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PR.005 | 개신교인의 무의식 속 오류와 뒤섞인 신앙 100선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거야. 삶과 행위는 구원과 관계없어’ - 믿음에서 삶을 떼어 놓을 때 사라지는 구원의 본질

 

해설

개신교 신앙에서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가르침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선행이나 공로로 구원을 얻을 수 없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하거나 종교적 행위를 통해 구원을 획득하려는 인간의 교만을 경계한다는 점에서 귀중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이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것이므로 삶과 행위는 구원과 관계없다’는 생각으로 발전한다면 문제는 전혀 달라집니다. 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실제로는 이웃을 미워하고, 자기 욕망을 위해 다른 사람을 해치며, 악을 죄로 여기지도 않는다면, 과연 그의 믿음은 그를 구원하는 참된 믿음일까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이 질문은 단순히 믿음과 행위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를 묻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믿음이란 무엇이며, 주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신다는 것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기독교 신앙의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먼저 이 명제를 개신교 전체의 공식 교리로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종교개혁 전통의 ‘오직 믿음’(sola fide)은 일반적으로 선행이 칭의의 근거나 공로가 될 수 없다는 뜻이지, 선행이 전혀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실제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1장 2항은 믿음이 칭의의 유일한 수단이지만,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 안에서 그 믿음은 홀로 있지 않고 다른 구원의 은혜들과 함께하며 사랑으로 역사한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제16장에서는 선행을 참되고 살아 있는 믿음의 열매와 증거라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삶과 행위는 구원과 관계없다’는 말은 엄밀한 개혁주의 교리를 그대로 표현한 것이라기보다, 칭의와 성화의 구별이 일상적인 신앙 언어 속에서 지나치게 단순화된 결과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스베덴보리와 종교개혁 신학 사이의 실제적인 차이도 남아 있습니다. 종교개혁 전통이 칭의를 설명할 때 믿음과 행위의 역할을 엄격하게 구별한다면, 스베덴보리는 참된 믿음 자체가 체어리티와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관심은 특정 교단을 잘못 이해하여 비판하는 데 있지 않고, 구원의 본질에서 믿음과 삶을 분리할 수 있는가를 살피는 데 있습니다.

 

이 문제의 출발점은 로마서 3장 28절입니다. 바울은 사람이 율법의 행위와 관계없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선언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 16절 역시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인간이 율법을 준수하거나 자신의 종교적 공로를 쌓아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 율법의 지위,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문맥을 함께 살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들을 읽으면서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지 않는다’는 가르침을 곧바로 ‘어떤 선한 행위도 구원과 관계없다’는 결론으로 확대하면, 바울의 의도를 지나치게 단순화하게 됩니다. 바울 자신도 갈라디아서 5장 6절에서 중요한 것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라고 말하며, 로마서 2장 6절로 7절에서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바울에게도 믿음은 단순한 지적 동의나 언어적 고백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참된 믿음은 새로운 생명과 관계되며, 그 생명은 실제 삶에서 나타납니다.

 

여기서 반드시 함께 읽어야 할 말씀이 야고보서 2장 14절로 26절입니다. 야고보는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행함이 없다면 그 믿음이 그를 구원할 수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특히 가난한 형제나 자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라고 말하는 사람의 예를 통해, 실제 사랑이 없는 믿음의 공허함을 드러냅니다. 이어 17절에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선언하고, 26절에서는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처럼 행함 없는 믿음도 죽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구원을 얻기 위해 선행의 점수를 쌓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믿음이라면 그 믿음 안에 실제로 살아 있는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웃의 고통을 보면서도 전혀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다른 사람을 해치는 일을 즐거워하면서도 자신에게 믿음이 있다고 주장한다면, 야고보는 그 믿음의 생명 자체를 질문합니다. 문제는 선행이라는 외적인 증거가 충분한가를 넘어, 선을 사랑하는 내적인 생명이 그 사람 안에 존재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새 예루살렘과 그 천적 교리’(New Jerusalem and Its Heavenly Doctrine) 108항은 이 문제를 매우 명료하게 설명합니다. 체어리티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믿음의 본질도 알 수 없으며, 체어리티가 없는 곳에는 믿음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체어리티와 믿음이 선과 진리처럼 하나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109항에서는 체어리티와 믿음의 관계를 인간의 의지와 이해에 비유합니다. 의지는 선을 받아들이고 이해는 진리를 받아들이는데, 두 능력이 함께 인간의 생명을 이루는 것처럼 체어리티와 믿음도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믿음이 먼저 생기고 그 결과로 선행이 뒤따라온다는 시간적 순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진리는 체어리티의 선과 결합될 때 비로소 살아 있는 믿음이 된다는 존재론적 설명입니다. 이해 속에만 머물러 있는 진리는 아직 그 사람의 생명이 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진리가 의지 안에 받아들여져 사랑의 대상이 되고, 그 사랑이 실제 삶에서 선한 행위로 나타날 때 비로소 그 진리는 인간의 내면에 살아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에게 체어리티가 없는 믿음은 다소 부족한 믿음이 아니라, 구원하는 믿음으로서의 본질을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336항에서 더욱 깊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믿음과 체어리티 가운데 어느 것이 먼저인가 하는 오래된 논쟁을 다루면서, 시간상으로는 믿음이 먼저이지만 목적상으로는 체어리티가 먼저라고 설명합니다. 사람은 일반적으로 먼저 진리를 배우고 이해한 다음, 그 진리에 따라 선을 행하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겉으로 보면 믿음이 선행보다 먼저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배우는 궁극적인 목적은 그 진리를 삶으로 실현하여 선을 행하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집을 짓는 일에 비유합니다. 시간상으로는 기초를 놓고 벽을 세우며 지붕을 만드는 일이 먼저이지만, 집을 짓는 궁극적인 목적은 그 안에서 살아가기 위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의 진리를 배우는 것은 체어리티의 생명에 이르기 위한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선행보다 앞세울 수는 있어도, 선행과 무관한 독립적인 구원의 수단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진리를 아는 것이 목적이 되고 그 진리대로 살아가는 것이 부차적인 일이 되는 순간, 신앙의 수단과 목적이 뒤바뀌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더욱 깊이 살펴보아야 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행위’의 의미입니다. 행위는 단순히 눈에 보이는 행동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모든 행위에는 그 행위를 일으키는 의지와 사랑이 들어 있습니다. 같은 돈을 기부하더라도 어떤 사람은 이웃의 어려움을 진심으로 덜어 주고 싶어서 기부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은 자신의 명성을 높이기 위해 기부할 수 있습니다. 외적인 행동은 같지만 그 안에 있는 사랑은 다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471–476항에서 인간의 삶이 그의 사랑에 따라 형성되며, 행위에는 그 사람의 의지와 생각이 담겨 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인간의 행위를 보신다는 것은 단순히 외적인 행동의 숫자를 세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행위 안에 어떤 사랑이 있었고, 그 사랑이 어떠한 삶을 형성했는지를 보신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구원과 관련된 것은 행위의 외적인 양이 아니라, 선을 사랑하고 악을 멀리하려는 내적인 상태입니다. 그러나 그 내적인 상태는 실제 삶과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행위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행위는 사랑을 실현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선행이 중요하다는 가르침은 결국 행위구원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이 질문은 개신교 신자들이 스베덴보리의 구원론을 접할 때 가장 먼저 제기할 수 있는 반론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자신의 능력으로 선을 만들어 내거나 자신의 공로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모든 참된 선은 오직 주님에게서 옵니다. 인간이 스스로 선하다고 여기고 자신의 행위를 구원의 공로로 삼는다면, 오히려 그 안에는 자기 사랑과 ‘프로프리움’(proprium)이 개입합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이 자신의 의지와 행동 안에서 실제로 작용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 100–128항은 사람이 자신의 악을 마치 스스로 제거하는 것처럼 노력해야 하지만, 그 악을 실제로 제거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심을 설명합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자유와 책임이 동시에 들어 있습니다.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주님께서 자신을 변화시키실 때까지 기다려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노력으로 거듭남을 완성했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인간이 자유롭게 주님께 협력하는 바로 그 과정에서 주님의 신성한 능력이 역사합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와 선행을 강조하는 것은 은혜를 부정하는 일이 아니라, 은혜가 인간의 생명 안에서 어떻게 실제로 작용하는지를 설명하는 일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실제적인 사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오랫동안 교회에 다니고, 성경을 잘 알고, 구원의 확신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가족을 함부로 대하고, 직장에서 약한 사람을 괴롭히며, 자신에게 손해를 끼친 사람을 용서하지 않고, 자신의 탐욕과 교만을 조금도 문제 삼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나는 예수님을 믿으므로 구원받았다. 선행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다’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경우 우리는 그 사람의 최종적인 영적 상태를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되지만, 그의 신앙 이해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가 믿음이라고 부르는 것이 실제로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일인지, 아니면 자신의 삶을 바꾸지 않아도 된다는 종교적 안심을 얻는 일인지 살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7장 21절에서 자신을 향해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마태복음 25장 31절로 46절에서는 굶주린 사람을 먹이고,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것을 주며, 병든 사람과 갇힌 사람을 돌보는 일을 통해 마지막 심판의 장면을 보여 주십니다. 이 말씀들은 주님께서 인간의 종교적 고백만이 아니라 그 고백이 이웃을 향한 실제 사랑으로 나타나는지를 중요하게 여기신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그러나 반대편의 위험도 있습니다. 믿음과 삶의 결합을 강조하다 보면, 어느 순간 사람이 자신의 행위를 끊임없이 평가하면서 ‘나는 오늘 충분히 선하게 살았는가? 이 정도의 선행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가?’라는 불안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이것 역시 주님의 구원하시는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거듭남은 인간이 자신의 선행을 계산하여 합격점을 얻는 과정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내면을 변화시키시고, 그 사람이 점차 악을 미워하며 선을 사랑하도록 새롭게 하시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죄와 연약함을 발견하는 것은 절망해야 할 이유가 아니라 주님께 더욱 나아가야 할 이유입니다. 자신의 내면에 아직 이기심과 교만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것을 죄로 여기며 주님께 도움을 구하는 사람은 이미 자신의 삶을 돌아보지 않는 사람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선행을 쌓았는가가 아니라,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며 그 사랑이 어느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구원의 확신도 자신의 공로나 과거의 신앙고백에만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도 자신을 새롭게 하시는 주님의 사랑과 능력을 신뢰하는 데서 더욱 깊어져야 합니다.

 

이 문제는 교회의 설교와 양육에도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만일 교회가 구원의 확신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삶의 변화와 체어리티를 부차적인 문제로 취급한다면, 성도들은 교리를 정확히 알고 신앙고백을 바르게 하는 것을 신앙생활의 중심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교회가 선행과 봉사만을 강조하면서 주님께서 모든 선의 근원이심을 충분히 가르치지 않는다면, 성도들은 자신의 헌신과 공로를 통해 구원을 확보하려는 또 다른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믿음과 행위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일이 아닙니다. 믿음은 주님께서 누구이신지, 무엇이 선하고 참된 것인지를 배우고 받아들이는 것이며, 체어리티는 그 진리가 사랑이 되어 실제 삶에서 작용하는 것입니다. 이 둘은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새 예루살렘과 그 천적 교리’ 243항에서 교리는 교회를 이루는 데 필요하지만, 교리만으로 인간 안에 교회가 성립하지는 않으며 그 교리에 따른 삶이 있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결국 교회의 본질은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그 진리를 통해 주님의 사랑이 사람들의 삶 안에서 실현되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 문제를 주님 자신의 가르침으로 돌아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14장 15절에서 자신을 사랑한다면 자신의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시고, 같은 장 21절에서는 자신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가르치십니다.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영적 질서가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단지 그분에 관하여 올바른 생각을 갖거나 감정적으로 깊은 애정을 느끼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분이 선하다고 말씀하신 것을 선으로 받아들이고, 악하다고 말씀하신 것을 악으로 인정하며, 자신의 삶을 그 말씀에 따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것이므로 삶과 행위는 관계없다는 생각은 결국 주님을 믿는 것과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분리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믿음과 사랑이 분리된 사람을 만들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진리를 알고, 그 진리를 사랑하며, 마침내 그 사랑으로 살아가는 새로운 생명을 얻도록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질문은 ‘나는 믿음으로 구원받는가, 행위로 구원받는가?’라는 양자택일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나의 믿음은 실제로 주님을 향하고 있는가? 내가 알고 있는 진리가 내 사랑을 변화시키고 있는가? 그 사랑이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으로 나타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구원은 믿음이라는 이름의 종교적 자격이 아니라, 믿음과 체어리티가 하나가 되어 살아 움직이는 천국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PR.005 해설)

 

요약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다’는 말에는 인간이 자기 공로나 행위로 구원을 획득할 수 없으며, 구원의 근원은 오직 주님의 은혜라는 귀중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러므로 삶과 행위는 구원과 관계없다’는 결론으로 나아가면 오류가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참된 믿음은 체어리티와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으며, 진리는 선과 결합될 때 인간의 실제 생명이 됩니다. 선행은 구원을 구매하는 공로가 아니지만, 주님에게서 오는 선이 인간 안에 받아들여져 삶으로 나타나는 본질적인 자리입니다. 따라서 믿음과 삶의 관계는 구원의 원인과 부차적인 결과라는 구별만으로 충분히 설명되지 않습니다. 참된 구원은 주님께서 인간 안에 믿음과 체어리티를 결합하시고 새로운 사랑의 생명을 이루어 가시는 과정입니다.

 

 

 

PR.004, ‘죽기 직전에라도 예수님 믿는다고 하면 천국 간다’

SL.PR.004 | 개신교인의 무의식 속 오류와 뒤섞인 신앙 100선 ‘죽기 직전에라도 예수님 믿는다고 하면 천국 간다’ - 마지막 고백이 평생의 사랑을 바꿀 수 있는가? 개신교 신앙생활에서 흔히 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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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RC.040 | 천주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마리아의 발현과 메시지는 신자들의 회개와 신심에 도움을 줄 수 있다’ – 영적 체험의 유익함은 그 메시지가 실제로 마리아에게서 왔다는 증거인가?

 

해설

‘마리아의 발현과 메시지는 신자들의 회개와 신심에 도움을 줄 수 있다.’ 이것은 천주교의 마리아 신앙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 ‘성모 발현’(聖母發現, Marian apparition)과 ‘사적 계시’(私的啓示, private revelation)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천주교에는 마리아가 특정한 사람들에게 나타나 기도와 회개, 평화와 보속을 권고했다는 오랜 전승이 있습니다. 프랑스의 루르드와 포르투갈의 파티마는 널리 알려진 사례이며,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메주고리예 역시 많은 신자가 순례하는 장소입니다. 이러한 발현을 경험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마리아가 자신들에게 특별한 메시지를 전달했다고 증언하며, 그 메시지를 접한 신자들 가운데 신앙을 회복하고 회개와 기도생활에 새로운 열정을 갖게 되었다는 사례들도 전해집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어떤 메시지를 통하여 회개했다는 사실이 그 메시지를 전한 존재가 실제로 마리아였다는 증거가 될까요? 특별한 모습이나 음성을 경험했다는 사실만으로 그 현상이 객관적인 영계의 사건이라고 확정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 스베덴보리 역시 영계를 보고 천사와 영들을 만났다고 기록했는데, 그의 영적 경험과 천주교의 성모 발현을 어떤 기준으로 비교해야 할까요? 이번 명제는 영적 체험의 가능성을 처음부터 부정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체험의 진실성과 메시지의 신학적 정확성, 그리고 그로부터 나타나는 회개와 사랑의 열매를 구별하는 문제입니다.

 

먼저 천주교의 공식적인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67항은 교회 역사에서 여러 사적 계시가 보고되었으며, 그 가운데 일부는 교회의 권위에 의하여 인정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적 계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공적 계시와 동일한 권위를 지니지 않으며, 새로운 구원의 진리를 추가하거나 기존의 계시를 완성하는 역할을 하지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사적 계시는 특정한 시대에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계시를 더욱 충실하게 살아가도록 도울 수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천주교가 마리아의 모든 발현과 메시지를 성경과 동일한 신적 권위로 받아들이라고 가르친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설령 교회가 어떤 발현과 관련된 신심을 인정하더라도 모든 신자가 그 발현을 반드시 믿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러한 구별에는 인정해야 할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인간의 구원에 필요한 진리는 이미 주님의 계시 안에 있으며, 특별한 체험이나 새로운 메시지가 그 계시를 대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별도의 질문이 남습니다. 어떤 메시지가 신앙생활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과 그 메시지를 실제로 마리아가 전달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사적 계시의 권위를 성경보다 낮게 인정하더라도, 그 발현의 초자연적 출처가 실제로 확인되었는지는 다시 살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에 관하여 2024년 5월 17일 바티칸 신앙교리부가 발표한 ‘초자연적 현상으로 추정되는 사건의 판별을 위한 규범’(Norms for Proceeding in the Discernment of Alleged Supernatural Phenomena)은 중요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이 규범은 발현이나 환시, 특별한 메시지를 검토할 때 그 내용이 신앙과 도덕에 부합하는지, 체험자의 진실성과 태도는 어떠한지, 그리고 회개와 기도, 이웃 사랑과 같은 실제적인 열매가 나타나는지를 살피도록 합니다. 특히 ‘장애 없음’(Nihil obstat)이라는 긍정적인 결론은 관련 신심과 순례를 허용하거나 장려할 수 있다는 의미이지, 그 발현이 실제로 하늘에서 일어난 사건임을 확정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는 천주교가 스스로 긍정적인 영적 열매와 초자연적 출처의 진실성을 구별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러한 원칙은 2024년 9월 19일 발표된 메주고리예 관련 문서 ‘평화의 모후’(The Queen of Peace)에도 적용되었습니다. 신앙교리부는 메주고리예를 통한 회개와 화해, 기도와 신앙의 회복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발현 자체의 초자연적 진실성을 확정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마리아의 메시지라고 전해지는 내용 가운데 일부에는 신학적으로 부정확하거나 혼란을 일으킬 수 있는 표현이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따라서 어떤 신자가 특정한 순례지에서 참된 회개를 경험했다는 사실과 그곳에서 보고된 모든 발현과 메시지가 실제로 마리아에게서 왔다는 주장은 구별해야 합니다. 신앙적 유익함은 인정할 수 있지만, 그것이 발현의 모든 세부 내용과 초자연적 출처를 보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 역시 특별한 영적 현상을 무조건 받아들이지 말고 분별하도록 가르칩니다. 요일4:1은 모든 영을 다 믿지 말고 그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는지 시험하라고 권합니다. 살전5:20–21은 예언을 멸시하지 말되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고 가르칩니다. 또한 마24:24에서 주님께서는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며 사람들을 미혹할 수 있다고 경고하십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어떤 현상이 놀랍고 특별하다는 이유만으로 그 출처를 신적으로 확정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영적 현상을 분별한다는 것이 그와 관련된 사람을 곧바로 거짓말쟁이나 악한 사람으로 규정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어떤 체험자는 자신이 경험한 것을 진실하게 증언할 수 있지만, 그 체험의 원인과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기억과 감각, 기대와 신앙적 배경은 체험을 해석하는 과정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체험자의 진실성과 체험의 객관적인 사실 여부, 메시지의 신학적 타당성을 구별해야 합니다. 또한 특별한 체험 안에 참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고 해서 그 전체를 참되다고 인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성경이 강조하는 분별은 놀라운 현상 자체에 매료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무엇이 주님의 진리와 일치하며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하는지 살피는 데 있습니다.

 

이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영적 발현의 가능성을 살펴보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에서 인간이 죽은 후에도 완전한 인간의 형상을 지니고 영계에서 살아간다고 설명합니다. 영계의 천사와 영들은 서로 보고 듣고 말하며 실제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자연계의 인간이 영적인 존재를 지각하거나 영계와 관계된 특별한 경험을 하는 것이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 자신은 오랫동안 영계의 여러 존재와 만나고 대화한 경험을 기록했으며,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827항에서는 자신이 영계에서 마리아를 보았다고도 전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론을 따른다는 이유로 모든 영적 발현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의 직접적인 기록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능성과 실제적인 진실성은 구별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마리아를 보았다고 기록했다는 사실이 후대에 보고된 모든 성모 발현의 진실성을 보증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이 빛나는 여인의 모습을 보았거나 자신을 마리아라고 소개하는 존재의 말을 들었다고 주장하더라도, 그 경험만으로 실제로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나타났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영적 존재의 모습과 정체, 그 존재가 전달하는 메시지의 출처는 각각 검토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HH.249는 중요한 직접 근거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당시 인간이 영들과 직접 대화하도록 허락되는 일이 드물며, 그러한 교통에는 위험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영들이 자신이 인간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특히 악한 영들이 그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해로운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종교적인 문제에 지나치게 몰두하면서 자신의 생각과 내적인 체험에 사로잡히는 상태도 주의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모든 종교적 환시나 특별한 체험이 반드시 악령에게서 비롯된다고 판정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어떤 사람이 특별한 모습을 보거나 메시지를 들었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을 참된 천국의 계시라고 받아들이는 일에는 위험이 따를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영계와의 교통은 인간의 호기심이나 의지에 따라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주님의 허락과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따라서 성모 발현을 신앙의 특별한 은총으로 받아들이기 전에 그 현상을 어떤 근거로 이해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러한 체험을 추구하는 태도 자체가 올바른 영적 질서에 속하는지 살펴야 합니다. 특별한 체험의 존재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과 그 체험을 무조건 추구하거나 신적 진리의 확실한 근거로 삼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영적 일기’(Spiritual Diary, SD) 1647항은 이 문제를 더욱 깊이 이해하도록 돕습니다. 그는 자신이 표상과 환시, 영들과 천사들의 대화를 통하여 여러 가지를 경험했지만, 실제로 자신에게 진리를 가르치신 분은 영이나 천사 자체가 아니라 오직 주님이었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영들이 여러 가지를 가르치려 할 때 거짓된 내용이 섞여 있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그들의 말을 그대로 믿는 것이 금지되었다고 기록합니다. 이 진술은 스베덴보리가 영적 체험을 했다는 사실보다 더욱 중요한 원칙을 보여 줍니다. 영계의 존재가 어떤 말을 한다고 해서 그 말이 곧바로 신적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또한 TCR.779에서 그는 새 교회의 교리를 어떤 천사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말씀을 읽는 가운데 받았다고 밝힙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영적 경험을 근거로 성모 발현의 메시지 역시 특별한 신적 권위를 지닌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적용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누가 나타났으며 얼마나 놀라운 체험이 일어났는가보다, 그 경험을 통하여 주장되는 진리가 실제로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의 기록에서도 영적 경험과 그 안에서 받아들이는 신적 진리는 구별되며, 모든 참된 진리의 근원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이 원칙은 발현 메시지의 내용을 검토할 때도 중요합니다. 성모 발현으로 전해지는 메시지들에는 기도와 회개, 죄에서 돌아서는 삶, 사랑과 평화, 이웃을 위한 희생을 강조하는 내용이 적지 않습니다. 이러한 권고는 그 자체로 성경의 가르침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메시지 안에 참된 내용이 들어 있다는 사실과 그 메시지가 실제로 마리아에게서 왔다는 사실은 구별해야 합니다. 참된 내용은 여러 경로를 통하여 인간에게 전달될 수 있으며, 어떤 체험에 대한 해석이 부정확하더라도 그 안에 성경과 일치하는 진리가 포함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회개와 사랑을 권고하는 메시지 안에 특정한 발현 장소나 발현자에게 지나친 종교적 권위를 부여하거나, 주님께 직접 나아가는 신앙을 흐리게 하는 내용이 함께 들어 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따라서 메시지를 통째로 받아들이거나 통째로 부정하기보다 개별적인 내용을 분별해야 합니다. 특히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인간의 ‘거듭남’(regeneration)은 특별한 감동이나 종교적 열정을 경험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참된 거듭남은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선과 진리를 배우고, 자신의 악을 죄로 여겨 피하며,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을 실천하는 삶으로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발현 메시지를 듣고 눈물을 흘리거나 특별한 평안을 느낀 것이 회개의 출발점이 될 수는 있지만, 실제적인 영적 변화는 그 이후의 삶에서 무엇을 사랑하고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통하여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특별한 체험의 감동보다 그 체험 이후에 이루어지는 실제적인 거듭남이 더욱 중요합니다.

