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42.심화

 

1. ‘르우벤에서 시므온을 거쳐 레위로, 신앙이 체어리티에 이르는 길 (창29:32-34)

 

32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33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34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하고 그의 이름을 레위라 하였으며 (29:32-34)

 

 

AC.342에서 스베덴보리가 창29:32-34의 르우벤, 시므온, 레위의 출생을 한꺼번에 인용한 이유는, 교회가 낳는 두 가지가 본질적으로 신앙’과 체어리티’이며, 신앙이 체어리티를 향하여 나아가는 질서가 말씀의 다른 곳에서도 나타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AC.340에서는 같은 창29의 구절 가운데 르우벤과 시므온의 이름을 고대인들이 어떤 상태와 의미를 이름에 담았다’는 사실의 예로 인용했습니다. 그러나 AC.342에서는 같은 구절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사용합니다. 이번에는 르우벤, 시므온, 레위가 차례로 무엇을 상징하는지를 통해 신앙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  체어리티’라는 질서를 보여 줍니다.

 

먼저 르우벤’은 신앙’을 상징합니다. 레아는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다’고 말하며 첫아들의 이름을 르우벤이라 합니다. 르우벤이라는 이름에는 보다’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다른 해설까지 연결해서 보면 ’은 이해성, 그러니까 이해하는 능력(understanding)으로 진리를 보고 인정하는 것과 관계됩니다. 따라서 르우벤은 진리를 보고 그것을 참이라고 인정하는 신앙의 첫 단계를 나타냅니다. AC.342에서는 이 복잡한 내용을 길게 풀지 않고 간단히 르우벤은 신앙을 상징한다’고 정리합니다.

 

그다음 시므온’은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을 상징합니다. 레아는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다’고 말하고 둘째 아들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합니다. 시므온은 듣다’와 연결된 이름입니다. 말씀에서 듣는 것’은 단순히 귀로 소리를 받아들이는 데 그치지 않고, 들은 것을 받아들이고 순종하여 행하는 것과 연결됩니다. 우리가 일상에서도 말을 들었다’와 말을 들었다가 그대로 했다’를 구별하듯, 영적인 의미에서 참으로 듣는 것은 진리를 받아들여 삶으로 옮기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그래서 르우벤에서 보고 인정한 신앙’이 시므온에서는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셋째 레위’가 체어리티’를 상징합니다. 여기서 창29:34의 표현이 특히 중요합니다. 레아는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라고 말하고 그의 이름을 레위라 합니다. ‘레위’라는 이름은 연합하다’, ‘결합하다’라는 의미와 연결됩니다. 따라서 레위가 체어리티를 상징한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체어리티는 신앙과 별도로 하나 더 덧붙이는 덕목이 아니라, 신앙의 진리가 사람의 삶과 사랑에 결합되는 데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세 이름을 차례로 놓으면 AC.342의 핵심이 아주 선명해집니다. ‘르우벤’에서는 진리를 보고 인정합니다. ‘시므온’에서는 그 진리를 받아들여 행합니다. ‘레위’에서는 그렇게 행하던 선이 마침내 사랑과 결합하여 체어리티가 됩니다. 다시 말하면 앎과 인정  행함  사랑과의 결합’이라는 흐름입니다. 이것이 AC.342가 창29:32-34 전체를 한꺼번에 인용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조심해야 합니다. 이것을 먼저 지식으로 신앙을 얻고, 그다음 행동을 충분히 반복하면, 마지막에 자동으로 체어리티가 생긴다’는 기계적인 과정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체어리티를 심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사람이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에 따라 살려고 할 때, 주님께서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심으시고, 신앙과 체어리티를 결합하십니다. 따라서 르우벤에서 레위로 나아가는 과정 전체가 거듭남 안에서 이루어지는 주님의 역사입니다.

