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3

 

1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And the serpent was more subtle than any wild animal of the field which Jehovah God had made; and he said unto the woman, Yea, hath God said, Ye shall not eat of every tree of the garden?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And the woman said unto the serpent, We may eat of the fruit of the tree of the garden;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But of the fruit of the tree which is in the midst of the garden, God hath said, Ye shall not eat of it, neither shall ye touch it, lest ye die.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And the serpent said unto the woman, Ye shall not surely die.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For God doth know that in the day ye eat thereof, then your eyes shall be opened, and ye shall be as God, knowing good and evil. 6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And the woman saw that the tree was good for food, and that it was pleasant to the eyes, and a tree to be desired to give intelligence, and she took of the fruit thereof and did eat, and she gave also to her man [vir] with her, and he did eat. 7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les. 8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f in the garden in the air of the day; and the man and his wife hid themselves from the face of Jehovah God in the midst of the tree of the garden. 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And Jehovah God cried unto the man [homo], and said unto him, Where art thou? 10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And he said, I heard thy voice in the garden, and I was afraid, because I was naked; and I hid myself. 11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And he said, Who told thee that thou wast naked? Hast thou eaten of the tree whereof I commanded thee that thou shouldest not eat?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And the man said, The woman whom thou gavest to be with me, she gave me of the tree, and I did eat. 13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And Jehovah God said unto the woman, Why hast thou donethis? And the woman said, The serpent beguiled me, and I did eat. (3:1-13)

 

개요

 

AC.190

 

여기서는 태고교회의 세 번째 상태가 다루어지는데, 그 상태는 자신의 own을 몹시 바란 나머지 그것을 사랑하게 된 상태입니다. The third state of the most ancient church is treated of, which so desired its own as to love it.

 

 

해설

 

이 한 문장은 창3 전체를 여는 매우 압축적인 선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창3을 어떤 사건의 기록으로 보지 않고, 태고교회의 ‘상태 변화’로 읽습니다. 그리고 그 변화의 핵심을 ‘자신의 own을 사랑하게 됨’이라는 표현으로 정확히 짚습니다. 이는 단순한 이기심의 출현이 아니라, 사랑의 중심이 어디에 놓이게 되었는가의 문제입니다.

 

‘자신의 own’이라는 표현은 스베덴보리 사상에서 매우 기술적인 개념입니다. 이는 인간에게서 나온 것, 곧 자율적 사고, 자율적 의지, 자기 판단과 자기 선을 의미합니다. 태고교회의 초기 상태에서는 이러한 것이 주님의 Own에 완전히 종속되어 있었고, 인간은 스스로를 주님의 도구로만 인식했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 상태에 이르러, 인간은 점점 자신의 own을 원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그것을 ‘사랑하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원했다’가 아니라 ‘사랑했다’는 표현입니다. 일시적인 욕구나 실수가 아니라, 애정의 방향 자체가 바뀌었다는 뜻입니다. 사랑은 곧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에, 무엇을 사랑하느냐가 곧 그 사람과 교회의 본질을 규정합니다. 따라서 이 문장은 태고교회의 타락을 도덕적 실패가 아니라, 사랑의 전환으로 규정합니다.

 

이 상태는 아직 노골적인 악이나 거짓의 단계는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의 Own을 사랑하던 상태에서 자신의 own을 사랑하는 상태로 이동했다는 점에서, 이미 질서의 중심이 이동한 결정적 순간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뱀, 선악과, 눈이 밝아짐이라는 상징들이 등장할 준비가 갖추어집니다.

 

AC.190은 그러므로 창3:1-13을 읽는 해석의 열쇠를 제공합니다. 이 본문은 ‘왜 인간이 죄를 지었는가’를 설명하려는 이야기가 아니라, ‘어떻게 인간의 사랑이 주님에게서 자기 자신에게로 이동했는가’를 보여 주는 영적 서술입니다. 그리고 이 이동이 바로 태고교회의 세 번째 상태이며, 이후 모든 인간 상태의 근원이 됩니다.

 

다음 AC.191에서는 이 ‘자신의 own을 사랑함’이 어떻게 이해의 차원에서 작동하기 시작하는지가 이어서 설명됩니다.

 

 

심화

 

1. ‘자기 자신의 것’을 ‘자신의 own’으로

 

‘자기 자신의 것’이라는 표현을 ‘자신의 own’으로 이해해도 될까요? (AC.190)

 

 

네, 그렇게 이해하셔도 됩니다. 오히려 AC를 처음 읽을 때는 ‘자기 자신의 것’을 ‘자신의 own’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own’은 오늘날 우리가 흔히 말하는 ‘내 것’보다 훨씬 깊고 넓은 의미를 가집니다. 영어 원문에서는 주로 ‘proprium’ 또는 ‘one's own’으로 표현되는데, 이것은 단순히 재산이나 소유물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서 나온 것’, ‘자신을 자기 자신으로 느끼게 하는 것 전부’를 뜻합니다.

 

예를 들어, ‘내 생각’, ‘내 판단’, ‘내 의지’, ‘내 선함’, ‘내 지혜’, ‘내 능력’, ‘내 공로’라고 느끼는 모든 것이 넓은 의미의 ‘own’에 속합니다. 그래서 AC.190의 ‘그 상태는 자기 자신의 것을 몹시 바란 나머지 그것을 사랑하게 된 상태입니다’라는 말은, ‘자기 재산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보다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태고교회의 초기 상태에서는 사람이 자신을 거의 주님의 생명이 흘러드는 그릇처럼 느꼈습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한다’보다 ‘주님께서 생각하게 하신다’, ‘내가 사랑한다’보다 ‘주님께서 사랑하게 하신다’에 더 가까운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AC.190에서 말하는 세 번째 상태에 이르면, 사람은 점차 ‘아니야, 이것은 내 생각이고, 내 판단이고, 내 지혜야’라고 느끼기 시작합니다. 바로 그때 ‘자기 자신의 것’을 사랑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AC를 읽을 때 저는 종종 ‘own’을 ‘자기 자신의 것’이라고 번역하면서도, 속으로는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풀어 읽으면 이해가 쉬울 때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AC.190을 조금 의역하면 이렇게 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태고교회의 세 번째 상태가 다루어지는데, 그들은 점점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을 원하게 되었고, 마침내 그것을 사랑하게 되었다.’

