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05(D1)-주일예배(2542, 눅18,31-34),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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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의 속뜻

 

 

31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32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33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34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그들이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눅18:31-34)

 

 

율법과 예언서에는 주님에 대해 기록한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이 말의 의미는 주님이 지옥을 정복하심으로 해서 의롭게 되셨고, 천국을 질서 아래 두셨으며, 당신의 인성을 영화롭게 만드셨고, 또한 그렇게 해서 인간이 거듭나고 구원받는 것을 의미한다. (천국의 비밀 10239:4, 이순철 역) Therefore when the Lord suffered John to baptize him, he said: Thus it becometh us to fulfil all the righteousness of God (Matt. 3:15). “To fulfill all the righteousness of God” denotes to subdue the hells by his own power, and reduce them and the heavens into order, and at the same time glorify his human; which things were done by means of temptations admitted into himself, thus by means of continual combats with the hells, even to the last on the cross. (That this is the “righteousness” which the Lord fulfilled, see n. 9486, 9715, 9809, 10019, 10152.) The like things are also signified by “all things being fulfilled which were written concerning the Lord in the law and the prophets” (Luke 18:31; 22:37; 24:44); and by the Lord’s coming “to fulfill all things of the law” (Matt. 5:17, 18).

 

※ 위 내용은 출30:19,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그 두멍에서 수족을 씻되(And Aaron and his sons shall wash from it their hands and their feet)에 관한 속뜻 주석 중 일부입니다.

 

 

※ 아래 본문 중 ‘개인적으로는’은 이 설교의 원 저자이신 이순철 목사님 본인을 가리킵니다.

 

새 교회에 입문하면서 개인적으로는 말할 수 없이 많은 것들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큰 소득은 성경의 내적 의미, 곧 속뜻에 대해 잘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전에는 성경을 읽으면서도 큰 감동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얼마나 인간을 사랑하시는지 실감이 잘 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아마 그렇겠지요. 그래서 그런지 주변에 교회 다니는 친구들을 보면 성경을 대하는 태도가 제각기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의 기록들이 실제와 다르다면서 성경의 완벽함을 의심합니다. 왜 우리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어야 하느냐 의문을 던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경은 따지지도 묻지도 말고 그냥 믿어야 한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단순하게 말씀에 따라 살려고 애쓰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름대로는 모두 독실한 신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오늘날 기독교 신앙의 뿌리가 그렇게 튼튼하지가 않구나 하는 것입니다. 이유가 뭘까요? 하나님을 잘 믿으려면 먼저 하나님에 대해서, 그리고 말씀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하는데, 그냥 맹목적으로, 아, 표현이 좀 그런가요? 말씀의 내적 의미, 즉 그 속뜻을 모른 채 그냥 겉 글자만 믿기 때문이지 싶은데요, 그것은 잘 모르는 어떤 존재, 즉 그 존재의 겉만 믿는 것과 같으며, 그러므로 진정한 믿음이라 볼 수 없지 않을까 저 개인적으로는 생각합니다.

 

새 교회에서는 성경은 문자, 즉 겉 글자로 된 외적 의미, 그러니까 겉뜻과, 그 속의 내적 의미, 즉 속뜻으로 이루어진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문자적 의미로만 말씀을 이해하면 여러 가지 오해가 생길 수 있다는 말씀이지요. 예를 들면, 앞에서 어떤 분이 말씀에 기록된 내용들이 실제와 많이 다르다고 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말씀의 문자적 의미는 내적 의미를 나타내기 위한 수단이며, 그러므로 그 자체로는 진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오류가 없는 완전한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문자적으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내적 의미로 볼 때 그렇다는 것이며, 그래서 우리는 말씀의 내적 의미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적 의미를 통해 볼 때, 성경에는 어떤 내용이 들어있을까요? 첫째는, 인류가 생긴 이래로 존재 했던 교회들의 역사가 있습니다. 내적 의미에 따르면,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된 교회는 아담과 그 후손들로 표상되는 태고교회입니다. 태고교회 다음에는 노아와 그의 후손들로 표상되는 고대교회가 있었고, 그 후에는 야곱의 자손들로 표상되는 유대교회가 있었습니다. 유대교회는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 해서 스스로 무너졌습니다. 유대교회가 있던 자리에 세워진 것이 현 기독교회입니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인류를 위한 마지막 교회인 새 교회가 등장합니다. 그 교회를 요한계시록에서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계21:2, 10)이라고 합니다. 내적 의미를 통해 성경에 기록된 두 번째 내용은 주님에 관한 것입니다. 창세기와 예언서, 그리고 복음서의 기록들은 주님이 오실 것에 대한 예언과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어떻게 인류를 구원하시는지 그 과정들을 소상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세 번째 내용은 인간의 영적 거듭남에 관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 1장과 2장에는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 창조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데, 내적 의미로 볼 때, 그것은 자연계의 창조가 아니라 인간이 거듭나는 과정을 그린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은 이와 같이 주님에 대해, 그리고 하늘의 천국과 지상의 교회에 대해, 또한 신앙인들의 거듭남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 곧 그 속뜻을 통해 이러한 것들을 이해할 때, 우리는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고, 그때 비로소 주님을 굳게 믿고 따를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것은 인간에게 참된 진리를 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주님이 입으신 인간은 선 그 자체이신 여호와에게서 나오는 진리 그 자체였습니다. 그렇다고 주님이 처음부터 완전한 인간이요, 완전한 진리로 오신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인간(human) 안에는 어머니 마리아에게서 받은 유전적인 속성들이 남아 있어서 그것을 완전히 벗으셔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로부터 받은 유전적인 것들을 벗는 일은 불완전한 몸을 통해 지옥의 시험을 불러들여 그것을 완전히 이기심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십자가의 마지막 시험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을 때, 비로소 주님은 신성한 인간(Divine Human)이 되셨으며, 동시에 완전하고 신성한 진리가 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이 마지막 시험인 십자가 고난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 담담하게 말씀하십니다. 주님께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까요? 먼저 본문 31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31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말씀에서 ‘열둘’(’12)이라는 수는 믿음 또는 믿음에 관한 모든 것을 나타냅니다. ‘열둘’(12)이라는 숫자에 그런 의미가 있기 때문에, 말씀에는 주님의 제자들을 ‘열두 제자’로 표현을 했고, 이스라엘을 또한 ‘열두 지파’로 표현했습니다. 따라서 본문에 나오는 주님의 열두 제자는 주님을 믿는 모든 사람을 뜻하며, 또한 그들의 다양한 믿음을 나타냅니다. 주님을 믿는다 하지만 사람들의 믿음이 모두 같지는 않습니다. 베드로나 요한과 같은 믿음이 있는가 하면, 도마와 같은 믿음도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모든 사람을 함께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십니다. 예루살렘은 주님이 마지막 시험을 당하실 고난의 현장입니다. 그러나 내적 의미로는 하나님의 성전을 뜻하고, 또한 사람의 내면에서는 하나님이 계신 곳인 속 사람을 뜻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자고 하시는 것은 주님에게는 십자가의 시험을 통해 당신의 인성과 신성이 하나 되는 것을 의미하고요, 제자들에게는 시험을 통해 겉 사람과 속 사람이 하나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곧 영적 성장을 의미하기 때문에 말씀에서는 표현하기를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 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또 선지자들을 통해 기록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과 관련해서 ‘천국의 비밀’ 10239번 글의 4항은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과 예언서에는 주님에 대해 기록한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고 말하는데, 그 의미는 주님이 지옥을 정복하심으로 해서 의롭게 되셨고, 천국을 질서 아래 두셨으며, 당신의 인성을 영화롭게 만드셨고, 또한 그렇게 해서 인간이 거듭나고 구원받는 것을 의미한다.

 

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선지자들의 예언은 주님이 세상에 오실 것과 지옥을 정복하시고, 그 능력으로 인류를 구원하시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선지자들을 통해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것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지금 올라가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는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그것에 대해 32절과 33절에서는,

 

32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33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말씀에서는 주님에 대해 ‘인자’(人子), 즉 사람의 아들이라 부르기도 하고, 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주님을 사람의 아들이라 할 때는 주님의 인간 안에 있는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를 때는 주님의 인간 안에 있는 선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시험을 당하실 때 주님은 왜 당신 자신을 인자라고 부르실까요? 그 이유는 지옥의 영들은 선은 공격하지 못하고, 오직 진리만 공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에서 주님은 인자가 욕을 당하고, 채찍질과 침 뱉음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욕을 먹고 채찍질을 당하는 것은 주님의 교회가 말씀의 진리를 왜곡하고 더럽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욕을 당하시는 주님은 말씀이시며, 진리 그 자체이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모진 고난을 당하시고,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주님이 삼 일 만에 일어나신 것은 시험을 통해 주님의 인성이 신성과 하나가 되신 것이며, 그렇게 해서 완전하고 신성한 진리가 되신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에서 ‘’(3)은 완전한 성취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모든 일을 한 번에 이루시지 않습니다. 한 번 하시고, 두 번 하시고, 마지막 세 번째 이루십니다. 그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세 번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릴 때는 3시에 못 박히시고, 6시까지 견디시며, 마지막으로 9시에 숨을 거두셨습니다. 교회가 무너질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는 한 번 참으시고, 두 번 참으시며, 마지막으로 교회 안에 믿음과 사랑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그때 비로소 교회의 문을 닫으십니다. 교회가 타락하는 모습을 마가복음 12장에서는 포도원을 세로 얻은 농부들이 주인이 보낸 종을 때리고, 두 번째 보낸 종을 또 때리며, 마지막에는 주인의 아들을 죽이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또 마태복음 26장에는 베드로가 닭이 울기 전 주님을 세 번 부인하는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당시 유대교회의 신앙을 의미합니다.

 

주님이 당신의 고난에 대해 말씀하실 때, 제자들은 그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본문에는 주께서 그들에게 말씀의 의미를 감추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왜 말씀의 의미를 감추셨을까요? 첫째는, 진리를 받을 준비가 안 된 사람에게 진리를 주면, 그것을 더럽힐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더럽히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십자가의 마지막 시험을 이기시기 전 주님은 아직 완전한 진리가 아니셨기 때문입니다. 그와 관련해, 요한복음 14장 25절 이하에서는,

 

25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26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하십니다. 주님이 보내주시겠다고 하신 보혜사 성령은 말씀의 내적 의미를 통해 밝혀주시는 신성한 진리를 의미합니다. 주님은 언제 그것을 보내주실까요? 그것에 대해 ‘참된 기독교’ 791번 글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천국에서 마지막 심판을 끝내신 후, 세상에서 그를 따르던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셨다. 그리고 다음 날 그들 모두를 온 영계로 보내 다니엘서 7장 13절과 14절의 예언, 즉

 

13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14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고 한 예언에 따라 주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가 다스리신다는 것과 그의 나라가 세세토록 있을 것이라는 복음을 가르치게 하셨다. (이순철 역)

 

Note: After this work was finished the Lord called together his twelve disciples who followed him in the world; and the next day he sent them all forth throughout the whole spiritual world to preach the gospel that the Lord God Jesus Christ reigns, whose kingdom shall be for ages and ages, according to the prediction in Daniel (7:13, 14), and in Revelation (11:15).

 

Also that blessed are those that come to the marriage supper of the lamb (Rev. 19:9).

 

This took place on the nineteenth day of June, 1770. This is what is meant by these words of the Lord:

 

He shall send his angels and they shall gather together his elect, from the end of the heavens to the end thereof (Matt. 24:31).

