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And Abel, he also brought of the firstlings of his flock, and of the fat thereof; and Jehovah looked to Abel, and to his offering. (4:4)

 

AC.350

 

여기서아벨’(Abel)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체어리티를 상징합니다. ‘ 떼의 처음 ’(firstlings of the flock, ‘양의 첫 새끼’) 거룩한 것을 상징하는데, 그것은 오직 주님께만 속한 것입니다. ‘기름진 (fat, ‘기름’) 천적인 자체를 상징하며, 이것 역시 주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리고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셨다’(Jehovah looking unto Abel, and to his offering,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것은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과 체어리티에 기초한 모든 예배가 주님을 기쁘시게 했음을 뜻합니다. ByAbelhere as before is signified charity; and by thefirstlings of the flockis signified that which is holy, which is of the Lord alone; byfatis signified the celestial itself, which also is of the Lord; and byJehovah looking unto Abel, and to his offering,” that the things of charity, and all worship grounded in charity, were well-pleasing to the Lord.

 

해설

 

AC.350은 창4:4의 ‘아벨은 자기도 양의 새끼와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라는 말씀의 속뜻을 간결하게 요약합니다. 바로 앞 AC.346-349가 가인의 ‘땅의 소산’과 ‘제물’을 통하여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행위와 거기서 나오는 예배를 설명했다면, 이제 아벨의 제물에서는 그와 정반대되는 예배가 나타납니다. 곧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살아 있는 예배입니다.

 

먼저 ‘아벨’은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체어리티를 상징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벨이 단순히 ‘선한 사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가인이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나타내는 것과 대응하여, 아벨은 신앙의 생명이 되어야 할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가인과 아벨의 두 제물은 두 사람이 서로 다른 물건을 하나님께 드린 사건을 넘어, 서로 다른 내적 근원에서 나오는 두 종류의 예배를 보여 줍니다.

 

떼의 처음 ’에서 ‘처음 ’은 거룩한 것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에 매우 중요한 말을 덧붙입니다. 그 거룩한 것은 ‘오직 주님께만 속한 ’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자기에게서 거룩한 것을 만들어 내어 주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인간 안에 있는 참된 선과 사랑, 체어리티와 신앙의 생명은 그 근원이 모두 주님에게 있습니다.

 

따라서 아벨이 ‘ 떼의 처음 ’을 드렸다는 말씀에는 참된 예배의 중요한 고백이 들어 있습니다. ‘내가 주님께 드리는 선도 본래 주님에게서 받은 것입니다.’ 사람은 그것을 자신의 자유 안에서 받아들이고 살아내며 주님께 돌려드리지만, 그 선의 최초 근원은 자신에게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참된 예배에서 인간의 공로가 배제되어야 하는 이유와도 연결됩니다. 선을 행하면서 그것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면 자기 의가 들어오지만, 그것이 주님에게서 왔음을 인정하면 감사와 겸손의 예배가 됩니다.

 

이어지는 ‘기름진 ’(fat)은 ‘천적인 자체’(the celestial itself)를 상징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적인 ’은 가장 깊은 의미에서 사랑의 선과 관련됩니다. 따라서 아벨이 양 떼의 처음 난 것과 그 기름진 것을 드렸다는 것은 단순히 좋은 품질의 제물을 골라 드렸다는 뜻을 넘어, 주님에게서 오는 거룩한 것과 사랑의 선으로 예배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여기서도 스베덴보리는 ‘이것 역시 주님께 속한 ’이라고 다시 강조합니다. ‘처음 ’도 주님의 것이고 ‘기름진 ’도 주님의 것입니다. 짧은 한 문장 안에서 같은 원리를 두 번 반복하는 셈입니다. 참된 예배에서 거룩함의 근원도 주님이고, 사랑의 선의 근원도 주님입니다. 인간은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마치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낸 것처럼 주님께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은 선을 인정하고 그것에 따라 살아가며 다시 주님께 돌려드립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349의 원리와 정확하게 이어집니다. 거기서 스베덴보리는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들로부터 생명을 얻으며, 그것들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생명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이제 아벨의 제물은 그 원리를 실제로 보여 줍니다. 외적으로는 양 떼의 처음 난 것과 기름진 것을 드렸지만, 그 외적 제물의 내적 생명은 체어리티와 천적인 선에 있고, 그 모든 것의 생명은 다시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셨다’는 말씀 역시 주님께서 어떤 물질적인 제물을 다른 제물보다 선호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과 체어리티에 기초한 모든 예배가 주님을 기쁘시게 했다’는 뜻으로 풀이합니다. 주님께서 돌아보신 것은 제물의 외형보다 그 제물 안에 있는 체어리티입니다.

 

여기서 특히 ‘체어리티에 기초한 모든 예배’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참된 예배는 체어리티와 별개의 종교 행위가 아닙니다. 예배와 삶이 분리되어 한쪽에서는 하나님을 섬기고 다른 한쪽에서는 이웃을 향한 사랑 없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향한 선과 사랑이라는 내적 생명이 예배 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그래서 체어리티는 단지 예배 외에 추가되는 하나의 덕목이 아니라 예배를 살아 있게 하는 내적 토대입니다.

 

이 점에서 가인의 제물과 아벨의 제물의 차이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둘 다 여호와께 제물을 드렸습니다. 따라서 차이는 ‘예배를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가 아닙니다. 가인의 제물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왔고, 아벨의 제물은 체어리티에서 나왔습니다. 외적으로는 둘 다 예배였지만 내적으로는 생명의 근원이 달랐던 것입니다.

 

AC.348-350을 함께 놓으면 매우 아름다운 질서가 보입니다. AC.348에서는 체어리티의 행위를 ‘살아 있는 열매’라고 했고, AC.349에서는 내적인 것이 외적인 예배에 생명을 주며 그 생명의 궁극적인 근원은 주님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AC.350에서는 바로 그 살아 있는 내적 예배가 아벨의 제물로 나타납니다. ‘체어리티체어리티의 행위체어리티에 기초한 예배’가 하나의 흐름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흐름의 처음과 끝에는 주님이 계십니다. 인간에게 체어리티를 주시는 분도 주님이고, 그 체어리티에서 선을 행할 수 있게 하시는 분도 주님이며, 그 선으로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하시는 분도 주님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예배는 인간이 자기 것을 주님께 바치는 것이라기보다,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주님의 것으로 인정하며 감사와 사랑으로 다시 돌려드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AC.350의 중심은 ‘ 아벨의 제물을 주님께서 받으셨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아벨이라는 개인을 편애하셨거나 양의 제물이 농산물보다 우월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아벨’은 체어리티를, ‘ 떼의 처음 ’은 주님께만 속한 거룩한 것을, ‘기름진 ’은 역시 주님께 속한 천적인 것을 나타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셨다’는 것은 체어리티에 속한 것과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예배가 주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보면 아벨의 제물은 참된 예배의 질서를 아주 짧고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선을 주님의 것으로 인정하고, 선을 체어리티의 삶으로 살아내며, 체어리티에서 주님을 예배하는 .’ 이것이 살아 있는 예배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가인의 예배와 아벨의 예배를 가르는 본질적인 차이입니다.

 

 

 

AC.349, 창4:3, ‘제물이 예배를 뜻하는 이유 - 외적 예배는 내적인 것으로부터 생명을 얻습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4:3) AC.349 ‘제물’(offering)이 예배를 뜻한다는 것은 유대교회의 표상들에서 분명합니다. 그 교회에서는 온갖 종류의 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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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3)

 

AC.349

 

제물’(offering) 예배를 뜻한다는 것은 유대교회의 표상들에서 분명합니다. 교회에서는 온갖 종류의 희생 제물뿐 아니라 땅과 모든 소산의 열매, 그리고 처음 것을 드리는 것도제물’(offerings)이라 불렀으며, 그들의 예배는 이러한 것들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은 천국적인 것들을 표상했고, 모두 주님을 가리켰으므로, 이러한 제물들이 참된 예배를 상징했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명합니다. 표상하는 실재가 없다면 표상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또는 내적인 것이 없는 외적 종교가 우상과 같은 , 죽은 외에 무엇이겠습니까?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들로부터 생명을 얻으며, 그것들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생명을 얻습니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표상교회의 모든 제물은 주님을 향한 예배를 상징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에 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앞으로 이어지는 글들에서 각각 자세히 다룰 것입니다. 일반적으로제물’(offerings) 예배를 뜻한다는 것은 선지서 전반에서도 분명합니다. 말라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That by anofferingis meant worship is evident from the representatives of the Jewish church, in which sacrifices of every kind, as well as the first fruits of the earth and of all its produce, and the oblation of the firstborn, were calledofferings,” in which their worship consisted. And as they all represented heavenly things, and all had reference to the Lord, it must be obvious to everyone that true worship was signified by these offerings. For what is a representative without the thing it represents? Or what is an external religion without an internal but a kind of idol and a thing of death? The external has life from things internal, that is, through these from the Lord. From these considerations it is evident that all the offerings of a representative church signify the worship of the Lord; and concerning these of the Lords Divine mercy we shall treat in particular in the following pages. That byofferingsin general is meant worship, is evident in the prophets throughout, as in Malachi:

 

2그가 임하시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3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하게 하는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되 ,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공의로운 제물을 여호와께 바칠 것이라 4 때에 유다와 예루살렘의 봉헌물이 옛날과 고대와 같이 여호와께 기쁨이 되려니와 (3:2-4) Who shall abide the day of his coming? He shall sit as a refiner and purifier of silver, and he shall purify the sons of Levi, and purge them as gold and silver, and they shall offer unto Jehovah an offering in righteousness. Then shall the offering of Judah and of Jerusalem be pleasant unto Jehovah, as in the days of eternity, and as in ancient years. (Mal. 3:24)

 

공의로운 제물’(offering in righteousness) 내적 제물이며, ‘레위 자손’(sons of Levi), 거룩하게 예배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드릴 것입니다. ‘옛날’(days of eternity) 태고교회를, ‘고대’(ancient years) 고대교회를 뜻합니다. 에스겔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Anoffering in righteousnessis an internal offering, which thesons of Levi,” that is, holy worshipers, will offer. Thedays of eternity,” signify the most ancient church, and theancient years,” the ancient church. In Ezekiel: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이 땅에 있어서 거룩한 이스라엘의 높은 산에서 나를 섬기리니 거기에서 내가 그들을 기쁘게 받을지라 거기에서 너희 예물과 너희가 드리는 열매와 너희 모든 성물을 요구하리라 (20:40) In the mountain of my holiness, in the mountain of the height of Israel, there shall all the house of Israel, all that land, worship me; there will I accept them, and there will I require your oblations, and the first fruits of your offerings, in all your sanctifyings. (Ezek. 20:40)

 

예물’(Oblations)너희가 드리는 열매와 너희 모든 성물’(first fruits of the offerings in the sanctifyings) 역시 주님으로 말미암아 체어리티로 거룩하게 행위를 뜻합니다. 스바냐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Oblationsand thefirst fruits of the offerings in the sanctifyingsare likewise works sanctified by charity from the Lord. In Zephaniah:

 

내게 구하는 백성들 내가 흩은 자의 딸이 구스 건너편에서부터 예물을 가지고 와서 내게 바칠지라 (3:10) From beyond the rivers of Ethiopia my suppliants shall bring mine offering. (Zeph. 3:10)

 

구스(Ethiopia) 천적인 것들, 사랑과 체어리티와 체어리티의 행위를 소유한 사람들을 뜻합니다. “Ethiopiadenotes those who are in possession of celestial things, which are love, charity, and the works of charity.

 

 

해설

 

AC.349AC.346에서 제시한 세 번째 표현, 곧 가인이 ‘여호와께 제물로 드렸다’는 말씀의 속뜻을 본격적으로 설명합니다. AC.346에서는 ‘제물’이 그 신앙에서 비롯된 ‘예배’를 뜻한다고 간단히 밝혔습니다. 이제 AC.349는 왜 말씀에서 제물이 예배를 상징하는지를 유대교회의 희생 제사와 첫 열매, 처음 난 것을 드리는 제도를 통해 설명합니다.

 

여기서 가장 먼저 붙들어야 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유대교회의 제사 자체를 참된 예배의 본질로 보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희생 제물과 첫 열매와 처음 난 것을 드리는 모든 외적 의식은 ‘천국적인 것들’을 표상했고, 궁극적으로 모두 주님을 가리켰습니다. 따라서 그 의식의 가치는 동물이나 곡식이라는 물질 자체에 있지 않고, 그것이 표상하는 내적 실재에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매우 날카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표상하는 실재가 없다면 표상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표상은 그것이 가리키는 실재 때문에 의미가 있습니다. 제물이 사랑을 표상한다면 사랑이 있어야 하고, 첫 열매가 주님께 속한 선을 표상한다면 실제 삶 안에 그 선이 있어야 합니다. 표상만 남고 그것이 가리키는 실재가 사라지면 껍데기만 남습니다.

 

이어지는 두 번째 질문은 더욱 강합니다. ‘내적인 것이 없는 외적 종교가 우상과 같은 , 죽은 외에 무엇이겠습니까?’ 여기서 AC.348AC.349가 정확하게 만납니다. AC.348에서는 체어리티 없는 신앙의 행위를 ‘죽은 행위’라고 했습니다. 이제 AC.349에서는 내적인 것이 없는 외적 종교를 ‘죽은 ’이라고 합니다. 행위도 예배도 외적인 형식만으로는 살아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외적인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뜻으로 읽으면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요점은 외적인 것을 버리는 데 있지 않고 외적인 것에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밝히는 데 있습니다. 그는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들로부터 생명을 얻으며, 그것들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생명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AC.349의 핵심 문장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질서가 있습니다. 생명의 근원은 주님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선이 사람의 내면에 받아들여지고, 그것이 외적인 예배와 행위로 나타날 때 그 외적인 것은 살아 있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외적 예배의 생명은 외적 형식 자체에 있지 않고, 그 안에서 역사하는 내적인 것에 있으며, 더 깊게는 그 내적인 것의 근원이신 주님에게 있습니다.

 

이 원리는 가인의 제물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입니다. 가인도 제물을 드렸습니다. 따라서 외적 예배가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예배가 어디에서 나왔는가 하는 것입니다. 앞의 AC.346-348에서 보았듯이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나타내며, 그의 ‘땅의 소산’은 체어리티 없는 신앙의 행위를 뜻합니다. 그렇다면 그 소산을 여호와께 드리는 ‘제물’은 자연스럽게 그러한 상태에서 나온 예배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문제는 ‘예배를 드리지 않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배를 드렸다는 사실 때문에 더 깊은 문제가 드러납니다. 외적 예배가 존재한다고 해서 그 예배가 자동으로 참된 예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배의 내적 생명이 무엇인가를 보아야 합니다.

 

3:2-4의 ‘공의로운 제물’은 이 점을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 주님께서는 레위 자손을 금과 은처럼 연단하여 깨끗하게 하시고, 그 후에 그들이 ‘공의로운 제물’을 드립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내적 제물’이라고 풀이합니다. 참된 예배는 단순히 제단 위에 무엇을 올려놓는 행위가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의 내면을 정결하게 하신 결과로 나오는 예배라는 것입니다.

