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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3위격

 

위 심화 3 설명 중 3위격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요, 이에 대한 설명 좀 부탁합니다. 특히 위격이라는 게 뭔가요? 삼위일체 할 때,   같은 거죠?

 

 

네, 정확히 보신 것처럼 3위격’의 위격’은 삼위일체’에서 말하는 그 (位)’와 같은 개념입니다. 다만 이 용어가 일상 언어가 아니라 신학적 번역어이다 보니, 정확히 풀어 이해해 두시면 이후 논의가 훨씬 또렷해집니다.

 

먼저 위격(位格)’이라는 말의 원어는 라틴어 persona’이고, 영어로도 그대로 person’이라고 번역됩니다. 그런데 여기서의 person’은 우리가 일상에서 말하는 한 사람, 한 개인’이라는 뜻과는 조금 다릅니다. 신학에서의 위격’은 스스로 인식하고 관계할 수 있는 주체’, 또는 독립된 인격적 중심’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하면 생각하고, 의지, 의도하고, 관계 맺는 주체성’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전통적인 삼위일체 교리에서 말하는 세 위격’은 이렇게 설명됩니다.

 

 아버지’: 신성의 근원적 위격

 아들’: 성육신하신 위격(예수 그리스도)

 성령’: 역사하시는 위격

 

이 셋이 각각 위격’이며, 동시에 본질(신성)은 하나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삼위일체(三位一體)’라는 표현이 나온 것입니다. ‘세 위격이지만 한 본질’이라는 뜻입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입니다.  위격’이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그림이 됩니다. 만약 이것을 우리가 일상적으로 이해하는 세 사람’처럼 받아들이면, 사실상 세 하나님’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도 많은 신학자들이 이 부분을 설명하기 위해 매우 고심해 왔습니다. ‘셋이지만 하나’라는 표현 자체가 인간 언어로는 완전히 풀기 어려운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다른 설명을 제시합니다. 그는 세 위격’이라는 개념을 유지하기보다, 그것을 한 분 주님 안의 세 측면으로 재정리합니다. 곧,

 

 아버지’ = 보이지 않는 신성(존재 자체)

 아들’ = 보이는 신성(성육신하신 주님)

 성령’ = 그 한 분 주님에게서 나와 역사하는 신적 작용

 

이렇게 이해합니다. 그래서 세 위격’이 아니라, ‘한 분 주님의 세 측면 또는 세 가지 방식으로 나타나심’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 차이를 아주 단순하게 비교하면 이렇습니다. 전통 설명으로는 한 하나님 안에 세 위격이 있다’이지만, 스베덴보리 설명으로는 한 주님이 세 방식으로 나타나고 역사하신다’라고 말이지요.

 

여기서 다시 목사님 질문으로 돌아오면, ‘제3위격’이라는 말은 전통 신학에서는 성령 하나님’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곧, ‘삼위일체 가운데 세 번째 위격’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위격’이라는 말 자체는 그냥 자리 하나’가 아니라, ‘하나의 인격적 주체’를 뜻합니다. 그래서 제3위격’이라고 하면, 단순히 순서가 세 번째라는 의미를 넘어서, ‘세 번째 인격적 주체’라는 의미까지 포함하고 있는 표현입니다.

 

위격이란 하나님 안에서 누구처럼 말해지고 관계되는 인격적 모습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래서 삼위일체는 하나님이 세 분이라는 뜻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이 세 가지 인격적 방식으로 나타나신다는 것을 설명하려는 표현입니다.’

 

 

 

AC.96, 심화 3, ‘성령은 내적 감각?’

AC.96.심화 3. ‘성령은 내적 감각?’ 위 AC.96 해설 끝부분에 ‘성령은 단순한 능력이나 열정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분별하고 받아들이는 내적 감각입니다.’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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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성령은 내적 감각?

 

 AC.96 해설 끝부분에 성령은 단순한 능력이나 열정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분별하고 받아들이는 내적 감각입니다.’라는 내용이 나오는데요, 이런 설명은 특히 개신교인들로 하여금 분노하게 할 것 같아요. 세 분 하나님 중 한 분인 성령 하나님을 감히... 하면서 말이죠.

 

 

그 반응, 충분히 예상되는 지점입니다. 특히 전통적인 개신교 신앙 안에서는 성령’이 성령 하나님(제3위격)’으로 확고히 이해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내적 감각’이라고 표현하면 격하한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은 단순히 맞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부정하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는가의 문제’로 풀어 주셔야 오해가 풀립니다.

