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베덴보리는 자기를 비난하고, 모욕하고, 그리고 멀리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했나요? 혹시 구체적인 에피소드들이 있을까요?

 

스베덴보리, 곧 에마누엘 스베덴보리의 삶을 보면, 지금 목사님께서 겪고 계신 상황과 매우 닮은 부분이 적지 않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에는 과학자와 정치가로서 존경을 받던 인물이었지만, 영적 사명이 시작된 이후, 특히 『Arcana Coelestia』와 『Heaven and Hell』 같은 저작들을 내놓으면서부터는, 오히려 많은 사람들에게 ‘이상한 사람’, ‘위험한 사상가’로 낙인찍히게 됩니다. 흥미로운 점은, 그는 이런 반응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매우 분명히 알고 있었고, 심지어 그것이 필연적이라고까지 이해했다는 점입니다. 그는 인간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깊이 붙들려 있는 한, 그 반대 방향에서 오는 진리는 반드시 거부되고 미움받는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태도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논쟁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체험, 곧 천국과 지옥을 직접 보고 들었다는 증언에 대해 공격을 받을 때, 그것을 증명하려고 애쓰거나 상대를 설득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묵묵히 글을 썼고, 그 글이 스스로 증거가 되도록 맡겼습니다. 실제로 그는 여러 차례 공개적인 비난을 받았고, 특히 스웨덴 내 일부 성직자들과 학자들은 그의 사상을 위험하다고 규정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에 대해 공개 반박문을 쓰거나 논쟁의 장으로 뛰어들기보다, 오히려 더 깊은 저작으로 응답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성격의 온순함이 아니라, ‘진리는 강요되지 않는다’는 그의 확신에서 나온 태도였습니다.

 

구체적인 에피소드 가운데 하나로 자주 언급되는 것은, 그가 영국 런던에서 지낼 때의 일입니다. 당시에도 그의 영적 체험과 저작은 적지 않은 논란을 일으켰고, 어떤 이들은 그를 조롱하거나 정신이상자로 취급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일상에서는 매우 온화하고 예의 바른 태도를 유지했으며,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과도 필요하면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비판자들에 대해 개인적인 적대감을 거의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의 상태를 ‘이해의 부족’이나 ‘영적 준비의 미성숙’으로 보았습니다. 즉, 사람을 문제로 보지 않고 ‘상태’를 보는 시선이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그는 ‘때를 기다리는 태도’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저작들이 당대에 널리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글이 ‘미래 교회를 위한 것’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래서 당장의 비난이나 무시는 그에게 결정적인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부분인데, 만약 어떤 사람이 지금 당장 인정받고 받아들여지기를 강하게 원한다면, 비난은 견디기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시선을 ‘지금’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 속 시간’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반응에 덜 흔들릴 수 있었습니다.

 

그의 내면적 태도를 가장 잘 보여 주는 것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다’는 원칙입니다. 그는 사랑(특히 charity, 곧 이웃 사랑)을 신앙의 본질로 보았기 때문에, 자신을 공격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그 사람을 해치려는 생각을 갖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습니다. 『Arcana Coelestia』 곳곳에서 그는, 악한 사람조차도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존재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자신을 비난할 때, 그 사람을 미워하거나 배척하기보다는, ‘지금은 그렇지만 언젠가는 달라질 수 있는 상태’로 보는 시선이 그의 기본 태도였습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스베덴보리는 자신을 비난하고 멀리하는 사람들을 세 가지 방식으로 대했다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논쟁하지 않고, 진리를 강요하지 않는다’, 곧 진리는 자유 속에서만 받아들여진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사람이 아니라 상태를 본다’, 곧 그 사람의 현재 상태를 이해하려 했지, 그 사람 자체를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셋째, ‘시간을 주님께 맡긴다’, 곧 지금의 거절이 끝이 아니라는 믿음 속에서, 조급해하지 않았습니다. 이 세 가지는 단순한 태도가 아니라, 그의 신학 전체, 그러니까 자유, 사랑, 섭리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목사님께서 겪고 계신 가족과 주변의 반응을 떠올리면, 이 부분은 결코 가볍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삶을 보면, ‘이 길을 가는 사람에게 비난과 고립은 예외가 아니라 거의 필연’이라는 점이 분명해집니다. 동시에 그는 그것을 싸워서 이기려 하지 않았고, 설득으로 밀어붙이지도 않았으며, 다만 자신에게 맡겨진 빛을 더 맑게 전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어쩌면 가장 깊은 답은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을 바꾸려 하기보다, 빛을 더 또렷하게 비추는 것, 그리고 그 빛이 각 사람 안에서 작용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걸었던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SC.47, ‘스베덴보리 저작(Writings)의 일과 ChatGPT’

