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20.심화

 

2. ‘자신이 저세상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임종, 그러니까 지상에서 숨을 거두는, 정말 수없이 다양한 케이스가 있습니다. 평안한, 온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쓸쓸히 홀로 고독사하는 사람도 있고... 병원이나 요양원에서 편안하게 떠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교통사고 등 갑작스런 사고사나 전쟁이나 강도, 감옥 형장의 이슬, 혹은 자살 등... 제가 말씀드리고픈 것은 저는 고등학생 때 모친을 교통사고로 잃은 경험이 있는데요, 그러니까 이런 사별의 경험은 정말 선 굵은 인생의 자국을 남기더라는 거죠. 아마 숨을 거두시는 분도 그러지 싶은데... 그런데 어떻게 사후 자기가 죽은지조차 모를 수가 있는 건가요? 모든 게 이어진다면서 말이죠...

 

 

겉으로 보면 모순처럼 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한편으로는 사람이 죽은 뒤에도 의식은 끊어지지 않고 그대로 이어진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사람이 자신이 죽은 줄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두 진술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같은 사실을 서로 다른 측면에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먼저 구별해야 할 것은 ‘의식의 연속’과 ‘상황에 대한 인식’입니다. 사람은 죽는 순간 자신의 기억과 생각, 감정과 사랑, 성격과 삶의 방향을 그대로 지닌 채 영계로 들어갑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삶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나는 지금 죽었다’는 사실을 즉시 깨닫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지상에서도 깊이 잠들었다가 막 깨어났을 때 잠시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분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의식은 계속 이어졌지만, 새로운 상황을 이해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죽음 직후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납니다.

 

더욱이 주님께서는 죽음을 인간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단절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의 자연스러운 이행이 되도록 섭리하십니다. 만일 사람이 육체를 떠나는 순간 자신이 모든 것을 잃었다고 느낀다면, 특히 교통사고나 전쟁, 살해, 갑작스러운 사고와 같은 경우에는 엄청난 충격과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러한 충격이 영혼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보호하십니다. 사람은 여전히 보고, 듣고, 생각하고, 느끼며, 자신이 살아 있다는 연속된 의식 속에 머물게 됩니다. 그리고 천사들의 인도와 새로운 환경을 통해 조금씩 자신이 영계에 들어왔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 점은 지상에서의 죽음의 모습이 얼마나 다양하든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안히 숨을 거두고, 어떤 사람은 병원이나 요양원에서 생을 마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교통사고나 재난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고, 전쟁이나 범죄의 희생자가 되기도 하며, 때로는 극심한 절망 속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도 합니다. 남겨진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죽음의 방식이 평생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됩니다. 갑작스러운 사별은 삶을 ‘그 이전’과 ‘그 이후’로 나누어 놓을 만큼 깊은 흔적을 남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증언은 지상에서 바라본 죽음과 영계에서 경험하는 죽음이 반드시 같은 모습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지상에서는 사고의 순간이 마지막 장면으로 기억되지만, 영계에서는 그 한순간의 충격이 새로운 삶의 출발점이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는 각 사람의 상태에 맞게 천사들을 보내시고, 마치 깊이 잠든 아이를 조심스럽게 옮기듯 그 영혼을 새로운 삶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교통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영원히 사고의 충격 속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연속성 안에서 주님의 보호를 받으며 점차 영계의 삶에 적응하게 됩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AC.320은 ‘사람은 자신이 아직도 이 세상에 있으며, 심지어 아직도 육체 안에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죽음을 부정한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로 인해 죽음이 파괴적인 단절로 경험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나는 끝났다’는 의식보다 ‘나는 계속 살아 있다’는 의식을 먼저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 연속된 삶 속에서 비로소 자신이 영계에 들어왔음을 하나씩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AC.320은 단순히 사후 세계의 한 현상을 설명하는 글이 아닙니다. 오히려 죽음의 순간에도 변함없이 역사하시는 주님의 자비를 보여 주는 글입니다. 인간에게는 죽음이 가장 큰 변화처럼 보이지만, 주님께서는 그 변화가 영혼에게 감당할 수 없는 충격이 되지 않도록 섭리하십니다.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주님의 손 안에서 이 세상의 삶에서 저세상의 삶으로 조용히 옮겨지며, 그 연속성 속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원한 삶의 새로운 시작이 됩니다.

 

 

 

AC.320, 창4 앞,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AC.320-323)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On The Nature Of The Life Of The Soul Or Spirit AC.320 영혼(soul)으로서의 삶, 곧 죽은 뒤 처음 영계에 들어가는 신참, 신생 영들(novitiate spirits)의 삶에 관한 일반적인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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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0, 심화 1, ‘soul’과 ‘spirit’

AC.320.심화 1. ‘soul’과 ‘spirit’ ‘soul’과 ‘spirit’의 차이가 뭔가요? 그리고 적절한 우리말 번역은? AC.320에는 흥미롭게도 ‘soul’과 ‘spirit’이라는 두 단어가 함께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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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0.심화

 

1. ‘soul spirit

 

soul spirit의 차이가 뭔가요? 그리고 적절한 우리말 번역은?

 

 

AC.320에는 흥미롭게도 ‘soul’과 ‘spirit’이라는 두 단어가 함께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the life of souls’라고 말한 뒤, 곧바로 ‘that is, of novitiate spirits’라고 덧붙입니다. 이는 두 단어가 서로 전혀 다른 개념이라기보다, 같은 대상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표현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일반적으로 ‘soul’은 사람의 생명이나 존재 자체를 가리키는 보다 포괄적인 표현입니다. 성경의 히브리어 ‘네페쉬’와 헬라어 ‘프쉬케’에 가까운 용법으로, 살아 있는 인간은 물론 죽은 뒤에도 계속 존재하는 사람 자체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AC.320의 ‘the life of souls’는 문자 그대로는 ‘영혼들의 삶’이지만, 실제 의미는 ‘사후 인간의 삶’ 또는 ‘죽은 사람들의 삶’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반면 ‘spirit’은 영계에서 실제로 살아가는 영적 인간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죽은 뒤의 사람을 매우 자주 ‘spirit’이라고 부르며, 특히 영계의 사회와 공동체 안에서 활동하는 존재를 말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따라서 ‘novitiate spirits’는 ‘영계에 처음 들어온 새 영들’, 곧 신참, 신생 영들을 뜻합니다.

 

이 때문에 AC.320의 첫 문장은 먼저 가장 넓은 의미의 ‘사후 인간의 삶’을 제시한 뒤, 그것이 곧 ‘영계에 처음 들어온 새 영들의 삶’을 말하는 것이라고 풀어 설명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soul’은 주제를 포괄적으로 제시하는 표현이고, ‘spirit’은 그 주제를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표현입니다. 따라서 두 단어를 모두 ‘영혼’으로 번역하면 원문의 의도가 흐려지고, 모두 ‘’으로 번역해도 스베덴보리의 섬세한 표현 차이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한편 스베덴보리의 저작 전체를 살펴보면, 그가 가장 강조하는 것은 사실 ‘soul’이나 ‘spirit’보다 ‘man’이라는 표현입니다. 특히 ‘천국과 지옥’에서는 사람이 죽은 뒤에도 여전히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설명합니다. 그는 영을 희미한 기운이나 추상적 의식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영은 보고, 듣고, 말하고, 기억하고, 생각하며, 사랑하는 완전한 인간입니다. 그래서 영계에서는 ‘’이라는 말보다 ‘사람’이라는 표현이 오히려 본질을 더 잘 나타내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AC 번역에서는 ‘soul’은 기본적으로 ‘영혼’으로, ‘spirit’은 ‘’으로 옮기는 것이 가장 일관성이 있습니다. 다만 ‘the life of souls’처럼 ‘영혼’이라는 우리말이 다소 추상적으로 들리는 문맥에서는, 해설을 통해 이것이 곧 ‘사후 인간의 삶’을 뜻한다는 점을 함께 설명해 주는 것이 좋습니다. 따라서 AC.320의 첫 문장은 ‘영혼의 삶, 곧 영계에 처음 들어온 새 영들의 삶에 관한 일반적인 사항과 관련하여...’라고 번역하는 것이 원문의 의미와 스베덴보리의 의도를 가장 잘 살리는 번역이라고 생각됩니다.

