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8

 

말씀은 말씀에서 나온 교리가 아니면 이해될 수 없다

The Word cannot be understood except by means of doctrine from the Word.

 

 

교회의 교리는 반드시 말씀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3464, 5402, 6832, 10763, 10765). 교리 없이 말씀은 이해되지 않는다 (9025, 9409, 9424, 9430, 10324, 10431, 10582). 참된 교리는 말씀을 읽는 자들에게 등불과 같다 (10401). 참되고 순수한 교리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열린 사람들(those who are in enlightenment from the Lord)로부터 나와야 한다 (2510, 2516, 2519, 2524, 10105). 말씀은 열린 자가 형성한 교리에 의해 이해된다 (10324). 열린 자들은 스스로 말씀으로부터 교리를 형성한다 (9382, 10659). 교회의 교리로 가르치고 배우는 자들과, 말씀의 겉뜻만으로 가르치고 배우는 자들 사이의 차이에 대하여 보라 (9025). 교리 없이 말씀의 겉뜻 안에만 있는 자들은 신적 진리에 관한 어떤 이해에도 이르지 못한다 (9409, 9410, 10582). 그들은 많은 오류에 빠질 수 있다 (10431). The doctrine of the church must be from the Word (n. 3464, 5402, 6832, 10763, 10765). The Word without doctrine is not understood (n. 9025, 9409, 9424, 9430, 10324, 10431, 10582). True doctrine is a lamp to those who read the Word (n. 10401). Genuine doctrine must be from those who are in enlightenment from the Lord (n. 2510, 2516, 2519, 2524, 10105). The Word is understood by means of doctrine formed by one enlightened (n. 10324). They who are in enlightenment form for themselves doctrine from the Word (n. 9382, 10659). What is the difference between those who teach and learn from the doctrine of the church, and those who teach and learn from the sense of the letter of the Word alone (n. 9025). They who are in the sense of the letter of the Word without doctrine, do not come into any understanding concerning Divine truths (n. 9409, 9410, 10582). They may fall into many errors (n. 10431).

 

진리를 진리 자체를 위하여 사랑하는 자들은, 성인이 되어 자기 이해로 볼 수 있게 되면, 단지 자기 교회의 교리 안에 머물지 않고, 그것이 참된지 아닌지를 말씀으로부터 살핀다 (5402, 5432, 6047). 그렇지 않으면 사람은 누구나 타인과 자기 출생지로부터 진리를 갖게 될 것이며, 유대인으로 태어났든 헬라인으로 태어났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6047). 그러나 말씀의 겉뜻으로부터 신앙에 관한 것이 된 그런 것들은 충분히 살핀 뒤에야 비로소 버려야 하며, 성급히 소멸되어서는 안 된다 (9039). They who are in the affection of truth for the sake of truth, when they become adults, and can see from their own understanding, do not simply abide in the doctrinals of their churches, but examine from the Word whether they be true or not (n. 5402, 5432, 6047). Otherwise everyone would have truth from another, and from his native soil, whether he were born a Jew or a Greek (n. 6047). Nevertheless such things as are become matters of faith from the literal sense of the Word, are not to be extinguished till after a full view (n. 9039).

 

