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후손들 가운데는 아직 태고교회의 선이 어느 정도 남아 있었으며,두 번째와 세 번째 후손들에게서는 그 선이 더욱 외적 형태로 변하였습니다.그들은 태고교회 사람들처럼 주님으로부터 직접 퍼셉션을 받아 선과 진리를 아는 그런 상태는 아니었지만,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부여받아 교회의 상태를 이어 갈 수 있었습니다.’
위 해설 내용 중 나오는 위 표현은 거의 오늘날 우리 모습과 같아 보이는데요,그렇다면 태고교회 범주에 속하는 저들과 고대교회,유대교회 및 기독교회를 거치며,거의 그 끝자락에 있는 것 같은 오늘 우리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언뜻 보면AC.295의 설명은 오늘날 신앙인들의 상태와 거의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저작 전체를 연결해서 보면, 둘 사이에는 매우 큰 차이가 있습니다.
가장 큰 차이는 ‘남아 있는 선의 출처’입니다.
태고교회의 첫째, 둘째, 셋째 후손들은 비록 퍼셉션은 잃었지만, 여전히 태고교회라는 거대한 생명의 줄기에서 나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조상들로부터 이어받은 천적 생명의 흔적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받은 영적 선과 자연적 선도 태고교회의 천적 선을 바탕으로 형성된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중심은 아직 살아 있었고, 외적인 층만 점차 두꺼워진 것입니다.
반면 오늘날 우리는 태고교회의 생명에서 유구한 세월을 지나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고대교회와 유대교회, 그리고 기독교회를 거치면서 인류 전체의 상태는 계속 바뀌었습니다. 오늘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태고교회의 퍼셉션을 전혀 갖고 있지 않습니다. 선과 진리를 스스로 직관하는 능력도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말씀과 교리, 양심을 통하여 사람을 인도하십니다. 이것이 태고교회 후손들과 오늘 우리의 가장 큰 차이입니다.
또 하나의 차이는 ‘리메인스의 성격’입니다.
태고교회 후손들에게 남아 있던 것은 태고교회의 실제 생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지는 리메인스는 주님께서 각 사람의 일생 동안 조금씩 심어 주시는 선과 진리입니다. 어린 시절 순수한 애정, 부모를 신뢰하던 마음, 진실을 사랑했던 경험, 이웃을 불쌍히 여겼던 마음 등을 주님께서 보존하셨다가 거듭남의 기초로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리메인스는 태고교회의 유산이라기보다, 각 사람 안에서 새롭게 마련되는 씨앗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차이는 ‘교통의 방식’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처음에는 천사들과 거의 끊임없이 교통하였습니다. 퍼셉션을 잃은 뒤에도 그 교통은 아직 상당 부분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은 일반적으로 천사들과 의식적으로 교통하지 않습니다. 천사들은 우리 곁에 있지만, 우리는 그들의 존재를 거의 느끼지 못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자유를 보호하시기 위하여 그 교통을 의식 밖에서 이루어지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배우고, 양심을 통하여 선과 악을 분별하며, 자유롭게 선택하는 가운데 인도받습니다.
그렇다고 오늘날 사람이 반드시 더 열등한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여러 곳에서 주님께서는 각 시대에 맞는 구원의 길을 마련하신다고 말합니다. 태고교회에는 퍼셉션이 필요했고, 고대교회에는 표상과 상응이 필요했으며, 유대교회에는 의식과 희생 제사가 필요했습니다. 기독교회에는 말씀과 신앙이 주어졌고, 새교회에는 말씀의 속뜻이 열렸습니다. 시대마다 주어지는 은혜의 형태는 달라도,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하시려는 목적은 언제나 같습니다.
그래서AC.295를 오늘 우리에게 적용하면 조금 다른 빛이 보입니다. 태고교회 후손들은 천적 선을 잃은 뒤, 사실은 희미해진 뒤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입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처음부터 퍼셉션을 모르고 태어나지만, 주님께서는 말씀과 리메인스, 그리고 양심을 통하여 우리에게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형성해 가십니다. 겉으로는 비슷해 보여도, 그들이 ‘천적 상태에서 영적 상태로 내려온 사람들’이라면, 우리는 ‘자연적 상태에서 영적 상태로 올라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방향이 정반대인 것입니다.
이 점이 저는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태고교회 후손들은 높은 산에서 아래로 내려오면서도 아직 산의 공기를 품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반대로 오늘 우리는 골짜기에서 출발하여 주님의 인도를 따라 조금씩 산을 오르는 사람들입니다. 두 경우 모두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이 중요하지만, 하나는 잃은 것을 보호받는 과정이고, 다른 하나는 아직 없는 것을 새롭게 형성 받는 과정입니다.AC.295는 태고교회의 후손들을 설명하면서도, 동시에 오늘 우리 역시 주님께서 각자의 상태에 맞는 ‘가죽옷’을 입혀 주신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는 어느 시대의 사람도 그의 상태에 맞는 선을 마련하지 않으신 적이 없으며, 그 선을 통하여 언제나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이끌어 오셨습니다.
그들을 가리켜 ‘가죽옷을 입었다’(clothed with a coat of skin)고 한 까닭은 이렇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을 가리켜 그들은 순진무구함(innocence)으로 인해 ‘벌거벗었다’(naked)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걸 잃었을 때,그들은 자신들이 악 가운데 있음을 의식하게 되었는데, 이 역시 ‘벌거벗음’(nakedness)이라 합니다. 모든 것이 역사적으로 서로 이어져 보이게 하기 위해, 그러니까 태고교회 사람들의 말하는 방식에 따라, 여기서는 그들이 ‘벌거벗지 않도록 옷을 입었다’(clothed lest they should be naked), 다시 말해 악 가운데 있지 않도록 옷을 입었다 한 것입니다. 그들이 영적 선과 자연적 선 가운데 있었다는 것은 이 3장 1절로 13절까지 그들에 관하여 앞에서 말한 내용으로 분명하며, 또한 여기서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을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Jehovah God made them a coat of skin, and clothed them) 한 사실로도 분명합니다. 여기서는 그 교회의 첫 번째 후손들, 그리고 특히 두 번째, 세 번째 후손들을 다루는데, 그들은 이러한 선을 부여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The reason why they are said to be “clothed with a coat of skin,” is that the most ancient people were said to be “naked,” on account of their innocence; but when they lost their innocence they became conscious that they were in evil, which also is called “nakedness.” That all things might appear to cohere historically (in accordance with the way of speaking of the most ancient people), they are here said to be “clothed lest they should be naked,” or in evil. Their being in spiritual and natural good is evident from what was remarked above concerning them, from verse 1 to 13 of this chapter, as well as from its being here related that “Jehovah God made them a coat of skin, and clothed them”; for it here treats of the first—and more especially of the second and third—posterities of the church, who were endowed with such good.
