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3)

 

AC.347

 

세월이 지난 후에’(end of days, ‘날들의 끝에’)가 ‘시간이 흐른 ’를 뜻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명합니다. 처음에는, 그리고 그 교리 안에 단순함이 있었을 때에는, 여기서 ‘가인’(Cain)이라 불리는 교리가 후에 그렇게 된 것만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그들이 자기들의 자손을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a man Jehovah, ‘여호와인 사람’)라고 했다는 사실에서도 분명합니다. 따라서 처음에는 신앙이 ‘날들의 끝에’, 곧 시간이 흐른 뒤에 이르렀을 때만큼 사랑에서 멀리 분리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참된 신앙의 모든 교리에서 흔히 일어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That by theend of daysis signified in process of time, is evident to all. At first, and while there was simplicity in it, the doctrine here calledCaindoes not appear to have been so unacceptable as it became afterwards, as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they called their offspring aman Jehovah.” Thus at first faith was not so far separated from love as at theend of days,” or in process of time; as is wont to be the case with every doctrine of true faith.

 

 

해설

 

AC.347은 바로 앞 AC.346의 ‘세월이 지난 후에’라는 표현을 설명하면서, 가인으로 표상된 교리가 처음부터 완전히 타락한 형태로 출발한 것은 아니었다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밝힙니다. 스베덴보리는 ‘처음에는, 그리고 교리 안에 단순함이 있었을 때에는’ 가인의 교리가 후대에 이르러 나타난 것만큼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는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가인의 발생과 타락을 한순간의 사건이 아니라 점진적인 과정으로 보게 합니다.

 

여기서 ‘단순함’(simplicity)은 단순히 지식이 부족하거나 생각이 단순했다는 뜻으로 읽기보다, 아직 교리가 자기주장을 강화하여 사랑과 맞서지 않았던 초기 상태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앞의 AC.338에서 보았듯이 가인의 시작은 신앙 자체를 버리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 자체로 하나의 ’으로 구별하여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 출발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신앙과 사랑 사이의 거리가 아직 크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구별’과 ‘분리’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신앙을 사랑과 구별하여 하나의 교리로 정리하는 것 자체가 곧바로 악은 아닙니다. 문제는 시간이 흐르면서 그 구별이 분리가 되고, 분리가 마침내 우열 관계로 변하는 데 있습니다. 신앙이 ‘나는 사랑 없이도 참된 신앙이다’라고 주장하기 시작하고, 더 나아가 자신을 체어리티보다 앞세우게 되면 가인의 성격이 본격적으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세월이 지난 후에’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AC.346에서는 이를 단순히 ‘시간이 흐른 ’라고 밝혔지만, AC.347은 그 시간 동안 무엇이 일어났는지를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사랑과 신앙 사이의 분리가 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거리가 점점 벌어졌습니다. 결국 ‘세월이 지난 후에’ 이르러서는 체어리티 없는 신앙의 행위인 ‘땅의 소산’을 여호와께 드리는 상태, 곧 사랑과 분리된 신앙으로부터 예배하는 상태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그 초기 상태가 아직 완전히 타락하지 않았다는 증거로 드는 것이 ‘그들이 자기들의 자손을 향해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표현은 앞의 창4:1, 곧 하와가 가인을 낳으며 한 말과 연결됩니다. AC.338에서 스베덴보리는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는 말씀을 태고교회 안에서 신앙이라는 첫 자손이 생겨난 것으로 설명했습니다. 즉 가인의 초기 단계에는 여전히 그 신앙이 주님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인식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가인’이라는 이름만 보고 처음부터 모든 것이 거짓이고 악이었다고 생각하면 AC.347의 중요한 뉘앙스를 놓치게 됩니다. 처음에는 참된 것에서 출발했습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신앙이 있었고, 그 신앙은 아직 사랑과 아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신앙을 사랑과 별개로 취급하는 경향이 강해졌고, 마침내 신앙 자체를 구원의 본질로 높이면서 체어리티를 밀어내게 된 것입니다.

 

특히 마지막 문장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참된 신앙의 모든 교리에서 흔히 일어나는 ’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AC.347은 태고교회의 가인이라는 특정 교리만 설명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참된 진리에서 시작한 교리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 교리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자기애와 지성적 자부심에 의해 본래의 생명에서 멀어질 수 있다는 일반적인 교회사의 원리를 보여 줍니다.

 

예를 들어 어떤 교리가 처음에는 주님을 더욱 사랑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도록 돕기 위해 명료하게 정리될 수 있습니다. 그 단계에서는 교리가 사랑을 섬깁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그 교리를 ‘우리가 옳다는 증거’로 사용하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관심이 ‘ 진리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서 ‘누가 교리를 정확하게 믿는가?’로 이동합니다. 더 진행되면 교리를 정확하게 고백하는 것을 사랑과 삶보다 중요하게 여기고, 마침내 교리의 차이 때문에 서로 판단하고 정죄하기까지 합니다. 처음의 참된 교리는 그대로인 것처럼 보여도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내적 상태는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AC.347은 앞서 살펴본 ‘가인의 분리는 어디서 시작되었는가?’라는 문제를 한층 더 세밀하게 만듭니다. 가인의 길은 처음부터 ‘체어리티를 없애자’라고 선언하면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주 작은 이동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따로 바라보고, 그것을 점점 독립적인 것으로 만들며, 시간이 흐르면서 그 독립성을 강화한 것입니다. 결국 처음에는 미세했던 틈이 나중에는 신앙과 사랑의 완전한 분리로 발전합니다.

 

이것은 개인의 영적 삶에서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처음 말씀을 배우고, 교리를 알아갈 때에는 그 진리가 주님께 가까이 가고 삶을 고치기 위한 것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이것을 안다’는 데 만족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자신이 가진 진리로 다른 사람을 재고, 판단하기 시작할 수도 있습니다. 진리 자체는 변하지 않았는데 그것을 받아들이는 목적이 달라진 것입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가인의 문제는 과거 어느 교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신앙인 안에서 끊임없이 경계해야 할 가능성이 됩니다.

 

그러므로 참된 교리를 보존한다는 것은 단지 처음의 정확한 문장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 교리가 처음 지향했던 목적, 곧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고,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으로 이끄는 목적도 함께 보존해야 합니다. 교리의 문장은 그대로인데 사랑이 빠져버린다면 외형은 보존되었어도 그 생명은 이미 달라진 것입니다.

 

결국 AC.347이 보여 주는 것은 ‘참된 것에서 시작했다는 사실이 끝까지 참된 상태를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엄중한 사실입니다. 신앙은 계속 사랑을 바라보고, 사랑을 섬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처음에는 거의 보이지 않던 작은 분리가 ‘시간이 흐른 ’ 점점 커져 마침내 신앙과 체어리티를 서로 갈라놓게 됩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는 바로 그 점진적인 변화를 담고 있는 표현입니다.

 

 

 

AC.346, 창4:3, ‘체어리티 없는 신앙에서도 행위와 예배는 나올 수 있습니다’(AC.346-349)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And at the end of days it came to pass that Cain brought of the fruit of the ground an offering to Jehovah. (창4:3) AC.346 ‘날들의 끝에’(end of days)는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And at the end of days it came to pass that Cain brought of the fruit of the ground an offering to Jehovah. (4:3)

 

AC.346

 

날들의 끝에’(end of days)는 시간이 흐른 뒤를 뜻하고, ‘땅의 소산’(fruit of the ground)은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를 뜻하며, ‘여호와께 제물로 드림’(an offering to Jehovah)은 거기에서 나온 예배를 뜻합니다. By theend of daysis meant in process of time; by thefruit of the ground,” the works of faith without charity; and byan offering to Jehovah,” worship thence derived.

 

 

해설

 

AC.346부터 창4:3의 속뜻으로 들어갑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라는 짧은 한 절 안에서 스베덴보리는 세 표현을 차례로 풉니다. ‘날들의 끝에’는 시간이 흐른 뒤를, ‘땅의 소산’은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를, 그리고 ‘여호와께 제물로 드림’은 그런 신앙에서 나온 예배를 나타냅니다.

 

먼저 ‘날들의 끝에’가 ‘시간이 흐른 ’를 뜻한다는 것은 단순히 며칠이나 몇 년이 지났다는 자연적인 시간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앞의 AC.338-345에서 가인의 상태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으로 인식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신앙과 체어리티 사이에 분리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날들의 끝에’라는 표현은 그러한 상태가 어느 정도 진행되어 그 성질이 실제 행위와 예배로 나타날 단계에 이르렀음을 보여 줍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가인의 분리는 어느 순간 갑자기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신앙을 사랑과 구별하여 바라보는 미세한 변화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분리가 하나의 확고한 원리가 되고, 마침내 그 원리에 맞는 행위와 예배까지 생겨납니다. 따라서 ‘날들의 끝에’는 단순한 시간 경과라기보다 한 영적 상태가 자라 그 결과를 나타내기 시작하는 과정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다음 ‘땅의 소산’은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를 뜻합니다. 여기서 다시 주의해야 할 것은 ‘땅의 소산’ 자체가 언제나 나쁜 것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바로 AC.343의 사30:23에서는 ‘땅의 소산의 양식’이 체어리티를 나타냈습니다. 따라서 상응의 의미는 언제나 그 표현이 놓인 문맥과 상태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여기서는 ‘가인’이 땅의 소산을 가져옵니다. 가인은 이미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나타내고, AC.345에서는 ‘농사하는 ’가 체어리티 없이 신앙만을 붙드는 사람을 나타낸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경작한 땅에서 나온 ‘소산’ 역시 그와 같은 신앙으로부터 나온 행위를 나타냅니다. 다시 말해 행위 자체가 외적으로는 선해 보일 수 있지만, 그 안에 체어리티의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구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행위가 있으니 체어리티도 있다’고 자동으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종교적인 일을 하고, 봉사하고, 헌금하며, 예배에 성실히 참석한다고 해도 그 행위의 내적 성질은 그 행위가 어떤 사랑과 목적에서 나오는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자기 의를 세우거나 사람들에게 인정받거나 자신의 신앙적 우월성을 확인하기 위한 행위와,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여 행하는 선은 외형이 비슷해도 내적으로는 서로 다릅니다.

 

그래서 AC.346의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라는 표현을 잘 붙들 필요가 있습니다. 가인에게도 ‘행위’가 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땅을 경작했고 소산을 얻었으며, 그 소산을 가지고 여호와께 제물까지 드렸습니다. 겉모습만 보면 상당히 종교적입니다. 문제는 그 행위를 낳은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344와 매우 긴밀하게 이어집니다. AC.344는 신앙의 기억 지식과 인식 지식과 교리가 사람을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만들고, 마침내 체어리티에 이르게 하지 못한다면 ‘ 아무것도 아닌 ’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AC.346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단지 지식과 교리만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도 나름의 ‘행위’를 낳고 심지어 ‘예배’까지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여호와께 제물로 드림’은 ‘거기에서 나온 예배’를 뜻합니다. 여기서 ‘거기에서’란 바로 앞의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에서 나온다는 뜻입니다. 즉 가인의 예배는 그의 내적 신앙 상태와 별개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어떤 사랑과 신앙 안에 있느냐에 따라 그에게서 나오는 예배의 성질도 달라집니다.

 

이것은 창4:3-5에서 왜 가인의 제물과 아벨의 제물에 대한 주님의 반응이 달랐는지를 이해하는 출발점이 됩니다. 겉으로만 보면 두 사람 모두 자기에게 있는 것을 여호와께 드렸습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을,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를 단순히 ‘식물 제사는 나쁘고 동물 제사는 좋다’는 식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핵심은 제물의 자연적인 종류가 아니라 그 제물을 낳은 내적 상태입니다.

 

가인의 제물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으로부터 나온 예배를 나타냅니다. 반면 뒤에서 보게 될 아벨의 제물은 체어리티에서 나온 예배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제물이라는 외적인 형식만이 아니라 그 안에서 주님께 올라오는 사랑과 선입니다. 동일한 기도, 동일한 찬송, 동일한 헌금, 동일한 봉사라도 그 안의 목적과 사랑에 따라 영적인 성질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여기서 AC.338부터 이어져 온 흐름이 매우 선명하게 연결됩니다. 처음에는 신앙을 사랑에서 떼어 ‘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으로 바라봅니다. 시간이 흐릅니다. 그 신앙에서 특정한 행위가 나옵니다. 그리고 그 행위에서 예배가 나옵니다. 즉 ‘내적인 분리행위예배’라는 흐름입니다. 처음의 아주 미세한 교리적 분리가 마침내 삶과 예배의 성질까지 결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AC.346은 예배에 대해서도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 예배는 어디에서 나오고 있는가?’도 물어야 합니다.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서 나오는가, 아니면 자기 의와 자기 확신과 자신의 신앙적 정당성을 확인하는 데서 나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목회와 교회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외적으로 매우 활발하고 정교한 종교생활을 하면서도 체어리티가 중심에서 사라질 수 있습니다. 예배와 성경공부와 봉사와 선교와 헌신이 풍성해 보이는데, 그 결과 사람들이 점점 더 자기 의에 강해지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며 서로 갈라진다면 그 행위와 예배가 어떤 사랑에서 나오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반대로 참된 예배는 사람이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자기 악을 버리며, 이웃의 선을 바라고 실제로 선을 행하는 삶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가인의 제물은 ‘예배하지 않는 사람’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예배하는데도 체어리티와 분리될 있다’는 훨씬 더 섬세하고 무거운 문제를 보여 줍니다.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도 교리는 남을 수 있고, 행위도 남을 수 있으며, 심지어 예배도 남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신앙을 신앙답게 하고 예배를 예배답게 하는 생명, 곧 체어리티가 빠질 수 있습니다.

