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f in the garden in the air of the day; and the man and his wife hid themselves from the face of Jehovah God in the midst of the tree of the garden. (3:8)

 

AC.222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은지라(hide themselves from the face of Jehovah)는 내적 딕테이트(internal dictate)를 두려워하였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악을 의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흔히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것은 그들의 대답, 곧 다다음 절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I heard thy voice in the garden, and I was afraid because I was naked)라는 말로부터도 분명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낯(the face of Jehovah), 또는 주님의 얼굴(the face of the Lord)은 자비(mercy), 평화(peace), 그리고 모든 선(good)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다음의 축복 말씀으로부터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That to “hide themselves from the face of Jehovah,” means to be afraid of the dictate, as is wont to be the case with those who are conscious of evil, is evident from their reply (verse 10): “I heard thy voice in the garden, and I was afraid because I was naked.” The “face of Jehovah,” or of the Lord, is mercy, peace, and every good, as is clearly evident from the benediction:

 

25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6:25, 26) Jehovah make his faces to shine upon thee, and be merciful unto thee; Jehovah lift up his faces upon thee, and give thee peace (Num. 6:25–26).

 

또 시편에서, And in David: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67:1) God be merciful unto us, and bless us, and cause his faces to shine upon us (Ps. 67:1).

 

,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4:6) There be many that say, Who will show us any good? Jehovah, lift thou up the light of thy faces upon us (Ps. 4:6).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자비는 이사야서에서 자기 앞의 사자(the angel of faces)라고도 불립니다. The mercy of the Lord is therefore called the “angel of faces,” in Isaiah:

 

7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와 그의 찬송을 말하며 그의 사랑을 따라, 그의 많은 자비를 따라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 큰 은총을 말하리라 8그가 말씀하시되 그들은 실로 나의 백성이요 거짓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녀라 하시고 그들의 구원자가 되사 9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하여금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의 사랑과 그의 자비로 그들을 구원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 (사63:7-9) I will make mention of the mercies of Jehovah; he hath requited them according to his mercies, and according to the multitude of his mercies; and he became their savior. In all their affliction he was afflicted, and the angel of his faces saved them; in his love and in his pity he redeemed them (Isa. 63:7–9).

 

 

해설

 

AC.222는 창세기 38절의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은지라’를 설명하면서, 말씀에서 ‘여호와의 낯(the face of Jehovah)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밝혀 줍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무서워하여 숨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이 구절을 해석합니다.

 

그에 따르면 주님의 얼굴은 진노나 심판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비(mercy), 평화(peace), 사랑(love), 그리고 모든 선(good)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반복해서 ‘주의 얼굴을 비추소서’라고 기도합니다. 만일 주님의 얼굴이 두려움과 심판 자체라면, 아무도 그 얼굴이 자신에게 비추어지기를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아담은 그런 얼굴을 피하여 숨었을까요? 이유는 주님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자기 안의 악을 의식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악을 사랑하는 상태에서는 주님의 사랑조차 불편하게 느껴집니다. 마치 눈병이 난 사람이 태양 빛을 괴롭게 느끼는 것과 같습니다. 태양은 변하지 않았지만, 눈의 상태가 변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현상을 영계에서도 반복해서 보았다고 설명합니다. 선한 영이나 천사가 가까이 오면 악한 영들은 고통을 느끼며 물러납니다. 천사가 그들을 공격하기 때문이 아니라, 천국의 사랑과 평화가 그들의 상태와 정반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도망갑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한 영적 원리를 보여 줍니다. 주님은 누구에게도 얼굴을 돌리지 않으십니다. 실제로 말씀 전체를 보면, 주님의 얼굴은 언제나 자비를 향하고 있습니다. 변하는 것은 인간의 상태입니다. 사람이 주님을 사랑할 때는 그 얼굴이 평화와 기쁨으로 느껴지고, 자기 사랑과 악 속에 있을 때는 같은 얼굴이 불편함과 두려움으로 느껴집니다.

 

또한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이사야 63장의 ‘자기 앞의 사자(the angel of faces)를 주님의 자비의 표현으로 해석합니다. 이는 주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가까이 오시는 사랑의 임재를 뜻합니다. 즉 ‘얼굴’은 단순한 형상이 아니라 주님의 가장 가까운 현존과 사랑을 의미합니다.