교회의 참된 교리는 체어리티와 신앙의 교리이다 (2417, 4766, 10763, 10765). 신앙의 교리가 교회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삶, 곧 체어리티가 교회를 이룬다 (809, 1798, 1799, 1834, 4468, 4677, 4766, 5826, 6637). 교리들은 사람이 그것에 따라 살지 않으면 아무런 가치가 없으며, 그것들이 단지 기억과 사고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삶을 위한 것임은 누구나 알 수 있다 (1515, 2049, 2116). 오늘날 교회들에서는 신앙의 교리가 가르쳐지고, 체어리티의 교리는 도덕 철학이라 불리는 학문으로 밀려나 거절되고 있다 (2417).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삶, 곧 체어리티로 인정받는다면 교회는 하나가 될 것이다 (1285, 1316, 2982, 3267, 3445, 3451, 3452). 체어리티의 교리가 체어리티 없는 신앙의 교리보다 얼마나 더 우월한지 보라 (4844). 체어리티에 관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자들은 천적인 것들에 대하여 무지 가운데 있다 (2435). 오직 신앙의 교리만을 붙들고 체어리티의 교리는 붙들지 않는 자들은 오류에 빠지는데, 다음에 그 오류들이 또한 묘사되어 있다 (2383, 2417, 3146, 3325, 3412, 3413, 3416, 3773, 4672, 4730, 4783, 4925, 5351, 7623–7677, 7752–7762, 7790, 8094, 8313, 8530, 8765, 9186, 9224, 10555). The true doctrine of the church is the doctrine of charity and faith (n. 2417, 4766, 10763, 10765). The doctrine of faith does not constitute the church, but the life of faith, which is charity (n. 809, 1798, 1799, 1834, 4468, 4677, 4766, 5826, 6637). Doctrinals are of no account, unless one lives according to them; and everyone may see they are for the sake of life, and not merely for the memory and thought thence derived (n. 1515, 2049, 2116). In the churches at this day the doctrine of faith is taught, and not the doctrine of charity, the latter being rejected to a science, which is called moral philosophy (n. 2417). The church would be one, if they should be acknowledged as men of the church from the life, thus from charity (n. 1285, 1316, 2982, 3267, 3445, 3451, 3452). How much superior the doctrine of charity is to that of faith separate from charity (n. 4844). They who know nothing concerning charity, are in ignorance with respect to heavenly things (n. 2435). They who only hold the doctrine of faith, and not that of charity, fall into errors; which errors are also described (n. 2383, 2417, 3146, 3325, 3412, 3413, 3416, 3773, 4672, 4730, 4783, 4925, 5351, 7623–7677, 7752–7762, 7790, 8094, 8313, 8530, 8765, 9186, 9224, 10555).

 

오직 신앙의 교리 안에만 있고, 신앙의 삶, 곧 체어리티 안에는 아닌 자들을 가리켜 옛날에는 무할례자(the uncircumcised), 혹은 블레셋 사람(Philistines)이라고 불렀다 (3412, 3413, 3463, 8093, 8313, 9340). 고대인들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교리를 붙들었고, 신앙의 교리를 그것에 종속시켰다 (2417, 3419, 4844, 4955). They who are only in the doctrine of faith, and not in the life of faith, which is charity, were formerly called the uncircumcised, or Philistines (n. 3412, 3413, 3463, 8093, 8313, 9340). The ancients held the doctrine of love to the Lord and of charity towards the neighbor, and made the doctrine of faith subservient thereto (n. 2417, 3419, 4844, 4955).

 

열린 자가 형성한 교리는 그 후에 이성과 학문적인 것들에 의해 확증될 수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더 충만히 이해되고 굳게 세워진다 (2553, 2719, 2720, 3052, 3310, 6047). 이 주제에 관하여는 New Jerusalem and Its Heavenly Doctrine 51번을 보라.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 안에 있는 자들은 교회 안의 교리적인 것들은 무슨 이성적 통찰 없이 그저 단순히 믿어야 하는 것들이라고 한다 (3394). Doctrine formed by one enlightened may afterwards be confirmed by things rational and scientific; and that thus it is more fully understood, and is corroborated (n. 2553, 2719, 2720, 3052, 3310, 6047). See more on this subject in New Jerusalem and Its Heavenly Doctrine (n. 51). They who are in faith separate from charity would have the doctrinal of the church simply believed, without any rational intuition (n. 3394).

 

지혜로운 사람의 표지는 교리를 확증하는 데 있지 않고, 그전에 먼저 그것이 참인지를 보는 데 있다. 이것이 열린 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경우다 (1017, 4741, 7012, 7680, 7950). 확증의 빛은 자연적 빛이다. 영적 빛이 아니며, 심지어 악한 자에게도 있을 수 있다 (8780). 모든 것, 심지어 거짓까지도 진리처럼 보이게 하려고 아주 단단히 확증될 수 있다 (2482, 2490, 5033, 6865, 8521). It is not the mark of a wise man to confirm a dogma, but to see whether it be true before it is confirmed; and that this is the case with those who are in enlightenment (n. 1017, 4741, 7012, 7680, 7950). The light of confirmation is a natural light, and not spiritual, and may exist even with the evil (n. 8780). All things, even falsities, may be so far confirmed, as to appear like truths (n. 2482, 2490, 5033, 6865, 8521).

