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가인을 보호하시는 이유 (2025/7/14)

 

다음은 창세기 4장, 저 유명한 가인과 아벨 본문입니다.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9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10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11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12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13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1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15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16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17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4:1-17)

 

이 가인 본문을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창, 출 속뜻 주석)에서는 글 번호 AC.324-403에 걸쳐 다루고 있지만, 오늘은 한 가지, 곧 여호와는 왜 친 아우를 살해한 자를 보호하시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게 하시는,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의 속뜻에만 주목하고자 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여기에도 사실 여러 아르카나가 있어, 그리고 모두 서로 연결되어 있어 어느 하나를 분리해 내기가 쉽지 않지만, 그래도 한 가지,

 

심지어 그 신앙이, 분리된 신앙, 곧 사랑 따로 신앙 따로 신앙일지라도 신앙에 대한 폭행은 신성모독이 될 수 있다(to do violence to faith even when thus separated would be a sacrilege)

 

는 이것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 창세기 첫 열한 장, 곧 1장부터 11장까지는, 주님이 스베덴보리를 통해 알리신 바에 의하면 실제 역사가 아닙니다. 여기는 고대인들이 즐겨 사용하던 스토리텔링식 역사 서술 방식으로, 지구의 지질학적 나이가 45, 6억 년 정도임을 감안하면, 그리고 말씀에 나오는 숫자들, 특히 날 수, 연 수의 의미가 상태들과 그 변화임을 감안하면, 그래서 비록 총 11장에 불과하지만 실제로는 수천, 수만, 아니 수십, 수백만 년의 역사일지도 모릅니다. 말씀은,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인류의 출발, 그 첫 등장에 대한 역사적 사실 확인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습니다. 실제 역사는 아브라함의 등장부터입니다. 참고로, 그래서 창11까지 말씀에 나오는 인명들은 어느 한 개인의 이름이 아닌, 그 이름으로 부른 교회, 교리, 신앙을 말합니다. 즉 예를 들면, 므두셀라가 969세를 살았다는 건, 므두셀라라는 교회, 혹은 교리나 신앙이 숫자 969로 표현하는 어떤 장구한 세월 존재했다는 말입니다.

 

 

AC.66, ‘말씀의 네 가지 스타일’(AC.66)

66말씀(the Word)에는 일반적으로 네 가지 스타일이 있습니다. 첫 번째 스타일은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 스타일입니다. 그들의 표현 방식은 다음과 같았는데요, 그들은 어떤 지상에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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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사람 아담은 일곱째 날, 곧 안식일 상태, 천적 인간의 상태를 말하며, 이는 곧 태고교회를 의미합니다. 이 상태는 사랑과 신앙, 선과 진리가 하나 된 상태입니다. 여기 사랑과 신앙은 주님 사랑, 주님 신앙을 말합니다. 이때는 주님 사랑 안에서만 주님 신앙도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랬던 태고교회가 시간이 흐르자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하는 사람들이 일어났는데 이들이 곧 가인입니다. 이들은 주님을 사랑하는 일에 올인하는 대신 주님을 연구하는 일에 올인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의 신비를 탐구, 그걸 교리화하는 일에 전념하는 사람들이었지요. 당연히 이들의 삶은 이웃 사랑, 곧 체어리티를 소홀히 하는 삶이었고, 그러므로 이들은 오리지날 태고교회 입장에서 보면 이단(heresy)이었습니다.

 

반면, 이런 중에도 여전히 주님을 사랑하여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체어리티(charity)의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들이 바로 아벨입니다. 이들은 주님께 받아들여졌지만, 가인이라는 교회는, 당연한 얘기지만, 주님이 받으실 수 없었습니다. 참고로, 교회가 낳는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 이 둘 뿐입니다. 그래서 아담이라는 교회에서 가인과 아벨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불행히도 가인이라는 교회는 그럼에도 돌이키는 대신 아벨이라는 체어리티를 자신들한테서 완전히 끊어내었는데, 즉 박탈하고 말았는데, 이것을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 결과, 이제 끔찍한 삶이 펼쳐지는데요, 그러자 가인은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하소연합니다. 사람은, 교회는 오직 체어리티로만 주님과 결합하는데, 이 유일한 연결고리를 끊어냈으니, 즉 스스로 박탈하고 말았으니, 이제는 철저히 악과 거짓만 남은 상태로 큰 두려움 가운데 살아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것은, 그러자 주님은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보통 우리 같으면, 그걸 이제 알았냐? 너는 선을 넘었으니 어쩔 수 없다.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니 나는 모르겠다 보통 이럴 텐데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러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예상을 깨고, 주님은 이런 가인일지라도 그를 지키시며, 보호하십니다. 가인은 형제 살해범, 곧 이단인데도 말입니다.

 

이 아르카나의 결론만 말씀드리면, 주님의 섭리는 이후 인류의 미래를 보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류가 아벨의 길이 아닌, 결국 가인의 길을 걷게 될 걸 아시고, 비록 그가 이단이지만 그의 안에 새로운 일을 시작하셔서, 그를 통해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큰 그림을 그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가인을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이 그의 안에 새로운 일을 시작하셨다’는 표현 안에는 사실은 어마어마한 배경 이야기가 숨어있습니다. 여기서 다루기에는 무리여서 그냥 이렇게만 넘어가겠습니다.

