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3:22)
AC.299
여기에는 두 가지 아르카나(arcana)가 있습니다. 첫째는, ‘여호와 하나님’(Jehovah God)은 주님을 의미함과 동시에 천국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만일 그들이 신앙의 신비들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았다면, 그들은 영원히 멸망하였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Here are two arcana: first, that “Jehovah God” signifies the Lord, and at the same time heaven; secondly, that had they been instructed in the mysteries of faith they would have perished eternally.
해설
AC.299는 앞의 AC.298에서 간략하게 언급한 두 가지 중요한 교리를 다시 정리하면서, 이제부터 그것들을 더욱 자세히 설명하겠다는 서론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두 가지 아르카나’라고 하는데, 여기서 ‘아르카나’란 인간의 자연적 사고만으로는 알 수 없고, 오직 주님의 계시를 통하여서만 알 수 있는 천국의 비밀을 말합니다.
첫 번째 아르카나는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표현의 의미입니다. 말씀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물론 주님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어떤 문맥에서는 주님만이 아니라 주님과 완전히 하나 되어 있는 천국까지 함께 포함하여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는 천국이 주님과 대등한 또 하나의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천국 전체가 주님의 신적 사랑과 신적 진리를 받아 하나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3:22의 ‘우리’(us)라는 표현도 여러 신적 존재의 회의가 아니라, 주님과 하나 된 천국을 함께 포함하는 표현으로 이해됩니다.
이 교리는 스베덴보리의 천국관 전체와도 연결됩니다. 천사들은 혼자 힘으로 사랑하거나 지혜롭게 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들이 가진 모든 생명과 사랑, 그리고 지혜는 오직 주님으로부터 끊임없이 유입(influx)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주님과 분리된 독립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주님의 생명 안에서 하나 된 공동체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말씀에서는 어떤 경우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주님과 그분의 천국을 함께 포함하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두 번째 아르카나는 더욱 놀랍습니다. 일반적인 기독교에서는 신앙의 신비를 많이 알수록 영적으로 더욱 유익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정반대의 원리를 말합니다. 사람의 내적 상태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음에도 가장 깊은 신앙의 신비까지 알게 되면,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영원한 파멸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신앙의 진리는 단순한 지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신비들은 주님 자신과 천국 질서에 관한 가장 거룩한 진리들입니다. 사람이 그것들을 충분히 알고도 자신의 악한 사랑 때문에 의도적으로 거부하거나 왜곡하면,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거룩한 것을 모독(profanation)하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는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을 한 사람 안에서 뒤섞어 버리므로, 영적 질서를 근본적으로 파괴하게 됩니다.
이 때문에 창3:22에서 주님께서는 사람이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며, 그 길을 막으셨습니다. 이것은 영생을 막으신 것이 아니라, 아직 준비되지 않은 사람이 신앙의 가장 깊은 신비에 접근, 그것을 모독함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영적 상태에 빠지는 것을 막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감추신 것은 은혜가 아니라, 더 큰 재앙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하기 위한 자비였습니다.
이처럼 AC.299가 제시하는 두 가지 아르카나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주님과 천국의 완전한 하나 됨을 보여 주고, 둘째는 그 주님께서 인간의 영원한 구원을 위하여 얼마나 세심하게 섭리하시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창3:22는 단순히 에덴동산에서 인간을 내쫓으시는 장면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이 다시 구원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주님께서 자비 가운데 보호하시는 섭리의 시작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주님과 그분의 천국을 함께 의미합니다.여기서 복수의 의미가 나타나는 것은,주님의 판단과 섭리가 천국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질서를 암시하기 때문입니다.
위 내용은 저 위AC.298해설에 나오는 내용인데,이게 무슨 뜻인가요?
창3:22에서 주목할 만한 표현 가운데 하나는‘우리’라는 복수 표현입니다.
And Jehovah God said,Behold,the man is become as one of us...
겉으로만 보면 하나님께서‘나’가 아니라‘우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이 때문에 오래전부터 이 구절은 삼위일체를 암시하는 본문이라거나,하나님께서 천사들과 의논하시는 장면이라는 해석이 제시되기도 하였습니다.그러나 스베덴보리는AC.298에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 구절을 설명합니다.그는‘여호와 하나님’은 주님을 의미함과 동시에 천사들의 천국도 함께 의미한다고 말합니다.그렇다면 이 말씀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이 질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천국’이 무엇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일반적으로 우리는 천국을 주님이 계시는 곳,그리고 천사들이 사는 장소로 생각합니다.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은 단순한 장소가 아닙니다.천국은 주님의 신적 사랑과 신적 진리가 모든 천사에게 흘러들어 하나의 생명으로 결합된 공동체입니다.그래서 그는 천국 전체를‘주님의 큰 사람’(Maximus Homo)이라고 부릅니다.수많은 천사가 있지만,모두 주님의 생명을 받아 하나의 몸처럼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매우 중요한 교리와 연결됩니다.그는 천사들이 자기 자신에게서,그러니까 스스로 사랑하거나 지혜롭게 되는 존재가 아니라고 반복하여 말합니다.천사들이 가진 모든 사랑과 지혜는 오직 주님으로부터 끊임없이 흘러 들어오는 것입니다.만일 그 유입(influx)이 단 한 순간이라도 끊어진다면,천사는 즉시 천사일 수 없게 됩니다.다시 말해,천국은 주님과 나란히 존재하는 또 하나의 권위가 아니라,주님의 생명을 받아 살아가는 하나의 유기체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창3:22의‘우리’라는 표현도 자연스럽게 이해됩니다.