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앞의 영상을 부부의 입장에서 보면 가장 강하게 남는 질문은 ‘우리는 정말 팀인가?’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시선을 조금 옮겨 부모의 자리에서 바라보겠습니다. 그러면 질문도 달라집니다. ‘결혼한 자녀와 배우자가 팀이 되도록 나는 얼마나 물러나 주고 있는가?’입니다. 영상에는 시어머니의 말, 장모의 개입, 명절 방문 순서, 음식 준비, 용돈, 육아, 제사와 친척 관계 등 수많은 문제가 등장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켜고 부모의 자리에서 보면 이 모든 문제의 밑바닥에는 하나의 영적인 문제가 숨어 있습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과 ‘자녀를 삶의 연장으로 붙들고 있는 ’은 같은가 하는 문제입니다.

 

성경은 결혼에 관하여 매우 놀라운 순서를 제시합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몸을 이룰지로다(2:24). 여기에는 ‘떠남’이 먼저 있고 ‘합함’이 있으며 그 결과 ‘ ’이 됩니다. 물론 이것은 부모와 관계를 끊으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부모 공경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결혼이 이루어지는 순간 관계의 질서에는 분명한 변화가 생깁니다. 이전까지 부모와 자녀가 하나의 가정이었다면 이제 그 자녀는 배우자와 새로운 가정을 이루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창2:24의 ‘떠남’은 자녀에게만 요구되는 일이 아닙니다. 자녀가 부모를 떠나야 한다면 부모 역시 자녀가 떠날 수 있도록 놓아주어야 합니다. 어쩌면 후자가 더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결혼애(Conjugial Love, 1768, CL)에서 스베덴보리는 참된 결혼의 본질을 두 마음의 결합에서 찾습니다. 두 사람이 단순히 한집에서 사는 것을 넘어 점차 하나의 삶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그 안에는 ‘하나가 되고자 하는 의지’가 있습니다(CL.215). 그렇다면 결혼한 자녀를 둔 부모가 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사랑 가운데 하나는 바로 그 결합을 보호해 주는 것입니다. 아들과 며느리 사이, 딸과 사위 사이에 형성되고 있는 ‘우리’를 존중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이 어린 시절에는 보호하고 가르치고 개입하는 사랑이었다면, 결혼 이후에는 상당 부분 ‘물러남으로써 보호하는 사랑’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이것이 어려운 까닭은 부모에게는 자녀의 결혼보다 부모-자녀 관계가 훨씬 오래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들은 며느리를 만나기 수십 년 전부터 내 아들이었고, 딸은 사위를 만나기 수십 년 전부터 내 딸이었습니다. 부모에게는 수많은 기억과 희생과 애착이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 깊은 곳에서는 결혼 후에도 ‘ 아들’, ‘ ’이라는 감각이 가장 먼저 작동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결혼한 자녀에게는 이제 또 하나의 매우 중요한 정체성이 생겼습니다. ‘누군가의 남편’, ‘누군가의 아내’입니다. 부모가 이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악의가 전혀 없어도 자녀의 결혼생활에 끊임없이 압력을 가할 수 있습니다.

 

명절은 이 질서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때입니다. ‘이번에는 언제 오니?’, ‘ 시에 거니?’, ‘자고 거지?’, ‘큰아버지가 오시는데 얼굴은 보고 가야지’, ‘명절인데 정도는 해야 하지 않니?’ 각각의 말만 떼어 놓으면 크게 잘못된 말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실제로 부모 입장에서는 오랜만에 자녀를 보고 싶은 마음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요구가 양가에서 동시에 들어오면 자녀 부부는 그 사이에서 선택해야 합니다. 부모에게는 ‘조금만 있다 가라’는 한마디이지만, 자녀의 배우자에게는 ‘우리 친정보다 시댁이 항상 우선이다’ 또는 그 반대의 메시지로 경험될 수도 있습니다. 영상이 보여 주는 갈등의 상당 부분은 바로 이런 작은 요구들이 반복되면서 생겨납니다.

