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아토스산 수도 공동체를 방문했을 때, 깊은 인상을 받았던 한 러시아 수도사의 삶을 소개합니다. 자동자막에는 이름이 ‘티흔’, ‘티온’ 등으로 흔들려 나오지만, 생애의 연대와 특징을 대조해 보면 인물은 러시아 출신의 아토스 수도자 ‘티혼 골렌코프(Tikhon Golenkov, 1884-1968), 흔히 ‘캅살라의 티혼’ 또는 ‘아토스의 티혼’이라 불리는 인물로 보입니다. 그는 1884년 러시아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수많은 수도원을 순례했고, 이후 아토스산에 정착하여 수십 년 동안 매우 엄격한 금욕과 기도생활을 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훗날 아토스의 성 파이시오스에게 영적 지도를 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영상 초반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자신이 머문 수도원을 아토스에서 매우 오래되고 큰 수도원 가운데 하나로 소개합니다. 자동자막의 ‘이비로 수도원’은 아마 ‘이비론 수도원(Iviron Monastery)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비론은 10세기 말 조지아계 수도사들에 의해 세워졌으며, 오늘날 아토스산 20개 주요 수도원 가운데 서열상 세 번째에 해당하는 유서 깊은 수도원입니다. 다만 티혼이 평생 이비론 수도원의 대표 수도사였다고 이해하기보다는, 아토스산 여러 지역에서 수행하다가 특히 캅살라와 카룰리아 등 은수 지역에서 살았던 러시아 수도자로 보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강문호 수도사가 티혼의 삶에서 가장 먼저 강조하는 것은 그의 극단적인 금욕입니다. 밤을 새워 기도하고, 졸음을 이기기 위해 몸을 불편하게 하며, 딱딱한 곳에서 잠을 자고, 매우 적은 음식을 먹고, 추위와 더위를 견디며, 옷도 최소한으로 소유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실제 전승에서도 티혼은 매우 엄격한 금욕가로 묘사됩니다. 긴 시간 기도하고, 누더기에 가까운 옷을 입으며, 단순한 음식으로 살고, 거친 환경에서 수행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런 삶을 접하면 자연스럽게 ‘ 정도로 자신을 절제해야 진정한 수도자인가?’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에서 외적 금욕과 내적 거듭남을 반드시 구별하게 합니다. 금식과 절제, 그리고 고독은 인간의 욕망을 돌아보고 마음을 주님께 집중시키는 유익한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적게 먹는 것 자체가 사람을 거룩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딱딱한 침대에서 잔다고 자기 사랑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며, 추위를 견딘다고 proprium이 자동으로 죽는 것도 아닙니다. 외적 절제는 내적 사랑의 질서가 바뀌도록 돕는 수단일 때 비로소 영적 의미를 갖습니다.

 

영상에서 티혼은 ‘탐식은 모든 죄가 들어오는 현관’이라는 취지로 말하며, 먹는 것을 극도로 줄였다고 소개됩니다. 욕망을 절제해야 한다는 뜻에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육체적 욕망에 끌려갈수록 그것이 다른 욕망과 결합하여 삶 전체를 지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자연적 욕구 그 자체를 악으로 보지 않습니다. 먹고 마시고 쉬고 몸을 돌보는 것은 창조질서에 속합니다. 문제는 그것이 목적이 되어 사람을 지배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듭남은 음식 자체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음식과 쾌락을 자기 삶의 중심으로 삼으려는 무질서한 사랑을 바른 위치로 돌려놓는 일입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은 극도로 금식하면서도 ‘나는 이렇게 절제하는 사람’이라는 자기 의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좋은 음식을 감사히 먹으면서도 탐욕에 지배되지 않고 이웃과 나누며 살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영성의 척도는 얼마만큼 먹느냐가 아니라 무엇이 그 사람의 지배적인 사랑인가에 있습니다. 금욕은 사랑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한 수단이지, 그 자체가 천국의 상태는 아닙니다.

