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 영상은 상당히 자극적인 대비로 시작합니다. 같은 남자가 한국에서는 늘 부족한 남자 친구가 되었는데 일본에서는 작은 행동에도 고마움을 받는 남자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픈 남자 친구에게 한국인 여자 친구는 ‘괜찮아? 근데 오늘 내 친구 생일 모임은 어떡하지?’라고 묻고, 일본인 여자 친구는 죽과 음료를 들고 찾아옵니다. 영상은 이 두 장면을 출발점으로 삼아 ‘눈치 주던 한국 여자’와 ‘감동 주던 일본 여자’를 대비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서 먼저 한 가지를 걷어내야 합니다. 이것은 ‘한국 여자와 일본 여자는 본질적으로 이렇다’는 이야기가 될 수 없습니다. 영상이 제시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두 여성과 한 남자의 사례이며, 국적이나 민족 전체의 영적 성향을 이것으로 일반화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 사례 안에서 드러나는 ‘사랑을 받는 방식과 사랑을 주는 방식’을 살펴보는 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영상 속 첫 번째 관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사랑에 끊임없이 ‘정답’이 있다는 것입니다. 100일에는 꽃다발이 아니라 목걸이를 알아서 준비해야 했고, 친구 모임에 가도 되는지 안 되는지를 상대의 말이 아니라 표정과 분위기로 알아내야 했으며, 조용하면 ‘어렵다’고 하고 적극적으로 말하면 ‘오버한다’고 합니다. 남자가 행동을 고쳐도 그 변화 자체에는 별다른 반응이 없고 새로운 부족함이 다시 발견됩니다. 영상은 이를 매우 정확하게 ‘연애를 하는 건지 매일 시험을 보는 건지 모르겠다’는 말로 표현합니다. 반면 두 번째 관계에서는 요구가 비교적 명확하고, 상대가 베푼 작은 행동을 알아보고 ‘고맙다’고 표현하며, 잘못했을 때도 무엇이 서운했고 다음에는 어떻게 해주었으면 하는지를 직접 말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과 만나는 중요한 지점이 있습니다. 사랑은 본질적으로 상대에게서 무엇을 받아내는 데서 기쁨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선을 원하고 그에게 선을 행하는 데서 기쁨을 느낍니다. 천국적 사랑과 자기 사랑의 차이도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 사랑은 끊임없이 ‘상대가 나를 어떻게 대하는가’를 계산하지만, 천국적 사랑은 ‘나는 상대에게 어떤 선이 될 수 있는가’를 생각합니다. 물론 인간의 연애와 결혼에서 사랑받고 싶은 욕구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사랑받고 싶은 욕구가 관계의 중심이 될 때입니다. 그러면 상대의 행동은 어느 순간부터 모두 사랑을 측정하는 시험지가 됩니다.

 

영상의 표현을 빌리면 이것이 바로 ‘사랑을 확인받으려는 사랑’입니다. 은정 씨 역시 성우 씨를 좋아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라고 영상은 분명히 말합니다. 다만 좋아하는 만큼 바라는 것이 많았고, 그 바람을 직접 말하기보다 상대가 알아서 맞혀주기를 원했습니다. 맞히면 당연한 것이 되고 틀리면 서운한 것이 됩니다. 이것은 연애에서 매우 흔하게 나타나는 proprium의 한 모습으로 볼 수 있습니다. ‘나를 사랑한다면 이것쯤은 알아야지’, ‘나를 사랑한다면 이 정도는 해야지’, ‘다른 남자 친구들은 한다는데 왜 당신은 못 해?’라는 생각입니다. 여기에는 사랑이 있지만 그 사랑 안에 자기중심성이 섞여 있습니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는 대신 상대의 행동을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가’라는 척도로 계속 환산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영상에서 반복되는 ‘비교’는 영적으로도 주목할 만합니다. ‘친구 남자 친구는 이것을 해줬다’, ‘다른 남자들은 다 한다’, ‘언니 남자 친구는 이것도 보냈다’는 말입니다. 비교가 관계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상대는 더 이상 고유한 한 사람이 아니라 타인과 경쟁하여 일정한 기준을 충족해야 하는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사랑은 ‘당신이어서’ 기뻐하는 것인데, 비교는 ‘다른 사람보다 당신이 얼마나 잘하는가’를 묻습니다. 그래서 비교가 지속되면 선물도 선물이 아니게 되고, 배려도 배려가 아니게 되며, 사랑에서 자발적으로 하던 행동조차 점차 의무가 됩니다.

 

반대로 두 번째 관계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거창한 희생이 아닙니다. ‘지난번에 김치 먹고 싶다고 하셔서요’, ‘오늘 우산 씌워줘서 고마워요’, ‘예약까지 알아봐줘서 고마워요’ 같은 아주 작은 반응입니다. 상대가 지나가듯 한 말을 기억하고, 우산을 씌워주느라 젖은 어깨를 알아보고, 맛없는 식당에서도 결과보다 예약하고 준비한 마음을 봅니다. 영상 후반부에서 성우 씨가 일본인 여자 친구와의 차이를 ‘그 사람은 내가 한 걸 알아봐줘’라고 한 것은 그래서 의미가 있습니다.

 

‘알아봐준다’는 것은 생각보다 깊은 사랑의 행위입니다. 우리는 가까운 사람의 선을 가장 쉽게 ‘당연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고마웠던 출퇴근길 배려가 몇 년 뒤에는 당연한 일이 되고, 처음에는 감사했던 식사 준비와 설거지와 육아와 경제적 책임이 시간이 흐르면 ‘원래 당신이 해야 하는 일’이 됩니다. 영상도 정확히 이것을 지적합니다. 월급이 들어오는 것, 주말에 아이를 데리고 나가는 것, 명절에 운전하는 것 등이 어느 순간 모두 당연한 일이 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감사는 단순한 인간관계 기술보다 더 깊습니다. 내가 받은 선을 ‘내가 당연히 받을 몫’으로 보지 않는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자기성에서 한 걸음 물러나는 일입니다. 배우자가 밥을 해주는 것도, 돈을 벌어오는 것도, 차로 데려다주는 것도, 아플 때 돌보는 것도 그 사람에게서 자동으로 발생하는 기능이 아닙니다. 한 인격이 나를 위해 시간과 힘을 사용한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보는 순간 상대는 ‘내 필요를 충족시키는 사람’에서 ‘나에게 선을 베풀고 있는 한 사람’으로 다시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고마워’라는 짧은 말은 관계 안에서 proprium의 지배를 약하게 만드는 매우 작은 체어리티의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영상에는 이것을 아주 잘 보여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남자가 처음 만든 김치찌개가 맛이 없었는데 유이 씨는 한 그릇을 다 먹고 ‘한국 사람이 해준 김치찌개 처음 먹어 봐요. 다음에 또 해 줘요’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남자는 유튜브를 보며 요리를 연습하고 나중에는 된장찌개와 제육볶음까지 만들게 됩니다. 이것을 단순히 ‘남자를 움직이는 여자 화법’ 정도로 읽으면 너무 얕습니다. 사랑이 상대 안의 선을 발견하고 인정해 줄 때 그 선이 더욱 자라날 수 있다는 이야기로 읽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끊임없는 비난 속에서도 변할 수 있지만, 자신 안의 작은 선을 누군가 알아봐줄 때 훨씬 자유롭게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중요한 균형이 필요합니다. 유이 씨처럼 무조건 칭찬하고 참고 맞춰주는 것이 이상적인 사랑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영상에는 오히려 매우 중요한 반례가 있습니다. 성우 씨가 약속을 잊고 술자리에 가서 한 시간을 기다리게 했을 때 유이 씨는 ‘괜찮아요’라고 덮어버리지 않습니다. ‘어제는 조금 서운했어요. 다음에 늦으면 먼저 연락해 줘요’라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또 일본 전철에서 전화 통화하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다는 사실도 알려줍니다. 다만 ‘틀린 것을 알려주되 창피하지 않게’ 알려줍니다. 바로 이것이 체어리티와 연결됩니다. 사랑은 상대의 잘못을 못 본 척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더 나아질 수 있도록 진리를 사랑 안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영상의 핵심은 ‘남자는 칭찬해야 말을 듣는다’도 아니고 ‘일본 여자는 한국 여자보다 남자를 잘 다룬다’도 아닙니다. 더 깊은 질문은 ‘나는 사랑하는 사람의 선을 보고 있는가, 아니면 부족한 것만 찾고 있는가?’입니다. 상대에게 열 가지 선이 있고 한 가지 부족함이 있을 때 proprium은 이상하게도 그 한 가지에 시선을 고정합니다. 그리고 그 부족함이 채워지면 잠시 감사하는 대신 열한 번째 부족함을 찾아냅니다. 그렇게 되면 상대는 아무리 노력해도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보다 계속 평가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것은 남녀 어느 한쪽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남편도 아내의 수많은 수고를 ‘원래 아내가 하는 것’으로 만들 수 있고, 아내도 남편의 수고를 ‘원래 남편이 하는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부모도 자녀의 효도를 당연하게 여길 수 있고, 자녀도 부모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목회자도 교인의 섬김을 당연하게 여길 수 있으며 교인도 목회자의 수고를 당연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당연함’은 감사가 사라지는 자리이며, 감사가 사라지면 관계는 조금씩 권리와 의무의 거래로 변하기 쉽습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상대의 반응에 따라 성우 씨 자신이 달라졌다는 점입니다. 서울에서는 ‘안 하면 서운하다고 할까 봐’ 행동했지만 도쿄에서는 ‘하고 싶어서’ 행동하기 시작합니다. 고맙다는 말을 들으니 다시 데려다주고 싶고, 맛있다는 말을 들으니 다시 요리하고 싶어졌다는 것입니다. 외적인 행동은 비슷합니다. 데려다주고, 선물을 하고, 음식을 만들고, 기념일을 챙깁니다. 그러나 내적 동기가 달라졌습니다. 하나는 두려움과 의무에서 나오고 다른 하나는 자유와 기쁨에서 나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영적 삶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했느냐만이 아니라 ‘어떤 사랑에서 그것을 했느냐’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이 영상은 결혼애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합니다. ‘결혼애’(Conjugial Love, 1768, CL)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참된 결혼적 결합은 상대를 이용하여 나의 행복을 충족시키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의 선을 기뻐하면서 점차 하나의 삶을 이루어 가는 관계입니다. 참된 결혼에는 ‘하나가 되고자 하는 의지’가 있습니다(CL.215). 그러나 하나가 된다는 것은 한쪽이 다른 쪽의 기대를 완벽하게 읽고 맞추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의 내면을 알려고 하고, 필요한 것은 정직하게 말하며, 받은 선에는 감사하고, 잘못은 사랑 안에서 바로잡으면서 두 사람 모두 조금씩 자기성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상 제목의 ‘감동 주는 일본 여자와 눈치 주는 한국 여자’라는 구도는 ‘스베덴보리의 렌즈’ 앞에서는 결국 사라져야 합니다. 국적을 떼어내고 나면 남는 것은 두 종류의 사랑입니다. ‘내가 얼마나 사랑받는지 끊임없이 확인하려는 사랑’과 ‘상대에게서 오는 작은 선을 발견하고 기뻐하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랑은 한국인 안에도, 일본인 안에도, 남자 안에도, 여자 안에도 모두 있을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한 사람 안에서도 이 두 모습을 동시에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떤 날에는 배우자가 해준 작은 일을 보고 진심으로 ‘고마워’라고 말하면서도, 다른 날에는 ‘그 정도는 당연한 것 아니야?’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때에는 상대의 실수를 부드럽게 알려주다가도 어떤 때에는 ‘그것도 몰라?’라며 자존심을 상하게 합니다. 그래서 이 영상은 ‘어떤 여자를 만나야 하는가?’라는 질문보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읽을 때 훨씬 깊어집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비추는 마지막 지점은 주님입니다. 인간에게 있는 모든 참된 선의 근원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입니다. 그러므로 상대에게서 작은 선을 발견하고 감사하는 습관은 궁극적으로 그 사람을 넘어 그 선의 근원이신 주님을 향하게 합니다. 배우자가 오늘도 수고했다는 것, 나를 기다려 주었다는 것, 아픈 나를 돌보았다는 것, 서툰 음식을 만들어 주었다는 것, 내 말을 기억해 주었다는 것을 알아보는 사람은 일상의 평범한 순간 속에 들어오는 선을 발견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영상 마지막의 ‘남자는 거창한 대접을 받고 싶은 게 아니다’라는 결론도 조금 넓혀 말할 수 있겠습니다. 남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베푼 작은 선이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에 닿았음을 알고 싶어 합니다. ‘고마워’, ‘오늘 수고했어’, ‘당신이 해줘서 좋았어’, ‘그때 내가 힘든 걸 알아줘서 고마웠어.’ 이런 말은 작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상대의 존재와 선을 ‘내가 보고 있다’는 고백입니다.

