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519에서 에녹 교회의 사람들이 한 일은 매우 특별합니다. 그들은 태고교회와 그 뒤를 이은 교회들에서 ‘퍼셉션의대상이었던것들’을 모아 교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주님으로부터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퍼셉션할 수 있었는데, 왜 그것을 굳이 교리로 만들어야 했을까요? 살아 있는 퍼셉션이 있다면 기록된 교리나 외적인 기준은 오히려 불필요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AC.464에서도 스베덴보리는 당시 사람들에게는 퍼셉션이 있었으므로 에녹이 만든 교리가 실제로 사용되지는 않았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에녹의 교리는 현재의 필요보다 ‘미래의필요’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창5의 교회들을 따라오면서 우리는 그 변화가 한순간에 일어난 것이 아님을 보았습니다. 최초의 태고교회에서는 선으로부터 진리를 명료하게 퍼셉션했지만, 후대 교회로 내려가면서 퍼셉션은 점차 더 일반적이고 흐릿해졌습니다. 게난에 이르면 그 변화가 분명해지고, 마할랄렐에서는 쓰임에서 오는 기쁨보다 진리들에서 오는 기쁨을 더 좋아하는 상태가 나타났으며, 야렛은 마할랄렐과 에녹 사이의 중간 상태에 있었습니다. 인간이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내적으로 알아볼 수 없게 되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AC.519의 한 표현이 중요해집니다. 에녹의 사람들이 교리를 만든 목적은 그것이 ‘무엇이선이고무엇이진리인지를아는기준’이 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퍼셉션이 살아 있을 때에는 사람 안에 그러한 분별의 기준이 살아 있었습니다. 선을 사랑하는 가운데 주님으로부터 진리를 퍼셉션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퍼셉션이 사라진 뒤에도 사람이 자기 생각과 욕망을 선과 진리의 기준으로 삼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전 교회들이 주님으로부터 퍼셉션했던 것들을 보존하여, 후대 사람들이 그것을 통해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배울 수 있게 하는 새로운 방식이 필요했습니다. 에녹의 교리는 바로 이러한 필요에 응답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퍼셉션에서 교리로의 변화에는 두 측면이 함께 있습니다. 인간 편에서 보면 이것은 분명 이전보다 낮아진 상태를 보여 줍니다. 살아 있는 퍼셉션으로 알던 것을 이제는 외적으로 주어진 가르침을 통해 배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섭리라는 관점에서 보면 전혀 다른 모습이 나타납니다. 인간이 이전의 내적 능력을 잃어 간다고 해서 주님께서 선과 진리에 이르는 길까지 닫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받을 수 있는 방식에 맞추어 그 길을 새롭게 마련하십니다. 직접 퍼셉션할 수 있을 때에는 퍼셉션으로 인도하시고, 그것이 사라져 갈 때에는 이전에 주신 선과 진리를 교리의 형태로 보존하여 후대가 그것을 통해 배울 수 있게 하십니다. 인간의 상태는 낮아져도 주님의 인도하심은 끊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리’ 자체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중요한 통찰을 줍니다. 에녹의 교리는 인간이 머리로 만들어 낸 추상적인 신학 체계에서 출발하지 않았습니다. 그 재료는 앞선 교회들이 실제로 ‘퍼셉션했던것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먼저 주님으로부터 받은 살아 있는 선과 진리가 있었고, 그다음 그것이 교리의 형태로 정리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본래의 질서는 ‘교리에서생명으로’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받은생명이교리로보존되는것’이었습니다. 이후 사람들이 그 교리를 배우게 되었을 때에도 목적은 단순히 많은 진리를 아는 데 있지 않고, 그 진리를 통해 다시 선을 알고 선한 삶으로 나아가는 데 있었습니다.
