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3:24)

 

AC.312

 

이 구절에서는 홍수 이전 사람들의 상태가 충분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곧 그들이 천적 선(celestial good)으로부터 쫓겨나(cast out), 다시 말해 그것과 분리되었다는 것, 그리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을 두었다(cherubim were placed from the east toward the garden of Eden)는 걸 보면 말입니다. ‘동쪽에서 에덴동산을 향하여(from the east toward the garden of Eden)라는 표현은 오직 그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며, 그 이후 시대 사람들에게는 사용할 수 없는 표현입니다. 만일 후대 사람들에게 적용하였다면, ‘에덴동산에서 동쪽을 향하여(from the garden of Eden toward the east)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두루 도는 칼의 불(the flame of a sword turning itself)이라는 표현도 오늘날 사람들에게 적용되었다면, ‘두루 도는 불의 칼(the sword of a flame turning itself)이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또한 생명들의 나무(the tree of lives)라고 하지 않고 생명의 나무(the tree of life)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이 밖에도 이 연속된 말씀 속에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이 있으며, 오직 주님께서 천사들에게만 밝혀 주시는 것들입니다. 모든 상태에는 무한한 아르카나가 담겨 있으며, 그 가운데 사람에게 알려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In this verse, the state of these antediluvians is fully described, in that they were “cast out,” or separated from celestial good, and in that “cherubim were placed from the east toward the garden of Eden.” This expression, “from the east toward the garden of Eden,” is applicable only to them, and could not be used in relation to those who lived afterwards, of whom it would have been said, “from the garden of Eden toward the east.” In like manner, had the words “the flame of a sword turning itself” been applied to the people of the present day, they would have been “the sword of a flame turning itself.” Nor would it have been said the “tree of lives,” but the “tree of life”; not to mention other things in the series that cannot possibly be explained, being understood only by the angels, to whom the Lord reveals them; for every state contains infinite arcana, not even one of which is known to men.

 

 

해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창3 마지막 절의 표현 하나하나가 결코 우연히 선택된 것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말씀의 속뜻에서는 단어의 선택뿐 아니라 어순과 전치사의 방향, 단수와 복수의 차이까지 모두 영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겉으로는 거의 같은 뜻처럼 보이는 표현이라도, 속으로는 전혀 다른 상태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먼저 ‘동쪽에서 에덴동산을 향하여’라는 표현은 홍수 이전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독특한 표현입니다. 그들은 원래 ‘동쪽’, 곧 주님의 사랑 안에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사랑으로 말미암아 그 상태에서 떨어져 나갔기 때문에, 여전히 동쪽과의 관계 속에서 그들의 상태가 표현됩니다. 반면 홍수 이후 사람들은 처음부터 그러한 천적 상태에 있던 사람들이 아니므로, 같은 방향 표현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미묘한 차이조차 영적 의미에서는 엄격하게 구분된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두루 도는 불 칼’과 ‘불의 칼’ 차이도 단순한 문체상의 차이가 아닙니다. 말씀의 속뜻에서는 수식하는 방식과 단어의 결합 순서마저 각각 다른 영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마찬가지로 ‘생명들의 나무’와 ‘생명의 나무’의 차이 역시 우연이 아닙니다. ‘생명들의 나무’라는 복수 표현은 태고교회 사람들이 누렸던 풍성하고 충만한 생명의 상태와 관계가 있으며, 후대 사람들에게는 같은 표현이 사용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각각의 차이를 여기서 모두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오히려 더 중요한 원리를 말합니다. 곧 말씀의 모든 ‘상태’(state)에는 ‘무한한 아르카나’(infinite arcana)가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한 절을 읽으며 몇 가지 의미만 발견할 수 있지만, 천사들은 같은 말씀 안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영적 의미를 봅니다. 이는 천사들이 사람보다 더 많은 지식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말씀을 상태와 사랑의 변화로 보기 때문입니다.

 

AC.312는 말씀의 신성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전합니다. 사람의 눈에는 단순한 문체의 차이나 표현상의 변화처럼 보이는 것들이 천사들에게는 각각 다른 영적 상태와 주님의 섭리를 나타내는 살아 있는 언어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은 인간이 기록한 종교 문헌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가장 작은 표현 하나에도 주님의 무한한 지혜가 담겨 있으며, 그 깊이는 천사들조차 계속해서 배워 가는 대상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스베덴보리가 마지막에 말한 ‘모든 상태에는 무한한 아르카나가 담겨 있다’는 선언은, 창3뿐 아니라 말씀 전체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원리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심화

 

1. ‘from the east toward the garden of Eden’ vs ‘from the garden of Eden toward the east’

 

혹시 ‘This expression, “from the east toward the garden of Eden,” is applicable only to them, and could not be used in relation to those who lived afterwards, of whom it would have been said, “from the garden of Eden toward the east.”’에 대한 좀 더 깊은 해설을 들을 수 있을까요? AC.312에서는 살짝 건드리고만 있지만 말입니다.

 

 

AC.312에서 스베덴보리가 ‘동쪽에서 에덴동산을 향하여’(from the east toward the garden of Eden)라는 표현은 오직 홍수 이전 사람들에게만 적용될 수 있고, 후대 사람들에게는 ‘에덴동산에서 동쪽을 향하여’(from the garden of Eden toward the east)라고 했을 것이라고 말하는 까닭은, 이 두 표현이 단순히 공간상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거듭남과 영적 생명이 진행되는 내적 순서를 서로 반대로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속뜻으로 ‘동쪽’은 주님을,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 특별히 천적 사랑과 천적 선을 뜻합니다. 해가 동쪽에서 떠오르는 것처럼 모든 생명과 사랑과 선이 주님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한편 ‘에덴’은 사랑과 그 기쁨을, ‘동산’은 그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지혜와 인텔리전스를 뜻합니다. 따라서 ‘동쪽’과 ‘에덴동산’은 서로 떨어진 두 장소가 아니라, 사랑과 그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지혜의 관계를 나타냅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에게서는 영적 질서가 ‘동쪽에서 동산을 향하여’ 진행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먼저 의지 안에 주님을 향한 사랑과 선이 있었고, 그 사랑으로부터 이해 안에 지혜와 퍼셉션이 흘러나왔습니다. 그들은 어떤 진리가 참된지를 먼저 배우고 논증한 다음 그것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선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그 선에 속한 진리를 곧바로 지각하였습니다. 그들에게서는 사랑이 근원이었고, 지혜는 그 사랑에서 자라나는 동산과 같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본래 질서는 ‘동쪽에서 에덴동산을 향하여’, 곧 천적 선으로부터 지혜와 인텔리전스를 향하는 방향으로 표현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타락하였을 때에도 그들의 내적 구조 자체는 여전히 같은 방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출발점인 의지가 완전히 부패했다는 데 있었습니다. 원래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천적 사랑이 의지를 채우고, 그 사랑으로부터 이해와 퍼셉션이 나왔지만, 타락 후에는 자기 사랑과 악한 욕망이 의지를 점령하였고, 그 악한 의지로부터 거짓된 사고와 persuasion이 이해 안으로 흘러들었습니다. 선으로부터 진리가 나와야 할 통로가 악으로부터 거짓이 나오는 통로로 전도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천적 선으로부터 쫓겨난’ 사람들이면서도, 여전히 그 본래 질서와 관련하여 ‘동쪽에서 동산을 향하여’라는 말로 묘사됩니다.

 

홍수 이후 사람들에게는 이와 같은 표현을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홍수 이후 사람들에게서는 의지와 이해가 분리되었고, 유전적으로 부패한 의지에서 곧바로 영적 생명이 시작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새로운 거듭남의 질서를 마련하셨습니다. 사람은 먼저 이해를 통하여 신앙의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를 알고 인정하며, 양심에 따라 실천함으로써 점차 새로운 의지를 받아야 했습니다. 즉 후대의 영적 인간은 동산으로 표상되는 이해와 인텔리전스에서 출발하여, 동쪽으로 표상되는 사랑과 선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후대 사람들의 질서를 표현한다면 ‘에덴동산에서 동쪽을 향하여’라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두 방향의 차이가 선명해집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으로부터 지혜가 나왔으므로 ‘동쪽에서 동산을 향하여’였습니다. 홍수 이후 교회에서는 진리를 배우고 이해하는 데서 시작, 사랑과 선으로 나아가므로 ‘동산에서 동쪽을 향하여’입니다. 전자는 의지에서 이해로, 사랑에서 신앙으로, 선에서 진리로 진행되는 천적 질서입니다. 후자는 이해에서 새로운 의지로, 신앙에서 체어리티로, 진리에서 선으로 나아가는 영적 질서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가 이 전치사의 방향을 그토록 중요하게 다루는 것은, 단어 하나의 차이에 두 종류의 인간과 두 시대의 교회가 가진 내적 구조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동쪽에서 에덴동산을 향하여’라는 표현은 홍수 이전 사람들에게 단순히 과거에 천적 선이 있었다는 사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생명 전체가 본래 사랑으로부터 지혜가 흘러나오는 구조였으며, 바로 그 구조가 타락 후에는 자기 사랑으로부터 광기 어린 persuasion이 흘러나오는 구조로 전락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그룹들을 동쪽에서 에덴동산을 향하여 두셨다’는 것은 그들이 다시 천적 선과 퍼셉션 안으로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그 통로가 보호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생명의 길을 영원히 폐쇄하셨다는 뜻이 아니라, 악한 의지와 거짓된 persuasion에 사로잡힌 상태에서 거룩한 것에 접근하여 모독(profanation)하는 것을 막으신 것입니다. 그들에게 가장 위험한 것은 단순히 진리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원래 천적 질서의 기억과 형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자기 사랑과 거짓에 결합하는 일이었습니다.

