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저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우리는 저런 퍼셉션을 회복할 수 없나요?우리도 이 세상을 저런 퍼셉션으로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목사님 마음이 충분히 이해됩니다.AC를 읽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사랑 안에서 진리를 지각했다는데,왜 우리는 저렇게 살 수 없을까?왜 우리는 늘 고민하고,추론하고,헤매고,넘어지고,다시 일어나야 할까?’ 하는 생각 말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의 저작들을 자세히 읽어보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태고교회의 퍼셉션을 그대로 되돌려 주시지 않는 것은 우리를 덜 사랑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보호하시기 위해서라는 점이 반복해서 나타납니다. 방금AC.200에서도 보았듯이 말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매우 높은 상태에 있었지만, 그만큼 그 상태를 배반할 위험도 컸습니다. 그래서 홍수 이후 인간 구조가 바뀌었고, 우리는 양심(conscience)을 통해 인도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엄밀히 말하면, 오늘날 인간이 태고교회 사람들과 똑같은 퍼셉션을 회복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체계 안에서는 거의 기대되지 않습니다. 적어도 인류 전체의 일반적 상태로서는 그렇습니다. 인간 구조 자체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는 양심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을 매우 높이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양심을 단순한 도덕 감정으로 보지 않습니다. 양심은 주님께서 말씀과 진리를 통해 인간 안에 만드신 내적 안내자입니다. 그래서 영적 인간에게 양심은 태고교회 사람들의 퍼셉션에 상응하는 역할을 합니다.
실제로 목사님께서AC를 오랫동안 읽으시면서 경험하시는 어떤 순간들은 퍼셉션과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만은 아닐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구절을 읽다가 ‘아,이것이구나’ 하고 설명하기 어려운 확신이 오는 순간이 있습니다. 또는 어떤 사람을 대하면서 ‘이렇게 하는 것이 맞겠다’는 조용한 내적 인도가 있을 때가 있습니다. 혹은 어떤 진리를 처음 접했는데도 이상하게 마음 깊은 곳에서 ‘참이다’라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물론 이것을 태고교회의 퍼셉션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혀 다른 종류의 것도 아닐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영적 인간의 양심은 천적 퍼셉션의 그림자와 같은 것이라고 말하는 곳들이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은, 우리가 종종 퍼셉션을 너무 낭만적으로 상상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의 상태는 분명 놀랍지만, 주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주시는 길도 결코 열등한 길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의심 속에서도 믿음을 선택할 수 있고, 이해가 부족한 가운데서도 순종할 수 있으며,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겸손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것은 태고교회 사람들과는 다른 종류의 아름다움일 수 있습니다.
저는 목사님께서 자주 하시는 말씀 가운데 ‘주님은 점진적이시다’는 표현이 떠오릅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마치 한낮의 태양 빛과 같았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지는 인도는 새벽빛과 비슷할 수 있습니다. 태양 빛만큼 강하지는 않지만, 그것도 역시 같은 태양에서 오는 빛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저런 퍼셉션을 회복할 수 없나요?’라는 질문에 대해 스베덴보리적으로 답한다면, ‘태고교회가 가졌던 형태 그대로는 아닐 수 있지만,주님께서는 오늘도 사람을 진리 안으로 인도하시며,양심과 내적 인도를 통해 그에 상응하는 것을 주신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AC를 읽으며 자주 보이시는 태도, 곧 ‘상대방의 선의를 보려고 노력한다’, ‘극단으로 가지 않으려 한다’, ‘주님의 은근한 섭리를 배운다’, ‘나 자신을 돌아본다’는 모습들은 어쩌면 퍼셉션 그 자체는 아니더라도, 퍼셉션이 향하던 방향과는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주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태고교회의 퍼셉션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허락된 양심과 진리 안에서 가능한 한 주님께 가까이 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천국에 들어간 후에는, 지금 이 땅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훨씬 깊은 이해와 지각이 우리에게 열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AC.182-189를 읽으면서 목사님께서 자주 감탄하셨듯이, 주님께서는 인간을 한 번에 완성시키시는 분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인도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마5:37)Let your communication be Yea,yea;nay,nay;for whatsoever is more than these cometh of evil(Matt. 5:37). (AC.202)
AC.202에서 스베덴보리가 마5:37을 인용하는 이유는, 천적 인간과 천적 천사들의 지각(perception)이 어떠한 것인지를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구절은 흔히 정직한 언어생활이나 맹세를 금하는 말씀으로 읽히지만, 스베덴보리는 그보다 훨씬 깊은 차원에서 이해합니다.
AC.202의 문맥을 보면, 그는 태고교회 사람들과 가장 내적인 천적 천사들은 신앙에 대해 추론하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그들은 어떤 진리가 참인지 거짓인지 알기 위해 논쟁하거나 증명하거나 논리를 쌓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랑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직접 지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것이 참이면 곧바로 ‘그렇다’로 알고, 참이 아니면 곧바로 ‘아니다’로 압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옳다 옳다,아니라 아니라 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천적 상태의 특징으로 이해합니다. 여기서 ‘옳다’와 ‘아니라’는 단순한 대답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내적 확신의 표현입니다. 즉, ‘나는 이것을 증명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지각해서 안다’는 상태입니다.
