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가 소개하는 곳은 아토스의 이비론 수도원입니다. 아토스에 얽힌 전승과 이비론 수도원의 오래된 역사, 그리고 무엇보다 그곳에서 경험한 ‘손님대접의영성’을 소개하면서, ‘주는것을잊지말고, 하나님께로부터받는것도잊지말라’는 메시지로 나아갑니다. ‘스베덴보리의렌즈’로 보면, 이번 영상은 앞선 몇 편과 조금 다른 의미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수도자의 극단적인 금욕이나 기이한 일화보다 ‘타인을향하여열리는삶’이 중심에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아토스를 바라보는 시선부터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상에는 ‘마리아의정원’, 여성 출입 금지의 기원, 황후의 방문 등에 관한 여러 전승이 등장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그 자체로 동방정교회의 오랜 수도 전통과 신심을 이해하는 데 흥미로운 자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전승의 신성함이나 기적성 자체가 영적 진리를 보증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장소가 천 년 이상 보존되었고, 수많은 성물과 고문서를 간직하고 있으며, 수많은 수도자가 그곳에서 기도했다는 사실은 존중할 만하지만, 그것이 곧 그 장소 자체를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룩함의 근원은 언제나 주님이며, 사람이나 장소, 그리고 물건은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삶으로 나타내는 만큼만 거룩함에 참여합니다. 따라서 ‘마리아의정원’이라는 전승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그곳에서사람들이어떤사랑으로살아가는가?’입니다.
이 점에서 영상 후반부의 ‘손님대접’ 이야기가 오히려 이번 영상의 영적 중심에 가깝습니다. 가뭄과 흉년 때문에 수도원 자신들의 먹을 것조차 부족해지자 수도사들은 방문객에게 무료로 음식을 제공하던 관행을 중단하기로 합니다. 인간적으로는 충분히 이해할 만한 결정입니다. 그런데 한 가난한 방문객이 찾아와 ‘두가지를잊지말라. 주는것과받는것이다. 사람들에게주면하나님께로부터받을것을믿으라’는 취지의 말을 남깁니다. 이후 수도원은 다시 창고를 열어 가난한 사람과 나그네에게 음식을 나누었고, 그것이 이비론 수도원의 중요한 전통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는 스베덴보리의 신학과 매우 아름답게 만나는 지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의 삶은 근본적으로 ‘받아서주는삶’입니다. 모든 선과 진리, 모든 사랑과 생명은 인간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흘러들어옵니다. 인간은 그것을 자기 것으로 움켜쥐기 위해 받는 존재가 아니라, 받아서 다시 이웃에게 흘려보내도록 지음받은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영상의 ‘주는것과받는것을잊지말라’는 말은 단순한 자선의 격언보다 훨씬 깊게 읽을 수 있습니다. ‘받음’과 ‘줌’은 서로 반대되는 두 행동이 아니라 하나의 영적 순환입니다. 주님에게서 받고, 이웃에게 흘려보내며, 그렇게 흘려보내는 가운데 다시 주님에게서 받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매우 중요한 주의점도 있습니다. 이것을 ‘내가남에게하나를주면하나님께서나에게열을주신다’는 식의 보상 원리로 이해하면 금세 본래 의미에서 벗어납니다. 주는 행위가 더 큰 물질적 복을 받기 위한 수단이 되는 순간, 겉으로는 체어리티처럼 보여도 그 안에는 자기 사랑이 숨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주었으니하나님께서나에게갚으실것이다’가 아니라 ‘내가가진것부터가주님에게서온것이므로필요한이웃에게흘려보내는것이마땅하다’가 더 깊은 질서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다시 주시는 것도 반드시 돈이나 재산의 증가를 뜻하지 않습니다. 선을 사랑하는 마음, 이웃을 볼 수 있는 눈, 더 깊은 평안과 지혜, 주님을 신뢰하는 마음 역시 주님에게서 오는 훨씬 귀한 선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손님이오지않는집에는천사도오지않는다’는 수도원의 말도 문자 그대로 어떤 신비한 법칙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말이 가리키는 정신은 아름답습니다. 낯선 사람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식탁을 열고, 자기에게 속한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행위는 인간을 자기 자신에게서 밖으로 향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언어로 말하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모든 것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는 운동이라면, 체어리티는 받은 선을 이웃에게 유용하게 흘려보내는 운동입니다. 그래서 환대는 단순한 예절이 아니라 잘 행해질 때 ‘use’, 곧 쓰임의 한 형태가 됩니다.
영상에서 아브라함이 나그네를 대접하다 천사를 만났다는 이야기를 연결하는 것도 이런 의미에서 읽으면 좋습니다. 창세기 18장에서 아브라함은 자기 장막 앞을 지나가는 이들을 보고 먼저 달려나가 맞이하고, 물과 음식과 쉼을 제공합니다. 속뜻에서 더 깊은 의미들이 있겠지만, 겉으로도 이 장면에는 매우 아름다운 질서가 있습니다. ‘먼저대접하고, 나중에그들이누구였는지를알게됩니다.’ 상대가 천사인 줄 알았기 때문에 대접한 것이 아닙니다. 먼저 환대했습니다. 바로 이 순서가 중요합니다. 체어리티는 ‘가치있는사람인지확인한뒤사랑하는것’이 아니라, 선과 진리에 따라 필요한 쓰임을 행하는 데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수도원이라는 장소를 넘어 우리 일상으로 곧바로 이어집니다. 수도원에 들어가지 않아도 식탁 하나를 여는 것이 수도가 될 수 있습니다. 누군가의 말을 들어주는 것도 수도가 될 수 있고, 어려운 사람에게 시간과 물질을 내어주는 것도 수도가 될 수 있으며, 자기 능력과 지식을 필요한 사람에게 사용하는 것도 수도가 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수도생활을 바라볼 때, 특히 중요하게 보는 지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얼마나세상에서멀리떨어졌는가?’보다 ‘얼마나자기중심성에서벗어나주님의선을이웃에게흘려보내는가?’가 더 본질적인 질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번 영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천 년 된 박물관도, 아토스의 신비로운 전승도, 여성의 출입이 제한된 독특한 수도 전통도 아닙니다. 오히려 굶주림이 닥쳤을 때 닫으려 했던 ‘창고를다시여는장면’입니다. 수도원의 거룩함이 박물관 속 오래된 성물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배고픈 사람에게 내어주는 한 조각의 빵에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외적 성물은 과거의 거룩한 삶을 기억하게 할 수 있지만, 체어리티는 지금 여기에서 주님의 사랑을 살아 있게 합니다.
다만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스베덴보리는 ‘주는것’ 자체도 분별 없이 절대화하지 않습니다. 체어리티는 단순히 누구에게나 무엇이든 주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게 실제로 선한 것이 무엇인지를 지혜롭게 살피는 사랑입니다. 악을 돕는 것은 체어리티가 아니며, 상대의 잘못을 강화하는 도움 역시 참된 선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환대와 나눔에는 사랑과 함께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단순한 자선과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체어리티 사이의 중요한 차이입니다.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가 아토스의 웅장한 역사와 희귀한 보물들을 한참 이야기하지만, ‘스베덴보리의렌즈’로 끝까지 따라가 보면 결국 가장 빛나는 보물은 다른 데 있는 듯합니다. 그것은 ‘주는것과받는것을잊지말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문장을 조금 더 깊게 바꾸어 읽어볼 수 있습니다. ‘주님에게서받았음을잊지말고, 받은것을이웃에게흘려보내기를잊지말라.’ 그렇게 읽는 순간 이비론 수도원의 오래된 환대 이야기는 특정 수도원의 미담을 넘어 그리스도인의 일상 전체를 비추는 말이 됩니다.
결국 참된 수도는 세상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느냐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외적 고요가 내적 고요를 도울 수 있고, 외적 청빈이 자기 사랑을 돌아보게 할 수도 있으며, 수도원의 규율과 전통이 영적 훈련에 유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목적은 아닙니다. 목적은 사람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자기 것으로 가두지 않고, 삶의 쓰임으로 이웃에게 흘려보내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영상에서 우리가 가져갈 가장 아름다운 문장은 어쩌면 이것일 것입니다. ‘받은것은내것이어서받은것이아니라, 주님의선이나를지나다른사람에게까지흘러가도록받은것입니다.’ 그 흐름이 막히지 않는 곳,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바로 그곳에서 천국의 질서가 시작됩니다.
40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의 처음 태어난 남자를 일 개월 이상으로 다 계수하여 그 명수를 기록하라41나는 여호와라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태어난 자 대신에 레위인을 내게 돌리고 또 이스라엘 자손의 가축 중 모든 처음 태어난 것 대신에 레위인의 가축을 내게 돌리라42모세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대로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태어난 자를 계수하니43일 개월 이상으로 계수된 처음 태어난 남자의 총계는 이만 이천이백칠십삼 명이었더라44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45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태어난 자 대신에 레위인을 취하고 또 그들의 가축 대신에 레위인의 가축을 취하라 레위인은 내 것이라 나는 여호와니라(민3:40-45)
14너는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구별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내게 속할 것이라15네가 그들을 정결하게 하여 요제로 드린 후에 그들이 회막에 들어가서 봉사할 것이니라16그들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게 온전히 드린 바 된 자라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초태생 곧 모든 처음 태어난 자 대신 내가 그들을 취하였나니17이스라엘 자손 중에 처음 태어난 것은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내게 속하였음은 내가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태어난 자를 치던 날에 그들을 내게 구별하였음이라18이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태어난 자 대신 레위인을 취하였느니라19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취하여 그들을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주어 그들로 회막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봉사하게 하며 또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성소에 가까이 할 때에 그들 중에 재앙이 없게 하려 하였음이니라20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께서 레위인에 대하여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을 다 따라 레위인에게 행하였으되 곧 이스라엘 자손이 그와 같이 그들에게 행하였더라(민8:14-20)
출13과 민3, 민8을 함께 읽으면 처음에는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출13에서 여호와께서는 ‘태에서처음난모든것은다거룩히구별하여내게돌리라이는내것이니라’고 명하십니다. 사람의 장자도, 짐승의 처음 난 것도 모두 여호와의 것입니다. 그런데 민수기에 이르면 뜻밖의 변화가 나타납니다. 이스라엘 모든 장자를 직접 여호와께 구별하는 대신 레위 지파 전체를 취하여 그 장자들을 대신하게 하십니다. ‘이스라엘자손중모든처음태어난자대신에레위인을내게돌리고’(민3:41), ‘이스라엘자손중모든처음태어난자대신내가그들을취하였나니’(민8:16)라고 하십니다. 왜 하필 레위일까요? 더구나 야곱의 실제 장자는 르우벤이며, 출생 순서로 보아도 레위는 르우벤과 시므온 다음의 셋째 아들입니다.AC.352는 이 문제를 말씀의 속뜻에서 풀면서 사랑과 신앙의 내적 질서를 매우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먼저 ‘처음난것’이 왜 거룩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출13:2에서 주님께서는 ‘처음난모든것은다거룩히구별하여내게돌리라이는내것이니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처음’ 못지않게 ‘내것’입니다. 처음 난 것이 거룩한 까닭은 자연적 출생 순서 자체에 신성함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모든 선과 진리의 처음이시며 근원이신 주님을 표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AC.352는 처음 난 것들이 모두 거룩했던 이유를 ‘오직홀로‘장자’이신 주님을 가리켰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예배에서 처음 난 것은 궁극적으로 주님을 표상합니다.
그런데AC.352는 곧이어 ‘사랑과거기서비롯된신앙이‘장자’이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거기서비롯된’이라는 말입니다. 신앙이 홀로 장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거기서비롯된신앙’이 장자입니다. 그 이유는 이어지는 문장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모든사랑은주님에게서오는것이며,인간에게서오는것은조금도없다.’ 따라서 처음 난 것을 주님께 돌리는 행위에는 ‘내안에있는참된사랑과선의근원은내가아니라주님이시다’라는 내적 고백이 들어 있습니다. 처음 난 것이 ‘내것’이 아니라 ‘여호와의것’이라는 출13의 반복은 바로 이 질서를 표상합니다.
출13:15의 유월절 사건도 같은 배경을 보여 줍니다. 애굽의 처음 난 것은 죽었지만 이스라엘의 장자는 보존되었고, 그 결과 이스라엘의 모든 처음 난 것은 여호와께 속한 것으로 구별되었습니다. 따라서 장자의 거룩함에는 단지 ‘첫번째’라는 의미뿐 아니라 ‘주님께서살리셨으므로주님의것’이라는 의미도 들어 있습니다. 생명을 보존하신 분이 주님이시므로 그 생명의 처음을 주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속뜻으로 더 깊이 들어가면 인간 안에 있는 사랑과 신앙의 참된 생명 역시 인간 자신에게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원리가 드러납니다.