 

결국 AC.222의 핵심은, 아담이 숨은 이유가 주님의 진노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상태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얼굴은 여전히 자비와 평화와 선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그 사랑을 더 이상 기쁨으로 받을 수 없게 되었고, 그래서 숨으려 하였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진리의 말씀을 피하고 양심의 소리를 듣기 싫어할 때, 그는 실제로 주님에게서 숨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는 자신의 상태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심화

 

1. ‘민6:25-26’

 

25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민6:25, 26) Jehovah make his faces to shine upon thee, and be merciful unto thee; Jehovah lift up his faces upon thee, and give thee peace (Num. 6:25–26).

 

 

이 구절을 AC.222에서 인용한 이유는, 말씀에서 ‘여호와의 얼굴’(the faces of Jehovah)이 자비(mercy), 평화(peace), 사랑(love), 그리고 모든 선(good)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창3:8의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숨었다’는 구절을 해설하면서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만일 주님의 얼굴이 진노와 심판을 의미한다면, 아담과 하와가 숨은 것은 당연한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은 오히려 정반대를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얼굴은 자비와 평강의 얼굴입니다.

 

그래서 그는 민수기 6장의 축복을 인용합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얼굴을 비추신다’는 것은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인간에게 흘러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태양이 빛을 비추듯이, 주님께서는 끊임없이 선과 진리를 보내십니다. 따라서 ‘얼굴을 비춘다’는 것은 은혜를 베푸신다는 말과 나란히 사용됩니다.

 

또한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는 말씀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평강(peace)은 단순한 마음의 안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천국의 가장 깊은 상태이며, 주님 안에 있는 모든 질서와 조화가 인간 안에 흘러 들어오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얼굴은 평강의 근원으로 묘사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창3의 의미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아담과 하와는 진노의 얼굴을 피해 숨은 것이 아닙니다. 자비와 평강의 얼굴을 피해 숨었습니다. 문제는 주님의 얼굴이 아니라 자기들의 상태였습니다. 그들은 벌거벗음을 알게 되었고, 악을 의식하게 되었으며, 그래서 주님의 빛 앞에 서기를 두려워했습니다.

 

마치 병든 눈이 햇빛을 두려워하는 것과 같습니다. 햇빛 자체는 따뜻하고 생명을 주는 것이지만, 눈에 병이 있으면 그 빛이 고통스럽게 느껴집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얼굴은 언제나 자비와 평화이지만, 악을 의식하는 사람은 그 빛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또한 스베덴보리가 주목하는 것은 ‘얼굴’(face)이 아니라 히브리어 원문의 복수형인 ‘얼굴들’(faces)입니다. 영어 본문도 ‘his faces’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는 주님의 사랑과 자비가 한 가지 방식이 아니라 무수한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을 암시하는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여호와의 얼굴’이라는 표현을 단순한 외형적 얼굴이 아니라, 주님의 신적 사랑과 자비가 인간에게 드러나는 모든 방식으로 이해합니다.

 

따라서 AC.222에서 민6:25-26을 인용한 이유는 매우 분명합니다. 창3에서 아담과 하와가 피한 ‘여호와의 얼굴’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얼굴은 심판의 얼굴이 아니라 은혜의 얼굴이며, 진노의 얼굴이 아니라 평강의 얼굴입니다.

 

결국 이 축복의 말씀은 창3의 장면을 거꾸로 비추어 줍니다. 아담은 그 얼굴을 피해 숨었지만, 주님은 여전히 그 얼굴을 비추고 계셨습니다. 인간은 도망쳤지만, 주님의 자비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민수기의 축복은 단순한 제사장의 축도가 아니라, 창세기 이후 모든 인류를 향한 주님의 변함없는 마음을 보여 주는 말씀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라는 말씀 속에는, 숨은 아담을 찾아 나서신 주님의 사랑이 이미 담겨 있는 것입니다.

 

 

2. ‘시67:1’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시67:1) God be merciful unto us, and bless us, and cause his faces to shine upon us (Ps. 67:1).

 

 

이 구절을 AC.222에서 인용한 이유는, ‘여호와의 얼굴’(the faces of Jehovah)이 자비(mercy), 축복(blessing), 평강(peace), 그리고 모든 선(good)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창3:8의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숨었다’는 말씀을 해설하면서, 먼저 ‘여호와의 얼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성경 전체를 통해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증거 구절 가운데 하나가 바로 시67:1입니다.