 

이 점은 지금 읽고 있는 가인과 아벨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AC.341-342에서 가인과 아벨은 각각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보여 줍니다. 그런데 정상적인 질서라면 신앙은 체어리티와 경쟁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신앙은 체어리티를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바로 그것을 르우벤, 시므온, 레위가 보여 줍니다. 신앙은 행위로 나아가고,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은 마침내 체어리티와 결합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그런데 가인’에서는 정반대의 일이 일어납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향하여 나아가지 않고 사랑에서 자신을 떼어 내어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것’이 되려고 합니다. 정상적인 길은 르우벤  시므온  레위’인데, 가인은 그 길을 거부하고 신앙 자체에 머물려 하는 셈입니다. 그래서 결국 자신의 형제’인 아벨, 곧 체어리티와 충돌하게 됩니다.

 

이렇게 보면 AC.342에서 왜 하필 레아의 첫 세 아들’을 가져왔는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신앙과 체어리티를 각각 상징하는 성경 인물을 하나씩 찾아 제시한 것이 아닙니다. 세 아들이 출생의 순서’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르우벤에서 시작된 것이 시므온을 거쳐 레위에 이릅니다. 즉 말씀의 계보 자체가 신앙이 삶으로 들어가 체어리티에 이르는 질서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특히 레위의 연합’이라는 의미는 AC.342의 전체 내용을 아름답게 마무리합니다. 신앙의 최종 목적은 진리를 많이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가 사람의 삶에 들어와 선이 되고, 그 선이 사랑과 결합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보는 것’에서 시작하여 그것을 듣고 행하는 것’으로 나아가며, 마침내 사랑과 연합하는 것’에 이릅니다. 따라서 르우벤과 시므온을 지나 레위에 이르는 흐름은 단순한 세 이름의 나열이 아니라 거듭남의 방향을 압축해서 보여 주는 하나의 작은 그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이어서 레위 지파가 제사장직을 맡았으며, ‘양 치는 자를 표상했다’고 설명합니다. 레위가 체어리티를 상징하므로, 레위 지파가 맡은 제사장직 역시 가장 깊은 의미에서는 사랑과 체어리티의 선을 섬기는 일을 나타냅니다. 이것이 다시 아벨의 양 치는 자’와 연결됩니다. 아벨도 체어리티를 상징하고, 레위도 체어리티를 상징하며, 두 경우 모두 양 치는 자’라는 이미지와 연결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AC.341 형제’라는 표현도 더욱 깊어집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서로 경쟁하는 두 교리가 아닙니다. 신앙은 본래 체어리티에 이르도록 주어진 것이며, 체어리티는 신앙이 생명을 얻는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아벨을 가인의 형제’라고 한 것은 단순한 가족관계의 표현이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가 본래 함께 있어야 하는 관계임을 보여 줍니다.

 

결국 창29:32-34 AC.342에서 인용한 이유는 르우벤은 신앙, 시므온은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 레위는 체어리티’라는 세 단계의 연결을 통해 신앙이 체어리티를 향하여 나아가는 정상적인 질서를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이 정상적인 질서를 옆에 놓아 보면 가인’의 문제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가인의 잘못은 신앙을 가진 것 자체가 아니라, 그 신앙이 가야 할 곳으로 가지 않은 데 있습니다. 신앙은 아벨, 곧 체어리티를 향하여 나아가야 했는데, 오히려 체어리티에서 자신을 분리하고 마침내 그것을 소멸시키려 했습니다.

 

그래서 이 세 구절을 AC.342의 문맥에서 한 문장으로 압축한다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르우벤에서 신앙이 시작되고, 시므온에서 그 신앙이 삶으로 나아가며, 레위에서 마침내 신앙과 사랑이 결합하여 체어리티에 이릅니다.’

 

이것이 가인이 걸어야 했지만 걷지 않은 길이며, 동시에 오늘 우리의 신앙도 끊임없이 걸어야 하는 길입니다. 무엇을 알고 무엇을 믿는가에서 멈추지 않고, 그것을 실제로 행하며, 마침내 주님께서 그 선을 우리의 사랑과 결합하시도록 하는 것, 바로 그것이 신앙이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어 가는 거듭남의 질서입니다.