 

특히 ‘레위 자손’을 스베덴보리가 ‘거룩하게 예배하는 사람들’로 풀이하는 것은 앞의 AC.342와도 연결됩니다. 거기서 레위는 체어리티를 나타냈고, 바로 그 때문에 레위 지파가 제사장직을 받았다고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참된 예배와 체어리티는 서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예배의 거룩함은 외적 의식의 정교함보다 그 안에 있는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나옵니다.

 

또한 ‘옛날’이 태고교회를, ‘고대’가 고대교회를 뜻한다는 설명도 의미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예배의 원형을 교회의 가장 초기 상태와 연결합니다. 특히 태고교회는 사랑을 중심으로 주님을 예배했던 천적 교회였습니다. 따라서 ‘옛날과 고대와 같이’ 제물이 다시 기쁨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옛 제사 제도를 복원한다는 뜻이 아니라 예배가 다시 그 내적 본질을 회복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20:40에서는 ‘예물’과 ‘ 열매’가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주님으로 말미암아 체어리티로 거룩하게 행위’라고 풀이합니다. 이 표현은 AC.348AC.349를 이어 주는 매우 중요한 연결고리입니다. 앞에서는 살아 있는 행위가 ‘체어리티로부터 행하는 ’이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그 행위가 주님으로 말미암아 체어리티로 거룩하게 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사람이 선을 행한다고 해서 그 선을 자기 것으로 돌려서는 안 됩니다. 참된 체어리티의 행위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받아 행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것을 자유롭게 받아 자신의 삶에서 실천하지만, 그 선의 생명과 근원은 주님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그 행위가 예물이 되고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습3:10에서 ‘구스’가 천적인 것들, 곧 사랑과 체어리티와 체어리티의 행위를 소유한 사람들을 뜻한다는 설명은 AC.349 전체를 아름답게 마무리합니다. 참된 제물은 결국 사랑, 체어리티, 그리고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행위와 연결됩니다. 제물이라는 외적인 형식이 가리키던 실재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AC.346부터의 흐름이 매우 선명해집니다. ‘땅의 소산’은 체어리티 없는 신앙의 행위를 나타내고, 그 소산을 ‘제물’로 드리는 것은 그 행위에서 나온 예배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가인의 예배는 외적인 형식을 갖추고 있었지만 그 생명의 근원이 되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예배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헌금하고 성찬에 참여하는 모든 외적 예배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외적 예배가 주님에게서 오는 내적 사랑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면서도 이웃을 미워하고, 자기 의를 높이며, 진리를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도구로 사용한다면 외적 예배와 내적 삶 사이에 분리가 생깁니다.

 

반대로 참된 예배는 예배 시간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주님께 받은 선이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와 실제 쓰임으로 흘러나갈 때 삶 자체가 예배의 연장이 됩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에게 예배와 삶, 신앙과 체어리티,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은 서로 따로 떨어진 영역이 아닙니다. 내적인 사랑이 외적인 행위와 예배 안에서 표현되고, 그 모든 것이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을 때 하나의 살아 있는 질서를 이룹니다.

 

결국 AC.349의 핵심은 ‘예배의 생명은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질문으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외적 형식이 예배에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으로부터 생명을 얻고, 내적인 것은 주님에게서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예배는 단순히 무엇을 주님께 드리는 행위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과 선을 다시 삶과 체어리티의 행위로 주님께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AC.350, 창4:4, ‘왜 주님께서는 아벨의 제물을 받으셨는가 - 체어리티에 기초한 참된 예배’(AC.350-3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And Abel, he also brought of the firstlings of his flock, and of the fat thereof; and Jehovah looked to Abel, and to his off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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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8, 창4:3, 가인의 ‘땅의 소산’ - 체어리티 없는 죽은 행위와 살아 있는 열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4:3) AC.348 ‘땅의 소산’(fruit of the ground)이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를 뜻한다는 것은 이어지는 내용에서도 분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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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 영상은 처음부터 매우 흥미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인간이 우주를 연구하면서 블랙홀과 빅뱅과 원자의 세계까지 파고들었지만, 정작 가장 가까이 있는 하나의 현상, 곧 ‘내가 지금 무엇인가를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리를 듣고, 색을 보고, 아픔을 느끼고,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그 모든 것을 ‘내가 경험하고 있다’고 압니다. 과학은 그 과정에서 어느 뉴런이 활성화되고 어떤 신경전달물질이 분비되는지를 점점 더 정밀하게 밝힐 수 있지만, 영상이 묻는 것은 그보다 한 걸음 더 깊은 질문입니다. ‘그런 물리적 과정이 느낌을 동반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먼저 한 가지는 분명히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상 제목과 구성에는 리처드 파인만이 전면에 등장하지만, 영상에서 전개하는 ‘의식의 어려운 문제’, 펜로즈와 해머로프의 미세소관 이론, 의식과 양자현상의 관계 등은 파인만 자신의 의식 이론이 아닙니다. 영상 자체도 미세소관을 이용한 양자의식 이론은 파인만이 세상을 떠난 뒤 등장했으므로 그가 알지 못했을 것이라고 밝힙니다. 그러므로 이 영상을 ‘파인만이 말년에 의식의 비밀을 발견했다’는 식으로 읽어서는 곤란합니다. 오히려 파인만은 이 영상에서 하나의 ‘태도’를 대표한다고 보는 편이 좋겠습니다. 곧 자연 앞에서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인정하고, 아름다운 이론이라도 현실과 맞지 않으면 버릴 줄 아는 과학자의 태도입니다.

 

이러한 구별을 하고 나면 오히려 영상의 진짜 가치가 더욱 잘 보입니다. 영상은 과학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과학이 엄청나게 성공했기 때문에 생겨난 새로운 질문을 보여 줍니다. 예를 들어 어머니가 어린아이에게 불러주던 자장가를 생각해 봅니다. 음파의 주파수도 측정할 수 있고, 고막의 진동도 분석할 수 있으며, 청각 신경에서 뇌까지 전달되는 전기적 신호도 추적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그 음악을 들을 때 활성화되는 뇌 영역까지 관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수십 년 뒤 같은 멜로디를 들었을 때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물이 나는 ‘ 느낌 자체’는 어디에 있습니까? 영상은 바로 이 틈을 집요하게 바라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바로 이 지점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은 육체만으로 완결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육체와 뇌가 중요하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살아 있는 동안 인간의 내적 생명은 자연계에서 육체를 통하여 나타나며, 감각기관과 신경계와 뇌는 그 생명이 자연계에서 활동하기 위한 정교한 기관입니다. 따라서 뇌에서 일어나는 물리적·화학적 변화를 발견했다고 해서 영적 인간을 부정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그러한 변화가 일어나도록 인간의 내적 생명이 어떻게 자연적 기관을 사용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이어집니다.

 

이 차이는 ‘원인’과 ‘수단’을 구별하면 조금 더 분명해집니다. 피아노 건반을 누르면 현이 진동하고 공기가 떨리며 우리의 고막도 진동합니다. 이 모든 것을 물리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피아노 내부를 아무리 분해해도 베토벤의 음악을 사랑하는 피아니스트의 마음 자체가 그 안에서 발견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피아노가 필요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피아니스트가 이 자연계에서 음악을 들려주려면 악기가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인간관에서 육체와 뇌도 이와 비슷한 위치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뇌는 하찮은 껍데기가 아니라 인간의 내적 생명이 자연계에서 나타나는 놀랍도록 정교한 기관입니다. 그러나 기관의 작동을 완전히 설명했다고 해서 그 기관을 통하여 나타나는 생명의 근원까지 설명한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영상이 말하는 이른바 ‘의식의 어려운 문제’가 스베덴보리와 뜻밖의 접점을 갖습니다. 빨간 사과를 볼 때 빛의 파장과 망막의 반응과 시각피질의 활동을 모두 설명했다고 합시다. 그래도 ‘ 나는 빨강을 빨갛게 경험하는가?’라는 질문이 남습니다. 통증 신호가 척수를 따라 올라가는 과정을 모두 추적했다고 해도 ‘ 그것이 나에게 아픔으로 느껴지는가?’라는 질문은 그대로입니다. 영상은 현대 과학이 바로 이 지점에서 아직 결정적인 답을 갖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라면 여기서 질문 자체를 조금 바꾸었을 것입니다. ‘물질이 어떻게 의식을 만들어내는가?’라고 묻기 전에 ‘과연 물질이 의식을 만들어내는 것인가?’라고 물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큰 차이입니다. 처음부터 뇌가 의식의 생산자라고 전제하면 연구의 방향은 ‘어떤 물질적 과정이 주관적 경험을 만들어내는가?’가 됩니다. 그러나 뇌가 의식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적 생명이 뇌를 통하여 자연계에 나타난다면, 뇌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신경학적 현상은 의식의 ‘생산 과정’이라기보다 의식이 육체적 차원에서 표현되는 ‘상응하는 과정’일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상응’을 단순한 비유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상응은 영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이 서로 닮았다는 정도가 아니라, 내적인 원인이 외적인 결과 안에서 질서 있게 표현되는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생각을 할 때 특정 뇌 영역이 활성화되고, 어떤 정서를 느낄 때 특정 신경전달물질의 변화가 나타난다는 사실은 스베덴보리의 관점과 충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대응 관계가 매우 정교하게 발견될수록 ‘속의 상태가 겉의 기관을 통하여 어떻게 표현되는가?’라는 문제가 더욱 흥미로워집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단계 더 들어가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의 영조차도 자기 안에 독립적으로 생명을 가진 존재는 아닙니다. 이것이 영상의 여러 가설과 스베덴보리의 관점이 결정적으로 갈라지는 곳입니다. 영상은 의식이 뇌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혹시 ‘우주의 가장 근본적인 법칙’과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묻습니다. 그리고 양자 붕괴와 의식을 연결하는 가능성까지 소개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까지는 매우 흥미로운 질문이지만, 여기에서 멈출 수 없습니다. 생명의 궁극적인 근원은 양자장이든 미세소관이든 우주의 어떤 물리적 구조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독특하면서도 핵심적인 가르침 가운데 하나가 바로 ‘생명의 유입’입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끊임없이 받아 살아갑니다. 궁극적으로 생명 자체이신 분은 오직 주님이며, 인간은 그 생명을 자신의 상태에 따라 받아들이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그 생명이 마치 자기 자신의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나는 지금 생각하고 있고, 사랑하고 있고, 선택하고 있으므로 당연히 ‘ 생각도 것이고 생명도 ’이라고 느낍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렇게 느낄 수 있도록 허락된 것이 인간의 자유와 합리성의 토대라고 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영상이 반복해서 말하는 ‘ 안에 진짜 누군가가 있다’는 느낌도 새롭게 읽힙니다. 영상은 마지막 부분에서 ‘ 말들을 듣고 있는 동안 여러분의 몸속 안에 진짜 누군가가 존재한다’고 표현합니다. 이 표현은 매우 인상적이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약간의 보완이 필요합니다. 마치 육체라는 상자 안에 영혼이라는 작은 사람이 들어 있는 것처럼 이해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영은 몸 안에 들어 있는 또 하나의 물체가 아닙니다. 오히려 살아 있는 인간 전체의 내적 차원이 영이고, 육체는 그것이 자연계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주어진 외적 형식이라고 이해하는 편이 가깝습니다.

 

따라서 죽음 역시 ‘의식이 꺼지는 사건’으로만 이해되지 않습니다. 육체라는 자연적 기관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는 것이지 인간의 내적 생명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영계에서 만났다고 기록한 사람들은 자신이 여전히 생각하고, 보고, 듣고, 느끼고, 기억하며 살아 있다는 사실을 경험합니다. 오히려 자연계에 있을 때보다 자신이 더욱 온전하게 살아 있다고 느낀다고 그는 거듭 말합니다. 그렇다면 지상에서 뇌와 의식이 그토록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도 다르게 보입니다. 뇌가 영을 만들어내기 때문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영이 활동하려면 뇌와 신경계라는 자연적 기관을 통하여야 하기 때문에 둘의 관계가 그렇게 긴밀하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영상 중간에 등장하는 펜로즈와 해머로프의 ‘조화 객관 환원’, 곧 Orch-OR 이론도 이 점에서 흥미롭습니다. 영상은 뇌세포 내부의 미세소관에서 양자적 과정이 일어나고, 일정한 순간에 양자상태가 붕괴하면서 의식의 순간이 발생할 가능성을 소개합니다. 동시에 뇌처럼 따뜻하고 습하며 복잡한 환경에서 그런 양자적 상태가 충분히 유지될 수 있느냐는 반론도 소개하고, 설령 양자현상이 실제로 존재하더라도 ‘ 그것이 느낌이 되는가?’라는 근본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고 인정합니다. 바로 이 마지막 인정이 중요합니다.

 

양자역학을 영혼의 증거로 사용하려는 유혹은 상당히 조심해야 합니다. 고전물리학으로 설명하기 어려우니 양자역학을 가져오고, 양자역학이 신비하니 거기에 영혼이나 하나님을 집어넣는 식의 논증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아직 과학이 설명하지 못했다’와 ‘그러므로 영적 세계가 존재한다’ 사이에는 논리적 간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과학이 언젠가 미세소관의 양자현상을 완전히 설명한다고 해서 영계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며, 반대로 Orch-OR 이론이 폐기된다고 해서 영혼이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영적 실재의 근거를 현재 과학의 미해결 영역에 세워 놓으면 과학이 발전할 때마다 신앙의 자리가 줄어드는 이상한 결과가 생깁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훨씬 근본적인 구별을 요구합니다. ‘물질적 과정이 얼마나 정교한가?’와 ‘생명의 근원은 무엇인가?’는 같은 질문이 아닙니다. 과학이 전자를 연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후자는 존재론적인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연적인 것은 그 자체에서 생겨난 독립적 실재가 아니라 영적인 것의 종착점이며 효과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자연계의 가장 미세한 양자현상까지 내려간다고 해서 자동으로 영계에 도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작은 물질도 여전히 자연적 차원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영상이 의식을 ‘우주의 근본적 구성요소’일 가능성으로 확장하는 대목도 흥미롭지만 조심스럽게 읽어야 합니다. 의식을 단순한 뇌의 부산물로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스베덴보리와 가까워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의식을 우주 자체의 속성으로 돌려버리면 자칫 범심론적인 방향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우주는 스스로 살아 있는 신적 존재가 아닙니다. 생명은 주님에게서 나오며, 피조세계는 그 생명을 질서에 따라 받아들입니다. 그러므로 ‘우주가 의식을 갖는다’와 ‘모든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유입된다’는 말은 전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영상 후반의 동물 의식 이야기도 이 점에서 재미있습니다. 문어와 까마귀와 박쥐와 상어는 인간과 다른 감각세계 안에서 살아갑니다. 영상은 이를 통해 인간의 경험만이 의식의 유일한 형태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오만을 낮추는 좋은 지적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단순히 ‘의식의 ’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인간에게는 자연적 감각을 넘어 영적 진리와 선을 받아들이고, 주님을 향하며,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자유와 합리성 안에서 영원한 목적을 향해 형성될 수 있는 내적 차원이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단순히 인간의 ‘의식 볼륨’이 더 크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리고 저는 이 영상에서 특히 AI에 관한 대목이 오늘날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고 봅니다. 영상은 인간의 기억과 행동과 말투를 컴퓨터가 완벽하게 복제한다고 해도 그것이 곧 ‘’의 의식이 옮겨갔다는 뜻은 아닐 수 있다고 말합니다. 또한 인간처럼 행동하는 기계와 실제로 인간처럼 경험하는 존재를 구별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구별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인간은 정보의 집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평생 쓴 글과 설교와 편지와 음성과 영상을 모두 AI에 학습시켰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 AI가 그 사람의 말투를 완벽하게 재현하고, 가족에게 그 사람이 생전에 했을 법한 말을 하며, 심지어 과거의 기억에 관한 질문에도 정확하게 대답한다고 합시다. 그래도 그것은 그 사람 자신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의 정체성은 단순한 기억 데이터의 총합보다 훨씬 깊습니다. 인간의 중심에는 그가 실제로 사랑하는 것이 있으며, 그의 의지와 이해가 있고, 궁극적으로 그의 지배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사후에도 인간의 인격을 이루는 중심입니다.

