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3:22)
AC.301
또 하나의 아르카나는, 만일 그들이 신앙의 신비들을 배웠더라면 영원히 멸망하였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now lest he put forth his hand, and take also of the tree of lives, and eat, and live to eternity) 하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그 사정은 이렇습니다. 사람들이 삶의 질서를 거꾸로 뒤집어, 자기 자신과 자기 proprium으로부터가 아니면 살려고도 하지 않고, 지혜로워지려고도 하지 않는 상태가 되면, 그들은 신앙에 관한 모든 것을 들을 때마다 그것이 과연 사실인지 아닌지를 자기 스스로 따져 보려 합니다. 그런데 그 판단을 자기 자신과 자기의 감각 및 기억 지식으로부터 내리기 때문에, 결국은 반드시 부인하기(denial)에 이르게 되고, 이어서 blasphemy와 profanation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마침내는 거룩한 것들과 속된 것들을 서로 뒤섞는 일조차 거리낌없이 행하게 됩니다. 사람이 이러한 상태에 이르면, 다른 삶에서는 더 이상 구원의 희망이 남지 않을 정도로 정죄됩니다. 이는 profanation으로 인해 한 번 뒤섞인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이 계속 뒤섞인 채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것에 대한 어떤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그것과 결합된 속된 것에 대한 생각도 동시에 떠오르게 됩니다. 그 결과 그는 정죄 받은 자들의 사회 외에는 어느 사회에도 있을 수 없게 됩니다. 이처럼 결합되어 있는 생각은 다른 생명에서 매우 예민하게 지각됩니다. 중간 영계의 영들조차 그것을 아주 분명히 알아차리며, 천사적 영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그들은 한 사람의 단 하나의 생각만으로도 그 사람의 성품이 어떠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한 번 결합된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다시 분리하는 것은 지옥과도 같은 고통을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만일 사람이 그 고통이 어떠한지를 안다면, 그는 지옥 자체를 피하려는 것과 같은 마음으로 profanation을 피하려 할 것입니다. The other arcanum is that had they been instructed in the mysteries of faith they would have perished eternally, which is signified by the words, “now lest he put forth his hand, and take also of the tree of lives, and eat, and live to eternity.” The case is this: When men have become inverted orders of life, and are unwilling to live, or to become wise, except from themselves and from their own, they reason about everything they hear respecting faith, as to whether it is so, or not; and as they do this from themselves and from their own things of sense and of memory-knowledge, it must needs lead to denial, and consequently to blasphemy and profanation, so that at length they do not scruple to mix up profane things with holy. When a man becomes like this, he is so condemned in the other life that there remains for him no hope of salvation. For things mixed up by profanation remain so mixed up, so that whenever any idea of something holy presents itself, an idea of something profane that is conjoined with it is also there, the consequence of which is that the person cannot be in any society except one of the damned. Whatever is present in any idea of thought in consequence of being conjoined with it, is most exquisitely perceived in the other life, even by spirits in the world of spirits, and much more so by angelic spirits, so exquisitely indeed that from a single idea they know a person’s character. The separation of profane and holy ideas when thus conjoined cannot be effected except by means of such infernal torment that if a man were aware of it he would as carefully avoid profanation as he would avoid hell itself.
해설
AC.301에서 스베덴보리는 본 절인 창3:22의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는 말씀의 참뜻을 설명합니다. 겉으로만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이 영생 얻는 것을 막으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심판이 아니라 자비로운 보호를 의미한다 설명합니다.
본문의 첫 번째 핵심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신앙의 가장 깊은 신비를 알려 주지 않는 것이 오히려 주님의 자비라는 점입니다. 이미 삶의 질서가 뒤집혀 자기 자신과 자기 proprium만을 신뢰하는 사람은, 신앙의 진리를 받아들이더라도 그것을 믿음으로 순종하지 않고, 자신의 감각과 memory-knowledge로 판단하려 합니다. 따라서 더 많은 진리를 알게 될수록 더 깊은 부인과 반대에 빠질 위험이 커집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사람이 결국 ‘부인’, ‘blasphemy’, 그리고 ‘profanation’으로 나아간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논리의 흐름은 매우 분명합니다. 자기 지성만을 절대 기준으로 삼으면, 먼저 진리를 의심하게 되고, 계속해서 거절하게 되며, 마침내는 거룩한 것마저 속된 것과 뒤섞어 버리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왜 profanation이 다른 죄보다 특별히 심각한지를 설명합니다. 그 이유는 거룩한 것과 악한 것이 한 사람 안에서 동시에 결합되기 때문입니다. 이 상태에서는 거룩한 것을 생각할 때마다 그것과 결합된 속된 것도 함께 떠오르므로, 두 가지를 다시 분리하기가 극히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창3:24에서 그룹과 두루 도는 불칼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는 것도, 사람이 이런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한 주님의 보호로 연결됩니다.
