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290.심화

 

19. ‘32:32

 

내가 바로로 하여금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사람을 두렵게 하게 하였으나 이제는 그가 그 모든 무리와 더불어 할례를 받지 못한 자 곧 칼에 죽임을 당한 자와 함께 누이리로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2:32) For I have put My dismay in the land of the living; and he shall be laid down in the midst of the uncircumcised with them that are slain with the sword, even Pharaoh and all his multitude, says the Lord Jehovih (Ezek. 32:32).

 

 

스베덴보리가 AC.290에서 위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이 구절이 앞에서 인용한 겔32:23-27의 결론에 해당하며,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과 죽음의 상태’를 다시 한번 선명하게 대조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눈에 띄는 표현은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입니다. AC.290에서 스베덴보리가 계속해서 여러 성경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바로 이 표현이 단순히 지상의 세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의미에서는 주님으로부터 생명이 흘러나오는 영역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도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은 주님의 생명이 역사하는 영역, 곧 교회와 천국의 생명의 질서를 상징합니다.

 

이 구절에서 바로는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사람을 두렵게 하였으나 결국 그 모든 무리와 더불어 할례를 받지 못한 자 곧 칼에 죽임을 당한 자와 함께 누이리로다’라는 심판을 받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칼에 죽임을 당한 자’는 단순히 전쟁에서 죽은 사람을 뜻하지 않습니다. ‘’은 진리를 파괴하거나 거짓을 뜻하는 상징이므로, ‘칼에 죽임을 당한 자’는 거짓으로 인해 영적 생명을 잃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또한 할례를 받지 못한 자 역시 중요한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할례를 proprium의 악을 제거하고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표상으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할례를 받지 못한 자’는 자신의 proprium 안에 머물러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바로가 그들 가운데 눕는다는 것은, 결국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과 단절된 동일한 영적 상태에 이르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특히 이 구절은 앞에서 반복된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사람을 두렵게 하였다’는 말씀을 다시 한번 결론적으로 언급합니다. 다시 말해, 바로는 한때 생명의 영역 안에서 강대한 권세를 행사하며 사람들을 두렵게 하였지만, 그 결과는 생명의 영역에 남는 것이 아니라, 영적 생명을 잃은 자들과 함께하는 상태였습니다. 이것은 세상에서의 권세와 참된 생명은 전혀 다른 문제임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AC.290에서 이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이라는 표현을 또 하나의 성경적 증거로 제시하기 위해서입니다. 동시에 바로와 애굽의 최후를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거부하는 사람은 비록 세상에서는 위엄과 권세를 누리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 영적 생명을 잃은 자들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 구절은 AC.290의 핵심 사상을 다시 확인해 줍니다. 참된 생명은 사람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께 있습니다. 사람은 그 생명을 받아들이는 동안에만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 속하며, 그 생명을 거부하면 결국 영적 죽음의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바로에 대한 이 마지막 선언은 이러한 진리를 매우 엄숙하게 마무리하는 증거로 인용된 것입니다.

 

 

 

AC.290, 심화 18, ‘겔32:23-27’

AC.290.심화 15. ‘겔32:23-27’ 23그 무덤이 구덩이 깊은 곳에 만들어졌고 그 무리가 그 무덤 사방에 있음이여 그들은 다 죽임을 당하여 칼에 엎드러진 자 곧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사람을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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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32:23-27

 