 

핵심부터 분명히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는 성령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실제적인 방식으로 설명’하려는 것입니다. 전통 신학이 성령은 하나님이시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성령의 신적 근원’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그다음 질문,  그렇다면 그 성령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떻게 실제로 작용하시는가?’를 끝까지 밀고 들어갑니다. 그 결과 나온 설명이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신적 진리의 발출’, 그리고 그것이 인간 안에서 분별하고 받아들이는 내적 감각’으로 경험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전환이 하나 있습니다. 전통 표현인 성령은 하나님이시다’라는 표현은 존재에 대한 선언인 반면, 스베덴보리 설명인 성령은 주님으로부터 나와 인간 안에서 역사하는 방식이다’라는 설명은 작용과 경험에 대한 설명이라는 것입니다. 즉, 둘은 서로를 부정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다른 층위의 설명’이라는 것이지요. 하나는 누구인가’를 말하고, 다른 하나는 어떻게 역사하는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걸 조금 더 안전하게 풀어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실제로 우리 안에서 어떻게 역사하실까요? 스베덴보리는 그 역사하심이 우리가 진리를 깨닫고, 선을 분별하고, 주님을 향해 마음이 움직이는 내적 감각으로 경험된다고 설명합니다.’

 

이렇게 표현하면 성령 = 내적 감각’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  내적 감각으로 경험된다’는 구조가 됩니다. 이 차이가 매우 중요합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개신교 안에서도 사실 이와 유사한 경험 언어는 이미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았다

 마음에 확신이 온다

 깨달음이 온다

 양심에 찔린다

 

이런 표현들은 모두 성령의 역사’가 인간 안에서 어떻게 느껴지는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부분을 더 정교하게, 더 체계적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이 실제로 우리 안에서 어떻게 역사하시는지를 생각해 보자  그 역사하심은 결국 우리가 진리를 분별하고 선을 느끼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그것을 내적 감각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성령을 내적 감각이라고 하는 것은 성령 하나님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역사하심이 우리 안에서 어떻게 실제로 경험되는지를 설명하는 표현입니다.’

 

 

 

AC.96, 심화 4, ‘제3위격’

AC.96.심화 4. ‘제3위격’ 위 심화 3 설명 중 ‘제3위격’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요, 이에 대한 설명 좀 부탁합니다. 특히 ‘위격’이라는 게 뭔가요? ‘삼위일체’ 할 때, 그 ‘위’ 같은 거죠?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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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6, 심화 2, ‘요20:22’

AC.96.심화 2. ‘요20: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요20:22) He breathed on them and said, Receive ye the Holy Spirit (John 20:22). 이 구절은 Gospel of John 20:22로, AC.96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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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0: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20:22) He breathed on them and said, Receive ye the Holy Spirit (John 20:22).

 

 

이 구절은 Gospel of John 20:22로, AC.96의 맥락에서는 콧김(숨)’이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주님의 생명이 인간에게 전달되는 방식’을 드러내는 핵심 장면으로 이해됩니다. 앞에서 애4:20 콧김’이 생명 자체’를 의미한다고 보셨다면, 여기서는 그 생명이 어떻게 주어지는가’가 직접적으로 나타납니다.

 

먼저 숨을 내쉬며(breathed on them)라는 행위 자체가 중요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제스처가 아니라,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사람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신 장면과 정확히 연결되는 행동입니다. 즉,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단순히 말씀으로만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 곧 신적 생명의 실제 유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성령’은 앞서 설명드린 것처럼 또 다른 인격’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신적 진리의 발출, 곧 주님의 실제 작용입니다. 따라서 이 장면은 이렇게 읽히는 것이 정확합니다. ‘주님이 자신의 생명을 그들에게 불어넣으시며, 그 생명이 이제 그들 안에서 진리와 능력으로 역사하게 하신다.’

 

이것을 AC.96 콧김 개념과 연결하면 매우 선명해집니다.

 

 콧김’ = 생명 자체

 숨을 내쉬심’ = 그 생명의 전달

 성령’ = 그 생명이 인간 안에서 실제로 역사하는 형태

 

즉, 이 세 가지가 하나의 구조입니다. 그래서 이 장면은 단순히 성령을 주셨다’는 사건이 아니라, ‘인간의 생명이 어디서 오는가, 그리고 어떻게 계속 유지되는가’를 보여주는 매우 깊은 계시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이 일이 부활 이후’에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이는 주님의 인성이 완전히 영화롭게 된 이후, 곧 신성과 완전히 하나가 된 상태에서, 그 생명이 더 직접적으로 인간에게 전달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 숨을 내쉬심’은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이제는 주님의 생명이 더 내적으로, 더 직접적으로 인간 안에 역사하기 시작한다’는 전환점입니다.

 

주님은 말씀만 주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불어넣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것은 단순히 가르침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20:22는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주님과 인간 사이의 생명 관계’를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AC.96, 심화 3, ‘성령은 내적 감각?’

