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3:17)



AC.269

여호와 하나님, 곧 주님께서 (ground), 곧 겉 사람을 저주하신 것이 아니라, 겉 사람이 스스로 속 사람으로부터 돌아서고 분리됨으로써 스스로 저주받은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설명한 바와 같습니다(AC.245 참조). That Jehovah God (that is, the Lord) did not “curse the ground,” or the external man, but that the external man averted or separated itself from the internal, and thus cursed itself, is evident from what was previously shown (n. 245).

 

 

해설

 

이 글은 매우 짧지만, 창3 전체를 이해하는 핵심 원리를 다시 한번 선언하는 중요한 결론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까지 반복해서 강조해 온 사실을 다시 확인합니다. 곧, 사람의 타락과 저주의 원인은 주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 자신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의 섭리론과 구원론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원칙 가운데 하나입니다.

 

3을 문자 그대로 읽으면, 하나님께서 뱀을 저주하시고, 땅을 저주하시며, 사람에게 형벌을 내리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는 전혀 다른 사실이 드러난다고 설명합니다. 주님은 사랑 자체이시며 선 자체이시므로, 누구에게도 악을 행하시거나 저주를 내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따라서 성경에 ‘주님께서 저주하셨다’고 기록된 것은, 인간 편에서 일어난 영적 상태의 변화를 인간의 언어에 맞추어 표현한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여기서 ‘겉 사람이 스스로 속 사람으로부터 돌아섰다’는 표현이 매우 중요합니다. 속 사람은 언제나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통로입니다. 반면 겉 사람은 그 생명을 받아 실제 삶으로 나타내는 영역입니다. 그런데 겉 사람이 own과 감각을 따라 독립하려 할 때, 주님께서 관계를 끊으시는 것이 아니라, 겉 사람이 스스로 그 생명의 흐름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돌아섬’(aversion)입니다.

 

따라서 ‘저주’도 하나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저주는 주님께서 적극적으로 내리시는 형벌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으로부터 분리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결과입니다. 마치 햇빛을 등지고 그림자 속으로 들어간 사람이 어둠을 경험하는 것은 태양이 어둠을 보낸 것이 아니라 스스로 빛을 등졌기 때문인 것과 같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창3의 모든 저주를 이러한 원리로 이해합니다.

 

이 점에서 AC.269는 앞의 AC.267과 AC.268을 자연스럽게 이어 줍니다. AC.267에서는 rational이 own과 감각에 동의함으로써 겉 사람이 타락하였다고 설명하였고, AC.268에서는 그 결과 겉 사람이 속 사람으로부터 분리되었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이제 AC.269에서는 그 상태를 ‘저주’라고 부르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저주는 주님의 행동이 아니라, 분리의 결과입니다.

 

스베덴보리가 AC.245를 다시 인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이미 AC.245에서 주님은 아무도 저주하지 않으시며, 악인은 스스로 악을 선택함으로써 자신을 저주받은 상태에 이르게 한다고 설명하였습니다. AC.269는 그 원리를 다시 적용하여, 창3:17의 ‘땅이 저주를 받으리라’는 말씀도 같은 방식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즉, 말씀은 사람의 입장에서 표현되었지만, 실제 영적 원인은 언제나 사람 자신의 돌아섬에 있습니다.

 

이 가르침은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사람은 어려움을 당하면 흔히 ‘하나님께서 나를 벌하셨다’거나 ‘하나님께서 복을 거두셨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주님은 언제나 같은 사랑으로 사람에게 생명을 흘려보내십니다. 변하는 것은 주님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사람이 주님을 향하여 마음을 열면 그 생명을 더욱 풍성히 받고, 스스로 등을 돌리면 그 생명을 충분히 받지 못하게 됩니다. 이것이 영적 세계의 변하지 않는 질서입니다.

 

결국 AC.269는 창3의 ‘저주’를 하나님의 형벌이 아니라 영적 인과관계로 이해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주님께서는 결코 겉 사람을 저주하지 않으십니다. 겉 사람이 own과 감각을 따라 스스로 속 사람으로부터 분리될 때, 그 결과로 생명의 흐름이 막히고 영적 황폐가 찾아옵니다. 이것이 성경이 ‘저주’라고 부르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이 글은 창3의 심판 기사를 하나님의 진노의 기록이 아니라, 사랑이신 주님의 질서를 떠난 사람이 필연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영적 결과에 대한 계시로 읽어야 함을 가르쳐 주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AC.268, 창3:17, ‘땅’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창3:17)AC.268‘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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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68.심화

 

1. ‘AC.118

 

