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 설교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신성종 목사가 죽음을 ‘교리 문제’로 시작하지 않고 ‘사람의 두려움’에서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화장장에서 어머니의 유골함을 받아 든 아들이 ‘이렇게 태웠는데 나중에 부활할 어머니 몸은 어떻게 됩니까?’라고 묻자, 그는 그 질문의 밑바닥에 ‘내가 어머니한테 몹쓸 짓을 것은 아닙니까?’라는 죄책감이 있음을 알아차립니다. 이것은 목회적으로 매우 중요한 통찰입니다. 사람이 죽음 앞에서 묻는 질문은 표면적으로는 신학적이어도 실제로는 사랑, 상실, 죄책감, 두려움의 언어인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좋은 가셨어요’, ‘천국 가셨으니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라는 말이 실제 유가족에게 별 위로가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그의 고백도 진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이런 태도는 충분히 귀하게 볼 수 있습니다. 체어리티는 먼저 상대방의 실제 상태를 살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죽음이 두렵다고 해서 신앙이 없는 것은 아니다’, ‘슬퍼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소망 없는 사람처럼 슬퍼하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께서도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셨다’는 설교 후반의 권면도 좋습니다. 신앙을 인간의 자연적 정서 자체를 억압하는 도구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육체를 입고 자연계에 사는 동안 사람에게 죽음은 이별이고, 사랑하는 사람을 눈앞에서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는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슬픔 자체가 신앙의 실패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그 슬픔이 절망으로 닫히느냐, 아니면 주님을 향한 신뢰 가운데 통과되느냐입니다. 이런 점에서 신성종 목사의 ‘무섭지 않은 것이 믿음이 아니라 무서운데도 손을 놓지 않는 것이 믿음’이라는 표현은 목회적으로 매우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설교는 여기서부터 스베덴보리와 매우 중요한 갈림길에 들어섭니다. 신성종 목사는 고린도전서 15장을 통해 ‘몸은 버려지는 껍데기가 아니다’라는 명제를 세우고, 당시 헬라 철학의 영혼-육체 이원론을 비판합니다. 그는 ‘육신의 옷을 벗고 하늘나라로 갔다’, ‘몸은 껍데기이고, 진짜는 영혼이다’ 같은 기독교 장례식의 익숙한 표현 안에 사실 헬라적 사고가 들어 있다고 지적합니다. 여기까지는 상당히 생각해 볼 만한 문제 제기입니다. 인간을 영혼이라는 ‘진짜 인간’과 아무 가치 없는 육체라는 ‘껍데기’로 단순 분해하는 사고는 분명 조심해야 합니다. 자연계의 몸 역시 주님이 인간에게 주신 것이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랑하고 섬기고 일하고 체어리티를 실천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제3의 길이 열립니다. 그것은 ‘물질적 몸이 껍데기가 아니므로 물질적 몸이 다시 살아나야 한다’도 아니고, ‘물질적 몸은 아무 가치가 없고 영혼만 진짜다’도 아닙니다. 인간은 사후에도 완전한 인간이며, 몸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다만 그 몸은 이 자연계의 물질로 이루어진 몸이 아니라 영계의 실체에 상응하는 ‘영적 ’입니다. 사람이 죽을 때 자연계의 육체는 자연계에 남겨 두지만, 그 사람 자신은 몸 없는 의식이나 구름 같은 영혼이 되어 떠도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사람의 형상을 그대로 지닌 영으로 깨어나고, 보고 듣고 말하고 걷고 사람을 만나며 살아갑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영계에서의 인간이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처음에는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삶의 연속성을 경험한다고 거듭 설명합니다.

 

이 점에서 신성종 목사가 ‘신령한 ’을 ‘유령 같은 비물질적인 무엇’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 것은 뜻밖에도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가까운 지점까지 옵니다. 차이는 그다음입니다. 신성종 목사는 그 ‘신령한 ’을 마지막 날 현재의 육체가 변화하여 얻는 몸으로 이해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죽는 순간 자연적 몸을 벗고 이미 영적 몸으로 영계에 들어간다고 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는 수천 년 동안 무덤 속에서 몸의 부활을 기다리는 영혼이라는 상태가 없습니다. 아담 시대의 사람도, 오늘 죽은 사람도 사후에는 영계에서 인간으로 살아갑니다. 마지막 날에 무덤으로 돌아와 옛 물질을 다시 모아 몸을 만드는 과정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설교의 출발점이 된 ‘화장하면 나중에 어머니의 몸은 어떻게 됩니까?’라는 질문에 스베덴보리는 신성종 목사보다 훨씬 더 직접적으로 대답했을 것입니다. ‘화장하든 매장하든 어머니 자신에게는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어머니는 육체 속에 남아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연적 육체는 이 자연계에서 살아가기 위해 잠시 입었던 몸이며, 죽음과 동시에 인간 자신은 영적 몸으로 영계에서 깨어납니다. 따라서 화장은 부활을 어렵게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애초에 사후의 인간이 다시 사용해야 할 몸을 훼손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매장된 시신도 다시 필요한 것이 아니고, 화장된 재도 다시 모을 필요가 없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설교의 ‘씨앗’ 비유도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다르게 읽힙니다. 신성종 목사는 고린도전서 15장의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를 장례와 미래의 육체 부활로 연결합니다. ‘어머니는 지금 땅에 심겨 있는 거네요’라는 유가족의 말은 이 설교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 가운데 하나입니다. 목회적 위로로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정확히 말해 ‘어머니가 땅에 심겨 있는 ’이 아닙니다. 땅에 있는 것은 어머니가 자연계에서 사용하던 육체입니다. 어머니 자신은 이미 영계에서 깨어나 삶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더 정확한 위로는 ‘어머니는 사라진 것도 아니고, 땅속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미 다른 세계에서 사람으로 살아 계십니다’가 될 것입니다.

 

이 차이는 작아 보이지만, 사후세계 이해 전체를 바꿉니다. 전통적 육체 부활론에서는 ‘죽음 영혼의 중간 상태 마지막 육체 부활’이라는 구조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집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에게서는 ‘죽음 영계에서 깨어남 중간영계에서 내면이 드러남 자신의 지배적 사랑에 따라 천국 또는 지옥으로 들어감’이라는 흐름입니다. 따라서 부활은 먼 미래에 있을 사건만이 아니라 죽음과 함께 인간에게 실제로 일어나는 사후의 깨어남과 깊이 연결됩니다. 이것은 유가족에게 주는 위로의 내용까지 크게 달라지게 합니다. ‘언젠가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보다 ‘ 사람은 지금도 주님의 섭리 아래 존재하며 살아 있습니다’라는 쪽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하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부활을 다루는 부분에서는 더욱 세심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신성종 목사는 부활하신 예수가 만져질 수 있었고, 음식을 드셨으며, 못 자국도 있었다는 사실을 들어 우리의 미래 부활 몸 역시 이와 같은 물질적 몸이라는 논증을 펼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부활은 일반 인간의 사후 과정과 동일한 사례가 아닙니다. 주님은 인간처럼 자연적 몸을 버리고 영으로 살아난 분이 아니라, 지상 생애 동안 인성을 신성과 하나 되게 하시는 영화의 과정을 완성하시고, 신적 인성(Divine Human)으로 부활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무덤에 주님의 몸이 남아 있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일반 인간의 죽음과 다릅니다. 이것을 모든 인간의 시체가 마지막 날 다시 일어날 것이라는 직접적인 모델로 삼으면 스베덴보리의 기독론과 사후세계론에서는 중요한 구별 하나가 사라집니다.

 

그렇다고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보이고 만져지고 함께 음식을 드신 사건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영적인 것은 물질적이지 않으므로 실체도 없다’는 우리의 자연적 선입견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묘사하는 영계는 희미하고 추상적인 의식의 세계가 아닙니다. 그곳에는 사람, 집, 길, 공동체, 산과 들, 식물과 수많은 환경이 있으며, 사람들은 서로 보고 말하고 살아갑니다. 그것들은 자연계 물질이 아니라 영적 실체와 그 상응으로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몸이 없으면 어떻게 서로 알아봅니까?’라는 질문 자체가 스베덴보리에게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영들은 몸 없는 영혼들이 아니라 사람의 형상을 지닌 인간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머니를 다시 만나면 알아볼 있습니까?’라는 설교 속 질문에도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매우 적극적입니다. 알아볼 수 있습니다. 다만 천국에서의 재회는 단순히 얼굴을 기억하여 알아보는 차원을 넘어섭니다. 영계에서는 사람의 내면이 외면에 더욱 직접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자연계에서는 몸과 사회적 역할과 여러 외적 조건이 사람의 내면을 가릴 수 있지만, 영계에서는 점차 그 사람의 지배적 사랑과 실제 성품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진정한 결합은 단순한 혈연만으로 영원히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내적 사랑과 삶의 상태가 서로 조화를 이루느냐와 관계됩니다. 이 부분은 ‘죽으면 가족이 모두 그대로 모여 영원히 함께 산다’는 식의 단순한 위로와는 구별해야 합니다.

 

설교에서 또 하나 크게 갈라지는 부분은 요한계시록 21장의 ‘ 하늘과 ’입니다. 신성종 목사는 ‘성경의 마지막 그림은 우리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내려오는 ’이라며, ‘새로워진 몸을 입은 우리가 새로워진 땅에서 하나님과 함께 사는 ’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흙냄새, 밥 짓는 냄새, 손을 잡는 감촉, 함께 밥 먹는 시간 같은 자연적 삶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정서적으로 매우 따뜻하고 매력적인 그림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 하늘과 ’ 해석은 이것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 하늘과 ’은 물질 우주가 폐기되고 새로운 물질 지구가 만들어진다는 뜻이 아니라, 영계에서 이루어지는 새 하늘과 그에 상응하여 자연계에 세워지는 새로운 교회, 곧 새로운 영적 질서를 가리킵니다. ‘ 예루살렘’ 역시 하늘에서 물리적으로 내려오는 거대한 도시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새 교회의 교리와 삶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 설교에서 가장 조심해서 받아들여야 할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천국은 결국 새로워진 지구이며, 우리는 부활한 물질적 몸으로 그곳에서 다시 산다’는 그림은 성경의 문자적 이미지를 매우 충실하게 붙들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에게는 그 문자 안의 속뜻을 자연적 차원에 고정한 해석이 됩니다. 요한계시록의 ‘ 하늘’, ‘ ’, ‘ 예루살렘’을 자연적 공간과 물질적 도시로 읽기 시작하면, 계시록 전체에 흐르는 상응적 언어를 놓치게 됩니다.

 

그렇지만 신성종 목사가 이 교리를 통해 도달한 윤리적 결론은 매우 귀합니다. 그는 고린도전서 15장이 58절에서 ‘그러므로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안에서 헛되지 않은 앎이라’로 끝난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그리고 교회 화장실을 청소한 사람, 새벽에 난로를 피운 사람, 김치를 담가 홀로 사는 노인에게 가져다준 사람, 수십 년 동안 주보를 접은 사람들의 손을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아주 중요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천국을 이루는 것은 단순히 올바른 교리를 알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실제 삶의 유용한 일, 곧 쓰임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 손이 다시 살아납니다’라는 표현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다시 해석해야 합니다. 관절이 붓고 굳은살이 박힌 바로 그 물질적 손의 원자들이 다시 모인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손으로 행했던 사랑과 쓰임이 그 사람의 영원한 인격 안에 남는다고 보는 편이 더 가깝습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무엇을 사랑했고, 무엇을 의도했고, 그 사랑을 어떻게 삶으로 행했는지가 그 사람의 내적 생명을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는 신성종 목사의 ‘부활이 있으므로 지금 하는 일이 헛되지 않다’는 결론과 스베덴보리의 ‘사람이 세상에서 형성한 지배적 사랑과 삶의 상태를 가지고 영원으로 들어간다’는 가르침이 뜻밖에 깊이 만납니다. 결론의 영적 방향은 가까운데 그 결론을 설명하는 사후세계의 구조가 다른 것입니다.

 

그리고 이번 설교를 읽으며 특별히 눈여겨볼 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중심 본문이 고린도전서 15장이라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울 서신을 포함한 사도들의 서신을 복음서나 계시록과 같은 의미에서 ‘말씀’으로 보지 않으며, 그 안에 연속적인 내적 의미, 곧 아르카나가 담겨 있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사도서신이 무가치하거나 읽을 필요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교회를 가르치고 신앙과 체어리티의 삶을 권면하는 중요한 교훈이 그 안에 있습니다. 따라서 고린도전서 15장의 ‘’, ‘썩을 것과 썩지 아니할 ’, ‘육의 몸과 신령한 ’을 창세기나 계시록의 상응처럼 하나하나 아르카나로 풀어내기보다, 사도 바울이 당시 교회에 가르치려 했던 교리적 가르침으로 읽고 그것을 말씀 전체와 조화시키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더 적절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설교는 아주 흥미로운 역설을 보여 줍니다. 신성종 목사는 ‘ 없는 영혼이 천국으로 간다’는 통속적 기독교 관념을 헬라 철학의 영향이라고 비판하면서 성경적 사후세계를 회복하려 합니다. 문제 제기 자체에는 중요한 진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대안으로 ‘마지막 무덤에서 육체가 부활하여 지구에서 살아간다’는 방향으로 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두 그림 모두를 넘어섭니다. 인간은 몸 없는 영혼이 아닙니다. 그러나 다시 자연적 육체를 입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은 죽는 순간 자연적 몸을 내려놓고 영적 몸으로 깨어나며, 그 몸으로 영계에서 완전한 인간의 삶을 계속합니다. 저는 이번 설교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바로 이 지점이 가장 중요한 분별점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처음 화장장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면, 세 관점의 차이가 아주 선명해집니다. ‘어머니의 몸을 태워 버렸는데 어떻게 부활합니까?’라는 질문에 통속적인 영혼불멸론은 ‘몸은 중요하지 않고 영혼만 천국에 갔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신성종 목사는 ‘ 몸은 씨앗이며 하나님께서 마지막 썩지 않는 몸으로 다시 살리십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어머니 자신은 유골함 안에도, 무덤 안에도 계시지 않습니다. 자연적 육체는 그곳에 남았지만 어머니는 이미 영적 몸으로 영계에서 깨어나셨습니다’라고 대답하게 됩니다. 세 답은 비슷하게 유가족을 위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인간이 ‘지금 어디에 있으며 어떤 상태로 존재하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세계관을 전제합니다.

 

그럼에도 이 설교 전체를 오류 때문에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처음부터 끝까지 흐르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정죄하지 말자’, ‘유가족의 슬픔을 억누르지 말자’, ‘화장 때문에 죄책감을 갖지 말자’, ‘몸으로 행한 작은 사랑의 수고를 하찮게 여기지 말자’, ‘죽음이 마지막이므로 현재의 삶이 허무한 것이 아니라 영원이 있으므로 오늘의 사랑과 수고가 중요하다’는 목회적 메시지는 충분히 귀합니다. 특히 이름 없이 교회를 섬기고 이웃을 돌본 사람들의 작은 수고를 기억하는 부분은 체어리티와 쓰임이라는 스베덴보리의 핵심 가르침과 매우 아름답게 만납니다.

 

결국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이 설교에 던지는 질문은 ‘신성종 목사의 부활 신앙이 옳으냐 그르냐’ 정도가 아닙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부활이란 정확히 무엇인가?’입니다. 자연적 육체의 재생인가, 아니면 인간이 죽음을 통과하여 영적 세계에서 자신의 참된 몸으로 깨어나는 것인가? ‘ 하늘과 ’은 미래의 물질 우주인가, 아니면 주님이 이루시는 새로운 영적 질서와 새 교회인가? 그리고 예수의 부활은 우리 육체 부활의 단순한 견본인가, 아니면 주님의 인성이 완전히 영화되어 신성과 하나 된 유일무이한 사건인가? 이 질문들 앞에서 신성종 목사의 설교는 오히려 좋은 출발점을 제공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의 목회적 고백을 그대로 귀하게 남겨 두어도 좋겠습니다. ‘무섭지 않은 것이 믿음이 아니라 무서운데도 손을 놓지 않는 것이 믿음입니다.’ 여기에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을 덧붙인다면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죽음 앞에서 우리가 붙드는 소망은 ‘언젠가 흩어진 육체의 원소가 다시 모일 ’이라는 데 있지 않습니다. 소망은 ‘죽음조차 주님이 주신 생명의 연속을 끊을 없다’는 데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음과 함께 무(無)로 사라졌다가 먼 훗날 다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문을 통과하여 영계에서 계속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장례는 한 사람의 존재가 끝나는 자리가 아니라, 우리의 눈에서는 닫히지만 그에게는 다른 세계가 열리는 경계가 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설교가 품고 있는 따뜻한 목회적 위로와 스베덴보리의 놀라울 만큼 구체적인 사후세계의 가르침이 서로 만날 수 있다고 봅니다.

 

 

심화

바울은 왜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을 이렇게 말했을까?

