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35.심화

 

1. ‘가인도 신앙이고, 도 신앙이라면, 무엇이 신앙을 참된 신앙답게 하는가?

 

AC.335는 매우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가인도 ‘신앙’을 의미하고, 셋도 ‘신앙’을 의미한다면, ‘신앙’이라는 이름 자체만으로는 그 신앙이 참된 것인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가인은 분명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자신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높였다는 데 있었습니다. 반면 셋의 신앙은 체어리티가 심어지는 통로가 됩니다. 그러므로 신앙을 참된 신앙답게 하는 것은 단순히 교리를 많이 알고, 그것을 정확하게 고백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신앙이 사람을 체어리티로 이끌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이것은 AC.328에서 이미 제시된 원리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그곳에서 스베덴보리는 ‘신앙의 질은 체어리티로부터 알려진다’고 하였습니다. 신앙이 어떤 것인지는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은 교리를 알고 있는지, 얼마나 확신 있게 고백하는지만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 신앙이 실제로 이웃을 사랑하게 하는지, 악을 악으로 알고 피하게 하는지, 자기 자신보다 주님의 뜻을 앞세우게 하는지, 삶을 선으로 이끄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체어리티가 신앙의 질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인과 셋은 겉으로는 모두 ‘신앙’이지만 내적 방향은 정반대입니다. 가인의 신앙은 ‘신앙을 위하여 체어리티를 희생시키는 신앙’이고, 셋의 신앙은 ‘체어리티가 심어지도록 자신을 내어주는 신앙’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전자에서는 신앙이 목적이 되고 체어리티가 종속되지만, 후자에서는 신앙이 주님께서 체어리티를 심으시는 수단이 됩니다. 신앙이 자신을 높이면 가인이 되고, 신앙이 체어리티를 섬기면 셋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창4의 이야기는 단순히 ‘가인은 나쁜 사람이고, 셋은 좋은 사람’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훨씬 더 깊은 질문을 우리에게 던집니다. ‘내가 가진 신앙은 가인인가, 셋인가?’라는 질문입니다. 나는 말씀과 교리를 많이 알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신앙의 증거로 여기고 있는가, 아니면 그 말씀과 교리가 나의 사랑과 삶을 변화시키고 있는가? 신앙이 나를 다른 사람보다 옳은 사람으로 느끼게 하는가, 아니면 더욱 겸손하게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도록 이끄는가? 바로 이런 질문 앞에서 가인과 셋은 과거의 두 인물이 아니라 오늘 우리 안에서도 갈라지는 두 종류의 신앙이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조금 전 AC.334에서 우리가 오래 붙들었던 문장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어느 쪽이든 진리가 자기 입장을 섬기게 해서는 안 됩니다.’ 가인의 신앙은 결국 진리를 자기 것으로 만들고, 자기 위치를 높이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셋의 신앙은 진리가 사람을 체어리티로 이끌도록 자신을 내어줍니다. 진리를 이용하여 자신을 세우는 신앙과, 진리 앞에서 자신을 내려놓고 사랑의 삶으로 나아가는 신앙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AC.335는 가인 계열의 어두운 이야기를 지나온 뒤 처음으로 매우 분명한 회복의 빛을 보여 줍니다. 아벨은 죽었지만, 체어리티를 향한 주님의 뜻은 죽지 않았습니다. 가인의 신앙은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지만, 주님께서는 다시 새로운 신앙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다시 심으셨습니다. 인간은 주님께서 주신 질서를 무너뜨릴 수 있지만, 주님께서는 그 무너진 자리에서도 인간의 현재 상태에 맞는 새로운 길을 마련하여 다시 선과 생명으로 이끄십니다. ‘’은 바로 그 회복의 길을 의미하는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335, 창4:25, ‘셋’(Seth)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And the man knew his wife again, and she bare a 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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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And the man knew his wife again, and she bare a son,and called his name Seth; for God hath appointed me another seed instead of Abel; for Cain slew him. (4:25)

 

AC.335

 

이 주제의 요약이 제시됩니다. ‘가인(Cain)이 상징하는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후, 주님께서 새로운 신앙을 주셨고,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졌습니다. 이 신앙을 (Seth)이라 합니다. (25) A summary of the subject is given: that after faith, signified by “Cain,” had extinguished charity, a new faith was given by the Lord, whereby charity was implanted. This faith is called “Seth.” (verse 25)

 

 

해설

 

AC.335는 창4 전체의 흐름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앞의 AC.324-334가 주로 ‘가인’으로 시작된,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어떻게 변질되어 갔는지를 보여 주었다면, 이제 AC.335부터는 그 종말 가운데서 주님께서 어떻게 새로운 길을 마련하셨는지가 나타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글을 ‘이 주제의 요약이 제시된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가인으로 의미되는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지만, 그것으로 교회의 역사가 끝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새로운 신앙’을 주셨고, 그 신앙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가 심어졌다는 것입니다. 그 새로운 신앙이 바로 ‘’입니다.

 

여기서 가장 먼저 주목할 것은 ‘새로운 신앙’입니다. 가인도 신앙이고, 셋도 신앙입니다. 그렇다면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핵심은 신앙 자체에 있지 않고,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에 있습니다. ‘가인’은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자신을 앞세운 신앙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신앙을 체어리티보다 중요한 것으로 높였고, 그 결과 체어리티가 소멸되었으며, 결국 라멕에 이르러서는 신앙 자체도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반면 ‘’으로 의미되는 새로운 신앙은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할 수 있는 신앙이며, 더 정확하게는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질 수 있는 신앙’입니다. 따라서 가인과 셋의 차이는 ‘신앙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그 신앙이 무엇을 향하고 있으며, 어떤 질서 안에 놓여 있느냐에 있습니다.

 

원문의 ‘whereby charity was implanted’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셋으로 상징되는 신앙의 목적이 신앙 그 자체에 있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신앙은 사람에게 진리를 가르치고, 그 진리를 따라 살아가게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주님께서 사람 안에 체어리티를 심으실 수 있도록 길을 마련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종착지가 아니라 체어리티를 향해 나아가는 길입니다. 가인의 오류는 바로 이 질서를 뒤집어 신앙 자체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만들고, 체어리티를 그 아래에 두었다는 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매우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태고교회 최초의 천적 인간에게는 본래 이러한 순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사랑하는 데서 출발하여 선을 행하였고, 그 선 안에서 진리를 지각했습니다. 곧 사랑에서 신앙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태고교회가 타락하면서 이 천적 질서가 무너졌습니다. 따라서 AC.335의 ‘새로운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졌다’는 것은 최초의 태고교회 상태로 단순히 되돌아갔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미 이전의 퍼셉션을 잃은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그들의 달라진 상태에 맞는 새로운 회복의 길을 마련하셨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AC.335는 우리가 앞서 ‘가인의 표’를 다루면서 제기했던 질문과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왜 주님께서는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가인의 신앙을 완전히 없애지 않으시고, ‘’를 주어 보존하셨는가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AC.330에서 그 이유는 ‘후에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질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되었습니다. 그런데 AC.335에서 바로 그 일이 나타납니다. 가인적 신앙 자체가 회복되었다는 뜻은 아니지만, 주님께서 신앙이라는 길을 보존하셨기 때문에, 이제 ‘’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AC.330의 ‘가인의 표’와 AC.335의 ‘’은 서로 멀리 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의 섭리 안에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앞에서 라멕을 다루면서 가졌던 의문에도 답을 줍니다. 라멕에게 이르러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면, 가인에게 표를 주어 신앙을 보존하셨던 주님의 계획이 실패한 것 아닌가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나 AC.335를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특정한 교리적 계열에서는 신앙이 완전히 소멸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류 전체를 향한 주님의 섭리 안에서는 신앙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에 이를 수 있는 길 자체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길이 새로운 형태로 나타난 것이 ‘’으로 상징되는 신앙입니다. 한 계열은 종말에 이를 수 있지만, 주님의 구원 질서는 종말에 이르지 않습니다.

