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PR.007 | 개신교인의 무의식 속 오류와 뒤섞인 신앙 100선

 

‘칭의를 받았으면 내 내면이 실제로 얼마나 변화했는가는 구원과 별개의 문제다’ -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주님은 왜 그 내면까지 새롭게 하시는가?

 

해설

개신교 신앙생활에서 ‘칭의’는 구원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입니다.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의로움이나 종교적 공로로 구원을 얻을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가르침입니다. 여기에는 구원의 근원이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라는 귀중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가르침이 ‘하나님께서 이미 나를 의롭다고 인정하셨으니 내 내면이 실제로 얼마나 변화했는가는 구원과 별개의 문제다’라는 생각으로 발전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의롭다고 인정하신다는 것은 단지 그 사람에 대한 법적인 판단을 바꾸신다는 뜻일까요? 아니면 그 사람이 실제로 의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내면까지 새롭게 하신다는 뜻일까요? 만일 하나님 앞에서는 의롭다고 인정받았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악을 사랑하고 이웃을 해치는 것을 즐거워한다면, 과연 그 사람 안에 구원의 생명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은 칭의와 성화의 관계를 넘어 주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목적 자체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먼저 개신교의 공식적인 칭의 교리를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종교개혁 전통은 일반적으로 칭의와 성화를 구별합니다. 칭의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믿는 죄인을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것이며, 성화는 그 사람이 실제 삶에서 거룩하게 변화되는 과정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1장 1항은 하나님께서 인간 안에 의를 주입하시는 방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하심으로써 죄인을 의롭다고 인정하신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같은 장 2항은 의롭다 하심을 받는 믿음이 사랑으로 역사한다고 가르치며, 제13장은 성화를 통해 인간이 실제로 새로워진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개혁주의의 공식 교리가 내면의 변화를 불필요하게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이러한 구별이 신앙생활에서 단순화되면서, 칭의만으로 구원의 본질적인 문제가 모두 해결되었고 실제적인 변화는 부차적인 일처럼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검토해야 할 것은 칭의와 성화를 구별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 구별을 근거로 구원과 거듭남을 사실상 분리하는 사고방식입니다.

 

성경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실제적인 변화는 함께 강조됩니다. 바울은 롬3:24에서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롬6:1-2에서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계속 머물러도 되느냐고 물은 뒤, 죄에 대하여 죽은 사람이 어떻게 그 가운데 더 살겠느냐고 반문합니다. 이어 롬6:4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고후5:17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을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부르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바울에게 은혜는 죄를 계속 사랑해도 된다는 허가가 아니라,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주님께서도 요3:3에서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이해할 때 하나님께서 죄인을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문제와, 그 사람이 실제로 어떻게 새로워지는가 하는 문제를 서로 무관하게 다루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는 이 문제를 개혁과 거듭남의 관계에서 설명합니다. TCR.571은 인간이 자연적 상태에서 영적 상태로 변화되는 과정을 두 단계로 구별합니다. 첫 번째인 개혁은 주로 이해를 통해 진리를 받아들이는 상태이며, 두 번째인 거듭남은 그 진리가 의지와 사랑에 받아들여지는 상태입니다. 사람은 먼저 진리를 배우고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이해했다고 해서 곧바로 그 사람의 사랑이 변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을 정확하게 알면서도 실제로는 이웃을 미워하고 이용할 수 있으며, 거짓말이 죄라는 사실을 이해하면서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말하는 것을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거듭남이란 이렇게 이해 속에 머물던 진리가 의지 안에 받아들여져 실제로 선을 사랑하는 새로운 생명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TCR.571에서 지상에서 개혁의 첫 번째 상태에 들어간 사람은 사후에 두 번째 상태로 인도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거듭남을 지상에서 반드시 완성해야 하는 도덕적 과제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진리를 통해 자신의 사랑이 변화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죄 사함 이해는 종교개혁 신학의 법정적 칭의 이해와 중요한 차이를 드러냅니다. TCR.611–614는 사람이 거듭나는 만큼 죄가 제거되며, 이러한 제거가 죄 사함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제거’는 인간이 저지른 악이 존재 자체를 잃고 완전히 사라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TCR.614는 악이 뿌리째 뽑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을 악에서 물러나게 하시고 선 안에 머물도록 보존하신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죄 사함은 단순히 과거의 죄를 더 이상 계산하지 않는 법적인 선언만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인간을 악의 지배에서 실제로 건져 내시고 새로운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역사와 결합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죄를 용서하시는 주님의 사랑이 부족하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사랑이 인간의 내면까지 새롭게 하기를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주님은 인간을 의로운 사람으로 간주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선을 사랑하고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내면의 변화를 강조하는 것은 결국 인간의 도덕적 성취에 따라 구원 여부를 결정하는 일이 아닐까요? 스베덴보리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모든 참된 선은 오직 주님에게서 오며, 인간의 의지를 새롭게 하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 DP, 1764) 100–128항은 사람이 자신의 악을 마치 스스로 제거하는 것처럼 노력해야 하지만, 실제로 악을 제거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TCR.576–578은 주님께서 인간을 새롭게 하시되 인간의 자유로운 협력이 필요하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주님과 인간이 구원의 공로를 나누어 가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구원의 모든 능력은 주님에게서 오지만,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와 합리성을 존중하시면서 그 능력이 인간 안에 받아들여지도록 역사하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악을 살피고 그것을 죄로 인정하며, 주님께 도움을 구하여 그 악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이러한 노력은 자기 공로로 구원을 획득하는 행위가 아니라, 주님의 구원하시는 역사에 자유롭게 협력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내면의 변화를 강조하는 것은 인간의 공로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가 얼마나 깊이 인간의 생명 안에서 역사하는지를 보여 주는 일입니다.

