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2:5, 6)

 

AC.93

 

평화의 평온함을 부여받고, 비로 새로워지며, 악과 거짓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된 천적 인간의 상태는 주님에 의해 에스겔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됩니다. The state of the celestial man, thus gifted with the tranquility of peace—refreshed by the rain—and delivered from the slavery of what is evil and false, is thus described by the Lord in Ezekiel:

 

25내가 또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맺고 악한 짐승을 그 땅에서 그치게 하리니 그들이 빈 들에 평안히 거하며 수풀 가운데에서 잘지라 26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고 내 산 사방에 복을 내리며 때를 따라 소낙비를 내리되 복된 소낙비를 내리리라 27그리한즉 밭에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이 그 소산을 내리니 그들이 그 땅에서 평안할지라 내가 그들의 멍에의 나무를 꺾고 그들을 종으로 삼은 자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낸 후에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겠고, 31내 양 곧 내 초장의 양 너희는 사람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라 (34:25-27, 31) I will make with them a covenant of peace, and will cause the evil wild beast to cease out of the land, and they shall dwell confidently in the wilderness, and sleep in the woods; and I will make them and the places round about my hill a blessing; and I will cause the rain to come down in his season; rains of blessing shall they be. And the tree of the field shall yield its fruit, and the earth shall yield its increase, and they shall be upon their ground in confidence, and shall know that I am Jehovah, when I have broken the reins of their yoke, and delivered them out of the hand of those that make them to serve them; and ye my flock, the flock of my pasture, ye are a man, and I am your God (Ezek. 34:25–27, 31).

 

또한 이것이 셋째 날에 이루어진다고 말하는데, 말씀에서 셋째 날일곱째 날과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호세아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됩니다. And that this is effected on the “third day,” which in the Word signifies the same as the “seventh,” is thus declared in Hosea:

 

2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3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빛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하니라 (6:2, 3) After two days will he vivify us; in the third day he will raise us up, and we shall live before him and we shall know, and shall follow on to know Jehovah: his going forth is prepared as the dawn, and he shall come unto us as the rain, as the late rain watering the earth (Hos. 6:2–3).

 

또한 이 상태가 밭의 성장(the growth of the field)에 비유된다는 것은, 에스겔에서 태고교회를 말하면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And that this state is compared to the “growth of the field” is declared by Ezekiel, when speaking of the ancient church:

 

내가 너를 들의 풀같이 많게 하였더니 네가 크게 자라고 심히 아름다우며 (16:7) I have caused thee to multiply as the growth of the field, and thou hast increased and hast grown up, and hast come to excellent ornaments (Ezek. 16:7).

 

이 상태는 또한 비유되기를, And it is also compared to:

 

그들은 내가 심은 가지요 내가 손으로 만든 것으로서 (60:21) A shoot of the Lords planting, and a work of the hands of Jehovah God (Isa. 60:21).

 

 

해설

 

이 글은 지금까지 축적해 온 모든 설명을, ‘말씀 전체의 증언’ 속에 단단히 고정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더 이상 개념 설명에 머물지 않고, 에스겔, 호세아, 이사야를 연속적으로 인용하여, 천적 인간의 상태가 특정 저자의 사상이나 체험이 아니라, ‘말씀 전체에 일관되게 흐르는 주제’임을 보여 줍니다.

 

먼저 에스겔의 ‘화평의 언약(a covenant of peace)은, 천적 상태의 핵심을 가장 압축적으로 표현합니다. 언약은 단순한 약속이 아니라, ‘관계의 안정’을 뜻합니다. 평화의 언약이 세워졌다는 것은, 주님과 사람 사이 관계가 더 이상 깨질 위험 속에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악한 들짐승이 그친다는 표현은, 외적 위협이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라, ‘악과 거짓이 더 이상 내면을 점령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빈 들에 평안히 거하며 수풀 가운데에서 잘지라’는 말은 역설적으로 들리지만, 영적 의미에서는 매우 정확합니다. 광야와 숲은 본래 위험과 불확실성의 장소입니다. 그곳에서 안심하고 잠든다는 것은, 환경이 안전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 안에 평화가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천적 평화는 조건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내적 질서의 결과입니다.