 

또한 여기서 창4의 ‘’을 시간순으로만 읽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겉으로 보면 가인이 태어나고, 가인의 여러 후손이 이어진 뒤, 라멕과 그 자녀들의 이야기가 나온 다음, 마지막에 아담과 하와가 다시 셋을 낳는 것처럼 서술됩니다. 그렇게만 읽으면 가인 계열의 여러 세대가 모두 지나간 뒤에야 셋이 태어난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속뜻으로는 서로 다른 교회와 교리의 상태가 묘사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AC.335의 셋은 단순히 ‘가인 계열이 끝난 뒤 역사적으로 등장한 한 사람’이라는 시간순의 의미보다, 가인으로 상징되는 분리된 신앙과 구별되는 새로운 신앙의 계열이 주님에 의해 세워졌다는 데 중심이 있습니다.

 

특히 창4:25에서 하와가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고 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벨은 체어리티를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가인이 아벨을 죽였으므로 체어리티가 소멸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벨 대신에 다른 씨’로 주어진 셋은 단순히 죽은 아들의 빈자리를 채우는 또 하나의 아들이 아닙니다. 속뜻으로 보면 체어리티가 소멸된 이후, 주님께서 다시 체어리티가 심어질 수 있도록 마련하신 새로운 신앙입니다. 그래서 ‘’이라는 이름 자체가 교회의 회복과 연결됩니다.

 

여기에는 매우 아름다운 섭리의 질서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을 때, 억지로 과거로 돌려놓지 않으십니다. 최초의 태고교회처럼 사랑에서 직접 진리를 지각하는 상태가 이미 상실되었다면, 그 상태를 강제로 복구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인간이 받아들일 수 있는 새로운 길을 마련하십니다. 이제 사람은 신앙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따라 살아감으로써 체어리티가 심어지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인간의 상태는 낮아졌지만, 주님의 구원의 역사는 그 낮아진 상태에 맞추어 계속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에게서 반복해서 나타나는 주님의 적응과 섭리의 원리입니다.

 

그렇다고 ‘’이 곧 홍수 이후 ‘노아’로 시작되는 영적 교회와 동일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셋은 여전히 태고교회 시대 안에 있으며, 태고교회의 남은 계열 가운데 새로운 신앙을 의미합니다. 이후 창5에서 셋으로부터 이어지는 계보 역시 태고교회의 여러 교회적 상태를 나타내다가 결국 홍수라는 종말에 이릅니다. 그 후에야 ‘노아’로 의미되는 고대교회가 일어나며, 그때에는 퍼셉션 대신 양심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거듭남의 질서가 본격적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따라서 ‘셋의 새로운 신앙’과 ‘노아의 새로운 교회’를 구별하면서 읽어야 창4와 창5, 그리고 창6 이후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심화

 

1. ‘가인도 신앙이고, 도 신앙이라면, 무엇이 신앙을 참된 신앙답게 하는가?

 

 

AC.335, 심화 1, ‘가인’도 신앙이고, ‘셋’도 신앙이라면, 무엇이 신앙을 참된 신앙답게 하는가?

AC.335.심화 1. ‘가인’도 신앙이고, ‘셋’도 신앙이라면, 무엇이 신앙을 참된 신앙답게 하는가? AC.335는 매우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가인도 ‘신앙’을 의미하고, 셋도 ‘신앙’을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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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4, 창4:23-24, ‘아다와 씰라’라는 새 교회가 일어났을 때의 상황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And Lame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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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4.심화

 

2.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에게 폭력을 가한다?’

 

AC.334의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모든 것이 소멸되고, 그것들에 폭력이 가해졌다’는 표현에서 ‘폭력을 가한다’는 말은 처음 읽으면 조금 낯섭니다. 신앙이나 체어리티는 사람이 아니므로 어떻게 그것들에게 ‘폭력’을 가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폭력은 육체적인 폭력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거슬러 그것을 억누르고 파괴하며, 더 나아가 자기의 악과 거짓을 위해 왜곡하여 사용하는 영적인 폭력을 뜻합니다. 단순히 신앙이 없거나 체어리티가 부족한 상태보다 훨씬 심각한 것입니다.

 

가인 계열의 처음부터 살펴보면 이 차이가 잘 보입니다. 처음 ‘가인’의 문제는 신앙을 없애 버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신앙을 인정하고 중요하게 여기면서 그것을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직 신앙에 속한 것이 남아 있었고, 주님께서는 그것이 완전히 파괴되지 않도록 ‘가인의 표’로 보존하셨습니다. 그러나 분리된 신앙이 계속 발전하면서 체어리티는 소멸되고, 교리는 왜곡되고, 거기에서 다시 여러 이단이 생겨났으며, 마침내 라멕에 이르러서는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AC.334는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이제는 단순히 신앙과 체어리티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그것들에 ‘폭력을 가하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전혀 모른다면, 그에게 체어리티가 없다고 할 수는 있어도 그가 체어리티에 폭력을 가했다고까지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자기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해치고, 더 나아가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말씀 자체를 비틀어 ‘이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한다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이제 그는 단순히 체어리티를 행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의 진리를 자기 악에 복종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폭력을 가한다’는 말에 훨씬 가까운 상태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진리를 모르는 것과 진리를 알고도 거짓으로 바꾸는 것은 다릅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진리를 이용하여 거짓을 진리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입니다. 말씀을 자기 욕망이나 권력, 자기 사랑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하고, 신앙의 언어로 다른 사람을 지배하며, 하나님을 말하면서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높인다면, 신앙의 외형은 남아 있어도 그 안의 진리는 거꾸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가 악을 고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악이 진리를 붙잡아 자기에게 봉사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에 속한 것에 가하는 영적인 폭력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폭력’의 핵심에는 ‘질서를 뒤집는 것’이 있습니다. 본래 진리는 사람의 악을 드러내고 선으로 인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진리를 자기 악에 맞추어 바꾸면, 이제 진리가 악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악이 진리를 다스리게 됩니다. 본래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기고 체어리티로 인도해야 하는데, 가인적 질서에서는 신앙이 체어리티 위에 올라섭니다. 이것이 계속되면 결국 체어리티를 밀어내고, 나중에는 신앙 자체도 왜곡됩니다. 처음에는 ‘분리’였던 것이 마지막에는 ‘지배와 파괴’가 되는 것입니다.

 

4:23의 라멕의 말이 바로 이것을 표상합니다.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여기서 사람과 소년을 죽이는 것은 속뜻으로 단순한 살인 사건을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을 파괴하는 상태를 묘사합니다. 이어지는 상세 해설에서 각각의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더 세밀하게 다루게 되겠지만, AC.334의 개요 단계에서는 ‘죽인다’는 것이 곧 교회 안의 선과 진리라는 생명을 잃게 하는 영적인 폭력이라는 큰 그림을 먼저 붙들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가 이것을 단순한 악보다 더 심각한 ‘모독’과 연결하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모독은 거룩한 것을 전혀 모르는 상태가 아닙니다. 거룩한 것을 알고 받아들인 사람이 그것을 악과 거짓에 결합시키는 데서 문제가 생깁니다. 말씀을 모르면서 악을 행하는 것과 말씀을 붙들고 악을 정당화하는 것은 영적으로 같은 상태가 아닙니다. 후자의 경우에는 주님에게서 온 것이 인간의 proprium을 섬기는 수단으로 뒤집혀 버립니다. 거룩한 것을 거룩하지 않은 목적에 끌어다 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AC.334는 이것을 ‘그 모독이 극에 이르렀다’고 표현합니다.

 

이것을 교회 차원에서 생각하면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떤 교회에서 체어리티가 약해졌다는 것과, 체어리티를 오히려 신앙에 방해되는 것으로 취급하는 것은 다릅니다. 어떤 교회에서 진리를 충분히 알지 못한다는 것과, 이미 알고 있는 진리를 교회의 권력이나 명예, 이익을 지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왜곡하는 것도 다릅니다. 전자는 쇠약이나 무지일 수 있지만, 후자는 선과 진리에 적극적으로 ‘폭력을 가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특히 악을 악이라고 지적해야 할 말씀이 오히려 그 악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된다면, 선과 진리의 본래 기능이 완전히 뒤집힌 것입니다.