 

결국 AC.346의 핵심은 ‘예배는 예배를 낳은 내적 사랑의 성질을 따른다’는 데 있습니다. 가인의 ‘땅의 소산’은 체어리티 없는 신앙에서 나온 행위를, 그것을 ‘여호와께 제물로 드림’은 그러한 상태에서 나온 예배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참된 예배를 이루는 것은 외적인 제물의 크기나 종교적 형식의 정교함이 아니라, 그 안에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가 살아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AC.345, 창4:2,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농사하는 자’ 가인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5 ‘농사하는 자’(tiller of the ground)가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을 나타낸다는 것, 곧 사랑에서 분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이스라엘의 여러 수도원을 찾아다니던 중 그리심산의 수도원을 방문했던 경험에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영상은 앞선 수도사 전승들과 조금 다릅니다. 다른 수도사의 특별한 삶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강문호 수도사 자신의 체험이 중심입니다. 그리심산에서 나사렛과 예루살렘 방향을 바라보며 ‘예수님은 길을 얼마나 많이 걸으셨을까?’ 생각했고, 그 생각이 결국 자신도 예수님의 길을 몸으로 한번 걸어 보고 싶다는 결심으로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걷기가 단순한 순례 체험을 넘어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이후 가난한 사람과 나그네를 바라보는 눈이 달라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영상 초반의 ‘사람이 계획을 세운다 할지라도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구나’라는 고백은 이 이야기 전체를 여는 좋은 문장입니다. 수도원으로 향하던 중 자동차가 고장 나 계획이 두 시간가량 어그러졌는데, 강문호 수도사는 그 작은 사건을 통해 ‘아무리 내가 서둘러도 하나님의 속도에 맞추어야 한다’고 깨닫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섭리는 단순히 내가 세운 일정이 잘 풀리게 해 주시는 주님의 도움을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알지 못하는 수많은 길을 통해 주님께서 사람을 선으로 이끄시는 신적 질서에 가깝습니다. 때로는 내가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는 것도 섭리 안에 있지만, 지연되고 막히고 예상과 달라지는 것 역시 섭리 안에서 쓰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 하나님께서 차를 고장 나게 하셨는가?’를 섣불리 단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통해 내가 무엇을 배우고 어떤 선으로 인도되는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그리심산 꼭대기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예수께서 걸으셨을 것으로 생각되는 길을 바라보다 자기 자신에게 시선을 돌립니다. 이 대목은 이번 영상에서 상당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는 아버지를 닮았다는 말은 평생 수없이 들었는데 ‘강문호 목사, 예수님 닮았구나’라는 말은 한 번도 듣지 못했다고 고백합니다. ‘나는 과연 예수님을 얼마나 닮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이것은 수도생활을 하든 하지 않든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본질적인 질문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에서 ‘예수님을 닮는다’는 말을 조금 더 깊이 들어가게 합니다. 주님을 닮는다는 것은 외적으로 주님이 걸으셨던 길을 걷거나, 주님처럼 가난하게 살거나, 주님께서 겪으셨던 육체적 고생을 비슷하게 경험하는 것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그런 외적 실천은 귀한 영적 계기가 될 수 있지만, 그 자체가 거듭남은 아닙니다. 주님을 닮는다는 것은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사람의 의지와 삶 속으로 들어와 그 사람의 사랑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어디를 걸으셨는가?’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가 ‘주님께서는 길을 걸으셨는가? 누구를 사랑하셨고, 누구를 섬기셨으며, 무엇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셨는가?’를 묻게 됩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그래서 서울의 아직은 섬기시던 갈보리교회에서 충주봉쇄수도원까지 거리를 재어 봅니다. 약 146킬로미터였습니다. 예수께서 걸으셨던 길을 생각하며 이 정도 거리를 자신도 한번 걸어 보겠다고 결심합니다. 더욱이 일부러 더운 7월을 택하고 돈도 없이 길을 나섭니다. 배낭에는 빈 양재기와 잠잘 때 필요한 최소한의 물품을 넣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 행동 자체를 일반적인 신앙의 모범으로 만들지 않는 것입니다. 누구나 돈 없이 146킬로미터를 걸어야 예수님을 닮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강문호 수도사가 자기 자신에게 적용한 하나의 수도적 훈련입니다. 외적인 수도 훈련의 가치는 그 외형의 강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속 사람이 어떻게 변화되느냐에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변화가 뜻밖에도 첫날부터 시작됩니다. 점심때가 되어 배가 고파졌지만 아무 집에나 들어가 ‘ 주십시오’라고 말하지 못합니다. 음식점들이 즐비해 있는데도 돈이 없으니 들어갈 수 없습니다. 빈 양재기를 가지고 나왔지만 막상 그것을 내밀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자신 안의 무언가가 깨지기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평생 목회자로서 사람들에게 대접받는, 그것도 보통 극진히 대접받던 자리에 익숙해져 있었는데, 이제 자신이 누군가에게 한 끼를 부탁해야 하는, 그러니까 구걸해야 하는 처지가 되자 그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처음 몸으로 알게 된 것입니다.

 

이 대목은 이번 영상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가장 주목할 만한 장면 가운데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외적인 가난이 잠시나마 내적인 proprium을 건드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나는 겸손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제로는 자신의 지위와 역할, 평판과 대우 속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벗겨지는 상황에 놓이면 미처 알지 못했던 자기 모습이 드러납니다. ‘ 끼를 달라는 말을 하겠더라’는 고백은 사소해 보이지만 오히려 매우 정직합니다. 평생 베푸는 위치에 있던 사람이 받는 위치에 서 보는 순간입니다. 베푸는 사람에게는 아직 자존심을 유지할 여지가 있지만, 도움을 청해야 하는 사람은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길가에서 절 하나를 발견합니다. 그 앞에는 ‘식사 제공합니다’라는 현수막이 붙어 있었습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목사가 배고프다고 절에 들어가 밥을 먹을 수 있겠느냐는 생각으로 그냥 지나갑니다. 그런데 그 뒤로 교회들도 몇 곳 지나쳤지만 ‘식사 제공합니다’라는 현수막을 내건 교회는 하나도 없었다고 회고합니다. 이 장면은 굳이 불교와 기독교를 비교하여 어느 쪽이 낫다고 판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체어리티라는 관점에서 우리 자신에게 질문을 돌리는 편이 훨씬 유익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배고픈 사람이 실제로 들어와 밥을 먹을 있는 신앙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체어리티는 단순한 호의나 감정이 아닙니다. 선은 반드시 쓰임으로 내려와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진리를 알고 있는 것과 실제로 배고픈 사람에게 밥 한 그릇을 내어주는 것은 다릅니다. 전자는 이해 속에 있는 진리이고, 후자는 삶이 된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절 앞의 ‘식사 제공합니다’라는 작은 문구가 강문호 수도사에게 남긴 인상은 충분히 의미가 있습니다. 신앙은 결국 사람에게 어떤 선을 행하고 있는가를 통해 그 생명력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저녁이 되고 어두워지면서 문제는 더욱 현실적으로 변합니다. 이제 배고픔뿐 아니라 ‘오늘 어디에서 자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다가 멀리 교회 십자가가 보이고, 그곳에서 아는 후배 목사를 만나 숙식의 도움을 받습니다. 하루 종일 굶은 뒤 먹은 그 밥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여기에도 중요한 변화가 있습니다. 평소라면 평범했을 한 끼가 그날은 잊을 수 없는 은혜가 되었습니다. 대상은 똑같은 밥인데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상태가 달라진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영적 삶을 이해할 때 ‘상태(state)를 매우 중요하게 다룹니다. 같은 말씀을 읽어도 사람의 상태에 따라 전혀 다르게 받아들여지고, 같은 선물을 받아도 자기 충족 속에 있을 때와 궁핍 속에 있을 때 그 의미가 다릅니다. 배고픔을 경험하기 전에는 ‘밥을 대접한다’는 것이 하나의 친절이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하루 종일 굶고 나면 밥 한 그릇이 사람을 살리는 체어리티라는 것을 몸으로 알게 됩니다. 지식이 경험을 통과하면서 삶의 인식으로 내려온 것입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하루 약 14시간씩 사흘을 걸어 충주봉쇄수도원에 도착했다고 회고합니다. 그리고 잔디밭에 엎드려 한없이 울었다고 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 눈물이 ‘내가 해냈다’는 성취의 눈물이 아니었다는 그의 설명입니다. 한번 걸었을 뿐인데 이렇게 힘든데 예수께서는 얼마나 많이 걸으셨겠느냐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영상은 외적인 순례에서 내적인 성찰로 들어갑니다.

 

바로 이 지점은 매우 소중하면서도 동시에 조심해서 붙들어야 할 지점입니다. 수도적 훈련에는 언제나 두 방향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내가 이만큼 걸었다, 내가 이만큼 금식했다, 내가 이만큼 버텼다’는 자기 공로로 향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그 경험을 통하여 ‘나는 얼마나 약한 존재인가, 주님께서는 얼마나 낮아지셨는가’를 깨닫는 길입니다. 똑같이 146킬로미터를 걸어도, 아니 정확히는 그보다는 많이 적은, 왜냐 하면, 서울 갈보리교회에서 인도로 걸을 수 있는 데가 근처에는 없어 할 수 없이 차로 이동, 좀 서울 외곽에서 출발해야 해서... 전자는 proprium을 키우고 후자는 proprium을 낮춥니다. 외적인 행위가 영적 가치를 자동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를 통해 어떤 사랑이 형성되느냐가 결정적입니다.

 

이 점에서 강문호 수도사가 ‘내가 승리했다고 하는 기쁨의 눈물은 아니었다’고 굳이 말한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아도 수도의 가장 중요한 기준은 ‘얼마나 대단한 일을 했는가?’가 아니라 ‘ 일을 통해 자기 자신에게서 얼마나 멀어지고 주님과 이웃에게 얼마나 가까워졌는가?’입니다. 수행의 양보다 애정의 방향이 중요합니다.

 

그 후 강문호 수도사는 프랑스 생장피에드포르에서 스페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약 800킬로미터의 순례길도 걸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번 영상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몇 킬로미터를 걸었느냐가 아닙니다. 그가 그 경험의 결과로 무엇이 달라졌다고 말하느냐입니다. 그는 ‘자아가 깨집니다. 인생은 나그네라는 것이 절실하게 느껴집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다음 말이 오히려 이번 영상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뒤부터는 누가 찾아오면 밥을 주고 싶고, 잘 곳이 없는 사람에게 잠자리를 마련해 주고 싶고, 돈이 없는 사람을 보면 여관비라도 주고 싶어졌다는 것입니다. 집에 빈방이 있으면 집 없는 사람을 생각하고, 입지 않는 옷이 있으면 헐벗은 사람을 생각하고, 지갑에 돈이 있으면 돈 없는 사람을 생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순례’가 ‘체어리티’로 바뀝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이것이야말로 이 영상에서 가장 귀한 대목입니다. 146킬로미터를 걸었다는 사실보다 ‘배고픈 사람을 보게 되었다’는 변화가 더 중요합니다. 800킬로미터를 걸었다는 사실보다 ‘빈방을 보면 없는 사람을 생각하게 되었다’는 변화가 더 중요합니다. 외적 수도가 내적 체어리티로 열매 맺은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적 삶을 세상을 떠나는 삶으로 보지 않습니다. 자기 직업과 가정과 사회적 책임을 버리는 것이 그 자체로 더 거룩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 가운데서 맡겨진 쓰임을 성실하게 행하면서 악을 죄로 알고 피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삶이 천국을 준비하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순례길에서 받은 감동이 참으로 영적인 것이었는지를 판단하는 가장 좋은 기준은 ‘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가?’입니다. 이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가 들려주는 후반부의 변화는 바로 그 기준에 상당히 잘 부합합니다.

 

특히 ‘빈방이 있으면 없는 사람을 생각하고, 입지 않는 옷이 있으면 헐벗은 사람을 생각하고, 지갑에 돈이 있으면 없는 사람을 생각하게 되었다’는 고백은 단순하지만 깊습니다. 사람의 시선이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에서 ‘내가 가진 것이 누구에게 쓰일 있는가?’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소유를 버리는 것보다 더 깊은 변화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재산 그 자체는 악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재산을 사랑하는 질서입니다. 내가 가진 것을 자기만족과 지배를 위해 사용하는가, 아니면 주님께서 맡기신 쓰임을 위해 사용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영상 마지막에 강문호 수도사는 이스라엘의 어떤 가정에서는 밥을 조금 넉넉하게 지어 놓고 식사 전에 자녀에게 문밖에 나가 지나가는 가난한 사람이 있는지 살펴보게 하며, 있다면 불러 함께 먹는다는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사실관계의 일반화 여부는 별도로 확인할 필요가 있겠지만, 이 일화가 전달하려는 영적 뜻은 아름답습니다. ‘ 식탁에 아직 자리가 남아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체어리티는 거창한 사업에서만 시작되지 않습니다. 내 밥상 한 자리, 내 방 한 칸, 내 옷 한 벌, 내 지갑의 얼마가 다른 사람을 위한 쓰임이 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면, ‘예수님을 닮는다’는 영상 초반의 질문과 후반부가 하나로 연결됩니다. 처음에는 강문호 수도사가 ‘나는 예수님 닮았다는 말을 번도 듣지 못했다’며 예수께서 걸으셨던 거리를 실제로 걸어 보려 합니다. 그러나 영상이 끝날 무렵에는 예수님을 닮는 것이 ‘예수님이 걸으신 거리를 걷는 ’에서 ‘예수님이 바라보셨던 사람들을 바라보는 ’으로 이동합니다. 저는 이것이 이번 영상의 가장 아름다운 흐름이라고 봅니다.

 

주님의 발자국을 그대로 따라 걷는 것은 누구에게나 가능하지 않습니다. 나사렛에서 예루살렘까지 갈 수도 없고,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을 수도 없는 사람이 훨씬 많습니다. 그러나 배고픈 사람을 바라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외로운 사람에게 다가가고, 내게 있는 것을 필요한 사람과 나누고, 자신의 자리에서 정직하게 쓰임을 감당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예수님을 따라 걷는다’는 말의 가장 깊은 뜻은 예수님의 이동 경로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이 향했던 방향으로 우리의 사랑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앞서 살펴본 크리스토포로스 이야기와도 묘하게 맞닿아 있습니다. 크리스토포로스는 그리스도를 찾다가 강을 건너지 못하는 사람들을 등에 업어 주는 쓰임 속에서 마침내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예수님의 길을 몸으로 따라가려다가 자신이 배고파 보고, 잘 곳이 없어 보고, 도움받아 보고 나서 비로소 배고픈 사람과 나그네를 새롭게 보기 시작합니다. 두 이야기 모두 결국 ‘주님을 찾는 길이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로 열린다’는 곳에서 만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더 묻게 합니다. 이런 체험은 한 번의 감동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이후의 삶에서 계속 검증되어야 합니다. 순례 중에 눈물을 흘리는 것은 소중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보고 마음 아파하는 것도 소중합니다. 그러나 거듭남은 순간의 감동보다 반복되는 선택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내 proprium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자기 명예와 편안함과 이익을 앞세우려 할 때마다 그것을 내려놓고 주님의 선을 선택하는 일이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참된 수도는 어떤 특별한 장소나 특별한 며칠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매 순간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이번 영상은 그래서 외적인 수도 훈련의 한계를 보여 주기보다는, 오히려 외적인 수도 훈련이 제대로 쓰였을 때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이야기로 읽고 싶습니다. ‘걷기’가 목적이 아니라 ‘눈이 열리는 ’이 목적입니다. ‘고생’이 목적이 아니라 ‘이웃의 고생을 알아보게 되는 ’이 목적입니다. ‘나는 이만큼 했다’가 목적이 아니라 ‘주님께서 내게 주신 것으로 이제 누구를 섬길 것인가?’가 목적입니다. 외적인 훈련이 여기까지 사람을 데려간다면 그 훈련은 귀한 쓰임을 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번 영상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그분이 걸으셨던 거리를 재현하는 데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길에서 주님께서 바라보셨던 가난한 자와 나그네를 나도 바라보고 사랑하며, 내게 맡겨진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체어리티의 삶으로 이어질 비로소 속뜻을 얻습니다.’

