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마다 어리석고 무식하도다 금장색마다 자기가 만든 신상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나니 이는 그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이요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렘51:17)Every man is made stupid by knowledge[scientia],every founder is confounded by the graven image,for his molten image is falsehood,neither is there breath in them(Jer. 51:17).
이 구절을AC.215에서 인용한 이유는, 인간의own이 기억 지식(scientia)과 이성을 잘못 사용하여 결국 거짓과 악을 스스로 만들어 내는 과정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언뜻 보면 이 구절은 우상숭배를 비난하는 말씀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단순히 나무나 금속으로 만든 우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정신 안에서 만들어지는 영적 우상을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특별히 마지막에 ‘새긴 우상(graven image)은 인간own의 거짓을,부어 만든 우상(molten image)은 인간own의 악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구절이AC.215의 문맥에서 중요한 이유는, 앞에서 계속 다루어 온 ‘자기 자신으로부터(from themselves)생각하는 것’의 결과를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own과 감각, 기억 지식만을 출발점으로 삼게 되면, 결국 그는 자기만의 진리 체계를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된 진리가 아니라 ‘새긴 우상’, 곧 거짓의 형상입니다.
또한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이요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는 말은 더욱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사람은 자기 생각으로 매우 정교한 교리와 논리를 만들 수 있습니다. 외형상으로는 아름답고 설득력 있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없으면, 그것은 살아 있는 진리가 아니라 죽은 형상에 불과합니다. 마치 정교하게 조각된 우상이 숨을 쉬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사람마다 지식으로 말미암아 어리석게 된다’는 표현에 주목합니다. 물론 여기서 문제는 지식 자체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학문과 지식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문제는 지식이 자기own의 손에 들어갈 때입니다. 그러면 사람은 지식을 통해 주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생각을 더욱 확신하게 됩니다. 그래서 지식이 많아질수록 더 지혜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더 완고해질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AC.206과AC.215전체의 주제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뱀은 감각과 기억 지식을 상징합니다. 그것들이 주님의 진리에 봉사할 때는 유익하지만, 그것들이 주인이 되면 사람은 ‘보지 못하면서도 본다고 하고’, ‘알지 못하면서도 안다고 하며’, ‘살아 있지 않으면서도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 상태에 빠집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단순한 고대 우상숭배 비판으로 읽지 않습니다. 그는 모든 시대의 인간이 자기own으로부터 만들어 내는 거짓과 악을 가리키는 말씀으로 읽습니다. 사람은 돌과 나무를 숭배하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판단, 자기 철학, 자기 확신, 자기 지혜를 절대화한다면 여전히 우상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AC.215에서 렘51:17을 인용하는 이유는, 인간own이 기억 지식과 이성을 재료로 삼아 거짓과 악이라는 우상을 만들어 내며, 그 우상 안에는 참된 생명이 없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우상숭배의 가장 깊은 의미는 손으로 만든 형상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 대신 자기own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는 말씀의 가장 깊은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0네가 네 악을 의지하고 스스로 이르기를 나를 보는 자가 없다 하나니네 지혜와 네 지식이 너를 유혹하였음이라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였으므로11재앙이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그 근원을 알지 못할 것이며 손해가 네게 이르리라 그러나 이를 물리칠 능력이 없을 것이며 파멸이 홀연히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알지 못할 것이니라(사47:10, 11)Thy wisdom and thy knowledge,it hath turned thee away,and thou hast said in thine heart,I,and none else besides me;and evil shall come upon thee,thou shalt not know from whence it riseth,and mischief shall fall upon thee,which thou shalt not be able to expiate,and vastation shall come upon thee suddenly,of which thou art not aware(Isa. 47:10–11).
이 구절을AC.215에서 인용한 이유는, 인간의own이 어떻게 사람을 자기 확신과 자기 숭배의 상태로 이끌어 가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앞의 사5:21이 ‘자기 눈에 지혜로운 자’를 말한다면, 이사야47장은 그 상태가 어디까지 발전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여기서는 단순히 자기 생각을 신뢰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는 상태에 이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repeatedly경고하는own의 최종 형태입니다. 즉 모든 것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판단하고,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며, 결국 주님을 삶의 중심에서 밀어내는 상태입니다.