 

그래서 ‘마인드 업로딩’을 통한 디지털 불멸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애초부터 불멸의 방향을 잘못 찾은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정보를 컴퓨터에 복사함으로써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영적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육체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 살아갑니다. 문제는 ‘어떻게 나를 복제하여 죽지 않을 것인가?’가 아니라 ‘나는 지금 무엇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형성되고 있는가?’입니다. 사후에 계속되는 것은 컴퓨터에 저장된 내 정보가 아니라 바로 그렇게 형성된 ‘’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이 영상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스베덴보리의 인간론에 아주 가까운 문 앞까지 옵니다. 영상은 계속해서 ‘정보만으로는 부족하다’, ‘구조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 있다’, ‘기계적 처리와 실제 경험은 다르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당신은 종이에 적힌 글씨가 가득한 책이 아니며, 차갑게 재생되는 녹음기도 아니고, 단순히 정보만 처리하는 기계회로도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에 한 문장을 더 붙일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을 살아 있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여기서 과학의 질문과 영적인 질문이 갈라지면서도 서로를 향해 열립니다. 과학은 뇌에서 무엇이 일어나는지를 연구합니다. 그것은 계속 연구되어야 합니다. 뉴런도 연구하고 미세소관도 연구하고 양자현상도 연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 모든 연구를 방해하는 대신 훨씬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 모든 기관을 통하여 생각하고 사랑하고 느끼는 생명 자체는 어디에서 오는가?’

 

그의 대답은 ‘주님으로부터’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과학이 모르는 자리에 ‘하나님’을 집어넣는 답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은 과학으로 아직 발견하지 못한 하나의 원인이 아니라 ‘생명 자체’이십니다. 모든 피조물은 그분으로부터 존재하며 순간순간 존속합니다. 특히 인간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이도록 창조되었고, 그것을 마치 자기 자신의 것처럼 받아 자유롭게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내가 살아 있다’는 경험은 단순한 생물학적 착각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내가 독립적인 생명의 원천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이렇게 보면 영상의 마지막 장면은 상당히 아름답게 다시 읽힙니다. 밤하늘의 별을 보고, 뺨을 스치는 바람을 느끼고, 어느 순간 문득 ‘, 내가 지금 살아 있구나’라고 느끼는 평범한 순간을 영상은 ‘우주가 숨겨둔 가장 깊은 비밀’과 연결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그 경탄을 굳이 꺾을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더 깊게 가져갈 수 있습니다. ‘내가 살아 있다는 ’은 정말 신비로운 일입니다. 다만 그 신비의 최종 목적지는 ‘우주가 스스로 의식을 갖는다’는 데 있지 않고, ‘나는 생명 자체이신 주님에게서 지금 순간에도 생명을 받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신앙의 문제는 의식의 수수께끼보다 한층 더 깊어집니다. 중요한 것은 단지 ‘ 내가 의식을 가지고 있는가?’가 아닙니다. ‘그렇게 주어진 의식과 자유와 합리성을 가지고 나는 무엇을 사랑하며 살아갈 것인가?’입니다. 인간에게 의식이 있다는 것만으로 천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성과 자기의식이 아무리 뛰어나도 그것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만을 섬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의 영적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의식의 정교함이 아니라 그의 의지와 사랑이 어느 방향으로 형성되는가입니다.

 

그러므로 이 영상의 질문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과시켜 마지막까지 밀고 가면 질문은 세 번 바뀝니다. 처음에는 ‘뇌는 어떻게 의식을 만들어내는가?’입니다. 그다음에는 ‘과연 뇌가 의식을 만들어내는 것인가?’가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내가 지금 받아 누리고 있는 생명을 나는 무엇을 위해 사용하고 있는가?’가 됩니다.

 

첫 번째는 뇌과학의 질문이고, 두 번째는 인간 존재에 관한 철학적·영적 질문이며, 세 번째는 거듭남의 질문입니다.

 

그래서 이 영상의 가장 큰 가치는 어떤 양자의식 이론이 옳다는 데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오히려 현대 과학이 인간의 뇌를 그토록 깊이 들여다보고도 마침내 ‘느끼고 있는 ’라는 문 앞에서 다시 질문하기 시작했다는 데 있습니다. 과학은 그 문 앞에서 계속 실험하고 측정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문을 지나 한 걸음 더 안으로 들어가 인간의 속 사람과 겉 사람, 영과 몸, 사랑과 지혜, 그리고 그 모든 생명이 끊임없이 유입되는 근원을 이야기합니다.

 

파인만이 칠판에 남겼다는 유명한 문장, ‘내가 만들어 없는 것은 내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도 그런 의미에서 이 영상과 절묘하게 어울립니다. 다만 그것을 파인만 자신의 의식론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영상 역시 당시 파인만이 다른 물리학적 문제를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인정합니다. 그럼에도 그 문장을 오늘의 의식 문제에 하나의 비유로 가져오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인간은 뇌의 구조를 모방하고 언어를 생성하는 기계를 만들며 인간 행동의 놀라운 부분까지 재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살아 있음’ 그 자체를 만들어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보면 어쩌면 그것은 당연합니다. 생명은 인간이 조립하는 물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 자신조차 자기 생명의 원천이 아닙니다. 우리는 생명을 소유한 독립적 근원이 아니라 생명을 받아들이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가 그 생명을 빌려 쓰는 것처럼 느끼게 하지 않으시고 놀랍게도 완전히 ‘나의 생명’인 것처럼 느끼게 하십니다. 그래야 사랑할 수도 있고, 생각할 수도 있고, 선택할 수도 있으며, 그 선택을 통하여 실제로 하나의 인격으로 형성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의식이 있는가?’라는 현대 과학의 거대한 질문 앞에서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영혼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짧게 답하고 끝내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더 놀라운 방향으로 우리를 데려갈 것입니다. ‘당신이 지금 생각하고 사랑하고 느끼며 살아 있다는 모든 생명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리고 그것이 마치 완전히 당신 자신의 것처럼 주어진 까닭은 무엇인가?’

 

그 질문 끝에서 의식의 신비는 마침내 거듭남의 문제와 만납니다. 생명이 어디서 왔는지를 아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생명을 가지고 어떤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의식은 그 자체로 인간의 최종 목적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삶으로 살아낼 수 있도록 주어진 놀라운 그릇입니다.

 

그렇게 보면 밤하늘을 바라보다 문득 ‘내가 지금 살아 있구나’ 하고 느끼는 순간은 정말 경이로운 순간입니다. 그러나 그 경이로움의 중심에는 ‘의식을 가진 우주’가 아니라 ‘생명을 주시는 주님과 생명을 받아 살아가는 인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관계 안에서, 과학이 아직 풀지 못한 ‘의식의 신비’는 스베덴보리에게 단순한 지적 미스터리를 넘어 인간이 누구이며 어디에서 생명을 받고 무엇을 향해 살아가도록 창조되었는지를 묻는 영적인 질문으로 바뀝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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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아토스산 수도 공동체를 방문했을 때, 깊은 인상을 받았던 한 러시아 수도사의 삶을 소개합니다. 자동자막에는 이름이 ‘티흔’, ‘티온’ 등으로 흔들려 나오지만, 생애의 연대와 특징을 대조해 보면 인물은 러시아 출신의 아토스 수도자 ‘티혼 골렌코프(Tikhon Golenkov, 1884-1968), 흔히 ‘캅살라의 티혼’ 또는 ‘아토스의 티혼’이라 불리는 인물로 보입니다. 그는 1884년 러시아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수많은 수도원을 순례했고, 이후 아토스산에 정착하여 수십 년 동안 매우 엄격한 금욕과 기도생활을 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훗날 아토스의 성 파이시오스에게 영적 지도를 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영상 초반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자신이 머문 수도원을 아토스에서 매우 오래되고 큰 수도원 가운데 하나로 소개합니다. 자동자막의 ‘이비로 수도원’은 아마 ‘이비론 수도원(Iviron Monastery)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비론은 10세기 말 조지아계 수도사들에 의해 세워졌으며, 오늘날 아토스산 20개 주요 수도원 가운데 서열상 세 번째에 해당하는 유서 깊은 수도원입니다. 다만 티혼이 평생 이비론 수도원의 대표 수도사였다고 이해하기보다는, 아토스산 여러 지역에서 수행하다가 특히 캅살라와 카룰리아 등 은수 지역에서 살았던 러시아 수도자로 보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강문호 수도사가 티혼의 삶에서 가장 먼저 강조하는 것은 그의 극단적인 금욕입니다. 밤을 새워 기도하고, 졸음을 이기기 위해 몸을 불편하게 하며, 딱딱한 곳에서 잠을 자고, 매우 적은 음식을 먹고, 추위와 더위를 견디며, 옷도 최소한으로 소유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실제 전승에서도 티혼은 매우 엄격한 금욕가로 묘사됩니다. 긴 시간 기도하고, 누더기에 가까운 옷을 입으며, 단순한 음식으로 살고, 거친 환경에서 수행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런 삶을 접하면 자연스럽게 ‘ 정도로 자신을 절제해야 진정한 수도자인가?’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에서 외적 금욕과 내적 거듭남을 반드시 구별하게 합니다. 금식과 절제, 그리고 고독은 인간의 욕망을 돌아보고 마음을 주님께 집중시키는 유익한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적게 먹는 것 자체가 사람을 거룩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딱딱한 침대에서 잔다고 자기 사랑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며, 추위를 견딘다고 proprium이 자동으로 죽는 것도 아닙니다. 외적 절제는 내적 사랑의 질서가 바뀌도록 돕는 수단일 때 비로소 영적 의미를 갖습니다.

 

영상에서 티혼은 ‘탐식은 모든 죄가 들어오는 현관’이라는 취지로 말하며, 먹는 것을 극도로 줄였다고 소개됩니다. 욕망을 절제해야 한다는 뜻에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육체적 욕망에 끌려갈수록 그것이 다른 욕망과 결합하여 삶 전체를 지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자연적 욕구 그 자체를 악으로 보지 않습니다. 먹고 마시고 쉬고 몸을 돌보는 것은 창조질서에 속합니다. 문제는 그것이 목적이 되어 사람을 지배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듭남은 음식 자체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음식과 쾌락을 자기 삶의 중심으로 삼으려는 무질서한 사랑을 바른 위치로 돌려놓는 일입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은 극도로 금식하면서도 ‘나는 이렇게 절제하는 사람’이라는 자기 의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좋은 음식을 감사히 먹으면서도 탐욕에 지배되지 않고 이웃과 나누며 살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영성의 척도는 얼마만큼 먹느냐가 아니라 무엇이 그 사람의 지배적인 사랑인가에 있습니다. 금욕은 사랑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한 수단이지, 그 자체가 천국의 상태는 아닙니다.

 

그런데 영상이 중반으로 들어가면서 티혼의 모습 가운데 훨씬 따뜻한 부분이 나타납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티혼이 동물들을 매우 사랑했다고 전합니다. 쥐가 많은 곳에서 살면서도 동물들을 해치지 않고, 여우와 가까이 지내며, 멧돼지가 와서 새끼를 낳으면 보호하고, 사냥꾼이 오면 다른 곳으로 보내어 동물을 지켜 주었다는 일화들입니다. 실제 티혼의 전승에서도 그가 산짐승들과 친숙하게 지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매우 흥미롭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동물 세계 역시 인간의 애정과 상응한다고 설명합니다. 자연계의 동물들은 각기 다른 종류의 애정과 성향을 표상하며, 창조세계 전체는 영적 세계의 질서를 반영합니다. 그러므로 동물을 사랑한다는 것이 곧 높은 영성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생명을 함부로 대하지 않고, 창조된 존재를 사랑과 책임으로 돌보는 태도에는 분명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특히 티혼이 자기에게 다가오는 동물을 단순한 방해물로 여기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 대했다는 전승은 그의 금욕과는 또 다른 얼굴을 보여 줍니다. 영성이 자기 몸을 혹독하게 다루는 데만 머문 것이 아니라 주변 생명을 부드럽게 바라보는 방향으로 나타났다면, 바로 그 부분에서 우리는 금욕의 열매를 볼 수 있습니다. 참된 영성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다른 존재를 더 거칠게 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온유하게 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강문호 수도사가 영상에서 ‘하나님과 합일의 관계’라고 표현하는 대목과도 연결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인간이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하나가 되는 식의 ‘합일’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인간은 영원히 피조물이고, 주님은 창조주이십니다. 그러나 사람의 의지(will)와 이해성(understanding)이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면서 주님과 ‘결합(conjunction)될 수는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즐겨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자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지혜를 받아 그분과 결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도의 목표도 특별한 황홀경이나 신비체험 자체라기보다 주님의 선과 진리가 사람의 삶을 실제로 다스리게 되는 데 있다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 결합이 깊어지면 사람은 더 많이 사랑하고, 더 진실해지고, 더 온유해지며, 자기 공로를 덜 주장하게 됩니다. 결국 주님과의 결합은 삶의 열매로 드러나야 합니다.

