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And the rib which Jehovah God had taken from the man, he built into a woman, and brought her to the man. (2:22)

 

AC.153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built into a woman)라고는 하지만, 앞서 거듭남을 다룰 때처럼 여자가 ‘창조’(created), ‘형성’(formed), 혹은 ‘만들어졌다’(made)고는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만들다’(build)라는 말은 무너진 것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이런 의미로 말씀에서 사용되며, ‘만들다, 짓다’(build)는 악에 대해, ‘다시 세우다’(raise up)는 거짓에 대해, ‘새롭게 하다’(renew)는 둘 다에 대해 사용됩니다. 이사야서에 이르기를, The rib is said to be “built into a woman,” but it is not said that the woman was “created,” or “formed,” or “made,” as before when treating of regeneration. The reason of this is that to “build” is to raise up that which has fallen; and in this sense it is used in the Word, where to “build” is predicated of evils; to “raise up,” of falsities; and to “renew,” of both; as in Isaiah:

 

그들은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을 것이며 예부터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킬 것이며 황폐한 성읍 곧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을 중수할 것이며 (사61:4) They shall build the wastes of eternity, they shall set up again the ancient desolations, and they shall renew the cities of the waste, the desolations of generation and generation. (Isa. 61:4)

 

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구절들과 다른 곳들에서 ‘황폐’(Wastes)는 악을 뜻하고, ‘황무’(desolations)는 거짓을 뜻합니다. 그래서 ‘쌓다’(build)는 앞의 것에, ‘다시 일으키다’(set up again)는 뒤의 것에 적용되며, 이러한 구분은 선지자들에 의해 다른 곳들에서도 주의 깊게 지켜집니다. 예레미야서에서도 이르기를, “Wastes” in this and other passages signify evils; “desolations,” falsities; to “build” is applied to the former, to “set up again” to the latter, and this distinction is carefully observed in other places by the prophets, as where it is said in Jeremiah: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 네가 세움을 입을 것이요 네가 다시 소고를 들고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춤추며 나오리라 (렘31:4) Yet still will I build thee, and thou shall be built, O virgin of Israel. (Jer. 31:4)



해설

 

AC.153은 ‘여자’를 가리켜 왜 ‘창조’나 ‘형성’, 혹은 ‘만들어졌다’고 하지 않고, 오직 ‘지어졌다’(built into)라고만 표현되는지를 정밀하게 설명하는 단락입니다. 이는 단순한 어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상태 변화에 대한 ‘영적 진단의 정확성’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앞선 창조와 거듭남의 과정에서는 ‘창조하다’(create), ‘형성하다’(form), ‘만들다’(make)라는 표현이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생명이 없는 상태에서 생명이 주어지고, 질서가 처음으로 세워지는 과정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 삼고 있는 상태는 전혀 다릅니다. 이미 질서 안에 있었던 것이 ‘기울어지고 무너진 뒤의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새로 창조하지 않으시고, 무너진 것을 다시 세우십니다. 이것이 ‘짓다’(build)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선지서에서의 용례를 끌어옵니다. ‘황폐’는 악을 뜻하고, ‘황무’는 거짓을 뜻합니다. 그리고 악에 대해서는 ‘짓다’가, 거짓에 대해서는 ‘다시 세우다’가 사용됩니다. 이는 악이 의지의 차원에서 무너진 상태이기 때문이며, 거짓은 이해의 차원에서 붕괴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단어 선택 하나하나가 ‘의지와 이해의 구분’, 그리고 악과 거짓의 차이를 반영합니다.

 

여자가 ‘지어졌다’는 것은, 인간의 own이 ‘이미 무너진 상태’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창조 이전의 공허함이 아니라, 한때 생명과 질서 안에 있었으나 자기 인도를 원함으로 인해 붕괴된 상태입니다. 주님은 이 own을 제거하지 않으시고, 그 위에 다시 질서를 세우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처음과 같은 상태는 아닙니다. 그래서 ‘창조’도 아니고, ‘형성’도 아니며, ‘만듦’도 아닙니다.

 

예레미야에서 ‘이스라엘의 처녀’를 다시 짓겠다고 한 말씀은 같은 원리를 보여줍니다. 이는 완전히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타락과 황폐를 겪은 뒤의 회복입니다. 그러므로 ‘짓다’라는 말은 언제나 ‘회복과 허락’, 그러나 동시에 ‘이전 상태와는 다른 긴장’을 동반합니다.

 

이 단락은 매우 중요한 신학적 균형을 보여줍니다. 주님은 인간의 own을 허락하시되, 그것을 신적 질서 안에 다시 세우십니다. 그러나 그 질서는 더 이상 순전한 천적 질서가 아니라, 이후에 시험과 위험을 내포한 상태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여자’는 축복이면서 동시에 이후 서사의 모든 긴장의 출발점이 됩니다.

