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베덴보리와 바울, 루터, 캘빈을 비교할 때, 무엇보다 먼저 조심해야 할 점은, 이들을 ‘누가 옳고 그르다’는 식으로 재단하기보다, 각자가 교회 역사 속에서 맡았던 고유한 사명과 시대적 위치를 존중하는 태도입니다. Emanuel Swedenborg18세기 계몽주의 시대 한가운데서 ‘계시의 내적 의미’를 밝히는 일을 했고, Paul the Apostle1세기 초대교회가 유대적 경계를 넘어 세계 종교로 확장되는 전환점에서 ‘이방 선교’와 ‘은혜의 복음’을 정립했으며, Martin LutherJohn Calvin은 중세 말 교회의 왜곡과 부패 속에서 ‘말씀의 권위’와 ‘은혜의 절대성’을 회복하려 애쓴 종교개혁자였습니다. 이 네 인물은 서로 경쟁 관계라기보다, 각 시대의 필요 속에서 다른 각도로 주님의 섭리를 섬긴 인물들로 보는 것이 더 온당합니다.

 

바울은 ‘신앙(faith)을 통해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복음을 강력히 선포했습니다. 그의 관심은 율법주의에 매인 양심을 해방시키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루터는 이 바울의 외침을 재발견하여 ‘이신칭의’(以信稱義)를 교회의 중심 교리로 세웠고, 캘빈은 이를 더욱 조직적으로 정리하여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의 질서를 체계화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는 데 있습니다. 이 점은 오늘날 가톨릭과 개신교를 막론하고 여전히 소중한 유산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전통을 부정하기보다, 그 위에 한 걸음 더 들어가 ‘신앙과 삶의 결합’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참된 신앙은 반드시 사랑(자선, charity)과 하나로 결합되어야 하며, 삶 속에서 선을 행하지 않는 신앙은 살아 있는 신앙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바울의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선언과 대립한다기보다, 그 말씀을 내적 의미 차원에서 더 깊이 파고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루터와 캘빈이 ‘은혜의 기초’를 놓았다면, 스베덴보리는 ‘그 은혜가 인간 안에서 어떻게 실제 삶으로 열매 맺는가’를 설명하려 한 셈입니다.

 

또 하나의 차이는 계시 이해 방식입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사도로서 직접적 사도적 권위를 가졌고, 루터와 캘빈은 성경의 문자적 의미를 중심으로 교리를 재정립했습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성경이 ‘상응’에 의해 기록되었으며, 문자 속에 영적, 천적 의미가 담겨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것은 기존 교회 전통을 무너뜨리려는 시도라기보다, 성경의 깊이를 더 확장해 보려는 시도였습니다. 가톨릭의 영적 해석 전통이나, 개신교 안의 경건주의적 흐름과도 어떤 접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구원 이해에서도 결은 조금 다릅니다. 루터와 캘빈은 ‘법정적 칭의’에 무게를 두었고, 스베덴보리는 ‘인간 존재의 실제 변화’, 곧 거듭남과 성품의 개혁을 더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서로를 부정하기보다, 한쪽은 ‘출발점’을, 다른 한쪽은 ‘과정과 완성’을 더 부각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국 모두가 말하려 한 것은, 인간이 자기 사랑에서 벗어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와 바울, 루터, 캘빈을 나란히 놓고 볼 때, 우리는 긴장보다는 ‘연속성과 심화’라는 관점으로 접근하는 것이 유익합니다. 바울이 복음의 기초를 놓고, 종교개혁자들이 그것을 역사 속에서 다시 밝히며, 스베덴보리가 그 복음의 내적 의미와 천상적 차원을 해설했다는 식의 이해는, 가톨릭이나 개신교인들에게도 비교적 부담이 적은 설명이 될 수 있습니다.

 

결국 네 인물 모두의 중심에는 ‘주님이 누구이신가’와 ‘인간이 어떻게 새 사람이 되는가’라는 공통 질문이 있습니다. 강조점과 언어, 시대적 문제의식은 달랐지만, 그들이 향한 방향은 하나님과 인간의 참된 결합이었습니다.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우리는 누구를 배척하기보다 각자의 빛을 통해 더 넓은 빛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빛의 근원은 한 분 주님이심을, 서로 다른 증언들이 조용히 가리키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심화

 

스베덴보리와 바울, 루터, 캘빈을 조금 더 깊이 비교하려면, 단순히 ‘교리 몇 가지의 차이’를 나열하기보다, 이들이 각각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어떤 구조로 이해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유익합니다. Paul the Apostle에게서 중심은 ‘그리스도 안에 있음’입니다. 인간은 율법 아래에서 스스로 의로워질 수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새 사람이 됩니다. 바울의 사상은 법정적 선언(칭의)만이 아니라, 실제 존재의 변화(“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까지 포함합니다. 다만 그의 서신은 논쟁적 상황 속에서 기록되었기 때문에, ‘행위가 아닌 신앙’이라는 표현이 강하게 부각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 자신도 ‘사랑으로 역사하는 신앙’을 말하며, 신앙과 삶의 분리를 의도하지는 않았습니다.

 

Martin Luther는 중세 교회의 공로 사상과 면죄부 남용 속에서 양심의 해방을 절박하게 외쳤습니다. 그의 체험에서 핵심은 ‘하나님의 의는 인간을 정죄하는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선물로 주어지는 의’라는 발견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신앙을 ‘붙드는 손’으로, 은혜를 ‘주어지는 선물’로 비유했습니다. John Calvin은 이 은혜를 더 체계화하여,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예정 교리를 강조했습니다. 그의 관심은 혼란한 시대 속에서 ‘구원의 확실성’을 보장하는 것이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인간의 공로를 배제하고, 하나님 중심의 구원을 세우려는 공통 목적을 가졌습니다.

