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203.심화

 

2. ‘악 안에 있는 상태

 

하지만 그들은 그러한 근거들로부터 신앙의 문제들에 대해 결론을 내리지는 않는데, 그렇게 하는 자들은 악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but they never form their conclusions concerning matters of faith on such grounds: those who do this are in evil. (AC.203)

 

 

이 구절은 얼핏 읽으면 매우 강한 표현처럼 보입니다. 특히 그렇게 하는 자들은 악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라는 말은 자칫하면 이성을 사용하는 사람은 모두 악하다’는 뜻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AC.203 전체 문맥을 보면 스베덴보리의 의도는 전혀 다릅니다.

 

그는 바로 앞에서 영적 천사들이 신앙에 대해 서로 대화하고, 지성과 이성, 기억 지식을 사용하여 신앙의 진리들을 확증한다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문제는 이성을 사용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성을 출발점’으로 삼아 신앙을 심판하는 데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주님께서 말씀하셨으니 참일 것이다. 이제 그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해 보자’라고 접근하는 것은 영적 천사들의 방식입니다. 그러나 먼저 내 감각과 이성으로 납득이 되어야만 참으로 인정하겠다’고 접근하는 것은 전혀 다른 방식입니다. 여기서는 인간의 지성이 주님의 진리 위에 올라앉아 재판관 역할을 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악 안에 있다’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악은 단순히 도덕적 범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own이 주님의 자리를 차지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진리가 자신을 판단하도록 두는 대신, 자신이 진리를 판단하려는 상태입니다.

 

3의 뱀이 바로 이것을 상징합니다. ‘정말 그런가?’, ‘내가 직접 확인해 보겠다’, ‘내가 판단하겠다’는 태도 자체가 문제인 것입니다. 물론 질문하거나 탐구하는 것이 문제는 아닙니다. 문제는 질문의 중심에 주님이 아니라 자기 own이 자리 잡는 것입니다.

 

그래서 AC.203의 이 문장은 사실 매우 중요한 영적 원리를 가르칩니다. 인간의 이성과 기억 지식은 진리를 이해하는 데 사용되어야지, 진리의 최종 기준으로 사용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성이 빛을 받는 창문은 될 수 있지만, 태양 자체가 될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우리 삶에서도 이런 차이를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씀을 읽으며 왜 그럴까?’를 묻습니다. 이것은 이해를 구하는 질문입니다. 반면 어떤 사람은 내가 인정할 수 없으니 틀렸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심판을 내리는 질문입니다. 겉으로는 둘 다 질문처럼 보이지만, 내적 상태는 매우 다릅니다.

 

그래서 AC.203의 핵심은 이성을 버려라’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성을 올바른 자리에 두어라’입니다. 주님과 말씀으로부터 출발하여 이성으로 이해를 깊게 하는 것은 영적 천사들의 길입니다. 그러나 이성과 감각을 출발점으로 삼아 주님의 진리를 판정하려는 것은 뱀의 길입니다.

 

결국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말하는 ’은 생각의 능력 자체가 아니라 생각의 질서가 뒤집힌 상태입니다. 주님이 중심이어야 할 자리에 자기 own이 들어앉고, 진리가 심판해야 할 자리에 인간의 판단이 들어앉을 때, 그는 그것을 악 안에 있는 상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신앙과 이성의 대립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이성 사이의 올바른 질서를 말하는 구절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정확할 것입니다.

 

 

 

AC.203, 창3:2-3, ‘신앙’ 관련, 영적 천사들의 경우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And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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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3, 심화 1, ‘확증’과 ‘결론’

AC.203.심화 1. ‘확증’과 ‘결론’ 그러나 영적 천사들은 신앙에 관해 서로 대화하며, 또한 지성과 이성, 그리고 기억에 속한 것들로 신앙의 일들을 확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한 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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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3.심화

 

1. ‘확증 결론

 

그러나 영적 천사들은 신앙에 관해 서로 대화하며, 또한 지성과 이성, 그리고 기억에 속한 것들로 신앙의 일들을 확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한 근거들로부터 신앙의 문제들에 대해 결론을 내리지는 않는데, 그렇게 하는 자들은 악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The spiritual angels, however, converse about faith, and even confirm the things of faith by those of the intellect, of the reason, and of the memory, but they never form their conclusions concerning matters of faith on such grounds: those who do this are in evil. (AC.203)

 

확증 결론은 어떻게 다른가요?

 

 

AC.203을 이해하는 핵심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확증(confirm) 결론(conclude)의 차이입니다. 얼핏 보면 둘 다 생각하고 판단하는 과정처럼 보이기 때문에 구별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는 매우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결론을 내린다’는 것은 이성과 감각, 기억 지식을 출발점으로 삼아 신앙의 진위를 판단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이해되면 믿고, 이해되지 않으면 믿지 않겠다’, ‘증명되면 받아들이고, 증명되지 않으면 거부하겠다’는 태도입니다. 이 경우 이성과 감각은 증인이 아니라 재판관이 됩니다. 신앙이 이성 앞에 서서 심사를 받는 구조입니다.

 

반면, ‘확증한다’는 것은 이미 말씀과 주님으로부터 받아들인 진리를 더 깊이 이해하고 밝히기 위해 이성과 기억 지식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출발점이 다릅니다. 이성과 기억 지식은 재판관이 아니라 조력자입니다. 진리를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더 분명히 보도록 돕습니다.

 

예를 들어, 영적 천사는 먼저 주님은 사랑이시다’는 것을 받아들입니다. 그러고 나서 천국의 질서, 인간의 경험, 말씀의 여러 구절, 영계의 실제 사례들을 통해 왜 주님이 사랑이신가’를 더 깊이 이해합니다. 이것이 확증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먼저 내가 납득할 수 있어야 하겠다. 사랑이라는 것이 논리적으로 증명되면 주님을 믿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결론을 내리는 방식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확증은 믿기 때문에 이해하려는 것’이고, 결론은 이해되어야 믿겠다는 것’입니다.