 

 

심화

 

1. ‘사61:4’

 

그들은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을 것이며 예부터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킬 것이며 황폐한 성읍 곧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을 중수할 것이며 (사61:4) They shall build the wastes of eternity, they shall set up again the ancient desolations, and they shall renew the cities of the waste, the desolations of generation and generation. (Isa. 61:4)

 

 

이 구절이 AC.153에 인용된 이유는, 인간 안에서 무너지고 황폐해진 영적 상태가 주님에 의해 다시 세워지고 회복되는 과정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AC.153의 흐름은, 타락과 proprium 때문에 인간 안의 천적 질서와 퍼셉션이 무너졌지만, 주님께서 인간을 완전히 버려두지 않으시고, 다시 회복과 재건의 길을 여신다는 데로 이어집니다. 사61:4는 바로 그 ‘재건’의 이미지를 매우 강하게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이사야서 61장에서 ‘황폐한 곳’, ‘무너진 곳’, ‘대대로 무너져 있던 성읍’은 단순 전쟁 폐허를 뜻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황폐(desolation)는 진리와 선이 사라진 영적 상태를 뜻합니다. 곧, 인간 안에서 주님과의 연결이 끊어지고, 진리가 메말라 있으며, 사랑이 무너진 상태입니다. 이것은 바로 proprium 중심으로 기울어진 인간 상태와 연결됩니다.

 

특히 ‘성읍’(cities)은 말씀에서 자주 교리적 구조와 진리 체계를 뜻합니다. 그래서 성읍이 황폐해졌다는 것은, 인간 안의 진리 질서 자체가 무너졌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단순히 감정적으로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정도가 아니라, 인간 안의 생각과 삶의 구조 전체가 왜곡된 상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그것을 ‘다시 세우신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거듭남(regeneration)을 단순 도덕 개선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것은 무너진 도시를 다시 건축하는 것 같은 일입니다. 인간 안에 다시 질서가 세워지고, 사랑과 진리가 다시 연결되고, 삶 전체가 새 구조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 황폐함을 다시 세운다’,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킨다’는 표현들이 사용됩니다.

 

또 ‘대대로 황폐하였다’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이것은 단순 일시적 실수가 아니라, 인간성과 교회 전체 안에 오랫동안 누적된 타락 상태를 뜻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인류는 태고교회의 퍼셉션 상실 이후 점점 더 외적 인간 중심으로 기울어졌고, 결국 영적 황폐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바로 그런 상태 속에서도 다시 회복의 길을 여십니다.

 

그래서 AC.153에서 이 구절이 인용된 이유는, proprium과 타락으로 무너진 인간 안의 영적 질서와 진리 구조가 주님에 의해 다시 재건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즉, 에덴의 상실이 마지막이 아니라, 거듭남을 통한 회복과 재건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 개인 심리 회복 정도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참된 재건은 인간 안의 ‘도시’, 곧 생각과 사랑과 삶의 질서 전체가 다시 주님 중심으로 세워지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61장은 단순 위로의 시가 아니라, 황폐해진 인간성과 교회를 다시 살리시는 주님의 구속과 거듭남의 약속으로 읽히는 것입니다.

 

 

2. ‘렘31:4’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 네가 세움을 입을 것이요 네가 다시 소고를 들고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춤추며 나오리라 (렘31:4) Yet still will I build thee, and thou shall be built, O virgin of Israel. (Jer. 31:4)

 

 

이 구절이 AC.153에 인용된 이유는, 주님께서 타락과 황폐 이후에도 인간 안의 교회적 상태를 다시 세우시고 회복하신다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AC.153의 중심 흐름은, proprium 때문에 무너진 인간 안의 천적 질서와 퍼셉션이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 다시 재건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예레미야 31:4는 바로 그 회복의 약속을 가장 따뜻하고 인격적인 언어로 보여 주는 구절입니다.

 

예레미야서 31:4에서 ‘처녀 이스라엘’은 단순 민족 국가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이스라엘은 교회, 곧 진리와 주님과의 관계 안에 있는 인간 상태를 뜻합니다. 그리고 ‘처녀’(virgin)는 아직 순수성과 수용 가능성이 남아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즉, 완전히 닫혀 버린 상태가 아니라, 다시 주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이 남아 있는 교회 상태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표현은 ‘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 네가 세움을 입을 것이다’입니다. 이것은 단순 외적 회복이나 민족 재건을 넘어서, 인간 안의 영적 질서가 다시 세워지는 것을 뜻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거듭남은 무너진 집을 다시 짓는 것과 같습니다. proprium 중심으로 흩어진 인간 안의 생각과 사랑과 삶의 구조가, 다시 주님 중심 질서 안으로 재배열되는 것입니다.

