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참여하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믿었던 사울 - 열심보다 중요한 진리

 

사울(사도 바울의 회심 전 이름)은 하나님을 미워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일을 했습니다. 훗날 바울은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며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많은 일을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고백합니다(행26:9). 이것은 대단히 무서운 말씀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거역하면서도 자신이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울에게는 ‘열심’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과거를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라고 표현합니다(빌3:6). 따라서 그의 문제는 신앙적 열심이 부족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열심이 너무 강했습니다. 문제는 그 열심이 참된 진리에 의해 인도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던 율법과 종교적 체계를 하나님과 동일시했고, 그것을 위협한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제거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그의 ‘하나님 사랑’에는 진리에 대한 중대한 오류가 섞여 있었습니다.

 

바로 여기서 앞서 이야기한 ‘나는 하나님의 자녀인데 왜 하나님은 내 편이 아니실 때가 있지?’라는 질문과 놀랍게 연결됩니다. 스데반이 죽임당하던 그 순간 사울에게 물었다고 상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누구 편이십니까?’ 사울은 아마 자신 있게 ‘우리 편’이라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편이고 스데반은 위험한 이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하늘이 열린 것을 본 사람은 사울이 아니라 스데반이었습니다. 스데반은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행7:56)고 말합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편’이라고 확신했던 바로 그 자리에서, 주님께서는 사울이 박해하는 사람과 함께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메섹 길에서 이 사실이 완전히 뒤집힙니다. 사울에게 나타나신 주님께서는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고 하십니다(행9:4). 사울의 입장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을 왜 박해하느냐’가 아니라 ‘왜 ‘나’를 박해하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사울이 하나님을 위해 제거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 안에서 오히려 주님께서 박해받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것만큼 ‘종교적 확신’과 ‘실제 진리’가 얼마나 멀어질 수 있는지를 강렬하게 보여 주는 장면도 드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진실하게 믿는다’는 것과 ‘진리를 믿는다’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사울은 자신의 믿음에 진지했습니다. 그러나 진지함이 그 믿음의 내용을 자동으로 진리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사람은 거짓을 진심으로 믿을 수도 있습니다. 더구나 그 거짓에 종교적 열심이 결합하면 매우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확신 때문에 오히려 자신의 행동을 의심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울은 그때 이미 악한 사람이었고 지옥적인 ‘지배적 사랑’(ruling love)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단정해야 할까요? 바로 여기에서도 조심해야 합니다. 이후의 바울을 보면 그의 내면에는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틀렸다는 사실이 드러났을 때 끝까지 자기 입장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난 뒤 자신의 세계 전체가 무너지는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자기가 평생 옳다고 믿었던 것을 내려놓고 자신이 박해하던 주님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차이입니다. ‘거짓을 진리라고 잘못 믿었던 사람’과 ‘거짓임을 알면서도 자기 사랑 때문에 끝까지 붙드는 사람’은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울의 이야기는 인간의 ‘합리성’(rationality), 곧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를 이해하고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왜 중요한지도 보여 줍니다. 참된 신앙은 ‘나는 확신한다’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혹시 내가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내 생각과 내 종교적 체계를 지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고 자신을 진리 앞에 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사울의 회심은 단순히 무신론자가 하나님을 믿게 된 사건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을 열렬히 믿던 사람이 ‘자기가 믿고 있던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무너지고 참된 주님을 새롭게 알아가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사울의 회심은 종교인에게 훨씬 더 무서운 회심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프로프리움’(proprium)의 문제도 깊이 숨어 있습니다. 종교적인 프로프리움은 세속적인 프로프리움보다 오히려 알아차리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내가 옳다’가 ‘하나님이 옳으시다’와 결합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내 생각에 반대하는 사람이 곧 하나님께 반대하는 사람처럼 보이고, 내 교리를 비판하는 사람이 진리를 공격하는 사람처럼 보이며, 심지어 상대방을 공격하면서도 그것을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느낄 수 있습니다. 사울이 바로 그 지점까지 갔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요16:2)은 그래서 섬뜩할 정도로 정확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부정하면서만 악을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위하여’라는 이름으로도 악을 행할 수 있습니다. 종교적 언어가 붙었다고 해서 그 행위가 선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그것이 주님의 선과 진리에 합하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사울의 이야기가 두려운 이야기로만 끝나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사울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네가 어떻게 감히 내 사람들을 죽이느냐’며 즉시 심판하여 제거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가 보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을 보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사울은 눈이 멀었습니다. 이것은 문자적으로 실제 일어난 사건이면서 동시에 너무나 강렬한 영적 그림입니다. ‘나는 누구보다 잘 본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비로소 ‘나는 보지 못하고 있었다’는 자리로 내려갑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진짜 눈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거듭남(regeneration)의 중요한 한 모습일 것입니다. 거듭남은 언제나 ‘나쁜 사람이 착한 사람이 되는 것’처럼 단순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나는 하나님을 잘 알고 있고, 나는 하나님 편이며, 나는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확신하던 사람이 주님 앞에서 ‘내가 틀릴 수도 있었습니다’라고 무너지는 과정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을 버리고 바울이 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하면서 붙들고 있던 거짓을 버림으로써 비로소 자신이 사랑한다고 말했던 하나님을 참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울의 이야기를 오늘 우리에게 적용할 때 가장 위험한 방식은 ‘저런 사람이 바로 사울 같은 사람이다’라고 다른 사람을 지목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순간 우리는 다시 사울의 자리에 설 수도 있습니다. 이 말씀의 칼날은 먼저 나를 향해야 합니다. ‘나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내 생각을 사랑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진리를 지키는 것인가, 아니면 내가 옳다는 것을 지키는 것인가? 상대방의 오류를 분별하는 것과 상대방을 미워하는 것을 혼동하고 있지는 않은가? 주님의 이름으로 내 분노와 적개심을 정당화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사람을 바라볼 때도 상당히 중요한 원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설교나 신학에서 명백한 오류를 발견했다면 오류는 오류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곧바로 ‘그러므로 저 사람의 내면도 악하다’로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사울조차 스데반의 죽음에 찬성하고 교회를 박해하던 바로 그 시절, 훗날 바울이 될 가능성을 주님께서는 이미 보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당시의 사울을 보지만 주님께서는 그 사람의 내면 깊은 곳과 앞으로 자유롭게 진리를 받아들일 가능성까지 보십니다.