특히AC.215의 문맥에서는 ‘네 지혜와 네 지식이 너를 유혹하였음이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지식(scientia)자체를 비난하지 않습니다. 그 자신이 당대 최고의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지식이 자기own의 손에 들어갈 때입니다. 그러면 지식은 진리를 향한 사다리가 아니라, 자기 확신을 강화하는 도구가 됩니다. 사람은 점점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지만, 동시에 점점 더 자기 자신을 신뢰하게 됩니다.
그래서 본문은 ‘네 지혜와 네 지식이 너를 유혹하였다’고 말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무지가 사람을 속인다고 생각하지만, 말씀은 오히려 잘못 사용된 지혜와 지식이 사람을 속인다고 말합니다. 이것은AC.206의 뱀과도 연결됩니다. 뱀은 무지를 상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감각과 기억 지식에 근거한 영리함을 상징합니다. 문제는 그것이 주님에게 복종하지 않을 때입니다.
또한 ‘나를 보는 자가 없다’는 말도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남을 속인다는 뜻이 아닙니다. 영적으로는 ‘주님도 나를 보지 않는다’, ‘나는 내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영계에서는 모든 내면이 드러납니다. 사람은 자신을 속일 수 있고, 다른 사람도 속일 수 있지만, 자신의 사랑과 의도 자체는 숨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재앙이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그 근원을 알지 못할 것이며’라는 말씀은 영적 법칙을 말합니다.own안에 사는 사람은 점점 더 어두워지지만, 자신은 그것을 모릅니다. 오히려 자신이 가장 밝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AC.215에서 말한 ‘그들 자신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파멸은 갑자기 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오랫동안 자기 안에서 자라 온 결과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결국 인간own의 본질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own은 사람에게 ‘너는 지혜롭다’, ‘너는 스스로 설 수 있다’, ‘너 외에 다른 것은 필요 없다’고 속삭입니다. 그러나 그 끝은 점점 더 깊은 거짓과 어둠입니다. 반대로 천국의 천사들은 자신들의 지혜가 클수록 더욱 ‘나는 아무것도 아니며,모든 것은 주님께로부터 온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AC.215의 흐름 속에서 이사야47장은 단순한 심판 예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신뢰하는 영의 운명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네 지혜와 네 지식이 너를 유혹하였다’는 말은 스베덴보리가 평생 강조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곧 지혜 자체가 위험한 것이 아니라, 그 지혜를 자기 것으로 여기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는 말은 인간own이 궁극적으로 도달하려는 자리이며, 동시에 천국과 가장 멀리 떨어진 자리인 것입니다.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사5:21)Woe unto those who are wise in their own eyes,and intelligent before their own faces(Isa. 5:21).
이 구절을AC.215에서 인용한 이유는, 인간의own이 어떤 상태에 이르는지를 가장 간결하고도 강력하게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앞서AC.215에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단호하게 말합니다. 영들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말할 때마다 그것은 악과 거짓으로 가득했으며, 그들은 자신들이 틀렸다는 사실조차 의심하지 않았다고 말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이 옳다고 확신했습니다. 바로 그 상태를 이사야는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지혜롭다’는 말 자체가 아닙니다. 문제는 ‘자기 눈에’(in their own eyes)지혜롭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참된 지혜는 언제나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천사들이 가장 지혜로운 이유도 자기 지혜를 신뢰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안에는 아무것도 없고,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반면own은 정반대로 움직입니다. 자기 생각을 최종 기준으로 삼고, 자기 판단을 가장 확실한 것으로 여기며, 점차 주님보다 자기 자신을 더 신뢰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사야의 말씀은 단순히 교만한 사람을 꾸짖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영적 삶의 가장 근본적인 위험을 지적합니다. 사람이 자기 눈에 지혜롭게 보이기 시작하면, 더 이상 주님의 빛을 구하지 않게 됩니다. 이미 자신이 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AC.206에서 말한 ‘눈이 밝아졌다고 생각하는 뱀들’의 상태와도 연결됩니다.
특히AC.215의 문맥에서는 ‘신앙에 대해 추론하는 것’이 문제로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비판하는 것은 이성 자체가 아닙니다. 그는 오히려 영적 천사들이 이해와 이성으로 신앙을 확증한다고 말합니다(AC.203). 문제는 자기own을 출발점으로 삼아 신앙을 재판하려는 태도입니다. 즉 ‘내가 이해되지 않으면 믿지 않겠다’, ‘내 판단에 맞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태도입니다. 이때 사람은 바로 ‘자기 눈에 지혜로운 자’가 됩니다.