 

※ 창4:25,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에 나오는 ‘아담(the man)과 그의 ‘아내(wife)는 앞 19절에 나오는 ‘아다와 씰라(Adah and Zillah)로 상징된 새 교회를, 이름이 셋(Seth)인 그녀의 ‘아들(son)은 새로운 신앙을 의미합니다. 가인의 계보는 역사 속에 사라지고, 아담과 하와로부터 새로운 아들이 시작되는 게 아닙니다.

 

주님은 가인에 대하여 이런 섭리를 갖고 계시는데, 이런 주님의 계획은 아랑곳하지 않고, 가인은 이단이야, 가인은 아벨을 죽였어, 그러므로 가인을 죽여야 해 하며 그에게 손을 대는 것은, 주님 보실 때 신앙에 대한 폭행이며, 곧 신성모독을 범하는 것입니다. 기억할 것은, 단지 가인에 대한 소멸만 막으셨을 뿐, 그에 대한 저주는 계속 유효하다는 사실입니다.

 

※ 저 같으면 시작부터 헝클어져서 에이, 파토났네... 그냥 다 리셋하고, 첨부터 다시 하지 할 것 같은데 주님은 그러지 않으십니다.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정말 번거로운 일을 시작하십니다. 주님은 참으로 우리가 상상할 수 없으신 신(The Divine)이십니다. 그런 분이 또 사랑의 신이신 게 얼마나 천만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이단을 대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할 많은 것을 알려줍니다. 두 가지만 말씀드립니다.

 

첫째, 이단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교리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기독교, 개신교 교리로 살아간다 하더라도 신앙 따로 체어리티 따로의 삶, 곧 자기 사랑, 세상 사랑의 삶을 산다면, 그는 주님이 보실 땐, 그가 오히려 가인의 후예, 곧 정통 이단입니다. 반면, 개신교에서 말하는 이단이라 하더라도 그가 그의 신앙 안에서 체어리티의 삶을 산다면, 그는 주님 보실 때 아벨의 후손인 것이고 말입니다. 이런 분들은 혹시 생전에 회심하지 못해도 사후, 돕는 천사들에 의해 재교육받고, 주님을 영접하여 천국에 들어갑니다. 천국은 생전에 그 속 사람의 상태가 천국을 받을 수 있는 상태인 사람이 들어가는 나라이지, 속 사람의 상태와 상관없이 무슨 라이센스만 취득하면 무조건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한 좀 더 자세한 내용은 아래 링크를 참조하세요.

 

 

HH.318, 36장, '천국의 비기독교인들'(HH.318-328)

36천국에 있는 이교도, 즉 교회 밖 사람들The Heathen, or Peoples outside of the Church, in Heaven 318일반적 견해에 의하면, 교회 밖에서 난 사람들, ‘이교도’, ‘비기독교인’이라 불리는 그들은 구원받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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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이단에 속했다고 강제로 무릎 꿇리고, 개종 기도를 시키고, 강요와 윽박, 협박과 위협을 가하는 것은 신앙에 대한 폭행이며, 주님에 대한 신성모독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나면, 이런 일을 주도한 개신교인은 아멘, 할렐루야! 오, 주님, 감사합니다. 제가 길 잃은 어린양을 구원시켰습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일은 착하고 신실할수록, 그리고 굳은 신념의 소유자일수록 더욱 아무 거리낌 없이 행합니다. 무지하기 때문인데요, 자기가 하는 일이 영혼을 살리는 일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옳고 그름, 선과 진리를 오직 학습으로만 알고, 퍼셉션(perception, 천사들과 주님 간 커뮤니케이션 방법), 곧 하늘의 음성으로는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무지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무지하더라도 혹시 주님은? 하며 늘 주님의 눈치 볼 줄은 알아야 합니다. 저런 개신교인은, 아니 어느 종교라 하더라도 자기와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 저렇게 하는 사람은 평소 그의 삶의 태도가 주님 앞에 어떤지를 여과 없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유다서에 보면 천사장 미가엘 이야기가 나옵니다.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비방하는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 (1:9)

 

천사장 미가엘조차도 심지어 마귀에 관한 일조차 주님 앞에 조심하는 것을 봅니다. 우리도 그래야겠습니다. 몰라서 그럴 수는 있으나 겸손해야 합니다. 무의식 중에라도 늘 주님을 경외하며, 모든 언변과 행실을 조심해야 합니다. 경외란 주님을 향한 거룩한 두려움입니다.

 

결론입니다.