이 점은 AC.519가 ‘하나님과동행하다’를 단순히 ‘교리를알다’라고 하지 않고, ‘신앙의교리에따라가르치고사는것’이라고 설명하는 데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에녹에게 교리는 박물관에 보관된 과거의 퍼셉션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알고, 그것을 가르치며, 그에 따라 살아가기 위한 기준이었습니다. 따라서 교리가 삶에서 분리되는 순간 에녹이 교리를 만든 본래 목적에서도 멀어지게 됩니다. 진리를 많이 알고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만으로는 ‘하나님과동행함’이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 진리가 삶의 길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에는 오늘날 말씀과 교리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돌아보게 하는 중요한 적용도 있습니다. 우리는 태고교회 사람들처럼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직접 퍼셉션하는 상태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내마음에이렇게느껴진다’, ‘내안에서이런확신이든다’는 것 자체를 진리의 최종 기준으로 삼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말씀과 말씀으로부터 나온 참된 교리를 통해 자신의 생각과 욕망을 살펴야 합니다. 에녹의 교리가 필요해진 이유 자체가 인간의 내적 퍼셉션이 더 이상 안전한 기준이 될 수 없게 되어 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퍼셉션을 오늘날 개인의 직감이나 강한 내적 확신과 곧바로 동일시하여 그것을 말씀이나 교리보다 앞세우는 것은 태고교회의 퍼셉션을 오히려 거꾸로 이해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반대편의 위험도 있습니다. 말씀과 교리를 정확하게 알고 있으면서 그것을 삶과 분리하는 것입니다. 앞서 마할랄렐 교회에서 보았듯이 쓰임의 기쁨보다 진리들에서 오는 기쁨을 더 좋아하기 시작하는 것 자체가 이미 질서의 변화를 보여 주었습니다. 교리는 선과 진리를 분별하고 그것에 따라 살도록 주어진 것이지,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는 만족을 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교리가 퍼셉션을 대신하게 된 이후에도 주님의 목적은 변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지식으로 채우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통해 선으로 인도하고 마침내 그 선이 삶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에녹은 태고교회의 쇠퇴 과정 가운데 있으면서도 동시에 주님의 놀라운 보존의 섭리를 보여 주는 교회입니다. 인간에게서 어떤 내적 능력이 사라져 갈 때 주님께서는 그와 함께 선과 진리까지 사라지게 두지 않으십니다. 한 시대가 직접 받을 수 있었던 것을 다음 시대가 받을 수 있는 형태로 옮겨 보존하십니다. 퍼셉션으로 받았던 것이 교리가 되고, 그 교리가 후대에게 선과 진리를 분별하는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녹의 출현은 단순히 ‘퍼셉션의시대가끝나고교리의시대가시작되었다’는 교회사적 변화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상태가 달라질 때마다 그 상태에 맞는 방법으로 계속 다가오시며, 사람이 다시 선과 진리를 알고 그에 따라 살 수 있도록 길을 마련하시는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 줍니다. 에녹이 ‘하나님과동행하였다’는 말씀 안에는 바로 이러한 주님의 보존과 인도하심이 담겨 있습니다. (AC.518-519심화1)
개신교 신앙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 인간이십니다. 그분은 신성에 있어서는 성부와 동일한 본질을 지니시고, 인성에 있어서는 죄를 제외하고 우리와 같은 인간의 본성을 지니셨다는 것입니다. 이 두 본성은 한 인격 안에 연합되어 있지만 서로 섞이거나 변하지 않으며, 분리되거나 나뉘지도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이해는 교회사에서 ‘위격적연합’(hypostaticunion)이라 불리며, 대부분의 개신교 교단에서 정통 기독론의 핵심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여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모두 진지하게 받아들이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이 가르침을 살펴보면 한 가지 근본적인 질문이 생깁니다. 주님께서 인간으로 태어나신 뒤 십자가와 부활을 거쳐 이루신 영화는 과연 무엇을 변화시켰을까요? 신성과 인성은 단지 한 인격 안에 결합되어 있을 뿐, 각각의 본성으로 영원히 남아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주님께서는 자신이 취하신 인성을 실제로 신성하게 하심으로써 신성과 인성이 완전히 하나인 신적 인성을 이루신 것일까요? 이 질문은 단순히 두 본성의 관계를 설명하는 신학적 용어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 우리가 예배하는 부활하신 주님의 인성이 과연 어떤 인성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먼저 전통적인 기독교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451년 칼케돈 공의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분이시며 참 하나님이자 참 인간이시라고 고백하면서, 두 본성이 ‘혼합없이,변화없이,분할없이,분리없이’ 연합되어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앞의 두 표현은 신성과 인성이 뒤섞이거나 한 본성이 다른 본성으로 바뀌는 것을 부정하고, 뒤의 두 표현은 그리스도를 두 인격으로 나누거나 신성과 인성을 서로 떨어뜨리는 것을 부정합니다. 따라서 칼케돈 신조는 예수님 안에 신과 인간이라는 두 인격이 따로 존재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두 본성의 고유한 특성을 보존하면서도 한 분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지키려는 교리입니다. 