 

여기서 부모가 특별히 살펴야 할 것은 ‘나는 요구하지 않았다’는 자기평가입니다. 직접 ‘우리 집부터 와라’고 말하지 않았더라도 서운한 표정, 반복되는 질문, 다른 집 자녀와의 비교, ‘옛날에는 그랬다’는 말, 늦게 왔을 때의 냉랭함으로 충분히 압력을 줄 수 있습니다. 자녀는 부모를 잘 알기 때문에 부모가 명시적으로 요구하지 않아도 무엇을 원하는지 압니다. 그러므로 부모의 거듭남은 말만 조심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어야 사랑받는다고 느끼는 마음’ 자체를 살펴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proprium의 문제가 등장합니다. proprium은 노골적인 이기심으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주 선한 외형을 입을 때 분별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가족인데 정도는 해야지’,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당연하지’, ‘우리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명절에 가족이 모이는 뭐가 나쁘니?’ 모두 그 자체로 틀린 말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 말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입니다. 자녀의 자유와 새 가정을 존중하는 사랑이 들어 있을 수도 있고, ‘내가 부모이니 정도는 받을 권리가 있다’는 자기성이 들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외적 행동만 보면 둘은 비슷하지만 내적 동기는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영상에서 매우 중요한 대목은 ‘아들이 효도하고 싶은데 며느리가 일을 하고, 딸이 효도하고 싶은데 사위가 비용을 부담한다’는 지적입니다. 부모의 입장에서도 이것은 깊이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며느리가 차린 명절상을 받으면서 ‘우리 아들이 효자다’라고 생각한다면 실제로 그 효도의 상당 부분을 누가 감당하고 있는지 보아야 합니다. 반대로 딸이 부모에게 좋은 선물을 해왔을 때도 그 비용과 준비가 사위에게 어떤 부담이 되었는지 부모는 알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모가 자녀의 효도를 기쁘게 받는 것과 자녀 배우자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때로는 부모가 먼저 ‘너희가 무리하면서까지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 주는 것이 오히려 더 깊은 가족 사랑일 수 있습니다.

 

특히 며느리와 사위를 ‘우리 사람이 되었으니 우리 방식에 따라야 하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결혼은 한 사람이 다른 집안으로 편입되어 그 집안의 관습에 복종하는 사건만은 아닙니다. 두 사람이 새로운 가정을 이루는 사건입니다. 따라서 ‘우리 집은 원래 이렇다’는 말은 생각보다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이 새로운 가족에게 과거의 질서를 그대로 강요하는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통은 소중하지만 사람보다 높을 수는 없습니다. 전통이 사랑을 돕는다면 보존할 가치가 있지만, 전통 때문에 한 사람이 지속적으로 고통받는다면 부모 역시 그 전통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부모가 자녀 부부에게 아무 말도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것 역시 반대 극단입니다. 자녀가 결혼했다고 부모의 지혜와 경험이 무가치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부모는 조언할 수 있고 걱정할 수 있으며 잘못된 것을 잘못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조언’과 ‘지배’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조언은 상대에게 자유를 남겨 둡니다. 지배는 내가 원하는 결론을 상대가 선택해야 마음이 놓입니다. ‘ 생각은 이렇지만 결정은 너희 둘이 의논해서 해라’라고 말하고 실제로 다른 결정을 했을 때도 그것을 존중할 수 있다면 조언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알아서 해라’라고 말해 놓고 다른 선택을 하면 서운함과 냉대로 대한다면 사실상 선택권을 준 것이 아닙니다.