스베덴보리가 AC.268에서 AC.118을 인용한 이유는, 방금 설명한 ‘rational은 겉 사람에 속하지만, 속 사람과 겉 사람을 연결하는 매개체’라는 가르침이 이미 창2의 에덴동산 해설에서 밝혀졌던 내용임을 상기시키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 AC.268의 설명은 새로운 이론이 아니라, 이미 제시한 인간의 영적 구조를 타락의 문맥에 적용한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AC.118에서 스베덴보리는 에덴에서 흘러나오는 네 강을 사람의 내적 구조와 연결하여 해석합니다. 그 가운데 ‘힛데겔’은 rational의 밝은 통찰을, ‘앗수르’는 rational 자체를 의미합니다. 특히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라는 표현은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거쳐 rational에 이르는 진리의 유입(influx)을 나타냅니다. 즉, rational은 스스로 빛을 내는 기관이 아니라,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빛을 받아 작용하는 기관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이 AC.268의 핵심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AC.268에서 스베덴보리는 ‘속 사람은 rational을 통하여 겉 사람에게 작용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AC.118에서 이미 ‘강이 속에서 밖으로 흘러간다’는 상징으로 설명했던 동일한 원리입니다. 따라서 AC.118의 인용은, 속 사람에서 rational을 거쳐 겉 사람으로 이어지는 질서가 창조 때부터 주어진 본래의 질서임을 확인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또한 AC.118 rational의 위치를 매우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rational은 속 사람도 아니고, 가장 바깥의 감각적인 차원도 아닙니다. 그것은 양자를 이어 주는 중간 영역입니다. 그래서 AC.268에서 rational을 ‘일종의 매개체(medium)’라고 부르는 것도 AC.118의 설명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 안의 모든 작용이 주님 → 속 사람 → rational → 겉 사람이라는 질서를 따라 이루어진다고 이해합니다.

 

이 때문에 rational은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됩니다. 본래 rational은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빛을 받아 겉 사람을 인도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창3에서처럼 rational이 감각과 own의 편에 서게 되면, 더 이상 속 사람의 빛을 전달하지 못하게 됩니다. AC.268에서 ‘rational이 동의하면 겉 사람이 속 사람으로부터 분리된다’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AC.118 rational이 본래 어떻게 기능하도록 창조되었는지를 보여주고, AC.268은 그 기능이 어떻게 손상되었는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또한 AC.118에서 ‘유브라데(Phrath, Euphrates)를 기억 지식(memory-knowledge)의 경계라고 설명한 것도 AC.268과 연결됩니다. 속 사람의 빛은 rational을 거쳐 기억과 감각, 그리고 행동에까지 흘러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 흐름이 중간에서 막히면 기억 지식은 더 이상 영적 생명을 담지 못한 채 단순한 지식으로 남게 됩니다. 이것이 창3 이후 인간에게 나타나는 중요한 변화 가운데 하나입니다.

 

스베덴보리가 AC.268에서 AC.118을 인용한 이유는, 인간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다시 상기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창조의 본래 질서에서는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거쳐 rational에 빛이 흘러들고, rational은 다시 그 빛을 겉 사람에게 전달합니다. 그러나 rational own과 감각에 동의하는 순간 그 흐름은 차단되고, 겉 사람은 속 사람과 분리됩니다. 따라서 AC.118은 인간의 본래 구조를 설명하는 본문이고, AC.268은 그 구조가 타락으로 어떻게 손상되었는지를 설명하는 본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둘을 연결함으로써, 창2은 창조의 질서를, 창3은 그 질서의 붕괴를 보여주는 서로 대응되는 기록임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AC.268, 창3:17, ‘땅’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창3:17)AC.268‘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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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3:17)



AC.268

(ground)이 겉 사람을 의미한다는 것은 앞에서 earth’, ‘ground’, 그리고 field에 관하여 설명한 내용으로부터 분명합니다. 사람이 거듭나면 더 이상 earth라 하지 않고, ‘ground라 하는데, 이는 천적 씨가 그 안에 심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 여러 곳에서 사람을 ground에 비유하며, 또한 ground라고 합니다. 선과 진리의 씨는 속 사람이 아니라 겉 사람, 곧 사람의 애정과 기억 속에 심어집니다. 이는 속 사람 안에는 사람 자신의 own이 전혀 없고, 오직 겉 사람 안에만 own이 있기 때문입니다. 속 사람 안에는 선과 진리가 존재하며, 그것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 사람은 겉 사람, 곧 육적인 사람(corporeal man)이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선과 진리는 사람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 안에 보존됩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겉 사람이 마치 죽은 것과 같은 상태가 될 때라야 비로소 나타나는데, 이는 대개 유혹 가운데 있을 때나, 재난과 질병을 겪을 때,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 그러합니다. 또한 rational도 겉 사람에 속합니다 (AC.118 참조). rational은 그 자체로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를 이어 주는 일종의 매개체(medium)입니다. 속 사람은 rational을 통하여 육체적인 겉 사람에게 작용합니다. 그러나 rational이 잘못된 것에 동의하게 되면, 겉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분리됩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은 더 이상 속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게 되며, 따라서 속 사람에 속한 총명과 지혜도 더 이상 인식하지 못하게 됩니다. That the “ground” signifies the external man is evident from what was previously stated concerning “earth,” “ground,” and “field.” When man is regenerate, he is no longer called “earth,” but “ground,” because celestial seed has been implanted in him; he is also compared to “ground” and is called “ground” in various parts of the Word. The seeds of good and truth are implanted in the external man, that is, in his affection and memory, and not in the internal man, because there is nothing of one’s own in the internal man, but only in the external. In the internal man are goods and truths, and when these no longer appear to be present, the man is external or corporeal; they are however stored up in the internal man by the Lord, without the man’s knowledge, as they do not come forth except when the external man as it were dies, as is usually the case during temptations, misfortunes, sicknesses, and at the hour of death. The rational belongs also to the external man (n. 118), and is in itself a kind of medium between the internal man and the external; for the internal man, through the rational, operates on the corporeal external. But when the rational consents, it separates the external man from the internal, so that the existence of the internal man is no longer known, nor consequently the intelligence and wisdom which are of the internal.

