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 설교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신성종 목사가 죽음을 ‘교리 문제’로 시작하지 않고 ‘사람의 두려움’에서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화장장에서 어머니의 유골함을 받아 든 아들이 ‘이렇게 다 태웠는데 나중에 부활할 때 어머니 몸은 어떻게 됩니까?’라고 묻자, 그는 그 질문의 밑바닥에 ‘내가 어머니한테 몹쓸 짓을 한 것은 아닙니까?’라는 죄책감이 있음을 알아차립니다. 이것은 목회적으로 매우 중요한 통찰입니다. 사람이 죽음 앞에서 묻는 질문은 표면적으로는 신학적이어도 실제로는 사랑, 상실, 죄책감, 두려움의 언어인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좋은 데 가셨어요’, ‘천국 가셨으니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라는 말이 실제 유가족에게 별 위로가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그의 고백도 진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이런 태도는 충분히 귀하게 볼 수 있습니다. 체어리티는 먼저 상대방의 실제 상태를 살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죽음이 두렵다고 해서 신앙이 없는 것은 아니다’, ‘슬퍼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소망 없는 사람처럼 슬퍼하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께서도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셨다’는 설교 후반의 권면도 좋습니다. 신앙을 인간의 자연적 정서 자체를 억압하는 도구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육체를 입고 자연계에 사는 동안 사람에게 죽음은 이별이고, 사랑하는 사람을 눈앞에서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는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슬픔 자체가 신앙의 실패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그 슬픔이 절망으로 닫히느냐, 아니면 주님을 향한 신뢰 가운데 통과되느냐입니다. 이런 점에서 신성종 목사의 ‘무섭지 않은 것이 믿음이 아니라 무서운데도 손을 놓지 않는 것이 믿음’이라는 표현은 목회적으로 매우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설교는 여기서부터 스베덴보리와 매우 중요한 갈림길에 들어섭니다. 신성종 목사는 고린도전서 15장을 통해 ‘몸은 버려지는 껍데기가 아니다’라는 명제를 세우고, 당시 헬라 철학의 영혼-육체 이원론을 비판합니다. 그는 ‘육신의 옷을 벗고 하늘나라로 갔다’, ‘몸은 껍데기이고, 진짜는 영혼이다’ 같은 기독교 장례식의 익숙한 표현 안에 사실 헬라적 사고가 들어 있다고 지적합니다. 여기까지는 상당히 생각해 볼 만한 문제 제기입니다. 인간을 영혼이라는 ‘진짜 인간’과 아무 가치 없는 육체라는 ‘껍데기’로 단순 분해하는 사고는 분명 조심해야 합니다. 자연계의 몸 역시 주님이 인간에게 주신 것이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랑하고 섬기고 일하고 체어리티를 실천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제3의 길이 열립니다. 그것은 ‘물질적 몸이 껍데기가 아니므로 그 물질적 몸이 다시 살아나야 한다’도 아니고, ‘물질적 몸은 아무 가치가 없고 영혼만 진짜다’도 아닙니다. 인간은 사후에도 완전한 인간이며, 몸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다만 그 몸은 이 자연계의 물질로 이루어진 몸이 아니라 영계의 실체에 상응하는 ‘영적 몸’입니다. 사람이 죽을 때 자연계의 육체는 자연계에 남겨 두지만, 그 사람 자신은 몸 없는 의식이나 구름 같은 영혼이 되어 떠도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사람의 형상을 그대로 지닌 영으로 깨어나고, 보고 듣고 말하고 걷고 사람을 만나며 살아갑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영계에서의 인간이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처음에는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삶의 연속성을 경험한다고 거듭 설명합니다.