23그 무덤이 구덩이 깊은 곳에 만들어졌고 그 무리가 그 무덤 사방에 있음이여 그들은 다 죽임을 당하여 칼에 엎드러진 자 곧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사람을 두렵게 하던 자로다 24거기에 엘람이 있고 그 모든 무리가 그 무덤 사방에 있음이여 그들은 다 할례를 받지 못하고 죽임을 당하여 칼에 엎드러져 지하에 내려간 자로다 그들이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두렵게 하였으나 이제는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수치를 당하였도다 25그와 그 모든 무리를 위하여 죽임을 당한 자 가운데에 침상을 놓았고 그 여러 무덤은 사방에 있음이여 그들은 다 할례를 받지 못하고 칼에 죽임을 당한 자로다 그들이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두렵게 하였으나 이제는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수치를 당하고 죽임을 당한 자 가운데에 뉘었도다 26거기에 메섹과 두발과 그 모든 무리가 있고 그 여러 무덤은 사방에 있음이여 그들은 다 할례를 받지 못하고 칼에 죽임을 당한 자로다 그들이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두렵게 하였으나 27그들이 할례를 받지 못한 자 가운데에 이미 엎드러진 용사와 함께 누운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이 용사들은 다 무기를 가지고 스올에 내려가서 자기의 칼을 베개로 삼았으니 그 백골이 자기 죄악을 졌음이여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용사의 두려움이 있던 자로다 (32:23-27) whose graves are put in the flanks of the pit, and her assembly is around her grave; all of them slain, fallen by the sword, who put dismay in the land of the living. Elam is there, and all her crowd around her grave, all of them slain, fallen by the sword, who have gone down uncircumcised to the lower earth, who put their dismay in the land of the living; and they have borne their humiliation with those who go down to the pit. They have put a bed for her in the midst of the slain with all her crowd; her graves are all around him, all of them uncircumcised, slain by the sword, for their dismay was put in the land of the living, but they have borne their humiliation with them that go down to the pit. He is put in the midst of the slain. Meshech is there, Tubal, and all her crowd; her graves are all around him, all of them uncircumcised, pierced by the sword, for they put their dismay in the land of the living. And they shall not lie with the mighty who are fallen of the uncircumcised, who are gone down to hell with their weapons of war; and they have put their swords under their heads, but their iniquities shall be on their bones, as they were the dismay of the mighty in the land of the living (Ezek. 32:23-27).

 

 

스베덴보리가 AC.290에서 위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이 본문이 반복해서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the land of the living)을 언급하면서도, 동시에 그와 정반대되는 상태인 구덩이’, ‘지하’, ‘죽임을 당한 자들’, ‘할례받지 못한 자들’을 대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AC.290의 핵심은 오직 주님만이 생명 자체(Life Itself)이시며, 모든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본문은 생명의 영역과 생명에서 끊어진 영역을 극명하게 대비하는 중요한 증거가 됩니다.

 

32는 애굽과 여러 강대국의 몰락을 묘사하면서, 그들이 모두 구덩이로 내려간 자들 가운데 있게 되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앗수르, 엘람, 메섹, 두발과 같은 민족들이 차례로 등장하며, 모두 칼에 죽임을 당한 자’, ‘구덩이로 내려간 자’, ‘지하로 내려간 자’로 묘사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표현을 단순한 전쟁의 결과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거부한 영적 상태를 나타내는 상응으로 이해합니다.

 

특히 이 본문에서는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사람을 두렵게 하던 자’라는 말이 여러 번 반복됩니다. 이 표현은 처음 읽으면 다소 이상하게 들립니다. 이미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 있었다면 왜 다시 그것이 강조될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러나 말씀의 영적 의미에서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은 단순히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역사하는 영역, 곧 교회와 천국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두려움을 끼쳤다’는 것은, 생명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진리와 선을 파괴하는 영향력을 행사하였음을 의미합니다.

 

반대로 그들의 최후는 모두 구덩이’, ‘지하’, ‘죽임을 당한 자 가운데’로 묘사됩니다. 이는 장소의 이동보다 상태의 변화를 말합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거부한 결과, 생명의 영역에서 분리되어 영적 황폐 가운데 놓이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과 구덩이’는 서로 대조되는 두 장소가 아니라, 생명의 유입을 받는 상태와 그 유입을 거절하는 상태를 각각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또한 이 본문에서 반복되는 할례를 받지 못한 자’라는 표현도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할례는 단순한 유대인의 의식이 아니라, proprium의 악을 제거하고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상태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할례를 받지 못한 자’는 여전히 자신의 proprium 안에 머물러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결국 모두 구덩이로 내려가는 자들 가운데 놓이는 것은,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과의 연결이 끊어진 결과를 보여 줍니다.

 

이 구절은 앞에서 AC.290이 인용한 여러 말씀과도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36:9에서는 주님을 생명의 원천’이라 하였고, 17:13에서는 생수의 근원’이라 하였으며, 38:11과 사53:8에서는 산 자의 땅’을 생명의 영역으로 묘사하였습니다. 26:20에서는 주님께서 살아 있는 자의 땅’에 영광을 두신다고 하였고, 여기 겔32:23-27에서는 그 생명의 영역을 어지럽힌 자들이 결국 모두 구덩이로 내려간다고 선언합니다. 이처럼 각각의 인용은 서로 다른 측면에서 동일한 진리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겔32:23-27 AC.290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살아 있는 자의 땅’이라는 표현을 다시 한번 증거로 제시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 생명의 영역과 주님으로부터 분리된 죽음의 영역을 강렬하게 대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사람은 살아 있는 자의 땅’에 속하지만, 그 생명을 거부하는 사람은 비록 세상에서는 강대한 자처럼 보일지라도 결국 구덩이’와 지하’의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따라서 이 본문은 오직 주님만이 생명 자체이시며, 모든 참된 생명은 주님으로부터만 흘러나온다는 AC.290의 중심 교리를 매우 극적인 대조를 통해 확증해 주는 중요한 성경적 증거가 됩니다.

