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3:24)

 

AC.308

 

앞에서 동쪽(east)에덴동산(garden of Eden)의 의미를 설명하였으므로, 여기서 다시 오래 머물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룹들(cherubim) 말인데요, 이것은, 만일 이것이 없으면, 사람은 자신의 own으로부터, 그리고 감각과 기억 지식에 속한 것들로부터 신앙의 아르카나(the mysteries of faith) 안으로 미친 듯이 들어가 그것들을 profane, 그리하여 자기 자신을 파멸시킬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막으시는 주님의 섭리를 뜻합니다. 이것은 말씀에서 그룹들이 언급되는 모든 구절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바로 이런 quality의 사람들이었는데, 이들은, 만일 주님의 오심, 교회의 표상, 모형들이 주님을 상징함, 사후의 삶, 속 사람과 말씀의 속뜻 등 이런 것들에 관하여 밝히 알게 되는 순간, 이들은 분명 그것을 profane, 그렇게 해서 결국 영원히 멸망하였을, 그런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궤 위 속죄소(the mercy seat over the ark)에 있는 그룹들(cherubim), 성막 휘장들(the curtains of the tabernacle)에 있는 그룹들, 휘장(the veil)에 있는 그룹들, 그리고 성전(the temple)에 있는 그룹들로 표상되었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그들을 지켜 보존하고 계셨다는 말입니다. As the signification of the “east” and of the “garden of Eden” were given above, it is needless to dwell longer on them; but that “cherubim” denote the providence of the Lord lest man should insanely enter into the mysteries of faith from his own, and from what is of the senses and of memory-knowledge, and should thus profane them, and destroy himself, is evident from all the passages in the Word where mention is made of “cherubim.” As the Jews were of such a quality that if they had possessed any clear knowledge concerning the Lord’s coming, concerning the representatives or types of the church as being significative of him, concerning the life after death, concerning the interior man and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they would have profaned it, and would have perished eternally; therefore this was represented by the “cherubim” on the mercy seat over the ark, upon the curtains of the tabernacle, upon the veil, and also in the temple; and it was signified that the Lord had them in keeping. (Exod. 25:18–21; 26:1, 31; 1 Kings 6:23–29, 32)

 

18금으로 그룹 둘을 속죄소 두 끝에 쳐서 만들되 19한 그룹은 이 끝에, 또 한 그룹은 저 끝에 곧 속죄소 두 끝에 속죄소와 한 덩이로 연결할지며 20그룹들은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그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하고 21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25:18-21)

 

1너는 성막을 만들되 가늘게 꼰 베 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로 그룹을 정교하게 수 놓은 열 폭의 휘장을 만들지니, 31너는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짜서 휘장을 만들고 그 위에 그룹들을 정교하게 수 놓아서 (26:1, 31)

 

23내소 안에 감람나무로 두 그룹을 만들었는데 그 높이가 각각 십 규빗이라 24한 그룹의 이쪽 날개도 다섯 규빗이요 저쪽 날개도 다섯 규빗이니 이쪽 날개 끝으로부터 저쪽 날개 끝까지 십 규빗이며 25다른 그룹도 십 규빗이니 그 두 그룹은 같은 크기와 같은 모양이요 26이 그룹의 높이가 십 규빗이요 저 그룹도 같았더라 27솔로몬이 내소 가운데에 그룹을 두었으니 그룹들의 날개가 퍼져 있는데 이쪽 그룹의 날개는 이쪽 벽에 닿았고 저쪽 그룹의 날개는 저쪽 벽에 닿았으며 두 날개는 성전의 중앙에서 서로 닿았더라 28그가 금으로 그룹을 입혔더라 29내 외소 사방 벽에는 모두 그룹들과 종려와 핀 꽃 형상을 아로새겼고, 32감람나무로 만든 그 두 문짝에 그룹과 종려와 핀 꽃을 아로새기고 금으로 입히되 곧 그룹들과 종려에 금으로 입혔더라 (왕상6:23-29, 32)