 

이제 다시 ‘’의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때를 따라 소낙비를 내리되 복된 소낙비를 내리리라’는 앞서 AC.90–92에서 말한 안개 같은 평온함을, 보다 풍성한 생명의 공급으로 확장합니다. 이 비로 인해 밭의 나무는 열매를 맺고, 땅은 소산을 냅니다. 이는 천적 인간에게서 겉 사람의 행위와 삶의 결과가 ‘자연스럽고 풍성하게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더 이상 억지나 불안이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특히 ‘그들의 멍에의 나무를 꺾고’라는 표현은 결정적입니다. 이는 죄책감이나 규범의 억압에서 벗어났다는 뜻이 아니라, ‘악과 거짓의 강제적 지배에서 해방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겠고’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지식의 증가가 아니라, 관계의 확증입니다.

 

에스겔의 마지막 선언, ‘내 양 곧 내 초장의 양 너희는 사람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라’라는 말씀은, 태고교회가 단수로 ‘사람’이라 불렸던 이유를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천적 상태에서 인간은 흩어진 개인이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하나의 사람’으로 서게 됩니다.

 

이어지는 호세아의 인용은 시간의 상징을 더합니다. ‘셋째 날’은 말씀에서 항상 완성을 뜻하며, 여기서는 ‘일곱째 날’과 같은 상태를 가리킵니다. 둘 다 ‘안식과 생명의 완성’을 뜻합니다. 이틀은 준비의 시간이고, 셋째 날은 생명이 일어나는 날입니다. 그래서 ‘살리심’과 ‘일으키심’을 함께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호세아에서 주님이 비와 같이, 늦은 비와 같이 오신다는 표현은, 천적 상태의 평화가 ‘갑작스러운 개입이 아니라, 때가 찼을 때 자연스럽게 임하는 은혜’임을 보여 줍니다. 늦은 비는 성숙을 위한 비입니다. 씨 뿌릴 때 필요한 봄비가 아니라, 열매를 맺게 하는 비입니다.

 

마지막으로 에스겔과 이사야의 비유는 이 상태를 ‘성장’으로 묘사합니다. 천적 상태는 점프나 도약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성장’입니다. 밭에서 자라나는 식물처럼, 주님이 심으시고 주님의 손으로 이루신 일입니다. 그래서 이 상태는 ‘여호와의 심으심’이며, ‘여호와 하나님의 손의 일’이라 불립니다.

 

AC.93은 이렇게 모든 것을 하나로 묶습니다. 천적 평화는 싸움이 끝난 뒤에 오는 정지 상태가 아니라, 주님과의 언약 안에서 자라나는 ‘살아 있는 생명 상태’입니다. 비가 내리고, 열매가 맺히고, 사람은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주님의 양 떼이자 ‘사람’으로 서게 됩니다.

 

이 지점에 이르면, 안식은 더 이상 설명의 대상이 아니라, 말씀 전체가 한 목소리로 증언하는 ‘궁극의 목적’으로 드러납니다.

 

 

 

AC.92, 창2:5-6, 평화의 기쁨에서 태어나는 ‘들의 초목, 밭의 채소’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창2:5, 6)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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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22:7)

 

AC.2803

 