 

Emanuel Swedenborg는 이 전통을 정면으로 거부하기보다, 그 내부에서 제기된 긴장을 해소하려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신앙만’, 즉 ‘오직 믿음’이 구원한다는 공식이 실제 삶에서 ‘사랑 없는 신앙’으로 오해될 가능성을 우려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참된 신앙은 본질적으로 사랑과 하나이며, 사랑 없는 신앙은 실재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가 행위를 공로로 세우려 한 것이 아니라, ‘신앙의 실체는 사랑 안에서만 존재한다’고 본 것입니다. 다시 말해, 루터가 말한 ‘참된 신앙은 반드시 선행을 낳는다’는 주장과 깊은 차원에서는 통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이를 단순한 윤리적 열매가 아니라, 존재 구조의 결합, 곧 진리와 선의 결혼이라는 형이상학적 틀로 설명했습니다.

 

계시 이해에서도 한 단계 더 들어갈 수 있습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난 사도로서, 복음의 중심 내용을 선포했습니다. 루터와 캘빈은 성경의 문자적 의미를 최종 권위로 삼았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성경의 문자적 의미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그 속에 ‘상응’에 따른 영적 의미가 내재한다고 보았습니다. 이것은 문자 해석을 무너뜨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문자 해석이 서로 충돌해 보일 때, 그 깊은 일관성을 보여주려는 시도였습니다. 실제로 종교개혁 전통 안에도 알레고리적, 영적 해석의 흔적은 존재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체계적으로 복원하려 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구원 과정에 대한 이해에서도 미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루터와 캘빈은 ‘칭의’라는 사건적 전환을 강조했고, 성화는 그 결과로 보았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을 하나의 긴 여정으로 설명하며, 인간 안의 사랑의 질서가 실제로 재배열되는 과정을 상세히 다룹니다. 여기서 그는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그러나 이 역시 ‘은혜 없이 인간이 스스로 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오지만, 인간은 그것을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협력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는 가톨릭 전통의 ‘은총과 자유의 협력’ 사상과도 대화를 시도할 수 있는 지점입니다.

 

결국 네 인물을 깊이 비교하면, 차이만큼이나 공통점이 보입니다. 모두 인간 중심 신앙을 경계했고, 모두 그리스도를 구원의 중심에 두었으며, 모두 인간의 삶이 변화되어야 함을 말했습니다. 강조점이 달랐을 뿐, 서로를 완전히 배제하는 관계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바울이 복음의 씨앗을 뿌렸고, 루터와 캘빈이 그 씨앗을 다시 일으켜 세웠으며, 스베덴보리가 그 나무의 보이지 않는 뿌리 구조를 설명하려 했다고 비유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가톨릭이나 개신교인들에게도 이 비교는 위협이 아니라 확장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기존 전통을 허무는 혁명가라기보다, 복음의 내적 구조를 더 깊이 해설하려 한 해설자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바울, 루터, 캘빈 역시 각각의 시대 속에서 주님께 붙들린 증인들이었습니다. 서로 다른 시대의 다른 목소리들이지만, 그들이 가리키는 중심은 하나였다고 조심스럽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SC.22, 스베덴보리가 자신이 어떻게 ‘계시’를 받았는지를 직접 묘사한 주요 원문들

혹시 스베덴보리가 자신이 어떻게 ‘계시’를 받았는지를 직접 묘사한 주요 원문들을 좀 확인 및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스베덴보리가 자신이 어떻게 계시를 받았는지를 직접 묘사한 주요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2

천국을 만드는 것은 주님의 신성이다

It Is the Divine of the Lord That Makes Heaven

 

HH.9

천사들은 그들의 지혜로 더 나아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선과 진리뿐 아니라 생명에 속한 모든 것 역시 주님으로부터 온다고 말이지요. 그들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컨펌(confirm)합니다. 어떤 것도 자기 자신으로부터는 생겨날 수 없고, 오직 자기보다 앞선(prior to) 어떤 것에서만 생겨날 수 있으며, 그러므로 모든 것은 하나의 첫째(a first)로부터, 즉 맨 처음 존재로부터 나온다고 말입니다. 그들은 이것을 만물 생명의 존재 그 자체(esse)라고 합니다. 또한 존재의 지속도 마찬가지인데요, 지속적 존재란 끊임없는 생겨남(a ceaseless springing forth)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도 중간 매개들(intermediates)을 통하여 처음과 계속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즉시 흩어지고 완전히 소멸됩니다. 천사들은 또한 말하기를, 생명의 근원은 오직 하나이며, 인간의 생명은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물줄기와 같다고 합니다. 만일 그 물줄기가 그 근원으로부터 끊임없이 이어지지 않는다면, 즉시 말라 버릴 것입니다. Angels from their wisdom go still further. They say that not only everything good and true is from the Lord, but everything of life as well. They confirm it by this, that nothing can spring from itself, but only from something prior to itself; therefore all things spring from a first, which they call the very being [esse] of the life of all things. And in like manner all things continue to exist, for continuous existence is a ceaseless springing forth, and whatever is not continually held by means of intermediates in connection with the first instantly disperses and is wholly dissipated. They say also that there is but one fountain of life, and that man’s life is a rivulet therefrom, which if it did not unceasingly continue from its fountain would immediately flow away.

 

[2] 천사들은 또 말하기를, 이 하나의 생명의 근원(fountain), 곧 주님으로부터 나아오는 것은 오직 신적 선(Divine good)과 신적 진리(Divine truth)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각 사람은 그것들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영향을 받는데요, 그것들을 신앙과 삶으로 받아들이는 자는 그 안에서 천국을 발견하지만, 그것들을 거부하거나 억누르는 자는 그것을 지옥으로 바꾸어 버립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선을 악으로, 진리를 거짓으로, 그리고 그렇게 해서 생명을 죽음으로 바꾸기 때문입니다. 거듭 생명의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천사들은 이렇게 컨펌합니다. 우주의 모든 것은 선과 진리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인간 의지의 생명, 곧 그의 사랑의 생명은 선과 관련되어 있고, 그의 이해의 생명, 곧 그의 신앙의 생명은 진리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선과 진리가 위로부터 오기 때문에, 생명의 모든 것도 위로부터 와야 한다고 말입니다. Again, they say that from this one fountain of life, which is the Lord, nothing goes forth except Divine good and Divine truth, and that each one is affected by these in accordance with his reception of them—those who receive them in faith and life find heaven in them while those who reject them or stifle them change them into hell; for they change good into evil and truth into falsity, thus life into death. Again, that everything of life is from the Lord they confirm by this: that all things in the universe have relation to good and truth—the life of man’s will, which is the life of his love, to good, and the life of his understanding, which is the life of his faith, to truth; and since everything good and true comes from above it follows that everything of life must come from above.

