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EO.001 |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신다’ - 하나님을 안다는 것과 알 수 없다는 것의 경계
해설
동방정교회 신학을 처음 접할 때 가장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가르침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신다’는 고백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이시며 지혜이시고, 전능하시며 전지하시고,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동방정교회는 이러한 고백들이 아무리 참되고 거룩하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하나님의 본질을 다 이해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고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이성과 언어와 경험을 통해 하나님을 설명하려 할 때, 그 설명은 언제나 인간의 유한한 이해 안에 머무릅니다. 이러한 한계를 인정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무지를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인간의 관념 속에 가두지 않으려는 신앙적 겸손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을 본질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면 우리는 과연 하나님을 얼마나 알 수 있으며, 그분을 어떻게 사랑하고 그분과 실제로 결합할 수 있습니까? 이것이 동방정교회의 신비신학과 스베덴보리의 신학이 만나는 첫 번째 질문입니다.
동방정교회는 이러한 문제를 오래전부터 ‘부정신학’(apophatic theology)이라는 전통 속에서 다루어 왔습니다. 부정신학이란 하나님께 무엇이 있다고 말하기보다, 하나님은 우리가 알고 있는 피조물의 어떤 개념으로도 완전히 규정할 수 없는 분이라고 고백하는 신학적 접근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선하시지만 인간이 경험하는 선함의 한계를 초월하시고, 지혜로우시지만 인간의 지성이 이해하는 지혜보다 무한히 높으시며, 존재하시지만 피조물들이 존재하는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으십니다. 이러한 설명은 하나님에게 선이나 지혜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모든 선과 지혜의 근원이시므로 인간이 사용하는 개념만으로는 그분을 충분히 표현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동방정교회는 이와 함께 하나님에 대해 긍정적으로 말하는 ‘긍정신학’(cataphatic theology)도 인정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생명이시고 진리이시라는 성경의 증언은 참되지만, 그러한 긍정적 진술조차 하나님의 무한하신 실재를 다 담아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정신학과 긍정신학은 서로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에 관해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의 경계를 함께 보여 줍니다.
이러한 전통을 대표하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8세기 신학자 다마스쿠스의 요한(John of Damascus)입니다. 그는 자신의 저서 ‘정통신앙 해설’(An Exposition of the Orthodox Faith) 제1권에서 하나님의 신성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며,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것 이상으로 그분의 본질을 규정하려 해서는 안 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완전한 무지 속에 남겨 두신 것은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영원하시고, 시작과 끝이 없으시며, 선하시고, 지혜로우시고, 모든 것의 창조주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 안에서 실제로 어떠한 분이신지를 피조물의 지성으로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구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관한 참된 지식을 얻는 것과 하나님의 무한한 본질 전체를 파악하는 것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전자는 계시를 통해 가능하지만, 후자는 피조물에게 불가능합니다. 미국 정교회(OCA)의 교리 해설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가장 내밀한 본질을 피조물에게 완전히 드러내지는 않으셨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충만하게 계시하셨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동방정교회가 고백하는 하나님의 불가해성은 결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영원히 넘을 수 없는 무지의 장벽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이 문제를 어떻게 가르치고 있습니까? 요1:18은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나 독생하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나타내셨다고 증언합니다. 출33:20에서는 주님께서 모세에게 사람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살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사55:8-9는 하나님의 생각과 길이 인간의 생각과 길보다 높다고 선언합니다. 이 말씀들은 인간이 자신의 자연적 이해만으로 하나님의 본질을 파악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그러나 성경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요14:9에서 예수께서는 빌립에게 자신을 본 사람이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시며, 요17:3에서는 유일하신 참하나님과 그분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가르치십니다. 따라서 성경에는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말씀과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말씀이 함께 있으며,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가르침과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는 가르침도 함께 있습니다. 이 두 가지를 단순한 모순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자연적 감각과 유한한 이성으로 포착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을 계시하실 때 인간은 그 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참되게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단순히 하나님에 관한 정보를 전달하신 분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을 알고 그분과 관계를 맺도록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신 분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이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 사랑과 지혜’(Divine Love and Wisdom, 1763) DLW.17에서 하나님 안에는 무한한 것들이 구별되면서 하나를 이루고 있으며, 인간은 자연적 관념으로 하나님의 무한한 것들을 완전히 지각할 수 없다고 설명합니다. 천사들 역시 인간보다 더 높은 영적 관념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의 무한하심 전체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동방정교회가 강조하는 하나님의 초월성과 중요한 공통점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인간은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자신의 이해 안에 모두 담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높은 천국에 있는 천사라도 피조물이며, 피조물은 결코 무한하신 창조주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는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이 하나님에 대한 참된 관념 자체를 가질 수 없다는 뜻은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무한한 본질을 모두 파악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신 방식에 따라 그분을 참되게 생각하고 사랑하며 그분과 결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관념은 무한을 유한한 개념 안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신을 드러내신 모습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 이 문제를 이해하는 핵심은 ‘하나님은 참으로 인간이시다’(God is very Man)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는 DLW.11에서 천국의 천사들이 하나님을 인간 형상으로 생각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연계의 인간처럼 물질적 신체를 가지셨다거나, 어떤 공간 속에 갇힌 유한한 존재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시며 지혜 