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 울기 전에 세 번 주님을 부인한 베드로

 

 

54예수를 잡아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55사람들이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았는지라 베드로도 그 가운데 앉았더니 56한 여종이 베드로의 불빛을 향하여 앉은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하니 57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이 여자여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58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보고 이르되 너도 그 도당이라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 하더라 59한 시간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장담하여 이르되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60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아직 말하고 있을 때에 닭이 곧 울더라 61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62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눅22:54-62)

 

 

(오직 믿음의) 신앙이 주님을 배척한다는 것은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한 것의 의미를 통해 알 수 있다. 그가 밤에 주님을 부인한 것은 교회의 마지막 때 즉 교회 안에 인애가 없는 때를 뜻한다. (천국의 비밀 6073:3, 이순철 역) And that faith would reject the Lord is evident from the representation by Peter when he denied Him thrice; that he did this at night, signifies the last time of the church, when there is no longer any charity (see n. 6000);

 

 

말씀의 영적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 말씀을 읽으면서, ‘나라도 아마 그랬을 거야’ 할까요, 아니면 베드로를 비난하거나 안타까워할까요? 여기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영적 의미, 곧 속뜻으로 주님의 제자를 뜻하는 게 아니라 사랑 없는 신앙, 그러니까 사랑과 분리된 신앙, 말로는 사랑, 사랑하는데 실제로는 삶이 받쳐주지 않거나 사랑의 삶, 즉 체어리티(charity, 인애)의 삶에 별로 관심이 없는 신앙을 뜻합니다. 베드로는 본래 사랑과 체어리티를 동반한 신앙을 뜻합니다만, 그러나 본문에서는 교회의 마지막 때의 신앙, 즉 신앙과 교리만 있고, 정작 있어야 할 사랑은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 없는 신앙이란 어떤 것입니까? 주님을 믿기는 하는 데 그에 따라 살지는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곧 삶이기 때문입니다.

 

※ 이 문제는 사실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제가 요즘 요한계시록 번역 준비 작업을 하면서 그 속뜻 브리핑을 읽고 있는데, 거기 보면 계시록에 나오는 용, 짐승이 다 그 속뜻으로는 이런 신앙, 이런 신앙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읽고 있는 책은 스베덴보리(1688-1772, 스웨덴) 저,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1757년에 책을 쓰기 시작했으나 생전엔 출판을 못 한, 사후 첫 라틴 출판은 1785-1789)입니다.

 

세상에서는 이웃에게 많이 베풀고 기부를 많이 하는 사람을 사랑이 많은 사람이라고 합니다만, 그러나 새 교회에서는 자기가 맡은 일을 공정하고 성실하게 하는 걸 사랑이며 체어리티라고 가르칩니다. 만약 국회의원이 자기 자신이나 가까운 사람들에게 유리하도록 법을 만든다면, 그것은 몇몇 사람에게만 좋고 그 밖의 사람에게는 나쁜 법이 될 것이며, 그러므로 그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교회가 주님에게서 점점 멀어지면 나중에는 신앙만으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치고 삶을 소홀히 합니다. 그런 신앙, 그런 신앙이 오늘 본문의 베드로로 표상되는 신앙입니다.

 

54예수를 잡아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그래서 본문 54절에 보면, 베드로가 주님을 멀찍이 따라갔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로 표상되는 신앙이 주님과는 거리가 먼 신앙이라는 뜻입니다. 신앙인들이 사랑 없는 신앙 안에 있을 때, 그들에게 있는 진리는 마치 감옥에 갇힌 것처럼 힘을 쓰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런 신앙을 가지고는 이웃을 사랑할 수도 없고, 악의 유혹을 물리칠 수도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이 대제사장의 집에 붙잡혀 있는 것은 진리가 그렇게 힘을 쓰지 못하는 모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이 누가복음 속뜻 강해를 비롯, 이순철 목사님의 설교 원본은 ‘믿음’(belief)과 ‘신앙’(faith)을 별로 구분하지 않습니다. 이는 목사님이 개신교 배경이시기 때문인 것 같은데요,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글들을 보면 ‘belief’보다 ‘faith’를 압도적으로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오직 믿음’이라는 표현에서조차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가급적 ‘믿음’을 ‘신앙’으로 수정, 표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집에 들어갔을 때 일어난 일들을 본문 55절과 56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55사람들이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았는지라 베드로도 그 가운데 앉았더니 56한 여종이 베드로의 불빛을 향하여 앉은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하니

