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의 속뜻
35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한 맹인이 길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36무리가 지나감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은대 37그들이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하니 38맹인이 외쳐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39앞서가는 자들이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0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명하여 데려오라 하셨더니 그가 가까이 오매 물어 이르시되 41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42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43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눅18:35-43)
영적인 질병을 치유하는 믿음은 주님으로부터만 온다. 즉 주님께서는 말씀으로부터 진리를 배워 그것에 따라 사는 사람에게 치유의 믿음을 주신다. (계시록 해설 815:5, 이순철 역) the faith by which spiritual diseases are healed by the Lord can be given only through truths from the Word and a life according to them; (AE.815.5)
※ 위 글은 스베덴보리 저,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어린 양 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을 하더라’(계13:11) 속뜻 중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And I saw another beast coming up out of the earth,)에 관한 주석 내용 일부 인용입니다.
복음서를 읽다 보면 주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시는 모습이 자주 나옵니다. 아시는 것처럼, 주님이 고치시는 병은 육신의 질병이 아니라 영적 질병(spiritual diseases)입니다. 영적인 질병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사후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신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영적 질병이란 어떤 것입니까? 영적 질병은 내적으로는 선과 진리의 불균형으로 인해 생기는 병입니다. 그러니까 선은 있는데 진리가 없거나, 진리는 있는데 선이 없거나 할 때 생기는 병입니다. 영적인 질병들은 종종 육신의 병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열등감이나 우울증, 거만함, 분노 조절 장애, 각종 중독 같은 것으로 나타납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맹인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입니다. ‘맹인’(盲人)이라고 부르는 것은 속뜻으로는, 그가 선은 있는데 진리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에 대한 애정은 있는데 진리에 대해 아는 게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맹인은 어떻게 눈을 뜰 수 있었을까요? 지금부터 그것에 대해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본문 35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35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한 맹인이 길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여리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막 들어가는 초입(初入, 골목 등으로 들어가는 어귀)에 있는 도시입니다. 그래서 ‘여리고’ 사람들의 영적인 의미, 즉 속뜻은 진리에 대해 무지한 교회 밖 이방인을 뜻합니다. 맹인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길가에 앉아 구걸을 하는 것으로 보아 진리에 대한 애정이 많은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길가에 앉아 구걸하다가’는 진리를 구하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36무리가 지나감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은대 37그들이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하니
길가에 앉아 구걸하던 맹인이 많은 사람이 지나가는 기척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이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대답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선만 있고 진리가 없거나, 또는 진리만 있고 그에 부합하는 선이 없을 때, 사람은 영적인 병에 듭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일종의 시험과도 같습니다. 시련이 있을 때, 종교가 없는 사람들은 종교를 찾게 되고, 종교를 가지고 있지만 확신이 없는 사람은 구원의 진리를 찾아 나섭니다. 그것이 길에 앉아 진리를 구걸하는 맹인의 상태입니다. 그리고 그때 주님을 만나게 되는데, 그것이 영적 맹인이 참된 진리를 만나는 순간입니다. 본문에는 주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불렀습니다. 나사렛 예수라는 말은 주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주님을 비하(卑下, 스스로를 겸손하게 낮추거나 상대방을 업신여겨 낮춤)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인정하는 사람들에게는 신성한 진리, 또는 구원의 진리라는 뜻입니다. (AC 9144:10). From this it is evident what was signified by the “crown of thorns,” and by his being hailed “King of the Jews,” by “behold the man,” and also by the inscription on the cross, “Jesus of Nazareth, the king of the Jews” (John 19:19, 20); namely, that Divine truth, or the Word, was so regarded and so treated by the Jews, among whom was the church. (That all things done to the Lord by the Jews at his crucifixion signified the states of their church with respect to truth Divine, or the Word, see n. 9093.)
38맹인이 외쳐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자기 앞을 지나가는 사람이 나사렛 예수라는 말을 들은 맹인이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습니다.