 

 

 

AC.342, 창4:2, ‘신앙에서 행위로, 행위에서 체어리티로’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2 교회의 두 번째 자손이 체어리티라는 것은, 교회가 잉태하고 낳는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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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4:2)

 

AC.342

 

교회의 두 번째 자손이 체어리티라는 것은, 교회가 잉태하고 낳는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서 분명합니다. 야곱에게서 난 레아의 첫 아들들도 같은 것을 상징합니다. ‘르우벤(Reuben)은 신앙을, ‘시므온(Simeon)은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을, ‘레위(Levi)는 체어리티를 상징합니다(29:32-34). 이런 이유로 레위 지파가 제사장직을 맡았으며, ‘양 치는 자(shepherd of the flock)를 표상했습니다. That the second offspring of the church is charity,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the church conceives and brings forth nothing else than faith and charity. The same is signified by the first children of Leah from Jacob; “Reuben” denoting faith; “Simeon,” faith in act; and “Levi,” charity (Gen. 29:32, 33, 34), wherefore also the tribe of Levi received the priesthood, and represented the “shepherd of the flock.”

 

32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33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34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하고 그의 이름을 레위라 하였으며 (29:32-34)

 

체어리티는 교회의 두 번째 자손이므로 형제(brother)라고 하며, 그 이름을 아벨(Abel)이라고 합니다. As charity is the second offspring of the church, it is called “brother,” and is named “Abel.”

 

 

해설

 

AC.342는 바로 앞 AC.341의 ‘교회의 두 번째 자손은 체어리티이며, ‘아벨형제가 이를 상징한다’는 설명에 성경 안의 또 다른 근거를 제시합니다. 그리고 그 근거로 매우 흥미롭게도 야곱과 레아에게서 난 첫 세 아들, 곧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를 가져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세 이름을 통해 ‘신앙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 체어리티’라는 하나의 영적 질서를 보여 줍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교회가 잉태하고 낳는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잉태하고 낳는다’는 표현은 AC.339에서 살펴본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교회가 실제로 아이를 낳는다는 뜻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생겨나는 영적인 것들을 잉태와 출생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참으로 생겨나야 할 것은 주님을 향한 신앙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이며, 결국 교회의 모든 교리와 삶도 이 둘을 향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신앙과 체어리티’라는 두 가지를 서로 독립된 두 요소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까지 가인의 문제를 통해 계속 살펴보았듯, 신앙이 체어리티와 분리되어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것’이 되는 순간 본래의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AC.342가 레아의 세 아들을 가져오는 이유도 오히려 신앙이 체어리티를 향해 어떻게 나아가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첫째 아들 ‘르우벤’은 신앙을 상징합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340에서 르우벤의 이름을 다룬 것과는 관점이 조금 다릅니다. AC.340에서는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다’는 말과 ‘르우벤’이라는 이름의 관계를 통해 고대인들이 이름에 어떤 상태와 의미를 담았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습니다. 여기 AC.342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르우벤이 신앙을 상징한다고 밝힙니다.

 

둘째 아들 ‘시므온’은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을 상징합니다. 이 단계가 매우 중요합니다. 신앙은 머릿속에서 어떤 것을 참이라고 인정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면 그것은 그의 행동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진리를 알고 인정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진리에 따라 살아 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르우벤에서 나타난 신앙이 시므온에서는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리고 셋째 아들 ‘레위’가 체어리티를 상징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신앙 다음에 행동하고, 그다음에 착한 사람이 된다’는 외적인 단계의 나열이 아닙니다. 신앙으로 받아들인 진리를 실제로 행하면서, 그 진리가 점차 사람의 의지와 사랑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이것이 주님의 뜻이므로 해야 한다’고 알고 행하지만,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마침내 그것을 사랑하여 기꺼이 행하게 됩니다. 그때 선은 더 이상 외적인 의무에 머물지 않고 체어리티의 선이 됩니다.