해설
AC.295는 ‘가죽옷’이라는 표현이 왜 사용되었는지를 먼저 태고교회의 ‘벌거벗음’과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태고교회 사람이 벌거벗었다는 것은 단순히 옷을 입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악을 감추거나 선한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마음이 없었으며,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서로 어긋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생각과 의지에는 위장과 꾸밈이 없었으므로, ‘벌거벗음’은 수치가 아니라 순진무구함(innocence)을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그랬던 태고교회 사람들이 순진무구함을 잃게 되자 ‘벌거벗음’의 뜻도 달라졌습니다. 이제 그들은 자신들이 악 가운데 있음을 의식하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 안에서 살았으므로 자기 상태를 감추려 하지 않았지만, proprium이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자신들의 악과 수치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타락 이후의 ‘벌거벗음’은 순진무구함이 아니라 선이 결여된 상태, 곧 악 가운데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이야기가 역사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기록되었다고 말합니다. 아담과 그의 아내가 벌거벗었으므로 하나님께서 옷을 지어 입히셨다는 외적 서술, 그러니까 무슨 스토리 텔링 같은 이런 서술은 하나의 역사적 사건처럼 읽힙니다. 그러나 이러한 서술 방식은 태고교회 사람들이 영적인 것들을 자연적인 사물로 표현하던 방식에 따른 것입니다. ‘벌거벗음’, ‘가죽’, ‘옷’, ‘입히심’은 모두 인간의 내적 상태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벌거벗지 않도록 옷을 입혔다’는 것은 그들을 악 가운데 그대로 버려두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옷은 사람의 내면을 덮고 보호하는 외적인 것을 나타냅니다. 인간이 천적 선과 퍼셉션을 잃은 뒤에도 주님께서는 그가 완전히 선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더 외적인 선을 주셨습니다. 그 선은 이전의 순진무구함과 같은 내적 선, 곧 천적 선은 아니었지만, 악을 억제하고 사람을 보존할 수 있는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이었습니다.
여기서 ‘가죽’은 인간의 가장 바깥쪽에 있는 것을 나타냅니다. 가죽, 그러니까 피부가 몸의 외부를 덮듯이, 가죽옷은 속 사람의 천적 생명이 사라진 뒤 인간에게 남겨진 겉 사람의 선을 뜻합니다. 이는 단순히 외형적 착함이나 세상에서 인정받는 도덕성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남아 있는 상태에 맞추어 주신 선이며, 이를 통하여 인간이 더 깊은 타락으로 빠지지 않도록 붙드시고 보호하신 것입니다.
AC.295는 이들이 영적 선과 자연적 선 가운데 있었다고 말합니다. 영적 선은 신앙의 진리에서 비롯, 이웃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게 하는 선이며, 자연적 선은 그러한 영적 선이 겉 사람의 생활과 행동 가운데 나타난 것입니다. 마음속에서 선을 인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으며, 질서 있고 유익하게 살아가는 모습으로 드러나는 선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은 서로 분리된 두 선이라기보다, 속에서 받은 선과 그것이 생활 속에 나타난 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태고교회 자체보다 그 교회의 후손들을 다룬다고 밝힙니다. 첫 번째 후손들 가운데는 아직 태고교회의 선이 어느 정도 남아 있었으며, 두 번째와 세 번째 후손들에게서는 그 선이 더욱 외적 형태로 변하였습니다. 그들은 태고교회 사람들처럼 주님으로부터 직접 퍼셉션을 받아 선과 진리를 아는 그런 상태는 아니었지만,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부여받아 교회의 상태를 이어 갈 수 있었습니다. ‘가죽옷’은 바로 이처럼 교회의 생명이 내적인 것에서 점차 외적인 것으로 옮겨 간 상태를 보여 줍니다.
AC.295는 ‘여호와 하나님이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는 말 속에 타락한 인간을 향한 주님의 섭리가 담겨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인간은 순진무구함과 천적 선을 잃었지만, 주님께서는 그를 벌거벗은 채, 곧 악 가운데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이 받아들일 수 있는 더 외적인 영적 선과 자연적 선으로 그를 덮고 보호하셨으며, 그 선을 통하여 새로운 교회의 후손들이 이어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또한 ‘가죽옷’(coat of skin)이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의미한다는 것도, 속뜻의 계시와 함께, 이어지는 말씀 가운데 이와 비슷한 표현들이 나오는 구절들을 서로 비교해 보지 않고서는 누구에게도 분명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서는 ‘가죽’(skin)이라는 일반적인 표현이 사용되었지만, 실제로는 염소 새끼나 양, 숫양의 가죽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동물들은 말씀에서 선에 대한 애정(affections)과 체어리티(charity), 그리고 체어리티에 속한 것을 의미하며, 희생 제사에 사용된 양들도 역시 같은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체어리티의 선, 곧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지닌 사람들을 ‘양’(sheep)이라고 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양들의 목자’(shepherd of the sheep)라 일컬음을 받으시며, 체어리티를 가진 사람들을 주님의 ‘양’(sheep)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Neither would it be evident to anyone that a “coat of skin” signifies spiritual and natural good, except by a revelation of the internal sense, and a subsequent comparison of passages in the Word where similar expressions occur. The general term “skin” is here used, but that of a kid, sheep, or ram, is understood, which animals in the Word signify affections of good, charity, and that which is of charity, as was likewise signified by the sheep used in the sacrifices. Those are called “sheep” who are endowed with the good of charity, that is, with spiritual and natural good, and hence the Lord is called the “shepherd of the sheep,” and those who are endowed with charity are called his “sheep,” as everybody knows.
해설
AC.294에서 스베덴보리는 앞 글의 논의를 한 걸음 더 발전시킵니다. 앞에서는 ‘가죽옷’에 내적 의미, 곧 속뜻이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였다면, 여기서는 왜 그것이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의미하는지를 말씀 전체를 통해 증명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의 구절만 떼어 놓고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에 일관되게 흐르는 상응의 법칙을 따라 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말씀 해석 방법 가운데 가장 중요한 원리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는 먼저 ‘속뜻의 계시와 함께, 이어지는 말씀의 여러 구절을 서로 비교하지 않고서는 이 의미를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두 단계가 있습니다. 첫째는 주님께서 그 말씀의 속뜻을 계시해 주시는 것이고, 둘째는 그 계시에 따라 말씀 전체를 서로 비교하며 확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말씀의 속뜻은 사람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계시를 기초로 하여 말씀 전체의 일관성을 통해 검증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언제나 창세기만 설명하지 않고, 시편과 선지서, 복음서 등 말씀 전체를 끊임없이 인용합니다.
