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유튜브 채널 ‘말씀의 서사’의 이번 영상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기에 상당히 중요한 영상입니다. 주제가 바로 ‘삼위일체’이기 때문입니다. 자막 전체를 보면 이 영상은 전통적인 니케아-아타나시우스적 삼위일체론을 대중적으로 아주 쉽게 설명하려는 영상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중간중간 사용하는 비유와 표현 가운데는 스베덴보리의 삼위일체 이해에 매우 가까이 접근하는 부분이 있는 반면, 결정적인 대목에서는 스베덴보리가 가장 강하게 문제 삼았던 ‘영원 전부터 서로 구별되는 신적 위격’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이번 영상은 단순히 ‘맞다, 틀리다’로 판정하기보다, 전통적 삼위일체론이 무엇을 지키려 했으며 스베덴보리가 그것을 어떻게 다시 한 분 하나님 안에서 이해했는지를 보여 주기에 아주 좋은 자료입니다.

 

영상은 오랫동안 교회를 다닌 사람도 ‘삼위일체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으면 쉽게 설명하지 못한다는 데서 출발하며, 이것을 신앙이 얕기 때문이 아니라 삼위일체가 그만큼 깊고 신비로운 진리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출발점에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삼위일체가 본래부터 인간의 이해를 초월할 만큼 모순적인 신비인가, 아니면 교회가 하나님을 영원한 위격으로 설명하면서 이해하기 어려워진 것인가?’라고 질문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후자에 훨씬 가깝습니다. 그는 삼위일체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참된 기독교에는 반드시 삼위일체가 있다고 말합니다. 다만 그 삼위일체를 ‘ 신적 인격의 연합’으로 이해하는 것을 거부하고,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성 자체, 신적 인간, 발출하는 신성의 삼위일체로 이해합니다. 영상과 스베덴보리 모두 ‘하나님은 분이며 삼위일체가 있다’고 말하지만, ‘ 셋이 어디에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서 길이 갈라지는 것입니다.

 

영상은 신명기 64절의 ‘하나’인 히브리어 ‘에하드’가 창세기 224절의 ‘ ’에도 쓰인다는 사실을 들어, 하나가 반드시 단순한 숫자적 하나만을 뜻하지 않고 ‘여럿이 연합된 하나’일 수도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어 창세기 11절의 ‘엘로힘’이 형태상 복수인데 동사는 단수라는 점도 삼위일체를 암시하는 하나의 힌트처럼 제시합니다. 다행히 영상도 이것들만으로 삼위일체가 ‘증명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선을 긋는데, 이 신중함은 좋습니다. 그러나 ‘에하드’가 집합적 하나를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이 곧 하나님이 복수 인격으로 구성된 존재라는 뜻은 아니며, ‘엘로힘’의 형태 역시 그것만으로 삼위일체의 증거가 되지는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의 하나 되심을 먼저 온전히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성은 세 존재가 하나의 목적과 사랑으로 연합하여 이루는 하나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영상이 창세기 126절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를 설명하면서 ‘혼자가 아니었던 겁니다’, ‘하나님 안에는 이미 서로 대화하고 의논하시는 우리가 계셨던 ’이라고 말하는 대목은 더욱 조심해서 보아야 합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의 창조 이야기를 따라가 보면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을 인간의 거듭남과 태고교회의 형성을 다루는 말씀의 속뜻으로 읽습니다. 따라서 창1:26의 ‘우리’를 곧바로 영원 전부터 서로 의논하던 세 신적 위격의 대화로 읽는 것은 AC의 해석과 상당히 멀어집니다. 더구나 ‘서로 대화하고 의논하시는 우리’라는 표현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성부가 성자에게 말하고 성자가 성부에게 응답하며 성령이 그 옆에 계시는 세 신적 주체가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스베덴보리가 전통적 삼위일체 교리에서 가장 우려했던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은 ’이라고 고백하면서 생각 속에서는 세 분을 그리게 되는 것입니다.

 

영상이 가장 강력한 증거로 제시하는 것은 요단강에서 예수께서 세례받으시는 장면입니다. 물속에는 성자, 비둘기같이 내려오는 성령, 하늘에서는 성부의 음성이 있으므로 ‘성부, 성자, 성령 분이 같은 순간에 각자의 자리에서 동시에 나타났다’고 설명하며, 이것이 한 분이 세 역할을 하는 ‘1 3’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삼위일체를 단순한 양태론, 곧 한 하나님이 때로는 아버지 역할을 하고 때로는 아들 역할을 하고 때로는 성령 역할을 한다는 식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영상이 경계하는 단순한 ‘1 3역론’에 스베덴보리를 넣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세례 장면이 ‘영원히 서로 구별되는 신적 인격’을 증명하는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구별은 실제적인 구별이지만 세 하나님 사이의 구별이 아닙니다.