 

이러한 이해는 목회 현장에서도 중요한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어떤 신자가 오랫동안 교회에 다니고 칭의에 관한 교리를 정확하게 알고 있지만, 가정에서 가족들을 함부로 대하고 직장에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속이면서도 ‘나는 이미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내 구원에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의 신앙 이해를 다시 살펴야 합니다. 물론 그 사람의 최종적인 영적 상태를 인간이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의 신앙고백과 실제 삶 사이에 심각한 분리가 있다는 사실은 외면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자신의 악과 연약함을 발견하고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아직 충분히 변화되지 않았으므로 구원받지 못했다고 단정하는 것 역시 잘못입니다. 거듭남은 완성된 도덕적 상태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 안에서 이루어 가시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변화 정도를 계산하는 일이 아니라, 악을 죄로 인정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실제로 선을 사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자신의 악을 발견하고 그것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는 사람과, 악을 사랑하고 정당화하면서도 이미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안심하는 사람은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습니다.

 

결국 ‘칭의를 받았으면 내 내면이 실제로 얼마나 변화했는가는 구원과 별개의 문제다’라는 말에서 바로잡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신뢰가 아니라, 그 은혜가 인간 안에서 실제로 이루려는 목적에 대한 이해입니다. 주님께서는 단지 죄인을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데 그치지 않고 그의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겔36:26-27에서 하나님께서 새 마음과 새 영을 주시고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여 살 같은 마음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말씀은 이러한 구원의 본질을 잘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변화되지 않은 인간에게 새로운 신분만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새로운 사랑과 새로운 생명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나는 이미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괜찮다’는 안도감이 아니라, 오늘도 자신의 의지와 이해를 새롭게 하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참된 구원의 확신은 내면의 변화를 외면하는 데서 깊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실제로 거듭나게 하시는 주님을 신뢰하는 데서 깊어집니다. (PR.007 해설)

 

요약

칭의와 성화를 구별하는 것 자체가 오류는 아니며, 개혁주의의 공식 교리도 내면의 변화를 불필요하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칭의를 받았다는 이유로 실제적인 거듭남과 내면의 변화를 구원과 별개의 문제로 여기는 것은 오류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죄 사함은 주님께서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면서 악의 지배에서 물러나게 하시는 역사와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구원은 법적인 지위만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와 이해가 새로워지고 선과 진리가 실제 생명으로 받아들여지는 과정입니다. 이 모든 변화의 근원은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주님의 은혜입니다.

 

 

 

PR.006. ‘선행을 강조하면 행위구원이다’

SL.PR.006 | 개신교인의 무의식 속 오류와 뒤섞인 신앙 100선 ‘선행을 강조하면 행위구원이다’ - 주님이 명하신 선한 삶을 왜 경계하게 되었는가? 해설개신교 신앙생활에서 선행의 중요성을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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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RC.007 | 천주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고해성사를 통해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면 죄를 용서받는다’ - 죄를 용서하는 권세는 사제에게 있는가, 오직 주님께 있는가?