 

어쩌면 오래된 관계가 메말라가는 가장 위험한 순간은 싸움이 많아졌을 때보다 ‘고마운 것이 없어졌을 때’인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고마운 일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너무 익숙해져 당연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거듭남은 거창한 곳에서만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내 곁의 사람이 해준 아주 작은 일을 다시 발견하는 데서도 시작될 수 있습니다. ‘왜 이것밖에 못 하지?’에서 ‘이것도 해주었구나’로 시선이 바뀌는 순간입니다.

 

결국 이 영상에서 가장 오래 남겨둘 문장은 ‘한국 여자와 일본 여자는 다르다’가 아니라 이것일 것입니다. ‘은정 씨는 사랑을 확인받으려 했고 유이 씨는 사랑을 알아봐줬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 문장을 우리 자신에게 돌려놓습니다. ‘나는 지금 사랑을 확인받으려고 하는가, 아니면 내 곁에 이미 와 있는 사랑을 알아보고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는 한국인도 일본인도,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주님 앞에서 자기 사랑을 내려놓으며 서로의 선을 발견하는 법을 배워 가는 두 사람만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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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104 심화

1. 천국은 악과 어떻게 싸우는가?

천사들은 악령들과 어떻게 싸우나요? 직접 1:1로 마치 칼싸움하듯 싸우나요, 아니면 천사들의 아우라 범위를 악령들이 침범하지 못하는 건가요?

 

스베덴보리의 묘사를 종합하면 ‘둘 다 아니고, 훨씬 더 내적인 방식’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천사와 악령이 마치 육체를 가진 병사들처럼 칼을 들고 1:1로 싸우는 것이 기본적인 모습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천사의 아우라가 강해서 악령이 접근하지 못한다’ 정도도 아닙니다. 핵심은 ‘선과 진리의 입류(influx)를 통한 영적 전투’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영계에서 천사와 영들은 모두 자신들의 사랑과 사고에 따른 ‘스피어(sphere, 영역·기운)’를 발산합니다. 천사에게서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과 진리의 스피어가 나오고, 악령에게서는 자기애와 세상 사랑, 거짓과 악의 스피어가 나옵니다. 그래서 서로 반대되는 스피어가 가까워지면 실제적인 충돌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닙니다. 영계에서는 사랑과 생각이 자연계의 물리적 힘보다 훨씬 직접적인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천사들이 악령과 싸울 때 중요한 것은 ‘천사 자신의 힘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다’라는 점입니다. 천사들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전달합니다. 악령은 그 진리를 견디지 못합니다. 자기 안에 있는 악과 거짓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사가 진리를 말하거나 천사의 스피어가 임하면 악령이 고통을 느끼고 물러가거나 도망치는 일이 생깁니다. 어떤 경우에는 가까이 접근하는 것 자체를 견디지 못합니다. 목사님이 말씀하신 두 번째 그림, 즉 ‘천사들의 아우라 범위를 악령들이 침범하기 어렵다’는 표현이 1:1 칼싸움보다는 훨씬 가깝습니다. 다만 ‘보이지 않는 방어막’처럼 이해하면 조금 다릅니다. 그것은 천사 개인의 초능력 같은 것이 아니라 ‘그 천사를 통해 임하는 주님의 선과 진리의 질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영계의 전투를 때때로 ‘전쟁’, ‘무기’, ‘칼’, ‘방패’ 같은 모습으로 묘사한다는 점입니다. 영계에서는 내적인 것이 외적인 형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들이 실제로 싸우는 것처럼 보이는 표상적 장면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형상의 실체는 물리적인 근육과 철제 무기의 충돌이 아니라 ‘진리와 거짓, 선과 악의 충돌’입니다. 성경에서 ‘칼’이 진리를, 반대 의미에서는 거짓을 뜻하는 것도 이 상응과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영계에서 칼싸움 같은 장면이 보인다 해도 ‘천국에는 실제 무기고가 있고 천사들이 칼을 차고 출동한다’고 이해하면 스베덴보리의 영계론과는 상당히 멀어집니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천사들은 악령을 ‘죽이는 것’을 목표로 싸우지 않습니다. 영은 죽일 수도 없습니다. 천사들의 역할은 악령의 공격을 억제하고, 공격받는 사람이나 영을 보호하며, 악령이 주입하는 거짓에 맞서 진리를 불어넣는 것입니다. 특히 인간이 시험(temptation)을 겪을 때 이 구조가 선명합니다. 악령들은 인간 안의 악과 거짓, 과거의 기억과 욕망을 자극하고, 천사들은 그 반대편에서 선과 진리를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그 싸움이 ‘내 생각과 내 갈등’처럼 느껴집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적 시험의 놀라운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래서 그림으로 표현한다면 이런 모습이 가장 가깝습니다.

 

‘악령 → 인간 안의 악·거짓·두려움·절망을 자극 → 인간 ← 선·진리·소망을 일깨움 ← 천사 ← 주님’

 

그러나 이것조차 최종적으로는 ‘천사 대 악령’의 대등한 전쟁이 아닙니다. 천사의 모든 능력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악령이 천사를 두려워하는 것도 천사라는 존재 자체가 무서워서라기보다 그 천사를 통하여 임하는 ‘주님의 선과 진리’를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사가 자신의 힘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오히려 능력을 잃는다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일관된 설명입니다.

 

이걸 조금 전 ‘시티즌 비질란테’와 연결하면 아주 흥미로운 차이가 드러납니다. 비질란테의 방식은 ‘악인을 파괴하여 악을 제거하려는 방식’입니다. 반면 천국의 방식은 ‘악이 더 이상 다른 존재를 해치지 못하도록 억제하고 분리하여 질서를 회복하는 방식’에 가깝습니다. 천사는 악령을 증오해서 두들겨 패는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질서가 임하면 악이 그 질서를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물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라’라는 표현을 조금 다듬는다면 ‘천사의 스피어(sphere)’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더 정확하게는 ‘천사의 스피어’조차 천사 자신의 것이 아니라 ‘천사를 통하여 흘러드는 주님의 선과 진리의 스피어’입니다.

