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21-23)

 

AC.134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프로프리움 상태로 들어가게 되며, 하나의 어떤 프로프리움이 그에게 주어지는데, 이것이 갈빗대로 여자를 세우신 것으로 묘사됩니다 (21-23). Wherefore he is let into a state of his own, and an own is given him, which is described by the rib built into a woman (verses 21 to 23).

 

 

해설

 

이 단락은 창세기 2장 전체 가운데서도 ‘가장 섬세하고 오해되기 쉬운 지점’을 정확히 짚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여자의 창조를 어떤 사회적, 생물학적 사건으로 보지 않습니다. 이것은 인간 안에서 일어나는 ‘내적 상태의 변화’, 곧 ‘프로프리움(proprium)이 실제로 형성되는 순간을 묘사한 것입니다.

 

먼저 주목해야 할 표현은 ‘자신의 프로프리움 상태로 들어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는 인간이 더 이상 순수하게 주님으로부터만 흐름을 받는 상태에 머물지 않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이제 인간은 ‘나에게 속한 것’, ‘내가 느끼는 것’, ‘내가 선택하는 것’을 갖는 상태로 들어갑니다. 이 상태 자체가 즉시 악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단계입니다.

 

그러나 이 ‘프로프리움’은 직접적으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갈빗대’라는 상징을 통해 형성됩니다. 갈빗대는 심장을 보호하는 구조로서, 사랑과 생명에 가장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도 중심 그 자체는 아닙니다. 이는 인간의 자기성(自己性)이 ‘사랑의 중심에서 분리된 주변부로부터 형성됨’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프로프리움은 생명의 중심이 아니라, 중심을 둘러싼 외곽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이 갈빗대가 ‘여자’로 세워진다는 표현은, 프로프리움이 단순한 자아의식이 아니라 ‘애정의 형태’, 곧 인간이 스스로 느끼고 반응하는 정서적 주체로 형성됨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여자는 열등하거나 종속적인 존재가 아니라, 인간 안에서 자기성을 표상하는 살아 있는 구조입니다.

 

중요한 점은, 이 과정이 인간의 요청에 대한 주님의 응답이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이 주님께만 인도받는 상태에 만족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가 자기로 느끼는 삶의 구조를 허락하십니다. 그러나 그 구조는 결코 중심 자리를 차지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갈빗대에서 나왔고, 심장 옆에서 나왔으며, 본래의 생명 중심을 대체하지 않도록 설계되었습니다.

 

AC.134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프로프리움’은 주님과의 결합을 끊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유롭게 사랑하고 선택할 수 있도록 허락된 구조이며, 그 기원과 위치를 잊는 순간 문제가 시작된다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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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3.심화

 

3. ‘아이가 끝까지 말을 안 들을 때

 

아이가 끝까지 말을 안 들으면요?

 

 

끝까지 말을 안 듣는 순간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때 기준은 하나로 정리하시면 분명해집니다. ‘아이를 이기려 하지 말고’, 상황을 안전하고 질서 있게 끝내라’’입니다. 사랑과 자유를 지키되, 경계는 실제로 작동하게 만드는 것이 핵심입니다.

 

먼저, 아이가 멈추지 않을 때는 말로 설득을 길게 이어가기보다 ‘짧고 단호한 개입으로 행동을 멈추게 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위험한 행동이면 즉시 물리적으로 떼어 놓고, 규칙을 어긴 행동이면 더 이상의 선택지를 줄이지 말고 ‘미리 정해 둔 결과를 바로 실행’합니다. 예를 들어 ‘지금 안 멈추면 장난감은 오늘 끝’이라고 했다면, 반복 설명 대신 ‘그대로 끝내고 치웁니다.’ 이때 목소리는 낮고 짧게, 감정은 최대한 중립으로 유지합니다. 고함과 위협은 통제감을 주는 대신 신뢰를 깎고, 결국 더 큰 저항을 낳습니다.

 

둘째, ‘일관성’이 힘입니다. 한 번은 봐주고 한 번은 강하게 나가면, 아이는 어디까지 밀어붙일 수 있는지 시험하게 됩니다. 규칙은 적게, 그러나 분명하게 정하고, ‘항상 같은 결과가 뒤따르도록’ 하십시오. 결과는 아이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에서, 행동과 직접 연결된 것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이 아니라 ‘배움의 구조’가 됩니다.

 

셋째, 아이가 계속 버티는 경우는 대개 ‘배고픔, 피곤함, 과자극’ 같은 기본 상태가 무너진 때가 많습니다. 이때는 훈육보다 ‘환경을 재정비’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자리를 옮기고, 자극을 줄이고, 잠깐의 ‘쿨다운(진정 시간)’을 제공합니다. 부모도 감정이 올라왔다면 ‘잠시 멈추는 것’이 원칙입니다. 분노 상태에서의 훈육은 거의 항상 과잉으로 흐릅니다.