 

이 시편을 보면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 얼굴빛을 비추사’라는 표현이 나란히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왜냐하면 말씀 자체가 이미 ‘주의 얼굴빛’과 ‘은혜’, ‘복’을 같은 의미권 안에서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의 얼굴은 인간을 정죄하거나 멀리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주고 복을 주며 생명을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 ‘얼굴빛을 비추사’라는 표현은 태양의 빛을 연상시킵니다. 자연계에서 태양이 빛과 열을 보내듯이, 영계에서는 주님께서 사랑과 진리를 끊임없이 보내십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천국 전체는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사랑의 열과 진리의 빛으로 유지됩니다. 그래서 ‘주님의 얼굴빛’은 단순한 미소나 호의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신적 사랑과 신적 진리 자체를 의미합니다.

 

이 때문에 시67은 AC.222의 논증에 매우 중요한 본문이 됩니다. 만일 주님의 얼굴이 진노와 심판을 의미한다면, 어찌하여 시편 기자가 ‘주의 얼굴빛을 비추어 달라’고 기도하겠습니까? 오히려 그는 그것을 가장 큰 복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는 주님의 얼굴이 곧 은혜와 축복의 근원임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창3의 장면도 다시 보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피한 것은 무서운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사실 가장 따뜻하고, 가장 자비로운 얼굴을 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악을 의식하는 사람은 바로 그 사랑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랑의 빛은 자신의 상태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마치 오랫동안 닫혀 있던 방에 햇빛이 들어오면 먼지와 어지러움이 드러나는 것과 같습니다. 햇빛은 악한 것이 아니지만, 그 빛은 숨겨져 있던 것을 보이게 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때로 빛 자체를 피하려 합니다. 아담과 하와도 그러했습니다.

 

따라서 AC.222에서 시67:1을 인용한 이유는, ‘여호와의 얼굴’이 무엇인지를 긍정적으로 정의하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은 사랑의 얼굴이며, 은혜의 얼굴이며, 복의 얼굴입니다. 주님의 얼굴빛이 비친다는 것은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인간 안에 흘러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구절은 창3의 비극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인간은 바로 그 얼굴빛을 피해 숨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구절은 희망도 보여 줍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얼굴은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숨더라도 주님은 여전히 얼굴빛을 비추고 계십니다. 그래서 시67:1은 AC.222의 맥락에서 보면 단순한 축복 기도가 아니라, 숨은 인간을 향해 여전히 사랑과 은혜를 비추고 계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여 주는 말씀인 것입니다.

 

 

3. ‘시4:6’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시4:6) There be many that say, Who will show us any good? Jehovah, lift thou up the light of thy faces upon us (Ps. 4:6).

 

 

이 구절을 AC.222에서 인용한 이유는, 참된 선(good)은 오직 주님으로부터 오며, ‘주의 얼굴의 빛’(the light of thy faces)은 그 선을 인간에게 전달하는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 시편의 앞부분을 보면 사람들이 ‘누가 우리에게 선을 보여 줄 수 있는가?’라고 묻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물질적 복이나 세상적 성공을 구하는 질문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보면 인간이 참된 행복과 평화, 선한 삶의 근원을 찾는 질문입니다.

 

그에 대한 답으로 다윗은 ‘여호와여 주의 얼굴의 빛을 우리에게 비추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연결에 주목합니다. 사람들은 선을 찾고 있지만, 다윗은 선 자체를 달라고 하지 않고, 주님의 얼굴빛을 구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얼굴빛이 비추어질 때, 선도 함께 오기 때문입니다.

 

AC.222의 문맥에서 이것은 매우 중요한 증거가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호와의 얼굴’이 자비와 평화와 모든 선을 의미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만일 주님의 얼굴이 진노나 심판을 의미한다면, 다윗이 ‘주의 얼굴빛을 비추어 달라’고 기도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가장 큰 복으로 구하고 있습니다.

 

특히 여기서 ‘얼굴의 빛’(light of thy faces)이라는 표현은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인간에게 흘러드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을 빌리면, 천국의 모든 빛은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신적 진리이며, 그 빛 속에는 신적 사랑의 열이 함께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얼굴빛은 단순한 호의의 표시가 아니라, 인간 영혼을 살리는 영적 생명 자체입니다.