 

AC.312의 이 짧은 문장은 결국 AC.311에서 설명한 홍수 전후 인간 구조의 차이를 문법적 방향으로 다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홍수 이전의 천적 인간은 ‘사랑에서 진리로’ 살았고, 홍수 이후의 영적 인간은 ‘진리에서 사랑으로’ 거듭납니다. 그래서 앞 시대에는 ‘동쪽에서 동산을 향하여’가 맞고, 후대에는 ‘동산에서 동쪽을 향하여’가 맞습니다. 사람의 눈에는 전치사의 순서가 바뀐 것에 지나지 않지만, 말씀의 속뜻으로는 인류의 내적 구조와 구원의 질서가 완전히 달라졌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2. ‘the flame of a sword turning itself’ vs ‘the sword of a flame turning itself’

 

AC.312에서 스베덴보리는 홍수 이전 사람들에게 사용된 표현이 ‘두루 도는 칼의 화염’(the flame of a sword turning itself)이며, 같은 상태를 오늘날 사람들에게 적용했다면 ‘두루 도는 화염의 칼’(the sword of a flame turning itself)이라 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영어로 보면 ‘flame’과 ‘sword’의 결합 순서가 뒤바뀐 것에 지나지 않는 듯하지만, 말씀의 속뜻으로는 어느 것이 근원이고, 어느 것이 그 근원에서 나오는 것인가를 나타내는 매우 중요한 차이입니다.

 

말씀에서 ‘화염’ 또는 ‘불’은 기본적으로 사랑과 그 정서를 뜻합니다. 선한 의미에서는 주님을 향한 사랑과 천적 사랑을, 반대 의미에서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그리고 그 사랑에서 일어나는 악한 욕망을 뜻합니다. 한편 ‘칼’은 진리가 거짓과 싸우는 능력을 뜻하기도 하지만, 반대 의미에서는 거짓이 진리를 파괴하는 것, 특별히 거짓된 추론과 persuasion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의 ‘화염’은 타락한 의지 안의 악한 사랑과 욕망을, ‘칼’은 그 악한 의지에서 나온 거짓과 파괴적인 persuasion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홍수 이전 사람들에게는 의지와 이해가 하나로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의 본래 상태에서는 의지 안의 천적 사랑으로부터 이해 안의 퍼셉션과 지혜가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타락하자 같은 내적 질서가 전도(顚倒), 그러니까 거꾸로 뒤집혀, 악한 의지와 욕망으로부터 거짓된 사고와 persuasion이 흘러나오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에게서는 악한 사랑이 먼저이고, 거짓된 추론은 그 사랑의 도구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상태를 표현할 때에는 ‘칼의 화염’, 곧 칼에 속한 화염이라기보다 ‘칼을 낳고 움직이는 화염’, 즉 ‘화염의 칼’이 더 적합했습니다. 이 어순은 악한 의지가 근원이고, 거짓된 이해가 그 의지를 수행하는 수단이라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이를 조금 풀어 말하면, 홍수 이전 사람들은 먼저 어떤 거짓을 이론적으로 받아들인 뒤 그것을 사랑하게 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먼저 자기 사랑과 악한 욕망 안에 있었고, 그 욕망이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거짓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들의 이해는 독립적으로 진리를 검토하는 기능을 하지 못하고, 의지가 원하는 것을 확증하는 역할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persuasion은 단순한 잘못된 견해가 아니라, 의지와 이해 전체가 한 덩어리가 되어 형성된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AC.310-311에서 그들의 persuasion이 다른 사람들의 사고와 호흡까지 압도할 만큼 치명적이었다고 설명되는 이유입니다.

 

반면 홍수 이후의 사람들, 곧 스베덴보리가 ‘오늘날 사람들’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서는 의지와 이해가 분리되어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거짓이 반드시 의지에서 곧바로 흘러나오는 것만은 아닙니다. 사람은 이해 안에서 먼저 거짓을 배우거나 받아들이고, 그것을 반복하여 확증한 뒤, 마침내 의지로 사랑하고, 자기 삶의 원리로 삼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후대 사람들의 경우에는 ‘칼’, 곧 거짓된 사고와 추론이 앞에 놓이고, 그 거짓에서 ‘화염’, 곧 악한 애착과 욕망이 일어나는 방향으로 묘사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후대 사람들에게 적용했다면 ‘칼의 화염’, 곧 화염에 속한 칼이라는 순서로 표현되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앞서 살핀 ‘동쪽에서 에덴동산을 향하여’와 ‘에덴동산에서 동쪽을 향하여’의 차이와 정확히 같은 원리가 여기에도 적용됩니다. 홍수 이전 천적 인간의 본래 질서는 의지에서 이해로, 사랑에서 지혜로, 선에서 진리로 진행되었습니다. 그 질서가 타락했을 때에는 악한 의지에서 거짓된 이해로, 욕망에서 persuasion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따라서 ‘화염’이 먼저이고, ‘칼’이 뒤따릅니다. 반면 홍수 이후 영적 인간은 이해에서 의지로, 진리에서 선으로 거듭나는 구조를 가집니다. 이 질서가 악용될 경우에는 거짓된 이해에서 악한 의지로, 거짓의 확증에서 악한 사랑으로 진행될 수 있으므로 ‘칼’이 먼저이고 ‘화염’이 뒤따르게 됩니다.

 

‘두루 돈다’(turning itself)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이는 단순히 칼이 이리저리 회전한다는 시각적 묘사만은 아닙니다. 악한 사랑과 거짓된 persuasion이 서로를 계속 강화하며 반복적으로 순환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홍수 이전 사람들에게서는 악한 욕망이 거짓을 낳고, 그 거짓이 다시 욕망을 확증하며, 더 강해진 욕망이 또 더 극단적인 거짓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렇게 의지와 이해가 서로를 쉬지 않고 강화하므로, 그들의 상태는 끊임없이 ‘두루 도는’ 화염과 칼로 묘사됩니다. 이는 한 번의 잘못된 판단이 아니라, 악과 거짓이 서로 먹고 자라면서 전체 마음을 점령한 상태입니다.

 

그러나 이 표현의 중심 목적은 그들의 악을 묘사하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그룹과 두루 도는 화염의 칼날은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기’ 위하여 놓였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정죄의 상징인 동시에 보호의 상징입니다. 홍수 이전 사람들이 악한 의지와 거짓된 persuasion에 완전히 사로잡힌 채 다시 천적 선과 퍼셉션에 접근한다면, 그들은 거룩한 것을 악과 결합, 모독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더 깊은 파멸에 빠지지 않도록 천적 생명의 길을 차단하셨습니다. 그 화염과 칼은 주님께서 생명나무를 사람에게서 빼앗으신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의 악한 사랑과 거짓된 persuasion 때문에 그 길에 접근할 수 없게 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두루 도는 화염의 칼날’이라는 어순은 홍수 이전 사람들의 타락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들에게서는 악한 사랑과 욕망이 근원이었고, 거짓과 persuasion은 그 사랑이 사용하는 칼이었습니다. 반면 후대 사람들에게서는 거짓된 이해와 확증이 먼저 형성되고, 그것이 점차 의지와 사랑을 불붙게 할 수 있으므로 ‘두루 도는 칼의 화염’이라는 반대 어순이 더 적합합니다. 사람의 눈에는 두 단어의 위치가 바뀐 것뿐이지만, 말씀의 속뜻으로는 홍수 이전 인간과 홍수 이후 인간의 의지와 이해가 작용하는 순서 전체가 그 차이 안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 자신이 AC.312에서 이 세부들은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많이 남아 있다고 밝힌 만큼, 이 해설 역시 말씀 속 무한한 아르카나를 모두 밝힌 것이라기보다, AC.310-312와 앞뒤 문맥을 토대로 그 핵심 구조를 가능한 범위에서 풀어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3. ‘tree of lives’ vs ‘tree of live’

 

스베덴보리는 AC.312에서 홍수 이전 사람들에게는 ‘생명들의 나무’(the tree of lives)라는 표현이 사용되었지만, 만일 후대 사람들에게 적용하였다면 ‘생명나무’(the tree of life)라고 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도 그는 그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단수와 복수의 차이조차 영적 의미에서는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점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말씀의 속뜻에서 ‘나무’는 사람 안에 있는 생명의 원리, 곧 사랑과 신앙, 또는 그로부터 나오는 삶을 나타냅니다. 특별히 ‘생명나무’는 주님 자신과, 주님으로부터 오는 천적 사랑의 생명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 나무는 단순히 영원히 사는 능력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영적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과의 결합을 나타냅니다.