 

앞의 신성종 목사의 설교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살펴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사람이 죽은 뒤 다시 자연적 육체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죽음과 함께 영계에서 영적 몸으로 깨어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바울은 왜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마치 죽은 육체가 장차 다시 살아나는 것처럼 말했을까요?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는 질문에 씨앗을 예로 들고,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난다’고 말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이 문제를 다룰 때 가장 먼저 조심해야 할 것은 ‘그러면 바울이 틀렸다는 말인가?’라고 너무 빨리 결론짓는 것입니다. 반대로 ‘바울도 사실 스베덴보리와 완전히 똑같은 사후세계관을 가르쳤다’고 만드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을 쓴 역사적 상황과 목적을 먼저 살펴보고, 그가 무엇을 말하려 했으며 무엇까지 말하지 않았는지를 구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의 직접적인 문제는 바울 자신이 12절에서 밝힙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여기서 고린도교회 일부 사람들이 부인하고 있었던 것은 일차적으로 그리스도의 부활 자체라기보다 ‘죽은 자의 부활’이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이 장에서 가장 먼저 지키려고 했던 것은 사후세계의 세밀한 구조나 부활의 물리적 메커니즘이 아니라 ‘죽음이 인간의 생명을 끝내지 못한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분에게 속한 사람들의 부활은 분리될 없다’는 기독교 신앙의 근본적인 소망이었습니다.

 

이 점을 놓치면 고린도전서 15장을 마치 ‘마지막 무덤 시체가 어떤 과정을 거쳐 다시 만들어지는가’를 설명하는 장처럼 읽게 됩니다. 그러나 실제로 바울은 그런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그는 흩어진 뼈와 육체의 원소가 어떻게 다시 모이는지 말하지 않고 오히려 ‘씨앗’을 이야기합니다.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뿐이로되 하나님이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종자에게 형체를 주시느니라’고 합니다. 여기에는 분명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함께 있습니다. 심어진 것과 나타나는 것이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심어진 바로 그 형체가 그대로 되돌아오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바울의 씨앗 비유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도토리를 땅에 심었는데 나중에 땅에서 거대한 참나무가 올라왔다고 합시다. 도토리와 참나무는 모양도, 크기도, 기능도 전혀 다릅니다. 그렇다고 참나무가 그 도토리와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생명의 연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비유를 통해 부활을 단순한 ‘원상복구’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신다’고 합니다.

 

더욱 주목할 구절은 44절입니다.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신령한 몸도 있느니라.’ 여기서 바울은 ‘’과 ‘영혼’을 대조하지 않습니다. 헬라어로 양쪽 모두 ‘소마(sōma)’, 곧 ‘’입니다. ‘소마 프쉬키콘(sōma psychikon)’과 ‘소마 프뉴마티콘(sōma pneumatikon)’, 곧 한 종류의 몸과 다른 종류의 몸을 대조합니다. 따라서 바울이 말하는 부활은 ‘몸을 버리고 없는 영혼이 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이 점에서는 신성종 목사의 지적도 귀담아들을 만합니다. 그는 ‘신령한 ’을 흐릿하고 비물질적이며 유령 같은 무엇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 이해와도 중요한 접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사후의 인간을 몸 없이 떠다니는 의식이나 그림자 같은 존재로 설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사후에도 완전한 인간이며, 인간의 형상을 가진 영적 몸으로 보고, 듣고, 말하고, 걷고, 다른 사람들과 만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지점에서 전통적인 육체 부활론과 스베덴보리의 설명이 갈라집니다. ‘신령한 ’이 있다는 것과 ‘무덤에 들어간 자연적 육체가 훗날 다시 살아나 신령한 몸으로 변한다’는 것은 같은 명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전자를 강하게 말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후대 기독교가 그 말씀을 바탕으로 발전시킨 ‘마지막 시체의 재결합과 육체 부활’이라는 구체적인 그림까지 바울이 이 장에서 모두 설명했다고 보아야 하는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특히 고린도전서 1550절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받을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바울 자신이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연적 상태의 ‘혈과 ’이 그대로 하나님 나라를 상속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고린도전서 15장의 중심을 단순히 ‘현재의 물질적 육체가 다시 돌아온다’는 명제로 축소하면 바울 자신의 언어가 가진 훨씬 풍부한 긴장을 놓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설명이 매우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스베덴보리도 ‘부활’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인간이 죽음 후에 부활한다고 매우 분명하게 말합니다. 다만 ‘무엇이 부활하는가?’와 ‘언제 부활하는가?’에 대한 설명이 전통적인 육체 부활론과 다릅니다. 부활하는 것은 무덤 속에 남겨진 자연적 육체가 아니라 ‘ 사람 자신’이며, 그 부활은 수천 년 뒤 우주의 마지막 날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죽은 뒤 자연계에서 영계로 깨어날 때 일어납니다. 자연적 육체는 자연계에 남지만 사람 자신은 영적 몸으로 영계에서 계속 살아갑니다.

 

이렇게 보면 ‘몸은 소중하다’는 말과 ‘자연적 육체가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말을 반드시 동일시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연적 몸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체어리티와 쓰임을 행하도록 주어진 귀한 도구입니다. 그러므로 몸을 악한 것, 영혼을 가두어 놓은 감옥, 아무 가치 없는 껍데기로 여기는 것은 기독교적인 인간 이해와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연적 몸이 귀하다는 사실이 곧 그 몸의 물질이 영원히 보존되거나 마지막 날 다시 조립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자연적 몸은 자연계에 속하고, 영적 몸은 영계에 속합니다.

 

그러므로 신성종 목사의 설교에 등장하는 ‘화장하면 어머니의 몸은 나중에 어떻게 부활합니까?’라는 질문에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조금 다른 대답을 할 수 있습니다. 화장하든 매장하든 어머니 자신에게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어머니 자신이 그 자연적 육체 속에 남아 부활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연적 몸은 자연계에 남겨지지만 그 사람 자신은 이미 영적 몸으로 영계에서 깨어납니다. 그러므로 화장이 부활을 방해할 수도 없고, 매장이 부활을 더 안전하게 보장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바울은 이것을 ‘사람은 죽는 즉시 영계에서 영적 몸으로 깨어난다’고 스베덴보리처럼 명료하게 설명하지 않았을까요? 여기서는 바울 서신의 성격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독특한 이해를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도들의 서신을 모세오경과 예언서, 복음서와 계시록처럼 연속적인 내적 의미, 곧 아르카나가 들어 있는 ‘말씀’과 동일한 범주에 두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사도서신을 무가치하거나 잘못된 글이라고 보는 것도 아닙니다. 사도들은 초기 기독교회를 세우고 사람들에게 주님에 대한 신앙과 체어리티의 삶을 가르치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따라서 바울을 영계의 구조와 사후 인간의 상태를 완전히 계시받아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사람으로 읽기보다는, 당시 교회가 처한 문제 속에서 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언어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가르치는 사도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의 가장 큰 관심은 ‘죽은 정확히 단계의 상태를 거쳐 천국에 들어가는가?’가 아닙니다. 그의 관심은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셨으며 너희도 그분 안에서 살아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안에서 살아가는 너희의 삶은 헛되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실제로 바울 자신의 다른 글들을 보면 사후 상태에 관한 표현이 언제나 하나의 완성된 조직신학 체계처럼 나타나는 것도 아닙니다. 그는 고린도후서에서는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을 말하고, 빌립보서에서는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말합니다. 이런 표현들은 죽은 사람이 아주 먼 미래의 부활 때까지 사실상 아무런 삶도 없이 기다린다는 그림과는 잘 맞지 않습니다. 반면 고린도전서 15장과 데살로니가전서에서는 미래의 부활과 주님의 오심이라는 종말론적 언어를 강하게 사용합니다. 후대 기독교 신학은 이러한 여러 표현을 종합하여 ‘죽음 영혼의 중간 상태 마지막 육체 부활’이라는 체계를 세웠지만, 그 완성된 체계를 그대로 바울 자신의 명시적인 설명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서 또 하나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사실 스베덴보리와 똑같은 사후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표현만 다르게 했다’고 주장해서도 안 됩니다. 그것은 역사적 바울에게 스베덴보리의 계시를 거꾸로 투영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당시 유대교의 부활 신앙과 초기 기독교의 종말론적 언어 속에서 말하고 있으며, 스베덴보리는 훨씬 후대에 사후 인간의 깨어남, 영적 몸, 중간영계, 천국과 지옥의 상태 등을 매우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둘 사이에는 실제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균형 있게 말한다면 이렇습니다. ‘바울은 부활이라는 진리를 강력하게 가르쳤지만, 사후세계의 메커니즘 전체를 밝힌 것은 아닙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붙들고 있는 핵심은 인간이 죽음으로 소멸하지 않는다는 것, 주님의 부활이 우리의 생명과 분리된 사건이 아니라는 것, 부활한 인간에게는 ‘’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몸은 지금의 썩고 약하고 죽는 자연적 상태와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부활’과 ‘영적 ’이 실제로 무엇이며 인간에게 언제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훨씬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고린도전서 15장의 씨앗 비유도 새로운 의미로 다가옵니다. 씨앗과 나무 사이에는 분명한 연속성이 있지만 동일한 외적 형체가 반복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연적 몸과 영적 몸 역시 동일한 물질의 재조립이라는 의미에서 하나가 아닙니다. 그러나 죽기 전의 사람과 죽은 뒤의 사람이 서로 다른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 사람’이라는 인격과 생명의 연속성은 그대로 이어집니다. 죽음은 한 인간을 없애고 나중에 복제품을 만드는 사건이 아니라 자연계에서의 삶이 영계에서의 삶으로 이어지는 경계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고린도전서 15장의 마지막 58절이 매우 중요해집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안에서 헛되지 않은 앎이라.’ 바울은 부활에 관한 긴 논의를 ‘그러므로 죽은 뒤의 일을 많이 연구하라’로 끝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주의 일에 힘쓰라’고 끝냅니다. 사후의 생명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현재의 삶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체어리티와 쓰임의 가르침과도 깊이 만납니다. 사람이 영원으로 가지고 가는 것은 자연적 육체를 구성했던 물질이 아니라 그가 세상에서 무엇을 사랑했고, 무엇을 의도했으며, 그 사랑을 어떻게 실제 삶의 쓰임으로 나타냈는가 하는 그의 내적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병든 사람을 돌본 손, 배고픈 사람에게 음식을 건넨 손, 교회와 가정과 사회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을 묵묵히 감당한 손으로 행한 사랑은 헛되지 않습니다. 물질적인 그 손 자체가 영원히 보존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손을 움직였던 사랑과 의도와 삶이 그 사람 자신 안에 영원히 남기 때문입니다.

 

결국 고린도전서 15장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다는 것은 바울을 틀렸다고 버리는 것도 아니고, 바울의 모든 표현을 억지로 스베덴보리와 일치시키는 것도 아닙니다. 바울이 당시 고린도교회를 향해 증언한 부활의 핵심 진리를 먼저 존중하고, 그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은 사후세계의 실상을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을 통해 더 깊이 살펴보는 것입니다.

 

바울의 외침은 분명합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에 매우 구체적인 설명을 더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죽음과 함께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영계에서 영적 몸을 지닌 완전한 인간으로 깨어납니다.’ 그리고 두 가르침은 마침내 삶을 향한 한 질문 앞에서 만납니다. ‘그렇다면 나는 오늘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 답 역시 고린도전서 15장의 마지막에 이미 놓여 있습니다. ‘너희 수고가 안에서 헛되지 않은 앎이라.’ 죽음 이후에도 생명이 계속되기 때문에 오늘의 사랑이 중요하고, 영원이 있기 때문에 지금의 체어리티와 쓰임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부활에 관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어쩌면 ‘ 몸의 물질이 마지막 어떻게 다시 모일 것인가?’가 아니라 ‘영원으로 이어질 오늘의 삶을 나는 어떤 사랑으로 살아가고 있는가?’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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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먼저 영상에서 매우 강하게 느껴지는 것은 ‘거룩하게 살고 싶다’는 열망입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1,600년 동안 그곳에서 수도하다 세상을 떠난 수도자들의 유골을 보면서 끔찍함보다 오히려 ‘향기가 났다’, ‘고개를 숙이고 흠모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또 게라시모스가 기도하던 동굴과 그곳에 얽힌 이야기들을 소개하면서 마지막에는 자신도 ‘그런 영이 임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이 마음 자체는 가볍게 볼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무엇을 더 얻고 높아질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가까이 것인가’를 사모하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수도 전통이 오랜 세월 수많은 사람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것도 바로 이 지점일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서 ‘거룩함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한 번 더 묻게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룩함은 어떤 장소에서 오래 기도하고, 육체를 극도로 절제하고, 세상을 떠나 고독하게 산다는 사실 그 자체에서 생기지 않습니다. 사람을 거룩하게 하는 것은 오직 주님이며,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실제 삶에서 살아갈 때 그 삶이 거룩해집니다. 그러므로 수도원도 거룩함을 돕는 장소가 될 수 있고, 광야의 동굴도 그럴 수 있지만, 그것들이 그 자체로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수도원 안에서도 proprium은 얼마든지 살아 있을 수 있고, 오히려 ‘나는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산다’, ‘나는 이렇게 많이 기도한다’, ‘나는 이런 금욕을 견뎌 냈다’는 영적 자기의가 더 미세한 형태로 자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수도생활을 부정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수도생활을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제자리에 놓아 줍니다. 침묵, 금식, 기도, 독거, 절제, 단순한 생활은 모두 훌륭한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의 목적은 ‘수도자가 되는 ’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가 주님께 굴복하고, 악을 죄로 알고 피하며, 주님께 받은 선을 이웃에게 흘려보내는 데 있습니다. 결국 천국의 삶은 세상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었는가보다 ‘무엇을 사랑하며 살았는가’에 의해 결정됩니다.

 

이 영상에서 특별히 아름다운 대목은 게라시모스와 사자의 이야기입니다. 게라시모스가 발에 가시가 박힌 사자를 치료해 주었고, 그 뒤 사자가 그를 따르며 도왔으며, 마침내 게라시모스가 죽은 뒤에도 그의 무덤 곁을 떠나지 않았다는 전승입니다. 이것을 역사적으로 어디까지 사실로 받아들일 것인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영상 자체도 수도 전통에서 전해 내려오는 성인전적 이야기의 성격으로 읽는 것이 안전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이야기가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동물은 매우 흥미로운 존재입니다. 말씀의 속뜻에서 동물들은 인간의 여러 정서와 애정을 표상합니다. 온순하고 유익한 동물들은 선한 애정들을, 사납고 해로운 동물들은 악한 애정들을 표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고 현실의 사자 한 마리를 곧바로 어떤 하나의 영적 의미와 기계적으로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영적 그림은 상당히 아름답습니다. 인간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야생의 힘이 사랑과 돌봄 앞에서 적대성을 잃고 봉사하는 힘으로 바뀝니다. ‘가시를 주는 ’에서 시작하여 ‘곁을 지키는 ’으로 끝나는 이 이야기는, 인간 안의 거칠고 자연적인 것조차 주님의 질서 아래 들어오면 선을 섬기는 힘이 될 수 있다는 그림으로 읽어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도 한 가지는 조심해야 합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마지막에 ‘동물과도 친해지고, 동물도 알아주고, 하나님이 알아주는 것은 물론 사람들이 인정하는 신성한 ’을 구하는 취지로 기도합니다.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사람들이 알아보는 거룩함’이 아닙니다. 심지어 ‘동물까지 알아보는 성자 같은 사람이 되는 ’도 아닙니다. 우리가 구해야 하는 것은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는 ’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성자라고 생각하는지, 영성이 깊다고 인정하는지는 본질적으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차이는 작아 보이지만 대단히 중요합니다. ‘ 수도자처럼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지’라는 열망은 아름답게 출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중심이 ‘주님’에서 ‘거룩한 ’로 옮겨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끊임없이 인간의 proprium을 경계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거룩해졌는가’를 바라보는 순간, 거룩함은 어느새 자기 소유물이 되기 쉽습니다. 반대로 ‘ 안에는 선한 것이 하나도 없으며, 모든 선과 진리는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점점 깊이 인정하는 사람은 자신을 거룩한 사람으로 만들려고 애쓰기보다 주님께서 자기 안에서 일하시도록 자신을 내어 드리게 됩니다.

 

영상에 등장하는 광풍도 이런 관점에서 흥미롭게 읽을 수 있습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앞을 제대로 보기 어려울 만큼 거센 바람과 먼지가 부는 날에도 동굴을 향해 걸어갔고, 안내자는 ‘게라시모스는 이런 날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 기도했던 성인’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분명 인상적인 장면입니다. 그러나 영적 삶에서 더 중요한 광풍은 바깥의 날씨가 아니라 인간 안에서 일어나는 시험입니다. 기도하기 좋은 분위기가 깨졌을 때, 사람에게 인정받지 못할 때, 내가 옳다고 생각한 것이 무너질 때, 자존심이 상할 때, 내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을 때에도 주님을 향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훨씬 깊은 문제입니다. 외적 광풍을 견디는 수도보다 ‘proprium 광풍’을 견디는 내적 싸움이 더 어렵습니다.