 

가인같은 이단도 주님은 존중하셨거늘, 만일 내가 함부로 대하는 이 사람의 신앙이 오히려 아벨의 신앙이라면, 나중에 그 후과를 어떻게 감당하시려고 그러십니까? 유대인들도 신념의 사람들이었지만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 자들이 되었고, 사울 시절 바울도 그렇게 교회를 핍박, 박해하였으나 결국 거꾸러지지 않았습니까? 다른 사람을 살펴보고 그 열매가 아벨의 열매이면, 비록 내가 믿는 교리와 다르더라도 시비, 훼방, 간섭 등을 하지 말고, 그 시간에 오히려 주님 앞에 자기 할 도리만 다 하시기 바랍니다. 이 자기 할 도리’는 심지어 전도, 선교, 목회보다도 더 우선합니다. 주님의 나라는 속 사람의 나라인데, 이 속 사람은 자기 할 도리’로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굳은 신념으로 함부로 사는 사람보다는 사랑으로 늘 주님 뒤에 있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사랑보다 더 강력한 신념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언행에 있어 항상 나의 이 말과 글, 행위와 행실로 주님을 온전히 드러내고 있는가, 증거하고 있는가, 아니면 사울 시절 바울처럼 바보같이 나의 이 열심으로 오히려 주님을 욕되게 하고 있는 건 아닌가 살펴야 할 것입니다. 이 주님을 드러낸다’는 것은, 거기에 주님이 느껴지는가, 사람들이 내 말, 내 글, 곧 일상 중 나를 접하고 주님을 느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천사들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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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말렉’의 속뜻 (4)

 

 

14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없이 하여 천하에서 기억도 못 하게 하리라 15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16이르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14And Jehovah said unto Moses, write this for a memorial in the book, and put it in the ears of Joshua, that blotting I will blot out the memory of Amalek from under the heavens. 15And Moses built an altar, and called the name of it Jehovahnissi. 16And he said, Because there is a hand against the throne of Jah, Jehovah shall have war against Amalek from generation to generation.

 

 

우리 주변의 악과 거짓에 대하여 보통은 그는 악하다, 그는 거짓되다 정도로만 표현하는 데 비해 이 아말렉은 그 정도 수준에 그치는 게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말렉은 한마디로 거짓입니다. 보통은 진리가 선을 담는 그릇이듯 거짓도 악을 담는 그릇일 뿐인데, 이 거짓은 얼마나 지독한지 거짓 자체가 악일 정도인 거짓으로, 그 대표적인 속성은 은밀하다는 것입니다. 내면의 악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건 대부분 겉의 삶을 사는 사람으로서는 결코 눈치조차 챌 수 없습니다. 오늘날 가장 이상한, 분명 100% 부정인데도 언론도, 정치권도 아무도 말을 안 하는, 그래서 정말 이상한, 그래서 은밀하게 전 세계를 가장 효과적으로 망치고 있는 이 ‘부정선거’라는 이슈도 이 아말렉이라는 안경을 쓰고 보아야만 비로소 보일 정도로 이 거짓은 은밀한 거짓입니다. 이 덫에 걸리면 우리의 모든 것이 무너집니다. 어설픈 신앙으로 적당히 겉과 속 사이를 왔다리갔다리 하는 신앙으로는 말입니다. 평범한 악과 거짓의 경우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나 이 아말렉이라는 덫은 오직 100% 주님의 신성하신 진리(The Lord’s Divine Truth)로만 이길 수 있습니다. 다음은 스베덴보리가 전하는, 천사들의 아주 흥미로운 한 가지 속성입니다. (HH.278)

 

또한 그들은 무엇이 우리에게 좋은지 우리는 모른다는 것, 오직 모든 것을 살피시고 영원한 것을 섭리하시는 주님만이 아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also they do not themselves know what is good for them, the Lord alone knowing this, who looks in all things that he provides to what is eternal.

 

그들이 주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없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받는 모든 것의 근원을 주께 돌리기 때문에, 자기 본성으로부터 떨어져 있다. As they love nothing so much as to be led of the Lord, attributing all things they receive to him, they are kept apart from what is their own [proprium];

 

저는 아말렉을 생각할 때 늘 이런 천사들의 모습, 속성이 생각납니다. 그래서 제 역량이 아직 많이 미흡할지라도 제가 할 수 있는 한 천사들처럼 하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속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아말렉이라는 거짓은 더 이상 싸울 수 없는 상태가 되도록 철저히 제거되어야 하는데, 이 사실을 싸우는 진리(truth fighting against this falsity, 여호수아)가 듣고 종신(終身)토록 기억할 수 있도록 그를 도우라는 지시가 있었습니다. (14)

 

내면의 악에 속한 거짓의 사람들과 하는 이 계속되는 전쟁 중에서 주님은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우리가 거룩한 예배 안에서 주님의 지시를 기억한다면 말입니다. (15)

 

그들은 주님의 영적 나라(the Lord’s spiritual kingdom)에 폭력을 행사하기 원하기 때문에, 주님의 신성하신 능력(the Lord’s Divine power)으로 그들은 멍에 아래 끌려가 지옥에 던져져 다시는 그곳에서 기어 나올 수 없습니다. (16)

 

오늘 본문이 왜 이런 속뜻을 갖는지는 함께 첨부하는 주석본 원고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설교 역시 이 전체 주석을 다 살피기에는 너무 무리여서 몇 가지만 살피겠습니다.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write this for a memorial in the book

 

※ 여기서는 ‘’에 대한 특별한 의미만 보고 가겠습니다.

