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38.심화

 

1. ‘내적 방향의 변화

 

위 해설, ‘혼자 사는 것을 설명하면서, 여기서 혼자 사는 것은 정서적 외로움이나 사회적 결핍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더 이상 주님께만 인도받는 상태에 만족하지 못하게 된 내적 방향의 변화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 안에서 나도 함께 이끌고 싶다는 의식이 깨어난 상태가 바로 혼자 사는 것입니다.’라고 하는데요, 여기 내적 방향의 변화가 뭔가요? 그리고 천적 인간의 삶이 뭐가 부족하다고 이렇게 곁눈질을 하나요? 천사들은 이러지 않지요? 이것이 천국과 지상의 차이인가요?

 

 

여기서 말하는 ‘내적 방향의 변화’는,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 변화 이전에 먼저 일어나는 아주 미세한 중심 이동을 뜻합니다. 원래 천적 인간의 상태에서는 삶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주님으로부터 받는 방향’으로 열려 있습니다. 그는 생각하고 사랑하고 행동하지만, 그 생명의 근원을 자기에게 두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인간 안에 ‘나도 판단하고 싶다’, ‘나도 중심이 되고 싶다’, ‘나도 스스로 알고 결정하고 싶다’는 움직임이 아주 조용히 생기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것이 ‘내적 방향의 변화’입니다. 아직 노골적인 반역이나 악은 아닙니다. 다만 생명의 시선이 ‘주님으로부터 받는 쪽’에서 ‘나 자신에게서 나오고 싶은 쪽’으로 아주 미세하게 기울기 시작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혼자 사는 것’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외로움이 아니라, 영적 독립의 욕구입니다. 원래 인간은 ‘주님과 결합되어 있으되 동일하지 않은 상태’ 안에 있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proprium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결합’보다 ‘독립’을 원합니다. 곧, ‘함께 살기’보다 ‘나도 내 힘으로 살아보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에덴에서 시작되는 긴장의 핵심입니다.

 

그렇다면 왜 인간은 이런 곁눈질을 하느냐, 천적 인간의 삶에 뭐가 부족해서 그러느냐 하는 질문이 나옵니다. 사실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주님의 인도 안에는 결핍이 없습니다. 문제는 결핍이 아니라, 자유입니다. 인간은 단순히 행복하게 유지되는 존재가 아니라, 자유 안에서 사랑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자유가 있으려면, 아주 미세하게라도 ‘자기 쪽으로 향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남아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움직임은 ‘무언가 부족해서’라기보다, 자유로운 존재 안에 필연적으로 열려 있는 가능성입니다.

 

다만 지상과 천국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지상에서는 이 방향 전환이 실제로 깊어질 수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중심 쪽으로 점점 더 굳어질 수도 있고, 반대로 다시 주님께 돌아설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지상은 선택과 재형성의 자리입니다. 반면 천국에서는 이미 방향이 확정되어 있습니다. 천사들에게도 ‘자기처럼 느끼는 감각’은 여전히 있지만, 그것이 더 이상 ‘독립 욕구’로 굳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든 생명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단순히 교리로가 아니라, 끊임없이 느끼고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국과 지옥』에서 천사들의 상태 변화가 나와도, 그것은 지상의 인간처럼 ‘타락 가능성’의 흔들림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과 감사가 새롭게 살아나는 리듬에 가깝습니다. 천사들도 때때로 자기 자신처럼 느끼는 상태가 더 의식되지만, 그들은 그 순간조차 자연스럽게 다시 주님께 돌립니다. 반면 지상에서는 그 ‘자기감’이 실제로 자기중심으로 굳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천국과 지상의 가장 큰 차이 가운데 하나입니다.