 

한글 성경에는 뜰 한가운데 불을 피웠다고 하는데, 영어 성경에는 ‘넓은 방 한가운데’라고 되어 있습니다. 말씀에서 방은 사람의 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대제사장 집의 방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사랑 없는 신앙 안에 있는 사람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나타냅니다. 이를테면 방 한가운데 타고 있는 불은 애정을 뜻하는데, 그것은 지옥으로부터 그들의 자아 사랑을 통해 흘러들어오는 탐욕과 미움, 질투 같은 악한 애정을 뜻하며, 그러므로 베드로가 그 불을 쬐는 것은 사랑 없는 신앙은 필연적으로 악한 애정의 지배를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때 여종 하나가 베드로를 주목하다가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합니다. 여종은 악한 애정을 가진 지옥의 영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여종이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다 도발하는 건, 지옥의 영들이 베드로로 표상되는 사랑 없는 신앙 안에 있는 사람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사랑 없는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 이를테면 믿음만의 교리 안에 있는 사람 중에도 진리를 따라 살려는 순진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때 그의 마음속에 있는 지옥의 영들은 그의 일거일동을 주의 깊게 살피다 그가 자기들과 한 편이 아니다 싶을 때, 마치 이리가 달려들 듯 그를 공격합니다. 여종이 베드로를 주목하다가 도발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마침내 지옥의 영들과의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여종의 말,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에서 ‘’는 바로 진리이신 주님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 말은 사랑 없는 신앙 안에 있는 사람에게 아직 진리가 남아 있음을 뜻합니다. 이러한 의미를 통해 지옥이 싸움을 걸어오는 목적이 무엇인지 분명해지는데요, 그들은 신앙인의 내면에 남아 있는 진리를 파괴하려는 것입니다. 싸움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57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이 여자여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베드로는 ‘이 여자여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라고 주님을 부인했고, 그 순간 싸움이 끝나버렸습니다. 주님을 부인한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지옥의 유혹에 굴복하는 것이고, 그것은 시험에서 지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속 깊은 곳으로부터 남을 미워하거나 시기하는 마음이 수시로 올라옵니다. 부정한 욕망에 휩싸일 때도 있습니다. 그런 것이 모두 지옥으로부터 오는 시험입니다. 그때 사랑 있는 신앙 안에 있는 사람은 그 싸움에서 어렵지 않게 이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 있는 신앙 안에 주님이 계셔서 우리를 대신해 싸워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 없는 신앙 안에 있는 사람은 주님도 도우실 수 없습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때 주님은 손발이 묶여 대제사장의 집에 갇힌 것과 같은 상태에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입으로만 말하고, 행하지는 않을 때, 우리에게 있는 진리는 그렇게 힘을 쓸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그렇게 되면 시험이 있을 때마다 속절없이 무너집니다. 그리고 그때 가지고 있던 선과 진리를 하나씩 지옥에게 빼앗깁니다. 그것은 마치 이스라엘의 왕들이 이방 왕들과의 싸움에서 졌을 때, 성전의 보물을 빼앗기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시험이 한바탕 휘몰아치고 지나가면 한동안은 평화가 찾아옵니다. 그때 신앙인들은 간신히 몸과 마음을 추슬러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데, 그러나 다시 지옥의 공격이 시작되고, 또 다시 무릎을 꿇습니다. 사랑 없는 신앙 가운데 있는 신앙인들의 그런 모습을 58절과 59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58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보고 이르되 너도 그 도당이라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 하더라 59한 시간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장담하여 이르되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60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아직 말하고 있을 때에 닭이 곧 울더라

 