 

증거판(the testimony)이 들어 있던 궤는 이 구절(3:24)의 생명나무(the tree of lives)와 같은 것을 의미하였는데, 곧 주님과 오직 주님께만 속한 천적인 것들을 의미하였습니다. 이런 이유로 주님은 자주 그룹들 위에 앉아 계신 이스라엘의 하나님(God of Israel sitting on the cherubim)으로 일컬음을 받으셨고, 또한 그룹들 사이에서(between the cherubim)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셨습니다. For the ark, in which was the testimony, signified the same as the tree of lives in this passage, namely, the Lord and the celestial things which belong solely to him. Hence also the Lord is so often called the “God of Israel sitting on the cherubim,” and hence he spoke with Moses and Aaron “between the cherubim” (Exod. 25:22; Num. 7:89).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25:22)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서 여호와께 말하려 할 때에 증거궤 위 속죄소 위의 두 그룹 사이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목소리를 들었으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이었더라 (7:89)

 

이것은 에스겔에서 분명하게 묘사되는데, 거기 보면, This is plainly described in Ezekiel, where it is said:

 

3그룹에 머물러 있던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에 이르더니 여호와께서 그 가는 베 옷을 입고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찬 사람을 불러 4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에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 하시고 5그들에 대하여 내 귀에 이르시되 너희는 그를 따라 성읍 중에 다니며 불쌍히 여기지 말며 긍휼을 베풀지 말고 쳐서 6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이와 여자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하지 말라 내 성소에서 시작할지니라 하시매 그들이 성전 앞에 있는 늙은 자들로부터 시작하더라 7그가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성전을 더럽혀 시체로 모든 뜰에 채우라 너희는 나가라 하시매 그들이 나가서 성읍 중에서 치더라 (9:3-7) The glory of the God of Israel was uplifted from upon the cherub whereon he was, to the threshold of the house. And he called to the man clothed with linen, and said unto him, Go through the midst of the city, through the midst of Jerusalem, and set a mark upon the foreheads of the men who groan and sigh for all the abominations done in the midst thereof. And to the others he said, Go ye after him through the city, and smite; let not your eye spare, neither have ye pity; slay to blotting out the old man, and the young man, and the virgin, the infant, and the women; defile the house, and fill the courts with the slain (Ezek. 9:3–7).

 

2하나님이 가는 베 옷을 입은 사람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그룹 밑에 있는 바퀴 사이로 들어가 그 속에서 숯불을 두 손에 가득히 움켜 가지고 성읍 위에 흩으라 하시매 그가 내 목전에서 들어가더라, 7그 그룹이 그룹들 사이에서 손을 내밀어 그 그룹들 사이에 있는 불을 집어 가는 베 옷을 입은 자의 손에 주매 그가 받아 가지고 나가는데 (10:2, 7) He said to the man clothed in linen, Go in between the wheel to beneath the cherub, and fill thy palms with coals of fire from between the cherubim, and scatter them over the city; the cherub put forth his hand from between the cherubim unto the fire which was between the cherubim, and took thereof, and put it into the palms of him that was clothed in linen, who took it and went out (Ezek. 10:2, 7).

 

이 구절들을 통해 그룹들(cherubim)은 사람들이 신앙의 아르카나 안으로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시는 주님의 섭리(the providence of the Lord)를 뜻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의 광적 욕망(insane cupidities)에 내맡겨졌는데, 이것을 여기서는 성읍 위에 흩어질 불(fire that was to be scattered over the city)아무도 아끼지 말라(none should be spared)는 표현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From these passages it is evident that the providence of the Lord in preventing men from entering into the mysteries of faith is signified by the “cherubim”; and that therefore they were left to their insane cupidities, here also signified by the “fire that was to be scattered over the city,” and that “none should be spared.”