 

 

 

AC.320, 심화 2, ‘자신이 저세상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AC.320.심화 2. ‘자신이 저세상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임종, 그러니까 지상에서 숨을 거두는, 정말 수없이 다양한 케이스가 있습니다. 평안한, 온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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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0, 창4 앞,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AC.320-323)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On The Nature Of The Life Of The Soul Or Spirit AC.320 영혼(soul)으로서의 삶, 곧 죽은 뒤 처음 영계에 들어가는 신참, 신생 영들(novitiate spirits)의 삶에 관한 일반적인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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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On The Nature Of The Life Of The Soul Or Spirit

 

AC.320

 

영혼(soul)으로서의 삶, 곧 죽은 뒤 처음 영계에 들어가는 신참, 신생 영들(novitiate spirits)의 삶에 관한 일반적인 사항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저는 많은 경험을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저세상(the other life)에 들어가면 그는 자신이 저세상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여전히 이 세상에 있으며, 심지어 아직도 육체 안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상태는 매우 실제적이어서, 누군가 그에게 자신이 영이라고 말해 주면 그는 크게 놀라고 경이로워합니다. 이는 자신이 감각과 욕구, 생각에 있어서 전과 똑같이 한 인간으로 존재함을 발견하기 때문이며, 또한 세상에 살 때에는 영의 존재를 믿지 않았거나, 혹은 어떤 사람들처럼 영이 지금 자신이 경험하는 것과 같은 존재일 수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With regard to the general subject of the life of souls, that is, of novitiate spirits, after death, I may state that much experience has shown that when a man comes into the other life he is not aware that he is in that life, but supposes that he is still in this world, and even that he is still in the body. So much is this the case that when told he is a spirit, wonder and amazement possess him, both because he finds himself exactly like a man, in his senses, desires, and thoughts, and because during his life in this world he had not believed in the existence of the spirit, or, as is the case with some, that the spirit could be what he now finds it to be.

 

 

해설

 

이 글은 사람이 죽은 직후 경험하는 가장 보편적인 상태를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증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사실을 단순한 추측이나 철학적 사색이 아니라, 오랜 기간 영계에서 직접 보고 경험한 결과로 제시합니다. 따라서 이 글은 이후 이어지는 사후 세계에 관한 모든 설명의 출발점이 됩니다.

 

가장 먼저 주목할 것은, 사람은 죽는 순간 자신의 존재가 끊어진다고 느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는 자신이 ‘저세상(the other life)에 왔다는 사실조차 처음에는 의식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여전히 이전과 같은 세상에 있으며, 여전히 육체를 가지고 살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영이 곧 사람 자신이며, 육체는 단지 세상에서 사용하는 가장 바깥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육체를 벗는다고 해서 의식 자체가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 의식은 그대로 계속됩니다.

 

스베덴보리는 특히 사람이 ‘감각과 욕구, 생각’을 그대로 가지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영이 막연한 기운이나 그림자가 아니라 완전한 인간(homo)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보고, 듣고, 말하고, 기억하며, 생각하고, 사랑합니다. 다만 이제는 물질적 몸을 통하여가 아니라 영적 몸을 통하여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은 사람의 인격이 새롭게 만들어지는 사건이 아니라, 이미 형성된 내면의 사람이 자신의 본래 세계로 옮겨가는 과정입니다.

 

사람들이 놀라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살아 있을 때 영을 비물질적인 어떤 에너지나 희미한 의식 정도로 상상합니다. 그러나 실제 영계에 들어가면 자신이 여전히 완전한 사람이며, 이전과 거의 같은 의식과 감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결과 자신이 죽었다는 말을 들으면 오히려 믿기 어려워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주님의 자비로운 섭리와도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만일 사람이 죽는 순간 모든 환경이 갑자기 바뀌고, 자신의 존재 방식이 완전히 달라진다면 그는 극심한 혼란과 두려움에 빠질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람의 의식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그는 마치 한 방에서 다른 방으로 옮겨간 것처럼 점진적으로 새로운 세계에 적응하게 됩니다. 이후에야 비로소 자신이 영계에 있으며, 육체를 떠났음을 차츰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점진적인 전이는 주님의 사랑과 섭리가 영혼을 얼마나 세심하게 보호하시는지를 보여 줍니다.

 

또한 이 글은 사람의 사후 상태가 죽음 자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서 형성된 삶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도 암시합니다. 죽음은 사람을 다른 존재로 바꾸지 않습니다. 사람은 세상에서 사랑하던 것을 그대로 사랑하고, 생각하던 방식 그대로 생각하며, 살아온 삶의 성향을 그대로 가지고 영계로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새로운 사람을 만드는 순간이 아니라, 이미 형성된 참된 사람이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결국 AC.320은 ‘죽음은 삶의 단절이 아니라 연속’이라는 스베덴보리의 사후관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 주는 글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람이 저세상에 들어가도 자신이 여전히 같은 사람이라고 느끼는 이유는, 참된 인간은 육체가 아니라 영이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죽음은 존재의 끝이 아니라, 영원한 삶을 향한 첫걸음이며, 주님께서는 그 첫걸음을 혼란이 아니라 평안 가운데 내딛도록 섭리하고 계십니다.

 

 

심화

 

1. ‘soulspirit

 

 

AC.320, 심화 1, ‘soul’과 ‘spirit’

AC.320.심화 1. ‘soul’과 ‘spirit’ ‘soul’과 ‘spirit’의 차이가 뭔가요? 그리고 적절한 우리말 번역은? AC.320에는 흥미롭게도 ‘soul’과 ‘spirit’이라는 두 단어가 함께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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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자신이 저세상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AC.320, 심화 2, ‘자신이 저세상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AC.320.심화 2. ‘자신이 저세상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임종, 그러니까 지상에서 숨을 거두는, 정말 수없이 다양한 케이스가 있습니다. 평안한, 온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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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9, 창3 뒤, ‘두 번째 사례’

사람이 영생에 들어감에 관하여 (계속) AC.319 나는 또 다른 한 사람도 보았는데, 그는 천사들에 의해 곧바로 천국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는 주님께 받아들여졌고, 천국의 영광을 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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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AC.182-319 번역, 해설 및 심화 - ChatGPT.pdf 소개

 

 

3, AC.182-319 번역, 해설 및 심화 - ChatGPT.pdf’는 흔히 ‘인간의 타락’이라고 불리는 창세기 3장을, 단순한 최초 인간의 범죄 기록이나 불순종 이야기로 읽지 않습니다. 이 책은 인간이 본래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고, 사랑 안에서 진리를 지각하던 천적 상태에서 어떻게 점차 자신의 감각과 판단을 신뢰하게 되었으며, 마침내 자신의 own(proprium)을 사랑하는 상태로 기울어졌는지를 보여주는 인간 영혼의 깊은 역사입니다. 창세기 2장이 인간의 본래적 질서와 에덴의 상태를 보여준다면, 창세기 3장은 그 질서가 어떻게 흔들리고 전도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 타락의 한복판에서도 인간을 버리지 않으시고, 구원과 보존의 길을 마련하시는 주님의 자비로운 섭리를 보여줍니다.

 

이 책은 창세기 3장 본문에 들어가기에 앞서 AC.182-189의 ‘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기’에 관한 설명으로 시작합니다. 이 부분은 사람이 육체의 죽음 이후 어떤 과정을 거쳐 영적 의식을 회복하는지를 매우 섬세하게 보여줍니다. 죽은 사람은 곧바로 심판대에 세워지거나 자신의 모든 악과 마주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천적 천사들의 사랑과 보호 안에서 깨어납니다. 그는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오직 생각만 하다가, 영적 천사들의 도움으로 점차 빛을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눈의 막이 벗겨지는 것처럼 보이고, 희미한 빛과 푸른 그림자와 작은 별을 보며, 마침내 자신이 육체가 아니라 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 과정은 죽음이 갑작스러운 단절이 아니라, 주님의 보호 아래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새로운 깨어남임을 보여줍니다.

 

특별히 AC.182-189는 주님께서 인간을 어떻게 다루시는가를 깊이 생각하게 합니다. 주님은 사람에게 감당할 수 없는 빛을 한꺼번에 비추지 않으십니다. 잠에서 막 깨어난 사람의 눈에 정오의 태양을 비추지 않듯이, 영혼이 받을 수 있는 만큼만 조금씩 열어 주십니다. 천사들은 그 사람에게서 사랑과 같은 부드럽고 온화한 생각 외에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합니다. 심지어 생전에 악을 선택했던 사람에게도 처음에는 영원한 생명에 들어왔다는 행복과 기쁨을 맛보게 하십니다. 이 책은 이러한 모습을 통하여 주님의 첫 번째 태도가 정죄가 아니라 보호이며, 판결이 아니라 사랑이고, 배척이 아니라 가능한 한 오래 붙들어 주시는 자비임을 거듭 보여줍니다.