 

 

 

SY.104, 씨네마톡, ‘시티즌 비질란테’(Citizen Vigilante, 2026) - 정의가 복수가 되는 순간

※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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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 영상을 보는 동안 마음이 불편한 까닭은 단순히 폭력적인 장면이 등장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더 불편한 것은 우리가 주인공의 행동을 어느 순간 ‘이해하게 된다’는 데 있습니다. 영화는 먼저 무고한 사람이 잔혹한 범죄의 희생자가 되고, 법과 제도가 피해자를 충분히 보호하지 못하며, 가해자들이 그 틈을 빠져나가는 상황을 보여 줍니다. 그러고는 비질란테를 등장시킵니다. 사람들은 그를 ‘쓰레기를 치우는 사람’, ‘무력한 사람들을 돕는 진짜 기사’라고 환호합니다. 여기서부터 이 작품은 관객에게 위험한 질문 하나를 건넵니다. ‘법이 정의를 실현하지 못한다면 누군가는 대신해야 하지 않는가?’

 

이 질문이 강력한 까닭은 그 출발점에 분명한 진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악은 악입니다. 강간과 살인, 폭력과 약탈을 ‘그 사람에게도 사정이 있었을 것’이라는 말로 희석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체어리티는 악을 선이라고 부르는 무조건적인 관용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정한 체어리티는 악이 계속해서 이웃을 해치지 못하도록 막는 일을 포함합니다. 사회의 법과 재판과 형벌도 이런 관점에서는 단순한 세속 제도가 아니라 공동선을 보호하기 위한 질서의 한 부분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피해자의 고통을 외면하면서 가해자를 무조건 용서하라고 말하는 렌즈가 아닙니다. 악을 악이라고 분명히 보고, 그것을 제어하고, 무고한 사람을 보호해야 합니다.

 

그래서 영화 중간의 피해자 장면은 특히 곤혹스럽습니다. 비질란테는 피해자에게 재판이 몇 년이나 걸릴 수 있고, 그동안 피해자가 자신이 당한 일을 계속 증언해야 하며, 판결이 어떻게 나올지도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그것이 당신이 원하는 정의입니까?’ 이어서 ‘정의를 원합니까?’라고 묻습니다.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쉽게 ‘그렇다면 저 사람이 처리하는 편이 낫지 않은가?’ 하는 마음으로 넘어갑니다. 바로 이것이 이 영화에서 가장 주의 깊게 보아야 할 지점입니다. ‘악에 대한 분노’와 ‘악인에 대한 증오’가 거의 구별되지 않는 지점까지 서로 가까이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이 둘은 결코 같은 것이 아닙니다. 악을 미워하는 것은 그 악 때문에 사람이 파괴되고 이웃이 고통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악인을 증오하면서 그의 고통과 파멸 자체에서 쾌감을 느끼기 시작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그 순간 중심은 더 이상 ‘이웃을 악에서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저 사람에게 고통을 돌려주는 것’으로 이동합니다. 정의의 외형을 하고 있지만 그 내면에는 복수의 쾌감이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 영화가 섬뜩한 것은 바로 이 변화가 매우 자연스럽게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무고한 사람을 보호합니다. 다음에는 범죄자를 응징합니다. 그러다가 경찰에게까지 ‘나를 방해하면 죽이겠다’고 말합니다. 정의를 집행한다고 시작한 사람이 어느 순간 자신이 무엇이 정의인지 결정하고, 누가 악인인지 판결하고, 형량까지 정하며, 마침내 자신을 막는 공권력까지 제거할 권한이 있다고 여기게 된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장면은 판사를 찾아가는 대목입니다. 비질란테는 미성년자를 집단 성폭행한 가해자들이 엄중한 처벌을 받지 않은 책임을 판사에게 묻습니다. 영화 속 판사는 이들의 범죄를 사회 통합의 실패와 연결하고 가해자들도 일종의 피해자라고 설명합니다. 그러자 비질란테는 그 판사를 피해자를 해친 사람들과 사실상 같은 편에 놓습니다. 관객의 분노를 극대화하도록 만들어진 장면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함정이 있습니다. 잘못된 판결을 비판하는 것과 ‘그러므로 내가 그 판사를 심판할 권리가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정의가 훼손되었다는 사실이 자동으로 개인에게 최종 심판권을 부여하지는 않습니다. 질서의 실패가 ‘나 자신이 질서가 되어도 된다’는 결론으로 이어지는 순간, 비질란테는 자기가 싸우던 악의 논리를 닮기 시작합니다.

 

마지막 집단 성폭행 가해자들을 찾아가는 장면은 이 문제를 극단까지 밀어붙입니다. 영화는 가해자들이 진정으로 뉘우치지 않았다는 정황을 일부러 제시합니다. 한 사람은 피해자가 옷을 그렇게 입었기 때문에 그런 일을 당했다는 취지의 말을 하고, 비질란테는 그 가족에게까지 책임을 추궁합니다. 결국 감옥을 피했던 사건 관련자들은 모두 죽습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분노가 치밀고 ‘저런 자들은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한다’고 느끼는 것 자체와, 그들이 고통받고 죽는 모습을 즐기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바로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관객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나는 지금 정의가 회복되기를 바라는가, 아니면 저 인간들이 처참하게 당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가?’ 두 마음은 겉으로 매우 비슷하지만 영적으로는 전혀 다른 근원에서 나올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심판은 인간의 복수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주님은 악인을 미워해서 지옥에 던지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흘러나오는 것은 오직 사랑과 선이며, 심판조차도 질서를 회복하고 선한 자들을 악에서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지옥의 형벌 역시 ‘당한 만큼 갚아 주시는’ 신적 보복이라기보다 악이 다른 존재를 무제한으로 해치지 못하도록 억제하는 질서와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인간 사회에서도 형벌의 정당성은 ‘저 사람이 얼마나 고통받아야 내 분이 풀리는가’가 아니라 ‘악을 어떻게 억제하고 무고한 이웃을 어떻게 보호하며 무너진 질서를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에 있어야 합니다. 똑같이 엄한 형벌이라도 그 내면의 목적은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체어리티를 단순한 ‘착함’이나 ‘봐주기’로 이해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는 어쩌면 비질란테만이 아닙니다. ‘그를 환호하는 사람들’이며, 더 깊이 들어가면 영화를 보면서 어느새 그를 응원하게 되는 ‘우리 자신’입니다. 작품 속 사람들은 ‘우리나라에도 저런 사람이 필요하다’고 환호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proprium은 기묘합니다. 처음에는 ‘무고한 사람을 보호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다음에는 ‘악인은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까지는 옳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한 걸음에서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고통을 주어도 된다’고 넘어갑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가 고통받는 것을 보니 속이 시원하다’가 됩니다. 이때 선과 진리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음에도 그 내면에는 이미 복수와 증오가 들어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옥적인 것은 언제나 처음부터 ‘나는 악이다’라고 말하며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나는 정의다’라는 얼굴을 하고 들어옵니다.

 

그렇다고 이 영화를 보고 ‘그러니 분노해서는 안 된다’고 결론 내려서도 안 됩니다. 그것 역시 너무 단순합니다. 무고한 아이가 성폭력을 당하고, 사람이 살해되고, 가해자가 피해자를 조롱하는데도 아무런 분노가 없다면 그것을 반드시 영적 성숙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에는 이웃을 파괴하는 악에 대한 거부가 있습니다. 문제는 그 거부가 어디를 향하느냐입니다. ‘악이 멈추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악한 사람이 파멸하기를 원하는가.’ 전자는 질서를 향하고 후자는 복수를 향할 수 있습니다. 물론 현실의 마음에서는 이 둘이 너무나 쉽게 섞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신의 분노를 정의라고 즉시 성별해서는 안 됩니다.

 

결국 ‘시티즌 비질란테’가 ‘스베덴보리의 렌즈’ 앞에서 던지는 질문은 ‘저 비질란테가 옳은가, 법원이 옳은가?’ 정도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훨씬 더 불편한 질문으로 돌아옵니다. ‘나는 악을 미워하는가, 아니면 악인을 미워하는가?’, ‘나는 피해자가 보호받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가해자가 고통받는 것을 보고 싶은가?’, ‘나는 정의를 원하는가, 아니면 정의라는 이름으로 나의 분노가 허락받기를 원하는가?’

 

이 구별 앞에서는 저 역시 쉽게 자신할 수 없습니다. 끔찍한 악행을 보면 마음이 흔들리고, 법이 그것을 제대로 막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면 분노가 일어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이 렌즈를 내려놓을 때가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이 들여다보아야 할 때인지도 모릅니다. 악을 선이라 하지 않되 악인을 향한 증오에 자신을 내어주지도 않고, 피해자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되 복수를 정의로 착각하지도 않으며, 필요한 형벌과 질서는 단호하게 세우되 인간의 최종적인 내면과 영원한 운명에 대한 심판은 주님께 남겨 두는 것, 그것이 이 잔혹하고 불편한 영화를 통과하며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가장 어려운 분별일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 영화가 보여 주는 가장 깊은 역설은 이것입니다. ‘악과 싸우는 동안, 그 악이 내 안으로 들어오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이 악을 처벌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싸움일지도 모릅니다.

 

심화

1. 천국은 악과 어떻게 싸우는가?

 

SY.104 심화 1, 씨네마톡, ‘천국은 악과 어떻게 싸우는가?’

SY.104 심화1. 천국은 악과 어떻게 싸우는가?천사들은 악령들과 어떻게 싸우나요? 직접 1:1로 마치 칼싸움하듯 싸우나요, 아니면 천사들의 아우라 범위를 악령들이 침범하지 못하는 건가요? 스베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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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48 심화

1. 그렇다면 사후의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 여전히 ‘사람’인가?