 

이 문제는 발현을 경험했다고 주장하는 사람과 그 메시지를 따르는 신자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으로도 이어집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마리아를 보았다고 주장한다는 이유만으로 그가 반드시 거짓말을 하거나 사람들을 속이려 한다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그 사람이 매우 경건하고 겸손하며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체험을 신적인 사건이라고 받아들여서도 안 됩니다. 인간은 자신이 경험한 일을 진실하게 설명하면서도 그 의미나 원인을 잘못 해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발현과 관련된 신심 가운데 실제적인 회개와 사랑의 열매가 나타났더라도, 그러한 열매가 발현의 모든 세부 내용과 메시지를 정당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사람의 진실성과 메시지의 정확성, 그리고 영적 열매의 가치를 구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가장 깊은 내면과 의도를 완전하게 알고 계시지만, 우리는 그 사람을 정죄하기보다 그가 전하는 내용 가운데 말씀의 진리와 일치하는 것은 인정하고 일치하지 않는 것은 분별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요구하는 태도는 모든 특별한 체험을 조롱하거나 무조건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체험에 과도한 권위를 부여하지 않으면서도 그 안에 존재할 수 있는 진리와 선을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의 최종적인 영적 상태는 주님께 맡기되, 그가 전하는 메시지와 신학적 주장은 말씀에 따라 검토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특별한 영적 현상에 대한 관심이 말씀 자체에 대한 신뢰를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일입니다. 어떤 신자는 성경을 읽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일보다 새로운 발현과 메시지에 더 큰 열정을 기울일 수 있습니다. 또한 특정한 시기와 장소에 주어진 경고나 약속을 신앙의 중심에 놓고, 그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중요한 영적 기회를 놓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인간의 영적 생명을 위한 가장 중요한 진리는 이미 주님의 말씀 안에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인간에게 선과 진리를 가르치시고, 그 말씀을 받아들여 살아가는 사람을 거듭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새로운 메시지가 나타났더라도 그것이 말씀을 대신하거나 말씀보다 높은 권위를 차지해서는 안 됩니다. 참된 영적 체험이라면 인간의 시선을 체험 자체나 특정한 전달자에게 붙들어 두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로 향하게 해야 하며, 새로운 신비에 대한 호기심보다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삶으로 이끌어야 합니다. 마리아가 요2:5에서 하인들에게 주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권한 것처럼, 신앙의 올바른 방향은 특별한 전달자에게 머무르지 않고 주님께로 나아가는 데 있습니다. 결국 발현과 메시지를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은 그것이 얼마나 신비롭고 놀라운가가 아니라, 주님의 진리에 부합하며 인간을 회개와 사랑, 거듭남의 삶으로 이끄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선한 열매가 나타났더라도 발현의 초자연적 진실성은 별도로 검토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특별한 체험을 성급하게 부정해서도 안 되지만, 그것을 말씀보다 높은 권위로 받아들여서도 안 됩니다. 참된 신앙은 새로운 메시지를 찾아다니는 데 있지 않고,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주님의 말씀을 깊이 이해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SL.RC.040 해설)

 

요약

‘마리아의 발현과 메시지는 신자들의 회개와 신심에 도움을 줄 수 있다’라는 명제는 그 가능성 자체에서 반드시 오류라고 할 수 없습니다. 어떤 발현과 관련된 메시지나 신심을 통하여 신자가 자신의 악을 돌아보고 기도생활을 회복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천주교 역시 사적 계시를 그리스도의 완성된 공적 계시와 동일한 권위로 가르치지 않으며, 2024년의 판별 규범에서는 긍정적인 영적 열매와 발현 자체의 초자연적 진실성을 구별합니다. 따라서 천주교가 모든 성모 발현을 반드시 믿어야 할 신앙의 진리로 선언한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어떤 메시지가 신자들에게 유익했다는 사실만으로 실제로 마리아가 나타나 그 메시지를 전달했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HH.249에서 영들과 직접 교통하는 일의 위험을 경고하며, SD.1647에서는 영들이 전달하는 내용을 그대로 믿지 않고 오직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TCR.779에서는 새 교회의 교리를 천사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말씀을 통하여 받았다고 밝힙니다. 따라서 오류로 검토해야 할 핵심은 특별한 종교적 체험을 통하여 회개와 신앙의 회복이 일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발현의 초자연적 출처를 충분한 근거 없이 확정하거나, 그 메시지를 말씀과 동일하거나 더 높은 권위로 받아들이며, 특정한 발현자나 장소에 특별한 영적 권능을 부여하는 데 있습니다. 다만 이것이 모든 성모 발현이 실제로 거짓이거나 악한 영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개별적인 체험의 출처와 성격은 충분한 근거 없이 단정해서는 안 되며, 그 안에 담긴 진리와 오류도 구별해야 합니다. 참된 회개와 거듭남은 특별한 현상을 경험하는 데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악을 죄로 여겨 피하고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을 실천하는 데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성모 발현과 메시지를 이해하는 중요한 기준은 체험자의 확신이나 현상의 신비로움보다, 그 내용이 주님의 말씀에 부합하며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모든 영적 체험과 메시지는 말씀의 진리 아래에서 분별해야 하며, 인간의 영원한 생명과 구원의 유일한 근원은 오직 주님 한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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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RC.039 | 천주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마리아에게 특별한 공경을 드리는 것은 하느님께 드리는 흠숭과 다르다’ – 공경과 흠숭의 구별은 실제 신앙의 내면에서도 유지되는가?

 

해설

‘마리아에게 특별한 공경을 드리는 것은 하느님께 드리는 흠숭과 다르다.’ 이것은 천주교가 마리아 신심을 설명할 때 제시하는 가장 중요한 신학적 원칙 가운데 하나입니다. 천주교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성인들에게 표하는 공경을 구별하며, 마리아에게는 다른 성인들보다 특별한 공경을 드릴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마리아에게 기도를 청하거나 성모상 앞에서 무릎을 꿇는 모습을 보고, 그것만으로 그 사람이 마리아를 하나님과 동등한 신으로 숭배한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흠숭과 공경의 차이는 사용하는 명칭에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실제로 누구를 모든 생명과 구원의 근원으로 인정하고 의지하는가에 있는 것일까요? 특별 공경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종교적 행위가 올바른 것으로 인정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예배가 외적인 의식보다 그 안에 담긴 내적인 사랑과 신앙에 있다고 가르치는데, 이러한 관점에서 마리아 공경의 의미와 한계를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요? 이 문제는 단순히 천주교의 종교적 관습을 평가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인간에 대한 존경이 어떻게 구별되는지, 그리고 그 구별이 실제 신앙의 삶에서도 유지되는지를 묻는 문제입니다.

 

먼저 천주교의 공식적인 용어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전통적인 가톨릭 신학에서는 하나님께만 드리는 ‘흠숭’(欽崇, latria), 천사와 성인들에게 드리는 ‘공경’(恭敬, dulia), 그리고 마리아에게 드리는 ‘특별 공경’(特別恭敬, hyperdulia)을 구별합니다. 흠숭은 하나님을 창조주이자 모든 생명과 구원의 근원으로 인정하고 그분께 드리는 예배를 뜻합니다. 공경은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베푸신 은총과 그들이 보여 준 거룩한 삶을 존중하는 것이며, 특별 공경은 주님의 어머니였던 마리아의 독특한 역할과 복됨을 특별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흠숭과 공경이 단순히 경배의 강도에 따라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천주교는 마리아에게 드리는 공경이 아무리 특별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께만 드려야 할 흠숭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마리아를 공경한다는 사실만으로 그를 창조주나 신적 존재로 인정한다고 해석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다만 천주교의 특별 공경은 일반적인 역사적 인물에 대한 존경보다 넓은 종교적 의미를 지니며, 성모 축일과 묵주기도, 전구 요청 등의 신심 행위까지 포함합니다. 그러므로 공경과 흠숭이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원칙을 인정하는 것과 그 원칙 아래 이루어지는 모든 종교적 행위가 올바르다고 판단하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이러한 구별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 66항에서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이 항목은 마리아가 주님의 어머니로서 특별한 공경을 받지만, 그 공경은 성육신하신 말씀과 성부와 성령께 드리는 흠숭과 본질적으로 다르며 오히려 그 흠숭을 증진한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67항은 마리아에 관한 가르침과 신심에서 지나친 과장과 편협한 축소를 모두 피하고, 참된 신앙에 근거하지 않은 헛된 믿음을 경계하도록 권고합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971항 역시 마리아에 대한 특별 공경이 하나님께 드리는 흠숭과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설명합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1997년 10월 22일의 교리교육에서 마리아에 대한 공경이 다른 성인들에게 드리는 공경보다 특별하지만, 하나님께만 드리는 흠숭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된다고 밝혔습니다. 이러한 공식적인 가르침에는 인정해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만 속하는 영광과 권능이 있으며, 아무리 복된 인간이라도 창조주와 동일한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주교가 이러한 구별을 공식적으로 선언한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실제 신심 행위가 언제나 그 원칙에 일치한다고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교리의 내용과 개인의 신앙적 이해, 그리고 구체적인 종교 행위는 각각 살펴야 합니다.

 

성경 역시 하나님께만 드려야 할 예배와 인간에게 표할 수 있는 존경을 구별합니다. 출20:3–5는 다른 신들을 두지 말고 우상을 만들어 그것들에게 절하거나 섬기지 말라고 명령하며, 마4:10에서 주님께서는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분만 섬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모든 참된 예배의 궁극적인 대상이 하나님 한 분이심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성경이 인간에 대한 존경 자체를 금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과 신앙의 선배들을 기억하고 그 믿음을 본받으라는 히13:7의 권고는 인간에게 표할 수 있는 올바른 존경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마리아 역시 주님의 성육신을 위하여 선택된 복된 여인이었으며, 눅1:48에서 이후의 모든 세대가 자신을 복되다고 일컬을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따라서 마리아를 복되다고 인정하고 그의 믿음과 순종을 존중하는 일 자체를 우상숭배라고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를 복되다고 일컫는 것과 그에게 기도하며 특별한 영적 보호와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동일한 행위가 아닙니다. 성경이 어떤 사람을 존경하도록 가르친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에게 종교적 청원을 드려도 된다는 결론이 자동으로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공경과 흠숭을 구별하는 문제는 외적인 명칭을 넘어 실제로 누구에게 어떤 종류의 영적 권능을 기대하는가 하는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이러한 차이는 성모상과 성화 앞에서 이루어지는 신심 행위를 살펴볼 때 더욱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천주교는 성모상 자체를 신으로 섬긴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성모상과 성화는 마리아의 믿음과 주님의 성육신을 기억하도록 돕는 종교적 표상이며, 형상에 표하는 존경은 궁극적으로 그 형상이 나타내는 인물을 향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어떤 신자가 성모상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는 외적인 모습만으로 그가 실제로 마리아를 하나님처럼 섬긴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무릎을 꿇거나 절하는 행위는 문맥에 따라 예배뿐 아니라 존경과 간청을 표현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형상이 기억과 묵상의 도구라는 설명과 그 형상에 특별한 영적 능력이 있다고 믿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특정한 성모상이나 성지에 독립적인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거나, 그 형상 앞에서 기도하면 마리아가 자신의 필요를 특별하게 해결해 준다고 기대한다면 그 믿음은 별도로 검토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형상이나 몸의 자세 자체가 아니라, 인간이 어떤 존재에게 능력을 기대하고 그 능력이 어디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겉으로 비슷한 행위를 하더라도 그 안에 담긴 믿음과 의도는 다를 수 있으며, 인간은 다른 사람의 가장 깊은 내면을 완전하게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외적인 신심 행위의 의미를 검토하되, 그것을 행하는 사람의 최종적인 영적 상태까지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 문제를 더욱 깊이 살펴보도록 이끕니다. 그는 참된 예배가 단순한 기도문이나 찬송, 몸의 자세와 종교적 의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외적인 행위 안에 담긴 사랑과 신앙에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구별은 ‘속 사람’(internal man)과 ‘겉 사람’(external man)의 관계와 연결됩니다. 인간은 겉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면서도 속으로는 자신의 영광과 이익을 추구할 수 있으며, 반대로 짧고 단순한 기도 안에서도 주님을 향한 깊은 사랑과 믿음을 품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종교 행위의 영적 가치를 판단하려면 그 행위가 겉으로 어떻게 나타나는가뿐 아니라 무엇을 향하여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지 살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 HH.2–12에서 천국의 하나님은 오직 주님 한 분이시며, 천국의 모든 선과 진리가 그분에게서 비롯된다고 가르칩니다. 천사들은 자기 자신의 능력으로 선과 진리를 만들어 내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이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천사와 성인의 믿음과 사랑을 존중하는 일은 가능하지만, 그들에게 주님께만 속한 신적 권능을 기대하거나 그들을 구원의 근원처럼 의지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참된 공경은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선과 진리를 인정하는 것이며, 참된 예배는 그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이신 주님께 자신을 열고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에 대한 존경과 주님께 드리는 예배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원칙은 스베덴보리의 가르침과도 일치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당시 로마 가톨릭의 마리아 신심에 대하여 강한 비판도 남겼습니다. 그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TCR.94에서 마리아를 다른 모든 성인보다 높이고 여신이나 성인들의 여왕처럼 받드는 신심을 비판합니다. 또한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기보다 마리아의 아들로 이해하는 경향이 주님의 참된 신성에 관한 이해를 흐리게 한다고 지적합니다. 다만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직접적인 평가와 천주교의 공식 교리 내용을 구별해야 합니다. 천주교는 마리아를 실제로 여신이라고 가르치지 않으며, 마리아에게 드리는 특별 공경이 하나님께 드리는 흠숭과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분명히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TCR.94를 천주교가 공식적으로 마리아를 여신으로 인정했다는 증거처럼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비판은 마리아의 자연적인 모성을 지나치게 높이는 과정에서 주님의 유일한 신성이 흐려지고, 인간이 주님께만 돌려야 할 영광과 의존을 피조물에게 옮길 위험에 관한 것입니다. 그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마리아에게 어떤 명칭을 사용하는가에만 있지 않습니다. 신앙의 실제적인 중심이 주님께 있는가, 아니면 마리아라는 특별한 피조물에게 옮겨 가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따라서 특별 공경이라는 명칭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그 신심의 모든 내용과 행위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문제는 앞서 살펴본 마리아의 전구 및 묵주기도와도 연결됩니다. 천주교는 마리아에게 드리는 특별 공경이 하나님께 드리는 흠숭과 다르다고 가르치면서, 동시에 그에게 신자들을 위하여 기도해 달라고 청하는 행위를 인정합니다. 그러나 공경과 흠숭이 교리적으로 구별된다는 사실과 그러한 청원이 실제 영계의 질서에 부합한다는 주장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TCR.824–825에서 지상의 사람들이 천국의 성인들에게 드리는 기도를 그 성인들이 알고 듣는다는 생각을 직접 비판합니다. 따라서 마리아에게 드리는 청원을 흠숭이 아니라 특별 공경이라고 부른다는 사실만으로 그 행위의 타당성이 입증되지는 않습니다. 물론 천주교는 모든 전구와 은총이 그리스도의 유일한 구속에 종속되어 있다고 설명합니다. 2025년 바티칸 신앙교리부의 ‘신자들의 어머니’(Mater Populi Fidelis) 역시 마리아를 그리스도와 나란히 서는 구원자처럼 이해하거나, 주님의 자비가 부족하므로 마리아가 인간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을 경계합니다. 이러한 공식적인 구별은 인정해야 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그 설명을 넘어, 천국의 특정한 인간에게 직접 종교적 청원을 드리는 행위 자체가 참된 영적 교통의 질서에 부합하는지 검토해야 합니다. 이처럼 마리아를 존중하는 일반적인 태도와 마리아에게 직접 기도를 청하는 구체적인 행위는 구별하여 평가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마리아를 특별히 존중한다는 것은 실제로 어떤 의미를 지녀야 할까요? 성경은 마리아의 믿음과 순종을 중요한 모범으로 제시합니다. 눅1:38에서 마리아는 자신을 주의 여종이라고 부르며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고백합니다. 눅1:46–47에서는 자신의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하나님 자신의 구주를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요2:5에서 하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권합니다. 이러한 모습에서 마리아는 자신에게 특별한 신적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거나 사람들이 자신에게 머물도록 이끌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순종하도록 권합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를 존중하는 가장 분명한 길은 그가 보여 준 믿음과 순종을 기억하고 본받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존중이 그에게 독립적인 영적 권능을 기대하거나 직접적인 종교적 청원을 드려야 한다는 뜻으로 확대될 필요는 없습니다. 한 인간의 아름다운 믿음을 인정하는 것과 그 인간을 영적인 의존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인간의 참된 위대함은 특별한 호칭이나 독립적인 거룩함에 있지 않고,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여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으로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마리아의 복됨 역시 이러한 영적 원리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공경과 흠숭의 구별을 실제 신앙의 내면에 적용해야 합니다. 어떤 신자가 하나님께만 흠숭을 드린다고 고백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마리아가 주님보다 더 자비롭고 자신의 기도를 더 잘 들어주며 특별한 능력으로 자신을 보호한다고 생각한다면, 그 신앙에는 공식적인 교리와 실제적인 의존 사이의 긴장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능성을 근거로 모든 천주교 신자가 마리아를 하나님처럼 섬긴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마리아를 기억함으로써 주님의 성육신과 구속을 더욱 깊이 묵상하고 그분을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마리아에 대한 공경이 주님께 직접 나아가는 신앙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가능성을 구별하되 다른 사람의 가장 깊은 내면은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강조하는 참된 예배의 중심은 주님 한 분을 향한 사랑과 믿음, 그리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 선을 행하는 삶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드리는 흠숭과 인간에게 표하는 공경은 분명히 구별되어야 하지만, 그 구별은 이름을 다르게 붙이는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실제 기도의 대상과 영적 의존의 방향에서도 유지되어야 합니다. 결국 마리아를 비롯한 모든 피조물을 올바르게 존중하는 길은 그들에게서 나타나는 선과 진리의 근원이 오직 주님이심을 인정하고, 모든 예배와 구원의 소망을 주님 한 분께 돌리는 데 있습니다. (SL.RC.039 해설)

 

요약

‘마리아에게 특별한 공경을 드리는 것은 하느님께 드리는 흠숭과 다르다’라는 명제의 기본적인 구별 자체는 오류가 아닙니다. 하나님께만 드리는 흠숭과 인간에게 표하는 존경은 본질적으로 달라야 하며, 이러한 원칙은 성경과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에도 부합합니다. 천주교는 ‘흠숭’(latria), ‘공경’(dulia), ‘특별 공경’(hyperdulia)을 구별하고, 마리아를 하나님과 동등한 신으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따라서 천주교의 모든 마리아 공경을 신적 숭배와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교리적 구별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마리아에게 드리는 모든 종교적 청원과 신심이 자동으로 정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HH.2–12에서 천국의 모든 생명과 권능이 주님에게서 비롯된다고 가르치며, TCR.94에서는 마리아를 지나치게 높이는 당시의 신심을 비판합니다. 또한 TCR.824–825에서는 천국의 성인들에게 직접 기도를 드리는 관행이 영계의 질서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오류로 검토해야 할 핵심은 마리아를 복된 여인으로 기억하고 그의 믿음과 순종을 존중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특별 공경이라는 이름 아래 그에게 주님께만 속한 영적 권능을 기대하거나, 주님께 돌려야 할 실제적인 신앙적 의존을 다른 피조물에게 옮기는 데 있습니다. 다만 이것이 모든 마리아 공경을 반드시 우상숭배라고 판정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람의 내면은 주님께 맡기되, 그가 믿고 실천하는 교리와 행위는 말씀의 진리에 따라 분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번 명제는 ‘공경과 흠숭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원칙에서는 참되지만, ‘따라서 마리아에게 드리는 모든 특별 공경과 종교적 청원은 올바르다’는 결론으로 확대할 때에는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판정해야 합니다. 참된 신앙은 하나님께 드리는 흠숭과 인간에게 표하는 존경을 구별하고, 모든 선과 진리와 구원의 근원을 주님 한 분에게서 찾으며,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으로 나아가는 데 있습니다.

 

 

 

RC.040. ‘마리아의 발현과 메시지는 신자들의 회개와 신심에 도움을 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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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C.038. ‘묵주기도를 바치며 마리아의 전구를 청하는 것은 올바른 신심이다’

SL.RC.038 | 천주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묵주기도를 바치며 마리아의 전구를 청하는 것은 올바른 신심이다’ – 주님의 생애를 묵상하는 기도와 마리아에게 청원하는 기도는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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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RC.038 | 천주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묵주기도를 바치며 마리아의 전구를 청하는 것은 올바른 신심이다’ – 주님의 생애를 묵상하는 기도와 마리아에게 청원하는 기도는 같은 영적 질서에 속하는가?

