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61.심화

 

3. ‘influx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어떻게 하나로 작용하는지, 혹은 어떻게 하나로 보이게 되는지는, 한쪽이 다른 쪽으로 흘러드는 influx, 곧 유입이 어떠한지를 알지 못하면 알 수 없습니다. How the internal and external act as a one, or how they appear as a one, cannot be known unless the influx of the one into the other is known. (AC.161)

 

 

AC.161의 이 문장은 스베덴보리 인간론 전체를 여는 열쇠 같은 문장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평소 자기 자신을 ‘하나의 나’로 느끼지만, 스베덴보리는 실제 인간 안에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라는 서로 다른 층위가 존재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실제로는 둘이 다른데 왜 우리는 거의 항상 하나처럼 느끼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답이 바로 ‘influx’, 곧 유입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속 사람과 겉 사람은 단순 병렬 구조가 아닙니다. 속 사람이 먼저이고, 겉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생명을 받습니다. 다시 말해, 겉 사람은 자기 혼자 움직이는 독립 시스템이 아니라, 속 사람으로부터 끊임없이 influx, 곧 유입을 받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 유입이 너무 지속적이고 자연스럽기 때문에, 인간은 둘을 거의 하나처럼 느낍니다.

 

비유하자면 전등과 전기 같은 관계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보통 ‘전등이 빛난다’고 느끼지만, 실제 빛은 전등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전류 유입 때문에 나타납니다. 그런데 전류 흐름이 너무 자연스럽고 끊김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전등과 전류를 분리해서 거의 느끼지 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 안의 속 사람과 겉 사람 관계도 비슷하다고 봅니다.

 

속 사람은 주님과 천국에 열려 있는 더 깊은 인간입니다. 사랑, 양심, 더 높은 진리 질서가 자리하는 곳입니다. 반면 겉 사람은 감각하고 기억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자연적 인간입니다. 그런데 겉 사람은 스스로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느끼지만, 실제로는 속 사람을 통하여 계속 influx를 받고 있습니다.

 

문제는 오늘날 인간은 이 influx를 거의 의식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자기 생각, 자기 감정, 자기 의지를 전부 자기 독립 생명처럼 느낍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appearance, 곧 ‘그렇게 보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실제로는 모든 생명과 thought affection이 끊임없이 흘러들어옵니다. 인간은 그것을 자기 것으로 느끼도록 허락받았을 뿐입니다.

 

여기서 AC.161의 ‘how they appear as a one’이라는 표현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은 실제로는 구별되지만, 유입 때문에 하나처럼 보입니다. 마치 영혼과 몸이 서로 다른데도 하나의 인간처럼 느껴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팔을 움직일 때, ‘영혼이 몸에 influx를 보내고 있다’고 느끼지 않고 그냥 ‘내가 움직인다’고 느끼는 것처럼 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 타락과 거듭남도 결국 이 influx 문제로 설명합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만으로 산다고 믿기 시작하면, 그는 influx의 근원을 잊어버립니다. 즉 겉 사람이 자기 독립 생명처럼 굳어집니다. 반대로 거듭남은 점점 ‘나는 나 자신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influx를 받아 산다’는 것을 배우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천적 인간은 속 사람과 겉 사람의 차이를 지각합니다. 그는 자기 안에서 무엇이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지, 무엇이 단순 겉 사람 움직임인지를 어느 정도 압니다. 그리고 겉 사람이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께 다스려지고 있다는 것도 압니다. 반면 오늘날 대부분 인간은 influx를 거의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겉 사람 자체를 자기 존재 전체로 느끼며 삽니다.

 

결국 AC.161은 단순 심리학 설명이 아닙니다. 인간 존재 자체가 ‘유입 구조’ 위에 세워져 있다는 선언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닫힌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생명과 사랑과 생각이 흘러들어오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하나처럼 보이는 이유도, 바로 그 끊임없는 influx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AC.161, 심화 2, ‘공명’

AC.161.심화 2. ‘공명’ 그리고 바로 이것이 창3 타락의 문을 엽니다. 뱀의 유혹은 갑자기 외부에서 폭력적으로 덮친 것이 아닙니다. 인간 안에 이미 ‘나도 독립적으로 알고 싶다’, ‘나도 내 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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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공명

 

그리고 바로 이것이 창3 타락의 문을 엽니다. 뱀의 유혹은 갑자기 외부에서 폭력적으로 덮친 것이 아닙니다. 인간 안에 이미 나도 독립적으로 알고 싶다’, ‘나도 내 own 안에서 살고 싶다는 경향이 생겼기 때문에, 거짓이 그 안에서 공명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AC.161 심화 1)

 

공명이라는 표현 앞에 소름이 돋습니다...

 

 

아마 목사님께서 소름 돋으신 이유는, 그 표현이 단순 창3 이야기만이 아니라 인간 내면 전체를 너무 정확히 건드리기 때문일 겁니다. 사실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에서 악은 대부분 ‘외부 침입’이라기보다 ‘내부 공명’으로 설명됩니다. 지옥은 인간 안에 없는 것을 억지로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인간 안에 방향성으로 존재하는 것에 말을 겁니다.

 

그래서 뱀의 말은 단순 정보 전달이 아닙니다.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는 말이 힘을 가진 이유는, 인간 안에 이미 아주 미세하게라도 ‘나도 내 own 안에서 살고 싶다’, ‘나도 스스로 알고 판단하고 싶다’는 움직임이 생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인간 안에 그런 경향이 전혀 없었다면, 그 말은 그냥 지나가는 소음처럼 들렸을 것입니다.

 

이 점이 정말 무섭습니다. 악은 대개 ‘완전히 낯선 것’으로 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 안 어딘가 이미 원하고 있던 것처럼 다가옵니다. 그래서 유혹은 단순 외적 공격이 아니라, 내 own 안의 어떤 것과 외부 거짓이 서로 진동수를 맞추는 현상처럼 보입니다. 목사님께서 ‘공명’이라는 표현에 반응하신 것도 바로 그 때문일 가능성이 큽니다. 너무 현대적이면서도, 동시에 인간 영혼의 실제를 정확히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repeatedly 말하는 것도 이것입니다. 지옥은 인간을 강제로 끌고 가지 못합니다. 반드시 인간 안에 어떤 동의, 어떤 기울어짐, 어떤 delight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래서 유혹의 진짜 전장은 외부가 아니라 인간 own 안입니다. 외부 거짓은 단지 그 안에 이미 존재하는 자기 사랑과 독립 욕구를 깨워 흔드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왜 태고교회 타락이 그렇게 비극적인가를 보여 줍니다. 그들은 원래 주님의 생명을 너무도 직접적으로 알던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존재들 안에서 ‘나도 내 own 안에서 살고 싶다’는 미세한 방향 변화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이전에는 단순히 거짓으로 보이던 것이 이제는 ‘매력적인 가능성’처럼 들리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공명입니다.