 

또 하나 부모가 매우 조심해야 할 것은 부부 사이의 갈등에 들어가는 방식입니다. 자녀가 배우자에 대한 불만을 부모에게 털어놓을 때 부모의 본능은 자기 자녀를 보호하는 쪽으로 움직입니다. 그러나 부부싸움은 화해하면 끝날 수 있어도 부모의 마음에 새겨진 며느리나 사위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은 오래 남을 수 있습니다. 자녀는 다음 날 배우자와 화해했는데 부모는 몇 년 전 들은 이야기를 아직 기억하는 일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결혼한 자녀가 배우자를 흉볼 때 무조건 함께 분노해 주는 것이 반드시 사랑은 아닙니다. 때로는 ‘많이 힘들었겠구나. 그래도 문제는 너희 둘이 이야기해 보아라’ 하고 자녀를 다시 배우자에게 돌려보내는 것이 그 결혼을 보호하는 부모의 지혜일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매우 깊은 영적 원리가 있습니다. 참된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을 ‘ ’으로 만들려 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인간에게 자유를 주시는 것처럼, 사랑은 상대가 자기 자리에서 바르게 설 수 있도록 돕습니다. 자녀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자녀의 모든 선택을 대신하고, 자녀의 배우자와 경쟁하고, 자녀가 자신보다 배우자를 우선할 때 배신당했다고 느낀다면 그 사랑 안에는 소유하려는 자기성이 섞여 있을 수 있습니다. 부모에게도 거듭남이 필요하다는 말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자녀를 키우는 동안에는 붙잡아 주는 것이 사랑이었다면 어느 시점부터는 놓아주는 것이 사랑이 됩니다.

 

그래서 결혼한 자녀가 ‘이번 명절에는 처가부터 가겠습니다’, ‘이번에는 여행을 가려고 합니다’, ‘제사는 이렇게 간소화했으면 합니다’, ‘이번에는 오래 있지 못합니다’라고 말할 때 부모의 마음에 서운함이 생기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감정은 자연스럽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다음입니다. 그 서운함을 자녀에게 죄책감으로 돌려줄 것인가, 아니면 주님 앞에서 자신의 마음을 살필 것인가입니다. ‘ 나는 아이들이 오지 않으면 이렇게 섭섭한가? 내가 원하는 가족의 모습을 아이들에게 강요하고 있지는 않은가? 아이들이 나를 사랑한다는 증거를 특정한 방식으로 확인받으려 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런 질문이 부모 자신의 거듭남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부모에게는 또 하나의 어려운 시험이 있습니다. 자녀의 배우자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입니다. 부모의 눈에는 분명 부족한 점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기억해야 할 것은 그 사람이 ‘ 며느리’, ‘ 사위’이기 이전에 자녀가 평생을 함께 살아갈 배우자라는 사실입니다. 부모가 며느리나 사위를 지속적으로 깎아내리면 결국 자녀에게 두 충성 사이에서 선택하도록 요구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녀가 배우자를 보호하면 ‘결혼하더니 변했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창2:24의 질서에서 보면 어느 정도의 변화는 오히려 당연합니다. 부모를 버린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결혼적 결합을 보호하기 위해 경계를 세우는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모에게 가장 아름다운 말 가운데 하나는 어쩌면 ‘우리 때문에 너희 둘이 싸우지는 마라’일 것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 일은 우리가 감당할 테니 너희 가정을 먼저 세워라’라고 말할 수 있다면 더욱 깊은 사랑일 것입니다. 이것은 부모를 중요하지 않은 존재로 만드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부모가 자신의 자리를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자녀의 사랑을 붙잡아야만 안심하는 부모가 아니라 자녀가 배우자와 잘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기뻐할 수 있는 부모, 이것은 결코 작은 영적 성숙이 아닙니다.

 

여기서 부모 공경의 의미도 새롭게 볼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효도를 요구하는 것과 자녀가 자유롭게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전혀 다른 열매를 맺습니다. 강요된 효도는 외적 행동을 얻을 수는 있지만 마음까지 얻기는 어렵습니다. 반대로 부모가 자녀 부부의 자유와 경계를 존중하면 오히려 자녀가 기쁜 마음으로 부모를 찾을 가능성이 커집니다. 사랑은 붙잡을수록 멀어지고 자유를 줄수록 가까워지는 역설적인 면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강제로 사랑을 받아내지 않으시는 이유와도 통하는 지점입니다.