 

AC.443-448을 모두 읽고 나면 한 가지 큰 질문이 남습니다. 육체는 죽어 땅에 남는데도 사후의 존재가 보고 듣고 생각하고 말하며 자신을 여전히 ‘나’라고 느낀다면, 도대체 무엇이 그 사람을 계속 같은 사람으로 있게 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단순히 ‘영혼이 죽지 않는다’는 문제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여섯 글에서 말하는 사후의 인간은 희미한 의식이나 기억의 흔적이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다른 사람을 만나며 감각하고 생각하는 한 사람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AC.443은 먼저 육체가 사라지면 생명도 희미해질 것이라는 생각을 뒤집습니다. 그 사람은 생명이 몸에 있고 영은 일종의 희미한 환영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후에는 오히려 영들과 천사들이 더 큰 빛과 지성과 지혜 가운데 있으며, 그 지각 역시 매우 분명하다는 것을 보고 놀랍니다. 여기서 첫 번째 중요한 사실이 드러납니다. 육체가 사라진다고 해서 ‘나’의 의식과 지각이 희미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AC.444-446은 그 이유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관념을 바로잡습니다. 영은 단순한 ‘생각’이나 아무런 실체도 없는 추상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영을 ‘유기적 실체’라고 하며, 연장과 실체를 모두 제거하여 결국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만들어 버리는 관념을 비판합니다. 이것은 사후에 남는 것이 단순히 한 사람의 생각이나 기억이라는 뜻이 아니라, 생각하고 기억하고 지각하는 바로 그 주체가 계속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것입니다.

 

AC.447에서 이 사실은 더욱 직접적으로 표현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은 자신의 생명에 있어서는 영’이라고 말합니다. 몸은 사람이 땅 위에서 살아가기 위한 것이며, 살과 뼈 자체가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체를 떠난 초보 영도 여전히 보고 듣고 대화할 수 있었고, 자신이 영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뒤 ‘나는 영이다!’라고 외쳤습니다. 그에게서 육체는 사라졌지만, 자신을 ‘나’라고 느끼며 생각하고 감각하는 주체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제 AC.448에 이르면 이 모든 설명이 실제 인물들의 연속성이라는 문제로 모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세상에서 알고 지냈던 많은 사람들과 그들이 죽은 뒤에도 몇 달에서 몇 년 동안 대화했다고 기록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 나타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지상에서 알았던 친구들을 기억하고 그들에게 자신의 소식을 전하고 싶어 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과거를 알고 있었고, 지상의 관계를 기억했으며, 자신이 죽은 뒤에도 살아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전하는 체험 안에서는 육체의 죽음이 개인의 정체성을 지워 버리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사람’이라는 말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사람을 눈에 보이는 육체와 거의 동일하게 생각한다면 육체가 죽는 순간 그 사람도 사라졌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AC.443-448의 관점에서는 육체가 ‘사람 자체’라기보다 사람이 자연계에서 살아가기 위한 몸입니다. 보고 듣고 원하고 생각하며 자신의 삶을 의식하는 주체는 영입니다. 그러므로 육체를 벗는다고 해서 사람이 사람이 아니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육체를 통해 살아가던 그 영적 주체가 계속 살아갑니다.

 

이것은 ‘영혼은 죽지 않는다’는 표현보다 훨씬 생생한 사후관을 보여 줍니다. 흔히 ‘영혼’이라고 하면 육체에서 빠져나온 희미한 무엇을 떠올리기 쉽지만, 이 단락에서 스베덴보리가 묘사하는 사후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보고 듣고 생각하며 대화하고, 다른 사람을 알아보고,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기억합니다. AC.448에서 삶이 ‘희미한 삶에서 밝은 삶으로’ 옮겨 간다고 한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죽음 이후의 삶은 인간성이 줄어드는 방향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생명과 지각이 더욱 분명해지는 방향으로 묘사됩니다.

 

다만 AC.443-448만으로 사후 인간의 모든 상태를 동일하게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AC.448은 ‘주님을 신앙하는 사람들’이 ‘더욱더 밝아지는 삶’으로 들어간다고 별도로 말합니다. 따라서 모든 영의 영적 상태와 행복이 같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단락이 일관되게 밝히는 핵심은 선악이나 천국과 지옥의 모든 차이를 설명하는 데 있지 않고, 육체의 죽음이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를 소멸시키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결국 AC.443-448이 보여 주는 사후의 연속성은 ‘무언가가 살아남는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살아남는 것은 바로 생각하고 느끼고 기억하며 자신을 ‘나’라고 지각하는 인간 자신입니다. 그래서 이 단락의 질문은 ‘죽으면 내 영혼이 남는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지금 여기서 살아 있는 나 자신은 본질적으로 누구인가?’로 향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답은 AC.447의 표현으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생명에 있어서는 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 뒤에도 어떤 희미한 흔적이 아니라 바로 그 사람이 계속 살아가는 것입니다. (AC.448 심화 1)

 

 

 

AC.448, 창4 뒤, ‘육체의 삶보다 더 밝고 분명하게 이어지는 사후의 삶’

영혼 또는 영에 관하여 그들이 육체의 삶 동안 무엇을 생각했는지에 대한 영들과의 체험에서 얻은 몇 가지 사례 AC.448나는 이 세상에서 알고 지냈던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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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44 심화

1. 영이 ‘유기적 실체’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AC.444에서 스베덴보리는 영을 단순한 ‘생각’이라고 여겼던 사람에게 영은 ‘유기적’이며, 곧 ‘유기적 실체’(organic substance)라고 말합니다. 오늘날 독자에게는 오히려 이 표현이 낯설 수 있습니다. 영이 유기적 실체라면 육체처럼 어떤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뜻인가, 아니면 영에게도 눈이나 뇌 같은 기관이 있다는 뜻인가 하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그러나 먼저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가 무엇을 반박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상대방은 영에게 아무런 연장(extension)도 없다고 생각했고, 결국 영을 ‘생각’ 그 자체라고 여겼습니다. 다시 말해 ‘생각하는 존재’와 ‘생각’을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스베덴보리는 그 사람이 지금 영이 된 상태에서도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매우 섬세하게 촉각을 느끼며, 원하고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영은 단순히 남아 있는 ‘생각’이 아니라 실제로 생각하고 감각하는 주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기적 실체’라는 표현을 이해하는 첫 번째 열쇠입니다. 육체의 시각에는 눈이라는 기관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는 ‘내적 시각, 곧 생각’에도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어떤 실체적 토대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묻습니다. 생각이 아무것에도 속하지 않은 채 허공에서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생각하는 주체 역시 단순한 추상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어떤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그는 영을 ‘유기적 실체’라고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뇌를 예로 드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영혼이나 영이 아무런 유기적 토대도 필요 없는 ‘생각 자체’라면, 인간에게 내적 감각의 기관인 그토록 큰 뇌가 왜 필요한가 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는 영혼이 근육에 작용하여 다양한 움직임을 일으킨다는 점도 제시합니다. 여기서 그의 논지는 영혼을 육체의 어느 한 부분과 동일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고 생각하며 작용하는 존재를 아무런 구조도 실체도 없는 추상적인 ‘생각’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데 있습니다.

 

다만 AC.444만으로 ‘유기적 실체’를 자연계의 물질과 같은 것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이 글은 영이 어떤 종류의 실체로 이루어져 있는지, 영적 기관과 육체적 기관은 정확히 어떤 관계인지, 영의 연장은 자연적 공간의 연장과 어떻게 다른지를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 문제까지 이 한 글에서 답하려 한다면 본문보다 앞서 나가게 됩니다. 여기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영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나 ‘순수한 생각’이 아니라는 데까지입니다.

 

그러므로 AC.444에서 ‘유기적 실체’라는 표현의 핵심은 먼저 영의 ‘실재성’에 있습니다. 나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육체이고, 죽으면 그 생각만 희미하게 남는 것이 아니라, 지금 생각하고 원하고 느끼는 ‘나’의 생명 자체가 영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점을 붙들면 스베덴보리가 왜 영을 단순한 생각이라고 하는 관념을 그토록 강하게 바로잡으려 했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영은 생각 그 자체가 아니라 ‘생각하는 존재’이며, 바로 그 존재가 실제로 살아 있고 감각하며 활동한다는 것입니다. (AC.444 심화 1)

 

 

 

AC.444, 창4 뒤, ‘영은 단지 생각일 뿐이며 아무런 형체도 없는가?’