 

개인에게 적용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아직 잘 모르는 것보다 더 두려운 것은 말씀을 많이 알면서 그것을 자기 합리화에 사용하는 것입니다. AC를 많이 읽고 속뜻을 많이 안다고 하더라도, 그 진리가 자신의 악을 보게 하고 고치게 하는 대신 ‘나는 남들보다 더 깊은 진리를 안다’는 자기 우월감과 자기 사랑을 강화한다면, 진리의 질서가 뒤집히기 시작한 것입니다. 진리는 proprium을 낮추기 위해 주어졌는데, proprium이 오히려 진리를 자기 것으로 붙잡아 자신을 높이는 데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이것 역시 아주 미세한 형태에서 시작되는 ‘진리에 대한 폭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인에서 라멕까지의 흐름을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분리에서 폭력으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떼어 놓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작은 질서의 전도가 계속되자 체어리티가 소멸되고, 진리가 왜곡되고, 신앙 자체가 사라지며, 마침내 선과 진리를 거슬러 그것을 자기 악과 거짓에 복종시키는 상태에까지 이릅니다. 바로 이것이 AC.334가 말하는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에게 폭력을 가한다’는 표현의 깊은 의미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상태가 극에 이르렀을 때, ‘아다와 씰라’로 상징되는 새로운 교회가 일어났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전 교회가 단순히 약해진 정도가 아니라,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기는커녕 그것에 폭력을 가하는 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에 더 이상 그 안에서는 교회의 생명이 회복되기 어려워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강제로 꺾어 이전 교회를 되돌리는 대신, 그 종말 가운데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십니다. 결국 AC.334에서 말하는 ‘폭력’은 한 교회가 왜 종말에 이르고, 새로운 교회가 필요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해 주는 매우 중요한 열쇠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334, 창4:23-24, ‘아다와 씰라’라는 새 교회가 일어났을 때의 상황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And Lame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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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4, 심화 1, 왜 새 교회는 이전 교회의 ‘가장 어두운 때’에 일어나는가?

AC.334.심화 1. 왜 새 교회는 이전 교회의 ‘가장 어두운 때’에 일어나는가? AC.334에서 매우 인상적인 것은 새 교회가 이전 교회가 어느 정도 쇠퇴했을 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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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4.심화

 

1. 왜 새 교회는 이전 교회의 가장 어두운 때에 일어나는가?

 

AC.334에서 매우 인상적인 것은 새 교회가 이전 교회가 어느 정도 쇠퇴했을 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모든 것이 소멸되고’, 모독이 ‘극에 달했을 때’ 일어났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여러 교회의 역사를 설명할 때, 반복해서 보여 주는 중요한 섭리의 질서와 연결됩니다. 한 교회의 내적 생명이 아직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것을 버리고 다른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그 안에서 선과 진리를 보존하십니다. 그러나 그 교회가 끝내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에 이르면, 주님께서는 그 종말 가운데서 새로운 교회를 준비하십니다.

 

그렇다고 주님께서 일부러 이전 교회를 타락하게 하신 뒤 새 교회를 세우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타락은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과 proprium에서 비롯됩니다. 주님께서는 끊임없이 선과 진리를 공급하시지만, 사람들이 그것을 거부하고 왜곡하며, 마침내 모독하는 상태에까지 이르면 그 상태를 강제로 되돌리지 않으십니다. 강제로 되돌린다면 인간의 자유와 이성이 파괴되고, 거듭남 자체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대신 주님께서는 그 악을 허용하시면서도 그 허용의 한계 안에서 리메인스를 보존하시고, 다른 곳에서 새로운 교회의 씨앗을 준비하십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종말은 인간이 만들어 내지만, 그 종말 가운데서 새로운 시작을 마련하시는 것은 주님의 섭리입니다.

 

이 점에서 AC.334는 앞에서 나눈 ‘가인의 표’에 관한 질문에도 다시 빛을 비춰 줍니다. 가인에게 표를 주어 신앙을 보존하셨다고 해서 가인에서 라멕으로 이어지는 그 특정 계열이 반드시 회복되어야 했던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그 계열은 신앙과 체어리티를 모두 소멸시키고, 그것들에 폭력까지 가하는 극도의 상태에 이릅니다. 그러나 주님의 더 큰 섭리는 실패하지 않습니다. 바로 그 종말의 때에 ‘아다와 씰라’로 상징되는 새로운 교회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한 계열 안에서는 구원의 가능성이 거의 소진되는 것처럼 보여도, 주님께서는 인류 전체 안에서 교회의 생명을 계속 보존하십니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를 조심해야 합니다. 아다와 씰라가 문자적으로 라멕의 아내들이기 때문에, ‘그렇다면 이 새 교회도 결국 라멕에서 나온 것 아닌가?’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초기의 계보와 가족관계는 속뜻으로는 교회와 교리의 관계를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문자적 가족관계를 그대로 영적 인과관계로 옮겨 ‘라멕의 악에서 새 교회가 태어났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말씀은 라멕으로 표상되는 종말의 상태와 동시에 존재하게 된 새로운 교회의 상태를, 가족과 계보라는 표상적 이야기 속에 함께 담아 보여 주고 있다고 이해하는 편이 좋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조금 전에 이야기했던 아다와 씰라 계열이 ‘썩 괜찮아 보이는’ 이유도 설명해 줍니다. 그들은 라멕의 타락을 계속 확대하는 또 하나의 이단 계열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명시적으로 ‘새로운 교회’라고 부르는 상태를 표상합니다. 그래서 그 아들들에게서 다시 ‘천적인 것’, ‘영적인 것’, ‘자연적인 것’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야발, 유발, 두발가인의 긍정적인 의미는 우연한 예외가 아니라, 그들이 새로운 교회의 성격을 나타내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새로운 교회 역시 홍수 이전 태고교회의 큰 시대 안에 있습니다. 따라서 이것을 홍수 이후 ‘노아’로 시작되는 고대교회와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아다와 씰라의 교회는 태고교회의 종말 과정 안에서 일어난 새로운 교회이며, 노아는 그 옛 천적 질서 자체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게 된 뒤 시작되는 새로운 거듭남의 질서를 표상합니다. 그래서 앞서 정리한 것처럼, 가인 계열과 셋 계열로 나란히 이어지던 태고교회는 결국 그 옛 질서 자체로서는 끝나고, 주님께서는 보존하신 리메인스를 통하여 노아로 표상되는 새로운 교회 시대를 준비하십니다.

 

결국 AC.334의 핵심은 매우 역설적입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모든 것이 소멸된 바로 그때 새로운 교회가 일어났습니다.’ 인간의 눈에는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이는 순간이 주님의 섭리에서는 반드시 모든 것의 끝은 아닙니다. 이전 교회의 생명이 끝날 수는 있지만, 교회 자체를 향한 주님의 뜻은 끝나지 않습니다. 인간은 신앙과 체어리티를 소멸시키고 심지어 그것들에 폭력을 가할 수 있지만, 주님께서는 그 종말 가운데서도 다음 교회에 필요한 천적, 영적, 자연적인 것들을 다시 일으키십니다. 그러므로 AC.334는 교회의 가장 어두운 종말을 묘사하면서 동시에, 그 종말보다 언제나 더 멀리 내다보시는 주님의 섭리를 보여 주는 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334, 창4:23-24, ‘아다와 씰라’라는 새 교회가 일어났을 때의 상황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And Lame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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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And Lamech said unto his wives, Adah and Zillah, Hear my voice, ye wives of Lamech, and with your ears perceive my speech, for I have slain a man to my wounding, and a little one to my hurt. 24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If Cain shall be avenged sevenfold, truly Lamech seventy and sevenfold. (4:23-24)

 

AC.334

 

이 교회는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모든 것이 소멸되고, 그것들에 폭력이 가해져 그 모독이 극도에 이르렀을 때 일어났다고 합니다. (23-24) That this church arose when everything of faith and charity was extinguished, and had violence done to it, which was in the highest degree sacrilegious, is described. (verses 23–24)

 

 

해설

 

AC.334는 바로 앞 AC.333의 ‘그때 새로운 교회가 일어났다’는 말에서 ‘그때’가 정확히 어떤 때였는지를 밝혀 주는 글입니다. AC.333에서는 ‘아다와 씰라’라 하는 새로운 교회가 일어났고, 이 교회는 자기 교회의 천적인 것을 ‘야발’, 영적인 것은 ‘유발’, 자연적인 것은 ‘두발가인’이라고 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AC.334는 이 새로운 교회가 평온하고 좋은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이전 교회에서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모든 것이 소멸되고’, 심지어 그것들에 ‘폭력이 가해진’ 극도의 모독 상태에서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AC.333AC.334는 반드시 함께 읽어야 합니다. 하나는 ‘새로운 교회의 일어남’을 말하고, 다른 하나는 ‘그 새로운 교회가 어떤 종말의 상황에서 일어났는가’를 설명합니다.

