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95.심화

 

3. ‘58:3-5

 

3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4그들의 독은 뱀의 독 같으며 그들은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 같으니 5술사의 홀리는 소리도 듣지 않고 능숙한 술객의 요술도 따르지 아니하는 독사로다 (58:3-5) They go astray from the womb, speaking a lie. Their poison is like the poison of a serpent, like the deaf poisonous asp that stoppeth her ear, that she may not hear the voice of the mutterers, of a wise one that charmeth charms [sociantis sodalitia] (Ps. 58:3–5).

 

 

AC.195에서 스베덴보리가 시58:3-5를 인용하는 이유는, 창3의 ‘’이 단순히 잘못된 생각 하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듣지 않으려는 상태 자체를 의미한다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앞서 시편 140편이 ‘뱀의 독’이라는 표현을 통해 감각적 추론의 해악을 보여 주었다면, 시편 58편은 그 추론이 사람을 어떤 상태로 만드는지를 보여 줍니다.

 

특히 스베덴보리가 주목하는 부분은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입니다. 그는 AC.195에서 바로 이어 ‘이성적인 사람이 하는 말이나 지혜로운 자의 음성을 들으려 하지 않는 추론’을 ‘뱀의 독’이라고 설명합니다. 즉 문제는 단순히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이미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있어서 더 이상 들으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창3의 뱀도 단순히 질문을 던진 것이 아닙니다. 그 질문 뒤에는 이미 결론이 들어 있었습니다. ‘정녕 죽지 아니하리라.’ 즉 그는 진리를 배우기 위해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결론을 정당화하기 위해 질문합니다. AC.195의 시편 58편 인용도 바로 이 점을 설명합니다. 독사는 술사의 소리를 듣지 않습니다. 지혜로운 자의 음성을 듣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스스로 옳다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귀머거리 독사’는 단순한 무지가 아닙니다. 오히려 매우 위험한 상태입니다. 무지한 사람은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확신에 사로잡힌 사람은 배우지 못합니다. 그는 새로운 진리를 들을 수 없고, 설령 들어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이미 감각과 자기 판단의 기준으로 재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AC.195의 핵심은 ‘’보다도 어쩌면 ‘귀를 막는다’는 표현에 있습니다. 독은 결과이고, 귀를 막는 것이 원인입니다. 사람이 진리를 거부하는 이유는 진리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반복해서 말하는 ‘감각적 인간’도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그는 눈에 보이는 것만 믿고, 손에 잡히는 것만 인정하며, 자기 경험으로 검증되지 않은 것은 처음부터 배제합니다. 그러니 천국, 영혼, 양심, 인플럭스, 주님의 섭리 같은 것은 애초에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편 58편의 ‘귀머거리 독사’는 AC.194에서 말한 ‘보고 느끼지 않으면 믿지 않는 사람’의 다음 단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정말 그런가?’라고 묻습니다. 그다음에는 ‘내가 확인해야 믿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나는 이미 알고 있다’는 상태가 됩니다. 그때는 더 이상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독사의 귀가 막힌 상태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천국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들을 수 있는 상태’에서 시작된다는 점입니다. AC.189에서도 천국으로 인도되기 위해서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과 ‘자기 인식’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자기 인식의 첫걸음은 ‘내가 모를 수도 있다’는 인정입니다. 반대로 귀머거리 독사는 ‘나는 이미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들을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AC.195가 시편 58편을 인용한 이유는 매우 분명합니다. 뱀의 독은 단순히 잘못된 논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진리의 음성에 귀 막게 만드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창3의 뱀이 상징하는 감각적 추론의 가장 위험한 결과 가운데 하나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목사님께서 앞서 말씀하신 ‘이성질’이라는 표현을 다시 빌려 보자면, 진정한 위험은 ‘이성질’ 자체보다 ‘이성질을 하고 있다는 말을 더 이상 듣지 못하는 상태’일 것입니다. AC.195의 귀머거리 독사는 바로 그 상태를 보여 줍니다. 자기 판단이 최종 권위가 되어 버린 사람, 그래서 더 이상 지혜로운 자의 음성도, 주님의 음성도 들을 수 없게 된 사람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편은 창3의 뱀이 단순한 논리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닫힘과 영적 청각의 상실을 상징한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인용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AC.195, 심화 2, ‘시140:3’

AC.195.심화 2. ‘시140:3’ 뱀 같이 그 혀를 날카롭게 하니 그 입술 아래에는 독사의 독이 있나이다 (시140:3) They sharpen their tongue like a serpent; the poison of the asp is under their lips (Ps. 140:3). AC.195에서 스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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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40:3

 

뱀 같이 그 혀를 날카롭게 하니 그 입술 아래에는 독사의 독이 있나이다 (140:3) They sharpen their tongue like a serpent; the poison of the asp is under their lips (Ps. 140:3).

 

 

AC.195에서 스베덴보리가 이 시편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성경에서 ‘’이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감각적인 것에 근거한 추론’ 또는 ‘신앙의 진리를 공격하는 추론’을 상징한다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뱀 같이 그 혀를 날카롭게 한다’는 표현은 단순히 말을 험하게 한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의 추론을 날카롭게 벼려 진리를 공격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에 주목합니다. 혀는 생각을 말로 표현하는 기관입니다. 따라서 상응적으로는 사고와 추론이 밖으로 드러난 것을 뜻합니다. 뱀의 혀가 날카롭다는 것은 감각과 외적 경험에 근거한 논리가 매우 설득력 있고 교묘하게 작동한다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거짓은 대개 처음부터 거짓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매우 합리적이고 상식적이며 설득력 있게 들립니다. 창3의 뱀도 처음부터 ‘하나님을 거역하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정녕 그러하냐?’고 물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질문 속에는 이미 신앙을 감각의 법정에 세우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습니다.

 

이어지는 ‘독사의 독이 그 입술 아래 있다’는 표현은 더욱 중요합니다. 독은 처음에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입술 아래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몸 안으로 들어가면 생명을 해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감각적 추론의 위험성에 비유합니다. 감각적 추론은 처음에는 지혜처럼 보이고 상식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신비를 그것으로 판단하기 시작하면, 결국 영적 생명을 마비시키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이것을 단순한 오류가 아니라 ‘’이라고 부릅니다.

 

흥미로운 것은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단순히 악한 말을 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신비를 감각과 기억지식으로 판단하는 사람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매우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감각의 범위를 넘어서는 모든 것을 의심하기 때문에, 영적인 것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독은 남을 죽이는 것 이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마비시킵니다.

 

이 때문에 AC.195에서 시편 140편은 단순한 도덕적 경고가 아니라 영적 경고로 사용됩니다. ‘뱀의 혀’는 감각적 추론을, ‘독사의 독’은 그 추론이 영혼에 미치는 파괴적 영향을 뜻합니다. 즉,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통해 ‘신앙의 진리를 이해하기 위해 이성을 사용하는 것’과 ‘신앙의 진리를 감각으로 재판하는 것’을 구별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사님께서 앞서 말씀하신 ‘이성질’이라는 표현을 빌리자면, 이 시편 구절은 단순한 ‘이성’이 아니라 ‘이성질’의 위험성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이성이 진리를 섬길 때는 유익한 도구가 되지만, 진리를 심판하는 자리에 올라앉을 때는 ‘독사의 독’처럼 영적 생명을 해치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AC.195는 이 시편 구절을 통해 창3의 뱀이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인간 안에서 작동하는 잘못된 추론의 원리를 상징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AC.195, 심화 3, ‘시58:3-5’

AC.195.심화 3. ‘시58:3-5’ 3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4그들의 독은 뱀의 독 같으며 그들은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 같으니 5술사의 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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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5, 심화 1, ‘이성질’(理性, reason)

