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37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오늘날 교회에서는 신앙고백을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무엇을 믿는지 분명하게 고백하고 올바른 교리를 배우는 것은 오히려 신앙생활의 중요한 일부입니다.그런데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에서는 신앙을 따로 고백하는 것이 교리의 왜곡이었고,심지어‘엄청난악’으로 여겨졌다고 합니다.그렇다면 오늘날의 신앙고백 역시 잘못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AC.337자체가 그 답을 줍니다.태고교회와 오늘날 인간의 영적 상태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태고교회는 천적 인간이었고,사랑으로부터 주님께 받은 퍼셉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반면 스베덴보리는‘오늘날에는사정이전혀다르다’고 하며,지금은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서고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신다고 말합니다.
태고교회 사람에게 사랑과 신앙은 아직 분리된 두 체계가 아니었습니다.그들은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가운데 무엇이 선이고 참된지를 주님으로부터 퍼셉션으로 지각했습니다.따라서 사랑 안에 신앙이 있었고,신앙에 속한 모든 것이 그 사랑으로부터 살아 있었습니다.
비유하자면 어떤 부모가 자기 아이를 깊이 사랑할 때‘나는내아이를사랑한다’는 것과‘나는내아이가소중하다고믿는다’를 두 개의 별도 체계로 만들 필요가 없는 것과 어느 정도 비슷합니다.사랑하기 때문에 그 가치를 알고 있으며,그 앎이 사랑과 함께 살아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아이를사랑하는지는중요하지않다.그아이가소중하다는사실을정확하게믿기만하면된다’고 한다면 질서가 달라집니다.원래 사랑 안에서 살아 있던 앎을 사랑에서 떼어 내어 독립시킨 것입니다.태고교회에서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한다는 것은 이보다 훨씬 깊은 영적 차원에서 그러한 전도를 의미했습니다.
가인의 시작도‘사랑을버리자’는 노골적인 선언이 아니었습니다.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따로 떼어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세우는 데서 시작했습니다.그러나 신앙이 사랑과 분리되어도 온전한 신앙일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다음에는 신앙이 사랑보다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고,마침내 체어리티가 없어도 신앙만 있으면 된다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창4에서 스베덴보리가 묘사하는 가인 계열의 진행은 바로 이러한 분리의 결과를 보여 줍니다.처음에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였지만,결국 체어리티가 소멸되고 교리가 왜곡되며,라멕에 이르러서는 신앙에 속한 것마저 남지 않고 신앙과 체어리티에 폭력을 가하는 상태에까지 이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인간에게 신앙을 따로 배우고 고백하는 것은 그 자체로 가인의 분리가 아닙니다.AC.337은 이 점을 분명하게 구별합니다.오늘날에는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서며,주님께서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십니다.따라서 말씀을 배우고 교리를 이해하며 자신이 무엇을 믿는지 분명히 하는 것은 후대 인간에게 필요한 과정입니다.
여기서‘신앙이앞선다’는 것은‘신앙이더중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스베덴보리는 곧바로 체어리티가 가장 중요한 것이 된다고 말합니다.신앙의 진리는 인간을 체어리티로 이끌기 위해 주어지고,주님께서 그 진리를 통하여 인간 안에 선을 형성하실 때 신앙은 자신의 참된 목적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신앙고백이 가인적으로 되는 지점은 신앙을 말한다는 사실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그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할 때입니다.교리를 정확히 안다는 사실이 삶에서의 선을 대신하고,올바른 신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악을 피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할 필요를 약화시킨다면 가인의 원리가 다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정확한 교리가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악을 더 분명하게 보게 하고,주님을 의지하게 하며,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고 쓰임을 행하게 한다면 그 신앙은 자신에게 맡겨진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신앙은 체어리티와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를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따라서‘태고교회에서는신앙고백이악이었다’는 말을 오늘날 모든 신앙고백에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스베덴보리가‘그때’라고 한 것을 중요하게 보아야 합니다.사랑과 신앙이 퍼셉션 안에서 하나였던 천적 교회에서는 그것을 처음 분리하는 것이 교회의 본질적인 질서를 깨뜨리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시대와 상태에 따라 주님의 거듭남의 질서가 어떻게 달리 적용되는지를 보여 줍니다.태고교회의 천적 인간과 후대의 영적 인간을 같은 방식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그러나 둘 모두를 관통하는 목적은 같습니다.진리와 선이 결합되고 신앙과 체어리티가 살아 있는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AC.337이 오늘 우리에게 묻는 질문은‘신앙을고백하고있는가?’가 아닙니다.그것보다 더 깊은 질문은‘내가고백하는신앙은어디로나를이끌고있는가?’입니다.그 신앙이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나아가고 있다면 신앙은 살아 있습니다.그러나 신앙이 체어리티와 분리된 채 자기 자신만을 높인다면 태고교회의 가인에게서 나타난 영적 위험이 오늘 우리 안에서도 반복될 수 있습니다.