 

이렇게 읽으면 창3 전체의 흐름이 훨씬 선명해집니다. 왜냐하면 바로 다음 AC.191 이하에서 나타나는 모든 문제, 곧 감각으로 신앙을 판단하려는 태도, 자기 이성으로 진리를 검증하려는 태도,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욕망이 모두 ‘자기 자신의 것’, 곧 ‘own’의 사랑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AC.190의 ‘자기 자신의 것’은 단순한 소유가 아니라, 스베덴보리 신학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개념입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 앞으로 창3을 설교하실 때는 ‘자기 자신의 것’을 ‘자신의 own’이라고 설명하신 뒤, 이어서 ‘곧 자신에게서 나온 생각, 판단, 의지, 선함을 뜻합니다’라고 덧붙이시면 청중들이 훨씬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AC.189, 창3 앞, ‘완만하게 위로 경사진 길’

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기 (계속) Continuation Concerning The Entrance Into Eternal Life Of Those Who Are Raised From Death AC.189 그 후에는 완만하게 위로 경사진 길들이 보였는데, 이는 선과 진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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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89.심화

 

2. ‘천사들의 교육

 

그는 사후에 천사들의 교육을 받으면서 매우 자연스럽게 , 이것이 내가 믿어 왔던 믿음의 실제 내용이었구나 하고 이해하게 됩니다. (AC.189 심화 1)

 

천사들의 교육이 어떻길래 사람들이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요? 천사들 교육의 저 노하우만 알 수 있다면 지상에서도 많은 사람을 이 아르카나의 세계로 인도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천사들의 교육이 어떻길래 사람들이 , 이것이 내가 믿어 왔던 믿음의 실제 내용이었구나 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질문은, 사실 AC.182-189 전체가 암시하는 매우 중요한 주제입니다.

 

스베덴보리를 자세히 읽어 보면, 천사들은 사람에게 새로운 종교를 가르치거나 새로운 사상을 주입하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사람 안에 이미 있었지만 분명히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개신교인이 평생 예수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며 살았다고 합시다. 천사들은 그에게 당신은 틀렸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가 살아오면서 가장 깊은 기쁨을 느꼈던 순간들, 가장 평안했던 순간들, 가장 주님께 가까웠던 순간들을 보게 합니다. 그러면 그는 놀랍게도 그것이 교리 논쟁에서 승리했던 순간이 아니라, 누군가를 용서했던 순간, 진실을 선택했던 순간,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했던 순간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때 비로소 그는 , 이것이 내가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때 실제로 의미했던 것이었구나 하고 깨닫게 됩니다.

 

또한 천사들은 논쟁하지 않습니다. AC.202를 보면 천적 천사들은 신앙에 대해 추론하거나 논증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상대방을 이기려 하지 않고, 상대방이 진리를 사랑하도록 돕습니다. 그래서 천사들의 교육은 설득이라기보다 조명에 가깝습니다. 억지로 납득시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보게 합니다.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 보여 줍니다. 그래서 배우는 사람은 자신이 패배했다고 느끼지 않고, 오히려 이전에는 희미했던 것이 분명해졌다고 느낍니다.

 

무엇보다 천사들은 생각보다 애정을 먼저 다룹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특징입니다. 지상에서는 흔히 생각을 바꾸면 사람이 바뀐다고 여기지만,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은 생각보다 사랑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천사들은 먼저 그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는지를 살핍니다. 그리고 그 사랑 속에 이미 들어 있는 진리를 보여 줍니다. 그러면 진리는 외부에서 들어온 낯선 교리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설명해 주는 빛이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배웠다’기보다 이제야 알겠다’고 느끼게 됩니다.

 

또 하나의 특징은 천사들이 언제나 그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만 가르친다는 점입니다. AC.184에서 죽은 사람이 처음 보는 빛은 눈부신 정오의 빛이 아니라, 잠에서 막 깨어난 사람이 눈꺼풀 사이로 보는 희미한 빛입니다. 주님은 사람을 갑자기 강한 빛 가운데 던져 넣지 않으십니다. 천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상태와 역량에 맞추어 조금씩 열어줍니다. 그래서 배우는 사람은 위협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을 새롭게 이해하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리고 천사들은 언제나 그 사람의 언어로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개신교인에게는 개신교인의 언어로, 가톨릭 신자에게는 가톨릭 신자의 언어로, 선한 이방인에게는 그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가르칩니다. 천사들은 먼저 상응’, ‘천적’, ‘영적’, ‘퍼셉션 같은 용어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 사람 안에 이미 있는 선과 진리의 씨앗을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그러면서 점차 그 안에 담긴 더 깊은 의미를 열어줍니다. 그래서 배우는 사람은 나는 다른 종교를 배우고 있다’고 느끼지 않고, ‘내가 원래 믿고 사랑하던 것의 참뜻을 배우고 있다’고 느끼게 됩니다.

 

이런 점들을 종합해 보면, 천사들의 교육 비결은 결국 한 가지로 귀결됩니다. 그들은 사람에게 진리를 가르치기 전에 먼저 그 사람이 사랑하는 것을 드러내 보게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 안에 이미 들어 있는 진리를 보여 줍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오랫동안 품고 계신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아르카나의 세계로 인도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해, AC.182-189가 주는 답은 의외로 단순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먼저 아르카나를 이해시키려 하기보다, 그들이 이미 사랑하고 있는 주님, 이미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선, 이미 갈망하고 있는 진리를 더 깊이 보게 돕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 그들은 스스로 말하게 됩니다.

 

, 이것이 내가 평생 찾고 있었던 것이었구나.’

 

그리고 저는 AC 전체를 읽으며, 천사들의 교육이란 결국 사람으로 하여금 이 한마디를 하게 만드는 과정이라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됩니다. ‘당신은 저로 하여금 전혀 새로운 길을 걷게 하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도움으로 말미암아 저는 제가 오래전부터 찾고 있던 길이 실제로 어디로 이어지는 길인지를 이제야 비로소 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천사들이 사용하는 가장 놀라운 교육의 방법이 아닐까 싶습니다.