 

특히 이 구절은 앞의 이사야 61:4와 흐름이 이어집니다. 거기서는 황폐한 도시와 무너진 곳을 다시 세운다고 했다면, 여기서는 그 회복이 더 인격적 관계 언어로 표현됩니다. 즉, 주님께서 단순 시스템을 복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과 다시 관계를 맺으시고 그 존재를 다시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또 ‘소고를 들고 춤추며 나오리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말씀에서 춤과 기쁨은 단순 감정 폭발이 아니라, 사랑과 진리가 다시 조화를 이루며 살아 움직이는 상태를 뜻합니다. 즉, 회복은 단순 죄 사함 선언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안에 다시 살아 있는 기쁨과 질서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AC.153에서 이 구절이 인용된 이유는, 타락과 proprium으로 인해 무너진 인간 안의 교회 상태와 영적 질서가 주님에 의해 다시 세워질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만으로는 무너진 것을 다시 세울 수 없지만, 주님은 ‘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거듭남의 시작은 인간의 자기 재건이 아니라, 주님의 재건 역사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매우 깊은 위로도 들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전체에서 주님은 인간이 무너질 가능성을 모르고 자유를 허락하신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무너질 것을 아시면서도 사랑과 자유를 허락하셨고, 동시에 그 무너짐 이후에도 다시 세우시는 길까지 준비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AC.153의 이 흐름은 단순 심판 이후가 아니라, ‘재건하시는 주님’의 이야기입니다.

 

 

 

AC.152, 창2:22, ‘이 구절을 글자 그대로 읽으면 안 되는 이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And the rib which Jehovah God had taken from the man, he built into a woman, and brought her to the man. (창2:22) AC.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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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속임의 실제 통로는 여자

 

여자(woman)가 사람의 own을 뜻한다는 사실은, 여자가 속임을 당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을 속이는 것은 언제나 그의 own, 곧 같은 말로 하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외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

 

뱀은 3장에서 등장하지만, 속임의 실제 통로는 여자를 통해 열립니다. , 악은 언제나 own 안으로 초대될 때 비로소 힘을 갖습니다. 외부의 거짓이 침입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공명하는 own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AC.152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핵심은, 인간을 실제로 무너뜨리는 것은 바깥의 악 자체가 아니라, 그 악이 인간 안의 proprium과 결합할 때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을 속이는 것은 언제나 그의 own’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own,  proprium은 단순 자의식이 아니라, ‘내가 나로부터 산다’, ‘내가 중심이다’, ‘내 판단과 내 욕망이 기준이다’라고 느끼는 자기 중심 구조를 뜻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구조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 기울어질 때, 인간은 진리를 왜곡해서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악을 단순 외부 침입으로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만약 악이 단지 외부 공격이라면, 인간은 거의 피해자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악이 힘을 얻는 이유를 인간 안의 proprium에서 찾습니다. 즉, 바깥에서 들어온 거짓이 인간 안의 어떤 욕망과 자기 사랑과 만나 그래, 바로 이거야 하고 공명할 때, 비로소 그것이 살아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3장에서 뱀은 먼저 등장하지만, 실제 대화와 수용의 중심은 여자입니다. 이것이 뜻하는 것은 굉장히 깊습니다. 뱀은 감각적 추론과 외적 설득을 상징합니다. 즉, ‘정말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을까?’, ‘너도 스스로 판단할 수 있지 않느냐?’ 같은 외적 유혹입니다. 그런데 그 유혹 자체만으로는 아직 인간이 무너지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인간 안의 proprium과 연결될 때입니다.

 

그래서 속임의 실제 통로는 여자였다’라는 말은, 악이 인간 안의 자기중심 구조를 통해 받아들여졌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거짓은 단순히 밖에서 강제로 주입되지 않습니다. 인간 안에서 그것을 원하고 좋아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무엇이 있을 때, 비로소 그것이 힘을 가집니다. 이것이 악은 언제나 own 안으로 초대될 때 힘을 갖는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굉장히 현실적인 인간 경험이기도 합니다. 같은 유혹을 들어도 어떤 사람은 별 반응이 없고, 어떤 사람은 강하게 끌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스베덴보리식으로 말하면, 인간 안의 proprium이 그것과 공명하기 때문입니다. 즉, 바깥 거짓이 안의 자기 사랑과 만날 때, 비로소 속임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AC.152는 타락을 단순 외부 사탄의 공격 사건’처럼 설명하지 않습니다. 타락은 인간 안의 proprium이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굳어지기 시작할 때 일어나는 내적 사건입니다. 뱀은 제안할 수 있지만, 인간 안의 own이 그것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타락은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여자’라는 proprium의 비극성과 존엄성이 동시에 드러납니다. 그것은 원래 주님께서 자유로운 사랑과 응답을 위해 vivify하신 자기감이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구조가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돌기 시작하면, 가장 깊은 속임의 통로가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proprium은 단순 악이 아니라, 인간 자유 전체가 걸려 있는 가장 위험하면서도 필수적인 구조입니다.