 

명절 역시 이런 의미에서는 부모에게 하나의 거울이 됩니다. ‘아이들이 시에 왔는가’, ‘얼마짜리 선물을 가져왔는가’, ‘며느리가 음식을 얼마나 했는가’, ‘사위가 얼마나 오래 앉아 있었는가’를 평가하는 시간이 아니라, ‘나는 이들의 결혼을 평안하게 해주는 부모인가?’를 돌아보는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며느리가 부엌에서 일하고 있을 때 ‘너도 앉아서 쉬어라’라고 말하고, 사위가 불편하게 앉아 있을 때 자연스럽게 쉴 자리를 만들어 주고, 자녀 부부가 다음 일정 때문에 일어나려 할 때 ‘그래, 얼른 봐라’ 하고 보내 줄 수 있다면 그것도 매우 실제적인 체어리티입니다. 거창한 신앙 고백보다 이런 작은 행동 속에서 사랑의 질서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결국 부모의 입장에서 이 영상의 핵심 질문은 ‘ 요즘 자녀들은 명절을 힘들어하는가?’가 아닐 것입니다. 더 깊은 질문은 ‘나는 자녀가 결혼한 뒤에도 여전히 부모-자녀 관계가 그들의 삶에서 가장 우선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입니다. 그리고 ‘내가 섭섭하지 않기 위해 자녀의 배우자가 희생하도록 요구하고 있지는 않은가?’입니다. 이 질문은 부모에게 결코 편안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듭남은 언제나 이런 불편한 자기 발견을 통과합니다.

 

2:24의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라는 말씀은 그래서 자녀에게만 주어진 말씀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자녀에게는 ‘떠날 용기’를 요구하고 부모에게는 ‘보낼 사랑’을 요구합니다. 자녀가 떠나는 것이 거듭남이라면 부모가 보내는 것 역시 거듭남입니다. 어린 자녀에게는 손을 잡아 주는 부모가 필요하지만, 결혼한 자녀에게는 그 손을 조금씩 놓아주는 부모가 필요합니다. 붙잡고 싶은 마음이 올라올 때마다 ‘ 아이는 소유가 아니라 주님께 속한 사람이며, 이제 배우자와 함께 새로운 삶을 이루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부모의 가장 큰 성공은 자녀가 언제까지나 부모를 가장 먼저 찾게 만드는 데 있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아들과 며느리가 서로 사랑하고, 딸과 사위가 서로를 보호하며, 그들의 아이들이 평안한 가정 안에서 자라는 것을 기뻐하면서 자신은 한 걸음 뒤에서 그 결혼을 축복할 수 있게 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우리 집에 먼저 와라’보다 ‘너희 둘이 의논해서 편한 대로 해라’, ‘며느리가 이것도 하느냐’보다 ‘너희 둘이 행복하게 살아라’, ‘결혼하더니 자식이 변했다’보다 ‘이제 정말 자기 가정을 이루어 가는구나’라고 말할 수 있는 부모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이것은 단순한 세대 갈등 해결법이 아닙니다. 사랑의 질서를 배우는 일입니다. 부모의 사랑도 주님의 손 안에서 계속 변화하고 정화되어야 합니다. 처음에는 품는 사랑이었다가, 가르치는 사랑이 되고, 기다리는 사랑이 되며, 마침내 놓아주고 축복하는 사랑으로 성숙해 갑니다. 어쩌면 결혼한 자녀를 둔 부모에게 주어진 거듭남의 한 장면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 자녀를 얼마나 붙잡고 있는가’가 아니라 ‘주님 안에서 얼마나 자유롭게 놓아줄 있는가.’ 자녀의 결혼을 지켜 주기 위해 기꺼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 것, 그것 역시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매우 깊은 사랑입니다.

 

 

 

SY.102, 존버의 경제학, ‘명절 이혼이 많은 진짜 이유’ (20260922)

※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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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3 심화

1.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하라는 말씀은 인용되었는가?’