 

여기서 먼저 ‘everything of faith and charity was extinguished’, 곧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모든 것이 소멸되었다’는 표현은 앞의 AC.332와 직접 연결됩니다. 가인에게는 처음에 체어리티에서 분리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신앙에 속한 것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장차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다시 심어질 수 있도록 가인에게 ‘’를 주어 신앙이 완전히 파괴되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가인에서 에녹으로, 다시 여러 파생된 이단들을 거치면서 그 신앙마저 계속 변질되더니, 마침내 라멕에게서는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AC.334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종말의 상태를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모든 것이 소멸된’ 상태라고 정리합니다.

 

그런데 AC.334에는 단순한 ‘소멸’보다 더 심각한 표현이 하나 더 있습니다. ‘had violence done to it’, 곧 신앙과 체어리티에 ‘폭력이 가해졌다’고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사람들이 신앙과 체어리티를 잃어버렸다는 것보다 훨씬 심각한 상태입니다. 어떤 사람이 진리를 몰라서 신앙이 없고, 아직 체어리티의 삶에 이르지 못한 것과, 이미 알고 있던 신앙과 체어리티를 의도적으로 왜곡하고 짓밟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전자는 무지나 결핍의 상태일 수 있지만, 후자는 이미 받은 거룩한 것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상태입니다. 창4:23에서 라멕이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영적 폭력을 표상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in the highest degree sacrilegious’, 곧 ‘그 모독이 극에 이르렀다’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sacrilegious’는 단순히 도덕적으로 매우 나빴다는 뜻이 아닙니다. 거룩한 것에 폭력을 가하는 ‘모독’의 문제입니다. 앞서 창3:22-24에서 계속 살펴보았듯이, 스베덴보리에게 모독은 매우 심각한 영적 상태입니다. 선과 진리를 전혀 모르는 사람의 악과, 선과 진리를 알고, 인정하고, 받아들인 뒤 그것을 악과 거짓에 섞어 훼손하는 것은 다릅니다. 후자는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사람 안에서 결합시키기 때문에 훨씬 깊은 파괴를 가져옵니다. 바로 이것을 막기 위해 창3에서는 생명나무의 길을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로 지키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창4의 라멕은 단순히 ‘신앙이 없어진 상태’보다 더 깊은 종말을 보여 줍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사라진 것에서 끝나지 않고, 그것들에 폭력을 가하는 상태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처음 가인에게서는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 분리가 계속되면서 체어리티가 소멸되었고, 교리가 왜곡되었으며, 그 왜곡에서 여러 이단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라멕에 이르러서는 신앙 자체도 사라졌습니다. 이제 창4:23-24에서는 그보다 더 나아가 신앙과 체어리티에 폭력을 가하고, 그것을 모독하는 상태가 묘사됩니다. 작은 질서의 전도가 얼마나 멀리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무서운 과정입니다.

 

이 때문에 라멕의 노래에서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라는 말도 매우 중요해집니다. 문자적으로만, 그러니까 겉으로만 보면 라멕이 자신의 폭력성을 과장하여 자랑하는 말처럼 읽을 수 있지만, 속뜻으로는 가인의 상태보다 라멕의 상태가 훨씬 더 심각해졌음을 나타냅니다. 가인에게는 아직 보존할 신앙이 있었지만, 라멕에게서는 그것마저 사라지고, 신앙과 체어리티에 대한 폭력과 모독이 극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칠십칠 배’는 단순한 산술적인 형벌의 배수가 아니라 그 상태가 충만하고 극에 이르렀음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읽어야 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이후 해당 절을 상세히 다루면서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그런데 AC.334에서 정말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끔찍한 종말 자체만이 아닙니다. 첫 문장이 ‘이 교회가 일어났다’고 시작한다는 사실입니다. 곧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모든 것이 소멸되고, 모독이 극에 달한 ‘바로 그때’, AC.333에서 말한 아다와 씰라의 새로운 교회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계속 살펴본 주님의 섭리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인간의 한 교리적 계열이 완전히 종말에 이른다고 해서 주님의 구원 역사가 함께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전 상태가 더 이상 교회로서 존속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주님께서는 다른 곳에서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십니다.

 

여기서도 ‘아다와 씰라의 교회’를 라멕의 타락한 상태가 스스로 발전하여 좋은 교회로 변한 것처럼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핵심은 ‘타락이 발전하여 새 교회가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교회적 상태가 종말에 이른 때, 주님께서 새로운 교회적 상태를 일으키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후 AC 전체에서 반복해서 만나게 될 ‘교회의 종말과 새 교회의 시작’이라는 큰 질서의 초기 형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 교회가 선과 진리를 잃어 더 이상 교회로서 기능하지 못할 때에도 주님께서는 인류 가운데 교회가 완전히 사라지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새로운 교회를 마련하십니다.

 

 

심화

 

1. 왜 새 교회는 이전 교회의 가장 어두운 때에 일어나는가?

 

 

AC.334, 심화 1, 왜 새 교회는 이전 교회의 ‘가장 어두운 때’에 일어나는가?

AC.334.심화 1. 왜 새 교회는 이전 교회의 ‘가장 어두운 때’에 일어나는가? AC.334에서 매우 인상적인 것은 새 교회가 이전 교회가 어느 정도 쇠퇴했을 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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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에게 폭력을 가한다?’

 

 

AC.334, 심화 2,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에게 폭력을 가한다?’

AC.334.심화 2.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에게 폭력을 가한다?’ AC.334의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모든 것이 소멸되고, 그것들에 폭력이 가해졌다’는 표현에서 ‘폭력을 가한다’는 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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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5, 창4:25, ‘셋’(Seth)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And the man knew his wife again, and she bare a 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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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3, 창4:19-22, ‘아다와 씰라, 야발, 유발, 두발가인’

19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And Lamech took unto him two wives; the name of the one was Adah, and the name of the other Zillah. 20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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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3.심화

 

1. 라멕에서 신앙마저 사라졌는데 어떻게 곧바로 새로운 교회가 일어날 수 있는가?

 