본문의 마지막 부분은 사후 세계의 상태를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영계에서는 사람의 생각 하나에도 그 사람의 전체 상태가 담겨 있으며, 영들은 물론 천사들까지도 그 생각 하나만으로 사람의 성품을 분명히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설명을 덧붙이는 이유는, profanation이 단순히 외적 행동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가장 깊은 내면 상태를 영원히 뒤섞어 버리는 일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결국 AC.301의 중심 메시지는, 주님께서 어떤 사람들에게 신앙의 깊은 신비를 허락하지 않으시는 것은 그들을 버리시기 때문이 아니라, 더 큰 영적 파멸인 profanation으로부터 보호하시기 위한 자비로운 섭리라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창3:22의 말씀은 영생을 막으시는 선언이 아니라, 사람이 영원한 멸망에 빠지지 않도록 생명나무의 길을 잠시 막아 두시는 주님의 사랑과 보호를 나타내는 말씀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심화
1. ‘profanation’
마침내는 거룩한 것들과 속된 것들을 서로 뒤섞는 일조차 거리낌없이 행하게 됩니다. 사람이 이러한 상태에 이르면, 다른 삶에서는 더 이상 구원의 희망이 남지 않을 정도로 정죄됩니다. 이는 profanation으로 인해 한 번 뒤섞인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이 계속 뒤섞인 채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것에 대한 어떤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그것과 결합된 속된 것에 대한 생각도 동시에 떠오르게 됩니다. 그 결과 그는 정죄 받은 자들의 사회 외에는 어느 사회에도 있을 수 없게 됩니다. (AC.301)
위 AC.301에 나오는 내용이 좀 알쏭달쏭합니다. 그러니까 지상 생활 중 어떤 상황, 어떤 경우가 이런 케이스가 될까요?
AC.301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profanation’은 단순히 죄를 짓는 것도 아니고, 교회를 떠나는 것도 아닙니다. ‘거룩한 것을 충분히 알고, 어느 정도 인정하고 경험한 뒤, 그것을 의도적으로 악과 결합시키는 상태’를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 일상에서 어떤 경우를 염두에 둔 것인지 이해하면 AC.301이 훨씬 선명해집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오랫동안 말씀을 배우고, 그것이 참이라는 것도 마음으로 인정하며, 주님의 임재까지 깊이 경험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자기 욕망을 버리지 못해 ‘말씀은 참이지만, 나는 내 욕심대로 살겠다’ 결심합니다. 그리고 그 후에도 말씀을 이용, 자신의 탐욕과 명예욕을 정당화하기 시작합니다. 이 경우에는 거룩한 진리를 단순히 버린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악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profanation’은 바로 이런 상태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목회자가 말씀을 깊이 알고 설교도 합니다. 그는 사랑과 겸손을 설교하지만, 실제로는 교회를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이용합니다. 그는 말씀을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그것을 자신의 야망을 위해 사용합니다. 그러면 그의 마음속에서는 거룩한 말씀과 자기애가 서로 결합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AC.301이 말하는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이 뒤섞이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는 늘 ‘용서하라’, ‘사랑하라’ 가르치면서, 정작 자신은 미움과 복수를 즐기고, 그것을 당연하게 여긴다면, 아이들에게 가르친 거룩한 진리와 자신의 악한 삶이 한 사람 안에서 함께 존재하게 됩니다. 물론 이것만으로 곧바로 AC.301이 말하는 ‘profanation’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 사람이 진리를 충분히 알면서도 의식적으로 계속 그렇게 살아간다면, 점점 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설명입니다.
반대로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낙심하여 한동안 교회를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사람, 또는 진리를 잘 이해하지 못해 의심하는 사람은 AC.301의 대상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이런 사람들에게는 회개의 가능성이 남아 있다고 봅니다. 그가 가장 경계하는 것은 ‘진리를 분명히 알면서도 그것을 악을 위해 이용하는 상태’입니다.
