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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형에서 상응으로

긴 강의를 모두 들은 뒤에야 비로소 이 글을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 몇 시간만 듣고 글을 썼다면 아마 전혀 다른 내용이 되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스베덴보리의 말씀 해석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강의라고 느꼈습니다. 휴거와 대환난, 천년왕국, 이스라엘의 회복, 새 예루살렘 등 전체적인 틀은 오늘날 보수적 종말론의 전형적인 구조를 따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 강의를 스베덴보리의 렌즈, 그러니까 스베덴보리의 관점으로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듣고 난 뒤에는 처음의 인상과는 조금 다른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물론 차이는 여전히 컸습니다. 그러나 그 차이보다 먼저 보이기 시작한 것은 성경을 향한 진지한 태도였습니다. 이 강의는 성경을 단순한 역사책으로 읽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는 하나님의 질서가 있으며, 성막과 광야와 가나안은 모두 장차 이루어질 더 큰 실체를 보여 주는 ‘모형’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성경의 사건 하나하나를 하나의 거대한 구속사의 흐름으로 연결하려는 이러한 시도는 충분히 귀하게 볼 만한 부분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저는 스베덴보리를 떠올렸습니다. 흥미롭게도 스베덴보리 역시 성경을 문자 그대로의 역사로만 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모든 말씀 안에는 하늘과 연결되는 내적 의미가 있으며, 눈에 보이는 역사 뒤에는 언제나 주님의 신적 질서가 숨겨져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 점에서 두 사람은 출발점이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두 사람 모두 성경은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살아 있는 하나님의 계시라는 사실을 전제로 말씀을 읽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도덕 교훈이나 역사책 정도로만 이해하는 현실을 생각하면, 이처럼 말씀의 깊이를 찾으려는 태도 자체는 이미 매우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같은 출발선에서 출발한 두 사람의 길은 곧 서로 다른 방향으로 향하기 시작합니다. 강사 목사님은 ‘모형’이라는 열쇠를 사용하여 말씀을 풀이합니다. 성막은 하늘 성전의 모형이며, 가나안은 천국의 모형이고, 예루살렘은 새 예루살렘의 모형입니다. 다시 말하면 과거의 사건이 미래에 이루어질 더 큰 실체를 미리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역사는 하나님의 구속사가 완성되어 가는 방향으로 이해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상응(correspondence)이라는 열쇠를 사용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번 강의를 들으며, 두 해석이 갈라지는 가장 중요한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모형은 역사를 미래와 연결합니다. 그러나 상응은 역사를 인간의 영혼과 연결합니다. 성막은 천국의 모형일 뿐 아니라 인간의 마음과도 상응하며, 광야는 이스라엘의 역사일 뿐 아니라 거듭나는 사람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시험의 상태와도 상응합니다. 가나안은 약속의 땅인 동시에 주님의 사랑 안에서 안식을 누리는 영혼의 상태이며, 새 예루살렘은 장차 내려올 거룩한 성인 동시에 주님의 진리로 새롭게 된 교회와 인간의 내면을 의미합니다.

 

저는 이번 강의를 들으며, 이 차이를 이렇게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강사 목사님은 성경을 ‘역사의 설계도’로 읽으셨고, 스베덴보리는 같은 성경을 ‘영혼의 설계도’로 읽었습니다. 이 차이는 단순히 해석 방법 하나가 다른 정도의 문제가 아닙니다. 말씀을 바라보는 방향 자체가 달라집니다. 강사 목사님의 시선은 앞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들을 향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의 시선은 지금 이 순간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이루고 계시는 일을 향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더 이상 과거를 설명하거나 미래를 예언하는 책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늘도 내 안에서 주님께서 어떻게 옛사람을 벗기시고 새사람을 빚어 가시는지를 보여 주는 살아 있는 책이 됩니다. 저는 이번 긴 강의를 끝까지 들으며, 바로 이 한 가지 차이가 이후 등장하는 휴거와 천년왕국, 새 예루살렘, 일곱 교회, 이기는 자에 대한 모든 해석의 방향을 결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이어질 이야기들도 결국은 모두 이 한 가지 질문으로 다시 모일 것입니다. ‘말씀은 미래의 역사를 보여 주기 위해 기록된 것인가, 아니면 오늘도 우리를 거듭나게 하기 위해 기록된 것인가?’ 저는 스베덴보리의 저작들을 읽어 올수록 그 대답은 점점 더 분명해졌습니다. 말씀은 무엇보다 먼저 한 사람의 영혼을 천국 사람으로 빚어 가시는 주님의 살아 있는 도구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저는 이번 강의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다시 읽기 시작했습니다.

 

 

역사의 설계도와 영혼의 설계도

강의를 계속 들으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표현 가운데 하나는 ‘모형적 진리는 하나님의 설계도’라는 말이었습니다. 강사 목사님은 출애굽에서 광야를 거쳐 가나안에 이르는 이스라엘의 여정을 단순한 민족사의 한 장면으로 보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류 역사를 어떻게 이끌어 가시는지를 미리 보여 주신 거대한 청사진이며, 동시에 성도가 어떻게 성장해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영적 모형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저는 이 대목을 들으며 깊이 공감했습니다. 성경의 사건들은 결코 흩어진 이야기들이 아닙니다. 창세기와 출애굽기, 여호수아서와 요한계시록은 서로 무관한 책들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으로 연결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질서 속에서 자신의 뜻을 계시하십니다. 이러한 통일성을 붙드는 태도는 오늘날 성경을 지나치게 조각내어 읽는 풍조 속에서 오히려 귀하게 평가할 만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는 다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는 하나님의 설계도가 단지 역사를 위한 설계도만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 설계도는 무엇보다 한 사람의 영혼을 위한 설계도입니다. 출애굽은 애굽이라는 한 나라를 떠난 사건인 동시에, 사람이 세상 중심의 삶에서 주님 중심의 삶으로 옮겨 가는 첫걸음입니다. 광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사십 년을 걸었던 장소인 동시에, 인간이 거듭나는 동안 반드시 지나야 하는 시험과 훈련의 상태입니다. 가나안은 이스라엘의 목적지였지만, 동시에 주님의 사랑과 진리 안에서 비로소 안식을 얻은 영혼의 상태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강사 목사님은 하나님의 설계도를 주로 역사 속에서 찾으셨고, 스베덴보리는 같은 설계도를 인간의 내면에서 발견합니다.

 

이 차이는 성경을 읽는 독자의 위치까지 바꾸어 놓습니다. 역사의 설계도를 따라 읽을 때, 우리는 주로 하나님의 구속사가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를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나 영혼의 설계도를 따라 읽기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나는 지금 광야 어디쯤에 있는가’, ‘내 안에는 아직 어떤 애굽이 남아 있는가’, ‘나는 정말 가나안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는가’를 묻게 됩니다. 성경은 그때부터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가 됩니다. 말씀은 더 이상 수천 년 전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주어진 기록이 아니라, 오늘도 내 안에서 계속되고 있는 하나님의 역사로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저는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상응론이 가진 가장 큰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상응은 역사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역사를 더욱 살아 있게 만듭니다. 출애굽은 실제 역사였고, 광야도 실제 광야였습니다. 그러나 그 역사가 오늘 내 안에서도 반복될 때, 비로소 말씀은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성경은 과거의 사건을 보존한 책이 아니라,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 안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거듭남의 질서를 기록한 책입니다. 저는 이번 강의를 들으며, 강사 목사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설계도’라는 표현이 스베덴보리의 상응론 안에서는 더욱 깊고 넓은 의미를 갖게 된다는 사실을 새롭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종말은 미래의 사건인가, 현재의 상태인가?

강의가 본격적으로 요한계시록으로 들어가면서 저는 두 해석이 가장 선명하게 갈라지는 지점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종말’을 바라보는 시선이었습니다. 강사 목사에게 요한계시록은 앞으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보여 주는 책입니다. 휴거와 대환난, 천년왕국, 새 예루살렘은 모두 아직 완전히 성취되지 않은 미래의 사건들이며, 성도는 시대의 징조를 분별하고 그날을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저는 이러한 설명을 들으며, 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 자연스럽게 세계 정세와 이스라엘의 회복, 전쟁과 재난, 국제 질서의 변화에 관심을 갖게 되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 해석은 말씀을 역사의 큰 흐름 속에서 읽기 때문에, 현재 일어나는 사건들 역시 종말의 퍼즐 조각으로 보게 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요한계시록을 읽는 시선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돌립니다. 물론 그는 최후의 심판과 새 하늘과 새 땅을 실제로 인정합니다. 다만 그것을 먼저 외부 세계에서 찾지 않습니다. 그는 가장 먼저 인간의 내면에서 그 의미를 찾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세계의 마지막을 알려 주는 책이기 전에, 한 사람 안에서 옛사람이 끝나고 새사람이 시작되는 과정을 보여 주는 책이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바벨론은 단순한 역사적 세력이 아니라 자기 사랑과 권력욕이 지배하는 영적 상태이며, 아마겟돈은 나라와 나라 사이의 전쟁이라기보다 진리와 거짓이 인간의 마음속에서 벌이는 마지막 싸움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 역시 우주가 새롭게 창조되는 장면만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 안에 새로운 이해와 새로운 의지를 세우시는 거듭남의 완성을 의미합니다.

 

저는 이 차이를 생각하면서 문득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매우 중요하게 다룹니다. 만일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서 시작된다면, 종말 역시 우리 안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자기 사랑이 무너지는 순간은 옛 시대의 종말이며, 주님의 사랑이 자리 잡기 시작하는 순간은 새 시대의 시작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일생 동안 수없이 많은 ‘작은 종말’을 경험합니다. 어제까지 붙들고 있던 거짓을 버리고 진리를 선택할 때, 미움을 내려놓고 용서를 선택할 때, 교만을 버리고 겸손을 선택할 때마다, 한 시대는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열립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이해한 종말의 가장 깊은 의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강의를 들으며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강사 목사은 ‘언제 종말이 오는가’를 매우 진지하게 묻고 계셨습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오늘 내 안에서 무엇이 끝나고 있는가’를 묻습니다. 하나는 미래를 향한 질문이고, 다른 하나는 현재를 향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두 질문은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보완할 수도 있습니다. 미래의 재림을 진심으로 기다리는 사람이라면 오늘도 자신의 마음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주님께서 찾으시는 것은 종말의 날짜를 정확히 계산하는 사람이 아니라, 언제 주님을 만나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도록 날마다 새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 사람일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저는 요한계시록이 미래의 예언서인 동시에, 오늘도 우리 영혼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휴거보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무엇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가이다

강의를 들으며 가장 오랫동안 귀를 기울였던 부분 가운데 하나는 휴거에 대한 설명이었습니다. 강사 목사은 휴거를 단순한 상징으로 이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마지막 시대에 자신의 백성을 보호하시기 위한 실제 사건이며, 이후 이어질 대환난과 천년왕국이라는 거대한 구속사의 흐름 속에서 반드시 이해해야 할 중요한 교리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이러한 해석은 오늘날 복음주의 종말론에서 널리 받아들여지는 관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강사 목사은 성도들이 휴거의 시기를 논쟁하기보다, 언제라도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깨어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거듭 권면하셨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들으며 단순히 미래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려는 강의가 아니라, 성도들을 영적으로 긴장하게 하려는 목회적 의도가 담겨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장면에서도 우리의 시선을 조금 다른 곳으로 이끕니다. 그는 ‘언제 휴거가 일어나는가’보다 ‘주님께서는 무엇으로 사람을 구원하시는가’를 먼저 묻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읽다 보면, 주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는 방식은 언제나 그의 사랑과 의지를 변화시키는 데 있습니다. 사람의 몸을 어느 장소로 옮기는 것이 구원의 본질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새로운 사랑 안으로 옮기는 것이 구원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가장 중요한 ‘들림’은 공간적인 이동이 아니라 영적인 상승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던 사람이 주님을 사랑하게 되고, 자기 자신만을 위하던 사람이 이웃을 위하여 살기 시작할 때, 그는 이미 주님께 이끌려 올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휴거 역시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됩니다. 그것은 단지 미래 어느 날 일어날 한 사건으로만 남지 않습니다.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선을 선택할 때마다, 주님께서는 그 사람을 조금씩 더 높은 영적 상태로 이끌어 올리십니다. 거짓에서 진리로, 자기 사랑에서 이웃 사랑으로, 두려움에서 신뢰로 옮겨 가는 모든 과정이 하나의 영적 휴거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성경의 모든 종말론적 표현을 단순히 상징으로 돌려버린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인정하면서도, 그 안에 언제나 인간의 거듭남과 연결되는 더 깊은 의미가 함께 담겨 있다고 설명합니다.

 

저는 이번 강의를 들으며,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휴거의 시기와 순서를 모두 정확하게 알고 있다 하더라도, 여전히 자기 사랑과 미움 속에서 살아간다면 그 지식은 그 사람을 천국 사람으로 만들지 못할 것입니다. 반대로 종말론의 세부 구조를 완벽하게 설명하지 못하더라도, 날마다 주님의 진리 안에서 자신의 삶을 새롭게 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이미 천국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아마 스베덴보리는 후자를 더 중요하게 보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에 들어가게 하는 것은 미래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현재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저는 강사 목사의 강의와 스베덴보리의 저작이 결국 하나의 질문 앞에서 만난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준비되어 있는가?’ 강사 목사은 다가올 마지막 시대를 향하여 이 질문을 던지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오늘 내 마음속에 임하시는 주님을 향하여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그리고 저는 이 두 질문이 서로를 배척하기보다 오히려 더욱 깊게 만들어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일수록 오늘의 거듭남을 더욱 소중히 여겨야 하고, 오늘 거듭남의 길을 걷는 사람은 언제 주님께서 오시더라도 두려움 없이 그분을 맞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구원은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되는 사건이 아니라, 주님께서 오늘도 말씀을 통하여 우리 안에서 조용히 이루어 가시는 생명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저는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해 휴거를 바라볼 때, 그 역사야말로 말씀 전체가 우리에게 보여 주는 가장 깊은 구원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천년왕국은 언제 시작되는가보다 어디에서 시작되는가가 더 중요하다

이번 강의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주제 가운데 하나는 단연 천년왕국이었습니다. 강사 목사님은 천년왕국을 단순한 상징이나 비유로 보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재림 이후 실제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통치 시대이며, 구약의 수많은 예언과 요한계시록이 함께 증언하는 역사적 실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특별히 이스라엘의 회복과 새 예루살렘, 그리고 이기는 자들의 통치가 모두 이 시대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강의를 들으면서 저는 강사 목사님이 천년왕국 자체보다도, 하나님께서 결국 역사를 선으로 완성하신다는 확신을 성도들에게 심어 주고자 한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세상은 혼란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질서로 귀결된다는 믿음이야말로 이 강의 전체를 지탱하는 중요한 축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천년왕국을 바라보는 시선을 조금 다른 곳으로 돌립니다. 그는 먼저 ‘천년’이라는 숫자보다 ‘왕국’이라는 상태에 주목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나라는 특정한 연대 속에서만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한 사람 안에서 다스리기 시작하는 순간 이미 시작됩니다. 그래서 천년왕국은 미래에만 존재하는 나라가 아니라 현재에도 존재하는 나라입니다. 사람이 자기 사랑의 지배에서 벗어나 주님의 다스리심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할 때, 그 사람 안에서는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열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광야와 가나안의 의미도 자연스럽게 달라집니다. 강사 목사님에게 광야는 천년왕국을 준비하는 연단의 과정이며, 가나안은 마침내 들어가게 될 안식의 땅입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에게 광야는 오늘도 계속되는 거듭남의 과정이고, 가나안은 그 과정 속에서 이미 맛보기 시작하는 천국의 평안입니다. 물론 사람은 완전한 천국을 아직 누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기 시작한 사람은 이미 천국의 첫 열매를 경험합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죽은 뒤 처음 만나는 낯선 나라가 아니라, 이 땅에서부터 조금씩 익숙해져 가는 삶의 방식입니다.

 

저는 이 차이가 매우 아름답게 느껴졌습니다. 강사 목사님의 설명은 성도들에게 소망을 줍니다. 세상의 마지막은 절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라는 사실을 힘있게 선포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설명은 그 소망을 오늘의 삶으로 가져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만이 아니라, 지금 내 안에서도 시작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년왕국은 단순히 기다리는 대상이 아니라 살아가는 현실이 됩니다. 미래의 완성을 기다리면서도 오늘 주님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이미 그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결국 이번 강의를 들으며 저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강사 목사님은 ‘천년왕국이 언제 시작되는가’를 설명하셨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년왕국이 어디에서 시작되는가’를 설명합니다. 하나는 역사의 시간 속에서, 다른 하나는 인간의 마음속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저는 이 두 시선이 서로를 부정하기보다 오히려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래에 완성될 주님의 나라를 믿는 사람이라면, 오늘도 그 나라의 질서 안에서 살아가려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천년왕국은 달력 위의 한 시대이기 전에, 주님께서 우리의 사랑과 생각을 다스리기 시작하시는 거룩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 나라가 오늘도 말씀을 통하여 우리 안에 조용히 세워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저는 이번 강의를 들으며, 그 점이야말로 두 관점이 가장 아름답게 대화할 수 있는 지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새 예루살렘은 도시인가,상태인가?

이번 강의를 들으며 가장 오래 머물러 생각하게 된 부분은 새 예루살렘에 대한 설명이었습니다. 강사 목사님은 새 예루살렘을 매우 실제적인 존재로 설명하셨습니다. 그것은 장차 하늘로부터 내려올 거룩한 도성이며, 모든 성도가 동일하게 거하는 일반적인 천국이 아니라, 특별히 ‘이기는 자’들에게 허락되는 영광스러운 중심 도성으로 이해하셨습니다. 따라서 새 예루살렘은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마지막에 완성하실 실제 나라의 중심이며, 성도들은 이 영광을 사모하며, 오늘의 삶 속에서 연단과 순종을 감당해야 한다고 권면하셨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들으며,  강사 목사님이 성도들의 소망을 매우 구체적인 미래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천국은 막연한 관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 실제 나라라는 믿음을 심어 주려는 목회적 의도가 분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새 예루살렘을 바라보는 순간에도 다시 한 번 시선을 인간의 내면으로 돌립니다. 물론 그 역시 새 하늘과 새 땅을 인정하며, 주님께서 새로운 시대를 여신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새 예루살렘은 무엇보다도 ‘새로운 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교회는 건물이나 조직보다 먼저 사람 안에서 세워집니다. 주님의 진리가 이해를 새롭게 하고, 주님의 사랑이 의지를 새롭게 할 때, 그 사람 안에는 이미 새 예루살렘이 세워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새 예루살렘은 단지 하늘에서 내려오는 도시가 아니라, 하늘의 질서가 인간의 마음속으로 내려오는 사건입니다.

 

저는 이 차이가 매우 인상 깊었습니다. 강사 목사님은 새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우리가 장차 들어갈 나라’를 생각하게 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같은 새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주님께서 지금 내 안에 세우고 계시는 나라’를 생각하게 합니다. 하나는 미래의 소망을 더욱 선명하게 하고, 다른 하나는 현재의 거듭남을 더욱 절실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읽고 난 뒤에는 새 예루살렘이 더 이상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에만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늘도 진리를 사랑하려 애쓰는 모든 사람의 삶 속에서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사실 요한계시록은 새 예루살렘을 매우 아름다운 언어로 묘사합니다. 순금으로 된 거리, 진주로 된 문, 각종 보석으로 장식된 기초석은 읽는 이의 마음을 압도합니다. 강사 목사님은 이러한 묘사를 장차 이루어질 실제 영광으로 이해하십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그 모든 표현을 상응으로 풀이합니다. 금은 사랑을, 보석은 진리의 다양한 빛을, 진주는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이 되는 참된 지식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새 예루살렘의 아름다움은 건축 재료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사랑과 지혜의 아름다움이 됩니다. 도성의 찬란함은 결국 주님께서 그 백성 안에 이루신 거듭남의 찬란함인 것입니다.

