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200.심화

 

3. ‘더 낮아졌지만 더 안전해진

 

왜냐하면 이제 사람은 태고교회 사람들처럼 깊은 지각을 배반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AC.200 해설)

 

 

이 문장은 얼핏 보면 이상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보통 우리는 ‘깊은 지각을 가진 사람이 더 안전하지 않은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반드시 그렇지 않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오늘날 사람들처럼 ‘믿어야 한다’, ‘배워야 한다’, ‘연구해야 한다’의 상태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랑 안에서 진리를 직접 지각했습니다. 다시 말해, 어떤 것이 주님께 속한 것인지, 어떤 것이 선한 것인지, 어떤 것이 진리인지를 내적으로 알았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말씀을 공부하여 알게 되는 것을 그들은 마치 눈으로 보는 것처럼 알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문에 그들의 타락은 훨씬 위험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르고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알면서 죄를 짓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사람은 진리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잘못을 범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태고교회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거스르는지 알면서도 그것을 거스르게 됩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 어떤 사람이 주님의 섭리를 의심한다면, 그 사람은 실제로는 주님의 섭리를 거의 보지 못한 상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의 인도를 내적으로 지각하면서도 자기 own을 사랑하는 쪽으로 돌아설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배반은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의식적인 반전(反轉)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여러 곳에서 말하는 ‘선과 진리를 알면서도 그것을 거스르는 상태’의 위험성입니다. 그는 이런 상태를 영적 세계에서 가장 치유하기 어려운 상태 가운데 하나로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진리 자체가 악과 결합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반면 홍수 이후 인간은 그렇게 높은 지각을 갖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배우고, 이해하고, 믿고, 실천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따라서 넘어질 수도 있고, 오해할 수도 있고, 심지어 한동안 잘못된 길로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회복될 여지도 훨씬 많습니다. 왜냐하면 태고교회 사람들처럼 깊은 지각 자체를 뒤집어 버리는 상태까지는 잘 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어린아이가 부모를 배신하는 것과, 모든 사랑을 다 받고 자란 성인이 의식적으로 부모를 배신하는 것의 차이와 비슷합니다. 후자의 배신이 훨씬 깊고 심각한 이유는, 무엇을 배반하는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홍수 이후 인간의 상태를 단순한 하락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분명 태고교회보다 낮은 상태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더 보호받는 상태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이전만큼 높이 오를 수는 없게 되었지만, 이전만큼 깊이 추락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왜냐하면 이제 사람은 태고교회 사람들처럼 깊은 지각을 배반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라는 말은 단순한 능력의 감소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보호를 의미합니다. 인간은 더 이상 태고교회 수준의 지각을 갖지 못하지만, 그 대신 그 지각을 완전히 뒤집어 멸망에 이르는 위험에서도 어느 정도 보호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AC.200의 맥락에서 보면, 홍수 이후 인간은 영적으로 더 낮아졌지만 동시에 더 안전해졌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세상이 멸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인간 구조가 바뀌었다고 말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에게서 어떤 것을 거두어 가신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보존하기 위해 감당할 수 있는 상태로 조정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AC.200이 보여 주는 매우 깊은 섭리의 한 모습입니다.

 

 

 

AC.200, 심화 2, ‘인간의 상태 변화’, 주님의 섭리

AC.200.심화 2. ‘인간의 상태 변화’, 주님의 섭리 이러한 변화는 홍수 이후 세상이 멸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일어난 것입니다. Such was the change made after the flood to prevent the destruction of the world.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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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인간의 상태 변화’, 주님의 섭리

 

이러한 변화는 홍수 이후 세상이 멸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일어난 것입니다. Such was the change made after the flood to prevent the destruction of the world. (AC.200)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변화는 단순한 타락이나 퇴보로만 설명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변화가 세상이 멸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허용된 섭리적 전환이었다고 말합니다. 만일 태고교회의 방식, 곧 선에서 곧바로 진리를 보는 방식이 그 상태 그대로 타락과 결합되었다면, 인간은 돌이킬 수 없이 파괴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인간의 구조 자체를 바꾸어, 진리를 먼저 배우고 그로부터 선으로 나아가는 방식으로 인류를 보존하셨습니다. (AC.200 해설)

 

 

이 대목은 AC.200 전체뿐 아니라 스베덴보리의 교회 역사관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보통 우리는 태고교회에서 고대교회로, 천적 인간에서 영적 인간으로의 변화를 들으면 자연스럽게 ‘타락’, ‘쇠퇴’, ‘퇴보’라는 관점으로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실제로 어떤 의미에서는 맞습니다. 태고교회의 직접적인 지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즉시 아는 상태도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놀라운 말을 합니다. 이 변화는 단지 인간이 타락한 결과만이 아니라, 동시에 주님의 섭리 가운데 허용되고 준비된 변화였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태고교회 사람들은 선과 진리가 매우 깊이 결합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랑 안에서 진리를 지각했고, 진리를 안다는 것은 곧 그것을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그런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악을 사랑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그들은 단순히 진리를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진리를 알면서도 거스르는 사람이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상태가 영적으로 가장 위험한 상태 가운데 하나라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그래서 홍수 이전 인류의 비극은 단순히 악해졌다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높은 지각과 깊은 진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자기 own과 결합시켰다는 데 있었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홍수 전 인류의 멸망입니다. AC.310 이하에서 설명되는 ‘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도 바로 그런 상태를 가리킵니다.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생긴 악이 아니라, 진리를 알면서도 그것을 왜곡한 상태 말입니다.