 

그래서 저는 영상 초반의 ‘강문호 목사, 예수님 닮았구나 하는 말을 번도 듣지 못했다’는 고백에 대한 답이 어쩌면 영상 후반부에 이미 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닮았다는 것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해 주는 데 있지 않습니다. 굳이 누군가에게 ‘예수님을 닮았다’는 말을 들을 필요도 없습니다. 배고픈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치던 눈이 그를 돌아보는 눈으로 바뀌고, 내 빈방이 나만의 여분 공간이 아니라 누군가 쉴 수 있는 방으로 보이며, 내 지갑 속 돈이 내 것만이 아니라 누군가를 살리는 쓰임으로 보이기 시작한다면, 바로 그런 변화 속에서 주님의 형상이 조금씩 사람 안에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SY.76, 강문호 수도사, ‘크리스토포로스, 그리스도를 업고 강을 건넌 수도사’ (20191229)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여덟 번째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성 크리스토포로스에 관한 오래된 기독교 전승을 소개합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일반적으로 성 크리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 영상은 상당히 거친 어조로 오늘날 신학생들의 공부 태도를 비판합니다. ‘기도를 많이 한다고 성서학자들의 수십 연구를 뛰어넘을 없다’, ‘전공자가 비전공자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한심하다’, ‘개론서도 소화하지 못하면서 특정 주제만 파고드는 것은 잘못된 독서다’, ‘영어도 하지 않으면서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겉핥기로 다루어서는 된다’는 것입니다. 표현만 떼어 놓고 보면 다소 모욕적으로 들리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거친 표현을 잠시 걷어내고 중심 문제의식만 보면 귀담아들을 내용이 적지 않습니다. 신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단순히 종교적인 열정을 표현하는 일이 아니며, 오랜 시간 축적된 지식과 연구 방법을 배우고, 자신의 생각을 검증받으며, 무엇보다 자기가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 가는 훈련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도 영상의 문제의식과 상당 부분 만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지식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의 생애 자체가 놀라울 정도로 광범위한 학문적 탐구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는 광산학, 금속학, 수학, 천문학, 해부학, 생리학, 철학 등 여러 분야를 깊이 연구했고, 훗날 신학 저술을 시작한 뒤에도 성경 원문과 당시 이용할 수 있었던 여러 학문적 자료를 폭넓게 사용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가르쳐 주실 것이므로 공부할 필요가 없다’거나 ‘기도만 많이 하면 학문적 훈련 없이도 성경을 제대로 이해할 있다’는 식의 태도를 스베덴보리에게서 정당화하기는 어렵습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이성과 지성 역시 주님께서 사용하시는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영상이 ‘기초’를 강조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개론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고 곧바로 어려운 주제나 독창적인 해석으로 뛰어드는 것은 신학에서만 문제가 되는 일이 아닙니다. 어떤 분야든 기초 개념과 기존 연구를 알지 못하면 자기가 발견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미 오래전에 논의된 내용인지, 혹은 오래전에 반박된 주장인지조차 알기 어렵습니다. 이런 점에서 ‘1층도 없는 건물의 2층을 짓는다’는 영상의 비유는 꽤 적절합니다. 신학 역시 역사, 언어, 문헌, 교리, 철학적 배경을 차근차근 익히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여기서 매우 중요한 질문 하나가 생깁니다. ‘학문적으로 많이 아는 ’과 ‘말씀을 참으로 이해하는 ’은 과연 같은 것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여기서부터 영상의 주장과 스베덴보리 사이에 상당히 중요한 긴장이 나타납니다. 영상에서는 성서학자와 신학자의 오랜 연구가 일종의 지적 권위로 제시됩니다. 물론 전문 연구자의 축적된 지식을 존중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은 단순히 인간의 역사와 언어와 문헌을 연구하여 그 의미를 완전히 밝혀낼 수 있는 책이 아닙니다. 말씀에는 문자적 의미가 있고, 그 문자 안에는 영적 의미가 있으며, 더 깊은 차원에는 천적 의미가 있습니다. 이 내적 의미는 천국과 연결되어 있으며 궁극적으로 주님을 향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완벽하게 알고, 고대 근동의 역사와 문화를 깊이 연구하고, 교회사와 신학사의 방대한 문헌을 독파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말씀의 내적 의미에 도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런 공부가 필요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바로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학문을 무시하는 신앙주의’도 위험하지만 ‘학문이 말씀의 모든 것을 해명할 있다고 생각하는 지성주의’ 역시 위험합니다. 전자는 이성을 버리고, 후자는 계시의 깊이를 인간 이성의 범위 안에 가두기 쉽습니다.

 

영상에서 가장 조심스럽게 살펴볼 대목은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한들 성서학자들의 수십 년의 연구물을 뛰어넘는 성경 이해를 갖출 없습니다’라는 주장입니다. 이 말을 ‘기도가 학문 연구를 대신할 없다’는 뜻으로 이해한다면 충분히 타당합니다. 성경의 역사적 배경이나 원문의 문법을 알고 싶으면서 기도만 하고 사전과 주석과 연구서를 펼치지 않는다면 그것은 경건이라기보다 게으름에 가까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성경을 참으로 이해하는 깊이는 전문 연구자의 학문적 수준을 넘어설 없다’는 뜻으로 확대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말씀의 참된 이해에는 지식 이상의 것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진리를 아는 것과 진리를 행하는 것을 분리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진리를 단순히 기억 속에 저장한다고 해서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의지로 받아들이고 삶으로 행할 때 비로소 그것은 사람 안에서 살아 있는 진리가 됩니다. 그래서 지성적으로 대단히 뛰어난 사람이 말씀에 관한 수많은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정작 말씀의 영적 본질에는 멀리 있을 수 있고, 반대로 학문적 지식은 많지 않은 사람이 자신이 아는 작은 진리를 성실하게 살아냄으로써 그 진리의 본질에 더 가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는 신학의 학문적 서열만으로 측정하기 어려운 차원이 있습니다.

 

이 점은 영상의 두 번째 주장, 곧 ‘전공자가 비전공자의 이야기에 그렇게 귀를 기울이느냐’는 주장과도 연결됩니다. 전문성의 가치를 강조하려는 의도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의학이나 법학에서도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판단을 동일하게 취급할 수 없듯이 신학 역시 전문적 훈련을 존중해야 합니다. 인터넷이나 유튜브에서 우연히 들은 주장 하나를 수십 년 연구한 학자의 견해보다 무조건 높게 평가한다면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특히 자신감 있게 말하는 것과 정확하게 아는 것을 혼동하기 쉬우므로 전문성에 대한 존중은 더욱 필요합니다.

 

그러나 ‘전공자가 비전공자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한심하다’는 데까지 나아가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진리는 학위에 의해 진리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떤 주장이 참인지 아닌지는 말한 사람의 학위가 아니라 그 내용과 근거를 통해 검토해야 합니다. 더구나 기독교 신앙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께서 언제나 기존 종교 엘리트의 제도적 권위를 통해서만 말씀하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께서 부르신 제자들 가운데 당시의 전문적인 랍비 교육을 받은 종교 엘리트가 중심을 이루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전문성을 존중하는 것과 전문성을 진리의 최종 보증으로 삼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 자신은 매우 흥미로운 사례가 됩니다. 그는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의미의 신학교 출신 전문 신학자가 아니었습니다. 오랫동안 자연과학과 철학을 연구한 학자였으며, 그의 인생 후반부에 전혀 다른 차원의 소명을 받아 성경과 신학에 관한 방대한 저술을 남겼습니다. 만일 ‘신학 전공자가 비전공자의 신학적 이야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한심하다’는 원칙을 엄격하게 적용한다면 스베덴보리의 신학 저술은 애초에 읽어 볼 가치조차 없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질문은 ‘그가 어느 신학교를 졸업했는가?’가 아니라 ‘그가 무엇을 말했으며, 그것이 말씀과 얼마나 일관되게 연결되고, 인간의 거듭남과 주님을 사랑하는 삶을 어떻게 밝히는가?’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권위를 무조건 받아들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했다’는 이유만으로 생각을 멈춘다면 그것 역시 이 영상이 비판하는 맹목성과 다른 형태일 뿐입니다. 그의 주장도 읽고, 비교하고, 문맥을 살피고, 말씀과 연결하여 숙고해야 합니다. 다만 처음부터 ‘비전공자’라는 이유로 들을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다면 우리는 진리를 판단하는 기준을 내용에서 신분으로 옮겨 버리게 됩니다.

 

영상에서 영어 공부를 강조하는 부분은 상당히 현실적인 조언입니다. 번역은 언제나 선택과 해석을 동반하기 때문에 원문이나 원서를 직접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신학 연구에서 분명 큰 장점입니다. 영어권에서 생산되는 방대한 신학 연구에 직접 접근할 수 있다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 연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번역본은 매우 유용하지만 영어 번역본을 서로 비교하고, 필요하면 라틴어 원문까지 확인할 수 있다면 한 단어와 문장의 의미를 훨씬 세밀하게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언어 공부를 경시할 이유는 없습니다.

 

다만 여기에서도 언어는 ‘도구’이지 ‘진리 자체’는 아니라는 구별이 필요합니다. 히브리어를 잘한다고 구약의 영적 의미가 자동으로 열리는 것도 아니고, 헬라어를 잘한다고 복음서의 내적 의미가 자동으로 드러나는 것도 아닙니다. 원어는 문자적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도구이지만,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의 더 깊은 층위는 ‘상응’을 통해 열립니다. 자연적 표현과 영적 실재 사이의 상응을 알지 못하면 문자 안에 담긴 영적 질서를 온전히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어 연구와 상응에 대한 이해 역시 서로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차원의 작업으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영상 후반부에는 오리게네스, 아우구스티누스, 안셀무스, 아퀴나스, 루터, 칼뱅, 슐라이어마허, 리츨, 슈바이처, 불트만, 한스 큉 등 기독교 신학사의 거대한 이름들이 등장합니다. 이 전통을 공부하는 것은 분명 중요합니다. 2천 년 동안 수많은 사람이 하나님과 그리스도, 성경과 구원, 교회와 인간에 대해 씨름하면서 남긴 사유의 유산을 무시하는 것은 지혜롭지 않습니다. 우리가 오늘 처음 신학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미 앞서 걸어간 수많은 사람이 있고, 그들의 성공과 실패 모두가 후대에게 귀중한 자료가 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에서도 하나의 구별을 덧붙여야 합니다. ‘위대한 신학사’와 ‘계시의 진리’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신학사는 인간이 계시를 이해해 온 역사이며, 따라서 위대한 통찰과 함께 시대적 한계와 오류도 포함합니다. 어느 시대의 거대한 신학자라 해도 그 사람의 모든 말이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루터와 칼뱅도, 아퀴나스와 아우구스티누스도 역사 속 인간입니다. 그들을 공부하되 그들의 권위 아래 말씀을 놓아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들의 사상을 말씀 앞에서 살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특히 신앙과 체어리티가 분리되는 것을 매우 심각하게 봅니다. 이것은 오늘 영상의 주제를 바라보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신학을 아무리 많이 공부해도 그것이 사람을 선한 삶으로 이끌지 않는다면 그 지식은 아직 사람의 기억과 지성의 영역에 머물러 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뜨거운 신앙을 말하면서 진리를 배우려 하지 않고 자기 확신과 감정만 좇는다면 그것 역시 온전한 신앙이 아닙니다. 참된 신앙은 진리를 필요로 하고, 그 진리는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 움직여야 합니다. 따라서 ‘공부냐 신앙이냐’라는 양자택일 자체가 잘못된 질문일 수 있습니다.

 

영상이 비판하는 ‘성령의 조명’이라는 표현도 같은 방식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깨닫게 주셨다’는 말이 공부하지 않는 자신의 태도를 정당화하거나 다른 사람의 검증을 거부하는 수단으로 사용된다면 매우 위험합니다. 자기 생각을 곧바로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확신하기 시작하면 사람은 교정받기 어려워집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을 빌려 생각하면 인간의 proprium은 종교적 언어를 사용할 때조차 자기 자신을 높일 수 있습니다. ‘나는 성령께 직접 배웠다’는 확신이 오히려 자기 지성에 대한 가장 강력한 신뢰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성령의 조명’이나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을 단순한 종교 수사 정도로 취급해서도 곤란합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하나님은 연구 대상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연구하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다르고, 그리스도에 관한 명제를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과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도 다릅니다. 신학은 하나님에 관한 학문이지만 기독교 신앙은 결국 사람이 주님을 향하여 삶의 방향을 바꾸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학문적 신학이 이 차원을 잃으면 하나님을 연구하면서 정작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역설도 가능해집니다.

 

그래서 이 영상의 마지막 말, ‘신학은 단순한 종교 수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치열한 학문입니다’라는 선언에는 충분히 동의할 수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에 한 문장을 더 붙이고 싶습니다. ‘그러나 신학은 치열한 학문인 것으로 끝나서도 됩니다.’ 신학의 목적이 신학자를 만드는 데만 있다면 그것은 아직 절반입니다. 진리를 배우는 목적은 결국 그 진리가 사람의 삶이 되게 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오늘날 신학교의 위기는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도 아니고 ‘기도를 너무 많이 해서’도 아닐 것입니다. 공부와 신앙, 지성과 삶, 진리와 체어리티가 서로 분리되어 버린 것이 더 근본적인 문제일 수 있습니다. 학문 없는 열심은 쉽게 맹목으로 흐르고, 삶 없는 학문은 쉽게 지적 자부심으로 흐릅니다. 한쪽에서는 ‘성령께서 알려 주셨다’며 배움을 거부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나는 전공자다’라며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겉으로는 정반대처럼 보이지만 두 태도의 깊은 곳에는 뜻밖에도 같은 위험, 곧 ‘내가 안다’는 자기 확신이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지혜로운 사람은 많이 아는 사람이기 이전에 자신이 아는 진리를 선을 위해 사용하는 사람입니다. 지식은 필요합니다. 공부도 필요합니다. 원어와 영어도 필요하고, 신학사와 성서학도 공부할 가치가 있습니다. 좋은 개론서를 정독하고 위대한 학자들의 연구를 읽으라는 이 영상의 권면도 충분히 귀담아들을 만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지식은 목적지가 아니라 길입니다. 그 길의 끝에는 ‘내가 얼마나 많이 아는가?’가 아니라 ‘내가 아는 진리가 나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이 영상은 신학생들에게 꽤 필요한 경고를 던집니다. 다만 그 경고를 한 단계 더 깊게 가져갈 필요가 있습니다. ‘기도만 하지 말고 공부하라’에서 멈추지 않고, ‘공부하되 공부를 우상으로 만들지 말라’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비전공자의 말을 무비판적으로 좇지 말라’에서 멈추지 않고, ‘전공자의 권위도 진리 자체로 여기지 말라’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성령의 조명이라는 말로 무지를 합리화하지 말라’에서 멈추지 않고, ‘인간의 학문으로 성령의 역사를 대신할 수도 없음을 기억하라’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결국 삶이 남습니다. 수천 권의 신학서를 읽고 히브리어와 헬라어와 라틴어를 자유롭게 읽으며 신학사 전체를 꿰뚫는다 해도, 그 지식이 이웃을 사랑하고 악을 멀리하며 주님을 향하는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천국의 관점에서 그 지식은 아직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 것입니다. 반대로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배우기를 즐기며, 배운 진리를 조금씩 삶에 옮기고, 더 밝은 진리 앞에서 자기 생각을 기꺼이 내려놓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는 이미 참된 의미에서 ‘신학하는 사람’의 길을 걷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학은 분명 치열한 학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해 한마디를 더 보탠다면 이렇습니다. ‘참된 신학은 마침내 삶이 되어야 합니다.’