자체이시고, 모든 인간적 생명의 원형이시라는 뜻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창1:26-27의 말씀도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닮은 것이지, 하나님께서 인간의 유한한 육체를 닮으신 것이 아닙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에게 자신을 보이셨다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서 있는 별개의 신적 존재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신성이 인간에게 보이도록 자신을 나타내신 ‘신적 인간’(Divine Human)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어떤 추상적 신성을 상상하는 데 머물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와 생명을 알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동방정교회와 스베덴보리의 차이를 지나치게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동방정교회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참되게 알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정교회의 신비신학은 하나님을 인간에게서 멀리 떨어진 추상적인 절대자로 남겨 두려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하나님의 본질을 소유하거나 파악할 수 없으면서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신적 에너지에 참여함으로써 그분과 실제로 결합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신적 에너지는 단순한 물리적 힘이나 하나님께서 만들어 내신 어떤 효과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창조되지 않은 역사하심을 가리킵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신적 사랑과 지혜가 주님에게서 흘러들어오는 ‘인플럭스’(influx)를 통해 인간에게 생명과 선과 진리를 공급한다고 설명합니다. 두 전통 모두 인간이 하나님을 자기 안에 소유하거나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동일해지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실제적인 신적 결합을 가르친다는 점에서 만납니다. 그러나 정교회의 ‘본질과 에너지의 구별’과 스베덴보리의 ‘신적 사랑과 지혜의 인플럭스’를 완전히 같은 교리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각각의 개념이 전제하는 신론과 인간론, 그리고 신적 결합의 구조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 차이는 이후 EO.006과 EO.007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게 됩니다.
그렇다면 두 전통의 차이가 실제 신앙생활에서는 어떻게 나타납니까? 어떤 신자가 하나님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시는 분이라는 말씀을 듣고, 자신은 하나님을 도저히 알 수 없으므로 모든 것을 신비로 남겨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무한하심 앞에서 겸손해지는 것은 옳지만, 그 겸손이 하나님을 알아 가려는 노력 자체를 포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어떤 신자가 성경과 교리를 많이 공부하여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충분히 갖추었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은 이미 하나님을 잘 알고 있다고 확신한다면 그것 역시 위험합니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소유하는 것과 하나님의 사랑 안에 실제로 살아가는 것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동방정교회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앎이 지적 정보의 축적을 넘어 그분과의 살아 있는 결합을 향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진리가 인간의 이해 안에만 머무르지 않고 의지와 삶에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참된 신앙은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인정하면서도 그분을 알아 가고, 하나님을 알아 가면서도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지 않으며, 자신이 이해한 진리를 실제 삶 속에서 사랑과 선으로 실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고백하면서도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을 쉽게 정죄하고, 하나님은 진리이시라고 고백하면서도 자신이 가진 교리적 지식을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는 증거로 삼는다면,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 있을지는 몰라도 그 이름에 담긴 생명을 충분히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에 관한 전문적인 신학 지식은 많지 않더라도,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려 애쓰고, 어려운 이웃을 외면하지 않으며,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을 살피면서 주님께 도움을 구하는 사람은 이미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만큼 하나님의 사랑을 실제 삶에 받아들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신학적 지식 자체가 중요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됩니다. 참된 진리는 인간에게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가르치며, 의지가 주님의 사랑을 올바르게 받아들이도록 안내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지식의 많고 적음보다 그 지식이 어떤 사랑과 결합하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인간의 영적 성숙은 진리를 많이 아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이해가 받아들인 진리가 의지의 사랑과 결합하여 삶의 선으로 나타날 때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은 결국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가르치시는 선을 행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십니까? 그렇습니다. 동방정교회의 이 고백에는 인간이 결코 잃어버려서는 안 될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지성으로 완전히 설명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시며, 천사조차 하나님의 무한하심 전체를 파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고백이 하나님을 참되게 알 수 없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면, 그것은 성경이 증언하는 계시의 목적과 어긋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영원히 알 수 없는 분으로 남아 계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자신을 알고 사랑하며 자신과 결합하도록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나타내셨기 때문입니다. 동방정교회는 이 신비를 성육신과 신적 에너지에의 참여라는 언어로 설명하고, 스베덴보리는 신적 인간과 신적 사랑 및 지혜의 인플럭스라는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두 전통의 차이를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인정하는 일과 하나님을 참되게 아는 일은 서로 대립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참된 겸손은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물러서는 데 있지 않고, 자신이 아는 하나님보다 하나님께서 무한히 크신 분임을 인정하면서도 그분이 주신 계시를 따라 계속 알아 가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결국 신앙의 목적은 하나님을 완전히 설명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알도록 허락하신 하나님을 참되게 알고 그분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EO.001 해설)
요약
동방정교회가 고백하는 하나님의 불가해성은 인간이 하나님의 무한한 본질을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는 참된 겸손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과 하나님을 참되게 알 수 없다는 주장은 구별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하나님은 무한하시므로 피조물이 그분을 모두 이해할 수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나타내신 신적 인간으로서 인간이 알고 사랑하며 결합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결국 참된 신앙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포기하는 것도, 그 지식을 완전하다고 여기는 것도 아니라, 주님께서 계시하신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사랑과 선한 삶으로 실현하는 데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