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영상은 아주 사소한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남편이 처음 가는 길에서 차선을 하나 잘못 탑니다. 아내가 말합니다. ‘아, 진짜. 그것도 제대로 못 해?’ 조금 뒤 주차가 한 번에 되지 않자 ‘됐어. 그냥 내가 할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연애할 때도 이 남자는 운전을 잘하는 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때는 ‘괜찮아. 다시 가면 되지’ 하며 웃었습니다. 똑같은 사람이 똑같은 실수를 했는데, 10년 사이에 ‘웃을 일’이 ‘못난 일’이 되었습니다. 영상은 여기서 질문합니다. ‘사람은 그대로인데 왜 평가만 달라졌는가?’

 

영상이 내놓는 답은 ‘고마움이 사라진 자리에 채점표가 들어앉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연애할 때 집까지 데려다주면 고맙고, 밥값을 내면 고맙고, 퇴근길에 케이크 하나를 사와도 ‘내 생각이 나서 샀구나’ 합니다. 그러나 결혼 후에는 운전도, 월급도, 집안일도, 아이 돌보는 것도 모두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 됩니다. 물론 결혼하면 서로 책임을 지므로 어느 정도 당연해지는 것은 정상입니다. 문제는 ‘책임이 당연해지는 것’과 함께 ‘고마움까지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상당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사랑은 상대에게서 무엇을 받을 것인가를 먼저 세지 않지만, proprium은 끊임없이 계산합니다. ‘나는 이만큼 했는데 당신은 무엇을 했어?’, ‘남편이라면 이 정도는 해야 하는 것 아니야?’, ‘다른 집 남편은 저렇게 하는데 당신은 왜 못 해?’ 이렇게 상대가 ‘사랑하는 사람’에서 ‘나의 기대를 충족시켜야 하는 사람’으로 바뀌는 순간, 부부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장부가 생깁니다. 그리고 그 장부의 특징은 매우 불공정합니다. 잘한 것은 ‘원래 해야 할 일’이어서 기록하지 않고, 못한 것만 기록합니다.

 

영상은 이것을 정확히 짚습니다. 남편이 매일 출근하고 월급을 가져오고, 주말에 아이를 데리고 나가고, 차에 이상이 생기면 정비소를 알아보고, 보일러가 고장 나면 기사를 부르는 일들은 기록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재활용을 한 번 내놓지 않으면 ‘당신은 집에서 하는 게 뭐야?’라는 말이 나옵니다. 영상은 이 말이 아픈 이유를 ‘하나를 지적당해서가 아니라 하나로 사람 전체가 정리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참 예리한 지적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대하시는 방식은 이와 정반대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오래 읽다 보면 거듭남 가운데 있는 인간이 얼마나 불완전한 존재인지 거듭 만나게 됩니다. 주님은 그 불완전함을 모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 자신보다 훨씬 더 정확하게 아십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한 번의 실패로 그 사람 전체를 규정하지 않으시고, 그 안에 남겨 두신 선과 진리, 곧 리메인스를 보존하시며 끊임없이 그 사람을 선 쪽으로 이끄십니다. 그렇다면 결혼 안에서도 사랑은 상대의 결점을 못 보는 것이 아니라 ‘결점을 보면서도 그 결점으로 그 사람 전체를 규정하지 않는 것’에 가까울 것입니다.

 

영상에는 더 깊은 통찰이 하나 나옵니다. 결혼하면서 배우자 위에 ‘남편’이라는 자리가 덮인다는 것입니다. 연애할 때는 ‘이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해주었는가’를 보지만 결혼 후에는 ‘남편이면 이 정도는 해야 하는 것 아닌가?’로 기준이 바뀝니다. 더구나 그 ‘이 정도’라는 기준을 현실의 한 사람에게서 가져오는 것도 아닙니다. 돈은 가장 많이 버는 남편에게서, 집안일은 가장 잘하는 남편에게서, 육아는 가장 다정한 아빠에게서, 성격은 가장 무던한 남편에게서 하나씩 가져와 머릿속에 ‘이상적인 남편’을 조립합니다. 그리고 현실의 한 남자에게 그 모든 기준을 요구합니다. 영상의 표현처럼 ‘사람이 내려간 게 아니라 기준이 올라간 것’입니다.