반대로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난다’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스베덴보리의 문맥에서는, 천적 인간이 신앙의 문제를 감각과 기억 지식으로 논증하려고 할 때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랑 안에서 이미 지각되는 것을 굳이 추론의 대상으로 끌어내리면, 그는 천적 상태에서 영적 상태로, 더 나아가 감각적 상태로 내려가게 됩니다. 그래서AC.202는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만지지 말라’고 하신 이유를 바로 여기에서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주님은 사랑이시다’라는 것은 오늘날 신학 명제처럼 토론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살아 있는 실재로 지각했습니다. 따라서 ‘정말 그런가?’,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하고 논쟁하기 시작하는 순간, 이미 더 낮은 단계로 내려온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런 추론 자체를 피했습니다.
이 점에서AC.202는AC.195-196과도 연결됩니다. 앞에서는 감각적 인간이 신앙의 신비를 추론으로 판단하려 하다가 뱀의 독에 물리는 상태를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반대편에 있는 천적 인간의 상태를 보여 줍니다. 그는 추론을 통해 진리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진리를 지각합니다.
물론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생각하지 말라’거나 ‘이성을 사용하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대부분의 현대인은 영적 인간의 길을 걷는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말씀을 배우고, 이해하고, 숙고하고, 이성을 사용해야 합니다. 다만AC.202는 그보다 더 높은 상태, 곧 태고교회와 천적 천사들의 상태를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한 이유는, 천적 인간이 진리를 대하는 방식이 어떠한지를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에게 진리는 토론의 결론이 아니라 퍼셉션의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언어는 ‘옳다’ 또는 ‘아니다’로 충분했습니다. 그 이상으로 끝없는 논증과 추론이 필요해지는 것은 이미 퍼셉션이 약해진 상태를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결국AC.202에서 마5:37은 단순한 언어 윤리의 말씀이 아니라, 태고교회와 천적 천사들의 내적 상태를 보여 주는 말씀으로 사용됩니다. 그들은 사랑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진리를 즉시 지각하기 때문에 ‘옳으’면 옳고, ‘아니’면 아닙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천적 상태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것입니다.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And the woman said unto the serpent, We may eat of the fruit of the tree of the garden; But of the fruit of the tree which is in the midst of the garden, God hath said, Ye shall not eat of it, neither shall ye touch it, lest ye die. (창3:2, 3)
AC.202
태고교회, 곧 천적 인간은 단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eating of the tree of knowledge), 곧 신앙에 속한 것을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 지식들로부터 배우는 것을 삼갔을 뿐만 아니라, 그 나무를 만지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는데, 이는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 지식들로부터 신앙에 속한 어떤 것이라도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들은 천적 생명에서 영적 생명으로, 그리고 그 아래로 내려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삶은 천적 천사들의 삶도 그러한데, 그들 가운데서 더욱 내적으로 천적인 이들은 ‘신앙’이라는 말조차도 듣기를 허용하지 않으며, 영적인 것에 속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견디지 못합니다. 만일 다른 이들에 의해 그런 말이 언급되면, 그들은 신앙 대신 사랑의 지각(a perception of love)을 가지게 되는데, 그 차이는 그들 자신만이 압니다. 이처럼 그들은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을 사랑과 체어리티(charity)로부터 얻게 됩니다. 더더욱 그들은 신앙에 대한 어떤 추론(reasoning)도 듣기를 견디지 못하며, 특히 그것에 관한 어떤 기억 지식의 말은 더욱 견디지 못합니다. 이는 그들이 사랑을 통해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을 가지기 때문이며, 이 퍼셉션으로부터 어떤 것이 그러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즉시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에 관해 무엇이든 말을 하면, 그들은 단순히 그것이 그렇다거나 그렇지 않다고만 대답하는데, 이는 그들이 그것을 주님으로부터 지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마태복음에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was a celestial man, was of such a character as not only to abstain from “eating of the tree of knowledge,” that is, from learning what belongs to faith from sensuous things and memory-knowledges, but was not even allowed to touch that tree, that is, to think of anything that is a matter of faith from sensuous things and memory-knowledges, lest they should sink down from celestial life into spiritual life, and so on downward. Such also is the life of the celestial angels, the more interiorly celestial of whom do not even suffer faith to be named, nor anything whatever that partakes of what is spiritual; and if it is spoken of by others, instead of faith they have a perception of love, with a difference known only to themselves; thus whatever is of faith they derive from love and charity. Still less can they endure listening to any reasoning about faith, and least of all to anything of memory-knowledge respecting it; for, through love, they have a perception from the Lord of what is good and true; and from this perception they know instantly whether a thing is so, or is not so. Therefore when anything is said about faith, they answer simply that it is so, or that it is not so, because they perceive it from the Lord. This is what is signified by the Lord’s words in Matthew: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마5:37) Let your communication be Yea, yea; nay, nay; for whatsoever is more than these cometh of evil (Matt. 5:37).