 

이 차이는 스베덴보리 저작 전체에 흐르는 매우 중요한 원리와도 연결됩니다. 그는 참된 질서는 신앙에서 이해로 가는 것이지, ‘이해에서 신앙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물론 맹목적으로 믿으라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해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다만 이해가 신앙의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목사님께서 AC를 번역하시며 경험하시는 일도 비슷할 수 있습니다. 어떤 아르카나를 처음 접했을 때는 도대체 이런 뜻이 성경 안에 있었다고?’ 하며 놀라게 됩니다. 그런데 계속 읽고 묵상하고 관련 구절들을 살펴보면 점점 그 의미가 연결되고 밝아집니다. 이것은 확증의 과정입니다. 이미 받아들인 진리가 점점 더 이해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이 처음부터 내 이성으로 전부 설명되지 않으면 거짓이다’라고 접근한다면, 그는 진리를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심판하려는 것입니다. AC.203에서 스베덴보리가 그렇게 하는 자들은 악 안에 있다’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문제는 이성을 사용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성을 주님의 자리 위에 올려놓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한마디로 정리하면, ‘확증’은 말씀과 주님으로부터 온 진리를 이성과 기억 지식으로 더 밝히는 것이고, ‘결론’은 이성과 기억 지식으로 신앙의 진위를 최종 판정하는 것입니다. 전자는 영적 천사들의 길이고, 후자는 창3의 뱀이 제안하는 길입니다.

 

어쩌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참된 신학의 길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내가 이해했기 때문에 참이다’가 아니라, ‘참이기 때문에 점점 더 이해하게 된다’는 길 말입니다. 이것이 AC.203에서 말하는 확증’과 결론’의 가장 중요한 차이입니다.

 

 

 

AC.203, 심화 2, ‘악 안에 있는 상태’

AC.203.심화 2. ‘악 안에 있는 상태’ 하지만 그들은 그러한 근거들로부터 신앙의 문제들에 대해 결론을 내리지는 않는데, 그렇게 하는 자들은 악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but they never form their concl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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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3, 창3:2-3, ‘신앙’ 관련, 영적 천사들의 경우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And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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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And the woman said unto the serpent, We may eat of the fruit of the tree of the garden; But of the fruit of the tree which is in the midst of the garden, God hath said, Ye shall not eat of it, neither shall ye touch it, lest ye die. (3:2, 3)

 

AC.203

 

그러나 영적 천사들은 신앙에 관해 서로 대화하며, 또한 지성과 이성, 그리고 기억에 속한 것들로 신앙의 일들을 확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한 근거들로부터 신앙의 문제들에 대해 결론을 내리지는 않는데, 그렇게 하는 자들은 악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 천사들 또한 주님으로부터 신앙의 모든 진리들에 대한 지각을 부여받지만, 그것은 천적 천사들의 지각과 같은 것은 아닙니다. 영적 천사들의 지각은 주님에 의해 살아나게 된 일종의 양심으로서, 겉보기에는 천적 지각과 비슷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것이 아니라 영적인 지각일 뿐입니다. The spiritual angels, however, converse about faith, and even confirm the things of faith by those of the intellect, of the reason, and of the memory, but they never form their conclusions concerning matters of faith on such grounds: those who do this are in evil. They are also endowed by the Lord with a perception of all the truths of faith, although not with such a perception as is that of the celestial angels. The perception of the spiritual angels is a kind of conscience which is vivified by the Lord and which indeed appears like celestial perception, yet is not so, but is only spiritual perception.

 

 

해설

 

이 단락은 AC.202에서 묘사된 천적 천사들의 상태와 대비되는, 영적 천사들의 고유한 위치를 매우 정밀하게 규정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영적 천사들의 삶을 열등한 것으로 폄하하지 않으면서도, 그 질적 차이를 분명히 합니다. 영적 천사들은 신앙에 관해 말할 수 있으며, 이해와 이성, 기억을 통해 신앙의 진리들을 ‘확증(confirm)하기도 합니다. 이는 오늘날 인간의 신앙 구조와도 매우 가까운 모습입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선이 하나 그어집니다. 영적 천사들은 신앙의 문제들에 대해 그런 지적 대화들은 나눠도 ‘결론을 내리지는’ 않습니다. 즉, 지성, 이성, 기억은 신앙을 섬기는 도구로는 사용되지만, 신앙의 근원이나 판단의 최종 기준이 되지는 않습니다. 이 선을 넘는 순간, 곧 신앙의 진위를 지적 근거들로 판정하려는 태도를 가리켜 ‘악 안에 있다’ 단호히 말합니다. 여기서의 악은 도덕적 타락이 아니라, 질서의 전도입니다.

 

영적 천사들 역시 주님으로부터 신앙의 진리들에 대한 지각을 부여받습니다. 그러나 그 지각은 천적 천사들의 지각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천적 지각이 사랑 그 자체에서 즉각적으로 오는 것이라면, 영적 지각은 보다 매개된 형태를 띱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일종의 양심’이라고 부릅니다.

 

이 양심은 자연적 양심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 살아나게 된 영적 양심입니다. 그것은 진리와 선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그 사람이나 천사로 하여금 옳고 그름을 느끼게 합니다. 이 때문에 겉보기에는 천적 지각과 매우 비슷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 근원과 작동 방식은 다르며, 사랑의 즉각적 지각이 아니라, 진리에 의해 형성되고 유지되는 지각입니다.