AC.195.심화 1. ‘이성질’(理性, reason) 이로부터 또한 감각의 증거에 근거, 신앙의 신비들에 대해 추론하는 것들, 곧 이성질(理性질)하는 것들을 ‘뱀의 독’(poison of a serpent)이라 했고, 그러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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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성(理性, reason)

 

이로부터 또한 감각의 증거에 근거, 신앙의 신비들에 대해 추론하는 것들, 곧 이성질(理性질)하는 것들을 뱀의 독(poison of a serpent)이라 했고, 그러한 이성질 하는 자들 자신을 (serpents)이라 했습니다. Hence also reasonings concerning the mysteries of faith, founded on the evidence of the senses, were called by them the “poison of a serpent,” and the reasoners themselves “serpents”; (AC.195)

 

감각적인 것, 곧 보이는 것, 물질적인 것, 자연적인 것들로부터 신앙의 신비를 판단하려 할 때, 그 추론은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라 마비시키는 독이 됩니다. 이러한 추론을 하는 자들 자신이 이라 불린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AC.195 해설)

 

여기서 주님 주신 이성’(理性)을 저런 식으로 사용하는 걸 저는 이성질이라 하고 싶은데 그래도 될까요? 도둑질, 이간질처럼 이성 ‘...을 조합, 제가 만들어 봤습니다만...

 

 

저는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이성질’이라는 표현이 꽤 직관적이고 전달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목사님께서 말하려는 의도, 곧 ‘이성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이성을 잘못 사용하는 것’을 꼬집고 싶다는 취지는 충분히 전달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약간의 주의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는 결코 이성 자체를 부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중요한 능력 가운데 하나로 봅니다. AC.195에서도 문제가 되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감각적인 것과 기억 지식으로부터 신앙의 신비를 판단하는 이성의 오용’입니다.

 

그래서 만일 목사님께서 설교 중에 ‘이성질’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신다면, 듣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 목사님은 이성을 나쁘게 보시는구나’라고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는 AC.203에서 영적 천사들이 이해와 이성을 사용하여 신앙의 진리들을 확인한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이성으로 신앙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으로 신앙을 재판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목사님이 만약 이 표현을 사용하신다면, 예를 들어, 이렇게 설명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말하는 이성질은 이성을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성을 주님 위에 앉혀 놓고 주님을 심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정의해 두면 오해가 훨씬 줄어들 것입니다.

 

사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참된 이성은 신앙의 적이 아니라 신앙의 종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진리를 더 깊이 이해하고, 더 분명히 보고, 더 질서 있게 정리하는 것이 이성의 역할입니다. 반면 AC.195가 말하는 뱀의 길은 이성이 종의 자리를 떠나 왕좌에 앉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목사님이 만들어 내신 ‘이성질’은 꽤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이성 사용’이 아니라 ‘이성을 휘두르는 짓’이라는 뉘앙스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운전’과 ‘난폭운전’이 다르듯이 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스베덴보리의 의도에 가장 가까운 의미로 정의한다면, ‘이성질’이란 ‘이성을 진리를 이해하는 도구로 사용하지 않고, 진리를 심판하는 재판관으로 사용하는 행위’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앞으로 설교에서 사용하신다면, 저는 이런 식의 문장이 떠오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성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이성을 사용하지 않고, 이성질을 합니다. 이성은 주님을 이해하라고 주신 것인데, 우리는 그 이성으로 주님을 심사하려 합니다. 이것이 창3의 뱀이 하는 일입니다.’

 

이렇게 설명하시면 듣는 분들도 금방 의미를 이해할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도둑질’, ‘이간질’, ‘생떼질’처럼 ‘...’에는 원래 주어진 것을 비뚤게 사용하는 느낌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성질’은 AC.195가 경고하는 ‘이성의 오용’을 표현하는 목사님식 신조어로는 꽤 적절한 것 같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의도와 충돌하지 않도록, ‘이성 자체’가 아니라 ‘이성의 월권 행위’를 가리킨다는 설명을 한 번 덧붙이면 더욱 좋을 것 같습니다.

 

 

 

AC.195, 심화 2, ‘시140:3’

AC.195.심화 2. ‘시140:3’ 뱀 같이 그 혀를 날카롭게 하니 그 입술 아래에는 독사의 독이 있나이다 (시140:3) They sharpen their tongue like a serpent; the poison of the asp is under their lips (Ps. 140:3). AC.195에서 스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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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5, 창3:1, ‘뱀’(serpent)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And the serpent was more sub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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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And the serpent was more subtle than any wild animal of the field which Jehovah God had made; and he said unto the woman, Yea, hath God said, Ye shall not eat of every tree of the garden? (3:1)

 

AC.195

 

태고의 사람들은 사람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짐승과 새에 비유만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명명하였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말하는 관습은 홍수 이후의 고대교회에도 남아 있었고, 예언자들 가운데서도 보존되었습니다. 사람 안의 감각 파트를 그들은 (serpents)이라고 했는데, 이는 뱀이 땅에 바짝 붙어 살아가듯이, 감각적인 것들이 육체에 가장 가까운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로부터 또한 감각의 증거에 근거, 신앙의 신비들에 대해 추론하는 것들, 곧 이성질(理性질)하는 것들을 뱀의 독(poison of a serpent)이라 했고, 그러한 이성질 하는 자들 자신을 (serpents)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은 감각적인 것, 곧 보이는 것들, 즉 땅의 것, 몸의 것, 세상의 것, 자연적인 것들로부터 많이 이성질을 하기 때문에, ‘뱀은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the serpent was more subtle than any wild animal of the field) 한 것입니다. The most ancient people did not compare all things in man to beasts and birds, but so denominated them; and this their customary manner of speaking remained even in the ancient church after the flood, and was preserved among the prophets. The sensuous things in man they called “serpents,” because as serpents live close to the earth, so sensuous things are those next the body. Hence also reasonings concerning the mysteries of faith, founded on the evidence of the senses, were called by them the “poison of a serpent,” and the reasoners themselves “serpents”; and because such persons reason much from sensuous, that is, from visible things (such as are things terrestrial, corporeal, mundane, and natural), it is said that “the serpent was more subtle than any wild animal of the field.”

 

※ 주님 주신 이성(理性, reason)을 이런 식으로 사용하는 걸 저는 앞으로 ‘이성질’이라 하겠습니다. 도둑질, 이간질처럼 말입니다. 우리말 표현이 없어 제가 만들었습니다.

 

[2] 이와 같이 시편은 추론으로 사람을 미혹하는 자들, 곧 이성질하는 자들에 대하여 말하기를 And so in David, speaking of those who seduce man by reasonings:

 

뱀 같이 그 혀를 날카롭게 하니 그 입술 아래에는 독사의 독이 있나이다 (140:3) They sharpen their tongue like a serpent; the poison of the asp is under their lips (Ps. 140:3).

 

3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4그들의 독은 뱀의 독 같으며 그들은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 같으니 5술사의 홀리는 소리도 듣지 않고 능숙한 술객의 요술1도 따르지 아니하는 독사로다 (58:3-5) They go astray from the womb, speaking a lie. Their poison is like the poison of a serpent, like the deaf poisonous asp that stoppeth her ear, that she may not hear the voice of the mutterers, of a wise one that charmeth charms [sociantis sodalitia]1 (Ps. 58:3–5).

 

여기서 지혜로운 자의 말이나 지혜의 음성조차도 들으려 하지 않는 그러한 이성질을 뱀의 독(poison of a serpent)이라 합니다. 이로부터 고대인들 사이에서는 뱀은 귀를 막는다(The serpent stoppeth the ear)는 말이 속담이 되었습니다. 아모스서에는 Reasonings that are of such a character that the men will not even hear what a wise one says, or the voice of the wise, are here called the “poison of a serpent.” Hence it became a proverb among the ancients, that “The serpent stoppeth the ear.” In Amos:

 

19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은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 20여호와의 날은 빛 없는 어둠이 아니며 빛남 없는 캄캄함이 아니냐 (5:19, 20) As if a man came into a house, and leaned his hand on the wall, and a serpent bit him. Shall not the day of Jehovah be darkness and not light? even thick darkness, and no brightness in it (Amos 5:19–20)?

