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59.심화

 

4. 때로 수천의 영들에게 둘러싸여 괴롭힘을 받았던 스베덴보리

 

 AC.59 본문 중 이 사실의 확실성은, 제가 지금까지 수년 동안, 비록 육신 안에 있으면서도, 저 세상의 영들, 그중에서도 가장 악한 영들과 함께 지내 온 경험을 통해 확언할 수 있습니다. 저는 때로 수천의 영들에게 둘러싸여, 그들이 독을 내뿜고, 가능한 모든 방식으로 저를 괴롭히도록 허락받았으나, 주님의 보호 아래서 제 머리카락 하나도 해를 입지 않았습니다.’라는 부분도 정말 놀랍습니다. 저는 일상 중 약간의 어떤 영적이다 싶은 순간, 혹은 상황도 매우 놀라며 크게 두려워하는 편인데, 위 증언에 따르면 스베덴보리는 저의 천배 만배의 상황을, 그것도 오랜 기간 경험했다는 것이어서 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정말 쳐다볼 수도 없을 만큼 큰 영적 거인이지 싶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 구절에서 우리가 받아야 할 핵심은 ‘스베덴보리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냐’가 아니라, ‘주님의 보호가 어떤 방식으로 실제로 작용하는가’입니다. 그 경험은 스베덴보리 개인의 위대함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아무리 강한 영적 영향 속에 있어도, 주님이 허락하신 범위 안에서는 결코 파괴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의 중심은 스베덴보리가 아니라 ‘주님의 보호 질서’입니다.

 

먼저 목사님께서 느끼신 놀라움과 두려움은 아주 자연스럽습니다. 사람은 조금만 ‘보이지 않는 세계’의 느낌이 와도 불안해집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평소 감각 세계에 익숙하고, 그 너머를 통제할 수 없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그 세계가 열려 있는 상태에서 오래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운 강도의 경험을 했습니다. 이 점만 보면 분명 ‘특별한 사람’이 맞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특별해서 견딘 것’이 아니라, ‘주님이 특별히 지키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본문을 잘 보시면, 스베덴보리는 계속해서 한 가지를 강조합니다. ‘허락되었으나’, ‘주님의 보호 아래서’입니다. 즉, 아무리 수천의 영들이 둘러싸고 괴롭히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은 무제한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철저히 ‘주님의 허락과 통제 안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머리카락 하나도 해를 입지 않았다’입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이걸 우리의 상태로 연결하면 오히려 더 중요한 위로가 됩니다. 우리는 그런 극단적인 경험을 하지 않지만, 일상 속에서도 감정의 흔들림, 생각의 혼란, 설명하기 어려운 불안 같은 것들을 겪습니다. 이것도 넓게 보면 ‘영적 영향’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이 말해 주는 것은, ‘그 어떤 영향도 주님의 허락 없이 우리를 넘어설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 파괴되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이렇게 받아들이시면 좋습니다. ‘나는 약하고 두려워하는 사람인데, 스베덴보리는 강해서 견딘다’가 아니라, ‘스베덴보리도 본질적으로는 같은 인간이지만, 주님의 보호 아래 있었기 때문에 아무 해를 입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 역시 그 보호 안에 있다’입니다. 이것이 훨씬 더 본질적인 적용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의 이 경험은 ‘보여 주기 위한 예외적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인류를 위해 영적 세계의 구조를 밝히는 사명을 받았기 때문에, 특별한 방식으로 보호받으며, 그 세계를 직접 경험한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신앙의 길은 그런 방식이 아닙니다. 오히려 ‘보지 못한 채 믿고, 느끼지 못한 채 선택하는 것’이 더 정상적인 길입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느끼시는 ‘조금만 영적인 느낌이 와도 놀라고 두려워하는 상태’는 오히려 매우 정상적인 인간의 상태입니다.

 

이걸 목회적으로도 연결해 보면, 성도들에게도 같은 균형이 필요합니다. ‘영계는 실제로 있다’는 것을 알되, 그것을 두려워하거나 집착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중심은 항상 ‘영적 경험’이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 그리고 삶의 변화’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결국 강조하는 것은 경험 자체가 아니라, 그 경험을 통해 드러난 ‘질서’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한 문장으로 다시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아무리 강한 영적 영향 속에서도, 주님의 보호 아래 있는 사람은 결코 해를 입지 않으며, 그 모든 것은 주님의 허락과 한계 안에서만 일어난다’입니다.

 

목사님께 드리고 싶은 한마디로 마무리하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스베덴보리의 강함이 아니라, 그를 지키신 주님의 절대적인 보호입니다.’