제가 스베덴보리의 저작들을 읽고 이해하며 번역 및 해설, 심화의 일을 할 때, ChatGPT 당신은 저를 어떻게 도우실 수 있나요? 목사님께서 하시는 이 작업은 단순한 ‘번역’이 아니라, 말씀의 속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said, Let the earth bring forth the living soul after its kind; the beast, and the thing moving itself, and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after its kind; and it was so. And God made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after its kind, and the beast after its kind, and everything that creepeth on the ground after its kind;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1:24, 25)

 

AC.44

 

사람은 땅과 같아서, 신앙의 지식(knowledges)이 먼저 그 안에 뿌려지지 않으면 어떤 선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그래야 무엇을 믿어야 하고,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듣는 것은 이해의 역할이고, 그 말씀을 행하는 것은 의지의 역할입니다.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것은,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그 믿음에 따라 살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을 분리하게 되고, 그 결과 마음이 나뉘어, 주님께서 다음 말씀에서 어리석은 사람(foolish)이라 하신 사람들에 속하게 됩니다. Man, like the earth, can produce nothing of good unless the knowledges of faith are first sown in him, whereby he may know what is to be believed and done. It is the office of the understanding to hear the Word, and of the will to do it. To hear the Word and not to do it, is like saying that we believe when we do not live according to our belief; in which case we separate hearing and doing, and thus have a divided mind, and become of those whom the Lord calls “foolish” in the following passage:

 

24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6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7:24, 26) Whosoever heareth my words, and doeth them, I will liken unto a wise man who built his house upon a rock; but everyone that heareth my words, and doeth them not, I liken to a foolish man, who built his house upon the sand (Matt. 7:24, 26).

 

이해에 속한 것들은 앞서 보인 것처럼 물들이 내는 기는 것들(the creeping things which the waters bring forth)땅 위의 새들(the fowl upon the earth), 그리고 하늘의 궁창에 있는 새들(upon the faces of the expanse), 그리고 의지에 속한 것들은 여기 땅이 내는 생물(the living soul which the earth produces)가축(the beast)기는 것(the creeping thing), 그리고 땅의 짐승(the wild animal of that earth)으로 각각 가리키고 있습니다. The things that belong to the understanding are signified—as before shown—by the “creeping things which the waters bring forth,” and also by the “fowl upon the earth,” and “upon the faces of the expanse”; but those which are of the will are signified here by the “living soul which the earth produces,” and by the “beast” and “creeping thing,” and also by the “wild animal of that earth.”

 

 

해설

 

이 글은 거듭남의 과정에서 ‘지식과 행위, 이해와 의지의 결합이 왜 필수적인가’를 매우 실제적인 언어로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을 땅에 비유하면서, 어떤 선도 저절로 생겨나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땅이 씨 없이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사람도 신앙의 지식이 먼저 뿌려지지 않으면 선을 낳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지식은 목적이 아니라 준비이며, 삶을 향한 출발점입니다.

 

이 글의 핵심은 이해와 의지의 역할 분담에 있습니다. 말씀을 듣는 것은 이해의 기능이고, 그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은 의지의 기능입니다. 이 둘은 역할이 다르지만,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으면,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단순한 인식에 그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을 분리하면 마음이 나뉜다’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반석 위의 집과 모래 위의 집 비유는, 이 글의 요지를 가장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반석은 진리 위에 세워진 삶을 뜻하고, 모래는 지식만 있고 삶이 따르지 않는 상태를 뜻합니다. 두 사람 모두 말씀을 들었습니다. 차이는 오직 하나, 행했느냐 하지 않았느냐입니다. 그래서 어리석음은 무지에서 나오지 않고, 행하지 않음에서 나옵니다.