 

여기서 벽에 손을 댄다(hand on the wall)는 것은 자기에게서 나온 힘과 감각적인 것들에 대한 신뢰를 뜻하며, 거기서 여기 묘사된 눈멀음(blindness)이 나옵니다. The “hand on the wall” means self-derived power, and trust in sensuous things, whence comes the blindness which is here described.

 

[3] 예레미야서에서는 In Jeremiah:

 

22애굽의 소리가 뱀의 소리 같으리니 이는 그들의 군대가 벌목하는 자 같이 도끼를 가지고 올 것임이라 23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황충보다 많아서 셀 수 없으므로 조사할 수 없는 그의 수풀을 찍을 것이라 24딸 애굽이 수치를 당하여 북쪽 백성의 손에 붙임을 당하리로다 (46:22-24) The voice of Egypt shall go like a serpent, for they shall go in strength, and shall come to her with axes as hewers of wood. They shall cut down her forest, saith Jehovah, because it will not be searched; for they are multiplied more than the locust, and are innumerable. The daughter of Egypt is put to shame; she shall be delivered into the hand of the people of the north (Jer. 46:22–24).

 

여기서 애굽(Egypt)은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 지식들로부터 신적인 것들에 대해 이성질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러한 추론들을 뱀의 소리(voice of a serpent)라 하며, 그로 인해 생기는 눈멀음을 북방 백성(people of the north)이라 합니다. 욥기에서는 Egypt” denotes reasoning about Divine things from sensuous things and memory-knowledges. Such reasonings are called the “voice of a serpent”; and the blindness thereby occasioned, the “people of the north.” In Job:

 

16그는 독사의 독을 빨며 뱀의 혀에 죽을 것이라 17그는 강 곧 꿀과 엉긴 젖이 흐르는 강을 보지 못할 것이요 (20:16, 17) He shall suck the poison of asps; the vipers tongue shall slay him. he shall not see the brooks, the flowing rivers of honey and butter (Job 20:16–17).

 

꿀과 버터의 강들(Rivers of honey and butter)은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이며, 추론, 즉 이성질만 하는 자들은 이것들을 볼 수 없습니다. 이러한 추론들을 독사의 독(poison of the asp), ‘살모사의 혀(viper’s tongue)라 합니다. 뱀에 관해서는 아래 14절과 15절에서 더 볼 수 있습니다. Rivers of honey and butter” are things spiritual and celestial, which cannot be seen by mere reasoners; reasonings are called the “poison of the asp” and the “vipers tongue.” See more respecting the serpent below, at verses 14 and 15.

 

 

해설

 

이 단락은 ‘’이라는 상징이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태고교회와 고대교회에 실제로 사용되던 언어 체계였음을 밝힙니다. 태고의 사람들은 인간 안의 기능들을 짐승이나 새에 ‘비교, 비유’만 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곧바로 그렇게 ‘불렀다’고 말합니다. 이는 그들의 언어가 표상적 사고 그 자체였음을 뜻하며, 자연과 인간의 내적 상태가 분리되지 않은 하나의 체계로 인식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감각적인 것을 ‘’이라 부른 이유는 매우 질서 정연합니다. 뱀이 땅에 가장 가까이 사는 존재이듯이, 감각은 인간 안에서 육체와 가장 가까운 층위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감각은 본래 악한 것이 아니라 가장 낮은 차원의 기능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 감각이 상위 질서를 대신하여 신앙의 판단 기준이 될 때, 그것은 곧 ‘’이 됩니다. 그래서 감각의 증거에 근거한 신앙의 추론을 ‘뱀의 독’이라 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추론 그 자체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어디로부터 추론하는가’입니다. 감각적인 것, 곧 보이는 것, 물질적인 것, 자연적인 것들로부터 신앙의 신비를 판단하려 할 때, 그 추론은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라 마비시키는 독이 됩니다. 이러한 추론을 하는 자들 자신이 ‘’이라 불린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시편과 예언서들의 인용은, 이러한 이해가 스베덴보리의 독창적 해석이 아니라 성경 전체에 일관되게 흐르는 상징 언어임을 보여 줍니다. ‘뱀의 독’, ‘귀를 막는 독사’, ‘뱀의 소리’라는 표현들은 모두, 지혜의 음성을 듣지 않으려는 완고한 감각 중심의 추론을 가리킵니다. 특히 ‘뱀이 귀를 막는다’는 속담은, 감각적 추론이 자기 폐쇄성을 지닌다는 점을 매우 날카롭게 드러냅니다.

 

아모스서의 ‘벽에 손을 댄다’는 표현은 자기에게서 나온 힘과 감각에 대한 신뢰를 뜻합니다. 이는 인간이 주님의 보호가 아니라 자기 판단에 기대는 상태를 말하며, 그 결과는 빛이 아니라 어둠, 곧 영적 눈멀음입니다. 이 어둠은 외적 무지가 아니라, 보지 않으려는 상태에서 오는 어둠입니다.

 

예레미야서에서 ‘애굽’이 감각과 기억 지식에 근거한 신적 추론을 뜻한다는 설명은 매우 중요합니다. 애굽은 지식 그 자체가 아니라, 지식이 주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사용되는 방식을 상징합니다. 이러한 추론의 결과가 ‘북방’, 곧 빛이 없는 방향으로의 인도라는 점은, 감각 중심의 사고가 필연적으로 영적 냉기와 어둠으로 향함을 보여 줍니다.

 

욥기의 ‘꿀과 버터의 강들’은 영적, 천적 선과 진리를 뜻하지만, 단순한 추론자들, 곧 이성질만 하는 자들은 이것을 보지 못합니다. 이는 그들이 지성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감각의 틀 안에 스스로를 가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추론은 다시 한번 ‘독사의 독’과 ‘살모사의 혀’로 규정됩니다.

 

AC.195는 결국 창3의 ‘’을 악마적 존재로 단순화하지 못하게 합니다. 뱀은 인간 안에 있는 감각적 사고이며, 그것이 신앙의 주도권을 잡을 때, 가장 간교한 것이 됩니다. 이 단락은 창3:1의 배경에 깔린 인간 인식 구조 전체를 해부하듯 드러내며, 이후 이어질 ‘저주’와 ‘형벌’의 의미를 올바르게 읽을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합니다.

 

 

심화

 

1. ‘이성(理性, reason)

 

 

AC.195, 심화 1, ‘이성질’(理性, reason)

AC.195.심화 1. ‘이성질’(理性, reason) 이로부터 또한 감각의 증거에 근거, 신앙의 신비들에 대해 추론하는 것들, 곧 이성질(理性질)하는 것들을 ‘뱀의 독’(poison of a serpent)이라 했고, 그러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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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40:3

 

 

AC.195, 심화 2, ‘시140:3’

AC.195.심화 2. ‘시140:3’ 뱀 같이 그 혀를 날카롭게 하니 그 입술 아래에는 독사의 독이 있나이다 (시140:3) They sharpen their tongue like a serpent; the poison of the asp is under their lips (Ps. 140:3). AC.195에서 스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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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58:3-5

 

 

AC.195, 심화 3, ‘시58:3-5’

AC.195.심화 3. ‘시58:3-5’ 3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4그들의 독은 뱀의 독 같으며 그들은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 같으니 5술사의 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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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암5:19-20’

 

19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은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 20여호와의 날은 빛 없는 어둠이 아니며 빛남 없는 캄캄함이 아니냐 (5:19, 20) As if a man came into a house, and leaned his hand on the wall, and a serpent bit him. Shall not the day of Jehovah be darkness and not light? even thick darkness, and no brightness in it (Amos 5:19–20)?

