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20.심화

 

4. ‘1:1, 3-4, 9

 

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9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1, 3-4, 9)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God was the Word. All things were made by him, and without him was not anything made that was made. In him was life, and the life was the light of men. And the light shineth in darkness. He was the true light, which lighteth every man that cometh into the world (John 1:1, 3–4, 9).

 

 

이 요한복음 1장 구절이 AC.20에 인용된 이유는, 창세기 1장의 빛이 있으라’는 말씀이 단순한 물리적 빛의 창조가 아니라, 주님 자신으로부터 오는 생명과 진리의 유입을 뜻한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AC.20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거듭남의 첫 단계에 들어설 때, 비로소 주님이 계시며, 그분이 선 자체요 진리 자체이심’을 알게 된다고 설명했는데, 요한복음 1장은 바로 그 진리를 가장 직접적으로 선언하는 본문입니다.

 

먼저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는 선언은, 창세기 1장의 태초’를 다시 해석하는 열쇠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말씀(the Word)은 단순한 언어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 자체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는 주님과 분리된 무엇이 아니라, 곧 하나님 자신입니다. 따라서 창세기의 창조는 물질 우주를 만드는 사건 이전에, 신적 진리가 인간 안에 질서를 세우는 과정으로 읽혀야 합니다.

 

이어지는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다’는 말씀도 같은 맥락입니다. 여기서 만물’은 단지 자연계만이 아니라, 인간 안에서 새롭게 형성되는 모든 영적 질서까지 포함합니다. 즉, 거듭남 속에서 이루어지는 새 창조 역시 말씀, 곧 주님의 진리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AC 전체의 흐름에서 보면, 창세기 1장의 여섯 날은 모두 이 말씀의 역사’에 의해 진행됩니다.

 

특히 AC.20과 직접 연결되는 부분은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는 말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생명과 빛을 분리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단순히 빛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생명 자체이시며, 그 생명이 인간 안에서는 ’으로 경험됩니다. 다시 말해, 사람이 진리를 보기 시작하는 것은 단순한 지적 계몽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그 안에 스며들기 시작한 결과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의 빛이 있으라’는 말은 단순히 우주 공간에 광자가 생겼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 안에 처음으로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의 빛’이 비치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AC.20에서 말하는 빛의 최초 침투’가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은 그 빛 안에서 자기 선이 사실은 선이 아니었음을 보고, 동시에 주님만이 선과 진리의 근원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또한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였다’는 흐름도 AC.20의 문맥과 깊이 연결됩니다. 거듭남 이전 인간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속에 있기 때문에, 빛이 와도 그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참 빛’은 모든 사람에게 비춥니다. 이는 거듭남의 시작이 인간 쪽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먼저 비추시는 주님의 역사라는 뜻입니다.

 

결국 AC.20에서 이 요한복음 구절이 인용된 이유는, 창세기 1장의 ’을 올바르게 이해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빛은 물리적 빛 이전에, 주님 자신에게서 나오는 생명의 빛이며, 말씀의 빛이며, 인간 안에서 거듭남을 시작하게 하는 진리의 빛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은 창세기 1장의 속뜻을 해설하는 복음서적 열쇠 역할을 합니다.  창조의 빛’은 곧 말씀의 빛’이며, 그 빛은 결국 주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AC.20, 창1:3, '빛의 첫 인식 : 자기 선이 무너지고 주님을 알기 시작하는 때'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And God said,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창1:3) AC.20 첫 번째 상태는 사람이 선과 진리가 더 높은 어떤 것임을 알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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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 심화 3, ‘요8:24’

AC.20.심화 3. ‘요8:24’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요8:24) Except ye believe that I am, ye shall die in your sins (John 8:24). 이 요한복음 8장 24절이 AC.20에 인용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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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심화

 

3. ‘8:24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8:24) Except ye believe that I am, ye shall die in your sins (John 8:24).

 

 

이 요한복음 8 24절이 AC.20에 인용된 이유는, 거듭남의 첫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단순한 도덕 개선이나 종교적 관심이 아니라, ‘주님이 누구이신가’를 아는 것임을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AC.20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처음으로 빛 안에 들어오기 시작할 때, 비로소 자기 선이 선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동시에 주님이 계시며, 그분이 선 자체요 진리 자체이심’을 알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바로 그 지점을 뒷받침하기 위해 이 구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주님은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핵심은 단순히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는 정도가 아닙니다. ‘내가 그이다(I am)라는 표현은 매우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이는 단순한 자기소개가 아니라, 생명과 존재의 근원이 바로 주님 자신이라는 선언입니다. 다시 말해,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사람은 자기 자신 안에 갇힌 채 머무르게 된다는 뜻입니다.

 

AC.20의 흐름에서 보면, 거듭남 이전 사람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선으로 여기고, 그것을 지지하는 생각들을 진리라고 믿습니다. 즉,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삼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빛이 비치기 시작하면, 사람은 처음으로 내 기준이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단계로, 선과 진리의 실제 근원이 자기 밖에, 곧 주님 안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여기서 요8:24가 결정적으로 들어옵니다. 주님이 누구이신지를 알지 못하면, 사람은 여전히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살아가게 되고, 결국 자기 사랑과 거짓 안에 머무르게 됩니다. 이것이 죄 가운데서 죽는 것’입니다. 여기서 죽음’은 육체적 죽음보다 먼저, 영적 죽음을 뜻합니다. 곧 주님과 분리된 상태입니다.