 

 

해설

 

말씀은 거룩하지만, 그 거룩함이 사람에게 자동으로 이해를 주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교리 없이 말씀을 읽으면 이해에 이르지 못한다고 단언합니다. 이것은 교리가 말씀보다 위에 있다는 뜻이 아니라, 말씀으로부터 길어 올린 질서 있는 진리의 체계가 있어야 비로소 말씀의 세부들이 제자리를 찾는다는 뜻입니다. 교리는 지도와 같고, 말씀은 광대한 땅과 같습니다. 지도가 없이 광야에 들어가면 길을 잃기 쉽듯, 교리 없이 말씀을 읽으면 각 구절이 흩어져 보이거나 모순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교리는 사람의 사유에서 임의로 만들어진 체계가 아니라, ‘열림(enlightenment) 가운데 형성된 것이어야 합니다. 열림은 주님께서 이해의 내면, 곧 속을 여시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교리는 단순한 학문적 산물이 아니라, 삶과 사랑의 질서 속에서 주님께 인도받으며 형성된 것입니다. 이런 교리만이 등불처럼 말씀을 밝혀 줍니다. 반대로 글자만 붙들고, 즉 말씀을 겉뜻으로만, 그리고 교리 없이 읽으면 사람은 자기 애정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결론에 도달할 수 있고, 심지어 거짓도 진리처럼 확증할 수 있습니다.

 

진리를 ‘진리 자체를 위하여’ 사랑하는 사람은 성인이 되면 자신이 속한 교회의 교리를 그대로 반복하는 데 머물지 않고, 말씀으로 그것을 시험합니다. 이것은 반항이 아니라 성숙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은 태어난 문화와 전통에 따라 자동적으로 ‘자기 교회 진리’를 갖게 될 뿐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스베덴보리는 신중함을 요구합니다. 겉뜻으로 보고 신앙에 관한 것으로 받아들인 것들은 충분히 살피기 전에는 성급히 버려서는 안 됩니다. 참된 검토는 파괴가 아니라 정화입니다.

 

WH.8의 중심은 체어리티와 신앙의 관계에 있습니다. 교회의 참 교리는 체어리티와 신앙의 교리이지만, 교회를 실제로 이루는 것은 신앙의 교리가 아니라 ‘신앙의 삶’, 곧 체어리티입니다. 신앙이 머리에만 머물면 교회는 분열되지만, 체어리티가 삶이 되면 교회는 하나가 됩니다. 고대 교회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중심에 두고 신앙을 그에 종속시켰다는 말은, 교리의 중심이 사랑이어야 함을 뜻합니다. 사랑 없는 신앙은 블레셋과 같고, 지식은 있어도 생명은 없는 상태입니다.

 

또한 열림(enlightenment) 가운데 형성된 교리는 이후 이성과 학문으로 확증될 수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질서가 중요합니다. 먼저 열림이 있고, 그다음 이성적 확증이 있지만, 반대로 먼저 확증하고 나중에 진리를 찾으려 하면, 그것은 자연적 빛 안에서의 논증, 논쟁에 머무를 뿐입니다. 확증의 빛은 악한 자에게도 있을 수 있으며, 모든 거짓도 체계적으로 세워지면 진리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무엇을 확증할 것인가를 먼저 묻지 않고, 그것이 참인가를 먼저 봅니다. 이것이 열린 자의 표지입니다.

 

결국 WH.8은 말씀과 교리, 사랑과 신앙, 열림과 이성의 질서를 보여 줍니다. 말씀은 근원이고, 교리는 그로부터 나오며, 체어리티는 교리를 살아 있게 하고, 열림은 그 모든 것을 올바른 질서 안에 두는 하늘의 빛입니다. 이런 질서 안에서만 말씀은 이해되고, 교회는 실제가 됩니다.

 

 

 

WH.7, '말씀은 열린 사람이 아니면 이해가 안 된다'

WH.7 말씀은 열린(enlightened) 사람이 아니면 이해가 안 된다 The Word is not understood except by those who are enlightened. 인간의 이성적 능력(rational faculty)은 주님에 의해 열리지(enlightened) 않으면 신성(Divine)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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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1:2) 본문 중 리메인스에 관한 설명 가운데 겉의 일들이 황폐해지기 전까지는 결코 빛이나 낮 가운데 나오지 않습니다라는 설명이 나오는데 이게 무슨 뜻인가요?