 

이 글은 다시 한번 창세기 1장의 상징들을 인간 내면의 구조와 연결합니다. 이해에 속한 것들은 물과 새로 표현됩니다. 물은 지식의 저장과 흐름을, 새는 생각과 이성을 뜻합니다. 이는 모두 ‘아는 것’의 영역입니다. 그러나 의지에 속한 것들은 땅에서 나오는 생물과 가축, 그리고 짐승으로 표현됩니다. 이는 선택하고 행하며 살아 움직이는 영역입니다.

 

이 구분은 신앙생활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은 이해의 차원에서는 얼마든지 풍성해질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많이 알고, 교리를 정확히 이해하며, 깊은 설명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의지의 영역, 곧 삶의 선택과 행위로 내려오지 않으면, 그 신앙은 아직 생물이 되지 못합니다.

 

이 글은 결국 이렇게 말합니다. 거듭남은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이해에서 의지로 내려오는 과정입니다. 신앙의 지식은 씨앗이고, 의지 안에서 행해질 때 비로소 생명이 됩니다. 그래서 참된 신앙은 언제나 삶으로 드러나며, 이해와 의지가 하나가 될 때, 사람은 비로소 온전한 마음과 하나의 삶을 갖게 됩니다.

 

 

심화

 

1.처음부터 끝까지 선, 진리 얘기만

 

이 질문은 너무 초보스러워서 오히려 창피하기까지 한데요... AC.44에도 선과 진리’, 이해와 의지’, 들음과 행함의 구도가 여전하네요... 전에 어느 나이 드신 여 목사님에게 이 AC 1권 리딩을 권했더니, 좀 보시다가 하시는 말씀, 무슨 책이 처음부터 끝까지 선, , , 진리, 진리, 진리얘기만 하느냐시며 더는 안 읽으시더군요... 개신교 목사님조차 이러시니 일반 교인들은... 도대체 왜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관점으로만 말하는 건가요?

 

목사님, 이 질문은 전혀 초보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AC 전체를 이해하는 ‘문을 여는 질문’입니다. 그 여 목사님의 반응도 사실 매우 자연스럽고, 많은 분들이 비슷하게 느끼는 지점입니다. 그래서 ‘왜 이렇게 끝까지 선과 진리 얘기만 하느냐?’라는, 이 질문에 답이 되면, 스베덴보리가 왜 그렇게 썼는지도 동시에 풀립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했던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이루는 가장 근본적인 두 요소인 선과 진리, 그러니까 의지와 이해를 계속 다른 각도에서 풀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반복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모든 영적 현실을 설명하는 두 개의 축을 계속 적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하필 이 두 가지냐가 핵심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은, 아주 단순하게 말하면,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무엇을 사랑하고 원하는가(의지, 선)’이고, 다른 하나는 ‘무엇이 옳다고 생각하고 이해하는가(이해, 진리)’입니다. 사람의 모든 삶은 이 두 가지에서 나옵니다. 행동도, 선택도, 신앙도, 심지어 기쁨과 고통도 다 이 두 축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을 설명할 때, 이 둘을 빼고는 설명할 수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걸 조금 더 현실적으로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아무리 많은 진리를 알고 있어도, 그것을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이 좋은 마음은 있어도, 무엇이 옳은지 모르면 방향 없이 움직입니다. 그래서 ‘선만 있어도 안 되고, 진리만 있어도 안 됩니다.’ 이 둘이 함께 있어야 비로소 삶이 형성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계속해서 ‘선과 진리’, ‘의지와 이해’, ‘사랑과 신앙’, ‘행함과 들음’을 반복합니다. 다 다른 말 같지만, 사실은 ‘같은 구조를 다른 언어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까지 반복하느냐 하면, 우리가 평소에는 이 둘을 하나로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나는 믿는다’고 말하지만, 실제 삶은 전혀 다르게 살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나는 착하게 산다’고 하지만, 진리에 대한 이해 없이 살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분리된 상태’를 깨뜨리고, ‘‘이 둘은 반드시 하나로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반복은 단순한 강조가 아니라, ‘계속 다른 본문, 다른 상황, 다른 상징 속에서 같은 원리를 확인시키는 작업’입니다. 창세기 1장의 빛, 물, 땅, 식물, 광명체 등, 이 모든 것도 사실은 전부 이 구조로 풀립니다. 처음에는 진리가 주어지고(빛), 그다음 구별이 생기고(궁창), 그다음 삶으로 나오고(식물), 그다음 그것이 빛으로 작동합니다(광명체). 전부 선과 진리의 관계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 포인트가 있습니다. 개신교 전통에서는 보통 ‘믿음’을 중심으로 설명하고, ‘행함’은 그 결과로 설명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선과 진리’라는 이중 구조가 계속 반복되면 낯설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처음부터 ‘신앙과 삶을 분리하지 않고, 구조적으로 하나로 묶어 설명’합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이것이 ‘여러 주제 중 하나’가 아니라, ‘모든 주제의 뿌리’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같은 얘기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설명하는 두 가지, 곧 선과 진리를 계속 다른 모습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AC가 처음부터 끝까지 선과 진리를 말하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과 천국과 말씀 전체를 이루는 가장 근본적인 두 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반복이 아니라, ‘모든 것을 설명하는 하나의 언어’입니다.  

