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2026/09/06)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2, ‘ 함께 주를 경배하세’, 230, ‘우리의 참되신 구주시니’, 92, ‘위에 계신 나의 친구입니다.

 

오늘 4 절별 주석 그 세 번째, 6절로 8, AC 글 번호로는 359번에서 369번입니다. 먼저 본문니다.

 

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4:6-8)

 

제목은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이며, 다음은 오늘부터 시작하는 3 요약입니다. 새로 오신 분들, 그리고 기존 성도 모두를 위한, 지난 2월부터 시작한 이 특별한 주일예배를 위한, 그 흐름과 문맥을 잊지 않기 위한 시간입니다.

 

 

오늘 리딩에 들어가기 전에 지금까지의 흐름을 잠깐 돌아보겠습니다. 우리는 창세기의 문자적 의미를 존중하면서, 스베덴보리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따라 속뜻을 함께 읽고 있습니다. 1에서는 천지창조를 주님께서 인간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거듭남의 과정으로, 2에서는 에덴동산을 주님의 사랑과 생명 안에 살아가는 천적인 상태로 읽었습니다. 그리고 3에서는 사람이 주님보다 자기 감각과 proprium 따르면서 질서가 무너지는 과정을 살펴보았습니다.

 

4에서는 이후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가 어떻게 변해 가는지를 읽고 있습니다. 가인은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본래 신앙과 체어리티는 함께 있어야 형제이지만, 신앙을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떼어 내어 자체로 중요한 것으로 여기기 시작하면서 사이의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지난주에는 가인과 아벨의 제물을 읽었습니다. 사람 모두 제물을 드렸지만 중요한 것은 제물의 종류가 아니라 예배가 어디에서 나왔는가였습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에서도 행위와 예배가 나올 있지만, 사랑의 생명이 없으면 죽은 행위 죽은 예배 있습니다. 가인은 자기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분노했고 그의 얼굴이 떨어졌습니다. 바로 지점에서 지난주 리딩이 끝났습니다.

 

오늘은 다음 장면입니다. 아직 가인은 아벨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먼저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시며 돌이킬 길을 열어 두십니다. 오늘은 가지를 마음에 두고 읽겠습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본래 함께 살아야 형제이며,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이제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될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그리고 가운데에서도 주님께서 어떻게 인간을 부르시는지 함께 읽겠습니다.

 

 

다음은 오늘 리딩 범위인 AC.359-369 요약입니다.

 

 

AC.359-369 앞의 AC.346-358에서 가인의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결과 가인이 분하여 얼굴이 떨어진 , 그러니까 안색이 변한 , 주님께서 아직 그에게 돌이킬 길을 열어 주시는 장면에서 시작, 마침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4:6-8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그리고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말씀을 하나씩 풀면서, 스베덴보리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할 수도 있었지만 오히려 체어리티 위에 군림하려 함으로써 마침내 그것을 소멸시키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이번 구간의 중심은 단순히 가인이 아벨을 죽였는가?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무엇이 주도해야 하며, 질서가 뒤집힐 신앙은 어떻게 자기 생명인 체어리티를 잃게 되는가? 있습니다.

 

AC.359-360에서 가장 먼저 주목할 것은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라는 말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양심이 말해 주었다(conscience dictated) 뜻이라고 설명합니다. 가인은 이미 분노했고 얼굴이 떨어졌으며, 체어리티가 떠남으로써 그의 내적인 것들이 변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아벨을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바로 사이에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악이 실제 행위로 완성되기 전에 주님께서 인간의 내면에 경고하시며 돌이킬 가능성을 열어 두신다는 매우 중요한 장면입니다. 가인의 상태가 이미 크게 기울어졌어도 주님의 부르심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다만 여기서 양심이라는 표현은 태고교회와 고대교회의 차이를 염두에 두고 조심스럽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은 퍼셉션으로 인도되었고, 홍수 고대교회의 영적 인간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바탕으로 형성된 양심으로 인도되었다고 구별합니다. 그러므로 AC.359-360에서 가인에게 양심이 말해 주었다 한다고 해서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이 후대 영적 인간과 똑같은 형태의 완성된 양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이미 타락의 길에 들어섰어도 주님으로부터 오는 내적인 딕테이트와 경고가 아직 남아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인간이 악을 선택하기 전에 끊임없이 선을 향하여 돌이킬 길을 보여 주십니다.

 

이것은 주님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를 함께 생각하게 합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이 아벨을 죽이지 못하도록 그의 자유를 강제로 빼앗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침묵하신 것도 아닙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말씀하시며 그의 상태를 보여 주시고,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경고하시며, 아직 선택할 있는 길을 열어 주십니다. 주님의 섭리는 인간을 강제로 선하게 만드는 방식이 아니라, 자유 가운데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스스로 악에서 돌아서도록 끊임없이 이끄시는 방식으로 역사합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이야기는 악이 이미 결정된 운명처럼 진행된 이야기가 아니라, 여러 차례의 경고와 돌이킬 가능성에도 불구, 인간이 점차 체어리티를 거부하는 이야기입니다.

 

AC.361부터는 돌이킬 길이 무엇인지 더욱 분명해집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것은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면 체어리티가 함께 있을 있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것은 선한 의도가 없다면 체어리티가 없고 오히려 악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말씀을 스베덴보리는 매우 뜻밖의 방식으로 풉니다. 여기서 너를 원하는 체어리티이며,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하지만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기 때문에 함께 있을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문제는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어느 하나를 버려야 한다는 있는 것이 아니라 사이의 질서에 있습니다.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아벨로 표상되는 체어리티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을 없애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본래 서로 적대하는 원리가 아니라 하나의 교회적 생명을 이루어야 하는 형제입니다. 문제는 가인,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와 함께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위에 서서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한다는 있습니다. 따라서 4:7 깊은 긴장은 신앙이냐 체어리티냐 아니라 누가 주도권을 가지느냐입니다.