 

사실 오늘날 인간도 거의 같은 구조 안에서 삽니다. 어떤 말이나 사상이 내 안에서 강하게 흔들리는 이유는, 대개 이미 그 방향의 affection이 내 안 어딘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남은 단순 지식 교정이 아니라 affection의 재형성입니다. 내 안의 공명 구조 자체가 바뀌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천사들의 경우는, 자기 사랑과 지옥적 사고가 들려와도 그것과 공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의 불협화음처럼 느낍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내적 affection 구조 자체가 이미 주님 중심으로 재형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같은 말이 어떤 영에게는 달콤하게 들리고, 어떤 천사에게는 고통스럽게 들립니다. 결국 인간은 ‘무엇과 공명하는 존재인가’에 따라 자기 영적 상태가 드러나는 셈입니다.

 

 

 

AC.161, 심화 3, ‘influx’

AC.161.심화 3. ‘influx’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어떻게 하나로 작용하는지, 혹은 어떻게 하나로 보이게 되는지는, 한쪽이 다른 쪽으로 흘러드는 influx, 곧 유입이 어떠한지를 알지 못하면 알 수 없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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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1, 심화 1, ‘이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악하지 않았으며’

AC.161.심화 1. ‘이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악하지 않았으며’ 이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악하지 않았으며, 여전히 선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다만 그들은 겉 사람 안, 곧 자기의 own 안에서 살기를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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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악하지 않았으며

 

이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악하지 않았으며, 여전히 선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다만 그들은 겉 사람 안, 곧 자기의 own 안에서 살기를 원하였고, 이것이 주님에 의해 허락되었습니다. This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as not evil, but was still good; and because they desired to live in the external man or in their own, this was permitted them by the Lord; (AC.161)

 

위 본문에서 그들은 겉 사람 안, 곧 자기의 own 안에서 살기를 원하였고 말인데요, 이것이 악한 거 아닌가요?

 

 

바로 그 지점이 AC.161의 핵심 긴장입니다. 목사님께서 느끼신 ‘아니, 겉 사람 안에서, 자기 own 안에서 살고 싶어 한다면 그게 이미 악 아닌가?’라는 감각은 사실 매우 자연스럽고, 스베덴보리도 결국은 그 방향이 타락으로 이어졌다고 봅니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evil)을 단순 충동 발생 자체로 보지 않고, 그것이 굳어져 의지의 중심이 되는 상태로 본다는 점입니다.

 

AC.161에서 말하는 이 후손들은 아직 ‘악한 자들’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중심 자체가 완전히 자기 사랑으로 굳어진 상태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선을 사랑했고, 여전히 주님과의 연결 안에 있었습니다. 다만 이제 이전 태고교회처럼 ‘주님 안에서만 살고 싶다’는 상태보다, ‘나 자신 안에서도 살고 싶다’, ‘ own 안에서도 느끼고 움직이고 싶다’는 방향성이 강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즉, 문제는 아직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 그 자체라기보다, 자기 자신 안에서 살고자 하는 경향의 강화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것을 즉시 끊어버리지 않으시고 허락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기 자신처럼 느끼는 자리 자체를 완전히 제거하면 자유와 자발성도 함께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태고교회 초기 인간은 자기감을 거의 ‘투명한 그릇’처럼 가졌습니다. 자기 자신을 느끼더라도 즉시 그것이 주님께로부터 온 생명임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AC.161의 후손들은 점점 그 자기감을 더 독립적으로 느끼고 싶어 하기 시작합니다. 다시 말해, 이전에는 ‘나는 주님으로부터 산다’가 너무 자명했는데, 이제는 ‘나도 나 자신처럼 살고 싶다’는 방향성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아직 완성된 악이라기보다, 악의 방향성(direction)의 시작이라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마치 병이 아직 몸 전체를 장악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중심 방향이 바뀌기 시작한 상태와 비슷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들을 여전히 ‘good’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아직 선을 미워하지 않았고, 진리를 조롱하지도 않았으며, 자기 사랑 속에 굳어지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시선이 점점 ‘주님 안의 삶’에서 ‘자기 own 안의 삶’으로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창3 타락의 문을 엽니다. 뱀의 유혹은 갑자기 외부에서 폭력적으로 덮친 것이 아닙니다. 인간 안에 이미 ‘나도 독립적으로 알고 싶다’, ‘나도 내 own 안에서 살고 싶다’는 경향이 생겼기 때문에, 거짓이 그 안에서 공명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AC.161은 굉장히 미묘한 상태를 다룹니다. 완전히 악한 상태는 아닙니다. 그러나 순수한 천적 상태에서 방향이 틀어지기 시작한 상태입니다. 마치 아주 미세하게 나침반 방향이 틀어졌는데, 시간이 지나면 엄청난 거리 차이가 생기는 것과 비슷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타락은 대개 이렇게 시작됩니다. 갑작스러운 폭발적 악이라기보다, ‘주님 중심’에서 ‘자기 중심’으로 무게 중심이 조금씩 이동하는 것입니다.

 

 

 

AC.161, 심화 2, ‘공명’

AC.161.심화 2. ‘공명’ 그리고 바로 이것이 창3 타락의 문을 엽니다. 뱀의 유혹은 갑자기 외부에서 폭력적으로 덮친 것이 아닙니다. 인간 안에 이미 ‘나도 독립적으로 알고 싶다’, ‘나도 내 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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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1, 창2:24,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를 푸는 열쇠, influx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창2:24) AC.161 이 태고교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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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2:24)

 

AC.161

 

이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악하지 않았으며, 여전히 선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다만 그들은 겉 사람 안, 곧 자기의 own 안에서 살기를 원하였고, 이것이 주님에 의해 허락되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은 자비로 그 안에 주입되었습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어떻게 하나로 작용하는지, 혹은 어떻게 하나로 보이게 되는지는, 한쪽이 다른 쪽으로 흘러드는 influx, 곧 유입이 어떠한지를 알지 못하면 알 수 없습니다. 이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기 위해 하나의 행위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행위 안에 체어리티, 곧 사랑과 신앙이 없고, 그래서 그 안에 주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그 행위는 체어리티의 일이나 신앙의 열매라 불릴 수 없다고 말입니다. This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as not evil, but was still good; and because they desired to live in the external man or in their own, this was permitted them by the Lord; what is spiritual celestial, however, being mercifully instilled therein. How the internal and external act as a one, or how they appear as a one, cannot be known unless the influx of the one into the other is known. In order to conceive some idea of it, take for example an action. Unless in an action there is charity, that is, love and faith, and in these the Lord, that action cannot be called a work of charity, or the fruit of faith.