의 의미입니다. 이것이 곧 그들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만지지 말라는 뜻이었는데, 만일 그것을 만졌다면 그들은 악 안에 있게 되었을 것이며, 곧 그 결과로 ‘죽었을’(die)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적 천사들도 다른 천사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주제에 대해 서로 대화하지만, 그것은 사랑으로부터 형성되고 파생된 천적 언어로 이루어지며, 영적 천사들의 언어보다 더욱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것입니다. This then is what was meant by their not being allowed to touch the fruit of the tree of knowledge; for if they touched it, they would be in evil, that is, they would in consequence “die.” Nevertheless the celestial angels converse together on various subjects like the other angels, but in a celestial language, which is formed and derived from love, and is more ineffable than that of the spiritual angels.
해설
이 단락은 ‘만지지도 말라’는 금지가 얼마나 철저한 의미를 지니는지를 가장 극단적인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태고교회의 천적인 사람들에게 금지된 것은 잘못된 결론이나 오류가 아니라, 신앙을 감각과 기억 지식의 영역으로 끌어내리는 사고방식 그 자체였습니다. 그들은 신앙의 내용을 감각적으로 검토하거나 지적으로 다루는 단계로 내려가는 것 자체가 곧 생명의 차원 하락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천적 생명에서 영적 생명으로 내려간다’는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중립적 변화로 보지 않습니다. 태고교회에게는 영적인 단계조차도 이미 하강이었으며, 그 아래로 더 내려갈 위험의 시작이었습니다. 이는 오늘날 인간의 기준과는 완전히 다른 관점이며, 바로 이 점 때문에 태고교회의 성향이 현대인에게 거의 이해되지 않는다고 앞 단락에서 말한 것입니다.
천적 천사들의 삶에 대한 설명은 이 상태가 단지 역사적 과거가 아니라, 지금도 하늘에서 살아 있는 질서임을 보여 줍니다. 더욱 내적으로 천적인 천사들은 ‘신앙’이라는 말조차 허용하지 않는데, 이는 신앙을 부정해서가 아니라, 그들에게는 신앙이 개념이나 고백이 아니라 사랑의 퍼셉션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말로 분리해 부르는 순간, 이미 그들의 생명 방식과 어긋나게 됩니다.
그들이 신앙 대신 ‘사랑의 퍼셉션’(perception of love)을 가진다는 설명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신앙과 사랑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를 뜻하며, 진리는 언제나 사랑 안에서 즉각적으로 인식됩니다. 이 차이는 외부에서는 거의 구별할 수 없고, 오직 그들 자신만이 압니다. 이는 퍼셉션의 어떠함이 언어로 완전히 전달될 수 없다는 점을 암시합니다.
이 때문에 천적 천사들은 신앙에 대한 추론(reasoning, 이성질)을 견디지 못합니다. 추론은 진리를 외부에서 판단하려는 시도이며, 그들에게 진리는 이미 내적으로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기억 지식에 근거한 신앙 논의는 그들에게 거의 폭력에 가까운 것으로 느껴집니다. 이는 진리가 부정확해서가 아니라, 그 접근 방식 자체가 생명의 질서를 해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그들의 응답은 매우 단순합니다. ‘그렇다’ 혹은 ‘그렇지 않다’입니다. 이는 무지의 표시가 아니라, 완전한 퍼셉션의 결과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는 말씀은 바로 이러한 천적 상태를 가리키며, 그 이상을 덧붙이려는 모든 시도는 이미 악으로부터 난 것이라고 설명됩니다. 여기서 ‘악’은 도덕적 악이 아니라, 질서를 벗어난 사고 작용을 뜻합니다.
‘만지지 말라’는 명령의 참된 의미는 여기서 분명해집니다. 그것은 신앙을 탐구하지 말라는 금지가 아니라, 신앙을 감각과 지식의 대상으로 취급하지 말라는 절대적 경계선이었습니다. 만일 그 경계선을 넘는 순간, 그들은 천적 생명에서 떨어져 나가게 되며, 그것이 바로 ‘죽음’으로 표현됩니다.
마지막으로 천적 천사들의 대화에 대한 언급은 오해를 방지합니다. 그들은 침묵 속에만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들도 다른 천사들처럼 풍부한 대화를 나누지만, 그 언어는 사랑에서 직접 형성된 천적 언어이며, 영적 천사들의 언어보다 훨씬 더 말로 옮길 수 없는 성격을 가집니다. 이는 진리의 가장 깊은 차원은 언제나 사랑의 언어로만 표현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AC.202는 결국, 창3의 금지가 단순한 도덕 규율이 아니라, 생명의 차원을 보존하기 위한 가장 깊은 영적 경계였음을 밝힙니다. 그리고 동시에 오늘날 인간의 신앙 구조가 왜 더 이상 천적일 수 없는지를,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질서 안에 보존될 수 있는지를 대비적으로 보여 주는 결정적 단락입니다.