본문에서 특히 어려운 표현은 ‘거룩한 것을 생각할 때마다 속된 것도 함께 떠오른다’는 부분입니다. 이것은 이런 뜻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말씀을 이용하여 평생 남을 속이고 권력을 얻었다면, 사후에는 ‘말씀’이라는 생각 자체가 곧 자신의 탐욕과 연결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거룩한 진리만 따로 받아들이고 기뻐하는 것이 불가능해집니다. 거룩한 생각이 일어나는 순간, 그것과 결합된 악도 동시에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분리될 수 없다’ 말하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창3:22에서 주님께서 사람이 생명나무에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하신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심판이 아니라 보호로 이해합니다. 이미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사람이 더 깊은 신앙의 신비까지 알게 되면, 그것마저 자신의 악과 결합시켜 훨씬 더 심한 ‘profanation’에 빠질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더 깊은 진리를 아직 허락하지 않으심으로써, 오히려 그들을 더 큰 영적 파멸에서 보호하신다고 설명합니다.
결국 AC.301의 핵심은 ‘죄를 많이 지으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거룩한 진리를 충분히 알고도 그것을 자기 악과 의도적으로 결합시키는 것이 가장 위험한 영적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섭리는 사람의 상태에 맞추어 진리를 허락하시며, 때로는 더 깊은 진리를 아직 알지 못하게 하시는 것조차 자비의 한 형태라고 스베덴보리는 설명합니다. 이는 창3:24에서 그룹과 두루 도는 불칼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는 이유와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2. ‘중세 교회와 오늘날’
중세 교황들 및 그 계급 구조 아래서 겉과 속이 다르게 산 많은 성직자들, 그리고 오늘날 뉴스에 나오는 많은 목회자들도 어쩌면 저런 경우일 수 있겠네요...
네, 충분히 그런 가능성은 있습니다. 다만 AC.301의 기준에 따르면, 특정 집단 전체를 그렇게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기준은 직분이나 교단이 아니라 ‘한 사람의 내적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중세의 일부 교황들과 고위 성직자들 가운데는 말씀과 교회의 거룩한 것들을 충분히 알면서도 그것을 권력과 재물, 정치적 지배를 위해 이용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만일 그들이 진리를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그것을 자기애와 세속적 야망의 도구로 사용하였다면, 그것은 AC.301이 말하는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결합시키는 상태’에 가까운 사례가 될 수 있습니다.
그 아래에 있던 수많은 사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모두 같은 상태로 볼 수는 없습니다. 어떤 이는 단지 잘못된 교리 속에서 태어나 그것을 진실이라고 믿으며 살았을 수도 있고, 어떤 이는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려 했을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도 여러 곳에서, 잘못된 교리 안에 있어도 선한 삶을 산 사람들은 사후에 진리를 배우고 받아들인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직분만으로 AC.301의 대상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 뉴스에 등장하는 일부 목회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그들이 말씀을 깊이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그것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속이고, 자신의 권력과 명예와 재산을 위해 복음을 수단으로 삼는다면, AC.301의 설명과 상당히 가까운 사례가 될 수 있습니다. 특히 거룩한 말씀을 이용하여 악을 정당화하거나, 자신의 탐욕을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포장하는 일은 스베덴보리가 가장 심각하게 본 ‘profanation’의 방향과 일치합니다.
반대로 뉴스에 이름이 오르내린다고 해서 모두 AC.301의 상태라고 판단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 사람의 내면과 그가 알고 있는 진리의 정도, 그리고 얼마나 의식적으로 행했는지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최종적인 영적 상태에 대한 판단은 언제나 주님께 속한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AC.301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남을 판단하는 기준이라기보다 자신을 살피는 기준입니다. ‘나는 말씀을 배우는 만큼 그것에 따라 살려고 하는가?’, ‘혹시 내가 아는 진리를 내 자존심이나 명예, 유익을 위해 이용하고 있지는 않은가?’를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사실 스베덴보리 자신도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무지보다도 ‘알면서 거스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창3:22-24를 설명하면서, 주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더 깊은 진리를 아직 허락하지 않으시는 것조차 심판이 아니라 자비라고 해석한 것입니다. 진리를 더 많이 안다는 것은 그만큼 더 큰 책임도 함께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는 목회자, 신학자, 성직자뿐 아니라 스베덴보리를 연구하는 우리 모두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경고라고 볼 수 있습니다.