 

해설

‘고해성사를 통해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면 죄를 용서받는다.’ 이것은 천주교의 ‘고해성사’(告解聖事, Sacrament of Penance and Reconciliation)에 관한 핵심적인 가르침입니다. 천주교 신자들은 세례 이후에 지은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 및 교회와 화해하기 위하여 사제를 찾아가 자신의 죄를 고백합니다. 사제는 고백을 듣고 필요한 권고와 보속을 제시하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죄경을 선언합니다. 천주교는 이러한 성사적 과정을 통하여 신자가 실제로 죄의 용서를 받는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에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며 하나님과 이웃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몇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고, 사죄경을 듣는 일과 주님께서 실제로 죄를 용서하시는 일은 어떤 관계에 있을까요? 사죄의 선언이 이루어진 순간 인간의 내적 악도 제거되는 것일까요? 사제에게 고백하는 행위는 참된 회개에 도움이 될 수 있지만, 반드시 거쳐야 하는 죄 사함의 통로이기도 할까요? 무엇보다 스베덴보리는 죄의 용서를 주님에 의한 실제적 거듭남과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사제의 직무를 존중하면서도 주님께만 속한 죄 사함의 권능을 어떻게 구별해야 할까요? 이번 문제는 죄를 고백하는 행위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고백과 회개, 사죄 선언과 실제적 죄의 용서가 각각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별하는 문제입니다.

 

먼저 천주교의 공식적인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1422–1424항은 고해성사를 회개와 참회, 고백과 용서, 화해의 성사로 설명합니다. 세례를 받은 사람이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교회의 친교를 손상시켰을 때 이 성사를 통하여 용서와 화해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주교가 사제에게 하나님과 독립된 죄 사함의 권능이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교리서 1441항은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분이 오직 하나님뿐이라고 명시합니다. 다만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죄를 용서하는 직무를 맡기셨으며, 그 직무가 주교들과 사제들에게 이어졌다고 설명합니다. 1461항은 사제가 성품성사에 따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죄의 권한을 행사한다고 가르치며, 1466항은 고해 사제가 하나님의 용서를 지배하는 주인이 아니라 그 용서를 섬기는 사람이라고 밝힙니다. 따라서 천주교의 고해성사를 사제가 자신의 능력으로 죄를 없애는 제도라고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천주교의 공식적인 이해에서 죄를 용서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사제는 그 용서를 성사적으로 전달하는 직무를 수행합니다. 두 전통의 실제적인 차이는 사제가 독립적인 신적 권능을 소유하는가에만 있지 않습니다. 주님께만 속한 죄 사함의 권능이 사제의 사죄 선언을 통하여 성사적으로 행사된다는 천주교의 이해가 스베덴보리의 가르침과 일치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또한 천주교는 입술로 죄를 고백하기만 하면 아무런 회개 없이 자동으로 용서받는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1448항은 참회자의 통회와 고백, 보속, 그리고 교회의 직무를 통한 사죄를 고해성사의 중요한 요소로 설명합니다. 특히 1451항은 ‘통회’(痛悔, contrition)를 자신이 지은 죄를 슬퍼하고 미워하며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으로 정의합니다. 1452항은 하나님을 모든 것보다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완전한 통회가 대죄의 용서도 얻을 수 있다고 설명하면서, 가능한 한 빨리 성사적 고백을 하겠다는 결심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1456항은 양심 성찰을 통하여 기억해 낸 중대한 죄들을 사제에게 고백하도록 규정합니다. 그러므로 천주교의 고해성사에는 죄의 인정과 진정한 뉘우침, 새로운 삶에 대한 결심이 함께 포함됩니다. 이러한 가르침에는 인정해야 할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죄를 외면하거나 정당화하지 말고 그것을 인정하고 돌이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실제적인 회개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것과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고 사죄를 받는 절차를 죄의 용서를 얻는 통상적인 성사적 통로로 규정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천주교는 두 요소를 하나의 성사 안에서 연결하지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각각의 영적 의미를 구별하여 살펴야 합니다.