 

해설

‘묵주기도를 바치며 마리아의 전구를 청하는 것은 올바른 신심이다.’ 이것은 천주교에서 오랫동안 실천해 온 ‘묵주기도’(默珠祈禱, Rosary)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묵주기도는 일정한 수의 구슬을 이용하여 정해진 기도문을 반복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와 마리아의 생애에 관한 신비를 묵상하는 기도입니다. 천주교 신자들에게 묵주기도는 주님의 성육신과 가르침, 고난과 부활을 마음에 새기며 마리아의 ‘전구’(轉求, intercession)를 청하는 중요한 신심 행위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몇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묵주기도는 예수님을 향한 기도일까요, 마리아를 향한 기도일까요? 성경의 말씀을 묵상하는 행위와 마리아에게 직접 전구를 요청하는 행위는 동일한 영적 의미를 지닐까요? 정해진 기도문을 여러 차례 반복하는 것이 주님께 깊이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러한 반복에 포함된 모든 기도 내용도 올바르다고 보아야 할까요? 무엇보다 스베덴보리는 모든 참된 예배와 기도가 주님 한 분을 향해야 한다고 가르치는데, 묵주기도의 그리스도 중심적인 묵상과 마리아를 향한 직접적인 청원을 어떻게 구별해야 할까요? 이번 문제는 단순히 천주교의 기도 관습을 평가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기도가 무엇이며 누구를 향해야 하는지, 그리고 외적인 신앙 행위가 어떻게 참된 내적 예배로 이어지는지를 묻는 문제입니다.

 

먼저 묵주기도의 구성과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묵주기도는 일반적으로 십자가의 성호와 사도신경으로 시작하여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 등을 바치며 정해진 신비를 묵상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한 단에서는 주님의 기도 한 번과 성모송 열 번, 영광송 등을 바치며, 통상 다섯 단을 하나의 묵주기도 단위로 삼습니다. 묵주기도의 신비는 주님의 성육신과 탄생을 묵상하는 환희의 신비, 공생활과 복음 선포를 묵상하는 빛의 신비, 고난과 십자가를 묵상하는 고통의 신비, 부활과 영광을 묵상하는 영광의 신비로 이루어집니다. 전통적으로는 환희·고통·영광의 세 신비가 사용되었으며, 2002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빛의 신비를 추가로 제안하여 오늘날 널리 사용하는 네 묶음의 구성이 갖추어졌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살펴보면 묵주기도가 처음부터 끝까지 마리아의 이름만 부르는 기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묵주의 구슬은 기도의 순서를 기억하고 집중을 돕는 도구이며, 각 단에서 묵상하는 중심 사건은 주님의 성육신과 구속의 역사입니다. 따라서 묵주기도의 영적 의미를 평가하려면 성경에 근거한 묵상과 실제로 반복하는 기도문의 대상을 함께 살펴야 합니다.

 

천주교 역시 묵주기도의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고 설명합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2002년 10월 16일 교황 교서 ‘동정 마리아의 묵주기도’(Rosarium Virginis Mariae) 1항에서 묵주기도가 마리아적인 성격을 지니지만 본질적으로 그리스도 중심적인 기도라고 설명했습니다. 또한 12항에서는 묵주기도가 ‘관상’(觀想, contemplation)을 잃으면 그 본래 의미를 상실하고 기계적인 반복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26항은 반복되는 기도문이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을 더욱 깊게 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설명하며, 28항은 묵주기도가 하나의 묵상 방법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나아가 묵주의 구슬을 부적이나 마술적인 물건처럼 취급하는 태도도 경계합니다. 따라서 천주교의 공식적인 가르침은 기도문을 많이 반복하거나 묵주를 오래 사용하면 자동으로 특별한 은총을 받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외적인 기도가 주님의 생애를 깊이 이해하고 그분을 사랑하며 말씀대로 살아가는 내적인 변화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도에는 인정해야 할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마음을 집중하고 말씀을 반복하여 기억하는 훈련이 필요하며, 주님의 생애와 가르침을 깊이 묵상하는 행위는 신앙생활에 유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묵주기도 전체를 처음부터 무의미한 반복이나 우상숭배라고 규정하는 것은 그 안에 담긴 성경적 묵상의 가치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판단입니다.

 

그러나 묵주기도의 중심을 이루는 ‘성모송’(聖母誦, Hail Mary)을 살펴보면 별도의 문제가 나타납니다. 성모송은 크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집니다. 앞부분은 눅1:28의 천사의 인사와 눅1:42의 엘리사벳의 축복에 근거합니다. 마리아가 은총을 받은 여인이며 주님께서 그와 함께하신다는 사실, 그리고 그가 낳은 예수님이 복되시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내용입니다. 이러한 말씀은 성경에 직접 근거하며, 마리아에게 주어진 특별한 소명을 인정하고 그를 통하여 세상에 오신 주님을 찬양하는 의미를 지닙니다. 그러나 성모송의 뒷부분은 마리아에게 지금과 죽을 때에 죄인인 자신들을 위하여 기도해 달라고 청하는 내용입니다. 이 부분은 성경의 인사를 그대로 낭독하는 것이 아니라, 후대 교회의 신심 안에서 발전한 직접적인 전구 요청입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2676–2677항 역시 이 두 부분을 구별하여 설명합니다. 앞부분에서는 주님께서 마리아에게 베푸신 은총을 찬양하고, 뒷부분에서는 마리아의 모성적 전구에 자신을 맡긴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모송 전체가 성경 구절을 그대로 낭독하는 기도라고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에는 성경에 근거한 축복과 후대 교회가 발전시킨 전구 요청이 결합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묵주기도의 성경적 묵상과 마리아를 향한 청원의 타당성을 별도로 검토해야 합니다.

 

성경의 말씀을 반복하여 묵상하는 행위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시1:2는 복 있는 사람이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한다고 가르치며, 마26:44에는 주님께서 겟세마네에서 같은 말씀으로 다시 기도하신 사실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마6:7에서 주님께서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을 근거로 모든 반복 기도를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경계하신 것은 같은 말을 다시 하는 형식 자체보다, 말을 많이 해야만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하신다고 생각하는 외적인 기도 태도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속 사람’(internal man)과 ‘겉 사람’(external man)에 관한 가르침도 이러한 구별을 이해하도록 돕습니다. 참된 예배는 단순히 입술의 말과 몸의 동작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외적인 행위 안에 담긴 사랑과 신앙에 있습니다. 인간은 겉으로 기도하면서도 속으로는 자신의 욕망만을 추구할 수 있으며, 반대로 짧고 단순한 기도 안에서도 주님을 향한 깊은 사랑과 믿음을 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반복되는 기도문이나 묵주의 사용은 그것이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자신의 악을 돌아보며 선을 행하는 삶으로 인도할 때 유익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외적인 반복에 특별한 효력이 있다고 믿거나 기도의 횟수 자체를 신앙의 목표로 삼는다면 예배의 질서가 뒤집힐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반복하는가보다 무엇을 생각하며 누구를 향하여 기도하고, 그 기도가 삶의 어떤 변화로 이어지는가 하는 점입니다.

 

여기서 묵주기도의 그리스도 중심적 묵상과 마리아의 전구가 만납니다. 천주교는 묵주기도를 통하여 마리아와 함께 그리스도의 생애를 묵상하고, 마리아의 전구를 청함으로써 그리스도께 더욱 가까이 나아간다고 설명합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동정 마리아의 묵주기도’ 16항과 33항에서 마리아의 모성적 전구가 묵주기도의 중요한 요소라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묵주기도의 그리스도 중심성을 인정한다는 이유로 그 안에 마리아를 향한 직접적인 청원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천주교는 두 요소가 서로 조화를 이룬다고 이해하지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그리스도의 생애를 묵상하는 일과 천국의 마리아에게 전구를 요청하는 일은 서로 다른 영적 행위입니다. 주님의 성육신과 가르침, 고난과 부활을 묵상하는 것은 인간의 마음을 주님의 사랑과 진리로 향하게 합니다. 반면 마리아에게 직접 전구를 요청하는 행위는 그가 지상의 신자들이 드리는 청원을 실제로 알고 들을 수 있다는 전제를 포함합니다. 이러한 전제는 마리아가 복된 여인이었다는 사실이나 주님의 어머니였다는 사실에서 자동으로 도출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묵주기도의 묵상에 담긴 진리를 인정하면서도, 마리아를 직접적인 기도 요청의 대상으로 삼는 부분은 별도로 검토해야 합니다.

 

이 문제에 관하여 스베덴보리는 매우 직접적인 가르침을 남겼습니다. 그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824–825항에서 천국의 성인들이 지상에서 자신들에게 드리는 기도를 듣는다고 생각하는 관행을 비판합니다. TCR.824에서는 지상에서 성인으로 공경받던 사람들이 영계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며, 자신들이 지상의 사람들에게서 기도와 공경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고 설명합니다. 이어 TCR.825에서는 성인들에게 드리는 청원이 실제로 그들에게 들리지 않는다고 명확하게 말합니다. 이 설명은 천국의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거나 주님의 섭리 안에서 선한 쓰임을 감당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천사들이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진리를 받아 인간을 보호하고 돕는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천사들의 도움과 그들에게 직접 기도하는 행위는 다른 문제입니다. 영계와 자연계 사이의 참된 교통은 주님의 질서 안에서 이루어지며, 인간이 원하는 특정한 영적 존재를 자유롭게 불러 자신의 간구를 전달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따라서 TCR.824–825는 묵주기도에 포함된 마리아를 향한 청원을 검토하는 데 중요한 직접 근거가 됩니다. 다만 이 항목들은 성인에게 드리는 기도에 관한 일반적인 가르침이지, 묵주기도 전체의 구성과 목적을 직접 분석한 해설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묵주기도의 성경 묵상에 대한 평가와 그 안에 포함된 전구 요청에 대한 판단을 구별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마리아는 다른 성인들과 달리 지상의 기도를 들을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천주교는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자 교회의 영적 어머니이므로 그의 전구가 특별한 가치를 지닌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직접적인 저작에서 마리아에게 그러한 예외적인 기도 청취 능력이 주어졌다고 가르치는 근거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TCR.827에서 자신이 영계에서 마리아와 만났으며, 마리아가 주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예배한다고 말했다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마리아는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는 인간으로 나타나며, 모든 신자의 청원을 듣고 은총을 전달하는 독립적인 권위자로 제시되지 않습니다. 물론 이 기록이 마리아의 모든 천상 활동을 설명하는 것은 아니므로 그가 어떠한 사랑이나 선한 쓰임도 감당하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천주교 역시 마리아를 주님과 동등한 신으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천주교가 말하는 전구는 그리스도의 유일한 중재에 종속된 것으로 이해되며, 2025년 바티칸 신앙교리부의 ‘신자들의 어머니’(Mater Populi Fidelis)도 이러한 구별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두 전통의 실제적인 차이는 마리아가 독립적인 신적 권능을 지녔는가의 문제에만 있지 않습니다. 천국의 특정한 인간에게 직접 청원하는 행위 자체가 참된 영적 교통의 질서에 부합하는가 하는 점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TCR.824–825에 비추어 보면, 마리아에게 직접 전구를 요청하는 관행은 그러한 질서와 일치한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이러한 신학적 구별은 묵주기도를 바치는 사람들의 실제적인 신앙생활을 이해할 때에도 중요합니다. 어떤 신자는 묵주기도를 통하여 주님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고, 어떤 사람은 반복되는 기도 속에서 자신의 불안과 두려움을 가라앉히며 주님께 마음을 돌릴 수 있습니다. 가족이 함께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고 화해의 마음을 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무조건 거짓되거나 무가치하다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지닌 불완전한 이해 가운데서도 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참된 선과 진리를 통하여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도를 통하여 실제적인 위로와 평안을 경험했다는 사실이 그 기도에 포함된 모든 교리적 전제가 참되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반대로 교리적 오류를 발견했다고 해서 그 기도 가운데 이루어진 모든 진실한 회개와 사랑의 경험까지 부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여기서 사람의 내면과 기도의 내용을 구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각 사람의 마음과 사랑을 완전하게 알고 계시지만, 우리는 사람을 정죄하기보다 그가 믿고 실천하는 내용이 말씀의 진리와 얼마나 일치하는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묵주기도를 바치는 사람의 최종적인 영적 상태를 판단하는 일과 묵주기도의 신학적 내용을 평가하는 일은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묵주기도의 긍정적인 요소를 보존하면서도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더욱 온전한 기도의 방향을 찾을 수 있을까요? 그 핵심은 외적인 형식보다 기도의 대상과 내용에 있습니다. 주님의 성육신과 탄생을 묵상하고, 그분의 가르침과 고난을 기억하며, 부활과 인성의 영화(榮化, glorification)를 깊이 생각하는 것은 귀중한 영적 훈련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정해진 시간에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말씀을 반복하여 기억하는 것도 신앙생활에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묵상을 위하여 반드시 마리아에게 전구를 요청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주님께 직접 기도할 수 있으며, 그분의 말씀을 통하여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요14:13–14에서 주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으로 구하는 기도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단순히 기도 끝에 정해진 말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신성과 그분의 말씀에 담긴 진리를 인정하고 그 뜻에 따라 살아가려는 마음과 관계됩니다. 그러므로 참된 기도는 특별한 형식을 이용하여 주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행위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마음을 주님의 사랑과 진리에 열어 드리는 행위입니다. 주님의 생애를 묵상하는 기도는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갈 때 더욱 깊은 영적 의미를 지닙니다.

 

마지막으로 묵주기도의 가치를 판단할 때 우리가 붙들어야 할 중심은 주님과 인간 사이의 직접적인 영적 관계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가장 깊은 내면을 알고 계시며, 인간이 자신의 고통과 필요를 말씀드리기 전에 이미 그에게 필요한 것을 아시는 분입니다. 인간이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기 위하여 다른 어떤 피조물의 특별한 자비나 영향력을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묵주기도에 담긴 주님의 성육신과 구속의 역사에 대한 묵상은 존중할 수 있지만, 마리아에게 직접 전구를 요청하는 부분까지 동일한 수준의 신적 진리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외적인 반복과 묵주의 사용 역시 그 자체로 거룩하거나 부정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사랑과 믿음을 표현하고 인간의 마음을 어디로 인도하는가에 따라 평가해야 합니다. 우리는 묵주기도를 바치는 신자들의 진실한 마음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되지만, 기도의 내용과 대상은 말씀의 진리와 스베덴보리의 영계 이해에 비추어 분별해야 합니다. 마리아가 요2:5에서 하인들에게 주님의 말씀대로 행하라고 권한 것처럼, 참된 신앙의 방향은 언제나 마리아 자신에게 머무르지 않고 주님께로 나아가는 데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반복되는 기도를 넘어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으로 나아가는 것, 바로 여기에 참된 기도의 목적이 있습니다. 결국 올바른 신심의 중심은 묵주의 구슬이나 기도의 횟수, 특정한 성인의 전구에 있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 한 분을 바라보고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여 선을 행하는 삶에 있습니다. (SL.RC.038 해설)

 

요약

‘묵주기도를 바치며 마리아의 전구를 청하는 것은 올바른 신심이다’라는 명제에는 주님의 성육신과 가르침, 고난과 부활을 지속적으로 묵상하고 기도의 훈련을 통하여 신앙을 깊게 하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천주교는 묵주기도를 본질적으로 그리스도 중심적인 관상기도로 설명하며, 외적인 반복이나 묵주 자체에 마술적인 효력이 있다는 생각을 경계합니다. 이러한 공식적인 이해는 정확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모송에는 성경에 근거한 마리아에 대한 축복뿐 아니라, 천국의 마리아에게 직접 전구를 요청하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두 요소는 구별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TCR.824–825에서 천국의 성인들이 지상에서 자신들에게 드리는 기도를 알고 듣는다는 생각을 직접 비판합니다. 따라서 그의 관점에서 묵주기도에 담긴 주님의 생애에 대한 묵상은 유익한 영적 훈련이 될 수 있지만, 마리아에게 직접 청원하는 부분은 참된 영적 교통의 질서와 일치한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또한 반복되는 기도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외적인 형식과 반복 횟수에 특별한 효력이 있다고 믿거나, 그 안에 담긴 기도의 내용과 대상을 올바르게 분별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가 묵주기도 전체를 직접 분석하여 반박했다고 주장할 근거는 부족합니다. 그의 직접적인 비판은 성인들에게 드리는 청원에 관한 것이며, 묵주기도 전체에 대한 평가는 그 가르침과 내적 예배의 원리에 근거한 신학적 적용입니다. 그러므로 오류의 핵심은 묵주를 사용하거나 주님의 생애를 반복하여 묵상하는 행위 자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 중심적인 묵상과 마리아에게 직접 전구를 청하는 행위를 하나의 신심으로 결합하고, 후자를 정당한 기도의 방식으로 확정하는 데 있습니다. 참된 기도는 주님께 직접 마음을 열고 그분의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이며, 그 말씀에 따라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데 있습니다. 묵주기도를 바치는 사람의 내면은 주님께 맡기되, 그 기도의 내용과 영적 질서는 말씀에 따라 분별해야 합니다. 모든 참된 기도와 예배의 중심은 오직 주님 한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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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RC.037 | 천주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마리아는 신자들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전구한다’ – 주님께 직접 나아가는 기도에 마리아의 중재가 필요한가?

 

해설

‘마리아는 신자들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전구한다.’ 이것은 천주교의 마리아 신앙에서 매우 중요한 ‘전구’(轉求, intercession)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전구란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고 그의 필요를 하나님께 아뢰는 행위를 말합니다. 천주교 신자들은 마리아가 지상 생애를 마친 후에도 천국에서 신자들을 사랑하며, 그들을 위하여 주님께 기도한다고 믿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성모송의 마지막 부분에도 나타납니다. 신자들은 마리아에게 자신들을 위하여 지금과 죽을 때에 기도해 달라고 청합니다. 여기에는 주님의 어머니였던 마리아가 천국에서도 신자들을 모성적 사랑으로 돌보고, 그들이 주님의 은총을 받아들이도록 돕는다는 신앙적 확신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을 접하면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마리아가 천국에 있다는 사실과 지상의 신자들이 드리는 기도를 듣는다는 사실은 같은 것일까요? 천국의 천사들과 구원받은 사람들이 서로 사랑한다는 사실이 그들에게 직접 기도를 드려도 된다는 근거가 될까요? 무엇보다 주님께서 무한한 사랑과 자비 자체이시라면, 인간이 그분께 나아가기 위하여 마리아의 도움을 먼저 요청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이 문제는 마리아에게 기도를 청하는 관행의 적절성을 넘어, 기도의 대상과 영적 교통의 질서, 주님의 유일한 중재, 그리고 천국의 모든 생명과 권능이 어디에서 비롯되는가를 묻는 중요한 신학적 문제입니다.

 

먼저 천주교의 공식적인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 62항은 마리아가 천상의 영광에 들어간 후에도 모성적 역할을 계속하며, 여러 형태의 전구를 통하여 신자들이 구원의 은총을 받도록 돕는다고 설명합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969항 역시 이러한 내용을 가르치며, 마리아를 ‘변호자’(Advocate), ‘도움이신 분’(Helper), ‘중재자’(Mediatrix) 등의 칭호로 부르는 전통을 소개합니다. 그러나 970항은 마리아의 모성적 역할이 그리스도의 유일한 중재를 약화시키거나 대체하지 않으며, 그 모든 구원적 영향력이 그리스도의 공로와 중재에 전적으로 의존한다고 밝힙니다. 따라서 천주교가 마리아를 그리스도와 동등한 구원자로 가르치거나, 그에게 독립적인 신적 능력이 있다고 선언한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천주교는 마리아의 전구를 그리스도의 유일한 구원에 참여하는 종속적인 협력으로 설명합니다. 다만 여기서 구별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마리아의 전구가 주님의 권능에 종속되어 있다는 설명과, 마리아가 실제로 지상의 신자들이 드리는 청원을 알고 그들을 위하여 전구한다는 사실이 신적으로 확증되었다는 주장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검토해야 할 핵심은 후자의 주장입니다.

 

천주교가 전구를 설명할 때 중요하게 사용하는 개념은 ‘성도의 통공’(聖徒의 通功, communion of saints)입니다. 이는 지상에서 살아가는 신자들과 죽은 후 정화를 받는 이들, 그리고 천국의 성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영적 공동체를 이룬다는 가르침입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954–959항은 죽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의 영적인 결합을 끊지 못한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956항은 천국의 성인들이 지상의 신자들을 위하여 전구하며, 이러한 형제적 사랑이 지상의 신자들에게 도움이 된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마리아의 전구는 성인들의 일반적인 전구와 연결되지만, 그가 주님의 어머니이자 교회의 영적 어머니라는 특별한 지위 때문에 더욱 뛰어난 모성적 역할로 이해됩니다. 성경 역시 살아 있는 신자들이 서로를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약5:16은 서로 죄를 고백하고 병이 낫기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권하며, 바울도 여러 서신에서 성도들에게 자신을 위하여 기도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러므로 전구라는 행위 자체를 잘못된 것으로 규정해서는 안 됩니다. 문제는 자연계에서 살아가는 신자들이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는 일과, 천국에 있는 특정한 성인에게 직접 기도를 청하는 일이 동일한 영적 질서에 속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천주교는 성도의 통공을 근거로 두 행위 사이에 연속성이 있다고 이해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영계의 질서를 설명하면서 이 문제를 다르게 가르칩니다.