맹인은 주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습니다. 다윗은 평생 이방인들과 싸웠던 사람입니다. 그것은 마치 진리가 거짓을 상대로 치열하게 싸우는 모습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다윗’은 신성한 진리를 표상합니다. 그렇게 볼 때, 주님을 향해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부르는 것은 주님이 신성한 진리 그 자체이신 분이라는 사실을 맹인이 인정하는 것입니다. 대다수의 유대인들이 주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비하할 때, 맹인은 어떻게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맹인은 그동안 말씀을 통해 진리를 배우려고 했고, 진리를 알면 그대로 살려고 노력한 것이 아닐까요? 그것이 길에 앉아 구걸하는 것의 속뜻이기 때문입니다. ‘길’의 속뜻은 진리이기 때문이지요. 그때 주님은 이렇게 그를 만나시기 이전에 이미 그에게 당신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요, 진리 자체인 분이시라는 믿음을 주셨던 것이고, 그런 믿음이 그에게 이미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오늘 주님을 만나자마자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도 진리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를 때가 있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진리를 모를 때는 마음에 평안이 없었지요. 그러다가 우연히 스베덴보리를 만났고, 주님의 사랑과 섭리로 그의 책들에 적힌 내용들이 구원의 진리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마치 맹인이 오늘 예수를 보자마자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39앞서가는 자들이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맹인이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큰 소리로 외치자, 본문 39절에는 “앞서가는 자들이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 했습니다. 주님을 만나 처음 진리를 배우기 시작할 때는 시련이 많습니다. 진리를 잘못 적용, 실수할 때도 있고, 진리를 가지고 옳으니 그르니 하며 다른 사람과 다투기도 합니다. 진리를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할 때는 수치심과 좌절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것은 죽이 막 끓기 시작할 때와 같이 혼란스러운 모습입니다. 그때 마음 한쪽에서 집요하게 꾸짖는 소리가 들립니다. 지옥의 영들이 비난하고 조롱하는 소리이지요. 그런가 하면, 참된 진리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질시 어린 시선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 앞서가는 자들의 꾸짖음입니다. 이런 일련의 시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맹인은 자신의 병의 원인에 대해 점점 더 분명하게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막연하게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던 기도가 좀 더 구체적인 기도로 바뀝니다. 그때를 40절과 41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40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명하여 데려오라 하셨더니 그가 가까이 오매 물어 이르시되 41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맹인이 주님께 가까이 가는 것은 그동안 희미하게 알고 있던 진리를 점점 분명하게 알기 시작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때 주님께서 ‘내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맹인은 그동안 그저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푸소서’라고 두루뭉술하게만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가까이 가면서 병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진리에 대한 무지였습니다. 진리에 대한 무지란, 진리가 아예 없거나, 있더라도 진리만 있고 선은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 없는 진리는 죽은 진리와 같아 설령 있다 하더라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맹인은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구체적으로 대답했습니다. 보기를 원한다는 것은 단순한 진리, 지식에 불과한 진리가 아니라 선이 있는 진리, 선을 동반한 진리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선이 있는 진리를 소유할 때라야 진리를 적재적소에 올바로 적용할 수 있고, 또한 진리를 가지고만 있지 않고, 적극적으로 행하기 시작합니다. 진리 안에 있는 선, 곧 주님이 우리를 그렇게 만드시기 때문이지요.