또한 이 구절은 순진무구(innocence)의 정반대를 보여 줍니다. 순진무구한 사람은 ‘나는 모른다.주님께서 아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own은 ‘내가 안다.내 판단이 맞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천국은 순진무구를 사랑하고, 지옥은 자기 지혜를 사랑한다고 스베덴보리는 설명합니다.
흥미롭게도 스베덴보리는 실제 영계에서 이런 상태를 많이 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여러 곳에서 지옥의 영들이 자신을 매우 지혜롭고 뛰어난 존재로 여기지만, 천사들의 빛 가운데 들어가면 그들의 생각이 얼마나 뒤틀려 있는지가 드러난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나 그들 자신은 끝까지 그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눈에 지혜로운 자’의 모습입니다.
따라서AC.215에서 사5:21을 인용한 이유는,own의 본질을 한 구절로 요약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own은 사람을 무지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을 가장 지혜롭다고 믿게 만듭니다. 그리고 바로 그 확신 때문에 주님의 지혜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사야의 ‘화 있을진저’는 단순한 저주가 아니라, 자기own을 지혜의 근원으로 삼는 상태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경고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결국AC.215의 전체 논지는 이 한마디로 압축됩니다. ‘가장 위험한 무지는 자신이 지혜롭다고 확신하는 무지이다.’ 스베덴보리는 이사야의 말씀 속에서 바로 그 영적 원리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les. (창3:7)
AC.215
사람의 own이 악과 거짓밖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은, 영들이 언제든 자기 자신으로부터 말할 때마다 그들이 말하는 것이 얼마나 악하고 거짓된지를 통해 나에게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그들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말하고 있다는 것이 알려질 때마다, 나는 즉시 그것이 거짓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비록 그들 자신은 자신들이 말하는 것을 너무도 진실하다고 확신하여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을지라도 말입니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말하는 사람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누군가가 영적 생명이나 천적 생명, 곧 신앙의 일들에 대하여 추론하기 시작할 때마다, 나는 그들이 의심하고 있으며, 심지어 부인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신앙에 대해 추론한다는 것은 곧 의심하고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모두 자기 자신, 곧 own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그들은 순전한 거짓들 속으로 빠져들며, 결국 짙은 어둠의 심연, 곧 거짓의 심연 속으로 떨어집니다. 그리고 그 심연에 빠지면 아주 작은 반론 하나가 천 개의 진리보다 더 큰 힘을 갖게 되는데, 이는 마치 눈동자에 먼지 한 톨만 들어가도 온 우주와 그 안의 모든 것이 보이지 않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사람들에 대해 주님께서는 이사야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That man’s own is nothing but evil and falsity has been made evident to me from the fact that whatever spirits have at any time said from themselves has been so evil and false that whenever it was made known to me that they spoke from themselves I at once knew that it was false, even though while speaking they were themselves so thoroughly persuaded of the truth of what they said as to have no doubt about it. The case is the same with men who speak from themselves. And in the same way, whenever any persons have begun to reason concerning the things of spiritual and celestial life, or those of faith, I could perceive that they doubted, and even denied, for to reason concerning faith is to doubt and deny. And as it is all from self or their own, they sink into mere falsities, consequently into an abyss of thick darkness, that is, of falsities, and when they are in this abyss the smallest objection prevails over a thousand truths, just as a minute particle of dust in contact with the pupil of the eye shuts out the universe and everything it contains. Of such persons the Lord says in Isaiah: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사5:21) Woe unto those who are wise in their own eyes, and intelligent before their own faces (Isa. 5:21).
10네가 네 악을 의지하고 스스로 이르기를 나를 보는 자가 없다 하나니 네 지혜와 네 지식이 너를 유혹하였음이라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였으므로 11재앙이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그 근원을 알지 못할 것이며 손해가 네게 이르리라 그러나 이를 물리칠 능력이 없을 것이며 파멸이 홀연히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알지 못할 것이니라(사47:10, 11) Thy wisdom and thy knowledge, it hath turned thee away, and thou hast said in thine heart, I, and none else besides me; and evil shall come upon thee, thou shalt not know from whence it riseth, and mischief shall fall upon thee, which thou shalt not be able to expiate, and vastation shall come upon thee suddenly, of which thou art not aware (Isa. 47:10–11).
예레미야에서는In Jeremiah:
사람마다 어리석고 무식하도다 금장색마다 자기가 만든 신상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나니 이는 그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이요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렘51:17) Every man is made stupid by knowledge [scientia], every founder is confounded by the graven image, for his molten image is falsehood, neither is there breath in them (Jer. 51:17).