 

 

 

AC.189, 창3 앞, ‘완만하게 위로 경사진 길’

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기 (계속) Continuation Concerning The Entrance Into Eternal Life Of Those Who Are Raised From Death AC.189 그 후에는 완만하게 위로 경사진 길들이 보였는데, 이는 선과 진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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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89, 심화 1,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과 자기 인식’

AC.189.심화 1.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과 자기 인식’ 이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과 자기 인식을 통해 그가 점차적으로 천국을 향해 인도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자기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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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89.심화

 

1.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과 자기 인식

 

이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과 자기 인식을 통해 그가 점차적으로 천국을 향해 인도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자기 인식과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 없이는 아무도 그곳으로 인도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which signify that by the knowledges of what is true and good, and by self-acknowledgment, he should be led by degrees toward heaven; for no one can be conducted thither without such self-acknowledgment, and the knowledges of what is true and good. (AC.189)

 

이 상승의 조건으로 두 가지가 명시됩니다. 첫째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며, 둘째는 자기 인식입니다. 지식만으로도, 혹은 선한 정서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으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아는 인식이 반드시 함께 요구됩니다. 여기서 자기 인식은 단순한 자기 성찰이 아니라, 자신의 내적 상태가 주님의 질서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를 인정하는 것을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조건을 매우 단호하게 말합니다. 아무도 이러한 자기 인식과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 없이는 천국으로 인도될 수 없다고 합니다. 이는 천국이 도덕적 보상이나 외적 신분의 결과가 아니라, 내적 상태와 이해의 질서에 따라 도달되는 곳임을 분명히 하는 선언과도 같습니다. (AC.189 해설)

 

개신교인들, 더 나아가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천국 가는 거, 곧 구원받는 걸 예수 믿고 그분의 피로 죄사함 받아 하나님의 자녀라는 새 신분을 취득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선과 진리’, 자기 인식 같은 용어, 개념들은 아주 낯설어하며 불편해하고, 힘들어하지요. 그러나 죽어 영이 되면, 이런 다른 결들이 눈 녹듯 사라지고 호의적이 되나요? 이런 매우 낯선 두 절대 조건이 반드시 요구되는 걸 보면 말입니다.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리고 사실 이 질문은 AC.189 하나를 넘어, 스베덴보리 신학과 전통적 개신교 신학이 어디에서 갈라지는가를 묻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먼저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사람이 죽는다고 해서 갑자기 신학이 바뀌거나, 모든 사람이 자동으로 ‘선과 진리’, ‘자기 인식’의 중요성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죽음은 사람의 본질을 바꾸지 않습니다. 다만 죽음 이후에는 지상에서 가려져 있던 것들이 점차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개신교인이 평생 ‘나는 예수 믿으니 천국 간다’고 생각하며 살았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삶 속에 실제로는 주님을 사랑하려는 마음, 이웃을 해치지 않으려는 양심, 진리를 사랑하려는 태도가 있었다면, 그는 사후에 천사들의 교육을 받으면서 매우 자연스럽게 ‘, 이것이 내가 믿어 왔던 믿음의 실제 내용이었구나’ 하고 이해하게 됩니다. 그 경우 ‘선과 진리’, ‘자기 인식’은 낯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이미 어렴풋이 살아왔던 것의 설명으로 받아들여집니다.

 

반면 어떤 사람이 ‘예수 믿으면 된다’는 말을 자기 삶의 변화를 거부하는 면허증처럼 사용했다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그 사람은 사후에도 처음에는 같은 생각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계에서는 신분이나 교단, 신학 체계보다 실제 사랑과 삶이 드러납니다. 그때 그는 점차 ‘내가 생각했던 믿음과 실제 내 삶은 달랐구나’라는 사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여기서 AC.189의 ‘자기 인식’이 결정적으로 중요해집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자기 인식은 현대 심리학적 자기 분석과 다릅니다. 그것은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아는 것이 아니라, ‘나는 주님 없이 스스로 선할 수 없는 존재다’, ‘내 안에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있다’, ‘내 생명은 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실 잘 생각해 보면, 이것은 개신교의 가장 깊은 전통과 완전히 다른 말도 아닙니다. 루터나 칼뱅도 인간의 자기 의를 경계했습니다. 문제는 시간이 흐르면서 구원이 점점 ‘법적 신분 변화’ 중심으로 이해되면서, 인간 내면의 실제 변화와 자기 인식의 문제가 뒤로 밀려난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 지점을 다시 끌어냅니다. 그는 ‘예수 믿고 천국 간다’를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실제로 무엇인가?’를 묻습니다. 그리고 그 대답 가운데 하나가 바로 AC.189의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과 ‘자기 인식’입니다.

 

목사님께서 지적하신 것처럼,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선과 진리’, ‘자기 인식’이라는 표현을 처음 들으면 상당히 낯설어합니다. 저 역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천사들은 사람에게 새로운 종교를 가르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그 사람이 이미 사랑하고 있었던 것을 더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그래서 선한 개신교인이 죽어 천사들의 교육을 받을 때, 천사는 아마 이렇게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전부 틀렸습니다.’ 오히려 ‘당신이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했을 때, 그 사랑이 실제로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당신이 회개라고 불렀던 것이 실제로는 이런 자기 인식이었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불렀던 것이 실제로는 이런 선과 진리였습니다’ 하고 설명할 가능성이 훨씬 큽니다.

 

그러므로 많은 경우 사람들은 죽은 뒤 스베덴보리의 용어를 배우기보다, 자신이 지상에서 부분적으로만 이해했던 것의 실제 내용을 배우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종교적 언어의 차이는 점점 중요성을 잃고, 삶과 사랑의 실제 상태가 중요해집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AC.189가 말하듯, 천국으로 인도되는 데에는 반드시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과 ‘자기 인식’이 필요합니다. 다만 그것이 반드시 ‘스베덴보리라는 이름을 알아야 한다’거나, ‘상응이라는 단어를 알아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주님은 사람마다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가르치십니다.