이 신조가 형성된 역사적 배경에는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다가 그분의 참된 인성을 약화시키거나, 반대로 신성과 인성을 지나치게 분리하여 그리스도의 인격적 통일성을 훼손할 위험을 경계하려는 노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과 비교할 때에도 전통 교리가 신성과 인성을 단순히 느슨하게 결합된 두 실체로 이해한다고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진정한 쟁점은 그 연합의 깊이와 완성, 특히 주님의 영화 이후 인성의 상태에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스베덴보리 역시 신성과 인성이 단순히 뒤섞인다는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주의교리’(DoctrineoftheLord, DL, 1763) 35항에서 그는 주님께서 어머니에게서 받으신 인간 본성이 신적 본질로 그대로 변하거나 신적 본질과 혼합되는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설명합니다. 이 점에서는 칼케돈 신조와 중요한 접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는 같은 항에서 주님께서 어머니에게서 받은 인성을 점차 벗으시고, 그분 안에 계신 신성으로부터 새로운 인성을 입으셨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이 ‘신적인성’(DivineHuman)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화는 어머니에게서 받은 유한한 인간 본성이 신적 본질과 섞여 신성이 되는 과정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그 인성에 속한 것을 점차 벗으시고, 자신의 신성으로부터 나온 인성을 입으심으로써 인성 자체가 신성하게 되는 과정입니다. 여기서 전통적인 두 본성 교리와 스베덴보리의 가르침 사이에 결정적인 차이가 드러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부활하신 주님의 인성은 신성과 연합되어 있으면서도 여전히 별개의 유한한 인간 본성으로 남아 있는 인성이 아니라, 완전히 영화된 신적 인성입니다.
이러한 영화의 과정을 이해하려면 주님께서 세상에 계시는 동안 겪으신 두 상태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DL.35와 ‘참된기독교’(TrueChristianReligion, TCR, 1771) 104항에서 주님의 지상 생애에 ‘비움’ 또는 낮아지심의 상태와 영화의 상태가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주님께서는 어머니에게서 받은 인성 안에 계실 때 시험을 받으시고 고통을 겪으셨으며, 아버지께 기도하시고 자신을 아버지보다 낮은 분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신성과 인성의 결합이 이루어지는 영화의 상태에서는 아버지와 자신이 하나이며, 아버지께서 자신 안에 계시고 자신도 아버지 안에 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서로 다른 두 하나님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주님 안에 계신 신성과 아직 영화되어 가는 인성 사이의 관계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설명입니다. 요14:10에서 주님께서 아버지께서 자신 안에 계신다고 말씀하시고, 요10:30에서 아버지와 자신이 하나라고 선언하신 것도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시험을 이기실 때마다 어머니에게서 받은 인성에 속한 것을 벗으시고 자신의 신성으로부터 나온 인성을 입으셨으며, 십자가의 마지막 시험과 부활을 통해 이 과정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영화는 주님의 지상 생애에 부수적으로 일어난 변화가 아니라 성육신과 구속의 목적을 완성하는 결정적인 역사입니다.
여기서 성경의 부활 본문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눅24:39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손과 발을 보라고 하시며, 자신은 살과 뼈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요20:27에서는 도마에게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확인하라고 하십니다. 이러한 본문들은 부활하신 주님이 단지 비물질적인 영으로만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실제 인성을 지니신 분임을 보여 줍니다. 전통적인 기독론은 이를 부활 이후에도 주님의 참된 인성이 보존된다는 중요한 근거로 이해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신적 인성으로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러한 방식으로 자신을 나타내실 수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분은 일반적인 인간처럼 물질적인 육체를 무덤에 남겨 두고 영으로만 부활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인성 자체가 영화되었기 때문에 무덤도 비어 있었으며, 그분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 말씀들이 전통적인 두 본성 교리를 저절로 반박하는 것은 아닙니다. 양쪽 모두 부활하신 주님이 실제로 살아 계신 한 분 그리스도임을 고백하지만, 그분의 부활한 인성이 어떤 본성을 지니는지에 관해 서로 다르게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의 해석에서 중요한 것은 부활이 단순한 육체의 소생이 아니라 주님의 인성이 완전히 신성하게 된 영화의 완성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차이는 스베덴보리가 사용하는 영혼과 몸의 비유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TCR.98-101에서 그는 주님 안의 신성과 인성이 인간 안의 영혼과 몸처럼 하나라고 설명합니다. 영혼과 몸은 서로 구별되지만 두 사람이 아니며, 하나의 인격을 이룹니다. 마찬가지로 주님 안에서 성부는 그분의 내적인 신성이고, 성자는 그 신성에서 비롯된 인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주장은 단순히 신성과 인성이 한 인격 안에 공존한다는 것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는 주님의 신성이 영혼처럼 인성 안에 거하시고, 인성이 영화됨으로써 신성과 완전한 하나를 이루었다고 가르칩니다. 일반 인간의 영혼과 몸은 각각 유한하지만, 주님의 경우 그분의 내적인 생명은 영원하신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인성도 영화의 과정을 통해 신적 인성이 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하나가되었다’는 말은 신성과 인성이 서로 뒤섞여 구별할 수 없는 어떤 제삼의 본성이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성이 인성 안에, 인성이 신성 안에 완전하게 결합하여 한 분 주님을 이루었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것은 두 본성의 단순한 병존이 아니라 신성과 인성의 살아 있는 완전한 하나 됨입니다.