이장은태고교회의퇴보,곧그교리의왜곡과,그결과생겨난이단들과분파들을가인과그의후손들의이름아래다루고있으므로,여기서한가지주의해야할것이있습니다.참된교회가어떠했는지를올바르게이해하지않고서는그교리가어떻게왜곡되었는지,또한그교회의이단들과분파들이어떤성격의것이었는지를이해할수없다는것입니다.태고교회에관해서는위에서충분히설명했습니다.곧태고교회는천적인간이었으며,주님을향한사랑과이웃을향한사랑에속한신앙외에는어떠한신앙도인정하지않았다는것,그들은이사랑을통하여주님으로부터신앙,곧신앙에속한모든것에대한퍼셉션을가지고있었다는것,그리고이러한이유로신앙이사랑에서분리될까하여신앙을언급하는것조차원하지않았다는것을위에서설명했습니다.(AC.200,203)As this chapter treats of the degeneration of the most ancient church, or the falsification of its doctrine, and consequently of its heresies and sects, under the names of Cain and his descendants, it is to be observed that there is no possibility of understanding how doctrine was falsified, or what was the nature of the heresies and sects of that church, unless the nature of the true church be rightly understood.Enough has been said above concerning the most ancient church, showing that it was a celestial man, and that it acknowledged no other faith than that which was of love to the Lord and toward the neighbor.Through this love they had faith from the Lord, or a perception of all the things that belonged to faith, and for this reason they were unwilling to mention faith, lest it should be separated from love, as was shown above. (n. 200, 203)
[2] 천적인간은이와같으며,시편에서도표상을통하여이와같이묘사됩니다.거기서는주님을‘왕’으로,천적인간을‘왕의아들’로말합니다. Such is the celestial man, and such he is described by representatives in David, where the Lord is spoken of as the king, and the celestial man as the king’s son:
[3] 태고교회와그교리는이와같았습니다.그러나오늘날에는사정이전혀다릅니다.지금은신앙이체어리티에앞서지만,그럼에도주님께서는신앙을통하여체어리티를주시며,그때체어리티가가장중요한것이됩니다.이로부터태고시대에사람들이신앙을따로고백하여그것을사랑에서분리했을때교리가왜곡되었다는사실을알수있습니다.이와같이교리를왜곡한사람들,곧신앙을사랑에서분리하거나신앙만을따로고백한사람들을당시에‘가인’(Cain)이라불렀으며,이러한일은그때엄청난악으로여겨졌습니다. Such was the most ancient church, and such was its doctrine.But the case is far different at this day, for now faith takes precedence over charity, but still through faith charity is given by the Lord, and then charity becomes the principal.It follows from this that in the most ancient time doctrine was falsified when they made confession of faith, and thus separated it from love.Those who falsified doctrine in this way, or separated faith from love, or made confession of faith alone, were then called “Cain”; and such a thing was then regarded as an enormity.
해설
AC.337은 창4의 가인과 그 후손들을 더 자세히 해설하기 전에 잠시 멈추어, 태고교회의 본래 상태가 어떠했는지를 다시 확인하는 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매우 중요한 해석 원칙을 먼저 제시합니다. ‘무엇이왜곡되었는지를알려면먼저왜곡되기전의참된모습이무엇이었는지를알아야한다’는 것입니다. 가인과 그의 후손들로 의미되는 이단들과 분파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알려면, 먼저 태고교회에서 사랑과 신앙이 본래 어떤 관계 안에 있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태고교회는 천적 인간이었습니다. 이들에게 교회의 중심은 신앙을 별도로 고백하고 교리를 체계화하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먼저였고, 그 사랑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무엇이 선이고 참된지를 퍼셉션으로 지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신앙은 사랑과 나란히 서 있는 독립된 무엇이 아니라 사랑 안에 살아 있는 진리였습니다.
