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뜻이라면 반드시 일이 잘 풀릴 거야’

 

‘하나님의 뜻이라면 반드시 일이 잘 풀릴 거야.’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매우 자연스럽게 듣게 되는 말입니다. 어떤 일을 앞두고 기도했는데 예상보다 순조롭게 진행되면 ‘역시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시는구나’라고 생각하고, 반대로 계속 문제가 생기고 계획이 어그러지면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 보다’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시고 형통하게 하시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이삭의 아내를 구하러 가면서 ‘여호와께서 나의 길에서 나를 인도하사’라고 고백했고(창24:27), 요셉에 대해서도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라고 기록합니다(창39:2). 그러므로 어떤 일이 순조롭게 열릴 때 그것을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감사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여기에서 하나의 공식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 일이 잘 풀림’, 그리고 그 반대편에 ‘하나님의 뜻이 아님 = 일이 막힘’이라는 공식을 놓는 것입니다. 이 공식이 성립한다면 우리는 일이 얼마나 잘 풀리는지만 보아도 하나님의 뜻을 상당히 정확하게 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조금만 깊이 읽어 보면 이 공식은 곧 무너집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요셉입니다. 성경은 분명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함께하셨던 요셉의 삶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일이 잘 풀리는 삶’과 상당히 달랐습니다. 형들에게 미움을 받고 구덩이에 던져졌으며, 노예로 팔렸고, 보디발의 집에서 충성스럽게 일했지만, 거짓 고발을 받아 감옥에 갔습니다. 심지어 술 맡은 관원장은 요셉의 부탁을 잊어버렸습니다. 만일 요셉이 매 순간 ‘하나님의 뜻이라면 일이 잘 풀려야 한다’는 기준으로 자신의 삶을 해석했다면, 여러 차례 ‘나는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났나 보다’라고 결론 내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바로 그 막혀 있는 시간 속에서도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다’고 말합니다(창39:21).

 

바울의 삶은 더욱 분명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복음을 전하는 길은 언제나 순조롭게 열렸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고, 배가 파선하고, 사람들에게 쫓겨났습니다. 행16에서는 바울과 실라가 복음을 전하다 매를 맞고 깊은 감옥에 갇힙니다. 그런데 바로 그곳에서 한밤중에 기도하고 찬송했고, 옥문이 열렸으며, 간수와 그의 집이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행16:22-34).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의 뜻’과 ‘막힘’이 서로 반대편에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었기 때문에 감옥에 가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던 바로 그 길에서 감옥에 갔습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일이 아주 잘 풀린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을 피해 다시스로 도망하려 했을 때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가 있었습니다. 삯을 내니 배에도 탈 수 있었습니다(욘1:3). 상황만 놓고 보면 놀라울 만큼 길이 잘 열렸습니다. ‘기도했더니 마침 배가 있더라. 역시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셨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배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배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피해 달아나는 배였습니다.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사실을 보여 줍니다. ‘문이 열렸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의 뜻을 증명하지 않으며, ‘문이 닫혔다’는 사실 자체도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증명하지 않습니다. 열린 문으로 잘못 들어갈 수도 있고, 닫힌 문 앞에서 기다려야 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닫힌 문 자체가 주님의 인도하심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단지 우리가 통과해야 할 어려움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상황의 순조로움만으로 하나님의 뜻을 판별하려 하면 우리는 매우 쉽게 자기 욕망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실제로 주님께서 길을 막으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행16에서 바울 일행은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려 했지만, 성령께서 허락하지 않으셨고, 비두니아로 가려고 했으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행16:6-7). 이후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통하여 방향이 바뀝니다. 그러므로 일이 막히는 것을 전혀 무시해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환경의 열림과 닫힘은 우리가 분별할 때 참고해야 할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다만 그것 하나만으로 하나님의 뜻을 판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들어가면 이 문제는 더욱 깊어집니다. 주님의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이 자연계에서 원하는 일을 모두 성공시키는 데 있지 않고, 인간을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고 거듭나게 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대개 ‘이 일이 성공할 것인가’, ‘이 관계가 이루어질 것인가’, ‘사업이 잘될 것인가’, ‘문제가 해결될 것인가’를 보지만, 주님께서는 그 일을 통하여 우리가 어떤 사랑의 사람이 되어 가는지를 보십니다.