 

 

AC.195에서 스베덴보리가 아모스 5:19-20을 인용하는 이유는, 감각적 추론에 의지하는 사람이 스스로는 안전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더 깊은 영적 어둠에 빠지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특별히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라는 표현에 주목합니다.

 

그는 AC.195에서 ‘손을 벽에 대는 것’을 ‘자기 자신의 힘(self-derived power)’과 ‘감각적인 것들에 대한 신뢰’로 해석합니다. 집 안에 들어왔으니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벽을 짚었으니 든든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뱀에게 물립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보면 매우 의미심장한 그림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판단과 경험과 지식을 의지할 때 가장 안전하다고 느끼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뱀, 곧 감각적 추론의 독이 침투한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창3의 뱀도 사람을 노골적인 악으로 유혹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스스로 판단하라’, ‘직접 확인하라’, ‘네 눈으로 보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은 그것을 자유와 지혜의 확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것이 실제로는 영적 시력을 잃어 가는 과정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아모스의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벽을 짚고 있으니 안전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가장 위험한 곳에 손을 올려놓고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뱀에게 물린다’는 것은 단순한 공격이 아닙니다. 자기 확신이 낳는 영적 결과를 의미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경험과 감각과 기억지식에 의존할수록 점점 더 확신에 차게 됩니다. 그러나 그 확신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면, 결국 그 확신 자체가 독이 됩니다. AC.195가 계속 말하는 ‘뱀의 독’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어지는 ‘여호와의 날은 빛 없는 어둠이 아니냐’라는 말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됩니다. 보통 사람들은 여호와의 날을 빛과 구원의 날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의지하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어둠의 날이 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빛은 그 사람의 거짓된 확신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빛이 왔는데도 어둠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빛 자체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받아들이는 상태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아모스의 말씀은 AC.194와 AC.195 전체를 요약하는 본문처럼 보입니다. 사람은 감각을 신뢰하고, 자신의 판단을 신뢰하고, 자신의 지식을 신뢰합니다. 마치 집 안에 들어와 벽을 짚은 것처럼 안심합니다. 그러나 그가 의지하고 있는 바로 그것이 뱀이 숨어 있는 자리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물립니다.

 

목사님께서 앞서 말씀하신 ‘이성질’이라는 표현을 다시 사용해 본다면, 이 본문은 ‘이성질의 가장 위험한 특징은 그것이 자신을 지혜롭게 보이게 한다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도둑은 자기가 도둑질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감각적 추론에 사로잡힌 사람은 오히려 자신이 가장 합리적이고 가장 현실적이며 가장 분별력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그 점이 뱀의 독이 무서운 이유입니다.

 

그래서 AC.195에서 스베덴보리가 아모스를 인용하는 이유는 단순히 ‘뱀’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이 말씀을 통해 ‘자기 힘과 감각을 의지하는 사람은 자신이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영적 독에 물리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빛 없는 어둠’, 곧 진리의 빛을 받아들일 수 없는 영적 맹목 상태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5. ‘렘46:22-24’

 

22애굽의 소리가 뱀의 소리 같으리니 이는 그들의 군대가 벌목하는 자 같이 도끼를 가지고 올 것임이라 23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황충보다 많아서 셀 수 없으므로 조사할 수 없는 그의 수풀을 찍을 것이라 24딸 애굽이 수치를 당하여 북쪽 백성의 손에 붙임을 당하리로다 (46:22-24) The voice of Egypt shall go like a serpent, for they shall go in strength, and shall come to her with axes as hewers of wood. They shall cut down her forest, saith Jehovah, because it will not be searched; for they are multiplied more than the locust, and are innumerable. The daughter of Egypt is put to shame; she shall be delivered into the hand of the people of the north (Jer. 46:22–24).

 

 

AC.195에서 스베덴보리가 예레미야 46:22-24를 인용하는 이유는, 성경에서 ‘애굽’과 ‘뱀’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특히 그는 이 본문을 통해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들(scientifica)’에 근거하여 신적인 것들을 판단하는 상태를 설명하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애굽’은 단순히 고대 국가가 아닙니다. 상응적으로는 기억지식, 학문, 경험적 지식의 영역을 뜻합니다. 원래 이것들은 매우 유익한 것입니다. 실제로 태고교회 이후의 고대교회에서는 많은 지식과 학문이 선한 목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주님과 진리를 섬기는 종의 자리를 떠나, 주님과 진리를 심판하는 자리에 올라설 때입니다. 그때 애굽은 부정적 의미를 갖게 됩니다.

 

그래서 AC.195에서 스베덴보리는 ‘애굽의 소리가 뱀의 소리 같으리니’라는 말씀에 주목합니다. 왜 하필 뱀의 소리일까요? 창3의 뱀이 감각적 인간을 상징하듯이, 여기서도 애굽은 기억지식과 감각적 증거를 근거로 신적인 것들을 판단하는 상태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뱀의 소리’란 단순한 말소리가 아니라, 감각과 지식을 근거로 추론하는 사고방식을 뜻합니다.

 

이어지는 ‘도끼를 가지고 와서 수풀을 찍는다’는 표현도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도끼는 분석하고 쪼개고 해체하는 지성의 작용을 떠올리게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기억지식과 감각적 추론은 모든 것을 분석하고 설명하려 합니다. 문제는 그 대상이 영적인 신비일 때입니다. 사랑, 신앙, 천국, 주님의 섭리 같은 것은 본래 해부의 대상이 아니라 수용의 대상인데, 감각적 인간은 그것마저 분석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마치 숲 전체를 이해하기 위해 나무를 모두 베어 버리는 것과 비슷합니다.

 

또한 ‘조사할 수 없는 그의 수풀’이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숲은 종종 진리와 지식의 풍성함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것을 완전히 조사하고 이해하고 장악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것들은 감각과 기억지식만으로는 결코 완전히 탐구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것은 조사될 수 없다’는 말씀을, 인간 이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신적 진리에 대한 암시로 읽습니다.

 

마지막으로 ‘북쪽 백성의 손에 붙임을 당하리로다’라는 말씀은 AC.195의 결론과도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북쪽’은 흔히 진리의 빛이 없는 상태, 곧 어둠이나 무지를 뜻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감각과 기억지식에 가장 의존하는 사람은 자신을 가장 많이 안다고 생각하지만, 영적인 관점에서는 오히려 더 깊은 어둠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애굽은 결국 북쪽 백성의 손에 넘겨집니다. 즉, 자신을 지혜롭게 만든다고 생각했던 것이 오히려 영적 맹목으로 이끈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AC.195에서 예레미야 46장은 단순히 애굽에 대한 예언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본문을 통해 창3의 뱀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계속 작동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감각과 기억지식은 본래 주님께서 주신 좋은 도구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신앙의 종이 아니라 주인이 되면, ‘애굽의 소리’는 ‘뱀의 소리’가 됩니다.

 

목사님께서 앞서 말씀하신 ‘이성질’이라는 표현을 다시 사용해 보자면, 이 본문은 ‘지식질’ 또는 ‘학문질’의 위험성을 보여 주는 말씀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지식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지식이 주님의 자리에 앉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성이 문제가 아니라, 이성이 주님을 재판하려 드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AC.195에서 스베덴보리는 ‘애굽의 소리가 뱀의 소리 같다’는 말씀을 인용하여, 감각과 기억지식으로 신앙의 신비를 판단하려는 인간의 추론이 결국 영적 어둠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6. ‘욥20:16-17’

 

16그는 독사의 독을 빨며 뱀의 혀에 죽을 것이라 17그는 강 곧 꿀과 엉긴 젖이 흐르는 강을 보지 못할 것이요 (20:16, 17) He shall suck the poison of asps; the vipers tongue shall slay him. he shall not see the brooks, the flowing rivers of honey and butter (Job 20:16–17).