 

[3] 이러한 믿음을 지닌 천사들은 자기들이 행한 선에 대해 어떤 감사도 받으려 하지 않으며, 누가 선을 그들에게 돌리면 기뻐하지 않고 물러납니다(withdraw). 누군가가 자기가 스스로 지혜롭다고 믿거나, 스스로 선을 행한다고 믿는 것을 그들은 이상하게 여깁니다. 자기 자신을 위하여 선을 행하는 것은 선이라 부르지 않는데, 그것은 자기(self)에게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선을 위하여 선을 행하는 것은 신성(the Divine)으로부터 나온 선이라 부르며, 그들은 이것이 곧 천국을 이루는 선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 선이 곧 주님이기 때문입니다.주18 This being the belief of the angels they refuse all thanks for the good they do, and are displeased and withdraw if anyone attributes good to them. They wonder how anyone can believe that he is wise from himself or does anything good from himself. Doing good for one’s own sake they do not call good, because it is done from self. But doing good for the sake of good they call good from the Divine; and this they say is the good that makes heaven, because this good is the Lord.18

 

 

18. 주님으로 말미암는 선은 그 안에 내적으로 주님이 계시지만, 사람으로 말미암는 선은 그렇지 않다. Good from the Lord has the Lord inwardly in it, but good from one’s own has not (n. 1802, 3951, 8480).

 

 

해설

 

이 글은 HH.8에서 제시된 원리를 철학적, 형이상학적 깊이로 확장합니다. 단지 ‘선과 진리는 주님한테서 온다’는 차원을 넘어, ‘생명 그 자체가 주님한테서 온다’고 말합니다.

 

천사들의 논증은 매우 단순하면서도 근본적입니다. ‘아무것도 스스로 생겨날 수 없다.’ 이것은 존재론의 제1 원리입니다. 어떤 것이 존재하려면, 그것보다 앞선 원인이 있어야 합니다. 끝없이 거슬러 올라가면, 반드시 ‘맨 처음’, 곧 더 이상 다른 것에서 오지 않는 근원이 있어야 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esse’, 곧 ‘존재 그 자체’는 바로 그 첫째 원리이며, 스베덴보리에게 그것은 주님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지속적 존재는 끊임없는 생겨남’이라는 통찰입니다. 우리는 존재를 한 번 생겨난 후 스스로 유지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천사들의 관점에서는 존재란 매 순간 새롭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마치 등불이 계속 타오르려면 계속 기름이 공급되어야 하듯, 생명은 매 순간 근원으로부터 흘러들어와야 합니다. 연결이 끊어지면 즉시 소멸입니다.

 

인간의 생명은 근원에서 흘러나오는 시냇물, 물줄기와 같다’는 비유는 매우 아름답습니다. 시냇물은 스스로 흐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근원이 있기에 흐릅니다. 만일 근원이 마르면, 흐름도 사라집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의지, 생각, 사랑, 신앙은 모두 생명의 근원과 연결되어 있을 때만 살아 있습니다.

 

또한 주님으로부터 나아오는 것은 오직 ‘신적 선’과 ‘신적 진리’뿐이라고 말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같은 신적 유입이 사람에 따라 ‘천국’이 되기도 하고, ‘지옥’이 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근원이 둘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근원은 하나입니다. 그러나 수용 방식이 다릅니다. 받아들이는 이는 선과 진리 안에서 사랑과 신앙을 이루고, 거부하거나 왜곡하는 이는 그것을 악과 거짓으로 바꾸어 버립니다. 즉, 지옥은 별도의 창조물이 아니라, 왜곡된 수용의 결과입니다.

 

이어지는 설명에서 천사들은 생명의 구조를 선과 진리의 관계로 설명합니다. 의지의 생명은 사랑이며 선과 관련되고, 이해의 생명은 신앙이며 진리와 관련됩니다. 모든 선과 진리가 위로부터 온다면, 의지와 이해의 생명 역시 위로부터 와야 합니다. 이로써 ‘생명 전체가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결론이 자연스럽게 도출됩니다.

 

이러한 인식 때문에 천사들은 선에 대한 감사를 받지 않으려 합니다. 선을 자기 것으로 돌리는 순간, 그것은 이미 변질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하여 선을 행하는 것은 겉으로는 선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자기 사랑의 확장일 수 있습니다. 반면 ‘선을 위하여 선을 행하는 것’은 곧 신적 선의 흐름에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 자체가 주님이시기 때문에, 그 선이 곧 천국을 이룹니다.

 

이 글은 인간의 공로 의식과 자율성에 대한 자연적 사고를 근본에서 흔듭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을 무가치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높입니다. 왜냐하면 ‘근원과 연결된 존재’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빛나는 존재가 아니라, 태양과 연결될 때 빛나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 연결이 바로 천국입니다.

 

결국 HH.9은 이렇게 말합니다.

 

생명은 소유가 아니라 참여다.’

 

그리고 그 참여가 사랑과 신앙 안에서 이루어질 때, 그것이 곧 천국입니다.