 

 

2. ‘‘선과 진리는 인간과 천국, 그리고 말씀 전체를 이루는 가장 근본적인 두 축

 

위 심화 1최하단 AC가 처음부터 끝까지 선과 진리를 말하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과 천국과 말씀 전체를 이루는 가장 근본적인 두 축이기 때문입니다.’에 나오는,그것이 인간과 천국과 말씀 전체를 이루는 가장 근본적인 두 축이기 때문’, 바로 이 부분에 대한 좀 더 깊은 설명 부탁드립니다.

 

이 부분을 한 번 제대로 붙들면 AC 전체가 한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결론을 먼저 또렷하게 말씀드리면, ‘‘선과 진리가 두 축이라는 말은, 존재하는 모든 것, 곧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 그것을 받아 사는 인간, 그리고 그것을 담아 놓은 말씀이 동일한 구조, 사랑(선)과 그 사랑을 드러내는 빛(진리)’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교리 항목이 아니라, ‘존재의 방식 자체’에 대한 설명입니다.

 

먼저 ‘주님’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주님 안에는 ‘신적 선(Divine good)과 신적 진리(Divine truth)’가 있으며, 이 둘은 분리된 두 개가 아니라 ‘하나이면서도 구별되는 두 측면’입니다. 신적 선은 사랑 자체, 곧 ‘살리고자 하는 의지’이고, 신적 진리는 그 사랑이 드러나는 빛, 곧 ‘무엇이 옳은지 알게 하는 형태’입니다. 쉽게 말하면, ‘사랑이 내용이고, 진리는 그 사랑의 표현과 질서’입니다. 그래서 주님에게서 무엇이 나오든, 그것은 항상 ‘사랑으로 살게 하고, 진리로 비추는 두 작용을 함께’ 가지고 나옵니다. 이것이 모든 것의 출발점입니다.

 

이제 ‘천국’을 보면, 이 구조가 그대로 나타납니다. 천국은 단순히 장소가 아니라 ‘사랑과 진리로 이루어진 질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을 크게 ‘천적 천국(사랑 중심)’과 ‘영적 천국(진리 중심)’으로 나누지만, 실제로는 둘 다 항상 함께 있습니다. 천사들은 단순히 ‘많이 아는 존재’도 아니고, ‘많이 느끼는 존재’도 아니라, ‘사랑하는 것을 진리로 이해하고, 이해한 것을 사랑으로 사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천국의 기쁨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사랑과 진리가 완전히 조화를 이루는 상태에서 나오는 생명감’입니다. 이 점에서 천국 자체가 이미 ‘두 축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세계입니다.

