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5

 

천국 전체가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하는데, 이는 그분과 아버지가 하나이시기 때문이며, 그분 자신이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In the universal heaven they know no other father than the Lord, because he and the father are one, as he himself has said:

 

6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8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14:6, 8-11) I am the way, the truth, and the life. Philip saith, Show us the father Jesus saith to him, Am I so long time with you, and hast thou not known me, Philip? He that hath seen me hath seen the father how sayest thou then, Show us the father? Believest thou not that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n me? Believe me that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n me. (John 14:6, 8–11)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주님’에 대한 선언을 한층 더 깊은 차원으로 끌어올립니다. AC.14에서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이 ‘주님’이심을 분명히 했다면, AC.15에서는 그 주님이 곧 ‘아버지’이시라는 사실을 천국의 인식 방식으로부터 설명합니다. 온 천국에서는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고 말하는데, 이는 천국에서 삼위가 분리된 개념으로 인식되지 않음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천국의 인식은 교리적 분해가 아니라, 실재에 대한 직관적 인식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근거를 주님의 말씀 자체에서 찾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주님은 자신을 ‘(the way)이며, ‘진리(the truth)이며, ‘생명(the life)이라고 선언하시는데, 이는 단지 구원의 통로라는 의미를 넘어, 신적 실재 자체가 주님 안에 있음을 말하는 표현입니다. 길은 접근의 방식이고, 진리는 빛이며, 생명은 존재의 근원인데, 이 모든 것이 주님 한 분 안에 있다는 선언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떠나서는 아버지께 이를 수도, 알 수도 없습니다.

 

빌립의 질문은 인간적이며, 동시에 매우 표상적인 질문입니다. 그는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요청합니다. 이는 눈에 보이고, 분리된 어떤 신적 대상을 기대하는 마음의 표현이지요. 그러나 주님의 대답은 단호하면서도 깊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이라는 말씀은, 아버지가 주님과 다른 어딘가에 계신 분이 아니라, 주님의 인성 안에 완전히 계신다는 선언입니다. 이는 단순한 연합이나 동행이 아니라, 상호 내재, 곧 하나 됨을 뜻합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이라는 반복된 표현은, 주님의 신성과 인성이 분리될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 신학에서 이 진술은 매우 핵심적입니다. 주님의 인성은 부활을 통해 완전히 신성화되었고, 그 결과 천국에서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따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천국의 모든 존재들은 주님의 얼굴에서 곧 아버지를 봅니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아버지’라는 개념이 추상적 근원이 아니라, 주님 자신으로 인식됩니다.

 

이 점은 거듭남의 교리와도 직접 연결됩니다. 인간의 거듭남은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이루어지는데, 만일 주님과 아버지를 분리된 대상으로 생각한다면, 인간의 내적 시선은 필연적으로 갈라집니다. 그러나 천국의 질서에서는 신적 선과 신적 진리가 하나로 인식되며, 그 하나 됨이 주님 안에 완전히 나타나 있습니다. 그래서 거듭남의 모든 단계는 주님을 향해 단일한 방향으로 진행됩니다.

 

이 글은 또한 신앙의 단순성을 회복해 줍니다. 인간의 이성은 종종 신적 실재를 분해하여 이해하려 하지만, 천국의 인식은 오히려 단순합니다. 주님을 알면 아버지를 아는 것이고, 주님을 사랑하면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리를 축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리를 살아 있는 인식으로 회복하는 길이지요.

 

결국 AC.15는 독자에게 하나의 분명한 초점을 요구합니다. 거듭남을 말할 때, 신앙을 말할 때, 기도를 말할 때, 그 대상은 언제나 주님 한 분이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천국이 그렇게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길이시며, 그 길의 끝에서 만나는 또 다른 분이 계신 것이 아니라, 그 길 자체가 곧 목적지이십니다. 이 인식 위에서만, 이후에 이어질 태고교회와 창세기의 모든 상응적 해설이 올바른 중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AC.14, 창1, '주님' =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

AC.14 이어지는 모든 글 가운데서 주님이라는 이름이 가리키는 분은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며, 다른 무슨 보조적 이름을 덧붙이지 않고 단지 ‘주님’(the Lord)으로만 일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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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

 