지옥은 신앙인들을 항상 주시합니다. 그리고 그가 진리를 붙잡고 일어서려 할 때, 어디선가 나타나 ‘너도 그 도당이라’,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하며 계속 달려듭니다. 말씀에서 갈릴리 사람은 주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을 뜻하지만, 여기 지옥 영들이 말하는 갈릴리 사람은 온전히 지옥의 편에 서지 않은 사람, 즉 그들이 조금만 방심하면 언제든 예수의 편에 설 사람을 의미합니다. 지옥의 영들은 그런 사람을 유심히 지켜보다가 조금만 이상하면 ‘너도 그 도당이라’,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하며 맹렬히 공격해 넘어뜨립니다. 사랑 없는 신앙 안에 있는 교회가 그렇게 넘어지기를 반복하다 나중에는 더 이상 회복될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그렇게 교회가 완전히 무너지는 것이 베드로가 세 번 주님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말씀에서 세 번은 완전한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는 그때 닭이 울었다고 합니다. 닭 우는 새벽은 주님이 오시는 때를 말합니다. 주님은 교회 안에 사랑과 신앙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때, 새로운 진리로 오셔서 그것으로 교회를 심판하시고, 새 교회를 여십니다. 그것이 닭이 울고 새벽이 오는 것입니다.

 

61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62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위 말씀은 기존의 교회가 무너지고, 새로운 교회가 열리는 걸 표현한 것입니다.

 

교회의 마지막 때 모든 사람이 죄의 홍수 속으로 빠져들 때도 노아처럼 주님의 손을 붙잡고 놓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돌아보시고, 그들을 그 무너지는 교회로부터 구해내십니다. 주님께서 돌이켜 보신 베드로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타락한 교회 안에서도 신앙을 잃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던 아주 적은 수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주님의 시선이 그들에게 머물렀을 때 비로소 그들의 영의 눈이 열리고 자신의 실체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사랑도 신앙도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에 통곡합니다. 말씀에는 그것을 베드로가 제사장의 집을 빠져나와 슬피 우는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회개하는 사람들을 데리고 새로운 교회의 문을 여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교회의 마지막 때 어떻게 교회들이 무너지는가를 봤습니다. 주님은 교회와 교회에 속한 사람들에게 수없이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들은 입으로만 주님을 믿는다 할 뿐 변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의지가 약해서이기도 하고, 그들의 신앙인 사랑 없는 신앙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사랑 없는 신앙은 아무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옥이 공격해 올 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 보면 홍수에 떠내려가듯 한없이 주님에게서 멀어집니다. 새 교회 사람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새 교회의 진리는 힘이 있는 진리이지만 그렇더라도 삶 속에서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신앙에 따라 살지 않는 사람은 시험이 있을 때마다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한 것처럼 시험에서 지고, 그렇게 해서 주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한없이 미끄러져 지옥의 문턱에까지 이르렀지만, 마지막 순간에 주님께서 그를 들어 올려 구원하셨습니다. 그것은 침몰하는 거대한 배에서 구해지는 것과 같은 기적입니다. 그러므로 일이 뜻대로 되지 않더라도 누구든지 구원의 소망을 버리면 안 됩니다. 주님은 각자에게 숙제를 맡기십니다. 어떤 사람은 바로바로 마치지만, 한없이 미루는 사람도 있습니다. 후자라고 왜 숙제를 빨리 마치고 싶지 않겠습니까? 뜻대로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한없이 미적거리고 있을 때, 호된 시련이 닥칩니다. 시련은 극한의 상황에 몰릴 때까지 계속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그동안 어디에도 계시지 않은 것 같던 주님이 우리를 돌아보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시선이 우리에게 머무는 순간 눈이 밝아져 우리 자신의 실체를 볼 수 있습니다. 그때 한편으로는 수치의 눈물이, 그리고 한편으로는 회개의 눈물이 터집니다. 주님은 그렇게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십니다.