 

특히 주님의 성육신과 영화의 과정에서는 아직 완전히 하나가 된 상태를 시간 속에서 이루어 가시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복음서에는 아들이 아버지께 기도하고, 아버지의 음성이 들리고, 성령이 임하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이것을 곧바로 ‘영원 전부터 존재하던 인격이 잠시 장면에 동시에 등장했다’고 읽으면 성육신과 영화라는 거대한 과정이 사라져 버립니다. 성육신하신 주님은 단순히 이미 완성된 삼위일체의 한 위격이 인간의 옷을 입고 잠시 지상에 내려오신 것이 아니라, 모친 마리아에게서 취한 인성을 통하여 시험을 겪으시고 악과 지옥을 이기시며 그 인성을 점차 신성과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서에 나타나는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이해할 때에는 이 ‘영화’의 과정이 반드시 함께 고려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번 영상에서 매우 흥미로운 대목이 있습니다. 9분대에 등장하는 ‘태양 비유’입니다. 영상은 하나의 태양에서 ‘, , 생명을 살리는 에너지’가 나온다고 설명하면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모습은 셋이지만 본질은 완전히 하나’라고 말합니다. 이 부분은 뜻밖에도 스베덴보리의 신학을 설명하기에 훨씬 적합한 방향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 사랑과 신적 지혜를 태양의 열과 빛에 상응시켜 설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의 태양에서 열과 빛이 나오듯 신성의 근원이 나뉘어 여러 신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신성이 서로 구별되는 방식으로 나타나고 발출합니다. 따라서 이 영상은 여기에서 조금만 방향을 달리했더라면 스베덴보리의 삼위일체 이해에 상당히 가까이 갈 수도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 비유를 제시한 직후 다시 ‘성부가 계획하고, 성자가 실행하고, 성령이 적용한다’는 세 주체의 분업 구조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이 설명은 복음주의 교회에서 삼위일체적 구원을 설명할 때 매우 익숙하고 교육적으로도 이해하기 쉽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자칫 ‘성부라는 분이 계획하고, 성자라는 다른 분이 지상으로 내려와 값을 치르고, 성령이라는 다른 분이 그것을 인간에게 전달한다’는 구조가 될 수 있습니다. 특히 영상의 ‘예수님은 번의 죽음으로 우리의 값을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갚아주셨습니다’라는 문장은 전통적인 대속·형벌대속적 구원론과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십자가는 구속의 핵심적인 마지막 시험이며 영화의 완성이지만, 성부께서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형벌의 값을 성자가 대신 지불하여 성부의 태도를 바꾸었다는 식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성육신 전에는 진노하시다가 성자의 희생 때문에 인간을 사랑하게 되신 분이 아닙니다. 바로 그 한 분 하나님께서 사랑 때문에 친히 인간에게 오셔서 지옥을 정복하고 자신의 인성을 영화하심으로 인간에게 다시 구원의 길을 여신 것입니다.

 

영상 후반에 제시하는 ‘삼위일체를 일상에서 누리는 다섯 가지 실천법’에서도 이 차이는 매우 실제적으로 나타납니다. 영상은 ‘하나님 아버지, 오늘 하루를 주관해 주세요. 예수님, 십자가의 사랑을 기억합니다. 성령님, 오늘 저를 인도해 주세요’라고 각각 부르도록 권하고, 찬송도 1절은 성부, 2절은 성자, 3절은 성령께 드리라고 하며, 하루의 감사 역시 세 분에게 역할별로 나누어 드리도록 권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문제 제기가 실제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이것을 오랫동안 반복하면 신자의 마음속에는 자연스럽게 세 개의 신적 중심이 형성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로는 ‘ 하나님’이라고 하지만 기도할 때는 세 분을 차례로 찾아가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새 교회 신학에서 중심은 ‘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부는 주님 밖에 따로 계시는 또 다른 신적 인격이 아니라 주님의 내적 신성이며, 성자는 그 신성이 세상에서 취하셨다가 영화하신 신적 인간이며, 성령은 그 한 분 주님에게서 발출하여 인간에게 역사하시는 신적 진리와 신적 활동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나아갈 때 우리는 성부를 건너뛰는 것도 아니고 성령을 제외하는 것도 아닙니다. 한 분 주님께 나아감으로써 신성 전체에 나아갑니다. 이 점에서는 오히려 영상 자체가 14분대에 말한 ‘여러분은 기도할 때마다 삼위일체 하나님 전체와 만나고 있는 겁니다’라는 표현이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라면 그것을 ‘ 분이 동시에 기도를 듣는다’고 설명하기보다 ‘ 주님 안에 신성의 충만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을 것입니다.

