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부를 찬송가는 순서대로 찬550,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과 찬553, ‘새해 아침 환히 밝았네’입니다.

 

 

2026년 첫 주일입니다. 보통은 신년 주일이라 하여 설교도 그에 맞게 준비하지만, 저희는 당분간 아주 특별한 절기 외에는 오직 이 AC에만 전념하기로 한 점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부터는 창세기 5장입니다. 오늘부터 6주에 걸쳐 창세기 5장을 살피게 되며,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 1절로 3절입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다.

 

 

1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2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3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5:1-3)

 

 

위 본문을 아래

 

창5 아담 계보의 속뜻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겉으로 보면 무슨 가계 족보의 서두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성경 전체에서 인간이 무엇이며 교회가 무엇인지를 가장 압축적으로 선언하는 대목입니다. ‘아담의 계보’라는 말로 시작하지만, 이는 한 개인의 혈통 기록이 아니라, 태고교회라는 최초의 교회 상태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떻게 다음 상태로 넘어갔는지를 말해 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인간의 기원이 아니라, ‘사람됨의 기원’, 곧 교회의 기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전혀 새로울 수 있는 이 관점을 아래 세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성경이 말하는사람은 개인이 아니라 교회입니다

 

본문은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로 시작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어떤 한 사람의 족보를 떠올리지만, 곧바로 이어지는 말씀은 그 기대를 깨뜨립니다. 바로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히브리어 ‘아담’(אָדָם, Adam)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사람’을 뜻하는 말이며, 성경은 이 ‘사람’을 단수로 말하면서도 동시에 복수로 취급합니다. 이는 분명히 어떤 한 개인,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인류 최초의 인간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닌 것이지요.

 

성경에서 ‘사람’은 언제나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형성된 상태를 뜻합니다. 신앙과 사랑이 결합한 상태, 다시 말해 교회가 존재할 때, 그 상태를 성경은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태고교회는 곧 ‘사람’이었고, 그 교회에 속한 이들은 개인이기 이전에 교회의 일부였습니다. 그들의 사고, 사랑, 퍼셉션(perception), 삶 전체가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이 ‘아담의 계보’로 시작하는 것은, 인간 개인의 계보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교회 상태의 계승’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이 얼마나 오래 살았는가’보다, ‘그 이름으로 불리던 교회가 어떤 상태로 얼마나 오래 이어졌는가’를 기록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본문을 읽으며, 나 자신을 한 개인으로 보기보다, 지금 나는 어떤 교회 상태에 서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모양은 즉각적 퍼셉션의 삶을 뜻합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인간이 외적으로 하나님을 닮았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살도록 지어졌다’는 뜻입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무엇이 선인지, 무엇이 참인지를 배움과 학습을 통해서 알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랑 안에서 즉각적으로 인식, 곧 지각(perception, 퍼셉션)했습니다. 이것을 스베덴보리는 ‘퍼셉션’이라 부릅니다. 아래는 관련 설명입니다.

 

스베덴보리는 AC.483에서 창세기 5장에 나열된 이름들, 곧 ‘셋’(Seth), ‘에노스’(Enosh), ‘게난’(Kenan), ‘마할랄렐’(Mahalalel), ‘야렛’(Jared), ‘에녹’(Enoch), ‘므두셀라’(Methuselah), ‘라멕’(Lamech), ‘노아’(Noah)라는 이름들을 다시 한번 분명히 정리합니다. 셋에서 노아에 이르는 모든 이름들은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각각 하나의 ‘교회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교회들 가운데 첫째이자 중심이 되는 교회를 ‘사람’이라 했습니다. 이는 앞서 여러 차례 보았듯이, 태고교회가 주님의 모양과 형상을 가장 온전하게 반영했던 교회였기 때문이지요. 이후에 나오는 모든 교회들은 이 ‘사람’의 상태에서 파생된 변형들이었습니다.

 

이 교회들의 가장 중요한 공통 특징은 바로 ‘퍼셉션’(perception)이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퍼셉션이란, 지식이나 판단 능력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진리를 즉각적으로 알아보는 내적 지각’을 의미합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선한지를 배워서 알지 않았고, 명령을 통해 분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랑 안에서 곧바로 퍼셉션, 곧 지각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시대 교회들 사이의 차이는 교리의 차이나 제도의 차이가 아니라, ‘퍼셉션의 차이’였습니다.

 

이 퍼셉션의 삶은 율법 이전의 삶이었고, 교리 이전의 삶이었습니다. 옳고 그름을 따로 계산하지 않아도,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마음으로 직관적으로 알았던 삶입니다. 그래서 태고교회는 규범 중심의 교회가 아니라, ‘사랑 중심의 교회’였습니다.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말은, 인간이 그와 같은 질서 안에 놓였다는 선언입니다.

 

그러나 이 모양은 자동적으로 유지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자유가 있었기 때문에, 이 퍼셉션의 삶은 점차 약해졌고, 결국 다른 방식의 교회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먼저 이 가장 완전한 상태를 제시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인간 창조의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상태에 이르지 못할지라도, 성경은 여전히 그 방향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셋째, ‘셋을 낳았다는 것은 새로운 교회가 세워졌음을 뜻합니다

 

본문 3절에서 갑자기 시간이 흐르고, 아담이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셋’(Seth)이라 부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오해하기 쉽습니다. 마치 한 사람이 나이 들어 아들을 낳은 것처럼 읽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새로운 교회 상태의 출현’을 말합니다.

 

태고교회의 완전한 퍼셉션의 상태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고, 주님께서는 그 리메인스(remains)를 보존하시어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셨습니다. 그 교회가 바로 ‘셋’으로 대표, 표상됩니다. 이 교회는 태고교회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동일하지도 않았습니다. 사랑이 여전히 중요했으나, 더 이상 모든 것을 즉각적으로 인식하지는 못했고, 신앙이 점점 더 전면에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교회를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가장 순수한 상태가 지나가도, 주님은 언제나 그다음 상태를 준비하십니다. 셋은 타락의 결과가 아니라, ‘섭리의 응답’입니다.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방식으로, 교회는 계속 이어집니다.

 

오늘 우리의 교회 역시 셋의 교회와 닮아 있습니다. 우리는 즉각적 퍼셉션의 삶을 살지 못하지만, 사랑과 신앙의 결합 안에서 여전히 주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형태가 아니라, 결합입니다. 사랑이 신앙과 분리되지 않을 때, 교회는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한 가지 분명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단지 존재하게 하시기 위해 창조하지 않으셨고, 교회를 세우기 위해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는 무너져도 끝나지 않고, 언제나 다음 상태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계보 위에 서 있는가, 그리고 우리의 삶은 다음 상태를 낳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를 이 말씀 앞에서 함께 돌아보게 됩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 우리 신앙의 핵심은 ‘속 사람의 상태’입니다. 천국도 지옥도 모두 이 속 사람의 상태를 다르게 표현한 것입니다. 천국이나 지옥은 무슨 시공간의 나라가 아니라 상태와 그 변화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무엇보다도 자기 속 사람의 상태 관리에 매진해야 합니다. 대신 ‘나는 교회 몇 년 다녔어’, ‘나는 예수님 영접 기도한 지 벌써 30년이나 된 사람이야’, ‘나는 교회에서 목사로, 장로로, 권사, 집사로 평생 섬겼어’ 등등 이런 다분히 겉 사람에 치우친 공로에 의지하시다가는 나중에 큰일 납니다.

 

동일한 원리로 우리는 성경도 이제는 겉이 아닌 속으로, 아니 겉도 보고 속도 보면서 읽어야 합니다. 그래야 엉뚱하게 해석하는 바람에 삼천포로 빠지지 않게 됩니다. 겉도 중요하지만, 속으로 읽는 훈련, 곧 천사들이 읽는 방식으로 읽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오, 사랑의 주님,

 

오늘 신년을 맞아 창세기 5장 첫 본문으로 주님 음성에 귀 기울였습니다. 다소 생소하고 낯선 내용들이 혹시 있었을지라도 반발심 대신 주님을 사랑하는 애정 어린 마음으로 저마다 자기 내면을 들을 귀 있는 상태로 유지하고자 힘써 노력하는 심령들에게는 주님, 아낌없이 놀라운 하늘의 계시를 부어주시옵소서. 그래서 놀라운 일, 곧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 결실의 기적들이 일어나게 하시고, 그렇지 못한 심령들에게도 주님, 저들을 어루만지사 부드러운 심령들 되게 하시기를, 그래서 다들 올 한 해 능히 주님의 계시를 받기에 합당한 심령들 되게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다음 본문은 창5:4-20(AC.486-515)입니다.

