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내가 너희 위에 사람과 짐승을 많게 하되 그들의 수가 많고 번성하게 할 것이라 너희 전 지위대로 사람이 거주하게 하여 너희를 처음보다 낫게 대우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12내가 사람을 너희 위에 다니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 이스라엘이라그들은 너를 얻고 너는 그 기업이 되어 다시는 그들이 자식들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리라(겔36:11, 12)I will multiply upon you man and beast,and they shall multiply and be fruitful,and I will cause you to dwell as in your ancient times,and will do better unto you than at your beginnings,and ye shall know that I am Jehovah,yea,I will cause man to walk upon you,even my people Israel(Ezek. 36:11–12).
이 구절은AC.55의 문맥에서 ‘거듭남이 진행될 때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회복과 풍성함,그리고 질서의 재건’을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겔36:11-12의‘사람과 짐승을 많게 한다’는 것은 단순한 번성의 약속이 아니라,사람 안에서 선과 진리,그리고 그에 속한 여러 기능들이 다시 살아나 풍성해지고,처음보다 더 나은 질서로 회복되는 거듭남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먼저 ‘사람과 짐승을 많게 하되 그들의 수가 많고 번성하게 할 것이라’입니다. 여기서 ‘사람’은 내적인 것, 곧 이해와 진리에 속한 것을 의미하고, ‘짐승’은 외적인 것, 곧 의지와 애정, 특히 자연적인 수준의 선과 감정들을 의미합니다. 이 둘이 함께 ‘많아지고 번성한다’는 것은, 사람 안에서 진리와 선이 함께 자라나고, 그것이 점점 풍성해진다는 뜻입니다. 즉, 단순히 지식이 늘어나는 것도 아니고, 감정만 좋아지는 것도 아니라, 이해와 의지가 함께 살아나는 상태입니다.
그다음 ‘너희 전 지위대로 사람이 거주하게 하여 너희를 처음보다 낫게 대우하리니’입니다. ‘전 지위’는 단순히 과거의 상태가 아니라, ‘본래 있어야 했던 질서’, 곧 주님께서 처음 의도하신 인간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더 나아가 ‘처음보다 낫게 한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거듭남이 단순한 ‘원상복구’가 아니라, ‘더 깊고 확고한 상태로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유혹과 싸움을 거쳐 얻어진 질서는 처음보다 더 단단하고 흔들리지 않는 상태가 됩니다.
이제 중요한 표현입니다. ‘내가 사람을 너희 위에 다니게 하리니.’ 여기서 ‘사람이 다닌다’는 것은 단순히 사람이 존재한다는 뜻이 아니라, ‘내적인 인간,곧 참된 이해가 중심이 되어 전체를 이끈다’는 뜻입니다. 즉, 사람 안에서 ‘진리와 이해’가 위에 서고, 그 아래에 다른 모든 요소들이 질서 있게 따르는 상태입니다.
이어지는 ‘그들은 내 백성 이스라엘이라’는 표현이 이 상태를 더 분명하게 합니다. ‘이스라엘’은 성경에서 ‘영적 교회’, 곧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내 백성 이스라엘’은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여 그것 안에 사는 사람’, 곧 거듭난 사람을 가리킵니다. 즉, ‘사람이 너희 위에 다닌다’는 것은 ‘진리 안에 있는 사람이 그 삶의 중심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너는 그 기업이 되어 다시는 그들이 자식들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리라’입니다. ‘기업’은 단순한 소유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자식들’은 사람 안에서 생겨나는 선과 진리, 곧 새로운 생명들을 뜻합니다. 따라서 ‘자식들을 잃지 않는다’는 것은, 한때는 생겼다가 사라지던 선과 진리들이 이제는 사라지지 않고 지속되는 상태, 곧 안정된 거듭남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제AC.55의 흐름과 연결하면 전체가 또렷해집니다. 거듭남이 진행되면, 사람 안에서 먼저 진리와 선이 조금씩 생겨납니다. 그러나 초기에는 이것들이 쉽게 사라지고 흔들립니다. 그러다가 점점 질서가 세워지면서, 진리와 선이 함께 자라고, 그 상태가 안정되며, 결국에는 ‘잃어버리지 않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이 구절이 말하는 ‘번성’, ‘회복’, ‘기업’의 의미입니다.