 

 

해설

 

AC.308은 창3:24의 ‘그룹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말씀 전체의 여러 구절을 통해 본격적으로 밝히는 글입니다. 앞의 AC.306에서는 그룹들이, 거룩한 것에 사람이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뜻한다 간단히 설명하였고, AC.307에서는 홍수 직전 태고교회의 마지막 후손들이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을 잃고, 광적 욕망과 persuasion에 내맡겨진 상태를 다루었습니다. 이제 AC.308은 왜 거룩한 것에 대한 접근이 제한되는 것이 오히려 주님의 자비로운 보호인지를 성막과 성전, 그리고 에스겔의 환상을 통해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먼저 이 글에서 ‘그룹들’은 어떤 특별한 계급의 천사들을 단순히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의 속뜻으로는, 사람이 자신의 proprium과 감각적 사고, 그리고 기억 지식을 가지고 신앙의 아르카나 안으로 함부로 들어가 그것들을 모독, 즉 profanation 하지 못하도록 보호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뜻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이 신앙의 아르카나를 탐구한다는 행위 자체가 나쁘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문제는 ‘자신의 proprium으로부터’, 곧 주님으로부터 오는 겸손과 선한 애정 없이 자기 지성과 감각적 판단만으로 거룩한 것들을 장악하려는 데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거룩한 진리를 자기 안에서 받아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판단하고 지배 및 이용하려 합니다.

 

감각과 기억 지식에 속한 것들로부터’ 신앙의 아르카나 안으로 들어간다는 말도 같은 뜻입니다. 감각과 기억 지식 자체는 악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겉 사람에게 속한 유용한 수단이며, 주님으로부터 오는 속 사람의 빛을 섬길 때에는 진리를 확인하고 삶에 적용하는 도구가 됩니다. 그러나 순서가 뒤집혀 감각적 증거와 기억 지식이 신앙의 진리를 재판하는 최종 기준이 되면, 사람은 천적인 것을 자연적인 것 아래에 두게 됩니다. 그는 이해되지 않는 것은 부정하고, 감각으로 확인되지 않는 것은 거짓이라 여기며, 자기 지성이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만 거룩한 것으로 인정합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그러니까 자신의 proprium을 가지고 신앙의 아르카나 안으로 들어가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러한 진입을 ‘광적으로’, 그러니까 미친 듯이 들어가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는 단순히 열심히 연구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기 사랑과 거짓된 확신에 사로잡힌 사람이 거룩한 것을 자기 소유로 삼고, 자기 판단에 복종시키며, 자기 목적에 이용하려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때 사람은 진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진리에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혜롭다는 평가를 받거나 다른 사람을 지배하거나, 아니면 자신의 악한 삶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진리를 이용합니다. 그렇게 되면 신앙의 아르카나는 그 사람 안에서 모독, 곧 profanation 됩니다.

 

profanation은 거룩한 것을 단순히 모르거나 부정하는 것보다 훨씬 심각한 상태입니다. profanation은 사람이 먼저 거룩한 것을 알고 인정하고 받아들인 뒤, 다시 그것을 부정하거나 악한 삶과 뒤섞을 때 생깁니다. 거룩한 것과 불결한 것이 한 사람 안에서 결합되면,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이 서로 분리되기 어려운 상태가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사람이 그런 상태에 이를 위험이 있을 때, 오히려 더 깊은 진리를 보지 못하도록 하시고, 더 깊은 거룩한 것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으십니다. 이것이 그룹들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는 이유입니다.