 

또 한 가지, 영상에는 한국 목회자들이 악천후에도 동굴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강문호 수도사가 ‘역시 한국 사람들은 한국 사람이구나’ 하며 감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역시 그 현장에서 느낀 반가움과 감동의 표현으로 받아들이면 충분하겠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누가 독하게 기도하는가’가 영성의 척도가 되지는 않습니다. 오랜 시간 기도하는 것도 귀하고, 새벽기도도 귀하며, 금식도 귀합니다. 그러나 기도의 열매는 결국 그 사람이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 나타납니다. 더 온유해졌는가, 자기 생각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는가, 타인의 허물을 덜 정죄하게 되었는가, 자신의 악을 더 분명하게 보게 되었는가, 이웃에게 더 유익한 사람이 되었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영상의 핵심을 ‘게라시모스처럼 되어야 한다’에서 한 걸음 더 안쪽으로 옮겨 읽고 싶습니다. 게라시모스의 동굴도, 1,600년의 수도 전통도, 수도자들의 유골도, 광풍 속의 기도도, 사자의 충성도 모두 우리를 감동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가리켜야 할 마지막 대상은 ‘위대한 수도자’가 아니라 ‘사람을 거룩하게 하시는 주님’이어야 합니다. 성자의 삶이 귀하다면 그것은 그 사람에게서 주님의 어떤 것이 비쳐 나왔기 때문이지, 그 사람이 스스로 거룩함의 원천이 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특히 사자 이야기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을 저는 ‘사자가 성인을 알아보았다’는 데서 찾기보다 ‘고통받는 존재의 가시를 주었다’는 데서 찾고 싶습니다. 이것은 아주 작은 차이 같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큰 차이입니다. 사자를 굴복시킨 영적 능력이 중심이 아니라, 아파하는 생명에게 다가가 그 고통의 원인을 제거해 준 체어리티가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발에 박힌 ‘가시’를 발견하고 그것을 빼 주는 사람, 상처받은 사람에게 다가가 고통을 덜어 주는 사람, 그리고 그 일을 자신의 공으로 돌리지 않는 사람이라면, 수도복을 입고 있든 평범한 옷을 입고 있든 이미 수도 영성의 깊은 중심에 가까이 가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영상에서 우리가 받아야 할 기도도 조금 달라질 수 있습니다. ‘주님, 사람들이 알아보는 성스러운 사람이 되게 하소서’라기보다 ‘주님, 안의 악을 보게 하시고, 그것을 죄로 알고 피하게 하시며, 제게 주시는 선을 것이라 여기지 않게 하시고, 오늘 곁에 있는 존재의 가시 하나라도 주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저는 이것이 게라시모스의 이야기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통과시켰을 때 남는, 더 조용하지만 더 깊은 수도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SY.87, 강문호 수도사, ‘수도학교’ (20200112)

※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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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4:6)

 

AC.363

 

가인(Cain)이라 불린 신앙의 교리가 어떤 성질의 것이었는지는 절에 대한 설명에서 있습니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체어리티가 신앙과 결합될 수는 있었으나,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권을 가져야 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먼저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If thou doest well art thou not uplifted)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네가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면 체어리티가 함께 있을 있다 뜻입니다. 선을 행한다(do well) 것은 속뜻으로 선한 의도를 가지는 뜻하는데, 선을 행하는 것은 선을 의도하는 데서(from willing what is good) 나오기 때문입니다. 고대에는 행위와 의지가 하나를 이루었습니다. 사람들은 행위를 보고 의지를 알았는데, 당시에는 위선이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낯을 (uplifting) 체어리티가 함께 있음을 뜻한다는 것은 앞에서 얼굴에 관하여 설명한 것으로 분명합니다. 얼굴을 든다(lift up the face) 것은 체어리티를 가지는 것이며, 얼굴이 떨어진다(face to fall) 것은 반대입니다. The nature of the doctrine of faith that was calledCainis seen from the description of it in this verse, from which it appears that charity was capable of being joined to faith, but so that charity and not faith should have the dominion. On this account it is first said, “If thou doest well art thou not uplifted?signifying, If thou art well disposed, charity may be present; for todo wellsignifies, in the internal sense, to be well disposed, since doing what is good comes from willing what is good. In ancient times action and will made a one; from the action they saw the will, dissimulation being then unknown. That anupliftingsignifies that charity is present is evident from what has been already said about the face, that tolift up the faceis to have charity, and that for theface to fallis the contrary.

 

 

해설

 

AC.363은 앞의 AC.361-362에서 제시된 가인의 문제를 한층 더 정확하게 밝혀 줍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 자체에 있지 않았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글 첫머리에서 체어리티가 신앙과 결합될 있었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문제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함께 있느냐 없느냐만이 아니라, 둘이 함께 있을 때 어느 것이 주도권을 가지느냐였습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 그대로라면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권을 가져야(charity and not faith should have the dominion) 했습니다. 이것은 체어리티가 신앙을 억누르거나 무가치하게 만든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본래 결합되어야 하지만, 그 결합 안에서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기고 체어리티로 인도해야 하며, 체어리티가 신앙에 생명과 방향을 주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362의 설명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은 신앙을 버린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을 사랑보다 본질적인 으로 만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신앙을 사랑보다 앞세우자, 신앙은 사랑에서 나오는 체어리티에서도 분리되었고, 결국 사랑 없이 살게 되었습니다. AC.361에서는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하지만, 가인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기 때문에 함께 있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63은 그 반대의 정상적인 질서를 명시합니다. 체어리티와 신앙은 결합되어야 하되,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해야 합니다. 바로 이 질서가 뒤집힌 것이 가인의 교리였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먼저 하신 말씀이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에게 너는 이미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했으므로 끝났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아직 체어리티가 다시 신앙과 결합할 가능성이 남아 있습니다. 가인이 다시 선을 향한다면 체어리티가 그와 함께 있을 수 있고, 떨어졌던 얼굴도 다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4:7은 단순한 책망이나 심판의 선언이라기보다 가인에게 주어진 회복의 초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선을 행한다(to do well)는 것을 단순히 외적으로 선한 행동을 한다는 뜻으로 해석하지 않습니다. 속뜻으로는 선한 의도를 가지는 (to be well disposed)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선을 행하는 것은 선을 의도하는 것에서(from willing what is good) 나오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행위의 외적 모양보다 그 행위가 흘러나오는 내적 의지입니다. 선한 행위가 참으로 선하려면 그 안에 선을 향하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살펴본 가인의 제물과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가인에게도 행위가 있었습니다. 그는 땅을 경작했고, 그 소산으로 여호와께 제물을 드렸습니다. 겉으로 보면 예배도 드렸습니다. 그러나 AC.348-349에서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 없는 신앙에서 나온 행위를 죽은 행위, 내적인 것이 없는 외적 예배를 죽은 예배로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가인에게 선을 행하라고 하신 말씀은 단순히 이번에는 좋은 행동을 하라거나 합당한 제물을 드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외적 행위의 근원이 되는 내적 의지가 먼저 선을 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스베덴보리는 고대에는 행위와 의지가 하나를 이루었다고 말합니다. 당시에는 사람의 행위를 보면 그 사람의 의지를 알 수 있었는데, 그 이유를 위선(dissimulation)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즉 마음속으로 원하는 것과 밖으로 행하는 것이 오늘날처럼 쉽게 서로 갈라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의지에 있는 것이 행위로 나타났고, 행위는 그 사람 안에 있는 의지를 드러냈습니다. 그래서 선을 행한다는 것과 선을 의도한다는 것이 서로 분리된 두 가지가 아니라 하나의 상태를 안과 밖에서 표현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여기서 고대에는이라는 표현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일반적인 고대사 전체에 대한 진술이라기보다, 이 문맥에서 다루고 있는 태고교회 사람들의 특유한 내적 상태와 연결하여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고대에 살았던 모든 사람이 역사적으로 거짓말이나 위선을 전혀 몰랐다는 뜻으로 확대하기보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는 의지와 행위가 아직 하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행위를 보면 그 사람의 의지를 알 수 있었으며, 속마음을 감추고 그와 다른 모습을 밖으로 꾸미는 위선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AC.363의 관심은 고대 인류 전체의 사회사를 설명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 사람들의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었는지를 설명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앞의 AC.358에서 살펴본 얼굴의 의미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얼굴은 인간의 내적인 것들을 상징합니다. 특히 태고교회와 관련해서는 내적인 애정과 상태가 얼굴에 그대로 나타났기 때문에 얼굴이 그 사람의 내면을 표상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가인의 얼굴이 떨어졌다는 것은 단순히 화가 나서 표정이 어두워졌다는 뜻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떠남으로써 그의 내적인 것들이 변했다는 뜻이었습니다.

 

그 반대가 바로 AC.363낯을 (an uplifting)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얼굴을 든다는 것을 체어리티가 함께 있는 것으로 풀이합니다. 그러므로 창4:6-7에는 매우 선명한 대조가 있습니다. 가인의 얼굴은 떨어졌습니다. 체어리티가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하십니다. 다시 말해 가인이 선을 의도하고, 체어리티가 다시 그와 함께 있게 된다면, 변해 버린 그의 내적인 것들도 다시 올바른 질서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얼굴을 은 곧 체어리티의 회복이며, 그에 따른 내적인 것들의 회복입니다.

 

여기서 AC.358 심화에서 살펴본 여호와의 얼굴까지 연결해 보면 더욱 깊은 그림이 나타납니다. 여호와의 얼굴은 주님의 자비를 뜻하며, 주님께서 그 얼굴을 들어 사람에게 비추신다는 것은 그 자비가 사람에게 유입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얼굴이 다시 들리는 것도 인간이 자기 힘으로 스스로를 개선하여 얻는 결과라고만 볼 수 없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자비를 받아 그것이 사람 안에서 체어리티가 될 때, 떨어졌던 인간의 얼굴, 곧 그의 내적인 것들이 다시 들리는 것입니다. 주님의 얼굴은 언제나 자비로 우리를 향하고 있으며, 문제는 인간이 그 자비를 받아 체어리티 안으로 돌아오느냐에 있습니다.

 

AC.363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의지입니다. 참된 선은 단순히 행동의 외적 모양만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선을 향하는 의지에서 선한 행위가 나와야 합니다. 다만 이 태고교회의 상태를 오늘날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홍수 후 영적 인간의 질서에서는 의지 자체가 처음부터 선을 직접 지각하여 행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말씀에서 선과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이해성(understanding) 안에서 받아들이며, 그 진리에 따라 양심적으로 살아가는 과정을 통하여 새로운 의지가 형성됩니다. 바로 앞 AC.359-360에서 우리가 퍼셉션과 양심의 차이를 조심스럽게 살펴본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는 마음이 아직 충분히 원하지 않더라도 이것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선이기 때문에 행해야 한다고 진리와 양심에 따라 순종하는 단계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주님께서는 그 진리를 점차 의지 안에 심으십니다. 처음에는 해야 하기 때문에행하던 선을 나중에는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행하게 하십니다. 그렇게 진리가 선과 결합되고, 신앙이 체어리티와 결합되며, 아는 것과 원하는 것과 행하는 것이 점차 하나를 향하게 됩니다. 태고교회의 행위와 의지가 하나였다는 상태를 오늘날 우리가 그대로 되풀이하는 것은 아니지만, 거듭남을 통하여 속과 겉이 주님의 질서 안에서 점차 하나가 되어 간다는 원리는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합니다.

 

이렇게 보면 가인의 길은 거듭남의 방향과 정확히 반대입니다.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사랑에서 구별한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었지만, 그 구별을 분리로 만들었고, 분리된 신앙을 사랑과 체어리티보다 위에 세웠으며, 마침내 체어리티를 자기 아래에 두고 지배하려 했습니다. 그러면서 외적인 행위와 예배는 남아 있었지만, 그 안의 생명은 점차 사라졌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그 가인에게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말씀하십니다. 다시 체어리티를 받아들이고, 신앙을 체어리티와 결합시키며, 외적 행위가 선을 향한 내적 의지에서 흘러나오게 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AC.363의 핵심은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하라는 데 있지 않습니다. 둘은 반드시 결합되어야 합니다. 다만 그 결합에는 주님의 질서가 있습니다. 신앙이 체어리티 위에 서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해야 하며, 진리는 선을 섬기고, 신앙은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면 가인의 질서가 되지만, 체어리티가 신앙에 생명과 방향을 주면 신앙은 비로소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얼굴을 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떨어진 얼굴을 다시 들게 하는 것은 더 많은 지식이나 더 강한 교리적 확신이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을 받아 체어리티가 다시 신앙과 함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직 가인은 아벨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아직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할 길이 열려 있습니다. 그래서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는 말씀은 책망인 동시에 자비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체어리티에서 떠나 얼굴이 떨어진 가인에게도 여전히 돌아올 길을 보여 주고 계십니다.

 

 

 

AC.362, 창4:6,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든 가인의 교리’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창4:6) AC.362 여기서는 ‘가인’(Cain)이라 하는 신앙의 교리가 묘사됩니다. 이 교리는 신앙을 사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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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4:6)

 

AC.362

 

여기서는 가인(Cain)이라 하는 신앙의 교리가 묘사됩니다. 교리는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함으로써, 사랑에서 나오는 체어리티에서도 신앙을 분리하였습니다. 교회가 있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이단들이 생겨납니다. 사람들이 신앙의 어떤 특정 조항 하나에 몰두하면 그것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사고에는 이런 성향이 있어서, 어떤 가지에 몰두하면 그것을 다른 모든 것보다 앞세우며, 특히 그것을 자기 자신이 발견한 것이라고 상상할 , 그리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그를 부풀게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생각과 일치하고 그것을 확증하는 것처럼 보이게 되며, 마침내 그것이 거짓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참이라고 맹세할 정도에 이르게 됩니다. 바로 이런 식으로 가인(Cain)이라 하던 사람들은 신앙을 사랑보다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으며, 결과 사랑 없이 살게 되자 자기 사랑과 거기서 비롯된 환상이 서로 결탁하여 그들을 생각 가운데 더욱 굳어지게 하였습니다. The doctrine of faith calledCainis here described, which in consequence of separating faith from love, separated it also from charity, the offspring of love. Wherever there is any church, there arise heresies, because while men are intent on some particular article of faith they make that the main thing; for such is the nature of mans thought that while intent on some one thing he sets it before any other, especially when his imagination claims it as a discovery of his own, and when the love of self and of the world puff him up. Everything then seems to agree with and confirm it, until at last he will swear that it is so, even if it is false. Just in this way those calledCainmade faith more essential than love, and as they consequently lived without love, both the love of self and the fantasy thence derived conspired to confirm them in it.

 

 

해설

 

AC.362는 가인의 문제가 어떻게 하나의 교리로 굳어졌는지를 본격적으로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글입니다. 앞의 AC.361에서 우리는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하지만, 가인으로 표상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자기 아래에 두고 지배하려 하기 때문에 함께 할 수 없다는 설명을 보았습니다. 이제 AC.362에서는 한 걸음 더 들어가 어떻게 그런 생각이 생겼으며, 어떻게 그것이 하나의 확고한 교리가 되었는가?를 설명합니다.

 

첫 문장이 전체를 압축합니다. ‘가인은 단순히 신앙 자체가 아니라 신앙의 교리입니다. 그런데 그 교리는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했고, 그 결과 사랑의 자손인 체어리티에서도 신앙을 분리했습니다. 여기서 체어리티는 사랑의 자손(the offspring of love)이라는 표현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이 내적인 근원이라면 체어리티는 그 사랑이 이웃을 향하여 나타나는 삶입니다. 따라서 신앙을 사랑에서 떼어 놓는 순간 그것은 자연스럽게 체어리티에서도 떨어져 나갑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를 서로 독립된 것으로 만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이 문제를 가인이라는 고대의 한 이단에만 한정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있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이단들이 생겨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사고에는 어떤 하나의 진리를 붙잡았을 때, 그것을 전체로 만들어 버리는 성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단이 반드시 처음부터 완전히 거짓된 생각에서 시작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신앙처럼 실제로 중요하고 참된 것을 붙잡고, 그것을 다른 모든 것보다 앞세울 때 문제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앞에서 살펴본 가인의 시작과 정확히 맞닿습니다. 가인은 처음부터 거짓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태고교회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에 속한 것을 하나의 구별되는 것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데서 출발했습니다. 문제는 그 구별분리가 되고, 분리된 것이 마침내 주된 이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AC.362에서는 바로 그 과정의 심리적 원인을 설명합니다. 인간은 어떤 하나에 몰두하면 그것을 다른 모든 것보다 앞세우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매우 날카로운 대목이 그것을 자기 자신이 발견한 것이라고 상상할 입니다. 어떤 진리를 단순히 주님에게서 받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내가 이것을 발견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다른 내적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후자의 경우 그 진리가 점차 나의 진리가 됩니다. 그러면 그 진리를 내려놓거나 수정하는 것은 단순히 생각 하나를 수정하는 일이 아니라 를 부정하는 일처럼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자기 사랑이 그 교리와 결합합니다.