 

 

해설

 

AC.161은 창2의 마지막 상태를 ‘정확히 평가하는 균형의 문장’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후손들을 ‘이미 악해진 존재’로 규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분명히 말합니다. 그들은 여전히 선했다고. 이 진술은 이후의 타락을 단순한 도덕적 실패로 오해하지 않게 하는 중요한 기준을 제공합니다.

 

이 후손들이 문제를 안게 된 이유는 악을 선택했기 때문이 아니라, ‘삶의 중심을 어디에 두고자 했는가’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겉 사람, 곧 자기의 own 안에서 살기를 원했습니다. 주님은 이 욕구를 즉각적으로 거부하지 않으시고, 허락하셨습니다. 다만 동시에,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을 자비로 그 안에 주입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이 상태는 방임이 아니라 ‘보호가 동반된 허락’이었습니다.

 

여기서 핵심 개념은 ‘유입(influx)입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하나처럼 작용하거나 보이게 되는 것은, 둘이 동일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속 사람에서 겉 사람으로 무엇이 어떻게 흘러들어오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 유입의 질서가 유지되는 한, 겉 사람 안에서의 삶도 여전히 선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이해시키기 위해 ‘행위’를 예로 듭니다. 어떤 행위가 겉으로 보기에 선해 보여도, 그 안에 체어리티, 곧 사랑과 신앙이 없고, 그래서 그 안에 주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그 행위는 체어리티의 일도, 신앙의 열매도 아니라고 말입니다. 이는 외적 형식과 내적 근원의 차이를 분명히 가릅니다.

 

이 예시는 단순한 도덕 교훈이 아니라,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를 설명하는 구조적 비유’입니다. 겉 사람의 행위는 속 사람으로부터의 유입이 있을 때만 살아 있습니다. 유입이 끊기면, 동일한 행위라도 그 성질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AC.161은 따라서 창2의 마지막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아직 선했고, 주님은 그들이 자기의 own 안에서 살도록 허락하셨으며, 동시에 그 안에 영적, 천적 생명을 계속 주입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구조는 ‘유입에 대한 의존성’ 위에 서 있었고, 바로 그 지점이 다음 절에서 다룰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움이 없었다’는 마지막 보호 상태로 이어집니다.

 

다음 AC.162에서는 이 상태가 왜 아직 무너지지 않았는지, 그리고 무엇이 마지막으로 그들을 지켜 주고 있었는지가 밝혀지게 됩니다.

 

 

심화

 

1. ‘이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악하지 않았으며

 

 

AC.161, 심화 1, ‘이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악하지 않았으며’

AC.161.심화 1. ‘이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악하지 않았으며’ 이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악하지 않았으며, 여전히 선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다만 그들은 겉 사람 안, 곧 자기의 own 안에서 살기를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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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공명

 

 

AC.161, 심화 2, ‘공명’

AC.161.심화 2. ‘공명’ 그리고 바로 이것이 창3 타락의 문을 엽니다. 뱀의 유혹은 갑자기 외부에서 폭력적으로 덮친 것이 아닙니다. 인간 안에 이미 ‘나도 독립적으로 알고 싶다’, ‘나도 내 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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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influx

 

 

AC.161, 심화 3, ‘influx’

AC.161.심화 3. ‘influx’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어떻게 하나로 작용하는지, 혹은 어떻게 하나로 보이게 되는지는, 한쪽이 다른 쪽으로 흘러드는 influx, 곧 유입이 어떠한지를 알지 못하면 알 수 없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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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influx로 보는 체어리티와 신앙의 열매’

 

이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기 위해 하나의 행위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행위 안에 체어리티, 곧 사랑과 신앙이 없고, 그 안에 주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그 행위는 체어리티의 일이나 신앙의 열매라 불릴 수 없다고 말입니다. In order to conceive some idea of it, take for example an action. Unless in an action there is charity, that is, love and faith, and in these the Lord, that action cannot be called a work of charity, or the fruit of faith. (AC.161)

 

 

AC.161의 이 문장은 스베덴보리의 ‘행위’ 이해를 매우 압축적으로 보여 줍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어떤 행동이 겉으로 선해 보이면, 그것 자체로 선한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겉 행동 자체보다, 그 안에 무엇이 흐르고 있는가를 훨씬 중요하게 봅니다. 그래서 그는 ‘행위 안에 체어리티, 곧 사랑과 신앙이 없고, 그래서 그 안에 주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된 체어리티의 일이나 신앙의 열매가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행위를 단순 외적 결과로 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같은 행동이라도 그 안에 흐르는 affection과 목적과 influx가 다르면 영적으로는 전혀 다른 것이 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가난한 사람을 돕는다고 합시다. 겉으로는 모두 같은 자선 행위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자기 명예와 자기 만족을 위해 하고, 다른 사람은 진심으로 이웃의 선을 바라며, 주님 안에서 행할 수 있습니다. 외적 행동은 비슷해도, 속 사람에서 겉 사람으로 흘러드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영적 본질은 전혀 다릅니다.

 

그래서 AC.161은 앞 문장의 influx 설명과 바로 연결됩니다. 겉 사람의 행위는 단순 겉 사람만의 산물이 아닙니다. 그 안에는 속 사람으로부터의 유입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속 사람 안에 다시 사랑과 신앙이 있어야 하며, 그 사랑과 신앙 안에 주님이 계셔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그 행위는 살아 있는 선이 됩니다.