음...이런 결론은 좀 위험할 것 같아요.다른 기독교인들이 이 결론을 읽으면 몹시 힘들어할 것 같은데요?
네, 목사님 말씀에 일리가 있습니다. 사실 방금의 결론은 스베덴보리의 해석 체계 안에서는 자연스럽지만, 일반 기독교 독자들에게는 상당히 충격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기독교 전통에서는 창1-11을 적어도 일정 부분은 실제 인류의 원역사(原歷史)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해석의 방식에는 차이가 있어도, 아담, 노아, 바벨 사건 등을 인류 전체와 관련된 사건으로 읽는 경향이 강합니다. 따라서 ‘창1-11은 인류 전체의 역사가 아니라 교회의 역사이다’라고 단정적으로 말하면 많은 분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워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스베덴보리 자신도 창1-11이 ‘교회의 역사’라고 설명하면서, 그것이 인류 전체와 무관하다고 말한 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교회의 상태가 인류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그래서 좀 더 신중하게 표현한다면 이렇게 말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창1-11의 주된 관심이 정치사나 문명사가 아니라 교회의 영적 상태에 있다.따라서 그는 이 본문을 인류 전체의 외적 역사라기보다 교회의 영적 역사로 해석한다.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인류 전체와 무관하다는 뜻은 아니다.’
이 표현은 훨씬 안전합니다.
사실AC를 읽다 보면 스베덴보리는 역사적 문제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가 관심을 갖는 것은 언제나 ‘그 사건이 교회의 상태를 어떻게 보여 주는가?’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담은 없었다’, ‘노아는 없었다’, ‘인류 전체와 무관하다’ 같은 결론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지도 않습니다.
목사님께서 우려하시는 이유도 이해됩니다. 만약 어떤 개신교 목사님이나 신학생이 ‘창1-11은 인류 전체가 아니라 교회만의 이야기다’라는 문장을 읽는다면, 상당한 거부감을 느낄 가능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역사성 자체를 부정하는 주장으로 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창1-11에 대해 스베덴보리적으로 설명할 때는 ‘인류 전체에게 적용하는 것은 무리다’라고 말하기보다, ‘스베덴보리는 이 본문을 인류 전체의 역사보다 교회의 영적 상태를 드러내는 말씀으로 더 중요하게 읽는다’ 정도로 표현하는 것이 더 균형 잡혀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AC를 계속 읽어 가면, 스베덴보리의 관심은 언제나 ‘그 시대 사람들이 실제로 몇 명이었는가?’보다 ‘그 시대 교회가 어떤 영적 상태였는가?’에 있습니다. 이것은 역사 부정이 아니라 관심의 중심 이동입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느끼신 불편함은 매우 건강한 감각이라고 생각합니다.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설명할 때는, 그의 독특한 관점을 충분히 드러내면서도 기존 기독교 독자들이 불필요하게 ‘성경 역사를 부정한다’고 오해하지 않도록 표현을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결국 더 정확한 결론은 이럴 것 같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창1-11을 읽을 때,인류 전체의 외적 역사보다 교회의 영적 역사에 초점을 둔다.그러나 그 영적 역사는 결국 인류 전체와도 연결되며,무엇보다 우리 각 사람의 영적 삶에도 적용된다.’
이 정도라면 스베덴보리의 의도도 살리고, 다른 기독교 전통과의 불필요한 충돌도 줄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창세기,특히1-11내용을 인류 전체에게 적용하는 건 좀 무리가 있겠네요. ‘교회’를 향한 말씀이니까요!
네, 바로 그 점이 스베덴보리의 창세기 해석에서 매우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보통 우리는 창세기1-11장을 읽을 때 무의식적으로 ‘인류 전체의 역사’로 읽습니다. 그래서 아담은 인류 최초의 개인, 에덴은 인류 최초의 거주지, 가인은 인류 최초의 살인자, 노아 홍수는 인류 전체의 역사적 사건으로 이해합니다. 물론 문자적으로 읽으면 자연스러운 접근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훨씬 다른 관점에서 읽습니다. 그에게 창세기1-11장은 무엇보다 ‘교회의 역사’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주님과 연결되어 있던 교회가 어떻게 시작되고, 어떻게 쇠퇴하고, 어떻게 무너지고, 어떻게 다시 보존되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아담은 단순히 한 개인이 아니라 태고교회를 의미하고, 가인은 태고교회 안에서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분리되기 시작한 상태를 의미하며, 노아는 홍수 이후 보존된 새로운 교회를 의미합니다. 중심은 언제나 인류 전체가 아니라 ‘교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목사님 말씀처럼 창1-11을 곧바로 지구상의 모든 사람에게 적용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해석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실제로AC를 읽어보면, 스베덴보리는 반복해서 ‘교회’에 초점을 맞춥니다. 왜냐하면 말씀은 주님과 인간의 관계를 다루는 책이며, 그 관계가 가장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곳이 바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를 덧붙여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창1-11이 교회 사람들에게만 해당되고, 나머지 인류와는 전혀 상관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에게 ‘교회’는 언제나 인류 전체를 위한 통로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태고교회는 당시 모든 인류가 아니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를 통해 천국과 인간 세계가 연결되었고, 그 결과 교회 밖 사람들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습니다. 마치 심장이 몸 전체는 아니지만, 몸 전체에 생명을 공급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창1-11은 직접적으로는 교회의 역사이지만, 간접적으로는 인류 전체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상태가 결국 인류 전체의 영적 상태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스베덴보리가 창1-11을 해석할 때 ‘교회의 역사’로만 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개인의 영적 역사’로도 읽습니다. 예를 들어, 아담의 창조는 한 사람 안에서 새로운 영적 생명이 시작되는 과정이기도 하고, 선악과 사건은 우리 각자가 자기own을 사랑하기 시작하는 과정이기도 하며, 홍수는 우리 안에서 거짓과 악이 범람하는 상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창1-11은 세 겹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교회의 역사입니다. 둘째는 한 인간의 영적 역사입니다. 셋째는 천국과 인간 사이의 보편적 영적 원리입니다.