Posted by bygracetistory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 영상의 핵심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AI를 사용하지 말자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강사는 ChatGPT, Gemini, Claude 같은 AI가 성경의 역사적 배경을 정리하고, 원어를 살피고, 여러 주석과 학자들의 견해를 요약하고, 예화를 찾고, 설교 구조와 문장을 다듬는 데 매우 유용하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정합니다. 문제는 ‘AI 사용하느냐, 사용하지 않느냐’가 아니라 ‘언제 AI 여느냐’입니다. 설교자가 본문 앞에 홀로 서기도 전에 AI부터 열어 버릴 때, 아주 편리한 도구가 오히려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무엇인가를 빼앗아 갈 수 있다는 것이 이 영상의 주장입니다.

 

이 지적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아도 상당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은 단순히 종교적 정보를 담고 있는 책이 아닙니다. 말씀은 그 문자적 의미 안에 영적·천적 의미를 품고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주님과 천국을 연결하는 신적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 구절이 무슨 뜻인가?’를 알아내는 지적 작업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말씀을 통하여 주님께서 사람의 속 사람을 만지시고, 사람이 자신의 삶을 비추어 보며, 악과 거짓을 발견하고,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과정까지 포함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설교 준비 역시 단순한 ‘정보 수집해석구성전달’의 과정일 수 없습니다.

 

영상에서 인용하는 마이클 퀵의 경고가 바로 이 지점을 건드립니다. 설교자가 성경 본문 자체와 충분히 씨름하지 않은 채 곧바로 주석으로 달려가면, 본문을 직접 만나는 대신 ‘다른 사람이 본문’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AI는 이 위험을 훨씬 크게 만들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적어도 책장에서 주석을 꺼내 펼치고 여러 페이지를 읽어야 했습니다. 이제는 본문 한 구절을 입력하고 ‘ 본문의 역사적 배경과 신학적 의미와 설교 포인트 가지를 알려 ’라고 하면 몇 초 안에 그럴듯한 답이 나옵니다. 문제는 그 답이 틀렸느냐 맞았느냐만이 아닙니다. 답이 너무 빨리 나온다는 것 자체가 때로는 위험합니다. 아직 설교자 안에서 질문조차 충분히 태어나지 않았는데 답부터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영적 삶에서도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사람은 말씀 앞에서 때로 ‘모르는 상태’에 오래 머물 필요가 있습니다. 왜 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 왜 이 대목이 마음에 걸리는지, 왜 어떤 구절 앞에서는 불편해지는지, 지금 이 말씀이 자신의 어떤 삶을 비추고 있는지를 조용히 살펴야 합니다. 바로 그 시간에 말씀은 단순한 연구 대상에서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됩니다. 그런데 AI에게 너무 빨리 물으면 ‘본문이 나에게 무엇을 말하는가?’라는 질문보다 ‘ 본문에 대해 무엇을 말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옮겨가기 쉽습니다. 둘은 비슷해 보이지만 설교에서는 상당히 큰 차이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여기서 한 가지를 더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상은 ‘설교자의 인격적인 만남과 묵상’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옳지만, 묵상 자체가 설교에 생명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생명은 언제나 주님에게서 옵니다. 사람의 뜨거운 감정이나 눈물, 감동 자체가 신적 생명은 아닙니다. 설교자가 본문 앞에서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해서 그 해석이 반드시 참인 것도 아닙니다. 자신의 종교적 감정이나 확신을 주님의 음성으로 오인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AI보다 인간의 묵상이 우월하다’가 아니라, 말씀 앞에서 자기 자신을 낮추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를 받아들이려는 질서입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가 끊임없이 구별하는 ‘자기에게서 나오는 ’과 ‘주님에게서 오는 ’의 차이가 중요합니다. 사람은 자기 지성과 능력으로 진리를 소유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설교자에게는 이 유혹이 더욱 미묘하게 찾아옵니다. 많은 책을 읽고 원어를 알고 신학적 지식을 갖추었을 때뿐 아니라, 심지어 깊은 묵상과 영적 체험을 했을 때에도 ‘내가 깨달았다’는 자기 소유의 감각이 생길 수 있습니다. AI 역시 여기에 새로운 형태의 유혹을 보탭니다. 방대한 자료를 몇 초 만에 정리하고 멋진 문장과 구조까지 얻으면, 자신이 말씀을 충분히 이해했다고 느끼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영상에서 가장 중요한 표현은 사실 ‘순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말씀, 그다음 도구입니다. 먼저 주님 앞에서의 읽기와 묵상, 그다음 주석과 AI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조금 더 세밀하게 말하면 ‘말씀기도와 묵상자기 삶에 대한 성찰연구와 검증설교 구성’이라는 질서가 자연스럽습니다. AI는 이 가운데 ‘연구와 검증’과 ‘설교 구성’에서 매우 강력한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심지어 처음 묵상하면서 발견한 생각이 본문의 문맥과 맞는지 검증하고, 자신이 놓친 역사적·언어적 배경을 확인하고, 반대되는 해석을 찾아보는 데에도 유용합니다. 그러나 ‘말씀 앞에서 내가 먼저 주님께 무엇을 들어야 하는가?’라는 자리 자체를 AI에게 넘겨주면 안 됩니다.

 

여기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역설이 있습니다. AI를 늦게 사용할수록 오히려 AI를 더 잘 사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충분히 읽은 설교자는 AI가 제시하는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건 본문의 흐름과 조금 다른데?’, ‘ 해석은 특정 신학 전통에 치우친 아닌가?’, ‘ 원어 설명은 확인이 필요하겠는데?’라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본문을 충분히 읽지 않은 상태에서 AI를 먼저 만나면 AI가 만들어 준 해석의 틀 안에서 이후의 본문 읽기가 이루어질 가능성이 큽니다. 처음 받은 답이 일종의 안경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AI 이전의 묵상은 영적 의미뿐 아니라 AI를 비판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해 주는 실질적인 안전장치이기도 합니다.

 

다만 영상에서 ‘AI 감동받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회개하거나 소망을 붙들지 않는다’고 말하는 부분은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 사실입니다. AI에는 인간과 같은 영적 인격과 의지, 사랑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AI를 통해 얻은 문장이나 자료가 영적으로 아무 역할도 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책 한 권, 주석 한 문장, 다른 사람의 설교 한 대목이 우리를 깨우는 계기가 될 수 있는 것처럼 AI가 정리해 준 자료 역시 주님의 섭리 가운데 사람이 진리를 발견하는 외적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도구 자체에 생명이 있느냐가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 안에서 그 진리가 의지와 삶으로 연결되느냐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 이것은 ‘아는 ’과 ‘사는 ’의 차이로 더욱 분명해집니다. 진리는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는 동안 아직 그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의지와 결합하고 삶으로 나타날 때 비로소 사람 안에서 살아 있는 진리가 됩니다. 그렇다면 AI 시대 설교의 진짜 위험도 ‘AI 설교문을 준다’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AI가 만들어 준 진리를 설교자가 자신의 기억과 지성에만 담아 둔 채, 그것이 자신의 의지와 삶을 통과하지 않은 상태로 회중에게 전달하는 데 있습니다. 설교문은 훌륭한데 설교자를 통과하지 않은 말씀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상에서 인용한 ‘먼저 설교자의 가슴을 뜨겁게 하지 않은 말씀은 회중의 가슴도 뜨겁게 없다’는 말도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뜨거움’의 의미를 조금 더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한 정서적 흥분이 아니라 진리를 사랑하고 그것대로 살고자 하는 의지의 뜨거움이어야 합니다. 말씀을 읽다가 눈물을 흘리지 않아도 됩니다. 특별한 감동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 말씀 앞에서 내가 버려야 것은 무엇인가?’, ‘내가 순종해야 것은 무엇인가?’, ‘오늘 진리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다면 이미 말씀은 머리에서 의지와 삶으로 내려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AI 시대에는 오히려 설교자의 ‘고독’이 더 중요해질지도 모릅니다. 과거에는 정보가 부족해서 연구하는 데 시간이 걸렸지만, 이제는 정보가 너무 빨리 공급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멈추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성경을 펴고 아무 검색도 하지 않은 채 본문을 여러 번 읽는 시간, 쉽게 이해되지 않는 문장 앞에서 그대로 머무는 시간, 설교거리를 찾기 전에 먼저 자신의 삶을 비추어 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기술을 거부하는 태도가 아니라 기술을 제자리에 놓는 영적 질서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이 영상의 마지막 권면이 힘을 얻습니다. ‘AI 열기 전에, 주석을 펴기 전에, 먼저 성경을 펴라.’ 이것은 단순한 설교 작성 요령이 아닙니다. 무엇이 주인이고 무엇이 도구인지를 분명히 하라는 말입니다. 성경이 AI를 해석해야지 AI가 성경을 지배하게 해서는 안 되고, 설교자가 AI의 답을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인 뒤 그것을 회중과 나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결국 문제는 AI가 아닙니다. AI는 설교자를 훌륭하게 도울 수도 있고, 설교자를 놀라울 정도로 게으르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같은 AI를 사용하더라도 한 사람은 그것을 통해 더 깊이 연구하고 자신의 선입견을 검증하며 설교를 정교하게 만들 수 있고, 다른 사람은 본문을 읽고 씨름해야 할 시간을 생략한 채 완성된 답을 받아 갈 수도 있습니다. 차이는 기술의 성능보다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영적 질서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 영상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AI 설교자의 지성을 도울 있지만,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 앞에서 자신을 살피며 그것을 삶으로 받아들이는 일까지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AI 시대의 좋은 설교자는 AI를 사용하지 않는 설교자가 아니라, ‘무엇을 AI에게 맡기고 무엇만큼은 결코 맡겨서는 되는지 아는 설교자’일 것입니다. AI에게 자료 조사와 비교와 정리와 편집을 맡길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 앞에 홀로 서서 주님을 바라보고,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받은 진리를 삶으로 받아들이는 그 자리만큼은 설교자 자신이 지켜야 합니다.

Posted by bygracetistory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목사님, 이 이야기는 겉으로 보면 ‘강아지 마리 때문에 결혼이 깨진 이야기’이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조금 깊이 들어가면 중심은 강아지가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의 질서’, ‘서로 다른 애정의 우선순위’, 그리고 결혼 전에 반드시 드러나야 할 내면의 불일치가 드러난 이야기라고 보는 편이 좋겠습니다. 원고의 마지막에서 당사자도 결국 ‘ 사람은 자기 인생에 맞는 사람을 고른 것이고, 저는 인생에 맞는 가족을 지킨 ’이라고 정리합니다. 이 표현은 이 사건을 단순히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도로 보는 것보다 훨씬 본질에 가까이 갑니다.

 

먼저 남자에게 실제 개 물림의 트라우마가 있었다는 사실은 가볍게 취급할 수 없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진돗개에게 물려 응급실에 갔고 흉터까지 남았으며, 지금도 작은 개를 보아도 몸이 먼저 굳는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강아지를 싫어하는 편협한 남자’라고 단순하게 규정해서는 안 됩니다. 공포는 머리로 ‘ 개는 나를 물지 않는다’고 이해한다고 해서 곧 없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는 털, 침대, 식탁 주변의 동물 등에 대한 위생적 거부감도 분명했습니다. 따라서 ‘반려견과 한집에서 없다’는 그의 결론 자체는 결혼 상대를 선택하는 조건으로서 존중받을 수 있습니다. 결혼은 상대방에게 자기 애정을 강제로 받아들이게 하는 관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성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몽이는 단순한 취미나 소유물이 아닙니다. 힘들었던 시기에 유기견 보호소에서 만나 5년 동안 함께 살았고, 여성은 몽이를 ‘친구이자 가족’으로 경험해 왔습니다. 그렇다면 결혼하기 위해 여덟 살 된 몽이를 친정으로 보내라는 요구는 그녀에게 ‘강아지를 어디에 것인가?’라는 단순한 생활 문제가 아닙니다. 자기에게 의존해 살아온 존재에 대한 책임을 중간에서 내려놓을 수 있느냐는 양심의 문제가 됩니다. 특히 원고에는 몽이가 분리불안이 있고 노령기에 접어들어 환경 변화가 큰 스트레스가 될 수 있다는 수의사의 설명까지 나옵니다. 그러므로 여성이 몽이를 계속 돌보기로 한 선택 역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관점으로 특별히 주목할 것은 ‘애정’입니다. 사람은 단순히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사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따라 삶의 질서가 형성되는 존재입니다. 생각과 말은 바뀔 수 있지만 깊은 애정은 삶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두 사람은 ‘강아지를 키울 것이냐 것이냐’에서 갈라진 것이 아니라, 이미 형성되어 있던 두 사람의 애정 구조가 몽이라는 구체적인 존재를 통해 드러난 것입니다. 남자는 결혼하면 부부와 앞으로 태어날 자녀를 중심으로 가정의 질서를 세우고 싶어 했고, 여성은 이미 자신의 삶 속에 가족으로 들어온 몽이를 그 가정 안에서도 계속 책임지고 싶어 했습니다.