 

2025년 11월 4일 바티칸 신앙교리부가 발표한 ‘신자들의 어머니’(Mater Populi Fidelis)는 이러한 가르침을 더욱 명확하게 정리했습니다. 이 문서의 24–29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재자이시며, 그분의 중재는 다른 피조물의 도움으로 보충해야 하는 불완전한 중재가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37–42항은 마리아의 모성적 전구를 그리스도의 유일한 중재에 참여하는 특별한 협력으로 이해합니다. 특히 38항은 마리아의 기도가 다른 성인들의 전구와 구별되는 특별한 가치와 효력을 지닌다고 설명하고, 41항은 마리아가 천국에서도 신자들의 기도에 모성적으로 동참한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이 문서가 마리아의 역할을 단순한 상징이나 신앙의 모범으로 축소한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천주교는 마리아의 실제적인 천상 전구를 인정하면서도, 그가 은총을 독립적으로 만들어 내거나 주님의 자비를 대신 관리하는 존재는 아니라고 구별합니다. 이러한 설명에는 주님의 유일한 구원을 보존하려는 중요한 신학적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전구가 그리스도께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가 지상의 수많은 신자가 드리는 청원을 실제로 어떤 방식으로 알고 받아들이는가 하는 질문까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그 문제는 자연계와 영계 사이의 영적 교통이 어떤 질서로 이루어지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천주교가 마리아의 전구를 설명할 때 자주 제시하는 성경은 요2:1–11의 가나 혼인 잔치입니다.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지자 마리아는 예수님께 그 사정을 알리고, 하인들에게는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권합니다. 천주교는 여기서 마리아가 사람들의 필요를 민감하게 살피고 그것을 주님께 아뢰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이러한 해석에는 인정해야 할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인 사건과 후대의 신학적 적용은 구별해야 합니다. 요2장의 마리아는 지상에서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고 있던 인간이었으며, 혼인 잔치의 구체적인 상황을 직접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그 사정을 예수님께 알렸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곧 사후에도 지상의 모든 신자가 드리는 기도를 듣고 주님께 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이 사건에서 실제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분은 마리아가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권능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으며, 하인들에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라고 권했습니다. 따라서 이 사건의 중심은 마리아의 독립적인 중재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가나 혼인 잔치를 마리아의 전구를 보여 주는 신앙적 표상으로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천국에서 이루어지는 전구의 구체적인 작용을 입증하는 직접적인 근거로 삼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천주교는 천사들이 인간을 돕는 말씀과 계8:3–4에서 성도들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는 환상도 천상 전구의 근거로 사용합니다. 이러한 성경적 연결 역시 그 의미를 정확하게 구별해야 합니다. 천사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인간을 돕는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곧 인간이 특정한 천사나 성인에게 직접 기도를 드려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계8장의 환상도 성도들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나타나는 상징적 장면이지, 마리아에게 직접 전구를 요청하라는 명령은 아닙니다. 한편 딤전2:5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가 한 분이시며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가르칩니다. 이 말씀은 살아 있는 신자들이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는 일을 금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을 하나님과 화해시키고 구원하시는 유일한 중재자가 주님이심을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따라서 살아 있는 신자들의 상호 기도, 천사들의 도움, 천국의 성인들에게 드리는 전구 요청, 그리고 그리스도의 유일한 구원적 중재는 각각 구별해야 합니다. 이들을 모두 하나의 의미로 취급하면 성경이 직접 가르치는 내용과 후대의 신학적 해석 사이의 차이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살펴보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에서 인간이 죽은 후에도 완전한 인간의 형상을 지니고 영계에서 살아간다고 설명합니다. 천국의 천사들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이며, 서로를 위한 선한 쓰임 가운데 살아갑니다. 따라서 죽음 이후의 인간이 이웃을 향한 사랑을 잃거나 다른 존재를 위한 선한 마음을 모두 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천국의 삶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에 기초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천국의 사랑이 곧 지상의 인간이 원하는 특정한 영적 존재를 자유롭게 불러 자신의 청원을 전달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연계와 영계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가르치지만, 그 연결이 인간의 선택에 따라 특정한 성인이나 천사를 기도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모든 참된 영적 교통은 주님의 질서 안에서 이루어지며, 그 중심에는 언제나 주님 자신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천사들이 인간을 사랑하고 도울 수 있다는 사실과 그들에게 직접 기도하는 행위가 정당하다는 주장은 구별해야 합니다. 이것은 마리아의 전구뿐 아니라 모든 성인에게 드리는 기도를 검토할 때 적용해야 할 원칙입니다.

 

이러한 구별은 스베덴보리의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824–825항에서 매우 직접적으로 나타납니다. TCR.824에서 스베덴보리는 영계에 들어온 가톨릭 신자들, 특히 수도자들이 자신들이 지상에서 공경하던 성인들을 찾는 모습을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찾는 성인들은 천국이나 영계의 다른 곳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으며, 지상의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기도하고 공경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고 기록합니다. 또한 자신이 성인으로 공경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그러한 공경을 원하는 영들은 오히려 영적 혼란에 빠진다고 설명합니다. 이어 TCR.825에서는 성인들에게 드리는 청원이 실제로 그들에게 들리지 않는다고 더욱 명확하게 말합니다. 그는 지상의 신자들이 성인들에게 전하는 기도가 그들에게 도달하여 전달된다고 생각하는 관행을 강하게 비판합니다. 이 두 항목은 스베덴보리의 성인 전구에 관한 입장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직접 근거입니다. 여기서 그의 비판은 단순히 성인들의 지위가 주님보다 낮다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지상의 신자가 천국의 성인들에게 직접 청원하고, 그들이 그 청원을 듣는다고 생각하는 관행 자체가 영계의 실제 질서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 내용은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영적 경험과 그에 근거한 가르침으로 제시한 것이므로, 성경 본문과 동일한 종류의 역사적 증언으로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그의 신학 안에서는 성인에게 드리는 기도의 타당성을 판단하는 명백한 자료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오해를 피해야 합니다. 천국의 성인들이 지상의 신자들이 자신들에게 드리는 청원을 듣지 못한다는 스베덴보리의 설명이 천사들이 인간을 돕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는 오히려 천사들이 주님의 섭리 안에서 인간을 보호하고 인도하며, 악령들의 영향으로부터 인간을 지키는 역할을 감당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천사들은 자신의 독립적인 능력으로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시는 사랑과 보호의 역사에 참여합니다. 따라서 천사들의 도움은 실제적이지만 그 근원은 언제나 주님입니다. 인간이 자신에게 어떤 천사가 함께하는지 알지 못하더라도 천사의 보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 도움은 인간의 의식에 직접 드러나지 않는 방식으로도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영적인 도움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 도움을 받기 위하여 특정한 영적 존재를 직접 불러야 한다는 주장을 구별하는 일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인간은 천사들에게 직접 기도함으로써 주님의 도움을 얻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나아가고 주님께서 자신의 섭리에 따라 천사들을 통하여 인간을 보호하고 인도하십니다. 따라서 천국의 사랑과 선한 쓰임을 인정하는 일은 성인들에게 드리는 기도를 정당화하는 일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이 점에서 마리아의 전구와 일반 성인들의 전구도 비교해야 합니다. 천주교는 모든 성인의 전구가 그리스도의 유일한 중재에 종속되어 있으며, 마리아의 전구는 그 가운데 특별한 모성적 성격과 뛰어난 지위를 지닌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성인들에게 직접 드리는 청원이 실제 영계의 질서와 일치하지 않는다면, 마리아가 주님의 어머니였다는 사실만으로 그에게 예외적인 기도 청취 능력이 주어졌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TCR.827에서 자신이 영계에서 마리아와 만났다고 기록하면서, 마리아가 주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예배한다고 전합니다. 여기서 마리아는 주님과 나란히 신적 권능을 행사하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는 인간으로 나타납니다. 물론 이 기록이 마리아의 모든 천상 활동을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그에게 어떠한 사랑이나 선한 쓰임도 없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 본문은 마리아가 지상의 모든 신자가 드리는 기도를 들을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지녔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TCR.824–825의 직접적인 성인 기도 비판과 TCR.827의 마리아에 관한 기록을 함께 고려하면, 마리아에게 전구를 청하는 관행을 신적으로 확정된 진리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마리아가 복된 여인이라는 사실과 그에게 기도를 드려야 한다는 주장은 별도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더욱 근본적인 질문은 인간이 주님께 기도할 때 그 기도가 주님께 도달하기 위하여 다른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가 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 7–12항에서 천국의 모든 선과 진리가 오직 주님에게서 비롯된다고 설명합니다. 주님은 인간이 자신의 필요를 말씀드리기 전에는 알지 못하시는 분이 아니며, 다른 피조물이 인간의 사정을 설명해야만 비로소 그를 이해하시는 분도 아닙니다. 주님은 무한한 사랑과 지혜 자체이시며, 인간의 내적인 상태와 필요를 모든 피조물보다 완전하게 알고 계십니다. 따라서 주님께 기도하는 일은 그분에게 새로운 정보를 알려 드리거나, 원래 베풀지 않으려 하셨던 은총을 설득하여 받아 내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마음을 주님께 열고, 그분의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이며, 자신의 이해와 의지를 주님의 뜻에 맞추어 가는 영적인 행위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마리아의 전구가 없으면 주님의 자비에 가까이 나아가기 어렵다는 생각은 옳지 않습니다. 물론 천주교의 공식 교리 역시 마리아의 전구가 없으면 주님께 나아갈 수 없다고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에게 직접 전구를 청하는 관행을 특별한 신앙적 도움으로 제시한다면, 그러한 방식이 주님께 직접 나아가는 기도의 질서에 실제로 부합하는지 검토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주님은 인간에게 이미 가까이 계시며, 인간이 그분께 나아가기 위하여 반드시 거쳐야 하는 별도의 천상 인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문제는 인간의 실제적인 신앙 감정과도 관련됩니다. 어떤 신자는 하나님을 엄격한 심판자로 생각하면서 그분께 직접 기도하기를 두려워할 수 있습니다. 반면 어머니의 사랑을 떠올리게 하는 마리아에게는 자신의 연약함과 아픔을 더 쉽게 털어놓을 수 있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감정 자체를 경솔하게 비판하거나 그 사람이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서로 다른 신앙적 배경과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주님께서는 각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선과 진리를 통하여 그를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의 대상을 더욱 깊이 살펴보아야 합니다. 마리아가 주님보다 더 자비롭고 인간의 고통을 더 잘 이해하는 존재처럼 느껴진다면, 그것은 주님의 사랑에 대한 이해가 아직 충분하지 않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모든 참된 모성애와 위로와 자비의 근원은 오직 주님 자신에게 있습니다. 천주교의 2025년 ‘신자들의 어머니’ 문서 역시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약화시키는 방식으로 마리아의 전구를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경계합니다. 따라서 이 문제는 특정한 신앙 감정을 비난하는 데 있지 않고, 그 신앙이 궁극적으로 누구를 모든 사랑과 자비의 근원으로 인정하는가를 살피는 데 있습니다. 참된 신앙의 성숙은 우리를 주님께 직접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하고, 주님께서 이미 우리를 완전하게 사랑하시는 분임을 깨닫도록 이끕니다.

 

마리아의 지상 생애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모습도 이러한 방향을 가리킵니다. 요2:5에서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권합니다. 눅1:38에서는 자신을 주의 여종이라고 부르며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고백합니다. 또한 눅1:46–47에서는 자신의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하나님 자신의 구주를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말씀들에서 마리아는 자신에게 특별한 신적 권능이 있다고 주장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반드시 자신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순종하도록 이끄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를 진정으로 존중한다면 그가 보여 준 믿음과 순종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가 주님의 성육신을 위하여 특별한 쓰임을 감당한 복된 여인이었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하지만, 그러한 역사적 역할이 그를 영원한 기도 요청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신앙의 귀중한 모범이 될 수 있다는 사실과 그에게 기도를 드리고 영적인 도움을 청해야 한다는 주장은 구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모든 천사와 구원받은 인간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이는 피조물이며, 그들이 지닌 모든 선한 쓰임의 근원은 오직 주님입니다. 참된 존중은 그들에게 주님의 권능을 나누어 부여하는 데 있지 않고, 그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선과 진리를 인정하는 데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번 교리가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기도의 대상이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 있는 이웃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위하여 기도해 달라고 부탁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상호 기도는 이웃을 사랑하고 서로의 짐을 지는 체어리티의 중요한 표현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자연계의 인간이 천국의 특정한 성인들에게 직접 청원하고, 그들이 그 청원을 듣는다고 생각하는 관행을 영계의 실제 질서와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천국의 천사들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능력으로 인간을 돕지만, 인간은 그들에게 직접 기도함으로써 주님의 도움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마땅히 바라보고 의지해야 할 분은 오직 주님 자신입니다. 이는 천사들의 도움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도움의 시작과 끝이 주님에게 있다는 뜻입니다. 마리아 역시 주님의 성육신을 위하여 선택된 복된 여인이었지만, 그에게 어떠한 사랑과 선한 쓰임이 있다면 그것 역시 주님에게서 비롯됩니다. 따라서 우리의 기도는 마리아에게 머무르거나 그를 거쳐야만 주님께 도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우리 각 사람의 가장 깊은 내면을 알고 계시며, 우리가 마음을 열 때 사랑과 진리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참된 기도의 목적은 어떤 천상 존재의 특별한 영향력을 얻는 데 있지 않고, 주님과의 직접적인 영적 결합 안에서 우리의 이해와 의지가 새로워지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결국 모든 기도의 궁극적인 대상과 모든 자비와 구원의 근원은 오직 주님 한 분이십니다. (SL.RC.037 해설)

 

요약

‘마리아는 신자들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전구한다’라는 명제에는 신자들이 서로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천주교는 마리아의 전구를 그리스도의 유일한 중재와 동등한 권능으로 가르치지 않으며, 그분의 구속과 은총에 종속된 모성적 협력으로 설명합니다. 특히 2025년 신앙교리부 문서는 주님의 자비가 부족하여 마리아가 이를 보충해야 한다는 이해를 경계합니다. 이러한 공식적인 구별은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지상의 신자들이 천국에 있는 마리아에게 기도를 청할 때 그가 실제로 그 청원을 알고 주님께 전구한다는 주장은 성경이 직접적으로 확정하는 내용을 넘어서는 신학적 주장입니다. 가나 혼인 잔치와 신자들의 상호 기도, 천사들의 도움에 관한 말씀들은 각각 중요한 의미가 있지만, 마리아에게 사후의 전구를 요청하는 행위를 직접 명령하거나 보증하지는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TCR.824–825에서 천국의 성인들이 지상에서 자신들에게 드리는 기도를 알고 듣는다는 생각을 직접 비판하며, 그러한 관행이 실제 영계의 질서와 일치하지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이번 문제에서는 그의 주님론에서 도출되는 해석적 판단뿐 아니라 성인들에게 드리는 기도에 관한 직접적인 반론도 확인됩니다. 다만 이것이 천국의 천사들과 구원받은 인간들이 사랑을 잃거나 주님의 섭리 안에서 선한 쓰임을 감당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류의 핵심은 마리아를 복된 여인으로 존중하거나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는 사랑의 행위를 인정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마리아에게 특별한 기도 청취 능력과 전구의 역할이 부여되었다고 확정하고, 그에게 직접 청원하는 행위를 정당한 영적 교통의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모든 천국의 선과 권능은 주님에게서 나오며, 주님은 이미 인간의 모든 내적인 필요를 알고 계시는 무한한 사랑과 자비 자체이십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주님께 나아가기 위하여 마리아의 전구를 요청해야 할 신학적 필요는 없으며, 참된 기도는 주님께 직접 마음을 열고 그분의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 있는 이웃을 위하여 기도하고 서로를 사랑해야 하지만, 모든 영적 생명과 구원의 유일한 근원이신 주님 한 분만을 기도의 궁극적인 대상으로 삼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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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RC.036 | 천주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마리아는 교회의 어머니이며 모든 신자의 영적 어머니다’ – 영적 생명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는가, 주님에게서 태어나는가?

 

해설

‘마리아는 교회의 어머니이며 모든 신자의 영적 어머니다.’ 이것은 천주교가 마리아에게 부여하는 ‘교회의 어머니’(Mother of the Church)와 ‘영적 모성’(靈的母性, spiritual motherhood)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천주교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은 육신의 어머니였다는 사실을 넘어,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자와 교회 전체에 대하여 특별한 어머니의 역할을 지닌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이해에서 마리아는 신자들을 모성적 사랑으로 돌보고, 그들이 그리스도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도록 도우며, 교회의 믿음과 순종을 보여 주는 특별한 모범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몇 가지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어머니였다는 역사적 사실이 어떻게 모든 신자의 어머니라는 결론으로 이어질까요? 성경은 마리아가 교회 전체의 영적 어머니라고 직접 가르칠까요? 사람이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주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일인데, 여기에 마리아의 영적 모성이라는 별도의 관계가 필요한 것일까요? 무엇보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에서 ‘어머니’가 교회를 나타낸다고 가르치는데, 교회의 영적 모성과 마리아 개인에게 부여된 모성적 지위를 어떻게 구별해야 할까요? 이러한 질문은 단순히 마리아에게 사용하는 존칭의 적절성을 넘어, 인간이 누구에게서 영적 생명을 받고 어떤 과정을 통하여 거듭나는가를 묻는 문제입니다. 따라서 이 명제를 검토하려면 천주교의 공식적인 가르침을 정확히 이해하고, 성경과 스베덴보리의 교회론 및 거듭남의 가르침에 비추어 그 의미와 한계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먼저 천주교의 공식적인 입장을 확인해야 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 53항은 마리아가 사랑으로 협력하여 그리스도의 지체인 신자들이 교회 안에서 태어나도록 도왔다는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지체들의 어머니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61항은 마리아가 순종과 믿음, 소망과 사랑으로 구세주의 구원 사업에 특별하게 협력했으므로 ‘은총의 질서 안에서 우리의 어머니’라고 가르칩니다. 62항은 그러한 모성적 역할이 마리아의 지상 생애에만 국한되지 않고 천상에서도 계속된다고 설명합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963–970항 역시 이 가르침을 계승합니다. 특히 968항은 마리아가 인간의 초자연적인 생명을 회복시키는 구속의 역사에 특별하게 협력했다고 설명하며, 969항은 그가 천상에서도 신자들을 위한 모성적 돌봄과 전구를 계속한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천주교의 영적 모성은 단순히 마리아를 존경할 만한 신앙의 선배로 기억한다는 뜻보다 적극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과 특별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오늘날에도 신자들의 영적 삶을 돕는 역할을 감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주교는 이러한 역할을 그리스도에게서 독립된 권능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교회헌장 60항은 그리스도의 중재가 유일하며, 마리아의 모든 구원적 영향력은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와 중재에 의존한다고 명확하게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천주교가 마리아를 영적 생명의 독립적인 근원으로 선언했다고 비판하는 것은 공식 교리의 실제 의미를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합니다.

 

이 칭호의 역사적 발전도 중요합니다. 교황 바오로 6세는 1964년 11월 21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제3회기 폐막 연설에서 마리아를 ‘교회의 어머니’라고 선언했습니다. 여기서 교회란 성직자들만이 아니라 교회의 목자들과 모든 신자를 포함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합니다. 이후 이 칭호는 가톨릭의 전례와 신심 안에서 더욱 널리 사용되었으며, 2018년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결정에 따라 성령 강림 대축일 다음 월요일을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영적 모성이라는 생각이 1964년에 처음 만들어진 것은 아닙니다. 이 사상은 오랜 교회 전통 안에서 발전했으며, 마리아를 교회의 믿음과 사랑의 모범으로 이해하는 가르침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천주교 역시 교회의 설립자와 머리는 그리스도이시며, 교회의 생명은 그분의 구속과 성령의 역사에서 비롯된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마리아를 교회의 어머니라고 부른다는 사실만으로 그를 교회의 창설자나 최고 통치자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 칭호가 단순한 명예적 표현을 넘어 모든 신자와의 실제적인 영적 관계를 나타낸다고 설명한다면, 그러한 관계가 성경과 주님의 영적 질서에서 어떤 근거를 갖는지 별도로 검토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2025년 11월 4일 바티칸 신앙교리부가 발표한 ‘신자들의 어머니’(Mater Populi Fidelis)는 특히 주목할 만한 문서입니다. 이 문서의 34–37항은 마리아의 영적 모성이 그리스도의 어머니라는 역사적 사실에서 출발하지만,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의 모든 지체와 관계되는 모성으로 확장된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마리아가 단순히 과거의 모범에 머무르지 않고, 오늘날에도 신자들을 위한 모성적 협력과 ‘전구’(轉求, intercession)를 감당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 문서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유일한 중재를 약화시키거나, 마리아에게 그리스도와 나란히 서는 독립적인 구원적 역할을 부여하는 표현을 경계합니다. 특히 45–47항은 마리아가 하나님과 별도로 은총을 보관하거나 모든 은총이 반드시 그의 손을 통하여 전달되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설명합니다. 마리아의 역할은 신자들이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받아들이도록 돕는 모성적 협력이며, 실제로 영적 생명을 주시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인정해야 할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천주교의 공식 교리 자체가 마리아를 주님의 은총과 독립된 생명의 근원으로 만들지 않으려는 분명한 의도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구별을 인정하더라도 마리아 개인에게 모든 신자의 영원한 어머니라는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는 일이 신적으로 확정된 진리인지에 관한 질문은 여전히 남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천주교의 영적 모성론과 스베덴보리의 교회론을 비교해야 합니다.