 

그런데 영상이 중반으로 들어가면서 티혼의 모습 가운데 훨씬 따뜻한 부분이 나타납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티혼이 동물들을 매우 사랑했다고 전합니다. 쥐가 많은 곳에서 살면서도 동물들을 해치지 않고, 여우와 가까이 지내며, 멧돼지가 와서 새끼를 낳으면 보호하고, 사냥꾼이 오면 다른 곳으로 보내어 동물을 지켜 주었다는 일화들입니다. 실제 티혼의 전승에서도 그가 산짐승들과 친숙하게 지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매우 흥미롭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동물 세계 역시 인간의 애정과 상응한다고 설명합니다. 자연계의 동물들은 각기 다른 종류의 애정과 성향을 표상하며, 창조세계 전체는 영적 세계의 질서를 반영합니다. 그러므로 동물을 사랑한다는 것이 곧 높은 영성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생명을 함부로 대하지 않고, 창조된 존재를 사랑과 책임으로 돌보는 태도에는 분명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특히 티혼이 자기에게 다가오는 동물을 단순한 방해물로 여기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 대했다는 전승은 그의 금욕과는 또 다른 얼굴을 보여 줍니다. 영성이 자기 몸을 혹독하게 다루는 데만 머문 것이 아니라 주변 생명을 부드럽게 바라보는 방향으로 나타났다면, 바로 그 부분에서 우리는 금욕의 열매를 볼 수 있습니다. 참된 영성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다른 존재를 더 거칠게 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온유하게 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강문호 수도사가 영상에서 ‘하나님과 합일의 관계’라고 표현하는 대목과도 연결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인간이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하나가 되는 식의 ‘합일’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인간은 영원히 피조물이고, 주님은 창조주이십니다. 그러나 사람의 의지(will)와 이해성(understanding)이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면서 주님과 ‘결합(conjunction)될 수는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즐겨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자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지혜를 받아 그분과 결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도의 목표도 특별한 황홀경이나 신비체험 자체라기보다 주님의 선과 진리가 사람의 삶을 실제로 다스리게 되는 데 있다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 결합이 깊어지면 사람은 더 많이 사랑하고, 더 진실해지고, 더 온유해지며, 자기 공로를 덜 주장하게 됩니다. 결국 주님과의 결합은 삶의 열매로 드러나야 합니다.

 

영상에는 티혼의 초상화를 마른 우물에 던져 넣고 기도했더니 샘물이 솟아올라 초상화가 물 위로 떠올랐다는 기적 이야기도 나옵니다. 이런 이야기는 수도원 전승에서 성인의 거룩함을 기억하는 방식 가운데 하나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런 기적담을 굳이 하나하나 해부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오히려 그 이야기의 중심이 무엇인지 보면 됩니다. 수도원 공동체가 자신들이 존경하던 수도자의 삶을 기억하며, 주님께 도움을 구했고, 그 경험을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가 반복해서 보여 주듯, 기적 자체가 영성의 증거는 아닙니다. 물이 솟았는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수도자의 삶에서 어떤 선이 흘러나왔는가입니다. 어떤 사람이 놀라운 기적과 연결되어 있어도 자기 사랑과 지배욕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것이 천국적인 상태를 보증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아무 기적도 없지만 일평생 조용히 악을 피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했다면 그 삶은 주님 앞에서 훨씬 깊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인의 기적담은 사람을 숭배하게 하기보다 그 사람을 통하여 일하신 주님께 시선을 돌리게 할 때, 가장 건강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영상 후반에는 아토스 수도원의 식사 장면이 소개됩니다. 여러 수도사가 함께 앉고, 수도원장이 기도한 뒤 식사를 시작하며, 식사 중에는 말을 하지 않고 한 사람이 성경을 읽는다고 합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이를 ‘입으로는 육신의 양식을 먹고, 귀로는 영의 양식을 먹는다’고 표현합니다. 이 모습은 수도생활의 한 가지 아름다운 질서를 보여 줍니다. 자연적인 필요와 영적인 필요를 서로 적대시키지 않고, 한 식탁 안에서 함께 놓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은 본래 서로 적이 아닙니다. 자연적인 것은 영적인 것이 표현되고 실현되는 바탕입니다. 육체가 음식을 먹는 동안 마음이 말씀을 듣는다는 장면은 그래서 상징적으로도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식사시간에 반드시 성경을 소리 내어 읽어야 한다는 형식이 아니라, 자연적 삶이 영적 삶의 질서 아래 놓여 있어야 한다는 원리입니다. 먹고 일하고 쉬고 대화하는 평범한 일상 자체가 주님의 선과 진리를 표현하는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영상에는 포도주를 마시는 수도사들의 모습도 자연스럽게 등장합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자신은 술을 마시지 않아 옆의 미국인에게 잔을 건네주었다는 일화를 웃으며 소개합니다. 이 장면은 오히려 수도 전통을 지나치게 엄숙하고 비현실적인 것으로만 보지 않게 해 줍니다. 수도자들도 먹고 마시고 웃고 서로를 배려하며 살아가는 인간입니다. 영성은 인간성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연적인 삶을 바른 질서 안에 두는 것입니다.