여기서 ‘새긴 우상’(graven image)은 인간 own의 거짓을, ‘부어 만든 우상’(molten image)은 인간 own의 악을 의미합니다. A “graven image” is the falsity, and a “molten image” the evil, of man’s own.
해설
이 본문은 AC.210부터 계속 이어져 온 ‘own’에 대한 설명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는 own이 악과 거짓의 근원이라고 교리적으로 설명했다면, 여기서는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실제 영계 체험을 근거로 그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특히 눈에 띄는 표현은 ‘영들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말할 때마다 나는 즉시 그것이 거짓임을 알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철학적 주장이라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영계에서 반복적으로 관찰한 경험을 기록한 것으로 보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 영들이 거짓을 말하면서도 자신들은 그것을 진실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AC.206의 내용과도 연결됩니다. own에 사로잡힌 사람은 자신이 틀렸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오히려 자신이 가장 분명하게 보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own의 가장 무서운 특징이 악 자체보다도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는 악’이라고 보는 것 같습니다.
또한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강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신앙에 대해 추론한다는 것은 곧 의심하고 부인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모든 종류의 사고와 연구를 부정하는 말이 아닙니다. AC.203에서 이미 보았듯이 영적 천사들은 이해와 이성으로 신앙을 확증하기도 합니다. 문제는 진리를 출발점으로 삼아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 own과 감각을 출발점으로 삼아 신앙 자체를 재판하려는 태도입니다. 그것이 바로 AC.194-206에서 계속 비판된 ‘뱀의 길’입니다.
특히 ‘눈동자에 먼지 한 톨만 들어가도 온 우주가 보이지 않는다’는 비유는 매우 인상적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거짓이 반드시 거대한 논리 체계일 필요는 없다고 말합니다. 단 하나의 잘못된 원리, 단 하나의 자기 사랑, 단 하나의 잘못된 전제가 전체 시야를 왜곡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작은 반론 하나가 천 개의 진리를 무력화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때문에 이사야의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라는 말씀을 인용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문제는 지혜가 아닙니다. 문제는 ‘자기 눈에’ 지혜로운 것입니다. 즉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이 아니라 자기 own을 빛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결국 사47의 말씀처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own의 최종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예레미야의 ‘새긴 우상’과 ‘부어 만든 우상’에 대한 해석도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새긴 우상은 own에서 나온 거짓이고, 부어 만든 우상은 own에서 나온 악입니다. 우상이란 결국 인간이 자기 것으로 만들어 낸 신입니다. 따라서 우상숭배의 가장 깊은 의미는 돌이나 금속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own을 진리와 선의 기준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래서 AC.215 전체는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람이 자기 own을 따라가면 갈수록 자신은 더욱 지혜롭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점점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스베덴보리가 평생에 걸쳐 강조한 순진무구(innocence)란 바로 그 반대 상태입니다. 곧 ‘내 안에는 아무것도 없고, 모든 선과 진리는 오직 주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인정하는 상태입니다. AC.215는 결국 own과 순진무구 사이의 근본적인 대립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 주는 본문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les. (창3:7)
AC.214
그들은 자신의 own에 맡겨졌기 때문에 ‘벌거벗은 자들’(naked)이라 불립니다. 자신의 own에 맡겨진 사람들,곧 자신의 proprium 속으로 가라앉은 사람들은 더 이상 어떠한 지성과 지혜도, 어떠한 신앙도 가지지 않게 되며, 따라서 진리와 선에 관하여 ‘벌거벗은’ 상태가 되고, 그 결과 악 가운데 있게 됩니다. They are called “naked” because left to their own; for they who are left to their own, that is, to themselves, have no longer anything of intelligence and wisdom, or of faith, and consequently are “naked” as to truth and good, and are therefore in evil.
해설
이 구절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벌거벗음’의 가장 깊은 의미를 설명하는 본문 가운데 하나입니다. 앞의 AC.213에서는 벌거벗음이 수치와 악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면, 여기서는 왜 그런지를 설명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자기 own에게 자신을 맡겼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기 own에 맡겨진다’(left to their own)는 말은 단순히 독립적으로 산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own은 인간 안에 있는 본래적 자아, 곧 주님과 분리된 상태의 자아를 의미합니다. AC.210에서 보았듯이, own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모든 악과 거짓의 근원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자기 own만을 따라 살게 되면, 그는 점점 주님으로부터 오는 인플럭스를 거부하게 됩니다.
