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87을 읽으면 ‘악한영들은물러가고선한영들이가까이오며,천적천사들도가까이온다’는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앞의 AC.50에서는 사람마다 적어도 두 영과 두 천사가 함께 있다고 했습니다. 그때 ‘두영’을 악한 영들로 이해했다면 여기서 자연스럽게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AC.87의선한영들은갑자기어디에서등장한것인가?’
이 질문을 풀기 위해서는 먼저 앞에서 가졌던 전제 하나를 바로잡는 것이 좋습니다. ‘영들’이라는 말 자체를 언제나 ‘악한영들’과 같은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87만 보아도 스베덴보리는 악한 영들과 선한 영들을 분명히 구별합니다. 따라서 어떤 번호에서 단순히 ‘영들’이라고 했을 때 그것을 자동으로 악한 영들이라고 확정하기보다, 그 번호의 문맥과 스베덴보리의 직접 설명을 따라 판단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AC.50의 ‘두영’에 대한 앞선 설명도 수정해서 이해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AC.50이 사람과 영계 및 천국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영들’과 ‘천사들’을 구별했다고 해서, 거기서 말한 ‘영들’이라는 명칭 자체가 곧 ‘악한영들’을 뜻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영’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선악을 확정하는 명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AC.87은 같은 ‘영들’가운데 ‘악한영들’과 ‘선한영들’을 명시적으로 구별하여 말합니다.
그렇다면 AC.87에서 왜 선한 영들과 천적 천사들을 따로 말할까요? 여기서는 원문이 말하는 데까지 정확히 따라가는 것이 좋습니다.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될 때 악한 영들은 물러가고 선한 영들이 가까이 오며 천적 천사들도 가까이 옵니다. 그리고 이들이 함께 있을 때에는 악한 영들이 도저히 머물 수 없어 멀리 달아납니다. 따라서 이 번호에서 ‘선한영들’과 ‘천적천사들’은 같은 명칭으로 묶이지 않고 서로 구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AC.87한 번호만 가지고 이 두 부류의 존재론적 차이와 영계에서의 정확한 위치, 역할, 상태를 모두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특히 ‘영들은천사들보다아래단계의존재들이다’, ‘아직완전히확정되지않은상태의존재들이다’, ‘선한영들은인간을더나은상태로이끄는역할을한다’는 식으로 전체 구조를 먼저 완성하면 AC.87이 직접 말하지 않은 내용까지 섞일 수 있습니다. 그러한 구별은 스베덴보리가 영들의 세계와 천국, 영들과 천사들의 상태를 직접 설명하는 곳에서 차례로 확인하는 편이 안전합니다.
AC.87에서 지금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충분합니다. ‘영들’이라는 말은 곧 ‘악한영들’이라는 고정된 뜻이 아니며,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악한 영들과 선한 영들을 분명히 구별합니다. 또한 선한 영들과 천적 천사들도 서로 구별하여 말합니다. 그러므로 AC를 읽을 때 ‘영’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미리 정해 둔 하나의 뜻을 기계적으로 대입하기보다, 그 문맥에서 어떤 영들을 말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용어 문제를 넘어 앞으로 AC를 읽는 데 중요한 원칙이 됩니다. 우리가 상응을 고정된 사전처럼 사용하지 않기로 한 것과 마찬가지로, 영계의 존재들을 가리키는 명칭도 한 번 정한 설명을 모든 번호에 기계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AC.50은 AC.50의 문맥에서, AC.87은 AC.87의 문맥에서 먼저 읽어야 하며, 여러 번호가 충분히 쌓였을 때 스베덴보리 자신이 보여 주는 전체 구조를 따라 정리해야 합니다.
따라서 ‘선한영들은갑자기어디에서등장했는가?’라는 질문에 지금 가장 정확하게 답하면 이렇습니다. 선한 영들이 AC.87에서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앞서 ‘영들’을 너무 빨리 ‘악한영들’로만 한정해서 이해했던 것입니다. AC.87은 그 이해를 바로잡아 줍니다. 영들 가운데 악한 영들도 있고 선한 영들도 있으며, 이 번호에서는 천적 인간에게서 악한 영들은 물러가고 선한 영들과 천적 천사들이 가까이 온다고 스베덴보리가 직접 말하고 있습니다. 그보다 더 자세한 영들과 천사들의 질서는 앞으로 스베덴보리 자신이 그것을 열어 줄 때 따라가면 됩니다. (AC.87심화1)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창4:18)
AC.404
이모든이름은‘가인’(Cain)이라불린최초의이단에서파생된이단들을의미합니다.그러나그것들에관하여는이름들외에는전해지는것이없으므로,그것들에관하여무엇인가말하는것은불필요합니다.그이름들의어원으로부터어느정도알수있는것이있을수있습니다.예를들어‘이랏’(Irad)은그가‘성읍에서내려온다’(descendsfromacity)는것을의미하며,따라서‘에녹’(Enoch)이라불린이단에서내려왔음을의미합니다.다른이름들도이와같습니다. All these names signify heresies derived from the first,which was called “Cain”;but as there is nothing extant respecting them,except the names,it is unnecessary to say anything about them. Something might be gathered from the derivations of the names;for example,“Irad” means that he “descendsfromacity,” thus from the heresy called “Enoch,” and so on.
해설
AC.404는 창4:18에 이어지는 가인의 계보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간결하게 밝혀 줍니다. 가인에게서 에녹이 나왔고, 에녹에게서 이라드가 나왔으며, 그 뒤로 므후야엘, 므드사엘, 라멕이 이어집니다. 문자적 의미에서는 한 가문의 족보이지만, 스베덴보리는 이 모든 이름이 ‘가인’이라 불린 최초의 이단에서 파생된 여러 이단들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제 가인의 계보는 단순히 여러 세대가 이어지는 혈통이 아니라, 최초의 영적 분리가 계속 다른 형태로 파생되어 가는 하나의 교리적 계보로 읽힙니다.
이 설명은 앞의 AC.399-400과 직접 연결됩니다. AC.399에서는 가인이라는 분열 또는 이단이 자기 자신에게서 또 다른 분열을 산출했고 그것이 에녹이라 불렸다고 했습니다. AC.400에서는 그 원리를 더욱 일반화하여 ‘하나의이단이잉태되면거기에서수많은이단이태어납니다’라고 했습니다. AC.404는 바로 그 말이 실제 가인의 계보에서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가인에서 시작된 최초의 분리가 에녹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후의 여러 이름으로 계속 파생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최초의이단’이라는 표현은 가인의 본래 의미를 다시 기억하게 합니다. 가인은 단순히 어떤 잘못된 교리 하나를 표상한 것이 아니라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상태를 표상했습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이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었고 신앙은 사랑에 속해 있었지만,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에게서는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독립적인 위치를 차지하기 시작했습니다. AC.398의 표현대로 하면 ‘의지대신이해가,사랑대신신앙이지배하게된’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최초의 분리에서 이후의 여러 이단이 파생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라드, 므후야엘, 므드사엘 등이 각각 정확히 어떤 교리를 주장했는지 알고 싶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스스로 멈춥니다. ‘그것들에관하여는이름들외에는전해지는것이없으므로,그것들에관하여무엇인가말하는것은불필요하다’고 합니다. 이것은 AC를 읽는 우리에게도 중요한 해석 태도를 보여 줍니다. 속뜻이 있다고 해서 본문이 제공하지 않는 세부 내용까지 자유롭게 만들어 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스베덴보리는 이름의 의미에서 어느 정도 추론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 예로 ‘이라드’를 듭니다. 이라드라는 이름은 ‘성읍에서내려온다’는 의미를 가지므로, 속뜻에서는 앞의 ‘성읍’, 곧 에녹이라 불린 이단에서 파생되어 내려온 것을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AC.401에서 에녹은 시작되거나 형성되기 시작한 가르침과 연결되었고, AC.402에서 성읍은 교리적인 것 또는 이단적인 것을 의미했습니다. 따라서 이라드가 ‘성읍에서내려온다’는 것은 앞서 형성된 에녹의 교리적·이단적 상태에서 또 다른 상태가 파생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이렇게 보면 가인의 계보에는 상당히 일관된 흐름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가인이라는 최초의 분리가 있습니다. 그 분리에서 에녹이라는 새로운 이단이 산출됩니다. 에녹은 가르침으로 시작되고 형성되는 상태와 관련되고, 그 이름을 따라 성읍이 세워지면서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 전체가 하나의 형태를 갖춥니다. 그리고 이제 그 ‘성읍’에서 이라드가 내려옵니다. 하나의 분리된 신앙이 가르침이 되고, 그 가르침이 교리적인 전체를 이루며, 그 교리적 전체에서 다시 새로운 형태의 분리가 파생되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AC.404에서 말하는 ‘계보’는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 앞의 상태가 뒤의 상태를 낳는 연속성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AC.400에서 이미 말한 ‘잉태와출생’의 원리와 같습니다. 하나의 교리적 전제가 받아들여지면 그 안에서 다음 결론이 나오고, 그 결론에서 다시 다른 결론이 나옵니다. 처음의 근본 원리가 계속 후속적인 형태들을 산출하면서 하나의 계보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 번호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의 절제입니다. 그는 ‘다른이름들도이와같다’고 말할 뿐, 각각의 이름에 대해 상세한 교리적 내용을 만들어 내지 않습니다. 이름의 어원에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는 있지만, 그 이상을 뒷받침할 내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상응을 다룰 때도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상응은 무엇이든 마음대로 영적 의미를 붙이는 작업이 아니라, 말씀 자체와 AC의 설명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읽어야 합니다.