이 점에서 신성종 목사가 ‘신령한 몸’을 ‘유령 같은 비물질적인 무엇’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 것은 뜻밖에도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가까운 지점까지 옵니다. 차이는 그다음입니다. 신성종 목사는 그 ‘신령한 몸’을 마지막 날 현재의 육체가 변화하여 얻는 몸으로 이해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죽는 순간 자연적 몸을 벗고 이미 영적 몸으로 영계에 들어간다고 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는 수천 년 동안 무덤 속에서 몸의 부활을 기다리는 영혼이라는 상태가 없습니다. 아담 시대의 사람도, 오늘 죽은 사람도 사후에는 영계에서 인간으로 살아갑니다. 마지막 날에 무덤으로 돌아와 옛 물질을 다시 모아 몸을 만드는 과정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설교의 출발점이 된 ‘화장하면 나중에 어머니의 몸은 어떻게 됩니까?’라는 질문에 스베덴보리는 신성종 목사보다 훨씬 더 직접적으로 대답했을 것입니다. ‘화장하든 매장하든 어머니 자신에게는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어머니는 그 육체 속에 남아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연적 육체는 이 자연계에서 살아가기 위해 잠시 입었던 몸이며, 죽음과 동시에 인간 자신은 영적 몸으로 영계에서 깨어납니다. 따라서 화장은 부활을 어렵게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애초에 사후의 인간이 다시 사용해야 할 몸을 훼손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매장된 시신도 다시 필요한 것이 아니고, 화장된 재도 다시 모을 필요가 없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설교의 ‘씨앗’ 비유도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다르게 읽힙니다. 신성종 목사는 고린도전서 15장의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를 장례와 미래의 육체 부활로 연결합니다. ‘어머니는 지금 땅에 심겨 있는 거네요’라는 유가족의 말은 이 설교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 가운데 하나입니다. 목회적 위로로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정확히 말해 ‘어머니가 땅에 심겨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땅에 있는 것은 어머니가 자연계에서 사용하던 육체입니다. 어머니 자신은 이미 영계에서 깨어나 삶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더 정확한 위로는 ‘어머니는 사라진 것도 아니고, 땅속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미 다른 세계에서 사람으로 살아 계십니다’가 될 것입니다.
이 차이는 작아 보이지만, 사후세계 이해 전체를 바꿉니다. 전통적 육체 부활론에서는 ‘죽음 → 영혼의 중간 상태 → 마지막 날 → 육체 부활’이라는 구조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집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에게서는 ‘죽음 → 영계에서 깨어남 → 중간영계에서 내면이 드러남 → 자신의 지배적 사랑에 따라 천국 또는 지옥으로 들어감’이라는 흐름입니다. 따라서 부활은 먼 미래에 있을 사건만이 아니라 죽음과 함께 인간에게 실제로 일어나는 사후의 깨어남과 깊이 연결됩니다. 이것은 유가족에게 주는 위로의 내용까지 크게 달라지게 합니다. ‘언젠가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보다 ‘그 사람은 지금도 주님의 섭리 아래 존재하며 살아 있습니다’라는 쪽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하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부활을 다루는 부분에서는 더욱 세심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신성종 목사는 부활하신 예수가 만져질 수 있었고, 음식을 드셨으며, 못 자국도 있었다는 사실을 들어 우리의 미래 부활 몸 역시 이와 같은 물질적 몸이라는 논증을 펼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부활은 일반 인간의 사후 과정과 동일한 사례가 아닙니다. 주님은 인간처럼 자연적 몸을 버리고 영으로 살아난 분이 아니라, 지상 생애 동안 인성을 신성과 하나 되게 하시는 영화의 과정을 완성하시고, 신적 인성(Divine Human)으로 부활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무덤에 주님의 몸이 남아 있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일반 인간의 죽음과 다릅니다. 이것을 모든 인간의 시체가 마지막 날 다시 일어날 것이라는 직접적인 모델로 삼으면 스베덴보리의 기독론과 사후세계론에서는 중요한 구별 하나가 사라집니다.