이어지는 모든 글 가운데서 주님이라는 이름이 가리키는 분은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며, 다른 무슨 보조적 이름을 덧붙이지 않고 단지 주님(the Lord)으로만 일컬음을 받으십니다. 온 천국 전체에서 그분만이 주님으로 인정되고 경배를 받으시는데, 이는 그분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시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제자들에게도 자신을 그렇게 부를 것을 명하셨는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In the following work, by the name Lord is meant the savior of the world, Jesus Christ, and him only; and he is called “the Lord” without the addition of other names. Throughout the universal heaven he it is who is acknowledged and adored as Lord, because he has all sovereign power in the heavens and on earth. He also commanded his disciples so to call him, saying,

 

너희가 나를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3:13) Ye call me Lord, and ye say well, for I am (John 13:13).

 

그래서 그분의 부활 후에 제자들은 그분을 주님(the Lord)이라 불렀습니다. And after his resurrection his disciples called him “the Lord.”

 

 

해설

 

이 글은 창세기 1장의 거듭남 해설 중 잠시 멈추고, ‘Arcana Coelestia’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전제 하나를 분명히 선언하는 자리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후의 모든 설명에서 ‘주님(the Lord)이라는 이름이 누구를 가리키는지를 명확히 규정합니다. 그것은 막연한 신적 존재나 삼위 중 한 위격이 아니라,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을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이 선언은 단순한 명칭 설명이 아니라, 이후 모든 속뜻 해석의 중심이 오직 주님께 있음을 밝히는 신학적 기준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을 다른 어떤 이름과도 결합하지 않고, 단순히 ‘주님’으로만 부른다고 말합니다. 이는 호칭의 단순화를 넘어서, 천국과 교회의 인식 구조를 드러냅니다. 천국에서는 ‘주님’이라는 이름 하나로 모든 것이 충분하며, 다른 구분이나 보충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에서는 주님이 곧 신적 선과 신적 진리 자체로 인식되기 때문입니다. 이름은 구별을 위해 필요하지만, 주님 안에서는 구별이 아니라 결합이 중심이 됩니다.

 

온 천국 전체에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주님으로 인정되고 경배를 받는다는 진술은 매우 결정적입니다. 그 이유는 그분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시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는 단순히 권위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과 질서의 근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천국의 모든 질서, 모든 생명, 모든 빛과 사랑은 주님에게서 흘러나오기 때문에, 그분만이 주님으로 불릴 수 있습니다. 다른 어떤 존재도 이 자리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사실이 성경 안에서도 분명히 증언되었음을 보여 주기 위해 주님의 말씀을 직접 인용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요13:13)고 하시며, 그 호칭이 올바른 인식임을 스스로 확인해 주십니다. 이는 제자들의 개인적 존경 표현이 아니라, 주님 자신의 정체성 선언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주님이라 불리는 것을 허락하셨을 뿐 아니라, 그것이 진리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부활 이후 제자들이 그분을 ‘주님’이라 불렀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부활은 주님의 인성마저 신성화되었음을 의미하는 사건이며, 그 이후에 ‘주님’이라는 호칭은 더 이상 단순한 존칭이 아니라, 신성과 인성을 하나로 지니신 분을 가리키는 고백이 됩니다. 즉, 주님이라는 이름은 부활 이후 더욱 온전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이 글이 거듭남의 여섯 상태를 설명한 직후에 배치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깊습니다. 거듭남의 모든 단계, 모든 상태, 모든 변화의 주체가 누구인가를 다시 한번 분명히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거듭남은 어떤 원리나 추상적 진리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주님, 곧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로 이루어집니다. 그분이 아니면 그 어떤 단계도 시작되지 않고, 유지되지 않으며,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AC.14는 독자에게 조용하지만, 단호한 방향 설정을 요구합니다. 이후에 나올 모든 속뜻 해설, 모든 상징, 모든 단계는 주님과 무관하게 이해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창세기 1장의 빛, 궁창, 식물, 광명체, 생물, 사람은 모두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참된 의미를 가집니다. 주님을 떠난 해석은 아무리 정교해 보여도 중심을 잃은 해석이 됩니다.

 

결국 이 글은 ‘Arcana Coelestia’ 전체의 신앙 고백과 같습니다. 천국에서 주님이 누구이신가, 교회에서 누구를 주님이라 부르는가, 그리고 인간의 거듭남을 실제로 이루시는 분이 누구인가에 대한 분명한 선언입니다. 이 선언 위에서만 이후의 모든 해설이 올바른 방향을 갖게 됩니다.  