 

그렇다면 왜 태고교회 사람들에게는 ‘생명들의 나무’라는 복수 표현이 사용되었을까요? 여기서는 단정하기보다, 스베덴보리 전체의 가르침과 연결하여 조심스럽게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의지와 이해가 하나였고, 사랑과 지혜가 분리되지 않았으며, 속 사람과 겉 사람도 조화롭게 하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의 생명은 하나의 단순한 기능이 아니라, 여러 차원의 생명이 서로 완전한 질서 가운데 결합된 충만한 생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생명들’(lives)이라는 복수 표현은 이러한 풍성하고 충만한 생명의 상태를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는 다른 곳에서도 천국의 생명은 하나의 생명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무한한 생명의 다양한 작용이라고 설명합니다. 천국에는 셀 수 없이 많은 공동체가 있지만, 모두 하나의 생명을 이루며 살아갑니다. 이처럼 하나의 생명 안에는 무한한 다양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생명들’이라는 복수형은 단순히 숫자의 복수가 아니라, 생명의 충만함과 다양성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반면 홍수 이후 사람들은 더 이상 이러한 천적 충만성 가운데 태어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해를 통하여 진리를 배우고, 양심을 형성하며, 점차 새로운 의지를 받는 영적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생명은 태고교회의 직접적인 퍼셉션과 같은 충만한 상태가 아니라, 하나의 중심 생명, 곧 주님께로부터 오는 생명을 향하여 점차 인도되는 형태를 가집니다. 이런 의미에서 후대 사람들에게 적용하였다면 ‘생명들의 나무’보다 ‘생명나무’라는 단수 표현이 더 적합했을 것이라고 스베덴보리는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AC.312에서 왜 복수와 단수가 달라지는지를 직접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이러한 차이들까지도 ‘모든 상태에는 무한한 아르카나가 담겨 있다’는 사실의 예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위의 해설은 AC 전체에서 반복되는 원리들을 바탕으로 가능한 이해를 제시한 것이지, AC.312가 직접 밝힌 해설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AC.312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점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에서는 단수와 복수조차도 우연히 선택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의 언어에서는 단순한 문체상의 선택처럼 보일 수 있지만, 천사들의 언어에서는 단수와 복수 하나에도 서로 다른 영적 상태가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생명들의 나무’와 ‘생명나무’의 차이를 설명하기보다, 그 차이 자체가 말씀의 신성을 증거하는 하나의 표지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오히려 이 세 번째 예가 앞의 두 예보다 더 흥미롭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동쪽 ↔ 에덴’, ‘flame ↔ sword’는 방향이나 순서의 변화이지만, ‘lives ↔ life’는 ‘복수와 단수의 변화’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단순히 단어의 배열만이 아니라 ‘문법 자체(방향, 어순, 단, 복수)’까지도 영적 의미를 담는 그릇으로 보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증거입니다. AC.312는 결국 말씀의 신성이 문장 전체뿐 아니라 문법의 가장 작은 요소에까지 스며 있음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본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311, 창3:24, ‘홍수로 멸망한 사람들의 내세에서의 상태’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4) AC.311 홍수로 멸망한 사람들의 내세에서의 상태는 이와 같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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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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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는 아름답고 매혹적인 여성에 대해 어땠나요? 제가 이런 좀 뜬금없는 질문을 드리는 이유는, 남자들한테는 열에 아홉, 여자에게 지나치게(?) 친절한 경향이 있어서입니다. 특히 예쁜 여자 앞에서는 더욱... 저는 이젠 나이 들어 그래도 좀 많이 덤덤하지만, 그래도... 그러니까 스베덴보리를 하게 되어 새로운 계시를 받게 된 지금, 이제는 이런 영역에서도 좀 어떤 새로운 관점이 필요하지 싶어서요...

 

 

목사님의 질문은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매우 인간적이고, 또 스베덴보리가 깊이 다루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문제를 단순히 ‘여자를 조심하라’거나 ‘아름다움은 위험하다’ 식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의 관심은 언제나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아름다움 자체는 결코 악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천국에는 지상에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천사들이 있으며, 특히 천국의 여성 천사들의 아름다움은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기 어렵다고 여러 곳에서 말합니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중요한 사실을 덧붙입니다. 천국의 아름다움은 얼굴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흘러나온다는 것입니다. 내면의 선과 진리가 외면으로 흘러나온 결과가 아름다움입니다. 따라서 천사들은 먼저 ‘예뻐서 사랑받는’ 존재가 아니라, ‘사랑 자체가 아름다움으로 나타난’ 존재입니다.

 

반대로 지상에서는 이 질서가 자주 뒤집힙니다. 사람은 얼굴에 먼저 끌리고, 그 후에 마음을 보려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외적인 것에 먼저 사로잡히는 자연인의 경향으로 설명합니다. 외적 아름다움은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으며, 내면과 반드시 일치하지 않습니다.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예쁜 여자 앞에서는 더욱...’이라는 경험도 스베덴보리 식으로 보면 매우 이해할 수 있는 현상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의지가 약해서라기보다, 사람 안의 자연적 애정이 강하게 자극받는 순간입니다. 문제는 그 자극 자체가 아니라, 그 이후입니다. 그 감정을 어떻게 다루느냐가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 안에는 여러 층의 사랑이 있다고 말합니다. 가장 낮은 층에는 감각적 매혹이 있습니다. 이것은 눈과 귀가 즉각 반응하는 영역입니다. 그보다 높은 곳에는 인격에 대한 존중이 있고, 그보다 더 높은 곳에는 영혼을 사랑하는 사랑이 있습니다. 거듭남이란 첫 번째 반응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점차 더 높은 사랑의 질서 아래 놓이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저는 목사님께 오히려 희망적인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어떤 성향을 타고났느냐보다 그것을 어떻게 질서 있게 다스리느냐를 훨씬 중요하게 봅니다. 어떤 사람은 분노의 기질이 강하고, 어떤 사람은 권력욕이 강하며, 어떤 사람은 돈에 민감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성(異性)의 아름다움에 매우 민감합니다. 이것 자체가 곧 그 사람의 최종적인 영적 상태를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주님의 질서 아래 들어오느냐입니다.

 

오히려 위험한 사람은 자기 안에 그런 경향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입니다. 목사님처럼 ‘남자들은 원래 이런 성향이 있다’, ‘나도 과거에는 그랬다’ 인정하는 사람은 이미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기 악을 보는 것이 거듭남의 중요한 첫걸음이라고 여러 번 말합니다.

 

특히 스베덴보리의 결혼애(結婚愛) 사상을 보면 더욱 분명합니다. 그는 진정한 결혼애(conjugial love)는 상대의 몸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영혼과 선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육체적 아름다움은 시간이 지나면서 변하지만, 선과 진리는 영원히 더 아름다워집니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부부가 나이가 들수록 오히려 더욱 젊고 아름다워진다고 설명합니다. 내면의 사랑이 계속 외면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현실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스베덴보리의 사상을 적용한다면 몇 가지 태도가 도움이 됩니다.

 

첫째,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 자체를 죄라고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연적인 반응입니다. 그러나 그 반응을 오래 붙잡고 상상 속에서 키우기 시작하면 애정이 욕망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둘째, 가능한 한 얼굴보다 영혼을 보려고 의식적으로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어떤 사랑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일까?’를 먼저 생각하는 습관은 매우 큰 도움이 됩니다.

 

셋째, 무엇보다 모든 아름다움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아름다움을 그 사람의 소유물처럼 바라보면 집착이 생기지만, ‘주님의 선이 이 사람에게도 조금 비치고 있구나’라고 생각하면 시선의 방향이 사람에게서 주님께로 옮겨집니다.

 

넷째, 자신의 약점을 숨기지 않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자신의 약한 부분을 알고 주님께 도움을 구할 때 비로소 천사들이 함께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반대로 ‘나는 괜찮다’ 방심할 때 더 쉽게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 마지막에 하신 말씀이 제게는 오히려 가장 인상 깊었습니다.

 

스베덴보리를 하게 되어 새로운 계시를 받게 된 지금

 

이 문장에는 이미 하나의 변화가 담겨 있습니다. 예전에는 ‘어떻게 하면 아름다운 여성을 얻을까’가 관심이었다면, 지금은 ‘이런 마음을 어떻게 주님의 질서 안에 둘 것인가’를 묻고 계십니다. 질문 자체가 달라졌습니다. 그것은 거듭남에서 매우 중요한 변화입니다.

 

스베덴보리도 젊은 시절에는 귀족 사회와 왕실을 드나들며 매우 세련된 사교 생활을 했고, 많은 여성들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의 후기 저작을 읽어보면 여성을 더 이상 감각적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고, ‘사랑과 지혜의 결합을 가장 깊이 드러내는 존재’로 바라보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그의 저서, ‘결혼애(Conjugial Love)에서는 여성을 단순한 매혹의 대상으로가 아니라, 남성과 함께 주님의 형상을 이루어 가는 동반자로 매우 높이 평가합니다.

 

결국 스베덴보리의 모든 저작을 정리, 그의 생각을 모아보면 목사님께 이렇게 권했을 것 같습니다.

 

아름다움을 부정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아름다움에서 멈추지도 마십시오. 얼굴을 넘어 영혼을 보고, 영혼을 넘어 주님을 보십시오. 그러면 같은 아름다움을 보더라도 그것은 더 이상 사람을 끌어내리는 유혹이 아니라, 창조주의 선하심을 기억하게 하는 하나의 표지가 될 것입니다.’