 

영상에는 티혼의 초상화를 마른 우물에 던져 넣고 기도했더니 샘물이 솟아올라 초상화가 물 위로 떠올랐다는 기적 이야기도 나옵니다. 이런 이야기는 수도원 전승에서 성인의 거룩함을 기억하는 방식 가운데 하나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런 기적담을 굳이 하나하나 해부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오히려 그 이야기의 중심이 무엇인지 보면 됩니다. 수도원 공동체가 자신들이 존경하던 수도자의 삶을 기억하며, 주님께 도움을 구했고, 그 경험을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가 반복해서 보여 주듯, 기적 자체가 영성의 증거는 아닙니다. 물이 솟았는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수도자의 삶에서 어떤 선이 흘러나왔는가입니다. 어떤 사람이 놀라운 기적과 연결되어 있어도 자기 사랑과 지배욕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것이 천국적인 상태를 보증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아무 기적도 없지만 일평생 조용히 악을 피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했다면 그 삶은 주님 앞에서 훨씬 깊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인의 기적담은 사람을 숭배하게 하기보다 그 사람을 통하여 일하신 주님께 시선을 돌리게 할 때, 가장 건강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영상 후반에는 아토스 수도원의 식사 장면이 소개됩니다. 여러 수도사가 함께 앉고, 수도원장이 기도한 뒤 식사를 시작하며, 식사 중에는 말을 하지 않고 한 사람이 성경을 읽는다고 합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이를 ‘입으로는 육신의 양식을 먹고, 귀로는 영의 양식을 먹는다’고 표현합니다. 이 모습은 수도생활의 한 가지 아름다운 질서를 보여 줍니다. 자연적인 필요와 영적인 필요를 서로 적대시키지 않고, 한 식탁 안에서 함께 놓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은 본래 서로 적이 아닙니다. 자연적인 것은 영적인 것이 표현되고 실현되는 바탕입니다. 육체가 음식을 먹는 동안 마음이 말씀을 듣는다는 장면은 그래서 상징적으로도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식사시간에 반드시 성경을 소리 내어 읽어야 한다는 형식이 아니라, 자연적 삶이 영적 삶의 질서 아래 놓여 있어야 한다는 원리입니다. 먹고 일하고 쉬고 대화하는 평범한 일상 자체가 주님의 선과 진리를 표현하는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영상에는 포도주를 마시는 수도사들의 모습도 자연스럽게 등장합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자신은 술을 마시지 않아 옆의 미국인에게 잔을 건네주었다는 일화를 웃으며 소개합니다. 이 장면은 오히려 수도 전통을 지나치게 엄숙하고 비현실적인 것으로만 보지 않게 해 줍니다. 수도자들도 먹고 마시고 웃고 서로를 배려하며 살아가는 인간입니다. 영성은 인간성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연적인 삶을 바른 질서 안에 두는 것입니다.

 

이번 영상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티혼의 극단적인 수행이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오히려 더 오래 붙들고 싶은 것은 그 뒤에 나타나는 온유함입니다. 밤을 새워 얼마나 오래 기도했는가보다 동물을 어떻게 대했는가, 얼마나 적게 먹었는가보다 다른 존재를 어떻게 바라보았는가, 얼마나 많이 고행했는가보다 자기 삶에서 주님을 어떻게 드러냈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금욕은 겉사람을 다루지만 거듭남은 속 사람의 사랑을 바꿉니다.

 

여기에서 proprium의 문제도 다시 등장합니다. 수도생활은 세상의 재산과 명예를 버리는 삶이지만, 그것만으로 proprium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나는 다른 사람이 하지 못하는 수행을 한다’, ‘나는 평생을 수도에 바쳤다’, ‘나는 특별한 영적 경험을 했다’는 형태로 proprium이 다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깊은 수도는 외적인 소유를 버리는 것보다 자신이 행한 선과 수행을 자기 공로로 소유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참된 선은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인간은 그것을 마치 자기 힘으로 행하는 것처럼 힘써 살아야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 선의 근원이 자신이 아니라 주님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티혼의 삶에서 우리가 보아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도 ‘얼마나 대단한 수도를 했는가?’가 아니라 ‘ 수행을 통해 자기 자신은 얼마나 뒤로 물러나고, 주님의 선이 얼마나 드러났는가?’일 것입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아토스산을 직접 방문한 경험 자체에도 큰 감동을 표현합니다. 다른 문화와 전통 속에서 오랜 세월 수도생활을 이어 온 사람들을 직접 보고, 함께 먹고, 이야기하고, 그들의 기도와 생활을 가까이에서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다른 기독교 전통을 이렇게 직접 만나는 것은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개신교가 익숙하게 여겨 온 방식만이 기독교 영성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몸으로 발견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오래된 전통이라고 해서 자동으로 더 깊은 것은 아니며, 극단적인 수행이라고 해서 자동으로 더 거룩한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언제나 같은 기준으로 돌아갑니다. ‘이것이 사람 안의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자라게 하는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바른 위치로 돌려놓는가? 선과 진리가 실제 삶의 쓰임으로 나타나는가?’ 이것이 수도원이든 교회든, 금식이든 기도든, 설교든 신학이든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는 기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티혼의 삶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혹독한 금욕의 정도만은 아닐 것입니다. 젊은 시절 수많은 수도원을 찾아다니면서도 단순히 ‘좋은 수도원’을 찾기보다 자신을 제대로 지도해 줄 영적 스승을 찾았고, 이후 오랜 수도생활을 거쳐 다른 사람을 지도하는 위치에 이르렀다는 점 역시 중요합니다. 실제 자료에서도 티혼은 훗날 아토스의 성 파이시오스에게 영적 영향을 준 인물로 기억됩니다.

 

이것은 영적 성숙이 개인의 완성으로 끝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과 진리는 결국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한 쓰임으로 흘러가야 합니다. 혼자 깊은 동굴에서 기도하는 시간도 귀할 수 있지만, 그 기도가 사람을 더 부드럽고 지혜롭게 만들어 다른 사람을 선으로 이끄는 쓰임으로 이어질 때 그 열매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이번 영상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담는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티혼의 엄격한 금욕은 자체가 거룩함의 척도라기보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벗어나 주님께 온전히 향하려는 하나의 수도적 수단이었으며, 수행의 참된 열매는 극단적인 고행보다 온유함과 사랑, 그리고 다른 존재를 위한 쓰임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영상에서 ‘극한의 수도’를 바라보며 한마디를 더 덧붙이고 싶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가장 깊은 금식은 음식만 줄이는 것이 아니라 proprium 먹고 싶어 하는 자기 명예와 자기 공로를 줄이는 것이며, 가장 깊은 청빈은 물건을 적게 갖는 데서 끝나지 않고, 자신에게 있는 모든 선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않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외적 금욕이 내적 거듭남으로 이어질 때, 수도는 특별한 사람들의 기이한 삶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각자의 자리에서 걸을 수 있는 ‘내적 수도’의 길을 보여 주게 됩니다.

 

 

 

SY.80, 강문호 수도사, ‘그리심산 수도원, 예수님의 길을 걸으며 비로소 나그네를 보다’ (20191231)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이스라엘의 여러 수도원을 찾아다니던 중 그리심산의 수도원을 방문했던 경험에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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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3)

 

AC.348

 

땅의 소산’(fruit of the ground)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를 뜻한다는 것은 이어지는 내용에서도 분명합니다.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는 신앙이 없는 행위이며, 자체로 죽은 행위입니다. 그것들은 오직 사람에게만 속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에 관하여 예레미야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That by thefruit of the groundare meant the works of faith without charity, appears also from what follows; for the works of faith devoid of charity are works of no faith, being in themselves dead, for they are solely of the external man. Of such it is written in Jeremiah:

 

1여호와여 내가 주와 변론할 때에는 주께서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이니이까 2주께서 그들을 심으시므로 그들이 뿌리가 박히고 장성하여 열매를 맺었거늘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들의 마음은 머니이다, 4언제까지 이 땅이 슬퍼하며 온 지방의 채소가 마르리이까 짐승과 새들도 멸절하게 되었사오니 이는 이 땅 주민이 악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그가 우리의 나중 일을 보지 못하리라 함이니이다 (렘12:1-2, 4) Wherefore doth the way of the wicked prosper? Thou hast planted them, they also have taken root; they have gone on, they also bear fruit; thou art near in their mouth, and far from their reins; how long shall the land mourn, and the herb of every field wither? (Jer. 12:12, 4)

 

입에는 가까우나 마음에는 멀다’(Near in the mouth, but far from the reins) 것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을 뜻하며, 그들에 관하여땅이 슬퍼한다’(the land mourns) 말합니다. 같은 선지서에서는 그러한 행위를행위의 열매’(fruit of works)라고 부릅니다. “Near in the mouth, but far from the reinsdenotes those who are of faith separated from charity, concerning whom it is said thatthe land mourns.” In the same prophet such works are called thefruit of works”:

 

9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10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렘17:9, 10) The heart is deceitful [supplantativum] above all things, and it is desperate, who can know it? I Jehovah search the heart, I try the reins, even to give to every man according to his ways, and according to the fruit of his works. (Jer. 17:910)

 

미가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In Micah:

 

그 땅은 그 주민의 행위의 열매로 말미암아 황폐하리로다 (미7:13) The land shall be desolate because of them that dwell therein, for the fruit of their works. (Micah 7:13)

 

그러한열매(fruit) 열매가 아니며, 그러한행위(work)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열매와 뿌리가 모두 멸망하는 것을 아모스에서는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That suchfruitis no fruit, or that theworkis dead, and that both fruit and root perish, is thus declared in Amos:

 

내가 아모리 사람을 그들 앞에서 멸하였나니 그 키는 백향목 높이와 같고 강하기는 상수리나무 같으나 내가 그 위의 열매와 그 아래의 뿌리를 진멸하였느니라 (암2:9) I destroyed the Amorite before them,whose height was like the height of the cedars, and he was strong as the oaks; yet I destroyed his fruit from above, and his roots from beneath. (Amos 2:9)

 

다윗의 글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And in David:

 

왕이 그들의 후손을 땅에서 멸함이여 그들의 자손을 사람 중에서 끊으리로다 (시21:10) Their fruit shalt thou destroy from the earth, and their seed from the sons of man. (Ps. 21:10)

 

그러나 체어리티의 행위는 살아 있으며, 그것들에 관하여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는다’(take root downward, and bear fruit upward)고 선언합니다. 이사야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But the works of charity are living, and of them it is declared that theytake root downward, and bear fruit upward;” as in Isaiah:

 

유다 족속 중에 피하여 남은 자는 다시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으리니 (사37:31) The remnant that is escaped of the house of Judah shall again take root downward, and bear fruit upward. (Isa. 37:31)

 

위로 열매를 맺는다’(bear fruit upward)는 것은 체어리티로부터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열매를 같은 선지서에서는 ‘아름답고 영화로운 열매’(fruit of excellence)라고 부릅니다. Tobear fruit upwardis to act from charity. Such fruit is called thefruit of excellence,” in the same prophet:

 

그날에 여호와의 싹이 아름답고 영화로울 것이요 그 땅의 소산은 이스라엘의 피난한 자를 위하여 영화롭고 아름다울 것이며 (사4:2) In that day shall the shoot of Jehovah be beautiful and glorious, and the fruit of the earth excellent and comely for them that are escaped of Israel. (Isa. 4:2)

 

그것은 또한 ‘구원의 열매’(fruit of salvation)이며, 같은 선지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부릅니다. It is also thefruit of salvation,” and is so called by the same prophet:

 

하늘이여 위로부터 공의를 뿌리며 구름이여 의를 부을지어다 땅이여 열려서 구원을 싹트게 하고 공의도 함께 움 돋게 할지어다 나 여호와가 이 일을 창조하였느니라 (사45:8) Drop down, ye heavens, from above, and let the skies pour down righteousness; let the earth open, and let them bring forth the fruit of salvation, and let righteousness spring up together; I Jehovah will create it. (Isa. 45:8)

 

 

해설

 

AC.348은 앞의 AC.346에서 간략하게 밝힌 ‘땅의 소산’의 의미를 본격적으로 설명합니다. AC.346에서는 가인이 드린 ‘땅의 소산’이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를 뜻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48은 왜 그런 행위가 참된 열매가 될 수 없는지를 여러 말씀을 통해 보여 줍니다.

 

첫 문장이 이 글 전체의 핵심입니다.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는 신앙이 없는 행위이며, 자체로 죽은 행위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선행을 많이 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 행위는 어디에서 나오는가?’입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도 행위를 할 수 있습니다. AC.346에서 이미 보았듯이 가인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땅을 경작했고, 소산을 거두었으며, 그것을 여호와께 제물로 드렸습니다. 따라서 외적으로 보면 ‘행위’도 있고 ‘예배’도 있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죽은 행위’라고 합니다. 그 행위가 ‘오직 사람에게만 속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 사람’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외적인 행위 자체가 나쁘다는 뜻은 아닙니다. 모든 체어리티는 결국 자연계에서 구체적인 행위로 나타나야 합니다. 문제는 그 외적인 행위가 속 사람의 선과 결합되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행위라면 외적인 행위도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의, 명예, 인정, 보상, 종교적 우월성 같은 목적에서 행한다면 겉으로 아무리 선해 보여도 그 행위에는 천국의 생명이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가장 먼저 렘12:1-2, 4을 인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뿌리가 박히고 장성하여 열매를 맺습니다.’ 외적으로는 아주 성공적입니다. 종교적인 삶도 열매를 맺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말이 이어집니다.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들의 마음은 머니이다.’

 

이것은 가인의 예배를 매우 정확하게 보여 줍니다. 입으로는 주님을 말하고, 외적으로는 제물을 드리며, 종교적인 행위도 합니다. 그러나 그 내면의 사랑은 주님과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고 해석합니다. 신앙의 말은 입에 있지만 그 신앙의 생명이 되어야 할 체어리티는 마음에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땅이 슬퍼한다’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은 교회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될 때, 피해를 입는 것은 단순히 개인의 종교생활만이 아닙니다. 교회 자체가 황폐해집니다. 교리는 남아 있고, 예배도 남아 있으며, 종교적 활동도 활발할 수 있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사랑과 선이 사라지면 교회의 내적 생명은 메말라 갑니다.

 

이어지는 렘17:9-10은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갑니다. 주님께서는 단지 외적으로 나타난 행위만 보지 않으시고,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십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한 이유는 행위의 영적 성질을 결정하는 것이 외적인 모양만이 아니라 그 행위가 나온 내적 사랑과 의도임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원문의 ‘폐부’(reins)는 고대 성경의 상징적 표현입니다. 자연적인 장기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깊은 내면과 애정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한다’는 것은 주님께서 사람이 무엇을 했는지만이 아니라 왜 그렇게 했는지, 그 행위의 내적 근원이 무엇인지를 보신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갚으신다는 말씀에서 ‘행위의 열매’가 중요해집니다. 행위는 그 사람 안에 있는 사랑의 열매입니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듯이, 내적인 사랑은 외적인 삶을 통해 자신을 드러냅니다. 따라서 행위와 내면을 서로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7:13의 ‘ 주민의 행위의 열매로 말미암아 황폐하리로다’ 역시 같은 원리를 보여 줍니다. 열매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열매가 선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악한 사랑도 자기에게 맞는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열매’라는 말이 나올 때 무조건 선행을 뜻한다고 정해 놓아서는 안 됩니다. 어떤 뿌리에서 나온 열매인지 문맥을 보아야 합니다.

 

이 점에서 암2:9의 인용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아모리 사람은 ‘백향목 높이’ 같고 ‘상수리나무’처럼 강합니다. 외적으로는 거대하고 견고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위의 열매’뿐 아니라 ‘아래의 뿌리’까지 멸하십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열매와 뿌리를 함께 언급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열매는 행위이고, 뿌리는 그 행위를 낳는 내적 근원입니다. 뿌리가 악하면 그 열매 역시 영적으로 살아 있는 열매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AC.348은 여기서 놀라운 대조를 보여 줍니다. 지금까지는 ‘죽은 열매’를 설명했지만 사37:31부터는 ‘살아 있는 열매’로 전환합니다.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으리니

 

스베덴보리는 ‘위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아주 간결하게 ‘체어리티로부터 행하는 ’이라고 풀이합니다. 이 한 문장이 AC.348 전체를 압축합니다. 참된 열매는 단순히 외적으로 좋은 일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로부터 행하는 것입니다.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는다’는 표현에는 영적 삶의 질서가 아름답게 담겨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먼저 뿌리가 내려야 보이는 곳에서 열매가 맺힙니다. 마찬가지로 사람 안에서 주님께서 사랑과 선을 심으시고, 그것이 내적 생명이 될 때, 그 생명이 자연적인 삶으로 내려와 말과 행동과 쓰임이라는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행위는 겉에서 억지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밖으로 흘러나옵니다.