 

 

 

AC.59, 창1:30, ‘모든 푸른 풀’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1:30) AC.59 여기서 자연적 인간의 음식으로 오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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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9, 심화 3, ‘찾아오지 않는 성도’

AC.59.심화 3. ‘찾아오지 않는 성도’ 위 심화 2 본문 중 ‘어떤 성도가 반복적인 문제를 가지고 찾아옵니다.’라고 하는데... 만일, 안 찾아올 경우는 어떻게 하나요?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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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찾아오지 않는 성도

 

위 심화 2 본문 중 어떤 성도가 반복적인 문제를 가지고 찾아옵니다.’라고 하는데... 만일, 안 찾아올 경우는 어떻게 하나요?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 가령, 목회자에게 실망했다든지, 목회자를 비롯, 다른 제삼자가 자기 사정 아는 걸 프라이버시 침해로 여긴다든지 등의 이유로 말이지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찾아오지 않는 성도’에 대한 목회의 핵심은 ‘끌어내려 하기보다, 안전한 거리에서 관계의 문을 열어 두고, 스스로 돌아올 수 있는 통로를 지켜 주는 것’입니다. AC.59의 원리에 그대로 연결하면, 주님도 사람을 억지로 끌어내지 않으시고, 그 상태를 허용하시되 길을 열어 두시며, 때를 기다리십니다. 목회도 같은 결을 가져야 합니다.

 

먼저 가장 중요한 것은 ‘접근 방식의 전환’입니다. 찾아오지 않는 사람을 억지로 상담 자리로 끌어내려 하면, 그 사람에게는 ‘압박’이나 ‘감시’로 느껴지기 쉽습니다. 특히 목회자에게 실망했거나, 자신의 사정을 드러내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경우라면 더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때 필요한 것은 ‘문제 해결 시도’보다 ‘관계 회복의 최소 단위’입니다. 아주 짧은 안부, 부담 없는 인사, 설교 후 가벼운 대화, 혹은 전혀 종교적이지 않은 일상적 접촉이 더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핵심은 ‘이 사람은 나를 바꾸려는 사람이 아니라, 나를 존중하는 사람이다’라는 느낌을 주는 것입니다.

 

그다음은 ‘프라이버시에 대한 존중을 분명히 보여 주는 것’입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태도로 드러나야 합니다. 예를 들어, 그 사람의 상황을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다 하더라도, 먼저 꺼내지 않는 것입니다. 대신 상대가 열 때까지 기다립니다. 그리고 혹시 말을 꺼냈을 때도, ‘더 말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라는 여지를 항상 남겨 두어야 합니다. 이것이 쌓이면, 그 사람 안에 ‘여기는 안전하다’는 감각이 생깁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직접 상담이 아니라 간접 통로를 여는 것’입니다. 설교, 글, 소그룹, 혹은 다른 신뢰하는 성도를 통한 연결 등입니다. 어떤 사람은 목회자와 1:1로는 마음을 열지 않지만, 말씀이나 다른 관계를 통해 서서히 열립니다. 주님도 직접 말씀하시기도 하지만, 비유와 사건과 다른 사람을 통해 우회적으로 일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목회도 그렇게 유연해야 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필요한 태도가 ‘기다림’입니다. 이것이 가장 어렵지만 가장 중요합니다. AC.59의 원리대로라면, 사람은 자기 상태 안에서 충분히 겪고, 느끼고, 고민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 시간이 없이 바뀐 것은 오래 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지금 당장 해결되지 않아도, 주님이 그 사람 안에서 일하고 계신다’는 신뢰를 가져야 합니다. 이 신뢰가 없으면 조급해지고, 결국 관계를 더 닫히게 만듭니다.

 

이걸 아주 실제적으로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어떤 성도가 교회에 나오지만, 거리를 둡니다. 이때 ‘요즘 왜 그러세요?’라고 바로 묻기보다, ‘요즘 건강은 괜찮으세요?’, ‘요즘 바쁘시죠?’ 정도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짧게라도 반응하면, 거기서 멈추고, 더 밀어붙이지 않습니다. 대신 시간이 지나면서 반복적으로 ‘안전한 접촉’을 쌓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 사람이 먼저 말을 꺼낼 수 있습니다. 그때가 ‘문이 열린 순간’입니다.