 

이번 영상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티혼의 극단적인 수행이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오히려 더 오래 붙들고 싶은 것은 그 뒤에 나타나는 온유함입니다. 밤을 새워 얼마나 오래 기도했는가보다 동물을 어떻게 대했는가, 얼마나 적게 먹었는가보다 다른 존재를 어떻게 바라보았는가, 얼마나 많이 고행했는가보다 자기 삶에서 주님을 어떻게 드러냈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금욕은 겉사람을 다루지만 거듭남은 속 사람의 사랑을 바꿉니다.

 

여기에서 proprium의 문제도 다시 등장합니다. 수도생활은 세상의 재산과 명예를 버리는 삶이지만, 그것만으로 proprium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나는 다른 사람이 하지 못하는 수행을 한다’, ‘나는 평생을 수도에 바쳤다’, ‘나는 특별한 영적 경험을 했다’는 형태로 proprium이 다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깊은 수도는 외적인 소유를 버리는 것보다 자신이 행한 선과 수행을 자기 공로로 소유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참된 선은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인간은 그것을 마치 자기 힘으로 행하는 것처럼 힘써 살아야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 선의 근원이 자신이 아니라 주님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티혼의 삶에서 우리가 보아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도 ‘얼마나 대단한 수도를 했는가?’가 아니라 ‘ 수행을 통해 자기 자신은 얼마나 뒤로 물러나고, 주님의 선이 얼마나 드러났는가?’일 것입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아토스산을 직접 방문한 경험 자체에도 큰 감동을 표현합니다. 다른 문화와 전통 속에서 오랜 세월 수도생활을 이어 온 사람들을 직접 보고, 함께 먹고, 이야기하고, 그들의 기도와 생활을 가까이에서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다른 기독교 전통을 이렇게 직접 만나는 것은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개신교가 익숙하게 여겨 온 방식만이 기독교 영성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몸으로 발견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오래된 전통이라고 해서 자동으로 더 깊은 것은 아니며, 극단적인 수행이라고 해서 자동으로 더 거룩한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언제나 같은 기준으로 돌아갑니다. ‘이것이 사람 안의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자라게 하는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바른 위치로 돌려놓는가? 선과 진리가 실제 삶의 쓰임으로 나타나는가?’ 이것이 수도원이든 교회든, 금식이든 기도든, 설교든 신학이든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는 기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티혼의 삶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혹독한 금욕의 정도만은 아닐 것입니다. 젊은 시절 수많은 수도원을 찾아다니면서도 단순히 ‘좋은 수도원’을 찾기보다 자신을 제대로 지도해 줄 영적 스승을 찾았고, 이후 오랜 수도생활을 거쳐 다른 사람을 지도하는 위치에 이르렀다는 점 역시 중요합니다. 실제 자료에서도 티혼은 훗날 아토스의 성 파이시오스에게 영적 영향을 준 인물로 기억됩니다.

 

이것은 영적 성숙이 개인의 완성으로 끝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과 진리는 결국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한 쓰임으로 흘러가야 합니다. 혼자 깊은 동굴에서 기도하는 시간도 귀할 수 있지만, 그 기도가 사람을 더 부드럽고 지혜롭게 만들어 다른 사람을 선으로 이끄는 쓰임으로 이어질 때 그 열매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이번 영상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담는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티혼의 엄격한 금욕은 자체가 거룩함의 척도라기보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벗어나 주님께 온전히 향하려는 하나의 수도적 수단이었으며, 수행의 참된 열매는 극단적인 고행보다 온유함과 사랑, 그리고 다른 존재를 위한 쓰임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영상에서 ‘극한의 수도’를 바라보며 한마디를 더 덧붙이고 싶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가장 깊은 금식은 음식만 줄이는 것이 아니라 proprium 먹고 싶어 하는 자기 명예와 자기 공로를 줄이는 것이며, 가장 깊은 청빈은 물건을 적게 갖는 데서 끝나지 않고, 자신에게 있는 모든 선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않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외적 금욕이 내적 거듭남으로 이어질 때, 수도는 특별한 사람들의 기이한 삶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각자의 자리에서 걸을 수 있는 ‘내적 수도’의 길을 보여 주게 됩니다.

