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And the woman said unto the serpent, We may eat of the fruit of the tree of the garden; But of the fruit of the tree which is in the midst of the garden, God hath said, Ye shall not eat of it, neither shall ye touch it, lest ye die. (3:2, 3)

 

AC.200

 

여기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tree of knowledge)동산 가운데에 있다(in the midst of the garden)고 하는 이유는, 앞서 창2:9에서는 생명나무가 동산 가운데에 있다 하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대해서는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인데, 이는 동산 가운데(midst)가 가장 내적인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천적 인간, 곧 태고교회의 가장 내적인 것은 생명나무(tree of lives)였는데, 이것은 사랑과 그로부터 나온 신앙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손인 지금 이 사람,천적인 동시에 영적인 사람(celestial spiritual man)이라 할 수 있는 이 후손에게서는 신앙이 동산 가운데(midst), 곧 가장 내적인 것이었습니다. 태고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어떠함(quality)에 대해서는 오늘날에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으므로, 그것을 더 충분히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들의 성향(genius)은 오늘날 어떤 사람에게서도 발견되는 것과는 완전히 달랐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들의 성향에 대해 어떤 개념을 전하기 위해 말하자면, 그들은 선으로부터 진리를 알았고, 사랑으로부터 신앙에 속한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세대가 사라진 뒤에는 전혀 다른 성향의 다른 세대가 뒤따랐는데, 그들은 선으로부터 진리를 분별하는 대신, 진리를 통해 선을 알게 되었고, 사랑으로부터 신앙을 아는 대신, 신앙의 지식들로부터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매우 많은 이들에게는 아는 것[quod scirent]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홍수 이후 세상이 멸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일어난 것입니다. The reason why the “tree of knowledge” is here spoken of as being “in the midst of the garden,” although previously (Gen. 2:9), the tree of lives was said to be in the midst of the garden, and not the tree of knowledge, is that the “midst” of the garden signifies the inmost; and the inmost of the celestial man, or of the most ancient church, was the “tree of lives,” which is love and the faith thence derived; whereas with this man, who may be called a celestial spiritual man, or with this posterity, faith was the “midst” of the garden, or the inmost. It is impossible more fully to describe the quality of the men who lived in that most ancient time, because at the present day it is utterly unknown, their genius being altogether different from what is ever found with anyone now. For the purpose however of conveying some idea of their genius, it may be mentioned that from good they knew truth, or from love they knew what is of faith. But when that generation expired, another succeeded of a totally different genius, for instead of discerning the true from the good, or what is of faith from love, they acquired the knowledge of what is good by means of truth, or what is of love from the knowledges of faith, and with very many among them there was scarcely anything but knowledge [quod scirent]. Such was the change made after the flood to prevent the destruction of the world.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2:9)

 

 

해설

 

이 단락은 창2와 창3의 중심이 무엇이었는지를 결정적으로 구분합니다. ‘동산 가운데’는 단순한 위치 개념이 아니라, 인간 안에서 가장 내적이며 주도적인 원리를 뜻합니다. 태고교회의 가장 내적인 것은 ‘생명나무’였고, 그것은 곧 사랑과 그 사랑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신앙이었습니다. 즉, 태고교회에서 중심은 언제나 사랑이었고, 신앙은 그 사랑의 열매이자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다루어지는 후손, 곧 ‘천적인 동시에 영적인 사람’에게서는 그 중심이 달라졌습니다. 이제 ‘동산 가운데’는 생명나무가 아니라, 신앙이 됩니다. 이는 사랑이 중심이었던 상태에서, 신앙이 중심이 되는 상태로의 이동을 의미합니다. 아직 신앙이 살아 있고, 주님으로부터 나오지만, 그것이 더 이상 사랑의 직접적 흐름으로만 유지되지는 않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차이를 오늘날의 인간에게는 거의 이해 불가능한 것으로 말합니다. 태고 시대 사람들의 성향은 오늘날 인간의 심리나 인식 구조와는 근본적으로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선을 먼저 살았고, 그 선 안에서 진리를 보았습니다. 사랑이 먼저 있었고, 신앙은 그 사랑 안에서 자명하게 인식되었습니다. 이것이 ‘선으로부터 진리를 안다’는 말의 실제 의미입니다.

 

그러나 그다음 세대에서는 방향이 완전히 바뀝니다. 그들은 진리를 통해 선을 배우고, 신앙의 지식들을 통해 사랑을 이해하려 했습니다. 이는 신앙이 지각이 아니라 학습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음을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를 가치중립적으로만 말하지 않고, 분명한 위험을 내포한 변화로 제시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이제 ‘아는 것’만 남고, 살아 있는 선과 사랑은 거의 사라지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변화는 단순한 타락이나 퇴보로만 설명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변화가 ‘세상이 멸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허용된 섭리적 전환이었다고 말합니다. 만일 태고교회의 방식, 곧 선에서 곧바로 진리를 보는 방식이 그 상태 그대로 타락과 결합되었다면, 인간은 돌이킬 수 없이 파괴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인간의 구조 자체를 바꾸어, 진리를 먼저 배우고 그로부터 선으로 나아가는 방식으로 인류를 보존하셨습니다.