그런데 민3과 민8에 이르면 모든 장자를 대신하여 레위인을 취하십니다. 민3:41은 ‘이스라엘자손중모든처음태어난자대신에레위인을내게돌리라’고 하고, 민8:18은 더욱 직접적으로 ‘이스라엘자손중모든처음태어난자대신레위인을취하였느니라’고 합니다. 자연적 질서만 보면 이상합니다. 장자를 대신할 사람을 고른다면 실제 장자인 르우벤과 연결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AC.352는 여기에서 자연적 출생 순서와 영적 질서가 반드시 같지는 않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속뜻에서 레위는 ‘사랑’을 상징합니다. 반면 레위보다 먼저 태어난 르우벤과 시므온은 신앙에 속한 것들을 상징합니다. 그렇다면 놀라운 역전이 일어납니다. 자연적 순서에서는 르우벤과 시므온이 레위보다 먼저지만, 내적 질서에서는 레위가 나타내는 사랑이 신앙보다 먼저입니다. 그래서 실제 출생 순서로 셋째인 레위가 영적 의미에서는 모든 장자를 대신하게 됩니다. 말씀의 속뜻에서는 육체의 출생 순서보다 사랑과 신앙 사이의 내적 질서가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AC.352가 이 구절들을 인용하는 핵심 이유입니다. ‘사랑이신앙보다내적으로먼저다.’ 여기서 ‘먼저’라는 말은 단순한 시간 순서를 뜻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신앙의 생명이며 근원이라는 뜻입니다. 신앙이 아무리 먼저 의식에 나타나고, 진리를 먼저 배우며, 그것을 지성으로 이해한다고 해도, 그 신앙을 살아 있게 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신앙은 생명을 잃습니다. 반대로 사랑 안에 있을 때 신앙은 사랑이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를 밝히는 진리가 됩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가인을 통해 살펴본 문제와 정확히 연결됩니다.AC.338에서 ‘가인’은 태고교회의 첫 번째 자손, 곧 신앙을 나타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처음난것’이라고 불리는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닙니다. 실제로AC.352마지막에서도 ‘교회의처음난것은신앙’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매우 섬세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교회의처음난것이신앙이다’라는 것과 ‘신앙이사랑보다내적으로우위에있다’는 것은 전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인식되는 교회의 첫 출발이 신앙일 수 있습니다. 특히 태고교회 이후의 인간은 말씀을 통하여 먼저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인 뒤,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가면서 주님께서 그 신앙으로 체어리티를 심으시는 길을 걷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앙은 교회의 ‘처음난것’입니다. 그러나 그 신앙에 생명을 주는 근원은 여전히 사랑이며, 사랑의 근원은 주님입니다. 따라서 외적·시간적 순서에서는 신앙이 먼저 나타날 수 있어도 내적·생명적 질서에서는 사랑이 먼저입니다.
바로 이 점을 레위가 모든 장자를 대신하는 표상이 놀랍도록 정확하게 보여 줍니다. 르우벤과 시므온은 자연적 출생 순서에서는 레위보다 앞섭니다. 그러나 사랑을 나타내는 레위가 모든 장자를 대신하여 주님께 속하게 됩니다. 이는 신앙에 속한 것들이 아무리 먼저 나타난다고 해도, 그 모든 것의 내적 중심에는 사랑이 있어야 함을 보여 줍니다. 신앙의 진리들은 사랑을 섬기기 위해 존재하며, 궁극적으로 사람을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인도해야 합니다.
더구나 레위인은 단순히 장자를 대신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성막 봉사의 직무를 받습니다. 민8:15은 정결하게 된 레위인들이 ‘회막에들어가서봉사할것’이라고 하고, 민8:19은 그들을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주어 ‘회막에서이스라엘자손을대신하여봉사하게’ 했다고 말합니다. 이것 역시 의미심장합니다. 사랑은 관념으로 머무르지 않고 ‘봉사’, 곧 쓰임으로 나아갑니다. 체어리티가 실제 삶에서 이웃의 선을 위한 행위로 나타나는 것과 같은 질서입니다.
따라서 레위가 장자를 대신한다는 말씀은 ‘사랑이중요하고신앙은중요하지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이 신앙답게 되기 위해서는 사랑이라는 생명을 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랑 없는 신앙은 가인의 길로 나아가지만, 사랑에서 생명을 받는 신앙은 주님의 질서 안에 있습니다. 신앙과 사랑은 서로 제거해야 할 경쟁자가 아니라 하나의 생명을 이루어야 할 것들입니다. 다만 그 안에는 분명한 질서가 있습니다. 신앙이 사랑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신앙에 생명을 주고, 신앙은 그 사랑이 바르게 행할 수 있도록 진리로 섬깁니다.
이렇게 보면 ‘장자’라는 표현에 두 층위가 있다는AC.352마지막 문장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배에서처음난것들은주님을상징하고,교회의처음난것은신앙을상징한다.’ 예배에서 처음 난 것을 여호와께 드리는 것은 모든 거룩함과 사랑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반면 교회의 발생이라는 측면에서 처음 난 것은 신앙입니다. 그러나 그 신앙조차 독립적인 생명의 근원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으로부터 생명을 받아야 합니다. 두 의미는 충돌하지 않고 하나의 질서를 이룹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질서가 아벨의 제물 안에 들어 있습니다. 아벨은 체어리티이고, 그가 드린 것은 ‘양떼의처음난것’입니다. 체어리티가 주님께 드리는 처음 난 것은 ‘내안에있는사랑과선은내것이아니라주님의것입니다’라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아벨의 제물에는 자기 공로가 아니라 주님을 향한 인정이 있고,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 안에서 살아 있는 신앙이 있습니다.
결국 ‘왜장자가아닌레위가모든장자를대신했는가?’라는 질문의 답은 자연적 족보가 아니라 말씀의 내적 질서에서 찾아야 합니다. 자연적 출생에서는 르우벤과 시므온이 레위보다 먼저지만, 영적 생명의 질서에서는 사랑이 신앙보다 내적으로 먼저입니다. 신앙은 진리를 보고 고백하지만, 그 신앙에 생명을 주는 것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 자체의 근원은 인간이 아니라 주님입니다. 그래서 모든 처음 난 것은 주님의 것이며, 사랑을 상징하는 레위가 모든 장자를 대신하여 주님께 속하게 됩니다.
이것은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읽는 데도 매우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이 존재했다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신앙이 자신에게 생명을 주는 사랑으로부터 독립하려 했다는 데 있었습니다. 반대로 주님의 질서는 신앙을 다시 사랑 안에 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AC.352에서 장자와 레위의 표상을 통하여 보여 주시는 질서는 결국 하나입니다. ‘사랑은주님에게서오며,신앙은그사랑으로부터생명을얻는다.’ 자연적 순서에서는 신앙이 먼저 보일 수 있지만, 내적 질서에서는 언제나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이 먼저입니다. 이것이 장자가 아닌 레위가 모든 장자를 대신하게 된 말씀 안에 담긴 깊은 속뜻입니다.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2
‘양의첫새끼’(firstlings of the flock, ‘양떼의처음난것’)는오직주님께만속한것을상징한다는것은표상교회에서처음난것, 곧장자에관한규례에서분명합니다. 처음난것은모두거룩했는데, 이는그것들이오직홀로 ‘장자’(firstborn)이신주님을가리켰기때문입니다. 사랑과거기서비롯된신앙이 ‘장자’(firstborn)입니다. 모든사랑은주님에게서오는것이며, 인간에게서오는것은조금도없습니다. 그러므로오직주님만이 ‘장자’(firstborn)이십니다. 이것은고대교회들에서사람과짐승의처음난것을여호와께거룩한것으로드림으로써표상되었습니다. (출13:2, 12, 15)That the “firstlings of the flock” signify that which is of the Lord alone is evident from the firstlings or firstborn in the representative church, which were all holy, because they had relation to the Lord, who alone is the “firstborn.” Love and the faith thence derived are the “firstborn.” All love is of the Lord, and not one whit of it is of man, therefore the Lord alone is the “firstborn.” This was represented in the ancient churches by the firstborn of man and of beast being sacred to Jehovah; (Exod. 13:2, 12, 15)
또한속뜻으로사랑을상징하는레위지파가, 비록속뜻으로신앙을상징하는르우벤과시므온보다나중에태어났지만, 모든장자를대신하여받아들여지고제사장직을맡게된것으로도표상되었습니다. (민3:40-45; 8:14-20) and by the tribe of Levi, which in the internal sense signifies love—though Levi was born after Reuben and Simeon who in the internal sense signify faith—being accepted instead of all the firstborn, and constituting the priesthood. (Num. 3:40–45; 8:14–20)
40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의 처음 태어난 남자를 일 개월 이상으로 다 계수하여 그 명수를 기록하라 41나는 여호와라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태어난 자 대신에 레위인을 내게 돌리고 또 이스라엘 자손의 가축 중 모든 처음 태어난 것 대신에 레위인의 가축을 내게 돌리라 42모세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대로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태어난 자를 계수하니 43일 개월 이상으로 계수된 처음 태어난 남자의 총계는 이만 이천이백칠십삼 명이었더라 44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45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태어난 자 대신에 레위인을 취하고 또 그들의 가축 대신에 레위인의 가축을 취하라 레위인은 내 것이라 나는 여호와니라 (민3:40-45)
14너는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구별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내게 속할 것이라 15네가 그들을 정결하게 하여 요제로 드린 후에 그들이 회막에 들어가서 봉사할 것이니라 16그들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게 온전히 드린 바 된 자라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초태생 곧 모든 처음 태어난 자 대신 내가 그들을 취하였나니 17이스라엘 자손 중에 처음 태어난 것은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내게 속하였음은 내가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태어난 자를 치던 날에 그들을 내게 구별하였음이라 18이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태어난 자 대신 레위인을 취하였느니라 19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취하여 그들을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주어 그들로 회막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봉사하게 하며 또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성소에 가까이 할 때에 그들 중에 재앙이 없게 하려 하였음이니라 20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께서 레위인에 대하여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을 다 따라 레위인에게 행하였으되 곧 이스라엘 자손이 그와 같이 그들에게 행하였더라 (민8:14-20)
주님께서 그분의 인성에 관하여 모든 것의 장자이심을 다윗의 글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Of the Lord as the firstborn of all, with respect to his human essence, it is thus written in David:
26그가 내게 부르기를 주는 나의 아버지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 하리로다 27내가 또 그를 장자로 삼고 세상 왕들에게 지존자가 되게 하며(시89:26-27) Heshallcallme, myFather, myGod, andtherockofmysalvation. Iwillalsomakehimmyfirstborn, highabovethekingsoftheearth. (Ps. 89:26–27)
또 요한의 글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And in John: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계1:5) JesusChristthefirstbornofthedead, andtheprinceofthekingsoftheearth. (Rev. 1:5)
예배에서 처음 난 것들은 주님을 상징하고, 교회의 처음 난 것은 신앙을 상징한다는 것을 유의해야 합니다. Observe that the firstborn of worship signify the Lord, and the firstborn of the church, faith.
해설
AC.352는 앞의 AC.350에서 ‘양떼의처음난것’이 왜 ‘오직주님께만속한거룩한것’을 상징하는지를 자세히 설명합니다. 그런데 이 글은 단순히 성경에서 ‘장자’가 무엇을 상징하는지를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랑과 신앙의 관계, 그리고 인간 안에 있는 모든 참된 사랑의 근원이 누구인가를 매우 깊이 다룹니다.
가장 먼저 주목할 문장은 ‘사랑과거기서비롯된신앙이 ‘장자’입니다’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순서가 중요합니다. ‘사랑과신앙’이라고만 하지 않고 ‘사랑과거기서비롯된신앙’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가인과 아벨을 통해 계속 살펴본 태고교회의 본래 질서를 다시 보여 줍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신앙이 사랑과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사랑이 먼저 있었고 신앙은 그 사랑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은 사랑에서 태어난 것이었습니다.
바로 다음 문장은 이 글의 핵심이라 할 만큼 중요합니다. ‘모든사랑은주님에게서오는것이며, 인간에게서오는것은조금도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양떼의처음난것’을 오직 주님께 속한 것이라고 말하는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참된 사랑은 인간이 자기 안에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사랑이나 체어리티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은 실제로 사랑하고 자비를 베풀며 선을 행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의 생명과 최초 근원은 인간의 proprium에 있지 않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인간이 받아들여 마치 자기 것으로 느끼면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참된 사랑이 깊어질수록 ‘내가이렇게사랑했다’는 자기 의보다는 ‘주님께서사랑할수있게하셨다’는 인정이 깊어집니다.
이 때문에 ‘처음난것’이 거룩했습니다. 처음 난 동물이나 사람 자체에 어떤 신비한 거룩함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것들이 모든 선과 사랑의 처음이신 주님을 표상했기 때문입니다. 출13:2, 12, 15에서 처음 난 것을 여호와께 구별하여 드리게 하신 규례도 바로 이 내적 실재를 표상했습니다. 인간에게 처음이며 가장 귀한 것은 본래 주님의 것이라는 고백이 그 표상 안에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AC.352에서 특별히 흥미로운 부분은 레위 지파에 관한 설명입니다. 자연적인 출생 순서로 보면 레위는 장자가 아닙니다. 르우벤이 첫째이고 시므온이 둘째이며 레위가 셋째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속뜻에서 ‘레위’가 사랑을, 르우벤과 시므온이 신앙에 속한 것을 상징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실제 이스라엘의 모든 장자를 대신하여 레위 지파가 여호와께 구별되었고 제사장직을 담당했습니다.
여기서 자연적인 출생 순서와 영적인 질서가 서로 달라집니다. 자연적인 계보에서는 르우벤과 시므온이 레위보다 앞서지만, 내적 질서에서는 사랑이 신앙의 근원이므로 사랑이 먼저입니다. 그래서 장자를 대신하여 ‘사랑’을 상징하는 레위가 선택됩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가인의 문제를 통해 보아 온 ‘무엇이먼저인가?’라는 질문과도 직접 연결됩니다.