여기서 주님께서‘우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여러 신적 존재가 서로 의논하거나 회의하는 장면을 묘사하는 것이 아닙니다.또한 천사들이 주님께 의견을 제시하거나 결정에 참여한다는 뜻도 아닙니다.오히려 주님과 완전히 하나 되어 있는 천국 전체를 함께 포함하는 표현입니다.주님은 언제나 천국과 분리되어 역사하지 않으시며,천국 역시 언제나 주님의 생명 안에서 움직입니다.그러므로 말씀은 때때로 주님과 그분의 천국을 함께 포함하는 의미에서 복수 표현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표현은 말씀 전체에 나타나는 대표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입니다.예를 들어,창11:7에서도‘자,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하시며,사6:8에서도‘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하십니다.이 모든 구절은 하나님 안에 여러 인격이 존재한다는 뜻이 아니라,주님의 신적 역사가 천국 전체를 통하여 나타나는 질서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이해해야 합니다.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은 언제나 주님과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왜 스베덴보리가AC.298에서 굳이 이 문제를 언급하는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창3:22는 사람이 타락한 직후의 장면입니다.그러나 주님께서는 인간을 버리거나 홀로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오히려 천국 전체가 주님의 사랑과 자비 안에서 하나 되어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봉사합니다.그러므로‘우리’라는 표현은 심판을 위한 회의가 아니라, ‘주님과 천국이 하나 되어 인간을 보호하시고 구원하시는 신적 질서’를 암시하는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는 이어지는‘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지 못하게 하심’과도 아름답게 연결됩니다.주님께서는 인간을 영생에서 배제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아직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신앙의 가장 깊은 신비를 접하여 그것을 모독(profanation)함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영적 파멸에 이르는 것을 막으셨습니다.이러한 보호의 섭리는 주님 홀로의 행위이면서도,동시에 주님과 하나 된 천국 전체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신적 역사입니다.따라서 창3:22의‘우리’는,여러 존재의 의견을 모으는 회의의 언어가 아니라,주님과 천국의 완전한 일치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랑과 섭리의 언어라고 이해하는 것이AC.298의 문맥에 가장 잘 부합합니다.
창3:22에 보면,영역은‘the tree of lives’인데,한역은‘생명나무의 열매’입니다.왜 이런 차이가?
창3:22의Potts영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lest he put forth his hand,and take also of the tree of lives,and eat,and live forever.
이를 직역하면 ‘그가 손을 내밀어 생명들의 나무(the tree of lives)에서도 취하여 먹고 영원히 살게 될까 하노라’가 됩니다. 여기에는 ‘fruit’(열매)라는 단어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개역개정을 비롯한 대부분의 한글 성경은 ‘생명나무의 열매도 따먹고’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겼을까요?
먼저 이것은 원문을 잘못 번역한 것이라기보다, 언어의 관용 차이에서 비롯된 번역입니다. 히브리어와 영어에서는 ‘나무에서 취하여 먹다’(take of the tree, eat)라는 표현이 자연스럽습니다. 듣는 사람은 당연히 나무의 열매를 먹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국어에서는 ‘나무를 먹는다’는 표현이 매우 어색하게 들립니다. 실제로 먹는 것은 나무 자체가 아니라 열매이므로, 번역자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열매’를 보충한 것입니다. 일반적인 성경 번역으로서는 충분히 자연스럽고 이해하기 쉬운 번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Arcana Coelestia를 번역할 때에는 문제가 조금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성경을 단순한 이야기나 역사로 읽지 않고, 모든 단어와 표현에 담긴 상응(correspondence)을 해설합니다. 따라서 어떤 단어가 원문에 실제로 있는지 없는지는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해설하는 대상은 ‘열매’가 아니라 ‘생명나무’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AC.298을 보면 스베덴보리는 ‘그가 손을 내밀어 생명나무에서도 취하여 먹는 것’을 곧 ‘신앙의 신비들(the mysteries of faith)을 배우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다시 말해, 여기서 핵심은 어떤 열매를 먹느냐가 아니라, ‘생명나무에 접근하여 그것에 참여하는 것 자체’입니다. 만일 번역에서 ‘열매’를 중심에 놓으면 독자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열매의 의미는 무엇인가?’로 향하게 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심은 ‘생명나무’라는 상징 전체에 있습니다. 이것이AC를 번역할 때 일반 성경 번역과는 다른 기준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Potts의 번역입니다. 대부분의 영어 성경은 ‘the tree of life’라고 번역하지만,Potts는 ‘the tree of lives’라고 옮겼습니다. 이것은 히브리어 원문의 형태를 더욱 충실하게 반영한 것입니다. 창세기의 히브리어는 ‘חַיִּים’(ḥayyîm)인데, 이 단어는 문법적으로 복수형입니다. 물론 히브리어에서 복수형은 반드시 수량의 복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충만함이나 완전함을 나타내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럼에도Potts는 이를 ‘lives’라고 번역, 원문의 형태를 가능한 한 보존하였습니다.
스베덴보리가Potts의 영역을 사용한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 우리가 읽는AC영어판은Potts의 번역을 따르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Potts보다 선대의 사람이고, 또 스베덴보리는 라틴어로 기술했습니다. 따라서AC를 번역할 때에는Potts가 굳이 ‘tree of lives’라고 옮긴 이유도 함께 존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히 일반 영어 성경처럼 ‘tree of life’로 바꾸거나, 다시 한국어에서 ‘생명나무의 열매’로 의역해 버리면, 원문이 지닌 구조와 강조점이 상당 부분 희미해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AC번역에서는 일반 성경 번역보다 원문의 상징 구조를 더 보존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따라서 본문의 번역은 ‘그가 손을 내밀어 생명나무에서도 취하여 먹고’ 또는 원문의 형태를 더욱 살려 ‘생명들의 나무에서도 취하여 먹고’와 같이 옮기는 것이AC의 해설 방식과 더 잘 어울립니다. 그리고 필요한 경우, 해설에서 ‘여기서 취하여 먹는 대상은 생명나무의 열매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나무 자체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해 주는 편이 독자의 이해에도 훨씬 도움이 됩니다.