 

여기에 세상 사랑까지 더해집니다. 어떤 교리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그것으로 명성을 얻고, 자기 집단의 정체성과 권위를 세울 수 있게 되면 이제 그 교리를 지키는 데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함께 작동합니다. 처음에는 이것이 진리인가?를 물었지만, 나중에는 내가 틀릴 있는가?’, ‘우리가 틀릴 있는가?의 문제가 됩니다. 진리를 사랑해서 교리를 붙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교리를 붙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매우 위험한 단계가 시작됩니다. ‘모든 것이 그것과 일치하고 그것을 확증하는 것처럼 보입니다.이것은 오늘날 말하는 단순한 지적 오류보다 훨씬 깊은 영적 현상입니다. 이미 사랑이 방향을 정했기 때문에 이해성(understanding)이 그 사랑을 섬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결론을 먼저 정해 놓고, 말씀과 경험과 논리를 모두 그 결론을 지지하는 증거로 읽습니다. 반대되는 것은 보이지 않거나 중요하지 않게 여기고, 자기 생각을 지지하는 것은 작은 것까지 크게 보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거짓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참이라고 맹세할정도가 됩니다. 이것은 단순히 정보를 잘못 알고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거짓이 자기 사랑과 결합하여 확증된 상태입니다. 처음에는 나는 이것이 옳다고 생각한다였지만, 나중에는 이것은 반드시 옳아야 한다가 됩니다. 그리고 결국 이것과 다른 것은 틀렸다가 됩니다. 여기에서 교리적 차이는 쉽게 상대방을 향한 분노와 배척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가인의 길입니다. 가인들은 신앙을 버린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신앙을 지나치게 높였습니다. 신앙을 사랑보다 본질적인 (more essential)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표현이 AC.362의 핵심입니다. 문제는 신앙을 중요하게 여긴 것이 아니라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든 것입니다. 수단이 목적보다 위에 올라간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앞의 AC.361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너는 그를 다스릴지니라는 가인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는 상태였습니다. AC.362는 그 지배가 어떻게 교리적으로 정당화되는지를 설명합니다. ‘신앙이 본질적이다라고 정하면 체어리티는 자연스럽게 신앙 아래로 내려갑니다. 사랑과 선한 삶은 있으면 좋은 ’, ‘신앙의 결과’, 또는 부차적인 이 되고, 무엇을 믿고 어떤 교리를 고백하는지가 가장 중요한 것이 됩니다.

 

그런데 그 결과를 스베덴보리는 아주 간결하게 말합니다. ‘ 결과 그들은 사랑 없이 살았다.교리의 질서가 삶의 질서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사랑보다 신앙을 앞세운 것이 단순한 신학적 순서 문제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실제 삶에서 사랑이 사라졌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왜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그토록 엄중하게 다루는지를 보여 줍니다. 교리의 잘못된 질서는 결국 삶의 잘못된 질서가 됩니다.

 

더 심각한 것은 사랑이 사라진 빈자리가 비어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과 거기서 비롯된 환상이 그들을 확증했습니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떠난 자리에 자기 사랑이 들어옵니다. 그리고 이해성은 그 자기 사랑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계속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신앙이 사랑보다 중요하다는 교리는 단순한 지적 오류가 아니라 자기 사랑을 보호하고 강화하는 체계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fantasy를 단순히 상상정도로 이해하면 약합니다. 여기서는 자기 사랑에서 생겨난 왜곡된 사고, 곧 자기가 원하는 것을 참이라고 여기고, 그에 맞추어 현실과 말씀을 보는 일종의 환상입니다. 그래서 자기 사랑과 환상이 conspired’, 곧 서로 결탁합니다. 사랑이 거짓된 방향을 원하고, 사고가 그것을 끊임없이 합리화합니다. 결국 악한 사랑과 거짓된 사고가 서로를 강화하는 구조가 됩니다.

 

이것은 앞으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을 이해하는 데도 결정적입니다. 아벨을 죽이는 것은 단순히 신앙이 체어리티를 싫어했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이미 그 전에 신앙이 사랑보다 본질적이다라는 교리가 형성되었습니다. 그 교리는 자기 사랑에 의해 확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는 이제 단순한 형제가 아니라 그 교리의 정당성을 위협하는 존재가 됩니다. 그렇게 되면 다음 단계는 체어리티를 제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AC.362이단이 어떻게 생기는가?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매우 중요한 설명이기도 합니다. 이단은 반드시 성경을 버린 데서만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의 어떤 한 진리를 붙잡아 그것을 전체 질서에서 떼어내고 절대화할 때 생길 수 있습니다. 신앙도 진리입니다. 사랑도 진리입니다. 체어리티도 진리입니다. 그러나 신앙을 붙잡아 사랑체어리티를 그 아래에 종속시키면, 참된 것 하나를 붙잡고서 전체를 왜곡할 수 있습니다.

 

이 원리는 신앙과 체어리티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 어떤 특정 교리, 성경 번역, 예배 형식, 성례 이해, 종말론, 은사, 교회 정치, 특정 신학자의 가르침 등 무엇이든 그것을 전체보다 앞세우면 같은 위험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이 처음에는 상당 부분 참되더라도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가 되고, 이어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잘못되었다가 되고, 마침내 그것을 중심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체어리티를 잃는다면 구조적으로 가인의 길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질문은 교리가 맞는가?만이 아닙니다. ‘ 교리가 나를 어디로 데려가고 있는가?도 물어야 합니다. 참된 교리는 인간을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인도합니다. 진리를 더 많이 알수록 겸손해지고,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하며, 선한 쓰임을 더 충실히 행하게 해야 합니다. 반대로 진리를 많이 알수록 자기 우월감이 커지고, 다른 사람을 쉽게 정죄하며, 자기 해석을 지키기 위해 체어리티를 희생하게 된다면, 그 교리가 아무리 정교해도 이미 가인의 위험이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스베덴보리를 읽는 우리에게도 예외가 아닙니다. ‘아르카나를 많이 알고 상응과 퍼셉션과 체어리티의 질서를 정확히 설명한다고 해서 자동으로 가인의 위험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나는 말씀의 속뜻을 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질서를 안다는 생각이 자기 사랑과 결합하면 스베덴보리의 가르침 자체도 자기 우월성을 확증하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체어리티가 신앙의 생명이라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체어리티를 잃는 역설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AC.362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진리를 적게 알라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언제나 그 목적 안에 두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사랑을 섬겨야 하고, 진리는 선을 섬겨야 하며, 교리는 삶을 섬겨야 합니다. 내가 발견했다고 생각하는 어떤 진리도 전체 말씀과 교회의 질서, 그리고 무엇보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목적 아래 놓여 있어야 합니다.

 

결국 AC.362는 가인의 비극이 신앙을 버린 데서시작된 것이 아니라 신앙을 지나치게 높인 데서시작되었다는 역설을 보여 줍니다.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고, 그 결과 사랑 없이 살게 되었으며, 사랑이 떠난 자리에 자기 사랑이 들어왔고, 자기 사랑에서 나온 환상이 그 교리를 계속 확증했습니다. 그렇게 참된 것 하나를 전체보다 앞세운 작은 질서의 뒤집힘이 마침내 체어리티 자체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그래서 AC.362의 경고를 한 문장으로 압축한다면 이렇겠습니다. ‘이단은 언제나 거짓을 사랑하는 데서만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하나의 진리를 너무 사랑하여 그것을 다른 모든 진리의 질서 위에 올려놓는 데서 시작됩니다.다만 그때 실제로 사랑하는 것은 어느 순간부터 그 진리 자체가 아니라 진리를 발견하고 소유한 가 될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신앙의 교리는 가인의 교리가 됩니다.

 

 

 

AC.363, 창4:6,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권을 가져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창4:6) AC.363 ‘가인’(Cain)이라 불린 신앙의 교리가 어떤 성질의 것이었는지는 이 절에 대한 설명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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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1, 창4:6,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창4:6) AC.361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If thou doest well, an uplifting)에서 ‘낯을 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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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4:6)

 

AC.361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If thou doest well, an uplifting)에서 낯을 네가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면 체어리티가 네게 있음을 상징합니다.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if thou doest not well, sin lieth at the door) 네가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체어리티가 없고, 오히려 악이 있음을 상징합니다.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To thee is his desire, and thou rulest over him) 체어리티가 너와 함께 있기를 원하지만, 네가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기 때문에 함께 있을 없음을 상징합니다. If thou doest well, an upliftingsignifies that if thou art well disposed, thou hast charity; “if thou doest not well, sin lieth at the doorsignifies that if thou art not well disposed, thou hast no charity, but evil. To thee is his desire, and thou rulest over himsignifies that charity is desirous to be with thee, but cannot because thou desirest to rule over it.

 

 

해설

 

AC.361은 창4:7의 속뜻을 한 문장 안에 압축하여 제시하는 개요입니다. 그런데 이 절은 문자 그대로만 읽으면 상당히 익숙합니다. ‘선을 행하면 낯을 것이고, 선을 행하지 않으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으며, 죄가 너를 원하지만 너는 죄를 다스려야 한다는 일종의 도덕적 권면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가인과 아벨,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체어리티의 관계에 관한 말씀으로 읽습니다. 특히 마지막의 그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그를 다스릴지니라를 죄와 인간의 싸움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하지만,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기 때문에 함께할 없는 상태로 해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먼저 네가 선을 행하면에 해당하는 if thou doest well을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외적으로 착한 일을 한다는 뜻으로만 읽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설명은 if thou art well disposed’, 네가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면’, 더 정확하게는 내적 성향과 애정이 선을 향하고 있다면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다시 앞의 AC.346-358과 연결됩니다. 가인도 행위가 있었고, 제물도 드렸습니다. 문제는 외적 행위의 유무가 아니라 그 행위가 어떤 내적인 것에서 나오는가였습니다.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행위라야 살아 있는 행위였습니다. 그러므로 선을 행한다는 것은 단순히 외적으로 옳은 행동을 하는 것보다 그 행위의 내적 근원인 체어리티가 그 사람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이때 an uplifting’, 들어 올림은 바로 앞의 얼굴이 떨어졌다와 정반대입니다. AC.358에서 가인의 얼굴이 떨어짐은 체어리티가 떠남으로써 그의 내적인 것들이 변한 것을 뜻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들어 올림은 그 반대 상태입니다. 선한 애정이 있고, 체어리티가 있다면 얼굴이 다시 들립니다. 이것은 단순히 떳떳하게 고개를 있다는 심리적 표현을 넘어, 인간의 내적인 것들이 다시 올바른 질서에 놓이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창4:6-7에는 아주 아름다운 대조가 있습니다. 가인의 얼굴이 떨어졌습니다.그런데 주님께서는 네가 선을 행하면 들어 올림이 있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이미 떨어진 얼굴도 다시 들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인은 아직 돌이킬 수 있습니다. 체어리티로 돌아온다면 그의 내적인 것들도 회복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단순한 책망이 아니라 회복의 가능성을 열어 두시는 말씀입니다.

 

반대로 네가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는 체어리티가 없으면 악이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도 스베덴보리는 선과 악의 기준을 체어리티와 연결합니다. 체어리티가 없는 자리를 중립 상태가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악이 차지합니다. 이것은 가인에게 특히 중요합니다. 그는 신앙이 있기 때문에 체어리티는 없어도 된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그러한 중간지대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체어리티가 없으면서도 신앙만으로 안전하게 머물 수 있는 자리는 없습니다. 체어리티를 배제하면, 결국 악이 문에놓이게 됩니다.

 

이라는 표현도 이후 AC에서 더 자세히 풀리겠지만, 이 개요만 보더라도 아직 악이 완전히 실행된 상태라기보다 바로 들어오려는 경계에 있다는 느낌이 강합니다. 실제 이야기에서도 가인은 아직 아벨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분노가 일어났고 내적인 것들이 변했지만, 체어리티를 완전히 소멸시키는 행위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악이 문에있습니다. 바로 이 순간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AC.359-361은 주님께서 악이 완전히 행위가 되기 전에 인간에게 경고하시고 돌이킬 길을 열어 두시는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AC.361에서 가장 놀라운 부분은 마지막입니다. 개역개정의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를 우리는 자연스럽게 죄가 너를 지배하려 하지만 네가 죄를 이겨야 한다는 뜻으로 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속뜻에서 전혀 다른 장면을 봅니다. 여기서 는 체어리티를 가리키며, ‘그의 소원은 네게 있다는 것은 체어리티가 너와 함께 있기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앞의 아벨과 가인의 관계를 생각하면 매우 깊은 뜻이 됩니다. 아벨, 곧 체어리티는 가인, 곧 신앙을 버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다시 말하면 문제는 체어리티가 신앙을 배척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체어리티와 신앙은 본래 함께 있어야 하는 형제입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통하여 생명을 얻고, 체어리티는 신앙의 진리를 통하여 무엇이 선인지 알고 행합니다. 그러므로 정상적인 질서에서는 둘이 서로 분리될 이유가 없습니다.

 

문제는 이어지는 너는 그를 다스릴지니라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네가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기 때문에 체어리티가 너와 함께 있을 없다고 풀이합니다. 여기서 ’, 곧 가인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입니다. 이 신앙은 체어리티와 함께 있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를 자기 아래에 두려 합니다. ‘신앙이 먼저이고, 체어리티는 신앙에 종속되어야 한다’, ‘교리를 올바르게 믿는 것이 본질이고, 사랑과 삶은 그다음이다라는 질서입니다. 바로 이것이 가인의 문제입니다.

 

따라서 여기에는 단순한 분리보다 더 깊은 문제가 있습니다. 가인은 체어리티를 완전히 없애기 전에 먼저 그것을 지배하려 합니다. 체어리티를 신앙 아래에 놓고 신앙이 주인이 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이것은 질서의 전도입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지배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를 섬기고 체어리티로 인도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우리가 앞서 AC.342-344에서 보았듯이 신앙의 목적은 체어리티입니다. 목적이 수단을 지배해야지 수단이 목적을 지배해서는 안 됩니다.

 

이 점에서 AC.361은 앞으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을 이해하는 결정적인 열쇠가 됩니다. 아벨 살해는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는 사건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구별됩니다. 그다음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됩니다. 이어서 분리된 신앙에서 죽은 행위와 죽은 예배가 생깁니다. 체어리티가 받아들여지고 자기 예배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분노합니다. 그리고 이제 체어리티가 자신과 함께 있기를 원함에도 그것을 자기 아래에 두고 지배하려 합니다. 그 지배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다음 단계에서 마침내 아벨을 죽입니다. 즉 체어리티 자체를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라는 말씀은 생각보다 매우 애틋한 표현입니다. 아벨은 아직 가인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체어리티는 여전히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도 가인에게 말씀하시며, 돌아올 길을 열어 두십니다. 문제는 가인이 체어리티와 함께있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 위에서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둘러싼 창4 전체의 비극이 응축됩니다.

 

오늘날의 신앙생활에도 이 말씀은 매우 직접적입니다. 우리는 체어리티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얼마든지 가인의 질서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사랑도 중요하지요. 선행도 해야지요.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믿는 교리가 옳다는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사랑과 삶을 교리 아래의 부속물로 만들어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참된 질서는 그 반대입니다. 진리는 선을 위하여 있고, 신앙은 체어리티를 위하여 있으며, 우리가 아는 것은 결국 우리가 어떻게 사랑하고 살아갈 것인가를 섬기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AC.361의 핵심은 선을 행하라는 단순한 도덕 명령보다 훨씬 깊습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에게 본래의 질서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선한 애정을 회복하여 체어리티가 다시 있게 하라. 그러면 떨어진 얼굴이 들릴 것이다. 체어리티가 너와 함께 있기를 원하니 그것을 지배하려 하지 말라. 신앙이 체어리티 위에 서려 하지 말고, 다시 체어리티와 하나가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가인에게 주어진 마지막 회복의 초대처럼 읽힙니다. 아직 아벨은 살아 있습니다. 아직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아직 죄는 문에있을 뿐입니다. 아직 떨어진 얼굴은 다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때 여호와께서 말씀하십니다. 이후의 비극을 알고 있는 우리는 그래서 이 구절을 더욱 무겁게 읽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이 아벨을 죽이기 전에 이미 그에게 체어리티로 돌아갈 길을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AC.362, 창4:6,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든 가인의 교리’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창4:6) AC.362 여기서는 ‘가인’(Cain)이라 하는 신앙의 교리가 묘사됩니다. 이 교리는 신앙을 사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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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0, 창4: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 다시 확인되는 양심의 딕테이트’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창4:6) AC.360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Jehovah said unto Cain)가 양심이 말해 주었음을 뜻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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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4:6)

 

AC.360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Jehovah said unto Cain) 양심이 말해 주었음을 뜻한다는 것은 별도의 확증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와 비슷한 구절이 앞에서 이미 설명되었기 때문입니다. ThatJehovah said unto Cainmeans that conscience dictated, needs no confirmation, as a similar passage was explained above.