이어서 그는 여기서 사용된 ‘가죽’이 아무 동물의 가죽이 아니라, 실제 의미로는 염소 새끼와 양, 그리고 숫양의 가죽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설명입니다. 성경에서 희생 제사에 사용되는 동물은 아무 동물이나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특별히 지정하신 동물들, 곧 모두 특정한 선과 진리를 상징하는 동물들입니다. 따라서 그 가죽 역시 같은 상응을 지닙니다. 창세기 본문은 단순히 ‘가죽’이라고만 기록하지만, 속뜻으로는 희생 제사에 사용되는 깨끗한 짐승의 가죽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하필 양(sheep)과 숫양(ram)일까요?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이 동물들은 모두 선에 대한 애정과 체어리티를 상징합니다. 특히 양은 체어리티 자체를 가장 대표적으로 나타내는 동물입니다. 체어리티란 단순한 자선 행위가 아니라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삶 전체를 말합니다. 따라서 양은 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상태를 나타내며, 숫양은 그러한 선이 보다 힘 있게 작용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가죽은 그러한 선이 가장 바깥 삶 속에 나타난 상태를 의미하게 됩니다.
이 점에서 앞 절의 ‘가죽옷’의 의미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가죽은 몸의 가장 바깥을 덮는 것이며, 양은 체어리티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가죽옷’은 체어리티의 선이 인간의 겉 생활, 그러니까 일상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태고교회는 처음처럼 천적 퍼셉션 안에서 살아갈 수는 없게 되었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체어리티를 따라 살아가는 새로운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가죽옷’은 단순한 보호의 상징이 아니라 체어리티를 실천하는 새로운 삶의 질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해석의 근거로 주님께서 스스로를 ‘선한 목자’(요10:11)라 하신 사실을 제시합니다. 만일 양이 단순히 동물에 불과하다면, 주님께서 사람들을 ‘양’이라 하시고, 자신을 ‘선한 목자’라 하신 말씀은 깊은 의미를 잃게 됩니다. 그러나 양이 체어리티 안에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면, 목자는 그들을 사랑과 진리로 인도하시는 주님을 의미하게 됩니다. 따라서 복음서의 ‘선한 목자’와 창3의 ‘가죽옷’은 서로 다른 이야기가 아니라 동일한 상응 원리 위에 서 있는 말씀입니다.
목사님께서 제안하신 것처럼 창3:20-24를 태고교회의 흥망성쇠를 압축한 요약, 결론으로 이해하면, 이 글의 의미는 더욱 풍성해집니다. 태고교회는 천적 상태를 잃었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을 완전히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선한 목자’이신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체어리티의 삶을 다시 가르치시고, 그 삶을 상징하는 ‘가죽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창3:21은 단순히 수치를 가리는 장면이 아니라, 새로운 교회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AC.294는 성경 전체가 하나의 일관된 상응 체계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주는 아름다운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의 ‘가죽옷’, 희생 제사의 ‘양’, 복음서의 ‘양’과 ‘선한 목자’는 각각 다른 시대와 다른 문맥에서 기록되었지만 모두 하나의 영적 진리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언제나 체어리티 안에 있는 사람들을 당신의 양으로 삼으시고, 그들을 사랑으로 입히시며, 끝까지 목자처럼 인도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가죽옷’은 타락 이후 인간이 입게 된 가장 외적인 옷이면서도, 동시에 주님의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가는 새로운 삶의 시작을 알리는 은혜의 옷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의미들은 말씀을 겉으로만 읽어서는 결코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분명 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음이 분명합니다. 누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실제로 그들을 위해 가죽으로 된 옷을 만들어 입히셨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It could never appear from the letter that these things are signified; and yet there is evidently here enfolded some deeper meaning, for everyone must be aware that Jehovah God did not make a coat of skin for them.
해설
AC.293은 창3:21의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는 말씀을 해석하면서, 왜 말씀에는 반드시 내적 의미가 존재하는지를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지금까지 설명한 ‘가죽옷’의 의미는 말씀을 겉으로만 읽어서는 결코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창3:21을 겉으로만 읽으면,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위해 옷을 만들어 입혀 주신 역사적 사건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영적 선과 자연적 선, 그리고 타락한 인간을 향한 주님의 교육과 섭리가 담겨 있으며, 이러한 의미는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곧바로 중요한 사실을 덧붙입니다. 비록 겉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이 말씀 속에는 분명 더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내적 의미를 사람의 상상력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말씀 자체가 이미 더 깊은 뜻을 품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내적 의미, 즉 속뜻은 겉뜻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겉뜻에 감추어진 주님의 뜻을 밝혀 주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설명하는 스베덴보리의 논리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는 누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실제로 가죽으로 된 옷을 만들어 입히셨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주님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창세기가 여기서 전하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재단사가 되어 옷을 지어 입히셨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러한 표현 자체가 독자로 하여금 그 안에 담긴 더 깊은 뜻을 찾도록 이끌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말씀 해석 원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그는 말씀의 역사적 사건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역사 자체가 목적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말씀은 역사 속에 주님과 천국, 교회와 사람의 거듭남에 관한 영원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겉 글자는 그 진리를 담는 그릇이며, 내적 의미는 그 안에 담긴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겉 글자를 붙드는 것과 내적 의미를 찾는 것은 서로 대립하는 일이 아니라, 서로를 완성하는 일입니다.
창3:20-24를 태고교회의 흥망성쇠를 압축한 결론으로 이해하면, 이 구절의 의미는 더욱 선명해집니다. 만일 이 다섯 절이 단순히 몇 가지 역사적 사건만 기록한 것이라면, ‘가죽옷’은 최초의 의복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다섯 절은 태고교회의 처음과 마지막, 그리고 그 전 과정을 압축하여 보여 주는 결론입니다. 그렇다면 ‘가죽옷’ 역시 단순한 옷이 아니라, 교회의 상태가 변화한 것을 보여 주는 영적 표지로 이해하는 것이 문맥에도 더욱 잘 어울립니다.
실제로 성경 전체를 살펴보면 ‘옷’은 거의 언제나 사람의 영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제사장의 거룩한 옷은 거룩한 직분을 의미하고, 흰옷은 진리와 순결을, 더러운 옷은 죄와 거짓을 의미합니다. 또한 스베덴보리는 천사들의 옷 역시 그들의 사랑과 지혜의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 여러 저술에서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창3:21의 ‘가죽옷’도 같은 상응의 원리 안에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것은 타락 이후 인간에게 허락된 새로운 영적 상태를 나타내는 상징입니다.
이 글은 오늘날 우리가 말씀을 대하는 태도에도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우리는 먼저 겉 글자를 소중히 읽어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멈추지 말고, 왜 주님께서 하필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셨는지를 겸손히 물어야 합니다.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 안에는 언제나 글자를 넘어서는 영원한 생명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남은 평생 추구했던 것도 바로 이러한 말씀의 깊이를 밝히는 일이었습니다.