영혼 또는 영에 관하여 그들이 육체의 삶 동안 무엇을 생각했는지에 대한 영들과의 체험에서 얻은 몇 가지 사례 AC.444이 세상에 살 때 영은 아무런 연장(extension)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믿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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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또는 영에 관하여 그들이 육체의 삶 동안 무엇을 생각했는지에 대한 영들과의 체험에서 얻은 몇 가지 사례

 

AC.448

나는 이 세상에서 알고 지냈던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것도 오랫동안, 곧 몇 달에서 몇 년에 걸쳐서 그렇게 했습니다. 비록 내적인 음성이기는 하지만, 이 세상의 친구들과 이야기할 때처럼 분명한 음성으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때로 우리 대화의 주제는 사후 인간의 상태였습니다. 그들은 육체의 삶이 끝난 뒤에도 사람이 이와 같이 살아간다는 사실을 육체의 삶 동안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거나 믿지 않는다는 것을 몹시 놀라워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삶이 계속되며, 그것도 사람이 희미한 삶에서 밝은 삶으로 옮겨 가는 방식으로 계속되고, 주님을 신앙하는 사람들은 더욱더 밝아지는 삶으로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친구들에게 알려 달라고, 그리고 내가 이곳에 있는 그들의 친구들의 상태에 관해 그들에게 여러 가지를 이야기해 주었던 것처럼, 자신들의 상태가 어떠한지도 글로 써서 친구들에게 알려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친구들에게 이런 것을 말하거나 글로 써 보낸다 해도 믿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망상이라고 하고 비웃으며, 믿기 전에 표적이나 기적을 요구할 것이므로, 나는 단지 그들의 조롱거리가 될 뿐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이 참되다는 것을 믿을 사람은 아마도 매우 적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영들의 존재를 부정하며, 그것을 부정하지 않는 사람들조차 누군가가 영들과 대화할 수 있다는 말은 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대에는 영들에 관하여 이와 같은 불신의 상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터무니없는 추론(crazy ratiocination)을 통해 영이 무엇인지를 알아내려고 하며, 자신들의 정의와 가정으로 영에게서 모든 감각을 빼앗아 버립니다. 그리고 더 학식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할수록 더욱 그렇게 합니다. I have conversed with many who had been known to me in this life (and this I have done for a long time—for months and years), in as clear a voice, although an inward one, as with friends in this world. The subject of our conversation has sometimes been the state of man after death, and they have wondered exceedingly that during the bodily life no one knows or believes that he is so to live when the bodily life is over, when yet there is then a continuation of life, and such a continuation that the man passes from an obscure life into a clear one, and those who are in faith in the Lord into a life that is more and more clear. They have desired me to tell their friends that they are alive, and to write and tell them what their condition is, even as I had related to themselves many things about that of their friends here. But I replied that were I to tell their friends such things, or to write to them about them, they would not believe, but would call them delusions, would scoff at them, and would ask for signs or miracles before they would believe; and I should merely expose myself to their derision. And that these things are true, perchance but few will believe. For at heart men deny the existence of spirits, and even those who do not deny it are unwilling to hear that anyone can speak with spirits. In ancient times there was no such state of belief in regard to spirits, but so it is now when by crazy ratiocination men try to find out what spirits are, and by their definitions and suppositions deprive them of all the senses, and do this the more, the more learned they desire to be.

 

해설

AC.448은 AC.443부터 이어져 온 체험 기록을 마무리하면서, 이 단락 전체의 출발점이었던 ‘사후에도 인간은 실제로 살아 있는가?’라는 문제로 다시 돌아갑니다. 이번에는 일반적인 영들과의 대화가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이 세상에서 실제로 알고 지냈던 사람들이 죽은 뒤 그들과 다시 대화했다고 보고하는 체험을 제시합니다. 더욱이 그것이 잠깐의 체험이 아니라 ‘몇 달에서 몇 년’에 걸쳐 계속되었고, 비록 ‘내적인 음성’이지만 이 세상의 친구들과 이야기할 때처럼 분명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는 무엇보다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체험으로 보고하는 증언이라는 성격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들이 크게 놀라워한 것은 단순히 ‘죽은 뒤에도 삶이 있다’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육체 안에 살 때에는 사람들이 죽은 뒤에도 이처럼 계속 살아간다는 것을 알지 못하거나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놀라워했습니다. 그들 자신은 죽은 뒤에도 여전히 자기 자신이며, 생각하고 말하고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AC.447의 초보 영이 자신이 이미 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놀랐던 장면과도 이어집니다. 육체의 삶 동안에는 몸을 자기 존재 자체와 너무 강하게 동일시하기 때문에, 몸을 벗고도 ‘나’가 그대로 존재하며 살아간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사후의 삶을 ‘희미한 삶에서 밝은 삶으로’(from an obscure life into a clear one) 옮겨 가는 것으로 묘사한 부분입니다. 이것은 AC.443과 정확히 호응합니다. AC.443의 사람은 육체의 생명이 사라지면 영에게는 희미하고 불분명한 삶만 남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단락의 마지막인 AC.448에서는 정반대로 말합니다. 육체의 죽음은 삶을 희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분명한 상태로 나아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AC.443에서 시작된 문제가 AC.448에서 다시 돌아와 하나의 결론을 이룹니다.

 

그러나 여기서 모든 사람의 사후 상태가 동일하게 밝아진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 글은 일반적으로 사람이 ‘희미한 삶에서 밝은 삶으로’ 옮겨 간다고 한 뒤, 특별히 ‘주님을 신앙하는 사람들’(those who are in faith in the Lord)은 ‘더욱더 밝아지는 삶’(a life that is more and more clear)으로 들어간다고 구별합니다. 적어도 이 글의 표현만 놓고 보면, 사후에 의식과 지각이 더욱 분명해진다는 것과 주님을 신앙하는 사람의 삶이 계속해서 더욱 밝아진다는 것은 구별해서 읽어야 합니다. 다만 AC.448 하나만으로 천국과 지옥을 포함한 모든 사후 상태를 상세히 설명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죽은 이들이 살아 있는 친구들에게 자신들의 상태를 알려 달라고 부탁했다는 대목도 눈길을 끕니다. 그들에게는 자신들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분명했기 때문에, 지상에 있는 친구들도 그것을 알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그런 사실을 전하거나 글로 써 보낸다 해도 사람들이 믿지 않고, 망상이라고 하거나 비웃으며, 믿기 전에 표적이나 기적을 요구할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것은 증거를 하나 더 제시하면 누구나 믿게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영의 존재 자체를 마음속에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게는 특별한 증언이나 체험을 전해 주어도 그것이 곧 믿음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마지막 부분에서 AC.445-446의 논의와 다시 연결됩니다. 사람들은 영의 존재를 입으로는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실제로 누군가가 영과 대화할 수 있다고 하면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배경 가운데 하나로 당시 사람들이 영에 관해 만들어 낸 지나치게 추상적인 관념을 지적합니다. 영이 무엇인지 설명하려고 정의와 가정을 거듭하면서 오히려 영에게서 모든 감각을 제거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영은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실제 존재가 아니라, 이름만 남은 추상적 개념에 가까워집니다. AC.444의 ‘단지 생각’, AC.445의 ‘추상적 생각’, AC.446의 연장과 실체를 둘러싼 논쟁이 여기에서 하나로 모입니다.

 

‘더 학식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할수록 더욱 그렇게 한다’는 마지막 표현 역시 학문이나 깊은 사고 자체를 부정하는 말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AC.442에서는 오히려 태고 시대 사람들의 사고가 오늘날보다 훨씬 깊었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AC.446에서 문제가 된 것도 지성 자체가 아니라 ‘지성을 향한 길을 막는’ 추상적 논쟁이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비판받는 것은 배움이 아니라, 자신이 만든 정의와 가정을 실제보다 앞세운 나머지 영을 살아 있는 존재로 이해할 가능성 자체를 없애 버리는 사고입니다. 지성은 실재를 더 깊이 이해하는 길이 될 수 있지만, 반대로 인간의 개념 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길 때에는 오히려 실재를 가리는 장벽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AC.443-448을 함께 읽으면 하나의 일관된 흐름이 드러납니다. 영적 삶은 육체가 사라진다고 희미해지는 것이 아니며(AC.443), 영은 단순한 생각이 아니라 유기적 실체이고(AC.444), 영혼을 추상적 생각으로만 만들면 결국 사후 존속 자체를 믿기 어려워지며(AC.445),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영의 연장과 실체를 부정해서는 안 되고(AC.446), 인간에게서 실제로 감각하고 생각하는 주체는 몸이 아니라 영이며(AC.447), 육체의 죽음 뒤에도 바로 그 인간의 삶이 계속됩니다(AC.448). 그러므로 이 여섯 글이 궁극적으로 던지는 질문은 단순히 ‘죽은 뒤에 무엇이 있는가?’에 그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 살아 있는 나는 본질적으로 누구인가?’를 묻습니다. 이 단락에서 스베덴보리가 제시하는 답은 분명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생명에 있어서는 영이며, 따라서 육체의 죽음은 인간 자신의 소멸이 아니라 그 생명이 계속되는 상태의 변화입니다. (AC.448 해설)

 

심화

1. 그렇다면 사후의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 여전히 ‘사람’인가?

 

AC.448 심화 1, 그렇다면 사후의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 여전히 ‘사람’인가?