 

이 점에서 시4:6은 창3의 장면과 깊은 대조를 이룹니다. 다윗은 ‘주의 얼굴빛을 비추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그 얼굴을 피해 숨었습니다. 다윗은 그것을 가장 큰 축복으로 여겼고, 아담과 하와는 그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그 차이는 주님의 얼굴에 있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얼굴은 언제나 동일합니다. 차이는 인간의 상태에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 얼굴은 평화와 기쁨이지만, 자기 악을 의식하는 사람에게는 두려움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마치 같은 태양이 건강한 눈에는 즐거움이지만, 아픈 눈에는 고통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이 구절은 스베덴보리의 핵심 사상 가운데 하나를 잘 보여 줍니다. 사람들은 흔히 ‘무엇이 선인가?’를 묻지만, 스베덴보리는 참된 선은 인간에게서 나오지 않고 주님에게서 온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선을 직접 찾기보다 주님의 얼굴빛을 구해야 합니다. 빛이 오면 선도 함께 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AC.222에서 시4:6을 인용한 이유는, 사람들이 찾는 모든 참된 선의 근원이 주님의 얼굴빛 안에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창3장의 의미를 더욱 깊게 드러냅니다. 아담과 하와가 피해 숨은 것은 바로 인간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 곧 모든 선과 평화의 근원인 주님의 얼굴빛이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그 얼굴빛을 거두지 않으시고, 숨은 인간을 끝까지 찾아 나서셨습니다. 이것이 AC.222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따뜻한 메시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4. ‘사63:7-9’

 

7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와 그의 찬송을 말하며 그의 사랑을 따라, 그의 많은 자비를 따라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 큰 은총을 말하리라 8그가 말씀하시되 그들은 실로 나의 백성이요 거짓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녀라 하시고 그들의 구원자가 되사 9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하여금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의 사랑과 그의 자비로 그들을 구원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 (사63:7-9) I will make mention of the mercies of Jehovah; he hath requited them according to his mercies, and according to the multitude of his mercies; and he became their savior. In all their affliction he was afflicted, and the angel of his faces saved them; in his love and in his pity he redeemed them (Isa. 63:7–9).

 

 

이 구절을 AC.222에서 인용한 이유는, ‘여호와의 얼굴’(the faces of Jehovah)이 심판이나 진노가 아니라 사랑(love), 자비(mercy), 긍휼(pity), 구원(salvation)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창3:8의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숨었다’는 구절을 설명하면서, 먼저 말씀 전체에서 ‘여호와의 얼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가장 아름다운 증거 가운데 하나로 이사야 63장을 인용합니다.

 

특히 그는 ‘자기 앞의 사자’(the angel of his faces)라는 표현에 주목합니다. 문자적으로는 마치 주님 앞에 서 있는 어떤 천사를 말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이것은 단순히 한 천사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의 사랑과 자비가 인간에게 다가오는 신적 임재를 의미합니다.

 

본문 전체를 보면 ‘자비’, ‘사랑’, ‘긍휼’, ‘구원’이라는 단어들이 반복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문맥 속에서 ‘자기 앞의 사자’가 등장합니다. 이것은 말씀 자체가 이미 ‘얼굴’이라는 표현을 자비와 사랑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특히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라는 구절은 매우 감동적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을 멀리 떨어져 인간을 심판하는 존재로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상태를 아시고, 인간의 고통을 보시며, 끊임없이 구원하려 하시는 분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셨다’는 표현은 주님의 사랑의 본성을 잘 드러냅니다.

 

또한 ‘그의 사랑과 그의 자비로 그들을 구원하셨다’는 말씀도 중요합니다. 여기에는 진노나 보복의 언어가 없습니다. 구원의 동기는 오직 사랑과 자비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통해 ‘여호와의 얼굴’이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그것은 인간을 향한 주님의 사랑이 드러난 모습입니다.

 