 

이것은 비교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비교는 현실의 배우자와 현실의 다른 한 사람을 비교하지 않습니다. 여러 사람의 가장 좋은 부분만 잘라 붙인 ‘존재하지 않는 사람’과 내 배우자를 비교합니다. 그러므로 내 배우자가 이길 방법이 없습니다. 남편에게 적용하면 ‘돈도 잘 벌고, 집안일도 잘하고, 아이에게도 자상하고, 부모에게도 잘하고, 말도 다정하고, 아내 마음도 알아서 헤아리며, 취미도 건전하고, 외모 관리도 하는 남편’이 됩니다. 아내에게 똑같이 적용하면 역시 현실에 존재하기 어려운 여자가 만들어집니다.

 

여기서 영상 제목의 한계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결혼 후 남편을 무시하기 시작하는 여자들의 특징’이라고 되어 있지만, 이 현상은 여성에게만 해당하지 않습니다. 남편 역시 아내를 다른 여성들과 비교하며 똑같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누구 아내는 돈도 벌면서 집안일도 잘한다더라’, ‘누구 엄마는 아이 교육을 저렇게 한다더라’, ‘연애할 때는 안 그랬는데 왜 이렇게 변했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영상 자체도 후반부에서 남편이 아내의 외모나 친정을 약점으로 공격하는 것 역시 관계를 무너뜨린다고 인정합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여자의 문제’로만 읽으면 영상에서 건질 수 있는 훨씬 깊은 진실을 놓치게 됩니다.

 

특히 눈여겨볼 것은 ‘말’입니다. 밖에서는 직장 동료나 친구에게 절대로 하지 않을 말을 배우자에게는 너무 쉽게 합니다. ‘그것도 못 해?’, ‘당신이 뭘 알아?’, ‘당신은 센스 없잖아’, ‘당신한테 시키면 두 번 일이야.’ 심지어 다른 사람들 앞에서 ‘우리 남편은 진짜 똥손이야’, ‘우리 집에서 제일 큰 애가 얘야’ 같은 말을 농담으로 합니다. 처음에는 모두 웃습니다. 남편도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 웃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반복되면 농담이 아니라 그 가정에서 그 사람에게 부여된 ‘정체성’이 됩니다.

 

이 대목은 영적으로 매우 무겁습니다. 말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말에는 생각이 실리고, 생각에는 애정이 실립니다. 계속해서 상대를 낮추는 말이 입에서 나온다면 이미 내 안에서는 그 사람을 낮추어 보는 시선이 어느 정도 자리 잡았다는 뜻입니다. 더 무서운 것은 처음에는 화가 나서 그런 말을 하지만, 반복하다 보면 그 말에 맞추어 상대를 보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원래 그런 사람이야’라는 말은 결국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든 틀 속에 상대를 가두는 일이 됩니다.

 

영상이 보여주는 악순환은 더욱 섬뜩합니다. 아내가 남편의 판단을 계속 고쳐줍니다. 무엇을 사오면 ‘왜 이것을 샀어?’, 의견을 내면 ‘당신이 뭘 알아?’, 일을 하면 ‘그렇게 하는 게 아니지’라고 합니다. 그러면 남편은 어느 순간부터 아내의 표정을 먼저 살핍니다. ‘이걸 사도 되나?’, ‘이 말을 하면 또 틀렸다고 하려나?’ 결국 자기 의견을 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본 아내가 다시 말합니다. ‘당신은 왜 자기 생각이 없어?’ 알아서 하면 지적받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알아서 하는 게 없다’고 지적받습니다.

 

