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4:15)

 

AC.395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whosoever slayeth Cain, vengeance shall be taken on him sevenfold)라는 말씀의 의미는, 심지어 그렇게 분리되었을지라도 신앙을 폭행하는 것은 신성모독(sacrilege)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가인’(Cain)의 의미가 체어리티로부터 분리된 신앙이라는 점, 그리고 ‘칠’(7,seven, 일곱)의 의미는 신성함(what is sacred)이라는 점을 볼 때 분명합니다. 숫자 ‘칠’(seven)은 잘 알려진 대로 아주 거룩하게 여겨졌습니다. 육일간의 창조에 이은 일곱 번째 날, 이날이 곧 천인(天人,the celestial man)이요, 그 안에 평화와 쉼, 그리고 안식일(the sabbath)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이 숫자는 유대교회의 예전에서 아주 자주 나오며, 이 숫자가 나오는 곳마다 신성함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그 기간이 아주 길든지 짧든지 둘 다 칠들(sevens)로 구별했는데요, 아래 다니엘 본문처럼 메시아의 오심을 가리키는 아주 장구한 시간 간격을 가리켜 ‘이레’(weeks)라 한 것처럼 말입니다. (9:24-25) That the words “whosoever slayeth Cain, vengeance shall be taken on him sevenfold” signify that to do violence to faith even when thus separated would be sacrilege,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Cain,” which is faith separated from charity, and from the signification of “seven,” which is what is sacred. The number “seven” was esteemed holy, as is well known, by reason of the six days of creation, and of the seventh, which is the celestial man, in whom is peace, rest, and the sabbath. Hence this number occurs so frequently in the rites of the Jewish church, and is everywhere held sacred, and hence also both greater and less periods of time were distinguished into sevens, and were called “weeks,” such as the great intervals of time to the coming of the messiah; (Dan. 9:24–25)

 

24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일흔 이레를 기한으로 정하였나니 허물이 그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용서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환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 25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예순두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광장과 거리가 세워질 것이며 (9:24-25)

 

라반과 야곱은 칠 년이라는 기간을 ‘칠 일’이라 하였습니다. (29:27, 28) and the time of seven years called a “week” by Laban and Jacob. (Gen. 29:27–28)

 

27이를 위하여 칠 일을 채우라 우리가 그도 네게 주리니 네가 또 나를 칠 년 동안 섬길지니라 28야곱이 그대로 하여 그 칠 일을 채우매 라반이 딸 라헬도 그에게 아내로 주고 (29:27, 28)

 

같은 이유로 어디서든 이 ‘칠’이라는 숫자는 거룩 혹은 신성불가침(inviolable)으로 여겨집니다.그래서 시편을 보면 For the same reason, wherever it occurs, the number seven is accounted holy or inviolable. Thus we read in David:

 

주의 의로운 규례들로 말미암아 내가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 (119:164) Seven times a day do I praise thee. (Ps. 119:164)

 

이사야에서 In Isaiah: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일곱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 (30:26) The light of the moon shall be as the light of the sun, and the light of the sun shall be sevenfold, as the light of seven days, (Isa. 30:26)

 

여기 ‘해’(sun)는 사랑을, ‘달’(moon)은 사랑으로 말미암은 신앙(faith from love)을 가리키는데, 사랑처럼 될 신앙입니다. 사람의 거듭남의 기간이 일곱 번째 날, 곧 천인, 천적 인간이 되기 전, 숫자 ‘육’(6,six)으로 구별되듯, 그가 황폐해지는 기간, 곧 천적인 것이 전혀 남지 않을 때까지 걸리는 시간 또한 그렇습니다. 유대인들의 여러 번 포로 생활 및 마지막, 즉 바벨론 유수(幽囚,captivity), 곧 십 년씩 일곱 번, 즉 칠십 년간 지속된 기간은 이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또한 땅은 안식년을 가져야 한다 여러 번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에 나오는 느부갓네살 역시 같은 내용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where the “sun” denotes love, and the “moon” faith from love, which should be as love. As the periods of man’s regeneration are distinguished into six, before the seventh arrives, that is, the celestial man, so also are the periods of his vastation, up to the time when nothing celestial remains. This was represented by the several captivities of the Jews, and by the last or Babylonish captivity, which lasted seven decades, or seventy years. It is also said several times that the earth should rest on its sabbaths. The same is represented by Nebuchadnezzar, in Daniel:

 