 

그러나 사후의 길은 단순히 사랑받고 위로받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사람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과 자기 인식을 통하여 완만하게 위로 경사진 길로 인도되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아무도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과 자기 인식 없이는 천국으로 인도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자기 인식은 자신의 성격이나 장단점을 분석하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생명과 선과 지혜가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며, 자신에게서 나오는 own은 본질적으로 악과 거짓으로 기울어진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천국은 어떤 종교적 신분이나 교리적 명칭만으로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고 어떤 진리를 받아들이며, 자신의 상태를 주님의 빛 안에서 얼마나 인정하는가에 따라 가까워지는 상태의 나라입니다.

 

이 사후 소생에 관한 서문은 창세기 3장 전체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창세기 3장 역시 한순간의 범죄나 외적인 형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적 상태가 한 단계씩 변화하는 과정을 다루기 때문입니다. AC.190은 이 장의 주제를 태고교회의 세 번째 상태라고 규정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own을 몹시 원한 나머지 마침내 그것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상태에서 인간은 자신이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다는 것을 알았고, 두 번째 상태에서는 사랑 안에서 진리를 직접 지각하는 에덴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 상태에서는 ‘내가 직접 알고 싶다’, ‘내 감각으로 확인하고 싶다’, ‘내 판단으로 옳고 그름을 결정하고 싶다’는 욕구가 생겨났습니다. 창세기 3장의 타락은 바로 이 사랑의 중심이 주님에게서 자기 자신에게로 이동한 사건입니다.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상징은 ‘’, ‘여자’, ‘남자’입니다. 뱀은 인간의 감각 파트를, 여자는 자신의 own을 사랑하는 애정을, 남자는 rational을 뜻합니다. 감각은 본래 악한 것이 아닙니다. 감각은 인간의 가장 바깥쪽에 있으며, 자연계와 접촉하게 하는 유익한 기능입니다. 그러나 감각이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장 높은 판단자의 자리로 올라갈 때 문제가 시작됩니다. 본래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이 속 사람과 rational을 거쳐 감각을 인도해야 하지만, 타락한 인간은 오히려 감각으로 주님의 계시와 신앙의 신비를 판단하려 합니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이성적으로 증명할 수 없으면 믿지 않으려는 태도가 바로 뱀의 상태입니다.

 

뱀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부인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참으로 그렇게 말씀하셨느냐’고 묻습니다. 이 질문은 겉으로는 신중하고 합리적으로 들리지만, 실제로는 계시를 감각과 자기 판단의 심문대에 올려놓는 첫걸음입니다. 이 책은 타락의 흐름을 ‘감각의 제안, 사랑의 동의, 이성의 승인’이라는 매우 섬세한 구조로 설명합니다. 먼저 감각이 ‘정말 그런가’라고 제안하고, 자기 own을 사랑하는 애정이 그것을 알고 싶어 하며, 마지막으로 rational이 그 욕망에 동의하고 논리적으로 정당화합니다. 사람은 자신이 충분히 생각하고 합리적인 결론을 내렸다고 여기지만, 실제로는 이미 사랑이 방향을 정했고, 이성은 그 사랑을 변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금지된 과일을 먹는 외적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는 질서를 떠나, 자기 자신으로부터 선과 악을 판단하려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인간이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하고 자기 지혜로 자신을 인도할 수 있다고 믿을 때, 그는 생명나무가 상징하는 주님으로부터의 생명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창세기 3장은 인간이 무지했기 때문에 타락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자기 스스로 알고 판단하고 지혜로워지기를 원했기 때문에 타락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 책은 지식이나 이성 자체를 정죄하지 않으면서도, 그것들이 주님과 질서에서 분리되어 사용될 때 얼마나 위험해질 수 있는지를 깊이 보여줍니다.

 

특히 이 책에서는 감각적 증거에 근거하여 신앙의 신비를 판단하는 추론을 ‘뱀의 독’이라고 설명합니다. 시편과 예언서들에 등장하는 ‘’, ‘독사’, ‘뱀의 독’, ‘귀를 막는 독사’, ‘뱀의 소리’ 같은 표현들은 모두 단순한 동물 비유가 아니라, 지혜의 음성을 들으려 하지 않고 감각적 사실과 기억 지식만으로 신적인 것을 판단하는 인간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이성의 오용을 설명하기 위해 ‘이성질’이라는 독특한 표현도 사용합니다. 이는 이성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이성을 주님 위에 올려놓고 신앙과 계시를 심사하는 데 사용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참된 이성은 신앙의 적이 아니라 신앙을 섬기는 도구이지만, 자기 own과 결합한 이성은 진리를 밝히는 빛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수단이 됩니다.

 

그러나 창세기 3장은 인간이 타락하는 과정만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AC.193은 그들이 악 안에 있음을 여전히 인식하였으며, 그들 안에 ‘지각의 남은 흔적’과 ‘자연적 선’이 남아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눈이 열렸고, 여호와의 음성을 들었으며, 자신들이 벗은 것을 부끄러워했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고,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그들은 변명하고 책임을 전가하기도 했지만, 아직 부끄러움과 두려움과 어느 정도의 인정과 고백이 남아 있었습니다. 완전히 악에 잠긴 사람은 자신이 악 안에 있음을 보지 못하며 부끄러워하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이들의 부끄러움은 단순한 정죄의 증거가 아니라, 주님께서 아직 그들 안에 보존하신 마지막 지각과 자연적 선의 흔적입니다.

 

이 점에서 이 책은 인간의 부족함을 바라보는 주님의 시선을 새롭게 보여줍니다. 인간은 자신과 타인을 쉽게 ‘모 아니면 도’로 판단하고, 한 번의 잘못이나 신앙적 차이로 관계를 끊어 버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타락한 인간 안에서도 아직 남아 있는 가장 작은 선과 가장 희미한 지각을 찾아내어 보존하십니다.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고,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며, 사람의 상태와 역량에 맞추어 아주 조금씩 질서를 회복시키십니다. 이 책은 자신의 혈기와 극단성, 단절하려는 성향을 돌아보게 하는 동시에, 그러한 상태를 보고 괴로워하며 상대방의 선의를 보려고 애쓰는 마음 역시 주님께서 보존하신 중요한 선의 흔적일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3:14-19에 이르면 뱀과 여자와 남자에게 내려지는 이른바 ‘저주’가 등장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분노한 하나님이 외부에서 부과한 형벌로 보지 않습니다. 저주란 사람이 주님에게서 돌아서고 속 사람과 겉 사람의 질서를 무너뜨림으로써 스스로 들어간 상태입니다. 뱀이 배로 다니고 흙을 먹는다는 것은 감각 파트가 더 이상 위를 바라보지 못하고 가장 낮은 자연적, 육체적 대상들 안에서만 살아가는 상태를 뜻합니다. 여자가 해산의 고통을 겪고 남편의 다스림을 받는다는 것은 자신의 own에서 비롯된 애정과 욕망이 진리와 선을 낳으려 할 때 겪게 되는 고통과, rational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된 상태를 뜻합니다. 남자가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얻는다는 것은 천적 인간처럼 사랑에서 즉시 진리를 지각하던 상태를 잃고, 이제는 수고와 싸움과 학습을 통하여 진리와 선을 얻어야 하는 영적 인간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말씀은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뱀은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창3:15입니다. 이 책은 이 말씀을 단순히 먼 미래의 구세주에 관한 예언으로만 읽지 않고, 주님께서 인간의 자기 사랑과 감각적 악을 어떻게 정복하시는지를 보여주는 최초의 복음으로 해석합니다. ‘뱀의 머리’는 악의 지배, 특별히 자기 사랑이 모든 것을 지배하려는 욕망을 뜻합니다. 자기 사랑은 지상뿐 아니라 천국과 심지어 주님 위에까지 군림하고자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것을 땅에까지 낮추시고 짓밟으십니다. 반면 ‘발꿈치’는 인간의 가장 낮은 자연적 차원을 의미합니다. 뱀은 바로 그 가장 바깥쪽을 공격하지만, 주님께서는 그 자연적 차원 안으로까지 오셔서 유혹을 이기시고 인간을 구원하십니다.

 

3 후반부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의 분리라는 중요한 주제를 다룹니다. 본래 인간 안에서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속 사람을 통하여 rational에 흘러들고, rational을 거쳐 겉 사람과 감각과 행동에까지 내려가는 질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rationalown과 감각에 동의하면서 이 흐름이 막혔고, 겉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돌아서 분리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인간은 더 이상 사랑 안에서 즉시 진리를 지각하지 못하고, 기억 지식과 추론과 외적 경험을 통하여 힘들게 진리를 배워야 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창세기 2장이 인간의 본래 구조와 질서를 보여준다면, 창세기 3장은 그 구조가 어떻게 손상되었으며, 이후 인간의 거듭남이 왜 그렇게 많은 싸움과 수고를 필요로 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3:20-24는 흔히 낙원에서의 추방과 형벌의 장면으로 이해되지만, 이 책은 이 부분에서 오히려 주님의 보호와 자비를 발견합니다. 아담이 자기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부른 것은 새로운 교회와 생명의 가능성을 나타냅니다. 주님께서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것은 인간이 잃어버린 천적 상태를 대신하여, 이제 더 외적이고 자연적인 선으로 그들을 보호하신다는 뜻입니다. 가죽옷은 에덴의 순수함을 회복한 것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도록 주어진 새로운 보호막입니다. 주님은 인간이 잃어버린 것을 즉시 되돌려 주시지는 않지만, 현재의 상태에서 감당할 수 있는 새로운 질서를 마련하십니다.