 

 

 

설교

2026-01-04(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632, 25. 창5.1, 2026-01-04(D1)-주일예배(창5,1-3, AC.469-485, 성찬), ‘창5 아담 계보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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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가 AC.470에서 ‘이 장부터 11장, 곧 에벨의 때까지 이름들은 결코 사람을 뜻하지 않고 실제적인 것들, 곧 상태들을 뜻한다’고 단언하는 것은, 창세기 1–11장을 해석하는 데 있어 하나의 명확한 경계선을 제시하기 위함입니다. 이는 단순한 주석 상의 편의가 아니라, 말씀의 표현 방식과 인간의 인식 구조가 바뀌는 결정적인 전환점을 가리키는 선언입니다. 다시 말해, 어디까지를 순수한 ‘상태의 역사’로 읽어야 하고, 어디서부터 점차 ‘역사와 계보의 언어’로 내려오는지를 가르는 기준이 바로 에벨이라는 뜻입니다.

 

에벨이 그 기준이 되는 첫 번째 이유는, 그의 시대가 보편적 교회 시대의 마지막 경계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태고교회와 그 이후의 고대교회 초기까지는, 인류가 아직 하나의 비교적 공통된 인식 구조 안에 있었습니다. 지역과 문화의 차이는 있었지만, 선과 진리를 인식하는 근본 방식은 크게 갈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 시기의 교회들을 ‘사람 이름’으로 부르면서도, 실제로는 개인이 아니라 하나의 교회 상태 전체를 가리킬 수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이름은 곧 상태’라는 관계가 거의 완전하게 유지됩니다.

 

그러나 에벨의 시대를 지나면서, 이 보편성은 점차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그 결정적인 표지가 바로 바벨탑 사건(11)입니다. 언어가 갈라지고, 인식이 분열되며, 교회는 하나의 중심에서 여러 갈래로 흩어집니다. 이때부터 인간은 더 이상 동일한 방식으로 선과 진리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즉각적 인식은 사라지고, 각 집단은 자기 언어와 자기 이해 방식, 자기 교리 체계를 갖게 됩니다. 이 지점부터 성경은 더 이상 ‘이름 하나’만으로 교회의 상태를 충분히 전달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에벨 이전까지는 이름이 순수하게 상태를 뜻하지만, 그 이후부터는 이름이 점차 실제 인물과 혈통, 역사적 계보와 함께 읽히기 시작합니다.

 

두 번째 이유는, 에벨이 히브리 계통의 시작점이기 때문입니다. 에벨은 단순한 족보상의 한 인물이 아니라, ‘히브리’라는 명칭이 유래하는 인물입니다. 이는 혈통적 의미를 넘어서, 주님께서 계시를 보존하실 특정 계열이 분리되기 시작했음을 뜻합니다. 이전까지는 교회가 비교적 넓고 느슨하게 퍼져 있었다면, 이 시점부터는 계시가 점점 한 계보, 한 줄기로 집중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에벨 이후의 족보는 단순한 상징의 연속이 아니라, 실제 계시 보존의 역사로서 점점 구체성을 띠게 됩니다.

 

이 변화는 말씀의 수준이 낮아졌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수용 능력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에벨 이전에는 인간이 하늘적인 방식, 곧 상태 중심의 언어를 어느 정도 감당할 수 있었지만, 그 이후에는 더 이상 그 방식이 유지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말씀은 점차 역사, 민족, 언약, 표징 같은 외적 장치를 통해 전달되기 시작합니다. 이때부터 이름은 더 이상 단독으로 의미를 유지하지 못하고, 다른 요소들과 결합하여 의미를 형성합니다.

 

세 번째로 중요한 점은, 에벨 이후에는 동일한 이름이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태고교회와 고대교회 초기에는 하나의 이름이 하나의 교회 상태를 비교적 안정적으로 대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식이 분열된 이후에는, 같은 이름이라 하더라도 서로 다른 교리적, 영적 상태를 가리키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후로 갈수록 이름만으로 말하지 않고, 그 이름이 속한 땅, 민족, 언약의 맥락을 함께 제시합니다. 이는 말씀의 혼합이 아니라, 인간 인식의 분열에 대한 주님의 배려입니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에벨을 기준으로 분명한 선을 긋습니다. 에벨 이전까지는 ‘이름 = 상태 = 교회’라는 공식이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고, 에벨 이후부터는 ‘이름 + 혈통 + 역사’가 함께 작동하는 혼합 국면으로 들어갑니다. 이 경계선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창세기 1–11장은 끝없이 논쟁적인 역사 문제가 되지만, 이 기준을 붙들면 그 전체가 하나의 일관된 영적 역사로 읽히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AC.470에서 말하는 ‘에벨의 때까지’라는 표현은 임의적인 구분이 아니라, 인류 인식 구조의 변화, 교회 형태의 변화, 말씀 전달 방식의 변화가 동시에 일어난 지점을 정확히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기준을 가지고 창세기 초반을 읽을 때, 왜 앞부분은 유난히 상징적이고, 왜 중반부부터 점점 민족사처럼 보이기 시작하는지, 그리고 왜 바벨 이후의 족보는 이전과 전혀 다른 느낌을 주는지가 자연스럽게 이해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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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 (1:5)

 

AC.22

 

이제 ‘저녁’(evening)이 무엇을 뜻하고 ‘아침’(morning)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저녁’은 모든 이전의 상태를 의미하는데, 그것은 그 상태가 그늘의 상태, 곧 거짓의 상태이며 신앙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아침’은 모든 이후의 상태를 의미하는데, 그것은 빛의 상태, 곧 진리의 상태이며 신앙의 지식들이 있는 상태입니다. 일반적으로 말해 ‘저녁’은 사람 자신의 것에 속한 모든 것을 의미하지만, ‘아침’은 주님께 속한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사무엘서에서 다윗을 통해 하신 다음 말씀과 같습니다. What is meant by “evening” and what by “morning” can now be discerned. “Evening” means every preceding state, because it is a state of shade, or of falsity and of no faith; “morning” is every subsequent state, being one of light, or of truth and of the knowledges of faith, “Evening,” in a general sense, signifies all things that are of man’s own; but “morning,” whatever is of the Lord, as is said through David:

 

2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심이여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3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석이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4그는 돋는 해의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내린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하시도다 (삼하23:2-4) The spirit of Jehovah spake in me, and his word was on my tongue; the God of Israel said, the rock of Israel spake to me. He is as the light of the morning, when the sun ariseth, even a morning without clouds, when from brightness, from rain, the tender herb springeth out of the earth (2 Sam. 23:2–4).

 

신앙이 없을 때가 ‘저녁’이고 신앙이 있을 때가 ‘아침’이므로,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을 ‘아침’이라 하며, 그가 오신 그때는 신앙이 없었기 때문에 ‘저녁’이라고 합니다. 이는 다니엘서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As it is “evening” when there is no faith, and “morning” when there is faith, therefore the coming of the Lord into the world is called “morning”; and the time when he comes, because then there is no faith, is called “evening,” as in Daniel:

 

14그가 내게 이르되 이천삼백 주야까지니 그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되리라 하였느니라, 26이미 말한 바 주야에 대한 환상은 확실하니 너는 그 환상을 간직하라 이는 여러 날 후의 일임이라 하더라 (8:14, 26) The holy one said unto me, Even unto evening when it becomes morning, two thousand and three hundred (Dan. 8:14, 26).

 

이와 같이 말씀에서 ‘아침’은 주님의 모든 오심을 의미하며, 그러므로 그것은 곧 새로운 창조를 의미하는 표현입니다. In like manner “morning” is used in the Word to denote every coming of the Lord; consequently it is an expression of new creation.