 

AC.362 질서의 전도가 어떻게 하나의 교리로 굳어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여기서 가인 이제 단순히 사람의 내적 상태가 아니라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하고, 결과 사랑의 자손인 체어리티에서도 신앙을 분리하는 하나의 신앙의 교리 나타냅니다. 스베덴보리는 어느 교회에서든 사람들이 신앙의 어떤 조항에 지나치게 집중하여 그것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만들 이단이 생길 있다고 설명합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거짓으로 믿어서 이단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가지를 전체보다 앞세우고 그것을 중심으로 나머지 모든 것을 재배열하면서 교리의 질서가 무너질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생각을 자신이 발견한 것으로 여기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거기에 결합하면 문제는 더욱 깊어집니다. 사람은 자기가 특별히 발견했다고 생각하는 가지에 마음이 사로잡히면 점차 모든 것이 그것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게 됩니다. 처음에는 하나의 생각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성경도, 경험도, 다른 교리도 모두 자기 생각을 확증하는 자료처럼 읽히기 시작합니다. 마침내 그것이 거짓이라 해도 틀림없는 진리라고 맹세할 정도가 됩니다. 이것이 AC.362 보여 주는 가인의 교리가 굳어지는 과정입니다.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은 신앙을 사랑보다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고, 사랑 없이 살아감으로써 자기 사랑과 거기서 나온 판타지가 서로 결합하여 교리를 더욱 확증했습니다.

 

대목은 교리를 공부하는 사람에게 특별히 중요한 경고가 됩니다. 문제는 교리를 깊이 연구하는 자체가 아닙니다. 진리의 측면을 전체 질서에서 떼어 내어 가장 중요한 것으로 만들고, 지식을 자기의 발견이나 영적 우월성으로 소유하려 문제가 시작됩니다. 이것은 AC 읽고 말씀의 속뜻과 상응을 배우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아르카나를 안다는 사실이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보다 내가 깊은 진리를 안다는 자기 의식을 강화한다면 높은 진리조차 가인의 교리로 변질될 있습니다. 진리는 언제나 사랑과 체어리티를 섬겨야 합니다.

 

AC.363 그래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올바른 질서를 매우 명확하게 선언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결합될 있지만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권을 가져야 합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에서 선을 행한다 것은 속뜻으로 선한 의도를 가지는 것을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선을 행하는 것은 선을 의도하는 (from willing what is good)에서 나오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가인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단순히 겉으로 착한 행동 가지를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적 의지가 선을 향하고 선에서 실제 행위가 나오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고대에는 행위와 의지가 하나였다 말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을 고대에 살았던 모든 사람이 거짓이나 위선을 전혀 몰랐다는 일반적인 역사적 진술로 확대하기보다, 문맥에서 다루는 태고교회 사람들의 특유한 내적 상태와 연결하여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는 의지와 행위가 아직 하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행위를 보면 사람의 의지를 있었으며, 속마음과 다른 모습을 밖으로 꾸미는 위선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AC.363 관심은 당시 인류 전체의 사회사를 설명하는 있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었는지를 보여 주는 있습니다.

 

이것은 앞에서 살펴본 가인의 제물과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가인에게는 행위가 있었고 예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AC.348-349에서 그것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죽은 행위 죽은 예배 설명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선을 행한다 것은 단지 외적 행위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선한 의지에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한 의지의 궁극적 근원 역시 인간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있습니다. 인간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받아 의지하고 행할 ,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다시 결합되며 그의 얼굴, 내적인 것들도 다시 들릴 있습니다.

 

AC.364에서는 반대의 상태가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말씀으로 나타납니다. 선한 의도가 없으면 체어리티가 없고, 체어리티가 없는 곳에는 무자비함과 증오가 있으며 결과 온갖 악이 들어올 준비를 합니다.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 것은 악이 아직 완전히 들어와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 최종 상태라기보다, 마음 앞에서 들어오기를 원하며 기다리는 상태를 보여 줍니다. 가인은 이미 분노했고 얼굴도 떨어졌지만 아직 아벨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에는 경고와 함께 아직 돌아설 있다는 가능성도 들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죄를 일반적으로 마귀라고 부르며, 사람이 체어리티를 잃을 마귀, 지옥의 무리가 가까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이 악을 행한 책임을 외부 마귀에게 돌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유입에 관한 가르침에서 인간에게 선과 악의 영향이 유입되지만, 인간은 자유 가운데 어느 것을 받아들이고 자기 것으로 삼을지를 선택합니다. 그러므로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 것은 악이 강제로 인간 안으로 들어온다는 뜻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사라진 마음이 악의 유입을 받아들이기 쉬운 상태가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할 있습니다.

 

그리고 AC.364 악을 마음 문에서 몰아내는 길을 매우 단순하면서도 강하게 제시합니다. 그것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입니다. 강한 자기 의지나 많은 종교 지식만으로 악을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받아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악을 몰아내는 근본적인 힘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계속 이어져 가인의 문제를 정확히 뒤집습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회복의 역시 신앙을 더욱 독립적으로 강화하는 있지 않고, 신앙이 다시 사랑과 체어리티 안으로 돌아가는 있습니다.

 

AC.365 관계를 불꽃 이라는 아름다운 비유로 설명합니다. 체어리티는 불꽃과 같고 신앙은 불꽃에서 나오는 빛과 같습니다. 불꽃에는 열과 빛이 함께 있으며, 열과 빛은 모두 불꽃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면 불꽃의 열이 없는 빛과 같아집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겨울의 이라고 부릅니다. 겨울에도 빛은 있습니다. 사물을 수도 있고 무엇이 어디 있는지 분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빛에는 생명을 일으키는 따뜻함이 없기 때문에 아래에서는 모든 것이 굳어지고 죽습니다.