 

또한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다’는 말씀은 인간이 하나님과 동등해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은 선악을 스스로 안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천사들처럼 영적 존재의 외형을 가진 것처럼 보였으나, 실제로는 생명과 지혜의 근원이 되지 못했습니다. ‘우리’라는 표현은 주님과 그분으로부터 생명과 능력을 받는 천국을 포함합니다. 주님은 유일한 생명의 근원이시며, 천사들은 그분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존재들입니다. 인간이 천사와 비슷해 보이는 것은 rational과 선택의 자유를 가졌기 때문이지만, 자기 자신으로부터 선악을 알 수 있다고 믿는 순간 그는 천사와 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천국의 질서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생명나무의 길이 막힌 것도 단순한 벌이 아닙니다. 만일 타락한 인간이 자신의 거짓과 악을 거룩한 천적 진리와 결합한다면, 그것은 모독(profanation)이 되어 회복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인간이 생명나무에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보호하십니다.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칼은 진리와 선을 독점적으로 가로막는 무서운 수문장이 아니라,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거룩한 것에 접근하여 더 깊은 파멸에 빠지는 것을 막는 주님의 자비로운 섭리를 나타냅니다. 주님은 문을 닫으실 때조차 사람을 버리기 위해 닫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더 큰 악과 모독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해 닫으십니다.

 

AC.307 이하에서 다루어지는 ‘그릇된 확신(persuasions)과 홍수의 문제는 창세기 3장의 결과가 이후 인류에게 어떻게 확대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자기 사랑과 감각적 사고에서 시작된 작은 의심은 세대를 거치며 점차 거짓된 확신으로 굳어졌고, 마침내 인간의 모든 의지와 이해를 지배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릇된 확신은 단순히 잘못된 의견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사랑에서 나온 거짓이 사람의 생각 전체를 장악하여, 어떤 진리도 들을 수 없고 자기 거짓만을 절대적으로 참이라고 믿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태고교회 마지막 후손들의 상태였으며, 성경의 ‘홍수’는 바로 그러한 악한 욕망과 그릇된 확신이 인간을 질식시키는 내적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럼에도 이 책의 마지막 메시지는 멸망이 아니라 리메인스의 보존입니다. 주님은 태고교회가 완전히 무너지기 전에 인간 안에 남아 있는 선과 진리의 흔적을 따로 보존하시고, 그것을 통하여 새로운 교회가 시작될 수 있도록 준비하십니다. 창세기 3장의 무화과나무 잎, 부끄러움, 여호와의 음성을 들음, 자연적 선, 가죽옷, 생명나무의 보호는 모두 주님께서 인간 안에 남겨 두신 리메인스와 연결됩니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지만, 주님께서는 인간이 알지 못하는 깊은 곳에 선과 진리를 저장하시고, 훗날 거듭남과 새로운 교회의 씨앗으로 사용하십니다.

 

따라서 ‘3, AC.182-319 번역, 해설 및 심화 -ChatGPT.pdf’는 단순한 타락 교리 해설서가 아닙니다. 이 책은 인간의 감각과 사랑과 이성이 어떻게 서로 결합하여 주님의 질서를 거스르게 되는지를 해부하듯 보여주는 인간 내면의 진단서입니다. 동시에 타락한 인간 안에서도 가장 작은 선과 진리를 지키시고, 감당할 수 없는 거룩한 것에서 잠시 멀리 두시며, 점진적으로 새로운 길을 준비하시는 주님의 사랑과 섭리를 보여주는 구원의 기록입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는 뱀과 여자와 남자를 먼 옛날의 인물들로만 볼 수 없게 됩니다. 자신의 감각이 무엇을 제안하고, 자신의 애정이 무엇을 원하며, 자신의 이성이 무엇을 정당화하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됩니다.

 

무엇보다 이 책은 독자에게 매우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진리의 최종 기준으로 삼고 있는가? 주님으로부터 오는 말씀과 선인가, 아니면 내 감각과 판단과 own인가?’ 그리고 또 묻습니다. ‘나는 내 안의 악과 거짓을 볼 때 절망하고 단절하는가, 아니면 그 한복판에서도 남아 있는 선과 진리의 흔적을 보존하시는 주님의 자비를 신뢰하는가?’ 이 두 질문은 창세기 3장 전체를 관통하며, 동시에 모든 인간의 거듭남을 결정하는 질문입니다.

 

창세기 2장이 ‘인간은 본래 어디로부터 살도록 창조되었는가’를 보여준다면, 창세기 3장은 ‘인간은 어떻게 자기 자신으로부터 살게 되었는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창세기 4장은 그 자기 중심의 삶이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 곧 가인과 아벨의 갈등으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여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창세기 3장은 에덴과 인간 역사 사이에 놓인 다리이며, 천적 인간에서 영적 인간으로 넘어가는 거대한 전환점입니다.

 

3, AC.182-319 번역, 해설 및 심화 -ChatGPT.pdf’는 바로 이 전환을 따라가며, 인간의 타락을 단순히 두려워하거나 정죄하기보다 그 속에 숨은 영적 질서와 주님의 구원 섭리를 바라보도록 돕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own을 사랑함으로써 에덴을 잃었지만, 주님은 인간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은 생명나무에서 멀어졌지만, 주님은 생명나무로 돌아갈 새로운 길을 준비하셨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눈이 열렸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영적 시력을 잃었고, 주님은 사후의 영혼에게 다시 빛을 열어 주시듯, 거듭남을 통하여 인간의 내적 눈을 다시 열어 가십니다.

 

이 책이 끝내 보여주는 것은 타락한 인간의 위대함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위대함입니다. 인간의 감각과 ownrational이 질서를 무너뜨렸지만, 주님은 그 무너진 질서 속에서도 구원의 씨앗을 보존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3장은 낙원을 잃어버린 이야기인 동시에, 주님께서 인간을 다시 천국으로 인도하기 시작하신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책은 그 깊고도 자비로운 시작을, AC.182에서 AC.319에 이르는 스베덴보리의 아르카나와 함께 매우 세밀하게 따라가는 기록입니다.

 

 

창3, AC.182-319 번역, 해설 및 심화 - ChatGPT.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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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3, AC.182-319 번역, 해설 및 심화 - 목차.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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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2, AC.67-181 번역, 해설 및 심화 - ChatGPT.hwpx 소개

창2, AC.67-181 번역, 해설 및 심화 - ChatGPT.hwpx 소개 ‘창2, AC.67-181 번역, 해설 및 심화 - ChatGPT.hwpx’는 단순히 창세기 2장에 대한 주석이나 해설서가 아닙니다. 이 책은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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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영생에 들어감에 관하여 (계속)

 

AC.318

 

어떤 영 하나가 내게 와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그는 얼마 전에 막 세상을 떠난 사람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 채, 아직도 세상에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저세상에 있으며, 더 이상 집이나 재산 등 세상에서 소유했던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않고, 이전에 소유하던 모든 것을 잃은, 전혀 다른 나라에 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그는 크게 불안해졌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어디에 머물러야 할지 알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때 그는 주님께서 자신뿐 아니라 모든 사람을 친히 돌보신다는 사실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자기 자신에게 맡겨졌는데, 이는 그의 생각이 세상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평소의 방향을 따라 움직이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는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저세상에서는 모든 사람의 생각이 분명히 드러나므로 그의 생각도 그대로 알려졌습니다. 그는 이제 생활할 모든 수단을 잃은 상태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를 깊이 고민하였습니다. 이러한 염려 가운데 있을 때, 그는 심장의 기능에 상응하는 공동체에 속한 천적 천사들과 함께 있게 되었고, 그들은 그가 바랄 수 있는 모든 친절과 사랑으로 그를 돌보아 주었습니다. 이 일이 있은 뒤 그는 다시 자기 자신에게 맡겨졌습니다. 그러자 그는 그처럼 큰 친절을 어떻게 보답할 수 있을지를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마음으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통해 그는 육체 안에서 살아 있을 때 이미 신앙의 체어리티 가운데 살았던 사람임이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곧바로 천국으로 올려졌습니다. A certain spirit came and discoursed with me, who, as was evident from certain signs, had only lately died. At first he knew not where he was, supposing himself still to be in the world; but when he became conscious that he was in the other life, and that he no longer possessed anything, such as house, wealth, and the like, being in another kingdom, where he was deprived of all he had possessed in the world, he was seized with anxiety, and knew not where to betake himself, or whither to go for a place of abode. He was then informed that the Lord alone provides for him and for all; and was left to himself, that his thoughts might take their wonted direction, as in the world. He now considered (for in the other life the thoughts of all may be plainly perceived) what he must do, being deprived of all means of subsistence; and while in this state of anxiety he was brought into association with some celestial spirits who belonged to the province of the heart, and who showed him every attention that he could desire. This being done, he was again left to himself, and began to think, from charity, how he might repay kindness so great, from which it was evident that while he had lived in the body he had been in the charity of faith, and he was therefore at once taken up into heaven.