 

결국 사울의 이야기는 ‘열심이 있느냐?’보다 더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그 열심은 진리에 의해 인도되고 있는가?’ 그리고 그보다 더 깊은 질문도 던집니다. ‘내가 틀렸다는 사실을 주님께서 보여 주실 때 나는 바뀔 수 있는가?’ 어쩌면 사울과 완고한 종교인을 가르는 결정적인 차이는 처음부터 오류가 없었느냐가 아니라, 진리가 찾아왔을 때 자신의 오류를 내려놓을 수 있었느냐에 있을 것입니다.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사울의 가장 무서운 오류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데 있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믿으면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을 박해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회심이 주는 희망까지 함께 붙인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잘못된 열심 속에 있던 사울조차 버리지 않으시고, 그가 자기 확신보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도록 눈을 감기시고 다시 뜨게 하셨습니다.’

 

 

 

SY.123, ‘나는 하나님의 자녀인데 왜 하나님은 내 편이 아니실 때가 있지?’

‘나는 하나님의 자녀인데 왜 하나님은 내 편이 아니실 때가 있지?’ - 주님은 내 편이 아니라 나를 구원하시는 분 ‘나는 하나님의 자녀인데 왜 하나님은 내 편이 아니실 때가 있지?’ 신앙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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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나님의 자녀인데 왜 하나님은 내 편이 아니실 때가 있지?’ - 주님은 내 편이 아니라 나를 구원하시는 분

 