 

그래서 자연적 성공과 영적 선이 언제나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사업이 크게 성공했는데 그 성공 때문에 돈과 명예에 대한 사랑이 더욱 강해질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사업이 실패했는데 그 실패를 통하여 자신의 교만을 보고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게 될 수도 있습니다. 원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졌다고 해서 그 결혼이 자동으로 주님의 뜻이라는 뜻도 아니며, 좋은 일을 하려고 하는데 어려움이 생긴다고 해서 그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자연계에서의 ‘잘됨’과 영적 의미에서의 ‘선’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여기서 특히 조심해야 할 것이 ‘프로프리움’(proprium)입니다. 우리는 자기가 원하는 일이 잘 풀리면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해석하기 쉽습니다. ‘내가 기도했는데 계약이 성사되었다’, ‘내가 원하던 사람이 나타났다’, ‘돈이 마련되었다’, ‘문이 열렸다.’ 물론 실제로 주님의 섭리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원했던 일이 이루어졌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이 주님의 뜻이었다고 단정하면, 어느 순간 ‘내가 원하는 것’과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동일시하게 됩니다.

 

반대로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이 생기면 ‘하나님께서 막으신다’고 너무 쉽게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주님의 제지인지, 다른 사람의 자유로운 선택 때문인지, 자연계의 조건 때문인지, 나 자신의 준비 부족 때문인지, 아니면 선한 일을 이루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어려움인지는 즉시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든 장애물에 하나님의 특별한 메시지를 붙이는 것도 신적 섭리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면 이 문제는 더욱 선명해집니다. 겟세마네에서 시작하여 체포, 심문, 조롱, 채찍질,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외적으로만 보면 모든 일이 ‘잘못 풀리고’ 있었습니다. 제자는 배신했고, 다른 제자들은 도망갔으며, 종교 지도자들은 주님을 거부했고, 빌라도는 십자가형을 허락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일이 잘 풀릴 것이다’라는 기준만 적용한다면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에서 가장 멀리 벗어난 사건처럼 보여야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의 중심은 바로 그 십자가에 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형통 = 하나님의 뜻’이라는 공식은 유지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은 어떻게 분별해야 할까요? 가장 먼저 보아야 할 것은 ‘일이 잘 풀리는가’가 아니라 ‘이것이 선하고 참된가’입니다.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과 충돌한다면 아무리 문이 활짝 열려도 주님의 뜻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거짓말을 하면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해서 그것이 주님의 축복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이용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해서 주님께서 길을 열어 주신 것도 아닙니다. 상황보다 먼저 선과 진리를 보아야 합니다.

 

그다음에는 자신의 동기를 살펴야 합니다. ‘나는 왜 이것을 원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주님의 영광이라는 말을 붙이고 있지만, 실제로는 인정받고 싶은 것인지,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을 말하지만, 사실은 성공하고 싶은 것인지, 하나님의 뜻을 찾는다고 하면서 이미 내가 원하는 답을 정해 놓고 주님께 확인만 요구하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일은 외부에서 표적을 찾는 일만이 아니라 자신의 사랑을 살피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유와 합리성 안에서 실제 상황도 신중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생각과 판단을 없애고, 매 순간 초자연적인 신호로 지시하시는 방식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것이 아닙니다. 필요한 정보를 살피고, 조언을 듣고, 결과를 예상하고, 책임 있게 선택해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말씀의 선과 진리에 비추어 보고, 그 뒤에도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결과는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이 잘 풀릴 때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잘 풀렸으니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단정하지 않습니다. 일이 막힐 때도 멈추어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막혔으니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신다’고 즉시 결론 내리지 않습니다. 형통과 장애 모두 분별의 자료는 될 수 있지만 최종 기준은 아닙니다.

 

오히려 때로는 하나님의 뜻 안에 있기 때문에 견뎌야 하는 어려움도 있습니다. 선을 선택했기 때문에 손해를 볼 수 있고, 진실을 말했기 때문에 관계가 어려워질 수도 있으며, 옳은 일을 하려고 했기 때문에 더 힘든 길을 걸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 ‘일이 안 풀리니 내가 잘못 가고 있나’라고만 생각한다면 우리는 선을 너무 빨리 포기하게 됩니다.

 

반대로 일이 놀라울 만큼 잘 풀릴 때야말로 더 깊이 자신을 살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 성공을 나는 무엇을 위해 사용할 것인가’, ‘이 일이 나를 주님과 이웃에게 더 가까이 가게 하는가, 아니면 나 자신에게 더 집착하게 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형통 자체가 영적 성공을 보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한다는 것은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맞히는 일이 아닙니다. 지금 내 앞에 놓인 상황에서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진리인지 살피고, 그것을 자유롭게 선택하며, 그 결과 속에서도 주님의 섭리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거듭남(regeneration)은 모든 일이 내 뜻대로 풀리는 삶이 아니라, 일이 풀리든 막히든 점점 주님의 선과 진리를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이라면 반드시 일이 잘 풀릴 거야’라는 말에는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필요한 길을 열어 주신다는 귀한 신뢰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하나의 공식으로 만들면 위험합니다. 주님의 뜻 안에서도 일이 막힐 수 있고, 주님의 뜻을 거슬러 가면서도 일이 놀라울 만큼 잘 풀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일이 잘 풀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하나의 참고가 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뜻을 증명하는 기준은 아닙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더 깊이 압축하면 이것이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묻는다는 것은 ‘이 일이 잘될 것인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이 상황에서 무엇이 선하고 참되며, 나는 그것을 선택함으로 어떤 사람이 되어 가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일이 가장 잘 풀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던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곳에서 주님의 사랑은 가장 깊이 드러났습니다.