 

따라서 ‘르우벤 시므온 레위’의 흐름은 매우 아름답습니다. 신앙이 있고, 그 신앙이 행위로 나아가며, 마침내 체어리티에 이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앞 단계가 뒤 단계에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체어리티에 이르렀다고 신앙이 필요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자신의 목적과 생명을 얻습니다. 진리는 선을 향해 나아가고, 신앙은 사랑을 향해 나아가며, 마침내 둘이 하나의 삶 안에서 결합됩니다.

 

이 점에서 AC.342는 우리가 앞서 살펴본 태고교회와 오늘날 교회의 차이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됩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은 사랑으로부터 신앙을 가졌습니다. 사랑 안에서 무엇이 참인지를 퍼셉션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영적 인간에게는 신앙의 진리를 먼저 배우고, 그것을 행하며, 그 신앙으로 주님께서 체어리티를 심으시는 질서가 필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르우벤 시므온 레위’는 특히 영적 인간의 거듭남의 질서를 생각하게 합니다.

 

여기서 레위 지파가 제사장직을 맡았다는 사실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레위가 체어리티를 상징하기 때문에 레위 지파가 제사장직을 맡았으며 ‘양 치는 자’를 표상했다고 설명합니다. 제사장직의 본질은 지위나 종교적 권력에 있지 않고,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과 선을 섬기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체어리티를 상징하는 레위와 제사장직이 연결되는 것은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다시 아벨에게 돌아옵니다. AC.341에서 ‘아벨’은 체어리티를, ‘양 치는 자’는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사람을 나타냈습니다. 이제 AC.342에서는 레위 역시 체어리티를 상징하며, 바로 그 때문에 ‘양 치는 자’를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레위 - 체어리티 제사장직 양 치는 자’와 ‘아벨 체어리티 양 치는 자’가 서로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서로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여러 부분에서 같은 영적 질서가 반복해서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양 치는 자’라는 표현을 제사장직과 연결하면 체어리티의 성격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목자는 양을 지배하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라 먹이고, 돌보고, 보호하고,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마찬가지로 참된 제사장직과 목회 역시 사람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영적 선을 돌보는 쓰임입니다. 그러므로 ‘양 치는 자’는 단순히 선한 감정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이웃의 영적 선을 위하여 실제로 섬기는 체어리티의 삶을 아름답게 보여 줍니다.

 

그리고 AC.342 마지막에서 스베덴보리는 다시 ‘형제’라는 표현으로 돌아옵니다. ‘체어리티는 교회의 두 번째 자손이므로 형제라고 하며, 그 이름을 아벨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형제’는 단순한 가족 호칭이 아닙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본래 서로 결합되어야 하는 관계임을 보여 줍니다. 가인과 아벨이 ‘형제’라는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가 서로 떼어 놓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말씀의 이야기 구조 자체가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후 가인이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말하는 장면은 훨씬 무겁게 다가옵니다. 속뜻으로는 신앙이 ‘내가 체어리티를 돌보아야 합니까?’라고 말하는 것과도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이라면 바로 그 ‘형제’를 지켜야 합니다.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AC.341이 이미 단호하게 말했듯 ‘신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죽이는 순간, 단지 자기 형제를 잃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생명도 잃게 됩니다.

 

AC.342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르우벤 시므온 레위’의 질서와 ‘가인 아벨’의 관계를 함께 볼 때 드러나는 대조입니다. 한쪽에서는 신앙이 행위로 나아가 마침내 체어리티에 이릅니다. 이것이 신앙이 가야 할 정상적인 방향입니다. 그러나 가인으로 나타나는 흐름에서는 신앙이 체어리티를 향해 나아가는 대신 자신을 사랑에서 분리하여 독립시키려 합니다. 결국 체어리티라는 ‘형제’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소멸시키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그래서 AC.342는 가인의 문제가 무엇인지 역으로 더욱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신앙의 목적지는 자기 자신이 아닙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향해 가야 합니다. 진리는 선을 향해 가야 하며, 아는 것은 행하는 것으로 이어지고, 행하는 것은 마침내 사랑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이 이 길을 걸으면 ‘르우벤 시므온 레위’의 질서가 나타나지만, 신앙이 자기 자신을 목적 삼으면 ‘가인’의 길이 시작됩니다.

