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03.심화

 

1. 상징 상응

 

상징 상응을 같은 뜻으로 사용해도 되나요? 위 해설 끝단에 이 원칙을 붙들고 있을 때, 창세기의 상징들은 더 이상 혼란이 아니라 질서가 됩니다라는 표현에 제가 상응들이라는 표현을 첨가, 창세기의 상징들, 상응들은이라고 했는데, 이래도 되나 해서 묻는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두 단어를 완전히 같은 뜻으로 써 버리는 것은 조심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상징들, 상응들은’처럼 병렬로 함께 쓰는 것은 가능하지만, 엄밀히는 같은 개념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겹치지만 다른 층위’를 강조하는 표현으로 이해하시는 것이 가장 적절합니다.

 

상징’은 비교적 넓은 말입니다. 어떤 것이 다른 어떤 것을 ‘가리킨다’, ‘표현한다’는 일반적인 의미입니다. 문학에서도, 설교에서도, 일상에서도 쓸 수 있는 말입니다. 반면 ‘상응’은 상응 개념으로, 스베덴보리 체계 안에서는 훨씬 더 엄밀합니다.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에 ‘실제적 대응 관계’, 곧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생명의 질서 속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단순히 의미를 빗대는 것이 아니라, 존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 핵심입니다.

 

그래서 차이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상징’은 의미를 가리키는 표현이고, ‘상응’은 그 의미가 성립되는 실제 관계입니다. 상징은 언어의 층위이고, 상응은 존재의 질서입니다.

 

이 기준으로 보면, 목사님께서 쓰신 ‘창세기의 상징들, 상응들은’이라는 표현은 충분히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강조 효과가 있습니다. ‘겉으로는 상징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실제 상응 질서가 있다’는 뉘앙스를 자연스럽게 담기 때문입니다. 다만 반복 사용 시에는 약간 장황하게 느껴질 수 있으니, 문맥에 따라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더 깔끔할 때도 있습니다.

 

정리하면, 완전히 같은 뜻으로 섞어 쓰는 것은 피하시되, 지금처럼 두 개를 나란히 두어 ‘표현(상징)과 실재(상응)를 함께 짚는 방식’은 오히려 스베덴보리식 글쓰기에서는 아주 적절한 사용입니다.

 

 

 

AC.103, 창2:9, ‘주제가 의미를 결정한다 : 상응 해석의 원리’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3 여기서 ‘나무들’(trees)이 퍼셉션을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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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2:9)

 

AC.103

 

여기서 나무들(trees)이 퍼셉션을 의미하는 이유는, 이 글이 천적 인간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 인간이 다루어질 때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무엇을 주제로 다루느냐에 따라, 그에 대응하여 사용되는 술어의 성격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The reason why “trees” here signify perceptions is that the celestial man is treated of, but it is otherwise when the subject is the spiritual man, for on the nature of the subject depends that of the predicate.

 

해설

 

이 짧은 문장은, 지금까지 읽어 온 모든 상응 해설에 ‘해석 원칙의 열쇠’를 쥐여 주는 매우 중요한 단락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상응이 고정된 사전처럼 기계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같은 ‘나무’라는 표현이라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어떤 인간 상태가 논의되고 있는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핵심 문장은 이것입니다. ‘주제(subject)의 성격에 따라 술어(predicate)의 성격이 달라진다.’

 

지금 창세기 2장은 천적 인간을 다루고 있습니다. 천적 인간은 사랑과 퍼셉션의 상태로 사는 인간입니다. 따라서 이 장에서 등장하는 ‘나무’는 지식이나 교리가 아니라, ‘직접적인 인식, 곧 퍼셉션’을 의미하게 됩니다. 나무가 퍼셉션을 뜻하는 것은 나무라는 상징 때문이 아니라, ‘천적 인간이라는 주제’ 때문입니다.

 

반대로, 만일 같은 ‘나무’라는 말이 영적 인간을 다루는 문맥에서 등장한다면, 그 의미는 달라집니다. 영적 인간에게 중심적인 것은 퍼셉션이 아니라 신앙의 진리, 곧 이해와 교리입니다. 그래서 그 경우의 ‘나무’는 지식, 교리, 혹은 기억 지식과 연결된 의미를 띠게 됩니다. 상응은 대상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결정’됩니다.

 

이 원칙은 성경 해석 전반에 매우 중요한 기준을 제공합니다. 특정 단어 하나를 떼어 놓고, ‘항상 이것은 이것이다’라고 말하는 방식은, 스베덴보리식 해석이 아닙니다. 그는 언제나 묻습니다. ‘지금 여기서 말씀이 다루고 있는 인간의 상태는 무엇인가?’

 

이렇게 보면, AC.102에서 설명된 ‘나무는 퍼셉션’이라는 해석도 절대적 정의가 아닙니다. 그것은 ‘천적 인간을 전제로 할 때에만’ 성립하는 정의입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창세기 2장은 특별합니다. 이 장은 역사나 교리의 설명이 아니라, 인간이 가장 본래적인 상태에 있을 때의 내적 구조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또한, 왜 창세기 1장과 2장이 같은 창조 이야기를 전혀 다른 언어로 말하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주제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1장은 영적 인간의 형성과 질서를, 2장은 천적 인간의 생명과 퍼셉션을 다룹니다. 그래서 같은 자연적 표현이 전혀 다른 깊이와 결을 띱니다.