 

이것은 앞의 가인과 정확히 대조됩니다. 가인에게도 ‘땅의 소산’이라는 열매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온 것이므로 ‘죽은 열매’였습니다. 반면 사37:31의 열매는 체어리티라는 살아 있는 뿌리에서 나옵니다. 따라서 차이는 ‘행위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 행위의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가’에 있습니다.

 

4:2에서는 이러한 열매를 ‘아름답고 영화로운’ 것으로 표현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사45:8에서는 그 열매가 ‘구원의 열매’로까지 나아갑니다. 하늘에서 의가 내려오고, 땅이 열려 구원이 싹트며, 공의가 함께 자랍니다. 여기서는 위에서 내려오는 것과 아래에서 열매 맺는 것이 하나의 질서를 이룹니다. 모든 참된 선의 근원은 주님에게 있고, 인간은 그것을 받아 자신의 삶에서 열매 맺습니다.

 

따라서 ‘체어리티로부터 행한다’는 것을 인간이 자기 힘으로 선한 마음을 만들어 선행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사45:8의 마지막 말이 그 점을 분명히 합니다. ‘ 여호와가 일을 창조하였느니라.’ 살아 있는 열매의 궁극적인 근원은 주님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의 속 사람 안에 선을 심으시고, 인간이 자유롭게 그 선을 받아 살아갈 때, 그것이 겉 사람을 통해 행위로 나타납니다.

 

이렇게 보면 AC.348에서 ‘뿌리’와 ‘열매’의 관계는 곧 ‘ 사람’과 ‘ 사람’의 관계와 연결됩니다. 체어리티 없는 행위는 겉 사람에만 머물기 때문에 죽어 있습니다. 반면 살아 있는 행위는 속 사람 안에 있는 체어리티에서 시작하여 겉 사람의 실제 삶으로 나옵니다. 그러므로 참된 거듭남은 속 사람만 변화시키거나 겉 행동만 고치는 일이 아니라, 속의 선이 겉의 삶으로 흘러나와 둘이 하나가 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AC.348은 결국 우리가 선행을 바라보는 기준을 바꾸어 놓습니다. ‘무엇을 얼마나 많이 했는가?’보다 먼저 ‘어디에서 그것을 행했는가?’를 묻게 합니다. 예배, 봉사, 헌금, 구제, 전도, 설교, 성경공부 같은 종교적 행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모든 것은 귀한 열매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살아 있는 열매가 되려면 체어리티라는 뿌리에서 나와야 합니다.

 

그러므로 AC.348의 중심은 ‘행위가 중요하다’거나 ‘신앙보다 행위가 중요하다’는 단순한 주장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앙과 체어리티와 행위는 하나의 생명 질서 안에 있어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신앙의 진리는 사람을 체어리티로 이끌고, 체어리티는 실제 행위로 열매 맺습니다. 이 연결이 끊어지면 행위가 있어도 죽은 행위가 될 수 있지만, 이 질서가 살아 있으면 사람의 일상적인 작은 쓰임까지도 ‘위로 열매를 맺는’ 살아 있는 행위가 됩니다.

 

그래서 가인의 ‘땅의 소산’과 사37:31의 ‘위로 맺는 열매’는 겉으로는 모두 ‘열매’이지만 영적으로는 정반대입니다. 하나는 체어리티 없는 신앙에서 나온 죽은 열매이고, 다른 하나는 체어리티에서 나온 살아 있는 열매입니다. 결국 열매의 생명을 결정하는 것은 그 열매의 외형이 아니라 그 뿌리입니다.

 

 

 

AC.349, 창4:3, ‘제물이 예배를 뜻하는 이유 - 외적 예배는 내적인 것으로부터 생명을 얻습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4:3) AC.349 ‘제물’(offering)이 예배를 뜻한다는 것은 유대교회의 표상들에서 분명합니다. 그 교회에서는 온갖 종류의 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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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7, 창4:3, ‘세월이 지난 후에 - 신앙이 사랑에서 점점 멀어질 때’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4:3) AC.347 ‘세월이 지난 후에’(end of days, ‘날들의 끝에’)가 ‘시간이 흐른 뒤’를 뜻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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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3)

 

AC.347

 

세월이 지난 후에’(end of days, ‘날들의 끝에’)가 ‘시간이 흐른 ’를 뜻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명합니다. 처음에는, 그리고 그 교리 안에 단순함이 있었을 때에는, 여기서 ‘가인’(Cain)이라 불리는 교리가 후에 그렇게 된 것만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그들이 자기들의 자손을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a man Jehovah, ‘여호와인 사람’)라고 했다는 사실에서도 분명합니다. 따라서 처음에는 신앙이 ‘날들의 끝에’, 곧 시간이 흐른 뒤에 이르렀을 때만큼 사랑에서 멀리 분리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참된 신앙의 모든 교리에서 흔히 일어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That by theend of daysis signified in process of time, is evident to all. At first, and while there was simplicity in it, the doctrine here calledCaindoes not appear to have been so unacceptable as it became afterwards, as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they called their offspring aman Jehovah.” Thus at first faith was not so far separated from love as at theend of days,” or in process of time; as is wont to be the case with every doctrine of true faith.

 

 

해설

 

AC.347은 바로 앞 AC.346의 ‘세월이 지난 후에’라는 표현을 설명하면서, 가인으로 표상된 교리가 처음부터 완전히 타락한 형태로 출발한 것은 아니었다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밝힙니다. 스베덴보리는 ‘처음에는, 그리고 교리 안에 단순함이 있었을 때에는’ 가인의 교리가 후대에 이르러 나타난 것만큼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는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가인의 발생과 타락을 한순간의 사건이 아니라 점진적인 과정으로 보게 합니다.

 

여기서 ‘단순함’(simplicity)은 단순히 지식이 부족하거나 생각이 단순했다는 뜻으로 읽기보다, 아직 교리가 자기주장을 강화하여 사랑과 맞서지 않았던 초기 상태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앞의 AC.338에서 보았듯이 가인의 시작은 신앙 자체를 버리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 자체로 하나의 ’으로 구별하여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 출발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신앙과 사랑 사이의 거리가 아직 크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구별’과 ‘분리’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신앙을 사랑과 구별하여 하나의 교리로 정리하는 것 자체가 곧바로 악은 아닙니다. 문제는 시간이 흐르면서 그 구별이 분리가 되고, 분리가 마침내 우열 관계로 변하는 데 있습니다. 신앙이 ‘나는 사랑 없이도 참된 신앙이다’라고 주장하기 시작하고, 더 나아가 자신을 체어리티보다 앞세우게 되면 가인의 성격이 본격적으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세월이 지난 후에’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AC.346에서는 이를 단순히 ‘시간이 흐른 ’라고 밝혔지만, AC.347은 그 시간 동안 무엇이 일어났는지를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사랑과 신앙 사이의 분리가 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거리가 점점 벌어졌습니다. 결국 ‘세월이 지난 후에’ 이르러서는 체어리티 없는 신앙의 행위인 ‘땅의 소산’을 여호와께 드리는 상태, 곧 사랑과 분리된 신앙으로부터 예배하는 상태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그 초기 상태가 아직 완전히 타락하지 않았다는 증거로 드는 것이 ‘그들이 자기들의 자손을 향해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표현은 앞의 창4:1, 곧 하와가 가인을 낳으며 한 말과 연결됩니다. AC.338에서 스베덴보리는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는 말씀을 태고교회 안에서 신앙이라는 첫 자손이 생겨난 것으로 설명했습니다. 즉 가인의 초기 단계에는 여전히 그 신앙이 주님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인식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가인’이라는 이름만 보고 처음부터 모든 것이 거짓이고 악이었다고 생각하면 AC.347의 중요한 뉘앙스를 놓치게 됩니다. 처음에는 참된 것에서 출발했습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신앙이 있었고, 그 신앙은 아직 사랑과 아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신앙을 사랑과 별개로 취급하는 경향이 강해졌고, 마침내 신앙 자체를 구원의 본질로 높이면서 체어리티를 밀어내게 된 것입니다.

 

특히 마지막 문장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참된 신앙의 모든 교리에서 흔히 일어나는 ’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AC.347은 태고교회의 가인이라는 특정 교리만 설명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참된 진리에서 시작한 교리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 교리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자기애와 지성적 자부심에 의해 본래의 생명에서 멀어질 수 있다는 일반적인 교회사의 원리를 보여 줍니다.

 

예를 들어 어떤 교리가 처음에는 주님을 더욱 사랑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도록 돕기 위해 명료하게 정리될 수 있습니다. 그 단계에서는 교리가 사랑을 섬깁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그 교리를 ‘우리가 옳다는 증거’로 사용하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관심이 ‘ 진리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서 ‘누가 교리를 정확하게 믿는가?’로 이동합니다. 더 진행되면 교리를 정확하게 고백하는 것을 사랑과 삶보다 중요하게 여기고, 마침내 교리의 차이 때문에 서로 판단하고 정죄하기까지 합니다. 처음의 참된 교리는 그대로인 것처럼 보여도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내적 상태는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AC.347은 앞서 살펴본 ‘가인의 분리는 어디서 시작되었는가?’라는 문제를 한층 더 세밀하게 만듭니다. 가인의 길은 처음부터 ‘체어리티를 없애자’라고 선언하면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주 작은 이동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따로 바라보고, 그것을 점점 독립적인 것으로 만들며, 시간이 흐르면서 그 독립성을 강화한 것입니다. 결국 처음에는 미세했던 틈이 나중에는 신앙과 사랑의 완전한 분리로 발전합니다.

 

이것은 개인의 영적 삶에서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처음 말씀을 배우고, 교리를 알아갈 때에는 그 진리가 주님께 가까이 가고 삶을 고치기 위한 것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이것을 안다’는 데 만족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자신이 가진 진리로 다른 사람을 재고, 판단하기 시작할 수도 있습니다. 진리 자체는 변하지 않았는데 그것을 받아들이는 목적이 달라진 것입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가인의 문제는 과거 어느 교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신앙인 안에서 끊임없이 경계해야 할 가능성이 됩니다.

 

그러므로 참된 교리를 보존한다는 것은 단지 처음의 정확한 문장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 교리가 처음 지향했던 목적, 곧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고,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으로 이끄는 목적도 함께 보존해야 합니다. 교리의 문장은 그대로인데 사랑이 빠져버린다면 외형은 보존되었어도 그 생명은 이미 달라진 것입니다.

 

결국 AC.347이 보여 주는 것은 ‘참된 것에서 시작했다는 사실이 끝까지 참된 상태를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엄중한 사실입니다. 신앙은 계속 사랑을 바라보고, 사랑을 섬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처음에는 거의 보이지 않던 작은 분리가 ‘시간이 흐른 ’ 점점 커져 마침내 신앙과 체어리티를 서로 갈라놓게 됩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는 바로 그 점진적인 변화를 담고 있는 표현입니다.

 

 

 

AC.348, 창4:3, 가인의 ‘땅의 소산’ - 체어리티 없는 죽은 행위와 살아 있는 열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4:3) AC.348 ‘땅의 소산’(fruit of the ground)이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를 뜻한다는 것은 이어지는 내용에서도 분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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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6, 창4:3, ‘체어리티 없는 신앙에서도 행위와 예배는 나올 수 있습니다’(AC.346-349)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And at the end of days it came to pass that Cain brought of the fruit of the ground an offering to Jehovah. (창4:3) AC.346 ‘날들의 끝에’(end of days)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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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And at the end of days it came to pass that Cain brought of the fruit of the ground an offering to Jehovah. (4:3)

 

AC.346

 

날들의 끝에’(end of days)는 시간이 흐른 뒤를 뜻하고, ‘땅의 소산’(fruit of the ground)은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를 뜻하며, ‘여호와께 제물로 드림’(an offering to Jehovah)은 거기에서 나온 예배를 뜻합니다. By theend of daysis meant in process of time; by thefruit of the ground,” the works of faith without charity; and byan offering to Jehovah,” worship thence derived.

 

 

해설

 

AC.346부터 창4:3의 속뜻으로 들어갑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라는 짧은 한 절 안에서 스베덴보리는 세 표현을 차례로 풉니다. ‘날들의 끝에’는 시간이 흐른 뒤를, ‘땅의 소산’은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를, 그리고 ‘여호와께 제물로 드림’은 그런 신앙에서 나온 예배를 나타냅니다.

 

먼저 ‘날들의 끝에’가 ‘시간이 흐른 ’를 뜻한다는 것은 단순히 며칠이나 몇 년이 지났다는 자연적인 시간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앞의 AC.338-345에서 가인의 상태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으로 인식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신앙과 체어리티 사이에 분리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날들의 끝에’라는 표현은 그러한 상태가 어느 정도 진행되어 그 성질이 실제 행위와 예배로 나타날 단계에 이르렀음을 보여 줍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가인의 분리는 어느 순간 갑자기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신앙을 사랑과 구별하여 바라보는 미세한 변화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분리가 하나의 확고한 원리가 되고, 마침내 그 원리에 맞는 행위와 예배까지 생겨납니다. 따라서 ‘날들의 끝에’는 단순한 시간 경과라기보다 한 영적 상태가 자라 그 결과를 나타내기 시작하는 과정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다음 ‘땅의 소산’은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를 뜻합니다. 여기서 다시 주의해야 할 것은 ‘땅의 소산’ 자체가 언제나 나쁜 것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바로 AC.343의 사30:23에서는 ‘땅의 소산의 양식’이 체어리티를 나타냈습니다. 따라서 상응의 의미는 언제나 그 표현이 놓인 문맥과 상태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여기서는 ‘가인’이 땅의 소산을 가져옵니다. 가인은 이미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나타내고, AC.345에서는 ‘농사하는 ’가 체어리티 없이 신앙만을 붙드는 사람을 나타낸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경작한 땅에서 나온 ‘소산’ 역시 그와 같은 신앙으로부터 나온 행위를 나타냅니다. 다시 말해 행위 자체가 외적으로는 선해 보일 수 있지만, 그 안에 체어리티의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구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행위가 있으니 체어리티도 있다’고 자동으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종교적인 일을 하고, 봉사하고, 헌금하며, 예배에 성실히 참석한다고 해도 그 행위의 내적 성질은 그 행위가 어떤 사랑과 목적에서 나오는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자기 의를 세우거나 사람들에게 인정받거나 자신의 신앙적 우월성을 확인하기 위한 행위와,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여 행하는 선은 외형이 비슷해도 내적으로는 서로 다릅니다.