 

그러므로 ‘형통’을 주님의 뜻과 동일시해서도, ‘막힘’을 주님의 부재와 동일시해서도 안 됩니다. 주님의 섭리는 때로 열린 문을 통하여 우리를 이끄시고, 때로 닫힌 문 앞에서 우리를 멈추게 하시며, 때로는 아주 어렵고 좁은 길을 끝까지 걸어가게 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길이 얼마나 편한가가 아니라, 그 길에서 내가 누구를 따르고 있는가입니다.

 

 

 

SL.24, ‘기도응답이 안 일어나는 건 네 믿음이 부족해서야’

‘기도응답이 안 일어나는 건 네 믿음이 부족해서야’ ‘기도응답이 안 일어나는 건 네 믿음이 부족해서야.’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의외로 자주 듣게 되는 말입니다. 병이 낫지 않거나, 자녀의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결혼을 포기하면 더 거룩해지는가?’ - 사제와 수도자의 독신을 바라보는 스베덴보리의 렌즈

 

1. 독신이라는 선택에 담긴 사랑과 헌신

 

‘신앙의 쉼터’ 영상은 가톨릭 사제와 수도자들이 왜 결혼하지 않는지를 설명하면서, 그 독신 생활을 단순한 금욕이나 교회법의 강제가 아니라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으로 소개합니다. 특히 ‘억제가 아니라 사로잡힘’이라는 표현은 이 영상의 중심 메시지를 잘 드러냅니다. 결혼이나 가정이 나쁘기 때문에 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에 사로잡혀 자신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을 기꺼이 내려놓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설명은 수도 생활을 단순히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구를 억누르는 삶으로 이해하는 시각을 넘어, 그 안에 담긴 신앙적 동기를 바라보게 합니다.

 

실제로 가톨릭교회는 사제의 독신을 변경할 수 없는 신앙 교리 자체가 아니라 오랜 전통을 통해 발전한 교회 규율로 이해합니다. 서방 가톨릭교회에서는 사제의 독신을 원칙적으로 요구하지만, 동방 가톨릭교회에서는 이미 결혼한 남성이 사제품을 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교구 사제의 독신 약속과 수도자의 정결·청빈·순명 서원은 제도적으로도 구별됩니다. 영상은 이러한 차이를 비교적 정확하게 소개하면서, 사제의 독신은 목자로서의 봉사와, 수도자의 정결은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는 축성 생활과 특별히 연결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먼저 인정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결혼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사람의 삶이 불완전하거나 사랑이 부족하다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병든 사람을 돌보고, 가난한 사람을 섬기고, 버림받은 이들의 친구가 되어 준 사제와 수도자들의 삶에는 분명히 귀한 사랑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에서도 어떤 사람의 영적 상태를 판단하는 기준은 그가 결혼했는지 독신으로 살았는지가 아니라, 그가 무엇을 사랑했고 어떤 선을 실제로 행했는지에 있습니다. 따라서 독신 생활의 신학적 의미를 검토하는 것과 그 생활을 선택한 사람들의 진실한 헌신을 존중하는 것은 서로 충돌하지 않습니다.

 

2. 독신이 하늘나라를 미리 보여 준다는 주장

 

영상에서 가장 깊이 검토해야 할 부분은 사제와 수도자의 독신이 ‘하늘나라를 미리 살아 보여 주는 표징’이라는 설명입니다. 가톨릭교회는 마태복음 22장 30절의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는 말씀을 중요한 성경적 근거로 삼습니다. 지상의 혼인은 아름답고 거룩하지만 영원한 삶에서는 그 형태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으며, 따라서 혼인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는 사람은 장차 완성될 하늘나라의 삶을 지금부터 미리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이 해석은 가톨릭 신학 안에서 일관된 의미를 가집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1758, HH)을 읽으면 전혀 다른 설명을 만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HH.366에서 천국에도 혼인이 있다고 명확하게 말합니다. 천사들은 모두 인간으로 살았던 사람들이며, 인간이 남자와 여자로 창조된 질서는 죽음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천국의 혼인은 지상의 혼인과 여러 면에서 다르지만, 그 본질에서는 더욱 깊고 완전한 사랑의 결합이라고 설명합니다.