 

 

해설

 

이 단락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에서 반복되는 ‘저녁’과 ‘아침’을 시간적 개념이 아니라 영적 상태의 언어로 해석하는 결정적인 원리를 제시합니다. ‘저녁’은 언제나 이전의 상태를 가리키며, 그것은 빛이 약해진 상태, 곧 그늘과 혼합의 상태를 말합니다. 이 상태는 거짓이 섞여 있고 신앙이 부재한 상태로, 인간의 내면이 아직 주님의 빛에 의해 질서 잡히지 않았음을 뜻합니다. 반대로 ‘아침’은 이후의 상태로, 주님의 빛이 비추어 진리와 신앙의 지식들이 살아나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표현은 하루의 경과가 아니라, 거듭남이 반드시 거치는 영적 이동의 방향을 나타냅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혼돈에서 질서로 나아가는 것이 주님의 불변의 방식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대비를 더욱 분명히 하기 위해 ‘저녁’을 사람 자신의 것, 곧 본성(proprium)에 속한 모든 것으로 설명합니다. 사람 자신의 것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비롯되며, 주님의 빛이 없을 때에는 그것이 선처럼, 진리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것은 신앙이 없는 상태이며, 영적 실재에 비추어 보면 어둠입니다. 반대로 ‘아침’은 주님께 속한 모든 것으로, 주님의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역사하는 상태입니다. 이 구분은 도덕적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근원에 대한 문제입니다.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주님에게서인가 사람 자신에게서인가의 문제이며, 거듭남은 바로 이 근원 인식이 점점 명료해지는 과정입니다.

 

다윗의 예언에서 묘사되는 ‘아침 빛’은 이 상태를 매우 풍부하게 설명합니다. 해가 떠오르는 아침, 구름 없는 밝은 빛, 비 뒤에 돋아나는 연한 풀은 모두 주님의 임재로 인해 생명이 새롭게 발생하는 상태를 상징합니다. 이는 단순한 지식의 증가가 아니라, 주님의 진리가 사람 안에서 살아 움직이며 퍼셉션으로 인식되는 상태입니다. 이때 진리는 외부에서 주입된 교리가 아니라,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해되고 받아들여지는 빛이 됩니다. 연한 풀이 돋아난다는 표현은, 주님의 빛 아래에서 선한 삶의 움직임이 자발적으로 시작됨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서 주님의 세상 오심을 ‘아침’이라 부르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신앙이 사라지고 교회가 황폐해진 상태는 ‘저녁’이며, 바로 그 상태 속으로 주님이 오시기 때문에 그때는 동시에 ‘저녁’이라고도 합니다. 다니엘서의 ‘주야’라는 표현은, 교회가 완전히 어두워진 상태에서 다시 빛을 받기까지의 전 과정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따라서 ‘아침’은 단지 과거의 탄생 사건만을 가리키지 않고, 신앙이 없는 상태 속으로 주님이 새롭게 임하시는 모든 순간을 뜻합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말씀에서 ‘아침’이라는 표현이 주님의 모든 오심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오심은 언제나 새로운 창조입니다. 이는 우주의 창조가 아니라, 인간 안에서 일어나는 재창조, 곧 거듭남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에서 반복되는 저녁과 아침은 과거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고, 오늘도 각 사람 안에서 계속되는 주님의 창조 사역의 리듬을 드러냅니다. AC.22는 이처럼 성경의 시간 언어를 상태의 언어로 전환함으로써, 말씀이 언제나 현재형으로 우리 안에서 작용하는 살아 있는 계시임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AC.21, 창1:4, 5,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And God saw the light, that it was good; and God distinguished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5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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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5:3)

 

AC.485

 

여기서 ‘셋’(Seth)이라 하는 교회가 앞서 위에서(4:25)말한 교회와는 다른 교회임은 AC.435에서 볼 수 있습니다. That a different church is here meant by “Seth” from that which was described above (Gen. 4:25), may be seen at n. 435.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4:25)

 

서로 다른 교리의 교회들을 같은 이름으로 불렀다는 사실은, 앞 장(4:17, 18)에서 ‘에녹’(Enoch)과 ‘라멕’(Lamech)이라 했던 교회들과, 여기서도 역시 ‘에녹’(Enoch)과 ‘라멕’(Lamech)이라 하는 다른 교회들(5:21, 30), 그러니까 동명이인 교회들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That churches of different doctrine were called by the same name, is evident from those which in the foregoing chapter (Gen. 4:17–18) were called “Enoch” and “Lamech,” while here other churches are in like manner called “Enoch” and “Lamech” (Gen. 5:21, 30).

 

17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18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4:17, 18)

 

21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30라멕은 노아를 낳은 후 오백구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5:21, 30)

 

 

해설

 

스베덴보리는 AC.485에서 매우 중요한 해석 원칙 하나를 분명히 짚어 줍니다. 그것은 성경에 동일한 이름이 반복해서 등장할 때, 그 이름이 항상 동일한 교회나 동일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은 창세기 425절에 나오는 ‘’과 이름은 같지만, ‘서로 다른 교회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면, 창세기 4장과 5장의 흐름은 쉽게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창세기 4장의 ‘’은 가인의 계보 이후, 태고교회 안에서 다시 세워진 어떤 회복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반면 창세기 5장의 ‘’은, 이미 태고교회의 첫 상태가 지나간 이후, ‘새로운 국면에서 등장한 또 다른 교회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름은 같지만, 역사적, 영적 위치는 다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차이를 명확히 구분하지 않으면, 교회의 연속과 변화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고 봅니다.

 

이 원리는 ‘’뿐 아니라, ‘에녹’과 ‘라멕’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창세기 417, 18절에 등장하는 ‘에녹’과 ‘라멕’은 가인의 계보 안에 있는 교회 상태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창세기 521절과 30절에서도 다시 ‘에녹’과 ‘라멕’이라는 이름이 등장합니다. 만일 이것을 동일한 인물이나 동일한 교회로 읽는다면, 성경의 내적 구조는 심각한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말합니다. ‘이들은 이름은 같지만, 서로 다른 교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경에서 이름이 가리키는 것이 ‘사람’이 아니라 ‘상태’라는 점입니다. 이름은 특정 개인의 고유명사가 아니라, ‘어떤 종류의 교회, 어떤 성질의 신앙 상태를 대표하는 표지’입니다. 그러므로 동일한 이름이 반복될 수 있으며, 그때마다 그것은 다른 시대, 다른 맥락에서 유사한 성질을 가진 교회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이는 마치 오늘날 ‘개혁 교회’라는 이름이 여러 나라와 시대에서 서로 다른 교회를 가리키는 것과 유사합니다.

 

이 사실은 창세기 4장과 5장의 구조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열쇠가 됩니다. 4장은 주로 태고교회의 붕괴와 그 왜곡된 계보를 다루고 있고, 5장은 태고교회의 본래 계보와 그 변형된 계승을 다룹니다. 이 두 장에서 동일한 이름이 등장한다는 것은, ‘동일한 종류의 상태가 서로 다른 계열 안에서 반복되었음’을 뜻합니다. 가인의 계보 안에도 ‘에녹’이라는 어떤 신앙 상태가 있었고, 태고교회의 계보 안에도 또 다른 ‘에녹’의 상태가 있었습니다.

 

AC.485는 우리에게 성경을 문자적 연속성만으로 읽지 말라고 강하게 요청합니다. 이름이 같다고 해서 내용도 같은 것은 아니며, 순서가 비슷하다고 해서 의미도 동일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언제나 ‘내적 질서와 상태의 변화를 중심으로 기록된 책’입니다. 이 질서를 놓치면, 성경은 반복과 혼란의 기록처럼 보이지만, 이 질서를 붙들면, 성경은 매우 정교한 영적 역사로 드러납니다.

 

또한 이 말씀은 교회의 역사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줍니다. 교회는 언제나 동일한 이름과 형태를 유지하지 않습니다. 어떤 이름은 여러 번 재사용되지만, 그 안의 내용은 시대와 상태에 따라 달라집니다. 주님께서는 하나의 교회가 무너질 때마다, ‘비슷한 성질을 지닌 새로운 교회 상태를 다시 일으키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름은 반복되지만, 그 의미는 고정되지 않습니다.

 

오늘날의 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교회’라는 이름 아래, 전혀 다른 신앙 상태들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명칭이나 전통보다 중요한 것은, 그 안에 어떤 사랑과 신앙의 결합이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AC.485는 우리로 하여금 이름이 아니라 ‘내용과 상태를 보게 하는 눈’을 갖도록 이끕니다.

 

결국 AC.485는 창세기 5장의 족보를 읽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해석의 경고문과도 같습니다. 동일한 이름이 반복될 때, 우리는 ‘같은 사람인가’를 묻기보다, ‘같은 상태인가, 아니면 다른 상태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이 질문을 붙들 때, 성경은 더 이상 혼란스러운 이름의 나열이 아니라, ‘교회가 어떻게 변화하고 반복되며 보존되는지를 보여 주는 깊은 영적 지도’로 우리 앞에 서게 됩니다.