 

말씀에 나오는 생명책의 속뜻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가운데 죽은 자들이 심판받게 될 책들의 속뜻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은, 그저 하늘에 그런 책들이 있으며, 거기에는 모든 사람의 행위와 그 기억이 보존되어 있다고밖에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가령,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20:12)

 

라는 말씀을 보면, 사실 이 구절에 나오는 ‘책들(books)은 우리가 아는 일반 종이책들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생전에 행한 모든 일에 대한 기억을 의미합니다. 모든 사람은 생전 자기가 행한 모든 일의 기억, 곧 자기의 생명책을 내세에 가지고 가기 때문입니다 (AC.2474).

 

※ 다음은 이와 관련된 내용입니다.

 

사후 사람의 행위가 드러날 때, 조사하는 일을 맡은 천사는 사람의 얼굴을 살핀다. 이어 양손의 손가락에서 시작해 전신을 살펴본다. 내가 이것을 이상하게 여겼더니, 그 이유를 알려주었다. 사고와 의지에 속한 모든 것은 뇌에 새겨져 있다. 뇌에 그 출발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전신에도 새겨지는데, 이는 사고와 의지의 모든 것은 출발점에서 시작해 몸의 모든 부분으로 퍼져나가고, 가장 말초적인 것에 종착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의지와 그에 따른 생각에서 나와 기억에 새겨진 모든 것은 단지 뇌에만 새겨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전체에 새겨지는 것이며, 몸의 각 부분의 질서에 따라 거기 배열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확실한 것은 사람 전체가 그 자신의 의지와 사고와 똑같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악인은 그의 악이고, 선인은 그의 선인 것이다.265 말씀에 나오는 사람의 생명책이 의미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즉 사람이 행하고 생각한 모든 것은 그 사람 전체에 새겨져 있어 그 기억에서 불러일으키면 책 읽듯이 읽을 수 있고, 천국의 빛으로 그 영을 비추면 그 모든 것이 영상으로 나타난다. 이에 죽은 뒤의 기억에 관한 특기할 만한 점을 덧붙인다. 다만 전반적인 것뿐 아니라 아주 미세한 구체적인 것까지도 기억에 들어간 것은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나는 그곳에서 이 세상 것과 같은 저술을 담은 책들을 본 적이 있는데, 그것은 저자의 기억에서 나온 것이고, 이 세상에서 그 사람이 쓴 책에서 단 한 글자도 빠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사람의 기억에서는 아주 극미한 것까지, 심지어 사람이 이 세상에서 상실한 기억까지도 되살릴 수 있다. 그 이유는 이렇다고 했다. 사람에게는 외적 기억과 내적 기억이 있는데, 외적 기억은 사람의 자연체에 속해 있고, 내적 기억은 그 사람의 영체에 속해 있다. 사람이 생각하고, 의도하고, 말하고, 행하고, 심지어 듣고 본 것도 아주 세밀한 것까지 그의 내적, 즉 영적 기억에 새겨지고,266 거기 새겨진 것은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앞에서 말했듯이 그 모든 것은 영과 영체의 사지에 새겨지고, 그렇게 해서 그 의지에서 나온 생각과 행동에 따라 영의 모습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모순되게 들리고, 따라서 믿기 어려운 말임은 나도 안다. 그렇지만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속으로 생각하고, 비밀리에 행한 것이 행여 죽은 뒤에 감춰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때에는 모든 것이 낱낱이 백일하에 공개된다는 것을 믿기 바란다.

 

2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3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 (12:2, 3) (HH.463) //

 

주님 한 분 외에는 그 누구도 어떤 사람을 그의 행위를 따라 심판할 수 없습니다. 모든 행위는 깊이 감추어져 있는 최종 원인, 숨은 동기, 이유에서 나오기 때문인데, 사람은 이들 동기, 이유로 심판받으며, 주님 말고는 아무도 그것들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심판이라는 것은 오직 그분께만 속한 일입니다.

 

 

내가 아말렉을 없이하여 천하에서 기억도 못 하게 하리라 that blotting I will blot out the memory of Amalek from under the heavens

 

※ 여기는 내용이 중요하여 전부를 보겠습니다.

 