 

스베덴보리가 AC.433에서 마18:22를 인용한 이유는 라멕의 일흔일곱 배의 보복에 사용된 숫자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두 말씀은 얼핏 보면 서로 정반대의 내용을 말합니다. 마태복음에서 주님은 형제를 끝없이 용서하라고 말씀하시지만, 창세기에서 라멕은 일흔일곱 배의 보복을 말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두 말씀을 연결합니다. 그 이유를 이해하려면 숫자 자체보다 그 숫자가 사용된 문맥을 먼저 살펴야 합니다.

 

마태복음에서 베드로는 형제가 자신에게 죄를 범하면 몇 번까지 용서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주님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를 문자적인 횟수로만 읽으면 용서할 수 있는 최대 횟수가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말씀을 그렇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형제가 죄를 범할 때마다 용서하여 그 용서가 끝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밝힙니다. 따라서 이 말씀의 핵심은 용서의 횟수를 계산하는 데 있지 않고, 용서에 끝을 정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께서는 단순히 계속 용서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이러한 숫자를 사용하셨을까요? AC.433에서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말씀의 일곱이 지니는 의미와 연결합니다. 일곱째 날이 천적 인간과 천적 교회, 천적 천국을 나타내며, 가장 높은 의미에서는 주님 자신을 나타내기 때문에 일곱은 거룩한 것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에 나오는 일곱과 일흔 번씩 일곱 번은 단순한 계산을 넘어 거룩한 의미를 지닌 표현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구별할 점이 있습니다. 4:24의 표현은 일흔일곱 이고, 18:22의 개역개정 표현은 일흔 번씩 일곱 입니다. 두 표현을 산술적으로 같은 수라고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두 구절을 연결하는 이유는 숫자가 계산상 동일하기 때문이 아니라, 말씀에서 지극히 거룩한 것을 나타내는 수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번 번호의 논증은 산술적 일치가 아니라 말씀의 영적 의미에 관한 것입니다.

 

이 점을 이해하면 같은 계열의 숫자가 서로 다른 문맥에서 사용되는 이유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형제를 용서하는 일이 다루어집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는 표현을 끝없는 용서, 곧 영원한 용서로 풀이합니다. 반면 창세기에서는 라멕이 신앙과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일이 다루어집니다. 그래서 일흔일곱 배의 보복은 지극히 거룩한 것을 침해한 데 따른 정죄를 나타냅니다. 두 구절은 같은 행동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대상에 적용된 숫자의 의미를 보여 줍니다.

 

그렇다고 마태복음의 용서와 창세기의 정죄를 단순히 하나는 무한한 자비, 다른 하나는 무한한 복수라는 대칭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AC.433에서 스베덴보리는 마태복음의 용서가 끝없고 영원하다는 사실을 밝히지만, 라멕에 대해서는 지극히 거룩한 것을 침해했기 때문에 정죄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이번 번호에서 정죄를 끝없는 복수라고 정의하지 않습니다. 두 구절을 연결하되, 각각에 관해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밝힌 내용은 구별해야 합니다.

 

또한 주님의 용서에 관한 말씀을 읽으면서, 용서란 잘못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여기거나 피해를 계속 감수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단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AC.433이 직접 설명하는 것은 용서의 횟수에 끝을 정하지 말라는 말씀의 속뜻입니다. 실제 관계에서 잘못을 어떻게 바로잡고 어떤 경계를 세워야 하는지까지 이번 번호가 모두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이 말씀의 거룩한 의미를 받아들이면서도, 본문이 다루지 않은 문제에 관한 결론을 성급히 덧붙이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결국 스베덴보리가 마18:22를 인용한 것은 라멕의 보복을 용서와 동일시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말씀에서 일곱과 그에 연결된 수들이 문자적인 횟수를 넘어 거룩한 의미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그 의미가 끝없는 용서로, 창세기에서는 지극히 거룩한 것을 침해한 데 따른 정죄로 나타납니다. 이 구별을 이해하면 일흔일곱 배의 보복이라는 낯선 표현을 단순한 형벌의 배율로 읽지 않고, 라멕이 나타내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소멸이라는 문맥 안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433 심화 1)

