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02.심화

 

3. ‘13:13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13:13) Seeing they should see, and hearing they should hear, and should understand (Matt. 13:13).

 

 

가이드 1.0에 따르면, 마13:13은 예수님께서 왜 비유로 말씀하셨는지를 설명하는 구절이지만, AC.302에서는 단순한 ‘교육 방법’을 설명하기 위해 인용된 것이 아닙니다. 이 구절은 창3:22에서 시작된 주님의 보호 섭리가 신약 시대에도 동일하게 계속되고 있음을 증명하는 핵심 성구로 인용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반드시 창3:22-24, 요12:40, 마12:31-32, 히6:4-6, 히10:26-29와 하나의 교리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AC.301에서 스베덴보리는 창3:22의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를 해설하면서, 주님께서 사람을 생명나무에 가까이하지 못하게 하신 이유는 생명을 주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profanation을 막기 위해서라고 설명합니다. 이어지는 창3:24의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칼’은 바로 이러한 보호 섭리를 상징합니다. AC.302는 이 동일한 원리가 유대교회와 주님의 공생애 가운데서도 계속 역사하였음을 보여주는 단락입니다.

 

이러한 문맥에서 마13:13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한다’는 말씀은, 주님께서 사람들의 이해를 일부러 막으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내적 상태를 아셨기 때문에,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천국의 깊은 진리를 직접 드러내지 않으셨습니다. 그 결과 말씀은 비유와 상응 속에 감추어졌고, 사람들은 외적인 뜻만 이해할 수 있도록 허락되었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AC.302의 답은 분명합니다. 만일 그들이 내적 진리를 충분히 이해하고, 그것을 참된 것으로 인정한 뒤 다시 거부하였다면, 그들은 단순한 불신앙이 아니라 profanation에 이르게 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비유는 단순한 교수법이 아니라, 사람의 영혼을 보호하는 자비의 수단이었습니다.

 

이 점에서 마13:13은 요12:40과 완전히 같은 원리를 말합니다. 요12:40에서는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다’ 표현하고, 마13:13에서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한다’ 표현합니다. 표현은 다르지만 의미는 동일합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감당하지 못할 진리를 무리하게 열어 주지 않으심으로써 더 큰 영적 파멸을 막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원리는 다시 마12:31-32의 ‘성령을 모독하는 죄’와도 연결됩니다. 성령은 신적 진리를 의미하며, 성령을 모독한다는 것은 이미 인정한 진리를 악과 결합시키는 profanation을 뜻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사람들이 성령을 모독하는 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하시기 위한 섭리였습니다. 히6:4-6과 히10:26-29 역시 모두 같은 원리를 설명합니다. 인정한 진리를 배반하는 것이 가장 위험하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사람의 상태에 맞추어 계시를 조절하십니다.

 

AC.302에서 마13:13을 인용한 이유는, 주님께서 비유를 사용하신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만이 아닙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창3:22에서 생명나무를 막으시고, 창3:24에서 그룹과 두루 도는 불칼로 길을 지키게 하신 그 동일한 자비의 섭리가 복음서에서도 변함없이 역사하고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마13:13의 비유는 사람들에게 진리를 숨기기 위한 장벽이 아니라, 사람의 자유와 장래의 구원 가능성을 끝까지 보존하시려는 주님의 사랑에서 나온 보호의 장치였으며, AC.302는 바로 이 점을 밝히기 위해 이 말씀을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AC.302, 심화 2, ‘요12:40’

AC.302.심화 2. ‘요12:40’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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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2:40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라 (12:40) He hath blinded their eyes, and stopped up their heart, that they should not see with their eyes, nor understand with their heart, and convert themselves, and I should heal them (John 12:40).

 

 

가이드 1.0에 따르면, 요12:40은 단독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창3:22-24, AC.301-303, 13:13, 마12:31-32, 히6:4-6, 히10:26-29를 하나의 교리적 흐름 안에서 읽어야 합니다. 그렇게 볼 때, AC.302에서 스베덴보리가 요12:40을 인용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일부러 믿지 못하게 하신다’는 예정론적 사상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profanation을 막기 위한 주님의 보호 섭리를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먼저 AC.301에서 스베덴보리는 창3:22의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먹어 영생할까 하노라’를 해설하면서, 주님께서 사람을 생명나무에서 막으신 이유는 생명을 주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profanation을 막기 위해서라고 설명합니다. 사람이 아직 악을 사랑하는 상태에서 천국의 가장 깊은 진리를 충분히 받아들였다가 나중에 그것을 거부하면,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이 한 사람 안에서 결합되어 돌이킬 수 없는 영적 상태에 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AC.301의 중심 메시지입니다.

 

AC.302는 바로 이 원리를 유대교회의 역사 속에서 보여줍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유대인들에게 속 사람이나 천국의 내적 신비, 사후의 삶, 메시아의 참된 본질 등이 명확하게 계시되지 않았던 것은 단순히 그들의 완악함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내적 상태를 아셨고, 만일 그들이 이러한 진리를 인정한 뒤 다시 그것을 거부하게 되면 profanation에 빠질 것을 미리 보셨습니다. 따라서 계시를 제한하신 것은 심판이 아니라 자비였습니다.