 

천주교가 사제의 사죄권을 설명할 때 중요하게 제시하는 성경은 요20:22-23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시면서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마16:18-19에서 베드로에게 주어진 천국 열쇠와 매고 푸는 권세, 마18:18에서 제자들에게 주어진 권세도 교회의 화해와 사죄 직무에 연결하여 해석합니다. 이러한 말씀들이 죄의 용서와 교회의 책임에 관한 중요한 가르침을 담고 있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도들에게 주어진 권한과 후대에 발전한 개별 고백 및 성사적 사죄 제도가 모든 세부 내용에서 동일한 것인지는 별도로 검토해야 합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1447항 역시 교회 역사에서 참회의 구체적인 방식이 달라졌으며, 오늘날과 같은 사제와 신자 사이의 개별적인 고백 방식이 오랜 과정을 거쳐 정착되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오늘날 고해성사의 모든 절차가 요20에 직접 명시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천주교는 사도적 직무와 교회의 전통을 통하여 이러한 제도가 발전했다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성경의 권위에 관한 말씀을 인간에게 독립적인 죄 사함의 권능을 부여하는 것으로 해석하지 않습니다. 그에게서 천국 열쇠와 매고 푸는 권세의 근원은 주님에게서 나오는 믿음과 진리입니다.

 