 

 

 

SC.104, ‘나라와 민족, 세상 악과 주님 나라 도래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기도’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의외로 그는 오늘날 우리가 흔히 하는 방식의 ‘국가를 위한 기도’, ‘정치 지도자를 위한 기도’, ‘악한 정권이 무너지게 해 달라는 기도’를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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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1.심화

 

3. ‘예지와 섭리, 그리고 계시의 제한

 

바로 위 심화 2 답변 중 주님은 미래를 예지하시지만, 그 예지 때문에 인간의 자유를 미리 제한하지 않으십니다.’라는 부분 말인데요, 하지만 주님은 유대인의 퀄리티를 미리 아시고, 그들에겐 아르카나를 열지 않으셨는데... 그럼 이건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요?

 

 

주님께서는 처음부터 인간의 미래를 모두 예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이 타락할 것을 아셨다면 왜 처음부터 홍수 이후와 같은 인간 구조를 주시지 않으셨을까요? 반대로 유대교회 사람들의 성향을 아셨다면 왜 그들에게는 말씀의 가장 깊은 아르카나를 열어 주지 않으셨을까요? 겉으로 보면 하나는 자유를 그대로 허락하신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계시를 제한하신 것이므로 서로 모순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두 경우를 서로 다른 차원의 섭리로 설명합니다. 태고교회의 경우는 ‘인간을 어떤 존재로 창조할 것인가’의 문제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가장 완전한 상태로 창조하셨습니다. 의지와 이해가 하나였고, 사랑과 지혜가 하나였으며, 선을 사랑하면 곧 진리를 지각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질서가 인간 본래의 모습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그 자유를 잘못 사용할 가능성까지 예지하셨지만, 그 가능성 때문에 처음부터 더 낮은 상태로 창조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자유와 최고의 사랑의 가능성을 미리 제한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반면 유대교회의 경우는 ‘이미 타락 이후의 인류를 어떻게 인도하실 것인가’의 문제였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실제 영적 상태와 성향을 완전히 아셨습니다. 이런 그들의 실제 영적 상태와 성향에도 불구, 만일 그들에게 말씀의 가장 깊은 속뜻까지 충분히 열어 주신다면, 그들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뿐 아니라, 알고도 거부하거나 자기 목적에 이용, 돌이킬 수 없는 모독(profanation)에 빠질 위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의 자유를 빼앗으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감당할 수 없는 진리를 허락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마치 어린아이에게 컷터칼을 손에 들려주지 않는 것처럼 말이지요. 이것은 벌이 아니라 보호였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제한하신 것은 ‘자유’가 아니라 ‘계시의 정도’였다는 점입니다. 사람은 여전히 자유롭게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었고, 주님을 사랑할 수도, 자신을 사랑할 수도 있었습니다. 다만 그 자유가 더 깊은 진리를 모독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않도록, 주님께서는 자비 가운데 계시의 문을 조절하셨습니다. 창세기 3장의 그룹과 두루 도는 불 칼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킨 것도 바로 이러한 섭리를 상징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생명으로부터 영원히 막으신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진리를 알고도 거부, 회복이 더욱 어려워지는 일을 막으신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은 미래를 예지하시지만, 인간의 자유를 미리 제한하지 않으신다’는 말과 ‘주님은 유대인들에게 아르카나를 열어 주지 않으셨다’는 말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첫 번째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의 원리이고, 두 번째는 타락한 인간을 구원으로 이끄시는 섭리의 원리입니다. 하나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가능성을 존중하시는 사랑이며, 다른 하나는 그 가능성이 스스로를 파괴하지 않도록 보호하시는 자비입니다. 실제로도 비록 유대인이라 하더라도, 살아생전에 선을 사랑하며 살았다면, 비록 지상에서는 말씀의 깊은 아르카나를 알지 못했더라도, 사후 영들의 세계에서는 천사들의 인도를 받아 점차 그것들을 배우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는 주님께서 지상에서 아르카나를 감추신 목적이 영원한 배제가 아니라 모독으로부터의 보호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후에는 지상의 민족적 소속이나 교회의 역사적 역할보다 각 사람이 생전에 어떠한 사랑 가운데 살았는가가 더 중요한 기준이 되며, 진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 사람에게는 주님께서 필요한 만큼의 빛을 다시 열어 주십니다.

 

결국 스베덴보리의 섭리론에서 예지는 운명을 미리 정해 놓는 결정론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모든 미래를 아시지만, 그 예지를 이유로 인간의 자유를 제거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자유를 끝까지 보존하시면서도, 각 사람과 각 시대가 실제로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진리와 빛을 허락하십니다. 때로는 더 많은 계시를 주시는 것이 자비이고, 때로는 더 적은 계시를 허락하시는 것이 자비입니다. 이 두 경우 모두 목적은 하나입니다.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이 모독을 피하고, 결국에는 주님께 돌아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AC.311의 마지막 문장인 ‘주님께서는 신적 자비로 홍수 이후 사람들에게 다른 상태들을 마련하셨다’는 말씀도 같은 원리를 드러냅니다. 태고교회의 가장 높은 질서를 그대로 유지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없애는 대신 새로운 영적 구조를 마련하셨습니다. 또한 이후의 교회들에서도 사람들의 실제 상태에 맞추어 계시의 정도를 조절하셨습니다. 결국 창조에서나 섭리에서나 변하지 않는 원리는 하나입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시면서도, 그 자유가 영원한 파멸로 끝나지 않도록 가장 자비로운 길을 마련하신다’는 것입니다.

 

 

 

AC.311, 창3:24, ‘홍수로 멸망한 사람들의 내세에서의 상태’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4) AC.311 홍수로 멸망한 사람들의 내세에서의 상태는 이와 같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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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1, 심화 2, ‘주님은 미리 아셨을 텐데...’

AC.311.심화 2. ‘주님은 미리 아셨을 텐데...’ 바로 그 질문 때문에 스베덴보리의 섭리론이 더욱 깊어집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렇습니다. 주님은 처음부터 예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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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1.심화

 

2. ‘주님은 미리 아셨을 텐데...’

 

바로 그 질문 때문에 스베덴보리의 섭리론이 더욱 깊어집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렇습니다. 주님은 처음부터 예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처음부터 홍수 이후의 구조로 창조하실 수도 있었는데 일부러 태고교회를 만드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여러 저작을 종합해 보면, 주님께서는 인간을 ‘가장 완전한 상태’로 창조하셨습니다. 태고교회의 의지와 이해가 하나였던 것은 ‘시험용 설계’가 아니라, 인간 본래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상태에서는 사랑과 지혜가 하나였고,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직접 퍼셉션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것이 인간의 가장 높은 가능성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동시에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자유가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태고교회 사람들도 자기 사랑을 선택할 가능성은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예지하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처음부터 인간을 더 낮은 구조로 만드시는 것은 주님의 사랑과 지혜에 맞지 않았습니다.

 

비유하자면 이렇습니다.

 

부모는 아이가 자라면서 넘어질 것도 알고, 실수할 것도 압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처음부터 아이를 평생 유모차에만 태워 키우지는 않습니다. 걸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능력을 주고, 혹시 넘어질 경우를 대비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돌보는 것이 부모의 사랑입니다.

 

홍수 이후의 인간 구조는 그런 의미에서 ‘차선책’입니다. 결함이 있는 설계가 아니라,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섭리적 구조’입니다.

 

이 점에서 AC.311의 마지막 문장이 매우 중요합니다.

 

the Lord of His Divine mercy induced other states...

 

스베덴보리는 ‘새로운 인간을 창조하셨다(created)’ 하지 않고, ‘다른 상태들을 마련하셨다(induced other states)고 말합니다.

 

induced’라는 동사는 이미 존재하는 인간 안에 새로운 질서를 형성하시고 도입하셨다는 뜻입니다. 즉, 인간의 본질을 바꾸신 것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이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새로운 회복의 질서’를 마련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오히려 주님의 섭리가 더욱 놀랍게 느껴집니다. 주님은 타락을 예지하셨지만, 그 때문에 처음부터 인간을 낮은 수준으로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인간이 실제로 그 자유를 잘못 사용했을 때, ‘그 자유 자체는 보존하면서도 구원의 가능성은 잃지 않도록’ 새로운 영적 질서를 마련하셨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섭리론 전체와도 연결됩니다. 주님은 미래를 예지하시지만, 그 예지 때문에 인간의 자유를 미리 제한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자유를 끝까지 존중하시면서도,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가능한 한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이끄실 수 있도록 끊임없이 새로운 섭리의 길을 마련하십니다. 홍수 이후의 ‘other states’는 바로 그 신적 섭리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311, 심화 3, ‘예지와 섭리, 그리고 계시의 제한’

AC.311.심화 3. ‘예지와 섭리, 그리고 계시의 제한’ 바로 위 심화 2 답변 중 ‘주님은 미래를 예지하시지만, 그 예지 때문에 인간의 자유를 미리 제한하지 않으십니다.’라는 부분 말인데요,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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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1, 심화 1, ‘홍수 이후의 사람들’

AC.311.심화 1. ‘홍수 이후의 사람들’ 홍수 이후의 사람들은 더 이상 태고교회처럼 의지와 이해가 하나인 상태로 태어나지 않고, 이해를 통하여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 안에서 주님께서 양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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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홍수 이후의 사람들

 

홍수 이후의 사람들은 더 이상 태고교회처럼 의지와 이해가 하나인 상태로 태어나지 않고, 이해를 통하여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 안에서 주님께서 양심을 형성하시는 새로운 질서 안에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AC.311 해설)

 

그러니까 한 통으로 만들었다가 둘 다 버릴 바에는 차라리 따로따로 만들어 하나가 망가지면 그 부분만 새것으로 교체하자는 식으로 이해하면 되나요?