신적 진리는 아들이며, 신적 선은 아버지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아들은 진리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앞의 489, 491, 533, 1147, 2633 참조). 그리고 아버지는 선을 의미합니다. 또한 진리의 잉태와 출생이 선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에서도 분명합니다. 진리는 다른 어떤 근원으로부터도 존재할 수 없고 나타날 수 없습니다 (existere). 이는 여러 차례 보인 바와 같습니다. 여기서 아들이 신적 진리이고, ‘아버지가 신적 선인 까닭은, 신적 본질과 인성의 결합, 그리고 인성과 신성의 결합이 곧 선과 진리의 신적 혼인, 그리고 진리와 선의 신적 혼인이기 때문입니다. 이로부터 천적 혼인이 나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곧 주님 안에는 무한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으며, 무한하기 때문에 그것은 어떤 관념으로도 파악될 수 없고, 오직 모든 선과 진리의 있음나타남(esse et existere), 곧 선 자체와 진리 자체라는 식으로만 이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선 자체가 아버지이며, 진리 자체가 아들입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선과 진리, 그리고 진리와 선의 신적 혼인이 있으므로, 아버지는 아들 안에 있고, 아들은 아버지 안에 있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요한복음에서 친히 가르치신 바와 같습니다. That Divine truth is the “son,” and Divine good the “father,”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a “son” as being truth (see n. 489, 491, 533, 1147, 2633); and of a “father” as being good; and also from the conception and birth of truth, which is from good. Truth cannot be and come forth [existere] from any other source than good, as has been shown many times. That the “son” here is Divine truth, and the “father” Divine good, is because the union of the Divine essence with the human, and of the human essence with the Divine, is the Divine marriage of good with truth, and of truth with good, from which comes the heavenly marriage; for in Jehovah or the Lord there is nothing but what is infinite; and because infinite, it cannot be apprehended by any idea, except that it is the being and the coming forth [esse et existere] of all good and truth, or is good itself and truth itself. Good itself is the “father,” and truth itself is the “son.” But because as before said there is a Divine marriage of good and truth, and of truth and good, the father is in the son, and the son is in the father, as the Lord himself teaches in John:

 

10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14:10, 11) Jesus saith unto Philip, Believest thou not that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n me? Believe me that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n me (John 14:10–11).

 

36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 38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시니 (10:36, 38) Jesus said to the Jews, Though ye believe not me, believe the works; that ye may know and believe that the Father is in me, and I in the Father (John 10:36, 38).

 

9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10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21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17:9, 10, 21) I pray for them; for all mine are thine, and thine are mine; and that they all may be one, as thou Father art in me, and I in thee (John 17:9, 10, 21).

 

31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32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13:31, 32);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17:1) Now is the son of man glorified, and God is glorified in him; if God be glorified in him, God shall also glorify him in himself. Father, glorify thy son, that thy son also may glorify thee (John 13:31–32; 17:1).

 

[2] 이로부터 주님 안에서 신성과 인성의 결합이 어떠한지(the nature of the union of the Divine and the human in the Lord) 알 수 있습니다. 곧 그것은 상호적이고 교호적인(mutual and alternate) 결합, 다시 말해 서로 안에 거하는(reciprocal) 결합입니다. 이 결합이 바로 신적 혼인(the Divine marriage)이라 불리는 것이며, 이로부터 천적 혼인(the heavenly marriage)이 내려오는데, 이것이 곧 하늘에서의 주님의 나라 자체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이렇게 말씀되어 있습니다. From this may be seen the nature of the union of the Divine and the human in the Lord; namely, that it is mutual and alternate, or reciprocal; which union is that which is called the Divine marriage, from which descends the heavenly marriage, which is the Lord’s kingdom itself in the heavens —thus spoken of in John: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14:20) In that day ye shall know that I am in my Father, and ye in me, and I in you (John 14:20).

 

21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26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17:21-23, 26) I pray for them, that they all may be one, as thou Father art in me and I in thee, that they also may be one in us, I in them and thou in me; that the love wherewith thou hast loved me may be in them, and I in them (John 17:21–23, 26).

 

이 천적 혼인이 선과 진리, 그리고 진리와 선의 혼인이라는 것은 앞에서 볼 수 있습니다 (2508, 2618, 2728–2729 이하 참조). That this heavenly marriage is that of good and truth, and of truth and good, may be seen above (n. 2508, 2618, 2728–2729 and following numbers).