 

 

심화

 

1.주님 = 예수 그리스도?’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 AC.14본문 중 주님이라는 이름이 가리키는 분은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며라는 내용을 접하면, ? 그럼, 다른 이름들, 그러니까 여호와 하나님, 성령 등 다른 분들보다 높으시다는 말인가? 삼위일체라 하시니 한 분이신 건 알겠는데... 그래도 그중 어느 한 분이 독식하는 건 좀 불공평한 거 같은데...’ 할 것 같습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요?

 

많은 기독교인들이 AC.14의 그 문장을 처음 접하면 목사님 말씀처럼 바로 그 지점에서 잠깐 멈칫합니다. ‘주님이라는 이름이 가리키는 분은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라고 하면, 마치 성부와 성령보다 예수님이 더 높은 분처럼 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의도는 ‘세 위 가운데 한 분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삼위일체를 한 분 안에서 이해하자는 것’입니다. 이 차이를 차근차근 설명해 주면 대부분의 반감이 자연스럽게 풀립니다.

 

먼저 스베덴보리가 전제하는 가장 중요한 원리를 먼저 짚어 주는 것이 좋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본질적으로 한 분’이라고 봅니다. 이것은 사실 전통 기독교도 동일하게 고백하는 부분입니다. 다만 역사적으로 교회는 그 한 분 하나님 안에서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세 위격’을 구분하여 설명해 왔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설명 방식이 사람들에게 자칫 ‘세 분 하나님’처럼 느껴질 위험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삼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삼위가 한 분 안에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다른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그의 설명은 비교적 단순합니다. 그는 성부, 성자, 성령을 ‘세 분 인격’이라기보다 ‘한 분 하나님 안의 세 가지 본질적 측면’으로 이해합니다. 쉽게 말하면 이렇게 설명합니다. 성부는 하나님 안의 ‘신적 본질’, 성자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나타나신 ‘신적 인성’, 성령은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작용과 영향’입니다. 이렇게 보면 세 분이 서로 경쟁하거나 높고 낮은 관계가 아니라 ‘한 분 하나님 안의 세 차원’이 됩니다.

 

이 관점에서 AC.14의 문장을 보면 의미가 훨씬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가 ‘주님’이라는 이름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가장 완전히 나타나신 모습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보이지 않는 신적 본질 자체를 직접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접근하시기 위해 ‘인성을 입고 세상에 오셨다’는 것이 기독교의 성육신 교리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 점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실제로 알 수 있는 방식은 ‘주님,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부보다 성자를 높인다는 뜻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이 인간에게 나타나신 방식이 바로 주님’이라는 뜻입니다. 복음서에서도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구절을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또 하나 설명하기 좋은 비유가 있습니다. 인간도 영혼, 몸, 그리고 활동이라는 세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혼이 근원이고, 몸이 그것을 드러내며, 활동이 그 영향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세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스베덴보리는 삼위일체도 이와 비슷하게 이해합니다. 성부는 신적 본질, 성자는 그 본질이 인간에게 보이는 모습, 성령은 그 본질이 인간에게 작용하는 영향입니다. 그러나 그 전체는 ‘한 분 하나님’입니다.

 

이렇게 설명하면 ‘예수님이 다른 위보다 더 높다는 오해’도 자연스럽게 풀립니다. 스베덴보리는 예수님을 성부보다 높은 분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이 인간에게 완전하게 나타나신 분’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라는 이름이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설교나 강의에서는 이렇게 정리하면 성도들이 이해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그 한 분 하나님이 인간에게 가장 분명하게 나타나신 모습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성경과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을 말할 때, 종종 ‘주님’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그 주님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삼위 중 한 분을 높이는 말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을 한 분 안에서 이해하려는 표현’입니다.