따라서 목사님 말씀이 맞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창1-11을 곧바로 ‘인류 전체의 외적 역사’로 읽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습니다. 오히려 그 중심은 교회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교회의 역사는 우리 각자의 영혼 안에서도 반복되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는 결국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말씀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라면 아마 이렇게 말할 것 같습니다. 창1-11은 ‘모든 사람이 무엇을 했는가’를 기록한 책이 아니라, ‘주님과 연결된 인간이 어떤 길을 걸어왔는가’를 기록한 책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교회의 역사이면서 동시에 우리 각자의 영적 역사이기도 한 것입니다.
태고교회 시대에는 천적 상태가 인류 전체의 일반적인 상태에 가까웠지만,(AC.201심화1)
전에 언젠가 제가‘태고교회도 지금처럼 그 시대 인류 중 일부를 가리키는 거죠?비록 태고 시대라 해도 그 시대 인류 전체가 태고교회는 아닌 거죠?’라고 물었더니‘그렇습니다’라는 대답을 들었던 것 같은데...그러면 위 내용과 충돌하는 거 아닌가요?
좋은 질문입니다. 사실 이 둘은 반드시 충돌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표현을 조금 더 정확하게 할 필요는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태고교회’(Most Ancient Church)는 언제나 ‘인류 전체’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말씀에서 ‘교회’란 특정 조직이나 국가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알고 주님과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태고교회 역시 당시 지상에 존재하던 모든 인간을 가리키는 말은 아닙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는 여러 곳에서 교회가 있는 곳과 교회가 없는 곳을 구분합니다. 태고교회 시대에도 주님과 연결된 사람들이 있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목사님께서 전에 질문하셨을 때의 ‘그 시대 인류 전체가 태고교회는 아니다’라는 답변은 맞습니다.
그렇다면 왜 ‘태고교회 시대에는 천적 상태가 인류 전체의 일반적인 상태에 가까웠다’는 표현이 나왔을까요?
엄밀히 말하면 그 표현은 ‘인류 전체’보다 ‘교회 전체’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즉, 태고교회에 속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천적 상태가 일반적이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태고교회라는 공동체 자체가 천적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 개신교 안에도 신앙 수준이 매우 다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양심을 통한 신앙’, ‘말씀을 배우는 신앙’이 일반적입니다. 마찬가지로 태고교회 안에도 개인차는 있었겠지만, 전체적인 성향은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지각하는 천적 성향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정확하게 말하면, ‘태고교회 시대에는 태고교회에 속한 사람들에게 천적 상태가 일반적이었다’가 됩니다. 반면 홍수 이후의 교회들에서는 영적 상태가 일반적이 되었습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스베덴보리가 태고교회를 말할 때, 종종 거의 인류 전체를 대표하는 것처럼 말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태고교회의 영향력이 매우 광범위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 동일한 상태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사실AC를 계속 읽다 보면 태고교회 안에서도 점차 쇠퇴가 일어납니다. 가인 계열, 셋 계열, 라멕, 그리고 결국, 노아 이전 세대로 이어지는 흐름을 보면, 이미 태고교회 내부에서도 상태의 차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만일 모든 사람이 동일한 상태였다면, 그런 구분 자체가 나타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목사님께서 기억하시는 이전 답변과AC.201의 설명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태고교회는 당시 인류 전체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나 태고교회에 속한 사람들의 일반적 성향은 천적 성향이었다.’
‘홍수 이후에는 그러한 천적 성향이 일반적이지 않게 되었고,대신 영적 성향이 일반적이 되었다.’
이렇게 이해하면 두 설명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전체 사상을 따라가면, 주님께서는 어느 시대든 ‘남은 자’(remnant)를 보존하십니다. 태고교회 시대에도 교회 밖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고, 오늘날에도 천적 성향에 가까운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시대나 집단 자체보다, 주님께서 각 사람 안에 어떤 사랑과 어떤 상태를 형성하고 계시는가입니다.