 

 

해설

 

이 글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인간의 영적 구조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본문입니다. 그는 먼저 ‘ground’가 겉 사람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앞에서 ‘earth’는 아직 거듭나지 않은 상태를, ‘ground’는 천적인 씨를 받을 준비가 된 상태를 의미한다고 하였는데, 여기서는 그 의미를 더욱 발전, 선과 진리가 실제로 심어지고 자라나는 장소가 바로 겉 사람이라는 사실을 설명합니다.

 

처음 읽으면 다소 의외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가장 깊은 영적 생명은 속 사람 안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선과 진리의 씨는 겉 사람의 애정과 기억 속에 심어진다고 말합니다. 이는 거듭남이 단순히 보이지 않는 내면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실제로 생각, 배우고 기억하며 살아가는 삶의 자리에서 시작된다는 뜻입니다. 말씀을 듣고,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실천하려는 모든 과정은 겉 사람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속 사람이 비어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속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머무는 자리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속 사람 안에는 사람 자신의 own이 없다고 말합니다. 속 사람은 본래 사람의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 안에 마련해 두신 생명의 통로입니다. 따라서 참된 선과 진리는 언제나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통하여 사람에게 흘러 들어옵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가르침이 하나 나옵니다. 속 사람 안에 있는 선과 진리는 사람이 평소에는 거의 의식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것들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그것들을 사람도 모르는 가운데 보존하고 계신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여러 차례 등장한 리메인스의 교리와도 깊이 연결됩니다. 사람은 자신이 모든 선을 잃어버린 것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주님께서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으시며, 필요한 때를 위하여 그것들을 속 사람 안에 안전하게 간직하십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그 선과 진리가 언제 드러나는지도 설명합니다. 그것들은 겉 사람이 ‘마치 죽은 것과 같은 상태’에 이를 때 나타납니다. 유혹 가운데 자기 확신이 무너질 때, 큰 재난이나 질병으로 자신의 무력함을 깨달을 때, 또는 죽음을 앞두고 세상의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될 때,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속 사람의 생명이 더욱 분명하게 작용하기 시작합니다. 이는 주님께서 사람이 자신의 own을 의지하지 않게 될 때, 속 사람 안에 간직해 두셨던 선과 진리를 더욱 자유롭게 역사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스베덴보리는 rational의 위치를 매우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rational은 속 사람에 속하는 것도 아니고, 가장 바깥의 육체적 차원에 속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겉 사람에 속하지만, 동시에 속 사람과 겉 사람을 이어 주는 매개체입니다. 속 사람은 rational을 통하여 겉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며, 사람은 rational을 통하여 진리를 이해하고, 삶에 적용합니다. 따라서 rational은 본래 속 사람의 빛을 겉 사람에게 전달하는 통로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때문에 rational은 매우 중요한 갈림길이 되기도 합니다. rational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을 받아들일 때에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하나로 연결됩니다. 반대로 rational이 감각과 own에 동의하면,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의 연결이 끊어집니다. 이것이 AC.267에서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라는 말씀이 갖는 심각한 의미이기도 합니다. rational의 동의는 단순한 생각 하나가 아니라, 인간 전체의 영적 질서를 바꾸는 결정이 됩니다.

 

AC.268은 사람의 영적 구조와 거듭남의 과정을 하나의 질서 안에서 설명하는 글입니다. 겉 사람은 선과 진리가 실제로 심어지고 자라는 삶의 자리이며, 속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머무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rational은 이 둘을 연결하는 소중한 매개체입니다. 그러나 rationalown과 감각의 편에 설 때에는 속 사람과의 연결이 끊어지고, 이때 사람은 속 사람의 존재와 그 안에 있는 지혜와 총명조차 의식하지 못하게 됩니다. 반대로 rational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을 받아들일 때에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하나로 결합되고, 사람은 비로소 주님께서 속 사람 안에 보존해 두셨던 리메인스의 역사 가운데 참된 거듭남을 경험하게 됩니다.

 

 

심화

 

1. ‘AC.118

 

 

AC.268, 심화 1, ‘AC.118’

AC.268.심화 1. ‘AC.118’ 스베덴보리가 AC.268에서 AC.118을 인용한 이유는, 방금 설명한 ‘rational은 겉 사람에 속하지만, 속 사람과 겉 사람을 연결하는 매개체’라는 가르침이 이미 창2의 에덴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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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69, 창3:17,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창3:17)AC.269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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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67, 창3: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AC.267-271)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And unto the man he 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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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67.심화

 

1. ‘속 사람’, ‘겉 사람

 

여기 내적인 사람’, ‘외적인 사람을 각각 속 사람’, ‘겉 사람으로 이해해도 되나요?

 

 

속 사람’과 ‘겉 사람’이라는 표현은 스베덴보리의 internal man external man을 이해하는 데 매우 적절한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내적인 사람’, ‘외적인 사람’보다 우리말에서 훨씬 자연스럽고 직관적이어서, 독자들도 의미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앞으로 AC 번역에서는 internal man은 ‘속 사람’, external man은 ‘겉 사람’으로 통일하여 사용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개념을 정확하게 전달하려면 한 가지 중요한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internal man external man은 단순히 ‘마음속’과 ‘겉모습’을 대비하는 표현이 아닙니다. 그는 이것을 인간 존재를 이루는 두 가지 영적 차원으로 사용하며, 각각 고유한 기능과 역할을 가진 실제적인 구조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합니다.

 

속 사람(internal man)은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직접 받는 차원입니다. 퍼셉션과 천적, 영적 생명이 자리하는 영역이며, 거듭남의 중심이 되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이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과 연결되며, 참된 선과 진리는 언제나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거쳐 사람 안으로 흘러 들어옵니다.

