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 여기 1강, 2강...은 실제 사경회 일정표가 아닌,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 순서를 말합니다.
4강 1부
‘죄론’의 문을 열다 : 죄를 행위가 아니라 ‘삶을 움직이는 사랑’으로 보기
4강은 앞선 강의들과 연결되면서도 분위기가 조금 달라집니다. 앞에서는 교회시대의 이기는 자, 광야의 연단, 영계의 구조와 사후의 상태 등을 비교적 큰 틀에서 살펴보았다면, 이제 강사는 그 모든 문제를 한 사람의 실제 내면으로 끌고 들어옵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을 정결하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강사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죄론’을 시작합니다. 죄론을 공부하는 목적도 명확하게 밝힙니다. ‘죄성과 정욕의 지배를 받게 될 때 나타나는 어두운 마음과 몸의 행실과 생활’을 세밀하게 분별하고, ‘선과 악, 빛과 어둠, 영성과 육성, 영적 행실과 육적 행실’을 구별함으로써 철저한 자기 성찰과 회개생활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이 출발점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아도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에게도 거듭남은 막연하게 ‘좋은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점점 더 구체적으로 보고 그것을 죄로 인정하여 주님 앞에서 물리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강사는 여기서 죄론을 ‘기본 진리’ 가운데 하나의 독립된 과목 정도로 놓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른 과목들을 꿰는 중심축으로 이해합니다. ‘입문’에서 말하는 휴거 성도의 자격도 죄 문제와 관계되고, ‘교회시대 이기는 자’도 죄 문제가 해결되어 하나님의 생명이 ‘내주합일’된 성도이며, ‘영계론’에서도 사후 심판과 천국·지옥의 문제가 결국 죄와 연결되고, ‘속죄복음’은 하나님께서 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셨는지를 다루며, ‘성화된 성도들의 생애’는 죄 문제를 해결한 성도들의 삶이고, ‘성장론’ 역시 죄와 싸우며 성장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합니다. 앞서 목사님께서 보여 주신 ‘핵심진리’의 목차와 여러 권의 책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가 여기서 아주 잘 드러납니다. ‘핵심진리’는 여러 교리를 병렬적으로 모아 놓은 책이라기보다, ‘인간이 어떻게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 변화되는가?’라는 하나의 문제를 여러 방향에서 바라보는 체계에 가깝습니다.
이러한 출발점에는 상당한 힘이 있습니다. 오늘날 죄를 말할 때 우리는 흔히 몇 가지 외적인 행위를 먼저 떠올립니다. 거짓말, 음란, 탐욕, 미움, 폭력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강사는 처음부터 훨씬 깊은 곳을 보려고 합니다. 겉으로 드러난 범죄를 고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그것을 낳는 ‘죄성’과 ‘정욕’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4강은 단순한 윤리 강의가 아니라 일종의 ‘내면 해부’로 들어갑니다. 사람이 무엇을 했는지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행동을 하게 만든 내 안의 무엇이 있는가?’를 묻기 시작합니다.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깊은 접점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악은 단순히 밖으로 나타난 행위가 아닙니다. 행위 이전에 의지가 있고, 의지 안에는 사랑이 있으며, 그 사랑에서 생각과 의도가 흘러나옵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아주 경건하고 선한 행동을 하면서도 그 행위의 목적이 자기 영광, 자기 명예, 자기 이익이라면 그 행위의 내적 성질은 외관과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반대로 겉으로 보기에는 작고 보잘것없는 행동이라도 주님과 이웃을 향한 선한 애정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 안에는 천국적인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인간은 외관을 보지만 주님은 그 행위를 낳은 의지와 목적을 보십니다.
이번 강의에는 이것을 매우 생생하게 보여 주는 대목이 나옵니다. 강사는 자기 자신을 예로 들면서 지금 자신이 사람들 앞에서 말씀을 증거하고 있지만, 마음속에 ‘여러분들에게 인정받고 싶고 여러분들에게 칭찬받고 싶은’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것이 바로 타락한 인간의 실상이라고 말합니다. 강단도 자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인데 거기서 ‘자기 자랑’이 나오기 시작하면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깊은 뿌리를 ‘타락한 정욕’에서 찾습니다. 저는 이 대목이 이번 4강 전체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정욕’이라는 말은 이미 성적 욕망이라는 일상적인 의미를 훨씬 넘어섰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다’, ‘칭찬받고 싶다’, ‘내가 한 일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까지 정욕의 영역으로 들어갑니다. 그렇다면 이번 강의에서 말하는 정욕은 단순히 육체의 몇 가지 본능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자신을 만족시키고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삼으려는 광범위한 애정과 욕망을 가리키는 말이 됩니다.
바로 여기서 AC를 읽어 온 우리에게는 ‘proprium’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둘을 곧바로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proprium은 ‘욕심이 많다’ 정도보다 훨씬 깊습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서 생각하고 자기 자신에게서 선을 행한다고 여기는 그 ‘자기 것’, 그리고 자기 자신을 중심에 놓으려는 타락한 의지 전체와 관계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음식과 성욕과 재물욕을 상당히 절제하고도 proprium에 깊이 빠져 있을 수 있습니다. ‘나는 저 사람들과 달리 정결하다’, ‘나는 영적인 사람이다’, ‘나는 진리를 제대로 알고 있다’는 마음이 생긴다면 오히려 훨씬 알아보기 어려운 proprium이 등장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강사가 강단 위의 자기 자신에게까지 칼날을 돌리는 것은 귀하게 볼 부분입니다. 죄론을 남에게 적용하기 시작하면 금세 위험해집니다. ‘저 사람은 탐욕스럽다’, ‘저 목사는 명예욕이 많다’, ‘저 성도는 육적이다’ 하면서 죄론이 타인을 분류하고 판단하는 도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강사는 ‘지금 말씀을 전하고 있는 나에게도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그것을 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죄론의 칼날이 먼저 자기 자신을 향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회개의 기본 질서와도 잘 맞습니다. 회개는 타인의 악을 발견하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의 악을 살피는 데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강의에는 이 문제를 아주 일상적인 자리까지 끌어내리는 재미있는 경험담도 등장합니다. 강사가 평신도 시절 주일학교 교사로 섬기면서 아이들에게 ‘무엇을 먹든지 무엇을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한 주간 살아 보자고 했다고 합니다. 자신도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늦은 점심을 먹으면서 물 한 모금을 마셔도 ‘하나님께 영광’, 밥 한 숟가락을 먹어도 ‘하나님께 영광’ 하며 감사했는데, 밥을 거의 다 먹었을 무렵 그릇 밑에서 죽은 바퀴벌레를 발견합니다. 그 순간 조금 전까지 평안하게 하나님께 감사하던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일화가 다소 우스워 보이지만 강사가 하려는 이야기는 상당히 진지합니다. ‘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먹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환경 하나가 바뀌자 내면의 상태가 즉시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즉 신앙은 평온한 상황에서 내가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만으로는 충분히 드러나지 않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찾아왔을 때 내 안에서 무엇이 튀어나오는지를 보면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내면이 드러납니다.
스베덴보리의 시험 이해에서도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시험은 인간에게 없던 악을 새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사람 안에 잠재해 있던 것을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평상시에는 자기 자신도 모릅니다. 자신이 인내심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겸손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주님을 신뢰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기 뜻과 반대되는 일이 생기고, 인정받지 못하고, 손해를 보고, 자존심이 상하고, 원하는 것이 좌절될 때 무엇이 올라오는지를 보면 그동안 감추어져 있던 사랑의 상태가 드러납니다. 그래서 시험은 고통스럽지만 거듭남에서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드러나지 않은 악은 싸울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이번 강의의 ‘죄론’이 단순한 죄 목록 공부가 아니라는 것이 다시 분명해집니다. 강사가 원하는 것은 ‘이것은 죄, 이것은 죄 아님’이라는 체크리스트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빛 가운데 사는 행실과 어둠 속에 사는 행실을 세밀하게 분별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마음의 움직임을 분별하는 눈을 갖자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이것을 왜 하고 있는가, 내가 이것을 얻었을 때 왜 기쁜가, 이것을 빼앗겼을 때 왜 이렇게 화가 나는가, 사람에게 인정받지 못했을 때 왜 마음이 무너지는가를 살피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죄론은 추상적인 조직신학이 아니라 영성생활의 실제가 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보완이 필요합니다. 자기 안을 깊이 들여다본다고 해서 그것 자체가 거듭남은 아닙니다. 오히려 지나친 자기 관찰은 사람이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게만 시선을 두게 할 수도 있습니다. 핵심은 ‘내 안에 이런 악이 있구나’를 발견한 다음 그것을 주님 앞에서 죄로 인정하고, 실제 삶에서 그 악을 행하지 않기 위해 싸우며,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싸움의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죄와 싸우는 일조차 proprium의 새로운 자랑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나는 이것까지 끊었다’, ‘나는 저 사람보다 정결하다’, ‘나는 이 정도로 연단받았다’는 또 하나의 자기 의가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회개의 방향은 자기혐오가 아니라 주님을 향합니다. 인간은 자기 안의 악을 보지만 악만 바라보고 앉아 있지 않습니다. 악에서 얼굴을 돌려 주님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며 그것을 삶으로 행합니다. 악을 제거하는 이유도 ‘아무 욕망도 없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이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빈집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주님이 거하실 집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4강 첫머리에 흐르는 ‘정결’이라는 주제를 조금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정결은 인간성의 삭제가 아닙니다. 인간의 감정과 애정과 기쁨을 하나씩 없애어 무감각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난 사람은 오히려 더욱 풍성하게 사랑하고 더욱 깊게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다만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에서 기쁨을 얻는지가 달라집니다. 자기만을 위한 기쁨에서 이웃의 선을 기뻐하는 쪽으로, 소유하는 기쁨에서 유용하게 쓰는 기쁨으로, 인정받는 기쁨에서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기뻐하는 쪽으로 사랑의 중심이 이동합니다.
그러므로 이번 4강의 첫 질문인 ‘무엇을 정결하게 해야 하는가?’에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답한다면, 단순히 ‘욕망을 제거해야 한다’고 하기보다 ‘우리 사랑의 질서가 정결해져야 한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하겠습니다. 무엇을 사랑하는가, 왜 사랑하는가, 무엇을 가장 사랑하는가, 그리고 그 사랑 아래 다른 모든 사랑들이 어떤 질서로 놓여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결국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것도 이 가장 깊은 사랑입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4강은 이제 본격적인 핵심으로 들어갑니다. 강사는 ‘죄성’과 ‘정욕’을 구별하기 시작하고, 정욕 자체는 본래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기능인데 타락하면서 자기 만족을 위한 것으로 변질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 정욕을 혈육간의 애정, 남녀간의 애정, 친구간의 애정, 사물에 대한 애정과 여러 욕망으로 세분하기 시작합니다. 이 부분부터는 ‘핵심진리’의 인간론과 스베덴보리의 ‘사랑의 질서’가 상당히 가까이 접근하면서도 동시에 중요한 차이를 보이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그것은 4강 2부에서 별도의 주제로 충분히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4강 1부의 중심을 한 문장으로 모으면 이렇습니다. ‘죄를 알려면 먼저 행동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 행동을 낳고 있는 내 안의 사랑과 목적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에 한 문장을 더 보탭니다. ‘그 사랑을 발견하는 목적은 자신을 정죄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사랑의 질서를 주님께서 바로잡으실 수 있도록 자유 가운데 악을 죄로 알고 물리치는 데 있습니다.’ 바로 이 자리에서 공용복 선생의 ‘죄론’과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은 상당히 깊은 대화를 시작합니다.