3. ‘세속적 배신, 이중 첩자’
profanation은 꼭 종교적, 그러니까 주님의 말씀하고만 관련되어야 성립하나요? 세상, 세속 진리, 그러니까 이중 첩자라든지, 이런저런 배신자들의 경우는 설령 그 행태가 유사, 비슷할지라도 그냥 세상 죄일 뿐, profanation은 아닌 건가요?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의 정의에 따르면 ‘profanation’은 본질적으로 ‘거룩한 것’과 관련된 개념입니다. 따라서 세속적인 배신이나 이중 첩자 행위 자체는 아무리 악해도, 그것만으로는 ‘profanation’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profanation’이라는 말 자체가 ‘거룩한 것(sacred things)을 속된 것(profane things)과 결합시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AC.301에서도 계속 ‘holy’와 ‘profane’의 결합을 말하지, ‘선’과 ‘악’ 일반의 결합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국가 기밀을 적국에 넘긴 이중 첩자는 매우 큰 죄를 범한 것입니다. 그는 충성심을 배반했고, 많은 사람을 위험에 빠뜨렸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행위가 하나님의 말씀이나 신앙의 거룩한 것과 직접 관련되지 않았다면, 그것은 악한 죄이고 배신이지만, 스베덴보리의 의미에서 ‘profanation’은 아닙니다.
사업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생 함께 일한 동업자를 속여 회사를 빼앗거나, 친구를 배신하여 큰 이익을 얻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 역시 심각한 악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히 세속적 탐욕과 배신의 문제라면, 아직 AC.301이 말하는 ‘profanation’은 아닙니다.
그러나 같은 배신이라도 양상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목회자가 성경 말씀을 이용하여 신자들의 신뢰를 얻고, 그 신뢰를 발판으로 거액의 헌금을 가로채거나 자신의 권력을 세우는 경우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때 그는 단순히 돈을 훔친 것이 아니라, 거룩한 말씀과 하나님의 이름을 자신의 탐욕을 위해 사용한 것입니다. 여기서는 ‘배신’이면서 동시에 ‘profanation’이 될 가능성이 생깁니다.
또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거짓 예언을 하여 사람들을 조종한다면, 그것 역시 단순한 거짓말을 넘어 거룩한 것을 악의 도구로 사용하는 일이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특별히 두려워한 경우입니다.
그래서 저는 ‘profanation’을 이렇게 이해하면 가장 명확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profanation’은 죄이지만, 모든 죄가 ‘profanation’은 아닙니다.
모든 ‘profanation’은 악이지만, 모든 악이 ‘profanation’은 아닙니다.
‘profanation’은 ‘거룩한 것을 알고, 어느 정도 인정한 뒤, 그것을 의도적으로 악과 결합시키는 특수한 죄’입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의 개념은 매우 좁고도 엄격합니다. 그는 사람을 쉽게 ‘profanation’의 상태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AC.301에서 강조하는 것은, 주님께서 사람들이 그런 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때로는 더 깊은 진리를 아직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profanation’은 일반적인 죄보다 더 깊고 특별한 영적 상태이기 때문에, 주님께서도 특별한 섭리로 그것을 막으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창3:22-24는 더욱 의미심장합니다. 생명나무의 길을 막으신 것은 단순히 죄인을 막으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거룩한 것’을 ‘악’과 영구히 결합시키는 ‘profanation’에 빠지는 것을 막으신 주님의 자비로운 보호였다는 것이 AC.301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 ‘태고교회 후손들’
태고교회 후손들은 비록 타락은 했어도 종교적이었나 봅니다. 타락 후 바로 profanation 문제가 대두되는 걸 보면 말입니다.
네, 바로 그 점을 보신 것이 맞습니다. 태고교회 후손들은 타락했다고 해서 곧바로 무신론자나 비종교인이 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여전히 태고교회로부터 전해 내려온 거룩한 지식과 천국에 관한 인식, 주님에 관한 가르침, 선과 진리의 내적 의미를 어느 정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런 거룩한 것들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자기애와 감각적 욕망 아래로 끌어내려 섞기 시작했다는 데 있었습니다.