아말렉을 없이하여 기억도 못 하게 하다(blotting out the memory of Amalek)의 의미가 아말렉, 곧 내면의 악에서 비롯되는 거짓을 제거하는 것인 이유는, 이것, 곧 이 아말렉은 제거는 할 수 있지만, 지울 수는, 없앨 수는 없기(can be removed, but cannot be blotted out) 때문입니다. 이 거짓은 영원히 사는 지옥 정령들(infernal genii), 곧 악마들한테 있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AC.8593). 주님은 이들을 제거, 영적 교회 사람들한테로 흘러들지(flowing into) 못 하도록 막고 계시는데, 그 이유는, 이들은 이해(the understanding)에 속한 사람들의 사고(thoughts), 생각 속으로는 흘러들지 않기 때문에, 즉 지옥 악령들(infernal spirits)이 하듯 신앙에 관한 것 속으로는 흘러들지 않고, 대신 의지(the will)에 속한 사람들의 애정(affections) 속으로는, 그리고 그렇게 해서 체어리티(charity)에 관한 것들 속으로는 흘러들기 때문입니다. 이 일은 너무나 은밀하게 진행되어 어디에도 이런 일이 그들로 말미암았다는 흔적을 찾을 수 없을 정도인데요, 그런 까닭에, 만일 이들이 영적 교회 사람 안으로 흘러들면, 이 사람은 도저히 구원받을 수가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그 사람의 진리와 선에 관한 애정들을 왜곡시켜 그를 완전히 타락시킬 것이기 때문인데, 그래서 이들 지옥 정령급 악마들은 주님에 의해 주님의 영적 나라 사람들을 건드릴 수 없도록, 즉 커뮤니케이션할 수 없도록 제거, 곧 조치 되는 것입니다.

 

더욱 알아야 하는 것은, 영적 교회 사람한테는 새로운 의지가 그 지적 파트(the intellectual part)에 심겼다는 사실인데요 (AC.895, 927, 1023, 1043, 1044, 2256, 4328, 4493, 5113), 만일 이들 정령들, 그러니까 이들 삼층 지옥 악마들에게 이곳으로 흘러들어도 된다는 허락만 나면, 이들은 저 영적 교회를 철저히 파괴할 겁니다. 이들은 또 옛 의지의 유전 악 안으로도 들어가 그걸 다시 열어보려 하지만, 그러나 그 악은 여전히 닫혀 있습니다 (이런 내용은 AC.986, 1667, 2308 참조). 이들 지옥 정령들의 유입을 막기 위한 제거가 이런 식으로 시행됩니다. 이들의 거짓은 내면의 악에서 나오는 것으로, 그 자체가 악이며, 이런 악은 실제로 지적 파트 안으로는 유입될 수 없고, 대신 의지 파트 안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영적 교회 사람의 새로운 의지는 지적 파트 안에 심겼기 때문에, 이들 정령들은 여기로는 흘러들 수가 없어 결과적으로는 모든 유입에서 제거가 된 것입니다. 이를 위해 주님은 모든 지적인 것에 대해 이들 정령들이 더욱 황폐해지도록 하십니다.

 

※ 지옥이 아무리 잔머리를 굴려봐야 모든 것을 섭리하시는, 즉 미리 아시는 주님은 그들과 직접 싸우시는 대신 전체 설계를 고치셔서 저들로 하여금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게 하십니다.

 

※ 다음은 위 참조 글들 중 일부 인용입니다.

 

땅 위에서 물이 걷힌지라 the waters were dried up from off the earth (8:13)

 

이 표현의 속뜻은 ‘그러자 거짓들이 나타나지 않았다’(falsities did not then appear)인데, 그 이유는 지금까지 드린 말씀에 있습니다. 특별히 의미하는 바는, 거짓들이 이 교회에 속한 사람의 의지에 관한 것들로부터 분리되었다는 것입니다. ‘땅’(the earth)은 여기서는 인간의 의지를 의미하는데, 이는 탐욕 덩어리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땅 위에서 물이 걷힌지라’라고 한 것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그의 ‘지면’(ground)은 그의 지적 파트(intellectual part)에 있습니다. 여기엔 진리들이 파종되어 있지요. 진리들은 절대로 의지 파트(will part)에 파종되지 않습니다. 영적 인간에게 있어 이 의지 파트는 지적 파트와 분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표현은 같은 구절 끝에 가서 ‘지면에서 물이 걷혔더니’로 바뀝니다. 태고 교회에 속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지면은 그의 의지 안에 있었습니다. 거기에 주님은 선들을 파종하셨고, 그러자 그 선들로부터 인간은 진리를 알고 지각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으로부터 신앙을 가질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만일 이 방법이 현재까지도 이어졌다면, 인간은 영원히 사라질 수밖에 없었을 것인데요, 인간의 의지가 철저하게 부패, 오염됐기 때문입니다.

 