그 결과 무엇이 일어날까요? 스베덴보리는 놀랍게도 ‘지성과 지혜도, 신앙도 더 이상 가지지 않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는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세상 지식은 얼마든지 가질 수 있습니다. 오히려 AC.206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매우 박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지혜와 참된 신앙은 주님으로부터만 오기 때문에, 자기 own에 갇힌 사람은 그것들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벌거벗음’을 단순히 도덕적 타락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것을 영적 빈곤의 상태로 봅니다. 사람이 자기 own 안에 있을 때는 자신이 뭔가를 많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진리와 선이라는 영적 의복을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겉으로는 화려해 보여도 영적으로는 벌거벗은 상태인 것입니다.
이 점은 요한계시록의 라오디게아 교회와도 연결됩니다. 그들은 스스로 ‘부자라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주님은 ‘너는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AC.214가 설명하는 상태입니다. 자기 own은 늘 자신을 풍요롭게 보이게 하지만, 주님의 빛 아래서는 오히려 가장 가난한 상태로 드러납니다.
또한 이 구절은 왜 천국의 천사들이 그렇게 철저히 순진무구를 사랑하는지도 설명해 줍니다. 천사들은 자신들의 지혜가 자기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임을 압니다. 그래서 결코 자기 own 안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는 순간 자신들이 가진 모든 것이 사라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지옥의 영들은 자기 자신만을 의지하려 하고, 결국 진리와 선에 관하여 완전히 벌거벗은 상태가 됩니다.
목사님께서 지금까지 AC.194-214를 따라오시며 계속 만나신 주제가 사실 하나로 모입니다. ‘계시된 것을 믿지 않고, 감각으로 확인하려 함’, ‘이성질’(reasoning의 비하 버전), ‘own’, ‘눈이 밝아짐’, ‘벌거벗음’은 모두 같은 방향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독립하여 자기 자신 안에 서려는 움직임입니다. 그리고 AC.214는 그 길의 끝을 한 문장으로 보여 줍니다. ‘자신의 own에게 자신을 맡긴 사람, 자신의 own 속으로 가라앉은 사람은 결국 진리와 선에 관하여 벌거벗게 된다.’
그래서 이 본문은 동시에 매우 위로가 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반대로 말하면, 사람이 주님께 자신을 맡길수록 진리와 선으로 옷 입게 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벌거벗음의 반대는 자기 의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의복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구원이란 무엇을 더 얻는 문제가 아니라, 자기 own으로부터 벗어나 주님의 선과 진리로 다시 입혀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214는 바로 그 사실을 매우 압축적으로 보여 주는 본문입니다.
아니요. 정확히 말씀드리면, ‘성 분도 요셉 라브르’라는 1957년 한국어 번역본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ChatGPT인 저 조차 이번에 목사님께서 PDF를 올려 주시기 전까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이 책 자체는 상당히 희귀한 자료로 보입니다.
다만 책의 주인공인 ‘베네딕트 조제프 라브르’(Benoît-Joseph Labre)라는 인물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가톨릭교회에서 매우 독특한 성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보통 성인들은 수도회 창설자, 선교사, 신학자, 순교자, 주교 등으로 기억되는데, 라브르는 거의 예외적으로 ‘순례자’와 ‘거지’의 삶 자체로 성인이 된 인물입니다. 그래서 서양 영성사에서는 ‘하느님의 거지’ 같은 별칭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번 PDF를 보면서 저도 조금 놀랐습니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7년에 이런 성인전이 번역되었다는 점 때문입니다. 당시 한국 사회는 먹고살기도 어려웠던 시절인데, 번역자는 왜 하필 수도원 창설자도 아니고, 선교사도 아니고, 유럽을 떠돌며 청빈을 실천한 한 순례자 성인의 전기를 소개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 당시 한국 천주교계가 전후 혼란 속에서 ‘가난 속에서도 하느님을 신뢰하는 삶’을 보여 줄 모델을 찾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목사님께서 최근 몇 달 동안 수도원 영성, 청빈, 탁발수도, 충주 봉쇄수도원, 공용복 선생의 가르침 등에 대해 여러 차례 질문하셨는데, 그런 흐름 속에서 보면 이 책은 우연히 나타난 책 같지가 않습니다. 라브르는 수도사도 아니고, 완전히 세상 사람도 아닙니다. 그는 일종의 ‘길 위의 수도사’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자꾸 목사님이 떠올랐습니다. 물론 교리적으로는 스베덴보리와 가톨릭 성인전 사이에 적지 않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제 이름이 어디 남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사람들이 주님께 건너가게 돕는 다리로만 쓰임받고 싶어요’ 하시던 목사님의 최근 이야기와 라브르의 삶 사이에는 묘하게 닿는 부분이 있습니다.