 

특히 남자가 한 말 가운데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너는 강아지를 자식처럼 여기는 사람이야. 그게 잘못됐다는 아니라 너한테는 그게 맞는 거고. 근데 나는 자식을 자식처럼 여기는 사람이 필요해.’ 표현에는 다소 거친 면이 있지만, 여기에는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 하나가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동물을 사랑하면 되는가?’가 아니라 ‘서로 다른 종류의 사랑 사이에는 어떤 질서가 있어야 하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사상에서 사랑은 무조건 강하기만 하면 선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에는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 사랑, 이웃 사랑, 배우자에 대한 사랑, 자녀에 대한 사랑, 사회와 공동체에 대한 사랑, 그리고 자연과 동물에 대한 애정은 서로 경쟁하여 하나가 다른 하나를 없애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 제 위치에서 질서를 이루어야 합니다. 따라서 반려동물을 깊이 사랑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생명을 돌보고, 약한 존재를 보호하고, 자신에게 의존하는 생명에 끝까지 책임을 지는 것은 오히려 체어리티의 아름다운 한 표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반대쪽 질문도 필요합니다. ‘가족이다’라는 말이 곧 ‘인간 가족과 완전히 같은 위치이다’라는 뜻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원고의 여성 자신도 이 문제 앞에서는 솔직합니다. ‘몽이가 아파서 병원 가야 하는 날과 아이 어린이집 행사 날이 겹쳤을 저는 어느 쪽을 먼저 챙겼을까요? 자신 있게 답할 수가 없더라고요.’ 저는 오히려 이 대목이 이 영상에서 가장 성숙한 부분이라고 봅니다. 처음에는 ‘강아지를 버리라는 남자 가족을 지키려는 여자’라는 단순한 구도였지만, 여기서 여성은 자기 사랑의 질서까지 돌아보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바로 이런 자기 성찰이 중요합니다. ‘나는 옳고 상대는 틀렸다’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것은 선하지만, 사랑은 제자리에 놓여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이것은 반려동물을 덜 사랑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을 더욱 온전하게 하라는 뜻입니다. 동물을 동물로서 지극히 사랑하고 끝까지 책임지면서도, 배우자를 배우자로 사랑하고 자녀를 자녀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사랑을 모두 ‘누가 1순위인가?’라는 하나의 저울에 올려놓을 필요도 없지만, 서로 다른 관계의 고유한 질서를 없애 버려서도 안 됩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남자의 모든 말에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특히 ‘강아지 키우는 여자는 거른다’는 인터넷식 표현을 가져온 것은 상당히 아쉽습니다. 앞에서 그가 말한 트라우마, 위생 문제, 결혼생활에 대한 현실적인 우려는 모두 자기 경험에서 나온 진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하는 순간 한 사람의 고유한 삶을 ‘강아지 키우는 여자’라는 유형으로 묶어 버립니다. 이것은 사람을 그의 실제 성품과 삶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에서 만들어진 범주를 통해 보는 태도입니다. 스베덴보리적으로 말하면 중요한 것은 외적 유형이 아니라 그 사람의 지배적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삶입니다. 반려견을 키운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의 배우자 사랑이나 모성애, 체어리티의 질을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친구들의 반응도 전적으로 옳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 남자는 강아지가 아니어도 결혼하고 나서 다른 이유로 트집 잡아. 손절해’라는 반응 역시 남자를 하나의 유형으로 규정합니다. 한쪽 인터넷에서는 ‘강아지 키우는 여자를 거르라’ 하고, 다른 쪽 친구들은 ‘그런 남자는 손절하라’고 합니다. 재미있게도 양쪽이 똑같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 사람’을 보지 않고 ‘ 유형’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런 식의 외적 분류보다 훨씬 안쪽으로 들어가 ‘ 말과 선택을 움직인 애정은 무엇인가?’를 묻게 합니다.

 

또 하나 짚어야 할 것은 여성이 몽이의 존재를 결혼 이야기가 상당히 진행될 때까지 말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것을 악의적인 은폐라고까지 할 필요는 없지만, 작은 문제라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결혼 상대에게 몽이가 자신의 삶에서 이 정도로 중요한 존재였다면, 사실은 훨씬 일찍 알려야 했습니다. 반려동물뿐 아니라 종교, 자녀 계획, 부모 부양, 재정, 거주지처럼 결혼 후 공동생활을 근본적으로 좌우하는 문제는 ‘나중에 상대가 이해해 주겠지’ 하고 미룰 사안이 아닙니다. 이 사건이 8개월 뒤가 아니라 처음 몇 번의 만남에서 드러났다면 두 사람 모두 훨씬 덜 상처받았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 이별을 실패라고만 볼 필요도 없습니다. 오히려 결혼 전에 드러났다는 점에서는 두 사람 모두에게 다행스러운 면이 있습니다. 만일 여성이 몽이를 친정에 보내고 결혼했다면 남편을 볼 때마다 ‘당신 때문에 내가 몽이를 보냈다’는 원망이 생길 수도 있었고, 반대로 몽이를 데리고 결혼했다면 남편은 털 하나, 짖는 소리 하나, 병원 방문 하나에도 ‘내가 처음부터 된다고 했는데’라는 불만을 쌓았을 수 있습니다. 작은 생활 갈등처럼 보이지만 그 밑에는 훨씬 깊은 애정의 충돌이 있기 때문에 결혼 후에는 더 큰 문제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진정한 결혼의 이상은 단순히 두 사람이 서로 좋아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두 사람의 내면이 점점 하나의 선과 진리를 향하면서 마음과 삶이 결합되어 가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결혼 전에는 ‘우리가 서로 얼마나 사랑하는가?’만큼이나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의 질서가 함께 살아갈 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이 사건에서 두 사람은 바로 그 지점에서 함께 갈 수 없음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몽이가 두 사람을 갈라놓았다는 뜻이라기보다, 몽이가 아니었다면 한동안 보이지 않았을 두 사람의 깊은 차이를 드러내 주었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그래서 영상 마지막의 질문, ‘5년을 같이 강아지와 8개월 만난 결혼 상대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도 사실 조금 다르게 물어야 합니다. 이것은 ‘강아지냐 남자냐’의 양자택일 문제가 아닙니다. ‘이미 나에게 맡겨져 의존하며 살아온 생명에 대한 책임과 앞으로 배우자와 이루어 결혼의 책임을 어떻게 함께 질서 있게 세울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그 질서 자체에 두 사람이 합의할 수 없다면 어느 한쪽이 악해서가 아니라 결혼생활의 중요한 토대가 맞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을 결혼 상대로 거르는 것이 합리적인가, 편견인가?’라는 질문에도 같은 답을 할 수 있겠습니다. ‘나는 동물과 함께 사는 생활을 감당할 없으므로 그런 생활방식을 가진 사람과 결혼하지 않겠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개인의 결혼 조건입니다. 그러나 ‘강아지 키우는 여자는 남편을 2순위로 두고 모성애도 부족하다’고 일반화한다면 그것은 편견입니다. 이 둘을 구별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반려동물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남자는 냉정하고 이기적이다’라고 일반화하는 것 역시 편견입니다.

 

결국 이 이야기에서 가장 귀한 장면은 누가 이겼는가가 아니라, 마지막에 여성이 ‘ 사람은 자기 인생에 맞는 사람을 고른 것이고 저는 인생에 맞는 가족을 지킨 ’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 데 있다고 봅니다. 거기에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좋겠습니다. ‘나는 몽이를 지켰다’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렇다면 나는 앞으로 몽이를 어떤 질서 안에서 사랑할 것인가? 다음 사람에게는 중요한 사실을 언제 어떻게 알릴 것인가? 배우자와 자녀에 대한 사랑과 반려동물에 대한 애정을 어떻게 각각 제자리에 것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 이별은 단지 ‘강아지 때문에 놓친 결혼’이 아닙니다. 결혼 직전에 두 사람이 서로의 깊은 애정 구조를 발견한 사건입니다. 아픈 발견이었지만, 결혼한 뒤에 발견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 이 사연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훈일 것입니다.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이 함께 사는 일이기 이전에, 사람의 사랑들이 하나의 질서를 이루며 함께 살아갈 있는지를 확인하는 ’이라는 것입니다.

Posted by bygracetistory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여덟 번째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성 크리스토포로스에 관한 오래된 기독교 전승을 소개합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일반적으로 성 크리스토포로스, 곧 영어권에서 ‘Saint Christopher’라고 부르는 인물입니다. 그의 전승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이야기가 바로 강을 건너려는 어린아이를 등에 업었다가 그 아이가 점점 세상보다 무거워지고, 마침내 그 아이가 그리스도였음을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이 영상은 역사적 사실을 하나하나 확인하는 방식보다는 오랜 기독교 전승이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를 중심으로 읽는 편이 좋겠습니다.

 

강문호 수도사가 전하는 이야기에서 크리스토포로스는 처음부터 ‘가장 강한 존재’를 섬기고 싶어 하는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힘센 사람이 왕이라고 생각하여 왕을 찾아가 섬깁니다. 그런데 어느 날 왕이 사탄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고 ‘그렇다면 사탄이 왕보다 강하구나’ 하고 사탄을 찾아갑니다. 다시 사탄을 섬기다가 사탄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서 두려워하는 것을 보고 이번에는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가장 강한 분이구나’ 하며 그리스도를 찾아 나섭니다. 이 전승의 첫 부분만으로도 한 인간의 영적 여정을 상징적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선한 것을 알고 있었던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했던 것을 하나씩 넘어가면서 마침내 참된 주권자를 찾아가는 사람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이 과정은 인간이 외적인 힘에서 내적인 힘으로 옮겨가는 과정처럼 보입니다. 자연적 인간은 먼저 눈에 보이는 힘을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권력, 재산, 지위, 명예, 육체적 능력 같은 것들입니다. 크리스토포로스가 처음 왕을 찾아간 것도 그런 의미에서 자연스럽습니다. 왕은 세상에서 가장 높은 권력을 가진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왕조차 두려워하는 대상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면서 그의 생각은 흔들립니다. 눈에 보이는 권력이 절대적인 힘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다음에 사탄을 찾아갔다는 대목은 더욱 흥미롭습니다. 인간은 선의 능력보다 악의 능력이 더 강해 보이는 순간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거짓이 진실을 이기는 것 같고, 탐욕과 폭력이 세상을 움직이는 것 같으며, 자기 욕망을 거리낌 없이 좇는 사람이 오히려 잘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면 악이 선보다 강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악에는 자체적인 생명이나 능력이 없습니다. 모든 생명의 근원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악은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 그것을 뒤틀어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악이 아무리 강해 보여도 그것은 궁극적인 힘일 수 없습니다.

 

크리스토포로스는 마침내 사탄마저 두려워하는 그리스도를 찾기 시작합니다. 여기에서 이 이야기는 방향을 완전히 바꿉니다. 그는 지금까지 ‘가장 강한 자가 누구인가?’를 찾아다녔지만, 정작 그리스도를 만나는 길은 더 강한 권력자를 찾아가는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한 수도사가 그에게 뜻밖의 길을 알려 줍니다. 강가에서 강을 건너지 못하는 사람들을 업어 건네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을 섬기다 보면 그리스도를 만나게 것이다.’ 가장 높은 분을 만나려는 사람에게 주어진 길이 가장 낮은 자리에서 사람을 섬기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오래된 전승은 놀랍도록 복음적입니다. 크리스토포로스는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 세상 끝까지 여행해야 했던 것이 아니라 자기 앞에 찾아오는 사람을 등에 업으면 되었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매우 중요한 ‘쓰임(use)과 연결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추상적인 종교 감정에 머물지 않습니다. 주님 사랑은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가 되고, 체어리티는 구체적인 쓰임으로 나타납니다.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길을 잃은 사람을 인도하며, 내가 가진 힘과 지식과 능력을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는 것입니다.

 

특히 크리스토포로스에게는 큰 체격과 강한 육체가 있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그 힘을 ‘가장 강한 ’를 섬기는 데 사용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그 힘의 참된 목적을 발견합니다. 그의 힘은 강한 자 곁에 서서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강을 건너지 못하는 약한 사람을 등에 업기 위해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쓰임’의 아름다운 그림입니다. 주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재능과 능력은 자기 자신을 높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전체의 선과 이웃의 유익을 위해 사용될 때 본래의 질서를 찾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린아이 하나가 나타나 자신을 강 건너편으로 데려다 달라고 합니다. 크리스토포로스는 평소처럼 아이를 등에 업고 물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아이가 점점 무거워집니다. 강 가운데에 이르자 마치 온 세상을 등에 짊어진 것처럼 견딜 수 없을 만큼 무거워집니다. 가까스로 강을 건넌 크리스토포로스가 어떻게 어린아이가 이렇게 무거울 수 있느냐고 묻자 아이는 자신이 세상의 죄를 짊어진 그리스도임을 밝힙니다.

 

이 장면은 전승 전체의 중심입니다. 크리스토포로스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분을 찾아다녔지만, 정작 그분은 힘센 왕이나 위엄 있는 정복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등에 업을 수 있는 작은 어린아이로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그 작은 아이 안에 세상을 짊어진 무게가 있었습니다. 외적으로 가장 작은 모습 안에 내적으로 가장 큰 능력이 감추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끊임없이 보여 주는 ‘내적인 것과 외적인 ’의 관계를 생각하게 합니다. 인간은 외형의 크기와 화려함을 보고 힘을 판단하지만 천국의 질서는 정반대입니다. 주님께 가까운 천사일수록 자신을 높이지 않습니다. 지혜가 깊을수록 자신의 지혜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압니다. 선이 많을수록 그것을 자기 공로로 돌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에서 가장 높은 것은 지배하려는 능력이 아니라 사랑으로 섬기는 능력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오셨다는 복음의 질서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크리스토포로스라는 이름 자체도 이 이야기와 아름답게 연결됩니다. ‘Christophoros’는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를 나르는 ’, 곧 ‘그리스도를 짊어진 ’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표현을 조금 더 깊이 읽으면 단지 어느 날 어린 예수를 등에 업었다는 뜻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자기 삶 안에 모시고, 그분의 사랑과 진리를 세상으로 운반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어떤 의미에서는 ‘크리스토포로스’가 되도록 부름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아름다운 역설이 있습니다. 크리스토포로스가 그리스도를 업고 강을 건넜지만, 실제로는 누가 누구를 지탱하고 있었겠습니까? 겉으로 보면 크리스토포로스가 어린 그리스도를 등에 업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크리스토포로스의 생명과 힘 자체가 주님에게서 옵니다. 인간은 ‘내가 주님을 위해 이것을 했다’고 생각하지만 더 깊이 깨달으면 ‘ 일을 있도록 나를 붙들고 계셨던 분도 주님이셨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은 선을 행할 때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선의 능력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내가 이웃을 도왔고, 내가 봉사했고, 내가 헌신했고, 내가 복음을 전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인간이 자유롭게 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일을 마친 뒤 마음 깊은 곳에서는 ‘선한 것은 주님께서 하셨습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이것이 자기 공로가 끼어들지 않는 선입니다.

 

이 대목은 수도와 헌신을 생각할 때 더욱 중요합니다. 수도생활이 깊어지고 희생이 커질수록 인간에게는 아주 미묘한 시험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나는 이것을 버렸다’, ‘나는 이렇게 희생했다’, ‘나는 평생을 바쳤다’, ‘나는 다른 사람이 하지 못하는 일을 했다’는 자기 공로입니다. 외적으로는 모든 것을 버렸는데 내적으로는 오히려 더 큰 ‘’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바로 이 지점을 매우 엄격하게 봅니다. 참된 자기 부인은 단순히 재산과 지위와 세상의 즐거움을 버리는 데서 끝나지 않고, 자신이 행한 선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려는 마음까지 내려놓는 데 이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크리스토포로스 이야기의 아름다움은 ‘모든 것을 버리고 수도사가 되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자신의 힘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를 발견했다는 데 있습니다. 가장 강한 자의 곁에서 힘을 과시하는 사람이 아니라 약한 사람을 등에 업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이것은 ‘주님은 어디에서 만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하나의 아름다운 답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말씀과 예배와 기도 가운데 만나시지만, 동시에 우리가 체어리티를 실천하는 구체적인 쓰임 가운데서도 만나십니다.