 

영상의 신학적 결론은 마지막 부분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런데 혼자서는 사랑할 없다. 그러므로 창조 이전부터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서로 사랑하고 계셨다.’ 그리고 그 사랑이 넘쳐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름답고 감동적인 설명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대목이 스베덴보리와 전통적 삼위일체론의 차이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은 하나님 안에 사랑을 주고받는 세 인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신성 자체가 사랑 그 자체이며 지혜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본질에는 자신 밖의 다른 존재를 사랑하고, 그 존재에게 자신의 것을 주며, 그 존재와 결합하기를 원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적 사랑은 창조를 향합니다. 인간과 천국을 창조하신 것도 사랑할 대상을 필요로 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비로소 완성되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완전한 신적 사랑 자체가 자신의 선과 행복을 다른 존재에게 나누어 주려 하기 때문입니다. 영상의 논리를 끝까지 밀고 가면 ‘사랑이 되기 위해 하나님 안에 최소한 복수의 인격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되지만, 스베덴보리에게 하나님의 단일성은 결핍이나 고독이 아닙니다. 오히려 무한한 사랑과 지혜와 생명의 완전한 하나 됨입니다.

 

그렇다고 이 영상을 ‘삼위일체를 잘못 가르치는 영상’이라고 단순하게 평가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전통적 기독교가 지키고자 했던 매우 중요한 진리들이 곳곳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것,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신적이라는 것, 성령은 단순한 비인격적 힘으로 축소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우리의 구원 전체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영상은 진지하게 붙들고 있습니다. 또한 고난 속에서 외적 상황의 변화보다 먼저 마음이 변화되고 평안을 얻는다는 후반부의 메시지도 매우 귀합니다. 이것은 ‘문제 해결’ 자체보다 인간의 내적 상태와 거듭남을 중요하게 보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충분히 귀하게 받을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이 영상에는 한 가지 일관된 긴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라고 계속 말하면서 실제 설명에서는 성부·성자·성령을 각각 생각하고, 말하고, 사랑하고, 계획하고, 행동하는 세 신적 주체로 그립니다. 그래서 ‘셋이 완벽하게 하나로 움직인다’고 아무리 강조해도 독자의 내적 사고에는 결국 세 분이 남기 쉽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삼위일체론은 이 문제에 대해 매우 급진적이면서도 단순한 답을 내놓습니다. ‘삼위일체를 버리지 말라. 그러나 삼위를 영원한 인격에게 나누지 말라. 삼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사람에게 영혼과 몸과 그에게서 나오는 활동이 있다고 해서 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듯, 주님 안에는 성부라 불리는 신성 자체, 성자라 불리는 신적 인간, 성령이라 불리는 발출하는 신성이 있습니다. 이 셋은 세 하나님이 서로 완벽하게 협력하여 하나가 된 것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의 삼위입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의 핵심 질문도 ‘ 분이 어떻게 하나가 되는가?’에서 ‘ 하나님 안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가 어떻게 존재하는가?’로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이번 영상 제목 ‘그런데 아직도 어려운 삼위일체’에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답한다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삼위일체가 어려운 까닭은 반드시 하나님 자체가 모순적인 신비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분이라고 고백하면서 분을 생각하도록 배워 왔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삼위일체를 없애지 않습니다. 오히려 흩어져 있던 삼위를 다시 주님 안에 모읍니다. 그때 성부께 것인가, 성자께 것인가, 성령께 구할 것인가 하는 신자의 오래된 혼란도 새로운 아래 놓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면 됩니다. 그분 안에 신성의 모든 충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번 영상에서 가장 역설적인 부분입니다. 영상은 ‘삼위일체의 안개를 걷어 주겠다’고 시작하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보면 그 안개가 완전히 걷히는 지점은 ‘ 분이 어떻게 하나인가’를 더 정교하게 설명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 셋이 주님 안에서 어떻게 하나인가’를 보는 데 있습니다. 그 순간 삼위일체는 세 하나님을 억지로 하나라고 이해해야 하는 난제가 아니라, 한 분 하나님께서 사랑 자체로 계시고, 인간에게 보이도록 오셨으며, 지금도 자신의 영으로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구원의 한 질서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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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 영상에서 강사가 다루는 본문은 역대상 49-10절의 유명한 ‘야베스의 기도’입니다. 한때 한국 교회에서도 ‘나의 지경을 넓혀 주십시오’라는 구절을 중심으로 크게 유행했던 기도입니다. 그 과정에서 ‘지경’은 사업의 확장, 재산의 증가, 사역의 성장, 영향력의 확대 같은 것으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았고, 그래서 야베스의 기도가 대표적인 ‘복을 구하는 기도’로 자리 잡았습니다. 강사가 문제 삼는 것도 바로 이 지점입니다. 그는 히브리어 본문을 자세히 살피면서 마지막 구절을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라고만 읽을 것이 아니라 ‘내가 고통을 일으키지 않게 하옵소서’라고도 읽을 수 있다고 제안합니다. 그렇게 되면 야베스의 기도는 ‘하나님, 나를 잘되게 주십시오’라는 기도에서 ‘하나님, 내가 남을 아프게 하는 사람이 되지 않게 주십시오’라는 기도로 깊어집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볼 때 바로 이 방향 전환은 매우 주목할 만합니다.