16또 그 마음은 변하여 사람의 마음 같지 아니하고 짐승의 마음을 받아 일곱 때를 지내리라, 23왕이 보신즉 한 순찰자, 한 거룩한 자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이르기를 그 나무를 베어 없애라 그러나 그 뿌리의 그루터기는 땅에 남겨두고 쇠와 놋줄로 동이고 그것을 들풀 가운데에 두라 그것이 하늘 이슬에 젖고 또 들짐승들과 더불어 제 몫을 얻으며 일곱 때를 지내리라 하였나이다, 32네가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면서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내서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리라 하더라 (4:16, 23, 32) His heart shall be changed from man, and a beast’s heart shall be given unto him, and seven times shall pass over him. (Dan. 4:16, 23, 32)

 

그리고 계시록, 마지막 때의 황폐함(the vastation of the last times)에 관하여 And in John, concerning the vastation of the last times:

 

1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 6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7네 생물 중의 하나가 영원토록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금 대접 일곱을 그 일곱 천사들에게 주니 8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으로 말미암아 성전에 연기가 가득 차매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 (15:1, 6-8) I saw another sign in heaven, great and marvelous, seven angels, having the seven last plagues; (Rev. 15:1, 6–8)

 

그리고 계속해서 and that:

 

성전 바깥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은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11:2) The gentiles should tread the holy city under foot forty and two months, or six times seven. (Rev. 11:2)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두루마리가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5:1) I saw a book written within and on the back, sealed with seven seals. (Rev. 5:1)

 

같은 이유로 징벌의 가혹함과 더함을 모세의 책에서처럼 숫자 ‘칠’(7)로 표현했습니다. For the same reason the severities and augmentations of punishment were expressed by the number seven; as in Moses:

 

18 만일 너희가 그렇게까지 되어도 내게 청종하지 아니하면 너희의 죄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일곱 배나 더 징벌하리라, 21너희가 나를 거슬러 내게 청종하지 아니할진대 내가 너희의 죄대로 너희에게 일곱 배나 더 재앙을 내릴 것이라, 24나 곧 나도 너희에게 대항하여 너희 죄로 말미암아 너희를 칠 배나 더 치리라, 28내가 진노로 너희에게 대항하되 너희의 죄로 말미암아 칠 배나 더 징벌하리니 (26:18, 21, 24, 28) If ye will not yet for all this obey me, then I will chastise you sevenfold for your sins. (Lev. 26:18, 21, 24, 28)

 

그리고 시편에서 And in David:

 

주여 우리 이웃이 주를 비방한 그 비방을 그들의 품에 칠 배나 갚으소서 (79:12) Render unto our neighbors sevenfold into their bosom. (Ps. 79:12)

 

자, 정리하자면, 신앙을 폭행하는 것은 일종의 신성모독(sacrilege)이었기 때문에,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whosoever should slay Cain, vengeance should be taken on him sevenfold) 하십니다. 그동안 말씀드린 것처럼, 신앙은 예배에 속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Now as it was a sacrilege to do violence to faith—since as has been said it was to be of service—it is said that “whosoever should slay Cain, vengeance should be taken on him sevenfold.”  

 

※ 비록 이 가인이라는 신앙이 아벨이라는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인류는 이 가인이라는 신앙을 통해 체어리티를 회복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며, 그렇기 때문에 이런 섭리 안에서 주님도 보호하시는 가인이라는 신앙을, 한 치 앞도 못 보는 우리가 나서서 손대는 건 그 자체로 주님을 대적하는 거, 곧 신성모독이 됩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어떤 신앙이 내가 알던 교리와 다를 때, 그저 교리만 다를 뿐 그 안에 주님을 사랑함과 주님을 신앙함이 분명히 보이면, 그러면 직접 나서는 대신 주님께 맡기고, 대신 내가 믿는 교리를 성실히 실천, 주님과 결합하는 일에만 마음을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해설

 