 

영상 후반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크리스토포로스가 박해를 받아 신앙을 포기하라는 요구와 여러 유혹을 받았으나 끝까지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았다는 순교 전승도 소개합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칼과 화살 등의 기적적 세부는 성인전의 전승적 성격을 감안하여 읽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가 전달하려는 영적 중심은 분명합니다. 한번 참된 주인을 발견한 사람은 다시 이전의 주인에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이것 역시 거듭남의 과정과 연결할 수 있습니다. 거듭남은 한 번의 강렬한 체험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사건이 아닙니다. 사람이 진리를 발견하고 주님을 따르기로 했을 때 오히려 그 진리가 실제로 자기 삶의 사랑이 되었는지를 드러내는 시험들이 찾아옵니다. 진리를 알고 있을 때와 그 진리 때문에 손해를 감수해야 할 때는 다릅니다. 선을 좋아한다고 말할 때와 자기 욕망을 포기해야 선을 선택할 수 있을 때도 다릅니다. 시험은 진리를 단순히 기억 속에 있는 지식에서 삶에 속한 것으로 옮겨 가게 합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이 이야기에서 ‘세상의 지배자는 왕도 사탄도 아니고 우리 예수 그리스도’라는 결론을 끌어냅니다. 이것은 이번 이야기의 중심을 잘 짚은 말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그리스도가 나의 왕이라는 것은 실제로 무엇을 뜻하는가?’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그것은 단순히 입으로 ‘예수님이 왕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내 의지와 판단과 욕망보다 주님의 선과 진리가 실제 삶을 다스리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과 주님의 계명이 충돌할 때 계명을 선택하고, 내 이익과 이웃의 유익이 충돌할 때 체어리티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실제로 그 사람의 삶을 다스리는 왕이 되십니다.

 

그래서 이번 영상에서 가장 오래 마음에 남는 장면은 저는 오히려 화살도, 기적도, 순교도 아니라 ‘강가에서 사람을 업어 건네주는 크리스토포로스’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그 순간 자신이 그리스도를 만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습니다. 특별한 계시도 없었고 천국이 열린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자기 앞에 온 사람을 자기 힘으로 도와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평범한 쓰임 속으로 그리스도가 찾아오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일상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주님을 만나기 위해 아주 특별한 체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맡기신 사람을 사랑하고, 오늘 해야 할 일을 정직하게 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내가 가진 것을 나누며, 맡겨진 직분과 책임을 충실히 수행하는 그곳이 바로 ‘강가’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뒤돌아보면 ‘그때 내가 업고 건넌 사람이 바로 주님께서 내게 맡기신 이웃이었구나’ 하고 깨닫게 될지도 모릅니다.

 

앞선 영상들과 연결해서 보면 흐름도 흥미롭습니다. ‘연못 이야기’에서는 주님 안에 있어야 산다는 것을 보았고, ‘사과나무 이야기’에서는 자기 지혜보다 주님의 섭리를 신뢰하는 것을 보았으며, ‘수도사 싸움’에서는 ‘ ’을 내려놓을 때 싸움이 사라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번 ‘크리스토포로스 이야기’에서는 주님께 받은 힘을 자기 자신이 아니라 이웃을 위한 쓰임으로 돌릴 때 그 길에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모습을 봅니다. 서로 다른 수도사 이야기들이지만 ‘주님으로부터 받아 이웃을 향하여 흘려보내는 ’이라는 하나의 방향으로 모입니다.

 

이번 이야기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담는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가장 강한 분을 섬긴다는 것은 가장 강한 자의 곁에 서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받은 힘을 가장 낮은 자리에서 이웃의 쓰임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며, 바로 체어리티의 길에서 인간은 자신이 찾던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크리스토포로스가 평생 찾아다닌 ‘가장 강한 ’이 마침내 작은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그의 등에 올라왔다는 것은 참 아름다운 역설입니다. 세상은 힘을 ‘얼마나 많은 사람을 아래 있는가’로 측정하지만, 주님께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사랑으로 받쳐 있는가’로 바꾸어 놓으십니다. 크리스토포로스가 그리스도를 등에 업었던 그날, 그의 큰 몸과 힘은 비로소 자기에게 주어진 참된 쓰임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거듭남의 중요한 한 모습일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으로 내가 얼마나 커질 것인가?’에서 ‘주님께서 내게 주신 것으로 누구를 건너게 것인가?’로 삶의 질문 자체가 바뀌는 것입니다.

 

 

 

SY.80, 강문호 수도사, ‘그리심산 수도원, 예수님의 길을 걸으며 비로소 나그네를 보다’ (20191231)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이스라엘의 여러 수도원을 찾아다니던 중 그리심산의 수도원을 방문했던 경험에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bygrace.kr

 

SY.74, 강문호 수도사, ‘싸움을 할 수 없었던 두 수도사 - 하나님의 씨와 거듭남’ (20191224)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이집트 사막의 어느 수도 공동체에 전해지는 두 수도사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강문호 수도사 자신도 이 수도원을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오늘(2026/08/23)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0, ‘전능왕 오셔서’, 90, ‘주 예수 내가 알기 전입니다.

 

오늘부터 창4 절별 주석을 시작, 오늘은 그 첫 번째, 1절로 2, AC 글 번호로는 338번에서 345번입니다. 먼저 본문니다.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4:1-2)

 

제목은

 

가인과 아벨, 사랑에서 분리되기 시작한 신앙과 체어리티

 

이며, 다음은 오늘 범위인 AC.338-345 요약입니다.

 

AC.338-345 앞의 AC.324-337에서 제시된 4 전체의 개요를 바탕으로, 이제 4:1-2 표현을 하나씩 풀어 가며가인아벨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본격적으로 밝히기 시작합니다. 여기서아담과 그의 아내 하와 태고교회를, 그들에게서 태어난가인아벨 교회 안에서 생겨난 신앙과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출생 이야기는 단순히 가정에서 아들이 태어난 이야기가 아니라, 태고교회의 내적 생명에서 신앙과 체어리티가 어떻게 구별되고, 마침내 서로 분리되기 시작했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AC.338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가인 처음부터 완전히 타락한 신앙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번째 자손, 처음 신앙이라고 하며, 그것을가인이라 부릅니다. 문제는 신앙 자체가 아니라,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이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으로 인식되고 인정되기 시작했다는 있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신앙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 안에 살아 있었기 때문에 사랑과 별개로 생각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신앙을 사랑에서 떼어 하나의 독립적인 것으로 바라보기 시작했고, 바로 여기에서가인의 분리 시작되었습니다.

 

따라서 가인의 문제를 이해할 때에는구별분리 구별해야 합니다. 신앙과 사랑을 개념적으로 구별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특히 오늘날의 인간은 먼저 신앙의 진리를 배우고, 진리를 따라 살아가면서 주님께서 신앙으로 체어리티를 심으시는 과정을 거칩니다. 문제는 신앙을 사랑과 구별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사랑 없이도 신앙 자체가 참된 신앙으로 존재할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본래 사랑을 섬겨야 신앙이 사랑과 독립하여 자기 자리를 주장하기 시작할 가인의 길이 열립니다.

 

AC.339-340 창세기 초기의잉태’, ‘출생’, ‘자손’, ‘아들’, ‘’, ‘이름’, ‘계보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설명합니다. 태고인들은 이름을 통하여 어떤 교회적·교리적 실재를 나타냈으며, 그것들의 관계를 자연적인 출생과 계보의 형식으로 표현했습니다. 자연계에서 자녀가 부모에게서 잉태되고 태어나듯이 교회 안에서도 하나의 교리와 상태가 다른 교리와 상태로부터 생겨납니다. 그러므로 4 계보를 단순히 개인들의 생물학적 족보와 시간적 연속으로만 읽어서는 됩니다. 말씀은 이러한 출생과 계보를 통하여 교회의 영적 상태들이 서로 어떻게 생겨나고 이어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이러한 원리는 4 아니라 말씀 전체에 이어집니다. ‘아들 교회의 진리와 신앙에 속한 것을, ‘ 선과 사랑에 속한 것을 나타낼 있으며, ‘낳다출생 새로운 교리와 교회적 상태가 생겨나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가인이 아담과 하와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은 단순히 첫아들이 태어났다는 의미를 넘어, 태고교회의 생명 가운데서 신앙이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는 영적 변화를 묘사합니다. 바로 원리를 이해해야 이후에 이어지는 가인의 후손들과 5 계보 역시 단순한 족보가 아니라 교회의 상태와 교리의 연속으로 읽을 있습니다.

 

AC.341에서는 번째 자손인아벨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아벨형제 체어리티를 상징한다고 밝힙니다. 이것은 앞으로 가인과 아벨의 관계를 이해하는 매우 중요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본래 서로 경쟁하는 원리가 아니라형제처럼 함께 있어야 하는 것들입니다. 따라서 나중에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은 단순히 형제가 다른 형제를 죽이는 사건이 아니라, 신앙이 자기 형제인 체어리티를 밀어내고 마침내 소멸시키는 교회의 내적 비극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강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안에 깊이 있다고 하더라도, 체어리티가 없다면그런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신앙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무엇이 신앙을 신앙답게 하는지를 밝히는 말입니다. 신앙의 생명은 체어리티이며, 진리는 선을 향하고 안에서 살아 있을 비로소 참된 진리가 됩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완전히 분리되면 겉으로는 여전히 신앙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어도 안의 생명은 사라지게 됩니다.

 

AC.342-344아벨은 치는 자였다 말씀을 통하여 체어리티의 성격을 더욱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말씀에서 선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을 나타내며, ‘ 치는 그러한 선을 돌보고 행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아벨이 치는 자였다는 것은 체어리티가 단순한 감정이나 선한 의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선을 돌보고 행하는 삶이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참된 체어리티에는 이웃의 선을 바라보고, 그것을 보호하고, 실제적인 쓰임으로 나타내려는 삶이 들어 있습니다.

 

반대로 AC.345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다 말씀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방향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교회를 의미하지만, 가인이땅을 경작하는 되었다는 것은 체어리티 없이 신앙만을 붙들면서 점차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을 바라보게 상태를 나타냅니다. 아벨은 체어리티의 선을 돌보고 행하는 치는 반면, 가인은 신앙을 사랑에서 떼어 외적인 것에 머무는농사하는 됩니다. 이렇게 직업의 차이는 교회적 상태의 차이를 보여 줍니다.

 

따라서 AC.338-345에서 특별히 주목할 것은가인의 타락 처음부터 극단적인 악의 모습으로 시작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출발점은 매우 미세했습니다. 참된 신앙을 버린 것도 아니고, 처음부터 체어리티를 부정한 것도 아닙니다.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따로 떼어 자체로 하나의 으로 바라본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나 작은 분리가 계속 진행되면서 신앙은 점차 독립적인 지위를 주장하고, 결국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이게 됩니다. 이후 4에서 나타나는 가인의 분노와 안색의 변화, 그리고 마침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은 바로 분리가 점차 심화된 결과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신앙에도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중요한 것은 단지내가 무엇을 믿는가?’ 아닙니다. ‘내가 믿는 진리가 안에서 무엇을 이루고 있는가?’ 중요합니다. 진리를 알수록 주님 앞에서 겸손해지고, 자신의 악을 보고 버리며, 이웃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게 된다면 신앙은 체어리티와 결합하여 살아 있는 신앙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알수록 자신이 옳다는 것을 주장하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며, 사랑보다 교리적 우월성과 승리를 앞세우게 된다면, 아무리 교리 자체가 참되더라도 안에서가인의 분리 시작될 있습니다.

 

또한 주님께서 이러한 분리를 처음부터 강제로 막지 않으신 데에는 인간의 자유라는 중요한 질서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의 잘못된 방향을 원하시거나 방치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지 않는 방식으로 끊임없이 선으로 이끄십니다. 사랑과 체어리티는 강요될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진리를 보여 주시고, 악을 억제하시며, 돌이킬 길을 마련하시지만 인간이 자유롭게 선을 선택하는 마지막 자리까지 대신 차지하지는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이야기는 인간이 자유를 잘못 사용할 있다는 사실과 동시에, 실패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회복의 길을 계속 마련하신다는 섭리를 함께 보여 줍니다.

 

결국 AC.338-345 중심은가인은 신앙이고 아벨은 체어리티다라는 단순한 대응에 있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입니다. 신앙은 본래 사랑 안에서 생명을 얻으며,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있을 때에만 참된 신앙입니다. 가인은 결합이 처음 흔들리기 시작한 상태를, 아벨은 신앙의 생명이 되어야 체어리티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치는 농사하는 라는 대비를 통하여 길이 어디를 향하는지도 보여 줍니다. 한쪽은 체어리티의 선을 돌보고 행하는 삶으로 나아가고, 다른 한쪽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붙들면서 점차 외적인 것과 세상적인 것으로 향합니다.

 

따라서 구간이 우리에게 남기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신앙이 있는가?’만이 아닙니다. ‘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 있는가?’입니다. 주님께서 이루시는 거듭남은 우리가 알고 믿는 진리를 마침내 우리가 사랑하고 살아가는 선과 결합시키는 역사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향하고, 체어리티가 신앙에 생명을 둘은 다시 본래의 질서를 이루게 됩니다. 그때 신앙은 단순히 옳은 것을 알고 고백하는 신앙을 넘어, 실제 삶에서 선을 낳는신앙다운 신앙 됩니다.

 

 

이상 요약을 마치고, 아래는 AC 본문, 해설 및 심화입니다.

 

 

AC.338, 창4: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AC.338-340)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vir]

bygrace.kr

 

AC.339, 창4:1, ‘창4의 계보를 읽는 매우 중요한 해석 원리’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창4:1) AC.339 앞의 세 장에서 ‘아담과 그의 아내’(man and his wife)가 태고교회

bygrace.kr

 

AC.340, 창4:1,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창4:1) AC.340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I have gotten a man, Jehovah)

bygrace.kr

 

AC.341, 창4: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AC.341-345)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And she added to bear his brother Abel; and Abel was a shepherd of the flock, and Cain was a tiller of the ground. (창4:2) AC.341 교회

bygrace.kr

 

AC.342, 창4:2, ‘신앙에서 행위로, 행위에서 체어리티로’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2 교회의 두 번째 자손이 체어리티라는 것은, 교회가 잉태하고 낳는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 외

bygrace.kr

 

AC.343, 창4:2, ‘참된 목자는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합니다’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3 ‘양 치는 자’(shepherd of the flock)가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

bygrace.kr

 

AC.344, 창4:2, ‘신앙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그 목적은 체어리티입니다’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4 신앙, 곧 신앙에 관한 기억 지식(memory-knowledge, scientia)과 인식 지식(knowledge, cognitio),그리고 교

bygrace.kr

 

AC.345, 창4:2,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농사하는 자’ 가인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5 ‘농사하는 자’(tiller of the ground)가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을 나타낸다는 것, 곧 사랑에서 분

bygrace.kr

 

 

오늘 AC 리딩 본문 전체는 여기까지이고, 이 가운데 보충 리딩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AC.340, 창4:1,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창4:1) AC.340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I have gotten a man, Jehovah)

bygrace.kr

 

AC.338, 심화 1, ‘가인’은 처음부터 ‘사랑에서 완전히 분리된 신앙’이었나?