이 점은 앞의 AC.403과도 잘 연결됩니다. 태고인들은 영적인 것들을 ‘표상적유형들’아래 ‘역사형식’으로 배열했습니다. 따라서 가인의 계보에 등장하는 이름들도 영적인 상태들의 연속을 역사적 족보의 형태로 나타냅니다. 그러나 표상적 역사라고 해서 모든 이름의 세부 의미가 우리에게 자동으로 열리는 것은 아닙니다. 속뜻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우리가 그 속뜻의 모든 세부를 알고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AC.404는 한편으로는 매우 강하게 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매우 조심스럽게 말합니다. 강하게 말하는 것은 ‘이모든이름은가인이라는최초의이단에서파생된이단들을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조심스럽게 말하는 것은 ‘각각이구체적으로무엇인지는이름외에는자료가없으므로자세히말하지않겠다’는 것입니다. 이 두 태도를 함께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교리 이해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잘못된 근본 원리는 여러 후속적인 오류를 낳을 수 있습니다. 특히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 진리를 선한 삶에서 분리하며, 이해를 사랑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시키는 원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교리적 형태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가 역사 속의 모든 교리나 교파를 임의로 가인의 어느 후손과 연결해서는 안 됩니다. AC.404자체가 그런 과도한 추정을 경계하게 합니다.
오히려 가인의 계보를 우리 자신에게 적용하면 더욱 유익합니다. 하나의 잘못된 원리를 받아들였을 때 그것이 어떤 후속적인 생각들을 낳는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옳다는것이사랑하는것보다중요하다’는 원리가 마음에 자리 잡으면, 거기서 상대를 판단하는 생각이 나오고, 그 판단을 정당화하는 논리가 생기며, 마침내 사랑하지 않는 행동까지도 옳다고 설명하는 하나의 내적 ‘성읍’이 세워질 수 있습니다. 하나의 분리가 그 자체에서 후손을 낳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거듭남의 역사에서는 그 반대도 가능합니다. 잘못된 근본 원리가 발견되고 그것을 악으로 인정하여 피할 때, 주님께서는 진리를 다시 선과 결합시키십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를 섬기게 되고, 이해는 자기 지성에서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표현하는 수단이 됩니다. 가인의 계보를 읽는 목적은 단순히 옛 이단의 역사를 분류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신앙과 사랑의 질서가 어떻게 유지되거나 무너지는지를 보는 데 있습니다.
결국 AC.404는 가인의 후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상세히 해독하려 하기보다 그 계보 전체의 성격을 먼저 붙들게 합니다. 그들은 모두 ‘가인’이라 불린 최초의 이단에서 파생된 이단들을 나타냅니다. 이라드가 ‘성읍에서내려온다’는 이름으로 에녹의 이단에서 파생된 상태를 보여 주듯, 뒤의 이름들도 같은 계보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세부 내용이 주어지지 않은 곳에서는 멈추어야 합니다. 말씀의 속뜻을 깊이 읽는 것과 말씀보다 앞서 나가는 것은 다른 일이기 때문입니다. AC.404는 바로 그 두 가지를 함께 가르쳐 주는 번호입니다. (AC.404해설)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창4:17)
AC.403
이제우리는‘성읍’(city)이무엇을의미하는지를살펴보았습니다.그러나창세기의이부분전체가역사형식(historicalform)으로구성되어있기때문에,문자적의미(senseoftheletter)안에있는사람들에게는가인이성읍을세우고그것을에녹이라불렀던것처럼보일수밖에없습니다.비록문자적의미로부터그들은또한가인이아담의장자에불과했음에도이미그땅에많은사람이살고있었다고생각하지않을수없지만말입니다.역사적연속(historicalseries)에는이러한것이들어있습니다.그러나앞에서살펴본것처럼,태고인들(mostancientpeople)은모든것을‘표상적유형들’(representativetypes)아래‘역사형식’(formofahistory)으로배열하는데익숙했습니다.그리고이것은그들에게지극히즐거운일이었는데,그렇게함으로써모든것이살아있는것처럼보였기때문입니다. We have now seen what a “city” signifies.But as all this part of Genesis is put into a historical form,to those who are in the sense of the letter it must seem that a city was built by Cain,and was called Enoch,although from the sense of the letter they must also suppose that the land was already populous,notwithstanding that Cain was only the firstborn of Adam;the historical series has this in it.But as we observed above,the most ancient people were accustomed to arrange all things in the form of a history,under representative types,and this was to them delightful in the highest degree,for it made all things seem to be alive.
해설
AC.403은 창세기 4장을 읽는 데서만 중요한 번호가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창세기 초반부 전체를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보여 주는 중요한 해석 원리입니다. 앞의 AC.402에서는 ‘성읍’이 실제 성읍 자체보다 교리적인 것 또는 이단적인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왜 창세기 본문은 마치 실제 인물들이 태어나고, 성읍을 세우고, 그 성읍에 이름을 붙인 것처럼 역사 이야기의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AC.403은 바로 그 질문에 답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창세기의이부분전체가역사형식으로구성되어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문자적 의미만을 따라 읽으면 가인이 실제로 성읍을 세우고 그 이름을 에녹이라 불렀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본문이 그렇게 보이도록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 역사 형식을 문자 그대로만 밀어붙일 때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아담의 장자에 불과한데도 이미 성읍을 세울 만큼 많은 사람이 땅에 살고 있었다고 생각해야 하는 난점이 생긴다고 지적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관심은 단순히 ‘가인의아내는어디에서왔는가?’같은 역사적 난제를 해결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는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이이야기는처음부터실제사건들의연대기적기록만을목적으로쓰인것인가?’하는 것입니다. 그의 답은 그렇지 않다는 쪽입니다. 창세기 초반의 이 부분은 영적인 실재를 역사적인 형식 아래 배열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역사적연속’(historicalseries)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가인이 태어나고, 아벨을 죽이고, 놋 땅에 거하고, 에녹을 낳고, 성읍을 쌓는 일련의 이야기는 표면적으로는 하나의 연속된 역사처럼 전개됩니다. 그러나 그 속뜻에서는 교회의 상태들이 서로 이어지고, 하나의 교리적 상태가 다음 상태를 산출하며, 사랑과 신앙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하고 쇠퇴하는지가 하나의 영적 연속으로 펼쳐집니다. 문자적 역사 형식은 그 영적 연속을 담는 외적 그릇인 셈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태고인들의 사고방식에서 찾습니다. 태고인들은 ‘모든것을표상적유형들아래역사형식으로배열하는데익숙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표상적유형들’(representativetypes)이란 자연적인 인물, 장소, 사건, 사물 등을 통하여 영적이고 천적인 실재를 나타내는 형식을 말합니다. 곧 추상적인 교리나 영적 상태를 직접 개념적으로 설명하기보다 사람과 장소와 사건의 형태로 살아 있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태고교회의 퍼셉션적 성격과도 잘 연결됩니다. 태고인들은 영적인 것을 자연적인 것과 분리된 추상 개념으로만 보지 않았습니다. 자연계의 모든 것 속에서 영적인 의미를 느끼고 보았으며, 자연적인 형상들을 통해 천적이고 영적인 실재를 지각하는 데 익숙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영적 진리를 이야기와 인물과 장소의 형태로 표현하는 것이 단순한 문학적 장식이 아니라 매우 자연스러운 사고 방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방식이 그들에게 ‘지극히즐거운일’이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모든것이살아있는것처럼보였기때문’입니다. 이것은 AC.403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장 가운데 하나입니다. 영적 진리를 단지 추상적인 명제와 정의로만 전달하면 개념으로 머물 수 있지만, 그것을 사람과 사건과 장소의 형식으로 표현하면 진리가 움직이고 관계를 맺으며 살아 있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가인과 아벨, 에덴과 놋, 에녹과 성읍은 단순한 추상어가 아니라 영적 상태들이 살아 움직이는 하나의 이야기로 펼쳐지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창세기 초반의 서술은 일종의 ‘살아있는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신앙이체어리티에서분리되면교리적오류가파생된다’고 한 문장으로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그것을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나가고, 놋 땅에 거하고, 에녹을 낳고, 성읍을 쌓는 이야기로 펼쳐 보여 줍니다. 그러면 하나의 교리적 명제가 인간의 선택과 관계와 결과를 가진 살아 있는 서사가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AC.403을 근거로 ‘창세기초반은역사적의미가전혀없고순전히만들어낸이야기다’라고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강조하는 것은 ‘역사형식’과 ‘표상적유형들’입니다. 그의 관심은 문자적 형식 뒤에 있는 속뜻을 밝히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에서 우리가 안전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스베덴보리는창세기이부분을단순한문자적연대기로만읽지않고,영적인실재를역사형식아래배열한말씀으로읽는다’는 정도입니다.
또한 ‘역사형식’이라고 해서 내용이 임의적이거나 무질서하게 꾸며졌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가 ‘역사적연속’이라고 부른 것처럼, 사건들의 순서와 관계 자체가 영적 상태들의 질서와 진행을 담고 있습니다. 가인이 아벨보다 먼저 나오고, 아벨을 죽인 뒤 놋 땅에 거하며, 그 뒤 에녹과 성읍이 나오는 순서는 임의적인 배열이 아닙니다. 각각이 앞의 상태에서 다음 상태로 이어지는 영적 연속을 표현합니다.
이 점은 AC.399-402의 흐름을 다시 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가인이라는 분열에서 에녹이라는 새로운 분열이 산출되고, 그것이 가르침으로 형성되며, 다시 성읍이라는 교리적 전체가 만들어졌습니다. 만일 이것을 추상적인 교리 설명으로만 기록했다면 매우 건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은 그것을 출생과 이름과 성읍 건설이라는 이야기로 표현했습니다. 바로 이렇게 함으로써 영적 변화가 ‘살아있는것처럼’보이게 됩니다.
따라서 AC.403은 우리가 창세기 초반을 읽는 태도에도 중요한 기준을 줍니다. 문자적 이야기를 무시하고 곧바로 속뜻으로 뛰어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그 이야기의 흐름을 충분히 따라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역사 형식 자체가 속뜻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먼저 나오고, 누가 누구를 낳고, 어디로 이동하며, 무엇을 세우고, 무엇이라 이름하는지가 모두 영적 연속을 담는 표상적 형식입니다.