이걸 실제적으로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처음에는 어떤 깨달음이 생겨도 금방 흐려지고, 어떤 결심도 오래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같은 진리라도 점점 깊어지고, 선한 마음도 더 안정적으로 유지됩니다. 이전에는 쉽게 무너지던 것이 이제는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바로 그 상태가 ‘처음보다 낫게 되는 상태’이며, ‘자식들을 잃지 않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단순한 회복의 약속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 안에 세우시는 점진적이면서도 확고한 변화의 과정’을 보여 줍니다. 즉, 흩어져 있던 것이 모이고, 약하던 것이 강해지며, 잠깐이던 것이 지속되는 상태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겔36:11-12는 거듭남을 통해 사람 안에서 선과 진리가 풍성해지고,그 질서가 처음보다 더 견고하게 회복되어 더 이상 사라지지 않는 상태에 이르게 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And God blessed them, and God said unto them,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replenish the earth, and subdue it; and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heavens, and over every living 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창1:28)
AC.55
태고의 사람들은 이해와 의지, 곧 신앙과 사랑의 결합을 결혼이라 했기 때문에, 그 결혼에서 생겨나는 선의 모든 것은 ‘생육’(fruitfulness)이라 했고, 진리의 모든 것은 ‘번성’(multiplications)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들 가운데서도 이런 표현들이 사용되는데요, 예를 들어 에스겔입니다.As the most ancient people called the conjunction of the understanding and the will, or of faith and love, a marriage, everything of good produced from that marriage they called “fruitfulness,” and everything of truth, “multiplications.” Hence they are so called in the prophets, as for instance in Ezekiel:
11내가 너희 위에 사람과 짐승을 많게 하되 그들의 수가 많고 번성하게 할 것이라 너희 전 지위대로 사람이 거주하게 하여 너희를 처음보다 낫게 대우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12내가 사람을 너희 위에 다니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 이스라엘이라그들은 너를 얻고 너는 그 기업이 되어 다시는 그들이 자식들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리라(겔36:11, 12)I will multiply upon you man and beast, and they shall multiply and be fruitful, and I will cause you to dwell as in your ancient times, and will do better unto you than at your beginnings, and ye shall know that I am Jehovah, yea, I will cause man to walk upon you, even my people Israel(Ezek. 36:11–12).
여기서 ‘사람’(man)은 이스라엘이라 하는 영적 인간을 뜻하고, ‘전 지위’(ancient times)는 태고교회를, ‘처음’(beginnings)은 홍수 이후의 고대교회를 뜻합니다. 이 본문에서 진리에 속한 ‘수가 많음’(multiplication)이 먼저 언급되고, 선에 속한 ‘번성’(fruitfulness,앞에서는multiplications을 ‘번성’으로 번역,서로 다른 영어를 같은 한글 단어로 번역한 바람에 헷갈릴 수 있으니 주의해야)이 그다음에 언급되는 이유는, 이미 거듭난 사람이 아니라 이제 거듭나게 될 사람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By “man” is here meant the spiritual man who is called Israel; by “ancient times,” the most ancient church; by “beginnings,” the ancient church after the flood. The reason why “multiplication,” which is of truth, is first mentioned, and “fruitfulness,” which is of good, afterwards, is that the passage treats of one who is to become regenerated, and not of one who is already regenerated.
[2]이해가 의지와 결합하거나, 신앙이 사랑과 결합할 때, 주님께서는 그 사람을 ‘결혼한 땅’(a married land)이라 하십니다. 이사야입니다.When the understanding is united with the will, or faith with love, the man is called by the Lord “a married land,” as in Isaiah:
다시는 너를 버림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 될 것임이라(사62:4)Thy land shall be no more termed waste, but thou shalt be called Hephzibah [my delight is in her], and thy land Beulah [married], for Jehovah delighteth in thee, and thy land shall be married(Isa. 62:4).