 

먼저 히브리어 자체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역대상 49절에서 야베스의 어머니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고 말하는데, 여기 사용된 히브리어 ‘오체브(עֹצֶב)는 고통, 슬픔, 수고 같은 뜻을 가집니다. 그리고 ‘야베스(יַעְבֵּץ)라는 이름과 이 단어 사이에는 분명한 언어유희가 있습니다. 실제로 여러 번역과 주석도 이 점을 인정합니다. 다만 영상에서 설명하듯 야베스라는 이름이 단순히 ‘오체브의 자음 순서를 바꾼 단어’라고 어원적으로 확정하는 것은 조금 조심하는 편이 좋습니다. 본문이 두 단어의 유사한 소리를 이용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성경의 이름 풀이에서는 현대 언어학적 어원과 문학적인 언어유희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야베스라는 이름과 고통을 뜻하는 오체브 사이에 의도적인 말놀이가 있다’고 하는 정도가 가장 안전합니다. 더구나 고유명사 야베스의 첫 요드(י)를 곧바로 히브리어 미완료형의 접두사라고 분석하는 것 역시 지나치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고유명사가 되면 그 자체로 이름이므로, 일반 동사의 활용형처럼 단순하게 역분석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본문 저자가 ‘야베스 - 고통 - 근심’이라는 음성적 연결을 독자에게 의식시키고 있다는 강사의 큰 관찰은 옳습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10절 끝의 ‘레빌티 오츠비(לְבִלְתִּי עָצְבִּי)입니다. 여기의 ‘오츠비’는 ‘고통하다, 슬프게 하다’와 관련된 동사의 부정사 형태에 1인칭 단수 접미사가 붙은 것으로 분석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 부정사에 붙은 인칭 접미사는 문맥에 따라 행위의 주체처럼 이해되기도 하고 객체처럼 이해되기도 하기 때문에, 강사가 소개한 두 방향의 가능성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 영어 번역들도 갈립니다. NASBNET 같은 번역은 대체로 ‘그것이 나를 아프게 하지 않도록’, 곧 야베스가 고통받지 않도록이라는 방향으로 번역하지만, NKJVHCSB 계열은 ‘내가 고통을 일으키지 않도록’이라는 방향을 취한 적이 있습니다. 따라서 강사가 말하는 ‘내가 고통을 야기하지 않게 주십시오’는 임의로 만들어 낸 번역은 아닙니다. 다만 영상에서 ‘킹제임스 번역이 저처럼 해석했다’고 말한 부분은 정확히는 수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통적인 KJV는 ‘that it may not grieve me’, 곧 ‘그것이 나를 근심하게 하지 않도록’이라고 번역하며, ‘that I may not cause pain’이라고 한 것은 NKJV입니다. 작은 차이 같지만 히브리어 해석을 중심으로 하는 영상이므로 이 구분은 중요합니다.

 