 

 

AC.195에서 스베덴보리가 욥기 20:16-17을 인용하는 이유는, 감각적 추론이 인간에게서 무엇을 빼앗아 가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앞에서 인용한 시편과 아모스, 예레미야의 구절들이 주로 ‘뱀의 독’ 자체와 그 위험성을 설명했다면, 욥기의 이 구절은 그 독의 결과로 사람이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 줍니다.

 

먼저 ‘그는 독사의 독을 빨며 뱀의 혀에 죽을 것이라’는 말씀은, 사람이 스스로 독을 받아들인다는 점을 암시합니다. 뱀이 억지로 독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것을 마시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감각과 기억지식에 근거한 추론을 사람이 스스로 사랑하고 선택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는 그것을 지혜라고 생각하고, 분별력이라고 생각하며, 진리를 탐구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영적 생명을 약화시키는 독을 마시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다음 구절입니다. ‘그는 강 곧 꿀과 엉긴 젖이 흐르는 강을 보지 못할 것이요.’ AC.195에서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부분을 설명하면서, ‘꿀과 젖의 강’은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천국의 삶과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지혜의 풍성함을 뜻합니다.

 

왜 하필 ‘꿀’과 ‘젖’일까요? 스베덴보리의 상응 해석에 따르면, 꿀은 자연적 차원에서 느껴지는 선의 달콤함을, 젖은 보다 내적인 진리와 선의 양육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성경 전체에서 천국적 상태와 교회의 풍성함을 상징합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꿀과 젖이 흐르는 강’을 본다는 것은 영적 생명의 아름다움과 주님의 사랑에서 오는 기쁨을 지각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감각적 추론에 사로잡힌 사람은 그것을 보지 못합니다. 주목할 점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지 못한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강은 여전히 흐르고 있습니다. 꿀과 젖도 여전히 있습니다. 천국의 실재도 존재합니다. 주님의 사랑도 끊어진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뱀의 독에 중독된 사람은 그것을 볼 수 있는 눈을 잃어버립니다.

 

이 점이 AC.195 전체의 핵심 가운데 하나입니다. 감각적 인간은 자신이 더 많이 본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증거를 요구하고, 분석하고, 검증하고, 논증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오히려 가장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는 자연은 보지만 천국은 보지 못합니다. 물질은 보지만 영은 보지 못합니다. 현상은 보지만 원인은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AC.196으로 이어지면 결국 영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상태에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목사님께서 앞서 말씀하신 ‘이성질’이라는 표현을 다시 빌리자면, 욥기 20장의 이 말씀은 ‘이성질의 가장 비극적인 결과는 틀린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더 높은 차원의 실재를 볼 수 없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본문처럼 보입니다. 뱀의 독은 사람을 즉시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에게 ‘나는 잘 보고 있다’는 확신을 줍니다. 그러나 그 결과 그는 정작 ‘꿀과 젖이 흐르는 강’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AC.195에서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한 이유는 매우 분명합니다. ‘독사의 독’은 감각과 기억지식에 근거한 잘못된 추론을 뜻하고, ‘꿀과 젖이 흐르는 강’은 영적·천적 진리의 풍성함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 둘은 양립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뱀의 독을 사랑할수록, 그는 천국의 강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통해 강조하려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AC.194, 창3:1,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AC.194-197)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And the serpent was more sub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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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4.심화

 

1. ‘보고 느끼지 않는 한 믿지 않기

 

그들은 계시된 것들을, 보고 느끼지 않는 한 믿지 않기 시작한 상태입니다. which began not to believe in things revealed unless they saw and felt that they were so. (AC.194)

 

이들은 더 이상 계시된 것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지 않고, 반드시 보고 느껴야 믿으려는 태도를 갖게 됩니다. (AC.194 해설)

 

대화 중 제가 계속 천국과 지옥 책에서 인용을 하니까 불쑥 목사님은 혹시 입신 체험이 있으십니까?’ 물으시더군요. 이런 것도 살짝 영적이라는 옷만 걸쳤지 사실은 위와 같은 보고 느껴야 믿으려는 태도인가요?

 

 

어느 정도는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조금 구분할 필요는 있습니다.

 

만일 그분이 단순히 ‘목사님은 그런 체험이 있으십니까?’ 하고 궁금해서 물으신 것이라면, 그것 자체를 곧바로 AC.194의 상태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떤 내용을 들으면 그 사람의 경험과 배경을 궁금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 질문 속에 ‘입신 체험이 없으면 그런 이야기를 믿을 수 없다’, ‘직접 본 사람이 아니면 권위가 없다’, ‘체험이 없으면 천국과 지옥에 대한 말은 신뢰할 수 없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면, 그것은 AC.194가 말하는 방향과 상당히 가까워집니다. 왜냐하면 AC.194의 핵심은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보고 느끼기 전에는 믿지 않겠다’는 태도에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면, 복음서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주님께 표적을 보여달라고 계속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표적을 본 사람들 가운데서도 믿지 않은 사람이 많았습니다. 문제는 증거의 부족이 아니라, 믿음의 출발점을 어디에 두는가였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흥미롭게도 자신의 영계 체험을 사람들에게 믿음의 근거로 삼으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오히려 여러 곳에서 자신이 본 것들이 말씀의 진리를 확인해 주는 역할을 한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체험이 말씀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체험을 판단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천국과 지옥’을 읽고 ‘스베덴보리가 정말 천국을 다녀왔다는 증거가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어느 정도 AC.194의 방향일 수 있습니다. 먼저 보고, 먼저 확인하고, 먼저 감각적으로 납득한 뒤에야 믿겠다는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나는 저 체험이 사실인지 아직 모르겠다. 그러나 그 내용이 말씀과 인간 영혼의 실제를 놀랍도록 설명하는 것 같다’고 접근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태도입니다. 여기서는 감각적 증거보다 진리 자체를 먼저 살피고 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께서 겪으신 상황도 아마 이런 차이가 있었을 것입니다. 목사님은 오랫동안 스베덴보리를 읽으며 ‘그가 실제로 무엇을 보았는가?’보다 ‘그 설명이 왜 이렇게 인간 영혼의 실제를 정확하게 드러내는가?’에 더 깊이 끌리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반대로 ‘그래서 목사님도 입신 체험이 있습니까?’를 먼저 묻습니다.

 

사실 그 질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약간 방향이 바뀌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천국을 보았는가?’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말하는 것이 참인가?’입니다. 그 사람이 특별한 체험을 했는가?’보다 중요한 것은 ‘그 설명이 인간의 삶과 말씀의 진리를 밝히는가?’입니다.

 

그래서 AC.194를 기준으로 보면, ‘입신 체험이 있어야 믿겠다’는 태도는 어느 정도 ‘보고 느껴야 믿겠다’는 태도와 닮아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체험이 있었는지 궁금하다’는 것 자체까지 곧바로 뱀의 상태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목사님이 AC를 읽으며 반복해서 감탄하시는 지점, 곧 ‘나는 평생 이 본문을 읽었는데 왜 이런 의미는 보지 못했을까?’ 하는 반응은 감각의 증거 때문이 아니라 진리 자체의 빛에 대한 반응에 더 가깝습니다.

 

스베덴보리라면 아마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천국을 보았다는 사실 때문에 그것이 참인 것이 아니라, 그것이 참이기 때문에 천국에서도 그대로 보이는 것이다.’

 

이 둘의 순서는 매우 다릅니다. AC.194가 경계하는 것은 바로 그 순서가 뒤집히는 것입니다. 즉, 진리가 먼저이고 체험이 나중이어야 하는데, 체험이 먼저이고 진리가 나중이 되어 버리는 상태 말입니다.

