 초점도 바꿉니다. 천국을 생각하면서 ‘그곳에도 자동차가 있을까, 텔레비전이 있을까, 아파트가 있을까’를 궁금해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질문은 ‘나는 그 천국의 사랑을 지금 받아들이고 있는가’입니다. 천국의 시설을 알아도 천국의 사랑이 없다면 그 지식은 사람을 천국 사람으로 만들지 못합니다. 반대로 천국의 생활환경을 전혀 몰라도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 안에는 이미 천국의 생명이 시작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이번 사경회가 그토록 반복해서 ‘익은 열매’를 말하는 이유와 다시 연결됩니다. 영계에 대한 지식의 목적도 결국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를 알려 주는 데 있어야 합니다. ‘천국에는 어떤 문명이 있나’를 아는 것보다 ‘천국에 사는 존재는 어떤 사랑을 가지고 있나’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지상에서부터 실제 삶으로 살아가는 것이 영계 공부의 가장 중요한 열매여야 합니다.
그렇게 보면 ‘핵심진리’의 이번 독특한 영계 문명론도 단순히 옳다, 그르다로 잘라 버릴 필요가 없습니다. 먼저 그 안에 있는 ‘천국은 실제 인간이 살아가는 구체적인 세계다’, ‘하나님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상태에 맞게 영계를 섭리하신다’, ‘천국은 죽어 있는 정적 공간이 아니다’라는 귀한 직관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스베덴보리의 상응을 통해 ‘그 구체적인 세계가 왜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는가’를 한 단계 더 깊게 볼 수 있습니다.
그때 ‘영계의 문명’은 자연계 기술 발전의 복제품에서 ‘사랑과 지혜가 형상을 이루는 살아 있는 세계’로 깊어집니다. 집도, 길도, 나무도, 빛도, 이동도 모두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내적 상태와 쓰임의 외적 형상이 됩니다. 그러므로 영계에 무엇이 ‘있느냐’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그것은 무엇에 상응하는가?’입니다.
바로 이 질문이 다음 부분으로 이어집니다. 강의는 이제 히8:5의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를 가져와, 자연계의 성막과 이스라엘의 역사, 가나안과 열두 지파 등이 하늘의 ‘원형’을 지상에서 보여 주는 ‘모형’이라고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에서 ‘핵심진리’의 가장 중요한 성경 해석 원리 가운데 하나인 ‘모형-원형’이 다시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의 ‘표상-상응’과 얼핏 매우 비슷하지만, 두 원리가 실제로 무엇을 말하는지는 상당히 다릅니다.
따라서 다음 3강 9부에서는 ‘모형과 원형’을 본격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가나안은 천국의 모형이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는 천국의 열두 지파를 보여 준다’, ‘성막은 하늘에 있는 원형의 모형이다’라는 ‘핵심진리’의 설명을 먼저 충분히 따라간 뒤, 스베덴보리에게 성경의 역사와 장소와 사물이 왜 영적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를 ‘상응과 표상’의 질서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아마 이 부분은 지금까지의 영계 구조 차이보다 더 근본적인 갈림길, 곧 ‘성경을 영적으로 읽는다는 것은 정확히 무엇인가’를 보여 주는 중요한 대목이 될 것입니다.
3강9부
‘모형과 원형’ - 가나안과 이스라엘의 역사는 천국의 축소판인가, 말씀의 속뜻을 담은 표상인가
이번 3강의 아홉 번째 부분에서는 ‘핵심진리’가 왜 그토록 ‘모형적 진리’를 중요하게 여기는지가 아주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강사 목사님은 ‘모형’이 있다는 것은 반드시 그 배후에 ‘원형’이 있다는 뜻이라고 설명합니다. 아직 실제 아파트가 완성되기 전에 모델하우스를 만들어 두고, 사람들이 그것을 통해 장차 완성될 아파트의 모습을 미리 이해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의 실상을 인간이 알아보기 쉽도록 지상의 역사와 제도와 인물들을 통하여 모형으로 보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설명에서 ‘모형’은 단순한 상징이나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원형을 이해하기 위한 축소된 형상’이라는 매우 강한 의미를 갖습니다.
강의는 이 원리를 히8:5와 연결합니다.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는 말씀을 근거로, 모세가 시내산에서 성막을 만들 때 단순히 자기 생각으로 설계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실제 ‘원형’을 보고, 그것을 지상에 모형으로 재현했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지상의 성막은 모형이고 하늘의 성막은 원형이며, 우리가 지상 성막을 연구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의 성막과 영계의 구조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강의는 이 원리를 이스라엘 역사 전체로 확대합니다. 출애굽에서 광야를 지나 가나안에 들어가는 과정은 성도가 처음 주님을 믿을 때부터 ‘익은 열매’가 되어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의 영적 여정을 모형적으로 보여 주는 ‘하나님의 설계도’라고 설명합니다.
이 대목을 들으면 2강에서 살펴본 ‘모형적 진리’가 3강의 영계론과 어떻게 결합되는지가 분명해집니다. 2강에서는 애굽, 광야, 가나안을 한 사람의 성화 과정으로 읽었다면, 3강에서는 그 모형을 실제 사후 세계의 구조와 연결합니다. 가나안이 단지 ‘신앙생활의 성숙’을 나타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실제 천국의 원형을 지상에 보여 주는 모형이 되고, 이스라엘 백성은 천국 백성의 모형이 됩니다. 강사 목사님은 그래서 ‘가나안은 무엇의 모형입니까?’라고 묻고 ‘천국의 모형’이라고 답하며, 이어 ‘이스라엘 백성은 천국 백성의 모형’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접근에는 분명 귀한 직관이 있습니다. 성경을 서로 떨어져 있는 역사적 사건들의 모음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 섭리가 역사와 제도와 장소를 통하여 일관되게 표현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성막과 제사, 출애굽과 광야, 가나안과 예루살렘을 모두 하나의 큰 구원 이야기 안에서 읽게 합니다. 그래서 성경이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알려 주는 책에 머물지 않고 ‘오늘 한 사람의 영혼 안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질서로 이루어지는가’를 보여 주는 살아 있는 말씀처럼 읽힙니다.
그리고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매우 가까운 출발점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인물, 장소, 사건, 성막과 제사,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단순한 역사적 사실로만 읽지 않습니다. 그의 ‘천국의 비밀’ 전체가 바로 그 문자적 역사 안에 인간의 거듭남과 교회의 상태, 그리고 가장 깊게는 주님의 영화에 관한 아르카나가 들어 있음을 밝히는 작업입니다. 따라서 ‘지상의 역사 안에 영적 실재가 담겨 있다’는 기본적인 직관에서 ‘핵심진리’와 스베덴보리는 상당히 가까운 곳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모형-원형’이라는 설명과 스베덴보리의 ‘표상-상응’은 같지 않습니다. 이 차이가 이번 부분의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핵심진리’의 모형론은 모델하우스 비유가 보여 주듯, 먼저 하늘에 실제 원형이 있고 그와 비슷한 것을 지상에 만들어 놓아 원형을 이해하게 한다는 구조입니다. 그래서 ‘하늘의 성막-지상의 성막’, ‘천국의 백성-이스라엘 백성’, ‘천국-가나안’이 원본과 모형처럼 대응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의 상응은 단순한 ‘원본과 복사본’ 관계보다 훨씬 근본적입니다.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에 창조 때부터 내재하는 질서 있는 관계가 있기 때문에 자연적 형상 안에 영적인 의미가 표현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차이를 성막으로 보면 아주 잘 드러납니다. ‘핵심진리’의 설명에서는 하늘에 실제 성막이 있고, 모세가 그것을 보고 지상의 성막을 비슷하게 만든 것으로 이해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성막은 물론 천국과 주님의 신적 인성, 그리고 인간의 거듭남을 표상합니다. 그러나 핵심은 ‘하늘 어디엔가 똑같이 생긴 거대한 성막 건물이 있고 그것을 지상에서 축소 복제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지성소와 성소와 뜰, 법궤와 등잔대, 떡상과 향단, 휘장과 제단, 금과 은과 놋, 각 치수와 배치가 각각 신적 질서 안에서 서로 다른 천국적·영적 실재에 상응하기 때문에 성막 전체가 살아 있는 표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상응에서는 ‘원형’이 단순히 다른 세계에 있는 같은 모양의 사물이 아닙니다. 가장 깊은 원형은 주님의 신적 사랑과 지혜, 그로부터 나오는 천국의 질서, 그리고 그 질서가 인간 안에서 나타나는 선과 진리의 상태입니다. 자연적인 형상은 그 영적 실재가 최종적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따라서 ‘모형과 원형’을 완전히 틀린 표현이라고 버릴 필요는 없지만, ‘원형’을 영계에 있는 물리적 복제품 정도로 이해하면 스베덴보리의 상응보다 훨씬 좁아집니다.
가나안도 그렇습니다. 강의는 가나안을 천국의 모형이라고 매우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이것은 기독교 전통에서도 익숙한 읽기입니다. 광야를 지나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여정은 성도가 구원과 성화의 과정을 지나 천국에 이르는 그림으로 충분히 읽을 수 있습니다. ‘핵심진리’는 여기에 더 강한 의미를 부여하여 가나안의 구조 자체가 천국의 실제 구조를 보여 준다고 봅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가나안은 주님의 나라와 천국, 교회를 표상합니다. 그러나 ‘가나안=사후 천국’이라는 하나의 고정된 대응에 머물지 않습니다. 사람 안에서 선과 진리가 결합하여 주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상태, 교회의 내적 상태, 그리고 가장 깊은 속뜻에서는 주님께서 자신의 인성을 신성과 하나로 하시는 영화의 과정까지 연결됩니다. 따라서 가나안은 미래에 죽어서 가는 천국을 가리키면서 동시에 지금 한 사람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천국을 나타냅니다.
이 지점에서 두 해석법의 차이가 상당히 선명해집니다. ‘모형론’은 쉽게 ‘애굽=세상, 광야=연단, 가나안=천국’이라는 안정된 대응표를 만듭니다. 이것은 교육적으로 매우 강력합니다.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고, 자기 신앙 여정을 어디쯤 가고 있는지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상응은 같은 장소에도 문맥에 따라 훨씬 더 다양한 의미가 나타납니다. 애굽은 때로 기억지식과 자연적 학문을 좋은 의미로 나타낼 수도 있고, 그것이 영적인 것을 지배할 때에는 나쁜 의미를 가질 수도 있습니다. 광야도 시험과 황폐뿐 아니라 새 상태를 준비하는 보호와 교육의 장소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가나안도 주님의 나라를 표상하지만 그 땅이 악한 족속에게 점령되어 있을 때에는 교회 안의 선과 진리가 악과 거짓에 의해 점유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상응은 단순한 ‘암호표’가 아닙니다. 같은 단어에 언제나 같은 한글 뜻을 붙이는 방식이 아니라 말씀 전체의 문맥과 내적 연속성을 따라 살아 움직입니다. 이 점은 앞으로 ‘핵심진리’의 모형적 진리를 해설할 때 매우 중요하겠습니다. 큰 흐름의 모형은 충분히 유익하지만, 그것을 모든 본문에 기계적으로 적용하면 말씀 안의 더 깊은 층들이 가려질 수 있습니다.
광야의 경우가 특히 그렇습니다. ‘핵심진리’에서는 광야가 거의 일관되게 ‘연단 과정’으로 사용됩니다. 사람은 애굽에서 나온 뒤 광야에서 죄성과 정욕을 드러내고 말씀에 순종하는 훈련을 받아야 하며, 그렇게 정결해져 가나안에 들어갑니다. 이 큰 흐름 자체에는 깊은 영적 진실이 있습니다. 구원은 출발만으로 끝나지 않고 실제 삶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속뜻에서 광야는 단순히 ‘고생하면서 성숙하는 훈련소’만은 아닙니다. 이전의 선과 진리는 더 이상 충분하지 않은데 새로운 선과 진리는 아직 온전히 자리 잡지 못한 상태, 자기 힘으로 살 수 없음을 배우는 상태, 진리에 대한 갈망이 있으나 아직 풍성함을 누리지 못하는 상태 등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광야에서는 만나가 내리고 반석에서 물이 나옵니다. 광야의 중심은 단지 ‘고난’이 아니라 자기 의존에서 주님 의존으로 옮겨 가는 데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모형적 진리’를 상응으로 깊게 한다는 것은 기존 해석을 부정하는 일이 아니라 초점을 더 내적으로 옮기는 일입니다. ‘광야=연단’이라는 큰 틀을 유지하면서도 ‘무엇을 위한 연단인가’를 묻고, 답을 ‘고난을 견디어 자격을 얻는 것’보다 ‘자기 proprium을 신뢰하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법을 배우는 것’에서 찾게 됩니다. 그러면 ‘핵심진리’의 엄격한 성화론도 인간 수행 중심으로 흐르지 않고 주님 중심으로 더 깊어질 수 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 역사의 ‘순서’입니다. 강의는 출애굽에서 광야를 지나 가나안에 들어가고, 예루살렘 성과 이스라엘 왕국이 완성되는 과정을 ‘처음 예수님 믿을 때부터 완덕에 이르기까지’의 영적 성장 과정으로 읽습니다. 동시에 노아 홍수 이후 영원한 천국이 완성될 때까지의 인류 역사 발달 과정도 같은 모형 안에 들어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하나님의 설계도’라고 부릅니다.
이 구조에는 큰 힘이 있습니다. 개인의 거듭남과 인류 역사, 이스라엘의 역사를 한 줄로 연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거듭남론에서는 실제 영적 성장이 그렇게 한 번만 통과하는 직선적 단계표로만 진행되지는 않습니다. 사람 안의 서로 다른 층이 차례로 열리면서 비슷한 상태가 더 깊은 차원에서 반복될 수 있습니다. 어떤 영역에서는 이미 상당한 평화와 자유를 누리면서도, 다른 더 깊은 사랑이 건드려지면 다시 광야와 같은 시험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애굽을 나왔고 이제 광야 3단계이며 곧 가나안에 들어간다’는 식으로 자기 영적 수준을 너무 정확하게 측정하려 들면 위험할 수 있습니다. 모형은 방향을 보여 주는 지도이지, 자신의 영적 등급을 계산하는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내가 어느 단계에 있는가’보다 ‘지금 이 말씀에서 주님께서 내 안의 무엇을 드러내고 계시는가’를 묻는 편이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번 사경회 공동체에도 부드럽지만 중요한 균형이 될 수 있습니다. 오랜 세월 ‘핵심진리’를 반복해 듣다 보면 애굽, 광야, 가나안, 익은 열매, 영혼의 할례 같은 구조가 매우 익숙한 공통 언어가 됩니다. 그것은 공동체가 자기 삶을 돌아보는 데 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언어가 사람들을 영적 단계로 분류하거나 ‘나는 어디까지 왔다’는 자기 판단의 도구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특히 생전 공용복 선생님의 육성을 직접 기억하는 원로들에게 이런 용어는 단순한 개념 이상일 수 있으므로, 더더욱 그분이 가리키고자 했던 실제 삶의 열매를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겠습니다.
‘열두 지파’로 넘어가면 모형론과 상응론의 차이는 더 선명해집니다. 강의는 천국이 실제 열두 지파로 되어 있으며, 지상의 이스라엘이 열두 지파로 세워진 이유도 천국의 원형을 모형적으로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심지어 ‘천국 백성들이 12지파로 구분되어 있기 때문에 모형적으로 그렇게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이라고 명확하게 말하고, 모형적 해석을 ‘가장 정확한 해석법’이라고 강조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열둘’과 ‘열두 지파’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천국에 문자 그대로 르우벤 구역, 시므온 구역, 유다 구역 같은 열두 행정구역이 있기 때문에 지상에도 열두 지파를 만들었다는 식으로 이해되지 않습니다. ‘열둘’은 선과 진리에 속한 모든 것을 전체적으로 나타내며, 각각의 지파는 서로 다른 종류의 선과 진리의 성질을 표상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열두 지파의 순서가 달라질 때는 그 문맥의 영적 의미에 따라 배열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만일 열두 지파가 단순히 천국의 열두 실제 행정구역을 복제한 것이라면 지파의 이름과 순서의 변화가 별 의미가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각각이 서로 다른 사랑과 진리의 성질을 표상한다면 배열 자체에도 의미가 생깁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은 자연적 구조를 천국 지도의 복사본으로 읽기보다, 그 자연적 구조 안에서 영적 성질의 질서와 다양성을 읽습니다.
여기서 ‘원형’이라는 말도 한 층 더 깊어질 수 있습니다. ‘천국에 열두 지파가 있으므로 지상에 열두 지파를 만들었다’보다 ‘천국 전체에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의 모든 종류와 질서가 있고, 그 완전한 전체가 말씀에서 열둘과 열두 지파라는 자연적 형상으로 표현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때 원형은 열두 구역의 지도라기보다 주님의 나라 안에 있는 선과 진리의 충만한 질서입니다.
가나안 칠족도 같은 원리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핵심진리’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칠족을 몰아내는 사건을 인간 안의 죄성을 제거하는 영적 전쟁과 연결합니다. 이 방향 자체는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가나안의 여러 족속을 서로 다른 종류의 악과 거짓, 특히 교회의 선과 진리를 왜곡하는 상태들과 연결합니다. 그러나 ‘일곱 족속=정확히 일곱 종류의 죄성’, 나아가 ‘지옥에도 일곱 지파가 있다’는 식으로 자연적 숫자와 영계 행정구조를 직접 대응시키는 것에는 신중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일곱’은 완전함과 전체를 나타내는 수이며 문맥에 따라 좋은 의미와 반대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나안 칠족은 악과 거짓의 여러 종류를 전체적으로 나타낼 수 있지만, 그것이 곧 지옥에 행정적으로 정확히 일곱 구역만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천국과 지옥에는 무수한 공동체가 있기 때문입니다. 숫자는 영적 성질의 전체성을 나타내는 말씀의 언어이지 반드시 사후 세계의 구획 숫자를 알려 주는 통계가 아닙니다.
이런 차이는 ‘모형적 해석이 가장 정확한 해석법’이라는 강의의 선언을 들을 때도 중요합니다. 모형적 해석은 성경의 문자 너머를 바라보게 하는 매우 귀한 입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그 입구를 지나 더 깊이 ‘상응과 표상’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적 의미가 자연계의 그림을 영계에 그대로 옮겨 놓는 방식으로 제한될 수 있습니다.
특히 히8:5를 모든 모형론의 가장 중요한 근거로 사용하는 데에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한 가지 더 구별이 필요합니다. 히브리서는 매우 귀한 사도적 문헌이고 성막과 그리스도를 연결하는 깊은 교훈을 담고 있지만, 스베덴보리가 엄밀한 의미에서 연속적인 속뜻과 아르카나가 있는 ‘말씀’으로 분류하는 책은 아닙니다. 따라서 히8:5의 한 구절을 기초로 성경 전체의 모든 자연적 구조를 ‘하늘 원형의 직접적 복사본’이라고 확대하는 방식은 스베덴보리의 말씀 해석과는 다릅니다.
그렇다고 히8:5를 무시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 구절이 보여 주는 중요한 진실, 곧 지상 성막이 자기 완결적인 종교건물이 아니라 더 높은 신적 질서를 가리킨다는 사실은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다만 그 ‘더 높은 질서’를 ‘하늘에 똑같이 생긴 성막 건물’로 제한하지 않고, 주님의 신적 인성과 천국의 질서, 인간의 속사람과 거듭남까지 들어가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상응론입니다.
이 점은 성경 해석의 중심이 무엇인지와도 연결됩니다. 모형론을 개인의 영적 성장 지도에 집중하면 출애굽, 광야, 가나안이 ‘내가 어떻게 완덕에 도달하는가’를 보여 주는 과정으로 읽힙니다. 이것은 분명 유익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의 가장 깊은 중심은 인간의 자기완성이 아니라 주님입니다. 출애굽과 광야, 가나안의 가장 깊은 속뜻에는 주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지옥들과 싸우시고 자신의 인간성을 신성과 하나 되게 하신 영화의 과정이 담겨 있습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 거듭남의 길은 주님의 영화와 완전히 독립된 별도의 프로젝트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먼저 모든 지옥을 이기시고 신적 인간이 되셨기 때문에 그분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와 거듭남을 이루는 것입니다. 따라서 ‘광야에서 이기는 것’도 내가 내 힘으로 성화의 단계를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승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 관점이 더해지면 ‘핵심진리’의 모형론이 훨씬 주님 중심으로 깊어질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나의 영적 성장의 모형이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는 먼저 주님의 구속과 영화의 길이 담겨 있고, 그 주님의 길이 내 거듭남 안에 반영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말씀의 중심이 나의 단계와 상급이 아니라 주님께로 이동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공용복 선생님의 가르침을 존중하는 방식과도 잘 맞을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병상의 증거자 공용복’과 제자들의 모습을 통해 느껴지는 것은, 적어도 이 공동체가 한 인간 스승 자체를 최종 목적지로 삼으려 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공용복 선생님의 문장을 보존하려는 제자들의 태도 뒤에는 그분이 평생 가리키려 했던 하나님과 구원의 길을 보존하려는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형적 진리 역시 ‘우리 스승의 독특한 해석법’을 지키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해석이 궁극적으로 얼마나 주님을 더 밝게 보여 주는가를 물어야 가장 아름답겠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에서 공용복 선생님의 모형론을 부정하기보다 하나의 문을 더 열어 줍니다. ‘가나안은 천국의 모형입니다.’ 그렇다면 ‘그 천국은 먼저 어디에 이루어져야 합니까?’라고 묻습니다. 사람의 속사람에서 주님의 선과 진리가 질서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는 천국 백성의 모형입니다.’ 그렇다면 ‘그 열두 지파의 가장 깊은 의미는 무엇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주님의 나라를 이루는 모든 종류의 선과 진리입니다. ‘성막은 하늘 성막의 모형입니다.’ 그렇다면 ‘그 성막의 가장 깊은 원형은 무엇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주님의 신적 인성과 천국, 그리고 인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주님의 거처입니다.
이렇게 하면 ‘모형-원형’은 버려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깊어집니다. 처음에는 눈에 보이는 지상 모형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영계 원형으로 올라가고, 그다음에는 영계의 외적 형상 너머 그 형상을 존재하게 하는 신적 사랑과 지혜, 주님과 인간의 결합이라는 더 깊은 원형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지난 8부의 ‘영계 문명’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앞에서 강의는 자연계 문명이 발전하면 영계 환경도 그것을 따라 발전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번에는 지상의 성막과 이스라엘 구조가 하늘의 원형을 모형적으로 보여 준다고 말합니다. 두 설명을 함께 놓으면 방향이 조금 복잡해집니다. 한쪽에서는 자연계 문명이 영계에 영향을 주고, 다른 한쪽에서는 영계 원형이 자연계에 모형으로 내려옵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론은 이 관계를 한 질서 안에서 정리합니다. 영적 원인이 자연적 결과로 내려오되, 자연계에서 인간이 자유롭게 형성한 것은 사후 그의 영적 상태와 결합하여 다시 나타납니다. 단순한 일방 복사 관계가 아니라 생명과 상태의 질서입니다.
그래서 ‘원형과 모형’이라는 표현은 유익하지만, 원형을 너무 자연적으로 상상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천국에 자연계의 가나안 지도를 그대로 확대해 놓은 지역이 있고, 실제 열두 부족 행정구역이 있으며, 실제 성막 건물이 있어 지상 성막이 그것을 축소 복제했다는 그림에 머무르면 영계 역시 자연계의 또 하나의 물리세계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영계는 매우 실제적이지만 그 실제성의 법칙은 상응과 상태입니다.
이것은 말씀의 속뜻을 이해하는 데도 결정적인 차이를 만듭니다. ‘모형’은 대개 ‘이것은 저것을 가리킨다’고 묻지만, ‘상응’은 ‘이 자연적 형상이 어떤 영적 사랑과 진리의 질서에서 나왔는가’를 묻습니다. 전자는 화살표 하나로 연결하기 쉽고, 후자는 단계와 질서, 문맥과 전체 연결을 봅니다. 그래서 상응을 알면 성경은 단순한 미래 예언표나 영계 지도보다 훨씬 깊은 생명의 말씀이 됩니다.
그렇다고 초심자에게 모형적 읽기가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애굽은 속박, 광야는 시험, 가나안은 하나님 나라’라는 큰 그림은 성경을 자기 삶과 연결하는 매우 좋은 입구가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입구를 최종 목적지로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들어갈수록 더 깊은 아르카나가 열립니다.
이 점에서 ‘핵심진리’가 ‘모형, 모형, 모형’이라고 반복하며 이 해석을 그렇게 중요하게 가르쳐 온 이유도 충분히 이해됩니다. 강의는 실제로 모형적 해석이 ‘성경을 바로 해석하는 중요한 단서’이고 ‘가장 정확한 해석법’이라고 강조합니다. 오랫동안 이 가르침을 들은 회중에게는 모형적 진리가 성경 전체를 연결하는 하나의 큰 뼈대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함부로 무너뜨리기보다 그 뼈대 안에 상응이라는 더 깊은 생명을 넣어 주는 방식이 가장 자연스럽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기존에 익숙한 문장도 새롭게 깊어집니다. ‘가나안은 천국의 모형이다.’ 맞습니다. 그런데 천국은 죽은 뒤 들어가는 장소이기 전에 주님의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다스리는 상태입니다. ‘광야는 연단의 모형이다.’ 맞습니다. 그런데 그 연단의 가장 깊은 목적은 고통을 견디어 공로를 쌓는 것이 아니라 자기 proprium에서 주님 의존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천국 백성의 모형이다.’ 맞습니다. 그런데 천국 백성을 이루는 것은 혈통이나 외적 집단이 아니라 선과 진리의 무수한 상태들입니다.
그리고 성막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상의 성막은 하늘의 것을 보여 주는 모형이다.’ 이 큰 방향을 받아들이면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성막 전체가 주님 자신과 천국, 인간의 속사람과 거듭남의 질서를 동시에 보여 주는 놀라운 표상이 됩니다. 성막은 단순한 천국 건축물의 축소판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 안에 거하시기 위해 어떤 질서가 세워져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번 3강 9부는 단순한 해석법 비교보다 훨씬 중요한 지점입니다. ‘핵심진리’와 스베덴보리 모두 성경의 문자 너머를 봅니다. 둘 다 구약 역사를 오늘의 영적 삶과 연결합니다. 따라서 차이는 ‘영적으로 읽느냐 문자적으로 읽느냐’가 아닙니다. 차이는 ‘그 영적 의미가 어떤 원리로 존재하느냐’입니다. 하나는 ‘하늘 원형-지상 모형’이라는 모델을 중심으로 하고, 다른 하나는 신적 질서가 영적 세계와 자연적 세계에 단계적으로 표현되는 ‘상응-표상’을 중심으로 합니다.
그리고 두 길의 차이는 결국 주님을 어디에 놓느냐에서도 나타납니다. 모형론이 잘못 사용되면 성경이 ‘내가 어떤 단계로 성장해야 하는가’라는 자기 영적 성장표가 될 수 있습니다. 상응의 속뜻은 그 모든 과정의 중심에 먼저 주님의 영화와 구속을 놓고, 그분의 승리가 인간의 거듭남 안에서 어떻게 재현되는지를 봅니다. 인간은 원형이 아닙니다. 주님이 중심이십니다.
이 관점에서 ‘하나님의 설계도’라는 강의의 표현도 매우 아름답게 바뀔 수 있습니다. 성경이 인간이 영적 단계를 올라가는 매뉴얼이라기보다, 주님께서 어떻게 인간에게 내려오시고 구원하시며, 그분의 신적 질서가 한 사람 안에서 어떻게 천국을 이루어 가는지를 보여 주는 설계도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설계도의 주인공은 ‘완덕에 도달하는 나’가 아니라 ‘나를 거듭나게 하시는 주님’이 됩니다.
이것이 아마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이번 모형론에 더해 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빛일 것입니다. ‘핵심진리’가 열어 놓은 성경의 영적 읽기를 닫지 않고, 오히려 그 문을 더 깊이 열어 주는 것입니다. 가나안에서 천국을 보고, 다시 그 천국에서 주님의 나라를 보고, 다시 그 주님의 나라가 오늘 내 속사람 안에서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3강 9부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모형은 원형을 가리키지만, 상응은 그 원형이 왜 자연적 형상으로 나타날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핵심진리’의 모형론은 말씀의 문자 너머를 보게 하는 귀한 입구이고, 스베덴보리의 상응론은 그 입구를 지나 주님과 천국, 인간의 거듭남을 하나의 신적 질서 안에서 보게 하는 더 깊은 렌즈입니다.
그리고 이 차이를 붙들면 다음 3강 10부로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강의는 이제 이 모형론을 실제 영계 구조에 적용하여 ‘천국은 열두 지파로 구성되고, 지옥은 일곱 가지 죄성에 따라 여러 구역으로 나뉜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천국 백성이 열두 지파이기 때문에 지상 이스라엘도 열두 지파로 세워졌다’는 강한 모형론이 등장합니다. 다음에는 이 ‘열두 지파와 일곱 죄성’을 살펴보면서, 자연계의 숫자와 조직을 영계의 실제 행정구조로 읽는 방식과 스베덴보리가 ‘열둘’과 ‘일곱’을 선과 진리의 전체, 혹은 상태의 충만함으로 읽는 방식의 차이를 차분하게 살펴보겠습니다.
3강10부
천국의 열두 지파와 지옥의 일곱 지파 - 영계의 실제 구역인가, 사랑과 진리의 여러 상태인가
이번 3강의 열 번째 부분에서는 앞의 ‘모형과 원형’이라는 해석 원리가 영계의 구체적인 구조에까지 적용됩니다. 강사 목사님은 천국이 열두 지파로 나뉘어 있다고 설명하고, 이에 대응하여 지옥도 일곱 가지 죄성에 따라 ‘일곱 지파’, 곧 일곱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고 말합니다. 실제 강의 후반에는 ‘천국이 12지파로 나뉘어 있는 것처럼, 성령의 열매를 따라 나뉘어 있는 것처럼, 지옥도 일곱 가지 죄성에 따라 일곱 지파로 나뉘어 있다’고 매우 명시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사람이 어떤 죄성을 발전시켰느냐에 따라 그와 같은 성질의 지옥 구역에서 생활하게 되고, 그곳에서 형벌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이 설명은 앞서 살펴본 ‘가나안은 천국의 모형이고 이스라엘 백성은 천국 백성의 모형’이라는 모형론의 자연스러운 연장입니다. 지상 이스라엘이 열두 지파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은 천국의 원형에 실제 열두 지파가 있기 때문이고, 하나님께서 그 원형을 지상에서 알아보기 쉽도록 이스라엘이라는 모형 안에 나타내셨다는 것입니다. 반대쪽에서는 가나안 칠족이 지옥의 일곱 가지 죄성과 연결됩니다. 강의는 가나안 땅을 천국의 모형으로 보면서, 그 땅을 이스라엘이 차지하기 전에 살고 있던 가나안 칠족을 ‘일곱 가지 죄성이 뿌리박힌 사람의 영’을 나타내는 존재로 설명합니다. 다만 강사 목사님은 가나안 칠족 자체를 추상적인 일곱 죄성과 곧바로 동일시하기보다, ‘가나안 칠족은 사람이고 지옥 백성을 가리키며, 그들이 가진 성질이 지옥의 성질과 죄의 성질을 나타낸다’고 한 번 구별하여 설명합니다.
이 구별은 의외로 중요합니다. 강의도 단순히 ‘이 족속 이름 하나는 죄 하나’라는 기계적인 암호표만 만들려는 것은 아닙니다. 가나안 칠족이라는 사람들의 집단이 어떤 성질을 대표하고, 그 성질들이 지옥적 상태와 연결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가나안 칠족을 몰아내고 그 땅을 차지하는 사건은 한 사람 안에 깊이 뿌리박힌 죄성의 세력이 제거되고, 그 자리를 하나님의 생명이 차지하는 과정으로 읽힙니다. 앞선 강의에서 ‘영적 할례’를 통하여 죄성이 굴러 떨어지고 가나안에 들어간다고 설명했던 것과도 정확히 이어집니다.
이렇게 보면 ‘핵심진리’의 가나안 정복 해석은 단순한 고대 전쟁 이야기를 신앙적으로 미화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전쟁을 인간 내면의 싸움으로 가져오려는 데 중요한 목적이 있습니다. ‘가나안 칠족은 저 옛날의 나쁜 민족’이라고 외부를 향해 읽기보다 ‘내 안에서 주님의 나라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를 묻게 하는 것입니다. 교만과 탐욕, 거짓과 음란, 지배욕과 자기중심성 같은 것들이 주님의 선과 진리가 자리해야 할 내면을 점유하고 있다면, 그것이 오늘 내 안의 ‘가나안 칠족’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적용 자체는 충분히 실제적이고 영적으로 유익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다시 상당한 접점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이스라엘 열두 지파와 가나안의 여러 민족은 모두 말씀의 속뜻에서 중요한 영적 상태들을 표상합니다. 열두 지파는 교회와 천국 안에 있는 선과 진리의 모든 것을 전체적으로 나타내며, 각각의 지파는 그 전체 안에서 서로 다른 성질의 선과 진리를 표상합니다. 가나안의 여러 족속 역시 서로 다른 종류의 악과 거짓, 특히 주님의 나라와 교회의 선과 진리를 왜곡하거나 점유하는 여러 상태를 표상합니다. 그러므로 ‘열두 지파에는 천국적인 의미가 있고 가나안 족속에는 지옥적인 의미가 있다’는 큰 방향은 스베덴보리에게도 낯설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중요한 차이가 시작됩니다. ‘핵심진리’에서는 천국의 열두 지파를 실제 영계의 열두 구역과 상당히 직접적으로 연결합니다. 천국 백성이 열두 지파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지상 이스라엘도 열두 지파로 세워졌다는 설명입니다. 앞선 부분에서도 강사는 ‘천국 백성들이 12지파로 구분되어 있기 때문에 모형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세우셨다’고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에게 ‘열둘’은 무엇보다 영적 수입니다. 선과 진리에 관한 모든 것, 곧 하나의 완전한 전체를 뜻합니다.