 

그래서 AC.346의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라는 표현을 잘 붙들 필요가 있습니다. 가인에게도 ‘행위’가 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땅을 경작했고 소산을 얻었으며, 그 소산을 가지고 여호와께 제물까지 드렸습니다. 겉모습만 보면 상당히 종교적입니다. 문제는 그 행위를 낳은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344와 매우 긴밀하게 이어집니다. AC.344는 신앙의 기억 지식과 인식 지식과 교리가 사람을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만들고, 마침내 체어리티에 이르게 하지 못한다면 ‘ 아무것도 아닌 ’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AC.346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단지 지식과 교리만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도 나름의 ‘행위’를 낳고 심지어 ‘예배’까지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여호와께 제물로 드림’은 ‘거기에서 나온 예배’를 뜻합니다. 여기서 ‘거기에서’란 바로 앞의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에서 나온다는 뜻입니다. 즉 가인의 예배는 그의 내적 신앙 상태와 별개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어떤 사랑과 신앙 안에 있느냐에 따라 그에게서 나오는 예배의 성질도 달라집니다.

 

이것은 창4:3-5에서 왜 가인의 제물과 아벨의 제물에 대한 주님의 반응이 달랐는지를 이해하는 출발점이 됩니다. 겉으로만 보면 두 사람 모두 자기에게 있는 것을 여호와께 드렸습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을,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를 단순히 ‘식물 제사는 나쁘고 동물 제사는 좋다’는 식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핵심은 제물의 자연적인 종류가 아니라 그 제물을 낳은 내적 상태입니다.

 

가인의 제물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으로부터 나온 예배를 나타냅니다. 반면 뒤에서 보게 될 아벨의 제물은 체어리티에서 나온 예배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제물이라는 외적인 형식만이 아니라 그 안에서 주님께 올라오는 사랑과 선입니다. 동일한 기도, 동일한 찬송, 동일한 헌금, 동일한 봉사라도 그 안의 목적과 사랑에 따라 영적인 성질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여기서 AC.338부터 이어져 온 흐름이 매우 선명하게 연결됩니다. 처음에는 신앙을 사랑에서 떼어 ‘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으로 바라봅니다. 시간이 흐릅니다. 그 신앙에서 특정한 행위가 나옵니다. 그리고 그 행위에서 예배가 나옵니다. 즉 ‘내적인 분리행위예배’라는 흐름입니다. 처음의 아주 미세한 교리적 분리가 마침내 삶과 예배의 성질까지 결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AC.346은 예배에 대해서도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 예배는 어디에서 나오고 있는가?’도 물어야 합니다.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서 나오는가, 아니면 자기 의와 자기 확신과 자신의 신앙적 정당성을 확인하는 데서 나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목회와 교회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외적으로 매우 활발하고 정교한 종교생활을 하면서도 체어리티가 중심에서 사라질 수 있습니다. 예배와 성경공부와 봉사와 선교와 헌신이 풍성해 보이는데, 그 결과 사람들이 점점 더 자기 의에 강해지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며 서로 갈라진다면 그 행위와 예배가 어떤 사랑에서 나오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반대로 참된 예배는 사람이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자기 악을 버리며, 이웃의 선을 바라고 실제로 선을 행하는 삶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가인의 제물은 ‘예배하지 않는 사람’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예배하는데도 체어리티와 분리될 있다’는 훨씬 더 섬세하고 무거운 문제를 보여 줍니다.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도 교리는 남을 수 있고, 행위도 남을 수 있으며, 심지어 예배도 남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신앙을 신앙답게 하고 예배를 예배답게 하는 생명, 곧 체어리티가 빠질 수 있습니다.

 

결국 AC.346의 핵심은 ‘예배는 예배를 낳은 내적 사랑의 성질을 따른다’는 데 있습니다. 가인의 ‘땅의 소산’은 체어리티 없는 신앙에서 나온 행위를, 그것을 ‘여호와께 제물로 드림’은 그러한 상태에서 나온 예배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참된 예배를 이루는 것은 외적인 제물의 크기나 종교적 형식의 정교함이 아니라, 그 안에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가 살아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AC.345, 창4:2,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농사하는 자’ 가인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5 ‘농사하는 자’(tiller of the ground)가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을 나타낸다는 것, 곧 사랑에서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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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이스라엘의 여러 수도원을 찾아다니던 중 그리심산의 수도원을 방문했던 경험에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영상은 앞선 수도사 전승들과 조금 다릅니다. 다른 수도사의 특별한 삶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강문호 수도사 자신의 체험이 중심입니다. 그리심산에서 나사렛과 예루살렘 방향을 바라보며 ‘예수님은 길을 얼마나 많이 걸으셨을까?’ 생각했고, 그 생각이 결국 자신도 예수님의 길을 몸으로 한번 걸어 보고 싶다는 결심으로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걷기가 단순한 순례 체험을 넘어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이후 가난한 사람과 나그네를 바라보는 눈이 달라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영상 초반의 ‘사람이 계획을 세운다 할지라도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구나’라는 고백은 이 이야기 전체를 여는 좋은 문장입니다. 수도원으로 향하던 중 자동차가 고장 나 계획이 두 시간가량 어그러졌는데, 강문호 수도사는 그 작은 사건을 통해 ‘아무리 내가 서둘러도 하나님의 속도에 맞추어야 한다’고 깨닫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섭리는 단순히 내가 세운 일정이 잘 풀리게 해 주시는 주님의 도움을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알지 못하는 수많은 길을 통해 주님께서 사람을 선으로 이끄시는 신적 질서에 가깝습니다. 때로는 내가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는 것도 섭리 안에 있지만, 지연되고 막히고 예상과 달라지는 것 역시 섭리 안에서 쓰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 하나님께서 차를 고장 나게 하셨는가?’를 섣불리 단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통해 내가 무엇을 배우고 어떤 선으로 인도되는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그리심산 꼭대기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예수께서 걸으셨을 것으로 생각되는 길을 바라보다 자기 자신에게 시선을 돌립니다. 이 대목은 이번 영상에서 상당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는 아버지를 닮았다는 말은 평생 수없이 들었는데 ‘강문호 목사, 예수님 닮았구나’라는 말은 한 번도 듣지 못했다고 고백합니다. ‘나는 과연 예수님을 얼마나 닮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이것은 수도생활을 하든 하지 않든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본질적인 질문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에서 ‘예수님을 닮는다’는 말을 조금 더 깊이 들어가게 합니다. 주님을 닮는다는 것은 외적으로 주님이 걸으셨던 길을 걷거나, 주님처럼 가난하게 살거나, 주님께서 겪으셨던 육체적 고생을 비슷하게 경험하는 것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그런 외적 실천은 귀한 영적 계기가 될 수 있지만, 그 자체가 거듭남은 아닙니다. 주님을 닮는다는 것은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사람의 의지와 삶 속으로 들어와 그 사람의 사랑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어디를 걸으셨는가?’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가 ‘주님께서는 길을 걸으셨는가? 누구를 사랑하셨고, 누구를 섬기셨으며, 무엇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셨는가?’를 묻게 됩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그래서 서울의 아직은 섬기시던 갈보리교회에서 충주봉쇄수도원까지 거리를 재어 봅니다. 약 146킬로미터였습니다. 예수께서 걸으셨던 길을 생각하며 이 정도 거리를 자신도 한번 걸어 보겠다고 결심합니다. 더욱이 일부러 더운 7월을 택하고 돈도 없이 길을 나섭니다. 배낭에는 빈 양재기와 잠잘 때 필요한 최소한의 물품을 넣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 행동 자체를 일반적인 신앙의 모범으로 만들지 않는 것입니다. 누구나 돈 없이 146킬로미터를 걸어야 예수님을 닮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강문호 수도사가 자기 자신에게 적용한 하나의 수도적 훈련입니다. 외적인 수도 훈련의 가치는 그 외형의 강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속 사람이 어떻게 변화되느냐에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변화가 뜻밖에도 첫날부터 시작됩니다. 점심때가 되어 배가 고파졌지만 아무 집에나 들어가 ‘ 주십시오’라고 말하지 못합니다. 음식점들이 즐비해 있는데도 돈이 없으니 들어갈 수 없습니다. 빈 양재기를 가지고 나왔지만 막상 그것을 내밀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자신 안의 무언가가 깨지기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평생 목회자로서 사람들에게 대접받는, 그것도 보통 극진히 대접받던 자리에 익숙해져 있었는데, 이제 자신이 누군가에게 한 끼를 부탁해야 하는, 그러니까 구걸해야 하는 처지가 되자 그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처음 몸으로 알게 된 것입니다.

 

이 대목은 이번 영상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가장 주목할 만한 장면 가운데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외적인 가난이 잠시나마 내적인 proprium을 건드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나는 겸손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제로는 자신의 지위와 역할, 평판과 대우 속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벗겨지는 상황에 놓이면 미처 알지 못했던 자기 모습이 드러납니다. ‘ 끼를 달라는 말을 하겠더라’는 고백은 사소해 보이지만 오히려 매우 정직합니다. 평생 베푸는 위치에 있던 사람이 받는 위치에 서 보는 순간입니다. 베푸는 사람에게는 아직 자존심을 유지할 여지가 있지만, 도움을 청해야 하는 사람은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길가에서 절 하나를 발견합니다. 그 앞에는 ‘식사 제공합니다’라는 현수막이 붙어 있었습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목사가 배고프다고 절에 들어가 밥을 먹을 수 있겠느냐는 생각으로 그냥 지나갑니다. 그런데 그 뒤로 교회들도 몇 곳 지나쳤지만 ‘식사 제공합니다’라는 현수막을 내건 교회는 하나도 없었다고 회고합니다. 이 장면은 굳이 불교와 기독교를 비교하여 어느 쪽이 낫다고 판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체어리티라는 관점에서 우리 자신에게 질문을 돌리는 편이 훨씬 유익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배고픈 사람이 실제로 들어와 밥을 먹을 있는 신앙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체어리티는 단순한 호의나 감정이 아닙니다. 선은 반드시 쓰임으로 내려와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진리를 알고 있는 것과 실제로 배고픈 사람에게 밥 한 그릇을 내어주는 것은 다릅니다. 전자는 이해 속에 있는 진리이고, 후자는 삶이 된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절 앞의 ‘식사 제공합니다’라는 작은 문구가 강문호 수도사에게 남긴 인상은 충분히 의미가 있습니다. 신앙은 결국 사람에게 어떤 선을 행하고 있는가를 통해 그 생명력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저녁이 되고 어두워지면서 문제는 더욱 현실적으로 변합니다. 이제 배고픔뿐 아니라 ‘오늘 어디에서 자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다가 멀리 교회 십자가가 보이고, 그곳에서 아는 후배 목사를 만나 숙식의 도움을 받습니다. 하루 종일 굶은 뒤 먹은 그 밥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여기에도 중요한 변화가 있습니다. 평소라면 평범했을 한 끼가 그날은 잊을 수 없는 은혜가 되었습니다. 대상은 똑같은 밥인데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상태가 달라진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영적 삶을 이해할 때 ‘상태(state)를 매우 중요하게 다룹니다. 같은 말씀을 읽어도 사람의 상태에 따라 전혀 다르게 받아들여지고, 같은 선물을 받아도 자기 충족 속에 있을 때와 궁핍 속에 있을 때 그 의미가 다릅니다. 배고픔을 경험하기 전에는 ‘밥을 대접한다’는 것이 하나의 친절이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하루 종일 굶고 나면 밥 한 그릇이 사람을 살리는 체어리티라는 것을 몸으로 알게 됩니다. 지식이 경험을 통과하면서 삶의 인식으로 내려온 것입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하루 약 14시간씩 사흘을 걸어 충주봉쇄수도원에 도착했다고 회고합니다. 그리고 잔디밭에 엎드려 한없이 울었다고 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 눈물이 ‘내가 해냈다’는 성취의 눈물이 아니었다는 그의 설명입니다. 한번 걸었을 뿐인데 이렇게 힘든데 예수께서는 얼마나 많이 걸으셨겠느냐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영상은 외적인 순례에서 내적인 성찰로 들어갑니다.

 

바로 이 지점은 매우 소중하면서도 동시에 조심해서 붙들어야 할 지점입니다. 수도적 훈련에는 언제나 두 방향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내가 이만큼 걸었다, 내가 이만큼 금식했다, 내가 이만큼 버텼다’는 자기 공로로 향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그 경험을 통하여 ‘나는 얼마나 약한 존재인가, 주님께서는 얼마나 낮아지셨는가’를 깨닫는 길입니다. 똑같이 146킬로미터를 걸어도, 아니 정확히는 그보다는 많이 적은, 왜냐 하면, 서울 갈보리교회에서 인도로 걸을 수 있는 데가 근처에는 없어 할 수 없이 차로 이동, 좀 서울 외곽에서 출발해야 해서... 전자는 proprium을 키우고 후자는 proprium을 낮춥니다. 외적인 행위가 영적 가치를 자동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를 통해 어떤 사랑이 형성되느냐가 결정적입니다.

 

이 점에서 강문호 수도사가 ‘내가 승리했다고 하는 기쁨의 눈물은 아니었다’고 굳이 말한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아도 수도의 가장 중요한 기준은 ‘얼마나 대단한 일을 했는가?’가 아니라 ‘ 일을 통해 자기 자신에게서 얼마나 멀어지고 주님과 이웃에게 얼마나 가까워졌는가?’입니다. 수행의 양보다 애정의 방향이 중요합니다.

 

그 후 강문호 수도사는 프랑스 생장피에드포르에서 스페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약 800킬로미터의 순례길도 걸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번 영상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몇 킬로미터를 걸었느냐가 아닙니다. 그가 그 경험의 결과로 무엇이 달라졌다고 말하느냐입니다. 그는 ‘자아가 깨집니다. 인생은 나그네라는 것이 절실하게 느껴집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다음 말이 오히려 이번 영상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뒤부터는 누가 찾아오면 밥을 주고 싶고, 잘 곳이 없는 사람에게 잠자리를 마련해 주고 싶고, 돈이 없는 사람을 보면 여관비라도 주고 싶어졌다는 것입니다. 집에 빈방이 있으면 집 없는 사람을 생각하고, 입지 않는 옷이 있으면 헐벗은 사람을 생각하고, 지갑에 돈이 있으면 돈 없는 사람을 생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순례’가 ‘체어리티’로 바뀝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이것이야말로 이 영상에서 가장 귀한 대목입니다. 146킬로미터를 걸었다는 사실보다 ‘배고픈 사람을 보게 되었다’는 변화가 더 중요합니다. 800킬로미터를 걸었다는 사실보다 ‘빈방을 보면 없는 사람을 생각하게 되었다’는 변화가 더 중요합니다. 외적 수도가 내적 체어리티로 열매 맺은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적 삶을 세상을 떠나는 삶으로 보지 않습니다. 자기 직업과 가정과 사회적 책임을 버리는 것이 그 자체로 더 거룩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 가운데서 맡겨진 쓰임을 성실하게 행하면서 악을 죄로 알고 피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삶이 천국을 준비하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순례길에서 받은 감동이 참으로 영적인 것이었는지를 판단하는 가장 좋은 기준은 ‘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가?’입니다. 이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가 들려주는 후반부의 변화는 바로 그 기준에 상당히 잘 부합합니다.