 

AC.19에서 리메인스가 ‘겉의 일들이 황폐해지기 전까지는 결코 빛이나 낮 가운데 나오지 않는다’는 표현은, 거듭남의 구조를 이해하는 핵심 열쇠입니다.

 

먼저 ‘리메인스(remains)가 무엇인지부터 분명히 해야 합니다. 리메인스는 주님께서 사람 안에 몰래 간직해 두신 선과 진리의 씨앗입니다. 어린 시절의 순진함, 양심의 흔적, 말씀을 들으며 잠시 감동받았던 기억, 이웃을 향한 따뜻한 마음 같은 것들이 여기에 속합니다. 이것들은 우리의 ‘겉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의 ‘속 사람’ 안에 저장해 두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것이 ‘빛 가운데 나오지 않는다’고 할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겉 사람이 아직 자기 본성과 세상 사랑에 강하게 붙들려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잘 살 수 있다고 믿고, 자기 생각이 옳다고 확신하고, 세상적 성공과 자아 만족을 선이라고 여기고 있는 동안에는, 리메인스가 활동할 공간이 없습니다. 햇빛은 이미 떠 있지만, 짙은 안개가 그것을 가리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겉의 일들이 황폐해진다’는 말은, 인생이 무너진다는 뜻이 아니라, 겉 사람의 자만과 자기 신뢰가 흔들린다는 뜻입니다. 실패, 상실, 유혹, 고난, 양심의 가책 같은 경험을 통해 사람이 자기 힘의 한계를 깨닫는 순간이 옵니다. 그때 겉 사람의 주장들이 잠잠해집니다. AC에서는 이것을 ‘황폐’ 또는 ‘정적 상태’라고 부릅니다. 겉의 소리가 낮아질 때, 속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황폐’는 파괴가 아니라 정리입니다. 겉 사람의 허위와 교만이 약해질 때, 주님께서 저장해 두신 리메인스가 비로소 작용합니다. 그때 사람이 문득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래도 선은 선이지’, ‘그래도 진리는 중요하지’, ‘나는 혼자가 아니구나’ 등, 이런 깨달음이 바로 리메인스가 빛 가운데 나오는 순간입니다.

 

이것은 영적 법칙과 같습니다. 낮이 오기 전에는 밤이 있습니다. 씨앗이 싹트기 전에는 껍질이 갈라집니다. 겉 사람의 확신이 무너지지 않으면, 속 사람의 생명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때로 우리 인생을 ‘조용히 비우시는’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중요한 점은, 리메인스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겉 사람이 아무리 거칠어도, 주님은 속 사람 안에 선과 진리의 씨앗을 남겨 두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으로 드러나기 위해서는 겉의 강한 집착이 약해져야 합니다. 이것이 AC.19에 나오는 저 표현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혹 지금 어떤 황폐를 겪고 있다면, 그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일 수 있습니다. 겉 사람이 조용해질 때, 속 사람 안의 리메인스가 깨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빛이 있으라’는 말씀이 실제가 됩니다.

 

 

 

SC.18, ‘profanation’(신성모독)에 관하여

SC.18, Emanuel Swedenborg의 ‘Arcana Coelestia’에서 말하는 ‘profanation’에 대하여 Emanuel Swedenborg의 ‘Arcana Coelestia’에서 말하는 ‘profanation’(신성모독, 神性冒瀆)은 단순한 신성모독이라는 외적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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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16, ‘진리를 진리 자체를 위하여 사랑한다’는 게 뭔가요?

‘진리를 진리 자체를 위하여 사랑한다’는 게 뭔가요? ‘진리를 진리 자체를 위하여 사랑한다’는 것은, 진리가 나에게 유리하기 때문에, 나의 입장을 강화해 주기 때문에, 나를 높여 주기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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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8, ‘성도들아 찬양하자’와 찬63, ‘주가 세상을 다스리니’입니다.

 

오늘부터 해설 버전 누락분 창세기 1장부터 3장입니다. 창3 마치면 창6으로 원래대로 이번엔 쭈욱 나갑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으로 본문은 창1 1절로 2절, AC 글 번호로는 16번에서 19번입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다.