 

 

 

AC.484, 창5:3, '사람', 곧 '아담'과 '셋'의 차이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5:3) AC.484 ‘셋’(Seth)이라는 교회가 태고교회와 매우 유사하였다는 건, 사람, 곧 아담이 ‘자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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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5:3)

 

AC.484

 

‘셋’(Seth)이라는 교회가 태고교회와 매우 유사하였다는 건, 사람, 곧 아담이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셋이라 불렀다고 한 데를 보면 분명합니다. 여기서 ‘모양’(likeness)은 신앙과 관련되고, ‘형상’(image)은 사랑과 관련됩니다. 그러나 이 교회가 사랑과 그로부터 나오는 신앙에 관하여 태고교회와 같지 않았다는 사실은, 바로 앞에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다’(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and blessed them, and called their name man)한 데를 보면 분명합니다. 이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여섯째 날의 영적 인간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의 모양은 여섯째 날의 영적 인간에 대한 것이며, 다시 말해 사랑이 그다지 주된 것이 아니었으나, 여전히 신앙은 사랑과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That the church called “Seth” was very nearly like the most ancient church is evident from its being said that the man begat in his likeness, according to his image, and called his name Seth; the term “likeness” having relation to faith, and “image” to love; for that this church was not like the most ancient church with regard to love and its derivative faith, is plain from its being said just before,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and blessed them, and called their name man,” by which is signified the spiritual man of the sixth day, as was said above, so that the likeness of this man was to the spiritual man of the sixth day, that is, love was not so much the principal, but still faith was conjoined with love.

 

 

해설

 

스베덴보리는 AC.484에서 ‘’의 교회가 태고교회와 ‘거의 같았다’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분명한 차이가 있었음을 조심스럽게 짚어 줍니다. 이 교회가 태고교회와 매우 유사하다는 것은, ‘그의 모양대로, 그의 형상대로’ 낳았다고 표현된 데서 드러납니다. 이는 단절이 아니라 계승이었고, 붕괴가 아니라 연속이었음을 뜻합니다. 주님께서는 태고교회의 선과 진리를 완전히 잃어버리게 두지 않으셨고, 그 흔적을 따라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셨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곧바로 중요한 구분을 덧붙입니다. ‘모양’은 신앙과 관련되고, ‘형상’은 사랑과 관련된다는 점입니다. 이 표현은 셋의 교회가 태고교회의 구조를 그대로 반복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 구조의 강조점이 달라졌음’을 보여 줍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이 주된 것이었고, 신앙은 그 사랑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왔습니다. 그러나 셋의 교회에서는 신앙이 이전보다 더 전면에 등장하며, 사랑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더 이상 즉각적 인식의 중심에 있지는 않았습니다.

 

이 차이는 바로 앞 구절에서 언급된 ‘남자와 여자’의 창조, 그리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부르셨다’는 표현과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여섯째 날의 영적 인간’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여섯째 날은 형성이 거의 완성된 단계이지만, 아직 안식일, 곧 일곱째 날의 천적 상태에는 이르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 영적 인간은 진리와 신앙을 통해 선을 향해 나아가며, 사랑과 신앙이 결합되어 있지만, ‘사랑이 지배적 중심은 아닌 상태’입니다.

 

따라서 셋의 교회가 닮은 ‘사람’은 태고교회의 완전한 천적 인간이 아니라, ‘여섯째 날의 영적 인간이었습니다. 이것이 ‘거의 같다’는 표현의 정확한 의미입니다. 사랑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고, 신앙이 사랑과 분리된 것도 아니었지만, 사랑이 모든 것을 즉각적으로 인도하는 상태는 더 이상 아니었습니다. 대신 신앙이 의식적으로 보존되고, 그 신앙을 통해 사랑이 유지되는 질서가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이 변화는 타락이라기보다, ‘주님의 섭리에 따른 조정’이었습니다. 태고교회의 순수한 인식의 상태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게 되었을 때, 주님께서는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다른 방식의 교회를 마련하셨습니다. 그 교회는 여전히 사랑과 신앙을 지녔지만, 즉각적 인식 대신 ‘신앙을 통한 인도’를 받는 교회였습니다. 셋의 교회는 바로 이 전환점에 서 있는 교회였습니다.

 

AC.484는 교회의 ‘퇴보’와 ‘보존’을 함께 보여 줍니다. 한편으로는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가 더 이상 유지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주님께서 교회를 포기하지 않으셨음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사랑이 덜 중심이 되었을지라도, 신앙은 여전히 사랑과 결합되어 있었고, 그 결합이 교회의 생명을 지탱했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의 신앙 상태를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는 태고교회의 즉각적 인식에는 이르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회가 아닌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사랑과 신앙의 결합이 여전히 살아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사랑이 주도하지 못하는 상태일지라도, 신앙이 사랑과 결합되어 있다면, 그곳에는 여전히 교회의 생명이 흐르고 있습니다.

 

결국 AC.484는 셋의 교회를 통해 한 가지 중요한 원리를 보여 줍니다. 교회는 언제나 동일한 형태로 유지되지 않지만, ‘주님의 섭리 안에서는 항상 이어진다’는 원리입니다. 형태와 강조점은 달라질 수 있으나, 사랑과 신앙의 결합이 유지되는 한, 교회는 여전히 교회입니다. 셋의 교회는 태고교회의 그림자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그림자조차도 주님께서 의도하신 빛의 방향 안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 관점을 붙들 때, 창세기 5장의 계보는 단순한 쇠퇴의 기록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과 함께 걸어오신 인내의 역사’로 읽히게 됩니다.

 

 

 

AC.485, 창5:3, 창4, 창5에 반복되는 '셋', '에녹', '라멕'이라는 이름들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5:3) AC.485 여기서 ‘셋’(Seth)이라 하는 교회가 앞서 위에서(창4:25)말한 교회와는 다른 교회임은 AC.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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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83, 창5:3, ‘퍼셉션’(perception), 창5 이름들의 비밀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5:3) AC.483 이어서 나오는 ‘셋’(Seth), ‘에노스’(Enosh), ‘게난’(Kenan), ‘마할랄렐’(Mahalale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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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5:3)

 

AC.483

 

이어서 나오는 ‘셋’(Seth), ‘에노스’(Enosh), ‘게난’(Kenan), ‘마할랄렐’(Mahalalel), ‘야렛’(Jared), ‘에녹’(Enoch), ‘므두셀라’(Methuselah), ‘라멕’(Lamech), ‘노아’(Noah)라는 이름들은 그만큼 많은 교회들을 의미하며, 그 가운데 첫째이자 주된 교회를 ‘사람’(man)이라 하였습니다. 이 교회들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퍼셉션’(perception, 지각, 통찰력, 인식)이었으며, 그러므로 그 시대 교회들의 차이는 주로 이 퍼셉션의 차이였습니다. 여기서 퍼셉션에 관하여 덧붙이자면, 온 하늘, 천국 전체에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 말고는 지배적인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퍼셉션은 말로 어떻게 설명할 수 없는, 그야말로 설명 불가한 것이며, 그 차이는 헤아릴 수 없어 어느 두 천국 공동체도 동일한 퍼셉션을 누리지 않습니다. 그곳에 있는 퍼셉션들은 ‘속’(, genera)과 ‘종’(, species)으로 구분되는데, 그 속은 무수하며, 각 속에 속한 종들 또한 무수합니다. 이에 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뒤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By the names which follow: “Seth,” “Enosh,” “Kenan,” “Mahalalel,” “Jared,” “Enoch,” “Methuselah,” “Lamech,” “Noah,” are signified so many churches, of which the first and principal was called “man.” The chief characteristic of these churches was perception, wherefore the differences of the churches of that time were chiefly differences of perception. I may here mention concerning perception, that in the universal heaven there reigns nothing but a perception of good and truth, which is such as cannot be described, with innumerable differences, so that no two societies enjoy similar perception; the perceptions there existing are distinguished into genera and species, and the genera are innumerable, and the species of each genus are likewise innumerable; but concerning these,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이와 같이 속이 무수하고, 또 각 속 안에 종이 무수하며, 그 종들 안에는 더욱 무수한 변종들이 있으므로, 이런 영계, 천국의 실상을 감안할 때, 오늘날 세상이 이런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에 관하여 얼마나 아는 게 없는지가 분명합니다. 곧 그들은 퍼셉션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며, 설령 그것을 설명해 주어도 그러한 것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많은 것들도 이와 같습니다. 태고교회는 퍼셉션의 속과 종의 차이에 이르기까지, 주님의 천적 나라를 대표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퍼셉션의 본질이 전혀, 그것도 가장 일반적인 차원에서조차 전혀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이 교회들의 퍼셉션의 속과 종에 대해 말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어둡고 낯설게 들릴 것입니다. 난생처음 듣는 얘기들이니까요! 그들은 그 당시 집과 가문과 민족으로 구분되어 있었고, 집과 가문 안에서만 결혼하였는데, 이는 퍼셉션의 속과 종이 존재 및 타고난 성향으로 전해지는 것처럼 부모로부터 정확히 계승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태고교회에 속했던 자들은 하늘에서도 함께 거합니다. Since then there are innumerable genera, and innumerable species in each genus, and still more innumerable varieties in the species, it is evident how little—so little that it is almost nothing—the world at this day knows concerning things celestial and spiritual, since they do not know even what perception is, and if they are told, they do not believe that any such thing exists; and so with other things also. The most ancient church represented the celestial kingdom of the Lord, even as to the generic and specific differences of perception; but whereas the nature of perception, even in its most general aspect, is at this day utterly unknown, any account of the genera and species of the perceptions of these churches would necessarily appear dark and strange. They were at that time distinguished into houses, families, and nations, and contracted marriage within their houses and families, in order that genera and species of perceptions might exist, and be derived from the parents precisely as are the propagations of native character; wherefore those who were of the most ancient church dwell together in heaven.