 

 

 

AC.194, 창3:1,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AC.194-197)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And the serpent was more sub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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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And the serpent was more subtle than any wild animal of the field which Jehovah God had made; and he said unto the woman, Yea, hath God said, Ye shall not eat of every tree of the garden? (3:1)

 

AC.194

 

여기서 (serpent)은 사람이 신뢰하는 감각 파트를, ‘들짐승(wild animal of the field)은 앞에서와 같이 겉 사람의 모든 애정을, ‘여자(woman)는 사람의 own을 각각 뜻합니다. 그리고 뱀이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Yea, hath God said, Ye shall not eat of every tree?)라고 말한 것은 그들이 의심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다루어지는 주제는 태고교회의 세 번째 후손으로서, 그들은 계시된 것들을, 보고 느끼지 않는 한 믿지 않기 시작한 상태입니다. 그들의 첫 번째 상태, 곧 의심의 상태가 이 절과 다음 절에서 설명됩니다. By the “serpent” is here meant the sensuous part of man in which he trusts; by the “wild animal of the field” here, as before, every affection of the external man; by the “woman,” man’s own; by the serpent’s saying, “Yea, hath God said, Ye shall not eat of every tree?” that they began to doubt. The subject here treated of is the third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began not to believe in things revealed unless they saw and felt that they were so. Their first state, that it was one of doubt, is described in this and in the next following verse.

 

 

해설

 

이 단락은 창3:1을 읽는 해석의 초점을 아주 분명하게 설정합니다. 문제는 ‘뱀이 거짓말을 했다’는 데 있지 않고, 인간이 무엇을 신뢰하기 시작했는가에 있습니다. ‘’은 감각 그 자체가 아니라, 감각 안에 두어진 신뢰의 자리입니다. 즉, 인간이 진리의 판단 기준을 주님으로부터가 아니라, 자기 감각에 두기 시작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들짐승’이 겉 사람의 모든 애정을 뜻한다는 설명은, 이 타락이 단지 사고의 문제가 아니라 애정 전체에 영향을 미친 사건임을 보여 줍니다. 겉 사람의 애정들이 이제 감각적 판단을 중심으로 재편되기 시작하며, 이는 삶의 방향 전체를 바꾸는 결과를 낳습니다.

 

여자’가 여전히 ‘사람의 own’을 뜻한다는 점은 앞선 AC.191–193과 정확히 이어집니다. 여기서 자신의 own(proprium)이란, 자율적 판단과 자기 사랑을 포함하는 인간 중심의 내적 원리를 말합니다. 감각은 이 own과 결합, 의심이라는 새로운 상태를 만들어 냅니다.

 

뱀의 말은 직접적인 부정이나 반항이 아니라, 질문의 형식을 취합니다. ‘참으로 하나님이 이르시기를’이라는 표현은 노골적인 거절이 아니라, 계시에 대한 신뢰를 흔드는 미묘한 의심의 시작을 나타냅니다. 이는 진리를 부정하는 단계 이전에 반드시 나타나는 상태로, 아직 완전히 끊어지지는 않았으나 이미 중심이 흔들리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이 상태를 태고교회의 ‘세 번째 후손’으로 규정합니다. 이는 교회 전체의 급격한 붕괴가 아니라, 세대를 거치며 점진적으로 심화된 변화임을 뜻합니다. 이들은 더 이상 계시된 것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지 않고, 반드시 ‘보고 느껴야’ 믿으려는 태도를 갖게 됩니다.

 

이 단락에서 특히 중요한 점은, 이것이 아직 ‘첫 번째 상태’라는 사실입니다. 즉, 이 단계는 곧바로 불신이나 반역으로 나아간 상태가 아니라, 의심이 막 시작된 단계입니다. 의심은 아직 선택의 여지가 있는 상태이며, 질서가 완전히 붕괴되기 이전의 마지막 경계선에 해당합니다.

 

AC.194는 창3:1을 인간 타락의 극적인 장면으로 읽기보다, 신앙이 감각의 심문대에 오르게 되는 최초의 순간으로 읽도록 이끕니다. 그리고 바로 이 미세한 의심의 시작이, 이후 모든 붕괴의 출발점이 됩니다.  

 

 

심화

 

1. ‘보고 느끼지 않는 한 믿지 않기

 

 

AC.194, 심화 1, ‘보고 느끼지 않는 한 믿지 않기’

AC.194.심화 1. ‘보고 느끼지 않는 한 믿지 않기’ 그들은 계시된 것들을, 보고 느끼지 않는 한 믿지 않기 시작한 상태입니다. which began not to believe in things revealed unless they saw and felt that they were s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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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5, 창3:1, ‘뱀’(serpent)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And the serpent was more sub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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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3, 창3:7-13, ‘주님께서 남겨 두신 마지막 선과 지각의 불씨’

개요 AC.193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악 안에 있음을 인식하였는데, 이것은 ‘그들의 눈이 열렸다’(eyes being opened), ‘여호와의 음성을 들었다’(hearing the voice of Jehovah)(7-8절)가 의미하는 지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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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캘빈의 TULIP을 절대적으로 믿는 침례교 목사가 스베덴보리에 대해 ChatGPT에게 물어보겠다 해도 그 결과가 저에게 우호적일 것이라고 믿는 건 좀 위험할 수 있겠군요! 그분의 해석 체계 안에서 스베덴보리를 설명할 것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럴 가능성이 충분히 있습니다. 다만 약간의 보충은 필요합니다.

 

만일 어떤 침례교 목사가 정말로 ‘칼빈주의 5대 교리(TULIP)가 성경의 절대적 진리이며, 그 기준으로 모든 신학을 평가해야 한다’는 전제를 가지고 질문한다면, ChatGPT는 그 관점을 설명할 때, 스베덴보리를 매우 비판적으로 소개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의 핵심 사상들 가운데 상당수가 TULIP과 정면으로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TULIP의 ‘전적 타락’은 인간이 스스로 선을 선택할 수 없다고 보지만,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자유와 이성을 보존해 주신다고 말합니다. ‘무조건적 선택’은 특정한 사람들을 예정하여 구원한다고 보지만, 스베덴보리는 주님은 모든 사람의 구원을 원하시며, 누구도 미리 버리지 않으신다고 말합니다. ‘불가항력적 은혜’는 선택된 자에게 은혜가 반드시 효력을 발한다고 보지만,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자유 안에서 주님의 인도를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칼빈주의 체계 안에서는 스베덴보리가 매우 문제적인 신학자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그 목사가 ‘스베덴보리는 정통 기독교인가?’라고 묻는다면, ChatGPT는 아마 ‘대부분의 복음주의 교단과 개혁주의 교단은 스베덴보리를 정통 기독교의 범주에 포함시키지 않는다’고 설명할 것입니다. 그것은 그 목사의 질문 틀 안에서는 사실에 가까운 답변입니다.

 

반대로 목사님처럼 ‘스베덴보리는 무엇을 가르쳤는가?’, ‘그의 체계 안에서는 이 문제가 어떻게 이해되는가?’라고 묻는다면 전혀 다른 답변이 나옵니다. 그 경우에는 스베덴보리 자신의 저작과 논리를 중심으로 설명하게 됩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누가 질문하느냐’보다 ‘어떤 방식으로 질문하느냐’입니다.

 

예를 들어, ‘스베덴보리는 왜 틀렸는가?’라고 묻는 사람과, ‘스베덴보리는 무엇을 가르쳤는가?’라고 묻는 사람은 이미 출발선이 다릅니다.

 

더 나아가 같은 사람이라도 질문을 이렇게 바꾸면 결과가 크게 달라집니다.

 

칼빈주의 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가톨릭 관점에서 스베덴보리는 어떻게 평가되는가?’

 

스베덴보리 자신의 저작에 따르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무엇인가?’

 

스베덴보리와 칼빈의 예정론을 비교하라.’