이 때문에 AC.337의 ‘그들은신앙을언급하는것조차원하지않았다’는 표현도 문자적인 금기처럼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이 ‘신앙’이라는 낱말 자체를 싫어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랑 안에 하나로 있던 것을 따로 떼어 ‘신앙’이라고 세우는 순간 그것이 사랑에서 분리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신앙은 독립된 종교적 영역이 아니라 사랑으로부터 주님께 받은 퍼셉션 안에 들어 있었습니다.
바로 이 기준에서 볼 때 가인의 문제가 얼마나 근본적이었는지가 드러납니다. 가인은 신앙을 부정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따로 떼어 독립된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상태에서는 ‘신앙을따로말하고고백하는것이왜그렇게심각한가?’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랑과 신앙이 본래 하나로 있었던 천적 인간에게서 그 둘을 분리하는 것은 단순한 표현상의 구별이 아니라 교회의 생명 질서를 뒤집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가인과 그의 후손들의 이야기를 이해하려면 먼저 참된 태고교회를 알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기준이 ‘사랑과신앙의하나됨’이라면 가인의 죄는 단순히 하나의 교리적 오류를 주장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사랑으로부터 오는 신앙을 사랑에서 떼어 내어 별개의 것으로 세웠다는 데 있습니다. 그 첫 분리가 뒤의 모든 변질의 출발점이 됩니다.
시72의 인용은 이 천적 질서를 표상으로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해’를 사랑으로, ‘달’을 신앙으로 설명합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자연계의 달이 자기 빛을 내는 것이 아니라 해의 빛을 받아 비춘다는 점을 기계적인 상응으로 확대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AC.337이 직접 밝히는 핵심은 사랑이 중심이고 신앙이 그 사랑과 결합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생명과 빛을 받았습니다.
‘산들’과 ‘작은산들’은 태고교회를 의미합니다. 말씀에서 산과 높은 곳이 사랑과 연결되는 경우가 많으며, 여기에서도 태고교회의 천적 성격을 보여 줍니다. 그들에게 가장 높은 것은 신앙고백 자체가 아니라 주님을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그 사랑으로부터 이웃 사랑과 신앙에 속한 퍼셉션이 나왔습니다.
특히 ‘달이다할때까지’라는 표현에 대해 스베덴보리는 ‘신앙이사랑이될것이기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을 진리나 신앙이 없어져 버린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이 사랑과 분리된 별개의 것으로 남지 않고 사랑 안에서 완전히 살아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진리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생명이 됩니다.
사30:26의 ‘달빛은햇빛같겠고’라는 말씀도 같은 설명을 보강합니다. AC.337에서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의 모든 세부 상응을 해설하는 것은 아닙니다. 직접적인 연결점은 달과 해, 곧 신앙과 사랑입니다. 신앙의 빛이 사랑의 빛과 하나 되는 천적 질서를 보여 주기 위해 이 말씀을 함께 인용합니다.
그런데 AC.337 [3]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이 일어납니다. ‘그러나오늘날에는사정이전혀다릅니다.’ 이 문장을 놓치면 태고교회의 질서를 오늘의 사람에게 그대로 적용하는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시대를 포함한 후대 인간에게서는 ‘신앙이체어리티에앞선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시며, 그 체어리티가 형성되면 체어리티가 가장 중요한 것이 됩니다.
여기에서 ‘신앙이체어리티에앞선다’는 것은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더 높거나 본질적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어서 체어리티가 ‘가장중요한것’이 된다고 말합니다. 후대의 영적 인간에게서는 진리와 신앙이 거듭남의 과정에서 먼저 의식적으로 주어질 수 있지만, 그 신앙의 목적은 주님께서 그것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형성하시는 데 있습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향하며,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여기서 바로 앞 AC.335의 셋과 AC.336의 에노스를 조심해서 구별해야 합니다. 셋은 ‘새로운신앙’, 에노스는 ‘그신앙을통하여심어진체어리티’라고 했지만, 셋과 에노스 자체는 여전히 태고교회 문맥 안에 있습니다. 따라서 AC.337 [3]의 ‘오늘날에는신앙이체어리티에앞선다’는 후대 영적 인간의 질서를 셋과 에노스에게 그대로 소급해서는 안 됩니다. AC.335-336은 태고교회 안에서 가인의 분리 이후 새로운 신앙과 체어리티가 형성된 것을 말하고, AC.337 [3]은 그것과 별도로 태고교회의 천적 질서와 스베덴보리 시대의 후대 질서를 대비합니다.