이 문제는 앞으로AC번역에서 중요한 원칙 하나를 보여 줍니다. 일반 성경 번역은 읽기 쉽고 자연스러운 표현을 우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AC번역은 그 위에 한 단계 더 나아가,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해설하는 상응의 중심 단어를 가능한 한 그대로 보존하는 것’을 우선해야 합니다. 그래야 번역과 해설이 서로 어긋나지 않고, 독자는 원문과 해설 사이의 연결을 자연스럽게 따라갈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And Jehovah God said, Behold, the man is become as one of us, knowing good and evil; and now lest he put forth his hand, and take also of the tree of lives, and eat, and live to eternity, (창3:22)
AC.298
‘여호와 하나님’(Jehovah God)이 처음에는 단수로 언급되었다가, 이어서 복수로 언급되는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주님을, 그리고 동시에 천사들의 천국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선과 악을 아는 것’(knowing good and evil)은 그가 천적 인간이 되었으며, 그 결과 지혜롭고 총명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lest he put forth his hand, and take also of the tree of lives) 하는 것은, 그는 신앙의 신비들(the mysteries of faith)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만일 그런 신비들까지 배우게 된다면, 그는 영원토록 결코 구원받을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곧 ‘영생할까’(live to eternity)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The reason “Jehovah God” is first mentioned in the singular, and afterwards in the plural number, is that by “Jehovah God” is meant the Lord, and at the same time the angelic heaven. The man’s “knowing good and evil” signifies that he had become celestial, and thus wise and intelligent; “lest he put forth his hand, and take also of the tree of lives” means that he must not be instructed in the mysteries of faith, for then never to all eternity could he be saved, which is to “live to eternity.”
해설
이 글은 창3:22의 가장 난해한 부분 가운데 하나를 설명합니다. 겉으로만 읽으면 마치 하나님께서 사람이 생명나무 열매를 먹어 영생하는 것을 막으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정반대의 의미를 밝힙니다. 주님께서 막으신 것은 영생 자체가 아니라, 사람이 더 깊은 영적 파멸에 빠지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심판보다도 주님의 자비로운 섭리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여호와 하나님’이 처음에는 단수로, 이어서는 복수의 의미를 띠게 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말씀에서 주님은 결코 천사들과 분리되어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천국 전체는 주님의 신적 생명이 흘러드는 하나의 큰 사람(Maximus Homo)이며, 천사들은 자신에게서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는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주님만을 의미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주님과 그분의 천국을 함께 의미합니다. 여기서 복수의 의미가 나타나는 것은, 주님의 판단과 섭리가 천국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질서를 암시하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선과 악을 아는 것’에 대한 설명은 겉, 그러니까 표면적인 이해와는 상당히 다릅니다. 일반적으로는 사람이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선과 악을 알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AC.298은 여기서 말하는 ‘아는 것’이 단순한 경험이나 지식이 아니라, 태고교회 사람이 본래 가지고 있었던 천적 지각(perception)의 상태를 가리킨다고 설명합니다. 즉, 천적 인간은 선이 무엇이고 악이 무엇인지를 주님으로부터 직접 분별할 수 있는 지혜와 총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표현은 지혜 자체를 말하는 것이지, 단순히 죄를 경험하게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다음 말씀입니다.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라는 말씀을 기록된 겉 글자 그대로 이해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이 영생하는 것을 막으신 것처럼 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풉니다. 여기서 생명나무는 주님과 사랑의 생명 자체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미 타락, 자기애와 세상 사랑 가운데 빠진 사람이 그 거룩한 신앙의 신비들까지 충분히 알게 되면, 그것을 의도적으로 거스르고 모독(profanation)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의식적, 의도적인 거부가 되므로, 영적 상태는 훨씬 더 회복하기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신앙의 신비들(the mysteries of faith)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진리를 아끼셔서 숨기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의 상태가 아직 그것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때에는, 더 깊은 진리를 허락하지 않으시는 것이 오히려 자비라는 뜻입니다. 이는 앞에서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칼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는 이유를 설명한 AC.301 이하의 내용과도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거룩한 것을 함부로 받아들이는 것보다, 아직 모르는 상태에 머무는 편이 영적으로 훨씬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영생할까’도 겉뜻인 육체의 생명을 끝없이 유지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말씀에서 생명은 언제나 영적 생명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여기 ‘영생할까’는 주님과 결합된 생명 가운데 영원히 존재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타락한 상태에서 생명나무의 신비를 모독하게 되면, 그 사람은 그러한 영원한 생명에 이를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하게 됩니다. 그래서 본문은 ‘영생을 막으신다’는 말씀이 아니라, ‘영생의 가능성을 끝내 잃게 되는 상태를 막으신다’는 말씀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 글은 창3 전체의 중요한 결론 가운데 하나를 보여 줍니다. 타락 이후에도 주님의 목적은 결코 인간을 버리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더 깊은 악과 모독에 빠지지 않도록 그의 영적 상태에 맞추어 진리를 허락하시고, 때로는 더 높은 진리를 잠시 감추시며 보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지 못하게 하심’은 은혜를 거두신 사건이 아니라, 장차 다시 생명에 이를 수 있도록 인간을 보존하시는 자비로운 섭리였습니다. 이런 이유로 AC.298은 창3:22를 심판의 말씀이 아니라, 주님의 무한한 사랑과 섭리가 가장 깊이 나타난 말씀 가운데 하나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았더라(계4:4)
AC.297에서 스베덴보리는 창3:21의 ‘가죽옷’을 해설하면서, 말씀에서 ‘옷’이 단순한 육체의 의복이 아니라 선을 둘러싸고 그것을 드러내는 영적, 자연적 차원의 것들을 의미한다고 밝힙니다. 천적 선은 가장 내적인 것이므로 그 자체로는 옷을 입지 않은 것과 같으며, 그 천적 선에서 나오는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이 그것을 둘러싸는 ‘옷’이 됩니다. 계4:4의 이십사 장로들이 ‘흰옷’을 입고 있는 모습은 바로 이러한 상응을 보여 주기 때문에AC.297에 인용된 것입니다.