태고교회는 본래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을 통해 선과 진리를 직접 지각하던 교회였습니다. 그러므로 그 후손들은 단순히 교리 몇 가지를 머리로 배운 정도가 아니라, 천국과 영적 생명에 관한 매우 깊은 인식의 유산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비록 세대가 지나면서 퍼셉션 자체는 점차 사라졌어도, 그 퍼셉션에서 비롯된 지식과 표상, 예배 형태와 거룩한 전승은 상당 기간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그들의 타락은 단순한 무지나 야만화가 아니라, 이미 알고 있던 거룩한 것들을 자기중심적인 추론과 욕망에 종속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창3에서 뱀이 여자에게 말을 걸고, 여자가 나무의 열매에 관하여 대답하며, 마침내 사람이 선악을 아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과정도 이를 보여줍니다. 그들은 거룩한 것에 관하여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명령도 알고 있었고, 생명나무가 뜻하는 천적 생명의 질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지각하는 대신 감각과 memory-knowledge를 출발점으로 삼아 거룩한 것들을 판단하려 했습니다. 타락은 종교 자체를 버리는 것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종교적이고 거룩한 것을 proprium의 지배 아래 놓는 것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타락 직후 profanation의 위험이 곧바로 대두됩니다. 그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면 profanation의 위험도 그만큼 크지 않았을 것입니다. profanation은 거룩한 것을 알고 인정한 사람이 그것을 악과 결합할 때 성립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생명나무의 길이 막힌 것은 이미 충분히 거룩한 것을 알고 있던 상태에서 더 깊은 천적 아르카나까지 접하게 될 경우, 그것마저 자기애와 거짓에 섞어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이를 위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태고교회 후손들의 타락은 오늘날 흔히 생각하는 종교의 상실과는 다릅니다. 그들은 종교를 버렸다기보다 종교를 변질시켰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대신 자신을 높이기 위해 거룩한 것을 사용했고, 천국의 질서를 따르는 대신 자신의 욕망을 정당화하는 데 영적 지식을 동원했습니다. 외형상으로는 여전히 예배와 거룩한 말과 종교적 표상을 간직했을 수 있지만, 그 안의 중심은 주님 사랑에서 자기 사랑으로 바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창3:22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라는 말씀은 단순히 사람이 지식을 많이 얻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지각하던 사람이 이제 그것들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판단하고 결정하려 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거룩한 영역을 떠난 것이 아니라 거룩한 영역 안에서 자기 자신을 주인으로 세우려 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profanation으로 이어질 수 있는 가장 위험한 문턱이었습니다.
따라서 말씀하신 대로, 태고교회 후손들은 타락한 뒤에도 매우 종교적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다만 그 종교성은 점차 주님을 향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한 종교성으로 변해 갔습니다. 그들은 거룩한 것을 부정해서만 타락한 것이 아니라, 거룩한 것을 붙들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proprium과 결합했기 때문에 더욱 위험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룹과 두루 도는 불칼은 단순히 죄인을 낙원 밖에 가두는 형벌이 아니라, 거룩한 것의 마지막 깊이까지 profanation하지 못하도록 막으시는 주님의 자비로운 섭리였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5. ‘가룟 유다’
가룟 유다의 죄는 profanation으로 보아야 하나요? 일반 교인들이 질문할 것 같아요...
네, 일반 교인들이 충분히 물을 만한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profanation 개념에 비추어 보면, 가룟 유다의 죄는 단순한 배신을 넘어 profanation의 성격을 매우 강하게 지닌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다만 ‘유다라는 개인의 영원한 내적 상태가 profanation의 최종 단계였다’고 우리가 단정하기보다는, ‘복음서에 기록된 그의 행위가 profanation을 대표적으로 드러낸다’고 설명하는 편이 정확하고 안전합니다.
가룟 유다는 단순히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들은 외부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주님께 직접 부름받은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였고, 주님의 말씀을 들었으며, 주님의 이적과 삶을 가까이에서 보았습니다. 또한 다른 제자들과 함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치는 권능까지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거룩한 것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 채 범죄한 사람이 아니라, 매우 가까운 자리에서 주님의 거룩하심을 접하고, 어느 정도 인정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바로 그 거룩한 관계를 이용하여 주님을 넘겨주었습니다. 특히 배신의 표로 ‘입맞춤’을 사용했다는 점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입맞춤은 본래 사랑과 친교, 결합을 표시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유다는 사랑의 표지를 배신의 신호로 바꾸었습니다. 겉으로는 주님께 가까이 다가가 사랑과 존경을 표시하면서, 속으로는 주님을 원수들에게 넘겨주고 있었습니다. 거룩한 표상과 악한 의도를 한 행위 안에 결합했다는 점에서, 이는 profanation의 구조를 매우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또한 은 삼십을 받고 주님을 판 것은 단순히 스승 한 사람을 배신한 사건만이 아닙니다. 유다는 자신이 가까이에서 알고 따랐던 주님을 세속적 이익과 맞바꿨습니다. 다시 말해, 거룩한 것을 탐욕 아래에 두고, 주님과의 관계를 돈을 얻는 수단으로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거룩한 것을 부정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거룩한 것을 악한 사랑에 종속시킨 일이므로 profanation의 성격을 가집니다.