 

HH.367에서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혼인을 두 사람이 하나의 마음을 이루는 결합이라고 설명합니다. 인간의 마음을 이루는 ‘이해’(understanding)와 ‘의지’(will)가 하나를 이룰 때 참된 인간의 마음이 형성되듯, 참된 혼인에서도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존재로 남아 있으면서 내적으로 하나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남녀가 함께 생활하거나 서로에게 애정을 느끼는 관계를 넘어섭니다. 선과 진리의 결합, 사랑과 지혜의 결합이 인간관계 안에 실제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참된 결혼애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은 결혼을 넘어선 독신의 세계가 아닙니다. 오히려 지상에서 불완전하게 경험했던 참된 결혼애가 그 내적 본질을 온전히 드러내는 세계입니다. 이는 가톨릭의 독신 이해와 단순한 강조점의 차이를 넘어, 영원한 삶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의 차이입니다. 가톨릭은 독신을 장차 완성될 하늘나라의 표징으로 이해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선과 진리가 결합하는 참된 혼인 자체에서 하늘나라의 질서를 발견합니다.

 

3. 스베덴보리가 영구 독신 서원을 경계한 이유

 

이 문제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 주는 저작은 ‘결혼애’(Conjugial Love, 1768, CL)입니다. 특히 CL.155와 CL.156은 사제와 수도자의 독신을 살펴볼 때 피할 수 없는 본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CL.155에서 영구적인 독신을 서원했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에게 참된 정결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고 설명합니다. 참된 정결은 단순히 성적 행위를 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인간 안에 있는 결혼애가 올바른 질서에 따라 보존되고 정화되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구별이 있습니다. 인간은 외적 행동을 억제할 수 있지만, 외적인 억제가 곧 내적 사랑의 변화를 뜻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결혼하지 않고 평생 정결하게 생활한다고 해도, 그 내면이 욕망과 자기중심적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 독신 자체가 그를 거룩하게 만들지는 못합니다. 반대로 결혼한 사람이 배우자를 진실하게 사랑하고, 자신의 이기심을 버리며, 상대방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처럼 여기게 된다면 그 사람은 혼인 생활을 통하여 내적으로 정화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CL.156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혼인의 상태가 독신의 상태보다 우선한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혼인이 창조 때부터 세워진 질서이며, 선과 진리의 결합에서 비롯되고, 주님과 교회의 결합에 상응하기 때문입니다. 이 주장은 모든 사람이 반드시 결혼해야 한다거나, 독신자는 영적으로 열등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혼인의 거룩함을 독신보다 낮은 것으로 여기는 종교적 사고를 근본적으로 바로잡으려는 가르침입니다.

 

더욱 주목할 부분은 CL.155에서 수도원 생활을 했던 사람들도 죽음 이후에는 지상에서 했던 서원에서 풀려나 자유롭게 자신의 삶을 선택하게 된다고 설명한다는 사실입니다. 참된 결혼애를 원하는 사람은 그에 맞는 혼인 생활로 인도되고, 독신 생활을 원하는 사람은 자신의 사랑과 상태에 맞는 공동체에서 생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외적인 종교 제도가 영원한 삶의 형태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적 사랑이 드러나 그에 상응하는 삶을 이루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이 대목은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수도 생활의 헌신 자체를 무가치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구적 독신 서원을 영적으로 더 높은 상태의 보증처럼 이해하는 것은 분명하게 경계합니다. 천국의 질서는 인간이 지상에서 어떤 종교적 약속을 했는지보다, 그 약속을 지키는 동안 어떤 사랑을 자신의 생명으로 받아들였는지에 따라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4. ‘나를 비워야 하나님이 들어오신다’는 말의 속뜻

 

영상의 후반부에는 매우 인상적인 표현이 등장합니다. ‘내가 나로 가득 차 있으면 하느님이 들어오실 자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외로움의 십자가를 견디며 자신을 비울 때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으로 흘러나온다고 설명합니다. 이 말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에 관한 가르침과 깊이 연결될 수 있습니다. 다만 무엇을 비워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더욱 세밀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인간이 비워야 할 것은 결혼이나 재산, 가족관계와 같은 외적 삶의 형태 자체가 아닙니다. 인간이 참으로 버려야 할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고, 자신을 모든 판단과 사랑의 중심에 놓으려는 ‘프로프리움’(proprium)입니다. 인간은 혼자 살면서도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일 수 있고, 가족과 함께 살면서도 자신을 버리고 이웃을 위해 살아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거듭남은 외적 관계의 수를 줄이는 일이 아니라, 그 관계들 안에서 자신의 사랑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변화시키는 일입니다.