4강 2부
‘정욕’은 처음부터 악한 것이 아니다 : 창조된 애정과 타락한 욕망, 그리고 사랑의 질서
4강 1부에서 강사는 죄를 단순히 겉으로 드러난 행동에서 찾지 않고, 그 행동을 낳는 인간의 내면으로 들어갔습니다. 이제 2부에서는 그 내면을 움직이는 ‘정욕’이 무엇인가를 본격적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먼저 주의해야 할 것은 이 강의가 사용하는 ‘정욕’이라는 말의 범위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정욕’이라고 하면 성적인 욕망을 먼저 떠올리지만, 이 강의에서의 정욕은 훨씬 넓습니다. 강사는 그것을 크게 ‘애정’과 ‘욕망’으로 나누고, 애정에는 혈육간의 애정, 남녀간의 애정, 친구간의 애정, 사물에 대한 애정 등이 있으며, 욕망에는 식욕, 성욕, 물욕, 명예욕, 수면욕 등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정욕’은 인간의 자연적 삶을 움직이는 광범위한 애정과 욕구를 가리키는 하나의 포괄적인 용어입니다.
그런데 이 강의에서 매우 중요한 구별 하나가 등장합니다. 강사는 ‘정욕 자체가 처음부터 죄악된 것은 아니다’라고 봅니다. 인간에게 애정이 있고 음식에 대한 욕구가 있고, 이성에게 끌리는 마음이 있고, 무엇인가를 소유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곧 죄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육체적 생명을 유지하고 인간관계를 이루며 자연계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주신 기능입니다. 문제는 타락 이후 이 기능들이 본래의 질서를 잃고 ‘자기를 만족시키는 방향’으로 변질되었다는 데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 구별은 이번 4강 전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을 놓치면 ‘핵심진리’의 죄론을 모든 자연적 욕구를 악하게 보는 금욕주의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 대목에서 강사가 말하는 것은 ‘배고픔이 죄다’, ‘남녀간의 애정이 죄다’, ‘부모와 자녀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죄다’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주신 정상적인 기능이 타락을 통하여 방향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강의가 문제 삼는 것은 욕구의 ‘존재’보다 욕구의 ‘지배’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야 할 인간의 중심이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서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기능들이 이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나’를 만족시키는 도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자연적인 애정과 욕구 자체를 악으로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 쉬는 것, 가족을 사랑하는 것, 직업을 갖고 일하는 것, 재산을 소유하는 것, 사회에서 인정받는 것 자체가 악은 아닙니다. 자연계에서 살아가는 인간에게 이런 것들은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어떤 ‘질서’ 안에 놓여 있는가입니다. 낮은 사랑이 높은 사랑을 섬기면 선한 질서 안에 있지만, 낮은 사랑이 높은 사랑 위로 올라가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면 질서가 전도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자주 말하는 ‘목적-원인-결과’의 질서를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가장 안쪽에는 사람이 무엇을 궁극적으로 사랑하는가라는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생각과 판단이 ‘원인’이 되며, 그것이 실제 행동이라는 ‘결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똑같이 돈을 버는 사람이라도 돈을 버는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가에 따라 그 행위의 영적 성질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가족을 돌보고 맡겨진 일을 충실히 수행하며 다른 사람에게 유용한 사람이 되기 위해 재산을 얻는 것과, 재산 자체를 최고의 선으로 여기고 그것을 통해 다른 사람 위에 서려는 것은 외적으로는 모두 ‘돈을 버는 행위’이지만 내적으로는 전혀 다릅니다.
명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적 명예나 지위를 갖는 것 자체가 악은 아닙니다. 그 지위를 통하여 더 큰 유용성을 수행하고 공동체를 섬기기 원한다면 명예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용성은 핑계가 되고 ‘내가 높아지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는 순간 질서가 뒤집힙니다. 그때 사람은 일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통해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사람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존경을 이용하여 자기 proprium을 만족시키게 됩니다. 1부에서 강사가 자기 자신에게 적용했던 ‘말씀을 전하면서도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칭찬받고 싶은 마음’이 바로 여기에 해당합니다.
그러므로 ‘핵심진리’가 말하는 ‘타락한 정욕’과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질서가 전도된 사랑’ 사이에는 상당히 중요한 접점이 있습니다. 둘 다 인간에게 주어진 자연적 기능 자체를 없애야 한다고 하지 않고, 그것이 자기중심적으로 변질된 상태를 문제 삼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보다 정교하게 ‘사랑들의 질서’라는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인간에게는 여러 사랑이 있으며, 그 사랑들은 서로 위아래의 질서를 이루어야 합니다. 가장 높은 곳에는 주님 사랑이 있어야 하고, 그 아래에는 이웃 사랑이 있으며, 그 아래에서 세상과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 봉사해야 합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도 그 자체로 완전히 제거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높은 사랑을 섬기는 위치에 있을 때에는 유용한 기능을 합니다.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합니다. ‘자기 사랑’을 무조건 자기 자신을 조금이라도 돌보거나 좋아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신앙은 병적인 자기부정으로 흘러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몸을 돌보고, 건강을 지키고, 필요한 것을 얻고, 자신의 직업과 재능을 발전시키는 것은 그 자체로 자기 사랑의 악이 아닙니다. 그것들이 주님과 이웃을 섬기기 위한 질서 안에 있다면 오히려 필요합니다. 문제는 ‘나’가 궁극적인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사람과 심지어 하나님까지도 자기 행복과 자기 영광을 위한 수단으로 만들 때 자기 사랑은 지옥적인 사랑으로 전도됩니다.
바로 여기서 ‘핵심진리’가 정욕을 설명하면서 사용하는 ‘자기 만족’이라는 표현을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만족이 악한 것은 아닙니다. 선을 행하고 기뻐하는 만족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을 돕고 기뻐하는 만족도 있으며, 맡은 일을 잘 수행하고 느끼는 만족도 있습니다. 천국의 천사들에게도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에 의하면 천국의 기쁨은 자연계의 기쁨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깊습니다. 따라서 문제는 ‘만족을 느끼느냐’가 아니라 ‘무엇에서 만족을 느끼느냐’입니다. 이 차이는 작아 보이지만 영적으로는 결정적입니다.
가령 누군가 어려운 사람을 도왔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회복되는 것을 보며 기뻐합니다. 그 기쁨 자체는 악한 자기 만족이 아닙니다. 체어리티에는 선을 행하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내가 이런 일을 했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중심이 되고, 칭찬을 받지 못하면 섭섭하고, 다른 사람이 더 인정받으면 불편해진다면 그때 숨어 있던 다른 사랑이 드러납니다. 겉으로는 동일한 선행이지만 내적으로는 두 사랑이 서로 섞여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 거듭남의 과정에서는 이 두 가지가 아주 깔끔하게 분리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처음부터 순수한 주님 사랑과 체어리티만으로 선을 행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우리는 선을 행하면서도 인정받고 싶고, 봉사하면서도 감사받고 싶으며, 주님의 일을 하면서도 자기 뜻대로 되기를 바랍니다. 거듭남은 이런 혼합된 동기 속에서 시작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가진 작은 선한 의도를 붙드시고, 시간이 흐르면서 그 안에 섞여 있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조금씩 드러내어 정결하게 하십니다.
따라서 ‘내 동기가 100퍼센트 순수하지 않으니 나는 위선자다’라고 생각하는 것도 바른 결론은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안의 혼합된 동기를 발견하는 것이 거듭남의 일부입니다. 어제까지는 ‘나는 주님만을 위해 봉사한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누군가 나를 인정하지 않자 화가 납니다. 그 순간 주님께서 새로운 것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은 맞지만, 그 사랑 안에 아직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도 섞여 있구나.’ 이것을 보고 낙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서 인정하고 그 악을 물리치면서 선한 동기가 점점 더 자유롭게 움직이도록 하는 것이 거듭남입니다.
이 점에서 ‘핵심진리’의 강한 자기 성찰은 매우 유익하면서도 동시에 조심해서 사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끝없이 파헤쳐 ‘이것도 정욕, 저것도 정욕, 이것도 자기 만족’이라고만 하면 결국 사람은 자기 안에서 선한 것을 하나도 발견하지 못하고 끊임없는 자기 정죄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자기 성찰의 목적은 자기 자신에게 절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서 선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주님에게로 돌이키게 하는 데 있습니다. 내가 내 힘으로 선해질 수 없음을 알게 될수록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실제 삶에서 배우게 됩니다.
이것은 proprium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인간의 proprium을 매우 부정적으로 말하기 때문에 처음 읽는 독자는 ‘그렇다면 인간에게 자기라는 것은 없어져야 하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인격을 없애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인간이 주님에게서 선과 진리를 받아 자유롭게 자기 것처럼 행하게 하십니다. 스베덴보리가 때때로 말하는 ‘천적 proprium’, 곧 주님에게서 받은 새로운 own의 신비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이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마치 자기 것처럼 자유롭게 사랑하고 행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주님에게서 온 것임을 아는 상태입니다. 거듭남은 ‘나’가 사라지는 과정이 아니라, 거짓된 ‘나’에서 참된 ‘나’로 변화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강의에서 ‘정욕을 죽인다’는 표현도 이러한 관점에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자연적 애정 자체를 죽인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을 죽이고, 부부간의 애정을 죽이고, 음식의 맛을 느끼는 기쁨을 없애고, 일을 성취하는 만족을 제거하는 것이 거듭남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애정들이 하나님보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어야 하는 것은 애정 그 자체라기보다 그 애정을 지배하고 있는 자기중심적 질서입니다.
강사는 이것을 ‘우상’이라는 강한 표현으로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계셔야 할 자리에 다른 것이 올라가면 그것이 우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설명은 성경적으로도 매우 직관적입니다. 우상은 반드시 나무나 돌로 만든 신상일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에서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더 의지하고, 그것을 잃으면 자기 존재 전체가 무너질 것처럼 느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실제로 마음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것을 ‘지배적 사랑’이라는 개념으로 더욱 깊이 볼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수많은 애정이 있지만 그 모든 애정을 조직하고 방향을 결정하는 중심 사랑이 있습니다. 이것이 지배적 사랑입니다. 사람이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가장 깊은 목적으로 삼으면 다른 자연적 사랑들이 그 아래에서 질서를 찾습니다. 반대로 자기 자신과 세상을 가장 높은 목적으로 삼으면 종교적 행위조차 그 사랑을 섬길 수 있습니다. 기도도 하고, 성경도 읽고, 설교도 하고, 헌금도 하면서 그 모든 것을 자기 명예와 자기 의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가?’만이 아닙니다. 더 깊은 질문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은 무엇인가?’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알아보는 한 방법은 ‘무엇을 잃을 때 내가 가장 크게 흔들리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돈을 잃을 때인가, 명예를 잃을 때인가, 사람의 인정을 잃을 때인가, 내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인가, 가족에 대한 내 뜻이 좌절될 때인가. 이런 순간에 평소 감추어져 있던 지배적 사랑의 일부가 모습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강사가 정욕의 첫 번째 형태로 ‘혈육간의 애정’을 다루기 시작하는 것도 이런 맥락입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의 사랑은 하나님께서 주신 매우 깊고 자연스러운 사랑입니다. 그러나 강사는 마태복음 10장 37절, 곧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다’는 말씀을 가져와, 가족 사랑조차 하나님보다 앞설 수 없다고 강조합니다. 여기서 강의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가족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우선순위입니다.
이 점에서도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상당 부분 동의하면서 한 가지를 더 보탭니다. 혈육간의 사랑은 자연적 사랑이지만, 거듭나면서 그것이 영적 사랑으로 높아질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단지 ‘내 자녀니까’, ‘내 부모니까’, ‘내 가족이니까’ 사랑합니다. 이것은 자연적 혈연애입니다. 그러나 거듭나면서 ‘이 사람이 주님께 속한 한 영혼이기 때문에’, ‘그 사람의 영원한 선을 원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더해집니다. 그러면 혈연을 넘어서는 체어리티가 그 자연적 사랑 안으로 들어옵니다.