 

[3] 그리고 신적 선은 신적 진리 없이 존재하거나 나타날 수 없고, 신적 진리 또한 신적 선 없이 존재하거나 나타날 수 없으며, 둘은 상호적으로 서로 안에 있으므로, 신적 혼인은 영원부터 있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곧 아들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아들 안에 있었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가르치신 바와 같습니다. And because Divine good cannot be and come forth without Divine truth, nor Divine truth without Divine good, but the one in the other mutually and reciprocally, it is therefore manifest that the Divine marriage was from eternity; that is, the son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n the son, as the Lord himself teaches in John:

 

5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24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17:5, 24) And now O Father, glorify thou me with thyself, with the glory which I had with thee before the world was (John 17:5, 24).

 

영원부터 나신 신적 인성은 또한 시간 안에서도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시간 안에서 태어나 영화롭게 된 것이 바로 그 동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께로 간다고, 곧 아버지께 돌아간다고 여러 번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에는 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But the Divine human which was born from eternity was also born in time; and what was born in time, and glorified, is the same. Hence it is that the Lord so often said that he was going to the Father who sent him; that is, that he was returning to the Father. And in John:

 

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14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1-3, 14)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the Word is Divine truth itself),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the Word was God; the same was in the beginning with God. All things were made by him, and without him was not anything made that was made. And the Word was made flesh, and dwelt among us, and we saw his glory, the glory as of the only-begotten of the Father, full of grace and truth (John 1:1–3, 14; see also John 3:13; 6:62).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3:13)

 

그러면 너희는 인자가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6:62)

 

 

해설

 

먼저, 이 글은 스베덴보리 기독론의 핵심을 가장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대목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기서 ‘아버지 = 신적 선’, ‘아들 = 신적 진리’라는 상응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존재의 구조를 밝히는 선언입니다. 신적 선은 ‘있음(esse)이고, 신적 진리는 그 있음이 드러난 ‘나타남(existere)입니다. 사랑은 본질이고, 진리는 그 사랑이 형상을 입고 이해 가능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사랑은 스스로를 드러내고자 하고, 진리는 사랑이 스스로를 표현한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는 선에서 태어나며, 선 없이는 진리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진리는 결코 독립적 실체가 아니라, 사랑이 자신을 인식 가능한 형태로 드러낸 것입니다.

 

여기서 삼위에 대한 전통적 오해가 풀립니다. 스베덴보리는 세 위격을 세 존재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그는 주님 안에서 ‘본질과 표현’, ‘사랑과 그 사랑의 지혜’, ‘선과 진리’라는 구분을 합니다. 이는 분리가 아니라 구별입니다. 사랑과 지혜가 다르지만 분리되지 않는 것처럼, 선과 진리는 서로를 전제로 합니다. 사랑은 자신을 알게 하기를 원하고, 진리는 사랑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주님은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둘 사이의 친밀함을 말하는 정도가 아니라, 상호 내재, 곧 존재의 상호 침투를 말합니다.

 

이 상호 내재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신적 혼인’입니다. 선이 진리 안에 있고, 진리가 선 안에 있는 상태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조화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본질을 이루는 상태입니다. 선이 진리 안에 있을 때, 진리는 생명을 가집니다. 진리가 선 안에 있을 때, 선은 질서와 방향을 가집니다. 만약 선만 있고 진리가 없다면 그것은 맹목적 충동이 되고, 진리만 있고 선이 없다면 그것은 차갑고 죽은 지식이 됩니다. 주님 안에서는 이 둘이 완전하게 하나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사랑 자체이시며, 동시에 진리 자체이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신적 혼인이 영원부터 있었다는 점입니다. 요한복음 17장의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광’이라는 말씀은, 시간 이전에 이미 신적 선과 신적 진리의 완전한 결합이 있었다는 선언입니다. 말씀은 영원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들’은 시간 안에서 새로 생겨난 존재가 아니라, 영원한 신적 진리입니다. 성육신은 영원한 진리가 시간 속에 나타난 사건입니다. 다시 말해, 보이지 않던 사랑이 눈에 보이게 된 사건입니다. 보이지 않던 선이 인간적 형상을 입은 사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영원부터 나신 신적 인성’이라는 표현은, 주님의 인성이 단순한 피조적 육체가 아니라, 신적 진리의 영원한 형상이라는 뜻입니다. 다만 그것이 시간 안에서 점진적으로 영화롭게 되었고, 최종적으로 완전한 신성으로 하나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아버지께로 간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장소 이동이 아니라, 인성의 완전한 신성화, 곧 나타남이 본질과 완전히 하나 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교리는 단지 기독론에 머물지 않습니다. 이것은 인간 거듭남의 원리입니다. 주님 안에 있는 신적 혼인에서 하늘의 혼인이 흘러나옵니다. 하늘의 혼인은 선과 진리의 결합입니다. 인간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배우되, 그것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것은 생명이 없습니다. 반대로 사랑하려 하나, 무엇이 참된지 모르면 그것은 왜곡됩니다. 거듭남은 진리가 선과 결합하는 과정입니다. 진리가 의지 속으로 내려와 사랑이 되고, 사랑이 다시 진리를 통해 질서를 얻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천적 혼인’이며, 이것이 곧 주님의 나라입니다.