 

반면 ‘겉 사람(external man)은 감각과 기억 지식, 행동과 생활이 이루어지는 자연적인 차원입니다. 사람은 몸을 통하여 세상과 접촉, 배우고, 기억하고, 행동하며 살아가는데, 이러한 모든 활동은 겉 사람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겉 사람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속 사람으로부터 질서를 받아야 제 기능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AC.267에서 ‘외적인 사람 전체도 스스로 저주받은 상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라는 표현도, ‘겉 사람 전체도 스스로 저주받은 상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라고 옮기면 훨씬 자연스럽고 의미도 분명하게 전달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저주’는 주님께서 내리시는 형벌이 아니라, 겉 사람이 속 사람으로부터 스스로 분리된 결과를 의미합니다.

 

다만 용어를 사용할 때에는 스베덴보리가 구별하는 층위를 함께 살려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는 internal external뿐 아니라 interior exterior도 엄밀하게 구별하여 사용합니다. 만일 internal interior를 모두 ‘내적’이라고 번역하면, 스베덴보리가 의도한 인간의 영적 구조가 독자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는 사람을 설명할 때 inmost, internal, interior, exterior, external과 같이 여러 단계의 질서를 구분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구조를 가능한 한 우리말에서도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예를 들어 inmost는 ‘가장 깊은’, internal은 ‘’, interior는 ‘내적’, exterior는 ‘외적’, external은 ‘’으로 구분하면,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영적 층위와 흐름을 비교적 충실하게 보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번역 원칙을 따르면 스베덴보리의 개념 구조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도 한국어의 자연스러움을 함께 살릴 수 있습니다. 특히 ‘속 사람’과 ‘겉 사람’이라는 표현은 독자들이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쉽고,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인간의 영적 구조를 가장 자연스럽게 전달하는 번역어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됩니다.

 

 

 

AC.267, 창3: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AC.267-271)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And unto the man he 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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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And unto the man he said, Because thou hast hearkened unto the voice of thy wife, and hast eaten of the tree of which I commanded thee, saying, Thou shalt not eat of it; cursed is the ground for thy sake; in great sorrow shalt thou eat of it all the days of thy life. (3:17)



AC.267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man hearkening to the voice of his wife)는 남자,rational의 동의를 의미하며, 이로 말미암아 rational 역시 스스로 돌아서게 되었고, 따라서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cursed is the ground for thy sake)라는 말씀으로 뜻하는 바와 같이 외적인 사람, 곧 겉 사람 전체도 스스로 저주받은 상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또한 너는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eat thereof in sorrow)라는 것은 그의 삶의 장래 상태가 비참하게 될 것을 의미하며, 이는 그 교회의 끝에 이를 때까지,네 평생에(all the days of his life) 그러할 것임을 뜻합니다. By the “man hearkening to the voice of his wife” is signified the consent of the man, or rational, by which it also averted or cursed itself, and consequently the whole external man, denoted by “cursed is the ground for thy sake.” To “eat thereof in sorrow” means that the future state of his life would be miserable, and this even to the end of that church, or “all the days of his life.”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창3:17을 영적인 의미로 해석하기 시작합니다. 앞에서는 여자의 상태와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라는 말씀을 설명하였다면, 이제는 아담에게 하신 말씀을 통해 타락이 사람 전체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설명합니다. 특히 그는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라는 표현을 단순한 순종의 문제가 아니라, rational이 감각과 own의 제안에 동의한 사건으로 이해합니다.

 

앞에서 뱀은 감각의 차원을, 여자는 own의 욕구를 따라 움직이는 애정의 차원을 나타냈습니다. 그런데 이제 남자, 곧 rational까지 그것에 동의하였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동의(consent)를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유혹은 밖에서 시작될 수 있지만, 그것이 실제 죄가 되는 것은 rational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승인할 때입니다. 따라서 창3의 타락은 감각의 유혹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rational이 그것을 옳다 인정한 데서 완성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rational 역시 스스로 돌아섰다(averted itself)’고 말합니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사람을 저주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주님에게서 돌아섰다는 점입니다. 이는 지금까지 창3 전체에서 반복되어 온 원리입니다. 사람은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으로부터 돌아설 때, 그 결과로 스스로 저주받은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저주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형벌이 아니라, 질서를 떠난 사람이 필연적으로 경험하는 영적 결과입니다.

 

이어지는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라는 말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에서도 ‘(ground)을 교회의 외적 상태, 또는 사람의 외적 생명을 의미하는 상징으로 설명하였습니다. 따라서 외적인 사람, 곧 겉 사람이 저주를 받았다는 것은 자연 자체가 저주를 받았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의 외적 삶 전체가 내적 질서를 잃어버렸다는 의미입니다. 내면이 무너지면 그 결과는 반드시 삶 전체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너는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라는 말씀도 단순히 육체노동의 고단함을 예언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사람의 장래 영적 상태가 비참하게 될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본래 퍼셉션 안에서 평안하게 진리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타락 이후에는 같은 진리를 얻기 위해서 이제부터는 끊임없는 유혹과 갈등, 노력과 수고를 겪어야 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 수고는 육체적인 노동보다 먼저 영적 삶의 고단함을 가리킵니다.