 

이 문맥에서 요12:40은 결정적인 증거가 됩니다.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다’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받지 못하게 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이 아직 감당할 수 없는 진리를 보거나 인정하지 않도록 허락하심으로써, 장차 더 큰 영적 파멸인 profanation을 막으셨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여기서 ‘눈을 멀게 하심’은 형벌이 아니라 보호이며, ‘마음을 완고하게 하심’은 버리심이 아니라 더 깊은 죄를 막으시는 섭리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곧이어 인용되는 마13:13과도 완전히 일치합니다. 주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는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도록 괴롭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직 준비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내적 진리를 직접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말씀을 상응과 표상 속에 감추신 것도 같은 이유이며, 유대교회의 모든 의식과 제사 역시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요12:40과 마13:13은 서로 다른 말씀이 아니라 하나의 동일한 섭리를 두 가지 방식으로 설명하는 본문입니다.

 

이와 동시에 요12:40은 마12:31-32의 ‘성령을 모독하는 죄’와도 긴밀히 연결됩니다. 성령은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신적 진리이며,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이미 인정한 신적 진리를 악과 결합시키는 profanation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사람으로 하여금 아직 그 진리를 충분히 인정하지 못하게 하시는 것은, 결국 그 사람이 성령을 모독하는 상태에 이르지 않도록 보호하시는 일입니다. 히6:4-6과 히10:26-29 역시 모두 같은 원리를 설명합니다. 먼저 인정한 뒤 배반하는 것이 위험한 것이지, 아직 인정하지 못한 상태 자체가 가장 큰 죄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AC.302에서 요12:40을 인용한 이유는, 주님의 계시가 언제나 사람의 구원 가능성을 보존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에게 가능한 한 많은 진리를 한꺼번에 알려 주시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사람의 내적 상태에 맞추어 진리를 조금씩 여시며, 아직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것을 감추시기도 하십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사람이 profanation에 빠져 영원히 회복하기 어려운 상태에 이르는 것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가이드 1.0에 따라 볼 때, 요12:40은 ‘심판의 말씀’이 아니라 ‘보호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눈을 멀게 하셨다는 표현은 사람을 버리셨다는 선언이 아니라, 창3:22에서 생명나무를 지키시고, 창3:24에서 그룹과 두루 도는 불칼을 두신 것과 동일한 자비의 섭리를 역사 속에서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AC.302는 바로 이 점을 증명하기 위해 요12:40을 인용하고 있으며, 이로써 창3:22-24, 요12:40, 마13:13, 마12:31-32, 히6:4-6, 히10:26-29는 모두 하나의 교리, 곧 ‘profanation을 막으시는 주님의 자비로운 섭리’를 증거하는 말씀으로 하나의 유기적인 체계를 이루게 됩니다.

 

 

 

AC.302, 심화 3, ‘마13:13’

AC.302.심화 3. ‘마13:13’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마13:13) Seeing they should see, and hearing they should hear, and sh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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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2, 심화 1, ‘가이드 1.0’

AC.302.심화 1. ‘가이드 1.0’ ※ 아래는 앞으로 자주 접하시게 될 ‘가이드 1.0’이라는 표현에 대한 설명입니다. ‘가이드 1.0’은 스베덴보리의 한 구절을 그의 전체 저작이 이루는 일관된 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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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이드 1.0

 

 아래는 앞으로 자주 접하시게 될 가이드 1.0이라는 표현에 대한 설명입니다.

 

 

가이드 1.0’은 스베덴보리의 한 구절을 그의 전체 저작이 이루는 일관된 교리 체계 안에서 해석하는 원칙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어느 한 문장이나 단락을 독립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스베덴보리 전체 저작이 증언하는 하나의 교리 안에서 그 의미를 밝히는 해석 방법입니다.

 

이 원칙은 ‘천국의 비밀’뿐 아니라 ‘천국과 지옥’, ‘새 예루살렘과 그 교리’, ‘주님의 교리’, ‘참된 기독교’ 등 스베덴보리의 모든 저작을 서로 연결하여 읽는 것을 기본으로 합니다. 따라서 어떤 구절의 의미를 판단할 때에는 반드시 다른 저작에서 같은 주제를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함께 살펴봅니다.

 

가이드 1.0은 또한 성경과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서로 대립시키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은 자신의 저작이 새로운 계시가 아니라, 말씀의 영적 의미를 밝혀 주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성경 본문을 해석할 때에는 먼저 말씀 자체를 존중하고, 이어서 스베덴보리가 그 말씀을 전체 교리 속에서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함께 살핍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어느 한 구절도 고립되어 해석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창3:22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창3:24는 물론, 관련된 ‘천국의 비밀’의 다른 단락들과 복음서, 히브리서 등에서 동일한 영적 원리를 설명하는 말씀들을 함께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비로소 각각의 본문이 하나의 교리 안에서 서로를 밝혀 주게 됩니다.

 

가이드 1.0은 특히 스베덴보리의 핵심 교리들이 여러 저작에 걸쳐 반복되고 발전된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사랑과 신앙, 자유와 섭리, 거듭남, 상응, 천국과 지옥, 그리고 profanation과 같은 주제들은 어느 한 권에서 완성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한 단락만을 근거로 결론을 내리기보다, 관련된 모든 설명을 종합하여 이해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이러한 해석 방법은 스베덴보리 저작 전체의 교리적 일관성을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습니다. 어느 한 문장이 다른 곳과 충돌하는 것처럼 보일 경우에도, 먼저 전체 저작의 공통된 가르침을 살펴보고, 그 안에서 해당 문장의 의미를 이해하려고 합니다. 즉, 부분은 전체에 의해 해석되고, 전체는 다시 부분을 더욱 분명하게 밝혀 줍니다.