 

이 점에서 독신 생활과 결혼 생활은 서로 다른 환경이지만, 동일한 영적 과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독신자는 자신의 시간과 자유를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에 바칠 수도 있고, 자신의 안락함과 독립성을 지키는 데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결혼한 사람 역시 배우자와 자녀를 자신의 소유물처럼 여기며 살아갈 수도 있고, 그들을 주님께서 맡기신 이웃으로 받아들이며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싸움은 같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한 사랑이 중심이 될 것인가, 아니면 주님께 받은 사랑으로 이웃을 섬길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비운다’는 말은 세상에서 물러나거나 인간적인 사랑을 포기한다는 뜻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때로는 가정을 이루고 평생 한 사람을 사랑하는 과정이야말로 자기중심적 사랑을 내려놓는 가장 구체적이고 끈질긴 훈련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배우자의 약함을 받아들이고, 서로의 잘못을 용서하며, 자신이 원하는 것보다 상대방에게 참으로 유익한 것을 선택하는 일은 단순한 감정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이 실제 행동으로 나타나면서 인간의 내면을 변화시키는 거듭남의 과정입니다.

 

5.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상징과 실제 결혼애

 

영상은 수도자가 자신의 온 삶을 그리스도께 봉헌한다는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상징을 사용합니다. 가톨릭 수도 전통에서 이러한 표현은 깊은 신앙적 의미를 지니며, 실제 혼인을 뜻하기보다 주님께 대한 온전한 사랑과 충실함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상응 이해를 적용할 때는 이러한 상징을 특정한 생활 형태에만 독점적으로 연결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로 표현되는 것은 교회가 주님에게서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분과 결합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별이나 혼인 여부가 아니라 주님과 인간 사이에 이루어지는 영적 결합입니다. 교회가 신부라는 것은 교회가 주님을 다른 그 어떤 걸로도 대신할 수 없는 사랑의 근원으로 받아들이며, 그분의 진리를 자신의 생명으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독신 수도자만이 특별한 의미에서 주님의 신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에 따라 살아가는 모든 사람과 교회가 이 상응의 의미에 참여합니다.

 

그렇다면 참된 결혼애는 오히려 이 영적 진리를 더욱 풍성하게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남편과 아내 사이의 참된 결합은 주님과 교회의 결합에 상응하고, 궁극적으로 선과 진리의 결합에서 그 생명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결혼은 주님께 대한 사랑을 방해하는 세속적인 관계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참된 결혼애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이 인간 사이에서 가장 내밀하고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방식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구별해야 할 것은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와 참된 결혼애입니다. 결혼했다고 해서 누구나 자동으로 거룩한 사랑을 경험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독신으로 살았다고 해서 참된 결혼애를 이해할 가능성이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마음속에 선과 진리가 결합할 수 있는 질서가 형성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내적 질서가 지상의 결혼 생활에서도, 독신으로 수행하는 이웃 사랑의 삶에서도 주님을 향한 참된 사랑의 기준이 됩니다.

 

6. ‘혼자 사는 사제가 부부를 상담할 수 있는가?’

 

영상은 처음에 제기한 현실적인 질문, 곧 결혼하지 않은 사제가 어떻게 부부 문제를 상담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도 답합니다. 사제는 많은 가정의 기쁨과 고통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때로는 당사자보다 더 넓은 관점에서 갈등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설명에는 충분한 타당성이 있습니다. 결혼 경험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한 사람의 통찰이나 상담 능력을 부정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나 반대 방향의 과장도 경계해야 합니다. 많은 부부를 상담했다는 사실만으로 결혼의 내적 경험을 모두 이해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부부 사이에는 함께 살아 보지 않고서는 온전히 알기 어려운 관계의 깊이와 책임, 친밀함과 갈등이 있습니다. 따라서 목회적 상담에서는 성경과 신학에 대한 이해뿐 아니라 인간관계에 대한 실제적 지식, 심리적 통찰, 경청하는 태도, 그리고 필요할 때 전문적 도움을 연결하는 겸손이 함께 요구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더욱 중요한 질문은 상담자가 결혼했는지 독신인지가 아니라, 그가 부부에게 어떤 사랑을 가르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뜻을 상대방에게 관철시키는 것을 사랑이라고 가르치는가, 아니면 서로의 자유와 인격을 존중하면서 선과 진리 안에서 하나 되어 가는 길을 가르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부부를 단지 이혼하지 않고 함께 살아야 하는 사람들로 보는가, 아니면 서로를 통해 내적으로 변화되고 거듭나도록 부름받은 사람들로 보는가 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참된 목회적 지혜는 어떤 삶을 경험했다는 사실 하나에서 자동으로 생기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인간을 어떻게 사랑하시며, 그 사랑이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질서를 이루어야 하는지 이해하고 실제로 살아가려는 노력에서 자랍니다. 그런 의미에서 결혼한 목회자도 배워야 하고 독신 사제도 배워야 합니다. 무엇보다 상담받는 사람들의 내면을 자신이 모두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7. 하늘나라의 예고편은 독신인가, 사랑인가?