 

 

 

AC.433, 창4:24, ‘일흔일곱 배의 보복은 왜 가장 거룩한 것의 침해를 뜻하는가?’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창4:24) AC.433 가인이 ‘일곱 배로 보복을 받을 것’(avenged sevenfold)이라는 말이 ‘가인’(Cain)이 나타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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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4:24)

 

AC.433

가인이 일곱 배로 보복을 받을 (avenged sevenfold)이라는 말이 가인(Cain) 나타내는 분리된 신앙에 폭력을 가하는 것은 신성모독이라는 뜻임은 이미 15절에서 밝혔습니다. 그리고 일흔일곱 배의 보복(seventy and sevenfold avengement) 훨씬 신성모독을 뜻하며, 결과가 정죄라는 사실은 일흔일곱 (seventy and sevenfold) 의미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일곱(seven)이라는 수가 거룩한 것은 일곱째 (seventh day) 천적 인간, 천적 교회, 천적 천국을 뜻하며, 가장 높은 의미에서는 주님 자신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말씀에서 일곱(seven)이라는 수는 어디에 나오든 거룩한 또는 지극히 거룩한 것을 뜻합니다. 다만 거룩함과 신성함은 그곳에서 다루는 대상에 따라 적용되며, 대상에 상응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일흔(seventy)이라는 수의 의미도 나옵니다. 일흔은 일곱 시대를 포함하는데, 말씀에서 시대는 년이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거룩하거나 신성한 것을 표현하고자 때에는 일흔일곱 (seventy-sevenfold)라고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형제를 일곱 번까지만 용서할 것이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하라고 말씀하신 경우가 그러합니다(18:22). 이는 형제가 죄를 범할 때마다 용서하여 용서가 끝이 없도록, 영원하도록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거룩한 것입니다. That Cains beingavenged sevenfoldsignifies that it was sacrilege to do violence to that separated faith which is meant byCain,” has been already shown at verse 15. And that by aseventy and sevenfold avengementis signified a far greater sacrilege, the consequence of which is damnation,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seventy and sevenfold.” That the numbersevenis holy originates in the fact that theseventh daysignifies the celestial man, the celestial church, the celestial kingdom, and, in the highest sense, the Lord himself. Hence the numberseven,” wherever it occurs in the Word, signifies what is holy, or most sacred; and this holiness and sanctity is predicated of, or according to, the things that are being treated of. From this comes the signification of the numberseventy,” which comprises seven ages; for an age, in the Word, is ten years. When anything most holy or sacred was to be expressed, it was saidseventy-sevenfold,” as when the Lord said that a man should forgive his brother not until seven times, but until seventy times seven (Matt. 18:22), by which is meant that they should forgive as many times as he sins, so that the forgiving should be without end, or should be eternal, which is holy.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18:22)

 

그리고 여기서 라멕이 일흔일곱 배로 보복을 받을 (be avenged seventy and sevenfold)이라는 말은 지극히 거룩한 것을 침해했기 때문에 정죄가 있다는 뜻입니다. And here, that Lamech shouldbe avenged seventy and sevenfoldmeans damnation, because of the violation of that which is most sacred.

 