 

천주교가 마리아의 영적 모성을 설명할 때 가장 중요하게 사용하는 성경은 요19:26–27입니다. 십자가 위에 계신 주님께서는 자신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마리아에게는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고 말씀하시고 제자에게는 ‘보라 네 어머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 제자는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직접적인 역사적 문맥에서 주님은 자신의 어머니를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맡기시고, 그 제자에게 마리아를 어머니처럼 돌보도록 하십니다. 이는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도 어머니를 돌보셨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천주교는 여기에서 더 깊은 신학적 의미를 발견합니다. 사랑하시는 제자가 모든 신자를 대표하며, 주님께서 마리아를 그 제자의 어머니로 맡기신 것은 교회 전체에 마리아를 영적 어머니로 주신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마리아의 믿음과 순종을 교회의 삶과 연결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요19:26–27은 모든 시대의 신자들이 마리아를 반드시 영적 어머니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직접 선언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이 말씀만으로 마리아가 천국에서 모든 신자의 영적 생명을 지속적으로 돌보는 특별한 권위를 받았다고 확정하기도 어렵습니다. 따라서 성경이 직접 기록한 사건과 그 사건에 부여한 후대의 신학적 해석을 구별해야 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주님론은 중요한 관점을 제공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102항에서 주님께서 마리아에게서 취하신 인성을 영화하셨으므로, 영화 이후의 주님을 여전히 마리아에게서 비롯된 자연적인 인성에 의하여 규정해서는 안 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이러한 가르침의 근거 가운데 하나로 요19:26–27을 인용하며, 주님께서 마리아를 ‘어머니’가 아니라 ‘여자여’라고 부르신 사실에 주목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성경의 문자적 문맥과 스베덴보리의 신학적 해석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당시의 호칭 자체가 자연적인 모자 관계를 부정한다는 뜻은 아니며, 이 장면은 오히려 주님께서 마리아를 돌보시는 구체적인 사랑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것은 주님의 영원한 신적 정체성이 마리아에게서 받은 자연적인 인성에 종속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마리아가 주님의 지상 생애에서 실제로 어머니였다는 사실은 인정하되, 그 자연적인 모성을 근거로 영화된 주님과 교회 전체에 대한 영원한 모성적 권위를 도출하는 데에는 신중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마리아를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맡기신 사건과 마리아에게 모든 신자의 거듭남을 돌보는 보편적 직분이 부여되었다는 주장은 동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제 성경에서 ‘어머니’가 지니는 영적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AC, 1749–1756) 289–290항에서 창3:20의 하와가 ‘모든 산 자의 어머니’라고 불린 이유를 해설합니다. 그는 여기서 ‘어머니’가 교회를 나타내며, ‘산 자’는 생명 자체이신 주님에게서 오는 믿음과 생명을 가진 사람들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AC.289는 아내와 어머니가 교회, 넓은 의미에서는 하늘과 땅에 있는 주님의 나라를 나타낸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AC.290은 참된 생명이 오직 주님에게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 말씀에서 하와가 모든 산 자의 어머니라는 것은 어떤 한 여성이 모든 인간의 영적 생명을 직접 만들어 낸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고 전달하는 교회의 영적 역할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설명은 AC.2691과 2717항에서도 이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어머니를 교회와 연결하여 해석하며, 특히 진리에 대한 애정과 관계된 영적 교회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사용합니다. 따라서 말씀에서 어머니가 지니는 속뜻은 단순한 자연적 출생을 넘어, 주님의 선과 진리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그들이 영적으로 살아나는 과정과 관계됩니다. 이것은 마리아의 영적 모성을 검토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기준입니다. 성경에서 어머니가 교회를 나타낸다는 사실과 마리아라는 역사적 인물에게 모든 신자의 보편적인 영적 모성의 권위가 주어졌다는 주장은 구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영적 의미는 성경의 다른 말씀에서도 확인됩니다. 갈4:26에서 바울은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 자유자이며 우리의 어머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어머니는 특정한 인간 여성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오는 자유와 생명을 지닌 영적 공동체를 나타냅니다. 또한 계12:1의 해를 입은 여자에 관하여 스베덴보리는 ‘계시록 해설’(Apocalypse Revealed, AR, 1766) 533항에서 그 여인이 새 하늘에 있는 주님의 새 교회와 땅 위에 세워질 새 교회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어머니와 여자가 교회의 영적 상태를 나타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상응의 원리를 조심스럽게 적용해야 합니다. 어떤 여성이 교회를 나타내는 표상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사실이 그 여성 개인에게 교회의 모든 영적 권위가 실제로 부여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마리아가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순종한 모습은 교회가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모습을 아름답게 보여 주는 신앙적 모범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교회를 나타내는 모범이라는 주장과 그가 모든 신자의 영원한 어머니라는 주장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 원리는 역사적인 인물을 신격화하거나 그에게 특별한 종교적 권위를 부여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말씀 안에 담긴 주님의 선과 진리를 이해하도록 돕는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영적 출생의 근원을 살펴보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요3:3–8에서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으며,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또한 요1:12–13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나는 것이라고 증언합니다. 여기서 ‘거듭남’(regeneration)은 인간이 주님에게서 새로운 영적 생명을 받는 과정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인간은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악을 죄로 여겨 피하며 선을 행하는 삶으로 나아가는 만큼 영적으로 새로워집니다. 이 과정에서 교회는 말씀을 가르치고 진리의 삶으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영적인 어머니의 쓰임을 감당합니다. 그러나 교회 자체가 생명의 근원인 것은 아닙니다. 교회는 주님께서 말씀과 진리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곳이며, 실제로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마리아는 주님께서 인간으로 세상에 오시는 자연적인 출생에서 특별한 역할을 감당했지만, 다른 모든 인간의 영적 출생이 마리아에게서 비롯된다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스베덴보리의 교회론은 영적 모성의 중심을 특정한 역사적 인물보다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고 전하는 교회의 쓰임에 둡니다. 그리고 그 교회조차 모든 생명을 주님에게서 받는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천주교와 스베덴보리의 가르침 사이에 공통점과 차이가 함께 나타납니다. 천주교 역시 영적 생명의 유일한 근원이 마리아 자신이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마리아의 영적 모성은 그리스도의 구속과 은총에 종속되어 있으며, 신자들이 그리스도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도록 돕는 모성적 협력으로 설명됩니다. 그러나 천주교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마리아 개인에게 모든 신자를 향한 지속적인 모성적 역할이 실제로 주어졌다고 고백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의 직접적인 가르침에서 영적 어머니라는 표현은 우선 교회와 관계되며, 인간의 거듭남은 주님께서 말씀과 선과 진리를 통하여 이루시는 역사입니다. 따라서 마리아가 교회의 모범이라는 사실은 인정할 수 있지만, 그의 자연적인 모성을 모든 신자를 향한 보편적이고 영원한 영적 직분으로 확장하는 데에는 별도의 근거가 필요합니다. 특히 천주교가 마리아의 영적 모성을 천상에서 계속되는 전구와 돌봄의 역할로 설명하는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영계 이해와 함께 검토해야 합니다. 천국의 천사들이 서로 사랑하며 선한 쓰임을 감당한다는 사실과, 특정한 한 인간에게 모든 신자를 향한 특별한 모성적 권위가 부여되었다는 주장은 구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의 구체적인 내용은 마리아의 전구와 중재에 관한 후속 해설에서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TCR.827에서 자신이 영계에서 마리아와 만난 경험을 기록합니다. 그는 마리아가 자신은 주님의 어머니였지만 주님께서 어머니에게서 취하신 인간적인 것을 벗으시고 인성을 신적으로 만드셨으므로 이제는 그분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예배한다고 말했다고 전합니다. 이 기록은 성경에 기록된 사건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영적 경험으로 보고한 내용이므로, 자료의 성격을 정확하게 구별해야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마리아 이해를 직접 보여 주는 중요한 본문입니다. 여기서 마리아는 주님을 예배하는 영계의 인간으로 나타나며, 모든 신자의 영적 생명을 낳거나 보존하는 독립적인 권위자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다만 그 기록에 특별한 모성적 직분이 언급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마리아가 천국에서 어떠한 사랑이나 쓰임도 감당하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천국론에 따르면 모든 천사는 자신에게 맡겨진 선한 쓰임 안에서 주님의 사랑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마리아가 주님의 성육신을 위하여 특별한 쓰임을 감당했다는 사실과, 그가 영원히 모든 인간의 영적 어머니로서 특별한 천상 권위를 행사한다는 주장은 동일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전자는 성경과 스베덴보리의 저작이 직접 뒷받침하지만, 후자는 그의 직접적인 가르침으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이 문제는 실제 신앙생활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인간은 어머니의 사랑을 통하여 위로와 보호, 따뜻함과 돌봄을 경험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어머니의 사랑과 연결하여 이해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성경 역시 사49:15에서 어머니가 자기 자식을 잊을 수 있겠느냐고 말씀하시면서, 설령 어머니가 자식을 잊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잊지 않으신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어머니의 사랑은 주님의 사랑을 이해하도록 돕는 비유이지만, 주님의 사랑이 부족하여 다른 존재가 그것을 보충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참된 모성애의 근원은 주님 자신에게 있습니다. 따라서 마리아를 특별히 자비로운 영적 어머니로 생각하면서 주님께서는 멀고 엄격하시지만 마리아는 자신을 더 잘 이해하고 받아 주는 분이라고 여긴다면, 그 신앙적 이해는 다시 살펴야 합니다. 주님은 이미 무한한 사랑과 자비 자체이시며, 인간이 그분께 나아가기 위하여 반드시 다른 피조물의 모성적 보호를 거쳐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천주교의 공식 가르침과 개인적인 통념을 구별해야 합니다. 2025년 신앙교리부 문서는 마리아를 주님의 엄격한 심판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하는 별도의 피난처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경계합니다. 따라서 문제는 어머니의 사랑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묵상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랑의 표상을 주님과 인간 사이에 반드시 필요한 별도의 영적 권위나 관계로 확정하는 데 있습니다.

 

마리아의 믿음과 순종을 존중하는 일은 이러한 신학적 구별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눅1:38에서 마리아는 자신을 주의 여종이라고 부르며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고백합니다. 눅1:46–47에서는 자신의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하나님 자신의 구주를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요2:5에서 가나의 혼인 잔치에 참석한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마리아가 교회의 믿음과 순종을 보여 주는 중요한 모범이 될 수 있음을 알려 줍니다. 그는 자신의 특별한 지위를 주장하기보다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도록 이끄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를 교회의 믿음과 순종의 본보기로 기억하는 데에는 귀중한 신앙적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과 순종이 모든 신자에게 마리아와의 직접적이고 영원한 모자 관계를 형성한다는 사실까지 증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인간의 참된 위대함은 특별한 칭호나 지위를 받았는가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얼마나 받아들이고 그것을 실제적인 삶에서 실천하는가에 있습니다. 마리아가 참으로 복된 여인인 것도 그가 주님의 성육신을 위하여 선택되었고, 그 말씀을 믿음과 순종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를 진정으로 존중한다면 그의 삶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 방향, 곧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태도를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교회의 참된 영적 모성이 무엇이며 인간이 누구에게서 새롭게 태어나는가를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은 위에 있는 예루살렘을 우리의 어머니라고 부르며, 스베덴보리는 말씀에서 어머니가 교회를 나타낸다고 가르칩니다. 교회는 주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선과 진리를 전하며, 사람들이 그 말씀을 받아들여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도록 돕는 영적인 어머니의 역할을 감당합니다. 그러나 교회조차 생명의 근원은 아닙니다. 교회가 참된 교회인 것은 오직 주님께서 그 안에 계시고, 그분의 선과 진리가 사람들의 삶 속에서 받아들여지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주님께서 인간으로 오시기 위하여 선택하신 복된 어머니였으며, 그의 믿음과 순종은 교회가 본받아야 할 귀중한 모범입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을 영적으로 낳고 거듭나게 하시는 분은 마리아가 아니라 주님 자신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어떤 특별한 인간과 영적인 모자 관계를 맺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교회의 어머니이며 모든 신자의 영적 어머니다’라는 명제를 검토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마리아의 모성적 지위를 높이거나 낮추는 데 있지 않습니다. 어머니라는 영적 표상을 통하여 주님의 사랑과 교회의 참된 쓰임을 이해하고, 모든 영적 생명의 근원이 오직 주님 한 분이심을 더욱 분명하게 깨닫는 데 있습니다. 교회는 그 생명을 받아들이고 전하는 영적인 어머니의 쓰임을 감당하지만, 그 모든 생명과 사랑의 시작과 끝은 언제나 주님 자신이십니다. (SL.RC.036 해설)

 

요약

‘마리아는 교회의 어머니이며 모든 신자의 영적 어머니다’라는 명제에는 마리아가 주님의 성육신을 위하여 선택된 복된 여인이며, 그의 믿음과 순종이 교회와 신자들에게 중요한 모범이 된다는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천주교는 마리아의 영적 모성을 그리스도에게서 독립된 생명의 근원으로 설명하지 않으며, 그의 역할을 그리스도의 유일한 구속과 은총에 종속된 모성적 협력으로 가르칩니다. 특히 2025년 신앙교리부 문서는 마리아에게 독립적인 구원적 권위나 모든 은총의 필수적 전달자라는 지위를 부여하는 이해를 경계합니다. 이러한 공식적인 구별은 정확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요19:26–27에서 주님께서 마리아를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맡기신 사건을 모든 시대의 신자에게 적용하고, 그에게 영원한 영적 모성의 직분이 부여되었다고 확정하는 것은 성경 본문의 직접적인 진술을 넘어서는 신학적 해석입니다. 스베덴보리는 AC.289–290과 2691·2717항에서 어머니가 교회를 나타내며, 모든 참된 영적 생명은 오직 주님에게서 비롯된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TCR.102와 827에서는 영화된 주님과 마리아의 자연적인 모자 관계를 구별하고, 마리아를 주님을 예배하는 영계의 인간으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오류로 검토해야 할 핵심은 마리아를 복된 어머니로 존중하거나 교회의 믿음과 순종의 모범으로 삼는 데 있지 않습니다. 마리아의 역사적 모성을 교회 전체의 보편적이고 영원한 영적 모성으로 확대하고, 그에게 모든 신자를 향한 특별한 천상 직분을 신적으로 확정하는 데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가 이 칭호를 직접적으로 반박했다고 주장할 근거는 부족하며, 이러한 판단은 그의 주님론과 교회론, 거듭남의 가르침에 근거한 신학적 평가입니다. 성경에서 어머니가 나타내는 중요한 영적 의미는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전달하는 교회이며, 실제로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 자신이십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를 교회의 믿음과 사랑을 보여 주는 귀중한 모범으로 존중할 수는 있지만, 인간의 영적 출생과 구원을 이해하기 위하여 마리아의 별도 모성적 권위를 반드시 믿어야 할 진리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모든 인간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분은 오직 주님 한 분이시며, 참된 교회는 그 생명을 받아들이고 이웃에게 전하는 영적인 어머니의 쓰임을 감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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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RC.035 | 천주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마리아는 하늘의 여왕으로 공경받는다’ – 천국의 참된 왕권은 누구에게 있으며, 마리아의 특별한 지위는 어디까지 인정할 수 있는가?

 

해설

‘마리아는 하늘의 여왕으로 공경받는다.’ 이것은 천주교의 마리아 신앙에서 널리 사용되는 ‘하늘의 여왕’(Regina Caeli, Queen of Heaven)이라는 칭호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천주교 신자들은 마리아를 ‘천상 모후’(天上母后)라고 부르며, 성모상에 왕관을 씌우거나 왕좌에 앉은 마리아의 모습을 성화와 조각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묵주기도의 영광의 신비 마지막 단에서는 마리아가 하늘의 모후로 관을 받으시는 일을 묵상합니다. 이러한 신심에는 마리아가 주님의 어머니로서 특별한 영광을 받았으며, 천국의 모든 성인과 천사 가운데 뛰어난 지위를 차지한다는 믿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을 접하면 몇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천국의 왕은 오직 주님 한 분이신데, 어떻게 마리아를 하늘의 여왕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마리아가 하늘의 여왕이라는 말은 단순한 존칭일까요, 아니면 실제로 천국에서 특별한 권위를 행사한다는 뜻일까요? 무엇보다 천국의 모든 생명과 권능이 오직 주님에게서 나온다면, 마리아에게 별도의 왕적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 과연 정당할까요? 이 문제는 단순히 마리아에게 사용하는 칭호의 적절성을 넘어, 천국이 어떤 질서로 이루어져 있는지, 천사와 성인들의 영적 권위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그리고 모든 예배의 중심이 누구에게 있어야 하는지를 묻는 중요한 신학적 문제입니다.

 

먼저 천주교가 말하는 마리아의 왕권(王權, queenship)을 정확히 이해해야 합니다. 교황 비오 12세는 1954년 10월 11일 회칙 ‘하늘의 여왕께’(Ad Caeli Reginam)를 발표하면서 마리아를 하늘의 여왕으로 공경하는 신학적 근거를 설명하고, 마리아의 왕권을 기념하는 축일을 제정했습니다. 처음에는 5월 31일에 지냈지만, 현재 로마 가톨릭 전례력에서는 성모 승천 대축일로부터 여드레 뒤인 8월 22일에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을 지냅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1954년의 회칙이 마리아의 왕권을 처음으로 새로운 신앙의 교의로 선포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비오 12세는 회칙 6항에서 새로운 신앙의 진리를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교회의 전통과 전례 안에서 인정되어 온 마리아의 왕적 지위를 더욱 분명히 설명하려 한다고 밝혔습니다. 따라서 마리아의 왕권을 1954년에 갑자기 만들어 낸 교리라고 설명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랜 전통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 전통이 실제로 주님의 계시에 근거한 진리인가는 별도로 검토해야 합니다. 특히 마리아의 왕권은 단순히 존칭으로만 이해되지 않습니다. 천주교는 마리아에게 그리스도에게서 비롯되는 특별한 왕적 존엄과 영향력이 있으며, 그가 신자들을 위하여 모성적으로 전구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명예로운 칭호와 실제적인 천상 권위에 관한 주장을 함께 살펴야 합니다.

 

천주교가 마리아의 왕권을 설명하는 첫 번째 근거는 그가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라는 사실입니다. 눅1:32–33에서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실 예수님이 다윗의 왕위를 받으시고 영원히 다스리실 것이라고 전합니다. 또한 눅1:43에서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내 주의 어머니’라고 부릅니다. 천주교는 이 말씀들을 근거로 영원한 왕이신 그리스도의 어머니에게도 특별한 왕실적 존엄이 주어졌다고 이해합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왕실에서 왕의 어머니가 차지한 지위 역시 이러한 해석과 연결됩니다. 왕상2:19에서는 솔로몬이 어머니 밧세바를 위하여 일어나 절하고, 자신의 오른쪽에 자리를 마련해 주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천주교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마리아를 왕이신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자 특별한 영광을 받은 여인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성경이 직접 증언하는 내용과 후대의 신학적 적용을 구별해야 합니다. 눅1:32–33은 예수님께서 영원히 다스리실 왕이심을 분명하게 가르치지만, 마리아에게 천국의 왕권이 부여된다고 직접 선언하지는 않습니다. 왕상2:19 역시 고대 이스라엘 왕실에서 왕의 어머니가 존중받았다는 역사적 사례이지, 마리아가 천국에서 모든 천사와 성인을 다스린다는 사실을 직접 가르치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마리아의 왕권은 이러한 성경 본문들을 연결하여 형성된 신학적 해석이며, 성경이 명시적으로 선언하는 주님의 영원한 왕권과는 구별해야 합니다.

 

비오 12세의 회칙은 마리아의 왕권을 그리스도의 어머니라는 지위에만 근거하지 않습니다.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에 특별하게 협력했다는 사실도 중요한 근거로 제시합니다. 회칙 34–39항은 마리아가 구속주이신 그리스도와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었으며, 그분의 고난과 승리에 특별한 방식으로 참여했기 때문에 왕적 존엄을 받는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회칙 39항은 엄밀하고 완전한 의미에서 참된 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마리아는 제한적이고 유비적인 의미에서 그 왕권에 참여한다고 분명하게 구별합니다. 여기서 마리아의 왕권은 그리스도에게서 독립된 신적 통치권이 아니라, 그분에게서 비롯되는 종속적인 권위라는 것입니다. 또한 천주교는 하나님께만 드리는 ‘흠숭’(欽崇, adoration)과 성인들에게 드리는 ‘공경’(恭敬, veneration)을 구별하며, 마리아에게는 다른 성인들보다 특별한 공경을 드린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구별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 66항과 ‘가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971항에서도 확인됩니다. 그러므로 천주교가 공식적으로 마리아를 주님과 동등한 신으로 숭배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검토가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마리아의 왕권이 주님의 왕권에 종속되어 있다고 설명하더라도, 그에게 부여된 특별한 천상 권위와 신자들을 위한 ‘전구’(轉求, intercession)가 과연 성경과 천국의 영적 질서에 근거하는지는 별도로 살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하늘의 여왕’이라는 표현이 다른 문맥에서도 나타납니다. 렘7:18과 렘44:17–19에서는 유다 백성이 하늘의 여왕에게 제물을 바치고 분향하며 전제를 드리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하여 이러한 행위를 강하게 책망하십니다. 이 말씀을 근거로 천주교가 마리아를 하늘의 여왕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곧 구약의 우상숭배와 동일하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교에서는 역사적 대상과 신학적 의미를 구별해야 합니다. 예레미야서의 하늘의 여왕은 고대 근동의 여신 숭배와 관계된 표현인 반면, 천주교가 마리아를 하늘의 여왕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리스도의 어머니에게 주어진 특별한 영광을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같은 표현을 사용한다고 해서 그 대상과 의미가 자동으로 동일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이 구절들을 마리아 공경에 대한 직접적인 역사적 판정으로 사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다만 여기에는 우리가 반드시 살펴야 할 영적 원칙이 있습니다. 인간이 주님께만 속한 신적 권능과 영광을 다른 존재에게 돌리고, 그 존재를 신적 생명과 구원의 근원처럼 의지한다면 그것은 참된 예배의 질서를 벗어나는 일이 됩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질문은 마리아에게 사용하는 칭호가 고대 여신의 명칭과 같다는 사실이 아니라, 실제로 누구를 모든 사랑과 자비, 권능과 구원의 궁극적인 근원으로 여기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천국의 왕권을 살펴보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 2–6항에서 천국의 하나님은 오직 주님 한 분이시라고 가르칩니다. 천국의 모든 천사는 주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며, 그분과 나란히 독립적인 신적 통치권을 지니는 존재는 없습니다. 또한 HH.7–8에서는 천국을 천국 되게 하는 것이 천사들 자신에게서 비롯되는 거룩함이나 권능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흘러나와 천사들이 받아들이는 신적 선과 진리라고 설명합니다. 천사들은 자신들이 행하는 모든 참된 선과 자신들이 이해하는 모든 참된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식합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어떤 천사도 자신의 능력과 지혜로 천국을 이루거나 유지하지 않습니다. 천국의 모든 생명은 주님에게서 흘러들어오며, 천사들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만큼 천국의 생명에 참여합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마리아의 왕권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기준을 제공합니다. 설령 마리아가 천국에서 매우 높은 상태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에게 독립적인 신적 권능이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어떤 천사가 특별한 지혜와 사랑을 지니고 있다고 해서 그가 다른 천사들에게 신적 생명을 부여하는 근원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천국의 참된 통치권은 오직 주님에게 속하며, 모든 천사와 인간은 그분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자신에게 맡겨진 쓰임을 감당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94항에서 마리아를 높이는 당시 로마 가톨릭의 신심을 직접적으로 비판합니다. 그는 기독교인들이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기보다 마리아의 아들로 생각하는 경향을 지적하면서, 로마 가톨릭이 마리아를 다른 모든 성인보다 높이고 여신이나 성인들의 여왕처럼 받들었다고 비판합니다. 원문에는 마리아를 ‘여신 또는 여왕’(goddess or queen)으로 높였다는 강한 표현이 실제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평가와 천주교의 공식 교리를 구별해야 합니다. 천주교는 마리아를 여신이라고 가르치지 않으며, 그에게 주님과 동등한 신적 왕권이 있다고 선언하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TCR.94의 비판을 오늘날 천주교의 공식 교리를 그대로 설명한 문장으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이 본문은 스베덴보리가 당시의 마리아 신심에서 발견한 영적 위험을 보여 주는 자료입니다. 그가 특히 경계한 것은 주님의 신적 정체성을 마리아에게서 비롯된 자연적인 모자 관계 안에 가두거나, 마리아에 대한 공경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주님의 유일한 신성이 흐려지는 현상이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마리아에게서 자연적인 인성을 취하셨지만, 그 인성을 점차 영화하여 온전히 신적으로 만드셨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영화 이후의 주님을 여전히 마리아에게서 비롯된 자연적인 인성에 의하여 규정하거나, 그 모성에서 마리아의 영원한 왕적 권위를 도출하는 일은 그의 주님론에 비추어 다시 검토해야 합니다.