영상은 이를 ‘몇 년에 걸쳐 서로가 제일 싫어하는 모습을 서로에게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남편이 무엇을 해도 고쳐주다 보니 남편은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되고,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남편을 보면서 아내는 ‘역시 이 사람은 내가 시켜야만 움직인다’고 확신합니다. 이 부분은 거듭남이라는 관점에서도 생각할 거리가 많습니다. 인간관계에서 우리는 상대의 악을 단지 발견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우리의 태도로 그 약점을 더욱 강화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남편의 무책임이나 게으름을 모두 아내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됩니다. 실제로 무책임한 남편도 있고, 가족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남편도 있으며, 모든 결정을 배우자에게 떠넘기면서 편하게 살아온 사람도 있습니다. ‘아내가 잔소리를 해서 남편이 이렇게 되었다’는 하나의 설명으로 모든 부부를 해석한다면 그것 역시 영상이 경계하는 ‘채점표’와 다르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 먼저 향해야 합니다. ‘상대가 왜 저렇게 되었는가?’보다 먼저 ‘나는 이 관계 안에서 무엇을 만들어 내고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영상에서 특히 아픈 부분은 배우자가 서로의 약점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라는 대목입니다. 배우자는 회사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돌아온 얼굴도 보고, 승진에서 밀린 날도 알고, 돈 걱정으로 잠들지 못하는 밤도 압니다. 좋은 배우자는 그 약점을 알기 때문에 지켜줍니다. 그러나 관계가 상하면 바로 그 지식이 무기가 됩니다. ‘그러니까 회사에서도 인정 못 받지’, ‘당신이 그러니까 승진을 못 하는 거야.’ 가장 믿었던 사람이 가장 아픈 곳의 정확한 위치를 알고 거기를 누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혼의 친밀성이 가진 두 얼굴입니다. 친밀함은 상대의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갈 수 있는 특권입니다. 동시에 그만큼 깊은 상처를 줄 수 있는 능력이기도 합니다. 낯선 사람은 내가 어디가 아픈지 모릅니다. 배우자는 압니다. 그래서 결혼애에서 친밀함은 단순히 서로 많은 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알게 된 것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상대의 약점을 알게 되었을 때 그것을 보호하는 데 사용하는가, 싸움에서 이기는 데 사용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때 체어리티가 매우 구체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체어리티는 막연하게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감정이 아닙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의 약점을 이용하지 않는 것, 상대의 실수를 사람 전체의 평가로 확대하지 않는 것, 내가 옳더라도 상대의 인격을 짓밟는 방식으로 그 옳음을 행사하지 않는 것 역시 체어리티입니다. 특히 부부 싸움에서 ‘사실인 말’이 가장 잔인한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거짓말이라서 상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어서 더 깊이 박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비교입니다. 결혼할 때 남편의 월급에 만족했던 아내가 몇 년 뒤 주변 친구들의 남편과 비교하기 시작합니다. 누구는 대기업으로 옮겼고, 누구는 서울에 집을 샀고, 누구 집 아이는 학원을 여러 개 다닙니다. 그러자 어제까지 성실하게 출근하고 월급을 가져오며 아이를 사랑하던 남편이 갑자기 부족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영상은 ‘바뀐 건 남편이 아니라 비교 대상이 하나 생겼다는 것뿐’이라고 지적합니다.

 

비교는 감사의 반대편에 있습니다. 감사는 ‘내게 주어진 것’을 보지만 비교는 ‘내게 없는 것’을 봅니다. 감사는 지금 내 곁의 사람을 보지만 비교는 다른 사람의 장점을 끌어와 내 곁의 사람을 재판합니다. 그리고 비교에는 끝이 없습니다. 내 배우자보다 돈을 많이 버는 사람도 언제나 있고, 더 다정한 사람도 있고, 더 집안일을 잘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기준을 따라가기 시작하면 배우자의 가치는 계속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영상에서 가장 안타까운 변화는 결국 남편이 ‘말을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설명합니다. 다음에는 다툽니다. 그다음에는 피합니다. 마지막에는 ‘응’, ‘알았어’, ‘그래’ 세 마디만 남습니다. 아내는 ‘당신은 왜 나랑 대화를 안 해?’라고 하지만 남편은 이미 ‘말해서 뭐 하나? 어차피 틀렸다고 할 텐데’라는 상태에 들어갔습니다. 영상 마지막 질문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우리 남편은 왜 나랑 대화를 안 해요?’가 아니라 ‘그 사람은 언제부터 말을 안 하게 됐을까요?’입니다.

 