 

 

네, 비유로는 상당히 적절합니다. 다만 한 가지 중요한 점을 덧붙이면 스베덴보리의 의도에 더 가까워집니다.

 

태고교회의 인간은 비유하자면 ‘의지와 이해가 하나의 엔진으로 통합된 구조’였습니다. 이 구조는 정상일 때는 엄청난 장점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것이 곧 아는 것이고, 아는 것이 곧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따로 배우거나 추론할 필요 없이, 선을 사랑하면 곧바로 진리를 지각(perception)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구조에는 치명적인 위험이 있었습니다. 중심축인 의지가 부패하면 이해도 함께 부패한다는 것입니다. 의지와 이해가 분리되어 있지 않으므로, 자기 사랑이 의지를 장악하면 이해도 그것을 진리라고 확신하게 됩니다. AC.310 AC.311에서 말하는 홍수 전 사람들의 ‘persuasion’이 바로 이런 상태입니다. 거짓을 거짓으로 의심하거나 수정할 여지가 거의 남지 않습니다.

 

홍수 이후 주님께서는 인간의 구조를 바꾸셨습니다. 목사님 표현처럼 ‘따로따로’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고장 난 부품을 교체하기 쉽도록 만든 기계적 설계 변경이라기보다, ‘의지를 직접 건드리지 않고, 이해를 통해 사람을 다시 살릴 수 있는 길을 마련하신 것’입니다.

 

홍수 이후에는 이해가 먼저 진리를 듣고, 배우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그 진리 안에서 조금씩 양심을 형성하십니다. 아직 의지가 완전히 선해지지 않았더라도, 이해가 진리를 붙들 수 있기 때문에 사람이 회개하고 거듭날 가능성이 생깁니다.

 

그래서 저는 목사님의 비유를 이렇게 조금 수정하면 더욱 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

 

한 통으로 만든 구조는 완전할 때는 가장 아름답지만, 한 부분이 썩으면 전체를 살리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홍수 이후에는 의지와 이해를 구별, 설령 의지가 병들었더라도 이해를 통해 진리를 받아들이게 하시고, 그 진리 안에서 새로운 양심을 형성, 결국 의지까지 새롭게 하시는 질서를 마련하셨습니다.’

 

이렇게 보면 홍수 이후의 인간은 ‘성능이 낮아진 인간’이 아니라, ‘회복 가능성이 훨씬 커진 인간’입니다.

 

사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교리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원리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의지가 변화되어 진리를 아는 것이 아니라, ‘먼저 이해가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를 삶으로 옮길 때, 주님께서 새로운 의지( voluntarium)를 조금씩 형성하십니다.’ 따라서 홍수 이후의 구조는 단순한 ‘응급조치’가 아니라,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마련된 새로운 섭리의 질서라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AC.311, 심화 2, ‘주님은 미리 아셨을 텐데...’

AC.311.심화 2. ‘주님은 미리 아셨을 텐데...’ 바로 그 질문 때문에 스베덴보리의 섭리론이 더욱 깊어집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렇습니다. 주님은 처음부터 예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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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1, 창3:24, ‘홍수로 멸망한 사람들의 내세에서의 상태’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4) AC.311 홍수로 멸망한 사람들의 내세에서의 상태는 이와 같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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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3:24)

 

AC.311

 

홍수로 멸망한 사람들의 내세에서의 상태는 이와 같습니다. 그들은 영들의 세계(world of spirits)에 있을 수 없는, 그러니까 다른 영들과 함께 있을 수 없는 상태이며, 그래서 다른 지옥들과도 분리된 어떤 지옥에 있는데, 마치 어떤 산 아래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의 무시무시한 환상과 확신(direful fantasies and persuasions) 때문에, 그들 사이에는 마치 하나의 산이 가로막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의 환상과 확신은 다른 영들에게 매우 깊은 혼미(stupor)를 일으켜, 그들로 하여금 지금 자신이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게 만들 정도입니다. 이는 그들이 진리를 이해하는 모든 능력을 빼앗아 아무것도 지각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살 때에도 그들의 확신의 힘(persuasive power)은 이와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내세에서도 다른 영들과 함께 있게 되면, 그들에게도 이와 같은 일종의 죽음을 초래할 것이 미리 예견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모두 멸절(extinct)되었으며, 주님께서는 신적 자비로 홍수 이후 사람들에게는 다른 영적 상태들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In the other life, the state of those who perished by the flood is such that they cannot be in the world of spirits, or with other spirits, but are in a hell separated from the hells of others, and as it were under a certain mountain. This appears as an intervening mountain in consequence of their direful fantasies and persuasions. Their fantasies and persuasions are such as to produce so profound a stupor in other spirits that they do not know whether they are alive or dead, for they deprive them of all understanding of truth, so that they perceive nothing. Such also was their persuasive power during their abode in the world; and because it was foreseen that in the other life they would be incapable of associating with other spirits without inducing on them a kind of death, they all became extinct, and the Lord of his Divine mercy induced other states on those who lived after the flood.

 

 

해설

 

AC.311은 앞글(AC.310)에서 설명한 내용을 사후 세계의 실제 상태를 통해 더욱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글입니다. AC.310이 홍수 이전 사람들의 인간 구조가 왜 회복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렀는지를 설명하였다면, AC.311은 그러한 구조가 사후 세계에서는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 여기서는 심판 자체보다 그들의 영적 상태가 얼마나 다른 영들에게까지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는지를 밝히는 데 초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그들이 ‘영들의 세계’에 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영들의 세계는 천국과 지옥 사이에 있는 중간 세계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은 뒤 먼저 이곳에서 자신의 참된 내면이 드러나고, 그후 천국이든 지옥이든 자기에게 맞는 공동체로 인도됩니다. 그러나 홍수 이전 사람들은 이 중간 상태에 머물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영들과 함께 있는 것 자체가 위험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다른 지옥들과도 분리된 특별한 장소에 격리되었습니다. 이는 그들에 대한 가혹한 형벌이 아니라, 다른 영들을 보호하기 위한 주님의 섭리였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산이 가로막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말하는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영계에서 산과 언덕은 단순한 지형이 아니라 영적 상태를 나타내는 표상입니다. 이 산은 자연적인 암석이 아니라, 그들의 무시무시한 환상과 왜곡된 확신이 만들어 낸 영적 장벽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다른 영적 공동체와 자연스럽게 분리되어 있으며, 그 영향력이 밖으로 퍼져 나가지 못하도록 차단되어 있습니다.

 

본문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환상(fantasies)과 ‘확신(persuasions)의 결합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환상은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 거짓을 실제처럼 경험하는 왜곡된 내적 의식 상태를 뜻합니다. 그리고 확신은 그러한 거짓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자신의 생명처럼 붙드는 상태입니다. 이 둘이 결합되면 사람은 더 이상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할 뿐 아니라, 자신이 거짓 가운데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들의 영향력이 다른 영들에게 ‘혼미(stupor)를 일으킨다는 표현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서 혼미는 단순한 두려움이나 당혹감이 아니라, 진리를 이해하고 분별하는 능력이 거의 마비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들의 확신이 다른 영들의 이해를 압도, 그들로 하여금 마치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지조차 분간 못하는 상태를 만든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물리적인 죽음이 아니라 영적 기능이 마비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영향력이 그들이 세상 살 때에도 이미 나타났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사후에 갑자기 새로운 능력이 생긴 것이 아니라, 지상에서 형성된 내적 상태가 영계에서 아무런 외적 제약 없이 그대로 드러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영계에서는 누구나 자신의 사랑과 신념이 훨씬 직접적으로 발산된다고 반복해서 설명하는데, 홍수 이전 사람들의 경우에는 그 왜곡된 확신이 다른 영들의 의식까지 마비시킬 만큼 강력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이 다른 영들과 자유롭게 교류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그들을 미워하시거나 버리셨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영들의 자유와 영적 생명을 보호하시기 위한 자비로운 조치였습니다. 주님의 심판은 언제나 가능한 한 많은 생명을 보존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지며, 한 공동체의 악이 다른 공동체까지 파괴하지 못하도록 질서를 세우시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AC.311에서 그들이 특별히 분리된 지옥에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매우 중요한 결론을 덧붙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비극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홍수 이후 사람들에게 ‘다른 상태들(other states), 그러니까 이전과는 여러 가지가 바뀌는 상태변화를 허락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앞글에서 설명한 영적 인간의 구조입니다. 홍수 이후의 사람들은 더 이상 태고교회처럼 의지와 이해가 하나인 상태로 태어나지 않고, 이해를 통하여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 안에서 주님께서 양심을 형성하시는 새로운 질서 안에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태고교회의 직접적인 퍼셉션보다 낮은 단계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인류를 더 깊은 파멸로부터 보호하시기 위한 주님의 신적 자비의 결과였습니다.