AC.96.심화 3. ‘성령은 내적 감각?’ 위 AC.96 해설 끝부분에 ‘성령은 단순한 능력이나 열정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분별하고 받아들이는 내적 감각입니다.’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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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6, 심화 1, ‘애4:20’

AC.96.심화 1. ‘애4:20’ AC.96 본문에 ‘이로부터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이, 곧 주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이를 가리켜 ‘콧김’(breath of the nostrils)이라 하는데, 이는 예레미야 애가에 기록된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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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4:20

 

AC.96 본문에 이로부터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이, 곧 주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이를 가리켜 콧김(breath of the nostrils)이라 하는데, 이는 예레미야 애가에 기록된 바와 같습니다라 하며, 아래 애4:20을 인용합니다. 우리의 콧김 곧 여호와께서 기름 부으신 자가 그들의 함정에 빠졌음이여 우리가 그를 가리키며 전에 이르기를 우리가 그의 그늘 아래에서 이방인들 중에 살겠다 하던 자로다 (4:20)

 

 

이 구절은 Book of Lamentations 4:20인데, AC.96에서는 이 말씀을 통해 ‘주님이 인간 안에서 어떻게 생명으로 작용하시는가’를 매우 깊은 상응으로 풀어냅니다. 처음 읽으면 ‘콧김’이라는 표현이 다소 낯설고 낮게 느껴질 수 있지만, 사실은 성경 전체에서 ‘생명’과 가장 직접적으로 연결된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먼저 ‘콧김(breath of the nostrils)이라는 말을 보시면, 이것은 단순한 호흡이 아니라 ‘생명의 숨결’을 의미합니다. 창세기에서 주님이 사람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는 말씀과 같은 맥락입니다. 즉, ‘콧김’은 인간이 살아 있는 이유, 곧 주님으로부터 들어오는 생명 자체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표현을 단순한 육체적 호흡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유입’, 곧 가장 근원적인 영적 생명으로 봅니다.

 

이제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표현을 함께 보면, 이것은 왕이나 제사장을 가리키는 역사적 표현이기도 하지만, 속뜻에서는 ‘주님 자신’, 곧 신적 진리와 사랑으로 충만하신 분을 가리킵니다. ‘기름 부음’은 언제나 사랑과 선의 충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단순히 어떤 왕의 죽음을 애도하는 말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과 같은 존재’, 곧 주님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읽힙니다.

 

이 둘을 합치면 매우 깊은 의미가 나옵니다. ‘우리의 콧김, 곧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이 표현은 ‘우리의 생명 자체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스스로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계속 생명을 받아야만 존재하는 존재라는 선언입니다. 이것이 AC.96에서 이 구절을 인용하는 핵심 이유입니다.

 

이어지는 ‘우리가 그의 그늘 아래에서 살겠다’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그늘’은 보호와 동시에 임재를 의미합니다. 곧, ‘우리는 그분의 보호와 임재 아래에서만 살 수 있는 존재다’라는 인식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신앙 고백이 아니라, 존재의 구조에 대한 인식입니다.

 

그런데 애가의 문맥에서는 이 ‘콧김’이 ‘함정에 빠졌다’고 합니다. 이것은 문자적으로는 왕의 몰락을 말하지만, 영적으로는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멀어질 때, 생명의 근원을 잃어버린 것처럼 느끼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실제로 주님의 생명이 끊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 쪽에서 그것을 차단하고 있기 때문에, 마치 ‘콧김이 사라진 것 같은’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단순한 비극의 묘사가 아니라, 매우 깊은 영적 원리를 담고 있습니다. ‘인간의 생명은 전적으로 주님께 달려 있으며, 그분의 임재 안에서만 참으로 살 수 있다.’

 

성경에서 콧김은 단순한 숨이 아니라 생명 자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콧김이라고 할 때는, 우리의 생명이 바로 주님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처음에는 낯설었던 이 표현이 오히려 ‘주님과 인간의 관계를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표현’으로 열리게 됩니다.

 

 

 

AC.96, 심화 2, ‘요20:22’

AC.96.심화 2. ‘요20: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요20:22) He breathed on them and said, Receive ye the Holy Spirit (John 20:22). 이 구절은 Gospel of John 20:22로, AC.96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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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6, 창2:7,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셨다’ 오해 바로잡기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2:7) AC.96 ‘여호와 하나님이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Jehovah God breathed into his nostr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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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2:7)

 

AC.96

 

여호와 하나님이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Jehovah God breathed into his nostrils)라고 하는 것에 관한 설명입니다. 고대와 말씀에서 (nostrils, 콧구멍)는 그 향기로 인해 기쁨을 주는 모든 것을 뜻하였으며, 이것은 곧 퍼셉션(perception)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여호와께서 번제물 및 그분과 그분의 나라를 표상하는 것들로부터 향기로운 냄새를 맡으셨다(smelled an odor of rest) 반복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랑과 신앙에 속한 것들이 그분께 가장 기쁨이 되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이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셨다(he breathed through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ves) 하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이, 곧 주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이를 가리켜 콧김(breath of the nostrils)이라 하는데, 이는 예레미야 애가에 기록된 바와 같습니다 (4:20). As to its being said that “Jehovah Go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case is this: In ancient times, and in the Word, by “nostrils” was understood whatever was grateful in consequence of its odor, which signifies perception. On this account it is repeatedly written of Jehovah, that he “smelled an odor of rest” from the burnt offerings, and from those things which represented him and his kingdom; and as the things relating to love and faith are most grateful to him, it is said that “he breathed through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ves.” Hence the anointed of Jehovah, that is, of the Lord, is called the “breath of the nostrils” (Lam. 4:20).