 

이러한 구별은 TCR.827에서도 확인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영계에서 흰옷을 입은 마리아를 보았으며, 마리아가 자신은 주님의 어머니였지만 주님께서 어머니에게서 취하신 인간적인 것을 벗으시고 인성을 신적으로 만드셨으므로 이제는 그분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예배한다고 말했다고 기록합니다. 또한 마리아는 주님 안에 모든 신성이 있으므로 사람들이 그분을 여전히 자신의 아들로 이해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고 전합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영적 경험으로 보고한 내용입니다. 따라서 성경의 증언과 동일한 종류의 자료로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마리아 이해를 직접적으로 보여 주는 중요한 기록입니다. 여기서 마리아는 천국의 왕좌에 앉아 다른 천사와 성인을 다스리는 존재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그는 주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예배하는 영계의 인간으로 나타납니다. 다만 이 기록이 마리아의 천국 내 모든 관계와 쓰임을 완전하게 설명하는 것은 아니므로, 마리아에게 어떠한 특별한 영적 상태나 영예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주님과 구별되는 피조물이며, 자신의 하나님으로 오직 주님을 예배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이해는 천국의 모든 선과 생명이 오직 주님에게서 비롯된다는 HH.7–8의 가르침과 일치합니다.

 

그렇다면 천국에서 높은 지위나 특별한 권위를 갖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는 흔히 자연계의 왕권을 기준으로 천국의 질서를 상상합니다. 자연계에서 왕이나 여왕은 영토와 백성을 다스리는 통치자이며, 높은 지위에는 더 큰 권력과 영향력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천국의 질서는 그러한 자연적인 권력 구조와 동일하지 않습니다. 천국에도 서로 다른 천사 사회와 질서가 있으며, 천사들은 각자의 상태와 쓰임에 따라 다양한 역할을 감당합니다. 그러나 참된 권위는 자기 자신을 높이거나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는 데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이고, 그 사랑과 지혜로 다른 사람을 섬기는 선한 쓰임에서 나타납니다. 주님께서는 막10:42–45에서 세상의 집권자들이 사람들을 주관하지만, 제자들 가운데서는 크고자 하는 사람이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천국의 참된 높음은 바로 이러한 섬김의 질서와 관계됩니다. 따라서 마리아의 특별한 영적 상태를 인정하더라도, 그것을 다른 모든 천사와 성인을 지배하는 독립적인 권력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마리아의 복됨은 주님께서 맡기신 거룩한 쓰임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뜻에 순종한 데서 이해해야 합니다. 천국의 어떤 존재도 자신의 권능으로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는 만큼 참된 사랑과 지혜 안에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천주교의 공식적인 설명과 실제 신앙생활에서 형성될 수 있는 통념을 다시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천주교는 마리아의 왕권이 주님의 왕권에 종속되어 있으며, 마리아에 대한 공경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나아가도록 돕는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공식적인 교리의 구별을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실제 신앙생활에서도 언제나 그 구별이 올바르게 유지된다고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신자가 마리아를 주님보다 더 자비로운 존재로 생각하거나, 주님께서는 엄격하시지만 마리아가 그분의 마음을 움직여 자신에게 필요한 은총을 얻어 준다고 이해한다면, 그것은 별도로 검토해야 할 신앙적 통념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주님론은 매우 중요한 진리를 밝힙니다. 주님은 무한한 사랑과 지혜 자체이시며, 모든 자비와 구원의 근원이십니다. 주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고 도우시기 위하여 어떤 피조물에게 설득을 받으셔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마리아를 통하여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더욱 깊이 깨닫는 것과, 마리아가 주님보다 더 자비로워 그분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전자는 신앙적인 정서와 해석의 문제로 살펴볼 수 있지만, 후자는 주님 자신의 신적 사랑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될 수 있습니다. 다만 이러한 문제는 마리아의 왕권이라는 칭호 자체보다 전구와 중재에 관한 신학적 이해와 더욱 직접적으로 연결되므로, 후속 해설에서 별도로 다루는 것이 적절합니다.

 

마리아라는 인물의 역사적 중요성과 믿음의 모범은 충분히 존중해야 합니다. 눅1:38에서 마리아는 자신을 주의 여종이라고 부르며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고백합니다. 또한 눅1:46–47에서는 자신의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자신의 마음이 하나님 자신의 구주를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마리아는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여왕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인간으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모습은 천국의 참된 질서와도 깊이 연결됩니다. 천국의 천사들은 자신들이 가진 선과 진리를 자기 자신의 것으로 여기지 않으며,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기뻐합니다. 마리아의 복됨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주님의 성육신이라는 특별한 역사에 쓰임을 받았으며, 자신에게 맡겨진 소명을 믿음과 순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를 올바르게 기억하는 길은 그를 하늘의 여왕으로 높이는 표현이 얼마나 장엄한가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하여 인간으로 오신 주님의 신성과 구속의 역사를 더욱 깊이 이해하고, 그가 보여 준 순종을 우리 자신의 삶에서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인간의 참된 영광은 다른 사람보다 높은 지위를 차지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으로 살아가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늘의 여왕’이라는 칭호가 우리에게 던지는 근본적인 질문을 생각해야 합니다. 천국에는 과연 주님과 나란히 영광을 받으며 특별한 왕권을 행사하는 존재가 있을까요? 스베덴보리는 천국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로 이루어진 하나의 영적 질서이며, 그 안의 모든 천사는 오직 주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한다고 가르칩니다. 천국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천사 사회가 존재하며, 각기 서로 다른 선한 쓰임을 감당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다양성의 중심에는 언제나 주님 한 분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를 복된 여인으로 기억하고 그의 믿음과 순종을 존중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에게 천국의 모든 천사와 성인 위에 있는 특별한 왕적 권위를 부여하고 이를 신앙적으로 공경해야 할 지위로 확정하는 일은 별도의 근거를 요구합니다. 특히 그 권위를 주님의 영원한 왕권에 대한 참여라는 말로 설명하더라도, 그러한 참여가 실제로 어떤 영적 의미를 가지며 무엇을 근거로 마리아에게만 특별히 부여되는지 검토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강조하는 것은 천국의 모든 생명과 통치가 오직 주님에게 속한다는 사실입니다. 마리아를 공경하는 마음이 참으로 올바른 방향을 향한다면 그 마음은 마리아에게 머무르지 않고, 마리아가 자신의 하나님이자 구주로 찬양한 주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 역시 어떤 특별한 인간이나 천사의 영광을 바라보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천국의 모든 사랑과 지혜, 모든 선과 진리, 모든 권능과 영광의 근원이신 주님을 바라보고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천국의 참된 왕은 오직 주님 한 분이시며, 그분의 왕권은 다른 어떤 피조물에게서도 비롯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교리를 검토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마리아의 지위를 높이거나 낮추는 데 있지 않고, 천국의 모든 생명과 권능이 오직 주님에게 속한다는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깨닫는 데 있습니다. (SL.RC.035 해설)

 

요약

‘마리아는 하늘의 여왕으로 공경받는다’라는 명제에는 마리아가 주님의 성육신을 위하여 선택된 복된 여인이며, 그에게 부여되는 모든 영광과 은총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에게서 비롯된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천주교는 마리아의 왕권을 주님과 동등한 신적 통치권으로 가르치지 않으며, 왕이신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자 구속의 역사에 특별히 협력한 인물에게 주어진 종속적이고 참여적인 권위로 설명합니다. 또한 마리아에 대한 공경과 하나님께 드리는 흠숭을 구별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마리아가 천국에서 모든 천사와 성인 위에 있는 여왕으로 통치한다는 사실을 직접 선언하지 않습니다. 천주교가 제시하는 근거들은 주님의 왕권, 고대 왕실에서 왕의 어머니가 차지한 지위, 마리아의 특별한 소명과 구속에 대한 협력을 연결한 신학적 해석에 해당합니다. 스베덴보리는 HH.2–12에서 천국의 모든 선과 권능이 오직 주님에게서 비롯된다고 가르치며, TCR.94에서는 마리아를 여신이나 성인들의 여왕처럼 높이는 당시의 신심을 직접 비판합니다. 또한 TCR.827에서는 마리아가 주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예배하는 영계의 인간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오류로 검토해야 할 핵심은 마리아를 복된 여인으로 존중하거나 그가 특별한 쓰임을 감당했다고 인정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가 주님의 어머니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천국의 모든 피조물 위에 있는 특별한 왕적 권위를 신적으로 확정하고, 그 권위를 종교적 공경과 전구 요청의 근거로 삼는 데 있습니다. 다만 이는 천주교가 마리아를 여신으로 가르친다는 뜻이 아니며, 마리아의 왕권과 전구의 구체적인 타당성도 각각 구별하여 검토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천국의 모든 천사와 인간은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는 피조물이며, 그들의 참된 위대함은 독립적인 권능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지혜를 받아 이웃을 섬기는 선한 쓰임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여왕’이라는 칭호보다 더욱 중요한 진리는 천국의 유일한 왕이신 주님께 모든 영광과 권능이 속한다는 사실입니다. 참된 신앙은 마리아의 왕권에 머무르지 않고, 마리아 자신이 자신의 하나님이자 구주로 찬양한 주님 한 분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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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천주교 신앙에서 일곱 성사는 교회생활의 중심을 이루는 중요한 제도입니다. 천주교는 세례성사, 견진성사, 성체성사, 고해성사, 병자성사, 성품성사, 혼인성사를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시고 교회에 맡기신 거룩한 성사로 가르칩니다. 신자는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하고, 견진을 통하여 신앙을 굳게 하며, 성체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결합하고, 고해를 통하여 죄의 용서를 받으며, 병자성사를 통하여 고통 가운데 특별한 은총을 구합니다. 성품성사와 혼인성사는 각각 교회의 직무와 부부의 결합을 거룩한 소명으로 이해하도록 합니다. 이러한 성사 체계는 인간의 출생과 성장, 죄와 회개, 질병과 죽음, 결혼과 공동체적 봉사에 이르기까지 삶의 중요한 순간들을 포괄합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신앙이 단순한 생각이나 고백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삶의 모든 영역에서 주님의 은총을 받아야 한다는 귀중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주님의 은총은 일곱 가지 성사라는 특정한 의식들을 통하여 전달되는 것일까요? 그러한 성사를 집전하고 관리하는 교회는 인간의 구원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 성사의 거룩함과 그 성사가 인간 안에서 실제로 이루는 영적인 변화는 어떻게 구별해야 할까요? 이 질문은 천주교의 성사 체계를 단순히 부정하는 문제가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에게 생명을 주시고 그를 거듭나게 하시는 방식이 무엇인지를 다시 살펴보는 문제입니다.

 

먼저 천주교의 공식 가르침을 정확히 이해해야 합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1113–1134항은 성사를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시고 교회에 맡기신 은총의 유효한 표지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표현은 단순한 ‘표지’가 아니라 ‘유효한 표지’라는 점입니다. 천주교에 따르면 성사는 보이지 않는 은총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만 하는 의식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성사 안에서 친히 역사하시며, 그 성사가 나타내는 은총을 실제로 베푸십니다. 특히 교리서 1128항은 성사가 ‘행위 자체로’(ex opere operato) 효력을 가진다고 설명합니다. 이 라틴어 표현은 성사적 행위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효력이 발생한다는 뜻이지만, 그 행위 자체에 주님과 독립된 신비한 능력이 들어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천주교는 성사의 효력이 집전자인 사제의 개인적인 거룩함이나 성사를 받는 사람의 공로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 사역과 그분의 능력에 근거한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합당한 조건과 교회의 의도에 따라 성사가 거행될 때 그리스도께서 그 성사 안에서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성사의 객관적인 효력과 그 성사가 인간 안에서 맺는 열매를 구별해야 합니다. 천주교는 성사의 열매가 그것을 받는 사람의 내적인 준비와 태도에도 달려 있다고 분명히 가르칩니다. 성사를 받기만 하면 누구나 자동으로 거룩해지고 구원받는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일곱 성사 모두를 모든 신자가 빠짐없이 받아야 한다고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천주교의 성사론을 단순한 의식주의나 종교적 마술로 규정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성사가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객관적인 은총의 수단이며, 그 성사적 행위 안에서 실제적인 영적 효력이 발생한다고 보는 점은 분명합니다.

 

이러한 일곱 성사의 체계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도 중요합니다. 초대 기독교 공동체에는 이미 세례와 성찬, 죄의 고백과 용서, 병자를 위한 기도와 안수, 교회 직무를 위한 안수와 혼인에 관한 여러 신앙적 실천이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실천들이 처음부터 오늘날 천주교가 가르치는 일곱 가지 성사라는 완성된 체계로 정리되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성사에 관한 신학적 이해는 여러 세기에 걸쳐 발전했고, 중세 서방교회에서 일곱 성사의 체계가 정착되었습니다. 특히 12세기 신학자 페트루스 롬바르두스는 일곱 성사를 체계적으로 설명한 중요한 인물이며, 이후 교회의 공의회들을 거쳐 이 체계는 공식적인 교리로 확립되었습니다. 16세기 트리엔트 공의회는 종교개혁의 성례전 이해에 대응하여 신약의 성사가 일곱 가지이며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셨다는 가르침을 확정했습니다. 물론 천주교는 이러한 발전을 인간이 임의로 새로운 성사를 만들어 낸 과정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맡기신 신앙의 유산을 성령의 인도 아래 점차 명확하게 이해하고 정식화한 과정으로 봅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어떤 교리 체계가 발전했다는 사실과, 그 체계의 모든 내용이 주님께서 직접 제정하신 신적인 질서라는 주장은 서로 구별하여 검토해야 합니다. 성경에 어떤 거룩한 행위가 등장한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이 독립적인 은총 전달의 성사로 제정되었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일곱 성사 체계의 신학적 정당성을 판단하려면 그 역사적 형성뿐 아니라 성경의 실제 가르침과 그 의식들의 영적인 의미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성경에서 세례와 성찬이 차지하는 특별한 위치는 분명합니다. 마28:19에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세례를 베풀라고 명령하셨고, 눅22:19에서는 마지막 식사 자리에서 자신을 기념하여 이를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고전11:23-26에서 바울은 주님의 만찬을 교회가 계속 지켜야 할 거룩한 일로 전합니다. 물론 다른 다섯 성사와 관련된 성경적 근거들도 존재합니다. 약5:14-15에는 병든 사람을 위하여 장로들이 기도하고 기름을 바르는 일이 나오고, 요20:23에는 죄의 용서에 관한 사도적 직무가 언급됩니다. 사도행전에는 안수를 통하여 성령의 은사를 받거나 교회의 직무를 맡기는 장면들이 등장하며, 혼인의 거룩함은 창2:24와 마19:4-6에서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이러한 행위들은 모두 중요한 신앙적 의미를 지닙니다. 그러나 각각의 행위가 성경에 나타난다는 사실과 그것들이 모두 동일한 의미에서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일곱 가지 성사라는 결론 사이에는 추가적인 신학적 해석이 필요합니다. 천주교는 교회의 성전과 교도권을 통하여 그 결론을 정당화하지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성경의 영적 의미와 주님께서 세우신 의식의 실제적인 쓰임을 기준으로 다시 살펴보아야 합니다. 특히 성경의 거룩한 행위를 후대의 제도적 질서와 동일시할 때에는, 그 행위가 지닌 본래의 영적인 목적이 제도 자체의 권위에 가려지지 않는지 주의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TCR.667–691에서 세례를, TCR.698–752에서 성찬을 설명합니다. 그는 TCR.667에서 기독교회의 두 성사인 세례와 성찬의 의미와 효력을 이해하려면 말씀의 영적 의미를 알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TCR.669에서는 이 두 성사가 기독교회에서 매우 귀중한 위치를 차지하지만, 그 쓰임을 이해하지 못하면 사람들이 단지 거룩한 의식이라는 이유만으로 그것들을 받아들이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성사를 단순한 인간의 종교적 관습이나 상징적인 기념행위로 축소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세례와 성찬이 주님께서 세우신 거룩한 의식이며, 자연계와 영계의 상응을 통하여 실제적인 영적 쓰임을 가진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천주교의 일곱 성사 체계를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세례는 기독교회로 들어가는 입문과 거듭남의 길에 관계되고, 성찬은 주님의 신적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며 그분과 결합하는 일에 관계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 두 성사는 단지 교회의 의무적인 예식이 아니라 인간의 영적 출생과 성장, 그리고 주님과의 결합을 나타내고 섬기는 특별한 수단입니다. 여기서 천주교와의 중요한 차이가 드러납니다. 천주교는 일곱 성사를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객관적인 은총의 수단으로 이해하지만, 스베덴보리는 두 성사의 특별한 거룩함을 인정하면서도 그 의미와 효력을 말씀의 영적 의미, 상응, 거듭남, 주님과의 결합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성사의 숫자가 일곱인가 둘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은총의 전달과 인간의 영적 변화가 어떤 질서 안에서 이루어지는가에 관한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세례의 경우 스베덴보리는 TCR.677–687항에서 세 가지 쓰임을 설명합니다. 첫 번째는 기독교회로 들어가는 입문이며, 두 번째는 구속자이시며 구원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인정하며 따르게 하는 것이고, 세 번째이자 궁극적인 쓰임은 거듭남입니다. 여기서 첫 번째 쓰임과 세 번째 쓰임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례를 통하여 기독교회 안으로 들어간다는 사실과 그 사람의 내면에서 거듭남이 완성되었다는 사실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세례의 물은 영적으로 진리를 통한 정결을 나타내지만, 자연적인 물이 인간의 머리를 씻는다고 해서 그 사람의 의지와 이해에 자리 잡은 악과 거짓이 모두 제거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주님의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의 빛으로 자신의 악을 발견하며, 주님의 도움을 구하여 그 악을 죄로 여겨 피하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주님께서는 인간의 내면을 점차 변화시키십니다. 그렇다고 세례가 단순한 표지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세례가 사람을 영계의 기독교인들과 연결하는 실제적인 쓰임도 가진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세례의 거룩함을 인정하면서도 그 의식의 시행 자체를 거듭남의 완성과 동일시하지 않는 구별이 필요합니다. 세례는 주님께서 인간을 새로운 삶으로 부르시는 거룩한 시작이며, 그 시작이 가리키는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이 실제로 거듭나는 데 있습니다.

 

성찬은 이러한 거듭남과 주님과의 결합을 더욱 깊이 드러냅니다. TCR.698에서 스베덴보리는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의 상응을 알지 못하면 성찬의 쓰임과 유익을 이해할 수 없다고 설명합니다. 성찬의 빵은 주님의 사랑에서 오는 신적 선을, 포도주는 주님의 지혜에서 오는 신적 진리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주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것은 자연적인 육체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오는 신적 선과 진리를 인간이 자신의 영적 생명 안에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성찬이 단지 신적 선과 진리를 기억하게 하는 상징적인 의식이라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TCR.716에서 스베덴보리는 성찬 안에 주님께서 그분의 모든 구속과 함께 온전히 현존하신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TCR.725에서는 합당하게 성찬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주님 안에 있고 주님께서 그들 안에 계시며, 그 결과 주님과의 결합이 이루어진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성찬은 단순히 외적인 믿음을 표현하는 행위가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과 실제로 결합하시는 특별한 거룩한 수단입니다. 다만 그 결합은 성찬의 자연적인 빵과 포도주가 독립적인 신적 능력을 갖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성찬 안에 현존하시며, 인간이 신앙과 체어리티 안에서 그분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성사 이해를 천주교의 성사적 실재론에 대한 단순한 상징주의적 반박으로 이해한다면 중요한 부분을 놓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성찬의 실제적인 거룩함과 주님의 현존을 인정하지만, 그것을 자연적인 물질의 실체 변화가 아니라 주님의 신적 선과 진리, 그리고 인간과 주님 사이의 실제적인 영적 결합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이 지점에서 천주교의 ‘행위 자체로’라는 성사 효력의 원리와 스베덴보리의 상응론을 비교하면 두 전통의 공통점과 차이점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두 전통 모두 성사의 거룩함이 집전자의 개인적인 능력이나 공로에서 발생한다고 보지 않습니다. 또한 인간이 주님의 은총을 받아들이는 내적인 상태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천주교는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사가 올바르게 거행될 때 그리스도께서 그 성사 안에서 객관적으로 역사하시며, 각 성사에 고유한 은총을 베푸신다고 가르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세례와 성찬의 실제적인 영적 효력을 인정하면서도, 자연적인 표지와 영적인 실재 사이의 상응을 통하여 그 쓰임을 설명합니다. 여기서 상응은 자연적인 물질이 자동으로 영적인 실재로 변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연적인 물과 빵과 포도주는 각각 영적인 진리와 선을 나타내며, 이러한 상응을 통하여 자연계의 예배와 영계의 질서가 연결됩니다. 따라서 성사의 실제적인 영적 효력이 있다는 사실과 성사 자체가 독립적인 은총 전달 능력을 가진다는 주장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천주교 역시 성사가 그리스도와 독립된 능력을 가진다고 가르치지는 않지만, 성사적 행위의 객관적인 효력과 일곱 성사의 신적 제정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스베덴보리와 차이를 보입니다. 결국 핵심 쟁점은 주님께서 성사를 통하여 역사하실 수 있는가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일곱 가지 성사적 행위를 구원에 필요한 객관적인 은총의 수단으로 제정하셨다는 주장을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다섯 성사는 영적인 가치가 없는 것일까요? 그렇게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견진은 신앙을 더욱 깊이 이해하고 주님의 진리에 충실하게 살아가겠다는 결단의 기회가 될 수 있으며, 고해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진심으로 회개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병자성사는 고통 가운데 주님의 자비와 섭리를 신뢰하도록 도울 수 있고, 성품은 말씀을 가르치고 교회를 섬기는 직무의 중요성을 일깨울 수 있으며, 혼인은 부부가 서로 사랑하고 충실하게 살아가야 할 거룩한 책임을 확인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의식들은 실제로 인간의 신앙생활에 유익한 쓰임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유익함을 인정하는 것과, 이 모든 의식이 각각 고유한 성사적 은총을 전달하는 신적으로 제정된 수단이라고 인정하는 것은 다릅니다. 예를 들어 회개는 고해성사의 틀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TCR.509–570항에서 참된 회개가 자신의 악을 살피고 인정하며, 그것을 죄로 여겨 주님의 도움을 받아 실제로 피하는 데 있다고 설명합니다. 어떤 사람이 사제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사죄경을 들었다고 하더라도 그 죄를 여전히 사랑하고 계속 행하려 한다면, 그 사람 안에서 참된 회개가 이루어졌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주님의 진리 앞에서 자신의 악을 발견하고 진심으로 돌아서는 사람에게는 실제적인 회개의 과정이 시작됩니다. 혼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부부의 참된 사랑은 혼인 예식 자체에서 자동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서로를 위하여 살아가는 가운데 깊어집니다. 따라서 종교적인 의식이 영적 성장을 돕는다는 사실과 그 의식 자체가 독립적인 은총의 질서를 이룬다는 주장은 구별해야 합니다.

