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And Jehovah God said, Behold, the man is become as one of us, knowing good and evil; and now lest he put forth his hand, and take also of the tree of lives, and eat, and live to eternity, (3:22)

 

AC.283

 

네 번째 후손에 대하여. 이들에게서는 자연적 선(natural good)이 소멸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만일 그들이 새롭게 창조되어, 곧 거듭나서 신앙의 천적인 것들(the celestial things of faith)을 배웠다면 오히려 멸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것을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Lest he put forth his hand, and take also of the tree of lives, and eat, and live to eternity.)라는 말씀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22절) Of the fourth posterity, in which natural good began to be dissipated, and which, had they been created anew or instructed in the celestial things of faith, would have perished, which is meant by, “Lest he put forth his hand, and take also of the tree of lives, and eat, and live to eternity.” (verse 22)

 

 

해설

 

AC.283은 태고교회 후손들의 상태가 세대를 거치며, 어떻게 점차 낮아졌는지를 설명하는 연속적인 개요 가운데 하나입니다. AC.282에서 첫 번째 후손에게는 천적 영적 선이 있었고, 두 번째와 세 번째 후손에게는 자연적 선이 남아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네 번째 후손에 이르러서는 그 자연적 선마저 점차 소멸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도덕성이 약해졌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연적 바탕 자체가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자연적 선’은 사람의 자연적 삶 안에 나타나는 순박함, 온순함, 정직함, 인정, 이웃에 대한 호의와 같은 선을 말합니다. 이러한 선이 아직 남아 있을 때에는, 비록 높은 퍼셉션이나 천적 사랑을 잃었더라도 주님께서 그 사람을 붙드시고, 더 깊은 거듭남으로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네 번째 후손에게서는 감각과 자기 사랑이 점점 강해지면서 이 자연적 선조차 흩어지고 소멸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매우 놀라운 말을 덧붙입니다. 곧 이들이 만일 거듭나서 신앙의 천적인 것들을 배웠다면 오히려 멸망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보통은 사람이 높은 진리를 많이 알수록 더 구원에 가까워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중요한 것은 얼마나 높은 진리를 아느냐가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내적 상태가 준비되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 너무 높은 진리가 주어지면, 그것은 구원의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모독의 위험이 될 수 있습니다.

 

신앙의 천적인 것들’은 주님에 대한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 퍼셉션, 순진, 자비와 같은 가장 높은 신앙의 내용들을 뜻합니다. 이것들은 단순히 머리로 배우는 교리가 아니라, 의지와 삶 전체로 받아들여야 하는 거룩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자연적 선마저 거의 소멸한 사람에게 이러한 천적인 것들이 주어지면, 그는 그것을 참으로 사랑하거나 살아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입과 지식으로는 인정하면서도 마음과 삶으로는 거부하게 됩니다.

 

이것이 왜 멸망으로 이어지는지를 이해하려면 모독(profanation)의 원리를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은 진리를 전혀 모를 때보다, 진리를 알고 인정한 뒤에 그것을 부정하고 악한 삶과 섞을 때 더 위험한 상태에 빠집니다. 거룩한 것과 악한 것을 결합하면 사람 안에서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이 뒤섞이며, 그 결과 주님께서 사람을 회복시키실 수 있는 질서 자체가 파괴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사람을 모독으로부터 보호하시기 위하여, 그가 감당할 수 없는 높은 진리를 때로는 알지 못하게 하시고, 더 외적인 상태에 머물게 하십니다.

 

3:22의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는 말씀도 이런 의미입니다. 여기서 ‘손을 든다’는 것은 자기 능력으로 취하려는 것을 의미하고, ‘생명나무’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천적 사랑과 그 생명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사람이 자기 힘과 자기 지혜로 천적인 것을 차지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한 사람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영원히 산다는 것은 참된 영생을 얻는다는 뜻이 아니라, 악과 거짓을 거룩한 것과 결합한 상태가 굳어져 영원히 지속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사람을 생명나무에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하신 것은 형벌이 아니라 보호였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구원에서 제외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더 깊은 모독과 정죄에 빠지지 않도록 천적인 것에 접근하는 길을 막으신 것입니다. 자연적 선마저 거의 사라진 상태에서는 높은 천적 진리를 직접 주시는 것보다, 더 낮고 외적인 질서 안에 머물게 하시는 편이 그들의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더 자비로운 조치였습니다.

 

AC.283은 진리가 많을수록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니라, 사람이 그 진리를 사랑하고 살아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네 번째 후손은 자연적 선이 소멸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앙의 천적인 것들을 직접 받으면 그것을 모독하여 오히려 멸망할 위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막으심으로 그들을 보호하셨습니다. 이 단락은 주님의 섭리가 언제나 더 많은 계시를 주시는 방식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사람이 감당하지 못할 거룩한 것을 가리시는 방식으로도 나타난다는 깊은 진리를 보여줍니다.