 

우리의 콧김 곧 여호와께서 기름 부으신 자가 그들의 함정에 빠졌음이여 우리가 그를 가리키며 전에 이르기를 우리가 그의 그늘 아래에서 이방인들 중에 살겠다 하던 자로다 (4:20)

 

또한 주님 자신도 요한복음에서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성령을 받으라(breathing on his disciples) 하심으로 같은 걸 의미하셨습니다 (20:22). And the Lord himself signified the same by “breathing on his disciples,” as written in John: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20:22) He breathed on them and said, Receive ye the Holy Spirit (John 20:22).

 

 

해설

 

이 글은 창세기 2 7절의 가장 섬세하고도 오해되기 쉬운 표현, 곧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셨다’라는 말을 풀어 주는 대목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표현을 생물학적 행위나 신체 묘사로 읽지 않습니다. 그는 고대인의 언어 감각과 말씀의 상응 구조 속에서 이 표현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고대에 ‘’, 즉 ‘콧구멍’은 단순히 호흡 기관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향기를 느끼는 자리였고, 곧 ‘기쁨을 분별하는 감각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콧구멍’을 퍼셉션과 직접 연결합니다. 퍼셉션이란, 선과 진리가 주님으로부터 오는 걸 즉각적으로 알아차리는 능력입니다. 이는 논리나 추론이 아니라, 향기를 맡듯이 자연스럽게 분별되는 인식입니다.

 

이 배경 위에서, 성경에 반복해서 나오는 ‘여호와께서 향기로운 냄새를 맡으셨다’는 표현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실제 냄새를 맡으셨다는 말이 아니라, ‘사랑과 신앙에서 나온 것들을 기쁘게 받으신다’는 뜻입니다. 번제물과 희생 제사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주님과 그분의 나라를 표상하는 상징이었습니다. 그 상징이 사랑과 신앙에서 나올 때, 그것은 ‘향기’가 됩니다.

 

그래서 ‘코로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셨다’는 말은, 주님께서 사람에게 생물학적 생명을 주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앞에서 말씀드린 바입니다. 여기서 말씀드리는 것은, ‘사랑과 신앙의 생명을 퍼셉션의 차원에서 주셨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은 사람에게 무엇이 선하고 참된지를 느끼고 기뻐할 수 있는 능력을 불어넣으신 것입니다.

 

이 맥락에서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이’가 ‘콧김의 숨’이라 불린다는 표현이 이해됩니다. 이는 단순한 시적 표현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생명과 퍼셉션의 흐름을 가리킵니다. 기름 부음은 사랑의 상징이며, 그 사랑이 퍼셉션을 통해 살아 움직일 때, 그것은 ‘’으로 표현됩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요한복음의 장면을 연결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 하신 장면은, 바로 이 창세기적 의미를 다시 실현한 사건입니다. 이는 새로운 교회, 새로운 인간에게 ‘퍼셉션의 생명’이 주어지는 순간입니다. 성령은 단순한 능력이나 열정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분별하고 받아들이는 내적 감각입니다.

 

AC.96은 이렇게 말합니다. 생명의 숨은 폐로 들어가는 공기가 아니라, ‘사랑과 신앙을 기쁨으로 인식하는 퍼셉션의 생명’이라고 말입니다. 이 숨이 있을 때, 사람은 비로소 주님의 생명을 자기 안에서 살아 있는 것으로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이 퍼셉션이야말로,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가장 본래적이었고, 천적 인간의 가장 깊은 특징이었습니다.  

 

 

심화

 

1.4:20

 

 

AC.96, 심화 1, ‘애4:20’

AC.96.심화 1. ‘애4:20’ AC.96 본문에 ‘이로부터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이, 곧 주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이를 가리켜 ‘콧김’(breath of the nostrils)이라 하는데, 이는 예레미야 애가에 기록된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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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2

 

 

AC.96, 심화 2, ‘요20:22’

AC.96.심화 2. ‘요20: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요20:22) He breathed on them and said, Receive ye the Holy Spirit (John 20:22). 이 구절은 Gospel of John 20:22로, AC.96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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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성령은 내적 감각입니다

 

 

AC.96, 심화 3, ‘성령은 내적 감각?’