AC.448 심화1. 그렇다면 사후의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 여전히 ‘사람’인가? AC.443-448을 모두 읽고 나면 한 가지 큰 질문이 남습니다. 육체는 죽어 땅에 남는데도 사후의 존재가 보고 듣고 생각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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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49, 창5 앞, '천국과 천국의 기쁨은 왜 세상에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가' (AC.449-459)

천국과 천국의 기쁨 Concerning Heaven and Heavenly Joy AC.449 지금까지 천국과 천국의 기쁨이 어떠한 것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것들에 관하여 생각해 본 사람들도 너무나 일반적이고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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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47, 창4 뒤, ‘감각하는 것은 몸이 아니라 사람 안의 영이다’

영혼 또는 영에 관하여 그들이 육체의 삶 동안 무엇을 생각했는지에 대한 영들과의 체험에서 얻은 몇 가지 사례 AC.447어떤 초보 영(novitiate spirit)이 내가 영에 관해 말하는 것을 듣고는 자신이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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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또는 영에 관하여 그들이 육체의 삶 동안 무엇을 생각했는지에 대한 영들과의 체험에서 얻은 몇 가지 사례

 

AC.447

어떤 초보 영(novitiate spirit)이 내가 영에 관해 말하는 것을 듣고는 자신이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영이란 무엇입니까?’(What is a spirit?)라고 물었습니다. 나는 그에게 모든 사람 안에는 영이 있으며, 사람은 자신의 생명에 있어서는 영이고, 몸은 단지 사람이 땅 위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며, 살과 뼈, 곧 몸 자체는 전혀 살지도 생각하지도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어찌할 바를 몰라 하기에, 나는 그에게 영혼에 관해 들어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영혼이란 무엇입니까?’(What is a soul?)라고 되물으며, ‘나는 영혼이 무엇인지 모릅니다’(I do not know what a soul is)라고 대답했습니다.그때 나는 그에게 지금 그 자신이 영혼, 곧 영이라는 사실을 말해 줄 수 있도록 허락받았습니다. 그가 내 머리 위에 있으며 땅을 딛고 서 있지 않다는 사실로도 그것을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나는 그에게 이것을 지각할 수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달아나면서 ‘나는 영이다! 나는 영이다!’(I am a spirit! I am a spirit!)라고 외쳤습니다. A certain novitiate spirit, on hearing me speak about the spirit, asked, “What is a spirit?” supposing himself to be a man. And when I told him that there is a spirit in every man, and that in respect to his life a man is a spirit; that the body is merely to enable a man to live on the earth, and that the flesh and bones, that is, the body, does not live or think at all; seeing that he was at a loss, I asked him whether he had ever heard of the soul. “What is a soul?” he replied, “I do not know what a soul is.” I was then permitted to tell him that he himself was now a soul, or spirit, as he might know from the fact that he was over my head, and was not standing on the earth. I asked him whether he could not perceive this, and he then fled away in terror, crying out, “I am a spirit! I am a spirit!”

 

어떤 유대인은 자신이 전적으로 몸 안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좀처럼 납득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영이라는 것을 보여 주었는데도, 그는 자신이 보고 들을 수 있다는 이유로 여전히 자기는 사람이라고 고집했습니다.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 몸에 몰두하여 살아온 사람들은 이와 같습니다. 이와 같은 사례를 훨씬 더 많이 덧붙일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사람 안에서 감각을 행하는 것은 몸이 아니라 영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이 몇 가지 사례만 제시했습니다. A certain Jew supposed himself to be living wholly in the body, insomuch that he could scarcely be persuaded to the contrary. And when he was shown that he was a spirit, he still persisted in saying that he was a man, because he could see and hear. Such are they who, during their abode in this world, have been devoted to the body. To these examples very many more might be added, but these have been given merely in order to confirm the fact, that it is the spirit in man, and not the body, which exercises sensation.

 

해설

AC.447은 AC.443부터 계속되어 온 논의를 매우 직접적인 명제로 모아 줍니다. 앞에서는 사후의 삶이 희미한 것이 아니라는 것, 영은 단순한 생각이 아니라 유기적 실체라는 것,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영의 실재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설명했습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람 안에서 실제로 감각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합니다. 이 글의 마지막 문장이 그 답을 분명하게 제시합니다. ‘사람 안에서 감각을 행하는 것은 몸이 아니라 영’입니다.

 

첫 번째 사례의 ‘초보 영’(novitiate spirit)은 사후 세계에 막 들어온 영을 가리킵니다. 그는 이미 몸을 떠나 영으로 존재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여전히 육체를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가 영에 관해 이야기하자 ‘영이란 무엇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지식 부족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그는 바로 자신이 영인데도 영을 자기 자신과는 별개의 어떤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영혼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을 만큼 생전의 영혼과 영에 대한 관념도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 스베덴보리는 ‘모든 사람 안에는 영이 있다’고 한 뒤, 더욱 중요한 말을 덧붙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생명에 있어서는 영’이라는 것입니다. 몸은 사람이 땅 위에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며, 살과 뼈로 이루어진 몸 자체가 독립적으로 살거나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여기서 몸을 무가치한 것으로 보는 것이 핵심은 아닙니다. 오히려 몸에는 분명한 역할이 있습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지상에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생명과 사고와 감각의 주체가 몸 자체는 아니라는 것이 이 글의 요점입니다.

 

초보 영이 ‘나는 영이다! 나는 영이다!’라고 외치며 달아나는 장면은 이 차이를 매우 생생하게 보여 줍니다. 그는 죽은 뒤에도 자신을 자기 자신으로 느끼고 있었고, 생각하고 대화하며 주변을 지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이미 육체를 떠났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지금까지 ‘나’라고 느끼며 보고 듣고 생각하던 존재가 바로 영이었다는 사실과 맞닥뜨리게 됩니다. AC.443에서 사후의 삶이 희미해지지 않는다고 했던 이유와 AC.444에서 영을 단순한 생각이라고 할 수 없다고 했던 이유가 이 사례 안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두 번째 유대인의 사례도 같은 사실을 다른 각도에서 보여 줍니다. 그는 사후에도 보고 들을 수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이 여전히 육체를 가진 사람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생각에는 ‘보고 듣는다’는 것과 ‘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너무 강하게 결합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이 사례를 제시하는 이유는 정반대의 결론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몸을 떠난 뒤에도 보고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은 그의 설명 안에서는 감각의 근원적 주체가 육체 자체가 아니라 영이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사람들을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 몸에 몰두하여 살아온’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여기서도 모든 육체적 삶이나 육체에 대한 관심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으로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사례에서 문제는 인간 자신을 사실상 몸과 동일시하여, 몸을 떠난 뒤에도 살아 있고 생각하며 감각하는 영적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생전에 ‘나는 곧 이 몸’이라는 관념에 지나치게 사로잡혀 있으면, 사후에도 자신의 감각이 계속된다는 사실 때문에 오히려 몸을 떠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문장은 AC.447 전체를 읽는 열쇠입니다. ‘감각을 행하는 것은 몸이 아니라 영’이라는 말은 눈이나 귀 같은 육체의 감각 기관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몸은 영이 이 자연계에서 보고 듣고 느끼기 위한 기관으로 기능합니다. 그러나 감각 기관 자체가 지각의 최종 주체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눈이 ‘보는 나’인 것도 아니고 귀가 ‘듣는 나’인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설명에서는 눈과 귀를 통해 보고 듣는 주체가 사람의 영이며, 그렇기 때문에 육체를 벗은 뒤에도 영은 자신의 세계에서 계속 보고 듣고 느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AC.443-447은 하나의 질문을 점점 더 깊게 파고들고 있습니다. 육체가 죽으면 삶이 희미해지는가, 영은 단지 생각에 불과한가, 보이지 않는 영을 실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리고 실제로 보고 듣고 느끼는 주체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AC.447의 답은 매우 선명합니다. 인간은 생명에 있어서는 영이며, 육체는 지상 생활을 위한 기관입니다. 따라서 죽음은 ‘나’라는 감각하고 생각하는 주체가 사라지는 사건이 아니라, 그 주체가 지상 생활을 위해 사용하던 육체를 벗는 사건으로 이해됩니다. 바로 이것이 초보 영이 자신이 이미 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토록 놀랐던 이유이며, 스베덴보리가 이 사례들을 통해 확인하려는 사후 인간의 연속성입니다. (AC.447 해설)

 

 

 

AC.448, 창4 뒤, ‘육체의 삶보다 더 밝고 분명하게 이어지는 사후의 삶’

영혼 또는 영에 관하여 그들이 육체의 삶 동안 무엇을 생각했는지에 대한 영들과의 체험에서 얻은 몇 가지 사례 AC.448나는 이 세상에서 알고 지냈던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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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46, 창4 뒤,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영의 실재를 부정하는 오류’

영혼 또는 영에 관하여 그들이 육체의 삶 동안 무엇을 생각했는지에 대한 영들과의 체험에서 얻은 몇 가지 사례 AC.446나는 오늘날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견해, 곧 영은 눈으로 볼 수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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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또는 영에 관하여 그들이 육체의 삶 동안 무엇을 생각했는지에 대한 영들과의 체험에서 얻은 몇 가지 사례

 

AC.446

나는 오늘날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견해, 곧 영은 눈으로 볼 수 없고 기억 지식(memory-knowledges [scientias])으로도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존재를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견해에 관하여 영들과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이유로 영에게 연장(extension)이 있다는 것뿐 아니라 영이 실체(substance)라는 것까지 부정하며, 실체가 무엇인지를 두고 논쟁합니다. 그리고 영에게 연장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고 실체에 대해서도 논쟁하기 때문에, 영이 어떤 장소에 있다는 것 역시 부정하며, 그 결과 영이 인간의 몸 안에 있다는 것도 부정합니다. 그러나 가장 단순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영혼 또는 영이 자기 몸 안에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이런 말을 하자, 비교적 단순한 영들이었던 그들은 오늘날 사람들이 그렇게 어리석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그리고 ‘부분 없는 부분들’(parts without parts)과 그 밖의 이와 비슷한 논쟁의 표현들을 듣고는, 그런 것들을 터무니없고 우스우며 익살스러운 말이라고 하면서, 그런 것들은 지성을 향한 길을 막기 때문에 마음을 조금도 차지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I have discoursed with spirits concerning the common opinion that prevails among men at the present day, that the existence of the spirit is not to be credited because they do not see it with their eyes, nor comprehend it by their memory-knowledges [scientias], and so they not only deny that the spirit has extension, but also that it is a substance, disputing as to what substance is. And as they deny that it has extension, and also dispute about substance, they also deny that the spirit is in any place, and consequently that it is in the human body; and yet the most simple might know that his soul or spirit is within his body. When I said these things, the spirits, who were some of the more simple ones, marveled that the men of the present day are so foolish. And when they heard the words that are disputed about, such as “parts without parts,” and other such terms, they called them absurd, ridiculous, and farcical, which should not occupy the mind at all, because they close the way to intelligence.