 

따라서 이 본문은 단순히 ‘예수와 아버지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 전체의 구조를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시며, 그 사랑은 지혜로 드러나며, 그 지혜는 말씀으로 표현됩니다. 말씀은 곧 신적 진리이며, 그것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이는 인간 예수 안에서 보이지 않는 신적 사랑을 만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 신학에서 성육신의 의미입니다.

 

설교적으로 말한다면, 주님은 사랑을 말씀으로 보여 주신 분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말씀을 받아들여 사랑과 결합시킬 때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됩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상호 내재는 곧 우리 안에 주님이 거하시고,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는 상태로 이어집니다.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라는 말씀은 신비적 표현이 아니라, 선과 진리의 결합이 인간 안에서 이루어질 때 생기는 실제 상태를 말합니다.

 

결국 AC.2803은 삼위 이해, 성육신 이해, 하늘의 구조, 인간 거듭남의 원리를 하나로 묶는 핵심 단락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둘이 아니라, 사랑과 그 사랑의 나타남이라는 한 실재의 두 측면입니다. 그 완전한 결합이 주님 안에서 이루어졌고, 그 결합이 우리 안에서 모형적으로 이루어질 때 우리는 하늘의 생명에 참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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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 (20:7)

 

AC.2533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And now restore the man’s wife

 

이 말이 합리적 요소의 오염 없이(without taint from the rational) 교리의 영적 진리를 되돌려 놓으라는 뜻임은 아내가 영적 진리(spiritual truth)를 의미한다는 데서 분명합니다 (2507, 2510 참조). 또한 사람은 교리 그 자체(doctrine itself)를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은 그 상태에서 주님을 표상하는데, 그가 사람이라 불릴 때에는 천적 기원의 교리, 곧 천적 진리(celestial truth)를 의미합니다. 내적 의미에서 사람은 지성(the intellectual)을 뜻합니다 (158, 265, 749, 915, 1007, 2517 참조). 그러므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는 것은 교리의 영적 진리를 오염 없이 되돌려 놓으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합리적 요소의 오염 없이라고 한 것은,그녀를 돌려보내야 할 아비멜렉이 합리적인 것들과 관련된 교리, 곧 교리의 합리적 요소들(the rational things of doctrine)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2510 참조). That this signifies that he should render up the spiritual truth of doctrine without taint from the rational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wife” as being spiritual truth (see n. 2507, 2510); and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 “man” as being doctrine itself; for Abraham (by whom the Lord in that state is represented), when called a “man” signifies celestial truth, which is the same as doctrine from a celestial origin; for in the internal sense a “man” is the intellectual (see n. 158, 265, 749, 915, 1007, 2517). Hence it is evident that to “restore the man’s wife” is to render up the spiritual truth of doctrine without taint. That it means without taint from the rational is because Abimelech, who was to restore her, signifies doctrine that has regard to rational things, or what is the same, the rational things of doctrine (n. 2510).