 

결국 가이드 1.0의 목적은 새로운 해석을 만들어 내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 자신이 여러 저작을 통해 일관되게 증언한 하나의 교리를 가능한 한 충실하게 따라가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이 원칙은 개인의 추측이나 단편적인 인용보다, 전체 저작의 조화와 일관성을 해석의 최우선 기준으로 삼습니다.

 

이 책에서 제시하는 모든 번역과 해설은 이러한 가이드 1.0의 원칙을 따르고 있습니다. 독자들께서는 각 단락을 개별적인 설명으로만 읽기보다, 스베덴보리 전체 저작이 하나의 유기적인 교리 체계를 이루고 있다는 관점에서 함께 읽으실 때, 말씀의 영적 의미와 그 깊이를 더욱 온전하게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AC.302, 심화 2, ‘요12:40’

AC.302.심화 2. ‘요12:40’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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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2, 창3:22, ‘AC.301 계속’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3:22) AC.302 이것이 바로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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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3:22)

 

AC.302

 

이것이 바로 신앙의 신비들이 유대인들에게 결코 드러나지 않았던 이유입니다. 그들은 사람이 죽은 후에도 계속 살아간다는 사실조차 분명하게 듣지 못했으며, 주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실 것이라는 사실도 명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무지와 둔함 가운데 붙들려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한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속 사람의 존재나 어떤 내적인 것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고, 지금도 알지 못합니다. 만일 그들이 그것을 알았거나, 지금이라도 그것을 알고 인정하게 된다면, 그들의 성품이 그러하기 때문에 그것을 profane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다른 생에서 그들에게는 더 이상 구원의 희망이 남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요한복음에서 말씀하신 뜻입니다. This is the reason why the mysteries of faith were never revealed to the Jews. They were not even plainly told that they were to live after death, nor that the Lord would come into the world to save them. So great were the ignorance and stupidity in which they were kept, and still are kept, that they did not and do not know of the existence of the internal man, or of anything internal, for if they had known of it, or if they now knew of it, so as to acknowledge it, such is their character that they would profane it, and there would be no hope of any salvation for them in the other life. This is what is meant by the Lord in John: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라 (12:40) He hath blinded their eyes, and stopped up their heart, that they should not see with their eyes, nor understand with their heart, and convert themselves, and I should heal them (John 12:40).

 

또한 주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로만 말씀하시고, 그 뜻을 설명하지 않으신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And by the Lord speaking to them in parables without explaining to them their meaning, lest (as he himself says),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13:13) Seeing they should see, and hearing they should hear, and should understand (Matt. 13:13).

 

같은 이유로 신앙의 모든 신비는 그들에게 감추어졌고, 그들의 교회의 표상들 속에 숨겨졌으며, 예언서의 문체 역시 같은 성격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는 것과 인정하는 것은 서로 다른 일입니다. 알고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알지 못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러나 인정한 뒤에 그것을 모독하고 profane하는 사람,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바로 이러한 사람입니다. For the same reason all the mysteries of faith were hidden from them, and were concealed under the representatives of their church, and for the same reason the prophetic style is of the same character. It is however one thing to know, and another to acknowledge. He who knows and does not acknowledge is as if he knew not; but it is he who acknowledges and afterwards blasphemes and profanes, that is meant by these words of the Lord.

 

 

해설

 

AC.302는 앞의 AC.301을 이어받아 창3:22의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먹어 영생할까 하노라’는 말씀을 계속 해설하는 단락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이 말씀은 주님께서 사람의 구원을 막으신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이 profanation에 빠지는 것을 막으시는 무한한 자비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창3:24의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칼’은 바로 그 자비로운 섭리가 실제로 어떻게 역사하는지를 보여주는 표상입니다. AC.302는 그 동일한 섭리가 이후 유대교회와 복음서에서도 계속 작용하였음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단락의 중심은 유대인들에 대한 평가가 아닙니다. 중심은 주님의 섭리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유대인들이 사후 세계나 속 사람, 그리고 메시아에 관한 내적 진리를 분명히 배우지 못했던 이유를 그들의 지적 능력이나 민족적 열등성에서 찾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그들의 영적 상태를 아셨기 때문에, 그들이 감당할 수 없는 거룩한 진리를 일부러 감추셨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계시를 제한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더 깊은 영적 파멸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요12:40과 마13:13도 이해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구원의 길을 닫으시려는 것이 아니라,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내적 진리를 받아들였다가 훗날 그것을 거부하여 profanation에 이르는 일을 막으시려는 자비였습니다. 그래서 말씀은 표상으로 주어졌고, 예언은 상응의 문체로 기록되었으며, 주님께서도 많은 진리를 비유를 통해 가르치셨습니다. 이는 모두 창3:22에서 시작된 동일한 보호의 섭리가 역사 속에서 계속 나타난 모습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특별히 강조하는 것이 바로 ‘아는 것’과 ‘인정하는 것’의 차이입니다. 사람은 어떤 진리를 지식으로 알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직 삶과 의지 속으로 들어오지 않았다면, 그는 진리를 ‘인정’한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진리를 참된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신의 신앙으로 인정한 사람은, 그 진리와 자신의 내적 생명이 결합된 상태에 있게 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profanation의 가능성이 생깁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알고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알지 못하는 사람과 같다’고 말합니다. 이는 단순한 무지를 칭찬하는 말이 아니라, profanation의 조건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단순히 듣거나 배우는 것만으로는 profanation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거룩한 것으로 인정한 후, 다시 그것을 의도적으로 부정하고 악한 삶과 결합시키면,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이 한 사람 안에서 뒤섞이게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일관되게 말하는 profanation의 본질입니다.