 

그래서 저는 오히려 사후 세계에서 많은 선한 개신교인들이 이런 반응을 보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던 그 뜻이었구나.’

 

, 이것이 내가 평생 기도하면서 어렴풋이 느끼던 것이었구나.’

 

, 이것이 내가 죄인이라고 고백할 때 실제로 의미하던 자기 인식이었구나.’

 

, 이것이 내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부르던 선과 진리였구나.’

 

그때는 ‘선과 진리’, ‘자기 인식’이라는 말 자체보다, 그 실재가 더 중요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실재는 생각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이미 씨앗으로 심겨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주님은 사람을 교리의 이름으로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 사람이 실제로 사랑한 것과 실제로 살고자 했던 것을 보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AC.189, 심화 2, ‘천사들의 교육’

AC.189.심화 2. ‘천사들의 교육’ 그는 사후에 천사들의 교육을 받으면서 매우 자연스럽게 ‘아, 이것이 내가 믿어 왔던 믿음의 실제 내용이었구나’ 하고 이해하게 됩니다. (AC.189 심화 1) 천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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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89, 창3 앞, ‘완만하게 위로 경사진 길’

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기 (계속) Continuation Concerning The Entrance Into Eternal Life Of Those Who Are Raised From Death AC.189 그 후에는 완만하게 위로 경사진 길들이 보였는데, 이는 선과 진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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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기 (계속) Continuation Concerning The Entrance Into Eternal Life Of Those Who Are Raised From Death

 

AC.189

 

그 후에는 완만하게 위로 경사진 길들이 보였는데, 이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과 자기 인식을 통해 그가 점차적으로 천국을 향해 인도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자기 인식과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 없이는 아무도 그곳으로 인도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주제의 계속되는 설명은 이 장의 끝부분에서 볼 수 있습니다. Afterwards pathways were seen sloping gently upward, which signify that by the knowledges of what is true and good, and by self-acknowledgment, he should be led by degrees toward heaven; for no one can be conducted thither without such self-acknowledgment, and the knowledges of what is true and good. A continuation of this subject may be seen at the end of this chapter.

 

해설

 

이 단락은 AC.182-188에서 단계적으로 전개된 사후 여정의 방향을 명확히 정리하며, 그 최종 목표가 무엇인지를 조용히 제시합니다. 여기서 처음으로 ‘위로 경사진 길들’이 등장하는데, 이는 더 이상 단순한 보호나 준비의 단계가 아니라, 분명한 상승의 방향성이 주어졌음을 뜻합니다. 그러나 그 경사는 ‘완만하다’고 표현됩니다. 이는 천국으로의 인도가 급격하거나 강제적인 변화가 아니라, 점진적이고 질서 있는 과정임을 분명히 합니다.

 

이 상승의 조건으로 두 가지가 명시됩니다. 첫째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며, 둘째는 자기 인식입니다. 지식만으로도, 혹은 선한 정서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으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아는 인식이 반드시 함께 요구됩니다. 여기서 자기 인식은 단순한 자기 성찰이 아니라, 자신의 내적 상태가 주님의 질서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를 인정하는 것을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조건을 매우 단호하게 말합니다. ‘아무도’ 이러한 자기 인식과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 없이는 천국으로 인도될 수 없다고 합니다. 이는 천국이 도덕적 보상이나 외적 신분의 결과가 아니라, 내적 상태와 이해의 질서에 따라 도달되는 곳임을 분명히 하는 선언과도 같습니다.

 

중요한 점은, 이 길이 이미 ‘보였다’는 것입니다. 즉, 천국으로 가는 길은 숨겨져 있거나 불확실한 것이 아니라, 분명히 존재하며 인식 가능한 질서입니다. 다만 그 길을 실제로 걷게 하는 것은 외부의 명령이 아니라, 배움과 자기 인식을 통한 내적 변화입니다.

 

마지막 문장에서 스베덴보리는 이 주제가 창세기 3장의 끝부분에서 다시 이어질 것임을 암시합니다. 이는 이 ‘Continuation’이 단순한 삽입 설명이 아니라, 창3의 영적 의미와 직접 연결되어 있음을 분명히 합니다. 즉, 인간이 타락 이후 어떤 방식으로 다시 천국을 향해 인도되는가 하는 문제는, 바로 여기서 제시된 질서와 동일한 원리에 따라 설명될 것입니다.

 

이 단락은 결국, 사후 여정의 핵심 원리가 무엇인지를 요약합니다. 천국으로의 길은 완만하며, 지식과 자기 인식이라는 두 축을 통해서만 열립니다. 그리고 이 원리는 죽음 이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 땅에서의 영적 삶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질서입니다.  

 

 

심화

 

1.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과 자기 인식

 

 

AC.189, 심화 1,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과 자기 인식’

AC.189.심화 1.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과 자기 인식’ 이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과 자기 인식을 통해 그가 점차적으로 천국을 향해 인도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자기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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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천사들의 교육

 

 

AC.189, 심화 2, ‘천사들의 교육’

AC.189.심화 2. ‘천사들의 교육’ 그는 사후에 천사들의 교육을 받으면서 매우 자연스럽게 ‘아, 이것이 내가 믿어 왔던 믿음의 실제 내용이었구나’ 하고 이해하게 됩니다. (AC.189 심화 1) 천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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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88, 창3 앞, 본격적인 ‘배움의 단계’로 들어감

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기 (계속) Continuation Concerning The Entrance Into Eternal Life Of Those Who Are Raised From Death AC.188 그의 그다음 삶은 말에서 내려 걸어서 가는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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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88.심화

 

1.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에 대해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에게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에 대해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는 점이 암시됩니다. and it is insinuated to him that he must be instructed in the knowledges of what is true and good. (AC.188)

 

마지막 문장에서 이 전환의 핵심이 분명히 제시됩니다. 그에게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에 대해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는 점이 암시됩니다. 이는 사후에 모든 것이 즉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질서에 따라 배우고 익혀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영적 세계에서도 무지는 그대로 남아 있으며, 생전의 삶에서 선과 진리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지 않았던 부분은 이후의 교육을 통해 보완되어야 합니다. (AC.188 해설)

 

그러면 이 대목에서 사람들은 , 그때 스베덴보리가... , 그때 아무개 목사가 그렇게 정성을 다해 전하던 것들에 대해 미리 진작 좀 귀 기울일 걸...’들 하나요?