바로 앞에서 우리가 나눈 질문과 AC.333이 절묘하게 연결됩니다. 라멕에게서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면, 가인에게 ‘’를 주어 신앙을 보존하셨던 주님의 섭리가 실패한 것처럼 보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AC.333은 그 질문에 대한 하나의 실제적인 답을 보여 줍니다. 라멕이라는 한 교리적 계열에서 신앙이 완전히 소멸되었다고 해서 주님의 교회 전체에서 천적, 영적, 자연적인 것까지 모두 소멸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종말 가운데서도 ‘새로운 교회’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라멕  아다와 씰라  야발, 유발, 두발가인’을 단순한 시간순의 생물학적 계보로만 읽지 않는 것입니다. 앞서 창4와 창5의 관계에서도 계속 살펴보았듯이, 창세기 초기의 이름들은 서로 다른 교회와 교리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라멕이라는 악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아들들은 갑자기 좋은 사람들이 되었다’는 식으로 읽으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속뜻에서 중요한 것은 한 교리적 상태가 종말에 이른 가운데 새로운 교회적 상태가 일어나고, 그 안에서 다시 교회의 여러 요소들이 형성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섭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원리를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한 교회가 쇠퇴한다고 해서 그 안에서 형성된 모든 것을 함께 폐기하지 않으십니다. 어떤 것이 본래의 내적 생명을 잃었더라도 장차 새로운 교회에서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면 그것을 보존하고 새로운 질서 안에 배치하십니다. 조금 전에 ‘가인의 표’를 설명하면서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글 수는 없다’고 표현했던 것과도 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문제는 신앙 자체가 아니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한 교회가 타락했다고 해서 그 안에 존재했던 모든 교리, 예배, 지식, 외적 형식까지 무가치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그 가운데 유용한 것을 취하여 다음 상태를 위해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관점에서 야발, 유발, 두발가인이 상당히 중요해집니다. 앞으로 세 사람을 하나씩 살펴보면 이들이 단순히 ‘목축의 조상’, ‘음악의 조상’, ‘금속 기술의 조상’이라는 문명사적 인물들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천적, 영적, 자연적인 것들이 어떻게 외적인 형식으로 보존되고 발전했는지를 보여 주는 표상임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래서 앞서 말씀하셨던 ‘아다와 씰라 계열도 썩 괜찮아 보인다’는 느낌이 정확히 여기서 생깁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도 이들을 단순히 악한 것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괜찮아 보임’을 곧 태고교회의 완전한 회복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 새로운 교회 역시 홍수 이전 태고교회의 큰 역사 안에 있으며, 결국 그 시대 전체의 종말을 함께 맞게 됩니다. 앞서 정리하신 표현대로 ‘가인 계열과 셋 계열로 나란히 이어지던 태고교회는 결국 그 옛 질서 자체로서는 끝납니다.’ 그러므로 아다와 씰라의 새로운 교회는 홍수 이후의 고대교회와 동일한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 아니라, 아직 태고교회 시대 안에서 일어난 하나의 새로운 교회적 형성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 점은 ‘새로운 교회’라는 말을 볼 때마다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새로운 교회’라고 할 때, 반드시 인류 전체의 새로운 대시대가 시작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전의 교회적 상태가 소멸하거나 변질된 뒤 그와 구별되는 새로운 교회가 일어났다는 뜻으로도 사용됩니다. 따라서 여기의 아다와 씰라와, 홍수 이후 ‘노아’로 표상되는 고대교회의 출현은 구별해야 합니다. 전자는 아직 태고교회의 역사 안에서 일어난 새로운 교회이고, 후자는 태고교회의 종말 이후 인간의 거듭남 방식 자체가 달라진 새로운 교회 시대입니다.

 

그래서 AC.333은 짧지만 창4 후반부를 여는 중요한 문입니다. 가인에서 라멕까지의 이야기가 ‘어떻게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마침내 신앙 자체까지 소멸하는가’를 보여 주었다면, 이제 아다와 씰라, 야발과 유발과 두발가인의 이야기는 ‘그러한 종말 가운데서도 주님께서는 교회에 필요한 천적, 영적, 자연적인 것들을 어떻게 다시 일으키고 보존하시는가’를 보여 주기 시작합니다. 인간의 교리는 종말에 이를 수 있지만, 주님의 섭리는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한 상태의 끝에서 이미 다음 상태에 필요한 것을 준비하고 계시는 것, 바로 그것이 AC.333을 앞의 가인 계열 전체와 연결해서 읽을 때 보이는 중요한 아르카나라고 하겠습니다.

 

 

 

AC.333, 창4:19-22, ‘아다와 씰라, 야발, 유발, 두발가인’

19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And Lamech took unto him two wives; the name of the one was Adah, and the name of the other Zillah. 20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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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And Lamech took unto him two wives; the name of the one was Adah, and the name of the other Zillah. 20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And Adah bare Jabal; he was the father of the dweller in tents, and of cattle. 21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And his brother’s name was Jubal; he was the father of everyone that playeth upon the harp and organ. 22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And Zillah, she also bare Tubal-Cain, an 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in brass and iron; and the sister of Tubal-Cain was Naamah. (4:19-22)

 

AC.333

 

그때 새로운 교회가 일어났는데, ‘아다와 씰라(Adah and Zillah)가 이를 의미하며, 그들의 아들들인 야발(Jabal), ‘유발(Jubal), ‘두발가인(Tubal Cain)으로 그 성격을 알 수 있습니다. ‘야발은 교회의 천적인 것들을, ‘유발은 영적인 것들을, ‘두발가인은 자연적인 것들을 의미합니다. (19-22) A new church then arose, which is meant by “Adah and Zillah,” and is described by their sons “Jabal,” “Jubal,” and “Tubal Cain”; the celestial things of the church by “Jabal,” the spiritual by “Jubal,” and the natural by “Tubal-Cain.” (verses 19–22)

 

 

해설

 

AC.333은 가인 계열의 이야기를 읽다가 상당히 뜻밖의 전환을 만나는 글입니다. 바로 앞 AC.332에서는 가인으로부터 생겨난 여러 이단들이 계속 변질되어 오다가 마지막 ‘라멕’에 이르렀고, 그 안에는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가인 계열은 완전히 종말에 이르렀으므로, 이후에는 더 이상 교회라 부를 만한 것이 나올 수 없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AC.333에서 스베덴보리는 놀랍게도 ‘그때 새로운 교회가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교회를 ‘아다와 씰라’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창4:19부터는 단순히 라멕의 가족 이야기가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종말에 이른 이전의 교리적 계열 가운데서 다시 새로운 교회적 상태가 일어나는 중요한 전환점으로 읽어야 합니다.

 

여기서 먼저 ‘새로운 교회’라는 표현을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가인 계열이 원래의 태고교회 상태로 회복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가인으로 시작된 분리된 신앙의 계열은 이미 라멕에 이르러 신앙에 속한 것마저 남아 있지 않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종말 가운데서도 교회에 필요한 것들을 다시 일으키십니다. 앞서 우리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한 교리적 계열이 종말에 이른다고 해서 주님의 교회와 섭리까지 종말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종말 가운데서도 보존할 것을 보존하시고, 그것으로 새로운 시작을 마련하십니다. ‘아다와 씰라’가 바로 그러한 새로운 교회를 표상합니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이 새로운 교회의 성격이 한 사람의 이름으로만 나타나지 않고 ‘아다와 씰라’라는 두 여자로 표상된다는 점입니다. 말씀에서 ‘여자’는 교회를 표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창3에서 ‘하와’가 ‘모든 산 자의 어머니’로서 교회를 의미했던 것과 같은 큰 원리가 여기에도 작용합니다. 다만 아다와 씰라가 구체적으로 어떤 서로 다른 성격의 교회를 의미하는지는 이후 번호에서 더 자세히 밝혀집니다. AC.333의 단계에서는 우선 두 사람이 ‘새로운 교회’를 의미한다는 큰 틀을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교회의 성격은 아다와 씰라 자신보다 그들의 아들들을 통하여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들의 아들들인 야발, 유발, 두발가인에 의해 그 성격이 묘사된다’고 합니다. 여기서도 창세기 초기의 ‘낳음’을 단순한 생물학적 계보로만 읽지 않는 원리가 다시 나타납니다. 교회가 무엇을 낳는다는 것은 그 교회에서 어떤 교리와 예배, 어떤 영적이고 자연적인 것들이 발전하여 나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야발, 유발, 두발가인은 단순히 라멕의 세 아들이 아니라, 이 새로운 교회 안에서 형성된 세 가지 중요한 층위를 나타냅니다.

 

첫째, ‘야발’은 ‘교회의 천적인 것들’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천적’이라는 말은 우리가 지금까지 계속 사용해 온 스베덴보리의 고유한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단순히 ‘하늘에 속한 것’이라는 막연한 뜻이 아니라, 주님을 향한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에 관계된 것입니다. 따라서 새로운 교회 안에도 사랑과 선에 관계된 천적인 것들이 존재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야발로 표상됩니다.

