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4

 

8절,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Verse 8, And Cain talked to Abel his brother; and it came to pass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hat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r, and slew him.

 

※ 8절 속뜻

 

 

 

366.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는 시간의 경과를 상징합니다. “Cain spake to Abel” signifies an interval of time.

 

‘가인’은 앞서 기술처럼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아벨’은 이웃 사랑, 곧 신앙의 아우를 각각 상징하며, 그래서 여기서 그는 두 번 ‘아우’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Cain,” as before stated, signifies faith separated from love; and “Abel” charity, the brother of faith, on which account he is here twice called his “brother.”

 

‘들’은 무엇이든지 교리에 속한 것을 상징합니다. A “field” signifies whatever is of doctrine.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는 분리된 신앙이 이웃 사랑의 불을 꺼트렸음을 상징합니다.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r, and slew him” signifies that separated faith extinguished charity.

 

 

367. 이웃 사랑이 신앙의 ‘아우’라는 것과, ‘들’이 교리에 속한 무언가를 상징한다는 걸 증명하기 위한 것 말고는 이들 아케이나 확증을 위해 굳이 말씀 내 유사 구절들을 찾는 것은 불필요합니다. It is unnecessary to confirm these things by similar passages from the Word, except so far as to prove that charity is the “brother” of faith, and that a “field” signifies whatever is of doctrine.

 

이웃 사랑이 신앙의 ‘아우’라는 사실은 신앙의 속성이나 본질상 누구에게나 자명합니다. That charity is the “brother” of faith is evident to everyone from the nature or essence of faith.

 

이 형제지간(兄弟之間)이 에서와 야곱으로 표현되었으며, 그 장자권 및 그로 말미암은 주도권 다툼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This brotherhood was represented by Esau and Jacob, and was the ground of their dispute about the birthright and the consequent dominion.

 

이것은 또한 유다로 말미암은 다말의 두 아들, 베레스와 세라로 (창38:28-30),

 

28해산할 때에 손이 나오는지라 산파가 이르되 이는 먼저 나온 자라 하고 홍색 실을 가져다가 그 손에 매었더니 29그 손을 도로 들이며 그의 아우가 나오는지라 산파가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터뜨리고 나오느냐 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베레스라 불렀고 30그의 형 곧 손에 홍색 실 있는 자가 뒤에 나오니 그의 이름을 세라라 불렀더라 (창38:28-30)

 

또 에브라임과 므낫세(창48:13-14)로도 표현되었습니다.

 

13오른손으로는 에브라임을 이스라엘의 왼손을 향하게 하고 왼손으로는 므낫세를 이스라엘의 오른손을 향하게 하여 이끌어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매 14이스라엘이 오른손을 펴서 차남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왼손을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엇바꾸어 얹었더라 (창48:13-14)

 

이 둘도 다른 유사한 경우들과 같이 장자권과 그로 인한 주도권 다툼이 있습니다. It was also represented by Pharez and Zarah, the sons of Tamar by Judah (Gen. 38:28, 29, 30); and by Ephraim and Manasseh (Gen. 48:13, 14); and in both of these, as well as in other similar cases, there is a dispute about the primogeniture and the consequent dominion.

 

신앙과 이웃 사랑은 교회의 자식들이기 때문에, For both faith and charity are the offspring of the church.

 

신앙을 일컬어 ‘남자’라 하였고, 이 장 1절에 나오는 ‘가인’을 가리켰지요, 이웃 사랑을 일컬어 ‘아우’라 불렀습니다. 사19:2, 렘13:14 및 다른 데서들도 말이지요. Faith is called a “man,” as was Cain, in verse 1 of this chapter, and charity is called a “brother,” as in Isa. 19:2; Jer. 13:14; and other places.

 

내가 애굽인을 격동하여 애굽인을 치리니 그들이 각기 형제를 치며 각기 이웃을 칠 것이요 성읍이 성읍을 치며 나라가 나라를 칠 것이며 (사19:2)

 

또 그들로 피차 충돌하여 상하게 하되 부자 사이에도 그러하게 할 것이라 내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사랑하지 아니하며 아끼지 아니하고 멸하리라 하셨다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13:14)

 

신앙과 이웃 사랑 간 결합을 ‘형제의 계약’(암1:9)이라 합니다. The union of faith and charity is called “the covenant of brethren.” (Amos 1:9)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두로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그 형제의 계약을 기억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로잡은 자를 에돔에 넘겼음이라 (암1:9)