이런 파종을 인간의 의지 파트에 하는 경우와, 아니면 지금처럼, 그의 지적 파트에 하는 경우가 어떤 건지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고려하면 분명해집니다. 태고 교회에 속한 사람에게는 그의 유아기 때부터 선과 진리에 관한 퍼셉션이 시작, 계시들이 주어졌는데, 놀라운 것은, 이들 계시가 그의 의지 파트에 파종되었기에 그는 새로운 가르침 없이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걸 지각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현대인들이 주님으로부터 배우고 알아야 할, 그러나 여전히 그 모든 애를 써서도 그 천분의 일도 알 수 없는 모든 특별하고 특이한 것들을 그는 하나의 일반 원리로부터 알 수 있도록 말입니다. 반면, 영적 교회에 속한 사람의 경우는, 그는 현재 배우고 있는 것밖에는 모르며, 이런 식으로 자기가 아는 걸 참이라 붙들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심지어 거짓된 걸 배워도 그것이 자기 마음에 참이라 여겨지면 그는 그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무슨 다른 퍼셉션이 없어, 그냥 그것이 그렇다고 설득되기 때문입니다. 양심을 가진 사람들은 양심으로부터 어떤 딕테이트를 받지만, 이 딕테이트라는 게, 어떤 게 참인 이유는, 그렇게 들었고, 그렇게 학습했기 때문이라는, 참 어처구니없는 거라는 거 말고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것이 그들의 양심을 형성하는 것이며, 거짓된 것에 관한 양심을 가진 자들의 경우를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 이것이 오늘날 ‘오직 믿음’, ‘오직 은혜’의 신앙을 학습한 사람들의 영적 실상이며, 정말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다음과 같은 사람들은 사후 이런 정령들, 그러니까 삼층 지옥 악마들이 되는데요, 이들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기 위해 끊임없이 궁리하고, 이런 악한 생각들이 떠오를 때마다 크게 기뻐하며, 악을 행하면서도 은밀하게, 그리고 타인을 이용해서 하는, 그래서 아무도 이런 짓을 자기들이 하는 줄을 모르게 최대한 조심하면서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겉으로는 겸손하고 예의 바르며, 친구 같고 그리스도인들처럼 보이는데요, 이들의 평소 말과 일상생활을 보면 말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사실은 위선자요, 그 속은 사기성이 농후한 호랑이들입니다. (AC.895, 8:13)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and called the name of it Jehovah-nissi

 

※ 여기서는 특별히 민수기 유명한 놋뱀 본문만 보겠습니다.

 

8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9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21:8, 9)

 

놋뱀이 주님을 표상하는 것은 요3:14, 15를 보세요. 이 역시도 보호를 의미함이 분명한데요, 장대에 달린 뱀을 바라봄으로써 나을 수 있었던 것은, 주님 신앙으로 거짓의 악으로부터 치유되는 걸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4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3:14, 15)

 

 

이르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and he said, Because there is a hand against the throne of Jah

 

※ 한글 성경에는 단순히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이라고만 번역되어 있지만, 사실은 ‘여호와의 보좌를 대적하고자 하기에’라는 본문이 생략된 것입니다. 이 내용 역시 중요하여 전체를 보겠습니다.

 

이 표현의 속뜻은 ‘그들이 주님의 영적 나라에 폭력을 행사하기 원하기 때문에(because they wish to do violence to the Lord’s spiritual kingdom)인데, 그 이유는, ‘누구에게 손대는 것(a hand against anyone)은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Jah)의 보좌(the throne of Jah)는 주님의 영적 나라를 각각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Jah)의 보좌’가 주님의 영적 나라를 가리킨다는 것은, ‘보좌’라는 말은 주님의 왕권(royalty)을 서술할 때 쓰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영적 나라는 그분의 왕권과 상응합니다. 주님에 관한 서술 관련,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성직(priesthood), 다른 하나는 왕권(royalty)입니다. 천적 나라는 그분의 성직, 영적 나라는 그분의 왕권에 상응합니다. 주님을 신성하신 선(Divine good) 관련해서는 ‘제사장(Priest)으로, 신성하신 진리(Divine truth) 관련해서는 ‘(King)으로 부릅니다. 이 후자, 곧 신성하신 진리는 ‘그리스도(Christ)라는 이름에, 전자인 신성하신 선은 ‘예수(Jesus)라는 이름에 그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AC.1728, 2015, 3004, 3009, 6148 참조). ‘보좌’는 주님의 왕권, 그러니까 주님의 영적 나라에 관한 서술에 사용됩니다. ‘(Jah)도 같습니다 (‘보좌’의 의미는 AC.5213, ‘’는 AC.8267 참조).

 

주제 자체, 즉 아말렉으로 표상되는 자들, 이들은 내면의 악으로 말미암는 거짓 안에 있는 지옥 정령들인데, 이들이 주님의 영적 나라에 대해 폭력 행사하기를 원한다는 것은 위에서(AC.8593, 8622) 이미 보았습니다. 이런 악의 거짓(the falsity of this evil) 안에 있는 자들은,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그분 안에 있는 인성(the human in Himself)을 신성(Divine)으로 만드시기 전까지는 영적 교회에 속한 사람들로부터 멀어질 수 없었습니다. 그 후 그들은 지옥에 갇혔고, 다시는 일어설 수 없습니다. 더욱이 인플럭스(influx)를 통해 이루어지는 커뮤니케이션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영적 교회에 속한 사람은 신앙의 진리에 대해 모호함 가운데 있으며, 그것을 진리로 인정하는 것도 교회가 그렇게 말해와서지, 그가 그걸 진리로 지각해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이 진리는 선이 되며, 결국은 양심 문제가 됩니다. 만약 악성 정령들(malignant genii)이 영적 교회에 속한 사람들의 모호함 가운데로 흘러들게 되면, 이들은 수천 가지 방식으로 저들의 양심을 파괴할 것입니다. 이들은 거기 있는 신앙의 진리를 상대로 행동하지 않고, 저들의 애정 그 자체를 상대로 행동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어디서든지 선한 애정이 조금이라도 감지되는 순간, 잽싸게 그것을 왜곡, 절대 감지될 수 없도록 은폐합니다. 이들은 바로 그 목적을 공격합니다. 한마디로, 그들의 악의(malignity)는 형용할 수 없을 정도지만, 뼛속 깊이 관통하는, 안 보이는 죽음의 독에 비유할 수 있겠습니다. 이들 정령들에 관해서는 각 장 끝에서 다루는 주님의 자비에 관한 경험을 말씀드릴 때 더 다루겠습니다.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Jehovah shall have war against Amalek from generation to generation

