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영생에 들어감에 관하여 (계속)

 

AC.316

 

영혼이 이처럼 그 천사들에게서 스스로 멀어지면, 그는 선한 영들에게 받아들여지며, 그들과 함께 있는 동안에도 온갖 친절한 도움을 받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가 세상에서 살아온 삶이 선한 영들과 함께 머물 수 없는 성격이라면, 그는 이들로부터도 떠나기를 원하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은 여러 차례 반복, 마침내 그는 세상에서의 자신의 삶과 완전히 일치하는 사람들과 함께하게 됩니다. 그들 가운데서 그는 마치 자기 자신의 삶을 다시 발견한 것처럼 느낍니다. 놀랍게도 그는 그들과 함께 육체 안에서 살았던 것과 거의 같은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삶 속으로 다시 들어간 뒤에는 새로운 삶의 시작이 이루어집니다. 어떤 이는 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어떤 이는 더 짧은 시간이 지난 후에, 그 새로운 시작으로부터 지옥을 향해 나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을 향한 신앙 가운데 있었던 사람들은 그 새로운 삶의 시작으로부터 한 걸음씩 천국으로 인도됩니다. When the soul thus dissociates himself, he is received by good spirits, who likewise render him all kind offices while he is in their company. If however his life in the world has been such that he cannot remain in the company of the good, he desires to be rid of these also, and this process is repeated again and again, until he associates himself with those who are in full agreement with his former life in the world, among whom he finds as it were his own life. And then, wonderful to say, he leads with them a life like that which he had lived when in the body. But after sinking back into such a life, he makes a new beginning of life; and some after a longer time, some after a shorter, are from this borne on toward hell; but such as have been in faith toward the Lord are from that new beginning of life led step by step toward heaven.

 

 

해설

 

AC.316은 사람이 사후 자신의 영원한 거처에 이르게 되는 과정이 어떠한지를 매우 질서 있게 설명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의 운명이 단 한 번의 심판으로 갑자기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적 사랑이 점차 드러나고 그것에 맞는 공동체를 찾아가는 과정을 통하여 결정된다고 말합니다. 이는 ‘천국과 지옥’에서 자세히 설명되는 중간 영계의 원리를 이미 창세기 주석 속에서 간결하게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앞선 AC.314AC.315에서는 사람이 먼저 영적 천사들의 보살핌을 받고, 그 가르침을 원하지 않을 경우 스스로 그들에게서 멀어진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AC.316에서는 그 사람이 곧바로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선한 영들의 공동체로 인도된다고 말합니다. 주님의 섭리는 가능한 한 모든 사람이 선한 공동체 안에 머물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한 공동체와 맞지 않더라도 다른 공동체에서 다시 도움받을 기회가 주어집니다. 이는 주님께서 사람을 얼마나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형성된 삶이 선을 사랑하는 삶이 아니라면, 그는 그 공동체 안에서도 오래 머물지 못합니다. 중요한 것은 선한 영들이 그를 내쫓는 것이 아니라, 본문이 말하듯 그가 ‘떠나기를 원한다’는 점입니다. 선한 분위기는 그의 내적 사랑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점차 답답하고 불편하게 느껴집니다. 결국 사람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것과 일치하는 곳을 스스로 찾아가게 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사람을 특정한 곳으로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이 자신의 사랑을 따라 자신의 자리를 선택한다는 스베덴보리의 기본 원리를 다시 확인해 줍니다.