 

 

심화

 

1. 형이상학’(形而上學)

 

형이상학’(形而上學)이라는 말이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는, 일상에서 잘 쓰이지 않는 철학 용어이기 때문입니다. 아주 쉽게 말하면, 형이상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근본 원리를 묻는 학문’입니다. 무엇이 존재하는가, 존재는 어떻게 유지되는가, 모든 것의 근원은 무엇인가 같은 질문을 다룹니다. 눈에 보이는 사물이나 현상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존재의 구조와 원인을 묻는 것이 형이상학입니다.

 

예를 들어, 나무가 자라는 과정을 생물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과학입니다. 그러나 ‘왜 무엇인가가 존재하는가?’, ‘존재는 스스로 설 수 있는가, 아니면 근원이 필요한가?’ 같은 질문은 형이상학입니다. HH.9에서 천사들이 ‘아무것도 스스로 생겨날 수 없고, 모든 것은 처음 것에서 나온다’고 말하는 부분이 바로 형이상학적 사고입니다. 이것은 도덕 이야기가 아니라, 존재의 근본 구조를 묻는 설명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단지 ‘착하게 살아라’고 말하는 윤리 교사가 아니라, ‘존재 자체는 어디에서 오는가?’를 묻는 사상가입니다. 그가 ‘지속적 존재는 끊임없는 생겨남이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철저히 형이상학적 진술입니다. 우리는 한 번 태어나면 그냥 계속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는 존재가 매 순간 근원으로부터 유지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이 바로 형이상학입니다.

 

형이상학은 보이는 것 뒤에 있는 보이지 않는 근본을 묻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HH.9에서는 ‘모든 생명의 근원은 주님이시다’라는 존재의 근본 원리를 설명하는 부분이기 때문에, 그것을 형이상학적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다시 말해, 행동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구조를 다루는 설명이라는 뜻입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형이상학은 왜 존재하는가, 무엇이 근원인가를 묻는 사유이며, HH.9는 바로 그 차원에서 생명의 근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2. 생명

 

이 ‘생명’에 대한 질문은 HH.9에서 가장 근본을 묻는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생명’은 단순히 숨 쉬고 움직이는 상태를 뜻하지 않습니다. 그는 생명을 ‘사랑하고 생각하고 의지하는 능력의 근원’으로 이해합니다. 다시 말해, 생명은 단순한 생물학적 활동이 아니라, 사랑하고, 원하고, 이해하고, 신앙하는 그 모든 의식 활동의 근원적 힘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생명은 인간의 소유가 아니라, 오직 주님께만 속한다고. 인간은 생명의 근원이 아니라 생명을 받는 그릇입니다. 우리가 ‘내가 생각한다’, ‘내가 사랑한다’, ‘내가 결정한다’고 느끼지만, 그 생각과 사랑과 의지의 능력 자체는 근원에서 계속 흘러와야 유지됩니다. 그래서 HH.9에서 ‘지속적 존재는 끊임없는 생겨남’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생명은 한 번 주어지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주어지는 것입니다.

 

생명은 단순히 살아 있다는 상태가 아니라, 사랑하고 생각할 수 있는 힘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덧붙일 수 있습니다. ‘그 힘의 근원은 나 자신이 아니라 주님입니다.’ 마치 빛은 전구가 내지만, 그 근원인 전기는 발전소에서 오는 것처럼, 우리는 사랑하고 생각하지만, 그 생명의 근원은 우리 안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생명은 항상 ‘사랑’과 ‘진리’의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의지의 생명은 사랑이고, 이해의 생명은 진리 안에서 활동합니다. 그래서 모든 생명이 선과 진리의 관계 안에서 설명됩니다. 만약 사랑이 왜곡되면 생명도 왜곡되고, 진리가 거짓으로 변하면 생명의 빛도 어두워집니다. 그가 ‘선과 진리를 거부하면 생명을 죽음으로 바꾼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생명은 내가 살아 있다는 느낌이 아니라, 사랑하고 생각하게 하는 근원적 힘이며, 그 근원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3. 존재론’(存在論)

 

이런 용어를 정확히 풀어 두지 않으면, HH 같은 텍스트는 계속 추상적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존재론’(存在論)은 아주 간단히 말하면 ‘무엇이 어떻게 존재하는가’를 묻는 생각입니다. 더 어렵게 말하면 ‘존재의 구조를 다루는 철학’이지만, 쉽게 풀면 ‘있는 것의 근본을 묻는 질문’입니다.

 

예를 들어 이런 차이가 있습니다. ‘사람은 어떻게 착해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윤리의 문제입니다. ‘사람은 왜 존재하는가?’ 또는 ‘사람의 생명은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질문은 존재론의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 행동의 옳고 그름을 묻는 것이 아니라, 그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의 근원을 묻는 것입니다. HH.9에서 천사들이 ‘아무것도 스스로부터 생겨날 수 없다’고 말할 때, 그것은 도덕 이야기가 아니라 존재론적 설명입니다. 존재가 어떻게 유지되는지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존재론은 왜 있는가?”를 묻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묻는다면 그것은 삶의 방법에 대한 질문이고, ‘왜 내가 존재하는가?’를 묻는다면 그것은 존재론적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착하게 살아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진리, 생명 자체는 어디에서 오는가?’를 묻습니다. 그래서 그의 설명은 존재론적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조금 더 쉬운 비유를 들면 이렇습니다. 나무가 열매를 맺는 법을 설명하는 것은 농업 지식입니다. 그러나 ‘나무가 존재할 수 있는 근원은 무엇인가? 씨앗은 어디에서 왔는가?’를 묻는 것은 존재론적 질문입니다. HH.9는 바로 이런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생명은 어디에서 오는가?’, ‘존재는 스스로 설 수 있는가?’를 묻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존재론은 무엇이 근원이며, 무엇이 어떻게 존재하는가를 묻는 생각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도덕만 말하는 분이 아니라, 존재의 근원을 설명하는 분이기 때문에 이런 용어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4. esse

 

esse’는 라틴어로, 가장 기본적인 뜻은 ‘있다(to be)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이 단어를 사용할 때는 단순히 ‘존재한다’는 상태를 넘어서, ‘존재하게 하는 근원적 있음’, 곧 ‘존재 그 자체’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HH.9에서 천사들이 ‘만물 생명의 존재 그 자체(the very being [esse] of the life of all things)라고 말할 때, 그것은 단순히 ‘하나의 존재’가 아니라,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는 근원적 있음, 더 이상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첫째 원리를 뜻합니다.