더 무서운 것은 싸움마저 사라지는 순간입니다. 남편은 퇴근하고 지하주차장에서 휴대전화를 보다가 올라가고, 아내는 아이와 친구와 취미에 집중합니다. 같은 집에서 ‘관리비 냈어?’, ‘아이 학원 데려다줘’, ‘택배 받아줘’ 같은 기능적인 말만 합니다. 겉으로는 조용합니다. 그러나 영상은 ‘조용한 집을 사이 좋은 집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싸움이 없어진 게 아니라 기대가 없어진 것’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결혼애’(Conjugial Love, 1768, CL)에서 스베덴보리가 결혼을 바라보는 핵심에는 두 마음의 결합이 있습니다. 몸이 한집에 산다고 결합된 것이 아닙니다. 함께 돈을 쓰고 아이를 키운다고 자동으로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서로의 내면을 향해 열리고, 서로의 선을 기뻐하며, 점점 하나가 되기를 원하는 방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영상 속 ‘조용한 부부’의 문제는 싸움이 없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두 사람의 내면이 서로에게 닫혔다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영상은 남편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말합니다. 많은 남편이 ‘참는 것이 가정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공개적인 비하나 모욕을 그냥 웃고 넘깁니다. 그러나 영상은 필요하다면 ‘그 얘기는 그만하자’, ‘그런 말 듣는 것 싫어. 앞으로는 하지 마’라고 차분히 선을 표시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역시 중요한 균형입니다. 체어리티는 무조건 참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가 악한 습관을 계속하도록 방치하는 것도 사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선을 긋는다’는 것을 보복이나 권력투쟁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나를 무시했으니 나도 당신을 무시하겠다’가 아니라 ‘우리 사이에서 이런 방식의 말은 서로에게 좋지 않으니 여기서 멈추자’는 것입니다. 상대를 굴복시키기 위한 경계가 아니라 관계를 보호하기 위한 경계입니다. 사랑은 무조건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 선을 위해 질서를 세우기도 합니다.

 

영상이 제시하는 회복의 출발점은 의외로 작습니다. 거창한 ‘우리 대화 좀 하자’가 아니라 상대가 한 일을 하나씩 다시 알아보는 것입니다. ‘오늘 그것 챙겨줘서 편했어’, ‘이거 당신이 알아본 거지?’ 영상은 이를 ‘잔소리를 줄이는 것’과 구별합니다. 잔소리만 줄이면 집이 조용해질 뿐이지만 ‘잘한 것을 세기 시작하면 사람이 다시 말을 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표현하면 ‘선의 발견’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람에게는 악과 거짓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심어 두시고 보존하신 선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관계가 나빠질수록 상대 안의 선은 보지 않고 악과 결점만 수집합니다. 마치 검사가 유죄 증거만 모으듯 지난 몇 년의 사건들을 모아 ‘봐, 당신은 원래 이런 사람이야’라는 판결문을 작성합니다. 회복은 그 판결문을 찢는 데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상대의 잘못을 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잘못 때문에 보이지 않게 된 선을 다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더 깊은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나는 왜 배우자를 무시할 때 은밀한 만족을 느끼는가?’ 상대가 틀리고 내가 옳다는 것을 확인할 때 proprium은 만족합니다. 내가 더 현명하고, 더 책임감 있고, 더 희생하며, 이 가정이 유지되는 것은 ‘내가 붙잡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은 상당히 달콤할 수 있습니다. 영상에서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남편을 깎아내리는 이유 중 하나를 ‘자기가 인정받고 싶어서’라고 분석합니다. 남편이 얼마나 못하는지를 보여줌으로써 ‘그런 사람을 데리고 이 집을 이만큼 꾸려가는 나’를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렌즈는 남편에게서 아내에게로, 그리고 다시 영상을 보고 있는 우리 자신에게로 돌아와야 합니다. ‘저런 여자와 살면 얼마나 힘들까?’에서 멈추면 이 영상은 또 하나의 남녀 갈등 콘텐츠가 됩니다. 그러나 ‘나는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어떤 채점표를 들이대고 있는가?’라고 묻기 시작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배우자뿐 아니라 자녀, 부모, 교회 공동체의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습니다.

 