이 가르침은 주님께서 오늘도 인간과 어떻게 관계하시는가 하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골2:9는 그리스도 안에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다고 말씀하며, 요14:9에서는 주님께서 자신을 본 사람이 아버지를 보았다고 선언하십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이 말씀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우리에게 나타나신 주님이 서로 다른 신적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 인성을 영화하셨기 때문에 인간은 그분의 신적 인성 안에서 보이지 않는 신성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만일 주님의 인성을 영원히 신성과 구별되는 유한한 인간 본성으로만 생각한다면, 신앙의 실제적인 사고 속에서 주님의 신성과 인성을 서로 다른 차원에 놓을 위험이 있습니다. 물론 전통적인 기독교가 반드시 그러한 분리를 가르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칼케돈 신조는 그것을 명시적으로 금지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한 인격이라는 고백에도 불구하고 신성과 인성을 실제 사고에서 분리해 생각하는 경향을 비판하며, 부활하신 주님의 인성 자체가 신성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분의 인성은 우리가 신성에 도달하기 위해 잠시 통과해야 하는 외적인 껍질이 아닙니다. 바로 그 신적 인성 안에 하나님의 모든 충만함이 계시며, 우리는 그분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예배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오해를 경계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주님께서 어머니에게서 받은 인성을 벗으셨다고 말할 때, 그것을 주님의 인간적인 경험과 사랑과 지혜가 아무 의미 없이 폐기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지상에서 겪으신 배고픔과 피로, 고난과 시험, 십자가의 고통은 실제적인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분은 인간의 삶을 외적으로 흉내 내신 것이 아니라 참으로 인성을 취하셔서 인간의 조건 안에서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영화가 그 인성을 단순히 인간적인 상태로 남겨 두는 것이 아니라, 그 인성 안에 있던 유한한 것들을 벗으시고 신적인 것으로 완성하신 과정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신적 인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그분의 인간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그 인성을 통해 지옥의 세력을 이기시고, 이제 신적 인성 안에서 모든 사람에게 직접 다가오실 수 있는 분이 되셨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의 영화 교리는 단순한 기독론적 차이를 넘어 주님의 구속과 구원, 그리고 인간과 주님 사이의 결합을 이해하는 근본적인 토대가 됩니다.