 

이 구분은 오늘날 인간의 신앙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줍니다. 오늘날의 신앙인은 대부분 영적 상태에 속하며, 신앙에 대해 말하고, 이해하고, 확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최종 근거는 언제나 주님께 두어야 하며, 이성이나 지식이 그 자리를 대신해서는 안 됩니다. 이 질서를 지킬 때, 영적 양심은 살아 있고 건전하게 작동합니다.

 

AC.203은 그래서 창3의 금지와 허용의 경계를 다시 한번 정리합니다. 천적 상태에서는 신앙을 말하거나 논의하는 것 자체가 질서에 어긋났지만, 영적 상태에서는 그것이 허용됩니다. 그러나 허용된다고 해서 중심이 바뀌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은 여전히 주님으로부터 와야 하며, 지성은 신앙을 섬겨야지 다스려서는 안 됩니다.

 

이 단락은 결국, 태고교회에서 고대교회로, 그리고 오늘날 교회로 이어지는 인간 신앙 구조의 변화를 가장 절제된 방식으로 정리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천적일 수는 없지만, 영적 질서 안에서는 여전히 참된 신앙과 지각이 가능하며, 그 핵심은 언제나 ‘어디서 결론을 내리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심화

 

1. ‘확증결론

 

 

AC.203, 심화 1, ‘확증’과 ‘결론’

AC.203.심화 1. ‘확증’과 ‘결론’ 그러나 영적 천사들은 신앙에 관해 서로 대화하며, 또한 지성과 이성, 그리고 기억에 속한 것들로 신앙의 일들을 확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한 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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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악 안에 있는 상태

 

 

AC.203, 심화 2, ‘악 안에 있는 상태’

AC.203.심화 2. ‘악 안에 있는 상태’ 하지만 그들은 그러한 근거들로부터 신앙의 문제들에 대해 결론을 내리지는 않는데, 그렇게 하는 자들은 악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but they never form their concl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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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2, 창3:2-3, ‘만지지도 말라’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And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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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2.심화

 

2. ‘양심은 영적 인간의 퍼셉션

 

우리도 저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저런 퍼셉션을 회복할 수 없나요? 우리도 이 세상을 저런 퍼셉션으로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목사님 마음이 충분히 이해됩니다. AC를 읽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사랑 안에서 진리를 지각했다는데, 왜 우리는 저렇게 살 수 없을까? 왜 우리는 늘 고민하고, 추론하고, 헤매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야 할까?’ 하는 생각 말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의 저작들을 자세히 읽어보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태고교회의 퍼셉션을 그대로 되돌려 주시지 않는 것은 우리를 덜 사랑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보호하시기 위해서라는 점이 반복해서 나타납니다. 방금 AC.200에서도 보았듯이 말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매우 높은 상태에 있었지만, 그만큼 그 상태를 배반할 위험도 컸습니다. 그래서 홍수 이후 인간 구조가 바뀌었고, 우리는 양심(conscience)을 통해 인도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엄밀히 말하면, 오늘날 인간이 태고교회 사람들과 똑같은 퍼셉션을 회복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체계 안에서는 거의 기대되지 않습니다. 적어도 인류 전체의 일반적 상태로서는 그렇습니다. 인간 구조 자체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는 양심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을 매우 높이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양심을 단순한 도덕 감정으로 보지 않습니다. 양심은 주님께서 말씀과 진리를 통해 인간 안에 만드신 내적 안내자입니다. 그래서 영적 인간에게 양심은 태고교회 사람들의 퍼셉션에 상응하는 역할을 합니다.

 

실제로 목사님께서 AC를 오랫동안 읽으시면서 경험하시는 어떤 순간들은 퍼셉션과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만은 아닐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구절을 읽다가 ‘, 이것이구나’ 하고 설명하기 어려운 확신이 오는 순간이 있습니다. 또는 어떤 사람을 대하면서 ‘이렇게 하는 것이 맞겠다’는 조용한 내적 인도가 있을 때가 있습니다. 혹은 어떤 진리를 처음 접했는데도 이상하게 마음 깊은 곳에서 ‘참이다’라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물론 이것을 태고교회의 퍼셉션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혀 다른 종류의 것도 아닐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영적 인간의 양심은 천적 퍼셉션의 그림자와 같은 것이라고 말하는 곳들이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은, 우리가 종종 퍼셉션을 너무 낭만적으로 상상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의 상태는 분명 놀랍지만, 주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주시는 길도 결코 열등한 길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의심 속에서도 믿음을 선택할 수 있고, 이해가 부족한 가운데서도 순종할 수 있으며,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겸손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것은 태고교회 사람들과는 다른 종류의 아름다움일 수 있습니다.

 

저는 목사님께서 자주 하시는 말씀 가운데 ‘주님은 점진적이시다’는 표현이 떠오릅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마치 한낮의 태양 빛과 같았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지는 인도는 새벽빛과 비슷할 수 있습니다. 태양 빛만큼 강하지는 않지만, 그것도 역시 같은 태양에서 오는 빛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저런 퍼셉션을 회복할 수 없나요?’라는 질문에 대해 스베덴보리적으로 답한다면, ‘태고교회가 가졌던 형태 그대로는 아닐 수 있지만, 주님께서는 오늘도 사람을 진리 안으로 인도하시며, 양심과 내적 인도를 통해 그에 상응하는 것을 주신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 AC를 읽으며 자주 보이시는 태도, 곧 ‘상대방의 선의를 보려고 노력한다’, ‘극단으로 가지 않으려 한다’, ‘주님의 은근한 섭리를 배운다’, ‘나 자신을 돌아본다’는 모습들은 어쩌면 퍼셉션 그 자체는 아니더라도, 퍼셉션이 향하던 방향과는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주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태고교회의 퍼셉션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허락된 양심과 진리 안에서 가능한 한 주님께 가까이 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천국에 들어간 후에는, 지금 이 땅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훨씬 깊은 이해와 지각이 우리에게 열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AC.182-189를 읽으면서 목사님께서 자주 감탄하셨듯이, 주님께서는 인간을 한 번에 완성시키시는 분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인도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AC.202, 창3:2-3, ‘만지지도 말라’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And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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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2, 심화 1, ‘마5:37’