 

쉽게 설명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나도 있고, 나무도 있고, 별도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개별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esse’는 그런 개별적인 것들보다 더 깊은 차원입니다. ‘도대체 있음이라는 것은 어디에서 오는가?’를 묻는 자리입니다. 어떤 것도 스스로 존재할 수 없다면, 반드시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는 첫 근원이 있어야 합니다. 그 근원을 그는 ‘esse’라고 부르고, 그것을 곧 주님과 동일시합니다.

 

esse는 그냥 있다가 아니라, “있게 하는 있음입니다.’ 마치 전구 하나하나는 빛나지만, 그 빛을 가능하게 하는 전기가 따로 있듯이, 개별 존재들은 있지만, 그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근원이 있습니다. 그 근원적 있음이 바로 ‘esse’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는 ‘esse’와 ‘existere’를 구분합니다. ‘esse’는 존재의 근원이고, ‘existere’는 그 존재가 밖으로 나타난 상태입니다. 태양 자체가 ‘esse’라면, 그 빛이 퍼져 나와 드러나는 것은 ‘existere’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존재 그 자체(esse)이시고, 그분으로부터 나오는 사랑과 진리는 나타남(existere)의 차원에서 피조물 안에 드러납니다.

 

그래서 HH.9에서 말하는 ‘esse’는 철학적 장식어가 아니라, 매우 중요한 신학적 선언입니다. ‘생명은 스스로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이신 주님에게서 나온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esse는 단순한 존재가 아니라, 모든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 있음이며,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주님으로 이해합니다.’

 

 

5. 의지의 생명, 이해의 생명

 

의지의 생명, 이해의 생명’이라는 표현은 처음 들으면 매우 추상적으로 들리지만, 사실은 인간 안의 가장 기본적인 두 기능을 설명하는 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을 크게 두 축으로 봅니다. 하나는 ‘의지(will), 곧 사랑하고 원하고 선택하는 능력이고, 다른 하나는 ‘이해(understanding), 곧 생각하고 판단하고 분별하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 두 기능이 단순한 심리 작용이 아니라, ‘생명’의 서로 다른 표현이라고 말합니다.

 

의지의 생명’이라는 것은 의지를 의지 되게 하는 근원적 힘을 뜻합니다. 의지는 단순히 결심하는 능력이 아니라,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원하는지에 의해 움직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의지의 생명을 곧 ‘사랑의 생명’이라고 설명합니다. 사람이 무엇을 진정으로 사랑하는가가 그의 의지의 중심입니다. 이 사랑이 바로 의지의 생명입니다. 만약 사랑이 없다면, 의지는 작동하지 않습니다.

 

이해의 생명’은 이해를 이해 되게 하는 근원적 힘을 뜻합니다. 이해는 단순한 정보 처리 능력이 아니라, 무엇이 참인지 분별하고 의미를 파악하는 능력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신앙의 생명’ 혹은 ‘진리의 생명’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무엇을 참으로 받아들이고 믿는가가 그의 이해의 중심을 형성합니다. 진리의 빛이 없다면 이해는 어둡습니다.

 

사람 안에는 사랑하는 부분과 생각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부분이 의지이고, 생각하는 부분이 이해입니다. 그리고 그 둘을 움직이게 하는 근원적 힘을 각각 의지의 생명, 이해의 생명이라고 합니다.’ 즉, 의지는 사랑으로 살고, 이해는 진리로 삽니다.

 

조금 더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자동차에 엔진과 조향 장치가 있다고 합시다. 엔진이 차를 움직이게 하는 힘이라면, 그것이 의지의 생명과 비슷합니다. 조향 장치가 방향을 잡아 준다면, 그것이 이해의 생명과 비슷합니다. 둘 다 있어야 차가 제대로 움직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랑만 있고 진리가 없으면 방향을 잃고, 진리만 있고 사랑이 없으면 움직일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HH.9에서 ‘의지의 생명은 선과 관련되고, 이해의 생명은 진리와 관련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생명은 하나이지만, 인간 안에서는 사랑과 진리라는 두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근원은 오직 주님에게 있습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의지의 생명은 사랑이며, 이해의 생명은 진리이고, 이 두 생명이 함께 작용할 때 인간은 살아 있는 존재가 됩니다.’

 

 

 

HH.8, 2장, '주님 신성의 수용은 철저한 자기 부인 위에'

2천국을 만드는 것은 주님의 신성이다It Is the Divine of the Lord That Makes Heaven HH.8천국에 있는 모두가 알고, 믿으며, 심지어 지각하기(perceive)까지 하는 게 있는데, 그것은 곧 스스로 뭘 의도하거나 행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지금부터 이곳 파주 크리스찬 메모리얼 파크에서 세 번째 故 권성조(權聖祚, 1923 生 - 2015 卒, 享 91세), 故 김정자(金貞子, 1926 生 - 2005 卒, 享 79세), 두 분의 추모예배를 드리겠습니다.

 

찬송

563장, 예수 사랑하심을1, 2

 

본문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17:21)

 

설교

 

※ 편의상 두 분의 호칭을 각각 ‘아버님’, ‘어머님’으로 통일하겠습니다.

 

오늘로 어느덧 두 분의 각각 11주기, 21주기 기일이 되었습니다.