 

따라서 AC.342는 매우 짧지만 거듭남의 중요한 질서를 보여 줍니다. ‘신앙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 체어리티.’ 진리를 배우고 인정하는 데서 시작하여, 그 진리를 실제 삶에서 행하고, 마침내 그 선을 사랑하여 기꺼이 행하는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신앙과 체어리티는 더 이상 서로 떨어진 두 가지가 아니라 하나의 삶을 이루게 됩니다.

 

결국 AC.342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도 매우 실제적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진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입니다. 머릿속의 신앙으로 머물러 있는가, 삶의 행동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그리고 그 행동이 점차 사랑과 체어리티가 되어 가고 있는가?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를 자신의 경쟁자로 여기지 않습니다. 체어리티를 향해 나아가며, 마침내 체어리티 안에서 자신의 생명을 발견합니다. 바로 그것이 ‘아벨’을 신앙의 ‘형제’라고 한 깊은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심화

 

1. ‘르우벤에서 시므온을 거쳐 레위로, 신앙이 체어리티에 이르는 길(창29:32-34)

 

 

AC.342, 심화 1, ‘르우벤에서 시므온을 거쳐 레위로, 신앙이 체어리티에 이르는 길’ (창29:32-34)

AC.342.심화 1. ‘르우벤에서 시므온을 거쳐 레위로, 신앙이 체어리티에 이르는 길’ (창29:32-34) 32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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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1, 창4: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AC.341-345)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And she added to bear his brother Abel; and Abel was a shepherd of the flock, and Cain was a tiller of the ground. (창4:2) AC.341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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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은 앞선 몇 편처럼 오래된 수도사들의 특별한 이야기를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강문호 수도사가 충주봉쇄수도원에서 직접 겪은 아주 작은 일상에서 시작합니다. 수도원에는 금붕어와 비단잉어 백여 마리가 사는 조그마한 연못이 있는데, 어느 목사님의 제안으로 연못 바닥에 자갈을 깔고 정비하기로 했습니다. 포클레인을 불러 연못을 수리하려면 먼저 그 안의 물고기들을 모두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습니다. 그래서 강문호 수도사가 직접 연못 안에 들어가 물고기들을 손으로 잡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사정을 알 리 없는 물고기들은 필사적으로 도망칩니다. 자신들을 잡으려는 손이 죽이려는 손이 아니라 살리려는 손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도망가는 물고기들을 보며 속으로 ‘, 이놈들아. 잡혀라. 안 잡히면 포클레인에 깔려 죽는다’고 합니다. 이 짧은 장면이 이번 영상 전체를 여는 하나의 영적 비유가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 장면을 바라보면 먼저 ‘섭리’가 떠오릅니다. 우리는 흔히 주님의 섭리라 하면 내가 원하는 일이 잘 풀리고, 위험에서 벗어나며, 기도한 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섭리는 언제나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모습으로만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붙잡히는 것처럼 느껴지고, 내가 원하는 방향과 반대로 끌려가는 것처럼 느껴지며, 지금까지 편안하게 살던 자리에서 갑자기 옮겨지는 것처럼 경험되기도 합니다. 연못 속 물고기의 눈으로 보면 자기를 붙잡는 손은 위협입니다. 그러나 연못 밖에서 전체 상황을 보고 있는 사람의 눈에는 그 손이 생명을 살리는 손입니다. 물고기는 곧 포클레인이 들어온다는 것을 모르지만 사람은 압니다. 이 작은 차이에서 인간과 주님의 시야가 얼마나 다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인간은 눈앞의 순간을 보지만 주님은 영원을 보십니다. 우리는 지금 나에게 좋은 것을 구하지만 주님은 그것이 우리의 영원한 생명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는가?’라고 묻는 순간에도 주님의 섭리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더 먼 곳을 향해 움직이고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모든 고난과 실패를 단순히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다’고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일어나는 어떤 일도 선을 위하여 사용하실 수 있으며, 우리가 자유롭게 주님을 향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물고기에게는 붙잡힘이었지만 실상은 구원이었던 그 순간처럼 말입니다.