 

겨울의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성질을 매우 정확하게 보여 줍니다. 사람에게 성경 지식과 교리적 이해가 있을 있고, 상당히 정확하게 진리를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빛에는 열이 없습니다. 반대로 이것이 진리나 신앙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도 아닙니다. 불꽃에는 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빛도 있습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진리의 빛을 필요로 하며, 진리는 사랑이 어떻게 지혜롭게 이웃을 섬겨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문제는 자체가 아니라 빛이 불꽃에서 떨어져 나와 홀로 존재하려는 있습니다.

 

따라서 AC.361-365 반복해서 말하는 것은 신앙을 버리고 체어리티만 가지라 것이 아닙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다시 올바른 질서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는 동안에는 참된 신앙이 아니며, 체어리티가 주도할 비로소 신앙이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사랑이 신앙을 지배해야 한다는 단순한 인간 중심적 명제가 아닙니다. 모든 참된 체어리티의 근원은 주님이시므로, 체어리티가 주도한다는 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이 진리를 통하여 인간의 삶을 이끈다는 뜻입니다.

 

AC.366에서 마침내 4: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이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먼저 가인이 아벨에게 말하고라는 표현이 시간의 간격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아벨의 죽음은 가인의 분노 직후 갑자기 일어난 사건으로만 읽히지 않습니다. 가인이 분노하고, 얼굴이 떨어지고, 주님의 경고를 받고,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는 말씀을 들었음에도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단계에 이른 것입니다. 가인의 타락은 이번에도 점진적입니다.

 

여기서 아벨을 거듭 아우, 형제라고 부르는 것도 중요합니다. 아벨로 표상되는 체어리티는 신앙의 적이 아니라 신앙의 형제입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본래 교회 안에서 함께 태어나 함께 살아야 하는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것은 신앙이 자기와 무관한 적을 제거했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에게 생명을 주어야 형제를 죽였다는 뜻입니다.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순간 신앙은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생명의 근원을 잃게 됩니다.

 

또한 가인이 아벨을 죽인 장소가 이라는 것도 중요합니다. 교리에 속한 것들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체어리티의 소멸은 단순히 감정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교리의 에서도 일어납니다. AC.362에서 보았듯이 신앙을 사랑보다 본질적인 것으로 세우는 생각이 하나의 교리로 굳어지고, 교리가 체어리티를 부차적인 것으로 밀어낼 , 바로 교리의 들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일이 일어납니다. 교리는 체어리티를 살리는 들이 수도 있고,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들이 수도 있습니다.

 

AC.367 그래서 체어리티가 신앙의 형제라는 사실을 말씀 전체를 통해 확증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에서와 야곱, 베레스와 세라, 에브라임과 므낫세처럼 말씀에 반복해서 나타나는 형제와 장자권의 이야기를 가져옵니다. 이야기들에는 공통적으로 누가 장자인가, 누가 주도권을 가지는가라는 문제가 등장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교회의 자손이지만, 인간의 거듭남 과정에서는 어느 것이 앞서는 것처럼 보이는가와 궁극적으로 어느 것이 주도해야 하는가 사이에 긴장이 나타날 있습니다.

 

특히 야곱과 에서의 관계는 가인과 아벨의 관계와 비슷한 문제를 보여 줍니다. 야곱은 에서를 밀어내려 했으며 장자권과 주도권을 차지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궁극적으로 에서로 표상되는 체어리티가 주도권을 가지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거듭남의 질서를 이해하는 중요합니다. 영적 인간의 거듭남 과정에서는 진리와 신앙이 먼저 앞에 서서 사람을 이끄는 것처럼 보일 있습니다. 사람은 먼저 말씀을 배우고 무엇이 선인지 알며, 진리에 따라 자신을 훈련합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깊어지면 진리가 안으로 들어가고, 마침내 선과 체어리티가 진리를 이끄는 천국의 질서가 세워집니다. 따라서 체어리티의 주도권은 진리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본래의 목적 안에 두는 것입니다.

 

AC.367 마지막에서 주님께서 어머니와 동생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들이라 하신 8:21 말씀도 같은 질서를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듣는 신앙에, 행하는 체어리티에 연결합니다. 말씀을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은 서로 떨어져서는 됩니다.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7에서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습니다. 따라서 참된 형제 관계 신앙을 고백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들은 진리가 체어리티의 삶으로 나타날 이루어집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의 형제의 언약 진리를 듣는 것과 진리를 행하는 것이 하나가 되는 삶입니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 형제라는 말의 의미도 새롭게 보여 줍니다. 같은 교리를 고백하고 같은 교회에 속했다고 해서 자동으로 영적 형제 관계가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초대교회에서 서로를 형제라 부른 깊은 이유는 체어리티에 있었습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고, 말씀을 듣고 행하며, 서로의 쓰임을 위하여 살아갈 신앙의 형제 관계가 실제가 됩니다. 따라서 교회의 참된 연합 역시 단순한 교리적 동일성만이 아니라 진리와 체어리티가 함께 살아 있는 데서 이루어집니다.

 

AC.368 AC.366에서 교리를 상징한다고 것을 말씀의 여러 구절을 통해 더욱 자세히 확증합니다. 씨를 뿌리는 , 좋은 씨와 가라지가 함께 있는 , 밭에 감추인 보화 말씀에서 단순한 농경지가 아니라 진리와 선이 심기고 자라며 열매 맺는 교리적 영역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가인이 아벨을 죽인 장소가 이어야 했는지를 이해하게 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결정하는 중요한 싸움이 바로 교리의 영역에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교리는 본래 인간을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인도하기 위한 것입니다. 말씀의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이유도 결국 진리가 삶이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교리가 목적을 잃고 자기 정당화나 우월성을 위한 체계가 되면, 같은 오히려 체어리티를 죽이는 장소가 있습니다. 따라서 교리의 참됨은 단순히 논리적으로 얼마나 정교한가만으로 판단할 없습니다. 참된 교리는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를 살리고, 인간이 실제 선과 쓰임의 삶으로 나아가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생명의 씨앗이 자라는 장소인 동시에, 질서가 뒤집히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장소가 수도 있습니다.