결국 ‘예수님의신성과인성은한인격안에있지만서로섞이지않는두본성이다’라는 말에서 보존해야 할 진리는 주님께서 참 하나님이자 참 인간으로 세상에 오셨으며, 그분이 한 인격이시라는 사실입니다. 또한 신성과 인성이 서로 섞여 본래의 의미를 잃는다는 생각을 경계하는 것 역시 중요한 진리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바로잡아야 할 부분은 신성과 인성이 영화 이후에도 각각의 본성으로 구별된 채 남아 있다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단지 신성과 인성을 한 인격 안에 결합하신 데서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어머니에게서 받은 인성을 점차 벗으시고 자신의 신성으로부터 나온 인성을 입으심으로써, 마침내 인성 자체를 완전히 신성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주님의 영화이며, 신적 인성의 완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단지 ‘예수님안에신성과인성이어떻게함께존재하는가?’가 아닙니다. ‘주님께서인간으로오셔서고난과시험을이기시고부활하신결과,그분의인성에는과연어떤일이일어났는가?그리고지금내가믿고사랑하며예배하는부활하신주님의인성은여전히유한한인간본성인가,아니면하나님의모든충만함이거하시는신적인성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질문을 통해 우리의 시선을 신성과 인성이 완전히 하나가 되신 주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이끕니다. (PR.004해설)
‘세례를받아천주교신자가되면하느님의자녀가된다.’ 이 말은 천주교 신앙생활에서 매우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가르침입니다. 천주교에서는 세례를 단순히 신앙 공동체에 가입하는 의식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세례를 통하여 원죄가 씻기고 새로운 생명을 받으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결합하고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난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아직 말을 하지 못하고 신앙을 이해할 능력이 없는 유아에게도 세례를 베풉니다. 여기에는 인간이 자신의 공로로 구원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먼저 은총을 베푸신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근본적인 질문이 생깁니다. 세례라는 외적인 의식이 이루어지는 순간, 인간의 내적인 생명에도 실제적인 영적 출생이 완성되는 것일까요? 물로 머리를 씻고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과, 주님을 사랑하고 악을 피하며 선을 행하는 새로운 생명이 인간의 내면에 형성되는 것은 같은 사건일까요? 더 나아가 ‘하느님의자녀가된다’라는 말은 새로운 종교적 신분이 부여되었다는 뜻입니까, 아니면 주님의 생명을 받아 실제로 그분을 닮은 존재로 변화되어 간다는 뜻입니까? 이 질문의 목적은 세례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세례가 무엇을 의미하며, 그 세례가 가리키는 참된 영적 출생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밝히는 데 있습니다.
먼저 천주교의 공식 가르침을 정확하게 살펴보겠습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CatechismoftheCatholicChurch)1265항은 세례를 받은 사람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하느님의 양자가 되며, 그리스도의 지체와 성령의 성전이 된다고 가르칩니다. 이어 1266항은 세례를 통하여 성화의 은총과 의화의 은총이 주어지고, 하느님을 믿고 바라고 사랑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덕과 성령의 선물이 부여된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1272항은 세례가 그리스도께 속한다는 지워지지 않는 영적인 인호를 남긴다고 가르칩니다. 이처럼 천주교는 세례를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이 실제로 역사하는 성사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세례받은 사람이라면 이후 어떻게 살아도 자동으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세례를 통하여 받은 은총은 신앙생활 속에서 성장해야 하며, 인간은 그 은총에 응답하고 죄를 피하며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또한 천주교는 유효한 세례를 받은 다른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신자들도 그리스도와 일정한 친교 안에 있다고 인정합니다. 따라서 이 명제를 ‘천주교신자만하느님의자녀가된다’라는 배타적인 주장으로 이해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실제 쟁점은 세례라는 성사적 행위 자체가 인간에게 새로운 영적 신분과 은총을 부여한다는 천주교의 이해가,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거듭남의 질서와 어떻게 다른가 하는 데 있습니다.
성경은 세례와 새로운 출생을 긴밀하게 연결합니다. 요3:3에서 주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시고, 5절에서는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가르치십니다. 천주교는 이 말씀을 세례의 필요성과 성사적 은총을 설명하는 중요한 근거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6절에서 주님께서는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영적 출생이 자연적인 사건이나 외적인 신분 변화와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합니다. 또한 요1:12–13에서는 주님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며, 그들이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났다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새로운 출생의 근원은 인간의 종교적 행위나 제도적 소속이 아니라 주님 자신입니다. 물론 이러한 말씀들이 세례와 거듭남의 관계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물과 성령, 외적인 씻음과 내적인 새 생명의 관계가 무엇인지를 더욱 깊이 살펴보도록 이끕니다. 세례가 영적인 출생을 나타내는 거룩한 의식이라는 사실과, 그 의식의 시행이 곧 영적 출생의 완성이라는 주장은 구별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기독교’(TrueChristianReligion, TCR, 1771) TCR.667–691에서 세례의 의미와 쓰임을 체계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는 세례의 첫 번째 쓰임이 기독교회로 들어가는 입문과 동시에 영계의 기독교인들 가운데 연결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TCR.677–680). 두 번째 쓰임은 구속자이시며 구원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인정하며 그분을 따르게 하는 것이고(TCR.681–683), 세 번째이자 궁극적인 쓰임은 인간이 거듭나는 것입니다(TCR.684–687). 이 세 가지를 함께 살펴보면 스베덴보리가 세례를 단순한 종교적 가입 절차로 축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세례는 주님께서 세우신 거룩한 의식이며 자연계에서 행해지는 세례는 영계의 질서와도 실제적인 관계를 맺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첫 번째 쓰임과 세 번째 쓰임을 구별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세례를 통하여 기독교회 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실제로 거듭나는 것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전자는 새로운 영적 삶을 향한 입문이며, 후자는 그 입문이 가리키는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세례가 인간을 거듭남의 길로 인도할 수는 있지만, 세례받았다는 사실만으로 거듭남이 이미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례의 참된 가치는 그 의식 자체에 머물지 않고, 그것이 인간을 주님께 인도하여 어떤 새로운 생명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가에 있습니다.