 

또한 ‘네 평생에’라는 표현도 단순히 개인의 일생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그 교회의 끝에 이를 때까지’라고 해석합니다. 다시 말해, 창3에서 다루는 것은 한 개인 아담의 생애가 아니라 태고교회 전체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평생’은 그 교회가 존속하는 전 기간을 뜻하며, 그 기간 동안 교회는 점차 쇠퇴하여 마침내 홍수로 끝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 설명은 앞에서 살펴본 AC.261에서 AC.266까지의 흐름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own이 애정을 왜곡하고, 감각이 그것을 부추기며, 마침내 rational이 그것에 동의하자 사람의 외적 삶 전체가 영향을 받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과정을 매우 질서 있게 설명하면서, 타락은 한순간의 사건이 아니라 사람 안의 여러 기능이 차례로 질서를 잃어가는 과정임을 보여줍니다.

 

AC.267은 창3:17을 통하여 타락이 완성되는 마지막 단계를 설명하는 글입니다. 감각의 유혹과 own의 욕구에 rational까지 동의함으로써 사람은 스스로 주님으로부터 돌아섰고, 그 결과 외적 삶 전체가 본래의 질서를 잃게 되었습니다. 이후 사람은 진리를 살아가는 일조차 끊임없는 영적 수고와 유혹 가운데 행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상태는 태고교회가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절망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왜 주님의 구속과 거듭남이 반드시 필요한지를 보여주려는 스베덴보리의 깊은 영적 가르침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심화

 

1. ‘속 사람’, ‘겉 사람

 

 

AC.267, 심화 1, ‘속 사람’, ‘겉 사람’

AC.267.심화 1. ‘속 사람’, ‘겉 사람’ 여기 ‘내적인 사람’, ‘외적인 사람’을 각각 ‘속 사람’, ‘겉 사람’으로 이해해도 되나요? ‘속 사람’과 ‘겉 사람’이라는 표현은 스베덴보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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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68, 창3:17, ‘땅’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창3:17)AC.268‘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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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66, 창3:16, ‘창3:16에 담긴 결혼의 법의 의미’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창3:16)AC.266모든 법과 계명은 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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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3:16)



AC.266

모든 법과 계명은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참된 근원으로 하여 나오는 것이므로, 이 결혼의 법 역시 거기에서 비롯됩니다. 이 법은, 자신의 own에 속한 욕구(desire)로 행동하는 아내가 남자가 하는 것처럼 rational로 행동하기보다는, 남편의 신중한 판단(prudence)에 복종하여야 함을 요구합니다. As every law and precept comes forth from what is celestial and spiritual, as from its true beginning, it follows that this law of marriage does so, which requires that the wife, who acts from desire, which is of what is her own, rather than from reason, like the man, should be subject to his prudence.

 

 

해설

 

이 글은 매우 신중하게 읽어야 하는 부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단순히 남녀의 사회적 우열이나 가정에서의 권위 구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창3:16의 영적 의미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오늘날 사회 제도나 남녀 관계에 그대로 적용하려 하기보다, 먼저 그 안에 담긴 영적 질서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먼저 그는 모든 법과 계명이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에서 비롯된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참된 질서는 인간 사회가 임의로 만든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천국 질서를 근원으로 합니다. 그러므로 결혼의 질서 역시 단순한 생활 규범이 아니라, 천국 질서를 지상에 반영한 것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결혼을 언제나 ‘천적 결혼(the heavenly marriage)과 연결하여 설명하는 이유입니다.

 

이어지는 설명에서 ‘아내’와 ‘남편’은 문자적인 남녀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상응적으로 ‘아내’는 애정과 의지의 측면을, ‘남편’은 진리와 이해의 측면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 글은 인간 안에 있는 두 기능, 곧 사랑과 진리, 의지와 이해, 그리고 선을 향한 애정과 rational의 질서를 함께 설명하는 말씀으로도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서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아내는 자신의 own에 속한 욕구로 행동한다’고 말하는 부분입니다. 이것은 여성이 본질적으로 irrational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창3의 문맥에서 이미 타락이 시작된 태고교회의 상태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own을 따르기 시작하면 애정은 쉽게 자기중심적으로 흐를 수 있고, 그러한 애정을 그대로 따르는 것은 영적 질서를 무너뜨릴 위험이 있습니다. 따라서 문제의 핵심은 ‘여성’이 아니라 ‘own’입니다.

 

반대로 ‘남자는 rational로 행동한다’는 말도 rational이 최고의 기능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앞 AC.265에서 rational은 총명을 모방하는 기능일 뿐이며, 퍼셉션과 총명의 빛을 받아야만 올바르게 작용한다고 설명하였습니다. 따라서 여기의 rational은 독립적인 판단 능력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의 빛을 받아 애정을 바른 방향으로 인도해야 하는 기능을 의미합니다.