동시에 문자적 이야기에서만 멈추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말씀의 깊이는 그 역사 형식 안에 교회의 상태, 인간의 거듭남, 사랑과 신앙의 관계, 선과 진리의 질서가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자적 의미와 속뜻은 경쟁하는 두 층위라기보다, 외적 형식과 그 안에 담긴 내적 생명의 관계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AC.403의 마지막 표현, ‘모든것이살아있는것처럼보였다’는 말은 우리가 왜 말씀의 표상과 상응을 공부하는지까지 생각하게 합니다. 상응을 공부하는 목적은 단어마다 뜻을 붙여 놓는 일종의 암호 해독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씀 속 인물과 사건과 장소가 영적 실재와 연결되면서 다시 살아 움직이도록 보는 데 있습니다. ‘가인=신앙’, ‘아벨=체어리티’, ‘성읍=교리’라고 대응표만 외운다면 아직 태고인들이 느꼈던 그 생명성에 이른 것은 아닙니다. 그 관계들이 하나의 살아 있는 영적 서사로 움직이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AC.403은 창세기 초반의 속뜻을 읽는 하나의 중요한 안내문입니다. 태고인들은 영적 실재를 ‘표상적유형들’아래 ‘역사형식’으로 배열했고, 그 방식은 모든 것을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게 했습니다. 따라서 창세기의 인물과 장소와 사건들은 단순한 이름과 지명이 아니라 교회의 상태와 인간 마음의 변화를 살아 있는 역사처럼 보여 주는 표상적 형식입니다.
결국 AC.403이 말하는 것은 ‘역사를버리고상징만보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말씀의 역사적 형식이 왜 그렇게 구성되었는지를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그 형식 안에서 영적 실재가 인물과 사건과 장소를 통하여 살아 움직입니다. 가인의 성읍도 바로 그렇게 읽어야 합니다. 단순히 고대의 한 사람이 세운 도시가 아니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어떻게 가르침을 낳고 교리적 세계를 형성해 갔는지를 살아 있는 역사 형식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태고인들이 즐겨 사용했던 표상적 서술 방식이며, 스베덴보리가 창세기 초반의 속뜻을 읽는 기본 관점입니다. (AC.403해설)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창4:17)
AC.402
가인이‘쌓은성읍’(citythatwasbuilt)이그이단에서나온교리적인것과이단적인것전체를의미한다는사실은말씀에서성읍의이름이나오는모든구절로부터분명합니다.그어느곳에서도성읍자체를의미하지않고,언제나어떤교리적인것또는이단적인것을의미하기때문입니다.천사들은성읍이무엇인지,또어떤성읍의이름이무엇인지전혀알지못합니다.앞에서보여준것처럼그들의관념은영적이고천적이기때문에성읍에대한어떤관념도가지고있지않으며가질수도없습니다.그들은오직성읍과그이름이무엇을의미하는지만퍼셉션합니다.따라서‘거룩한성’(holycity),곧‘거룩한예루살렘’(holyJerusalem)은일반적으로는주님의나라를,특별히는그나라가그안에있는각개인을의미합니다.‘성읍시온’(city)과‘시온산’(mountainofZion)도이와같은방식으로이해되는데,후자는신앙의천적인것을,전자는신앙의영적인것을의미합니다. That by the “citythatwasbuilt” is signified all the doctrinal and heretical teaching that came from that heresy,is evident from every passage of the Word in which the name of a city occurs;for in none of them does it ever mean a city,but always something doctrinal or else heretical. The angels are altogether ignorant of what a city is,and of the name of any city;since they neither have nor can have any idea of a city,in consequence of their ideas being spiritual and celestial,as was shown above. They perceive only what a city and its name signify. Thus by the “holycity,” which is also called the “holyJerusalem,” nothing else is meant than the kingdom of the Lord in general,or in each individual in particular in whom is that kingdom. The “city” and “mountainofZion” also are similarly understood;the latter denoting the celestial of faith,and the former its spiritual.
[2]천적인것과영적인것자체도‘성읍들’(cities),‘궁전들’(palaces),‘집들’(houses),‘성벽들’(walls),‘성벽의기초들’(foundationsofwalls),‘방벽들’(ramparts),‘성문들’(gates),‘빗장들’(bars),그리고그가운데있는‘성전’(temple)으로묘사됩니다.에스겔48장과The celestial and spiritual itself is also described by “cities,” “palaces,” “houses,” “walls,” “foundationsofwalls,” “ramparts,” “gates,” “bars,” and the “temple” in the midst;as in Ezekiel 48;
여기서‘진리의성읍’(cityoftruth),곧‘예루살렘’(Jerusalem)은신앙의영적인것들을의미하고,‘성산’(mountainofholiness),곧‘시온산’(ofZion)은신앙의천적인것들을의미합니다. where the “cityoftruth,” or “Jerusalem,” signifies the spiritual things of faith;and the “mountainofholiness,” or “ofZion,” the celestial things of faith.
[3] 신앙의천적인것들과영적인것들이성읍으로표상되는것처럼,유다와이스라엘의성읍들은모든교리적인것들을의미합니다.이성읍들은각각그이름이언급될때어떤교리적인것에관한고유한의미를가지지만,그것이무엇인지는속뜻으로부터가아니면아무도알수없습니다.‘성읍들’(cities)이교리적인것들을의미하므로이단들도역시성읍들로의미되며,이경우각각의성읍은그이름에따라어떤특정한이단적견해를의미합니다.지금은다음말씀의구절들로부터일반적으로‘성읍’(city)이어떤교리적인것또는이단적인것을의미한다는사실만을보여주고자합니다. As the celestial and spiritual things of faith are represented by a city,so also are all doctrinal things signified by the cities of Judah and of Israel,each of which when named has its own specific signification of something doctrinal,but what that is no one can know except from the internal sense. As doctrinal things are signified by “cities,” so also are heresies,and in this case every particular city,according to its name,signifies some particular heretical opinion. At present we shall only show from the following passages of the Word,that in general a “city” signifies something doctrinal,or else heretical.
여기서는주님의강림때영적이고천적인것들에관한기억지식(memory-knowledge)을다룹니다.또환상의골짜기,곧환상(fantasy)을다루는곳에서는, where the subject treated of is the memory-knowledge of spiritual and celestial things at the time of the Lord’s advent. So again,when treating of the valley of vision,that is,of fantasy:
예레미야에서는‘남방에있는자들’(inthesouth),곧진리의빛가운데있으면서그것을꺼버리는자들을말하면서, In Jeremiah,speaking of those who are “inthesouth,” that is,in the light of truth,and who extinguish it:
여기서‘성벽’(wall),‘방벽’(rampart),‘성문’(gates),‘빗장’(bars)이오직교리적인것들을의미한다는것은누구나볼수있습니다. where anyone may see that by a “wall,” a “rampart,” “gates,” and “bars,” doctrinal things only are meant.
여기서‘혼돈의성읍’(cityofemptiness)은교리의공허함을의미하며,‘거리들’(streets)은여기서도다른곳에서와마찬가지로성읍에속한것들,곧거짓들이나진리들을의미합니다.계시록에서는, where the “cityofemptiness” denotes emptinesses of doctrine;and “streets” signify here as elsewhere the things which belong to the city,whether falsities or truths. In John:
그여자가그러한성격의교회를의미한다는것은앞에서보여준바와같습니다. and that the woman denotes a church of that character has been shown before.
해설
AC.402는 가인이 에녹의 이름을 따라 세운 ‘성읍’이 왜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 전체를 의미하는지를 말씀 전체의 용례를 통하여 설명합니다. AC.399에서는 이 의미를 간단히 제시했지만, 이번 번호에서는 거룩한 예루살렘과 시온에서부터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시편, 스가랴, 민수기,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많은 구절을 인용하여 ‘성읍’이라는 표상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따라서 많은 성경 인용에 압도되기보다 스베덴보리가 무엇 하나를 입증하기 위해 이 모든 구절을 모으고 있는지를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하나의 명제는 ‘성읍은교리적인것또는이단적인것을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매우 강하게 ‘말씀에서성읍은어느곳에서도성읍자체를의미하지않는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말씀의 속뜻을 설명하는 그의 방식에서 나온 진술입니다. 문자적 의미에서 실제 예루살렘이나 시온이나 여러 성읍이 역사적 장소로 존재했다는 것을 부정하는 말이라기보다, 천사들이 받아들이는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는 그러한 자연적 장소가 영적인 실재를 표상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따라서 이 문장을 근거로 말씀의 문자적·역사적 의미가 무가치하다고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가 집중하는 것은 성읍의 ‘속뜻’입니다.
그는 이 점을 천사들의 관념을 통하여 설명합니다. 천사들은 성읍이 무엇인지 또는 어떤 성읍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며, 그들의 관념은 영적이고 천적이기 때문에 자연계의 성읍에 관한 관념을 갖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들이 퍼셉션하는 것은 그 성읍과 이름이 ‘무엇을의미하는가’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말씀 이해에서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자연적 이미지가 말씀을 통하여 천국에 이를 때 천사들은 그 자연적 형태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상응하는 영적·천적 실재를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거룩한예루살렘’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거룩한 성, 곧 거룩한 예루살렘이 일반적으로는 ‘주님의나라’를 의미하고, 특별히는 그 나라가 그 안에 있는 각 개인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주님의 나라는 단지 인간 밖에 존재하는 천국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질서가 한 사람 안에 세워질 때 그 사람 안에도 주님의 나라가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룩한 예루살렘이라는 성읍은 주님의 나라가 교리와 진리의 질서 안에서 형성된 모습을 나타냅니다.
이어 ‘시온산’과 ‘성읍시온’을 구별합니다. 산은 신앙의 ‘천적인것’을, 성읍은 신앙의 ‘영적인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천적인 것은 사랑과 선에 더 직접적으로 관련되고, 영적인 것은 그 사랑과 선에서 나오는 진리와 신앙에 관련됩니다. 산이 높은 곳으로서 사랑의 천적 상태를 나타낸다면, 성읍은 그 안에 질서 있게 배치된 길과 집과 성벽과 문을 가진 구조로서 진리와 교리의 영적 질서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2]에서는 성읍뿐 아니라 ‘궁전,집,성벽,성벽의기초,방벽,성문,빗장,성전’이 한꺼번에 등장합니다. 에스겔 48장과 계시록 21장의 거룩한 성이 대표적입니다. 이것들은 단순한 천국 건축물의 설계도가 아니라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이 어떻게 하나의 질서를 이루는지를 자연적 이미지로 표현합니다. 특히 성벽과 성문과 기초는 성읍을 이루고 보호하며 출입을 규정하는 요소들이므로 교리의 진리들과 그 질서에 관련된 표상으로 이해됩니다.