 

 

 

SY.83, 강문호 수도사, ‘아토스 이비론 수도원, 주는 것과 받는 것을 잊지 말라’ (20200106)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가 소개하는 곳은 아토스의 이비론 수도원입니다. 아토스에 얽힌 전승과 이비론 수도원의 오래된 역사, 그리고 무엇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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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80, 강문호 수도사, ‘그리심산 수도원, 예수님의 길을 걸으며 비로소 나그네를 보다’ (20191231)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이스라엘의 여러 수도원을 찾아다니던 중 그리심산의 수도원을 방문했던 경험에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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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3)

 

AC.348

땅의 소산(fruit of the ground)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를 뜻한다는 것은 이어지는 내용에서도 분명합니다.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는 신앙이 없는 행위이며, 자체로 죽은 행위입니다. 그것들은 오직 사람에게만 속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에 관하여 예레미야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That by thefruit of the groundare meant the works of faith without charity, appears also from what follows; for the works of faith devoid of charity are works of no faith, being in themselves dead, for they are solely of the external man. Of such it is written in Jeremiah:

 

1여호와여 내가 주와 변론할 때에는 주께서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평안함은 무슨 까닭이니이까 2주께서 그들을 심으시므로 그들이 뿌리가 박히고 장성하여 열매를 맺었거늘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들의 마음은 머니이다, 4언제까지 땅이 슬퍼하며 지방의 채소가 마르리이까 짐승과 새들도 멸절하게 되었사오니 이는 주민이 악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그가 우리의 나중 일을 보지 못하리라 함이니이다 (12:1-2, 4) Wherefore doth the way of the wicked prosper? Thou hast planted them, they also have taken root; they have gone on, they also bear fruit; thou art near in their mouth, and far from their reins; how long shall the land mourn, and the herb of every field wither? (Jer. 12:12, 4)

 

입에는 가까우나 마음에는 멀다(near in the mouth, but far from the reins) 것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을 뜻하며, 그들에 관하여 땅이 슬퍼한다(the land mourns) 말합니다. 같은 선지서에서는 그러한 행위를 행위의 열매(fruit of works)라고 부릅니다. Near in the mouth, but far from the reinsdenotes those who are of faith separated from charity, concerning whom it is said thatthe land mourns. In the same prophet such works are called thefruit of works”:

 

9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10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17:9, 10) The heart is deceitful [supplantativum] above all things, and it is desperate, who can know it? I Jehovah search the heart, I try the reins, even to give to every man according to his ways, and according to the fruit of his works. (Jer. 17:910)

 

미가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In Micah:

 

땅은 주민의 행위의 열매로 말미암아 황폐하리로다 (7:13) The land shall be desolate because of them that dwell therein, for the fruit of their works. (Micah 7:13)

 

그러한 열매(fruit) 열매가 아니며, 그러한 행위(work)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열매와 뿌리가 모두 멸망하는 것을 아모스에서는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That suchfruitis no fruit, or that theworkis dead, and that both fruit and root perish, is thus declared in Amos:

 

내가 아모리 사람을 그들 앞에서 멸하였나니 키는 백향목 높이와 같고 강하기는 상수리나무 같으나 내가 위의 열매와 아래의 뿌리를 진멸하였느니라 (2:9) I destroyed the Amorite before them, whose height was like the height of the cedars, and he was strong as the oaks; yet I destroyed his fruit from above, and his roots from beneath. (Amos 2:9)

 

시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And in David:

 

왕이 그들의 후손을 땅에서 멸함이여 그들의 자손을 사람 중에서 끊으리로다 (21:10) Their fruit shalt thou destroy from the earth, and their seed from the sons of man. (Ps. 21:10)

 

그러나 체어리티의 행위는 살아 있으며, 그것들에 관하여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는다(take root downward, and bear fruit upward) 선언합니다. 이사야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But the works of charity are living, and of them it is declared that theytake root downward, and bear fruit upward;as in Isaiah:

 

유다 족속 중에 피하여 남은 자는 다시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으리니 (37:31) The remnant that is escaped of the house of Judah shall again take root downward, and bear fruit upward. (Isa. 37:31)

 

위로 열매를 맺는다(bear fruit upward) 것은 체어리티로부터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열매를 같은 선지서에서는 아름답고 영화로운 열매(fruit of excellence)라고 부릅니다. Tobear fruit upwardis to act from charity. Such fruit is called thefruit of excellence,in the same prophet:

 

그날에 여호와의 싹이 아름답고 영화로울 것이요 땅의 소산은 이스라엘의 피난한 자를 위하여 영화롭고 아름다울 것이며 (4:2) In that day shall the shoot of Jehovah be beautiful and glorious, and the fruit of the earth excellent and comely for them that are escaped of Israel. (Isa. 4:2)

 

그것은 또한 구원의 열매(fruit of salvation)이며, 같은 선지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부릅니다. It is also thefruit of salvation,and is so called by the same prophet:

 