 

영상은 사제와 수도자들의 독신을 ‘지상에 먼저 도착한 하늘나라의 예고편’이라고 표현합니다. 매우 아름답고 인상적인 비유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천국관을 적용하면 그 비유의 중심을 조금 다르게 놓게 됩니다. 하늘나라를 미리 보여 주는 것은 독신이라는 생활 형태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삶 안에 실제로 나타나는 천국의 사랑입니다.

 

천국은 외적인 신분이나 종교적 직책에 따라 이루어지는 세계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묘사하는 천국에서는 모든 천사가 주님에게서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며, 자신에게 주어진 고유한 쓰임 안에서 기쁨을 누립니다. 그 기쁨의 중심에는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다른 존재의 행복을 위한 사랑이 있습니다. 이러한 천국의 원리는 지상의 수도원에서도 나타날 수 있고, 병원이나 학교에서도 나타날 수 있으며, 자녀를 돌보는 평범한 가정에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독신 수도자가 가난한 이들의 상처를 돌보며 기쁨을 누리는 모습은 분명 하늘나라의 사랑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늙고 병든 배우자를 오랜 세월 돌보는 남편이나 아내의 모습 역시 같은 사랑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장애가 있는 자녀를 평생 품고 살아가는 부모의 헌신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리에서 이웃을 위해 묵묵히 일하는 사람의 삶도 그러합니다. 이 모든 삶에서 중요한 것은 사랑의 대상이 얼마나 많은가가 아니라 그 사랑이 얼마나 진실하며, 얼마나 자신을 내려놓고 상대방의 선을 구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특히 주목할 것은 결혼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사랑이 단순히 여러 사랑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는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입니다. 참된 결혼애는 선과 진리의 결합이라는 천국의 가장 깊은 질서와 연결됩니다. 물론 이것이 모든 기혼자가 독신자보다 영적으로 우월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참된 결혼애를 잃어버린 혼인은 외적인 관계만 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혼의 본질을 하나님과의 결합에 대한 장애물처럼 이해하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제시하는 창조와 천국의 질서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합니다.

 

8.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어떤 삶인가?

 

이 영상을 통하여 우리는 사제와 수도자들의 헌신을 새롭게 존중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그들의 삶을 존중하는 것과 그 독신 생활에 부여된 모든 신학적 의미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임을 분별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종교적 금욕이나 자기희생의 외적인 크기보다, 그 안에서 실제로 어떤 사랑이 형성되고 있는지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이는 종교적 헌신을 평가절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헌신을 더욱 깊은 기준 앞에 세우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모든 재산을 내놓고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고 해도, 그 내면에서 자기 의로움이나 영적 우월감을 키우고 있다면 그 외적 희생은 참된 거듭남으로 이어지지 못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세상 사람들 눈에는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가정생활을 하면서도, 날마다 자신의 이기심을 돌아보고 배우자와 자녀와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그 일상 속에서 주님의 나라를 향해 자라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포기했는지만이 아니라, 그 포기를 통하여 무엇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시 영상의 마지막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당신이 진짜로 찾는 행복은 어디에 있느냐, 그리고 당신의 사랑은 결국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 이 질문은 독신자와 기혼자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 질문을 한 걸음 더 깊이 이끕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인간적 사랑을 포기해야 하는가, 아니면 하나님께 받은 사랑으로 인간적 관계 자체를 정화하고 거룩하게 만들어 가야 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하지 않는다’는 고백에는 진실한 헌신이 담겨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배우자를 더욱 진실하게 사랑한다’는 고백에도 똑같이,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설명에 따르면 참된 결혼애의 질서 안에서 더욱 깊이 드러나는 영적 진리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인간적 사랑을 모두 버린 채 홀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사랑을 주님으로부터 받아 선한 질서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독신인가 결혼인가 하는 외적인 구분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삶을 통하여 어떤 사랑을 이루고 계시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독신의 헌신도, 결혼의 헌신도 그 자체가 구원의 공로나 거룩함의 보증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사랑으로 자신과 이웃의 삶을 변화시켜 가는 거듭남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가 보여 주는 천국은 바로 그러한 사랑이 가장 온전한 형태로 실현되는 곳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은 누가 더 많은 것을 포기했는가가 아니라, 누구의 삶에서 주님의 사랑이 더욱 진실하게 나타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독신자의 조용한 헌신 속에서 나타나든, 부부가 평생 서로를 사랑하는 삶 속에서 나타나든, 모든 참된 선의 근원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 영상에서 인용한 가톨릭의 독신 교회법과 그리스도론적·교회론적·종말론적 근거는 바오로 6세의 1967년 회칙 ‘사제 독신 생활’과 교회법 제277조에서 확인됩니다. 다만 ‘1139년에 독신이 처음 시작되었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서방 교회의 독신 규율은 그 이전부터 발전해 왔으며 제2차 라테라노 공의회는 그 제도화에서 중요한 단계였습니다.