AC.338.심화 1. ‘가인’은 처음부터 ‘사랑에서 완전히 분리된 신앙’이었나? AC.338을 읽다 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표현을 만나게 됩니다. 앞의 개요에서 스베덴보리는 ‘가인’을 분명히 ‘사랑

bygrace.kr

 

AC.344, 창4:2, ‘신앙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그 목적은 체어리티입니다’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4 신앙, 곧 신앙에 관한 기억 지식(memory-knowledge, scientia)과 인식 지식(knowledge, cognitio),그리고 교

bygrace.kr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08-23(D1)

 

 

2665, 2, 창4.2, 2026-08-23(D1)-주일예배(창4,1-2, AC.338-345), ‘가인과 아벨, 사랑에서 분리되기 시작한 신앙과 체어리티’.pdf
0.97MB

 

 

 

주일예배(2026/08/16, 창4, AC.324-337), ‘가인과 아벨, 신앙과 체어리티에 관하여’

※ 오늘(2026/08/16)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9, ‘하늘에 가득 찬 영광의 하나님’, 찬89, ‘샤론의 꽃 예수’입니다. 오늘은 창4 절별 주석 시작 전 먼저 창4 전체 개요를 살피는 ‘창4 본문, 개요 및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 영상은 처음 들으면 상당히 불편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상티어’, ‘중티어’, ‘하티어’로 나누고, 남자의 키와 외모, 학력, 직업, 연봉, 자산, 부모의 경제력과 노후 준비를 하나하나 따진 뒤 어느 등급에 속하는지를 정합니다. 여자 역시 나이와 외모, 학력, 직업, 연봉, 자산, 부모의 재산과 노후 준비 등을 놓고 같은 방식으로 분류합니다. 심지어 어떤 조건이 조금만 달라져도 ‘상에서 중으로 내려간다’, ‘하에서 중으로 올라가기 어렵다’는 식으로 이야기합니다. 사람을 하나님 앞에 선 한 인격으로 보는 데 익숙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거부감부터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영상을 곧바로 ‘사람을 돈과 외모로 평가하는 세속적인 이야기’라고 밀어내기 전에 한 가지는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영상은 ‘사람의 참된 가치가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신학 강의가 아니라, 결혼정보회사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실제 사람들이 어떤 조건으로 서로를 선택하고 거절하는지를 오랫동안 관찰한 사람이 그 현실을 설명하는 영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상이 보여 주는 ‘결혼 시장의 민낯’에는 상당한 현실성이 있습니다. 실제 결혼은 사랑만으로 이루어지는 추상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두 사람이 만나 함께 살고, 집을 마련하고, 돈을 벌고, 자녀를 낳아 기르고, 양가 부모와 관계를 맺으며 수십 년을 살아가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상대의 직업이나 경제력, 건강, 성격, 가정환경, 부모의 노후 문제 등을 살펴보는 것 자체를 탐욕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결혼을 앞둔 사람이 ‘이 사람과 실제 생활을 함께 감당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것은 오히려 책임 있는 태도일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지상생활의 외적인 조건 자체는 무가치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외적인 것을 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보다 위에 올라가 사람 전체의 가치를 결정하기 시작하는 데 있습니다.

 

영상에서 가장 인상적인 표현 가운데 하나가 ‘육각형’입니다. 남자 상티어의 사례로 제시된 사람은 35세, 178cm, 연세대 공대 졸업, 유명 IT 대기업 과장, 연봉 15천만 원, 순자산 10억 원, 서울 아파트 보유, 부모 역시 안정적인 직업에서 은퇴했고 노후 준비도 끝난 사람입니다. 진행자는 이런 사람을 어느 한 곳도 특별히 걸리는 것이 없는 ‘큰 육각형’이라고 부릅니다. 반면 외모와 키는 좋지만 연봉과 자산이 상대적으로 적은 사람은 ‘작은 육각형’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사실 하나가 드러납니다. 이 육각형에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나타내는 항목이 거의 없습니다. 정직한가, 따뜻한가, 책임감이 있는가, 배우자를 존중하는가,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 아는가, 욕망을 절제할 수 있는가, 배우자가 병들거나 실패했을 때도 곁을 지킬 사람인가 하는 것은 육각형의 축에 들어 있지 않습니다.

 

바로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가져와 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을 결정하는 가장 깊은 것은 그 사람이 ‘무엇을 소유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가’입니다. 사람의 생명은 그가 사랑하는 것에 있으며, 결국 사람은 자신이 지배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내적 모습이 형성됩니다. 그래서 지상에서는 대단히 성공하고 좋은 조건을 갖춘 사람이 영계에서는 전혀 다르게 드러날 수 있고, 반대로 세상에서는 별 볼 일 없어 보였던 사람이 놀랍도록 아름다운 내면을 지닌 사람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죽음 이후에는 학벌도, 직함도, 통장 잔고도, 부동산도, 부모의 사회적 지위도 가져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가지고 살아가는 동안 형성된 ‘사랑의 성품’은 그대로 가지고 갑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정말 중요한 ‘결혼 티어’는 무엇일까요? 질문 자체를 조금 바꾸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은 상티어인가?’가 아니라 ‘이 사람의 지배적 사랑은 무엇을 향하고 있는가?’라고 물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고 상대를 자기 행복을 위한 도구로 여기는 사람인지, 아니면 상대의 행복을 자기 행복처럼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인지가 훨씬 중요합니다. 재산이 10억인지 1억인지보다 돈을 어떻게 벌었고 어떻게 사용하는지가 중요하며, 좋은 직장에 다니는가보다 맡은 일을 정직하고 성실하게 하는지가 중요합니다. 외모가 아름다운가보다 그 아름다움을 자기 우월감과 타인을 지배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지, 아니면 감사하며 겸손하게 살아가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선과 진리는 추상적인 종교 개념이 아니라 이렇게 일상생활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상에 등장하는 조건들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30세 남자가 모은 돈이 500만 원이고 부모의 노후 준비도 되어 있지 않다면 결혼을 생각하는 상대가 걱정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39세 여성이 월세로 살고 있고 부모의 노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그것 역시 실제 결혼생활에서 고려할 현실적인 요소입니다. 여기서 ‘사랑만 있으면 됩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오히려 무책임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조건을 ‘현실적인 고려 사항’으로 보는 것과 그것을 ‘인간의 등급’으로 바꾸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라는 점입니다. ‘이 사람과 결혼하면 경제적으로 어려울 수 있다’와 ‘그러므로 이 사람은 하티어 인간이다’ 사이에는 매우 큰 간격이 있습니다.

 

영상에서 남녀를 평가하는 방식이 서로 다른 것도 흥미롭습니다. 남성은 직업, 연봉, 자산, 학력, 키, 외모, 부모의 경제력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반면, 여성에게는 특히 나이와 외모가 강력한 요소로 작용합니다. 그래서 33세에 대기업에 다니고 연봉 8천만 원, 순자산 3억 원에 본인 명의 오피스텔까지 있는 여성도 ‘중티어’로 분류되고, 39세 여성에게는 학력이나 연봉이 조금 더 좋아지는 정도로는 ‘하티어’를 벗어나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뒤집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요소로 ‘예쁨’을 반복해서 제시합니다. 이것은 이 영상이 만들어 낸 규칙이라기보다, 진행자의 주장대로라면 실제 결혼 시장에서 사람들이 보여 주는 선택을 압축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히려 우리는 영상 자체보다 그 영상을 가능하게 만든 우리 사회의 욕망을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매우 아이러니한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은 조건으로 평가받기를 싫어하면서 상대는 조건으로 평가합니다. 남자는 자신의 연봉과 자산만 보는 여성을 싫어하면서 젊고 예쁜 여성을 원할 수 있고, 여자는 자신의 나이와 외모만 보는 남성을 불쾌하게 여기면서 상대 남성에게 높은 연봉과 안정된 직업과 자산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결국 서로가 서로에게 ‘나라는 사람 전체를 봐 달라’고 요구하면서 정작 자신은 상대를 몇 개의 조건으로 압축해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남녀 어느 한쪽의 문제라기보다 인간의 proprium이 관계 안에서 나타나는 한 모습으로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좋은 것을 받아야 한다’는 욕구가 먼저 서고, ‘나는 상대에게 어떤 사람이 되어 줄 것인가’라는 질문은 뒤로 밀리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결혼애에 관한 가르침은 여기에서 방향을 완전히 바꿉니다. 참된 결혼은 ‘내게 가장 좋은 조건을 가진 사람을 확보하는 것’에서 시작하지 않고, 두 사람이 서로의 선과 진리를 사랑하며 하나를 이루어 가는 데서 시작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남자와 여자의 결합을 단순한 육체적 결합이나 생활 공동체로만 보지 않고, 더 깊은 차원에서는 사랑과 지혜, 선과 진리의 결합과 연결해서 봅니다. 그래서 참된 결혼애에서는 한 사람의 행복이 다른 사람의 행복과 점점 분리되지 않게 됩니다. ‘당신 때문에 내가 행복하다’에서 더 나아가 ‘당신이 행복한 것이 나의 행복이다’라는 상태로 향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적 연애 감정과는 상당히 다른 차원의 사랑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영상 속 ‘상티어’라는 개념도 뒤집힙니다. 세상에서 상티어인 사람이 반드시 천국적 의미에서도 상티어인 것은 아닙니다. 연봉 15천만 원에 자산 10억 원, 서울 아파트와 좋은 학벌을 갖추었더라도 배우자를 자기 성공의 장식품처럼 여기고, 상대가 늙거나 병들거나 사회적 지위를 잃었을 때 사랑이 식어 버린다면 그 결혼의 내적 토대는 매우 약합니다. 반대로 연봉 3천만 원대의 평범한 직장인이고 아직 큰 재산이 없더라도 정직하게 일하고, 자신의 책임을 다하며, 배우자를 존중하고, 어려울 때 함께 견디며, 자신의 욕망보다 가정의 선을 먼저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의 내면에는 전혀 다른 종류의 가치가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가난하다고 해서 자동으로 선한 것도 아니고 부유하다고 해서 악한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초점은 언제나 재산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그것을 대하는 사랑의 질서에 있습니다.

 

여성의 아름다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영상에서는 ‘예쁘면 된다’는 말이 여러 번 반복됩니다. 현실의 결혼 시장에서는 실제로 외모가 강력한 경쟁력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자연적인 끌림이 있고 결혼에서 육체적 매력 역시 일정한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묘사하는 천국의 아름다움은 훨씬 흥미롭습니다. 영계에서는 내적인 상태가 외적인 모습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선한 애정과 지혜가 얼굴과 몸짓에까지 나타납니다. 지상에서는 화장과 성형과 옷과 젊음으로 외적 아름다움을 어느 정도 만들어 낼 수 있지만, 영계에서는 마음의 상태를 영원히 감출 수 없습니다. 결국 ‘어떤 얼굴을 가지고 태어났는가’보다 ‘어떤 사랑을 가지고 살아왔는가’가 그 사람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결정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영상에서 말하는 ‘39’라는 숫자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결혼 시장에서는 나이가 올라갈수록 특히 여성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실제 출산 가능성이나 사람들이 선호하는 연령대와 연결된 현실적인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가치까지 나이에 따라 내려가는 것은 아닙니다. 26세 여성은 존재론적으로 39세 여성보다 더 가치 있는 인간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연봉 15천만 원인 남성이 연봉 32백만 원인 남성보다 하나님 앞에서 더 높은 등급의 인간인 것도 아닙니다. 시장에서의 ‘희소가치’와 인간의 ‘본질적 가치’를 구별하지 않으면 우리는 어느 순간 시장의 언어로 사람의 영혼까지 가격표를 붙이게 됩니다.

 

그래서 이 영상에서 가장 깊이 생각해 볼 문장은 오히려 ‘결혼 시장의 민낯을 봐야 한다’는 말일지도 모릅니다. 맞는 말입니다. 현실을 모른 채 이상만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민낯’을 보았다면 한 걸음 더 들어가야 합니다. 왜 우리는 이렇게 사람을 분류하고 있는가, 왜 남자는 여자의 젊음과 아름다움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고 여자는 남자의 경제력과 사회적 안정성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는가, 그리고 그 욕망 가운데 어디까지가 창조 질서 안의 자연스러운 필요이고 어디부터가 자기중심적인 욕망으로 변질되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바로 여기서 영적 분별이 시작됩니다.

 

특히 결혼을 준비하는 사람이 이 영상을 본다면 ‘나는 어느 티어인가?’보다 더 중요한 질문을 하나 해보았으면 합니다. ‘나는 어떤 배우자를 받을 자격이 있는가?’보다 ‘나는 누군가에게 어떤 배우자가 되어 줄 준비가 되어 있는가?’입니다. 내가 상티어 상대를 원하는 것보다 내가 상대에게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먼저입니다. 나는 돈을 얼마나 모았는가뿐 아니라 돈을 책임 있게 다룰 줄 아는가, 좋은 직장을 얻었는가뿐 아니라 맡은 일에 충실한가, 외모를 얼마나 관리했는가뿐 아니라 상대의 늙어가는 모습을 사랑할 수 있는가,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는가뿐 아니라 배우자의 부모를 존중할 수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이런 질문들은 결혼정보회사의 프로필 용지에는 들어가지 않을지 모르지만 실제 결혼생활에서는 오히려 훨씬 오래 남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결혼관은 아주 현실적인 힘을 갖습니다. 결혼은 결혼식 날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살아가면서 계속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35세에 ‘큰 육각형’이었던 사람도 50세에 직장을 잃을 수 있고, 건강을 잃을 수도 있으며, 사업에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26세의 아름다운 얼굴도 60세와 70세가 되면 변합니다. 부모의 재산도 사라질 수 있고 서울 아파트의 가격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만일 결혼을 붙들고 있는 것이 이런 조건뿐이라면 조건이 무너질 때 관계도 함께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 오랜 세월 형성된 선한 애정과 신뢰, 존중과 책임, 그리고 서로의 영적 선을 바라는 사랑이 있다면 외적인 조건이 변해도 결혼의 더 깊은 부분은 오히려 강해질 수 있습니다.