‘나는 하나님의 자녀인데 왜 하나님은 내 편이 아니실 때가 있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상당히 절실하게 생기는 질문입니다. 열심히 기도했는데 일이 내가 바라던 방향과 정반대로 흘러갈 때, 억울한 일을 당했는데도 상대방이 잘되고 내가 손해를 볼 때, 분명 좋은 뜻으로 시작했다고 생각했는데 길이 막힐 때 이런 생각이 듭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인데 하나님은 왜 저 사람을 막아 주시지 않지? 왜 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지? 하나님이라면 적어도 내 편은 되어 주셔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여기에는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아주 쉽게 혼동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과 ‘하나님이 언제나 내가 원하는 쪽을 지지하신다’는 것은 전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여호수아 5장에는 이 문제를 놀랍도록 선명하게 보여 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여리고를 앞둔 여호수아가 칼을 든 존재를 만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적들을 위하느냐’고 묻습니다. 쉽게 말하면 ‘당신은 우리 편입니까, 저쪽 편입니까?’라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뜻밖에도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지금 왔느니라’입니다(수5:13-14). 여호수아는 ‘하나님이 우리 편인가?’를 물었지만, 질문의 방향 자체가 바뀝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하나님이 내 편인가?’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질서 안에 서 있는가?’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어느 편에 서느냐에 따라 그쪽에 합류하시는 분이 아니라, 선과 진리 그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 소원을 특별히 우선 처리해 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버지가 자녀를 정말 사랑한다면 자녀가 원하는 것을 무조건 들어주지 않는 것과 비슷합니다. 어린아이는 사탕을 더 달라고 하고 위험한 곳에도 가고 싶어 하지만, 부모는 때로 ‘안 된다’고 합니다. 아이의 눈에는 그 순간 부모가 자기 편이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거절이 사랑일 수 있습니다. 주님의 섭리 역시 우리가 당장 원하는 행복보다 훨씬 더 깊은 것을 바라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주님의 섭리가 궁극적으로 향하는 것은 사람이 세상에서 원하는 모든 것을 얻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유 안에서 영원한 생명에 적합한 사람으로 거듭나도록 이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간절히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주님께서 내 편이 아니시다’고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실제로 나에게 선한 것인지 나는 완전히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우리는 자신의 욕망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이 일이 잘되어야 하나님의 영광이지’, ‘저 사람이 잘못했으니 하나님께서 반드시 저 사람을 꺾으셔야 해’, ‘나는 옳으니까 하나님께서 내 억울함을 풀어 주셔야 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진실한 정의감과 함께 자기 사랑, 인정받고 싶은 욕망, 상대방이 패배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섞여 있을 수도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프로프리움’(proprium)은 신앙의 언어까지 사용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때때로 내가 원하는 ‘승리’를 주시는 것보다 내 안에 숨어 있는 것을 보게 하시는 쪽을 택하실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반드시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일으켜 나를 훈련시키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섭리론에서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악을 허용하시는 것을 구별해야 합니다. 인간의 자유 때문에 주님께서 허용하시는 고통과 악이 있으며, 주님께서 그 악 자체를 원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일단 허용된 상황 속에서도 주님은 끊임없이 사람을 선으로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어떤 실패나 고난을 당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일부러 이것을 보내셨다’고 단정할 필요도 없고, 반대로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주님의 섭리는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방향으로 쉬지 않고 역사합니다.

 

여기서 ‘내 편’이라는 말의 의미도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만일 ‘내 편’이라는 것이 ‘내가 옳든 그르든 나를 지지해 주는 것’을 뜻한다면, 주님은 결코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편이 아니십니다. 내가 거짓을 말하면 상대방이 아무리 나쁜 사람이어도 주님께서 내 거짓을 진리라고 해주시지 않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미워하면서 ‘저 사람은 악인이니까 하나님도 내 미움을 인정하시겠지’라고 생각해도 주님께서는 미움을 선으로 바꾸어 주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사람의 편을 들어 진리를 바꾸시는 분이 아니라, 사람을 진리의 편으로 이끄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내 편’이라는 말을 ‘나의 영원한 선을 바라시고 끝까지 나를 구원으로 이끄시는 분’이라는 뜻으로 사용한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주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철저하게 우리 편이십니다. 내가 잘못된 길을 선택할 때조차 즉시 버리지 않으시고, 나의 자유와 ‘합리성’, 곧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를 이해하고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보존하시면서 계속 돌아올 길을 마련하십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는 것보다 내가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때로는 바로 그것 때문에 주님이 내 편이 아닌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생각하면 이것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아이 둘이 싸우는데 한 아이가 부모에게 ‘엄마는 누구 편이야?’라고 묻는다면 좋은 부모는 무조건 자기 아이의 행동을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자기 아이가 잘못했다면 오히려 자기 아이를 바로잡습니다. 그렇다고 그 아이를 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네 잘못까지 사랑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이것보다 훨씬 완전합니다. 주님은 ‘나’를 사랑하시지만 ‘내 악’을 사랑하지 않으십니다. 나를 구원하기 원하시기 때문에 오히려 내가 붙들고 있는 악과 거짓에는 반대하십니다. 그래서 때로는 주님이 ‘나를 반대하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사실은 주님께서 ‘내 안의 나를 파괴하는 것’을 반대하고 계시는 순간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기도의 의미도 바꾸어 놓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내 편으로 끌어오는 일’이 아닙니다. 내가 세운 계획을 하나님께 설명하고 승인을 받아내는 것도 아닙니다. 기도는 점점 내가 주님의 뜻과 질서에 맞추어지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겟세마네에서 보여 주신 기도의 질서는 깊습니다.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고백은 자신의 뜻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자신의 뜻을 아버지의 뜻 아래 두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은 ‘하나님, 제 편이 되어 주십시오’에서 조금씩 ‘주님, 제가 주님의 편에 서게 해주십시오’로 변화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앞에서 나눈 여러 질문과도 하나로 이어집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니까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나는 전도를 많이 했으니 구원받을 거야’, ‘나는 주님께 헌신했으니 큰 상을 받을 거야’, ‘나는 죽으면 곧 주님 품에 안기겠지’라는 말들에는 공통적으로 ‘나’를 중심으로 하나님을 바라볼 위험이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됨도, 전도도, 헌신도, 천국의 소망도 모두 귀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의 중심이 ‘주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해주실 것인가?’에 머물면 신앙의 중심에 여전히 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거듭남’(regeneration)은 그 중심이 서서히 바뀌어 가는 과정입니다. ‘주님께서 내 뜻을 이루어 주시는가?’에서 ‘나는 주님의 뜻을 사랑하게 되었는가?’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인데 왜 하나님은 내 편이 아니실 때가 있지?’라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나를 사랑하시지만, 언제나 내 욕망의 편을 드시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내 안의 거짓과 악에는 반대하시며, 내가 선과 진리의 편에 서도록 이끄십니다.’