 

이 때문에 주님께서는 인간 구조 자체를 바꾸시는 섭리를 행하셨습니다. 이제 인간은 더 이상 선에서 진리를 보는 존재가 아니라, 진리를 먼저 배우고, 그것을 통해 선으로 인도되는 존재가 됩니다. 즉, 사랑이 먼저이고, 신앙이 나중이었던 구조에서, 신앙이 먼저 주어지고, 사랑이 뒤따르는 구조로 바뀌게 됩니다.

 

표면적으로 보면, 이것은 낮아진 상태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인류를 위한 보호 장치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제 사람은 태고교회 사람들처럼 깊은 지각을 배반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천천히 배우고, 조금씩 이해하고, 점진적으로 거듭날 수 있게 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이전보다 덜 높아졌지만, 이전보다 훨씬 안전해졌습니다.

 

그래서 AC.200은 인간 역사 전체를 보는 스베덴보리의 독특한 관점을 보여 줍니다. 주님은 인간의 쇠퇴를 단순히 방치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쇠퇴 속에서도 인류가 계속 존재할 수 있도록 새로운 구조를 마련하셨습니다. 태고교회의 상실은 비극이지만, 동시에 홍수 이후 인류의 생존 조건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목사님께서 자주 감탄하시는 주님의 ‘점진성’과 ‘보호하시는 섭리’가 떠오릅니다. 우리는 흔히 ‘왜 주님은 인간을 처음 상태로 되돌리지 않으실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종종 가장 높은 상태를 즉시 회복시키기보다, 현재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상태 안에서 보존하는 길을 선택하십니다.

 

마치 중병을 앓은 사람이 예전의 건강을 당장 회복하지 못하더라도, 먼저 생명을 보존하고, 서서히 회복하도록 치료받는 것과 비슷합니다. 태고교회의 상실은 분명 손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손실 속에서도 인류 전체가 멸망하지 않도록 새로운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변화는 홍수 이후 세상이 멸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일어난 것입니다’라는 한 문장은 단순한 역사 설명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타락보다 더 크신 주님의 섭리를 보여 주는 선언입니다. 인간은 점점 낮아졌지만, 주님은 그 낮아진 상태에 맞추어 새로운 구원의 길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오늘날 우리가 말씀을 배우고, 진리를 익히고, 양심을 따라 조금씩 거듭나는 방식 자체가 바로 그 섭리의 결과인 것입니다.

 

 

 

AC.200, 심화 3, ‘더 낮아졌지만 더 안전해진’

AC.200.심화 3. ‘더 낮아졌지만 더 안전해진’ 왜냐하면 이제 사람은 태고교회 사람들처럼 깊은 지각을 배반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AC.200 해설) 이 문장은 얼핏 보면 이상하게 들릴 수 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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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0, 심화 1, ‘[quod scirent]’

AC.200.심화 1. ‘[quod scirent]’ 그리고 그들 가운데 매우 많은 이들에게는 아는 것[quod scirent]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and with very many among them there was scarcely anything but knowledge [quod sciren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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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quod scirent]’

 

그리고 그들 가운데 매우 많은 이들에게는 아는 것[quod scirent]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and with very many among them there was scarcely anything but knowledge [quod scirent]. (AC.200)

 

많은 사람들에게는 이제 아는 것만 남고, 살아 있는 선과 사랑은 거의 사라지게 됩니다. (AC.200 해설)

 

 

이 대목은 짧지만 매우 무섭고도 슬픈 진단이라고 생각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원래 선으로부터 진리를 알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사랑이 먼저였고, 진리는 그 사랑 안에서 자연스럽게 지각되었습니다. 그들은 오늘날처럼 신앙을 공부해서 아는 사람들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진리를 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AC.200에서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후손들은 점차 그 상태를 잃어버립니다. 이제는 선으로부터 진리를 아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관한 지식으로부터 선을 배우려고 합니다.

 

여기까지는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실제로 홍수 이후의 영적 교회는 대부분 이런 방식으로 존재했습니다. 문제는 그다음에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들 가운데 매우 많은 이들에게는 아는 것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없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공부를 많이 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진리를 아는 것과 진리를 사랑하는 것이 분리되었다는 뜻입니다.

 

생각해 보면 사람은 얼마든지 선에 대해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랑에 대해 강의할 수 있습니다. 겸손의 중요성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천국에 대한 교리를 정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사랑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경고하는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진리가 삶이 되지 않고, 지식으로만 남아 있는 상태 말입니다.

 

그래서 아는 것만 남았다’는 말은 사실상 살아 있는 신앙이 죽어가고 있다’는 말과 비슷합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에게 신앙은 단순한 앎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있으며, 선을 사랑하는 삶 속에서 살아 움직입니다. 그런데 사랑은 점점 사라지고, 진리에 대한 기억만 남게 되면, 신앙은 생명을 잃은 껍데기가 됩니다.

 

저는 AC.200을 읽을 때마다 오늘날의 종교 현실도 떠오릅니다. 교리를 많이 아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성경 지식이 풍부한 사람도 많습니다. 신학을 공부한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라면 아마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그 지식이 사랑으로 살아 있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 상태는 태고교회 후손들에게 나타났던 바로 그 상태와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 대목이 목사님께 특별히 와닿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 같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오랫동안 AC를 번역하고 해설하시면서 단순히 아는 것’을 늘리는 작업을 하고 계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 지식이 삶이 되고, 사랑이 되고, 영적 상태가 되기를 바라며 작업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AC를 읽고도 단지 흥미로운 내용이네요 정도로 끝나 버릴 때, 아쉬움을 느끼시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입니다.