AC.96.심화 3. ‘성령은 내적 감각?’ 위 AC.96 해설 끝부분에 ‘성령은 단순한 능력이나 열정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분별하고 받아들이는 내적 감각입니다.’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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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위격

 

 

AC.96, 심화 4, ‘제3위격’

AC.96.심화 4. ‘제3위격’ 위 심화 3 설명 중 ‘제3위격’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요, 이에 대한 설명 좀 부탁합니다. 특히 ‘위격’이라는 게 뭔가요? ‘삼위일체’ 할 때, 그 ‘위’ 같은 거죠?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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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5, 창2:7, 겉 사람을 ‘사람’ 되게 하는 사랑의 생명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2:7) AC.95 여기서는 겉 사람의 생명이 다루어집니다. 앞의 두 절에서 그의 신앙, 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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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2:7)

 

AC.95

 

여기서는 겉 사람의 생명이 다루어집니다. 앞의 두 절에서 그의 신앙, 그러니까 이해의 생명이 다루어졌다면, 이 절에서는 그의 사랑, 곧 의지의 생명이 다루어집니다. 지금까지 겉 사람은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는 걸 마음 내켜 하지 않았고, 대신 그와 끊임없이 싸우고 있었으므로, 이때에는 겉 사람은 사람(man)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천적 상태가 되면서,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기 시작, 이로 인해 겉 사람 또한 이제 사람(man)이 됩니다. 이는 신앙의 생명과 사랑의 생명으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신앙의 생명은 그를 준비시키지만, 그를 사람(man)이 되게 하는 것은 사랑의 생명입니다. The life of the external man is here treated of—the life of his faith or understanding in the two former verses, and the life of his love or will in this verse. Hitherto the external man has been unwilling to yield to and serve the internal, being engaged in a continual combat with him, and therefore the external man was not then “man.” Now, however, being made celestial, the external man begins to obey and serve the internal, and it also becomes “man,” being so rendered by the life of faith and the life of love. The life of faith prepares him, but it is the life of love which causes him to be “man.”

 

 

해설

 

이 글은 창세기 2 7절을 둘러싼 설명을 한 단계 더 깊이 밀어 넣습니다. AC.94에서 겉 사람이 생명의 숨을 받아 살아나게 되었음을 말했다면, AC.95는 그 생명이 ‘어떤 질서로 겉 사람 안에 자리 잡는가’를 분명히 구분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생명을 하나로 뭉뚱그리지 않습니다. 그는 겉 사람의 생명 안에서도, 신앙의 생명과 사랑의 생명을 분리하여 설명합니다.

 

먼저 앞의 두 절에서 다루어진 것은 신앙, 곧 이해의 생명입니다. 이는 겉 사람이 무엇이 참인지 알고 분별할 수 있게 되는 단계입니다. 이 단계에서 겉 사람은 여전히 속 사람과 긴장 관계에 있습니다. 그는 진리를 알지만, 그것 따르기를 즐거워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이때까지 겉 사람은 아직 ‘사람’이라 불리지 않습니다. 지식과 이해만으로는, 아직 사람의 본질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이 절에서 다루어지는 것이 사랑의 생명, 곧 의지의 생명입니다. 여기서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겉 사람이 더 이상 속 사람과 싸우지 않고, 대신 그를 섬기기 시작합니다. 순종이 강요가 아니라, 의지의 움직임이 됩니다. 이때 비로소 겉 사람은 속 사람과 하나의 방향을 갖게 되고, 그래서 비로소 ‘사람’이라 할 수 있는 상태에 들어갑니다.

 

스베덴보리는 매우 단호하게 말합니다. 지금까지 겉 사람은 사람이 아니었다고 말입니다. 이는 충격적인 표현처럼 들릴 수 있지만, 그 의미는 분명합니다. 겉 사람은 생명의 질서에 참여하지 않는 한, 단지 기능과 형식일 뿐입니다. 그가 진정으로 ‘사람’이 되는 순간은, 속 사람의 사랑이 그의 의지를 움직이기 시작할 때입니다.

 

여기서 신앙과 사랑의 관계가 명확히 정리됩니다. 신앙의 생명은 준비합니다. 이해를 열고, 길을 닦고, 질서를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준비 위에 사랑의 생명이 와야 합니다. 사랑의 생명이 겉 사람의 의지를 사로잡을 때, 사람은 더 이상 분열된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생명으로 움직이는 존재가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마지막 문장에서 결론을 압축합니다. 신앙의 생명은 그를 준비시키지만, 그를 ‘사람’ 되게 하는 것은 사랑의 생명이라고 말입니다. 이는 스베덴보리 인간학의 핵심 원리 중 하나입니다. 사람을 사람 되게 하는 것은, 무엇을 아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사랑하느냐’입니다.

 

AC.95는 이렇게 창세기 2장의 ‘사람 형성’을 마무리합니다. 겉 사람은 신앙으로 빚어지고, 사랑으로 살아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주님으로부터 온 것일 때, 비로소 겉 사람과 속 사람은 하나의 사람으로 서게 됩니다.