 

이 원리는 신약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마12:31-32의 ‘성령을 모독하는 죄’, 히6:4-6의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도 타락한 자’, 히10:26-29의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하는 자’는 모두 같은 영적 상태를 가리킵니다. 서로 다른 본문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 전체 저작을 종합해 보면 모두 하나의 교리를 설명합니다. 곧 인정한 진리를 악과 결합시키는 profanation입니다.

 

AC.302는 주님의 계시가 왜 사람마다 다르게 주어지는지, 왜 어떤 시대에는 내적 진리가 감추어졌는지, 왜 말씀이 상응과 표상으로 기록되었는지를 하나의 원리로 설명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에게 가능한 한 많은 진리를 주시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으십니다. 그보다 사람의 자유를 보존하시고, 장차라도 회개하여 구원받을 가능성을 끝까지 지켜 주시는 것을 더 큰 목적으로 삼으십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감추시는 일조차도 심판이 아니라 사랑이며, 창3:22에서 시작되어 창3:24의 그룹과 불칼로 나타난 주님의 자비로운 보호 섭리는 유대교회와 복음서를 거쳐 오늘날까지도 변함없이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심화

 

1. ‘가이드 1.0

 

 

AC.302, 심화 1, ‘가이드 1.0’

AC.302.심화 1. ‘가이드 1.0’ ※ 아래는 앞으로 자주 접하시게 될 ‘가이드 1.0’이라는 표현에 대한 설명입니다. ‘가이드 1.0’은 스베덴보리의 한 구절을 그의 전체 저작이 이루는 일관된 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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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2:40

 

 

AC.302, 심화 2, ‘요12:40’

AC.302.심화 2. ‘요12:40’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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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3:13

 

 

AC.302, 심화 3, ‘마13:13’

AC.302.심화 3. ‘마13:13’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마13:13) Seeing they should see, and hearing they should hear, and sh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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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유대인들

 

위 내용 중 만일 그들이 내적인 진리를 충분히 이해하고 그것을 참된 것으로 인정한 뒤 다시 거부하였다면, 그들은 단순한 불신앙이 아니라 profanation에 이르게 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인데요, 유대인들이 지난날 어땠기에 주님의 섭리가 이렇게 진행되며,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유대인으로 태어나는 사람들은 좀 억울한 거 아닌가요?

 

 

좋습니다. 이 질문은 오히려 AC.302를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질문입니다. 그리고 가이드 1.0에 따르면, 이 답은 AC.302만으로는 부족하며, ‘천국의 비밀’ 전체에서 스베덴보리가 유대교회를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지난날 어땠기에 주님의 섭리가 이렇게 진행되었나요?’

 

가이드 1.0에 따르면, 먼저 한 가지 오해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결코 ‘유대 민족은 본래부터 다른 민족보다 더 악했기 때문에 주님께서 그들에게 진리를 감추셨다’ 말하지 않습니다. 또한 ‘조상들의 죄 때문에 후손들이 영적으로 손해를 보았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전체 교리와 맞지 않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은 자신의 사랑과 자신의 삶에 따라 심판을 받으며, 어느 민족에 태어났는가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었는가가 영원한 운명을 결정한다고 일관되게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AC.302에서 말하는 유대교회의 특별한 상태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이는 오랜 인류 역사 속에서 교회가 점차 쇠퇴해 온 과정과 연결됩니다. 태고교회는 내적 교회였고, 고대교회는 상응을 이해하는 영적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점차 내적인 것을 잃고 외적인 것만 붙드는 상태로 기울어졌습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마지막으로 세워진 대표, 그러니까 표상적 교회가 바로 유대교회였습니다.

 

따라서 유대교회는 처음부터 내적 진리를 직접 가르치기 위한 교회가 아니라, 제사와 절기, 성막과 성전, 제사장과 희생 제물 등 외적 예배를 통해 천국의 신비를 표상하도록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영적 진리를 깊이 이해하는 데 있지 않고, 장차 오실 주님과 천국의 질서를 외적 표상으로 보존하는 데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주님의 섭리도 그 교회의 성격에 맞게 진행되었습니다. 만일 그 공동체 전체가 내적 진리를 충분히 알고도 계속 외적 욕망과 자기 사랑 가운데 머물렀다면, 그들은 단순히 진리를 모르는 상태가 아니라, 인정한 진리를 스스로 훼손하는 profanation에 빠질 위험이 매우 컸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필요한 만큼의 빛만 허락하시고, 더 깊은 진리는 상응과 비유 속에 감추어 두셨습니다. AC.302가 요12:40과 마13:13을 인용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유대인으로 태어나는 사람들은 좀 억울한 거 아닌가요?’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그러나 가이드 1.0에 따르면,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아닙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말하는 것은 ‘교회의 역사적 역할’이지 ‘개인의 영원한 운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유대인으로 태어났다는 사실만으로 더 낮은 천국에 가거나 더 적은 은혜를 받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에서 선한 사람은 죽은 뒤 천사들에게 계속 교육을 받으며, 지상에서 알지 못했던 천국의 진리도 기쁘게 배우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많이 배운 사람이든 적게 배운 사람이든, 주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가 실제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의 빛을 주시고, 다른 생에서도 계속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지상에서 받은 계시의 양은 구원의 유불리를 결정하는 기준이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가 AC.302에서 강조하는 것은 정반대의 원리입니다. 사람은 더 많은 진리를 받을수록 더 큰 책임도 함께 받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진리를 더 많이 열어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아직 열어 주지 않으시는 것은 차별이 아니라 자비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양의 빛을 주시는 것이 공평이 아니라, 각 사람이 가장 안전하게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그의 영적 상태에 가장 알맞은 빛을 허락하시는 것이 참된 공평입니다.