 

 

 

AC.282, 창3:20-24, ‘창3:21 개요’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And Jehovah God made for the man and for his wife coats of skin, and clothed them. (창3:21) AC.282 그 첫 번째 후손에 관하여, 그 안에는 천적 영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282.심화

 

1. ‘celestial spiritual good’, ‘natural good

 

AC.282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후손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영적으로 낮아지는 과정을 매우 간결하게 요약합니다. 그는 첫 번째 후손에게는 ‘천적 영적 선(celestial spiritual good)이 있었고, 두 번째와 세 번째 후손에게는 ‘자연적 선(natural good)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 두 표현은 단순히 선의 종류를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사람 안에서 어떻게 점차 약화되어 갔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개념입니다.

 

먼저 ‘천적 영적 선’은 가장 높은 수준의 선인 ‘천적 선(celestial good)과는 조금 다릅니다. 천적 선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 자체를 말합니다. 그러나 ‘천적 영적 선’은 그 사랑으로부터 흘러나와 이웃을 향해 나타나는 선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에 대한 사랑이 근원이 되고, 그 사랑이 이웃을 사랑하고 진리를 실천하는 삶으로 나타난 상태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첫 후손이 비록 처음 태고교회만큼 높은 상태는 아니었지만, 여전히 천적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영적 선 안에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이 때문에 ‘천적 영적 선’은 사랑과 신앙이 아직 분리되지 않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사람은 먼저 주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선을 행하며, 그 선 안에서 진리를 깨닫습니다. 즉, 사랑이 여전히 중심이고, 신앙은 그 사랑의 표현입니다. 태고교회의 첫 후손들은 처음 교회만큼 퍼셉션이 밝지는 않았지만, 아직 이러한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교회는 더욱 낮은 상태로 내려갑니다. 그 결과 나타난 것이 ‘자연적 선’입니다. 자연적 선이란 겉으로는 선하게 보이는 삶이지만, 그것이 반드시 천적 사랑에서 직접 흘러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이웃을 돕고, 정직하게 살며, 사회 질서를 지키는 것처럼 인간 사회에서 나타나는 여러 선한 행위들이 여기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선은 여전히 선이지만, 그 근원이 천적 사랑보다는 자연적인 성향이나 교육, 양심, 사회적 질서에 더 가까운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자연적 선이 모두 부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자연적 선도 주님께서 사용하시는 중요한 바탕입니다. 사람은 먼저 자연적 차원에서 선을 배우고 실천하며, 그 위에 영적 선과 천적 선이 점차 세워집니다. 따라서 자연적 선은 거듭남의 출발점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그 안에만 머무르면 외적 도덕성에 그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자연적 선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과 연결되어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AC.282에서 말하는 교회의 변화는 바로 이러한 질서의 변화입니다. 처음 태고교회는 주님 사랑 자체 안에서 살았습니다. 그다음 세대는 아직 그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영적 선을 가지고 있었지만, 점차 그 밝음이 약해졌습니다. 다시 그다음 세대는 주님 사랑의 직접적인 퍼셉션을 잃고, 주로 자연적 선에 의하여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선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라, 선의 근원이 점점 더 바깥쪽으로 이동하였음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변화를 스베덴보리는 ‘가죽옷(coats of skin)이라는 상징으로 설명합니다. 옷은 사람의 가장 바깥을 덮는 것을 의미하며, 가죽은 더욱 외적인 생명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사람에게 가죽옷을 입혀 주셨다는 것은, 높은 천적 상태를 잃은 사람들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이제 그들의 수준에 맞는, 보다 외적인 선과 진리를 통하여 계속 보호하시고 인도하셨다는 뜻입니다. 비록 이전보다 낮은 상태가 되었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에게도 여전히 구원의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천적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의 차이는 선의 유무가 아니라 선의 근원에 있습니다. 천적 영적 선은 주님에 대한 사랑에서 직접 흘러나오는 선이며, 자연적 선은 그보다 한 단계 바깥에서 나타나는 선입니다. AC.282는 태고교회의 후손들이 점차 높은 영적 상태를 잃어갔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주님께서는 그들이 어떤 상태에 있든지 그 수준에 맞는 선과 진리를 마련하시어 끝까지 구원의 섭리를 이어 가셨음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AC.282, 창3:20-24, ‘창3:21 개요’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And Jehovah God made for the man and for his wife coats of skin, and clothed them. (창3:21) AC.282 그 첫 번째 후손에 관하여, 그 안에는 천적 영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And Jehovah God made for the man and for his wife coats of skin, and clothed them. (3:21)

 

AC.282

 

그 첫 번째 후손에 관하여, 그 안에는 천적 영적 선(celestial spiritual good)이 있었으며, 또한 두 번째와 세 번째 후손에 관하여, 그 안에는 자연적 선(natural good)이 있었는데,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the coat of skin)을 지어 입히시니라(the coat of skin which Jehovah God made for the man and his wife)의 의미입니다. (21) Of its first posterity, in which there was celestial spiritual good; and of its second and third, in which there was natural good, signified by the “coat of skin which Jehovah God made for the man and his wife.” (verse 21)

 

 

해설

 

AC.282는 창3:21에 대한 해설의 서론입니다. 지금까지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타락과 홍수 전까지의 쇠퇴 과정을 설명해 왔는데, 여기서는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나타납니다. 비록 태고교회가 점차 타락하고 있었지만, 그 모든 후손이 한꺼번에 완전히 멸망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후손들 가운데 여전히 선의 흔적과 생명의 가능성을 보존하고 계셨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후손들을 여러 세대로 구분합니다. 첫 번째 후손은 아직 ‘천적 영적 선(celestial spiritual good)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는 원래 태고교회의 순수한 천적 상태보다는 한 단계 낮아진 상태이지만, 여전히 주님에 대한 사랑이 중심이 되는 매우 높은 상태였습니다. 다시 말해, 완전한 타락이 시작되기 이전의 초기 후손들입니다.