 

 

 

AC.96, 창2:7,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셨다’ 오해 바로잡기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2:7) AC.96 ‘여호와 하나님이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Jehovah God breathed into his nostr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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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4, 창2:7, 겉 사람이 비로소 ‘사람’이 되는 과정(AC.94-9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And Jehovah God formed man, dust from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ves, and man became a l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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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And Jehovah God formed man, dust from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ves, and man became a living soul. (2:7)

 

AC.94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form man, dust from the ground)는 그의 겉 사람을 형성하셨다는 뜻입니다. 이는 그 이전에는 겉 사람이 아직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며, 그래서 앞 절(5)에서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no man to till the ground)라고 한 것입니다.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breathe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ves)는 그에게 신앙과 사랑의 생명을 주셨다는 뜻이며,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man became a living soul)는 그의 겉 사람 또한 살아 있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To “form man, dust from the ground” is to form his external man, which before was not man; for it is said (verse 5) that there was “no man to till the ground.” To “breathe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ves” is to give him the life of faith and love; and by “man became a living soul” is signified that his external man also was made alive.

 

 

해설

 

이 글은 창세기 2 7절을 둘러싼 가장 핵심적인 오해를 바로잡는 자리입니다. 흔히 이 구절을 ‘인류 최초 인간의 육체적 창조’로 읽어 왔지만,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전혀 다른 차원에서 해석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의 형성’은 육체의 시작이 아니라, ‘겉 사람이 비로소 사람이 되는 과정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는 표현을 겉 사람의 형성으로 해석합니다. 이는 매우 결정적인 전환입니다. 겉 사람은 그 자체로 자동적으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앞 절을 다시 불러옵니다. 거기 ‘땅을 경작할 사람이 없었다’는 말은, 단순히 노동 인구가 없었다는 뜻이 아니라, ‘겉 사람이 아직 주님의 질서 안에서 기능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겉 사람은 존재는 하고 있었지만, 아직 ‘사람’이라 부를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이라는 표현은 겉 사람의 가장 외적이고 낮은 차원을 가리킵니다. 흙은 생명의 근원이 아니라, 생명이 형성되어 나타나는 자리입니다. 겉 사람은 바로 그런 자리입니다. 그 자체로는 생명을 가지지 않지만, 속 사람으로부터 생명이 주어질 때, 비로소 살아 움직이게 됩니다. 그래서 ‘형성되었다’라는 말이 사용됩니다. 이는 목적과 질서가 주어졌다는 뜻이지, 생명이 이미 충만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제 핵심은 ‘생명의 숨’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한 생물학적 호흡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것은 ‘신앙과 사랑의 생명’입니다. 즉, 생명의 숨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내적 생명이며, 속 사람의 생명입니다. 이 숨이 불어넣어질 때, 비로소 겉 사람은 단순한 외적 구조를 넘어, 속 사람과 연결된 존재가 됩니다.

 

그래서 마지막 문장이 중요합니다.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는 말은, 속 사람만 살아난 것이 아니라, ‘겉 사람 또한 살아나게 되었다’는 선언입니다. 이전까지 겉 사람은 도구였고, 형체였으며, 가능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속 사람의 생명이 그 안에 흐르면서, 겉 사람도 함께 살아 움직이게 됩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람’입니다.

 

이 구조는 앞서 반복적으로 설명된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를 다시 한번 명확히 합니다. 겉 사람이 먼저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속 사람의 생명이 먼저 주어지고, 그 생명이 겉 사람을 살립니다. 그래서 천적 상태에서는 겉 사람이 억지로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미 살아 있기 때문에, ‘기쁘게 섬깁니다’.

 

AC.94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은 흙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생명의 숨을 받아 겉 사람까지 살아났기 때문에 사람이 되었다고 말입니다. 이는 인간 존재를 육체 중심으로 이해하는 모든 사고를 근본에서부터 전환시키는 설명입니다.

 

이 단락에 이르면, 창세기 2장의 ‘사람 창조’는 더 이상 과거의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반복되는 이야기입니다. 겉 사람이 아직 살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 주님께서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실 때, 사람은 다시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그때, 겉 사람과 속 사람은 하나의 생명 안에서 함께 숨 쉬게 됩니다.

 

 

 

AC.95, 창2:7, 겉 사람을 ‘사람’ 되게 하는 사랑의 생명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2:7) AC.95 여기서는 겉 사람의 생명이 다루어집니다. 앞의 두 절에서 그의 신앙, 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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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3, 창2:5-6, 말씀 전체에 일관되게 흐르는 ‘천적 인간의 상태’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창2:5, 6)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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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3.심화

 

5. 16:7에서 태고교회를 말하면서?’