이 문제에서 중요한 직접적인 근거는 스베덴보리의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AC, 1749–1756) 9410항입니다. 그는 마16:18-19와 마18:18의 말씀을 해설하면서, 베드로는 주님에게서 오는 믿음을 표상하며 천국 열쇠는 진리에서 비롯되는 권능을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천국을 열고 닫는 권능은 어떤 인간이 자신의 지위에 따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믿음과 진리에 속하며, 궁극적으로 주님 자신에게만 있습니다. AC.9410:2–3에서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자기 권한으로 다른 사람을 천국에 들이거나 천국에서 제외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강하게 비판합니다. 이어 4절에서는 어떤 인간도 스스로 죄 하나를 풀어 줄 수 없으며, 죄가 풀리는 것은 주님께서 인간 안에 새로운 생명을 이루시는 거듭남을 통해서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사제의 사죄권을 검토하는 데 중요한 직접 근거입니다. 다만 이 본문에서 스베덴보리가 비판하는 것은 특히 인간이 자신에게 주님 고유의 구원 권능이 있다고 주장하는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이를 천주교가 사제에게 하나님과 독립된 권능이 있다고 가르친다는 증거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정확한 논점은 천주교가 인정하는 사제의 종속적인 성사적 권한과,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주님의 유일한 죄 사함의 권능 사이에 어떤 신학적 차이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죄의 실제적인 제거는 사제의 직무나 선언 자체보다 주님께서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에 달려 있습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는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고 사죄를 받는 행위 자체를 잘못된 것으로 보았을까요? 이 질문에 대해서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539항이 매우 중요한 답을 제공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양심의 짐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이 교회의 성직자에게 자신의 죄를 하나하나 고백하고 사죄를 받아 마음의 부담을 덜어 내는 것이 해롭지 않다고 명시합니다. 그러한 실천이 자신을 성찰하고 날마다 저지르는 악을 돌아보는 습관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를 ‘자연적 고백’(natural confession)이라고 부르며, 주님 앞에서 자신의 악을 인정하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영적 고백’(spiritual confession)과 구별합니다. 이 대목은 스베덴보리의 입장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그는 사제 앞에서 죄를 고백하는 모든 행위를 무가치하거나 해로운 것으로 규정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사죄를 받는 행위가 양심의 안정을 돕는 유익한 쓰임을 지닐 수 있다고 인정했습니다. 또한 TCR.567:7에서는 가톨릭 신자들이 자신을 성찰하고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는 실천을 언급하면서, 그러한 자기 성찰조차 회피하는 개혁교회 신자들을 비판합니다. 그러나 이 두 본문을 스베덴보리가 가톨릭의 성사적 사죄권 전체를 승인했다는 뜻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사제 앞에서 이루어지는 고백의 자연적·목회적 유익을 인정하면서도, 실제적인 죄의 용서와 거듭남은 주님에 의하여 이루어진다고 분명히 구별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구별은 TCR.528–531과 538–539항에 나타나는 실제적인 회개의 가르침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회개가 자신의 죄를 막연하게 인정하거나 입술로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고 설명합니다. 인간은 먼저 자신을 성찰하여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인정하며, 주님께 악을 이길 힘을 구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자신의 탐욕과 거짓말, 분노와 교만을 고백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그러한 악을 피하려 하지 않는다면 참된 회개의 목적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TCR.538항은 죄의 고백을 구주이신 주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한다고 명시하며, 539항은 자기 성찰 후에 주님께 악을 물리칠 능력과 선을 행할 마음을 구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이미 인간의 죄를 알고 계시므로 죄를 일일이 열거하여 알려 드릴 필요가 없으며, 주님은 자비 자체이시므로 모든 사람의 죄를 용서하신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인간 안에 있는 죄의 성향이 사라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죄는 인간이 악에서 돌아서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만큼 제거됩니다. 따라서 참된 고백은 단순히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말하는 행위가 아니라, 주님 앞에서 그 악을 인정하고 실제로 돌이키는 영적 과정입니다. 