가인의 오류는 신앙 자체에 있지 않았습니다. 본래 사랑에서 나온 신앙을 사랑과 분리하여 독립시키고, 마침내 사랑보다 앞세운 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AC.352의 레위에 관한 설명은 그 질서를 다시 바로잡습니다. 영적인 질서에서는 사랑이 근원이고 신앙은 그 사랑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참된 신앙으로 존재하려면 계속 사랑을 바라보고 사랑을 섬겨야 합니다.
여기서 ‘장자’라는 상응에는 흥미로운 이중성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마지막에 ‘예배에서처음난것들은주님을상징하고, 교회의처음난것은신앙을상징한다’고 특별히 주의를 줍니다. 따라서 ‘장자’라는 말을 어디에서나 기계적으로 하나의 의미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예배의 표상으로서 처음 난 것을 주님께 드릴 때 그것은 주님을 가리키지만, 교회 안에서 생겨나는 첫 번째 것을 말할 때에는 신앙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이것은 AC.338에서 가인을 태고교회의 ‘첫번째자손’, 곧 신앙이라고 한 것과도 연결됩니다. 교회의 삶에서 나타나고 인식되는 첫 자손은 신앙입니다. 그러나 그 신앙의 생명과 근원은 사랑이며, 그 사랑 자체는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처음난것’이라고 해서 신앙이 사랑보다 우월하거나 독립적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신앙은 자신을 낳은 사랑과 자신에게 생명을 주시는 주님을 향해야 합니다.
시89:26-27과 계1:5의 인용은 이 모든 표상이 궁극적으로 누구를 향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주님은 ‘장자’이십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그분의인성에관하여’ 주님이 모든 것의 장자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구약의 처음 난 것에 관한 여러 표상은 궁극적으로 주님을 향하며, 주님 안에서 그 의미가 완성됩니다.
이 점에서 아벨이 ‘양떼의처음난것’을 드렸다는 말씀의 의미도 더욱 깊어집니다. 아벨은 체어리티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체어리티가 드리는 것은 ‘처음난것’, 곧 오직 주님께 속한 거룩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참된 체어리티는 자기 안에 있는 사랑과 선을 자기 것으로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이 주님에게서 왔음을 인정하며 주님께 돌려드립니다.
이것은 참된 예배의 내적 자세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고, 자비를 베풀고, 봉사하고, 말씀을 전하고, 어떤 선한 쓰임을 행했을 때 그것을 자기 공로로 붙들면 그 순간 선의 질서가 뒤집힐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이선의생명은주님에게서왔습니다’라고 인정하면, 인간은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자유롭게 행하면서도 그 근원을 주님께 돌립니다. 이것이 아벨이 ‘양떼의처음난것’을 드리는 모습 속에 들어 있는 중요한 속뜻입니다.
따라서 AC.352는 ‘모든사랑은주님에게서온다’는 유입의 원리와도 깊이 연결됩니다. 인간은 생명과 사랑의 독립적인 근원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와 책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받아들일 것인지, proprium의 사랑을 따를 것인지 인간은 자유 안에서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거듭남은 점점 더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기 삶의 생명으로 삼는 과정입니다.
결국 AC.352가 말하는 ‘양떼의처음난것’의 핵심은 단순히 ‘가장좋은것을하나님께바쳐야한다’는 교훈이 아닙니다. 더 깊은 속뜻은 ‘우리안의모든참된사랑과선의처음과근원은주님이시다’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주님에게서 오고, 참된 신앙은 그 사랑에서 나오며, 체어리티의 행위 역시 그 사랑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그래서 아벨의 제물이 주님께 받아들여지는 이유도 더욱 선명해집니다. 아벨의 예배에는 ‘주님에게서받은것을주님의것으로인정하는질서’가 들어 있습니다. 가인의 길은 신앙을 사랑에서 떼어 독립시키는 길이었다면, 아벨의 길은 사랑과 선의 근원을 주님께 돌리고 그 사랑에서 신앙과 행위와 예배가 나오게 하는 길입니다. 결국 AC.352는 우리에게 ‘내안에있는선의근원을누구에게돌리고있는가?’라는 매우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1
‘아벨’(Abel)이체어리티를상징한다는것은앞에서설명했습니다. 체어리티는이웃을향한사랑과자비를뜻합니다. 이웃을자기자신처럼사랑하는사람은이웃이고통을당할때에도자신의고통을대하듯그를불쌍히여기기때문입니다. That “Abel” signifies charity has been shown before. By charity is meant love toward the neighbor, and mercy; for he who loves his neighbor as himself is also compassionate toward him in his sufferings, as toward himself.
해설
AC.351은 매우 짧은 글이지만, 스베덴보리가 ‘체어리티’(charity)를 무엇으로 이해하는지를 아주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앞에서는 ‘아벨’이 체어리티를 상징한다고 반복해서 설명했지만, 여기서는 한 걸음 더 들어가 ‘그러면체어리티란실제로무엇인가?’를 말합니다. 그 답이 ‘이웃을향한사랑과자비’입니다.
먼저 주목할 것은 체어리티를 단순히 ‘선행’이라고 정의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선행은 체어리티가 외적으로 나타나는 중요한 모습이지만, 체어리티 그 자체는 그보다 안쪽에 있습니다. 그것은 ‘이웃을향한사랑’입니다. 따라서 어떤 행동이 외적으로 선해 보인다고 해서 그 자체로 곧 체어리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앞의 AC.348에서 보았듯이 행위의 생명은 그것이 어디에서 나오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체어리티에서 나온 행위라야 살아 있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AC.351은 ‘이웃을향한사랑’에 곧바로 ‘자비’(mercy)를 연결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체어리티는 이웃을 추상적으로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이웃이 고통을 당할 때 그의 고통에 마음이 움직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웃을자기자신처럼사랑하는사람은이웃이고통을당할때에도자신의고통을대하듯그를불쌍히여긴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자기자신처럼’이라는 표현은 자연스럽게 ‘네이웃을네자신과같이사랑하라’는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웃의 고통을 단순히 ‘저사람에게일어난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신의 일처럼 마음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다른 사람의 모든 감정과 고통을 문자 그대로 자신이 똑같이 느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핵심은 이웃의 어려움을 자기와 무관한 것으로 밀어내지 않는 데 있습니다.
이 점에서 ‘자비’는 체어리티의 매우 실제적인 모습입니다. 평안하고 아무 문제가 없을 때 ‘나는이웃을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웃이 고통 가운데 있을 때 그 고통을 보고 마음이 움직이며, 가능한 범위에서 그 사람의 선을 위해 무엇인가 하려는 데서 체어리티의 성질이 더욱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또한 여기서 말하는 자비는 단순한 감상이나 일시적인 연민에 머물지 않습니다. 바로 앞 AC.348-350의 흐름을 함께 보면 더욱 분명합니다. AC.348에서는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행위가 살아 있는 열매라고 했고, AC.349에서는 그러한 내적인 것이 외적 예배에 생명을 준다고 했으며, AC.350에서는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과 체어리티에 기초한 모든 예배가 주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51은 그 모든 것의 중심에 있는 체어리티가 ‘이웃을향한사랑과자비’라고 밝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흐름을 하나로 연결하면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체어리티는 이웃을 사랑하고 그의 고통을 자기 일처럼 돌아보는 내적 애정이며, 그 체어리티가 실제 행위로 나타나면 살아 있는 ‘열매’가 되고, 그 체어리티에서 주님을 향하면 살아 있는 ‘예배’가 됩니다. 결국 삶과 예배가 하나의 뿌리에서 나오는 셈입니다.
이것은 가인과 아벨의 대조를 더욱 깊게 이해하게 합니다. ‘아벨’이 체어리티라는 것은 단순히 아벨이 ‘선’을 나타낸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아벨은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라는 교회의 생명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후 가인이 아벨을 죽인다는 것은 신앙이 어떤 추상적인 덕목 하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고 그의 고통을 자기 일처럼 여기는 바로 그 생명을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왜 ‘신앙이아닌신앙’이 되는지도 더욱 분명해집니다. 사람이 아무리 많은 진리를 알고 올바른 교리를 고백하더라도, 이웃의 고통에는 무관심하고 다른 사람의 선에는 관심이 없다면 그 신앙에는 신앙을 살아 있게 하는 생명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참된 신앙은 사람이 진리를 알수록 이웃을 더 깊이 바라보고, 그의 필요와 고통에 더욱 민감해지도록 이끕니다.
그러나 여기서 체어리티를 단순히 ‘불쌍한사람을보고마음아파하는것’으로 축소해서도 안 됩니다. AC.351은 체어리티의 한 중요한 성질을 ‘자비’라는 측면에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체어리티는 궁극적으로 이웃의 참된 선을 바라고 그 선을 위해 행하는 삶 전체와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위로하고 돕는 것이 체어리티이고, 때로는 잘못을 그대로 방치하지 않는 것도 체어리티일 수 있습니다. 기준은 언제나 ‘이웃의참된선을원하는가?’에 있습니다.
특히 ‘이웃의고통을자신의고통처럼’이라는 표현은 체어리티가 얼마나 깊은 결합의 사랑인지를 보여 줍니다. 이웃이 나와 아무 관계없는 타인이 아니라, 그의 선과 행복이 나에게도 중요해지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랑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그사람의문제’로 밀어내지만, 체어리티는 그 경계를 넘어 이웃의 상태에 마음을 엽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의 근원 역시 앞의 AC.350에서 본 것처럼 인간 자신에게 있지 않습니다. ‘양떼의처음난것’과 ‘기름진것’이 오직 주님께 속한다고 했듯이, 참된 체어리티 역시 주님에게서 옵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억지로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받아들이면서 점차 다른 사람의 선과 고통을 자기 일처럼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거듭남의 중요한 변화입니다.
결국 AC.351은 짧은 한 문장으로 ‘아벨’의 성격을 매우 따뜻하고 실제적으로 보여 줍니다. 아벨은 단순히 교리적으로 ‘체어리티’를 상징하는 이름이 아닙니다. 그 체어리티란 ‘이웃을자기자신처럼사랑하고, 이웃이고통당할때자신의고통을대하듯자비를베푸는것’입니다. 따라서 신앙과 체어리티가 결합한다는 것은 단지 두 신학 개념을 올바르게 연결한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가 알고 믿는 진리가 마침내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보고 마음이 움직이며 그의 선을 위해 살아가는 사랑으로 변해 가는 것을 뜻합니다.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And Abel, he also brought of the firstlings of his flock, and of the fat thereof; and Jehovah looked to Abel, and to his offering. (창4:4)
AC.350
여기서 ‘아벨’(Abel)은앞에서와마찬가지로체어리티를상징합니다. ‘양떼의처음난것’(firstlingsoftheflock, ‘양의 첫 새끼’)은거룩한것을상징하는데, 그것은오직주님께만속한것입니다. ‘기름진것’(fat, ‘기름’)은천적인것자체를상징하며, 이것역시주님께속한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아벨과그의제물을돌아보셨다’(JehovahlookinguntoAbel, andtohisoffering,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는것은체어리티에속한것들과체어리티에기초한모든예배가주님을기쁘시게했음을뜻합니다. By “Abel” here as before is signified charity; and by the “firstlings of the flock” is signified that which is holy, which is of the Lord alone; by “fat” is signified the celestial itself, which also is of the Lord; and by “Jehovah looking unto Abel, and to his offering,” that the things of charity, and all worship grounded in charity, were well-pleasing to the Lord.
해설
AC.350은 창4:4의 ‘아벨은자기도양의첫새끼와그기름으로드렸더니여호와께서아벨과그의제물은받으셨으나’라는 말씀의 속뜻을 간결하게 요약합니다. 바로 앞 AC.346-349가 가인의 ‘땅의소산’과 ‘제물’을 통하여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행위와 거기서 나오는 예배를 설명했다면, 이제 아벨의 제물에서는 그와 정반대되는 예배가 나타납니다. 곧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살아 있는 예배입니다.
먼저 ‘아벨’은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체어리티를 상징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벨이 단순히 ‘선한사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가인이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나타내는 것과 대응하여, 아벨은 신앙의 생명이 되어야 할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가인과 아벨의 두 제물은 두 사람이 서로 다른 물건을 하나님께 드린 사건을 넘어, 서로 다른 내적 근원에서 나오는 두 종류의 예배를 보여 줍니다.
‘양떼의처음난것’에서 ‘처음난것’은 거룩한 것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에 매우 중요한 말을 덧붙입니다. 그 거룩한 것은 ‘오직주님께만속한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자기에게서 거룩한 것을 만들어 내어 주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인간 안에 있는 참된 선과 사랑, 체어리티와 신앙의 생명은 그 근원이 모두 주님에게 있습니다.
따라서 아벨이 ‘양떼의처음난것’을 드렸다는 말씀에는 참된 예배의 중요한 고백이 들어 있습니다. ‘내가주님께드리는선도본래주님에게서받은것입니다.’ 사람은 그것을 자신의 자유 안에서 받아들이고 살아내며 주님께 돌려드리지만, 그 선의 최초 근원은 자신에게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참된 예배에서 인간의 공로가 배제되어야 하는 이유와도 연결됩니다. 선을 행하면서 그것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면 자기 의가 들어오지만, 그것이 주님에게서 왔음을 인정하면 감사와 겸손의 예배가 됩니다.