 

 

해설

 

스베덴보리는 AC.483에서 창세기 5장에 나열된 이름들을 다시 한번 분명히 정리합니다. 셋에서 노아에 이르는 모든 이름들은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각각 하나의 ‘교회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교회들 가운데 첫째이자 중심이 되는 교회를 ‘사람’이라 했습니다. 이는 앞서 여러 차례 보았듯이, 태고교회가 주님의 모양과 형상을 가장 온전하게 반영했던 교회였기 때문이지요. 이후에 나오는 모든 교회들은 이 ‘사람’의 상태에서 파생된 변형들이었습니다.

 

이 교회들의 가장 중요한 공통 특징은 바로 ‘퍼셉션(perception)이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퍼셉션이란, 지식이나 판단 능력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진리를 즉각적으로 알아보는 내적 지각’을 의미합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선한지를 배워서 알지 않았고, 명령을 통해 분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랑 안에서 곧바로 퍼셉션, 곧 지각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시대 교회들 사이의 차이는 교리의 차이나 제도의 차이가 아니라, ‘퍼셉션의 차이’였습니다.

 

※ 특별히 이 ‘perception’이라는 영어를 ‘인식’이나 ‘지각’ 등으로 번역하지 않고 읽는 그대로 음역하는 이유는 이 단어가 가지는 고유 뉘앙스 때문입니다. 이런 게 몇 가지 있지요. ‘체어리티(charity)라든지 라틴어 ‘아르카나(arcana)라든지 등등... 이런 방식은 그냥 저 개인적 취향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퍼셉션의 세계를 천국의 질서와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온 천국에는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 외에는 아무것도 지배하지 않으며, 이 퍼셉션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미묘하고 풍부합니다. 천국의 어떤 두 공동체도 동일한 퍼셉션을 누리지 않으며, 그 차이는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이 퍼셉션들은 속과 종으로 나뉘는데, 속 자체가 무수하고, 각 속 안의 종들도 무수합니다. 그리고 그 종들 안에는 다시 셀 수 없이 많은 변종들이 존재합니다.

 

※ 스베덴보리가 본인은 이미 동식물의 복잡한 분류체계를 알면서도 굳이 이 두 단계, ‘’과 ‘’만 언급하는 이유는, 천국의 질서는 이 둘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으로는 사랑의 방향을, ‘’으로는 그 퍼셉션을 알 수 있기 때문이지요. 천국은 이 정도로 충분한 것입니다.

 

이 설명은 오늘날 우리의 영적 무지를 날카롭게 드러냅니다. 스베덴보리는 오늘날 세상이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퍼셉션’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기 때문이며, 심지어 그것이 존재한다는 설명을 들어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현대 신앙은 이해와 분석에는 익숙하지만, 퍼셉션이라는 차원에는 매우 낯설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태고교회의 세계는 오늘날의 감각으로는 어둡고 낯설게 느껴질 수밖에 없어요. 우리는 내가 모르는 영역은 어둡게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고교회는 바로 이 퍼셉션의 속과 종의 차이에 이르기까지, 주님의 천적 나라를 땅 위에서 살아 있는 방식으로 대표하고 있었습니다. 천국 수많은 공동체가 서로 다른 퍼셉션을 가지고 조화를 이루듯이, 태고교회의 교회들도 서로 다른 퍼셉션의 상태를 지니면서도 하나의 질서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창세기 5장에 여러 이름들이 나열되는 이유입니다. 그것은 분열이 아니라, ‘풍성한 차이 속의 하나됨’을 보여 주는 구조입니다.

 

이 질서를 보존하기 위해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집과 가족과 민족으로 구분되어 살았고, 집과 가족 안에서만 결혼했습니다. 이것은 폐쇄성이나 혈통 순수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퍼셉션의 속과 종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보존하기 위한 섭리적 질서’였습니다. 퍼셉션은 타고난 성향과 깊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부모로부터 자녀에게 계승되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타고난 성향의 전파’에 비유합니다. 마치 성격과 기질이 유전되듯이, 퍼셉션의 결도 그렇게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태고교회에 속했던 자들은 천국에서도 함께 거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땅에서 이미 퍼셉션의 속과 종에 따라 질서 있게 살았기 때문에, 하늘에서도 자연스럽게 같은 공동체로 모입니다. 하늘의 공동체는 임의로 배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퍼셉션의 성질에 따라 자연스럽게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땅에서의 삶은 하늘 삶의 예비이며, 태고교회의 삶은 이미 그 예비를 가장 온전하게 살았던 삶이었습니다.

 

AC.483은 교회의 차이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바꾸어 줍니다. 우리는 종종 차이를 분열로 여기지만, 주님의 나라에서는 차이가 곧 질서이며, 다양성이 곧 조화입니다. 문제는 차이가 아니라, 퍼셉션이 사라진 데 있습니다. 퍼셉션이 사라지면, 차이는 곧 충돌이 되지만, 퍼셉션이 살아 있을 때 차이는 서로를 완성하는 관계가 됩니다.

 

결국 AC.483은 태고교회를 하나의 이상적인 과거로만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늘의 질서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는 모형’이며, 오늘날 교회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퍼셉션을 잃어버린 시대에, 말씀은 우리를 다시 ‘퍼셉션이 지배하는 세계’로 초대합니다. 비록 태고교회의 상태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그 방향을 바라보는 것은 오늘날 신앙의 깊이를 회복하는 데 여전히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AC.484, 창5:3, '사람', 곧 '아담'과 '셋'의 차이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5:3) AC.484 ‘셋’(Seth)이라는 교회가 태고교회와 매우 유사하였다는 건, 사람, 곧 아담이 ‘자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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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82, 창5:3, ‘세’(years), ‘년’(numbers of years)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5:3) AC.482 이 장에 나오는 ‘세’(years, 백삼십 세, 구백삼십 세 같은)와 ‘연수’(numbers of years, 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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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5:3)

 

AC.482

 