 

또한 ‘남편의 prudence에 복종한다’는 표현도 신중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서 prudence는 단순한 세상적 처세술이나 영리함이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의 빛 안에서 바르게 분별하고 인도하는 지혜로운 판단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애정이 진리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는 영적 질서를 말하는 것이지,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일방적으로 지배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러한 해석은 스베덴보리의 다른 저작들과도 일치합니다. 그는 참된 결혼에서는 남편과 아내가 우열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완성하는 하나의 생명이 된다고 반복하여 설명합니다. 남편은 진리를, 아내는 선을 대표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두 사람이 하나의 사랑과 하나의 지혜 안에서 결합될 때, 비로소 천국 형상을 이루게 됩니다. 따라서 이 글은 지배의 원리가 아니라 질서의 원리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AC.266은 창3:16의 ‘그가 너를 다스릴 것이다’라는 말씀을 영적 질서의 관점에서 설명하는 글입니다. 모든 참된 질서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천적, 영적 질서에서 비롯되며, 사람 안에서는 애정이 own을 따라 움직이기보다 주님으로부터 빛을 받는 rational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이것은 남녀의 우열을 말하는 본문이 아니라, 타락 이후에도 사람이 거듭남의 길을 걸어가기 위해 반드시 회복해야 할 내적 질서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AC.267, 창3: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AC.267-271)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And unto the man he 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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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65, 창3:16, ‘남편’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창3:16)AC.265‘남편’으로 옮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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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65.심화

 

1. ‘AC.158

 

스베덴보리가 AC.265에서 AC.158의 내용을 다시 인용한 이유는, 창3:16에 나오는 ‘남자(man, vir)의 의미를 올바르게 이해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같은 ‘남자’라는 표현이라도 교회의 상태와 문맥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먼저 AC.158에서 확립해 놓았던 기본 원칙을 다시 불러옵니다.

 

AC.158에서 스베덴보리는 ‘남자(vir)가 단순히 남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롭고 총명한 사람’, 곧 내적인 사람(the internal man), 그러니까 속 사람의 상태를 의미한다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래서 사41과 렘5을 인용, ‘남자를 찾지 못한다’는 말씀이 문자 그대로 남성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지혜와 총명을 가진 사람이 없다는 뜻임을 밝혔습니다. 이것은 ‘vir’의 기본적인 상응 의미를 제시한 것입니다.

 

그런데 AC.265에서는 같은 ‘남자(vir)를 스베덴보리는 rational로 해석합니다. 얼핏 보면 AC.158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독자가 혼란을 느끼지 않도록 먼저 AC.158을 상기시키며, 왜 지금은 다른 의미로 설명하는지를 이어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바로 이어지는 문장에 나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음으로써 지혜와 총명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rational만 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본래 ‘vir’가 나타내던 것은 지혜와 총명이었지만, 지금 창3은 이미 타락이 진행된 상태를 다루고 있으므로, 그 지혜와 총명을 대신하여 전면에 나타난 기능이 rational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상응 자체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상응이 교회의 상태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고 설명한다는 점입니다. 건강한 태고교회에서는 ‘남자(vir)가 지혜와 총명을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타락이 진행되면서 퍼셉션과 총명이 약화되자, 같은 ‘vir’가 이제는 rational을 나타내게 됩니다. 즉, 상징은 같지만, 그것이 표현하는 실제 상태가 달라진 것입니다.

 

또한 AC.158의 인용은 rational의 위치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을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AC.265에서 rational을 ‘총명을 모방하는 것(imitative of intelligence)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rational은 총명과 전혀 별개의 기능이 아니라, 원래 총명을 본받아 작용하도록 창조된 기능입니다. 그러므로 AC.158에서 말한 총명과 AC.265에서 말한 rational은 서로 단절된 개념이 아니라, 타락 전과 타락 후의 인간 상태를 보여주는 연속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이 인용은 창3 전체의 흐름도 잘 보여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창2과 초기 태고교회의 상태를 설명할 때에는 퍼셉션, 지혜, 총명을 중심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창3로 들어오면서는 점차 proprium, own, 감각, 그리고 rational이 전면에 등장합니다. AC.158을 다시 인용한 것은 바로 이러한 변화를 독자가 분명히 인식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AC.265에서 AC.158을 인용한 이유는, ‘남자(vir)의 본래 의미가 지혜롭고 총명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먼저 상기시킨 다음, 타락으로 인해 그 지혜와 총명이 손상되면서 이제는 rational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음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이 인용은 두 글의 의미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하며, 창3이 태고교회가 이미 끝난 시대가 아니라, 퍼셉션에서 rational 중심의 상태로 점차 이동해 가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해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265, 창3:16, ‘남편’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창3:16)AC.265‘남편’으로 옮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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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3:16)



AC.265

남편으로 옮긴 남자(man, vir)rational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 장 6절에서 분명히 나타납니다. 거기에는 여자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the woman gave to her man with her, and he did eat)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그의 동의를 의미합니다. 또한 이 사실은 AC.158에서 남자에 관하여 말한 내용으로부터도 분명한데, 거기에서는 남자가 지혜롭고 총명한 사람을 의미하였습니다. 그러나 여기 남자rational을 의미합니다. 이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써 지혜와 총명이 파괴된 결과, rational만 남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rational은 본래 총명(intelligence)을 모방하는 것이며, 말하자면 총명의 겉모습, 또는 닮은 형상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That by “man” [vir] is signified the rational appears from verse 6 of this chapter, in that the woman gave to her man with her, and he did eat, by which is meant his consent; and the same is also evident from what was said of the man in n. 158, where by him is meant one who is wise and intelligent. Here however “man” denotes the rational, because in consequence of the destruction of wisdom and intelligence by eating of the tree of knowledge, nothing else was left, for the rational is imitative of intelligence, being as it were its semblance.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창3:16의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라는 말씀에 나오는 ‘남자(vir)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다시 설명합니다. 그는 이미 AC.261에서 ‘남자’를 rational로 해석하였는데, 여기서는 왜 그렇게 해석하는지 그 근거를 제시합니다. 특히 같은 ‘남자’라는 상징도 교회의 상태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창3:6을 근거로 듭니다.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라는 것은 단순히 음식을 함께 먹었다는 기록이 아니라, rational이 감각과 proprium의 제안을 받아들여 그것에 동의하였음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사람의 가장 바깥 차원에서 시작된 유혹이 이제 rational의 승인까지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타락이 더욱 깊어진 결정적인 단계였습니다.