 

특히 ‘빈방이 있으면 없는 사람을 생각하고, 입지 않는 옷이 있으면 헐벗은 사람을 생각하고, 지갑에 돈이 있으면 없는 사람을 생각하게 되었다’는 고백은 단순하지만 깊습니다. 사람의 시선이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에서 ‘내가 가진 것이 누구에게 쓰일 있는가?’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소유를 버리는 것보다 더 깊은 변화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재산 그 자체는 악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재산을 사랑하는 질서입니다. 내가 가진 것을 자기만족과 지배를 위해 사용하는가, 아니면 주님께서 맡기신 쓰임을 위해 사용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영상 마지막에 강문호 수도사는 이스라엘의 어떤 가정에서는 밥을 조금 넉넉하게 지어 놓고 식사 전에 자녀에게 문밖에 나가 지나가는 가난한 사람이 있는지 살펴보게 하며, 있다면 불러 함께 먹는다는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사실관계의 일반화 여부는 별도로 확인할 필요가 있겠지만, 이 일화가 전달하려는 영적 뜻은 아름답습니다. ‘ 식탁에 아직 자리가 남아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체어리티는 거창한 사업에서만 시작되지 않습니다. 내 밥상 한 자리, 내 방 한 칸, 내 옷 한 벌, 내 지갑의 얼마가 다른 사람을 위한 쓰임이 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면, ‘예수님을 닮는다’는 영상 초반의 질문과 후반부가 하나로 연결됩니다. 처음에는 강문호 수도사가 ‘나는 예수님 닮았다는 말을 번도 듣지 못했다’며 예수께서 걸으셨던 거리를 실제로 걸어 보려 합니다. 그러나 영상이 끝날 무렵에는 예수님을 닮는 것이 ‘예수님이 걸으신 거리를 걷는 ’에서 ‘예수님이 바라보셨던 사람들을 바라보는 ’으로 이동합니다. 저는 이것이 이번 영상의 가장 아름다운 흐름이라고 봅니다.

 

주님의 발자국을 그대로 따라 걷는 것은 누구에게나 가능하지 않습니다. 나사렛에서 예루살렘까지 갈 수도 없고,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을 수도 없는 사람이 훨씬 많습니다. 그러나 배고픈 사람을 바라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외로운 사람에게 다가가고, 내게 있는 것을 필요한 사람과 나누고, 자신의 자리에서 정직하게 쓰임을 감당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예수님을 따라 걷는다’는 말의 가장 깊은 뜻은 예수님의 이동 경로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이 향했던 방향으로 우리의 사랑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앞서 살펴본 크리스토포로스 이야기와도 묘하게 맞닿아 있습니다. 크리스토포로스는 그리스도를 찾다가 강을 건너지 못하는 사람들을 등에 업어 주는 쓰임 속에서 마침내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예수님의 길을 몸으로 따라가려다가 자신이 배고파 보고, 잘 곳이 없어 보고, 도움받아 보고 나서 비로소 배고픈 사람과 나그네를 새롭게 보기 시작합니다. 두 이야기 모두 결국 ‘주님을 찾는 길이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로 열린다’는 곳에서 만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더 묻게 합니다. 이런 체험은 한 번의 감동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이후의 삶에서 계속 검증되어야 합니다. 순례 중에 눈물을 흘리는 것은 소중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보고 마음 아파하는 것도 소중합니다. 그러나 거듭남은 순간의 감동보다 반복되는 선택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내 proprium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자기 명예와 편안함과 이익을 앞세우려 할 때마다 그것을 내려놓고 주님의 선을 선택하는 일이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참된 수도는 어떤 특별한 장소나 특별한 며칠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매 순간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이번 영상은 그래서 외적인 수도 훈련의 한계를 보여 주기보다는, 오히려 외적인 수도 훈련이 제대로 쓰였을 때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이야기로 읽고 싶습니다. ‘걷기’가 목적이 아니라 ‘눈이 열리는 ’이 목적입니다. ‘고생’이 목적이 아니라 ‘이웃의 고생을 알아보게 되는 ’이 목적입니다. ‘나는 이만큼 했다’가 목적이 아니라 ‘주님께서 내게 주신 것으로 이제 누구를 섬길 것인가?’가 목적입니다. 외적인 훈련이 여기까지 사람을 데려간다면 그 훈련은 귀한 쓰임을 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번 영상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그분이 걸으셨던 거리를 재현하는 데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길에서 주님께서 바라보셨던 가난한 자와 나그네를 나도 바라보고 사랑하며, 내게 맡겨진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체어리티의 삶으로 이어질 비로소 속뜻을 얻습니다.’

 

그래서 저는 영상 초반의 ‘강문호 목사, 예수님 닮았구나 하는 말을 번도 듣지 못했다’는 고백에 대한 답이 어쩌면 영상 후반부에 이미 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닮았다는 것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해 주는 데 있지 않습니다. 굳이 누군가에게 ‘예수님을 닮았다’는 말을 들을 필요도 없습니다. 배고픈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치던 눈이 그를 돌아보는 눈으로 바뀌고, 내 빈방이 나만의 여분 공간이 아니라 누군가 쉴 수 있는 방으로 보이며, 내 지갑 속 돈이 내 것만이 아니라 누군가를 살리는 쓰임으로 보이기 시작한다면, 바로 그런 변화 속에서 주님의 형상이 조금씩 사람 안에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SY.81, 강문호 수도사, ‘아토스의 티혼 수도사, 금욕과 거듭남’ (20200105)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아토스산 수도 공동체를 방문했을 때 깊은 인상을 받았던 한 러시아 수도사의 삶을 소개합니다. 자동자막에는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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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76, 강문호 수도사, ‘크리스토포로스, 그리스도를 업고 강을 건넌 수도사’ (20191229)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여덟 번째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성 크리스토포로스에 관한 오래된 기독교 전승을 소개합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일반적으로 성 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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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 영상은 상당히 거친 어조로 오늘날 신학생들의 공부 태도를 비판합니다. ‘기도를 많이 한다고 성서학자들의 수십 연구를 뛰어넘을 없다’, ‘전공자가 비전공자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한심하다’, ‘개론서도 소화하지 못하면서 특정 주제만 파고드는 것은 잘못된 독서다’, ‘영어도 하지 않으면서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겉핥기로 다루어서는 된다’는 것입니다. 표현만 떼어 놓고 보면 다소 모욕적으로 들리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거친 표현을 잠시 걷어내고 중심 문제의식만 보면 귀담아들을 내용이 적지 않습니다. 신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단순히 종교적인 열정을 표현하는 일이 아니며, 오랜 시간 축적된 지식과 연구 방법을 배우고, 자신의 생각을 검증받으며, 무엇보다 자기가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 가는 훈련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도 영상의 문제의식과 상당 부분 만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지식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의 생애 자체가 놀라울 정도로 광범위한 학문적 탐구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는 광산학, 금속학, 수학, 천문학, 해부학, 생리학, 철학 등 여러 분야를 깊이 연구했고, 훗날 신학 저술을 시작한 뒤에도 성경 원문과 당시 이용할 수 있었던 여러 학문적 자료를 폭넓게 사용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가르쳐 주실 것이므로 공부할 필요가 없다’거나 ‘기도만 많이 하면 학문적 훈련 없이도 성경을 제대로 이해할 있다’는 식의 태도를 스베덴보리에게서 정당화하기는 어렵습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이성과 지성 역시 주님께서 사용하시는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영상이 ‘기초’를 강조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개론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고 곧바로 어려운 주제나 독창적인 해석으로 뛰어드는 것은 신학에서만 문제가 되는 일이 아닙니다. 어떤 분야든 기초 개념과 기존 연구를 알지 못하면 자기가 발견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미 오래전에 논의된 내용인지, 혹은 오래전에 반박된 주장인지조차 알기 어렵습니다. 이런 점에서 ‘1층도 없는 건물의 2층을 짓는다’는 영상의 비유는 꽤 적절합니다. 신학 역시 역사, 언어, 문헌, 교리, 철학적 배경을 차근차근 익히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여기서 매우 중요한 질문 하나가 생깁니다. ‘학문적으로 많이 아는 ’과 ‘말씀을 참으로 이해하는 ’은 과연 같은 것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여기서부터 영상의 주장과 스베덴보리 사이에 상당히 중요한 긴장이 나타납니다. 영상에서는 성서학자와 신학자의 오랜 연구가 일종의 지적 권위로 제시됩니다. 물론 전문 연구자의 축적된 지식을 존중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은 단순히 인간의 역사와 언어와 문헌을 연구하여 그 의미를 완전히 밝혀낼 수 있는 책이 아닙니다. 말씀에는 문자적 의미가 있고, 그 문자 안에는 영적 의미가 있으며, 더 깊은 차원에는 천적 의미가 있습니다. 이 내적 의미는 천국과 연결되어 있으며 궁극적으로 주님을 향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완벽하게 알고, 고대 근동의 역사와 문화를 깊이 연구하고, 교회사와 신학사의 방대한 문헌을 독파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말씀의 내적 의미에 도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런 공부가 필요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바로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학문을 무시하는 신앙주의’도 위험하지만 ‘학문이 말씀의 모든 것을 해명할 있다고 생각하는 지성주의’ 역시 위험합니다. 전자는 이성을 버리고, 후자는 계시의 깊이를 인간 이성의 범위 안에 가두기 쉽습니다.

 

영상에서 가장 조심스럽게 살펴볼 대목은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한들 성서학자들의 수십 년의 연구물을 뛰어넘는 성경 이해를 갖출 없습니다’라는 주장입니다. 이 말을 ‘기도가 학문 연구를 대신할 없다’는 뜻으로 이해한다면 충분히 타당합니다. 성경의 역사적 배경이나 원문의 문법을 알고 싶으면서 기도만 하고 사전과 주석과 연구서를 펼치지 않는다면 그것은 경건이라기보다 게으름에 가까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성경을 참으로 이해하는 깊이는 전문 연구자의 학문적 수준을 넘어설 없다’는 뜻으로 확대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말씀의 참된 이해에는 지식 이상의 것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진리를 아는 것과 진리를 행하는 것을 분리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진리를 단순히 기억 속에 저장한다고 해서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의지로 받아들이고 삶으로 행할 때 비로소 그것은 사람 안에서 살아 있는 진리가 됩니다. 그래서 지성적으로 대단히 뛰어난 사람이 말씀에 관한 수많은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정작 말씀의 영적 본질에는 멀리 있을 수 있고, 반대로 학문적 지식은 많지 않은 사람이 자신이 아는 작은 진리를 성실하게 살아냄으로써 그 진리의 본질에 더 가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는 신학의 학문적 서열만으로 측정하기 어려운 차원이 있습니다.

 

이 점은 영상의 두 번째 주장, 곧 ‘전공자가 비전공자의 이야기에 그렇게 귀를 기울이느냐’는 주장과도 연결됩니다. 전문성의 가치를 강조하려는 의도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의학이나 법학에서도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판단을 동일하게 취급할 수 없듯이 신학 역시 전문적 훈련을 존중해야 합니다. 인터넷이나 유튜브에서 우연히 들은 주장 하나를 수십 년 연구한 학자의 견해보다 무조건 높게 평가한다면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특히 자신감 있게 말하는 것과 정확하게 아는 것을 혼동하기 쉬우므로 전문성에 대한 존중은 더욱 필요합니다.

 

그러나 ‘전공자가 비전공자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한심하다’는 데까지 나아가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진리는 학위에 의해 진리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떤 주장이 참인지 아닌지는 말한 사람의 학위가 아니라 그 내용과 근거를 통해 검토해야 합니다. 더구나 기독교 신앙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께서 언제나 기존 종교 엘리트의 제도적 권위를 통해서만 말씀하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께서 부르신 제자들 가운데 당시의 전문적인 랍비 교육을 받은 종교 엘리트가 중심을 이루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전문성을 존중하는 것과 전문성을 진리의 최종 보증으로 삼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 자신은 매우 흥미로운 사례가 됩니다. 그는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의미의 신학교 출신 전문 신학자가 아니었습니다. 오랫동안 자연과학과 철학을 연구한 학자였으며, 그의 인생 후반부에 전혀 다른 차원의 소명을 받아 성경과 신학에 관한 방대한 저술을 남겼습니다. 만일 ‘신학 전공자가 비전공자의 신학적 이야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한심하다’는 원칙을 엄격하게 적용한다면 스베덴보리의 신학 저술은 애초에 읽어 볼 가치조차 없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질문은 ‘그가 어느 신학교를 졸업했는가?’가 아니라 ‘그가 무엇을 말했으며, 그것이 말씀과 얼마나 일관되게 연결되고, 인간의 거듭남과 주님을 사랑하는 삶을 어떻게 밝히는가?’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권위를 무조건 받아들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했다’는 이유만으로 생각을 멈춘다면 그것 역시 이 영상이 비판하는 맹목성과 다른 형태일 뿐입니다. 그의 주장도 읽고, 비교하고, 문맥을 살피고, 말씀과 연결하여 숙고해야 합니다. 다만 처음부터 ‘비전공자’라는 이유로 들을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다면 우리는 진리를 판단하는 기준을 내용에서 신분으로 옮겨 버리게 됩니다.

 

영상에서 영어 공부를 강조하는 부분은 상당히 현실적인 조언입니다. 번역은 언제나 선택과 해석을 동반하기 때문에 원문이나 원서를 직접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신학 연구에서 분명 큰 장점입니다. 영어권에서 생산되는 방대한 신학 연구에 직접 접근할 수 있다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 연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번역본은 매우 유용하지만 영어 번역본을 서로 비교하고, 필요하면 라틴어 원문까지 확인할 수 있다면 한 단어와 문장의 의미를 훨씬 세밀하게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언어 공부를 경시할 이유는 없습니다.

 

다만 여기에서도 언어는 ‘도구’이지 ‘진리 자체’는 아니라는 구별이 필요합니다. 히브리어를 잘한다고 구약의 영적 의미가 자동으로 열리는 것도 아니고, 헬라어를 잘한다고 복음서의 내적 의미가 자동으로 드러나는 것도 아닙니다. 원어는 문자적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도구이지만,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의 더 깊은 층위는 ‘상응’을 통해 열립니다. 자연적 표현과 영적 실재 사이의 상응을 알지 못하면 문자 안에 담긴 영적 질서를 온전히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어 연구와 상응에 대한 이해 역시 서로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차원의 작업으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영상 후반부에는 오리게네스, 아우구스티누스, 안셀무스, 아퀴나스, 루터, 칼뱅, 슐라이어마허, 리츨, 슈바이처, 불트만, 한스 큉 등 기독교 신학사의 거대한 이름들이 등장합니다. 이 전통을 공부하는 것은 분명 중요합니다. 2천 년 동안 수많은 사람이 하나님과 그리스도, 성경과 구원, 교회와 인간에 대해 씨름하면서 남긴 사유의 유산을 무시하는 것은 지혜롭지 않습니다. 우리가 오늘 처음 신학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미 앞서 걸어간 수많은 사람이 있고, 그들의 성공과 실패 모두가 후대에게 귀중한 자료가 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에서도 하나의 구별을 덧붙여야 합니다. ‘위대한 신학사’와 ‘계시의 진리’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신학사는 인간이 계시를 이해해 온 역사이며, 따라서 위대한 통찰과 함께 시대적 한계와 오류도 포함합니다. 어느 시대의 거대한 신학자라 해도 그 사람의 모든 말이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루터와 칼뱅도, 아퀴나스와 아우구스티누스도 역사 속 인간입니다. 그들을 공부하되 그들의 권위 아래 말씀을 놓아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들의 사상을 말씀 앞에서 살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특히 신앙과 체어리티가 분리되는 것을 매우 심각하게 봅니다. 이것은 오늘 영상의 주제를 바라보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신학을 아무리 많이 공부해도 그것이 사람을 선한 삶으로 이끌지 않는다면 그 지식은 아직 사람의 기억과 지성의 영역에 머물러 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뜨거운 신앙을 말하면서 진리를 배우려 하지 않고 자기 확신과 감정만 좇는다면 그것 역시 온전한 신앙이 아닙니다. 참된 신앙은 진리를 필요로 하고, 그 진리는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 움직여야 합니다. 따라서 ‘공부냐 신앙이냐’라는 양자택일 자체가 잘못된 질문일 수 있습니다.