 

반대로, ‘주님이 그이시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선과 진리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AC.20에서 말하는 빛의 최초 침투’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단순한 교리적 선언이 아니라, 거듭남의 출발 조건을 말하는 말씀으로 인용된 것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믿음’을 단순한 교리 동의로 이해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에게 믿음은 주님의 존재와 본질을 인정하고, 자기중심의 삶에서 벗어나 주님 중심의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방향 전환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예수를 믿지 않으면 벌받는다’는 식의 협박으로 읽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선과 진리의 근원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인간은 자기 안의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영적 원리를 밝히는 말씀으로 읽혀야 합니다.

 

결국 AC.20에서 이 구절이 인용된 이유는, 거듭남의 첫 빛은 언제나 주님 인식’과 함께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먼저 자기 선의 한계를 보고, 이어서 주님만이 선 자체요 진리 자체이심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인식이 죄와 어둠에서 생명과 빛으로 넘어가는 문이 되는 것입니다.

 

 

 

AC.20, 심화 4, ‘요1:1, 3-4, 9’

AC.20.심화 4. ‘요1:1, 3-4, 9’ 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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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 심화 2, ‘스베덴보리의 경험’

AC.20.심화 2. ‘스베덴보리의 경험’ 위 심화 1번에 이어지는 질문인데요, 스베덴보리는 이런 걸 어떻게 알았을까요? 본인이 직접 이런 과정을 밟은 건가요? 이 질문은 스베덴보리 연구에서 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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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8.심화

 

3. ‘51:9-11

 

9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 능력을 베푸소서 옛날 옛 시대에 깨신 것 같이 하소서 라합을 저미시고 용을 찌르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며 10바다를, 넓고 깊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받은 자들을 건너게 하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니이까 11여호와께 구속받은 자들이 돌아와 노래하며 시온으로 돌아오니 영원한 기쁨이 그들의 머리 위에 있고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이다 (51:9-11) Awake as in the ancient days, in the generations of old. Art not thou it that drieth up the sea, the waters of the great deep, that maketh the depths of the sea a way for the ransomed to pass over? Therefore the redeemed of Jehovah shall return (Isa. 51:9–11).

 

 

이 이사야 51장 구절이 AC.18에 인용된 이유는, 창세기 1 2절의 깊음(deep),  깊음 위의 흑암’이 단순한 바다나 물리적 심연이 아니라, 거듭나기 이전 인간 안에 있는 욕망과 거짓의 혼돈 상태’를 뜻한다는 사실을 성경 자체로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특별히 바다’, ‘깊은 물’, ‘’, 그리고 구속받은 자들이 건너가는 길’이라는 이미지들을 통해, 창조와 구원이 동일한 영적 구조 안에 있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먼저 이 본문은 단순히 출애굽 사건을 회상하는 시가 아닙니다. 문자적으로는 홍해를 가르시고, 백성을 건너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이지만, 스베덴보리는 그 속뜻에서 이것을 거듭남 이전의 혼돈 상태로부터 인간을 건져 내시는 주님의 역사’로 읽습니다. 그래서 바다’와 깊은 물’은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라, 인간 안에 있는 깊은 혼란과 시험의 상태를 뜻합니다.

 

특히 라합을 저미시고 용을 찌르신 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말씀에서 (dragon)이나 바다 괴물’은 흔히 자기 사랑과 거짓, 그리고 그것에서 나오는 교만한 추론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 안에서 주님의 질서를 거스르는 가장 깊고 원초적인 상태를 상징합니다. 이것은 AC.18에서 말한 깊음’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창세기 1 2절의 깊음’은 아직 질서 잡히지 않은 인간의 욕망과 거짓의 심연이며, 이사야는 그것을 바다의 깊은 물’과 ’이라는 상징으로 다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바다를 말리시고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받은 자들을 건너게 하셨다’는 표현도 결정적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기적 이야기가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 안의 혼돈과 시험 가운데 ’을 내신다는 뜻입니다. 즉, 거듭남은 혼돈이 없는 상태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깊음 한가운데서 주님께서 길을 여심으로 시작됩니다. 그래서 AC.18에서 스베덴보리는 깊음’이 단지 부정적 상태만이 아니라, 동시에 주님의 영이 움직이시기 시작하는 자리라는 점을 말하려 했습니다.

 

이어지는 구속받은 자들이 돌아와 시온으로 돌아온다’는 말은, 거듭남의 결과를 뜻합니다. ‘시온’은 주님과의 사랑의 상태, 곧 회복된 교회와 회복된 인간 내면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깊은 물을 건넌다는 것은 단순히 위험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혼돈 상태에서 질서와 평안의 상태로 이동하는 영적 여정을 뜻합니다.

 

결국 이 본문이 AC.18에 인용된 이유는 매우 분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의 깊음’을 설명하면서, 그것이 단순한 우주론적 바다가 아니라 인간 안의 영적 혼돈 상태이며, 주님은 바로 그 깊음 속에서 길을 내시고 사람을 구속하여 새 창조로 이끄신다는 사실을 이사야 51장을 통해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조와 출애굽과 거듭남은 모두 같은 구조를 갖습니다.  혼돈의 깊음  주님의 역사  길의 열림  구속받은 자의 귀환’이라는 구조입니다.

 

 

 

AC.18, 창1:2, '깊음의 황폐 : 욕정과 거짓이 말라야 새 생명이 열린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8 ‘깊음’(faces of the deep)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욕정(cupidities)과, 그로 말미암는 거짓(fals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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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8, 심화 2, 라틴어 ‘vastatio’의 영역 ‘vastation’과 ‘desolation’(혹은 ‘devastation’)의 비교

AC.18.심화 2. 라틴어 ‘vastatio’의 영역 ‘vastation’과 ‘desolation’(혹은 ‘devastation’)의 비교 AC 포츠역 영어 ‘vastation’은 현대 사전엔 잘 안 나오고, 대신 ‘desolation’이 나오네요. ‘vast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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