 

본문은 이러한 과정이 ‘반복된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사람은 단 한 번의 선택으로 자신의 영원한 상태가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공동체를 거치며 자신의 참된 성향이 점점 분명해지고, 마침내 가장 편안하게 느껴지는 공동체를 만나게 됩니다. 그곳은 다른 누구의 선택이 아니라 자신의 사랑이 이끌어 낸 자리입니다. 그래서 영계의 공동체는 단순히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 아니라, 동일한 사랑과 동일한 삶을 가진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형성한 공동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상태를 매우 인상적인 표현으로 설명합니다. 그는 ‘마치 자기 자신의 삶을 다시 발견한 것처럼’ 느낀다고 말합니다. 이는 영계에서 사람이 더 이상 외적 예절이나 사회적 역할에 의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 그대로 살아가게 됨을 뜻합니다. 세상에서는 직업이나 체면, 법과 관습 때문에 자신의 본성을 어느 정도 숨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계에서는 그러한 외적 껍질이 벗겨지고, 사람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그의 삶 전체를 이루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자연스럽게 자신과 같은 사랑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서 가장 편안함을 느끼게 됩니다.

 

더 나아가 스베덴보리는 ‘육체 안에서 살았던 것과 거의 같은 삶을 살아간다’고 말합니다. 이는 죽음이 사람의 성품을 즉시 바꾸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사람은 죽었다고 해서 갑자기 천사가 되거나 악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형성된 사랑과 사고방식, 습관과 삶의 방향이 그대로 이어집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반복하여 강조하는 ‘죽음은 상태의 변화이지 인격의 변화가 아니다’라는 원리입니다.

 

그러나 그 상태가 영원히 그대로 지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은 매우 중요한 말씀을 덧붙입니다. ‘그와 같은 삶 속으로 다시 들어간 뒤에는 새로운 삶의 시작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새로운 삶의 시작’은 사람이 자신의 참모습을 완전히 드러낸 이후의 새로운 단계입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외적 제약 속에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내적 사랑이 온전히 현실이 되는 삶을 시작합니다. 이 시점부터 각 사람은 자신의 사랑이 향하는 방향으로 점차 나아가게 됩니다.

 

악을 사랑한 사람은 그 새로운 시작으로부터 점차 지옥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형벌을 선고받아 끌려가는 과정이 아닙니다. 자신의 사랑을 더욱 자유롭게 실천할 수 있는 공동체를 향하여 자연스럽게 이동하는 과정입니다. 반대로 주님을 향한 신앙 가운데 살았던 사람은 그 새로운 시작으로부터 ‘한 걸음씩’ 천국으로 인도됩니다. 여기서도 스베덴보리는 ‘한 걸음씩’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천국 역시 단번에 완성되는 상태가 아닙니다. 사람은 사후에도 계속 배우고 성장하며, 천사들의 도움을 받아 점점 더 깊은 사랑과 지혜 가운데 들어갑니다. 이는 천국이 정지된 상태가 아니라 끝없는 성장의 나라임을 보여줍니다.

 

AC.316은 사후 세계를 하나의 거대한 영적 선택의 과정으로 보여줍니다. 주님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을 선한 공동체로 이끌고, 가능한 한 천국으로 인도하시려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은 결코 자유를 침해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따라 스스로 공동체를 선택하고, 그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참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따라서 천국과 지옥은 외부에서 강제로 배정되는 장소가 아니라, 평생 형성된 사랑이 마침내 자신의 영원한 집을 찾아가는 결과입니다. 이것이 AC.316이 보여주는 사후 세계의 질서이며, 동시에 주님의 공의와 자비가 완전한 조화를 이루는 방식입니다.

 

 

심화

 

1. ‘주님이 신생 영에게 일련의 코스를 밟게 하시는 이유

 

 

AC.316, 심화 1, ‘주님이 신생 영에게 일련의 코스를 밟게 하시는 이유’

AC.316.심화 1. ‘주님이 신생 영에게 일련의 코스를 밟게 하시는 이유’ 사람의 자유와 선택을 존중하시는 주님은 왜 사후 처음 눈 뜨는 영에게 이후 진행될 전체 코스를 설명, 너는 이 코스를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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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7, 창3 뒤, ‘저마다 다 다른 속도로 진행되는 사후의 여정’