 

결국 AC.200의 경고는 지식 자체를 향한 것이 아닙니다. 지식은 필요합니다. 문제는 지식만 남는 것입니다. 사랑 없는 진리, 삶 없는 교리, 체어리티 없는 신앙, 지각 없는 지식이 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그들 가운데 매우 많은 이들에게는 아는 것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없었다’고 말할 때의 안타까움도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 한 문장은 단순한 역사적 진단이 아니라, 모든 시대의 교회를 향한 경고처럼 들립니다. ‘진리를 아는 것’에서 멈추지 말고, ‘진리로 사는 것’으로 나아가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진리를 많이 아는 사람들의 나라가 아니라, 진리를 사랑하여 삶이 되게 한 사람들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AC.200, 심화 2, ‘인간의 상태 변화’, 주님의 섭리

AC.200.심화 2. ‘인간의 상태 변화’, 주님의 섭리 이러한 변화는 홍수 이후 세상이 멸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일어난 것입니다. Such was the change made after the flood to prevent the destruction of the world.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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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0, 창3:2-3, 창2 ‘사랑’에서 창3 ‘신앙’으로 중심 이동을 허락하신 이유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And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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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And the woman said unto the serpent, We may eat of the fruit of the tree of the garden; But of the fruit of the tree which is in the midst of the garden, God hath said, Ye shall not eat of it, neither shall ye touch it, lest ye die. (3:2, 3)

 

AC.200

 

여기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tree of knowledge)동산 가운데에 있다(in the midst of the garden)고 하는 이유는, 앞서 창2:9에서는 생명나무가 동산 가운데에 있다 하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대해서는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인데, 이는 동산 가운데(midst)가 가장 내적인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천적 인간, 곧 태고교회의 가장 내적인 것은 생명나무(tree of lives)였는데, 이것은 사랑과 그로부터 나온 신앙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손인 지금 이 사람,천적인 동시에 영적인 사람(celestial spiritual man)이라 할 수 있는 이 후손에게서는 신앙이 동산 가운데(midst), 곧 가장 내적인 것이었습니다. 태고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어떠함(quality)에 대해서는 오늘날에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으므로, 그것을 더 충분히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들의 성향(genius)은 오늘날 어떤 사람에게서도 발견되는 것과는 완전히 달랐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들의 성향에 대해 어떤 개념을 전하기 위해 말하자면, 그들은 선으로부터 진리를 알았고, 사랑으로부터 신앙에 속한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세대가 사라진 뒤에는 전혀 다른 성향의 다른 세대가 뒤따랐는데, 그들은 선으로부터 진리를 분별하는 대신, 진리를 통해 선을 알게 되었고, 사랑으로부터 신앙을 아는 대신, 신앙의 지식들로부터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매우 많은 이들에게는 아는 것[quod scirent]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홍수 이후 세상이 멸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일어난 것입니다. The reason why the “tree of knowledge” is here spoken of as being “in the midst of the garden,” although previously (Gen. 2:9), the tree of lives was said to be in the midst of the garden, and not the tree of knowledge, is that the “midst” of the garden signifies the inmost; and the inmost of the celestial man, or of the most ancient church, was the “tree of lives,” which is love and the faith thence derived; whereas with this man, who may be called a celestial spiritual man, or with this posterity, faith was the “midst” of the garden, or the inmost. It is impossible more fully to describe the quality of the men who lived in that most ancient time, because at the present day it is utterly unknown, their genius being altogether different from what is ever found with anyone now. For the purpose however of conveying some idea of their genius, it may be mentioned that from good they knew truth, or from love they knew what is of faith. But when that generation expired, another succeeded of a totally different genius, for instead of discerning the true from the good, or what is of faith from love, they acquired the knowledge of what is good by means of truth, or what is of love from the knowledges of faith, and with very many among them there was scarcely anything but knowledge [quod scirent]. Such was the change made after the flood to prevent the destruction of the world.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2:9)

 

 

해설

 

이 단락은 창2와 창3의 중심이 무엇이었는지를 결정적으로 구분합니다. ‘동산 가운데’는 단순한 위치 개념이 아니라, 인간 안에서 가장 내적이며 주도적인 원리를 뜻합니다. 태고교회의 가장 내적인 것은 ‘생명나무’였고, 그것은 곧 사랑과 그 사랑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신앙이었습니다. 즉, 태고교회에서 중심은 언제나 사랑이었고, 신앙은 그 사랑의 열매이자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다루어지는 후손, 곧 ‘천적인 동시에 영적인 사람’에게서는 그 중심이 달라졌습니다. 이제 ‘동산 가운데’는 생명나무가 아니라, 신앙이 됩니다. 이는 사랑이 중심이었던 상태에서, 신앙이 중심이 되는 상태로의 이동을 의미합니다. 아직 신앙이 살아 있고, 주님으로부터 나오지만, 그것이 더 이상 사랑의 직접적 흐름으로만 유지되지는 않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차이를 오늘날의 인간에게는 거의 이해 불가능한 것으로 말합니다. 태고 시대 사람들의 성향은 오늘날 인간의 심리나 인식 구조와는 근본적으로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선을 먼저 살았고, 그 선 안에서 진리를 보았습니다. 사랑이 먼저 있었고, 신앙은 그 사랑 안에서 자명하게 인식되었습니다. 이것이 ‘선으로부터 진리를 안다’는 말의 실제 의미입니다.