 

AC.369 지금까지의 설명을 하나로 모아 4:8 결론을 밝힙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고, 아벨은 체어리티이며, 둘은 본래 형제이고, 들은 신앙의 교리에 속한 것들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말씀은 신앙과 체어리티가 교회의 교리 안에서 나왔음에도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고, 그로 말미암아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상태를 뜻합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체어리티의 소멸이 처음부터 체어리티는 필요 없다 노골적으로 선언하는 방식으로만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먼저 신앙을 사랑보다 본질적인 것으로 세웁니다. 그러면 체어리티는 신앙에 비해 부차적인 것이 됩니다. 입술로는 사랑과 선한 삶이 중요하다고 말하면서도 구원의 본질은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 자체에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러한 전제가 결국 체어리티를 소멸시킨다고 말합니다.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마침내 아벨을 죽이는 데까지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AC.369 스베덴보리 당시 기독교의 체어리티의 행위가 없어도 오직 신앙만으로 구원받는다 교리를 직접 비판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단순히 특정 교파나 종교개혁의 표어를 공격하는 것으로만 읽어서는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문제 삼는 것은 신앙 자체가 아니라 신앙을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하는 영적 질서입니다. 실제로 입술로는 사랑이 없는 신앙은 구원하지 못한다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구원하는 본질은 오직 신앙이라고 전제한다면 체어리티는 실제 교리와 삶에서 점차 주변으로 밀려날 있습니다. 바로 내적 모순을 가인의 상태가 보여 줍니다.

 

따라서 AC.359-369 전체를 보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은 결코 갑작스럽지 않습니다. AC.338에서 시작된 작은 구별이 사랑과 신앙의 분리가 되고, AC.346-358에서 분리가 죽은 행위와 죽은 예배로 나타났으며, 예배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분노와 내적인 것들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이번 구간에서는 주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신앙이 체어리티 위에 주도권을 가지려 하고, 질서의 전도가 하나의 교리로 굳어지며, 마침내 교리의 들에서 자기 형제인 체어리티를 소멸시킵니다. 구별 분리 죽은 행위 죽은 예배 분노 내적인 것들의 변화 체어리티에 대한 지배 체어리티의 소멸이라는 하나의 흐름이 4:8에서 절정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 구간에는 심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매우 중요한 자비의 메시지도 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기 전에 여호와께서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고 하셨고, 죄가 아직 문에 있을 경고하셨으며, 선을 행하면 다시 얼굴을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악의 길로 상당히 깊이 들어갔어도 주님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선으로 돌아올 길을 열어 두신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변하는 것은 주님의 사랑과 자비가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상태입니다. 주님의 얼굴은 여전히 인간을 향하고 있지만, 가인은 얼굴을 받아들이는 대신 자기 사랑과 분리된 신앙을 선택합니다.

 

이것은 거듭남의 과정에서도 매우 실제적인 문제입니다. 우리 안에도 어떤 진리를 다른 모든 것보다 높이고 싶은 마음이 생길 있고, 내가 옳다는 확신 때문에 이웃에 대한 사랑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교리를 지키겠다는 명분으로 사람을 정죄하고, 진리를 변호한다는 이유로 체어리티를 희생할 수도 있습니다. 바로 그때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 말씀과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 말씀이 우리에게도 들려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진리는 이웃을 사랑하지 않을 자유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이웃을 지혜롭게 사랑할 것인지를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특히 AC 읽는 우리에게 가인의 이야기는 더욱 조심스러운 자기 점검을 요구합니다. 말씀의 속뜻을 알고 상응을 이해하며 스베덴보리의 아르카나를 많이 배운다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지식 때문에 나는 다른 사람보다 깊은 진리를 안다 생각이 자라나고,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을 쉽게 판단하거나 안에 있는 선과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게 된다면 바로 우리가 공부하는 교리의 에서 아벨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참된 교리는 사람을 높이는 지식이 아니라 주님 앞에서 더욱 겸손하게 하고, 이웃을 지혜롭게 사랑하게 하며, 실제 쓰임으로 나아가게 하는 진리여야 합니다.

 

결국 AC.359-369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나는 옳은 신앙을 가지고 있는가?에서 걸음 나아갑니다. 내가 가진 신앙 안에서 아벨은 살아 있는가? 묻습니다. 내가 알고 믿는 진리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따뜻해지고 있는지, 아니면 많은 빛은 있지만 열이 없는 겨울의 되어 가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를 경쟁자로 여기지 않고 자기 형제로 받아들이며, 체어리티 안에서 비로소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따라서 이번 AC.359-369 앞의 AC.346-358에서 나타난 죽은 행위와 죽은 예배 어디까지 나아갈 있는지를 보여 주는 결정적인 구간입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은 처음에는 여전히 행위하고 예배하며 진리를 말할 있습니다. 그러나 분리가 계속되면 체어리티를 자기 아래 두려 하고, 교리적으로 질서를 정당화하며, 마침내 체어리티 자체를 소멸시킬 있습니다. 반대로 주님께서 이루시는 거듭남은 과정을 거꾸로 돌리는 일입니다. 진리가 다시 선을 섬기고, 신앙이 체어리티와 결합하며, 우리가 듣는 말씀을 실제로 행하고,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이 이웃을 향한 쓰임으로 나타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결국 우리 안에서 매일 일어나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질서에 관한 말씀입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였지만,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가인과 아벨이 형제로 함께 사는 것입니다. 신앙의 빛이 체어리티의 불꽃에서 나오고, 진리가 선을 섬기며, 아는 것과 원하는 것과 행하는 것이 주님 안에서 점차 하나가 되는 , 이것이 거듭남의 질서입니다. 그리고 질서가 회복될 우리의 신앙은 이상 모든 것을 얼어붙게 하는 겨울의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열을 품고 이웃을 살리는 살아 있는 빛이 됩니다.