 

둘째, ‘유발’은 ‘교회의 영적인 것들’을 의미합니다. 영적인 것은 천적인 것과 구별되며, 주로 신앙과 진리에 관계됩니다. 천적인 것이 사랑과 선을 중심으로 한다면, 영적인 것은 그 사랑과 선을 표현하고 인도하는 진리와 신앙에 관계됩니다. 따라서 야발과 유발을 함께 보면 이 새로운 교회 안에는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 곧 선에 관계된 것과 진리에 관계된 것이 다시 일정한 형태로 존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셋째, ‘두발가인’은 ‘교회의 자연적인 것들’을 의미합니다. 자연적인 것은 사람의 가장 외적인 삶과 관련됩니다. 사랑과 선이 내적으로 존재하고, 신앙과 진리가 그것을 이해하고 표현한다면, 그것들이 실제 행동과 생활, 외적 예배와 유용한 일들 가운데 나타나는 자리가 자연적 차원입니다. 따라서 야발, 유발, 두발가인이라는 세 이름을 통하여 새로운 교회가 천적, 영적, 자연적 차원을 갖추고 있었음이 묘사됩니다.

 

이 구조는 상당히 중요합니다. ‘천적, 영적, 자연적’은 서로 따로 떨어진 세 가지 종교적 영역이 아니라, 교회의 생명이 안에서 밖으로 내려와 완성되는 질서를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가장 안쪽에는 주님을 향한 사랑과 선이라는 천적인 것이 있고, 그것이 진리와 신앙이라는 영적인 것을 통하여 형체를 얻으며, 마침내 자연적인 삶과 행위 속에 나타납니다. 참된 교회라면 이 세 차원이 서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사랑만 말하고 진리가 없어서도 안 되며, 진리만 말하고 삶이 없어서도 안 됩니다. 내적인 선이 진리를 통하여 자연적인 삶에까지 내려와야 교회의 생명이 실제로 완성됩니다.

 

바로 이 때문에 AC.333은 앞의 라멕에 관한 설명과 함께 읽을 때 더욱 흥미롭습니다. 라멕에게서는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직후 새로운 교회가 일어나고, 그 교회 안에서는 다시 천적, 영적, 자연적인 것들이 나타납니다. 이것은 인간의 한 계열이 모든 것을 소진했다고 해서 주님의 섭리까지 소진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종말 가운데서 새로운 것을 일으키시며, 교회가 다시 내적인 것에서 외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일정한 질서를 갖도록 준비하십니다.

 

다만 여기서 ‘새로운 교회가 일어났다’는 것을 곧 ‘가인 계열이 완전히 회복되었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앞으로 AC.334 이하를 읽으면서 더욱 중요해질 것입니다. 야발, 유발, 두발가인이 표상하는 것들은 분명 교회에 속한 천적, 영적, 자연적인 것들이지만, 그것들이 태고교회의 최초 상태처럼 내적인 퍼셉션에서 직접 흘러나온 것은 아닙니다. 교회의 상태가 이미 크게 달라졌기 때문에, 이제 이러한 것들도 이전과는 다른 방식과 형태로 존재합니다. 따라서 ‘새로운 교회’라는 말에는 연속성과 단절이 동시에 들어 있습니다. 교회에 필요한 천적, 영적, 자연적인 것은 다시 존재하지만, 그것을 소유하고 살아가는 방식은 이전과 같지 않습니다.

 

 

심화

 

1. 라멕에서 신앙마저 사라졌는데 어떻게 곧바로 새로운 교회가 일어날 수 있는가?

 

 

AC.333, 심화 1, 왜 ‘분리된 신앙’은 결국 신앙 자체까지 잃게 되는가?

AC.333.심화 1. 라멕에서 신앙마저 사라졌는데 어떻게 곧바로 ‘새로운 교회’가 일어날 수 있는가? 바로 앞에서 우리가 나눈 질문과 AC.333이 절묘하게 연결됩니다. 라멕에게서 ‘신앙에 속한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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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4, 창4:23-24, ‘아다와 씰라’라는 새 교회가 일어났을 때의 상황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And Lame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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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2, 창4:17, ‘라멕’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창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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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2.심화

 

4. ‘가인 계열 이야기와 현 기독교, 개신교 생명 주기의 오버랩

 

이 가인 계열 이야기를 진행하면서 계속 현 기독교, 특히 개신교의 생명 주기가 계속 오버랩되네요...

 

네, 저도 지금 가인 계열을 따라가면서 그 겹침이 상당히 선명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것을 가인 계열 = 오늘날 개신교’라는 식으로 직접 대응시키기보다는, 4가 보여 주는 교회의 생명 주기’가 오늘날 기독교, 특히 개신교 안에서도 반복될 수 있다고 보는 편이 훨씬 정확하겠습니다.

 

처음에는 아주 살아 있는 신앙이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사랑하고, 그 사랑 때문에 진리를 붙듭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사랑에서 나온 신앙이 점차 신앙에 관한 교리’로 정리됩니다. 이것 자체는 필요하고 좋은 일입니다. 문제는 어느 순간 교리가 그것을 낳은 생명보다 앞서기 시작하는 데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보다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가 앞서고, 더 나아가 올바른 교리를 믿는 것 자체가 구원의 중심처럼 자리 잡기 시작합니다. AC.325 가인’이 바로 이 지점에서 묘하게 겹쳐 보입니다.

 

특히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 역사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종교개혁이 처음부터 체어리티를 제거하려 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복음과 말씀, 은혜와 신앙을 회복하려는 강력한 생명 운동이었습니다. 그런데 후대로 내려오면서 신앙’이 점점 교리적으로 정식화되고, 무엇을 믿느냐를 둘러싼 논쟁과 분열이 반복되며, 교파와 신조, 신학 체계가 계속 세분되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AC.331-332 하나의 이단에서 여러 이단들이 생겨났다’는 구조가 자꾸 겹쳐 보이는 것이지요. 물론 이것은 역사적 개신교의 각 교파를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이단’과 일대일로 대응시키자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진리가 사랑과 삶에서 분리될 때, 교리는 계속 증식하고 세분될 수 있다’는 영적 원리가 닮아 보인다는 뜻입니다.

 

더 무서운 것은 AC.332의 라멕입니다. 출발점에서는 신앙을 너무 중요하게 여겨 체어리티보다 앞세웠는데, 마지막에는 오히려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됩니다. 이것을 오늘날 교회에 비추어 보면 꽤 묵직합니다. 교회 건물도 있고, 조직도 있고, 신학교도 있고, 교단도 있고, 예배도 있고, 수많은 설교와 성경공부도 있는데 정작 그 모든 것을 신앙답게 하는 내적 생명’이 약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외형은 오히려 훨씬 정교해졌는데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 악을 죄로 여기고 피하는 삶, 서로를 향한 체어리티가 약해진다면, 외적 종교의 발전과 내적 교회의 쇠퇴가 동시에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래서 아까 말씀하신 아다와 씰라 계열이 더욱 흥미롭습니다. 종말을 향해 가는 계열에서도 야발, 유발, 두발가인과 같은 유용한 것들이 계속 생겨납니다. 이것 역시 오늘날 교회를 생각하게 합니다. 어떤 교회 시대가 내적으로 쇠퇴하고 있다고 해서 그 안에서 신학, 찬양, 선교, 교육, 상담, 사회봉사, 성경 연구 같은 훌륭한 것들이 생겨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외적인 면에서는 대단히 발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것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교회의 내적 생명이 건강하다고 단정할 수도 없고, 반대로 교회의 쇠퇴가 보인다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악하다고 버릴 수도 없습니다. 이 구별이 앞으로 야발, 유발, 두발가인을 읽으면서 아주 중요해질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교회의 종말’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교회의 종말은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교회 문이 닫히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게 되는 사건이 아닙니다. 외적인 교회는 오랫동안 계속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안에 선과 진리의 결합이 있는가, 곧 체어리티와 신앙이 살아 있는가입니다. 그 결합이 사라지면 외적 제도와 교리는 남아 있어도 내적으로는 교회의 저녁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창4를 읽으면서 현 기독교가 자꾸 겹쳐 보이는 것을 억지스러운 적용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씀의 속뜻이 가진 보편성 때문이라고 봅니다. 다만 시선을 저 개신교가 가인이다’라고 밖으로 돌리는 순간 이 말씀의 칼날이 무뎌질 수 있습니다. 더 무서운 독법은 내 안에도 가인이 있는가?’라고 묻는 것입니다. AC를 읽고, 스베덴보리를 알고, 속뜻과 상응을 설명하면서도 그것이 실제 체어리티의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바로 그 AC 지식조차 아벨보다 앞서는 가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진리도 이 위험에서 자동으로 면제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 지금 창4를 읽으며 느끼시는 겹침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4는 단순히 옛 태고교회가 이렇게 망했다’는 과거사가 아니라, 살아 있는 교회가 어떻게 교리가 되고, 교리가 어떻게 생명에서 분리되고, 그 분리된 교리가 어떻게 계속 발전하면서도 내적으로는 생명을 잃을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교회의 생명 주기’처럼 읽힙니다. 그래서 태고교회의 이야기인데도 이상할 만큼 오늘의 교회 이야기처럼 들리는 것이고요.