 

결국 AC.302는 유대교회를 낮추려는 본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창3:22의 ‘생명나무를 막으심’과 창3:24의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칼’, 그리고 요12:40과 마13:13을 하나로 연결하면서, 주님께서는 시대와 민족을 막론하고 언제나 사람을 profanation으로부터 보호하시기 위해 계시를 조절하신다는, 하나의 일관된 섭리의 법칙을 보여주는 본문입니다. 이것이 가이드 1.0에 따라 AC.302를 이해하는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301, 창3:22, 두 번째 아르카나,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3:22) AC.301 또 하나의 아르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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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1.심화

 

10. ‘profanation 관련 대표 구절들

 

스베덴보리의 저작 전체를 하나의 일관된 신학 체계로 읽는 관점에서 보면, 성경에는 profanation을 직접 또는 표상적으로 다루는 본문들이 생각보다 많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몇몇 본문은 스베덴보리의 교리를 이해하는 데 중심축이 되는 위치를 차지합니다. 각각의 본문은 서로 다른 시대와 문맥에서 기록되었지만, 모두 ‘거룩한 것을 알고도 그것을 악과 결합하는 상태’라는 하나의 영적 원리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본문은 창3:22-24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에덴동산에서 내보내시고,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칼로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신 사건은, AC.301 이하에서 profanation 교리의 출발점으로 해설됩니다. 여기서 그룹은 사람을 천국에서 쫓아내는 존재가 아니라, 사람이 더 깊은 거룩한 것에 들어가 그것까지 profanation하는 일을 막으시는 주님의 자비로운 섭리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창3은 성경 전체에서 profanation의 원리를 가장 먼저 표상으로 보여주는 본문입니다.

 

신약에서 이 원리를 가장 직접적으로 말씀하신 곳은 마12:31-32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 하셨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성령’은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신적 진리의 역사와 작용을 의미하므로, 성령을 모독한다는 것은 단순히 입으로 하나님을 욕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인정한 신적 진리를 의도적으로 거부하고, 악과 결합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신약에서 profanation을 가장 직접적으로 경고하는 본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이 교리를 매우 깊이 설명합니다. 히6:4-6에서는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을 말합니다. 또한 히10:26-29에서는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이라는 표현과 함께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를 말합니다. 두 본문 모두 공통적으로 먼저 거룩한 것을 알고 체험한 뒤 그것을 의도적으로 거스르는 상태를 말하고 있으며, 이는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profanation의 정의와 거의 일치합니다.

 

베드로후서와 누가복음도 같은 원리를 다른 각도에서 보여줍니다. 벧후2:20-22에서는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다’ 말합니다. 눅11:24-26에서는 더러운 귀신이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 이전보다 더 악한 귀신들과 함께 그 사람 안에 거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두 본문 모두 거룩한 것이 한때 사람 안에 들어왔으나 다시 악이 그것을 차지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으며, profanation의 영적 구조를 잘 보여줍니다.

 

구약의 예언서들 역시 이 주제를 반복해서 다룹니다. 겔22에서는 제사장들이 ‘내 성물을 더럽히며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지 아니하였다’ 책망받습니다. 말1에서는 더러운 제물을 주님의 제단에 드리는 일이 꾸짖음을 받습니다. 유1:4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방탕의 기회로 바꾸는 자들이 등장합니다. 이러한 본문들은 단순히 종교의식을 잘못 행한 것이 아니라, 거룩한 것을 자기 욕망과 결합시키는 상태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profanation과 깊이 연결됩니다.

 

이 모든 본문을 종합해 보면, profanation을 연구할 때 가장 중심이 되는 본문은 다섯 곳으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창3:22-24 profanation을 미리 막으시는 주님의 섭리를 보여주고, 마12:31-32는 성령을 모독하는 죄를 통해 그 원리를 직접 선언합니다. 히6:4-6과 히10:26-29는 이미 거룩한 것을 체험한 사람이 그것을 배반하는 상태를 설명하며, 벧후2:20-22는 알고 난 뒤 다시 악으로 돌아가는 위험을 경고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대표적인 본문들이 모두 하나의 동일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먼저 사람이 진리와 거룩한 것을 알고, 그것을 어느 정도 인정하거나 체험한 뒤, 마지막으로 그것을 악과 결합하거나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과정이 반복됩니다. 바로 이 구조가 AC.301에서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profanation의 본질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따라서 창세기의 그룹과 불칼, 주님의 성령 모독에 대한 경고, 그리고 히브리서와 베드로후서의 엄중한 권면은 각각 따로 떨어진 말씀이 아니라, 하나의 동일한 영적 원리를 여러 시대와 여러 방식으로 계시한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저작 전체를 하나의 일관된 신학 체계로 읽는 관점에 가장 부합하는 해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301, 창3:22, 두 번째 아르카나,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3:22) AC.301 또 하나의 아르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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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1, 심화 9, ‘성령 모독’(마12:31, 32)

AC.301.심화 9. ‘성령 모독’(마12:31, 32) 31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32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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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성령 모독(12:31, 32)

 

31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32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12:31, 32)

 

 

위 주님 말씀도 profanation 관련 말씀인가요?