시편의 ‘하나님의성’, 에스겔의 ‘여호와께서거기계시다’, 이사야의 ‘여호와의성읍’, 스가랴의 ‘진리의성읍’도 모두 같은 논증에 사용됩니다. 특히 슥8:3에서 ‘예루살렘은진리의성읍’, ‘시온산은성산’이라고 한 구절은 스베덴보리의 구별을 매우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그는 예루살렘, 곧 진리의 성읍을 ‘신앙의영적인것들’로 보고, 시온산을 ‘신앙의천적인것들’로 봅니다. 성읍이 진리와 교리의 질서와 연결된다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보여 주는 구절인 셈입니다.
그러나 성읍이 언제나 좋은 교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3]부터의 중요한 전환입니다. ‘성읍’이라는 상응은 교리적인 것을 나타내므로, 그 교리가 거짓과 악에서 나온 경우에는 이단적인 것을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성읍 자체가 선하거나 악한 상응이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어떤 성읍인지, 어떤 문맥에 있는지, 어떤 이름으로 불리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유다와 이스라엘의 각각의 성읍도 각기 다른 교리적인 것을 의미하며,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속뜻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고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이것은 앞의 AC.386에서 확인한 중요한 원리와도 통합니다. 상응은 기계적인 일대일 암호표가 아닙니다. ‘성읍=참된교리’라고 고정할 수도 없고 ‘성읍=거짓교리’라고 고정할 수도 없습니다. 보다 근본적으로 성읍은 ‘교리적인것’을 나타내며, 그것의 영적 질은 그 성읍이 놓인 전체 문맥과 이름에 따라 결정됩니다. 거룩한 예루살렘은 주님의 나라와 참된 교리의 질서를 나타내지만, 가인의 에녹 성읍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온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 전체를 나타냅니다.
[4]와 [5]의 수많은 인용은 바로 이 원리를 양쪽 방향에서 입증합니다. 애굽 땅의 다섯 성읍, 환상의 골짜기의 떠들썩한 성읍, 닫힌 남방의 성읍들, 시온의 성벽과 성문과 빗장, 견고한 성읍, 혼돈의 성읍, 계시록의 큰 성읍과 만국의 성읍들이 차례로 등장합니다. 각각의 구절을 별개의 주제로 떼어 심화하기보다, 모두 ‘성읍과그구성요소들이교리적상태를표현한다’는 하나의 증거군으로 읽는 것이 이번 번호의 논지를 가장 잘 살립니다.
특히 사24:10의 ‘혼돈의성읍’은 이해하기 좋은 예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교리의공허함’이라고 풀이합니다. 실제 건물들이 비어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진리가 사라져 교리가 텅 빈 상태를 성읍의 황폐함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읍의 ‘거리들’은 성읍에 속한 것, 곧 문맥에 따라 거짓이나 진리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하나의 성읍이 전체적인 교리의 질서를 나타낸다면 그 안의 거리와 성벽과 문과 집들도 그 전체를 구성하는 개별적인 것들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계16장의 ‘큰성읍이세갈래로갈라지고만국의성읍들이무너졌다’는 말씀도 같은 방식으로 읽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단순히 어떤 거대한 도시가 물리적으로 세 부분으로 갈라지는 사건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단적인 교회 상태와 그 교리적 구조의 붕괴를 나타낸다고 봅니다. 계17:18에서는 그 큰 성읍이 요한이 본 ‘여자’라고 설명되며, 스베덴보리는 그 여자가 그러한 성격의 교회를 의미한다고 연결합니다. 따라서 ‘성읍’과 ‘여자’와 ‘교회’가 서로 다른 자연적 표상을 통하여 하나의 영적 실재를 여러 측면에서 보여 주게 됩니다.
이제 이 모든 설명을 다시 가인의 성읍으로 가져오면 AC.399-402의 흐름이 선명해집니다. 가인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는 분열을 표상합니다. 그 가인에게서 에녹이라는 또 다른 분열이 태어났습니다. AC.401에서는 에녹이라는 이름이 ‘시작되거나형성되기시작한가르침’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에녹의 이름을 따라 성읍이 세워집니다. 즉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하나의 새로운 가르침을 낳고, 그 가르침에서 다시 여러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들이 형성되어 하나의 전체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가인이성읍을쌓았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단계입니다. 처음에는 사랑과 신앙의 관계가 뒤집힌 하나의 원리였습니다. 그 원리가 새로운 분열을 낳았고, 그 분열이 가르침이 되었으며, 이제 그 가르침이 하나의 교리적 세계를 형성합니다. 잘못된 영적 원리가 개인적인 생각의 수준을 넘어 전승되고 조직될 수 있는 구조를 갖추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교리체계’자체를 부정적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거룩한 예루살렘 역시 성읍입니다. 즉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질서 있게 결합되어 이루는 참된 교리도 성읍으로 표상됩니다. 문제는 성읍을 세우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 성읍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과 체어리티를 중심으로 진리가 질서를 이루면 거룩한 성읍이 될 수 있지만,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원리가 중심이 되면 가인의 성읍이 됩니다.
이 점은 교리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도 중요한 기준을 줍니다. 교리는 필요합니다. 인간이 태고교회의 퍼셉션을 잃은 뒤에는 진리를 배우고 이해하며 그것을 통하여 주님께 인도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앞의 AC.393-398에서 신앙이 ‘인류의쓰임을위하여’보존된 이유도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교리가 많다는 것도, 교리가 체계적이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 교리가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있는지, 그리고 사람을 실제 사랑과 선한 삶으로 이끄는지가 중요합니다.
AC.402가 보여 주는 가장 아름다운 대조는 결국 ‘가인의성읍’과 ‘거룩한예루살렘’입니다. 둘 다 성읍이며 둘 다 교리적인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하나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으로부터 형성된 교리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나라가 그 안에 이루어진 교리적·영적 질서입니다. 외적으로는 모두 ‘성읍’이지만 그 안에 거하는 사랑이 다릅니다.
그러므로 성읍의 속뜻을 이해하는 핵심은 건물의 규모나 성벽의 견고함이 아니라 그 성읍을 이루는 진리들이 어떤 선과 결합되어 있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진리는 사랑과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을 때 주님의 나라를 이루는 거룩한 성읍이 됩니다. 반대로 진리가 사랑에서 분리되어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조직될 때에는 아무리 견고한 성벽과 정교한 구조를 갖추더라도 가인의 성읍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AC.402가 수많은 말씀의 성읍들을 통하여 가인이 쌓은 한 성읍의 속뜻을 밝혀 주는 이유입니다. (AC.402해설)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창4:17)
AC.401
‘에녹’(Enoch)이라불린것은그모든교리적또는이단적가르침을포함한하나의이단이었다는사실은,이이름자체에서도어느정도분명합니다.‘에녹’이라는이름은그렇게시작되거나형성되기시작한가르침(instructionsobegunorinitiated)을의미하기때문입니다.That it was a heresy with all its doctrinal or heretical teaching that was called “Enoch” is in some measure evident from this name,which means the instruction so begun or initiated.
해설
AC.401은 앞의 AC.399-400에서 설명한 ‘에녹’의 의미를 그 이름 자체에서 다시 확인합니다. AC.399에서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분열 또는 이단이 자기 자신에게서 또 다른 분열 또는 이단을 산출했고 그것이 ‘에녹’이라 불렸으며, 가인이 쌓은 성읍은 거기서 나온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 전체를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AC.400에서는 이것을 더 일반화하여 교회든 이단이든 서로 잉태하고 낳으면서 하나의 영적 계보를 형성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401은 왜 그 새로운 상태가 하필 ‘에녹’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는지를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에녹이라는 이름이 ‘그렇게시작되거나형성되기시작한가르침’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번 에녹은 단순히 가인 다음에 등장한 또 하나의 이단이라는 의미만을 갖지 않습니다. 가인으로 표상되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이제 자기에게서 새로운 교리적 가르침을 만들어 내기 시작한 상태를 나타냅니다. 분리가 단순한 주장이나 태도로 머무르지 않고 가르칠 수 있는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점에서 AC.399의 ‘성읍’과 AC.401의 ‘에녹’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에녹은 새롭게 산출된 분열 또는 이단이며, 성읍은 거기서 나온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 전체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의 분열된 원리가 생겨나고, 그 원리가 가르침으로 형성되며, 그 가르침에서 여러 교리적인 것들이 조직되어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흐름입니다. AC.399에서 ‘교리체계’라는 표현을 조심스럽게 사용할 수 있었던 이유가 AC.401에서 조금 더 분명해집니다. 이제 단순한 분열을 넘어 실제로 ‘가르침’이 형성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계보에서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처음 가인은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는 하나의 교리적 원리를 표상했습니다. AC.398에서는 그 결과 사랑 대신 신앙이, 의지 대신 이해가 지배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제 그렇게 독립한 이해와 신앙은 자기 나름의 가르침을 만들어 내기 시작합니다. ‘에녹’은 바로 그 단계와 관련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가르침’자체가 악하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문제 삼는 것은 가르침의 존재가 아니라 그 가르침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번 문맥에서 에녹의 가르침은 가인, 곧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으로부터 산출되었습니다. 따라서 그 가르침 역시 그 최초의 분리라는 성격을 품고 있습니다. 교리가 정리되고 가르침이 체계화되었다고 해서 그 근원의 문제가 저절로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AC.400의 마지막 문장과 연결하면 그 위험이 더 잘 보입니다. ‘하나의이단이잉태되면거기에서수많은이단이태어납니다.’처음에는 하나의 잘못된 원리였지만 그것이 가르침으로 형성되기 시작하면 다른 사람에게 전달될 수 있고, 그 가르침으로부터 다시 새로운 결론들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의 분리가 다음 분리를 낳고, 그것이 다시 가르침과 교리를 낳으면서 계보가 이어집니다.