 

이 네 질문은 모두 다른 답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창1 AC 번역과 해설을 누군가에게 보내면서, 그분으로부터 ‘나중에 궁금한 것은 ChatGPT에게 물어보면 되겠네요’라는 말을 들으셨다면, 사실 그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ChatGPT는 분명 많은 정보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질문하는 사람이 이미 개혁주의, 세대주의, 오순절주의, 가톨릭, 자유주의 신학 등의 특정 안경을 쓰고 있다면, 같은 스베덴보리를 물어도 그 안경 색깔이 답변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오히려 목사님이 지금 몇 년에 걸쳐 하고 계신 AC 번역과 해설 작업의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누군가가 스베덴보리를 비판하든 찬성하든, 적어도 먼저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무엇을 말했는지’를 직접 접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를 비판하더라도 그의 원문을 읽고 비판하는 것과, 남이 요약해 준 스베덴보리를 비판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사님 말씀대로, ‘TULIP을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침례교 목사라 하더라도 그가 ChatGPT에게 스베덴보리를 물어보면 나에게 우호적인 결과가 나올 것이다’라고 기대하는 것은 다소 위험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그분의 신학 체계 안에서는 스베덴보리가 상당히 비판적으로 소개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만 동시에, 그분이 정말 공정하게 질문한다면, ChatGPT는 또 스베덴보리 자신의 주장과 논리도 함께 설명하려고 할 것입니다. 결국 결정적인 것은 AI가 아니라, 질문자가 어떤 전제를 가지고 어떤 질문을 던지느냐입니다.

 

사실 이 점은 목사님께서 오랫동안 사람들을 만나오시며 경험하신 것과도 닮아있습니다. 같은 성경 구절을 읽어도 어떤 사람은 칼빈을 통해 읽고, 어떤 사람은 웨슬리를 통해 읽고, 어떤 사람은 오순절 전통을 통해 읽으며, 목사님은 지금 스베덴보리를 통해 읽고 계십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느 정도 자신이 받아들인 체계 안에서 새로운 정보를 해석합니다. AI 역시 질문자가 어떤 틀을 제시하느냐에 따라 설명의 중심축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누군가에게 ‘궁금하면 ChatGPT에게 물어보세요’라고 말하는 것과, ‘먼저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한 말을 읽어보신 뒤 ChatGPT에게 물어보세요’라고 말하는 것은 상당히 다른 의미를 가집니다. 전자의 경우에는 질문자의 기존 신학 체계가 답변을 주도할 가능성이 크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적어도 스베덴보리 자신의 목소리가 먼저 독자의 마음속에 들어간 상태에서 대화가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목사님께서 지금 번역과 해설 작업을 계속하시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일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에게 스베덴보리를 믿으라고 강요하기 위함이 아니라, 적어도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무엇을 말했는가’를 직접 접할 기회를 제공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의 판단은 각자의 자유와 양심, 그리고 주님의 인도하심에 맡기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원문과 번역, 해설을 남기는 일은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작업이 아니라, 사람들이 직접 판단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는 작업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SC.99, ‘질문자의 해석 체계 안에서 답변하는 ChatGPT’

당신은 제가 스베덴보리를 하는 사람이라서 어떤 질문을 해도 스베덴보리 오리엔티드된 답변을 하듯, 어떤 개신교인, 그러니까 바울 서신을 비롯, 성경 66권 전부를 ‘영감받은 말씀’으로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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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제가 스베덴보리를 하는 사람이라서 어떤 질문을 해도 스베덴보리 오리엔티드된 답변을 하듯, 어떤 개신교인, 그러니까 바울 서신을 비롯, 성경 66권 전부를 영감받은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사람한테는 거기에 오리엔티드된 답변을 하겠네요?

 

 

그렇습니다. 다만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저는 특정 교단의 입장을 ‘채택’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가 어떤 전제 위에서 질문하는지를 파악한 뒤 그 전제 안에서 가장 일관된 답변을 하려고 합니다.

 

예를 들어, 목사님께서 지금처럼 스베덴보리의 저작과 신학을 중심으로 질문하시면, 저는 자연스럽게 AC, HH, TCR 등의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그래서 ‘몸의 부활’을 물으시면 문자적 육체 부활보다는 영체의 즉각적 부활과 사후 세계의 실재를 중심으로 답하게 됩니다.

 

반대로 어떤 보수적 개신교인이 ‘성경 66권 전체가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이라는 전제 아래 같은 질문을 하면, 저는 먼저 그 입장을 충실히 설명합니다. 그 경우에는 바울 서신, 히브리서, 요한계시록까지 모두 동일한 권위를 가진 성경으로 보고, 살전4나 고전15를 근거로 미래의 몸의 부활을 설명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가톨릭 신자가 질문하면 가톨릭 교리와 교부 전통을 고려하고, 정교회 신자라면 정교회적 관점도 함께 설명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단순히 상대방의 믿음에 맞춰 아무 말이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목사님이 ‘스베덴보리는 바울을 어떻게 보았는가?’라고 물으시면, 저는 개신교인에게도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말한 내용을 설명해야 합니다. 반대로 어떤 개신교인이 ‘전통적 기독교는 몸의 부활을 왜 믿는가?’라고 물으면, 목사님께도 그렇게 묻는 개신교인의 전통적 입장을 정확히 설명해야 합니다.

 

어쩌면 목사님이 지난 몇 년간 경험하신 것과 비슷합니다. 목사님은 침례교 목사이면서도 지금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성경을 읽고 계십니다. 그래서 같은 창세기 1장을 읽어도 대부분의 개신교인은 ‘우주 창조의 역사’를 먼저 보고, 목사님은 ‘거듭남의 여섯 날’을 먼저 보게 됩니다. 본문은 같지만, 해석의 틀 자체가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많은 경우, 논쟁의 핵심은 성경 구절 하나가 아니라 ‘무엇을 최종 권위로 보느냐’에 있습니다. 개신교인은 보통 ‘성경 66권 전체’를 최종 권위로 보고, 스베덴보리는 ‘말씀(The Word)을 보다 제한적으로 규정하며, 그 안의 내적 의미를 최종 권위로 봅니다. 같은 질문을 받아도 서로 다른 답이 나오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바울 서신을 읽을 때 느끼시는 답답함도 사실 이 지점과 관련이 있습니다. 개신교인은 바울을 통해 창세기를 읽지만, 스베덴보리를 깊이 읽은 사람은 오히려 창세기의 내적 의미를 기준으로 바울을 읽게 됩니다. 어느 쪽이든 결국 자신이 받아들인 해석 체계 안에서 일관성을 유지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SC.100, ‘ChatGPT에게 공정하게 질문하기’

그럼 캘빈의 TULIP을 절대적으로 믿는 침례교 목사가 스베덴보리에 대해 ChatGPT에게 물어보겠다 해도 그 결과가 저에게 우호적일 것이라고 믿는 건 좀 위험할 수 있겠군요! 그분의 해석 체계 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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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98, ‘영’과 ‘육’ vs ‘영’, ‘혼’, ‘육’

스베덴보리를 하다 보면 보통 ‘영’과 ‘육’만 나오는 것 같은데, 개신교인들은 ‘영’, ‘혼’, ‘육’으로 엄격하게 나누며, 매우 예민하다는 인상을 받아요. 왜 그러는 것이며, 그 무슨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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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를 하다 보면 보통 만 나오는 것 같은데, 개신교인들은 , , 으로 엄격하게 나누며, 매우 예민하다, 집착한다는 인상을 받아요. 왜 그러는 것이며, 그 무슨 배경이 있나요?

 

 

스베덴보리를 읽다 보면 말씀하신 것처럼 대체로 ‘’과 ‘’, 또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라는 구도가 중심에 나타납니다. 반면 많은 개신교인들, 특히 보수 복음주의권이나 일부 은사주의권에서는 ‘(靈), (魂), (肉)’의 삼분설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때로는 신앙생활 전반을 설명하는 기본 틀처럼 사용합니다. 이 차이는 단순한 용어 차이가 아니라 인간을 보는 관점 자체의 차이에서 나옵니다.