 

이러한 의미는 유대인들에게서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AC.308은 유대인들이 만일 주님의 오심, 교회의 표상과 모형들이 주님을 의미한다는 사실, 사후의 삶, 속 사람, 말씀의 속뜻에 관하여 명백한 지식을 가졌더라면 그것을 profane 하였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유대 민족 전체를 단순히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교회, 그러니까 유대교회의 표상적 기능과 그들의 내적 상태 사이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그들은 외적 예배와 의식은 매우 철저히 지켰지만, 그 안에 있는 주님과 천국, 그리고 거듭남의 의미를 받아들일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만일 그 내적 의미가 분명하게 열렸다면, 그들은 외적으로는 거룩한 것을 행하면서 내적으로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위하여 그것을 이용했을 것이고, 그로 인해 더 깊은 profanation에 빠졌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표상적 예배는 허락하셨지만, 그 표상들의 깊은 속뜻은 감추셨습니다. 성막과 성전의 모든 기물과 의식은 주님과 천국, 그리고 교회에 관한 가장 깊은 아르카나를 담고 있었지만, 유대인들은 그것을 외적인 명령과 의식으로만 알았습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진리를 주지 않으신 냉혹한 처분이 아니라, 그들이 감당할 수 없는 거룩한 것을 알아 나중에 profane 하지 않도록 보호하신 섭리였습니다. 그래서 그룹들이 속죄소 위에, 성막 휘장에,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휘장, 그리고 성전 벽과 문에 새겨졌습니다.

 

특히 궤 위 속죄소의 두 그룹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궤 안에는 증거판, 곧 십계명이 들어 있었고, 궤 위에는 속죄소가 있었으며, 그 위에 두 그룹이 날개를 펴고 있었습니다. 증거궤는 말씀과 신적 진리를, 더 깊게는 주님 자신과 주님께 속한 천적인 것들을 의미합니다. AC.308은 이 궤가 창3의 생명나무와 같은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생명나무가 주님과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지혜의 생명을 뜻하는 것처럼, 증거궤도 주님과 오직 주님께만 속한 천적인 것들을 뜻합니다.

 

그룹들이 속죄소를 날개로 덮고 그 얼굴을 속죄소를 향한 것은, 신적 거룩함이 주님의 섭리로 보호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그룹들은 거룩한 것을 주님으로부터 떼어 내어 사람에게 감추는 존재가 아니라, 사람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거룩한 것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지키는 표상입니다. 동시에 두 그룹 사이에서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은, 거룩한 진리가 완전히 차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질서와 방법에 따라 전달된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사람이 함부로 거룩한 것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막으시지만, 사람이 겸손히 주님으로부터 받고자 할 때에는 필요한 만큼 말씀하시고 인도하십니다.

 

이 점에서 그룹은 단순한 차단의 상징이 아니라, 계시의 질서를 지키는 상징입니다. 생명나무로 가는 길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지켜지고 있습니다. 궤도 감추어져 있지만, 그룹들 사이에서 주님의 음성은 들립니다. 그러므로 그룹의 기능은 사람을 영원히 진리 밖에 두는 데 있지 않고, 그 사람이 진리를 profane 하지 않으면서 받을 수 있는 상태가 될 때까지 거룩한 것을 보호하는 데 있습니다.

 

성막의 휘장들과 성전 벽에 그룹들이 수놓아지고 새겨진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휘장은 성소의 여러 단계와 경계를 나타내며, 무엇이 더 내적인 것이고, 무엇이 더 외적인 것인지를 구분합니다. 그룹들이 그 경계에 놓였다는 것은 사람이 외적 상태에서 곧바로 가장 내적인 거룩함 안으로 뛰어들 수 없으며, 주님께서 정하신 질서에 따라 점차 준비되어야 함을 뜻합니다. 거듭남도 이와 같습니다. 사람은 기억 지식에서 신앙으로, 신앙에서 체어리티로, 체어리티에서 주님 사랑으로 한 단계씩 인도됩니다. 자기 지성으로 이 질서를 건너뛰려 하면, 거룩한 것을 이해하는 대신 왜곡하고 모독하게 됩니다.