 

저는 이 부분을 묵상하면서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만일 지금 내 안에 아직도 미움과 교만과 자기 사랑이 가득하다면, 설령 장차 새 예루살렘이라는 도성 앞에 서게 된다 하더라도 그 나라를 진정한 기쁨으로 누릴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질문을 던집니다. 천국은 장소보다 상태가 먼저입니다. 사랑이 같아야 함께 살 수 있고, 진리를 기뻐하는 마음이 있어야 그 나라를 천국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죽은 뒤에 우리를 천국 사람으로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 조금씩 천국 사람이 되도록 이끌어 가십니다.

 

결국 이번 강의를 들으며 저는 새 예루살렘에 대한 두 시선이 서로를 배척하기보다 오히려 더욱 풍성하게 해 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강사 목사님은 우리에게 장차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게 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나라가 이미 오늘 우리의 마음속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 두 시선이 하나로 만나는 지점이 바로 주님의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늘의 질서가 땅으로 내려오는 것, 그것이 곧 새 예루살렘이며, 그 땅은 세상이라는 공간이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의 마음입니다. 저는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하여 새 예루살렘을 바라볼 때마다, 언젠가 들어갈 한 도시를 기다리기보다 오늘 내 마음이 그 거룩한 도성을 닮아 가고 있는지를 먼저 돌아보게 됩니다. 그것이야말로 요한계시록이 우리 모두에게 들려주는 가장 현재적인 초청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기는 자는 특별한 성도인가, 거듭나는 모든 사람인가?

이번 강의를 통하여 강사 목사님께서 가장 강조하신 표현을 하나만 꼽으라면, 저는 주저 없이 ‘이기는 자’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반복하여 등장하는 이 표현은 강의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축이었습니다. 강사 목사님은 이기는 자를 단순히 예수를 믿는 사람과 동일하게 이해하지 않으셨습니다. 광야의 연단을 통과하고, 말씀 안에서 자신을 정결하게 하며, 끝까지 믿음을 지킨 사람만이 이기는 자이며, 그러한 사람들에게만 새 예루살렘과 천년왕국의 영광이 허락된다고 설명하셨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들으며,  강사 목사님이 성도들에게 매우 높은 영적 목표를 제시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신앙은 단순한 출발이 아니라 끝까지 완주해야 하는 여정이며, 그 여정 속에서 반드시 영적인 성숙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끊임없이 강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권면에는 저 역시 깊이 공감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신앙을 지나치게 가볍게 이해하는 경향도 적지 않습니다. 한 번의 결단만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생각하거나, 삶의 변화 없이도 구원의 확신만을 붙드는 모습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런 현실 속에서 강사 목사님이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라고 거듭 외치시는 것은 분명 귀한 경고입니다. 신앙은 실제 삶으로 증명되어야 하며, 말씀은 반드시 인격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점은 누구도 가볍게 여길 수 없는 중요한 진리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기는 자’라는 표현을 조금 더 조용하고도 깊게 바라봅니다. 그는 먼저 ‘무엇을 이기는가?’를 묻습니다. 그리고 그 대답은 언제나 동일합니다. 사람이 이겨야 하는 가장 큰 원수는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자기 사랑과 거짓입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의 전쟁은 먼저 인간의 마음속에서 벌어집니다. 아마겟돈도, 짐승과의 싸움도, 용과의 싸움도 결국은 주님의 진리와 인간의 자기 사랑 사이에서 일어나는 영적 전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기는 자는 특별한 영웅이 아니라, 매일 조금씩 자기 자신을 이겨 가는 사람입니다.

 

저는 스베덴보리의 이 설명에서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이기는 자는 어느 날 갑자기 완성된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넘어졌지만 다시 일어나는 사람, 미워했던 사람을 용서하려 애쓰는 사람, 자기 교만을 발견하고 주님 앞에 낮아지는 사람, 작은 선이라도 기쁨으로 실천하려는 사람이 모두 거듭남의 길을 걷고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을 한순간의 사건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평생 계속되는 주님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이기는 자란 한 번도 넘어지지 않은 사람이 아니라, 넘어질 때마다 다시 주님께 손을 내미는 사람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강의 후반부로 갈수록 강사 목사님의 설명도 이 점에 가까워진다는 사실입니다. 강사 목사님은 거창한 영웅담보다 오히려 일상의 작은 순종을 말씀하시기 시작했습니다. 보기 싫은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는 것,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려 애쓰는 것, 가정 안에서 자신을 낮추는 것, 이런 작은 승리들이야말로 진정한 영성이라고 권면하셨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들으며 두 관점이 가장 아름답게 만나는 지점을 보았습니다. 결국 이기는 자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 어제의 자기 자신보다 조금 더 주님을 닮아 가는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강의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보며 ‘이기는 자’라는 표현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특별한 소수에게만 주어진 칭호가 아니라, 주님과 함께 거듭남의 길을 걷는 모든 사람을 향한 부르심입니다. 물론 그 길은 쉽지 않습니다. 광야도 있고 시험도 있으며 넘어짐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한 번도 넘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다시 주님을 향하여 일어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완전한 사람을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변화되기를 원하는 사람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 작은 변화가 쌓이고 또 쌓일 때, 어느 날 우리는 비로소 이기는 자라는 말씀이 먼 미래의 영광이 아니라, 오늘도 우리 안에서 조용히 이루어지고 있는 주님의 약속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광야는 목적지가 아니라, 사람을 바꾸시는 주님의 학교이다

이번 강의를 들으며 강사 목사님께서 매우 비중 있게 다루신 또 하나의 주제는 광야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난 뒤 곧바로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사십 년 동안 광야를 지나야 했던 이유를, 강사 목사님은 단순한 역사적 과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훈련시키시는 영적 학교로 설명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를 통하여 사람의 교만과 아집을 깨뜨리시고, 순종을 배우게 하시며, 마침내 하나님의 백성다운 사람으로 만들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설명을 들으며 강사 목사님에게 광야는 단순한 고난이 아니라 사랑의 교육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벌하시기 위해 광야를 허락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약속의 땅에 합당한 존재로 빚어 가시기 위해 광야를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는 스베덴보리 역시 깊이 공감합니다. 그의 저작을 읽다 보면 시험은 결코 하나님의 진노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사랑의 과정입니다. 사람은 평안할 때에는 자기 자신을 잘 알지 못합니다. 자신이 얼마나 자기 사랑에 붙들려 있는지, 얼마나 세상의 인정에 기대어 살아가는지, 얼마나 자신의 생각을 신뢰하는지를 시험이 찾아오기 전에는 거의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광야가 시작되면 비로소 자신의 참모습이 드러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주님께서 사람을 버리시는 과정이 아니라, 사람에게 자기 자신을 보여 주시는 과정으로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모르셔서 시험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모르기 때문에 시험이 필요하다는 설명은 오래도록 제 마음에 남아 있는 가르침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갑니다. 강사 목사님은 광야를 지나야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거기에 이렇게 덧붙일 것 같습니다. ‘광야의 가장 큰 목적은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가나안에 살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천국은 장소 이전에 상태입니다. 만일 사람 안에 여전히 애굽의 사랑이 그대로 남아 있다면, 설령 가나안에 들어간다 해도 그는 그곳을 천국으로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사람을 먼저 변화시키십니다. 사랑이 바뀌고, 기쁨이 바뀌고, 삶의 목적이 바뀌어야 비로소 천국은 그 사람의 집이 됩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스베덴보리의 천국관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다시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는 죽은 뒤에 천국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 천국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이 거듭남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광야도 더 이상 단순한 통과 의례가 아닙니다. 그것은 천국을 준비하는 시간이 아니라, 이미 천국을 배우는 시간입니다. 용서를 배우고, 겸손을 배우고, 진리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며, 무엇보다 주님만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는 곳이 바로 광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광야는 천국의 반대편이 아니라, 천국으로 이어지는 첫 교실입니다.

 

그래서 이번 강의를 들으며 저는 광야를 조금 다르게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광야가 빨리 끝나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광야가 끝나는 것보다 광야가 이루는 일을 더 중요하게 봅니다. 광야가 끝났는데 사람은 그대로라면, 그는 또 다른 광야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광야가 아직 계속되고 있어도 사람이 달라지고 있다면, 그는 이미 가나안의 첫 열매를 맛보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목적은 단순히 고난을 제거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고난을 통하여 새로운 사람을 창조하시는 데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강사 목사님과 스베덴보리는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한 가지 사실 앞에서는 함께 서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그대로 두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변화이며, 광야는 그 변화를 이루시는 주님의 가장 깊은 사랑의 섭리입니다. 다만 강사 목사님은 그 광야를 장차 들어갈 가나안을 위한 준비 과정으로 바라보시고, 스베덴보리는 그 광야 자체가 이미 천국 사람이 되어 가는 과정이라고 바라봅니다. 저는 이 두 시선을 함께 붙들 때, 광야는 더 이상 피하고 싶은 시간이 아니라 주님께서 가장 가까이 계시는 시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배우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미래를 예언하는 책인가, 사람을 변화시키는 책인가?

이번 강의를 끝까지 들으며 제 마음속에 가장 오래 남은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많은 모형을 말씀 속에 남겨 두셨을까?’ 강사 목사님은 그 대답을 매우 일관되게 제시하셨습니다. 출애굽과 광야, 가나안과 예루살렘은 모두 장차 이루어질 하나님의 구속사를 보여 주는 설계도입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 역시 그 설계도의 완성으로 읽어야 하며, 성도는 이 큰 흐름을 이해할 때, 비로소 마지막 시대를 바르게 준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설명을 들으며, 강사 목사님이 무엇보다 성경의 통일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꼈습니다. 창세기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계획이 요한계시록에서 완성된다는 큰 그림은 분명 성경을 더욱 입체적으로 읽게 만드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같은 질문 앞에서 조금 다른 대답을 내놓습니다. 하나님께서 같은 질서를 창세기에서도, 출애굽기에서도, 여호수아에서도, 복음서에서도, 요한계시록에서도 반복하여 말씀하시는 이유는 단지 미래를 예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거듭남이라는 영원한 질서를 보여 주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시대는 바뀌고 역사도 흘러가지만, 사람이 주님께 돌아오는 길은 언제나 같습니다. 애굽을 떠나고, 광야를 지나고, 가나안에 들어가는 이 질서는 아브라함 시대에도, 사도 시대에도,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그래서 말씀은 과거의 사람들에게만 주어진 책도 아니고, 미래 세대만을 위한 예언서도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거듭남의 교과서입니다.

 

저는 바로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의 상응론이 가진 놀라운 힘을 느낍니다. 상응은 성경을 현재형으로 바꾸어 줍니다. 출애굽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고, 광야도 지금 계속되고 있으며, 가나안도 지금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읽을 때 가장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은 ‘이 예언이 언제 이루어질까?’가 아니라 ‘이 말씀은 오늘 내 안에서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입니다. 그렇게 읽기 시작하면 요한계시록도 더 이상 두려운 책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의 마지막을 알려 주는 암호가 아니라, 주님께서 한 사람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과정을 보여 주는 희망의 책이 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저는 이번 강의 전체를 다시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강사 목사님은 끊임없이 ‘준비하십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준비는 시대를 분별하고, 순수한 진리를 붙들며, 광야의 연단을 통과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여기에 한 문장을 덧붙일 것입니다. ‘말씀을 살아내십시오.’ 왜냐하면 말씀은 준비를 위한 정보가 아니라, 사람을 변화시키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많이 안다고 사람이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말씀을 사랑하기 시작하면 사람은 반드시 변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평생 강조한 진리와 사랑의 결합이며, 동시에 제가 이번 강의를 들으며 가장 깊이 공감하게 된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요한계시록을 예전보다 조금 다르게 읽게 되었습니다. 물론 앞으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역사도 귀합니다. 그러나 그 역사보다 먼저 귀한 것은 오늘 내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계를 새롭게 하시기 전에 사람을 새롭게 하십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여시기 전에 한 사람의 마음속에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을 마련하십니다. 결국 성경의 모든 모형은 이 한 가지를 향하여 흐르고 있습니다. 사람을 천국으로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천국 사람이 되게 하는 것. 저는 그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해 이번 강의를 끝까지 들으며 얻게 된 가장 소중한 깨달음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같은 말씀을 읽으면서도 왜 서로 다른 결론에 이르는가?

이번 강의를 끝까지 들으며 저는 처음 품었던 질문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왜 같은 성경을 읽으면서도 이렇게 다른 결론에 이를까?’ 처음에는 그 이유를 휴거나 천년왕국, 새 예루살렘과 같은 개별 교리에서 찾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강의를 모두 듣고 난 뒤에는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차이는 개별 교리에 있기보다, 성경을 읽는 가장 근본적인 방향에 있었습니다. 강사 목사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구속 역사가 앞으로 어떻게 완성될 것인가를 중심으로 말씀을 읽으셨습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하나님께서 지금 한 사람 안에서 무엇을 이루고 계시는가를 중심으로 말씀을 읽었습니다. 결국 두 사람은 같은 말씀을 바라보면서도 서로 다른 질문을 던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나니 지금까지 강의에서 다루었던 여러 주제가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되기 시작했습니다. 휴거는 어디에서 일어나는가보다 주님께서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키시는가의 문제가 되었고, 천년왕국은 언제 시작되는가보다 주님의 통치가 내 삶에서 시작되었는가의 문제가 되었습니다. 새 예루살렘은 장차 내려올 거룩한 도성인 동시에, 오늘 내 안에 세워지고 있는 새로운 교회의 모습으로 다가왔습니다. 일곱 교회 역시 소아시아의 일곱 공동체이기 전에, 지금도 내 마음속에서 반복되는 여러 영적 상태를 비추는 거울처럼 읽히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상응이라는 열쇠가 말씀을 여는 방식이라는 사실을 이번 강의를 통하여 더욱 분명하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강사 목사님의 해석을 가볍게 평가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저는 이 강의를 통하여 다시 한 번 느꼈습니다. 말씀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성경을 붙들고 씨름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강사 목사님의 관심은 결국 사람을 거룩하게 하는 데 있었습니다. 시대를 분별하라는 말씀도, 광야의 연단을 통과하라는 말씀도, 이기는 자가 되라는 권면도 모두 성도들이 주님 앞에서 더욱 정결한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는 목회자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저는 바로 그 점에서 이 강의를 끝까지 들을 가치가 충분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그 목회적 열정을 조금 더 깊은 자리로 이끌어 갑니다. 그는 성도를 미래의 천년왕국으로 먼저 보내지 않습니다. 먼저 오늘의 거듭남으로 인도합니다. 먼 훗날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게 하기 전에, 지금 내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고 있는지를 묻게 합니다. 그것은 종말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종말을 오늘의 삶으로 가져오는 일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말씀 해석을 오래 접할수록 성경은 점점 미래의 예언서라기보다 현재의 생명서가 됩니다. 말씀을 읽을 때마다 주님께서 세상을 어떻게 바꾸실 것인가보다, 먼저 나를 어떻게 바꾸고 계시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아마 이것이 이번 강의를 통하여 제가 얻은 가장 큰 열매일 것입니다. 강사 목사님은 저에게 다시 한 번 성경의 큰 그림을 보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 큰 그림이 결국 한 사람의 작은 마음 안에서 완성되어야 한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저는 이 두 시선을 함께 붙들 때, 말씀은 더욱 풍성해진다고 믿습니다. 역사는 주님의 섭리 안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역사를 이루시는 동일한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속에서 조용히 새 창조를 계속하고 계십니다. 저는 그 사실을 이번 긴 강의를 통하여 다시 한 번 깊이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제가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하여 이 강의를 읽으며 독자들과 가장 나누고 싶었던 이야기입니다.

 

 

말씀의 문자는 문이요, 생명은 그 안에 계신 주님이다

이번 강의를 들으며 제 마음속에 여러 차례 떠오른 생각 가운데 하나는 강사 목사님께서 성경의 문자를 얼마나 깊이 신뢰하고 사랑하시는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창세기의 작은 사건 하나도 결코 우연으로 보지 않으셨고, 출애굽과 광야, 성막과 절기, 가나안과 예루살렘, 그리고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성경 전체를 하나의 질서 안에서 연결하시려는 모습에서는 오랜 세월 말씀을 붙들고 씨름해 온 분만이 가질 수 있는 경건한 집념이 느껴졌습니다. 오늘날 성경을 단순한 역사 자료나 종교 문헌 정도로만 이해하려는 경향이 점점 강해지는 현실을 생각하면, 이러한 태도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귀하게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번 강의를 들으며 무엇보다 강사 목사님은 성경을 사랑하는 분이라는 사실을 여러 번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있었기에 긴 세월 동안 같은 말씀을 반복하여 묵상하고, 또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을 기쁨으로 감당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저는 다시 스베덴보리를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스베덴보리 역시 누구보다 성경을 사랑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평생 말씀을 연구하며 살아갔고, 자신의 거의 모든 저작을 성경의 내적 의미를 밝히는 일에 바쳤습니다. 그런데 그의 성경 사랑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그는 말씀의 문자를 사랑하면서도, 언제나 그 문자 안에 살아 계신 주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성경은 단순히 바른 해석을 얻기 위한 책이 아니라,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는 자리였습니다. 그는 말씀을 읽을 때마다 사람은 단순히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과 접촉하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의 성경관은 단순한 해석학을 넘어 하나의 영적 경험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문자를 종종 집의 문에 비유합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튼튼한 문이라도 그 문은 집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존재합니다. 문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그러나 문이 없다면 집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말씀의 문자도 이와 같다고 그는 설명합니다. 창세기의 역사도, 출애굽의 사건도, 광야의 시험도, 요한계시록의 환상도 모두 우리를 더 깊은 곳으로 인도하는 입구입니다. 그래서 문자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동시에 문 앞에만 머물러서도 안 됩니다. 문을 지나야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듯이, 문자를 통하여 그 안에 담긴 주님의 사랑과 지혜, 그리고 거듭남의 생명으로 들어가야 비로소 말씀은 살아 있는 계시가 됩니다. 저는 이번 강의를 들으며 강사 목사님께서 성경의 문을 매우 소중히 여기신다는 사실을 느꼈고, 스베덴보리는 그 문을 지나 어디까지 들어갈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강사 목사님의 ‘모형’과 스베덴보리의 ‘상응’은 서로 흥미로운 관계를 맺습니다. 강사 목사님은 성막을 보며 장차 이루어질 하늘의 실체를 바라보십니다. 스베덴보리는 같은 성막을 보며 인간의 마음과 천국 공동체를 함께 바라봅니다. 강사 목사님은 광야를 보며 하나님의 구속사가 완성되어 가는 과정을 설명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같은 광야를 보며 오늘도 우리 안에서 계속되는 거듭남의 여정을 설명합니다. 그러나 두 분 모두 문자에서 끝나지는 않습니다. 문자 너머를 바라본다는 점에서는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습니다. 다만 강사 목사님의 시선은 주로 앞으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역사에 머물고, 스베덴보리의 시선은 지금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역사까지 더 깊이 들어갑니다. 저는 이 차이를 우열의 문제라기보다 시선의 깊이와 방향의 차이로 이해하고 싶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또 하나의 아름다운 비유를 남깁니다. 그는 말씀의 문자와 속뜻의 관계를 인간의 몸과 영혼의 관계에 비유합니다. 몸이 있어야 영혼이 이 세상에서 활동할 수 있듯이, 말씀의 문자도 있어야 그 안에 담긴 신적 생명이 인간에게 전달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문자를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문자가 거룩하기 때문에 그 안에 신적 생명이 머무를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몸만 있고 생명이 없다면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듯, 문자만 있고 그 안의 사랑과 진리가 살아 움직이지 않는다면 말씀도 인간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저는 이 설명을 처음 접했을 때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때 비로소 성경은 단순히 연구해야 할 책이 아니라, 살아 계신 주님께서 우리를 만나시는 거룩한 자리라는 사실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번 강의를 들으며 저는 자연스럽게 제 자신에게도 질문을 던지게 되었습니다. 나는 과연 말씀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보다, 말씀이 얼마나 나를 바꾸고 있는가를 묻게 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말씀을 많이 기억하는 것보다 말씀을 사랑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길 것입니다. 성경을 수없이 읽었어도 여전히 미움을 붙들고 있다면, 아직 문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성경에 대한 지식은 많지 않아도 말씀 한 구절 때문에 용서하게 되고, 낮아지게 되고, 주님을 더욱 의지하게 되었다면 그는 이미 문을 지나 집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결국 말씀의 목적은 정보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새롭게 만드는 데 있습니다. 이 점에서는 강사 목사님께서 반복해서 강조하신 삶의 변화와도 아름답게 만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번 긴 강의를 마치며 강사 목사님에게서 말씀을 향한 깊은 경외심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에게서는 그 말씀 안에 계신 주님을 향한 깊은 사랑을 보았습니다. 저는 이 둘이 서로 경쟁하는 관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씀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때 사람은 더욱 깊은 의미를 찾게 되고, 그 깊은 의미를 만날수록 다시 문자를 더욱 귀하게 여기게 됩니다. 결국 말씀의 문자는 우리를 주님께 인도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문을 지나 주님을 만나는 순간, 성경은 더 이상 읽는 책에 머물지 않고 살아가는 생명이 됩니다. 저는 이번 강의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다시 바라보며, 바로 이 점이 스베덴보리의 성경관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깊은 울림을 주는 이유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왜 스베덴보리는 끝까지 상응을 말했는가?