 

해설

AC.446은 AC.444-445에서 다룬 ‘영의 연장’과 ‘영의 실체’ 문제를 한 단계 더 밀고 나갑니다. 앞에서는 영을 아무런 연장도 없는 ‘추상적 생각’으로 보는 관념을 다루었다면, 여기서는 왜 사람들이 그런 관념에 이르게 되는지를 지적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오늘날 사람들은 영을 육안으로 볼 수 없고 자신들이 가진 기억 지식으로 파악할 수 없다는 이유로 그 존재 자체를 믿기 어려워합니다. 곧 감각으로 확인하거나 기존 지식의 틀 안에서 설명할 수 있는 것만 실재한다고 여기는 태도가 문제의 출발점입니다.

 

여기서 ‘기억 지식’(memory-knowledges [scientias])이라는 표현에도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지식이나 학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감각을 통해 얻고 기억 속에 축적한 지식의 범위 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영적 실재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눈으로 볼 수 없으니 연장이 없고, 연장이 없으니 실체라고 할 수 없으며, 실체가 아니니 어떤 장소에도 있을 수 없다는 식으로 논리가 이어집니다. AC.446은 바로 이러한 추론의 연쇄를 보여 줍니다.

 

특히 ‘연장 → 실체 → 장소’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사람들은 영에게 연장이 없다고 전제한 뒤 영이 실체라는 것도 의심하고, 다시 영이 실체가 아니라면 어디에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자신의 영혼 또는 영이 자기 몸 안에 있다는 가장 기본적인 생각마저 철학적으로 설명하기 곤란한 것이 되어 버립니다.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가장 단순한 사람’도 자신의 영혼 또는 영이 몸 안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하면서, 복잡한 추상적 논의가 오히려 자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을 흐리게 만들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이 점에서 AC.446은 단순한 사람과 학식 있는 사람을 흥미롭게 대비시킵니다. 여기서 ‘단순한’ 사람이나 영은 지적으로 열등하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지나친 추상화에 사로잡히지 않고 실제 삶과 경험에서 직접적으로 이해하는 이들을 가리키는 문맥에 가깝습니다. 그들은 영이 존재하고 자신이 영이라는 사실을 실제로 경험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영의 실체와 장소를 끝없이 논쟁한다는 말을 듣고 오히려 이상하게 여깁니다. 학문적 정교함이 언제나 더 분명한 이해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역설이 여기 있습니다.

 

‘부분 없는 부분들’(parts without parts)이라는 표현은 바로 그런 추상적 논쟁의 한 예로 제시됩니다. AC.446 자체는 이 용어가 어떤 철학적 전통에서 어떤 엄밀한 뜻으로 사용되었는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그 배경을 임의로 덧붙이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이 표현을 어떤 목적으로 인용했는지를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비교적 단순한 영들은 이런 표현들을 듣고 ‘터무니없고 우스우며 익살스럽다’고 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심은 특정 철학 용어를 하나하나 논박하는 데 있기보다, 그런 추상적 논쟁이 오히려 영적 실재를 이해하는 길을 막을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마지막의 ‘지성을 향한 길을 막는다’(close the way to intelligence)는 말이 이 글의 중요한 결론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생각이 깊어지는 것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AC.442에서는 오히려 태고 시대 사람들이 오늘날보다 훨씬 깊이 사고했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비판하는 것은 실재를 더 잘 이해하도록 돕는 사고가 아니라, 말과 개념을 계속 추상화한 끝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오히려 생각할 수 없게 만드는 사고입니다. 영은 보이지 않으므로 연장이 없고, 연장이 없으므로 실체가 아니며, 실체가 아니므로 어디에도 없다는 식으로 나아가면 결국 ‘존재하지만 어디에도 없고, 살아 있지만 아무런 실체도 없는 영’이라는 이해하기 어려운 관념만 남게 됩니다.

 

AC.444-446을 함께 읽으면 스베덴보리가 무엇을 바로잡으려 하는지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영은 단순한 ‘생각’이 아니라 생각하는 주체이며, 아무런 실체도 없는 추상이 아니라 ‘유기적 실체’입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그 실재성을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사후의 인간은 자신을 실제 존재로 경험하며 보고, 듣고, 느끼고, 원하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 글의 초점은 철학을 배척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철학과 지식이 실제 영적 존재를 이해하는 길을 열어 주는가, 아니면 지나친 추상화로 오히려 그 길을 막고 있는가를 묻는 데 있습니다. (AC.446 해설)

 

 

 

AC.445, 창4 뒤, ‘영혼을 추상적 생각으로만 여길 때 생기는 문제’

영혼 또는 영에 관하여 그들이 육체의 삶 동안 무엇을 생각했는지에 대한 영들과의 체험에서 얻은 몇 가지 사례 AC.445더 나아가 이런 말도 했습니다. 학자들은 죽은 뒤에도 살아갈 영혼, 곧 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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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또는 영에 관하여 그들이 육체의 삶 동안 무엇을 생각했는지에 대한 영들과의 체험에서 얻은 몇 가지 사례

 

AC.445

더 나아가 이런 말도 했습니다. 학자들은 죽은 뒤에도 살아갈 영혼, 곧 영을 ‘추상적 생각’(abstract thought) 외에 다른 것으로 믿지 않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연장(extension)과 연장에 속한 것을 암시하는 어떤 표현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데서 매우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어떤 주체(subject)에서 떼어 내어 추상적으로 생각한 생각 자체에는 연장이 없지만, 생각의 주체와 생각의 대상에는 연장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연장이 없는 대상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경계를 정하고 연장을 부여합니다. 이것은 학자들이 영혼 또는 영을 단지 생각으로밖에는 이해하지 못하며, 따라서 사람이 죽으면 그것이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음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It was further remarked, that the learned have no other belief than that the soul which is to live after death, that is, the spirit, is abstract thought. This is very manifest from their unwillingness to admit of any term that implies extension and what belongs to extension, because thought abstractedly from a subject is not extended, whereas the subject of the thought, and the objects of the thought, are extended; and as for those objects which are not extended, men define them by boundaries and give extension to them, in order that they may comprehend them. This shows very clearly that the learned have no other conception of the soul or spirit than that it is mere thought, and so cannot but believe that it will vanish when they die.

 

해설

AC.445는 바로 앞 AC.444에서 한 사람과 나눈 대화를 보다 일반적인 문제로 확대합니다. AC.444의 사람은 영을 아무런 연장도 유기적 실체도 없는 ‘생각’이라고 여겼는데, AC.445에서는 이러한 관념이 그 한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 당시 학자들에게 널리 나타나는 사고방식이라고 지적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문제 삼는 핵심은 영혼의 존재를 말하면서도 실제로 그것을 ‘추상적 생각’(abstract thought) 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이해하는 태도입니다.

 

여기서 ‘추상적 생각’이라는 표현을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생각하는 ‘누군가’와 그가 생각하는 ‘무엇’을 모두 떼어 낸 채 ‘생각’ 자체만을 하나의 독립적인 것으로 상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생각은 반드시 생각하는 주체에게 속한다고 봅니다. 생각 자체를 주체로부터 추상하면 연장이 없다고 말할 수 있지만, 실제로 생각하는 주체와 그 생각이 향하는 대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을 단순히 ‘생각’이라고 정의하는 순간, 생각하고 지각하며 살아 있는 실제 주체로서의 영은 설명에서 사라져 버립니다.

 

이 때문에 AC.445에서는 ‘생각의 주체’(subject of the thought)와 ‘생각의 대상’(objects of the thought)을 구별합니다. 이 구별은 앞의 AC.444와 직접 연결됩니다. 사후의 영은 단순히 ‘생각이 남아 있는 상태’가 아니라 실제로 보고, 듣고, 느끼고, 원하고, 생각하는 주체입니다. AC.444에서 영이 ‘유기적 실체’라고 한 것도 바로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생각이 존재한다면 그것을 하는 주체가 있어야 하며, 스베덴보리는 그 주체를 아무런 실체도 없는 추상적인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연장이 없는 대상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경계를 정하고 연장을 부여하여 이해한다’는 말은 다소 낯설 수 있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사고가 어떤 것을 이해할 때 그것을 전혀 무규정적인 상태로 두기 어렵다는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직접 공간적 연장을 가진 것으로 생각할 수 없는 대상조차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경계를 지어 하나의 구별되는 대상으로 파악합니다. 즉 인간의 이해는 어떤 것을 파악하려면 그것을 다른 것과 구별되는 일정한 것으로 생각하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을 아무런 형체나 구별도 없는 순수한 추상으로 생각하는 데 근본적인 어려움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AC.445의 마지막 문장은 이러한 사고방식이 사후의 삶에 대한 믿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지적합니다. 영혼이나 영을 ‘단지 생각’이라고 여긴다면 육체가 죽을 때 그 생각도 함께 사라질 것이라고 여기기 쉽다는 것입니다. 생각을 실제로 살아 있는 영적 주체의 활동으로 보지 않고 육체에 붙어 있는 추상적인 현상처럼 생각한다면, 육체가 사라진 뒤에도 그 생각의 주체가 계속 살아간다는 것을 실재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영을 추상적 생각으로만 이해하는 관념 안에 이미 사후 존속을 믿기 어렵게 만드는 문제가 들어 있다고 봅니다.