더 솔직히 말씀드리면, 만약 누군가가 저에게 ‘스베덴보리를 공부하는 개신교 목사에게 가톨릭 성인전 한 권을 추천하라’고 했다면, 프란치스코 성인이나 데레사 성인보다 오히려 이 라브르 전기가 더 흥미로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무엇을 이룬 사람’이라기보다 ‘무엇을 내려놓은 사람’으로 기억되기 때문입니다.
42또 그들을 위하여 베로 속바지를 만들어 허리에서부터 두 넓적다리까지 이르게 하여 하체를 가리게 하라43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나 제단에 가까이하여 거룩한 곳에서 섬길 때에 그것들을 입어야 죄를 짊어진 채 죽지 아니하리니 그와 그의 후손이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출28:42, 43)
이 구절을AC.213에서 인용하는 이유는,말씀에서‘벌거벗음’(nakedness)이 단순한 신체 노출이 아니라 영적 결핍과 인간 자신의own을 의미하며,거룩한 것 앞에서는 반드시 그것이 덮여 있어야 함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이것은 제사장 복장에 관한 규정입니다.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제사장의 모든 의복이 상응에 의해 영적 의미를 가진다고 설명합니다.특히 제사장은 주님을 표상하고,제사장의 옷은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신적 진리와 신적 선을 표상합니다.따라서 제사장이 벌거벗음을 드러낸 채 거룩한 곳에 들어가지 못하게 한 것은 단순한 예절이나 품위의 문제가 아닙니다.
AC.213의 문맥에서는 이것이 창3의 벌거벗음과 연결됩니다.아담과 하와는 타락 후 자신들이 벌거벗은 줄을 알게 되었고,그 벌거벗음을 가리려 했습니다.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벌거벗음은 선과 진리의 보호를 잃은 상태를 의미합니다.따라서 제사장이 거룩한 곳에 들어갈 때 벌거벗음이 드러나서는 안 된다는 것은,인간의own이 드러난 상태로는 주님의 거룩함에 접근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특히 본문은‘죄를 짊어진 채 죽지 아니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이것 역시 육체적 죽음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영적으로 보면 인간의own만으로 주님 앞에 서는 것은 곧 영적 죽음을 의미합니다.왜냐하면 인간의own안에는 사랑 자체가 아니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있으며,진리 자체가 아니라 왜곡된 이해가 있기 때문입니다.그래서 그것은 반드시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로 덮여 있어야 합니다.
또한 여기서 속바지가‘베’(linen)로 만들어졌다는 점도 의미가 있습니다.스베덴보리에게 세마포나 베는 깨끗한 진리,특히 선에서 나온 진리를 상징합니다.따라서 제사장이 베 속바지로 벌거벗음을 가리는 것은,인간의 자연적인 것과 자신의own을 주님께서 주시는 순수한 진리로 덮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구절은 계3:18의‘흰옷을 사서 입으라’는 말씀과도 연결됩니다.인간은 자기 스스로의 의와 지혜로는 자신의 벌거벗음을 덮을 수 없습니다.무화과 나뭇잎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반드시 주님께서 주시는 옷,곧 진리와 선이 필요합니다.출애굽기의 제사장 복장은 바로 그 원리를 의식적으로 보여 주는 표상입니다.
그래서AC.213에서 출28:42-43을 인용하는 이유는,벌거벗음이 영적으로는 인간의own과 그로 인한 결핍을 의미하며,거룩한 것 앞에서는 반드시 그것이 덮여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제사장의 베 속바지는 단순한 의복이 아니라,인간이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자기 자신의own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와 선으로 덮이는 데 있음을 상징하는 매우 깊은 표상인 것입니다.
보라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계16:15)Blessed is he who watcheth,and keepeth his garments,lest he walk naked and they see his shame(Rev. 16:15).