이번 강의를 마무리해 가면서 저는 처음에 품었던 질문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왜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거의 모든 저작에서 그렇게까지 ‘상응’을 반복하여 설명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처음 스베덴보리를 접하는 사람들은 상응을 단순히 성경을 해석하는 하나의 방법쯤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의 저작을 오래 읽다 보면 그것이 단순한 해석 기법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상응은 성경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 낸 이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천국과 세상, 영과 육, 사랑과 진리, 자연과 영계를 연결하시는 창조의 질서 자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베덴보리에게 상응은 선택할 수도 있고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는 해석법이 아니라, 창조 세계를 이해하는 가장 근본적인 원리였습니다.

 

이번 강의에서 강사 목사님은 성경의 여러 사건들을 ‘모형’이라는 관점에서 매우 일관되게 설명하셨습니다. 성막은 하늘의 모형이고, 절기는 장차 이루어질 하나님의 역사의 모형이며, 광야는 연단의 모형이고, 가나안은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의 모형입니다. 저는 이러한 설명을 들으며 성경 전체가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되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성경은 스스로도 많은 사건을 ‘장차 올 것의 그림자’ 또는 ‘예표’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모형이라는 관점은 성경 안에서도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이 이번 강의의 중요한 장점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갑니다. 그는 묻습니다. ‘왜 그것이 모형이 될 수 있는가?’ 성막이 왜 하늘의 모형이 되고, 광야가 왜 거듭남의 여정을 드러내며, 가나안이 왜 천국을 상징할 수 있는가를 설명하는 더 근본적인 원리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의 대답이 바로 ‘상응’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는 처음부터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천국의 사랑은 자연계의 따뜻함과 상응하고, 진리는 빛과 상응하며, 사람의 몸은 영혼과 상응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역사 역시 단순히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영원한 영적 질서를 담아낼 수 있습니다. 모형은 상응 위에 세워질 때 비로소 그 깊은 의미를 갖게 됩니다.

 

저는 이번 강의를 들으며 두 관점의 차이를 하나의 그림으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강사 목사님은 성경의 ‘가로축’을 매우 선명하게 보여 주십니다. 창세기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구속사가 출애굽과 광야를 지나 요한계시록에서 완성되는 거대한 역사 말입니다. 그 흐름은 분명 아름답고, 성경을 통전적으로 읽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에 또 하나의 축을 더합니다. 저는 그것을 ‘세로축’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창세기에서 오늘의 나에게로, 광야에서 오늘의 시험으로, 새 예루살렘에서 오늘 내 안에 세워지는 새로운 교회로 이어지는 축입니다. 가로축이 시간을 따라 흐른다면, 세로축은 인간의 내면을 향하여 내려옵니다. 그리고 이 두 축이 만나는 자리에서 성경은 비로소 살아 있는 말씀이 됩니다.

 

어쩌면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끝까지 상응을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일 것입니다. 만일 상응이 없다면 성경은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책은 될 수 있어도, 오늘의 나를 변화시키는 책이 되기는 어렵습니다. 반대로 상응만 말하고 역사성을 무시한다면 말씀은 현실과 동떨어진 상징의 세계로 흩어질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둘을 함께 붙듭니다. 그는 역사가 실제였음을 인정하면서도, 그 역사가 동시에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 안에서 반복되는 영적 역사라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출애굽은 과거의 사건인 동시에 오늘도 계속되는 사건이며, 광야는 이스라엘의 여정인 동시에 지금도 우리 안에서 계속되는 거듭남의 과정입니다. 저는 이 점이야말로 스베덴보리의 상응론이 가진 가장 놀라운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강의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보며 저는 한 가지를 더욱 분명하게 배우게 되었습니다. 모형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무엇을 이루실 것인지를 보여 줍니다. 상응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어떻게 우리 안에서 이루고 계시는지를 보여 줍니다. 모형은 역사의 방향을 밝혀 주고, 상응은 영혼의 방향을 밝혀 줍니다. 저는 이 둘을 함께 바라볼 때 성경은 더욱 입체적으로 읽히며, 하나님의 말씀은 단지 오래전의 기록도,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예언도 아니라, 오늘도 살아 계신 주님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생명의 말씀으로 다가온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가 평생토록 ‘상응’을 말한 이유는 새로운 해석법을 소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씀 안에 살아 계신 주님의 생명이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에게 흘러가도록 하기 위함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에필로그 만일 스베덴보리가 이 강의를 끝까지 들었다면

이번 긴 강의를 모두 마친 뒤에도 한동안 쉽게 자리를 떠날 수 없었습니다. 여러 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을 오갔지만, 그 가운데 가장 오래 남은 것은 조금 색다른 상상이었습니다. ‘만일 스베덴보리가 이 강의를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들었다면 어떤 말을 했을까?’ 물론 누구도 그 대답을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방대한 저작들을 오랫동안 읽어 온 사람이라면, 적어도 어떤 방향으로 생각했을지는 조심스럽게 그려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마지막 글은 비평도 아니고 평가도 아닙니다. 다만 한 사람의 독자로서, 또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조용히 그려 보는 하나의 상상입니다.

 

아마 스베덴보리는 강의를 들으며 여러 번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을 것입니다. 성경을 하나의 통일된 계시로 읽으려는 태도 앞에서, 말씀을 존중하는 마음 앞에서, 그리고 신앙은 반드시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권면 앞에서는 깊이 공감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의 저작을 읽어 보면, 참된 신앙은 언제나 삶 속에서 드러나야 한다는 점을 반복하여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믿는 대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사랑하는 대로 천국에 간다는 그의 설명은 교리보다 삶을 더 깊이 바라보게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강사 목사님께서 성도들에게 순종과 거룩함, 회개와 삶의 변화를 거듭 강조하신 부분은 스베덴보리 역시 소중하게 여겼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스베덴보리는 몇몇 중요한 지점에서는 매우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다른 방향을 제시했을 것입니다. 휴거를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주님께서는 사람의 몸보다 먼저 사랑을 들어 올리십니다’라고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천년왕국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주님의 나라는 먼저 사람의 마음속에서 시작됩니다’라고 덧붙였을지도 모릅니다. 새 예루살렘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그 거룩한 성은 장차 내려오는 동시에, 오늘도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 안에 세워지고 있습니다’라고 설명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강의를 부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같은 말씀을 한 단계 더 깊은 곳에서 바라보도록 초대하기 위한 조용한 권면이었을 것입니다.

 

저는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읽으며 자주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그는 논쟁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사람을 진리 안으로 이끄는 일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의 글에는 상대를 이기려는 날카로움보다, 사람을 주님께 더 가까이 데려가려는 따뜻함이 더 많이 배어 있습니다. 물론 진리에 대해서는 결코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말하는 목적은 상대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함께 더 큰 빛으로 나아가기 위함이었습니다. 저는 이번 강의를 들으며 저도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교리의 차이는 분명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 차이를 말하는 방식은 언제나 주님의 사랑을 닮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진리를 말하면서도 진리의 열매를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강의를 통하여 저는 또 하나의 귀한 사실을 다시 배우게 되었습니다. 강사 목사님께서 전하신 말씀에는 적어도 한 가지 분명한 힘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이크 앞에서 하시는 말씀과 삶을 분리하지 않으려는 진지함입니다. 저는 그것이야말로 모든 신앙인이 오래도록 간직해야 할 가장 귀한 모습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을 거듭남의 중요한 열매로 설명합니다. 사람이 입으로 고백하는 것과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이 하나가 되고, 가르치는 것과 살아가는 것이 하나가 될 때, 비로소 진리는 그의 삶 속에서 몸을 입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이번 강의를 들으며 단지 하나의 종말론을 접한 것이 아니라, 한 신앙인의 삶의 태도를 함께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 긴 글을 마무리하며 저는 처음보다 훨씬 더 조용한 마음으로 한 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언젠가 우리는 모두 이 땅의 모든 해석과 논쟁을 뒤로한 채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는 우리가 붙들었던 많은 교리들이 더 밝은 빛 가운데 새롭게 이해될 것입니다.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말하지만, 그날에는 주님께서 보여 주시는 그대로 보게 될 것입니다. 저는 그날을 생각하면, 교리의 차이를 가볍게 여길 수는 없지만, 동시에 그 차이를 말하는 우리의 태도 역시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야 한다는 사실을 더욱 깊이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이 긴 시리즈의 마지막을 저는 하나의 소망으로 맺고 싶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계속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해 다양한 기독교 콘텐츠를 바라볼 것입니다. 때로는 공감할 것이고, 때로는 분명한 차이를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글의 목적은 누군가를 판단하거나 논박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말씀을 더 깊이 이해하고, 주님을 더 깊이 사랑하며, 우리의 삶이 조금이라도 더 천국을 닮아 가도록 서로를 돕는 데 있습니다. 결국 모든 참된 계시는 사람을 주님께로 이끌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번 강의를 통하여 다시 한번 그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교리의 차이는 남아 있지만, 주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과 말씀을 향한 경외심은 언젠가 모든 참된 신앙인이 함께 만나게 될 하나의 공통된 언어가 될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SY.33, ‘신학교 자퇴합니다’, 제가 본 것은 ‘추악한 거래’였습니다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이 영상은 매우 강한 메시지를 담고 있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몇 가지 중요한 구분이 필요합니다. 가장 먼저 말할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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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2.심화

 

1. ‘공주농아교회를 생각하며

 

이 글을 읽으면서 반대로 농아(聾啞)인들, 그러니까 못 듣고, 말 못 하는 분들 생각과, 그분들을 대상으로 목회하시는, 저의 친구 목사님 생각이 났습니다.  육체적 장애를 갖고 살아가시는 분들에 대해서 좀 깊이 다루어 주세요.

 

 

AC.322를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농아인교회와 농아목회, 그리고 지상에서 듣고 말하는 육체적 기능에 제한을 지닌 채 살아가는 분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실제 한국 교계에서는 오랫동안 ‘농아인교회’, ‘농아목회’라는 명칭을 사용해 왔으므로 여기서도 그 현장 용어를 존중하겠습니다. 다만 이분들의 본질을 이해할 때에는 육체적 청각과 음성언어의 제한을 영 자체의 결핍과 혼동하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AC.322의 핵심은 육체의 눈과 귀가 감각의 근원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육체의 귀로 듣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감각하는 주체는 영이라고 말합니다. 귀는 자연계의 소리를 영에게 전달하는 기관이며, 혀와 성대는 영의 생각과 애정을 자연계의 음성으로 나타내는 기관입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지상에서 청각 기관의 손상으로 소리를 듣지 못하거나 음성언어를 자유롭게 사용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사람의 영적 청각이나 생각하고 교통하는 능력까지 결여된 것은 아닙니다. 육체의 통로가 제한된 것이지, 그 사람의 영이 불완전하거나 인간성이 덜한 것이 아닙니다.

 

이 구분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흔히 보고 듣고 말하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더 온전한 사람처럼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인간론에서는 사람의 본질이 육체의 기능에 있지 않고, 의지와 이해, 사랑과 생각을 지닌 영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듣지 못하는 몸, 보지 못하는 몸, 걷지 못하는 몸은 그 사람의 영적 가치나 영원한 가능성을 규정하지 않습니다. 육체적 장애는 자연계에서 영이 자신을 나타내는 특정 통로가 제한된 상태이지, 영 자체가 손상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AC.322는 농인들에게 특별한 위로를 줍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사후의 청각은 단순히 물리적 소리를 더 크게 듣는 능력이 아닙니다. 영계의 말은 생각과 애정이 훨씬 직접적으로 전달되는 교통입니다. 지상에서는 음성, 문자, 표정, 몸짓과 같은 외적 기호를 거쳐야 하지만, 영계에서는 말하는 사람의 생각과 애정이 그 표현 안에 함께 담깁니다. 따라서 지상에서 소리를 듣지 못한 사람도 육체를 벗은 뒤에는 다른 영들과 온전히 교통할 수 있으며, 지상에서 겪었던 의사소통의 장벽도 더 이상 같은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농인의 지상 삶을 단지 ‘사후에 고쳐질 결핍’으로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매우 조심해야 할 부분입니다. 농인은 지금 이 땅에서도 불완전한 인간이 아닙니다. 수어는 부족한 몸짓이 아니라 생각과 감정, 신앙과 예배를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언어입니다. 소리를 듣는 사람이 음성언어로 말씀을 받고 기도하듯, 농인은 수어와 시각적 언어를 통하여 말씀을 받고 기도하며 주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귀에 들리는 음성보다 그의 마음의 애정과 의도를 보십니다. 그러므로 수어로 드리는 기도는 음성으로 드리는 기도보다 조금도 덜 온전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듣는다’는 말도 언제나 육체적 청각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말씀의 속뜻으로 ‘듣는다’는 것은 진리를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을 뜻합니다. 귀로 설교를 듣고도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영적으로 듣지 못하는 사람일 수 있으며, 자연적 소리를 듣지 못하더라도 수어와 말씀을 통하여 진리를 받아들이고 삶으로 행하는 사람은 영적으로 참되게 듣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육체적 청각과 영적 청각을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은 소리를 감지하는 기관의 상태보다,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여 사랑과 삶으로 응답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같은 원리에서 ‘말한다’는 것도 음성을 낸다는 뜻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말한다’는 것은 자신의 생각과 애정을 표현하고, 다른 사람과 나누는 것입니다. 농인이 손과 얼굴과 몸의 움직임으로 수어를 사용할 때, 그는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수어는 얼굴 표정과 공간, 움직임을 함께 사용하기 때문에 애정과 관계를 풍성하게 표현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농인을 ‘말 못 하는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의 실제 언어 능력과 인간적 교통을 충분히 보지 못하는 표현이 될 수 있습니다.

 

농인 목회 역시 단순히 음성 설교를 수어로 옮기는 보조적 사역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농인의 언어와 문화와 삶의 경험 안에서 말씀이 육화되도록 섬기는 온전한 목회입니다. 농인 공동체에는 청인 중심 사회에서 겪는 고립, 교육과 정보 접근의 어려움, 가족 안에서조차 충분히 소통하지 못하는 아픔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농인 목회자는 단순한 통역자가 아니라, 그들의 언어 안에서 말씀을 전하고, 그들의 기쁨과 상처를 함께 나누며, 교회가 참된 영적 공동체가 되도록 섬기는 목회자입니다.

 

특히 교회는 농인을 일방적인 도움의 대상으로만 바라보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해 줄 것인가’라는 질문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주님께서 그들을 통하여 교회에 무엇을 가르치시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농인 공동체는 언어가 반드시 소리여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교통의 본질이 음성이 아니라 생각과 애정의 나눔이라는 사실, 몸 전체가 언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는 오히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계의 언어, 곧 생각과 애정이 표현 전체에 담기는 언어를 이해하는 데 특별한 빛을 줄 수 있습니다.

 

또한 장애를 개인의 죄나 믿음 부족과 연결해서는 안 됩니다. 육체적 장애를 곧바로 영적 결함의 표지로 해석하는 것은 주님의 섭리와 인간의 존엄을 크게 오해하는 것입니다. 자연계의 몸은 유전, 질병, 사고, 환경 등 수많은 자연적 원인 아래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각 사람이 처한 조건 안에서도 자유와 합리성을 보존하시고, 그가 받을 수 있는 방법으로 선과 진리를 공급하십니다. 누군가는 소리로 말씀을 받고, 누군가는 문자로, 누군가는 수어와 표정과 관계를 통하여 받습니다. 통로는 다르지만, 생명의 근원은 오직 주님 한 분입니다.

 

여기에는 목회적으로도 중요한 경계가 있습니다. 농인을 위해 기도하면서 오직 ‘귀가 열리고 말하게 되는 기적’만을 목표로 삼으면, 당사자는 현재의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불완전하거나 받아들여지지 않은 존재라는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물론 치유를 구하는 기도 자체가 잘못은 아니지만, 그보다 먼저 그 사람이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주님의 형상을 지닌 온전한 인격이며, 그의 언어와 공동체, 그리고 신앙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참된 치유는 신체 기능의 변화만이 아니라, 고립이 교통으로, 배제가 공동체로, 수치가 존엄으로 바뀌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AC.322의 마지막 문장인 ‘감각하는 능력이 어떠하냐에 따라 생명도 그러하다’는 말씀도 단순히 감각기관의 성능을 평가하는 말이 아닙니다. 여기서 더 깊은 감각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 다른 사람의 애정과 필요를 받아들이는 능력입니다. 귀가 밝아도 이웃의 아픔을 듣지 못할 수 있고, 자연적 소리를 듣지 못해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매우 깊이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 생명의 깊이는 청력의 수치나 발음의 정확성으로 측정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에 마음이 움직이며, 주님과 이웃에게 어떻게 응답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농인들은 사후에 비로소 ‘온전한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미 지금 온전한 인간, 그러니까 주님으로부터 거듭날 수 있는 완전한 인간 구조를 가진 존재이며, 다만 자연계의 특정 감각 통로에 제한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사후에는 그 제한이 벗겨지고, 그동안 영 안에 있었던 생각과 애정과 교통의 능력이 훨씬 더 자유롭고 완전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그때 그들은 처음으로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서도 이미 사람이었던 자신이 육체의 제약 없이 더욱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AC.322는 농인들을 향해 ‘언젠가 귀가 열릴 것이니 지금의 삶을 견디라’고만 말하는 글이 아닙니다. 오히려 청인들에게 ‘육체의 귀를 인간의 기준으로 삼지 말라’고 경고하는 글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듣는 이는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며, 참으로 말하는 이는 사랑과 진리를 삶으로 표현하는 사람입니다. 농인을 섬기시는 그 목사님의 사역은 바로 이 영적 듣기와 말하기가 수어라는 아름다운 언어를 통하여 교회 안에 실현되도록 돕는 귀한 목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322, 창4 앞, ‘AC.321의 내용을 훨씬 더 구체적으로 확장’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AC.322 영들이 육체 안에서 살 때보다 훨씬 더 섬세한 감각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그릇된 생각을 조심해야 합니다. 저는 수천 번 반복된 경험을 통하여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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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AC.322

 

영들이 육체 안에서 살 때보다 훨씬 더 섬세한 감각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그릇된 생각을 조심해야 합니다. 저는 수천 번 반복된 경험을 통하여 사실은 그 반대임을 알고 있습니다. 영의 본성에 관하여 미리 형성된 관념 때문에 이걸 믿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저세상에 들어갔을 때 자신의 경험을 통해 배우게 하세요. 안 믿을 수가 없을 겁니다. 무엇보다도 영들은 시각(sight)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빛 가운데 살기 때문인데, 선한 영들과 천사적 영들, 그리고 천사들은 이 세상의 한낮 정오의 빛으로는 거의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훨씬 더 밝은 빛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들이 머물며 사물을 보는 그 빛에 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the Lord’s Divine mercy)로 이후에 설명하겠습니다. 영들은 또한 청각(hearing)을 가지고 있으며, 그 청각 또한 육체의 청각으로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잘 들립니다. 그들은 여러 해 동안 거의 끊임없이 저와 말해 왔습니다. 다만 그들의 말에 관해서도 주님의 신적 자비로 이후에 설명하겠습니다. 그들에게는 후각(the sense of smell)도 있으며, 이에 관해서도 역시 주님의 신적 자비로 이후에 다루고자 합니다. 그들에게는 지극히 섬세한 촉각(a most exquisite sense of touch)이 있습니다. 지옥에서 겪는 고통과 고문도 이 촉각에서 비롯됩니다. 모든 감각은 촉각과 관련되며, 다른 감각들은 단지 촉각의 여러 차이와 다양한 형태일 뿐입니다. 그들은 또한 육체 안에 있을 때 가졌던 것들로는 비교조차 안 되는 욕망과 애정들을 가지고 있는데, 이에 관해서도 주님의 신적 자비로 이후에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영들은 육체 안에서 살 때보다 훨씬 더 맑고 분명하게 생각합니다. Beware of the false notion that spirits do not possess far more exquisite sensations than during the life of the body. I know the contrary by experience repeated thousands of times. Should any be unwilling to believe this, in consequence of their preconceived ideas concerning the nature of spirit, let them learn it by their own experience when they come into the other life, where it will compel them to believe. In the first place spirits have sight, for they live in the light, and good spirits, angelic spirits, and angels, in a light so great that the noonday light of this world can hardly be compared to it. The light in which they dwell, and by which they see, will of the Lord’s Divine mercy be described hereafter. Spirits also have hearing, hearing so exquisite that the hearing of the body cannot be compared to it. For years they have spoken to me almost continually, but their speech also will of the Lord’s Divine mercy be described hereafter. They have also the sense of smell, which also will of the Lord’s Divine mercy be treated of hereafter. They have a most exquisite sense of touch, whence come the pains and torments endured in hell; for all sensations have relation to the touch, of which they are merely diversities and varieties. They have desires and affections to which those they had in the body cannot be compared, concerning which of the Lord’s Divine mercy more will be said hereafter. Spirits think with much more clearness and distinctness than they had thought during their life in the body.