 

조금 더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주님은 내가 옳기 때문에 내 편이 되시는 분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내가 옳은 것의 편에 서도록 이끄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질문에서 가장 중요한 문장을 하나만 남긴다면 이것을 택하겠습니다. ‘신앙이 깊어진다는 것은 하나님을 내 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점점 하나님의 편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을 특권에서 거듭남으로, 보호받을 권리에서 아버지를 닮아 가는 삶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SY.124,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참여하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믿었던 사울’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참여하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믿었던 사울 - 열심보다 중요한 진리 사울(사도 바울의 회심 전 이름)은 하나님을 미워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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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122, ‘나는 사후 눈 뜨면 주님 품에 안겨 있겠지?’

‘나는 사후 눈 뜨면 주님 품에 안겨 있겠지?’ - 죽음 직후 우리를 맞이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예수 믿으니까 죽은 뒤 눈을 뜨면 곧바로 주님 품에 안겨 있겠지.’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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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후 눈 뜨면 주님 품에 안겨 있겠지?’ - 죽음 직후 우리를 맞이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예수 믿으니까 죽은 뒤 눈을 뜨면 곧바로 주님 품에 안겨 있겠지.’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에게는 아주 자연스럽고 따뜻한 기대입니다. 그리고 이 말에는 분명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죽음은 주님에게서 떨어져 미지의 세계로 내던져지는 사건이 아니며, 주님의 섭리와 보호는 죽음의 순간에도 중단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묘사하는 사후의 깨어남을 따라가 보면, 이 표현은 조금 다듬을 필요가 있습니다. ‘죽자마자 눈을 뜨면 예수님께서 눈앞에 서 계시고, 내가 그분의 품에 문자 그대로 안긴다’고 단정하기보다는, ‘사후의 첫 순간부터 나는 주님의 보호와 인도 안에 있다’고 말하는 편이 훨씬 정확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1758)에서 묘사하는 죽음 직후의 장면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육체의 기능이 멈춘 뒤에도 사람의 영은 살아 있으며, 천사들이 그 사람 곁에서 깨어남을 돕습니다. 처음에는 천적 천사들이 가까이하며 아주 평화로운 상태 속에서 그 사람을 보호하고, 이후 그의 상태가 변화함에 따라 다른 천사들과 영들이 함께합니다. 다시 말해 죽음 직후의 사람은 홀로 버려지지 않습니다. 자연계의 육체를 벗는 그 가장 낯선 순간부터 천국의 질서 안에서 세심하게 보호받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눈을 뜨면 주님 품에 있다’는 표현은 영적으로 매우 아름다운 진실을 담고 있습니다. 천사들이 사람을 보호한다고 해도 그 보호의 근원은 천사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구별이 하나 있습니다. ‘주님의 품에 있다’는 것과 ‘나는 곧바로 천국의 최종 거처에 들어간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에는 ‘영들의 세계’(world of spirits)가 있습니다. 이것은 천국과 지옥 사이에 있는 중간 상태이며, 사람이 자연계에서 형성한 자신의 진정한 내면이 드러나는 곳입니다. 죽었다고 해서 갑자기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억도 인격도 사랑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처음에는 자연계에서의 외적 모습과 상당히 비슷하지만, 점차 외면이 벗겨지고 그 사람의 실제 ‘지배적 사랑’(ruling love)이 나타납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인이니까 눈 뜨면 주님 품에 있겠지’라는 생각이 자칫 위험한 확신으로 변할 수도 있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나는 전도를 많이 했으니 구원받을 거야’, ‘나는 주님께 헌신적으로 살았으니 큰 상을 받을 거야’와 같은 원리입니다. 교회에 오래 다녔는지, 목회했는지, 성경을 많이 읽었는지, 주님의 이름을 얼마나 많이 불렀는지가 사후에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그 사람의 최종적 영적 상태를 대신하지는 못합니다. 결국 드러나는 것은 ‘나는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며 살았는가?’입니다.