 

이렇게 설명해 주면,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느끼는 ‘불공평하다’는 느낌은 사라지고, 오히려 ‘, 결국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뜻이구나’ 하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AC.15, 창1, '천국 전체가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AC.15 천국 전체가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하는데, 이는 그분과 아버지가 하나이시기 때문이며, 그분 자신이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In the universal heaven they know no other father than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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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 창1 개요,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첫 번째 상태까지만'

AC.13 거듭남 과정 중인 모든 사람이 이 상태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첫 번째 상태까지만 이르고, 어떤 이들은 두 번째 상태까지만, 또 다른 이들은 세 번째,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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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

 

거듭남 과정 중인 모든 사람이 이 상태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첫 번째 상태까지만 이르고, 어떤 이들은 두 번째 상태까지만, 또 다른 이들은 세 번째, 네 번째, 혹은 다섯 번째 상태에도 이르지만, 이렇게 여섯 번째 상태까지 이르는 이는 적고(few), 일곱 번째 상태에 이르는 이는 거의(scarcely) 없습니다. Those who are being regenerated do not all arrive at this state. The greatest part, at this day, attain only the first state; some only the second; others the third, fourth, or fifth; few the sixth; and scarcely anyone the seventh.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여섯 단계, 더 나아가 일곱 번째 상태까지 제시한 뒤, 매우 현실적이고도 냉정한 평가를 덧붙입니다. 그는 거듭남의 질서가 보편적이라고 해서, 모든 사람이 그 모든 단계를 실제로 통과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듭남의 초입에 머물며, 일부만이 중간 단계로 나아가고, 극히 소수만이 깊은 단계에 이른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이는 영적 삶에 대한 이상화나 낙관을 경계하게 하는 매우 중요한 진술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첫 번째 상태는 혼돈과 공허, 흑암의 상태였지요.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상태에만 머문다는 말은, 많은 이들이 여전히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속에서 살면서도 그것을 문제로 인식하지 못한 채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신앙을 말하고 종교적 언어를 사용하더라도, 실제 삶의 중심은 여전히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지요. 이는 비난이 아니라, 영적 현실에 대한 관찰입니다.

 

두 번째 상태에 이르는 사람들은 주님께 속한 것과 자기에게 고유한 것을 어느 정도 구별하기 시작하지만, 그 구별이 삶 전체에 미칠 만큼 깊어지지는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상태에 이르는 이들은 점점 줄어드는데, 이는 회개, 내적 빛, 살아 있는 신앙의 단계로 갈수록 더 큰 인내와 진실한 내적 변화가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이 단계들은 외적 신앙 활동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고, 실제 삶에서의 선택과 싸움을 동반합니다.

 

여섯 번째 상태에 이르는 사람이 적다(few)는 말은, 신앙과 사랑이 실제로 하나가 되어 말과 행위가 일치하는 삶에 이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 줍니다. 이 단계에서는 영적 즐거움과 자연적 즐거움 사이의 싸움이 본격적으로 일어나며, 사랑이 삶의 중심을 차지하도록 지속적인 내적 전환이 요구됩니다. 많은 이들이 이 지점에서 멈추거나 뒤로 물러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덧붙여 언급하는 일곱 번째 상태는 안식의 상태, 곧 천적 상태에 해당하는데, 그는 이 상태에 이르는 이는 거의 없다(scarcely)고 말합니다. 이는 절망을 주기 위한 말이 아니라, 오히려 천적 상태가 인간의 공로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극히 드문 깊은 결합의 열매임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동시에 이것은 주님의 섭리가 얼마나 인내심 있게 인간을 인도하시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 주기도 합니다.

 

이 글은 성도들에게 매우 중요한 균형 감각을 줍니다. 한편으로는 거듭남의 목표가 분명히 제시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사람이 동일한 영적 성취에 이르러야 한다는 압박은 제거됩니다. 주님은 각 사람을 그가 설 수 있는 자리에서 인도하시며, 첫 번째 상태에 머물러 있는 사람조차도 주님의 섭리 밖에 있지 않습니다. 거듭남의 깊이는 다를 수 있지만, 주님의 자비는 동일하게 작용합니다.

 

그래서 AC.13은 거듭남의 교리를 인간 평가의 기준으로 사용하지 말라는 조용한 경고로도 읽을 수 있어요. 누가 더 높은 단계에 있는지를 가늠하려 들기보다, 주님이 각 사람을 어떤 질서 속에서 인도하고 계신지를 바라보게 합니다. 또한 자기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디까지 왔는가를 따지기보다,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주님께 속한 것을 선택하고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결국 이 글은 창세기 1장의 거대한 영적 구조를 제시한 뒤, 그것을 인간의 현실 속에 다시 내려놓습니다. 거듭남은 위대한 이상이지만, 동시에 매우 개별적이고 점진적인 여정입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을 천적 상태로 억지로 끌어올리시는 분이 아니라, 각 사람의 자유와 상태에 맞추어 선과 진리를 조금씩 심으시는 분이십니다. AC.13은 그 점을 차분하게, 그러나 매우 분명하게 밝혀 주는 개요 마무리 글입니다.  