먼저 ‘이십사 장로들’은 문자 그대로 스물네 명의 특정 인물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말씀에서 열둘은 신앙과 사랑에 속한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나타내며, 이십사는 열둘이 배가된 수로서 교회와 천국에 속한 모든 진리와 선을 충만하게 나타냅니다. 또한 ‘장로들’은 지혜 있는 자들, 곧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아 그것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표상합니다. 그러므로 이십사 장로들은 천국과 교회에 속한 모든 선과 진리, 또는 그것을 받아들인 모든 사람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흰옷’을 입었다는 것은, 그들이 가진 선이 진리를 통하여 밝고 순수하게 나타났음을 뜻합니다. 말씀에서 흰색은 빛과 상응하고, 빛은 신적 진리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진리는 선과 분리된 지식이나 교리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장로들이 주님의 보좌 주위에 앉아 있다는 사실은 그들의 진리가 주님으로부터 나왔으며, 주님의 선을 섬기고 드러내는 진리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흰옷’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둘러싸고 나타내는 순수한 진리를 의미합니다.
이것이AC.297의 논지와 직접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적 선 자체가 가장 내적인 것이며,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은 그것을 둘러싸는 의복과 같다고 설명합니다. 계4:4에서도 장로들의 내적 지혜와 선은 눈에 직접 보이는 것으로 묘사되지 않고, 그들이 입은 ‘흰옷’을 통해 나타납니다. 곧 보이지 않는 내적 선이 보이는 진리의 형상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에서 ‘옷’이 진리, 특히 선에서 나온 진리를 의미하는 기본적인 이유입니다.
또한 장로들이 ‘보좌들 위에 앉아 있다’는 것도 중요합니다. 말씀에서 ‘앉는다’는 것은 어떤 상태에 확고히 자리 잡는 것을 의미하며, ‘보좌’는 심판과 통치, 더 깊게는 신적 진리에 기초한 질서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장로들이 흰옷을 입고 보좌에 앉아 있다는 것은, 그들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진리 안에 굳게 서 있으며, 그 진리에 따라 판단하고 살아가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들의 옷은 단지 그들을 장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내적 상태가 외적으로 나타난 형상입니다.
‘머리에 금관을 썼다’는 사실은 흰옷의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 ‘머리’는 가장 내적이고 지배적인 것을 의미하며, ‘금’은 사랑의 선, 특히 천적 선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머리의 금관은 그들의 모든 지혜와 진리 가장 높은 곳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의 선이 있음을 나타냅니다. 흰옷이 진리를 의미한다면, 금관은 그 진리를 지배하고 생명을 주는 선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계4:4에는 ‘금관’이라는 선과 ‘흰옷’이라는 진리가 함께 나타나며, 진리가 선을 입혀 드러낸다는AC.297의 메시지를 완전하게 보여 줍니다.
이 구절은 창3의 ‘가죽옷’과도 대비되면서 연결됩니다. 창3:21의 가죽옷은 태고교회 사람이 천적 상태를 잃은 뒤, 주님께서 그들에게 허락하신 보다 외적인 영적, 자연적 선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타락한 인간을 위한 자비로운 보호의 옷이었습니다. 반면, 계4:4의 흰옷은 거듭난 사람들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순수한 진리의 옷입니다. 가죽옷은 인간의 낮아진 상태에 맞추어 주신 외적 보호를 강조하고, 흰옷은 선과 진리가 다시 조화를 이룬 천국적 상태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둘 다 내적 생명을 외적으로 둘러싸고 나타내는다는 점에서 동일한 ‘옷’의 상응에 속합니다.
스베덴보리가 계4:4를AC.297에서 인용한 이유는, 말씀에서 ‘옷’이 일관되게 선을 둘러싸고 표현하는 진리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십사 장로들의 금관은 가장 내적 사랑의 선을, 흰옷은 그 선에서 나오는 순수한 진리를, 보좌에 앉아 있는 모습은 그 선과 진리 안에 확고히 세워진 천국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천적 선이 가장 내적 중심에 있고, 영적 선과 자연적 진리가 그것을 옷처럼 둘러싸고 드러낸다는AC.297의 구조를 매우 선명하게 증명하는 본문입니다.
4그러나 사데에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몇 명이 네게 있어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5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계3:4, 5)Who have not defiled their garments,and they shall walk with me in white,for they are worthy(Rev. 3:4–5),
AC.297에서 스베덴보리는 ‘가죽옷’(coats of skin)을 설명하면서, ‘옷’(garments)이 영적 의미로는 무엇을 뜻하는지를 여러 성경 구절을 통해 증명합니다. 그 가운데 계3:4-5는 특히 ‘옷’이 단순한 의복이 아니라, 사람의 내적 선과 진리를 밖으로 드러내는 영적 상태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 주는 대표적인 본문이기 때문에 인용됩니다.
첫째, 여기서 ‘옷’은 사람의 외적 삶 전체를 의미합니다.AC.297의 핵심은, 천적 선 자체는 벌거벗은 상태와 같고, 그것이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통하여 밖으로 나타나는 것을 ‘옷을 입는다’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옷’은 몸을 덮는 천 조각이 아니라, 내면의 사랑과 신앙이 외적 생각과 말, 그리고 행동 속에 나타난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계시록에서 ‘옷을 더럽히지 않았다’는 것은 마음속 사랑이 생활 가운데까지 순결하게 보존되었다는 뜻입니다.