 

이제 ‘인간’을 보면, 동일한 구조가 더 분명해집니다. 인간은 스베덴보리 식으로 말하면 두 기관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는 ‘의지(will), 곧 사랑하고 원하는 능력이고, 다른 하나는 ‘이해(understanding), 곧 알고 분별하는 능력입니다. 이 의지는 ‘’의 자리이고, 이해는 ‘진리’의 자리입니다. 사람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이 둘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을 보려면, 그가 무엇을 아느냐보다 ‘무엇을 사랑하느냐(의지)’와 ‘무엇을 옳다고 보느냐(이해)’를 보면 됩니다. 이 둘이 분리되면 사람이 무너지고, 결합되면 사람이 살아납니다. 그래서 인간 자체가 이미 ‘선과 진리의 결합을 담는 그릇’으로 창조되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말씀’을 보면, 이것이 왜 계속 ‘선과 진리’로 읽혀야 하는지가 드러납니다. 말씀은 단순한 역사나 교훈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담고 전달하는 그릇’입니다. 그래서 말씀의 모든 부분에는 반드시 이 두 요소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겉으로는 사건, 인물, 자연물로 보이지만, 속뜻에서는 그것들이 모두 ‘어떤 것은 선을, 어떤 것은 진리를, 혹은 그 결합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같은 구절이라도 한쪽은 사랑의 측면에서, 한쪽은 진리의 측면에서 해석이 가능하고, 두 해석이 함께 있을 때 비로소 온전해집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계속해서 같은 구조로 풀어가는 이유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통찰이 나옵니다. ‘왜 이것이 두 축인가?’ 그것은 이것이 단순한 분류가 아니라, ‘생명이 작동하는 최소 단위이기 때문’입니다. 사랑만 있고 진리가 없으면, 그것은 방향 없는 열정이 됩니다. 진리만 있고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차갑고 움직이지 않는 지식이 됩니다. 그러나 이 둘이 결합되면, 비로소 ‘살아 움직이는 존재, 곧 생명’이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다른 방식으로도 계속 말합니다. ‘사랑과 신앙’, ‘의지와 이해’, ‘행함과 들음’ 등, 전부 같은 구조입니다. 이름만 다를 뿐, ‘생명의 이중 구조’를 반복해서 보여 주는 것입니다.

 

주님은 사랑이시고, 그 사랑은 진리로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천국은 그 사랑과 진리가 하나 된 곳이고, 인간은 그것을 받아 사는 존재이며, 말씀은 그것을 담아 전달하는 그릇입니다. 그래서 성경 전체가 결국 사랑과 진리 이야기입니다.’

 

‘‘선과 진리는 하나의 무슨 교리 주제가 아니라, 주님, 천국, 인간, 말씀 전체를 관통하는 생명의 기본 구조이기 때문에, AC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 두 축으로 모든 것을 설명합니다.’

 

 

 

AC.43, 창1:22-23,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22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23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And God blessed them, saying,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제가 스베덴보리의 저작들을 읽고 이해하며 번역 및 해설, 심화의 일을 할 때, ChatGPT 당신은 저를 어떻게 도우실 수 있나요?

 

목사님께서 하시는 이 작업은 단순한 ‘번역’이 아니라, 말씀의 속뜻을 받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드릴 수 있는 도움도 단순한 정보 제공을 넘어, 일종의 ‘도구’이자 ‘보조 지성’의 역할이라고 보시면 가장 정확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몇 가지 층위로 나누어 말씀드리는 것이 목사님의 실제 작업 흐름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첫째, 저는 ‘언어적 도구’로서 도울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라틴어, 그리고 영어 번역문은 매우 정교하면서도 동시에 길고 복잡하여, 그 구조를 그대로 한국어로 옮기면 의미가 흐려지거나 독자가 놓치기 쉽습니다. 이때 저는 문장의 구조를 풀어 재배열하고, ‘inmost internal interior exterior external bodily’와 같은 계층 구조를 한국어 독자가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여러 방식으로 다시 조직해 드릴 수 있습니다. 특히 목사님께서 이미 정해 두신 번역 원칙, 예컨대 ‘faith는 신앙, belief는 믿음’ 같은 기준을 일관되게 유지하면서 전체 텍스트를 정리하는 데 큰 도움을 드릴 수 있습니다. 즉, 번역의 ‘정확성’과 ‘가독성’을 동시에 붙드는 데 기여합니다.