이 차이는 실제 삶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자녀를 사랑한다면서 자녀의 잘못을 무조건 감싸는 것은 영적 사랑이 아닐 수 있습니다. 가족을 위해서라며 다른 사람에게 불의를 행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선악의 기준을 바꾼다면 혈육간의 애정이 높은 사랑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높은 사랑의 자리를 빼앗은 것입니다. 반대로 자녀의 영원한 선을 위해 때로는 바로잡아 주고, 부모를 사랑하지만 하나님의 진리와 양심에 어긋나는 요구에는 따르지 않는다면 자연적 사랑이 영적 질서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부모나 자녀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은 인간적인 사랑을 파괴하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사랑을 더욱 참된 사랑으로 만들라는 말씀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주님보다 자녀를 더 사랑하면 결국 자녀를 ‘나의 것’으로 사랑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자녀를 사랑하면 자녀를 주님의 사람으로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소유하려는 사랑에서 그의 영원한 선을 바라는 사랑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의 특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거듭남은 인간의 애정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애정의 ‘질’을 변화시킵니다.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것을 받아들이고, 영적인 것이 천적인 것을 받아들이면서 같은 행동 안에도 전혀 다른 생명이 들어오게 됩니다. 그래서 거듭난 뒤에도 사람은 가족을 사랑하고, 친구를 사랑하고, 일을 사랑하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기고, 음식도 즐깁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더 이상 삶의 최종 목적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더 높은 사랑을 섬기는 질서 안에 들어갑니다.
여기에서 이번 4강의 ‘정욕’이라는 용어를 독자는 특별히 조심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강의가 사용하는 넓은 의미의 ‘정욕’을 오늘날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음란한 욕망’과 동일시하면 강의 전체가 크게 왜곡됩니다. 이 강의에서 정욕은 인간의 자연적 애정과 욕망이라는 넓은 영역을 가리키며, 핵심 문제는 그것이 타락하여 ‘자기 만족’과 결합하고 하나님보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앞으로 나오는 식욕, 성욕, 물욕, 명예욕 등의 설명 역시 ‘이 욕구가 존재하는 것이 죄인가?’보다 ‘이 욕구가 누구를 섬기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핵심진리’와 스베덴보리 사이의 작은 차이도 점점 보이기 시작합니다. ‘핵심진리’는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고’, ‘끊고’, ‘죽이는’ 언어를 강하게 사용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악한 사랑을 물리치는 싸움을 분명히 말하면서도 전체 구조를 ‘질서의 회복’으로 설명하는 데 훨씬 강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두 설명을 함께 놓으면 서로를 보완하여 읽을 수 있습니다. ‘핵심진리’의 언어는 악과 실제로 싸워야 한다는 긴장을 일깨우고, 스베덴보리의 설명은 그 싸움의 목적이 인간의 자연성을 파괴하는 데 있지 않고 주님 아래 바른 질서로 되돌리는 데 있음을 보여 줍니다.
결국 4강 2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욕이 있다’는 사실보다 ‘정욕이 어디에 자리하고 있는가’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애정과 욕구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섬기는 종의 자리에 있으면 그것은 자연적 삶을 풍성하게 하는 기능이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인의 자리로 올라가면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을 자기에게로 끌어당깁니다. 바로 그때 자연적인 것이 육적인 것으로 전도되고, 선물로 주어진 것이 우상이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번 부분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렇습니다. ‘거듭남은 사랑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질서를 바로잡는 것입니다.’ 인간에게서 애정과 욕망이 사라지는 것이 천국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에게서 흘러오는 사랑이 가장 깊은 중심을 차지하고, 그 사랑 아래 이웃 사랑과 자연적 애정들이 아름다운 질서를 이루는 것이 천국의 질서입니다. 그리고 그 질서가 지금 이 땅에서부터 사람의 내면에 형성되기 시작하는 것이 거듭남입니다.
이제 강의는 여기서 한층 더 구체적으로 들어갑니다. 혈육간의 애정을 비롯한 여러 정욕이 실제 생활에서 어떻게 하나님보다 앞자리를 차지하는지, 그리고 주님께서 광야에서 받으신 시험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라는 말씀을 통하여 식욕과 인간의 육적 요구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동시에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는 강한 표현이 본격적으로 등장합니다. 이 지점부터는 ‘절제’와 ‘억압’, ‘시험’과 ‘거듭남’을 구별하는 일이 중요해집니다. 그것을 4강 3부에서 충분히 살펴보겠습니다.
4강 3부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는 것 : 억압이 아니라 주님 아래로 돌아오는 것
4강은 ‘정욕’을 인간에게 처음부터 악하게 주어진 어떤 것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애정과 욕망이 타락 이후 자기중심적으로 변질된 것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강의는 자연스럽게 매우 실천적인 질문으로 넘어갑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타락한 정욕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입니다. 여기서 강사가 반복하여 사용하는 표현이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 ‘끊는다’, ‘죽인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의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는 말씀이 그 배경에 있습니다. 이 표현은 강렬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그 의미를 조금 세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인간에게 있는 모든 욕구와 애정을 없애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거듭남은 곧 자기 억압이나 금욕생활이 되어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강의가 실제로 겨냥하는 것은 단순히 ‘무엇을 좋아하는 마음’ 자체가 아닙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식욕도 있고, 성욕도 있고, 가족에 대한 애정도 있으며, 친구와 사물에 대한 애정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인간이 자연계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능입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하나님의 질서를 벗어나 사람을 지배하기 시작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는 말을 이 강의 자체의 앞뒤 맥락에서 읽어도, 인간의 자연성을 파괴한다는 뜻보다는 하나님보다 앞선 자리를 차지한 욕망의 지배를 끝낸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와 상당히 깊은 곳에서 만납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악은 생각으로 ‘악이구나’ 하고 아는 것만으로 제거되지 않습니다. 실제 생활에서 악을 죄로 알고 피해야 합니다. 그것도 단지 사회적 평판이 나빠질까 봐, 처벌받을까 봐, 건강을 해칠까 봐 피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주님을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에’ 피해야 합니다. 바로 그때 종교적인 의미에서의 회개가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는 강의의 강한 언어에는 단순히 악을 이해하는 데 머물지 말고 실제로 싸우라는 중요한 요청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 반드시 구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악을 행하지 않는 것’과 ‘악한 애정 자체가 사라진 것’은 같지 않습니다. 사람이 어떤 욕망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다고 해서 그 욕망의 뿌리까지 이미 제거되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처음에는 악을 하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올라오는데도 말씀 때문에 하지 않는 단계가 있을 수 있습니다. 바로 이때 사람 안에서는 실제 전투가 일어납니다. 한쪽에서는 오래된 proprium의 애정이 끌어당기고, 다른 쪽에서는 주님에게서 받은 진리가 ‘그것은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적 시험은 바로 이런 내적 충돌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의 초기에는 ‘억제’가 어느 정도 필요합니다. 화가 난다고 즉시 화를 쏟아내지 않고, 욕심이 생긴다고 그대로 따라가지 않으며, 음란한 욕망이 일어난다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올라온다고 그것을 만족시키기 위해 사람을 조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최종 목적이 아닙니다. 계속 이를 악물고 평생 욕망을 눌러 놓는 상태가 천국적인 상태는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더 깊은 일을 하십니다. 인간이 악을 반복해서 죄로 알고 물리칠 때, 시간이 흐르면서 그 악에 대한 애정 자체가 약해지고 반대로 선을 사랑하는 새로운 애정이 강해지도록 하십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면 ‘십자가에 못 박는다’는 말이 훨씬 깊어집니다. 처음에는 ‘하고 싶지만 하지 않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예전에는 하고 싶었던 것을 이제는 원하지 않는 것’으로 변화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선을 행하는 것이 기쁜 것’으로 바뀝니다. 이것이 단순한 행동 교정과 거듭남의 차이입니다. 행동만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강사는 이 문제를 주님의 광야 시험과 연결합니다. 주님께서 사십 일을 금식하신 뒤 주리셨을 때 시험하는 자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했고, 주님께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응답하셨습니다. 강의에서는 이것을 식욕이라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가 하나님보다 앞설 수 없다는 예로 읽습니다. 육체는 떡을 요구하지만 인간의 생명은 떡보다 더 높은 곳, 곧 하나님에게서 온다는 것입니다.
이 적용에는 분명한 실천적 의미가 있습니다. 배고픔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주님께서도 ‘주리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러므로 육체적 필요가 존재한다는 것과 그 필요에 지배당하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음식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지만, 음식이 삶의 중심이 될 수 있습니다. 성욕은 결혼과 인류의 지속에 관계된 자연적 기능이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을 자기 만족의 대상으로 만드는 방향으로 전도될 수 있습니다. 휴식은 몸과 마음의 회복을 위해 필요하지만, 쉼 자체가 삶의 목적이 되어 맡겨진 유용성을 외면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재물 역시 생활과 유용성을 위해 필요하지만, 소유 그 자체가 최고의 기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다시 ‘욕구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그 욕구가 어떤 질서 아래 있느냐’입니다.
다만 주님의 광야 시험을 ‘식욕을 절제하신 사건’ 정도로만 이해한다면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복음서에 기록된 주님의 시험들은 한 인간이 자신의 육체적 욕망을 절제한 사건보다 훨씬 깊습니다. 주님께서는 모계로부터 취하신 유전적 인간성을 통하여 지옥들과 싸우셨고, 계속되는 시험과 승리를 통해 그 인간성을 신성하게 하시는 영화의 과정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광야의 시험 역시 지옥 전체와의 신적 전투라는 깊은 차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시험에도 말씀의 속뜻에서는 훨씬 깊은 아르카나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강의의 실천적 적용이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층위를 구별하면 됩니다. 문자적 차원에서는 ‘육체의 요구가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선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의 속뜻에서는 인류의 구원을 위한 신적 전투와 영화라는 훨씬 깊은 실재가 있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전자의 적용을 폐기하기보다 후자의 깊이를 더해 줍니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한 가지 매우 중요한 문제가 생깁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정욕을 ‘죽일’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어느 정도 가능합니다. 강한 의지력을 가진 사람은 금식할 수도 있고, 술을 끊을 수도 있으며, 성적 욕구를 억제할 수도 있고, 돈과 명예를 포기하고 매우 검소하게 살 수도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뿐 아니라 다른 종교의 수행자들도 상당한 수준의 금욕을 이루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 자체가 거듭남의 증거일까요?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매우 신중합니다. 외적인 절제만으로는 사람의 내적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세상을 버린 것처럼 보이면서도 ‘나는 세상을 버린 사람’이라는 자기 의를 사랑할 수 있고, 명예를 포기하면서도 ‘나는 명예를 초월한 영적인 사람’이라는 더 은밀한 명예욕에 빠질 수 있습니다. 심지어 겸손 자체를 자랑할 수도 있습니다. 자연적 욕망 하나를 억제했는데 그 에너지가 더 깊은 proprium으로 옮겨 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악과 싸우는 방식은 매우 독특한 긴장을 갖습니다. 사람은 악과 싸울 때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싸워야 합니다. 가만히 있으면서 ‘주님께서 알아서 제거하시겠지’ 해서는 안 됩니다. 실제로 결단하고, 피하고, 거절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싸움의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자유와 인플럭스가 함께 작용하는 거듭남의 질서입니다. 인간은 자유롭게 싸우지만 승리의 능력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이 점은 ‘핵심진리’가 강조하는 ‘끊어라’, ‘죽여라’,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언어에 매우 중요한 균형을 제공합니다. 그 말을 ‘내 의지력으로 나를 정결하게 만들라’고 받아들이면 신앙생활은 엄청난 자기 프로젝트가 됩니다. 그리고 성공한 사람은 자기 의에 빠지고 실패한 사람은 절망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마치 내가 하는 것처럼 악을 물리친다’고 이해하면 인간의 책임과 주님의 역사가 동시에 살아납니다.
바로 여기에서 ‘시험’의 의미도 달라집니다. 시험은 단순히 내가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 증명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얼마나 약한지를 알게 되는 자리일 수 있습니다. 평소에는 ‘나는 이것쯤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시험이 오면 자기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경험합니다. 그때 사람은 proprium에 대한 신뢰를 조금씩 내려놓고 주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웁니다. 그러므로 시험의 목적은 강한 ‘자기’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는 새로운 사람을 형성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AC의 거듭남 이야기와도 아주 깊이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거듭나는 동안 악한 영들과 선한 천사들의 인플럭스 사이에서 실제적인 영적 싸움을 경험한다고 설명합니다. 악한 영들은 인간의 악과 거짓을 자극하고, 주님께서는 천사들을 통해 선과 진리를 흘려보내십니다. 그러나 인간 자신에게는 그것이 ‘내 생각’, ‘내 욕망’, ‘내 갈등’처럼 느껴집니다. 바로 그 가운데 자유가 보존됩니다. 인간은 어느 쪽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일 것인지 선택하며, 반복되는 선택을 통해 새로운 의지가 형성되어 갑니다.