이 결합에서 나오는 진리의 열매들을 ‘아들’(sons)이라 하고, 선의 열매들을 ‘딸’(daughters)이라 하는데, 이는 말씀 전반에서 매우 자주 나타나는 표현입니다.The fruits thence issuing, which are of truth, are called “sons,” and those which are of good are called “daughters,” and this very frequently in the Word.
[3]땅이 ‘가득 차게 된다’(replenished)는 것은 진리와 선이 많아진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에게 복을 주시고 말씀하실 때, 곧 그에게 역사하실 때, 선과 진리는 헤아릴 수 없이 증가합니다. 주님께서 마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The earth is “replenished,” or filled, when there are many truths and goods; for when the Lord blesses and speaks to man, that is, works upon him, there is an immense increase of good and truth, as the Lord says in Matthew:
31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32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마13:31, 32)The kingdom of the heavens is like to a grain of mustard seed, which a man took and sowed in his field, which indeed is the least of all seeds, but when it is grown, it is the greatest among herbs, and becometh a tree, so that the birds of the heavens come and build their nests in the branches thereof(Matt. 13:31–32).
‘겨자씨 한 알’(grain of mustard seed)은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되기 전의 선을 뜻하는데, 그것이 ‘모든 씨 가운데 가장 작다’(the least of all seeds)고들 하는 이유는, 그가 자기가 하는 선을 자기한테서 난 거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자기한테서 나는 건 실상 악밖에 없는데도 말입니다. 그러나 아직 거듭남의 상태 중에 있기 때문에, 그 안에는 선이 있습니다. 비록 그것이 가장 작은 선, 보잘것없어 보이는 선일지라도 말입니다.A “grain of mustard seed” is man’s good before he becomes spiritual, which is “the least of all seeds,” because he thinks that he does good of himself, and what is of himself is nothing but evil. But as he is in a state of regeneration, there is something of good in him, but it is the least of all.
[4]마침내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면 그것은 크게 자라 ‘풀’(herb)이 되고, 결합이 완성되면 ‘나무’(tree)가 됩니다. 그리고 이 나무의 가지에 ‘공중의 새들’(birds of the heavens), 곧 진리들, 지적인 것들이 깃드는데(build their nests in its branches), 이 가지들은 기억 지식(memory-knowledges)입니다. 사람이 영적 인간일 때, 그리고 영적 인간이 되어 가는 동안에는 전투 상태에 있기 때문에,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subdue the earth and have dominion)는 말씀이 덧붙여집니다.At length as faith is joined with love it grows larger, and becomes an “herb”; and lastly, when the conjunction is completed, it becomes a “tree,” and then the “birds of the heavens” (in this passage also denoting truths, or things intellectual) “build their nests in its branches,” which are memory-knowledges. When man is spiritual, as well as during the time of his becoming spiritual, he is in a state of combat, and therefore it is said, “subdue the earth and have dominion.”
해설
이 글은 앞선AC.54에서 말한 ‘결혼’ 개념을 한 단계 더 확장합니다. 결혼은 이해와 의지, 신앙과 사랑의 결합이었고, 이제 이 결합에서 ‘무엇이 나오는가’가 주제가 됩니다. 태고의 사람들은 이 결합에서 나오는 결과를 매우 분명히 구분했습니다. 선에서 나오는 것은 ‘생육’(fruitfulness), 곧 열매 맺음이라 했고, 진리에서 나오는 것은 ‘번성’(multiplications)이라 했습니다. 즉 열매 맺음은 질의 문제이고, 번성함은 양의 문제입니다.
이 구분은 단순한 언어 습관이 아니라, 인간 내적 과정에 대한 정밀한 통찰에서 나온 것입니다. 선은 사랑에 속하고, 사랑은 생명을 낳는 근원입니다. 그래서 선은 ‘열매’로 표현됩니다. 반면 진리는 이해에 속하고, 이해는 분별하고 확장하는 기능을 합니다. 그래서 진리는 ‘번성’으로 표현됩니다. 이 둘은 분리될 수 없지만, 작용 방식은 다릅니다.
