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69.심화

 

1.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게 하려면

 

본문 중 사람이 잠겨 있던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기만 하면, 그 길은 다시 열리며, 그는 영들 가운데 있게 되고, 그들과 더불어 어떤 공동의 삶 안에 있게 됩니다.’ 말인데요, 이것은 사람의 사후 일어나는 일을 말하는 건가요? 해설을 보니 스베덴보리 본인은 이런 상태였던 것 같은데... 그럼, 우리 같은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이런 상태에 들어갈 수 있나요?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AC.69의 그 구절은 ‘일반적인 사람에게 요구되는 상태’나 ‘의도적으로 들어가야 할 영적 체험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목적 아래 허락된 ‘예외적 개방 상태’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Emanuel Swedenborg 자신이 경험한 바로 그 상태가 그것이며, 모든 사람이 동일한 방식으로 추구하거나 재현해야 하는 길로 제시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읽을 때 가장 먼저 붙잡으셔야 할 것은 ‘이것은 사후 상태의 원리를 설명하는 동시에, 특수한 경우의 예시를 포함한다’는 점입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이 구절은 1차적으로는 ‘사후 상태’의 원리를 설명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육체적 감각과 그에 묶여 있던 것들이 물러가고, 그 즉시 영적 감각이 열리면서 영들과 더불어 실제적인 공동의 삶 안으로 들어갑니다. 이것이 ‘다른 삶(the other life)의 본성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이 일반 원리를 설명하면서, 동시에 자신에게는 이 상태가 ‘육체 안에 있으면서도’ 제한적으로 열렸다고 증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는 죽은 뒤에 일어날 일을 미리 경험하도록 허락받은 ‘특수한 경우’입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질문, ‘우리 같은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이런 상태에 들어갈 수 있는가’인데, 여기서 방향을 아주 조심해서 잡으셔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전체 저작을 일관되게 보면, 그는 결코 사람들이 ‘영들과 교통하는 상태’를 추구하도록 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그것은 매우 위험할 수 있으며, 인간의 질서를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에 주님의 특별한 보호와 목적 아래에서만 허락된다고 강조합니다. 인간의 정상적인 상태는 ‘외적으로는 이 세상에, 내적으로는 주님과 연결된 상태’이지, 의식적으로 영들과 교류하는 상태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간다’는 말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것을 문자적으로 ‘감각을 끊는다’, ‘현실을 떠난다’로 이해하시면 곧바로 길이 어긋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육체적인 것’은 단순히 몸 자체가 아니라, ‘감각 중심의 삶’,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묶인 상태’를 포함합니다. 따라서 이것이 물러간다는 것은, 외적 삶을 버린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에 지배되지 않는 상태’로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허락된 방식은 전혀 다르게 나타납니다. 우리는 영들과 눈에 보이게 교류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지와 이해의 질서’를 통해 이미 영적 세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선을 사랑하고 진리를 따르며 살아갈 때, 그는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천사들과 함께 있는 것이고, 반대로 자기중심적 사랑에 빠질 때는 다른 영들과 연결됩니다. 즉, 우리는 이미 ‘공동의 삶 안에’ 있습니다. 다만 그것이 감각적으로 열려 있지 않을 뿐입니다.

 

이 점에서 보면, 우리에게 주어진 길은 ‘영적 체험을 얻는 것’이 아니라 ‘거듭남’을 통해 상태를 바꾸는 것입니다. 곧, 의지가 정화되고 이해가 밝아지면서, 점점 더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때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간다’는 것은, 세상일을 하면서도 그것에 매이지 않고, 감각을 사용하면서도 그것이 중심이 되지 않으며, 점점 더 ‘속 사람’이 ‘겉 사람’을 이끄는 상태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히려 여기서 중요한 역설이 하나 있습니다. 사람이 억지로 ‘영적 상태’에 들어가려고 하면 할수록, 그것은 참된 영적 상태에서 멀어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그 욕구 자체가 종종 ‘보고 싶다’, ‘특별해지고 싶다’는 자기중심적 사랑에서 나오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이런 감각적 개방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대신 더 안전하고 본질적인 길, 곧 ‘사랑과 신앙을 통한 내적 결합’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정리하면, AC.69의 상태는 ‘모든 사람이 들어가야 할 체험 상태’가 아니라, ‘죽은 뒤에는 누구나 들어가게 되는 실제 상태’이며, 동시에 스베덴보리에게는 특별히 미리 열렸던 상태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길은 그것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육체적인 것에 지배되지 않는 삶’, 곧 사랑과 진리 안에서 점점 자유로워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이미, 비록 보이지 않을 뿐, 영들과 더불어 참된 공동의 삶 안에 있는 것입니다.