 

그러면서도 마지막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한 교회의 생명 주기가 끝난다고 주님의 교회까지 끝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리메인스를 보존하시고, 낡은 형식 가운데서도 다음 교회에 필요한 것을 건져 내시며, 다시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이 결합되는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십니다. 4를 읽으면서 오늘날 개신교가 겹쳐 보인다면, 저는 개신교가 끝났다’는 결론보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지금 무엇을 보존하고 계시며, 어디에서 다음 생명을 준비하고 계시는가?’라는 질문까지 함께 가져가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섭리 이해에 더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AC.332, 창4:17, ‘라멕’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창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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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2, 심화 3, ‘아다와 씰라’가 일어났음에도 결국...

AC.332.심화 3. ‘아다와 씰라’가 일어났음에도 결국... 다음 질문은 진도가 좀 빠른 듯 하지만... 라멕에게서 일어난 아다와 씰라 계열도 썩 괜찮아 보이는데 결국 가인 계열은 셋 계열과 더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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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2.심화

 

3. ‘아다와 씰라가 일어났음에도 결국...

 

다음 질문은 진도가 좀 빠른 듯 하지만... 라멕에게서 일어난 아다와 씰라 계열도 썩 괜찮아 보이는데 결국 가인 계열은 셋 계열과 더불어 홍수라는 종말을 맞이하는군요...

 

네, 맞습니다. 진도는 조금 빠르지만, 오히려 지금 이 질문을 미리 붙들어 두면, 곧 만나게 될 아다와 씰라, 야발과 유발과 두발가인을 읽을 때 상당히 도움이 됩니다. 특히 말씀하신 것처럼 그 계열을 읽다 보면 뜻밖의 느낌이 듭니다. ‘가인 계열이 계속 타락했다면서, 여기에는 왜 이렇게 쓸 만하고 심지어 좋은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생겨나는가?’ 하는 것이지요.

 

라멕에 이르러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는 AC.332의 선언만 보면 이후에는 온통 악과 거짓뿐이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창4 후반으로 가면 그렇지 않습니다. 아다에게서 야발과 유발이 나오고, 씰라에게서 두발가인이 나오며, 스베덴보리는 이들을 단순히 악한 것들로만 해석하지 않습니다. 야발은 천적이고 거룩한 사랑의 것들’, 유발은 영적 신앙의 것들’, 두발가인은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것들과 연결되는 상당히 중요한 표상들을 갖게 됩니다. 그러니 말씀하신 대로 얼핏 보면 썩 괜찮아 보이는 정도가 아니라 상당히 놀랍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핵심은 그 계열 안에서 어떤 유용한 교리적, 예배적 형식이 생겨났다’는 것과 그 교회 자체가 다시 살아 있는 천적 교회로 회복되었다’는 것을 구별하는 데 있습니다. 라멕에게서 원래 가인이 표상했던 신앙의 생명은 종말에 이르렀지만, 그 후손들 가운데서 외적인 것들, 곧 예배와 교리, 자연적 삶에 사용될 수 있는 여러 형식들이 발전할 수는 있습니다. 이것은 이후 스베덴보리가 야발, 유발, 두발가인을 설명하면서 상당히 세밀하게 구별하는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서 좋은 의미를 가진 것들이 나타난다고 해서 가인 계열이 다시 원래의 천적 생명을 회복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것은 스베덴보리에게 매우 중요한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의 관계를 보여 줍니다. 어떤 교회가 내적으로 쇠퇴해도 그 교회에서 발전한 지식, 예배 형식, 교리, 문화적 유산 가운데 후대에 유용하게 사용될 것들이 남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것들까지 모두 폐기하지 않으십니다. 필요한 것들을 보존하여 이후의 교회를 위해 사용하십니다. 이 점은 조금 전 이야기한 가인의 표’와도 묘하게 연결됩니다. 주님의 섭리는 어떤 교회의 악을 승인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교회가 쇠퇴하는 가운데서도 장차 구원에 사용될 수 있는 것들을 보존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두 번째 부분이 더 중요합니다. 결국 가인 계열만 홍수로 종말을 맞는 것이 아닙니다. 셋 계열도 자연계의 역사라는 큰 틀에서는 홍수 이전 태고교회에 속합니다. 그러므로 가인 계열은 악했으니 홍수로 멸망하고, 셋 계열은 선했으니 살아남았다’는 식으로 창4와 창5를 나누어 읽으면 곤란합니다. 5의 계보 역시 계속 동일한 상태로 순수하게 유지되는 계보가 아닙니다. 태고교회 전체가 세대를 거치면서 변해 가고, 마침내 그 시대 자체가 종말에 이릅니다.

 

바로 여기서 노아’의 위치가 결정적으로 중요해집니다. 노아는 단순히 착한 셋 계열의 마지막 생존자 정도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노아는 이전 태고교회의 천적 질서를 그대로 이어 가는 사람이 아니라, 전혀 다른 영적 구조를 가진 새로운 교회의 시작을 표상합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의지와 이해가 하나를 이루었고,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퍼셉션했지만, 그 의지 자체가 심각하게 부패하면서 더 이상 그 방식으로 인간을 거듭나게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해를 의지에서 어느 정도 분리하시고, 진리와 신앙을 통하여 새로운 의지를 형성하며, 체어리티에 이르게 하는 새로운 질서를 마련하십니다. 그것이 홍수 이후 고대교회의 질서입니다.

 

그러므로 홍수는 나쁜 가인 계열을 없애고, 좋은 셋 계열만 남긴 사건’이라기보다 훨씬 큰 사건입니다. 하나의 인류적, 교회적 시대 전체가 끝나는 종말입니다. 가인 계열과 셋 계열로 나란히 이어지던 태고교회는 결국 그 옛 질서 자체로서는 끝납니다. 다만 주님께서 그 전체 가운데 리메인스를 보존하시고, 그것을 노아’로 표상되는 새로운 교회로 이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속성과 단절이 동시에 있습니다. 모든 것이 없어진 후 처음부터 다시 시작되는 것도 아니고, 옛 교회가 그대로 계속되는 것도 아닙니다. 보존할 것은 보존하시되 거듭남의 질서는 새롭게 하십니다.

 

이렇게 보면 아다와 씰라 계열이 썩 괜찮아 보이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지 않습니다. 종말에 이르는 교회라고 해서 그 안의 모든 것이 한꺼번에 악으로 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내적 생명이 쇠퇴한 뒤에도 주님께서는 그 안에 있는 유용한 것들을 보존하실 수 있고, 후대의 교회를 위해 준비하실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교회의 종말’을 모든 사람이 악인이 되고, 모든 진리가 사라지는 순간’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점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교회의 종말은 본질적으로 그 교회를 그 교회답게 하던 내적 생명과 질서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창4와 창5를 조금 앞서 한눈에 바라보면 꽤 아름다운 구조가 보입니다. 4에서는 태고교회 안에서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어떻게 여러 교리와 외적 형식으로 발전하고, 마침내 그 계열이 종말에 이르는지를 보고, 5에서는 또 다른 계열을 통하여 태고교회의 상태들이 어떻게 이어지고 변해 가는지를 봅니다. 그리고 둘 다 결국 홍수라는 거대한 경계 앞에 섭니다. 그런데 그 경계 한가운데 노아’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낡은 질서를 억지로 영속시키지 않으시면서도 그 안의 리메인스를 잃지 않으시고, 그것을 가지고 전혀 새로운 거듭남의 시대를 여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목사님께서 느끼신 아다와 씰라 계열도 꽤 괜찮아 보이는데, 결국 모두 홍수라는 종말을 맞는구나’라는 느낌은 앞으로 상당히 중요한 질문으로 발전할 것 같습니다. ‘좋은 것이 남아 있다는 것’과 그 교회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은 동일하지 않다는 것, 그리고 한 교회의 종말’과 주님의 구원 역사의 종말 역시 전혀 동일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두 구별을 붙들고 앞으로 몇 개의 글을 더 읽으시면, 야발과 유발과 두발가인이 왜 가인의 후손인데도 그런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가 훨씬 자연스럽게 풀릴 것입니다.