 

정리하면, AC.138의 ‘내적 방향의 변화’란, 인간이 더 이상 단순히 ‘받아 사는 존재’로 머물기보다, ‘나도 근원이 되고 싶다’는 쪽으로 아주 미세하게 기울기 시작한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은 결핍 때문이 아니라 자유 때문이며, 지상에서는 그것이 실제 분리와 타락으로까지 갈 수 있지만, 천국에서는 더 이상 그렇게 굳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AC.138, 창2:18, ‘proprium에 의한 내적 방향 변화의 시작’(AC.138-141)

창2:18-25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And Jehovah God said, 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I will make him a help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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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8-25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And Jehovah God said, 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I will make him a help as with him. (2:18)

 

AC.138

 

혼자(alone)라는 말은 그가 주님께 인도받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상에 의해서도 인도받고자 하였음을 뜻합니다.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help as with him)은 사람의 proprium을 뜻하는데, 이것은 이후에 갈빗대로 만드신 여자(rib built into a woman)로 불리게 됩니다. By “alone” is signified that he was not content to be led by the Lord, but desired to be led by self and the world; by a “help as with him” is signified man’s own, which is subsequently called a “rib built into a woman.”

 

 

해설

 

이 단락은 창2:18의 유명한 표현들을 ‘전적으로 영적, 구조적 의미’로 고정시켜 줍니다. 여기서 ‘혼자 사는 것’은 정서적 외로움이나 사회적 결핍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더 이상 주님께만 인도받는 상태에 만족하지 못하게 된, 즉 주님의 인도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내적 방향의 변화’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 안에서 ‘나도 함께 이끌고 싶다’는 의식, 즉 ‘내 힘으로 살아보고 싶다’는 의식이 깨어난 상태가 바로 ‘혼자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돕는 배필’ 역시 외부에서 보충되는 타자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분명히 ‘사람 자신의 proprium’이라고 규정합니다. 인간이 스스로 느끼고 판단하며 선택하려는 구조, 곧 ‘proprium’이 여기서 ‘돕는 배필’이라는 형식으로 등장합니다. 이는 주님을 대체, 대신하는 조력자가 아니라, ‘주님과의 인도 관계를 매개하는 자기성’입니다.

 

그를 위하여’, 즉 ‘그에게 맞는’이라는 표현은 이 proprium이 무질서한 반항으로 주어진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인간의 상태에 맞게, 인간이 인간으로 살 수 있도록 허락된 구조입니다. 그러나 그 적합성은 어디까지나 ‘주님 중심의 질서 안에서만’ 유지됩니다. 이 proprium이 중심으로 올라오면, 돕는 자는 곧 대체자가 됩니다.

 

마지막으로, 이 proprium이 이후에 ‘갈빗대로 만드신 여자’로 불린다는 점은, 그것이 이성적 판단이 아니라 ‘애정의 차원’에서 형성된 자기성임을 예고합니다. 인간은 먼저 사랑과 애정의 영역에서 proprium을 느끼고, 그다음에야 생각과 판단이 따라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자기성을 ‘돕는 배필’로 허락하시되, 생명의 중심이 아니라 ‘곁에 두어진 구조’로 두십니다.

 

AC.138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의 문제는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만 인도받는 상태에 머무르지 못하는 성향이며, 그에 대한 주님의 응답이 바로 ‘proprium’의 허락이라고 말입니다.

 

 

심화

 

1. ‘내적 방향의 변화

 

 

AC.138, 심화 1, ‘내적 방향의 변화’

AC.138.심화 1. ‘내적 방향의 변화’ 위 해설, ‘혼자 사는 것’을 설명하면서, ‘여기서 ‘혼자 사는 것’은 정서적 외로움이나 사회적 결핍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더 이상 주님께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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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주님과의 인도 관계를 매개하는 자기성’

 

역시 위 해설, ‘돕는 배필’을 설명하면서, ‘따라서 ‘돕는 배필’ 역시 외부에서 보충되는 타자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분명히 ‘사람 자신의 proprium’이라고 규정합니다. 인간이 스스로 느끼고 판단하며 선택하려는 구조, 곧 ‘proprium’이 여기서 ‘돕는 배필’이라는 형식으로 등장합니다. 이는 주님을 대체, 대신하는 조력자가 아니라, ‘주님과의 인도 관계를 매개하는 자기성’입니다.’라고 하는데요, 여기 ‘주님과의 인도 관계를 매개하는 자기성’이 뭔가요? 표현이 어려워 알 듯 모를 듯 합니다.

