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And God created man in his own image, in the image of God created he him;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1:27)

 

AC.53

 

여기서 형상(image)이 두 번 언급되는 이유는, 이해에 속한 신앙을 자기 형상(his image)이라 하며, 의지에 속한 사랑을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이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은 영적 인간에게서는 뒤따르지만, 천적 인간에게서는 앞서 나옵니다. The reason why “image” is here twice mentioned is that faith, which belongs to the understanding, is called “his image”; whereas love, which belongs to the will, and which in the spiritual man comes after, but in the celestial man precedes, is called the “image of God.”

 

 

해설

 

이 구절은 짧지만, 스베덴보리 인간학에서 ‘이해와 의지’, ‘신앙과 사랑’, 그리고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관계를 가장 정밀하게 압축해 놓은 핵심 문장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여기서 형상이 두 번 언급되는 것은 두 개의 형상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의 형상이 이해 중심의 상태에서 의지 중심의 상태로 완성되어 가는 과정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먼저 문장을 그대로 따라가 보겠습니다. ‘이해에 속한 신앙을 자기 형상이라 하며’입니다. 여기서 ‘자기 형상’이라는 표현은, 아직 형상의 중심이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 쪽에 더 가까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 상태는 사람이 진리를 배우고, 이해하고, 그것을 따라 살려고 애쓰는 단계입니다. 분명 주님을 향하고 있지만, 여전히 중심은 ‘내가 이해하고, 내가 판단하고, 내가 따라가는’ 구조에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자기 형상’이라고 표현됩니다.

 

이 상태가 바로 영적 인간의 출발점입니다. 그는 진리를 통해 주님께 나아갑니다. ‘이것이 옳다’는 것을 이해하고, 그 이해에 따라 삶을 조정해 갑니다. 이때 사랑은 아직 앞서지 않고, 신앙이 이끄는 방향을 따라 점점 형성됩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도 ‘이 사랑은 영적 인간에게서는 뒤따른다’고 말합니다. 즉, ‘신앙 사랑’의 순서입니다.

 

이제 다음으로 넘어가면, ‘의지에 속한 사랑을 하나님의 형상이라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제 형상의 중심이 더 이상 ‘사람 쪽’이 아니라 ‘하나님 쪽’으로 옮겨집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단순히 배워서 갖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직접 작용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시므로, 그 사랑이 사람 안에서 중심이 될 때, 그 사람은 단순히 주님을 닮아 가는 수준을 넘어, ‘주님의 생명이 실제로 흐르는 형식’이 됩니다. 그래서 이때 비로소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릅니다.

 

이 상태가 바로 천적 인간입니다. 그는 더 이상 ‘이것이 옳은가’를 먼저 따지지 않습니다. 이미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랑에서 자연스럽게 옳은 것이 나옵니다. 그래서 본문은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이 앞선다’고 말합니다. 즉, ‘사랑 신앙’의 순서입니다. 이해는 더 이상 주도권을 쥐고 판단하는 역할이 아니라, 이미 있는 사랑을 밝히고 표현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제 전체를 하나로 묶어 보시면, 이 구절의 구조가 분명해집니다. ‘형상’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다만 그 하나의 형상이 처음에는 ‘이해 중심(신앙 중심)’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자기 형상’이라 불리고, 점차 ‘의지 중심(사랑 중심)’으로 완성되면서 ‘하나님의 형상’이라 불리는 것입니다. 즉, 두 번의 언급은 두 개의 형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형상이 ‘중심이 이동하며 완성되는 두 단계’를 보여 줍니다.

 

이걸 실제적으로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말씀을 배우고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이해합니다. 그래서 노력하며 따라갑니다. 이때는 여전히 ‘내가 이해해서 따라가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을 지나면서, 어느 순간부터는 ‘이것이 좋아서’, ‘이것이 참으로 선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렇게 살게 됩니다. 그때는 더 이상 이해가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중심이 되어 삶이 흘러갑니다. 바로 그 전환이 ‘자기 형상’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의 변화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단순히 용어를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거듭남의 깊은 흐름을 한 문장으로 보여 줍니다. ‘신앙이 앞서는 상태에서 시작하여, 사랑이 중심이 되는 상태로 나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형상이 완성되는 길입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AC.53형상의 두 번 언급은 두 개의 형상이 아니라, 신앙 중심에서 사랑 중심으로 이동하며, 하나의 형상이 완성되는 과정을 나타냅니다.’