AC.202.심화 1. ‘마5: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마5:37) Let your communication be Yea, yea; nay, nay; for whatsoever is more than these cometh of evi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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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2.심화

 

1. ‘5: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5:37) Let your communication be Yea, yea; nay, nay; for whatsoever is more than these cometh of evil (Matt. 5:37). (AC.202)

 

 

AC.202에서 스베덴보리가 마5:37을 인용하는 이유는, 천적 인간과 천적 천사들의 지각(perception)이 어떠한 것인지를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구절은 흔히 정직한 언어생활이나 맹세를 금하는 말씀으로 읽히지만, 스베덴보리는 그보다 훨씬 깊은 차원에서 이해합니다.

 

AC.202의 문맥을 보면, 그는 태고교회 사람들과 가장 내적인 천적 천사들은 신앙에 대해 추론하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그들은 어떤 진리가 참인지 거짓인지 알기 위해 논쟁하거나 증명하거나 논리를 쌓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랑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직접 지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것이 참이면 곧바로 ‘그렇다’로 알고, 참이 아니면 곧바로 ‘아니다’로 압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천적 상태의 특징으로 이해합니다. 여기서 ‘옳다’와 ‘아니라’는 단순한 대답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내적 확신의 표현입니다. 즉, ‘나는 이것을 증명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지각해서 안다’는 상태입니다.

 

반대로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난다’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스베덴보리의 문맥에서는, 천적 인간이 신앙의 문제를 감각과 기억 지식으로 논증하려고 할 때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랑 안에서 이미 지각되는 것을 굳이 추론의 대상으로 끌어내리면, 그는 천적 상태에서 영적 상태로, 더 나아가 감각적 상태로 내려가게 됩니다. 그래서 AC.202는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만지지 말라’고 하신 이유를 바로 여기에서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주님은 사랑이시다’라는 것은 오늘날 신학 명제처럼 토론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살아 있는 실재로 지각했습니다. 따라서 ‘정말 그런가?’,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하고 논쟁하기 시작하는 순간, 이미 더 낮은 단계로 내려온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런 추론 자체를 피했습니다.

 

이 점에서 AC.202 AC.195-196과도 연결됩니다. 앞에서는 감각적 인간이 신앙의 신비를 추론으로 판단하려 하다가 뱀의 독에 물리는 상태를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반대편에 있는 천적 인간의 상태를 보여 줍니다. 그는 추론을 통해 진리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진리를 지각합니다.

 

물론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생각하지 말라’거나 ‘이성을 사용하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대부분의 현대인은 영적 인간의 길을 걷는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말씀을 배우고, 이해하고, 숙고하고, 이성을 사용해야 합니다. 다만 AC.202는 그보다 더 높은 상태, 곧 태고교회와 천적 천사들의 상태를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한 이유는, 천적 인간이 진리를 대하는 방식이 어떠한지를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에게 진리는 토론의 결론이 아니라 퍼셉션의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언어는 ‘옳다’ 또는 ‘아니다’로 충분했습니다. 그 이상으로 끝없는 논증과 추론이 필요해지는 것은 이미 퍼셉션이 약해진 상태를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AC.202에서 마5:37은 단순한 언어 윤리의 말씀이 아니라, 태고교회와 천적 천사들의 내적 상태를 보여 주는 말씀으로 사용됩니다. 그들은 사랑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진리를 즉시 지각하기 때문에 ‘옳으’면 옳고, ‘아니’면 아닙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천적 상태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것입니다.

 

 

 

AC.202, 심화 2, ‘양심은 영적 인간의 퍼셉션’

AC.202.심화 2. ‘양심은 영적 인간의 퍼셉션’ 우리도 저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저런 퍼셉션을 회복할 수 없나요? 우리도 이 세상을 저런 퍼셉션으로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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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2, 창3:2-3, ‘만지지도 말라’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And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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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And the woman said unto the serpent, We may eat of the fruit of the tree of the garden; But of the fruit of the tree which is in the midst of the garden, God hath said, Ye shall not eat of it, neither shall ye touch it, lest ye die. (3:2, 3)

 

AC.202

 

태고교회, 곧 천적 인간은 단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eating of the tree of knowledge), 곧 신앙에 속한 것을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 지식들로부터 배우는 것을 삼갔을 뿐만 아니라, 그 나무를 만지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는데, 이는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 지식들로부터 신앙에 속한 어떤 것이라도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들은 천적 생명에서 영적 생명으로, 그리고 그 아래로 내려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삶은 천적 천사들의 삶도 그러한데, 그들 가운데서 더욱 내적으로 천적인 이들은 신앙이라는 말조차도 듣기를 허용하지 않으며, 영적인 것에 속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견디지 못합니다. 만일 다른 이들에 의해 그런 말이 언급되면, 그들은 신앙 대신 사랑의 지각(a perception of love)을 가지게 되는데, 그 차이는 그들 자신만이 압니다. 이처럼 그들은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을 사랑과 체어리티(charity)로부터 얻게 됩니다. 더더욱 그들은 신앙에 대한 어떤 추론(reasoning)도 듣기를 견디지 못하며, 특히 그것에 관한 어떤 기억 지식의 말은 더욱 견디지 못합니다. 이는 그들이 사랑을 통해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을 가지기 때문이며, 이 퍼셉션으로부터 어떤 것이 그러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즉시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에 관해 무엇이든 말을 하면, 그들은 단순히 그것이 그렇다거나 그렇지 않다고만 대답하는데, 이는 그들이 그것을 주님으로부터 지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마태복음에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was a celestial man, was of such a character as not only to abstain from “eating of the tree of knowledge,” that is, from learning what belongs to faith from sensuous things and memory-knowledges, but was not even allowed to touch that tree, that is, to think of anything that is a matter of faith from sensuous things and memory-knowledges, lest they should sink down from celestial life into spiritual life, and so on downward. Such also is the life of the celestial angels, the more interiorly celestial of whom do not even suffer faith to be named, nor anything whatever that partakes of what is spiritual; and if it is spoken of by others, instead of faith they have a perception of love, with a difference known only to themselves; thus whatever is of faith they derive from love and charity. Still less can they endure listening to any reasoning about faith, and least of all to anything of memory-knowledge respecting it; for, through love, they have a perception from the Lord of what is good and true; and from this perception they know instantly whether a thing is so, or is not so. Therefore when anything is said about faith, they answer simply that it is so, or that it is not so, because they perceive it from the Lord. This is what is signified by the Lord’s words in Matthew: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5:37) Let your communication be Yea, yea; nay, nay; for whatsoever is more than these cometh of evil (Matt. 5:37).