특히 오랜 관계일수록 그렇습니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는 작은 친절에도 감사하지만 가족이 수십 년 동안 해온 수고에는 좀처럼 감사하지 않습니다. 낯선 사람이 문을 잡아주면 ‘감사합니다’라고 하면서 배우자가 매일 차려주는 밥, 벌어오는 생활비, 운전, 설거지, 장보기, 병원 동행, 아이 돌봄에는 감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가족이니까 당연하지’라는 말은 어느 순간 사랑을 가장 빠르게 메마르게 하는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영상 마지막의 말이 그래서 오래 남습니다. ‘상대 아래에 있는 사람처럼 대하지 않는 것. 밖에서는 절대 안 할 말을 가족이라는 이유로 하지 않는 것. 상대의 약한 자리를 안다는 이유로 거기를 누르지 않는 것. 남의 집 배우자를 기준으로 내 옆 사람의 값을 매기지 않는 것.’ 이것은 단순한 부부관계 기술을 넘어 체어리티의 매우 실제적인 모습과 맞닿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결혼은 상대가 내 기대를 얼마나 잘 충족시키는지를 평가하는 긴 시험장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가까운 한 사람을 통해 내 proprium이 얼마나 끈질긴지를 발견하고, 그것을 주님 앞에서 내려놓으며,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거듭남의 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배우자의 결점은 분명 보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두 길이 갈립니다. ‘당신은 왜 그것도 못 해?’라고 상대를 내려다보는 길과, ‘이 사람의 부족함 앞에서 지금 내 안에서는 무엇이 올라오고 있는가?’라고 자신을 돌아보는 길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결혼생활에서 가장 위험한 날은 크게 싸운 날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상대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게 된 날, 잘해도 아무 느낌이 없고 못하면 짜증만 나는 날, 서로의 마음보다 기능만 주고받는 날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회복의 시작도 거창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늘 배우자가 해온 아주 작은 선 하나를 다시 발견하고 그것을 입 밖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고마워.’

 

결국 이 영상의 제목 ‘당신은 왜 그것도 못 해?’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뒤집으면 우리 자신을 향한 질문 하나가 남습니다. ‘나는 왜 가장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의 선은 당연하게 여기면서, 그의 부족함은 그렇게 쉽게 세고 있는가?’ 그리고 그 질문 앞에서 우리는 배우자의 성적표가 아니라 내 손에 들린 ‘채점표’를 바라보게 됩니다. 어쩌면 주님께서 먼저 내려놓게 하시는 것은 상대의 결점이 아니라 바로 그 채점표인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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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5-480 심화

2, ‘아담은 한 사람인가, 태고교회인가?’

 

AC.478에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강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여기서 다루는 주제는 인류 최초의 어떤 한 사람의 창조가 아니라 태고교회’라고 합니다. 창세기를 전통적인 방식으로 읽어 온 독자라면 여기서 자연스럽게 질문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는 아담을 인류 최초의 한 남성 개인으로 보지 않았다는 말인가?’

 

먼저 스베덴보리가 창세기의 ‘아담’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는 분명합니다. AC.478에서 그는 히브리어 ‘아담’(Adam)이 ‘사람’(man)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더욱이 창1:26에서는 ‘사람’을 단수로 말하면서 곧이어 ‘그들’이라는 복수로 받고, 창5:2에서는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뒤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 ‘사람’은 한 남성 개인에게만 적용되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남자와 여자를 함께 포함하는 말이며, 속뜻으로는 태고교회를 가리킵니다. AC.137에서도 창세기 처음 세 장은 ‘사람’(homo)이라 하는 태고교회를 그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다룬다고 설명합니다.

 

이 점은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 1764, DP) 241에서 더욱 직접적으로 밝혀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아담과 그의 아내’가 ‘세상에 창조된 최초의 인간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아담이라는 개인에게 태고교회라는 추가적인 상징적 의미도 있다’는 정도의 설명보다 훨씬 강합니다. 창세기에서 ‘아담과 그의 아내’라는 형상으로 묘사된 대상 자체가 인류 최초의 두 개인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DP.328에서도 같은 원리가 다시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스라엘·유대교회 이전의 여러 교회가 역사적인 방식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민족들과 사람들의 이름 아래 묘사되었다고 설명하면서, 그 첫 번째인 태고교회가 ‘아담과 그의 아내 하와’의 이름 아래 묘사되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AC.478 한 곳에서 우연히 등장하는 특이한 해석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창세기 초기 역사를 이해하는 일관된 방식입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는 역사적 개인 아담의 존재를 부정했는가?’라는 질문에는 어떻게 답해야 할까요? 여기서는 질문 자체를 조금 정밀하게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은 하나님께서 세상에 최초로 창조하신 한 남성 개인이며, 하와는 그와 함께 최초로 창조된 한 여성 개인이라고 스베덴보리가 보았는가?’라고 묻는다면, DP.241에 비추어 답은 분명합니다. 그는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아담과 그의 아내’는 최초로 창조된 두 인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직접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과 ‘인류 역사 전체를 통틀어 아담이라는 이름을 가진 어떤 개인도 실제로 존재한 적이 없었다’는 명제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후자의 문제를 입증하는 데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의 질문은 ‘아담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역사상 단 한 명도 없었는가?’가 아니라 ‘주님께서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라는 이름 아래 무엇을 계시하셨는가?’입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그의 답은 명확합니다. ‘태고교회’입니다.