 

 

네, 스베덴보리의 저작 전체를 읽어 보면, 그런 경우는 분명히 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다만 그것이 흔히 생각하는 식의 아이고,내가 왜 그때 그 말을 안 들었을까!’ 하는 후회라기보다는, ‘이제야 알겠다’에 더 가깝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사람은 죽은 뒤에도 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갑니다. 지상에서 들었던 설교, 읽었던 책, 만났던 사람들, 심지어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일들까지도 내면에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생전에 어떤 진리를 접했던 사람은 사후에 그것이 다시 떠오를 수 있습니다. 그때 그는 , 내가 전에 들은 적이 있구나 하고 알아보게 됩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는 여러 곳에서, 죽은 뒤 천사들의 가르침을 들으면서 자신이 지상에서 들었던 말씀이나 진리를 떠올리는 영들을 묘사합니다. 그들은 새로운 것을 배우는 동시에, 예전에 들었지만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을 새롭게 이해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 그때 스베덴보리가...’, ‘, 그때 아무개 목사가...’라는 반응은 충분히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이름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을 통해 주님께서 전하려 하셨던 진리입니다.

 

다만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것은, 사후에 깨닫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단순히 진리를 아는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사랑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생전에 스베덴보리의 책을 전혀 읽지 않았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러나 그는 선을 사랑했고, 진실을 사랑했고, 양심에 따라 살았습니다. 그런 사람은 사후에 오히려 매우 기쁘게 진리를 받아들입니다. 그는 , 이것이 내가 막연히 사랑하던 것의 참모습이었구나 하고 느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스베덴보리를 수십 년 읽고도 자기 사랑을 버리지 않았다면, 사후에 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을 뿐, 반드시 더 쉽게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AC.188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에 대해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는 말은, 단순히 정보 부족을 채우는 교육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삶과 애정이 무엇을 사랑해 왔는지를 진리의 빛 속에서 배우는 과정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목사님의 질문을 읽으며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목사님께서는 지난 여러 해 동안 거의 매일같이 AC를 번역하고 해설하셨습니다. 조회 수가 많지도 않았고, 크게 알려지지도 않았습니다. 때로는 누가 이걸 읽을까 하는 마음도 있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사후 세계에서 어떤 영혼이 천사들의 가르침을 들으며 , 내가 예전에 어디선가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 그때 누군가가 상응에 대해 설명했었는데...’, ‘, 그때 창세기 해설에서 이런 말을 했었는데...’ 하고 떠올린다면, 그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때 그 사람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 아무개 목사’라는 이름일지는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오래전부터 나를 준비시키고 계셨구나’라는 사실을 먼저 보게 될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스베덴보리도, 목사님도, 그리고 수많은 설교자와 교사들도 결국은 그 준비 과정에 사용된 도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도구들의 수고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천국에서는 지상에서 행한 선한 봉사와 사랑의 수고가 잊히지 않는다고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따라서 어떤 영혼이 사후에 진리를 배우면서 그때 누군가가 나에게 이 길을 미리 알려 주었었구나 하고 깨닫는 일은 충분히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씀드리면, 목사님께서 수년 동안 해 오신 AC 번역과 해설 작업은 바로 그런 종류의 씨앗을 뿌리는 일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씨앗은 뿌릴 때는 보이지 않지만, 나중에야 비로소 어디에 떨어졌는지가 드러나니까요.

 

 

 

AC.188, 창3 앞, 본격적인 ‘배움의 단계’로 들어감

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기 (계속) Continuation Concerning The Entrance Into Eternal Life Of Those Who Are Raised From Death AC.188 그의 그다음 삶은 말에서 내려 걸어서 가는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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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기 (계속) Continuation Concerning The Entrance Into Eternal Life Of Those Who Are Raised From Death

 

AC.188

 

그의 그다음 삶은 말에서 내려 걸어서 가는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그가 그 말을 그 자리에서 움직이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에 대해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는 점이 암시됩니다. His subsequent life is represented by his dismounting from the horse and walking on foot, because he cannot make the horse move from the place; and it is insinuated to him that he must be instructed in the knowledges of what is true and good.

 

해설

 

이 단락은 AC.187에서 제시된 상징을 한 단계 더 진행시키며, 사후 여정이 본격적인 ‘배움의 단계’로 들어감을 보여 줍니다. 말에서 내려 걷는다는 것은 단순한 이동 방식의 변화가 아니라, 이전에 가능하다고 느꼈던 힘이나 자율성이 실제로는 아직 주어지지 않았음을 깨닫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는 말 위에 있었으나, 그 말을 움직일 수 없었고, 결국 내려와 자신의 발로 걷게 됩니다.

 

말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다시 한번 강조됩니다. 이는 이해의 능력, 곧 사고의 힘이 아직 자유롭게 작동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님을 뜻합니다. 사후 초기에는 인간이 생전에 쌓아온 사고 습관이나 지적 능력을 그대로 사용하여 스스로 방향을 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러한 이해가 아직 생명과 결합되지 않았기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걷는다’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걷는 것은 스베덴보리에게서 삶의 실천, 곧 의지와 행위의 차원을 의미합니다. 이는 이제 사후의 삶이 단순한 인식이나 느낌의 단계에서 벗어나, 실제로 무엇을 배우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의 문제로 전환되었음을 나타냅니다. 다시 말해, 그는 이제 관찰자나 보호받는 존재가 아니라, 배움의 과정 안으로 들어간 존재가 됩니다.

 

마지막 문장에서 이 전환의 핵심이 분명히 제시됩니다. 그에게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에 대해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는 점’이 암시됩니다. 이는 사후에 모든 것이 즉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질서에 따라 배우고 익혀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영적 세계에서도 무지는 그대로 남아 있으며, 생전의 삶에서 선과 진리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지 않았던 부분은 이후의 교육을 통해 보완되어야 합니다.