이 때문에 창3의 장면이 더욱 깊이 이해됩니다. 아담과 하와는 ‘여호와의 얼굴’을 피해 숨었습니다. 그러나 AC.222에 따르면 그 얼굴은 사랑의 얼굴이며 자비의 얼굴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자신들을 멸하려는 얼굴을 피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구원하려는 얼굴을 피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영적 상태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사람은 악을 의식하게 되면 주님을 피하고 싶어 합니다. 기도를 미루고, 말씀을 멀리하고, 영적인 것을 피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주님의 얼굴은 변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숨는다고 해서 사랑이 진노로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사야 63장은 주님의 얼굴이 어떤 얼굴인지를 보여 줍니다. 그것은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는 얼굴이며, 사랑으로 구속하고 자비로 품어 주는 얼굴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자비 자체를 ‘그 얼굴의 사자’라고 부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AC.222에서 사63:7-9를 인용한 이유는, 창3의 ‘여호와의 얼굴’을 올바르게 이해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 얼굴은 두려움의 근원이 아니라 사랑의 근원입니다. 아담이 두려워한 것은 주님의 얼굴이 아니라, 그 얼굴의 빛 아래 드러난 자기 자신의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이 본문은 창3을 매우 따뜻하게 비추어 줍니다. 인간은 숨었지만, 그를 찾으시는 분은 ‘그의 사랑과 그의 자비로 구원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아담이 피한 얼굴은 심판자의 얼굴이 아니라, 이사야가 노래한 바로 그 ‘사랑과 자비의 얼굴’이었던 것입니다.

 

 

 

AC.221, 창3:8, ‘그 날 바람이 불 때’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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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1.심화

 

1. ‘9: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9:4) I must work the works of him that sent me, while it is day; the night cometh when no man can work (John 9:4).

 

 

이 구절을 AC.221에서 인용한 이유는, 말씀에서 ‘(day)은 신앙과 진리의 빛이 있는 상태를, ‘(night)은 신앙과 진리의 빛이 사라진 상태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주님께서 단순히 시간이 있을 때 일을 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시간보다 상태(state)를 봅니다. 그에 따르면 주님께서 말씀하신 ‘’은 해가 떠 있는 시간이 아니라 진리가 비추는 상태이며, ‘’은 해가 진 시간이 아니라 진리가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낮에는 일할 수 있다’는 말은 사람이 아직 진리를 듣고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에 있다는 뜻입니다. 양심이 살아 있고, 회개할 수 있으며, 주님의 인도를 따를 수 있는 상태입니다. 반면 ‘밤이 오면 아무도 일할 수 없다’는 말은 진리의 빛이 거부되고 신앙이 사라져 더 이상 영적 진보가 어려운 상태를 의미합니다.

 

AC.221의 문맥에서는 이것이 창3:8의 ‘그 날 바람이 불 때(the breath of the day)와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표현을 태고교회 후손들이 아직 얼마간의 지각(perception)을 보유하고 있던 상태로 해석합니다. 즉 완전한 낮은 아니지만, 아직 밤도 아닌 상태입니다. 빛은 약해지고 있었지만 완전히 꺼지지는 않았습니다.

 

따라서 요9:4 AC.221에서 매우 적절한 증거 구절이 됩니다. 주님 자신도 ‘’과 ‘’을 영적 상태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사용하셨기 때문입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처음에는 밝은 낮과 같은 퍼셉션 가운데 있었지만, 점차 ‘날의 서늘함’으로 내려왔고, 결국 밤에 가까워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 말씀은 거듭남의 과정에도 적용됩니다. 사람이 주님의 진리를 들을 수 있고, 양심의 소리에 응답할 수 있으며, 내적 딕테이트(interior dictate)를 느낄 수 있을 때가 바로 ‘’입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그 빛을 거부하면 점차 ‘’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낮이 있을 때 일하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창3:8의 아담과 하와는 이미 한낮의 밝은 퍼셉션은 잃었지만, 아직 완전한 밤에 들어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여호와의 음성을 들었고, 여전히 부끄러움을 느꼈으며, 여전히 자신들이 타락했다는 것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그 날 바람이 불 때’입니다.

 

그러므로 AC.221에서 요9:4를 인용한 이유는, 말씀의 ‘’과 ‘’이 시간의 개념이 아니라 신앙과 지각의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이며, 창3:8의 ‘그 날 바람이 불 때’가 아직 완전히 꺼지지 않은 영적 빛의 상태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태고교회의 후손들에게 남아 있던 마지막 퍼셉션의 빛은 이미 저물어 가고 있었지만, 아직 완전한 밤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AC.221, 창3:8, ‘그 날 바람이 불 때’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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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f in the garden in the air of the day; and the man and his wife hid themselves from the face of Jehovah God in the midst of the tree of the garden. (3:8)

 

AC.221

 