 

이러한 구별의 바탕에는 인간의 자유와 합리성에 관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 DP, 1764) DP.71–99는 인간이 합리성에 따른 자유 안에서 행동해야 한다는 원리를 설명하며, DP.100–128은 사람이 자신의 악을 마치 스스로 제거하는 것처럼 노력해야 하지만 실제로 그 악을 제거하시는 분은 주님이심을 가르칩니다. 이것은 인간이 자기 능력으로 구원을 획득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는 일이 인간의 자유로운 수용과 협력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모든 인간에게 사랑과 진리의 생명을 주시지만,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면서까지 그 생명을 강제로 받아들이게 하지는 않으십니다. 인간은 자신이 무엇을 사랑하고 어떤 악을 행하고 있는지 살피며, 진리를 받아들여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과정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종교적인 의식도 이러한 내적인 회개와 거듭남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이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교회의 성사적 질서가 얼마나 완전하게 갖추어져 있는가만이 아니라, 그 질서가 사람들을 실제로 주님께 인도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교회는 말씀과 예배와 거룩한 의식을 통하여 주님을 증언하고 인간의 영적 성장을 도울 수 있지만,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는 분은 언제나 주님이십니다. 교회의 직무는 그분의 구원하시는 역사를 섬기는 것이지, 그 역사를 교회의 제도적 권한 안에 가두는 것이 아닙니다.

 

이 문제를 실제 신앙생활에 적용해 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어떤 천주교 신자가 어린 시절 세례를 받고 견진을 받았으며, 평생 미사와 고해성사에 충실하게 참여했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러한 신앙생활은 그가 주님을 기억하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이웃을 사랑하도록 돕는 귀중한 수단이 되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가족을 멸시하고,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거짓을 행하며,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성사생활에 충실하다는 사실만으로 안심한다면 어떻겠습니까? 반대로 같은 성사에 참여하는 다른 신자는 그때마다 자신의 악을 돌아보고 진심으로 회개하며, 가족과 이웃을 대하는 태도를 조금씩 바꾸어 갈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은 외적으로 동일한 성사에 참여하지만, 그 성사가 각자의 실제적인 삶과 맺는 관계는 서로 다릅니다. 물론 우리는 그들의 최종적인 영적 상태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내적인 사랑과 영원한 운명은 오직 주님께서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사생활의 풍부함이 반드시 내적인 거듭남의 정도와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위험은 천주교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개신교 신자 역시 자신이 세례를 받았거나 정기적으로 성찬에 참여한다는 사실을 영적인 안전의 근거로 삼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세례와 성찬을 단순한 기념행위로 축소하여 그 안에 담긴 실제적인 영적 쓰임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은 이 양쪽 모두를 경계하게 합니다. 성사는 인간을 자동으로 구원하는 의식도 아니지만, 단순히 인간의 기억을 돕기 위한 상징적 행위에 불과한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세우신 세례와 성찬은 실제적인 영적 쓰임을 가지며, 그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을 주님과 결합하도록 인도하는 데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은총 자체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은총을 어떤 종교적인 의식에 참여할 때 외부에서 주어지는 특별한 영적 혜택처럼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주님의 은총은 그러한 특정한 순간에만 베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인간에게 당신의 사랑과 지혜를 주시며,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만큼 그분과 결합하고 새로운 생명을 얻습니다. 주님의 신적 선과 진리는 인간의 이해를 밝히고 의지를 변화시키며, 자신만을 사랑하던 마음을 점차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꾸어 갑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따라서 은총의 본질은 종교적인 의식이 완료되었다는 사실보다, 주님께서 베푸시는 생명이 인간 안에 실제로 받아들여져 새로운 사랑과 삶을 형성하는 데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주님께서 세우신 성사의 특별한 쓰임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세례와 성찬의 목적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세례는 인간을 주님께서 이루시는 거듭남의 길로 인도하고, 성찬은 주님의 신적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며 그분과 결합하도록 돕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거룩한 의식은 언제나 그것이 나타내는 영적 실재를 향하여 인간을 인도해야 합니다. 표지가 실재를 대신할 수는 없으며, 외적인 형식이 그 형식의 궁극적인 목적보다 앞설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권위와 질서에도 적용됩니다. 교회의 거룩함은 은총을 소유하고 분배하는 독립적인 권한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베푸시는 생명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그 생명을 받아들이도록 돕는 쓰임에서 드러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요15:4-5에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포도나무로, 제자들을 가지로 말씀하시면서 당신 안에 거하지 않으면 아무도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이 말씀은 구원의 본질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가지가 살아 있는 것은 어떤 외적인 자격을 얻었기 때문이 아니라 포도나무와 실제로 연결되어 생명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영적 생명은 그가 얼마나 많은 종교적인 의식에 참여하였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실제로 결합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물론 주님께서는 인간이 그 결합을 향하여 나아가도록 거룩한 의식을 세우시고 교회를 통하여 가르치십니다. 그러나 그 의식은 언제나 목적이 아니라 수단입니다. 세례는 거듭남을 향한 거룩한 입문이며, 성찬은 거듭나는 인간이 주님의 신적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며 그분과 결합하는 특별한 수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단순히 ‘나는 어떤 성사를 받았는가?’가 아닙니다. ‘그 성사가 나타내는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실제로 내 삶 안에서 작용하고 있는가? 나는 그 진리의 빛으로 자신의 악을 발견하고 피하고 있는가? 주님께서 주시는 선을 받아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려는 구원은 종교적인 의식을 축적하여 얻는 특별한 신분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지혜가 인간 안에 받아들여져 실제적인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생명 안에서 인간은 주님과 결합하며, 그 결합이 점차 깊어지는 가운데 천국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SL.RC.005 해설)

 

요약

‘교회의 일곱 성사는 구원에 필요한 은총을 전달한다’는 명제에는 주님께서 인간의 자연적이고 공동체적인 삶을 통하여 영적인 생명을 가르치시며, 거룩한 의식을 인간의 신앙과 거듭남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신다는 귀중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또한 천주교가 성사의 효력을 집전자의 개인적인 거룩함이나 인간의 공로에 의존시키지 않고 그리스도의 역사에 근거한다고 가르치는 점과, 성사의 열매를 얻기 위하여 수령자의 합당한 태도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점도 정확히 평가해야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일곱 가지 의식 모두를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독립적인 성사적 은총의 수단으로 이해하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세례와 성찬이라는 두 성사를 특별히 가르치며, 그 실제적인 영적 효력을 자연계와 영계의 상응, 주님의 신적 선과 진리, 인간의 거듭남과 주님과의 결합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따라서 오류의 핵심은 거룩한 의식이 영적인 유익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 있지 않고, 일곱 성사라는 특정한 제도적 체계에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구원적 은총 전달의 질서라는 지위를 부여하는 데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이 체계를 인간의 구원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제도적 경로로 절대화한다면, 주님의 직접적인 구원 역사와 교회의 봉사적 역할을 혼동하게 됩니다. 다만 천주교가 모든 신자에게 일곱 성사 전부를 요구하거나, 교회가 그리스도와 독립적으로 은총을 소유하고 분배한다고 가르치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결국 구원의 유일한 근원은 주님이시며, 성사의 참된 목적은 인간이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실제로 거듭나고 그분과 결합하도록 인도하는 데 있습니다. 주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려는 가장 귀중한 은총은 단순히 거룩한 의식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이 아니라, 그분의 사랑을 받아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며 천국의 생명으로 살아가게 하시는 거듭남의 은총입니다.

 

 

 

RC.004. ‘천주교회에 속해 있다는 것은 참된 신앙의 중요한 보증이다’

SL.RC.004 | 천주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RC.004. ‘천주교회에 속해 있다는 것이 참된 신앙의 중요한 보증이다’ ‘천주교회에 속해 있다는 것이 참된 신앙의 중요한 보증이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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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RC.034 | 천주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마리아는 지상 생애를 마친 뒤 몸과 영혼이 함께 하늘에 올림받았다’ - 성모 승천은 특별한 육체적 영화인가, 주님의 유일한 부활과 구별해야 할 교리인가?

 

‘마리아는 지상 생애를 마친 뒤 몸과 영혼이 함께 하늘에 올림받았다.’ 이것은 천주교의 대표적인 마리아 교리 가운데 하나인 ‘성모 승천’(聖母昇天, Assumption of Mary)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천주교는 마리아가 지상 생애를 마친 뒤 영혼만 천국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몸과 영혼이 함께 천상의 영광에 들어갔다고 믿습니다. 여기에는 마리아가 주님의 어머니로서 특별한 은총을 받았으며,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리에 다른 신자들보다 앞서 참여했다는 신앙적 이해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교리를 접하면 몇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인간은 죽은 후 영원한 세계로 들어가는데, 마리아만 몸과 영혼이 함께 하늘에 올림받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 말하는 몸은 지상에서 사용하던 자연적인 육체일까요, 아니면 영광스럽게 변화된 몸일까요? 마리아의 특별한 승천은 성경 어디에 기록되어 있을까요? 무엇보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죽은 후에도 완전한 인간의 형상을 지닌 영적 몸으로 살아간다고 가르치는데, 이러한 사후세계의 이해와 천주교의 성모 승천 교리는 어떤 관계에 있을까요? 이 질문은 마리아의 특별한 지위에 관한 문제를 넘어 인간의 죽음과 부활, 자연계와 영계의 관계, 그리고 주님께서 이루신 인성의 영화(榮化, glorification)가 무엇인지를 묻는 중요한 신학적 문제입니다.

 

성모 승천은 1950년 11월 1일 교황 비오 12세가 교황령 ‘지극히 관대하신 하느님’(Munificentissimus Deus)을 통하여 공식적으로 확정한 교리입니다. 그 정의문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하느님의 어머니이자 평생 동정녀이신 마리아가 지상 생애를 마친 뒤 몸과 영혼이 함께 천상의 영광에 들어갔다고 선언합니다. 이 가르침은 ‘가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966항에도 나타납니다. 교리서는 마리아의 승천을 그리스도의 부활에 특별하게 참여한 사건이며,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장차 이루어질 몸의 부활을 미리 보여 주는 사건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승천과 마리아의 승천은 구별해야 합니다. 영어에서 주님의 승천은 ‘어센션’(Ascension), 마리아의 승천은 ‘어섬션’(Assumption)이라고 부릅니다. 전자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자신의 신적 능력으로 하늘에 오르셨다는 의미이고, 후자는 마리아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으로 천상의 영광에 올림받았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천주교가 마리아에게 예수님과 동일한 신적 권능을 부여한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성모 승천을 자연적인 육체가 아무런 변화 없이 물질적인 공간을 이동한 사건으로 단순화하는 것도 정확하지 않습니다. 천주교는 마리아의 몸이 영화되어 천상의 영광에 참여했다고 가르칩니다. 우리가 검토해야 할 핵심은 바로 이러한 특별한 육체적 영화가 실제로 계시된 진리인가 하는 점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정확하게 구별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천주교가 1950년에 확정한 교리의 정의문은 마리아가 지상 생애를 마쳤다고 선언하지만, 그가 반드시 죽은 뒤 부활했는지, 아니면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하늘에 올림받았는지를 신앙의 교리로 확정하지는 않았습니다. ‘지상 생애를 마친 뒤’라는 표현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가톨릭과 동방교회의 오랜 전통에서는 마리아가 실제로 죽음을 경험했다고 이해하는 견해가 널리 이어져 왔습니다. 동방교회는 이를 ‘성모 안식’(Dormition of the Theotokos)이라고 부르며, 마리아가 죽음의 잠을 거쳐 천상의 영광에 들어갔다고 이해합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역시 1997년 7월 2일의 교리교육에서 마리아가 죽은 뒤 그 몸이 영화되었다는 전통적인 이해를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1950년의 교리 정의문이 마리아의 죽음 여부를 신앙의 진리로 결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따라서 천주교가 마리아는 죽지 않았다고 가르친다거나, 반대로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세부 과정까지 공식적으로 확정했다고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교리가 실제로 확정한 내용과 그 주변에서 발전한 신학적 설명 및 전승을 구별해야 합니다.

 

성모 승천은 앞서 살펴본 ‘무염시태’(無染始胎, Immaculate Conception) 및 마리아의 평생 동정과 연결됩니다. 천주교는 마리아가 주님의 성육신을 위하여 특별히 준비되었으며, 원죄에서 보존되는 은총을 받았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그러한 특별한 은총이 지상 생애의 마지막에도 이어졌다고 이해합니다. 비오 12세는 마리아의 몸이 무덤의 부패에 맡겨지지 않고 천상의 영광에 들어간 것을 그의 특별한 신학적 지위와 연결하여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원죄 없이 잉태되었다는 교리를 받아들인다고 해서, 그의 몸이 반드시 다른 모든 인간보다 먼저 영화되어야 한다는 결론이 논리적으로 자동으로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성모 승천은 무염시태와 연결되어 있지만, 그 자체로 별도의 계시적 근거를 요구하는 교리입니다. 천주교는 그 근거를 성경의 직접적인 사건 기록에서만 찾지 않고 교회의 전통과 전례, 성경의 여러 예표와 상징을 종합하여 설명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 문제를 검토할 때에는 그러한 신학적 연결이 실제로 말씀의 속뜻과 주님의 부활에 관한 가르침에 부합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마리아가 주님의 어머니로서 특별한 역할을 감당했다는 사실과, 그 몸이 다른 인간들과 구별되는 특별한 방식으로 영화되었다는 주장은 서로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마리아가 주님의 성육신과 지상 생애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는 사실을 기록하지만, 그가 언제 어디에서 지상 생애를 마쳤으며 몸이 어떤 방식으로 천상의 영광에 들어갔는지는 직접적으로 기록하지 않습니다. 행1:14에는 마리아가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는 모습이 나타나지만, 그 이후의 죽음이나 승천에 관한 사건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천주교는 계12:1에 나타나는 해를 입은 여자, 창3:15의 여자와 뱀 사이의 적대 관계, 그리고 구약의 언약궤에 관한 말씀들을 성모 승천과 연결하여 해석합니다. 이러한 본문들은 마리아의 역할과 구원의 역사를 신학적으로 연결하여 생각하게 하지만, 마리아의 육체가 실제로 하늘에 올림받았다는 사건을 직접 서술하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계12:1의 여인을 마리아 개인과만 동일시하는 것은 본문의 상징적 성격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해석이 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계시록 해설’(Apocalypse Revealed, AR, 1766) 533항에서 해를 입은 여인이 새 하늘에 있는 주님의 새 교회와 땅 위에 세워질 새 교회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이 여인은 우선 교회와 그 영적 상태를 나타내는 표상입니다. 이를 마리아의 육체적 승천을 직접 증명하는 본문으로 사용하는 것은 말씀의 속뜻과 후대의 교리적 적용을 혼동할 위험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방식으로 데려가신 사람들에 관한 기록도 있습니다. 창5:24는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셨다고 기록하며, 왕하2:11은 엘리야가 회오리바람 가운데 하늘로 올라갔다고 전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들이 곧 마리아에게도 같은 사건이 일어났다는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더욱이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초기 인물들의 이야기 안에 교회의 영적 상태와 변화에 관한 깊은 속뜻이 담겨 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에녹의 이야기를 문자적으로만 이해하여 마리아의 승천과 직접 연결하는 데에는 신중해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특별한 방식으로 사람을 데려가실 수 있는가 하는 가능성의 문제와, 마리아에게 실제로 그러한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이 계시되었는가 하는 증거의 문제를 구별하는 일입니다. 성경에 어떤 종류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기록되지 않은 다른 사람에게도 동일한 사건이 일어났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마리아의 성모 승천 역시 이러한 구별 아래에서 검토해야 합니다.

 

이제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론을 살펴보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 445–452항에서 인간이 죽는 순간의 상태와 영계에서 깨어나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인간이 죽는 것은 그 존재가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계에서 사용하던 육체와 분리되어 영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명은 물질적인 육체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 안에 있으며, 육체는 영이 자연계에서 활동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도구입니다. 따라서 육체의 기능이 멈추더라도 인간의 생명은 계속됩니다. 또한 HH.453–469에서는 사람이 죽은 후에도 완전한 인간의 형상을 지니고 있으며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고, 느끼는 능력을 계속 지닌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후의 인간이 단순히 형체 없는 의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실제로 몸을 가지고 있지만, 그 몸은 자연계의 물질로 이루어진 육체가 아니라 영계에 속하는 ‘영적 몸’(靈的身體, spiritual body)입니다. 이러한 구별은 성모 승천 교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만일 마리아가 죽은 후에도 완전한 인간의 형상을 지니고 살아간다는 의미라면,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그것은 마리아만의 특별한 특권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이 죽은 후에도 영적 몸을 지닌 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주교의 성모 승천은 단순히 마리아가 영계에서 인간의 형상을 지닌 존재가 되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천주교는 마리아가 장차 모든 의인에게 이루어질 몸의 부활과 영화에 특별한 방식으로 미리 참여했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두 전통의 차이는 사후에도 인간이 몸을 지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그 몸이 무엇이며 자연적인 육체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의 문제에서 드러납니다.

 

이 구별은 스베덴보리의 ‘최후의 심판’(Last Judgment, LJ, 1758) 36항에서 더욱 명확해집니다. 그는 자연계의 인간은 자연적인 몸을 입고 있지만 영계의 인간은 영적인 몸을 입고 있으며, 두 몸은 서로 다른 차원에 속한다고 설명합니다. 자연적인 눈은 자연적인 것을 보고, 영적인 눈은 영적인 것을 봅니다. 따라서 영계에 들어간 인간이 완전한 몸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지상에서 입었던 자연적인 육체가 그대로 영계로 옮겨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은 자연적인 몸을 벗고 영적인 몸으로 살아가며, 그 안에서 자신의 사랑과 신앙에 따라 영원한 삶을 계속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물질적인 육체가 다시 살아나야 비로소 인간이 완전해진다는 생각은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론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천주교와 스베덴보리의 차이는 더욱 선명해집니다. 천주교는 마지막 날에 모든 인간에게 이루어질 몸의 부활을 믿으며, 마리아는 그 영광에 특별히 앞서 참여했다고 설명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죽은 후 이미 영적 몸을 지닌 완전한 인간으로 살아간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마리아가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하여 자연적인 육체의 특별한 영화까지 필요로 했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습니다.

 

여기서 더욱 결정적인 본문은 HH.316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부활하실 때 영으로만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몸까지 부활하셨다고 설명합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지상 생애 동안 자신의 인성 전체를 영화하여 신적으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영혼은 처음부터 아버지이신 여호와의 신성 자체였으며, 그분의 인성은 그 신성과 완전히 하나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일반 인간과 달리 몸까지 영화하여 부활하셨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일반 인간은 영으로 부활하지만 주님은 몸까지 부활하셨다고 분명하게 구별합니다. 여기서 주님의 몸의 부활을 자연적인 물질의 몸이 아무런 변화 없이 보존된 사건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인성을 온전히 신적으로 영화하셨으며, 그 영화된 인성은 자연적인 물질의 한계에 속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부활은 일반 인간의 사후 각성과 동일한 사건이 아니라, 주님 자신의 신적 능력으로 이루신 유일한 영화의 완성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에 비추어 보면 마리아가 자신의 몸까지 특별히 영화되어 하늘에 올림받았다는 천주교의 교리는 중요한 신학적 긴장을 일으킵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만이 몸까지 영화하여 부활하셨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다만 여기서 두 전통의 용어를 무조건 같은 의미로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천주교가 말하는 마리아의 몸의 영화는 피조물에게 베푸신 은총이며,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주님의 인성의 영화는 신성 자체가 인성을 신적으로 만드신 사건입니다. 두 설명은 동일한 종류의 영화가 아니므로, 단순히 같은 단어를 사용한다는 이유만으로 모순이라고 단정하기보다 두 전통이 몸의 부활과 영화 자체를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함께 검토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마리아는 사후에 어떤 존재로 이해해야 할까요? 스베덴보리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827항에서 마리아와 관련된 특별한 영적 경험을 기록합니다. 그는 흰옷을 입은 마리아를 보았으며, 마리아가 자신은 주님의 어머니였지만 주님께서 어머니에게서 취하신 인간적인 것을 벗으시고 인성을 신적으로 만드셨으므로 이제는 그분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예배한다고 말했다고 전합니다. 이 기록에서 마리아는 주님과 동일한 신적 권위를 지닌 존재가 아니라 주님을 예배하는 영계의 한 인간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여기서 자료의 성격을 분명하게 구별해야 합니다. TCR.827은 성경에 기록된 사건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영적 경험으로 보고한 내용입니다. 또한 이 본문은 마리아가 지상 생애를 마칠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그의 자연적인 육체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마리아와 영계에서 만났다는 기록만으로 성모 승천의 역사적 사실이 반박되었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이 기록은 스베덴보리가 마리아를 주님을 예배하는 영계의 인간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직접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러한 이해는 모든 인간이 사후에도 영적 몸을 지닌 존재로 살아간다는 그의 사후세계론과 일치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천국의 영광이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천주교는 성모 승천을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부활에 특별히 참여한 사건으로 이해하며, 장차 모든 신자에게 이루어질 몸의 부활에 대한 소망을 보여 준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천국의 영광은 자연적인 육체가 얼마나 특별한 방식으로 보존되거나 변화되었는가에 따라 결정되지 않습니다. 천국의 상태는 인간이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진리를 얼마나 받아들이고 그 사랑과 진리에 따라 살아가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천국의 모든 천사는 영적 몸을 지니고 있으며, 각 사람은 자신의 내적인 사랑과 신앙에 따라 서로 다른 천국의 상태에 있게 됩니다. 따라서 자연적인 육체가 특별한 방식으로 영화되었다는 사실이 천국에서의 더 높은 영적 상태를 결정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마리아의 실제적인 천국의 상태를 인간이 임의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의 내면과 영원한 상태에 대한 최종적인 앎은 오직 주님께 속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마리아에게 어떤 특별한 영광이 주어졌는가보다, 천국의 모든 생명과 영광이 오직 주님에게서 비롯된다는 사실입니다. 천국은 특별한 몇 사람의 신체적인 특권에 의하여 성립하는 세계가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영적인 삶의 세계입니다.