사람이 영생에 들어감에 관하여 (계속) AC.317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천국을 향하여 더 천천히 나아가고, 어떤 사람들은 더 빨리 나아갑니다. 나는 죽은 직후 곧바로 천국으로 올려진 사람들도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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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5, 창3 뒤, ‘사람의 사후 운명이 정해지는 방식’

사람이 영생에 들어감에 관하여 (계속) AC.315 그러나 되살아난 사람, 곧 영혼이 가르침 받기를 원하지 않는 성향이라면, 그는 천사들의 무리로부터 떠나기를 원하게 됩니다. 천사들은 이를 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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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영생에 들어감에 관하여 (계속)

 

AC.315

 

그러나 되살아난 사람, 곧 영혼이 가르침 받기를 원하지 않는 성향이라면, 그는 천사들의 무리로부터 떠나기를 원하게 됩니다. 천사들은 이를 매우 예민하게 알아차립니다. 저세상에서는 모든 생각의 관념들이 서로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천사들이 그를 떠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사람이 스스로 그들에게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천사들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그들에게 친절한 도움을 베풀고, 가르치며, 천국으로 인도하기를 무엇보다도 간절히 바랍니다. 이것이 천사들에게 가장 큰 기쁨입니다. But if the resuscitated person or soul is not of such a character as to be willing to be instructed, he then desires to be rid of the company of the angels, which they exquisitely perceive, for in the other life there is a communication of all the ideas of thought. Still, they do not leave him even then, but he dissociates himself from them. The angels love everyone, and desire nothing more than to render him kindly services, to instruct him, and to convey him to heaven. In this consists their highest delight.

 

 

해설

 

AC.315는 사람의 사후 운명이 주님의 일방적인 결정이나 천사들의 선택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 자신의 내적 사랑과 자유로운 선택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실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앞선 AC.314에서는 영적 천사들이 새롭게 깨어난 영혼에게 필요한 도움을 베풀고, 그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 저세상의 일들을 알려 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AC.315는 모든 사람이 그 도움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덧붙입니다. 영계에서도 자유는 그대로 존중되며,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방향을 따라 움직입니다.

 

본문에서 스베덴보리는 ‘가르침 받기를 원하지 않는 성향’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핵심은 지식의 부족이 아니라 의지의 방향입니다. 천국의 진리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사람의 사랑에 달려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진리를 들으면 기뻐하고 더 배우기를 원하지만, 어떤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삶이 바뀌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 가르침을 거부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상태를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사랑의 선택으로 이해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천사들이 그 사람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스스로 그들에게서 멀어진다’고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 신학의 중요한 원리 가운데 하나입니다. 주님께서는 누구도 버리지 않으시며, 천사들 또한 누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 자신이 자신의 사랑을 따라 천사들과 함께 있기를 불편해하고, 결국 그들과의 교제를 끊게 됩니다. 이는 지옥이 주님께서 사람을 밀어 넣으시는 장소가 아니라, 사람이 자신의 사랑을 따라 스스로 선택하는 상태라는 스베덴보리의 일관된 가르침과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또한 스베덴보리는 저세상에서는 ‘모든 생각의 관념들이 서로 전달된다’고 말합니다. 이는 영계의 교통이 지상의 언어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지상에서는 마음과 다른 말을 할 수도 있고, 자신의 속생각을 숨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계에서는 내면의 생각과 애정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며, 천사들은 말보다 먼저 그 사람의 상태를 지각합니다. 그래서 상대가 진리를 원하는지 거부하는지, 평안을 느끼는지 불편해하는지를 즉시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소통은 논리적 추론 결과가 아니라 상태와 상태가 직접 서로 통하는 영적 교통입니다.

 

본문의 마지막은 천사들의 사랑이 어떠한지를 아름답게 보여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사들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친절하게 섬기고 가르치며, 천국으로 인도하기를 무엇보다도 원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아무런 차별도, 보상에 대한 기대도 없습니다. 천사들은 자신을 위해 사람을 돕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 사람이 주님께 가까워지기를 바라기 때문에 섬깁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것이 천사들에게 가장 큰 기쁨이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에서는 흔히 다른 사람 돕는 일이 희생이나 의무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사랑 자체가 기쁨이기 때문에, 남을 섬기는 것이 곧 자신의 행복이 됩니다.