 

연못을 수리하는 동안 물고기들은 수도원에서 가장 큰 물통으로 사용할 수 있는 목욕탕에 임시로 옮겨집니다. 그런데 넓은 연못에서 살던 물고기들에게 목욕탕은 답답했는지 자꾸 물 밖으로 뛰쳐나옵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바닥에 떨어진 물고기들을 다시 주워 넣으며 또 말합니다. ‘나오면 죽어. 물 안에 있어.’ 여기서 두 번째 영적 그림이 생겨납니다. 처음에는 ‘잡혀야 산다’였고, 이제는 ‘안에 있어야 산다’입니다. 그리고 강문호 수도사는 자연스럽게 요한복음 15장의 주님의 말씀을 떠올립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인간도 주님 안에 거하지 않고서는 참된 영적 생명을 가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 지점은 스베덴보리의 가르침과 매우 깊이 만납니다. 스베덴보리에 의하면 인간은 생명의 주인이 아니라 ‘생명을 받아 사는 존재’입니다. 생명 자체는 오직 주님께 있습니다. 인간에게 있는 사랑도, 생각도,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도 그 근원에서는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생명을 인간에게 주시면서 마치 그것이 인간 자신의 것인 것처럼 느끼게 하십니다. 우리가 ‘내가 생각한다’, ‘내가 사랑한다’, ‘내가 선택한다’, ‘내가 살아간다’고 느끼는 것은 정상입니다. 그래야 인간에게 자유와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깨어날수록 사람은 한 가지를 점점 깊이 인정하게 됩니다. ‘내 안에 있는 참된 생명은 나에게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바로 이것이 포도나무와 가지의 아르카나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가지는 실제로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가지가 스스로 생명의 근원은 아닙니다. 줄기와 뿌리에서 생명을 받아 열매를 맺습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실제로 선을 행해야 하고, 실제로 악을 피해야 하며, 실제로 이웃을 사랑하고 맡겨진 쓰임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서도 ‘이 선은 나에게서 나온 것이다’라고 자기 공로로 돌리지 않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거듭남을 설명하면서 반복해서 강조하는 중요한 질서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인간은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행해야 하지만, 동시에 선을 행할 힘은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번 영상의 ‘잡혀서 살아라’라는 표현도 아름답게 들립니다. 물론 주님께 붙잡힌다는 것은 인간의 자유를 빼앗아 강제로 끌고 가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은 인간의 자유를 지극히 존중하십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억지로 붙잡혀 있는 인간이 아니라, 진리를 알고 그것이 생명의 길임을 깨달아 자유롭게 주님 안에 머물기를 원하는 인간입니다. 처음에는 계명이 나를 붙잡는 울타리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 말라’, ‘용서하라’, ‘사랑하라’, ‘거짓을 버려라’, ‘탐욕을 버려라’ 하는 말씀들이 자유를 제한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사람은 그 계명들이 자신을 가두는 울타리가 아니라 오히려 생명을 지켜 주는 울타리였음을 조금씩 깨닫게 됩니다.

