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4:18)

 

AC.332

하나의 이단에서 생겨난 여러 이단들 역시 각각 이름들로 불렸으며, 마지막이 라멕(Lamech)인데, 안에는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18) The heresies that sprang from this one are also called by their names, in the last of which, called Lamech, there was nothing of faith remaining. (verse 18)

 

해설

AC.332는 앞의 AC.331에서 말한 이단의 확장이 계속되어 마침내 어디에 이르는지를 보여 줍니다. AC.331에서 에녹은 가인으로 표상된 이단, 곧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가 더욱 확장된 상태를 나타냈습니다. 이제 창4:18에는 에녹에서 이랏, 므후야엘, 므드사엘, 라멕으로 이어지는 계보가 나타납니다. 문자적으로는 한 집안의 계보이지만, 스베덴보리의 속뜻에서는 하나의 교리적, 교회적 상태에서 여러 파생된 상태들이 생겨나며 점차 변질되어 가는 과정을 나타냅니다.

 

AC.332가 먼저 말하는 것은 하나의 이단에서 생겨난 여러 이단들입니다. 처음의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였습니다.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분리가 한 번 일어나고 계속 유지되면 그것이 한 형태로만 머물지 않고 여러 파생된 교리적 상태들을 낳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창4낳고, 낳고, 낳았다는 계보의 언어는 속뜻에서 단순한 혈통의 계승만이 아니라 교리와 교회의 상태가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이어지는 영적 계승을 보여 줍니다.

 

여기에서 이단이라는 말을 오늘날 특정 교단을 정죄하는 의미로 곧바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AC.324부터의 문맥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핵심은 본래 하나였던 사랑과 신앙이 분리되면서 생겨난 교리적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여러 이단들이 생겨났다는 말은 단순히 교파의 수가 늘어났다는 뜻이 아니라, 처음의 영적 분리에서 여러 변형된 교리적 상태들이 파생되었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정확합니다.

 

이 점에서 창4의 계보는 하나의 점진적인 변질 과정을 보여 줍니다. 처음 가인은 신앙 자체를 없앤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신앙을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하여 그것을 주된 것으로 높이려는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초기에는 아직 신앙에 속한 어떤 것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것이 AC.330에서 가인이 를 받아 보존되는 이유와도 연결됩니다. 이후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다시 심어져야 했기 때문에 신앙 자체가 그 자리에서 완전히 소멸되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보존되었다고 해서 분리된 신앙의 상태 자체가 승인된 것은 아닙니다.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이 계속 체어리티와 결합되지 않은 채 전개되면 그 상태 역시 점차 변질될 수 있습니다. AC.331의 에녹은 그 첫 확장이고, AC.332에서는 다시 이랏, 므후야엘, 므드사엘을 거쳐 라멕에 이릅니다. 각각의 이름은 앞의 상태에서 파생된 또 다른 교리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AC.332에서 가장 무거운 말이 나옵니다. ‘ 마지막이 라멕인데, 안에는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출발점은 신앙을 높이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정작 신앙에 속한 것마저 잃어버립니다. 이것은 창4의 가인 계열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역설입니다. 체어리티보다 신앙을 앞세워 신앙을 지키려 했지만, 신앙을 그 생명인 체어리티에서 계속 분리한 결과 마침내 신앙 자체의 성질도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이 단지 어떤 교리를 알고 그것을 옳다고 인정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와 결합되어야 합니다. 진리는 선과 결합될 때 살아 있는 진리가 되고, 신앙은 삶의 선과 결합될 때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따라서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계속 분리되어 있다면 처음에는 여전히 신앙의 지식과 형식을 유지할 수 있어도, 그 상태가 계속 진행되면서 신앙을 신앙답게 하는 내적 생명을 잃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는 말을 그 시대의 모든 사람에게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AC.332는 가인에서 파생되어 라멕에 이른 특정한 교리적 계열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곧바로 당시 인류 전체에서 신앙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읽어서는 안 됩니다. 4와 창5, 그리고 이후 노아로 이어지는 전체 흐름을 함께 보면 주님께서 다른 방식으로 교회의 생명을 보존하시는 과정이 계속 나타납니다.