 

이 구별은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시대 자체를 신화적이고 비역사적인 시대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AC.1114 이하에서는 ‘사람 또는 아담이라 했던 태고교회’에 속했던 이들과 사후세계에서 대화했다고 기록하며, 그 교회의 후대에 속했던 사람들도 언급합니다. 따라서 ‘아담 = 태고교회’라는 해석은 ‘실제로 존재했던 사람들은 없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실제 많은 사람으로 이루어진 최초의 교회가 있었으며, 말씀은 그 교회와 그 상태를 ‘아담’, 곧 ‘사람’이라는 이름 아래 묘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창5의 계보를 이해하는 데도 매우 중요합니다. 창5의 아담,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등의 이름을 단순히 한 가족의 생물학적 족보로만 읽는다면 스베덴보리가 밝히려는 속뜻을 놓치게 됩니다. AC.470은 이 이름들이 실제적인 것들, 곧 여러 교회와 그 상태들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AC.485는 창4의 셋과 창5의 셋이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어도 서로 다른 교회를 의미한다고까지 명시합니다. 따라서 창5의 계보는 태고교회에서 이어져 나온 여러 교회와 그 상태의 계승을 기록한 내적 역사로 읽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스베덴보리가 ‘그러므로 역사적 개인 아담은 존재하지 않았다’라는 현대적인 문장으로 결론짓지 않았는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의 목적은 역사학적 논쟁을 벌이는 데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이름의 개인이 있었느냐 없었느냐가 아니라, 주님께서 말씀의 ‘아담’이라는 이름 안에 어떤 신적 진리를 담으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아담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대신, 훨씬 더 자신의 해석 원리에 맞는 방식으로 ‘아담과 그의 아내는 세상에 창조된 최초의 인간들을 의미하지 않고 태고교회의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DP.241).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입장을 가장 정확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는 인류 최초의 두 개인에 관한 전기적 기록의 주인공이 아니라 태고교회와 그 교회에 속한 사람들을 나타냅니다. 그렇다고 태고시대의 실제 사람들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실제 사람들로 이루어진 최초의 교회가 있었으며, 말씀은 그 교회를 ‘아담’, 곧 ‘사람’이라는 이름 아래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창세기의 아담을 읽을 때 중심 질문은 ‘최초의 한 남자가 누구였는가?’보다 ‘왜 주님께서는 최초의 교회를 ‘사람’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내셨는가?’가 됩니다. 그 질문을 따라가면 창1의 창조, 창2의 에덴, 창3의 타락, 그리고 창5의 계보가 모두 한 개인의 전기를 넘어 태고교회의 형성과 천적 상태, 쇠퇴와 후대 교회들의 계승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내적 역사로 열리게 됩니다. (AC.475-480 심화 2)

 

 

 

AC.480, 창5:2, ‘여섯째 날의 끝과 안식일의 시작에 이른 사람’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5:2) AC.480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사람’이라 일컬어졌다는 것은 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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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5-480 심화 1, 왜 신앙과 사랑의 결혼이 이루어져야 비로소 ‘사람’이라 하는가?

AC.475-480 심화1, 왜 신앙과 사랑의 결혼이 이루어져야 비로소 ‘사람’이라 하는가? 창5:2에는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라고 되어 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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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5-480 심화

1, 왜 신앙과 사랑의 결혼이 이루어져야 비로소 ‘사람’이라 하는가?

 

창5:2에는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AC.475-480에서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태고교회의 거듭남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남자’는 이해(understanding)와 거기에 속한 것들을, 따라서 신앙을 의미하고, ‘여자’는 의지(will)와 거기에 속한 것들을, 따라서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말씀은 이 둘을 끝까지 ‘남자와 여자’라고 따로 부르지 않고, 그들의 이름을 하나의 ‘사람’(homo)이라 합니다. 왜 신앙과 사랑이 결혼을 이루었을 때 비로소 둘을 하나의 ‘사람’이라 하는 것일까요?