더구나 이 절의 히브리어는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습니다. ‘웨아시타 메라아(וְעָשִׂיתָ מֵּרָעָה)라는 부분 자체가 해석상 어려움이 있는 표현입니다. 많은 번역본은 문맥을 따라 ‘나를 악에서 지켜 주시고’, ‘재앙으로부터 보호하시고’와 같이 이해하지만, 마소라 본문의 문법을 문자 그대로 풀면 매끄럽지 않습니다. NET 성경도 이 대목의 히브리어가 어렵다는 점을 주석에서 명시하고 다른 본문 가능성까지 논의합니다. 그러므로 10절 마지막을 하나의 문법 분석만으로 완전히 해결됐다고 말하기보다는, ‘본문 자체가 여러 해석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며, 가운데 내가 고통을 일으키지 않도록이라는 이해도 실제 번역 전통 속에 존재한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오래된 유대교 주석 전통에서는 대체로 야베스 자신에게 손해와 고통이 닥치지 않게 해 달라는 의미로 읽어 왔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남에게 고통을 주지 않게’라는 해석은 매우 아름답고 문법적으로 가능한 독법 가운데 하나이지만, 전통적 해석을 폐기하는 결정적 번역이라고까지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말씀의 문자적 의미가 ‘나에게 고통이 오지 않게 주십시오’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곧바로 기복주의라고 규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주님께 보호와 건강과 평안과 생계와 필요한 자연적 복을 구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무엇을 위해 구해지는가입니다. ‘나의 지경을 넓혀 주십시오’가 ‘ 소유를 늘려 주십시오’, ‘나를 유명하게 만들어 주십시오’, ‘ 사역을 남들보다 크게 만들어 주십시오’라는 자기중심적 욕망으로 변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반대로 주님께서 맡기신 쓰임을 더 잘 감당하기 위해 필요한 자연적 조건과 능력과 기회를 구한다면 같은 말도 전혀 다른 기도가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외적 행위 자체보다 그 행위 안에서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목적으로 삼는지가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야베스의 기도의 핵심은 ‘복을 구했느냐, 복을 구하지 않았느냐’가 아닙니다. ‘ 복의 중심에 누가 있는가’입니다. 우리의 proprium은 복조차도 자기 자신을 향하게 만듭니다. ‘주님, 나의 지경을 넓혀 주십시오’라고 하면서 마음 깊은 곳에서는 ‘내가 인정받게 주십시오’, ‘ 이름이 높아지게 주십시오’, ‘내가 다른 사람보다 성공하게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같은 ‘지경’을 구하면서 ‘제가 많은 사람에게 선을 행할 있게 하시고, 책임을 감당하게 하시며, 주님께 받은 것을 넓게 쓰게 하십시오’라고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문자적으로 똑같은 기도라 하더라도 내적 의미에서는 전혀 다른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점에서 강사가 마지막 구절을 ‘내가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지 않게 주십시오’라고 읽은 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놀라울 만큼 잘 만납니다. 스베덴보리는 반복해서 ‘악을 죄로 여겨 피하는 ’을 기독교적 삶의 첫째요 본질적인 것으로 말합니다. ‘신적 섭리265번에서도 악을 죄로 여겨 삼가는 것이 기독교 종교의 본질이라고 설명하며, ‘참된 기독교535번에서는 체어리티의 첫째가 악을 피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지 ‘나에게 나쁜 일이 생기지 않도록 주십시오’라는 기도보다 훨씬 깊습니다. ‘주님, 안에 있는 악이 다른 사람에게 흘러나가지 못하게 주십시오. 말과 행동과 욕망 때문에 다른 사람이 상처받지 않게 주십시오. 그리고 악을 단순히 억제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그것이 주님께 죄임을 보고 돌이키게 주십시오’라는 기도가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내가 고통을 일으키지 않도록’이라는 기도조차 단순한 도덕적 착함을 넘어가야 합니다. 사람은 자기 힘으로 ‘좋은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한다고 해서 자신의 내면을 정결하게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외적 삶에서 악을 죄로 여기고 싸우며 물리칠 때, 실제로 그 악의 욕망을 내면에서 제거하시는 분은 주님이라고 설명합니다.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 1764) 145번은 사람이 악을 죄로 여기고 그것을 그만두기로 결심하면서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 싸움이 시작되고, 그 과정에서 주님께서 악한 욕망을 제거하고 선의 애정을 심으신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가장 깊은 야베스의 기도는 ‘제가 남에게 피해를 끼치도록 성격을 관리하겠습니다’가 아니라 ‘주의 손이 나와 함께하사, 제가 악을 행하지 않도록 하시고, 안에서 악을 일으키는 것까지 주님께서 다스려 주십시오’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야베스의 기도 가운데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라는 구절과도 아름답게 연결됩니다.

 

따라서 ‘지경을 넓혀 주십시오’와 ‘주의 손이 나와 함께하게 하십시오’와 ‘악에서 지켜 주십시오’와 ‘내가 고통을 일으키지 않게 하십시오’를 서로 떨어진 네 가지 소원으로만 읽지 않고 하나의 거듭남의 흐름으로 읽어 볼 수도 있습니다. ‘주님, 제게 주신 선과 진리의 삶의 영역을 넓혀 주십시오. 그러나 그것을 힘으로 소유하려 하지 않게 하시고, 언제나 주님의 손이 저와 함께하게 하십시오. 안의 악이 넓어진 지경 안으로 흘러들지 않게 하시며, 제가 받은 능력과 영향력이 오히려 다른 사람을 상하게 하는 도구가 되지 않게 주십시오.’ 이렇게 읽으면 ‘지경의 확대’는 성공의 확대가 아니라 쓰임의 확대가 됩니다. 지위가 높아질수록 더 많은 사람을 지배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고, 재물이 많아질수록 더 많이 소유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선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이 되며, 목회자의 영향력이 넓어질수록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라 더 많은 영혼을 주님께 연결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대상 410절에 스베덴보리가 직접 붙인 속뜻이라고 단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거듭남과 쓰임의 교리 안에서 이 기도를 읽을 때 자연스럽게 열리는 적용입니다.

 