 

넷째, 상황이 끝난 뒤에 ‘짧게 되짚기’를 합니다. “아까 왜 멈췄는지 기억해?” “다음엔 어떻게 하면 좋을까?”처럼 아이의 언어로 한두 문장으로 정리합니다. 길게 설교하지 말고, ‘다음 선택을 한 가지로 제시’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다섯째, 신앙의 관점에서는 이것이 ‘자유를 보존하면서 질서를 세우는 방식’입니다. 아이의 프로프리움을 꺾어 이기려는 것이 아니라, ‘자유 안에서 선택의 결과를 분명히 경험하게 하여 방향을 배우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호함은 필요하지만, 그 단호함은 ‘차분함과 일관성’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정리하면, 끝까지 말을 안 들을 때의 답은 ‘더 크게, 더 세게’가 아니라 ‘더 짧게, 더 분명하게, 그리고 반드시 실행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아이는 부모의 감정이 아니라 ‘질서 자체를 배우게’ 되고, 그 질서 안에서 점점 스스로 선택하는 힘이 자랍니다.

 

 

 

AC.133, 창2:18-25 개요,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과 진리, 그럼에도 자신의 프로프리움으로’(19-20절)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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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3, 심화 2, '프로프리움과 아이 훈육'

AC.133.심화 2. ‘프로프리움과 아이 훈육’ 영, 유아 아이가 말을 안 듣는다고 얼굴에 노기를 띠고 큰 소리로 위협하거나 ‘맞을래?’ 하면서 윽박지르는 거 말입니다. 그래도 안 통하면 실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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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3.심화

 

2. ‘프로프리움과 아이 훈육

 

, 유아 아이가 말을 안 듣는다고 얼굴에 노기를 띠고 큰 소리로 위협하거나 맞을래?’ 하면서 윽박지르는 거 말입니다. 그래도 안 통하면 실제로 아이를 폭행하고요. 사랑의 매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분노에 찬, 아이 등에 온통 시퍼런 매 자국이 날 정도로 아이를 때리는... 예수 믿는다는 부모가 이래도 되나요? 예를 들면, 다음 잠언 말씀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22:6)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22:15)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하려고 하지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그가 죽지 아니하리라(23:13)

 

같은 말씀들을 근거로 대면서 말이지요. 이런 상황에서 사랑과 자유를 위해 프로프리움을 허락하셨다는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요? 그러니까 주님의 그런 허락을 깊이 받아들였다면 실제로 위와 같은 상황에서 말 안 듣는 아이에게 어떻게 해야 하나요? 끝까지 부드럽고 온유한, 사랑스러운 말로만 타일러야 하나요?

 

 

말씀하신 장면처럼 분노로 아이를 위협하고 실제로 심한 체벌을 가하는 것은, 성경 구절을 어떻게 인용하든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훈계’가 아니라 아이에게 상처를 남기는 폭력입니다. 잠언의 ‘채찍’ 구절들도 문자 그대로 폭행을 허용하라는 뜻이 아니라, ‘질서를 세우는 분명한 교정과 경계의 필요성’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스베덴보리의 흐름(AC.122-133)으로 보아도, 주님의 인도는 결코 강압과 분노의 폭발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주님은 자유를 보존하시면서도 질서를 세우십니다. 부모의 역할도 그 방향을 닮아야 합니다.

 

프로프리움이 허락되었다’는 사실은 아이를 마음대로 꺾어도 된다는 근거가 아니라, 오히려 ‘아이도 자유 안에서 배우고 선택하도록 도와야 한다는 책임’을 뜻합니다. 자유를 준다는 것은 방임이 아니라, ‘안전한 경계 안에서 선택의 결과를 경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 양육에서는 두 가지가 함께 가야 합니다. 하나는 분명하고 일관된 규칙과 한계이고, 다른 하나는 아이가 그 규칙의 의미를 이해하도록 돕는 따뜻한 관계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이렇게 생각하시면 좋겠습니다. 아이가 잘못된 행동을 했을 때, 먼저 해야 할 일은 ‘행동을 멈추게 하는 것’입니다. 이때 필요한 것은 고함과 위협이 아니라, ‘단호하고 짧은 지시’입니다. 그다음에 왜 그 행동이 문제인지, 무엇이 더 좋은 선택인지 ‘아이의 수준에 맞게 설명’합니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합리적인 결과’, 그러니까 시간제한, 장난감 치우기, 활동 제한 같은 거를 적용합니다. 이것은 벌이 아니라, 행동과 결과를 연결해 주는 교육입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부모의 감정 상태입니다. ‘분노가 올라온 상태에서는 훈육을 미루는 것이 원칙’입니다. 잠시 거리를 두고 감정을 가라앉힌 뒤에 다시 다루는 것이 훨씬 효과적입니다.