 

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해서 신적 진리 그 자체이신 주님에게서 나오는 보혜사 성령, 즉 신성한 내적 진리가 천국을 통해 지상에까지 전파되게 된 것입니다. 참된 기독교 791번 글은 그 일이 일어난 때를 지상의 시간으로 1770년 6월 19일이었다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선지자들이 당신에 대해 기록한 모든 것을 이루자고 하십니다. 주님은 왜 예루살렘에 제자들과 함께 올라가려고 하실까요? 주님은 바로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한편으로는 고난을 당하시고, 한편으로는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시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은 주님을 욕되게 하거나 채찍질을 할 수 없습니다. 진리를 아는 사람들이 그렇게 합니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얼마나 주님께 함부로 했을까를 생각하면 말할 수 없이 부끄럽고 두렵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주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는 사실에 설레고 기대가 됩니다. 항상 자신을 낮추시고, 주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끝까지 싸워 이기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새 교회의 모든 성도와, 그리고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분과 함께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6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7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사42:6-7)

 

아멘

 

2022-02-13(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5-05(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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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의 속뜻

 

 

18어떤 관리가 물어 이르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9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20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21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22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3그 사람이 큰 부자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24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25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26듣는 자들이 이르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27이르시되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28베드로가 여짜오되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29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30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눅18:18-30)

 

 

생명은 곧 주님이시며, 그러므로 구원과 천국을 뜻한다. 그 이유는 생명에 속한 모든 것이 하나의 근원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생명의 유일한 근원은 주님이시며, 천사와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형상에 불과한 것이다. (계시록 해설 186:11, 이순철 역) Life” signifies the Lord, and thence salvation and heaven, because all of life is from one only Fountain, and that only Fountain of life is the Lord, while angels and men are merely forms receiving life from Him. (AE.186:11)

 

 

주변을 돌아보면 머리가 좋고 근면할 뿐 아니라 성격까지 좋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이들은 무슨 일이든 적극적으로 하고, 인간관계도 좋아서 대부분 자기 분야에서 성공합니다. 그들 중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헌금도 많이 하고, 봉사활동도 열심히 해서 모두가 그를 좋아하고, 또 부러워합니다. 그러다 보니 겉으로 내색은 않지만 속으로는 살짝 자부심이 있을 수 있는데요, 오늘 본문에 주님을 찾아온 관리가 바로 그런 사람이 아닐까 합니다. 그는 세상에서도 성공을 거뒀고, 신앙생활도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남 부러울 게 없어 보이는 그가 오늘 주님을 찾아온 이유는 뭘까요? 어쩌면 그는 세상에서 인정받은 것처럼 주님한테도 인정받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성공했다고는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 알 수 없는 어떤 공허함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의 문제가 뭔지,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에게 어떤 답을 주셨는지 본문의 의미를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18절입니다.

 

18어떤 관리가 물어 이르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관리가 이르기를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주님께 물었습니다. 잠깐 있다 사라질 육신의 생명을 만드는 것이 자연의 음식이라면, 영생을 만드는 것은 영적인 음식인 주님의 선과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라는 말은 어떻게 해야 진정한 선과 진리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19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그러자 주님께서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답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영생에 대해 묻는 사람에게 질문의 요지와는 다소 거리감이 느껴지는 얘기를 하십니다. 즉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영원한 생명을 만드는 선과 진리는 인간에게서는 나오지 않고 오로지 한 분 하나님에게서만 나오기 때문입니다. 영생 얻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아무리 진실한 말을 하고, 선한 일을 하더라도 주님으로부터 하지 않고, 즉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고, 자기 자신으로부터만 한다면 그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으로부터는 선과 진리가 아니라 악과 거짓만 나오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렇게 영생의 근원이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영생을 얻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 알려주십니다. 그것에 대해 20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20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십계명의 자연적 의미, 곧 겉뜻과 영적인 의미, 곧 속뜻을 모두 온전히 지켜야 합니다. 십계명을 온전히 지킨다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십계명의 겉뜻은 문자 그대로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속뜻에 대해서만 살짝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간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속뜻으로 간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인간의 생각을 섞어 더럽히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진리를 거짓으로 만드는 불경한 일이므로 절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두 번째는, 살인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살인은 진리가 아닌 거짓, 또는 선이 아닌 악을 사람들에게 주입해 그들을 영적으로 죽이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짓을 하면 안 됩니다. 세 번째는, 도둑질하지 말라 하십니다. 속뜻으로 도둑질은 다른 사람에게 거짓 진리를 가르쳐 그들에게서 진리를 빼앗거나 훔치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 역시 하지 말아야 합니다. 네 번째는, 거짓 증언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거짓 증언을 하지 말라는 것은 위선이나 위증, 사기, 또는 거짓으로 남을 모함하는 일 같은 거짓된 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는, 부모를 공경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과 교회를 마음을 다해 섬기라는 뜻입니다. 말씀에서는 주님과 교회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로 비유하는데요, 그렇게 볼 때, 신앙인들에게 영적 부모는 주님과 교회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와 같은 십계명의 가르침들을 자연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지키되 스스로 하듯, 즉 자발적으로 하듯 주님을 의지해 지키라고 하십니다. 계명을 지키는 모든 능력이 오직 주님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21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관리가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십계명에 관한 한, 그는 자기는 흠 없는 사람이라 생각한 듯합니다. 그동안 자연적인 의미를 철저히 지켰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의 말을 들으시고,

 

22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주님께서는 네게 있는 것을 다 팔라 하십니다. 주님은 무슨 뜻으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정말 재산을 모두 팔라는 뜻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네게 있는 것’은 첫째는, 잘못된 교리 관련 지식들입니다. 예를 들면, 주님 당시에는 유대교회의 장로들의 전통 같은 것이고, 오늘날에는 개혁교회 교리의 주류인 믿음만의 교리, ‘오직 믿음’의 교리 같은 것입니다. 둘째는,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에 속한 욕망과 그것에서 비롯된 거짓들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있는 동안에는 참된 진리와 선이 주님으로부터 흘러들어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네게 있는 것을 버리라 하시고, 그래야 하늘에서 보화, 즉 참된 진리와 선이 내려올 것이라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또 나를 따르라 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것은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에 끌려다니지 말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23그 사람이 큰 부자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관리는 큰 부자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는 근심에 빠졌습니다. 그 모습을 보시고 주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25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낙타는 감각을 통해 습득한 자연적 지식을 말합니다. 그리고 바늘귀는 영적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은 인간의 지식과 감각을 바탕으로, 그리고 그렇게 해서 습득한 세상 학문을 가지고 천국을, 영적 진리를, 신앙의 신비를 추론, 접근, 들여다보고자 하는 걸 뜻합니다. 낙타가 어떻게 바늘귀로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자연적인 것으로 영적인 것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 비유를 드신 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게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부자는 어떤 사람이기에 그토록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운 것일까요? 여기서 부자는 말씀에 대한 지식이 많고, 영적 통찰력까지 갖춘 사람입니다. 문제는 그가 그러한 지식과 지적 통찰력을 바탕으로 스스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는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은 인간의 지식이나 총명함으로 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주님이 주시는 신앙의 진리와 선으로만 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찾아온 그 관리에게서 성실, 근면 같은 장점들을 보셨습니다만, 그러나 동시에 지적 교만도 보셨습니다. 그것은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비롯한 것인데요, 그래서 주님은 너에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하시고 네게 있는 것을 다 버리고, 나를 따르라 하신 것입니다.

 

26듣는 자들이 이르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27이르시되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그러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라고 주님께 묻습니다. 주님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나 자라면서 배우고 익힌 수많은 지식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나름대로 모두 총명하다 생각합니다. 그런 것들 때문에 신앙인들조차 중요한 결정을 할 때, 주님의 뜻을 따르기보다 자신의 판단에 따라 결정들을 하지요. 그 배경에는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비롯한 욕망들이 있는 것입니다. 자아와 세상으로부터 오는 욕망들은 인간의 힘으로는 이길 수 없고, 오직 주님의 능력으로만 이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8베드로가 여짜오되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29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30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주님께서 끝으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집이나 아내, 형제와 부모 자녀들은 그 속뜻으로는 모두 자아에 속한, 악하고 거짓된 것들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세상 사는 동안 부단히 그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그러한 것들은 우리의 생각과 의지 안에 완고하게 들러붙어 있어서 한 번에 없어지지 않습니다. 주님께 의지해서 평생에 걸쳐 조금씩 버려 나가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주님께서는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주님을 찾아온 어떤 관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관리는 총명하고 성실한 사람이어서 자신의 일에서도 성공을 하고, 재물도 많이 모은 사람이 아닐까 짐작을 해 보는데요, 그렇게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 주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주님께 물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십계명을 지키되 문자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즉 겉뜻으로나 속뜻으로나 온전하게 지킬 것을 요구하십니다. 자아와 세상에 매여 있는 사람들은 십계명 안에 있는 영적인 의미를 볼 수 없습니다. 설사 본다 하더라도 세상 것들을 지키기 위해 영적인 것들을 포기합니다. 주님을 찾아온 관리가 바로 그런 사람이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십계명의 자연적 의미만을 지키면서도 모두 지켰다 스스로 믿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가 계명의 반쪽만 지킨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온전하게 지킬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어떻게 하면 반쪽짜리 신앙인이 온전한 신앙인이 될 수 있을까요? 첫째는, 영생의 진리를 얻기 위해 잡다한 세상 지식들, 이를테면 이전의 교회에서 배웠거나, 또는 책에서 배운 잘못된 교리나 신앙 관련 지식들을 버려야 합니다. 그것은 새 술을 담기 위해 새 부대를 준비하는 일입니다. 둘째는,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벗어나 주님과 이웃 사랑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언제까지나 영생의 본질인 진정한 선과 진리를 얻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들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영원한 생명을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자아와 세상 사랑에 빠져 있던 관리는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단순히 그가 가지고 있는 자연적인 것들을 모두 버리라는 말씀으로만 알고 심히 근심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이 말씀은 문자 그대로 자연적인 것들을 모두 버리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다만 이제까지는 그 모든 부와 소유를 자신을 위해 사용했다면 지금부터는 주님과 이웃을 위한 목적으로 사용하라는 말씀입니다.

 

※ 실제로 과거 여러 인물들을 보면, 수도사의 아버지로 일컫는 성 안토니우스(251-356) 라든가, 성 프란치스코(1181-1226) 등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이해, 정말 문자 그대로 실천하고 수도적 삶에 뛰어들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지요. 말씀의 속뜻, 아르카나가 아직 세상에 계시(1750년대)되지 않았던 시절이었음을 고려할 때, 이분들은 놀랍게도 여전히 그 소유의 쓰임새에 주목하셨음을 봅니다. 천사들은 주님이 모든 걸 거저 주시고, 입히시고 누리게 하시지만, 그리고 자기들 가운데 누구는 더 좋은 것을 받고 자기는 덜 받지만, 그러나 그들은 그저 그 쓰임새에만 주목할 뿐, 그걸 소유하고자 마음을 쓰거나 질투하거나 하지 않는답니다. 우리 역시 그래야 하겠습니다. ‘아, 나한테 얼마만 있으면 참 선하고 좋은 일을 할 수 있을 텐데...’ 하는 분이 계시다면, 그런 생각도 좋은 생각이긴 하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선행을 실천하다 보면, 필요한 것들을 주님이 공급해 주시겠지...’ 하는, 그 순서가 반대인, 이런 생각도 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적 성취와 우월감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교회와 이웃을 섬기는 도구로 삼으라는 말씀이지요. 그런 인식의 전환, 곧 쓰임새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있을 때, 비로소 영적인 눈, 영안이 열리고, 굳어있던 의지가 뛰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인 진정한 진리와 선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십계명의 온전한 의미들을 알게 되고, 계명을 온전히 지킬 능력이 생깁니다. 이 일은 비단 내세를 위한 일만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를 버린 자는 현세에 여러 배를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현재 어려움을 겪고 계십니까? 주님의 말씀을 믿고, 지금 바로 실행에 옮기시길 바랍니다. 불가능할 것만 같던 일들을 주님께서 꼭 실현시켜 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이 진리 가운데 있는 모든 성도들과 함께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16:24)

 

아멘

 

 

2022-01-30(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4-28(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4-04-28(D1)-주일예배(2541, 눅18,18-30),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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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21(D1)-주일예배(2540, 눅18,15-17),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는 자’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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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는 자’의 속뜻

 

 

15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16예수께서 그 어린아이들을 불러 가까이하시고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7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눅18:15-17)

 

 

선은 그 안에 순진함이 있는 만큼 선이다. 왜냐하면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 있고, 순진함은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結婚愛 414, 이순철 역) The reason why good is good insofar as innocence is within it is that all good is from the Lord, and innocence is to be led by the Lord. (CL.414)

 

 

주님께서는 천국은 어린아이의 것이라고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예전의 아이들은 지금과 많이 달랐기 때문일까요? 그건 아니고, 어린아이의 속뜻이 순진함, 이노센스(innocence)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그와 관련된 말씀입니다. 먼저 15절입니다.

 

15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사람들이 주님이 만져주시기를 바라고, 어린 아기들을 데리고 주님 앞에 나아왔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어린 아기는 순진함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아기를 데리고 주님 앞에 나아오는 것은, 그 속뜻으로는, 사람들이 주님께 진리를 배우러 나올 때 순진한 마음으로 나아온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은 진리 자체이신 분이기 때문이지요. 그들은 주님이 자기의 아기를 만져주시기 원했습니다. 주님이 아기를 만지신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주님이 순진한 마음 가운데로 오셔서 사람들과 교류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가 순진한 마음으로 말씀을 가까이할 때, 주님께서 그 마음속으로 오셔서 진리의 깨달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이 아기를 만지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주님의 제자들이 그들을 꾸짖습니다. 여기서 제자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말씀에서 주님의 제자는 보통은 주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을 뜻하지만, 그러나 여기서는 주님을 잘못 믿는 사람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 거짓 교리를 만들거나, 또는 진리를 알면서도 행하지는 않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는 사람들을 꾸짖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배우려는 사람들을 방해하거나 박해하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순진한 사람들을 박해할까요? 순진함에는 여러 가지가 있고, 그것에 따라 박해하는 방법도 다릅니다. 예를 들면, 진리를 전혀 모르는 교회 밖의 사람들의 순진함이 있습니다.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이들은 무조건 베푸는 것이 선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요, 새 교회에서는 이런 걸 무지의 순진함이라고 합니다. 이때 우리가 이런 사람들을 조롱하거나 업신여긴다면 그것은 순진한 사람들을 박해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가 하면, 참된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의 순진함도 있습니다. 이들에게 순진함이란 참된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또한 그것에 따라 살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참된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을 거짓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이 질시하고 핍박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 또한 순진한 사람을 박해하는 것입니다.