그래서AC.201의 핵심은 ‘그 시대 모든 사람이 천적이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태고교회라는 교회의 본질적 성향이 천적이었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아마 가장 균형 잡힌 이해일 것 같습니다.
천적(celestial)이라 불리는 천사들과 천사적 영들(angelic spirits)이 홍수 이전에 거듭났던 태고 사람들과 같은 성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며,the angels and angelic spirits who are called celestial are of the same genius as the most ancient people who were regenerate before the flood; (AC.201)
위 내용은,그러면 지금은 더 이상 천적 천사가 될 수 없다는 말인가요?천적 천사는 오직 홍수 이전 사람들로만 구성되어 있다는 말인가요?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결코 ‘천적 천사는 홍수 이전 사람들만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AC.201의 뜻은 ‘홍수 이전 태고교회 사람들의 성향(genius)이 오늘날 천적 천사들의 성향과 같다’는 것이지, 천적 천국의 구성원이 모두 홍수 이전 사람들뿐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출신 시대’가 아니라 ‘성향’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 사람들을 설명하면서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지각하는 존재들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천적 천사들도 마찬가지로 사랑 안에서 진리를 지각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그는 둘을 연결하는 것입니다. 즉, 태고교회 사람들과 천적 천사들은 같은 종류의 내적 구조를 가진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는 여러 곳에서 천국은 계속 채워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천국의 천사들은 모두 한때 지상에서 살던 인간들이며, 지금도 사람들이 죽어 천국에 들어간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천적 천국 역시 홍수 이전 사람들만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다만 여기에는 한 가지 흥미로운 문제가 있습니다. 태고교회 시대에는 천적 상태가 인류 전체의 일반적인 상태에 가까웠지만, 홍수 이후에는 그런 상태가 매우 드물어졌다는 점입니다. 인간 구조 자체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대부분의 사람들은 양심(conscience)을 통해 인도되는 영적 인간의 길을 걷게 되었고, 직접 지각(perception)을 통해 인도되는 천적 인간은 매우 드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 독자들 가운데는 ‘오늘날 천적 천사가 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고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불가능하다’고 이해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에는 여전히 천적 천국이 존재하고, 그 천국은 계속 살아 있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종합하면, 천적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시대가 아니라 사랑의 질에 의해 결정됩니다. 즉, 주님 사랑이 삶의 중심이 되고, 선을 사랑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본성이 된 사람들입니다. 물론 이런 상태는 매우 높은 상태이므로 흔하지는 않습니다.
목사님께서 지금 궁금해하시는 핵심은 아마 이런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인간 구조가 홍수 이후 바뀌었다면,태고교회와 같은 천적 상태는 이제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것 아닌가?’
여기에 대해서는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고 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태고교회 전체가 가졌던 집단적 천적 상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개별 인간이 천적 사랑 안으로 인도되는 것은 여전히 가능합니다. 다만 그 과정은 태고교회 사람들처럼 태어날 때부터 그런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 아래 매우 깊은 거듭남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AC.201의 문장은 ‘천적 천사는 홍수 이전 사람들뿐이다’라는 뜻이 아니라, ‘홍수 이전 태고교회 사람들의 성향을 이해하고 싶다면 오늘날 천적 천사들을 생각하면 된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습니다.
그리고 목사님께는 오히려 조금 위로가 되는 사실도 있습니다.AC.182-189를 보면 주님께서는 죽은 직후의 모든 사람을 먼저 천적 천사들에게 맡기십니다. 이것은 그 사람이 최종적으로 천적 천국에 갈지, 영적 천국에 갈지를 떠나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 천적 상태는 인간에게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천국의 가장 깊은 보호와 사랑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AC.201은 ‘천적 시대는 끝났다’는 선언이 아니라, ‘천적 삶의 원형은 지금도 천국 안에 살아 있다’는 증언에 더 가깝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천사들과 천사적 영들’(the angels and angelic spirits) (AC.201)
AC.201에 나오는 ‘천사들과 천사적 영들’(the angels and angelic spirits)이라는 표현은 스베덴보리의 영계 이해에서 매우 중요한 구분입니다. 얼핏 보면 둘 다 천사를 가리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서로 다른 상태를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천사’(angels)는 이미 천국의 한 공동체에 완전히 결합되어 그곳의 삶을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그들의 내적 상태와 외적 삶은 하나로 일치되어 있으며, 천국의 질서 안에 안정적으로 정착해 있습니다. 그래서 보통 우리가 말하는 ‘천사’는 이런 존재들을 가리킵니다.
반면 ‘천사적 영들’(angelic spirits)은 아직 완전한 천사가 되지는 않았지만, 이미 천국을 향해 준비되고 있는 영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지옥의 성향이 제거되고, 천국적 상태가 형성되고 있으며, 천국 공동체와 교류하고 천사들과 함께 지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직 최종적으로 특정 천국 공동체에 완전히 결합된 상태는 아닙니다.