 

이 단락은 결국, 사후의 삶이 자동적인 완성이나 즉각적인 충만이 아니라, 계속되는 성장과 학습의 과정임을 보여 줍니다. 말에서 내려 걷는 모습은 겸손의 시작이며, 자신이 아직 배워야 할 존재임을 받아들이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각 사람이 이후 어디로 향하게 될지가 점차 분명해지기 시작합니다.  

 

 

심화

 

1.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에 대해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AC.188, 심화 1,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에 대해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AC.188.심화 1.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에 대해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에게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에 대해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는 점이 암시됩니다. and it is insinuated to him that 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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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89, 창3 앞, ‘완만하게 위로 경사진 길’

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기 (계속) Continuation Concerning The Entrance Into Eternal Life Of Those Who Are Raised From Death AC.189 그 후에는 완만하게 위로 경사진 길들이 보였는데, 이는 선과 진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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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87, 창3 앞, 생명력 넘치는 ‘젊음’의 상태에서 출발

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기 (계속) Continuation Concerning The Entrance Into Eternal Life Of Those Who Are Raised From Death AC.187 그가 다음으로 선한 영들의 공동체로 이끌려 가는 것은, 한 젊은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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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87.심화

 

1. ‘지옥을 향해 몰고 있으나

 

한 젊은이가 말 위에 앉아 그것을 지옥을 향해 몰고 있으나 말이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by a young man sitting on a horse and directing it toward hell, but the horse cannot move a step. (AC.187)

 

말 위에 앉아 지옥을 향해 가고 있는 모습은, 인간 안에 여전히 남아 있는 하향적 성향, 곧 자기 사랑이나 세상 사랑의 흔적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점은 말이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이 시점의 인간이 아직 그러한 방향으로 실제로 나아갈 수 없는 상태에 있으며, 보호와 질서 안에 묶여 있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지옥을 향한 가능성은 상()으로는 나타나지만, 그것이 곧바로 현실이 되지는 않습니다. (AC.187 해설)

 

자신의 이런 영적 실상을 정작 본인이 지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사람의 영으로서의 첫 출발 모습이 이런 상태라는 기술 앞에 새삼 옷깃을 여미게 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목사님께서 느끼신 그 옷깃을 여미게 된다’는 느낌은 AC.187을 바르게 읽을 때 자연스럽게 생기는 반응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 장면은 죽은 사람의 영광스러운 첫 출발을 보여 주면서도, 동시에 인간 본성에 대한 매우 냉정한 진실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AC.186에서는 방금 전까지 밝은 흰빛이 아름다운 금빛으로 변하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영원한 생명에 들어온 기쁨과 행복이 묘사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AC.187에서는 갑자기 젊은이가 말을 타고 지옥을 향해 가려 한다’는 상이 나타납니다. 이 전환은 충격적입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인간이 아무리 천사들의 보호 아래 깨어나더라도 자신의 own,  proprium은 아직 사라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놀라운 것은 이 사람이 악인으로 묘사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AC.186의 흐름상 그는 방금 영원한 생명에 들어온 기쁨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그의 내면에는 여전히 지옥을 향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남아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인간 본성을 얼마나 깊이 보았는지를 보여 주는 대목입니다.

 

목사님 말씀처럼, 여기서 더욱 인상적인 것은 말이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한다’는 부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인간 안에 악의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고 끝나지 않습니다. 그는 동시에 주님의 보호도 함께 보여 줍니다. 방향은 지옥을 향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움직일 수 없습니다. 의도는 있을 수 있으나 실행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가능성은 드러나지만, 현실화되지는 않습니다.

 

저는 이 장면을 읽을 때마다, 인간이 죽은 직후에 곧바로 자기 본성의 가장 깊은 층까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놀랍습니다. 주님은 먼저 그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의 기쁨을 맛보게 하시고, 그 후에야 그 사람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조금씩 드러내십니다. 마치 의사가 중환자를 수술대에 올리자마자 모든 치료를 한꺼번에 하지 않고, 환자가 감당할 수 있는 순서대로 진행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 덧붙이신 정작 본인이 지각하는지는 모르겠다’는 생각도 매우 흥미롭습니다. 사실 AC.187의 문맥을 보면, 이것은 그 사람 자신이 의식적으로 나는 지금 지옥으로 가고 싶다’고 생각하는 장면이라기보다, 그의 상태가 영계의 상응 속에서 그렇게 나타나는 장면에 가깝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자신을 젊은이로 보고 말을 타고 있을 수는 있지만, 그 상 전체가 자기 안에 남아 있는 가능성과 성향을 객관적으로 드러내는 것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자기 자신을 꽤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안에 무엇이 있는지 거의 모릅니다. 주님께서 조금만 빛을 비추시면 놀랄 만큼 많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동시에 우리는 그 사랑들 때문에 즉시 멸망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말이 움직이지 못하듯, 주님의 섭리가 우리를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AC.187은 인간의 비참함보다 주님의 보호를 더 크게 보여 주는 본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 안에는 여전히 지옥을 향할 수 있는 방향성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사람을 아직 놓지 않으십니다. 말은 지옥을 향해 서 있지만 움직이지 못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인간을 보호하시는 주님의 놀라운 섭리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저는 목사님께서 새삼 옷깃을 여미게 된다’고 하신 그 반응이 AC.187이 의도한 가장 건강한 반응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보다, ‘아, 나도 내 안에 저런 가능성이 있겠구나 하고 조용히 자신을 돌아보는 사람이 오히려 이 장면을 더 깊이 이해한 것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보여 주는 것은 절망이 아니라 겸손이며, 두려움이 아니라 주님의 보호 아래 있는 인간의 진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AC.187, 창3 앞, 생명력 넘치는 ‘젊음’의 상태에서 출발

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기 (계속) Continuation Concerning The Entrance Into Eternal Life Of Those Who Are Raised From Death AC.187 그가 다음으로 선한 영들의 공동체로 이끌려 가는 것은, 한 젊은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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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글이나 생각, 사상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거리를 두지는 않으시는 분의 식사 초대가 있을 시, 스베덴보리는 어떻게 했나요?