 

AC.103은 이렇게 말합니다. 상응은 단어에 붙어 있는 꼬리표가 아니라, 말씀이 바라보고 있는 ‘인간 상태 전체에 의해 살아나는 의미’라고 말입니다. 이 원칙을 붙들고 있을 때, 창세기의 상징들, 상응들은 더 이상 혼란이 아니라 질서가 됩니다.  

 

 

심화

 

1.상징상응

 

 

AC.103, 심화 1, ‘상징’과 ‘상응’

AC.103.심화 1. ‘상징’과 ‘상응’ ‘상징’과 ‘상응’을 같은 뜻으로 사용해도 되나요? 위 해설 끝단에 ‘이 원칙을 붙들고 있을 때, 창세기의 상징들은 더 이상 혼란이 아니라 질서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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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4, 창2:9, '퍼셉션과 양심 : 잃어버린 생명의 감각'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4 오늘날에는 퍼셉션(perception)이 무엇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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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2, 창2:9, '두 나무, 두 인식 : 사랑에서 보는가, 지식에서 판단하는가'(AC.102-106)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And out of the ground made Jehovah God to grow every tree desirable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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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2.심화

 

2. 모든 생명의 차원들

 

 AC.102 해설에 복수형 생명들(lives), 이 사랑에서 나오는 모든 생명의 차원들을 포함합니다라는 내용이 나오는데요, 여기 이 사랑에서 나오는 모든 생명의 차원들이라는 게 뭔가요?

 

 

여기서 말하는 ‘생명들(lives)의 복수형은, 하나의 생명이 여러 ‘층위’로 나뉘어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생명은 하나이며, 그 근원은 주님이시지만, 그 생명이 사람 안으로 들어올 때는 단일한 형태로 머무르지 않고, 사람의 존재 전체, 그러니까 의지, 이해, 감정, 사고, 행위에 걸쳐 다양한 방식으로 ‘펼쳐져’ 나타납니다. 그래서 ‘이 사랑에서 나오는 모든 생명의 차원들’이라는 말은, 사랑이라는 하나의 근원에서 흘러나와 인간 안의 여러 영역에 각각 다른 모습으로 작용하는 생명의 양상들을 가리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첫째는 ‘의지의 생명’입니다. 이것은 사랑 그 자체가 자리 잡는 중심이며, 무엇을 기뻐하고, 무엇을 원하느냐를 결정하는 생명입니다. 천적 인간에게서 가장 핵심이 되는 생명으로, 선을 사랑하고 그 안에 머물고자 하는 내적 움직임입니다. 둘째는 ‘이해의 생명’입니다. 이것은 진리를 인식하고 이해하는 능력으로, 사랑에서 흘러나온 빛이 사고의 형태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때의 이해는 단순한 분석이 아니라, ‘보는 것 같은 앎’, 곧 퍼셉션에 가까운 인식입니다.

 

셋째는 ‘감정과 정서의 생명’입니다. 사랑이 의지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기쁨, 평안, 확신, 따뜻함 같은 정서로 퍼져 나가는 차원입니다. AC.92에서 말한 ‘평화의 기쁨’이 바로 이 영역에 해당합니다. 넷째는 ‘이성과 사고의 생명’입니다. 이것은 이미 형성된 이해를 가지고 분별하고 적용하는 기능인데, 천적 상태에서는 이것마저도 사랑을 섬기는 도구로 작용합니다. 다섯째는 ‘행위의 생명’입니다. 말과 행동, 습관과 삶의 방식 속에 나타나는 생명으로, 내적인 사랑과 이해가 외적으로 열매 맺는 차원입니다.

 

이 모든 차원은 서로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의 흐름 안에 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이 먼저 의지에 들어오고, 그 사랑이 이해를 밝히며, 감정을 따뜻하게 하고, 사고를 질서 있게 하며, 결국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생명들’이라고 복수로 말하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생명이 여러 층위로 전개된 것’입니다. 마치 하나의 빛이 프리즘을 통과하며 여러 색으로 펼쳐지는 것과 비슷한 구조입니다.

 

결국 이 표현은, 천적 인간의 생명이 단순히 ‘살아 있다’는 수준이 아니라, 존재 전체가 사랑의 생명으로 가득 차서 각 영역마다 살아 움직이는 상태임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생명나무’가 단수로 끝나지 않고 ‘생명들’로 표현될 때, 그것은 사랑이 중심이 되어 인간 전체를 살리는 ‘다층적이고 충만한 생명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AC.102, 창2:9, '두 나무, 두 인식 : 사랑에서 보는가, 지식에서 판단하는가'(AC.10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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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2, 심화 1, ‘도덕적 시험 장치’

AC.102.심화 1. ‘도덕적 시험 장치’ 위 AC.102 해설 초입에 ‘흔히 우리는 에덴동산의 나무들을 도덕적 시험 장치로만 이해해 왔지만,’이라는 내용이 나오는데요, 이게 구체적으로 어떻게 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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