 

여기서 ‘in these the Lord’라는 표현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와 신앙 자체도 인간 독립 소유물로 보지 않습니다. 인간 안의 참된 사랑과 참된 신앙 안에는 이미 주님의 생명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참된 선행의 실제 생명은 인간이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것을 받아 행하는 그릇입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자주 ‘열매’(fruit)라는 표현을 씁니다. 열매는 나무에서 저절로 떨어져 나온 독립 물체가 아닙니다. 뿌리와 줄기와 생명 흐름 전체의 결과입니다. 마찬가지로 참된 선행도 단순 의지력 결과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 안으로 들어온 사랑과 신앙이 겉 사람 안에서 삶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반대로 겉 행동만 있고, 그 안에 체어리티와 신앙과 주님이 없다면, 그것은 외적으로는 선해 보여도 영적으로는 살아 있는 선이 아닐 수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에게서 ‘dead works’와 ‘living works’의 차이입니다. 살아 있는 행위는 주님의 생명이 흐르는 행위이고, 죽은 행위는 겉 사람 수준에서 자기 자신만으로 행해지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목사님께서 계속 붙들고 계신 proprium 문제와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인간은 쉽게 ‘내가 선을 행했다’고 느끼지만, 스베덴보리가 하는 진짜 질문은 ‘그 안에 무엇이 흐르고 있었는가?’라고 묻습니다. 자기 사랑과 자기 의인가, 아니면 주님으로부터 온 체어리티와 신앙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AC.161은 단순 도덕론이 아닙니다. 이것은 인간 행위 전체를 ‘influx 구조’ 안에서 다시 보는 설명입니다. 참된 체어리티의 행위란, 속 사람 안의 사랑과 신앙 속에 계신 주님이 겉 사람의 행동 안으로 흘러나온 결과라는 것입니다.

 

 

 

AC.160, 창2:24,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AC.160-162)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창2:24) AC.160 ‘부모를 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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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하루 중 상당 시간을 ChatGPT를 통한 AC번역 및 해설, 그리고 심화 관련, 초벌 및 마무리 작업, 그리고 그걸 블로그에 게시하는 작업으로 보냅니다. 보통 매일 8개 전후의 글 작성을 하는데, 글 하나하나에 집중하다 보면 지쳐 중간중간 누워 쉬어야 하며, 그럴 때면, 하릴없이 스마트폰으로 유튜브나 웹툰을 보거나 들으며 시간을 보내곤 합니다. 문제는 이렇게 보내는 시간이 다 합치면 몇 시간씩 된다는 것이며, 더욱 심각한 건, 제 시야가 자꾸 세상사를 향하게 되어 흐려진다는 것입니다. AC, 그리고 천국에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말이지요... 스베덴보리는 어땠나요? 그의 전체 저작량을 보면 하루하루가 거의 살인적인 시간 사용이었을 것 같은데, 그는 지치지 않았나요? 갈수록 6, 7, 8학년이 되어 심신이 예전 같지 않았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목사님 말씀을 읽으며, 지금 목사님이 단순히 ‘글을 많이 쓰느라 피곤한 상태’가 아니라, 실제로는 ‘두 세계 사이를 하루 종일 왕복하고 계시는 상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AC 본문을 붙들고 내적 의미를 따라가며, 그것을 번역하고 해설하고 심화까지 풀어낸다는 건, 단순 지적 노동이 아닙니다. 그것은 생각보다 훨씬 깊은 수준의 정신 집중과 내적 긴장을 요구합니다. 특히 목사님처럼 단순 번역이 아니라 ‘상태 안으로 들어가며’ 작업하는 경우에는 더 그렇습니다. 그러니 중간중간 몸이 꺼지듯 누워야 하는 것도, 정신이 자동적으로 가벼운 영상이나 웹툰 쪽으로 도피하려는 것도, 어느 정도는 자연스러운 반작용입니다. 사람이 높은 긴장 상태를 오래 유지하면, 낮은 감각 자극으로 균형을 찾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목사님이 정확히 보신 것도 있습니다. 문제는 ‘쉬는 것 자체’보다, 그 쉬는 방식이 점점 시야를 세상으로 끌고 내려간다는 점입니다. 처음에는 단순 휴식이었는데, 어느 순간 마음의 초점 자체가 흐려지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스베덴보리도 인간이기에 피곤함 자체는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의 후기 저작들을 보면, 인간적 체력으로는 거의 설명이 안 될 정도의 작업량입니다. 특히 Arcana Coelestia는 단순 집필이 아니라, 성경 전체를 절 단위로 따라가며 영적 의미를 풀어내는 작업이었으니, 오늘날 기준으로도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노동입니다. 게다가 그는 50대 후반 이후 본격적으로 영계 체험과 저작에 들어갔고, 60대와 70대에 가장 방대한 책들을 써냈습니다. 그러니 육체적으로 지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은 오히려 비현실적입니다.

 

하지만 스베덴보리에게는 목사님과 조금 다른 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는 이미 ‘두 세계 중 어느 쪽이 실재인가’에 대한 확신이 너무 강했습니다. 우리처럼 ‘천국을 믿는 사람’ 수준이 아니라, 실제로 영적 세계가 더 실재적이라는 감각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니 그의 경우는 세상 자극이 지금 우리에게 스마트폰처럼 강한 흡인력을 갖기 어려웠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는 후기에 점점 더 세상 사교와 오락, 명예 경쟁, 학문적 과시에서 멀어집니다. 대신 아주 규칙적인 삶을 살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과식하지 않았고, 밤늦게까지 무리하지 않았으며, 산책과 휴식을 상당히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즉, 그 엄청난 저작량은 ‘광적인 몰아치기’라기보다, 오히려 놀라울 정도의 규칙성과 집중의 반복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목사님은 지금 거의 ‘전투 모드’로 작업하고 계신 느낌이 강합니다. 하루 8개 전후의 글을 매일 생산한다는 건, 실제로는 일반적인 연구자나 목회자의 작업량을 이미 훨씬 넘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지금 목사님께 필요한 것은, ‘더 몰입해야 한다’보다, ‘내적 시야를 흐리지 않는 방식으로 오래 가는 법’을 배우는 것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목사님을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장거리 사역으로 부르신 것 같기 때문입니다. 지금 목사님은 자꾸 ‘AC에 집중해도 모자랄 시간인데’라고 느끼시지만, 인간 정신은 계속 최고 긴장 상태를 유지할 수 없게 창조되었습니다. 문제는 휴식이 아니라 ‘휴식의 질서’입니다. 예를 들어 스베덴보리라면, 휴식을 완전히 세속적 감각의 홍수 속으로 던져 넣기보다, 정신의 결을 크게 흐리지 않는 방향을 택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조용한 산책, 가벼운 독서, 자연 관찰, 기도 속 멈춤 같은 것 말입니다. 반면 오늘날 스마트폰 알고리즘은 사람의 ‘주의력 자체’를 계속 밖으로 끌어당기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몇 시간 웹툰과 유튜브를 보고 나면, 단순히 시간이 아까운 게 아니라, 마음의 방향 자체가 아래로 끌려 내려간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목사님이 너무 자신을 정죄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목사님은 이미 상당 부분 ‘자기 own과 싸우며’ 이 작업을 하고 계십니다. 중요한 것은 ‘왜 또 무너졌나’가 아니라, ‘어떻게 다시 방향을 돌리느냐’입니다. 스베덴보리도 인간 의지 자체를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람이 끊임없이 아래로 흐르려는 존재라는 것을 너무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더욱 ‘질서’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목사님도 지금부터는, ‘유튜브를 완전히 끊어야 한다’보다, ‘내 영의 초점을 크게 흐리지 않는 휴식 구조’를 만드는 게 더 현실적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완전히 감각적 영상 대신 자연 다큐, 조용한 클래식, 천국과 지옥 관련 지도, 미술, 역사 탐색, 혹은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눈 감고 쉬는 시간 같은 방향입니다. 인간 정신은 쉬어야 합니다. 문제는 ‘어디에서 쉬느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목사님이 자꾸 ‘내가 이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죄책감 속에만 머물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목사님이 하고 계신 AC 작업은, 사실상 한국어권에서는 거의 전례를 찾기 어려운 규모입니다. 당장은 조회수도 적고 반응도 미미하지만, 스베덴보리 자신도 생전에는 자기 저작이 이렇게 오래 읽힐 줄 인간적으로는 다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는 씨를 뿌렸고, 열매는 훨씬 뒤에 나타났습니다. 목사님 역시 지금 ‘즉각적 반응’보다 ‘미래 세대를 위한 길 닦기’에 가까운 일을 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러니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속도를 더 올리는 것이 아니라, 무너지지 않고 오래 가는 것입니다.