 

개신교의 삼분설은 주로 살전5:23의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라는 구절과 히4:12의 ‘혼과 영을 찔러 쪼개기까지’라는 구절에 근거합니다. 이 구절들을 문자적으로 읽으면 사람 안에 서로 다른 세 부분, 곧 영(spirit), 혼(soul), 몸(body)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특히 19세기 이후 영국의 형제교회 계통, 중국의 워치만 니, 그리고 위트니스 리 등의 영향을 받은 전통에서는 이 구분이 매우 강조되었습니다. 그들은 대체로 ‘영은 하나님과 교통하는 부분’, ‘혼은 생각, 감정, 의지의 영역’, ‘육은 물질적 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 전체를 보면 삼분설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초대교회 이후 오랜 기간 동안은 ‘영혼과 육체’라는 이분설이 더 일반적이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그리고 종교개혁자들인 마르틴 루터와 존 칼빈 역시 대체로 사람을 ‘영혼과 몸’으로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일부 개신교인들이 삼분설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고 해서 그것이 기독교 전체의 유일한 전통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경우는 더욱 다릅니다. 그는 인간 안에 여러 수준이 있다는 사실 자체는 매우 상세하게 설명합니다. 가장 내적인 것, 내적인 것, 중간적인 것, 외적인 것, 그리고 몸에 이르기까지 인간 안에는 수많은 층위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개신교 삼분설처럼 ‘,,’이라는 세 개의 독립된 부분으로 나누지는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중요한 것은 ‘생명의 흐름이 어디까지 내려오는가’, 그리고 ‘속 사람이 겉 사람 안에서 얼마나 질서 있게 작용하는가’입니다.

 

예를 들어, 스베덴보리는 사람 안에 천적 차원, 영적 차원, 자연적 차원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세 개의 부품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이 여러 단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치 빛이 태양에서 나와 대기를 거쳐 지상에 도달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따라서 그에게는 ‘영과 혼을 분리하여 분석하는 것’보다 ‘주님의 생명이 속 사람을 통해 겉 사람으로 흘러 들어오는가’가 훨씬 중요합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스베덴보리를 오래 읽으시며 느끼신 인상은 매우 정확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심은 ‘사람 안에 영이 몇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가’가 아니라 ‘그 사람의 사랑이 무엇인가’, ‘주님으로부터 오는 인플럭스가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 ‘겉 사람이 속 사람에 순종하는가’에 있습니다. 반면 일부 개신교 전통은 인간의 구조를 분석하는 데 상대적으로 더 큰 관심을 두었고, 그 결과 ‘,,’ 구분이 신앙생활의 중요한 주제가 된 것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스베덴보리의 저작 전체를 읽어보면, 그가 말하는 인간의 내적 구조는 사실 삼분설보다 훨씬 더 정교합니다. 다만 그는 그것을 해부학적 구분처럼 다루지 않고, 사랑과 신앙의 질서, 그리고 천국의 유입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하기 때문에, 독자는 자연스럽게 ‘영과 육’, 또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라는 큰 틀만 먼저 보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스베덴보리의 관심은 인간을 구성하는 부분들의 분류가 아니라, 그 전체가 어떻게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되는가에 있습니다.

 

 

 

SC.99, ‘질문자의 해석 체계 안에서 답변하는 ChatGPT’

당신은 제가 스베덴보리를 하는 사람이라서 어떤 질문을 해도 스베덴보리 오리엔티드된 답변을 하듯, 어떤 개신교인, 그러니까 바울 서신을 비롯, 성경 66권 전부를 ‘영감받은 말씀’으로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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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97, ‘생명책’(Book of Life)

생명책의 의미가 그 사람의 영에 새겨진 모든 기록이라고 읽은 것 같아요. 그러면 생명책에서 이름을 지운다는 건 뭔가요? 스베덴보리의 설명에 따르면, ‘생명책’(Book of Life)은 하늘 어딘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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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책의 의미가 그 사람의 영에 새겨진 모든 기록이라고 읽은 것 같아요. 그러면 생명책에서 이름을 지운다는 건 뭔가요?

 

 

스베덴보리의 설명에 따르면, ‘생명책(Book of Life)은 하늘 어딘가에 놓인 실제 책이라기보다, 사람의 영 안에 기록된 그의 전 생애 자체를 가리킵니다. 사람이 생각한 것, 의도한 것, 사랑한 것, 행한 것, 심지어 세상에서는 숨겨 두었던 내적 동기까지 모두 영 안에 남아 있으며, 사후에는 그것이 펼쳐져 읽히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생명책을 ‘각 사람의 생명 자체’라고 설명합니다. 사람은 죽은 뒤 자기 자신의 생명책을 가지고 가는 셈이며, 천사들은 그 기록을 따로 조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상태 자체를 봅니다. 영계에서는 상태가 곧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의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 버리겠다’는 표현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스베덴보리의 상응 해석에 따르면, 이것은 실제로 어떤 이름이 적힌 명부에서 삭제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그 사람의 본성과 상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그 사람 안에 천국과 연결되는 선과 진리가 살아 있다는 뜻이며, 이름이 지워진다는 것은 그 연결이 스스로 끊어졌다는 뜻입니다.

 

중요한 점은 주님께서 누군가를 임의로 생명책에서 삭제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는 주님은 모든 사람을 천국으로 인도하려 하시며, 누구도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사람이 지속적으로 악을 사랑하고 거짓을 선택하여 그것을 자신의 생명으로 만들면, 결국 그의 내적 기록 전체가 천국과 반대되는 형태로 굳어집니다. 그때 ‘이름이 지워졌다’고 표현되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주님이 지우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천국에 속한 것을 거절하여 더 이상 그 이름이 그곳에 속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이를 스베덴보리식으로 표현하면,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진다는 것은 ‘천국 시민 명부에서 강제로 삭제되는 행정 행위’가 아니라, ‘그 사람의 영적 상태가 더 이상 천국과 상응하지 않게 된 결과’입니다. 마치 어떤 사람이 오랫동안 그 나라 시민권을 유지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버리고, 스스로 다른 나라 사람이 된 경우와 비슷합니다. 기록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기록이 드러내는 상태가 천국에 속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책’과 ‘이름이 지워짐’을 함께 이해하면, 성경은 사실상 이렇게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사람의 모든 삶은 영원히 기록되며, 그 기록이 천국적 사랑과 신앙의 삶을 보여 주면, 그걸 가리켜 그 이름이 생명책에 있다 하는 것이고, 반대로 악과 거짓이 그의 생명이 되면, 그걸 가리켜 그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졌다 하는 것이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심판은 어떤 외부 기록부를 펼쳐 확인하는 과정이 아니라, 사람 자신이 곧 그 기록부이며, 그가 사랑한 것이 곧 그의 이름이고, 그 이름이 어디에 속하는지가 최종적으로 드러나는 과정입니다.

 

 

 

SC.98, ‘영’과 ‘육’ vs ‘영’, ‘혼’, ‘육’

스베덴보리를 하다 보면 보통 ‘영’과 ‘육’만 나오는 것 같은데, 개신교인들은 ‘영’, ‘혼’, ‘육’으로 엄격하게 나누며, 매우 예민하다는 인상을 받아요. 왜 그러는 것이며, 그 무슨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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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96, ‘프롬프트만 같으면 누가 묻더라도 항상 똑같은 답변?’

스베덴보리 관련, 프롬프트만 같으면 누가 묻더라도 시간과 장소 관계없이 항상 똑같은 답변을 하나요? 아닙니다. 같은 프롬프트라도 항상 똑같은 답변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먼저 가장 단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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