AC.293은 창3:21 하나만 설명하는 글이 아니라, 말씀 전체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원리라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실제로 가죽옷을 만드셨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왜 성령께서 하필 ‘가죽옷’이라는 표현을 기록하게 하셨느냐는 것입니다. 그 질문을 따라갈 때, 우리는 글자 너머에서, 타락한 인간을 끝까지 가르치시고 보호하시며, 새로운 교회의 길을 열어 가시는 주님의 사랑과 섭리를 만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AC.293이 우리에게 전해 주는 중요한 교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And Jehovah God made for the man and for his wife coats of skin, and clothed them. (창3:21)
AC.292
이 말씀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가르쳐 주셨음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가르치신 것을 ‘만드셨다’(making)와 ‘입히셨다’(clothing)로, 그리고 ‘가죽옷’(coat of skin)으로는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표상하고 있습니다. These words signify that the Lord instructed them in spiritual and natural good; his instructing them is expressed by “making” and “clothing,” and spiritual and natural good, by the “coat of skin.”
해설
AC.292는 창3:21의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는 말씀의 가장 핵심적인 의미를 설명하는 구절입니다. 일반적으로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의 수치를 가려 주셨다는 이야기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장면을 단순한 자비의 행동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그는 이것을 주님께서 타락한 인간을 새로운 상태에 맞게 다시 교육하시고 인도하시는 장면으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이 절의 중심은 ‘가죽옷’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만드시고 입히시는 주님’께 있습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만드셨다’와 ‘입히셨다’는 두 동사를 모두 ‘가르치셨다’는 의미로 풀이합니다. 말씀에서 주님께서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만들어 주시거나 입혀 주시는 행위는 단순한 외적 행동이 아니라, 그 사람의 상태에 알맞은 선과 진리를 공급하시고, 그에 따라 살아가도록 인도하시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께서는 단순히 인간을 보호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타락 이후의 인간이 살아갈 수 있도록 새로운 삶의 질서를 친히 가르쳐 주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변화가 나타납니다. 태고교회는 처음부터 천적 사랑 안에 있었기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퍼셉션을 통해 직접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타락 이후에는 이러한 퍼셉션을 거의 잃어버렸습니다. 이제는 이전처럼 내적 생명만으로 살아갈 수가 없게 되었고, 보다 외적인 방법을 통해 주님의 인도를 받아야 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가르치심’은 이전 천적 상태를 위한 것이 아니라, 타락 이후의 인간을 위한 새로운 교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죽옷’이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영적 선’은 신앙을 따라 행하는 선이며, ‘자연적 선’은 일상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도덕적이고 질서 있는 선을 말합니다. 인간은 비록 태고교회가 누리던 천적 선을 잃어버렸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이 완전히 악으로 무너지지 않도록 영적 선과 자연적 선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가죽옷’은 바로 그러한 새로운 삶의 상태를 상징합니다.
왜 하필 ‘가죽옷’일까요? 가죽은 몸의 가장 바깥을 덮는 것입니다. 상응적으로도 이는 가장 외적 차원의 삶을 의미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처음에는 내적 생명 안에서 살았지만, 이제는 그 상태를 거의 잃었기 때문에 가장 바깥 단계에서부터 보호와 인도를 받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이전 천적 상태에 알맞은 옷이 아니라, 현재의 상태에 맞는 ‘가죽옷’을 입히십니다. 이것은 이전보다 낮은 상태를 의미하지만, 동시에 그 상태에서도 여전히 구원의 길이 열려 있음을 보여 주는 주님의 자비로운 배려이기도 합니다.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창3:20-24를 태고교회의 흥망성쇠를 요약한 결론으로 이해한다면, 21절은 그 가운데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20절이 교회의 처음, 곧 ‘생명’으로 시작된 모습을 보여 준다면, 21절은 타락 이후에도 교회를 버리지 않으시는 주님의 섭리를 보여 줍니다. 교회는 처음의 그 천적 영광을 잃었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의 현재 상태에 맞는 새로운 삶의 질서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다시 말해 교회의 본래 상태는 사라졌지만, 교회 자체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새로운 방식으로 교회를 보존하시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이 장면은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깊은 의미를 줍니다. 우리는 처음 믿었을 때의 뜨거운 사랑이나 밝은 깨달음을 잃었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역사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처음과 같은 상태는 아니더라도 주님께서는 우리의 현재 형편에 맞는 선과 진리를 끊임없이 공급하십니다. 때로는 일상의 의무와 양심, 그리고 신앙의 실천을 통해 우리를 조금씩 인도하십니다. 어쩌면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님께서 입혀 주시는 ‘가죽옷’일지도 모릅니다.
AC.292는 ‘가죽옷’을 단순히 수치를 가리는 옷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타락한 인간에게 맞추어진 주님의 교육이며, 새로운 삶의 질서이자 새로운 교회의 출발입니다. 천적 상태를 잃은 인간에게 주님께서는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가르치시고, 그 선 안에서 다시 당신과 함께 살아가도록 인도하십니다. 따라서 ‘가죽옷’은 인간의 실패를 보여 주는 표지가 아니라, 실패한 인간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사랑과 섭리를 증언하는 은혜의 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창3:20)
AC.291
이 절에서는 교회가 처음으로 젊음의 꽃을 피우던 때, 곧 가장 아름답고 순수한 상태에 있었던 때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상태는 천적 결혼(the heavenly marriage)을 나타내기 때문에, 교회는 여기서 결혼(a marriage)으로 묘사되며, ‘생명’(life)을 뜻하는 말에서 유래한, ‘하와’(Eve)라는 이름으로 부릅니다. In this verse is described the first time, when the church was in the flower of her youth, representing the heavenly marriage, on which account she is described by a marriage, and is called “Eve,” from a word meaning “life.”
해설
AC.291에서 스베덴보리는 ‘이 절에서는 교회가 처음으로 젊음의 꽃을 피우던 때가 묘사된다’고 말합니다. 처음 읽으면 조금 의아합니다. 바로 앞 절에서는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라는 심판이 선포되었는데, 갑자기 ‘교회의 젊은 시절’과 ‘생명’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시간의 흐름으로 읽기보다 창세기 첫 세 장 전체의 결론으로 읽으면, 이 표현은 매우 자연스러워집니다. 창3:20은 새로운 사건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 전 생애를 다시 바라보게 하는 첫 장면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창3:20-24는 태고교회의 흥망성쇠를 다섯 구절로 압축하여 보여 주는 결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20절은 교회가 처음 생명을 받던 때를, 21절은 타락 이후에도 주님께서 보호하시는 섭리를, 22절은 모독을 막기 위한 자비로운 제한을, 23절은 에덴에서의 추방을 통한 교회의 종말을, 그리고 24절은 그룹과 두루 도는 불칼로 거룩한 것을 보존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각각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이 다섯 절은 단순한 다섯 사건이 아니라, 한 교회의 처음과 끝을 요약한 영적 결론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20절을 보자마자 교회의 ‘처음’을 말합니다. ‘젊음의 꽃을 피우던 때’란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상태를 말합니다. 봄에 꽃이 막 피어날 때가 식물의 가장 아름다운 시기인 것처럼, 태고교회 역시 처음에는 주님과 가장 가까이 결합한 천적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생명을 직접 받아들이며 살았고, 선과 진리를 분리하지 않았으며, 사랑과 지혜가 하나 된 상태 안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를 ‘천적 결혼’(the heavenly marriage)을 나타내는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천적 결혼이란 단순히 남녀의 결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선과 진리가 하나 되는 천국의 질서를 말합니다. 사람 안에서는 의지와 이해, 사랑과 신앙, 선과 진리가 서로 조화를 이루는 상태가 바로 천적 결혼입니다. 교회는 이러한 결합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참된 교회가 되므로, 성경은 교회를 신부와 아내로 자주 표현하며, 여기에서도 교회를 결혼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아담의 아내는 ‘하와’라는 이름을 받습니다. ‘하와’(Eve)는 ‘생명’을 뜻하는 말에서 나온 이름이며, 이어지는 말씀에서 ‘모든 산 자의 어머니’라고 설명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육체적 생명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영적 생명입니다. 태고교회는 처음에 바로 이러한 생명 안에서 존재하였으며, 그 생명을 통하여 천국과 직접 연결된 교회였습니다. 그러므로 ‘하와’라는 이름은 한 여인의 이름을 넘어, 교회가 처음 받았던 주님의 생명을 상징하는 이름이 됩니다.