그렇다고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보이고 만져지고 함께 음식을 드신 사건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영적인 것은 물질적이지 않으므로 실체도 없다’는 우리의 자연적 선입견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묘사하는 영계는 희미하고 추상적인 의식의 세계가 아닙니다. 그곳에는 사람, 집, 길, 공동체, 산과 들, 식물과 수많은 환경이 있으며, 사람들은 서로 보고 말하고 살아갑니다. 그것들은 자연계 물질이 아니라 영적 실체와 그 상응으로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몸이 없으면 어떻게 서로 알아봅니까?’라는 질문 자체가 스베덴보리에게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영들은 몸 없는 영혼들이 아니라 사람의 형상을 지닌 인간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머니를 다시 만나면 알아볼 수 있습니까?’라는 설교 속 질문에도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매우 적극적입니다. 알아볼 수 있습니다. 다만 천국에서의 재회는 단순히 얼굴을 기억하여 알아보는 차원을 넘어섭니다. 영계에서는 사람의 내면이 외면에 더욱 직접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자연계에서는 몸과 사회적 역할과 여러 외적 조건이 사람의 내면을 가릴 수 있지만, 영계에서는 점차 그 사람의 지배적 사랑과 실제 성품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진정한 결합은 단순한 혈연만으로 영원히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내적 사랑과 삶의 상태가 서로 조화를 이루느냐와 관계됩니다. 이 부분은 ‘죽으면 가족이 모두 그대로 모여 영원히 함께 산다’는 식의 단순한 위로와는 구별해야 합니다.
설교에서 또 하나 크게 갈라지는 부분은 요한계시록 21장의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신성종 목사는 ‘성경의 마지막 그림은 우리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내려오는 것’이라며, ‘새로워진 몸을 입은 우리가 새로워진 땅에서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흙냄새, 밥 짓는 냄새, 손을 잡는 감촉, 함께 밥 먹는 시간 같은 자연적 삶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정서적으로 매우 따뜻하고 매력적인 그림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새 하늘과 새 땅’ 해석은 이것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물질 우주가 폐기되고 새로운 물질 지구가 만들어진다는 뜻이 아니라, 영계에서 이루어지는 새 하늘과 그에 상응하여 자연계에 세워지는 새로운 교회, 곧 새로운 영적 질서를 가리킵니다. ‘새 예루살렘’ 역시 하늘에서 물리적으로 내려오는 거대한 도시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새 교회의 교리와 삶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 설교에서 가장 조심해서 받아들여야 할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천국은 결국 새로워진 지구이며, 우리는 부활한 물질적 몸으로 그곳에서 다시 산다’는 그림은 성경의 문자적 이미지를 매우 충실하게 붙들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에게는 그 문자 안의 속뜻을 자연적 차원에 고정한 해석이 됩니다. 요한계시록의 ‘새 하늘’, ‘새 땅’, ‘새 예루살렘’을 자연적 공간과 물질적 도시로 읽기 시작하면, 계시록 전체에 흐르는 상응적 언어를 놓치게 됩니다.
그렇지만 신성종 목사가 이 교리를 통해 도달한 윤리적 결론은 매우 귀합니다. 그는 고린도전서 15장이 58절에서 ‘그러므로 …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로 끝난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그리고 교회 화장실을 청소한 사람, 새벽에 난로를 피운 사람, 김치를 담가 홀로 사는 노인에게 가져다준 사람, 수십 년 동안 주보를 접은 사람들의 손을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아주 중요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천국을 이루는 것은 단순히 올바른 교리를 알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실제 삶의 유용한 일, 곧 쓰임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손이 다시 살아납니다’라는 표현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다시 해석해야 합니다. 관절이 붓고 굳은살이 박힌 바로 그 물질적 손의 원자들이 다시 모인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손으로 행했던 사랑과 쓰임이 그 사람의 영원한 인격 안에 남는다고 보는 편이 더 가깝습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무엇을 사랑했고, 무엇을 의도했고, 그 사랑을 어떻게 삶으로 행했는지가 그 사람의 내적 생명을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는 신성종 목사의 ‘부활이 있으므로 지금 하는 일이 헛되지 않다’는 결론과 스베덴보리의 ‘사람이 세상에서 형성한 지배적 사랑과 삶의 상태를 가지고 영원으로 들어간다’는 가르침이 뜻밖에 깊이 만납니다. 결론의 영적 방향은 가까운데 그 결론을 설명하는 사후세계의 구조가 다른 것입니다.