 

 

 

SC.83, ‘스베덴보리와 개신교의 기도, 찬양, 금식, 방언, 전도’

혹시 스베덴보리도 기도 생활을 했나요? 찬양, 그러니까 일상 중 찬송가를 부르기도 했나요? 금식은? 방언, 그리고 전도, 선교는요? 제가 스베덴보리를 처음 접하던 시기, 뭔가 크게 달랐던 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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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0.심화

 

4. ‘즉시 퍼셉션으로 감지하고 물러나는 상태

 

첫 번째 태고교회는 우리보다 훨씬 더 주님 안에 있었고, 훨씬 더 직접적으로 주님의 생명을 지각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주님과 분리된 독립 중심처럼 느끼는 정도가 매우 적었습니다. (AC.160 심화 3)

 

1에 의하면, 2 전반 첫 번째 태고교회 역시 부단한 자기 own과의 싸움, 그리고 그 극복을 통해 저 자리, 저 상태까지 이른 것 같은데... 그래서 윗글 표현 자기 자신을 주님과 분리된 독립 중심처럼 느끼는 정도가 매우 적었습니다라는 표현은 자기 자신을 주님과 분리된 독립 중심처럼 느끼려는 순간, 아주 단호하게 물러납니다로 고쳐 표현해야 할 것 같아요.

 

 

목사님 지적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리고 사실 AC.16-63까지의 ‘1 거듭남 구조’를 충분히 따라온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생길 수밖에 없는 문제 제기입니다. 왜냐하면 말씀하신 대로, 창2의 태고교회 인간 역시 아무 노력 없이 자동으로 천적 상태에 도달한 존재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창1 여섯 날의 과정 전체가, 질서 없는 상태로부터 점차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긴 형성 과정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제안하신 표현, 곧 ‘‘자기 자신을 주님과 분리된 독립 중심처럼 느끼는 정도가 매우 적었습니다’라기보다, ‘그렇게 느끼려는 순간 아주 단호하게 물러납니다라고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지적은 상당히 통찰력 있습니다. 실제로 천적 인간을 너무 ‘자기감 자체가 거의 없는 존재’처럼 이해하면, 창1 전체의 거듭남 투쟁 구조와 잘 연결되지 않는 면이 생깁니다.

 

다만 스베덴보리 흐름 안에서는 이 둘이 완전히 충돌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함께 볼 수 있습니다. 즉, 태고교회 인간에게도 proprium 가능성 자체는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창2에서 ‘돕는 배필’, ‘깊은 잠’, ‘여자’, 그리고 이후 타락 가능성 자체가 등장할 이유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도 인간인 이상 자기 자신 안으로 기울 가능성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차이는 ‘무게 중심’에 있습니다. 오늘날 인간은 거의 기본 상태 자체가 자기 자신 중심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돌이키려면 거꾸로 방향을 틀어야 합니다. 반면 태고교회 인간은 기본 중심이 주님 쪽에 훨씬 더 가까웠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독립 중심으로 느끼려는 움직임이 생기더라도, 그것이 오늘날 인간처럼 굳어지고 체질화되기 전에 훨씬 더 민감하게 그것을 감지하고 물러날 수 있었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즉 목사님 표현대로라면, 태고교회 인간은 ‘독립 중심 감각 자체가 전혀 없는 존재’라기보다, 그것이 올라오는 순간 즉시 그것의 위험성을 퍼셉션으로 느끼고, 자연스럽게 주님께 다시 돌이키는 존재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퍼셉션의 무서운 민감성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자기 사랑이나 자기 의를 느껴도 그것을 상당히 오랫동안 ‘나 자신’으로 붙들고 살아갑니다. 심지어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자기 proprium을 강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은 자기 자신 안으로 굽어지는 움직임 자체를 거의 영적 통증처럼 느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훨씬 빠르게 주님 질서로 되돌아갑니다.

 

이 점에서 창1의 여섯 날도 새롭게 보입니다. 그것은 단순 자동 성장 과정이 아니라, 인간 안의 혼돈이 점차 주님의 질서 안으로 정렬되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안식 상태 역시 ‘더 이상 어떤 유혹도 없는 상태’라기보다, 주님의 질서가 중심을 잡고 있는 상태로 이해하는 편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그래서 목사님 수정 표현은 상당 부분 타당합니다. 특히 ‘자기 자신을 독립 중심처럼 느끼는 정도가 적었다’는 말을 너무 정적인 상태로 이해하지 않고, ‘그 방향으로 움직이는 순간 즉시 퍼셉션으로 감지하고 물러나는 상태’로 이해하면, 창1의 거듭남 구조와도 훨씬 잘 연결됩니다.