 

가인과 아벨의 상징과 비슷한 것이 방금 말씀드린 야곱과 에서의 상징이었습니다. 야곱 역시 그의 형 에서를 대신하고 싶어 했다는 점에서 그런데요, 호세아를 보면 분명합니다. Similar to the signification of Cain and Abel was that of Jacob and Esau, as just said; in that Jacob also was desirous of supplanting his brother Esau, as is evident also in Hosea:

 

2야곱을 그 행실대로 벌하시며 그의 행위대로 그에게 보응하시리라 3야곱은 모태에서 그의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To visit upon Jacob his ways, according to his doings will he recompense him; he supplanted his brother in the womb. (호12:2-3)

 

그러나 에서, 곧 에서로 표현된 이웃 사랑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주도권을 쥘 것이라는 내용이, 그들의 아버지 이삭의 예언을 보면 나옵니다. But that Esau, or the charity represented by Esau, should nevertheless at length have the dominion, appears from the prophetic prediction of their father Isaac: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 하였더라 By thy sword shalt thou live, and shalt serve thy brother; and it shall come to pass, when thou hast the dominion, that thou shalt break his yoke from off thy neck. (창27:40)

 

또는 같은 건데요, 이방인들의 교회, 혹은 새 교회는 에서로, 유대인들의 교회는 야곱으로 표현됩니다. 그 이유는,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형제로 여겨야 한다는 말을 아주 자주 듣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의 교회, 혹은 원시 교회에서는 이웃 사랑으로 모두가 형제로 불렸습니다. Or what is the same, the church of the gentiles, or new church, is represented by Esau, and the Jewish church is represented by Jacob; and this is the reason for its being so often said that the Jews should acknowledge the gentiles as brethren; and in the church of the gentiles, or primitive church, all were called brethren, from charity.

 

마찬가지로 주님도 누가복음에서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들을 형제라 하셨습니다. Such as hear the Word and do it are likewise called brethren by the Lord (Luke 8: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하시니라 (눅8:21)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 말씀을 행하는 사람들은 이웃 사랑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들으면서, 혹은 신앙인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행함은 없는, 혹은 이웃 사랑은 없는 사람들, 이들은 형제가 아닙니다. 주님은 이런 사람들을 어리석은 사람들에 비유하셨기 때문입니다. those who hear are such as have faith; those who do are such as have charity; but those who hear, or say that they have faith, and do not, or have not charity, are not brethren, for the Lord likens them unto fools (Matt. 7:24, 26).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마7:24)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마7:26)

 

 

368. ‘들’이 교리를, 그리고 결과적으로 신앙과 이웃 사랑의 교리에 속한 것이면 무엇이나 상징한다는 것은 다음 예레미야 말씀을 보면 분명합니다. That a “field” signifies doctrine, and consequently whatever belongs to the doctrine of faith and charity, is evident from the Word, as in Jeremiah:

 

들에 있는 나의 산아 네 온 영토의 죄로 말미암아 내가 네 재산과 네 모든 보물과 산당들로 노략을 당하게 하리니 (17:3) O my mountain in the field, I will give thy possessions [facultates] and all thy treasures for a spoil.

 

이 구절에서, ‘들’은 교리를, ‘재산’과 ‘보물’은 신앙의 영적인 부(富), 혹은 신앙의 교리에 속한 것들을 뜻합니다. 다음 말씀도 같습니다. In this passage “field” signifies doctrine; “possessions” and “treasures” denote the spiritual riches of faith, or the things that belong to the doctrine of faith. In the same:

 

레바논의 눈이 어찌 들의 바위를 떠나겠으며 먼 곳에서 흘러내리는 찬물이 어찌 마르겠느냐 (18:14) Shall the snow of Lebanon fail from the rock of my field?

 

신앙의 교리의 결핍 시, 시온을 향하여 선포하시기를, ‘시온은 밭 같이 경작지가 될 것’이라 하십니다. It is declared concerning Zion, when destitute of the doctrine of faith, that she shall be “plowed like a field.” (Jer. 26:18, Micah 3:12)

 

유다의 왕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가 유다의 모든 백성에게 예언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시온은 밭 같이 경작지가 될 것이며 예루살렘은 돌 무더기가 되며 이 성전의 산은 산당의 숲과 같이 되리라 하였으나 (렘26:18)

 

이러므로 너희로 말미암아 시온은 갈아엎은 밭이 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이 되리라 (미3:12)

 

에스겔에서 In Ezekiel:

 

또 그 땅의 종자를 꺾어 옥토에 심되 수양버들 가지처럼 큰 물 가에 심더니 (17:5) He took of the seed of the land, and set it in a field of sowing,

 

교회와 교회의 신앙을 다루고 있습니다. 교리를 일컬어 그 안에 종자가 있는 ‘들’이라 하기 때문입니다. treating of the church and of its faith; for doctrine is called a “field” from the seed in it.