 

언젠가 제자들이 주님께 왜 우리는 주님처럼 귀신을 쫓아내지 못합니까 라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이런 종류의 문제는 기도로 밖에는 풀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기도로 오랜 숙제를 풀어나가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는 말로만 하지 말고, 작은 일이라도 사랑을 실천하며 하시기 바랍니다. 그때 주님께서 우리를 도와 기적을 만드십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새해를 맞이하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막13:35)

 

아멘

 

2023-01-22(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10-20(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4-10-20(D1)-주일예배(2566, 눅22,54-62), '닭 울기 전에 세 번 주님을 부인한 베드로'.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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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10-20(D1)-주일예배(2566, 눅22,54-62), '닭 울기 전에 세 번 주님을 부인한 베드로'.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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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47말씀하실 때에 한 무리가 오는데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을 앞장서 와서 48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시니 49그의 주위 사람들이 그 된 일을 보고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칼로 치리이까 하고 50그 중의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쪽 귀를 떨어뜨린지라 51예수께서 일러 이르시되 52예수께서 그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경비대장들과 장로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느냐 53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 하시더라 (눅22:47-53)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 기도를 마치신 주님이 제자들과 함께 계실 때, 열두 제자 중 하나인 유다가 한 무리의 사람들을 이끌고 나타났습니다. 주님을 잡으러 온 것입니다. 유다가 자기들끼리 정한 약속에 따라 주님께 입을 맞추러 다가옵니다. 그 장면을 본문 47, 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47말씀하실 때에 한 무리가 오는데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을 앞장서 와서 48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시니

 

말씀에서 유다라는 이름은 본래 사랑으로 행하는 선을 뜻합니다. 그러나 반대의 의미로는 자아 사랑에서 나오는 악을 뜻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유다는 특별히 자아 사랑에 깊이 빠져 있는 유대교회를 뜻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말씀에서 유다라는 이름은 좋은 의미로 쓰일 때도 있고, 나쁜 의미로 쓰일 때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다윗과 솔로몬 같은 걸출한 왕들이 유다 지파에서 나왔습니다. 그런가 하면, 야곱의 열두 아들 중 유다는 동생 요셉을 팔아넘기는 데 앞장섰고, 오늘 말씀에서 열두 제자 중 하나인 유다는 주님을 팔아넘기고 있습니다. 영적인 의미, 즉 그 속뜻으로 볼 때, 전자의 경우인 유다 지파로부터 왕들이 나온 것은 사랑의 선으로부터 진리가 나오는 걸 의미합니다. 그리고 후자의 경우, 즉 유다가 주님을 팔아넘기는 건 자아 사랑에 빠진 교회들이 진리를 파괴하는 걸 의미합니다. 자아 사랑에 빠진 사람이 진리를 미워하고 나중에는 파괴하기까지 하는 이유는, 진리가 자아 사랑에서 나오는 욕망을 죄라고 하고, 그러므로 멀리하라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불순한 욕망을 정당화하기 위해 진리를 왜곡, 조작합니다. 그것이 진리를 파괴하는 것이며, 또한 유다가 주님을 파는 것입니다.

 

유다가 입을 맞추려고 주님께 다가갔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십니다. 주님이 유다에게 하신 말씀은 자아 사랑에 빠진 유대교회가 겉으로는 진리를 사랑하는 것처럼 하면서 속으로는 진리를 죽이는 것을 뜻합니다.

 

갑자기 나타난 대제사장의 군사들을 보고 주님의 제자들이 두려워하며 검을 빼 들었습니다. 그 모습을 49절과 50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49그의 주위 사람들이 그 된 일을 보고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칼로 치리이까 하고 50그 중의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쪽 귀를 떨어뜨린지라

 

※ 다음은 이순철 목사님의 청주 새 교회 시절 에피소드입니다.