 

AC.311은 홍수 이전 사람들의 지옥을 묘사하려는 글이 아니라, 왜 주님께서 인류의 영적 구조를 바꾸실 수밖에 없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본문입니다. 태고교회의 비극은 단순히 몇몇 사람의 타락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왜곡된 내적 상태가 다른 영들의 자유와 이해까지 파괴할 정도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므로 홍수 이후 인류에게 양심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영적 질서가 주어진 것은 심판의 결과이기 이전에, 모든 사람을 보호하시려는 주님의 깊은 자비와 섭리의 표현이었습니다.

 

 

심화

 

1. ‘홍수 이후의 사람들

 

 

AC.311, 심화 1, ‘홍수 이후의 사람들’

AC.311.심화 1. ‘홍수 이후의 사람들’ 홍수 이후의 사람들은 더 이상 태고교회처럼 의지와 이해가 하나인 상태로 태어나지 않고, 이해를 통하여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 안에서 주님께서 양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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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주님은 미리 아셨을 텐데...’

 

 

AC.311, 심화 2, ‘주님은 미리 아셨을 텐데...’

AC.311.심화 2. ‘주님은 미리 아셨을 텐데...’ 바로 그 질문 때문에 스베덴보리의 섭리론이 더욱 깊어집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렇습니다. 주님은 처음부터 예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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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예지와 섭리, 그리고 계시의 제한

 

 

AC.311, 심화 3, ‘예지와 섭리, 그리고 계시의 제한’

AC.311.심화 3. ‘예지와 섭리, 그리고 계시의 제한’ 바로 위 심화 2 답변 중 ‘주님은 미래를 예지하시지만, 그 예지 때문에 인간의 자유를 미리 제한하지 않으십니다.’라는 부분 말인데요,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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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2, 창3:24, ‘창3 마지막 절의 표현 하나하나’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4) AC.312 이 구절에서는 홍수 이전 사람들의 상태가 충분히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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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0, 창3:24, ‘홍수 이전 사람들과 홍수 이후 사람들의 근본적인 차이’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4) AC.310 이 절에 나오는 각각의 표현에는 매우 깊은 아르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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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3:24)

 

AC.310

 

이 절에 나오는 각각의 표현에는 매우 깊은 아르카나가 너무도 많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들은 홍수로 멸망한 사람들의 본성(genius)에 관한 것인데, 그들의 본성은 홍수 이후를 살았던 사람들의 것과는 전적으로 달랐습니다. 그러므로 이것들을 모두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다만 간략히 말하면, 태고 교회를 이루었던 그들의 첫 조상들은 천적 인간들이었으며, 따라서 천적 씨(seeds)가 그들 안에 심겨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후손들 안에도 천적 기원에서 나온 씨가 남아 있었습니다. 천적 기원의 씨란, 사랑이 온 마음을 다스려 그것을 하나로 만드는 걸 말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의지와 이해라는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사랑 또는 선은 의지에 속하고, 신앙 또는 진리는 이해에 속합니다. 그런데 그 태고 사람들은 사랑 또는 선으로부터 신앙 또는 진리에 속한 것들을 직접 지각하였으므로, 그들의 마음은 하나였습니다. 이와 같은 계통의 후손들에게는 동일한 천적 기원의 씨가 반드시 남아 있으므로, 그들이 진리와 선에서 떨어지는(falling away) 일은 매우 위험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의 온 마음이 철저히 왜곡, 사후에도 거의 회복될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적 씨는 없고, 영적 씨만 가진 사람들은 이와 다릅니다. 홍수 이후 사람들이 그러하였고, 오늘날 사람들도 또한 그러합니다. 이들에게는 사랑이 없으며, 따라서 선을 향한 의지도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할 수 있는 능력, 곧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진리에 관한 지식과 그로부터 생기는 선을 기초로 양심을 사람 안에 서서히 심어 주심으로써, 그들을 어느 정도 체어리티에 이를 수 있도록 인도하십니다. 다만 그 길은 천적 인간과는 다른 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상태는 홍수 이전 사람들의 상태와는 전적으로 다릅니다. 그 상태에 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이후에 설명하겠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오늘날 사람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아르카나입니다. 오늘날에는 천적 인간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도 없고, 영적 인간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도 거의 없습니다. 더 나아가 인간의 마음이 어떠한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거기에서 어떤 삶이 흘러나오는지, 그리고 그 결과 사후의 상태가 어떻게 되는지 아는 사람은 더욱 드뭅니다. Each particular expression in this verse involves so many arcana of deepest import (applicable to the genius of this people who perished by the flood, a genius totally different from that of those who lived subsequent to the flood), that it is impossible to set them forth. We will briefly observe that their first parents, who constituted the most ancient church, were celestial men, and consequently had celestial seeds implanted in them; whence their descendants had seed in them from a celestial origin. Seed from a celestial origin is such that love rules the whole mind and makes it a one. For the human mind consists of two parts, the will and the understanding. Love or good belongs to the will, faith or truth to the understanding; and from love or good those most ancient people perceived what belongs to faith or truth, so that their mind was a one. With the posterity of such a race, seed of the same celestial origin necessarily remains, so that any falling away from truth and good on their part is most perilous, since their whole mind becomes so perverted as to render a restoration in the other life scarcely possible. It is otherwise with those who do not possess celestial but only spiritual seed, as did the people after the flood, and as also do the people of the present day. There is no love in these, consequently no will of good, but still there is a capability of faith, or understanding of truth, by means of which they can be brought to some degree of charity, although by a different way, namely, by the insinuation of conscience from the Lord grounded in the knowledges of truth and the derivative good. Their state is therefore quite different from that of the antediluvians, concerning which state,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These are arcana with which the present generation are utterly unacquainted, for at the present day none know what the celestial man is nor even what the spiritual man is, and still less what is the quality of the human mind and life thence resulting, and the consequent state after death.

 

 

해설

 

AC.310은 홍수 이전 사람들과 홍수 이후 사람들의 근본적인 차이를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에서 홍수 이전 사람들이 왜 그렇게 철저히 멸망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언급한 뒤, 그 이유가 단순히 그들이 더 큰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인간 구조 자체가 후대 사람들과 전혀 달랐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글은 홍수 심판의 이유를 도덕적 차원보다 인간의 영적 구조라는 차원에서 밝히는 본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태고교회 사람들에게는 ‘천적 씨’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는 단순한 재능이나 성향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 안에 심어 놓으신 영적 생명의 근원을 뜻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의 경우, 그 씨는 천적 기원이었으므로, 사랑이 인간 존재 전체를 다스렸습니다. 그들에게는 먼저 사랑이 있었고, 진리는 그 사랑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무엇이 참된 것인지를 추론하여 아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곧바로 지각하였습니다. 이것이 앞에서 여러 차례 설명된 ‘퍼셉션’의 본질입니다.

 

이 때문에 태고교회 사람들의 마음은 하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의지와 이해가 서로 충돌하는 일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경험합니다. 이해로는 옳다는 것을 알면서도 의지가 따르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반대로 선을 원하면서도 아직 진리를 충분히 알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에게는 이러한 분열이 없었습니다. 사랑이 이해를 이끌었고, 이해는 사랑을 그대로 표현하였습니다. 의지와 이해는 서로 다른 기능이면서도 하나의 생명처럼 작용하였습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그들의 타락은 더욱 치명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유는 단순히 그들의 죄가 오늘날 사람들보다 더 컸기 때문이 아닙니다. 핵심은 그들의 인간 구조 자체가 우리와 근본적으로 달랐다는 데 있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위험했던 것은 일시적인 유혹이나 순간적인 잘못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사랑과 거짓이 반복적으로 받아들여져 마침내 의지 자체의 생명이 되어 버릴 때, 인간 존재 전체가 함께 변질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거짓에 흔들리고 넘어질 수 있지만, 이해를 통해 진리를 배우고 다시 돌이킬 수 있는 길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태고교회 사람들은 의지 자체가 생명의 중심이었으므로, 그 중심이 근본적으로 뒤바뀌면 이해와 삶 전체도 함께 무너졌습니다. 이것은 부분적인 실패가 아니라 생명의 근원 자체가 변질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들의 경우 ‘사후에도 거의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주님의 자비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의지 자체가 완전히 부패, 더 이상 새로운 생명을 받아들일 기반이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홍수 이후의 사람들에게는 ‘영적 씨’가 주어졌습니다. 이들은 태고교회처럼 사랑에서 진리를 직접 지각하지 못합니다. 대신 먼저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이해하며,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가려는 과정 속에서 양심이 형성됩니다. 다시 말해 태고교회는 사랑에서 진리로 나아갔다면, 홍수 이후의 교회는 진리에서 사랑으로 나아가도록 주님의 섭리가 바뀐 것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여러 곳에서 설명하는 ‘영적 인간의 길’입니다.