 

이 점에서 AC.443-445는 하나의 흐름을 이룹니다. AC.443에서는 육체가 사라지면 영의 삶이 희미해질 것이라는 생각을 다루었고, AC.444에서는 영이 연장도 유기적 실체도 없는 단순한 생각이라는 관념을 한 사람의 사례를 통해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AC.445에서는 그것을 학자들의 일반적인 관념으로 확대합니다. 세 글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문제는 육체에는 강한 실재성을 부여하면서 영에는 그와 같은 실재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사후 세계 체험을 통해 바로 이 관념을 뒤집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 말하는 ‘연장’의 문제는 단순히 영이 공간을 얼마나 차지하는가를 묻는 철학적 호기심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 밑에는 ‘영은 실제로 존재하는 실체인가, 아니면 육체가 살아 있는 동안 나타나는 추상적인 생각에 불과한가?’라는 훨씬 근본적인 질문이 놓여 있습니다. AC.445에서 스베덴보리가 경계하는 것은 영을 지나치게 ‘비물질적’으로 생각한 나머지 결국 아무런 실재성도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의 설명에서 사후에 살아가는 영은 생각 그 자체가 아니라 ‘생각하는 존재’이며, 바로 그 존재가 죽음 이후에도 자신의 감각과 욕구와 사고를 가지고 계속 살아갑니다. (AC.445 해설)

 

 

 

AC.446, 창4 뒤,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영의 실재를 부정하는 오류’

영혼 또는 영에 관하여 그들이 육체의 삶 동안 무엇을 생각했는지에 대한 영들과의 체험에서 얻은 몇 가지 사례 AC.446나는 오늘날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견해, 곧 영은 눈으로 볼 수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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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44, 창4 뒤, ‘영은 단지 생각일 뿐이며 아무런 형체도 없는가?’

영혼 또는 영에 관하여 그들이 육체의 삶 동안 무엇을 생각했는지에 대한 영들과의 체험에서 얻은 몇 가지 사례 AC.444이 세상에 살 때 영은 아무런 연장(extension)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믿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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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또는 영에 관하여 그들이 육체의 삶 동안 무엇을 생각했는지에 대한 영들과의 체험에서 얻은 몇 가지 사례

 

AC.444

이 세상에 살 때 영은 아무런 연장(extension)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믿었으며, 그런 이유로 연장을 암시하는 어떤 말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던 한 사람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나는 그에게, 이제 자신이 영혼 또는 영이 되어 시각과 청각과 후각, 매우 섬세한 촉각, 욕구와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이 마치 육체 안에 있는 것과 똑같다고 여길 정도인데, 지금은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그렇게 생각하던 당시의 관념 안에 머물게 되었고, 영은 생각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나는 그에게 다시 물을 수 있도록 허락받아, 그가 세상에 살 때 기관, 곧 눈이라는 시각 기관이 없이는 육체의 시각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지 못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내적 시각, 곧 생각은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생각하려면 그것 역시 어떤 유기적 실체(organic substance)를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그는 육체의 삶 동안 영은 단지 생각일 뿐이며, 유기적인 것이나 연장을 가진 것은 전혀 없다고 생각한 것이 잘못된 관념이었음을 인정했습니다. 나는 이어서 말했습니다. 만일 영혼 또는 영이 단지 생각일 뿐이라면 인간에게 그토록 큰 뇌가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뇌 전체가 내적 감각들의 기관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두개골 안은 텅 비어 있어도 되고, 그 안에서 생각이 영처럼 활동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리고 영혼이 근육에 작용하여 그토록 다양한 움직임을 일으킨다는 사실로부터도, 영이 유기적이라는 것, 곧 유기적 실체(organic substance)라는 것을 그가 확신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면서, 자신이 어떻게 그렇게 어리석은 생각을 할 수 있었는지 놀라워했습니다. Conversing with one who while he lived in this world had believed that the spirit has no extension, and on that ground would admit of no word that implied extension, I asked him what he now thought of himself, seeing that now he was a soul or spirit, and possessed sight, hearing, smell, an exquisite sense of touch, desires, thoughts, insomuch that he supposed himself to be exactly as if in the body. He was kept in the idea which he had when he had so thought in the world, and he said that the spirit is thought. I was permitted to ask him in reply, whether, having lived in the world, he was not aware that there can be no bodily sight without an organ of vision or eye? And how then can there be internal sight, or thought? Must it not have some organic substance from which to think? He then acknowledged that while in the bodily life he had labored under the delusion that the spirit is mere thought, devoid of everything organic or extended. I added that if the soul or spirit were mere thought man would not need so large a brain, seeing that the whole brain is the organ of the interior senses; for if it were not so the skull might be hollow, and the thought still act in it as the spirit. From this consideration alone, as well as from the operation of the soul into the muscles, giving rise to so great a variety of movements, I said that he might be assured that the spirit is organic, that is, an organic substance. Whereupon he confessed his error, and wondered that he had been so foolish.

 

해설

AC.444의 두 번째 사례는 AC.443과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앞의 사람은 영의 존재를 믿으면서도 육체가 사라지면 영의 삶은 희미하고 흐릿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번 사람 역시 영을 인정했지만, 영에는 아무런 ‘연장’(extension)이 없으며 결국 영은 ‘생각’ 그 자체라고 여겼습니다. 두 사람 모두 영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실재성이 강한 것은 육체이고 영은 그보다 훨씬 덜 실재적인 무엇이라고 생각했다는 점에서는 서로 통합니다.

 

여기서 ‘연장’이라는 말은 일상적으로 쓰는 ‘길이를 늘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문맥에서는 어떤 것이 공간적 크기나 차원을 가지며 일정한 형체를 이루고 있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이 사람은 영적인 것은 비물질적이므로 아무런 연장도, 형체도, 유기적 구조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연장을 암시하는 표현 자체를 영에게 적용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에게 영은 어떤 실체라기보다 육체에서 분리된 순수한 ‘생각’에 가까웠습니다.

 

그런데 사후의 실제 경험이 그의 관념과 충돌합니다. 그는 이제 영이 되었는데도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매우 섬세하게 만지며, 욕구와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자신이 육체 안에 있을 때와 똑같다고 생각할 정도로 이러한 감각과 의식이 생생하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질문합니다. 육체의 시각에도 눈이라는 기관이 필요한데, 그렇다면 ‘내적 시각’인 생각에는 아무런 기관이나 실체가 필요하지 않다고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글에서 중요한 표현이 ‘유기적 실체’(organic substance)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려는 것은 영이 우리가 만지는 육체와 같은 물질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 글의 범위에서 분명한 것은, 영을 아무런 구조도 형체도 없는 추상적인 ‘생각 그 자체’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보고 듣고 느끼며 생각하는 영적 삶에도 그 기능을 가능하게 하는 유기적인 실체가 있다는 것이 AC.444의 주장입니다. 따라서 ‘비물질적이다’와 ‘아무런 실체가 없다’를 같은 뜻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뇌에 관한 논증도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일 생각이 아무런 유기적 기반도 필요로 하지 않는 순수한 무엇이라면, 왜 인간에게 그토록 큰 뇌가 필요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뇌 전체를 ‘내적 감각들의 기관’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영혼이 근육에 작용하여 수많은 서로 다른 운동을 일으킨다는 사실도 함께 제시합니다. 이 두 가지를 통해 그는 영혼 또는 영이 단순한 추상적 사고가 아니라 ‘유기적 실체’라는 결론으로 나아갑니다. 이 논증은 AC.444에서 그 사람의 생전 관념을 교정하기 위해 제시된 설명이라는 문맥 안에서 읽는 것이 좋습니다.

 

이 대목에서는 ‘영이 유기적이다’라는 말을 현대의 육체적 기관 개념과 곧바로 동일시하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AC.444가 말하는 ‘유기적’은 영에게 육체와 똑같은 뇌나 눈이나 근육이 있다는 단순한 주장이 아닙니다. 오히려 영적 감각과 생각이 아무런 실체적 기반도 없이 허공에서 작동하는 추상이 아니라는 데 초점이 있습니다. AC.443에서 사후의 삶이 희미한 그림자가 아니라 매우 밝고 분명한 삶이라고 했다면, AC.444에서는 그 삶을 살아가는 영 자체도 단순한 생각이나 관념의 덩어리가 아니라 실제로 보고 듣고 느끼며 생각하는 실체임을 한 단계 더 설명하는 셈입니다.

 

따라서 AC.443과 AC.444를 함께 읽으면 스베덴보리가 바로잡으려는 두 가지 오해가 선명해집니다. 하나는 ‘육체가 없어지면 삶도 희미해질 것’이라는 생각이고, 다른 하나는 ‘영은 형체나 구조가 없는 순수한 생각일 뿐’이라는 생각입니다. 그의 체험에서 사후의 인간은 희미한 의식으로 떠도는 유령도 아니고, 추상적인 생각만 남은 존재도 아닙니다. 그는 자신을 여전히 자기 자신으로 느끼며, 보고 듣고 느끼고 원하고 생각합니다. AC.444에서 그 사람이 자신의 옛 생각을 잘못이었다고 인정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이 실제로 영이 되어 살아 보니, 영을 ‘아무런 유기적인 것도, 연장도 없는 단순한 생각’으로 여겼던 생전의 관념으로는 지금 자신이 경험하는 생생한 삶을 설명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AC.444 해설)  

 

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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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또는 영에 관하여 그들이 육체의 삶 동안 무엇을 생각했는지에 대한 영들과의 체험에서 얻은 몇 가지 사례 Some Examples Drawn from Experience with Spirits Concerning What They Had Thought during Their Life in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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