 

 

스베덴보리의 생애 기록을 보면, 그는 자신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과도 상당히 폭넓게 교류했습니다. 오히려 그가 교류했던 사람들 가운데는 그의 저작에 깊이 공감한 사람보다, 호기심을 가진 사람, 일부만 동의하는 사람, 심지어 비판적인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는 정치가, 학자, 성직자, 귀족, 외교관들과 식사하고 대화했는데, 그들 모두가 스베덴보리의 신학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단순히 ‘내 교리를 믿느냐’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그는 사람의 이해력보다 의지를 더 중요하게 보았습니다. 다시 말해, 어떤 사람이 아직 자신의 저작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진리를 사랑하려는 마음이 있고, 선하게 살고자 하며, 정직하고 진실한 사람이라면 충분히 존중할 가치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실제로 그의 저작 전반에는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에 따라 살 때 평가받는다’는 사상이 반복됩니다.

 

반대로 그는 교리적으로는 동의한다고 말하지만, 내심은 비웃거나 악의를 품고 접근하는 경우를 훨씬 더 조심스럽게 보았습니다. 주님께서도 세리와 죄인들의 식사 초대에는 기꺼이 응하셨지만, 바리새인들의 초대에는 늘 그들의 내적 상태를 보시고 응하셨습니다. 응하시더라도 그 자리에 끌려가신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진리를 증언하셨습니다.

 

따라서 질문하신 경우처럼 ‘동의하지는 않지만, 거리를 두지도 않고, 인간적인 존중과 호의를 가지고 식사를 청하는 사람’이라면, 스베덴보리가 굳이 거절했을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입니다. 오히려 자연스럽게 식사하며 대화했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왜냐하면 그런 만남 자체가 주님의 섭리 가운데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을 설득하기 위해 다투는 일은 거의 하지 않았지만, 상대가 진지하게 묻는다면 기꺼이 설명했습니다.

 

목사님의 경우에도 저는 비슷한 원칙을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상대가 ‘스베덴보리를 그만두게 하려고’, 혹은 ‘논쟁해서 이겨 보려고’ 초청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리고 오랜 인간적 관계 속에서 존중과 호의를 가지고 식사를 청하는 것이라면, 굳이 피하실 이유는 없어 보입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그 자리에서 무슨 말을 할 것인가보다도, 그 사람을 어떤 애정으로 대할 것인가가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스베덴보리가 천국을 설명하면서, 천사들은 먼저 상대의 교리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있는 선의와 진실성을 본다고 여러 차례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상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 사람이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가?’보다 ‘그 사람이 진실하고 선한 마음으로 나를 대하는가?’가 먼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의하지는 않지만, 거리를 두지 않는 사람의 식사 초대’라면, 스베덴보리라면 아마도 상당히 편안한 마음으로 응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만 그 만남의 목적이 사랑의 교류인지, 아니면 끝없는 논쟁인지 정도는 분별했을 것입니다. 그는 사람을 피하기보다, 악한 목적을 가진 상태를 조심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SC.87, ‘몸의 부활’에 대한, 가톨릭, 정교회, 전통 개신교의 입장

기독교 안에서 ‘몸의 부활’에 대한 입장은 생각보다 다양하지만, 큰 틀에서는 대부분의 전통 교회들이 ‘최종적인 몸의 부활’ 자체는 믿고 있습니다. 다만 그 몸이 어떤 몸인가, 현재 죽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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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기 (계속) Continuation Concerning The Entrance Into Eternal Life Of Those Who Are Raised From Death

 

AC.187

 

그가 다음으로 선한 영들의 공동체로 이끌려 가는 것은, 한 젊은이가 말 위에 앉아 그것을 지옥을 향해 몰고 있으나 말이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가 젊은이로 나타나는 것은, 그가 영원한 생명에 처음 들어갈 때, 천사들 가운데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청춘의 한가운데에 있는 것처럼 느끼기 때문입니다. His being next taken into the society of good spirits is represented by a young man sitting on a horse and directing it toward hell, but the horse cannot move a step. He is represented as a youth because when he first enters upon eternal life he is among angels, and therefore appears to himself to be in the flower of youth.

 

해설

 

이 단락은 사후 초기의 기쁨과 평온 이후에 곧바로 등장하는, 매우 중요한 상징적 장면을 제시합니다. 그는 이제 ‘선한 영들의 공동체’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 이동이 직접적인 설명이 아니라 하나의 상징적 환상으로 나타납니다. 이는 영계에서의 이동과 변화가 공간적 이동이 아니라, 상태의 변화로 경험된다는 점을 다시 한번 보여 줍니다.

 

말 위에 앉아 지옥을 향해 가고 있는 모습은, 인간 안에 여전히 남아 있는 하향적 성향, 곧 자기 사랑이나 세상 사랑의 흔적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점은 말이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이 시점의 인간이 아직 그러한 방향으로 실제로 나아갈 수 없는 상태에 있으며, 보호와 질서 안에 묶여 있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지옥을 향한 가능성은 상(像)으로는 나타나지만, 그것이 곧바로 현실이 되지는 않습니다.

 

말은 스베덴보리 체계에서 이해 또는 사고의 힘을 상징합니다. 말이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은, 그 이해가 아직 악한 방향으로 사용될 수 없도록 제한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이는 앞선 단락들에서 계속 강조된 천적 천사들의 보호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며, 사후 초기에는 인간이 자기 의지대로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상태가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그가 ‘젊은이’로 나타난다는 설명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단순한 외형의 문제가 아니라, 내적 상태에 대한 지각입니다. 영원한 생명에 처음 들어간 인간은 천사들 가운데 있으며, 그 상태에서는 노쇠함이나 소진이 아니라, 생명력과 가능성의 충만함이 지배합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를 늙은 사람으로 느끼지 않고, 청춘의 한가운데에 있는 존재로 인식합니다.

 

여기서 ‘청춘’은 육체적 나이를 뜻하지 않고, 생명의 신선함과 아직 열려 있는 가능성을 뜻합니다. 이는 사후의 삶이 생전의 육체적 조건을 그대로 끌고 가는 연장이 아니라, 내적 상태에 따라 전혀 다른 자기 인식을 갖게 됨을 보여 줍니다.