해설

AC.433은 앞의 AC.432에서 일흔일곱 배의 보복이 정죄를 뜻한다고 한 이유를 설명합니다. 앞 번호에서는 라멕이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을 소멸시켰을 뿐 아니라, 그 신앙을 통해 태어나야 할 체어리티까지 소멸시켰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후자를 훨씬 더 큰 신성모독이라고 했습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왜 그러한 상태를 하필 일흔일곱 라는 수로 표현하는지, 말씀에서 일곱이 지니는 의미를 통해 설명합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창4:15로 돌아갑니다. 가인이 일곱 배로 보복을 받을 이라는 말은 가인이 나타내는 분리된 신앙에 폭력을 가하는 것이 신성모독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분리된 신앙에 폭력을 가하는 것조차 신성모독이라고 설명합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그 안에 남아 있는 거룩한 것을 함부로 파괴해도 된다는 뜻은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일곱은 왜 거룩한 것을 뜻할까요? 스베덴보리는 그 근거를 일곱째 에서 찾습니다. 창세기 1장의 엿새와 창세기 2장의 일곱째 날을 설명하면서, 그는 일곱째 날이 천적 인간과 천적 교회, 천적 천국을 뜻한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가장 높은 의미에서는 주님 자신을 뜻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일곱이라는 수의 거룩함은 숫자 자체에 어떤 신비한 힘이 있어서가 아니라, 말씀에서 일곱째 날이 나타내는 영적 의미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중요한 해석 원칙도 덧붙입니다. 말씀에서 일곱은 거룩한 것 또는 지극히 거룩한 것을 뜻하지만, 그 거룩함은 다루는 대상에 따라적용된다는 것입니다. 같은 수가 등장한다고 해서 모든 구절의 의미가 완전히 같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에 관해 일곱이라고 말하는지, 그 구절이 어떤 내용을 다루고 있는지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이 원칙을 놓치면 말씀의 숫자를 문맥과 관계없이 일정한 뜻으로만 대입하는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 일흔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말씀에서 한 시대를 십 년으로 나타내므로, 일흔은 일곱 시대를 포함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극히 거룩한 것을 표현할 때 일흔일곱 라는 말을 사용했다고 밝힙니다. 여기서 독자가 붙들어야 할 핵심은 일흔이나 일흔일곱을 실제 연수나 형벌의 횟수로 계산하는 일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수들이 말씀에서 거룩한 것의 의미를 나타내는 방식에 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를 보여 주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마18:22를 인용합니다. 베드로가 형제를 몇 번까지 용서해야 하는지 묻자, 주님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용서의 횟수에 상한선을 정한 것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형제가 죄를 범할 때마다 용서하여 그 용서가 끝이 없도록, 곧 영원하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일흔 번씩 일곱 번은 끝없는 용서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는 이 수가 용서와 연결되는 반면, 창세기에서는 라멕의 보복과 연결됩니다. 이것이 앞에서 말한 다루는 대상에 따라라는 원칙을 이해하는 중요한 사례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스베덴보리가 밝히는 의미는 끝없는 용서이고, 창세기에서 밝히는 의미는 지극히 거룩한 것을 침해한 데 따른 정죄입니다. 따라서 두 구절의 숫자 표현을 단순히 같은 결과를 나타내는 공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같은 거룩함의 의미가 각 구절에서 다루는 대상에 따라 달리 적용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라멕의 일흔일곱 배의 보복이 지극히 거룩한 것을 침해했기 때문에 정죄가 있다는 뜻이라고 결론짓습니다. 앞의 AC.432와 연결하면, 라멕은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을 소멸시켰을 뿐 아니라 그 신앙을 통해 태어나야 할 체어리티까지 소멸시켰습니다. 이번 번호는 바로 그 상태가 왜 일흔일곱 라는 표현으로 나타나는지를 설명합니다. 따라서 일흔일곱 배를 실제 형벌의 배율로 계산하거나, 주님께서 인간처럼 분노하여 복수하신다는 뜻으로 읽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밝히는 속뜻과 다릅니다. (AC.433 해설)

 

심화

1.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하라는 말씀은 인용되었는가?’

 

스베덴보리가 AC.433에서 마18:22를 인용한 이유는 라멕의 일흔일곱 배의 보복에 사용된 숫자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두 말씀은 얼핏 보면 서로 정반대의 내용을 말합니다. 마태복음에서 주님은 형제를 끝없이 용서하라고 말씀하시지만, 창세기에서 라멕은 일흔일곱 배의 보복을 말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두 말씀을 연결합니다. 그 이유를 이해하려면 숫자 자체보다 그 숫자가 사용된 문맥을 먼저 살펴야 합니다.