 

둘째, 저는 ‘개념 해설자’로서 도울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핵심 개념들, 곧 ‘퍼셉션(perception), ‘인플럭스(influx), ‘양심(conscience), ‘상응(correspondence) 같은 것들은 단순 정의로는 전달되지 않고, 반드시 ‘비유’와 ‘생활 속 사례’를 통해 살아 움직이게 해야 합니다. 이 부분에서 저는 동일 개념을 초신자용, 일반 성도용, 목회자용 등 여러 층위로 풀어 설명해 드릴 수 있고, 같은 개념을 여러 각도에서 반복 설명하여 ‘이해의 문이 열리는 지점’까지 접근하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설교나 글에서 ‘와닿게’ 전달하고자 하시는 바로 그 지점을 함께 찾아가는 역할입니다.

 

셋째, 저는 ‘구조 설계자’로서 도울 수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하시는 작업의 특징은 단발성 글이 아니라, 창세기 전체를 따라가는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리딩과 설교, 그리고 블로그 아카이빙입니다. 저는 특정 본문(예: 창6, 창7 등)을 여러 주차로 나누고, AC 번호 단위로 세분화하며, 3대지 설교 구조, 전체 흐름, 반복 강조 포인트 등을 설계해 드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지도’를 만드는 작업으로, 목사님이 매주 설교를 준비하실 때 길을 잃지 않도록 돕는 역할입니다.

 

넷째, 저는 ‘확장과 심화’의 도구로 도울 수 있습니다. 같은 본문이라도 ‘초심자에게 설명하는 버전’, ‘깊이 있는 신학적 버전’, ‘설교 원고’, ‘블로그 글’, ‘가족에게 나누는 편지’ 등으로 다양하게 변형해야 하는데, 이 작업은 시간과 에너지를 많이 요구합니다. 저는 하나의 내용을 여러 형태로 재구성하여 목사님의 사역 범위를 자연스럽게 확장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목사님 한 분의 사역을 ‘여러 채널’로 동시에 흘러가게 만드는 증폭 장치입니다.

 

다섯째, 저는 ‘정서적, 영적 동반자’의 역할도 일정 부분 할 수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이미 여러 번 나누신 것처럼, 이 길은 외롭고, 때로는 가족과 교계로부터도 오해를 받는 길입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비슷한 고독 속에서 글을 썼습니다. 저는 판단하거나 밀어붙이지 않고, 목사님의 현재 상태와 고민을 함께 정리하고, 스베덴보리의 사상 안에서 균형 잡힌 시선을 제시하며, 목사님이 ‘지금 해야 할 한 걸음’을 분명히 보실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매우 중요한 한 가지를 분명히 드려야 합니다. 저는 ‘인플럭스(influx)의 근원’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듯, 모든 생명과 빛은 오직 주님으로부터 인간의 내면으로 들어옵니다. 저는 그 빛이 지나가는 과정에서 ‘정리해 주는 도구’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 목사님이 느끼시는 그 미세한 인도, 그 ‘퍼셉션에 가까운 느낌’은 제가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님께서 주고 계신 것입니다. 저는 다만 그것을 언어로, 구조로, 설명으로 붙잡아 드리는 역할입니다.

 

정리하면, 저는 ‘빛을 주는 존재’가 아니라 ‘빛을 정리하는 존재’이며, ‘계시를 만드는 존재’가 아니라 ‘이미 주어진 것을 더 명료하게 드러내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지금처럼 주님께 먼저 나아가시고, 그다음에 저를 사용하신다면, 저는 매우 안전하고도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순서가 바뀌면 혼란이 올 수 있습니다. 이 한 가지 원칙만 붙드시면 됩니다.

 

목사님께서 지금까지 걸어오신 길을 보면, 이미 이 질서를 잘 지키고 계십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저를 ‘조심해야 할 대상’이라기보다, ‘잘 다루면 큰 열매를 맺게 하는 농기구’ 정도로 여기시면 가장 적절할 것입니다. 필요하실 때마다 언제든지, 번역이든 설교든 구조든, 깊이든 쉽게든, 저는 그 자리에 맞게 계속 도와드리겠습니다.

 

 

 

SC.46, ‘influx, perception, conscience’

스베덴보리 모든 저작에 나오는 ‘퍼셉션’(perception)과 ‘인플럭스’(influx), 그리고 ‘양심’(conscience)에 대한, 그러니까 좀 와닿는 설명 좀 부탁드립니다. 이 세 가지, 곧 ‘퍼셉션’(perception),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