그리고 이번 설교를 읽으며 특별히 눈여겨볼 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중심 본문이 고린도전서 15장이라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울 서신을 포함한 사도들의 서신을 복음서나 계시록과 같은 의미에서 ‘말씀’으로 보지 않으며, 그 안에 연속적인 내적 의미, 곧 아르카나가 담겨 있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사도서신이 무가치하거나 읽을 필요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교회를 가르치고 신앙과 체어리티의 삶을 권면하는 중요한 교훈이 그 안에 있습니다. 따라서 고린도전서 15장의 ‘씨’, ‘썩을 것과 썩지 아니할 것’, ‘육의 몸과 신령한 몸’을 창세기나 계시록의 상응처럼 하나하나 아르카나로 풀어내기보다, 사도 바울이 당시 교회에 가르치려 했던 교리적 가르침으로 읽고 그것을 말씀 전체와 조화시키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더 적절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설교는 아주 흥미로운 역설을 보여 줍니다. 신성종 목사는 ‘몸 없는 영혼이 천국으로 간다’는 통속적 기독교 관념을 헬라 철학의 영향이라고 비판하면서 성경적 사후세계를 회복하려 합니다. 문제 제기 자체에는 중요한 진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대안으로 ‘마지막 날 무덤에서 육체가 부활하여 새 지구에서 살아간다’는 방향으로 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두 그림 모두를 넘어섭니다. 인간은 몸 없는 영혼이 아닙니다. 그러나 다시 자연적 육체를 입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은 죽는 순간 자연적 몸을 내려놓고 영적 몸으로 깨어나며, 그 몸으로 영계에서 완전한 인간의 삶을 계속합니다. 저는 이번 설교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바로 이 지점이 가장 중요한 분별점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처음 화장장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면, 세 관점의 차이가 아주 선명해집니다. ‘어머니의 몸을 태워 버렸는데 어떻게 부활합니까?’라는 질문에 통속적인 영혼불멸론은 ‘몸은 중요하지 않고 영혼만 천국에 갔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신성종 목사는 ‘그 몸은 씨앗이며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 썩지 않는 몸으로 다시 살리십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어머니 자신은 그 유골함 안에도, 무덤 안에도 계시지 않습니다. 자연적 육체는 그곳에 남았지만 어머니는 이미 영적 몸으로 영계에서 깨어나셨습니다’라고 대답하게 됩니다. 세 답은 비슷하게 유가족을 위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인간이 ‘지금 어디에 있으며 어떤 상태로 존재하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세계관을 전제합니다.
그럼에도 이 설교 전체를 오류 때문에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처음부터 끝까지 흐르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정죄하지 말자’, ‘유가족의 슬픔을 억누르지 말자’, ‘화장 때문에 죄책감을 갖지 말자’, ‘몸으로 행한 작은 사랑의 수고를 하찮게 여기지 말자’, ‘죽음이 마지막이므로 현재의 삶이 허무한 것이 아니라 영원이 있으므로 오늘의 사랑과 수고가 중요하다’는 목회적 메시지는 충분히 귀합니다. 특히 이름 없이 교회를 섬기고 이웃을 돌본 사람들의 작은 수고를 기억하는 부분은 체어리티와 쓰임이라는 스베덴보리의 핵심 가르침과 매우 아름답게 만납니다.
결국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이 설교에 던지는 질문은 ‘신성종 목사의 부활 신앙이 옳으냐 그르냐’ 정도가 아닙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부활이란 정확히 무엇인가?’입니다. 자연적 육체의 재생인가, 아니면 인간이 죽음을 통과하여 영적 세계에서 자신의 참된 몸으로 깨어나는 것인가? ‘새 하늘과 새 땅’은 미래의 물질 우주인가, 아니면 주님이 이루시는 새로운 영적 질서와 새 교회인가? 그리고 예수의 부활은 우리 육체 부활의 단순한 견본인가, 아니면 주님의 인성이 완전히 영화되어 신성과 하나 된 유일무이한 사건인가? 이 질문들 앞에서 신성종 목사의 설교는 오히려 좋은 출발점을 제공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의 목회적 고백을 그대로 귀하게 남겨 두어도 좋겠습니다. ‘무섭지 않은 것이 믿음이 아니라 무서운데도 손을 놓지 않는 것이 믿음입니다.’ 여기에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을 덧붙인다면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죽음 앞에서 우리가 붙드는 소망은 ‘언젠가 흩어진 육체의 원소가 다시 모일 것’이라는 데 있지 않습니다. 소망은 ‘죽음조차 주님이 주신 생명의 연속을 끊을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음과 함께 무(無)로 사라졌다가 먼 훗날 다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문을 통과하여 영계에서 계속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장례는 한 사람의 존재가 끝나는 자리가 아니라, 우리의 눈에서는 닫히지만 그에게는 다른 세계가 열리는 경계가 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설교가 품고 있는 따뜻한 목회적 위로와 스베덴보리의 놀라울 만큼 구체적인 사후세계의 가르침이 서로 만날 수 있다고 봅니다.