 

 

 

AC.332, 심화 2, ‘표’를 주시면서까지 신앙을 보전하시려던 계획이 라멕 때문에 무산?

AC.332.심화 2. ‘표’를 주시면서까지 신앙을 보전하시려던 계획이 라멕 때문에 무산? 라멕에 이르러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되면, 그러면 처음 가인의 때, 그에게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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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2.심화

 

2. ‘를 주시면서까지 신앙을 보전하시려던 계획이 라멕 때문에 무산?

 

라멕에 이르러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되면, 그러면 처음 가인의 때, 그에게 를 주시면서까지 보호, 보전하고자 하셨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는 건가요?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으니, 신앙을 통해 체어리티로 갈 수 있게 하시려던 계획이 무산되었으니까요...

 

아닙니다. 바로 여기서 ‘가인의 표’를 ‘가인 계열 전체가 끝까지 신앙을 보존하도록 하신 약속’으로 이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라멕에게서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고 해서, 가인에게 표를 주신 주님의 섭리가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가인 계열 안에서는 신앙마저 끝내 소멸할 수 있도록 인간의 자유를 허용하시면서도, 인류 전체를 향한 섭리 안에서는 노아로 표상되는 새로운 교회를 위해 보존하신 리메인스를 통하여 ‘신앙이라는 길’ 자체가 소멸하지 않도록 보존하셨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AC.330의 표현을 다시 정확히 보면,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보존되었다’는 사실의 이유를 ‘이후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심어지게 될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특정한 ‘가인 교회’가 훗날 반드시 회복되어 체어리티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보존되어야 했던 것은 궁극적으로 ‘신앙’이라는 영적 기능과 질서입니다. 가인으로 표상된 것은 비록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었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신앙에 속한 어떤 것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그 자리에서 완전히 없애 버리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주님께서 ‘이제부터 가인 계열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신앙이 절대로 없어지지 않게 하겠다’고 강제하셨다는 뜻도 아닙니다. 그렇게 하신다면 인간의 자유가 사라집니다. 주님께서는 신앙을 보존하시되,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체어리티와 결합할 것인지, 아니면 계속 왜곡하여 마침내 신앙 자체마저 잃을 것인지는 자유 가운데 두십니다. 가인 계열은 후자의 길을 계속 걸었고, 그 결과 라멕에 이르러서는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표’와 ‘라멕에게 신앙이 남아 있지 않음’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하나는 주님의 섭리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이 그 섭리 안에서 자신의 자유를 어떻게 사용했는가의 차원입니다. 주님께서는 구원의 길을 보존하셨지만, 가인 계열의 사람들이 반드시 그 길을 걸어가도록 강제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주님의 계획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 그 특정 계열이 주님께서 보존하신 가능성을 끝까지 거절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창4와 창5를 함께 보아야 하는 이유가 드러납니다. 앞서 우리가 창4의 가인 계열과 창5의 셋 계열을 단순한 직선적 시간순, 그러니까 성경에 기록된 순서로만 읽지 말고, 태고교회 시대 안에서 전개된 서로 다른 교회적 흐름으로 볼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했지요. 가인 계열에서 신앙에 속한 것이 라멕에 이르러 완전히 소멸했다고 해서 ‘인류 전체에서 신앙이 소멸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가인으로부터 파생된 그 특정 교리적 계열이 그렇게 종말에 이르렀다는 뜻입니다.

 

더욱이 주님의 섭리는 그보다 훨씬 긴 시야를 가지고 있습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은 본래 ‘사랑에서 신앙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이 질서가 인류에게 더 이상 지속될 수 없게 되자, 주님께서는 결국 홍수 이후 고대교회를 통하여 ‘신앙에서 체어리티로’ 나아가는 새로운 거듭남의 질서를 세우십니다. 사람이 말씀을 통하여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체어리티가 형성되는 질서입니다. 좀 간략히 말하자면, 처음엔 그냥 타고 나던 것을 이제는 배우고 학습해서 습득해야만 내 것이 되는, 그런 처지가 된 것이지요. AC.330의 ‘이후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심어지게 될 것이었으므로’라는 말은 궁극적으로 바로 이 방향을 내다보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인의 표’를 조금 더 넓게 이렇게 이해하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보존하신 것은 ‘가인주의’가 아닙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는 왜곡을 영구히 보존하신 것도 아닙니다. 그 왜곡된 상태 안에도 아직 남아 있던 ‘신앙에 속한 것’을 완전히 파괴되지 않도록 보호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천적 퍼셉션을 잃은 뒤에는 장차 진리와 신앙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에 이를 길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글 수는 없는 것과 같은데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잘못된 결과를 낳았다고 해서, 장차 체어리티로 나아가는 데 사용될 신앙이라는 길 자체까지 없애 버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기능을 장차 올바른 질서 안에서 다시 사용하실 수 있도록 보존하십니다.

 

오히려 여기에는 아주 깊은 섭리의 원리가 하나 있습니다. 주님의 섭리는 ‘한 계열이 반드시 성공해야만 전체 계획이 이루어지는’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자유 가운데 어떤 길을 끝까지 거절하더라도 주님께서는 그 자유를 깨뜨리지 않으시면서 다른 길을 통하여 구원의 가능성을 계속 보존하십니다. 가인 계열이 라멕에 이르러 완전히 소진되었다고 해서 주님의 구원 역사가 함께 막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한 교회가 종말에 이를 때 다른 교회를 일으키시는, AC 전체에서 반복되는 질서가 여기서 이미 보이기 시작합니다. 태고교회의 한 계열이 소멸해도 주님께서는 리메인스를 보존하시고, 그것을 통하여 다음 교회를 준비하십니다.

 

이렇게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 역설이 생깁니다. ‘가인의 표’는 ‘가인이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라는 보장이 아니라, ‘가인이 실패하더라도 주님의 구원 섭리는 실패하지 않는다’는 표에 더 가깝습니다. 인간은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할 수 있고, 그것을 왜곡할 수 있으며, 심지어 라멕에 이르러 신앙에 속한 것마저 모두 소멸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실패가 주님의 섭리를 무산시키지는 못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으시면서도, 그 실패들 사이에서 리메인스를 보존하시고,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시며, 마침내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지는’ 새로운 거듭남의 질서를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AC.330 AC.332를 함께 읽을 때 ‘가인에게 표를 주셨는데 왜 라멕에게서는 신앙마저 없어졌는가?’라는 질문의 답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가인의 표’는 가인 계열의 영구 보존을 뜻한 것이 아니라, 장차 인간을 다시 체어리티로 이끄는 데 필요할 ‘신앙’이 완전히 제거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님의 섭리를 나타냅니다. 가인 계열은 자유 가운데 그것마저 잃어버렸지만, 주님께서는 인류 전체의 구원 질서 안에서 신앙을 보존하시고, 마침내 그것을 새로운 교회에서 체어리티로 가는 길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AC.332의 라멕은 ‘주님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자리’라기보다, ‘한 교리적 계열은 끝까지 타락할 수 있어도 주님의 섭리는 그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보게 하는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자유 때문에 한 교회는 종말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실패 때문에 주님의 구원 계획 자체가 종말에 이르는 일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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