 

그러나 그다음 세대에서는 방향이 완전히 바뀝니다. 그들은 진리를 통해 선을 배우고, 신앙의 지식들을 통해 사랑을 이해하려 했습니다. 이는 신앙이 지각이 아니라 학습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음을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를 가치중립적으로만 말하지 않고, 분명한 위험을 내포한 변화로 제시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이제 ‘아는 것’만 남고, 살아 있는 선과 사랑은 거의 사라지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변화는 단순한 타락이나 퇴보로만 설명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변화가 ‘세상이 멸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허용된 섭리적 전환이었다고 말합니다. 만일 태고교회의 방식, 곧 선에서 곧바로 진리를 보는 방식이 그 상태 그대로 타락과 결합되었다면, 인간은 돌이킬 수 없이 파괴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인간의 구조 자체를 바꾸어, 진리를 먼저 배우고 그로부터 선으로 나아가는 방식으로 인류를 보존하셨습니다.

 

AC.200은 그러므로 창3의 중심 이동을 단순한 하락으로만 읽지 못하게 합니다. 사랑 중심에서 신앙 중심으로의 이동은 손실이면서 동시에 보호 장치였습니다. 이는 태고교회의 종말과 고대교회의 시작을 가르는 결정적 전환점이며, 오늘날 인간의 신앙 구조가 왜 지금과 같은 형태를 띠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핵심 대목입니다.  

 

 

심화

 

1. ‘[quod scirent]’

 

 

AC.200, 심화 1, ‘[quod scirent]’

AC.200.심화 1. ‘[quod scirent]’ 그리고 그들 가운데 매우 많은 이들에게는 아는 것[quod scirent]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and with very many among them there was scarcely anything but knowledge [quod sciren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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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인간의 상태 변화’, 주님의 섭리

 

 

AC.200, 심화 2, ‘인간의 상태 변화’, 주님의 섭리

AC.200.심화 2. ‘인간의 상태 변화’, 주님의 섭리 이러한 변화는 홍수 이후 세상이 멸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일어난 것입니다. Such was the change made after the flood to prevent the destruction of the world.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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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더 낮아졌지만 더 안전해진

 

 

AC.200, 심화 3, ‘더 낮아졌지만 더 안전해진’

AC.200.심화 3. ‘더 낮아졌지만 더 안전해진’ 왜냐하면 이제 사람은 태고교회 사람들처럼 깊은 지각을 배반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AC.200 해설) 이 문장은 얼핏 보면 이상하게 들릴 수 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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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9, 창3:2-3, ‘나무’와 ‘열매’, 태고교회의 상태 변화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And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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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9.심화

 

1. ‘나무 나무의 열매

 

그들이 먹을 수 있었던 나무의 열매(fruit of the tree of which they might eat)가 태고교회로부터 그들에게 계시된 신앙의 선과 진리, 곧 신앙의 지식들[cognitiones]을 의미한다는 것은, 그것을 가리켜 그들이 먹을 수 있었던 동산 나무의 열매(fruit of the tree of the garden of which they might eat)라고는 해도, 앞서 천적 인간, 곧 태고교회를 다룰 때처럼 동산 나무(tree of the garden)라고는 더 이상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면 분명합니다 (2:16). That the “fruit of the tree of which they might eat” signifies the good and truth of faith revealed to them from the most ancient church, or the knowledges [cognitiones] of faith,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it is said to be the “fruit of the tree of the garden of which they might eat,” and not the “tree of the garden,” as before when treating of the celestial man, or the most ancient church (Gen. 2:16). (AC.199)

 

그냥 무심코 읽고 지나쳤던 표현들이었음에도 그 안에 이런 엄청난 아르카나가 들어있었다는 사실이 정말 놀랍고 또 놀랍습니다.

 

 

저도 AC.199 같은 대목을 읽을 때면 비슷한 놀라움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근거로 삼는 것은 거창한 문장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는 거의 지나쳐 버릴 만한 단어 하나의 차이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동산 나무’와 ‘동산 나무의 열매’를 같은 뜻으로 읽고 넘어갑니다. 실제로 일반 독서에서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왜 여기서는 나무가 아니라 열매라고 했는가?’를 묻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결과입니다. 그는 단순한 문체 변화나 우연한 표현 차이로 보지 않습니다. ‘나무’는 지각 자체를, ‘열매’는 그 지각으로부터 나오는 선과 진리의 지식들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창2에서는 태고교회가 직접 지각하는 상태였기 때문에 ‘동산 나무’라고 하고, 창3에서는 그 후손들이 이미 직접 지각하는 상태에서 한 단계 내려와 지각으로부터 전해진 지식들을 배우는 상태였기 때문에 ‘동산 나무의 열매’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말씀관 전체를 보여 주는 좋은 예입니다. 그는 성경을 단순히 종교적 가르침이 담긴 책으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단어 하나, 표현 하나, 심지어 접속과 순서까지도 영적 의미와 연결되어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곳에서 그는 엄청난 차이를 발견합니다.

 

목사님께서 놀라움을 느끼시는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수십 년 동안 성경을 읽어 왔고, ‘나무’와 ‘열매’라는 표현도 셀 수 없이 읽었습니다. 그런데 한 번도 ‘왜 여기서는 나무가 아니라 열매라고 했을까?’라는 질문을 해보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그 차이가 ‘직접 지각하는 상태’와 ‘전해 받은 지식을 배우는 상태’의 차이를 나타낸다는 생각은 더욱 하지 못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AC를 읽는 즐거움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거대한 교리 체계 때문이 아니라, 너무 익숙해서 보이지 않던 본문이 갑자기 입체적으로 열리기 때문입니다. 어제까지는 단순한 반복처럼 보였던 표현이 오늘은 전혀 다른 영적 상태를 구분하는 표지판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그냥 무심코 읽고 지나쳤던 표현들’이라는 말이 매우 공감됩니다. AC를 오래 읽다 보면 종종 이런 생각이 듭니다. ‘도대체 성경 안에 이런 것이 들어 있었다는 말인가?’ 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스베덴보리가 만들어 낸 의미처럼 느껴지다가도, 일단 설명을 듣고 나면 오히려 본문 자체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입니다.