그러나 여기서 구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가룟 유다의 ‘행위’가 profanation의 표본이라는 것과, 그의 내면 전체와 사후의 영원한 상태를 우리가 확정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profanation은 단 한 번의 외적 행동만으로 기계적으로 판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거룩한 것을 얼마나 알고 인정했으며, 그것을 어떤 의도에서 악과 결합했는가 하는 내적 상태와 관련됩니다. 그 깊이는 오직 주님만 아십니다.
유다가 뒤에 뉘우쳐 은 삼십을 돌려주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도 신중히 보아야 합니다. 그의 후회가 참된 회개였는지, 아니면 자신이 저지른 일의 결과와 공포를 견디지 못한 절망이었는지는 복음서의 기록만으로 완전히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참된 회개는 악을 미워하고 주님께 돌아가는 것이지만, 절망은 자기 행위의 결과에 압도되어 자신을 파괴하는 방향으로 흐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마지막 행동만으로 구원이나 멸망을 단정해서도 안 됩니다.
설교나 교인들과의 대화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면 좋겠습니다. ‘가룟 유다의 배신은 일반적인 세속적 배신과 다릅니다. 그는 주님을 가까이에서 알고 따랐으며, 사랑의 표인 입맞춤을 사용하여 주님을 팔았습니다. 따라서 그의 행위는 거룩한 것을 탐욕과 배신에 결합한 것으로서 profanation을 대표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러나 유다 개인의 내면과 영원한 운명에 대한 최종 판단은 주님께 속합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유다만을 정죄하는 데서 끝내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유다의 사건은 오늘날에도 사람이 주님의 이름과 말씀과 교회의 신뢰를 자기 명예, 재물, 권력의 수단으로 사용할 때 동일한 profanation의 방향으로 갈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가룟 유다의 죄가 두려운 까닭은 그가 멀리서 주님을 미워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 곁에 있으면서 그 거룩한 가까움을 악을 이루는 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점이 AC.301의 경고와 깊이 맞닿아 있습니다.
6. ‘자살’
‘자살’의 경우, 사후 ‘이 사람은 참 괜찮은 삶을 살았는데 순간 판단 실수로 자살했으니 정상 참작의 여지가 있다’ 하여 구원받는 경우가 있나요?
네, 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저작들을 종합해 보면, 오히려 그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죽었는가’가 아니라 ‘어떤 사람으로 살았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사후에 들어가는 상태는 죽는 마지막 몇 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평생 형성된 지배적인 사랑(dominant love)에 의해 결정된다고 여러 곳에서 설명합니다. 죽음은 그 상태를 드러내는 계기이지, 그것을 새로 만들어 내는 사건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평생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위해 살았으며, 선량한 양심을 가지고 살아온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극심한 육체적 고통이나, 정신적 혼란, 극도의 절망 속에서 순간적으로 자살했다면,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그 한순간만으로 그의 평생의 내적 상태가 모두 무효가 되었다고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후에 그는 처음 며칠 동안 천사들의 보호를 받으며 점차 평정을 되찾고, 지상에서 마지막 순간에 있었던 혼란과 고통에서 벗어나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AC.182 이하에서 보듯이, 주님은 사람이 죽는 순간의 충격 속에서도 사랑의 가장 내적인 부분을 보호하십니다. 그 보호는 죽음의 방식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 무엇이 살아 있었는가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반대로 자살하지 않았다고 해서 모두 천국에 가는 것도 아닙니다. 평생 악한 삶을 살다가 자연사한 사람과, 평생 선하게 살다가 마지막에 극도의 절망 속에서 자살한 사람을 비교한다면, 스베덴보리의 기준은 사망 원인이 아니라 평생 형성된 사랑입니다.