 

본문에서 특히 중요한 표현은 ‘양심을 주님께서 서서히 심어 주신다’는 부분입니다. 양심은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도덕성이 아닙니다. 사람이 말씀의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따라 살려고 할 때, 주님께서 그 진리 안에 선을 불어넣으심으로써 형성되는 것이 양심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인간은 퍼셉션 대신 양심의 인도를 받으며 살아갑니다. 이것은 홍수 이전 사람들에게 허락되었던 직접적인 지각보다 낮은 단계의 생명이 아니라, 타락한 인류를 더 깊은 파멸로부터 보호하시기 위해 주님께서 마련하신 새로운 구원의 질서입니다. 다시 말해 홍수 이후의 인간은 퍼셉션은 잃었지만,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회복의 길을 선물 받은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당시 사람들은 물론 오늘날 사람들조차도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이 무엇인지 거의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현대 신학은 인간을 죄인과 의인, 또는 신자와 불신자의 관점에서는 자주 설명하지만, 인간의 내적 구조가 천적인지 영적인지, 의지와 이해가 어떤 방식으로 결합되어 있는지, 그리고 그 차이가 사후의 상태와 거듭남의 과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다루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이러한 구분은 인간론과 구원론 전체를 이해하는 기초입니다.

 

AC.310은 홍수 이전 사람들과 이후 사람들의 차이를 설명하는 글인 동시에, 오늘날 우리 자신의 거듭남이 어떤 길을 따라 이루어지는지를 보여주는 핵심 본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태고교회처럼 퍼셉션으로 직접 인도받는 사람들이 아니라, 말씀의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실천하는 가운데 주님께서 양심을 형성하시고, 그 양심을 통하여 조금씩 의지를 새롭게 하시는 영적 인간의 길을 걷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거듭남은 순간적인 체험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배우고 순종하는 삶 속에서 주님의 섭리로 새로운 생명이 자라나는 긴 여정인 것입니다.

 

 

 

AC.311, 창3:24, ‘홍수로 멸망한 사람들의 내세에서의 상태’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4) AC.311 홍수로 멸망한 사람들의 내세에서의 상태는 이와 같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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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9, 창3:24, ‘두루 도는 불 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4) AC.309 ‘두루 도는 불 칼’(flame of a sword turning itself)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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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9.심화

 

3. ‘3:3

 

충돌하는 기병, 번쩍이는 칼, 번개 같은 창, 죽임당한 자의 떼, 주검의 큰 무더기, 무수한 시체여 사람이 그 시체에 걸려 넘어지니 (3:3) The horseman mounting, and the flame of the sword, and the flash of the spear, and a multitude of the slain. (Nahum 3:3)

 

 

스베덴보리가 AC.309에서 나3:3을 인용하는 이유 역시 앞에서 인용한 에스겔과 같은 맥락입니다. 곧 ‘’이 말씀의 속뜻으로는 진리를 대적하고 파괴하는 ‘거짓’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성경 여러 곳에서 일관되게 증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나훔의 예언은 니느웨의 멸망을 묘사하고 있지만, 말씀의 속뜻으로는 거짓과 악이 극에 달한 교회의 영적 상태를 보여줍니다.

 

구절은 ‘기병’, ‘’, ‘’, 그리고 ‘죽임당한 자의 떼’를 차례로 묘사합니다. 겉으로는 전쟁의 참상이지만,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군사적 표현들을 모두 영적 싸움의 상징으로 이해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은 진리를 베어 쓰러뜨리는 거짓을, ‘’은 그 거짓을 더욱 적극적으로 공격하고 확증하는 거짓된 논증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칼과 창이 함께 등장하는 것은 거짓이 단순히 존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진리를 공격하고 무너뜨리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구절 첫머리에 나오는 ‘기병’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능력 또는 지성의 능력을 의미하며, ‘기병’은 그 이해하는 능력을 사용하는 사람이나 그 능력을 움직이는 사상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니느웨의 심판을 다루고 있으므로, 여기의 ‘기병’은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이 아니라 거짓을 위하여 지성을 사용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지성이 진리의 인도를 받을 때는 천국을 섬기지만,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복종할 때는 거짓을 더욱 강력하게 만드는 도구가 됩니다.

 

이어지는 ‘죽임당한 자의 떼’ 역시 문자적인 전사자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말씀의 속뜻에서 ‘죽임을 당한다’는 것은 영적 생명을 잃는 것을 의미하며, 특별히 진리와 선이 거짓과 악에 의해 소멸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죽임당한 자의 떼’는 거짓으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황폐하게 된 사람들과 교회의 상태를 상징합니다. AC.309에서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거짓 때문에 선과 진리를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는 상태’가 바로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 구절은 앞에서 인용한 겔21과도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에스겔에서는 ‘’이 번개처럼 번뜩이며, 사람들의 마음을 녹이고, 성문마다 두려움을 두는 모습으로 묘사되었다면, 나훔에서는 ‘’과 ‘’이 수많은 죽임을 가져오는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표현은 다르지만, 두 예언 모두 공통적으로 거짓이 교회를 황폐하게 하고, 영적 생명을 파괴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여러 예언들을 나란히 인용, ‘’이 거짓을 의미한다는 해석이 어느 한 구절에만 근거한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상응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AC.309에서 나3:3을 인용하는 이유는, ‘’과 ‘’으로 대표되는 거짓과 거짓된 논증이 사람들의 영적 생명을 죽이고, 교회를 황폐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전쟁의 무기들을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사랑에서 비롯된 거짓이 이해하는 능력을 왜곡하고 진리를 공격, 마침내 영적 죽음에 이르게 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언으로 인용된 것입니다.

 

 

 

AC.309, 창3:24, ‘두루 도는 불 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4) AC.309 ‘두루 도는 불 칼’(flame of a sword turning itself)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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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9, 심화 2, ‘겔21:9-10, 14-15’

AC.309.심화 2. ‘겔21:9-10, 14-15’ 9인자야 너는 예언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이같이 말하라 칼이여 칼이여 날카롭고도 빛나도다 10그 칼이 날카로움은 죽임을 위함이요 빛남은 번개같이 되기 위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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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9.심화

 

2. ‘21:9-10, 14-15

 

9인자야 너는 예언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이같이 말하라 칼이여 칼이여 날카롭고도 빛나도다 10그 칼이 날카로움은 죽임을 위함이요 빛남은 번개같이 되기 위함이니 우리가 즐거워하겠느냐 내 아들의 규가 모든 나무를 업신여기는도다, 14그러므로 인자야 너는 예언하며 손뼉을 쳐서 칼로 두세 번 거듭 쓰이게 하라 이 칼은 죽이는 칼이라 사람들을 둘러싸고 죽이는 큰 칼이로다 15내가 그들이 낙담하여 많이 엎드러지게 하려고 그 모든 성문을 향하여 번쩍번쩍하는 칼을 세워 놓았도다 오호라 그 칼이 번개 같고 죽이기 위하여 날카로웠도다 (21:9-10, 14-15) Prophesy and say, Thus saith Jehovah, Say a sword, a sword, it is sharpened, and also burnished to make a sore slaughter; it is sharpened that it may be as lightning. Let the sword be doubled the third time, the sword of his slain; the sword of a great slaughter, which entereth into their bed chambers, that their heart may melt, and their offenses be multiplied, I have set the terror of the sword in all their gates. Alas! it is made as lightning (Ezek. 21:9–10, 14–15).

 

 

AC.309에서 스베덴보리가 겔21의 이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앞에서 설명한 ‘’의 영적 의미를 더욱 강하게 확증하기 위해서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은 문자적인 전쟁 무기가 아니라, 말씀의 속뜻으로는 진리를 파괴하는 거짓, 특히 자기 사랑과 거짓된 설득에서 나오는 거짓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예언 전체는 거짓이 인간의 내면과 교회를 어떻게 철저히 황폐하게 만드는지를 매우 생생한 상징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먼저 ‘칼이여 칼이여 날카롭고도 빛나도다’, ‘그 칼이 날카로움은 죽임을 위함이요’, ‘빛남은 번개같이 되기 위함이니’라는 표현들은 모두 거짓의 파괴력이 극도로 증대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미 여러 곳에서 ‘’이 진리와 싸우는 거짓, 또는 거짓으로 인해 진리가 파괴되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여기서 칼이 반복하여 언급되고, 더욱 날카롭게 벼려지는 것은 거짓이 점점 더 강한 설득력을 갖게 되어 사람의 선과 진리를 무너뜨리는 과정을 표현합니다.