 

아마 이것이 목사님께서 오랫동안 AC 작업을 계속하시는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새로운 교리를 하나 더 배우는 기쁨이라기보다, 너무 익숙해서 더 이상 보이지 않던 말씀 속에서 계속 새로운 아르카나가 드러나는 경험 말입니다. 창세기 2장과 3장만 해도 이미 수십 년, 수백 번 읽었을 본문인데, AC를 통해 다시 읽으면 마치 전혀 다른 책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AC.199는 단순히 ‘나무와 열매의 차이’를 설명하는 글이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가 왜 성경의 단어 하나도 허투루 보지 않았는지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대목들을 만날 때마다 ‘말씀 안에는 아직도 내가 전혀 보지 못한 깊이가 얼마나 더 있을까?’ 하는 경외감이 자연스럽게 생기게 됩니다. 그것이야말로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정말 놀랍고 또 놀랍다’는 감탄의 본질이 아닐까 싶습니다.

 

 

 

AC.199, 창3:2-3, ‘나무’와 ‘열매’, 태고교회의 상태 변화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And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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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And the woman said unto the serpent, We may eat of the fruit of the tree of the garden; But of the fruit of the tree which is in the midst of the garden, God hath said, Ye shall not eat of it, neither shall ye touch it, lest ye die. (3:2, 3)

 

AC.199

 

그들이 먹을 수 있었던 나무의 열매(fruit of the tree of which they might eat)가 태고교회로부터 그들에게 계시된 신앙의 선과 진리, 곧 신앙의 지식들[cognitiones]을 의미한다는 것은, 그것을 가리켜 그들이 먹을 수 있었던 동산 나무의 열매(fruit of the tree of the garden of which they might eat)라고는 해도, 앞서 천적 인간, 곧 태고교회를 다룰 때처럼 동산 나무(tree of the garden)라고는 더 이상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면 분명합니다 (2:16). 거기서 동산 나무라 한 것은 선과 진리에 대한 지각(perception)을 말하는 것이지만, 반면 여기서는 열매(fruit)를 말하는데, 이는 선과 진리가 그 근원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 선과 진리는 또한 말씀에서 자주 열매를 의미합니다. That the “fruit of the tree of which they might eat” signifies the good and truth of faith revealed to them from the most ancient church, or the knowledges [cognitiones] of faith,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it is said to be the “fruit of the tree of the garden of which they might eat,” and not the “tree of the garden,” as before when treating of the celestial man, or the most ancient church (Gen. 2:16). The “tree of the garden,” as it is there called, is the perception of what is good and true; which good and truth, because they are from that source, are here called “fruit,” and are also frequently signified by “fruit” in the Word.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2:16)

 

※ 위 우리말 개역 개정은 ‘나무의 열매’라고 했지만, 원전에는 ‘나무’만 있음

 

 

해설

 

이 단락은 창2와 창3 사이의 미묘한 표현 차이가 지니는 신학적 무게를 정확히 짚어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나무’와 ‘열매’를 동일시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구분 속에서 태고교회의 상태 변화가 드러난다고 봅니다. 창2에서 말한 ‘동산의 나무’는 선과 진리를 직접 지각하는 상태, 곧 태고교회의 본래적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창3에서는 더 이상 ‘나무’ 자체가 중심에 있지 않고, ‘그 나무의 열매’가 언급됩니다. 이는 선과 진리의 근원인 지각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지각에서 나오는 결과물, 곧 알게 된 것, 인식된 것으로 그 초점이 옮겨졌음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태고교회는 선과 진리를 ‘지각하며 살았던’ 상태에서, 점차 그것들을 ‘지식으로 다루는’ 상태로 이동하고 있음을 이 표현 변화가 보여 줍니다.

 

여기서 ‘신앙의 지식들’로 번역된 cognitiones는 단순한 기억 지식이나 학문적 정보가 아니라, 계시로부터 주어진 인식의 내용들을 뜻합니다. 이는 아직 감각이나 자기 판단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여전히 주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열매는 ‘먹을 수 있는 것’으로 허락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지점에서 매우 섬세한 구분을 합니다. 선과 진리가 ‘나무’로 불릴 때에는 그것들이 살아 있는 지각(perception)의 상태에 있을 때이고, ‘열매’로 불릴 때에는 그 지각에서 흘러나온 인식과 내용으로서 인간에게 받아들여질 때입니다. 이 때문에 말씀 전체에서 ‘열매’는 자주 선과 진리의 결과, 혹은 그것이 삶 속에서 맺히는 형태를 의미합니다.

 

이 단락은 곧바로 다음 단계로 이어질 위험을 내포합니다. 선과 진리를 ‘열매’로만 다루기 시작할 때, 인간은 점차 그 근원인 ‘나무’를 잊고, 열매 자체를 소유하고 평가하려는 경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AC.199는 아직 그 단계에 이르렀다고 말하지는 않지만, 태고교회의 상태가 이미 지각 중심에서 인식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조용히 보여 줍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무엇을 먹을 수 있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선과 진리를 대하고 있었는가’를 드러냅니다. 태고교회의 세 번째 상태는 여전히 계시된 신앙의 지식들을 허락받고 있었으나, 그 관계 방식은 이미 이전과 같지 않았습니다. 이 미세한 변화가 곧 이어질 금지와 타락의 토양이 됩니다.