하늘이여 위로부터 공의를 뿌리며 구름이여 의를 부을지어다 땅이여 열려서 구원을 싹트게 하고 공의도 함께 돋게 할지어다 여호와가 일을 창조하였느니라 (45:8) Drop down, ye heavens, from above, and let the skies pour down righteousness; let the earth open, and let them bring forth the fruit of salvation, and let righteousness spring up together; I Jehovah will create it. (Isa. 45:8)

 

해설

AC.348은 앞의 AC.346에서 간략하게 밝힌 가인의 땅의 소산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본격적으로 설명합니다. AC.346에서는 그것이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를 뜻한다고 했고, 이제 AC.348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러한 행위를 신앙이 없는 행위이며 자체로 죽은 행위라고 단언합니다. 이것은 상당히 강한 표현입니다. 가인에게 행위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인은 땅을 경작하고 소산을 거두어 여호와께 제물로 드립니다. 외적으로 보면 행위도 있고 예배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묻는 것은 행위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그 행위 안에 어떤 생명이 있는가입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으로부터 나온 행위는 겉으로 아무리 종교적이고 선해 보여도 신앙의 참된 생명이 없기 때문에 죽은 행위라고 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그것들은 오직 사람에게만 속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외적인 행위 자체가 나쁘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체어리티는 결국 자연계의 실제 삶에서 말과 행동과 쓰임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굶주린 사람을 먹이고, 어려운 사람을 돕고, 자기 직분을 성실하게 수행하며, 예배하고 봉사하는 일은 모두 겉 사람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문제는 그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과 결합되어 있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는 외적인 형태만 있을 뿐 그것을 안에서 살아 있게 하는 사랑의 생명이 없습니다. 따라서 AC.348 사람에게만 속한다는 말은 외적 행동을 낮추는 말이 아니라, 외적 행동이 내적 생명과 결합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12:1-2, 4가 첫 번째 증거로 인용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악한 사람들도 뿌리가 박히고 장성하여 열매를 맺습니다.외적으로만 보면 생명과 번영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곧이어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들의 마음은 머니이다라는 결정적인 말씀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입으로는 주님을 말할 수 있고, 신앙을 고백할 수 있으며, 외적인 종교 행위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신앙이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있지 않다면 입에 있는 신앙과 내적인 생명 사이에는 거리가 생깁니다. 따라서 열매를 맺는다는 표현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열매가 살아 있는 선의 열매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어떤 내적 상태에서 그 열매가 나왔는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이어지는 렘17:9-10과 미7:13도 같은 사실을 다른 각도에서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시고 각 사람에게 그의 길과 행위의 열매에 따라 갚으십니다. 미가에서도 땅이 주민의 행위의 열매로 말미암아황폐하게 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말씀에서 열매라는 말이 나온다고 해서 언제나 자동으로 좋은 행위를 뜻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악과 거짓에서도 그것에 맞는 행위가 나오며, 말씀은 그것 역시 행위의 열매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열매라는 외적 명칭이 아니라 그 열매의 질입니다. 이것은 가인의 땅의 소산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소산이 있다는 것만으로 그것이 주님께 받아들여지는 살아 있는 열매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2:9과 시21:10에서 스베덴보리는 그러한 열매가 결국 멸망한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아모스에서는 위의 열매아래의 뿌리가 함께 언급됩니다. 여기서 AC.348이 직접 강조하는 것은 체어리티가 없는 행위는 참된 의미에서 살아 있는 열매가 아니며 결국 그 열매와 뿌리가 함께 사라진다는 사실입니다. 뿌리와 열매의 이미지를 통해 행위에는 그것을 낳는 근원이 있다는 점도 자연스럽게 생각할 수 있지만, 이 번호에서 뿌리를 특정한 영적 기능과 일대일로 대응시켜 지나치게 세분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논지는 훨씬 단순하고 강합니다.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에서 나오는 행위는 외적인 모양을 가지고 한동안 자라고 열매를 맺는 것처럼 보여도 그 안에 영적인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AC.348은 죽은 행위를 설명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37:31부터는 정반대의 열매, 곧 살아 있는 체어리티의 행위로 전환합니다.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으리니라는 말씀에 대해 스베덴보리는 위로 열매를 맺는 것은 체어리티로부터 행하는 이라고 매우 명확하게 풀이합니다. 이것이 AC.348 전체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 가운데 하나입니다. 참된 열매는 단순히 외적으로 좋은 일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로부터행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인의 땅의 소산과 이사야의 위로 맺는 열매는 둘 다 겉으로는 열매이지만 영적으로는 전혀 다릅니다. 하나는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에서 나온 죽은 행위이고, 다른 하나는 체어리티로부터 나온 살아 있는 행위입니다.