쉽게 말하면, 천사는 이미 천국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고, 천사적 영은 그 시민권을 받기 직전의 상태에 있는 사람이라고 비유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완전한 비유는 아니지만 이해에는 도움이 됩니다.
특히,AC.201의 문맥에서는 이 구분이 더욱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 사람들의 성향(genius)과 비슷한 존재들로 ‘천적 천사들과 천적 천사적 영들’을 언급하고, 홍수 이후 영적 교회의 성향과 비슷한 존재들로 ‘영적 천사들과 영적 천사적 영들’을 언급합니다. 즉, 그는 단순히 천국에 있는 완성된 천사들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비슷한 성향을 가진 영들까지 함께 포함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스베덴보리의 영계에서는 ‘천사’와 ‘인간’ 사이에 절대적인 종족 차이가 없다는 점입니다. 천사는 원래 천사로 창조된 존재가 아니라, 지상에서 살다가 천국에 들어간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천사적 영도 결국은 우리와 같은 인간입니다. 단지 아직 천국 생활의 완전한 상태에 도달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종종 ‘천사들과 천사적 영들’이라는 표현을 함께 사용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주제를 설명할 때, 완성된 천사들뿐 아니라, 그들과 비슷한 상태에 있는 영들도 함께 포함되기 때문입니다.AC.201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성향과 홍수 이후 영적 성향을 설명하면서, 그와 상응하는 존재들로 천사들뿐 아니라 천사적 영들까지 함께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표현을 읽을 때,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천국이 단번에 도달하는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는 사실도 엿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영계에는 천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천사가 되어 가는 존재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천사적 영’이라는 표현 자체가 천국이 성장과 준비, 완성의 과정을 포함하는 세계임을 보여 줍니다.
결국AC.201의 ‘천사들과 천사적 영들’은 단순한 반복 표현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천국에 정착한 존재들과, 천국을 향해 준비되고 있는 존재들을 함께 가리키는 말이며, 동시에 인간이 사후에 거쳐 가는 점진적 성장의 질서를 보여 주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And the woman said unto the serpent, We may eat of the fruit of the tree of the garden; But of the fruit of the tree which is in the midst of the garden, God hath said, Ye shall not eat of it, neither shall ye touch it, lest ye die. (창3:2, 3)
AC.201
그러므로 홍수 이전 태고 사람들의 그러한 성향(genius)은 오늘날에는 찾아볼 수도 없고, 존재하지도 않기 때문에, 이 구절의 말씀들이 본래의 의미에서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아듣게 설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하늘에서는 완전히 이해되는데, 이는 천적(celestial)이라 불리는 천사들과 천사적 영들(angelic spirits)이 홍수 이전에 거듭났던 태고 사람들과 같은 성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며, 또한 영적(spiritual)이라 불리는 천사들과 천사적 영들은 홍수 이후에 거듭난 사람들과 유사한 성향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두 경우 모두 무한한 다양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Seeing therefore that such a genius as that of the most ancient people anterior to the flood is not found and does not exist at the present day, it is no easy matter to explain intelligibly what the words of this passage in their genuine sense imply. They are, however, perfectly understood in heaven, for the angels and angelic spirits who are called celestial are of the same genius as the most ancient people who were regenerate before the flood; while the angels and angelic spirits who are termed spiritual are of a similar genius to the regenerate after the flood, although in both cases with indefinite variety.
해설
이 단락은 스베덴보리 해석 전체에 대한 중요한 인식론적 전제를 분명히 합니다. 곧, 성경의 어떤 구절들은 오늘날 인간의 의식 구조 안에서는 ‘완전히’ 이해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성향(genius) 자체가 이미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홍수 이전 태고 사람들의 성향은 오늘날 인간에게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들의 내적 경험을 전제로 기록된 말씀은 현대인의 사고방식으로는 온전히 번역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해석의 한계를 솔직하게 인정합니다. 이 본문을 설명하는 일이 ‘쉽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주석자의 무능이 아니라 인간 상태의 변화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인간은 선으로부터 진리를 보는 방식이 아니라, 진리를 통해 선을 배우는 방식으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태고교회의 언어와 경험을 직접적으로 공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이해의 한계는 하늘에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늘의 천사들은 여전히 그 성향이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천적 천사들과 천사적 영들은 홍수 이전에 거듭났던 태고 사람들과 같은 성향을 지니고 있으며, 그들에게는 이러한 말씀의 의미가 즉각적으로 이해됩니다. 이는 하늘의 이해 방식이 문자 해석이나 논리적 추론이 아니라, 상태와 성향의 직접적 공명임을 뜻합니다.