 

 

이상 요약을 마치고, 아래는 AC 본문, 해설 및 심화입니다.

 

 

AC.359, 창4: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다 - 양심을 통한 주님의 부르심 (AC.359-360)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And Jehovah said unto Cain, Why is thine anger kindled? And why are thy faces fallen? (창4:6) AC.359‘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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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0, 창4: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 다시 확인되는 양심의 딕테이트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창4:6) AC.360‘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Jehovah said unto Cain)가 양심이 말해 주었음을 뜻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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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1, 창4:7,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AC.361-365)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If thou doest well, is there not an uplifting? And if thou doest not w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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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2, 창4:7,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든 가인의 교리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7) AC.362여기서는 ‘가인’(Cain)이라 하는 신앙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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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3, 창4:7,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권을 가져야 합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7) AC.363‘가인’(Cain)이라 불린 신앙의 교리가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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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4, 창4:7,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 악을 물리치는 것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7) AC.364 둘째로, ‘네가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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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5, 창4:7,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겨울의 빛과 같습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7) AC.365셋째로,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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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6, 창4: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죽이다 -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다 (AC.366-369)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And Cain spake to Abel his brother; and it came to pass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hat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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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7, 창4:8, 신앙과 체어리티는 형제입니다 - 장자권과 주도권의 속뜻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8) AC.367이러한 것들은 말씀의 비슷한 구절들로 확증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체어리티가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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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8, 창4:8, ‘들’은 왜 교리를 상징하는가? - 신앙의 씨가 뿌려지는 곳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8) AC.368‘들’(field)이 교리를 상징하며, 따라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교리에 속한 모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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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9, 창4:8, 가인이 아벨을 죽이다 -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신앙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8) AC.369그러므로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였다. 그들이 함께 들에 있을 때에’(Cain r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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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AC 리딩 본문 전체는 여기까지이고, 이 가운데 필수 리딩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AC.361, 창4:7,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AC.361-365)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If thou doest well, is there not an uplifting? And if thou doest not w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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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5, 창4:7,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겨울의 빛과 같습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7) AC.365셋째로,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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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9, 창4:8, 가인이 아벨을 죽이다 -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신앙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8) AC.369그러므로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였다. 그들이 함께 들에 있을 때에’(Cain r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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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이어서 성찬 있습니다.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09-06(D1)

 

2667, 4, 창4.4, 2026-09-06(D1)-주일예배(창4,6-8, AC.359-369, 성찬),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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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8/30, 창4:3-5, AC.346-358), ‘가인과 아벨의 제물 - 무엇이 예배를 살아 있게 하는가?’

※ 오늘(2026/08/30)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1, ‘홀로 한 분 하나님께’, 찬91, ‘슬픈 마음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은 창4 절별 주석 그 두 번째, 3절로 5절, AC 글 번호로는 346번에서 358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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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4:8)

 

AC.369

그러므로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였다. 그들이 함께 들에 있을 때에(Cain rose up against his brother Abel, and slew him,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ogether)라는 말씀은, 신앙과 체어리티가 신앙의 교리에서 나온 것이라 할지라도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고, 그로 말미암아 결국 체어리티를 소멸시킬 수밖에 없었음을 뜻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체어리티의 행위가 없어도 오직 신앙만으로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경우와 같습니다. 그들은 사랑이 없으면 신앙이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입술로 고백하면서도, 바로 오직 신앙만으로 구원받는다 전제 자체로 체어리티를 소멸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From this then it follows that the words Cain rose up against his brother Abel, and slew him,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ogether, denote that while both faith and charity were from the doctrine of faith, yet faith separate from love could not but disregard and thereby extinguish charity; as is the case at the present day with those who maintain that faith alone saves, without a work of charity, for in this very supposition they extinguish charity, although they know and confess with their lips that faith is not saving unless there is love.

 

해설

AC.369는 앞의 여러 단락에서 하나씩 설명해 온 상응을 창4:8의 한 장면 안에 다시 모아 줍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형제는 본래 서로 결합되어야 하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은 교리, 곧 신앙과 체어리티의 교리에 속한 것들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였다. 그들이 함께 들에 있을 때에라는 말씀은 단순히 한 형제가 다른 형제를 죽인 사건을 넘어,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교리의 영역에서 자기 형제인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여기서 특별히 눈여겨볼 것은 스베덴보리가 신앙과 체어리티가 신앙의 교리에서 나온 이라고 말한다는 점입니다. 가인과 아벨은 처음부터 전혀 관계없는 두 원리가 아니었습니다. AC.367에서 이미 보았듯이 둘은 모두 교회의 자손이며 형제입니다. 참된 교리 안에는 신앙도 있고 체어리티도 있습니다. 진리를 믿는 것과 그 진리에 따라 선을 행하는 것은 본래 하나의 교회적 삶 안에서 함께 있어야 합니다. 문제는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자기 자신을 독립적인 구원의 원리로 세울 때 시작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사용하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먼저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게 여긴다(disregard)고 합니다. 처음부터 체어리티는 필요 없다고 노골적으로 부정하는 것만이 문제인 것은 아닙니다. 신앙을 구원의 본질적인 것으로 세우고 체어리티를 그 뒤에 따라오는 부차적인 것으로 밀어내는 순간 이미 질서가 뒤집히기 시작합니다. AC.365에서 보았듯이 신앙이 주도권을 가지려 하는 동안에는 참된 신앙이 아니며, 체어리티가 주도할 때 비로소 신앙이 됩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에 덧붙이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신앙에 생명을 주는 본질적인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말씀의 깊은 의미입니다.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것은 단순히 체어리티의 위치를 조금 낮추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로 말미암아 결국 체어리티를 소멸시킨다고 말합니다.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채 구원하는 신앙으로 세워지면, 사람이 실제로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사는가는 구원의 본질에서 점차 밀려나게 됩니다. 입술로는 사랑과 선한 삶이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교리의 구조 자체가 그것들을 구원의 본질에서 제외한다면 체어리티는 실제 삶에서 점점 생명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AC.369 후반은 스베덴보리 당시의 기독교를 향한 매우 직접적인 비판으로 이어집니다. 그는 체어리티의 행위가 없어도 오직 신앙만으로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가인의 상태와 연결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비판하는 것은 신앙 자체가 아닙니다. 오히려 앞에서 계속 보았듯이 신앙과 체어리티는 형제이며 둘 다 교회의 자손입니다. 문제는 신앙만으로라는 분리입니다. 신앙을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떼어 내어 그것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만드는 순간, 신앙은 자기 생명의 근원과 분리됩니다.