 

4:2와 사45:8은 이 살아 있는 열매의 성질을 더욱 밝힙니다. 이사야는 그것을 아름답고 영화로운열매라고 하고, 이어 구원의 열매라고 표현합니다. 특히 사45:8의 마지막 여호와가 일을 창조하였느니라는 말씀은 체어리티로부터 행한다는 것이 인간이 자기 힘으로 선한 마음을 만들어 선행한다는 뜻이 아님을 분명하게 해 줍니다. 모든 참된 선과 체어리티의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선을 주시고 인간은 그것을 자유롭게 받아 삶으로 행합니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행위의 생명은 인간 자신의 공로나 선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인간은 마치 자기에게서 행하는 것처럼 선을 행하지만, 그 선의 근원은 주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스베덴보리가 반복해서 가르치는 질서입니다.

 

이 점에서 AC.348행위를 평가하는 매우 섬세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단순히 행위를 많이 하는 사람이 좋은 신앙인이다라고 말하지도 않고, 반대로 행위는 중요하지 않고 신앙만 있으면 된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와 행위가 하나의 살아 있는 질서 안에 있어야 합니다. 신앙의 진리는 사람이 무엇이 선인지 알도록 하고 체어리티를 향하게 하며, 주님께서 주시는 체어리티는 실제 삶에서 행위라는 열매를 맺습니다. 따라서 참된 행위는 신앙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신앙이 체어리티와 결합하여 밖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반대로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도 외적인 행위를 만들어 낼 수 있지만,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죽은 행위라고 합니다.

 

이것은 종교적인 행위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예배, 헌금, 봉사, 구제, 전도, 설교, 성경 공부와 같은 일은 모두 귀한 쓰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348은 그 외적인 모양만 보고 그 행위의 영적 성질을 판단하지 말라고 합니다. 같은 행위라도 자기 의와 명예와 인정, 다른 사람보다 낫다는 의식에서 행할 수도 있고, 주님께 받은 것을 이웃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려는 체어리티에서 행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다른 사람의 내적 동기를 완전히 알 수 없으므로 이 말씀을 타인의 행위를 심판하는 도구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나는 이것을 하고 있는가?’, ‘내가 하는 일이 정말 이웃의 참된 유익을 향하고 있는가?를 자신에게 묻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특히 AC.348은 앞의 AC.344-346과 함께 읽을 때 더욱 선명해집니다. AC.344에서는 신앙에 관한 모든 지식과 교리의 목적이 체어리티라고 했습니다. AC.345에서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참된 신앙이 아니라고 했고, AC.346에서는 그러한 신앙에서도 행위와 예배가 나올 수 있음을 보았습니다. 이제 AC.348은 그 행위의 영적 성질을 밝힙니다.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에서 나온 행위는 아무리 열매처럼 보여도 죽은 행위이고, 체어리티에서 나온 행위는 살아 있는 열매입니다. 따라서 창4에서 문제 되는 것은 가인이 아무 열매도 맺지 못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가인에게도 땅의 소산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열매에 체어리티의 생명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AC.348열매의 생명을 결정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답은 열매의 크기나 외형이나 사람들의 평가가 아니라, 그것이 체어리티로부터 나오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 체어리티의 근원은 다시 주님께 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이 사람 안에서 신앙의 진리와 결합되고 실제 삶의 쓰임으로 나타날 때 행위는 살아 있는 열매가 됩니다. 그러므로 이 번호는 우리에게 단순히 많은 선행을 하라고 말하기보다 행위의 생명은 어디에서 오는가?라고 묻습니다. 가인의 땅의 소산과 이사야의 위로 맺는 열매는 겉으로 모두 열매이지만 그 생명은 전혀 다릅니다. 바로 그 차이를 분별하는 것이 AC.348의 핵심입니다.

 

 

 

AC.348, 창4:3, 가인의 ‘땅의 소산’ - 체어리티 없는 죽은 행위와 살아 있는 열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4:3) AC.348‘땅의 소산’(fruit of the ground)이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를 뜻한다는 것은 이어지는 내용에서도 분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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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7, 창4:3, ‘세월이 지난 후에 - 신앙이 사랑에서 점점 멀어질 때’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4:3) AC.347‘세월이 지난 후에’(end of days, ‘날들의 끝에’)가 ‘시간이 흐른 뒤’를 뜻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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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3)

 

AC.347

세월이 지난 후에(end of days, 날들의 끝에’) 시간이 흐른 뜻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명합니다. 처음에는, 그리고 교리 안에 단순함이 있었을 때에는, 여기서 가인(Cain)이라 하는 교리가 후에 그렇게 것만큼 받아들일 없는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그들이 자기들의 자손을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a man Jehovah, 여호와인 사람’)라고 했다는 사실에서도 분명합니다. 따라서 처음에는 신앙이 날들의 끝에’, 시간이 흐른 뒤에 이르렀을 때만큼 사랑에서 멀리 분리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참된 신앙의 모든 교리에서 흔히 일어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That by theend of daysis signified in process of time, is evident to all. At first, and while there was simplicity in it, the doctrine here calledCaindoes not appear to have been so unacceptable as it became afterwards, as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they called their offspring aman Jehovah. Thus at first faith was not so far separated from love as at theend of days,or in process of time; as is wont to be the case with every doctrine of true faith.