 

 AC.93 본문을 보면, 또한 이 상태가 밭의 성장(growth of the field)에 비유된다는 것은, 에스겔에서 태고교회를 말하면서 분명히 드러납니다.’라고 하는데요, 이 겔16:7 어디를 봐서 이 구절이 태고교회를 말하는 것인가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16:7 한 구절만 떼어 놓고 보면 태고교회’를 직접적으로 말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16 전체 문맥’을 하나의 상징적 서사로 읽으면서, 그 시작 부분(특히 1-8절)을 태고교회 상태’로 이해합니다. 즉, 한 구절이 아니라 전체 흐름 속에서 그 의미가 드러난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겔16 본문

 

먼저 Book of Ezekiel 16장을 전체적으로 보면, 한 여인이 태어나고, 버려지고, 주님에 의해 길러지고, 아름답게 되고, 결국 타락하는 긴 이야기 구조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여인’을 단순한 개인이 아니라 교회’를 상징하는 존재로 봅니다. 이건 AC 전반에서 일관된 원리인데, ‘여인’, ‘신부’, ‘아내’는 언제나 교회를 의미합니다.

 

이제 구조를 단계로 보면 이렇게 됩니다.

 

 1-5절: 버려진 상태  아직 형성되지 않은 교회

 6-8절: 주님이 살리시고 기르심  순수하게 주님에 의해 형성되는 상태

 이후: 점점 장식되고 번영함  풍성해진 교회

 후반: 타락  교회의 변질

 

이 중에서 6-8절 구간’, 곧 목사님께서 질문하신 겔16:7이 포함된 부분이 중요합니다. ‘내가 너를 들의 풀같이 많게 하였다’, ‘네가 자라 아름다워졌다 하는 이 부분은 인간이나 교회가 자기 힘으로 만든 상태’가 아니라, ‘주님에 의해 자연스럽고 순수하게 자라난 상태’를 묘사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걸 태고교회’로 보는 이유는 바로 이 특징 때문입니다. 태고교회는

 

 퍼셉션으로 주님을 직접 아는 상태

 자기 지식이나 논증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생명’으로 사는 상태

 인위적 형식보다 자연적이고 순수한 성장’의 상태

 

입니다. 그런데 겔16:7 들의 풀같이 자람’, ‘아름다움에 이름’은 바로 이런 비인위적이고 순수한 생명 성장’을 묘사하는 전형적인 상응 표현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문자적으로 보면 그냥 번성했다’는 말이지만, 상응적으로 보면, ‘주님이 직접 심고 기르신 순수한 교회 상태’이고, 이것이 바로 태고교회의 본질과 맞아떨어지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 = 태고교회’라고 단순 대응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 구절이 묘사하는 상태의 성격이 태고교회의 상태와 동일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AC.93의 문장도 이렇게 이해하시면 정확합니다.

 

밭의 성장’은 주님에 의해 자연스럽게 자라는 상태’를 의미하는데, 이 상태가 겔16에서 나타나고, 그것이 바로 태고교회의 상태와 같다는 뜻입니다.

 

16:7이 직접 태고교회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구절이 보여주는 주님이 심고 자라게 하시는 순수한 상태가 바로 태고교회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왜 이 구절을 태고교회로 보았는가’가 하는 이유입니다.

 

 

 

AC.93, 창2:5-6, 말씀 전체에 일관되게 흐르는 ‘천적 인간의 상태’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창2:5, 6)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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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3, 심화 4, ‘사60:21’

AC.93.심화 4. ‘사60:21’ 그들은 내가 심은 가지요 내가 손으로 만든 것으로서 (사60:21) A shoot of the Lord’s planting, and a work of the hands of Jehovah God (Isa. 60:21). 이 구절, Book of Isaiah 60:21은 AC.93의 맥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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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3.심화

 

4. 60:21

 

그들은 내가 심은 가지요 내가 손으로 만든 것으로서 (60:21) A shoot of the Lords planting, and a work of the hands of Jehovah God (Isa. 60:21).

 

 

이 구절, Book of Isaiah 60:21 AC.93의 맥락에서 거듭남 이후의 인간 상태가 전적으로 주님께 속한 것’임을 매우 깊이 있게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앞에서 계속 반복되던 주제,  모든 것이 주님의 일이다’가 여기서는 존재 자체가 주님의 심으심’이라는 표현으로 한층 더 직접적으로 나타납니다.

 

먼저 내가 심은 가지(a shoot of the Lord’s planting)를 보시면, 여기서 가지’는 단순한 식물의 일부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나온 생명의 연속, 곧 인간 안에 시작된 새로운 생명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심었다’는 것은 그 생명이 인간에게서 자생적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이 시작하시고 뿌리를 내리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거듭남은 인간이 만들어낸 변화가 아니라, ‘주님이 심으신 생명’입니다.

 

이어 내 손으로 만든 것(a work of the hands of Jehovah God)이라는 표현은 그 의미를 더 분명히 합니다. ‘’은 능력과 실제 작용을 의미하므로, 이것은 단순한 선언이 아니라 주님의 실제 역사로 이루어진 상태’라는 뜻입니다. 앞에서 계속 보신 his work’, ‘주님의 일’이라는 표현이 여기서는 너희 존재 자체가 그 일이다’라는 수준까지 확장됩니다.