 

청주에 살 때 일입니다. 어느 교파 사람들이 전도를 목적으로 저를 찾아온 적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얘기하는 걸 한참 듣고 있다가 궁금한 것을 몇 가지 물어봤습니다. 그러다가 논쟁이 좀 있었고, 정작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안 하고 돌아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읽으면서 그때 생각이 났습니다. 새 교회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이 다른 교파 사람들의 논리적 오류를 지적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런 상황을 즐기려 하는 건 좋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주님의 제자들이 진리의 검을 휘두르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제자 중 하나가 대제사장의 종의 귀, 오른쪽 귀를 잘랐다는 건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 대제사장은 유대교회로 상징되는 타락한 교회의 성직자를 뜻하고, 그가 보낸 종은 그들이 만들어 낸 거짓 교리를 추종하는 사람들입니다. 또 오른쪽 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남아 있는 선한 의지를 뜻합니다. 왜냐하면 말씀에서 오른쪽은 선을 뜻하고, 귀는 의지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이 검을 빼 종의 오른쪽 귀를 자르는 건, 진리를 가지고 거짓 진리에 맞서 싸울 때, 상대의 선한 의지를 꺾을 정도로 압도적으로 이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리와 비진리의 논쟁에서 진리의 편이 완승했다고 해서 비진리 안에 있던 사람들이 바로 승복하는 건 아닙니다. 승복하지 않는다는 건 거짓인 줄 알면서 기존의 신앙을 고집한다는 뜻일까요? 대개는 그렇지만 때에 따라서는 크게 실망한 나머지 그동안의 신앙을 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그런 것이 상대의 선한 의지를 꺾는 것입니다. 잘못된 신앙을 버린다면 잘된 일이라 하겠지만 꼭 그런 건 아닙니다. 진리이든 비진리이든 그것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신앙으로 구원받겠다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강압적으로 상대의 신앙에 상처를 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말고 참으라고 하시고 종의 잘린 귀를 만져 낫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비록 거짓 진리 안에 있는 사람이라도 구원을 바라는 순수한 뜻이 있으면 그것을 꺾지 않고 지켜주십니다. 그런 의지가 있어야 언젠가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거짓 진리 안에 있는 사람 중 어떤 사람이 상대적으로 선한 사람이고, 어떤 사람이 악한 사람일까요? 그것에 대해 잠깐 말씀드리겠습니다. 스베덴보리 저,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1785, 라틴) 413번 글에 따르면, 진리를 대적하는 사람 중에는 두 부류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거짓으로부터 악을 행하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악으로부터 거짓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거짓으로부터 악을 행하는 사람은 거짓된 교리를 진리라고 믿고 그것에 따라 악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어리석을 뿐이고 악한 사람은 아닙니다. 적어도 자기가 믿는 교리에 충성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의 신앙을 억지로 빼앗지 않으시고 지켜주십니다. 마치 아벨을 죽인 가인을 보호하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반대로 악으로부터 거짓을 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악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대로 해석해 악이 죄가 아닌 것처럼 조작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도 회개하지 않으며, 그래서 희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귀를 만져 낫게 하신 것은 전자의 사람, 즉 거짓 교리를 진리로 믿고 충성하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손으로 만지신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그것에 대해 ‘계시록 해설’ 79번 글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영적인 힘은 다른 사람의 유익을 바라는 것이고, 할 수만 있다면 자기에게 있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영적으로 ‘손’이 뜻하는 것은 바로 이런 힘을 말한다. 그러므로 손으로 만지는 것은 그 힘이 통하고 전해지는 것을 뜻한다. (AE.79, 이순철 역) but spiritual power is to will the good of another, and to will to convey to another as far as possible what is with oneself. This power is what “hand” in the spiritual sense signifies, and its communication and transference are signified by “touching with the hand.” (AE.79, 계1:17 속뜻 주석)

 

주님께서 손으로 만지실 때,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와 그 능력이 상대에게 흘러 들어가 그의 영혼을 살린다는 것입니다. 바울도 한 때 주님을 심하게 대적했습니다. 사도행전 22장 20절에서 바울은 스데반이 피를 흘릴 적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했다고 고백합니다. 그럴 정도로 그는 주님을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런 바울에게도 회개와 갱생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것이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만져 낫게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당신을 잡으러 온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52절 말씀입니다.