 

그들이 그날 바람이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3:8)

 

 

해설

 

AC.360은 한 문장뿐인 매우 짧은 글입니다. 그러나 바로 앞 AC.359에서 우리가 만난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 양심이 말해 주었다는 해석을 다시 한번 분명하게 확인해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별도의 성경 인용을 동원하여 입증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그 이유를 이와 비슷한 구절이 앞에서 이미 설명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AC.360의 핵심은 새로운 교리를 제시하는 데 있지 않고, AC.359의 해석을 앞에서 이미 세워 놓은 해석 원리에 연결하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우리가 AC.359 심화에서 살펴본 양심(conscience)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AC.360에서도 다시 conscience라는 말을 그대로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단순한 번역상의 우연이나 AC.359의 일회적인 표현으로 돌리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의도적으로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을 인간 안에서 양심이 말해 주는 과 연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근거로 가인은 홍수 고대교회의 영적 인간과 동일한 양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결론 내려서는 안 됩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은 퍼셉션에 의해 인도되었고, 홍수 후 고대교회의 영적 인간에게는 진리에 관한 지식을 기초로 양심이 형성된다는 큰 구별은 그대로 유지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AC.359-360conscience는 그 시대적 차이를 무시한 채 후대의 양심 개념을 그대로 가인에게 옮겨 놓기보다, 가인의 타락한 상태에서도 여전히 그의 내면에 잘못을 알리고 제지하는 내적 딕테이트가 있었다는 문맥에서 조심스럽게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오히려 AC.360에서 새롭게 눈여겨볼 부분은 이와 비슷한 구절이 앞에서 설명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에게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는 성경의 표현이 반드시 외부에서 음성으로 들려오는 말씀만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내적 상태에 따라 퍼셉션이나 내적 딕테이트, 그리고 후대 영적 인간에게는 양심을 통하여 선과 진리를 알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여호와께서 이르셨다는 표현을 만날 때에는 그때 그 사람 또는 교회의 내적 상태가 어떠했는지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이것은 가인의 현재 상태에서 특히 중요합니다. 가인은 이미 자기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분노했고, 그의 얼굴이 떨어졌습니다. 체어리티가 떠났고 내적인 것들이 변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아벨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때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즉 악이 이미 애정 안에서 움직이고 있지만 아직 완전히 행위로 굳어지기 전에, 그 악을 보게 하고 돌이킬 수 있도록 하는 내적 경고가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AC.359-360을 함께 읽으면 하나의 중요한 장면이 보입니다. 가인의 내적인 상태는 이미 나빠졌지만, 주님과의 모든 접점이 즉시 끊어진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여전히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이후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가인은 아무런 경고도 없이 갑자기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것이 아니라, 그 전에 자신의 상태를 돌아볼 기회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그 내적 경고를 따르지 않고 계속 자기 방향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할 때에는 시대적 차이를 구별하면서 그 원리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태고교회의 퍼셉션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홍수 후 영적 인간의 질서에 속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우리가 말씀에서 배우고 받아들인 선과 진리를 통하여 양심을 형성하시고, 그 양심을 통하여 우리의 애정과 생각과 행위를 돌아보게 하십니다. 특히 분노나 질투, 자기 의가 일어날 때 그 상태를 정당화하는 목소리만 듣지 않고, ‘이것이 정말 체어리티와 일치하는가?라고 묻게 하는 내적 경고에 귀 기울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AC.360은 짧기 때문에 별도의 심화가 필요한 글은 아니겠습니다. 오히려 이미 작성한 AC.359 심화 1, 양심은 홍수 고대교회부터인데 가인에게 양심이 말해 주었다고 하는가?’AC.360을 중요한 추가 근거로 반영하면 좋겠습니다. AC.359에서 한 번 사용된 conscienceAC.360에서 다시 확인된다는 사실은 그 심화의 문제의식을 더욱 분명하게 해 줍니다.

 

 

 

AC.361, 창4:6,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창4:6) AC.361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If thou doest well, an uplifting)에서 ‘낯을 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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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9, 창4: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다 - 양심을 통한 주님의 부르심’(AC.359-360)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And Jehovah said unto Cain, Why is thine anger kindled? And why are thy faces fallen? (창4:6) AC.35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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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2026/08/30)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1, ‘홀로 하나님께’, 91, ‘슬픈 마음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은 창4 절별 주석 그 두 번째, 3절로 5, AC 글 번호로는 346번에서 358번입니다. 먼저 본문니다.

 

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4:3-5)

 

제목은

 

가인과 아벨의 제물 - 무엇이 예배를 살아 있게 하는가?

 

이며, 다음은 오늘 범위인 AC.346-358 요약입니다.

 

AC.346-358 앞의 AC.338-345에서 밝혀진 가인 아벨, 사랑에서 분리되기 시작한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가 이제 실제 행위와 예배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보여 줍니다. 4:3-5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드리고, 아벨은 양의 새끼와 기름으로 드렸으며,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 말씀을 하나씩 풀면서, 스베덴보리는 예배의 참된 성질이 외적인 형식이나 제물 자체에 있지 않고 그것이 어떤 내적 사랑에서 나오는가에 있음을 밝힙니다. 그리고 차이가 마침내 가인의 분함 안색이 변함으로 이어지면서,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인간의 내적인 것들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보여 줍니다.

 

AC.346-347에서 먼저 주목할 것은 세월이 지난 후에, 원문으로는 날들의 끝에라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자연적인 시간이 흘렀다는 것만이 아니라, 앞에서 시작된 가인의 분리가 점차 진행되어 이제 결과가 행위와 예배로 나타날 단계에 이르렀음을 보여 줍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가인으로 표상된 교리가 처음부터 완전히 타락해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처음에는 단순함 있었고, 신앙도 후대처럼 사랑에서 멀리 분리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처음의 작은 구별이 점차 분리가 되고, 분리가 굳어져 하나의 교리와 삶의 방식이 됩니다. 이것은 참된 교리도 시간이 흐르면서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상태에 따라 본래의 사랑과 목적에서 멀어질 있다는 중요한 경고입니다.

 

따라서 가인의 변화는 갑작스러운 타락이라기보다 점진적인 과정입니다. 처음에는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자체로 하나의 으로 바라보았을 뿐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신앙은 사랑 없이도 독립적으로 존재할 있다고 여기게 되고, 마침내 신앙으로부터 행위와 예배까지 만들어 냅니다. 흐름은 내적 분리에서 행위로, 행위에서 예배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AC.346 가인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땅을 경작하고, 소산을 거두며, 심지어 그것을 여호와께 제물로 드립니다. 문제는 종교적 행위가 없다는 있지 않고, 행위와 예배를 살아 있게 하는 체어리티가 안에 없다는 있습니다.

 

AC.348 이것을 땅의 소산이라는 표현을 통해 더욱 깊이 설명합니다. 땅의 소산 여기서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를 뜻하며, 스베덴보리는 그러한 행위를 죽은 행위라고 부릅니다. 체어리티 없는 신앙도 얼마든지 외적인 행위를 만들어 있습니다. 예배하고, 봉사하고, 헌금하고, 종교적인 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오직 사람에게만 속하고 사람의 사랑과 결합되어 있지 않다면 영적인 생명은 없습니다. 그래서 12장의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들의 마음은 머니이다라는 말씀이 가인의 상태를 보여 줍니다. 입으로는 주님을 가까이하고 외적으로는 열매까지 맺는 것처럼 보이지만, 행위의 뿌리가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있습니다.

 

여기서 뿌리와 열매 관계가 매우 중요합니다. 행위는 사람의 내적인 사랑에서 나오는 열매입니다. 따라서 외적으로 무엇을 했느냐만으로 행위의 영적 성질을 판단할 없습니다. 같은 봉사와 헌신이라도 자기 의와 명예, 인정과 보상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것인지에 따라 전혀 다른 열매가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37:31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으리니 인용하면서 위로 열매를 맺는다 것은 체어리티로부터 행하는 이라고 설명합니다. 살아 있는 행위는 사람 안에 주님께서 심으신 선이 사람의 실제 삶과 쓰임으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AC.349 여기에서 걸음 나아가 외적인 예배와 내적인 예배의 관계를 밝힙니다. 외적인 것은 자체로 생명을 가진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들로부터 생명을 얻으며, 궁극적으로는 내적인 것들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제사나 기도나 찬송이나 예배라는 외적인 형식 자체가 예배를 살아 있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안에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가 있을 외적인 예배도 생명을 얻습니다. 이것이 가인의 제물이 외적으로는 여호와께 드리는 제물이면서도 받아들여질 없었던 이유입니다. 문제는 제물을 드렸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제물이 어디에서 나왔느냐에 있습니다.

 

AC.350-354에서는 이제 아벨의 제물이 가인의 제물과 대조됩니다. 아벨 체어리티를, 떼의 처음 , 양의 새끼 거룩한 것을, 기름진 천적인 자체를 나타내며,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주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벨의 제물이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주님께서 동물 제물을 곡식 제물보다 좋아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셨다 것은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과 체어리티에 기초한 모든 예배가 주님을 기쁘시게 했다는 뜻입니다. 제물의 종류가 아니라 예배의 내적 생명이 핵심입니다.

 

특히 양의 새끼 기름 아벨의 예배가 자기에게서 나온 선을 주님께 내놓는 예배가 아니라, 모든 거룩함과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하는 예배임을 보여 줍니다. 처음 주님께 속한다는 것은 선의 시작과 근원이 주님께 있다는 것이며, 기름 천적인 것을 나타낸다는 것은 선의 가장 내적인 생명이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참된 예배는 내가 주님께 무엇을 드리는가?보다 내가 드리는 모든 선한 것의 근원이 누구인가? 인정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아벨의 제물 안에는 바로 질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인과 아벨의 대비를 신앙 체어리티 이해해서는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문제 삼는 것은 신앙 자체가 아니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입니다. 아벨이 상징하는 체어리티는 신앙을 없애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에 생명을 줍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를 향하고,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따라서 제물의 대비는 신앙의 예배와 사랑의 예배라는 단순한 대립보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죽은 신앙의 예배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살아 있는 예배 대비로 이해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AC.355부터 말씀의 초점은 제물 자체에서 결과 가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옮겨갑니다.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라는 4:5 말씀에서 스베덴보리는 가인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뿐 아니라 그러한 분리가 가능하다고 인정하는 교리로까지 설명합니다. 처음에는 사랑과 신앙 사이에 작은 간격이 있었지만 이제는 신앙은 체어리티와 분리되어도 참된 신앙일 있다 생각 자체가 하나의 교리로 굳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교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가인에게 분노가 일어나고 그의 내적인 것들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AC.356 지금까지의 논리를 다시 확인합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며, 받아들여지지 않은 제물은 분리된 신앙에서 나온 예배입니다. 이것은 이후의 분함 안색의 변화 이해하기 위한 전제입니다. 잘못된 신앙과 예배의 질서는 단순히 머릿속의 교리 문제에 머물지 않습니다. 결국 인간의 애정과 내적인 것들을 변화시킵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 정당성을 주장하기 시작하면, 진리의 문제는 사랑의 문제로 깊어집니다.

 

AC.357 가인이 몹시 분하여 바로 변화를 보여 줍니다. 체어리티가 떠날 분노가 일어납니다. 이것은 단순히 가인이라는 개인이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기분이 상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자신이 인정받지 못하고 체어리티가 받아들여지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신앙이 본래 체어리티를 섬겨야 자기 위치를 잊고 스스로 주된 것이 되려 , 체어리티는 형제가 아니라 경쟁자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여기에서 이후 아벨을 죽이는 사건의 씨앗이 이미 드러납니다.

 

AC.358 안색이 변하니, 문자적으로는 얼굴이 떨어졌다 표현은 결과 인간의 내적인 것들이 변했다는 뜻입니다. 고대인들에게 얼굴은 단순한 외모가 아니라 내적인 것들을 나타냈습니다. 특히 태고교회 사람들은 속과 겉이 일치했기 때문에 마음의 애정과 상태가 얼굴에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얼굴이 떨어졌다는 것은 화난 표정 하나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떠남으로써 그의 내적인 상태 전체가 변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것과 반대되는 것이 말씀에서 여호와께서 얼굴을 들어 비추신다 표현입니다. 여호와의 얼굴 주님의 자비를 나타내며, 주님께서 얼굴을 들어 인간에게 비추신다는 것은 자비로 인간에게 체어리티를 주시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가인의 얼굴이 떨어짐 주님의 자비가 사라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변한 것은 주님이 아니라 가인입니다. 주님의 사랑과 자비는 변함없이 인간을 향하지만, 인간이 체어리티에서 떠나 자기 사랑과 분리된 신앙으로 향할 사랑을 받아들이는 그의 내적인 상태가 변합니다.

 

따라서 AC.346-358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는 외적인 것의 생명은 어디에서 오는가?입니다. 가인에게도 행위가 있었고 예배가 있었으며 제물이 있었습니다. 아벨에게도 행위와 예배와 제물이 있었습니다. 겉으로만 보면 여호와께 예배드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왔고, 다른 하나는 체어리티에서 나왔습니다. 외적인 행위와 예배는 자체로 살아 있지 않으며, 사람의 사랑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을 비로소 살아 있게 됩니다. 이것이 가인의 땅의 소산 아벨의 양의 새끼와 기름 가르는 본질적인 차이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신앙과 예배에도 매우 직접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예배드리는가?, 나는 봉사하는가?, 나는 말씀을 공부하고 가르치는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디에서 나오고 있는가? 물어야 합니다. 진리를 많이 알고 정확한 교리를 고백하며 종교적 활동을 열심히 하더라도 그것이 자기 의와 인정 욕구, 교리적 우월성, 다른 사람을 판단하려는 마음에서 나온다면 외적인 종교생활은 풍성해도 안의 생명은 약해질 있습니다. 반대로 작은 행위라도 주님에게서 받은 선을 이웃에게 돌려주는 체어리티에서 나온다면 그것은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는 살아 있는 행위가 됩니다.

 

하나 중요한 것은 가인의 타락 과정이 다시 한번 점진적이라는 사실입니다. AC.338에서 시작된 작은 분리가 AC.346-358 이르면 하나의 분명한 연쇄를 이루게 됩니다. 처음에는 신앙을 사랑에서 따로 바라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구별이 분리가 됩니다. 분리된 신앙에서 체어리티 없는 행위가 생깁니다. 행위에서 체어리티 없는 예배가 생깁니다. 예배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분노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마침내 인간의 내적인 것들 자체가 변합니다. 이후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은 갑자기 일어난 비극이 아니라 이미 과정 속에서 준비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AC.346-358 중심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물은 받으셨는가?라는 질문에 있지 않습니다. 깊은 질문은 무엇이 행위와 예배를 살아 있게 하는가?입니다. 답은 체어리티이며, 궁극적으로는 체어리티를 통하여 인간에게 유입되는 주님의 생명입니다.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에서 생명을 받고, 내적인 것은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습니다. 따라서 참된 예배는 외적인 종교 행위를 정교하게 만드는 데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과 선이 사람에서 사람으로 흘러나와 실제 삶과 예배를 하나로 만들 이루어집니다.

 

결국 AC.346-358 우리에게 남기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나는 무엇을 주님께 드리고 있는가?보다 내가 드리는 것은 어디에서 나오고 있는가?입니다. 가인도 제물을 드렸고 아벨도 제물을 드렸지만, 예배의 내적 근원은 달랐습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은 행위와 예배까지 만들어 있지만 안에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없다면 결국 죽은 열매가 됩니다. 반대로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행위와 예배는 모든 거룩함과 선이 주님께 속한다는 것을 인정하며, 주님에게서 받은 생명을 다시 이웃을 향한 선과 쓰임으로 나타냅니다. 이것이 아벨의 살아 있는 예배입니다.

 

따라서 이번 구간은 앞의 AC.338-345에서 시작된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 단계 깊게 보여 줍니다. 구간이 가인과 아벨은 무엇인가? 밝혔다면, AC.346-358 둘의 차이가 실제 삶과 예배에서 어떻게 드러나는가? 보여 줍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있으면 행위도 살아 있고 예배도 살아 있으며 인간의 얼굴, 내적인 것들에도 주님의 자비가 비칩니다. 그러나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면 교리와 행위와 예배의 외형은 남아 있어도 생명은 점차 사라지고, 마침내 인간의 내적인 것들까지 변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루시는 거듭남은 우리가 가진 신앙과 진리가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살아 있는 행위와 예배가 되게 하시는 과정이며, 그때 우리의 전체가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는 하나의 예배가 되어 갑니다.

 

 

이상 요약을 마치고, 아래는 AC 본문, 해설 및 심화입니다.