 

이 구절에서 아주 중요한 전환은 이것입니다. 이전 단계에서는 주님이 우리 안에서 일하신다’는 인식이었다면, 여기서는 그 결과로 형성된 나 자신 자체가 주님의 작품이다’라는 인식으로 넘어갑니다. 그래서 더 이상 내가 무엇을 했다’가 중심이 아니라, ‘나는 주님이 하신 일의 결과이다’가 중심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천적 상태의 특징입니다.

 

이것을 AC.93 전체 흐름 안에서 보면 이렇게 연결됩니다.

 

1. 악한 것이 잠잠해지고(평안)

2. 진리가 내리고(비)

3. 선이 열매 맺고(열매)

4. 생명이 자라며(성장)

5. 결국 그 존재 자체가 주님의 심으심’으로 인식되는 상태에 이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매우 깊은 자기 인식의 변화입니다. ‘나는 나로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계속해서 존재하는 자이다’라는 인식입니다.

 

거듭남의 마지막 단계에서는 내가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존재 자체가 이미 주님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사야 60:21은 단순한 회복의 약속이 아니라, ‘인간이 어떤 존재로 완성되는가’를 보여주는 매우 깊은 선언입니다.

 

 

 

AC.93, 심화 5, ‘겔16:7에서 태고교회를 말하면서?’

AC.93.심화 5. ‘겔16:7에서 태고교회를 말하면서?’ 위 AC.93 본문을 보면, ‘또한 이 상태가 ‘밭의 성장’(growth of the field)에 비유된다는 것은, 에스겔에서 태고교회를 말하면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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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3, 심화 3, ‘겔16:7’

AC.93.심화 3. ‘겔16:7’ 내가 너를 들의 풀같이 많게 하였더니 네가 크게 자라고 심히 아름다우며 (겔16:7) I have caused thee to multiply as the growth of the field, and thou hast increased and hast grown up, and hast come 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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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3.심화

 

3. 16:7

 

내가 너를 들의 풀같이 많게 하였더니 네가 크게 자라고 심히 아름다우며 (16:7) I have caused thee to multiply as the growth of the field, and thou hast increased and hast grown up, and hast come to excellent ornaments (Ezek. 16:7).

 

 

이 구절은 Book of Ezekiel 16:7로, AC.93의 흐름에서는 안식 상태에 들어간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성장과 아름다움의 확장’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앞에서 보신 에스겔 34장의 평안과 열매가 질서가 잡힌 상태’라면, 여기서는 그 상태 위에서 생명이 풍성하게 자라나는 모습’이 강조됩니다.

 

먼저 내가 너를 들의 풀같이 많게 하였다’는 표현을 보시면, 여기서 ’은 자연 상태, 아직 인위적으로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를 의미하고, ‘’은 가장 기초적인 생명, 곧 선과 진리의 첫 싹과 같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주님께서 인간 안에 생명의 시작을 주시고, 그것을 자라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중요한 점은 내가...많게 하였다’는 표현입니다. 여기서도 반복되듯이, 성장의 근원은 인간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그다음 네가 크게 자라고’는 단순한 양적 증가가 아니라, ‘내적 생명의 확장’을 의미합니다. 처음에는 작은 이해와 작은 선에서 시작했지만, 점점 더 깊어지고 넓어지며 삶 전체를 채워가는 상태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보신 비가 내리는 것’, ‘열매를 맺는 것’과 연결되는 계속적인 성장의 단계입니다.

 

이어 심히 아름다우며’, 또는 영어의 excellent ornaments’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여기서 아름다움’은 외적인 장식이 아니라 질서가 완성된 상태에서 드러나는 조화’를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아름다움’은 언제나 선과 진리가 올바르게 결합된 상태’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내적 질서가 바로 서면, 그 사람 전체가 하나의 조화로운 아름다움으로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AC.93의 문맥과 연결하면 이렇게 됩니다. 여섯 날의 싸움을 지나 안식에 들어간 사람은 단지 쉬는 상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계속 자라고 풍성해지며, 그 결과 그의 삶 전체가 아름다움’, 곧 질서 있는 조화로 드러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안식은 정지가 아니라 질서 안에서의 생명력 있는 성장’입니다.

 

주님 안에서의 삶은 멈추는 것이 아니라, 더 깊고 더 아름답게 자라는 삶입니다.’

 

이 구절은 단순한 번영의 약속이 아니라, ‘주님이 이루신 질서 안에서 인간이 어떻게 풍성하고 조화롭게 변화되는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AC.93, 심화 4, ‘사60:21’

AC.93.심화 4. ‘사60:21’ 그들은 내가 심은 가지요 내가 손으로 만든 것으로서 (사60:21) A shoot of the Lord’s planting, and a work of the hands of Jehovah God (Isa. 60:21). 이 구절, Book of Isaiah 60:21은 AC.93의 맥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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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3, 심화 2, ‘호6:2-3’

AC.93.심화 2. ‘호6:2-3’ 2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3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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