 

그들의 생각에 속한 하나의 관념 안에는 이 세상에서 가졌던 천 개의 관념 안에 들어 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이 담겨 있습니다. 그들은 매우 예리하고 섬세하며, 명민하고 분명하게 서로 말합니다. 만일 사람이 그것 가운데 무엇이라도 지각할 수 있다면 크게 놀랄 것입니다. 요컨대 영들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으나, 육체와 뼈, 그리고 그것들에 따르는 불완전함을 제외하면 훨씬 더 완전한 방식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육체 안에서 살 때에도 실제로 감각한 것은 영이었음을 인정하고 지각합니다. 감각 능력이 육체 안에서 나타나기는 했지만, 그것이 육체에 속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육체를 벗어 버리면 감각은 훨씬 더 섬세하고 완전해집니다. 생명은 감각 활동에 있습니다. 감각이 없다면 생명도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감각 능력이 어떠하냐에 따라 생명도 그러합니다. 이것은 누구나 관찰할 수 있는 사실입니다. There are more things contained within a single idea of their thought than in a thousand of the ideas they had possessed in this world. They speak together with so much acuteness, subtlety, sagacity, and distinctness, that if a man could perceive anything of it, it would excite his astonishment. In short, they possess everything that men possess, but in a more perfect manner, except the flesh and bones and the attendant imperfections. They acknowledge and perceive that even while they lived in the body it was the spirit that sensated, and that although the faculty of sensation manifested itself in the body, still it was not of the body; and therefore that when the body is cast aside, the sensations are far more exquisite and perfect. Life consists in the exercise of sensation, for without it there is no life, and such as is the faculty of sensation, such is the life, a fact that anyone may observe.

 

 

해설

 

AC.322AC.321에서 간략히 언급한 내용을 훨씬 더 구체적으로 확장하는 글입니다. 앞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영이 육체 안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뛰어난 감각과 사고, 그리고 언어 능력을 가진다고 말했습니다. 이 글에서는 그 주장을 시각, 청각, 후각, 촉각, 욕망과 애정, 사고와 말의 능력으로 나누어 자세히 설명합니다. 중심 주장은 분명합니다. 사람은 죽은 뒤 감각을 잃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제약에서 벗어나 오히려 훨씬 더 섬세하고 완전한 감각을 누리게 됩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영이 감각을 지니지 못한다는 생각을 ‘그릇된 생각(false notion)이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많은 사람은 영을 희미한 기운이나 형체 없는 의식으로 상상합니다. 그래서 육체가 없으면 보거나 듣거나 만질 수도 없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영은 사람의 실질적인 내적 인간, 속 사람이며, 육체는 영이 자연계에서 활동하기 위해 사용하는 가장 바깥 도구입니다. 따라서 감각의 근원은 육체가 아니라 영에게 있습니다.

 

영들이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설명은 특히 중요합니다. 그들은 단지 사물을 볼 뿐 아니라 지상의 한낮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밝은 빛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러나 영계의 빛은 자연계의 태양 빛과 같은 물질적 빛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신적 진리의 빛이며, 그 빛 안에서 천사들은 사물뿐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의미와 상태까지 지각합니다. 그러므로 영계의 시각은 단순히 더 밝게 보는 능력이 아니라, 진리와 상태를 더 직접적이고 분명하게 보는 능력입니다.

 

청각 역시 육체의 청각보다 훨씬 분명합니다. 영계에서 말은 단순히 소리의 전달이 아니라 생각과 애정의 전달입니다. 지상에서는 사람이 말로 표현하기 전에 생각을 정리하고 단어를 골라야 하지만, 영계에서는 말이 생각과 훨씬 더 직접적으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영들의 언어는 짧은 표현 안에도 많은 의미를 담을 수 있고, 말하는 사람의 애정과 의도까지 함께 전달됩니다. 이것이 그들의 말이 ‘예리하고 섬세하며, 명민하고 분명하다(acuteness, subtlety, sagacity, and distinctness)는 뜻입니다.

 

촉각에 관한 설명은 더욱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스베덴보리는 모든 감각이 촉각과 관련되며, 다른 감각들은 촉각의 여러 차이와 형태라고 말합니다. 이는 감각의 본질이 어떤 대상과의 접촉과 반응에 있다는 뜻입니다. 시각은 빛과의 접촉이며, 청각은 소리의 진동과의 접촉이고, 후각은 냄새의 기운과의 접촉입니다. 더 깊은 의미에서 감각은 사람의 생명이 자기 바깥의 어떤 것과 관계를 맺는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촉각은 모든 감각의 가장 일반적 토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옥의 고통과 고문도 촉각에서 비롯된다는 말은 주의 깊게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지옥의 영들에게 고통을 가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영계에서는 사람의 내적 사랑과 욕망이 외적으로 드러나며, 악한 영들은 서로의 악한 욕망과 거짓된 상태에 직접 접촉합니다. 그 접촉이 그들에게 고통과 괴로움으로 경험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천국의 영들은 서로의 선한 사랑과 지혜에 접촉하면서 평안과 기쁨을 경험합니다. 같은 영적 감각 능력이 사랑의 상태에 따라 천국에서는 행복이 되고 지옥에서는 고통이 됩니다.

 

이 글은 욕망과 애정도 육체 안에 있을 때보다 훨씬 강렬하고 분명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사후에 사람이 전혀 다른 욕망을 새로 갖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상에서 형성한 주된 사랑이 육체의 외적 제약을 벗고 더욱 직접적으로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세상에서는 체면과 법, 환경 때문에 자신의 욕망을 감추거나 억제할 수 있지만, 영계에서는 사람이 실제로 사랑하는 것이 그의 삶과 얼굴과 말과 행동에 그대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사후의 삶은 새로운 성품을 얻는 삶이 아니라, 지상에서 형성된 진짜 성품이 드러나는 삶입니다.

 

사고 능력에 관한 설명도 매우 인상적입니다. 영들의 하나의 관념(idea) 안에는 지상에서의 천 개의 관념보다 더 많은 것이 담겨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영계의 생각이 단순히 더 빠르다는 뜻이 아닙니다. 영적 관념은 자연적 관념보다 훨씬 더 포괄적이고 내적입니다. 자연계의 생각은 시간과 공간, 언어와 감각의 제약을 받지만, 영계의 생각은 애정과 의미, 관계와 목적을 하나의 관념 안에 함께 담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천사의 생각 하나를 인간의 언어로 온전히 표현하려면 많은 문장과 설명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뛰어난 능력이 곧 지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악한 영들도 지상보다 더 예리하게 생각하고 말할 수 있지만, 그 능력을 자기 사랑과 거짓을 확증하는 데 사용합니다. 선한 영들과 천사들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 안에서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의 능력이 지혜와 행복으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능력의 크기보다 중요한 것은 그 능력이 어떤 사랑을 섬기고 있느냐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영들은 사람이 가진 모든 것을 가지고 있으나, 육체와 뼈와 그것들에 따르는 불완전함을 제외하면 더 완전하게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부분은 이 글의 핵심 가운데 하나입니다. 영은 불완전한 인간의 잔재가 아니라 완전한 인간 형상을 가진 존재입니다. 다만 자연계의 물질적 몸이 아니라 영적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인간성의 상실이 아니라, 인간의 참된 형상이 더 분명히 드러나는 과정입니다.

 

마지막 문장인 ‘감각 능력이 어떠하냐에 따라 생명도 그러하다’는 말씀은 이 글 전체를 요약합니다. 여기서 감각은 단순히 오감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에 반응하며, 무엇을 기쁨과 고통으로 느끼는가를 포함한 생명 전체의 수용 능력을 뜻합니다. 천국의 생명은 선과 진리를 섬세하게 느끼고 받아들이는 생명이며, 지옥의 생명은 자기 사랑과 거짓에만 반응하는 생명입니다. 따라서 사람의 생명의 질은 그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참되다고 느끼며, 무엇과 결합하기를 원하는가에 따라 결정됩니다.

 

AC.322는 죽음 뒤의 삶이 지상보다 희미하고 비현실적인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더 선명하고 실제적이며, 완전한 삶임을 가르칩니다. 육체는 감각의 근원이 아니라 영적 생명을 자연계에 나타내는 도구이며, 육체가 벗겨지면 영의 감각과 생각과 애정은 본래의 힘을 더욱 자유롭게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죽은 뒤 덜 인간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상에서 형성한 사랑과 성품에 따라 더욱 온전하고 분명한 인간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심화

 

1. ‘공주농아교회를 생각하며

 

 

AC.322, 심화 1, ‘공주농아교회를 생각하며’

AC.322.심화 1. ‘공주농아교회를 생각하며’ 이 글을 읽으면서 반대로 농아(聾啞)인들, 그러니까 못 듣고, 말 못 하는 분들 생각과, 그분들을 대상으로 목회하시는, 저의 친구 목사님 생각이 났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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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1, 창4 앞, ‘사후 두 번째 상태, 삶의 질이 더 완전해짐’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AC.321 두 번째 일반적인 사실은, 영은 육체 안에서 살 때보다 감각 기능을 훨씬 더 뛰어나게 사용하며, 생각하고 말하는 능력 또한 훨씬 더 탁월하다는 것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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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상은 매우 강한 메시지를 담고 있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몇 가지 중요한 구분이 필요합니다. 가장 먼저 말할 것은, 이 이야기의 핵심은 ‘신학교가 타락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교만한 마음은 어디에 가든 같은 세상을 만들어 낸다’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이 먼저 장소가 아니라 인간 안에 형성되는 사랑의 상태라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따라서 김성준 장로가 신학교에서 본 세속성과 권력욕은 특별히 신학교라는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proprium’, 곧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생명인 것처럼 느끼는 자기애의 본성이 드러난 사례일 뿐입니다. 같은 자기애는 교회 안에서도, 신학교 안에서도, 일반 회사에서도, 심지어 수도원에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영상을 보는 사람은 신학교를 비판하기보다 먼저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영상의 가장 큰 장점은 김성준 장로의 외적인 행동보다 내적인 동기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고 간다는 점입니다. 처음 그는 새벽기도를 빠짐없이 하고, 교회를 위해 헌신하며, 성도들에게 존경받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외적 선행 자체보다 그 선행 속에 무엇을 사랑하는지가 훨씬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같은 봉사를 하면서도 주님을 사랑하여 할 수도 있고, 자기 명예를 위하여 할 수도 있으며, 두 동기가 오랫동안 섞여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젊은 목사의 비판이 그의 마음을 뒤흔든 이유는 단순히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동안 자신도 알지 못했던 자기 사랑이 상처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시련은 새로운 악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안에 숨어 있던 악을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이 점에서 젊은 목사는 그의 적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 안에서 그의 속 사람을 비추는 거울이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특히 주목할 부분은 ‘복수심으로 신학교에 입학했다’는 대목입니다. 외적으로는 ‘더 배우고 싶다’는 아름다운 명분을 가지고 있지만, 내적으로는 ‘상대를 이기겠다’는 사랑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동일한 행동이라도 그것을 움직이는 사랑이 다르면, 영계에서는 전혀 다른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신학을 공부하는 행위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닙니다. 그것이 사랑에서 나왔는지, 명예욕에서 나왔는지가 결정적인 문제입니다. 이 영상은 바로 그 점을 비교적 잘 드러냅니다. 김성준 장로는 진리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높이기 위해 진리를 이용하려 했습니다. 이것은 말씀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자기애의 도구로 사용하는 모습입니다.

이 영상에서 신학교의 부패를 묘사하는 장면들은 상당히 자극적입니다. 교수의 금전 거래, 성적 조작, 목회의 취업화, 유튜브 알고리즘 중심의 설교 등은 현대 교회의 여러 병폐를 압축해 놓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부분을 조금 더 절제해서 읽는 것이 좋습니다. 실제 특정 신학교나 목회 현장을 일반화하는 근거로 삼기보다, 모든 인간 안에 있는 ‘세속적 사랑이 거룩한 것을 지배하려는 경향’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장면으로 읽는 편이 더 적절합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는 거룩한 직분일수록 자기 사랑이 침투하면 가장 심각한 형태의 모독(profanation)이 일어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문제는 신학교가 아니라 ‘거룩한 것을 자기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은 평신도에게도, 목회자에게도, 신학자에게도 동일하게 존재할 수 있습니다.

매우 인상적인 부분은 김성준 장로가 신학교를 떠난 뒤 빈 예배당에서 자신의 교만을 보는 장면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참된 시험의 결말과 상당히 닮아 있습니다. 시험은 상대방이 틀렸음을 증명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결국 자신의 악을 보게 만드는 데서 끝납니다. 처음에는 ‘저 사람이 교만하다’고 생각하지만, 시험이 깊어질수록 ‘내 안에도 같은 교만이 있었다’는 사실이 보입니다. 이것이 회개의 시작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인간에게 악을 보여 주시는 이유는 정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분리하고 제거하시기 위해서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김성준 장로가 흘리는 눈물은 실패의 눈물이 아니라 거듭남의 첫 번째 눈물입니다. 그는 신학교에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이 히브리어나 조직신학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보게 된 것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습니다.

영상 후반부에서 빌립보서 2장을 통하여 ‘자기를 비우신 그리스도’를 묵상하는 부분도 매우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다만 ‘자기를 비웠다’는 표현을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조금 더 조심스럽게 이해해야 합니다. 그것은 신성이 비워졌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 본성을 입으신 상태에서 끝까지 자신을 낮추며, 시험을 통하여 영광화의 길을 걸으셨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자기를 비움’은 신성을 버린 사건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가장 낮은 자리까지 내려가신 순종의 모습입니다. 이 점을 덧붙인다면 신학적으로도 훨씬 균형 잡힌 설명이 될 것입니다.

젊은 목사와 장로가 서로 회개하는 장면 역시 좋은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특히 둘 다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고, 서로에게 배우겠다고 말하는 부분은 천국 공동체의 원리를 잘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에서는 누구도 자신이 가장 지혜롭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오히려 모든 지혜가 주님께로부터 흘러온다는 사실을 깊이 알기 때문에 서로 배우는 기쁨 속에서 산다고 설명합니다. 장로의 경험과 젊은 목사의 학문이 경쟁하지 않고,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는 모습은 바로 이러한 질서를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그러나 마지막 결론인 ‘진정한 신학은 학교가 아니라 삶에서 배운다’는 문장은 약간의 보완이 필요합니다. 그대로 읽으면 마치 신학 공부 자체가 불필요한 것처럼 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결코 지식을 경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방대한 신학을 평생 연구한 사람입니다. 다만 그는 지식이 사랑을 섬길 때만 살아 있는 지혜가 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더 정확한 표현은 ‘진정한 신학은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과 삶 속에서 배우는 사랑이 하나 될 때 완성된다’일 것입니다. 지식 없는 사랑은 쉽게 미신이 되고, 사랑 없는 지식은 쉽게 교만이 됩니다. 천국은 이 둘이 하나 되는 곳입니다.

이 영상 전체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젊은 목사의 교만보다 먼저 김성준 장로 자신의 교만을 보게 하셨고, 신학교의 세속성보다 먼저 그의 마음속 세속성을 드러내셨으며, 결국 그를 높은 자리의 신학자가 아니라 가장 낮은 자리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셨다.’ 이것이 이 이야기의 진짜 중심입니다. 참된 거듭남은 환경이 바뀌는 데 있지 않고 사랑이 바뀌는 데 있습니다. 신학교를 떠났기 때문에 변화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사랑하던 사람이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방향을 돌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변화된 것입니다. 그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의 본질이며, 이 이야기에서 가장 깊이 읽어야 할 영적인 의미입니다.

 

 

 

SY.34, ‘시흥영성수련원, 79차 심령부흥대사경회’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모형에서 상응으로긴 강의를 모두 들은 뒤에야 비로소 이 글을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 몇 시간만 듣고 글을 썼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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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32, ‘그냥 성경만 공부하고 싶네요’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강문호 목사님의 이번 영상은 ‘그냥 성경만 공부하고 싶다’는 고백에서 시작하여, 잇사갈 지파가 시대를 분별하고, 이스라엘이 마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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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강문호 목사님의 이번 영상은 ‘그냥 성경만 공부하고 싶다’는 고백에서 시작하여, 잇사갈 지파가 시대를 분별하고, 이스라엘이 마땅히 행할 일을 알았던 이유를 성경 중심의 삶에서 찾고, 이를 자신의 성경 연구와 ‘잇사갈 성경대학’ 설립의 근거로 연결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평생 연구하고 다른 이들과 나누려는 열정은 귀합니다. 특히 신학을 오래 공부했음에도 ‘성경에 대하여 공부했지 성경 자체를 공부하지 못했다’고 고백하는 대목은, 교리 체계와 신학 지식이 말씀 자체를 대신할 수 없다는 중요한 자각을 담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교회의 전통이나 인간의 철학이 말씀 위에 군림해서는 안 되며, 모든 교리는 말씀으로부터 나와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직 성경’이라는 외침에는 분명 존중할 만한 중심이 있습니다.