 

마태복음에서 베드로는 형제가 자신에게 죄를 범하면 몇 번까지 용서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주님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를 문자적인 횟수로만 읽으면 용서할 수 있는 최대 횟수가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말씀을 그렇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형제가 죄를 범할 때마다 용서하여 그 용서가 끝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밝힙니다. 따라서 이 말씀의 핵심은 용서의 횟수를 계산하는 데 있지 않고, 용서에 끝을 정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께서는 단순히 계속 용서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이러한 숫자를 사용하셨을까요? AC.433에서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말씀의 일곱이 지니는 의미와 연결합니다. 일곱째 날이 천적 인간과 천적 교회, 천적 천국을 나타내며, 가장 높은 의미에서는 주님 자신을 나타내기 때문에 일곱은 거룩한 것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에 나오는 일곱과 일흔 번씩 일곱 번은 단순한 계산을 넘어 거룩한 의미를 지닌 표현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구별할 점이 있습니다. 4:24의 표현은 일흔일곱 이고, 18:22의 개역개정 표현은 일흔 번씩 일곱 입니다. 두 표현을 산술적으로 같은 수라고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두 구절을 연결하는 이유는 숫자가 계산상 동일하기 때문이 아니라, 말씀에서 지극히 거룩한 것을 나타내는 수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번 번호의 논증은 산술적 일치가 아니라 말씀의 영적 의미에 관한 것입니다.

 

이 점을 이해하면 같은 계열의 숫자가 서로 다른 문맥에서 사용되는 이유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형제를 용서하는 일이 다루어집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는 표현을 끝없는 용서, 곧 영원한 용서로 풀이합니다. 반면 창세기에서는 라멕이 신앙과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일이 다루어집니다. 그래서 일흔일곱 배의 보복은 지극히 거룩한 것을 침해한 데 따른 정죄를 나타냅니다. 두 구절은 같은 행동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대상에 적용된 숫자의 의미를 보여 줍니다.

 

그렇다고 마태복음의 용서와 창세기의 정죄를 단순히 하나는 무한한 자비, 다른 하나는 무한한 복수라는 대칭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AC.433에서 스베덴보리는 마태복음의 용서가 끝없고 영원하다는 사실을 밝히지만, 라멕에 대해서는 지극히 거룩한 것을 침해했기 때문에 정죄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이번 번호에서 정죄를 끝없는 복수라고 정의하지 않습니다. 두 구절을 연결하되, 각각에 관해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밝힌 내용은 구별해야 합니다.

 

또한 주님의 용서에 관한 말씀을 읽으면서, 용서란 잘못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여기거나 피해를 계속 감수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단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AC.433이 직접 설명하는 것은 용서의 횟수에 끝을 정하지 말라는 말씀의 속뜻입니다. 실제 관계에서 잘못을 어떻게 바로잡고 어떤 경계를 세워야 하는지까지 이번 번호가 모두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이 말씀의 거룩한 의미를 받아들이면서도, 본문이 다루지 않은 문제에 관한 결론을 성급히 덧붙이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결국 스베덴보리가 마18:22를 인용한 것은 라멕의 보복을 용서와 동일시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말씀에서 일곱과 그에 연결된 수들이 문자적인 횟수를 넘어 거룩한 의미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그 의미가 끝없는 용서로, 창세기에서는 지극히 거룩한 것을 침해한 데 따른 정죄로 나타납니다. 이 구별을 이해하면 일흔일곱 배의 보복이라는 낯선 표현을 단순한 형벌의 배율로 읽지 않고, 라멕이 나타내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소멸이라는 문맥 안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433 심화 1)

 

 

 

AC.432, 창4:24, ‘라멕의 일흔일곱 배 보복은 무엇을 뜻하는가?’ (AC.432-433)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If Cain shall be avenged sevenfold, truly Lamech seventy and sevenfold. (창4:24) AC.432 이 말씀은 그들이 ‘가인’(Cain)이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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