 

아버님의 경우, 11년 전인 2015년 삼일절 날, 며칠 전인 설 연휴 기간 뵌 모습을 마지막으로 다들 마음의 준비들을 하고 있던 차,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고, 그날 밤 국립중앙의료원 도착, 아직 간호사실에 병상 채 계신, 잠깐 손대어 느낀, 아직 그 발에 남아 있던 온기며... 그리고 이어 장례식장에서 입관 및 하관 예배 준비에 여념 없었던 그런 여러 장면들이 생각납니다. 특히 입관예배 때 다들 크게 울던 장면들이며, 포천 황동묘원 시절, 새벽 미명 그 춥고 어두운 길을 따라 당시 사정상 은밀하게 드려야 했던 하관예배도 생각납니다.

 

어머님의 경우는 더 거슬러 올라가 21년 전인 지난 2005527일 금요일, 그날, 위독하시다는 소식에 온 가족 함께 찾았다가 괜찮아 보이셔서 저녁 무렵 대전 집으로 내려왔는데, 집에 도착하자마자 돌아가셨다는 연락 받고, 방금 벗었던 구두를 얼른 다시 신고 그대로 출발, 이번엔 한양대학교 병원 장례식장으로 갔지요. 그때 어머님, 돌아가시기 며칠 전, 갑자기 찬송가 ‘예수 사랑하심을’을 부르시더라는 말씀에 감동하던 생각이 납니다. 발인까지는 사랑의교회에서 섬기시지만, 주일이라 장지까지는 어렵겠다 하시는 교회 부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장례식장에서 생전 처음 장례, 특히 하관예배 준비를 해야 했던 기억도 납니다. 아직 신학도 안 한 사람이 말입니다. 저는 사실 어머님 병 낫기를 위한 철야기도 때 주님 음성 듣고 신학교를 간 사람입니다. 그때 살던 아파트 앞, 다니던 교회에 가서 한밤 본당에서 혼자 어머님 병 낫게 하여 주시기를 간구하던 중, 신학교를 가라시는 음성을 들었지요. 주님은 어머님의 연약함을 통해서 둘째 사위를 신학교 가게 하시려는 계획이 있으셨었나 봅니다. 어쨌든 저는 신학도 하기 전 인생 첫 장례 집례를, 그것도 장모의 장례 하관예배를 인도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해 여름과 가을을 서둘러 준비, 이듬해인 2006년, 대전침례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입학, 신대원 3년 과정을 마치고, 계속해서 대전 모 교회에 부사역자로 청빙 받아 장년 사역을 시작하게 되지요.

 

잠시 두 분 관련, 저의 오래된 옛 기억들을 되살려 보았습니다. 저와는 다른 저마다 다들 특별한 기억들이 있으시지요? 이런 기억들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마치 어제 있었던 일처럼 생생합니다. 저의 모친께서는 제가 고3 때인 1980년 가을, 교통사고로 갑자기 떠나셨는데, 그 황망함 중에 겪었던 모든 것이 아직도 무슨 비디오 영상 보듯 생생하지요... 네, 과거 기억들 이야기는 이쯤하고...

 

그러면, 두 분은 지금쯤 천국에서 어떻게 지내고 계실까요?

 

주님의 자비(mercy)로 생전에 특별히 천국을 비롯, 영계를 27년간 왕래하며, 주님의 허락으로 많은 걸 기록으로 남긴 분이 계시는데, 이분의 대표적 저작 중 하나인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1758)이라는 책을 보면, 아버님, 어머님, 두 분의 현재 모습들을 대략 유추해 볼 수 있어 잠시 나누겠습니다.

 

참고로, 다음은 이분에 대한 간략한 소개입니다.

 

에마누엘 스베덴보리(Emanuel Swendenborg, 1688-1772)1688년,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서 출생, 웁살라대학에서 언어학, 수학, 광물학, 천문학, 생리학, 신학을 수학했습니다. 자연과학을 연구하여 광산학자로서의 권위를 인정받고, 아이작 뉴턴과 같은 최고 과학자 반열에 올랐으나 57세에 주님의 부르심으로 영계 체험을 시작, 이후 27년간 영계를 자유롭게 오고 가며, 보고 들은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겨 그 라틴어 원고만 수만 장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의 과학적 재능을 아낀 동료들에게 그는 다음과 같은 대답을 합니다.

 

저와 같은 과학자는 얼마든지 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일, 곧 영계에 관한 진리를 남기는 일은 인류 전체의 생명이 걸린 중요한 문제입니다. 주님께 받은 이 특별한 소명은 제가 과학자로 공헌하는 것보다 수천수만 배 더 중요합니다...”

 

그는 그의 마지막 저서, ‘True Christian Religion(1771)을 끝으로 이듬해인 1772년 주님이 부르시는 영원한 천국으로 들어갔습니다. //

 

이 스베덴보리라는 분이 전하는 많은 놀라운 사실들에 의하면, 사람은 사후 영계에서 눈을 뜰 때, 천국도, 지옥도 아닌, 중간 상태에서 눈을 뜬다고 합니다. 그에 의하면, 영계는 우리 사는 이 자연계처럼 시공간(視空間)의 나라가 아닌, 상태(state)와 그 변화의 나라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천국’이라고 하면, 그것은 사실은 ‘천국이라는 상태’의 준말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지옥도 마찬가지고요.

 

사람이 사후 바로 천국이라는 상태나 지옥이라는 상태로 못 들어가고 일단 이렇게 중간 상태에서 눈을 뜨는 이유는, 좀 쉽게 말씀드리면, 천국이나 지옥은 완전히 선하든지, 완전히 악하든지, 혹은 완전히 진실하든지, 완전히 거짓되든지 해야만 갈 수 있는, 즉 그래야만 들어갈 수 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들 아시겠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세상 살면서 이 둘이 어느 정도는 좀 섞여 있습니다. 그래서 바로는 못 가고 사람마다 다르지만 저마다 소위 ‘정제 기간’, 그러니까 렌더링(rendering)하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말이죠. 천국 갈 사람은 천국에서는 소용없는 악과 거짓을 떼어내는 시간이, 지옥 갈 사람은 지옥에선 소용없는 선과 진리를 떼어내는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둘이 섞여 있는 정도에 따라 그 중간 상태 체류 기간이 짧기도 하고 길기도 한데, 그런데 아버님, 어머님의 경우, 두 분 모두 겉과 속이 거의 같은 분들이셔서 아마 중간 상태 체류 기간은 무척 짧았겠고, 얼마 안 있어 두 분 다 바로 천국으로 올라가셨으리라 짐작됩니다. 사람이 이 중간 상태에 머무르는 기간은 다 다른데 최장 한 30년 정도랍니다.