 

AC.308이 겔910을 인용하는 이유는 그룹들의 보호 기능이 단순히 평화로운 성전 장면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심판의 장면에서도 동일하게 작용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겔9에서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은 그룹 위에서 성전 문지방으로 옮겨가고, 예루살렘의 가증한 일을 보고 탄식하며 우는 사람들의 이마에는 표가 그어집니다. 반면 다른 사람들에게는 심판이 임합니다. 여기서 이마의 표는 사람의 사랑과 의지 안에 주님의 선이 남아 있음을 뜻합니다. 겉으로는 같은 성읍과 성전에 있어도, 속으로 악을 슬퍼하고 거부하는 사람과 악을 사랑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전혀 다른 상태에 있습니다.

 

10에서 그룹들 사이의 불이 성읍 위에 흩어지는 장면도 같은 원리를 보여줍니다. 불은 그 본래 의미에서는 사랑을 뜻하지만, 악한 사람에게 임할 때에는 자기 사랑과 그 욕망의 불을 뜻합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이 악한 사람 안에 들어가면 그 사람의 상태에 따라 뒤집혀 자기 사랑의 불처럼 경험됩니다. 그러므로 성읍 위에 흩어지는 불은 주님께서 악을 만들어 보내신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들의 광적 욕망에 내맡겨진 결과 그 욕망이 그들을 심판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AC.308의 마지막 문장은 이 점을 분명히 합니다. 사람들은 신앙의 아르카나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보호받았고, 그 결과 자신들의 광적 욕망에 내맡겨졌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그들의 악을 원하시거나 그들을 악으로 밀어 넣으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이 이미 거룩한 것을 받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으므로, 더 깊은 진리를 열어 주어 profanation을 증가시키기보다 그들이 선택한 외적이고 자연적인 욕망의 수준에 머물도록 허용하셨다는 뜻입니다. 앞에서 살핀 것처럼, 같은 지옥 상태로 향하더라도 더 깊은 profanation으로 인해 더욱 악한 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제한하신 것입니다.

 

아무도 아끼지 말라’는 표현도 주님의 자비가 사라졌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의 문자적 의미에서는 가혹한 심판처럼 보이지만, 속뜻으로는 악과 거짓이 완전히 성숙하여 더 이상 선과 진리가 들어갈 자리가 없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주님께서 긍휼을 거두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주님의 긍휼을 받아들일 수 있는 모든 것을 자기 안에서 소멸시킨 것입니다. 심판은 주님에게서 오는 분노가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선택하고 형성한 사랑의 상태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 글은 또한 왜 세상에서 악이 곧바로 제거되지 않는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빛을 줍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자유를 없애면서까지 악을 강제로 제거하지 않으십니다. 자유가 사라지면 회개와 거듭남도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대신 주님께서는 악을 허용하시되, 그 악이 무한히 커지지 못하도록 제한하시고, 사람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끼치는 파멸을 가능한 한 줄이시며, 더 깊은 profanation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지키십니다. 그룹들은 바로 이러한 보이지 않는 섭리의 표상입니다.

 

그러므로 창3:24의 그룹들은 단순히 타락한 인간을 생명나무에서 쫓아내는 무서운 문지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이 거룩한 것을 함부로 다루어 자기 자신을 영원히 파멸시키지 않도록 생명나무의 길을 보호하시는 주님의 자비를 나타냅니다. 그 길은 닫힌 것이 아니라 지켜지고 있으며, 사람은 자기 지성과 감각으로 그 길을 침범할 수 없지만,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질서 안에서는 다시 그 길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AC.308의 중심은 이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거룩한 것을 사람에게서 빼앗기 위하여 그룹들을 세우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거룩한 것을 profane, 스스로를 파멸시키지 않도록 보호하시기 위하여 그룹들을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룹은 심판의 표상이면서 동시에 자비의 표상이고, 차단의 표상이면서 동시에 보존의 표상이며, 사람의 자유를 존중하시면서도 그 자유가 영원한 파멸로 치닫지 않도록 끝까지 지키시는 주님의 섭리를 나타냅니다.

