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1

 

다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부터 말하게 되고, 이로 인해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확증하게 되는 상태입니다. 그때 그 사람한테서 나오는 것들은 생기를 갖게 되는데, 말씀에서는 이것들을 ‘바다의 물고기’(fish of the sea), ‘하늘의 새’(birds of the heavens)라고 합니다. The fifth state is when the man discourses from faith, and thereby confirms himself in truth and good: the things then produced by him are animate, and are called the “fish of the sea,” and the “birds of the heavens.”

 

 

해설

 

AC.11은 거듭남의 다섯 번째 상태를 설명하며, 네 번째 상태에서 속 사람 안에 점화된 사랑과 신앙이 이제 실제로 ‘사람의 사고와 말, 그리고 삶의 원리’로 작동하기 시작하는 단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시기를 “사람이 신앙으로 말하고, 그로 인해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확증하는 단계”라고 말하는데, 이는 단순히 경건한 말을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진리가 실제로 그의 사고를 이끌고 판단을 형성하며, 삶의 기준이 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전 단계에서는 사람이 선을 행하고 경건하게 말했지만, 그것은 주로 시험과 고난, 내적 압박 가운데서 생겨난 반응적인 경건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섯 번째 상태에서는 ‘진리 자체가 사람의 내면에서 살아 움직여, 그 사람을 이끌고 그의 언어와 행동의 근원이 됩니다.’ 이로 인해 사람은 자신이 믿는 진리를 스스로 확증하게 되는데, 여기서의 ‘확증’은 단순히 머리로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그 진리를 경험하고, 그 진리가 나를 변화시키는 것을 체험하며, 그 진리가 참되다는 것을 마음과 행동으로 지지하게 되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 단계에서 사람이 산출하는 영적 산물들은 이제 ‘생기를 가진 것들(animated)이라고 불립니다. 즉, 이전 단계의 선은 여전히 자기 의지에서 나온 ‘생기 없는 선’이었다면, 이제는 ‘주님의 생명이 선과 진리 속에 실제로 흐르기 시작하여 살아 있는 선과 살아 있는 진리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창1:20에서는 이러한 산출물을 ‘수중생물’, 곧 물고기와 ‘하늘의 새’라고 부르는데, 물고기는 감각적, 지식적 차원의 진리(외적 진리)를, 새들은 이해력에서 솟아오르는 더 높은 차원의 진리(내적 사유와 통찰)를 상징합니다. 즉, 이 단계에서는 인간 안에서 지식 기반의 진리와 이해 기반의 진리가 모두 살아 움직이며, 영적 생명력—주님으로부터 오는 생기—을 갖게 됩니다. 다섯 번째 상태는 거듭남 과정에서 결정적인 중간 단계로, 신앙이 단순한 교리적 동의가 아니라 ‘사람 전체를 움직이는 내적 힘’이 되는 시점이며, 이후 여섯 번째 상태(신앙과 사랑의 결합으로 살아 있는 선이 완성됨)로 나아가기 위한 본격적 준비가 이 단계에서 이루어집니다.

 

 

 

AC.10, 창1, '네 번째 상태' (AC.6-15)

AC.10 네 번째 상태는 사람이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의 빛을 받게 되는 상태입니다. 사람은 그 이전에도 경건하게 말하고 선한 일들을 행하였지만, 그것은 그가 겪는 시험과 곤궁 때문에 그러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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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궁금한 게 있는데요, 스베덴보리는 왜 복음서 주석은 하지 않았나요? 주님의 육성이 담긴 복음서가 더 중요하지 않았을까요?

 

이 질문은 스베덴보리를 오래 읽은 분들조차 평생 품고 있는 핵심 질문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가 복음서를 주석하지 않은 것은 ‘의도적 선택’이며, 그의 전체 신학 구조 안에서 반드시 필요한 공백이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복음서 주석을 ‘안 한 게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한 것’

 

복음서에 대한 직접 주석은 없지만, 복음서의 내적 의미, 곧 속뜻을 그는 자신의 여러 저서, 예를 들면,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1758),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Divine Love and Wisdom, 1763), ‘하나님의 섭리(Divine Providence, 1764), ‘참 그리스도교(True Christian Religion, 1771) 등에서 전면적으로 풀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방식은 ‘본문을 따라가는 주석 방식(exegesis)이 아니라, ‘복음서 전체에 내재된 구조적, 보편적 진리를 다시 전개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의 생애는 신적 진리의 충만한 계시’로서, ‘그 동일한 내적 의미가 구원론, 기독론, 재림론, 연합론 전체에 이미 녹아 있도록 하는 방식’이지요. 그래서 굳이 복음서 본문을 한 절씩 풀지 않아도 그 내적 의미 전체가 그의 저작들 전체 속에 재구성되어 나타나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스베덴보리는 복음서를 해설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복음서 자체를 ‘신학 전체’로 펼쳐 놓은 것’입니다.