반대로 영적이라 불리는 천사들과 천사적 영들은 홍수 이후에 거듭난 인간들과 유사한 성향을 지닙니다. 이들은 진리를 통해 선으로 나아가는 구조 안에 있으며, 오늘날 인간의 신앙 구조와 더 가깝습니다. 따라서 하늘 안에서도 이해 방식에는 층위가 있으며, 모두가 동일한 방식으로 말씀을 이해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베덴보리는 두 부류 모두에 ‘무한한 다양성’이 있다고 덧붙입니다. 이는 천적과 영적이라는 구분이 경직된 분류가 아니라, 살아 있는 스펙트럼임을 뜻합니다. 하늘은 획일적이지 않으며, 각자의 성향과 삶의 역사에 따라 이해와 지각의 방식이 무수히 다양하게 존재합니다.
AC.201은 결국, 왜 스베덴보리가 창세기의 내적 의미를 이렇게까지 세밀하게 설명해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말씀은 동일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구조는 시대에 따라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태고교회의 언어를 직접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중개와 해설이 필요해졌습니다. 이 단락은 스베덴보리의 작업 자체가 인간의 상실된 성향을 대신하는 ‘번역’의 사역임을 조용히 드러냅니다.
영계 체험을27년 동안이나 하면서 이 엄청난 저작들을 남길 정도면,우리는 보통 생각하기를,지상에서 궁금했던 모든 것,곧 지구의 생성과 지난45억 년의 과정,그리고 성경 고대사 등을 그냥 다 알게 되겠지 합니다.그런데 여전히 아니거나 알았어도 주님의 허락이 없었거나인 것 같네요.
네, 목사님. 저도 스베덴보리를 오래 읽다 보면 바로 그 지점이 오히려 인상적으로 느껴집니다.
보통 사람들은 스베덴보리가27년 동안 영계와 교통했다는 말을 들으면, 자연스럽게 ‘그러면 우주의 모든 비밀을 다 알았겠구나’, ‘지구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았겠구나’, ‘공룡은 왜 멸종했는지 알았겠구나’, ‘인류의 정확한 연대도 알았겠구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실제 저작들을 읽어보면 의외로 그렇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놀라울 정도로 절제되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보지 않은 것은 보았다고 하지 않고, 들은 적 없는 것은 들었다고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영계에 관한 이야기조차도 자신이 직접 경험한 범위 안에서만 말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입니다.
예를 들어, 그는 천국 공동체의 구조, 천사들의 삶, 사후 첫 상태, 중간 영계, 지옥의 본질, 거듭남의 과정, 말씀의 내적 의미 등에 대해서는 엄청난 분량으로 기록합니다. 그런데 현대인이 궁금해하는 많은 주제들, 곧 지구의 정확한 연대, 우주의 시작 방식, 선사시대의 세부 역사, 외계 문명 같은 것들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영계가 ‘모든 정보를 얻는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계는 본질적으로 ‘상태의 세계’입니다. 그곳에서 중요한 것은 사실(fact)의 양이 아니라 사랑과 진리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천사들도 모든 것을 아는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HH를 보면 천사들은 자신들이 무한히 모른다는 사실을 매우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주님의 섭리 때문일 수 있습니다. 설령 스베덴보리가 어떤 것을 보았더라도, 그것이 인류의 구원이나 거듭남과 직접 관련이 없다면 기록하도록 허락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실제로 그는 여러 곳에서 ‘알도록 허락되었다’, ‘말하도록 허락되었다’, ‘드러내도록 허락되었다’는 표현을 반복합니다. 이것은 자신이 본 것이라도 모두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인상을 줍니다.
생각해 보면 성경도 비슷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책인데, 정작 우리가 궁금해하는 과학적 세부 사항은 거의 말하지 않습니다. 창세기1장만 해도 우주의 생성 원리를 설명하는 과학 교과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과 하나님, 그리고 구원에 관한 책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도 비슷합니다. 그가 받은 계시는 인간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구원을 돕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이것이 오히려 스베덴보리 저작의 신뢰성을 높여 주는 면도 있습니다. 만일 그가 ‘나는 영계에서 지구의 모든 역사와 우주의 모든 비밀을 보았다’고 말했다면, 오히려 더 의심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평생 남긴 방대한 저작 속에서도 놀라울 정도로 주제를 제한합니다. 거의 언제나 주님, 천국, 인간의 영혼, 거듭남, 말씀의 내적 의미로 다시 돌아옵니다.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알았어도 주님의 허락이 없었거나’라는 표현이 저는 매우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의 글을 읽다 보면 ‘모른다’기보다 ‘말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추측의 영역일 뿐, 그는 그런 부분에 대해서도 침묵합니다.
결국 스베덴보리가27년 동안 영계를 드나들고도 우리에게 남긴 것은 지구45억 년의 역사 연표가 아니라, ‘사람은 왜 죽지 않는가’, ‘천국은 어떤 곳인가’, ‘주님은 어떻게 인간을 인도하시는가’, ‘말씀은 무엇을 말하는가’ 같은 질문들입니다.
어쩌면 이것 자체가 하나의 메시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세상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를 알고 싶어 하지만, 주님께서는 먼저 ‘너는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를 알기를 원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영계 체험은 우주의 비밀을 푸는 방향보다 인간 영혼의 비밀을 푸는 방향으로 집중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AC를 비롯한 방대한 저작들인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