 

[2]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신앙의 교리는 그 자체로는 신적이므로 인간은 물론 천사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높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 안에서는 인간의 이해에 맞게, 합리적인 방식으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이는 마치 부모가 어린 자녀들을 가르칠 때, 자신은 더 깊고 높은 생각에서 사고하면서도 아이들의 기질과 이해 수준에 맞추어 설명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르침이 되지 못하고, 마치 바위 위에 씨를 뿌리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저 세상에서 단순한 마음을 가진 이들을 가르치는 천사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천적이고 영적인 지혜 안에 있으나, 배우는 이들의 이해를 넘어서 말하지 않고 단순하게 말하며, 점차적으로 그들의 이해가 자라도록 이끕니다. 만일 천사적 지혜의 높이에서 그대로 말한다면, 단순한 자들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여 신앙의 진리와 선으로 인도될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말씀 안에서 인간의 이해에 맞추어 합리적인 방식으로 가르치지 않으셨다면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은 그 내적 의미 안에서 천사적 이해로까지 고양됩니다. 그리고 천사들이 가장 높은 상태에서 지각하는 그 의미조차도 신적 본질에 비하면 무한히 아래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은 그 기원과 그 자체에 있어 하늘 전체도 작은 일부조차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무한한 것들을 내포하고 있으며, 그럼에도 문자로는 사소하고 거칠게 보일 뿐입니다. It was said above that although the doctrine of faith is in itself Divine, and therefore above all human and even angelic comprehension, it has nevertheless been dictated in the Word according to man’s comprehension, in a rational manner. The case herein is the same as it is with a parent who is teaching his little boys and girls: when he is teaching, he sets forth everything in accordance with their genius, although he himself thinks from what is more interior or higher; otherwise it would be teaching without their learning, or like casting seed upon a rock. The case is also the same with the angels who in the other life instruct the simple in heart: although these angels are in celestial and spiritual wisdom, yet they do not hold themselves above the comprehension of those whom they teach, but speak in simplicity with them, yet rising by degrees as these are instructed; for if they were to speak from angelic wisdom, the simple would comprehend nothing at all, and thus would not be led to the truths and goods of faith. The case would be the same if the Lord had not taught in the Word in accordance with man’s comprehension, in a rational manner. Nevertheless in its internal sense the Word is elevated to the angelic understanding; and yet that sense, in its highest elevation in which it is perceived by the angels, is infinitely below the Divine. It is hence manifest what the Word is in its origin, and thus in itself; and that it thus everywhere involves more things than the whole heaven is capable of comprehending, even as to a small part, although in the letter it appears so unimportant and so rude.

 

[3] 주님이 곧 말씀이심은, 말씀이 그분한테서 나오며 그분이 말씀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요한복음에 분명히 나타납니다. That the Lord is the Word, because the Word is from him and he is in the Word, is evident in John:

 

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4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14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1, 4, 14)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God was the Word; in him was life, and the life was the light of men; the Word was made flesh, and dwelt among us; and we saw his glory, the glory as of the only-begotten of the Father, full of grace and truth (John 1:1, 4, 14; see also Rev. 19:11, 13, 16).

 

11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13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16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19:11, 13, 16)

 

주님이 말씀이시므로 그분은 또한 교리이십니다. 그 자체로 신적인 교리는 오직 그분뿐이기 때문입니다. And as the Lord is the Word, he is also doctrine; for there is no other doctrine which is itself Divine.

 

 

해설

 

이 구절은 창세기 20장의 중심에서 울리는 하나의 영적 명령입니다.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라는 말은 단순히 한 여인을 원래 남편에게 돌려보내라는 역사적 사건의 정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교리의 질서를 바로 세우라는 명령이며, 진리와 합리성의 관계를 재정립하라는 하늘의 선언입니다. 여기서 사라는 ‘영적 진리’를 의미하고, 아브라함은 ‘천적 기원의 교리’, 곧 주님으로부터 직접 나오는 교리를 의미합니다. 아비멜렉은 ‘합리적 단계의 교리’, 즉 인간의 이해와 사유를 통하여 형성되는 교리적 체계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장면은 진리가 합리성에 의해 소유되거나 지배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결론은 분명합니다. 합리성은 진리를 소유할 수 없으며, 다만 봉사해야 합니다.