 

※ 가령, 이런 아르카나, 말씀의 속뜻에 기반한 새로운 내용들을 전한다 하여 기존 기독교회, 개신교회에서 이단으로 규정, 여러 방법을 통해 괴롭히는...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 주님의 제자들이 어린아이들을 꾸짖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순진함의 단계 내지는 유형은 다양한데요, 그래서 말씀에서는 아이를 젖먹이라 하기도 하고, 아기, 또는 어린아이라 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젖먹이가 가장 순진한 것이고, 아기나 어린아이로 갈수록 그보다는 덜 순진한 것입니다. 제자들이 꾸짖는 것을 보시고 주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16절입니다.

 

16예수께서 그 어린아이들을 불러 가까이하시고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어린아이에 비유되는 순진함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스베덴보리 저, ‘결혼애’(結婚愛, Conjugial Love) 414번 글에서는

 

선은 그 안에 순진함이 있는 만큼 선이다. 왜냐하면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 있고, 순진함은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라고 합니다. 즉 순진함이란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따르는 것인데, 그러므로 순진함이 없으면 주님을 따르지 않는다는 말이고, 그렇다면 그 안에 주님으로 말미암는 선도 없다는 뜻입니다. 이럴 경우, 비록 겉보기엔 선처럼 보일지라도 그 선은 주님으로 말미암은 선이 아니므로 참된 선이라 할 수 없겠습니다.

 

주님께서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말씀하신 것은 그런 까닭입니다. 주님은 교회 안의 사람이든 교회 밖의 사람이든 그들의 순진하고 선한 마음 안으로 오셔서 그들과 함께 하십니다. 스베덴보리 저, ‘천국의 비밀’(天界秘義, Arcana Coelestia) 1059번 글에 의하면, 놀랍게도 주님은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로 더 많이 오신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진리를 대적하지 않지만, 주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는 진리를 대적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랍니다. 진리를 대적한다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주님 당시 유대인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입맛대로 왜곡해서 진리로 믿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주님을 대적하고 진리를 대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만일 돌이키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13장 23절 이하에서는 그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3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들에게 이르시되 24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25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26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27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 28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29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30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눅13:23-30)

 

여기서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라고 주님께 여쭙는 것은 ‘교회 안에 주님을 대적하는 자가 많은데 구원받을 자가 과연 있겠습니까?’라는 뜻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나중 된 자는 교회 밖의 타 종교 사람들을 뜻하고, 먼저 된 자는 교회 안에 있는 자로서 말씀을 왜곡한 자들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교회 안의 사람들보다 오히려 이방인들이 구원받기가 쉽다는 의미입니다. 그 이유는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을 덮고 있는 지적 어둠은 주님에 의해 쉽게 걷히지만, 진리를 알면서도 더럽힌 자들은 그들을 덮고 있는 어둠이 걷히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완고함 때문이지요. 17절입니다.

 

17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인다는 것은 순진함이 있어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음을 뜻합니다.

 

※ 참고로, 스베덴보리에 의하면, 천국을 떠받치는 두 키워드는 ‘순진함’(innocence)과 ‘평화’(peace)라고 합니다.

 

순진한 사람이라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이유에 대해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281번 글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순진성(innocence)에 대해 천사들과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순진성이 모든 선함의 본질이라는 것과, 선은 그 안에 순진성이 있을 때만 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지혜(wisdom)도 순진성이 있어야 지혜이며, 사랑(love), 이타심(charity), 신앙(faith)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순진성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

 

선은 그 안에 순진함이 있어야 선이다. 모든 선은 주께로부터 오며, 순진함이란 주의 인도하심을 받기 원하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천사들은 말하기를, 오직 순진성에 의해서만 진리는 선에, 선은 진리에 결합될 수 있으므로 천사는 순진성이 있어야 천사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선과 진리가 천국적 결혼으로 결합되지 않은 사람 안에는 천국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과 진리의 결합을 천국적 결혼이라고 부르는 것이며, 천국적 결혼이 바로 천국인 것이다.

 

또 천사에게 들은 것은, 참된 결혼애는 순진성에서 생겨난다는 사실이다. 그 까닭은 참된 결혼애는 남편과 아내의 마음이 선과 진리의 결합 안에 있을 때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며, 그 결합이 낮은 단계로 내려와 결혼애로 표현되는 것이라고 했다. 부부는 각자의 마음이 사랑 안에 있는 만큼 서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결혼애에는 애들 같은 천진난만한 장난스러움이 있다고 했다. (천국과 지옥 281, 김은경 역)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진리 안에 들어온 우리들은 나름대로 순진한 사람들입니다. 진리에 대한 순수한 애정으로 이 진리를 택했고, 진리에 따라 살고자 지금 노력하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의 아니게 타 종교나 타 교파의 사람들에 대해 우월감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들 중에도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도 말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린 아기를 데리고 주님께로 오는 사람들을 꾸짖는 제자들과 같은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참된 진리 안에 있다고 우월감을 가지거나 다른 종교나 교파 사람들을 경시하면 안 됩니다. 만약 그렇게 하면 영적 순진함을 잃어버리거나 시험에 들 수가 있습니다.

 

※ 아래 이야기는 이 설교의 원 저자이신 이순철 목사님의 에피소드입니다.

 

종교가 다른 사람들끼리 미묘한 우월감을 갖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만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 한국 불교계의 큰 스님 중 한 분인 탄허 스님에 대한 강연이 있어서 들은 적이 있습니다. 강연자에 의하면, 탄허 스님은 기독교의 교리에 대해 기독교 신학자보다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성경을 모두 외우고 이해하는데 자신은 3년이 걸렸는데 재능이 있는 사람은 3개월이면 될 거라고 했다고 합니다. 불교에 비해 기독교의 교리가 그만큼 깊이가 없다는 뜻이겠지요. 그러면서도 기독교와 동양의 유, 불, 선이 서로 회통(會通)해야 한다 주장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탄허 스님에 대해 더 궁금해졌습니다. 강연하는 스님이 말하기를, 탄허 스님은 석가나 공자, 예수 같은 성인을 생각이 끊어진 자라고 정의했다고 합니다. 그것이 무슨 말일까요? 개인적으로 이해하기는, 성인들은 우주 만물의 본질인 진리를, 생각하지 않고도 모두 안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그것을 아는 지는 정확하게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새 교회에서는 그것을 어떻게 설명합니까? 생각하는 자는 영적인 사람이고, 생각이 끊어진 자, 즉 생각하지 않고 바로 아는 사람은 천적인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천적인 사람은 천국으로부터 오는 신성한 지각, 즉 퍼셉션(perception)을 통해 주님과 직접 소통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삼라만상의 이치를 앉은 자리에서, 생각하지 않고 바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강연자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밖에 있지 않고 사람 안에 있다고 할 뿐 모호하게 설명했습니다. 성경을 모두 이해했다는 탄허 스님이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았을까요? 만약 알았다면 예수님을 석가와 공자와 같은 성인이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군지 모르면서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믿어야 한다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잘 모르는 존재를 왜 믿고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까? 이 모든 의문들을 주님께서는 직접 세상에 오심으로써 풀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몸소 보여주시고, 음성을 들려주시며, 손으로 직접 만져보게 하셨습니다. 새 교회의 진리를 통해 이제 누구나 그 모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진리가 소중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진리를 믿고 따르는 일은 순진함이 없으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항상 순진함을 구하시기를 바라고, 주님이 주신 순진함으로 늘 자신과 세상을 이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30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1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마6:30-34)

 

아멘

 

2022-01-09(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4-21(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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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14(D1)-주일예배(2539, 눅18,9-14), ‘자기를 높이는 자, 자기를 낮추는 자’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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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04-14(D1)-주일예배(2539, 눅18,9-14), ‘자기를 높이는 자, 자기를 낮추는 자’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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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높이는 자, 자기를 낮추는 자’의 속뜻

 

 

9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눅18:9-14)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을 통해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선과 진리는 인간으로부터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말하고, 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선한 것, 진실한 것, 성실하고 공정한 것을 속 사람과 관계없이 오직 겉 사람으로부터 행한다면 그것은 인간 자신으로부터 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들은 모두 악이다. (계시록 해설 794:3, 이순철 역) all good and truth are from the Lord and not from man, because they are done from the internal through the external. But when a man does and speaks what is good, true, sincere, and just, for the sake of self and the world he does and speaks them from self, because from the external man without the internal; and such deeds or works are all evil (AE.794:3)

 

 

새 교회의 가르침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 선하고 진실한 사람인지 아니면 악하고 거짓된 사람인지는 오직 주님만 아신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는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판단할 때는 겉으로 드러나는 몇 가지 행동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되고, 살아오면서 그가 했던 일들을 잘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그와 관련이 있는 말씀입니다. 본문 10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0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주님 당시 유대교회 안에는 신학적 견해가 다른 몇 개의 분파들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바리새파나, 사두개파, 에세네파 같은 사람들인데, 그 중 바리새파 사람들은 토라라고 하는, 모세의 오경을 글자 그대로 지키는 경건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대중들의 신망이 아주 높았고, 그들 스스로도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에 비해 세리는 유대 사회에서 천대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세금을 징수하는 일을 했기 때문에 나름 전문직이었고 무식한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만, 그럼에도 천대를 받았던 까닭은 그들의 직업이 돈을 만지는 일이었고, 그러다 보니 부정을 저지르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며, 또 당시는 로마 제국의 식민지로서 아무래도 세리는 지배 계급의 수족 역할을 할 때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두 사람이 같은 시간에 성전에서 기도 하게 되었습니다. 바리새인이 먼저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11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바리새인들은 십계명을 글자 그대로 철저히 지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로 토색을 하거나 간음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토색이란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의 것을 억지로 빼앗는 것인데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또 소득의 십분의 일을 십일조로 바쳤으며, 유대교회의 전통인 이른바 장로의 전통에 따라 일주일에 두 번 금식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겉으로 보기에는 누구보다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그 역시 토색질하는 자요 간음자였습니다. 말씀에서 간음은 영적 의미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인간의 생각을 섞어 왜곡하는 것을 뜻합니다. 말씀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런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바리새인처럼 많이 아는 사람들이 말씀을 왜곡했고, 또한 그것으로 교인들을 가르쳤는데, 그것은 결과적으로는 교인들에게서 진리와 선을 빼앗는 일이었습니다. 영적으로 볼 때는, 그것이 바로 간음이요 토색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바리새인들은 겉으로는 경건한 자들이었지만, 속으로는 토색하는 자요, 간음자였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세리를 내려다보며,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다음은 세리의 기도입니다.

 

13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세리는 자신이 저지른 악과 거짓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감히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죄를 고백했습니다.  

 

참고로, 이 기도는 특히 정교회에서 아주 유명한, 그리고 가장 기본이 되는 기도입니다. 정교회에서는 이를 ‘예수기도’라고 하는데 묵주를 한알 한알 돌리며, 밤을 새워 이 문장만 반복합니다.