이렇게 보면, 창3:20은 창3:19와 모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흙’과 ‘생명’을 나란히 보여 주면서, 한 교회의 처음과 마지막을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생명’으로 시작했던 교회가 결국 ‘흙으로 돌아감’으로 끝나게 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장면은 시간적으로 과거로 되돌아간 것이 아니라, 이미 서술된 태고교회의 역사를 처음부터 다시 조망하는 결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AC.291에서 스베덴보리가 갑자기 ‘교회의 젊은 시절’을 언급하는 이유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결론은 단순히 과거를 회상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창3:20-24 전체를 보면, 태고교회의 역사는 인간의 실패로 끝났지만, 주님의 섭리는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생명을 주신 분도 주님이시고, 타락 이후에도 가죽옷으로 입히시는 분도 주님이시며, 생명나무를 함부로 범하지 못하게 막으시는 분도 주님이시고, 그룹과 두루 도는 불칼로 거룩한 것을 보존하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다섯 절은 태고교회의 흥망성쇠를 요약하는 동시에, 그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한순간도 교회를 떠나지 않으신 주님의 구원 섭리를 함께 증언하는 아름다운 결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2026/07/19)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39, ‘주 은혜를 받으려’, 찬85, ‘구주를 생각만 해도’입니다.
오늘은창3일곱 번째, 본문은 창3:16-19이고, AC 글 번호로는 261번에서 279번입니다. 오늘로 창3 전체 세 마디 중 두 번째 마디(창3:14-19)를 마칩니다. 다음 주부터는 마지막 세 번째 마디 시작합니다.
먼저 본문입니다.
16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17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3:16-19)
제목은
주님을 떠난 사람, 끝까지 붙드시는 주님
이며, 다음은AC.261-279입니다. 그전에 먼저 오늘 범위에 대한 요약 설명 후, 전체 글 중 특별히 몇몇 글을 리딩하겠습니다.
먼저 요약입니다.
오늘 읽을 본문은 창3:16-19에 대한 AC.261-279의 해설입니다. 이 본문은 겉으로는 여자의 임신과 출산의 고통, 남편의 다스림, 땅의 저주, 노동의 수고와 육체의 죽음을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한 남자와 한 여자에게 내려진 육체적 형벌 기록으로 보지 않습니다. 여기서 ‘남자’와 ‘여자’는 태고교회와 그 교회 안 여러 마음 기능을 표상하며, 이 말씀 전체는 태고교회가 주님으로부터 점차 돌아서면서 겪게 된 영적 상태의 변화를 묘사합니다.
먼저 ‘여자’는 교회를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순수한 처음 상태의 교회가 아니라 proprium, 곧 자기에게 속한 것을 사랑함으로써 왜곡되기 시작한 교회를 의미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본래 선과 진리, 그리고 생명이 모두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퍼셉션으로 직접 알았습니다. 그러나 점차 자기 생각과 자기 의지, 그리고 자기 지혜를 자신의 것으로 여기고 사랑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의 타락은 외적인 범죄 하나에서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처럼 여기기 시작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에서 ‘임신’은 마음 안에서 생각과 의도가 형성되는 것을 의미하고, ‘자식을 낳는 것’은 그렇게 형성된 생각으로부터 진리가 생겨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타락 이전에는 사랑 안에서 진리를 평안하게 지각할 수 있었지만, proprium이 들어온 뒤에는 진리 하나가 생각 속에 자리 잡고 삶으로 태어나는 일에도 싸움과 고통이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임신의 고통은 진리를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의 근심을, 출산의 고통은 그 진리를 실제 삶으로 살아 내는 과정의 영적 싸움을 뜻합니다.
이 싸움은 사람이 주님에게서 돌아서기 시작할 때, 악한 영들이 그 사람 안의 감각과 욕망을 강하게 자극하고, 동시에 천사들은 주님으로부터 사람을 보호하려고 애쓰면서 일어납니다. 악한 영들은 사람이 자기 자신만을 신뢰하게 만들고, 천사들은 사람 안에 보존된 리메인스를 통하여 선한 애정과 참된 생각을 일으킵니다. 따라서 영적 유혹은 주님께서 사람에게 고통을 부과하시는 일이 아니라, 악이 사람을 끌어가려는 가운데 주님께서 천사들을 통하여 그를 붙드시고 구원하시는 과정입니다. 진리는 이 싸움 없이 사람의 실제 생명이 되기 어렵습니다.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에서 ‘남자’ 또는 ‘남편’은 rational을 의미합니다. 태고교회의 처음 상태에서 남자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지혜와 총명을 표상했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뒤에는 직접적인 퍼셉션과 참된 총명이 크게 손상되고, rational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rational은 총명 자체가 아니라 총명을 닮은 기능이며, 속 사람과 겉 사람을 이어 주는 매개체입니다.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을 받아 애정과 감각을 질서 있게 인도하면 유익하지만, proprium과 감각의 제안에 동의하면, 오히려 속 사람과 겉 사람을 분리시키는 도구가 됩니다.
그러므로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라는 말씀은 단순히 남편이 아내의 말을 따랐다는 뜻이 아니라, rational이 proprium에서 나오는 욕구와 감각의 판단에 동의했다는 뜻입니다. 유혹은 감각에서 시작되었지만, rational이 그것을 승인할 때, 사람 전체의 질서가 무너집니다. 그 결과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땅’은 겉 사람을 뜻합니다. 주님께서 겉 사람을 저주하신 것이 아니라, 겉 사람이 속 사람으로부터 스스로 돌아서고 분리됨으로써 저주받은 상태에 이른 것입니다.