 

이 점은 AC.330가인의 와도 모순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신앙을 보존하셨다는 것은 가인 계열의 모든 후손이 반드시 끝까지 참된 신앙을 유지하도록 강제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은 자유 가운데 주님께서 보존하신 진리를 받아들이고 선과 결합할 수도 있으며, 반대로 그것을 계속 왜곡하여 잃을 수도 있습니다. 라멕은 바로 후자의 길이 끝까지 진행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가인에서 라멕까지의 흐름은 단순히 이단이 여러 이단으로 갈라졌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더 깊게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질서가 한 번 무너진 뒤 그 분리가 계속될 때 어떠한 영적 붕괴가 일어날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사랑과 신앙의 분리였고, 이어 그 분리가 예배에 나타났으며, 사람들의 상태가 악해지고 체어리티가 소멸되고 교리가 왜곡되었습니다. 그 왜곡이 계속 확대되자 마침내 처음에 그렇게 높였던 신앙 자체에 속한 것마저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창4의 계보 전체를 단순한 절망의 이야기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섭리는 특정한 한 계열의 성공이나 실패에 매이지 않습니다. 가인 계열이 라멕에서 신앙마저 잃는 상태에 이르더라도 주님의 구원의 질서가 함께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이후의 말씀에서는 그 종말 가운데서도 어떤 것들이 보존되고, 또 새로운 교회적 상태가 어떻게 준비되는지를 보게 됩니다.

 

따라서 AC.332는 우리에게 매우 엄중하면서도 단순한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 붙들고 있는 신앙은 무엇과 결합되어 있는가?신앙을 많이 말하고 진리를 강하게 주장하는 것만으로 그 신앙이 살아 있다고 보장되지는 않습니다. 그 진리가 악을 죄로 여기고 피하게 하며,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게 하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결합될 때 신앙은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채 자신만을 높이기 시작하면, 끝에는 체어리티뿐 아니라 신앙 자체까지 잃을 수 있다는 것이 라멕에 이른 가인 계열의 무거운 경고입니다.

 

심화

1. 분리된 신앙 결국 신앙 자체까지 잃게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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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가인의 표로 신앙을 보존하신 주님의 섭리는 라멕에서 실패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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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라멕에서 신앙이 사라졌는데 아다와 씰라의 계열에서는 유용한 것들이 나타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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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가인 계열의 생명 주기는 오늘날 기독교와 어떻게 겹쳐 보일 있는가?

 

AC.332 심화 4, ‘가인 계열’ 이야기와 현 기독교, 개신교 생명 주기의 오버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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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3, 창4:19-22, 아다와 씰라, 야발, 유발, 두발가인

19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And Lamech took unto him two wives; the name of the one was Adah, and the name of the other Zillah. 20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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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1, 창4:17, 에녹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And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and he was building a city, and 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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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1 심화

1. 4 에녹과 창5 에녹은 같은 의미인가?

 

AC를 처음 읽는 분에게는 여기서 매우 자연스러운 혼란이 생길 수 있습니다. 4에도 에녹이 나오고 창5에도 에녹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4의 에녹은 가인의 아들이고, 5의 에녹은 야렛의 아들이며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고 기록된 인물입니다. 이름은 같지만 스베덴보리가 두 에녹에게 부여하는 속뜻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4의 에녹은 AC.331에서 매우 간단하게 정의됩니다. ‘ 이단의 확장을 에녹이라 합니다. 여기서  이단은 가인으로 표상된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입니다. 따라서 창4의 에녹은 가인이라는 분리된 신앙의 교리적 상태가 더 전개되고 확장된 것을 나타냅니다.

 

반면 창5의 에녹은 전혀 다른 문맥에서 설명됩니다. 그곳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퍼셉션으로 알게 된 것들을 모아 교리적 지식으로 정리하고 보존한 상태와 에녹을 연결합니다. 그러므로 창4의 에녹과 창5의 에녹을 단지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같은 상응이나 같은 교회적 상태라고 볼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은 말씀의 속뜻을 읽을 때 매우 중요한 원리를 보여 줍니다. 상응은 단순한 암호표가 아닙니다. ‘에녹이라는 이름은 언제나 하나의 ’, ‘성은 언제나 하나의 ’, ‘물은 언제나 하나의 이라고 기계적으로 대입하여 해독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의 어떤 인물과 사물과 장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그것이 놓인 전체 문맥과 계열, 그리고 그 앞뒤에서 설명되는 영적 상태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따라서 같은 이름이 두 번 등장한다고 해서 반드시 같은 상태를 뜻하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이름이 다르다고 해서 전혀 관계없는 상태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각각의 문맥에서 그 이름을 어떤 교회적 또는 영적 상태와 연결하는가입니다. 4의 에녹은 가인의 계열 안에서 읽어야 하고, 5의 에녹은 그 장에서 전개되는 태고교회의 계승과 퍼셉션의 변화라는 문맥 안에서 읽어야 합니다.