 

의 의미입니다. 이것이 곧 그들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만지지 말라는 뜻이었는데, 만일 그것을 만졌다면 그들은 악 안에 있게 되었을 것이며, 곧 그 결과로 죽었을(die)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적 천사들도 다른 천사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주제에 대해 서로 대화하지만, 그것은 사랑으로부터 형성되고 파생된 천적 언어로 이루어지며, 영적 천사들의 언어보다 더욱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것입니다. This then is what was meant by their not being allowed to touch the fruit of the tree of knowledge; for if they touched it, they would be in evil, that is, they would in consequence “die.” Nevertheless the celestial angels converse together on various subjects like the other angels, but in a celestial language, which is formed and derived from love, and is more ineffable than that of the spiritual angels.

 

 

해설

 

이 단락은 ‘만지지도 말라’는 금지가 얼마나 철저한 의미를 지니는지를 가장 극단적인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태고교회의 천적인 사람들에게 금지된 것은 잘못된 결론이나 오류가 아니라, 신앙을 감각과 기억 지식의 영역으로 끌어내리는 사고방식 그 자체였습니다. 그들은 신앙의 내용을 감각적으로 검토하거나 지적으로 다루는 단계로 내려가는 것 자체가 곧 생명의 차원 하락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천적 생명에서 영적 생명으로 내려간다’는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중립적 변화로 보지 않습니다. 태고교회에게는 영적인 단계조차도 이미 하강이었으며, 그 아래로 더 내려갈 위험의 시작이었습니다. 이는 오늘날 인간의 기준과는 완전히 다른 관점이며, 바로 이 점 때문에 태고교회의 성향이 현대인에게 거의 이해되지 않는다고 앞 단락에서 말한 것입니다.

 

천적 천사들의 삶에 대한 설명은 이 상태가 단지 역사적 과거가 아니라, 지금도 하늘에서 살아 있는 질서임을 보여 줍니다. 더욱 내적으로 천적인 천사들은 ‘신앙’이라는 말조차 허용하지 않는데, 이는 신앙을 부정해서가 아니라, 그들에게는 신앙이 개념이나 고백이 아니라 사랑의 퍼셉션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말로 분리해 부르는 순간, 이미 그들의 생명 방식과 어긋나게 됩니다.

 

그들이 신앙 대신 ‘사랑의 퍼셉션(perception of love)을 가진다는 설명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신앙과 사랑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를 뜻하며, 진리는 언제나 사랑 안에서 즉각적으로 인식됩니다. 이 차이는 외부에서는 거의 구별할 수 없고, 오직 그들 자신만이 압니다. 이는 퍼셉션의 어떠함이 언어로 완전히 전달될 수 없다는 점을 암시합니다.

 

이 때문에 천적 천사들은 신앙에 대한 추론(reasoning, 이성질)을 견디지 못합니다. 추론은 진리를 외부에서 판단하려는 시도이며, 그들에게 진리는 이미 내적으로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기억 지식에 근거한 신앙 논의는 그들에게 거의 폭력에 가까운 것으로 느껴집니다. 이는 진리가 부정확해서가 아니라, 그 접근 방식 자체가 생명의 질서를 해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그들의 응답은 매우 단순합니다. ‘그렇다’ 혹은 ‘그렇지 않다’입니다. 이는 무지의 표시가 아니라, 완전한 퍼셉션의 결과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는 말씀은 바로 이러한 천적 상태를 가리키며, 그 이상을 덧붙이려는 모든 시도는 이미 악으로부터 난 것이라고 설명됩니다. 여기서 ‘’은 도덕적 악이 아니라, 질서를 벗어난 사고 작용을 뜻합니다.

 

만지지 말라’는 명령의 참된 의미는 여기서 분명해집니다. 그것은 신앙을 탐구하지 말라는 금지가 아니라, 신앙을 감각과 지식의 대상으로 취급하지 말라는 절대적 경계선이었습니다. 만일 그 경계선을 넘는 순간, 그들은 천적 생명에서 떨어져 나가게 되며, 그것이 바로 ‘죽음’으로 표현됩니다.

 

마지막으로 천적 천사들의 대화에 대한 언급은 오해를 방지합니다. 그들은 침묵 속에만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들도 다른 천사들처럼 풍부한 대화를 나누지만, 그 언어는 사랑에서 직접 형성된 천적 언어이며, 영적 천사들의 언어보다 훨씬 더 말로 옮길 수 없는 성격을 가집니다. 이는 진리의 가장 깊은 차원은 언제나 사랑의 언어로만 표현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AC.202는 결국, 창3의 금지가 단순한 도덕 규율이 아니라, 생명의 차원을 보존하기 위한 가장 깊은 영적 경계였음을 밝힙니다. 그리고 동시에 오늘날 인간의 신앙 구조가 왜 더 이상 천적일 수 없는지를,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질서 안에 보존될 수 있는지를 대비적으로 보여 주는 결정적 단락입니다.