 

신앙의 언어로 표현하면, 아이를 다루는 방식 자체가 이미 ‘‘사랑이 중심인가, 프로프리움이 중심인가를 드러냅니다.’ 분노로 때리는 순간, 부모의 프로프리움이 아이 위에 군림합니다. 반대로 단호하지만 차분하게 경계를 세우고, 아이가 이해하고 선택하도록 돕는다면, 그것은 ‘자유를 보존하면서 질서를 세우는 방식’입니다. 이것이 AC에서 말하는 주님의 인도 방식과 더 가깝습니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점 하나만 덧붙이겠습니다. 아이는 규칙보다 ‘관계 안에서 더 깊이 배웁니다.’ 자신이 안전하고 사랑받고 있다고 느낄 때, 부모의 말과 경계를 받아들일 힘이 생깁니다. 그래서 ‘부드럽게만’이 답도 아니고, ‘강하게 밀어붙이는 것’도 답이 아닙니다. 답은 ‘따뜻함 속의 단호함’, 곧 사랑과 질서가 함께 있는 자리입니다.

 

정리하면, 잠언의 말씀은 폭력을 허락하는 근거가 아니라 ‘책임 있는 훈육의 필요성’을 말하는 것이고, AC의 관점에서는 그 훈육조차도 ‘자유를 보존하는 사랑의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아이를 꺾는 것이 아니라, ‘아이 안에 있는 자유가 바른 방향으로 자라도록 돕는 것’, 그것이 이 문제에 대한 가장 정확한 적용입니다.

 

 

 

AC.133, 심화 3, '아이가 끝까지 말을 안 들을 때'

AC.133.심화 3. ‘아이가 끝까지 말을 안 들을 때’ 아이가 끝까지 말을 안 들으면요? 끝까지 말을 안 듣는 순간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때 기준은 하나로 정리하시면 분명해집니다. ‘아이를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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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3, 심화 1, '이 모든 걸 다 미리 아셨음에도'

AC.133.심화 1. ‘이 모든 걸 다 미리 아셨음에도’ 이 모든 걸 다 미리 아셨음에도 불구, 인간에게 허락하신 주님이 참으로 놀랍기만 합니다. 저 같으면 이런 대단히 위험스러울 수 있는 ‘프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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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3.심화

 

1. ‘이 모든 걸 다 미리 아셨음에도

 

이 모든 걸 다 미리 아셨음에도 불구, 인간에게 허락하신 주님이 참으로 놀랍기만 합니다. 저 같으면 이런 대단히 위험스러울 수 있는 프로프리움 같은 요소는 애초에 허락하지 않거나 어쩔 수 없이 허락하더라도 큰 제약을 걸었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그 반응은 아주 자연스럽습니다. ‘이렇게까지 위험하다면 애초에 허락하지 않으셨으면 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드는 지점이 바로 AC.133이 겨냥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프로프리움을 제한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사랑과 자유가 가능하도록 하는 최소 조건을 열어 두신 것’에 가깝습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사랑은 강제로 만들어질 수 없고, 반드시 자유 속에서만 생깁니다.’ 그런데 자유는 단순히 선택지가 여러 개인 상태가 아니라, ‘내가 선택한다’고 느낄 수 있는 상태를 포함합니다. 이 ‘내가 선택한다’는 감각이 바로 프로프리움의 토양입니다. 만약 이 감각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거나 강하게 제약해 버리면, 사람은 안전해질 수는 있어도, ‘사랑하는 존재가 아니라 프로그램처럼 반응하는 존재’가 됩니다. 그렇게 되면 ‘주님을 사랑한다’는 말 자체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방식은 위험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위험을 포함한 채로도 사람이 진짜로 살 수 있는 길을 여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균형이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인간이 ‘내 것’이라고 느끼며 선택할 수 있도록 자유를 주시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자유가 완전히 무너져 버리지 않도록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끊임없이 붙들고 제한하십니다.’ 강압적으로 막지 않지만, 완전히 방치하지도 않으십니다. 이것이 섭리의 방식입니다.

 

또 하나 보셔야 할 점은, 프로프리움이 단지 ‘위험 요소’만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왜곡되면 자기중심이 되지만, 질서 안으로 들어오면 ‘주님의 것을 내 것처럼 느끼며 사는 자리’로 바뀝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의 목표는 프로프리움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근원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여전히 ‘내가 생각한다, 내가 사랑한다’고 느끼지만, 실제로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그렇게 느끼며 살게 됩니다. 이 상태가 없으면 기쁨도, 친밀함도, 관계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하신 선택은 ‘위험을 없애는 안전한 창조’가 아니라, ‘자유와 사랑이 가능하도록 하는 창조’입니다. 그 대신 그 자유가 파괴로 가지 않도록, 사람의 안쪽과 바깥쪽에서 수없이 많은 방식으로 이끌고, 막고, 돌이키게 하십니다. 우리가 보기에 ‘왜 이렇게 돌아가게 하실까’ 싶은 길도, 실제로는 ‘자유를 보존하면서도 결국 생명 쪽으로 이끄는 길’입니다.