 

복음서를 주석하지 않은 직접적 이유들

 

첫째, 복음서는 ‘말씀’(Word)의 범주가 창세기, 출애굽기, 선지서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을 두 범주로 나누는데요, 하나는, ‘내적 의미(internal sense, heavenly sense, arcana, 속뜻)를 가진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모세오경과 선지서들, 그리고 시편 일부 및 계시록을 말합니다. 이 말씀들은 구절 하나하나가 상징과 표상으로 연결됩니다. 다른 하나는, 역사적 실제 기록을 기반으로 하나, 그 자체가 상징계는 아닌 ‘복음서의 문자’입니다. 복음서 역시 ‘말씀’이지만, 그러나 다른 종류의 말씀입니다. 그 안의 상징성은 예수님의 생애와 직접 결합되어 있으며, 그래서 창, 출 같은 방식의 상징 주석을 적용할 수 없습니다. 즉, 복음서는 ‘예수님의 실제 행적’이자 ‘내적 의미의 직접적 실현’이기 때문에 ‘상징 해석’을 위해 존재하는 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모세 이후 존재하던 성막과 제사가 주님 오신 이후 더 이상 필요가 없어 사라진 것과 같습니다. 성막과 제사는 주님을 표상하던 것들인데 정작 그 실체인 주님이 오시자 더는 그런 도우미들이 필요가 없어진 것이지요.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복음서를 창세기, 출애굽기처럼 절대적 상징 주석을 하지 않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둘째, 복음서는 예수님의 ‘육신으로의 신성화 과정’(glorification)을 그대로 보여주는 책이기 때문

 

스베덴보리는 ‘신적 인성(Divine Human)의 성화 과정(신성화, glorification)’이 복음서 전체의 핵심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과정은 곧바로 ‘내적 의미 자체’입니다. 즉, ‘예수님의 시험’, ‘기적들’, ‘설교’, ‘십자가’ 및 ‘부활’ 등, 이것들은 ‘상징의 외피가 아니라 내적 의미 그 자체의 역사적 구현’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건 주석할 필요가 없다’고 본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생애는 문자, 상징을 넘어 바로 ‘신적 실체의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역시 모든 문자와 상징, 표상, 상응이 가리키는 본체, 실체이신 분이 직접 오셨기 때문입니다.

 

셋째, 스베덴보리는 복음서를 이미 ‘보충 주석’ 형태로 곳곳에서 해설

 

주석서는 아니지만 복음서 본문을 해설한 문단들은 어마어마하게 많습니다. 예를 들면, 시험받으심에 대해서는 지옥 전체와의 전투로(AC, TCR 다수), 산상수훈에 대해서는 천국적 삶과 진리의 질서로, 기적은 선과 진리의 표상으로, 십자가는 마지막 시험과 완전한 연합, 부활은 인간 구원의 원형 등, 즉, 절대적으로 해설이 없는 것이 아니라 ‘본문 주석의 형태가 아닌, 신학 체계 속의 해설’로 그의 저작들 여기저기에서 다 언급할 수 없을 정도로 해설하고 있습니다.

 

그의 사명은 ‘재림기 말씀의 내적 의미 개방’이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사명을 다음처럼 정의합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를 열어 주는 일’과 특히 ‘모세오경과 선지서들을 통해서’라고 말입니다. 왜 이 두 곳일까요? 왜 복음서는 아닐까요?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예수님이 이미 복음서 속에서 ‘자신을 직접 계시하심’

 

복음서는 그 문자 의미 자체가 ‘신성의 직접 계시’이므로 ‘상징을 벗기기 위한 해설(exegesis)이 필수적이지 않습니다.

 

둘째, 그러나 창세기, 출애굽기는 상징과 표상으로 감추어져 있어 재림 시기에야 드러낼 수 있는 구조

 

창세기의 아담, 노아, 아브라함, 출애굽기의 애굽, 홍해, 시내산 등 이 모든 것이 인간 영적 발전의 ‘내적 단계’이므로, 재림 때 완전히 드러내야 했습니다. 즉, 창세기, 출애굽기, 계시록은 재림을 위해 봉인된 책들이지만, ‘복음서는 이미 드러난 계시의 핵심’이라는, 이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셋째, ‘복음서 주석은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살아내는 것’

 

스베덴보리는 복음서의 핵심을 이렇게 보았습니다. ‘산상수훈’은 천국의 삶, ‘사랑, 자비, 용서, 겸손’은 천국의 질서, ‘십자가’는 인간 구원의 전체 과정, ‘부활’은 삶의 변형, 변모 등, 따라서 그는 말합니다. “사람이 복음서를 ‘해설’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삶으로 살아내야’ 한다. 복음서는 지성의 책이 아니라, 생명의 책이다.” 그는 복음서를 주석하지 않는 대신, 그 복음서의 내적 의미를 ‘삶의 길(way of life)로서 제시했습니다.