 

 

AC.346, 창4:3, ‘체어리티 없는 신앙에서도 행위와 예배는 나올 수 있습니다’(AC.346-349)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And at the end of days it came to pass that Cain brought of the fruit of the ground an offering to Jehovah. (창4:3) AC.346 ‘날들의 끝에’(end of days)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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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7, 창4:3, ‘세월이 지난 후에 - 신앙이 사랑에서 점점 멀어질 때’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4:3) AC.347 ‘세월이 지난 후에’(end of days, ‘날들의 끝에’)가 ‘시간이 흐른 뒤’를 뜻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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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8, 창4:3, 가인의 ‘땅의 소산’ - 체어리티 없는 죽은 행위와 살아 있는 열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4:3) AC.348 ‘땅의 소산’(fruit of the ground)이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를 뜻한다는 것은 이어지는 내용에서도 분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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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9, 창4:3, ‘제물이 예배를 뜻하는 이유 - 외적 예배는 내적인 것으로부터 생명을 얻습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4:3) AC.349 ‘제물’(offering)이 예배를 뜻한다는 것은 유대교회의 표상들에서 분명합니다. 그 교회에서는 온갖 종류의 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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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0, 창4:4, ‘왜 주님께서는 아벨의 제물을 받으셨는가 - 체어리티에 기초한 참된 예배’(AC.350-3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And Abel, he also brought of the firstlings of his flock, and of the fat thereof; and Jehovah looked to Abel, and to his off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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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1, 창4:4, ‘체어리티란? - 이웃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여기는 사랑’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1 ‘아벨’(Abel)이 체어리티를 상징한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했습니다. 체어리티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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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2, 창4:4, ‘왜 장자가 거룩했는가 - 모든 사랑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2 ‘양의 첫 새끼’(firstlings of the flock, ‘양 떼의 처음 난 것’)는 오직 주님께만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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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3, 창4:4, 아벨이 드린 ‘기름’은 무엇을 뜻하는가 - 사랑에 속한 천적인 것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3 ‘기름’(fat)은 천적인 것 자체를 상징하며, 이것 역시 주님께 속한 것입니다. 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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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4, 창4:4, ‘주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신 이유 - 체어리티에 기초한 예배’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4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셨다’(Jehovah looked to Abel, and to his offe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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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5, 창4:5,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한 이유 - 체어리티가 떠날 때 내면에 일어나는 변화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But to Cain and his offering he looked not; and Cain’s anger was kindled exceedingly, and his faces fell. (창4:5) AC.355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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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6, 창4:5, ‘가인의 제물을 돌아보지 않으신 이유 -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예배’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4:5) AC.356 ‘가인’(Cain)이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또는 그러한 분리를 인정하는 교리를 상징한다는 것과, ‘그의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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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7, 창4:5, ‘가인의 분노는 무엇을 뜻하는가 - 자기 사랑과 체어리티의 떠남’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4:5) AC.357 ‘가인의 분노가 타올랐다’(Cain’s anger was kindled)는 것이 체어리티가 떠났음을 상징한다는 것은, 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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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8, 창4:5, ‘가인의 안색이 변했다는 것은 무엇인가 - 얼굴에 나타나는 내적 상태’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4:5) AC.358 ‘안색이 변했다’(faces falling)는 것이 내적인 것들이 변했음을 상징한다는 것은 ‘얼굴’(face)과 얼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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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AC 리딩 본문 전체는 여기까지이고, 이 가운데 필수 리딩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AC.349, 창4:3, ‘제물이 예배를 뜻하는 이유 - 외적 예배는 내적인 것으로부터 생명을 얻습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4:3) AC.349 ‘제물’(offering)이 예배를 뜻한다는 것은 유대교회의 표상들에서 분명합니다. 그 교회에서는 온갖 종류의 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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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8, 창4:5, ‘가인의 안색이 변했다는 것은 무엇인가 - 얼굴에 나타나는 내적 상태’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4:5) AC.358 ‘안색이 변했다’(faces falling)는 것이 내적인 것들이 변했음을 상징한다는 것은 ‘얼굴’(face)과 얼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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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8, 심화 1, ‘여호와께서 그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신다는 것은 무엇인가 - 주님의 얼굴과

AC.358.심화 1. ‘여호와께서 그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신다는 것은 무엇인가 - 주님의 얼굴과 체어리티’(민6:26; 시4: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민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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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08-30(D1)

 

2666, 3, 창4.3, 2026-08-30(D1)-주일예배(창4,3-5, AC.346-358), ‘가인과 아벨의 제물 - 무엇이 예배를 살아 있게 하는가’.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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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8/23, 창4:1-2, AC.338-345), ‘가인과 아벨, 사랑에서 분리되기 시작한 신앙과 체어리티

※ 오늘(2026/08/23)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0, ‘전능왕 오셔서’, 찬90, ‘주 예수 내가 알기 전’입니다. 오늘부터 창4 절별 주석을 시작, 오늘은 그 첫 번째, 1절로 2절, AC 글 번호로는 338번에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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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이번 설교에서 가장 먼저 귀하게 볼 수 있는 것은 ‘교회의 본질과 비본질을 구별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입니다. 박요한 목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복음을 본질로, 조직과 제도와 건물과 직분 같은 것은 비본질로 구분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이 구별은 상당히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교회를 단순히 외적인 조직이나 제도로 보지 않고, 사람 안에서 선과 진리가 결합되어 주님의 생명이 받아들여지는 상태와 깊이 연결하여 봅니다. 그러므로 건물, 직제, 교단, 예배 형식 등은 교회를 위한 외적 그릇일 수는 있어도, 그 자체가 교회의 생명은 아닙니다.

 

누가복음의 ‘ 포도주와 가죽 부대’ 비유를 박요한 목사가 교회의 제도와 형식의 갱신 문제에 적용한 것도 나름의 설교적 힘이 있습니다. 오래된 제도가 본래의 목적을 잃고 스스로 절대화될 때, 오히려 새롭게 역사하는 생명을 억압할 수 있다는 지적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외적인 것은 반드시 내적인 것을 섬겨야 합니다. 외적 형식이 내적 생명을 담는 그릇으로 기능하면 좋은 것이지만, 그릇 자체가 목적이 되는 순간 질서가 뒤집힙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가죽 부대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 가죽 부대가 포도주를 담고 있는가’입니다.

 

이 점에서 박요한 목사가 직분을 ‘계급’으로 변질시키는 것을 비판한 대목은 의미가 있습니다. 장로, 권사, 안수집사 등의 직분이 본래는 섬김을 위한 기능이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명예와 권세와 특권의 상징으로 변할 수 있다는 지적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모든 직분과 지위는 ‘용도(use)’를 위해 존재합니다. 직분 자체가 사람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그 직분을 통해 얼마나 선한 용도를 수행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따라서 직분이 ‘나는 이만큼 높은 사람이다’라는 자기 확장의 수단이 된다면, 외적으로는 교회 직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내적으로는 proprium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갈 수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균형은 필요합니다. 직분이나 제도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닙니다. 계급화될 수 있다는 이유로 모든 구조를 제거하는 것이 곧 영적으로 더 높은 상태를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제도가 없어도 사람의 자기 사랑과 지배욕은 얼마든지 다른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제도가 없을수록 특정 개인의 영향력이 더 커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직분이 없는 교회’라는 형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직분이 있든 없든 권한을 자기 영광이 아니라 용도를 위해 사용하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구조의 유무보다 그 구조를 움직이는 사랑의 성질을 더 중요하게 봅니다.

 

박요한 목사가 ‘교회 주인은 하나님’이라고 강조한 것도 핵심을 잘 짚은 부분입니다. 교회의 주인이 목사도, 장로도, 특정 헌금자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교회관과도 잘 맞습니다. 참된 교회는 주님에게 속하며, 사람은 그 안에서 맡겨진 용도를 수행할 뿐입니다. 어느 한 사람이 교회를 ‘ 교회’, ‘ 성도’, ‘ 조직’으로 소유하려는 순간, 주님의 것이 인간의 proprium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박요한 목사는 전통 교회의 문제를 주로 장로 중심 구조나 당회 구조에서 찾습니다. 이 부분도 조금 더 넓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 정치의 문제는 장로교의 당회라는 특정 제도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가 독점적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교회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날 수 있고, 회중제가 강한 교회에서는 다수의 여론이 또 다른 권력이 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는 정치가 없는 교회’라고 선언한 공동체에서도 비공식적인 영향력과 인간관계가 정치처럼 작동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치가 없는 교회를 만드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권력을 사랑하지 않는 교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임직헌금에 대한 비판도 이 설교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박요한 목사는 장로나 권사, 안수집사를 세우면서 상당한 금액의 임직예물을 요구하거나 자발적 감사헌금이라는 이름으로 사실상 경쟁을 유도하는 관행을 문제 삼습니다. 이 지적 역시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깊이 생각할 만합니다. 돈과 영적 지위를 연결하면, 외적 재산이 내적 가치와 섞이기 쉽습니다. 헌금 자체는 선한 용도가 될 수 있지만, ‘내가 이만큼 냈으므로 이만큼 인정받아야 한다’는 마음이 들어오면 그 헌금은 오히려 proprium을 강화하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박요한 목사가 ‘헌금을 많이 하지 말라’고까지 말하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입니다. 그 취지는 헌금 액수와 영적 권위를 연결하지 말라는 데 있습니다. 이 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시 핵심은 액수 자체가 아니라 동기입니다. 적게 드린다고 자동으로 겸손한 것도 아니고, 많이 드린다고 자동으로 교만한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행위의 외형보다 그 행위를 움직이는 사랑을 봅니다. 많은 헌금을 하면서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오직 선한 용도를 위해 할 수 있고, 반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나는 제도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사람’이라는 자기 의를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헌금 문제에서도 결국 중요한 것은 ‘얼마를 드렸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사랑하여 드렸는가’입니다.

 

박요한 목사가 주일 예배와 교회 활동을 다루는 방식도 흥미롭습니다. 그는 지나치게 많은 교회 활동이 오히려 사람을 지치게 하고, 예배의 본질을 잃게 만들 수 있다고 봅니다. 하루 종일 교회에서 봉사하고 정작 예배 시간에 졸게 되는 상황을 예로 들며 ‘예배가 중심’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외적 활동이 내적 목적을 압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설교 전체의 논리와 일관됩니다. 교회 봉사 자체가 주님과의 관계를 깊게 하는 용도가 아니라 ‘나는 이렇게 열심히 하는 사람이다’라는 자기 의를 만드는 수단이 된다면, 외적 종교 활동이 오히려 내적 신앙을 가릴 수도 있습니다.

 

특히 시아버지의 중요한 가족 행사보다 제자훈련 참석을 더 높이 평가하는 문화를 비판한 대목은 체어리티의 관점에서 생각할 만합니다. 신앙생활은 교회 프로그램에 많이 참석하는 것으로만 측정할 수 없습니다. 가족에 대한 책임, 이웃에 대한 성실함, 직장에서의 정직함 역시 모두 신앙이 삶으로 나타나는 자리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예배는 성전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에서 이루어집니다. 주일의 예배가 삶을 바꾸지 못하고, 오히려 가족을 무시하거나 일상의 의무를 경시하게 만든다면 외적인 종교성과 실제 체어리티 사이에 균열이 생긴 것입니다.

 

다만 박요한 목사가 ‘주일 예배도 번씩 빠지는 것이 좋다’, ‘오기 싫으면 유튜브로 드려도 된다’고 말하는 부분은 조금 더 신중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외적 예배를 절대화하지 말자는 취지는 이해할 수 있지만, 외적 예배를 가볍게 여기게 되는 반대편의 위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외적 예배를 무의미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외적 예배는 내적 예배를 담고 유지하는 중요한 그릇입니다. 문제는 형식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형식 안에 생명을 넣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당에 반드시 나와야 구원받는다’는 식의 압박도 잘못이지만, ‘마음만 있으면 형식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방향으로 가는 것도 균형을 잃을 수 있습니다.

 

이 설교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 가운데 하나는 ‘유튜브가 교회다’라는 선언입니다. 박요한 목사는 온라인으로 실시간 예배를 드리는 사람도 현장 참석자와 동일하게 성도로 인정하며, 유튜브를 오프라인 교회로 끌어오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오늘의 교회 형태 변화 속에서 상당히 새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교회는 반드시 특정 장소에 모여야 하는가?’ ‘ 공간에 있지 않아도 교회적 공동체가 가능한가?’라는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교회의 본질은 장소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주님을 향한 신앙과 체어리티가 사람 안에 있고, 그 사람들이 진리와 선 안에서 연결될 때 교회가 형성됩니다. 따라서 건물이 없다고 교회가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이 점에서 박요한 목사의 ‘예배당 건물이 교회가 아니다’, ‘내가 교회다’라는 강조에는 상당한 진실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의 ‘너희는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말씀을 사람 자신에게 적용한 것도 방향상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교회다’라는 말 역시 조금 더 정확히 해야 합니다. 개인 한 사람이 독립적으로 교회 전체가 되는 것이라기보다, 주님이 그 사람 안에서 선과 진리를 결합시키실 때 그 사람 안에 교회의 형상이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이 서로 연결될 때 더 넓은 의미의 교회가 형성됩니다. 그러므로 ‘건물이 교회가 아니다’에서 멈추지 않고, ‘그렇다면 안에 정말 교회가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가야 합니다. 내 안에서 진리와 선이 결합되어 있는가, 신앙과 체어리티가 하나 되어 있는가, 주님이 중심인가, 아니면 나 자신이 중심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박요한 목사가 ‘오무’를 강조하지만, 사실 더 중요한 것은 뒤이어 제시하는 ‘이유’입니다. 무엇을 없앴는가보다 무엇이 살아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계급이 없고, 정치가 없고, 임직헌금이 없고, 건물이 없어도, 그 안에 주님의 생명과 체어리티가 없다면 그것만으로 참된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직분과 건물이 있고 제도가 있어도, 그것들이 주님의 선과 진리를 섬기고 있다면 얼마든지 좋은 외적 질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이번 설교의 ‘오무’는 목적이라기보다 정리 작업에 가깝습니다. 낡은 가죽 부대의 불필요한 부분을 걷어내는 일입니다. 그러나 비워낸 그 자리에 무엇이 들어오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박요한 목사는 그것을 ‘십자가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십자가를 단순히 교리적으로 믿는 데서 그치지 않고 주님을 따르는 삶, 곧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오는 악을 물리치고 선을 행하는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설교에서 바울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는 구절을 강조하는 부분은 복음주의적 설교의 중심을 잘 보여줍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십자가를 ‘대속 교리의 문장’으로만 축소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주님께서 지옥들과 싸워 이기시고 인성을 영화롭게 하신 완성의 사건이며, 동시에 사람이 주님을 따를 때 겪는 시험과 자기 부인의 삶을 보여주는 표상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오직 십자가’라는 말이 참으로 깊어지려면 ‘십자가를 믿는다’에서 ‘십자가의 길을 따른다’로 나아가야 합니다.

 

설교 후반의 ‘목사가 노동하는 교회’라는 강조도 스베덴보리의 ‘용도’ 개념과 접점이 있습니다. 박요한 목사는 자신의 육체노동이 영적 건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말합니다. 노동을 통해 현실 감각을 잃지 않고, 게으름을 피하며, 삶의 현장에서 성도들의 어려움을 더 이해하게 된다는 취지입니다. 이것은 노동 그 자체를 영적 수행으로 절대화할 필요는 없지만, 선한 용도를 성실하게 수행하는 삶이 영적 성장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습니다.

 

다만 설교에서는 질병이나 경제적 어려움 같은 고난을 ‘메기’에 비유하면서 영혼을 깨우는 축복의 도구라고 설명합니다. 이 역시 일부 사람에게는 실제로 그렇게 작용할 수 있습니다. 어려움을 통해 자기 삶을 돌아보고 주님께 돌아오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질병과 고난을 ‘하나님이 영적 각성을 위해 보내신 도구’라고 단정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섭리론에서 주님은 악이나 고통 자체를 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다만 이미 발생한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도 가능한 선을 끌어내시고, 그것을 사람이 거듭나는 방향으로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이 고통을 보내셨다’보다 ‘주님은 고통 속에서도 선을 이루신다’고 표현하는 편이 더 적절합니다.