 

다만 먼저 몇 가지 성경 본문의 사실관계는 바로잡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영상에서는 레위 지파를 제사장 지파, 유다 지파를 장자 지파라고 설명하지만, 육신의 장자는 르우벤입니다. 유다는 장자 지파라기보다 통치권과 지도력의 대표 지파가 되었습니다. 야곱은 유다에게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49:10)라고 축복하였습니다. 또한 모세가 잇사갈 지파에게 ‘성전을 떠나지 말고 제사를 기뻐하며 살면 바다의 풍부한 것과 모래에 감추인 보배를 얻을 것’이라고 단독으로 축복한 것은 아닙니다. 신33:18-19은 스불론과 잇사갈을 함께 향한 축복입니다. ‘스불론이여 너는 밖으로 나감을 기뻐하라 잇사갈이여 너는 장막에 있음을 즐거워하라 그들이 백성들을 불러 산에 이르게 하고 거기에서 의로운 제사를 드릴 것이며 바다의 풍부한 것과 모래에 감추어진 보배를 흡수하리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잇사갈의 특징을 말할 때는 ‘성전을 떠나지 않았다’기보다 ‘장막에 있음을 즐거워했다’는 본문 표현에서 출발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또한 대상12:32의 ‘시세를 알고 이스라엘이 마땅히 행할 것을 아는 우두머리 이백 명’은 잇사갈 지파가 성경을 열심히 연구하여 세계사의 태초부터 종말까지를 파악했다는 뜻으로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이 본문은 다윗에게로 모여든 여러 지파의 용사들과 지도자들을 열거하는 문맥에 있습니다. 당시 잇사갈 자손들은 사울의 시대가 끝나고 다윗에게 왕권이 넘어가야 할 때를 분별했으며, 이스라엘이 다윗을 왕으로 세워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시세’는 단순한 시대 예측이나 종말 연대표라기보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지금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를 분별하는 지혜에 가깝습니다. 따라서 ‘성경을 공부하면 시대의 모든 사건과 미래의 흐름을 알 수 있다’고 확대하기보다, ‘말씀의 진리 안에 있을 때 현재의 상황에서 무엇이 옳은지를 분별할 수 있다’고 이해하는 편이 더 온전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잇사갈은 단순히 성경을 많이 공부하는 학자 집단을 뜻하지 않습니다. 말씀에서 열두 지파는 교회 안에 있는 선과 진리의 모든 요소를 나타내며, 각 지파는 거듭남의 과정에서 형성되는 특정한 영적 상태를 표상합니다. 잇사갈은 이름의 뜻과 야곱의 축복을 통해 ‘보상’, ‘품삯’, ‘일의 결과’와 관련된 의미를 가집니다. 창49:14-15에서 잇사갈은 ‘양의 우리 사이에 꿇어앉은 건장한 나귀’로 묘사되며, ‘쉴 곳을 보고 좋게 여기며 토지를 보고 아름답게 여기고 어깨를 내려 짐을 메고 압제 아래에서 섬기리로다’라고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해석에서 ‘나귀’는 자연적 이성을, ‘짐을 멘다’는 것은 봉사와 쓰임의 삶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잇사갈의 지혜는 지식을 많이 축적한 데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실제 삶의 짐으로 받아들여 유용하게 섬기는 데서 생기는 지혜입니다.

 

이 점에서 영상의 논지는 절반은 맞고 절반은 더 깊어져야 합니다. 잇사갈 사람들이 ‘시세를 알았다’는 것을 성경 연구의 결과라고 보는 것은 가능하지만, 말씀을 연구했다는 사실 자체가 자동으로 영적 분별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지성의 빛은 지식의 양보다 사랑의 방향에 의해 결정됩니다. 사람이 진리를 주님과 이웃을 섬기기 위해 배우면 그 진리는 내적으로 열리지만, 자기 이름을 높이고 다른 사람보다 우월해지기 위해 배우면 같은 성경 지식도 닫힌 지식이 됩니다. 말씀을 많이 읽고 수백 개의 과목을 만들 수는 있지만, 그것이 참된 시세 분별로 이어지려면 먼저 ‘내가 지금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가’, ‘이 진리가 누구의 유익을 위해 사용되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강문호 목사님은 신학을 십 년 공부했지만 ‘성경에 대하여 공부했지 성경을 공부하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이 고백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여기에도 한 걸음이 더 필요합니다. 성경 자체를 공부한다는 것은 성경에 관한 자료를 더 많이 모으고, 고대 문헌과 유대교 해석과 주석을 더 깊이 조사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자료는 문자적 배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지만, 말씀의 신성은 그 자료들의 오래됨이나 희귀성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말씀은 문자 안에 영적 의미와 천적 의미를 품고 있으며, 그 속뜻을 통해 천국과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대한 공부’에서 ‘성경 공부’로 옮겨 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고, 다시 ‘성경 공부’에서 ‘말씀으로 사는 것’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영상에서는 ‘성경은 태초부터 요한계시록의 종말까지를 기록한 책이므로 성경을 공부하면 시세를 알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자칫 성경을 세계사의 연대표나 미래 예측의 암호책으로 이해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창세기의 창조와 요한계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은 먼저 한 사람 안에서 이루어지는 거듭남의 전 과정을 가리킵니다. ‘태초’는 사람 안에 새 교회가 시작되는 첫 상태이며, ‘종말’은 옛 교회가 끝나고 새로운 영적 질서가 세워지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참된 목적은 세상에서 다음에 무슨 사건이 일어날지를 예측하는 데 있지 않고, 내 안의 혼돈이 어떻게 질서가 되고, 자연적 사람이 어떻게 영적 사람이 되며, 자기 사랑의 옛 세계가 어떻게 끝나고 주님의 나라가 어떻게 세워지는지를 아는 데 있습니다.

 

대상12:32의 ‘시세를 안다’는 말씀도 이 관점에서 보면 더욱 깊어집니다. ‘’는 말씀의 속뜻으로 사람의 영적 상태를 뜻합니다. 어떤 때는 진리를 배워야 할 때이고, 어떤 때는 시험을 견뎌야 할 때이며, 어떤 때는 악을 끊어야 할 때이고, 어떤 때는 배운 선을 실제로 행해야 할 때입니다. 잇사갈 자손이 ‘이스라엘이 마땅히 행할 것을 알았다’는 것은, 단순히 정치적 형세를 잘 읽었다는 의미를 넘어, 현재의 상태에서 어떤 선을 행해야 하는지를 분별하는 지혜를 표상합니다. 참된 영적 지도자는 미래를 신비하게 예언하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의 진리를 현재의 삶에 적용하여 ‘지금 무엇이 옳은가’를 밝히는 사람입니다.

 

강문호 목사님은 830개의 과목을 만들었으며 그중 72과목을 뽑아 성경대학 과정을 운영한다고 말합니다. 이 열정과 노동은 놀랍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서 과목의 수보다 그 과목들이 사람 안에서 어떤 열매를 맺는지를 묻습니다. 많은 것을 배우고, ‘놀라고, 뜨거워지고, 넓어지고, 높아지는 것’은 좋은 출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감탄과 열정은 아직 거듭남 그 자체가 아닙니다. 말씀을 듣고 놀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말씀 때문에 이전에 사랑하던 악을 미워하게 되었는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던 태도가 부드러워졌는가, 정직과 책임과 체어리티의 삶이 자라났는가 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깊이는 감탄의 크기로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변화로 증명됩니다.

 

하나님만 하나님으로 인정하기 시작했다’는 고백은 매우 귀합니다. 다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은 성경이 인간이 쓸 수 없는 신비한 책임을 깨닫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자기 지성과 자기 공로를 내려놓고,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삶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입으로 ‘오직 하나님’을 외치면서도 자기 해석과 자기 업적, 자기 이름을 중심에 둘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말수가 적고 학문적 업적이 크지 않아도, 자신에게 있는 모든 선을 주님께 돌리고 조용히 이웃을 섬기는 사람은 실제로 하나님만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며 사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오직 성경’이라는 표어 역시 정밀하게 살펴야 합니다. 강문호 목사님은 ‘그냥 성경만 공부하고 싶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성경의 대가들을 찾아가 그들의 저술과 자료를 입수하고 연구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 자체로 모순이라기보다,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 다양한 보조 자료를 사용하는 방식입니다. 다만 그렇다면 ‘성경만’이라는 말은 자료의 범위를 뜻하기보다 최종 권위의 중심을 뜻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외부 자료를 사용하더라도 그것을 말씀 위에 두지 않고, 말씀에 비추어 판단해야 한다는 뜻이라면 ‘오직 성경’은 타당한 고백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래된 유대 문헌이나 초대교회 문서가 성경의 깊이를 자동으로 보증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전통 의존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매우 거룩하게 보았지만, 문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가르쳤습니다. 문자적 의미는 성전의 문과 같고, 그 안에는 영적 의미와 천적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문자를 버리고 숨은 의미만 찾아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모든 속뜻은 문자 위에 기초하며, 문자 안에서 보존됩니다. 그러므로 참된 ‘오직 성경’은 문자만 고집하는 것도 아니고, 인간의 상상으로 비밀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도 아닙니다. 말씀 전체의 질서와 상응, 주님의 구원 역사와 인간의 거듭남을 중심으로 문자의 깊이를 열어 가는 것입니다.

 

또한 스베덴보리의 기준에서 성경의 모든 책이 동일한 방식으로 ‘말씀’에 속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내적 의미가 연속적으로 담긴 책들과 교회의 유익을 위해 기록된 사도적 문서들을 구분합니다. 복음서와 요한계시록, 모세오경과 여러 예언서는 내적 의미가 글자마다 연속적으로 담긴 말씀에 속하지만, 바울서신은 교회에 유익한 교리적 문서이면서도 같은 방식의 연속적 속뜻을 지닌 말씀으로 분류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경만’이라는 말도 단순히 육십육 권을 동일한 방식으로 읽는다는 뜻보다, 주님께서 말씀 안에 두신 신적 질서와 중심을 분별하며 읽는다는 뜻으로 깊어져야 합니다.

 

잇사갈 성경대학’이라는 이름에도 귀한 가능성과 함께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잇사갈의 영성은 시대를 분석하여 많은 정보를 제공하는 데만 있지 않고, 진리를 삶의 짐으로 받아들여 섬기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잇사갈의 이름을 붙인 성경대학이라면 학생들에게 단지 놀라운 성경 지식이나 알려지지 않은 고대 자료를 제공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자신이 배운 진리를 어떻게 가정과 교회, 사회에서 선한 쓰임으로 바꿀 것인지, 어떻게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분별하고 끊을 것인지, 어떻게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이웃에게 전달할 것인지를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야 ‘시세를 아는 사람’이 아니라 ‘시세를 알고 마땅히 행할 것을 아는 사람’을 세울 수 있습니다.

 

영상에서 ‘성경만 공부하고 싶은 분’을 초대하는 장면은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성경 공부는 사람을 폐쇄된 지식 공동체 안으로 모으는 것이 아니라, 더 넓은 체어리티와 겸손으로 내보내야 합니다. 배우면 배울수록 다른 교파와 사람들을 쉽게 판단하게 되고, 자신들이 특별한 비밀을 아는 집단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공부는 잇사갈의 지혜가 아니라 영적 교만을 낳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배우면 배울수록 자신이 모르는 것을 깨닫고, 다른 사람의 선을 존중하며, 자신의 책임을 더 성실히 감당하게 된다면 그 공부는 주님께서 주시는 빛 안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이번 영상의 가장 귀한 부분은 ‘성경에 관한 공부에서 성경 자체로 돌아가고 싶다’는 갈망입니다. 그러나 그 갈망은 다시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합니다. 성경 자체를 공부하는 데서 말씀의 속뜻을 보고, 말씀의 속뜻을 보는 데서 자기 삶을 비추며, 자기 삶을 비추는 데서 실제 악을 끊고 선을 행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성경을 많이 아는 사람보다 말씀으로 변화된 사람이 참된 잇사갈 사람이며, 시대의 사건을 많이 해석하는 사람보다 현재의 상태에서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분별하여 행하는 사람이 참된 지도자입니다.

 

그러므로 이 영상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잇사갈의 능력은 성경 지식의 양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진리를 받아 시대의 상태를 분별하고, 그때그때 마땅히 행할 선을 실천하는 데서 나왔습니다.’ 여기에 스베덴보리의 관점을 한마디 더 보탠다면 이렇습니다. ‘오직 성경은 성경만 많이 읽겠다는 표어가 아니라, 말씀을 통해 오직 주님께 배우고, 배운 진리를 자기 삶의 선한 쓰임으로 바꾸겠다는 결단이어야 합니다.’

 

 

 

SY.33, ‘신학교 자퇴합니다’, 제가 본 것은 ‘추악한 거래’였습니다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이 영상은 매우 강한 메시지를 담고 있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몇 가지 중요한 구분이 필요합니다. 가장 먼저 말할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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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31, ‘방언기도할 때, 3가지 생각하며 기도하세요’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이 강의는 방언을 받은 사람이 자신의 방언을 의심해서는 안 되며, 방언할 때에는 세 가지 생각, 곧 ‘사탄의 공격을 막는 방패가 세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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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이 강의는 방언을 받은 사람이 자신의 방언을 의심해서는 안 되며, 방언할 때에는 세 가지 생각, 곧 ‘사탄의 공격을 막는 방패가 세워진다’, ‘마음의 소원이 하나님께 더 빨리 전달되고 응답받는다’, ‘우둔함이 제거되고, 지혜와 명철과 총명이 들어와 영·혼·육이 세워진다’는 생각을 품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강사는 방언을 하나님께서 주신 귀중한 선물로 규정하고, 방언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그 선물을 내던지는 행위이며, 더 깊이 들어가면 하나님을 무시하는 죄라고까지 말합니다. 또한 방언의 소리가 단순하거나 반복적이더라도 그것을 의심하지 말고, 계속 사용하면 영적으로 성장하고, 성화되고, 삶의 돌파와 응답을 경험하게 된다고 강조합니다. 이 강의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를 귀히 여기고, 기도를 지속하며, 영적 나태함에서 벗어나라는 긍정적 열망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살펴보면, 이 강의는 성령의 은사를 지나치게 하나의 발성 현상과 결합시키고, 그 현상에 일정한 영적 효능이 자동으로 따라온다고 가르친다는 점에서 매우 신중한 분별이 필요합니다.

 

먼저 방언을 무조건 하나님께서 직접 주신 선물이라고 전제한 뒤, 그것을 의심하는 마음을 악한 귀신이 넣어 주는 것으로 규정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 인간의 이성과 분별력은 신앙의 적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자유 안에서 이성을 사용하여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선인지 살피기를 원하십니다. 참된 신앙은 생각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맹목적 확신이 아니라, 진리를 이해하고 그 진리에 따라 살려는 내적 동의입니다. 물론 악한 영들은 사람에게 의심과 혼란을 불어넣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의문이나 검토를 악한 영의 역사로 돌려서는 안 됩니다. 어떤 현상이 정말 성령으로부터 온 것인지, 자기 암시인지, 집단 분위기의 영향인지, 습관적으로 만들어진 소리인지 살피는 것은 불신앙이 아니라 오히려 영적 분별의 일부일 수 있습니다. 의심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그 의심을 어떻게 다루느냐입니다. 진리를 찾으려는 정직한 질문은 주님께서 주신 이성의 올바른 사용이지만, 진리를 알면서도 악한 삶을 고집하기 위해 일으키는 의심은 다른 문제입니다.

 

강사는 ‘내 방언이 정말 방언인가’라고 묻는 사람에게 그 질문을 멈추고, 무조건 계속하라고 권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외적 현상의 진위보다 그 현상이 어떤 내적 열매를 맺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방언을 많이 한다고 해서 자동으로 겸손해지고, 이웃을 사랑하며, 악을 죄로 알고 멀리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유창하고 강렬한 방언을 하더라도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그대로 품고 있으며, 타인을 정죄하고, 거짓말하고, 부당한 이익을 취하고, 자신의 영적 우월함을 자랑한다면 그 방언은 그의 거듭남을 보증하지 못합니다. 반대로 방언을 전혀 하지 않더라도 주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자신의 악을 살피며, 정직과 체어리티의 삶을 살아간다면 그는 실제적인 거듭남의 길을 걷고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소리의 신비함이나 기도의 길이가 아니라, 그 사람의 의지와 삶이 선과 진리에 따라 변화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특히 방언을 사용하지 않는 것을 ‘하나님을 무시하는 죄’라고 단정하는 것은 성경적으로도, 스베덴보리의 교리로도 지나친 주장입니다. 은사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주어지지 않으며, 은사의 종류와 기능도 서로 다릅니다. 무엇보다 은사는 그 자체가 구원의 조건이 아닙니다. 은사는 교회와 이웃을 섬기기 위한 수단이지, 개인의 영적 등급을 증명하는 표지가 아닙니다. 누군가 방언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가 하나님을 무시한다고 말할 수 없으며, 방언을 중단했다고 해서 주님께서 더는 그에게 선물을 주지 않으신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방언을 경험하지 못한 성도에게 불필요한 죄책감과 두려움을 줄 수 있습니다. 또한 자신의 발성 현상을 의심하는 사람에게 충분한 분별의 기회를 주지 않고 ‘의심하면 죄’라고 압박하면, 사람은 자유롭게 진리를 살피기보다 종교적 권위에 복종하여 자신의 판단을 억누르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강요된 신앙은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진리는 자유 안에서 받아들여져야 사람의 내면에 뿌리를 내릴 수 있습니다.

 

강의에서는 방언을 ‘하늘나라 언어’라고 규정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묘사하는 천국의 언어는 단순히 지상 언어로 해석되지 않는 반복 음절을 뜻하지 않습니다. 천사들의 말은 그들의 사랑과 사고에서 직접 흘러나오며, 그 말 안에는 지상의 언어보다 훨씬 풍부하고 완전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천국의 말은 생각과 애정의 상응에 따라 이루어지므로 천사들은 서로의 말을 분명하게 이해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 뜻을 알지 못한 채 반복적으로 발성하는 소리를 곧바로 천국의 언어와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천국의 언어가 지상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깊이를 지닌다는 것과, 뜻을 알 수 없는 모든 종교적 발성이 천국의 언어라는 것은 전혀 다른 주장입니다.

 

또한 강사는 고전14:2의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를 근거로 ‘방언은 통역하거나 번역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같은 고전14에서는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기를 기도하라고 하며, 교회 안에서는 통역이 없으면 잠잠하라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방언은 본질적으로 절대 통역할 수 없다’는 주장은 해당 장 전체의 문맥과 조화되기 어렵습니다. ‘사람이 알아듣지 못한다’는 표현은 통역의 은사가 전혀 불가능하다는 뜻이라기보다, 통역되지 않은 방언은 듣는 사람에게 의미를 전달하지 못한다는 뜻으로 읽어야 합니다. 바울이 염려한 것도 바로 교회 공동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인해 세움을 얻지 못하는 문제였습니다. 방언 그 자체보다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이 고전14의 중심 흐름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오순절의 여러 언어 역시 단순히 뜻을 알 수 없는 신비한 발성이 아닙니다. 오순절 사건에서 각 나라 사람들이 자기 나라의 언어로 하나님의 큰일을 들었다는 것은 복음이 여러 민족과 다양한 내적 상태에 전해지는 것을 표상합니다. ‘언어’는 말씀의 속뜻으로는 교리와 신앙고백, 곧 진리를 표현하는 방식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영적 언어의 기적은 사람이 무의미한 소리를 반복하는 데 있기보다, 서로 다른 상태와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를 각자의 이해 안에서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입술을 여시는 목적은 진리가 전달되고, 선이 행해지며, 이웃이 세움을 얻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강의에서 제시하는 첫 번째 생각은 방언할 때마다 강철 같은 영적 방패가 세워져 사탄의 공격을 막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체적인 영적 작용은 성경 본문이나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에서 직접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영적 공격을 막는 실제 방패는 진리에 대한 신앙과 선한 삶입니다. 엡6에서 말하는 ‘믿음의 방패’도 특정한 발성법이라기보다 주님을 의지하고 말씀의 진리 안에 서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악한 영들의 공격은 사람이 품고 있는 악한 욕망과 거짓 관념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그 공격에 맞서는 길은 반복적인 소리를 내는 것 자체가 아니라, 거짓을 진리로 밝히고, 악을 주님 앞에서 죄로 인정하여 멀리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방언을 하면서도 미움과 복수심, 탐욕과 음욕, 거짓과 교만을 붙들고 있다면 소리가 그를 자동으로 보호하는 방패가 되지는 않습니다. 반대로 사람이 조용히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유혹 가운데서 악을 거절한다면, 바로 그 진리가 실제적인 방패가 됩니다.

 

강사는 방언할 때 ‘지금 방패가 쳐지고 있다’고 계속 생각하라고 권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상상은 실제 영적 보호와 심리적 자기 암시를 혼동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어떤 생각을 반복하면 사람은 실제로 안정감이나 확신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느낌이 곧 영계에서 동일한 일이 일어났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환상이나 내적 느낌을 무조건 계시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매우 조심스럽게 다룹니다. 영적 세계의 사실은 개인의 상상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질서에 따라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강철 방패로 둘러싸이고 있다’는 심상을 반복하는 것보다, ‘주님, 제 안의 거짓을 보게 하시고 악을 거절할 힘을 주소서’라고 기도하며, 실제 삶에서 진리를 따르는 것이 훨씬 안전하고 실질적입니다.