 

 

 

AC.69, 창2, '사람은 본래 영들, 그리고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

AC.69 사람은 본래 주님에 의해 이렇게 창조되었습니다. 곧,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도 영들과, 그리고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실제로 태곳적에는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왜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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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9

 

사람은 본래 주님에 의해 이렇게 창조되었습니다. ,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도 영들과, 그리고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실제로 태곳적에는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몸을 입은 영이므로, 그들과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이 육체적인 것들과 세상적인 것들 속에 너무 깊이 잠기게 되어, 그 밖의 것에는 거의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게 되자, 그 길이 닫히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잠겨 있던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기만 하면, 그 길은 다시 열리며, 그는 영들 가운데 있게 되고, 그들과 더불어 어떤 공동의 삶 안에 있게 됩니다. Man was so created by the Lord as to be able while living in the body to speak with spirits and angels, as in fact was done in the most ancient times; for, being a spirit clothed with a body, he is one with them. But because in process of time men so immersed themselves in corporeal and worldly things as to care almost nothing for aught besides, the way was closed. Yet as soon as the corporeal things recede in which man is immersed, the way is again opened, and he is among spirits, and in a common life with them.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지금까지의 모든 오해의 가능성을 단번에 정리해 버립니다. 그는 ‘영들, 그리고 천사들과 말하는 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능력의 문제로 다루지 않습니다. 대신 그것을 ‘창조 질서의 문제’로 끌어올립니다. 즉, 이것은 어떤 특별한 인간에게만 주어진 예외적 능력이 아니라, ‘사람은 처음부터 그런 게 가능하도록 창조되었다’는 선언입니다. 이 한 문장만으로도, 영적 교통을 둘러싼 많은 종교적 상상과 오해는 자리를 잃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은 본질적으로 ‘몸을 입은 영’입니다. 이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는 인간을 ‘육체를 가진 존재’에서 출발하지 않고, ‘영적 존재가 육체를 입은 상태’로 정의합니다. 따라서 영들과 천사들과의 교통은 본질적으로 낯선 일이 아닙니다. 같은 종류의 생명이 다른 옷을 입고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인간과 영적 존재 사이의 단절은 본질이 아니라 ‘상태의 문제’입니다.

 

태곳적에는 실제로 그렇게 이루어졌다’는 말은, 스베덴보리의 인류사 이해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줍니다. 태고교회는 영계와 자연계를 오가는 특별한 집단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오간다’는 개념 자체가 필요 없었습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분리되지 않았고, 자연과 영적 실재가 동시에 인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영적 교통은 신비 체험이 아니라 ‘삶의 일상적 차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곧바로 전환합니다. 문제가 언제, 왜 발생했는지를 분명히 짚습니다. 사람들은 점차 ‘육체적인 것들과 세상적인 것들’ 속에 자신을 깊이 잠그게 되었고, 그 결과 다른 것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육체적인 것’ 자체가 악하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문제는 ‘그것들 속에 잠겨 버린 상태’입니다. 겉 사람이 속 사람을 압도하고, 외적 관심사가 내적 생명을 가려 버린 상태입니다.

 

이때 스베덴보리는 ‘길이 닫혔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매우 정확합니다. 길은 파괴된 것이 아니라 닫혔습니다. 즉, 인간의 본성에서 영적 교통의 가능성은 제거된 것이 아니라, ‘차단된 상태’로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만약 길이 파괴되었다면 회복은 불가능하지만, 닫혔다면 다시 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글의 후반부는 놀랍도록 희망적입니다. ‘사람이 그 안에 잠겨 있던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기만 하면’ 길은 다시 열린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어떤 특별한 의식이나 기술, 수행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단지 ‘잠김에서 벗어남’을 말합니다. 즉, 겉 사람의 지배가 약화되고, 속 사람이 다시 숨을 쉴 수 있는 상태가 되면, 인간은 자연스럽게 영들 가운데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영들 가운데 있게 되고, 그들과 더불어 어떤 공동의 삶 안에 있게 된다’는 마지막 문장은, 사후 세계를 전혀 다른 차원의 삶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미 이 땅에서 시작되고 있던 삶의 ‘연속’입니다. 사람은 죽음 이후에 갑자기 새로운 세계로 던져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자신이 속해 있던 공동의 삶의 차원이 분명해질 뿐입니다.