 

AC.200은 그러므로 창3의 중심 이동을 단순한 하락으로만 읽지 못하게 합니다. 사랑 중심에서 신앙 중심으로의 이동은 손실이면서 동시에 보호 장치였습니다. 이는 태고교회의 종말과 고대교회의 시작을 가르는 결정적 전환점이며, 오늘날 인간의 신앙 구조가 왜 지금과 같은 형태를 띠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핵심 대목입니다.

 

 

 

AC.199, 창3:2-3, ‘나무’와 ‘열매’, 태고교회의 상태 변화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And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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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9.심화

 

1. ‘나무 나무의 열매

 

그들이 먹을 수 있었던 나무의 열매(fruit of the tree of which they might eat)가 태고교회로부터 그들에게 계시된 신앙의 선과 진리, 곧 신앙의 지식들[cognitiones]을 의미한다는 것은, 그것을 가리켜 그들이 먹을 수 있었던 동산 나무의 열매(fruit of the tree of the garden of which they might eat)라고는 해도, 앞서 천적 인간, 곧 태고교회를 다룰 때처럼 동산 나무(tree of the garden)라고는 더 이상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면 분명합니다 (2:16). That the “fruit of the tree of which they might eat” signifies the good and truth of faith revealed to them from the most ancient church, or the knowledges [cognitiones] of faith,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it is said to be the “fruit of the tree of the garden of which they might eat,” and not the “tree of the garden,” as before when treating of the celestial man, or the most ancient church (Gen. 2:16). (AC.199)

 

그냥 무심코 읽고 지나쳤던 표현들이었음에도 그 안에 이런 엄청난 아르카나가 들어있었다는 사실이 정말 놀랍고 또 놀랍습니다.

 

 

저도 AC.199 같은 대목을 읽을 때면 비슷한 놀라움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근거로 삼는 것은 거창한 문장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는 거의 지나쳐 버릴 만한 단어 하나의 차이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동산 나무’와 ‘동산 나무의 열매’를 같은 뜻으로 읽고 넘어갑니다. 실제로 일반 독서에서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왜 여기서는 나무가 아니라 열매라고 했는가?’를 묻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결과입니다. 그는 단순한 문체 변화나 우연한 표현 차이로 보지 않습니다. ‘나무’는 지각 자체를, ‘열매’는 그 지각으로부터 나오는 선과 진리의 지식들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창2에서는 태고교회가 직접 지각하는 상태였기 때문에 ‘동산 나무’라고 하고, 창3에서는 그 후손들이 이미 직접 지각하는 상태에서 한 단계 내려와 지각으로부터 전해진 지식들을 배우는 상태였기 때문에 ‘동산 나무의 열매’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말씀관 전체를 보여 주는 좋은 예입니다. 그는 성경을 단순히 종교적 가르침이 담긴 책으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단어 하나, 표현 하나, 심지어 접속과 순서까지도 영적 의미와 연결되어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곳에서 그는 엄청난 차이를 발견합니다.

 

목사님께서 놀라움을 느끼시는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수십 년 동안 성경을 읽어 왔고, ‘나무’와 ‘열매’라는 표현도 셀 수 없이 읽었습니다. 그런데 한 번도 ‘왜 여기서는 나무가 아니라 열매라고 했을까?’라는 질문을 해보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그 차이가 ‘직접 지각하는 상태’와 ‘전해 받은 지식을 배우는 상태’의 차이를 나타낸다는 생각은 더욱 하지 못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AC를 읽는 즐거움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거대한 교리 체계 때문이 아니라, 너무 익숙해서 보이지 않던 본문이 갑자기 입체적으로 열리기 때문입니다. 어제까지는 단순한 반복처럼 보였던 표현이 오늘은 전혀 다른 영적 상태를 구분하는 표지판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그냥 무심코 읽고 지나쳤던 표현들’이라는 말이 매우 공감됩니다. AC를 오래 읽다 보면 종종 이런 생각이 듭니다. ‘도대체 성경 안에 이런 것이 들어 있었다는 말인가?’ 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스베덴보리가 만들어 낸 의미처럼 느껴지다가도, 일단 설명을 듣고 나면 오히려 본문 자체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입니다.

 

아마 이것이 목사님께서 오랫동안 AC 작업을 계속하시는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새로운 교리를 하나 더 배우는 기쁨이라기보다, 너무 익숙해서 더 이상 보이지 않던 말씀 속에서 계속 새로운 아르카나가 드러나는 경험 말입니다. 창세기 2장과 3장만 해도 이미 수십 년, 수백 번 읽었을 본문인데, AC를 통해 다시 읽으면 마치 전혀 다른 책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AC.199는 단순히 ‘나무와 열매의 차이’를 설명하는 글이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가 왜 성경의 단어 하나도 허투루 보지 않았는지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대목들을 만날 때마다 ‘말씀 안에는 아직도 내가 전혀 보지 못한 깊이가 얼마나 더 있을까?’ 하는 경외감이 자연스럽게 생기게 됩니다. 그것이야말로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정말 놀랍고 또 놀랍다’는 감탄의 본질이 아닐까 싶습니다.