 

두 번째 주장은 방언하면서 마음의 소원을 생각하면 성령께서 그 기도를 더 효과적으로 바꾸어 하나님께 빨리 전달하시며, 그 결과 응답이 빨라진다는 것입니다. 이 주장 역시 기도를 마치 영적 전송 속도의 문제처럼 이해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한국어로 기도하든, 침묵 가운데 마음으로 기도하든,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든 그 사람의 가장 깊은 의도와 필요를 이미 아십니다. 기도는 주님께 정보를 전달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하기 전부터 우리의 필요를 아십니다. 기도의 목적은 주님의 마음을 바꾸거나 응답을 재촉하는 데 있지 않고, 우리의 마음이 주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열리고 정돈되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 참된 기도는 사람의 소원이 무조건 빨리 이루어지도록 하는 기술이 아닙니다. 기도는 사람이 원하는 것을 주님께 강하게 밀어 올리는 수단이 아니라, 자신의 원함을 주님의 섭리와 질서 아래 내려놓는 행위입니다. 우리의 소원 중에는 선한 것도 있지만, 자기 사랑이나 세상 사랑에서 나온 것도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이 실제로 자신과 이웃의 영원한 선을 위한 것인지 충분히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방언을 하면 소원이 빨리 응답된다’는 기대는 기도를 욕망 성취의 도구로 변질시킬 위험이 있습니다. 참된 기도는 ‘이 소원을 반드시 빨리 이루어 주십시오’라는 요구보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시고, 그 뜻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저를 변화시켜 주십시오’라는 순종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자녀가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해 달라는 기도 자체는 귀합니다. 그러나 부모가 방언을 많이 한다고 해서 자녀의 자유가 무시된 채 회심이 자동으로 앞당겨지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끊임없이 선으로 이끄시지만,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으십니다. 부모의 기도는 자녀를 강제로 변화시키는 영적 압력이 아니라, 부모 자신이 더 지혜롭고 인내하며, 사랑으로 자녀를 대할 수 있도록 주님께 자신을 여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자녀의 회심을 위해 기도하면서도 실제로는 자녀를 정죄하고 통제하며, 자신의 종교적 기대를 강요한다면, 그 기도는 입술의 열심과 달리 자녀에게 주님의 사랑을 보여 주지 못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주장은 방언할 때 사람의 우둔함과 연약함이 제거되고, 지혜와 명철과 총명이 부어지며, 영과 혼과 육이 점점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고전14:4의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라는 표현이 사용됩니다. 그러나 ‘덕을 세운다’는 말을 지능이 높아지고, 총명이 자동으로 주입된다는 뜻으로 확대하는 것은 주의해야 합니다. 바울이 말한 ‘세움’은 신앙의 강화와 영적 유익을 뜻할 수 있지만, 반복 발성을 통해 지혜가 자동으로 증가한다는 공식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지혜는 진리를 많이 알고, 신비한 체험을 많이 하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삶에 적용할 때 생깁니다. 알고 있는 진리를 실제로 행할수록 그 진리는 사람의 의지와 결합하고, 그때 주님께서 더 깊은 이해를 열어 주십니다.

 

··’이 방언으로 세워진다는 설명도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을 서로 독립된 세 부분이 기계적으로 결합한 존재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은 가장 깊은 생명의 시작과 관련되고, ‘’은 육체를 벗은 뒤에도 살아가는 인간 전체이며, 육체는 지상에서 영이 활동하기 위한 외적 기관입니다. 인간의 거듭남은 방언을 통해 영과 혼과 육에 능력이 주입되는 과정이 아니라, 속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아 겉 사람을 질서 안에 두는 과정입니다. 지성과 의지, 생각과 행동, 속과 겉이 점차 하나의 질서로 정돈되는 것이 거듭남입니다.

 

강의는 방언을 많이 하면 ‘없어질 부분들이 제거되고’ 사람이 변화되어 성화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교리에 따르면 악은 어떤 기도 행위의 반복만으로 제거되지 않습니다. 악은 사람이 구체적인 삶 속에서 그것을 발견하고, 주님 앞에서 죄로 인정하고, 실제로 저항할 때 물러납니다. 예를 들어, 분노가 많은 사람이 아무리 오래 방언하더라도 자신의 분노를 정당화하고,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행동을 계속한다면 분노의 악은 제거되지 않습니다. 탐욕스러운 사람이 방언하면서도 부정한 이익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탐욕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성적 욕망에 끌리는 사람이 방언의 기름부음을 느끼면서도 음란한 시선과 행동을 끊지 않는다면, 그것이 성화라고 할 수 없습니다. 거듭남에는 반드시 자기 성찰, 회개, 악과의 싸움, 새로운 삶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이 강의에서 반복되는 ‘돌파’라는 표현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방언을 특정 방식으로 하면 응답과 성장과 변화의 돌파가 빠르게 일어난다는 가르침은 신앙을 일종의 영적 기술처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섭리는 사람의 영원한 구원을 위해 매우 깊고 세밀하게 역사하며, 때로는 우리가 원하는 것과 반대 방향으로 인도하십니다. 어떤 문제는 즉시 해결되지 않으며, 오랜 기다림과 실패와 낮아짐을 통해 사람의 자기 사랑이 드러나고, 정화되기도 합니다. 느린 과정이 반드시 믿음 부족의 결과는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사람이 외적 능력과 즉각적인 체험에 의존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가운데서도 진리를 붙들도록 기다림을 허락하실 수 있습니다.

 

방언의 소리와 ‘기름부음’을 서로 연결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강의에서는 방언을 자신 있게 크게 하고, 특정한 생각을 품으면, 방언 자체에 기름부음이 넘치고, 힘 있게 뻗어 나간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영적 능력은 소리의 강도나 유창함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천국의 능력은 선과 결합한 진리에서 나옵니다. 악한 사람도 종교적으로 매우 열정적일 수 있고, 강렬한 음성과 감정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영계의 악한 영들 역시 외적으로는 열심과 확신을 보이며,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강한 감정과 반복되는 음절, 몸의 열감, 황홀감, 소리의 유창함을 곧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 현상이 사람을 더 겸손하게 하고, 더 정직하게 하며, 이웃에게 더 온유하고 유익한 사람이 되게 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이 강의의 또 하나의 위험은 방언을 의심하거나 사용하지 않는 사람을 영적으로 열등한 상태에 놓는다는 점입니다. 방언을 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을 무시하는 사람, 악한 영의 의심에 사로잡힌 사람, 영적 발전이 멈춘 사람처럼 묘사됩니다. 그러나 교회는 다양한 은사와 기능을 가진 사람들로 이루어집니다. 누군가는 가르침으로, 누군가는 섬김으로, 누군가는 위로와 자비로, 누군가는 조용한 충성과 정직으로 주님의 나라를 섬깁니다. 눈에 띄는 초자연적 은사가 반드시 더 높은 영적 상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천국에서는 자신이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에게 있는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으로부터 왔음을 인정하고 이웃에게 유익을 행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방언 경험을 무조건 거짓이나 자기기만으로 단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 기도가 깊은 집중과 헌신을 돕고,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애정을 주님께 드리는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경험을 절대화하지 않는 것입니다. 방언을 한다면 그것을 자랑하거나 구원의 표지로 삼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지 않으며, 말씀과 이성의 분별 아래 두어야 합니다. 방언 후에 자신이 더 사랑하고 용서하며 정직하게 살게 되는지 살펴야 합니다. 아무리 강렬한 체험이라도 말씀의 진리와 체어리티의 삶에서 벗어난다면 경계해야 합니다. 반대로 방언이 한 사람을 겸손하게 하고, 주님을 더 의지하게 하며, 이웃을 섬기는 삶으로 이끈다면 그 열매 자체는 귀히 여길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성령께서 사람에게 주시는 가장 본질적인 언어는 입에서 나오는 신비한 음절이 아니라 삶으로 표현되는 선과 진리입니다. 사랑 없는 방언은 울리는 꽹과리가 될 수 있지만, 이웃을 살리는 친절한 말, 잘못을 인정하는 정직한 말, 낙심한 사람을 일으키는 위로의 말, 진리를 왜곡하지 않고 바르게 전하는 말은 천국의 애정이 지상 언어 안에 담긴 모습이 될 수 있습니다. 천국의 언어란 단지 인간이 해석할 수 없는 소리가 아니라,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애정이 진리의 형식을 입고 표현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방언할 때 가져야 할 가장 안전한 생각은 ‘방패가 생긴다’, ‘응답이 빨라진다’, ‘지혜가 자동으로 쏟아진다’는 확신이라기보다 다음과 같은 태도입니다. ‘주님, 이 기도가 참으로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면 저를 더 겸손하게 하시고, 제 악을 보게 하시며,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이끌어 주십시오. 제가 체험 자체를 사랑하거나 영적 우월감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오직 주님의 뜻을 구하게 하십시오.’ 이러한 기도는 방언을 하든 하지 않든 모든 성도에게 필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기도의 형식이 아니라 그 기도를 통해 사람의 의지가 주님의 뜻에 복종하고 삶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 강의는 방언을 귀히 여기고 꾸준히 기도하라고 격려한다는 점에서는 열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방언을 사용하지 않는 것을 죄로 규정하고, 의심을 악한 귀신에게서 온 것으로 단정하며, 방언에 ‘보호’, ‘응답 가속’, ‘지혜 주입’, ‘성화’, ‘돌파’라는 효능을 직접 연결하는 것은 성도들을 체험 중심의 신앙으로 이끌 위험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 성령의 역사는 특정 음성 현상에 갇히지 않습니다. 성령은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신성한 진리이며, 인간의 이해를 밝히고, 의지를 움직여 선한 삶을 살게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의 가장 확실한 표지는 방언의 유창함이 아니라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최종적으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이 강의에 던지는 질문은 단순합니다. ‘그 방언이 사람을 실제로 어떤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가?’입니다. 방언을 한 뒤에도 더 쉽게 남을 정죄하고, 자신의 체험을 자랑하며, 방언하지 않는 사람을 무시하고, 회개 없이 동일한 악을 반복한다면 그 방언은 거듭남의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 후에 자신의 잘못을 더 잘 보고, 용서하기 어려운 사람을 용서하며, 손해를 보더라도 정직을 선택하고,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섬긴다면 그 변화 안에서 성령의 역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많은 말보다, 알아들은 진리 하나를 삶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참된 영적 돌파는 입술의 음절이 달라지는 데 있지 않고, 자기 사랑에 갇혀 있던 마음이 열려 주님과 이웃을 향하는 데 있습니다.

 

 

 

SY.32, ‘그냥 성경만 공부하고 싶네요’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강문호 목사님의 이번 영상은 ‘그냥 성경만 공부하고 싶다’는 고백에서 시작하여, 잇사갈 지파가 시대를 분별하고, 이스라엘이 마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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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30, ‘하나님의 속성 중 삼위일체는 정확히 무엇인가요?’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첫머리에서 분명히 말하고 싶은 것은, 이 강의는 삼위일체를 보다 정확하게 설명하려는 진지한 시도라는 점입니다. 강사는 교회 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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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첫머리에서 분명히 말하고 싶은 것은, 이 강의는 삼위일체를 보다 정확하게 설명하려는 진지한 시도라는 점입니다. 강사는 교회 안에서 오랫동안 사용되어 온 모호한 표현들을 정리하고, 삼신론과 양태론, 아리우스주의와 예수 유일주의를 구분하면서 성경이 말하는 삼위일체를 설명하려고 애씁니다. 이러한 노력 자체는 충분히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아는 일은 신앙의 기초이며, 잘못된 하나님 이해는 결국 잘못된 신앙생활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바로 이 점에서는 강사와 깊이 공감할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는가’는 단순한 신학적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주님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여러 차례 강조합니다. 다만 여기서부터 스베덴보리는 전통적인 조직신학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강의는 처음부터 ‘한 하나님’과 ‘한 분 하나님’을 구분하면서 삼위일체를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세 하나님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은 분명히 성경적이며 매우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는 ‘한 하나님 안에 세 위격(Persons)이 영원부터 존재한다’는 전통적 표현 자체가 오히려 많은 사람들에게 세 하나님을 연상시키는 근본 원인이 되었다고 봅니다. 실제로 그는 저서,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에서 니케아 이후의 삼위일체 교리가 아무리 ‘한 하나님’을 말한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마음속으로는 결국 세 분을 각각 생각하게 된다고 지적합니다. 머리로는 하나라고 말하지만, 기도할 때는 성부 따로, 성자 따로, 성령 따로 생각하게 되고, 결국 의식 속에서는 세 신(神)을 떠올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입술은 하나를 말하지만 생각은 셋을 만든다’는 역설로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삼위일체는 부정되어야 할 교리가 아니라, 오히려 더욱 분명하게 이해되어야 할 교리입니다. 그러나 그 삼위는 세 위격이 아닙니다. 그는 저서, ‘주님(The Lord)과 ‘참된 기독교’에서 삼위는 한 분 주님 안에 있는 세 가지 신성한 본질이라고 설명합니다. 곧 ‘신성 자체(Divine Itself)로서의 성부, ‘신적 인성(Divine Human)으로서의 성자, 그리고 ‘신적 흘러나옴, 활동(Divine Proceeding)로서의 성령입니다. 이 셋은 세 인격이 아니라, 한 분 주님 안에서 영원히 하나를 이루는 신성의 세 가지 본질적 구별입니다. 그는 인간을 비유로 들어 영혼과 몸, 그리고 활동이 서로 구별되지만 한 사람을 이루듯이, 주님 안에서도 신적 사랑과 신적 지혜, 그리고 신적 작용, 활동이 하나를 이룬다고 설명합니다. 물론 이 비유조차 완전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세 사람을 연상시키는 것보다는 훨씬 성경적이라고 그는 판단합니다.

 

강의에서는 성경 번역의 문제를 상당한 비중으로 다룹니다. 특히 영어의 ‘one’을 ‘한 분’으로 번역하느냐 ‘’으로 번역하느냐에 따라 교리 이해가 달라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실제로 언어의 미묘한 차이가 신학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라면 번역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했을 것입니다. 말씀은 문자만으로는 결코 완전히 이해될 수 없으며, 문자 안에는 언제나 더 깊은 영적 의미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저서,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에서 성경의 문자, 즉 겉 글자만 가지고 교리를 세우면, 서로 다른 구절을 근거로 얼마든지 상반된 교리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말씀 전체를 비추는 하나의 중심 원리가 필요한데, 그 중심은 언제나 ‘주님’ 자신입니다. 다시 말해, 성경의 어느 구절이든 결국 주님을 드러내고 있는가를 기준으로 읽어야 합니다. 따라서 특정 번역어 하나만으로 삼위일체를 결정하려는 접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경 전체가 누구를 계시하고 있는가를 묻는 일입니다.

 

강의는 아리우스주의와 양태론을 모두 비판합니다. 이 부분에서도 스베덴보리는 상당 부분 동의합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피조물로 낮추는 아리우스주의를 분명히 거부합니다. 주님은 단순한 최고의 피조물이 아니라, 인간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 자신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양태론 역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삼위는 단순히 하나님께서 시대에 따라 가면만 바꾸어 쓰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단순한 역할 놀이가 아니라, 한 분 주님 안에 실제로 존재하는 신성의 구별입니다. 따라서 그는 아리우스주의와 양태론 모두를 넘어서려 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 신학이 독특한 이유입니다. 그는 전통적 삼위일체와 양태론 사이의 절충안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새로운 차원의 이해를 제시합니다.

 

특히 강의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세 위격이 서로 사랑하고, 서로 말씀하시며, 서로 교제하신다’는 설명은 스베덴보리와 가장 크게 갈라지는 지점입니다. 그는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아버지께 기도하시고 순종하시는 장면을 결코 두 신적 인격 사이의 대화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영화(榮化)가 완성되기 이전, 곧 아직 완전히 신성과 하나 되지 않은 인간성을 입고 계시던 주님의 상태를 보여 주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천국의 비밀’과 ‘주님’에서 그는 주님의 생애 전체를 인간성을 점차 신성으로 완전히 하나 되게 하시는 과정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이전의 기도와 순종은 영원히 독립된 두 인격 사이의 대화가 아니라, 인간성을 영화시키시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진 내적 싸움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부활 이후에는 그 영화가 완성되어, 주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한 분 하나님으로 계신다고 설명합니다.

 

강의는 니케아 공의회를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니케아와 아타나시우스 신조를 기독교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인정하면서도, 그 과정에서 교회가 점차 사도적 단순성을 잃었다고 봅니다. 그는 초대교회는 본래 예수 그리스도를 한 분 하나님으로 예배했지만, 후대로 갈수록 철학적 개념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면서 하나님 이해가 지나치게 형이상학적으로 변했다고 설명합니다. 그 결과 평범한 신자들은 삼위일체를 이해하지 못한 채 ‘신비’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신학자들은 끝없는 논쟁을 반복하게 되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새로운 계시를 통해 가장 먼저 바로잡으려 했던 것도 바로 이 하나님 이해였습니다.

 

강의 후반부에서는 여러 성경 구절을 통해 삼위일체를 증명하려 합니다. 예수님의 세례 장면, 마28:19, 요14, 고후13:14 등은 전통적으로도 가장 중요한 본문들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이 구절들을 모두 인정합니다. 다만 그는 이 본문들이 세 인격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한 분 주님 안에 있는 신성의 삼중성을 보여 준다고 읽습니다. 예를 들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라는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세 이름이 아니라 ‘이름’이 단수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에서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존재와 본질과 권능 전체를 뜻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세 이름을 나열하신 것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의 완전한 신성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는 성령에 대한 이해도 전통 신학과 다릅니다. 그는 성령을 제3의 독립된 신적 인격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성령은 부활하시고 영화되신 주님으로부터 끊임없이 발출되는, 흘러나오는 신적 진리와 신적 능력이며, 천사들과 사람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살아 있는 임재입니다. 마치 태양과 빛과 열이 분리될 수 없듯이, 주님과 성령 역시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성령이 단순한 힘이나 영향력만도 아닙니다. 성령은 주님 자신의 신적 활동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제3의 인격을 따로 받는 것이 아니라, 영화되신 주님께서 직접 사람 안에 역사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이 강의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볼 때 가장 중요한 질문은 ‘삼위가 있는가 없는가’가 아닙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모든 저작은 이 질문으로 모입니다. 그는 저서, ‘주님’을 통해 구약의 여호와께서 신약에서 인간성을 입고 세상에 오셨다고 증언합니다. ‘참된 기독교’에서는 기독교의 모든 교리는 결국 한 분 주님께로 귀결된다고 말합니다. ‘천국과 지옥’에서는 천국의 모든 천사들이 오직 한 분 주님만을 하늘의 하나님으로 예배한다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천국의 비밀’ 전권을 통해 성경 전체가 바로 그 한 분 주님만을 증언한다고 해설합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에게 삼위일체는 결코 세 인격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교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과 지혜와 작용이 완전히 하나 되신 한 분 주님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한 교리입니다.