 

이 점은 창4와 창5의 계보를 읽는 방식에도 중요한 도움을 줍니다. 두 장을 단순히 하나의 시간표로 이어 붙여 누가 누구와 정확히 같은 시대에 살았는가를 재구성하는 데 초점을 두기보다, 각 계보가 어떤 교회와 교리의 상태 변화를 보여 주는지를 먼저 살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해설에서 중심은 생물학적 연대 계산이 아니라 교회적 상태의 계승과 변화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창4와 창5의 두 계열이 역사적으로 정확히 어떻게 병행되었는지를 AC.331만으로 확정할 수도 없습니다. 속뜻에서 서로 다른 교회적 계열과 상태를 읽을 수 있다는 것과, 각각의 세대가 시간적으로 정확히 일대일 대응하여 동시에 존재했다고 말하는 것은 서로 다른 주장입니다. 그러므로  계열이 같은 태고교회 시대의 서로 다른 흐름을 보여 준다는 큰 그림은 가능하지만, 그것을 세밀한 연대표처럼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두 에녹의 차이를 가장 간단히 말하면 이렇습니다. 4의 에녹은 분리된 신앙의 교리가  확장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반면 창5의 에녹은 태고교회의 퍼셉션으로 알려진 것들을 수집하여 교리적으로 보존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하나는 이미 일어난 분리가 더 전개되는 방향이고, 다른 하나는 사라져 가는 퍼셉션의 지혜를 보존하는 방향입니다.

 

그러므로 두 에녹에게 공통적으로 교리적인 과 연결되는 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교리의 성격과 기능은 매우 다릅니다. 4에서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더욱 발전하는 쪽이고, 5에서는 퍼셉션으로 받은 것을 잃지 않도록 모아 보존하는 쪽입니다. 같은 이름이지만 서로 다른 교회적 상태를 표상하는 좋은 사례입니다.

 

이 차이는 오늘 우리가 교리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에도 의미 있는 통찰을 줍니다. 교리화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교리화하며 무엇을 위해 보존하는가입니다. 생명에서 분리된 진리를 체계화할 수도 있고, 반대로 주님께 받은 선과 진리를 다음 상태를 위해 충실하게 보존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교리가 있는가 없는가가 아니라 그 교리가 어떤 사랑과 결합되어 있으며 어떤 쓰임을 위해 존재하는가입니다.

 

따라서 창4와 창5의 두 에녹은 오히려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하나는 분리가 굳어지고 확장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 주고, 다른 하나는 사라져 가는 퍼셉션의 지혜를 교리적으로 보존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말씀의 속뜻을 읽을 때 이름 자체보다 문맥과 계열, 그리고 그 교리가 생명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는 것을 잘 보여 줍니다.

 

 

 

AC.331, 창4:17, 에녹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And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and he was building a city, and 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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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And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and he was building a city, and called the name of the city after the name of his son, Enoch. (4:17)

 

AC.331

이단의 확장을 에녹(Enoch)이라 합니다. (17) The amplification of this heresy is calledEnoch.(verse 17)

 

해설

AC.331은 매우 짧은 한 문장이지만, 4의 계보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중요한 글입니다. 4:17에는 가인이 그의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문자적으로는 가인의 아들 에녹의 출생을 말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속뜻에서 에녹을 앞에서 가인이라 한 이단이 더 확장된 상태로 봅니다. 그래서 AC.331은 단순히 에녹은 누구인가?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가인으로 표상된 분리된 신앙의 교리가 이후 어떻게 더 전개되는지를 보여 주는 첫 계보적 표지를 제시합니다.