 

방금 ‘겉과 속’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요, 이는 사람의 겉, 곧 겉 사람(external man)과, 사람의 속, 곧 속 사람(internal man)을 줄여 말씀드린 겁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우리 눈에 보이는 겉모습이 곧 겉 사람이고요, 눈에 안 보이지만 우리의 진짜 모습, 곧 우리의 진짜 정체가 바로 속 사람입니다. 사람의 사후, 천국이든 지옥이든 가는 건 바로 이 속 사람이 가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는 영이라고 하지요. 사후 세계를 가리켜 영계라고 하는 이유는 사후 세계는 육이 아닌 영들이 가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나라라고 했지만, 사실은 상태입니다. 아직 살아있는 우리는 사실은 영적 존재인 영(靈)이 자연적 존재인 이 육(肉)의 옷을 입고 이 세상에서 활동하는 것입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이 육은 영이 떠나면 바로 부패 시작, 썩어 없어집니다.

 

사람의 영이 육에서 분리되는 순간은 사람의 주요 장기인 심장과 폐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을 때입니다. 이 순간은 의료장비보다도 더 미묘하여 오직 모든 생명의 주(主)이신 주님만이 직접 하십니다. 왜 심장과 폐냐면, 사람의 심장은 주님의 신성(神性, Divine) 중 선(, Good)과, 사람의 폐는 주님의 신성 중 진리(眞理, Truth)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두 분도 이런 분리의 순간이 있으셨을 텐데요, 그럼, 이렇게 영과 육이 분리되면, 이후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이 세상인 우리 쪽에서는 임종이지만, 저 세상인 영계에서는 신생(新生), 곧 새롭게 태어남입니다. 마치 신생아실 아기들처럼 말입니다.

 

참고로, 임종 후 저세상에서 새롭게 눈 뜨기까지는 대략 72시간 정도 걸립니다. 이는 우리 안에서 뭔가 아주 근본적으로 준비되어야 할 게 있기 때문인데, 이때 영계의 악한 영들이 가까이 다가와 해치지 못하도록 가장 높은, 사랑의 천사들인 삼층천 천사들이 찾아와 지킵니다. 이 천사들이 찾아오면 특유의 향기가 진동하는데, 악한 영들은 이 향기를 아주아주 질색해서 다들 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에도 영감이 좀 예민하신 분들은 장례식장이나 영안실, 혹은 장지에서 이 향기를 느끼시는 분들이 계시며, 천주교의 많은 성인들 중에는 그 임종 시 또는 그 묘역 주위에 이 향기가 오래 머물렀다는 이야기들이 많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세상 사는 우리도 뭐 저희처럼 서울 살다 대전으로 가거나, 한국 살다 미국이나 호주로 이민을 가거나 하면, 제일 먼저 하는 게 자기가 살러 간 그곳의 가장 중요한 것들을 우선 배우고 익히는 것인 것처럼, 두 분 역시 사후 도착한 너무나도 생소한 영계에서 눈을 뜨셨을 때, 굉장히 생소하고 어리둥절하셨을 겁니다. 그러나 모든 걸 각자 알아서 해야 하는 우리와는 달리 사람이 사후 영계에서 눈을 뜨면, 이미 주님이 보내신 천사들의, 이루 말할 수 없는 사랑과 지혜의 돌봄을 받으며, 하나하나 새로운 생활을 위한 모든 준비를 하게 됩니다. 선인이든 악인이든 처음에는 말입니다. 지상에도 이와 거의 유사한 시스템이 있는데 바로 산부인과 신생아실 간호사들의 돌봄 시스템인 것 같아요. 누구든 영계에서 처음 눈을 뜰 땐, 그쪽에서 봤을 땐 신생영이기 때문이지요. 어머님도, 그리고 아버님도 여기서는 할머니로, 할아버지로 눈을 감으셨지만, 저쪽에서는 갓 태어난 여아, 남아였을 뿐입니다. 몸집이 그렇다는 게 아니고요! ㅎㅎㅎ

 

우리가 남의 나라에 살러 갈 때 그러듯, 영들도 영계에서의 신생아 과정 및 100퍼센트 속 사람 과정이 끝나 천국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배우는 게 바로 천국이라는 나라의 주인, 곧 주님이 누구이신가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뭐 주인이랄 것까지는 없지만, 그래도 대통령이든 주석이든, 왕이든 총리든 하여튼 소위 통치자, 최고 결정권자라는 게 있고, 그 사람이 누구냐, 어떤 사람이냐가 중요한데요, 거기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처럼 천국 역시 천국의 하나님이 누구시냐 하는 지식이 모든 걸 결정합니다. 두 분도 이 오리엔데이션 과정을 밟고, 그 내면이 확 열려 말할 수 없이 지혜로운 천국 천사의 지성으로 들어가셨을 겁니다. 천국에서는 주님에 대한 사랑의 지식이 많을수록 부자이기 때문이지요.

 

참고로, 사람의 이 오감, 즉 시각, 청각, 후각, 미각 및 촉각은 사후 영이 되면 몇 배로 향상, 놀라운 능력을 갖게 됩니다. 그동안은 물질인 육체에 갇혀 매우 제한적이었지만 말입니다. 이들 감각 역시 사실은 영에 속한 것입니다.