사제 앞에서의 고백이 이러한 성찰을 도울 수는 있지만, 그 고백 자체가 내적인 회개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죄의 용서와 거듭남의 관계는 AC.9444–9449에서 더욱 직접적으로 설명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저지른 죄가 그 사람의 생명에 뿌리내려 있으므로 주님께서 새로운 생명을 주시지 않는 한 그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AC.9445에서는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서 선을 행하거나 진리를 생각할 수 없으며, 오직 주님만이 인간을 죄에서 벗어나게 하실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어 AC.9448에서는 주님께서 인간을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 안에 머물게 하시고 악과 거짓에서 멀어지게 하시는 것이 죄의 용서라고 정의합니다. 또한 AC.9449는 죄가 용서된 상태의 표지로 하나님을 하나님 때문에 예배하고, 이웃을 이웃 때문에 섬기며, 악을 피하고 미워하는 삶을 제시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죄의 용서가 단순히 어떤 선언에 따라 인간의 법적 상태가 바뀌는 일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인간의 사랑과 의지, 이해와 삶을 실제로 변화시키시는 역사와 관계됩니다. 물론 천주교도 사죄 이후의 회개와 성화를 중요하게 가르치므로, 이 차이를 천주교는 삶의 변화를 불필요하게 여기고 스베덴보리만 삶의 변화를 강조한다는 식으로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두 전통의 차이는 회개의 필요성 자체보다, 사제의 성사적 사죄 선언에 어떠한 영적 효력을 부여하며 그것을 주님의 실제적인 죄 사함과 어떻게 연결하는가에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는 죄의 고백이 실제 목회 현장에서 어떤 쓰임을 지녀야 하는가를 생각하도록 이끕니다. 인간은 자신의 잘못을 혼자 인정하기 어려울 수 있으며, 신뢰할 수 있는 영적 지도자에게 죄를 털어놓고 조언을 구하는 가운데 양심의 깨달음과 위로를 얻기도 합니다. 약5:16은 서로 죄를 고백하며 기도하라고 권합니다. 또한 자신의 죄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혔다면 그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며 가능한 범위에서 피해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이러한 행위들은 진정한 회개의 중요한 표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잘못을 고백하거나 영적 지도자의 조언을 받는 일과, 주님께서 인간의 악을 실제로 제거하시는 일은 구별해야 합니다. 목회자나 사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죄를 성찰하도록 도우며 회개와 화해의 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권위로 인간의 내적인 악을 없애거나 그 사람의 영원한 상태를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이 사죄경을 듣고 마음의 평안을 얻었다는 사실이 그의 모든 악한 성향이 이미 제거되었다는 증거도 아닙니다. 반대로 그가 여전히 자신의 약함과 싸우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회개가 무가치하다고 판단해서도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점진적으로 거듭나게 하시며, 그 과정에서 인간은 자신의 악을 반복해서 돌아보고 다시 주님의 도움을 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영적 지도자의 참된 역할은 자신에게 죄 사함의 권능이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데 있지 않고,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하여 실제적인 회개와 새로운 삶을 시작하도록 돕는 데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고해성사의 참된 가치를 판단하려면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 누구인가 하는 질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눅15의 돌아온 아들의 비유에서 아들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아버지에게 돌아갑니다. 이 비유의 중심은 어떤 인간적인 중재자가 아들의 죄를 제거하는 데 있지 않고, 돌아온 아들을 맞아들이는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주님은 인간이 죄를 고백하기 전부터 그의 모든 내적인 상태를 알고 계시며, 그가 악에서 벗어나 선의 삶으로 돌아오기를 언제나 원하십니다. 따라서 참된 죄의 고백은 주님의 마음을 설득하여 원래 베풀지 않으려 하셨던 용서를 얻어 내는 일이 아닙니다. 자신의 악을 인정하고 주님의 도움을 받아 그 악에서 돌이키며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일입니다. 사제나 목회자, 신앙 공동체는 이러한 회개의 과정에서 귀중한 도움을 줄 수 있으며, 스베덴보리 역시 사제 앞에서의 고백과 사죄가 양심의 부담을 덜어 주는 자연적인 쓰임을 지닐 수 있다고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도움을 주님께서 이루시는 실제적인 죄의 제거와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가톨릭의 고해성사를 모든 경우에 무의미한 종교 의식으로 규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 안에는 자기 성찰과 죄의 인정, 뉘우침과 화해라는 중요한 선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분별해야 할 것은 그러한 유익과 사제의 성사적 사죄권에 관한 신학적 주장 사이의 차이입니다. 참된 죄의 용서는 오직 주님의 자비에서 비롯되며, 인간이 그분의 도움으로 악을 죄로 여겨 피하고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으로 나아갈 때 실제적인 구원의 열매로 나타납니다. 결국 죄를 용서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 한 분이시며, 고백과 회개의 궁극적인 목적은 용서를 선언받는 데서 끝나지 않고 사람이 실제로 새롭게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RC.007 해설)