이 지점에서 한국 교회의 이른바 ‘야베스의 기도 열풍’도 조금 다르게 평가할 수 있습니다. ‘지경을 넓혀 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는 사실 자체를 기복주의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지나칩니다. 성경에는 자연적 복을 구하는 기도가 있고, 주님께서는 우리의 자연적 삶도 섭리하십니다. 그러나 자연적 복을 최종 목적으로 만들 때 신앙의 질서가 뒤집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자연적인 것은 영적인 것을 섬겨야 합니다. 재물과 건강과 지위와 지식과 능력과 영향력은 모두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선한 쓰임을 위한 수단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경을 넓혀 주십시오’라는 기도를 버릴 것이 아니라 그 기도의 중심을 바꾸어야 합니다. ‘ 지경을 넓혀 것을 크게 주십시오’가 아니라 ‘주님께서 제게 맡기실 있는 쓰임의 지경을 넓혀 주십시오’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 영상의 가장 귀한 문장은 처음과 끝에 반복된 바로 이것일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지 않도록 그런 내가 있도록 인도해 달라.’ 이것은 매우 실제적인 회개의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 사람이 나에게 상처를 주었습니다’, ‘ 사람 때문에 내가 고통받습니다’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시선을 다시 나 자신에게 돌리게 합니다. ‘ 사람의 ’은 그 사람이 주님 앞에서 다룰 문제이고, 내가 지금 살펴야 하는 것은 ‘ 안의 ’입니다. ‘나는 누구에게 고통을 주고 있지는 않은가? proprium 자존심과 지배욕과 인정욕과 탐욕과 분노와 냉혹함 때문에 가까운 사람이 힘들어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것을 보는 것이 자기 성찰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발견한 악을 ‘ 성격이 원래 그래’라고 합리화하지 않고 ‘이것은 주님께 죄입니다’라고 인정하고 피하려 할 때 거듭남이 시작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악을 죄로 여겨 피하는 ’을 그토록 강조한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강사의 해석을 이렇게 평가하고 싶습니다. 히브리어 주해 차원에서는 ‘내가 고통을 일으키지 않도록’이라는 번역을 유일한 정답으로 밀어붙이기에는 조심할 점이 있습니다. 전통적인 ‘내가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이라는 해석 역시 충분한 문법적·번역사적 근거를 가지고 있으며, 실제 마소라 본문 자체에도 난해한 부분이 있습니다. 또한 영상에서 KJVNKJV를 혼동한 작은 오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감안하더라도 강사가 야베스의 기도를 자기중심적인 복의 청원에서 타인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 사람으로 변화되기를 구하는 기도로 전환한 것은 매우 좋은 신학적 통찰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내게 고통이 없게 하옵소서’와 ‘내가 고통을 주지 않게 하옵소서’ 가운데 하나를 버릴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둘이 함께 갈 수 있습니다. ‘주님, 악으로부터 저를 보호하여 주십시오. 그러나 무엇보다 제가 악의 통로가 되지 않게 하십시오. 지경을 넓혀 주십시오. 그러나 그것이 proprium 지경이 아니라 주님의 선과 진리가 흘러갈 쓰임의 지경이 되게 하십시오. 주의 손이 저와 함께하시되, 손으로 주변의 장애물만 치워 달라고 하지 않게 하시고, 먼저 안의 악을 보게 하시며 그것을 죄로 여겨 피하게 하십시오.

 

그렇게 되면 야베스의 기도는 더 이상 ‘고통 없는 인생과 성공을 보장받는 주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복을 받을수록 선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지경이 넓어질수록 많은 쓰임을 감당하게 하시며, 힘이 커질수록 아무도 해치지 않게 하시고, 무엇보다 모든 과정에서 주님의 손을 떠나지 않게 주십시오’라는 거듭남의 기도가 됩니다. 저는 야베스의 짧은 기도를 오늘 우리가 다시 드린다면, 바로 이 지점까지 가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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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4:15)

 

AC.39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Jehovah set a mark on Cain, lest anyone should smite him) 주님께서 신앙을 특별한 방식으로 구별하셔서 그것이 보존되게 하셨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mark) 어떤 사람에게 표를 하는 (setting a mark) 구별하는 수단을 의미한다는 데서 분명합니다. 에스겔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ThatJehovah set a mark on Cain, lest anyone should smite himsignifies that the Lord distinguished faith in a particular manner in order that it might be preserved,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amark,and ofsetting a markon anyone, as being a means of distinction. Thus in Ezekiel: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가운데에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 하시고 (9:4) Jehovah said, Go through the midst of the city, through the midst of Jerusalem, and make a mark on (or designate) the foreheads of the men groaning and sighing for all the abominations, (Ezek. 9:4)

 

여기서 이마에 표를 하는 (marking out the foreheads) 실제로 그들의 머리 앞부분에 어떤 표나 선을 그린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을 다른 사람들과 구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계시록에서도 where bymarking out the foreheads,is not meant a mark or line upon the front part of their heads, but to distinguish them from others. So in John, it is said that

 

그들에게 이르시되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각종 수목은 해하지 말고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 하시더라 (9:4) The locusts should hurt only those men who had not the mark of God on their foreheads, (Rev. 9:4)

 

하는데, 여기서도 표를 가진다는 것은 구별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where also to have the mark means to be distinguished.