 

영상이 비판하는 ‘성령의 조명’이라는 표현도 같은 방식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깨닫게 주셨다’는 말이 공부하지 않는 자신의 태도를 정당화하거나 다른 사람의 검증을 거부하는 수단으로 사용된다면 매우 위험합니다. 자기 생각을 곧바로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확신하기 시작하면 사람은 교정받기 어려워집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을 빌려 생각하면 인간의 proprium은 종교적 언어를 사용할 때조차 자기 자신을 높일 수 있습니다. ‘나는 성령께 직접 배웠다’는 확신이 오히려 자기 지성에 대한 가장 강력한 신뢰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성령의 조명’이나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을 단순한 종교 수사 정도로 취급해서도 곤란합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하나님은 연구 대상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연구하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다르고, 그리스도에 관한 명제를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과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도 다릅니다. 신학은 하나님에 관한 학문이지만 기독교 신앙은 결국 사람이 주님을 향하여 삶의 방향을 바꾸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학문적 신학이 이 차원을 잃으면 하나님을 연구하면서 정작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역설도 가능해집니다.

 

그래서 이 영상의 마지막 말, ‘신학은 단순한 종교 수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치열한 학문입니다’라는 선언에는 충분히 동의할 수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에 한 문장을 더 붙이고 싶습니다. ‘그러나 신학은 치열한 학문인 것으로 끝나서도 됩니다.’ 신학의 목적이 신학자를 만드는 데만 있다면 그것은 아직 절반입니다. 진리를 배우는 목적은 결국 그 진리가 사람의 삶이 되게 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오늘날 신학교의 위기는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도 아니고 ‘기도를 너무 많이 해서’도 아닐 것입니다. 공부와 신앙, 지성과 삶, 진리와 체어리티가 서로 분리되어 버린 것이 더 근본적인 문제일 수 있습니다. 학문 없는 열심은 쉽게 맹목으로 흐르고, 삶 없는 학문은 쉽게 지적 자부심으로 흐릅니다. 한쪽에서는 ‘성령께서 알려 주셨다’며 배움을 거부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나는 전공자다’라며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겉으로는 정반대처럼 보이지만 두 태도의 깊은 곳에는 뜻밖에도 같은 위험, 곧 ‘내가 안다’는 자기 확신이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지혜로운 사람은 많이 아는 사람이기 이전에 자신이 아는 진리를 선을 위해 사용하는 사람입니다. 지식은 필요합니다. 공부도 필요합니다. 원어와 영어도 필요하고, 신학사와 성서학도 공부할 가치가 있습니다. 좋은 개론서를 정독하고 위대한 학자들의 연구를 읽으라는 이 영상의 권면도 충분히 귀담아들을 만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지식은 목적지가 아니라 길입니다. 그 길의 끝에는 ‘내가 얼마나 많이 아는가?’가 아니라 ‘내가 아는 진리가 나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이 영상은 신학생들에게 꽤 필요한 경고를 던집니다. 다만 그 경고를 한 단계 더 깊게 가져갈 필요가 있습니다. ‘기도만 하지 말고 공부하라’에서 멈추지 않고, ‘공부하되 공부를 우상으로 만들지 말라’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비전공자의 말을 무비판적으로 좇지 말라’에서 멈추지 않고, ‘전공자의 권위도 진리 자체로 여기지 말라’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성령의 조명이라는 말로 무지를 합리화하지 말라’에서 멈추지 않고, ‘인간의 학문으로 성령의 역사를 대신할 수도 없음을 기억하라’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결국 삶이 남습니다. 수천 권의 신학서를 읽고 히브리어와 헬라어와 라틴어를 자유롭게 읽으며 신학사 전체를 꿰뚫는다 해도, 그 지식이 이웃을 사랑하고 악을 멀리하며 주님을 향하는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천국의 관점에서 그 지식은 아직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 것입니다. 반대로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배우기를 즐기며, 배운 진리를 조금씩 삶에 옮기고, 더 밝은 진리 앞에서 자기 생각을 기꺼이 내려놓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는 이미 참된 의미에서 ‘신학하는 사람’의 길을 걷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학은 분명 치열한 학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해 한마디를 더 보탠다면 이렇습니다. ‘참된 신학은 마침내 삶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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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 영상의 핵심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AI를 사용하지 말자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강사는 ChatGPT, Gemini, Claude 같은 AI가 성경의 역사적 배경을 정리하고, 원어를 살피고, 여러 주석과 학자들의 견해를 요약하고, 예화를 찾고, 설교 구조와 문장을 다듬는 데 매우 유용하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정합니다. 문제는 ‘AI 사용하느냐, 사용하지 않느냐’가 아니라 ‘언제 AI 여느냐’입니다. 설교자가 본문 앞에 홀로 서기도 전에 AI부터 열어 버릴 때, 아주 편리한 도구가 오히려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무엇인가를 빼앗아 갈 수 있다는 것이 이 영상의 주장입니다.

 

이 지적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아도 상당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은 단순히 종교적 정보를 담고 있는 책이 아닙니다. 말씀은 그 문자적 의미 안에 영적·천적 의미를 품고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주님과 천국을 연결하는 신적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 구절이 무슨 뜻인가?’를 알아내는 지적 작업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말씀을 통하여 주님께서 사람의 속 사람을 만지시고, 사람이 자신의 삶을 비추어 보며, 악과 거짓을 발견하고,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과정까지 포함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설교 준비 역시 단순한 ‘정보 수집해석구성전달’의 과정일 수 없습니다.

 

영상에서 인용하는 마이클 퀵의 경고가 바로 이 지점을 건드립니다. 설교자가 성경 본문 자체와 충분히 씨름하지 않은 채 곧바로 주석으로 달려가면, 본문을 직접 만나는 대신 ‘다른 사람이 본문’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AI는 이 위험을 훨씬 크게 만들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적어도 책장에서 주석을 꺼내 펼치고 여러 페이지를 읽어야 했습니다. 이제는 본문 한 구절을 입력하고 ‘ 본문의 역사적 배경과 신학적 의미와 설교 포인트 가지를 알려 ’라고 하면 몇 초 안에 그럴듯한 답이 나옵니다. 문제는 그 답이 틀렸느냐 맞았느냐만이 아닙니다. 답이 너무 빨리 나온다는 것 자체가 때로는 위험합니다. 아직 설교자 안에서 질문조차 충분히 태어나지 않았는데 답부터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영적 삶에서도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사람은 말씀 앞에서 때로 ‘모르는 상태’에 오래 머물 필요가 있습니다. 왜 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 왜 이 대목이 마음에 걸리는지, 왜 어떤 구절 앞에서는 불편해지는지, 지금 이 말씀이 자신의 어떤 삶을 비추고 있는지를 조용히 살펴야 합니다. 바로 그 시간에 말씀은 단순한 연구 대상에서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됩니다. 그런데 AI에게 너무 빨리 물으면 ‘본문이 나에게 무엇을 말하는가?’라는 질문보다 ‘ 본문에 대해 무엇을 말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옮겨가기 쉽습니다. 둘은 비슷해 보이지만 설교에서는 상당히 큰 차이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여기서 한 가지를 더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상은 ‘설교자의 인격적인 만남과 묵상’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옳지만, 묵상 자체가 설교에 생명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생명은 언제나 주님에게서 옵니다. 사람의 뜨거운 감정이나 눈물, 감동 자체가 신적 생명은 아닙니다. 설교자가 본문 앞에서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해서 그 해석이 반드시 참인 것도 아닙니다. 자신의 종교적 감정이나 확신을 주님의 음성으로 오인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AI보다 인간의 묵상이 우월하다’가 아니라, 말씀 앞에서 자기 자신을 낮추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를 받아들이려는 질서입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가 끊임없이 구별하는 ‘자기에게서 나오는 ’과 ‘주님에게서 오는 ’의 차이가 중요합니다. 사람은 자기 지성과 능력으로 진리를 소유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설교자에게는 이 유혹이 더욱 미묘하게 찾아옵니다. 많은 책을 읽고 원어를 알고 신학적 지식을 갖추었을 때뿐 아니라, 심지어 깊은 묵상과 영적 체험을 했을 때에도 ‘내가 깨달았다’는 자기 소유의 감각이 생길 수 있습니다. AI 역시 여기에 새로운 형태의 유혹을 보탭니다. 방대한 자료를 몇 초 만에 정리하고 멋진 문장과 구조까지 얻으면, 자신이 말씀을 충분히 이해했다고 느끼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영상에서 가장 중요한 표현은 사실 ‘순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말씀, 그다음 도구입니다. 먼저 주님 앞에서의 읽기와 묵상, 그다음 주석과 AI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조금 더 세밀하게 말하면 ‘말씀기도와 묵상자기 삶에 대한 성찰연구와 검증설교 구성’이라는 질서가 자연스럽습니다. AI는 이 가운데 ‘연구와 검증’과 ‘설교 구성’에서 매우 강력한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심지어 처음 묵상하면서 발견한 생각이 본문의 문맥과 맞는지 검증하고, 자신이 놓친 역사적·언어적 배경을 확인하고, 반대되는 해석을 찾아보는 데에도 유용합니다. 그러나 ‘말씀 앞에서 내가 먼저 주님께 무엇을 들어야 하는가?’라는 자리 자체를 AI에게 넘겨주면 안 됩니다.

 

여기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역설이 있습니다. AI를 늦게 사용할수록 오히려 AI를 더 잘 사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충분히 읽은 설교자는 AI가 제시하는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건 본문의 흐름과 조금 다른데?’, ‘ 해석은 특정 신학 전통에 치우친 아닌가?’, ‘ 원어 설명은 확인이 필요하겠는데?’라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본문을 충분히 읽지 않은 상태에서 AI를 먼저 만나면 AI가 만들어 준 해석의 틀 안에서 이후의 본문 읽기가 이루어질 가능성이 큽니다. 처음 받은 답이 일종의 안경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AI 이전의 묵상은 영적 의미뿐 아니라 AI를 비판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해 주는 실질적인 안전장치이기도 합니다.

 

다만 영상에서 ‘AI 감동받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회개하거나 소망을 붙들지 않는다’고 말하는 부분은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 사실입니다. AI에는 인간과 같은 영적 인격과 의지, 사랑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AI를 통해 얻은 문장이나 자료가 영적으로 아무 역할도 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책 한 권, 주석 한 문장, 다른 사람의 설교 한 대목이 우리를 깨우는 계기가 될 수 있는 것처럼 AI가 정리해 준 자료 역시 주님의 섭리 가운데 사람이 진리를 발견하는 외적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도구 자체에 생명이 있느냐가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 안에서 그 진리가 의지와 삶으로 연결되느냐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 이것은 ‘아는 ’과 ‘사는 ’의 차이로 더욱 분명해집니다. 진리는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는 동안 아직 그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의지와 결합하고 삶으로 나타날 때 비로소 사람 안에서 살아 있는 진리가 됩니다. 그렇다면 AI 시대 설교의 진짜 위험도 ‘AI 설교문을 준다’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AI가 만들어 준 진리를 설교자가 자신의 기억과 지성에만 담아 둔 채, 그것이 자신의 의지와 삶을 통과하지 않은 상태로 회중에게 전달하는 데 있습니다. 설교문은 훌륭한데 설교자를 통과하지 않은 말씀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상에서 인용한 ‘먼저 설교자의 가슴을 뜨겁게 하지 않은 말씀은 회중의 가슴도 뜨겁게 없다’는 말도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뜨거움’의 의미를 조금 더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한 정서적 흥분이 아니라 진리를 사랑하고 그것대로 살고자 하는 의지의 뜨거움이어야 합니다. 말씀을 읽다가 눈물을 흘리지 않아도 됩니다. 특별한 감동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 말씀 앞에서 내가 버려야 것은 무엇인가?’, ‘내가 순종해야 것은 무엇인가?’, ‘오늘 진리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다면 이미 말씀은 머리에서 의지와 삶으로 내려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AI 시대에는 오히려 설교자의 ‘고독’이 더 중요해질지도 모릅니다. 과거에는 정보가 부족해서 연구하는 데 시간이 걸렸지만, 이제는 정보가 너무 빨리 공급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멈추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성경을 펴고 아무 검색도 하지 않은 채 본문을 여러 번 읽는 시간, 쉽게 이해되지 않는 문장 앞에서 그대로 머무는 시간, 설교거리를 찾기 전에 먼저 자신의 삶을 비추어 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기술을 거부하는 태도가 아니라 기술을 제자리에 놓는 영적 질서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이 영상의 마지막 권면이 힘을 얻습니다. ‘AI 열기 전에, 주석을 펴기 전에, 먼저 성경을 펴라.’ 이것은 단순한 설교 작성 요령이 아닙니다. 무엇이 주인이고 무엇이 도구인지를 분명히 하라는 말입니다. 성경이 AI를 해석해야지 AI가 성경을 지배하게 해서는 안 되고, 설교자가 AI의 답을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인 뒤 그것을 회중과 나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결국 문제는 AI가 아닙니다. AI는 설교자를 훌륭하게 도울 수도 있고, 설교자를 놀라울 정도로 게으르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같은 AI를 사용하더라도 한 사람은 그것을 통해 더 깊이 연구하고 자신의 선입견을 검증하며 설교를 정교하게 만들 수 있고, 다른 사람은 본문을 읽고 씨름해야 할 시간을 생략한 채 완성된 답을 받아 갈 수도 있습니다. 차이는 기술의 성능보다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영적 질서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 영상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AI 설교자의 지성을 도울 있지만,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 앞에서 자신을 살피며 그것을 삶으로 받아들이는 일까지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AI 시대의 좋은 설교자는 AI를 사용하지 않는 설교자가 아니라, ‘무엇을 AI에게 맡기고 무엇만큼은 결코 맡겨서는 되는지 아는 설교자’일 것입니다. AI에게 자료 조사와 비교와 정리와 편집을 맡길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 앞에 홀로 서서 주님을 바라보고,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받은 진리를 삶으로 받아들이는 그 자리만큼은 설교자 자신이 지켜야 합니다.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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