 

 

심화

 

1. ‘25:18-21

 

 

AC.308, 심화 1, ‘출25:18-21’

AC.308.심화 1. ‘출25:18-21’ 18금으로 그룹 둘을 속죄소 두 끝에 쳐서 만들되 19한 그룹은 이 끝에, 또 한 그룹은 저 끝에 곧 속죄소 두 끝에 속죄소와 한 덩이로 연결할지며 20그룹들은 그 날개를 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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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6:1, 31

 

 

AC.308, 심화 2, ‘출26:1, 31’

AC.308.심화 2. ‘출26:1, 31’ 1너는 성막을 만들되 가늘게 꼰 베 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로 그룹을 정교하게 수 놓은 열 폭의 휘장을 만들지니, 31너는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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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왕상6:23-29, 32

 

 

AC.308, 심화 3, ‘왕상6:23-29, 32’

AC.308.심화 3. ‘왕상6:23-29, 32’ 23내소 안에 감람나무로 두 그룹을 만들었는데 그 높이가 각각 십 규빗이라 24한 그룹의 이쪽 날개도 다섯 규빗이요 저쪽 날개도 다섯 규빗이니 이쪽 날개 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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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25의 그룹과 왕상6의 그룹

 

 

AC.308, 심화 4, ‘출25의 그룹과 왕상6의 그룹’

AC.308.심화 4. ‘출25의 그룹과 왕상6의 그룹’ 솔로몬이 내소 가운데에 그룹을 두었으니 그룹들의 날개가 퍼져 있는데 이쪽 그룹의 날개는 이쪽 벽에 닿았고 저쪽 그룹의 날개는 저쪽 벽에 닿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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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25:22

 

 

AC.308, 심화 5, ‘출25:22’

AC.308.심화 5. ‘출25:22’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출25:22) 출25:22가 AC.308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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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7:89

 

 

AC.308, 심화 6, ‘민7:89’

AC.308.심화 6. ‘민7:89’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서 여호와께 말하려 할 때에 증거궤 위 속죄소 위의 두 그룹 사이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목소리를 들었으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이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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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9:3-7

 

 

AC.308, 심화 7, ‘겔9:3-7’

AC.308.심화 7. ‘겔9:3-7’ 3그룹에 머물러 있던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에 이르더니 여호와께서 그 가는 베 옷을 입고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찬 사람을 불러 4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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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10:2, 7

 

 

AC.308, 심화 8, ‘겔10:2, 7’

AC.308.심화 8. ‘겔10:2, 7’ 2하나님이 가는 베 옷을 입은 사람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그룹 밑에 있는 바퀴 사이로 들어가 그 속에서 숯불을 두 손에 가득히 움켜 가지고 성읍 위에 흩으라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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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9, 창3:24, ‘두루 도는 불 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4) AC.309 ‘두루 도는 불 칼’(flame of a sword turning itself)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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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7, 창3:24, ‘여섯째와 일곱째 후손’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4) AC.307 여기서는 홍수로 멸망한 여섯째와 일곱째 후손에 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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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7.심화

 

1. ‘being left to their 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

 

그러나 그들이 이러한 상태에 내맡겨졌다’, 남겨졌다는 것은 주님께서 그들을 버리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이 스스로 선택한 상태를 허용하심으로써, 더 깊은 거룩한 것들을 모독하는 데까지 이르지 않도록 막으시는 자비로운 섭리를 뜻합니다. 앞글에서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AC.307 해설)

 

위 해설 중 이 부분 말인데요, 이미 돌이킬 수는 없고, 그럼 할 수 없이 같은 지옥을 가더라도 덜 심한 지옥을 가도록  하셨다는 말로 이해해도 되나요?

 

 

네, 스베덴보리의 전체 신학에서는 그렇게 이해해도 큰 무리는 없습니다. 다만 표현을 조금 더 정확하게 다듬으면 좋겠습니다.