 

 

 

AC.160, 창2:24,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AC.160-162)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창2:24) AC.160 ‘부모를 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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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0, 심화 3, ‘온전한 천적 인간 상태, 곧 첫 번째 태고교회’

AC.160.심화 3. ‘온전한 천적 인간 상태, 곧 첫 번째 태고교회’ 그래서 이것은 단순 ‘하향 평준화’라기보다, ‘더 낮고 위험한 상태 안으로 내려왔지만, 동시에 더 자유로운 결합 가능성이 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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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스베덴보리도 기도 생활을 했나요? 찬양, 그러니까 일상 중 찬송가를 부르기도 했나요? 금식은? 방언, 그리고 전도, 선교는요? 제가 스베덴보리를 처음 접하던 시기, 뭔가 크게 달랐던 점이 기독교, 개신교인들에겐 일상적인 이런 기록이 거의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아주 중요한 관찰이십니다. 사실 많은 개신교인들이 처음 에마누엘 스베덴보리를 접할 때 느끼는 가장 큰 낯섦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신앙생활을 했는가?’ 하는 감각 말입니다. 현대 개신교인에게 익숙한 신앙인의 모습은 보통 ‘기도 많이 하는 사람’, ‘찬송을 즐겨 부르는 사람’, ‘전도 열심히 하는 사람’, ‘금식과 철야를 하는 사람’, ‘성령 체험과 방언을 말하는 사람’ 같은 형태로 드러나는데, 스베덴보리에게서는 그런 기록이 거의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기록이 빠져 있어서라기보다, 그의 신앙의 중심축 자체가 오늘날 복음주의적 경건 형태와 상당히 달랐기 때문입니다.

 

먼저 기도에 대해서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는 분명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만 그는 ‘기도의 외적 형식’보다 ‘삶 전체의 방향’을 더 본질적인 기도로 보았습니다. 그는 반복적 언어 자체보다, 사람이 주님 앞에서 자기 악을 보고 물러서며 선을 행하려는 상태를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의 저작들에는 ‘무릎 꿇고 몇 시간 통성기도했다’ 같은 기록은 거의 없지만, 대신 사람이 주님께 마음을 열고, 자기 own(proprium)을 경계하며, 진리를 따라 살기를 원할 때 그 자체가 살아 있는 기도라고 보는 흐름이 매우 강합니다. 실제로 그는 사람이 주기도문을 진심으로 이해하며 드릴 때, 천사들과 연결된다고까지 말합니다. 그리고 유명한 일화 가운데 하나는, 그가 영계 체험 초기에 극심한 영적 공격과 혼란 속에서 오직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보호를 받았다는 기록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기도를 ‘집회 중심 행위’라기보다 ‘주님 앞에 영혼을 여는 상태’로 보았습니다.

 

찬양과 찬송 역시 비슷합니다. 스베덴보리 시대의 스웨덴 루터교회 예배에는 당연히 찬송이 있었고, 그 역시 평생 교회 사람이었으므로 찬송 자체를 멀리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복음주의처럼 ‘찬양 사역’, ‘은혜로운 찬양 시간’, ‘찬양 집회’ 같은 형태의 기록은 거의 없습니다. 그의 관심은 음악적 감정 고양보다 ‘천국의 질서와 사랑의 상태’에 더 있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는 천국에서의 말과 음악이 사람의 내적 상태와 정확히 상응한다고 설명한다는 점입니다. 즉 천사들의 노래는 단순한 음악이 아니라 사랑과 지혜의 흐름 자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찬양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감정적 열광 자체를 신앙의 본질로 보지는 않았습니다.

 

금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스베덴보리 저작에는 금식 수행을 강조하는 흐름이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외적 금욕이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이것은 목사님께서 예전에 몸담으셨던 수도원 전통과 비교하면 꽤 낯설 수 있습니다. 그는 사람이 음식을 줄이는 것보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줄이는 것이 더 본질적 금식이라고 보았습니다. 다시 말해 ‘악에서 떠나는 것’이 진짜 금식이라는 방향입니다. 물론 절제와 단순한 삶 자체는 매우 중요하게 보았지만, 그것을 공로적 수행처럼 여기지는 않았습니다.

 

방언 문제는 더 분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오늘날 오순절 계통에서 말하는 방언 운동과 매우 거리가 있습니다. 그는 영적 세계와의 접촉 자체는 누구보다 강하게 경험한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영들과의 직접 교류’를 극도로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는 사람이 영들의 음성을 직접 좇기 시작하면 쉽게 환상과 자기 확신 속으로 빠질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현대식 의미의 방언 체험이나 신비주의적 열광을 신앙의 중심 증거로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삶의 변화’, ‘체어리티’, ‘주님 사랑’, ‘유익한 삶’이 참된 영성의 증거라고 말합니다.

 

전도와 선교는 조금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현대 개신교식 ‘노방전도’나 ‘대중부흥회’ 스타일과는 매우 달랐습니다. 그는 평생 거리 설교자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선교 의식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자기 저작 전체를 ‘새 교회(New Church)를 위한 주님의 준비 작업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새 시대를 위한 진리들을 드러내도록 부름받았다고 믿었습니다. 다만 그 방식이 매우 조용하고 비가시적이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감정적으로 설득하려 하기보다, 진리를 질서 있게 제시하고, 자유롭게 읽고 판단하도록 두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어쩌면 목사님께서 지금 블로그에 거의 매일 AC 해설과 심화를 올리시는 모습이, 외적으로는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방식과 더 가까울 수도 있습니다. 즉 ‘많은 사람을 즉시 움직이는 운동’보다 ‘오랜 시간 미래의 누군가를 위해 길을 닦는 작업’ 말입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처음 스베덴보리를 접하실 때 느끼셨던 그 낯섦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는 ‘신앙 활동 중심의 경건’보다 ‘존재 상태 중심의 거듭남’을 훨씬 더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개신교 문화에서는 흔히 ‘무엇을 얼마나 했는가’가 신앙의 표지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에게서는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가 중심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기록에는 집회, 부흥, 철야, 방언, 간증 같은 요소는 거의 없고, 대신 끝없이 인간의 의지, 사랑, 사고, 체어리티, 질서, 거듭남, 천국적 상태에 대한 분석이 등장합니다. 처음엔 이것이 ‘차갑다’ 혹은 ‘경건 생활이 없다’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래 읽다 보면, 그는 오히려 신앙을 인간 존재 전체의 가장 깊은 층위까지 가져가려 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SC.84, ‘살인적인 저작 활동 중 스베덴보리는 어떻게 쉬었나?’