속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통로이며, 겉 사람은 애정과 기억, 생각과 행동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삶의 자리입니다. 선과 진리의 씨는 겉 사람의 애정과 기억 안에 심어지지만, 그 생명은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흘러옵니다. rational은 이 둘을 연결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rational이 감각과 proprium의 편에 서면, 겉 사람은 속 사람의 빛을 받지 못하게 되고, 사람은 속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 안에 보존된 선과 진리조차 거의 의식하지 못하게 됩니다.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는 말씀에서 ‘먹는다’는 것은 영적으로 ‘산다’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아담 개인이 평생 힘들게 농사짓는다는 뜻이 아니라, 타락한 태고교회가 그 교회의 종말에 이르기까지 비참하고 불안한 영적 상태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는 뜻입니다. ‘네 평생에’는 한 개인의 수명이 아니라 그 교회가 존속하는 모든 날, 곧 타락이 시작된 때부터 홍수로 그 교회가 끝날 때까지의 전 기간을 의미합니다.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에서 가시덤불과 엉겅퀴는 저주와 황폐를 의미합니다. 열매 맺는 나무와 추수가 선과 진리의 번성을 뜻한다면, 그 반대인 가시덤불과 엉겅퀴는 선과 진리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악과 거짓이 차지한 상태를 뜻합니다. 황폐는 주님께서 선과 진리를 거두어 가신 상태가 아니라, 사람이 그것을 계속 거부함으로써 그것들이 삶 속에서 더 이상 작용하지 못하게 된 상태입니다. 열매가 맺혀야 할 겉 사람 안에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자라는 것입니다.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이라는 말씀은 사람이 들짐승과 같은 삶을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사람을 참으로 사람 되게 하는 것은 뛰어난 추론 능력이나 육체의 형태가 아니라,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의 생명을 받는 데 있습니다. 속 사람과 분리된 겉 사람은 욕망과 감각, 자기 보존과 쾌락을 따라 움직인다는 점에서 들짐승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한 사람도 여전히 rational을 사용하여 매우 예리하게 추론할 수 있지만, 그 rational은 주님의 빛을 섬기지 않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됩니다.
마지막으로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에서 ‘먹을 것’, 곧 ‘떡’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생명의 떡이시며, 사람과 천사는 모두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태고교회 말기의 사람들은 감각적이고 육체적인 것에 너무 깊이 빠진 나머지, 주님과 신앙 및 영원한 생명에 관한 것을 듣는 것조차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본래 기쁨과 평안으로 받아들여야 할 천적 양식을 반감과 수고 가운데 받아들이게 된 상태가 바로 ‘얼굴에 땀을 흘려 먹을 것을 먹는’ 상태입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역시 단순히 육체가 죽어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흙’은 생명이 없는 가장 낮은 자연적 상태, 곧 주님으로부터 분리된 정죄와 지옥 상태를 의미합니다. 사람이 주님의 얼굴에서 돌아서면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호흡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고, 그 결과 거듭나기 이전 겉 사람 상태로 되돌아가 마침내 영적으로 흙과 같은 상태에 이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사람을 버리신 결과가 아니라, 사람이 끝까지 주님으로부터 돌아선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전체는 하나의 연속된 타락 과정을 보여줍니다. 감각이 천적인 것에서 돌아서고, proprium이 자기 욕구를 사랑하며, rational이 거기에 동의하자, 겉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분리됩니다. 그 결과 진리는 싸움과 고통을 거쳐야만 태어나고, 삶은 수고와 불안으로 가득해지며, 선과 진리의 열매 대신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자랍니다. 마침내 사람은 천적인 것을 싫어하고, 자연적이며 감각적인 생명만을 따라 살다가 ‘흙’의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이 본문을 단지 인간의 파멸에 관한 말씀으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타락한 사람 안에서도 주님께서는 속 사람 안에 선과 진리의 리메인스를 보존하시며, 천사들을 통하여 그를 보호하십니다. 유혹과 고통이 있다는 것은 아직 사람 안에 지켜야 할 영적 생명이 남아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은 사람이 자기 힘으로는 생명을 회복할 수 없음을 보여 주는 동시에, 왜 주님께서 사람을 다시 결합,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셔야 했는지를 준비하여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창3의 타락에 대한 이 긴 설명의 중심에는 결국, 스스로 주님에게서 돌아선 사람을 끝까지 버리지 않으시고, 다시 속 사람과 겉 사람을 결합시키려 하시는 주님의 구원 역사가 놓여 있습니다.
오늘 AC 리딩 본문 전체는 여기까지이고, 이 가운데 오늘의 흐름과 예배 리딩의 밀도를 함께 생각하면, 심화까지 포함하여 꼭 읽었으면 하는 글은 다음 세 부분입니다.
첫째는 AC.263과 그 해설입니다. 이 글은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가 왜 영적 싸움을 의미하는지 가장 실제적으로 설명합니다. 사람이 감각의 차원에서 주님으로부터 돌아서면 악한 영들이 강하게 공격하기 시작하고, 함께 있는 천사들은 그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애쓴다는 설명은, 오늘 본문의 ‘고통’을 하나님의 형벌이나 단순한 심리적 괴로움으로 오해하지 않게 해줍니다. 또한 진리가 사람 안에 잉태되고, 삶으로 태어나는 과정이 왜 싸움과 근심을 동반하는지도 밝혀 줍니다. 오늘 리딩의 전반부를 이해하는 핵심 글이므로, AC.263 본문과 해설은 반드시 읽는 편이 좋겠습니다.
둘째는 AC.268과 심화 ‘AC.118’입니다. 오늘 본문 가운데 교리적으로 가장 중요한 부분을 하나 고른다면 저는 이것을 택하겠습니다. AC.268은 ‘땅’이 왜 겉 사람을 의미하는지, 선과 진리의 씨가 왜 겉 사람의 애정과 기억 안에 심어지는지, 속 사람 안에는 무엇이 보존되어 있는지, 그리고 rational이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한꺼번에 설명합니다. 특히 rational이 본래는 속 사람의 빛을 겉 사람에게 전달하는 매개체이지만, 감각과 proprium에 동의하면 오히려 둘을 분리시키게 된다는 설명은 창3의 타락 구조를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여기에 심화 ‘AC.118’을 함께 읽으면,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 rational, 겉 사람으로 이어지는 본래의 인플럭스 질서와 창3에서 그 질서가 어떻게 무너졌는지가 선명하게 대비됩니다.
셋째는 AC.276과 심화 ‘민21:5-6’입니다. AC.276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를 단순한 노동의 고통이 아니라,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싫어하고 멀리하게 된 상태로 해석합니다. ‘먹을 것’, 곧 ‘떡’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천적, 영적 생명의 양식이라는 설명과, 주님께서 친히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시라는 말씀은 오늘 본문의 결론을 주님 중심으로 모아 줍니다. 여기에 이스라엘 백성이 만나를 ‘하찮은 음식’이라 부르며 싫어한 민21:5-6 심화를 함께 읽으면, 천적인 것 자체가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타락한 사람이 그것을 부담스럽고 하찮게 여기게 되었다는 점이 매우 실제적으로 전달됩니다. 오늘날 사람도 세상적이고 감각적인 것은 즐거워하면서 말씀과 회개, 그리고 천국의 일은 부담스러워할 수 있다는 적용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습니다.