 

 

 

AC.152, 창2:22, ‘이 구절을 글자 그대로 읽으면 안 되는 이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And the rib which Jehovah God had taken from the man, he built into a woman, and brought her to the man. (창2:22) AC.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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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2, 심화 2, ‘왜 굳이 여자를 만들어 속게 하셨을까?’

AC.152.심화 2. ‘왜 굳이 여자를 만들어 속게 하셨을까?’ 그러면 주님으로 말미암아 vivified된 own조차 결국 속임의 통로가 되었다는 거잖아요? 이렇게 좀 허무하게 끝날 것이었으면 그냥 오리지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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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2.심화

 

2. ‘왜 굳이 여자를 만들어 속게 하셨을까?’

 

그러면 주님으로 말미암아 vivified own조차 결국 속임의 통로가 되었다는 거잖아요? 이렇게 좀 허무하게 끝날 것이었으면 그냥 오리지날 own으로 놔두시지 굳이 여자로 만드셨어야 했나요? 처음 own으로 속는 거와 이 여자라는 나중 own으로 속는 거가 뭐가 다른가요?

 

 

바로 그 질문 때문에 창세기 2장과 3장이 그렇게 깊고도 두려운 본문인 것입니다. 목사님께서 지금 느끼시는 ‘허무함’은 사실 매우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결국 속을 거였다면 왜 굳이 vivify proprium을 허락하셨는가?’ 하는 질문 말입니다. 스베덴보리도 사실상 바로 그 지점을 오래 붙들고 갑니다.

 

그런데 여기서 핵심은, 주님께서 허락하신 vivified proprium은 단순히 ‘속기 쉬운 개선판 자아’가 아니라, 사랑과 자유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구조였다는 점입니다. 만약 인간이 단지 최초의 오리지널 proprium, 곧 죽어 있는 자기성 상태에만 머물렀다면, 인간은 살아 있는 사랑의 존재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움직일 수는 있어도, 자기 삶처럼 느끼며 사랑하고 응답하는 존재는 되지 못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사랑은 강제로 주입될 수 없습니다. 사랑은 반드시 자유 안에서만 살아 있습니다. 그런데 자유는 반드시 ‘내가 스스로 원한다’는 자기감(as if from himself)을 필요로 합니다. 바로 여기서 vivified proprium이 등장합니다. 주님은 인간이 실제로는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으면서도, 마치 자기 스스로 사랑하고 생각하는 것처럼 느끼게 하십니다. 이것이 없으면 인간은 살아 있는 상호 관계 속 존재가 아니라, 거의 자동 기계 같은 상태에 머물게 됩니다.

 

그래서 처음의 죽은 proprium vivified proprium의 차이는 엄청납니다. 죽은 proprium은 자기 자신 안에만 갇혀 있는 상태입니다. 거기에는 진짜 천국적 사랑도, 자유로운 응답도 없습니다. 반면 vivified proprium은 주님의 생명이 통과하면서 인간 안에 살아 있는 자유와 사랑의 가능성을 열어 준 상태입니다. 즉, 인간이 ‘진짜로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문제는, 바로 그 자유 때문에 타락 가능성도 함께 열린다는 점입니다. 사랑과 자유를 허락한다는 것은, 동시에 인간이 자기 자신 쪽으로 기울 가능성도 허락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 위험을 모르셔서 허락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완전히 아시면서도 허락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자유 없는 선은 살아 있는 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2장의 ‘여자’는 단순 타락 장치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주님과 실제 사랑의 관계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하는 마지막 연결 구조입니다. 하지만 같은 구조가, 인간이 자기 자신을 중심 삼기 시작할 때는 타락의 통로도 됩니다. 이것이 바로 자유의 두려운 성격입니다.

 

그러므로 ‘처음 own으로 속는 것’과 ‘vivified, 여자라는 own으로 속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처음 죽은 proprium은 원래부터 닫혀 있고 생명 없는 자기성입니다. 그러나 vivified proprium은 원래는 주님의 생명을 받아 자유롭게 사랑하도록 허락된 구조였습니다. 그래서 후자의 타락은 단순 기계적 오류가 아니라, 사랑과 자유 안에서 일어난 배반에 가깝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타락은 더 비극적이지만, 동시에 구속과 거듭남도 의미를 갖게 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에게서 주님의 놀라움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은 인간이 넘어질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 자유를 제거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넘어질 가능성까지 감수하시면서, 인간이 진짜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되도록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천국은 단순히 ‘실수할 수 없는 자동 순종 상태’가 아니라, 자유 안에서 주님을 사랑하도록 형성된 존재들의 공동체가 됩니다.

 

 

 

AC.152, 심화 3, ‘속임의 실제 통로는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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