 

그다음 두 번째와 세 번째 후손은 더 낮은 상태로 내려갔지만, 그래도 ‘자연적 선(natural good)은 남아 있었습니다. 여기서 자연적 선이란 천적 선이나 영적 선처럼 직접 주님께 연결된 높은 상태는 아니지만, 외적 삶 가운데 남아 있는 선한 성향, 온순함, 질서, 도덕성, 순종 등의 형태로 나타나는 선을 말합니다. 즉 교회의 본래 영광은 잃어버렸지만, 인간다움과 선의 흔적은 아직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상태를 창3:21의 ‘가죽옷’으로 설명합니다. 일반적인 해석에서는 가죽옷을 단순히 인간의 수치를 가려 주기 위한 옷으로 이해하지만, 스베덴보리에게 옷은 언제나 어떤 진리나 상태를 덮고 보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 가죽(skin)은 인간의 가장 바깥층을 의미하므로, 가죽옷은 내적인 천적 상태가 사라진 이후에도 남아 있는 외적 선의 상태를 상징합니다.

 

이 점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왜냐하면 창3의 앞부분은 저주와 심판으로 가득 차 있지만, 21절에서는 오히려 주님의 자비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을 가렸던 것과 달리, 가죽옷은 주님께서 직접 지어 입히신 것입니다. 즉 인간이 스스로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상태 속에서도 주님께서 남겨 두신 선과 보호가 있다는 뜻입니다.

 

AC.282는 가죽옷이 단순한 의복이 아니라, 타락 이후에도 주님께서 후손들 안에 보존하신 선의 상태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첫 번째 후손에게는 아직 천적 영적 선이 있었고, 두 번째와 세 번째 후손에게는 자연적 선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남겨진 선이 훗날 새로운 교회가 세워질 수 있는 토대가 됩니다. 따라서 가죽옷은 심판의 상징이 아니라, 타락한 인류를 향한 주님의 보호와 보존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심화

 

1. ‘celestial spiritual good’, ‘natural good

 

 

AC.282, 심화 1, ‘celestial spiritual good’, ‘natural good’

AC.282.심화 1. ‘celestial spiritual good’, ‘natural good’ AC.282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후손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영적으로 낮아지는 과정을 매우 간결하게 요약합니다. 그는 첫 번째 후손

bygrace.kr

 

 

 

AC.283, 창3:20-24, ‘창3:22 개요’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And Jehovah God said, Behold, the man is b

bygrace.kr

 

AC.281, 창3:20-24, ‘창3:20 개요’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And the man [homo] called his wife’s name Eve, because she was the mother of all living. (창3:20) AC.281 천적 교회였던 태고교회는,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281.심화

 

1. ‘celestial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천적(天的, celestial)은 단순히 ‘하늘에 속한’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는 인간과 교회의 영적 상태를 설명할 때, ‘천적’과 ‘영적’을 엄격히 구분하여 사용합니다. 천적 상태란 주님에 대한 사랑이 사람의 가장 깊은 중심이 되고, 그 사랑으로부터 생각과 의지, 그리고 삶 전체가 흘러나오는 상태를 말합니다. 따라서 ‘천적’은 하늘이라는 장소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주님 사랑이 인간의 생명을 다스리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태고교회를 천적 교회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먼저 교리를 배우고 그것을 실천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선을 행하였고, 그 선 안에서 무엇이 진리인지를 퍼셉션을 통하여 직접 깨달았습니다. 다시 말해 사랑이 진리를 이끌었고, 삶이 신앙을 살아 있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천적 교회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반면 영적 교회는 조금 다른 질서를 따릅니다. 영적인 사람은 먼저 말씀을 배우고, 진리를 이해하며, 그것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그러므로 영적 교회에서는 신앙이 사랑을 이끌어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천적 교회에서는 사랑이 먼저이고 신앙은 그 사랑 안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납니다. 스베덴보리가 천적 교회를 모든 교회 가운데 가장 높은 상태로 설명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사람의 내적 구조와도 관계가 있습니다. 천적인 사람은 의지가 먼저 주님으로부터 새롭게 되고, 이해는 그 새로워진 의지를 따라 움직입니다. 반대로 영적인 사람은 이해를 통하여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에 따라 의지가 점차 변화됩니다. 결국 두 사람 모두 주님으로부터 거듭나지만, 거듭나는 순서와 방식이 서로 다른 것입니다.