 

요약

‘고해성사를 통해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면 죄를 용서받는다’라는 명제에는 인간이 자신의 죄를 성찰하고 인정하며 뉘우치고 하나님과 이웃에게 화해해야 한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천주교는 고해성사를 단순히 사제에게 죄를 말하면 자동으로 용서받는 절차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참된 통회와 고백, 보속과 사죄를 함께 강조하며, 죄를 용서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고 사제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용서의 직무를 수행한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공식적인 구별은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AC.9410:2–4에서 천국 열쇠와 매고 푸는 권세가 인간에게 독립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믿음과 진리에 속한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AC.9444–9449에서는 죄의 용서가 주님께서 인간을 악과 거짓에서 멀어지게 하시고 선과 진리 안에 머물게 하시는 실제적인 거듭남과 관계된다고 설명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가 사제 앞에서의 고백과 사죄를 모두 부정했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TCR.539에서는 양심의 짐을 덜기 위하여 교회의 성직자에게 죄를 고백하고 사죄를 받는 행위가 해롭지 않으며, 자기 성찰의 습관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명시합니다. 그러나 이를 자연적 고백으로 구별하고, 주님 앞에서 자신의 악을 인정하고 실제로 돌이키는 영적 고백과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TCR.567:7 역시 가톨릭 신자들의 자기 성찰과 고백 관행을 언급하면서 실제적인 회개를 회피하는 개혁교회 신자들을 비판합니다. 따라서 오류의 핵심은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거나 성직자의 조언과 위로를 받는 행위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사제의 성사적 사죄 선언을 주님께서 인간 안에서 이루시는 실제적인 죄의 제거와 어떠한 관계로 이해해야 하는가에 있습니다. 천주교는 사제의 권한을 주님에게서 받은 종속적인 직무로 설명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죄의 실제적인 제거가 오직 주님에 의한 회개와 거듭남의 과정에서 이루어진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사제의 고백 청취와 사죄가 목회적인 유익을 지닐 수 있다는 사실과, 그것이 죄의 용서를 성사적으로 성립시키는 권능이라는 주장은 구별해야 합니다. 참된 고백은 주님 앞에서 자신의 악을 인정하고 그 악에서 돌이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이며, 모든 죄의 용서와 구원의 근원은 오직 주님 한 분이십니다.

 

 

 

RC.006. ‘세례는 원죄를 씻어 주고 사람을 새롭게 태어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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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PR.006 | 개신교인의 무의식 속 오류와 뒤섞인 신앙 100선

 

‘선행을 강조하면 행위구원이다’ - 주님이 명하신 선한 삶을 왜 경계하게 되었는가?

 

해설

개신교 신앙생활에서 선행의 중요성을 강조하다 보면 뜻밖의 반응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선행을 강조하면 행위구원이 되는 것 아닙니까?’, ‘우리는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배웠습니다’, ‘착하게 사는 것으로 천국에 갈 수 있다면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 달리셨겠습니까?’라는 질문들입니다. 이러한 반응에는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진리를 지키려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경계심이 지나쳐 선행 자체를 강조하는 것까지 의심하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심각한 역설에 직면합니다. 주님께서는 이웃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라고 끊임없이 가르치셨는데, 정작 그분을 믿는 사람들이 선한 삶을 강조하는 일을 신학적으로 경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선행을 강조하는 것과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는 것은 과연 같은 일일까요? 그리고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참된 선행은 인간의 공로와 어떻게 구별되는 것일까요?