 

이와 비슷하게 설교 초반에서 스트레스와 근심이 당뇨, 비만, 암 등의 가장 큰 원인인 것처럼 말하는 부분도 설교의 영적 주제와는 별도로 신중해야 합니다. 육체 질병은 여러 복합적인 원인을 갖기 때문에 영적 상태나 심리적 스트레스 하나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비본질에 매달리다가 삶의 중요한 것을 잃을 있다’는 설교적 비유는 이해할 수 있지만, 의학적 인과관계까지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런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 해설에서도 설교의 중심 진리와 주변의 과도한 표현을 구별해서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번 설교에서 제가 가장 중요하게 보고 싶은 대목은 ‘묵은 것을 얼마나 벗어내느냐’라는 표현입니다. 박요한 목사는 신앙생활을 오래할수록 오히려 익숙한 형식에 갇힐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과도 깊이 연결할 수 있습니다. 거듭남은 한 번의 결단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낡은 proprium의 습관과 사랑을 벗어가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 가죽 부대’는 새 예배 형식이나 새 교회 모델보다 먼저 ‘새로워지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설교 전체를 조금 더 깊게 뒤집어 볼 수 있습니다. 전통 교회의 장로 제도, 당회, 임직헌금, 건물 중심주의를 낡은 가죽 부대라고 비판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런 것을 없앤 새로운 교회를 한다’는 생각 자체도 시간이 흐르면 또 하나의 묵은 포도주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교회와 다르다’, ‘우리는 본질적이다’, ‘우리는 제도를 벗어났다’는 자의식이 굳어지는 순간, 새로움을 추구하던 개혁 자체가 새로운 제도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낡은 가죽 부대는 언제나 ‘저쪽 교회’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새롭게 시작한 교회도 내일이면 낡을 수 있고, 제도를 비판하는 사람도 자기 방식에 집착하면 새로운 제도주의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개혁은 외적 형식을 한 번 바꾸는 사건이 아니라, 주님의 진리 앞에서 계속 자기 자신을 수정하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자면, 새 포도주는 주님에게서 오는 새로운 생명과 진리이고, 새 가죽 부대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새로워진 사람의 마음과 삶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때 핵심은 교회 제도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유연해지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옳다고 믿었던 것을 주님의 진리 앞에서 다시 살펴볼 수 있는가, 내 전통과 경험보다 주님의 뜻을 앞세울 수 있는가, 내가 가진 지위와 익숙함을 내려놓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박요한 목사 자신에게도, 설교를 듣는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장로들이 문제다’, ‘전통 교회가 문제다’, ‘건물 교회가 문제다’라고 말하는 순간, 다시 나단의 ‘당신이 사람이라’는 말씀을 떠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비판하는 그 제도주의와 자기 의가 내 안에는 없는가? ‘나는 개혁적이다’라는 자기 의는 없는가? ‘나는 본질을 안다’는 교만은 없는가? 개혁의 영은 남의 낡음을 벗겨내는 것이 아니라 먼저 자기 안의 낡음을 벗겨내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이번 설교의 중심 문장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다시 표현한다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참된 가죽 부대는 새로운 제도나 새로운 교회 모델이 아니라, 주님 앞에서 계속 자기 proprium 벗어내고 새롭게 되는 사람이며, 참된 교회 개혁은 외적 형식을 제거하는 데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안에 신앙과 체어리티가 다시 살아나게 하는 데서 완성됩니다.

 

박요한 목사가 마지막에 ‘내가 교회다’라고 말한 것도 바로 이런 방향에서 읽으면 더 깊어집니다. ‘예배당이 교회가 아니다’라는 부정적인 선언보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교회인가?’라는 질문이 더 중요합니다. 내 안에 주님이 거하시는가, 내 안에 주님의 진리가 있는가, 그 진리가 체어리티의 삶으로 나타나는가, 내 삶이 다른 사람에게 선한 용도가 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건물이 없어도 교회가 아닐 수 있고, 이것이 있다면 작은 공간에서도 참된 교회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결국 이번 설교에서 가장 귀한 부분은 ‘무엇을 없앴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남기려 하는가’입니다. 조직과 제도와 건물은 모두 바뀔 수 있습니다. 오늘의 새 가죽 부대도 내일은 낡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과 진리는 언제나 새롭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과제는 끊임없이 새로운 외형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새 생명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사람 자신이 계속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오무를 추구하는 교회’라는 표어도 결국 ‘오무’(五無)보다 ‘일유(一有)가 더 중요해집니다. 무엇을 다섯 가지 없앴는가보다, 그 모든 것을 벗겨낸 뒤 ‘주님이 계시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계신다는 것은 단지 입술로 예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선과 진리가 실제 삶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교회의 가장 깊은 자리이고, 이번 설교가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지점이라고 봅니다.

 

 

 

SY.89, 박요한 목사, ‘극우 정치병자 소굴이 된 한국교회의 비참한 실상’ (20260710)

※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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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도올은 강의 시작부터 종교가 무엇인지를 아주 단호하게 규정합니다. 하나님을 믿어서 죽은 뒤 천당에 가려는 신앙을 ‘도피세적’이라고 비판하면서, 종교의 목적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진리와 예수의 말씀대로 살고, 사랑을 베풀고, 이웃을 보살피며, 아름다운 윤리가 실현되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점에서는 기독교든 불교든 유교든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더 나아가 종교란 인간에게 어떤 별도의 초월적 세계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깨달음과 각성’을 통해 삶의 자세를 변화시키는 메시지라고 규정합니다.

 

이 대목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참 묘합니다. 상당히 가까이 다가왔다가 결정적인 지점에서 갈라지기 때문입니다. 우선 ‘죽어서 천국 가는 ’만을 신앙의 목적으로 삼고 현재의 삶을 소홀히 하는 태도에 대한 비판은 스베덴보리에게도 상당 부분 통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은 죽은 뒤 갑자기 들어가는 보상 장소가 아닙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자신의 지배적 사랑을 형성하고, 그 사랑에 따라 사후 자신의 영원한 상태가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나는 예수를 믿으니 죽으면 천국에 간다’고 고백하면서 실제 삶에서는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자기애와 세상 사랑에 따라 산다면, 그 고백 자체가 천국을 만들어 주지 않습니다.

 

특히 도올이 말하는 ‘사랑을 베풀고 이웃을 보살피며 아름다운 윤리가 실현되는 공동체’라는 표현은 외형만 놓고 보면 스베덴보리의 체어리티와 상당히 가까워 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종교를 단순한 신조의 동의로 보지 않습니다. 참된 신앙은 삶 안에서 나타나야 하며, 선을 행하는 삶과 분리된 신앙은 살아 있는 신앙이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는 도올이 한국 기독교를 향해 던지는 질문을 굳이 방어적으로 거부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당신의 신앙이 실제 이웃을 향한 삶으로 나타나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기독교가 계속 들어야 할 질문입니다.

 

그러나 도올이 ‘기독교라고 말한들, 불교라고 말한들, 유교라고 말한들 똑같다’고 넘어가는 순간 스베덴보리와는 갈라집니다. 선한 삶이 중요하다고 해서 모든 종교의 진리가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선과 진리는 서로 결합해야 합니다. 선만 있고 진리가 필요 없다거나, 어떤 진리를 믿든 착하게 살기만 하면 모두 같다는 식으로 갈 수 없습니다. 더욱이 주님은 단순히 훌륭한 윤리적 스승 가운데 한 분이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인성을 입고 오신 분이라는 것이 스베덴보리 신학의 중심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아주 미세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도올에게 예수의 말씀은 인간을 ‘깨닫게 하고 변화시키는 위대한 말씀’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말씀은 인간에게 단순히 깨달음을 제공하는 가르침을 넘어 ‘생명을 주는 신적 진리’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내면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면서 거듭나는 것입니다.

 

이 차이는 잠시 뒤 도올이 사용하는 ‘트랜스포메이션(transformation)이라는 말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도올은 도마복음의 말씀을 올바르게 해석하면 ‘나라는 존재가 트랜스포메이션을 일으킨다’고 말하고, 그것을 불교의 ‘대각’이나 ‘해탈’과 연결합니다. 스베덴보리라면 여기서 ‘변화’라는 현상 자체에는 동의하면서도 그 변화의 근원을 완전히 다르게 설명할 것입니다. 인간이 말씀을 깨달아 스스로 높은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의 속 사람을 통해 겉 사람을 질서 안으로 가져오시는 과정, 곧 ‘거듭남’입니다.

 

바로 여기서 이번 강의의 가장 흥미로운 대목이 등장합니다. 도올은 도마복음의 서문과 첫 번째 말씀 사이에 있는 ‘그리고 그가 말하였다’라는 표현을 세밀하게 분석합니다. 여기서 ‘’가 예수일 수도 있고 기록자인 도마일 수도 있다고 본 뒤, 결국 자신은 도마라고 해석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유명한 문장, 곧 ‘ 말씀들의 해석을 발견하는 자는 누구든지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를 도마가 독자에게 제시한 일종의 해석 원리로 봅니다.

 

그런데 여기서 도올이 강조하는 ‘해석을 발견한다’는 표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도올은 단순히 교수에게 배우거나 책에서 뜻을 찾아내는 것이 해석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ChatGPT에게 물어서 얻는 해석 같은 것도 아니라며, ‘너의 한가운데서 그것을 느껴야 한다’고 합니다. 말씀의 의미가 삶 속에서 발견되어야 하고, 그 발견이 자기 존재의 변화를 일으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상당히 귀담아들을 만합니다. 말씀을 지식으로만 아는 것과 그 말씀이 삶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은 분명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말씀의 진리를 단순히 기억 속에 저장하는 것을 신앙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진리가 의지 안으로 들어가 삶이 될 때 비로소 사람의 것이 됩니다. 머릿속에 알고 있는 진리와 사랑하여 행하는 진리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스베덴보리는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말씀의 해석을 발견한다’는 것이 단순히 독자의 실존적 깨달음에서 생겨나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 자체 안에 이미 신적 질서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문자적 의미 안에 영적, 천적 의미가 있으며, 그것들은 인간이 자유롭게 만들어 내는 의미가 아니라 주님께서 말씀 안에 두신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참된 해석은 ‘ 삶에서 나에게 어떤 의미가 되었는가?’만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삶에서 발견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그 발견은 말씀 안에 실제로 존재하는 신적 진리에 의해 인도되어야 합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렌즈’ 자체에도 중요한 경계가 됩니다. 우리 역시 어떤 문장을 읽고 스베덴보리를 가져다가 자유롭게 의미를 붙이는 작업을 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그 본문이 무엇을 말하는지 보고,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밝힌 상응과 속뜻이 무엇인지 살피고, 그 다음 그것이 우리의 삶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해석’이 어느 순간 본문을 듣는 일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본문에 집어넣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도올은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를 매우 독특하게 해석합니다. 일반적인 기독교식으로 ‘영생을 얻는다’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도마복음에는 애초에 ‘영혼’이라는 카테고리가 없다고 말합니다. 대신 ‘맛본다’는 행위 자체에 주목합니다. 맛보는 것은 죽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이 하는 행위이므로, ‘죽음을 맛본다’는 것은 사후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으면서 죽음을 먹고 있는 상태’를 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올은 오염된 음식을 먹는 비유를 듭니다. 먹는 행위 자체는 생명을 유지하는 행위인데, 먹는 음식에 독이 들어 있으면 그 사람은 살아가기 위해 먹으면서 오히려 죽음을 먹게 됩니다. 그리고 이 비유를 한국 기독교에 적용합니다.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고 신앙생활을 하는데, 잘못된 성경 해석과 죄책감, 협박과 겁박의 종교를 계속 받아들이면서 오히려 인간이 정신적으로 죽어 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도올은 ‘죽음을 맛본다’고 해석합니다.

 

여기에는 도올 특유의 상당히 자유로운 해석이 들어 있습니다. ‘죽음을 맛보다’라는 고대 표현 자체를 이렇게까지 현대 한국 기독교의 정신적 경직과 직접 연결하는 것은 본문 자체에서 곧바로 나오는 결론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특히 후반에 특정 정치적 집단까지 연결하여 ‘성경을 공부할수록 뇌가 경색되고 특정 정치세력이 된다’는 식으로 말하는 순간에는 신학적 해석과 도올 자신의 정치·사회적 평가가 뒤섞입니다. 이 부분은 구별해서 받아들여야 합니다. 특정 정치적 성향을 가졌다는 사실 자체를 사람의 영적 죽음의 증거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반대편 정치 성향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해야 할 원칙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살아 있으면서 죽음을 먹는다’는 발상 자체는 스베덴보리의 세계에서는 전혀 낯설지 않습니다. 오히려 상당히 깊은 접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생명’과 ‘죽음’은 단순히 육체가 살아 있느냐 죽었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생명이며, 자기애와 세상 사랑에서 비롯되는 악과 거짓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영적 죽음입니다. 따라서 사람은 육체적으로 멀쩡히 살아 있으면서도 영적으로는 죽음에 속한 것을 계속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육체의 죽음을 맞더라도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 안에 있다면 실제로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도올과 스베덴보리는 아주 가까이 왔다가 다시 갈라집니다. 도올은 ‘아무도 죽음을 체험할 없다. 인간은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살아 있다’고 말합니다. 육체적 경험의 차원에서는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 경계 너머를 이야기합니다. 육체의 죽음은 인간 존재의 소멸이 아니라 영으로서 삶이 계속되는 전환입니다. 사람은 육체를 벗은 뒤에도 보고, 듣고, 생각하고, 사랑하고, 다른 영들과 관계하며 살아갑니다. 따라서 도올이 ‘영혼’과 사후세계의 문제를 제거하고 ‘죽음을 맛보지 않는다’를 오직 현세적 삶의 질로 가져온다면, 스베덴보리는 그 현세적 의미를 인정하면서도 거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라면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를 훨씬 급진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은 사람에게 육체의 죽음은 존재의 종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람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는 말씀도 이런 관점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육체가 죽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악과 거짓이라는 영적 죽음에 빠지지 않고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 안에 거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도올이 ‘영생으로 해석하면 된다’고 밀어낸 바로 그 자리에서 스베덴보리는 ‘영생’이라는 말을 훨씬 더 깊게 되찾습니다. 영생은 ‘죽은 다음 끝없이 오래 사는 ’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지금 이 순간부터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 사는 상태이며, 육체의 죽음 이후에도 그 상태가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도올이 처음 비판한 ‘천당 가려고 예수 믿는 신앙’과도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천국을 미래의 보상 상품처럼 이해하지 않습니다. 천국은 먼저 사람 안에 형성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선과 진리가 사람의 의지와 이해 안에 받아들여지고, 그것이 실제 삶에서 체어리티로 나타날 때 사람 안에 천국의 질서가 형성됩니다. 죽음은 그 사람이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뀌는 순간이 아니라, 이미 형성되어 있던 내적 상태가 외적으로 드러나는 문턱입니다.

 

그러므로 도올이 ‘죽어서 천국 가려고 하지 말고 지금 땅에서 사랑하며 살아라’고 말한다면, 스베덴보리는 상당 부분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곧이어 중요한 말을 덧붙일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렇게 살아 형성된 사랑이 죽음 이후에도 당신의 삶이 된다.’ 현세와 내세는 서로 경쟁하는 두 세계가 아니라 하나의 연속선 위에 있습니다.

 

이번 강의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은 그래서 도올이 너무 좋은 문제를 제기하고도 그것을 결국 인간의 ‘깨달음’으로 수렴시킨다는 데 있습니다. ‘해석을 발견하라 삶에서 깨달아라 인격의 트랜스포메이션을 이루어라 죽음을 맛보지 말라.’ 아름다운 구조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여기에는 한 분이 빠져 있습니다.

 

주님’입니다.

 

거듭남은 자기계발의 최고 단계가 아닙니다. 인간이 말씀의 비밀을 깨달아서 스스로 고양되는 과정도 아닙니다. 인간은 자신의 proprium으로부터 자신을 거듭나게 할 수 없습니다. 선도 진리도 생명도 인간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흘러들어옵니다.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그 유입을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악을 죄로 알고 피하며, 배운 진리를 실제 삶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변화의 주체는 궁극적으로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도올의 ‘해석을 발견하라’는 말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해 조금 바꾸어 보면 이렇게 될 것 같습니다. ‘말씀의 속뜻을 알고 거기서 끝나지 말라. 진리가 안으로 들어오게 하라. 그러나 진리를 발견한 내가 나를 변화시킨다고 생각하지 말라. 진리를 통하여 나를 변화시키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도마복음과 정경 복음서 사이의 차이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도올은 도마복음이 서술을 제거하고 ‘살아 있는 예수의 말씀’만 남겼기 때문에 더 순결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반드시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과 주님의 ‘행하심’을 떼어 놓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무엇을 말씀하셨는지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광야에서 시험받으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제자들과 함께하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고, 십자가의 마지막 시험을 통과하시고, 인성을 영화롭게 하신 그 모든 과정 역시 계시입니다.

 

그러므로 도마복음의 어록에서 귀한 것을 발견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서사가 없기 때문에 순결하다’는 결론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오히려 뒤집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서사가 불순물을 첨가한 것이 아니라, 어쩌면 그 ‘서사’ 안에 주님의 구속과 영화라는 가장 깊은 아르카나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강의를 들으면서 저는 도올에게서 상당히 좋은 질문 하나를 받게 됩니다. ‘말씀을 읽으면서 나는 생명을 먹고 있는가, 죽음을 먹고 있는가?’ 이것은 충분히 간직할 만한 질문입니다. 성경을 많이 알고, 교리를 많이 알고, 심지어 스베덴보리를 많이 읽는 것 자체가 우리를 천국적으로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 때문에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자신을 높이며 자기 지성을 자랑하게 된다면, 진리의 지식조차 proprium을 강화하는 재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질문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도올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생명을 주는 것은 ‘내가 발견한 탁월한 해석’이 아닙니다. 생명은 오직 주님에게서 옵니다. 말씀의 속뜻도 결국 우리를 지적으로 놀라게 하기 위해 열린 것이 아니라, 우리를 주님께 연결하고 우리의 사랑과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강의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담는다면 저는 이렇게 정리하고 싶습니다.