이어지는 ‘기름진것’(fat)은 ‘천적인것자체’(the celestial itself)를 상징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적인것’은 가장 깊은 의미에서 사랑의 선과 관련됩니다. 따라서 아벨이 양 떼의 처음 난 것과 그 기름진 것을 드렸다는 것은 단순히 좋은 품질의 제물을 골라 드렸다는 뜻을 넘어, 주님에게서 오는 거룩한 것과 사랑의 선으로 예배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여기서도 스베덴보리는 ‘이것역시주님께속한것’이라고 다시 강조합니다. ‘처음난것’도 주님의 것이고 ‘기름진것’도 주님의 것입니다. 짧은 한 문장 안에서 같은 원리를 두 번 반복하는 셈입니다. 참된 예배에서 거룩함의 근원도 주님이고, 사랑의 선의 근원도 주님입니다. 인간은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마치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낸 것처럼 주님께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은 선을 인정하고 그것에 따라 살아가며 다시 주님께 돌려드립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349의 원리와 정확하게 이어집니다. 거기서 스베덴보리는 ‘외적인것은내적인것들로부터생명을얻으며, 곧그것들을통하여주님에게서생명을얻는다’고 했습니다. 이제 아벨의 제물은 그 원리를 실제로 보여 줍니다. 외적으로는 양 떼의 처음 난 것과 기름진 것을 드렸지만, 그 외적 제물의 내적 생명은 체어리티와 천적인 선에 있고, 그 모든 것의 생명은 다시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아벨과그의제물을돌아보셨다’는 말씀 역시 주님께서 어떤 물질적인 제물을 다른 제물보다 선호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체어리티에속한것들과체어리티에기초한모든예배가주님을기쁘시게했다’는 뜻으로 풀이합니다. 주님께서 돌아보신 것은 제물의 외형보다 그 제물 안에 있는 체어리티입니다.
여기서 특히 ‘체어리티에기초한모든예배’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참된 예배는 체어리티와 별개의 종교 행위가 아닙니다. 예배와 삶이 분리되어 한쪽에서는 하나님을 섬기고 다른 한쪽에서는 이웃을 향한 사랑 없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향한 선과 사랑이라는 내적 생명이 예배 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그래서 체어리티는 단지 예배 외에 추가되는 하나의 덕목이 아니라 예배를 살아 있게 하는 내적 토대입니다.
이 점에서 가인의 제물과 아벨의 제물의 차이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둘 다 여호와께 제물을 드렸습니다. 따라서 차이는 ‘예배를했느냐하지않았느냐’가 아닙니다. 가인의 제물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왔고, 아벨의 제물은 체어리티에서 나왔습니다. 외적으로는 둘 다 예배였지만 내적으로는 생명의 근원이 달랐던 것입니다.
AC.348-350을 함께 놓으면 매우 아름다운 질서가 보입니다. AC.348에서는 체어리티의 행위를 ‘살아있는열매’라고 했고, AC.349에서는 내적인 것이 외적인 예배에 생명을 주며 그 생명의 궁극적인 근원은 주님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AC.350에서는 바로 그 살아 있는 내적 예배가 아벨의 제물로 나타납니다. ‘체어리티 → 체어리티의행위 → 체어리티에기초한예배’가 하나의 흐름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흐름의 처음과 끝에는 주님이 계십니다. 인간에게 체어리티를 주시는 분도 주님이고, 그 체어리티에서 선을 행할 수 있게 하시는 분도 주님이며, 그 선으로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하시는 분도 주님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예배는 인간이 자기 것을 주님께 바치는 것이라기보다,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주님의 것으로 인정하며 감사와 사랑으로 다시 돌려드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AC.350의 중심은 ‘왜아벨의제물을주님께서받으셨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아벨이라는 개인을 편애하셨거나 양의 제물이 농산물보다 우월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아벨’은 체어리티를, ‘양떼의처음난것’은 주님께만 속한 거룩한 것을, ‘기름진것’은 역시 주님께 속한 천적인 것을 나타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호와께서아벨과그의제물을돌아보셨다’는 것은 체어리티에 속한 것과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예배가 주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보면 아벨의 제물은 참된 예배의 질서를 아주 짧고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주님에게서받은선을주님의것으로인정하고, 그선을체어리티의삶으로살아내며, 그체어리티에서주님을예배하는것.’ 이것이 살아 있는 예배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가인의 예배와 아벨의 예배를 가르는 본질적인 차이입니다.
‘제물’(offering)이예배를뜻한다는것은유대교회의표상들에서분명합니다. 그교회에서는온갖종류의희생제물뿐아니라땅과그모든소산의첫열매, 그리고처음난것을드리는것도 ‘제물’(offerings)이라불렀으며, 그들의예배는이러한것들로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이모든것은천국적인것들을표상했고, 모두주님을가리켰으므로, 이러한제물들이참된예배를상징했다는것은누구에게나분명합니다. 표상하는실재가없다면표상이무슨소용이있겠습니까? 또는내적인것이없는외적종교가우상과같은것, 죽은것외에무엇이겠습니까? 외적인것은내적인것들로부터생명을얻으며, 곧그것들을통하여주님에게서생명을얻습니다. 이러한사실로부터표상교회의모든제물은주님을향한예배를상징한다는것이분명합니다. 이에관해서는주님의신적자비로앞으로이어지는글들에서각각자세히다룰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제물’(offerings)이예배를뜻한다는것은선지서전반에서도분명합니다. 말라기에서는다음과같이말합니다. That by an “offering” is meant worship is evident from the representatives of the Jewish church, in which sacrifices of every kind, as well as the first fruits of the earth and of all its produce, and the oblation of the firstborn, were called “offerings,” in which their worship consisted. And as they all represented heavenly things, and all had reference to the Lord, it must be obvious to everyone that true worship was signified by these offerings. For what is a representative without the thing it represents? Or what is an external religion without an internal but a kind of idol and a thing of death? The external has life from things internal, that is, through these from the Lord. From these considerations it is evident that all the offerings of a representative church signify the worship of the Lord; and concerning these of the Lord’s Divine mercy we shall treat in particular in the following pages. That by “offerings” in general is meant worship, is evident in the prophets throughout, as in Malachi:
‘공의로운제물’(offeringinrighteousness)은내적제물이며, ‘레위자손’(sonsofLevi), 곧거룩하게예배하는사람들이그것을드릴것입니다. ‘옛날’(daysofeternity)은태고교회를, ‘고대’(ancientyears)는고대교회를뜻합니다. 에스겔에서는다음과같이말합니다. An “offering in righteousness” is an internal offering, which the “sons of Levi,” that is, holy worshipers, will offer. The “days of eternity,” signify the most ancient church, and the “ancient years,” the ancient church. In Ezekiel:
‘예물’(Oblations)과 ‘너희가드리는첫열매와너희모든성물’(firstfruitsoftheofferingsinthesanctifyings) 역시주님으로말미암아체어리티로거룩하게된행위를뜻합니다. 스바냐에서는다음과같이말합니다. “Oblations” and the “first fruits of the offerings in the sanctifyings” are likewise works sanctified by charity from the Lord. In Zephaniah:
‘구스’(Ethiopia)는천적인것들, 곧사랑과체어리티와체어리티의행위를소유한사람들을뜻합니다. “Ethiopia” denotes those who are in possession of celestial things, which are love, charity, and the works of charity.
해설
AC.349는 AC.346에서 제시한 세 번째 표현, 곧 가인이 ‘여호와께제물로드렸다’는 말씀의 속뜻을 본격적으로 설명합니다. AC.346에서는 ‘제물’이 그 신앙에서 비롯된 ‘예배’를 뜻한다고 간단히 밝혔습니다. 이제 AC.349는 왜 말씀에서 제물이 예배를 상징하는지를 유대교회의 희생 제사와 첫 열매, 처음 난 것을 드리는 제도를 통해 설명합니다.
여기서 가장 먼저 붙들어야 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유대교회의 제사 자체를 참된 예배의 본질로 보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희생 제물과 첫 열매와 처음 난 것을 드리는 모든 외적 의식은 ‘천국적인것들’을 표상했고, 궁극적으로 모두 주님을 가리켰습니다. 따라서 그 의식의 가치는 동물이나 곡식이라는 물질 자체에 있지 않고, 그것이 표상하는 내적 실재에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매우 날카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표상하는실재가없다면표상이무슨소용이있겠습니까?’ 표상은 그것이 가리키는 실재 때문에 의미가 있습니다. 제물이 사랑을 표상한다면 사랑이 있어야 하고, 첫 열매가 주님께 속한 선을 표상한다면 실제 삶 안에 그 선이 있어야 합니다. 표상만 남고 그것이 가리키는 실재가 사라지면 껍데기만 남습니다.
이어지는 두 번째 질문은 더욱 강합니다. ‘내적인것이없는외적종교가우상과같은것, 죽은것외에무엇이겠습니까?’ 여기서 AC.348과 AC.349가 정확하게 만납니다. AC.348에서는 체어리티 없는 신앙의 행위를 ‘죽은행위’라고 했습니다. 이제 AC.349에서는 내적인 것이 없는 외적 종교를 ‘죽은것’이라고 합니다. 행위도 예배도 외적인 형식만으로는 살아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외적인것은중요하지않다’는 뜻으로 읽으면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요점은 외적인 것을 버리는 데 있지 않고 외적인 것에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밝히는 데 있습니다. 그는 ‘외적인것은내적인것들로부터생명을얻으며, 곧그것들을통하여주님에게서생명을얻는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AC.349의 핵심 문장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질서가 있습니다. 생명의 근원은 주님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선이 사람의 내면에 받아들여지고, 그것이 외적인 예배와 행위로 나타날 때 그 외적인 것은 살아 있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외적 예배의 생명은 외적 형식 자체에 있지 않고, 그 안에서 역사하는 내적인 것에 있으며, 더 깊게는 그 내적인 것의 근원이신 주님에게 있습니다.
이 원리는 가인의 제물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입니다. 가인도 제물을 드렸습니다. 따라서 외적 예배가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예배가 어디에서 나왔는가 하는 것입니다. 앞의 AC.346-348에서 보았듯이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나타내며, 그의 ‘땅의소산’은 체어리티 없는 신앙의 행위를 뜻합니다. 그렇다면 그 소산을 여호와께 드리는 ‘제물’은 자연스럽게 그러한 상태에서 나온 예배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문제는 ‘예배를드리지않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배를 드렸다는 사실 때문에 더 깊은 문제가 드러납니다. 외적 예배가 존재한다고 해서 그 예배가 자동으로 참된 예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배의 내적 생명이 무엇인가를 보아야 합니다.
말3:2-4의 ‘공의로운제물’은 이 점을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 주님께서는 레위 자손을 금과 은처럼 연단하여 깨끗하게 하시고, 그 후에 그들이 ‘공의로운제물’을 드립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내적제물’이라고 풀이합니다. 참된 예배는 단순히 제단 위에 무엇을 올려놓는 행위가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의 내면을 정결하게 하신 결과로 나오는 예배라는 것입니다.
특히 ‘레위자손’을 스베덴보리가 ‘거룩하게예배하는사람들’로 풀이하는 것은 앞의 AC.342와도 연결됩니다. 거기서 레위는 체어리티를 나타냈고, 바로 그 때문에 레위 지파가 제사장직을 받았다고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참된 예배와 체어리티는 서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예배의 거룩함은 외적 의식의 정교함보다 그 안에 있는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나옵니다.
또한 ‘옛날’이 태고교회를, ‘고대’가 고대교회를 뜻한다는 설명도 의미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예배의 원형을 교회의 가장 초기 상태와 연결합니다. 특히 태고교회는 사랑을 중심으로 주님을 예배했던 천적 교회였습니다. 따라서 ‘옛날과고대와같이’ 제물이 다시 기쁨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옛 제사 제도를 복원한다는 뜻이 아니라 예배가 다시 그 내적 본질을 회복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겔20:40에서는 ‘예물’과 ‘첫열매’가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주님으로말미암아체어리티로거룩하게된행위’라고 풀이합니다. 이 표현은 AC.348과 AC.349를 이어 주는 매우 중요한 연결고리입니다. 앞에서는 살아 있는 행위가 ‘체어리티로부터행하는것’이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그 행위가 주님으로 말미암아 체어리티로 거룩하게 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사람이 선을 행한다고 해서 그 선을 자기 것으로 돌려서는 안 됩니다. 참된 체어리티의 행위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받아 행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것을 자유롭게 받아 자신의 삶에서 실천하지만, 그 선의 생명과 근원은 주님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그 행위가 예물이 되고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습3:10에서 ‘구스’가 천적인 것들, 곧 사랑과 체어리티와 체어리티의 행위를 소유한 사람들을 뜻한다는 설명은 AC.349 전체를 아름답게 마무리합니다. 참된 제물은 결국 사랑, 체어리티, 그리고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행위와 연결됩니다. 제물이라는 외적인 형식이 가리키던 실재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AC.346부터의 흐름이 매우 선명해집니다. ‘땅의소산’은 체어리티 없는 신앙의 행위를 나타내고, 그 소산을 ‘제물’로 드리는 것은 그 행위에서 나온 예배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가인의 예배는 외적인 형식을 갖추고 있었지만 그 생명의 근원이 되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예배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헌금하고 성찬에 참여하는 모든 외적 예배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외적 예배가 주님에게서 오는 내적 사랑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면서도 이웃을 미워하고, 자기 의를 높이며, 진리를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도구로 사용한다면 외적 예배와 내적 삶 사이에 분리가 생깁니다.