 

더욱 날카로운 것은 그들이 체어리티의 필요성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들도 사랑이 없으면 신앙이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입술로 고백한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교리적으로는 사랑도 중요합니다’, ‘선한 삶도 필요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구원은 오직 신앙만으로 받는다고 전제한다면, 사랑과 체어리티는 결국 구원의 본질 밖으로 밀려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문제 삼는 것은 바로 이 내적인 모순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특정 교파의 교리 문구를 공격하기 위한 설명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가인은 하나의 역사적 교리 논쟁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하려는 영적 경향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나는 오직 신앙만을 주장하지 않으니 가인과 관계없다고 쉽게 지나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것, 올바른 교리를 고백하는 것, AC의 속뜻을 이해하는 것을 실제 사랑과 삶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한다면 같은 질서의 전도가 우리 안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특히 AC를 읽는 우리에게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경고가 됩니다. 말씀의 속뜻과 상응을 많이 알고,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아르카나를 이해한다고 해서 그것 자체가 영적 생명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러한 지식 때문에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은 진리를 알고 있다고 여기고, 그 지식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며, 실제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을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게 된다면 바로 그 교리의 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높은 진리라 할지라도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면 겨울의 빛이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를 소멸시키지 않고 살립니다. 진리를 알수록 주님을 더 사랑하게 되고,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더 분명히 보게 되며, 이웃을 더 지혜롭게 사랑하고 실제 쓰임을 행하게 된다면 신앙과 체어리티는 형제로 함께 있는 것입니다. 신앙은 체어리티에게서 생명을 받고, 체어리티는 신앙의 진리를 통하여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배우며, 둘은 하나의 삶 안에서 결합됩니다.

 

따라서 AC.369에서 가장 무서운 말은 어쩌면 죽였다보다 그 앞의 중요하지 않게 여겼다일 수 있습니다. 체어리티의 소멸은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사랑보다 신앙을 조금 더 본질적인 것으로 여기고, 다음에는 체어리티를 신앙 뒤에 따라오는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며, 마침내는 체어리티가 없어도 신앙 자체가 사람을 구원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AC.338부터 이어져 온 가인의 길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이 먼저 그 자체로 어떤 것으로 구별되고, 점차 사랑에서 분리되고, 체어리티 없는 행위와 예배를 낳으며,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고, 마침내 자기 형제 아벨을 소멸시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우리에게 당신은 신앙을 가지고 있는가?만을 묻지 않습니다. 오히려 당신의 신앙 안에서 아벨은 살아 있는가?라고 묻습니다. 내가 믿고 고백하는 진리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살아 움직이고 있는지, 아니면 입술로는 체어리티를 인정하면서 실제로는 그것을 신앙보다 덜 중요한 것으로 밀어내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참된 신앙은 자기 형제를 죽이지 않습니다. 체어리티와 함께 살며,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그리고 그 체어리티의 궁극적인 근원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모든 선과 사랑의 근원이신 주님이십니다.

 

 

 

AC.368, 창4:8, ‘들’은 왜 교리를 상징하는가? - 신앙의 씨가 뿌려지는 곳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8) AC.368‘들’(field)이 교리를 상징하며, 따라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교리에 속한 모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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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4:8)

 

AC.368

(field) 교리를 상징하며, 따라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교리에 속한 모든 것을 상징한다는 것은 말씀에서 분명합니다. 예레미야에서, That afieldsignifies doctrine, and consequently whatever belongs to the doctrine of faith and charity, is evident from the Word, as in Jeremiah:

 

들에 있는 나의 산아 영토의 죄로 말미암아 내가 재산과 모든 보물과 산당들로 노략을 당하게 하리니 (17:3) O my mountain in the field, I will give thy possessions [facultates] and all thy treasures for a spoil. (Jer. 17:3)

 

여기서 (field) 교리를 상징하고, 재산(possessions) 보물(treasures) 신앙의 영적 부요함, 신앙의 교리에 속한 것들을 뜻합니다. 같은 예레미야에서, In this passagefieldsignifies doctrine; “possessionsandtreasuresdenote the spiritual riches of faith, or the things that belong to the doctrine of faith. In the same:

 

레바논의 눈이 어찌 들의 바위를 떠나겠으며 곳에서 흘러내리는 찬물이 어찌 마르겠느냐 (18:14) Shall the snow of Lebanon fail from the rock of my field? (Jer. 18:14)

 

신앙의 교리가 없어진 시온에 관해서는 밭같이 갈아엎어질 (plowed like a field)이라고 선언합니다(26:18; 3:12). It is declared concerning Zion, when destitute of the doctrine of faith, that she shall beplowed like a field.(Jer. 26:18, Micah 3:12)

 

유다의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가 유다의 모든 백성에게 예언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시온은 같이 경작지가 것이며 예루살렘은 돌무더기가 되며 성전의 산은 산당의 숲과 같이 되리라 하였으나 (26:18)