 

또한 천적이라는 말은 단순히 마음이 따뜻하거나 성격이 온순한 사람을 뜻하지 않습니다. 천적인 사람도 분명한 판단을 하고, 악을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다만 그 모든 판단과 행동의 출발점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에 대한 사랑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무엇보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기뻐하고, 이웃의 선을 자신의 기쁨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태고교회 말기에 이르러 이러한 천적 상태는 점차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퍼셉션을 잃고, 감각과 자기 판단을 더 신뢰하게 되었으며, 사랑이 진리를 이끌던 질서도 점차 깨졌습니다. 그 결과 사람은 자신의 rational에 의존, 진리를 판단하려 하였고, 결국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주님 사랑을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창3에서 묘사되는 타락의 본질입니다.

 

AC.281에서 태고교회를 ‘천적’이라 하는 것은 단순히 가장 오래된 교회였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에 대한 사랑과 ‘주님에 대한 신앙의 삶’이 완전히 하나였던 교회였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선을 행하였고, 그 선 안에서 진리를 깨달았으며, 그 진리를 다시 삶으로 살아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천적(celestial)의 가장 깊은 의미이며, 모든 거듭남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AC.281, 창3:20-24, ‘창3:20 개요’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And the man [homo] called his wife’s name Eve, because she was the mother of all living. (창3:20) AC.281 천적 교회였던 태고교회는,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And the man [homo] called his wife’s name Eve, because she was the mother of all living. (3:20)

 

AC.281

 

천적 교회였던 태고교회는, 주님에 대한 신앙의 삶(the life of faith in the Lord)으로 말미암아 하와(Eve), 모든 산 자의 어머니(the mother of all living)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20). Of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was celestial, and from the life of faith in the Lord, called “Eve,” and the “mother of all living” (verse 20).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20)

 

 

해설

 

AC.281은 창3:20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주제를 제시하는 제목입니다. 앞에서는 태고교회의 타락과 그 결과를 설명하였다면, 이제부터는 비록 타락 이후라 할지라도 주님께서 교회를 완전히 버리지 않으시고 새로운 소망을 준비하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하와’, 곧 ‘모든 산 자의 어머니’라는 이름은 단순히 첫 여인의 이름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세상에 이어 가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를 ‘천적 교회’라고 합니다. 여기서 ‘천적(天的, celestial)이란 단순히 하늘에 속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이 삶의 가장 깊은 중심이 되고, 그 사랑으로부터 모든 생각과 행동이 흘러나오는 상태를 말합니다. 천적인 사람은 먼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선을 행하며, 그 선 안에서 자연스럽게 진리를 지각합니다. 다시 말해 사랑이 진리를 이끌고, 삶이 신앙을 살아 있게 하는 상태가 바로 천적 상태입니다.

 

본문의 ‘the life of faith in the Lord’도 이러한 의미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서 life는 ‘생명’보다 ‘’으로 옮기는 것이 문맥에 더 잘 어울립니다. 스베덴보리가 자주 사용하는 ‘life of faith’, ‘life of charity’는 신앙이나 체어리티를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실제 삶으로 살아내는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표현은 ‘주님에 대한 신앙의 생명’보다 ‘주님에 대한 신앙의 삶’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의도를 더 정확하게 전해 줍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 신학의 중요한 특징이기도 합니다. 그는 참된 신앙은 반드시 삶으로 나타난다고 가르칩니다. 신앙은 단순히 교리를 인정하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믿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삶 속에서 비로소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그래서 그는 신앙과 삶을 결코 분리하지 않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이 천적이었다는 것은, 그들이 퍼셉션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선을 직접 받아들이며 살았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먼저 교리를 배우고 그것을 실천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선을 행하였고, 그 선 안에서 무엇이 진리인지를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후대의 영적 교회와 가장 크게 구별되는 특징입니다.

 

또한 말씀은 태고교회를 ‘하와’, 곧 ‘모든 산 자의 어머니’라고 합니다. 여기서 ‘산 자’는 육체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 영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모든 산 자의 어머니’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삶을 낳고 길러내는 교회를 상징하는 이름입니다.

 

AC.281은 태고교회를 단순히 최초의 교회로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 대한 사랑과 신앙의 삶이 하나였던 가장 순수한 교회의 모습을 우리에게 다시 보여줍니다. 그리고 ‘하와’라는 이름을 통하여, 참된 교회란 언제나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고, 그 생명을 실제 삶으로 살아내는 공동체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심화

 

1. ‘celestial

 

 

AC.281, 심화 1, ‘celestial’

AC.281.심화 1. ‘celestial’ 여기서 ‘천적’(天的, celestial)은 단순히 ‘하늘에 속한’이라는 막연한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영적 상태를 구분할 때 ‘천적’과 ‘영적’을 서로 다른

bygrace.kr

 

 

 

AC.282, 창3:20-24, ‘창3:21 개요’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And Jehovah God made for the man and for his wife coats of skin, and clothed them. (창3:21) AC.282 그 첫 번째 후손에 관하여, 그 안에는 천적 영

bygrace.kr

 

AC.280, 창3:20-24, ‘창3:20-24 본문, 개요’(AC.280-286)

창3:20-24 20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And the man [homo] called his wife’s name Eve, because she was the mother of all living.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3:20-24

 

20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And the man [homo] called his wife’s name Eve, because she was the mother of all living.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And Jehovah God made for the man and for his wife coats of skin, and clothed them. 22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And Jehovah God said, Behold, the man is become as one of us, knowing good and evil; and now lest he put forth his hand, and take also of the tree of lives, and eat, and live to eternity, 23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Therefore Jehovah God sent him forth from the garden of Eden, to till the ground from which he was taken. 24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And he cast out the man; and he made to dwell from the east toward the garden of Eden cherubim, and the flame of a sword turning itself, to keep the way of the tree of lives. (3:20-24)

 

개요

 

AC.280

 

태고교회와, 거기서 떨어져 나간 자들에 대하여 여기에서 간략히 다루고 있습니다. 또한 홍수 때에 이르러 마침내 소멸하게 된 그 후손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다루고 있습니다. The most ancient church, and those who fell away, are here summarily treated of; thus also its posterity down to the flood, when it expired.