 

 

 

AC.52, 창1:26, ‘순서에 깃든 아르카나’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26) AC.52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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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영적 인간’, 천적 인간

 

영적 인간’, 천적 인간을 설명해 주세요. 특히 천적이라는 표현을 설명해 주세요. 영적이라는 표현은 익숙한데, 천적이라는 표현은 낯설군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차이는 ‘무엇을 중심으로 사는가’의 차이이며, ‘천적’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하늘에 속했다’는 뜻이 아니라 ‘사랑(의지)이 직접 주님과 연결되어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매우 깊은 개념입니다. 즉, ‘영적 인간’은 진리(이해)를 통해 주님께 나아가는 사람이고, ‘천적 인간’은 선(사랑, 의지) 자체로 주님과 직접 결합된 사람입니다.

 

먼저 ‘영적 인간’부터 보겠습니다. 영적 인간은 ‘이해가 먼저 열리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말씀을 듣고, ‘이게 옳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를 먼저 깨닫습니다. 그래서 그 깨달은 진리를 따라 살려고 노력합니다. 다시 말해, ‘진리를 통해 선으로 나아가는 구조’입니다. 처음에는 의무처럼, 혹은 옳기 때문에 따르다가, 점점 그것이 삶이 되어 갑니다. 그래서 영적 인간은 ‘진리    ’의 흐름을 갖습니다.

 

이 상태에서는 여전히 생각과 판단이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이게 맞나?’, ‘이렇게 해야 하나?’를 끊임없이 따집니다. 그래서 때로는 갈등도 많고, 선택의 싸움도 계속됩니다. 그러나 이 과정을 통해 점점 질서가 세워지고, 결국 선한 삶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우리가 경험하는 거듭남의 길입니다.

 

이제 ‘천적 인간’을 보겠습니다. 천적 인간은 이와 정반대의 구조를 가집니다. 이 사람은 ‘사랑이 먼저’입니다. 즉, 무엇이 옳은지를 따지기 전에, 이미 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굳이 ‘이게 맞나?’ 고민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옳은 것을 선택합니다. 다시 말해, ‘    진리’의 흐름입니다.

 

여기서 ‘천적’이라는 말의 의미가 드러납니다. ‘천적’은 단순히 ‘하늘 같은’이 아니라, ‘천국의 가장 깊은 층위에 속한 상태’, 곧 ‘주님에 대한 사랑이 직접적으로 의지에 심겨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래서 천적 인간은 선을 ‘배워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행합니다. 진리는 그 사랑을 설명하고 표현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 차이를 아주 쉽게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영적 인간은 ‘이렇게 하는 것이 옳으니까 해야 한다’에서 출발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힘들고, 갈등도 있습니다. 반면 천적 인간은 ‘이게 좋다, 이것이 사랑스럽다’에서 출발합니다. 그래서 같은 행동을 해도, 그 안에는 억지가 아니라 기쁨이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을 ‘퍼셉션(perception)이 있는 사람’이라고 설명합니다. 즉, 무엇이 선한지 따져서 아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느끼고 아는 상태’입니다. 반면 영적 인간은 ‘양심(conscience)을 통해 살아갑니다. 즉, 배운 진리와 원칙에 따라 판단하고 선택하는 상태입니다.

 

이제 왜 ‘천적’이라는 표현이 낯설게 느껴지는지도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영적 인간’의 길을 걷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배우고, 이해하고, 그것을 따라 살려고 애쓰는 과정 속에 있기 때문에 ‘영적’이라는 표현은 익숙합니다. 그러나 ‘천적’은 그보다 더 깊은 상태, 곧 ‘이미 사랑이 중심이 된 상태’를 가리키기 때문에 낯설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AC의 흐름에서 보면, 태고교회가 바로 이 ‘천적 인간’의 상태였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따로 배우기 전에, 이미 선을 사랑하고 있었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주님과 연결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후 인간은 이 상태를 잃고, ‘영적 인간’의 길, 곧 진리를 통해 다시 올라가는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영적 인간은 진리를 통해 선으로 나아가는 사람이고, 천적 인간은 선 자체로 주님과 직접 연결된 사람입니다. 그리고 천적이라는 표현은 천국의 가장 깊은 차원에 속한 사랑의 상태’,  의지 자체가 주님과 결합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영적 인간은 옳기 때문에 선을 행하는 사람이고, 천적 인간은 사랑하기 때문에 선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AC.52, 창1:26, ‘순서에 깃든 아르카나’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26) AC.52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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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2, 심화 1, ‘시8:6-8’

AC.52.심화 1. ‘시8:6-8’ 6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7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8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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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2.심화

 

1. 8:6-8

 

6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7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8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8:6-8) Thou madest him to have dominion over the works of thy hands; thou hast put all things under his feet, the flock and all cattle, and also the beasts of the fields, the fowl of the heavens, and the fish of the sea, and whatsoever passeth through the paths of the seas (Ps. 8:6–8).