반대로 참된 예배는 예배 시간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주님께 받은 선이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와 실제 쓰임으로 흘러나갈 때 삶 자체가 예배의 연장이 됩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에게 예배와 삶, 신앙과 체어리티,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은 서로 따로 떨어진 영역이 아닙니다. 내적인 사랑이 외적인 행위와 예배 안에서 표현되고, 그 모든 것이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을 때 하나의 살아 있는 질서를 이룹니다.
결국 AC.349의 핵심은 ‘예배의생명은어디에서오는가?’라는 질문으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외적 형식이 예배에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으로부터 생명을 얻고, 내적인 것은 주님에게서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예배는 단순히 무엇을 주님께 드리는 행위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과 선을 다시 삶과 체어리티의 행위로 주님께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이 영상은 처음부터 매우 흥미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인간이 우주를 연구하면서 블랙홀과 빅뱅과 원자의 세계까지 파고들었지만, 정작 가장 가까이 있는 하나의 현상, 곧 ‘내가지금무엇인가를느끼고있다는사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리를 듣고, 색을 보고, 아픔을 느끼고,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그 모든 것을 ‘내가경험하고있다’고 압니다. 과학은 그 과정에서 어느 뉴런이 활성화되고 어떤 신경전달물질이 분비되는지를 점점 더 정밀하게 밝힐 수 있지만, 영상이 묻는 것은 그보다 한 걸음 더 깊은 질문입니다. ‘그런물리적과정이왜느낌을동반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먼저 한 가지는 분명히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상 제목과 구성에는 리처드 파인만이 전면에 등장하지만, 영상에서 전개하는 ‘의식의어려운문제’, 펜로즈와 해머로프의 미세소관 이론, 의식과 양자현상의 관계 등은 파인만 자신의 의식 이론이 아닙니다. 영상 자체도 미세소관을 이용한 양자의식 이론은 파인만이 세상을 떠난 뒤 등장했으므로 그가 알지 못했을 것이라고 밝힙니다. 그러므로 이 영상을 ‘파인만이말년에의식의비밀을발견했다’는 식으로 읽어서는 곤란합니다. 오히려 파인만은 이 영상에서 하나의 ‘태도’를 대표한다고 보는 편이 좋겠습니다. 곧 자연 앞에서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인정하고, 아름다운 이론이라도 현실과 맞지 않으면 버릴 줄 아는 과학자의 태도입니다.
이러한 구별을 하고 나면 오히려 영상의 진짜 가치가 더욱 잘 보입니다. 영상은 과학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과학이 엄청나게 성공했기 때문에 생겨난 새로운 질문을 보여 줍니다. 예를 들어 어머니가 어린아이에게 불러주던 자장가를 생각해 봅니다. 음파의 주파수도 측정할 수 있고, 고막의 진동도 분석할 수 있으며, 청각 신경에서 뇌까지 전달되는 전기적 신호도 추적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그 음악을 들을 때 활성화되는 뇌 영역까지 관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수십 년 뒤 같은 멜로디를 들었을 때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물이 나는 ‘그느낌자체’는 어디에 있습니까? 영상은 바로 이 틈을 집요하게 바라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바로 이 지점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은 육체만으로 완결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육체와 뇌가 중요하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살아 있는 동안 인간의 내적 생명은 자연계에서 육체를 통하여 나타나며, 감각기관과 신경계와 뇌는 그 생명이 자연계에서 활동하기 위한 정교한 기관입니다. 따라서 뇌에서 일어나는 물리적·화학적 변화를 발견했다고 해서 영적 인간을 부정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그러한변화가일어나도록인간의내적생명이어떻게자연적기관을사용하고있는가?’라는 질문이 이어집니다.
이 차이는 ‘원인’과 ‘수단’을 구별하면 조금 더 분명해집니다. 피아노 건반을 누르면 현이 진동하고 공기가 떨리며 우리의 고막도 진동합니다. 이 모든 것을 물리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피아노 내부를 아무리 분해해도 베토벤의 음악을 사랑하는 피아니스트의 마음 자체가 그 안에서 발견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피아노가 필요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피아니스트가 이 자연계에서 음악을 들려주려면 악기가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인간관에서 육체와 뇌도 이와 비슷한 위치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뇌는 하찮은 껍데기가 아니라 인간의 내적 생명이 자연계에서 나타나는 놀랍도록 정교한 기관입니다. 그러나 기관의 작동을 완전히 설명했다고 해서 그 기관을 통하여 나타나는 생명의 근원까지 설명한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영상이 말하는 이른바 ‘의식의어려운문제’가 스베덴보리와 뜻밖의 접점을 갖습니다. 빨간 사과를 볼 때 빛의 파장과 망막의 반응과 시각피질의 활동을 모두 설명했다고 합시다. 그래도 ‘왜나는빨강을빨갛게경험하는가?’라는 질문이 남습니다. 통증 신호가 척수를 따라 올라가는 과정을 모두 추적했다고 해도 ‘왜그것이나에게아픔으로느껴지는가?’라는 질문은 그대로입니다. 영상은 현대 과학이 바로 이 지점에서 아직 결정적인 답을 갖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라면 여기서 질문 자체를 조금 바꾸었을 것입니다. ‘물질이어떻게의식을만들어내는가?’라고 묻기 전에 ‘과연물질이의식을만들어내는것인가?’라고 물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큰 차이입니다. 처음부터 뇌가 의식의 생산자라고 전제하면 연구의 방향은 ‘어떤물질적과정이주관적경험을만들어내는가?’가 됩니다. 그러나 뇌가 의식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적 생명이 뇌를 통하여 자연계에 나타난다면, 뇌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신경학적 현상은 의식의 ‘생산과정’이라기보다 의식이 육체적 차원에서 표현되는 ‘상응하는과정’일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상응’을 단순한 비유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상응은 영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이 서로 닮았다는 정도가 아니라, 내적인 원인이 외적인 결과 안에서 질서 있게 표현되는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생각을 할 때 특정 뇌 영역이 활성화되고, 어떤 정서를 느낄 때 특정 신경전달물질의 변화가 나타난다는 사실은 스베덴보리의 관점과 충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대응 관계가 매우 정교하게 발견될수록 ‘속의상태가겉의기관을통하여어떻게표현되는가?’라는 문제가 더욱 흥미로워집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단계 더 들어가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의 영조차도 자기 안에 독립적으로 생명을 가진 존재는 아닙니다. 이것이 영상의 여러 가설과 스베덴보리의 관점이 결정적으로 갈라지는 곳입니다. 영상은 의식이 뇌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혹시 ‘우주의가장근본적인법칙’과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묻습니다. 그리고 양자 붕괴와 의식을 연결하는 가능성까지 소개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까지는 매우 흥미로운 질문이지만, 여기에서 멈출 수 없습니다. 생명의 궁극적인 근원은 양자장이든 미세소관이든 우주의 어떤 물리적 구조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독특하면서도 핵심적인 가르침 가운데 하나가 바로 ‘생명의유입’입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끊임없이 받아 살아갑니다. 궁극적으로 생명 자체이신 분은 오직 주님이며, 인간은 그 생명을 자신의 상태에 따라 받아들이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그 생명이 마치 자기 자신의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나는 지금 생각하고 있고, 사랑하고 있고, 선택하고 있으므로 당연히 ‘이생각도내것이고이생명도내것’이라고 느낍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렇게 느낄 수 있도록 허락된 것이 인간의 자유와 합리성의 토대라고 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영상이 반복해서 말하는 ‘내안에진짜누군가가있다’는 느낌도 새롭게 읽힙니다. 영상은 마지막 부분에서 ‘이말들을듣고있는동안여러분의그몸속안에진짜누군가가존재한다’고 표현합니다. 이 표현은 매우 인상적이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약간의 보완이 필요합니다. 마치 육체라는 상자 안에 영혼이라는 작은 사람이 들어 있는 것처럼 이해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영은 몸 안에 들어 있는 또 하나의 물체가 아닙니다. 오히려 살아 있는 인간 전체의 내적 차원이 영이고, 육체는 그것이 자연계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주어진 외적 형식이라고 이해하는 편이 가깝습니다.
따라서 죽음 역시 ‘의식이꺼지는사건’으로만 이해되지 않습니다. 육체라는 자연적 기관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는 것이지 인간의 내적 생명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영계에서 만났다고 기록한 사람들은 자신이 여전히 생각하고, 보고, 듣고, 느끼고, 기억하며 살아 있다는 사실을 경험합니다. 오히려 자연계에 있을 때보다 자신이 더욱 온전하게 살아 있다고 느낀다고 그는 거듭 말합니다. 그렇다면 지상에서 뇌와 의식이 그토록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도 다르게 보입니다. 뇌가 영을 만들어내기 때문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영이 활동하려면 뇌와 신경계라는 자연적 기관을 통하여야 하기 때문에 둘의 관계가 그렇게 긴밀하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영상 중간에 등장하는 펜로즈와 해머로프의 ‘조화객관환원’, 곧 Orch-OR 이론도 이 점에서 흥미롭습니다. 영상은 뇌세포 내부의 미세소관에서 양자적 과정이 일어나고, 일정한 순간에 양자상태가 붕괴하면서 의식의 순간이 발생할 가능성을 소개합니다. 동시에 뇌처럼 따뜻하고 습하며 복잡한 환경에서 그런 양자적 상태가 충분히 유지될 수 있느냐는 반론도 소개하고, 설령 양자현상이 실제로 존재하더라도 ‘왜그것이느낌이되는가?’라는 근본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고 인정합니다. 바로 이 마지막 인정이 중요합니다.
양자역학을 영혼의 증거로 사용하려는 유혹은 상당히 조심해야 합니다. 고전물리학으로 설명하기 어려우니 양자역학을 가져오고, 양자역학이 신비하니 거기에 영혼이나 하나님을 집어넣는 식의 논증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아직과학이설명하지못했다’와 ‘그러므로영적세계가존재한다’ 사이에는 논리적 간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과학이 언젠가 미세소관의 양자현상을 완전히 설명한다고 해서 영계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며, 반대로 Orch-OR 이론이 폐기된다고 해서 영혼이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영적 실재의 근거를 현재 과학의 미해결 영역에 세워 놓으면 과학이 발전할 때마다 신앙의 자리가 줄어드는 이상한 결과가 생깁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훨씬 근본적인 구별을 요구합니다. ‘물질적과정이얼마나정교한가?’와 ‘생명의근원은무엇인가?’는 같은 질문이 아닙니다. 과학이 전자를 연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후자는 존재론적인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연적인 것은 그 자체에서 생겨난 독립적 실재가 아니라 영적인 것의 종착점이며 효과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자연계의 가장 미세한 양자현상까지 내려간다고 해서 자동으로 영계에 도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작은 물질도 여전히 자연적 차원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영상이 의식을 ‘우주의근본적구성요소’일 가능성으로 확장하는 대목도 흥미롭지만 조심스럽게 읽어야 합니다. 의식을 단순한 뇌의 부산물로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스베덴보리와 가까워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의식을 우주 자체의 속성으로 돌려버리면 자칫 범심론적인 방향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우주는 스스로 살아 있는 신적 존재가 아닙니다. 생명은 주님에게서 나오며, 피조세계는 그 생명을 질서에 따라 받아들입니다. 그러므로 ‘우주가의식을갖는다’와 ‘모든생명이주님으로부터유입된다’는 말은 전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영상 후반의 동물 의식 이야기도 이 점에서 재미있습니다. 문어와 까마귀와 박쥐와 상어는 인간과 다른 감각세계 안에서 살아갑니다. 영상은 이를 통해 인간의 경험만이 의식의 유일한 형태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오만을 낮추는 좋은 지적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단순히 ‘의식의양’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인간에게는 자연적 감각을 넘어 영적 진리와 선을 받아들이고, 주님을 향하며,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자유와 합리성 안에서 영원한 목적을 향해 형성될 수 있는 내적 차원이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단순히 인간의 ‘의식볼륨’이 더 크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리고 저는 이 영상에서 특히 AI에 관한 대목이 오늘날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고 봅니다. 영상은 인간의 기억과 행동과 말투를 컴퓨터가 완벽하게 복제한다고 해도 그것이 곧 ‘나’의 의식이 옮겨갔다는 뜻은 아닐 수 있다고 말합니다. 또한 인간처럼 행동하는 기계와 실제로 인간처럼 경험하는 존재를 구별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구별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인간은 정보의 집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평생 쓴 글과 설교와 편지와 음성과 영상을 모두 AI에 학습시켰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 AI가 그 사람의 말투를 완벽하게 재현하고, 가족에게 그 사람이 생전에 했을 법한 말을 하며, 심지어 과거의 기억에 관한 질문에도 정확하게 대답한다고 합시다. 그래도 그것은 그 사람 자신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의 정체성은 단순한 기억 데이터의 총합보다 훨씬 깊습니다. 인간의 중심에는 그가 실제로 사랑하는 것이 있으며, 그의 의지와 이해가 있고, 궁극적으로 그의 지배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사후에도 인간의 인격을 이루는 중심입니다.