 

 

해설

 

AC.280은 창3 전체에 대한 또 하나의 요약 결론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까지 창3을 한 남자와 한 여자의 범죄 이야기로 해석하지 않고, 태고교회(The Most Ancient Church)의 형성, 타락, 그리고 종말의 역사로 해석해 왔습니다. 여기서는 그 사실을 다시 한번 짧고 분명하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먼저 ‘태고교회’가 언급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태고교회는 인류 역사상 가장 순수하고 천적인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주님과 직접적인 교통 가운데 있었으며, 오늘날의 양심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퍼셉션(perception)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선과 진리를 추론(rational)을 통해 배우기보다 즉각적으로 지각하였고, 사랑을 중심으로 살아갔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떨어져 나간 자들’이 생겨났습니다. 이것이 창3의 핵심 주제입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악했던 사람들이 아니라 원래 태고교회에 속해 있었지만, 점차 자기 자신을 신뢰하기 시작, 감각적 사고를 따르기 시작하면서 본래의 상태에서 이탈하였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뱀, 선악과, 여인, 아담 등의 표상을 통해 바로 이 이탈 과정을 설명해 왔습니다.

 

또한 그는 창3이 단지 최초의 이탈 세대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후손들의 역사 전체를 압축적으로 담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그 후손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다루고 있다’ 말합니다. 다시 말해 창3에는 태고교회의 쇠퇴가 시작되는 순간뿐 아니라, 그 쇠퇴가 세대를 거쳐 확대되고 심화되는 과정까지 함께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그 종착점을 ‘홍수 때에 이르러 마침내 소멸하게 된’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소멸(expired)은 단순히 육체적 멸망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태고교회의 영적 생명이 완전히 끝난 것을 의미합니다. 처음에는 퍼셉션을 잃었고, 다음에는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을 잃었으며, 마침내는 선과 진리를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창6과 창7에서 묘사되는 홍수의 영적 의미입니다.

 

AC.280은 창3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를 제공합니다. 창3은 단순히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였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태고교회가 어떻게 주님에게서 멀어졌고, 그 후손들이 어떻게 점점 더 타락하여 마침내 홍수라는 종말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예언적 역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여기에서 간략히 다루고 있다’고 말합니다. 창3은 앞으로 창4부터 홍수 기사에 이르기까지 전개될 태고교회의 쇠퇴사를 씨앗 형태로 요약하고 있는 장인 것입니다.

 

 

 

AC.281, 창3:20-24, ‘창3:20 개요’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And the man [homo] called his wife’s name Eve, because she was the mother of all living. (창3:20) AC.281 천적 교회였던 태고교회는,

bygrace.kr

 

AC.279, 창3:19, ‘창3:14-19 절별 요약’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창3:19)AC.279그러므로 이 모든 구절을 연속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유튜브 장르(?)중엔 탈북민들이 하시는 유튜브가 있습니다. 대부분 초대받는 게스트들은 북에서 태어나 짐승보다 못한 삶을 사시다 천신만고 사선을 넘어 겨우 대한민국의 품에 안기신 이야기들입니다만... 가끔 북에서 나름 호의호식(?) 하시던 고위층들 중 북을 떠나야만 했던 불가피한 사정으로 대한민국에 들어와 여기서도 나름 호의호식(?) 하시는 분들이 있는데요, 이들의 태도나 이야기들을 시청할 때면 속에서 좀 거부감이 들 때가 종종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라면 이런 현실 속에 저런 사람들을 어떻게 대했을까요?

 

 