이 점은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부분입니다. 역사적으로 일부 교회에서는 자살을 ‘용서받을 수 없는 죄’처럼 가르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런 식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사후 세계에서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을 언제나 그 사람의 전체 삶과 의지의 방향에 둡니다.
물론 이것이 자살을 가볍게 여긴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자살은 매우 비극적인 일이며, 많은 경우 깊은 절망과 혼란 속에서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 비극 자체가 곧 영원한 정죄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일반 교인들에게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사람이 어떻게 죽었는지만 보시는 분이 아니라, 어떤 사람으로 살아왔는지를 보십니다. 어떤 이는 순간의 극심한 절망 속에서 자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 안에 평생 주님을 향한 사랑과 선한 양심이 살아 있었다면, 주님께서는 그것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사후에는 지상의 혼란에서 벗어나 참된 상태가 드러나며, 모든 판단은 완전한 공의와 동시에 완전한 자비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이 답변은 AC.182 이하에서 보이는 ‘죽은 직후 이어지는 천사들의 보호’, HH에서 반복되는 ‘지배적 사랑에 따른 사후 상태’, 그리고 스베덴보리 전체 신학의 큰 원리와도 잘 일치합니다. 오히려 이런 관점은 유가족들에게도 막연한 정죄가 아니라, 주님의 공의와 자비를 함께 바라보게 하는 매우 중요한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7. ‘blasphemy와 profanation’
이 둘은 서로 관련은 있지만 같은 개념은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는 둘을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blasphemy’는 보통 ‘신성모독’으로 번역됩니다. 이는 거룩한 것에 대해 욕하거나 모욕하거나, 하나님이나 말씀을 공개적으로 비방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주로 말과 행동의 차원에서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주님의 이름을 조롱하거나, 말씀을 모욕하거나, 거룩한 것을 악의적으로 비웃는 것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반면 ‘profanation’은 ‘거룩한 것의 모독’ 또는 ‘거룩한 것의 더럽힘’으로 번역되며, 스베덴보리 신학에서는 훨씬 더 깊은 개념입니다. 이는 단순히 거룩한 것을 욕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인정한 거룩한 것을 의도적으로 악과 결합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profanation은 말보다 삶과 의지의 상태에 관한 개념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무신론자가 하나님을 욕한다면, 그것은 blasphemy일 수는 있어도 반드시 profanation은 아닙니다. 그가 거룩한 것을 진심으로 인정한 적이 없었다면, profanation의 핵심 조건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이 목사이거나 장로로서 성경을 잘 알고, 주님의 진리를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자신의 탐욕이나 권력, 사기를 위해 이용한다면, 그는 겉으로는 하나님을 욕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룩한 것을 악과 결합하고 있으므로 profanation의 위험이 매우 큽니다.
가룟 유다가 좋은 예입니다. 그는 주님을 공개적으로 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며 입맞춤까지 했습니다. 겉으로는 존경을 표시했지만, 바로 그 거룩한 친교의 표를 배신의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blasphemy보다 훨씬 깊은 의미의 profanation을 보여줍니다.
성경에도 이 둘은 어느 정도 구별되어 나타납니다. 복음서에서 주님께서는 성령을 ‘모독하는 것’(blasphemy against the Holy Spirit)에 대해 말씀하시는데(마12:31-32),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히 입으로 욕하는 차원이 아니라, 인정한 신적 진리를 끝내 거부하고 악과 결합하는 상태, 곧 profanation과 깊이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따라서 성경의 ‘blasphemy’ 가운데는 스베덴보리의 의미로 보면 profanation을 포함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blasphemy’는 거룩한 것을 비방하거나 욕하는 행위입니다.
‘profanation’은 거룩한 것을 알고 인정하면서 그것을 악과 결합하는 내적 상태입니다.
따라서 모든 profanation에는 어느 정도의 신성모독적 요소가 포함될 수 있지만, 모든 blasphemy가 profanation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특별히 두려워한 것은 후자였습니다. 왜냐하면 profanation은 사람의 가장 깊은 영적 차원에서 거룩한 것과 악이 하나로 섞이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창3:22-24에서 주님께서 그룹과 두루 도는 불칼로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신 근본 이유이기도 합니다.
AC.300, 창3:22, 첫 번째 아르카나, ‘여호와 하나님’(Jehovah God)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3:22) AC.300 첫 번째 아르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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