 

이 대목은 천국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천국은 황금 거리나 아름다운 풍경 때문에 행복한 곳이 아니라, 서로를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 되는 공동체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은 언제나 밖으로 흘러가며, 자신보다 다른 사람의 선과 행복을 먼저 구합니다. 그래서 천사들은 누군가를 천국으로 인도할 수 있을 때 가장 큰 만족을 느끼며, 그것을 자신의 영광으로 여기지 않고 모두 주님께 돌립니다.

 

AC.315는 구원의 문이 언제나 열려 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 문을 통과할 것인지는 사람 자신의 사랑이 결정한다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주님도, 천사들도 사람을 버리지 않습니다. 천사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사람을 섬기고 가르치며 천국으로 인도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결코 강요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끝내 다른 사랑을 선택한다면, 천사들은 그 자유를 존중합니다. 이처럼 주님의 자비와 인간의 자유는 서로 충돌하지 않고 함께 작용하며, 그 질서 안에서 각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세계를 스스로 선택하게 됩니다.

 

 

 

AC.316, 창3 뒤, ‘사람이 사후 자신의 영원한 거처에 이르게 되는 과정’

사람이 영생에 들어감에 관하여 (계속) AC.316 영혼이 이처럼 그 천사들에게서 스스로 멀어지면, 그는 선한 영들에게 받아들여지며, 그들과 함께 있는 동안에도 온갖 친절한 도움을 받습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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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4, 창3 뒤, ‘사람이 영생에 들어감에 관하여 (계속)’(AC.314-319)

사람이 영생에 들어감에 관하여 (계속) Continuation Concerning Man’s Entrance Into Eternal Life AC.314 되살아난(resuscitated) 사람, 곧 영혼이 주위를 둘러볼 수 있도록 빛의 사용이 허락되면, 앞에서 말한 영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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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이 글은 표면적으로는 ‘한 목사가 자신의 명예를 희생하여 한 집사를 살렸다’는 감동적인 간증처럼 전개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들여다보면, 이 이야기가 진정으로 감동을 주는 이유는 목사의 희생 자체보다도 ‘한 영혼의 회복을 모든 것보다 우선하는 사랑’이라는 원리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모든 사랑은 상대를 지배하거나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영원한 유익을 바라는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만일 이 이야기처럼 목사가 자신의 평판보다 한 사람의 거듭남과 회복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면, 그것은 천국적 사랑의 방향과 상당히 닮아 있습니다. 천국의 사랑은 언제나 ‘내가 어떻게 보이느냐’보다 ‘저 사람이 주님께 다시 돌아올 수 있느냐’를 먼저 묻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스베덴보리는 선과 진리는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고 강조합니다. 사랑은 반드시 지혜와 함께 움직여야 하며, 자비도 질서 안에서 행해져야 합니다. 따라서 실제 목회 현장에서 공개적인 축출을 통해 오히려 비밀을 지켜 주었다는 이 이야기가 모든 상황에서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주님은 각 사람의 상태에 따라 서로 다른 방법으로 인도하시며, 동일한 외적 행동이 언제나 동일한 영적 선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행동의 형태가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의도와 주님의 질서입니다. 만일 이러한 선택이 진정 자기 명예를 버리고 상대의 회복만을 바라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면 거기에는 선한 요소가 있을 수 있지만, 만일 인간적 감정이나 독단이 섞였다면 그만큼 영적 가치도 달라질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김집사의 변화입니다. 처음에는 새벽기도, 봉사, 헌금, 찬양 인도 등 누구보다 열심인 사람이었지만, 결국 그는 자신의 입으로 ‘그것이 하나님보다 사람들의 눈을 더 의식하는 신앙이었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수없이 설명하는 ‘겉 사람의 경건’과 ‘속 사람의 변화’의 차이를 잘 보여 줍니다. 사람은 외적으로는 매우 신앙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애와 명예욕,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그 선행의 중심에 있다면 아직 proprium(자아, 본성 같은 것이지만 그런 것들보다 더 깊은 것, 우리말로 옮기기가 어려움, own)이 살아 있는 상태입니다. 반대로 외적인 직분과 명예는 모두 잃었지만 겸손과 진실함을 배우게 되었다면, 영적으로는 오히려 더 큰 진보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외적인 봉사의 양보다 사람 안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먼저 보십니다.