 

요약

 

스베덴보리가 복음서를 주석하지 않은 이유는, 첫째, 복음서는 상징적 기록이 아니라, 신적 인간의 직접 계시이기 때문에, 둘째, 내적 의미는 이미 전체 신학에 통합되어 있기 때문에, 셋째, 주석의 대상은 ‘봉인된 말씀’인 창, 출, 계인 반면, 복음서는 그 자체로 개방된 말씀, 넷째, 복음서는 지식이 아니라 삶의 실천이 목적이기 때문에, 다섯째, 그의 사명 자체가 복음서 주석이 아니라 ‘말씀의 내적 의미 개방’이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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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

 

네 번째 상태는 사람이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의 빛을 받게 되는 상태입니다. 사람은 그 이전에도 경건하게 말하고 선한 일들을 행하였지만, 그것은 그가 겪는 시험과 곤궁 때문에 그러한 것이었지, 신앙과 체어리티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신앙과 체어리티가 사람의 속 사람 안에서 타오르게 되며, 말씀에서는 이 둘을 두 ‘광명체’(luminaries)라고 부릅니다. The fourth state is when the man becomes affected with love, and illuminated by faith. He indeed previously discoursed piously, and brought forth goods, but he did so in consequence of the temptation and straitness under which he labored, and not from faith and charity; wherefore faith and charity are now enkindled in his internal man, and are called two “luminaries.”

 

 

해설

 

AC.10은 거듭남의 네 번째 상태를 설명하는데, 이는 인간의 내적 변화가 본격적으로 일어나는 전환점이며, 창세기 1장의 ‘넷째 날(해, 달, 별)’에 대응되는 매우 중요한 단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를 “사람이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으로 비추임을 받는 때”라고 말하는데, 이는 이전 단계들과 비교했을 때 질적으로 전혀 다른 내적 생명의 탄생을 의미합니다. 세 번째 상태(회개의 단계)에서는 사람이 경건한 말을 하고 선한 행동을 하긴 했지만, 그것은 대부분 시험과 슬픔, 내적 압박 속에서 나온 것으로, 진정한 사랑과 신앙에서 우러난 것이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선을 이루고자 하는 고투(苦鬪)적 선이었습니다. 그러나 네 번째 상태에 접어들면, 주님에 의해 속 사람 안에서 ‘사랑과 신앙이 실제로 불붙기 시작’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enkindled”—불이 붙는 것—이라고 표현하며, 단순한 감정적 열심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참된 선의 애정과 진리의 빛이 인간 내부에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하는 사건으로 봅니다. 이 상태는 사람이 더 이상 ‘해야 해서 하는’ 경건이 아니라, ‘하고 싶어서 하는’ 선과 진리가 생겨나는 단계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은 주님을 향한 사랑에 실제로 감동되고, 진리의 조명 속에서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분별과 이해를 경험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사랑과 신앙의 내적 작용을 창세기 속 ‘두 광명체’—해와 달—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해는 사랑(특히 체어리티)을, 달은 신앙을 상징합니다. 이전 단계의 선행과 경건이 햇빛 없이 자란 식물과 같았다면, 이제야 비로소 사랑이라는 해의 빛과 신앙이라는 달의 질서가 속 사람 안에 배치되는 것입니다. 이때 사람은 주님의 선을 느끼고, 진리의 빛을 보며, 그에 따라 삶의 방향을 조정하기 시작합니다. 이 상태에서 일어나는 가장 큰 변화는, 사람의 선행이 더 이상 자신에게서 나온 것으로 느껴지지 않고, 주님이 자신 안에서 일하신다는 사실을 점차 자각하기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이는 거듭남의 본격적 내부화 단계이며, 주님이 인간 안에서 왕국을 세우기 시작하는 시점입니다. 따라서 AC.10의 네 번째 상태는 거듭남의 과정에서 ‘내적 빛의 시대’가 열리는 단계로, 주님의 사랑과 신앙이 속 사람 안에서 전인적인 생명력을 갖기 시작하는 성스러운 시점이며, 이후 단계(다섯째, 여섯째 날)의 모든 영적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근본 토대를 형성합니다.

 

 

 

AC.11, 창1, '다섯 번째 상태' (AC.6-15)

AC.11 다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부터 말하게 되고, 이로 인해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확증하게 되는 상태입니다. 그때 그 사람한테서 나오는 것들은 생기를 갖게 되는데, 말씀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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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 창1, '세 번째 상태' (AC.6-15)

AC.9 세 번째 상태는 회개(repentance)의 상태입니다. 이 상태에서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진지하게 말하며, 체어리티의 행위 같은 선을 행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이 선들을 자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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