 

52예수께서 그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경비대장들과 장로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느냐

 

대제사장은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타락한 유대교회의 성직자들을 뜻합니다. 그리고 경비대장은 성직자의 말만 듣고 참된 진리를 적대하는 교회 안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경비대장에 비유하는 것은 영적으로 볼 때, 그들은 진리를 대적해 싸우는 악한 군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장로들은 누굴까요? 타락한 교회 안에 있는 지적인 사람들, 즉 교리에 밝은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유대교회의 성직자와 신학자들과 평신도들이 모두 합세해서 주님을 죽이려 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향해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같이 검과 뭉치를 가지고 왔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말씀에서 강도와 도둑은 신앙인들에게 거짓 진리를 주입하는 나쁜 성직자를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교인들에게 있는 진리와 선을 빼앗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도둑들이 오히려 주님을 강도로 몰고 있습니다. 그들이 들고 있는 검과 몽둥이는 말씀을 조작해 만든 거짓 진리를 뜻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같이 검과 몽둥이를 가지고 나왔느냐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53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 하시더라

 

주님께서 끝으로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 하시더라’ 하십니다. 어둠의 권세는 지옥으로부터 오는 악과 거짓의 권세입니다.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 주님을 대적하게 만드는 사악한 권세이며, 진리의 영광을 가리는 어둠의 권세입니다. 주님은 이제 그 악과 거짓의 권세에 맞서 최후의 싸움을 하려고 하십니다. 지옥의 칠흑 같은 어둠이 주님에게 아직 남아 있는 불완전한 인성을 통해 들어와 주님을 공격해 올 때, 주님은 당신 안에 있는 아버지의 신성으로 그것을 물리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불완전한 인성을 벗고, 여호와가 주시는 신적 인성을 입고 부활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 하시며, 마지막 시험 가운데로 기꺼이 들어가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유대교회의 마지막 때, 그들이 주님을 핍박한 것처럼 교회의 마지막 때에는 타락한 교회들이 참된 진리를 핍박합니다. 그들은 말씀을 조작해 만든 거짓 진리를 가지고 참된 진리를 이단이요, 불법자라 규정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의 제자들처럼 진리의 검을 빼 들고 그들의 귀를 잘라야 할까요? 주님은 그러지 말라고 하십니다. 오히려 당신을 대적하는 자의 귀를 만져 낫게 하시고, 담담히 마지막 시험 가운데로 들어가셨습니다.

 

새 교회인들은 교파가 다르다고 다른 교파 사람들을 미워하면 안 됩니다. 진리에 대해 우월감을 가지거나 말씀을 전할 때 논쟁하듯 몰아붙여서도 안 됩니다. 상대의 신앙을 존중하고 언제까지라도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어둠의 때를 견뎌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주님이 지옥의 어둠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의 신앙도 이 시대의 어둠을 뚫고 눈부시게 떠오를 날이 올 것입니다. 그때까지 유다처럼 실족하지 않도록 서로 기도하고 격려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성도에게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7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8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끝까지 이르리로다 (시2:7-8)

 

아멘

 

 

2023-01-08(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10-13(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4-10-13(D1)-주일예배(2565, 눅22,47-53),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pdf
0.36MB
축도.2024-10-13(D1)-주일예배(2565, 눅22,47-53, AE.79),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pdf
0.22MB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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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권사님께 드린 권면 (2024/10/11)

 

다음은 제게 ‘할 말은 태산이지만 지금은 침묵할께요...’ 하신 어느 권사님께 보낸 답신입니다.

 

곧 팔 학년 되실 그분의 어떤 정황을 좀 아는 저는 다음날 아래와 같은 카톡 답신을 보내드렸는데요, 자세한 건 프라이버시 있어 좀 가리고, 내용 또한 좀 다듬어 글 올립니다.

 

 

권사님, 오늘은 어제 한글날을 피해 세종시 모처에서 외식 후, 국립 세종수목원에 들러 저희 부부, 둘째와 함께 좋은 시간을 가진 하루였습니다. 세종 국립수목원은 대전 저희 집에서 차로 25분 거리입니다.