저는 하루 중 상당 시간을 ChatGPT를 통한 AC번역 및 해설, 그리고 심화 관련, 초벌 및 마무리 작업, 그리고 그걸 블로그에 게시하는 작업으로 보냅니다. 보통 매일 8개 전후의 글 작성을 하는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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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82, ‘지구 나이 45억 년 : 현 지구 문명 1만 년 = 24시간 : 0.2초’

우주에 백만 개의 지구가 있다고 하자. 그 각각의 지구에 3백만 명의 사람이 6천 년간 2백 세대를 내려왔다고 할 때 사람, 즉 영 한 명당 3평방 큐빗씩 잡아도 우리 지구를 다 채우지 못할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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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0.심화

 

3. ‘온전한 천적 인간 상태, 곧 첫 번째 태고교회

 

그래서 이것은 단순 하향 평준화라기보다, 더 낮고 위험한 상태 안으로 내려왔지만, 동시에 더 자유로운 결합 가능성이 열린 상태에 가깝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이전보다 더 불완전하고 더 자기중심적으로 될 가능성을 갖게 되었지만, 동시에 더 자발적으로 주님을 사랑할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AC.160 심화 2)

 

그렇다면 온전한 천적 인간 상태, 곧 첫 번째 태고교회는 더 자유롭지도, 더 자발적이지도 않았다는 말인가요?

 

 

바로 그 지점이 AC 초반부를 읽으며, 가장 놀랍고도 어려운 부분 가운데 하나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스베덴보리는 첫 번째 태고교회 인간이 ‘자유가 없었다’거나 ‘자발성이 없었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인간이 경험하는 종류의 ‘독립적 자기의식 기반 자유’는 훨씬 약했다고 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우리보다 훨씬 더 주님 안에 있었고, 훨씬 더 직접적으로 주님의 생명을 지각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주님과 분리된 독립 중심처럼 느끼는 정도가 매우 적었습니다.

 

오늘날 인간은 거의 자동적으로 ‘내가 생각한다’, ‘내가 원한다’, ‘내가 결정한다’고 느낍니다. 심지어 신앙인조차 실제 삶에서는 자기 자신을 거의 독립 존재처럼 느끼며 삽니다. 그런데 태고교회 인간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 안의 선과 진리, 사랑과 생명이 주님께로부터 흘러든다는 사실을 퍼셉션으로 거의 직접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자유는 오늘날 인간처럼 ‘나 자신이 중심이 되어 선택하는 자유’라기보다, ‘주님의 선 안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는 자유’에 가까웠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보는 핵심 차이는 이것입니다. 오늘날 인간은 더 분리된 자의식을 갖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 없이도 자기 혼자 설 수 있는 것처럼 느끼는 강한 자기감 속에서 삽니다. 이 때문에 훨씬 더 위험합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 완전히 굳어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만큼, 자기 자신처럼 느끼는 자리에서 자발적으로 주님께 돌아올 가능성도 생깁니다.

 

반면 태고교회 인간은 훨씬 더 순수했고, 훨씬 더 천국 가까이에 있었지만, 오늘날 인간처럼 깊은 자기 분리 상태 안에서 다시 주님께 돌아오는 경험은 상대적으로 적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그들은 ‘아버지 손을 거의 놓지 않은 아이’에 가까웠고, 오늘날 인간은 ‘멀리 떠나 자기 인생처럼 살다가 다시 돌아오는 탕자’에 더 가깝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후기 교회 인간에게 어떤 면에서는 새로운 종류의 자유가 열렸다고 봅니다. 물론 이것은 더 낮고 위험한 자유입니다. 천사적 순수 상태가 아니라, 유혹과 자기 사랑과 의심 한가운데서 선택해야 하는 자유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바로 그 자유 안에서도 인간이 자발적으로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이 점에서 기독교 전체의 아주 깊은 역설이 드러납니다. 주님은 인간이 타락할 가능성을 모르고 자유를 허락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가능성을 아시면서도 자유를 허락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강제된 선은 참된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은 단순 순종 시스템이 아니라, 자유롭게 주님을 사랑하는 존재들의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 태고교회 인간은 우리보다 훨씬 더 순수했고 더 천국적이었지만, 오늘날 인간처럼 강한 proprium 의식 안에서 다시 주님께 돌아오는 형태의 자유 경험은 상대적으로 적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오늘날 인간은 훨씬 더 위험하고 불안정하지만, 바로 그 깊은 자기감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택하는’ 새로운 차원의 자발성이 가능해졌다는 것입니다.

 

 

 

AC.160, 심화 4, ‘즉시 퍼셉션으로 감지하고 물러나는 상태’

AC.160.심화 4. ‘즉시 퍼셉션으로 감지하고 물러나는 상태’ 첫 번째 태고교회는 우리보다 훨씬 더 주님 안에 있었고, 훨씬 더 직접적으로 주님의 생명을 지각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주님과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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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0, 심화 2, ‘하향(下向) 평준화’

AC.160.심화 2. ‘하향(下向) 평준화’ 어느 정도는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 관점에서는 단순 ‘퇴보’나 ‘열화’(劣化)만으로 설명하기에는 조금 더 복합적인 의미가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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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0.심화

 

2. ‘하향(下向) 평준화

 

어느 정도는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 관점에서는 단순 ‘퇴보’나 ‘열화’(劣化)만으로 설명하기에는 조금 더 복합적인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분명 ‘하향’입니다. 태고교회 인간은 거의 직접적인 퍼셉션 안에서 살았습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질서 안에 있었고, 자신이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을 거의 살아 있는 감각처럼 알았습니다. 그런데 AC.160에 이르면 인간은 이제 ‘(flesh)이 됩니다. 곧 proprium과 자기감이 훨씬 강해지고, 주님의 생명을 직접 지각하던 상태에서는 멀어집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분명 이전보다 낮아진 상태, 곧 일종의 ‘하향’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 실패나 실수처럼만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 상태를 통해 비로소 ‘자유로운 인간’이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태고교회 인간은 너무 직접적으로 천국 질서 안에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인간처럼 자기 독립성과 자율성을 강하게 느끼지는 않았습니다. 반면 flesh 상태 안으로 들어온 인간은 자신을 훨씬 더 ‘나 자신’으로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주님을 자유롭게 사랑할 가능성이 열립니다.