 

 

여기서 가장 어려운 부분은 ‘자기성’(proprium)이 단순히 방해물이나 악으로만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 ‘돕는 배필’을 설명하면서, 인간 안에 있는 어떤 ‘자기처럼 느껴지는 요소’가 왜 필요한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과의 인도 관계를 매개하는 자기성’이라는 표현이 나온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런 뜻입니다. 주님은 인간을 직접 움직이는 기계처럼 다루지 않으십니다. 인간은 반드시 ‘내가 생각한다’, ‘내가 선택한다’, ‘내가 사랑한다’고 느껴야 합니다. 그러니까 ‘생각도, 선택도, 그리고 사랑도 내가 능동적으로 한다’고 말이지요. 그런데 바로 이 ‘내가 한다고 느끼는 자리’가 proprium, 곧 자기성입니다. 만약 이것이 전혀 없다면, 인간은 주님의 인도를 받아도 그것을 자기 삶처럼 느끼지 못합니다. 사랑도, 기쁨도, 책임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자기성은, 비록 위험성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인간이 주님의 인도를 ‘자기 삶처럼’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드는 매개 역할을 합니다. 바로 이런 뜻에서 ‘주님과의 인도 관계를 매개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 보면 더 분명합니다. 어떤 사람이 선한 일을 할 때, 실제 생명과 선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그것을 전혀 자기 일처럼 느끼지 못한다면, 그는 사랑도 기쁨도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반대로 그가 ‘내가 선택했고, 내가 사랑했다’고 느낀다면, 바로 그 자기감 속에서 그는 주님의 생명을 자기 삶처럼 경험합니다. 이 자기감이 없다면, 인간은 살아 있는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proprium은 두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내가 근원이다’라고 굳어질 때의 타락한 자기중심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것을 내 삶처럼 느끼며 살아가는 자리’입니다. AC.138에서 말하는 ‘돕는 배필’은 후자 쪽에 가깝습니다. 곧, 인간이 주님의 인도를 실제 자기 삶 속에서 체험하고 응답할 수 있게 해 주는 ‘자기처럼 느껴지는 구조’입니다.

 

그래서 ‘돕는 배필’이 단순한 외부 보조자가 아니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것은 인간 밖에서 와서 부족함을 채워주는 타자(他者), 타인이 아니라, 인간 안에 형성된 ‘자유롭게 응답할 수 있는 자기감’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주님의 인도를 받지만, 그 인도가 자기 안에서 실제로 살아 움직이기 위해서는, ‘내가 원한다’, ‘내가 따른다’, ‘내가 사랑한다’고 느끼는 어떤 자기성이 필요합니다. 이 자기성이 바로 ‘돕는 배필’의 깊은 의미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표현을 너무 추상적으로 보지 마시고, 이렇게 이해하시면 훨씬 또렷합니다.

 

‘주님과의 인도 관계를 매개하는 자기성’이란, 인간이 주님의 생명을 단순히 외부 힘으로 당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 ‘내 선택’, ‘내 사랑’처럼 실제로 느끼며 응답할 수 있게 해 주는 자기감의 구조를 말합니다.

 

그리고 문제는 이 자기성이 존재하느냐가 아니라, 그것이 끝까지 ‘주님에게서 받은 것’으로 남느냐, 아니면 ‘진짜 내 것’으로 굳어지느냐에 있습니다.