에스겔의 본문에서 ‘수가 많음’(multiplication)이 먼저 나오고, ‘번성’(fruitfulness)이 뒤에 나오는 이유는 매우 중요합니다. 이 글이 이미 거듭난 상태가 아니라, ‘거듭나고 있는 상태’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듭남의 초기에는 진리가 먼저 늘어납니다. 사람은 먼저 알아야 하고, 분별해야 하며, 진리의 틀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다음에야 선이 그 진리 안에 들어와 생명으로 작용합니다. 그래서 과정의 언어에서는 진리가 먼저, 선이 나중에 나옵니다.
이해와 의지, 신앙과 사랑이 서로 결합했을 때, 그 사람을 ‘결혼한 땅’이라 합니다. 여기서 땅은 언제나 인간을 뜻하며, 특히 외적 인간과 내적 인간, 곧 겉 사람과 속 사람이 하나로 정렬된 상태를 뜻합니다. 땅이 결혼한다는 표현은, 더 이상 갈라진 상태가 아니라 하나의 질서 안에 들어왔다는 뜻입니다. 이때 인간은 더 이상 황무지가 아니라, 주님이 기뻐하시는 거처가 됩니다.
이 결합에서 나오는 산출물의 명명법도 매우 일관됩니다. 진리에서 나온 것은 ‘아들’, 선에서 나온 것은 ‘딸’이라 합니다. 이는 성별 개념이 아니라, ‘출처의 차이’를 말하는 언어입니다. 이해에서 나온 것은 아들이고, 의지에서 나온 것은 딸입니다. 말씀에서 교회가 딸이나 처녀로 불리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는 진리 이전에 선의 애정으로 규정되기 때문입니다.
겨자씨 비유는 이 전체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 줍니다. 처음의 선은 가장 작습니다. 왜냐하면 그 선은 아직 ‘자기에게서 나온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듭남의 과정 속에 있기 때문에, 그 작은 선은 자랍니다.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면서 풀로, 나무로 자라고, 마침내 그 안에 수많은 진리, 이해의 내용들이 깃들게 됩니다. 기억 지식은 이때 비로소 살아 있는 가지가 됩니다.
마지막으로, 이 글은 영적 인간의 상태를 ‘전투’로 규정합니다.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말씀은 지배욕이나 권력의 언어가 아니라, ‘내적 질서 회복의 언어’입니다. 아직 완전한 천적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외적인 것들과의 긴장과 싸움이 남아 있습니다. 이 싸움 속에서 진리와 선은 점점 더 결합하고, 인간은 다음 단계로 나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1:27)
AC.54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남자와 여자’(male and female)가 속뜻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태고교회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말씀의 속뜻이 그들의 후손들 가운데서 사라지자, 이 아르카나 역시 함께 사라졌습니다. 그들에게 결혼은 가장 큰 행복과 기쁨의 근원이었고, 그래서 그들은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결혼에 비유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그 안에 담긴 행복을 느끼고 인식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또한 내적인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오직 내적인 것들, 즉 속의 것들로만 기뻐했습니다. 겉의 것들은 눈으로 보기만 했고, 그것들이 무엇을 나타내는지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겉의 것들은 그것들이 그들의 생각을 속의 것들, 곧 내적인 것들로, 그리고 거기서 천적인 것들로, 결국에는 그들의 모든 것 되신 주님께로 돌이키게 해줄 때에만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오는 천상의 결혼에서 그들은 자기들의 결혼이 주는 행복을 인식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영적 인간 안에 있는 이해(understanding)를 남자라 불렀고, 의지(will)를 여자라 불렀으며, 이 둘이 하나로 작동할 때, 그것을 결혼(marriage)이라 불렀습니다. 그 교회로부터 이런 식으로 말하는 방식이 전해져 내려왔는데, 그로 인해 선에 대한 애정으로 교회를 가리켜 ‘딸’(daughter)과 ‘처녀’(virgin), 곧 ‘시온의 처녀’(virgin of Zion), ‘예루살렘의 처녀’(virgin of Jerusalem)라 하였고, 또한 ‘아내’(wife)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 주제들에 대해서는 다음 장 23절과 3장 15절에서 더 보게 될 것입니다.What is meant by “male and female,” in the internal sense, was well known to the most ancient church, but when the interior sense of the Word was lost among their posterity, this arcanum also perished. Their marriages were their chief sources of happiness and delight, and whatever admitted of the comparison they likened to marriage, in