 

그는 이어 AC.158을 상기시킵니다. 거기에서 ‘남자(vir)는 지혜롭고 총명한 사람을 의미하였습니다. 이는 태고교회가 아직 순수한 상태에 있었을 때의 의미입니다. 당시에는 퍼셉션이 살아 있었고, 지혜와 총명이 주님으로부터 직접 흘러 들어왔기 때문에 ‘남자’는 그러한 내적 상태를 나타내는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창3에서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같은 상징이지만, 교회의 상태가 변했기 때문에 그 의미도 달라진 것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가장 중요한 내용은 ‘지혜와 총명이 파괴된 결과 rational만 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표현은 지혜와 총명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뜻이라기보다, 태고교회가 본래 누렸던 직접적인 퍼셉션과 그로부터 나오는 참된 지혜와 총명이 크게 손상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아직 홍수 이전이며, 여전히 태고교회의 시대이지만, 그 내적 상태는 이미 상당히 쇠퇴하였습니다. 그 결과 이전처럼 사랑 안에서 즉시 진리를 보는 능력은 약해지고, rational의 역할이 점차 두드러지기 시작합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rational을 ‘총명을 모방하는 것(imitative of intelligence)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rational은 본래 나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총명을 닮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총명(intelligence)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의 빛 안에서 작용하는 반면, rational은 그것을 받아 표현하는 기능입니다. 따라서 퍼셉션과 총명이 약해져도 rational은 여전히 활동하지만, 더 이상 참된 근원으로부터 충분한 빛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rational을 ‘총명의 겉모습 또는 닮은 형상(semblance)’이라고 말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하지만, 본질은 다릅니다. 마치 거울에 비친 모습이 실제 사람을 닮았지만, 생명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 것처럼, rational도 총명을 닮아 추론하고 판단할 수는 있지만,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과 결합되지 않으면 참된 지혜 자체는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타락 이후 인간 상태의 특징입니다.

 

이 설명은 앞의 AC.261과도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거기서 스베덴보리는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를 rational의 역할이 점차 중요해지는 방향으로 내적 질서가 변화하기 시작한 것으로 해석하였습니다. AC.265는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즉, 퍼셉션과 총명이 약해졌기 때문에 사람은 이제 이전보다 훨씬 rational에 의존하여 진리를 이해하고 판단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아직 고대교회의 상태는 아니지만, 태고교회가 점차 그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AC.265는 ‘남자(vir)rational을 의미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글입니다. 타락 이전에는 ‘남자’가 퍼셉션으로부터 오는 지혜와 총명을 나타냈지만, 타락이 진행되면서 지혜와 총명이 약화되자 rational이 전면에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rational은 총명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닮은 기능입니다. 따라서 rational이 참된 역할을 하려면 언제나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을 받아야 하며, proprium이나 감각을 따라 독립적으로 판단하려 할 때에는 오히려 사람을 진리에서 멀어지게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창3의 ‘남자’를 통해 밝히고자 하는 핵심 가르침입니다.

 

 

심화

 

1. ‘AC.158

 

 

AC.265, 심화 1, ‘AC.158’

AC.264.심화 1. ‘AC.158’ 스베덴보리가 AC.265에서 AC.158의 내용을 다시 인용한 이유는, 창3:16에 나오는 ‘남자’(man, vir)의 의미를 올바르게 이해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같은 ‘남자’라는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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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66, 창3:16, ‘창3:16에 담긴 결혼의 법의 의미’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창3:16)AC.266모든 법과 계명은 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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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64, 창3:16, ‘임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창3:16)AC.264말씀에서 ‘잉태’(co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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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64.심화

 

6. ‘8:39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 (8:39)

 

 

스베덴보리가 AC.264에서 요8:39을 인용한 이유는, 말씀에서 ‘아들’이 단순한 혈통상의 자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에서 태어난 선과 진리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주님 자신의 말씀으로 확증하기 위해서입니다. 지금까지 그는 ‘잉태’, ‘출산’, ‘아들’이라는 표현이 모두 영적인 의미를 가진다고 설명해 왔으며, 이제 그 해석이 구약뿐 아니라 주님의 가르침에도 그대로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 구절에서 유대인들은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라고 대답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어받았다는 사실을 구원의 근거로 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혈통만으로는 참된 아브라함의 자녀가 될 수 없으며, 아브라함의 신앙과 삶을 이어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점에 주목합니다. 말씀에서 ‘아들’은 단순히 육신으로 태어난 자녀가 아니라, 어떤 사람에게서 나오는 성품과 삶, 곧 그의 사랑과 신앙에서 태어난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아들’이란 단지 아브라함의 혈통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같은 신앙과 순종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것이 상응에 따른 ‘아들’의 영적 의미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AC.261에서 설명한 ‘아들은 진리들’이라는 가르침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영적으로는 진리가 사람 안에 태어날 때 비로소 그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믿음도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삶 속에서 실현된 진리가 됩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진리가 자신의 삶 속에 실제로 태어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이 구절은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영적 출생’의 원리를 잘 보여줍니다. 사람은 육체적으로는 부모에게서 태어나지만, 영적으로는 주님에게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그 새로운 출생은 혈통이나 민족, 혹은 전통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 안에 심어 주시는 진리와 선을 받아들이고 살아감으로써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혈통보다 삶을 기준으로 참된 자녀를 구별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서 ‘(seed)는 신앙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씨가 뿌려져 자라 열매를 맺듯이, 주님께서 심으시는 신앙은 사람 안에서 진리와 선을 생겨나게 합니다. 따라서 씨에서 태어난 ‘아들들’은 신앙으로부터 나온 진리와 선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혈연적 계보가 아니라 영적 계보이며, 말씀 전체가 가르치는 거듭남의 원리입니다.