 

물론 끝까지 안 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때도 억지로 열려고 하지 않는 것이 원칙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의 본질은 언제나 ‘자유 안에서의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목회자는 끝까지 ‘길이 열려 있는 상태’를 유지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언제 돌아와도, 어색하지 않게 들어올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래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찾아오지 않는 성도에게는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말고, 관계를 안전하게 유지하며, 프라이버시를 존중하고, 간접적인 통로를 열어 두고, 주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이 가장 실제적인 목회입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찾아오지 않는 성도는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돌아올 수 있도록 안전한 거리에서 문을 열어 두고 기다리는 것이 주님의 방식에 가까운 목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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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적용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주님의 위와 같은 방법을 혹시 목회에 적용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AC.59에서 본 주님의 방식은 목회에 그대로 옮기면 이렇게 요약됩니다. ‘사람을 한 번에 바꾸려 하지 말고, 지금의 상태를 인정한 채, 그 안에서 진리와 선이 자라도록 돕고, 선택할 수 있는 공간을 지켜 주는 것’입니다. 즉, ‘제거’가 아니라 ‘전환’, ‘압박’이 아니라 ‘성장’, ‘통제’가 아니라 ‘동행’입니다.

 

먼저 가장 중요한 원리는 이것입니다. 주님은 사람의 욕정과 그에 따른 생각을 당장 없애지 않으십니다. 목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성도의 문제를 보면서 ‘이건 빨리 고쳐야 합니다’, ‘이건 틀렸습니다’라고 바로 제거하려 들면, 겉으로는 잠깐 눌릴 수 있어도, 결국 더 깊은 반발이나 위선, 혹은 무력감으로 돌아옵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이 상태가 지금 이 사람의 삶 전체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출발점입니다.

 

그다음 단계는 ‘진리를 심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방식이 중요합니다. 진리를 ‘강요’하면 그 사람의 기존 구조와 부딪혀 버립니다. 대신 ‘비추어 주어야’ 합니다. 즉, 그 사람이 스스로 ‘, 이런 길도 있구나’를 보게 해야 합니다. 설교든 상담이든, 결론을 밀어붙이기보다 ‘보게 하는 것’, ‘깨닫게 하는 것’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도 항상 그렇게 하십니다.

 

그리고 반드시 필요한 것이 ‘시간을 허락하는 것’입니다. 거듭남은 구조 자체가 바뀌는 일이기 때문에,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목회 현장에서는 이 부분이 가장 어렵습니다. 당장 변화가 보이지 않으면 답답하고, 때로는 실망도 됩니다. 그러나 AC의 관점에서는 ‘지금 변화가 더딘 것처럼 보여도, 그 안에서 구조가 바뀌고 있는 중일 수 있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속도를 조절하는 사람’이 아니라 ‘과정을 지켜 주는 사람’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선택의 자리’를 남겨 두는 것입니다. 주님은 악한 영들의 자극까지도 허용하시며 사람에게 선택의 공간을 주십니다. 목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두지 않고, 모든 것을 대신 판단해 주거나 강하게 통제하면, 겉으로는 정돈된 것처럼 보여도 실제 변화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이 길이 옳습니다’라고 말하되, 동시에 ‘선택은 당신이 해야 합니다’라는 자리를 남겨 두어야 합니다.

 

이걸 아주 실제적인 목회 장면으로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어떤 성도가 반복적인 문제를 가지고 찾아옵니다. 이때 ‘왜 또 그러십니까’가 아니라, ‘그 마음이 왜 그렇게 움직이는지 함께 들여다보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리고 그 상태를 인정한 위에서, ‘이럴 때 이런 선택도 가능하다’는 진리를 제시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실제로 선택하고 경험할 수 있도록 기다립니다. 이 과정을 반복하면서, 조금씩 중심이 이동합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의 방식에 가까운 목회’입니다.

 

또 하나 덧붙이면, 목회자는 ‘변화를 만들어 내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역사를 방해하지 않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주님은 이미 각 사람 안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목회자가 할 일은 그 일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이 일어날 수 있도록 환경을 지켜 주고, 때로는 방향을 비추고, 때로는 넘어지지 않도록 붙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체를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첫째, 성도의 현재 상태를 서둘러 제거하려 하지 말고 인정한다. 둘째, 진리를 강요하지 않고 비추어 준다. 셋째, 시간이 걸리는 과정을 견딘다. 넷째, 선택의 자리를 남겨 둔다. 다섯째, 주님의 일하심을 신뢰하고 그 통로가 된다.

 

한 줄로 정리하면, ‘주님의 거듭남 방식에 따른 목회는 사람을 억지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스스로 진리를 선택하며 서서히 변화될 수 있도록 동행하고 지켜 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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