 

여기서 이단은 앞의 AC.324-325에서 이미 설명된 것입니다. AC.324에서는 창4에서 교회로부터 분리된 교리들, 곧 이단들을 다룬다고 했고, AC.325에서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를 가인이라 했습니다. 따라서 AC.331 이단의 확장은 새로운 종류의 이단이 갑자기 등장했다는 뜻이 아니라, 이미 가인으로 시작된 분리된 신앙의 상태가 더 진행되고 전개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 점은 창4의 계보를 단순한 생물학적 족보로만 읽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스베덴보리의 속뜻에서는 이러한 낳음과 계승이 교회와 교리의 상태가 어떻게 하나에서 다른 것으로 이어지는지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인이 에녹을 낳았다는 말씀은 속뜻에서 가인으로 표상된 교리적 상태로부터 또 하나의 발전된 상태가 생겨났다는 식으로 읽게 됩니다.

 

다만 확장이라는 말을 오늘날 어떤 이단 단체가 사람을 많이 모으고 조직을 넓혔다는 뜻으로 곧바로 옮겨서는 안 됩니다. AC.331 자체는 그런 외적 조직 확대를 말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교리적 상태의 전개입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는 원리가 그대로 머물지 않고 더 펼쳐지고 형성되어 가는 과정이 에녹으로 불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의 흐름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AC.325에서는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었고, AC.326에서는 그 분리가 예배에 나타났으며, AC.327에서는 그 상태가 악해졌습니다. AC.328에서는 체어리티가 여전히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했지만, AC.329에서 결국 체어리티가 소멸되었습니다. 그리고 AC.330에서는 그 결과 교리가 왜곡되고 거짓과 악이 생겨났지만, 장차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다시 심어질 수 있도록 신앙 자체는 보존되었습니다. 이제 AC.331에서는 그 보존된 신앙이 당시의 분리된 상태 그대로 여러 형태로 더 전개되는 과정이 시작됩니다.

 

이 점에서 보존승인을 다시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AC.330에서 주님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어 신앙을 보존하셨다고 해서, 가인으로 표상되는 분리된 신앙의 상태 자체가 옳다고 인정된 것은 아닙니다. 신앙이 장차 체어리티를 다시 심는 통로가 되어야 했기 때문에 신앙에 속한 것이 소멸되지 않도록 보존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보존된 신앙은 곧바로 본래의 질서로 회복된 것이 아니라, 4의 이어지는 계보에서 여러 교리적 상태로 더 전개됩니다. 그 첫 번째가 에녹입니다.

 

따라서 AC.331에녹은 가인과 전혀 별개의 새로운 시작이라기보다 가인 안에 있던 원리가 한 단계 더 확장된 상태라고 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이것이 창4의 계보가 단순한 가족사가 아니라 교회와 교리의 상태 변화로 읽히는 이유입니다. 이후 등장하는 이름들도 각각 앞선 상태에서 파생된 또 다른 교리적 상태들을 나타내게 됩니다.

 

다만 여기서 에녹이라는 이름 자체가 언제나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5에도 에녹이 등장하지만 그 에녹은 전혀 다른 문맥과 계열 안에서 설명됩니다. 말씀의 속뜻은 에녹 = 언제나 이것이라는 고정된 암호표를 적용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같은 이름이라도 그것이 놓인 문맥과 계열, 그리고 그 이름이 표상하는 교회적 상태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AC.331의 핵심은 단순합니다. 가인으로 표상된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는 그 자리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더 확장되고 전개되었으며, 그 첫 상태를 에녹이라 합니다. 4의 계보는 이제부터 바로 그 분리된 신앙이 이후 어떤 교리적 형태들로 발전해 가는지를 추적하게 합니다.

 

이 짧은 한 문장은 오늘 우리의 신앙을 돌아볼 때에도 하나의 경고를 줍니다. 어떤 잘못된 분리는 작은 생각으로 시작될 수 있지만, 그것이 계속 유지되면 점차 설명과 논리를 얻고 하나의 확고한 체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어떤 교리가 얼마나 잘 정리되어 있는가만이 아니라, 그 교리가 여전히 선과 진리, 신앙과 체어리티의 올바른 결합 안에 있는가를 살피는 것입니다.

 

심화

1. 4 에녹 5 에녹 같은 의미인가?

 

AC.331 심화 1, 창4의 ‘에녹’과 창5의 ‘에녹’은 같은 의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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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2, 창4:18, 라멕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창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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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0, 창4:10-16, 창4:10-16 전체의 속뜻

10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And he said, What hast thou done? The voice of thy brother’s bloods crieth to me from the ground. 11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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