 

 

해설

 

AC.318AC.317에서 예고된 두 사례 가운데 첫 번째를 소개합니다. 이 사례는 왜 어떤 사람은 죽은 직후 거의 곧바로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단순히 한 사람의 특별한 경험을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내적 상태가 사후에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매우 섬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이 사람도 처음에는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그는 아직도 세상에 있는 줄로 생각하였습니다. 이것은 AC.181 이하에서 반복하여 설명된 내용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죽음은 의식의 단절이 아니라 연속이기 때문에, 사람은 처음에는 이전과 거의 같은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점차 자신이 전혀 다른 세계에 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가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재산을 잃었다는 사실보다도,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른다는 불안이었습니다. 집도 없고 재산도 없으며, 의지할 기반도 모두 사라졌다고 생각하자 자연스럽게 염려가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살아온 사고방식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여전히 세상의 기준으로 미래를 계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중요한 것은 그의 불안 자체가 아니라, 그 불안 속에서 드러난 마음의 방향입니다. 그는 먼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을 돌보신다’는 말씀을 들었지만, 곧바로 천국으로 인도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다시 자기 자신에게 맡겨졌습니다. 이는 앞선 AC.315AC.316에서 보았던 원리와 동일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에게 어떤 진리를 들려주신 뒤에도, 그것을 자신의 자유 안에서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기다리십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 평소의 생각을 따라가도록 허락되었습니다.

 

이때 그의 내면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는 자신의 처지만을 원망하거나, 잃어버린 것을 붙잡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요구하거나 불평하는 데 머물지도 않았습니다. 그가 고민한 것은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였습니다. 그리고 천적 천사들의 극진한 사랑을 받은 뒤에는 그의 생각이 더욱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그는 ‘이처럼 큰 친절을 어떻게 갚을 수 있을까’를 생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바로 이 한 가지 생각이 그의 영적 상태를 모두 드러냅니다.

 

만일 자기 사랑이 중심인 사람이라면, 그는 천사들의 도움을 당연하게 여기거나, 더 많은 도움을 받을 방법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받은 사랑을 어떻게 돌려줄 수 있을지를 먼저 생각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신앙의 체어리티’의 본질입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받은 사랑을 자기 안에 붙잡아두지 않고, 다시 다른 이에게 흘려보내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그의 한 생각만으로도 그는 세상에서 이미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가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본문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은 스베덴보리가 ‘이를 통해 그가 신앙의 체어리티 가운데 살았음이 분명히 드러났다’고 말하는 대목입니다. 천사들이 그의 과거를 조사하거나 심문한 것이 아닙니다. 그의 현재의 생각 하나가 그의 평생의 삶을 증언하였습니다. 이는 영계에서는 말보다 사랑이, 행동보다 의지가 더 직접적으로 드러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사람은 죽은 뒤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형성된 내적 사람이 있는 그대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또한 그를 맞이한 천사들이 ‘심장의 기능에 상응하는 공동체’에 속해 있었다는 점도 의미심장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심장은 사랑과 의지의 중심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이 공동체는 특별히 사랑과 생명의 선을 맡은 천적 공동체였습니다. 그들이 먼저 이 사람을 돌보았다는 것은, 그의 내적 생명이 이미 천적 사랑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그는 아직 그것을 완전히 의식하지 못했지만, 천사들은 그의 가장 깊은 상태를 이미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AC.318은 왜 어떤 사람은 죽은 직후 거의 곧바로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 비결은 특별한 지식이나 신비한 체험에 있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이미 주님을 믿고, 이웃을 사랑하며, 받은 선을 다시 베풀고자 하는 삶이 그의 본성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사람에게 죽음은 새로운 사람이 되는 사건이 아니라, 이미 세상에서 시작된 천국의 삶이 아무런 장애 없이 계속 이어지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그는 긴 시험이나 복잡한 과정을 거칠 필요 없이, 자신의 참된 상태가 드러나는 즉시 천국으로 올려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심화

 

1. ‘이 사람에 대한 몇 가지 질문

 

 

AC.318, 심화 1, ‘이 사람에 대한 몇 가지 질문’

AC.318.심화 1. ‘이 사람에 대한 몇 가지 질문’ 이 사람은 처음 눈 뜨는 과정부터, 그러니까 모든 신생 영들에게 허락된 기본 코스를 밟지 않았나요? 어떻게 자기가 죽어 내세에 와있는지조차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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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7, 창3 뒤, ‘저마다 다 다른 속도로 진행되는 사후의 여정’

사람이 영생에 들어감에 관하여 (계속) AC.317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천국을 향하여 더 천천히 나아가고, 어떤 사람들은 더 빨리 나아갑니다. 나는 죽은 직후 곧바로 천국으로 올려진 사람들도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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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영생에 들어감에 관하여 (계속)

 

AC.319

 

나는 또 다른 한 사람도 보았는데, 그는 천사들에 의해 곧바로 천국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는 주님께 받아들여졌고, 천국의 영광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밖에도 얼마의 시간이 지난 뒤 천국으로 인도된 다른 사람들에 관한 많은 경험이 있지만, 그것들은 여기서는 생략하겠습니다. I saw another also who was immediately translated into heaven by the angels, and was accepted by the Lord and shown the glory of heaven; not to mention much other experience respecting others who were conveyed to heaven after some lapse of time.

 

 

해설

 

AC.319AC.317AC.318에서 시작된 주제를 마무리하는 매우 짧지만 중요한 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에서 ‘어떤 사람들은 더 빨리 천국으로 나아간다’고 말한 뒤, AC.318에서는 그 실제 사례를 하나 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여기 AC.319에서는 또 다른 사례를 덧붙임으로써, 이러한 일이 특별한 한 사람에게만 일어난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라 실제로 여러 차례 목격한 사실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표현은 ‘천사들에 의해 곧바로 천국으로 옮겨졌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곧바로’는 시간의 길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중간영계에서 오랜 준비나 반복적인 상태의 변화가 거의 필요하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그 사람의 내적 상태가 이미 천국과 충분히 일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긴 준비 과정을 거치지 않고 자신의 공동체로 인도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를 천사들이 천국으로 데려갔다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이어서 ‘그는 주님께 받아들여졌다’고 덧붙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천사들은 어디까지나 인도하는 사역을 맡을 뿐이며, 사람을 천국의 시민으로 받아들이시는 분은 오직 주님뿐이심을 보여줍니다. 스베덴보리의 모든 저술에서 천사들은 결코 자기 권한으로 사람을 천국이나 지옥에 배치하지 않습니다. 모든 질서와 판단과 수용은 주님으로부터 이루어지며, 천사들은 그 섭리를 기쁨으로 수행하는 봉사자들입니다.

 

이어지는 ‘천국의 영광을 보게 되었다’는 표현도 단순히 아름다운 풍경을 구경하였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영광’은 언제나 주님의 신적 진리가 드러나는 광채와 그로부터 오는 기쁨을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따라서 이 사람은 단순히 화려한 천국의 모습을 본 것이 아니라, 자신이 속하게 될 천국의 생명과 질서, 그리고 그 안에 충만한 주님의 임재를 체험하기 시작하였다고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본문 마지막에서 스베덴보리는 ‘이 밖에도 얼마의 시간이 지난 뒤 천국으로 인도된 다른 사람들에 관한 많은 경험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 한 문장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앞의 두 사례만으로 모든 사람이 곧바로 천국으로 들어간다고 오해하지 않도록 균형을 잡아 주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는 어떤 사람은 즉시 천국으로 올라갔고, 어떤 사람은 얼마의 시간이 지난 뒤 천국으로 인도되었습니다. 즉, 주님의 섭리는 획일적인 방식으로 사람을 다루지 않으며, 각 사람의 영적 상태에 정확히 맞추어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줍니다.