이 점은 요한계시록의 열두 지파를 생각하면 더욱 분명합니다. 계7에서 각 지파마다 일만 이천 명씩 인침을 받아 14만 4천이 됩니다. 이것을 문자 그대로 읽으면 실제 열두 지파와 실제 인원수를 떠올리게 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열둘’, ‘일만 이천’, ‘14만 4천’을 모두 교회 안에 있는 선과 진리의 전체와 충만함을 나타내는 수로 읽습니다. 따라서 계시록의 열두 지파는 천국의 열두 행정구역 명단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속한 모든 종류의 선과 진리가 완전한 질서 안에 모여 있음을 나타냅니다.
이 차이를 아주 간단히 표현하면, ‘핵심진리’는 ‘천국에는 몇 지파가 있는가’를 묻는 경향이 강하고, 스베덴보리는 ‘열두 지파는 어떤 영적 전체를 나타내는가’를 묻습니다. 전자는 자연적인 구조와 영계의 구조 사이의 직접적인 닮음을 강조하고, 후자는 자연적 구조를 통하여 표현되는 영적 성질과 질서를 강조합니다. 둘 다 문자 너머를 보지만 ‘너머에 무엇이 있는가’에 대한 이해가 다릅니다.
그렇다고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의 공동체적 구분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천국에는 셀 수 없이 많은 공동체가 있습니다. 각각의 공동체는 서로 비슷한 사랑과 쓰임을 가진 천사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천국 전체는 놀라울 정도로 세밀한 질서 안에서 조직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정확히 열두 개의 행정구역으로 제한하지 않습니다. ‘열둘’은 그 무수한 다양성을 하나의 완전한 전체로 표현하는 말씀의 수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천국을 ‘가장 큰 사람’으로 설명하는 것과도 연결됩니다. 인간의 몸에는 눈, 귀, 심장, 폐, 손과 발 같은 큰 기관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셀 수 없이 많은 세부 기관과 조직이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이 서로 다른 기능을 하면서 하나의 몸을 이룹니다. 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수한 공동체가 서로 다른 사랑과 쓰임을 담당하면서 한 분 주님 아래 하나의 완전한 인간 형상을 이룹니다. 열두 지파는 그 전체를 말씀의 질서 안에서 대표적으로 표현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천국의 열두 지파’라는 ‘핵심진리’의 언어를 반드시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그것을 자연계의 열두 부족처럼 고정된 영계 행정구역으로 읽기보다, 천국 안에 있는 선과 진리의 모든 다양성과 질서를 ‘열둘’이라는 완전한 수로 표현한 것이라고 한 층 더 깊게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강의의 모형론을 완전히 무너뜨리지 않으면서도 상응의 의미로 확장할 수 있습니다.
지옥의 ‘일곱 지파’에서는 이 차이가 더 뚜렷해집니다. 강의는 지옥이 일곱 가지 죄성에 따라 일곱 지파, 곧 일곱 구역으로 나뉘며, 사람이 특별히 발달시킨 죄성에 따라 해당 구역에서 살아가고 형벌받는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모든 선이 제거되고 양심이 ‘화인 맞은’ 상태가 되면 지옥에 들어간다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죄를 반복하면 단순한 한 번의 행동에서 끝나지 않고 점차 사람의 성질이 된다는 강한 경고가 들어 있습니다.
이 문제의식 역시 스베덴보리와 매우 깊게 만납니다. 사람이 어떤 악을 반복해서 행하고 그것을 정당화하며 즐거워하면 그 악은 점점 그의 의지와 사랑에 뿌리를 내립니다. 처음에는 한 번 화를 낸 것이었지만, 계속 다른 사람을 억누르는 데서 기쁨을 느끼면 지배욕이 그 사람의 사랑이 되어 갈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필요 때문에 거짓말을 했지만, 거짓을 통해 사람을 조종하고 이익을 얻는 것을 즐기기 시작하면 거짓이 그의 생명과 결합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바로 이러한 ‘지배적인 사랑’이 사후의 공동체를 결정합니다.
따라서 ‘어떤 죄성이 발달했느냐에 따라 그와 같은 지옥으로 간다’는 강의의 경고는, 표현을 조금 바꾸면 스베덴보리의 사후 공동체 원리와 상당히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사람은 죽은 뒤 임의적인 벌의 주소를 배정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사랑한 악과 같은 사랑을 가진 영들과 결합합니다. 비슷한 사랑은 서로를 끌어당깁니다. 자연계에서도 권력을 사랑하는 사람끼리, 특정 욕망을 공유하는 사람끼리 쉽게 결합하는 것처럼, 영계에서는 그런 내적 친화성이 훨씬 직접적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일곱’이라는 수를 실제 지옥의 구역 수로 고정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상응과는 다릅니다. ‘일곱’은 말씀에서 하나의 전체와 충만함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수입니다. 좋은 문맥에서는 거룩함과 완전함을 나타내고, 반대 문맥에서는 악과 거짓의 전체적인 상태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가나안 칠족이나 일곱 악한 상태를 ‘인간 안에 있는 악과 거짓의 전체’라는 의미로 읽을 수는 있지만, 지옥에 정확히 일곱 종류의 영만 있고 정확히 일곱 구역만 존재한다고 결론 내리는 것은 다른 차원의 주장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묘사하는 지옥에도 무수한 공동체가 있습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라는 큰 뿌리 아래에서 악은 셀 수 없이 많은 형태로 갈라집니다. 어떤 사람은 지배하는 데서 가장 큰 즐거움을 느끼고, 어떤 사람은 속이는 데서, 어떤 사람은 복수에서,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선을 파괴하는 데서 즐거움을 느낍니다. 심지어 비슷해 보이는 악이라도 의도와 방식, 그 악과 결합된 거짓에 따라 성질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옥의 다양성을 일곱 죄성으로 교육적으로 묶을 수는 있어도, 실제 영계의 모든 지옥 공동체를 일곱 칸짜리 분류표에 완전히 넣기는 어렵습니다.
이 차이는 ‘죄성’이라는 말 자체를 이해할 때도 중요합니다. ‘핵심진리’에서는 죄성이 영혼 속에 뿌리박힌 어떤 내적 실체처럼 표현되는 경우가 많고, 앞에서는 ‘영적 할례’를 통하여 그 죄성의 뿌리가 굴러 떨어져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죄성을 어떤 물질적 덩어리처럼 보기보다 인간의 proprium에 속한 악한 사랑과 욕망의 질서로 이해하는 편이 더 가깝습니다. 문제는 내 안 어딘가에 ‘교만이라는 물질’이 박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높이는 데서 즐거움을 느끼는 사랑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악을 제거한다는 것도 그 ‘죄성 물질’을 영적으로 뽑아내는 것이라기보다, 주님께서 새로운 사랑의 질서를 세우심으로써 그 악한 사랑이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 2강에서 계속 살펴본 차이입니다. ‘핵심진리’의 ‘죄성 제거’라는 강한 언어가 인간에게 실제 변화를 요구한다는 점에서는 귀하지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악이 존재론적으로 완전히 없어졌다’고 자기 상태를 판정하기보다 ‘어떤 사랑이 지금 내 생명을 지배하고 있는가’를 보는 것이 더 안전합니다.
이렇게 보면 가나안 칠족을 몰아내는 장면도 한 번의 ‘완전 제거 사건’보다 거듭남의 계속되는 싸움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실제 성경에서도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들어간 순간 모든 적이 한꺼번에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오랜 기간 여러 족속과 싸웠고, 제거되지 않은 세력도 남았습니다. 이것은 영적으로도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사람에게 주님의 나라가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해서 proprium에 속한 모든 악이 한 번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선과 진리가 점차 삶의 여러 영역을 질서 있게 다스려 갑니다.
그러므로 ‘가나안 칠족의 멸망’을 ‘내 안의 일곱 죄성이 한 번에 완전히 소멸되는 사건’으로만 읽기보다, 주님께서 인간의 서로 다른 악과 거짓을 하나씩 드러내고 제압하시면서 자신의 나라를 세워 가시는 거듭남의 과정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핵심진리’가 강조하는 실제 죄와의 싸움은 그대로 살아 있으면서, 인간이 어느 순간 자기 자신을 ‘죄성이 완전히 제거된 사람’이라고 판정하는 위험은 줄어듭니다.
강의에서 ‘양심이 화인 맞는다’는 표현도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강사 목사님은 이를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상태, 양심이 무뎌지고 잃어진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이 말은 악이 어떻게 사람의 생명이 되어 가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처음 악을 행할 때에는 양심이 괴롭지만, 계속 악을 반복하고 정당화하면 점차 가책이 약해질 수 있습니다. 나중에는 오히려 악을 선이라고 부르고 그것을 하지 못하면 불편해질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바로 이 지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은 단순히 ‘악한 행동을 몇 번 했는가’로 지옥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악을 자유롭게 행하고 그것을 인정하며 자기 사랑과 결합시킬 때 실제악이 사람의 의지에 깊이 자리 잡습니다. 반대로 악을 범했더라도 그것을 악으로 인정하고 회개하며 주님의 도움으로 피하려 한다면 상황은 전혀 다릅니다. 죄를 범한 사실보다 그 죄에 대한 사랑과 태도가 중요합니다.
이 점에서는 강의 자료에 나타나는 ‘회개를 잘하는 성도가 가장 훌륭한 성도’라는 공용복 선생님의 가르침이 매우 귀하게 들립니다. 죄를 발견했을 때 ‘나는 이미 높은 단계에 도달했으므로 이런 죄가 있을 리 없다’고 자기기만하는 것보다, 죄가 보일 때마다 회개하고 다시 씻으며 한평생 그렇게 살다가 주님 나라에 가면 된다는 방향입니다. 실제 원고에도 ‘먼지가 묻게 되면 자꾸 닦고 또 닦고 한평생 그 일 하다가 주님 나라에 가면 되잖아요’, ‘회개를 잘하는 성도가 가장 훌륭한 성도다’라는 취지의 말이 나옵니다.
이 대목은 지금까지 살펴본 ‘죄성의 완전 제거’라는 강한 단계론에 하나의 매우 중요한 인간적 균형을 제공합니다. 적어도 실제 신앙생활의 자리에서는 ‘나는 이제 죄가 없다’고 선언하기보다 계속 죄를 발견하고 회개하는 삶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와도 상당히 잘 맞습니다.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사람이 자기 선을 자랑하기보다 자기 proprium의 실상을 더 깊이 알고 주님의 자비를 더 의지하게 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공용복 선생님의 생애를 알고 난 뒤에는 이 ‘회개를 잘하는 성도’라는 문장도 조금 다르게 들립니다. 거의 온몸의 기능을 잃어 가는 병상에서 오랜 시간을 살았던 사람이 자기 자신을 완성된 성자로 내세우기보다, 계속 닦고 또 닦으며 평생 회개하다 주님 나라에 가면 된다고 가르쳤다면, 그 안에는 적어도 자기완성의 영웅주의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겸손의 방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핵심진리’의 높은 단계 언어를 해설할 때도 이런 실제 문장들을 함께 기억해야 공평하겠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천국의 열두 지파’와 ‘지옥의 일곱 지파’를 실제 영적 계급표처럼만 읽으면 오히려 이 공동체가 중요하게 여겨 온 자기 성찰의 힘을 좁힐 수 있습니다. ‘나는 어느 천국 지파에 들어갈까’, ‘저 사람은 어떤 지옥 죄성에 속할까’를 묻기 시작하면 시선이 쉽게 다른 사람과 사후 주소지로 향합니다. 그러나 말씀의 속뜻으로 들어가면 질문은 ‘내 안에서 어떤 종류의 선과 진리가 형성되고 있는가’, ‘어떤 악과 거짓이 아직 주님의 나라를 점유하고 있는가’로 돌아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이것이 매우 중요한 방향입니다. 말씀의 지파와 족속들은 무엇보다 먼저 우리 내면의 상태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유다’라는 이름을 보면서 사후에 내가 어느 부족 주민이 될지를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지파가 표상하는 천국적 사랑과 선이 무엇인지를 봅니다. 가나안의 악한 민족을 보면서 ‘저런 사람이 지옥에 간다’고 말하기보다, 그들이 표상하는 악과 거짓이 내 안에 어떤 형태로 있는지를 살펴봅니다.
그리고 이 관점은 지옥의 형벌을 이해할 때도 중요합니다. 강의는 각 죄성에 따라 해당 지옥에서 생활하고 형벌을 받는다고 설명합니다. 이를 자연적인 법정의 형량처럼 생각하면 ‘교만죄 3구역, 거짓죄 4구역’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형벌은 하나님께서 죄목별로 고통을 배정하는 복수적 처벌이 아닙니다. 악한 영들이 자기 사랑과 지배욕에 따라 서로 해치려 하기 때문에, 그 악이 더 커지는 것을 막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제한과 결과가 형벌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지옥에서의 고통도 그 사람이 사랑한 악과 무관한 외부 벌이 아닙니다. 지배욕을 사랑하는 영들이 서로 만나면 서로 지배하려 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충돌합니다. 속임수를 사랑하는 영들은 서로 믿지 못하고 서로 속이려 합니다. 복수를 사랑하는 영들은 끝없는 보복 관계를 만듭니다. 그 자체가 지옥의 삶입니다. 악의 즐거움 안에는 이미 그 고통의 씨앗이 들어 있습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행한 대로 갚으신다’는 말씀도 더 깊게 읽힙니다. 하나님께서 외부에서 같은 양의 고통을 계산하여 돌려주신다는 뜻을 넘어, 사람이 반복하여 사랑하고 선택한 것이 결국 자기 생명의 세계가 된다는 것입니다. 선을 사랑하면 선한 사랑의 세계 안에서 자유롭게 살고, 악을 사랑하면 그 악의 관계와 질서 안에서 살게 됩니다. 심판은 자의적인 배정이라기보다 생명이 자기 결과를 드러내는 일입니다.
강의는 지옥 구조가 천국과 마찬가지로 세 층으로 되어 있으나 ‘거꾸로 되어 있다’, ‘반대의 모습을 취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직관에도 스베덴보리와 연결할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천국의 근본 사랑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고, 지옥의 근본 사랑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질서를 거슬러 최고의 자리를 차지한 것입니다. 천국에서 높아지는 것은 섬김이고, 지옥에서 높아지는 것은 지배입니다. 천국에서는 다른 사람의 행복을 자기 행복처럼 기뻐하지만, 지옥에서는 다른 사람을 자기 아래에 두는 데서 기쁨을 얻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지옥이 천국 질서의 ‘거꾸로 된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만 지옥을 하나님께서 천국과 대칭되도록 의도적으로 설계한 ‘반대 왕국’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천국만을 창조하십니다. 지옥은 피조물이 신적 질서를 뒤집어 자기 사랑을 최고의 자리에 놓은 결과입니다. 악은 선과 대등한 독립 원리가 아니라 선을 왜곡하고 뒤집은 상태입니다. 이 점은 지옥을 생각할 때 반드시 지켜야 할 중요한 신학적 균형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일곱 죄성’과 ‘열두 성령의 열매’를 완벽한 두 대칭표로 만드는 것에도 약간의 주의를 요구합니다. 강의는 천국의 열두 지파와 지옥의 일곱 지파를 상당히 선명한 대조 구조로 제시하지만, 스베덴보리에게 선과 악은 같은 수준에서 서로 대칭하는 두 창조질서가 아닙니다. 모든 참된 선과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오며, 악과 거짓은 그 선과 진리의 질서를 뒤집은 것입니다. 그래서 선은 본래적이고 악은 기생적입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면 지옥을 지나치게 독립적인 세계처럼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지옥은 하나님과 맞서는 또 하나의 왕국이 아닙니다. 모든 존재는 여전히 주님의 질서 아래 있으며, 지옥조차 주님의 섭리에 의해 일정한 한계 안에 제어됩니다. 악한 영들이 하고 싶은 대로 무한히 악을 펼칠 수 있는 세계가 아닙니다. 그렇지 않다면 지옥 자체가 서로를 파괴하여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번 강의가 말하는 ‘죄성을 발전시키지 말라’는 경고도 더욱 깊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죄가 무서운 이유는 단지 나중에 어느 무서운 지옥 구역에 떨어질까 봐서만이 아닙니다. 죄가 ‘나의 사랑’이 되어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내가 죄를 행하지만, 반복하고 즐기고 정당화하면 나중에는 죄가 나를 행한다고 해도 될 만큼 나의 의지를 지배하게 됩니다. 이것이 가장 두려운 점입니다.
반대로 거듭남의 아름다움도 여기에 있습니다. 처음에는 억지로 정직을 선택하지만 반복하여 주님의 도움으로 선을 선택하다 보면 나중에는 정직 자체를 사랑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용서가 너무 힘들지만 점차 다른 사람의 선을 바라는 것이 자기 기쁨이 됩니다. 그렇게 천국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지파’를 이루어 간다고 비유적으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천국의 열두 지파’라는 표현을 외부 지도에서 내면의 질서로 가져오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내 안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의 무수한 성질들이 서로 질서 있게 자리 잡는 것입니다. 어떤 것은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어떤 것은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로, 어떤 것은 진리를 사랑하는 지성으로, 어떤 것은 일상에서의 정직과 충성으로 나타납니다. 그것들이 서로 경쟁하지 않고 하나의 생명을 이루는 것이 인간 안의 작은 천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가나안 칠족’도 내 안의 악을 무조건 일곱 항목으로만 고정하기보다 주님의 나라와 맞지 않는 악과 거짓의 전체적인 세력을 나타내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가나안 정복은 과거의 폭력적 민족 정복을 오늘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는 위험에서 벗어나, 자기 안에서 벌어지는 영적 전쟁으로 들어옵니다. 싸워야 할 가나안 족속은 다른 종교인이나 다른 교파의 사람이 아니라 먼저 내 안의 지배욕과 교만, 거짓과 탐욕입니다.
이것은 이번 사경회 공동체를 바라볼 때도 중요한 균형입니다. ‘핵심진리’를 오래 배웠다는 사실이 자동으로 천국의 특정 지파에 속한다는 보장은 아닙니다. 반대로 스베덴보리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천국적 사랑에서 멀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실제 중요한 것은 그 가르침이 어떤 사랑과 삶을 형성했는가입니다. 앞에서 여러 차례 이야기했듯, 이 공동체 사람들에게서 실제로 겉과 속의 일치와 말씀대로 살려는 진지함이 나타난다면 그것은 교리적 차이와 별개로 귀한 천국적 방향으로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생전 공용복 선생님을 직접 기억하는 원로들이 이런 ‘열두 지파’, ‘일곱 죄성’, ‘가나안 칠족’의 문장을 들을 때, 그것은 단순한 교리 도표 이상의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 문장과 함께 스승이 ‘그러니 자기 죄를 보라’, ‘회개하라’, ‘실제로 빛의 열매를 맺으라’고 하던 목소리도 함께 기억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해설 역시 외적 도표의 정확성만 따지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문장이 사람에게 요구했던 실제 회개와 삶의 방향을 함께 보아야 공정하겠습니다.
그리고 앞서 자료에서 확인한 ‘회개를 잘하는 성도가 가장 훌륭한 성도다’라는 말은 이 지점에서 아주 좋은 균형추가 됩니다. 만일 사람이 ‘나는 일곱 죄성이 모두 제거되었다’, ‘나는 천국의 높은 지파에 속한다’고 자기 상태를 확신하게 된다면 그 순간 자기 성찰이 멈출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평생 먼지를 닦듯 자기 악을 보고 회개하는 삶을 중심에 둔다면 높은 단계의 언어가 교만으로 굳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거듭난 사람에게 자기 안의 악을 전혀 보지 않게 되는 상태를 이상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빛이 더 밝아질수록 자기 proprium에서 나오는 것이 어떠한지를 더 분명히 알게 됩니다. 그래서 선을 자기에게 돌리지 않고 주님께 돌립니다. 이런 겸손이 없다면 ‘천국에 관한 높은 지식’ 자체가 오히려 자기 사랑을 강화하는 재료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번 3강 10부에서 ‘핵심진리’의 천국 열두 지파와 지옥 일곱 지파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가장 선하게 깊게 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천국의 ‘열둘’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의 모든 충만함과 다양성을 나타내며, 지옥적 ‘일곱’은 주님의 질서를 거슬러 뒤집힌 악과 거짓의 전체적인 상태를 나타냅니다. 실제 영계에는 무수한 공동체가 있고, 각 영은 자기의 지배적인 사랑과 상응하는 공동체와 결합합니다. 숫자는 그 무수한 세계를 몇 개의 행정구역으로 제한하는 표지라기보다 영적 전체를 표현하는 말씀의 언어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핵심진리’의 모형론이 가진 교육적 힘도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열두 지파와 일곱 족속이라는 선명한 구조를 통해 선과 악의 질서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구조를 자연적인 영계 지도에서 멈추지 않고 내적인 사랑의 질서로 더 깊게 읽게 됩니다. ‘나는 천국 어느 지파에 갈까?’보다 ‘내 안에서 주님의 어떤 선과 진리가 자라고 있는가?’를 묻게 되고, ‘지옥에는 어떤 일곱 구역이 있을까?’보다 ‘나는 지금 어떤 악을 반복하여 내 생명으로 만들고 있는가?’를 묻게 됩니다.
바로 이 질문으로 돌아올 때 영계 지식은 호기심이 아니라 회개의 도구가 됩니다. 그리고 아마 그것이 공용복 선생님과 이 공동체가 이 긴 영계 강의를 통하여 궁극적으로 원했던 방향과도 가장 잘 만날 것입니다. 영계를 자세히 알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나는 죽은 뒤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가 아니라 ‘나는 지금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를 보게 하는 것입니다.
다음 3강 11부에서는 바로 이 ‘어떤 사람이 되었는가’가 사후에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심판’의 문제로 살펴보겠습니다. 강의는 백보좌 심판을 한곳에 있는 단 하나의 물리적 법정으로 이해하지 않고, 중간 영역 여러 곳에서 다양한 시기에 심판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실제 원고에서도 사람이 영계에 들어가자마자 심판받을 수도 있고, 천국이나 지옥에 들어가기 직전에 받을 수도 있으며, 그 중간에 받을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다음에는 이 ‘심판대’의 그림과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속사람의 드러남과 분리’가 어디까지 만나고 어디에서 달라지는지를 차분히 살펴보겠습니다.
3강11부
‘심판대’는 한곳에 있는가 - 백보좌 심판과 사후 심판, 그리고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드러남’의 심판
이번 3강의 열한 번째 부분에서는 지금까지 살펴본 중간 영역의 구조가 ‘심판’이라는 주제로 한 번 더 정리됩니다. 강사 목사님은 고후5:10, 히9:27, 계20:11 이하의 말씀 등을 연결하면서 사람이 죽은 뒤에는 누구나 반드시 심판을 받고, 그 심판은 ‘각자가 행한 대로’ 이루어진다고 강조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강의가 그 심판을 천국이나 지옥에 들어간 뒤의 사건으로 보지 않고, 천국과 지옥 사이의 중간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본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죽음 이후 어디선가 심판을 받아야 한다면 그 심판대가 있는 영역이 있어야 한다’는 논리로 중간 영역의 필요성을 설명합니다.
강의는 또 ‘그리스도의 심판대’, ‘하나님의 심판대’, ‘크고 흰 보좌’, 곧 ‘백보좌 심판대’를 서로 완전히 다른 세 종류의 심판으로 나누지 않습니다. 강사 목사님은 이 세 표현이 본질적으로 동일한 하나님의 심판을 가리키며, ‘백보좌’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라는 성격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해석의 장점은 성경 곳곳에 등장하는 심판의 표현들을 지나치게 복잡한 종말론적 재판 절차로 쪼개기보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 삶의 실제를 드러내게 된다’는 하나의 중심 원리로 묶으려 한다는 데 있습니다.
강사 목사님은 특히 계20장의 백보좌 심판을 ‘인류 역사 마지막 어느 한 날에, 모든 죽은 사람이 한 장소에 모여 처음으로 한 번에 심판받는 사건’으로만 이해하는 데 문제를 제기합니다. 그런 식으로 읽으면 이미 죽은 사람들은 천년왕국이 끝날 때까지 어디에선가 수천 년 동안 대기해야 하고, 천국이나 지옥에도 아직 들어가지 못한 채 마지막 심판을 기다려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강의는 이러한 해석 때문에 일부 신학자들이 천국도 지옥도 아닌 ‘대기 장소’를 인정하게 되었다고 설명한 뒤, 모든 영혼이 마지막 백보좌 심판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때 처음 심판받는다는 견해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강의는 사람이 죽어 영계에 들어간 뒤 각자의 과정 가운데 심판을 받는다고 봅니다. 더 나아가 강의 후반에는 하나님의 심판대가 어느 한 장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중간 영역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고 설명합니다. 지방도시마다 재판소가 있는 것처럼, 영계에도 여러 심판대가 있으며 지옥에 가까운 지역에도 있을 수 있고 다른 곳에도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입신 체험자들의 증언을 근거로 심판대가 상당히 많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핵심진리’가 영계를 얼마나 구체적이고 공간적인 실제 세계로 이해하는지가 다시 한번 드러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는 이번 3강 전체에서 반복해서 나타난 특징이 있습니다. ‘핵심진리’는 성경의 영적 의미를 인정하면서도 그 의미를 다시 꽤 구체적인 영계의 장소와 제도와 연결합니다. ‘심판대’가 단지 하나님의 심판을 표현하는 비유적 언어가 아니라 실제로 영계 여러 곳에 존재하는 일종의 사후 재판 장소로 이해되는 것입니다. 이 그림은 회중에게 ‘죽으면 실제 이런 과정을 거친다’는 매우 생생한 사후 세계상을 제공하는 장점이 있습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바로 여기에서 한 번 더 ‘그 외적 형상이 무엇을 나타내는가’를 묻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심판은 분명 실제입니다. 사람이 죽은 뒤 그의 상태가 드러나고, 선과 악이 분리되며, 각자가 자기 사랑에 맞는 공동체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심판의 본질은 특정한 법정 건물이나 좌석보다 ‘사람의 참된 내면이 신적 진리의 빛 가운데 완전히 드러나는 것’에 있습니다. 따라서 영계에서 실제 보좌나 법정 같은 형상이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심판이라는 내적 실재가 상응하여 외적 형상으로 나타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먼저 봐야 할 것은 ‘그 심판대가 몇 군데 있는가’보다 ‘심판이 영적으로 무엇인가’입니다.
이 차이는 계20장의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는 말씀을 이해할 때 더욱 분명해집니다. 강의는 이 말씀을 ‘각자의 행위대로 심판받는다’는 근거로 사용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책’은 매우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사후에 사람의 기억과 생명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가 자유롭게 사랑하고 생각하고 행했던 모든 것이 자기 내적 생명에 새겨져 있습니다. 따라서 ‘책이 펴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외부 기록보관소에서 인간의 행적을 적어 둔 장부를 꺼내 읽으신다는 뜻보다, 그 사람의 실제 삶과 사랑 전체가 가리움 없이 열리는 것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행한 대로 심판한다’는 말씀도 단순한 행동 점수 계산이 아닙니다. 같은 행동이라도 어떤 사랑과 의도에서 나왔느냐에 따라 영적 성질이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많은 돈을 주었어도 자기 이름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을 수 있고, 아주 작은 도움을 주었어도 진심으로 상대의 선을 바란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후에 드러나는 ‘행위’는 그 행위 안에 담겨 있던 의지와 사랑까지 포함합니다. 심판은 ‘무엇을 했는가’만이 아니라 ‘그것을 왜 했는가’까지 하나로 드러나는 일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지금까지 이 공동체가 그토록 강조해 온 ‘겉과 속의 일치’가 다시 중요해집니다. 자연계에서는 외적 행위와 내적 동기가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경건한 말을 하면서 속으로 자기 명예를 사랑할 수도 있고, 사람을 돕지만 실제로는 그 사람을 자기 영향력 아래 두고 싶어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후에는 이런 분리가 계속 유지될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사후 제2 상태에서 겉 사람이 벗겨지고 지배적인 사랑이 자유롭게 드러나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그래서 심판은 외부에서 새로운 판결문을 받는 것 이전에, 내가 실제 어떤 사람이었는지가 더 이상 감추어지지 않는 사건입니다.
이 관점에서는 ‘주님이 심판하신다’는 말도 조금 다르게 들립니다. 주님께서 사람의 정보를 새로 조사하여 천국인지 지옥인지 판단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이미 인간 전체를 완전히 아십니다. 오히려 신적 진리의 빛 앞에서 인간 자신이 더 이상 자기 상태를 숨길 수 없게 됩니다. 자연계에서는 자기기만도 가능하고, 좋은 평판과 종교적 언어로 자신을 덮을 수도 있지만 사후에는 그것이 영원히 유지될 수 없습니다. 주님의 빛이 비추면 실제 사랑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심판은 한편으로 매우 엄숙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놀랍도록 공정합니다. 하나님께서 임의적으로 누구를 좋아하여 천국에 넣고 누구를 미워하여 지옥에 보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유롭게 형성한 실제 사랑이 드러나고, 그 사랑과 같은 공동체로 자연스럽게 결합합니다. 선을 사랑한 사람은 천국의 선과 진리 안에서 자유와 기쁨을 느끼고, 자기 사랑과 지배욕을 가장 사랑한 사람은 천국의 질서를 답답하게 여기며 자기가 사랑하는 악을 더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공동체를 찾게 됩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심판은 ‘선고받아 끌려가는 사건’보다 ‘자기 사랑이 자기 세계를 찾아가는 사건’에 더 가깝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 천사들의 인도와 신적 질서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자유가 무시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사후에는 지상에서 가리고 있던 것이 사라지면서 그 자유가 더 완전히 드러납니다. 선한 사람은 선을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하고, 악한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 악을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합니다. 그 결과가 천국과 지옥의 분리입니다.
여기에서 강의가 말하는 ‘백보좌 심판대가 한 군데가 아니라 여러 곳에 있다’는 설명도 한 층 더 내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강의의 공간적 설명을 곧바로 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영계에 실제 심판의 상태를 표현하는 여러 장면과 장소가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영들의 세계 전체가 사실상 ‘드러남과 분리’의 세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정 법정에 들어가는 순간에만 심판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겉 사람이 벗겨지고 속사람이 드러나는 전 과정 자체가 심판입니다.
이 점은 강의가 후반에 ‘심판받는 시기’ 역시 한 시점으로 고정하지 않는다는 설명과 잘 연결됩니다. 강사 목사님은 심판대에서 심판받는 시기가 영계에 들어가자마자일 수도 있고, 천국이나 지옥에 들어가기 직전일 수도 있으며, 그 중간의 어떤 시점일 수도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 말은 심판을 단 한 번의 순간적인 재판보다 사후 과정의 여러 단계와 연결하여 이해하려는 시도입니다. 이 직관을 더 내적으로 발전시키면 ‘사람의 각 층이 열리고 실제 상태가 드러나는 전체 과정이 심판’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보면 사후의 심판은 한 번의 사건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과정입니다. 사람이 자연적 육체를 벗고 영계에서 깨어나는 순간부터, 외적 인격이 점차 벗겨지고, 실제 내적 사랑이 드러나고, 그 사랑과 맞지 않는 것이 분리되며, 마침내 자기에게 맞는 공동체로 들어갈 때까지 모든 과정에서 그의 생명이 밝혀집니다. 마지막에는 더 이상 겉과 속의 불일치가 유지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심판의 완성을 ‘판결문을 받는 순간’보다 ‘사람이 자기 지배적인 사랑과 완전히 일치하게 된 상태’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습니다.
여기에서 개인의 사후 심판과 요한계시록의 ‘최후의 심판’을 구별할 필요도 있습니다. 강의는 모든 사람이 죽은 뒤 각자 심판받는다고 하면서도, 계20장의 백보좌 심판이라는 미래의 최종적인 사건도 유지하려는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즉 개인의 사후 심판이 지금도 계속되지만, 역사 마지막에는 별도의 최종 백보좌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핵심진리’의 전체 종말론을 생각하면 이것은 천년왕국 이후의 역사적 사건으로 자리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개인의 사후 상태 변화와 ‘최후의 심판’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사람 개인은 죽은 뒤 영들의 세계에서 실제 상태가 드러나 천국 또는 지옥으로 준비됩니다. 그러나 ‘최후의 심판’은 모든 죽은 개인이 역사 마지막 날까지 기다렸다가 그날 처음 심판받는 사건을 뜻하지 않습니다. 한 교회 시대가 끝날 때 영들의 세계 안에 오랫동안 누적되어 있던 혼합 상태, 곧 외적으로는 경건한 것처럼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악과 거짓에 속했던 무리들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게 되어 분리되는 거대한 영적 사건입니다.
이 점에서 강의가 비판하는 ‘모든 죽은 사람이 마지막 백보좌 심판 때까지 기다린다’는 단순한 도식과 스베덴보리는 상당히 가까운 문제의식을 공유합니다. 강의 역시 이미 죽은 사람들이 천년왕국이 끝날 때까지 대기하다가 그때 처음 심판받는다고 보지 않습니다. 개인은 사후에 이미 자기 과정 가운데 심판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만 보면 전통적인 종말론적 상상보다 스베덴보리의 사후관에 훨씬 가까운 구조입니다.
그러나 그다음부터는 다시 차이가 납니다. ‘핵심진리’는 개인의 사후 심판과 미래 역사 마지막의 백보좌 심판을 함께 유지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계20의 백보좌와 천년을 자연계의 미래 정치·역사 연대표보다 영계와 교회의 상태 변화로 읽습니다. 따라서 ‘앞으로 지상에서 언제 백보좌 심판이 일어날 것인가’보다 ‘신적 진리가 나타날 때 어떤 교회적·영적 혼합 상태가 분리되는가’가 더 중요한 질문이 됩니다.
‘백보좌’의 ‘흰색’도 여기에서 상응으로 깊게 볼 수 있습니다. 강의는 백보좌를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성격과 연결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에서 ‘흰 것’은 진리와 진리의 빛을 나타냅니다. 신적 진리가 비추면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백보좌의 ‘흰색’은 단지 심판관이 깨끗하고 공정하다는 상징을 넘어, 완전히 순수한 신적 진리 안에서 모든 사람과 교회의 실제 상태가 드러나는 것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공의’를 이해하는 방식에도 변화를 줍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인간 법정처럼 잘못을 하나씩 찾아 죄목에 따라 처벌량을 정하는 공의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주님은 사람을 실제 그의 사랑에 따라 다루십니다. 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선과 맞지 않는 것을 벗겨 주시고, 악을 사랑하는 사람의 자유를 억지로 바꾸지 않으시되 그 악이 무한히 다른 존재를 해치지 못하도록 질서를 세우십니다. 이 공의 안에는 진리와 사랑, 자유와 질서가 함께 있습니다.