 

이러므로 너희로 말미암아 시온은 갈아엎은 밭이 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이 되리라 (3:12)

 

에스겔에서, In Ezekiel:

 

땅의 종자를 꺾어 옥토에 심되 수양버들 가지처럼 큰물 가에 심더니 (17:5) He took of the seed of the land, and set it in a field of sowing, (Ezek. 17:5)

 

이는 교회와 신앙을 다루는 말씀입니다. 교리는 안에 씨가 있기 때문에 (field)이라 합니다. 같은 에스겔에서, treating of the church and of its faith; for doctrine is called afieldfrom the seed in it. In the same:

 

들의 모든 나무가 여호와는 높은 나무를 낮추고 낮은 나무를 높이며 푸른 나무를 말리고 마른 나무를 무성하게 하는 알리라 여호와는 말하고 이루느니라 하라 (17:24) And let all the trees of the field know that I Jehovah bring down the high tree. (Ezek. 17:24)

 

요엘에서, In Joel:

 

10밭이 황무하고 토지가 마르니 곡식이 떨어지며 포도주가 말랐고 기름이 다하였도다 11농부들아 너희는 부끄러워할지어다 밭의 소산이 없어졌음이로다 12밭의 모든 나무가 시들었으니 (1:10-12) The field is laid waste, the ground mourneth, for the corn is wasted, the new wine is dried up, the oil languisheth, the husbandmen are ashamed, the harvest of the field is perished, all the trees of the field are withered, (Joel 1:1012)

 

여기서 (field) 교리를, 나무들(trees) 지식을, 농부들(husbandmen) 예배하는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시편에서, where thefieldsignifies doctrine, “treesknowledges, andhusbandmenworshipers. In David:

 

밭과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즐거워할지로다 그때 숲의 모든 나무들이 여호와 앞에서 즐거이 노래하리니 (96:12) The field shall exult and all that is therein; then shall all the trees of the forest sing, (Ps. 96:12)

 

여기서 밭이 즐거워할 수도 없고 숲의 나무들이 노래할 수도 없다는 것은 아주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이는 사람 안에 있는 것들, 신앙의 지식들을 뜻합니다. 예레미야에서, where it is perfectly evident that the field cannot exult, nor the trees of the forest sing; but things that are in man, which are the knowledges of faith. In Jeremiah:

 

언제까지 땅이 슬퍼하며 지방의 채소가 마르리이까 (12:4) How long shall the land mourn, and the herb of every field wither? (Jer. 12:4)

 

여기에서도 땅이나 들의 채소가 슬퍼할 있는 것이 아니며, 표현들이 황폐함의 상태에 있는 사람 안의 어떤 것들을 가리킨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와 비슷한 말씀이 이사야에도 있습니다. where it is also evident that neither the land nor the herbs of the field can mourn; but that the expressions relate to something in man while in a state of vastation. A similar passage occurs in Isaiah:

 

산들과 언덕들이 너희 앞에서 노래를 발하고 들의 모든 나무가 손뼉을 것이며 (55:12) The mountains and the hills shall break forth before you into singing, and all the trees of the field shall clap their hands. (Isa. 55:12)

 

주님께서도 시대의 완성에 관하여 예언하시면서 신앙의 교리를 (field)이라 하십니다. The Lord also in his prediction concerning the consummation of the age calls the doctrine of faith afield:

 

그때에 사람이 밭에 있으매 사람은 데려가고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24:40; 17:36) Then shall two be in the field, the one shall be taken and the other left, (Matt. 24:40; Luke 17:36)

 

여기서 (field) 참된 것이든 거짓된 것이든 신앙의 교리를 뜻합니다. (field) 교리를 상징하므로, 신앙의 씨를 받는 것은 사람이든 교회든 세계든 또한 (field)이라 합니다. where by afieldis meant the doctrine of faith, both true and false. As afieldsignifies doctrine, whoever receives a seed of faith, whether a man, the church, or the world, is also called afield.

 

해설

AC.368은 바로 앞 AC.367에서 남겨 둔 한 가지를 집중적으로 확증합니다. AC.367에서는 체어리티가 신앙의 형제라는 것을 주로 설명했다면, 이제 AC.368에서는 (field)이 교리를 상징하며, 더 구체적으로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교리에 속한 모든 것을 상징한다는 것을 말씀 여러 곳을 통해 보여 줍니다. 이것은 창4:8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라는 표현을 이해하기 위해 매우 중요합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일이 에서 일어났다는 것은 속뜻에서 분리된 신앙이 교리의 영역에서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 교리를 상징할까요? AC.368은 그 이유를 매우 간결하게 보여 줍니다. 들은 씨가 뿌려지는 곳입니다. 에스겔의 말씀을 인용한 뒤 스베덴보리는 교리는 안에 씨가 있기 때문에 들이라 한다고 설명합니다. 자연계에서 들이 씨를 받아 싹이 나고 자라 열매를 맺는 곳이라면, 영적으로 교리는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진리가 받아들여지고 자라는 영역입니다. 따라서 =교리라는 상응은 단순히 임의로 정해진 상징어가 아니라, 씨와 들의 관계를 통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앞서 창1에서 살펴본 의 의미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는 사람 안에 심기는 씨와 같고, 그 씨가 받아들여져 자랄 수 있는 곳이 필요합니다. AC.368에서는 바로 그 씨가 있는 곳이라는 점 때문에 교리를 이라 합니다. 따라서 교리는 단순히 머릿속에 정리된 신학 명제들의 목록이 아닙니다. 참된 교리는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를 받아 보존하고, 그것이 신앙과 체어리티의 삶으로 자라도록 하는 밭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예레미야의 들의 나의 에 관한 말씀에서 은 교리를 상징하고, ‘재산보물은 신앙의 영적 부요함, 곧 신앙의 교리에 속한 것들을 뜻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연적인 재산과 보물의 언어가 말씀의 속뜻에서는 사람이 주님에게서 받은 영적인 부요함을 나타낼 수 있음을 봅니다. 교회가 가진 참된 부요함은 건물이나 재산이나 외적인 세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은 선과 진리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교리 안에 받아들여지고 보존될 때 교리는 영적 보물을 품은 이 됩니다.