 

제가 이번 영상에서 가장 주목한 것은 ‘독신으로 살면 장차 천국에서 누릴 삶을 미리 살아가는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천국관과 정면으로 만나는 주제이기 때문에, 단순히 가톨릭과 개신교의 독신에 대한 입장 차이로 이해하기보다 ‘천국에서 인간의 사랑은 어떤 모습으로 완성되는가?’라는 문제로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겠습니다.

Posted by bygracetistory
,

‘기도응답이 안 일어나는 건 네 믿음이 부족해서야’

 

‘기도응답이 안 일어나는 건 네 믿음이 부족해서야.’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의외로 자주 듣게 되는 말입니다. 병이 낫지 않거나, 자녀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거나, 무너진 관계가 회복되지 않을 때 ‘더 믿어야 합니다’, ‘의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기도하세요’라는 권면을 듣습니다. 이런 말에는 분명 성경적인 면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믿음을 강조하셨고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마21:22). 실제로 불신앙 때문에 주님의 역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향에서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시니라’라고 한 말씀도 있습니다(마13:58).

 

그러나 ‘믿음이 중요하다’는 것과 ‘기도한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그건 분명히 믿음이 부족해서다’는 전혀 같은 말이 아닙니다. 후자의 공식을 적용하면 성경에서 가장 믿음이 깊었던 사람들의 기도조차 설명하기 어려워집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바울입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있는 ‘육체의 가시’가 떠나가기를 세 번이나 주님께 간구했습니다(고후12:8). 그러나 가시는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대신 주님께서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고후12:9). 바울의 믿음이 부족해서였을까요? 본문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요청한 것과 주님께서 주신 응답의 형태가 달랐던 것입니다.

 

더 결정적인 장면은 겟세마네입니다. 주님께서는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어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마26:39). 결국 그 잔은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감히 주님의 믿음이 부족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 장면만으로도 ‘내가 원하는 결과가 일어나지 않음 = 믿음 부족’이라는 공식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자신의 원함을 아뢰면서도 그것을 아버지의 뜻 아래 두는 가장 깊은 기도를 보여 주셨습니다.

 

따라서 믿음과 기도응답의 관계를 좀 더 섬세하게 보아야 합니다. 불신앙은 사람이 주님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 장애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내가 구한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그 원인을 내 믿음의 부족에서 찾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섭리 전체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다른 사람의 선택이 관계된 문제에서는 인간의 자유도 고려해야 합니다. 부모가 아무리 간절히 기도한다고 해도 주님께서 성인이 된 자녀의 자유를 제거하고 강제로 마음을 바꾸시는 것은 아닙니다.

 

눅15의 둘째 아들이 좋은 예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했지만 먼 나라에 있는 아들을 강제로 끌고 오지 않았습니다. 아들이 ‘스스로 돌이켜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리라’라고 해야 했습니다(눅15:17-18). 이것은 부모의 기도가 무의미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부모의 기도를 통하여 자녀에게 수많은 길을 열어 주시고 선과 진리를 공급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 자체를 강제로 심어 넣지는 않으십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freedom)와 ‘합리성’(rationality)을 보존하시면서 사람을 이끄시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문제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주님의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는 내가 지금 원하는 결과 하나만을 향하지 않고 나의 영원한 구원과 거듭남(regeneration)을 향합니다. 우리는 눈앞의 한 장면을 보지만 주님께서는 삶 전체를 보십니다. 그래서 내가 보기에 분명히 좋은 것처럼 보이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고, 반대로 지금은 실패와 손실처럼 보이는 일이 훗날 전혀 다른 의미를 드러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고통을 ‘하나님께서 일부러 보내신 훈련’이라고 해석해서도 안 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인간의 자유 및 자연계의 질서 안에서 허용하시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이 점을 놓치면 ‘믿음이 부족해서 응답받지 못했다’는 말은 고통받는 사람에게 매우 잔인한 말이 될 수 있습니다. 중병에 걸린 자녀를 위해 부모가 밤낮으로 기도했다고 합시다. 교회도 함께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결국 아이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부모에게 ‘조금만 더 믿었으면 하나님께서 살려 주셨을 텐데’라고 말한다면 자녀를 잃은 슬픔 위에 ‘내 믿음이 부족해서 아이가 죽었다’는 또 하나의 짐까지 얹는 셈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런 판결권을 주지 않았습니다.