강의가 ‘행한 대로’라는 말을 강하게 붙드는 것도 이 공동체의 전체 성화론과 잘 맞습니다. 신앙을 말로만 고백하고 실제 삶은 전혀 달라도 괜찮다는 생각을 강하게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람은 자기가 실제 어떻게 살았는가와 관계없이 ‘은혜의 캡슐’ 하나를 쓰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이 드러나고 그 생명에 맞는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의식은 스베덴보리의 ‘삶의 종교’와 매우 깊게 만납니다.
다만 여기서도 ‘행위’가 공로 계산으로 바뀌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참된 선한 행위에는 그 안의 사랑이 중요하고, 그 선의 능력도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사람이 선을 행했다고 해서 ‘나는 이것만큼 천국 상급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 선 안에 자기 공로가 섞입니다. 천국적 선은 선 자체를 사랑하기 때문에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판에서 행위가 중요하다는 것은 행위 점수를 세는 것보다 ‘행위 안에서 어떤 사랑이 생명이 되었는가’가 드러난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점에서는 공용복 선생님의 생애를 알고 난 지금 한 가지가 더욱 중요하게 느껴집니다. 육체의 대부분이 자유롭지 않은 사람은 외적으로 많은 종류의 행동을 할 수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심판이 단순한 ‘선행 총량’ 계산이라면 그런 사람은 구조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보는 것이 사랑과 의지라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병상에서 다른 사람의 선을 진심으로 바라고, 자기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향하고, 가능한 범위에서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려 한 삶은 외적 활동량만으로 측정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런 생애는 ‘행한 대로’라는 말씀에서 ‘행위’가 얼마나 깊은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말 한마디, 기도 하나, 상대를 향한 진심 어린 선한 의도도 그 사람의 사랑에서 나온 실제 행위입니다. 반대로 겉으로 엄청난 일을 했어도 그 목적이 자기 명예라면 그 행위의 영적 성질은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심판은 인간이 서로의 외적 결과만 보고 내리는 평가와 같을 수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인간이 다른 사람의 영원한 상태를 쉽게 판단해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외적 행위의 일부만 봅니다. 그 사람이 무엇을 알고 있었는지, 어떤 환경과 자유 가운데 선택했는지, 마음 깊은 곳에서 무엇과 싸웠는지, 주님께서 그 사람 안에 어떤 리메인스를 보존하셨는지를 알 수 없습니다. 주님만이 전체를 아십니다. 그러므로 심판에 대한 지식은 다른 사람을 ‘천국 사람’, ‘지옥 사람’으로 분류하게 만들기보다 자기 자신을 주님의 빛 앞에 세우게 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핵심진리’가 다른 사람의 죄성이나 사후 지옥 구역을 구체적으로 설명할 때에는 언제나 한 가지 균형이 필요합니다. 그 지식이 남을 판정하는 표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이런 죄성이니 저 지옥으로 갈 것이다’가 아니라 ‘이 악이 내 안에서 사랑이 되지 않도록 지금 회개해야 한다’로 돌아와야 합니다. 앞 10부에서 살펴본 ‘회개를 잘하는 성도가 가장 훌륭한 성도’라는 공용복 선생님의 말은 바로 이런 자기 성찰의 방향을 잘 보여 줍니다.
그리고 심판을 ‘드러남’으로 이해하면 현재의 회개 자체가 어떤 의미에서는 자발적인 심판이 됩니다. 주님의 진리가 내 악을 비출 때 그것을 감추고 합리화할 수도 있고, ‘주님, 이것이 제 안에 있습니다’라고 인정하고 돌이킬 수도 있습니다. 후자는 지금 주님의 심판을 구원의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숨겨 둔 것이 지금 빛으로 나오면 사후에 그것을 지키기 위해 가면을 유지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는 말씀을 듣고 자기 삶을 계속 살피는 이 공동체의 반복 훈련도 의미 있게 볼 수 있습니다. 같은 ‘핵심진리’를 수십 번 듣는 목적이 교리 확신만 더 강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매번 ‘나는 이 말씀 앞에서 지금 어떠한가’를 보는 것이라면 그것은 일종의 현재적 자기 심판을 자발적으로 받는 훈련이 될 수 있습니다. 특히 생전 공용복 선생님의 말을 직접 들었던 원로들에게 그 문장들은 단순한 활자보다 훨씬 직접적으로 양심을 깨우는 기억으로 작용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만 그 반복이 ‘우리에게는 이 진리가 있으니 우리는 안전하다’는 집단적 확신으로 변하면 정반대가 될 수 있습니다. 심판의 빛은 언제나 자기 안으로 먼저 들어와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오래 읽는 사람도 똑같습니다. ‘나는 영계 구조를 정확히 안다’는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자기 사랑과 이웃 사랑의 실제 상태를 보지 못하면 그 지식은 심판의 빛이 아니라 자기 확신의 벽이 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주님과 열두 제자의 관계를 떠올려 볼 수도 있겠습니다. 주님과 가까이 지냈다는 사실 자체가 제자들을 자동으로 완전하게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그들 역시 다투고, 누가 큰가를 묻고, 주님을 버리고 도망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그들의 실제 상태를 계속 드러냈고, 그들은 그 과정을 통하여 변화되었습니다. 참된 스승의 말은 제자에게 ‘너는 우리 편이므로 괜찮다’는 안전판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비추는 빛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공용복 선생님의 가르침을 기억하는 제자들에게도 가장 깊은 충실성은 문장을 그대로 보존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문장이 지금도 자기 삶을 심판하도록 허용하는 데 있을 것입니다.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가 끝이 아니라 ‘그 말씀 앞에서 나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읽는 사람에게도 정확히 같은 기준입니다.
결국 ‘심판대가 몇 군데인가’라는 질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의 빛 앞에서 무엇이 드러나는가’입니다. 영계에 실제 여러 심판의 장소와 형상이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굳이 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외적 형상의 본질은 사람의 생명과 사랑이 신적 진리 가운데 밝혀지는 데 있습니다. 보좌와 책과 심판대가 영적인 실재라면, 그 실재가 가리키는 중심은 ‘진실이 더 이상 감춰질 수 없음’입니다.
그래서 심판은 두려운 동시에 자비로운 사건입니다. 자기기만과 위선이 끝나는 것이 두렵지만, 선한 사람에게는 오해와 결함과 외적인 가면이 벗겨지고 주님께서 보아 오셨던 실제 선한 내면이 자유롭게 드러나는 해방이기도 합니다. 지상에서 사람들에게 제대로 이해받지 못했어도, 주님은 그 사랑을 정확히 아십니다. 반대로 사람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어도 속의 사랑이 자기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면 그것 역시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백보좌’는 두려움만의 이미지가 아니라 완전한 진실의 이미지이기도 합니다. 어떤 거짓도 남지 않고, 어떤 선도 잊히지 않으며, 어떤 사람도 외적 평판 때문에 잘못 판단되지 않습니다. 신적 진리의 흰 빛 가운데 있는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 의미에서 주님의 심판은 인간 법정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완전한 공정함입니다.
3강 11부에서 ‘핵심진리’와 스베덴보리가 만나는 지점은 그래서 꽤 깊습니다. 둘 다 죽음 후 실제적인 심판과 인간 삶의 책임을 인정하고, 모든 죽은 사람이 역사 끝까지 무의식적으로 기다렸다가 마지막 한날에 처음 심판받는다는 단순한 도식을 넘어서려 합니다. 그리고 사후에 사람의 실제 상태가 드러나고 분리되는 과정을 인정합니다. 반면 ‘핵심진리’는 이것을 중간 영역 여러 곳에 있는 실제 심판대와 여러 시기의 심판으로 보다 공간적·제도적으로 설명하고, 스베덴보리는 그 본질을 속사람과 지배적인 사랑이 신적 진리 가운데 드러나는 상태의 과정으로 더 내적으로 설명합니다.
두 설명 사이에서 어느 한쪽을 가볍게 밀어낼 필요는 없습니다. ‘핵심진리’의 구체적인 심판대 그림은 사후의 책임과 영계의 실재를 매우 생생하게 느끼게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은 그 그림을 더 깊이 열어 ‘왜 그런 법정과 보좌와 책이 나타나는가’를 설명합니다. 심판의 외형 뒤에는 진실의 완전한 드러남이라는 영적 실재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번 부분이 우리에게 남기는 가장 실제적인 질문은 ‘나는 사후 어느 심판대에 설 것인가?’보다 ‘주님의 빛이 오늘 내 삶을 비출 때 나는 무엇을 감추고 있는가?’일 것입니다. 아직 숨기고 합리화하는 악이 있는가, 사람들에게 보이는 모습과 실제 사랑 사이에 큰 간격이 있는가, 선한 행위 안에서도 자기 인정과 공로를 더 사랑하고 있지는 않은가를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계의 심판을 현재의 거듭남으로 가져오는 길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심판을 이렇게 이해한다면 그것을 공포로만 볼 필요도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멸망시키려고 빛을 비추시는 것이 아니라, 어둠을 드러내어 생명으로 이끄시기 위해 비추십니다. 자연계에서 그 빛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이고 악을 인정하며 돌이킬수록, 겉과 속의 간격은 줄어듭니다. 심판의 빛이 이미 구원의 빛이 되는 것입니다.
다음 3강 12부에서는 이 강의의 매우 중요한 마지막 쟁점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바로 눅23:43의 십자가 강도에게 하신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말씀, 부자와 나사로의 사후 상태, 그리고 마12:32의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라는 말씀을 통해 ‘사후에도 회개의 기회가 있는가’를 다루는 부분입니다. 특히 ‘핵심진리’가 사후 중간 영역에서의 복음 증거와 회개 가능성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왜 사후의 ‘가르침과 정화’는 인정하면서도 지배적인 사랑 자체를 뒤집는 ‘제2의 회개 기회’와는 구별하는지를 살펴보면 3강 전체가 가장 중요한 신학적 지점에서 마무리될 것입니다.
3강12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 사후 회개의 기회와 중간 영역, 그리고 3강 전체의 마지막 갈림길
3강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지금까지 쌓아 온 ‘중간 영역’의 논리가 가장 민감한 성경 본문들과 만납니다. 강사 목사님은 중간 영역에 대한 가르침을 전할 때 가장 많이 받는 반론 가운데 하나로 눅23:43, 곧 십자가 위에서 주님께서 강도에게 하신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를 제시합니다. 이 말씀을 자연스럽게 읽으면 강도는 죽은 바로 그날 주님과 함께 낙원에 들어간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죽은 뒤 먼저 중간 영역에 들어가 심판과 정화와 연단의 과정을 거친다는 지금까지의 설명은 어떻게 되는가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강사 목사님 자신도 이 구절을 중간 영역론을 말할 때마다 가장 자주 제기되는 반론이라고 소개합니다.
강의가 이 문제를 해결하는 핵심은 ‘오늘’이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강사 목사님은 영계에는 자연계와 같은 시간의 흐름이 없으며 ‘항상 오늘’이라는 상태가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 말씀하신 ‘오늘’을 자연계의 24시간이라는 시간 개념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하신 요20장의 장면도 함께 끌어옵니다. 십자가 위에서 금요일에 강도에게 ‘오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는데 부활 후에도 아직 올라가지 않았다고 하셨으니, 눅23:43의 ‘오늘’은 자연계의 그날 밤까지라는 뜻이 아니라 영계의 시간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설명에서 먼저 귀하게 볼 것은 ‘영계의 시간은 자연계의 시간과 같지 않다’는 직관입니다. 스베덴보리도 천국과 영계에는 자연계에서와 같은 시간은 없다고 매우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자연계의 시간은 해와 지구의 운동으로 측정되지만, 영계에서 그것에 해당하는 것은 ‘상태의 변화’입니다. 천사에게도 이전과 이후가 있고 사건의 순서가 있지만, 그것을 시계와 달력으로 측정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사후 세계를 자연계 시간표 그대로 연장해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강의의 기본 문제의식은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 가지는 더 조심스럽게 구별해야 합니다. ‘영계에는 자연계와 같은 시간이 없다’는 것과 ‘그러므로 눅23:43의 오늘은 즉시성을 전혀 뜻하지 않는다’는 것은 같은 명제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때는 아직 십자가 위에서 자연계의 사람에게 말씀하시던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영계의 시간 원리만으로 ‘오늘’의 자연스러운 의미를 완전히 제거하는 데에는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사후관에서는 이 말씀을 굳이 약화시킬 이유가 없습니다. 사람은 육체를 벗은 뒤 곧 영계에서 깨어나며, 의식 있는 인간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강도가 그날 주님과 함께 사후의 복된 상태에 들어갔다는 말씀 자체와 영들의 세계의 존재는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낙원에 있다’와 ‘사후의 모든 준비가 끝나 최종적인 천국 공동체에 영원히 정착했다’를 동일한 문장으로 만들 필요가 없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선한 사람은 사후에 주님의 보호 가운데 들어가지만, 그 뒤 자기 상태에 따라 외적인 것이 벗겨지고, 필요한 진리를 배우며, 자기에게 맞는 천국 공동체로 준비되는 과정을 거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약속과 사후의 상태 변화는 충분히 함께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서 어쩌면 ‘오늘’이나 ‘낙원’보다 더 중요한 말은 ‘나와 함께’일지도 모릅니다. 강도에게 주님께서 주신 약속의 중심은 사후 세계의 지리적 좌표가 아니었습니다. ‘너는 몇 층의 어느 영역을 거쳐 어디에 들어갈 것이다’가 아니라 ‘나와 함께 있으리라’였습니다. 천국의 본질 역시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은 장소이면서 동시에 상태이고, 그 상태의 본질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진리를 받아 주님과 결합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함께 있음’이 먼저이고, 낙원의 아름다운 환경은 그 결합이 상응하여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점은 십자가의 강도 이야기를 ‘핵심진리’의 전체 성화론과 나란히 놓을 때 상당히 중요합니다. 강도는 광야 연단을 수십 년 받은 사람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영혼의 할례’를 받은 적도, ‘익은 열매’의 단계를 통과했다고 성경이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죽음을 앞둔 순간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옆에 달리신 주님의 무죄를 인정하며,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간구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응답하십니다. 이 말씀에는 인간이 자기 성화의 성취를 제시하여 주님의 자비를 얻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가 먼저라는 복음의 중심이 매우 강하게 나타납니다.
그렇다고 십자가의 강도를 근거로 ‘죽기 직전 말 한마디만 하면 그 이전의 삶은 아무 상관없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의 생애 전체와 내면을 모릅니다. 주님만이 그의 자유와 사랑, 그 순간의 고백이 얼마나 깊은 내적 전환에서 나왔는지를 아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그를 받아들이셨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후 그가 사후 어떤 준비 과정을 거쳤는지는 눅23:43이 말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본문이 말하는 것보다 더 많이 말하지 않는 절제가 필요합니다.
강의는 이와 함께 눅16의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도 중간 영역론과 연결합니다. 부자는 이미 고통 가운데 있으면서도 아직 지상에 있는 자기 형제들을 기억하고, 누군가를 그들에게 보내 경고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강사 목사님은 이 장면을 인류 역사가 최종적으로 완결된 뒤의 상태가 아니라 아직 구원의 역사가 진행되고 있는 사후 세계의 상황으로 읽습니다. 이미 부자는 지옥 쪽에 있으면서도 지상 사람들과 관련된 관심을 가지고 있으므로, 죽은 뒤에도 의식과 기억과 관계 인식이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 역시 스베덴보리의 사후 인간관과 상당히 잘 맞습니다. 사람이 죽는다고 기억과 인격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지상에서 알았던 사람들을 기억하며, 다른 영들과 대화하고, 자기 사랑에 따라 기쁨과 괴로움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부자가 자기 형제들을 기억한다는 것 자체는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사후에도 완전한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원리와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그러나 부자가 자기 형제들을 걱정한다는 사실만으로 그가 ‘이제 회개하여 천국 사람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형벌을 당하면서 결과를 후회하는 것과 악 자체를 죄로 미워하여 사랑의 방향이 바뀌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자연계에서도 어떤 사람은 잘못 자체를 후회하기보다 그 잘못 때문에 자기가 손해 본 것을 후회할 수 있습니다. ‘다시는 잡히지 말아야지’와 ‘그 악 자체가 싫다’는 전혀 다른 회개입니다. 따라서 눅16만으로 사후의 근본적 회개 가능성을 확정하기에는 한 단계 더 많은 해석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제 3강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갈림길이 나타납니다. 강사 목사님은 마12:31-32의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를 사후 회개의 직접적인 근거로 사용합니다. 논리는 이렇습니다. 성령을 거역하는 죄만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함받지 못한다고 특별히 말씀하셨다면, 다른 죄에는 ‘오는 세상’에서도 사함받을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고, 따라서 지상에서 온전히 회개하지 못한 성도가 사후 심판대 앞에서 다시 회개하여 사죄의 은총을 받을 기회가 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강의는 그 장소를 바로 ‘중간 영역’이라고 명시합니다.
이것은 강의가 단순히 ‘사후에 잘못된 지식을 고칠 수 있다’고 말하는 수준을 넘어선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실제로 ‘이 세상 살 동안에 온전하게 회개하지 못했다면 사후의 심판대 앞에서 다시 한번 회개할 수 있는 기회’, 다시 말해 사죄의 은총을 받을 기회가 있다고 명시합니다. 그래서 ‘핵심진리’의 중간 영역은 단순한 대기장소나 교육기관이 아니라 실제로 지상에서 미완성된 회개와 성화가 계속될 수 있는 구원의 영역이 됩니다.
여기에서 이 가르침의 신앙적 마음을 먼저 충분히 이해해야겠습니다. 강사 목사님은 이것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복음적인 사랑’으로 받아들입니다. 지상에서 아직 충분히 익지 못했더라도 한 번 더 기회를 주시고, 중간 영역에서 정결하게 하여 마침내 천국으로 들어가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실제 강의는 ‘이 땅에서 못 했으면 한 번 더 기회를 주신다’는 것을 하나님의 끝까지 책임지심과 연결합니다. 이 가르침을 단순히 ‘사후 회개를 만들어 낸 잘못된 교리’라고만 읽으면, 그 밑에 있는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깊은 갈망을 놓치게 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바로 이곳에서 분명히 다른 길로 갑니다. 스베덴보리도 사후의 ‘정화’, ‘가르침’, ‘준비’를 매우 풍성하게 인정합니다. 선한 사람이 잘못 알고 있던 교리를 배울 수 있고, 천사들에게 진리를 배울 수 있으며, 자기 선한 사랑과 맞지 않는 외적인 습관과 거짓이 벗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상에서 악을 자기 지배적인 사랑으로 받아들여 형성한 사람이 사후의 고통과 설득을 통해 그 지배적인 사랑 자체를 선으로 뒤집는 ‘제2의 거듭남’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려면 ‘사후에 무엇까지 변할 수 있는가’를 세 층으로 나누어 보면 좋겠습니다. 첫째, 지식과 생각은 변할 수 있습니다. 선한 사람도 잘못된 교리를 가지고 죽을 수 있으며, 사후에 참된 진리를 배우고 자기 잘못을 기쁘게 고칠 수 있습니다. 둘째, 외적인 습관과 성격의 거친 부분도 정리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근본적인 선한 사랑과 맞지 않는 것들이 벗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셋째, 그 사람이 자유롭게 선택하며 형성한 ‘지배적인 사랑’ 자체가 사후 교육과 고통으로 정반대의 사랑으로 새로 만들어지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셋째를 지상의 삶과 연결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연계에서는 사람이 속사람과 겉 사람을 함께 가지고 살아갑니다.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몸을 통해 실제 행동으로 옮깁니다. 선과 악 사이에서 선택하고, 선택한 것을 실제 자연적 삶에 새겨 넣습니다. 반복된 선택은 습관이 되고, 습관은 애정과 결합하며, 결국 지배적인 사랑을 형성합니다. 그래서 지상의 삶은 단순히 천국에 가기 전의 예비학교가 아니라 인간의 영원한 사랑이 자유 가운데 형성되는 특별한 세계입니다.
이 때문에 ‘사후 회개가 없다’는 말을 ‘주님께서 죽은 사람에게 자비를 끊으신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주님은 사후에도 선한 사람을 놀라울 정도로 세심하게 인도하시고, 가르치고, 잘못된 것을 벗겨 주시며, 자기에게 맞는 천국 공동체로 준비시키십니다. 그러나 주님의 자비는 인간의 자유를 무효화하는 자비가 아닙니다. 인간이 자유롭게 형성한 사랑을 고통으로 강제 개조한다면 그것은 인간을 인간으로 사랑하는 방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핵심진리’와 스베덴보리는 모두 ‘하나님은 끝까지 사람을 돌보신다’고 말하지만 그 ‘끝까지’의 의미가 다릅니다. ‘핵심진리’에서는 지상에서 못 이룬 회개와 성화를 사후에도 계속할 기회를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끝까지 사랑하심으로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는 지상에서 사람이 자유롭게 받아들인 선을 끝까지 보존하고, 그 선이 온전히 드러나도록 모든 이질적인 것을 제거하며, 인간의 자유로운 사랑을 영원히 존중하시는 것이 끝까지 사랑하심입니다.
이 차이는 단순한 학설의 차이가 아니라 인간 자유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의 차이입니다. ‘핵심진리’의 입장에서는 인간이 지상에서 아직 완전히 결정되지 못한 부분을 사후에도 계속 선택하며 성장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사후에는 자유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 자유는 이미 형성된 지배적인 사랑 안에서 움직입니다. 선한 사람은 선을 더욱 자유롭게 사랑하고, 악한 사람은 악을 더욱 자유롭게 사랑합니다. 사후의 자유는 ‘나는 이제 전혀 다른 사랑을 선택해 볼까’라는 중립적 자유라기보다 ‘내가 실제 사랑한 것을 자유롭게 드러내는 자유’에 가깝습니다.
강의는 사후에 복음 자체가 전파된다는 근거로 벧전3:18-19의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를 사용합니다. 강사 목사님은 이것을 ‘이 땅이 아닌 죽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을 기회가 있는 곳’의 증거로 제시하며, 중간 영역에서 복음이 전해질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 본문 역시 ‘핵심진리’의 사후 구원론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만일 죽은 영들에게 복음이 선포될 수 있다면 사후에도 구원의 반응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스베덴보리와 접점도 있고 차이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성육신하여 세상에 계실 때 지옥들을 정복하고 영들의 세계를 질서 있게 하셨으며, 당시 구원을 기다리던 선한 영들을 해방하셨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구속 사역이 자연계에만 제한된 것이 아니라 영계 전체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은 매우 강하게 말합니다. 이런 의미에서는 ‘주님께서 영들에게도 구원의 역사를 행하셨다’는 큰 방향이 낯설지 않습니다.
그러나 벧전3장의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가 모든 시대의 모든 죽은 사람에게 ‘죽은 뒤 처음으로 복음을 듣고 새롭게 구원받을 두 번째 기회’를 의미한다고 확대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주님의 구속 사역 당시 영계에서 일어난 특별한 사건과, 모든 개인에게 반복적으로 주어지는 사후 복음 전도의 기회를 동일시하기에는 신중함이 필요합니다. 특히 스베덴보리에게도 사후에 진리를 가르치는 일이 있지만, 그것은 선을 받아들이는 내적 상태를 가진 사람에게 진리를 밝혀 주는 일이지, 악을 사랑하는 사람의 지배적인 사랑을 교리 교육으로 바꾸는 일이 아닙니다.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이 기독교를 전혀 들어 보지 못했지만 자신이 알고 있던 종교와 양심 안에서 선하게 살았다고 해 보겠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이 사람이 사후에 주님에 관한 참된 진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진리를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가 처음으로 예수라는 이름을 들었다고 해서 그때 처음 선한 사랑이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미 주님께서 그 사람 안에서 양심과 선을 통하여 역사하고 계셨고, 사후의 진리는 그 선한 사랑에 정확한 빛을 더해 주는 것입니다.
반대로 평생 복음을 들었으면서도 자기 이익과 지배를 가장 사랑한 사람이 죽은 뒤 더 명확한 복음 설명을 듣는다고 해서 그 지식이 그를 자동으로 새 사람으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정보 부족이 아니라 사랑의 방향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후 ‘복음 전도’와 사후 ‘거듭남’을 구별하게 해 줍니다.
그리고 마12:32의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역시 이 구별 속에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강의의 추론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죄는 오는 세상에서도 용서받지 못한다’고 굳이 말씀하셨다면 다른 죄는 오는 세상에서 용서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암시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장 자체가 직접 ‘다른 죄는 죽은 뒤 회개하면 용서받는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말씀의 중심은 무엇보다 성령에 대한 완고한 거역이 얼마나 깊은 악인가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한 구절 위에 사후 회개 전체의 교리를 세우려면 상당한 해석적 간격을 건너가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말씀을 ‘용서’가 무엇인가라는 문제로 더 깊게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죄를 용서하기 싫어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의 자비는 언제나 용서를 향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악을 자기 사랑으로 붙들고 그것에서 떠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용서는 외적인 법적 선언만으로 그 악을 제거할 수 없습니다. 용서받는다는 것은 악에서 실제로 돌아서는 것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언제나 용서하시지만 인간이 그 용서를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용서받지 못하는 죄’를 주님 쪽에서 ‘나는 이것만큼은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는 제한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사람 쪽에서 신적 진리와 선을 완고하게 거부하여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길 자체를 닫아 버리는 상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를 악이라고 부르고 진리를 알고도 의도적으로 거꾸로 돌리는 상태가 반복된다면, 인간이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내적 통로 자체를 스스로 막게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후 회개의 핵심 질문도 조금 달라집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뒤에는 용서를 안 해 주시는가?’가 아니라 ‘지배적인 사랑이 이미 형성된 사후 상태에서 인간은 악 자체를 자유롭게 미워하고 정반대의 사랑으로 돌아설 수 있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자연계에서와 같은 의미의 근본적 거듭남은 아니라는 쪽입니다. 그렇다고 주님의 자비가 사라진 것도 아닙니다. 자비의 작용 방식이 다릅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면 ‘핵심진리’의 사후 연단론을 훨씬 공정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 가르침의 의도는 ‘지금 대충 살아도 죽어서 회개하면 된다’가 아닙니다. 실제 강의 전체는 정반대로 이 땅에서 광야 연단을 받고 익은 열매가 되라고 매우 강하게 촉구합니다. 오히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성되지 못한 성도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최대한 넓게 붙들기 위해 사후 회개의 가능성까지 확장한 것입니다. 이 선한 의도를 인정해야 공정합니다.
그러나 선한 의도와 교리의 정확성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진리를 지키기 위해 반드시 ‘사후에 지배적인 사랑을 다시 바꿀 수 있다’는 결론까지 가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인간의 자유를 끝까지 존중하신다는 데서 같은 자비를 봅니다. 사람이 선을 조금이라도 자유롭게 받아들였다면 그 선을 끝까지 보존하시고, 그 선과 결합될 수 있는 모든 진리를 주시며, 외적 장애들을 제거하여 천국으로 준비시키십니다. 그러나 인간이 자유롭게 악을 자기 생명으로 만든 것을 강제로 뒤집지는 않으십니다.
이 지점에서 공용복 선생님의 생애까지 알고 ‘핵심진리’를 읽으면 이 사후 회개론의 정서적 뿌리도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거의 온몸의 자유를 잃어 가는 극심한 병상에서 오랜 세월 하나님을 붙들었던 사람에게 ‘하나님은 인간을 한 번 실패했다고 버리시는 분이 아니다’, ‘끝까지 사람을 붙들고 정결하게 하신다’는 확신은 단순한 교리적 낙관론 이상의 것이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공동체의 중간 영역론에는 영계 지리학 못지않게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에 대한 강한 신앙이 흐르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고 그 생애의 무게 때문에 사후 회개 교리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공용복 선생님을 깊이 존중한다면 ‘그분이 무엇을 지키려 했는가’와 ‘그 목적을 위해 사용한 설명이 어디까지 정확한가’를 구별하여 보는 편이 더 정직합니다. 그분이 지키려 했던 것은 아마 하나님의 자비와 인간의 실제 성화, 그리고 구원이 삶과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이었을 것입니다. 이 중심은 스베덴보리와도 매우 깊게 만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자비가 사후에 어떻게 역사하는지를 설명하는 데서 서로 다른 길을 갑니다.
그리고 이 차이가 오히려 현재의 삶을 어떻게 보느냐에 영향을 줍니다. ‘핵심진리’에서는 지금 완성되지 못해도 사후에 한 번 더 정결의 기회가 있다는 자비가 강조되면서도, 지상의 상급과 현재의 연단을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는 자연계의 삶이 더욱 결정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여기에서 지배적인 사랑이 자유롭게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작은 선택 하나가 영원과 연결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공포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 잘못 선택하면 끝이다’라는 식의 불안한 신앙이 아닙니다. 거듭남은 한 번의 실수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전 생애를 보시고 끊임없이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게 하시고, 같은 악과 수없이 싸우더라도 포기하지 않도록 힘을 주십니다. 중요한 것은 완벽한 성공률이 아니라 어느 방향을 사랑하고 있는가입니다. 악을 범했을 때 그것을 정당화하며 사랑하는가, 아니면 악으로 인정하고 다시 주님께 돌아서는가입니다.
이 점에서 앞서 자료에서 확인한 공용복 선생님의 ‘회개를 잘하는 성도가 가장 훌륭한 성도’라는 취지의 가르침은 상당히 중요한 균형이 됩니다. ‘한 번 영혼의 할례를 받으면 모든 죄성 문제가 완전히 끝난다’는 높은 단계의 언어만 있었다면 매우 경직될 수 있었겠지만, 실제 삶에서는 ‘먼지가 묻으면 닦고 또 닦으며 평생 회개하다 주님 나라에 가면 된다’는 방향도 함께 강조됩니다. 이런 문장은 이 공동체의 성화론을 단순한 완벽주의로만 볼 수 없게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바로 이 회개의 방향은 매우 중요합니다. 참된 회개는 자기 죄를 보고 인정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그 악을 더 이상 행하지 않으려고 실제 삶에서 싸우는 것입니다. 사람이 몇 번 넘어졌는지가 최종 기준이 아니라, 넘어진 뒤 그 악을 자기 것으로 변호하는가 아니면 다시 일어나 싸우는가가 중요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회개를 잘하는 사람’은 자기 안의 악을 잘 감추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빛이 비출 때 그것을 인정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사후 회개가 있는가?’라는 논쟁 역시 현재의 회개를 약화시키지 않는 방향으로 다루는 것이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사후의 새로운 거듭남 기회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사람을 절망시킬 이유는 없습니다. 오히려 지금 주님께서 주시는 수많은 회개의 기회를 더 귀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 자연계에 있고, 생각과 의지와 행동을 통해 실제로 새로운 사랑을 형성할 수 있습니다. 지금이 무서운 마지막 기회라기보다 ‘주님께서 내 자유 속에서 실제 새로운 생명을 형성하실 수 있는 귀한 시간’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강도는 그 자비가 인간의 계산보다 훨씬 넓다는 사실을 동시에 보여 줍니다. 우리는 누가 너무 늦었다고 쉽게 말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 숨이 남아 있는 순간에도 주님께서는 인간의 가장 깊은 자유를 아시며 그 사람을 받아들이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연계의 삶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가르침은 ‘이 시점을 넘으면 하나님도 어쩔 수 없다’는 인간적인 시간 제한보다, 인간의 사랑이 어디에서 자유롭게 형성되는가에 관한 질서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강의에서 벧전3장과 마12장, 눅16장과 눅23장을 모두 하나의 중간 영역론으로 연결하는 방식은 상당히 적극적인 성경 종합입니다. 각 본문에 공통적으로 ‘죽음 이후에도 의식적인 세계가 있다’, ‘심판이 있다’, ‘영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다’, ‘낙원이라는 상태가 있다’는 단서들이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 각각의 본문이 동일하게 ‘지상에서 미완성된 회개와 성화를 사후에도 계속할 수 있는 하나의 중간 영역’을 직접 가르친다고 말하려면 한 단계의 교리적 종합이 더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직접 이렇게 말한다’와 ‘이 본문들을 종합하여 이 강의는 이렇게 이해한다’를 구별하는 것이 공정하겠습니다.
이 구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도 똑같이 적용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방대한 영계 설명이 있다고 해서 그 설명을 모든 성경 구절에 강제로 집어넣어 ‘주님께서 이 구절에서 정확히 스베덴보리의 이 상태를 말씀하셨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말씀은 먼저 말씀 자체로 존중해야 하고, 스베덴보리의 영계론은 그 본문이 밝히는 영적 실재를 더 넓게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렌즈로 사용해야 합니다. 렌즈가 말씀의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런 태도를 유지하면 눅23:43도 아름답게 남습니다. ‘오늘’을 억지로 먼 미래로 미룰 필요도 없고, 그렇다고 ‘오늘 낙원’이라는 한 문장으로 사후의 모든 상태 변화를 부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사람이 육체를 벗은 뒤 즉시 영계에서 깨어나 주님의 보호 가운데 있을 수 있고, 동시에 자기 내적 상태에 따라 준비와 가르침을 받을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약속은 ‘나와 함께’입니다.
그리고 마12:32도 경고의 무게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반드시 ‘사후 제2 회개 기회’를 읽어 넣을 필요는 없습니다. 성령의 역사와 진리를 고의적으로 거슬러 악을 선이라 하고 선을 악이라 하는 완고함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깊이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동시에 주님의 자비는 끝이 없으며, 인간이 그 자비를 받아들일 자유의 길을 스스로 닫지 않도록 지금 회개해야 한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벧전3장의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 역시 주님의 구속 역사가 자연계 인간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영계 전체에 미쳤음을 보여 주는 매우 깊은 말씀으로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성육신하셔서 자연계뿐 아니라 영계의 질서까지 바로잡으셨습니다. 다만 그 사건에서 곧바로 ‘모든 사람이 죽은 뒤 한 번 더 복음을 듣고 처음부터 다시 선택한다’는 일반 법칙을 도출하는 데에는 조심스러움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보면 3강 전체에서 가장 큰 놀라움 가운데 하나는 ‘핵심진리’와 스베덴보리가 얼마나 가까이 다가가면서도 결정적인 한 지점에서 갈라지는가입니다. 양쪽 모두 인간이 죽은 뒤에도 살아 있는 완전한 인간이라고 봅니다. 천국과 지옥 사이의 중간적인 사후 세계를 인정합니다. 사람의 외적 상태가 벗겨지고 실제 내면이 드러나는 과정을 말합니다. 선한 사람에게 사후의 가르침과 준비와 정화가 있다는 것도 인정합니다. 영계에 실제 인간적 생활환경과 공동체가 있다는 점에서도 상당히 가까이 갑니다.