스베덴보리는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는 말이 단순한 형벌의 과장이나 위협이 아니라,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파괴하는 행위는 신성모독(sacrilege)’임을 선언하는 말씀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그 근거는 두 가지 상징에 있습니다. 첫째, ‘가인’은 이미 밝혀진 대로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을 뜻하며, 둘째, ‘(seven)이라는 수는 성경 전반에서 ‘거룩하고 침범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칠이라는 수가 거룩하게 여겨진 이유는 창조의 여섯 날과 그 완성인 일곱째 날, 곧 안식과 평화의 상태, 다시 말해 ‘천적 인간의 상태’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유대교회의 예식과 율법 전반에서 칠이라는 수가 반복적으로 사용되었고, 긴 시간의 구분 역시 ‘이레(weeks)라는 형태로 표현되었습니다. 다니엘서에서 메시아의 때를 가리키는 큰 기간들이 ‘이레’로 구분된 것(9:24, 25)이나, 야곱이 라반을 위해 봉사한 일곱 해가 한 ‘이레’로 불린 것(29:27, 28)이 그 예입니다. 또한 시편에서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119:164)는 표현, 이사야에서 햇빛은 일곱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는 표현(30:26)은 모두 ‘사랑과 신앙이 충만해진 완성 상태’를 가리킵니다. 반대로, 거듭남의 과정이 여섯 단계를 거쳐 일곱째에 이르는 것처럼, 황폐(vastation)의 과정 역시 일곱 단계에 이르러 더 이상 천적인 것이 남지 않는 상태에 도달하는데, 이것이 유대인의 여러 포로기, 특히 칠십 년에 걸친 바벨론 포로로 대표됩니다. 느부갓네살에게 일곱 때가 지나가도록 짐승의 마음이 주어진 사건(4:16, 23, 32)이나,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일곱 인(5:1), 일곱 재앙(15:1, 6-8), 여섯 곱하기 일곱의 기간(11:2) 역시 모두 ‘신적 질서의 완결성과 침범 불가능성’을 나타냅니다. 이런 이유로 성경에서는 형벌의 엄중함이나 완전성을 표현할 때도 ‘칠 배’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는 말은,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이 비록 생명력은 없을지라도 ‘주님의 섭리 안에서 반드시 보존되어야 할 역할을 지니므로’, 그것을 폭력적으로 제거하거나 무시하는 행위는 거룩한 질서를 훼손하는 중대한 죄라는 뜻입니다. 즉, 신앙은 사랑을 회복하기 위한 봉사의 수단으로 남겨져야 하기에, 주님께서는 그것을 ‘’이라는 표지로 둘러 보호하시며, 그 침범을 신성모독으로 규정하신 것입니다.

 

 

 

AC.396, 창4:15,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6 ‘가인

bygrace.kr

 

AC.394, 창4:15, '가인의 표와 마태복음 '고자' 이야기'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4 이제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4:15)

 

AC.394

 

이제 이것을 미리 아셨고, 또 인류가 영원한 사망으로 소멸되지 않도록 하셨기 때문에, 여기 다음과 같이 선언하십니다. ‘아무도 가인을 건드리면 안 된다!’ 이 가인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을 말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에게 어떤 표를 주셨는데, 이 표의 의미는 주님이 어떤 특별한 방식으로 신앙을 구별하셨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보존을 위해서지요. Now as this was foreseen, and was provided, lest the human race should perish in eternal death, it is here declared that none should do violence to Cain, by whom is signified faith separated from charity; and further that a mark was set upon him, which means that the Lord distinguished faith in a particular manner, in order to secure its preservation.  

 

※ 창세기 524절,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또한 이와 같습니다.

 

이런 사실들은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아르카나(arcana, 秘義)이며, 마태복음에서 주님이 결혼과 고자(鼓子, eunuch)에 관하여 하신 말씀 중에 언급되고 있습니다. These are arcana hitherto undiscovered, and are referred to by the Lord in what he said respecting marriage, and eunuchs, in Matthew:

 

어머니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19:12) There are eunuchs who were so born from their mother’s womb; and there are eunuchs who were made eunuchs of men; and there are eunuchs who have made themselves eunuchs for the kingdom of God’s sake; he that is able to receive it let him receive it. (Matt. 19:12)

 

천국의 결혼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고자’(eunuchs)라 합니다. ‘어머니의 태로부터 된’(born from the womb) 고자들은 천적 천사들을 닮았고, ‘사람이 만든’(made of men) 고자들은 영적 천사들과 비슷하며, ‘스스로 된’(made so by themselves) 고자들은 천사 같은 영들과 비슷한데, 체어리티보다는 순종으로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Those in the heavenly marriage are called “eunuchs”; those so “born from the womb,” are such as resemble the celestial angels; those “made of men,” are such as are like the spiritual angels; and those “made so by themselves,” are like angelic spirits, who act not so much from charity as from obedience.  