그래서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는 것은 단 한 번의 극적인 결단으로 모든 욕망이 사라지는 사건이라고 보기보다, 긴 거듭남의 과정으로 보는 편이 좋습니다. 오늘 하나를 발견하고 주님 앞에서 싸우고, 얼마 뒤 그보다 더 깊은 동기를 발견하고 또 싸우며, 어느 정도 정결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더 은밀한 자기 사랑이 드러나는 과정입니다. 이 과정은 때로 평생 계속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남은 인간 생애 전체에 걸친 일이며, 그 깊이는 인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큽니다.
여기에서 ‘완전’이나 ‘성화’를 이해하는 방식에서도 공용복 선생의 전통과 스베덴보리 사이에 앞으로 매우 중요한 대화가 필요해집니다. ‘죄성을 완전히 제거한다’는 표현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두 체계 사이의 거리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의 유전적 악 자체가 마치 어떤 물질처럼 뽑혀 없어져 다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악은 주님에 의해 억제되고 사람이 그 악에서 돌이켜 선을 사랑하도록 변화됩니다. 그래서 천국의 천사들도 자기 자신에게서 선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주님에게서 선을 받아 살아갑니다. 그들은 자기 proprium만 놓고 보면 아무 선도 없음을 압니다. 바로 그 인정 때문에 더욱 자유롭게 주님의 선을 받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화의 가장 깊은 표지는 ‘나는 이제 악이 없는 사람이다’라는 자기 확신이 아니라 오히려 ‘내게 있는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내적 인식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 대단히 중요한 지점입니다. 거듭날수록 사람은 자기 자신을 더 위대한 존재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주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더욱 깊이 압니다. 동시에 그것이 비참함이나 자기혐오로 나타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에게 의지할 수 있기 때문에 자유롭고 평안해집니다.
이렇게 보면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는 표현의 궁극적인 방향도 조금 달리 들립니다. 그것은 ‘나는 이제 아무 욕망도 느끼지 않는다’는 상태가 아니라 ‘더 이상 그 욕망을 주인으로 섬기지 않는다’는 상태입니다. 배고픔은 있지만 음식이 주인은 아닙니다. 재산은 있지만 재물이 주인은 아닙니다. 가족을 깊이 사랑하지만 가족이 주님보다 위에 있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의 인정이 기쁠 수 있지만 인정받지 못한다고 해서 선을 행하는 이유가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자연적 삶은 그대로 존재하지만 그 위에 새로운 질서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십자가’의 실천적 의미를 깊게 만듭니다. 십자가는 인간성을 없애는 도구가 아니라 자기중심적 지배가 죽는 자리입니다. 내가 중심이어야 한다는 요구, 내 뜻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요구, 내가 인정받아야 한다는 요구, 내가 소유해야 한다는 요구가 주님 앞에서 내려놓아지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그 자리가 비어 있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자리에 주님에게서 오는 새로운 사랑이 들어옵니다. 그래서 십자가 뒤에는 부활이 있습니다. 악을 끊는 것 뒤에는 선을 사랑하는 새로운 생명이 와야 합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핵심진리’의 강한 금욕적 언어를 굳이 약화시킬 필요도 없고, 반대로 문자 그대로 자연적 욕망의 제거로 받아들일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 언어를 ‘사랑의 질서 회복’이라는 더 큰 틀 안에 놓아 줍니다. 정욕과 싸우십시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자연적 생명 자체와 싸우지는 마십시오. 악을 끊으십시오. 그러나 선한 애정까지 잘라내지는 마십시오. 자기 사랑의 지배를 내려놓으십시오. 그러나 주님께서 맡기신 자기 자신을 돌보는 책임까지 버리지는 마십시오. 핵심은 무엇을 없애느냐보다 ‘누가 주인인가’입니다.
그래서 4강 3부의 중심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렇습니다.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는 것은 인간의 모든 애정과 욕망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주님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도록 그 지배를 끝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이 싸움은 단순한 억압에서 사랑의 변화로 나아갑니다. 처음에는 ‘하고 싶지만 말씀 때문에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면, 나중에는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나도 기뻐하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제 강의는 이 원리를 혈육간의 애정과 가족 관계에 더욱 구체적으로 적용하면서,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이라는 복음서의 매우 강한 말씀을 다룹니다. 그리고 이 대목을 ‘대환란’이라는 공용복 선생의 독특한 종말론적 틀과 연결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핵심진리’와 스베덴보리가 상당히 가까이 가다가 다시 분명하게 갈라지는 중요한 지점이 나타납니다. 그것을 4강 4부에서 충분히 살펴보겠습니다.
4강 4부
혈육의 사랑보다 주님을 더 사랑한다는 것 : 가족애의 제거가 아니라 사랑의 질서, 그리고 ‘대환란’에 대한 중요한 구별
앞선 4강 2부와 3부에서 강사는 ‘정욕’이 처음부터 악하게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자연적 애정과 욕망이 타락으로 말미암아 자기중심적으로 변질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그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는 것은 단순히 자연적인 욕구를 억압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인간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라는 데까지 왔습니다. 이제 강의는 그 원리를 가장 민감한 영역 가운데 하나인 ‘혈육간의 애정’에 적용합니다. 부모와 자녀, 남편과 아내, 형제자매처럼 인간에게 가장 깊고 자연스러운 사랑도 주님보다 앞설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강사는 여기서 마태복음 10장 37절의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라는 말씀과 누가복음 14장 26절의 매우 강한 말씀을 가져옵니다. 강의의 중심은 분명합니다. 혈육간의 애정 자체가 악이라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귀한 사랑이라도 하나님보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면 영적 질서가 뒤집힌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자칫 오해하기 쉽습니다. ‘부모를 사랑하지 말라’, ‘자녀에게 정을 떼라’, ‘가족을 멀리할수록 영적이다’라는 식으로 받아들이면 복음의 방향 자체가 이상해집니다. 예수께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폐기하신 것도 아니고, 자녀와 배우자를 냉정하게 대하라고 하신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문제는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가족에 대한 사랑이 주님 사랑과 충돌할 때 무엇이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지가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사랑의 양을 줄이라는 명령이라기보다 사랑의 질서를 묻는 말씀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부분을 매우 섬세하게 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혈연에 기초한 사랑은 자연적 사랑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고 자녀가 부모를 사랑하는 것은 창조 질서 안에 있는 매우 중요한 애정입니다. 그러나 자연적 사랑이라는 사실만으로 그것이 곧 영적 사랑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 자식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과 ‘그 사람의 선과 영원한 생명을 바라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전자는 자연적 혈연애만으로도 가능하지만, 후자에는 체어리티가 들어옵니다. 거듭남은 전자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전자 안에 후자가 들어오게 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부모가 자녀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자녀가 악을 행해도 무조건 감싸 준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세상에서는 그것을 ‘부모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반드시 선한 사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자녀의 악을 도와주고 그 악을 정당화하는 것이 결국 그 자녀의 영원한 선을 해친다면, 사랑처럼 보이는 애정 안에 소유욕과 자기애가 섞여 있을 수 있습니다. ‘내 자식이니까’라는 이유로 선과 진리의 기준까지 바꾸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녀가 당장은 싫어하더라도 그 사람의 참된 선을 위해 필요한 것을 말하고,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하면서도 끝까지 사랑한다면 자연적 혈연애 안으로 영적 사랑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가족보다 더 사랑한다는 것은 가족을 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족을 더 바르게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가족을 ‘내 것’으로 사랑하는 데서 주님께 속한 한 사람으로 사랑하는 데로 이동하기 때문입니다. 부모도, 배우자도, 자녀도 궁극적으로 나의 소유가 아닙니다. 모두 주님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내가 그들을 사랑하도록 잠시 관계 안에 맡겨진 것입니다. 이 질서가 세워지면 가족에 대한 사랑은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소유하려는 사랑에서 자유로워지고, 상대의 진정한 선을 바라는 사랑으로 깊어질 수 있습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천국관을 생각하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지상에서의 혈연관계 자체가 영원한 관계의 최종 토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영계에서는 사람의 내적 사랑과 상태가 드러나며, 같은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 결합합니다. 그렇다고 지상의 부모와 자녀, 부부의 사랑이 무의미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지상의 관계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넘어 다른 사람을 돌보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중요한 학교가 될 수 있습니다. 다만 혈연 자체가 영원한 결합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관계 안에서 어떤 사랑이 형성되었느냐가 중요합니다.
따라서 ‘혈육간의 애정을 끊는다’는 강의의 표현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 ‘혈육이라는 이유만으로 선과 진리보다 앞세우는 자기중심적 애착을 끊는다’고 이해하면 훨씬 안전합니다. 스베덴보리식으로 말하면 자연적 사랑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 사랑을 영적인 것 아래에 종속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4강 전체에서 계속 발견되는 중요한 보완입니다. ‘핵심진리’에서는 ‘끊는다’, ‘죽인다’, ‘십자가에 못 박는다’는 전투적 표현이 강하고, 스베덴보리는 그것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위한 싸움인지를 ‘질서’라는 언어로 보다 세밀하게 보여 줍니다.
그런데 이 부분부터 강의는 가족애의 문제를 종말론과 연결하기 시작합니다. 강사는 현재의 ‘교회시대’에는 사람이 자원하여 말씀에 순종하면서 혈육간의 애정과 여러 정욕을 다룰 수 있지만, 앞으로 ‘7년 대환란’, 특히 ‘후 3년 반’과 같은 극심한 환경에서는 사람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소유와 가족과 자기 생명까지 내려놓아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는 취지로 설명합니다. 그 과정에서 강의는 ‘반강제적으로’ 행실을 닦게 되는 상황을 말하고, 적그리스도의 통치와 대환란을 실제 미래 역사 속에서 일어날 사건으로 이해합니다.
여기서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핵심진리’ 사이의 차이가 상당히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이것은 작은 용어 차이가 아니라 말씀을 읽는 기본 방식의 차이와 관계됩니다. 공용복 선생의 전승에서는 다니엘과 요한계시록의 예언을 실제 역사적 미래 사건의 시간표와 연결하는 종말론적 틀이 매우 중요합니다. 앞서 보여 주신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각 시대 비교표’에서도 이러한 성격이 뚜렷하게 나타났습니다. ‘교회시대’, ‘대환란’, ‘천년그리스도왕국’, ‘새 하늘과 새 땅’ 등을 역사적 순서 안에 배열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요한계시록을 그렇게 읽지 않습니다. 특히 ‘마지막 때’, ‘심판’, ‘새 하늘과 새 땅’은 자연계 우주의 물리적 파괴와 재건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영적 상태와 그 종결, 심판, 그리고 새 교회의 출현을 가리키는 것으로 봅니다. ‘전쟁’도 단순히 미래의 군사전쟁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악, 진리와 거짓 사이의 영적 전투를 나타내며, 숫자와 기간 역시 말씀의 상응에 따라 영적 상태를 표현합니다. 따라서 ‘7년’이나 ‘3년 반’을 미래 달력의 정확한 기간으로 놓고 종말의 시간표를 구성하는 방식은 스베덴보리의 계시록 해석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습니다.
이 차이는 존중하면서 분명하게 말할 필요가 있습니다. ‘핵심진리’가 종말의 환난을 강조하는 목적 자체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금 주어진 은혜의 때에 자기 신앙을 점검하고, 세상과 육에 붙들리지 말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님을 선택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는 강력한 목회적 권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권면의 영적 핵심을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그 메시지를 미래에 일어날 특정한 7년의 정치·사회적 재난에만 묶어 두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 안에서 선과 진리가 시험받고, 기존의 종교적 외관이 무너지고,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는지가 드러나는 영적 상태로 더 깊이 읽습니다.