이 장에 나오는 ‘세’(years, 백삼십 세, 구백삼십 세 같은)와 ‘연수’(numbers of years, 팔백 년 같은)가 그 속뜻으로는 무엇을 뜻하는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겉뜻의 의미에 머무는 사람들은 그것들을 세속적 향년(享年), 그러니까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다는 말을 글자 그대로, 즉 아담이 죽을 때 나이가 구백삼십 살이었던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이 장부터 11장에 이르기까지는 문자적 의미의 겉뜻대로 역사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고, 모든 것은 전체적으로나 각각의 세부에 이르기까지 다른 것들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이름들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숫자들에도 해당됩니다. 말씀에서는 숫자 삼(3)과 숫자 칠(7)이 자주 언급되는데, 어디에서 언급되든 그것들은 시간이나 다른 것들을 포함하거나 표상하는 상태에 관하여 어떤 거룩한 것, 혹은 지극히 거룩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는 가장 짧은 시간 간격에서나 가장 긴 시간 간격에서나 동일합니다. 부분이 전체에 속하듯이, 가장 작은 것들도 가장 큰 것들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전체가 부분들로부터, 혹은 가장 큰 것이 그 가장 작은 것들로부터 올바르게 나아오기 위해서는, 그 사이에 닮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사야서에서 말하기를 What the “years” and the “numbers of years,” which occur in this chapter, signify in the internal sense, has hitherto been unknown. Those who abide in the literal sense suppose them to be secular years, whereas from this to the twelfth chapter there is nothing historical according to its appearance in the literal sense, but all things in general and every single thing in particular contain other matters. And this is the case not only with the names, but also with the numbers. In the Word frequent mention is made of the number three, and also of the number seven, and wheresoever they occur they signify something holy or most sacred in regard to the states which the times or other things involve or represent; and they have the same signification in the least intervals of time as in the greatest, for as the parts belong to the whole, so the least things belong to the greatest, for there must be a likeness in order that the whole may properly come forth from the parts, or the greatest from its leasts. Thus in Isaiah:

 

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품꾼의 정한 해와 같이 삼 년 내에 모압의 영화와 그 큰 무리가 능욕을 당할지라 (16:14) Now hath Jehovah spoken, saying, Within three years, as the years of a hireling, and the glory of Moab shall be rendered worthless. (Isa. 16:14)

 

주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품꾼의 정한 기한 같이 일 년 내에 게달의 영광이 다 쇠멸하리니 (21:16) Thus hath the Lord said unto me, Within a year, according to the years of a hireling, and all the glory of Kedar shall be consumed, (Isa. 21:16)

 

여기서 가장 짧은 간격과 가장 긴 간격이 모두 의미되고 있습니다. 하박국서에서는 where both the least and the greatest intervals are signified. In Habakkuk: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3:2) Jehovah, I have heard thy renown, and was afraid; O Jehovah, revive thy work in the midst of the years, in the midst of the years make known, (Hab. 3:2)

 

여기서 ‘수년 내에’(midst of the years)는 주님의 강림을 의미합니다. 짧은 간격에서는 사람이 거듭날 때마다 주님의 오심을 뜻하고, 긴 간격에서는 주님의 교회가 새로 일어날 때를 뜻합니다. 이와 같이 이사야서에서는 ‘구속할 해’(year of the redeemed)라고도 불립니다. where the “midst of the years” signifies the Lord’s advent. In lesser intervals it signifies every coming of the Lord, as when man is being regenerated; in greater, when the church of the Lord is arising anew. It is likewise called the “year of the redeemed,” in Isaiah:

 

이는 내 원수 갚는 날이 내 마음에 있고 내가 구속할 해가 왔으나 (63:4) The day of vengeance is in my heart, and the year of my redeemed is come. (Isa. 63:4)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사탄이 결박된 천 년(20:2, 7)과 첫째 부활의 천 년(20:4-6)도 결코 글자 그대로의 천 년을 뜻하지 않고, 그 상태들을 뜻합니다. 앞에서 보인 바와 같이 ‘날’(days)이 상태를 나타내는 데 사용되듯이, ‘해’(years)도 그러하며, 그 상태들은 해의 숫자로 묘사됩니다. So also the thousand years in which Satan was to be bound (Rev. 20:2, 7), and the thousand years of the first resurrection (Rev. 20:4–6), by no means signify a thousand years, but their states; for as “days” are used to express states, as shown above, so also are “years,” and the states are described by the number of the years.

 

2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잡아서 천 년 동안 결박하여 7천 년이 차매 사탄이 그 옥에서 놓여 (20:2, 7)

 

4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5(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6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하리라 (20:4-6)

 

이로부터 이 장에 나오는 시간들도 상태들을 포함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각 교회는 타고난 성향과 후천적으로 형성된 성향의 차이에 따라, 서로 다른 퍼셉션 상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Hence it is evident that the times in this chapter also involve states; for every church was in a different state of perception from the rest, according to the differences of genius, hereditary and acquired.

 

 

해설

 

스베덴보리는 AC.482에서 창세기 5장에 나오는 ‘연수’와 ‘수명’에 대한 오랜 오해를 정면으로 다룹니다. 그는 이 장의 연수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지금까지 아무도 그 내적 의미, 곧 속뜻을 알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문자적 의미에 머물러, 이 숫자들을 세속적 연대로 이해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창세기 5장부터 11장까지는 겉으로 보이는 역사 서술과 달리, ‘문자 그대로의 역사로 읽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구간’입니다. 이 구간은 인물 이름뿐 아니라, 숫자 하나하나까지도 모두 내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숫자는 단순한 계산 단위가 아니라, ‘상태를 표현하는 언어’입니다. 말씀에서 자주 등장하는 숫자 삼과 숫자 칠은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 숫자들은 언제 어디서 나타나든, 시간이나 사건이 포함하고 있는 ‘거룩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의미가 짧은 시간과 긴 시간에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점입니다. 삼 일이든 삼 년이든, 혹은 칠 일이든 일곱 세대든, 그것이 가리키는 것은 길이가 아니라 ‘상태의 성격’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원리를 ‘부분과 전체의 닮음’으로 설명합니다. 가장 작은 시간의 단위와 가장 큰 시간의 단위는 서로 닮아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작은 것들이 모여 큰 것을 이루고, 큰 것이 다시 작은 것들 속에 반영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시간의 길이는 중요하지 않고, 그 시간에 담긴 상태가 중요합니다. 이 닮음의 원리가 없으면, 말씀은 내적으로 하나의 질서를 이룰 수 없습니다.

 

이사야서에 나오는 ‘삼 년’과 ‘일 년’의 예는 이 사실을 잘 보여 줍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서로 다른 기간이지만, 내적으로는 동일한 종류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것은 일정한 한계 안에서 완성되거나 소진되는 상태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박국서에서 말하는 ‘수년 내에’는 연대의 중간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오심’, 곧 주님이 인간과 교회 안에 새롭게 임재하시는 결정적인 순간을 뜻합니다.

 

이 ‘오심’은 한 번의 사건으로만 이해되지 않습니다. 짧은 간격에서는 사람이 거듭날 때마다 주님이 오시는 것을 의미하고, 긴 간격에서는 교회가 쇠퇴한 뒤 다시 일어날 때 주님이 오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것을 ‘구속할 해’라고도 부릅니다. 이는 특정 연도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구원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상태’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천 년’도 같은 원리로 이해해야 합니다. 사탄이 결박된 천 년, 첫째 부활의 천 년은 문자적인 기간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영적 상태의 지속’을 나타냅니다. 성경에서 ‘’이 상태를 나타내듯이, ‘’ 역시 상태를 나타내며, 숫자는 그 상태의 성격과 완결성을 묘사합니다. 그러므로 숫자를 문자 그대로 붙잡으면, 말씀의 중심을 놓치게 됩니다.

 

이 원리를 창세기 5장에 적용하면, 족보에 나오는 긴 수명과 연수들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한 사람의 생물학적 수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각 교회 상태가 얼마나 지속되었는지’, 그리고 그 상태가 어떤 성격을 가졌는지를 나타냅니다. 각 교회는 서로 다른 퍼셉션 상태에 있었고, 그 차이는 타고난 성향과 삶을 통해 형성된 성향의 차이에서 나왔습니다. 숫자는 바로 그 차이를 표현하는 도구입니다.

 

AC.482는 우리로 하여금 말씀을 읽는 시선을 바꾸게 합니다. 우리는 종종 ‘얼마나 오래’라는 질문을 던지지만, 성경은 언제나 ‘어떤 상태였는가’를 묻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나 오래 교회를 다녔는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냈는가보다 중요한 것은, ‘그 시간 동안 어떤 상태에 있었는가’입니다.

 

결국 AC.482는 창세기 5장의 숫자들이 교회의 생애를 기록한 ‘영적 지도’임을 밝혀 줍니다. 그 숫자들은 시간의 길이를 재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가 걸어온 길의 성격을 보여 주기 위한 것입니다. 이 관점을 붙들 때, 족보처럼 보이던 이 장은 더 이상 난해한 기록이 아니라, ‘교회가 어떻게 태어나고, 머물고, 변화해 갔는지를 보여 주는 깊은 영적 증언’으로 읽히게 됩니다.