그래서 ‘마인드업로딩’을 통한 디지털 불멸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애초부터 불멸의 방향을 잘못 찾은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정보를 컴퓨터에 복사함으로써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영적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육체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 살아갑니다. 문제는 ‘어떻게나를복제하여죽지않을것인가?’가 아니라 ‘나는지금무엇을사랑하는사람으로형성되고있는가?’입니다. 사후에 계속되는 것은 컴퓨터에 저장된 내 정보가 아니라 바로 그렇게 형성된 ‘나’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이 영상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스베덴보리의 인간론에 아주 가까운 문 앞까지 옵니다. 영상은 계속해서 ‘정보만으로는부족하다’, ‘구조만으로도충분하지않을수있다’, ‘기계적처리와실제경험은다르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당신은종이에적힌글씨가가득한책이아니며, 차갑게재생되는녹음기도아니고, 단순히정보만처리하는기계회로도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에 한 문장을 더 붙일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당신을살아있게하는것은무엇인가?’
바로 여기서 과학의 질문과 영적인 질문이 갈라지면서도 서로를 향해 열립니다. 과학은 뇌에서 무엇이 일어나는지를 연구합니다. 그것은 계속 연구되어야 합니다. 뉴런도 연구하고 미세소관도 연구하고 양자현상도 연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 모든 연구를 방해하는 대신 훨씬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그모든기관을통하여생각하고사랑하고느끼는생명자체는어디에서오는가?’
그의 대답은 ‘주님으로부터’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과학이 모르는 자리에 ‘하나님’을 집어넣는 답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은 과학으로 아직 발견하지 못한 하나의 원인이 아니라 ‘생명자체’이십니다. 모든 피조물은 그분으로부터 존재하며 순간순간 존속합니다. 특히 인간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이도록 창조되었고, 그것을 마치 자기 자신의 것처럼 받아 자유롭게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내가살아있다’는 경험은 단순한 생물학적 착각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내가 독립적인 생명의 원천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이렇게 보면 영상의 마지막 장면은 상당히 아름답게 다시 읽힙니다. 밤하늘의 별을 보고, 뺨을 스치는 바람을 느끼고, 어느 순간 문득 ‘아, 내가지금살아있구나’라고 느끼는 평범한 순간을 영상은 ‘우주가숨겨둔가장깊은비밀’과 연결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그 경탄을 굳이 꺾을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더 깊게 가져갈 수 있습니다. ‘내가살아있다는것’은 정말 신비로운 일입니다. 다만 그 신비의 최종 목적지는 ‘우주가스스로의식을갖는다’는 데 있지 않고, ‘나는생명자체이신주님에게서지금이순간에도생명을받고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신앙의 문제는 의식의 수수께끼보다 한층 더 깊어집니다. 중요한 것은 단지 ‘왜내가의식을가지고있는가?’가 아닙니다. ‘그렇게주어진의식과자유와합리성을가지고나는무엇을사랑하며살아갈것인가?’입니다. 인간에게 의식이 있다는 것만으로 천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성과 자기의식이 아무리 뛰어나도 그것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만을 섬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의 영적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의식의 정교함이 아니라 그의 의지와 사랑이 어느 방향으로 형성되는가입니다.
그러므로 이 영상의 질문을 ‘스베덴보리의렌즈’를 통과시켜 마지막까지 밀고 가면 질문은 세 번 바뀝니다. 처음에는 ‘뇌는어떻게의식을만들어내는가?’입니다. 그다음에는 ‘과연뇌가의식을만들어내는것인가?’가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내가지금받아누리고있는이생명을나는무엇을위해사용하고있는가?’가 됩니다.
첫 번째는 뇌과학의 질문이고, 두 번째는 인간 존재에 관한 철학적·영적 질문이며, 세 번째는 거듭남의 질문입니다.
그래서 이 영상의 가장 큰 가치는 어떤 양자의식 이론이 옳다는 데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오히려 현대 과학이 인간의 뇌를 그토록 깊이 들여다보고도 마침내 ‘느끼고있는나’라는 문 앞에서 다시 질문하기 시작했다는 데 있습니다. 과학은 그 문 앞에서 계속 실험하고 측정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문을 지나 한 걸음 더 안으로 들어가 인간의 속 사람과 겉 사람, 영과 몸, 사랑과 지혜, 그리고 그 모든 생명이 끊임없이 유입되는 근원을 이야기합니다.
파인만이 칠판에 남겼다는 유명한 문장, ‘내가만들어낼수없는것은내가이해하지못한것이다’도 그런 의미에서 이 영상과 절묘하게 어울립니다. 다만 그것을 파인만 자신의 의식론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영상 역시 당시 파인만이 다른 물리학적 문제를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인정합니다. 그럼에도 그 문장을 오늘의 의식 문제에 하나의 비유로 가져오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인간은 뇌의 구조를 모방하고 언어를 생성하는 기계를 만들며 인간 행동의 놀라운 부분까지 재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살아있음’ 그 자체를 만들어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보면 어쩌면 그것은 당연합니다. 생명은 인간이 조립하는 물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 자신조차 자기 생명의 원천이 아닙니다. 우리는 생명을 소유한 독립적 근원이 아니라 생명을 받아들이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가 그 생명을 빌려 쓰는 것처럼 느끼게 하지 않으시고 놀랍게도 완전히 ‘나의생명’인 것처럼 느끼게 하십니다. 그래야 사랑할 수도 있고, 생각할 수도 있고, 선택할 수도 있으며, 그 선택을 통하여 실제로 하나의 인격으로 형성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왜의식이있는가?’라는 현대 과학의 거대한 질문 앞에서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영혼이있기때문이다’라고 짧게 답하고 끝내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더 놀라운 방향으로 우리를 데려갈 것입니다. ‘당신이지금생각하고사랑하고느끼며살아있다는그모든생명은어디에서오는가? 그리고그것이마치완전히당신자신의것처럼주어진까닭은무엇인가?’
그 질문 끝에서 의식의 신비는 마침내 거듭남의 문제와 만납니다. 생명이 어디서 왔는지를 아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생명을 가지고 어떤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의식은 그 자체로 인간의 최종 목적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삶으로 살아낼 수 있도록 주어진 놀라운 그릇입니다.
그렇게 보면 밤하늘을 바라보다 문득 ‘내가지금살아있구나’ 하고 느끼는 순간은 정말 경이로운 순간입니다. 그러나 그 경이로움의 중심에는 ‘의식을가진우주’가 아니라 ‘생명을주시는주님과그생명을받아살아가는인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관계 안에서, 과학이 아직 풀지 못한 ‘의식의신비’는 스베덴보리에게 단순한 지적 미스터리를 넘어 인간이 누구이며 어디에서 생명을 받고 무엇을 향해 살아가도록 창조되었는지를 묻는 영적인 질문으로 바뀝니다.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아토스산 수도 공동체를 방문했을 때, 깊은 인상을 받았던 한 러시아 수도사의 삶을 소개합니다. 자동자막에는 이름이 ‘티흔’, ‘티온’ 등으로 흔들려 나오지만, 생애의 연대와 특징을 대조해 보면 인물은 러시아 출신의 아토스 수도자 ‘티혼골렌코프’(TikhonGolenkov,1884-1968), 흔히 ‘캅살라의티혼’ 또는 ‘아토스의티혼’이라 불리는 인물로 보입니다. 그는 1884년 러시아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수많은 수도원을 순례했고, 이후 아토스산에 정착하여 수십 년 동안 매우 엄격한 금욕과 기도생활을 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훗날 아토스의 성 파이시오스에게 영적 지도를 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영상 초반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자신이 머문 수도원을 아토스에서 매우 오래되고 큰 수도원 가운데 하나로 소개합니다. 자동자막의 ‘이비로수도원’은 아마 ‘이비론수도원’(IvironMonastery)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비론은 10세기 말 조지아계 수도사들에 의해 세워졌으며, 오늘날 아토스산 20개 주요 수도원 가운데 서열상 세 번째에 해당하는 유서 깊은 수도원입니다. 다만 티혼이 평생 이비론 수도원의 대표 수도사였다고 이해하기보다는, 아토스산 여러 지역에서 수행하다가 특히 캅살라와 카룰리아 등 은수 지역에서 살았던 러시아 수도자로 보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강문호 수도사가 티혼의 삶에서 가장 먼저 강조하는 것은 그의 극단적인 금욕입니다. 밤을 새워 기도하고, 졸음을 이기기 위해 몸을 불편하게 하며, 딱딱한 곳에서 잠을 자고, 매우 적은 음식을 먹고, 추위와 더위를 견디며, 옷도 최소한으로 소유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실제 전승에서도 티혼은 매우 엄격한 금욕가로 묘사됩니다. 긴 시간 기도하고, 누더기에 가까운 옷을 입으며, 단순한 음식으로 살고, 거친 환경에서 수행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런 삶을 접하면 자연스럽게 ‘저정도로자신을절제해야진정한수도자인가?’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렌즈’는 여기에서 외적 금욕과 내적 거듭남을 반드시 구별하게 합니다. 금식과 절제, 그리고 고독은 인간의 욕망을 돌아보고 마음을 주님께 집중시키는 유익한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적게 먹는 것 자체가 사람을 거룩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딱딱한 침대에서 잔다고 자기 사랑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며, 추위를 견딘다고 proprium이 자동으로 죽는 것도 아닙니다. 외적 절제는 내적 사랑의 질서가 바뀌도록 돕는 수단일 때 비로소 영적 의미를 갖습니다.
영상에서 티혼은 ‘탐식은모든죄가들어오는현관’이라는 취지로 말하며, 먹는 것을 극도로 줄였다고 소개됩니다. 욕망을 절제해야 한다는 뜻에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육체적 욕망에 끌려갈수록 그것이 다른 욕망과 결합하여 삶 전체를 지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자연적 욕구 그 자체를 악으로 보지 않습니다. 먹고 마시고 쉬고 몸을 돌보는 것은 창조질서에 속합니다. 문제는 그것이 목적이 되어 사람을 지배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듭남은 음식 자체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음식과 쾌락을 자기 삶의 중심으로 삼으려는 무질서한 사랑을 바른 위치로 돌려놓는 일입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은 극도로 금식하면서도 ‘나는이렇게절제하는사람’이라는 자기 의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좋은 음식을 감사히 먹으면서도 탐욕에 지배되지 않고 이웃과 나누며 살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영성의 척도는 얼마만큼 먹느냐가 아니라 무엇이 그 사람의 지배적인 사랑인가에 있습니다. 금욕은 사랑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한 수단이지, 그 자체가 천국의 상태는 아닙니다.
그런데 영상이 중반으로 들어가면서 티혼의 모습 가운데 훨씬 따뜻한 부분이 나타납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티혼이 동물들을 매우 사랑했다고 전합니다. 쥐가 많은 곳에서 살면서도 동물들을 해치지 않고, 여우와 가까이 지내며, 멧돼지가 와서 새끼를 낳으면 보호하고, 사냥꾼이 오면 다른 곳으로 보내어 동물을 지켜 주었다는 일화들입니다. 실제 티혼의 전승에서도 그가 산짐승들과 친숙하게 지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렌즈’로 보면 매우 흥미롭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동물 세계 역시 인간의 애정과 상응한다고 설명합니다. 자연계의 동물들은 각기 다른 종류의 애정과 성향을 표상하며, 창조세계 전체는 영적 세계의 질서를 반영합니다. 그러므로 동물을 사랑한다는 것이 곧 높은 영성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생명을 함부로 대하지 않고, 창조된 존재를 사랑과 책임으로 돌보는 태도에는 분명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특히 티혼이 자기에게 다가오는 동물을 단순한 방해물로 여기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 대했다는 전승은 그의 금욕과는 또 다른 얼굴을 보여 줍니다. 영성이 자기 몸을 혹독하게 다루는 데만 머문 것이 아니라 주변 생명을 부드럽게 바라보는 방향으로 나타났다면, 바로 그 부분에서 우리는 금욕의 열매를 볼 수 있습니다. 참된 영성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다른 존재를 더 거칠게 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온유하게 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강문호 수도사가 영상에서 ‘하나님과합일의관계’라고 표현하는 대목과도 연결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렌즈’에서는 인간이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하나가 되는 식의 ‘합일’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인간은 영원히 피조물이고, 주님은 창조주이십니다. 그러나 사람의 의지(will)와 이해성(understanding)이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면서 주님과 ‘결합’(conjunction)될 수는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즐겨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자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지혜를 받아 그분과 결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도의 목표도 특별한 황홀경이나 신비체험 자체라기보다 주님의 선과 진리가 사람의 삶을 실제로 다스리게 되는 데 있다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 결합이 깊어지면 사람은 더 많이 사랑하고, 더 진실해지고, 더 온유해지며, 자기 공로를 덜 주장하게 됩니다. 결국 주님과의 결합은 삶의 열매로 드러나야 합니다.