 

반대로 교리가 황폐해질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의 교리가 없어진 시온이 밭같이 갈아엎어질 이라는 렘26:18과 미3:12을 인용합니다. 들이 씨와 열매로 풍성할 수도 있고 황무지가 될 수도 있는 것처럼, 교리 역시 참된 진리를 품을 수도 있고 진리를 잃어 황폐해질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라는 상응 자체가 언제나 좋은 교리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AC.368 마지막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람이 밭에 있으매 사람은 데려가고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이라는 말씀을 설명하면서, 스베덴보리는 이 참된 것이든 거짓된 것이든 신앙의 교리를 뜻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교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해서 그 내용이 자동으로 참된 것은 아닙니다. 교리는 씨를 품는 들이지만, 어떤 씨를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집니다. 참된 진리를 받아들이는 교리가 있는가 하면, 거짓을 신앙의 진리처럼 체계화하는 교리도 있을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가인의 이야기와 연결됩니다. AC.362에서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은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고, 자기 사랑과 거기서 나온 판타지로 그것을 계속 확증했습니다. 그 결과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하나의 교리로 굳어졌습니다. 따라서 가인과 아벨이 에 있었다는 것은 단순한 장소 설명이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가 교리의 문제로 들어갔음을 보여 줍니다.

 

요엘의 말씀은 의 황폐함을 더욱 풍성한 상응으로 보여 줍니다. ‘밭이 황무하고’, ‘곡식이 진하여’, ‘ 포도주가 말랐고’, ‘기름이 다하였으며’, ‘밭의 모든 나무가 시들었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을 교리, ‘나무들을 지식, ‘농부들을 예배하는 사람들로 설명합니다. 자연적인 농경의 황폐함을 묘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뜻에서는 교리와 그 안의 지식들이 생명을 잃고 그것을 가지고 예배하는 사람들까지 황폐해지는 상태가 묘사됩니다. 교리가 삶에서 분리되면 단지 몇 가지 신학 명제가 잘못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믿으며 어떻게 예배하는가 하는 전체 질서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96:12밭과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즐거워할지로다 그때 숲의 모든 나무들이 노래하리로다라는 말씀과 사55:12들의 모든 나무가 손뼉을 것이며라는 말씀은 말씀의 속뜻이 왜 필요한지를 매우 알기 쉽게 보여 줍니다. 자연적인 밭이 실제로 즐거워할 수 없고 나무가 노래하거나 손뼉 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표현은 사람 안에 있는 살아 있는 영적 실재를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는 시편의 경우 그것을 신앙의 지식들이라고 설명합니다. 말씀은 자연계의 사물들을 통하여 인간의 내적인 것과 천국적인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렘12:4땅이 슬퍼하며 지방의 채소가 마른다는 말씀은 황폐함(vastation)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땅이나 풀이 실제로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의 선과 진리에 속한 것들이 황폐해지는 상태가 자연계의 모습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이처럼 같은 과 그 안의 식물들이 어떤 곳에서는 기뻐하고 노래하며, 다른 곳에서는 마르고 황폐해지는 것은 교리와 지식이 그 안에 무엇을 받아들이고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 시대의 완성에 관하여 그때에 사람이 밭에 있으매 사람은 데려가고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라고 하신 말씀도 같은 맥락에서 인용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을 신앙의 교리라고 설명하면서 특별히 참된 것이든 거짓된 것이든이라고 덧붙입니다. 두 사람이 모두 같은 에 있다는 외적 사실만으로 그들의 내적 상태가 같다고 할 수 없습니다. 교리에 속해 있고 말씀을 알고 신앙을 고백한다고 해서 모두 같은 영적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사람이 그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이며 그것이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삶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AC.368 마지막에는 의 의미가 한 단계 더 넓어집니다. 들이 교리를 상징하는 이유가 그 안에 씨가 있기 때문이라면, 신앙의 씨를 받는 것 역시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든 교회든 세계든 신앙의 씨를 받는 것은 이라 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에서 상응의 의미가 단순한 단어 대응보다 훨씬 유기적이라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은 교리를 뜻하지만, 더 넓게는 주님에게서 오는 신앙의 씨가 받아들여지고 자랄 수 있는 수용의 영역까지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 마음 역시 주님의 말씀이 심기는 하나의 들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단지 많은 씨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많이 읽고, 많은 교리를 알고, AC의 많은 아르카나를 이해한다고 해도 그것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된다면 바로 그 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교리를 많이 아는 것이 오히려 자기 의와 우월감을 확증하는 수단이 되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며 사랑을 잃게 한다면 진리를 담아야 할 들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장소로 변한 것입니다.

 

반대로 참된 교리는 아벨을 살립니다. 진리가 우리를 주님께 더 가까이 가게 하고, 자기 악을 보게 하며, 이웃을 더 지혜롭게 사랑하고 실제 쓰임을 행하게 한다면 그 교리는 좋은 씨가 자라는 들이 됩니다. 그러므로 AC.368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나는 올바른 교리를 알고 있는가?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교리는 안에서 무엇을 자라게 하고 있는가?까지 나아갑니다. 신앙의 들에서 체어리티가 살아 있는가, 아니면 신앙이라는 이름 아래 체어리티가 밀려나고 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교리의 궁극적인 쓰임은 그 자체를 높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결합되어 살아 있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열매를 맺게 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AC.369, 창4:8, 가인이 아벨을 죽이다 -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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