 

 

심화

 

1. ‘나무나무의 열매

 

 

AC.199, 심화 1, ‘나무’와 ‘나무의 열매’

AC.199.심화 1. ‘나무’와 ‘나무의 열매’ ‘그들이 먹을 수 있었던 나무의 열매’(fruit of the tree of which they might eat)가 태고교회로부터 그들에게 계시된 신앙의 선과 진리, 곧 신앙의 지식들[cogn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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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8, 창3:2-3,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AC.198-203)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And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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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And the woman said unto the serpent, We may eat of the fruit of the tree of the garden; But of the fruit of the tree which is in the midst of the garden, God hath said, Ye shall not eat of it, neither shall ye touch it, lest ye die. (3:2, 3)

 

AC.198

 

동산 나무의 열매(fruit of the tree of the garden)는 태고교회로부터 그들에게 계시된 선과 진리를,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fruit of the tree which is in the midst of the garden, of which they were not to eat)는 그들이 자기들로부터 배워서는 안 되었던 신앙의 선과 진리를 뜻합니다. ‘만지지도 말라(not to touch it)는 신앙의 선과 진리를 자기들, 곧 감각과 기억 지식[sensuali et scientifico]으로부터 생각하는 것을 금하는 것이며, ‘죽을까 하노라(lest ye die)는 이렇게 하면 신앙, 곧 모든 지혜와 지성이 소멸되기 때문입니다. The “fruit of the tree of the garden” is the good and truth revealed to them from the most ancient church; the “fruit of the tree which is in the midst of the garden, of which they were not to eat” is the good and truth of faith, which they were not to learn from themselves; “not to touch it” is a prohibition against thinking of the good and truth of faith from themselves, or from what is of sense and memory-knowledge [sensuali et scientifico]; “lest ye die” is because thus faith, or all wisdom and intelligence, would perish.

 

 

해설

 

이 단락은 선악과 금지의 의미를 매우 정확하게 한정합니다. 문제는 ‘선과 진리를 아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어디로부터 아는가입니다. ‘동산 나무의 열매’는 태고교회가 주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계시의 선과 진리를 가리키며, 이는 본래 자유롭게 누릴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태고교회는 이 선과 진리를 지식으로 배운 것이 아니라, 지각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동산 가운데 있는 나무’는 전혀 다른 차원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신앙의 선과 진리, 곧 가장 중심적인 것들이며, 이것들은 결코 인간 자신한테서 배워서는 안 되는 것들입니다. 이는 인간이 신앙의 근원을 자기 안에 두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며, 신앙의 출처가 언제나 주님이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먹지 말라’는 명령은 행위의 금지가 아니라, 근원의 금지입니다. 신앙의 선과 진리를 자기 판단과 자기 이해의 대상으로 삼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 금지가 더욱 강화되어 ‘만지지도 말라’고 표현되는 것은, 단순한 실천 이전에 사고의 방향 자체를 제한하는 의미를 지닙니다. 생각부터가 이미 질서에 속하지 않으면, 행위는 필연적으로 그릇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특별히 덧붙이는 것이 ‘감각과 기억 지식으로부터’라는 표현입니다. 이는 신앙의 문제를 감각적 증거나 학문적 지식의 심문대에 올리는 태도를 직접적으로 겨냥합니다. 신앙의 선과 진리는 그 성격상 감각과 기억 지식으로 판별될 수 없는 것이며, 그것들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 순간, 이미 중심이 인간 쪽으로 이동합니다.

 

죽을까 하노라’는 표현은 형벌적 위협이 아니라, 필연적 결과에 대한 진술입니다. 이렇게 신앙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이해하려 하면, 신앙 그 자체가 사라지게 되며, 그 결과 모든 지혜와 지성도 함께 소멸됩니다. 이는 신앙이 지혜의 한 영역이 아니라, 지혜 전체의 생명이라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AC.198은 창3:2-3을 단순한 금지 명령의 기록이 아니라, 신앙 인식의 질서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선언으로 제시합니다. 신앙의 선과 진리는 인간이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는 것’이며, 이 질서가 무너질 때 비로소 타락이 시작됩니다.

 

 

 

AC.199, 창3:2-3, ‘나무’와 ‘열매’, 태고교회의 상태 변화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And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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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7, 창3:1, 다시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진 ‘뱀’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And the serpent was more sub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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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7.심화

 

2. ‘21:4-9

 

4백성이 호르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5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6여호와께서 불 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7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8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9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21:4-9) (AC.197)

 

 

AC.197에서 스베덴보리가 민수기 21장의 ‘놋뱀’을 언급하는 이유는, 앞에서 마10:16을 인용한 것과 같은 목적 때문입니다. 곧 ‘’이라는 상징이 본래부터 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만일 뱀이 본질적으로 악 그 자체를 의미한다면, 주님께서 ‘뱀같이 지혜로우라’고 말씀하실 수도 없고, 더욱이 광야에서 놋뱀을 통해 백성을 살리실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뱀은 본래 인간의 가장 바깥 단계인 감각 파트를 뜻합니다. 감각은 인간 존재의 가장 낮은 단계에 속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악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자연 세계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부분입니다. 문제는 이 감각이 주님의 질서 아래 있느냐, 아니면 자기 자신의 own 아래 있느냐입니다. 창3의 뱀은 감각이 주님의 자리를 차지한 경우이고, 민수기의 놋뱀은 감각이 주님께 복종한 경우를 보여 줍니다.