 

이곳은 두 번째 오는 데, 처음 방문 때 놓쳤던 여러 가지, 가령 수목원 전체 전기차 버스 투어라든지, 지중해 전시 온실 전망대를 새롭게 경험하면서, 그러나 이 모든 눈에 보이는 겉의 나라의 것들을 통해 이것들과 서로 상응(相應, correspondence)하고 있는 저 천국, 속의 나라의 어떠함들을 마음에 그리며 구경하는 중에 권사님 생각이 났지요...

 

권사님, 이제 얼마 안 남은 이 지상 생활 후, 우리는 그토록 바라던 천국으로 가게 되는데요, 그런데 천국은 눈에 보이는 이 겉 사람의 세상과 달리 속 사람으로 가게 되는 나라이며, 그러므로 당연히 천국은 이 겉의 나라가 아닌, 속의 나라라는 사실을 깊이 생각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중에 아직 아무도 자기 영의 모습을 본 자가 없듯 자기 육의 모습인 지금 거울에 비친 자기 외모 밖에는 본 사람이 없습니다. 아무도 자기 속 사람의 모습을 본 사람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어떤 섭리로 다른 사람들의 영을 잠깐 볼 수 있도록 허락받으신 분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그 육신의 외모는 말할 수 없이 아름답지만, 그 영은 가히 형용할 수 없이 끔찍한 괴물 형상인 여자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그 외모는 주름투성이인 노파이지만 그 영은 가히 이를 데 없이 젊고 아름다우신, 천사 같은 분들도 계시다고 합니다.

 

이는 사람이 겉 사람과 속 사람으로 되어 있다는 하나의 예이지만, 그러나 방금 말씀드린 대로, 천국은 속 사람으로 가는 나라임을 기억, 그러므로 권사님, 이제 그만 이 세상 일, 곧 겉의 나라의 일들로부터는 물러나시고, 저 천국, 곧 속의 나라에 대해서만 집중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겉의 나라에 속한 모든 일은, 그 동기가 주님을 사랑해서 하는 게 아닌 한, 우리 속 사람을 아름답게 단장하는 일에 아무 상관이 없거나 쓰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여전히 겉의 일에 마음을 기울여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실 경우, 이번에는 그 빈틈으로 계속해서 지옥이 우리 삶에 흘러들어오며, 그 결과, 삶의 우환이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히게 됩니다.

 

지옥, 곧 악한 영들은 우리의 속 사람, 곧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한, 우리 속 사람을 못 건드리지만, 그러나 우리의 겉 사람, 곧 유전 악 아래에 있어 지키기 쉽지 않은, 겉의 일들은 건드리며, 공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3:15) 하신 대로 악에게 공격을 받으신 것처럼 말입니다.

 

생전에 주님도 육으로는 마리아로 유전한 유전 악 가운데, 즉 십자가 마지막 시험 전까지는 아직 불완전한 인성 가운데 계셨기 때문이지요. 악은 오직 감각을 비롯, 이 겉의 나라에 속한 것들만 건드릴 수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 등장하는 을 비롯, ‘발꿈치 등은 이런 것들을 의미합니다.

 

겉의 일에서 물러나는 것은 주님 말씀하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11:28)

 

하신 말씀을 붙들고, 그 울타리 안에 머무르는 것이지만, 반대로 계속 겉의 일을 붙들고 씨름하는 것은 위 주님의 권면을 거스르는 것으로, 그 결과 주님도 더 이상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실 수 없어, 즉 더 이상 우리를 도우실 수 없어 우리는 지옥의 공격에 그대로 노출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권사님, 이제 그만 이 세상 겉의 일에서 손을 떼고 물러날 수 있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계속된 주님 말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마11:29-30)

 

하시는 이 말씀의 보호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살면서 당하는, 혹은 자초하는 모든 시험은 사실은 우리를 대신하여 주님이 홀로 싸우시는 시험들이며, 그래서 우리 힘으로 싸우면 지지만, 주님이 대신 싸워주셔서 우리가 이기는 줄을 믿습니다. 아멘!

 

대전에서 변 목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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