둘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하였다’는 표현은 진리 자체를 더럽히지 않았다는 의미라기보다, ‘선으로부터 나온 진리의 삶’을 더럽히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옷은 언제나 몸을 덮습니다. 상응으로는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을, 즉 겉이 속을 드러내고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사람이 거짓과 악을 받아들이면, 그의 ‘옷’은 더럽혀지고, 반대로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따라 살아가면 그의 ‘옷’은 깨끗하게 보존됩니다. 겉은 속을 반영하기 때문이지요. 겉을 보면 속을 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AC.297에서 말하는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은 천적 선의 의복’이라는 설명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셋째, ‘흰옷’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순수한 진리를 의미합니다. 말씀에서 흰색은 빛을, 빛은 진리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그 진리는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사랑에서 나오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흰옷을 입는다는 것은 교리를 많이 안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이 진리와 생활 속에서 밝게 드러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것 역시AC.297에서 말하는 ‘옷은 내적 선을 나타내는 외적 형상’이라는 원리를 잘 보여 줍니다.
넷째, ‘나와 함께 다니리니’라는 말씀도 같은 맥락입니다. 말씀에서 ‘걷는다’, ‘다닌다’는 것은 삶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흰옷을 입고 주님과 함께 걷는다는 것은, 주님과 같은 방향의 삶을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흰옷은 단순한 천국 예복이 아니라, 그러한 삶을 가능하게 하는 영적 상태 자체를 나타냅니다. 즉, 옷과 걷는다는 두 상징이 함께 사용되어 내면과 외면이 하나 된 신앙의 삶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다섯째, 이 구절은 창3의 ‘가죽옷’과도 아름답게 연결됩니다. 창세기의 가죽옷은 타락한 인간을 위한 주님의 자비로운 보호를 상징합니다. 사람은 더 이상 태고교회처럼 천적 선 가운데 직접 살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이라는 ‘의복’을 입혀 주셨습니다. 반면 계3의 흰옷은 그러한 보호 아래에서 다시 거듭난 사람이 입게 되는 순결한 영적 상태를 보여 줍니다. 하나는 타락 이후의 보호이고, 다른 하나는 거듭남 이후의 영화로운 상태입니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옷’은 내적 생명을 외적으로 나타내고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동일한 상응을 가집니다.
여섯째, 따라서AC.297에서 계3:4-5를 인용한 목적은, ‘옷’이라는 상징이 창세기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에서 일관되게 사용된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함입니다. 에스겔에서는 아름다운 의복으로, 이사야에서는 아름다운 옷으로, 그리고 계시록에서는 흰옷으로 표현되지만, 모두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사람의 삶 속에 나타난 외적 형상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말씀 전체가 하나의 동일한 상응 법칙에 따라 기록되었음을 보여 주는 중요한 증거이기도 합니다.
일곱째, 결국 계3:4-5는AC.297의 결론을 더욱 분명하게 확증합니다. 사람을 천국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겉으로 입은 의복이 아니라, 주님께 받은 사랑과 신앙이 삶 속에 나타난 영적 의복입니다. 그러므로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흰옷을 입은 자’는 모두 자기 공로로 의롭게 된 사람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천적 선이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통하여 순결하게 나타난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계3:4-5를AC.297에서 인용, ‘옷’이란 언제나 내적 생명을 나타내는 외적 진리와 선을 상징한다는 말씀의 일관된 의미를 독자에게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시온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네 힘을 낼지어다거룩한 성 예루살렘이여 네 아름다운 옷을 입을지어다이제부터 할례받지 아니한 자와 부정한 자가 다시는 네게로 들어옴이 없을 것임이라(사52:1)Put on thy beautiful garments,O Jerusalem, the city of holiness(Isa. 52:1).
사52:1이AC.297에 인용된 이유는, 말씀에서 ‘의복’이 단순한 겉 장식물이 아니라, 내적 선이 밖으로 나타날 때 입게 되는 진리와 외적 선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앞에서 천적 선은 가장 깊고 순진무구하기 때문에 옷 입지 않지만, 그보다 외적인 천적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은 ‘의복’에 비유되고, 또 의복이라 한다고 설명합니다. 이사야의 ‘아름다운 옷’은 이 원리를 뒷받침하는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은 속뜻으로 단순히 한 도시를 가리키지 않고, 주님의 교회, 특히 참된 교리 안에 있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이여 네 아름다운 옷을 입으라’는 명령은 실제 도시가 화려한 옷을 입으라는 뜻이 아니라, 황폐해졌던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다시 받아 교회다운 상태로 회복되라는 뜻입니다. 교회가 입는 옷은 교회의 외형을 이루는 참된 교리와 그 교리에 따른 선한 생활입니다.
여기서 ‘아름다운’이라는 말은 진리가 선으로부터 나올 때 지니는 아름다움을 나타냅니다. 진리는 그 자체만으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사랑과 체어리티의 선이 있을 때 아름답습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진리는 차갑고 생명이 없지만, 선을 담고 선을 표현하는 진리는 빛과 조화를 지닙니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옷’은 단순히 많은 진리를 알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선으로부터 나온 진리들로 교회가 단장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또한 의복은 몸 바깥에 있으면서 몸의 상태와 품위를 드러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교리와 외적 예배, 말과 행동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랑과 신앙을 밖으로 드러냅니다. 교회의 가장 깊은 생명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이지만, 이것은 교리와 예배, 그리고 삶이라는 의복을 통하여 겉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이 옷을 입는다는 것은 교회 안의 내적 선이 참된 교리와 거룩한 생활로 표현되는 것을 뜻합니다.