 

이 지점에서, 목사님이 앞서 던지신 질문, 곧 ‘스베덴보리는 평소 영계를 그렇게 오랜 시간 방문하면서 동시에 어떻게 이런 방대한 저술 작업을 병행할 수 있었는가’라는 질문이 다시 한번 명확해집니다. AC.69는 그 답을 ‘특별한 이중생활’이 아니라, ‘본래 인간에게 주어진 상태의 부분적 회복’에서 찾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육체의 삶을 중단한 것이 아니라, 육체적인 것들에 대한 잠김이 느슨해진 상태에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땅에서 글을 쓰며 살면서도, 동시에 영적 공동체 안에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계를 방문할 동안 육신은 마치 무슨 마취 상태에 있듯 꼼짝 못 한 채 누워있었다가 몸 안에 돌아오면 그때 깨어나 기억을 더듬어 가며 저술을 하는, 그런 방식이 아니라 두 가지를 동시에 하는 방식이었다는 말입니다.

 

결국 AC.69는 우리에게 아주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인간을 무엇으로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만약 인간을 철저히 육체적, 세속적 존재로만 이해한다면, 스베덴보리의 말은 처음부터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을 ‘몸을 입은 영’으로 이해한다면, 이 글은 기이한 선언이 아니라, 오히려 잃어버린 인간 이해의 회복처럼 들리기 시작합니다.

 

AC.67이 ‘말씀의 내적 의미는 다른 삶을 향한다’는 선언이었다면, AC.68은 ‘나는 그것을 경험했다’는 증언이었고, AC.69는 ‘그 경험은 인간 본성 자체에 근거한다’는 설명입니다. 이 세 단락이 함께 놓일 때, 스베덴보리는 더 이상 신비가가 아니라, ‘창조 질서를 다시 설명하는 증언자’로 서게 됩니다.  

 

 

심화

 

1.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게하려면

 

 

AC.69, 심화 1,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게’ 하려면

AC.69.심화 1.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게’ 하려면 본문 중 ‘사람이 잠겨 있던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기만 하면, 그 길은 다시 열리며, 그는 영들 가운데 있게 되고, 그들과 더불어 어떤 공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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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8, 창2, '이 책에 대한 사람들의 예상 반응'

AC.68 저는 많은 사람들이, 사람이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영들과, 그리고 천사들과 말할 수 없다고 할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 많은 이들은 이것이 모두 상상이라고 할 것이며,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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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CR(True Christian Religion) 소개, 그러니까 왜 이름을 이렇게 지었으며, 왜 세상 떠나기 전 이런 책을 썼고, 왜 주님은 이 책이 나오자 제자들을 불러 온 천국에 전하게 하셨는지, 그리고 이 책은 보니까 거의 조직신학같아 보이는데, 스베덴보리의 저작들을 처음 리딩하기 시작할 때, 이 책은 언제쯤 읽는 게 좋을지 등에 대한 자세한 해설을 부탁합니다.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TCRArcana Coelestia의 연장선 위에 있으면서도, 성격 자체는 전혀 다른 책입니다. AC가 ‘창세기, 출애굽기의 속뜻을 따라가며 인간의 거듭남 과정을 풀어낸 주석서’라면, TCR은 그 모든 내용을 한 번에 정리하여 ‘기독교 전체를 다시 세우는 종합 교리서’, 곧 일종의 ‘영적 조직신학’이라고 보시면 가장 정확합니다.