 

 

 

AC.290, 심화 19, ‘겔32:32’

AC.290.심화 19. ‘겔32:32’ 내가 바로로 하여금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사람을 두렵게 하게 하였으나 이제는 그가 그 모든 무리와 더불어 할례를 받지 못한 자 곧 칼에 죽임을 당한 자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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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0, 심화 17, ‘겔26:20 끝부분의 한, 영 차이’

AC.290.심화 17. ‘겔26:20 끝부분의 한, 영 차이’ 겔26:20 끝부분에 대한 한글과 영어가 아래와 같이 다른 이유 한글 : 살아 있는 자의 땅에서 영광을 얻지 못하리라 영어 : I shall put elegance in the land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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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26:20 끝부분의 한, 영 차이

 

26:20 끝부분에 대한 한글과 영어가 아래와 같이 다른 이유

 

한글 : 살아 있는 자의 땅에서 영광을 얻지 못하리라

 

영어 : I shall put elegance in the land of the living.

 

 

얼핏 보면 두 번역은 정반대처럼 보입니다.

 

그 이유는 개역개정이 히브리어 원문을 다르게 번역했기 때문이 아니라, 문장의 연결 방식을 다르게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 원문 마지막은 וְנָתַתִּי צְבִי בְּאֶרֶץ חַיִּים(ve-natatti tsevi be'erets chayyim)으로, 직역하면 그리고 내가 산 자의 땅에 영광(아름다움)을 둘 것이다’입니다. 여기에는 얻지 못하리라’라는 말이 들어 있지 않습니다.

 

문제는 앞부분의 부정문인 네가 다시는 거주하지 못하게 하리라’의 영향을 마지막 절까지 이어서 읽을 것인가, 아니면 여기서 새로운 문장을 시작할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사용한 라틴어와 KJV ‘...thou shalt not be inhabited. And I will set glory in the land of the living.’처럼 새 문장을 시작합니다. 따라서 의미는 두로는 심판을 받지만, 주님께서는 산 자의 땅에 자신의 영광을 세우신다’가 됩니다.

 

반면 개역개정은 앞의 부정을 끝까지 이어 ‘...네가 다시는 거주하지 못하게 하리니 살아 있는 자의 땅에서 영광을 얻지 못하게 하리라’로 번역하였습니다.  너는 살아 있는 자의 땅에서 영광을 얻지 못한다’는 의미가 되도록 문장을 연결한 것입니다.

 

따라서 원문 자체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문장 구조를 어떻게 끊어 읽느냐의 차이입니다. 그리고 AC.290을 보면 스베덴보리의 이해가 어느 쪽인지는 분명합니다. 그는 이 구절을 the land of the living’이라는 표현의 증거로 사용하면서 마지막을 I shall put elegance in the land of the living.’으로 인용합니다. 즉 스베덴보리가 사용한 히브리어와 라틴어 전통에서는 이 부분을 앞 문장의 계속이 아니라 독립된 새 문장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오히려 저는 이번 경우에는 개역개정보다 KJV와 스베덴보리의 번역이 AC.290의 논리에도, 히브리어 원문의 흐름에도 더 자연스럽다고 생각합니다. 앞부분은 두로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고, 마지막은 그 심판과 대조적으로 주님께서 산 자의 땅’에 자신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세우신다는 선언으로 마무리됩니다. 이러한 대조는 에스겔서의 문맥에도 잘 어울릴 뿐 아니라, AC.290이 강조하는 생명은 오직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주제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 주기 때문입니다.

 

 

 

AC.290, 심화 18, ‘겔32: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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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0, 심화 16, ‘겔26:20’

AC.290.심화 16. ‘겔26:20’ 내가 너를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내려가서 옛적 사람에게로 나아가게 하고 너를 그 구덩이에 내려간 자와 함께 땅 깊은 곳 예로부터 황폐한 곳에 살게 하리라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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