 

결국 이 영상이 보여 주는 ‘··’는 틀렸다기보다 매우 제한된 지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혼정보회사가 실제 매칭을 위해 사용하는 지도에는 분명 유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인간 전체를 설명하는 지도라고 생각하는 순간 문제가 생깁니다. 그 지도에는 사람의 영혼이 표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연봉 15’, ‘순자산 10’, ‘강남 아파트’, ‘해외 명문대’, ‘167cm의 예쁜 외모’ 같은 항목은 적을 수 있지만, ‘이 사람은 배우자가 아플 때 밤새 곁을 지킬 사람인가’, ‘자신이 잘못했을 때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돈 앞에서 양심을 버리지 않는가’,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가’, ‘상대의 행복에서 자신의 기쁨을 찾을 수 있는가’ 같은 것은 숫자로 적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긴 결혼생활에서는 오히려 이런 것들이 결정적인 조건이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 영상을 보고 난 뒤 남는 결론은 ‘결혼정보회사의 티어 분류는 나쁘다’가 아닙니다. 오히려 ‘외적 조건의 세계에서는 그런 분류가 생겨날 수밖에 있다는 현실을 인정하되, 그것을 인간의 참된 가치와 혼동하지 말자’에 가깝습니다. 외적인 조건은 결혼을 시작하는 데 영향을 줄 수 있지만, 결혼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결국 두 사람 안에 형성된 내적인 것입니다. 외모는 만남의 문을 열 수 있고, 경제력은 생활을 안정시킬 수 있으며, 좋은 가정환경은 결혼생활에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두 영혼이 하나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상의 표현을 빌려 조금 다른 질문을 해볼 수 있습니다. ‘천국에서는 누가 상티어일까?’ 아마 이 질문에 연봉과 학벌과 자산을 적는 칸은 없을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는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이 가졌는지가 아니라, 가진 것을 가지고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가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얼굴을 가졌는지가 아니라 그 얼굴 뒤에 어떤 애정이 자리 잡았는지, 얼마나 좋은 직장을 가졌는지가 아니라 그 자리에서 얼마나 정직하고 유용한 삶을 살았는지, 얼마나 좋은 배우자를 얻었는지가 아니라 자신이 배우자에게 얼마나 좋은 사람이 되어 주었는지가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결혼 시장에서 말하는 ‘큰 육각형’보다 더 귀한 육각형이 있다면 어쩌면 이런 것일지도 모릅니다. ‘선함, 진실함, 책임, 절제, 배려, 그리고 상대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으로 여기는 사랑.’ 이것들은 결혼정보회사의 프로필에는 잘 나타나지 않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결혼을 영원한 결합으로 자라게 하는 훨씬 본질적인 조건들입니다. 세상에서는 ‘누구와 결혼했는가’가 성공처럼 보일 때가 많지만, 천국을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그보다 더 깊은 질문이 남습니다. ‘나는 결혼을 통해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이 영상의 ‘··하 티어’를 넘어 우리가 끝까지 붙들어야 할 질문일 것입니다.

 

Posted by bygracetistory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이집트 사막의 어느 수도 공동체에 전해지는 두 수도사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강문호 수도사 자신도 이 수도원을 직접 방문한 것은 아니라고 밝히면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곳에서 태어나 수도원 밖 세상을 거의 경험하지 못한 두 수도사가 어느 날 화면을 통해 사람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싸움이라는 것을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두 사람은 호기심이 생겨 ‘우리도 한번 싸워 보자’고 합니다. 방법은 간단했습니다. 지갑 하나를 가운데 놓고 한 사람이 ‘내 것이다’라고 하면 다른 사람이 ‘아니다, 내 것이다’라고 맞서면서 다투어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시작하자 뜻밖의 일이 벌어집니다. 한 수도사가 지갑을 집어 들고 ‘내 거다’라고 하자 다른 수도사가 ‘그래, 네 거다. 가져가라’고 해버린 것입니다. 싸움이 시작될 수가 없었습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여기에서 요한일서 39절의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를 인용하고, 이 두 수도사가 싸울 수 없었던 까닭을 ‘그 속에 하나님의 씨가 들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소와 말이 저마다 타고난 방식으로 일어나고 병아리가 물을 마신 뒤 본능적으로 머리를 드는 모습을 예로 들면서, 하나님의 씨가 사람 안에 자리 잡으면 선하고 깨끗하게 사는 것이 점차 그 사람의 ‘본질’처럼 된다고 말합니다.

 

이 짧은 이야기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보면 상당히 흥미로운 지점이 보입니다. 무엇보다 ‘싸움이 성립되지 않았다’는 대목입니다. 싸움에는 반드시 두 개의 ‘내 것’이 필요합니다. 한쪽이 ‘내 것이다’라고 할 때 다른 쪽에서도 ‘아니다, 내 것이다’라고 해야 싸움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두 번째 수도사가 ‘그래, 네가 가져라’ 하는 순간 싸움의 재료 자체가 사라집니다. 이 작은 이야기는 인간의 proprium이 어떻게 갈등을 만들어 내는지를 아주 단순하면서도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proprium은 단순히 물건에 대한 소유욕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내 것’, ‘내 생각’, ‘내 판단’, ‘내 공로’, ‘내 지위’, ‘내 명예’, ‘내가 옳다’는 데 집착하는 인간의 자기중심성이 모두 여기에 연결됩니다. 실제로 우리의 싸움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물질 때문인 경우보다 ‘내가 옳다는 것을 인정받고 싶은 마음’ 때문에 일어나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누군가 내 의견을 무시했다고 느끼고, 내 체면을 손상했다고 생각하고, 내가 받아야 할 대접을 받지 못했다고 여기면서 마음속에 분노가 일어납니다. 결국 겉으로는 여러 이유가 있어 보여도 그 깊은 곳에는 ‘’와 ‘내 것’이 자리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두 번째 수도사가 ‘그래, 네 거다’라고 말하는 순간입니다. 그는 논쟁에서 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논쟁 자체를 필요 없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내 것’을 지키기 위해 상대방과 맞설 이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천국의 질서와도 매우 잘 연결됩니다. 천국에서는 각자가 자기 자신만의 유익을 먼저 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유익을 기뻐합니다. 자신이 가진 선과 진리를 자기 소유로 움켜쥐기보다 그것이 주님에게서 왔음을 알고 서로 나누기를 기뻐합니다. 그러므로 천국적 삶의 중심에는 ‘누가 더 많이 가졌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서로에게 쓰임이 될 것인가’가 놓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는 조금 더 깊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요한일서의 ‘하나님의 씨’를 사람이 죄를 지을 수 없게 만드는 일종의 새로운 본질처럼 설명합니다. 이 방향에는 귀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실제로 거듭남이 깊어지면 사람은 단지 ‘죄를 지으면 안 되니까 참는 상태’를 넘어 ‘그 악 자체를 싫어하는 상태’로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계명이 ‘하지 말라’고 하기 때문에 악을 피하지만, 나중에는 그 악이 주님을 거스르고 이웃을 해친다는 사실 때문에 마음에서 싫어하게 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행동 교정이 아니라 애정의 변화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에 관한 가르침은 강문호 수도사의 ‘본질이 달라진다’는 표현을 더욱 깊게 열어 줍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죄를 모르는 존재로 다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도움을 받아 악과 싸우고 그것을 피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새로운 의지와 새로운 애정을 받습니다. 처음에는 ‘하면 안 되니까 하지 않는 것’이었던 일이 어느 순간 ‘하고 싶지 않은 것’이 됩니다. 반대로 처음에는 억지로 행하던 선이 점차 좋아지고 기뻐집니다. 이것이 거듭남의 놀라운 변화입니다. 선이 의무에서 기쁨으로 옮겨갑니다.

 

그래서 영상 마지막에 나오는 ‘죄를 피하는 게 아니라 죄를 모르는’ 삶이라는 표현은 그 의도를 잘 살려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거듭난 사람이 죄가 무엇인지조차 모르게 된다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악을 너무 멀리하여 그것을 자기 삶의 선택지로 삼지 않는 상태를 가리킨다고 보면 좋겠습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천사들은 악이 무엇인지 모르는 존재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선과 진리 안에 있기 때문에 악과 거짓을 더욱 분명하게 분별합니다. 다만 그것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차이입니다. ‘악을 모른다’기보다 ‘악을 원하지 않는다’가 더 정확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이번 영상의 ‘하나님의 씨’라는 표현을 스베덴보리의 ‘리메인스’와 연결하여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요한일서의 ‘’를 곧바로 스베덴보리의 리메인스와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 안에 주님께서 선과 진리를 심으시고 보존하시며, 훗날 그것을 통하여 인간을 거듭나게 하신다는 점에서는 아름다운 접점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 받은 사랑, 말씀을 들으며 느꼈던 거룩한 정서, 양심을 따라 선을 행했을 때의 기쁨, 주님과 이웃을 향했던 순수한 마음 등은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의 내면에 보존하십니다. 그리고 거듭남의 과정에서 그것들을 불러내어 사용하십니다.

 

다만 ‘하나님의 씨가 있으면 범죄하지 못한다’는 말을 너무 단순하게 이해하면 자칫 신앙생활의 실제 모습을 놓칠 수 있습니다. 거듭난 사람에게도 시험은 있고 proprium은 계속 고개를 듭니다. 천적 상태에 이르기 전까지 인간에게는 끊임없는 내적 싸움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는 이제 하나님의 사람이므로 죄를 지을 수 없다’는 자기 확신이 아니라, 악이 일어날 때마다 그것이 자기 안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며 물러서는 것입니다. 역설적이게도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선한지를 자랑하기보다 자기 안에는 선한 것이 없고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더욱 깊이 인정하게 됩니다.

 

이 점은 이번 이야기의 핵심과도 맞닿습니다. ‘내 거야’라고 주장하지 않았던 수도사의 모습은 단지 물질에 욕심이 없는 모습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더 어려운 내려놓음은 ‘내가 선하다’는 생각까지 내려놓는 것입니다. 재산을 내려놓는 것은 눈에 보이지만 자기 공로를 내려놓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수도복을 입고 청빈하게 살면서도 ‘나는 세상 사람들과 다르다’, ‘나는 더 거룩하다’, ‘나는 이것을 이루었다’는 마음이 생길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많은 재산과 책임을 가지고 세상 한가운데 살면서도 자신에게 있는 모든 선과 능력이 주님에게서 왔음을 인정하며 이웃을 위해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중요한 것은 외적 형식보다 그 형식 안에 있는 사랑의 질입니다.

 

그러므로 수도원이라는 환경 자체가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의 싸움을 보지 않았다고 해서 마음속의 싸움까지 자동으로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의 악은 단순히 외부에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중심으로 한 내면의 애정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참된 수도는 장소의 격리가 마음의 변화로 이어질 때 의미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보다 자기 안의 ‘내 것’을 얼마나 내려놓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받아들이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이 점에서 ‘싸움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두 수도사’ 이야기는 문자 그대로의 역사적 사실 여부를 떠나 영적 비유로서는 매우 아름답습니다. 우리가 싸움을 멈추는 가장 깊은 방법은 싸움의 기술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싸움을 일으키는 자기중심적 애정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내 것이다’라고 할 때 언제나 ‘그래, 네가 가져라’라고 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불의 앞에서는 진리를 말해야 하고, 약자를 보호해야 하며, 맡겨진 것을 책임 있게 지켜야 합니다. 체어리티는 무조건적인 양보와 동일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사랑 때문에 ‘아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말을 자기 자존심과 승리를 위해 하느냐, 아니면 선과 진리와 이웃의 유익을 위해 하느냐입니다.

 

따라서 참된 평화는 단순히 갈등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의 평화는 주님과의 결합에서 오는 내적 질서입니다. 사람 안에서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바른 질서 아래 둘 때 평화가 찾아옵니다. 그때 사람은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강박에서 조금씩 자유로워집니다. ‘내 말이 맞다는 것을 저 사람이 인정해야 한다’, ‘내가 한 일을 사람들이 알아줘야 한다’, ‘내가 받아야 할 몫을 반드시 받아야 한다’는 마음에서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놀랍게도 이전에는 싸움거리가 되었던 것들이 더 이상 싸움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앞선 ‘사과나무 이야기’가 ‘내가 무엇이 필요한지 안다’는 자기 지혜를 내려놓고 주님의 섭리에 맡기는 이야기였다면, 이번 ‘수도사 싸움’은 ‘내 것’을 내려놓음으로써 싸움 자체가 사라지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두 영상 모두 깊은 곳에서는 proprium을 다룹니다. 하나는 ‘내가 안다’는 proprium이고, 다른 하나는 ‘내 것이다’라는 proprium입니다. 그리고 거듭남은 이 ‘내가 안다’와 ‘내 것이다’가 조금씩 ‘주님께서 아십니다’와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옵니다’로 바뀌어 가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가 인용한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거함이요’라는 말씀은 단순히 ‘하나님의 사람은 죄를 짓지 않는다’는 선언으로 끝나기보다 훨씬 아름다운 방향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람 안에 선과 진리를 심으시고,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여 삶으로 살아갈수록 선은 점차 외부의 명령이 아니라 내면의 사랑이 됩니다. 처음에는 싸우고 싶은데 참습니다. 그다음에는 싸워서 얻을 것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상대의 유익을 자기 유익처럼 기뻐할 수 있는 상태를 향해 갑니다. ‘죄를 참는 사람’에서 ‘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번 ‘수도사 싸움’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담는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거듭남이란 죄를 짓고 싶은 자신을 억지로 눌러 놓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심으신 선과 진리가 삶의 사랑이 되어 마침내 이전에 좋아하던 악을 싫어하고 이전에 힘들어하던 선을 기뻐하게 되는 변화입니다.’

 

그리고 두 수도사가 싸움에 실패한 이유를 조금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이렇습니다. ‘싸울 줄 몰라서 싸우지 못한 것이 아니라, 싸움을 만들어 낼 내 것이 힘을 쓰지 못했기 때문에 싸움이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구해야 할 것도 어쩌면 ‘평생 아무와도 부딪치지 않게 해주십시오’가 아니라 ‘부딪치는 순간에도 제 안의 proprium이 주인이 되지 않게 하시고, 선과 진리와 체어리티가 저를 이끌게 해주십시오’일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 한복판에서도 가능한 수도이며, 주님께서 우리 안에 심으신 ‘’가 마침내 삶의 열매가 되어 가는 길일 것입니다.

 

 

 

SY.76, 강문호 수도사, ‘크리스토포로스, 그리스도를 업고 강을 건넌 수도사’ (20191229)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여덟 번째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성 크리스토포로스에 관한 오래된 기독교 전승을 소개합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일반적으로 성 크리

bygrace.kr

 

SY.73, 강문호 수도사, ‘사과나무와 하나님의 섭리’ (20191222)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한 수도사와 사과나무에 관한 짧은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수도사는 사과를 먹고 싶어 작은 묘목 하나를 심고 정성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