 

 

이 구절은 AC.52의 문맥에서 ‘주님의 형상(image)으로 지음 받은 사람이 어떤 상태에 이르게 되는가’, 곧 ‘주님으로부터 난 사람 안에 세워지는 질서와 통치’를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8:6-8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다는 것은 사람이 스스로 지배자가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형상을 회복한 사람 안에서 주님의 질서가 서며, 그 결과 모든 내적, 외적 요소들이 그 질서 아래에 조화롭게 복종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먼저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입니다. AC.52에서는 ‘주님의 형상’이란, 사람이 진리를 통해 주님을 반영하는 상태, 곧 이해가 밝아지고 질서가 서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때 ‘다스린다’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 통제한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질서에 따라 모든 것을 제자리에 두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주님의 형상이 회복된 사람 안에서는 ‘무엇이 위에 있고, 무엇이 아래에 있어야 하는가’가 바로 서게 됩니다.

 

이제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다’입니다. ‘’은 성경에서 가장 바깥, 가장 낮은 것을 의미하며, ‘발 아래 둔다’는 것은 ‘외적이고 낮은 것들이 내적이고 높은 것 아래에 놓이는 상태’를 뜻합니다. AC.52의 흐름에서 보면, 이것은 바로 ‘형상이 회복된 사람 안에서 이해(진리)가 중심이 되어, 그 아래에 의지와 삶, 그리고 감각적 요소들이 질서 있게 정돈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제 구체적 대상들을 보시면 의미가 더 또렷해집니다. ‘소와 양’은 비교적 순한 애정, 곧 선한 자연적 감정들을 의미하고, ‘들짐승’은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욕망과 본능을 의미합니다. ‘공중의 새’는 생각과 이해의 활동, 곧 다양한 사유의 흐름을 의미하고, ‘바다의 물고기’는 가장 외적인 감각과 기억, 그리고 낮은 수준의 인식들을 의미합니다. 즉, 이것들은 모두 ‘사람 안에 있는 다양한 층위의 요소들’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발 아래’에 있다는 것은, 이 요소들이 서로 뒤엉켜 사람을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중심 아래에서 질서를 이루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AC.52에서는 그 중심이 바로 ‘주님의 형상’, 곧 진리를 통해 형성된 내적 인간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차이를 보셔야 합니다. 이 상태는 ‘내가 나를 잘 통제한다’는 수준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질서가 내 안에 세워졌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는 상태’입니다. 즉, 통제의 주체가 ‘’가 아니라 ‘내 안에 세워진 주님의 질서’입니다.

 

이걸 실제적으로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거듭나기 전에는 어떤 욕망이 올라오면 그것이 바로 생각을 지배하고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감정이 위에 있고, 이성이 그 뒤를 따라갑니다. 그런데 주님의 형상이 회복되면, 먼저 ‘이것이 옳은가’가 중심이 되고, 감정과 욕망은 그 아래에서 조절됩니다. 더 나아가면, 그런 욕망 자체도 점점 순화되어 전체가 하나의 조화 속에 들어갑니다.

 

바로 이 상태가 ‘만물이 발 아래 있는 상태’입니다. 즉, 높은 것이 낮은 것을 다스리고, 내적인 것이 외적인 것을 이끄는 질서가 회복된 상태입니다. 이것이 AC.52에서 말하는 ‘주님의 형상’이 실제로 사람 안에 나타난 모습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인간의 권세를 강조하는 말씀이 아니라, ‘주님의 형상을 통해 사람 안에 세워지는 질서의 완성 상태’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위대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질서가 사람 안에서 온전히 자리 잡을 때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8:6-8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다는 것은 주님의 형상이 회복된 사람 안에서 진리가 중심이 되어, 모든 내적, 외적 요소들이 질서 있게 복종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AC.52, 심화 2, ‘영적 인간’, ‘천적 인간’

AC.52.심화 2. ‘영적 인간’, ‘천적 인간’ ‘영적 인간’, ‘천적 인간’을 설명해 주세요. 특히 ‘천적’이라는 표현을 설명해 주세요. ‘영적’이라는 표현은 익숙한데, ‘천적’이라는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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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2, 창1:26, ‘순서에 깃든 아르카나’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26) AC.52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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