 

이 단락은 결국, 사후 여정이 단선적인 상승이나 하강이 아니라, 보호 속에서 자신의 성향이 서서히 드러나고 시험 되는 과정임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그 시작점은 언제나 생명력 넘치는 ‘젊음’의 상태에서 출발한다는 점을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말해줍니다.  

 

 

심화

 

1. ‘지옥을 향해 몰고 있으나

 

 

AC.187, 심화 1, ‘지옥을 향해 몰고 있으나’

AC.187.심화 1. ‘지옥을 향해 몰고 있으나’ 한 젊은이가 말 위에 앉아 그것을 지옥을 향해 몰고 있으나 말이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by a young man sitting on a horse and direct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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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88, 창3 앞, 본격적인 ‘배움의 단계’로 들어감

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기 (계속) Continuation Concerning The Entrance Into Eternal Life Of Those Who Are Raised From Death AC.188 그의 그다음 삶은 말에서 내려 걸어서 가는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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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86, 창3 앞, ‘영으로서의 삶이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됨’

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기 (계속) Continuation Concerning The Entrance Into Eternal Life Of Those Who Are Raised From Death AC.186 그는 그때부터 자신의 삶을 시작합니다. 이 삶은 처음에는 행복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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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86.심화

 

1. ‘악인에게도 이런 첫 상태를 허락하시는 주님

 

그는 그때부터 자신의 삶을 시작합니다. 이 삶은 처음에는 행복하고 기쁜 상태인데, 그는 스스로가 영원한 생명 안으로 들어왔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아름다운 금빛을 띠게 되는 밝은 흰빛으로 나타나며, 이는 그의 첫 삶이 곧 천적인 동시에 영적인 삶임을 의미합니다. He then commences his life.This at first is happy and glad, for he seems to himself to have come into eternal life, which is represented by a bright white light that becomes of a beautiful golden tinge, by which is signified his first life, to wit, that it is celestial as well as spiritual. (AC.186)

 

심지어 악인에게도 이런 첫 상태를 허락하시는 주님이 정말 놀랍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사실 AC.182-189를 처음 읽는 사람들은 흔히 이 부분을 놓칩니다. 그러나 천천히 읽어보면, 여기에는 스베덴보리가 평생 강조한 주님의 성품이 매우 아름답게 드러나 있습니다. 바로 주님께서는 사람을 처음 만나실 때, 심판자로 만나지 않으시고, 보호자와 아버지로 만나신다는 점입니다.

 

AC.186에서 죽은 사람은 자신의 삶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시작은 두려움도 아니고, 조사도 아니고, 판결도 아닙니다. ‘행복하고 기쁜 상태’입니다. 그는 자신이 영원한 생명 안으로 들어왔다고 느끼며, 그 상태는 아름다운 금빛을 띠게 되는 밝은 흰빛’으로 표현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그 사람이 선한 사람인지 악한 사람인지 구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아직 주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허락하시는 첫 번째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HH에서도 반복되는 원리입니다. 죽은 직후의 사람은 거의 모두 천사들과 함께 있으며, 자신이 여전히 사람으로 살아 있음을 발견하고, 사랑으로 돌봄을 받습니다. 심지어 지옥으로 가게 될 사람들까지도 처음에는 천사들의 보호 아래 놓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며, 누구도 처음부터 버려진 존재로 취급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 신학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생각할 때, ‘죽으면 곧바로 심판대 앞에 서는 것’을 먼저 떠올립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본 세계에서는, 죽은 사람은 먼저 천적 천사들의 품 안에서 깨어납니다. 마치 긴 여행을 마친 아이가 집에 돌아와 보호받는 것처럼 말입니다.

 

목사님께서 심지어 악인에게도 이런 첫 상태를 허락하시는 주님이 정말 놀랍습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매우 중요한 통찰입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악인도 처음에는 천국의 기쁨을 어느 정도 경험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끝까지 그 사람 안에 남아 있는 선과 진리를 살리려 하시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가능한 한 천국으로 이끌 수 있는 길을 찾으십니다.

 

물론 이후에는 각 사람이 자신의 진짜 사랑을 드러내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천사들의 사랑 안에 계속 머물기를 원하고, 어떤 사람은 점차 그것을 불편해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께서 밀어내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의 삶의 방향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AC.182도 분명히 말하듯이, 떠나기를 원하는 쪽은 천사가 아니라 사람 자신입니다.

 

그래서 AC.186을 읽으면 저는 주님의 공의보다 먼저 주님의 자비를 보게 됩니다. 주님은 사람을 만나자마자 너는 어디로 갈 것이다’라고 선언하지 않으십니다. 먼저 영원한 생명 안에 들어왔다는 기쁨을 맛보게 하십니다. 먼저 사랑받는 존재임을 느끼게 하십니다. 먼저 살아 있음을 알게 하십니다.

 

어쩌면 이것은 복음서의 탕자 비유와도 비슷합니다. 아버지는 탕자가 돌아왔을 때, 먼저 잔치를 베풀고 옷을 입히고 안아 줍니다. 심문부터 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묘사한 사후 첫 상태도 어딘가 그런 분위기를 풍깁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 감탄하신 바로 그 지점,  악인에게도’라는 부분이야말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신적 사랑의 특징입니다. 주님은 선한 사람만 사랑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며, 악인조차도 가능한 한 오래, 가능한 한 부드럽게, 가능한 한 천국 가까이 머물게 하십니다.

 

그래서 AC.186 밝은 흰빛이 아름다운 금빛으로 변한다’는 장면은 단순히 죽은 사람의 경험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주님의 마음을 보여 주는 장면인지도 모릅니다. 그 빛은 인간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사람에게 비추시는 주님의 사랑의 빛이기 때문입니다.

 

 

 

AC.186, 창3 앞, ‘영으로서의 삶이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됨’

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기 (계속) Continuation Concerning The Entrance Into Eternal Life Of Those Who Are Raised From Death AC.186 그는 그때부터 자신의 삶을 시작합니다. 이 삶은 처음에는 행복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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