 

 

 

AC.199, 창3:2-3, ‘나무’와 ‘열매’, 태고교회의 상태 변화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And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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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And the woman said unto the serpent, We may eat of the fruit of the tree of the garden; But of the fruit of the tree which is in the midst of the garden, God hath said, Ye shall not eat of it, neither shall ye touch it, lest ye die. (3:2, 3)

 

AC.199

 

그들이 먹을 수 있었던 나무의 열매(fruit of the tree of which they might eat)가 태고교회로부터 그들에게 계시된 신앙의 선과 진리, 곧 신앙의 지식들[cognitiones]을 의미한다는 것은, 그것을 가리켜 그들이 먹을 수 있었던 동산 나무의 열매(fruit of the tree of the garden of which they might eat)라고는 해도, 앞서 천적 인간, 곧 태고교회를 다룰 때처럼 동산 나무(tree of the garden)라고는 더 이상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면 분명합니다 (2:16). 거기서 동산 나무라 한 것은 선과 진리에 대한 지각(perception)을 말하는 것이지만, 반면 여기서는 열매(fruit)를 말하는데, 이는 선과 진리가 그 근원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 선과 진리는 또한 말씀에서 자주 열매를 의미합니다. That the “fruit of the tree of which they might eat” signifies the good and truth of faith revealed to them from the most ancient church, or the knowledges [cognitiones] of faith,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it is said to be the “fruit of the tree of the garden of which they might eat,” and not the “tree of the garden,” as before when treating of the celestial man, or the most ancient church (Gen. 2:16). The “tree of the garden,” as it is there called, is the perception of what is good and true; which good and truth, because they are from that source, are here called “fruit,” and are also frequently signified by “fruit” in the Word.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2:16)

 

※ 위 우리말 개역 개정은 ‘나무의 열매’라고 했지만, 원전에는 ‘나무’만 있음

 

 

해설

 

이 단락은 창2와 창3 사이의 미묘한 표현 차이가 지니는 신학적 무게를 정확히 짚어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나무’와 ‘열매’를 동일시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구분 속에서 태고교회의 상태 변화가 드러난다고 봅니다. 창2에서 말한 ‘동산의 나무’는 선과 진리를 직접 지각하는 상태, 곧 태고교회의 본래적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창3에서는 더 이상 ‘나무’ 자체가 중심에 있지 않고, ‘그 나무의 열매’가 언급됩니다. 이는 선과 진리의 근원인 지각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지각에서 나오는 결과물, 곧 알게 된 것, 인식된 것으로 그 초점이 옮겨졌음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태고교회는 선과 진리를 ‘지각하며 살았던’ 상태에서, 점차 그것들을 ‘지식으로 다루는’ 상태로 이동하고 있음을 이 표현 변화가 보여 줍니다.

 

여기서 ‘신앙의 지식들’로 번역된 cognitiones는 단순한 기억 지식이나 학문적 정보가 아니라, 계시로부터 주어진 인식의 내용들을 뜻합니다. 이는 아직 감각이나 자기 판단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여전히 주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열매는 ‘먹을 수 있는 것’으로 허락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지점에서 매우 섬세한 구분을 합니다. 선과 진리가 ‘나무’로 불릴 때에는 그것들이 살아 있는 지각(perception)의 상태에 있을 때이고, ‘열매’로 불릴 때에는 그 지각에서 흘러나온 인식과 내용으로서 인간에게 받아들여질 때입니다. 이 때문에 말씀 전체에서 ‘열매’는 자주 선과 진리의 결과, 혹은 그것이 삶 속에서 맺히는 형태를 의미합니다.

 

이 단락은 곧바로 다음 단계로 이어질 위험을 내포합니다. 선과 진리를 ‘열매’로만 다루기 시작할 때, 인간은 점차 그 근원인 ‘나무’를 잊고, 열매 자체를 소유하고 평가하려는 경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AC.199는 아직 그 단계에 이르렀다고 말하지는 않지만, 태고교회의 상태가 이미 지각 중심에서 인식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조용히 보여 줍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무엇을 먹을 수 있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선과 진리를 대하고 있었는가’를 드러냅니다. 태고교회의 세 번째 상태는 여전히 계시된 신앙의 지식들을 허락받고 있었으나, 그 관계 방식은 이미 이전과 같지 않았습니다. 이 미세한 변화가 곧 이어질 금지와 타락의 토양이 됩니다.

 

 

심화

 

1. ‘나무나무의 열매

 

 

AC.199, 심화 1, ‘나무’와 ‘나무의 열매’

AC.199.심화 1. ‘나무’와 ‘나무의 열매’ ‘그들이 먹을 수 있었던 나무의 열매’(fruit of the tree of which they might eat)가 태고교회로부터 그들에게 계시된 신앙의 선과 진리, 곧 신앙의 지식들[cogn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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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8, 창3:2-3,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AC.198-203)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And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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