 

같은 본문에서 In the same:

 

들의 모든 나무가 나 여호와는 높은 나무를 낮추고 낮은 나무를 높이며 푸른 나무를 말리고 마른 나무를 무성하게 하는 줄 알리라 나 여호와는 말하고 이루느니라 하라 (17:24) And let all the trees of the field know that I Jehovah bring down the high tree.

 

요엘입니다. In Joel:

 

10밭이 황무하고 토지가 마르니 곡식이 떨어지며 새 포도주가 말랐고 기름이 다하였도다 11농부들아 너희는 부끄러워할지어다 밭의 소산이 다 없어졌음이로다 12밭의 모든 나무가 다 시들었으니 (1:10-12) The field is laid waste, the ground mourneth, for the corn is wasted, the new wine is dried up, the oil languisheth, the husbandmen are ashamed, the harvest of the field is perished, all the trees of the field are withered,

 

여기 ‘밭’은 교리를, ‘나무’는 지식들을, ‘농부들’은 예배자들을 각각 상징합니다. where the “field” signifies doctrine, “trees” knowledges, and “husbandmen” worshipers.

 

시편에서 In David:

 

밭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즐거워할지로다 그 때 숲의 모든 나무들이 여호와 앞에서 즐거이 노래하리니  (96:12) The field shall exult and all that is therein; then shall all the trees of the forest sing,

 

여기서, ‘밭’이 어떻게 기뻐 어쩔 줄 몰라 하겠으며, ‘숲의 모든 나무들’이 어떻게 노래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 안에 있는 것들, 곧 신앙의 지식들 얘기인 것입니다. where it is perfectly evident that the field cannot exult, nor the trees of the forest sing; but things that are in man, which are the knowledges of faith.

 

예레미야에서 In Jeremiah:

 

언제까지 이 땅이 슬퍼하며 온 지방의 채소가 마르리이까 (12:4) How long shall the land mourn, and the herb of every field wither?

 

여기서도 분명한 것은, ‘땅’도, ‘지방의 채소’도 슬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표현들은 황폐함 가운데 있는 사람의 내면 속 어떤 것에 관한 것입니다. where it is also evident that neither the land nor the herbs of the field can mourn; but that the expressions relate to something in man while in a state of vastation.

 

비슷한 구절이 이사야에도 나옵니다. A similar passage occurs in Isaiah:

 

산들과 언덕들이 너희 앞에서 노래를 발하고 들의 모든 나무가 손뼉을 칠 것이며 (55:12) The mountains and the hills shall break forth before you into singing, and all the trees of the field shall clap their hands.

 

주님 또한 세상 종말 관련 예언 가운데 신앙의 교리를 가리켜 ‘밭’이라 하십니다. The Lord also in his prediction concerning the consummation of the age calls the doctrine of faith a “field:”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24:40; 17:36) Then shall two be in the field, the one shall be taken and the other left,

 

※ 개역개정 한글 성경에는 눅17:36 본문이 ‘(없음)’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밭’은 신앙의 교리, 곧 참과 거짓 둘 다를 의미합니다. where by a “field” is meant the doctrine of faith, both true and false.

 

‘밭’이 교리를 가리키기 때문에, 신앙의 씨앗을 받아들이는 누구든, 그것이 사람이든, 교회든, 아니면 세상이든, 또한 일컬어 ‘밭’이라 합니다. As a “field” signifies doctrine, whoever receives a seed of faith, whether a man, the church, or the world, is also called a “field.”