이것은 교리의 ‘근원’을 살피는 일이 왜 중요한지도 보여 줍니다. 어떤 가르침이 매우 논리적이고 정교하며 많은 성경 구절을 사용한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참된 교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가르침의 중심에서 신앙과 체어리티가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진리가 선을 섬기고 신앙이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도록 가르치는지, 아니면 신앙을 삶과 사랑에서 분리하여 그 자체로 구원의 본질인 것처럼 만드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원리를 다른 교회나 사람에게 ‘이단’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이번 본문의 목적과 거리가 있습니다. 오히려 가인의 계보를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는 편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 안에서도 어떤 잘못된 생각 하나가 받아들여지면 그것은 홀로 머물지 않습니다. 그 생각을 정당화하기 위한 다른 생각들이 생기고, 그것들이 서로 연결되면서 하나의 자기 논리를 만들 수 있습니다. 마침내 우리는 그 논리를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고 가르칠 정도로 확신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가인에게서에녹이태어나고성읍이세워지는’과정은 인간 마음 안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영적 과정입니다.
AC.401은 또한 같은 이름이 언제나 같은 상응을 갖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게 합니다. 창4의 가인 계열에도 에녹이 있고, 창5의 셋 계열에도 에녹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번호에서 ‘에녹’이라는 이름이 가르침의 시작과 관련된다는 사실만으로 두 에녹의 영적 질이 같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어떤 가르침이 시작되었느냐는 그 가르침이 속한 계열과 문맥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 점은 나중에 두 에녹을 비교할 때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가인 계열의 에녹에서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으로부터 교리적 가르침이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반면 셋 계열의 에녹에서는 태고교회의 퍼셉션에 속한 것들이 수집되고 교리적인 형태로 보존되는 전혀 다른 기능이 나타납니다. 같은 ‘에녹’과 ‘가르침’이라는 요소가 있어도 그것이 어느 계열에서 무엇을 보존하고 무엇을 전개하는가에 따라 영적 의미의 질은 달라집니다.
따라서 AC.401의 짧은 설명은 AC.399-400을 한 문장으로 묶어 주는 역할을 합니다. 가인이라는 분열에서 또 다른 분열인 에녹이 태어났고, 그 분열은 단순한 생각으로 끝나지 않고 ‘가르침’으로 시작되고 형성되었으며, 그로부터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 전체가 성읍으로 나타났습니다. ‘분리된신앙’이 이제 ‘가르쳐지는분리된신앙’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결국 AC.401에서 중요한 질문은 ‘우리는교리를가지고있는가?’가 아니라 ‘그교리는무엇으로부터시작되었는가?’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 안에서 진리를 이해하고 가르치는 것인지, 아니면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출발점으로 삼아 그 위에 가르침을 세우는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가인의 에녹은 하나의 분리가 가르침으로 형성되기 시작할 때 그것이 더 넓은 교리적 세계를 만들어 갈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참된 교리의 생명은 단지 올바른 문장과 정교한 체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교리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에 뿌리를 두고 그것을 섬기는 데 있습니다. (AC.401해설)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창4:17)
AC.400
‘가인이그의아내와동침하매그가임신하여에녹을낳았다’(Cainknewhiswife, andsheconceived, andbareEnoch)는이분열또는이단이자기자신에게서또다른분열또는이단을산출하였음을의미합니다.이것은앞에서말한것으로부터분명하며,또한1절에서사람과그의아내하와가가인을낳았다고한것으로부터도분명합니다.그러므로이제이어지는것들은교회의것이든이단들의것이든이와유사한잉태와출생들입니다.그들은이것들로하나의계보를이루었는데,이는이러한것들도서로이와같은방식으로관련되어있기때문입니다.하나의이단이잉태되면거기에서수많은이단이태어납니다.That “Cainknewhiswife,andsheconceived,andbareEnoch” signifies that this schism or heresy produced another from itself,is evident from what has been previously said,as well as from what is stated in the first verse,that the man and Eve his wife produced Cain;so that the things which now follow are similar conceptions and births,whether of the church,or of heresies,whereof they formed a genealogy,for these are similarly related to each other. From one heresy that is conceived there are born a host of them.
해설
AC.400은 AC.399에서 제시한 ‘가인이에녹을낳았다’는 속뜻을 확증하면서, 창세기의 족보를 읽는 매우 중요한 원리를 제시합니다. 가인이 에녹을 낳았다는 것은 단순히 한 사람이 아들을 낳았다는 가족사의 의미에 머물지 않고, 가인으로 표상되는 분열 또는 이단이 자기 자신에게서 또 다른 분열 또는 이단을 산출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제부터 이어지는 잉태와 출생과 계보가 교회와 이단들의 영적 관계를 나타낸다고 밝힙니다.
그 근거로 스베덴보리는 창4:1로 다시 돌아갑니다. 거기서 ‘사람과그의아내하와’가 가인을 낳았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러한 잉태와 출생은 단순한 생물학적 출산을 넘어 교회 안에서 새로운 교리와 상태가 발생하는 것을 표상했습니다. 따라서 가인이 다시 에녹을 낳는 것도 같은 방식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교회의 어떤 상태에서 가인이 산출되었고, 이제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분열에서 다시 에녹이라는 새로운 분열이 산출됩니다. 이것이 영적 계보입니다.
여기서 ‘잉태’와 ‘출생’을 구별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번 번호 자체는 둘의 세부 상응을 따로 정의하지 않지만, 적어도 하나의 영적 원리가 안에서 형성되고 그것이 다시 어떤 교리나 상태로 드러나는 과정을 ‘잉태와출생’이라는 언어로 표현하고 있음은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계보에서 누가 누구를 낳았다는 표현은 속뜻에서 단순히 시간적으로 다음 세대가 등장했다는 것보다, 앞의 상태에서 뒤의 상태가 어떻게 산출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관계가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교회의것이든이단들의것이든’이라고 말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잉태와 출생이라는 상응이 악한 것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선하고 참된 새로운 상태가 생겨나는 것도 잉태와 출생으로 표현될 수 있고, 반대로 잘못된 원리에서 새로운 분열과 이단이 생겨나는 것도 같은 언어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상응 자체가 선하거나 악한 것이 아니라, 무엇이 잉태되고 무엇이 태어나는가에 따라 그 질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씀의 상응을 기계적인 일대일 암호표처럼 읽어서는 안 된다는 점과도 연결됩니다. ‘출생은언제나이것하나를뜻한다’는 식으로 고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루고 있는 주제와 계열을 보아야 합니다. 가인의 계보에서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는 최초의 원리가 계속 파생되고 있으므로 그 잉태와 출생은 분열과 이단의 발생을 나타냅니다. 다른 계보에서는 같은 출생의 언어가 새로운 교회의 발생이나 선하고 참된 것의 전승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이 관계 때문에 ‘계보’가 형성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계보는 이름들의 단순한 목록이 아닙니다. 앞의 것이 뒤의 것을 낳고, 뒤의 것은 다시 그다음 것을 낳는 인과적·영적 연속성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창4의 가인 계보를 읽을 때 각각의 이름을 서로 고립시켜 해석하기보다, ‘앞의상태에서무엇이나왔으며그것이다시무엇을낳았는가?’라는 흐름을 계속 따라가야 합니다.
이 점에서 AC.399의 ‘성읍’도 다시 의미가 생깁니다. 가인이라는 분열에서 에녹이라는 또 다른 분열이 나오고, 그 에녹이라는 이름을 가진 성읍, 곧 그로부터 나온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 전체가 형성되었습니다. 이제 AC.400은 이것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하나의 이단적 원리가 형성되면 그것은 다시 새로운 결론과 교리를 산출하고, 그것들이 다시 다른 것을 산출하면서 하나의 계보를 이루게 됩니다.
그래서 마지막 문장인 ‘하나의이단이잉태되면거기에서수많은이단이태어납니다’가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역사적으로 이단들이 많이 생겼다는 관찰이 아닙니다. 하나의 잘못된 근본 원리가 받아들여지면 그 원리 안에 이미 여러 후속 결론의 씨앗이 들어 있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처음의 작은 분리가 그 자체의 논리를 따라 전개되면서 점차 여러 형태의 분리로 확장되는 것입니다.
가인의 경우 그 최초의 원리는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것이었습니다.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 속하여 그것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오히려 체어리티를 지배할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이 최초의 분리가 받아들여지면 그 뒤에는 신앙의 본질, 선한 삶의 중요성, 이웃 사랑의 위치, 교리와 삶의 관계 등에 관한 여러 후속적인 왜곡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하나의 근본적인 분리가 여러 교리적 분리를 낳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오늘날 어떤 특정 교파나 교리적 차이를 곧바로 ‘가인의이단계보’에 대입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번 번호에서 제시하는 핵심은 다른 사람에게 ‘이단’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데 있지 않고, 하나의 잘못된 영적 원리가 어떻게 자기 자신에게서 계속 새로운 오류를 산출하는지를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먼저 우리 자신의 신앙 안에서 진리를 체어리티와 분리하거나, 아는 것을 사는 것보다 높이 두거나, 교리적 옳음을 이웃 사랑보다 앞세우는 원리가 자라고 있지는 않은지를 살피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또한 ‘하나의이단에서수많은이단이태어난다’는 말을 모든 교리적 발전이 나쁘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교회 역시 잉태하고 낳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받아들여지고 그것이 삶 속에서 새로운 이해와 쓰임을 낳는다면 그것 역시 영적 출생입니다. 따라서 문제는 ‘무언가를낳는다’는 데 있지 않고 무엇으로부터 무엇이 태어나는가에 있습니다.