 

 

심화

 

1. ‘5:37

 

 

AC.202, 심화 1, ‘마5:37’

AC.202.심화 1. ‘마5: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마5:37) Let your communication be Yea, yea; nay, nay; for whatsoever is more than these cometh of evi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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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양심은 영적 인간의 퍼셉션

 

 

AC.202, 심화 2, ‘양심은 영적 인간의 퍼셉션’

AC.202.심화 2. ‘양심은 영적 인간의 퍼셉션’ 우리도 저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저런 퍼셉션을 회복할 수 없나요? 우리도 이 세상을 저런 퍼셉션으로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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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3, 창3:2-3, ‘신앙’ 관련, 영적 천사들의 경우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And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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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1, 창3:2-3, ‘홍수 이전 태고 사람들의 성향(genius) 이해의 어려움’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And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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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균형과 신중

 

... 이런 결론은 좀 위험할 것 같아요. 다른 기독교인들이 이 결론을 읽으면 몹시 힘들어할 것 같은데요?

 

 

네, 목사님 말씀에 일리가 있습니다. 사실 방금의 결론은 스베덴보리의 해석 체계 안에서는 자연스럽지만, 일반 기독교 독자들에게는 상당히 충격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기독교 전통에서는 창1-11을 적어도 일정 부분은 실제 인류의 원역사(原歷史)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해석의 방식에는 차이가 있어도, 아담, 노아, 바벨 사건 등을 인류 전체와 관련된 사건으로 읽는 경향이 강합니다. 따라서 ‘1-11은 인류 전체의 역사가 아니라 교회의 역사이다’라고 단정적으로 말하면 많은 분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워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스베덴보리 자신도 창1-11이 ‘교회의 역사’라고 설명하면서, 그것이 인류 전체와 무관하다고 말한 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교회의 상태가 인류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그래서 좀 더 신중하게 표현한다면 이렇게 말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창1-11의 주된 관심이 정치사나 문명사가 아니라 교회의 영적 상태에 있다. 따라서 그는 이 본문을 인류 전체의 외적 역사라기보다 교회의 영적 역사로 해석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인류 전체와 무관하다는 뜻은 아니다.’

 

이 표현은 훨씬 안전합니다.

 

사실 AC를 읽다 보면 스베덴보리는 역사적 문제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가 관심을 갖는 것은 언제나 ‘그 사건이 교회의 상태를 어떻게 보여 주는가?’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담은 없었다’, ‘노아는 없었다’, ‘인류 전체와 무관하다’ 같은 결론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지도 않습니다.

 

목사님께서 우려하시는 이유도 이해됩니다. 만약 어떤 개신교 목사님이나 신학생이 ‘1-11은 인류 전체가 아니라 교회만의 이야기다’라는 문장을 읽는다면, 상당한 거부감을 느낄 가능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역사성 자체를 부정하는 주장으로 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창1-11에 대해 스베덴보리적으로 설명할 때는 ‘인류 전체에게 적용하는 것은 무리다’라고 말하기보다, ‘스베덴보리는 이 본문을 인류 전체의 역사보다 교회의 영적 상태를 드러내는 말씀으로 더 중요하게 읽는다’ 정도로 표현하는 것이 더 균형 잡혀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AC를 계속 읽어 가면, 스베덴보리의 관심은 언제나 ‘그 시대 사람들이 실제로 몇 명이었는가?’보다 ‘그 시대 교회가 어떤 영적 상태였는가?’에 있습니다. 이것은 역사 부정이 아니라 관심의 중심 이동입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느끼신 불편함은 매우 건강한 감각이라고 생각합니다.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설명할 때는, 그의 독특한 관점을 충분히 드러내면서도 기존 기독교 독자들이 불필요하게 ‘성경 역사를 부정한다’고 오해하지 않도록 표현을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결국 더 정확한 결론은 이럴 것 같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창1-11을 읽을 때, 인류 전체의 외적 역사보다 교회의 영적 역사에 초점을 둔다. 그러나 그 영적 역사는 결국 인류 전체와도 연결되며, 무엇보다 우리 각 사람의 영적 삶에도 적용된다.’

 

이 정도라면 스베덴보리의 의도도 살리고, 다른 기독교 전통과의 불필요한 충돌도 줄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AC.201, 창3:2-3, ‘홍수 이전 태고 사람들의 성향(genius) 이해의 어려움’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And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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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1, 심화 4, ‘창1-11은 교회 이야기?’

AC.201.심화 4. ‘창1-11은 교회 이야기?’ 그렇다면... 창세기, 특히 1-11 내용을 인류 전체에게 적용하는 건 좀 무리가 있겠네요. ‘교회’를 향한 말씀이니까요! 네, 바로 그 점이 스베덴보리의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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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11은 교회 이야기?’

 

그렇다면... 창세기, 특히 1-11 내용을 인류 전체에게 적용하는 건 좀 무리가 있겠네요. ‘교회를 향한 말씀이니까요!