 

물 밖으로 뛰쳐나온 물고기를 생각하면 이것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물고기에게 물은 속박이 아닙니다. 물고기가 물속에 있어야 한다는 것은 자유의 제한이 아니라 그 존재가 살아갈 수 있는 질서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에게 주님의 계명은 생명을 억압하는 규칙이 아니라 영적 생명이 존재할 수 있는 질서입니다. 악을 마음껏 행할 수 있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하는 것은 물고기가 물 밖으로 뛰쳐나가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처음 몇 순간은 어디든 갈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생명 자체를 잃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참된 자유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하는 자유가 아니라, 선을 사랑하고 선을 행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이 점에서 proprium의 문제가 자연스럽게 나타납니다. 인간의 proprium은 끊임없이 ‘내가 내 삶의 주인이다’,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야 자유다’, ‘내 판단이 옳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상태가 주님으로부터 독립하여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가지의 모습입니다. 가지가 ‘나는 이제 줄기가 필요 없다’며 나무에서 떨어져 나온다면 그것은 독립이 아니라 죽음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주님 없이 자기 지혜와 자기 능력과 자기 의만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할수록 영적으로는 생명의 근원에서 멀어집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인간의 개성이 없어지는 과정이 아니라, 자기 생명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라는 착각에서 깨어나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이어 한 사람의 인상적인 목회 현장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교회에서 어떤 오해가 생겨 약 십 년 동안 교회를 떠나 있던 사람이 어느 날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무당이 굿하는 자리에 있게 되었는데, 굿을 하던 무당이 갑자기 ‘여기 예수 믿는 사람이 있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 순간 이 사람의 마음에 놀라운 깨달음이 찾아옵니다. ‘나는 십 년 동안 주님을 떠나 있었는데 주님은 나를 떠나지 않으셨구나. 나는 주님을 버렸는데 주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셨구나.’ 그리고 그는 그 일을 계기로 다시 교회로 돌아와 신앙생활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 일화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이 고백일 것입니다. ‘나는 주님을 떠났지만 주님은 나를 떠나지 않으셨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여기서 자연스럽게 ‘리메인스’를 생각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 안에 선과 진리의 상태들을 남겨 두시고 보존하십니다. 어린 시절 부모에게서 받은 사랑, 말씀을 들으며 느꼈던 거룩한 감동,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순간, 잘못을 뉘우치며 주님을 찾았던 경험 등은 모두 단순히 사라져 버리는 과거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선과 진리의 상태들을 사람의 깊은 내면에 보존하시며, 훗날 거듭남을 위하여 사용하십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리메인스의 신비입니다.

 

사람은 때로 아주 멀리 떠날 수 있습니다. 십 년이 아니라 수십 년을 떠날 수도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신앙과 아무 관계 없이 사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서 과거에 심어 두신 선과 진리를 함부로 잃어버리지 않으십니다. 어느 날 한 말씀을 듣다가, 어떤 사람을 만나다가, 예상하지 못한 사건을 겪다가 오래전에 묻혀 있던 것이 갑자기 살아날 수 있습니다. ‘그래, 나에게도 주님을 사랑했던 때가 있었지.’ 그렇게 사람의 마음이 다시 열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일화의 중심은 기이한 현상 자체보다 ‘십 년 동안 기다리신 주님’에게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강문호 수도사의 메시지가 참 따뜻해집니다. 인간은 주님을 놓을 수 있지만 주님께서는 인간을 쉽게 놓지 않으십니다. 물론 인간에게는 끝까지 거절할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편에서는 끊임없이 구원하시려는 사랑이 흘러옵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을 빌리면 주님의 신적 섭리는 모든 순간 인간의 영원한 구원을 목표로 합니다. 인간이 돌아설 수 있는 길을 남겨 두시고, 선을 선택할 가능성을 보존하시며, 때가 되면 다시 부르십니다. 그래서 ‘나는 주님을 버렸는데 주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셨다’는 이 사람의 고백은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를 아주 아름답게 표현하는 말로 들립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이어 태양을 예로 듭니다. 지구와 태양의 관계가 생명이 존재할 수 있는 질서 안에 있듯이 인간도 하나님 안에 있을 때 참된 생명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 역시 스베덴보리의 세계에서는 더욱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영계의 태양에 관하여 매우 중요하게 말합니다. 천국의 태양은 주님의 신적 사랑이 나타나는 것이며, 그 태양으로부터 나오는 열은 사랑에, 빛은 지혜와 진리에 상응합니다. 자연계에서 태양의 열과 빛이 생명을 가능하게 하듯, 영적으로는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진리가 인간의 영적 생명을 가능하게 합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연못의 물과 포도나무와 가지와 태양이 모두 하나의 방향을 가리킵니다. 물고기에게 물이 생명의 환경이고, 가지에게 포도나무가 생명의 근원이며, 자연계의 생명에게 태양의 열과 빛이 필요하듯, 인간의 영적 생명에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필요합니다. 인간은 그것을 받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핵심은 얼마나 많은 것을 ‘내가 이루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깊이 주님으로부터 받아 살아가는가에 있습니다.