 

먼저 ‘행위구원’이라는 표현의 의미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개신교에서는 인간이 자신의 선행이나 율법 준수, 종교적 공로를 통해 구원을 획득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입장을 비판할 때 이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행위구원을 경계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행이 구원의 대가가 될 수 없다는 주장과 선행이 구원에 본질적인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 주장은 전혀 다릅니다. 실제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6장은 선행을 참되고 살아 있는 믿음의 열매와 증거라고 설명하며, 선을 행할 능력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에게서 온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엄밀한 개혁주의 신학 자체가 선행을 불필요하게 여기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이러한 교리적 구별이 신앙생활에서 단순화되면서 선행을 강조하는 설교까지 행위구원으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형성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공식 교리가 실제로 가르치는 내용과 그것이 신자들의 의식 속에서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지를 구별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이 문제를 살펴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주님께서는 마5:16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제자들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마7:21에서는 자신을 향해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고 가르치십니다. 또한 요14:15에서는 자신을 사랑한다면 자신의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시고, 마25:31-46에서는 굶주리고 목마르며 병들고 갇힌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강조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선한 삶을 단순히 신앙의 장식이나 선택적인 열매로 다루지 않으셨습니다. 야고보 역시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선언합니다(약2:17). 그러므로 선행을 강조한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행위구원이라고 비판한다면, 주님께서 직접 가르치신 말씀까지 같은 비판을 받아야 하는 모순이 생깁니다. 문제는 선행의 중요성을 인정하느냐가 아니라, 그 선행의 근원을 어디에 두고 어떤 목적으로 행하느냐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422–424항은 체어리티의 본질을 사람이 자신의 직무와 사업과 일에서 정의롭고 성실하게 행동하는 것과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이것은 선행에 관한 우리의 통상적인 이해를 크게 넓혀 줍니다. 많은 사람은 선행이라고 하면 가난한 사람을 돕고, 헌금을 드리며, 교회에서 봉사하거나 특별한 자선활동에 참여하는 일을 먼저 떠올립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를 그러한 특별한 활동에만 한정하지 않습니다. 고용주가 노동자를 정당하게 대우하고, 노동자가 자신의 일을 정직하게 수행하며, 공직자가 사적인 이익보다 공공의 선을 우선하고, 부모가 자녀를 사랑과 지혜로 돌보는 일상적인 삶 속에서도 체어리티는 나타납니다. 다만 여기에는 중요한 구별이 있습니다. 외적으로 정의롭고 성실하게 행동한다고 해서 그 행위가 언제나 영적인 체어리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TCR.424에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그 사람을 지배한다면, 겉으로는 성실하게 직무를 수행하더라도 내적으로는 참된 체어리티가 없을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외적인 행동뿐 아니라 그 행동을 이끄는 내적인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참된 선행과 자기 공로를 추구하는 행위는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스베덴보리는 TCR.439–442에서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사람이 자신의 선행을 공로로 여기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어떤 사람이 어려운 이웃을 도우면서 자신의 선행을 자랑하고 그 대가로 천국의 높은 자리를 기대한다면, 그의 행위에는 자기 사랑이 개입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다른 사람이 같은 일을 하면서 모든 선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인정하고 이웃에게 필요한 도움을 주는 일 자체를 기뻐한다면, 그 행위는 전혀 다른 내적 성격을 지닙니다. 더 나아가 스베덴보리는 TCR.435–438에서 체어리티의 첫 번째 일이 악을 멀리하는 것이며, 그다음이 이웃을 위해 선한 쓰임을 행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사람이 자신의 탐욕과 거짓과 불의를 그대로 사랑하면서 외적으로 자선을 베푼다고 해서 그 자선이 자동으로 영적인 선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먼저 자신의 악을 주님 앞에서 죄로 인정하고 그것을 멀리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악한 삶 위에 선행을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악을 멀리함으로써 주님의 선이 실제로 흐를 수 있는 삶을 이루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시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사람이 자신의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려고 노력한다면, 그것도 결국 자신의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는 것이 아닐까요? 스베덴보리의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 DP, 1764) 100–128항은 이 문제를 인간의 자유와 주님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악을 마치 스스로 제거하는 것처럼 노력해야 하지만, 실제로 악을 제거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여기서 ‘마치 스스로’라는 표현은 인간이 자신의 능력으로 선을 만들어 낸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자유와 합리성을 통해 역사하시므로, 인간도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실제로 행동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거짓말하는 습관을 가진 사람이 ‘나는 은혜로 구원받았으니 주님께서 언젠가 고쳐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계속 거짓말한다면, 그는 자신의 자유를 사용하여 악을 멀리해야 할 책임을 회피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신의 거짓을 죄로 인정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정직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한다면, 그는 주님의 구원하시는 역사에 협력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노력은 자기 공로로 구원을 획득하는 행위가 아니라, 주님의 선과 진리를 자신의 삶 안에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이러한 이해는 교회가 선행을 가르치고 평가하는 방식에도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선행과 헌신을 강조하면서 실제로는 헌금 액수, 전도 실적, 봉사 시간, 교회 행사 참여 횟수 등을 중심으로 신앙의 열심을 평가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활동이 모두 잘못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교회 공동체를 위해 시간과 재물을 드리는 일도 귀한 쓰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영적 성숙이나 구원의 공로를 평가하는 기준으로 사용된다면 선행의 본래 의미가 왜곡될 위험이 있습니다. 반대로 교회 밖에서 자신의 직업을 정직하게 수행하고, 가정에서 가족을 성실하게 돌보며,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삶이 특별한 종교적 활동이 아니라는 이유로 가볍게 여겨진다면, 그 역시 체어리티의 본질을 놓치는 것입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특정한 종교 활동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일상적인 삶 전체에서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자신에게 맡겨진 쓰임을 정의롭고 성실하게 수행할 때 나타납니다. 그 쓰임이 주님을 향한 신앙과 결합될 때 일상의 도덕적 삶은 영적인 생명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목회자가 선행을 가르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선행의 필요성을 약화시키는 일이 아니라, 그 근원과 목적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일입니다. ‘선을 많이 행해야 천국에 갈 자격을 얻는다’는 식으로 가르친다면 인간의 공로를 강조하는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므로 우리는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가르친다면, 이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주님께서는 요15:5에서 자신을 떠나서는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시면서도, 같은 장에서 제자들이 많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이 두 말씀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주님을 떠나서는 참된 영적 선을 행할 수 없지만, 주님과 결합하는 사람은 그분에게서 오는 생명으로 선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TCR.373–377에서 체어리티와 믿음이 선한 행위 안에서 함께 존재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행위는 믿음에 덧붙이는 외적인 장식이 아니라, 믿음과 사랑이 실제 삶에서 하나로 나타나는 자리입니다. 이때 선행을 강조하는 것은 주님의 은혜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은혜가 인간 안에서 실제로 열매 맺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결국 ‘선행을 강조하면 행위구원이다’라는 말에서 보존해야 할 진리는 인간이 자신의 선행이나 종교적 공로로 구원을 획득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진리를 지키겠다는 이유로 선행 자체를 의심하거나,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단지 자신을 믿는다고 고백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실제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 삶은 특별한 종교적 활동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만나는 사람에게 정직하게 말하고, 자신의 책임을 성실하게 수행하며, 약한 사람을 이용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으며, 자신의 이기심과 교만을 주님 앞에서 죄로 인정하는 일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삶은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얻기 위한 거래가 아니라, 천국의 생명이 지금 이 땅에서 우리 안에 형성되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은 ‘선행을 강조하면 행위구원이 되는가?’가 아니라, ‘내가 행하는 선의 근원은 누구이며, 나는 누구를 위해 그 선을 행하고 있는가?’입니다. 참된 선행은 은혜와 경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은혜가 인간의 생명 안에서 어떻게 살아 움직이는지를 보여 주는 가장 구체적인 자리입니다. (PR.006 해설)

 

요약

선행을 강조하는 것 자체는 행위구원이 아닙니다. 인간이 자신의 선행과 공로로 구원을 획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류이지만,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는 일을 구원과 무관하게 여기는 것 역시 오류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참된 선행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이 인간의 자유와 합리성 안에 받아들여져 실제 삶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체어리티는 일상적인 직무와 관계 속에서 정의롭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과 깊이 연결되지만, 그 행위가 영적인 선이 되려면 주님을 인정하고 악을 죄로 여기며 멀리하는 내적인 삶이 함께해야 합니다. 따라서 참된 선행을 강조하는 것은 인간의 공로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의 실제적인 실현을 가르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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