 

 

네, 스베덴보리의 저작 전체를 하나의 일관된 신학 체계로 읽는 관점에서는, 12:31-32는 단순히 입으로 성령을 욕하는 죄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는 profanation을 가리키는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 이유는 먼저 주님께서 죄를 세 종류로 구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일반적인 죄입니다. 둘째는 사람을 향한 모독이나 인자를 거역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성령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앞의 두 가지는 용서받을 수 있지만, 마지막 것은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말의 강도가 더 세다는 뜻이 아니라, 죄의 성격 자체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성령’은 단순히 삼위일체의 한 위격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신적 진리의 역사와 작용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성령을 모독한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을 욕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인정한 신적 진리를 의도적으로 거부하고, 그것을 악과 결합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것이 바로 profanation의 정의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여러 저작에서 용서받지 못하는 죄’를 profanation과 연결합니다. 물론 주님께서 용서하시기를 거부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이 스스로 거룩한 것과 악을 하나로 결합해 버렸기 때문에, 그 상태에서는 회개와 분리가 거의 불가능해진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용서가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용서를 받아들일 내적 구조 자체가 무너진 것입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인자를 거역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는다’고 하신 말씀도 매우 중요합니다. ‘인자’는 말씀의 외적 모습, 곧 사람들이 아직 충분히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는 진리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무지에서 비롯된 반대나 오해는 회개와 함께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이미 사람 안에서 역사하고 있는 신적 진리입니다. 그것을 알고 인정한 뒤 의도적으로 거부하고 악에 이용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profanation이 발생합니다.

 

이 점은 창3:22-24와도 놀랍도록 연결됩니다. 주님께서 그룹과 두루 도는 불칼로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신 이유는 사람이 더 깊은 거룩한 것에 들어가 그것마저 profanation하는 일을 막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12:31-32는 그 원리를 교리적으로 말씀하신 것이고, 3:22-24는 그것을 역사적 표상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다시 말해, 창세기에서는 주님께서 profanation을 미리 막으시는 섭리를 보여주시고, 복음서에서는 이미 그것이 무엇인지를 직접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순간적으로 입에서 나온 거친 말 한마디를 뜻하지 않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수많은 사람이 영원히 소망이 없어질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이미 주님의 진리를 알고 인정한 사람이 그것을 끝내 악과 결합하여 자신의 삶의 도구로 삼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profanation이며, 주님께서 가장 경계하신 죄입니다.’

 

이렇게 보면 AC.301과 마12:31-32는 서로 다른 내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영적 원리를 각각 창세기의 표상과 복음서의 직접적인 가르침으로 드러낸 말씀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301, 심화 10, ‘profanation 관련 대표 구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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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1, 심화 8, ‘blasphemy와 profan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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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blasphemy profanation

 

이 둘은 서로 관련은 있지만 같은 개념은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는 둘을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blasphemy’는 보통 ‘신성모독’으로 번역됩니다. 이는 거룩한 것에 대해 욕하거나 모욕, 또는 하나님이나 말씀을 공개적으로 비방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주로 말과 행동의 차원에서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주님의 이름을 조롱하거나, 말씀을 모욕하거나, 거룩한 것을 악의적으로 비웃는 것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반면 ‘profanation’은 ‘거룩한 것의 모독’ 또는 ‘거룩한 것의 더럽힘’으로 번역되며, 스베덴보리 신학에서는 훨씬 더 깊은 개념입니다. 이는 단순히 거룩한 것을 욕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인정한 거룩한 것을 의도적으로 악과 결합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profanation은 말보다 삶과 의지의 상태에 관한 개념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무신론자가 하나님을 욕한다면, 그것은 blasphemy일 수는 있어도 반드시 profanation은 아닙니다. 그가 거룩한 것을 진심으로 인정한 적이 없었다면, profanation의 핵심 조건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이 목사이거나 장로로서 성경을 잘 알고, 주님의 진리를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자신의 탐욕이나 권력, 사기를 위해 이용한다면, 그는 겉으로는 하나님을 욕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룩한 것을 악과 결합하고 있으므로 profanation의 위험이 매우 큽니다.

 

가룟 유다가 좋은 예입니다. 그는 주님을 공개적으로 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며 입맞춤까지 했습니다. 겉으로는 존경을 표시했지만, 바로 그 거룩한 친교의 표를 배신의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blasphemy보다 훨씬 깊은 의미의 profanation을 보여줍니다.

 

성경에도 이 둘은 어느 정도 구별되어 나타납니다. 복음서에서 주님께서는 성령을 ‘모독하는 것(blasphemy against the Holy Spirit, 12:31-32)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히 입으로 욕하는 차원이 아니라, 인정한 신적 진리를 끝내 거부하고 악과 결합하는 상태, 곧 profanation과 깊이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따라서 성경의 ‘blasphemy’ 가운데는 스베덴보리의 의미로 보면 profanation을 포함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blasphemy’는 거룩한 것을 비방하거나 욕하는 행위, 즉, ’과 관련된 모독이라면, profanation’은 거룩한 것을 알고 인정하면서 그것을 악과 결합하는 내적 상태, 곧 ’과 관련된 모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profanation에는 어느 정도의 신성모독적 요소가 포함될 수 있지만, 모든 blasphemy profanation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특별히 두려워한 것은 후자였습니다. 왜냐하면 profanation은 사람의 가장 깊은 영적 차원에서 거룩한 것과 악이 하나로 섞이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창3:22-24에서 주님께서 그룹과 두루 도는 불칼로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신 근본 이유이기도 합니다.