목사님께서 느끼시는 거부감은 충분히 이해할 만한 감정입니다. 탈북민 유튜브를 보다 보면, 극심한 굶주림과 억압, 인신매매와 강제노동, 가족의 죽음 같은 참혹한 일을 겪고 대한민국에 온 분들이 있는가 하면, 북한에서도 비교적 높은 지위와 특권을 누리다가 권력투쟁이나 숙청, 신변의 위협 같은 사정으로 탈북한 분들도 있습니다. 특히 후자의 경우, 북한에서 누리던 우월감이나 권력의식이 말과 태도 속에 남아 있는 듯 보이거나, 한국에 와서도 비교적 성공적인 삶을 사는 모습을 볼 때 마음속에서 거부감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라면 먼저 그 사람의 외적인 신분보다 내적인 사랑을 보았을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왕과 거지, 장군과 죄수, 고위층과 밑바닥 인생이 구분되지만, 사후에는 그런 외적인 조건이 모두 벗겨지고, 결국 남는 것은 그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며 살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북한의 고위층이었다는 사실 자체가 그 사람을 악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고,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 자체가 그 사람을 선하게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계급이나 이력보다 그 안의 사랑과 의도를 보십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서 과거의 자기 사랑과 지배욕이 여전히 강하게 드러난다면,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가볍게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이 누렸던 특권을 자랑하거나, 다른 사람을 은근히 낮추어 보거나, 권력의 언어와 우월의식을 버리지 못하는 모습이 반복된다면, 그것은 옛 사랑이 아직 살아 있다는 징후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입으로는 겸손한 말을 할 수 있지만, 그 말 속에 흐르는 정서와 사랑까지 숨기기는 어렵습니다. 따라서 목사님께서 느끼시는 거부감이 언제나 편견이라고만 할 수는 없으며, 때로는 그 사람 안의 어떤 정서를 감지하는 분별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의 최종 심판까지 우리가 맡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그가 실제로 얼마나 회개했는지, 내적으로 얼마나 싸우고 있는지, 두려움과 상처 속에서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겉으로 거만해 보여도 안에서는 깊이 자신을 낮추고 있을 수 있고, 반대로 겸손한 말만 하는 사람도 속으로는 자기 사랑으로 가득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악을 악이라고 분별하는 것과 그 사람 자체를 정죄하는 것은 구분되어야 합니다. 판단은 주님께 맡기되, 우리에게 보이는 태도와 정서는 냉정하게 살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목사님 안에서 올라오는 거부감은 억지로 없애기보다 바르게 다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감정이 분별에서 나온 것이라면 무조건 눌러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그것이 미움과 멸시로 자라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마음속으로 ‘저 사람에게 아직 버리지 못한 자기 사랑이 있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그 영혼은 주님께 맡깁니다’라고 정리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악을 모른 척하는 것도 아니고, 사람을 미워하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그 사람의 말과 태도를 오래 시청할수록 내 마음이 불편해지고 평화를 잃는다면, 굳이 계속 볼 필요는 없습니다. 영적 분별은 모든 것을 끝까지 지켜보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내 속 사람을 흐리게 하는지를 알아차리고 적절히 거리를 두는 데서도 나타납니다. 어떤 콘텐츠가 내 안의 분노와 혐오를 계속 자극한다면, 그 사람을 정죄하기보다 조용히 시청을 멈추는 것이 더 지혜로울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라면 이 거부감을 우리 자신을 비추는 거울로도 사용하게 했을 것입니다. 내가 저 사람에게서 무엇을 보고 거부감을 느끼는지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 사랑, 우월감, 지배욕,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이라면, 그 씨앗이 내 안에도 전혀 없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타인의 악을 분별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같은 악의 뿌리가 내 안에 있음을 발견하여 주님 앞에 내려놓을 때, 분별은 정죄가 아니라 겸손으로 이어지고, 자비와 진리가 함께 자라게 됩니다.

 

 

 

SC.102, ‘분도 요셉 라브르’

ChatGPT, 혹시 아래와 같은 책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나요? 아니요. 정확히 말씀드리면, ‘성 분도 요셉 라브르’라는 1957년 한국어 번역본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ChatGPT인 저 조차 이번에 목사님께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3:19)



AC.279

그러므로 이 모든 구절을 연속적으로 살펴보면 다음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All these verses then, taken in a series, involve

 

감각 파트(the sensuous part)가 천적인 것으로부터 돌아섰다는 것 (14), that the sensuous part averted itself from the celestial (verse 14);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14)

 

주님께서 그들을 다시 결합시키기 위하여 세상에 오실 것이라는 것 (15), that the Lord would come into the world for the purpose of reuniting them (verse 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15)

 

겉 사람이 돌아섰기 때문에 싸움이 일어났다는 것 (16), that combat arose in consequence of the external man averting itself (verse 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16)

 

그 결과 비참함이 생겨났다는 것 (17), whence resulted misery (verse 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7)

 

정죄가 뒤따랐다는 것 (18), condemnation (verse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8)

 

그리고 마침내 지옥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 (19). and at length hell (verse 19).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19)

 

이러한 일들은 그 교회 안에서 네 번째 후손으로부터 홍수 때까지 차례로 일어났습니다. These things followed in succession in that church, from the fourth posterity down to the flood.

 

 

해설

 

AC.279는 창3 14절부터 19절까지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한눈에 정리하는 요약 결론입니다. 그는 지금까지 각 절을 따로 설명해 왔지만, 여기서는 그것들이 서로 독립된 사건들이 아니라 하나의 연속적인 영적 쇠퇴 과정을 보여준다고 설명합니다.