특히 ‘반강제적으로 정결하게 된다’는 개념은 스베덴보리의 인간론에서는 매우 신중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는 데 ‘자유’가 본질적이기 때문입니다. 강제된 것은 인간의 내적 생명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외부의 공포 때문에 악을 하지 않는 것과 악 자체를 죄로 미워하여 하지 않는 것은 영적으로 같은 상태가 아닙니다. 감옥에 있기 때문에 범죄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의 악한 사랑이 제거되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대환란 같은 극단적인 고난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을 잃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성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같은 고난을 겪고도 어떤 사람은 더욱 완고해지고, 어떤 사람은 절망하며, 어떤 사람은 주님께 돌아갈 수 있습니다. 고난 자체에는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신비한 자동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상황 속에서 인간이 자유롭게 무엇을 받아들이느냐입니다. 주님께서는 환난을 허용하시고 그것을 섭리 가운데 선을 위해 사용하실 수 있지만, 환난이 사람의 자유를 대신하여 거듭남을 만들어 내지는 않습니다.
이 점은 시험과 강제를 구별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영적 시험은 매우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때로는 사람이 자기 자유가 사라진 것처럼 느낄 만큼 내적인 압박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자유가 보존됩니다. 선과 진리를 붙들 것인지, 악과 거짓에 굴복할 것인지의 싸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자유를 지켜 주십니다. 자유가 없으면 사랑도 없고, 사랑이 없으면 어떤 것도 인간 자신의 생명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자원하여 정욕을 끊지 않으면 나중에 환난을 통해 강제로 끊게 된다’는 식의 설명은 목회적으로는 강한 경각심을 줄 수 있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지금 자유 가운데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악과 싸우는 것이 중요하며, 인간이 그것을 계속 거절할수록 자기 안의 악은 더욱 굳어질 수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환난은 그 사람의 상태를 드러낼 수 있고, 거짓된 의존을 흔들 수도 있지만, 그 자체가 거듭남을 대신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매우 중요한 목회적 차이를 낳습니다. 신앙생활의 동기가 ‘앞으로 대환란이 오니까 지금 준비해야 한다’는 두려움에만 놓이면, 신앙의 중심이 자칫 미래의 재난으로 옮겨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더 근본적인 질문은 ‘오늘 나는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가?’입니다. 대환란이 내일 오든 오지 않든, 오늘 내 안에서 자기 사랑이 주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면 바로 그것이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세상의 종말보다 먼저 보아야 할 것은 내 안에서 선과 진리가 어떤 상태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종말론도 갑자기 우리의 현재 삶 가까이로 옵니다. ‘마지막 때’는 단순히 먼 미래의 세계사적 사건만이 아니라, 한 사람 안에서 오래된 영적 상태가 끝나고 새로운 상태가 시작되는 것과도 상응적으로 연결하여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가 의지하던 거짓이 무너지고, 내가 감추어 두었던 악이 드러나며, 주님께서 새로운 진리와 선을 세우시는 과정에는 작은 의미의 심판과 새 창조가 있습니다. 물론 이것을 요한계시록의 모든 내용을 개인 심리로 환원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무엇보다 교회의 보편적 영적 상태와 마지막 심판, 새 교회의 형성을 다룹니다. 다만 그 동일한 신적 질서가 개인의 거듭남에도 반영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관점에서 다시 가족애의 문제로 돌아오면 강의가 왜 이 두 주제를 연결했는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극단적인 상황은 ‘내가 정말 무엇을 가장 사랑하는가’를 드러냅니다. 평상시에는 ‘나는 주님을 가장 사랑한다’고 얼마든지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족과 재산과 명예와 안전과 주님의 진리가 충돌하는 순간이 오면 사랑의 질서가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대환란의 세부 시간표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강의가 던지는 실존적인 질문은 그대로 남습니다. ‘나는 정말 주님을 가장 사랑하는가?’
그러나 여기에도 매우 중요한 균형이 필요합니다. 주님을 가장 사랑한다는 것은 가족에게 냉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을 사랑할수록 사람은 가족을 더욱 선하게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가족은 중요하지 않다’며 배우자와 자녀에 대한 책임을 방기한다면, 그것은 높은 사랑이 아니라 종교적 언어를 입은 proprium일 수도 있습니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서로 경쟁하는 두 사랑이 아닙니다. 참된 주님 사랑은 반드시 이웃 사랑으로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장 가까이 맡겨진 이웃 가운데 부모와 배우자와 자녀가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을 위하여 가족을 버린다’는 식의 극단적인 영성을 경계하게 합니다. 주님께서 맡기신 관계를 충실하게 돌보는 것도 유용성(use)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가족을 우상으로 만들지 않는 것과 가족에 대한 책임을 버리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하나는 사랑의 질서를 바로잡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의 의무를 저버릴 수도 있습니다. 이 둘을 구별하지 못하면 ‘자기부인’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면서도 자신은 영적이라고 생각하는 위험이 생깁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의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이라는 강한 말씀도 성경 전체의 빛 아래에서 읽어야 합니다. 여기서 ‘미워한다’를 감정적 증오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부모와 배우자와 자녀를 실제로 미워하라는 뜻일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과 충돌하는 경우 어떤 자연적 애정도 최종적인 주인이 될 수 없다는 철저한 우선성을 표현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말하면 모든 낮은 사랑이 가장 높은 사랑 아래에서 질서를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앞서 목사님께서 보여 주신 ‘영적 성장에 대한 도표’를 생각하면 더욱 흥미롭습니다. ‘핵심진리’는 출애굽-광야-가나안이라는 성경의 역사를 인간의 영적 성장과 연결합니다. 그렇다면 가족, 재산, 명예, 자기 생명에 대한 애착이 흔들리는 경험은 일종의 ‘광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는 평소 의지하던 것이 사라집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광야의 목적 역시 단순한 박탈이 아닙니다. 옛것을 빼앗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사람이 주님에게서 새로운 생명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입니다. 광야 뒤에는 가나안이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 뒤에는 부활이 있어야 하고, 악을 버린 자리에는 선한 사랑이 들어와야 합니다.
결국 4강에서 반복되는 ‘끊는다’는 언어를 우리는 계속 이 방향으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혈육간의 애정을 끊는다는 것은 가족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가족에 대한 자기중심적 소유욕을 끊는 것입니다. 식욕을 끊는다는 것은 음식을 즐기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음식의 지배를 끊는 것입니다. 물욕을 끊는다는 것은 재산을 전혀 소유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재물이 마음의 주인이 되는 것을 끊는 것입니다. 명예욕을 끊는다는 것은 모든 책임과 직분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인정이 삶의 목적이 되는 것을 끊는 것입니다. 결국 끊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창조의 기능이 아니라 그 기능을 자기 자신에게로 돌려놓은 ‘전도된 질서’입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proprium이 다시 모습을 드러냅니다. 인간의 proprium은 무엇이든 ‘나의 것’으로 붙잡으려 합니다. ‘내 자녀’, ‘내 재산’, ‘내 명예’, ‘내 사역’, 심지어 ‘내 신앙’, ‘내 성화’, ‘내 영성’까지 붙잡습니다. 거듭남은 이 모든 것을 물리적으로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주인이 내가 아님을 배우는 과정입니다. 자녀도 주님의 것이고, 재산도 주님께서 유용성을 위해 맡기신 것이며, 사역도 주님의 것이고, 진리도 내 지혜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이 인식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오히려 맡겨진 것을 더 충실하게 돌볼 수 있습니다. 소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4강 4부의 중심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주님을 가족보다 더 사랑한다는 것은 가족을 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을 내 것으로 소유하려는 사랑에서 벗어나 주님 안에서 더욱 참되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환난’의 핵심 역시 고난 자체가 사람을 정결하게 한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환난 속에서 무엇을 가장 사랑하는지가 드러나고 그 자유 가운데 주님을 선택하는 데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이번 부분에서 ‘핵심진리’와 스베덴보리는 한편으로 상당히 가까우면서 다른 한편으로 분명하게 갈라집니다. ‘주님보다 높은 자리를 차지한 자연적 애정은 내려와야 한다’는 데서는 깊이 만납니다. 그러나 미래의 문자적 ‘7년 대환란’과 ‘후 3년 반’을 통해 사람이 반강제적으로 정결해진다는 종말론적 틀에서는 상당히 달라집니다. 이 차이를 어느 한쪽을 조롱하거나 재단하는 방식으로 다룰 필요는 없습니다. 공용복 선생의 전승이 그 표현을 통해 무엇을 경고하려 했는지를 먼저 충분히 듣고, 그 다음 스베덴보리는 같은 문제를 자유와 사랑, 영적 심판과 말씀의 속뜻이라는 관점에서 어떻게 다르게 설명하는지를 보여 주면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처음부터 지키려 했던 ‘스베덴보리의 렌즈’의 역할일 것입니다.
그리고 4강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제 혈육간의 애정에서 다른 정욕들, 특히 인간의 육체적 욕망과 자기 만족의 문제로 시선이 이동하면서 ‘죄성’과 ‘정욕’의 관계가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동시에 ‘악을 끊는 것’과 ‘성화된 사람이 되는 것’이 과연 같은 것인가라는 더 깊은 질문도 생깁니다. 이 부분은 4강의 죄론 전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므로, 다음 4강 5부에서 충분히 이어가겠습니다.
4강 5부
‘죄성’과 ‘정욕’은 어떻게 결합하는가 : 욕망의 문제가 아니라 그 욕망을 지배하는 생명의 문제
4강은 이제 한층 더 깊은 자리로 들어갑니다. 지금까지 강사는 ‘정욕’을 혈육간의 애정, 남녀간의 애정, 친구간의 애정, 사물에 대한 애정과 식욕·성욕·물욕·명예욕·수면욕 등으로 넓게 설명하면서, 이것들이 본래부터 죄악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의 자연적 삶을 위해 주신 기능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어떻게 죄의 통로가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강사는 ‘죄성’과 ‘정욕’을 구별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타락을 이 둘이 결합한 사건으로 설명합니다. 이 구별은 이번 4강의 죄론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강사의 설명을 먼저 그대로 따라가 보면, 정욕은 인간에게 본래 주어진 자연적 기능입니다. 먹어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으므로 식욕이 있고, 인류가 이어지도록 남녀간의 애정과 성적 기능이 있으며, 가족 공동체를 이루도록 혈육간의 애정이 있고, 자연계에서 살아가도록 사물과 소유에 대한 관심도 있습니다. 그런데 강사는 ‘죄성’은 이와 다른 것으로 설명합니다. 죄성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며, 마귀의 죄악된 성질이 인간에게 들어와 하나님께서 주신 정욕과 결합함으로써 그 정욕을 변질시켰다고 봅니다. 그 결과 본래 생명을 보존하고 질서를 이루기 위한 기능이었던 정욕이 ‘자기 만족’을 향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설명에서 반드시 붙들어야 할 좋은 통찰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창조된 인간성’과 ‘타락한 인간성’을 구별하려 한다는 점입니다. 인간의 몸이 악해서 죄를 짓는 것도 아니고, 감정이 있기 때문에 죄인이 된 것도 아니며, 무엇인가를 좋아하고 원하는 능력 자체가 악한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만일 몸과 자연적 욕구 자체를 죄악시하면 구원은 자연스럽게 ‘몸에서 벗어나는 것’, ‘감정을 없애는 것’, ‘욕구를 느끼지 않는 것’으로 이해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창조관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을 처음부터 악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창조된 것이 하나님에게서 벗어나 자기중심적으로 사용되는 데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상당히 가까워집니다. 스베덴보리도 인간의 자연적 차원 자체를 악으로 보지 않습니다. 몸은 영혼의 감옥이 아니며 자연계의 삶도 버려야 할 저급한 실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자연적인 것은 더 높은 영적인 것을 받아 표현하는 최종적인 그릇입니다. 그래서 거듭남도 자연적인 것을 폐기하는 과정이 아니라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것에 순종하도록 질서를 바로잡는 과정입니다. 자연적인 것이 자기만을 위해 독립적으로 살려고 할 때 문제가 생기며, 속사람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그것을 실제 삶으로 표현할 때 자연적인 것은 거듭남의 중요한 자리가 됩니다.