 

 

369. 이상으로부터, 그리고 다음 사실들이 이어집니다. 즉, 본문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가 가리키는 것은, 신앙과 이웃 사랑이 둘 다 신앙의 교리로부터 왔으면서도, 자기를 사랑에서 분리하는 신앙은 이웃 사랑을 무시하지 않고는 못 배기며, 그래서 결국은 이웃 사랑의 불을 꺼트린다는 사실입니다. From this then it follows that the words “Cain rose up against his brother Abel, and slew him,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ogether,” denote that while both faith and charity were from the doctrine of faith, yet faith separate from love could not but disregard and thereby extinguish charity;

 

오늘날의 경우를 보면, 이웃 사랑의 행위는 없이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입장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런 경우입니다. 바로 이런 가정으로 그들은 이웃 사랑의 불을 꺼트리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그들이 알고 있고, 입술로 고백하기를, 사랑 없이 신앙 만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as is the case at the present day with those who maintain that faith alone saves, without a work of charity, for in this very supposition they extinguish charity, although they know and confess with their lips that faith is not saving unless there is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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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4

 

7절,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Verse 7, If thou doest well, art thou not exalted? And if thou doest not well, sin lieth at the door; and to thee is his desire, and thou rulest over him.

 

※ 7절 속뜻

 

 

 

361.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가 상징하는 것은, 네가 선에 대해 호의적이면 너는 이웃 사랑을 가졌다는 것이며,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가 상징하는 것은, 네가 만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이웃 사랑은 전혀 없고, 대신 악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If thou doest well, an uplifting” signifies that if thou art well disposed, thou hast charity; “if thou doest not well, sin lieth at the door” signifies that if thou art not well disposed, thou hast no charity, but evil.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가 상징하는 것은, 이웃 사랑은 신앙과 함께, 같이 지내는 걸 원하지만 그럴 수가 없는 게, 신앙이 이웃 사랑을 다스리고 지배하려고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To thee is his desire, and thou rulest over him” signifies that charity is desirous to be with thee, but cannot because thou desirest to rule over it.

 

 

362. ‘가인’이라 하는 신앙의 교리를 여기서 설명하고 있는데요,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하면, 그 결과, 이웃 사랑으로부터도 분리됩니다. 이웃 사랑은 사랑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The doctrine of faith called “Cain” is here described, which in consequence of separating faith from love, separated it also from charity, the offspring of love.

 

어디든지 교회가 있는 곳이면 이단들이 일어나는데요, 사람들은 신앙의 어떤 특별한 조항에 과도한 관심을 기울이다가 그만 그걸 메인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런 게 바로 인간 사고의 본성인데요, 사람은 어떤 것 하나에 과도한 관심을 보이다가 그걸 다른 것 앞에 두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며, 이런 경향은 특히 그가 그걸 자신의 고유한 발견이라고 주장할 때라든지, 그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 부풀어 올랐을 때 그렇습니다. Wherever there is any church, there arise heresies, because while men are intent on some particular article of faith they make that the main thing; for such is the nature of man’s thought that while intent on some one thing he sets it before any other, especially when his imagination claims it as a discovery of his own, and when the love of self and of the world puff him up.

 

그렇게 되면, 그때부터는 모든 것이 다 그것에 들어맞는 것 같고, 그것이 사실임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그는 결국 그것이 맞다 맹세까지 하게 됩니다. 심지어 그것이 거짓이더라도 말이지요. Everything then seems to agree with and confirm it, until at last he will swear that it is so, even if it is false.

 

바로 이런 식으로,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은 신앙을 사랑보다도 더 본질적인 걸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결과적으로 사랑 없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이런 삶에서 비롯된 자아와 판타지 둘 다에 대한 사랑으로 그들은 그런 어처구니없는 확신 가운데 있게 된 것입니다. Just in this way those called “Cain” made faith more essential than love, and as they consequently lived without love, both the love of self and the fantasy thence derived conspired to confirm them in it.

 

 

363. ‘가인’이라 부르는 신앙의 교리의 본질을 이 구절 설명 중 그 부분을 보면 알 수 있는데요, 그걸 보면, 이웃 사랑은 신앙과 결합할 수 있었다는 것, 그러나 신앙이 아닌 이웃 사랑이 주가 되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The nature of the doctrine of faith that was called “Cain” is seen from the description of it in this verse, from which it appears that charity was capable of being joined to faith, but so that charity and not faith should have the dominion.

 

이런 이유로,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를 먼저 거론한 것입니다. 이 표현은 선에 대해 호의적이면 이웃 사랑도 있을 수 있음을 상징합니다. ‘선을 행하다’의 속뜻이 기꺼이 선을 선택하고자 하는 마음인데요,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은 선한 일을 마음먹는 것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On this account it is first said, “If thou doest well art thou not uplifted?” signifying, If thou art well disposed, charity may be present; for to “do well” signifies, in the internal sense, to be well disposed, since doing what is good comes from willing what is good.