 

오염 없이 돌려보내라’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합리성은 본래 악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에게 주어진 귀한 능력입니다. 그러나 합리성은 스스로를 기준으로 삼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해되지 않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고, 스스로 납득한 것만을 진리로 인정하려 합니다. 이때 교리는 인간의 사고 구조에 맞추어 재구성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진리는 점점 인간 중심적으로 변형됩니다. 이것이 바로 ‘합리적 요소의 오염’입니다. 오염이란 반드시 거짓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가 인간의 자아와 결합되어 순수성을 잃는 것을 뜻합니다. 진리가 자기 사랑이나 명예욕, 혹은 지적 우월감과 결합될 때, 그것은 이미 순수한 교리의 상태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매우 깊은 신학적 원리를 제시합니다. 신앙의 교리는 그 자체로는 신적입니다. 그것은 인간은 물론 천사조차 완전히 파악할 수 없을 만큼 무한합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그 교리를 인간의 이해에 맞게, 합리적인 형식으로 내려주십니다. 이것은 교리가 본래 합리적이어서가 아니라, 인간이 합리적 단계를 거쳐야만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말씀은 놀라운 겸손을 보여 줍니다. 무한하신 주님께서 유한한 인간의 이해에 맞추어 자신을 낮추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육신의 원리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말씀은 문자라는 옷을 입고, 인간의 사고 틀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본질은 여전히 신적이며 무한합니다.

 

여기서 부모가 어린 자녀를 가르치는 비유가 등장합니다. 부모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깊이를 그대로 드러내지 않습니다. 아이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설명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르침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모의 사고 수준이 아이의 수준으로 낮아진 것은 아닙니다. 단지 표현이 조정된 것뿐입니다. 천사들이 단순한 자들을 가르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천적, 영적 지혜 안에 있지만, 배우는 이의 상태에 맞추어 단순하게 말합니다. 이 점은 목회 사역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설교자는 깊은 진리를 알고 있다 해도, 그것을 듣는 이들의 상태에 맞추어 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진리를 변질시켜서는 안 됩니다. 낮추되, 왜곡하지 않는 것, 이것이 질서입니다.

 

이 구절은 말씀의 구조 자체를 보여 줍니다. 말씀은 문자적 의미에서는 단순하고 때로는 거칠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 내적 의미는 천사적 이해로까지 고양됩니다. 그리고 그 천사적 이해조차 신적 본질에 비하면 무한히 아래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은 겉으로는 작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늘 전체가 다 헤아릴 수 없는 깊이를 품고 있습니다. 이것은 말씀을 대하는 태도를 결정합니다. 문자만 보고 판단하면 얕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적 의미를 인식하면, 그 안에 무한한 질서와 조화가 펼쳐집니다.

 

마지막으로 이 글은 ‘주님은 곧 말씀이시며, 동시에 교리이시다’라는 선언으로 절정에 이릅니다. 이는 단순한 신학적 명제가 아닙니다. 교리는 어떤 학파나 신학 체계의 산물이 아닙니다. 교리는 주님 자신에게서 나오며, 주님 자신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리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곧 주님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교리를 왜곡하면, 주님에 대한 인식도 왜곡됩니다. 이 점에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라는 명령은 매우 엄중합니다. 교리의 영적 진리를 인간의 합리성 속에 가두지 말고, 본래의 주인께 돌려드리라는 명령입니다.

 

결국 이 구절은 우리 각자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진리를 이해의 틀 안에 가두려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이해를 진리 아래 두고 있습니까? 합리성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도자가 아니라 도구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교리의 영적 진리가 먼저이며, 합리성은 그 진리를 섬겨야 합니다. 이것이 질서이며, 이것이 거듭남의 길입니다.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라는 이 명령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내면에서 반복되어야 할 영적 행위입니다.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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