 

결국 이렇게 정리하시면 가장 또렷합니다. 프로프리움은 허용된 위험이 아니라, ‘사랑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주어진 자유의 형태’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놀라움은, 그 위험을 제거하지 않으시면서도, 그 안에서 사람을 끝까지 살려 내신다는 데 있습니다.

 

 

 

AC.133, 심화 2, '프로프리움과 아이 훈육'

AC.133.심화 2. ‘프로프리움과 아이 훈육’ 영, 유아 아이가 말을 안 듣는다고 얼굴에 노기를 띠고 큰 소리로 위협하거나 ‘맞을래?’ 하면서 윽박지르는 거 말입니다. 그래도 안 통하면 실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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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3, 창2:18-25 개요,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과 진리, 그럼에도 자신의 프로프리움으로’(19-20절)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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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19, 20)

 

AC.133

 

먼저 주님께서 그에게 선의 애정(affections)과 진리의 인식(knowledges)을 알도록 허락하십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자신의 프로프리움(proprium, own)으로 기울어집니다 (19–20). And first it is given him to know the affections of good and the knowledges of truth with which he is endowed by the Lord; but still he inclines to his own (verses 19–20).

 

 

해설

 

이 문장은 창세기 2장 후반부의 ‘미묘하지만 결정적인 긴장’을 정확히 짚어 줍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부족함을 즉시 보충하기보다, 먼저 그가 어떤 선의 애정(affections)과 어떤 진리의 인식(knowledges)으로 충만하게 되어 있는지를 ‘알도록 하십니다’. 이는 인간이 빈 상태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이미 많은 것을 받았음을 스스로 인식하게 하려는 과정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뜻밖입니다. 그렇게 많은 선과 진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여전히 자기 자신의 것으로 기울어집니다. 이것은 무지 때문이 아니라, ‘자기 것, 곧 프로프리움(proprium, own)에 대한 성향’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문제는 ‘무엇을 받았는가’가 아니라, ‘어디로 기울어지는가’에 있습니다.

 

2:19-20에서 아담이 짐승들과 새들의 이름을 짓는 장면은, 인간이 주님께로부터 받은 선과 진리의 인식(knowledges)을 하나하나 분별하고 질서화하는 과정을 나타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에게는 돕는 배필이 없었다’는 결론에 이르는 것은, 이 모든 인식과 애정이 ‘아직 자신의 프로프리움과 결합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주님께 받은 것들을 인식하면서도, 그것을 여전히 ‘주님의 것’, 곧 자기 삶의 중심으로 삼지 못합니다.

 

이 단락은 인간의 내적 구조를 매우 솔직하게 보여줍니다. 인간은 충분히 가르침을 받고, 충분히 조명을 받았다고 해서, 저절로 주님께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언제나 자신의 프로프리움 쪽으로 기울 가능성을 안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만 합니다. 곧, 자신의 프로프리움과 결합될 수 있는 형식, 다시 말해 ‘돕는 배필’이 필요해지는 것입니다.

 

AC.133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과 진리를 충분히 인식한 후에도, 여전히 자신의 프로프리움을 중심으로 살고자 하며, 바로 이 지점에서 창세기 2장의 마지막 전개가 시작된다고 말입니다.

 

 

심화

 

1. ‘이 모든 걸 다 미리 아셨음에도

 

 

AC.133, 심화 1, '이 모든 걸 다 미리 아셨음에도'

AC.133.심화 1. ‘이 모든 걸 다 미리 아셨음에도’ 이 모든 걸 다 미리 아셨음에도 불구, 인간에게 허락하신 주님이 참으로 놀랍기만 합니다. 저 같으면 이런 대단히 위험스러울 수 있는 ‘프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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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프로프리움과 아이 훈육

 

 

AC.133, 심화 2, '프로프리움과 아이 훈육'

AC.133.심화 2. ‘프로프리움과 아이 훈육’ 영, 유아 아이가 말을 안 듣는다고 얼굴에 노기를 띠고 큰 소리로 위협하거나 ‘맞을래?’ 하면서 윽박지르는 거 말입니다. 그래도 안 통하면 실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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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아이가 끝까지 말을 안 들을 때

 

 

AC.133, 심화 3, '아이가 끝까지 말을 안 들을 때'

AC.133.심화 3. ‘아이가 끝까지 말을 안 들을 때’ 아이가 끝까지 말을 안 들으면요? 끝까지 말을 안 듣는 순간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때 기준은 하나로 정리하시면 분명해집니다. ‘아이를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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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4, 창2:18-25 개요, ‘여자의 창조 : 프로프리움의 형성’(21-23절)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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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2, 창2:18-25 개요, ‘프로프리움’(proprium, own)(18절)

18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And Jehovah God said, 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I will make him a help as with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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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2.심화

 

4. 프로프리움은 자아’?, ‘자기(9:23)?