 

같은 지옥을 가더라도 덜 심한 지옥을 가도록’이라는 말은 핵심 취지는 맞지만, 자칫 ‘주님께서 어느 지옥으로 보낼지를 결정하신다’는 뉘앙스를 줄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지옥의 위치나 정도를 주님께서 임의로 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형성한 사랑의 상태가 그에 상응하는 공동체를 찾아간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AC.306, 307의 의미를 스베덴보리식으로 풀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이 이미 자기 사랑과 persuasion 속에 깊이 빠졌더라도, 아직 천국의 가장 깊은 거룩한 것들을 충분히 알지 못한 상태라면, 그 악은 그 정도에서 머뭅니다. 그러나 만일 그런 사람이 천적 진리까지 깊이 알고, 그것을 인정하였다가 다시 의도적으로 부인하고 거스른다면, 그는 profanation에 빠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한 악보다 훨씬 더 무서운 상태로 봅니다.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을 한 사람 안에서 뒤섞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 사람이 더 깊은 진리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으십니다. 이것은 벌을 주기 위한 제한이 아니라, ‘더 악한 상태로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한 보호’입니다.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표현으로 옮기면,

 

같은 지옥을 가더라도 조금이라도 덜 악한 지옥에 머물도록 하시는 주님의 자비

 

라는 뜻에 상당히 가깝습니다.

 

저는 오히려 이렇게 표현하면 더 스베덴보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돌이키기 어려운 상태에 이른 사람까지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비록 그가 끝내 지옥을 선택하게 될지라도, 더 깊은 거룩한 것들을 모독하여 훨씬 더 비참한 상태에 이르지 않도록 막으십니다. 그러므로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은 천국의 문을 닫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신이 만든 악보다 더 깊은 악 속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지키시는 마지막 자비의 표상입니다.’

 

이 표현이 AC.306 AC.307의 핵심을 가장 잘 담는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것은 스베덴보리 신학의 매우 중요한 원리 가운데 하나입니다. ‘주님의 섭리는 구원받을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구원받지 않는 사람에게도 미칩니다.’ 지옥에 가는 사람에게조차도 가능한 한 악을 제한하시고, 가능한 한 고통을 줄이시며, 가능한 한 덜 악한 상태에 머물도록 질서를 세우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여러 저작에서 주님께서 지옥까지도 질서 가운데 다스리신다고 설명하는데, 바로 그 원리가 여기 AC.306, 307에도 이미 나타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참고로, 아래 링크들은 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 관련 글들입니다. 좀더 깊은 내용들이니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SC.13, ‘their 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AC.307, 창3:24)의 속뜻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4) ‘their 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에서 ‘cupidities’는 단순한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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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14, ‘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를 ‘홍수’(Flood)의 상징으로 사용하는 이유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4) AC.307에서 스베덴보리는 ‘홍수’가 자연적 재난이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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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7, 창3:24, ‘여섯째와 일곱째 후손’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4) AC.307 여기서는 홍수로 멸망한 여섯째와 일곱째 후손에 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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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3:24)

 

AC.307

 

여기서는 홍수로 멸망한 여섯째와 일곱째 후손에 대하여 다루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에덴동산에서 쫓겨난(cast out of the garden of Eden) 자들, 그러니까 진리를 이해하는 모든 능력이 박탈되었고, 그 결과 그들은 말하자면 더 이상 사람이 아니게 되었으며, 자신들의 광적 욕망(insane cupidities)persuasions에 남겨진 사람들이었습니다. It here treats of the sixth and seventh posterities, which perished by the flood, and were altogether “cast out of the garden of Eden,” that is, from all understanding of truth, and became as it were not men, being left to their 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

 

 

해설

 