영상에는 티혼의 초상화를 마른 우물에 던져 넣고 기도했더니 샘물이 솟아올라 초상화가 물 위로 떠올랐다는 기적 이야기도 나옵니다. 이런 이야기는 수도원 전승에서 성인의 거룩함을 기억하는 방식 가운데 하나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렌즈’에서는 이런 기적담을 굳이 하나하나 해부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오히려 그 이야기의 중심이 무엇인지 보면 됩니다. 수도원 공동체가 자신들이 존경하던 수도자의 삶을 기억하며, 주님께 도움을 구했고, 그 경험을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가 반복해서 보여 주듯, 기적 자체가 영성의 증거는 아닙니다. 물이 솟았는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수도자의 삶에서 어떤 선이 흘러나왔는가입니다. 어떤 사람이 놀라운 기적과 연결되어 있어도 자기 사랑과 지배욕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것이 천국적인 상태를 보증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아무 기적도 없지만 일평생 조용히 악을 피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했다면 그 삶은 주님 앞에서 훨씬 깊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인의 기적담은 사람을 숭배하게 하기보다 그 사람을 통하여 일하신 주님께 시선을 돌리게 할 때, 가장 건강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영상 후반에는 아토스 수도원의 식사 장면이 소개됩니다. 여러 수도사가 함께 앉고, 수도원장이 기도한 뒤 식사를 시작하며, 식사 중에는 말을 하지 않고 한 사람이 성경을 읽는다고 합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이를 ‘입으로는육신의양식을먹고, 귀로는영의양식을먹는다’고 표현합니다. 이 모습은 수도생활의 한 가지 아름다운 질서를 보여 줍니다. 자연적인 필요와 영적인 필요를 서로 적대시키지 않고, 한 식탁 안에서 함께 놓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렌즈’에서도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은 본래 서로 적이 아닙니다. 자연적인 것은 영적인 것이 표현되고 실현되는 바탕입니다. 육체가 음식을 먹는 동안 마음이 말씀을 듣는다는 장면은 그래서 상징적으로도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식사시간에 반드시 성경을 소리 내어 읽어야 한다는 형식이 아니라, 자연적 삶이 영적 삶의 질서 아래 놓여 있어야 한다는 원리입니다. 먹고 일하고 쉬고 대화하는 평범한 일상 자체가 주님의 선과 진리를 표현하는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영상에는 포도주를 마시는 수도사들의 모습도 자연스럽게 등장합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자신은 술을 마시지 않아 옆의 미국인에게 잔을 건네주었다는 일화를 웃으며 소개합니다. 이 장면은 오히려 수도 전통을 지나치게 엄숙하고 비현실적인 것으로만 보지 않게 해 줍니다. 수도자들도 먹고 마시고 웃고 서로를 배려하며 살아가는 인간입니다. 영성은 인간성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연적인 삶을 바른 질서 안에 두는 것입니다.
이번 영상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티혼의 극단적인 수행이지만, ‘스베덴보리의렌즈’로 오히려 더 오래 붙들고 싶은 것은 그 뒤에 나타나는 온유함입니다. 밤을 새워 얼마나 오래 기도했는가보다 동물을 어떻게 대했는가, 얼마나 적게 먹었는가보다 다른 존재를 어떻게 바라보았는가, 얼마나 많이 고행했는가보다 자기 삶에서 주님을 어떻게 드러냈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금욕은 겉사람을 다루지만 거듭남은 속 사람의 사랑을 바꿉니다.
여기에서 proprium의 문제도 다시 등장합니다. 수도생활은 세상의 재산과 명예를 버리는 삶이지만, 그것만으로 proprium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나는다른사람이하지못하는수행을한다’, ‘나는평생을수도에바쳤다’, ‘나는특별한영적경험을했다’는 형태로 proprium이 다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깊은 수도는 외적인 소유를 버리는 것보다 자신이 행한 선과 수행을 자기 공로로 소유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참된 선은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인간은 그것을 마치 자기 힘으로 행하는 것처럼 힘써 살아야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 선의 근원이 자신이 아니라 주님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티혼의 삶에서 우리가 보아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도 ‘얼마나대단한수도를했는가?’가 아니라 ‘그수행을통해자기자신은얼마나뒤로물러나고, 주님의선이얼마나드러났는가?’일 것입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아토스산을 직접 방문한 경험 자체에도 큰 감동을 표현합니다. 다른 문화와 전통 속에서 오랜 세월 수도생활을 이어 온 사람들을 직접 보고, 함께 먹고, 이야기하고, 그들의 기도와 생활을 가까이에서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다른 기독교 전통을 이렇게 직접 만나는 것은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개신교가 익숙하게 여겨 온 방식만이 기독교 영성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몸으로 발견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오래된 전통이라고 해서 자동으로 더 깊은 것은 아니며, 극단적인 수행이라고 해서 자동으로 더 거룩한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렌즈’는 언제나 같은 기준으로 돌아갑니다. ‘이것이사람안의주님사랑과이웃사랑을자라게하는가? 자기사랑과세상사랑을바른위치로돌려놓는가? 선과진리가실제삶의쓰임으로나타나는가?’ 이것이 수도원이든 교회든, 금식이든 기도든, 설교든 신학이든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는 기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티혼의 삶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혹독한 금욕의 정도만은 아닐 것입니다. 젊은 시절 수많은 수도원을 찾아다니면서도 단순히 ‘좋은수도원’을 찾기보다 자신을 제대로 지도해 줄 영적 스승을 찾았고, 이후 오랜 수도생활을 거쳐 다른 사람을 지도하는 위치에 이르렀다는 점 역시 중요합니다. 실제 자료에서도 티혼은 훗날 아토스의 성 파이시오스에게 영적 영향을 준 인물로 기억됩니다.
이것은 영적 성숙이 개인의 완성으로 끝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과 진리는 결국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한 쓰임으로 흘러가야 합니다. 혼자 깊은 동굴에서 기도하는 시간도 귀할 수 있지만, 그 기도가 사람을 더 부드럽고 지혜롭게 만들어 다른 사람을 선으로 이끄는 쓰임으로 이어질 때 그 열매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이번 영상을 ‘스베덴보리의렌즈’로 한 문장에 담는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티혼의엄격한금욕은그자체가거룩함의척도라기보다자기사랑과세상사랑에서벗어나주님께더온전히향하려는하나의수도적수단이었으며, 그수행의참된열매는극단적인고행보다온유함과사랑, 그리고다른존재를위한쓰임속에서찾아야합니다.’
그리고 이 영상에서 ‘극한의수도’를 바라보며 한마디를 더 덧붙이고 싶습니다. ‘주님께서원하시는가장깊은금식은음식만줄이는것이아니라proprium이먹고싶어하는자기명예와자기공로를줄이는것이며, 가장깊은청빈은물건을적게갖는데서끝나지않고, 자신에게있는모든선을자기것으로소유하지않는데까지나아가는것입니다.’ 그렇게 외적 금욕이 내적 거듭남으로 이어질 때, 수도는 특별한 사람들의 기이한 삶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각자의 자리에서 걸을 수 있는 ‘내적수도’의 길을 보여 주게 됩니다.
‘땅의소산’(fruit of the ground)이체어리티가없는신앙의행위를뜻한다는것은이어지는내용에서도분명합니다. 체어리티가없는신앙의행위는신앙이없는행위이며, 그자체로죽은행위입니다. 그것들은오직겉사람에게만속하기때문입니다. 이러한사람들에관하여예레미야에는다음과같이기록되어있습니다. That by the “fruit of the ground” are meant the works of faith without charity, appears also from what follows; for the works of faith devoid of charity are works of no faith, being in themselves dead, for they are solely of the external man. Of such it is written in Jeremiah:
1여호와여 내가 주와 변론할 때에는 주께서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이니이까 2주께서 그들을 심으시므로 그들이 뿌리가 박히고 장성하여 열매를 맺었거늘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들의 마음은 머니이다, 4언제까지 이 땅이 슬퍼하며 온 지방의 채소가 마르리이까 짐승과 새들도 멸절하게 되었사오니 이는 이 땅 주민이 악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그가 우리의 나중 일을 보지 못하리라 함이니이다 (렘12:1-2, 4) Whereforedoththewayofthewickedprosper? Thouhastplantedthem, theyalsohavetakenroot; theyhavegoneon, theyalsobearfruit; thouartnearintheirmouth, andfarfromtheirreins; howlongshallthelandmourn, andtheherbofeveryfieldwither? (Jer. 12:1–2, 4)
‘입에는가까우나마음에는멀다’(Near in the mouth, but far from the reins)는것은체어리티에서분리된신앙안에있는사람들을뜻하며, 그들에관하여 ‘땅이슬퍼한다’(the land mourns)고말합니다. 같은선지서에서는그러한행위를 ‘행위의열매’(fruit of works)라고부릅니다. “Near in the mouth,but far from the reins” denotes those who are of faith separated from charity, concerning whom it is said that “the land mourns.” In the same prophet such works are called the “fruit of works”:
9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10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렘17:9, 10) Theheartisdeceitful [supplantativum] aboveallthings, anditisdesperate, whocanknowit? IJehovahsearchtheheart, Itrythereins, eventogivetoeverymanaccordingtohisways, andaccordingtothefruitofhisworks. (Jer. 17:9–10)
미가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In Micah:
그 땅은 그 주민의 행위의 열매로 말미암아 황폐하리로다 (미7:13) The land shall be desolate because of them that dwell therein,for the fruit of their works. (Micah 7:13)
그러한 ‘열매’(fruit)는열매가아니며, 그러한 ‘행위’(work)는죽은것입니다. 그래서열매와뿌리가모두멸망하는것을아모스에서는다음과같이선언합니다. That such “fruit” is no fruit, or that the “work” is dead, and that both fruit and root perish, is thus declared in Amos:
내가 아모리 사람을 그들 앞에서 멸하였나니 그 키는 백향목 높이와 같고 강하기는 상수리나무 같으나 내가 그 위의 열매와 그 아래의 뿌리를 진멸하였느니라 (암2:9) I destroyed the Amorite before them,whose height was like the height of the cedars, and he was strong as the oaks; yet I destroyed his fruit from above, and his roots from beneath. (Amos 2:9)
다윗의 글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And in David:
왕이 그들의 후손을 땅에서 멸함이여 그들의 자손을 사람 중에서 끊으리로다(시21:10)Their fruit shalt thou destroy from the earth,and their seed from the sons of man. (Ps. 21:10)
그러나체어리티의행위는살아있으며, 그것들에관하여 ‘아래로뿌리를박고위로열매를맺는다’(take root downward, and bear fruit upward)고선언합니다. 이사야에서는다음과같이말합니다. But the works of charity are living, and of them it is declared that they “take root downward,and bear fruit upward;” as in Isaiah:
유다 족속 중에 피하여 남은 자는 다시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으리니(사37:31)The remnant that is escaped of the house of Judah shall again take root downward, and bear fruit upward. (Isa. 37:31)
‘위로열매를맺는다’(bear fruit upward)는것은체어리티로부터행하는것입니다. 그러한열매를같은선지서에서는 ‘아름답고영화로운열매’(fruit of excellence)라고부릅니다. To “bear fruit upward” is to act from charity. Such fruit is called the “fruit of excellence,” in the same prophet:
그날에 여호와의 싹이 아름답고 영화로울 것이요 그 땅의 소산은 이스라엘의 피난한 자를 위하여 영화롭고 아름다울 것이며(사4:2)In that day shall the shoot of Jehovah be beautiful and glorious, and the fruit of the earth excellent and comely for them that are escaped of Israel. (Isa. 4:2)
그것은또한 ‘구원의열매’(fruit of salvation)이며, 같은선지서에서는다음과같이부릅니다. It is also the “fruit of salvation,” and is so called by the same prophet:
하늘이여 위로부터 공의를 뿌리며 구름이여 의를 부을지어다 땅이여 열려서 구원을 싹트게 하고 공의도 함께 움 돋게 할지어다 나 여호와가 이 일을 창조하였느니라(사45:8)Drop down, ye heavens, from above, and let the skies pour down righteousness; let the earth open, and let them bring forth the fruit of salvation, and let righteousness spring up together; I Jehovah will create it. (Isa. 45:8)
해설
AC.348은 앞의 AC.346에서 간략하게 밝힌 ‘땅의소산’의 의미를 본격적으로 설명합니다. AC.346에서는 가인이 드린 ‘땅의소산’이 ‘체어리티가없는신앙의행위’를 뜻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48은 왜 그런 행위가 참된 열매가 될 수 없는지를 여러 말씀을 통해 보여 줍니다.
첫 문장이 이 글 전체의 핵심입니다. ‘체어리티가없는신앙의행위는신앙이없는행위이며, 그자체로죽은행위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선행을많이해야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그행위는어디에서나오는가?’입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도 행위를 할 수 있습니다. AC.346에서 이미 보았듯이 가인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땅을 경작했고, 소산을 거두었으며, 그것을 여호와께 제물로 드렸습니다. 따라서 외적으로 보면 ‘행위’도 있고 ‘예배’도 있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죽은행위’라고 합니다. 그 행위가 ‘오직겉사람에게만속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겉사람’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외적인 행위 자체가 나쁘다는 뜻은 아닙니다. 모든 체어리티는 결국 자연계에서 구체적인 행위로 나타나야 합니다. 문제는 그 외적인 행위가 속 사람의 선과 결합되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행위라면 외적인 행위도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의, 명예, 인정, 보상, 종교적 우월성 같은 목적에서 행한다면 겉으로 아무리 선해 보여도 그 행위에는 천국의 생명이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가장 먼저 렘12:1-2, 4을 인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뿌리가박히고장성하여열매를맺습니다.’ 외적으로는 아주 성공적입니다. 종교적인 삶도 열매를 맺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말이 이어집니다. ‘그들의입은주께가까우나그들의마음은머니이다.’
이것은 가인의 예배를 매우 정확하게 보여 줍니다. 입으로는 주님을 말하고, 외적으로는 제물을 드리며, 종교적인 행위도 합니다. 그러나 그 내면의 사랑은 주님과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체어리티에서분리된신앙’이라고 해석합니다. 신앙의 말은 입에 있지만 그 신앙의 생명이 되어야 할 체어리티는 마음에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땅이슬퍼한다’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땅’은 교회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될 때, 피해를 입는 것은 단순히 개인의 종교생활만이 아닙니다. 교회 자체가 황폐해집니다. 교리는 남아 있고, 예배도 남아 있으며, 종교적 활동도 활발할 수 있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사랑과 선이 사라지면 교회의 내적 생명은 메말라 갑니다.