 

주님께서 두 사람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14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바리새인들은 말씀의 영적 의미는 몰랐기 때문에, 오로지 문자적인 뜻만을 지켰습니다. 그것만으로도 능히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단순한 신앙 안에 있는 사람, 이를테면 말씀의 문자적인 뜻을 잘 지키며, 이웃에게 겸손한 사람들도 구원을 받습니다. 비록 속뜻을 모르더라도 말이지요. 그러나 오늘 말씀에 나오는 바리새인처럼 계명을 지킨다고 자랑하며, 함부로 이웃을 업신여기는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을 자신의 공으로 돌리는 사람들에 대해 마태복음 7장 22, 23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22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7:22-23)

 

겉으로 보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 같은데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고,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그것에 대해 잠깐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영적인 마음과 자연적인 마음, 두 마음이 있습니다. 영적인 마음을 다르게 말하면 속 사람(internal man)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주님과 연결된 마음입니다. 그에 비해 자연적 마음은 겉 사람(external man)이라 불리고, 이는 세상과 연결된 마음입니다. 여기서 사람이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모두 겉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다만 겉 사람이 하되 속 사람으로부터 하는 행동이 있고, 속 사람과 관계없이 겉 사람 혼자 하는 행동이 있습니다. 전자의 경우, 즉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을 통해 하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하는 행동입니다. 그러나 후자, 즉 겉 사람 혼자서 하는 것은 인간의 자아로부터 하는 행동입니다. 주님으로부터 하는 행동은 겉과 속이 같으며, 그러므로 진실하고 선합니다. 반대로 인간의 자아로부터 하는 행동은 겉과 속이 다르며, 그러므로 악하고 위선적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악하고 거짓된 것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 중에도 니고데모와 같은 사람은 진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요3:2) 하였고, 거듭남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바리새인들은 겉과 속이 다른, 교활하고 교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 11장에서 주님은 그들에게

 

39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40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41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눅11:39-41)

 

라고 말씀하십니다. 잔은 포도주를 담는 그릇이므로 영적으로는 진리와, 그리고 대접은 떡을 담는 그릇이므로 영적으로는 선과 각각 관련됩니다. 포도주와 떡은 각각 진리와 선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겉으로만 보면 진리를 말하고 선을 행하는 것 같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악과 거짓이 가득하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는 모든 행동은 모두 속 사람으로부터 하는 것이 아니라 겉 사람으로부터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주님으로부터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아로부터 하는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고 하셨습니다.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는 것은 이웃에게 선을 베풀 때는 속 사람으로부터 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의 의미를 통해 우리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때로는 바리새인처럼 자신을 높이고 다른 사람을 업신여긴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세리의 심정으로 가슴을 치며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반성한 적도 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14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하면 자기를 낮추는 자가 될 수 있을까요? 계시록해설 794:3항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을 통해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선과 진리는 인간으로부터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말하고 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직 겉 사람으로부터 행한다면 그것은 인간 자신으로부터 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들은 모두 악이다.

 

일이 뜻대로 안 되면 자기도 모르게 거친 말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말만 그럴듯하고 진심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겉으로는 축복을 하면서 속으로는 안 되기를 바랄 때도 있습니다. 이런 모든 것이 인간의 자아로부터 나오는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매사가 뜻대로 안 될 때는 니고데모처럼 은밀하게 말씀이신 주님을 찾아가야 합니다. 주님의 도우심을 받아 무슨 일이든 겉 사람 혼자 하던 버릇을 버리고 겸손하게 속 사람의 뜻을 따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때 속 사람과 겉 사람의 모든 것이 깨끗해진다고 하십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또한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형제에게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6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7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사58:6-7)

 

아멘

 

2021-12-05(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4-14(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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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07(D1)-주일예배(2538, 눅18,1-8),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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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의 속뜻

 

 

1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2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3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4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5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6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7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눅18:1-8)

 

 

기도에 의존하면 안 되는 이유는 (자아로부터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기도하는 사람은 그가 구하는 것이 유익한 것인지 아닌지는 오직 주님만 아신다고 항상 생각하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를 들어주실지 말지를 주님께 맡겨야 하고 그에 따라 겟세마네의 가장 쓰라린 시험 가운데서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자신의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해야 한다. (천국의 비밀 8179, 이순철 역) prayer is not to be relied upon. For in prayer from the Divine it is always thought and believed that the Lord alone knows whether it is profitable or not; and therefore the suppliant submits the hearing to the Lord, and immediately after prays that the will of the Lord, and not his own, may be done, according to the Lord’s words in His own most grievous temptation at Gethsemane (Matt. 26:39, 42, 44).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마26:39)

 

 

오늘부터 18장입니다. 오늘 말씀이 있기 바로 전인, 요 앞 장 17장에서 주님께서 가르치신 내용은, 교회의 마지막 때 환난과 심판이 있는데, 그때 신앙인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는 것이었는데요, 교회의 마지막 때 모습에 대해서는, 마태복음 24장 11절 이하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11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12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많은 사람을 미혹하는 거짓 선지자’는 교회의 거짓된 교리를 의미하고, ‘불법’은 교회들이 저지르는 악을 뜻합니다. 교회의 상태가 이렇다 보니, 교회의 마지막 때 신앙인들에게는 시험이 참으로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분별력을 잃고 거짓 진리에 휩쓸리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세상 즐거움에 빠져 신앙을 포기합니다. 교회의 마지막 때 신앙인들에게 닥치는 시험을 창세기에서는 노아 시대에 큰 홍수가 났을 때, 방주에 오른 사람들이 오랫동안 격랑 속을 떠다니는 모습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주님 당시 사도들도 그런 시험을 겪었고, 그리고 오늘 이 시대 우리도 역시 그런 시험 가운데 있는데요, 그렇다면, 이런 환난 가운데서 어떻게 해야 시험을 극복하고 마음속에 주님의 새 교회를 세울 수 있을까요?

 

1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오늘 말씀에서 주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항상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말씀의 내적 진리로 다시 오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시험 중에도 낙심하지 않고 항상 기도하는 신앙인들의 모습을 본문에는 과부와 재판장의 비유로 그리고 있습니다. 먼저 본문 2절과 3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3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어떤 도시에 사는 과부가 재판장에서 가서 원수에 대한 원한을 풀어달라고 하는데, 특이한 것은, 그 재판장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또 사람을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에서 ‘도시’나 ‘성읍’은 교회의 교리를 뜻하는데요, 그러니까 과부는 교회의 교리 안에서 생활하는 어떤 신앙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재판장은 누굴까요? ‘재판장’은 보통 진리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진리가 아니라 신앙인들이 가지고 있는 진리의 지식, 진리에 관한 지식을 뜻합니다. 재판장이 진리의 지식을 뜻하는 이유는 그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한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한다’는 건 주님에 대해서나 이웃에 대해 사랑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재판장은 사랑 없는 진리, 즉 진리가 아니라 진리의 지식, 진리에 관한 지식을 뜻합니다. 과부는 누굴까요? ‘과부’는 남편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영적으로는 선은 있는데 진리가 없는 사람을 뜻합니다. 선은 있는데 진리가 없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삶 가운데서 선을 행하기는 하는데 진리가 없어서 잘못 행하는 걸 말합니다. 주변을 돌아보면, 이웃의 호의는 받아들이지 않고, 일방적으로 베풀기만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얼핏 보면 선한 행동 같지만, 상대가 원치 않을 때는 자칫 인간관계가 소원해질 수도 있지요. 그런가 하면 도리에 어긋난 행동을 하면서도 그게 잘못인지를 모르는 사람도 있는데요, 예를 들면 이런 게 모두 선만 있고 진리가 없어서 생기는 일입니다. 신앙인들이 스스로 진리 없음을 느낄 때, 말씀을 통해 또는 교리 공부를 통해 진리를 배우기 시작합니다. 진리를 통해 모든 종류의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인데요, 이것이 바로 과부가 재판장에게 달려가 원한을 풀어달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원한’은 진리가 없음으로 인해 생겼던 모든 어리석은 행동들을 뜻합니다. 그런가 하면, 다른 종류의 과부도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과부가 선은 있는데 진리가 없는 과부라면 지금부터 말씀드리는 과부는 반대로 진리는 있는데 선이 없는 과부입니다. 진리는 있는데 선이 없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진리에 대해 아는 건 많은데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는 사람입니다. 의지가 부족하기 때문인데요, 이 경우에 ‘과부가 재판장을 찾아가는 것’은 의지가 약한 신앙인들이 진리를 통해 그것을 극복하려고 기도하면서 노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과부가 자꾸 찾아가자 마침내 재판장이 마음의 결심을 합니다. 그것에 대해 4절과 5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4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5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재판장은 처음 얼마 동안은 과부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신앙인들이 진리를 통해 영적 문제들을 해결하려 할 때, 처음에는 잘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통해 신앙인들이 처음 가지는 진리는 진리가 아니라 진리에 관한 지식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진리에 관한 지식은 마치 나무토막과 같은 것이어서 아무 힘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상태에서는 영적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가진 진리의 지식들은 어떻게 해야 능력 있는 진리로 변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진리에 대한 애정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신앙인들이 가진 진리에 관한 애정을 ‘과부가 수시로 재판장을 찾아가는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이 과부처럼 우리도 거듭남에 관한 모든 문제를 재판장인 진리와 그 능력으로 풀어나가야 합니다. 신앙인들이 진리를 통해 거듭남에 관한 자신의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애쓸 때, 주님께서는 그들의 이런 애정 가운데로 오셔서 죽어 있던 진리의 지식 속으로 주님의 생명을 불어넣으시고, 그렇게 해서 그 지식을 살아있는 진리로 만드십니다. 바로 그때가 본문에서 재판장이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제는 과부의 원한을 풀어 주리라 결심하는 순간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라는 것은 사랑 없는 진리가 주님에 의해 사랑 있는 진리로 변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는 건 사랑 있는 진리로 이제는 어떤 시험에서도 싸워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나타냅니다. 과부가 품고 있었던 ‘원한’은 뭘까요? 진리 또는 선이 없음으로 해서 그동안 지옥의 영들에게 당했던 수모와 아픔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6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7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재판장은 신앙인들이 처음 가지는 진리인 진리의 지식을 뜻합니다. 재판장을 불의하다 하는 것은 진리의 지식은 그 자체로 사랑 없는 진리이며, 그러므로 의롭지 않다는 뜻입니다. 비록 사랑 없는 진리라도 신앙인들이 그걸 붙들고 거듭나기를 힘쓸 때, 주님은 그 지식 안으로 오셔서 그것을 살아있는 진리로 만드시고, 그것으로 항상 시험에서 이길 수 있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이 말씀의 속뜻은, 말씀의 문자적 진리에라도 순종하면, 그들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재판장의 말을 듣는 것은 순종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하십니다. 여기서는 불의한 재판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한을 풀어 주신다고 하십니다. 여기 ‘하나님’은 뉘십니까? 말씀의 내적 의미로 다시 오신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말씀의 내적 진리를 통해 그동안의 원한을 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 곧 속뜻 안에는 지옥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전능하신 주님의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능력에 대해 이사야서 30장 26절에서는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일곱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

 

고 하셨습니다. ‘일곱 배’란 그때의 진리의 능력이 전보다 완전하고 거룩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완전한 진리인, 말씀의 내적 진리를 붙들고 각자의 문제를 풀어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모든 문제를 바로 해결해 주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밤낮으로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시되 오래 참지 않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8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의 내적 진리로 오신 주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미친다면 모든 원한이 속히 풀릴 것입니다. 병이 고쳐지고, 가난에서 건짐을 받을 것이고, 그 밖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조건이 있습니다. 어떤 조건입니까? 주님이 말씀의 내적 진리로 다시 오셨다는 것과, 그 진리 가운데 무한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진리의 능력이 속히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믿음은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 새 교회 가르침 ‘신앙에 관한 교리’ 69항을 보면,

 

인애는 믿음의 생명이고 본질이다. 그러므로 인애에서 분리된 믿음은 믿음이 아니다. (믿음의 교리 69, 이순철 역) Faith separated from charity is no faith, because charity is the life of faith: its soul, and its essence. (F.69)

 

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믿음, 신앙의 본질은 주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인애, 체어리티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기도의 응답이 없다면, 그리고 아무리 노력해도 시험에서 번번히 넘어진다면, 자신이 과연 체어리티의 삶을 살고 있는지 스스로를 돌아봐야 합니다. 체어리티의 삶을 살지 않으면 진정한 믿음이 생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간단하고 쉬운 일이라도 매일 같이 체어리티를 실천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때 진실한 믿음이 생기고 그것을 통해 주님의 능력이 흘러들어와 우리들의 삶을 높이 들어 올릴 것입니다.

 

시험을 당할 때는 낙심하지 마시고, 과부의 심정으로 재판장이신 주님께 매달리시기 바랍니다. 만약 시험에서 이기지 못하고 주저앉는다면, 시험을 통해 이루시려는 주님의 목적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목적이 무엇인지, 우리들의 영적 행보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 무엇인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잘못이 있다면 진심으로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때 막혔던 혈관이 뚫리는 것처럼 진리의 능력이 주님으로부터 쏟아져 들어와 모든 문제가 풀릴 것입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15:5)

 

아멘

 

2021-11-14(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4-07(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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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31(D1)-주일예배(2537, 눅24,1-12, 부활절), '다시 살아나신 주님'.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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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03-31(D1)-주일예배(2537, 눅24,1-12, 부활절), '다시 살아나신 주님'.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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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살아나신 주님

 

 

1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2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3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4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5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6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7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8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9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니 10(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 11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12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눅24:1-12)

 

사람의 생명에 속한 모든 것은 내적인 것에서 외적인 것으로 차례로 흘러들어온다. 외적인 것은 호감이 느껴지는 기억의 지식과 가장 바깥쪽의 것인 감각에 속한 것인데, 감각에 속한 것이란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고, 만짐으로써 세상과 소통하는 것이다. 외적인 것에 내적인 것들이 머무는 까닭은 내적인 것의 흐름이 거기서 끝나기 때문이다. 영적 의미로 사람이 걸치는 피복이나 옷으로 나타내어지는 것은 바로 이 외적인 것을 말한다. (천국의 비밀 9216:2, 이순철 역) These also follow in order from interior to exterior things. Exterior things are memory-knowledges with their pleasant feelings; and outermost things are those of the senses, which communicate with the world by the sight, the hearing, the taste, the smell, and the touch. Upon these the interior things rest, for in these they terminate. These are the things which are signified in the spiritual sense by the “covering” or “garment wherein he may sleep.” (AC.9216:2)

 

 

오늘은 부활절, 주님 부활하신 이 아침에 성도들과 함께 주님의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감사와 영광을 주님께 돌립니다.