 

그 출발점은 AC.477의 매우 중요한 선언에 있습니다. ‘가장 높은 의미로는 오직 주님 자신만이 사람이시다’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참된 사람이 되는 기준은 인간 자신에게 있지 않고 주님께 있습니다. 천적 교회를 ‘사람’이라 하는 것은 그 교회가 주님의 ‘모양’이기 때문이고, 영적 교회를 ‘사람’이라 하는 것은 주님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교회와 사람이 ‘사람’이라 하는 것은 그들 안에 독립적으로 참된 인간성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사랑과 선과 진리를 받아 주님의 형상과 모양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남자’와 ‘여자’가 함께 있어야 합니까? 남자가 의미하는 신앙은 진리를 알고 받아들이는 쪽과 관계되고, 여자가 의미하는 사랑은 그 진리를 원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쪽과 관계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진리를 이해하면서도 그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의 이해와 의지는 하나가 아닙니다. 반대로 선을 원한다고 하면서도 무엇이 참된 선인지를 밝혀 주는 진리와 분리되어 있다면 역시 온전한 질서를 이루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과정은 이처럼 나뉘어 있던 신앙과 사랑, 이해와 의지를 하나의 생명으로 결합하시는 과정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천적 인간에게서는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AC.479는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되었을 때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비롯된 신앙’으로 말미암아 가장 탁월한 의미로 ‘사람’이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신앙과 사랑의 결혼은 두 요소를 반반씩 결합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질서의 중심에는 사랑이 있고, 신앙은 그 사랑으로부터 나옵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의 진리를 보고,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무엇이 진리인지를 지각하며, 그렇게 알게 된 진리를 다시 삶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창4의 가인이 표상하는 상태와 정확히 대조됩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 자체에 있지 않았습니다. 신앙을 사랑과 분리하여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만든 데 있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본래 질서에서는 사랑이 신앙의 중심이었으며, 사랑으로부터 신앙에 속한 것들을 지각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신앙을 사랑으로부터 분리하면서 그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AC.337). 따라서 창5:2의 ‘남자와 여자’의 결혼은 창4에서 무너진 바로 그 질서의 본래 모습을 보여 줍니다.

 

AC.476에서 결혼이 이루어진 뒤 더 이상 ‘남자와 여자’라 하지 않고 ‘사람’이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해와 의지, 신앙과 사랑이 서로 분리되어 움직일 때에는 아직 둘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 둘을 결합하시면 하나의 삶이 됩니다. 사람이 믿는 것과 사랑하는 것, 아는 것과 원하는 것, 고백하는 것과 살아가는 것이 하나의 방향을 향하게 됩니다. 말씀에서 ‘그의 이름’이 아니라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다’ 한 것은 바로 이 하나 됨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AC.480은 이 상태를 창1의 여섯째 날의 끝과 일곱째 날의 시작에 연결합니다. 여섯째 날에는 신앙과 사랑이 하나가 되며, 그때 사랑이 중심이 되는 천적 상태가 시작됩니다. AC.83도 여섯째 날이 완성되는 때를 신앙과 사랑이 하나가 되어 사랑이 중심이 되기 시작하는 상태로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일곱째 날의 안식은 단순히 모든 활동이 중단된 상태가 아니라, 사람 안의 질서가 주님을 중심으로 바로잡혀 더 이상 신앙과 사랑이 서로 갈라져 싸우지 않는 천적 상태를 의미합니다.

 

결국 ‘사람’은 단순히 인간이라는 종의 명칭만이 아닙니다. 속뜻으로는 주님께서 사람 안에서 신앙과 사랑, 이해와 의지를 결합하여 하나의 생명으로 이루신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가장 높은 의미로는 오직 주님만이 사람이시고, 교회와 거듭난 사람은 주님의 형상과 모양을 받아 ‘사람’이 됩니다. 참된 인간성은 많이 아는 데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받은 진리가 사랑이 되고 그 사랑에서 다시 신앙과 삶이 흘러나오는 데서 완성됩니다. 창5:2의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다’는 말씀은 바로 이러한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를 압축하여 보여 줍니다. (AC.475-480 심화 1)

 

 

 

AC.475-480 심화 2, ‘아담은 한 사람인가, 태고교회인가?’

AC.475-480 심화2, ‘아담은 한 사람인가, 태고교회인가?’ AC.478에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강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여기서 다루는 주제는 인류 최초의 어떤 한 사람의 창조가 아니라 태고교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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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5, 창5:2, ‘신앙과 사랑의 결혼을 이룬 교회’(AC.475-480)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and blessed them, and called their name man, in the day when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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