이어지는 렘17:9-10은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갑니다. 주님께서는 단지 외적으로 나타난 행위만 보지 않으시고, ‘심장을살피며폐부를시험’하십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한 이유는 행위의 영적 성질을 결정하는 것이 외적인 모양만이 아니라 그 행위가 나온 내적 사랑과 의도임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원문의 ‘폐부’(reins)는 고대 성경의 상징적 표현입니다. 자연적인 장기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깊은 내면과 애정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심장을살피며폐부를시험한다’는 것은 주님께서 사람이 무엇을 했는지만이 아니라 왜 그렇게 했는지, 그 행위의 내적 근원이 무엇인지를 보신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각각그의행위와그의행실대로’ 갚으신다는 말씀에서 ‘행위의열매’가 중요해집니다. 행위는 그 사람 안에 있는 사랑의 열매입니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듯이, 내적인 사랑은 외적인 삶을 통해 자신을 드러냅니다. 따라서 행위와 내면을 서로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미7:13의 ‘그주민의행위의열매로말미암아황폐하리로다’ 역시 같은 원리를 보여 줍니다. 열매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열매가 선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악한 사랑도 자기에게 맞는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열매’라는 말이 나올 때 무조건 선행을 뜻한다고 정해 놓아서는 안 됩니다. 어떤 뿌리에서 나온 열매인지 문맥을 보아야 합니다.
이 점에서 암2:9의 인용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아모리 사람은 ‘백향목높이’ 같고 ‘상수리나무’처럼 강합니다. 외적으로는 거대하고 견고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위의열매’뿐 아니라 ‘아래의뿌리’까지 멸하십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열매와 뿌리를 함께 언급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열매는 행위이고, 뿌리는 그 행위를 낳는 내적 근원입니다. 뿌리가 악하면 그 열매 역시 영적으로 살아 있는 열매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AC.348은 여기서 놀라운 대조를 보여 줍니다. 지금까지는 ‘죽은열매’를 설명했지만 사37:31부터는 ‘살아있는열매’로 전환합니다.
‘아래로뿌리를박고위로열매를맺으리니’
스베덴보리는 ‘위로열매를맺는다’는 것을 아주 간결하게 ‘체어리티로부터행하는것’이라고 풀이합니다. 이 한 문장이 AC.348 전체를 압축합니다. 참된 열매는 단순히 외적으로 좋은 일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로부터 행하는 것입니다.
‘아래로뿌리를박고위로열매를맺는다’는 표현에는 영적 삶의 질서가 아름답게 담겨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먼저 뿌리가 내려야 보이는 곳에서 열매가 맺힙니다. 마찬가지로 사람 안에서 주님께서 사랑과 선을 심으시고, 그것이 내적 생명이 될 때, 그 생명이 자연적인 삶으로 내려와 말과 행동과 쓰임이라는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행위는 겉에서 억지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밖으로 흘러나옵니다.
이것은 앞의 가인과 정확히 대조됩니다. 가인에게도 ‘땅의소산’이라는 열매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온 것이므로 ‘죽은열매’였습니다. 반면 사37:31의 열매는 체어리티라는 살아 있는 뿌리에서 나옵니다. 따라서 차이는 ‘행위가있느냐없느냐’가 아니라 ‘그행위의생명이어디에서오는가’에 있습니다.
사4:2에서는 이러한 열매를 ‘아름답고영화로운’ 것으로 표현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사45:8에서는 그 열매가 ‘구원의열매’로까지 나아갑니다. 하늘에서 의가 내려오고, 땅이 열려 구원이 싹트며, 공의가 함께 자랍니다. 여기서는 위에서 내려오는 것과 아래에서 열매 맺는 것이 하나의 질서를 이룹니다. 모든 참된 선의 근원은 주님에게 있고, 인간은 그것을 받아 자신의 삶에서 열매 맺습니다.
따라서 ‘체어리티로부터행한다’는 것을 인간이 자기 힘으로 선한 마음을 만들어 선행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사45:8의 마지막 말이 그 점을 분명히 합니다. ‘나여호와가이일을창조하였느니라.’ 살아 있는 열매의 궁극적인 근원은 주님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의 속 사람 안에 선을 심으시고, 인간이 자유롭게 그 선을 받아 살아갈 때, 그것이 겉 사람을 통해 행위로 나타납니다.
이렇게 보면 AC.348에서 ‘뿌리’와 ‘열매’의 관계는 곧 ‘속사람’과 ‘겉사람’의 관계와 연결됩니다. 체어리티 없는 행위는 겉 사람에만 머물기 때문에 죽어 있습니다. 반면 살아 있는 행위는 속 사람 안에 있는 체어리티에서 시작하여 겉 사람의 실제 삶으로 나옵니다. 그러므로 참된 거듭남은 속 사람만 변화시키거나 겉 행동만 고치는 일이 아니라, 속의 선이 겉의 삶으로 흘러나와 둘이 하나가 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AC.348은 결국 우리가 선행을 바라보는 기준을 바꾸어 놓습니다. ‘무엇을얼마나많이했는가?’보다 먼저 ‘어디에서그것을행했는가?’를 묻게 합니다. 예배, 봉사, 헌금, 구제, 전도, 설교, 성경공부 같은 종교적 행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모든 것은 귀한 열매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살아 있는 열매가 되려면 체어리티라는 뿌리에서 나와야 합니다.
그러므로 AC.348의 중심은 ‘행위가중요하다’거나 ‘신앙보다행위가중요하다’는 단순한 주장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앙과체어리티와행위는하나의생명질서안에있어야한다’는 데 있습니다. 신앙의 진리는 사람을 체어리티로 이끌고, 체어리티는 실제 행위로 열매 맺습니다. 이 연결이 끊어지면 행위가 있어도 죽은 행위가 될 수 있지만, 이 질서가 살아 있으면 사람의 일상적인 작은 쓰임까지도 ‘위로열매를맺는’ 살아 있는 행위가 됩니다.
그래서 가인의 ‘땅의소산’과 사37:31의 ‘위로맺는열매’는 겉으로는 모두 ‘열매’이지만 영적으로는 정반대입니다. 하나는 체어리티 없는 신앙에서 나온 죽은 열매이고, 다른 하나는 체어리티에서 나온 살아 있는 열매입니다. 결국 열매의 생명을 결정하는 것은 그 열매의 외형이 아니라 그 뿌리입니다.
‘세월이지난후에’(end of days, ‘날들의 끝에’)가 ‘시간이흐른뒤’를뜻한다는것은누구에게나분명합니다. 처음에는, 그리고그교리안에단순함이있었을때에는, 여기서 ‘가인’(Cain)이라불리는교리가후에그렇게된것만큼받아들일수없는것은아니었던것으로보입니다. 이는그들이자기들의자손을 ‘여호와로말미암아득남하였다’(a man Jehovah, ‘여호와인 사람’)라고했다는사실에서도분명합니다. 따라서처음에는신앙이 ‘날들의끝에’, 곧시간이흐른뒤에이르렀을때만큼사랑에서멀리분리되어있지않았습니다. 참된신앙의모든교리에서흔히일어나는것처럼말입니다. That by the “end of days” is signified in process of time, is evident to all. At first, and while there was simplicity in it, the doctrine here called “Cain” does not appear to have been so unacceptable as it became afterwards, as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they called their offspring a “man Jehovah.” Thus at first faith was not so far separated from love as at the “end of days,” or in process of time; as is wont to be the case with every doctrine of true faith.
해설
AC.347은 바로 앞 AC.346의 ‘세월이지난후에’라는 표현을 설명하면서, 가인으로 표상된 교리가 처음부터 완전히 타락한 형태로 출발한 것은 아니었다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밝힙니다. 스베덴보리는 ‘처음에는, 그리고그교리안에단순함이있었을때에는’ 가인의 교리가 후대에 이르러 나타난 것만큼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는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가인의 발생과 타락을 한순간의 사건이 아니라 점진적인 과정으로 보게 합니다.
여기서 ‘단순함’(simplicity)은 단순히 지식이 부족하거나 생각이 단순했다는 뜻으로 읽기보다, 아직 교리가 자기주장을 강화하여 사랑과 맞서지 않았던 초기 상태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앞의 AC.338에서 보았듯이 가인의 시작은 신앙 자체를 버리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그자체로하나의것’으로 구별하여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 출발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신앙과 사랑 사이의 거리가 아직 크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구별’과 ‘분리’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신앙을 사랑과 구별하여 하나의 교리로 정리하는 것 자체가 곧바로 악은 아닙니다. 문제는 시간이 흐르면서 그 구별이 분리가 되고, 분리가 마침내 우열 관계로 변하는 데 있습니다. 신앙이 ‘나는사랑없이도참된신앙이다’라고 주장하기 시작하고, 더 나아가 자신을 체어리티보다 앞세우게 되면 가인의 성격이 본격적으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세월이지난후에’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AC.346에서는 이를 단순히 ‘시간이흐른뒤’라고 밝혔지만, AC.347은 그 시간 동안 무엇이 일어났는지를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사랑과 신앙 사이의 분리가 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거리가 점점 벌어졌습니다. 결국 ‘세월이지난후에’ 이르러서는 체어리티 없는 신앙의 행위인 ‘땅의소산’을 여호와께 드리는 상태, 곧 사랑과 분리된 신앙으로부터 예배하는 상태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그 초기 상태가 아직 완전히 타락하지 않았다는 증거로 드는 것이 ‘그들이자기들의자손을향해 ‘여호와로말미암아득남하였다’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표현은 앞의 창4:1, 곧 하와가 가인을 낳으며 한 말과 연결됩니다. AC.338에서 스베덴보리는 ‘내가여호와로말미암아득남하였다’라는 말씀을 태고교회 안에서 신앙이라는 첫 자손이 생겨난 것으로 설명했습니다. 즉 가인의 초기 단계에는 여전히 그 신앙이 주님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인식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가인’이라는 이름만 보고 처음부터 모든 것이 거짓이고 악이었다고 생각하면 AC.347의 중요한 뉘앙스를 놓치게 됩니다. 처음에는 참된 것에서 출발했습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신앙이 있었고, 그 신앙은 아직 사랑과 아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신앙을 사랑과 별개로 취급하는 경향이 강해졌고, 마침내 신앙 자체를 구원의 본질로 높이면서 체어리티를 밀어내게 된 것입니다.
특히 마지막 문장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참된신앙의모든교리에서흔히일어나는것’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AC.347은 태고교회의 가인이라는 특정 교리만 설명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참된 진리에서 시작한 교리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 교리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자기애와 지성적 자부심에 의해 본래의 생명에서 멀어질 수 있다는 일반적인 교회사의 원리를 보여 줍니다.
예를 들어 어떤 교리가 처음에는 주님을 더욱 사랑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도록 돕기 위해 명료하게 정리될 수 있습니다. 그 단계에서는 교리가 사랑을 섬깁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그 교리를 ‘우리가옳다는증거’로 사용하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관심이 ‘이진리를어떻게살아갈것인가?’에서 ‘누가이교리를정확하게믿는가?’로 이동합니다. 더 진행되면 교리를 정확하게 고백하는 것을 사랑과 삶보다 중요하게 여기고, 마침내 교리의 차이 때문에 서로 판단하고 정죄하기까지 합니다. 처음의 참된 교리는 그대로인 것처럼 보여도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내적 상태는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AC.347은 앞서 살펴본 ‘가인의분리는어디서시작되었는가?’라는 문제를 한층 더 세밀하게 만듭니다. 가인의 길은 처음부터 ‘체어리티를없애자’라고 선언하면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주 작은 이동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따로 바라보고, 그것을 점점 독립적인 것으로 만들며, 시간이 흐르면서 그 독립성을 강화한 것입니다. 결국 처음에는 미세했던 틈이 나중에는 신앙과 사랑의 완전한 분리로 발전합니다.
이것은 개인의 영적 삶에서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처음 말씀을 배우고, 교리를 알아갈 때에는 그 진리가 주님께 가까이 가고 삶을 고치기 위한 것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이것을안다’는 데 만족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자신이 가진 진리로 다른 사람을 재고, 판단하기 시작할 수도 있습니다. 진리 자체는 변하지 않았는데 그것을 받아들이는 목적이 달라진 것입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가인의 문제는 과거 어느 교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신앙인 안에서 끊임없이 경계해야 할 가능성이 됩니다.
그러므로 참된 교리를 보존한다는 것은 단지 처음의 정확한 문장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 교리가 처음 지향했던 목적, 곧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고,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으로 이끄는 목적도 함께 보존해야 합니다. 교리의 문장은 그대로인데 사랑이 빠져버린다면 외형은 보존되었어도 그 생명은 이미 달라진 것입니다.
결국 AC.347이 보여 주는 것은 ‘참된것에서시작했다는사실이끝까지참된상태를보장하지는않는다’는 엄중한 사실입니다. 신앙은 계속 사랑을 바라보고, 사랑을 섬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처음에는 거의 보이지 않던 작은 분리가 ‘시간이흐른뒤’ 점점 커져 마침내 신앙과 체어리티를 서로 갈라놓게 됩니다. ‘세월이지난후에’는 바로 그 점진적인 변화를 담고 있는 표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