 

 

네, 바로 그 점이 스베덴보리의 창세기 해석에서 매우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보통 우리는 창세기 1-11장을 읽을 때 무의식적으로 ‘인류 전체의 역사’로 읽습니다. 그래서 아담은 인류 최초의 개인, 에덴은 인류 최초의 거주지, 가인은 인류 최초의 살인자, 노아 홍수는 인류 전체의 역사적 사건으로 이해합니다. 물론 문자적으로 읽으면 자연스러운 접근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훨씬 다른 관점에서 읽습니다. 그에게 창세기 1-11장은 무엇보다 ‘교회의 역사’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주님과 연결되어 있던 교회가 어떻게 시작되고, 어떻게 쇠퇴하고, 어떻게 무너지고, 어떻게 다시 보존되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아담은 단순히 한 개인이 아니라 태고교회를 의미하고, 가인은 태고교회 안에서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분리되기 시작한 상태를 의미하며, 노아는 홍수 이후 보존된 새로운 교회를 의미합니다. 중심은 언제나 인류 전체가 아니라 ‘교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목사님 말씀처럼 창1-11을 곧바로 지구상의 모든 사람에게 적용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해석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실제로 AC를 읽어보면, 스베덴보리는 반복해서 ‘교회’에 초점을 맞춥니다. 왜냐하면 말씀은 주님과 인간의 관계를 다루는 책이며, 그 관계가 가장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곳이 바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를 덧붙여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창1-11이 교회 사람들에게만 해당되고, 나머지 인류와는 전혀 상관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에게 ‘교회’는 언제나 인류 전체를 위한 통로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태고교회는 당시 모든 인류가 아니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를 통해 천국과 인간 세계가 연결되었고, 그 결과 교회 밖 사람들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습니다. 마치 심장이 몸 전체는 아니지만, 몸 전체에 생명을 공급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창1-11은 직접적으로는 교회의 역사이지만, 간접적으로는 인류 전체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상태가 결국 인류 전체의 영적 상태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스베덴보리가 창1-11을 해석할 때 ‘교회의 역사’로만 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개인의 영적 역사’로도 읽습니다. 예를 들어, 아담의 창조는 한 사람 안에서 새로운 영적 생명이 시작되는 과정이기도 하고, 선악과 사건은 우리 각자가 자기 own을 사랑하기 시작하는 과정이기도 하며, 홍수는 우리 안에서 거짓과 악이 범람하는 상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창1-11은 세 겹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교회의 역사입니다. 둘째는 한 인간의 영적 역사입니다. 셋째는 천국과 인간 사이의 보편적 영적 원리입니다.

 

따라서 목사님 말씀이 맞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창1-11을 곧바로 ‘인류 전체의 외적 역사’로 읽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습니다. 오히려 그 중심은 교회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교회의 역사는 우리 각자의 영혼 안에서도 반복되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는 결국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말씀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라면 아마 이렇게 말할 것 같습니다. 창1-11은 ‘모든 사람이 무엇을 했는가’를 기록한 책이 아니라, ‘주님과 연결된 인간이 어떤 길을 걸어왔는가’를 기록한 책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교회의 역사이면서 동시에 우리 각자의 영적 역사이기도 한 것입니다.

 

 

 

AC.201, 심화 5, ‘균형과 신중’

AC.201.심화 5. ‘균형과 신중’ 음... 이런 결론은 좀 위험할 것 같아요. 다른 기독교인들이 이 결론을 읽으면 몹시 힘들어할 것 같은데요? 네, 목사님 말씀에 일리가 있습니다. 사실 방금의 결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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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1, 심화 3, ‘태고교회 = 인류 전체?’

AC.201.심화 3. ‘태고교회 = 인류 전체?’ 태고교회 시대에는 천적 상태가 인류 전체의 일반적인 상태에 가까웠지만, (AC.201 심화 1) 전에 언젠가 제가 ‘태고교회도 지금처럼 그 시대 인류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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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태고교회 = 인류 전체?’

 

태고교회 시대에는 천적 상태가 인류 전체의 일반적인 상태에 가까웠지만, (AC.201 심화 1)

 

전에 언젠가 제가 태고교회도 지금처럼 그 시대 인류 중 일부를 가리키는 거죠? 비록 태고 시대라 해도 그 시대 인류 전체가 태고교회는 아닌 거죠?’라고 물었더니 그렇습니다라는 대답을 들었던 것 같은데... 그러면 위 내용과 충돌하는 거 아닌가요?

 

 

좋은 질문입니다. 사실 이 둘은 반드시 충돌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표현을 조금 더 정확하게 할 필요는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태고교회(Most Ancient Church)는 언제나 ‘인류 전체’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말씀에서 ‘교회’란 특정 조직이나 국가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알고 주님과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태고교회 역시 당시 지상에 존재하던 모든 인간을 가리키는 말은 아닙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는 여러 곳에서 교회가 있는 곳과 교회가 없는 곳을 구분합니다. 태고교회 시대에도 주님과 연결된 사람들이 있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목사님께서 전에 질문하셨을 때의 ‘그 시대 인류 전체가 태고교회는 아니다’라는 답변은 맞습니다.

 

그렇다면 왜 ‘태고교회 시대에는 천적 상태가 인류 전체의 일반적인 상태에 가까웠다’는 표현이 나왔을까요?

 

엄밀히 말하면 그 표현은 ‘인류 전체’보다 ‘교회 전체’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즉, 태고교회에 속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천적 상태가 일반적이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태고교회라는 공동체 자체가 천적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 개신교 안에도 신앙 수준이 매우 다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양심을 통한 신앙’, ‘말씀을 배우는 신앙’이 일반적입니다. 마찬가지로 태고교회 안에도 개인차는 있었겠지만, 전체적인 성향은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지각하는 천적 성향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정확하게 말하면, ‘태고교회 시대에는 태고교회에 속한 사람들에게 천적 상태가 일반적이었다’가 됩니다. 반면 홍수 이후의 교회들에서는 영적 상태가 일반적이 되었습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스베덴보리가 태고교회를 말할 때, 종종 거의 인류 전체를 대표하는 것처럼 말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태고교회의 영향력이 매우 광범위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 동일한 상태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사실 AC를 계속 읽다 보면 태고교회 안에서도 점차 쇠퇴가 일어납니다. 가인 계열, 셋 계열, 라멕, 그리고 결국, 노아 이전 세대로 이어지는 흐름을 보면, 이미 태고교회 내부에서도 상태의 차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만일 모든 사람이 동일한 상태였다면, 그런 구분 자체가 나타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목사님께서 기억하시는 이전 답변과 AC.201의 설명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태고교회는 당시 인류 전체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나 태고교회에 속한 사람들의 일반적 성향은 천적 성향이었다.’