 

해설

AC.347은 바로 앞 AC.346세월이 지난 후에라는 표현을 설명하면서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의 분리가 한순간에 완성된 것이 아니라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심해졌다는 사실을 밝혀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처음에 그 교리 안에 단순함이 있었을 때에는 여기서 가인이라 하는 교리가 후에 그렇게 된 것만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처음에는 신앙이 시간이 흐른 뒤에 이르렀을 때만큼 사랑에서 멀리 분리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가인 해석을 더욱 정교하게 만들어 줍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의미하지만, 그 분리가 처음부터 마지막 상태와 똑같은 정도였던 것은 아닙니다. 이미 신앙을 사랑 안에 있는 것으로만 보지 않고 자체로 하나의 으로 구별하여 인식하는 방향이 시작되었지만, 처음에는 사랑과의 거리가 아직 그렇게 멀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거리가 더욱 벌어졌고, 결국 체어리티 없는 신앙의 행위와 예배가 나타나는 상태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단순함(simplicity)을 단순히 지식이 적거나 사고가 미숙한 상태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AC.347의 문맥에서는 아직 신앙에 관한 교리가 자기 자신을 독립적인 것으로 강하게 세우면서 사랑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초기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이 초기 상태를 곧 가인은 처음에는 온전한 참된 신앙이었다고 표현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AC.338에서 이미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에게서는 신앙이 자체로 하나의 으로 인식되고 인정되기 시작했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AC.340에서도 이전에는 사랑 안에서 퍼셉션으로 알고 있던 신앙에 속한 것들을 따로 꺼내어 구별된 교리로 만들기 시작했다고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가인의 성격은 처음부터 이미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다만 AC.347이 새롭게 알려 주는 것은 그 분리가 처음부터 최종적인 형태로 완성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점차 심화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에서 구별분리를 다시 정확히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과 사랑을 개념적으로 구별하여 이해하는 것 자체가 악은 아닙니다. 특히 후대의 인간에게는 진리를 배우고 신앙에 관한 교리를 분명하게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구별된 신앙이 사랑과 결합되어 있어야 한다는 본래 질서를 잃고, 점차 사랑과 별개로 존재할 수 있는 독립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데 있습니다. AC.347의 표현을 빌리면 문제는 신앙이 사랑에서 점점 멀리 분리되는것입니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간격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자신을 사랑과 체어리티에 의해 살아 있게 되는 것으로 보지 않고 그 자체로 충분한 것으로 여기기 시작하면, 그 거리는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커질 수 있습니다. 결국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이고, 마침내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밀어내는 상태에까지 이를 수 있습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라는 표현은 바로 이 점에서 중요합니다. AC.346에서는 이 말을 우선 단순하게 시간이 흐른 라고 설명했습니다. AC.347은 이제 그 시간이 흐르는 동안 신앙과 사랑의 관계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신앙이 후대만큼 사랑에서 멀리 분리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분리가 심해졌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창4:3에서 가인은 땅의 소산을 여호와께 제물로 가져옵니다. AC.346에서 이것은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와 거기에서 나온 예배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세월이 지난 후에는 단순히 달력상의 어느 기간이 지나갔다는 사실만을 알려 주는 데 그치지 않고, 이 문맥에서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의 상태가 시간이 흐르면서 어떻게 더 멀리 사랑에서 분리되었는지를 이해하게 해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초기 상태가 후대만큼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는 아니었다는 근거로 그들이 자기들의 자손을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고 했다는 사실을 듭니다. 이것은 앞의 AC.338AC.340에서 이미 자세히 살펴본 창4:1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표현을 근거로 초기의 가인은 완전한 신앙이었다고 되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직 신앙이 사랑에서 아주 멀리 떨어지지 않았고, 그들이 신앙에 속한 것을 주님과 관련하여 인식하는 상태가 남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상태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한 덩어리의 완성된 악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신앙을 따로 인식하기 시작한 작은 분리가 있었고, 그 분리가 점차 깊어져 나중에는 신앙이 체어리티와 멀리 떨어지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AC.347의 마지막 문장은 이 문제를 가인이라는 특정 교리에만 한정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참된 신앙의 모든 교리에서 흔히 일어나는 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엄중한 경고입니다. 참된 교리는 처음부터 거짓이기 때문에 타락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신앙에 속한 것을 담고 있는 교리도 그것을 받아들이고 사용하는 사람들의 상태에 따라 본래의 사랑과 생명에서 점점 멀어질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주님을 더 잘 알고, 말씀을 더 바르게 이해하며, 이웃에게 선을 행하도록 돕기 위해 교리를 분명하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관심이 진리에 따라 어떻게 것인가?에서 누가 교리를 정확하게 알고 고백하는가?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그 교리가 자기 집단의 우월성을 증명하거나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사용된다면, 교리의 문장은 그대로 남아 있어도 그것을 움직이는 사랑의 성질은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교리가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타락한다거나, 교리를 명료하게 정리하고 보존하는 것 자체가 위험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문제는 교리 그 자체보다 그것과 사랑의 관계입니다. 참된 교리를 보존한다는 것은 문장을 정확하게 전승하는 것과 함께 그 교리가 지향하는 생명도 보존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고, 자기 안의 악을 죄로 보아 피하게 하며,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와 실제 쓰임으로 나아가게 하기 위해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교리를 정확하게 보존하면서도 그 교리가 체어리티와 결합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교리적 정확성을 지키는 일과 사랑을 지키는 일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본래 함께 가야 합니다. 진리는 선을 보호하고 방향을 주며, 선은 진리에 생명을 줍니다.