 

영상 마지막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수도사의 삶을 ‘하나님만 붙잡고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는 거룩한 삶’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번 영상에서는 이 말이 전체 이야기를 잘 정리해 줍니다. 수도생활의 본질이 반드시 세상을 떠나 깊은 산속에서 사는 데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참된 수도는 결국 매일의 삶에서 주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수도원에 있는 사람도 주님에게서 멀어질 수 있고, 시장과 직장과 가정 한복판에 있는 사람도 주님 안에 깊이 거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장소가 아니라 사랑의 방향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만 붙잡는다’는 말 역시 다른 모든 인간관계를 버린다는 뜻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을 참으로 붙잡을수록 이웃을 더 바르게 사랑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서로 경쟁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이 이웃을 향하여 흘러갈 때 그것이 체어리티가 되고, 실제적인 쓰임으로 나타납니다.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가 살아 있다는 증거는 줄기에 매달려 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열매를 맺는 데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 안에 거하는 사람의 신앙은 결국 그의 삶에서 선한 열매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영상의 핵심을 ‘잡혀서 살아라’라는 강렬한 표현에서 시작하여 ‘붙어 있어라’, 그리고 마지막에는 ‘열매를 맺어라’로 이어서 읽고 싶습니다. 처음에는 주님께서 나를 붙드시는 은혜를 깨닫습니다. 다음에는 내가 주님 안에 거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님에게서 받은 생명이 나를 통하여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야 함을 깨닫습니다. ‘붙잡힘 거함 열매 맺음’입니다. 이 셋이 함께 있을 때 신앙은 단순한 고백을 넘어 삶이 됩니다.

 

연못에서 필사적으로 도망가던 금붕어에게 자신을 붙잡는 손이 살리는 손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능력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주님께서 말씀을 주셨고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이성을 주셨으며, 그 진리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거듭남은 물고기처럼 억지로 붙잡혀 옮겨지는 일이 아니라,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주님의 손길이 사실은 사랑이었다는 것을 조금씩 깨달아 가며 스스로 그 손을 신뢰하게 되는 과정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연못 이야기’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담는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물고기가 물 안에서 살고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열매를 맺듯, 인간은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아 살아가며, 거듭남이란 그 생명이 자기에게서 난 것이 아님을 점점 더 깊이 인정하면서 받은 사랑과 진리를 이웃을 위한 선한 열매로 돌려드리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강문호 수도사의 ‘잡혀서 살아라’라는 말을 그대로 마음에 담으면서 한마디를 덧붙인다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붙잡고 사는 것보다 먼저인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붙들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연못 속에서 주님의 손을 피해 달아나는 동안에도, 좁고 답답하다며 물 밖으로 뛰쳐나가는 동안에도, 심지어 십 년 동안 주님을 떠났다고 생각하는 동안에도 주님의 목적은 하나입니다. 우리를 붙잡아 당신에게 예속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살려 참으로 자유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작은 연못에서 발견할 수 있는 주님의 섭리이며,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하신 말씀의 깊은 위로이기도 합니다.

 

 

 

SY.68, 강문호 수도사, ‘시오도르 수도사’ (20191215)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https://youtu.be/ycpr_QuUjbc?si=heNUWptbnsCcOZsH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동방정교회에 전해 내려오는 ‘시오도르’ 수도사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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