 

고대에는 행위와 의지가 하나였습니다. 행위를 보면, 그 의지를 알 수 있었지요. 그때는 위선이 뭔지도 모르던 시절이었습니다. In ancient times action and will made a one; from the action they saw the will, dissimulation being then unknown.

 

‘낯을 들다’가 이웃 사랑이 있다를 상징함은 얼굴에 대해 이미 말씀드린 내용을 보시면 분명한데요, 거기에 보시면, ‘낯을 들다’가 이웃 사랑을 가지고 있음을, 그리고 ‘낯을 떨구다’는 그 반대를 각각 상징하고 있습니다. That an “uplifting” signifies that charity is present is evident from what has been already said about the face, that to “lift up the face” is to have charity, and that for the “face to fall” is the contrary.

 

 

364. 두 번째로,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가 상징하는 것은, 만일 네가 선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다면 이웃 사랑은 전혀 있을 수 없고 대신 악이 있다는 것입니다. Secondly, it is said, “If thou doest not well, sin lieth at the door,” which signifies, If thou art not well disposed, there is no charity present, but evil.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은,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가 준비를 마치고 안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악을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웃 사랑이 전혀 없는 곳에는 오직 무자비함과 증오, 결과적으로는 모든 악만 있기 때문입니다. Everybody can see that “sin lying at the door” is evil ready and desirous to enter; for when there is no charity there are unmercifulness and hatred, consequently all evil.

 

보통, 죄를 일컬어 ‘악마’라고 부르는데, 지옥에 있는 이 악마의 동료들은 사람에게 이웃 사랑이 결핍될 때, 그 사람 마음의 문 아주 가까이 와 있습니다. 마음의 문에서 이 악마와 그의 동료들을 쫓아버리는 오직 유일한 방법은 주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Sin in general is called the “devil,” who, that is, his crew of infernals, is ever at hand when man is destitute of charity; and the only means of driving away the devil and his crew from the door of the mind is love to the Lord and toward the neighbor.

 

 

365. 세 번째입니다.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가 상징하는 것은, 이웃 사랑은 신앙과 함께, 같이 지내기를 원하지만 그럴 수가 없는 게, 신앙은 이웃 사랑을 다스리고 지배하려고 하기 때문이며, 그것은 질서에 반(反)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In the third place it is said, “Unto thee is his desire, and thou rulest over him,” by which is signified that charity is desirous to abide with faith, but cannot do so because faith wishes to rule over it, which is contrary to order.

 

신앙이 주도권을 쥐며, 지배하려고 하는 한, 그런 건 전혀 신앙이 아닙니다. 오직 이웃 사랑이 다스릴 때만 신앙이 됩니다. 위에서 보여드린 것처럼 이웃 사랑이 신앙의 주인공이기 때문입니다. So long as faith seeks to have the dominion, it is not faith, and only becomes faith when charity rules; for charity is the principal of faith, as was shown above.

 

이웃 사랑은 불에 비유할 수 있겠는데요, 불은 열과 빛의 본질이지요. 열과 빛이 불에서 나오기 때문인데, 분리 상태에 있는 신앙은 마치 불의 빛은 빛인데 열 없는 빛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빛이 있어도 만물이 무기력하게 죽어가는 겨울철 빛입니다. Charity may be compared to flame, which is the essential of heat and light, for heat and light are from it; and faith in a state of separation may be compared to light that is without the heat of flame, when indeed there is light, but it is the light of winter in which everything becomes torpid and d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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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3:20-24

 

20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And the man [homo] called his wife’s name Eve, because she was the mother of all living.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And Jehovah God made for the man and for his wife coats of skin, and clothed them. 22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And Jehovah God said, Behold, the man is become as one of us, knowing good and evil; and now lest he put forth his hand, and take also of the tree of lives, and eat, and live to eternity, 23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Therefore Jehovah God sent him forth from the garden of Eden, to till the ground from which he was taken. 24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And he cast out the man; and he made to dwell from the east toward the garden of Eden cherubim, and the flame of a sword turning itself, to keep the way of the tree of lives.