 

이 표현의 속뜻은 ‘그들은 멍에 아래 끌려가 지옥에 던져지는데, 그곳에서 그들은 주님의 신성하신 파워 때문에 결코 기어 나올 수 없음(they were brought under the yoke and were cast into hell, from which by reason of the Lord’s Divine power they can never rise up)인데, 그 이유는, ‘여호와가 싸우리라(Jehovah having war)의 의미는 지옥으로 던진다는 것이고, ‘대대로(from generation to generation)의 의미는 영원히 그 상태에 있게 되며, 그래서 그들은 그곳에서 결코 다시 기어 나올 수 없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신성하신 파워 때문이라는 것은 바로 위 AC.8625 참조) ‘여호와가 싸우리라(Jehovah having war)의 의미가 지옥으로 던진다는 의미인 것은, 이것이 영원한 승리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지옥 정령들은 절대 결코 여호와, 곧 주님을 상대로 전쟁하거나 싸울 수 없습니다. 가끔 악 가운데 있는 자들을 예속시키느라 그들은 싸우고, 심지어 이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여전히 여호와(the Divine)를 상대로 대항할 힘이 그들에게는 전혀 없습니다. 신성하신 파워(Divine power), 주님의 능력이 실린 단 한 번의 끄덕임으로도 저들 악마의 무리 전체가, 심지어 그 수가 수천수만(myriads of myriads)이라 할지라도 즉시 제압됩니다. 그러나 여전히 저들에게 기회가 주어집니다. 저들의 행위가 무슨 쓰임새가 있는 한은, 저들의 악이 주님에 의해 선으로 바뀔 수 있는 한은 말이지요. 이 주제에 대해서는 주님의 자비로 다른 데에서 다루겠습니다. 이 모든 것으로 어느 정도 알 수 있는 사실은,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Jehovah having war with Amalek from generation to generation)가 의미하는 바는 저들을 사로잡아 지옥에 던짐이며, 주님의 신성하신 파워로 그들은 그곳에서 결코 기어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상으로 지난 4주에 걸친 아말렉 이야기를 마칩니다.

 

이 ‘아말렉’이라는 거짓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1. 겉과 속, 내적(internal), 외적(external), 내면(interior), 외면(exterior)이라는 게 뭔지, 이게 왜 중요한 건지

 

2. 다른 건 진리를 공격하는데 유독 이 아말렉이라는 거짓은 왜 선을 공격한다는 건지, 다른 말로는 왜 이해(understanding)가 아닌 의지(will)를 공격한다는 건지

 

3. 주님이 홍수 이후 인류에게는 왜 그의 의지 파트(will part)가 아닌, 지적 파트(intellectual part)에 새 의지를 임플란트하셨다는 건지

 

4. 홍수 전 인류와 홍수 후 인류의 차이가 뭔지, 도대체 홍수를 초래한 태고교회 후손들은 사람 안에 무슨 짓을 한 건지, 무슨 짓을 했길래 주님이 사람 안의 설계를 변경하셔야만 했는지

 

등을 깊이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느끼시겠지만, 이들 내용은 결코 간단치가 않습니다. 그렇게 몇 줄 문장으로 답할 수 있는 내용이면 굳이 창세기, 출애굽기 풀이를 총 10,837개의 글, 전체 8권의 볼륨, 8(1749-1756)에 걸쳐 기록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전지전능, 무소부재하신 신이십니다. 주님의 사랑과 지혜는 조금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를 통해 남기신 수십 권의 저작도 결국은 그 모든 것이 이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창출 속뜻 주석, 라틴)에서 출발합니다. 이 저작을 어떤 주제, 어떤 안경으로 보느냐에 따라 그때마다 새로운 책이 정돈되어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은 이 책, 이 저작으로 돌아가야 하며, 그래서 이제 다음 주부터 이 대하(大河)와도 같은 ‘창세기, 출애굽기 속뜻 강해’를 시작합니다. 다만 그 내용의 장구함으로 인해 일일이 살폈다가는 제 기력이 다할 때까지 끝을 못 볼 것 같아 그건 그때마다 원고로 대신하고 대략적으로 묶어 설교하겠습니다. 다만 이 일에 한결같이 정주행할 수 있도록 주님이 제 주변 안팎을 고요하게 다스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복음서에 보면 가끔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셨습니다. 주님은 포도나무 비유, 돌아온 탕자 비유 등 정말 명쾌, 명료한 쉬운 풀이로 배움과 상관없이 누구나 천국 이 어려운 아르카나를 알아들을 수 있게 가르치셨지만, 그러나 그런 주님조차 어찌하실 수 없는 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바로 안 들으려고 귀를 틀어막고, 마음에 커텐을 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주님도 어찌하실 수가 없으십니다. 주님은 사람의 의지를 억지로 강제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문제입니다. 마음, 곧 내면을 열고, 다가오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들릴 것입니다. 이런 분들에게 주님의 놀라우신 은혜가 임할 것입니다. 아멘!