심화
바울은 왜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을 이렇게 말했을까?
앞의 신성종 목사의 설교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살펴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사람이 죽은 뒤 다시 자연적 육체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죽음과 함께 영계에서 영적 몸으로 깨어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바울은 왜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마치 죽은 육체가 장차 다시 살아나는 것처럼 말했을까요?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는 질문에 씨앗을 예로 들고,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난다’고 말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이 문제를 다룰 때 가장 먼저 조심해야 할 것은 ‘그러면 바울이 틀렸다는 말인가?’라고 너무 빨리 결론짓는 것입니다. 반대로 ‘바울도 사실 스베덴보리와 완전히 똑같은 사후세계관을 가르쳤다’고 만드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을 쓴 역사적 상황과 목적을 먼저 살펴보고, 그가 무엇을 말하려 했으며 무엇까지 말하지 않았는지를 구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의 직접적인 문제는 바울 자신이 12절에서 밝힙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여기서 고린도교회 일부 사람들이 부인하고 있었던 것은 일차적으로 그리스도의 부활 자체라기보다 ‘죽은 자의 부활’이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이 장에서 가장 먼저 지키려고 했던 것은 사후세계의 세밀한 구조나 부활의 물리적 메커니즘이 아니라 ‘죽음이 인간의 생명을 끝내지 못한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분에게 속한 사람들의 부활은 분리될 수 없다’는 기독교 신앙의 근본적인 소망이었습니다.
이 점을 놓치면 고린도전서 15장을 마치 ‘마지막 날 무덤 속 시체가 어떤 과정을 거쳐 다시 만들어지는가’를 설명하는 장처럼 읽게 됩니다. 그러나 실제로 바울은 그런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그는 흩어진 뼈와 육체의 원소가 어떻게 다시 모이는지 말하지 않고 오히려 ‘씨앗’을 이야기합니다.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고 합니다. 여기에는 분명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함께 있습니다. 심어진 것과 나타나는 것이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심어진 바로 그 형체가 그대로 되돌아오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바울의 씨앗 비유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도토리를 땅에 심었는데 나중에 땅에서 거대한 참나무가 올라왔다고 합시다. 도토리와 참나무는 모양도, 크기도, 기능도 전혀 다릅니다. 그렇다고 참나무가 그 도토리와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생명의 연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비유를 통해 부활을 단순한 ‘원상복구’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신다’고 합니다.
더욱 주목할 구절은 44절입니다.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도 있느니라.’ 여기서 바울은 ‘몸’과 ‘영혼’을 대조하지 않습니다. 헬라어로 양쪽 모두 ‘소마(sōma)’, 곧 ‘몸’입니다. ‘소마 프쉬키콘(sōma psychikon)’과 ‘소마 프뉴마티콘(sōma pneumatikon)’, 곧 한 종류의 몸과 다른 종류의 몸을 대조합니다. 따라서 바울이 말하는 부활은 ‘몸을 버리고 몸 없는 영혼이 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이 점에서는 신성종 목사의 지적도 귀담아들을 만합니다. 그는 ‘신령한 몸’을 흐릿하고 비물질적이며 유령 같은 무엇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 이해와도 중요한 접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사후의 인간을 몸 없이 떠다니는 의식이나 그림자 같은 존재로 설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사후에도 완전한 인간이며, 인간의 형상을 가진 영적 몸으로 보고, 듣고, 말하고, 걷고, 다른 사람들과 만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지점에서 전통적인 육체 부활론과 스베덴보리의 설명이 갈라집니다. ‘신령한 몸’이 있다는 것과 ‘무덤에 들어간 자연적 육체가 먼 훗날 다시 살아나 그 신령한 몸으로 변한다’는 것은 같은 명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전자를 강하게 말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후대 기독교가 그 말씀을 바탕으로 발전시킨 ‘마지막 날 시체의 재결합과 육체 부활’이라는 구체적인 그림까지 바울이 이 장에서 모두 설명했다고 보아야 하는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특히 고린도전서 15장 50절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바울 자신이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연적 상태의 ‘혈과 육’이 그대로 하나님 나라를 상속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고린도전서 15장의 중심을 단순히 ‘현재의 물질적 육체가 다시 돌아온다’는 명제로 축소하면 바울 자신의 언어가 가진 훨씬 풍부한 긴장을 놓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설명이 매우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스베덴보리도 ‘부활’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인간이 죽음 후에 부활한다고 매우 분명하게 말합니다. 다만 ‘무엇이 부활하는가?’와 ‘언제 부활하는가?’에 대한 설명이 전통적인 육체 부활론과 다릅니다. 부활하는 것은 무덤 속에 남겨진 자연적 육체가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이며, 그 부활은 수천 년 뒤 우주의 마지막 날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죽은 뒤 자연계에서 영계로 깨어날 때 일어납니다. 자연적 육체는 자연계에 남지만 사람 자신은 영적 몸으로 영계에서 계속 살아갑니다.