 

첫 단계는 14절의 뱀입니다. 감각적 인간, 즉 인간의 감각 파트가 천적인 것에서 돌아서면서 타락이 시작됩니다. 원래 감각은 내적 인간, 즉 속 사람과 주님의 지배 아래 있어야 하지만, 그것이 독립하여 스스로 판단하기 시작할 때, 인간은 가장 낮은 수준의 사고에 갇히게 됩니다. 이것이 뱀이 흙을 먹게 되는 상태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15절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회복할 수 없는 상태로 향해 가고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 장차 세상에 오셔서 잃어버린 연결을 회복하실 것이 예언됩니다. 그래서 창3의 심판 가운데에도 이미 구원의 약속이 들어 있습니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는 말씀은 타락의 역사 속에 심어진 최초의 복음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16절의 싸움입니다.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 즉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의 조화가 깨지면서 영적 전투가 시작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임신하는 고통, 수고하고 자식을 낳음’으로 설명했습니다. 진리를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일 자체가 더 이상 자연스럽지 않게 되고, 갈등과 수고를 동반하게 됩니다.

 

네 번째 단계는 17절의 비참함입니다. 겉 사람이 속 사람으로부터 분리되면서 삶 전체가 고통스러워집니다. 땅이 저주를 받는다는 것은 겉 사람이 스스로를 저주받은 상태로 만든다는 뜻이며, 사람은 더 이상 선과 진리를 기쁨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됩니다.

 

다섯 번째 단계는 18절의 정죄입니다. 가시와 엉겅퀴가 돋아난다는 것은 선과 진리 대신 악과 거짓이 자라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타락은 단순한 약화가 아니라 적극적인 황폐와 왜곡의 단계로 들어갑니다.

 

마지막 여섯 번째 단계는 19절의 지옥입니다.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육체적 죽음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완전히 돌아서서 영적 생명을 상실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지옥 상태의 본질입니다.

 

특히 마지막 문장에서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과정이 ‘그 교회 안에서 네 번째 후손으로부터 홍수 때까지’ 진행되었다고 말합니다. 즉 창3은 하루아침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후손들 가운데 오랜 세월에 걸쳐 진행된 영적 쇠퇴의 역사를 묘사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감각적 독립으로 시작되었지만, 결국은 비참함과 정죄를 거쳐 영적 파멸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AC.279는 창3:14-19 전체를 하나의 영적 연대기로 제시합니다. 곧 ‘감각의 반역 주님의 구원 약속 영적 전투 비참함 정죄 지옥’이라는 순서입니다. 그리고 이 흐름은 단지 홍수 이전 태고교회의 역사만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멀어질 때 반복될 수 있는 영적 과정이기도 합니다. 반대로 주님께로 돌아가는 길은 이 과정의 한가운데에 놓인 15절, 곧 주님의 오심과 구원의 약속에서 시작된다는 점이 이 글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280, 창3:20-24, ‘창3:20-24 본문, 개요’(AC.280-286)

창3:20-24 20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And the man [homo] called his wife’s name Eve, because she was the mother of all living.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bygrace.kr

 

AC.278, 창3:19,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창3:19)AC.278‘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네가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278.심화

 

4. ‘지옥 상태(infernal state)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지옥 상태(infernal state)는 단순히 사람이 죽은 뒤 가는 장소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사람의 마음과 삶이 지옥의 사랑과 하나가 된 상태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 지옥은 먼저 사람 안에서 시작되며, 사후의 지옥은 그 내적인 상태가 완전히 드러난 결과입니다. 따라서 지옥(적) 상태’란 어떤 공간에 들어가는 것보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사람의 삶을 지배하게 된 영적 상태를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사람은 누구나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생명을 어떻게 사용할지는 자신의 자유에 달려 있습니다. 사람이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 천국(적) 상태가 형성되고, 반대로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고 자신의 유익과 지배를 최고의 목적으로 삼으면 점차 지옥(적) 상태가 형성됩니다. 따라서 천국과 지옥의 차이는 장소의 차이가 아니라 사랑의 차이입니다.

 

지옥 상태의 가장 큰 특징은 자기 사랑이 삶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기 사랑이란 자신을 돌보는 건강한 자존감이 아니라, 자신을 모든 것의 중심에 두고 다른 사람과 세상, 심지어 주님까지도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수단으로 삼으려는 사랑을 말합니다. 이러한 사랑은 처음에는 작아 보여도 점차 지배욕으로 발전, 자신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을 미워하고, 진리보다 자신의 생각을 더 신뢰, 선보다 자신의 이익을 더 중요하게 여기게 만듭니다.

 

이러한 상태가 계속되면 사람은 점점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불편하게 느끼기 시작합니다. 이전에는 기쁨이었던 말씀이 부담이 되고, 회개를 촉구하는 진리가 간섭처럼 느껴지며, 사랑과 섬김보다 인정과 성공이 더 중요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바로 지옥 상태가 깊어지는 과정이라고 설명합니다. 지옥은 갑자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날마다 무엇을 사랑하며 살아가는가에 따라 조금씩 형성됩니다.