그런데 ‘지상에서 형성된 지배적인 사랑 자체가 사후에 다시 반대 방향으로 바뀔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길이 갈라집니다. ‘핵심진리’는 하나님의 끝까지 책임지심을 강조하면서 ‘그렇다’는 가능성을 상당히 넓게 엽니다. 스베덴보리는 ‘생각과 외적인 것은 바뀔 수 있으나 지배적인 사랑의 방향은 자연계의 자유로운 삶에서 형성된다’고 봅니다. 이 차이가 중간 영역의 의미와 연단, 회개, 심판을 모두 다르게 배열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 차이를 ‘누가 더 자비로운 하나님을 믿는가’의 문제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핵심진리’는 사후에도 한 번 더 기회를 주시는 데서 하나님의 자비를 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자유를 영원히 존중하면서 그가 자유롭게 받아들인 가장 작은 선까지 끝까지 살려 내시는 데서 하나님의 자비를 봅니다. 둘 다 자비를 지키려 하지만 자비와 자유의 관계를 다르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오히려 공용복 선생님의 생애가 우리에게 좋은 태도를 가르쳐 줄 수도 있겠습니다. ‘병상의 증거자 공용복’을 통해 본 그분의 삶에는 단순한 교리적 자신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질문과 회의, 고통과 씨름, 그리고 그 가운데 다시 하나님께 향하려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분의 가르침을 존중하는 가장 좋은 방식 역시 모든 문장을 손댈 수 없는 완성품으로 만드는 데만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분이 그토록 찾고자 했던 진리와 하나님의 뜻을 계속 더 깊이 살피는 데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제자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생전 공용복 선생님의 육성을 직접 기억하는 원로들에게 ‘핵심진리’는 책을 넘어 스승과의 기억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문장과 다른 해석을 제시할 때는 그 사람들의 기억까지 함께 존중해야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스승의 유산은 제자를 자기 문장 안에 영원히 가두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바라보던 진리를 계속 바라보게 하는 데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3강을 처음부터 다시 보정한 일은 꽤 의미가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핵심진리의 영계 구조를 스베덴보리와 비교한다’는 성격이 조금 더 강했다면, 이제는 그 구조를 낳은 신앙적 마음과 그 가르침을 수십 년 동안 품고 살아온 사람들까지 함께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일치하는 부분에서는 단순히 ‘스베덴보리도 그렇게 말한다’보다 왜 그런 영적 직관이 중요한지를 보게 되었고, 다른 부분에서는 ‘틀렸다’고 자르기보다 어디에서 두 길이 갈라졌는지를 더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3강 전체를 돌아보면 ‘핵심진리’가 말하는 영계론의 가장 귀한 중심은 영계 지도의 세밀함 자체에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것은 ‘사람은 죽어 없어지는 존재가 아니다’, ‘지금의 삶은 영원과 연결되어 있다’, ‘천국은 실제 거룩한 생명을 가진 사람이 살아가는 나라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끝까지 구원으로 이끌고 싶어 하신다’는 강한 확신에 있습니다. 이 중심은 충분히 존중할 가치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에 몇 가지 중요한 깊이를 더합니다. 영계의 장소는 상태와 상응하고, 천국과 지옥은 사람이 사랑한 생명과 결합하며, 심판은 외적 법정의 선고보다 참된 사랑의 드러남이고, 사후 정화는 새로운 지배적 사랑을 만드는 두 번째 지상생활이라기보다 이미 형성된 선에서 이질적인 것을 벗겨 내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모든 천국적 생명의 실제 근원은 인간의 연단 성취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진리입니다.
이렇게 볼 때 3강의 가장 중요한 질문은 ‘중간 영역은 정확히 몇 층인가’, ‘심판대는 몇 군데 있는가’, ‘교육받는 낙원에는 문이 몇 개 있는가’가 아닐 것입니다. 물론 그런 설명도 강의 체계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질문은 ‘나는 지금 어떤 사랑을 형성하고 있는가’입니다. 사후에 나의 진짜 얼굴이 드러난다면, 지금 무엇을 사랑하며 살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질문은 다른 사람을 향하기보다 먼저 자기 자신을 향해야 합니다. ‘저 사람은 어느 지옥으로 갈까’가 아니라 ‘내 안에서 지옥적인 것을 사랑하고 있는 부분은 무엇인가’, ‘나는 14만 4천에 들어갈까’가 아니라 ‘오늘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있는가’, ‘나는 익은 열매인가’가 아니라 ‘오늘 내 안에서 주님의 생명이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3강의 마지막에 사후 회개 이야기가 나온 것은 오히려 현재의 회개로 돌아오게 하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사후에 또 기회가 있느냐 없느냐를 논쟁하는 동안 오늘 회개할 악을 그대로 붙들고 있다면 영계 지식이 아무 유익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진리가 지금 내 안의 잘못을 보여 주었다면 지금 돌이키면 됩니다. 주님은 지금도 자비로우시고, 지금도 힘을 주시며, 지금도 사람의 자유 안에서 새 생명을 이루십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강도에게 하신 말씀은 이 긴 영계 강의 끝에서 다시 아주 단순한 중심을 보여 줍니다. ‘나와 함께.’ 천국의 구조를 아무리 상세히 알아도 이 말이 빠지면 천국의 본질을 놓칠 수 있습니다. 중간 영역도, 심판도, 정화도, 교육도, 천국의 세 층도 모두 결국 사람을 주님과의 결합이라는 중심에서 보아야 합니다. 주님 없는 천국 지식은 천국의 지식일 뿐 천국의 생명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방대한 천국과 영계의 기록도 결국 같은 방향을 가리킵니다. 천국의 모든 것은 주님으로부터 나오고, 모든 천사는 주님으로부터 사랑과 지혜를 받으며, 천국 전체는 주님의 신적 인간을 중심으로 하나를 이룹니다. 그러므로 영계를 아는 최종 목적도 사후 세계에 대해 남보다 많이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주님의 생명과 질서를 더 기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는 데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보면 ‘익은 열매’라는 ‘핵심진리’의 오랜 표현도 매우 아름답게 다시 읽을 수 있습니다. 익은 열매는 자기 힘으로 모든 죄성을 완전히 소멸시켜 ‘나는 다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이기보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 그 생명이 실제 사랑과 삶으로 나타나는 사람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 남아 있는 결함이 조금 있더라도 생명의 방향은 분명합니다. 그는 악을 사랑하기보다 그것을 벗어나고 싶어 하고, 선을 의무 이상으로 사랑하기 시작하며, 자기 공로보다 주님의 자비를 더 의지합니다.
어쩌면 이런 사람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말은 ‘나는 익은 열매입니다’가 아니라 ‘주님, 저를 끝까지 익혀 주십시오’일지도 모릅니다. 자신을 완성된 사람으로 규정하기보다 끝까지 주님의 손에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살펴본 공용복 선생님의 생애와 제자들의 기억까지 함께 생각하면, ‘핵심진리’의 높은 단계 언어 뒤에 이런 간절함이 있었음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겠습니다.
그래서 3강 ‘영계의 구조와 실상’의 마지막을 이렇게 정리하고 싶습니다. ‘핵심진리’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죽은 뒤에도 하나님의 구원은 실제로 계속되는가’이고, 그 대답은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끝까지 책임지신다’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거기에 더하는 질문은 ‘그 끝까지 책임지심은 인간의 자유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이며, 그 대답은 ‘주님은 인간이 자유롭게 받아들인 선을 끝까지 보존하고 완성하시되, 자유롭게 형성한 사랑을 강제로 뒤집지는 않으신다’입니다.
두 가르침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차이를 제대로 아는 것이 오히려 서로의 중심을 더 잘 보게 합니다. ‘핵심진리’에서는 하나님의 끝없는 자비가, 스베덴보리에서는 그 자비와 결코 분리되지 않는 인간의 자유가 특별히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리고 둘을 함께 바라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무렇게나 살아도 결국 고쳐 주시는 사랑’으로도, ‘한 번 잘못하면 끝내시는 사랑’으로도 생각하지 않게 됩니다. 주님은 끝까지 사랑하시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자유를 끝까지 존중하시고, 지금 우리의 자유 안에서 끊임없이 선을 향하도록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긴 3강을 마치며 남는 가장 실제적인 권면은 단순합니다. 죽은 뒤의 기회를 계산하지 말고 오늘 주님께 돌아서는 것입니다. 영계의 심판대를 두려워하기 전에 오늘 말씀의 빛 앞에 자기 마음을 열고, 사후의 정화 과정을 궁금해하기 전에 오늘 보이는 악을 주님의 도움으로 멀리하며, 어느 천국 층에 들어갈지를 생각하기 전에 오늘 만나는 사람에게 천국의 사랑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육체를 벗는 날이 오면 우리가 낯선 우주로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 땅에서 사랑해 오던 생명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을 사랑하며 주님을 향해 살아온 사람에게 아직 남아 있는 무지와 결함이 있다면 주님께서는 그것 때문에 그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가르치시고, 벗겨 주시고, 준비시키시고, 자기에게 가장 맞는 천국 공동체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사후 세계에서 만나는 매우 깊고 따뜻한 자비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길의 중심에는 역시 십자가에서 들려온 한마디가 있습니다. ‘나와 함께.’ 천국에 대한 모든 지식은 결국 이 말씀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어디에 있느냐보다 누구와 함께 있느냐, 몇 층에 들어가느냐보다 누구의 사랑을 생명으로 받아들이고 있느냐가 먼저입니다. 그분과 함께하는 상태가 천국의 시작이며, 그 상태는 죽은 뒤에야 처음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작은 회개와 사랑과 쓰임 가운데 이미 시작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번 보정본의 3강 ‘영계의 구조와 실상’은 12부로 마무리하겠습니다. 1강과 2강에서 시작된 ‘익은 열매’, ‘연단’, ‘모형적 진리’가 3강에서 사후 세계의 구조와 연결되었고, 마지막에는 결국 ‘하나님의 자비와 인간의 자유, 현재의 거듭남’이라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이제까지의 흐름을 그대로 유지한다면 다음 강부터도 공용복 선생님의 생애와 이 공동체의 실제 신앙을 조용히 배경에 품되, 각각의 가르침을 먼저 충분히 경청한 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더 깊이 열어 가면 되겠습니다.
이 장의 끝에서는,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 이와 다르게 생각했던 사람들의 몇 가지 사례를 제시하겠습니다. At the end of the chapter, several examples will be given of those who during their abode in this world had thought otherwise.
해설
AC.323은 한 문장으로 된 매우 짧은 글이지만, AC.320-322에서 다룬 내용을 다음에 이어질 실제 영계 경험과 연결해 주는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여기서 ‘이와 다르게 생각했던 사람들’이란, 사람이 죽은 뒤에도 지금과 같은 인간으로 살아가며,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말하는 모든 능력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육체 안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완전한 감각과 사고 능력을 지닌다는 사실을 지상 생애 동안 믿지 않았던 사람들을 말합니다. AC.320에서는 사람이 저세상에 들어간 직후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삶의 연속성이 완전하다는 것을, AC.321에서는 영의 감각과 사고와 말하는 능력이 육체 안에 있을 때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것을, AC.322에서는 그것을 시각, 청각, 후각, 촉각, 애정, 사고와 언어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으로 설명했습니다. AC.323은 이제 이러한 설명을 교리적 진술에만 머물게 하지 않고, 실제 사례를 통하여 확인하겠다고 예고하는 글입니다.
특히 ‘during their abode in this world’를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이라고 옮긴 데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abode’에는 단순히 이 세상에서 ‘살았다’는 것보다 잠시 ‘머물렀다’는 뉘앙스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인간관에서 지상의 육체적 삶은 인간 존재의 전부가 아니라 영원한 삶의 첫 단계입니다. 사람은 잠시 자연계에 머물면서 자신의 사랑과 삶의 방향을 형성하고, 육체를 벗은 뒤에는 그 생명이 영계에서 계속됩니다. 따라서 죽음은 존재의 소멸이나 단절이 아니라, 자연계에서 영계로 삶의 장이 옮겨지는 사건입니다. AC.320에서 사람이 사후에도 자신을 여전히 같은 사람으로 느끼는 이유도 바로 이 생명의 연속성 때문입니다.
또한 여기서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주장을 단순한 추론이나 신학적 사변으로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AC.322에서 그는 ‘저는 수천 번 반복된 경험을 통하여 그 반대임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AC.323에서는 지상에 있을 때, 영의 실재와 사후의 감각적 삶을 믿지 않았던 사람들이 실제로 사후에 어떤 경험을 하게 되었는지를 제시하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믿지 않았으니 벌을 받았다’는 식의 이야기를 예고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 관념에 갇혀 있던 사람이 육체를 벗은 뒤 자신이 여전히 보고 듣고 생각하며 살아 있음을 직접 경험하면서 기존의 관념이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AC.323은 AC.320-322 전체의 중요한 결론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지상에서 영을 육체보다 덜 실제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영을 연기나 기운처럼 막연한 것으로 상상하거나, 사후의 삶을 의식만 희미하게 남아 있는 상태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전하는 영계는 정반대입니다. 육체가 더 실제적이고 영이 덜 실제적인 것이 아니라, 영이 본래적인 인간이며, 육체는 그 영이 자연계에서 살아가기 위해 잠시 사용하는 가장 바깥 형체입니다. 그러므로 육체를 벗는 것은 인간적인 감각과 사고를 잃는 일이 아니라, 그것들을 제한하던 자연적 조건에서 벗어나는 일입니다.
바로 앞 AC.322와 연결하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육체의 눈과 귀가 실제로 보고 듣는 주체가 아니라 영이 그것들을 통하여 보고 들었던 것이라면, 육체를 벗었다고 해서 시각이나 청각 자체가 사라질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자연적 기관의 제한이 사라지면서 영적 감각은 더욱 분명하고 완전하게 활동합니다. 그래서 사후에 자신이 여전히 보고 듣고 생각하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지상에서 ‘육체가 감각의 주체’라고 생각했던 사람에게는 자신의 옛 관념을 바로잡는 직접적인 경험이 됩니다.
따라서 AC.323의 ‘이와 다르게 생각했던 사람들’이라는 짧은 표현에는 상당히 넓은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사후세계를 부정했던 사람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영은 존재하더라도 육체가 없으면 인간다운 감각과 사고를 할 수 없다고 여겼던 사람들까지 포함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제 그들이 저세상에서 자기 자신의 생생한 존재를 통하여 무엇을 깨닫게 되는지를 실제 사례로 보여 주려 합니다. AC.323은 짧지만, AC.320-322의 ‘사후에도 나는 여전히 나이며, 오히려 더 분명하게 보고 듣고 생각하고 살아간다’는 메시지를 실제 영계 경험으로 넘겨주는 하나의 문턱과 같은 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2026/08/09)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8, ‘거룩 거룩 거룩 전능하신 주님’, 찬88, ‘내 진정 사모하는’입니다.
오늘은일종의 쉬어가는 주로 AC 글 번호로는 314번에서 323번입니다. AC 창3 뒤와 창4 앞, 그러니까 ‘사후 사람이 영생에 들어가는 것’, 그리고 ‘사후 사람이 영혼,즉 영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내용을 함께 다루겠습니다.
먼저 본문입니다.오늘은 창세기 본문이 필요 없는 AC 리딩 시간이지만, 창3과 창4의 연결 시간이기도 하므로 창3:24와 창4:1을 묶어 봉독하겠습니다.
24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창3:24; 4:1)
제목은
사람이 영생에 들어간다는 것과 영으로 산다는 것
이며, 다음은오늘 범위인AC.314-323 요약입니다.
‘사람이 영생에 들어감에 관하여’(AC.314-319)
AC.314-319는 사람이 죽은 뒤 어떻게 천사들의 인도를 받고, 자신의 내적 사랑과 삶의 질에 따라 점차 천국 또는 지옥을 향해 나아가는지를 보여 줍니다. 사후 처음 의식을 회복한 사람에게는 빛의 사용이 허락되고, 영적 천사들은 그가 원하는 것을 가능한 한 친절하게 도우며, 그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만 저세상의 일을 알려 줍니다. 여기에는 주님의 섭리의 중요한 원리가 드러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에게 진리를 한꺼번에 강요하지 않으시고, 각 사람의 상태와 수용 능력, 그리고 자유를 존중하시며, 그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씩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이러한 가르침과 인도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내적 성향 때문에 천사들의 가르침을 원하지 않게 되고, 결국 스스로 천사들에게서 멀어지려 합니다. 중요한 것은 천사들이 그 사람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자신의 사랑과 성향에 따라 그들에게서 떠난다는 점입니다. 천사들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친절히 돕고 가르치며, 가능한 한 천국으로 인도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천국의 사랑은 결코 강요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이 끝까지 존중됩니다.
이후 사람은 다시 선한 영들의 공동체로 인도되어 도움을 받지만, 세상에서 형성된 그의 삶이 그들과 함께 머물 수 없는 성격이라면 그곳에서도 스스로 떠나기를 원합니다. 이러한 과정은 여러 차례 반복되며, 마침내 그는 자신의 세상에서의 삶과 완전히 일치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게 됩니다. 그곳에서 그는 마치 자기 자신의 삶을 다시 발견한 것처럼 느끼며, 결국 자신이 평생 사랑해 온 것이 무엇이었는지가 온전히 드러납니다. 따라서 천국과 지옥은 외부에서 강제로 배정되는 장소라기보다, 사람이 자신의 가장 깊은 사랑을 따라 스스로 찾아가는 영적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또한 사후의 인도 과정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속도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어떤 사람은 더 천천히, 어떤 사람은 더 빨리 천국으로 나아가며, 심지어 죽은 직후 거의 곧바로 천국으로 올려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차이는 주님의 사랑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각 사람이 지상에서 얼마나 천국의 사랑과 질서에 맞는 삶을 이미 형성하였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AC.318의 첫 번째 사례는 이를 잘 보여 줍니다. 한 사람은 처음에는 자신이 죽은 줄도 모르고 여전히 세상에 있다고 생각했으며, 집과 재산을 모두 잃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걱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천적 천사들의 큰 친절을 받은 뒤, 그의 마음에서 나온 생각은 ‘이 큰 사랑을 어떻게 갚을 수 있을까’였습니다. 바로 이 반응을 통하여 그가 지상에서도 이미 신앙의 체어리티 가운데 살았던 사람임이 드러났고, 그는 곧바로 천국으로 올려졌습니다. 사후에 새로운 성품이 생긴 것이 아니라, 지상에서 형성된 사랑이 자연스럽게 드러난 것입니다.
AC.319에서는 또 다른 사람이 천사들에 의해 곧바로 천국으로 옮겨져 주님께 받아들여지고 천국의 영광을 보게 된 사례를 덧붙입니다. 이를 통해 스베덴보리는 사후의 길에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일반적인 질서가 있지만, 그 질서가 기계적으로 동일한 기간과 단계로 진행되는 것은 아님을 보여 줍니다. 이미 세상에서 천국의 삶을 자신의 내적 삶으로 형성한 사람에게는 긴 준비가 거의 필요하지 않을 수 있으며, 다른 사람에게는 보다 긴 정리와 준비의 과정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경우에 사람을 인도하고 받아들이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시며, 천사들은 그 섭리를 수행하는 사랑의 봉사자들입니다.
따라서 AC.314-319의 핵심은 사후의 심판이 외부에서 내려지는 일방적인 판결이 아니라, 사람의 내적 사랑이 드러나고, 그 사랑과 맞는 공동체를 스스로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데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가능한 한 사람을 천국으로 이끄시지만, 결코 그의 자유를 빼앗지 않으십니다. 사람은 자신이 세상에서 형성한 사랑을 따라 결국 자신의 영원한 삶의 자리를 찾아가며, 이미 천국의 사랑 가운데 살아온 사람에게 죽음은 천국의 삶이 중단 없이 계속되는 하나의 전환일 뿐입니다.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AC.320-323)
AC.320-323은 사람이 죽은 뒤에도 여전히 이전과 같은 사람으로 살아가며, 오히려 육체 안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선명하고 완전한 감각과 사고 능력을 지니게 된다는 사실을 설명합니다. 사람이 저세상에 들어가면 처음에는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여전히 이 세상에 있으며, 심지어 아직도 육체 안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죽음이 의식의 단절이 아니라 연속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죽는 순간에도 기억과 생각, 욕망과 애정, 성격과 사랑을 그대로 지닌 채 영계로 들어가므로, 자신이 여전히 같은 사람이라고 느끼는 것입니다.
AC.321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영의 감각과 사고와 말하는 능력이 육체 안에 있을 때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설명합니다. 사람이 육체를 벗으면 인간성이 희미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분명하고 실제적으로 드러납니다. 다만 영들은 이러한 변화를 처음부터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며, 주님께서 성찰의 빛을 허락하실 때, 비로소 자신의 현재 상태와 지상에서의 상태를 비교하여 그 차이를 깨닫게 됩니다.
AC.322는 이를 시각, 청각, 후각, 촉각, 애정, 사고와 언어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영들은 지상의 한낮의 빛과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밝은 빛 가운데 보고, 육체의 청각으로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분명하게 들으며, 후각과 촉각 역시 훨씬 더 완전하게 사용합니다. 특히 모든 감각은 어떤 의미에서 촉각과 관련되며, 지옥의 고통과 괴로움 역시 영적 감각이 더욱 직접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경험됩니다. 따라서 영계는 감각이 사라진 추상적 세계가 아니라, 지상보다 훨씬 더 생생하고 실제적인 세계입니다.
또한 영들은 육체 안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맑고 분명하게 생각하며, 그들의 하나의 관념 안에는 지상에서의 수많은 관념에 해당하는 풍부한 내용이 담길 수 있습니다. 그들의 말 역시 생각과 애정에 훨씬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지상의 언어보다 훨씬 더 예리하고 명료하게 의미를 전달합니다. 이는 감각과 사고의 실제 주체가 육체가 아니라 영이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눈과 귀, 뇌와 혀는 영이 자연계에서 자신을 나타내기 위한 도구였을 뿐이며, 육체를 벗은 뒤에는 그 영적 능력이 자연적 기관의 제약 없이 더욱 자유롭게 드러납니다.
그러나 이러한 뛰어난 능력이 그 자체로 선함이나 지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악한 영들도 뛰어난 감각과 사고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자기 사랑과 거짓을 위해 사용하며, 선한 영들과 천사들은 같은 능력을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진리를 위해 사용합니다. 따라서 사후에 중요한 것은 사람이 얼마나 잘 보고 듣고 생각하느냐가 아니라, 그 모든 능력이 어떤 사랑을 섬기고 있느냐입니다. 생명의 질은 감각과 사고 능력 자체보다 그것들이 무엇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며 추구하는지에 의해 결정됩니다.
이러한 관점은 육체적 장애를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빛을 줍니다. 육체의 눈이나 귀가 제한되어 있다고 해서 영 자체가 손상된 것은 아닙니다. 감각의 근원은 영에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연계에서 특정 감각 기관에 제약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도 영으로서는 온전한 인간 구조를 지니며, 사후에는 육체의 제한에서 벗어나 그동안 영 안에 있었던 감각과 생각과 교통의 능력을 더욱 자유롭게 나타내게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육체적 장애가 사람의 proprium이나 자기 사랑을 자동으로 제거하는 것도 아닙니다. 장애가 있든 없든 모든 사람은 동일하게 주님의 거듭남이 필요합니다.
마지막 AC.323은 이러한 설명을 실제 사례로 이어 주는 짧은 전환 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장의 끝, 그러니까 창4 끝에서, 지상에 있을 때 영과 사후의 삶을 이와 다르게 생각했던 사람들의 사례를 제시하겠다고 예고합니다. 즉 영은 희미하고 비현실적이며 육체가 없으면 감각이나 사고도 제대로 할 수 없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사후 자신의 실제 경험을 통하여 그러한 관념이 틀렸음을 어떻게 깨닫게 되는지를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결국 AC.320-323의 중심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사람의 참된 인간성은 육체에 있지 않고 영에 있으며, 죽음은 그 인간성을 약화시키는 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육체의 제약을 벗겨 그 본래 상태를 더 분명히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사람은 죽은 뒤에도 여전히 같은 사람으로 보고, 듣고, 생각하고, 사랑하며 살아가고, 오히려 그 모든 능력은 더욱 완전해집니다. 따라서 죽음은 생명의 소멸이 아니라, 영이 자신의 본래 세계에서 더 충만하고 실제적인 삶을 시작하는 전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첫 강의를 듣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이것이 일반적인 의미의 ‘강의’라기보다 새로운 공동체를 출범시키면서 그 정체성을 설명하는 일종의 오리엔테이션이라는 점입니다. 강사는 한국 개신교 안에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수도 전통을 다시 세워 보고 싶다는 상당히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수도사학교를 단순한 신학교나 성경공부 모임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공부하고 시험을 치고 책을 읽는 과정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보다 훨씬 깊은 곳에는 ‘사람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놓여 있습니다. 이 선명한 문제의식, 곧 ‘한국 개신교에 수도(修道)가 필요하다. 그리고 수도는 지식을 더 쌓는 일이 아니라 사람 자체가 달라지는 일이어야 한다.’ 이것이 첫 강의의 중심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저는 이 강의를 상당히 호의적으로 보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 역시 종교의 궁극적인 목적을 지식의 축적에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사람에게 알려지기 위해 주어지는 것이지만, 아는 데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이해한 진리가 의지 안으로 들어가고, 의지에서 행위로 나오며, 마침내 삶의 습관과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무엇을 알고 있는가’보다 훨씬 근본적인 질문은 ‘무엇을 사랑하는가’, 그리고 ‘그 사랑에 따라 어떻게 사는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수도사학교가 처음부터 ‘또 하나의 신학 공부’를 지향하지 않고, ‘사람의 변화’를 지향했다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장점입니다.
강의에서 반복적으로 느껴지는 또 하나의 문제의식은 한국 개신교의 ‘목회자 중심적 성공 모델’에 대한 불만입니다. 교회를 크게 하고, 사람을 모으고, 조직을 확장하고, 목회자로서 사회적 위치를 얻는 것과 복음적인 사람이 되는 것은 반드시 같은 일이 아니라는 문제의식입니다. ‘돈, 돈, 돈’ 같은 표현을 비롯, 강사는 교회가 물질과 성공을 좇으면서 하나님에게서 멀어질 가능성을 상당히 강하게 경계합니다. 이것은 표현의 강약을 떠나서 매우 성경적인 문제제기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문제가 더욱 깊어집니다. 교회의 타락은 먼저 제도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질서가 뒤집히면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진리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높이고 세상을 소유하기 위해 종교와 진리를 사용하기 시작할 때, 겉으로는 여전히 교회이고, 설교와 예배와 성경이 존재하더라도 속에서는 이미 질서가 전도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강사가 수도를 요청하는 이유를 단순히 ‘가톨릭에는 수도원이 있으니 개신교에도 수도원이 하나쯤 있어야 한다’는 정도로 이해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더 깊은 동기는 ‘목회 성공이라는 궤도 밖에서 하나님 앞에 한 사람으로 서는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당히 귀한 문제의식입니다. 목사라는 직함도, 교회의 크기도, 설교 능력도, 학위도 잠시 내려놓고, ‘나는 실제로 어떤 사람인가’를 하나님 앞에서 묻자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와도 매우 가까운 곳에서 만납니다. 영계에서는 직함이나 사회적 외관이 그 사람의 본질을 결정하지 않고, 그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며 살아왔는지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수도사학교의 방향에 하나의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무엇인가?’입니다. 강의에서는 상당한 정도로 훈련과 절제와 고행이 강조됩니다. 수도원 생활의 엄격함, 추위와 배고픔, 단순한 음식, 침묵, 걷기, 불편한 잠자리, 금식과 같은 경험들이 소개되고, 실제 교육과정에서도 독서와 글쓰기뿐 아니라 몸으로 견디고 경험하는 훈련이 중요하게 취급됩니다. 강사가 경험한 여러 수도원과 수도자들의 이야기도 이런 맥락에서 등장합니다. 심지어 수십 년 동안 한 장소에서 수도생활을 한 사람들, 죽을 때까지 그곳을 떠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깊은 경외도 느껴집니다.
여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몸을 가진 존재이고, 삶의 습관을 바꾸려면 일정한 규율도 필요합니다. 자기 욕망을 무조건 따라가지 않는 훈련 역시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도 거듭남에는 반드시 시험이 따르며, 사람은 자기 안의 악한 욕망과 싸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절제와 훈련 자체를 부정할 이유는 없습니다. 오히려 현대 그리스도교가 지나치게 ‘마음으로 믿기만 하면 된다’는 방향으로 흐르면서 삶의 훈련을 잃어버렸다면, 수도 전통이 그것을 일깨워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스베덴보리에게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구별이 하나 생깁니다. ‘고생하는 것’과 ‘거듭나는 것’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배가 고프다고 proprium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추운 곳에서 잔다고 자기 사랑이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침묵한다고 내면의 교만이 저절로 죽는 것도 아니고, 세상과 떨어져 산다고 세상 사랑이 자동으로 정화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은 수도생활 자체를 자기 공로로 삼을 수도 있습니다. ‘나는 저 사람들과 다르다. 나는 세상을 버렸다. 나는 금식한다. 나는 고행한다. 나는 수도자다’라는 새로운 형태의 proprium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세속적 자아를 버리고 종교적 자아를 얻은 것뿐이지, 진정한 자기 부인이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바로 여기서 이 강의를 읽는 중요한 열쇠가 생깁니다. 수도사학교가 추구하는 외적 훈련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어야 합니다. 침묵도 수단이고, 금식도 수단이며, 독서도 수단이고, 공동생활도 수단입니다. 심지어 수도원도 수단입니다. 목적은 오직 한 가지, 사람이 자기 안의 악을 주님 앞에서 보고, 그것을 죄로 인정하여 물리치며,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자신의 의지와 삶 안에 자리 잡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입니다. 이 목적을 위해 수도원이 도움이 된다면 수도원은 귀한 장소가 됩니다. 그러나 수도원 자체가 거룩한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보면 첫 학기 과정에서 독서와 글쓰기를 상당히 강조했다는 것도 새롭게 보입니다. 강의 후반부에서 강사는 A4 용지를 기준으로 요약하고, 인상 깊은 내용을 정리하고, 그것을 자신의 삶과 연결하여 쓰게 하는 식의 과제를 설명합니다. 한 달에 일정량의 글을 제출하게 하고, 많은 책을 읽게 하는 상당히 강도 높은 과정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에는 단순히 책을 많이 읽으라는 뜻보다 ‘읽은 것이 자기 삶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를 쓰라’는 중요한 요소가 들어 있습니다. 바로 이 대목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진리는 기억에만 머물러서는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억에 들어온 진리가 이해의 대상이 되고, 자신의 상태를 비추는 빛이 되며, 의지와 행위에 연결될 때, 비로소 살아 있는 진리가 됩니다.
다만 여기에도 한 단계가 더 필요합니다. ‘내 삶과 연결한다’는 것이 단순한 자기성찰에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진리는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분석하기 위한 심리학적 도구가 아니라, 무엇이 주님의 질서이고, 무엇이 그 질서에 반하는지를 분별하게 하는 빛입니다. 그러므로 독서 후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나는 무엇을 느꼈는가’만이 아니라 ‘이 진리가 내 안에서 어떤 악과 거짓을 드러내는가’, ‘나는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가’, ‘주님께서는 나를 어떤 선으로 이끄시는가’가 되어야 합니다. 이 단계까지 들어가면 수도사학교의 독서와 글쓰기 훈련은 단순한 인문학적 독서가 아니라 거듭남을 위한 자기성찰로 훨씬 깊어질 수 있습니다.
공동체 역시 그렇습니다. 혼자 있을 때에는 자신의 성품을 제대로 알기 어렵습니다. 함께 먹고, 함께 자고, 함께 일하고, 불편을 견디며 다른 사람에게 맞추어야 할 때, 비로소 자기 안에 숨어 있던 성냄, 경쟁심, 인정 욕구, 지배욕, 질투, 조급함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수도 공동체의 진정한 가치는 세상에서 도피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서 도피할 수 없게 만드는 데 있을 수 있습니다. 혼자 산속에 앉아 있을 때는 자신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여러 사람과 부딪히며 살아 보면 자신이 얼마나 자기 뜻대로 되어야 편안한 사람인지 금방 드러납니다. 이 점에서 공동생활은 매우 강력한 영적 거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서도 한 가지 더 나아갑니다. 공동체 안에서 드러난 악을 단순히 억누르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규칙 때문에 화를 참는 것과 화를 내고 싶어 하는 자기 안의 악을 죄로 인정하여 주님께 도움을 구하는 것은 다릅니다. 전자는 행동 교정일 수 있지만 후자는 거듭남입니다. 수도학교의 엄격한 규칙이 사람을 단정하게 만들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규칙 자체가 사람의 속 사람을 새롭게 할 수는 없습니다. 속 사람을 새롭게 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외적 규율은 그 역사를 위한 질서를 제공할 뿐입니다.