 

특히 AC.197에서 스베덴보리는 ‘놋뱀은 주님의 감각 파트(the sensuous part in the Lord)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놀라운 해석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보통 주님을 생각할 때, 천적이고 신적인 측면만 생각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는 우리와 같은 인간 본성을 입으셨고, 따라서 감각적 차원까지도 가지셨습니다. 다만 그 감각은 우리처럼 자기 own에 지배되지 않았고, 완전히 신적 질서 안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백성이 뱀에 물렸을 때, 놋뱀을 바라보고 살아난 것은 단순한 기적 사건이 아닙니다. 상응적으로는 자기 own과 감각적 욕망에 물린 인간이, 주님 안에 있는 완전한 인간성, 곧 완전히 질서 안에 있는 감각을 바라봄으로써 치유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병을 일으킨 것도 뱀이고, 치료의 표징도 뱀이지만, 둘은 전혀 다른 상태의 뱀입니다.

 

이 점은 창3과 연결해 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창3의 뱀은 인간이 감각으로 신앙을 판단하도록 유도합니다. 반면 민21의 놋뱀은 인간이 감각을 주님께 복종시킨 완전한 모습을 바라보게 합니다. 하나는 아래가 위를 지배하는 상태이고, 다른 하나는 아래가 위에 순종하는 상태입니다.

 

또한 놋(brass)은 스베덴보리의 상응 해석에서 흔히 자연적 선(natural good)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놋뱀은 단순한 뱀이 아니라, 선 안에 있는 감각적 인간, 질서 안에 있는 외적 인간, 곧 겉 사람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백성이 그것을 바라보았을 때 살아난 것입니다. 그들이 단순히 금속 조각을 본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장차 이루실 구원의 표상을 본 것입니다.

 

이 때문에 AC.197은 놋뱀을 매우 중요한 예로 사용합니다. 앞의 AC.195-196에서 스베덴보리는 뱀의 부정적 의미를 길게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면 독자는 ‘감각은 나쁜 것이구나’라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AC.197은 곧바로 반대 사례를 제시합니다. 감각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악한 것은 감각이 주님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고, 선한 것은 감각이 주님의 질서 아래 있는 것입니다.

 

결국 민수기 21장의 놋뱀은 창3의 뱀에 대한 해답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창3에서는 인간이 감각을 따라 주님을 판단했습니다. 민21에서는 인간이 주님을 바라봄으로써 감각이 치유됩니다. 그래서 AC.197에서 스베덴보리가 이 사건을 인용하는 이유는, 뱀이라는 상징의 본래 의미가 무엇인지를 보여 주고, 동시에 인간 안의 감각 파트도 주님 안에서는 완전하게 질서화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가 ‘주님만이 참된 천적 인간이며, 모든 사람을 돌보시고 섭리하시는 분’이라고 결론짓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AC.197, 창3:1, 다시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진 ‘뱀’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And the serpent was more sub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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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7, 심화 1, ‘마10:16’

AC.197.심화 1. ‘마10: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마10:16) Behold, I send you forth as sheep into the midst of wol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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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7.심화

 

1. ‘10: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10:16) Behold, I send you forth as sheep into the midst of wolves; be ye therefore prudent as serpents, and simple as doves (Matt. 10:16).

 

 

AC.197에서 스베덴보리가 마10:16을 인용하는 이유는 매우 중요합니다. 앞의 AC.195-196에서는 뱀이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즉, 감각적인 것에 근거하여 신앙의 신비를 판단하는 추론, 그리고 그로 인해 생기는 영적 맹목을 뜻했습니다. 그런데 AC.197에 이르면 갑자기 주님께서 친히 ‘뱀같이 지혜로우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뱀이 언제는 나쁘고 언제는 좋은 것입니까? 바로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본래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은 부정적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가장 바깥 단계인 감각 파트를 뜻했지만, 주님의 질서 아래 있는 감각을 의미했습니다. 감각은 원래 적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위험을 감지하고, 현실을 분별하는 능력은 모두 주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이 감각을 사용하여 자신을 보호하고, 외적 위험을 살피고, 삶의 질서를 유지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시기의 뱀이 ‘신중함(circumspection)과 ‘분별력(prudence)을 의미했다고 설명합니다.

 

주님께서 ‘뱀같이 지혜로우라’고 하신 것도 바로 이 의미입니다. 여기서 지혜롭다는 것은 신앙의 신비를 감각으로 판단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 속에서 살아가며, 악과 위험을 분별할 줄 아는 신중함을 뜻합니다. 양이 이리 가운데 들어가면서 아무 경계심도 없이 행동하는 것은 순결이 아니라 어리석음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비둘기같이 순결하라’고만 하지 않으시고, 동시에 ‘뱀같이 지혜로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감각 자체를 비난하지 않습니다. 감각이 주님 아래 있을 때는 유익합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감각이 주님 위에 올라앉을 때입니다. 감각이 종일 때는 ‘뱀같이 지혜로움’이 됩니다. 그러나 감각이 주인이 되어 신앙을 심판하기 시작하면 창3의 뱀이 됩니다.

 

그래서 AC.197AC.195-196의 균형을 잡아 주는 역할을 합니다. 앞의 글들만 읽으면 마치 감각과 이성이 모두 나쁜 것처럼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는 오히려 감각도, 이성도, 기억 지식도 모두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다만 그것들이 주님의 질서 안에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목사님께서 앞서 말씀하신 ‘이성질’이라는 표현을 빌리자면, 주님은 우리에게 이성을 버리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바르게 사용하라고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감각도 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감각을 통해 현실을 보고 위험을 분별해야 합니다. 그것이 ‘뱀같이 지혜로움’입니다. 그러나 감각이 신앙의 재판관이 되는 순간, 그것은 AC.195의 ‘뱀의 독’이 됩니다.