 

 

 

[2] 같은 책에는 손과 이마에 (mark on the hand and on the forehead) 받는 것에 관하여 기록되어 있습니다(13:16). And in the same book we read of amark on the hand and on the forehead.” (Rev. 13:16)

 

 

 

그가 모든 작은 자나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들에게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13:16)

 

같은 것이 유대교회에서는 첫째이자 계명을 손과 이마에 매는 것으로 표상되었습니다. 이에 관하여 신명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읽습니다. The same thing was represented in the Jewish church by binding the first and great commandment on the hand and on the forehead, concerning which we read in Moses:

 

4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8너는 그것을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6:4, 8) Hear, O Israel, Jehovah our God is one Jehovah; (Deut. 6:4, 8)

 

13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명령을 너희가 만일 청종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섬기면, 18이러므로 너희는 나의 말을 너희의 마음과 뜻에 두고 그것을 너희의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너희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며 (11:13, 18) and thou shalt love Jehovah thy God with all thy heart, and with all thy soul, and with all thy strength, and thou shalt bind these words for a sign upon thy hand, and they shall be as frontlets between thine eyes. (Deut. 11:13, 18)

 

이것으로 사랑에 관한 계명을 다른 모든 계명보다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 표상되었습니다. 이로부터 손과 이마에 표를 하는 (marking the hand and the forehead)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By this was represented that they should distinguish the commandment respecting love above every other, and hence the signification ofmarking the hand and the foreheadbecomes manifest.

 

[3] 이사야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So in Isaiah:

 

18내가 그들의 행위와 사상을 아노라 때가 이르면 나라와 언어가 다른 민족들을 모으리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것이며 19내가 그들 가운데에서 징조를 세워서 그들 가운데에서 도피한 자를 여러 나라 다시스와 뿔과 활을 당기는 룻과 두발과 야완과 나의 명성을 듣지도 못하고 나의 영광을 보지도 못한 섬들로 보내리니 그들이 나의 영광을 나라에 전파하리라 (66:18-19) I come to gather all nations and tongues; and they shall come and shall see my glory; and I will set a mark upon them. (Isa. 66:1819)

 

시편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And in David:

 

16내게로 돌이키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주의 종에게 힘을 주시고 주의 여종의 아들을 구원하소서 17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 (86:16-17) O turn unto me, and have mercy upon me, give thy strength unto thy servant, and save the son of thy handmaid. Set upon me a mark for good, and they that hate me shall see and be ashamed. (Ps. 86:1617)

 

구절들로부터 이제 의미가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가인이라 하는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 실제로 어떤 표가 주어졌다고 생각해서는 됩니다. 말씀의 속뜻에는 문자적 의미에 담긴 것과는 전혀 다른 것들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From these passages the meaning of a mark is now evident. Let no one therefore imagine that any mark was set upon a particular person called Cain, for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contains things quite different from those contained in the sense of the letter.

 

해설

AC.396가인의 가 무엇인지를 말씀의 여러 용례를 통해 확증합니다. 앞의 AC.392에서는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셨다는 것이 주님께서 신앙을 특별한 방식으로 구별하여 그것이 보존되게 하셨음을 의미한다고 먼저 밝혔습니다. AC.393-395에서는 왜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까지 보존되어야 했는지를 설명했습니다. 이제 AC.396에서는 라는 말 자체가 말씀에서 실제로 구별을 의미하는지를 에스겔, 계시록, 신명기, 이사야, 시편을 통하여 보여 줍니다.

 

가장 먼저 인용되는 겔9:4는 이 의미를 매우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예루살렘의 가증한 일들을 보고 탄식하며 우는 사람들의 이마에 표를 하라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실제 머리 앞부분에 어떤 선이나 표식을 그리는 것으로 읽지 않고, 그 사람들을 다른 사람들과 구별하는 으로 풀이합니다. 중요한 것은 표의 외형이 아니라 그 표를 통하여 어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어 보존된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창4장의 가인의 표 역시 같은 원리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9:4이마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아니한 사람들도 같은 증거로 제시됩니다. 여기서도 이마에 있는 표는 사람을 영적으로 구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는 단순히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표시라기보다 그 사람이 어떤 상태에 속해 있는지를 구별하는 표상입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가인의 표도 가인이라는 개인에게 붙은 특이한 신체 표식으로 찾으려 하지 않습니다.

 

[2]에서는 계13:16손과 이마에 가 언급되고, 이어 유대교회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손과 이마에 매도록 한 규례와 연결됩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그 표상을 사랑에 관한 계명을 다른 모든 계명보다 구별하는 이라고 해석한다는 점입니다. 6장의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계명이 첫째이자 큰 계명으로 구별되어야 했으며, 그것을 손과 이마에 두는 행위가 바로 그 구별을 표상했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가인 이야기 전체와도 깊이 연결됩니다. 가인의 문제는 사랑과 체어리티보다 신앙을 우위에 놓았다는 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의 의미를 확증하면서 다시 사랑에 관한 계명을 모든 계명보다 구별하는 표상을 가져옵니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신앙이 보존되는 목적은 신앙이 홀로 지배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결국 다시 사랑과 체어리티를 주된 것으로 인정하는 올바른 질서에 들어가기 위해서입니다.