이러한 구별은 유아 세례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TCR.677에서 스베덴보리는 아직 합리적으로 사고할 능력이 없고 신앙에 관한 것을 이해하거나 받아들일 수 없는 유아들도 세례를 받는다는 사실을 언급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세례의 첫 번째 쓰임이 기독교회로 들어가는 입문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고 설명합니다. 아직 선과 악을 분별하거나 의식적으로 회개할 능력이 없는 아이가 세례받는 순간 이미 영적인 거듭남을 완성했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유아 세례에 실제적인 영적 쓰임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세례받은 아이들이 영계에서 기독교인들과 연결되며, 주님께서 천사들을 통하여 그 아이들이 장차 주님에 대한 신앙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보호하고 준비시키신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자연계의 세례가 영계와 무관한 단순한 표시가 아님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아이가 성장하여 자신의 이해와 의지를 사용하기 시작하면, 그의 영적 상태는 점차 자신이 무엇을 믿고 사랑하며 어떤 삶을 선택하는가와 깊이 연결됩니다. 따라서 세례받았다는 사실이 이후의 모든 삶을 대신해 주지는 않습니다. 유아 세례는 거듭남의 완성이 아니라 거듭남을 향한 거룩한 시작이며, 주님께서는 그 아이가 성장하는 동안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도록 계속 인도하십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상응론이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천국의비밀’(Arcana Coelestia, AC, 1749–1756) AC.4255은 세례가 교회와 교회에 속한 것들로 들어가는 입문을 나타내며, 동시에 거듭남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세례의 물은 영적으로 진리를 의미하고, 물로 씻는 행위는 진리를 통하여 인간의 악과 거짓이 제거되는 정결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자연적인 물이 육체의 더러움을 씻는다고 해서 인간의 의지에 자리 잡은 자기 사랑과 탐욕과 미움과 교만을 실제로 씻어 내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내적인 악은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진리의 빛으로 자신의 악을 발견하며, 주님의 도움을 구하여 그 악을 죄로 여겨 피할 때 점차 제거됩니다. 이 과정에서 진리는 단순히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알려 주는 지식에 머물지 않고, 인간의 이해를 밝히고 의지를 변화시키는 수단이 됩니다. 따라서 세례의 물이 나타내는 참된 씻음은 자연적인 물질 자체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신적 진리가 인간 안에서 실제로 역사할 때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이것은 세례가 단순한 상징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세례에는 자연계와 영계를 연결하는 실제적인 영적 쓰임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세례가 나타내는 영적 실재와 세례라는 외적인 행위를 서로 혼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례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이 주님의 진리를 통하여 정결해지고 실제로 거듭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자녀가된다’라는 말의 가장 깊은 의미는 무엇일까요? 스베덴보리는 TCR.684에서 세례의 궁극적인 쓰임을 거듭남이라고 설명하면서, 인간을 실제로 거듭나게 하시는 분이 구속자이시며 구원자이신 주님이라고 가르칩니다. 인간은 스스로 새로운 영적 생명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그는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를 받아들여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배우고, 그 진리에 따라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려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실제로 악을 제거하시고 선한 생명을 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이러한 변화는 단번에 완성되는 종교적 신분의 변경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자유와 합리성을 사용하는 가운데 평생 계속되는 거듭남의 과정입니다. 또한 스베덴보리는 ‘천국과지옥’(HeavenandHell, HH, 1758) HH.329–345에서 어린아이들이 죽음 이후 주님의 인도 아래 천국에서 양육받고 성장하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이 가르침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일이 특정한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완성되거나 제한되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세례를 받은 아이뿐 아니라 세례를 받지 못한 아이도 주님의 사랑과 섭리 밖에 있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인간의 구원을 원하시며, 각 사람을 그가 처한 상태와 환경에 따라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자녀라는 표현은 단순히 종교적인 소속을 가리키는 신분 명칭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그 가장 깊은 의미는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사랑과 지혜를 반영하는 존재로 실제로 변화되어 간다는 데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천주교의 세례론과 스베덴보리의 가르침 사이에는 인정해야 할 공통점과 중요한 차이가 함께 존재합니다. 