다만 ‘죄성은 마귀의 것이 인간 안으로 들어와 정욕과 결합한 것이다’라는 설명에서는 스베덴보리와 조금 다른 언어가 필요합니다. 이것을 어떤 악한 ‘물질’이나 ‘성질’이 마귀에게서 인간 안으로 옮겨 들어온 것처럼 이해한다면 스베덴보리의 인간론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악은 인간 안에 독립적인 실체처럼 주입되는 어떤 물질이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영계로부터 끊임없는 인플럭스가 있으며, 선과 진리는 주님에게서 천국을 통하여, 악과 거짓은 지옥으로부터 흘러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가운데 자유를 가지고 자신에게 들어오는 것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며, 자기가 사랑하여 받아들인 것을 자기 것으로 삼습니다.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마귀가 내 안에 죄성을 집어넣었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되었다’고만 말하면 자칫 악의 책임을 외부로 돌릴 여지가 생깁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악한 인플럭스가 지옥에서 온다고 하면서도 인간의 책임을 결코 없애지 않습니다. 악이 밖에서 유입된다는 것과 내가 그것을 자유 가운데 받아들여 내 것으로 만든다는 것은 동시에 참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악을 사랑하고 그것을 반복하여 행하면 그 악은 그의 삶에 습관으로 자리 잡고, 마침내 그의 의지와 결합합니다. 그때 그는 ‘악이 들어왔다’고만 말할 수 없습니다. 자기가 그것을 받아들여 자기 생명처럼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AC를 읽으면서 계속 만나게 되는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인간에게서 선한 것은 인간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고, 악한 것 역시 인간이 스스로 창조한 독립적인 생명이 아니라 지옥으로부터 유입됩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그것들이 모두 ‘내 것’처럼 느껴집니다. ‘내가 생각한다’, ‘내가 원한다’, ‘내가 사랑한다’고 느낍니다. 이 ‘마치 자기 것처럼’ 느끼는 자유가 없다면 인간은 인간일 수 없고, 거듭남도 있을 수 없습니다. 문제는 그 자유 안에서 무엇을 자기 것으로 인정하고 사랑하느냐입니다.
그러므로 ‘죄성과 정욕의 결합’을 스베덴보리의 언어로 조금 바꾸어 표현한다면, 자연적 애정과 욕구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지배 아래 들어간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식욕 자체가 죄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식욕이 절제되지 않고 오직 자기 쾌락만을 목적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재물을 얻는 능력이 죄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재물이 유용성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자기 우월감과 안전과 지배의 궁극적인 근거가 됩니다.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이 기쁠 수 있지만, 인정받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되면 진리조차 사람의 박수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강사가 반복하는 ‘자기 만족’이라는 말이 다시 중요해집니다. 그러나 2부에서 살펴보았듯 모든 만족을 악하게 볼 수는 없습니다. 선을 행한 뒤 느끼는 기쁨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유익을 주었을 때의 기쁨도 있으며, 맡은 일을 충실하게 수행했을 때 느끼는 만족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은 기쁨이 없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에서 나오는 기쁨이 충만한 곳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만족 자체가 아니라 ‘무엇을 사랑하기 때문에 기쁜가’입니다.
이것은 죄를 분별하는 데 아주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누군가에게 선을 행하고 그 사람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기쁩니다. 그 기쁨이 곧 자기중심적인 정욕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체어리티에는 다른 사람의 선을 기뻐하는 행복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나에게 감사하지 않자 갑자기 화가 나고, ‘내가 너에게 얼마나 해 주었는데’라는 마음이 올라온다면 그 순간 내 선행 안에 섞여 있던 다른 목적 하나가 드러납니다. 나는 그 사람의 선만을 원했던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는 그 사람에게서 인정과 보답을 원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동안 행한 선을 전부 거짓이라고 단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인간의 동기는 거듭남의 과정에서 흔히 혼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선과 악이 처음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있어서 ‘나는 순수한 선으로 이것을 했다’거나 ‘전부 악한 동기였다’고 쉽게 말할 수 있는 경우보다, 선한 애정과 자기 사랑이 섞여 있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그 혼합된 상태에서 인간을 이끌어 가십니다.
예를 들어 목회자가 말씀을 전합니다. 정말 주님과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에 전합니다. 동시에 설교를 잘했다는 말을 듣고 싶은 마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전자의 사랑까지 가짜였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어느 날 후자의 동기를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사람들이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거나, 다른 사람의 설교를 더 칭찬하거나, 자신을 인정하지 않을 때 마음이 흔들립니다. 그때 비로소 ‘아, 내 안에 이것도 있었구나’ 하고 알게 됩니다. 바로 그 발견이 회개의 재료가 됩니다.
그래서 자기 성찰은 자신에게서 악을 발견하는 작업이지만, 자기 자신을 끝없이 의심하는 작업이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이것을 좋아하니 정욕인가? 이것을 먹고 기쁘니 육적인가? 가족을 사랑하니 혈육의 정에 빠진 것인가? 칭찬을 받고 기쁘니 내 모든 사역이 거짓이었는가?’ 하는 식으로 가면 영적 삶은 자유를 잃고 끊임없는 자기검열이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회개는 그렇게 인간을 자기 내면에 갇히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한 악을 발견하면 그것을 주님 앞에서 죄로 인정하고 실제로 행하지 않기 위해 싸운 뒤, 다시 주님과 이웃을 향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죄성과 정욕을 찾아낸다’는 강의의 요청을 조금 더 정교하게 다듬을 수 있습니다. 모든 감정의 밑바닥을 끝없이 파헤쳐 숨은 죄를 찾아내라는 뜻이라기보다, 실제 생활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악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내가 계속해서 사람을 깎아내리는가, 인정받지 못하면 견디지 못하는가, 돈 때문에 진리를 양보하는가, 가족의 이익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불의를 행하는가, 성적 욕망 때문에 다른 사람을 인격이 아니라 대상으로 보는가, 분노 때문에 사람을 해치는가를 살피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체적인 악을 주님 앞에서 다루는 것이 회개입니다.
스베덴보리가 회개를 매우 실제적인 생활의 문제로 다루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이 모든 내적 악을 한꺼번에 볼 수도 없고, 그것을 모두 자기 힘으로 제거할 수도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 하나씩 드러내십니다. 사람이 그것을 죄로 인정하여 싸우면 그 싸움을 통하여 더 깊은 내면이 열립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양파 껍질을 한꺼번에 벗기는 것처럼 일시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상태에서 상태로 진행됩니다.
이것을 ‘리메인스’와 연결해서 보면 더욱 깊어집니다. AC에서 우리가 계속 만나게 되는 리메인스는 주님께서 어린 시절부터 인간 안에 보존하시는 선과 진리의 상태들입니다. 인간이 자기 힘만으로 악과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인간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깊은 곳에 보존해 두신 선과 진리를 시험과 거듭남의 과정에서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죄성과 정욕을 발견했다고 해서 ‘내 안에는 악밖에 없다’고 결론내리는 것은 AC의 인간 이해와 맞지 않습니다. 인간에게서 스스로 나온 것은 악하지만, 주님께서 인간 안에 심고 보존하신 것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새로운 생명을 위한 토대가 됩니다.
이 차이는 죄론의 분위기를 크게 바꿉니다. 자기 안의 악을 보는 일은 분명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그 발견의 배후에는 이미 주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 악을 보여 주시는 것은 정죄하여 버리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에서 건져내시기 위해서입니다. 빛이 들어오기 때문에 어둠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안의 어둠을 더 선명하게 보게 되었다는 사실이 반드시 영적으로 퇴보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진리의 빛 아래 드러나기 시작한 것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죄성’이라는 말도 조금 조심해서 사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죄성을 인간 존재의 본질 그 자체처럼 이해하면 ‘나는 존재 자체가 악하다’는 결론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인간은 악 그 자체가 아닙니다. 악과 거짓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여 온 존재이지만, 동시에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생명을 받고 있으며 거듭날 수 있도록 자유와 이성을 부여받은 존재입니다. 주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것은 악한 존재를 없애 버리는 것이 아니라, 악의 지배에서 건져내어 새로운 의지와 이해를 형성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성을 죽인다’는 표현도 인간의 인격이나 자아 자체를 파괴한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인간이 ‘나에게서 선이 나온다’, ‘내 지혜로 진리를 안다’, ‘내가 나의 주인이다’라고 여기는 proprium의 지배가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proprium의 지배가 내려갈수록 인간은 개성을 잃는 것이 아니라 더 참된 개성을 갖게 됩니다. 천국의 천사들은 모두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지만 서로 똑같지 않습니다. 오히려 각각의 애정과 유용성에 따라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합니다. 주님에게 가까워질수록 인간은 획일화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창조하신 본래의 고유한 모습을 더 온전히 드러냅니다.
이 점에서 공용복 선생의 죄론이 가진 강한 ‘자기부인’의 언어와 스베덴보리의 proprium 이해는 매우 흥미롭게 대화할 수 있습니다. 공용복 선생의 전승은 인간 안의 죄성과 정욕을 철저히 찾아내어 끊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촉구합니다. 그 강점은 신앙을 지식이나 교리적 동의에 머물지 않게 한다는 데 있습니다. 실제 삶이 변해야 하고, 숨은 욕망과 싸워야 하며, 하나님보다 앞선 것이 있다면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진지한 성화의 요청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에 ‘그러나 누가 그것을 하는가?’라는 질문을 한 번 더 던집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자기 죄성을 제거하여 마침내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인가, 아니면 사람이 자유 가운데 악을 물리칠 때 실제로 그 일을 이루시는 분은 주님이신가 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후자입니다. 사람은 반드시 싸워야 하지만 승리는 주님의 것입니다. 인간은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행해야 하지만 모든 능력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 균형이 무너지면 성화는 쉽게 자기 의가 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악이 물러난 자리는 반드시 선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탐욕을 끊었는데 체어리티가 생기지 않았다면 아직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 아닙니다. 음란을 끊었는데 결혼의 거룩함과 상대방을 인격으로 존중하는 사랑이 생기지 않았다면 역시 충분하지 않습니다. 명예욕을 끊었는데 유용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면 빈자리만 생긴 것입니다. 혈육에 대한 소유욕을 끊었는데 가족의 영원한 선을 바라는 사랑이 생기지 않았다면 사랑 자체가 메말라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남은 ‘악을 제거하는 과정’인 동시에 ‘선이 심어지는 과정’입니다. 둘은 함께 갑니다. 거짓이 제거되는 만큼 진리가 자리를 잡고, 악한 애정이 물러나는 만큼 선한 애정이 살아납니다. 이것이 단순한 금욕과 거듭남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금욕은 ‘하지 않는다’에서 끝날 수 있지만 거듭남은 ‘사랑한다’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여기서 4강의 처음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강사가 죄론을 공부하는 목적을 ‘선과 악, 빛과 어둠, 영성과 육성, 영적 행실과 육적 행실을 분별하고 철저히 자기 성찰하여 회개생활을 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죄론의 목적은 죄에 관한 지식을 많이 쌓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안에서 무엇이 생명을 지배하고 있는지를 알아차리고 실제 삶에서 그 질서를 바꾸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그 변화의 가장 깊은 곳에는 ‘지배적 사랑’의 변화가 있습니다. 인간은 결국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것을 향해 살아갑니다. 생각은 그 사랑을 섬기고, 지식도 그 사랑을 섬기며, 심지어 종교도 그 사랑을 섬길 수 있습니다. 자기 사랑이 지배적이면 성경 지식마저 자기 우월감을 위해 사용할 수 있고, 주님 사랑과 체어리티가 지배적이면 자연적 재산과 능력과 지위까지 이웃의 유용성을 위해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의 궁극적인 질문은 ‘내게 욕망이 있는가 없는가?’가 아니라 ‘내 생명의 중심에서 무엇이 나를 움직이고 있는가?’입니다.