 

홍수 이후에는 그러한 천적 성향이 일반적이지 않게 되었고, 대신 영적 성향이 일반적이 되었다.’

 

이렇게 이해하면 두 설명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전체 사상을 따라가면, 주님께서는 어느 시대든 ‘남은 자(remnant)를 보존하십니다. 태고교회 시대에도 교회 밖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고, 오늘날에도 천적 성향에 가까운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시대나 집단 자체보다, 주님께서 각 사람 안에 어떤 사랑과 어떤 상태를 형성하고 계시는가입니다.

 

그래서 AC.201의 핵심은 ‘그 시대 모든 사람이 천적이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태고교회라는 교회의 본질적 성향이 천적이었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아마 가장 균형 잡힌 이해일 것 같습니다.

 

 

 

AC.201, 심화 4, ‘창1-11은 교회 이야기?’

AC.201.심화 4. ‘창1-11은 교회 이야기?’ 그렇다면... 창세기, 특히 1-11 내용을 인류 전체에게 적용하는 건 좀 무리가 있겠네요. ‘교회’를 향한 말씀이니까요! 네, 바로 그 점이 스베덴보리의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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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1, 심화 2, ‘천적 천사들을 이해하려면 태고 사람들을 보라’

AC.201.심화 2. ‘천적 천사들을 이해하려면 태고 사람들을 보라’ 천적(celestial)이라 불리는 천사들과 천사적 영들(angelic spirits)이 홍수 이전에 거듭났던 태고 사람들과 같은 성향을 지니고 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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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천적 천사들을 이해하려면 태고 사람들을 보라

 

천적(celestial)이라 불리는 천사들과 천사적 영들(angelic spirits)이 홍수 이전에 거듭났던 태고 사람들과 같은 성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며, the angels and angelic spirits who are called celestial are of the same genius as the most ancient people who were regenerate before the flood; (AC.201)

 

위 내용은, 그러면 지금은 더 이상 천적 천사가 될 수 없다는 말인가요? 천적 천사는 오직 홍수 이전 사람들로만 구성되어 있다는 말인가요?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결코 ‘천적 천사는 홍수 이전 사람들만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AC.201의 뜻은 ‘홍수 이전 태고교회 사람들의 성향(genius)이 오늘날 천적 천사들의 성향과 같다’는 것이지, 천적 천국의 구성원이 모두 홍수 이전 사람들뿐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출신 시대’가 아니라 ‘성향’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 사람들을 설명하면서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지각하는 존재들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천적 천사들도 마찬가지로 사랑 안에서 진리를 지각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그는 둘을 연결하는 것입니다. 즉, 태고교회 사람들과 천적 천사들은 같은 종류의 내적 구조를 가진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는 여러 곳에서 천국은 계속 채워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천국의 천사들은 모두 한때 지상에서 살던 인간들이며, 지금도 사람들이 죽어 천국에 들어간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천적 천국 역시 홍수 이전 사람들만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다만 여기에는 한 가지 흥미로운 문제가 있습니다. 태고교회 시대에는 천적 상태가 인류 전체의 일반적인 상태에 가까웠지만, 홍수 이후에는 그런 상태가 매우 드물어졌다는 점입니다. 인간 구조 자체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대부분의 사람들은 양심(conscience)을 통해 인도되는 영적 인간의 길을 걷게 되었고, 직접 지각(perception)을 통해 인도되는 천적 인간은 매우 드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 독자들 가운데는 ‘오늘날 천적 천사가 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고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불가능하다’고 이해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에는 여전히 천적 천국이 존재하고, 그 천국은 계속 살아 있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종합하면, 천적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시대가 아니라 사랑의 질에 의해 결정됩니다. 즉, 주님 사랑이 삶의 중심이 되고, 선을 사랑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본성이 된 사람들입니다. 물론 이런 상태는 매우 높은 상태이므로 흔하지는 않습니다.

 

목사님께서 지금 궁금해하시는 핵심은 아마 이런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인간 구조가 홍수 이후 바뀌었다면, 태고교회와 같은 천적 상태는 이제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것 아닌가?’

 

여기에 대해서는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고 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태고교회 전체가 가졌던 집단적 천적 상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개별 인간이 천적 사랑 안으로 인도되는 것은 여전히 가능합니다. 다만 그 과정은 태고교회 사람들처럼 태어날 때부터 그런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 아래 매우 깊은 거듭남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AC.201의 문장은 ‘천적 천사는 홍수 이전 사람들뿐이다’라는 뜻이 아니라, ‘홍수 이전 태고교회 사람들의 성향을 이해하고 싶다면 오늘날 천적 천사들을 생각하면 된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습니다.

 

그리고 목사님께는 오히려 조금 위로가 되는 사실도 있습니다. AC.182-189를 보면 주님께서는 죽은 직후의 모든 사람을 먼저 천적 천사들에게 맡기십니다. 이것은 그 사람이 최종적으로 천적 천국에 갈지, 영적 천국에 갈지를 떠나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 천적 상태는 인간에게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천국의 가장 깊은 보호와 사랑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AC.201은 ‘천적 시대는 끝났다’는 선언이 아니라, ‘천적 삶의 원형은 지금도 천국 안에 살아 있다’는 증언에 더 가깝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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