김집사가 결국 교회의 맨 뒷자리에 앉아 아무 직분도 맡지 않은 채 조용히 예배드리는 모습은 매우 상징적입니다. 스베덴보리라면 이것을 단순한 겸손의 모습이 아니라 ‘자기의 의를 벗어 버리고 주님 앞에 서는 상태’로 볼 것입니다. 이전에는 사람들에게 보이는 봉사가 중심이었다면, 이제는 오직 주님 앞에서만 살아가려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천국에서는 직분이 사람을 높이지 않습니다. 사랑의 질이 사람을 높입니다. 따라서 아무 직분이 없어도 주님을 진실하게 사랑하는 사람이 천국에서는 더 높은 상태에 있을 수 있습니다.

목사가 뒤에서 몰래 빚을 갚아 주고 일자리를 연결해 준 장면도 상응적으로 보면 의미가 있습니다. 참된 사랑은 가능한 한 상대를 부끄럽게 만들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사들은 선을 행하면서도 자신이 선을 행하고 있다는 의식을 거의 갖지 않으며, 모든 선을 주님께 돌린다고 설명합니다. 그런 점에서 도움을 주면서도 자신의 공로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모습은 천국적 사랑과 어느 정도 닮아 있습니다. 다만 실제 현실에서는 이러한 도움 역시 상대를 의존하게 만들지 않도록 지혜롭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야기 속에서도 빚을 전부 대신 갚아 주지 않고 스스로 책임질 부분을 남겨 둔 것은 영적 성장이라는 측면에서 의미 있는 설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이 이야기에는 오늘날 많은 신앙인들이 빠질 수 있는 함정도 잘 드러납니다. 새벽기도, 헌금, 봉사, 찬양, 직분은 모두 선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유지하는 수단이 되면, 그것은 영적인 생명이 아니라 종교적 외형만 남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상태를 매우 경계합니다. 사람은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자신 안에 숨어 있는 자기애를 거의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실패와 수치와 낮아짐을 통하여 비로소 자신의 실상을 발견하고, 그때부터 참된 거듭남이 시작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를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가장 깊이 읽는다면, 주인공은 사실 목사도 아니고 김집사도 아닙니다. 진정한 주인공은 배후에서 사람을 회복시키시는 주님의 섭리입니다. 목사는 도구일 뿐이고, 김집사는 변화되는 대상일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때로는 명예를 허무시고, 때로는 사람들의 오해를 허락하시며, 때로는 광야 같은 시간을 통과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 목적은 정죄가 아니라 사랑이며, 파괴가 아니라 재창조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반복하여 말하듯, 주님의 섭리는 가장 작은 일에까지 미치며, 언제나 인간의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고 역사합니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에서 가장 오래 남아야 할 교훈은 ‘착한 목사’가 아니라, 사람의 겉모습이 무너질 때 비로소 속 사람을 새롭게 빚으시는 주님의 자비로운 섭리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SY.2, ‘전 재산 10억 헌금한 장로가 2년 뒤 법원에 간 이유’

이 이야기의 핵심은 ‘10억을 잃은 장로’가 아닙니다. 말씀의 속뜻으로는 ‘사람을 믿던 신앙이 무너지고, 주님을 믿는 신앙으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입니다. 처음에는 너무 비극처럼 보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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