 

따라서 이 강의는 삼위일체를 성경적으로 설명하려는 진지한 노력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시선에서 보면, 여전히 니케아 이후의 전통적 틀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보기에 새로운 계시가 요청된 이유는 바로 이 지점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한 하나님’을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세 신’을 생각해 왔습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새로운 계시를 통해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씀의 참뜻을 다시 열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의 최종 목적은 세 위격의 관계를 분석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나타나신 한 분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저서, ‘주님’, ‘참된 기독교’, ‘천국의 비밀’을 통해 일관되게 증언한 핵심이며, 동시에 오늘날 삼위일체를 다시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붙들어야 할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SY.31, ‘방언기도할 때, 3가지 생각하며 기도하세요’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이 강의는 방언을 받은 사람이 자신의 방언을 의심해서는 안 되며, 방언할 때에는 세 가지 생각, 곧 ‘사탄의 공격을 막는 방패가 세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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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29, ‘삼위일체, 잘못돼서 어려운 겁니다’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이 강의는 처음부터 매우 도발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이미 어떤 ‘안경’을 쓰고 있으며, 그 안경이 바로 삼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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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강의는 처음부터 매우 도발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이미 어떤 ‘안경’을 쓰고 있으며, 그 안경이 바로 삼위일체 교리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강연자는 자신이 성경 자체를 다시 읽은 결과, 전통적 삼위일체 교리는 성경이 아니라 후대의 신학이 만들어 낸 틀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문제 제기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충격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흥미롭게도 ‘교리라는 안경이 성경 이해를 좌우한다’는 문제의식 자체는 스베덴보리 역시 매우 강하게 제기했던 부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저서,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과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곳곳에서, 사람들은 말씀을 있는 그대로 읽는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이미 형성된 교리와 자기 이해를 통해 말씀을 읽는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말씀은 언제나 사람의 애정과 사고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으며, 주님께서는 그 왜곡을 바로잡기 위해 말씀의 속뜻을 새롭게 열어 주신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안경’이라는 비유 자체는 상당히 의미 있는 문제 제기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기존 교리를 부정하기 위해 새로운 논리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의 내적 일관성 속에서 모든 교리를 다시 재정립하려 했다는 점이 이 강의와 근본적으로 다른 출발점입니다.

 

강연자는 이어서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님은 하나이지만 한 하나님은 아니다’라고 단정합니다. 즉 두 하나님이며 두 인격인데, 다만 목적과 뜻이 같기 때문에 ‘하나’라고 불린다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관점은 강연자와 일정 부분 겹치면서도 결정적으로 갈라집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전통적인 ‘세 인격이면서 한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실제로는 세 하나님이라는 관념을 심어 준다고 반복해서 지적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사상이 교회의 가장 큰 혼란 중 하나가 되었다고까지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스베덴보리가 두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주님 예수 그리스도 안에 보이지 않는 신성인 아버지와, 나타난 신적 인성, 그리고 발출, 즉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오시는 신성이 하나로 존재한다고 설명합니다. 인간에게 영혼과 몸, 그리고 활동이 분리될 수 없듯이, 주님 안에서도 신성과 인성, 그리고 활동, 즉 흘러나오시는 신성은 완전히 하나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반대한 것은 ‘삼위’ 자체가 아니라 ‘세 하나님처럼 생각하게 만드는 삼위의 이해’였습니다. 그는 삼위를 ‘한 인격 안의 삼위’로 재해석합니다. 이 점에서 강연은 전통 교리를 비판하는 데까지는 스베덴보리와 일부 공감대를 형성하지만, 그 대안으로 두 하나님을 세우는 순간 스베덴보리의 중심 교리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강연은 예수님의 순종을 중요한 논거로 사용합니다. 겟세마네에서 예수님께서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다는 사실을 들어, 뜻이 둘이므로 두 존재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장면을 전혀 다르게 해석합니다. 그는 주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마리아에게서 받은 인간성, 그러니까 인성을 입으셨으며, 그 인성 안에는 모든 인간이 경험하는 시험과 유혹을 실제로 겪을 수 있는 상태가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겟세마네에서 나타난 두 뜻은 두 하나님 사이의 갈등이 아니라, 아직 완전히 영화되지 않은 인성과 그 안에 내재한 신성 사이에서 일어난 마지막 시험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은 외부의 다른 하나님께 순종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성을 끝까지 신성에 복종시키심으로써 인성을 완전히 신성하게, 즉 Divine Human으로 만드셨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화(Glorification)의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순종은 두 신격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인성을 신성으로 변화시키는 구속 과정의 일부입니다.

 

강연은 또 예수님께서 태어나기 전에도 존재하셨으며, 태초에 아버지 안에서 혼으로 계시다가 몸을 입고 나오셨다고 설명합니다. 이 부분은 매우 독창적인 체계를 이루고 있지만, 스베덴보리의 설명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영원부터 존재하신 것은 ‘신적 진리’ 곧 말씀(Logos)이며, 이 말씀은 하나님 자신에게서 분리된 또 하나의 존재가 아닙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신적 진리가 인성을 입고 세상 가운데 오셨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태초 이전에 ‘아들’이라는 독립된 존재가 있었다고 보지 않습니다. 영원부터 존재하신 것은 신성 자체이며, ‘아들’이라는 표현은 시간 속에서 성육신하신 이후의 주님을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니케아 이후 형성된 ‘영원한 아들의 출생’ 개념을 비판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는 영원한 출생이라는 개념이 성경보다 철학적 추론에 가깝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영원부터 두 번째 하나님이 존재했다고 설명하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한 분 하나님께서 인성을 취하셨다는 것이 그의 일관된 입장입니다.

 

성령에 대한 강연자의 설명 역시 흥미롭습니다. 그는 성령은 별도의 존재가 아니라 아버지의 영이며, 아버지께서 직접 오실 수 없는 곳에서 대신 역사하시는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가까운 부분이 있습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는 성령을 제3의 독립 인격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그는 성령을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신적 진리와 신적 활동으로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성령은 주님의 역사하심이며, 인간 안으로 흘러 들어오는 신적 영향력입니다. 따라서 성령을 또 하나의 하나님으로 이해하는 것은 스베덴보리도 거부합니다. 그러나 강연이 성령을 오직 아버지의 영으로만 설명하는 반면, 스베덴보리는 성령은 영화되신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온다고 설명합니다. 부활 이후 주님께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영화된 인성으로부터 신적 진리가 직접 흘러나오기 시작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아버지와 분리된 존재도 아니지만, 단순히 아버지만의 영도 아닙니다. 영화되신 주님의 신적 활동 전체를 의미합니다.

 

이 강연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 가운데 하나는 ‘하나다’라는 표현을 ‘한 존재’가 아니라 ‘뜻과 목적의 일치’로 해석하는 대목입니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주님께서 제자들도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다는 점을 근거로 제시하는데, 이 논리는 일정한 설득력을 가집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사랑과 진리가 완전히 결합될 때, ‘하나’라고 표현할 수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주님 안에서는 사랑과 진리의 일치가 단순한 협력이 아니라 존재 자체의 완전한 연합으로 이루어졌다고 설명합니다. 인간은 사랑과 지혜가 부분적으로 하나가 될 수 있지만, 주님 안에서는 신성과 인성이 본질적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하나됨과 주님의 하나되심은 같은 단어를 사용하지만 동일한 수준의 하나는 아닙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미묘하지만 결정적인 구별입니다.

 

전체적으로 이 강의는 현대 복음주의 신학이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던 여러 난제를 정면으로 다루려는 진지한 시도를 보여 줍니다. 또한 삼위일체를 둘러싼 전통적 설명이 일반 신자들에게 논리적으로 매우 어렵게 들린다는 문제의식도 충분히 공감할 만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시각에서 보면, 이 강의는 전통 교회의 오류를 지적하는 데는 상당한 통찰을 보이지만, 그 대안을 세우는 과정에서 또 다른 형태의 분리를 만들어 냅니다. 세 하나님을 거부하려다 두 하나님을 세우는 결과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보기에 참된 해결은 하나님을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이지 않는 신성과 보이는 인성이 완전히 하나가 되었다는 성육신의 신비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를 본 자는 나를 보았다’는 말씀을 가장 결정적인 선언으로 받아들입니다. 주님은 아버지를 대표하는 또 다른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 직접 만날 수 있도록 자신을 드러내신 유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결국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볼 때, 이 강의는 기존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중요한 문제 제기를 담고 있으나, 그 문제의 최종 해답은 ‘두 하나님’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충만히 거하시는 한 분 하나님’이라는 계시 속에서 비로소 완성됩니다.

 

 

 

SY.30, ‘하나님의 속성 중 삼위일체는 정확히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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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28, ‘이게 교회입니까, 카페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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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표면적으로는 ‘교회를 떠난 아들과 뒤늦게 깨닫는 장로’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들여다보면, 이것은 단순히 세대 갈등이나 교회 개혁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한 사람 안에서 ‘진리의 질서’가 ‘사랑의 질서’로 다시 태어나는 거듭남의 이야기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이란 잘못된 행동 몇 가지를 고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선과 진리를 바라보는 중심 자체가 바뀌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누구나 진리를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사실은 자신이 세워 놓은 질서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이 원고의 강인호 장로는 바로 그 지점에 서 있는 인물입니다. 그는 악한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누구보다 성실하고 충성스럽고 책임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반복하여 말하듯, 지옥은 악한 의도만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선이라고 믿는 것 안에 자기 자신을 섬기는 사랑이 섞여 있을 때도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악인과 선인의 대결이 아니라, ‘주님을 위한 신앙’과 ‘자신이 만든 신앙’을 구별해 가시는 주님의 섭리를 보여주는 과정입니다.

 

원고는 매우 의도적으로 ‘3040 세대가 조용히 사라진다’는 현실에서 시작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도 가장 흔히 듣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흥미로운 점은 이야기의 초점이 젊은 세대에게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카메라는 처음부터 끝까지 장로를 따라갑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조입니다. 우리는 흔히 ‘왜 젊은 사람들이 떠나는가’를 묻지만, 이 이야기는 ‘왜 남아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가’를 묻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은 자기 사랑 안에서만 세상을 본다고 말합니다. 즉, 자신이 사랑하는 것이 곧 자신의 눈이 됩니다. 그러므로 같은 교회를 보아도 청년은 다른 교회를 보고, 장로는 또 다른 교회를 봅니다. 문제는 누가 옳으냐가 아니라, 무엇을 사랑하느냐입니다.

 

강인호 장로는 처음부터 거의 완벽한 신앙인의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새벽기도 20년 개근, 가장 먼저 교회 문을 열고, 보일러를 켜고, 헌금을 관리하고, 회의록을 검토하고, 누구보다 책임감 있게 봉사합니다. 세상 기준으로는 본받을 만한 신앙인입니다. 실제로 이런 분들이 한국교회를 지탱해 온 것도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외적인 선행 자체를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 선행이 어디에서 흘러나오느냐입니다.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선인지, 아니면 자신의 proprium이 만들어 낸 질서인지는 오직 시험이 올 때 드러납니다. 시험이 없을 때는 둘 다 거의 똑같아 보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반드시 사람에게 시험을 허락하십니다. 시험이란 악인을 벌주는 시간이 아니라 선의 근원이 어디인지를 보여 주시는 시간입니다.

 

이 장로가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행동은 ‘항상 같은 자리에 앉는 것’입니다. 원고는 이것을 단순한 습관처럼 묘사하지만, 상응적으로는 훨씬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성경에서 ‘자리’는 단순한 의자가 아니라 상태를 의미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영적 상태를 사랑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과 판단이 가장 편안한 자리에 머무르려 합니다. 장로는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싸우지 않습니다. 대신 성경과 찬송가를 올려놓습니다. 겉으로는 신앙적인 행동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곳은 내 자리입니다’라는 무언의 선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자기애는 대개 매우 공손한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큰소리치지 않아도 자기 중심성은 충분히 작동합니다. 오히려 예의 바른 자기애가 더 깊고 교묘할 수도 있습니다.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반복해서 등장하는 ‘전통’입니다. 장로는 ‘전통을 지키는 것이 신앙’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라면 즉시 이렇게 질문할 것입니다. ‘무엇을 위한 전통인가?’ 전통은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생명을 희생시키면서 전통을 보존한다면 이미 전통은 껍데기가 됩니다. 천국에서는 질서가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그 질서는 사랑을 위한 질서입니다. 사랑을 억누르는 질서는 이미 천국의 질서가 아닙니다. 따라서 장로가 지키고 있던 것은 질서였지만, 주님이 세우시는 질서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질서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전도사의 청년부 개편안은 이야기 속에서 하나의 시험으로 등장합니다. 영상 설교, 소그룹, 청년들의 참여, 질문 가능한 구조 등은 원고 안에서는 단순한 프로그램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프로그램 자체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들을 수 있는가’입니다. 천국에서는 누구도 강요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자유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당회에서는 가장 먼저 ‘안 된다’는 결론이 내려집니다. 놀라운 것은 반대 이유가 악해서가 아니라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proprium의 특징이 드러납니다. 자기애는 언제나 자신을 정의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사람을 상하게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릅니다.

 

아들 도훈은 끝까지 아버지를 공격하지 않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틀린 분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한 문장은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진리는 사랑 없이 전달되면 닫히지만, 사랑 안에서 전달되면 스스로 사람의 양심 속에서 역사한다고 말합니다. 도훈은 아버지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 변화가 시작됩니다. 만일 아들이 아버지가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했다면 장로는 끝까지 방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것을 보고 있습니다라는 표현은 아버지의 양심을 건드립니다. 사랑은 언제나 방어막을 통과합니다.

 

이야기의 전환점은 손자의 질문입니다. 아빠는 왜 교회 안 가요?어린아이의 질문은 신학도 아니고 논쟁도 아닙니다. 그런데 장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어린아이는 천국에서 오는 순수한 상태를 상징한다고 설명합니다. 어린아이의 질문은 논리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진실만 요구합니다. 그래서 장로는 처음으로 자신 안의 모순을 마주하게 됩니다. 시험은 언제나 가장 순수한 질문의 형태로 찾아옵니다.

 

결정적인 장면은 아들의 카카오톡 메시지를 예배당에서 다시 읽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원고는 매우 아름다운 상징을 사용합니다. 인쇄된 종이를 성경책 안에 끼워 두었다는 것입니다. 상응적으로 이것은 인간의 경험이 말씀 앞에 놓이는 순간을 의미합니다. 이전까지 장로는 말씀으로 사람을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사람의 고통을 가지고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이 순서가 바뀌는 순간 거듭남은 시작됩니다.

 

카페입니까?라고 말했던 자신의 음성이 되돌아오는 장면은 심판의 장면입니다. 그러나 이 심판은 하나님이 정죄하시는 심판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마지막 심판이란 하나님이 사람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 앞에서 사람이 자기 자신을 보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장로는 처음으로 자기 말을 자기 귀로 듣습니다. 그래서 무너집니다.

 

그가 무릎을 꿇으며 드리는 기도는 이 이야기의 중심입니다. 주님, 제가 지킨 게 뭡니까? 교회입니까, 제 자리입니까?이 질문은 사실 모든 종교인에게 던져지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신이 만든 자리를 지키고 있는가. 스베덴보리는 모든 거듭남은 이 질문에서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proprium을 선이라고 믿는 동안은 결코 변화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드러나는 순간부터 주님이 실제로 역사하십니다.

 

이어 등장하는 시편 127편,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은 단순한 위로의 말씀이 아닙니다. 원고는 처음부터 끝까지 ‘세운다’는 이미지를 반복합니다. 장로는 교회를 세운다고 믿었습니다. 전통도 세우고, 질서도 세우고, 권위도 세웠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가서야 그는 자신이 세운 것은 구조였고, 주님이 세우시는 것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것이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신학적 전환입니다.

 

이후의 변화는 더욱 의미심장합니다. 장로는 갑자기 개혁가가 되지 않습니다. 새벽기도도 계속하고, 가장 먼저 교회 문도 엽니다. 달라진 것은 행동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입니다. 거듭남은 직업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중심이 바뀌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자신이 먼저 말했고, 이제는 가장 마지막에 말합니다. 이전에는 빨간 펜으로 수정했고, 이제는 검은 볼펜으로 청년들의 말을 적습니다. 이전에는 사람을 교회에 맞추려 했고, 이제는 교회가 사람의 마음을 들을 수 있도록 돕습니다. 외형은 거의 같지만 내면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장로가 결국 아들이 등록한 교회를 묻지 않는 장면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포용이 아닙니다. 그는 이제 교회를 자기 소유로 보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교회는 조직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 안에 있다고 반복하여 말합니다. 그러므로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면 됐다라는 장로의 마지막 마음은 비로소 보편교회의 관점에 가까워진 것입니다. 그는 자기 교회보다 주님의 교회를 먼저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원고를 읽으며, 한 가지는 분명히 구분해야 합니다. 이 이야기가 곧 청년들이 원하는 대로 교회를 바꾸어야 한다는 결론으로 읽혀서는 안 됩니다. 원고가 말하려는 핵심도, 스베덴보리의 가르침도 그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천국에는 엄격한 질서가 있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질서 자체가 아니라, 그 질서가 사람을 살리는 질서인가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청년들의 요구 역시 모두 옳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진리는 시대에 따라 변하지 않습니다. 다만 진리를 전달하는 사랑과 경청의 방식은 끊임없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이 원고가 진정으로 말하는 것은 전통을 버리라도 아니고,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라도 아닙니다. 먼저 들으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먼저 들으셨고, 들으신 후에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이 이야기의 제목은 ‘교회를 떠난 아들’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떠난 장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장로가 떠난 것은 교회가 아니라 자신의 proprium이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자신이 주님의 집을 세우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가서야 주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을 통해, 손자의 질문을 통해, 귤 한 봉지를 들고 찾아온 친구를 통해, 아들의 담담한 메시지를 통해 이미 집을 세우고 계셨음을 깨닫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섭리의 방식입니다. 주님은 거대한 기적보다 일상의 작은 사건들을 엮어 한 사람의 사랑의 질서를 바꾸십니다. 그래서 참된 거듭남은 언제나 밖에서 보면 아주 조용하지만, 하늘에서는 한 영혼의 세계가 완전히 뒤집히는 가장 큰 사건입니다.

 

 

 

SY.29, ‘삼위일체, 잘못돼서 어려운 겁니다’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이 강의는 처음부터 매우 도발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이미 어떤 ‘안경’을 쓰고 있으며, 그 안경이 바로 삼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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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27,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나요?’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복음을 한 번도 듣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이 질문은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오래되었고, 동시에 가장 어려운 질문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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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을 한 번도 듣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이 질문은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오래되었고, 동시에 가장 어려운 질문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질문 앞에는 늘 여러 이름들이 함께 등장합니다. ‘조선 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이순신 장군은?’, ‘세종대왕은?’, ‘아마존 밀림의 원주민은?’, ‘이슬람 국가에서 태어나 평생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조차 듣지 못한 사람들은?’ 그리고 더 나아가 ‘태중에서 죽은 아이들’, ‘어린아이’, ‘지적 장애로 복음을 이해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하는 질문으로까지 이어집니다. 이러한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닙니다. 그 배후에는 언제나 더 근본적인 질문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정말 공평하신 분이신가?’ 만일 주님께서 사람마다 전혀 다른 환경 속에 태어나게 하셨다면, 그 환경의 차이가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인간의 깊은 고민이 이 질문 속에 담겨 있습니다.

 

이번 강의 역시 바로 그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강사는 먼저 하나님의 ‘’와 ‘공의’를 설명하며,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옳으신 분이므로 결코 불공평하게 심판하지 않으신다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는 창조 세계와 양심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일반계시’가 주어졌으며, 그 빛에 충실히 반응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특별계시’를 허락하신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누구에게도 불공평하지 않으며, 결국 모든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빛에 따라 심판받는다는 것이 강의의 핵심 논지입니다.