 

마지막으로 성모 승천 교리에서 인정해야 할 진리와 다시 검토해야 할 주장을 구별해야 합니다. 마리아가 주님의 성육신을 위하여 선택된 복된 여인이었다는 사실은 성경에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또한 주님께서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며 죽음 이후에도 인간이 계속 살아간다는 사실은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론에서도 중요한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마리아가 지상 생애를 마친 후에도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 안에서 살아간다는 이해 자체는 문제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다른 모든 인간과 달리 자신의 자연적인 육체와 연결된 특별한 육체적 영화를 미리 누렸다는 주장은 별도의 계시적 근거를 요구합니다. 성경은 그러한 사건을 직접 기록하지 않으며, 스베덴보리의 저작 역시 그것을 신적으로 확정된 진리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인간이 죽은 후 자연적인 몸을 벗고 영적인 몸으로 살아간다고 설명하며, 주님께서 자신의 몸까지 영화하여 부활하신 사건을 일반 인간의 부활과 구별합니다. 따라서 성모 승천을 반드시 믿어야 할 신앙의 교리로 확정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론에서 직접적인 뒷받침을 얻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는 마리아의 사후에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우리가 역사적으로 증명하거나 반증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가 더욱 중요하게 붙들어야 할 것은 주님께서 모든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베푸시며, 그들을 자신의 사랑과 진리 안에서 천국의 삶으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마리아가 어떤 특별한 방식으로 하늘에 들어갔는가보다, 죽음을 이기시고 자신의 인성을 영화하여 모든 구원의 근원이 되신 주님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일이 더욱 중요합니다. 결국 인간의 영원한 생명과 천국의 영광은 마리아의 특별한 승천에 근거하지 않고, 자신의 인성을 영화하여 모든 인간에게 천국의 길을 열어 주신 주님 한 분에게서 비롯됩니다. (SL.RC.034 해설)

 

 

‘마리아는 지상 생애를 마친 뒤 몸과 영혼이 함께 하늘에 올림받았다’라는 명제에는 마리아가 주님의 성육신을 위하여 선택된 복된 여인이며, 인간의 영원한 생명이 오직 주님의 은총과 구속에서 비롯된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천주교는 성모 승천을 마리아가 자신의 능력으로 하늘에 올랐다는 뜻으로 가르치지 않으며, 그리스도의 부활에 특별히 참여하여 몸과 영혼이 천상의 영광에 들어갔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마리아가 죽음을 경험했는지의 여부는 1950년의 교리 정의문에서 확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자신의 몸까지 특별히 영화되어 하늘에 올림받았다는 주장은 성경에서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을 넘어서는 교리적 선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HH.445–469와 LJ.36에서 인간이 죽은 후 자연적인 몸을 벗고 영적인 몸으로 살아간다고 설명하며, HH.316에서는 주님만이 자신의 몸까지 영화하여 부활하셨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마리아가 영계에서 완전한 인간의 형상을 지닌 존재로 살아간다는 사실과, 다른 모든 인간과 구별되는 특별한 육체적 영화를 미리 누렸다는 주장은 구별해야 합니다. 전자는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론과 일치하지만, 후자는 그의 가르침에서 직접적인 근거를 찾기 어렵습니다. 특히 천주교의 육체 부활론과 스베덴보리의 영적 몸에 관한 가르침은 인간의 사후 상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차이를 드러냅니다. 다만 이러한 신학적 차이가 마리아의 지상 육체에 실제로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지를 역사적으로 증명하거나 반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류로 검토해야 할 핵심은 마리아가 천국에서 살아간다는 믿음이나 그의 특별한 소명을 존중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성경의 직접적인 증언과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론에서 확증되지 않는 특별한 육체적 승천을 모든 신자가 반드시 믿어야 할 신적 진리로 확정하는 데 있습니다. 천국의 생명은 자연적인 육체의 특별한 보존에 달려 있지 않으며,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인간의 영적 상태와 관계됩니다. 그러므로 이 교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마리아의 특별한 육체적 지위를 높이는 데 있지 않고, 죽음을 이기시고 자신의 인성을 영화하여 모든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열어 주신 주님의 유일한 신성과 구속의 역사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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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RC.033 | 천주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기 전과 낳을 때와 낳은 후에도 평생 동정녀였다’ - 주님의 동정녀 탄생과 마리아의 평생 동정은 같은 신앙의 진리인가?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기 전과 낳을 때와 낳은 후에도 평생 동정녀였다.’ 이것은 천주교가 가르치는 ‘마리아의 평생 동정’(終身童貞, Perpetual Virginity of Mary)에 관한 교리입니다. 천주교는 마리아가 남자와 관계없이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했다는 사실을 믿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출산하는 순간에도 그의 동정성이 보존되었으며, 출산 이후에도 요셉과 부부관계를 맺지 않고 평생 동정녀로 살았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영원한 동정녀’라는 뜻의 그리스어 ‘아이파르테노스’(Aeiparthenos)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여기에는 주님의 성육신이 전적으로 하느님의 역사였으며, 마리아의 몸과 삶이 그 특별한 소명을 위하여 온전히 봉헌되었다는 신앙적 이해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몇 가지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성경은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할 때 동정녀였다고 분명히 증언하지만, 출산하는 순간의 신체적 상태와 그 이후의 결혼생활에 대해서도 같은 정도로 분명하게 가르칠까요? 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형제들과 자매들은 누구였을까요? 무엇보다 마리아의 평생 동정이 주님의 신성과 구속을 이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진리일까요? 이러한 질문은 단순히 마리아와 요셉의 사생활에 관한 호기심이 아닙니다. 성경이 직접 증언하는 사실과 교회가 후대에 확정한 교리를 어떻게 구별할 것인지, 그리고 동정과 결혼을 어떤 영적 질서 안에서 이해해야 하는지를 묻는 문제입니다. 따라서 이번 명제를 검토하려면 천주교의 공식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성경의 증언과 스베덴보리의 성육신론 및 상응의 가르침을 차례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천주교의 공식 가르침은 ‘가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496–507항에 나타납니다. 496항은 예수님께서 인간 남성의 개입 없이 성령의 능력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셨다고 설명합니다. 499항은 마리아의 동정성이 예수님을 출산하는 순간에도 보존되었다고 가르치며, 500항은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형제자매들이 마리아가 낳은 다른 자녀들이 아니라 친족들이었다고 해석합니다. 501항은 예수님이 마리아의 유일한 아들이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평생 동정은 세 가지 주장으로 구별됩니다. 첫째는 예수님을 잉태하고 출산하기 전까지의 동정(virginitas ante partum)이고, 둘째는 예수님을 출산하는 과정에서도 보존된 동정(virginitas in partu)이며, 셋째는 예수님을 낳은 이후에도 지속된 동정(virginitas post partum)입니다. 이 세 가지는 하나의 교리 안에 포함되어 있지만, 성경적 근거와 신학적 의미가 동일하지 않습니다. 특히 첫째는 주님의 신적 기원과 직접 연결되는 반면, 둘째와 셋째는 마리아의 출산 과정과 이후 삶에 관한 추가적인 주장입니다. 천주교는 세 가지 모두를 신앙의 진리로 고백하지만, 이를 검토하는 우리는 각각의 근거와 의미를 구별해야 합니다. 또한 천주교가 평생 동정을 단순한 신체적 순결 문제가 아니라, 마리아의 믿음과 주님께 대한 전적 헌신의 표지로 이해한다는 점도 인정해야 합니다. 실제로 교리서 506항은 마리아의 동정성을 의심으로 더럽혀지지 않은 믿음과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온전히 바친 상태의 표지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교리를 단순히 신체적인 동정 여부에 집착하는 가르침으로만 규정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출산 전 동정에 관해서는 성경의 증언이 매우 분명합니다. 마1:18은 마리아와 요셉이 함께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되었다고 기록합니다. 마1:20에서 천사는 요셉에게 마리아에게 잉태된 자가 성령으로 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눅1:34에서 마리아는 자신이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아들을 낳을 수 있느냐고 묻고, 눅1:35에서 천사는 성령이 그에게 임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그를 덮을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이 말씀들은 예수님의 잉태가 일반적인 인간의 출생과 근본적으로 달랐음을 증언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에 관한 교리’(Doctrine of the Lord, DL, 1763) DL.48과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TCR.92에서 이러한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의 특별한 질서를 설명합니다. 주님의 영혼은 처음부터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온 신성 자체였으며, 마리아는 주님께서 세상에 오시기 위한 자연적 인성을 제공한 어머니였습니다. 주님은 인간 아버지에게서 생명을 받으신 분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신적 생명을 받으시고, 마리아에게서는 자연적 인성을 취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동정녀 탄생은 단순히 놀라운 기적이나 마리아의 순결을 보여 주기 위한 사건이 아닙니다. 주님의 신적 기원과 직접 연결되는 성육신의 본질적 진리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이 사실을 부정하면 주님의 출생을 일반 인간의 출생과 구별하는 중요한 근거를 잃게 됩니다. 따라서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하기 전까지 동정녀였다는 사실은 성경과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이 직접적으로 뒷받침하는 진리입니다.

 

그러나 출산하는 순간에도 마리아의 신체적 동정성이 온전히 보존되었다는 두 번째 주장은 별도로 살펴야 합니다. 천주교는 주님의 탄생이 마리아의 동정성을 손상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거룩하게 했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출생이 일반적 출산과 달랐다는 특별한 신학적 이해입니다. 그렇다고 천주교가 주님께서 실제 인간의 몸을 취하지 않으셨다거나 출생 자체가 단순한 환상이었다고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천주교는 주님께서 참된 인간으로 태어나셨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 출생이 마리아의 동정성을 훼손하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서 실제로 태어나셨다는 사실을 증언할 뿐, 출산 순간의 구체적인 신체적 과정이나 마리아의 신체 상태가 어떻게 유지되었는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눅2:7은 마리아가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다고 기록하지만, 그 출산이 일반적인 신체적 출산과 어떤 점에서 달랐는지는 밝히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주님의 동정녀 잉태와 신적 기원을 중요하게 설명하지만, 확인되는 주요 직접 본문만으로는 마리아가 출산하는 순간에 어떤 신체적 상태를 유지했는지에 관한 별도의 교리를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출산 중 동정이 반드시 거짓이었다고 단정할 근거도 충분하지 않지만, 이를 주님의 성육신을 이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신적 진리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할 직접적인 근거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실제로 가르치는 내용과 교회가 신학적으로 확정한 내용을 구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세 번째 주장인 출산 후의 평생 동정은 성경 해석에서 더욱 직접적인 논쟁을 일으킵니다. 마13:55-56에서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그분의 형제들인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의 이름을 언급하고 자매들도 있다고 말합니다. 막6:3에도 같은 취지의 기록이 나타나며, 막3:31-35에서는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분을 찾아온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갈1:19에서 바울은 야고보를 ‘주의 형제’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표현을 일반적인 가족관계의 문맥에서 읽으면 예수님께 실제 형제자매들이 있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천주교는 이들이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다른 자녀들이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성경의 친족 관계를 나타내는 표현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엄밀한 가족관계의 용어와 반드시 일치하지 않으며, 가까운 친족을 형제라고 부르는 관습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리서 500항은 야고보와 요셉이 다른 마리아의 아들들이라고 설명하면서, 복음서의 형제자매 언급이 마리아의 다른 출산을 증명하지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역사적으로는 그들이 요셉의 이전 결혼에서 태어난 자녀들이었다는 해석도 존재했습니다. 따라서 성경의 ‘형제들’이라는 표현은 마리아에게 다른 자녀들이 있었다는 해석의 중요한 근거가 되지만, 그 표현만으로 논쟁이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동시에 이들이 모두 친족이었다는 천주교의 해석 역시 성경이 직접 명시한 관계를 그대로 옮긴 것은 아닙니다. 결국 복음서의 가족관계 표현을 해석할 때에는 그 문맥과 언어적 관습을 함께 고려해야 하며, 어느 한쪽의 결론을 처음부터 확정된 사실로 놓고 본문을 읽어서는 안 됩니다.

 

마1:25 역시 중요한 논쟁의 대상입니다. 이 말씀은 요셉이 마리아가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않았다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낳기까지’라는 표현을 근거로 예수님을 낳은 이후에는 자연스럽게 부부관계를 맺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일이 특정 시점까지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한다고 해서 반드시 그 이후에는 반대의 일이 일어났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마1:25는 예수님의 출생 이전에 요셉과 마리아가 부부관계를 맺지 않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 주지만, 출산 이후의 결혼생활을 확정하는 결정적인 증거는 아닙니다. 눅2:7의 ‘첫아들’이라는 표현도 마찬가지입니다. 첫아들이라는 말이 반드시 둘째나 셋째 아들의 존재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유대 율법에서 처음 태어난 아들은 후속 자녀의 유무와 관계없이 특별한 지위를 지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표현들은 마리아가 이후 다른 자녀들을 낳았을 가능성을 생각하게 하지만, 그 가능성을 곧바로 역사적으로 확정해 주지는 않습니다. 반대로 평생 다른 자녀를 낳지 않았다는 주장도 이 본문들만으로 직접 증명할 수 없습니다. 교회 역사에서는 마리아의 평생 동정을 지지하는 전통이 일찍부터 발전했으며, 2세기의 ‘야고보 원복음서’(Protoevangelium of James) 같은 외경 문헌에서도 마리아의 특별한 동정에 관한 이야기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러한 문헌은 정경 성경과 동일한 권위를 지니지 않습니다. 4세기에는 헬비디우스가 예수님의 형제들에 관한 본문을 근거로 마리아의 출산 후 결혼생활을 주장했고, 히에로니무스는 이에 반대하여 평생 동정을 옹호했습니다. 이 논쟁은 후대 교회에서 동정과 결혼의 영적 가치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문제와도 연결되었습니다. 따라서 평생 동정은 천주교만의 독특한 교리가 아니라 오래된 기독교 전통에 속하지만, 오랜 전통 자체가 성경의 직접적인 증언과 동일한 권위를 갖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 문제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스베덴보리가 주님의 동정녀 탄생을 분명하게 가르친다는 사실과, 마리아의 출산 중 및 출산 후 동정까지 직접 확정한다는 주장은 구별해야 합니다. ‘주님에 관한 교리’ DP.48과 TCR.92는 주님의 신적 기원과 마리아에게서 취하신 인성을 설명하는 직접적인 근거입니다. 그러나 이 본문들에서 마리아가 이후에도 평생 동정녀로 살았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것은 마리아의 동정성이 얼마나 오랫동안 유지되었는가보다, 주님께서 인간 아버지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신적 생명을 받으셨으며, 마리아에게서는 자연적 인성을 취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인성을 시험과 싸움을 통하여 영화하셨습니다. 따라서 성육신의 본질적인 진리는 주님의 신적 기원과 인성의 영화(榮化, glorification)에 있으며, 마리아의 출산 이후 생활에 관한 추가적인 가정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이 점에서 평생 동정의 세 측면을 동일한 수준의 신적 진리로 확정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직접적 가르침에서 도출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이것은 마리아가 실제로 평생 동정녀였을 가능성을 부정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역사적 사실의 가능성과 신앙적으로 반드시 받아들여야 할 교리의 확실성은 서로 구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더 깊이 살펴볼 문제는 성경에서 ‘동정녀’(童貞女, virgin)가 지니는 영적 의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AC, 1749–1756) AC.3081에서 창24:16에 등장하는 리브가가 동정녀이며, 남자가 그를 알지 못했다는 말씀을 해설합니다. 그는 동정녀가 주님의 나라와 교회를 나타내며, 그 안에 있는 선과 진리의 결합과 관계된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남자가 알지 못했다’는 표현은 거짓에 의하여 더럽혀지지 않은 순수한 상태를 의미한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동정녀는 단순히 육체적 성경험이 없는 상태를 넘어,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교회의 순수한 영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러한 설명은 마리아의 동정녀 탄생을 이해할 때도 중요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주님께서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셨다는 역사적인 사실은 신적 생명의 근원이 인간 남성에게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보여 줍니다. 동시에 동정녀의 상응은 인간이 주님의 생명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해석의 범위를 정확하게 지켜야 합니다. AC.3081은 리브가에 관한 말씀의 속뜻을 해설하는 본문이지 마리아의 평생 동정 여부를 직접 판정하는 본문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를 마리아 교리에 적용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상응 원리에 근거한 신학적 적용이지, 그가 마리아의 출산 후 동정을 직접 인정하거나 부정했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이처럼 문자적인 역사적 사실과 말씀의 속뜻을 구별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반드시 지켜야 할 해석의 원칙입니다.

 

이러한 영적 의미를 이해하면 육체적인 동정과 영적인 순결을 반드시 동일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결혼하지 않고 평생 동정생활을 했다고 해서 그 사람의 마음이 자동으로 거짓과 악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이 결혼하여 배우자와 사랑을 나누고 자녀를 낳았다고 해서 영적 순결을 잃는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결혼애’(Conjugial Love, CL, 1768) CL.154에서 결혼을 부정한 상태로 여기는 사람들은 참된 순결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CL.155에서는 평생 독신을 서약했다는 사실 자체가 참된 순결을 보증하지 않으며, 참된 결혼생활에 대한 사랑이 그 사람 안에 남아 있는가가 중요하다고 가르칩니다. CL.156에서는 결혼생활이 독신생활보다 선호되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참된 결혼애가 영적 선과 진리의 결합에 상응하며, 주님에게서 오는 거룩한 사랑이라는 그의 결혼관에 근거합니다. 따라서 결혼은 인간의 영적 삶을 더럽히는 낮은 상태가 아니라, 주님의 질서 안에서 사랑과 지혜가 결합하는 중요한 삶의 형태입니다. 물론 독신이나 동정의 삶도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선한 쓰임 가운데 살아간다면 존중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동정생활 자체가 결혼생활보다 본질적으로 더 거룩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마리아의 평생 동정 교리는 중요한 질문을 받게 됩니다. 만일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은 후, 요셉과 정상적인 부부관계를 맺었다면 그의 거룩함이 훼손되었을까요? 스베덴보리의 결혼관에 비추어 보면 그렇다고 말할 근거는 없습니다. 주님의 질서 안에 있는 참된 결혼애는 거룩한 사랑이며, 정상적인 부부관계 자체는 죄나 영적인 오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서도 천주교의 공식적인 입장을 정확하게 구별해야 합니다. 천주교는 결혼 자체를 부정하거나 부부관계를 본질적으로 부정하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혼인을 ‘성사’(聖事, sacrament)로 인정하며, 배우자 사이의 사랑과 자녀의 출산을 하느님께서 주신 선한 질서로 이해합니다. 따라서 마리아의 평생 동정 교리를 결혼에 대한 멸시로 규정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천주교는 마리아의 동정을 일반적인 결혼생활에 대한 부정으로 설명하기보다, 주님의 성육신이라는 유일한 사건에 온전히 봉헌된 특별한 소명으로 이해합니다. 이러한 의도에는 인정해야 할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특별한 소명을 설명하기 위하여 출산 중의 신체적 상태와 출산 이후의 모든 부부관계까지 신앙의 필수적인 진리로 확정해야 하는지는 별도로 검토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인간의 참된 거룩함은 외적 신체 상태나 결혼 여부에 의하여 결정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주님께서 막3:31-35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라고 말씀하신 것도 이러한 영적 관계의 중요성을 보여 줍니다. 이 말씀은 자연적 가족관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참된 관계가 혈연이나 외적 조건보다 깊은 영적 차원에 있음을 가르칩니다. 따라서 마리아를 존중하는 가장 확실한 길은 그의 신체적 상태에 관한 추정을 신앙의 중심에 두는 것이 아니라, 그가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순종한 믿음을 본받는 데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번 교리가 오늘 우리의 신앙에 던지는 질문을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의 동정녀 탄생은 스베덴보리의 주님론에서 성육신의 중요한 진리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 아버지에게서 태어나신 분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신적 생명을 받으시고, 마리아에게서 자연적 인성을 취하신 분입니다. 바로 이 사실 때문에 그분께서는 일반 인간과 달리 자신의 신적 능력으로 모든 시험을 이기시고, 인성을 영화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마리아가 어떤 신체적 상태를 유지했으며, 요셉과 어떠한 결혼생활을 했는지는 주님의 신적 기원과 인성 영화의 진리를 이해하는 데 같은 방식으로 요구되지 않습니다. 성경이 분명하게 증언하는 것은 주님께서 동정녀에게서 성령으로 잉태되셨다는 사실이며, 마리아의 출산 순간과 이후 생활에 관한 세부 사항은 그만큼 직접적으로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붙들어야 할 중심은 마리아의 평생 동정을 무조건 입증하거나 반박하는 데 있지 않고, 동정녀에게서 인간으로 오신 주님이 누구이신가를 올바르게 아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우리 각 사람 안에 이루고자 하시는 영적 출생 역시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인간이 거짓과 악에서 돌아서고 순수한 진리에 대한 애정으로 말씀을 받아들일 때, 그 사람 안에 천국의 생명을 이루십니다. 마리아가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고백한 것처럼, 우리 역시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선과 진리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결국 우리가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순결은 단순한 육체적 상태가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를 거짓과 악으로 더럽히지 않고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려는 마음의 순결입니다. (SL.RC.033 해설)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기 전과 낳을 때와 낳은 후에도 평생 동정녀였다’라는 명제에는 구별하여 판단해야 할 세 가지 주장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인간 아버지의 개입 없이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셨다는 출산 전 동정은 성경이 분명하게 증언하며, 스베덴보리의 성육신론에서도 중요한 신적 진리입니다. 둘째, 마리아가 예수님을 출산하는 순간에도 신체적인 동정성을 보존했다는 출산 중 동정은 천주교의 공식 교리이지만, 성경은 그 구체적인 출산 과정을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셋째,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은 후에도 요셉과 부부관계를 맺지 않고 평생 동정녀로 살았다는 출산 후 동정 역시 오랜 교회 전통에 근거하지만, 성경만으로 그 역사적 사실을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복음서의 형제자매 언급은 마리아에게 다른 자녀들이 있었다는 해석의 중요한 근거가 되지만, 친족관계에 관한 다른 해석도 존재하므로 신중한 검토가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직접적인 가르침 역시 이 문제를 명확히 해결한다고 주장할 근거는 부족합니다. 따라서 오류로 검토해야 할 핵심은 마리아가 실제로 평생 동정녀였을 가능성을 인정하거나 그의 특별한 소명을 존중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성경이 분명히 증언하는 동정녀 잉태와, 출산 중 및 출산 후 동정에 관한 후대의 교리적 확정을 동일한 수준의 직접적 신적 증언으로 취급하는 데 있습니다. 또한 육체적 동정 자체를 결혼생활보다 자동으로 더 높은 거룩함의 조건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동정녀의 속뜻은 거짓에 의하여 더럽혀지지 않은 순수한 상태와 선과 진리의 결합에 관계되며, 참된 거룩함은 외적 신체 상태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내적 삶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교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마리아의 출산 전후 생활을 신앙의 중심에 두는 것이 아니라,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인간으로 오시고, 자신의 인성을 영화하여 인류를 구원하신 주님의 유일한 신성과 구속의 역사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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