 

 

 

AC.483, 창5:3, ‘퍼셉션’(perception), 창5 이름들의 비밀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5:3) AC.483 이어서 나오는 ‘셋’(Seth), ‘에노스’(Enosh), ‘게난’(Kenan), ‘마할랄렐’(Mahalale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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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81, 창5:3,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And man lived a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begat into his likeness, after his image, and called his name Seth. (창5:3) AC.4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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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And man lived a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begat into his likeness, after his image, and called his name Seth. (5:3)

 

AC.481

 

‘백삼십 세’(hundred and thirty years)는 새 교회가 일어나기 전의 기간을 의미합니다. 이 새 교회는 태고교회와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into its likeness, and after its image)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모양’(likeness)은 신앙과, ‘형상’(image)은 사랑과 관련됩니다. 이 교회를 가리켜 ‘셋’(Seth)이라고 했습니다. By a “hundred and thirty years” there is signified the time before the rise of a new church, which, being not very unlike the most ancient, is said to be born “into its likeness, and after its image”; but the term “likeness” has relation to faith, and “image” to love. This church was called “Seth.”

 

 

해설

 

스베덴보리는 AC.481에서 창세기 53절의 ‘백삼십 세’라는 숫자를 단순한 연대 표시로 읽지 않습니다. 그는 이 숫자가 ‘새 교회가 일어나기 전의 상태와 기간’을 상징한다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이것은 시계로 잰 시간이나 인간의 수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가 쇠퇴한 이후 새로운 교회가 준비되는 영적 공백의 기간’을 뜻합니다. 이 기간은 단절의 시간이면서 동시에 준비의 시간이었습니다.

 

이 준비의 결과로 등장한 교회가 바로 ‘’으로 대표되는 새 교회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교회를 태고교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평가합니다. 이는 두 교회가 동일했다는 뜻이 아니라, ‘본질적 방향과 근원에서 연속성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태고교회가 완전히 붕괴되기 전에, 주님께서는 그 교회의 선과 진리의 잔존(殘存), 곧 리메인스(remains)를 보존하셨고, 그 리메인스 위에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셨습니다. 그래서 셋으로 대표, 표상되는 교회는 태고교회의 단절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연속’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는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이라는 표현을 매우 섬세하게 다룹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his)는 개인 아담이 아니라, ‘태고교회라는 상태 전체’입니다. 새 교회는 태고교회의 ‘모양’과 ‘형상’을 따라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이 두 단어의 의미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다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모양(likeness)은 신앙과 관련되고, ‘형상(image)은 사랑과 관련됩니다. 이 구분은 앞서 우리가 살펴본 일반적인 도식과는 반대로 보일 수 있지만, 여기서는 ‘계승의 관점’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태고교회의 본질은 사랑이 신앙을 낳는 구조였습니다. 사랑이 먼저 있었고, 신앙은 그 사랑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왔습니다. 그러나 셋으로 표상되는 새 교회에서는 이 질서가 미묘하게 달라집니다. 사랑은 여전히 중요했지만, 신앙이 이전보다 더 분명한 형태로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다시 말해, 태고교회에서는 사랑 안에서 모든 것이 즉각적으로 인식, 즉 지각(perception)되었다면, 셋의 교회에서는 ‘신앙이 의식적으로 퍼셉션되고 보존되어야 할 요소’로 부각(浮刻)됩니다. 그래서 이 교회 역시 태고교회의 ‘모양’과 ‘형상’을 따랐지만, 그 강조점은 조금 달랐습니다.

 

이 변화는 타락이라기보다, ‘섭리적인 전환’이었습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게 되었을 때, 주님께서는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의 교회를 준비하셨습니다. 그 교회는 여전히 사랑과 신앙을 지녔지만, 더 이상 즉각적 퍼셉션에 의존하지 않고, ‘신앙을 통해 사랑을 보존하는 방식’으로 나아갔습니다. 이 점에서 셋의 교회는 ‘태고교회와 크게 다르지 않으나, 동일하지도 않은’ 교회였습니다.

 

백삼십 세’라는 상징은 바로 이 전환에 무게를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짧은 순간의 변화가 아니라, ‘충분한 시간이 필요했던 영적 성숙과 재배치의 기간’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태고교회를 즉시 대체하지 않으셨고, 그 안에 남아 있던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며, 새로운 교회가 설 수 있도록 질서를 마련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숫자는 기다림의 시간이며, 동시에 소망의 시간입니다.

 

마침내 이 새 교회는 ‘’이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이라는 이름에는 ‘두었다’, ‘세웠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는 우연한 이름이 아니라,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세우신 교회’임을 드러내는 이름입니다. 태고교회의 순수한 상태는 지나갔지만, 주님께서는 인간과의 관계를 포기하지 않으셨고, 새로운 방식으로 교회를 다시 세우셨습니다. 셋의 교회는 바로 그 응답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깊은 위로를 줍니다. 교회가 무너진 뒤에도, 주님은 반드시 새로운 교회를 준비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영적 공백의 시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백삼십 년’의 시간은, 사실상 ‘주님의 가장 조용한 일하심의 시간’입니다. 그 시간 끝에 주님은 늘 ‘’을 일으키십니다.

 

결국 AC.481은 교회의 역사가 단절과 실패의 연속이 아니라, ‘보존과 재창조의 역사’임을 분명히 합니다. 태고교회가 사라진 자리에는 공허만 남은 것이 아니라, 새로운 교회가 태어날 토양이 준비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토양 위에 주님께서는 셋의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이 질서는 과거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고, 오늘날 교회와 우리 각자의 신앙 여정 속에서도 동일하게 반복되고 있습니다.

 

 

 

AC.482, 창5:3, ‘세’(years), ‘년’(numbers of years)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5:3) AC.482 이 장에 나오는 ‘세’(years, 백삼십 세, 구백삼십 세 같은)와 ‘연수’(numbers of years, 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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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80, 창5:2, '사람'이라 일컬으신 시점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5:2) AC.480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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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5:2)

 

AC.480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는 것은 첫째 장(1:26, 27)에서도 또한 분명히 드러나는데, 이는 여섯째 날의 끝, 다시 말해 안식일의 저녁에 해당하며, 곧 안식일, 곧 일곱째 날이 시작될 때를 뜻합니다. 왜냐하면 일곱째 날, 곧 안식일은 천적 인간을 의미하기 때문이며, 이는 앞에서 보인 바와 같습니다. That they were called “man” in the day that they were created, appears also from the first chapter (Gen.1:26–27), that is, at the end of the sixth day, which answers to the evening of the sabbath, or when the sabbath or seventh day began; for the seventh day, or sabbath, is the celestial man, as was shown above.

 

26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1:26, 27)

 

 

해설

 

스베덴보리는 AC.480에서 ‘사람이라 불린 날’이 언제인지를 창세기 1장의 창조 기사와 직접 연결합니다. 성경은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사람이라 불렸다’고 말하는데, 이날은 막연한 어느 하루가 아니라, ‘여섯째 날의 끝’, 곧 ‘일곱째 날이 시작되는 문턱’입니다. 이 시점은 시간적으로는 하루의 저녁이지만, 영적으로는 매우 결정적인 전환점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일곱째 날, 곧 안식일은 단순한 휴식의 날이 아니라, ‘천적 인간의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장의 여섯 날은 인간이 형성되는 과정을 단계적으로 보여 줍니다. 빛이 생기고, 구분이 이루어지고, 생명이 질서 잡히는 모든 과정은 결국 한 목적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 목적은 인간이 주님 안에서 ‘안식‘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 안식은 피곤함에서의 쉼이 아니라, ‘내적 갈등이 사라지고 사랑과 진리가 하나가 되는 상태’를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를 ‘천적 인간’이라 부르며, 바로 이 상태가 일곱째 날로 표현됩니다.