 

 

 

AC.137, 창2:18-25 배경, ‘창1, 2, 3을 읽는 법’

AC.137 창세기 처음 세 장은 일반적으로 태고교회를 다루는데, 이 교회는 시작부터 멸망에 이르기까지 ‘사람’(man, homo)이라 불립니다. 이 장의 앞부분은 그 교회가 가장 번성하였던 상태, 곧 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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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7

 

창세기 처음 세 장은 일반적으로 태고교회를 다루는데, 이 교회는 시작부터 멸망에 이르기까지 사람(man, homo)이라 불립니다. 이 장의 앞부분은 그 교회가 가장 번성하였던 상태, 곧 천적 인간이었을 때를 다루었고, 여기서는 이제 자기의 프로프리움(proprium, own)으로 기울어진 자들과 그들의 후손들을 다룹니다. The first three chapters of Genesis treat in general of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is called “man” [homo] from its first period to its last, when it perished; the preceding part of this chapter treats of its most flourishing state, when it was a celestial man; here it now treats of those who inclined to their own, and of their posterity.

 

 

해설

 

이 단락은 창세기 1, 2, 3장을 읽는 ‘해석의 지평을 단번에 정리해 주는 총괄 문장’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개별 사건을 넘어, 말씀 전체가 무엇을 그리고 있는지를 한 문장으로 압축합니다. 곧, 이 세 장은 역사 서술이 아니라 ‘태고교회라는 하나의 인간의 일생’을 다룬다는 선언입니다.

 

먼저 주목할 점은 태고교회가 ‘사람(homo)이라 불린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특정 개인을 뜻하지 않습니다. 태고교회 전체가 하나의 유기적 인간처럼 존재했고, 그 내적 상태의 변화가 곧 말씀의 이야기로 전개된다는 뜻입니다. 시작은 탄생, 중간은 성숙, 끝은 쇠퇴와 소멸입니다. 창세기 1, 2, 3장은 이 전 과정을 한 호흡으로 다룹니다.

 

이 장, 곧 창세기 2장은 그중에서도 ‘가장 절정의 순간’을 담고 있었습니다. 앞부분에서는 태고교회가 천적 인간이었을 때, 즉 주님과 직접 결합, 퍼셉션(perception)으로 살던 가장 번성한 상태가 묘사되었습니다. 에덴동산, 생명나무, 네 강, 평화의 안식은 모두 이 절정 상태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지점은 다릅니다. 이제 본문은 ‘자기의 것, proprium으로 기울어진 자들’을 다룹니다. 이는 곧 태고교회가 더 이상 순수한 천적 상태에 머물지 못하고, 자기의식과 자기중심이 서서히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했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 기울어짐은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후손에게로 이어지는 방향성’이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가 이 변화를 갑작스러운 붕괴로 묘사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매우 차분하게 말합니다. 앞부분은 가장 번성한 상태였고, 지금은 proprium으로 기울어진 상태를 다룬다고 말합니다. 즉, 타락은 한순간의 추락이 아니라, ‘방향의 변화가 누적된 결과’입니다.

 

AC.137은 독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창세기 1, 2, 3장을 따로따로 읽지 말고, 하나의 생명 이야기로 읽으라는 것입니다. 창조는 이상화된 과거가 아니라, 인간이 어떤 존재로 시작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근원이고, 에덴은 회상이 아니라 목표이며, 타락은 신화가 아니라 인간 내면에서 반복되는 구조입니다.

 

이 문장은 동시에 지금까지의 창세기 2장을 ‘아름답게 닫아 줍니다’. 천적 인간의 찬란함을 본 뒤에, 그 찬란함이 어떻게 proprium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는지를 보여주었고, 이제 독자는 다음 장에서 그 기울어짐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보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모든 것을 ‘한 사람의 일생’으로 읽도록 우리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AC.138, 창2:18, ‘proprium에 의한 내적 방향 변화의 시작’(AC.138-141)

창2:18-25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And Jehovah God said, 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I will make him a help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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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6, 창2:18-25 개요, ‘프로프리움 안에 주입된 이노센스’(25절)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25절) AC.136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노센스(innocence)가 이 프로프리움(proprium, own) 안에 주입되어, 그것이 여전히 용납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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