 

그럼 이 proprium 자아는요? 가장 맞는 한역은 뭔가요? 9:23,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가 바로 이 proprium을 말하는 거죠?

 

 

핵심만 먼저 분명히 말씀드리면, ‘proprium 자아로 번역하는 것은 부분적으로만 맞고, 그대로 쓰기에는 위험합니다.’ 그리고 눅9:23의 ‘자기’가 가리키는 바는 ‘proprium과 매우 깊이 연결되지만, 단순히 자아 전체와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왜 ‘자아’가 조심스러운가 하면, 오늘 우리가 쓰는 ‘자아’는 심리학적 의미가 강합니다. 곧 ‘나는 누구인가’, ‘자기 정체성’, ‘인격의 중심’ 같은 비교적 중립적이거나 때로는 긍정적인 개념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의 proprium은 그런 중립 개념이 아니라, ‘‘내가 근원이다’, ‘이건 내 것이다라고 여기는 귀속 의식과 그 방향성 전체’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자아’라고만 하면, proprium의 핵심인 ‘자기 귀속의 왜곡’이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가장 맞는 한역은 무엇인가를 물으신다면, 하나로 딱 떨어지는 단어는 사실 없습니다. 다만 의미를 가장 정확히 살리는 쪽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자기 것’ 또는 ‘자기 것으로 삼는 상태’. 둘째, 설명형으로는 ‘자기 중심성’ 혹은 ‘자기 귀속 의식’. 셋째, 문맥에 따라 ‘자기(proprium)라고 음역+의역을 병기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실제로 AC를 깊이 다루는 경우에는 이 방식이 가장 안전합니다.

 

이제 ‘자기를 부인하고’와의 관계를 보시면 훨씬 선명해집니다. 눅9:23의 ‘자기’는 단순히 ‘자기 존재’를 부정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존재를 부정하면 아무것도 남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부인해야 할 ‘자기’는 바로 ‘내 것이라 붙잡고, 내가 중심이 되려는 그 부분’, 곧 proprium입니다. 다시 말해,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은 ‘너 자신을 없애라’가 아니라, ‘네 안에서 근원 노릇을 하려는 것을 내려놓아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구분이 하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적으로 보면, 인간에게는 ‘느껴지는 자기’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자유도, 사랑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 ‘자기’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임을 인정하느냐’, 아니면 ‘진짜로 내 것이라고 붙잡느냐’입니다. 전자를 유지하면서 후자를 부인하는 것이 바로 눅9:23의 의미입니다.

 

이렇게 정리하시면 가장 정확합니다. ‘자아’는 존재 구조를 가리키는 말이고, proprium은 그 자아가 ‘자기중심으로 굳어질 때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씀은 자아를 없애라는 말이 아니라, ‘proprium으로 굳어지려는 방향을 끊으라’는 요청입니다.

 

결국 번역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proprium을 단순히 ‘자아’로 두면 너무 중립적이고, ‘고유 본성’은 너무 흐립니다. 그래서 가장 안전한 길은 ‘‘자기 것(proprium) 혹은 자기중심(proprium)처럼 의미를 드러내는 번역을 유지하면서, 필요할 때 설명을 덧붙이는 방식’입니다. 이렇게 해야 눅9:23 같은 구절도 살아 있고, AC 전체의 흐름도 정확히 이어집니다. 목사님 방식인 ‘체어리티(charity)처럼 그냥 ‘프로프리움(proprium)으로 병기하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처음에 한번 그 의미를 잡아주신 후 말이지요.

 

 

 

AC.132, 창2:18-25 개요, ‘프로프리움’(proprium, own)(18절)

18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And Jehovah God said, 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I will make him a help as with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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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2, 심화 3, 프로프리움은 ‘고유 본성’(固有 本性)?

AC.132.심화 3. 프로프리움은 ‘고유 본성’(固有 本性)? 이 ‘프로프리움’을 누구는 ‘고유 본성’(固有 本性)으로 번역하더군요. 그래도 될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고유 본성’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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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2.심화

 

3. 프로프리움은 고유 본성’(固有 本性)?

 

 프로프리움을 누구는 고유 본성’(固有 本性)으로 번역하더군요. 그래도 될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고유 본성이라는 번역은 가능은 하지만, 핵심을 정확히 전달하기에는 상당히 위험한 번역’입니다. 상황에 따라 보조적으로 쓸 수는 있어도, proprium의 중심 뜻을 대표하는 번역으로 쓰기에는 부족합니다.