order that in this way they might perceive its felicity. Being also internal men, they were delighted only with internal things. External things they merely saw with the eyes, but thought of what was represented. So that outward things were nothing to them, save as these could in some measure be the means of causing them to turn their thoughts to internal things, and from these to celestial things, and so to the Lord who was their all, and consequently to the heavenly marriage, from which they perceived the happiness of their marriages to come. The understanding in the spiritual man they therefore called male, and the will female, and when these acted as a one they called it a marriage. From that church came the form of speech which became customary, whereby the church itself, from its affection of good, was called “daughter” and “virgin”—as the “virgin of Zion,” the “virgin of Jerusalem”—and also “wife.” But on these subjects see the following chapter, at verse 23, and chapter 3, verse 15.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창2:23)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3:15)
해설
이 글은 창세기1장에 나오는 ‘남자와 여자’를 인간 생물학이나 사회 제도로 읽지 않고, ‘인간의 내적 구조의 언어’로 읽도록 이끕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가 이미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즉 그들은 ‘남자’와 ‘여자’를 외적 성별로 보기 이전에, ‘이해력과 의지’, 곧 진리와 선의 관계로 인식했습니다. 그러나 말씀의 속뜻이 상실되면서, 이 깊은 인식도 함께 사라졌습니다.
태고교회에서 결혼이 가장 큰 기쁨과 행복의 근원이었던 이유는, 그들이 결혼을 단순한 제도가 아니라 ‘천국 결혼의 반영’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 글에서 말하는 천국 결혼은 주님 안에서의 사랑과 지혜, 선과 진리의 결합을 뜻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결혼을 통해 이 결합을 직접 체험했고, 그래서 결혼은 그 자체로 기쁨이자 영적 인식의 창이었습니다.
이 글에서 매우 중요한 점은, 태고교회 사람들이 외적인 것들에 머물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눈으로 사물을 보되, 그것이 무엇을 나타내는지를 생각했습니다. 다시 말해, 사물 그 자체는 목적이 아니라 ‘표지와 통로’였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 곧 겉의 것들은 생각을 내적인 것들, 곧 속에 속한 것들로, 그다음에는 천적인 것들로, 궁극적으로는 주님께로 이끄는 계단이었습니다. 이 구조 안에서 결혼 역시 외적 관계를 넘어, 천상의 질서를 바라보게 하는 창이 되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영적 인간 안에서의 남자와 여자를 명확히 정의합니다. 이해력은 남자이고, 의지는 여자입니다. 이는 우열이나 역할 분담의 문제가 아니라, ‘기능적 상응’입니다. 이해력은 진리를 받아들이고 분별하며 비추는 역할을 하고, 의지는 그 진리를 사랑으로 받아 생명으로 삼는 역할을 합니다. 이 둘이 따로 움직일 때는 아직 미완의 상태이며, 이 둘이 하나로 작동할 때를 비로소 ‘결혼’이라 합니다.
이 결혼은 인간 내부에서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이해력에서 본 진리가 의지에서 사랑으로 받아들여질 때, 인간 안에 내적 결혼이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남의 핵심 구조이며, 앞선 단락들에서 말해 온 형상과 모양의 완성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는 단순한 인류 번성의 명령이 아니라, ‘인간이 어떻게 하나가 되는가’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이 글은 또한 성경 전체에 퍼져 있는 중요한 언어 습관의 뿌리를 설명합니다. 교회를 ‘딸’, ‘처녀’, ‘아내’로 부르는 표현은 단순한 시적 장치가 아니라, 교회를 ‘선에 대한 애정의 주체’로 보았기 때문에 생겨난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진리를 아는 집단이기 이전에, 선을 사랑하는 존재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아내’이며,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결혼의 언어로 묘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