이 점에서 첫 강의에서 느껴지는 ‘강한 사람을 만들겠다’는 분위기도 조심스럽게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고, 많은 책을 읽고, 어려운 훈련을 통과하며, 중도에 포기하지 않는 사람을 만들겠다는 열정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강사는 과정 중 많은 사람이 떨어져 나갈 수 있다는 것도 예상하고 있으며, 끝까지 남는 소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천국적인 사람은 반드시 의지가 강한 사람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더 중요한 것은 ‘자기 힘을 강하게 만든 사람’이 아니라 ‘자기 힘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약한 사람이 되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기 힘으로 악을 이겼다고 생각하지 않고, 싸우는 힘 자체가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도생활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은 어쩌면 실패했을 때가 아니라 성공했을 때일지도 모릅니다. 금식에 성공하고, 침묵에 성공하고, 독서량을 채우고, 남들이 포기한 훈련을 끝까지 견디고, 마침내 ‘수도사’라는 이름까지 얻었을 때, proprium은 그것을 자신의 의로 취하기 쉽습니다. ‘나는 해냈다’가 되는 순간입니다. 반대로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은 갈수록 ‘주님께서 하셨다’는 인식이 깊어지는 과정입니다. 사람은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듯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승리는 자신의 것이 아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수도의 외적 엄격함보다 훨씬 어려운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첫 강의 중 역사 부분은 조금 다르게 다룰 필요가 있습니다. 니므롯, 세미라미스, 담무스, 태양신 숭배, 바벨론 종교가 이후의 여러 종교와 기독교에 영향을 주었다는 이야기가 상당히 큰 역사적 틀로 제시됩니다. 여기서 강사가 말하고자 하는 영적 메시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순수한 하나님 신앙이 인간의 욕망과 권력, 우상숭배와 결합하면서 변질되고, 교회 역시 언제든 그 길을 갈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이 경고 자체는 귀담아들을 만합니다. 그러나 세미라미스와 담무스를 중심으로 고대 바벨론 종교에서 후대의 가톨릭 및 기독교 관습을 직접적으로 연결하는 역사 서술은 이 자료만으로 사실이라고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이 부분의 역사적 사실성은 별도의 검증 대상으로 남겨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바벨론’을 어떻게 보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바벨론의 핵심은 단순히 어떤 고대 종교의 계보가 아닙니다. 영적으로 ‘바벨론’은 거룩한 것을 이용하여 사람을 지배하려는 사랑, 곧 종교적인 것을 자기 권력과 영광을 위해 사용하는 상태와 깊이 연결됩니다. 이렇게 보면 바벨론은 밖에만 있지 않습니다. 가톨릭 안에서만 찾을 수도 없고, 특정 교단에만 돌릴 수도 없습니다. 개신교 목사에게도 바벨론이 있을 수 있고, 수도자에게도 있을 수 있으며, 심지어 ‘나는 타락한 교회를 떠나 순수한 수도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거룩한 것을 이용하여 자신을 높이려는 순간, 바벨론의 원리는 그 사람 안에서 다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첫 강의의 역사적 도식을 오히려 훨씬 더 날카로운 영적 질문으로 바꾸어 줍니다. ‘어느 교회가 바벨론인가?’가 아니라 ‘내 안의 바벨론은 무엇인가?’입니다. ‘어느 종교가 타락했는가?’가 아니라 ‘나는 주님의 것을 이용하여 나 자신을 높이고 있지는 않은가?’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이 강의에 더해 줄 수 있는 중요한 깊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강사가 수도 전통을 개신교가 다시 받아들여야 한다고 보는 방식입니다. 수도원이 가톨릭보다 먼저 존재했던 기독교적 유산이며, 그러므로 개신교가 수도 전통 자체를 가톨릭적인 것으로 치부하여 버릴 필요가 없다는 문제의식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여기에는 충분히 이해할 만한 부분이 있습니다. 실제로 기도, 침묵, 절제, 독신 또는 단순한 생활, 공동체 생활, 노동과 묵상 등 수도적 요소들은 기독교 역사 안에서 오랫동안 존재해 왔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어느 교파가 수도원의 소유권을 갖느냐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형식 안에 어떤 영이 들어 있느냐입니다.
그러므로 수도복을 입는 것도 같은 원리로 볼 수 있습니다. 강의 후반에는 과정을 마친 사람과 수도복, 수도사로서의 정체성 등에 관한 이야기도 등장합니다. 수도복 자체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이 겸손과 헌신을 기억하게 하는 표지가 될 수도 있고, 반대로 특별한 사람이라는 의식을 강화하는 표지가 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옷이 아니라 애정입니다. 같은 수도복을 입은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나는 주님의 종이다’라는 마음으로 입을 수 있고, 다른 한 사람은 ‘나는 보통 신자와 다른 특별한 영적 사람이다’라는 마음으로 입을 수도 있습니다. 겉으로는 동일하지만 영적으로는 전혀 다른 상태입니다.
여기서 수도사학교의 이름 자체도 흥미로워집니다. 나중에 ‘수도학교’로 이름이 바뀌었다는 사실은 단순한 명칭 변경 이상의 의미를 생각하게 합니다. ‘수도사’를 만드는 학교보다 ‘수도’를 배우는 학교라는 표현이 오히려 본질에 가까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수도는 특정 신분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향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명칭 변경의 실제 이유를 단정하는 말이 아니라,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바라본 의미입니다. 진정한 수도는 ‘나는 수도사다’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획득하는 데 있지 않고, 날마다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주님 앞에 내어놓으며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첫 강의에서 가장 귀하게 보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강사는 완성된 체계를 가르치는 사람처럼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한국 개신교 안에서 거의 해 보지 않은 일을 ‘우리끼리 시작한다’, ‘전통을 만들어 가야 한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마지막 부분에서도 ‘아무의 전통을 우리가 만들어 가야 되지’라는 취지의 말이 남아 있습니다. 여기에는 개척자의 서툶과 동시에 진정성이 있습니다. 이미 정답을 가지고 학생들을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경험하고 배우면서 길을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첫 학기 일정표가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완성된 수도원 규칙서라기보다 ‘한국 개신교 안에서 수도적 삶을 어떻게 실제로 가르쳐 볼 것인가’를 처음 실험해 본 흔적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보면 이것을 전부 부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많은 부분을 살릴 수 있습니다. 침묵은 자기 말이 얼마나 많은지를 발견하게 할 수 있고, 금식은 욕망의 힘을 보게 할 수 있으며, 공동생활은 proprium을 드러내고, 독서는 이해를 열며, 글쓰기는 자신의 상태를 성찰하게 하고, 노동은 관념적인 신앙을 실제 삶으로 끌어내릴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 모든 것을 어디로 향하게 하느냐입니다. 이 훈련들이 ‘훌륭한 수도자’를 만드는 방향으로 향하면 자기완성의 종교가 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나를 거듭나게 하시도록 내 안의 악과 거짓을 발견하고 물리치는 삶’으로 향한다면 매우 유익한 외적 질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스베덴보리가 수도 전통에 던지는 가장 큰 질문이 나옵니다. ‘왜 세상을 떠나야 하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천국 이해에서는 세상에서 맡은 직업과 책임을 성실히 수행하고, 이웃에게 유용한 일을 하면서 악을 죄로 여겨 피하는 삶이 매우 중요합니다. 거듭남의 현장은 반드시 수도원이 아닙니다. 가정도 수도원이 될 수 있고, 직장도 수도원이 될 수 있으며, 목회 현장도 수도원이 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책임을 감당하며 돈을 사용하고 갈등을 해결하고 용서하고 봉사하는 그 복잡한 일상 속에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실제 모습이 끊임없이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수도원은 거듭남을 위한 특별한 ‘훈련장’이 될 수는 있어도, 거듭남의 최종 목적지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보면 이 수도사학교가 품었던 이상과 스베덴보리 사이에는 생각보다 상당히 넓은 접점이 있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을 만드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사람 자체가 달라져야 한다’는 것, 지식을 삶으로 가져가야 한다는 것, 자기 욕망을 그대로 따라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 물질과 성공에 사로잡힌 종교를 경계해야 한다는 것, 실제 훈련과 실천이 필요하다는 것, 자신의 삶을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 등은 서로 깊이 만납니다. 차이는 ‘그 변화가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설명하는 데서 생깁니다.
수도사학교에서는 그것을 상당 부분 ‘훈련을 통한 사람 만들기’로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보다 한층 안쪽으로 들어갑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거듭나게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진리를 배우고, 자신을 살피고, 악을 죄로 인정하고, 그것과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듯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악을 제거하시고, 새로운 의지를 심으시며, 선과 진리를 결합시키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수도의 가장 깊은 자리는 산속 수도원의 독방이 아니라 사람의 의지입니다. 거기에서 ‘내가 원하는 것’과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만납니다.
그렇게 본다면 이 첫 강의를 한 문장으로 이렇게 읽어도 좋겠습니다. ‘이 강의는 세상을 버리는 수도자를 만들려는 시도라기보다, 세상에 삼켜지지 않는 그리스도인을 만들고 싶었던 한 개신교 목회자의 몸부림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에 한 문장을 더 보탭니다. ‘그러나 사람이 정말 버려야 할 것은 세상 그 자체가 아니라, 세상을 자기 자신을 위해 사랑하는 proprium이며, 사람이 정말 들어가야 할 수도원은 외딴 장소 이전에 주님 앞에 열리는 자신의 내면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첫 강의를 가볍게 보지 않습니다. 역사 설명에는 검토해야 할 부분이 있고, 금욕과 외적 훈련에는 조심해야 할 부분이 있으며, 수도자라는 특별한 신분을 강조할 경우 생길 수 있는 위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밑바닥에 흐르는 질문은 매우 진지합니다. ‘목회자가 되고도 사람이 변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성경을 많이 알고도 자기 욕망대로 산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교회가 커지고도 하나님에게서 멀어진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가?’ 수도사학교는 그 답을 ‘수도’에서 찾으려 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 질문에 아주 깊은 곳에서 답합니다. 다시 시작해야 할 곳은 ‘삶’입니다. 진리가 기억에서 이해로, 이해에서 의지로, 의지에서 행위로 내려와 마침내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사람은 자신의 proprium이 얼마나 완강한지를 발견하고, 수많은 시험을 통과합니다. 외적으로는 평범한 가정생활을 하고, 직업을 가지고 살아도 그 사람 안에서는 치열한 수도생활이 진행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평생 수도원에 살아도 자기 사랑을 붙들고 있다면 내적인 수도는 시작되지도 않았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첫 강의와 첫 학기 일정표를 함께 놓고 보면, 어쩌면 이 학교가 처음부터 찾고 있었던 가장 깊은 것은 ‘수도사’가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다른 사람이 되는 것’,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실제로 살아가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 갈망은 귀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갈망을 더 안쪽으로 인도합니다. 수도복에서 삶으로, 고행에서 회개로, 자기훈련에서 주님의 역사하심으로, 세상으로부터의 분리에서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분리로, 그리고 ‘특별한 수도자’가 되는 데서 ‘주님으로부터 새롭게 된 사람’이 되는 데로 말입니다. 저는 이 첫 강의의 가장 아름다운 가능성이 바로 거기에 있다고 봅니다.
이 설교의 중심은 매우 분명합니다. 신앙생활의 목표를 교회의 성장이나 성공, 은사나 신비 체험, 신학적 지식, 심지어 선교적 업적 자체에 두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두자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빌3:14의 ‘푯대를 향하여’를 중심에 놓고, 요단강에 발을 담그는 제사장들, 애굽으로 돌아가는 모세, 골리앗에게 달려가는 다윗, 아합 앞에 서는 엘리야의 모습을 연이어 제시하면서 이제 막 출발하는 교회가 처음부터 방향을 정확히 정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를 ‘GPS’라는 친숙한 비유로 설명합니다. 출발점에서 좌표가 조금만 어긋나도 먼 훗날에는 전혀 다른 곳에 도착하므로 교회의 좌표를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로 설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설교 전체를 관통하는 이 중심 명제는 매우 귀합니다.
특히 설교 초반에 제시되는 교회상은 주목할 만합니다. 설교자는 건물이나 숫자보다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기고, 죄인이 들어와도 과거 때문에 정죄하거나 배척하지 않으며, 부자나 유명인이나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 특별대우를 받는 대신 연약한 사람이 사랑받고, 서로의 것을 나누며, 직분과 서열보다 겸손과 순결과 거룩함이 존중받는 교회를 꿈꿉니다. 반대로 직분과 권위, 시기와 경쟁, 험담과 배척으로 가득한 교회를 매우 강하게 비판합니다. 표현은 때때로 거칠지만 그가 지향하는 방향은 분명합니다. 교회는 외적 규모나 사회적 힘으로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실제로 살아 있느냐에 따라 교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스베덴보리의 교회 이해와 상당히 가까운 곳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교회는 본질적으로 건물이나 교단, 조직 자체가 아닙니다. 교회의 본질은 사람 안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결합되어 있는가에 있습니다. 따라서 수천 명이 모이고 거대한 조직을 이루었다고 해서 그 자체로 천국적인 교회가 되는 것도 아니며, 아주 작은 공동체라고 해서 교회성이 약한 것도 아닙니다. 외적 교회가 참된 교회가 되는 것은 그 외적 형식 안에 내적인 것이 살아 있을 때입니다. 설교자가 ‘사람이 많이 모이는 것’보다 ‘한 죄인이 회개하는 것’을 더 귀하게 여기자고 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 깊은 울림을 줍니다.
설교자가 예수님 곁에 세리와 죄인들과 사회적으로 멸시받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부분도 중요합니다. 그의 요지는 ‘과거가 더러웠던 사람이 교회에 들어왔을 때 그의 과거를 계속 꼬리표처럼 붙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관용 이상의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사람은 현재 자연계에서 드러나는 이력만으로 규정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그 사람의 의지와 사랑이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가입니다. 과거에 어떤 악 가운데 있었더라도 그것을 죄로 인정하고 주님께 돌아서며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한다면, 주님께서 이루시는 거듭남은 바로 그 자리에서 진행됩니다. 그러므로 회개한 사람의 과거를 끊임없이 끄집어내어 현재의 그 사람을 규정하는 것은 거듭남이라는 복음의 본질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설교가 가장 힘 있게 전개되는 곳은 바울에 관한 부분입니다. 설교자는 바울에게 선교도, 신유도, 신비 체험도, 신학도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위대한 선교사였고 놀라운 능력을 경험했으며 ‘셋째 하늘’에 관한 체험도 있었고 뛰어난 신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모든 것보다 ‘그리스도를 얻는 것’을 원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3:8 이하의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를 중심으로 설교가 깊어집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는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조금 구별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 서신은 스베덴보리가 엄밀한 의미에서 말하는 ‘말씀’의 책들과 동일한 방식의 내적 의미, 곧 연속적인 아르카나를 지닌 책으로 다루어지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빌3의 각 문구를 창세기나 출애굽기, 선지서나 복음서처럼 상응을 따라 속뜻으로 풀어 가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바울의 말이 영적으로 무가치하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여기서 표현된 ‘그리스도를 얻고자 한다’는 신앙적 고백은 매우 귀하며, 그 내용을 주님의 가르침과 스베덴보리가 밝힌 거듭남의 질서에 비추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목표로 삼는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을 많이 생각하거나 예수님에 대해 뜨거운 감정을 갖는 것보다 훨씬 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주님의 계명을 사랑하여 행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닮는다는 것 역시 외적인 행동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진리가 사람의 의지와 삶 안에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나의 푯대’라는 선언은 결국 ‘내 사랑의 질서가 주님의 질서를 닮아 가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먼저 사랑하고 타인을 자기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상태에서 벗어나,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유용한 일을 기쁨으로 행하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 이것이 거듭남의 실제 내용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이 설교가 강조하는 ‘내가 죽는 것’도 조금 더 깊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설교자는 바울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부활에 이르기를 원했다는 것을 매우 강하게 표현하면서, 고난과 죽음을 마치 적극적으로 환영하는 것처럼 묘사합니다. 돌에 맞은 바울이 다시 성으로 들어간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죽고 싶어서’라고까지 표현하고, 뒤에서는 ‘내가 죽기를 미치도록 갈망하고’라는 강렬한 말을 사용합니다. 설교자의 의도가 육체적 죽음이나 자살을 권하는 것이 아님은 문맥상 분명합니다. 그 자신도 이를 구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은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영적으로 정돈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죽어야 하는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proprium에서 나오는 악과 거짓의 지배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인격을 파괴하려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참된 인격을 살리십니다.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은 자기 존재를 혐오하라는 말이 아니며, 고통 자체를 사랑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자기애와 세상 사랑이 모든 것을 지배하려는 상태,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보다 앞세우는 상태, 자신의 지성과 의를 신뢰하는 상태가 물러나는 것입니다. 그만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새로운 의지와 새로운 이해가 그 자리를 차지합니다. 이것이 거듭남이며, 이것이 영적인 의미에서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따라서 설교 후반의 ‘고통이 오면 뛰어가서 환영하십시오’라는 권면은 그 열정은 이해하면서도 신중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고통 자체를 선이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고난은 때로 시험의 장이 되고, 주님께서는 그 시험을 통해 우리의 악과 거짓을 드러내시고 정화하시며 선을 더욱 굳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고통을 일부러 찾아다니거나 부당한 학대를 계속 허용하거나 자신에게 해를 가하는 상황을 ‘십자가’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고통 자체가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고통 가운데서도 주님을 의지하고 악에 악으로 대응하지 않으며 진리와 선을 선택할 때 그 시험이 거듭남을 섬기게 됩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고난받으셨으므로 나도 고난받아야 한다’보다 더 깊은 질문은 ‘예수님께서는 고난 가운데서 무엇을 이루셨는가’입니다. 주님의 전 생애는 지옥들과 싸우시고 인성을 신성하게 하시는 계속적인 시험의 과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를 따른다는 것은 육체적 고통의 양을 주님과 비슷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올라오는 악과 거짓의 충동과 싸우면서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에 머무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시험과 거듭남의 핵심입니다.
설교자가 벧전2를 인용하여 예수님께서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셨다’는 점을 강조하는 부분은 이러한 의미에서 매우 아름답습니다. 악을 악으로 되갚지 않는 것은 천국적 삶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다만 여기에서도 ‘상대방의 죄를 내가 짊어지고 내가 죽어야 한다’는 설교자의 표현은 신학적으로 구별해서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처럼 다른 사람의 죄를 대속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악에 복수하지 않고 그것을 견딜 수는 있으며, 용서하고 그 사람의 회복을 바랄 수도 있지만, 그 사람의 악 자체를 내가 대신 담당하여 구속하는 것은 주님께 속한 일입니다.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대속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 가운데 이웃을 대하는 것입니다.
또한 용서는 악을 악이 아니라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누군가에게 반복적으로 해를 입으면서도 무조건 참는 것이 언제나 사랑인 것도 아닙니다. 때로는 진리를 말하고 경계를 세우며 악이 더 진행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오히려 그 사람을 향한 체어리티일 수 있습니다. 천국의 사랑에는 따뜻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질서가 있습니다. 사랑과 진리는 분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점이 보완된다면 설교자가 말하는 ‘욕을 당하고도 욕하지 않는 삶’은 훨씬 건강하고 깊은 의미를 갖게 됩니다.
설교 후반부에서 다시 교회 이야기로 돌아가는 것도 좋습니다. 설교자는 ‘자기 의로 충만한 의인’보다 자기 죄를 알고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하는 사람이 인정받는 교회, 큰소리치는 사람이 아니라 종처럼 섬기는 사람이 큰 자로 여김받는 교회, 많은 사람이 모였다는 사실보다 한 영혼이 구원받는 것을 기뻐하는 교회를 꿈꿉니다. 여기에는 복음서에서 반복되는 주님의 가르침과 통하는 매우 중요한 직관이 있습니다. 천국에서는 지상의 지위와 명성이 질서를 결정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외적 신분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사랑이 어떠한지가 중요합니다. 섬김을 사랑하는 사람은 높아지려 하지 않지만 바로 그 때문에 천국의 질서 안에서는 큰 자가 됩니다.
다만 ‘자기 의는 전혀 없고 내 죄밖에 없다’는 표현 역시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조금 더 섬세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서 나오는 선을 인간 자신의 공로로 돌리지 않는 것은 옳습니다. 모든 참된 선은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그러나 거듭난 인간에게 실제로 선이 형성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단지 죄인으로 남겨 두고 외부에서 의를 덮어씌우시는 분이 아니라 사람의 의지와 이해를 실제로 새롭게 하십니다.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선을 받아 마치 자기 것처럼 자유롭게 행하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본래 주님으로부터 왔음을 인정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난 삶의 아름다운 역설입니다. ‘내가 행하지만 그것의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설교에서 가장 귀한 문장인 ‘우리의 목표는 예수님입니다’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그대로 보존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문장의 깊이가 훨씬 더 깊어집니다. 예수님을 목표로 한다는 것은 단지 그분에 관한 지식을 늘리는 것도, 감동적인 체험을 많이 갖는 것도, 기적과 능력을 경험하는 것도 아닙니다. 설교자 자신이 선교와 신유와 신비 체험과 신학을 모두 궁극적 목표에서 내려놓은 것은 바로 이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들이 있다고 해서 사람이 반드시 천국적이 되는 것도 아니며, 없다고 해서 주님에게서 멀리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서 신비 체험 자체를 경계하거나 낮게 보는 방향으로까지 갈 필요도 없습니다. 이것 역시 중요한 균형입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이 방대한 영계 경험을 한 사람이라는 사실만 생각해 보아도 그렇습니다. 문제는 영적 체험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그것이 사람을 어디로 이끄느냐입니다. 환상이나 계시나 놀라운 체험을 했다는 이유로 자신을 특별한 사람으로 여기게 된다면 그것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주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허락하신 영적 체험이 그를 더욱 겸손하게 하고, 주님을 사랑하게 하며, 이웃에게 선을 행하게 하고, 말씀을 더욱 사랑하게 한다면 그 열매를 함부로 멸시할 이유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체험이냐 이성이냐’라는 양자택일이 아니라 그것이 선과 진리의 질서 안에 있는가입니다.
설교자가 교회의 미래를 ‘예수님을 닮은 사람들로 가득한 교회’라고 그리는 마지막 장면도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이 말은 ‘모두가 비슷한 종교적 말투와 행동을 갖게 되는 공동체’를 뜻하지 않습니다. 천국은 획일성이 아니라 다양성 가운데 이루어지는 하나입니다. 각 사람은 서로 다른 성품과 은사와 유용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모두가 하나의 중심, 곧 주님을 향합니다. 마치 인체의 서로 다른 기관들이 하나의 생명을 섬기듯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교회는 모두가 똑같아지는 곳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들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을 따라 서로를 섬기면서 하나가 되는 곳입니다.
이 점에서 설교 초반과 마지막은 아름답게 연결됩니다. 처음에는 ‘어떤 교회를 꿈꾸는가’를 묻고, 마지막에는 성도들에게 눈을 감고 그 교회를 상상해 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를 놓습니다. 이것은 목회적 호소로서 힘이 있습니다. 교회의 출발점에서 건물과 숫자와 영향력이 아니라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 갈 것인가’를 묻는 것은 언제나 필요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참된 교회가 되는 것은 아름다운 공동체 이상을 공유하는 것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각 사람의 속 사람에서 실제로 거듭남이 진행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악을 보고 인정하며, 그것이 죄이기 때문에 주님 앞에서 피하고, 주님께 선을 행할 힘을 구하며, 실제 생활에서 이웃에게 선을 행해야 합니다. 이것이 반복되면서 외적인 신앙이 내적인 신앙이 되고, 알고 있던 진리가 삶의 선과 결합합니다. 그때 교회는 조직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이 설교의 ‘GPS’ 비유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조금 바꾸어 말한다면 이렇습니다. 목적지를 ‘예수님’이라고 입력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매 순간 내가 걷는 길이 그 목적지와 일치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는가, 아니면 진리가 나를 변화시키도록 허용하는가. 내가 사람에게 인정받으려 하는가, 아니면 유용한 사람이 되려 하는가. 나에게 상처 준 사람을 속으로 계속 정죄하는가, 아니면 진실을 분별하면서도 그의 최종 상태는 주님께 맡기는가. 내가 가진 신학과 체험과 은사를 자신의 우월함을 확인하는 데 사용하는가, 아니면 이웃을 섬기는 데 사용하는가. 바로 이런 일상의 작은 선택들이 실제 GPS의 경로가 됩니다.
그래서 이 설교의 가장 좋은 부분은 역설적으로 가장 단순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예수님입니다.’ 이 문장을 굳이 고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우리에게 ‘그렇다면 예수님을 향해 간다는 것이 실제로 무엇인가’를 더욱 세밀하게 보여 줍니다. 그것은 고통을 많이 겪는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자신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며, 신비 체험을 부정하거나 반대로 추구하는 것도 아니고, 신학적으로 누구보다 정확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아 자신의 실제 삶에서 그것을 행하는 사람으로 조금씩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푯대를 향하여’라는 제목도 새로운 깊이를 갖습니다. 푯대는 단순히 저 멀리 바라보는 목표가 아닙니다. 주님은 목적지에만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을 향해 내딛는 매 걸음의 생명이십니다. 내가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려 애쓸 때, 나보다 약한 사람을 이용하지 않고 보호할 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때,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정직을 선택할 때,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보다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길 때, 우리는 이미 그 푯대를 향하여 걷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설교는 전체적으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아 폐기하거나 경계해야 할 설교라기보다, 상당히 귀한 중심을 가지고 있으면서 몇몇 강한 표현들을 거듭남과 시험, proprium, 체어리티, 선과 진리의 결합이라는 관점에서 조금 더 깊고 안전하게 다듬어 들으면 좋은 설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교회의 성공보다 예수 그리스도’, ‘직분보다 겸손’, ‘정죄보다 용서’, ‘유명인보다 회개하는 한 영혼’, ‘자기 자랑보다 섬김’을 앞세우는 방향은 소중합니다. 여기에 ‘자기 죽음’을 자기혐오가 아니라 proprium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거듭남으로, ‘고난’을 추구해야 할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허락하실 때 선과 진리가 굳어지는 시험의 장으로, ‘그리스도를 닮음’을 외적인 고난의 모방이 아니라 사랑과 지혜의 삶으로 이해한다면 설교의 중심 메시지는 오히려 더욱 풍성해집니다.
마지막으로 이 설교가 던지는 질문은 결국 이것 하나로 모입니다. ‘나는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푯대로 삼고 있는가?’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 질문을 다른 질문으로 바꾸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깊게 만듭니다. ‘내가 주님을 푯대로 삼고 있다는 사실이 오늘 나의 사랑, 생각, 말, 판단, 돈의 사용, 사람을 대하는 태도, 용서, 정직, 섬김과 유용한 삶에서 실제로 나타나고 있는가?’ 그렇다면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다는 것은 어떤 특별한 종교적 영웅이 되는 일이 아니라, 날마다 자신의 proprium에서 한 걸음 물러나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자신의 삶이 되도록 허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사람들이 하나둘 모일 때, 설교자가 그토록 간절히 꿈꾸었던 ‘예수님을 닮은 사람들이 가득한 교회’도 비로소 외적인 이상이 아니라 이 땅에서 천국을 조금씩 드러내는 실제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이 영상은 ‘강문호 수도사 이야기 : 채널설립이유’라는 제목으로, 강문호 목사님이 앞으로 자신이 접한 수도사들의 삶과 수도원에 얽힌 이야기들을 한 편씩 소개하겠다는 취지를 밝히는 영상입니다. 공개된 정교회 자료와 예루살렘 교회 관련 자료를 대조해 보면 영상에서 소개하는 첫 인물은 4세기 팔레스타인 수도 전통의 중요한 인물인 성 카리톤(Chariton the Confessor)입니다. 카리톤은 예루살렘으로 가던 길에 강도들에게 붙잡혀 그들의 동굴에 결박된 채 갇혔고, 강도들이 다시 약탈하러 나간 사이 뱀이 포도주 그릇에 독을 남겼으며, 돌아온 강도들이 그 포도주를 마시고 죽었다는 전승이 전해집니다. 카리톤은 살아남은 뒤 강도들이 모아 둔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과 교회 및 수도 공동체를 위해 사용하고, 자신이 구원받은 그 자리에서 수행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그곳에 파란 라브라(Pharan Lavra)가 형성되었고, 그는 뒤에도 두 곳의 라브라를 더 세운 것으로 전해집니다. 따라서 영상에서 ‘이스라엘 최초의 수도원’이라고 표현한 부분은 조금 넓은 표현이며, 보다 정확하게는 유대 광야의 초기 라브라 수도 전통을 연 매우 중요한 공동체라고 이해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Orthodox Church in America)
먼저 이 이야기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볼 때 눈에 들어오는 것은 기적 자체보다 카리톤의 반응입니다. 강도들이 갑자기 죽고 자신이 살아난 사건은 매우 극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전승에서 더 중요한 것은 카리톤이 살아남은 뒤, 그 사건을 자신의 특별함을 증명하는 표징으로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는 강도들이 모아 둔 재물을 자기 것으로 삼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과 교회와 수도 공동체를 위해 사용했으며, 자신이 살아남은 장소에서 수행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기적을 자신의 명예로 돌리는 대신 삶의 방향을 바꾸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이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중요합니다. 영적 체험의 가치는 그 체험이 얼마나 놀라웠는가에 있지 않고, 그 결과 사람의 사랑과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가에 있기 때문입니다. (Orthodox Church in America)
스베덴보리는 기적이나 초자연적 현상이 그 자체로 사람을 거듭나게 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사람은 놀라운 일을 보고 잠시 두려워하거나 감동할 수 있지만, 그 감정이 지나간 뒤에도 이전의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기적보다 중요한 것은 자유 가운데 받아들인 진리와 그것을 따라 변화된 삶입니다. 카리톤 이야기가 영적으로 의미 있는 이유도 뱀이 독을 풀어 강도들이 죽었다는 기이한 사건 때문이라기보다, 자신에게 다시 주어진 생명을 이전과 다른 방향으로 사용했다는 데 있습니다. ‘내가 살아났다’는 놀라움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그렇다면 이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할 수 있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카리톤처럼 강도의 동굴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지 않았더라도 하루하루 생명을 받고 살아갑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은 생명의 원천이 아니라 생명을 받아들이는 형식입니다. 생명 자체는 오직 주님에게 있으며, 사람은 매 순간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생각하고 사랑하고 행동합니다. 사람은 그것을 자기 생명처럼 느끼도록 창조되었지만, 그 생명의 근원은 자기 자신에게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는다면 그다음 질문은 자연스럽게 ‘이 생명을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사용할 것인가’가 됩니다.
카리톤이 강도들의 재물을 자신의 소유로 삼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과 교회 등을 위해 사용했다는 전승도 이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재물 자체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떤 사랑으로 어떤 쓰임을 위해 사용하는가입니다. 같은 재물이 자기 안전과 명예와 지배를 확대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고, 이웃에게 유익을 주는 도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강도들에게 재물은 탐욕과 폭력의 목적이었지만, 카리톤에게 넘어온 뒤 그 재물의 쓰임이 바뀌었다는 점은 상징적으로도 흥미롭습니다. 동일한 자연적 재물이 사랑의 방향에 따라 전혀 다른 성격을 갖게 된 것입니다.
영상에서 강문호 목사님이 수도사들의 이야기를 ‘사람 같지 않은 사람들의 초인간적인 이야기’처럼 소개하는 부분은 수도 전통에 대한 강한 감탄을 보여 줍니다. 실제로 극단적인 금욕과 고독, 기도와 희생의 삶을 살아간 수도사들의 이야기는 현대인에게 상당한 충격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균형이 필요합니다. 참된 영성은 사람을 ‘초인간’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 안의 본래 질서가 주님으로부터 회복되어 더욱 참된 인간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천사들도 인간과 다른 종류의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자연계에서 살다가 영계로 간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수도자의 위대함도 인간적인 삶을 초월했다는 데 있지 않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벗어나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변화된 만큼에 있습니다.
따라서 수십 년 동안 동굴에서 기도했다는 사실만으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영적으로 높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한 수도자가 사막에서 평생 기도하는 삶과 한 사람이 가정에서 배우자와 자녀를 책임지고, 직장에서 정직하게 일하며, 반복되는 갈등 속에서 자기 분노와 이기심을 이겨 가는 삶 가운데 어느 것이 주님 보시기에 더 깊은지는 외적인 형태만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중요한 것은 장소와 형식이 아니라 지배적인 사랑입니다. 수도원에서 살아도 자신의 proprium을 사랑할 수 있고, 세상 한복판에서 살아도 주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카리톤의 이야기 가운데 오히려 흥미로운 사실은 그가 사람들이 자신에게 몰려들자 더 깊은 고독을 찾아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는 전승입니다. 정교회 자료에는 그가 사람들의 칭찬을 피하고 고독을 원하여 더 깊은 광야로 물러났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에게 영적 지도를 구하는 사람들을 거절하지 않았으며, 결국 다른 수도 공동체들도 세웠습니다. 고독을 사랑하면서도 사람의 필요를 외면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수도와 쓰임의 관계를 생각하게 합니다. 참된 고독은 사람을 이웃으로부터 도피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서 자신을 비운 뒤, 다시 이웃에게 더 순수한 쓰임을 행하도록 준비시키는 것이어야 합니다. (Orthodox Church in America)
영상에서 특히 중요한 문장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은 아닌데 하나님의 소리만 나와야 한다’는 취지의 표현입니다. 이 말은 잘 이해하면 매우 아름답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꾸어 말하면,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모든 참된 선과 진리의 근원은 그 사람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진실한 말을 하고 선한 일을 행할 때, 겉으로는 그 사람이 말하고 그 사람이 행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선 자체와 진리 자체의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사람은 그것을 받아 자유롭게 행하는 그릇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소리’가 난다는 것은 그의 말투가 특별하거나 신비한 분위기를 풍긴다는 뜻이 아닙니다. 더 본질적으로는 그 사람의 말을 들은 뒤, 사람들의 시선이 그 사람에게 머물지 않고 주님께 향한다는 뜻이어야 합니다. 설교를 듣고 ‘저 목사님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만 남는 것과 ‘주님은 정말 이런 분이시구나’라는 깨달음이 남는 것은 매우 다릅니다. 전자는 사람에게 시선이 고정될 수 있지만, 후자는 사람을 통하여 주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매우 엄중한 영적 문제가 시작됩니다. ‘나에게서 하나님의 소리가 나야 한다’는 말이 어느 순간 ‘사람들이 나에게서 하나님의 특별한 음성을 듣는다’는 자기 인식으로 바뀌면, 그 순간 주님께 돌려져야 할 것이 proprium으로 돌아올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proprium은 세속적 자랑에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영적 체험, 말씀 지식, 기도생활, 목회 성공, 심지어 겸손과 희생까지도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는 말을 하면서도 ‘나는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었습니다’라는 자기 의식이 생길 수 있을 만큼 proprium은 미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소리만 나와야 한다’는 문장을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조금 더 완성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서 주님의 선과 진리가 흘러나와야 하지만, 정작 그 사람 자신은 그 선과 진리를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아야 합니다.’ 사람이 선을 행할 때에는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동시에 그 선의 근원과 힘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내적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거듭해서 강조하는 중요한 영적 질서입니다.