 

※ ‘고자’란 영적 생명을 직접 낳는 능력은 제한되었지만, 주님의 섭리 안에서 반드시 보존되어야 할 신앙의 상태를 가리키는 아르카나적 용어이며, 그러므로 가인의 표는 ‘영적 고자’의 표입니다. 주님은 사랑이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신앙이라도 함부로 제거하지 않으시고, 질서 안에 보존하셔서 다시 생명이 돌아올 길을 남겨두십니다. 그러므로 나와 교리가 다르다고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며 상대방의 신앙을 쥐잡듯이 몰아붙이며 괴롭히는 것은 정말 삼가셔야 합니다. 이런 행위는 가인조차 보존하시는 주님을 정면으로 모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해설

 

스베덴보리는 가인의 표에 담긴 의미를 한층 더 깊이 밝히며, 이것이 단지 특정 시대의 신앙 상태를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인류 전체가 멸망하지 않도록 마련된 주님의 보편적 섭리’임을 분명히 합니다. 만일 신앙이 체어리티와 분리되는 과정을 전혀 허용하지 않으셨다면, 인간은 태고교회와 같은 내적 상태를 유지할 수 없었기에 결국 ‘영원한 죽음’, 곧 주님과의 완전한 단절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를 허용하시되, 그 신앙이 폭력적으로 파괴되거나 경멸당하지 않도록 보호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가인을 해치지 말라’는 선언이며, 동시에 ‘가인에게 표를 두셨다’는 말씀의 핵심입니다. 여기서 가인은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을 의미하지만, 그 신앙조차도 주님께서는 ‘특별히 구별하여 보존’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거듭남의 과정에서 반드시 신앙, 곧 진리를 듣고 아는 단계에서 출발해야 하며, 이 신앙이 완전히 사라지면 체어리티로 나아갈 통로 자체가 끊어지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깊은 아르카나가 이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다고 말하며, 주님께서 복음서에서 혼인과 고자(eunuchs)에 대해 말씀하신 구절이 바로 이 진리를 가리킨다고 설명합니다. 마태복음 19장에서 말하는 ‘하늘의 혼인’에 속한 자들이 바로 이러한 질서 안에 있는 자들이며, ‘어머니의 태로부터 된 고자’는 태고교회와 같이 사랑과 신앙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 사랑으로 신앙을 바로 아는 상태, 특별히 신앙을 따로 낳을 필요가 없는 상태, 더 이상 무슨 생식이 필요 없는 완전한 상태, 곧 천적 천사와 같은 유형을 뜻합니다. 반면 ‘사람이 만든 고자’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구별되지만 다시 결합된 상태로, 홍수 이후의 교회나 초대 교회와 같이 ‘영적 천사’의 성격을 지닌 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는 체어리티에서 직접 움직이기보다는 주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천사적 영들’을 가리키는데, 이들 역시 주님의 나라를 위해 필요하고 보존되어야 할 유형입니다. 이 모든 구분은 신앙과 체어리티의 다양한 결합 방식이 주님의 섭리 안에서 각각 자리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며, 가인의 표는 바로 이러한 다양성이 무너지지 않도록 지켜주는 ‘섭리의 경계선’입니다. 결국 AC.394는 가인의 표를 통해, 주님께서 인간의 연약함을 미리 보시고, 신앙이 불완전한 형태로라도 남아 있어 체어리티로 다시 인도될 수 있도록 길을 여신 분임을 밝히며, 이것이 인류 구원의 깊은 신적 질서임을 드러냅니다.

 

 

 

AC.395, 창4:15,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5 ‘가인

bygrace.kr

 

AC.393, 창4:15, '가인 : 체어리티를 회복하기 위한 통로로서의 신앙'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3 우리는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4:15)

 

AC.393

 