‘거룩한 성’이라는 표현도 ‘아름다운 옷’의 의미를 분명하게 합니다. 말씀에서 ‘성’은 교리적인 것들을 의미하고, ‘거룩함’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거룩한 성 예루살렘’은 거룩한 진리의 교리 안에 있는 교회를 뜻합니다. 그런 예루살렘이 아름다운 옷을 입는 것은,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참된 교리와 그 교리에 일치하는 삶으로 갖추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구절은 겔16:10과도 같은 흐름에 있습니다. 에스겔에서는 주님께서 교회에 ‘수놓은 옷’, ‘가는 베’, ‘모시’를 입히시는 것으로 묘사되고, 이사야에서는 교회가 ‘아름다운 옷’을 입으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전자는 주님께서 선과 진리를 베푸시는 측면을, 후자는 교회가 주님께서 주신 선과 진리를 받아 실제로 입고 살아야 하는 측면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두 본문 모두 의복이 더 외적 선과 진리를 의미한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또한 ‘입으라’는 명령은 단지 진리를 배우고 기억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말씀에서 무엇을 입는다는 것은 그것을 자기 삶에 받아들여 자신의 상태가 되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옷을 입는다는 것은 선과 진리를 지식으로만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사람의 생각과 말, 그리고 행동을 실제로 감싸고 형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진리가 생활 속에 나타날 때 비로소 그것은 사람의 의복이 됩니다.
AC.297에서 사52:1을 인용한 이유는, 천적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이 말씀에서 ‘의복’으로 표현된다는 사실을 확증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름다운 옷’은 가장 깊은 천적 선 자체가 아니라, 그 선이 진리와 교리, 그리고 선한 생활을 통하여 외적으로 나타난 상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내적 사랑과 체어리티가 참된 진리와 거룩한 삶이라는 아름다운 의복을 입을 때, 교회가 비로소 ‘거룩한 성 예루살렘’으로 회복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수놓은 옷을 입히고 물돼지 가죽신을 신기고 가는 베로 두르고 모시로 덧입히고(겔16:10)I clothed thee with broidered work,and shod thee with badger,I girded thee about with fine linen,and I covered thee with silk(Ezek. 16:10).
겔16:10이AC.297에 인용된 이유는, 주님께서 교회와 사람에게 입혀 주시는 여러 종류의 ‘의복’이 각각 서로 다른 차원의 선과 진리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특히AC.297의 주제는 ‘의복’이란 무엇이며, 왜 말씀에서 선과 진리가 옷 입는 것으로 표현되는가를 설명하는 데 있습니다. 에스겔의 이 구절은 그 대표적인 증거로 제시됩니다.
먼저 겔16은 예루살렘, 곧 교회를 한 여인으로 묘사합니다. 주님께서는 버려져 있던 그 여인을 살리시고, 아름답게 단장시키십니다. 그런데 그 단장이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모두 영적인 은혜를 의미합니다. 곧 주님께서 교회에 여러 단계의 선과 진리를 공급하시고, 그것으로 교회를 온전하게 갖추어 가시는 과정을 의복과 장신구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놓은 옷을 입혔다’는 것은 다양한 진리들이 아름다운 질서 속에서 결합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수놓은(broidered work)옷은 여러 실이 조화를 이루어 하나의 아름다운 무늬를 만드는 것처럼, 말씀의 많은 진리들이 하나의 사랑 안에서 질서를 이루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것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살아 있는 진리의 아름다움을 뜻합니다.
‘물돼지 가죽신을 신겼다’는 표현은 더욱 의미심장합니다. 발은 사람의 가장 낮은 자연적 차원을 의미하며, 신은 그 발을 보호하는 가장 바깥의 덮개입니다. 따라서 ‘물돼지’(badgers)가죽으로 만든 신은 자연적 선이 사람의 외적 삶을 보호하는 것을 뜻합니다. 스베덴보리가AC.296에서 해달의 가죽을 자연적 선으로 설명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으며, 겔16은 그 해석을 다시 확인해 주는 중요한 증거가 됩니다.
또한 ‘가는 베로 두르고’는 순수한 진리가 삶을 질서 있게 묶어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허리는 사랑과 능력이 작용하는 부분을 뜻하며, 가는 베(fine linen)는 깨끗하고 순수한 진리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허리를 가는 베로 두른다는 것은 사람의 삶이 순수한 진리에 의해 질서를 갖추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어 ‘모시로 덧입히고’는 더욱 내적인 진리의 아름다움을 나타냅니다. 모시(silk)는 매우 부드럽고 빛나는 직물이므로, 사랑에서 비롯된 진리가 지닌 섬세함과 영광을 상징합니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의복 자체가 아니라, 의복이 내적 생명을 밖으로 나타내는 역할을 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 전체는 주님께서 사람을 여러 층위의 선과 진리로 차례차례 입히시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AC.297에서 겔16:10을 인용한 이유는, 말씀에서 ‘의복’이 단순한 옷이 아니라 내적 선과 진리가 외적으로 나타난 형상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수놓은 옷’, ‘물돼지 가죽신’, ‘가는 베’, ‘모시’는 각각 서로 다른 영적 의미를 지니지만, 모두 주님께서 교회와 사람에게 입혀 주시는 선과 진리의 다양한 층위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AC.297에서 ‘의복은 천적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의미한다’는 설명을 뒷받침하는 가장 중요한 성경적 근거 가운데 하나로 인용된 것입니다.
천적 선은 옷 입지 않습니다. 그것은 가장 깊고 순진무구하기 때문입니다. 옷 입는 선은 천적 영적 선부터이며, 그다음은 자연적 선입니다. 이들은 더 외적이기 때문인데, 그래서 ‘의복’(garments)에 비유되고, 또 그렇게 부릅니다. 에스겔에서 고대교회 얘기를 하면서 말이지요. Celestial good is not clothed, because it is inmost, and is innocent; but celestial spiritual good is that which is first clothed, and then natural good, for these are more external, and on that account are compared to and are called “garments”; as in Ezekiel, speaking of the ancient church:
수놓은 옷을 입히고 물돼지 가죽신을 신기고 가는 베로 두르고 모시로 덧입히고(겔16:10) I clothed thee with broidered work, and shod thee with badger, I girded thee about with fine linen, and I covered thee with silk (Ezek. 16:10).