 

또한 지옥 상태는 거짓과 악이 서로를 강화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먼저 악한 사랑이 생기면, 사람은 그 사랑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거짓을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거짓은 다시 악한 사랑을 더욱 굳게 만듭니다. 이처럼 악과 거짓은 서로를 지탱하며, 사람의 마음을 점점 더 닫아 버립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지옥을 단순히 악의 세계가 아니라, 악과 거짓이 완전히 결합된 상태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는 누구도 지옥 상태에 머물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언제나 회개의 기회가 있으며, 주님께서는 끊임없이 선과 진리를 보내셔서 사람을 돌이키려 하십니다. 유혹과 시련도 단순한 고통이 아니라, 지옥 상태에서 벗어나 천국 상태로 옮겨 가도록 돕는 섭리의 도구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악을 인정, 주님께 도움을 구할 때, 지옥 상태는 점차 무너지고 새로운 천국 상태가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사후에도 사람은 갑자기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상에서 형성된 사랑과 삶의 상태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날 뿐입니다. 그러므로 지옥에 가는 사람은 억지로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평생 사랑한 것과 같은 분위기를 스스로 찾아갑니다. 반대로 천국에 가는 사람도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님으로부터 형성된 천국 상태가 완전히 꽃피게 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지옥 상태(infernal state)는 죽음 이후의 형벌을 강조하는 개념이 아니라, 사람이 지금 이 순간 어떤 사랑을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영적 상태입니다. 사람은 매일의 작은 선택을 통하여 천국 상태를 키워 갈 수도 있고, 지옥 상태를 굳혀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은 단순히 미래의 지옥을 경고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 안에 있는 지옥 상태를 발견,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진리로 그것을 날마다 새롭게 하라고 초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AC.278, 창3:19,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창3:19)AC.278‘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네가

bygrace.kr

 

AC.278, 심화 3, ‘정죄’(condemnation)

AC.278.심화 3. ‘정죄’(condemnation)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정죄’(condemnation)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화를 내시거나 벌을 선고하시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일반적인 기독교에서는 정죄를 하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278.심화

 

3. ‘정죄(condemnation)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정죄(condemnation)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화를 내시거나 벌을 선고하시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일반적인 기독교에서는 정죄를 하나님의 심판이나 형벌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지만, 스베덴보리는 이를 전혀 다르게 설명합니다. 그에게 정죄란 사람이 자신의 사랑과 삶을 통하여 스스로 지옥을 선택한 결과이며, 그 선택에 따라 자신의 상태가 확정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주님은 누구도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사랑 자체이시며 자비 자체이시므로, 모든 사람을 천국으로 인도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선한 사람뿐 아니라 악한 사람에게도 끊임없이 선과 진리를 보내시며, 마지막 순간까지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다. 따라서 정죄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주님의 사랑을 끝까지 거부한 결과로 자신에게 일어나는 상태입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정죄를 하나의 판결’이라기보다 상태의 귀결’로 이해합니다. 사람은 죽은 뒤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서 사랑하고 선택하며 살아온 모습 그대로 영계에 들어갑니다. 그곳에서는 겉으로 감추어졌던 사랑과 의도가 모두 드러나고, 각 사람은 자신과 같은 사랑을 가진 공동체를 스스로 찾아갑니다. 선을 사랑한 사람은 천국을, 악을 사랑한 사람은 지옥을 자신의 집처럼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정죄의 실상입니다.

 

정죄가 스스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자유와도 깊이 관련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에게 자유를 주셨기 때문에, 강제로 천국에 들여보내지 않으십니다. 만일 악을 사랑하는 사람을 억지로 천국에 데려간다면, 그는 천국의 사랑과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극심한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오히려 자신과 같은 사랑이 지배하는 지옥을 더 편안하게 여기며, 그곳으로 돌아가기를 원합니다. 따라서 정죄란 주님께서 밀어내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신의 사랑을 따라 스스로 머물 곳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또한 정죄는 한순간의 실수나 죄 하나 때문에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고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무엇을 사랑하며 살아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거듭나기를 원하는 사람은 비록 많은 연약함이 있을지라도 정죄의 사람이 아닙니다. 반대로 악을 사랑하면서도 그것을 선이라고 정당화하고 끝까지 붙드는 사람이 스스로 정죄의 길을 선택하게 됩니다.

 

이러한 이유로 스베덴보리는 말씀에 나오는 심판’도 주님께서 사람을 임의로 구분하시는 행위라기보다, 사람 안에 있는 사랑이 드러나는 과정으로 설명합니다. 주님의 빛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비치지만, 선한 사람은 그 빛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악한 사람은 그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빛이 사람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빛 앞에서 사람의 본래 상태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심판과 정죄도 이와 같은 원리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정죄는 두려움의 교리가 아니라, 자유와 책임의 교리입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사람을 천국으로 이끄시지만, 그 사랑을 받아들일지 거부할지는 사람 자신의 자유에 맡기십니다. 결국 정죄란 주님께 버림받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끝까지 주님을 거부한 결과 자신이 사랑하는 삶과 공동체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구원이란 주님께서 특별히 몇 사람만 선택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진리를 기꺼이 받아들인 사람이 그 사랑 안에서 영원히 살아가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AC.278, 심화 4, ‘지옥 상태’(infernal state)

AC.278.심화 4. ‘지옥 상태’(infernal state)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지옥 상태’(infernal state)는 단순히 사람이 죽은 뒤 가는 장소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사람의 마음과 삶이 지옥의

bygrace.kr

 

AC.278, 심화 2, ‘시104:29’

AC.278.심화 2. ‘시104:29’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그들이 떨고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즉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 (시104:29) Thou hidest thy faces, they are troubled; thou takest away their breath, th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