 

이어지는 ‘그들의 깊은 곳까지 침입하는 칼’, 또는 개역개정의 ‘사람들을 둘러싸고’라는 표현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번역에는 차이가 있지만, 두 표현 모두 거짓의 파괴력이 사람의 가장 깊은 삶에까지 미친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하는 목적은 ‘침실’이나 ‘내실’ 자체의 상응을 설명하려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핵심은 거짓이 인간을 부분적으로만 손상시키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를 장악, 황폐하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그다음에 이어지는 ‘그들이 낙담하여’, ‘많이 엎드러지게 하려고’, ‘그 모든 성문을 향하여 번쩍번쩍하는 칼을 세워 놓았도다’라는 표현은 바로 AC.309의 논지를 직접 뒷받침합니다. ‘낙담’은 선에 대한 의지와 진리에 대한 확신이 무너지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많이 엎드러지게’라는 것은 거짓으로 인해 악과 오류가 계속 증가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또한 ‘성문’은 말씀의 속뜻으로는 사람의 마음에 진리가 들어오고 나가는 입구, 곧 교리와 이성의 출입구를 의미하는데, 모든 성문에 칼이 놓였다는 것은 진리가 들어올 통로 자체가 거짓에 의해 점령된 상태를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이 예언은 단순히 전쟁의 참상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거짓이 인간의 전 존재를 황폐하게 만드는 영적 상태를 단계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AC.309 전체의 결론과 가장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부분은 ‘그들이 낙담하여’라는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앞에서 거짓이 사람을 황폐하게 하여 ‘더 이상 선과 진리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오직 거짓과 그것을 확증하는 것들만 보게 된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에스겔의 예언은 바로 이러한 영적 황폐함을 예언자의 언어로 묘사한 대표적인 본문인 것입니다. 칼이 번개처럼 번뜩이고, 살육이 커지고, 마음이 녹으며, 넘어짐이 많아지고, 성문마다 칼의 공포가 놓이는 일련의 모습은 모두 거짓이 인간의 영적 생명을 철저히 파괴하는 과정을 상징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한 이유는 에스겔의 ‘’에 관한 예언이 그가 설명하고 있는 ‘거짓으로 인한 황폐함’의 가장 강력한 성경적 증거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칼의 물리적 움직임이나 전쟁 장면 자체가 아니라, 거짓이 사람의 마음과 이성, 그리고 진리가 드나드는 모든 통로를 점령, 영적 생명을 무너뜨리는 과정입니다. 이것이 AC.309에서 겔21을 길게 인용한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AC.309, 심화 3, ‘나3:3’

AC.309.심화 3. ‘나3:3’ 충돌하는 기병, 번쩍이는 칼, 번개 같은 창, 죽임당한 자의 떼, 주검의 큰 무더기, 무수한 시체여 사람이 그 시체에 걸려 넘어지니 (나3:3) The horseman mounting, and the flame of the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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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9, 심화 1, ‘which entereth into their bed chambers’

AC.309.심화 1. ‘which entereth into their bed chambers’ Potts역에는 있는 ‘which entereth into their bed chambers’ 표현이 개역개정에는 안 보이는 이유 개역개정에는 Potts 영어본의 ‘which entereth into their bed cham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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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9.심화

 

1. ‘which entereth into their bed chambers

 

Potts역에는 있는 which entereth into their bed chambers 표현이 개역개정에는 안 보이는 이유

 

 

개역개정에는 Potts 영어본의 ‘which entereth into their bed chambers’에 해당하는 ‘침실’이나 ‘은밀한 방’이라는 표현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개역개정이 어떤 말을 빠뜨린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같은 히브리어 표현을 서로 다르게 해석하여 번역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절 번호에도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AC.309의 영어본은 이 대목을 겔21:14-15로 표시하지만, 유대교식 히브리어 성경의 장절 체계에서는 겔21:19-20에 해당합니다. 기독교 성경에서는 앞 장 끝부분의 다섯 절을 겔21에 포함하지 않기 때문에 절 번호가 다섯 절씩 차이 납니다. 개역개정의 겔21:14에 나오는 ‘사람들을 둘러싸고 죽이는 큰 칼이로다’라는 부분이 바로 Potts 영어본의 ‘which entereth into their bed chambers’와 대응합니다. 히브리어 본문에도 해당 표현 자체는 존재하며, 개역개정은 그것을 ‘사람들을 둘러싸고’로 번역한 것입니다.

 

문제가 되는 히브리어는 ‘הַחֹדֶרֶת לָהֶם’, 곧 ‘하호데레트 라헴’입니다. ‘하호데레트’는 동사 ‘חדר’에서 나온 여성 단수 분사형인데, 이 동사는 ‘안으로 들어가다’, ‘꿰뚫고 들어가다’라는 방향으로도 이해될 수 있고, 문맥에 따라 ‘둘러싸다’, ‘사방에서 죄어 오다’라는 뜻으로도 해석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전통적인 일부 영어 역본은 칼이 그들의 내실 또는 은밀한 방 안으로 들어간다고 번역한 반면, 여러 현대 역본은 칼이 그들을 에워싸거나 사방에서 들이닥친다고 번역합니다. 실제로 KJV는 ‘privy chambers’로, Young의 직역본은 ‘inner chamber’로 옮기지만, 다른 현대 역본들은 ‘surrounds them’ 또는 ‘closing in on every side’로 처리합니다.

 

따라서 Potts 영어본의 ‘bed chambers’는 히브리어 본문에 ‘’을 뜻하는 별도의 명사가 명백하게 적혀 있기 때문에 생긴 번역이라기보다, ‘하호데레트’라는 동사의 의미를 안쪽으로 침입한다는 방향으로 이해한 전통적인 번역에 가깝습니다. 반대로 개역개정의 ‘사람들을 둘러싸고’는 같은 동사를 칼이 그들을 사방에서 둘러싸며 몰아붙이는 것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어느 한쪽에는 원문이 있고, 다른 쪽에는 원문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같은 난해한 히브리어 표현을 서로 다르게 해석한 것입니다.

 

여기서 AC 연구상 더욱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which entereth into their bed chambers’는 스베덴보리가 직접 작성한 영어가 아니라 Potts 영어 번역에 들어 있는 문구입니다. AC 원전은 라틴어이므로, 영어 문구만 보고 스베덴보리의 라틴 원문에도 반드시 ‘침실’이나 ‘내실’에 해당하는 명사가 있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Potts가 라틴 문장을 그대로 직역했을 수도 있지만, 성경 인용 부분을 당시 영어 독자들에게 익숙한 전통적 성경 문구에 맞추어 표현했을 가능성도 따로 검토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의 정확한 비교 순서는 ‘AC 라틴 원문’, ‘Potts 영어 번역’, ‘히브리어 성경 본문’, ‘개역개정’이어야 합니다. AC.309의 라틴 원문이 존재하는 것은 확인되지만, 현재 확보한 온라인 자료에서는 해당 라틴 인용문의 세부 문구까지 안정적으로 열람되지 않아, 라틴 원문에 ‘침실’이라는 명사가 실제로 들어 있다고 여기서 단정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렇다면 AC.309의 한국어 번역에서는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을까요?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한 목적은 칼이 사람의 내면 깊숙한 곳까지 들어간다는 공간적 세부를 특별히 해설하려는 데 있지 않습니다. AC.309에서 그가 직접 밝히는 핵심은 칼이 사람을 황폐하게 하여 선과 진리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오직 거짓과 그 반대되는 것들만 보게 한다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개역개정의 표현을 존중하여 ‘크게 살육하는 칼이 사람들을 에워싼다’고 옮겨도 AC.309의 논지는 손상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앞뒤의 ‘낙담하여’, ‘많이 엎드러지게’, ‘그 모든 성문을 향하여 번쩍번쩍하는 칼을 세워 놓았도다’라는 문맥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다만 Potts 영어본을 직접 번역하는 작업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면, ‘크게 살육하는 칼이 그들의 깊은 곳까지 침입한다’로 옮기는 절충안도 가능합니다. 이 번역은 영어의 ‘bed chambers’를 문자적으로 ‘침실’이라고 옮겨 독자에게 불필요한 공간 이미지를 주는 대신, 그 전통적 번역이 담고 있는 ‘안으로 깊이 들어간다’는 뜻을 살립니다. 그러나 AC.309 해설에서 그들의 ‘침실’이나 ‘내실’을 사람의 가장 깊은 내면이라고 곧바로 상응 풀이하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글에서 그 문구를 따로 해석하지 않았고, 바로 뒤에서 설명하는 것은 ‘’과 ‘넘어짐’의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제가 ‘은밀한 방’을 사람의 내면이라고 단정적으로 확장한 것은 본문이 직접 말한 범위를 넘어간 해설이었습니다.

 

심화 원고에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Potts 영어본의 ‘which entereth into their bed chambers’는 개역개정에서 ‘사람들을 둘러싸고’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는 개역개정이 어떤 구절을 생략한 것이 아니라, 히브리어 ‘하호데레트 라헴’을 다르게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전통적인 일부 역본은 이를 ‘그들의 내실까지 들어간다’는 뜻으로 이해하였고, 현대의 여러 역본은 ‘그들을 에워싸거나 사방에서 몰아붙인다’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또한 AC 원전은 라틴어이므로 Potts의 영어 표현을 곧바로 스베덴보리 자신의 문구와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AC.309에서 이 인용의 핵심은 칼이 어느 물리적 장소로 들어가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사랑에서 비롯된 거짓과 persuasion이 사람을 철저히 황폐하게 하여 더 이상 선과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한다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한국어 번역에서는 개역개정의 ‘사람들을 둘러싸고’라는 표현을 따르거나, Potts의 뉘앙스를 보존, ‘그들의 깊은 곳까지 침입하는 칼’이라고 옮기는 것이 적절합니다.

 

 

 

AC.309, 심화 2, ‘겔21:9-10, 14-15’

AC.309.심화 2. ‘겔21:9-10, 14-15’ 9인자야 너는 예언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이같이 말하라 칼이여 칼이여 날카롭고도 빛나도다 10그 칼이 날카로움은 죽임을 위함이요 빛남은 번개같이 되기 위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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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9, 창3:24, ‘두루 도는 불 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4) AC.309 ‘두루 도는 불 칼’(flame of a sword turning itself)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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