이사야에서는In Isaiah:
시온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네 힘을 낼지어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여 네 아름다운 옷을 입을지어다 이제부터 할례받지 아니한 자와 부정한 자가 다시는 네게로 들어옴이 없을 것임이라 (사52:1) Put on thy beautiful garments, O Jerusalem, the city of holiness (Isa. 52:1).
계시록에서는In Revelation:
4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5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계3:4, 5) Who have not defiled their garments, and they shall walk with me in white, for they are worthy (Rev. 3:4–5),
또한 이십사 장로들에 대해서도 그들이 ‘흰옷을 입었다’ 하고 있지요(계4:4). where it is likewise said of the four and twenty elders that they were “clothed in white raiment” (4:4).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았더라(계4:4)
이와 같이 더 외적 선들, 곧 천적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이 ‘의복’(garments)입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의 선을 부여받은 사람들은 천국에서 빛나는 의복 입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아직 몸 안에 있기 때문에 ‘가죽옷’(coat of skin) 입은 것으로 표현됩니다. Thus the more external goods, which are celestial spiritual, and natural, are “garments”; wherefore also those who are endowed with the goods of charity appear in heaven clothed in shining garments; but here, because still in the body, with a “coat of skin.”
해설
이 글의 중심은 선에도 내적 질서와 외적 질서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선을 하나의 평면적인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가장 깊은 곳에는 천적 선이 있고, 그 바깥에는 천적 영적 선이 있으며, 다시 그 바깥에는 자연적 선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 천적 선은 가장 깊은 생명 자체이므로 옷 입지 않습니다. 옷은 안에 있는 것을 둘러싸고 밖으로 드러내는 것이지만, 가장 깊은 것은 더 안쪽에 감추어야 할 다른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천적 선이 ‘순진무구하다’(innocent)는 말도 중요합니다. 여기서 순진무구함은 단순히 세상 경험이 없거나 어린아이처럼 미숙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으로부터는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고, 모든 선과 진리가 오직 주님으로부터만 온다는 것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상태입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겉과 속이 나뉘지 않고, 사랑과 행위가 하나를 이룹니다. 그러므로 ‘천적 선’(celestial good)은 무엇인가로 자신을 꾸미거나 감출 필요가 없으며, 그 자체로 생명이고 빛입니다.
반면 ‘천적 영적 선’(celestial spiritual good)은 처음으로 옷 입는 선입니다. 이것은 가장 깊은 천적 사랑이 진리와 질서를 통해 표현되기 시작한 상태입니다. 가장 깊은 사랑 자체는 말이나 형식 없이도 존재하지만, 그것이 생각과 지각, 신앙과 교리, 그리고 삶의 형식 안으로 내려오면 외적 모양, 즉 외형, 형태를 입게 됩니다. 바로 이때 이런 걸 선이 ‘의복’을 입는다 표현합니다. 의복은 선 그 자체가 아니라, 선이 밖으로 드러나고 전달될 수 있도록 하는 진리와 형식을 의미합니다.
그다음에 오는 자연적 선은 더욱 외적인 의복입니다. 자연적 선은 사람이 실제 생활에서 행하는 선, 곧 말과 행동, 습관과 관계, 책임과 봉사 속에서 나타나는 선입니다. 가장 깊은 사랑이 아무리 참되더라도 자연적 삶에까지 내려오지 않으면 세상에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자연적 선은 내적인 천적 영적 선을 덮고 보호하며, 그것을 현실 속에서 사용할 수 있게 하는 가장 바깥 의복과 같습니다.
에스겔의 ‘수놓은 옷’, ‘물돼지 가죽신’, ‘가는 베’, ‘모시’는 고대교회가 주님으로부터 여러 층위의 선과 진리를 받아 옷 입은 상태를 나타냅니다. ‘수놓은 옷’은 다양한 진리들이 아름다운 질서 속에서 결합한 것을, ‘물돼지 가죽신’은 가장 바깥 자연적 선을, ‘가는 베’는 순수한 진리를, ‘모시’는 그 진리의 빛나는 아름다움을 나타냅니다. 곧 주님께서 교회를 옷 입히신다는 것은 교회가 스스로 선과 진리를 만들어 냈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그것들을 받아 내적 생명과 외적 삶이 조화를 이루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사야의 ‘아름다운 옷’과 계시록의 ‘흰옷’도 같은 원리를 보여 줍니다. 예루살렘은 교회를 뜻하며, 그 교회가 아름다운 옷을 입는다는 것은 선에서 비롯된 참된 진리를 갖추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들’은 외적인 말과 행위까지 악과 거짓으로 물들이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흰옷을 입고 주님과 함께 걷는다는 것은, 그들의 진리가 선으로부터 나와 깨끗하고 빛나는 상태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십사 장로들의 흰옷 역시 말씀의 진리들이 선으로부터 빛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천국에서 체어리티의 선을 가진 사람들이 빛나는 의복 입은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설명은, 그 의복이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그들의 내적 상태가 밖으로 형상화된 것임을 뜻합니다. 천국에서는 겉모습이 속 상태와 일치합니다. 그러므로 선한 사랑과 체어리티 안에 있는 사람은 그 선에서 나온 진리에 따라 빛나는 옷 입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 옷의 밝음과 아름다움은 그 사람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과 진리가 밖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러나 여기서는 아직 몸 안에 있기 때문에 ‘가죽옷’(coat of skin) 입은 것으로 표현됩니다’라는 말은 창3의 상태를 설명합니다. 아담과 그의 아내는 더 이상 태고교회의 가장 깊은 천적 선 안에 머물지 못하고, 더 외적인 상태로 내려왔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주어진 옷은 빛나는 천국 의복이 아니라 ‘가죽옷’이었습니다. 가죽은 동물의 가장 바깥 부분이므로, 여기서는 영적 선과 자연적 선 가운데서도 특히 몸과 자연적 삶에 가까운 외적 선을 의미합니다. 곧 ‘가죽옷’은 단순한 형벌의 표지가 아니라, 사람이 아직 몸 안에 있고 내적 생명이 약해진 상태에서도 주님께서 외적 선을 통하여 그를 덮고 보호하시며, 거듭남의 길을 남겨 두셨다는 자비로운 섭리를 나타냅니다.