 

따라서 ‘사람이라 불렸다’는 선언은 여섯째 날의 한가운데서가 아니라, ‘여섯째 날이 마무리되고 일곱째 날이 시작되는 시점’에 주어집니다. 이는 사람이 단지 영적 상태로 형성되었을 때가 아니라, 그 영적 상태가 완성되어 천적 상태로 들어갈 때 비로소 참된 의미에서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앞서 보았듯이, 영적 인간은 ‘형상(image)에 해당하고, 천적 인간은 ‘모양(likeness)에 해당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라는 이름은 형성 과정의 중간이 아니라, ‘완성의 문턱’에서 주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점을 ‘안식일의 저녁’이라는 표현으로 매우 섬세하게 설명합니다. 저녁은 끝이면서 동시에 시작입니다. 여섯째 날의 저녁은 모든 형성의 노력이 끝나는 지점이면서, 동시에 일곱째 날의 안식이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이 전환점에서 인간은 더 이상 진리를 통해 선을 향해 애쓰는 존재가 아니라, ‘사랑 안에서 자연스럽게 선을 사는 존재’로 들어갑니다. 이것이 천적 인간의 상태이며, 성경이 그를 ‘사람’이라 부르는 이유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창세기 126, 27절의 표현도 새롭게 읽힙니다.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고’라고 말씀하신 후, 곧바로 ‘그들’로 표현이 바뀌는 이유는, 이 ‘사람’이 개인이 아니라 ‘하나의 상태, 곧 교회 전체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상태가 완성되어 안식의 단계에 이르렀을 때, 성경은 그들을 한 이름으로, 곧 ‘사람’이라는 이름으로 부릅니다. 이는 곧 태고교회가 천적 상태에 이르렀음을 선언하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여섯째 날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지, 아니면 일곱째 날을 향해 가고 있는지 하는 질문입니다. 여섯째 날은 필요하고 귀한 단계입니다. 그러나 그 단계는 목적지가 아닙니다. 진리를 배우고, 분별하고, 싸우는 모든 과정은 결국 ‘안식으로 들어가기 위한 준비’입니다. 신앙생활이 언제나 긴장과 분투로만 남아 있다면, 우리는 아직 여섯째 날의 저녁을 통과하지 못한 상태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안식일을 ‘천적 인간’이라고 말함으로써, 신앙의 목표를 분명히 합니다. 그 목표는 더 많은 지식이나 더 엄격한 규범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의 내적 평안과 일치’입니다. 사랑과 신앙이 더 이상 분리되지 않고, 주님의 뜻이 자연스럽게 삶으로 흘러나오는 상태, 그것이 안식이며, 그것이 참된 ‘사람’의 상태입니다.

 

결국 AC.480은 창세기 1장의 창조 기사가 과거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여섯째 날에서 일곱째 날로 넘어가는 그 전환은, 지금도 우리 각자의 삶 속에서 반복되고 있는 영적 여정입니다. 사람이 ‘사람이라 불리는 날’은, 주님 안에서 마침내 안식에 이르는 날입니다. 이 관점을 붙들 때, 안식일은 더 이상 율법의 규정이 아니라, ‘사람됨이 완성되는 은혜의 상태로 우리 앞에 서게 됩니다.

 

 

 

AC.479, 창5:2, ‘이름 부르기’(calling a name)와 '사람'이라는 이름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5:2) AC.479 ‘이름 부르기’(calling a name) 또는 ‘이름으로 부르기’(c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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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5:2)

 

AC.479

 

‘이름 부르기’(calling a name) 또는 ‘이름으로 부르기’(calling by name)는 말씀에서 사물의 성질을 안다는 걸 의미하며, 이는 앞에서 보인 바와 같습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태고교회의 성질과 관련되는데, 이는 사람이 흙에서 취해졌다는 것, 곧 주님에 의해 거듭났다는 것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아담’(Adam)이라는 말은 ‘땅’(ground)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가 이후에 천적 상태로 만들어졌을 때에는,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비롯된 신앙으로 말미암아 가장 탁월한 의미에서 ‘사람’(man)이 되었습니다. By “calling a name,” or “calling by name,” is signified in the Word to know the quality of things, as was shown above, and in the present case it has relation to the qual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denoting that man was taken from the ground, or regenerated by the Lord, for the word “Adam” means “ground”; and that afterwards when he was made celestial he became most eminently “man,” by virtue of faith originating in love to the Lord.

 

 

해설

 

스베덴보리는 AC.479에서 ‘이름 부르기’라는 성경의 표현이 단순한 호칭 행위가 아니라, ‘어떤 것의 성질을 안다’는 깊은 의미를 지닌다고 설명합니다. 성경에서 이름은 라벨이 아니라 본질을 드러내는 언어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어떤 존재의 이름을 부르신다는 건, 그 존재를 외적으로 지칭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그 존재가 어떤 상태이며 어떤 성질을 지니고 있는지를 밝히신다’는 뜻입니다. 이 원리를 붙들지 않으면, 성경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이름 부르심’의 장면들은 단순한 서술로 흘러가 버립니다.

 

이 원리가 창세기 5장에 적용될 때, ‘하나님이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는 표현은 태고교회의 성질 전체를 규정하는 선언이 됩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이름을 부르신 대상은 한 개인이 아니라, ‘태고교회라는 하나의 교회 상태’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그 교회가 어떤 성질을 지닌 교회인지, 어떤 근원에서 형성되었는지를 ‘이름 부르기’를 통해 드러내신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성질을 설명하기 위해 ‘아담’이라는 이름의 어원을 다시 끌어옵니다. 히브리어 ‘아담(אָדָם, Adam)은 ‘(ground)을 뜻합니다. 이는 사람이 흙으로 만들어졌다는 자연적 사실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주님에 의해 거듭났다는 영적 사실’을 가리킵니다. 성경에서 ‘’은 인간의 외적 상태, 곧 자연적 인간을 뜻하며, 그 땅에서 취해졌다는 말은 인간이 자신의 자연적 상태에서 주님에 의해 새롭게 형성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아담’이라는 이름은 ‘자연적 상태에 있다가 부름을 받아 거듭난 사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태고교회는 처음부터 완성된 천적 상태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거듭남의 과정을 거친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먼저 ‘’에서 취해진 존재였고, 다시 말해 자연적 인간의 상태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그 출발은 곧 주님의 역사로 이어져, 점차 영적 상태를 거쳐 천적 상태로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이 전환 과정 전체가 바로 태고교회의 형성 과정이며, 그 성질을 집약한 이름이 ‘아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서 태고교회가 천적 상태로 만들어졌을 때의 변화를 강조합니다. 그때 비로소 그들은 가장 탁월한 의미에서 ‘사람’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가장 탁월하다’는 말은 도덕적으로 우수하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됨의 기준에 가장 부합했다’는 뜻입니다. 앞서 보았듯이, 참된 ‘사람’은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비롯된 신앙을 지닌 존재입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바로 이 신앙을 살았기에, 성경은 그들을 가장 본질적인 의미에서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 신앙은 지식에서 출발한 신앙이 아니라, ‘사랑에서 흘러나온 신앙’이었습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먼저 주님을 사랑했고, 그 사랑 안에서 무엇이 참인지 곧바로 인식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신앙은 갈등이나 분투의 결과가 아니라, 사랑의 자연스러운 표현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사랑에서 비롯된 신앙’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 신앙이야말로 사람을 사람 되게 하는 핵심 요소입니다.

 

AC.479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방향을 제시합니다. 우리는 종종 ‘이름’과 ‘정체성’을 외적 기준에서 찾으려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이름은 언제나 ‘내적 성질의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부르시는가는, 우리가 어떤 성질의 삶을 살고 있는가와 직결됩니다. ‘아담’이라는 이름이 태고교회의 성질을 드러냈듯이, 오늘날 우리의 삶 역시 주님 앞에서 어떤 이름으로 불릴지를 스스로 묻게 됩니다.

 

또한 이 말씀은 거듭남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거듭남은 단순히 죄책에서 벗어나는 경험이 아니라, ‘자연적 상태에서 불러내어져 주님 중심의 상태로 옮겨지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의 목적은 단순히 영적 인간이 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사랑에서 비롯된 신앙을 사는 천적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데 있습니다. 이 길 위에 설 때, 인간은 비로소 성경이 말하는 가장 깊은 의미의 ‘사람’이 됩니다.

 

결국 AC.479는 ‘이름을 부르기’라는 짧은 표현 속에, 인간의 거듭남과 교회의 본질을 함께 담아냅니다. 태고교회는 땅에서 취해졌으나, 주님에 의해 새롭게 되었고, 마침내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신앙으로 가장 탁월한 의미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질서는 과거의 한 교회에만 적용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 각자의 영적 여정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주님의 질서입니다.

 

 

 

AC.480, 창5:2, '사람'이라 일컬으신 시점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5:2) AC.480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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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8, 창5:2, 히브리어 ‘아담’(אָדָם, Adam)은 ‘사람’이라는 뜻의 보통명사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5:2) AC.478 그가 ‘아담’(Adam)이라 불리는 이유는 히브리어 ‘아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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