 

 

1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1:1, 2)

 

 

이 본문을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라는 제목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시티아(Arcana Coelestia, AC)에 주목하여 귀 기울이고자 합니다. 지난주에 이어 오늘도, 오늘은 창1:1-2에 해당하는 AC.16-19를 그 번역과 해설로 접하면서, 거의 설교와도 같은 해설의 어떠함을 다시 한번 맛보고, 거기서 우리 모두 주님의 음성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시작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1:1)

 

 

AC.16, 창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창1:1) AC.16 태고(太古, the most ancient time)를 ‘태초’(太初, the beginning)라고도 합니다. 선지자들에 의해 선지서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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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1:2)

 

 

AC.17, 창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AC.17-19)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And 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s of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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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8, 창1:2, '깊음'(faces of the deep), '황폐'(vastation)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8 ‘깊음’(faces of the deep)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욕정(cupidities)과, 그로 말미암는 거짓(fals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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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 창1:2,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9 ‘하나님의 영’(spirit of God)이란 주님의 자비를 뜻하며, 이를 가리켜 ‘운행하시니라’(m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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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상입니다. 어떻습니까? 지난주에 이어 오늘도 AC 원문 번역과 특히 그 해설을 그대로 읽었는데요,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해설 없이 읽을 때는 정말 어려웠지만, 지금은 이렇게 해설로 풀어 주니까 글 하나하나가 다 무슨 설교 같지 않으신지요? 이 AC를 붙들고 어떻게 하면 좀 더 쉽게, 좀 더 와닿게 풀어 번역할 수 있을까 거의 6, 7년을 솔직히 몸부림을 쳐온 저로서는 뒤늦게 이 ChatGPT라는 AI의 도움이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모릅니다. 지난 세월이 헛수고는 아니었던 것이, 그래도 이 AI의 초벌 결과물을 문장 하나하나, 사용된 단어, 표현 하나하나의 적절함과 적당함을 살필 수 있는 안목을 그동안 주님은 제 안에 조성하셔서, 이 AI로 하여금 본연의 비서 역할에만, 도우미 역할에만 머무르게 하신다는 점입니다. 이 점은 의외로 매우 중요하며, 그래서 주님께 감사하고, 그래서 이 ChatGPT라는 AI를 믿고 쓸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유능한 비서가 생기는 바람에 그동안 엄두도 못 냈던 나머지, 그러나 무척 중요한 스베덴보리의 다른 저작들 역시 부지런히 번역 및 해설 작업을 병행, 제 블로그(https://bygrace.kr)에 수시로 올리고 있으니 참고하세요. 지난주 새롭게 시작한 저작들은 ‘최후의 심판(Last Judgment, 1758, LJ), ‘백마(白馬, White Horse, 1758, WH) 등인데, 이 비교적 짧은 글들은 AC가 배경으로 깔고 들어가는 다른 중요한 개념들을 매우 깊고 넓게 다져 주는 글들입니다. 이 글들을 읽으면 읽을수록 여러분의 내면은 탄탄한, 그리고 빛나는 계시의 지식으로 눈부시게 빛날 것입니다.

 

앞으로도 너무 많은 분량만 아니면 가급적 AC를 원본 및 해설 그대로 읽고자 합니다. 사실 말이 해설이지 형식만 조금 고치면 그대로 설교와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해설 없이 원본만 읽던 시절도 있었음을 생각하면, 지금은 그런 우리의 우직한 모습을 기뻐하신 주님의 큰 선물이라 생각합니다. ‘진리를 진리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자들, 그리고 신적 진리들에 따라 살기를 사랑하는 자들이 주님에 의해 인도되는 자들(AC.10578, 10645, 10829)이라는 위로의 말씀을 전해드립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02-15(D1)

 

2638, 1. 창1.1, 2026-02-15(D1)-주일예배(창1,1-2, AC.16-19),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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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2/22, 창1:3-5), '빛이 있으라', 거듭남의 시작

※ 오늘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9, ‘찬송하는 소리 있어’와 찬64, ‘기뻐하며 경배하세’입니다. 오늘은 창1 두 번째 시간으로 본문은 3절로 5절, AC 글 번호로는 20번에서 23번입니다. 본문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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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2/08, 창5:32), '노아, 그리고 셈, 함, 야벳의 속뜻'

※ 오늘 부를 찬송가는 순서대로 찬29, ‘성도여 다 함께’와 찬434, ‘귀하신 친구 내게 계시니’입니다. 오늘은 창세기 5장 여섯 번째, 마지막 시간으로 본문은 32절 한 절, AC 글 번호로는 534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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