 

 

 

AC.301, 심화 9, ‘성령 모독’(마12:31, 32)

AC.301.심화 9. ‘성령 모독’(마12:31, 32) 31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32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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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1, 심화 7, ‘결혼애’에 나오는 자살자들

AC.301.심화 7. ‘결혼애’에 나오는 자살자들 위 ‘자살’에 대한 답변과 달리 스베덴보리의 ‘결혼애’에서는 자살을 매우 어둡게 기술하고 있는 걸로 읽었던 것 같아요... 좋은 질문입니다.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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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결혼애에 나오는 자살자들

 

 자살에 대한 답변과 달리 스베덴보리의 결혼애에서는 자살을 매우 어둡게 기술하고 있는 걸로 읽었던 것 같아요...

 

 

좋은 질문입니다. 사실 이 문제는 스베덴보리를 읽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반드시 부딪히는 지점입니다. 그런데 그의 저작 전체를 하나의 일관된 신학 체계로 읽어보면, AC 천국과 지옥’, 그리고 결혼애’의 서술은 서로 충돌하지 않고 오히려 서로를 보완합니다.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스베덴보리는 어디에서도 자살하면 모두 지옥에 간다’는 일반 원칙을 가르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결혼애’에는 자살자들에 대한 매우 어둡고 음침한 영계의 모습이 묘사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얼핏 보면 두 내용이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서로 다른 차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스베덴보리의 영계 체험이 대개 한 부류의 사람들’을 보여주는 사례라는 데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에서 어떤 지옥 영들의 모습을 묘사한다고 해서 모든 악인이 똑같은 상태라는 뜻이 아니듯, ‘결혼애’에 나오는 자살자들도 모든 자살자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내적 상태를 가진 사람들을 대표하는 사례로 보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는 언제나 외적 행위보다 그 행위를 낳은 내적 사랑과 의지가 더 중요합니다. 같은 자살이라도 그 원인은 매우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극심한 우울과 정신적 혼란 속에서 생을 마감하고, 어떤 이는 불치병의 극심한 고통을 견디지 못하며, 또 어떤 이는 깊은 죄책감과 절망 속에서 무너집니다. 반면 어떤 이는 교만과 분노, 복수심, 자기애 때문에 자살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마지막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 행위를 낳은 지배적인 사랑입니다.

 

결혼애’에 묘사되는 어두운 자살자들은 대부분 이미 자기애와 절망, 증오, 복수심 같은 지옥적 사랑 속에 깊이 자리 잡은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의 자살은 지옥 상태의 원인이 아니라 이미 형성된 내적 상태가 마지막에 드러난 결과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보여주는 것은 자살이라는 행위 자체보다, 그 행위를 낳은 영적 상태인 것입니다.

 

반대로 AC.182 이하와 천국과 지옥’에서 제시되는 원리는 훨씬 더 보편적인 원리입니다. 주님께서는 죽는 모든 사람을 천사들을 통해 맞이하시고, 그 사람 안에 남아 있는 선과 진리를 보호하시며, 평생 형성된 지배적인 사랑에 따라 그 사람을 인도하십니다. 이 원리에는 자살자만을 예외로 한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오히려 이것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상위 원리라고 보아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결혼애’의 사례를 AC 천국과 지옥’의 보편 원리 안에서 이해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습니다. 자살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며, 대부분 매우 심각한 영적, 정신적 상태를 반영합니다. 그러나 자살이라는 한 번의 행위만으로 영원한 운명이 결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결혼애’가 특정한 상태의 자살자들을 보여주는 사례집이라면, AC 천국과 지옥’은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주님의 섭리와 심판의 원리를 설명하는 교리서에 가깝습니다.

 

그러므로 결혼애’를 읽다가 자살자들의 어두운 모습을 보더라도 그것을 모든 자살자의 운명으로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그 장면은 자살이라는 행위 자체를 정죄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그 지경까지 이르게 한 내적 사랑이 얼마나 어두울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영계의 사례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 전체를 종합하면, 최종적인 판단은 언제나 한 번의 행위가 아니라 평생 형성된 지배적 사랑과 삶 전체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것이 그의 일관된 메시지라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습니다.

 

 

 

AC.301, 심화 8, ‘blasphemy와 profan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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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자살

 

자살의 경우, 사후 이 사람은 참 괜찮은 삶을 살았는데 순간 판단 실수로 자살했으니 정상 참작의 여지가 있다 하여 구원받는 경우가 있나요?

 

 

네, 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저작들을 종합해 보면, 오히려 그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죽었는가’가 아니라 ‘어떤 사람으로 살았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사후에 들어가는 상태는 죽는 마지막 몇 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평생 형성된 지배적인 사랑(dominant love)에 의해 결정된다고 여러 곳에서 설명합니다. 죽음은 그 상태를 드러내는 계기이지, 그것을 새로 만들어 내는 사건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평생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위해 살았으며, 선량한 양심을 가지고 살아온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극심한 육체적 고통이나, 정신적 혼란, 극도의 절망 속에서 순간적으로 자살했다면,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그 한순간만으로 그의 평생의 내적 상태가 모두 무효가 되었다고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후에 그는 처음 며칠 동안 천사들의 보호를 받으며 점차 평정을 되찾고, 지상에서 마지막 순간에 있었던 혼란과 고통에서 벗어나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AC.182 이하에서 보듯이, 주님은 사람이 죽는 순간의 충격 속에서도 사랑의 가장 내적인 부분을 보호하십니다. 그 보호는 죽음의 방식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 무엇이 살아 있었는가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반대로 자살하지 않았다고 해서 모두 천국에 가는 것도 아닙니다. 평생 악한 삶을 살다가 자연사한 사람과, 평생 선하게 살다가 마지막에 극도의 절망 속에서 자살한 사람을 비교한다면, 스베덴보리의 기준은 사망 원인이 아니라 평생 형성된 사랑입니다.