이렇게 보면 ‘죄성’과 ‘정욕의 결합’이라는 이번 강의의 설명을 스베덴보리의 언어로 조금 더 깊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자연적 애정들이 proprium의 지배 아래 들어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섬기는 것이 타락의 질서이며, 거듭남은 그 자연적 애정들이 다시 속사람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의 지배 아래 들어가는 과정입니다. 같은 식욕, 같은 재산, 같은 가족, 같은 직업, 같은 재능이 존재하지만 그것들을 움직이는 중심 사랑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목적은 인간을 ‘욕망 없는 존재’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의 사람에게도 애정이 있고 열망이 있으며 기쁨이 있습니다. 오히려 지상에서보다 훨씬 강하고 순수합니다. 다만 그들은 자기만을 위해 소유하기를 열망하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하기를 열망하고, 남보다 높아지기를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유용성을 수행하기를 기뻐하며, 자기 영광보다 주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을 기뻐합니다. 사랑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과 질서가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4강 5부의 중심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죄성의 문제는 인간에게 욕망이 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애정과 욕망이 자기 사랑의 지배 아래 들어가 자기 만족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게 된 데 있습니다.’ 그리고 거듭남은 그 욕망들을 하나씩 잘라내어 무감각한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다시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섬기도록 질서를 회복하는 과정입니다.
이렇게 읽을 때 공용복 선생의 ‘죄성과 정욕을 철저히 다루라’는 요청은 약화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깊어집니다. 단순히 식욕이나 성욕처럼 눈에 잘 보이는 욕망 몇 가지를 절제했다고 안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보다 훨씬 깊은 곳에 ‘내가 옳아야 한다’, ‘내가 인정받아야 한다’, ‘내 뜻대로 되어야 한다’, ‘내 신앙이 더 높아야 한다’는 proprium이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자연적 욕망을 이기는 것보다 종교적인 모습을 입은 자기 사랑을 발견하는 일이 때로는 훨씬 어렵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바로 이 지점이 ‘핵심진리’의 죄론과 AC의 거듭남 이해가 서로에게 가장 유익하게 말을 걸 수 있는 자리일 것입니다. ‘핵심진리’는 우리에게 ‘실제로 싸우고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거기에 ‘그 싸움에서 누구의 힘을 의지하고 있으며, 무엇이 당신의 새로운 사랑이 되어 가고 있습니까?’라고 한 질문을 더합니다. 두 질문을 함께 붙들면 죄론은 단순한 금욕도, 단순한 교리도 아닌 실제 거듭남의 문제가 됩니다.
이제 4강은 이러한 죄성과 정욕의 문제를 더욱 실제적인 생활의 영역으로 가져가면서, 인간이 자신의 행실을 어떻게 살피고 죄를 어떻게 구체적으로 다루어야 하는지로 나아갑니다. 여기에서는 특히 ‘성화’를 죄를 하나씩 제거하여 어떤 완전한 상태에 도달하는 것으로 이해할 것인지, 아니면 주님에게서 오는 새로운 생명이 사람의 의지와 삶을 점점 다스리는 것으로 이해할 것인지가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이것은 공용복 선생의 전승과 스베덴보리 사이의 공통점뿐 아니라 차이까지 가장 섬세하게 살펴보아야 할 부분입니다. 4강 6부에서는 바로 그 ‘성화와 거듭남’의 문제를 중심으로 4강의 흐름을 이어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4강 6부
‘죽은 행실’을 회개한다는 것 : 큰일보다 생활 구석구석, 그리고 성화는 사랑의 열매로 드러난다
4강의 마지막 흐름은 지금까지 다루어 온 ‘죄성’과 ‘정욕’을 다시 매우 평범한 일상으로 끌어내립니다. 강사는 죄론을 연구하는 목적을 단지 인간의 타락 구조를 설명하는 데 두지 않습니다. ‘죽은 행실이 무엇인지 알아야 구체적으로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지도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죽은 행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철저한 회개생활도, 영적인 성장도 제대로 이루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론은 결국 ‘빛 가운데 사는 행실’과 ‘어둠 속에 사는 행실’을 생활 속에서 세밀하게 분별하기 위한 공부라고 설명합니다.
이 부분에서 4강 전체의 초점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처음에는 ‘죄성’, ‘정욕’, ‘타락’, ‘마귀’ 같은 상당히 무거운 단어들이 등장했지만, 강의가 궁극적으로 관심을 두는 것은 거대한 악행 몇 가지가 아닙니다. 평범한 하루 가운데 무슨 말을 하고, 어떤 표정을 짓고, 무엇 때문에 화를 내며, 사람을 어떻게 대하고, 작은 불편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입니다. 죄론을 공부하는 이유가 죄에 관한 전문지식을 쌓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까지 죄라고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생활 구석구석의 죽은 행실’을 발견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앞에서 강사가 들었던 ‘밥그릇 밑의 죽은 바퀴벌레’ 이야기가 그래서 단순한 웃음거리가 아니었습니다. ‘무엇을 먹든지 무엇을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겠다고 결심하여 물 한 모금, 밥 한 숟가락에도 감사했는데, 예상하지 못했던 불쾌한 상황 하나가 나타나자 방금 전까지의 평안이 순식간에 무너집니다. 강사는 바로 그런 순간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던 내면의 근원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 합니다. 평소에는 숨어 있어서 자신도 모르던 것이 환경의 자극을 만나 ‘행실’로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이 대목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사람에게 있는 내적인 사랑과 애정은 외적 상황을 통해 모습을 드러냅니다. 모든 일이 내 뜻대로 진행될 때에는 누구나 어느 정도 온유하고 평안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뜻과 다른 일이 생기고, 무시당하고, 손해를 보고, 기대가 좌절되고, 몸이 불편해질 때 무엇이 올라오는지를 보면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proprium의 일부가 드러납니다. 시험이 인간에게 없던 악을 새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안에 있던 것을 밖으로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는 이유입니다.
그렇다고 바퀴벌레를 보고 불쾌해진 것 자체를 곧바로 영적 죄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꼭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육체가 불결한 것을 싫어하고 위험한 것을 피하려는 자연적 반응 자체는 창조된 기능입니다. 문제는 그 자연적 반응이 어떤 마음과 결합하여 밖으로 나타나느냐입니다. 불편을 느끼는 것과 그 불편 때문에 사람에게 분노를 쏟아붓는 것은 다릅니다. 싫은 맛을 느끼는 것과 그것 때문에 다른 사람을 모욕하는 것도 다릅니다. 자연적인 감각과 영적인 악을 그대로 동일시하면 사람은 모든 인간적인 반응을 죄로 의심하는 과도한 자기검열에 빠질 수 있습니다.
강의 후반부는 오히려 이 문제를 매우 현실적인 방향으로 가져갑니다. 식사에서 음식이 조금 짜더라도 짜증을 내기보다 물을 타서 먹든지 덜 먹으면 된다는 식으로 말하면서, 그런 작은 상황에서 ‘입으로 상급을 쌓으라’고 권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상급을 보실 때 ‘큰 사업을 했는가, 큰 교회를 목회했는가, 많은 헌금을 했는가’ 같은 외적 규모를 중요하게 보시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 사랑의 열매를 맺으며 했는가’를 보신다고 강조합니다. 큰일을 했든 작은 일을 했든, 유명한 사람이든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든 생활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작은 죄와 정욕을 회개하면서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대목이 4강 전체에서 매우 귀한 부분이라고 봅니다. 앞에서 ‘죄성 제거’,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음’, ‘이기는 자’, ‘익은 열매’ 같은 매우 높은 단계의 언어가 반복되었습니다. 그런 언어만 듣다 보면 독자는 자칫 성화를 어떤 특별한 영적 경지, 평범한 사람이 좀처럼 도달할 수 없는 높은 단계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강의의 끝으로 갈수록 성화의 현장이 다시 식탁과 말투와 사람 관계와 작은 불편으로 내려옵니다. 큰일보다 작은 일을 어떻게 하는가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쓰임’과 ‘생활의 종교’를 생각하면 상당히 깊은 접점이 있습니다. 천국적인 삶은 특별한 종교적 활동을 많이 하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자기 직업과 가정과 사회생활에서 맡겨진 일을 정직하고 충실하게 수행하고, 다른 사람의 선을 바라며, 불의와 악을 죄로 알고 피하는 것이 영적인 삶의 실제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떠나 수도원에 들어가야 거듭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모든 직업을 버리고 종교적 활동만 해야 천국적인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사람이 자연계의 수많은 관계와 책임 가운데서 선과 진리를 삶으로 만들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큰 교회를 목회했는가’보다 ‘순간순간 사랑의 열매를 맺었는가’라는 강사의 질문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상당히 의미 있게 들립니다. 외적 결과가 아무리 크더라도 그 안의 사랑이 자기 명예와 자기 지배를 향하고 있다면 영적인 성질은 전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세상에는 이름조차 남지 않은 사람이 자기 가족과 이웃에게 정직하고 온유하게 대하며, 자기에게 맡겨진 작은 쓰임을 충실히 행했다면 그 삶 안에는 실제 천국적인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상급’을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빛을 줍니다. 강의는 생활 구석구석에서 사랑의 열매를 맺으면 ‘큰 상급’을 쌓을 수 있다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의 상급을 외부에서 별도로 지급되는 보상으로만 이해하면 충분하지 않습니다. 참된 선의 행위 안에는 이미 그 행위의 기쁨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유용한 일을 하는 사람이 그 사람의 선에서 기뻐하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 자체를 기뻐하는 상태가 천국적 상급의 본질에 가깝습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착한 일을 많이 하면 나중에 큰 상을 받는다’는 계산으로 선을 행하면 아직 자기 유익이 목적 가운데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이 선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기뻐하시기 때문에’, ‘이웃에게 유익하기 때문에’ 행하고 그것 자체에서 기쁨을 얻는다면 선과 상급이 분리되지 않습니다. 천국은 공로점수를 많이 모은 사람이 더 좋은 상품을 받는 곳이 아니라, 각 사람이 사랑하는 선과 쓰임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행복을 받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4강 마지막에 부르는 노래의 내용도 의미가 있습니다. ‘사랑으로 하지 않는 모든 말과 행함’은 천국에서 상급받지 못하고,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일을 버리고 주님께서 칭찬하실 은밀한 선행을 하라는 방향으로 강의가 마무리됩니다. 결국 4강의 죄론이 도착하는 곳은 ‘죄를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느냐’가 아니라 ‘사랑으로 살고 있느냐’입니다. 이것은 중요한 귀결입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핵심진리’의 ‘성화’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을 조금 더 정밀하게 비교할 수 있습니다. 강의에서는 죄성의 뿌리가 제거되고, 영적 할례를 받고, 생명과를 먹으며, 하나님의 생명이 ‘내주합일’되어 ‘익은 열매’가 되는 비교적 분명한 완성 단계가 강조됩니다. 다른 강의에서도 성화가 사후에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살아 있는 동안 가능하며, 그런 사람들이 ‘처음 익은 열매’, 곧 이기는 자라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거듭남이 단지 죽은 뒤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자연계의 삶 가운데 실제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에서는 매우 분명합니다. 인간이 이곳에서 자유와 이성을 가지고 악을 죄로 알고 피하며 주님으로부터 새로운 의지와 이해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상에서 실제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공용복 선생의 강한 문제의식은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깊이 만납니다.
그러나 ‘완성’을 말하는 방식에서는 차이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인간 안의 모든 유전적 악이 존재론적으로 뿌리째 뽑혀 다시는 아무 가능성도 남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악은 주님에 의해 질서 아래 놓이고 억제되며, 인간은 그 악을 사랑하지 않고 선을 사랑하는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천사들조차 자기 자신에게서 선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 proprium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선하지 않으며,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계속 흘러온다는 것을 압니다.