영상에서 강문호 목사님은 이스라엘의 여러 수도원을 방문하면서 그곳에 얽힌 ‘아름다운 이야기, 기적의 이야기, 하나님 이야기’를 모았고, 그것을 앞으로 하나씩 소개하겠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작업은 분명 가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오랜 기독교 역사 안에서 실제 사람들이 자신의 생명을 어떻게 주님께 돌렸는지를 보는 것은 오늘의 신앙을 돌아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적의 이야기’와 ‘하나님 이야기’는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닙니다. 기적이 많이 등장한다고 하나님이 더 많이 드러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특별한 현상은 거의 없어도 한 사람이 수십 년 동안 정직하게 악을 피하고 이웃을 섬겼다면, 그 삶에서 주님의 섭리가 훨씬 깊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에서도 섭리는 대개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게 움직입니다. 사람은 극적인 기적에서는 쉽게 하나님의 손길을 찾지만, 평범한 일상의 질서와 자유로운 선택 속에서 이루어지는 주님의 섭리는 잘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람의 자유를 보존하시면서 아주 미세한 방법으로 그를 선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수도사들의 기적담을 들을 때에도 ‘정말 놀라운 일이 일어났구나’에 머무르기보다, ‘그 일을 통해 이 사람의 사랑이 어떻게 변화되었는가’를 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카리톤 이야기도 바로 그렇게 읽는 편이 좋습니다. 독사와 포도주와 강도들의 죽음이라는 극적인 장면이 이야기의 중심처럼 보이지만, 영적으로 가장 중요한 장면은 그 이후입니다. 그는 살아남았고, 재물을 나누었으며, 자신에게 다시 주어진 생명을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몰려들 때에도 자신의 명성을 붙들기보다 다시 고독을 찾았다고 전해집니다. 적어도 전승이 보여 주려는 이상은 ‘기적을 경험한 특별한 인간’이 아니라, 살아남은 생명을 하나님께 돌려드린 인간입니다. (Orthodox Church in America)
여기에서 수도생활의 본질도 다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수도원은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장소가 아닙니다. 수도복 역시 사람의 내적 상태를 바꾸어 주지 않습니다. 고독과 금식과 기도와 노동은 거듭남을 돕는 외적 수단이 될 수 있지만, 그 수단을 통하여 실제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약해지고,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자라지 않는다면 수도의 외적 형식만 남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수도복을 입지 않고 세상 가운데 살더라도 자신의 악을 죄로 여기며 피하고, 맡겨진 쓰임을 정직하게 감당하며, 자신에게 있는 모든 선을 주님께 돌리는 사람이라면 그는 깊은 의미에서 내적 수도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영상에서 소개된 수도사 이야기를 ‘초인간적인 사람의 놀라운 일화’로만 받아들이기보다, ‘한 사람의 삶의 중심이 어떻게 바뀌었는가’라는 관점에서 읽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에는 더 잘 맞습니다. 살아남았다는 사실보다 살아남은 뒤 어떻게 살았는지가 중요하고, 수도원을 세웠다는 사실보다 왜 세웠는지가 중요하며, 사람들이 그를 찾아왔다는 사실보다 그 사람들이 그를 통해 누구를 바라보게 되었는지가 중요합니다.
결국 이 영상의 가장 좋은 핵심은 ‘하나님의 사람에게서는 하나님의 소리가 나야 한다’는 문장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거기에 한 가지 아주 중요한 조건을 덧붙입니다. 그 사람에게서 주님의 소리가 날수록 그 사람 자신은 더욱 뒤로 물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이름이 커지는 만큼 주님의 이름도 함께 커지는 것이 아니라, 참된 영적 질서에서는 사람이 투명해질수록 그를 통하여 주님이 더욱 분명히 보입니다.
따라서 이 영상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성 카리톤의 이야기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그가 죽음에서 살아났다는 기적 자체가 아니라, 다시 받은 생명과 재물을 자신의 것으로 움켜쥐지 않고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 쓰임으로 돌렸다는 데 있으며, 참된 하나님의 사람은 자기 특별함을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통하여 주님의 선과 진리가 드러나게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영상 속 ‘하나님은 아닌데 하나님의 소리만 난다’는 표현에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마지막 한 문장을 덧붙인다면 저는 이렇게 쓰고 싶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소리가 나는 사람은 자신에게서 들리는 그 선한 소리의 주인이 자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 위 제목의‘SY’는‘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라는 뜻입니다.
이 영상은 강문호 목사님이 충주봉쇄수도원이라는 유튜브 채널을 시작하면서 전한 첫 인사입니다. 오랫동안 섬기던 교회를 떠나 수도생활에 들어간 뒤, 이전 교회의 성도들에게 영상으로 인사를 전하면서, 후임 목회자와 새로 세워지는 직분자들을 축하하고, 지난 목회를 함께해 준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하며, 앞으로 자신이 걸어가려는 새로운 사역의 방향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영상은 어떤 특정한 성경 본문을 강해하는 설교라기보다 한 목회자가 오랜 담임목회를 마치고, 새로운 삶의 단계로 들어서면서 자신의 지난 시간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소망을 밝히는 인사말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먼저 영상에서 인상 깊은 것은 이전 교회와 성도들을 향한 애정과 감사입니다. ‘여러분들은 영상으로나마 제 얼굴을 보는데 저는 여러분을 보지 못해서 너무 안타깝다’는 첫 인사에는 오래 함께했던 공동체를 향한 그리움이 묻어 있습니다. 이어 후임 목회자를 자신보다 훌륭한 목회자로 기대한다고 축복하고, 장로들과 부목사들, 전도사들, 선교회와 교사들, 찬양대와 성도들에게 감사하면서 ‘모두가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내가 있었다’는 취지로 말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아도 이러한 감사는 귀한 태도입니다. 사람은 홀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나라는 수많은 서로 다른 쓰임들이 하나를 이루는 질서이며, 천국에서도 어느 한 존재가 모든 것을 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목회 역시 여러 사람의 기도와 노동과 조언과 봉사가 결합되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지난 세월을 자신의 업적으로만 기억하지 않고, 함께한 사람들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은 천국의 공동체적 질서와도 잘 어울립니다.
후임 목회자를 향해 ‘저보다 훌륭해서 잘되리라고 믿는다’는 취지로 말하는 부분도 의미가 있습니다. 한 시대의 자신의 역할이 끝났음을 인정하고, 다음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주는 것은 영적으로도 중요한 일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모든 직분과 역할은 사람이 영원히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어떤 쓰임을 위해 일정 기간 맡기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자신의 사역을 붙잡기보다 새로운 사람에게 기꺼이 넘기고, 그가 더 잘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적어도 표현된 내용 자체로 보면, 자신의 역할을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의 쓰임으로 이해하려는 방향과 맞닿아 있습니다.
영상의 중심은 이후 자신의 새로운 삶을 소개하는 부분으로 옮겨갑니다. 강 목사님은 이제 한 교회의 담임목회라는 범위를 넘어 수도원과 연결된 새로운 사역을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여러 나라의 수도원들과 네트워크를 만들고, 은퇴한 목회자들이 함께 모여 ‘평생 새벽기도, 평생 연구, 평생 후학들을 가르침, 평생 노동, 그리고 그 노동으로 얻은 것을 통한 평생 선교’를 하며 죽는 날까지 살아가는 공동체를 만들고 싶다는 비전을 밝힙니다. 여기에는 은퇴를 사역의 종료로 생각하지 않고, 삶의 마지막까지 어떤 쓰임을 계속하고 싶다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쓰임’이라는 관점에서 매우 흥미롭게 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천국의 삶은 무위도식하는 삶이 아니라 끊임없는 쓰임의 삶입니다. 천사들도 각자의 사랑과 지혜에 따라 다른 이들에게 유익을 주는 일을 행합니다. 그러므로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단순히 쉬는 삶만을 이상으로 삼기보다, 기도하고 연구하고 가르치고 노동하며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계속하고 싶다는 열망 자체는 귀합니다. 특별히 영상에서 기도와 연구뿐 아니라 ‘노동’을 수도생활의 중요한 부분으로 포함시키고 있다는 점은 눈여겨볼 만합니다. 영적 삶은 머릿속의 명상이나 종교적 감정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유용한 삶으로 나타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쓰임’에서 중요한 것은 그 규모보다 그 내적 목적입니다. 수도원이 몇 개 세워지고, 몇 나라와 연결되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참여하는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일을 통하여 실제로 사람 안에 선과 진리가 자라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천국에서는 큰 일을 했다는 이유로 더 높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에서 충실하게 수행한 사람이 귀하게 여겨집니다. 그러므로 작은 공동체를 섬기는 일이나 한 사람을 돌보는 일도 그 사랑과 쓰임이 참되다면 큰 조직을 세우는 것보다 결코 영적으로 작지 않습니다.
영상에는 ‘봉쇄수도원’이라는 독특한 삶의 방식도 소개됩니다. 일정한 특별한 경우 외에는 수도원 밖으로 나가지 않고, 사람들과의 접촉도 제한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겠다는 것입니다. 고독과 침묵은 오래된 기독교 수도 전통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왔으며, 분주한 외적 활동에서 물러나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고 기도와 말씀에 집중하는 시간은 분명 유익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때때로 무리를 떠나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따라서 사람과 활동으로 가득했던 오랜 목회생활을 마친 뒤, 일정 기간 깊은 고독을 선택하는 것 자체를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외적으로 세상에서 물러나는 것 자체를 더 높은 영적 상태로 보지는 않습니다. 사람의 거듭남은 대부분 실제 삶의 관계와 책임 가운데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혼자 있을 때에는 자신의 인내와 겸손을 확인하기가 쉽지만, 다른 사람과 부딪히고 의견이 다르며 손해를 감수해야 할 때, 비로소 자기 안의 분노와 지배욕,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고독은 거듭남을 돕는 수단이 될 수 있지만, 그 자체가 거듭남은 아닙니다. 수도원의 문을 닫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기 사랑이 마음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며, 사람과의 만남을 줄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만나는 사람을 자기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영상에서 특히 생각해 볼 부분은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고, 만나야 할 사람이 많아져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사람들만 만나느라 분주하면 너를 만나 주지 않겠다’는 취지의 말씀을 받았다고 소개하는 대목입니다. 여기서 우선 귀하게 볼 수 있는 것은 사역의 분주함 자체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대신할 수 없다는 자각입니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이유로 끝없이 사람을 만나고 행사를 진행하면서, 정작 자신의 내면은 점점 메말라 갈 수도 있습니다. 외적으로는 종교적인 일로 가득하지만, 내적으로는 주님에게서 멀어지는 역설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활동을 줄이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려는 결심에는 충분히 의미가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개인이 기도 가운데 경험한 어떤 내적 음성이나 생각을 곧바로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으로 확정하는 데에는 신중함이 필요합니다. 사람의 생각과 감정에는 여러 근원의 인플럭스가 작용하며, 자연계에 사는 동안 사람은 그 근원을 명확하게 식별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강한 내적 감동을 경험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주님의 뜻과 일치하는지는 말씀의 진리, 이성적인 분별, 그리고 그 결과 맺히는 선한 열매를 통해 확인되어야 합니다. 개인적인 체험을 부정할 필요는 없지만, 그 체험 자체가 절대적인 권위를 갖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강 목사님은 자신의 사역이 한 교회와 한 나라를 넘어 여러 나라의 수도원으로 확장되고, 더 나아가 ‘땅을 넘어 하늘까지’, ‘이 세상과 저세상까지’ 연결되는 일을 하고 있다는 취지로 말합니다. 이 표현은 문자 그대로의 영계 교통을 주장한다기보다 자신의 수도 사역을 영원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싶다는 포부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겠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자연계와 영계의 관계가 실제로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은 몸으로는 자연계에 살지만 그의 내면은 이미 영계와 연결되어 있고, 모든 선과 진리의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하여 흘러옵니다. 따라서 지상의 삶은 영원한 세계와 단절된 삶이 아닙니다.
그러나 자연계와 영계를 연결하는 주체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특별한 수도생활이나 어떤 영적 훈련이 인간에게 두 세계를 연결하는 권능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이미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고 있으며, 상응의 질서를 통해 영계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어떻게 저세상과 연결될 것인가’보다 ‘이미 주님으로부터 흘러오는 선과 진리를 이 세상에서 어떻게 받아 살아낼 것인가’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영계를 보고 천사들과 대화했지만, 그의 저작에서 영적 삶의 핵심은 영계를 보는 능력이 아니라 악을 죄로 알고 피하며 주님으로부터 선을 행하는 데 있습니다.
영상 전체를 통하여 느껴지는 한 가지 강한 흐름은 ‘남은 생애를 그냥 보내지 않겠다’는 결심입니다. 오랜 목회를 마치고도 기도와 연구, 후학 교육과 노동과 선교를 계속하며 죽는 날까지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에는 분명 귀한 면이 있습니다. 사람의 노년 역시 주님께서 주신 생명의 한 시기이며, 그때에도 경험과 지혜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사용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삶의 어느 시기도 그 자체로 무의미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현재의 조건 안에서 어떤 선한 쓰임을 행하는가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수도생활이든 목회든 선교든 모든 외적인 사역에는 하나의 공통된 영적 기준이 있습니다. ‘이 일을 통해 나의 자아가 커지고 있는가, 아니면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커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세속적 성공을 내려놓고도 종교적 성공을 사랑할 수 있고, 물질적 명예에서 물러난 뒤에도 영적 명예를 추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외적인 형식 자체보다 그 안에 흐르는 사랑의 성질을 봅니다. 수도원이라는 장소도, 기도와 연구라는 활동도, 선교라는 이름도 자동으로 거룩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한 사랑의 쓰임이 될 때 거룩해집니다.
그런 점에서 이 첫 인사 영상은 한 목회자가 자신의 이전 사역을 감사 가운데 내려놓고, 새로운 삶의 단계로 들어가려는 모습을 담은 영상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전 교회를 축복하고, 함께한 사람들에게 감사하며, 자신은 앞으로 고독과 기도, 연구와 교육, 노동과 선교를 결합한 수도생활을 해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러한 열망을 먼저 존중하면서도, 수도의 본질을 외적인 봉쇄나 활동의 규모에 두지 않습니다. 참된 수도는 사람이 어디에 사느냐보다 그의 마음이 누구에게 속해 있는가에 있으며, 참된 사역은 얼마나 큰 일을 이루느냐보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얼마나 순수하게 이웃의 유익으로 돌리는가에 있습니다.
따라서 이 첫 영상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담임목회를 마치고 고독과 기도, 연구와 노동, 후학 양성과 선교라는 새로운 쓰임의 삶으로 들어가려는 결심은 귀하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참된 수도의 완성은 세상에서 얼마나 멀리 물러났는가가 아니라, 자기 사랑에서 얼마나 벗어나 주님과 이웃을 위한 쓰임의 사람이 되어 가는가에 달려 있다’고 말입니다.
※ 여기 1강, 2강...은 실제 사경회 일정표가 아닌,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 순서를 말합니다.
2강 1부
‘모형적 진리’와 구원의 여정 - 출애굽은 지나간 역사가 아니라 한 사람 안에서 되풀이되는 영적 역사입니다
2강에 들어서면서 강의는 1강에서 제시했던 큰 방향 가운데 ‘모형적 진리’를 본격적으로 펼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경의 사건을 단순히 과거에 일어난 역사로만 읽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다가 모세를 통하여 해방되고, 홍해를 건너 광야에 들어가며, 수많은 시험과 연단을 거쳐 마침내 가나안에 이르는 전체 여정을 한 사람의 구원과 성화 과정에 대한 모형으로 읽습니다. 따라서 출애굽은 ‘옛날 이스라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알려 주는 이야기인 동시에 ‘오늘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죄에서 불러내어 어떤 과정을 거쳐 변화시키시는가’를 보여 주는 영적 지도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경 읽기는 ‘핵심진리’ 전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 공동체가 강조하는 ‘애굽’, ‘홍해’, ‘광야’, ‘요단’, ‘가나안’, ‘할례’, ‘생명과’, ‘익은 열매’ 같은 표현들은 각각 따로 떨어진 교리 용어가 아니라 하나의 긴 구원 여정 속에 배치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애굽에서 나왔다고 곧바로 가나안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출애굽이라는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지만, 그 뒤에는 광야가 있고, 광야에서는 자기 안에 숨어 있던 불신과 원망과 욕망이 드러나며, 그것을 통과한 뒤에야 약속의 땅으로 들어갑니다. 강의가 이 구조를 강조하는 이유는 ‘예수를 믿었다’는 최초의 신앙 고백과 ‘그리스도의 성품이 실제로 이루어진 사람’ 사이에는 긴 영적 여정이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 지점에서 먼저 ‘모형’이라는 말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성경 자체도 구약의 사건들을 후대의 영적 현실과 연결하여 읽는 경우가 있습니다. 고전10에서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사건을 후대 사람들을 위한 ‘본보기’로 말합니다. 홍해를 건넌 사건과 만나를 먹고 반석에서 물을 마신 사건을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연결합니다. 따라서 출애굽을 단순한 민족사적 사건 이상으로 읽으려는 ‘핵심진리’의 시도 자체는 기독교 전통과 동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는 오랜 세월 애굽의 종살이를 죄의 속박과, 출애굽을 구원과, 광야를 시험과, 가나안을 약속된 삶과 연결하여 읽어 왔습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겹치면 놀라운 접점이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출애굽기 전체를 단순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로만 읽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그는 출애굽의 사건 하나하나에 영적인 의미가 들어 있다고 봅니다. 애굽과 바로, 모세와 아론, 열 재앙, 유월절, 홍해, 만나, 반석의 물, 시내산, 성막과 제사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이 주님과 인간의 거듭남, 그리고 천국의 질서에 관한 것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외적 역사와 내적 의미가 함께 있다는 ‘핵심진리’의 기본 직관은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가까운 곳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처음부터 기억해 둘 중요한 차이가 하나 있습니다. ‘핵심진리’가 주로 사용하는 것은 ‘모형’이라는 틀입니다. 과거의 어떤 사건이 훗날 이루어질 구원의 현실을 미리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보다 근본적으로 ‘상응’과 ‘표상’을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옛날 사건 A가 훗날 사건 B를 예고했다’는 관계보다 깊습니다.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에 창조 때부터 질서 있는 상응 관계가 있기 때문에, 말씀의 자연적 사건 안에 영적인 의미가 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형은 역사적 유사성을 중심으로 볼 수 있지만, 상응은 자연계와 영계 사이의 질서 자체에 근거합니다.
예를 들어 ‘애굽’을 단순히 ‘죄악 세상’이라고 대응시키는 것만으로는 스베덴보리의 속뜻에 충분히 들어가지 못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애굽은 문맥에 따라 기억지식, 자연적 지식, 말씀에 관한 지식 등을 나타낼 수 있으며, 좋은 의미와 나쁜 의미가 모두 있습니다. 지식이 주님의 질서 아래 있을 때에는 매우 유익하지만, 자연적 지식이 영적인 것을 지배하려 할 때에는 그것이 속박의 ‘애굽’이 됩니다. 그러므로 ‘애굽=세상’이라는 일대일 대응보다 훨씬 역동적입니다. 같은 표상이 사람의 영적 상태에 따라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점이 앞으로 ‘모형적 진리’를 해설할 때, 중요한 보완점이 될 것입니다. 모형적 해석은 성경 전체를 하나의 구원 이야기로 연결해 주는 큰 장점이 있지만, 모든 사건을 미리 정해 놓은 구원 단계에 하나씩 대응시키기 시작하면, 본문이 가진 훨씬 풍성한 영적 의미가 좁아질 수 있습니다. ‘애굽은 이것, 홍해는 이것, 광야는 이것, 요단은 이것, 가나안은 이것’이라는 도표가 이해하기에는 매우 편리하지만, 말씀의 속뜻은 언제나 그렇게 단선적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이 공동체가 출애굽의 모형을 통해 강조하는 핵심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그 핵심은 매우 실제적입니다. ‘애굽에서 나오는 것’과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은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앙생활에 적용하면, ‘죄 사함을 경험했다’와 ‘죄의 지배에서 실제로 벗어나 새로운 성품으로 살아간다’는 것도 같지 않습니다. 처음 구원을 경험한 사람이 곧바로 모든 욕망과 자기중심성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 뒤부터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자기 내면의 상태가 드러날 수 있습니다.
광야가 바로 그 자리입니다. 애굽에 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이 노예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자기들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충분히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애굽을 나온 뒤 먹을 것이 부족해지고, 물이 부족해지고, 앞길이 보이지 않자 원망과 두려움과 불신이 쏟아져 나옵니다. 이것을 영적으로 읽으면, 매우 현실적인 이야기가 됩니다. 사람이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에는 주님의 은혜가 크게 느껴지고,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시험이 오면 자기 안에 숨어 있던 것들이 드러납니다. ‘나는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왜 이렇게 쉽게 불안해지는가’, ‘나는 사랑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왜 저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가’, ‘나는 하나님을 따른다고 했는데, 왜 내 뜻이 꺾이면 이렇게 화가 나는가’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러한 과정을 거듭남의 시험으로 설명합니다. 시험은 주님께서 사람을 괴롭히기 위해 보내시는 고난이 아닙니다. 사람 안에 있는 악과 거짓이 드러나고, 주님께서 주신 선과 진리가 그것과 싸우는 과정입니다. 시험이 없을 때, 사람은 자기가 얼마나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붙들려 있는지 잘 모릅니다. 평온할 때에는 누구나 어느 정도 선한 사람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이익이 침해되고, 자존심이 상하며, 원하는 것이 좌절될 때, 무엇이 올라오는지를 보면 그 사람의 내적 상태가 드러납니다.
이런 점에서 ‘핵심진리’가 광야를 ‘연단’의 장소로 읽는 것은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어려움을 모두 ‘마귀가 방해한다’거나 ‘내 믿음이 부족해서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는 식으로만 보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 과정을 통해 사람의 내면을 드러내고 다루신다는 관점은 신앙을 상당히 성숙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고난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 상황 속에서 이전에는 몰랐던 자기 자신을 보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여기에서도 ‘연단’이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고통을 보내어 일정량의 고난을 견디게 한 뒤, 그 대가로 성화를 주신다고 생각하면 위험합니다. 고통 자체에는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능력이 없습니다. 같은 고난을 겪으면서 어떤 사람은 더 부드러워지고, 어떤 사람은 더 완고해질 수 있습니다. 고난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고난 가운데 드러난 자기 상태를 보고 주님께 돌아서며,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때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구별은 공용복 선생의 생애를 읽을 때에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의 엄청난 육체적 고통 자체가 그를 성화시킨 것이 아닙니다. 만일 고통 자체가 사람을 성화한다면 세상에서 가장 고통받은 사람이 가장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고통 가운데 사람이 어떤 방향으로 자기 자유를 사용했는가입니다. 절망과 원망과 자기연민으로만 닫힐 수도 있고, 반대로 그 상황에서 주님을 찾고, 자기 생명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병상의 증거자 공용복’을 읽으면서 우리가 귀하게 보는 것도 단순히 ‘얼마나 많이 아팠는가’가 아니라 그 병상에서 무엇을 붙들고 살아갔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광야와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같은 광야를 모두가 걸었지만, 모두가 같은 사람이 된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에게 광야는 불평과 반역의 장소가 되었고, 어떤 사람에게는 주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우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외적인 환경은 같았지만, 내적인 반응은 달랐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광야의 본질은 ‘얼마나 고생했는가’보다 ‘그 고생 가운데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선택했는가’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점에서 인간의 자유가 중요해집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남은 주님께서 사람을 일방적으로 조종하여 선하게 만드는 과정이 아닙니다. 사람은 진리와 거짓, 선과 악 사이에서 자유롭게 선택해야 합니다. 물론 선을 행할 능력 자체는 주님으로부터 오지만, 사람은 그것을 자기에게 주어진 것처럼 받아들이고, ‘마치 스스로 하는 것처럼’ 악을 피하고 선을 선택해야 합니다. 이 자유로운 협력이 없으면 선은 사람의 생명 안에 뿌리내릴 수 없습니다.
출애굽 이야기에서도 이것이 계속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끌어내셨지만, 광야에서 매 순간 그들을 기계처럼 움직이지 않으셨습니다. 만나를 주시고 물을 주시며 길을 보여 주셨지만, 그들은 끊임없이 선택해야 했습니다. 믿을 것인가 원망할 것인가, 앞으로 갈 것인가 애굽으로 돌아가고 싶어 할 것인가. 주님의 말씀을 따를 것인가 자기 욕망을 따를 것인가... 이런 선택들이 쌓이면서 그들의 내적 상태가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출애굽’은 구원의 시작이면서 동시에 거듭남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악의 직접적인 지배에서 건져 내신 뒤, 비로소 본격적인 내적 정돈이 시작됩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통찰입니다. 어떤 사람은 회심 직후, 자기 안에 이전보다 더 많은 문제를 발견하고 낙심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었는데, 왜 나는 여전히 이런 생각을 하는가’, ‘왜 예전보다 오히려 내 악이 더 잘 보이는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빛이 들어왔기 때문에 이전에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방 안이 어두울 때에는 먼지가 보이지 않습니다. 햇빛이 들어오면 공중에 떠다니는 먼지까지 보입니다. 먼지가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빛 때문에 드러난 것입니다. 영적인 삶도 비슷합니다. 주님의 진리가 들어올수록 사람은 자기 안의 이기심과 거짓, 지배욕과 인정욕을 더 섬세하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참된 거듭남이 진행될수록 사람이 자기 자신을 점점 더 대단하게 생각하기보다 오히려 주님의 자비를 더 필요로 하는 사람임을 깨닫게 되는 역설이 생깁니다.
여기에서 ‘광야 연단’과 ‘성화’를 단계별 성취로만 이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광야를 통과하여 어느 날 ‘이제 나는 다 되었다’고 선언하는 것이 거듭남의 목표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남은 평생 계속되며, 천국에서도 사랑과 지혜의 완성은 끝없이 깊어집니다. 유한한 피조물이 무한하신 주님의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이는 데에는 끝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완덕’은 더 이상 성장할 것이 없는 종착점이라기보다, 주님의 질서 안에 들어가 계속해서 더욱 온전해지는 생명으로 이해하는 편이 좋습니다.
이렇게 보면 가나안 역시 단순히 ‘모든 시험이 끝난 완성 상태’라고만 볼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 이스라엘은 요단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간 뒤에도 싸움을 계속합니다. 여리고가 있고, 아이성이 있으며, 여러 민족과의 전쟁이 이어집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어떤 중요한 영적 문턱을 넘었다고 해서 모든 악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내적인 차원의 싸움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가나안이 특별히 주님의 나라, 교회, 그리고 인간 안의 천국적 상태를 표상합니다. 그러나 그 땅에 들어가는 과정과 그곳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사람이 선과 진리를 실제 자기 생명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악과 거짓이 어떻게 제거되어 가는지를 보여 줍니다. 따라서 출애굽-광야-가나안은 단순히 ‘불신자-신자-완전한 신자’라는 세 칸짜리 도표가 아니라, 한 사람 안에서 거듭남이 점점 더 깊어지는 역동적인 과정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여기서 ‘요단강’도 중요합니다. 강을 건너는 것은 경계를 넘어가는 사건입니다. 모형적 해석에서는 흔히 죽음이나 결정적인 성화의 문턱으로 읽힐 수 있지만, 스베덴보리에게 요단은 교회와 천국으로 들어가는 입구와 관련된 의미를 갖습니다. 특히 가장 외적인 진리, 곧 사람이 실제 삶으로 들어가기 위해 먼저 받아들여야 하는 기초적 진리를 나타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요단을 건넌다는 것은 단지 감정적으로 높은 영적 체험을 하는 것보다, 진리를 실제 삶 안으로 받아들이는 새로운 단계로 들어가는 것과 연결하여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차이를 알고 나면, ‘핵심진리’의 모형적 성경 읽기를 부정할 필요 없이 더 풍성하게 확장할 수 있습니다. ‘애굽은 구원 전, 광야는 연단, 가나안은 성화 후’라고 큰 지도를 먼저 이해하되, 그것을 절대적인 세 단계 공식으로 굳히지 않고, 말씀의 각 사건이 보여 주는 세밀한 영적 상태들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형적 진리가 상응의 세계로 열리기 시작합니다.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장점이 있습니다. 성경이 갑자기 ‘나의 이야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를 읽으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왜 저렇게 원망했을까’라고 남의 이야기를 읽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이스라엘은 지금 무엇 때문에 애굽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가’를 묻게 됩니다. 바로를 보면서 고대 이집트의 폭군만 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명령을 알면서도 자기 욕망을 놓지 않으려는 내 안의 완고함을 보게 됩니다. 만나를 보면서 고대의 기적적인 음식만 보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내 영혼에 필요한 선을 주님께서 어떻게 공급하시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가진 가장 큰 장점 가운데 하나가 나타납니다. 말씀의 속뜻은 사람에게 다른 사람을 판단할 자료를 주기보다 자기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됩니다. ‘바로는 저 악한 사람이다’, ‘애굽은 저 세속적인 사람들이다’, ‘광야에서 죽은 사람들은 저 믿음 없는 교인들이다’라고 외부를 향해 적용하는 순간, 말씀은 쉽게 심판의 도구가 됩니다. 그러나 ‘바로가 내 안에 있고, 애굽도 내 안에 있으며, 금송아지도 내 안에 있다’고 읽기 시작하면 말씀은 회개의 도구가 됩니다.
이것은 ‘핵심진리’가 추구하는 성화의 방향과도 잘 어울립니다. 다른 교회의 문제를 찾아내는 것보다 내 안의 애굽을 발견하는 것이 먼저이고, 다른 사람의 죄성을 지적하기보다 내 안에서 아직 주님께 순종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렇게 모형을 자기 내면으로 가져올 때, 출애굽 이야기는 단순한 종말의 예표나 교리적 도표를 넘어 매일의 거듭남을 위한 살아 있는 말씀이 됩니다.
그리고 이 관점에서 보면, 공용복 선생의 병상생활 역시 ‘광야’라는 말 하나로 단순화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 긴 세월에는 아마 수많은 종류의 영적 상태가 있었을 것입니다. 기대와 실망, 확신과 회의, 기도와 침묵, 감사와 고통이 있었을 것입니다. 실제 ‘병상의 증거자 공용복’도 그의 생애를 처음부터 흔들림 없는 영웅담으로만 묘사하지 않고 회의와 역경의 과정까지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그 삶을 귀하게 만드는 것은 ‘평생 고난을 견뎠다’는 한 문장이 아니라 그 긴 시간 동안 반복해서 하나님을 향하려 했다는 데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출애굽의 모형은 어느 한 번의 사건보다 ‘방향’을 가르쳐 줍니다. 애굽을 향하는가, 가나안을 향하는가. 넘어졌는가보다 다시 어느 방향으로 일어서는가가 중요합니다. 광야에서 원망한 적이 있는가보다 원망 가운데서 다시 주님을 바라보는가가 중요합니다. 거듭남은 완벽한 사람들의 행진이 아니라 넘어지고 드러나고 돌이키면서 점점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모형적 진리’를 다루는 2강의 출발은 상당히 귀합니다. 성경을 단지 지식으로 공부하지 않고 자기 생명의 지도처럼 읽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합니다. 그 지도는 단순한 단계표가 아니라 상응으로 이루어진 살아 있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한 사건 안에도 여러 깊이가 있고, 같은 표상도 문맥에 따라 서로 다른 상태를 나타내며, 그 모든 속뜻의 중심에는 궁극적으로 주님과 그분의 구원 역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2강 1부에서 붙들어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나는 지금 어느 단계인가?’보다 어쩌면 ‘주님께서는 지금 내 안에서 무엇을 보여 주고 계시는가?’일 것입니다. 전자는 자칫 자기 영적 수준을 측정하게 만들 수 있지만, 후자는 주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내가 광야에 있다고 느껴진다면 ‘나는 아직 낮은 단계구나’라고 낙심할 것이 아니라 ‘이 광야에서 주님께서 내 안의 무엇을 드러내시며, 무엇을 가르치고 계시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그렇게 읽을 때 출애굽은 수천 년 전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넘어 오늘의 이야기가 됩니다. 애굽에서 불러내시는 분도 주님이시고, 홍해를 가르시는 분도 주님이시며, 광야에서 만나를 내리시는 분도 주님이시고, 반석에서 물을 내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인간은 걷고 선택하고 싸우지만 구원의 처음부터 끝까지 실제 생명과 능력은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이것이 모형적 진리가 상응의 속뜻으로 더 깊어질 때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중심입니다.
그리고 이 중심을 붙들면 ‘핵심진리’가 강조하는 연단도 무겁고 두려운 수행의 길만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광야에서도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있었고, 만나가 있었으며, 반석의 물이 있었습니다. 시험보다 먼저 주님의 섭리가 있었고, 인간의 실패보다 더 오래 주님의 인도가 있었습니다. 거듭남의 길이 힘든 것은 사실이지만, 사람이 홀로 자기 힘으로 가나안까지 걸어가는 길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먼저 불러내시고, 동행하시며, 먹이시고, 가르치시고, 마침내 인도하십니다.
이렇게 2강의 첫 문을 열어 두면, 다음 부분부터 등장하는 출애굽의 여러 사건과 ‘핵심진리’의 구원 단계들을 보다 공정하게 볼 수 있겠습니다. 먼저 이 공동체가 왜 그것을 중요한 모형으로 읽는지 충분히 이해하고, 그다음 스베덴보리의 상응과 말씀의 속뜻을 통해 그 의미를 한 층씩 더 깊게 열어 보겠습니다. 그렇게 할 때 ‘모형적 진리’는 폐기해야 할 낡은 해석법이 아니라, 더 깊은 상응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하나의 의미 있는 입구가 될 수 있습니다.
2강 2부
로마서 7장과 8장 - ‘표면의 죄’에서 ‘마음의 죄’로, 그리고 생명의 성령의 법
2강의 두 번째 부분에서 강의는 출애굽과 광야라는 큰 모형을 인간의 내면으로 더 깊이 가져옵니다. 앞에서 광야가 단순히 고난의 장소가 아니라 사람 안에 숨어 있던 불신과 욕망과 자기중심성이 드러나는 자리라고 했다면, 이제 강사 목사님은 그 문제를 로마서 7장과 8장을 통해 설명합니다. 특히 로마서 7장을 ‘광야 성도들이 경험하는 내용’, 로마서 8장을 ‘생명과를 먹은 성도들이 경험하는 내용’으로 나누어 읽습니다. 강의에 따르면, 말씀을 철저히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서 비로소 자기 안의 깊은 죄성이 드러나며, 로마서 7장의 갈등은 바로 그 내면의 죄를 발견하는 상태를 보여 줍니다.