리딩 순서는 AC.263, AC.268과 심화 ‘AC.118’, AC.276과 심화 ‘민21:5-6’이 가장 좋겠습니다. 첫 글에서는 영적 싸움이 어떻게 시작되는지를 보고, 둘째 글에서는 그 싸움이 일어나는 인간의 내적 구조를 이해하며, 셋째 글에서는 타락의 가장 깊은 결과가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양식을 싫어하게 되는 것임을 보게 됩니다. 이렇게 읽으면 오늘 본문이 단순히 ‘고통, 저주, 노동, 죽음’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돌아설 때, 속 사람과 겉 사람의 질서가 어떻게 무너지고, 주님께서 그 가운데서도 어떻게 사람을 보호하고 다시 생명의 떡으로 이끄시는지를 보여 주는 하나의 연결된 계시로 들릴 것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과 생명의 주님, 오늘도 창세기 3장의 깊은 말씀을 통하여 저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저희 안에도 여전히 주님보다 자신을 의지하려는 proprium이 있고, 감각과 세상의 소리에 귀 기울이려는 연약함이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서도 저희를 버리지 않으시고, 천사들을 통하여 보호하시며, 리메인스를 보존하시고, 유혹을 허락, 새로운 생명으로 이끌어 가시는 주님의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저희의 rational이 감각과 자기 사랑을 따르지 않고, 언제나 주님의 빛을 받아 속 사람과 겉 사람을 아름답게 이어 주는 통로가 되게 하시며, 저희 마음에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아니라 선과 진리의 열매가 자라게 하옵소서. 무엇보다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신 주님과 주님 말씀을 세상 그 어떤 것보다 더 사모하게 하시고, 말씀을 듣고 배우고 행하는 일이 저희의 가장 큰 기쁨이 되게 하옵소서. 오늘 받은 말씀이 지식으로만 머물지 않고 저희 삶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생명 되게 하시며, 이번 한 주간도 모든 생각과 말, 그리고 행동 가운데 오직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따라 살아가게 하옵소서. 모든 영광과 감사를 주님께 올려드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너희가 말하기를 우리는 사망과 언약하였고 스올과 맹약하였은즉 넘치는 재앙이 밀려올지라도 우리에게 미치지 못하리니 우리는 거짓을 우리의 피난처로 삼았고 허위 아래에 우리를 숨겼음이라 하는도다(사28:15)for you have said,We have cut a covenant with death,and with hell have we made a vision;when the whip of inundation passes through,it shall not come to us;for we will set a lie as our protection,and in falsity will we hide ourselves(Isa. 28:15).
스베덴보리가AC.290에서 이 구절을 인용한 이유는,영적 죽음은 단순히 생명의 결핍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거짓과 악을 선택,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거부한 결과임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이 말씀은 생명의 근원이 오직 주님께 있다는AC.290의 메시지를,그 반대편에서 매우 강렬하게 증언하는 본문입니다.
먼저‘우리는 사망과 언약하였고 스올과 맹약하였다’는 말씀은 문자 그대로 죽음과 계약을 맺었다는 뜻이 아닙니다.말씀에서‘언약’은 결합을 의미하므로,이것은 사람들이 영적 죽음과 스스로 결합하였음을 나타냅니다.다시 말해,그들은 생명이신 주님과 결합하기보다 악과 거짓을 자신의 삶의 원리로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적 죽음의 본질입니다.
또한‘넘치는 재앙이 밀려올지라도 우리에게 미치지 못하리라’는 말은 자기 확신과 거짓된 안전감을 의미합니다.사람들은 자신들의 지혜와 교리,그리고 생활 방식이 자신들을 보호할 것이라고 믿었지만,그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AC.290의 관점에서 보면,생명은 오직 주님으로부터만 오므로,그분을 떠난 모든 안전은 결국 허상에 불과합니다.
이어지는‘우리는 거짓을 우리의 피난처로 삼았고’라는 말씀은 더욱 직접적입니다.피난처는 본래 사람을 보호하는 곳입니다.그러나 이들은 진리가 아니라 거짓을 보호막으로 삼았습니다.스베덴보리에 따르면 거짓은 생명을 전달하지 못하며,오히려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적 진리의 인플럭스를 막습니다.그러므로 거짓을 피난처로 삼는다는 것은 생명의 근원을 스스로 차단하는 행위입니다.
‘허위 아래에 우리를 숨겼다’는 표현도 같은 의미를 반복합니다.사람들은 자신들의 악과 거짓을 인정하지 않고,그것을 정당화하는 거짓된 사고 속에 자신을 숨깁니다.그러나 주님 앞에서는 이러한 은폐가 아무런 효력을 갖지 못합니다.오히려 그 거짓은 사람을 더욱 깊은 영적 죽음 속으로 이끌 뿐입니다.따라서 이 말씀은 영적 죽음이 외부에서 강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사람이 스스로 선택한 상태임을 보여 줍니다.
이 구절은AC.290에서 인용된 요8:21과 요8:24를 잘 보완합니다.요한복음에서는 주님께서‘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고 선언하셨고,이사야는 그 죄 가운데 머무는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그것은 거짓을 진리보다 사랑하고,허위를 안전으로 여기며,결국 사망과 결합하는 삶입니다.따라서 두 본문은 영적 죽음의 원인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구절은 바로 뒤에 인용된 사25:8과도 뚜렷한 대조를 이룹니다.사28:15에서는 사람들이 사망과 스스로 언약을 맺는 모습을 보여 주지만,사25:8에서는 여호와께서 그 사망을 영원히 멸하신다고 선포합니다.사람은 거짓을 선택,죽음과 결합하지만,주님께서는 진리와 생명으로 그 죽음을 깨뜨리십니다.이 대조는 생명의 근원이 사람에게 있지 않고,오직 주님께 있음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스베덴보리가 사28:15를AC.290에서 인용한 이유는,영적 죽음의 실체와 그 원인을 분명히 밝히기 위해서입니다.사람은 자기 안에 생명을 가진 존재가 아니므로,주님을 떠나 거짓과 악을 자신의 피난처로 삼는 순간 영적 죽음과 결합하게 됩니다.반대로 참된 생명은 오직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적 진리와 선을 받아들일 때만 주어집니다.따라서 이 구절은 생명 자체이신 주님을 떠난 모든 거짓된 의지와 거짓된 신뢰는 결국 영적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보여 주며,오직 주님만이 생명의 유일한 근원이심을 역설적으로 증언하는 중요한 성경 말씀입니다.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사25:8)He shall swallow up death perpetually;and the Lord Jehovih shall wipe away the tear from all the faces;and the reproach of His people shall He remove from all the earth;for Jehovah has spoken(Isa. 25:8).