이것은 AC.398과도 매우 깊게 연결됩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이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었고 신앙은 사랑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인에게서는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사랑 대신 신앙이, 의지 대신 이해가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AC.399-400은 바로 그 뒤집힌 질서가 이제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보여 줍니다. 이해가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스스로 중심이 되면, 자기 전제에서 계속 새로운 교리적 결론을 만들어 내며 그것들이 하나의 계보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주님께서 신앙을 보존하신 섭리가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AC.393-398에서 보았듯이 주님께서 신앙을 보존하신 것은 분리 자체를 승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후의 인류가 신앙의 지식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보존된 신앙은 인간의 자유 안에 놓입니다. 그것을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시킬 수도 있고, 자기 지성과 proprium을 따라 또 다른 분열을 산출하는 데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가인의 계보는 후자의 전개를 보여 줍니다.
따라서 AC.400은 앞으로 이어질 가인의 족보를 읽는 하나의 안내문과 같습니다. 이후 등장하는 이름들을 단순히 여러 사람의 세대로만 읽지 않고, 서로 관련된 교회적·교리적 상태들의 연속으로 읽어야 합니다. ‘누가누구를낳았다’는 것은 앞의 영적 상태가 뒤의 상태를 산출했다는 것이며, 그 연속적인 산출이 하나의 계보를 형성합니다.
결국 AC.400은 매우 짧은 번호이지만 하나의 강력한 원리를 남깁니다. ‘하나의이단이잉태되면거기에서수많은이단이태어납니다.’신앙과 체어리티 사이의 작은 분리가 단지 한 가지 교리 문제로 끝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최초의 원리가 계속 새로운 생각과 판단과 교리를 낳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받아들여져 서로 결합될 때에도 거기에서 새로운 선과 진리의 열매들이 계속 태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많이 만들어 내느냐가 아니라, 그 모든 잉태와 출생의 처음에 어떤 사랑과 어떤 원리가 자리 잡고 있느냐입니다. (AC.400해설)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And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and he was building a city, and called the name of the city after the name of his son, Enoch. (창4:17)
AC.399
‘가인이그의아내와동침하매그가임신하여에녹을낳았다’(Cainknewhiswife, andsheconceivedandbareEnoch)는이분열또는이단이자기자신에게서또다른분열또는이단을산출하였고,그것이‘에녹’(Enoch)이라불렸음을의미합니다.‘그가쌓은성읍’(thecitywhichhebuilt)은거기서나온교리적인것과이단적인것전체를의미합니다.그리고그분열또는이단이‘에녹’(Enoch)이라불렸기때문에,‘그성읍의이름을그의아들의이름을따라에녹이라하였다’(thenameofthecitywascalledafterthenameofhisson,Enoch)고한것입니다. The words “Cainknewhiswife,andsheconceivedandbareEnoch” signify that this schism or heresy produced another from itself that was called “Enoch.”By “thecitywhichhebuilt” is signified all that was doctrinal and heretical therefrom,and because the schism or heresy was called “Enoch,” it is said that “thenameofthecitywascalledafterthenameofhisson,Enoch.”
해설
AC.399부터 가인 계열의 계보가 시작됩니다. 문자적 의미에서는 가인이 아내와 동침하여 에녹을 낳고 성읍을 건설하여 아들의 이름을 따라 그 성읍을 에녹이라고 부른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계보를 단순한 가족사의 기록으로 읽지 않습니다. ‘가인’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는 하나의 분열 또는 이단을 의미했듯이, 가인에게서 태어난 ‘에녹’은 그 분열이 자기 자신에게서 다시 산출한 또 다른 분열 또는 이단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낳는다’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하나의 교리적 원리가 받아들여지면 그것은 그 상태에 머물지 않고 그 원리에서 다시 다른 결론과 교리를 산출합니다. 가인의 최초 문제는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체어리티와분리되어도그자체로신앙일수있다’는 원리가 일단 자리 잡으면, 거기에서 여러 후속적인 생각과 교리들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러한 파생을 계보의 ‘출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가인이에녹을낳았다’는 것은 단순히 한 이단 뒤에 우연히 또 다른 이단이 나타났다는 뜻보다 더 깊습니다. 원문은 ‘producedanotherfromitself’, 곧 ‘자기자신에게서또다른것을산출하였다’고 합니다. 새로운 분열은 이전 분열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들어 있던 원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한 최초의 원리가 새로운 형태로 전개되고 구체화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어 ‘성읍’이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쌓은 성읍을 ‘거기서나온교리적인것과이단적인것전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발전입니다. 처음에는 하나의 분열된 원리였던 것이 이제 여러 교리적인 내용들을 갖추기 시작합니다. 다시 말해 단순한 생각이나 주장 하나가 아니라, 서로 연결된 가르침들이 형성되면서 하나의 체계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읍’은 분리된 신앙이 교리적으로 조직되고 정착된 상태를 나타낸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AC.399의 원문이 직접 ‘교리체계’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원문은 ‘allthatwasdoctrinalandhereticaltherefrom’, 곧 ‘거기서나온교리적인것과이단적인것전체’라고 합니다. 따라서 ‘성읍=교리체계’는 이 표현을 이해하기 쉽게 요약한 말로 사용할 수 있지만, 스베덴보리가 이번 번호에서 직접 그렇게 정의했다고까지 말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분리된 신앙으로부터 여러 교리적·이단적 내용이 산출되고 그것들이 하나의 성읍으로 표상된다는 데 초점을 두면 충분합니다.
이것은 AC.397-398과도 매우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가인은 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나가 놋 땅에 거했으며, 전에 사랑이 지배하던 이해의 마음과 전에 체어리티가 지배하던 합리적 마음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AC.398에서는 사랑 대신 신앙이, 의지 대신 이해가 지배하게 되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399에서는 바로 그 이해와 신앙이 독립적으로 지배하는 상태에서 새로운 교리적 산물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여기에 중요한 영적 원리가 있습니다. 이해가 사랑과 선을 섬길 때에는 진리가 삶을 인도하는 수단이 됩니다. 그러나 이해가 사랑에서 분리되어 스스로 지배하려 하면, 사람은 자신이 세운 전제에서 계속 새로운 논리와 교리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처음의 전제가 잘못되어 있어도 그 위에 매우 정교하고 일관된 체계를 세울 수 있습니다. 논리적으로 정교하다는 사실 자체가 그 교리가 살아 있는 진리라는 보증은 아닙니다. 그것이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있는지를 함께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교리’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도 분명히 구별해야 합니다. 문제는 교리가 존재한다는 데 있지 않고, 어떤 근원에서 그 교리가 산출되었느냐에 있습니다. 선과 체어리티에서 나온 진리의 교리는 사람을 주님과 이웃에게로 이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는 원리에서 산출된 교리는 아무리 정교하게 조직되어도 그 최초의 분리를 계속 품을 수 있습니다. AC.399의 성읍은 바로 후자의 문맥에 있습니다.
이 점에서 ‘그성읍의이름을그의아들의이름을따라에녹이라하였다’는 표현도 의미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분열 또는 이단 자체가 에녹이라고 불렸기 때문에 그로부터 나온 교리적·이단적 전체도 에녹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즉 그 성읍의 성격은 그것을 낳은 원리와 분리되지 않습니다. 성읍을 구성하는 여러 교리가 아무리 많아져도 그 전체를 규정하는 것은 그것들의 근원이 된 ‘에녹’이라는 분열의 성격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반드시 구별해 두어야 할 것이 ‘가인계열의에녹’과 훗날 창5에 등장하는 ‘셋계열의에녹’입니다. 이름은 같지만 스베덴보리의 속뜻에서는 같은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번 AC.399의 에녹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으로부터 파생된 분열 또는 이단입니다. 반면 창5의 에녹은 태고교회의 퍼셉션에 속한 것들을 모아 교리적인 형태로 보존한 것과 관련됩니다. 따라서 성경에 같은 이름이 나온다는 이유만으로 동일한 상응을 기계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두 에녹을 나중에 함께 보면 매우 흥미로운 대조가 생깁니다. 가인 계열에서는 교리화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전개하고 굳히는 방향으로 나타나는 반면, 셋 계열의 에녹에서는 쇠퇴해 가는 퍼셉션의 지혜를 보존하기 위한 교리화가 나타납니다. 하나는 생명에서 분리된 교리의 발전이고, 다른 하나는 잃어 가는 생명의 지혜를 보존하기 위한 교리의 형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은 창5의 해당 AC번호에 이르렀을 때 충분히 다루는 편이 좋겠습니다.
AC.399는 또한 ‘가인의표’가 왜 신앙의 모든 문제를 즉시 해결한 것이 아니었는지도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 신앙을 보존하셨다는 것은 그 신앙이 곧바로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보존된 신앙은 여전히 인간의 자유 안에서 사용될 수 있었고, 가인의 계열에서는 오히려 새로운 분열과 교리적 체계를 산출하는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주님의 보존 섭리는 인간의 자유를 없애는 강제적인 교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신앙을 보존하신 것은 필요했습니다. 앞의 AC.393-398에서 반복해서 보았듯이, 인간이 태고교회와 같은 퍼셉션을 잃은 뒤에는 신앙의 지식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받을 길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동일한 이해 능력과 신앙의 지식이 한편으로는 분리된 교리 체계를 만들어 낼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주님께서 사람을 체어리티로 이끄시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결국 결정적인 것은 신앙의 지식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어떤 사랑과 결합되고 무엇을 섬기느냐입니다.
따라서 AC.399는 가인의 후손들을 단순한 고대 족보로 읽기보다, 하나의 잘못된 영적 원리가 어떻게 자기에게서 또 다른 원리를 낳고, 그것이 다시 교리적인 것들을 형성하면서 발전하는지를 보여 주는 출발점입니다. ‘가인이에녹을낳았다’는 것은 분열이 또 다른 분열을 산출한 것이며, ‘성을쌓았다’는 것은 그로부터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 전체가 형성된 것입니다.