 

왜 이름이 ‘True Christian Religion’(참된 기독교)인가 하는 질문은 이 책의 존재 이유와 직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당시 교회가 이미 본래의 기독교에서 벗어나 있다고 보았습니다. 특히 ‘신앙만으로 의롭게 된다’는 식의 분리된 신앙 이해, 삼위일체의 오해, 삶과 단절된 교리 중심 신앙 등을 문제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처음 주님께서 세우신 기독교’, 곧 사랑(체어리티)과 신앙이 하나로 결합된 본래의 기독교를 다시 드러내기 위해 이 책을 썼습니다. 여기서 ‘True’라는 단어는 단순히 ‘정확한’이 아니라 ‘원래의, 회복된, 본질적인’이라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말하자면 ‘기독교의 리셋판’, ‘본래 상태로 복원된 기독교’라는 선언입니다.

 

왜 생애 말년에 이 책을 썼는가도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미 AC를 비롯한 수많은 저작에서 방대한 진리를 풀어놓았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대부분 ‘조각들’처럼 흩어져 있었습니다. TCR은 그 조각들을 하나로 모아, 하나님, 신앙, 체어리티, 회개, 거듭남, 성례, 성경, 교회, 종말 등 기독교의 핵심 주제들을 체계적으로 재구성한 ‘최종 정리’입니다. 그래서 TCR은 단순한 한 권의 책이 아니라, 그의 전 생애 사상의 ‘결론’이자 ‘봉인’에 해당합니다. 마치 오랜 시간 쌓아 온 내용을 마지막에 한 권으로 정리하는 것과 같습니다.

 

말씀하신 ‘주님께서 이 책이 나오자 제자들을 불러 온 천국에 전하게 하셨다’는 대목은, 이 책이 단순한 신학서가 아니라 ‘새 시대의 선언문’이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이 책의 출간은 단순한 출판 사건이 아니라 영적 세계에서의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곧 ‘새 교회(New Church)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고, 천국과 교회 모두에 새로운 진리가 선포되는 계기였습니다. 그래서 ‘천사적 차원에서도 이 책의 내용이 전파되었다’는 표현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이는 과장된 상징이 아니라, 그만큼 이 책의 위상을 강조하는 신학적 진술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이 책은 매우 ‘조직신학적’입니다. 실제로 구성도 그렇습니다. 하나님론, 구원론, 신앙과 체어리티, 회개, 거듭남, 성례, 성경, 교회 등 전통적인 조직신학의 구조를 그대로 따르면서, 그 안의 내용을 완전히 새롭게 재해석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차이는, 일반 조직신학이 ‘논리’ 중심이라면, TCR은 ‘영적 경험과 계시 + 상응적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읽다 보면 단순한 교리 설명을 넘어, 인간의 실제 변화 과정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책은 언제 읽는 것이 좋은가 하는 질문이 매우 현실적이고 중요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너무 처음에는 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너무 늦게도 아닙니다.’입니다. 처음부터 이 책을 읽으면 개념이 너무 압축되어 있고 전제가 많아 이해가 쉽지 않습니다. 최소한 Heaven and Hell이나 초기 저작들, 그리고 AC의 일부를 통해 ‘속뜻’, ‘상응’, ‘거듭남’ 같은 기본 개념이 어느 정도 형성된 후에 읽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너무 뒤로 미루면, 전체 그림 없이 부분만 계속 파고들게 됩니다. 그래서 가장 좋은 시점은 ‘기본 개념이 잡히고, 이제 전체 구조가 궁금해질 때’입니다. 그때 TCR을 읽으면, 그동안 흩어져 있던 내용들이 한 번에 정리되면서 ‘, 이게 다 하나였구나’ 하는 깨달음이 옵니다.

 

정리하자면, TCR은 스베덴보리 사상의 ‘정수이자 종합’이며, 동시에 ‘새 교회의 헌장’과 같은 책입니다. AC가 ‘여정’이라면, TCR은 ‘지도’입니다. AC가 ‘과정의 기록’이라면, TCR은 ‘완성된 구조도’입니다. 그래서 두 책은 경쟁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완성시키는 관계에 있습니다. 처음에는 AC를 통해 눈을 열고, 그다음 TCR을 통해 전체를 붙잡는 것, 이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효과적인 읽기의 순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SC.56, ‘궤를 붙들다가 그 자리에서 죽은 웃사’(삼하6:7)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삼하6:7) 이 구절은 성경 전체를 통틀어도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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