 

 

심화

 

1.일곱 번째 상태와 수도원 전통의 완덕’, 합일의 비교

 

수도원 전통에서 말하는 ‘완덕’이나 ‘합일’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일곱째 날 상태’와 ‘부분적으로 겹치는 개념’이지만, 그 이해의 방식과 구조는 꽤 다릅니다. 이 차이를 차분히 정리하면 AC.13의 의미도 훨씬 또렷해집니다.

 

먼저 스베덴보리의 설명부터 보겠습니다. AC에서 창세기 창조의 여섯 날은 인간 거듭남의 단계이고, ‘일곱째 날은 안식의 상태’입니다. 여기서 안식이라는 것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주님이 인간 안에서 주된 분으로 역사하시는 상태’를 말합니다. 여섯 번째 상태까지는 인간이 싸우는 단계입니다. 진리와 거짓, 선과 욕정 사이에서 많은 영적 전투가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과 사랑이 결합되고 나면, 인간의 의지가 더 이상 주도권을 잡지 않고 ‘주님의 사랑이 중심이 되는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전투가 멈추고 평안이 옵니다. 이것이 일곱째 날입니다.

 

이 점에서 수도원 전통의 ‘완덕’이나 ‘합일’과 닮은 점이 있습니다. 중세 수도원 영성에서는 영적 여정을 보통 ‘정화조명합일’ 같은 단계로 설명합니다. 마지막 단계인 합일(union)은 인간의 의지가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여기서 인간은 더 이상 자기 중심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 안에서 살게 됩니다. 이런 설명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주님이 인간 안에서 주된 분으로 역사하시는 상태’와 상당히 비슷하게 들립니다.

 

하지만 중요한 차이도 있습니다. 수도원 전통에서는 종종 이 상태를 ‘신비적 체험이나 관상적 합일’로 강조합니다. 즉 깊은 기도나 관상을 통해 하나님과 직접적인 합일을 경험하는 상태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일곱째 날 상태를 그런 신비 체험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것을 ‘삶의 질서가 완전히 바뀐 상태’로 설명합니다. 즉 사랑이 의지의 중심이 되고, 선을 행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삶이 된 상태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수도원 전통에서는 이 상태가 종종 ‘소수의 성자들이 도달하는 특별한 영적 단계’처럼 설명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그는 이것을 ‘모든 사람이 거듭남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정상적인 상태’로 설명합니다. 물론 그 깊이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원리 자체는 특별한 수도 생활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일상의 삶 속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정리하면 가장 정확합니다. 수도원 전통의 ‘완덕’이나 ‘합일’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일곱째 날 상태와 ‘어떤 공통된 영적 직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인간의 중심이 자기 자신에서 하나님 쪽으로 완전히 이동하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수도원 전통이 그것을 ‘신비적 합일 경험’으로 강조하는 반면,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사랑이 주도하는 삶의 상태’로 설명합니다.

 

창세기의 일곱째 날은 어떤 특별한 신비 체험이 아니라, 사람이 오랫동안 주님과 함께 살아오면서 결국 ‘주님의 사랑이 그 사람의 삶을 자연스럽게 이끌게 되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영적 전투가 중심이 아니라 평안과 질서가 중심이 됩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안식입니다.

 

역사적으로 많은 신앙 전통이 이 상태를 ‘완덕, 합일, 안식, 평안’ 같은 이름으로 표현해 온 것입니다.

 

 

 

AC.14, 창1, '주님' =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

AC.14 이어지는 모든 글 가운데서 주님이라는 이름이 가리키는 분은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며, 다른 무슨 보조적 이름을 덧붙이지 않고 단지 ‘주님’(the Lord)으로만 일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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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 창1 개요, '여섯 번째 상태'

AC.12 여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는 때입니다. 이때 그에게서 나오는 것들을 ‘산 영’(living soul)과 ‘짐승’(beast)이라 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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