결국 이번 번호가 던지는 질문은 ‘교리가얼마나정교한가?’보다 더 깊습니다. ‘그교리는어디에서태어났는가?’입니다.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나온 신앙인가, 아니면 사랑에서 분리되어 스스로 지배하려는 신앙인가 하는 것입니다. 가인의 에녹과 성읍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도 자기 나름의 후손을 낳고 교리를 만들며 하나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의 생명은 교리의 규모나 논리적 정교함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신앙이 다시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에 결합되어 있느냐에 있습니다. (AC.399해설)
‘여호와의얼굴앞에서나가는것’(gooutfromthefacesofJehovah)이사랑의신앙에속한선에서분리되는것을의미한다는것은14절의해설에서볼수있습니다.‘놋땅에거하는것’(dwellinthelandofNod)이진리와선밖에있음을의미한다는것은‘놋’(Nod)이라는말의의미에서분명한데,그것은유리하며피하는자가되는것입니다.그리고‘유리하며피하는자’(wandererandfugitive)가되는것이진리와선을빼앗긴상태를의미한다는것은앞에서볼수있습니다.‘에덴동쪽’(towardtheeastofEden)이전에사랑이지배하던이해의마음(intellectualmind)가까이,그리고전에체어리티가지배하던합리적마음(rationalmind)가까이를의미한다는것은‘에덴동쪽’의의미에관하여앞에서말한것으로부터분명합니다.곧‘동쪽’(east)은주님을,‘에덴’(Eden)은사랑을의미합니다.태고교회사람들에게서는의지와이해로이루어진마음이하나였습니다.의지가모든것중의모든것이었기때문에이해는의지에속해있었습니다.이것은그들이의지에속한사랑과이해에속한신앙을구별하지않았기때문입니다.사랑이모든것중의모든것이었고신앙은사랑에속해있었기때문입니다.그러나‘가인’이라하는사람들에게서와같이신앙이사랑에서분리된후에는더이상의지가지배하지않았습니다.그리고그마음에서의지대신이해가,곧사랑대신신앙이지배하게되었으므로,그가‘에덴동쪽에거하였다’고한것입니다.방금말한것처럼신앙이구별되었기때문입니다.곧신앙에‘표가주어져’인류의쓰임을위하여보존되게하신것입니다. That to “gooutfromthefacesofJehovah” signifies to be separated from the good of the faith of love may be seen in the explication of verse 14; that to “dwellinthelandofNod” signifies outside of truth and good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 word “Nod,” which is to be a wanderer and a fugitive; and that to be “awandererandafugitive” is to be deprived of truth and good, may be seen above. That “towardtheeastofEden” signifies near the intellectual mind, where love had previously reigned, and also near the rational mind, where charity had previously reigned, is evident from what has been said of the signification of “theeastofEden,” namely, that “theeast” is the Lord, and “Eden” love. With the men of the most ancient church, the mind, consisting of the will and the understanding, was one; for the will was the all in all, so that the understanding was of the will. This was because they made no distinction between love, which is of the will, and faith, which is of the understanding, because love was the all in all, and faith was of love. But after faith was separated from love, as was the case with those who were called “Cain,” no will reigned any longer, and as in that mind the understanding reigned instead of the will, or faith instead of love, it is said that he “dwelttowardtheeastofEden”; for as was just now observed, faith was distinguished, or “hadamarksetuponit,” that it might be preserved for the use of mankind.
해설
AC.398은 앞의 AC.397을 상세히 설명하면서 가인으로 표상되는 변화가 인간 마음의 구조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를 보여 줍니다. 처음 두 표현은 앞에서 이미 설명된 의미를 다시 확인합니다. ‘여호와의얼굴앞에서나가는것’은 사랑의 신앙에 속한 선에서 분리되는 것이고, ‘놋땅에거하는것’은 진리와 선 밖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 번호의 중심은 세 번째 표현인 ‘에덴동쪽’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의지와 이해, 사랑과 신앙의 관계를 설명한 뒤, 가인에게서 그 주도권이 어떻게 뒤바뀌었는지를 밝힙니다.
먼저 ‘놋’이라는 이름 자체가 ‘유리하며피하는자’의 상태와 연결됩니다. 앞의 AC.380, AC.382, AC.388에서 ‘피하며유리하는자’는 무엇이 진리이고 선인지 알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가인이 놋 땅에 거했다는 것은 단순히 에덴을 떠나 다른 지역에 정착했다는 지리적 진술에 머물지 않습니다. 속뜻에서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진리와 선의 살아 있는 질서 밖에 놓인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에덴동쪽’은 그보다 훨씬 미묘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동쪽’은 주님을, ‘에덴’은 사랑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인이 에덴 동쪽에 거했다는 것을 ‘전에사랑이지배하던이해의마음가까이’이며 동시에 ‘전에체어리티가지배하던합리적마음가까이’라고 설명합니다. AC.397에서는 이해의 마음만 언급했는데, 이번 번호에서는 합리적 마음까지 덧붙입니다. 따라서 가인의 상태를 이해하려면 ‘사랑-신앙’뿐 아니라 ‘의지-이해’라는 인간 마음의 구조까지 함께 보아야 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서는 의지와 이해가 하나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하나였다’는 것은 두 기능을 개념적으로 전혀 구별할 수 없었다는 뜻이라기보다, 서로 대립하거나 독립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의지가모든것중의모든것이었기때문에이해가의지에속해있었다’고 설명합니다. 즉 의지가 중심이었고 이해는 그 의지의 질서 안에서 움직였습니다.
그 이유는 다시 사랑과 신앙의 관계에서 설명됩니다. 사랑은 의지에 속하고 신앙은 이해에 속합니다. 그런데 태고교회 사람들은 사랑과 신앙을 서로 독립된 두 가지로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사랑이모든것중의모든것이었고신앙은사랑에속해있었기때문’입니다. 이것은 AC.393에서 ‘태고교회는사랑에속한신앙외에는어떠한신앙도인정하지않았으며심지어신앙을따로언급하려하지도않았다’고 한 설명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따라서 태고교회의 질서는 ‘의지에서이해로’, 그리고 ‘사랑에서신앙으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인간 자신의 의지가 본래 선했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사랑과 선의 근원도 주님이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이 의지를 채우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랑 안에서 이해가 진리를 퍼셉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심은 인간의 의지 자체가 아니라 그 의지를 지배하던 주님으로부터의 사랑입니다.
가인에게서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신앙이사랑에서분리된후에는더이상의지가지배하지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 변화를 매우 대칭적인 문장으로 표현합니다. ‘의지대신이해가,곧사랑대신신앙이지배하게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인의 분리가 가져온 마음의 구조적 변화입니다.
따라서 가인의 문제를 단순히 ‘신앙을너무강조했다’는 정도로 이해해서는 부족합니다. 문제는 주도권의 역전입니다. 본래 신앙은 사랑에 속해 있었고 이해는 의지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면서 이해가 독립적인 지배 위치에 올라섰습니다. 진리가 선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진리라고 여기는 것이 선 위에 서고, 신앙이 체어리티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체어리티를 판단하고 지배하려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앞의 AC.362-363에서 설명한 가인의 교리와도 정확히 맞닿습니다. 거기서 가인으로 표상되는 교리는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으며,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체어리티가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AC.398에서는 그 문제가 더 깊은 인간 마음의 차원에서 설명됩니다. ‘신앙과체어리티중무엇이먼저인가?’라는 교리적 논쟁의 배후에는 ‘이해와의지중무엇이지배하는가?’라는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매우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AC.393에서 스베덴보리는 홍수 후의 영적 인간에게서는 신앙의 지식이 먼저 오고, 그 지식을 통하여 주님께서 체어리티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AC.398의 ‘이해가지배하게되었다’는 말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말은 서로 다른 차원을 말합니다. 영적 인간에게 신앙의 지식이 ‘먼저온다’는 것은 배우고 거듭나는 순서에 관한 것이며, 신앙이 사랑보다 ‘지배해야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식은 먼저 올 수 있지만 체어리티가 신앙에서 주된 것이 되어야 합니다.
바로 이 차이를 놓치면 가인의 신앙과 홍수 후 영적 교회의 신앙을 동일하게 만들어 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가인은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하여 이해가 의지 대신 지배하게 만든 상태입니다. 반면 주님께서 섭리하신 영적 교회의 질서는 신앙의 지식이 먼저 주어지더라도 그 신앙이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되고, 마침내 체어리티가 신앙에서 주된 것이 되는 질서입니다. 따라서 ‘신앙이먼저온다’와 ‘신앙이지배한다’는 전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이 구별 때문에 AC.398마지막의 ‘가인의표’가 다시 중요해집니다. 주님께서는 사랑 대신 신앙이 지배하게 된 잘못된 질서를 승인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해와 신앙을 완전히 소멸시키지도 않으셨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이구별되었고,곧신앙에표가주어져인류의쓰임을위하여보존되었다’고 다시 말합니다. 여기서 ‘fortheuseofmankind’, 곧 ‘인류의쓰임을위하여’라는 표현이 AC.395의 설명을 더욱 분명하게 해 줍니다.
왜 신앙을 보존해야 했습니까? AC.393에서 이미 답을 보았습니다. 인간이 더 이상 태고교회처럼 사랑으로부터 직접 진리를 퍼셉션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사람에게는 진리를 먼저 듣고 배우는 길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므로 이해와 신앙에 속한 지식이 보존되어야 했습니다. 그것을 통하여 주님께서 다시 체어리티를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인의 신앙은 잘못된 분리에서 시작되었지만, 주님께서는 그 안에서 앞으로 인류에게 쓰임이 될 수 있는 것을 구별하여 보존하셨습니다.