 

주님은 왜 세상에 오셔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다가 다시 사셨을까요? 그와 관련해 새 교회 가르침 “천국의 비밀” 9216번 글 2번 항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의 생명에 속한 모든 것은 내적인 것에서 외적인 것으로 차례로 흘러들어온다. 내적인 것들이 외적인 것에 머무는 까닭은 내적인 것의 흐름이 거기서 끝나기 때문이다...

 

이 말이 무슨 뜻일까요? 여러 가지로 이해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가장 내적 존재인 주님은 가장 외적 존재인 인간에게로 오셔서 영원히 그와 함께 사시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섭리입니다. 영원 전부터 계셨던 무한하신 주님이 당신의 피조물인 유한한 인간과 영원히 함께 살기를 원하신다는 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은 당신의 생명을 내어주실 정도로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지극히 높은 천국으로부터 지극히 낮은 이 땅으로 내려오셔서 모진 고난을 이기시고, 신성하고 완전한 진리가 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진리를 통해서만 인간은 주님을 바르게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은 완전하고 신성한 진리(Divine Truth)로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 만나는 사람들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습니다.

 

1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새벽’은 영적으로, 즉 그 속뜻으로는, 주님과 주님의 나라가 임하는 때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부활하신 주님이 완전하신 진리로 인간 앞에 모습을 드러내시는 때이며, 동시에 그 진리를 가지고 낡고 부패한 교회를 심판하시고, 새로운 교회를 여시는 때입니다. 그때가 새벽입니다. 그때 여자들이 향품을 준비해 무덤으로 갔다고 했습니다. ‘여자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진리를 사랑하여 참된 진리이신 주님을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심판 때 구원받을 사람들이며, 주님이 세우시는 새 교회에 참여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여자들은 살아계신 주님이 아니라 주님의 시신을 만나러 갑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있는 진리가 죽은 자의 시신처럼 아직 생명 없는 진리라는 반증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시신’은 죽은 진리, 즉 생명 없는 말씀의 지식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처음 진리를 받아들일 때의 진리는 생명이 없는 진리, 못 움직이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창세기 1장 창조의 순서 중 식물부터 먼저 창조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 이유는, 처음에는 진리를 믿기만 할 뿐 아직 행동하지는 않기 때문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여자들이 향품을 가지고 주님의 시신에 바르는 것은 죽은 것 같은 진리에 생명을 불어넣는 최초의 노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향품’은 내적 진리를 획득하기 전에 신앙인들이 소유하는 자연적인 진리, 이를테면 십계명의 문자적인 가르침 같은 것을 뜻합니다.

 

여자들이 무덤에 갔을 때, 무덤을 막았던 돌이 옮겨져 있었고, 그 안에는 당연히 있어야 할 시신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무덤을 막은 돌’은 뭘까요? 신앙인들의 내면에서 진리가 살아나는 걸 방해하는 여러 가지 자아의 거짓을 뜻합니다. 예를 들면, 진리를 안다는 자부심이나 진리에 대한 잘못된 추론, 또는 그 밖에 이기적인 악과 그것에서 비롯한 거짓들입니다. 우리 안에 그런 것들이 있는 동안에는 진리는 무덤 밖으로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처음에는 자연적 진리로, 그리고 다음에는 내적 진리로 말씀을 이해하고 지키려고 할 때, 주님에 의해 진리를 방해하던 거짓들이 물러갑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자아의 거짓을 물리칠 수 없고, 심지어 어떤 게 거짓인지도 잘 모릅니다. 거짓들은 마치 칡넝쿨이 나무를 감아 옴짝달싹 못 하게 하는 것처럼 진리가 자라는 걸 가로막습니다. 주님만이 그것들을 잘라내 치워주실 수 있습니다. 그때 죽었던 진리가 살아납니다. 바로 그런 상태가 무덤을 막았던 돌이 옮겨지는 것이고, 주님이 무덤에서 살아나시는 것입니다.

 

※ 제가 그랬습니다. 저는 이 새로운 계시, 그러니까 주님이 스베덴보리를 통해 새롭게 여신 이 계시를 지난 2017년 가을에 처음 접했습니다. 당시 갈보리교회 강문호 목사님이 충주봉쇄수도원을 준비하시면서 수도사 학교(후에 수도 학교로 개명)를 시작하셨는데, 첫 학기 종강 때인 그해 초여름, 강사로 오신 시흥 영성수련원 원장 박희진 수도사의 권유로 저는 그 후 틈틈이 대전 바이블아카데미를 다니게 되면서 거기 주교재인 ‘핵심진리’를 접하게 되었는데, 거기에 나오는 ‘영계의 구조’에 이 ‘스베덴보리’라는 이름이 나오는 걸 보고 말이지요. 나중에 혹시나 하여 저의 지난날 일지를 보니 과거 제가 부사역자로 있던 교회에서 제가 돌보던 어느 목장 목자를 통해 제 생애 처음으로 이 ‘스베덴보리’라는 이름을 들었더군요. 목장원 중 한 분이 이 이름으로 모이는 무슨 이상한 성경공부 모임에 다닌다는 그런 상담이었습니다. 그때는 그냥 흔한 이단 분파, 신천지 같은 덴 줄 알고 금했죠. 그때가 2011년 2월이었습니다. 아무튼, 지난 2017년 1학기부터 1기생으로 출발한 저는 그때부터 접하는 모든 내용이 지난 50여 년 알아 오던 모든 기존 교리 내지는 신앙의 결을 내려놓고, 완전 새롭게 시작해야만 하는 것들이었는데, 그것은 마치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는 것과 같았습니다. 저는 스베덴보리를 스베덴보리 연구회 출판, ‘위대한 선물’로 시작, 이어 그의 많은 저작 중 가장 대중적인 ‘천국과 지옥’으로 만나기 시작했고, 그렇게 이어진 주님의 이끄심으로 현재는 창세기, 출애굽기 속뜻 주석인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라틴, 天界秘義) 번역과 함께 이런저런 나름의 활동, 즉 유튜브와 블로그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지경입니다. 더욱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시간을 갖겠습니다.

 

※ 생각해 보면, 누구보다도 특히 교리적인 부분에서는 절대 타협이 없는, 골수도 정말 특이한 골수인 제가 달라도 너무 다른, 완전 그 근본부터 다른 이 아르카나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 역시 주님이 하신 것이며, 처음엔 요나처럼 도망가기 바빴던 저를 그러나 끊임없이 권하시되 마치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듯’ 저로 하여금 주님을 향하게 하신 분 역시 주님이십니다. 오직 주님만이 저를 옴짝달싹, 마치 칡넝쿨처럼 옭아맨, 기존 기독교, 특히 개신교 교리인 ‘오직 믿음’ 교리를 모두 잘라내 치워주셨던 것입니다. 무덤을 막았던 돌을 치우시고, 살아나신 주님께서 말입니다. 제가 주님의 이끄심으로 스베덴보리를 통해 새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있었던 것은, 마치 태생적으로 유대교인이었던 주님의 제자들이, 그리고 바울이, 그러나 주님을 만나 자기들의 DNA에 새겨진 것과도 같았던 유대교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과도 같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무덤을 막았던 돌이 옮겨지고, 주님의 시신이 보이지 않자, 여자들은 어쩔 줄을 몰라 합니다. 그 모습을 4절과 5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4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5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한글 성경에는 여자들이 근심했다고 하지만, 영어 성경에는 perplex, 즉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공황 상태에 빠졌다는 것이지요. 주님이 부활하셨는데 여인들은 기뻐하지 않고, 도리어 왜 공황 상태에 빠졌을까요? 첫째는, 신앙인의 내면에서 진리가 살아나려면 자아에 속한 게 죽어야 하는데, 그때 모든 걸 잃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진리가 살아났다 해도 처음 한동안은 진리가 나를 주장한다는 걸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 앞에 바로 나타나시지 않은 것과도 같은 일일 것입니다. 한마디로, 내면에서 진리가 살아날 때, 신앙인들은 역설적으로 어디에도 기댈 진리가 없는 것 같은 상실감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인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때 그들 곁에 빛나는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두 사람은 누굴까요?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살아있는 진리이신 주님이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입은 빛나는 옷’은 부활하신 주님에게서 나오는 가장 밝고 완전한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두 사람’이 나타났다고 했을까요? 부활하신 주님에게서 나오는 진리는 선만 있고 진리가 없거나 진리만 있고 선이 없는 그런 진리가 아니라, 선과 진리가 함께 있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천사가 여인들에게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라고 말했습니다. 여인들은 주님이 고난을 받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실 거라는 말을 듣기는 했으나 실제로 이루어질 거라고는 믿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신앙이 아직 자연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직접 눈으로 봐야만 믿는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천사들을 보고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립니다. 주님이 나타나실 때, 사람들이 두려워 떨거나 죽은 자처럼 되었다는 것은 말씀의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계시록을 쓴 요한도 주님의 발 앞에 죽은 자처럼 되었다고 했습니다. 신앙인들이 그렇게 두려워하는 것은 내면에서 어떤 영적 변화가 일어날 때 느끼는 불안과 공포를 의미합니다. 주님의 신성이 사람 안으로 임하실 때, 인간이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자들이 느끼는 두려움은 일종의 경건한 두려움입니다. 그러면 여자들에게 일어난 내면의 변화란 어떤 것입니까? 그에게서 죽은 진리가 살아나는 것이며, 그로 인해 자연적 신앙이 영적 신앙으로 한 단계 올라서는 것입니다.

 

7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8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9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니 10(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 11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여자들이 마침내 주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사신다고 한 것을 기억해 내고는 무덤에서 돌아가 그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렸습니다. 무덤은 그들이 죽은 진리를 만나던 곳이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 사용하던 곳입니다. 이를테면 진리의 지식이 보관된 내면의 기억과 같은 곳이죠. 그러나 진리가 완전히 살아날 때, 이제는 애써 그곳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살아있는 진리, 살아계신 주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면서 그때그때 필요한 진리를 공급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부활하신 주님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주님이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들은 사도들은 여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 역시 아직은 자연적 신앙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직접 보고 만져 보지 않으면 믿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베드로가 주님의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그것에 대해 12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12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베드로’란 이름은 진리에 대한 순종을 뜻합니다. 실제로 베드로의 성품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는 급히 무덤으로 달려가 몸을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봤습니다. ‘무덤으로 달려가는 것’은 진리에 대한 뜨거운 애정을 뜻합니다. 그리고 ‘몸을 구부려 들여다보는 건’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 안에 있는 진리들을 돌아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리, 또는 말씀을 대할 때는 언제나 몸을 낮춰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진리가 보이고, 또한 죽었던 진리가 살아나는 것이 보입니다. 그렇다면 그때 베드로의 눈에 들어온 것은 뭘까요? 주님의 시신이 아니라 세마포였습니다. ‘세마포’는 주님이 주시는 내적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본 진리는 이전에 알던 생명 없는 지식이 아니라 내적 진리였던 것입니다. 그제서야 그는 자신에게 있던 진리들이 살아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면에서 진리가 살아나는 건 눈먼 자가 눈을 뜨는 것 이상의 기적입니다. 흔히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진리가 살아나면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던 기질이 바뀝니다. 그것은 주님만이 이루실 수 있는 기적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 모든 일을 놀랍게 여겼다고 합니다. 놀랍게 여겼다는 건 기적과도 같은 일이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절을 맞아 다시 한번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오늘 말씀에서 여자들은 향품으로 표상되는 자연적 진리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시작합니다. 자연적 진리란 말씀의 문자로 표현된 진리이며, 내적 진리를 담기 위한 그릇 역할을 하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그 자체로는 아직 완전한 진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자연적 진리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점차 그 안에 내적 진리를 담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는 까닭은, 내적 진리가 자연적 그릇 안에 담길 때, 온전하고 힘 있는 진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지옥을 이기신 주님의 능력이 그 안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세상에 계실 때, 완전하지 않은 진리의 상태에서 지옥의 시험을 완전히 이기시고, 신성한 진리 자체가 되셨습니다. 만약 주님이 처음부터 신성한 진리 그 자체셨다면, 주님은 시험을 당하실 수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지옥이 감히 주님을 대적하거나 도발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에는 시험을 당하시는 주님의 진리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지 않고, 사람의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만큼 완전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께 기대어 자신에게 있는 진리를 매일 살려야 하고, 더 내적인 진리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온전히 거듭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은혜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호6:2)