강사 목사님은 여기에서 ‘표면적인 죄’와 ‘내면의 죄’를 매우 분명하게 구별합니다. 표면적인 죄는 말과 행동으로 실제 밖에 드러나는 죄이고, 내면의 죄는 아직 행동으로 나타나기 전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악심과 탐심입니다. 강의는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괴로워하는 이유가 외적인 율법을 전혀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철저히 지키려고 할수록 그보다 더 안쪽에 있는 탐심을 발견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탐내지 말라’는 계명이 없었다면 자신 안의 탐심을 알지 못했을 것이라는 롬7:7을 특별히 강조합니다.
이 부분은 ‘핵심진리’의 죄 이해에서 매우 중요한 진전입니다. 사람은 흔히 자신의 신앙 상태를 눈에 보이는 행동으로 평가합니다. 사람을 죽이지 않았고, 도둑질하지 않았고, 외적인 간음을 하지 않았고, 교회생활을 성실히 했으므로 자신을 비교적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빛이 더 깊이 들어오면 행동 이전의 마음이 보입니다. 실제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어도 누군가를 심하게 미워하고 있었고, 남의 것을 훔치지 않았어도 끊임없이 탐하고 있었으며, 겉으로 겸손해 보여도 속에서는 인정받고 높아지기를 갈망했던 자기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핵심진리’는 바로 이 층을 ‘내면의 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와 상당히 깊게 만나는 부분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거듭남은 외적 행동 몇 가지를 고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겉 사람을 계명에 맞추는 일이 필요합니다. 화가 나도 폭언을 하지 않고, 이익이 생겨도 거짓말하지 않고, 탐욕이 일어나도 부정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계속되면서 사람은 점점 더 ‘왜 나는 저 사람에게 이렇게 화가 나는가’, ‘왜 저 사람의 성공이 못마땅한가’, ‘왜 내 의견이 무시되면 견디기 힘든가’라는 더 깊은 사랑의 문제와 마주하게 됩니다. 행동의 뿌리에 있는 지배적인 사랑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로마서 7장의 경험을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려는 사람일수록 자기 안의 죄를 더 많이 발견하게 된다’고 읽는 강의의 통찰은 상당히 실제적입니다. 강사 목사님도 ‘철저히 노력하지 않으면 경험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역설처럼 보이지만 영적 삶에서는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주님의 빛이 약할 때에는 자기 안의 많은 것을 보지 못합니다. 빛이 밝아질수록 전에 보이지 않던 먼지가 보이듯, 진리를 진지하게 살려고 할수록 이전에는 문제라고 느끼지 못했던 작은 자기 사랑과 거짓까지도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거듭나기 시작하면 오히려 예전보다 자기가 더 악해진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악이 갑자기 더 많이 생긴 것이 아니라, 전에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는 자기상이 무너지고, 주님의 도움 없이는 자기 안의 악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이 점점 분명해집니다. 이런 의미에서는 로마서 7장의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라는 탄식이 단순한 영적 실패의 고백이라기보다 더 깊은 자기 인식이 시작된 상태를 보여 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구별 하나가 필요합니다. ‘마음에 악한 생각이나 충동이 떠올랐다’는 것과 ‘그 악을 내 것으로 받아들여 사랑했다’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인간의 생각과 애정에는 천국과 지옥으로부터 끊임없이 인플럭스가 들어옵니다. 사람이 원하지 않는 분노, 음란한 생각, 질투, 교만한 상상이 불쑥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타난 순간 곧바로 ‘이것이 곧 내 죄성이고, 내가 이 악을 범했다’고 자기에게 귀속시키면 지나친 자기 정죄로 흐를 수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생각을 어떻게 대하느냐입니다. 그것을 즐거워하고 붙잡으며 실제 의지로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이것은 주님의 질서에 맞지 않는다’고 보고 거절하는가입니다. 시험은 악이 전혀 떠오르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악과 선이 함께 의식 앞에 놓였을 때, 사람이 자유롭게 어느 쪽에 동의하는가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죄’를 세밀하게 살피는 ‘핵심진리’의 엄격함은 귀하지만, 모든 순간적 악한 생각을 곧바로 자기 본질로 동일시하지 않는 균형도 함께 필요합니다.
이 차이는 실제 영성생활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자기 내면을 진지하게 살피는 사람일수록 오히려 생각과 감정에 민감해지기 때문입니다. 화가 잠깐 올라온 것만으로 ‘나는 아직 전혀 변화되지 않았다’고 낙심할 수도 있고, 원치 않는 음란한 생각 하나 때문에 자신을 깊은 죄인으로 몰아붙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무엇이 떠올랐는가’만큼이나 ‘그것을 나는 사랑하는가, 미워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악이 보인다는 사실 자체가 오히려 그것과 싸울 수 있는 빛이 주어지고 있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이 점에서 ‘핵심진리’가 말하는 ‘범죄하기 쉬운 기회’라는 표현도 중요하게 볼 수 있습니다. 평온할 때에는 자기 안의 분노나 탐심이 잘 보이지 않지만, 실제 이해관계가 걸리고, 자존심이 상하고, 욕망이 자극되면 마음의 상태가 나타납니다. 강사 목사님은 바로 이런 환경에서 바울이 자기 안의 악심과 탐심을 발견했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1부에서 살핀 광야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광야는 새로운 악을 만들어 내는 곳이 아니라 이미 안에 있던 것이 밖으로 드러나는 곳입니다.
여기서 공용복 선생의 병상 생애를 조용히 떠올려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토록 극심한 육체적 제약 속에서는 평상시 건강한 사람이 좀처럼 마주하지 않을 수많은 내적 반응이 계속 일어났을 것입니다. ‘왜 나인가’, ‘왜 낫지 않는가’, ‘하나님께서는 왜 침묵하시는가’ 같은 질문 속에서 원망과 절망, 자기연민과 두려움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병상의 증거자 공용복’이 그의 삶을 처음부터 흔들림 없는 승리담으로만 기록하지 않고 ‘회의와 역경’까지 보여 준다는 사실은 오히려 의미가 있습니다. 내면의 싸움이 있었다는 것은 신앙이 없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런 싸움을 통하여 신앙이 실제 생명이 되어 갔을 가능성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강의는 로마서 7장의 상태를 이렇게 충분히 설명한 뒤 로마서 8장으로 넘어갑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매우 강한 전환을 제시합니다. ‘7장은 광야 성도들이 경험하는 내용’이고, ‘8장은 생명과를 먹은 성도들의 경험’이라는 것입니다. 롬8:1-2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를 읽으면서, 이제 생명의 성령의 법이 역사하면 죄의 법에서 실제로 해방되어 ‘범죄할 좋은 기회가 와도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에 ‘핵심진리’의 성화론이 아주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복음은 사람에게 죄를 지어도 계속 용서받는 길만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 지배 자체로부터 실제로 해방하는 능력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 제기입니다. 사람이 평생 같은 죄를 반복하면서도 ‘나는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았으니 괜찮다’고만 생각한다면 구원이 실제 삶의 변화와 분리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핵심진리’는 바로 이 점을 강하게 거부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이 방향에서는 매우 가까이 갑니다. 구원은 죄책을 법적으로 지워 주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사람이 악의 지배에서 실제로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악을 즐거워하던 사람이 그것을 싫어하게 되고, 선을 억지로 행하던 사람이 선을 기뻐하여 행하게 되는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진리가 외적 명령에서 내적 사랑이 되어 갈 때 사람은 점차 천국의 자유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해방’의 의미에서는 두 관점 사이에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핵심진리’의 설명은 뒤로 갈수록 죄성의 뿌리가 실제로 뽑히고, 그 결과 죄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는 상태를 매우 강하게 말합니다. 실제 강의는 광야 연단을 마치고, 마음과 행실이 정결해지면, 하나님께서 ‘영혼 속에 뿌리박힌 죄성을 뽑아내는 할례’를 베푸시며, 그 뒤 생명을 넣어 주어 생명과를 먹게 하신다고 설명합니다. 이 문제는 다음 3부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겠지만, 로마서 8장의 해석에도 이미 그 구조가 들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죄에서 해방된다’는 것은 악한 proprium이 존재론적으로 사라져 다시는 어떤 악한 충동도 생길 수 없게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더 정확히는 악이 사람을 지배하지 못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전에는 분노가 올라오면 거의 자동적으로 행동으로 이어졌다면, 거듭남이 진행된 사람은 그 분노를 보면서도 그것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더 깊어지면 악을 거절하는 일이 점점 자연스러워지고, 선을 행하는 것이 기쁨이 됩니다. 그러나 그는 그 선을 자기 능력의 결과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진정한 자유는 ‘나는 이제 악한 생각 자체가 전혀 없다’는 상태보다 ‘악이 다가와도 그것을 원하지 않고, 주님의 도움으로 따르지 않을 수 있다’는 상태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더욱 깊은 천국적 상태에서는 악을 따르지 않는 것이 억압이나 고통이 아니라 기쁨이 됩니다. 마치 정직한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싶지만 억지로 참는 것이 아니라, 거짓 자체가 자기 사랑과 맞지 않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진실을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로마서 7장과 8장을 서로 완전히 다른 두 종류의 사람으로 고정하는 데에는 조금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7장 사람’은 아직 죄성이 있고 ‘8장 사람’은 죄성이 완전히 제거된 사람이라고만 나누면 신앙생활이 지나치게 단계적인 자기판정으로 흐를 수 있습니다. 한 사람 안에서도 로마서 7장과 같은 경험과 로마서 8장과 같은 자유가 여러 층에서 반복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어떤 욕망에서는 상당한 자유를 얻었지만, 더 깊은 자기 사랑이 드러나면 다시 큰 싸움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에서 매우 중요한 특징입니다. 사람의 내면은 한 층이 아닙니다. 겉 사람의 어떤 악이 질서를 잡고 나면 더 내적인 원인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행동을 다스리고, 다음에는 생각을, 더 깊게는 그 생각을 낳는 애정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싸움이 완전히 사라지기보다 더 미세하고 내적인 형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물론 동시에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깊은 평안과 자유도 커집니다.
이 관점은 ‘완덕’을 생각할 때, 중요한 균형을 줍니다. 완덕을 ‘더 이상 자기 안에서 악을 발견하지 않는 상태’라고 생각하면 두 가지 위험이 생깁니다. 여전히 악을 느끼는 사람은 절망하고, 자기 안에서 악을 별로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가 높은 단계에 도달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영적 성숙은 오히려 자기에게는 선이 없으며, 모든 선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인식이 깊어지는 방향으로 갑니다. 자신감보다 주님께 대한 의존이 깊어집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신인 합일’이라는 이 공동체의 언어도 다시 돌아볼 수 있습니다. 가장 깊은 신인 합일은 ‘나는 이제 죄성이 없고, 신적 상태에 도달했다’는 자기 선언으로 나타나기보다, 자기 proprium을 덜 신뢰하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더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상태로 나타날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과 결합된 사람이라면, 자기 안의 선을 자기 공로로 여기기보다 오히려 더 겸손해질 것입니다.
강사 목사님이 로마서 7장을 바울의 ‘마음의 죄 발견’으로 읽는 부분에서 또 하나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바울의 서신은 교회를 위한 매우 유익한 사도적 문헌이지만, 창세기와 출애굽기, 복음서, 요한계시록처럼 연속적인 속뜻과 아르카나를 가진 엄밀한 의미의 ‘말씀’에는 포함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로마서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로마서 7장과 8장을 애굽-광야-가나안이라는 말씀의 표상 구조와 일대일로 연결하여, 그 자체를 하나의 상응 체계처럼 읽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해석법과는 다릅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7장=광야’, ‘로마서 8장=가나안’이라는 대응은 ‘핵심진리’가 제시하는 유익한 교리적 비유로는 받아들일 수 있지만, 말씀의 속뜻 자체라고까지 말하는 데에는 구별이 필요합니다. 로마서가 설명하는 영적 갈등과 성령 안의 자유를 출애굽의 표상적 역사와 함께 묵상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양쪽이 본래부터 동일한 내적 상응 구조로 기록되었다고 보는 것은 별개의 주장입니다.
이 차이를 굳이 날카로운 비판으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두 자료의 역할을 구별하면 됩니다. 출애굽기는 말씀의 표상과 속뜻을 통하여 거듭남의 질서를 보여 주고, 로마서는 사도적 교훈을 통하여 인간 안의 죄와 은혜, 성령 안의 삶을 교리적으로 설명합니다. 둘을 서로 비추어 읽을 수 있지만, 그 영감의 구조와 속뜻의 성격까지 같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무엇보다 이번 부분에서 가장 귀하게 남는 것은 ‘행동 이전의 사랑을 보라’는 요청입니다. 강의는 바울의 탐심을 통하여 행동만 보아서는 죄를 충분히 알 수 없다고 강조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서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가 ‘그 탐심은 어떤 사랑에서 나오는가’를 묻습니다. 왜 남의 것을 원하는가. 왜 다른 사람보다 더 갖고 싶어 하는가. 왜 내 뜻이 이뤄지지 않으면 불안한가. 그 밑바닥에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여러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거듭남의 핵심은 바로 이 ‘지배적인 사랑’의 질서가 바뀌는 것입니다. 자기와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과 세상에 필요한 것을 돌보는 사랑은 질서 안에서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최고의 자리에 올라가 주님과 이웃을 이용하기 시작하면 악이 됩니다.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중심이 되고, 자기와 세상에 대한 사랑이 그 아래에서 쓰임을 섬길 때 비로소 질서가 회복됩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의 ‘생명의 성령의 법’도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새로운 지배적인 사랑의 법’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자기 사랑의 즐거움이 사람을 끌고 갔다면,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의 즐거움이 더 강해집니다. 억지로 죄를 안 짓는 것에서 벗어나,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악이 싫어지는 상태로 변화합니다. 이것이 참된 해방입니다.
이렇게 보면 로마서 7장과 8장의 관계를 ‘패배와 완전무결’보다 ‘싸움과 자유’의 관계로 보는 것이 더 깊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7장에서는 자기 안의 악을 발견하면서 ‘나는 내 힘으로 이것을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로마서 8장에서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 안에서 악의 지배가 깨지는 자유를 경험합니다. 그러나 그 자유의 근원은 끝까지 자기에게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공용복 선생의 생애를 바라볼 때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극심한 고통을 견뎌 냈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가운데 자기 힘의 한계를 어떻게 받아들였으며, 자기 생명의 근원을 어디에서 찾았는가일 것입니다. 거의 육체적 자율성을 잃어버린 상황은 역설적으로 ‘내가 내 힘으로 내 삶을 지배한다’는 자연적인 확신을 극단적으로 흔드는 자리였을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주님의 생명과 능력을 말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핵심진리’의 성화론이 단순한 인간 의지력 훈련으로만 구성된 것은 아니라는 점도 함께 기억하게 합니다.
그래서 이 강의를 ‘행위구원’이라는 한마디로 잘라 버리는 것도 공정하지 않습니다. 강의는 인간에게 실제 순종과 싸움을 강하게 요구하지만, 그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 그리스도의 생명을 강조합니다. 인간이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수동적인 은혜관을 거부하는 것이지, 하나님 없이 인간이 자기 힘으로 완덕을 획득한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인간의 노력과 주님의 생명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더 섬세하게 정리할 필요는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관계를 아주 독특하게 표현합니다. 사람은 ‘마치 자기 자신에게서 하는 것처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실제 힘은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사람의 자유로운 의지가 사라지면 결합도 없지만, 그 자유를 자기 고유한 능력이라고 생각하면 자기 공로로 흐릅니다. ‘내가 싸운다’와 ‘주님이 힘을 주신다’가 함께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이번 2강 2부의 가장 좋은 결론은 ‘마음의 죄까지 철저히 찾아내라’는 데서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내면의 악을 보는 목적은 자기 자신을 끝없이 정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악을 주님께 가져가기 위해서입니다. 빛이 더 밝아져 자기 안의 더 깊은 탐심과 교만을 발견했다면, 그것은 절망할 이유가 아니라 주님의 구원이 더 깊은 층에까지 들어오고 있다는 신호일 수도 있습니다.
로마서 7장의 탄식이 로마서 8장의 자유로 이어지는 중심에도 바로 이 사실이 있습니다. ‘나는 왜 이렇지?’라는 자기 분석에서 끝나지 않고, ‘누가 나를 건져 내랴’라는 질문이 주님께로 향합니다. 거듭남은 자기를 깊이 보는 일이지만, 끝없이 자기만 바라보는 일은 아닙니다. 자기 악을 본 뒤 시선을 주님께 돌리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표면의 죄’에서 ‘마음의 죄’로 깊어지는 이번 강의의 방향은 매우 귀합니다. 다만 그 내면 탐구가 자기정죄나 영적 완벽주의로 흐르지 않고, 모든 구원과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로 귀결되어야 합니다. 그때 로마서 7장의 괴로움과 로마서 8장의 자유는 서로 대립하는 두 계급의 영적 신분이 아니라 한 사람이 주님 안에서 점점 더 깊이 거듭나는 과정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다음 3부의 주제가 열립니다. ‘핵심진리’는 이 죄와의 싸움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연단’, ‘죄성과 정욕’, ‘영혼의 할례’, ‘생명과’라는 강한 언어로 설명합니다. 특히 광야 연단을 마친 뒤 ‘죄성의 뿌리를 뽑아내는 할례’가 이루어지고 생명과를 먹게 된다는 설명은 이 공동체 성화론의 핵심 중 핵심입니다. 다음 2강 3부에서는 그 가르침의 진지함을 충분히 존중하면서, 스베덴보리에게 악이 ‘제거된다’는 것은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proprium과 유전악, 실제악,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새로운 의지의 형성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2강 3부
연단과 성화 - 죄성의 ‘제거’와 영혼의 할례,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새로운 의지
2강의 세 번째 부분에 들어서면 ‘핵심진리’의 성화론이 가장 선명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앞의 2부에서 강의는 로마서 7장을 통하여 행동으로 드러나는 ‘표면의 죄’보다 더 안쪽에 있는 탐심과 악심, 곧 ‘마음의 죄’를 발견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제 질문은 자연스럽게 다음 단계로 넘어갑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발견된 죄성과 정욕은 어떻게 처리되는가?’입니다. 강의가 이에 대해 내놓는 핵심적인 대답은 ‘광야의 연단’이며, 그 연단의 끝에서 ‘영혼의 할례’가 이루어지고, 마침내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생명과’를 먹게 된다는 구조입니다. 이 부분은 ‘핵심진리’ 전체를 이해하는 데 대단히 중요합니다.
먼저 강의가 말하는 ‘연단’을 단순히 많은 고통을 겪는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연단의 본질은 ‘범죄하기 쉬운 환경에서 실제로 죄를 범하지 않고 말씀에 순종하는 훈련’에 있습니다. 모욕을 당했을 때 모욕으로 갚고 싶은 마음이 올라오고, 손해를 보았을 때 자기 이익을 지키고 싶은 욕망이 일어나며, 자기 뜻이 꺾였을 때 분노와 아집이 드러납니다. 바로 그 순간 자기 욕망을 그대로 따라가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하는 것이 연단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연단은 고생의 양을 측정하는 개념이 아니라 시험 속에서 어떤 선택을 했는가를 보는 개념에 가깝습니다.
이 점은 상당히 귀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는 것과 실제로 변화되었다는 것은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많이 들었고, 기도를 많이 했으며, 교회에서 오래 봉사했다고 해서 자기를 거스르는 상황에서도 반드시 온유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실제 갈등의 순간에 무엇이 나오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평상시에는 친절하지만 자기 의견이 무시되면 크게 분노하고, 사랑을 말하면서도 손해가 생기면 이웃을 외면한다면 아직 진리가 의지와 충분히 결합하지 않은 것입니다. ‘핵심진리’가 연단을 실제 생활 속의 순종으로 보는 것은 바로 이런 자기기만을 막으려는 데 강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이 지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시험은 거듭남에 없어서는 안 될 과정입니다. 사람 안에는 오래된 proprium의 사랑과 주님으로부터 새롭게 받아들이는 선과 진리가 함께 존재하게 됩니다. 평온한 상태에서는 둘 사이의 충돌이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상황이 자기 사랑을 자극하면 숨어 있던 악한 애정이 올라오고, 동시에 양심과 진리가 그것을 거부하려 합니다. 그때 사람 안에서 실제 영적 싸움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먼저 중요한 균형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거룩하게 만들기 위해 일부러 악과 고통을 만들어 보내신다고 이해하면 안 됩니다. 주님에게서는 악이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다른 사람들의 자유로운 악, 그리고 지옥의 인플럭스로 인해 수많은 고통과 갈등이 일어납니다. 주님께서는 그것들을 원인으로 창조하시는 것이 아니라 허용하시며, 허용된 악조차 거듭남의 선한 결과를 위해 굽혀 사용하십니다. ‘주님께서 이 고통을 보내셨다’와 ‘주님께서 이 고통 속에서도 나를 버리지 않고 선을 이루신다’는 말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 구별은 공용복 선생의 병상생활을 생각할 때도 매우 중요하겠습니다. 거의 온몸이 자유롭지 않은 상태로 장기간 살아간 그 고통을 ‘하나님께서 공용복 선생을 성화시키기 위해 병을 주셨다’고 너무 간단히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하나님의 섭리를 지나치게 직접적인 원인으로 돌릴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병이라는 엄청난 제한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붙드시고, 그 고통조차 그의 신앙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실 수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병상의 증거자 공용복’에서 보이는 중요한 부분도 고통 자체의 크기보다, 그 고통 가운데 그가 어떤 방향으로 하나님을 찾았는가에 있을 것입니다.
‘핵심진리’는 이러한 연단의 결과를 매우 강한 표현으로 설명합니다. 광야에서 마음과 행실이 정결해지면 하나님께서 ‘영혼의 할례’를 베푸시고, 그 할례를 통하여 영혼 안에 뿌리박힌 죄성을 제거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성이 제거된 뒤 하나님의 생명이 사람 안에 들어오는데, 이것을 ‘생명과를 먹는다’는 표현으로 설명합니다. 이 구조에서는 광야 연단-정결-영혼의 할례-생명과라는 분명한 진행이 형성됩니다. 따라서 ‘성화’는 조금 더 착하게 살아가는 정도가 아니라 인간 안의 죄 문제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사건으로 이해됩니다.
여기서 ‘할례’라는 이미지는 성경적으로도 매우 강력합니다. 육체의 불필요한 부분을 베어 내듯, 영적으로는 하나님과의 결합을 방해하는 부정한 것을 제거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특히 신10:16의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라는 말씀이나 렘4:4의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라는 표현은 외적인 종교의 표지가 아니라 마음 자체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런 의미에서 ‘영혼의 할례’라는 ‘핵심진리’의 표현은 매우 적절한 영적 직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할례는 매우 중요한 표상입니다. 할례는 특별히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불결한 사랑을 제거하는 것을 표상합니다. 가장 외적이고 감각적인 자기 사랑이 주님의 질서에 복종하도록 제거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핵심진리’가 할례를 죄성의 처리와 연결하는 큰 방향 자체는 스베덴보리의 상응과 상당히 가까이 갑니다.
그러나 ‘제거된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서는 매우 중요한 차이가 생깁니다. ‘핵심진리’의 문장을 문자적으로 따라가면, 죄성이 마치 인간 영혼 속에 박혀 있는 어떤 뿌리나 물질과 같고, 영적 할례를 받으면 그것이 뽑혀 나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처럼 이해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뒤의 ‘이기는 자’ 가르침과 결합되면 ‘죄 문제를 완전히 해결한 상태’라는 표현이 상당히 강해집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거듭남론은 조금 다른 그림을 제시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에게 있는 악한 proprium은 지상생활에서 존재론적으로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악들을 제거하여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게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사람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옆으로 밀어내고 제어하십니다. 동시에 주님으로부터 새로운 의지가 형성되어 선이 지배적인 사랑이 되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악은 여전히 인간 proprium의 가능성으로 남아 있지만, 주님께 결합되어 있는 동안 그것은 통치권을 행사하지 못합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악이 ‘없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안에서 다시 분노나 탐심이나 교만이 올라왔을 때 두 가지 극단으로 갈 수 있습니다. 하나는 ‘나는 아직 영혼의 할례를 받지 못했구나’ 하고 지나치게 낙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나는 이미 죄성이 제거되었으니 지금 올라오는 것은 죄가 아니다’라고 자기 상태를 잘못 판단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설명은 이 두 위험을 모두 피하게 해 줍니다. 악한 충동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다시 지배권을 잡도록 내가 동의하느냐입니다.
오히려 거듭난 사람일수록 자기 안에서 나오는 것이 본질적으로 선하지 않다는 사실을 더 깊이 깨닫습니다. 천사들 역시 자신들에게 있는 선과 지혜를 자기 소유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만 오며,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은 악이라고 인정합니다. 이것은 천사들이 스스로를 증오한다는 뜻이 아니라, 생명의 원천을 정확하게 안다는 뜻입니다. 가장 높은 상태에 이를수록 자기 성취에 대한 확신보다 주님께 대한 의존이 깊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죄성이 뿌리 뽑힌다’는 ‘핵심진리’의 표현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가장 선하게 읽는다면, ‘죄성이 더 이상 지배적인 사랑이 되지 못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이전에는 모욕을 받으면 분노가 주인이었지만, 이제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이 더 강하여 그 분노를 거절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돈을 더 갖고 싶은 욕망이 모든 판단을 움직였지만, 이제는 정직과 이웃의 유익이 더 중요한 사랑이 됩니다. 악의 가능성이 제거되었다기보다 생명의 왕좌가 바뀐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 거듭남의 핵심입니다. ‘무엇이 내 안에 존재하는가’보다 ‘무엇이 내 삶을 지배하는가’입니다. 사람 안에 여러 종류의 충동과 생각이 들어올 수 있지만, 그중 무엇을 자기 의지로 받아들여 생명의 중심에 놓느냐가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으로는 ‘지배적인 사랑’이 인간 전체를 형성합니다. 사람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가장 사랑하는가에 따라 나머지 생각과 행동이 그 사랑을 섬기도록 배열됩니다.
따라서 성화는 인간에게서 모든 자연적인 욕구를 제거하는 과정도 아닙니다. ‘핵심진리’에서 정욕을 강하게 경계하기 때문에 여기 역시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먹고 싶은 욕구, 쉬고 싶은 욕구, 재산을 갖고 싶은 마음, 인정받고 싶은 자연적인 감정 자체가 모두 악한 것은 아닙니다. 이것들은 질서 안에서는 인간 생활에 필요한 것들입니다. 악은 그것들이 더 높은 사랑을 지배하게 될 때 생깁니다.
예를 들어, 돈을 사랑하는 것에도 질서가 있습니다. 가족을 부양하고, 맡겨진 쓰임을 충실히 수행하며,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재산을 관리하는 것은 선한 질서 안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돈 자체가 생명의 목적이 되어 정직과 이웃을 희생하기 시작하면 세상 사랑이 주님과 이웃 사랑을 지배하게 됩니다. 성화는 돈을 완전히 버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돈이 제 자리에 있도록 사랑의 질서를 회복하는 데 있습니다.
이 점은 수도적 영성을 이해할 때 특히 중요합니다. 금식, 절제, 수면 제한, 재산 포기 같은 외적인 자기 부인은 어떤 사람에게 매우 유익한 영적 훈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외적 고행 자체가 거룩함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많은 것을 포기하면서도 ‘나는 이렇게까지 했다’는 자기 의를 키울 수 있습니다. 반대로 평범한 가정과 직업생활을 하면서 자기 욕망을 절제하고 이웃에게 유익한 쓰임을 수행하는 사람이 매우 깊은 체어리티의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정욕을 죽인다’는 표현 역시 자연적인 인간 전체를 파괴하는 의미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자연적인 사람은 버려야 할 악한 껍데기가 아니라 영적인 것이 자연계에서 쓰임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그릇입니다. 거듭남은 자연적인 사람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질서 아래 두는 것입니다. 속 사람을 통해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과 진리가 겉 사람을 질서 있게 다스릴 때, 자연적인 욕구와 능력은 오히려 선한 쓰임의 훌륭한 도구가 됩니다.
이러한 관점으로 ‘생명과’를 보면 의미가 더 분명해집니다. ‘핵심진리’에서는 광야 연단을 마치고 영혼의 할례를 받은 뒤, 하나님께서 생명을 넣어 주시고 비로소 생명과를 먹게 되는 구조가 강합니다. 즉 생명과가 일종의 성화 완성 이후 주어지는 결정적인 생명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생명은 거듭남 마지막에 처음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 회개할 마음이 생긴 순간부터, 악을 악으로 볼 수 있는 빛이 생긴 순간부터, 선을 행하고 싶은 작은 애정이 생긴 순간부터 이미 주님의 생명이 역사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 생명이 없으면 광야 자체를 통과할 수 없습니다. 악을 볼 수 있는 빛도 주님으로부터 오고, 그것을 싫어할 수 있는 양심도 주님께서 보존하신 리메인스를 통하여 움직이며, 악을 거절할 힘도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그러므로 생명과는 광야의 끝에 처음 주어지는 상이라기보다 광야를 처음부터 끝까지 걷게 하는 생명의 원천이라고 보는 편이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에 더 가깝습니다.
이 차이는 에덴의 생명나무를 이해할 때 더욱 선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생명나무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퍼셉션(perception, 주님의 선과 진리에 대한, 주님으로부터 오는 지각), 궁극적으로는 주님 자신을 나타냅니다. 태고교회 인간이 생명나무 가운데 살았다는 것은 그들이 자기 지혜로 살기보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으로 살았다는 뜻입니다. 타락은 그 생명을 아직 한 번도 받아 보지 못했다가 나중에 얻을 기회를 잃은 사건이라기보다, 주님으로부터 살던 사람이 자기 proprium과 자신의 감각적 판단으로 선악을 결정하려 한 사건입니다.
따라서 생명과를 먹는다는 것은 ‘이제 충분히 정결해졌으므로 하나님께서 특별한 생명을 넣어 주신다’는 한 번의 사건으로만 제한하기보다, 주님의 선과 진리를 자기 의지와 삶으로 받아들이는 전 과정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진리를 듣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사랑하여 행할 때, 영적으로 ‘먹는’ 일이 일어납니다. 먹은 음식이 몸의 일부가 되듯, 받아들인 선과 진리가 사람의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혼의 할례-생명과’의 관계도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주님의 생명을 받은 뒤에야 악을 제거할 수 있는 것이지, 인간이 먼저 자기 안의 모든 악을 깨끗하게 제거한 다음, 빈 마음에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순서는 아닙니다. 주님의 생명이 먼저 역사하기 때문에 사람이 악을 볼 수 있고, 그것을 멀리할 수 있으며, 그 생명이 더 깊이 자리 잡으면서 악의 지배가 약해집니다. 은혜는 성화의 마지막 상이 아니라 성화 전체의 원인입니다.
이것은 ‘핵심진리’가 가진 강한 연단론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연단의 힘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더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실제로 선택해야 합니다. 화가 날 때 참아야 하고, 탐욕이 올라올 때 정직을 선택해야 하며, 자기 뜻이 꺾일 때 주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주님이 알아서 바꾸실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거듭남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모든 선택을 가능하게 하는 빛과 힘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도 동시에 인정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두 가지를 ‘마치 스스로 하는 것처럼’이라는 독특한 원리로 설명합니다. 사람은 마치 자신의 힘으로 하는 것처럼 자유롭게 싸워야 합니다. 주님께서 대신 화를 참아 주시는 것이 아니고, 사람을 기계처럼 선하게 움직이시는 것도 아닙니다. 실제로 선택하는 사람은 인간입니다. 그러나 싸움에서 이길 능력을 자기에게 돌려서는 안 됩니다. 그 능력은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이 두 가지가 함께 있을 때, 인간의 자유도 보존되고, 주님의 신성한 역사도 인정됩니다.
이 관점은 공용복 선생의 생애를 바라볼 때도 한층 더 의미가 있습니다. 거의 전신이 자유롭지 않은 사람이었다면, ‘인간의 노력’이라는 말 자체가 건강한 사람과는 전혀 다르게 들렸을 것입니다. 외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극도로 제한된 상태에서는 ‘나는 이것을 해냈다’는 자기 능력의 환상이 훨씬 일찍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의 자유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몸을 움직일 자유는 크게 제한되었어도 마음으로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하나님을 향할 것인가, 원망에만 머물 것인가 하는 내적 자유의 문제가 남아 있었습니다. 이 점은 인간의 자유가 단순한 육체적 행동 능력과 같지 않다는 것을 매우 깊게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 부분은 ‘리메인스’(remains)의 관점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시험을 받을 때, 완전히 빈 상태에서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각 사람에게 선과 진리의 상태들을 보존해 두십니다. 부모에게서 받은 사랑, 하나님에 대한 순진한 신뢰, 이웃에게 선을 행했을 때의 기쁨, 말씀을 통해 받아들인 진리 같은 것들이 리메인스로 남습니다. 이후 시험에서 주님께서는 그것들을 사용하여 사람의 양심을 움직이고, 악과 싸울 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랜 세월 같은 ‘핵심진리’를 반복해서 듣는 일도, 그것이 삶과 선한 애정에 결합된다면 단순한 정보의 반복 이상이 될 수 있습니다. 진리가 사람 안에 보존되어 훗날 시험의 순간에 쓰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반복된 진리가 자기 교리의 확신만 강하게 만들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척도가 된다면 방향은 달라집니다. 리메인스의 핵심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선과 진리가 결합된 상태입니다. ‘나는 이 진리를 안다’보다 ‘이 진리 덕분에 나는 조금 더 온유하고 정직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되었는가’가 중요합니다. 진리가 기억에만 있으면 지식이지만, 의지에 들어가 삶이 되면 영적 생명이 됩니다.
이 점에서 ‘핵심진리’가 연단의 결과를 반드시 ‘빛의 열매’로 확인하려 하는 태도는 귀합니다. 말로 ‘나는 많이 연단받았다’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자기를 모욕한 사람을 위해 기도하며, 말씀을 따라 선을 선택하는 열매가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기준은 영적 단계에 대한 자기과시를 상당 부분 견제할 수 있습니다. 높은 체험을 말하기보다 실제 생활의 열매를 보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열매’를 공로로 바꾸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선한 열매는 천국 입장 점수를 얻기 위한 행위가 아닙니다. 나무가 살아 있기 때문에 열매가 맺히듯,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은 사람이 그 생명에 따라 살 때 자연스럽게 선한 열매가 나타납니다. 따라서 열매는 구원을 ‘구매하는 조건’이라기보다 주님과의 결합이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결과입니다.