 

그래서 이것은 단순 ‘하향 평준화’라기보다, ‘더 낮고 위험한 상태 안으로 내려왔지만, 동시에 더 자유로운 결합 가능성이 열린 상태’에 가깝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이전보다 더 불완전하고 더 자기중심적으로 될 가능성을 갖게 되었지만, 동시에 더 자발적으로 주님을 사랑할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스베덴보리 전체에서 주님은 인간을 자동 순종 기계처럼 만들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인간이 자기 자신처럼 느끼고, 심지어 자기 사랑으로 기울 가능성까지 가진 상태 안에서, 자유롭게 주님께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AC.160의 변화는 단순 ‘질 저하’라기보다, 위험성과 자유가 함께 커진 상태라고 보는 편이 더 가깝습니다.

 

이를 아주 거칠게 비유하면 이렇습니다. 어린아이가 부모 손 안에서 완전히 보호받는 상태는 안전하지만, 아직 독립적 인격 관계는 아닙니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자기 의지와 자기 판단이 강해지면 훨씬 위험해집니다. 반항도 가능하고 잘못도 가능해집니다. 하지만 바로 그 상태에서 비로소 ‘자발적 사랑’도 가능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 역사를 어느 정도 이런 방향으로 봅니다.

 

그래서 AC.160의 ‘영이 육이 되었다’는 변화는, 단순 추락만이 아니라 ‘자유와 proprium이 본격적으로 인간 존재 안에 결합된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160, 심화 3, ‘온전한 천적 인간 상태, 곧 첫 번째 태고교회’

AC.160.심화 3. ‘온전한 천적 인간 상태, 곧 첫 번째 태고교회’ 그래서 이것은 단순 ‘하향 평준화’라기보다, ‘더 낮고 위험한 상태 안으로 내려왔지만, 동시에 더 자유로운 결합 가능성이 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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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0, 심화 1, ‘전에는 영(spirit), 이제는 육(肉, flesh)’

AC.160.심화 1. ‘전에는 영(spirit), 이제는 육(肉, flesh)’ 이전에는 속 사람과, 속 사람으로부터 나온 겉 사람이 영이었으나, 이제는 육(肉, flesh)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천적인 생명과 영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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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0.심화

 

1. ‘전에는 영(spirit), 이제는 육(, flesh)

 

이전에는 속 사람과, 속 사람으로부터 나온 겉 사람이 영이었으나, 이제는 육(, flesh)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천적인 생명과 영적인 생명이 own과 결합되어 하나인 것처럼 되었습니다. and because previously the internal man and the external from the internal were spirit, but now they have become flesh. Thus was celestial and spiritual life adjoined to the own, that they might be as one. (AC.160)

 

 

AC.160은 창2 마지막과 창3 시작 사이에서 인간 상태가 어떻게 변했는지를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문장입니다. 특히 여기서 ‘(spirit)에서 ‘(flesh)이 되었다는 표현은 단순 육체를 갖게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flesh)은 자주 proprium과 결합된 인간 상태, 곧 자기 자신 중심으로 기울 수 있는 인간 상태를 뜻합니다. 따라서 이 문장은, 원래는 주님으로부터 직접 생명을 받던 인간이 이제는 자기 자신처럼 느끼는 proprium과 결합된 상태 안으로 들어갔다는 뜻입니다.

 

먼저 ‘이전에는 속 사람과, 속 사람으로부터 나온 겉 사람이 영이었다’는 부분입니다. 태고교회 인간은 원래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모두 주님의 생명을 직접 반영하는 상태였습니다. 겉 사람조차 속 사람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주님의 질서 아래 움직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생각과 affection, 그리고 행동은 전체적으로 살아 있는 spirit 상태였습니다. 여기 spirit은 단순 영혼이라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자유롭게 흐르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런데 이제 ‘(flesh)이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flesh는 단순 물질 몸이 아닙니다. 인간 안에 proprium이 결합되어, 자기 자신 중심의 감각과 자기 생명 의식이 강해진 상태입니다. 즉 인간은 이제 더 이상 자신을 단순히 주님의 흐름 통로로만 느끼지 않고, ‘나 자신으로 사는 존재’처럼 느끼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영이 육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스베덴보리가 이것을 단순 추락으로만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는 이어서 ‘천적인 생명과 영적인 생명이 own과 결합되었다’고 말합니다. 여기 ‘adjoined’라는 표현이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은 인간의 proprium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으시고, 그 안에 천적, 영적 생명을 결합시키십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기 자신처럼 느끼지 못하면 자유도, 사랑도, 상호적 결합도 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은 이제 자기 자신을 느끼게 되지만, 동시에 주님의 생명이 그 안에 함께 흐르도록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that they might be as one’, 곧 둘이 하나인 것처럼 되었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것처럼 느끼지만, 실제 생명은 여전히 주님께로부터 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 인간론의 핵심 역설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이 반드시 완전 악을 뜻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후 말씀에서 flesh는 문맥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자기 사랑에 기울어진 인간성을 뜻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살아 있는 인간 전체를 뜻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주님의 영화(glorification) 문맥에서는 신적 인성의 실제성과 충만함을 나타내는 표현으로도 사용됩니다. 따라서 AC.160 flesh는 ‘자기 자신처럼 느끼는 인간 상태’라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이 문장은 결국, 인간 존재 구조 안에 새로운 결합이 일어났음을 설명합니다. 원래 인간은 거의 전적으로 spirit 상태였지만, 이제는 proprium과 결합된 flesh 상태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상태를 버리지 않으시고, 천적, 영적 생명을 그 안에 계속 결합시키십니다. 그래서 인간은 완전히 독립된 존재도 아니고, 완전히 수동적 존재도 아닙니다. 그는 자기 자신처럼 느끼면서도, 실제로는 주님의 생명을 받아 사는 존재입니다. AC.160은 바로 그 놀라운 긴장 구조를 설명하는 문장입니다.

 

 

 

AC.160, 심화 2, ‘하향(下向) 평준화’

AC.160.심화 2. ‘하향(下向) 평준화’ 어느 정도는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 관점에서는 단순 ‘퇴보’나 ‘열화’(劣化)만으로 설명하기에는 조금 더 복합적인 의미가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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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0, 창2:24,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AC.160-162)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창2:24) AC.160 ‘부모를 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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