이 점은 ‘성화’를 자기 소유로 만들지 못하게 하는 매우 중요한 안전장치가 됩니다. ‘나는 죄성 문제를 해결했다’, ‘나는 익은 열매다’, ‘나는 생명과를 먹은 사람이다’라고 자신의 영적 상태를 확정적으로 소유하기 시작하면, 역설적으로 그 순간 proprium이 가장 거룩한 옷을 입고 돌아올 수 있습니다. 자연적인 명예욕은 버렸지만 ‘영적으로 높은 사람이라는 명예’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공용복 선생의 전승 안에도 이 위험을 완화하는 매우 귀한 문장이 있었습니다. 앞서 확인했듯 ‘훌륭한 성도는 무엇을 많이 가진 사람도, 능력이 많은 사람도 아니라 회개를 잘하는 성도’라고 했습니다. 자신이 가르치는 진리를 잘 지키지 못하더라도 진리는 낮추지 말고 그대로 증거하되, 자신의 부족함은 회개해야 한다는 취지입니다. 이것은 높은 ‘완전’의 언어와 함께 반드시 붙들어야 할 균형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성숙한 신앙은 ‘나는 이제 회개할 것이 없다’로 가기보다 오히려 주님의 빛이 더 밝아짐에 따라 자기 안의 더 미세한 동기까지 보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간음과 도둑질 같은 큰 악만 죄로 보였는데, 나중에는 말 한마디 안의 자기 자랑, 사람을 은근히 낮추는 마음, 감사받고 싶은 동기, 자기 판단을 고집하는 아집까지 보이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반드시 퇴보가 아닙니다. 빛이 밝아졌기 때문에 먼지가 더 잘 보이는 것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것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연계에서 햇빛이 희미할 때는 방 안이 깨끗해 보이지만 강한 햇빛이 들어오면 공중의 먼지까지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진리가 사람 안에 더 깊이 들어올수록 자기 proprium의 미세한 움직임까지 드러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거듭난 사람의 특징이 ‘나는 내 안에서 악을 전혀 발견하지 못한다’가 아니라 오히려 ‘악을 더 빨리 알아차리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변호하지 않으며, 주님께 돌이키는 것’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공용복 선생의 ‘회개를 잘하는 성도가 훌륭한 성도’라는 말과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은 꽤 아름답게 만납니다. 완전함을 자기 무결점의 확신으로 이해하기보다, 주님의 빛 앞에서 계속 자기 것을 내려놓으며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상태로 읽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화’는 인간이 스스로 자기 영혼을 완성하여 하나님께 제출하는 프로젝트가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 안에서 자신의 질서를 세워 가시는 과정이 됩니다.
그리고 이때 ‘회개’도 죄책감을 오래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강의는 죄와 정욕을 ‘철저히 회개’하라고 반복하지만, 스베덴보리의 회개에는 반드시 실제 생활의 변화가 포함됩니다. 악을 보고, 그것을 죄라고 인정하며, 주님께 도움을 구하고, 다음 실제 상황에서 그것을 행하지 않기 위해 싸우는 것입니다. 화를 내고 나서 오래 자책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다음에 비슷한 상황이 왔을 때 한 번 말을 삼키는 것이 회개의 실제 열매일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강의가 말하는 ‘생활 구석구석’과도 정확히 만납니다. 대단한 순교의 순간이 와야만 이기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 찾아오는 작은 선택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말을 끊고 싶을 때 기다려 주는 것, 내 공로를 이야기하고 싶을 때 입을 다무는 것, 잘못을 지적받았을 때 즉시 변명하지 않는 것, 불편한 사람에게도 필요한 친절을 베푸는 것,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맡은 일을 정직하게 하는 것 같은 작은 선택들입니다. 이런 자리에서 사랑과 진리가 실제 자연적 삶 속에 내려옵니다.
다른 강의에서 소화 데레사를 예로 들어 ‘크고 위대한 일을 해서 성화된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작은 일을 잘 감당했다’고 설명하고, 생활 속의 ‘작은 원수’ 앞에서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오래 참는다’는 말씀을 적용해 순간순간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을 말한 것도 바로 이 전통의 일관된 방향을 보여 줍니다. 거대한 ‘익은 열매’라는 개념이 실제로는 작은 일상의 선택을 통해 익어 간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익은 열매’를 특별한 신비 체험이나 높은 영적 상태의 자기 인식으로만 이해하면 평범한 성도는 언제나 그것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작은 관계와 작은 말과 작은 책임 안에서 선을 선택하는 것이 실제 열매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천국적 생명은 특별한 장소에서만 자라는 것이 아니라 부엌과 식탁과 사무실과 교회 복도와 전화 한 통 속에서도 자랄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것을 ‘자연적 차원에까지 선과 진리가 내려와야 한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속으로 좋은 생각만 하고 실제 행위가 없다면 거듭남은 완성되지 않습니다. 선은 의지를 통하여 행위가 되어야 하고, 진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자연적인 행위가 영적인 것의 최종적인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자연계에 살아 있는 동안의 실제 행위가 그토록 중요합니다. 자연적 삶 안에서 선과 진리가 결합되어야 그것이 인간의 생명에 고정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죽은 행실’의 반대는 단순히 ‘종교적으로 보이는 행실’이 아닙니다. 생명이 있는 행실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이 진리를 통하여 실제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똑같이 설교하고, 헌금하고, 봉사하고, 식사하고, 일하지만 그 안을 움직이는 생명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자기 인정과 자기 유익이 움직이면 외관은 선해도 내적인 성질은 달라지고, 체어리티와 쓰임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행하면 일상적인 작은 행동 안에도 천국적 생명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4강 전체가 처음과 끝에서 아름다운 원을 이룹니다. 처음에는 ‘죄론을 왜 공부하는가?’라고 물었습니다. 답은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지 알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다시 ‘그렇다면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라고 묻습니다. 답은 거대한 사건보다 ‘생활 구석구석’입니다. 결국 죄론은 지옥의 죄 목록을 공부하는 학문이 아니라, 내 삶의 작은 자리들에서 어떤 사랑이 나를 움직이고 있는지를 살피는 공부가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4강의 강점을 상당히 높이 보고 싶습니다. 죄를 추상적인 ‘원죄’나 법적인 유죄 상태로만 놓아두지 않고, 사람의 애정과 욕망과 행실까지 들어가 실제로 변화되어야 한다고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었으니 죄 문제는 다 끝났다’는 식으로 삶의 변화를 약화시키지 않습니다. 신앙이 실제 성품과 행동에까지 내려와야 한다는 긴장은 매우 귀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여기에 계속 보태는 것은 세 가지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 자연적 애정과 욕망 자체를 악으로 만들지 말고 그 ‘질서’를 보자는 것입니다. 둘째, 죄와 싸우는 인간의 모든 능력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는 것입니다. 셋째, 성화를 ‘죄가 전혀 없는 자기완성’보다 지배적 사랑이 변화되어 선과 진리가 삶의 기쁨이 되는 거듭남으로 보자는 것입니다.
특히 세 번째가 중요합니다. ‘죄를 안 짓는 사람’과 ‘선을 사랑하는 사람’은 완전히 같은 표현이 아닙니다. 전자는 두려움이나 억압으로도 어느 정도 가능하지만, 후자는 새로운 생명이 필요합니다. 천국의 사람은 단지 악을 못 하게 된 사람이 아니라 선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선을 행하는 것이 그의 자유이고 기쁨입니다. 그래서 거듭남의 완성 방향은 ‘하지 않음’에서 ‘사랑하여 행함’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이것은 강의 마지막 찬양의 ‘사랑으로 행하라’는 방향과도 잘 만납니다. 결국 오랜 죄론 강의의 마지막 말이 ‘죄를 무서워하라’만이 아니라 ‘사랑으로 행하라’가 된다는 점은 의미가 있습니다. 죄를 벗는 목적이 사랑하기 위해서이고, 정욕의 지배를 끊는 목적도 더 자유롭게 선을 사랑하기 위해서이며, 자기중심적 만족을 내려놓는 목적도 주님과 이웃의 선에서 기쁨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에서 4강 전체를 관통했던 ‘정욕’이라는 말도 마지막으로 다시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정욕은 이 강의의 용법에서 인간의 애정과 욕망을 넓게 가리킵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모두 악한 것이 아니라 육체의 자연적 기능으로 주어졌지만 타락하여 자기중심적 방향을 갖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것을 ‘자연적 애정들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지배 아래 들어간 상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거듭남은 그 애정들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사랑과 체어리티 아래 다시 질서 있게 놓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식욕도 쓰임을 섬기고, 재물도 쓰임을 섬기며, 명예도 쓰임을 섬기고, 가족 사랑도 그 사람의 영원한 선을 섬깁니다. 인간의 자연적 삶 전체가 주님의 생명이 흐르는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것을 버린다’보다 더 깊은 변화일 수 있습니다. 물건을 버리기는 비교적 쉬울 수 있지만,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의 노예가 되지 않는 것은 훨씬 깊은 질서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칭찬을 전혀 듣지 않는 곳으로 도망가는 것보다 칭찬을 들으면서도 그것을 자기 영광으로 붙잡지 않는 것이 더 깊은 자유일 수 있습니다. 가족과 관계를 끊는 것보다 가족을 깊이 사랑하면서도 ‘내 것’으로 소유하지 않는 것이 더 깊은 사랑일 수 있습니다. 세상을 떠나는 것보다 세상 한가운데서 세상 사랑에 지배되지 않는 것이 더 깊은 거듭남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자연계의 삶과 쓰임을 매우 중요하게 보는 이유입니다. 거듭남은 인간을 자연계 밖으로 꺼내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삶 안에 천국의 질서를 넣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의 삶도 무위와 정지가 아니라 쓰임의 삶입니다. 사람은 지상에서부터 그 쓰임의 기쁨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4강의 ‘생활 구석구석’이라는 표현은 아주 좋은 끝맺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높은 영계 지식도, 복잡한 종말론도, 성화의 단계도 결국 생활 구석구석에서 사랑의 열매가 없다면 생명으로 내려오지 않은 것입니다. 반대로 특별한 지식이 많지 않아도 하루의 작은 관계들 속에서 악을 죄로 피하고 선을 사랑하며 쓰임을 행하는 사람 안에는 이미 천국의 질서가 형성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점에서 공용복 선생의 ‘회개를 잘하는 성도가 훌륭한 성도’라는 말도 다시 떠올릴 만합니다. 완전한 사람인 척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빛 아래 무엇이 드러날 때마다 그것을 인정하고 돌아서는 사람이 훌륭한 성도라는 것입니다. 이 문장을 ‘익은 열매’와 함께 읽으면 ‘핵심진리’의 성화론을 지나치게 딱딱한 완전주의로만 읽지 않게 해 주는 중요한 균형이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거기에 한 문장을 더할 수 있겠습니다. ‘회개를 잘한다는 것은 자기 악을 많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악에서 실제로 돌아서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삶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회개의 마지막은 죄책감이 아니라 새로운 삶입니다.
그래서 이번 4강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죄론의 목적은 인간을 죄에 사로잡아 두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주님의 생명을 막고 있는지를 발견하여 그것을 회개하고, 생활 구석구석에서 사랑의 열매가 나타나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더하면 이렇게 깊어집니다. ‘그 열매는 인간이 자기 힘으로 만들어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유 가운데 악을 물리칠 때 주님께서 그의 의지와 삶 안에 심어 자라게 하시는 선의 열매입니다.’
이렇게 해서 4강은 6부로 마무리하는 것이 자연스럽겠습니다. 처음에는 ‘죄란 무엇인가’에서 출발하여 ‘정욕’, ‘죄성’, ‘사랑의 질서’, ‘십자가에 못 박음’, ‘가족애와 대환란’, ‘성화와 거듭남’을 지나 마지막에는 ‘생활 구석구석의 사랑의 열매’로 돌아왔습니다. 앞서 한 편으로 너무 압축해서 보았을 때보다, 이렇게 여섯 부분으로 따라오니 이 강의가 단순히 ‘욕망을 죽이라’는 금욕 강의가 아니라 ‘무엇이 사람의 생명을 지배하고 있으며 그것이 실제 생활에서 어떤 열매를 맺는가’를 묻는 꽤 치밀한 죄론이라는 점이 훨씬 분명해집니다. 그리고 동시에 스베덴보리의 거듭남론이 이 강의의 장점을 살리면서도 ‘정욕의 제거’보다 ‘사랑의 질서 회복’, ‘인간의 성취’보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새 생명’ 쪽으로 한층 더 깊게 열어 줄 수 있다는 것도 보입니다.
SY.53, 심령부흥대사경회(79차) 3강 (7/28), 시흥영성수련원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여기 1강, 2강...은 실제 사경회 일정표가 아닌,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 순서를 말합니다. 3강 1부‘영계의 구조와 실상’ - ‘익은 열매’와 사후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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