 

이 원리는 개인의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경고가 됩니다. 처음 말씀을 배우거나 AC를 공부할 때에는 주님을 알고 싶다’, ‘ 삶을 고치고 싶다’, ‘말씀의 속뜻을 통하여 주님의 뜻을 따르고 싶다는 마음으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식이 쌓이고 익숙해지면서 어느 순간 관심이 나는 이것을 안다는 데로 옮겨 갈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자신이 가진 지식을 다른 사람을 평가하고 자신의 영적 우월성을 확인하는 데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진리 자체가 거짓으로 변한 것은 아니지만, 그 진리와 우리의 사랑 사이의 관계가 달라진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AC.347은 다른 교회나 다른 시대의 교리 타락을 분석하는 도구가 되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의 신앙을 살피는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특히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AC 번역과 해설 작업에도 이 원리는 매우 직접적입니다. 처음에는 말씀의 속뜻을 더 정확하게 알고 그것을 삶과 목회에 사용하기 위해 시작한 공부가 시간이 지나면서 정확한 번역’, ‘정확한 상응’, ‘정확한 교리를 갖추는 것 자체에만 만족하게 될 위험은 언제든 있습니다. 물론 정확성은 중요하며 결코 가볍게 여길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정확성이 우리를 주님께 더 가까이 이끌고, 자기 안의 proprium을 더 분명히 보게 하며,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는 체어리티와 쓰임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AC.344에서 말한 신앙의 목적을 놓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진리를 보존하는 일과 그 진리의 생명을 보존하는 일을 함께 붙들어야 합니다.

 

결국 AC.347이 보여 주는 것은 처음의 상태가 끝의 상태를 자동으로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은 처음부터 후대와 똑같이 사랑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신앙을 사랑과 별개의 것으로 세우는 방향이 계속되면서 그 거리는 점점 커졌습니다. 그래서 세월이 지난 후에이르러서는 체어리티가 없는 행위와 예배가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신앙의 생명을 한 번 얻고 끝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진리는 계속 사랑을 향하고, 신앙은 계속 체어리티와 결합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AC.347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나는 처음에 무엇을 믿었는가?에 머물지 않습니다. ‘시간이 흐른 지금, 내가 가진 신앙은 사랑과 가까워지고 있는가, 아니면 점점 멀어지고 있는가?입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라는 짧은 표현 속에 바로 이 엄중한 자기 성찰이 담겨 있습니다.

 

 

 

AC.348, 창4:3, 가인의 ‘땅의 소산’ - 체어리티 없는 죽은 행위와 살아 있는 열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4:3) AC.348‘땅의 소산’(fruit of the ground)이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를 뜻한다는 것은 이어지는 내용에서도 분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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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6, 창4:3, ‘체어리티 없는 신앙에서도 행위와 예배는 나올 수 있습니다’(AC.346-349)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And at the end of days it came to pass that Cain brought of the fruit of the ground an offering to Jehovah. (창4:3) AC.346‘날들의 끝에’(end of days)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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