 

왜냐하면 ‘고유 본성’이라고 하면, 대부분의 독자는 그것을 ‘타고난 성품’, ‘본래 가지고 있는 좋은 성질’ 쪽으로 이해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proprium은 그런 중립적이거나 긍정적인 ‘성격’이 아니라, 훨씬 더 근본적인 것, 곧 ‘내가 근원이라고 느끼는 상태’, ‘모든 것을 나에게 귀속시키려는 중심 감각’을 말합니다. 그래서 단순히 ‘본성’이라고 하면, 이 핵심이 거의 사라집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proprium은 단지 ‘성질’이 아니라 ‘작동하는 방향성’입니다. 그것은 ‘나에게서 나온 것처럼 느끼고, 그것을 나의 것으로 붙잡으려는 움직임’입니다. 그래서 AC 전체에서 proprium은 거의 언제나 ‘왜곡의 근원’, 혹은 ‘주님으로부터의 흐름을 가로막는 중심’으로 다뤄집니다. 그런데 ‘고유 본성’이라고 하면 이런 긴장과 위험성이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다만 왜 그런 번역이 나오는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proprium이 단순한 ‘소유물’이 아니라, 사람 안에 깊이 자리 잡은 ‘자기만의 소유인 것 같은 느낌’, ‘자기에게 속한 특유한 것’이라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고유’라는 말이 그 일부를 잡아주기는 합니다. 그래서 문맥에 따라 ‘자기의 고유스러운 것’ 정도로 풀어 설명할 때는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심 번역으로는, ‘자기 것’, ‘자기 것으로 삼는 상태’, 혹은 ‘자기중심(proprium) 쪽이 훨씬 정확합니다. 왜냐하면 이 표현들은 proprium의 핵심인 ‘귀속(내 것이라 여김)’과 ‘근원 의식’을 직접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체어리티(charity)처럼 그냥 ‘프로프리움(proprium)으로 병기하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처음에 한번 그 의미를 잡아주신 후 말이지요.

 

정리하면, ‘고유 본성’은 일부 뉘앙스를 담을 수는 있지만, proprium의 핵심인 ‘자기에게 돌리는 상태’를 흐릴 위험이 크기 때문에, 주 번역으로 쓰기보다는 설명용으로 제한하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맥락에서는 결국 이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라, 그것을 누구의 것으로 여기느냐’이기 때문입니다.

 

 

 

AC.132, 심화 4, 프로프리움은 ‘자아’?, ‘자기’(눅9:23)?

AC.132.심화 4. 프로프리움은 ‘자아’?, ‘자기’(눅9:23)? 그럼 이 proprium과 ‘자아’는요? 가장 맞는 한역은 뭔가요? 눅9:23, ‘자기를 부인하고’의 ‘자기’가 바로 이 proprium을 말하는 거죠? 핵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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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2, 심화 2, 그때그때 야단치고 바로잡아야?

AC.132.심화 2. 그때그때 야단치고 바로잡아야? 오히려 그때그때 야단치고, 강압적으로 하면 사람은 고분고분, 빙 돌아갈 길을 질러갈 수 있을 텐데...? 겉으로 보면 그 방법이 더 빠르고 확실해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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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때그때 야단치고 바로잡아야?

 

오히려 그때그때 야단치고, 강압적으로 하면 사람은 고분고분, 빙 돌아갈 길을 질러갈 수 있을 텐데...?

 

 

겉으로 보면 그 방법이 더 빠르고 확실해 보입니다. 실제로 강하게 몰아붙이면, 사람은 일단 멈추고, 겉 행동은 곧바로 바뀌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변화는 ‘사람의 중심이 바뀐 결과가 아니라, 압력에 대한 반응’일 뿐입니다. 압력이 사라지면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가거나, 안쪽에서는 오히려 반발이 쌓입니다. 그래서 길을 ‘질러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내면의 질서가 세워지지 않은 채 외형만 정돈된 상태’가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핵심은,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순종하는 행동’ 그 자체보다 ‘자유 속에서 선택된 사랑과 신앙’이라는 점입니다. 사랑은 강요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억지로 사랑하게 만들 수 없듯이, 선도 강압으로는 뿌리내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인도는 언제나 ‘자유를 보존하는 방식’으로 작용합니다. 이 자유가 유지되어야, 사람이 ‘정말로 자기 것처럼’ 선택하고, 그 선택이 그의 삶이 됩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강압은 인간의 프로프리움을 꺾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형태로 강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복종하지만, 속에서는 ‘억지로 한다’, ‘나는 원래 다르게 생각한다’는 감각이 남습니다. 이것은 진짜 변화가 아니라, ‘눌려 있는 자기중심’입니다. 반대로 주님의 방식은 느리고 답답해 보일 수 있지만, 사람 안에서 스스로 ‘, 이게 맞다’고 동의하는 지점이 생기도록 기다립니다. 이 동의가 생길 때, 비로소 변화는 되돌아가지 않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지름길처럼 보이는 강압은 사실은 우회로이고,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자유 속의 인도는 실제로는 ‘가장 곧은 길, 곧 지름길’입니다. 왜냐하면 그 길만이 사람의 의지와 이해, 곧 마음 전체를 함께 바꾸기 때문입니다.