 

이마의 세부 상응을 이번 번호에서 지나치게 확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직접 증명하려는 것은 표를 한다=구별한다는 명제이기 때문입니다. 손과 이마가 각각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별도 심화로 펼치기보다, 사랑에 관한 첫째 계명을 다른 모든 것보다 구별하는 표상이었다는 본문의 논증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3]의 사66:18-19와 시86:16-17도 같은 목적을 가집니다. ‘를 세우거나 은총의 표적을 보이는 것은 어떤 사람이나 상태가 다른 것과 구별되어 있음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에 인용된 성경 구절들은 서로 다른 독립 주제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 하나의 사실, 곧 말씀에서 표를 하는 이 구별을 의미한다는 것을 확증하는 하나의 인용군입니다.

 

이제 다시 가인에게 돌아오면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셨다는 말씀의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가인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을 표상합니다. 주님께서는 그 분리를 승인하신 것이 아니라, 그 상태에서도 신앙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도록 특별히 구별하여 보존하셨습니다. AC.393-394에서 설명했듯이 인류는 더 이상 태고교회처럼 사랑으로부터 직접 신앙에 속한 것을 퍼셉션할 수 없게 되었고, 이후에는 신앙의 지식을 먼저 듣고 배운 뒤 그것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체어리티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에 관한 지식이 완전히 사라져서는 안 되었습니다.

 

AC.395에서 그 보존이 왜 거룩한 문제였는지도 설명되었습니다. 가인을 죽이는 자에게 의 벌이 있다고 한 것은 일곱이 거룩하고 침해해서는 안 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분리된 신앙 자체가 거룩하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것을 이후의 구원을 위한 쓰임으로 구별하여 보존하셨기 때문에 함부로 파괴해서는 안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AC.396는 바로 그 특별한 구별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가인의 에는 구별보존이라는 두 요소가 함께 있습니다. 먼저 주님께서 신앙을 특별히 구별하시고, 그렇게 구별하신 목적은 그것이 보존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가인의 표를 단순히 하나님이 가인을 벌하시면서 동시에 보호하셨다는 도덕적 이야기로만 읽으면 이 구조를 놓치게 됩니다. 속뜻에서는 인류의 영적 상태가 낮아진 뒤에도 주님께서 앞으로 구원에 쓰일 수 있는 신앙의 지식을 보존하시는 섭리가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번호 마지막에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강하게 문자적 독법에 경계를 세웁니다. ‘가인이라 하는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 실제로 어떤 표가 주어졌다고 생각해서는 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가인의 표가 어떤 모양이었는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아예 그런 질문 자체가 속뜻의 초점에서 벗어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해석하고 있는 가인은 한 개인의 전기적 인물이 아니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는 교회적·영적 상태를 표상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창1-11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을 때 매우 중요한 독법을 다시 확인해 줍니다. 문자적 이야기를 읽으면서 가인의 표가 피부색이었을까, 흉터였을까, 어떤 초자연적인 표시였을까?라고 추측하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이 본문에서 찾는 아르카나와 관계가 없습니다. 그의 관심은 어떤 표였는가?라는 외적 모양이 아니라 표가 주어졌는가?라는 영적 기능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능은 신앙을 구별하여 보존하는 것입니다.

 

다만 이 마지막 문장을 근거로 말씀의 문자적 의미가 아무 가치가 없다고 확대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말씀에는 문자적 의미와 구별되는 속뜻이 있으며, 지금 자신이 해설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 속뜻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의 초점은 역사적·고고학적으로 가인의 몸에 어떤 표가 있었는지를 재구성하는 데 있지 않고, 그 이야기를 통하여 주님께서 교회의 신앙을 어떻게 보존하셨는지를 밝히는 데 있습니다.

 

AC.392-396을 한꺼번에 보면 이제 가인의 에 대한 설명이 상당히 완성됩니다. AC.392에서 가인을 죽이는 것이 모독이고 표는 신앙의 특별한 구별과 보존이라고 먼저 선언했습니다. AC.393에서는 인간이 천적 상태를 잃은 뒤 신앙의 지식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받아야 하는 새로운 질서를 설명했습니다. AC.394에서는 바로 인류가 영원한 죽음 가운데 멸망하지 않도록 신앙이 보존되었다고 밝혔고, AC.395에서는 일곱이 그 보존의 거룩하고 침해할 수 없는 성격을 보여 준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396자체가 말씀에서 구별을 의미한다는 것을 확증합니다.

 

결국 가인의 표는 가인의 죄를 눈에 보이게 표시한 낙인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의 타락 가운데에서도 구원을 위한 수단을 완전히 소멸시키지 않으시고 특별히 구별하여 보존하신 섭리를 나타냅니다. 인간은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했지만, 주님께서는 그 분리 때문에 신앙 자체까지 사라지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훗날 사람이 신앙의 지식을 듣고 배우며 그것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받을 수 있도록 보존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에서 궁극적으로 보아야 할 것은 가인의 몸에 새겨진 어떤 신비한 표시가 아니라, 인간의 실패 속에서도 구원의 길을 끊지 않으시는 주님의 보존 섭리입니다. (AC.396)

 

 

 

AC.395, 창4:15,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 일곱은 왜 거룩한 것을 뜻하는가?’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5‘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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