이렇게 보면 ‘영혼의 할례’도 인간이 자기에게 칼을 대어 죄성을 제거하는 영적 수술이 아니라, 사람이 주님의 진리에 순종하여 악을 멀리할 때, 주님께서 자기 사랑의 지배를 점점 약화시키시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악을 보고 거절해야 하지만, 그 악을 실제로 분리하고 새 질서를 세우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이 차이가 있어야 성화가 자기완성의 프로젝트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완덕’이라는 말도 가장 건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완덕은 ‘나는 더 이상 죄의 가능성이 없는 사람이다’라는 완전무결 선언이 아니라, 주님의 선과 진리가 점점 더 자유롭게 사람 안에서 하나가 되어 삶으로 나타나는 상태입니다. 사람은 유한하기 때문에 끝없이 성장할 수 있으며, 천국에서도 사랑과 지혜는 영원히 깊어집니다. 그러므로 완전함은 성장의 정지가 아니라 주님께 계속 열려 있는 질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공용복 선생과 그 제자들의 관계를 생각할 때도 의미가 있습니다. 만일 그분들이 스승에게서 배운 ‘성화’를 단지 어떤 특별한 단계에 도달하는 기술로만 받아들였다면 수십 년의 반복은 경직된 단계론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승의 병상과 삶, 그가 강조했던 순종과 자기 부인을 기억하면서 ‘나도 실제로 저 말씀처럼 살아야 한다’고 반복해서 자신을 돌아본다면, 같은 문장을 수십 번 듣는 일의 의미는 전혀 달라집니다. 특히 생전 공용복 선생의 육성을 기억하는 원로들에게는 그 문장이 단순한 정의가 아니라 ‘저 말씀을 하던 사람이 실제 어떻게 살았는가’와 함께 들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보정 작업에서는 ‘핵심진리’의 강한 성화 언어를 너무 쉽게 완벽주의나 행위구원으로 이름 붙이지 않는 것이 중요하겠습니다. 이 공동체가 실제로 강조하는 것은 ‘자기 힘으로 완전해져라’라기보다 말씀과 성령의 도움 가운데 실제로 죄와 싸우고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 변화의 종착점을 ‘죄성이 뿌리째 제거된 단계’로 얼마나 절대화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사람 스스로 판정할 수 있는지는 별도의 신학적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여기서 제공하는 가장 중요한 보완은 ‘제거’에서 ‘질서의 변화’로 시선을 옮기는 것입니다. 내 안에 악이 있는가 없는가만 보지 않고, 지금 무엇이 내 삶의 주인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이 왕좌에 앉아 있는가, 아니면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왕좌에 있는가. 악이 일어나는 순간이 있는가보다 그 악을 즐거워하며 살고 있는가, 아니면 그것을 싫어하고 주님의 도움으로 멀리하려 하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이 기준은 신앙인을 훨씬 겸손하게 만듭니다. 자신의 상태를 ‘완성’이라고 선언하기 어렵게 만들면서도 동시에 작은 악이 나타났다고 절망하지 않게 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직 화가 올라온다. 그러니 거듭나지 않았다’가 아니라 ‘화가 올라왔지만 나는 그것을 정당화하지 않고, 주님께 도움을 구해 거절하고 있는가’를 보게 됩니다. 이것이 악의 지배에서 자유로워지는 실제 과정입니다.
그리고 이런 자유가 깊어지면 처음에는 억지로 했던 선이 점점 기쁨이 됩니다. 처음에는 이를 악물고 원수를 용서하려 했다면, 나중에는 정말 그 사람의 선을 바랄 수 있게 됩니다. 처음에는 계명 때문에 정직했다면 나중에는 진실 자체를 사랑하게 됩니다. 바로 이때 ‘생명과를 먹는다’는 표현이 매우 아름답게 살아납니다. 진리가 더 이상 외부의 명령으로만 있지 않고 자기 사랑과 의지의 생명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2강 3부에서 ‘핵심진리’와 스베덴보리는 상당히 가까이 걸어갑니다. 양쪽 모두 구원이 실제 인간의 변화여야 한다고 말하고, 악을 죄로 알고 피해야 하며, 시험 가운데 자유로운 선택과 싸움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핵심진리’는 광야 연단의 완성-영혼의 할례-죄성 제거-생명과라는 비교적 뚜렷한 성화의 문턱을 말하는 반면, 스베덴보리는 악의 proprium이 존재론적으로 사라진다기보다 주님으로부터 새로운 의지가 형성되면서 악이 지배력을 잃고, 선이 지배적인 사랑이 되는 점진적 거듭남을 강조합니다.
이 두 관점의 차이를 가장 간단하게 표현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핵심진리’는 ‘죄의 뿌리가 얼마나 제거되었는가’를 묻는 경향이 강하고, 스베덴보리는 ‘지금 나를 실제로 지배하는 사랑이 무엇인가’를 묻습니다. 전자의 질문은 사람을 철저한 자기 성찰과 정결로 이끄는 힘이 있고, 후자의 질문은 그 정결이 자기 공로와 영적 자기판정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주님께 시선을 돌리게 합니다.
두 질문을 함께 품는다면, ‘연단’은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들어 완전한 인간이 되는 수행이 아니라, 시험 가운데 자기 proprium의 실상을 보고, 그것을 주님의 질서 아래 두며,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생명이 점점 자기 삶을 자유롭게 다스리도록 하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해한다면 공용복 선생이 병상에서 붙들었던 ‘성화’라는 주제도 고통의 신격화가 아니라, 인간의 외적 능력이 극도로 제한된 상황에서도 주님께서 속 사람을 어떻게 다루시고 생명을 형성하실 수 있는가라는 훨씬 깊은 질문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제 2강 마지막 4부에서는 이 모든 구조가 집중되는 ‘이기는 자’를 살펴보겠습니다. ‘핵심진리’가 말하는 ‘이기는 자’는 광야의 연단을 통과하고, 영혼의 할례를 받아 죄성이 처리되며, 생명과를 먹고, 흰옷과 인침을 받은 특별한 성도들로 설명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14만 4천, 처음 익은 열매, 휴거와 연결됩니다. 다음에는 이러한 강한 단계론이 실제 어떤 신앙적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를 먼저 충분히 이해한 뒤, 요한계시록에서 ‘이기는 자’, ‘흰옷’, ‘인침’, ‘14만 4천’이 스베덴보리의 상응에서는 무엇을 뜻하는지를 차분하게 비교해 보겠습니다.
2강 4부
‘이기는 자’ - 특별한 영적 계급인가, 끝까지 주님을 붙드는 사람인가
2강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지금까지 다룬 출애굽, 광야, 로마서 7장과 8장, 연단, 영혼의 할례, 생명과라는 흐름이 모두 ‘이기는 자’라는 표현으로 모입니다. ‘핵심진리’의 체계에서 ‘이기는 자’는 단순히 예수를 믿는 모든 성도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광야의 연단을 통과하고, 죄성과 정욕의 문제에서 깊은 정결을 경험하며, 생명과를 먹고, 흰옷을 입고, 하나님의 인침을 받은 성도들을 가리키는 매우 특별한 명칭으로 사용됩니다. 이들은 ‘처음 익은 열매’와 연결되고, 요한계시록의 14만 4천과도 연결되며, 종말론적으로는 대환난을 면하고, 휴거될 준비가 된 성도들로 설명됩니다. 이 구조만 놓고 보면 ‘핵심진리’의 성화론과 종말론이 이 지점에서 완전히 하나로 합쳐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이 가르침의 신앙적 의도를 충분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기는 자’를 강조하는 목적이 단순히 ‘특별한 소수의 엘리트 성도’를 만들어 내는 데 있다고만 보면 이 공동체의 실제 관심을 놓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강의의 전체 흐름을 보면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습니다. ‘나는 예수를 믿었으니 이미 다 되었다’고 안주하지 말고, 실제로 자기 안의 죄와 싸우며,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고, 끝까지 주님께 붙들려야 한다는 강한 요청이 중심입니다. 그러므로 ‘이기는 자’라는 말은 명예로운 신분을 얻기 위한 칭호라기보다 실제 삶의 변화를 요구하는 긴장된 영적 언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공동체의 오랜 반복 훈련과도 연결됩니다. 같은 ‘핵심진리’를 수십 번 듣는 이유가 단순히 교리를 더 많이 외우기 위해서라면 그 반복은 곧 지루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실제로 이 말씀을 살고 있는가’, ‘내 안의 혈기와 탐욕과 자기 의가 줄어들고 있는가’, ‘원수를 사랑하고 손해 속에서도 정직을 선택하는가’를 계속 점검하기 위해 같은 말씀을 다시 듣는다면 반복의 성격은 전혀 달라집니다. 특히 생전 공용복 선생의 육성과 삶을 직접 기억하는 원로들에게 ‘이기는 자’라는 말은 단순한 요한계시록의 용어가 아니라, 자신들이 보았던 한 스승의 오랜 신앙 여정과 겹쳐 들릴 수 있습니다.
강의가 ‘작은 승리’를 중요하게 보는 점도 주목할 만합니다. ‘이기는 자’라고 하면 흔히 엄청난 영적 전쟁을 치르고, 기적적인 승리를 거둔 사람을 떠올리기 쉽지만, 실제 영적 싸움은 매우 사소한 일상에서 일어납니다. 피곤할 때 짜증을 내지 않는 것, 누가 내 말을 무시했을 때 즉시 방어하지 않는 것, 손해가 생겨도 거짓말하지 않는 것, 인정받지 못해도 맡은 일을 충실히 하는 것, 나를 불편하게 한 사람의 선을 바라는 것 같은 작은 선택들이 쌓입니다. 이런 작은 승리를 강조한다는 점은 ‘핵심진리’의 성화론이 적어도 실제 생활을 상당히 중시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이 지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거듭남은 대개 극적인 체험보다 작은 일상의 선택에서 이루어집니다. 사람의 지배적인 사랑은 한두 번의 큰 결단으로만 형성되지 않고, 매일 반복되는 수많은 작은 선택을 통해 점점 굳어집니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정직한가, 상대가 나를 불편하게 해도 선을 선택하는가, 자기 공로를 말하고 싶은 순간에 조용히 물러설 수 있는가, 이런 작은 선택들이 결국 한 사람의 영적 방향을 만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작은 일에서 이겨야 한다’는 강조는 매우 깊은 영적 현실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기는 자’를 하나의 완성된 별도 계급으로 고정하는 데에는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에 반복되는 ‘이기는 자’라는 표현은 각기 다른 상태의 신앙인 모두에게 주어집니다. 첫사랑을 잃은 에베소 교회에도, 환난을 견디는 서머나 교회에도, 미지근한 라오디게아 교회에도 ‘이기는 자’가 되라는 말씀이 주어집니다. 이것은 이미 모든 싸움을 끝낸 사람만을 가리킨다기보다, 자기 상태 안에서 주님의 도움으로 악과 거짓을 이겨 가는 사람을 가리킨다고 보는 편이 자연스럽습니다.
여기에서 ‘이긴다’는 말의 주체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실제로 이기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인간은 악을 죄로 알고 피하고, 진리를 따라 실제로 선택하고 행동해야 하지만, 그 싸움에서 선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은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따라서 참된 ‘이기는 자’의 특징은 ‘나는 이제 충분히 강해졌다’는 자기 확신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께서 붙들어 주시지 않으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깊은 의존입니다. 영적 승리가 깊어질수록 자기 공로 의식은 줄고, 주님께 대한 감사가 커지는 것이 더 천국적인 방향입니다.
이 점은 ‘흰옷’과도 연결됩니다. ‘핵심진리’에서는 흰옷이 매우 특별한 상태의 표지로 설명됩니다. 모든 죄 문제가 해결되고, 의롭다 하심이 단지 법적 선언이 아니라 실제 삶의 정결로 나타난 성도에게 주어지는 표지처럼 이해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에게 ‘옷’은 진리를 나타내고, ‘흰색’은 진리의 빛과 정결함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흰옷을 입는다는 것은 주님의 진리가 그 사람의 삶을 덮고 있으며, 그 진리가 실제 행실에 나타나는 상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이제 나는 죄 문제가 완전히 끝난 사람이다’라는 자기 인증서로 읽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오히려 흰옷의 본질은 자기 의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진리’에 있습니다. 천사가 아름다운 옷을 입는 것은 자기 공로를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진리의 상태가 외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흰옷은 ‘내가 깨끗해졌다’는 선언보다 ‘주님이 주신 진리가 내 삶에 나타나고 있다’는 의미로 읽는 것이 더 스베덴보리적입니다. 그렇게 보면 ‘흰옷’도 인간의 성취보다 주님의 선물이라는 방향으로 시선이 옮겨집니다.
‘인침’도 마찬가지입니다. ‘핵심진리’에서는 14만 4천의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과 어린양의 이름이 기록되는 것을 특별한 ‘이기는 자’의 표지로 봅니다. 이들은 일반 성도와 구별되는 처음 익은 열매이며, 종말의 특별한 역할을 맡은 사람들로 설명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이름’은 단순한 문자 이름이 아니라 그 존재의 성질을 나타내고, ‘이마’는 사랑과 의지의 가장 깊은 것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마에 주님의 이름이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의 지배적인 사랑과 의지가 주님께 속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 해석은 매우 중요합니다. ‘인침’을 특수한 사람에게 외적으로 찍히는 표식처럼 생각하는 대신, ‘내 가장 안쪽의 사랑이 주님께 속해 있는가’를 묻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영계에서 진짜 표지는 외부에서 붙이는 명찰이 아니라 사람의 사랑 자체입니다. 천국의 영들은 서로의 외모와 말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의 애정을 느끼고, 비슷한 사랑을 가진 이들이 함께 모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인침을 받는다는 것도 본질적으로는 그 사람의 내적 사랑이 주님과 결합된 상태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가장 중요한 14만 4천의 문제가 나옵니다. ‘핵심진리’에서는 이 숫자를 실제 예정된 인원수로 이해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이들은 교회 시대의 특별한 ‘이기는 자’이며 처음 익은 열매로서 휴거되고, 이후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습니다. 이 숫자를 실제 인원으로 받아들이면 신앙의 질문은 자연스럽게 ‘나는 그 수 안에 들어갈 수 있는가’라는 방향으로 가기 쉽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14만 4천은 실제 인원수가 아닙니다. ‘열둘’은 선과 진리에 속한 모든 것을 나타내고, 그것이 확대된 ‘일만 이천’과 ‘14만 4천’은 주님의 교회 안에 있는 선과 진리의 충만함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숫자가 ‘몇 명’이냐를 묻는 대신 ‘어떤 상태’냐를 묻게 됩니다.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충만하게 결합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이 해석은 ‘특별한 소수’보다 ‘주님께 속한 완전한 영적 상태’를 강조합니다.
이 차이는 신앙생활에 상당히 큰 영향을 줍니다. 실제 숫자로 이해하면 ‘나는 선택된 집단에 들어갈 수 있는가’라는 경쟁적 긴장이 생길 수 있습니다. 반대로 상응으로 읽으면 ‘내 안에서 선과 진리가 얼마나 결합되고 있는가’를 보게 됩니다. 전자는 다른 사람과 비교할 가능성이 크고, 후자는 자기 내면을 돌아보게 합니다. 앞서 이 공동체가 ‘작은 승리’를 중요하게 본다는 점을 생각하면, 오히려 후자의 질문이 그 실제 영성훈련과도 상당히 잘 어울립니다.
‘처음 익은 열매’라는 표현도 비슷합니다. ‘핵심진리’에서는 특별히 먼저 완성된 성도들을 가리키는 단계적 명칭으로 사용됩니다. 그러나 성경의 열매 이미지를 더 넓게 보면 ‘익음’의 본질은 그 열매가 자기 힘으로 완성되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나무가 생명을 받아 열매를 맺듯, 사람도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선의 열매를 맺습니다. 따라서 ‘처음 익은 열매’의 강조가 지나치게 자기완성의 성취로 읽히지 않고, 주님께서 사람 안에서 먼저 이루신 결실로 이해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공용복 선생의 생애가 다시 조용히 배경으로 들어옵니다. 거의 온몸이 마비되는 극심한 제약 속에서 오랜 세월을 산 사람에게 ‘이긴다’는 말이 단순히 성공하고 능력을 발휘하는 의미였을 가능성은 낮습니다. 외적으로는 아무것도 이겨낸 것처럼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병은 계속되었고, 육체의 제한은 커졌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승리’가 의미를 가지려면, 결국 상황을 정복하는 승리보다 상황 속에서 자기 내면이 어떻게 주님께 향했는가 하는 승리여야 할 것입니다. 이 점은 ‘이기는 자’라는 말을 권력적·영웅적으로 읽지 않게 해 줍니다.
그래서 참된 ‘이기는 자’의 모습은 강한 사람이라기보다 ‘끝까지 주님을 붙드는 사람’에 더 가깝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시험이 사라진 사람이 아니라 시험 속에서도 주님을 떠나지 않는 사람, 악한 생각이 전혀 없는 사람이 아니라 악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 한 번도 넘어지지 않은 사람이 아니라 넘어졌을 때 회개하고 다시 주님께 돌아서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이긴다’는 말은 자기 공로의 선언이 아니라 주님의 승리에 참여한다는 뜻이 됩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의 ‘이기는 자’라는 표현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계시록의 모든 승리는 궁극적으로 어린양의 승리입니다. 사람은 자기 힘으로 용과 짐승을 이기지 않습니다. 어린양의 피와 증언의 말씀으로 이긴다고 하는 것도 결국 주님의 구속과 진리 안에서 승리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기는 자’의 중심은 ‘내가 무엇을 성취했는가’가 아니라 ‘주님의 승리가 내 삶 안에서 얼마나 실제가 되었는가’입니다.
이 관점에서는 ‘휴거’에 대한 이해도 조금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핵심진리’에서는 이기는 자가 대환난을 면하고 특별한 방식으로 들림받는 구조가 강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성경의 ‘들림’이나 ‘올라감’을 단순한 육체적 공간 이동으로만 읽지 않고, 더 높은 영적 상태로 들어가는 의미를 볼 수 있습니다. 영계에서 ‘위로 올라간다’는 것은 사랑과 지혜의 상태가 더 내적으로 높아지는 것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들림받는다’는 말의 핵심도 공간보다 상태일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핵심진리’의 휴거 이해와 분명히 다른 방향입니다. 이 차이를 억지로 좁힐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각각 무엇을 강조하는지를 분명히 보는 것이 좋습니다. ‘핵심진리’는 역사적 종말과 실제 사건의 연속성 속에서 ‘이기는 자’를 설명하고,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상응을 통해 그 상태가 모든 시대의 사람 안에서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봅니다. 하나는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다른 하나는 ‘이 말씀이 지금 내 안에서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더 강하게 묻습니다.
그렇다고 미래 소망을 무의미하게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도 인간의 사후 생명과 천국의 실재, 교회의 역사적 변화, 최후의 심판과 새 교회의 도래를 실제적인 것으로 봅니다. 다만 그것을 자연적인 시간표와 사건의 순서에만 가두지 않습니다. 말씀은 모든 시대의 사람에게 살아 있어야 하며, 요한계시록도 어느 한 마지막 세대에게만 의미 있는 책이 아니라 지금의 교회와 각 사람의 영적 상태를 비추는 말씀이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이기는 자’라는 말은 매우 현재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어느 미래 집단에 들어갈 것인가’보다 ‘오늘 나는 무엇을 이겨야 하는가’입니다. 오늘의 분노, 오늘의 인정욕, 오늘의 두려움, 오늘의 게으름, 오늘의 자기 의를 주님의 도움으로 어떻게 대할 것인가가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싸움에서 한 번 승리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층이 열리면 또 다른 싸움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거듭남의 길에서는 ‘나는 이기는 자가 되었다’는 선언보다 ‘오늘도 주님께 붙들려야 한다’는 태도가 더 안전합니다. 특히 자기 상태를 영적 단계로 분류하는 가르침에서는 이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완전히 알지 못합니다. 더구나 다른 사람의 내적 상태를 판정할 수는 없습니다. 외적으로 매우 미숙해 보이는 사람 안에 주님을 향한 깊은 사랑이 있을 수 있고, 반대로 영적 언어를 능숙하게 사용하는 사람 안에 자기 사랑이 강하게 숨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핵심진리’의 오랜 공동체적 전승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생전 공용복 선생을 기억하는 원로들이 ‘핵심진리’를 들을 때, 만일 ‘이기는 자’라는 말을 스승의 특별한 지위나 신비한 능력으로만 기억한다면 그 가르침은 영적 영웅주의로 흐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병상에서 실제 고통을 겪으면서도 하나님을 향하려 했던 한 사람의 삶을 함께 기억한다면 ‘이긴다’는 말은 전혀 다른 울림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외적인 환경을 정복했다는 말이 아니라, 환경에 짓눌려도 주님을 놓지 않았다는 뜻으로 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인간 스승과 주님을 구별하면서도 제자도에서 배울 수 있는 지점입니다. 제자는 스승의 특별한 체험이나 명성을 모방하는 사람이 아니라, 스승에게서 보았던 주님을 향한 방향을 자기 삶에서 이어 가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공용복 선생의 제자들이 ‘핵심진리’의 문장을 보존하는 것보다 더 깊은 과제는 그 문장이 요구하는 삶을 실제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주님의 열두 제자도 결국 주님의 말씀을 정확히 암기한 사람들이 아니라, 그 말씀을 자기 생명으로 받아 세상에 증언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기는 자’의 가장 안전한 표지는 특별한 지식이나 체험이 아니라 삶의 열매일 것입니다. 더 온유해졌는가, 더 진실해졌는가, 다른 사람의 선을 더 기뻐하는가, 자기 공로를 덜 주장하는가, 맡겨진 쓰임을 더 충실히 수행하는가, 자기에게 해를 준 사람을 위해서도 선을 바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나는 이기는 자다’, ‘나는 생명과를 먹었다’, ‘나는 인침을 받았다’는 말은 아무리 높아도 다시 살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천국관에서는 천사가 높을수록 자기 자신을 낮게 여긴다고 설명합니다. 그들이 자기 비하에 빠져 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에게 있는 모든 선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더 분명히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이기는 자’라는 가르침이 사람을 더 겸손하게 만들고 주님께 더 의존하게 한다면 그 가르침은 천국적 방향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나는 일반 성도와 다르다’는 영적 우월감을 키운다면 그 순간 그 가르침의 목적과 멀어질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14만 4천도 ‘특별한 자격을 가진 소수’라는 외적인 그림보다 ‘주님께 속한 선과 진리가 충만하게 결합된 상태’로 읽을 때 매우 아름다워집니다. 그렇게 읽으면 숫자가 사람을 나누는 벽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거듭남의 목표가 됩니다. 어느 시대, 어느 민족, 어느 교파에 속했든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받아 삶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그 영적 의미 안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새 예루살렘’과의 연결도 자연스럽습니다. ‘핵심진리’에서는 이기는 자가 새 예루살렘과 특별히 연결되는 구조가 강하지만, 스베덴보리에게 새 예루살렘은 주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새 교회와 그 교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새 예루살렘에 들어간다는 것은 특정한 천국 수도의 시민권을 얻는 것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새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진리대로 살아가는 상태에 들어가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기는 자’와 ‘새 예루살렘’의 관계도 결국 주님의 진리를 사랑하고, 삶으로 받는 사람이라는 방향으로 깊어집니다.
이렇게 보면 2강 전체가 하나의 큰 질문으로 묶입니다. ‘구원받았다고 고백한 뒤 나는 실제로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입니다. 1부의 출애굽과 광야, 2부의 로마서 7장과 8장, 3부의 연단과 영혼의 할례, 4부의 이기는 자는 모두 이 한 질문을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합니다. 신앙은 단지 출발점이 아니라 실제 생명의 변화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핵심진리’가 던지는 매우 귀하고도 강한 요청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 요청을 약화시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깊게 가져갑니다. 다만 변화의 기준을 ‘특별한 단계에 도달했는가’보다 ‘어떤 사랑이 나를 지배하고 있는가’에 두고, 모든 변화의 실제 원천을 인간의 연단 성취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에 둡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의 숫자와 옷과 인침을 외적 신분표보다 내적 상태의 상응으로 읽습니다.
그렇게 보면 ‘이기는 자’는 더 이상 완성된 소수의 영적 엘리트가 아닙니다. 악이 나타날 때마다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거절하고, 실패하면 회개하고, 다시 선을 선택하며, 받은 선을 자기 공로로 돌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 힘을 자랑하지 않고 주님을 붙듭니다. 오히려 싸움이 깊어질수록 ‘내가 이겼다’보다 ‘주님께서 나를 붙들어 주셨다’고 말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마 이것이 공용복 선생의 생애를 알고 난 뒤 ‘이기는 자’를 읽을 때 가장 달라지는 부분일 것입니다. 외적으로는 몸의 거의 모든 자유를 잃어 간 사람을 두고 ‘이긴다’는 말을 쓴다면, 승리의 의미는 세상의 성공이나 능력과 완전히 달라져야 합니다. 주님의 승리는 육체적 상황을 반드시 제거하는 데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 속에서도 한 사람의 속 사람이 주님을 향하고, 사랑을 잃지 않으며, 자기 존재의 의미를 하나님 안에서 다시 찾는 데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2강의 최종 질문은 ‘나는 이기는 자인가?’를 자기 영적 등급 판정으로 묻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나는 무엇 앞에서 주님께 붙들려야 하는가?’로 묻는 것이 좋겠습니다. 오늘 화낼 자유가 있었지만 선을 선택했는가, 오늘 자기 이익을 위해 거짓말할 수 있었지만 진실을 선택했는가, 오늘 누군가를 낮추어 내가 높아질 수 있었지만 그 사람의 선을 바랐는가, 그리고 그 모든 선을 내가 잘해서라고 생각하지 않고 주님께 돌리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이라면 ‘이기는 자’라는 가르침은 사람을 나누기보다 모두를 주님 앞에 세웁니다. 높은 체험이 있는 사람도, 평범한 일상을 사는 사람도, 병상에 있는 사람도, 세상에서 쓰임을 수행하는 사람도 각자의 자리에서 같은 질문을 받습니다. ‘당신의 생명은 지금 어느 사랑을 향하고 있는가?’
이렇게 2강은 마무리해도 좋겠습니다. ‘핵심진리’의 강한 성화 의지와 실제 삶의 열매를 요구하는 진지함은 충분히 귀하게 남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 진지함을 주님 중심으로 더 내면화합니다. 죄의 뿌리가 완전히 사라졌는가를 자기 스스로 판정하기보다, 주님의 생명이 얼마나 내 사랑과 의지 안에서 자유롭게 역사하고 있는가를 보고, 14만 4천이라는 숫자 안에 들어갈 자격보다 오늘 주님의 선과 진리가 내 안에서 결합하고 있는지를 살피게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이기는 자’의 가장 깊은 모습은 더 이상 싸울 필요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 싸움이 올 때마다 누구에게 의지해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마지막 고백은 ‘내가 이겼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이기셨고, 나는 그분 안에서 살게 되었다’가 될 것입니다.
※ 위 제목의‘SY’는‘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라는 뜻입니다.
이 영상은 단순한 사찰 소개가 아니라, 불교의 핵심 사상을 사찰과 불화, 불상, 의식, 그리고 붓다의 생애를 따라가며 자연스럽게 풀어내는 다큐멘터리 형식의 강의입니다. 시작부터 인간이 왜 늙고 병들고 죽는가라는 가장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고, 그 해답을 찾은 존재로 붓다를 소개하면서, 시청자를 ‘깨달음의 세계’로 초대합니다. 이후 화엄사, 송광사, 통도사, 흥국사 등을 차례로 순례하며, 화엄사상, 사성제, 팔상도, 법화경, 관세음보살 신앙, 정토신앙 등을 하나의 큰 흐름으로 연결하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먼저 높이 평가할 부분이 있습니다. 이 영상은 인간이 단순히 복을 받기 위해 종교를 찾는 존재가 아니라, 삶의 근본적인 괴로움을 해결하려는 존재라는 점을 매우 진지하게 다룹니다. ‘우리는 왜 늙고 병들고 죽는가’, ‘괴로움은 어디에서 오는가’, ‘집착을 어떻게 내려놓을 것인가’와 같은 질문은 인간의 영혼을 향한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사람 안에는 영원한 생명을 향한 갈망이 있으며, 그 갈망은 결코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런 점에서는 불교의 구도 정신과 스베덴보리의 영적 탐구는 서로 대화할 수 있는 공통 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영상은 화엄사상을 매우 아름답게 소개합니다. ‘꽃 한 송이도 절대적 가치를 가진다’, ‘세상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설명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모든 피조물이 주님의 사랑과 지혜를 담는 그릇이며, 자연계의 모든 사물은 영적인 실재를 반영하는 ‘상응’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풀 한 포기, 돌 하나에도 의미가 있다는 시선 자체는 스베덴보리도 깊이 공감할 것입니다. 다만 그 이유는 조금 다릅니다. 불교에서는 모든 존재가 상호 의존성 속에서 의미를 가지는 반면, 스베덴보리에게 모든 존재의 의미는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과 사랑을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영상의 중심에는 ‘일체개고’, 곧 ‘모든 것은 괴로움’이라는 사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흥미로운 보완을 제시합니다. 그는 인간이 느끼는 괴로움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지배하는 상태에서는 괴로움이 필연적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괴로움은 존재 자체의 본질이 아니라, 사랑의 질서가 뒤집힌 결과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 창조 자체는 선하며, 괴로움은 창조의 본래 모습이 아니라 인간 의지의 왜곡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 점에서 ‘세상은 본질적으로 고통’이라는 불교의 전제와 ‘세상은 본래 선하게 창조되었으나 인간이 질서를 잃었다’는 스베덴보리의 관점은 분명한 차이를 보입니다.
영상은 붓다의 생애를 통해 고행과 깨달음을 설명합니다. 특히 극단적인 고행을 버리고, 중도를 선택하는 장면을 중요한 전환점으로 소개합니다. 스베덴보리도 외적인 금욕 자체를 영성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는 참된 변화는 외적 고행보다 내적 사랑의 변화에서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단순히 육체를 괴롭히는 수행은 사람을 천사로 만들지 못하며, 오히려 사랑과 진리 안에서 마음이 새로워지는 것이 거듭남의 본질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런 점에서는 극단을 버리고 내면을 돌아보라는 영상의 메시지와 일정 부분 만나는 지점이 있습니다.
영상은 ‘모든 고통은 집착에서 온다’는 사성제를 반복하여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자기 자신만을 중심으로 삼는 ‘proprium’이 모든 영적 문제의 뿌리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집착을 내려놓으라는 권면은 일정 부분 자기애를 버리라는 성경적 권면과도 닿아 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는 ‘무엇을 향해 비우는가’에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집착을 비워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 목적이라면, 스베덴보리에게서는 자기 사랑을 비우고 그 자리를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채우는 것이 목적입니다. 단순한 비움이 아니라 사랑의 방향 전환이 핵심입니다.
영상은 ‘과거에도 집착하지 말고, 현재에도 집착하지 말고, 미래에도 집착하지 말라’는 설법도 소개합니다. 이것 역시 상당히 깊은 통찰입니다. 스베덴보리도 과거의 후회와 미래의 불안보다 현재 순간에 주님의 섭리를 신뢰하며 살아가는 삶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이 현재를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주님의 지속적인 생명 유입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즉 현재는 단순한 순간이 아니라, 주님께서 끊임없이 생명을 공급하시는 접점입니다.
후반부에서는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 아미타불, 극락정토, 명부와 시왕 심판 등 한국 불교에서 매우 친숙한 신앙 요소들이 소개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세계관과는 상당한 차이가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사람은 죽은 뒤 어떤 재판정에서 판결을 기다리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사랑 자체가 곧 자신의 세계를 결정합니다. 천국과 지옥은 외부에서 선고되는 장소가 아니라, 자신이 평생 사랑한 것이 완전히 드러나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시왕의 심판이나 극락왕생이라는 개념은 스베덴보리의 사후 세계 이해와는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영상은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붓다 혼자 존귀하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존재가 존귀하다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이러한 설명은 매우 따뜻하며 인간 존엄성을 강조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모든 인간은 주님의 형상을 받을 가능성을 가진 존재이며, 그래서 누구나 존귀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존귀함은 인간 스스로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끊임없이 흘러들어오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인간은 생명의 근원이 아니라 생명을 받는 그릇이라는 점이 중요한 차이입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부분은 불상과 불화를 ‘절대적인 대상이 아니라 방편’이라고 설명하는 대목입니다. 이는 불상을 우상 자체로 보기보다, 깨달음을 기억하게 하는 상징으로 이해하려는 설명입니다. 스베덴보리도 외적 형상 자체보다 그 형상이 무엇을 향하게 하는지가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다만 그는 참된 예배는 외적인 상징보다 주님 자신께 향해야 하며, 모든 상징은 결국 그분을 가리키는 데 그 의미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전체적으로 이 영상은 불교를 단순한 종교 의식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괴로움에 대한 철학과 수행의 길’로 매우 품위 있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특정 종교를 공격하거나 다른 신앙을 배척하기보다, 사찰의 문화와 수행, 예술과 교리를 조화롭게 연결한 점도 돋보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보면, 이 영상은 인간의 내면을 깊이 성찰하고 자기 중심성을 내려놓으려는 진지한 구도 정신을 잘 보여 줍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깨달음 자체보다 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인간은 스스로 깨달음에 이르는 존재인가, 아니면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끊임없이 흘러들어올 때 비로소 참된 생명을 얻는 존재인가?’ 그는 후자를 선택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 참된 구원은 인간의 수행이 완성하는 길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며 사랑 안에서 새롭게 되는 거듭남의 과정입니다. 그렇다고 이 영상의 구도 정신을 가볍게 볼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진심으로 진리를 찾고 자기 욕망을 돌아보려는 이러한 갈망은, 스베덴보리의 표현을 빌리면 주님께서 모든 사람 안에 심어 두신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갈증이 다양한 문화와 종교 속에서 나타나는 한 모습으로도 이해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