 

정리하면, 주님이 강압적으로 하지 않으시는 이유는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진짜로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선택하고 사랑하게 될 때에만, 그 삶은 그의 것이 되며, 그 상태만이 천국까지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AC.132, 심화 3, 프로프리움은 ‘고유 본성’(固有 本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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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2, 심화 1, 주님의 인도에 무슨 2프로 부족함이?

AC.132.심화 1. 주님의 인도에 무슨 2프로 부족함이? 위 본문에 ‘사람은 주님께 인도받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상, 곧 자기의 ‘프로프리움’(proprium, own)에 의해서도 인도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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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2.심화

 

1. 주님의 인도에 무슨 2프로 부족함이?

 

위 본문에 사람은 주님께 인도받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상, 곧 자기의 프로프리움(proprium, own)에 의해서도 인도받고자 하는 존재라는 부분 말인데요, 주님의 인도에 무슨 2프로 부족함이 있나요? 뭐가 부족해서 이런 것이죠?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주님의 인도에는 결핍이 전혀 없습니다.’ 문제는 인도의 내용이 아니라, ‘인도를 받는 인간의 상태’’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그 문장은 ‘주님의 인도에 무엇이 빠져 있어서 사람이 보충하려 든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이 그렇게 느끼고 싶어 하는 성향’을 가리킵니다.

 

왜 그런 성향이 생기느냐 하면, 인간은 창조될 때부터 ‘자기처럼 느끼는 상태’ 안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생각할 때 ‘내가 생각한다’, 결정할 때 ‘내가 결정한다’고 느낍니다. 이 감각이 없으면 자유도, 사랑도, 책임도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자기감’(自己感)이, 방향을 잘못 잡으면 ‘내가 중심이 되고 싶다’는 욕구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주님이 충분히 인도하고 계셔도, 사람은 그 안에 머무르기보다 ‘자기 쪽에서 한 번 더 쥐고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이것은 결핍을 보충하려는 행동이라기보다, ‘주도권을 잡고 싶어 하는 움직임’에 가깝습니다. 주님의 인도는 위에서 아래로, 사랑에서 지혜로, 질서 있게 흐릅니다. 그런데 인간의 프로프리움은 ‘그 흐름에 맡겨지기’보다, ‘내가 알고, 내가 판단하고, 내가 결정했다’는 느낌을 원합니다. 그래서 동일한 상황에서도 ‘주님이 이끄셨다’고 보기보다, ‘내가 잘해서 이렇게 됐다’고 해석하려는 경향이 생깁니다.

 

여기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의 인도는 언제나 ‘자유를 해치지 않는 방식’으로 작용합니다. 강제로 밀어붙이지 않고, 은밀하고 부드럽게, 안에서 움직입니다. 그러다 보니 인간은 그 인도를 ‘뚜렷한 외적 확증’으로 느끼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 빈틈에서 사람은 ‘그래도 내가 판단해야 확실하지’라는 쪽으로 기웁니다. 즉, 인도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인도가 너무 강압적이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사람이 자기 쪽으로 돌아설 여지가 생깁니다.

 

그래서 AC.132의 말은 이렇게 이해하시면 정확합니다. 사람은 주님의 인도만으로도 충분히 살 수 있도록 되어 있지만, 동시에 ‘자기처럼 느끼는 상태’ 때문에, 거기에 더해 ‘자기중심에서 한 번 더 움직이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프로프리움으로의 기울어짐입니다.

 

결국 핵심은 이것입니다. 주님의 인도는 언제나 완전하지만, 인간은 그 인도를 ‘그대로 받는 자리’에 머물기보다, ‘자기중심을 끼워 넣고 싶어 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길은 무엇을 더 보태는 길이 아니라, 오히려 ‘이미 충분한 인도 앞에서 내가 중심이 되려는 부분을 알아차리고 내려놓는 과정’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사람은 깨닫게 됩니다. 부족했던 것은 인도가 아니라, ‘그 인도를 온전히 맡기지 못했던 나의 상태’였다는 것을 말입니다.

 

 

 

AC.132, 심화 2, 그때그때 야단치고 바로잡아야?