42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주님께서 맹인의 말을 들으시고,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과, 선이 있는 진리는 오직 그분에게서만 나온다는 사실을 믿을 때, 영적 고질병이 치유됩니다. 그렇게 맹인의 병이 고쳐진 상태를 이사야서 35장 5절에서는,
그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라고 했습니다. 맹인의 눈이 밝아지는 것은 진리에 무지했던 사람들이 진리에 눈을 뜨는 것이고,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리는 것은 진리에 순종하는 힘이 생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리를 알면서도 행하지 못하는 때가 그동안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것은 진리를 아는 것도 아니고, 구원도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면서 주시는 진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가 함께 들어있는 진리이며, 그래서 구원의 진리입니다. 맹인은 그 진리를 통해 눈을 뜰 수 있었고, 삶의 질곡(桎梏, 차꼬와 수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맹인의 그런 상태를 본문 43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43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맹인이 보게 되었다는 것은 그의 병의 원인이던 진리에 대한 무지가 해소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맹인은 그동안 진리를 몰라서 극심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마음속에 사랑이 없어서 이웃과 잘 지내지 못했습니다. 열등감이나 우울증, 근거 없는 교만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일들이 진정한 진리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주님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맹인이 진리 없음을 고백하고, 주님께 매달렸을 때, 주님으로부터 치유의 믿음이 흘러들어와 닫혔던 눈이 떠졌습니다. 말씀에는 맹인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를 따랐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계시록 해설 1210번 글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praising God)은 믿음의 고백과 예배(to confess and worship him)라고 말합니다.
Saying, Praise God, all ye his servants, signifies worship of the Lord by those who are in truths. This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praising God,” as being to confess and worship him (of which presently); (계19:5)
구원의 진리로 인해 닫혔던 눈이 떠질 때,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진정한 믿음의 고백이 터져 나옵니다. 뿐만 아니라, 믿음에 따라 사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고, 예수를 따라가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 맹인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종교적인 믿음이든 개인적인 신념이든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이 모두 구원의 믿음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모든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진리로 밝혀져야 구원의 믿음이 됩니다. 구원의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삶이 즐겁지 않고, 삶 속에서 보람을 느낄 수도 없습니다. 그런 상태가 영적으로 병든 상태입니다. 어떻게 하면 구원의 믿음을 얻을 수 있으며, 영적 질병에서 놓여날 수 있을까요? 계시록 해설 815:5번 글에서는 “영적인 질병을 치유하는 믿음은 주님으로부터만 온다. 주님께서는 말씀으로부터 진리를 배워 그것에 따라 사는 사람에게 치유의 믿음을 주신다.”(이순철 역)고 합니다. 구원의 믿음은 인간에게서 나오지 않고,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 계시록 해설 1210번 글은, “사람이 자신에게는 어떤 선도 없고 자신으로부터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며 반면에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 오고 주님만이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 그때 사람은 자아 사랑에 속한 것들을 밀어내고 마음을 연다. 그리고 그때 하나님으로부터 선과 능력이 흘러들어올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when he acknowledges in heart that there is nothing of good in himself, and that he can do nothing of himself, and on the other hand, that all good is from the Lord, and that the Lord can do all things. When man is in this acknowledgment he puts aside what is his own which belongs to the love of self, and opens all things of his mind, and thus gives room for the Divine to flow in with good and with power. 이순철 역)라고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병자들을 고치실 때마다 먼저 ‘네가 나를 믿느냐’ 라고 물으시고, 그다음에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 사실, 곧 이 ‘자기 부인’의 태도가 구원의 출발점, 곧 위 말씀, ‘그때 사람은 자아 사랑에 속한 것들을 밀어내고 마음을 연다. 그리고 그때 하나님으로부터 선과 능력이 흘러들어올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처럼, 주님의 구원하시는 능력, 영적 질병에 걸린 나를 치료하시는 주님의 치료의 광선이 내 안을 환히 비춰 나의 내면, 내 영혼을 충만하게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누구를 주님의 제자 삼으실 때마다 하신 말씀,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눅9:23)
처럼, ‘자기를 부인할 것’을 요구하신 것도 그래서입니다. 이것이 곧 ‘네가 나를 믿느냐’의 속뜻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배우신 모든 성도와 이 진리를 사랑하시는 모든 분께 구원의 믿음, 치유의 믿음이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6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7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사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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