우리는 지금 이 말씀들의 속뜻 설명을 더 깊이 계속하기에 앞서, 먼저 이 경우가 어떻게 신앙과 연결되는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태고교회는 사랑의 신앙 말고는 그 어떤 신앙도 인정하지 않는, 신앙이라는 걸 심지어 입에 올리는 것조차 꺼리는 그런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신앙에 속한 모든 걸 주님으로 말미암는 사랑(love from the Lord)으로 지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앞서 지금까지 말씀드린 천적 천사들 또한 그렇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인류는 이런 캐릭터로 계속 있을 수 없어 언젠가는 신앙을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에서 분리, 신앙 자체를 하나의 교리로 만들 것을 예견하시고는 다음과 같이 섭리하셨는데, 그것은, 그들, 곧 주님 사랑과 신앙이 실제로 분리되되 신앙을 통해서, 즉 신앙에 관한 지식을 통해서 주님으로 말미암는 체어리티(from the Lord charity)를 받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그러니까 지식이나 들음(hearing)이 먼저 오고, 그러고 나서 지식이나 들음을 통해 이번에는 체어리티, 곧 이웃을 향한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과 자비가 주님으로 말미암아 베풀어지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이 체어리티라는 건, 신앙과 분리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신앙의 원리(the principal of faith)를 구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태고교회 시절 그들에게 있었던 퍼셉션(perception) 대신 이제 그 자리를 양심(conscience)이 계승하게 되었습니다. 이 양심은 체어리티와 결합한 신앙(faith joined to charity)을 통해 얻는 것인데, 이 양심은 참된 걸(what is true) 딕테이트하는 게 아닌, 그것이 참이라는 사실을(that it is true) 딕테이트하는 것으로, 이는 말씀에서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런 줄 아는 것입니다. 홍수 후 교회들은 거의 대부분 이런 캐릭터였으며, 주님 초림 후 첫 교회인 초대교회 역시 그랬습니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영적 천사들이 천적 천사들로부터 구분되는 것입니다. Before we proceed to elucidate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s before us, it is necessary to know how the case is with faith. The most ancient church was of such a character as to acknowledge no faith except that which is of love, insomuch that they were unwilling even to mention faith, for through love from the Lord they perceived all things that belong to faith. Such also are the celestial angels of whom we have spoken above. But as it was foreseen that the human race could not be of this character, but would separate faith from love to the Lord, and would make of faith a doctrine by itself, it was provided that they should indeed be separated, but in such a way that through faith, that is, through the knowledges of faith, men might receive from the Lord charity, so that knowledge [cognitio] or hearing should come first, and then through knowledge or hearing, charity, that is, love toward the neighbor, and mercy, might be given by the Lord, which charity should not only be inseparable from faith, but should also constitute the principal of faith. And then instead of the perception they had in the most ancient church, there succeeded conscience, acquired through faith joined to charity, which dictated not what is true, but that it is true, and this because the Lord has so said in the Word. The churches after the flood were for the most part of this character, as also was the primitive or first church after the Lord’s advent, and by this the spiritual angels are distinguished from the celestial.  

 

해설

 

스베덴보리는 가인과 그 표에 대한 내적 의미를 본격적으로 밝히기 전에, 먼저 ‘신앙이 무엇이며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이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태고교회는 사랑과 분리된 신앙이라는 개념 자체를 알지 못했으며, 오직 사랑에서 나온 신앙만을 인정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흘러오는 사랑 안에 있었기 때문에, 신앙에 속한 모든 진리를 배우거나 추론해서가 아니라 ‘직접적인 내적 지각’, 곧 ‘퍼셉션(perception)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신앙을 따로 말하지 않았고, 신앙은 사랑 안에 자연스럽게 포함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태는 천적 천사들의 상태와 동일하며, 이들은 진리를 외적으로 확인할 필요 없이 사랑 안에서 즉시 알아봅니다. 그러나 인류가 점차 겉 사람 중심으로 기울어지며 이러한 상태를 유지할 수 없게 될 것이 미리 보였기 때문에, 주님은 신앙과 사랑이 분리되는 과정을 허용하셨습니다. 다만 그 분리는 파괴가 아니라 ‘섭리적 조정’이었습니다. 신앙이 교리와 지식의 형태로 먼저 주어지고, 그 신앙의 지식을 통하여 주님께서 체어리티, 곧 이웃 사랑과 자비를 주시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때 체어리티는 신앙과 결코 분리되지 않아야 하며, 오히려 ‘신앙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본질’이 됩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태고교회의 지각은 사라지고, 대신 ‘신앙과 체어리티가 결합되어 형성된 양심’이 인간의 내적 안내자가 됩니다. 이 양심은 무엇이 참인지 스스로 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참이다라고 받아들이고 따르게 합니다. 홍수 이후의 교회들과 주님 강림 이후의 초대 교회는 대부분 이러한 성격을 지녔으며, 바로 이 점에서 영적 천사들은 천적 천사들과 구별됩니다. AC.393은 따라서 가인의 신앙이 왜 완전히 제거되지 않고 보존되어야 했는지를 이해하게 하는 핵심 열쇠로서, ‘사랑을 회복하기 위한 통로로서의 신앙’이라는 스베덴보리 신학의 중심 구조를 분명히 드러냅니다.

 

 

 

AC.394, 창4:15, '가인의 표와 마태복음 '고자' 이야기'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4 이제

bygrace.kr

 

AC.392, 창4: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AC.392-396)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And Jehovah said unto him,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