 

또한 스베덴보리는 ‘많은 경험이 있지만 여기서는 생략한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에서도 그의 기록 방식의 특징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독자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영계의 체험을 끝없이 나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교리를 설명하는 데 필요한 정도까지만 사례를 제시하고, 나머지는 의도적으로 절제합니다. 이는 그의 저술이 체험담 자체를 위한 책이 아니라, 체험을 통하여 주님의 질서를 설명하려는 책임을 보여줍니다.

 

AC.319AC.317AC.318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후 세계에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기본 질서가 있지만, 그 질서가 적용되는 방식과 속도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이미 세상에서 천국의 사랑과 신앙 안에 살아온 사람은 매우 빠르게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상태에 따라 얼마의 준비 기간을 거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어느 경우에도 사람을 받아들이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시며, 천사들은 그 섭리를 수행하는 사랑의 봉사자들입니다. 따라서 AC.319는 천국 입성이 사람의 공로나 천사들의 결정이 아니라, 주님께서 각 사람의 내적 상태에 따라 베푸시는 질서 있고 자비로운 섭리의 결과임을 다시 한번 분명하게 증언하는 글입니다.

 

 

 

AC.318, 창3 뒤, ‘사후 거의 곧바로 천국에 올라간 처음 사례’

사람이 영생에 들어감에 관하여 (계속) AC.318 어떤 영 하나가 내게 와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그는 얼마 전에 막 세상을 떠난 사람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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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8.심화

 

1. ‘이 사람에 대한 몇 가지 질문

 

이 사람은 처음 눈 뜨는 과정부터, 그러니까 모든 신생 영들에게 허락된 기본 코스를 밟지 않았나요? 어떻게 자기가 죽어 내세에 와있는지조차 모를 수 있죠? 그리고 천적 천사들의 돌봄을 부담스러워하지 않는 거 하나만으로도 그의 quality를 알 수 있지 않나요? 끝으로, 세 번째 상태인 오리엔테이션을 안 받아도 되나요? 탈북자들이 국정원, 하나원 등을 안 거치고 바로 대한민국 사회에 정착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천국도 그렇지 않나요?

 

 

AC.318을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이 사람은 모든 신생 영들에게 허락되는 기본 과정을 모두 거친 것일까요? 스베덴보리는 앞에서 모든 사람이 먼저 천적 천사들의 돌봄을 받고, 이어 영적 천사들의 돌봄을 받은 다음, 마지막으로 선한 영들의 돌봄을 받는 일반적인 질서를 설명하였습니다. 그런데 AC.318에서는 그런 과정이 거의 보이지 않은 채, 이미 어떤 영이 스베덴보리와 대화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그래서 마치 이 사람이 일반적인 과정을 생략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 전체를 연결하여 읽어보면, 오히려 그 반대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AC.181 이하에서 설명된 내용은 특정 사람의 경험이 아니라 모든 신생 영에게 적용되는 일반 법칙입니다. 반면 AC.318은 그 일반 법칙을 다시 반복하여 설명하려는 글이 아니라, 그 법칙이 실제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입니다. 따라서 AC.318은 처음부터 끝까지의 과정을 모두 기록한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중요한 장면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전체 문맥과 가장 잘 어울립니다. 다시 말해, 이 사람 역시 천적 천사들과 영적 천사들, 그리고 선한 영들의 돌봄이라는 기본 질서를 따랐지만, 스베덴보리는 그 모든 과정을 자세히 기록하지 않고, 천국으로 들어가게 되는 결정적인 순간만을 우리에게 보여준 것입니다.

 

그렇다면 또 하나의 의문이 생깁니다. 이미 천사들의 돌봄을 받고 있었다면 어떻게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을 수 있었을까요? 그러나 이것 역시 앞에서 설명된 첫 번째 상태의 목적을 생각하면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첫 번째 상태에서 주님께서는 사람이 죽음을 충격으로 경험하지 않도록 하십니다. 사람은 의식이 끊어진 것이 아니라 그대로 이어졌기 때문에 처음에는 여전히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천사들의 보호는 사람의 의식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사람이 즉시 그것을 자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는 이미 천사들의 인도를 받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의식 속에서는 아직 세상에 있는 줄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집도 없고 재산도 없으며 이전의 삶이 더 이상 계속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하나씩 경험하면서 비로소 자신이 다른 세계에 와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이 사람이 천적 천사들의 돌봄을 전혀 부담스러워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AC.315 AC.316을 함께 읽으면 이것만으로도 그의 영적 품질은 상당 부분 드러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기 사랑이 중심인 사람은 천적 천사들의 사랑과 평화를 오래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떠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천적 천사들의 사랑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고, 그 분위기를 조금도 불편해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이미 그의 가장 깊은 사랑이 천국의 사랑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그를 다시 자기 자신에게 맡기십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그의 상태를 몰라서 다시 시험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는 확인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의 참된 사랑이 외적 영향이 아니라 자신의 자유 안에서 스스로 드러나도록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그의 생각은 이 큰 사랑을 어떻게 갚을 수 있을까?’를 향합니다. 만일 그의 선함이 단지 천사들의 분위기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면 혼자 남겨졌을 때 다른 생각이 나왔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여전히 체어리티를 향하였습니다. 이것은 그의 선함이 순간적인 감정이 아니라 평생 형성된 삶의 본성이었음을 보여줍니다.

 

마지막으로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것은, 이 사람이 세 번째 상태, 곧 천국 공동체에 적응하는 오리엔테이션을 거쳤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본문이 직접 답하지 않기 때문에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AC.318은 그가 곧바로 천국으로 올려졌다’고 말하지만, ‘세 번째 상태가 전혀 없었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천국과 지옥’에서 설명하는 세 번째 상태는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질서 있는 준비 과정이지, 반드시 장기간의 교육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가장 자연스러운 이해는, 이 사람도 주님의 질서를 벗어난 것이 아니라 그 질서 안에서 자신의 상태에 맞는 매우 짧은 준비를 거쳤다는 것입니다.

 

이를 탈북민에 비유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대부분의 탈북민은 국정원 조사와 하나원 교육을 반드시 거쳐야 대한민국 사회에 적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대한민국의 언어와 문화, 제도와 생활방식을 이미 충분히 익힌 사람이 귀국한다면, 입국 절차는 거치더라도 장기간의 적응 교육은 거의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대한민국 사회에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천국도 이와 비슷합니다. 모든 사람은 주님의 질서를 거치지만, 그 준비의 길이와 깊이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이미 세상에서 천국의 삶을 자신의 본성으로 만든 사람은 긴 오리엔테이션이 필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 안에서의 성장과 배움은 다른 모든 천사들과 마찬가지로 영원히 계속됩니다.

 

AC.318이 보여주는 것은 어떤 특별한 예외가 아니라, 주님의 질서가 사람의 상태에 따라 얼마나 섬세하게 적용되는가 하는 사실입니다. 모든 사람은 동일한 질서 안으로 들어가지만, 이미 세상에서 천국을 살아온 사람에게는 그 질서가 매우 짧고 자연스럽게 진행됩니다. 그래서 그는 일반적인 사람들처럼 오랜 준비를 거치지 않고도 거의 곧바로 자신의 천국 공동체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만 이것은 AC.181 이하의 일반 원칙과 AC.317, 318의 사례를 종합하여 내릴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이며, 스베덴보리가 세 번째 상태가 완전히 생략되었다 직접 말한 것은 아니라는 점은 구별하여 이해하는 것이 본문에 가장 충실한 태도입니다.

 

 

 

AC.317, 창3 뒤, ‘저마다 다 다른 속도로 진행되는 사후의 여정’

사람이 영생에 들어감에 관하여 (계속) AC.317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천국을 향하여 더 천천히 나아가고, 어떤 사람들은 더 빨리 나아갑니다. 나는 죽은 직후 곧바로 천국으로 올려진 사람들도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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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영생에 들어감에 관하여 (계속)

 

AC.317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천국을 향하여 더 천천히 나아가고, 어떤 사람들은 더 빨리 나아갑니다. 나는 죽은 직후 곧바로 천국으로 올려진 사람들도 보았는데, 그 가운데 두 사례만을 여기에서 말하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Some however advance more slowly toward heaven, and others more quickly. I have seen some who were elevated to heaven immediately after death, of which I am permitted to mention only two instances.

 

 

해설

 

AC.317은 앞의 AC.316을 보완하면서, 사후 세계의 여정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속도로 진행되는 것은 아님을 알려 줍니다. 지금까지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영적 천사들과 선한 영들의 인도를 받고, 여러 공동체를 거치면서 자신의 내적 사랑에 완전히 일치하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반드시 같은 기간과 같은 과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마다 세상에서 형성한 영적 상태가 다르기 때문에, 사후의 인도 역시 각자의 상태에 따라 달라집니다.