이렇게 보면 ‘몸은 소중하다’는 말과 ‘자연적 육체가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말을 반드시 동일시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연적 몸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체어리티와 쓰임을 행하도록 주어진 귀한 도구입니다. 그러므로 몸을 악한 것, 영혼을 가두어 놓은 감옥, 아무 가치 없는 껍데기로 여기는 것은 기독교적인 인간 이해와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연적 몸이 귀하다는 사실이 곧 그 몸의 물질이 영원히 보존되거나 마지막 날 다시 조립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자연적 몸은 자연계에 속하고, 영적 몸은 영계에 속합니다.
그러므로 신성종 목사의 설교에 등장하는 ‘화장하면 어머니의 몸은 나중에 어떻게 부활합니까?’라는 질문에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조금 다른 대답을 할 수 있습니다. 화장하든 매장하든 어머니 자신에게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어머니 자신이 그 자연적 육체 속에 남아 부활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연적 몸은 자연계에 남겨지지만 그 사람 자신은 이미 영적 몸으로 영계에서 깨어납니다. 그러므로 화장이 부활을 방해할 수도 없고, 매장이 부활을 더 안전하게 보장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바울은 이것을 ‘사람은 죽는 즉시 영계에서 영적 몸으로 깨어난다’고 스베덴보리처럼 명료하게 설명하지 않았을까요? 여기서는 바울 서신의 성격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독특한 이해를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도들의 서신을 모세오경과 예언서, 복음서와 계시록처럼 연속적인 내적 의미, 곧 아르카나가 들어 있는 ‘말씀’과 동일한 범주에 두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사도서신을 무가치하거나 잘못된 글이라고 보는 것도 아닙니다. 사도들은 초기 기독교회를 세우고 사람들에게 주님에 대한 신앙과 체어리티의 삶을 가르치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따라서 바울을 영계의 구조와 사후 인간의 상태를 완전히 계시받아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사람으로 읽기보다는, 당시 교회가 처한 문제 속에서 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언어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가르치는 사도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의 가장 큰 관심은 ‘죽은 뒤 정확히 몇 단계의 상태를 거쳐 천국에 들어가는가?’가 아닙니다. 그의 관심은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셨으며 너희도 그분 안에서 살아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주 안에서 살아가는 너희의 삶은 헛되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실제로 바울 자신의 다른 글들을 보면 사후 상태에 관한 표현이 언제나 하나의 완성된 조직신학 체계처럼 나타나는 것도 아닙니다. 그는 고린도후서에서는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을 말하고, 빌립보서에서는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말합니다. 이런 표현들은 죽은 사람이 아주 먼 미래의 부활 때까지 사실상 아무런 삶도 없이 기다린다는 그림과는 잘 맞지 않습니다. 반면 고린도전서 15장과 데살로니가전서에서는 미래의 부활과 주님의 오심이라는 종말론적 언어를 강하게 사용합니다. 후대 기독교 신학은 이러한 여러 표현을 종합하여 ‘죽음 → 영혼의 중간 상태 → 마지막 날 → 육체 부활’이라는 체계를 세웠지만, 그 완성된 체계를 그대로 바울 자신의 명시적인 설명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서 또 하나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사실 스베덴보리와 똑같은 사후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표현만 다르게 했다’고 주장해서도 안 됩니다. 