 

그래서 마10:16AC.197에 인용된 이유는, 성경의 ‘’이 항상 악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본래 뱀은 인간의 감각 파트 자체를 뜻합니다. 그 감각이 주님께 순종할 때는 신중함과 분별력이 되고, 자기 자신의 own을 섬길 때는 거짓 추론과 영적 맹목이 됩니다. 같은 뱀이지만 방향이 다르고, 주인이 다르고, 역할이 다른 것입니다.

 

결국 AC.197이 말하는 핵심은 이것입니다. 뱀을 죽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뱀을 제자리에 두는 것이 목적입니다. 감각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질서 아래 두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인간은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한’ 상태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이 말씀을 인용한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AC.197, 심화 2, ‘민21:4-9’

AC.197.심화 2. ‘민21:4-9’ 4백성이 호르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5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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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7, 창3:1, 다시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진 ‘뱀’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And the serpent was more sub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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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And the serpent was more subtle than any wild animal of the field which Jehovah God had made; and he said unto the woman, Yea, hath God said, Ye shall not eat of every tree of the garden? (3:1)

 

AC.197

 

태고의 사람들, 곧 천적인 사람들에게 있어서 (serpent)은 신중함을 의미하였고, 또한 해(injury)를 입지 않기 위해 그들이 그 신중함을 행사하던 감각 파트를 의미하였습니다. 이러한 (serpent)의 의미는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에서 분명히 드러나는데, Among the most ancient people, who were celestial men, by the “serpent” was signified circumspection, and also the sensuous part through which they exercised circumspection so as to be secure from injury. This signification of a “serpent” is evident from the Lord’s words to his disciples: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10:16) Behold, I send you forth as sheep into the midst of wolves; be ye therefore prudent as serpents, and simple as doves (Matt. 10:16).

 

하신 말씀에서 그렇습니다. 또한 광야에 세워졌던 놋뱀(brazen serpent)에서도 그러한 의미가 나타나는데, 이것은 오직 천적 인간이신 주님 안에 있는 감각 파트를 의미하며, 그분만이 모든 것을 돌보시고 공급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바라본 모든 자들이 보존되었습니다. And also from the “brazen serpent” that was set up in the wilderness, by which was signified the sensuous part in the Lord, who alone is the celestial man, and alone takes care of and provides for all; wherefore all who looked upon it were preserved.

 

※ 놋뱀 에피소드는 아래 민수기 본문에 나옵니다.

 

4백성이 호르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5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6여호와께서 불 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7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8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9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21:4-9)

 

 

해설

 

이 단락은 앞선 AC.195–196에서 매우 부정적으로 다루어진 ‘’의 상징을 다시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본래부터 악한 상징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하며, 태고교회, 곧 천적인 사람들의 상태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졌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창3의 타락을 이해할 때, 감각 그 자체를 정죄하지 않도록 하는 중요한 균형 장치입니다.

 

태고의 사람들에게서 ‘’은 신중함, 곧 해(injury)를 분별하고 피할 줄 아는 지혜를 뜻했습니다. 이 신중함은 추론이나 의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내적 결합 속에서 자연스럽게 작동하는 보호적 기능이었습니다. 그 신중함이 작동하는 통로가 바로 감각 파트였으며, 이 감각은 상위 질서에 순종하는 도구로서 사용되었습니다. 즉, 감각은 주도권을 쥔 것이 아니라 봉사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고 하신 말씀은 바로 이 본래적 의미를 전제합니다. 여기서 뱀의 지혜는 간교함이나 속임이 아니라, 상황을 분별하고 해를 피하는 신중함입니다. 동시에 비둘기의 순결이 함께 언급됨으로써, 이 신중함이 자기 사랑이나 계산에서 나오지 않고, 선함과 결합되어야 함이 분명히 됩니다. 이 두 가지가 분리될 때, 뱀은 지혜가 아니라 독이 됩니다.

 

광야의 놋뱀은 이 의미를 가장 결정적으로 보여 주는 표상입니다. 놋뱀은 감각 파트 그 자체를 뜻하지만, 그것이 주님 안에 있을 때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주님은 오직 유일한 천적 인간이시며, 그분 안에서는 감각조차도 완전히 질서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놋뱀은 파괴의 도구가 아니라, 보존과 치유의 표징이 됩니다.

 

놋뱀을 바라본 자들이 보존되었다는 것은, 감각적인 것을 부정하거나 제거함으로써가 아니라, 그것을 주님께 속한 것으로 바라보고, 질서 안에 둘 때 생명이 유지된다는 뜻입니다. 이는 인간이 감각을 버려야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감각을 어디에 두느냐가 문제임을 분명히 합니다.

 

AC.197은 결국 창3의 뱀을 악마적 존재로 단순화하는 해석을 완전히 차단합니다. 뱀은 인간 안의 감각이며, 그것은 본래 신중함과 보호의 기능을 가진 것이었습니다. 타락은 뱀이 존재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그 뱀이 신앙의 주인이 되었기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이 단락은 감각의 회복 가능성을 열어 두며, 모든 질서의 회복이 오직 주님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점을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선언합니다.

 

 

심화

 

1. ‘10:16

 

 

AC.197, 심화 1, ‘마10:16’

AC.197.심화 1. ‘마10: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마10:16) Behold, I send you forth as sheep into the midst of wol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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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1:4-9

 

 

AC.197, 심화 2, ‘민21:4-9’

AC.197.심화 2. ‘민21:4-9’ 4백성이 호르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5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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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6, 창3:1, ‘뱀’의 시대적 확장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And the serpent was more sub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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