 

본문은 ‘더 천천히’와 ‘더 빨리’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간이 아니라 상태입니다. 영계에서는 지상의 시간 개념이 본질적인 의미를 갖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빠름과 느림은 시계의 시간이 아니라, 사람이 자신의 참된 사랑을 드러내고, 천국의 질서와 하나 되는 데 필요한 영적 과정의 차이를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에서 이미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꾸준히 살아왔기 때문에 외적인 것만 벗겨지면 곧바로 자신의 본래 상태가 드러납니다. 반면 어떤 사람은 겉으로는 선하게 보였지만, 내면에는 아직 정리되어야 할 여러 요소가 남아 있기 때문에, 보다 긴 준비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이것은 학교에서 모든 학생이 같은 속도로 배우지 않는 것과도 비슷합니다. 어떤 학생은 이미 충분한 기초가 갖추어져 있어 다음 단계로 곧바로 나아갈 수 있지만, 다른 학생은 기초를 다시 다져야 합니다. 그렇다고 앞선 학생이 더 사랑받거나, 뒤처진 학생이 덜 사랑받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훌륭한 교사는 각 학생의 수준에 맞추어 가장 적절한 속도로 가르칩니다. 주님의 섭리 역시 이와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동일하게 대하시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에게 가장 유익한 방식으로 인도하십니다.

 

특히 본문에서 눈길을 끄는 말씀은 ‘죽은 직후 곧바로 천국으로 올려진 사람들도 보았다’는 부분입니다. 지금까지의 설명만 보면 모든 사람이 반드시 중간 영계에서 일정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러한 일반적인 질서를 인정하면서도, 예외적인 경우가 있음을 직접 증언합니다. 그는 자신이 실제로 그런 사람들을 보았으며, 그 가운데 두 사례를 이어지는 글에서 소개하겠다고 말합니다.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한 균형을 보여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사후 세계의 질서를 매우 체계적으로 설명하지만, 그 질서를 기계적인 법칙으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중간 영계를 거쳐 자신의 상태가 충분히 드러난 후 천국이나 지옥으로 나아가지만, 이미 세상에서 그 상태가 거의 완전히 형성된 사람이라면 그 과정이 매우 짧거나 사실상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결국 모든 것은 주님의 자비로운 섭리 안에서 각 사람의 영적 상태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또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라고 표현한 점도 주목할 만합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마음대로 기록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유익하다고 허락하신 범위 안에서만 영계의 일을 전하고 있음을 여러 곳에서 밝힙니다. 따라서 이어질 두 사례는 단순히 흥미로운 일화가 아니라, 사후 세계의 중요한 영적 원리를 보여주기 위해 특별히 허락된 증언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317은 주님의 인도에는 획일성이 없음을 가르쳐 줍니다. 사람마다 삶이 다르듯이, 사후의 여정도 모두 다릅니다. 어떤 이는 오랜 준비를 거치고, 어떤 이는 거의 즉시 천국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그 차이는 주님의 사랑의 차이가 아니라, 각 사람이 세상에서 형성한 영적 상태의 차이에서 비롯됩니다. 주님께서는 어느 누구도 서두르거나 억지로 끌고 가지 않으시며, 각 사람에게 가장 적합한 속도로 천국을 향한 길을 열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사후 세계의 여정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시간표가 적용되는 과정이 아니라, 각 사람의 사랑과 신앙의 상태에 완전히 상응하는 주님의 개별적인 인도의 과정인 것입니다.  

 

 

심화

 

1. ‘이 사람에 대한 몇 가지 질문

 

 

AC.318, 심화 1, ‘이 사람에 대한 몇 가지 질문’

AC.318.심화 1. ‘이 사람에 대한 몇 가지 질문’ 이 사람은 처음 눈 뜨는 과정부터, 그러니까 모든 신생 영들에게 허락된 기본 코스를 밟지 않았나요? 어떻게 자기가 죽어 내세에 와있는지조차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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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6, 창3 뒤, ‘사람이 사후 자신의 영원한 거처에 이르게 되는 과정’

사람이 영생에 들어감에 관하여 (계속) AC.316 영혼이 이처럼 그 천사들에게서 스스로 멀어지면, 그는 선한 영들에게 받아들여지며, 그들과 함께 있는 동안에도 온갖 친절한 도움을 받습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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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6.심화

 

1. ‘주님이 신생 영에게 일련의 코스를 밟게 하시는 이유

 

사람의 자유와 선택을 존중하시는 주님은 왜 사후 처음 눈 뜨는 영에게 이후 진행될 전체 코스를 설명, 너는 이 코스를 다 돌래, 아니면 바로 천국 또는 지옥으로 갈래 묻고, 그로 하여금 선택하게 하지 않으시나요?

 

 

AC.314에서 AC.316을 읽다 보면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자유를 그토록 존중하신다면, 왜 사후 처음 눈을 뜬 영혼에게 앞으로의 과정을 모두 설명하시고, ‘이 모든 과정을 거칠 수도 있고, 원한다면 지금 바로 천국이나 지옥을 선택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을 원하느냐?’고 묻지 않으실까요? 겉으로 보기에는 이것이 가장 자유로운 방법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을 자세히 살펴보면, 오히려 그것이 진정한 자유를 보장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 이유는 스베덴보리에게 ‘선택’이란 단순히 생각으로 내리는 결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머리로 선택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것을 선택하는 존재입니다. 다시 말해 천국과 지옥은 두 장소 가운데 하나를 고르는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어떤 사랑 안에서 살기를 원하는가의 문제입니다. 만일 처음부터 ‘천국은 영원한 행복의 나라이고, 지옥은 고통의 나라입니다. 어느 곳을 선택하시겠습니까?’라고 묻는다면, 거의 모든 사람은 천국을 선택하겠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대답이 반드시 그 사람의 진정한 선택은 아닙니다. 행복은 원하지만, 천국의 삶 자체는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의 저서, ‘천국과 지옥’에서 많은 영들이 천국에 들어가기를 원하여 올라갔지만, 막상 천국의 분위기 속에서는 견딜 수 없어 스스로 내려오는 모습을 여러 차례 설명합니다. 천국에서는 모든 사람이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기쁨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그러한 분위기가 답답하고 불편하게 느껴집니다. 결국 그들은 천사들이 내보내서가 아니라, 자신이 더 이상 그곳에 머물 수 없음을 느끼고 스스로 떠납니다. 이것이 바로 AC.315 AC.316에서 천사들이 사람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천사들에게서 멀어진다고 설명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사후의 여정은 주님께서 사람에게 정보를 충분히 제공하지 않으셔서 생기는 과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 자신의 가장 깊은 사랑이 무엇인지를 그 사람 스스로 분명히 알게 하시는 과정입니다. 처음에는 영적 천사들과 함께 지내고, 이어 선한 영들과도 함께 생활합니다. 그러면서 여러 공동체를 경험하지만, 자신의 내적 사랑과 맞지 않는 곳에서는 오래 머물지 못합니다. 반대로 자신의 삶과 같은 사랑을 가진 공동체를 만나면 비로소 깊은 평안과 친숙함을 느끼게 됩니다. 본문이 말하는 ‘마치 자기 자신의 삶을 다시 발견한 것처럼’이라는 표현은 바로 이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 과정에서 사람은 비로소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됩니다. 세상에서는 체면과 사회적 역할, 법과 관습 때문에 자신의 내면을 어느 정도 감추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영계에서는 그러한 외적 껍질이 하나씩 벗겨지고, 사람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만 남게 됩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이르러 선택되는 것은 새로운 삶이 아니라, 평생 조금씩 선택해 온 삶의 완성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주님께서는 사람에게 ‘천국과 지옥 가운데 하나를 고르라’고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사랑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끝까지 드러내도록 허락하십니다. 그 결과 사람은 어느 순간 ‘내가 진정 편안한 곳은 바로 여기였구나’라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게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자유입니다. 자유란 여러 선택지를 설명받은 뒤 하나를 결정하는 권리가 아니라, 자신의 가장 깊은 사랑을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허락받는 상태입니다.