 

먼저 말해야 할 것은, 이러한 문제의식 자체는 매우 귀한 출발점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과연 어떤 분이신가를 묻지 않고서는 구원의 문제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그의 저작들인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하나님의 섭리(Divine Providence) 전반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설명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공의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법정의 공정함보다 훨씬 깊고 넓습니다. 그는 주님의 공의를 결코 자비와 분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공의와 자비는 하나님의 두 성품이 아니라, 하나의 신적 사랑이 나타나는 두 측면입니다. 인간은 흔히 ‘공정하게 심판하는 하나님’과 ‘사랑으로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서로 다른 모습으로 생각하지만, 스베덴보리에게서는 둘이 결코 갈라지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랑이시기 때문에 언제나 가장 공정하시며, 가장 공정하시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사랑을 거두지 않으십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공의를 말하면 쉽게 형벌을 떠올리고, 사랑을 말하면 쉽게 관용만을 떠올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공의는 사람을 벌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기 위해 존재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훈계하는 이유가 자녀를 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르게 성장시키기 위해서인 것처럼, 주님의 모든 심판 역시 사랑에서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의 섭리에서 주님은 단 한 사람도 지옥으로 보내기를 원하지 않으시며, 모든 사람을 천국으로 이끄시는 것이 신적 섭리의 영원한 목적이라고 반복하여 말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끝내 천국을 거부한다면, 그것은 주님께서 사랑을 거두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이 끝까지 자신의 사랑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이해하는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강의와 스베덴보리의 관점은 조금씩 갈라지기 시작합니다. 강의에서는 하나님의 공의를 설명하기 위해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라는 틀을 사용합니다. 창조 세계와 양심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 빛을 따라 하나님을 찾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복음이 전달된다는 것입니다. 고넬료에게 베드로가 보내지고,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빌립이 보내진 것이 그 대표적인 예로 제시됩니다. 이것은 분명 성경이 보여 주는 아름다운 섭리의 사례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에 훨씬 더 광대한 차원을 덧붙입니다. 그는 주님의 섭리가 인간의 지상 생애로 끝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특별계시는 반드시 지상에서만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죽음 이후에도 계속해서 사람을 가르치시고 인도하십니다.

 

이 사실은 스베덴보리 신학 전체를 이해하는 열쇠 가운데 하나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죽음을 모든 결정이 끝나는 마지막 순간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사람은 육체를 벗는 순간부터 비로소 자신의 참된 내면이 드러나는 세계로 들어갑니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과 비슷한 사랑을 가진 영들과 만나고, 천사들의 가르침도 받으며, 자신이 평생 사랑했던 것이 무엇인지 점점 분명하게 드러내게 됩니다. 따라서 지상에서 복음을 듣지 못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영원한 운명이 결정되는 일은 없습니다. 주님의 섭리는 인간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오래, 훨씬 더 세밀하게 역사합니다.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에서 스베덴보리가 가장 놀랍게 기록하는 내용 가운데 하나도 바로 이것입니다. 그는 수많은 이방인들과 직접 대화했다고 증언합니다. 그들은 지상에서 성경을 읽어 본 적도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역사적으로 알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선을 사랑했고, 거짓보다 진실을 사랑했으며, 이웃을 해치기보다 돕기를 원했습니다. 천사들이 그들에게 주님을 설명해 주었을 때, 그들은 오히려 기쁜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평생 사랑해 왔던 진리와 선이 바로 주님으로부터 나온 것이었음을 즉시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이러한 이방인들이 세상 교회 안에서 살면서도 자기애와 위선 속에 있었던 사람들보다 더 쉽게 천국의 삶을 받아들이는 경우를 여러 차례 기록합니다.

 

이 대목은 우리가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이라는 질문을 다시 생각하게 만듭니다. 어쩌면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일지도 모릅니다. ‘그 사람은 평생 무엇을 사랑했는가?’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은 지식을 시험 보는 장소가 아닙니다. 천국은 사랑의 나라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먼저 그 사람이 어떤 교리를 얼마나 많이 알고 있었는지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알고 있는 진리를 얼마나 사랑했으며, 그것을 삶으로 살려고 했는지를 보십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교회 밖에도 천국 백성이 많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사실을 설명하면서 매우 중요한 원리를 하나 제시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에게 결코 ‘가지지 않은 것’을 요구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참된 기독교를 관통하는 원리이기도 합니다. 사람마다 태어난 시대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며, 교육 수준이 다르고, 종교적 환경도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어려서부터 말씀을 가까이하며 성장하고, 어떤 사람은 평생 성경이라는 책의 존재조차 모른 채 살아갑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차이를 누구보다도 정확히 아십니다. 따라서 심판의 기준은 동일하지만, 그 기준이 적용되는 방식은 각 사람의 상태에 따라 완전히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주님의 무한한 섭리라고 설명합니다. 무한한 사랑은 획일적으로 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마다 가장 적절한 방식으로 인도하기 때문에 무한한 사랑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강의에서 반복되는 ‘주어진 빛에 따라 심판하신다’는 표현은 스베덴보리 안에서 훨씬 풍성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강의에서는 이 빛을 주로 창조 세계와 양심을 통하여 주어진 일반계시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은 단순한 자연의 증거가 아닙니다. 그는 빛을 언제나 ‘진리’와 연결합니다. 더욱이 그 진리는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인간의 사랑을 비추는 빛입니다. 그래서 같은 말씀을 읽어도 어떤 사람은 생명을 얻고, 어떤 사람은 오히려 더 깊은 자기 확신 속으로 들어갑니다. 차이는 말씀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랑에 있습니다. 말씀은 언제나 같은 빛이지만, 그 빛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상태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여기에서 스베덴보리가 자주 사용하는 ‘리메인스’라는 개념이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천국의 비밀에서 그는 리메인스를 주님께서 어린 시절부터 사람 안에 저장해 두시는 선과 진리의 모든 흔적이라고 설명합니다. 사람은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주님께서는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아이가 부모의 따뜻한 사랑을 받으며 느낀 순수한 기쁨, 거짓말을 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꼈던 순간, 누군가를 불쌍히 여겨 도와주고 싶었던 마음, 진실을 사랑했던 작은 선택들까지도 주님께서는 모두 보존하십니다. 이것이 리메인스입니다. 훗날 사람이 거듭날 수 있는 이유도, 천사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도, 사후 세계에서 새로운 진리를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도 모두 여기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는 사람 안에 천국의 씨앗을 먼저 심어 두신 뒤 평생 그것을 보호하시며 자라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에게 양심은 단순한 도덕 감각이 아닙니다. 강의에서는 양심을 거의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옳고 그름의 판단 능력으로 설명합니다. 물론 이것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양심을 훨씬 더 깊이 이해합니다. 참된 양심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가 사람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양심은 단순히 ‘이것은 나쁘다’고 말하는 마음속 목소리가 아니라, ‘주님께서 이것을 원하지 않으신다’는 내적인 감각입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도 이러한 양심은 형성될 수 있습니다. 비록 성경을 모르더라도 진실을 사랑하고, 정의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 역시 주님께서 역사하시는 통로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는 교회 밖 사람들의 선을 결코 가볍게 보지 않습니다. 다만 그 선 역시 궁극적으로는 모두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로마서 1장을 다시 읽으면 매우 흥미로운 차이가 나타납니다. 강의에서는 바울의 말을 따라 ‘창조 세계를 보면 누구나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점을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물론 바울은 분명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자연이 하나님을 직접 증명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연은 하나님의 신성을 직접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질서를 상응적으로 반영하는 세계입니다. 다시 말해, 해와 달과 별은 그 자체가 계시가 아니라 계시를 담는 그릇입니다. 자연 속의 질서를 보고 창조주의 질서를 깨닫는 사람도 있지만, 같은 자연을 보면서도 오히려 자연만을 절대화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조 세계는 인간 안에 있는 사랑과 결합될 때 비로소 계시가 됩니다. 자연은 언제나 같은 자연이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의 사랑은 결코 같지 않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변명할 수 없다’는 말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단순히 하나님을 몰라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이 되었기 때문에 진리를 거부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천국의 비밀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입니다. 악은 무지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왜곡된 사랑에서 시작됩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주님 사랑보다 위에 올라갈 때, 인간은 진리를 보아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무지는 원인이 아니라 결과입니다. 사람은 먼저 사랑을 잘못 선택하고, 그 결과 진리가 점점 보이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적 실명입니다.

 

이 점에서 강의가 강조하는 우상숭배도 조금 더 깊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강의에서는 조각상을 만들고 별과 해를 섬기는 것을 우상숭배의 대표적인 예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우상숭배를 훨씬 넓게 정의합니다. 사람 안에서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곧 우상입니다. 돈이 우상이 될 수도 있고, 명예가 우상이 될 수도 있으며, 학문이나 권력, 심지어 자신의 신학까지도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상은 나무나 돌로 만든 형상이 아니라 마음속 왕좌에 앉은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도 우상숭배는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으며, 반대로 교회 밖에도 진실을 사랑하는 마음은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시각입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강의를 들으며 자연스럽게 생기는 또 하나의 질문을 만나게 됩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왜 필요한가? 선하게만 살면 되는 것 아닌가?’ 스베덴보리는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교회의 존재를 누구보다 중요하게 여깁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단순히 사람 몇 명을 구원하기 위한 기관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위한 영적 심장과 폐의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천국과 지옥에서 말하는 ‘거대한 인간(Grand Man)의 개념처럼, 교회는 인류 전체를 향해 진리와 선을 순환시키는 중심 기관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없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존재 이유는 ‘교회 밖 사람은 모두 잃어버렸다’고 선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의 생명을 세상 전체에 흘려보내기 위해서입니다. 선교 역시 같은 의미를 갖습니다. 선교는 하나님의 사랑이 부족해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모든 사람에게 역사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인간이 기쁨으로 동참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선교 이해는 전통적인 개신교와 매우 다른 깊이를 보여 줍니다. 일반적으로 선교는 ‘복음을 모르기 때문에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구원받게 하는 일’로 설명됩니다. 물론 이것도 중요한 측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선교는 그보다 훨씬 더 큰 의미를 가집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온 인류를 향해 쉬지 않고 역사하고 계십니다. 어느 민족이든, 어느 시대이든, 어느 종교권이든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흐름이 끊어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선교사는 그 생명을 처음 만들어 내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역사하고 계시는 주님의 섭리에 기꺼이 동역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선교는 하나님의 사랑을 대신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참여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관점은 선교를 더욱 겸손하게 만들며, 동시에 더욱 절실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님께서 이미 일하고 계시는 밭으로 부름을 받는 것이지, 주님께서 아직 시작하지 않으신 일을 대신 시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강의에서는 고넬료와 에티오피아 내시를 특별계시의 대표적인 사례로 제시합니다. 이것은 성경이 분명히 보여 주는 아름다운 섭리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사건들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것입니다. 그는 이 사람들이 갑자기 선택된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주님의 섭리 안에서 준비되어 온 사람들이라고 설명할 것입니다. 고넬료는 이미 기도와 구제를 통하여 선을 사랑하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에티오피아 내시는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예루살렘까지 와서 하나님을 찾고 있었으며, 돌아가는 길에도 이사야서를 읽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특별계시는 아무에게나 갑자기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마음이 준비된 사람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시기 때문에, 먼저 사람 안에 진리를 향한 갈망이 형성되도록 인도하신 후 그 갈망에 가장 적절한 진리를 만나게 하십니다. 이것이 섭리의 방식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하나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환경’을 사용하시지만, 결코 ‘환경’에 사람을 묶어 두지 않으십니다. 인간은 흔히 환경을 운명처럼 생각합니다. ‘나는 기독교 국가에 태어나지 않았으니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었으니 책임이 없다’고 말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섭리가 환경보다 훨씬 깊다고 설명합니다. 사람은 환경의 산물이 아니라 사랑의 존재입니다. 환경은 사랑을 형성하는 하나의 도구일 뿐이며, 최종적으로 사람을 규정하는 것은 그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게 되었는가입니다. 그래서 같은 환경에서도 한 사람은 주님을 향해 열리고, 다른 사람은 더욱 자기 자신만을 향해 닫힙니다. 이것이 자유의 신비이며, 동시에 섭리의 신비입니다.

 

강의 후반부에서는 노아 시대와 소돔과 고모라, 그리고 바벨탑 사건이 반복해서 언급됩니다. 강사는 이 사건들을 통해 인류가 얼마나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해 왔는지를 설명합니다. 성경의 큰 흐름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설명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천국의 비밀을 읽고 나면 이 본문들은 전혀 새로운 깊이를 갖게 됩니다. 창세기의 초기 역사는 단순한 고대사의 기록이 아니라, 인간 영혼의 역사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노아 홍수는 단순히 물이 온 세상을 덮은 사건이 아닙니다. 말씀의 속뜻으로는 인간의 거짓과 악한 욕망이 영혼 전체를 뒤덮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원래 퍼셉션(perception)을 통하여 직접 주님의 인도를 받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점점 강해지면서 그 거룩한 인식을 잃어버렸고, 결국 거짓된 persuasion이 모든 것을 삼켜 버렸습니다. 이것이 홍수의 본질입니다. 그러므로 홍수는 단순한 형벌의 이야기가 아니라, 한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거듭남의 질서가 시작되는 이야기입니다. 주님께서는 심판을 위해 홍수를 허락하신 것이 아니라, 남아 있는 리메인스를 보존하여 새로운 교회를 세우기 위해 홍수를 허락하셨습니다. 심판 속에서도 언제나 중심은 구원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흔히 소돔을 특정한 죄의 상징으로만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소돔은 훨씬 근본적인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자기 사랑이 극도로 심화되어 선과 진리를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입니다. 외적인 죄는 그 내적 상태가 밖으로 드러난 결과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소돔을 읽을 때 중요한 것은 ‘저 사람들이 얼마나 악했는가’가 아니라 ‘내 안에도 주님의 음성을 거부하는 소돔은 없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말씀은 언제나 우리를 타인에게로 보내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의 마음으로 데려갑니다.

 

바벨탑 역시 같은 원리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바벨을 인간 문명의 교만으로 이해합니다. 물론 그것도 맞습니다. 그러나 천국의 비밀에서는 바벨을 ‘자기 이름을 높이려는 종교’로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위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영광을 위하는 종교가 바벨입니다. 이러한 바벨은 고대 메소포타미아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의 교회 안에도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습니다. 설교가 주님보다 설교자를 높이고, 교리가 주님보다 교단을 높이며, 신앙이 주님보다 자기 의를 높인다면, 그것이 바로 바벨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바벨을 역사 속 한 도시가 아니라 모든 시대의 영적 위험으로 읽습니다.

 

이러한 해석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강의를 듣다 보면 자연스럽게 ‘누가 구원받고 누가 구원받지 못하는가’에 관심이 집중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질문 자체를 바꾸어 놓습니다. 그는 ‘저 사람이 구원받는가?’보다 ‘나는 지금 어떤 사랑을 선택하고 있는가?’를 먼저 묻습니다. 이것이 말씀의 속뜻이 우리를 향하는 방식입니다. 말씀은 언제나 타인의 운명을 판단하는 책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강의의 후반부에서는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 같은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질문도 함께 다루어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궁금해하는 이유는 이해할 만합니다. 그들은 분명 훌륭한 삶을 살았고, 민족을 위해 헌신했지만, 역사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영원한 운명은 어떻게 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라면 이 질문 자체를 매우 조심스럽게 다룰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최종 상태를 아시는 분은 오직 주님 한 분뿐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람의 외적인 생애는 알 수 있지만, 그 사람의 가장 깊은 사랑과 양심, 그리고 주님께서 평생 동안 어떻게 섭리하셨는지는 결코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특정 인물이 천국에 있다거나 지옥에 있다고 단정하는 것은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영역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여러 영들을 만났다고 기록하면서도 개별 인물에 대해 극도로 신중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심판은 인간의 지식이 아니라 주님의 전지(全知)에 속한 일입니다.

 

이 점은 오늘날 우리의 신앙에도 매우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우리는 때때로 ‘저 사람은 구원받았을까?’, ‘저 사람은 구원받지 못했을 것이다’라는 판단을 쉽게 내립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러한 태도 자체가 인간을 말씀의 중심에서 벗어나게 만든다고 말합니다. 말씀은 다른 사람의 운명을 판정하는 책이 아니라, 내 자신의 사랑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심판자의 자리를 맡기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자신을 살피고, 악을 버리며, 이웃을 사랑하라는 삶을 맡기셨습니다. 결국 다른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추측하는 일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오늘 내가 주님께 더 가까워지고 있는가를 묻는 일입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선교의 필요성을 결코 약화시키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의 자비를 결코 좁게 만들지 않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려 합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크게 말하면 선교의 필요성이 약해질 것 같고, 선교를 강조하면 하나님의 자비가 좁아질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서는 이 둘이 서로 충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서로를 더욱 빛나게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선교를 명하십니다. 그리고 선교는 주님의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 사랑을 더 분명하게 알게 하는 은혜로운 통로입니다. 말씀을 직접 알고, 주님의 이름을 알고, 거듭남의 길을 분명히 배우는 것은 분명 큰 특권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특권이지, 다른 사람을 정죄할 권리가 아닙니다. 많이 받은 사람은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섬길 책임을 받을 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강의 전체를 하나의 더 큰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강사는 하나님의 공의를 변호하기 위해 애씁니다. 그리고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며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불공평하지 않으시다는 확신은 성경 전체가 증언하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 공의를 한 걸음 더 깊은 자리까지 이끌어 갑니다. 그의 눈에 하나님의 공의는 단순히 ‘공평하게 심판하시는 공의’가 아닙니다. 그것은 ‘단 한 사람도 잃지 않으려는 사랑의 공의’입니다. 주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의 환경을 아시고, 기질을 아시며, 받을 수 있는 진리의 정도를 아시고, 자유의 한계를 아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에게 가장 적절한 방식으로, 가장 적절한 시기에, 가장 적절한 진리를 허락하십니다. 어떤 이는 지상에서, 어떤 이는 사후 세계에서, 그러나 누구도 주님의 사랑 밖으로 버려진 채 방치되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보편적 섭리입니다.

 

이러한 스베덴보리의 구원론은 자칫 ‘모두가 결국 구원받는다’는 보편구원론으로 오해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스베덴보리의 사상을 정확하게 이해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인간의 자유를 강조합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천국으로 이끄시기를 원하시지만, 누구의 자유도 강제로 꺾지 않으십니다. 끝까지 자기 사랑을 사랑하는 사람은 결국 그 사랑을 따라 살 수 있는 공동체를 스스로 선택하게 됩니다. 그것이 지옥입니다. 반대로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랑과 같은 천국 공동체로 이끌립니다. 그러므로 천국과 지옥은 임의적인 선고가 아니라, 사람이 평생 자유 가운데 길러 온 사랑이 영원한 삶의 형태를 이루는 결과입니다. 이처럼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과 인간의 절대적인 자유를 동시에 붙들고 설명합니다. 어느 한쪽도 희생하지 않습니다.

 

결국 이 강의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볼 때, 가장 크게 달라지는 것은 질문의 방향입니다. 강의는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 질문을 더 깊은 질문으로 이끕니다. ‘주님은 과연 어떤 분이신가?’ 만일 주님께서 무한한 사랑 자체이시라면, 그 사랑은 어느 민족과 어느 시대도 제외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주님께서 무한한 지혜 자체이시라면, 사람마다 가장 적절한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만일 주님께서 무한한 공의 자체이시라면, 누구에게도 없는 것을 요구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주님께서 무한한 자비 자체이시라면, 사람이 마지막까지 자유롭게 천국을 선택할 수 있도록 평생, 그리고 사후 세계에서도 끊임없이 역사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라는 질문은 결국 ‘주님은 얼마나 크신 분이신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우리에게 보여 주는 주님은 인간의 교파나 국경 안에 갇혀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창세 전부터 모든 사람을 아시고, 세상 끝날까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며, 영원 속에서도 모든 사람을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교회는 그 사랑을 독점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증언하는 공동체이며, 선교는 그 사랑을 대신하는 일이 아니라 함께 기뻐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구원론은 하나님의 공의를 조금도 약하게 만들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그 공의를 무한한 사랑 안에서 이해하게 합니다.

 

결국 이 강의는 하나님의 공평함을 설명하려는 진지한 시도였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보면 우리는 그 공평함의 배후에 있는 훨씬 더 넓은 풍경을 보게 됩니다. 그 풍경의 중심에는 언제나 주님께서 계십니다. 사람을 정죄하기보다 살리기를 원하시고, 버리기보다 붙드시기를 원하시며, 한 영혼이라도 더 천국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지금 이 순간에도 쉼 없이 섭리하시는 주님 말입니다. 이러한 주님을 바라볼 때, 비로소 우리는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라는 질문 앞에서도 두려움보다 신뢰를 갖게 됩니다. 우리의 지식은 제한되어 있지만 주님의 사랑은 제한되지 않으며, 우리의 판단은 부분적이지만 주님의 섭리는 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평생의 저작을 통해 증언하고자 했던 하나님의 모습이며, 동시에 이 강의를 넘어 우리가 끝내 바라보아야 할 가장 큰 진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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