 

설교

2025-07-13(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7-13(D1)-주일예배(2606, 출17,14-16, AC.8618-8626), '아말렉'의 속뜻 (4).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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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7-13(D1)-주일예배(2606, 출17,14-16, AC.8618-8626), '아말렉'의 속뜻 (4) - 주석본.pdf
0.59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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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사랑한다면 덜 사랑해야... (2025/7/9)

 

이건 정말 중요한 말입니다. 아내도, 남편도, 부모, 자식, 심지어는 손주들 등 핏줄과, 그리고 혈육까지도, 정말 사랑한다면 덜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보다는 말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10:37)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을 지옥은 평소 눈여겨봐 뒀다가 기회가 포착되면 아주 집중적으로, 그리고 집요하게 공격, 그들을 통해 결국 우리를 무너뜨립니다. 사랑이 깊을수록 더 하며, 애정이 진할수록 더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입술로 주님, 사랑해요 고백해도 우리의 겉과 속이 다르면, 그 고백은 소용없습니다.

 

내가 사랑한다고 아무 생각 없이 애지중지, 그냥 자식 일이라고, 그냥 손주 일이라고 부주의하게 눈 돌아갔다가는 큰일납니다. 내가 꾹 참고 시치미 뗐더라면, 그 순간 주님을 먼저 생각했더라면, 지옥의 공격 대상에서 비껴갈 수 있었던 자녀가, 손주가, 부모님이, 나의 부주의로 내가 사실은 주님보다 이들을 더 사랑한다는 게 들통나는 바람에 발각, 지옥의 공격 대상이 되어 시달림을 받게 되니 말입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가장 안전하게 이들을 사랑하는 방법은, 이들을 모두 이들 모습으로 내 곁에 계신 주님으로 여기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응으로 사랑하는 것인데, 그러면 그 사랑은 안전하며, 보호받습니다. 즉 그때는 지옥이 이들을 건드릴 수 없습니다. 적어도 본인들이 자초하지만 않는다면 말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핏줄을 비롯, 모든 걸 상응으로 사랑해야 안전하다는 것은, 그래야 우리가 선을 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인데, 선을 넘지 않는다는 것은, 그저 우리는 우리 할 도리만 다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들이, 설령 악령들의 부추김을 받아 우리에게 못되게 굴어도 우리는 주님 앞에 자기 할 도리만 다하고 물러나면 되기 때문에, 지옥 입장에선 도무지 무슨 엿볼 틈이 생기질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상응(相應, correspondence)은, 천국과 지상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이 천국에, 천국에서 일어나는 일이 지상에 영향을 미친다는 아르카나(arcana, 秘義, secret)인데요, 여기엔 주님의 신성, 곧 주님의 능력이 깃들어 있어, 말씀에 나오는 모든 기적 또한 이 상응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저는 상응으로 살기 원합니다 하는 기도를 늘 하면서 사는 것이 좋습니다. 이 기도에는 정말 많은 것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얘를 어떻게 키웠는데, 내가 부모님을, 내가 남편을, 내가 아내를, 내가 그동안 교회를 어떻게 섬겼는데, 내가, 내가, 내가... 이런 생각이 들면, 언제든 화들짝,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물러나시기 바랍니다. 지옥에서 오는, 악한 영들의 부추김이기 때문입니다. 저들의 이런 부추김에 넘어가면 그때부터 우리는 그 모든 공을 자기에게 돌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중간에 돌이키지 않으면, 물거품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살아오면서 기울인 모든 사랑과 헌신, 정성과 힘의 공로를 모두 주님께 돌려야 합니다. 천사들처럼 말입니다. 모든 것을 주님의 공로로 돌릴수록 그는 천국이며 천사이지만, 모든 것을 자기 공로로 돌릴수록 그는 지옥이며, 악령입니다.

 

핏줄이, 혈육이 저 정도니 돈, 건강, 성취와 보람, 자랑, 명예, 권세 같은 건 말할 것도 없습니다.

 

오직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 삶의 가장 첫 자리, 그리고 삶의 영 순위에 주님을 모시는 사람은 지옥이 학을 떼고 물러납니다. 이런 사람은 삶의 저런 여러 영역을 아무리 찔러봐야 끄떡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욥1:22)

 

그 결과는 나는 물론이요, 내 주변도 평안합니다. 공격 대상을 찾는 지옥의 스캐닝에 포착되지 않으니 말입니다. 적어도 나랑 관련된 일에 관해서는 말이지요. 이것이 내 모든 핏줄을 사랑하는 진정한 방법이며, 그들을 주님의 보호 아래 들어가게 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다음 계명에 들어있습니다.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22:37, 38) 

 

4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5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6: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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