 

아멘

 

2023-04-09(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3-31(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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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24(D1)-주일예배(2536, 눅17,28-37), ‘지붕 위에 있는 사람은 세간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라’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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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03-24(D1)-주일예배(2536, 눅17,28-37), ‘지붕 위에 있는 사람은 세간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라’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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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 위에 있는 사람은 세간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라’의 속뜻

 

 

28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29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 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30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31그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의 세간이 그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그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32롯의 처를 기억하라 33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34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둘이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35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36(없음) 37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어디오니이까 이르시되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하시니라 (눅17:28-37)

 

 

주님이 사흘째 되는 날 다시 사신 것은 말세에 진리의 신성, 또는 말씀의 내적 의미가 고대 교회가 이해했던 것과 같은 모습으로 회복됨을 의미한다. 사흘째는 말세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해서 인자, 즉 진리의 신성이 그때 나타날 것이라고 말했다. (천국의 비밀 2813:3, 이순철 역) The Lord’s rising again on the third day also involves that truth Divine, or the Word as to the internal sense, as it was understood by the ancient church, will be revived in the consummation of the age, which is also the “third day” (n. 1825, 2788); on which account it is said that the son of man (that is, truth Divine) will then appear (Matt. 24:30, 37, 39, 44; Mark 13:26; Luke 17:22, 24–26, 30; 21:27, 36). (AC.2813:2)

 

 

지난주에 이어 오늘도 누가복음 17장 같은 본문, 지난주에는 전반부를 했다면 오늘은 후반부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인자가 나타나는 날’은 내적 의미, 즉 그 속뜻으로는 교회의 마지막 때, 낡고 부패한 교회가 무너지고, 새로운 교회가 열리는 때를 말합니다. 그때를 ‘인자가 나타나는 날’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때 주님께서 새 교회, 곧 인류 다섯 번째, 마지막, 그리고 영원한 교회인 새 교회의 교리로서 말씀의 내적 의미를 열어주시는데, 그 내적 의미, 속뜻이 바로 인자, 곧 진리이신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아시는 것처럼 주님은 세상에 계실 때, 당신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시거나 사람의 아들, 즉 인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실 때는, 주님의 거룩한 인간(Divine Human, 신적 인간) 안에 있는 선을 뜻하고, 인자라고 하실 때는 진리를 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이 말씀의 속뜻으로 오시는, 교회의 마지막 때를 가리켜 ‘인자가 나타나는 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그것에 대해 본문 28과 29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8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29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 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인자가 나타나는 날은 마치 롯이 소돔에서 나오는 때와 같다고 하십니다. 여기 소돔은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에 깊이 빠져있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불은 그 사랑에서 나오는 온갖 욕망들을, 유황은 그런 욕망들에서 비롯한 거짓 교리를 뜻합니다. 교회 안에 선과 진리가 사라지고, 대신 악한 욕망과 거짓 교리가 만연할 때, 신실한 신앙인들은 진리를 찾아 부패한 교회를 떠납니다. 그들이 바로 롯으로 표상되는 선한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불과 유황이 하늘에서 쏟아지고, 롯이 소돔에서 나오는 것은 교회의 마지막 때, 주님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불과 유황이 쏟아지는 것은 악한 욕망과 거짓 교리로 말미암아 교회가 스스로 몰락하는 것이고, 롯이 소돔을 떠나는 것은 선한 사람들이 부패한 교회를 떠나가는 것입니다. 노아 시대에도 홍수가 있기 직전, 어떤 사람들은 방주에 올라 구원을 얻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방주 밖에서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다가 홍수를 만났습니다. 그것이 주님이 교회를 심판하시는 방법입니다. 먹고 마신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먹는 것은 삶 가운데서 저지르는 악이 의지라는 생명에 쌓이는 것이고, 마시는 것은 삶 가운데서 저지르는 거짓들이 이성이라는 생명에 쌓이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은 곧 이성과 의지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31절과 32절 말씀입니다.

 

31그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의 세간이 그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그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32롯의 처를 기억하라

 

앞의 28절과 29절 말씀이 부패한 교회에 대한 심판에 대한 것이라면, 이 말씀은 새 교회에 대한 경계의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여기서 지붕은 영적으로 가장 높은 것인 사랑의 선을 뜻하고, 집과 세간은 그보다 낮은 차원의 것인 신앙의 진리를 뜻합니다. 따라서 지붕 위에 있는 사람이 집의 세간을 가지러 내려오는 것은, 선의 상태에 있던 사람이 진리의 상태로 내려가는 것이며, 거듭난 사람이 거듭나기 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거듭나기 전 사람과 거듭난 사람의 차이에 대해 '천국의 비밀' 10184번 글 4번 항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거듭나기 전에는 진리를 통해 선으로 나아가며, 그러므로 부분적으로는 자기가 자신을 이끈다. 그러나 거듭나게 되면 주님께서 선을 통해 그를 이끄신다. (AC.10184:4, 이순철 역) for in this state man is led by means of truth to good, thus partly by himself; but in the later or posterior state, namely when he has been regenerated, man is led by good, that is, through good by the Lord.

 

그러니까 거듭나기 전 진리의 인도를 받을 때는 주님께 완전히 의지하지 않고, 부분적으로는 자기 자신에 의지하는 상태라는 것이고, 거듭난 후에 선의 인도를 받을 때라야 비로소 주님을 완전히 의지하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난 사람이 거듭나기 전 상태로 돌아가는 것은 영적으로는 아주 위험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주님을 온전히 믿고 따르는 만큼 살아나고, 주님보다 자신을 믿는 만큼 영적으로는 죽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붕에 있던 사람이 세간을 가지러 집 안으로 내려오는 것이나, 롯의 처가 뒤를 돌아보는 것은 주님만을 믿고 따르던 사람이 자기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영적인 죽음을 의미하며,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러지 말라 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영적으로 뒷걸음치지 않고, 항상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그와 관련해 본문 34절과 35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34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둘이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35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밤에 두 사람이 한 자리에 누워 있는데,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림을 당한다고 말합니다. 밤은 교회의 마지막 때의 상태, 즉 교회 안에 악한 욕망과 거짓 교리가 가득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자리, 또는 침상은 교회의 교리를 뜻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마지막 때에는 같은 교리 안에 있더라도 삶의 행위에 따라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고,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믿음만의 교리 안에 있는 사람이라도 주님의 말씀에 따라 진실하고 선하게 사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지만, 새 교회의 신앙 안에 있더라도 믿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두 사람이 한 자리에 누워 있는데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림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믿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믿음에 따른 삶이 중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두 여자가 맷돌을 가는데 하나만 데려감을 얻고, 다른 하나는 버림을 당한다는 것도 비슷한 의미입니다. 여기서 여자는 진리에 대한 애정을 뜻하고, 맷돌을 가는 것은 애정을 가지고 말씀으로부터 진리를 깨우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진리에 대한 애정이 같아 보이더라도 애정의 질에 따라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고,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고,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지 못할까요? 자아의 애정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하고, 주님이 주시는 애정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습니다. 자아에서 비롯한 애정은 진리를 진리 그 자체로 사랑하지 않고, 자신의 어떤 이익을 위해 사랑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진리를 보려고 해도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자아의 욕심이 눈을 가리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주님이 주신 애정 안에 있는 사람은 진리 그 자체를 사랑합니다. 그런 사람은 항상 진리의 깨달음 안에 있게 되고, 그것으로 매일 같이 영적으로 성장합니다. 바로 그런 사람이 맷돌을 가는 두 여자 중 구원받는 사람입니다.

 

왜 우리는 진리를 알면서도 행하지 않을까요? 왜 우리는 진리를 그 자체로 사랑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것에 관해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3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자기 목숨을 보전하는 것은 주님보다 자신의 자아를 더 사랑하는 것이고, 자기 목숨을 잃는 것은 주님을 위해 자아를 버리는 일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자아를 목숨만큼이나 소중히 여깁니다. 굶주림은 견뎌도 모욕을 당하거나 자존심 상하는 것은 못 견디는 게 인간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이런 자아를 그대로 두면 절대로 이웃을 사랑할 수 없고, 나아가서 주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자아는 모든 진실과 선의를 왜곡하고, 결국은 주님을 대적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잃는다는 것일까요? 주님이 주시는 생명을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아를 버리는 자는 대신 주님의 생명인 선과 진리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그것으로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교회의 마지막 때에는 악하고 거짓된 지옥의 영들이 믿지 않는 자는 물론이고, 믿는 사람들까지 유혹해 시험에 들게 합니다. 그러다 보면, 롯의 아내가 뒤를 돌아보는 것처럼 신앙적으로 뒷걸음질 칠 때가 많습니다. 또 부패한 교회들은 인간의 추론을 앞세워 진리를 왜곡하고, 수많은 거짓 교리를 만들어 냅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들의 추론의 능력을 주검 위에 날아드는 독수리에 비유했습니다. 주검은 사랑과 믿음을 잃어버리고 영적으로 죽어 있는 교회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교회의 마지막 때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인간들이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마16:25)고 하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16:24)

 

생명처럼 아끼는 자아를 버리라는 것입니다. 자아를 버리기 위한 싸움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아와의 싸움에서 때로는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가장 아름답고 진실한 교리이신 주님을 붙잡고, 다시 일어나 걸어가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눈먼 자는 눈을 뜰 것이요, 귀머거리는 귀가 열릴 것이며, 앉은뱅이는 일어나 걸을 것입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성도들과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8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요5:8, 9)

 

아멘

 

 

원본

2021-10-17(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4-03-24(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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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17(D1)-주일예배(2535, 눅17,20-27), ‘인자(人子)의 날, 번개의 번쩍임’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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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03-17(D1)-주일예배(2535, 눅17,20-27), ‘인자(人子)의 날, 번개의 번쩍임’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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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人子)의 날, 번개의 번쩍임’의 속뜻

 

 

20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22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23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따르지도 말라 24번개가 하늘 아래 이쪽에서 번쩍이어 하늘 아래 저쪽까지 비침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 25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 바 되어야 할지니라 26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27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눅17:20-27)

 

 

천사들이 이 천국 또는 저 천국에 있는 것은 그들의 내면 때문이다. 왜냐하면 내면이 주님을 향해 열려 있는 만큼 그들은 보다 내적인 천국 안에 있기 때문이다. (천국과 지옥 33, 이순철 역) with the angels it is the interiors that cause them to be in one heaven or another; for as their interiors are more open to the Lord they are in a more interior heaven. (HH.33)

 

 

유대인들은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다 돌아온 이후 의기소침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구약의 예언에 따라 언젠가는 메시아가 오셔서 다윗 시대의 영광을 회복하실 거라고 믿었습니다. 더구나 주님이 오셨을 당시는 로마의 압제 아래 있는 암담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 열망은 더욱 컸습니다. 그들이 그런 바람을 가지게 된 것은 구약의 예언 때문이었는데, 특히 이사야서 11장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4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9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사11:1, 4, 9)

 

유대인들은 이 말씀 속에 속뜻이 있다는 것은 모르고 단지 메시아가 오셔서 다윗 왕의 영광을 재현할 것이라고만 믿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곧 메시아의 출현이었던 것입니다.

 

20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바리새인들은 주님이 메시아이신 줄도 모르고,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물었습니다. 주님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라고 대답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세속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도 세상 나라들처럼 물질로 만들어지는 나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세워지는 사랑과 지혜의 나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대답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임할까요? 마가복음 4장 26절 이하에는 그것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26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27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28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29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 (막4:26-29)

 

이 말씀을 들은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나라는 자연적인 나라가 아니라 사람의 내면에 세워지는 영적 나라이며, 그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고, 한 사람의 생애 전체를 통해 아주 천천히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번에는 제자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22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때가 이른다는 것은 교회의 마지막 때를 의미합니다. 즉 교회 안에 더 이상 사랑도 없고 진정한 믿음도 없는 때입니다. 교회들이 영적으로 그렇게 피폐해질 때, 신실한 신앙인들은 진리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고 다닙니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진정한 진리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본문에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하신 것은 그런 의미로 하신 말씀입니다. 즉 참된 진리를 찾아다니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교인들의 모습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말씀에서 ‘인자’는 진리이신 주님을 뜻하고,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는 것은 교회 안에 진리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교회에 진리가 없는 이유가 뭘까요? 그들이 말씀을 왜곡, 거짓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마3:10)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나무는 진리 또는 믿음을 뜻하고, 열매는 진리에 따른 삶의 행위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의 의미는 진리만 있고, 진리에 따른 삶이 없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교회가 그와 다르게 믿음만 있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것이 거짓입니다. 거짓된 교리들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랑과 진리를 파괴하고, 그렇게 해서 교회를 내적으로 붕괴시킵니다. 교회의 종말은 그렇게 시작됩니다.