 

이 점은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부분입니다. 역사적으로 일부 교회에서는 자살을 ‘용서받을 수 없는 죄’처럼 가르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런 식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사후 세계에서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을 언제나 그 사람의 전체 삶과 의지의 방향에 둡니다.

 

물론 이것이 자살을 가볍게 여긴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자살은 매우 비극적인 일이며, 많은 경우 깊은 절망과 혼란 속에서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 비극 자체가 곧 영원한 정죄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일반 교인들에게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사람이 어떻게 죽었는지만 보시는 분이 아니라, 어떤 사람으로 살아왔는지를 보십니다. 어떤 이는 순간의 극심한 절망 속에서 자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 안에 평생 주님을 향한 사랑과 선한 양심이 살아 있었다면, 주님께서는 그것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사후에는 지상의 혼란에서 벗어나 참된 상태가 드러나며, 모든 판단은 완전한 공의와 동시에 완전한 자비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이 답변은 AC.182 이하에서 보이는 ‘죽은 직후 이어지는 천사들의 보호’, HH에서 반복되는 ‘지배적 사랑에 따른 사후 상태’, 그리고 스베덴보리 전체 신학의 큰 원리와도 잘 일치합니다. 오히려 이런 관점은 유가족들에게도 막연한 정죄가 아니라, 주님의 공의와 자비를 함께 바라보게 하는 매우 중요한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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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1.심화

 

5. ‘가룟 유다

 

가룟 유다의 죄는 profanation으로 보아야 하나요?

 

 

스베덴보리의 profanation 개념에 비추어 보면, 가룟 유다의 죄는 단순한 배신을 넘어 profanation의 성격을 매우 강하게 지닌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다만 ‘유다라는 개인의 영원한 내적 상태가 profanation의 최종 단계였다’고 우리가 단정하기보다는, ‘복음서에 기록된 그의 행위가 profanation을 대표적으로 드러낸다’고 설명하는 편이 정확하고 안전합니다.

 

가룟 유다는 단순히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들은 외부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주님께 직접 부름받은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였고, 주님의 말씀을 들었으며, 주님의 이적과 삶을 가까이에서 보았습니다. 또한 다른 제자들과 함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치는 권능까지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거룩한 것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 채 범죄한 사람이 아니라, 매우 가까운 자리에서 주님의 거룩하심을 접하고, 어느 정도 인정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바로 그 거룩한 관계를 이용하여 주님을 넘겨주었습니다. 특히 배신의 표로 ‘입맞춤’을 사용했다는 점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입맞춤은 본래 사랑과 친교, 결합을 표시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유다는 사랑의 표지를 배신의 신호로 바꾸었습니다. 겉으로는 주님께 가까이 다가가 사랑과 존경을 표시하면서, 속으로는 주님을 원수들에게 넘겨주고 있었습니다. 거룩한 표상과 악한 의도를 하나의 행위 안에 결합했다는 점에서, 이는 profanation의 구조를 매우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또한 은 삼십을 받고 주님을 판 것은 단순히 스승 한 사람을 배신한 사건만이 아닙니다. 유다는 자신이 가까이에서 알고 따랐던 주님을 세속적 이익과 맞바꿨습니다. 다시 말해, 거룩한 것을 탐욕 아래에 두고, 주님과의 관계를 돈을 얻는 수단으로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거룩한 것을 부정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거룩한 것을 악한 사랑에 종속시킨 일이므로 profanation의 성격을 가집니다.

 

그러나 여기서 구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가룟 유다의 ‘행위’가 profanation의 표본이라는 것과, 그의 내면 전체와 사후의 영원한 상태를 우리가 확정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profanation은 단 한 번의 외적 행동만으로 기계적으로 판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거룩한 것을 얼마나 알고 인정했으며, 그것을 어떤 의도에서 악과 결합했는가 하는 내적 상태와 관련됩니다. 그 깊이는 오직 주님만 아십니다.

 

유다가 뒤에 뉘우쳐 은 삼십을 돌려주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도 신중히 보아야 합니다. 그의 후회가 참된 회개였는지, 아니면 자신이 저지른 일의 결과와 공포를 견디지 못한 절망이었는지는 복음서의 기록만으로 완전히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참된 회개는 악을 미워하고 주님께 돌아가는 것이지만, 절망은 자기 행위의 결과에 압도되어 자신을 파괴하는 방향으로 흐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마지막 행동만으로 구원이나 멸망을 단정해서도 안 됩니다.

 

설교나 교인들과의 대화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면 좋겠습니다. ‘가룟 유다의 배신은 일반적인 세속적 배신과 다릅니다. 그는 주님을 가까이에서 알고 따랐으며, 사랑의 표인 입맞춤을 사용하여 주님을 팔았습니다. 따라서 그의 행위는 거룩한 것을 탐욕과 배신에 결합한 것으로서 profanation을 대표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러나 유다 개인의 내면과 영원한 운명에 대한 최종 판단은 주님께 속합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유다만을 정죄하는 데서 끝내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유다의 사건은 오늘날에도 사람이 주님의 이름과 말씀, 그리고 교회의 신뢰를 자기 명예, 재물, 권력의 수단으로 사용할 때 동일한 profanation의 방향으로 갈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가룟 유다의 죄가 두려운 까닭은 그가 멀리서 주님을 미워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 곁에 있으면서 그 거룩한 가까움을 악을 이루는 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점이 AC.301의 경고와 깊이 맞닿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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