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1.심화

 

1. 자신을 확증하다(confirms himself)

 

 자신을 확증하다의 해설을 보면, 이는 삶의 경험 속에서 진리와 선이 참됨을 확인해 간다라는 의미라고 하는데요, 이게 무슨 말인가요?

 

AC.11의 ‘자신을 확증하다(confirm oneself)라는 표현은, 스베덴보리 사상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그런데 이 표현은 문자 그대로 보면 마치 ‘자기 생각을 고집스럽게 밀어붙인다’는 뜻처럼 들릴 수 있어서 오해가 생기기 쉽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의미는 조금 다릅니다.

 

먼저 스베덴보리에게서 ‘확증(confirm)이라는 말은 단순한 이론적 동의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어떤 진리를 머리로만 이해하는 단계와, 그것이 실제 삶 속에서 참된 것임을 경험을 통해 점점 분명히 알게 되는 단계는 다릅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말씀을 듣거나 가르침을 통해 ‘이것이 옳다’고 배웁니다. 그러나 그때는 아직 그것이 자기 삶 속에서 살아 있는 진리가 아닙니다. 다만 이해 속에 있는 진리입니다.

 

그다음 단계에서 사람은 그 진리를 실제 삶 속에서 적용해 봅니다. 예를 들어,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들었다고 합시다. 처음에는 그 말이 옳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다른 사람에게 선을 행하고, 정직하게 살고, 남을 해치지 않으려 애쓰면서 살아가다 보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다. 그 사람은 점점 깨닫습니다. ‘, 이렇게 사는 것이 정말 옳구나.’ ‘이것이 진짜 선이구나.’ 이런 깨달음이 경험을 통해 마음에 자리 잡습니다. 이것이 바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확증’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확증한다’는 말은 자기 의견을 억지로 강화한다는 뜻이 아니라, ‘삶 속에서 진리와 선이 실제로 참됨을 확인해 가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진리가 단순한 지식에서 벗어나 삶의 확신이 되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때 진리는 머리의 생각이 아니라, 마음과 삶에 뿌리를 내린 것이 됩니다.

 

AC.11의 문맥에서는 사람이 신앙의 원리로 말하고 행동하면서 점점 진리와 선 안에 자신을 세운다고 설명합니다. 즉 처음에는 신앙이 이해 속 지식일 뿐이지만, 그 신앙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는 동안 그 사람은 점점 그 진리 안에서 자신을 확고히 세우게 됩니다. 이것이 ‘확증’입니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다른 곳에서 ‘거짓을 확증하는 것’도 자주 말합니다. 사람이 어떤 잘못된 생각을 붙들고, 그 생각을 지지하는 근거만 계속 찾으면 그 역시 ‘확증’이 됩니다. 그래서 확증이라는 과정 자체는 중립적입니다. 문제는 무엇을 확증하느냐입니다. 진리를 확증하면 지혜가 깊어지고, 거짓을 확증하면 오히려 더 어두워집니다.

 

처음에는 진리가 ‘배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진리를 따라 살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 그것이 ‘내가 실제로 아는 것’이 됩니다. 바로 그 변화가 ‘확증’입니다. 다시 말해, ‘진리가 지식에서 확신으로 바뀌는 과정’입니다.

 

AC.11에서 말하는 ‘자신을 확증한다’는 것은 자기 생각을 고집하는 태도가 아니라, 신앙의 진리와 선이 삶 속에서 참됨을 드러내면서 사람 안에 점점 확고하게 자리 잡는 과정을 말합니다.

 

 

 

AC.12, 창1 개요, '여섯 번째 상태'

AC.12 여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는 때입니다. 이때 그에게서 나오는 것들을 ‘산 영’(living soul)과 ‘짐승’(beast)이라 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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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 창1 개요, '네 번째 상태'

AC.10 네 번째 상태는 사람이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의 빛을 받는 때입니다. 그는 이전에도 경건하게 말하고 선한 것들을 행했으나, 그것은 신앙과 체어리티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 그가 겪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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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24, 25)

 

AC.47

 