스베덴보리가AC.290에서 이 구절을 인용한 이유는,오직 여호와이신 주님만이 영적 죽음을 완전히 제거하시고,참된 생명을 주실 수 있음을 예언하는 대표적인 말씀으로 보기 때문입니다.이 구절은 생명의 근원이 오직 주님께 있으며,죽음을 이기시는 분도 오직 주님뿐이라는AC.290의 중심 메시지를 아름답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특히‘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는 말씀은 육체의 죽음이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는 뜻이 아닙니다.성경 전체의 문맥과 스베덴보리의 해석에 따르면,여기서‘사망’은 주님으로부터 분리된 영적 죽음을 의미합니다.사람은 누구나 육체적으로는 죽지만,주님과 결합된 사람은 영적 죽음에 빠지지 않습니다.따라서 여호와께서 사망을 멸하신다는 것은 영적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신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의 주어가‘주 여호와’라는 점도 매우 중요합니다.사람은 자기 힘으로 영적 죽음을 이길 수 없으며,어떤 천사나 사람도 다른 사람에게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오직 여호와만이 생명 자체이시므로 죽음을 멸하실 수 있습니다.AC.290이 반복하여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 점입니다.생명은 사람 안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옵니다.
이어지는‘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라는 말씀도 단순히 슬픔을 위로하신다는 의미에 그치지 않습니다.눈물은 영적 의미로는 악과 거짓으로 인해 겪는 고통과 시험,그리고 주님과 분리된 상태에서 오는 비참함을 나타냅니다.영적 죽음이 제거될 때,이러한 슬픔도 함께 사라집니다.그러므로 눈물을 씻으시는 일은 사망을 멸하시는 역사와 하나의 구원 사역을 이루고 있습니다.
또한‘그의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는 말씀도 같은 맥락입니다.말씀에서‘수치’는 죄 자체보다도 죄와 거짓으로 인해 생긴 영적 불명예와 황폐한 상태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주님께서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면,그 사람은 더 이상 악과 거짓의 지배 아래 있지 않게 되며,그 결과 영적 수치도 제거됩니다.따라서 사망의 제거와 수치의 제거는 모두 거듭남의 결과를 보여 줍니다.
이 구절은AC.290에서 앞서 인용된 요5:25와 요8:51을 더욱 완성해 줍니다.요5:25에서는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고 살아난다고 하였고,요8:51에서는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은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이사야는 그 모든 일을 하나의 예언으로 압축,여호와께서 친히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고 선포합니다.신약은 이 예언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마지막의‘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는 선언 역시 매우 의미심장합니다.이것은 사람의 소망이나 예언자의 희망이 아니라,생명 자체이신 여호와의 확실한 약속입니다.그러므로 영적 생명의 회복은 인간의 노력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여호와께서 친히 이루시고 보증하시는 구원의 역사입니다.AC.290이 생명을 주님의 고유한 속성으로 설명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성경의 선언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사25:8을AC.290에서 인용한 이유는,생명과 죽음에 관한 성경 전체의 결론을 제시하는 말씀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입니다.사람은 자기 안에 생명을 가진 존재가 아니므로 스스로 영적 죽음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오직 생명 자체이신 여호와,곧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만 영적 죽음을 영원히 멸하시고,사람에게 참된 생명을 주시며,그 결과 모든 영적 슬픔과 수치를 제거하십니다.따라서 이 구절은 오직 주님만이 생명 자체이시며,사람은 그분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살아간다는AC.290의 중심 메시지를 예언의 형태로 가장 장엄하게 선포하는 중요한 성경 말씀입니다.
51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52유대인들이 이르되 지금 네가 귀신 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요8:51, 52)Amen,amen,I say to you,If anyone keep My word,he shall not behold death for eternity.Then the Jews said to Him,Now we know that Thou hast a demon.Abraham is dead,and the prophets,and Thou sayest,If anyone keep My word,he shall not taste death into the ages(John 8:51, 52).
스베덴보리가AC.290에서 이 말씀을 인용한 이유는,주님께서 말씀하시는‘죽음’은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영적 죽음이며,참된 생명은 오직 주님의 말씀 안에서만 얻어진다는 사실을 직접 증언하기 때문입니다.이 본문은AC.290의 핵심 메시지를 매우 분명하게 뒷받침합니다.
주님께서는‘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만일 여기서 죽음을 육체의 죽음으로만 이해한다면,이 말씀은 문자적으로 성립하지 않습니다.실제로 아브라함도 죽었고,선지자들도 모두 육체적으로 죽었습니다.따라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죽음은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하나님과의 결합이 끊어진 영적 죽음을 의미합니다.스베덴보리도 말씀에서‘죽음’은 본질적으로 영적 죽음을 뜻한다고 일관되게 설명합니다.
특히‘내 말을 지키면’이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여기서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단순히 암송하거나 지식을 쌓는 것이 아니라,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고,그에 따라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주님의 말씀은 단순한 교훈이 아니라 신적 진리이며,그 안에는 주님의 생명이 함께 있습니다.그러므로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곧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와‘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는 두 표현도 같은 진리를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강조합니다.죽음을‘본다’는 것은 영적 죽음의 상태를 경험하는 것이며,죽음을‘맛본다’는 것은 그 상태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사람은 비록 육체는 죽더라도 영적 죽음에 들어가지 않습니다.왜냐하면 그의 생명이 이미 주님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의 반응은 문자적 이해와 영적 이해의 차이를 잘 보여 줍니다.그들은 아브라함과 선지자들이 육체적으로 죽었다는 사실만을 생각,주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그러나 주님께서는 처음부터 육체의 생명이 아니라 영혼의 생명을 말씀하고 계셨습니다.AC.290역시 같은 관점에서,사람의 참된 생명은 육체의 활동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끊임없이 흘러드는 영적 생명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구절은 앞에서AC.290에 인용된 요5:25와 요8:21, 24를 자연스럽게 이어 줍니다.요5:25에서는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고 살아난다고 하셨고,요8:21과24에서는 주님을 거부하는 사람은 죄 가운데 죽는다고 하셨습니다.여기서는 그 반대로,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은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는다고 선언하십니다.이처럼 생명과 죽음의 기준은 언제나 주님과의 관계에 있습니다.
또한 이 말씀은 마4:16의‘사망의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다’는 말씀과도 연결됩니다.빛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말씀을 지키는 사람이 되고,말씀을 지키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반대로 빛을 거부하는 사람은 죄 가운데 머물며,영적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따라서 이 모든 본문은 서로 다른 표현으로 동일한 진리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요8:51-52를AC.290에서 인용한 이유는 매우 분명합니다.사람은 자기 안에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는 존재가 아니며,오직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고 그 말씀을 삶으로 지킬 때만 영적 죽음을 이기고 참된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육체의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지만,주님의 생명을 받은 사람은 영적 죽음을 결코 경험하지 않습니다.따라서 이 말씀은 오직 주님만이 생명 자체이시며,사람은 그분의 말씀을 통하여 그 생명을 받아 살아가는 존재라는AC.290의 중심 메시지를 주님 자신의 선언으로 가장 분명하게 확증하는 중요한 성경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