이제 ‘에덴동쪽에거하였다’는 표현도 훨씬 선명해집니다. 가인은 에덴 안에 있지 않습니다. 사랑이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며 신앙이 사랑에 속해 있던 본래의 천적 질서에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에덴과 아무 관계도 없는 완전한 소멸 상태로 사라진 것도 아닙니다. 그는 ‘에덴동쪽’, 곧 전에 사랑이 지배하던 이해의 마음과 전에 체어리티가 지배하던 합리적 마음 가까이에 있습니다. 분리는 일어났지만 이해와 신앙이 보존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가까이’라는 표현은 AC.397에 이어 여전히 중요합니다. 그것은 가인의 상태가 선하고 정상적이었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 안에서 신앙이 앞으로 다시 선과 결합될 수 있는 쓰임을 위해 보존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사랑과 신앙의 본래적 하나 됨은 깨어졌지만, 신앙 자체가 제거되지는 않았습니다. 인간은 이제 그 보존된 신앙의 지식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받아들이는 다른 길로 인도될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AC.398은 태고교회에서 가인으로 넘어가는 변화와, 다시 홍수 후 영적 교회의 질서가 가능해지는 배경을 한꺼번에 보여 주는 중요한 번호입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의지와 이해가 하나였고, 사랑이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었으며 신앙은 사랑에 속해 있었습니다. 가인에게서는 그 결합이 깨져 이해가 의지 대신, 신앙이 사랑 대신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신앙을 없애지 않고 인류의 쓰임을 위해 구별하여 보존하셨습니다.
결국 가인의 문제는 ‘이해가존재한다’거나 ‘신앙이존재한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해가 의지에서,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스스로 지배하려 한 것이 문제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섭리는 그 뒤집힌 질서를 승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도 이해와 신앙을 보존하여 다시 선과 사랑을 받아들이는 수단으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인이 진리와 선 밖의 ‘놋땅’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에덴동쪽’, 곧 전에 사랑과 체어리티가 지배하던 마음 가까이에 거한다고 한 깊은 이유입니다. (AC.398해설)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And Cain went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 and dwelt in the land of Nod, toward the east of Eden. (창4:16)
AC.397
‘가인이여호와의얼굴앞에서나갔다’(CainwentoutfromthefacesofJehovah)는신앙이사랑의신앙에속한선에서분리되었음을의미합니다.‘그가놋땅에거하였다’(hedweltinthelandofNod)는진리와선밖에있음을의미합니다.‘에덴동쪽’(towardtheeastofEden)은전에사랑이지배하던이해의마음(intellectualmind)가까이에있음을의미합니다.By the words “CainwentoutfromthefacesofJehovah” is signified that faith was separated from the good of the faith of love;“hedweltinthelandofNod” signifies outside of truth and good;“towardtheeastofEden” is near the intellectual mind,where love reigned before.
해설
AC.397부터 가인의 이야기는 새로운 단계로 들어갑니다. 앞의 AC.392-396에서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도록 주님께서 특별히 구별하여 보존하신 것이 ‘가인의표’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창4:16에서는 그렇게 보존된 가인이 ‘여호와앞을떠나서에덴동쪽놋땅에거주’합니다. 속뜻에서는 분리된 신앙이 보존된 이후 어떤 상태에 놓이게 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첫째, ‘가인이여호와의얼굴앞에서나갔다’는 것은 신앙이 ‘사랑의신앙에속한선’에서 분리되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여호와의얼굴’은 앞의 AC.387과 직접 연결됩니다. 거기서 스베덴보리는 ‘여호와의얼굴’이 주님의 자비를 의미하며, 그 자비로부터 사랑의 신앙에 속한 모든 선이 나온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나간다는 것은 주님께서 가인을 내쫓아 더 이상 자비를 베풀지 않으셨다는 뜻이 아니라,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이 사랑에 속한 선에서 스스로 분리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의 얼굴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사람이 그 얼굴에서 돌아선 것입니다. 주님의 자비와 사랑은 변하지 않지만, 인간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신앙을 분리하면 그 자비에서 흘러오는 선을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받아들일 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여호와의얼굴앞에서나갔다’는 표현을 주님의 거절이나 버림으로 읽기보다 인간 쪽에서 일어난 영적 분리로 읽어야 합니다.
둘째, ‘놋땅에거하였다’는 것은 ‘진리와선밖에있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서도 표현의 강도를 그대로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번 번호에서 ‘모든진리와선이완전히소멸되었다’고 말하지 않고 ‘진리와선밖에있었다’고 합니다.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은 보존되었지만,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었기 때문에 참된 진리와 선의 질서 안에 거하지 못하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앞의 AC.380-382에서 가인이 ‘피하며유리하는자’가 되어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알지 못하게 되었다는 설명과 연결됩니다. 진리는 선과 결합될 때 그 참된 방향과 생명을 얻습니다. 그런데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면 진리에 관한 지식이 남아 있더라도 그것을 무엇을 위해 사용해야 하는지, 무엇이 실제로 선인지 올바르게 분별하는 능력이 흐려집니다. 그러므로 ‘놋땅’은 단순한 지리적 망명지가 아니라 신앙이 선과 진리의 살아 있는 질서 밖에 놓인 영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이번 번호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세 번째 표현인 ‘에덴동쪽’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전에사랑이지배하던이해의마음가까이에있음’이라고 풀이합니다. 여기서 ‘전에’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에덴은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 곧 사랑이 지배하던 상태와 연결됩니다. 그 상태에서는 사랑과 신앙이 분리되지 않았으며, 사랑으로부터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을 퍼셉션했습니다. AC.393에서 보았듯이 그들은 신앙을 따로 언급하려 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바로 그 질서를 깨뜨린 신앙입니다.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하고 신앙을 하나의 독립된 교리로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가인은 더 이상 에덴 ‘안’에 있지 않습니다. 사랑이 지배하는 상태 안에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에덴에서 완전히 동떨어진 곳에 있다고 하지 않고, ‘전에사랑이지배하던이해의마음가까이에’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AC.393-396에서 설명한 신앙의 보존이 다시 연결됩니다. 분리된 신앙은 본래의 천적 질서를 잃었지만 완전히 소멸되지는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그것을 특별히 구별하여 보존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인은 에덴 안에 있을 수는 없지만, 에덴과 아무 관계도 없는 곳으로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닙니다. 사랑이 지배했던 이해의 마음 ‘가까이에’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이후의 영적 인간에게 신앙의 지식이 어떤 역할을 하게 되는지를 생각하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직접 퍼셉션했습니다. 그러나 그 상태가 사라진 뒤에는 사람이 먼저 신앙의 지식을 배우고, 그 지식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체어리티를 받아야 했습니다. 따라서 신앙의 지식은 사랑 자체는 아니지만 다시 사랑과 결합될 수 있는 수단으로 보존되어야 했습니다. 가인이 에덴 동쪽 가까이에 있다는 표현은 바로 이러한 상태와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intellectualmind’, 곧 ‘이해의마음’이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가인이 에덴 동쪽에 있다는 것은 단순히 옛 천적 상태의 지리적 경계 가까이에 있다는 뜻이 아니라, 전에 사랑이 지배했던 ‘이해의마음’가까이에 있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이해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기능과 관련됩니다. 태고교회에서는 그 이해가 사랑 아래 있었고 사랑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다시 말해 이해가 독립적으로 진리를 만들어 내거나 사랑을 지배한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보았습니다.
가인의 상태에서는 이 질서가 뒤집혔습니다. 신앙, 곧 진리에 속한 것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독립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이해의 기능과 신앙의 지식을 완전히 파괴하지 않으셨습니다. 훗날 그것이 다시 체어리티를 받아들이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보존하셨습니다. 따라서 ‘에덴동쪽’이라는 위치에는 과거의 천적 질서와 현재의 분리된 신앙 사이의 거리와 연결 가능성이 동시에 표현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가까이에있다’는 말을 곧 ‘곧바로다시에덴으로돌아갈수있었다’거나 ‘가인의신앙이거의정상적인상태였다’는 뜻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이번 번호는 분명히 가인이 ‘진리와선밖에’있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상태의 단절은 실제적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단절이 완전한 소멸과 동일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사랑에서 분리되었고 진리와 선 밖에 있었지만, 주님의 섭리에 의해 보존되어 여전히 과거 사랑이 지배했던 이해의 마음 가까이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 점에서 AC.397은 앞의 ‘가인의표’설명과 이후의 가인 계보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합니다. 가인의 표를 통하여 신앙이 보존되었고, 이제 그 보존된 신앙이 에덴 밖 놋 땅에서 하나의 새로운 상태를 형성하기 시작합니다. 앞으로 에녹과 성읍, 그리고 가인의 후손들이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이 보존된 신앙이 점차 하나의 교리적 계보와 체계로 전개되는 과정으로 읽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AC.397자체에서는 아직 그 이후를 앞당겨 설명하기보다 ‘분리되었으나보존된신앙이어디에놓여있는가’를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결국 AC.397에는 매우 미묘한 긴장이 있습니다. 가인은 ‘여호와의얼굴앞에서나갔습니다.’사랑의 신앙에 속한 선에서 분리되었습니다. 그는 ‘놋땅’에 거합니다. 진리와 선 밖에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에덴동쪽’에 있습니다. 전에 사랑이 지배하던 이해의 마음 가까이에 있습니다. 완전히 에덴 안에도 아니고, 에덴과 아무 관계도 없는 완전한 소멸 상태에도 아닙니다.
바로 이 상태가 주님의 보존 섭리 아래 있는 가인의 신앙을 잘 보여 줍니다. 인간은 사랑과 신앙의 본래 질서를 무너뜨렸지만, 주님께서는 그 실패 때문에 진리에 속한 모든 것을 없애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신앙을 보존하시고, 그것이 다시 사랑과 체어리티를 받아들이는 수단이 될 가능성을 남겨 두셨습니다. 따라서 ‘에덴동쪽놋땅’은 단순한 추방의 장소가 아니라, 사랑에서 분리되어 진리와 선 밖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과거 사랑이 지배했던 이해의 마음 가까이에 보존되어 있는 신앙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AC.397해설)
※오늘(2026/09/13)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3, ‘영원한하늘나라’, 찬93, ‘예수는나의힘이요’입니다.
오늘은창4절별 주석 그 네 번째, 9절로 15절, AC글 번호로는 370번에서 396번입니다. 먼저 본문입니다.
9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10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11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12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13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1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15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창4:9-15)
제목은
가인의표,인간의실패보다더깊은주님의섭리
이며, 다음은 지난주부터 시작한 ‘3분요약’입니다. 새로 오신 분들, 그리고 그동안 함께해오신 분들 모두를 위한, 지난 2월부터 시작한 이 특별한 주일예배를 위한, 그 흐름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한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