AC.132.심화 2. 그때그때 야단치고 바로잡아야? 오히려 그때그때 야단치고, 강압적으로 하면 사람은 고분고분, 빙 돌아갈 길을 질러갈 수 있을 텐데...? 겉으로 보면 그 방법이 더 빠르고 확실해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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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2, 창2:18-25 개요, ‘프로프리움’(proprium, own)(18절)

18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And Jehovah God said, 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I will make him a help as with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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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18)

 

AC.132

 

사람은 주님께 인도받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상, 곧 자기의 프로프리움(proprium, own)에 의해서도 인도받고자 하는 존재이므로, 여기서는 사람에게 허락된 그 프로프리움이 다루어집니다 (18). Since man is such as not to be content to be led by the Lord, but desires to be led also by himself and the world, or by his own, therefore the own which was granted him is here treated of (verse 18).

 

 

해설

 

이 단락은 창세기 2장 후반부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어 하나’를 정확히 집어냅니다. 바로 ‘자기의 것(own), 곧 ‘proprium’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문제를 무지나 연약함에서 찾지 않고, 훨씬 더 근원적인 성향에서 찾습니다. 인간은 단순히 주님께 순종하지 못하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께만 인도받는 상태에 만족하지 못하는 존재’라는 점이 여기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중요한 것은, 이 ‘프로프리움’이 갑자기 죄로 규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허락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주님께서 인간에게 자율성과 독립성을 어느 정도 허용하셨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로봇처럼 전적으로 외부에서만 조종되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 느끼고 선택하는 주체로 창조되었습니다. 문제는 이 자기성(自己性) 자체가 아니라, ‘그 자기성이 중심이 되려는 경향’입니다.

 

이 단락은 인간 내면에서 일어나는 미묘한 이동을 포착합니다. 이전까지의 천적 인간은 주님의 인도 안에서 자유로웠습니다. 그러나 이제 인간은 ‘나도 함께 인도하고 싶다’, ‘나도 판단하고 싶다’, ‘나도 선택의 주체이고 싶다’는 방향으로 기울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AC.131에서 말한 ‘자기 자신에게로 기울어짐’의 구체적 내용입니다.

 

그래서 창2:18에서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아니하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는 외로움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더 이상 순수한 내적 일치 상태로만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신호입니다. 주님과의 직접적인 결합만으로는 더 이상 인간의 의식 구조가 유지되지 않게 되었고, 그 결과 ‘자기의 것’, 곧 ‘프로프리움’이 하나의 구조로 등장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과정을 도덕적으로 비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 존재의 현실을 매우 정직하게 묘사합니다. 인간은 주님께만 인도받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자기 자신과 세상도 함께 끌어안고 싶어 합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이후의 모든 분리, 대응, 결합의 서사가 시작됩니다.

 

AC.132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에게 허락된 ‘프로프리움’은 타락의 씨앗이 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한 필연적 조건이기도 하며, 창세기 2장 후반부는 바로 이 긴장 위에서 전개된다고 말입니다.

 

 

심화

 

1. 주님의 인도에 무슨 2프로 부족함이?

 

 

AC.132, 심화 1, 주님의 인도에 무슨 2프로 부족함이?

AC.132.심화 1. 주님의 인도에 무슨 2프로 부족함이? 위 본문에 ‘사람은 주님께 인도받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상, 곧 자기의 ‘프로프리움’(proprium, own)에 의해서도 인도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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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때그때 야단치고 바로잡아야?

 

 

AC.132, 심화 2, 그때그때 야단치고 바로잡아야?

AC.132.심화 2. 그때그때 야단치고 바로잡아야? 오히려 그때그때 야단치고, 강압적으로 하면 사람은 고분고분, 빙 돌아갈 길을 질러갈 수 있을 텐데...? 겉으로 보면 그 방법이 더 빠르고 확실해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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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프로프리움은 고유 본성’(固有 本性)?

 

 

AC.132, 심화 3, 프로프리움은 ‘고유 본성’(固有 本性)?

AC.132.심화 3. 프로프리움은 ‘고유 본성’(固有 本性)? 이 ‘프로프리움’을 누구는 ‘고유 본성’(固有 本性)으로 번역하더군요. 그래도 될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고유 본성’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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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프로프리움은 자아’?, ‘자기(9:23)?

 

 

AC.132, 심화 4, 프로프리움은 ‘자아’?, ‘자기’(눅9:23)?

AC.132.심화 4. 프로프리움은 ‘자아’?, ‘자기’(눅9:23)? 그럼 이 proprium과 ‘자아’는요? 가장 맞는 한역은 뭔가요? 눅9:23, ‘자기를 부인하고’의 ‘자기’가 바로 이 proprium을 말하는 거죠? 핵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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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3, 창2:18-25 개요,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과 진리, 그럼에도 자신의 프로프리움으로’(19-20절)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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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1, 창2:18-25 개요, '창2 후반부 : 자기 자신에게로 기울어진 태고교회의 후손들'(AC.131-137)

창2:18-25 18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And Jehovah God said, 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I will make him a hel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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