이 말씀들 안에 거듭남에 관한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는 사실은, 앞 절에서 땅이 생물, 가축, 땅의 짐승(the living soul, the beast, and the wild animal of the earth)을 낼 것이라고 말한 반면, 다음 절에서는 순서가 바뀌어 하나님께서 땅의 짐승, 가축(the wild animal of the earth, the beast)을 만드셨다고 말하는 데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이는 사람이 처음에는, 그리고 그가 천적 인간이 될 때까지는, 마치 자기에게서 나온 것처럼 무엇인가를 내놓기 때문인데요, 그래서 이렇게 거듭남은 겉 사람에서 시작되어 속 사람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여기 다른 순서가 나오는 것이며, 겉에 속한 것들이 먼저 언급되는 것입니다. That these words contain arcana relating to regeneration, is evident also from its being said in the foregoing verse that the earth should bring forth “the living soul, the beast, and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whereas in the following verse the order is changed, and it said that God made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and likewise “the beast”; for at first, and afterwards until he becomes celestial, man brings forth as of himself; and thus regeneration begins from the external man, and proceeds to the internal; therefore here there is another order, and external things are mentioned first.

 

 

해설

 

이 글은 창세기 본문의 ‘말씀 순서 변화 자체가 지닌 의미’를 통해, 거듭남의 방향과 구조를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단어 하나, 배열 하나도 우연이 아니라고 보며, 특히 순서의 변화는 항상 깊은 아르카나를 담고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는 같은 대상들이 등장하지만, 그 나열 순서가 바뀌는 이유가 바로 그 열쇠입니다.

 

앞 절에서는 땅이 ‘생물 가축 들짐승’ 순으로 낸다고 합니다. 이는 사람이 자기에게서 무언가를 내놓는 것처럼 느끼는 단계, 곧 겉 사람의 차원에서 거듭남이 시작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때 사람은 여전히 자신이 선을 행하고 생명을 만들어 낸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는 주님께서 일하고 계시지만, 사람의 퍼셉션은 아직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음 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들짐승 가축’ 순으로 만드셨다고 합니다. 이 순서 변화는, 거듭남의 주체가 점차 사람 자신에서 주님으로 옮겨 가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다시 말해, 처음에는 사람이 ‘내가 하고 있다’고 느끼지만, 점점 주님께서 하신다는 사실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변화는 단번에 일어나지 않으며, 천적 인간이 되기 전까지 계속됩니다.

 

이 글은 거듭남의 방향이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라는 점을 다시 한번 분명히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언제나 같은 원리를 강조합니다. 주님은 먼저 겉 사람을 통해 역사하시고, 그 겉 사람의 활동과 선택을 통해 속 사람을 열어 가십니다. 그래서 말씀에서도 겉에 속한 것들이 먼저 언급되고, 점차 더 깊은 차원으로 이동합니다.

 

특히 중요한 점은, 이 과정에서 사람의 ‘자기에게서 나온 것 같은 느낌’이 제거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그 착각을 즉시 부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것을 사용하시어 사람을 이끌어 가십니다. 사람이 자기가 하는 것처럼 느끼지 못하면,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글은 인간의 착각조차도 주님의 섭리 안에 포함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 글은 결국 이렇게 말합니다. 말씀의 순서 변화는 단순한 문체상의 변형이 아니라, 인간 내면에서 일어나는 방향 전환의 흔적입니다. 거듭남은 늘 바깥에서 안으로, 자기 자신에서 주님으로 이동하는 여정이며, 창세기의 언어는 그 여정을 가장 정밀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심화

 

1. ‘순서 변화가 아르카나인 이유

 

 

AC.47, 심화 1, '순서 변화가 아르카나인 이유'

AC.47.심화 1. ‘순서 변화가 아르카나인 이유’ AC.47 본문에 나오는 순서 변화, 곧 ‘생물, 가축, 땅의 짐승’에서 ‘땅의 짐승, 가축’ 순으로 바뀌는 것이 왜 ‘거듭남은 겉 사람에서 시작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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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8, 창1:24-25, ‘거듭남의 다섯 번째 상태, 여섯 번째 상태'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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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6, 창1:24-25, ‘짐승'(beasts), 사람의 애정(affections)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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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심화

 

1. ‘순서 변화가 아르카나인 이유

 

AC.47 본문에 나오는 순서 변화, 생물, 가축, 땅의 짐승에서 땅의 짐승, 가축순으로 바뀌는 것이 왜 거듭남은 겉 사람에서 시작되어 속 사람으로 나아간다는 아르카나가 되는 건가요?