 

23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따르지도 말라

 

교회의 마지막 때는 진리를 가장한 수많은 거짓과 이설이 나타나 진리에 목마른 신앙인들을 현혹합니다. 그 거짓들은 아주 교묘해서 가끔은 진리를 많이 안다는 사람조차도 빠져듭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신실한 교인들을 향해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따르지도 말라’ 하십니다. 진리를 잘 모르는 사람이 거짓에 빠져드는 것은 큰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진리를 잘 아는 사람이 거짓에 빠지는 것은 큰 죄입니다. 그것은 진리를 더럽히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 24절에서는 세상의 종말, 즉 교회의 마지막 때에는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24번개가 하늘 아래 이쪽에서 번쩍이어 하늘 아래 저쪽까지 비침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

 

여기서 ‘인자의 날’은 교회의 마지막 때를 뜻하며, 동시에 주님께서 새로운 교회의 교리로서 참된 진리를 선포하시는 때를 말합니다. 그때 번개가 하늘 아래 이쪽과 저쪽에서 번쩍이는 것은 교회의 거짓들과 맞서 싸우는 신성한 진리를 나타냅니다. 번개는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성한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신성한 진리를 가지고 어떻게 싸우실까요? 한편으로는, 진리를 찾아 헤매던 신실한 사람들에게 참된 진리를 밝혀 주십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 진리를 알면서도 왜곡했던 사람들의 주장이 거짓임을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들에게서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을 빼앗아 버리십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진리를 아는 것이 오히려 큰 화가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것에 대해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요9:39)

 

주님이 오셔서 참된 진리를 세상에 밝히실 때 거짓 교리 안에 있는 교회들은 가만히 있을까요? 참된 진리이신 주님을 핍박하고 말살하려고 합니다. 그것을 본문 25절에서는,

 

25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 바 되어야 할지니라

 

이 말씀은 교회들이 신성한 진리를 모독하고 배척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유대교회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인간의 생각을 섞어 장로의 전통이라는 인간의 교리를 만들어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소중히 여겼습니다. 그것은 진리를 모독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의 죄악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어린 양같이 순결하신 주님을 욕하고 폭행하며,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습니다. 주님을 폭행하고 죽이는 것은 신성한 진리를 모독하고 말살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는 그 본질에 있어 진리 그 자체이신 분이시기 때문이며, 이 진리는 선 자체이신 여호와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진리이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에 대해 요한복음에서는

 

9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요1:9, 10)

 

라고 말합니다. 교회의 마지막 때에는 항상 교회들에 의해 말씀이 왜곡되고 조작되었습니다. 그것은 주님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 이 시대도 그렇습니다. 이 시대의 새 교회도 이유 없이 박해를 받았고, 교리가 부인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의 시험을 이기시고, 신성한 인간으로 부활하신 것처럼 새 교회의 진리도 시험을 딛고 이겨냄으로써 보다 완전하고 단단한 진리가 됩니다. 완전한 진리가 된다는 것은 우리 안에서 진리와 선, 또는 믿음과 인애, 체어리티의 삶이 더욱 긴밀하게 결합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 악과 거짓의 위협과 유혹을 이겨냄으로써 이루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 바 되어야 할지니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지막 때, 주님이 밝혀 주시는 새로운 진리를 통해 눈이 밝아진 사람들은 그들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거짓 진리를 끝까지 붙들고 참된 진리를 박해하는 사람들은 점점 눈이 어두워져 나중에는 진리가 뭔지 거짓이 뭔지도 분별하지 못하는 영적 맹인, 소경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 신앙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어린 양 같은 순진함입니다. 그래야 주인이 부르시는 소리를 듣고, 진리의 우리 안으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이 진리는 그냥 가지고만 있는 진리가 아닙니다. 고난의 진리이며, 형제와 이웃들로부터 버림받을 수도 있는 진리입니다. 시험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말씀의 내적 진리로 다시 오신 주님의 손을 잡고, 시험을 이기고 또 이기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새 교회의 모든 성도들, 그리고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웃들에게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26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27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눅17:26, 27)

 

아멘

 

원본

2021-09-19(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4-03-17(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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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10(D1)-주일예배(2534, 눅17,11-19),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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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03-10(D1)-주일예배(2534, 눅17,11-19),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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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의 속뜻

 

 

11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14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예수의 발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17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눅17:11-19)

 

주님께서 치유하신 모든 자연적 질병들은 그것에 상응하는 영적 질병들을 의미한다. 영적 질병은 오직 주님에 의해서만 치유될 수 있다. 즉 주님의 신적 전능함을 바라보는 일과 삶의 회개를 통해서만 치유될 수 있다. (계시록 해설 815:5, 이순철 역) all the diseases healed by the Lord represented and thus signified the spiritual diseases that correspond to these natural diseases; and spiritual diseases can be healed only by the Lord, and in fact by looking to His Divine omnipotence and by repentance of life. (AE.815.5)

 

 

오늘 본문 말씀을 읽으면서 그동안 살면서 은혜를 입은 많은 분들 생각이 났습니다. 가깝게는 부모님과 형제들, 처가, 그리고 고등학교 동기들, 서울침례교회 청년부 형제자매들, 지구촌교회를 비롯, 침신대 신대원 동기들, 늘사랑교회 성도들과 그 외 개척 시절 물심양면 많은 도움을 주신 평책사 목회자 부부들, 그리고 수도원이나 4014 금식 운동 등으로 알게 된 많은 지인들 등, 제가 지난 4, 5년 꾸준히 틈틈이 글 공유를 하는 카카오톡 명단이 있는데, 그중 거의 대부분이 바로 한 번이라도 저희에게 은혜와 사랑을 베푸신 분들을 대상으로 초창기 처음 명단을 선정했던 것입니다. 아무 것도 무슨 대신 갚을 것 없는 때여서 제가 받은 은혜와 감사의 글 나누는 것 외에는 없었기 때문이지요. 지금은 제가 하는 이 스베덴보리의 낯설고 생소한 말씀 풀이와 이질적 교리로 그마저 많이들 소원해졌지만... 그러나 여전히 한 분 한 분 저희를 기억하시고 사랑과 은혜, 냉수 한 그릇이라도 베푸신 기억들은 두고두고 고맙고 감사합니다. 아주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다 제 일지에 기록되어 있으나, 그러나 정작 실제로 그 고마움을 나타내고 표현하는 일에는 저희가 너무 서툴러 본의 아니게 섭섭함과 서운함을 드리는 경우들도 가끔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참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그 한분 한분이 사실은 그분들 모습으로 저희를 도우신 주님이셨을 텐데 말입니다. 주님, 정말 죄송합니다...

 

네, 그렇습니다. 제 경우였지만... 이처럼 우리는 왜 보통은 주님의 은혜에 감사할 줄을 모를까요? 그리고 주님께 감사하지 않는 사람은 나중에 어떻게 될까요? 지금부터 그것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본문 1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11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면 주님이 갈릴리를 출발,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그러나 영적으로는, 즉 그 속뜻으로는, 이 말씀은 주님의 영화(glorification)의 과정을 나타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주님이 지옥의 시험을 이기시고, 점차 신성한 인간(The Divine Human)이 되시는 과정을 의미하지요. 이에 대해 지금부터 드리는 말씀은 조금 어려우실 듯 합니다만... 주님이 빛을 더하사 이해를 더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여기서 갈릴리는 교회 밖 이방인을 뜻하고, 사마리아는 이방인 가운데서도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따라서 주님이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것은 주님도 처음에는 교회 밖 이방인들처럼 하나님에 대해 전혀 모르는 상태로 계시다가, 그러니까 아주 어린 영유아 시절이셨겠지요, 점차 진리의 인도를 받아 내면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가신 것을 뜻하며, 그러므로 전반적으로는 주님의 영화의 과정을 의미하는데요, 왜냐하면 예루살렘은 주님의 영화, 즉 주님이 입으신 인성과 주님 안의 신성이 하나 되는 상태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에는 주님이 예루살렘에서 죽임을 당하시고, 또한 거기서 부활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죽임을 당하시는 것은 세상에서의 마지막 시험을 뜻하고, 부활은 시험에서 이기심으로 해서 신성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 즉 주님의 영화를 의미하기 때문이지요. 주님은 그렇게 한편으로는 인성을 영화롭게 만드시면서, 또 한편으로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시고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그렇다면 아직 신성과 완전히 결합하지 않으신 주님이 그러면 어떻게 병자들을 고치실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만... 그러나 주님이 영화롭게 되시는 과정을 보면, 주님의 인성과 신성이 서로 결합되어 있을 때도 있었고, 분리된 상태일 때도 있었는데요, 전자의 상태, 즉 인성과 신성이 결합한 상태를 주님의 영화의 상태라 하고, 후자의 상태, 즉 인성과 신성이 분리된 상태를 겸비(humiliation)의 상태라고 합니다. 겸비라는 것은 주님의 인성이 신성 앞에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이 병자들을 고치시는 것은 신성과 인성이 결합해 하나가 된 상태일 때, 즉 영화의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인데요, 그때 신성의 능력이 인성을 거쳐 병자들에게 전해져 병을 치유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주님이 병자를 고치시는 모습을 12절과 13절에서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12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영적 의미로 나병환자는 진리를 알면서도 그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이며, 그러므로 진리를 더럽히는 사람을 뜻합니다. 저를 비롯한 우리 역시 어떤 면에서는 여전히 영적 나병환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멀리 서서 큰 소리로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입으로는 주님을 인정하지만, 속으로는 그렇게까지 인정하지는 않는 걸 의미하는데요, 왜냐하면 본문을 보면, 그들이 입으로는 주님을 ‘예수 선생님이여’라고 부르면서도 정작 주님으로부터는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나병환자의 경우, 시대적으로, 즉 유대 정결법이 우선되는 당시 상황에서는 그럴 수 밖에 없었지만, 속뜻으로는 그렇다는 말입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사람들 중에는 실제로는 주님을 믿지 않고, 자기 자신을 믿거나 세상 재물을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조차 주님 앞에 나오면 영적인 복과 자연적인 복을 주님께 구합니다. 나병환자가 멀리서 주님께 병의 치유를 구하는 것은 이를테면 그런 것입니다.

 

14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러자 주님께서 그들에게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십니다. 레위기 13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 중에 나병환자가 생기면 먼저 제사장에게 보이고, 그를 통해 나병의 유무와 그 상태를 판단 받도록 했습니다. 주님이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라 하신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지요. 그렇다면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는 것의 영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말씀에서 제사장은 선을 뜻합니다. 그리고 몸을 보이라 할 때, 몸은 겉 사람의 삶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는 것은 선의 관점에서 삶을 되돌아보는 걸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선의 상태에 있던 사람이 돌아서서 악을 행하는지, 아니면 아직 선의 상태에 이르지 못하고, 진리의 상태에 있다가 악을 행하는지 스스로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자의 상태가 후자보다는 내적인 나병이고, 그러므로 위중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속까지 병드는 게 겉만 병든 것보다 더 치명적이기 때문이지요. 상한 양파나 감자, 사과 같은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은 나병환자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았다고 합니다. 간다는 것은 영적으로는 행하는 것을 의미하는데요, 그러니까 가다가 깨끗함을 받았다는 것은 나병환자들이 주님의 말씀대로 자신의 병의 상태를 진단한 후, 악에서 돌아설 때 병이 치유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저들처럼 주닙의 말씀대로 하면, 일상 가운데 이런 일이 고스란히 그대로 우리에게도 일어날 줄 믿습니다.

 

15절과 16절에는 병이 치유된 나병환자 중 한 사람이 주님께 돌아와 감사하는 모습을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습니다.