6그 위를 해달의 가죽으로 덮고 그 위에 순청색 보자기를 덮은 후에 그 채를 꿰고7진설병의 상에 청색 보자기를 펴고 대접들과 숟가락들과 주발들과 붓는 잔들을 그 위에 두고 또 항상 진설하는 떡을 그 위에 두고8홍색 보자기를 그 위에 펴고 그것을 해달의 가죽 덮개로 덮은 후에 그 채를 꿰고9청색 보자기를 취하여 등잔대와 등잔들과 불 집게들과 불똥 그릇들과 그 쓰는 바 모든 기름 그릇을 덮고10등잔대와 그 모든 기구를 해달의 가죽 덮개 안에 넣어 메는 틀 위에 두고11금제단 위에 청색 보자기를 펴고 해달의 가죽 덮개로 덮고 그 채를 꿰고12성소에서 봉사하는 데에 쓰는 모든 기구를 취하여 청색 보자기에 싸서 해달의 가죽 덮개로 덮어 메는 틀 위에 두고13제단의 재를 버리고 그 제단 위에 자색 보자기를 펴고14봉사하는 데에 쓰는 모든 기구 곧 불 옮기는 그릇들과 고기 갈고리들과 부삽들과 대야들과 제단의 모든 기구를 두고 해달의 가죽 덮개를 그 위에 덮고 그 채를 꿸 것이며(민4:6-14)
스베덴보리가AC.296에서 민4:6-14를 인용한 이유는, ‘해달의 가죽’이 성막 가장 바깥 덮개로 반복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통해 그것이 자연적 선을 표상한다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 본문에서 법궤와 진설병의 상, 등잔대, 금제단, 성소의 기구들, 번제단 기구들을 모두 운반할 때 해달의 가죽으로 덮습니다. 곧 해달의 가죽은 단순한 방수용 재료가 아니라, 거룩한 것들을 외부의 충격과 손상으로부터 보호하는 가장 바깥 덮개였습니다.
민4에 나오는 성막 기구들은 각각 주님과 천국, 교회와 사람 안의 거룩한 것들을 표상합니다. 법궤는 가장 내적인 천적 선과 진리를, 진설병의 상은 사랑의 선과 그 선에서 나오는 천적 양식을, 등잔대는 영적 진리와 그 진리에서 오는 밝음을, 금제단은 기도와 예배의 향기로운 것을 나타냅니다. 이처럼 가장 거룩한 것들이 이동할 때에는 반드시 덮개로 싸여야 했으며, 가장 바깥에는 공통적으로 ‘해달의 가죽 덮개’가 사용되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적인 거룩한 것들이 직접 외부에 노출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먼저 청색이나 홍색, 자색 보자기로 싸고, 그 위를 다시 해달의 가죽으로 덮었습니다. 청색은 천적인 진리를, 홍색은 영적 선을, 자색은 천적 선을 나타내는 색채이며, 해달의 가죽은 그 모든 것을 둘러싸는 가장 외적인 자연적 선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덮개의 순서는 내적인 것에서 외적인 것으로 이어지는 질서를 보여 줍니다.
특히 해달의 가죽이 거의 모든 성막 기구에 반복하여 사용된 것은 자연적 선의 보호 기능이 보편적임을 나타냅니다. 사람이 아무리 내적으로 사랑과 신앙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외적 삶의 질서와 선한 행위로 보호되지 않으면 쉽게 손상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연적 선은 내적 거룩함 자체는 아니지만, 그것을 보존하고 운반하며 세상 속에서 드러나게 하는 필수적인 외피입니다.
이 점은AC.296의 중심 주제인 ‘가죽옷’과도 직접 연결됩니다. 주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입혀 주신 ‘가죽옷’은 그들이 더 이상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에 머물 수 없게 된 뒤에도,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통하여 보호받을 수 있도록 마련해 주신 외적인 옷을 의미합니다. 민4의 해달 가죽 덮개 역시 같은 방식으로, 내적인 거룩한 것들이 외적인 자연적 선으로 보호되는 모습을 표상합니다.
또한 성막 기구들이 이동할 때 해달의 가죽으로 덮였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성막이 한곳에 고정되어 있을 때가 아니라 광야를 이동할 때, 곧 변화와 시험, 그리고 불안정의 상태를 통과할 때, 이 덮개가 필요했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거듭남의 과정에서 여러 상태의 변화를 지날 때, 내적 사랑과 신앙이 외적 삶의 선과 질서에 의해 보호되어야 함을 보여 줍니다. 자연적 선은 특히 시련과 변화의 과정에서 내적인 것을 지켜 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는 민4:6-14를 통하여 ‘가죽’이 말씀에서 단순한 동물성 재료가 아니라, 사람의 가장 바깥 자연적 차원에 속한 선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확증합니다. 법궤에서부터 제단 기구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거룩한 것이 해달의 가죽으로 덮였다는 것은,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자연적 선을 통하여 안전하게 보존된다는 질서를 보여 줍니다.
AC.296에서 이 긴 본문을 인용한 이유는, ‘해달의 가죽’이 자연적 선을 의미하며, 그 자연적 선이 내적인 거룩한 것들을 감싸고 보호하는 가장 바깥 덮개라는 사실을 말씀의 반복된 규례로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는 창3의 ‘가죽옷’, 창27의 ‘염소 새끼의 가죽’, 출26의 ‘붉은 물 들인 숫양의 가죽’과 함께 하나의 상응 체계를 이룹니다. 곧 주님께서는 사람의 가장 깊은 사랑과 신앙뿐 아니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외적 생활까지도 선으로 질서 있게 하셔서 사람 전체를 보호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