 

개요

 

280. 태고(太古) 교회와, 사라진 사람들이 여기서 간략하게 다루어집니다; 즉, 그 교회가 끝났을 때, 결국 홍수로 이어진 그 후손들을 포함한 이야기입니다. The most ancient church, and those who fell away, are here summarily treated of; thus also its posterity down to the flood, when it expired.

 

 

281. 20절은, 천적(天的, celestial)이었던 태고 교회에 관한 것입니다. 주님 신앙의 생명으로 시작한 교회이며, 이 교회를 가리켜 ‘하와’(Eve), ‘모든 산 자의 어머니’라 하였습니다. (20절) Of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was celestial, and from the life of faith in the Lord, called “Eve,” and the “mother of all living.” (verse 20)

 

 

282. 21절은, 그 첫 번째 후손에 관한 것으로, 그들에게는 천적 영적 선이 있었습니다; 이어 그 두 번째와 세 번째 후손에 관해서는, 그들에게는 자연적 선이 있었고, 그것을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지으신 가죽옷’으로 상징하였습니다. (21절) Of its first posterity, in which there was celestial spiritual good; and of its second and third, in which there was natural good, signified by the “coat of skin which Jehovah God made for the man and his wife.” (verse 21)

 

 

283. 22절은, 네 번째 후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거기서 자연적 선이 소멸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만일 그들이 신앙의 천적인 것들 안에서 새롭게 빚어지거나 가르침을 받고자 하였더라면, 그들은 소멸되어 버리고 말았을 텐데요,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의 의미가 바로 이런 내용입니다. (22절) Of the fourth posterity, in which natural good began to be dissipated, and which, had they been created anew or instructed in the celestial things of faith, would have perished, which is meant by, “Lest he put forth his hand, and take also of the tree of lives, and eat, and live to eternity.” (verse 22)

 

 

284. 23절은, 다섯 번째 후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후손에 이르러는 드디어 모든 선과 진리가 박탈되었고, 그리고 거듭남 이전 본래의 상태로 돌아갔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의 의미가 이런 내용입니다. (23절) Of the fifth posterity, which was deprived of all good and truth, and was reduced to the state in which they had been previous to regeneration, which is meant by his being “sent forth out of the garden of Eden to till the ground from which he was taken.” (verse 23)

 

 

285. 24절은, 여섯 번째, 그리고 일곱 번째 후손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 후손들은 선과 진리에 관한 모든 기억-지식을 박탈당했고, 그들의 본성에는 아주 더러운 사랑들과 신념들만 남았습니다; Of the sixth and seventh posterities, in that they were deprived of all memory-knowledge of what is good and true, and were left to their own filthy loves and persuasions;

이렇게 하지 않으면, 이들로 말미암아 신앙에 관한 거룩한 것들이 모독을 당할 것이기 때문인데요,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가 상징하는 것이 이런 내용입니다. (24절) this being provided lest they should profane the holy things of faith, which is signified by his being “driven out, and cherubim being made to dwell at the garden, with the flame of a sword, to keep the way of the tree of lives.” (verse 24)

 

배경

 

286. 이 장과 앞의 장들, 그리고 지금 보고 있는 이 절들에 이르기까지 다루어지고 있는 것은 태고 시대 사람들과 그들의 거듭남에 관한 내용입니다: 먼저, 들짐승처럼 살았던 사람들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들은 그러나 결국 영적인 사람들이 되었지요; 그다음은, 천적 인간이 된 사람들에 관한 내용입니다. 태고 교회를 구성한 사람들이 바로 이들입니다; 그 뒤에, 사라진 사람들과 그들의 자손들, 차례대로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후손들과 홍수 때까지 이른 그들의 계승자들에 관한 내용입니다. This and the preceding chapters, down to the verses now under consideration, treat of the most ancient people and of their regeneration; first, of those who lived like wild animals, but at length became spiritual men; then of those who became celestial men, and constituted the most ancient church; afterwards of those who fell away, and their descendants, in regular order through the first, second, and third posterities and their successors, down to the flood.

이 장을 포함, 이어지는 절들을 통해, 태고 교회의 사람이 형성된 때부터 홍수 때까지 이 기간에 일어난 일들에 대한 개요를 만나게 됩니다; 즉, 이것이 앞서 다룬 모든 내용, 곧 창세기 맨 앞 첫 세 장의 결론입니다. In the verses following, which conclude the chapter, we have a recapitulation of what occurred from the period when the man of the most ancient church was formed, until the flood; thus it is a conclusion to all that goes before.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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