양쪽 모두 세례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며, 그 의미가 단순한 외적 가입 절차보다 깊다고 인정합니다. 또한 세례받은 사람이 이후에도 신앙 안에서 성장하고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천주교는 세례 자체가 성화의 은총과 의화의 은총을 부여하고, 인간을 하느님의 양자로 만들며, 지워지지 않는 영적인 인호를 남긴다고 가르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세례의 실제적인 영적 쓰임을 인정하면서도, 세례의 첫 번째 쓰임인 교회로의 입문과 궁극적인 쓰임인 거듭남을 명확하게 구별합니다. 이 차이는 단순히 세례를 중요하게 여기는가 그렇지 않은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성사의 시행 자체가 인간 안에서 어떤 영적 변화를 이루는가, 그리고 그 성사가 가리키는 실제적인 거듭남이 어떻게 완성되어 가는가의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참된 영적 출생은 세례라는 외적인 의식의 시행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이해와 의지를 새롭게 하시고, 그가 점차 악을 피하고 선을 사랑하는 존재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 문제는 실제 신앙생활에도 중요한 경고를 줍니다. 어떤 사람이 어린 시절 세례를 받고 평생 천주교 신자로 살아왔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는 자신의 세례명을 소중히 여기고 주일마다 미사에 참석하며 여러 성사생활에 충실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그의 신앙생활에 귀중한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일상생활에서 다른 사람을 멸시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악을 행하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나는세례받은하느님의자녀다’라는 사실에 안심한다면 어떻겠습니까? 물론 그러한 사람의 최종적인 영적 상태를 우리가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필요한 것이 세례받았다는 사실에 대한 반복적인 확인이 아니라, 세례가 가리키는 참된 회개와 거듭남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또한 이 문제는 천주교에만 해당하지 않습니다. 개신교 신자 역시 자신이 세례를 받았거나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고백한 순간 구원과 하나님의 자녀 됨이 이미 확정되었다고 생각하면서, 이후의 실제적인 거듭남을 부차적인 문제로 여길 수 있습니다. 심지어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도 자신이 세례와 거듭남의 영적 의미를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영적으로 더 성숙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진리를 알고 있다는 사실과 그 진리가 자신의 삶 안에서 실제로 살아 있다는 사실은 서로 다릅니다. 세례의 영적 의미를 이해했다면, 그 이해는 자신을 높이는 지식이 아니라 주님 앞에서 더욱 겸손하게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빛이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주님께서 세례를 통하여 인간에게 보여 주시는 거룩한 목적을 생각해야 합니다. 물은 육체를 씻지만, 주님의 진리는 인간의 이해를 밝히고 그가 자신의 악을 발견하도록 돕습니다. 세례는 한 번 이루어지는 외적인 의식일 수 있지만, 주님의 진리로 마음을 씻고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는 과정은 평생 계속됩니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가볍게 여겨서도 안 되지만, 그 사실을 영적 성장의 완성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세례는 주님께서 인간을 새로운 삶으로 부르시는 거룩한 시작이며,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은 자신의 이해와 의지를 사용하여 진리를 배우고 악을 피하며 선을 행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그 과정에서 인간을 실제로 거듭나게 하십니다. 요1:12-13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의 자녀 됨은 결국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는 일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종교적 신분을 바꾸는 일보다 훨씬 깊으며, 주님의 생명이 인간 안에 받아들여져 새로운 사랑과 새로운 삶이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참으로 물어야 할 질문은 ‘나는언제세례를받았는가?’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나는그세례가나타내는거듭남의길을지금도걸어가고있는가?주님께서주시는진리로자신의악을발견하고피하며,주님의사랑을받아이웃을위한선한쓰임으로나아가고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참된 생명은 외적인 의식에 대한 기억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 안에 이루어 가시는 실제적인 거듭남 속에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SL.RC.003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