 

15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예수의 발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나병환자 가운데 한 사람이 주님을 찾아와 주님의 발아래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주님의 발아래 엎드리는 것은 그가 겸손하게 주님을 예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발아래 엎드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그와 관련해 계시록 해설 77번 글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힘과 지혜에 있어 하나님은 모든 것이고 그에 비해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할 때, 또는 모든 선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고, 인간으로부터는 악 외에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 그때 그는 하나님 앞에 굴복한다. 사람이 이러한 것을 마음으로 인정할 때, 그는 마치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난 사람처럼 머리를 숙인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때 또한 그에게서 자아가 제거된다. (이순철 역) when man thinks that the Divine in respect to power and wisdom is everything, and man in comparison is nothing, or that from the Divine is all good and from man nothing but evil. When man is in this acknowledgment from the heart he comes as it were out of himself, and thence falls upon his face, and when he is thus out of himself he also is removed from the proprium [what is his own], which in itself is wholly evil; when this is removed, the Divine fills him and raises him up; (AE.77)

 

주님께 감사드리는 나병환자는 자신은 아무 힘도 없고, 오로지 주님의 도우심으로 고침을 받았음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17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주님께서 발아래 엎드린 그 사람을 향해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물으십니다. 여기서 열 사람은 그 속뜻으로는 주님께 병 고침을 받은 모든 사람을 뜻합니다. 열이라는 숫자는 모든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홉은 결합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주님과의 결합이 아니라 자아와 세상과의 결합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주님께 돌아와 감사하지 않은 아홉 사람은 주님이 주시는 인애(仁愛, charity)의 신앙을 버리고, 자아에서 나오는 신앙으로 자기 자신 및 세상과 결탁, 결합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세상의 부귀를 좇아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앞이 캄캄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찾아 겨우 숨통이 트여 살만하게 되면 금방 또 제힘을 의지하여 세상 가치관으로 돌아서는 그런 버릇이 우리 안에 여전히 있는 것을 보는데요, 이런 일이 반복되면 나이는 들어가는데 이루거나 모아놓은 건 전혀 없이 마치 다람쥐 쳇바퀴 돌듯 제자리를 맴맴 도는, 어처구니없는 인생을 살게 되지요. 이런 못된 버릇이나 습관은 아주 단호하게 끊어내야 할 줄 믿습니다.

 

아, 그리고 참고로, 이 9:1 비율은 의외로 많은 곳에서 발견되거나 경험할 수 있는데요, 가령, 제가 몇 년째 대략 100여 분께 받은 바 은혜를 나누어 오지만, 그 가운데 꾸준히 답신을 보내오시거나 무슨 반응을 보이시는 분은 대략 열 분 정도밖에 안 됩니다. 처음엔 좀 서운함이 있었으나 ‘아, 원래 이런 거구나...’ 하는 걸 알게 되고 나선 그러려니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께로 돌아와 감사를 드리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말씀에는 그를 사마리아인 또는 이방인이라고 합니다. 사마리아인은 교회 밖의 이방인이지만 그럼에도 진리를 사랑하여 배우기를 원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사마리아인의 믿음은 자신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진 음식 부스러기를 먹는 개에 비유하신 주님의 비유에 기꺼이 동의한 수로보니게 여인과 같은 겸손한 믿음이며, 부잣집 문 앞에서 음식을 구걸하듯 진리에 갈급했던 거지 나사로와 같은 믿음입니다.

 

19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주님께서 그에게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셨습니다. ‘일어나는 것’은 주님이 주신 깨달음으로 그의 신앙이 자아의 이기적 신앙에서 주님이 주시는 이타적 신앙으로 한 단계 올라선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가는 것’은 신앙의 진리에 따라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는 삶을 뜻합니다. 말씀에서 걷는 것이나 가는 것은 삶의 행위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는데요, ‘구원하였다는 것’은 그의 병이 일시적으로 치유된 게 아니라 영원히 치유되었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구원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가 구원을 받은 이유는 그의 신앙이 인간의 이기적 신앙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인애의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공부하면서 신앙이라고 모두 같은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구원과 세상에서의 영달(榮達)을 위한 그런 신앙도 있습니다. 우리가 진리에 따라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기 위해서는 전자의 신앙, 즉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신앙이라야 합니다. 그게 아니라 후자의 신앙, 즉 이기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가 흘러들어올 때, 오히려 그것을 방해합니다. 그래서 악을 끊고 선을 행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병을 고치기를 원하는 병자들에게 언제나 ‘네가 나를 믿느냐’ 물으신 것입니다. 주님이 물으실 때의 그 믿음은 인간의 자아에서 나오는 이기적인 신앙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타적인 신앙입니다. 겸손한 사마리아인은 주님이 주신 깨달음에 따라 자아의 신앙을 버리고, 주님이 주신 신앙을 받아들였습니다. 그 결과 고질병인 나병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있었고, 주님의 발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반대로 나머지 아홉 사람의 나병환자들은 주님이 주신 깨달음을 통해 일시적으로 병을 고칠 수는 있었지만, 곧 본래의 상태로 되돌아갔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주시는 이타적인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고 이기적인 신앙을 고집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영적인 질병을 근본적으로 고칠 수 없고, 주님 앞에 겸손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에게로 돌아온 한 사람 사마리아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각자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진리에 따라 매일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자신의 신앙이 어떤 상태인지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통찰력으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신앙이 잘못된 것이라면 과감히 버리고, 주님으로부터 사랑의 신앙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이 진리를 사랑하는 형제와 자매들에게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눅17:6)

 

아멘

 

 

 

원본

2021-09-12(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맞춤 설교

2024-03-10(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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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03(D1)-주일예배(2533, 눅17,7-10),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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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03-03(D1)-주일예배(2533, 눅17,7-10),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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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의 속뜻

 

 

7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8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 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9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10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눅17:7-10)

 

 

사람이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을 통해 하는 일은 무엇이든 천국으로부터 하는 것, 즉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해 하는 것이다. 그러나 속 사람과 관계없이 겉 사람 혼자 하는 것은 무슨 일이든 자신으로부터 하는 것이다. (계시록 해설 794:3, 이순철 역) whatever man does from that internal through the external he does from heaven, that is, through heaven from the Lord; but anything that a man does by the external without the internal, this he does from self. (AE.794:3)

 

 

다음은 마태복음에 실린 주님의 산상수훈 말씀입니다.

 

1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2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3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4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5:1-4)

 

주님께서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십니다. 이웃에게 선한 일을 할 때는 생색을 내지 말고, 조용히 하라는 말씀이지요. 누구나 자기를 자랑하고픈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러지 말라 하십니다. 왜일까요? 자기 자신을 자랑하거나 높이는 건 자아에 대한 사랑이며, 악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대신 자신만을 사랑하면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의 문이 닫혀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통해 흘러들어오는 선(善, Divine Good)과 진리(眞理, Divine Truth)의 유입이 끊어집니다. 그런 상태가 속 사람과 관계없이 겉 사람 혼자서 살아가는 상태인데, 그때 우리는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 생각할 뿐 이웃에게는 관심이 없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1장 39절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이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처럼 행동했지만, 속으로는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39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40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눅11:39-40)

 

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바리새인들은 겉만 번지르르한 위선자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그들에게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41절) 하십니다.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는’ 건 이웃에게 선을 베풀 때는 겉 사람으로부터 하지 말고, 속 사람으로부터 하라는 뜻입니다. 똑같은 행동이라도 겉 사람으로부터 하는 행동이 있고, 속 사람으로부터 하는 행동이 있습니다. 전자는 인간의 자아로부터 하는 것이고, 그러므로 그 속 동기는 주님 보시기에 불순하고 악합니다. 반면, 후자, 즉 속 사람으로부터 하는 행동은 주님으로부터 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순수하고 선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웃을 구제할 때는 속 사람으로부터 하라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무익한 종이 되라고 하십니다. 주님 앞에 스스로 무익한 종이 되는 건 겉 사람의 마음으로는 어렵고, 속 사람의 마음이 열려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 앞에서 무익한 종이 될 수 있을까요? 그것에 대해 오늘 본문의 말씀들을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7절입니다.

 

7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종이 밭에서 돌아왔다고 합니다. 말씀에서 종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가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건 말씀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배워 익숙해지는 걸 의미합니다. 밭을 가는 건 진리의 지식을 배워 믿음이 자라가는 걸 의미하고, 양을 치는 건 그 믿음에 따라 선을 행하려고 노력하는 걸 의미합니다. 그러면 밭은 무엇일까요? 밭은 교회를 뜻합니다. 신앙인은 교회를 통해 매일 선과 진리에 대해 배우고, 그것을 묵상, 실천하는데요, 그것이 종이 밭을 일구고, 양을 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종이 밭에서 돌아와 앉아 누군가 차려주는 음식을 먹으려고 합니다. 말씀에서 앉는 건 의지의 상태를, 먹는 건 진리와 선을 실천하는 거, 즉 삶의 행위를 뜻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자리에 앉아 다른 사람이 차려주는 음식을 먹으려고 하는 종의 상태는 어떤 겁니까? 선을 행하기는 하는데, 주님과 이웃을 위해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진리에 대해 아는 걸 자랑하고, 진리를 이용해 사사로운 욕심을 채우려 하는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앞에서 말한 바리새인들과 같은 상태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종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물으신 겁니다. 그러면 종은 어떻게 처신하는 게 옳을까요? 그에 대해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8절 말씀입니다.

 

8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 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종은 자기가 먹기 전에 마땅히 주인의 먹을 것을 먼저 준비하고, 주인이 먹는 동안 곁에서 수종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신앙인들이 진리를 가지고 선을 행할 때는 자기 자신보다 먼저 주님과 이웃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속 사람이 열리고, 주님으로부터 천국의 지혜와 사랑, 그리고 기쁨과 행복이 쏟아져 들어옵니다. 주인이 먹은 다음, 종이 먹고 마실 음식은 바로 그런 천국의 것, 곧 천국에 속한 것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종 된 사람은 허리에 띠를 두르고 먼저 주인을 수발해야 합니다. 말씀에서 허리는 생식능력과 관련이 있는데요, 그래서 영적으로는 선한 열매를 생산하는 것, 즉 선을 행하는 걸 뜻합니다. 그리고 띠는 진리를 뜻합니다. 따라서 띠를 두르고 주인을 수종, 수발하는 건 선을 행함에 있어 자기 마음대로 하지 않고, 진리에 따라 행하는 걸 의미합니다. 진리에 따라 선을 행할 때, 주님과 이웃을 위한 선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이 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그걸 가지고 우리가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과 이웃을 위해 쓰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할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천국의 지혜와 사랑, 그리고 평화와 자유를 주십니다. 주님은 그걸 위해 종더러 먼저 주인을 수발하고, 그다음에 먹고 마시라고 명하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길에는 이와 같은 반전의 미학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육신의 생명을 버리심으로 영광을 얻으신 것이나, 신앙인들이 자아라는 생명을 버림으로 주님으로부터 참 생명을 얻는 건 겉 사람으로 사는 사람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반전입니다. 그럼에도 신앙인들 가운데는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듣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선과 진리를 가지고 주님을 섬기기보다 이웃들로부터 섬김받기를 원하는 것이지요. 그런 사람들이 주인보다 먼저 먹고 마시려는 종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잠깐의 쾌락을 위해 영원한 행복을 포기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9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하십니다. 신앙인들은 주님으로부터 진리를 배우고 믿고, 그것에 따라 살 수 있음에 항상 감사해야 합니다. 그걸로 추앙받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그걸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끝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0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우리는 주님 앞에 스스로 무익한 종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내가 잘나거나 총명해서 참된 진리 안에 들어온 게 아닙니다. 내가 선해서 이웃에게 선을 베풀고, 이웃의 허물을 용서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실제로는 아주 작은 선도 스스로 행할 수 없고, 아주 작은 악도 스스로 끊을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악하고 거짓된 것만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하고 진실한 모든 게 오직 주님으로부터만 온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그걸 인정할 때, 주님 앞에 엎드려 ‘주님, 저는 무익한 종입니다’ 고백할 수 있으며, 지금까지 한 일들에 대해 ‘그저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입니다’ 겸손하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 아시는 것처럼 사람에게는 속 사람이라는 마음과 겉 사람이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속 사람 안에는 주님이 계시고, 겉 사람 안에는 인간의 자아가 있습니다.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으로부터만 오고, 사람으로부터는 아니라는 건 선과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거쳐 겉 사람 안으로 흘러들어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선한 행위는 겉 사람 혼자 하는 게 아니라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을 통해 행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겉보기에 아무리 진실한 말을 하고, 성실하고 공정하게 행동하더라도 그 동기가 주님과 이웃을 위한 게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면 속 사람과 관계없이 겉 사람 혼자서 하는 일이며, 그러므로 악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속 사람이 열리고, 속 사람으로부터 말하고 행동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주님과 이웃 앞에 겸손’하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힘으로는 겸손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필요할 때마다 우리에게 시험을 허용하십니다. 시험을 통해 우리는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며, ‘주님과 함께’라야만 비로소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거듭나는 사람들에게 시험이 많은 것입니다. 시험을 잘 견디고 이김으로써 속 사람은 열립니다. 그리고 그때 무슨 일을 하든 자아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매일 같이 띠를 두르고, 정성껏 주님과 이웃을 섬길 수 있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형제에게 함께 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시107:15)

 

아멘

 

원본

2021-08-29(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4-03-03(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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