 

도올은 말씀의 해석을 삶에서 발견함으로써 죽음을 맛보지 않는 인간을 말하지만, 스베덴보리는 말씀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아 거듭나는 인간을 말합니다.

 

둘 사이에는 상당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둘 다 죽은 교리를 경계하고, 삶 없는 신앙을 경계하며, 말씀을 실제 삶으로 가져오려고 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중심은 다릅니다. 한쪽에는 ‘깨닫고 변화하는 인간’이 있고, 다른 쪽에는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도올을 보는 일은 바로 그 차이를 발견하면서도, 도올에게서 발견되는 진리의 조각을 버리지 않는 일이겠습니다. 그의 모든 말을 받아들일 필요도 없고, 그의 몇몇 과장 때문에 모든 말을 버릴 필요도 없습니다. ‘말씀을 삶에서 발견하라’, ‘신앙이 사랑과 이웃 돌봄으로 나타나야 한다’, ‘성경을 읽으면서 오히려 사람이 굳어질 수도 있다’는 그의 경고는 충분히 들을 만합니다. 다만 그 모든 것을 받아 들고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 묻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생명은 어디에서 오는가?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일관됩니다.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리고 아마 그 한마디가 이번 도올 강의와 ‘스베덴보리의 렌즈’ 사이의 가장 깊은 접점이면서, 동시에 가장 결정적인 갈림길일 것입니다.

 

 

 

SY.88, 도올 김용옥, ‘예수가 역사적으로 진짜 있었던 사람인가? - 바울의 레토릭은 근본적으로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 강의에서 도올 김용옥이 처음 던지는 질문은 매우 근본적입니다. ‘예수는 정말 살았는가?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사람인가?’입니다. 도올은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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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이번 설교는 사무엘하 121절로 6절, 곧 나단이 다윗에게 가난한 사람의 암양 한 마리를 빼앗은 부자의 비유를 들려주는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그러나 설교의 상당 부분은 한국 근현대사와 오늘의 정치 현실, 그리고 한국 교회 일부에서 나타나는 정치적 인물 숭배에 대한 강한 비판으로 전개됩니다. 박요한 목사는 자신의 교회가 붙드는 두 가치를 ‘개혁’과 ‘애민’이라고 말하며, 특히 ‘강한 자가 약한 자를 괴롭히는 ’, ‘상처 입은 사람을 조롱하는 ’, ‘자기가 지지하는 정치적 인물을 우상화하여 그의 어두운 면을 보지 않으려 하는 ’을 기독교 신앙과 양립하기 어려운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어린 시절부터 ‘인간을 우상화하지 않고’, 상처 입은 사람을 불쌍히 여기며 손을 잡아 줄 수 있는 사람을 길러야 한다는 교육의 비전으로 나아갑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이 설교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의외로 이승만도, 명성황후도, 오늘의 정치인들도 아닙니다. 오히려 나단이 다윗에게 한 한마디입니다. ‘당신이 사람이라.’ 이 말이야말로 이 긴 설교 전체를 영적인 차원으로 돌려놓을 수 있는 결정적인 말씀입니다. 다윗은 부자가 가난한 사람의 암양을 빼앗았다는 이야기를 듣자 즉시 분노합니다. ‘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그런데 다윗이 그렇게 분명하게 볼 수 있었던 악은 사실 자기 안에 있는 악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로 들었을 때에는 너무나 선명하게 보였지만, 자기 자신의 삶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끊임없이 다루는 인간의 proprium 문제와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생각하고 판단할 때 자기 악을 정당화하고, 변명하고, 때로는 아예 보지 못합니다. 반면 타인의 악은 놀라울 만큼 선명하게 봅니다. 그래서 남의 탐욕은 탐욕으로 보면서 자기 탐욕에는 이유가 있고, 남의 권력욕은 악으로 보면서 자기가 지지하는 사람의 권력욕에는 명분을 붙이며, 남의 거짓에는 분노하면서 자기편의 거짓에는 관대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좌우 어느 한 정치 진영에만 있는 현상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의 proprium 자체가 가진 보편적인 성향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번 설교의 정치적 메시지는 오히려 정치적 진영을 넘어서는 영적 메시지가 될 수 있습니다. 박요한 목사는 ‘인간을 우상화하지 마세요’라고 반복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지적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인간을 우상화하는 까닭은 단순히 그 사람을 너무 좋아하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 사람 안에서 ‘내가 사랑하는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질서, 내가 원하는 나라, 내가 원하는 성공, 내가 원하는 힘을 어떤 지도자가 대신 구현한다고 느끼면, 어느 순간 그 사람의 진실과 거짓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 사람을 통해 확장된 자신’을 지키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정치적 우상화의 가장 깊은 뿌리에는 결국 자기 사랑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 사람을 우상화하지 말라’는 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오늘 한 인물을 우상에서 끌어내린 사람이 내일 다른 인물을 그 자리에 올려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른쪽의 우상을 깨뜨리면서 왼쪽에 새로운 우상을 세울 수도 있고, 왼쪽의 우상을 비판하면서 오른쪽의 인물을 절대화할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나는 누구도 우상화하지 않는다’는 자기 자신의 판단과 정의감을 우상화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단순한 ‘우상 교체’가 아니라 인간 중심에서 주님 중심으로의 방향 전환입니다.

 

이 점에서 다윗 이야기는 매우 중요합니다. 다윗의 위대함은 그가 죄가 없는 사람이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그의 죄를 끔찍할 만큼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밧세바를 취하고, 그 사실을 감추려 하며, 마침내 충성스러운 우리아를 죽음으로 몰아넣습니다. 박요한 목사가 잘 짚었듯이 성경은 다윗의 ‘앞모습’만 보여 주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모습과 추한 모습을 모두 보여 줍니다. 이것 자체가 인간을 우상화하지 못하게 하는 성경의 놀라운 특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더 중요한 것은 다윗이 ‘들켰다’는 사실이 아니라 ‘자기의 악을 자기 악으로 인정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회개의 출발입니다. 회개는 ‘인간은 모두 죄인입니다’라는 일반적인 교리를 인정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바로 이것이 악입니다’라고 자기 삶에서 특정한 악을 보고, 그것이 주님의 뜻에 반하기 때문에 물리치려 하는 데서 실제적인 회개가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나단의 ‘당신이 사람이라’는 선언은 단순한 고발이 아닙니다. 다윗의 눈을 자기 자신에게 돌려놓는 진리의 빛입니다.

 

여기서 설교 전체를 향해서도 같은 질문을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설교에서는 이승만, 명성황후, 한국 교회의 극우적 정치교육, 특정 정치세력과 지도자들의 문제를 매우 강한 언어로 비판합니다. 박요한 목사가 제시한 각각의 역사적 사실과 정치적 평가는 별도로 검증하고 논의할 문제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더 중요한 질문은 ‘그들 가운데 누가 악한가?’가 아니라 ‘ 말씀을 듣고 있는 안에는 이것이 없는가?’입니다. 나단의 비유를 듣고 다윗이 ‘저런 놈은 죽어야 한다’고 외치는 데서 끝났다면 아무런 회개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말씀의 목적은 다윗으로 하여금 다른 악인을 정확하게 평가하게 하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 사람이 바로 당신입니다’라는 말씀을 듣게 하는 데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번 설교가 정말 깊은 영적 설교가 되려면, ‘ 정치인들이 사람이다’, ‘ 극우 기독교인들이 사람이다’, ‘ 지도자들이 사람이다’에서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에는 반드시 ‘그리고 나도 사람일 있다’로 돌아와야 합니다. 이것이 없다면 나단의 비유가 오히려 남을 심판하는 도구가 될 위험이 있습니다. 반대로 이것이 들어오면 설교의 정치적 소재 전체가 갑자기 거듭남의 문제로 바뀝니다.

 

박요한 목사가 강조하는 ‘애민’도 같은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약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상처 입은 사람을 조롱하지 않으며, 권력을 가진 사람이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보호해야 한다는 강조는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체어리티와 상당히 가까운 부분이 있습니다. 특히 ‘상처 입은 자의 손을 만져 주고 안아 있는 따뜻한 사람’을 길러야 한다는 설교 후반의 말은 기독교 신앙이 삶의 선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점에서 귀합니다. 신앙은 사람을 더 잔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더 선하게 만들어야 하며, 교리가 참이라면 결국 이웃을 향한 선한 삶이라는 열매를 맺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애민’과 ‘체어리티’를 완전히 같은 것으로 놓을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체어리티는 단순한 연민이나 따뜻한 감정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실제 삶에서 행하는 것이며, 동시에 진리에 따라 지혜롭게 행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돕는 것이 체어리티이고, 때로는 악을 제지하는 것이 체어리티이며, 때로는 잘못을 분명하게 말하는 것도 체어리티가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 분노를 쏟아내는가’가 아니라 ‘이웃의 참된 선을 위하여 행동하는가’입니다.

 

이 기준을 적용하면 박요한 목사가 약자에 대한 조롱과 멸시를 거부하면서 ‘기독교인은 써야 언어와 쓰지 않아야 언어가 있다’고 말한 부분은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자기와 생각이 다르거나 자신이 도덕적으로 동의할 수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사람을 비하하고 조롱하는 것과 그 사람의 생각이나 행동을 옳지 않다고 판단하는 것은 서로 다른 일입니다. 이것은 체어리티와 진리를 함께 붙들려는 태도와 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기준을 박요한 목사 자신의 언어에도 똑같이 적용해야 합니다. 설교 안에는 정치적 반대편이나 역사적 인물을 향한 매우 거친 표현과 조롱에 가까운 표현들이 적지 않게 등장합니다. 이것은 이번 설교가 스스로 제시한 ‘기독교인은 써야 언어와 쓰지 않아야 언어가 있다’는 기준과 긴장을 일으킵니다. 상대편의 조롱을 비판하면서 상대편을 조롱한다면, 주장하는 진리와 그것을 전달하는 형식 사이에 균열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중요한 것은 누구를 향한 조롱이냐가 아니라, 그 언어를 움직이는 정서가 어디에서 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분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불의 앞에서 아무 감정도 느끼지 않는 것이 반드시 선한 것은 아닙니다. 약자가 짓밟히는 것을 보고 마음 아파하는 것은 체어리티에서 비롯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노는 특히 자기 사랑과 결합하기 쉬운 정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분노’였던 것이 어느 순간 ‘악인이라고 판단한 상대를 미워하는 즐거움’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둘 다 정의로운 분노처럼 보이지만 영적 기원은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주님은 행위의 외형만 아니라 그 행위를 움직이는 사랑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박요한 목사가 말하는 ‘애민’은 매우 좋은 출발점이지만, 그것이 참된 체어리티가 되기 위해서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애민’을 넘어가야 합니다. 내가 정치적으로 동의하는 사람, 내가 피해자라고 인정하는 사람, 내가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내가 몹시 싫어하는 사람에게조차 그의 인간됨을 부정하지 않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악은 악이라고 말하면서도 그 사람 자체를 지옥에 던져 버리고 싶은 마음을 즐기지 않는 것, 이것이 훨씬 어려운 체어리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설교 후반에 소개되는 어린 학생의 질문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는데 정치인도 사랑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에 어떤 교회 지도자가 그 정치인을 ‘사탄’으로 규정하고 ‘박멸해야 한다’고 가르쳤다는 대목입니다. 사실 여부와 구체적 맥락은 별도로 확인해야 하지만, 박요한 목사가 이 사례를 통해 지적하는 문제 자체는 매우 중요합니다. 정치적 상대를 더 이상 하나의 인간으로 보지 않고 절대적인 악으로 규정하는 순간, 신앙은 체어리티를 잃을 위험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어느 진영에서 일어나든 동일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사람과 악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악은 거부해야 하지만 사람의 구원을 바라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지옥적인 것은 악과 거짓이지, 내가 미워하는 특정 인간 집단 자체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악을 선이라고 인정하라는 뜻이 아니라, 악을 거부하면서도 사람에게 선이 회복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치적 양극화가 극심할수록 더욱 어려우면서도 더욱 필요한 기독교적 태도입니다.

 

이제 다시 설교 제목 ‘한국 교회는 어떻게 극우 양성소가 되었나?’로 돌아가 봅니다. 여기서 박요한 목사가 말하는 ‘극우 양성소’는 문맥상 낡고 부패한 종교체제, 권력과 결탁하고 인간을 우상화하는 교회의 모습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보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는 ‘옛것’이라는 이유만으로 악하고, ‘새것’이라는 이유만으로 선한 것은 아닙니다. 교회의 참된 새로움은 제도와 간판을 바꾸는 데 있지 않고 사람의 속 사람이 새로워지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개혁의 가장 깊은 자리는 교단 총회도, 정치적 입장도, 예배 형식도 아닙니다. 한 사람의 속 사람입니다. 내가 진리를 이용하여 남을 심판하는가, 아니면 그 진리가 먼저 나를 심판하게 하는가? 내가 지지하는 사람의 악에도 같은 기준을 적용할 수 있는가? 내가 반대하는 사람에게도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구원의 가능성을 인정하는가? 내 신앙은 결국 이웃을 향한 선한 삶으로 나타나는가? 이런 질문 앞에서 교회가 끊임없이 자신을 살피는 것이 참된 개혁에 더 가깝습니다.

 

그 점에서 이번 설교의 ‘개혁’과 ‘애민’이라는 두 기둥도 조금 다르게 배열해 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개혁과 애민’이 서로 나란히 서 있는 두 가치라기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와 선의 결합으로 보는 편이 더 깊습니다. 진리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드러내고 개혁하게 하며, 선은 왜 그것을 고쳐야 하는지를 가르칩니다. 진리만 있고 체어리티가 없으면 개혁은 정죄가 되기 쉽고, 체어리티만 있고 진리가 없으면 사랑은 방향을 잃기 쉽습니다. 참된 교회에서는 이 둘이 결혼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설교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결국 정치적 인물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왕궁 안에 홀로 서 있는 나단과 다윗입니다. 한 사람은 진리를 말하고, 한 사람은 그 진리 앞에 섭니다. 다윗에게는 나단을 제거할 권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단을 제거한다고 자기 안의 악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나단의 말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다윗에게 다시 시작할 길이 열립니다.

 

우리에게도 ‘나단’은 찾아옵니다. 때로는 말씀으로, 때로는 양심을 통해, 때로는 다른 사람의 지적을 통해, 때로는 실패와 수치를 통해 찾아옵니다. 그때 proprium은 즉시 변명하고 싶어 합니다. ‘ 사람도 그러지 않았는가’, ‘저쪽은 심하지 않은가’, ‘내게도 사정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거듭남은 그 모든 비교를 멈추고 주님 앞에서 ‘ 사람이 바로 나입니다’라고 인정할 수 있는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번 설교를 한 문장으로 다시 읽는다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한국 교회가 새로워지는 길은 우리가 미워하는 사람의 우상을 깨뜨리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앞에서 안의 proprium 내가 만든 우상을 발견하고, 그것을 주님 앞에서 인정하고 물리치며, 자리에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가 살아나게 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이렇게 보면 박요한 목사가 마지막에 품었다는 교육의 비전도 의미가 달라집니다. 아이들에게 ‘누가 좋은 정치인이고 누가 나쁜 정치인인가’를 먼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인간도 절대화하지 않는 법,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의 잘못도 볼 수 있는 법,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도 인간으로 대하는 법, 약한 사람의 고통에 마음 아파하는 법,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안의 악을 발견했을 때 변명하지 않고 돌이키는 법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런 교육이라면 그것은 특정 정치 진영의 다음 세대를 만드는 교육이 아니라, ‘ 사람이 바로 당신입니다’라는 말씀 앞에 설 수 있는 양심을 길러 주는 교육이 될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이번 설교에서 가장 귀하게 건질 수 있는 결론입니다. 교회의 위기는 세상에 악한 사람이 많아서만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자기편의 악을 악이라고 부르지 못할 때, 진리를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지 않고 남에게만 적용할 때, 신앙이 체어리티와 분리될 때 교회 안에서 이미 위기가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참된 개혁은 언제나 남을 향해 들었던 손가락이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는 순간 시작됩니다. ‘ 사람이 바로 당신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 앞에서 ‘그렇습니다. 제가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을 때, 심판의 말씀이 오히려 거듭남의 문이 됩니다.

 

 

 

SY.91, 박요한 목사, ‘내가 장로와 당회를 없애버린 이유’ (20260724)

※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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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85, 박요한 목사, ‘내 어머니 같은 나의 하나님 -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와 어린아이 같은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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