 

암 환자가 낫지 않았다고 해서 믿음이 부족했다고 단정할 수 없고, 자녀가 돌아오지 않았다고 해서 부모의 기도가 부족했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무너진 결혼이 회복되지 않았다고 해서 어느 한 사람의 믿음이 부족했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 상황에 작용하는 수많은 조건과 사람들의 자유를 모두 알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무엇을 허용하시고 그 허용된 상황 속에서 어떤 영원한 선을 이루어 가시는지도 다 알지 못합니다.

 

여기에는 ‘프로프리움’(proprium)의 위험도 숨어 있습니다. ‘나는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반드시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확신이 얼핏 강한 믿음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동일시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기도는 주님의 뜻을 구하는 일이 아니라 내 뜻에 하나님의 이름을 붙이는 일이 됩니다. 결과가 다르게 나타났을 때에는 자신을 정죄하거나 다른 사람의 믿음을 정죄하게 됩니다.

 

참된 믿음은 오히려 더 겸손합니다. ‘주님, 저는 이것을 간절히 원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것이 선합니다. 그러나 저는 모든 것을 알지 못합니다. 주님께서는 제가 보지 못하는 것까지 보시니 제 뜻보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믿음이 약한 기도가 아닙니다. 겟세마네에서 주님께서 친히 보여 주신 기도의 질서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느부갓네살 앞에서 한 고백도 이 점을 놀랍도록 잘 보여 줍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풀무불에서 건져 내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자신들은 우상에게 절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단3:18). 이것은 ‘내 믿음이 충분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내가 원하는 결과를 주실 것이다’라는 믿음보다 훨씬 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역사하시지 않더라도 하나님을 신뢰하겠다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가 믿음의 깊이를 가장 잘 보여 주는 표현 가운데 하나인지도 모릅니다. 믿음은 결과를 통제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결과를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주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응답이라는 말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요청한 일이 그대로 이루어졌을 때만 ‘응답받았다’고 말한다면 바울의 기도는 실패한 기도가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바울에게 분명히 응답하셨습니다. 다만 문제를 제거하지 않고 그 문제 가운데 살아갈 은혜를 주셨습니다. 응답은 때로 상황의 변화일 수도 있고, 상황을 견딜 힘일 수도 있으며, 내가 원했던 문을 여는 대신 다른 길로 인도하시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이 생애 동안 왜 그렇게 되었는지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자신을 돌아볼 필요는 있습니다. 내가 욕심으로 구하고 있지는 않은지, 악한 목적을 위해 기도하고 있지는 않은지, 기도만 하면서 내가 해야 할 책임을 피하고 있지는 않은지, 주님의 뜻보다 내 뜻을 고집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야 합니다. 야고보도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약4:3). 그러나 이 말씀은 먼저 나 자신을 살피기 위한 말씀이지, 고통받는 다른 사람에게 ‘네 믿음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판결하기 위한 무기가 아닙니다.

 

따라서 ‘기도응답이 안 일어나는 건 네 믿음이 부족해서야’라는 말에는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진리가 들어 있지만, 그것을 모든 미응답에 적용하는 순간 위험한 단순화가 됩니다. 믿음의 부족이 주님의 역사를 받아들이는 데 장애가 되는 경우는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한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 사람의 믿음을 판정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조건이 있기 때문입니다.

 

목회적으로도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네 믿음이 부족하다’고 원인을 찾아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곁에서 함께 견디는 것입니다. 함께 기도하고, 지금 할 수 있는 선을 찾고, 그 사람이 자기 자신을 정죄하지 않도록 돕고, 결과를 주님의 지혜와 사랑에 맡길 수 있도록 곁에 있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체어리티(charity)에 더 가깝습니다.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믿음의 부족이 기도를 방해할 수는 있지만, 내가 구한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내 믿음이 부족했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번 글의 핵심은 더 짧게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믿음은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어 내는 능력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결과가 오지 않을 때에도 주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그것을 단 한마디로 보여 주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단3:18)

 

 

 

SL.25, ‘하나님의 뜻이라면 반드시 일이 잘 풀릴 거야’

‘하나님의 뜻이라면 반드시 일이 잘 풀릴 거야’ ‘하나님의 뜻이라면 반드시 일이 잘 풀릴 거야.’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매우 자연스럽게 듣게 되는 말입니다. 어떤 일을 앞두고 기도했는데

bygrace.kr

 

SL.23, ‘기도 많이 하면 하나님께서 내 소원을 들어 주신다’

‘기도 많이 하면 하나님께서 내 소원을 들어 주신다’ ‘기도 많이 하면 하나님께서 내 소원을 들어 주신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이라면 매우 익숙한 말입니다. ‘기도하면 됩니다’, ‘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