그것은 역사적 바울에게 스베덴보리의 계시를 거꾸로 투영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당시 유대교의 부활 신앙과 초기 기독교의 종말론적 언어 속에서 말하고 있으며, 스베덴보리는 훨씬 후대에 사후 인간의 깨어남, 영적 몸, 중간영계, 천국과 지옥의 상태 등을 매우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둘 사이에는 실제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균형 있게 말한다면 이렇습니다. ‘바울은 부활이라는 진리를 강력하게 가르쳤지만, 사후세계의 메커니즘 전체를 밝힌 것은 아닙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붙들고 있는 핵심은 인간이 죽음으로 소멸하지 않는다는 것, 주님의 부활이 우리의 생명과 분리된 사건이 아니라는 것, 부활한 인간에게는 ‘몸’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몸은 지금의 썩고 약하고 죽는 자연적 상태와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부활’과 ‘영적 몸’이 실제로 무엇이며 인간에게 언제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훨씬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고린도전서 15장의 씨앗 비유도 새로운 의미로 다가옵니다. 씨앗과 나무 사이에는 분명한 연속성이 있지만 동일한 외적 형체가 반복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연적 몸과 영적 몸 역시 동일한 물질의 재조립이라는 의미에서 하나가 아닙니다. 그러나 죽기 전의 사람과 죽은 뒤의 사람이 서로 다른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 사람’이라는 인격과 생명의 연속성은 그대로 이어집니다. 죽음은 한 인간을 없애고 나중에 복제품을 만드는 사건이 아니라 자연계에서의 삶이 영계에서의 삶으로 이어지는 경계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고린도전서 15장의 마지막 58절이 매우 중요해집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바울은 부활에 관한 긴 논의를 ‘그러므로 죽은 뒤의 일을 많이 연구하라’로 끝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주의 일에 힘쓰라’고 끝냅니다. 사후의 생명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현재의 삶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체어리티와 쓰임의 가르침과도 깊이 만납니다. 사람이 영원으로 가지고 가는 것은 자연적 육체를 구성했던 물질이 아니라 그가 세상에서 무엇을 사랑했고, 무엇을 의도했으며, 그 사랑을 어떻게 실제 삶의 쓰임으로 나타냈는가 하는 그의 내적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병든 사람을 돌본 손, 배고픈 사람에게 음식을 건넨 손, 교회와 가정과 사회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을 묵묵히 감당한 손으로 행한 사랑은 헛되지 않습니다. 물질적인 그 손 자체가 영원히 보존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손을 움직였던 사랑과 의도와 삶이 그 사람 자신 안에 영원히 남기 때문입니다.
결국 고린도전서 15장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다는 것은 바울을 틀렸다고 버리는 것도 아니고, 바울의 모든 표현을 억지로 스베덴보리와 일치시키는 것도 아닙니다. 바울이 당시 고린도교회를 향해 증언한 부활의 핵심 진리를 먼저 존중하고, 그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은 사후세계의 실상을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을 통해 더 깊이 살펴보는 것입니다.
바울의 외침은 분명합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에 매우 구체적인 설명을 더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죽음과 함께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영계에서 영적 몸을 지닌 완전한 인간으로 깨어납니다.’ 그리고 두 가르침은 마침내 삶을 향한 한 질문 앞에서 만납니다. ‘그렇다면 나는 오늘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 답 역시 고린도전서 15장의 마지막에 이미 놓여 있습니다.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죽음 이후에도 생명이 계속되기 때문에 오늘의 사랑이 중요하고, 영원이 있기 때문에 지금의 체어리티와 쓰임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부활에 관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어쩌면 ‘내 몸의 물질이 마지막 날 어떻게 다시 모일 것인가?’가 아니라 ‘영원으로 이어질 오늘의 삶을 나는 어떤 사랑으로 살아가고 있는가?’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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