 

이 질문은 AC를 읽으시다가 ‘? 순서가 왜 바뀌지?’에서 멈추는 바로 그 지점을 정확히 짚으신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생물, 가축, 땅의 짐승에서땅의 짐승, 가축으로 순서가 바뀐 것은, 실제 거듭남이 사람의 속(내적)에서 바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각하고 다루는 겉 사람(외적 삶)’에서부터 시작되어 점점 안쪽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보여 주는 상응적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기본 구조를 다시 잡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항상 기준이 되는 것은 ‘속 사람 겉 사람’의 질서입니다. 원래 창조의 질서는 위에서 아래로, 즉 ‘속 사람이 먼저이고, 겉 사람이 그에 따라 움직이는 구조’입니다. 그래서 본래적인, 이상적인 순서는 ‘더 높은 것(내적) → 더 낮은 것(외적)’입니다. ‘생물 가축 땅의 짐승’ 같은 배열은 바로 이 정상 질서를 반영합니다. 즉, 가장 안쪽의 살아 있는 원리에서 시작해 점점 바깥으로 내려오는 흐름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타락 이후 인간은 이 질서대로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속 사람은 닫혀 있고, 겉 사람, 그러니까 감각, 습관, 외적 행동이 오히려 앞에 나서 있습니다. 그래서 실제 거듭남의 출발점은, 이론적으로는 속 사람이지만, ‘경험적으로는 사람이 다룰 수 있는 유일한 자리, 곧 겉 사람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여기서 순서 변화가 의미를 갖습니다. ‘땅의 짐승 가축’이라는 순서는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가장 바깥, 즉 ‘생활 속의 행동, 습관, 감각적 반응(땅의 짐승)’에서부터 변화가 시작되어, 그다음에 ‘조금 더 길들여지고, 질서 잡힌 애정(가축)’으로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즉,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흐름’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아직 속 사람, 곧 깊은 의지나 사랑의 근본은 거의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 ‘이건 하지 말아야겠다’, ‘이렇게 살아야겠다’ 하며 ‘행동을 먼저 바꾸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어, 화가 나도 바로 터뜨리지 않고 한 번 참는다든지,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 애쓴다든지, 누군가를 도우려 노력하는 것 등, 이런 것들이 바로 ‘땅의 짐승’ 차원의 변화입니다. 가장 바깥에서의 변화입니다.

 

그런데 이런 외적인 순종과 실천이 반복되다 보면, 점점 그 안에 ‘새로운 애정이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억지로 하던 것이, 나중에는 조금씩 마음이 따라옵니다. 이것이 ‘가축’ 단계입니다. 즉, 단순한 행동이 아니라, ‘길들여진 애정, 질서 잡힌 의지’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다음에야 비로소 더 깊은 변화, 즉 속 사람의 열림, 참된 사랑과 진리의 결합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 출발은 언제나 ‘겉 사람에서 시작된 순종과 실천’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매우 분명히 말합니다. 거듭남은 위에서 시작되지만, ‘사람이 체험하는 순서는 아래에서 시작된다’고!

 

그래서 이 순서 변화는 단순한 표현상의 변화가 아니라, 이렇게 읽혀야 합니다. ‘거듭남은 가장 바깥의 삶에서 시작되어, 점점 더 안쪽으로 들어가며 완성된다.’ 이것이 바로 이 ‘아르카나’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중요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이 먼저 바뀌어야 행동이 바뀐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실제 거듭남의 과정에서는 그 반대 방향도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즉, ‘행동을 먼저 바르게 하면, 그에 따라 마음이 바뀌는 길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겉 사람에서 시작되는 거듭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이 완전히 바뀐 다음에 행동하라고 하시지 않고, 먼저 행동으로 순종하게 하셔서, 그 과정을 통해 마음까지 바꾸십니다.’

 

‘‘땅의 짐승 가축이라는 순서 변화는,거듭남이 사람의 외적인 삶과 행동에서 시작되어 점점 내적인 의지와 사랑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보여 주는 상응적 표현입니다.’

 

 

 

AC.47, 창1:24-25, ‘거듭남의 순서'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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