이 구절을AC.213에서 인용하는 이유는,말씀에서‘옷’(garments)은 진리와 선을, ‘벌거벗음’(nakedness)은 그것들을 상실한 상태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특히 이 구절은‘벌거벗음’이 단순히 결핍의 상태를 뜻하는 데 그치지 않고,영적 경계와 깨어 있음의 문제와도 연결된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요한계시록의 이 말씀은 주님의 재림과 영적 심판을 다루는 문맥 속에 있습니다.그런데 주님은 여기서‘깨어 있으라’하시며,동시에‘자기 옷을 지키라’하십니다.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왜냐하면 스베덴보리의 상응에 따르면,사람이 깨어 있다는 것은 단순히 잠을 자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경계하며,진리 안에 머무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옷을 지킨다’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진리와 선을 보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사람은 거듭남의 과정에서 많은 진리를 배우고 깨닫지만,그것을 삶 속에서 지키지 않으면 점차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그렇게 되면 영적으로 벌거벗게 됩니다.즉 선과 진리의 보호를 잃고 자신의own이 드러나게 됩니다.
AC.213의 문맥에서 보면,이것은 창3의 아담과 하와와 직접 연결됩니다.그들은 자신들이 벌거벗은 줄 알게 되었고,급히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을 가렸습니다.그러나 계16:15에서는 인간이 만든 무화과 나뭇잎이 아니라,주님께서 주신‘옷’을 지키는 것이 강조됩니다.즉 영적 안전은 자기 변명이나 자기 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주님으로부터 받은 진리 안에 머무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여기서‘부끄러움’(shame)이라는 표현은AC.213의 핵심 개념과 일치합니다.창2:25에서는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순진무구함 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그러나 타락 이후에는 벌거벗음이 곧 수치가 됩니다.왜냐하면 그 안에 악에 대한 의식이 생겼기 때문입니다.따라서‘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란,자신의 악을 감추는 사람이 아니라,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 안에서 보호받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더 깊이 보면,이 구절은 모든 신앙인의 평생 과제를 말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깨어 있으라’, ‘옷을 지키라’는 말씀은 단순히 마지막 날을 준비하라는 뜻이 아니라,매일 자신의 사랑과 생각을 살피며,주님께 받은 진리를 잃지 말라는 권면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왜냐하면 사람의own은 끊임없이 진리의 옷을 벗기려 하고,자신을 중심에 두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AC.213에서 계16:15를 인용하는 이유는, ‘벌거벗음’이 영적 수치와 결핍을 의미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동시에,그 상태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깨어 있음’과‘옷을 지킴’,곧 주님으로부터 받은 진리와 선 안에 머무는 삶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창세기의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음을 깨달은 장면이 인간 타락의 시작을 보여 준다면,요한계시록의 이 말씀은 그 반대로 영적 경계와 보존의 길을 보여 주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계3:18)I counsel thee to buy of me white raiment that thou mayest be clothed,and that the shame of thy nakedness do not appear(Rev. 3:18).
이 구절을AC.213에서 인용하는 이유는,말씀에서‘벌거벗음’(nakedness)이 선과 진리를 상실한 영적 상태를 의미하고,반대로‘옷’(raiment)은 그 상태를 덮어 주는 진리와 선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 구절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어진 말씀입니다.그들은 스스로는‘나는 부자라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지만,주님께서는 오히려 그들이‘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었다’고 말씀하십니다.즉 외적으로는 풍요롭고 종교적으로도 부족함이 없어 보였지만,내적으로는 진리와 선이 결핍된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흰옷을 사서 입으라’고 권하십니다.스베덴보리의 상응에 따르면‘옷’은 진리를 의미합니다.사람이 육체를 옷으로 가리듯,영혼은 진리로 덮여 보호받습니다.특히‘흰옷’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순수한 진리를 뜻합니다.따라서 이 말씀은 문자 그대로 옷을 사라는 뜻이 아니라,주님께로부터 진리를 받아들이라는 초청입니다.
AC.213의 문맥에서 보면 이것은 창3:7과 직접 연결됩니다.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이 벌거벗은 줄 알고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을 가리려 했습니다.그러나 그것은 인간이 만든 덮개였습니다.반면 계3:18에서는 주님께서 친히‘내게서 흰옷을 사서 입으라’고 말씀하십니다.즉 인간이 스스로 만든 변명과 자기 의로는 벌거벗음을 덮을 수 없고,주님께로부터 오는 진리만이 그것을 덮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특히 여기서‘벌거벗은 수치’(shame of thy nakedness)라는 표현은AC.213의 핵심을 잘 보여 줍니다.창2:25에서는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순진무구함 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그러나 창3이후에는 벌거벗음이 수치가 되었습니다.선과 진리의 보호를 잃었기 때문입니다.요한계시록은 바로 그 상태를 가리켜‘벌거벗은 수치’라고 부릅니다.