이 글은 앞의 AC.306을 이어받아, 창3 마지막 장면의 속뜻이 태고교회 말기에 이르러 홍수로 멸망하게 되는 사람들의 영적 상태를 설명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여섯째와 일곱째 후손’은 단순히 족보의 세대 수를 세려는 표현이 아니라, 태고교회가 마지막에 이르러 극도로 타락한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여기서 창45는 단순한 역사적 연대기로 이해하기보다, 태고교회 안에서 나타난 서로 다른 영적 계열을 보여주는 기록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창4는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면서 점차 타락해 가는 하나의 계열, 곧 가인 계열을, 창5는 주님께서 보존하신 또 다른 계열, 그러니까 셋 계열로 말이지요. 따라서 두 계열은 반드시 시간적으로 앞뒤를 이루는 사건이라기보다, 같은 시대 안에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 영적 흐름으로 이해하는 것이 AC 전체의 해석과 더 잘 조화를 이룹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여섯째와 일곱째 후손’도 어느 한 족보만을 가리키기보다, 결국 홍수로 멸망하게 된 태고교회의 마지막 사람들을 대표, 즉 표상하는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어느 계열이든 결국 끝에 가서는 홍수를 만나게 되니까요.

 

본문은 이어서 그들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어떤 장소에서 추방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진리를 이해하는 모든 능력을 박탈당했다는 말입니다. 에덴동산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지혜의 생명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그곳에서 쫓겨났다는 것은 더 이상 천적인 빛을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음을 뜻합니다.

 

또한 그들이 ‘더 이상 사람이 아니게 되었다’는 말씀도 육체적인 인간성을 잃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말씀의 속뜻에서 ‘사람’은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존재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 사랑과 거짓에 완전히 사로잡혀 선과 진리의 생명을 잃게 되면, 비록 겉모습은 여전히 사람일지라도 영적인 의미에서는 참된 사람이 아니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광적 욕망과 persuasion에 그대로 남겨졌다(being left to their 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고 합니다. 여기서 ‘광적 욕망’은 자기 사랑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악한 탐닉을 말하며, persuasion은 거짓을 너무도 강하게 확신한 나머지 어떤 진리도 받아들일 수 없게 된 영적 고착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겉으로는 신앙의 거룩한 것에 관심을 보이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모든 것을 자기 자신과 세상을 위하여 이용하기 때문에 결국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들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러한 상태에 ‘내맡겨졌다’, ‘남겨졌다’는 것은 주님께서 그들을 버리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이 스스로 선택한 상태를 허용하심으로써, 더 깊은 거룩한 것들을 모독하는 데까지 이르지 않도록 막으시는 자비로운 섭리를 뜻합니다. 앞글에서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결국 AC.307은 태고교회의 마지막 상태를 매우 간결하게 요약합니다. 그들은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을 잃었고, 참된 사람됨을 상실했으며, 자기 사랑에서 비롯된 광적 욕망과 persuasion 속에 스스로를 가두었습니다. 그 결과 홍수로 상징되는 영적 종말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글의 목적은 단순히 과거의 심판을 기록하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주님을 떠난 인간이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왜 주님께서 사람의 상태에 따라 진리를 허락하시기도 하고 감추시기도 하시며, 거룩한 것들이 모독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보호하시는지, 그리고 그렇게 하심으로써 가능한 한 비록 지옥 상태에 이르더라도 좀 덜 고통스러운 상태에 이르도록 끝까지 살피시는지를 밝히려는 데 있습니다.

 

 

심화

 

1. ‘being left to their 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

 

 

AC.307, 심화 1, ‘being left to their 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

AC.307.심화 1. ‘being left to their 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 그러나 그들이 이러한 상태에 ‘내맡겨졌다’, ‘남겨졌다’는 것은 주님께서 그들을 버리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이 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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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8, 창3:24, ‘그룹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4) AC.308 앞에서 ‘동쪽’(east)과 ‘에덴동산’(garden of Eden)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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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6, 창3: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AC.306-313)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And he cast out the man; and he made to dwell from the east toward the garden of Eden c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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