 

이 때문에 주님께서는 자신을 ‘인자(Son of Man)라고 부르십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자는 단순히 인간이 되신 분이라는 의미를 넘어, 말씀 자체이시며, 교회의 모든 진리의 근원이신 주님을 나타내는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참된 신앙과 진리는 주님에게서 씨처럼 심어지고, 사람 안에서 자라나 ‘아들’로 태어나게 됩니다.

 

AC.264에서 요8:39을 인용한 이유는, ‘아들’이 혈통이 아니라 영적 출생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주님의 말씀으로 확증하기 위해서입니다. 참된 ‘아브라함의 아들’은 아브라함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같은 신앙과 순종 속에서 주님으로부터 진리와 선을 받아 삶으로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창3:16의 ‘아들들을 낳는다’라는 말씀 역시 육체적인 자녀의 출생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 안에 신앙의 진리와 선을 태어나게 하시는 거듭남의 과정을 가리키는 말씀인 것입니다.

 

 

 

AC.264, 창3:16, ‘임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창3:16)AC.264말씀에서 ‘잉태’(co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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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64, 심화 5, ‘마13:37-38’

AC.264.심화 5. ‘마13:37-38’ 37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38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마13:37, 38) He that soweth the good seed 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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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64.심화

 

5. ‘13:37-38

 

37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38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13:37, 38) He that soweth the good seed is the son of man; the field is the world and the seed are the sons of the kingdom (Matt. 13:37–38).

 

 

AC.264에서 스베덴보리가 마13:37-38을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아들들(sons)이 단순히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깊게는 선과 진리, 특히 신앙의 진리들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창3:16의 ‘고통 중에 아들을 낳으리라’는 말씀을 설명하면서, 성경 전체에서 ‘아들’이라는 표현이 영적으로는 진리의 태어남과 관련되어 사용된다는 점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비유를 설명하시면서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문자적으로는 천국에 속한 사람들을 가리키지만, 스베덴보리는 그보다 더 내적인 의미를 봅니다. 씨(seed)는 이미 AC.255에서 설명했듯이 신앙 또는 신앙의 씨앗인 진리를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그 씨로부터 나오는 ‘아들들’은 그 신앙에서 생겨난 선과 진리들, 또는 그 진리들을 받아들여 살아가는 상태를 의미하게 됩니다.

 

특히 이 구절은 ‘’와 ‘아들’의 관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씨앗은 땅에 심겨져 자라나고 열매를 맺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는 사람 안에 심겨져 성장하며, 그 결과 새로운 이해와 새로운 삶이 태어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 결과물을 ‘아들들’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천국의 아들들’은 천국으로부터 나온 진리들, 또는 그 진리들에 의해 형성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또한 주님께서 자신을 ‘인자(Son of Man)라 하시는 점도 AC.264의 중요한 논점입니다. 주님은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자’는 주님의 신적 진리(Divine Truth)를 나타내는 칭호입니다. 즉 주님께서는 교회 안에 진리의 씨를 뿌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씨로부터 ‘천국의 아들들’, 곧 진리들이 태어나게 됩니다.

 

반대로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라는 말씀도 같은 원리를 보여줍니다. 진리가 아들을 낳듯이 거짓도 아들을 낳습니다. 선한 씨는 천국의 진리들을 산출하지만, 악한 씨는 거짓과 악을 산출합니다. 따라서 말씀에서 ‘아들’은 단순히 출생한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근원으로부터 나온 것과 그 결과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한 이유는, ‘아들’이라는 표현이 말씀에서 일관되게 진리들과 관련되어 사용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창3:16의 ‘아들을 낳는다’는 말씀도 결국은 진리들을 낳는 것을 의미하며, 마태복음의 ‘천국의 아들들’ 역시 같은 상응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말씀에서 참된 ‘아들’은 육체적 자녀보다도 먼저, 주님께서 심으신 신앙의 씨로부터 태어나는 선과 진리의 열매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AC.264의 마지막 문장과 연결하면, 주님 자신이 참된 ‘’이시며, 참된 신앙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자신을 ‘인자’라고 부르십니다. 그리고 천국의 아들들은 바로 그 분으로부터 나온 진리들이며, 거듭나는 사람 안에서 태어난 새로운 신앙과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아들 = 진리’라는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신약성경에서 직접 뒷받침하는 대표적인 증거로 인용되고 있습니다.

 

 

 

AC.264, 심화 6, ‘요8:39’

AC.264.심화 6. ‘요8:39’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 (요8:39) 스베덴보리가 AC.26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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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64, 심화 4, ‘사66:7-9’

AC.264.심화 4. ‘사66:7-9’ 7시온은 진통을 하기 전에 해산하며 고통을 당하기 전에 남아를 낳았으니 8이러한 일을 들은 자가 누구이며 이러한 일을 본 자가 누구이냐 나라가 어찌 하루에 생기겠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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