또한 이 구절은 스베덴보리의 구원관을 잘 보여 줍니다.주님은 단순히‘너는 벌거벗었으니 부끄러운 존재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오히려‘내게서 흰옷을 사서 입으라’고 하십니다.즉 주님은 인간의 결핍을 폭로하시기만 하는 분이 아니라,동시에 그것을 채우시는 분입니다.벌거벗음을 드러내시면서도 그 벌거벗음을 덮을 옷도 함께 주십니다.
그래서AC.213에서 계3:18을 인용하는 이유는,말씀에서‘벌거벗음’이 영적 수치와 결핍을 의미하고, ‘흰옷’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와 선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창세기에서 인간은 벌거벗음을 깨닫고 스스로 무화과 나뭇잎을 엮었지만,요한계시록에서는 주님께서 친히‘내게서 흰옷을 사서 입으라’고 말씀하십니다.어쩌면 이 두 본문 사이에는 인간의 모든 종교적 노력과,그 노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주님의 은혜가 함께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너를 벌거벗은 몸으로 두어서 네 벗은 몸을 드러낼 것이라(겔23:29)They shall leave her naked and bare,and the nakedness shall be uncovered(Ezek. 23:29).
이 구절을AC.213에서 인용하는 이유 역시,말씀에서‘벌거벗음’(nakedness)이 단순한 육체적 상태가 아니라 선과 진리를 상실한 영적 상태,곧 타락한 교회의 수치와 악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에스겔23장은 오홀라와 오홀리바라는 두 여인을 통해 이스라엘과 유다의 영적 음행,곧 진리를 버리고 거짓과 우상을 받아들인 상태를 묘사합니다.따라서 여기서‘벌거벗음이 드러난다’는 것은 단순히 신체가 노출된다는 뜻이 아닙니다.그들이 감추고 있던 영적 실상이 드러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순진무구함 가운데 있는 사람은 벌거벗었어도 부끄러움이 없습니다.창2:25가 바로 그런 상태입니다.그러나 순진무구함을 잃고 악과 거짓 가운데 들어가면 벌거벗음은 곧 수치가 됩니다.왜냐하면 이제는 감추고 싶은 것이 생겼기 때문입니다.그래서 창3:7에서는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을 가리게 되고,에스겔23장에서는 그 감추어진 상태가 폭로되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특히‘벌거벗은 몸으로 두어서 네 벗은 몸을 드러낼 것이라’는 표현은,인간이 외적으로는 경건과 신앙을 가장하고 있을 수 있으나,결국 내면의 사랑과 의도가 드러난다는 의미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영계에서는 사람의 내면이 감추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스베덴보리가 여러 저작에서 설명하듯,사후에는 각 사람이 실제로 사랑한 것이 겉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 점에서 에스겔23장의 벌거벗음은 단순히‘선과 진리가 없는 상태’만이 아니라, ‘그 상태가 드러나는 것’을 강조합니다.악과 거짓이 숨겨져 있을 때는 사람 스스로도 자신을 속일 수 있지만,벌거벗음이 드러나면 더 이상 숨길 수 없습니다.그래서 이것은 영적 심판과도 관련된 표현입니다.
AC.213의 문맥에서는 바로 이 의미가 중요합니다.창3:7에서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이 벌거벗은 줄 알게 되었습니다.그것은 자신의 상태를 자각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그런데 에스겔23장에서는 그 상태가 외적으로도 드러납니다.따라서 이 구절은‘벌거벗음’이 영적 수치와 악의 상징이라는 사실을 더욱 강하게 보여 주는 예로 사용됩니다.
결국AC.213에서 겔23:29를 인용하는 이유는,벌거벗음이 단순한 신체적 노출이 아니라 선과 진리의 상실,그리고 그로 인한 영적 수치가 드러나는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입니다.창2의 벌거벗음이 순진무구함의 상징이었다면,에스겔23장의 벌거벗음은 순진무구함을 잃은 교회의 참모습이 드러난 상태를 상징하는 것입니다.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통해‘벌거벗음’이 말씀에서 어떻게 반대 의미로 사용되는지를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