그 날 바람이 불 때(the air or breath of the day)란 교회가 아직 얼마간의 지각(perception)을 남겨두고 있던 시기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day)(night)의 의미로부터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태고인들(the most ancient people)은 교회의 상태들을 낮과 밤의 시간들에 비유하였는데, 교회가 아직 빛 가운데 있을 때의 상태를 낮의 시간에 비유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이 상태가 그 날 바람이 불 때에 비유된 것은, 그들에게 아직도 자신들이 타락하였음을 알 수 있는 얼마간의 지각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신앙(faith)의 상태는 (day), 신앙 없는 상태(no faith)(night)이라 하십니다. 요한복음에 이르기를, That by the “air” or “breath” “of the day” is signified a period when the church had still somewhat of perception remaining,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day” and of “night.” The most ancient people compared the states of the church to the times of the day and of the night, to the times of the day when the church was still in light, wherefore this state is compared to the breath or air “of the day,” because there was still some remnant of perception by which they knew that they were fallen. The Lord also calls the state of faith “day,” and that of no faith “night”; as in John: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9:4) I must work the works of him that sent me, while it is day; the night cometh when no man can work (John 9:4).

 

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같은 이유로 창세기 1장에 보면 사람의 거듭남(regeneration)의 상태들을 날들(days)이라 하고 있습니다. The states of the regeneration of man were for the same reason called “days” in chapter 1.

 

 

해설

 

AC.221은 창세기 38절의 ‘그 날 바람이 불 때’라는 표현을 설명하는 구절입니다. 문자적으로는 저녁 무렵의 선선한 바람이 부는 시간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시간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교회의 영적 상태에 대한 묘사로 해석합니다.

 

그에 따르면 말씀에서 ‘(day)은 신앙과 진리의 빛 가운데 있는 상태를 의미하고, ‘(night)은 신앙과 진리가 사라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그 날 바람이 불 때’란 완전한 낮도 아니고, 완전한 밤도 아닌 상태, 곧 빛이 약해지고 어둠이 다가오고 있지만, 아직은 빛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타락 직후의 태고교회 상태였습니다. 그들은 이미 뱀의 설득을 받아 자기 자신을 신뢰하기 시작하였고,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완전히 타락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직도 자신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고, 양심의 소리와 퍼셉션의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 날 바람이 불 때’란 ‘자신들이 타락하였음을 알 수 있는 얼마간의 퍼셉션이 남아 있는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만일 그 퍼셉션마저 완전히 사라졌다면 그들은 숨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부끄러움도 느끼지 못하고, 잘못을 깨닫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주님의 음성을 두려워할 만큼의 영적 감각이 남아 있었습니다.

 

여기서 ‘서늘함’ 또는 ‘바람(breath, air)이라는 표현도 의미가 있습니다. 뜨거운 한낮의 강한 빛은 아닙니다. 이미 빛은 약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완전한 밤도 아닙니다. 마지막 남은 빛이 희미하게 남아 있는 황혼과 같은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교회의 역사뿐 아니라 개인의 영적 상태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봅니다. 사람이 처음 잘못된 길로 들어설 때에는 아직 양심이 살아 있습니다.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 마음이 찔리고, 악을 행하면 불편함을 느낍니다. 이것이 바로 ‘날의 서늘함’, 곧 ‘그 날 바람이 불 때’ 같은 상태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계속 그 음성을 무시하면 결국 밤이 찾아옵니다. 그때는 양심도 무디어지고, 진리에 대한 감각도 사라지며, 잘못을 잘못으로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의 창조의 날들도 같은 원리로 이해합니다. 거기서의 ‘첫째 날’, ‘둘째 날’ 등은 자연적인 24시간이 아니라 거듭남의 단계들입니다. 즉 말씀에서 ‘’은 흔히 영적 상태를 의미합니다.

 

결국 AC.221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주님의 음성을 들은 때는 완전한 밤이 아니었습니다. 아직은 ‘날의 서늘함’이 남아 있었습니다. 아직은 양심이 살아 있었고, 아직은 자신들이 타락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심판의 순간이라기보다,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영적 감각이 아직 완전히 꺼지지 않은 상태를 보여 주는 매우 자비로운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그 마지막 남은 빛을 통해 인간을 다시 부르고 계셨던 것입니다.

 

 

심화

 

1. ‘9:4

 

 

AC.221, 심화 1, ‘요9:4’

AC.221.심화 1. ‘요9: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요9:4) I must work the works of him that sent me, while it is day; the night 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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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2, 창3:8,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은지라’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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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0, 창3:8, ‘거니시는 소리’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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