 

그래서 사후세계에는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자연계에서는 자신을 매우 신앙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도 외적인 신앙의 껍질이 벗겨진 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자신의 지배적 사랑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세상에서 별로 주목받지 못했고 화려한 신앙 경력도 없었던 사람이 실제로는 양심에 따라 살고 악을 죄로 여겨 피하며 이웃에게 선을 행하기를 사랑했던 사람으로 드러날 수도 있습니다. 사후에는 ‘나는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했는가?’보다 ‘나는 실제로 어떤 사람이 되어 있었는가?’가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사후에 주님을 직접 만나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은 천국의 중심이며 천국 전체를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천사들은 모두 주님을 바라보고, 천국의 모든 선과 진리와 생명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따라서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은 단순히 아름다운 장소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질서를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여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께 가까이 간다’는 것도 공간적으로 몇 미터 앞에 계신 주님에게 가까이 가는 것보다 ‘내 사랑이 주님의 사랑과 얼마나 조화를 이루는가?’라는 상태의 문제입니다.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역설이 생깁니다. 주님께서는 사후에 갑자기 우리를 사랑하기 시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이미 우리를 붙들고 계십니다. 죽은 뒤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자연계에서 만들어 놓았던 수많은 외적인 것들이 벗겨지면서 ‘내가 주님의 사랑을 얼마나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으로 되어 있는가?’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에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문제는 그 사랑을 받아들일 우리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주님 품’이라는 표현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으면 더욱 깊어집니다. 주님의 품은 단순히 사후에 한 번 경험하는 포옹이라기보다 주님의 사랑과 보호와 질서 안에 거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것은 죽은 뒤에 처음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악을 죄로 여겨 피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유용한 일’(use)을 기쁘게 행할 때 이미 주님의 품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거듭남’(regeneration)이란 어쩌면 사후에 주님 품에 안길 준비라기보다, 지금부터 그 품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되어 가는 과정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죽음의 순간을 두려워해야 할까요? 스베덴보리의 사후 묘사를 받아들인다면 오히려 상당한 위로가 있습니다. 죽음은 의식이 영원히 꺼지는 순간도 아니고, 영혼이 홀로 어둠 속으로 떨어지는 순간도 아닙니다. 자연계의 몸을 벗고 영적 감각이 열리면서 이미 자신을 둘러싸고 있었던 영계를 의식하기 시작하는 전환입니다. 그리고 그 깨어남 자체가 주님의 질서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죽을 때 내가 혼자이면 어떡하지?’라는 두려움에 대해서는 ‘혼자가 아닙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만 ‘나는 예수 믿었으니 눈 뜨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났고 천국행이 확정되어 있겠지’라고 생각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사후의 깨어남은 끝이라기보다 진실이 드러나는 시작입니다. 그곳에서는 교단도 직분도 평판도 종교적 이력도 우리의 내면을 가려 주지 못합니다. 내가 사랑한다고 말했던 주님을 실제로 사랑했는지, 내가 믿는다고 고백했던 진리를 실제 삶에서 받아들였는지, 체어리티(charity)가 내 삶 속에서 실제적인 선으로 나타났는지가 점점 분명해집니다.

 

그래서 ‘나는 사후 눈 뜨면 주님 품에 안겨 있겠지?’라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하고 싶습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의 순간에도 주님의 보호 밖으로 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의 품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만으로 자동 배정되는 자리가 아니라, 우리가 평생 받아들인 주님의 사랑과 선이 결국 우리 자신의 사랑이 되어 드러나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죽어서 눈을 뜬 다음 주님 품에 안기는 것만 기다릴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악을 하나씩 내려놓고, 진리를 받아들이고, 사람을 사랑하며, 자신의 자리에서 선한 ‘유용한 일’을 행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주님의 품 안에서 살아가기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후에 전혀 낯선 주님을 처음 만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부터 사랑하고 따르던 주님을 더 분명한 세계에서 계속 따라가는 것입니다.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죽음 뒤에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나를 받아 주실 것인가가 아니라, 언제나 나를 받아들이고 계셨던 주님의 사랑을 내가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며 받아들였는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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