 

아, 그리고 또 하나, 모든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때, 그 사람의 가장 눈부시게 젊었던 상태로 들어갑니다. 가끔 영안이 열린 분들이 계시는데 이런 분들은 주님의 허락으로 다른 사람의 영, 곧 그 사람의 속 사람의 모습을 보실 수 있게 됩니다. 겉보기엔 그렇게 아름답지만, 그러니까 얼굴이며 몸매며 말이지요. 그러나 그 속 사람은 뭐랄까, 거의 괴물 수준의 여자들이 있더랍니다. 반면, 어떤 할머니는 허리도 굽고, 온통 쭈글쭈글 주름살투성이 겉모습이었지만, 그 속 사람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아름다움인지 가히 천사의 모습 같더라는 말을 합니다. 우리도 사실 살면서 우리 속 사람의 모습을 본 적이 없어요. 어떤 사람들은 사후 영이 되어 드디어 자기 속 사람의 모습을 보고는 너무 놀라 기절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사람이 사후 천국이나 지옥에 들어가기 전 두 번의 상태 변화를 겪는데, 우리 속 사람의 모습이 드러나 정착하는 건 두 번째 상태 변화 후입니다. 첫 번째 상태 변화 때까지는 그래도 지상에서 내가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고 반갑게 맞이하지만, 이 두 번째 상태 변화 이후에는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심지어 가족과 혈연까지도 말이지요. 우리도 사후 영계에 도착하면 먼저 가신 부모님들, 그리고 형제들을 만날 텐데요, 우리가 만나는 분들은 주님의 허락으로 잠시 우리를 만나러 오신, 그러나 우리가 ‘, 누구시지?’ 할 정도로 눈부시게 빛나는, 매우 아름답고 생명력 넘치는 젊은이들 모습의 부모님, 그리고 형제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이미 지옥에 가신 분들을 이렇게 반갑게 만났다는 기록은 저는 아직 접하지를 못했습니다. 아마 지옥 가신 분들의 접견은 허락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천국에서는 모든 것이 질, 그러니까 퀄러티(quality)로 결정됩니다. 세상에서는 신앙생활을 몇 년 했냐, 교회를 몇 년 다녔냐? 회사에서 직급이 뭐냐? 무슨 자격증, 무슨 학위를 받았냐? 재산이 얼마나 되냐? 주식이나 코인, 금, 그리고 집 등 자산이 얼마나 되냐? 자식들은 얼마나 출세했냐? 등등으로 소위 행복과 불행, 인생을 잘 살았다, 못 살았다 같은 게 결정되지만, 천국은 그렇지 않습니다. 천국은 그런 걸로 들어가는 데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천국은 천국이라는 나라에 얼마나 어울리느냐로 그 입국 자격이 결정됩니다. 그러니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니고, 신학적 지식이 가득해도 그 속 사람의 퀄러티가 천국에 맞지 않으면 못 들어가는 데라는 말입니다. 천국은 그러니까, 음... 굳이 비유하자면, 로또 1등 당첨의 수천수만 배보다도 더 큰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건 말이지요. 그래서 주님도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28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6:28-30)

 

두 분이 지금 천국에서 어떤 삶을 살고 계실지 살짝 짐작이 되시지요?

 

이 세상과 천국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다른 말로는 서로 상응(相應, correspondence)한다고 하는데요, 그래서 세상 살 때, 미리 천국에 대한 지식들을 알면, 헛된 인생을 살지 않을 수 있어 아주 중요합니다. 헛된 인생이란, 뭔가 세상 살 때 열심히 했는데, 그래서 뭔가를 이루고, 뭔가를 남기고 그랬는데, 정작 나중에 보니 전혀 천국스럽지 않은, 그러니까 전혀 천국 입국을 염두에 두고 한 게 아닌, 그래서 본의 아니게 자기 속 사람이 전혀 천국에 안 어울리는 모습, 상태가 된, 그런 인생을 말합니다. 그럼, 세상에서 열심히 살지 말라는 말이냐? 하실 수도 있으나 그건 아니고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기준은 간단합니다. 세상 살면서 천국을 염두에 두고 뭘 한다는 건, 그걸 주님을 사랑해서 하는 걸 말합니다. 아주 작은 사소한 일 하나도 주님을 사랑해서 했으면 그건 천국을 염두에 두고 한 것이 되며, 반대로 자기를 사랑해서 한 거면 그건 천국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한 것이 됩니다. 오직 주님을 사랑하여 하는 모든 말과 행동만이 자기의 속 사람을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말입니다. 기독교인이어도 그 모든 동기가 자기 사랑이면, 나라와 민족을 사랑해도 그 동기가 자기 사랑이면, 매우 미안한 표현이지만 다 나가리가 됩니다. 반면, 타 종교인이어도 그 교리에 스며있는 주님의 신성을 따라 양심적이고 도덕적으로 살았으면, 즉 선과 진리를 행했으면, 주님은 그 사람의 그 모든 행위를 주님을 섬긴 것으로 쳐주십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결론입니다.

 

제 블로그(https://bygrace.kr/)에 오시면 더욱 많은 걸 접하실 수 있습니다.

 

 

찬송

563장, 예수 사랑하심을3, 4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여호와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빛과 도우심의 그 은혜와 사랑이, 오늘 이 추모예배를 통해 들려주신 천국 이야기, 곧 두 분의 천국의 삶 이야기를 통해, 이제라도 우리 속 사람의 모습을 천국에 어울리는 상태가 되게 하자는 메시지를 듣고, 그동안 안개처럼 흐리고 뿌옇던 시야가 맑아져 마음에 굳게 결심하고 돌아가는 모든 심령 가운데, 그리고 생활과 삶 가운데 이제부터 영원토록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2026-03-01(D1)

삼일절

파주 크리스찬 메모리얼 파크

변일국 목사

 

2640. 2026-03-01(D1)-추모예배(눅12,2-3), '2026 故 권성조(11주기), 김정자(21주기) 추모예배'.pdf
0.43MB
찬563. '예수 사랑하심을'.jpg
0.18MB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