 

AC.314에서 AC.316까지의 흐름은 사람을 심판하는 절차가 아니라, 사람을 자기 자신에게까지 정직하게 만드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누구에게도 천국이나 지옥을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또한 사람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시고, 여러 공동체를 경험하게 하시며, 자신의 사랑을 스스로 확인하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마지막에 이르러 각 사람은 외부의 명령이 아니라, 자신의 가장 깊은 사랑을 따라 영원히 살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주님의 자비와 인간의 자유가 완전하게 조화를 이루는 스베덴보리의 사후 세계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AC.316, 창3 뒤, ‘사람이 사후 자신의 영원한 거처에 이르게 되는 과정’

사람이 영생에 들어감에 관하여 (계속) AC.316 영혼이 이처럼 그 천사들에게서 스스로 멀어지면, 그는 선한 영들에게 받아들여지며, 그들과 함께 있는 동안에도 온갖 친절한 도움을 받습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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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영생에 들어감에 관하여 (계속)

 

AC.316

 

영혼이 이처럼 그 천사들에게서 스스로 멀어지면, 그는 선한 영들에게 받아들여지며, 그들과 함께 있는 동안에도 온갖 친절한 도움을 받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가 세상에서 살아온 삶이 선한 영들과 함께 머물 수 없는 성격이라면, 그는 이들로부터도 떠나기를 원하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은 여러 차례 반복, 마침내 그는 세상에서의 자신의 삶과 완전히 일치하는 사람들과 함께하게 됩니다. 그들 가운데서 그는 마치 자기 자신의 삶을 다시 발견한 것처럼 느낍니다. 놀랍게도 그는 그들과 함께 육체 안에서 살았던 것과 거의 같은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삶 속으로 다시 들어간 뒤에는 새로운 삶의 시작이 이루어집니다. 어떤 이는 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어떤 이는 더 짧은 시간이 지난 후에, 그 새로운 시작으로부터 지옥을 향해 나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을 향한 신앙 가운데 있었던 사람들은 그 새로운 삶의 시작으로부터 한 걸음씩 천국으로 인도됩니다. When the soul thus dissociates himself, he is received by good spirits, who likewise render him all kind offices while he is in their company. If however his life in the world has been such that he cannot remain in the company of the good, he desires to be rid of these also, and this process is repeated again and again, until he associates himself with those who are in full agreement with his former life in the world, among whom he finds as it were his own life. And then, wonderful to say, he leads with them a life like that which he had lived when in the body. But after sinking back into such a life, he makes a new beginning of life; and some after a longer time, some after a shorter, are from this borne on toward hell; but such as have been in faith toward the Lord are from that new beginning of life led step by step toward heaven.

 

 

해설

 

AC.316은 사람이 사후 자신의 영원한 거처에 이르게 되는 과정이 어떠한지를 매우 질서 있게 설명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의 운명이 단 한 번의 심판으로 갑자기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적 사랑이 점차 드러나고 그것에 맞는 공동체를 찾아가는 과정을 통하여 결정된다고 말합니다. 이는 ‘천국과 지옥’에서 자세히 설명되는 중간 영계의 원리를 이미 창세기 주석 속에서 간결하게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앞선 AC.314AC.315에서는 사람이 먼저 영적 천사들의 보살핌을 받고, 그 가르침을 원하지 않을 경우 스스로 그들에게서 멀어진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AC.316에서는 그 사람이 곧바로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선한 영들의 공동체로 인도된다고 말합니다. 주님의 섭리는 가능한 한 모든 사람이 선한 공동체 안에 머물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한 공동체와 맞지 않더라도 다른 공동체에서 다시 도움받을 기회가 주어집니다. 이는 주님께서 사람을 얼마나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형성된 삶이 선을 사랑하는 삶이 아니라면, 그는 그 공동체 안에서도 오래 머물지 못합니다. 중요한 것은 선한 영들이 그를 내쫓는 것이 아니라, 본문이 말하듯 그가 ‘떠나기를 원한다’는 점입니다. 선한 분위기는 그의 내적 사랑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점차 답답하고 불편하게 느껴집니다. 결국 사람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것과 일치하는 곳을 스스로 찾아가게 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사람을 특정한 곳으로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이 자신의 사랑을 따라 자신의 자리를 선택한다는 스베덴보리의 기본 원리를 다시 확인해 줍니다.

 

본문은 이러한 과정이 ‘반복된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사람은 단 한 번의 선택으로 자신의 영원한 상태가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공동체를 거치며 자신의 참된 성향이 점점 분명해지고, 마침내 가장 편안하게 느껴지는 공동체를 만나게 됩니다. 그곳은 다른 누구의 선택이 아니라 자신의 사랑이 이끌어 낸 자리입니다. 그래서 영계의 공동체는 단순히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 아니라, 동일한 사랑과 동일한 삶을 가진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형성한 공동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상태를 매우 인상적인 표현으로 설명합니다. 그는 ‘마치 자기 자신의 삶을 다시 발견한 것처럼’ 느낀다고 말합니다. 이는 영계에서 사람이 더 이상 외적 예절이나 사회적 역할에 의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 그대로 살아가게 됨을 뜻합니다. 세상에서는 직업이나 체면, 법과 관습 때문에 자신의 본성을 어느 정도 숨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계에서는 그러한 외적 껍질이 벗겨지고, 사람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그의 삶 전체를 이루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자연스럽게 자신과 같은 사랑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서 가장 편안함을 느끼게 됩니다.

 

더 나아가 스베덴보리는 ‘육체 안에서 살았던 것과 거의 같은 삶을 살아간다’고 말합니다. 이는 죽음이 사람의 성품을 즉시 바꾸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사람은 죽었다고 해서 갑자기 천사가 되거나 악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형성된 사랑과 사고방식, 습관과 삶의 방향이 그대로 이어집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반복하여 강조하는 ‘죽음은 상태의 변화이지 인격의 변화가 아니다’라는 원리입니다.

 

그러나 그 상태가 영원히 그대로 지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은 매우 중요한 말씀을 덧붙입니다. ‘그와 같은 삶 속으로 다시 들어간 뒤에는 새로운 삶의 시작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새로운 삶의 시작’은 사람이 자신의 참모습을 완전히 드러낸 이후의 새로운 단계입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외적 제약 속에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내적 사랑이 온전히 현실이 되는 삶을 시작합니다. 이 시점부터 각 사람은 자신의 사랑이 향하는 방향으로 점차 나아가게 됩니다.

 

악을 사랑한 사람은 그 새로운 시작으로부터 점차 지옥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형벌을 선고받아 끌려가는 과정이 아닙니다. 자신의 사랑을 더욱 자유롭게 실천할 수 있는 공동체를 향하여 자연스럽게 이동하는 과정입니다. 반대로 주님을 향한 신앙 가운데 살았던 사람은 그 새로운 시작으로부터 ‘한 걸음씩’ 천국으로 인도됩니다. 여기서도 스베덴보리는 ‘한 걸음씩’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천국 역시 단번에 완성되는 상태가 아닙니다. 사람은 사후에도 계속 배우고 성장하며, 천사들의 도움을 받아 점점 더 깊은 사랑과 지혜 가운데 들어갑니다. 이는 천국이 정지된 상태가 아니라 끝없는 성장의 나라임을 보여줍니다.

 

AC.316은 사후 세계를 하나의 거대한 영적 선택의 과정으로 보여줍니다. 주님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을 선한 공동체로 이끌고, 가능한 한 천국으로 인도하시려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은 결코 자유를 침해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따라 스스로 공동체를 선택하고, 그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참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따라서 천국과 지옥은 외부에서 강제로 배정되는 장소가 아니라, 평생 형성된 사랑이 마침내 자신의 영원한 집을 찾아가는 결과입니다. 이것이 AC.316이 보여주는 사후 세계의 질서이며, 동시에 주님의 공의와 자비가 완전한 조화를 이루는 방식입니다.

 

 

심화

 

1. ‘주님이 신생 영에게 일련의 코스를 밟게 하시는 이유

 

 

AC.316, 심화 1, ‘주님이 신생 영에게 일련의 코스를 밟게 하시는 이유’

AC.316.심화 1. ‘주님이 신생 영에게 일련의 코스를 밟게 하시는 이유’ 사람의 자유와 선택을 존중하시는 주님은 왜 사후 처음 눈 뜨는 영에게 이후 진행될 전체 코스를 설명, 너는 이 코스를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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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7, 창3 뒤, ‘저마다 다 다른 속도로 진행되는 사후의 여정’

사람이 영생에 들어감에 관하여 (계속) AC.317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천국을 향하여 더 천천히 나아가고, 어떤 사람들은 더 빨리 나아갑니다. 나는 죽은 직후 곧바로 천국으로 올려진 사람들도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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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5, 창3 뒤, ‘사람의 사후 운명이 정해지는 방식’

사람이 영생에 들어감에 관하여 (계속) AC.315 그러나 되살아난 사람, 곧 영혼이 가르침 받기를 원하지 않는 성향이라면, 그는 천사들의 무리로부터 떠나기를 원하게 됩니다. 천사들은 이를 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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