이 구별을 해 두면 가인의 의미도 더욱 정확해집니다. 가인은 단순히 ‘신앙이먼저오는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후대의 영적 인간에게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서는 것은 정상적인 거듭남의 질서가 될 수 있습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이 먼저 나타났다는 데 있지 않고, 신앙을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하여 그 자체로 독립시키고 높인 데 있습니다.
이 때문에 오늘날 신앙고백을 하거나 교리를 배우는 것 자체를 가인적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후대 인간에게는 말씀에서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 신앙이 체어리티를 향하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서 끝날 때입니다. 신앙고백의 정확성이 삶에서의 선과 체어리티를 대신하게 되면 가인의 영적 원리가 다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AC.337의 마지막 ‘이러한일은그때엄청난악으로여겨졌다’는 말에서 ‘그때’를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앙과 사랑이 하나였던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에서 신앙을 별도로 떼어 고백하는 것은 그 질서 자체의 붕괴를 뜻했습니다. 그러나 후대의 인간이 신앙을 명확히 배우고 고백하는 것은 그 자체로 같은 악이 아닙니다. 인간의 영적 상태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교리를 읽을 때 매우 중요한 원칙을 보여 줍니다. 어떤 질서를 무조건 모든 시대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천적 인간의 질서와 영적 인간의 질서를 구별해야 하고, 태고교회와 홍수 이후 교회의 상태도 구별해야 합니다. 사랑이 먼저였다는 태고교회의 질서를 오늘 사람에게 ‘먼저사랑이생긴다음에야진리를배워야한다’는 시간적 공식으로 옮겨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오늘날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선다는 말도 ‘그러므로신앙이체어리티보다중요하다’는 교리적 우선권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직접 말하듯, 주님께서는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시며 그때 체어리티가 가장 중요한 것이 됩니다. 과정상의 선행과 본질상의 주도권은 서로 다릅니다.
AC.337은 이처럼 가인의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기준점을 세워 줍니다. 참된 태고교회의 질서는 사랑 안에 신앙이 있었고, 사랑으로부터 신앙에 속한 것을 퍼셉션으로 지각하는 것이었습니다. 가인은 바로 그 질서를 깨뜨린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이후 가인의 후손들과 여러 이단적 상태를 읽을 때에도 ‘무엇을믿었는가?’만이 아니라 ‘그신앙이사랑과어떤관계에놓였는가?’를 계속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원리는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우리는 태고교회 사람처럼 퍼셉션으로 직접 진리를 아는 상태에 있지 않으며, 먼저 말씀에서 진리를 배우고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신앙의 목적은 여전히 같습니다. 주님께서 그 진리를 통하여 우리 안에 체어리티를 이루시고, 마침내 진리가 삶과 사랑 안에서 살아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AC.337은 ‘신앙보다사랑이중요하다’는 단순한 구호보다 훨씬 정교한 질서를 가르칩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으로부터 신앙이 있었고, 후대 인간에게서는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주어집니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도 신앙과 사랑의 최종적인 분리가 주님의 질서는 아닙니다. 신앙은 사랑과 결합될 때 살아 있고, 진리는 선과 결합될 때 그 목적을 이룹니다.
AC.336에서 가장 깊이 생각해 볼 표현은‘anotherman[homo]’,곧‘또하나의사람’일 것입니다.왜 스베덴보리는 단순히‘에노스는새로운교회였다’고 하지 않고 굳이‘또하나의사람’이라고 했을까요?이 질문은 스베덴보리에게‘사람’이라는 말이 어떤 영적 의미를 가지는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창세기 초기의 속뜻에서 사람은 단순히 인간의 외적 형체를 가진 존재만을 뜻하지 않습니다.인간을 참으로 사람답게 하는 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며,그 생명이 인간 안에서 선과 진리의 결합으로 받아들여질 때 인간은 영적인 의미에서 더욱 참된 사람이 됩니다.따라서‘사람’이라는 표현은 교회의 상태를 나타내는 이름으로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가인의 상태와 에노스의 상태가 대조됩니다.가인은 신앙을 의미했지만 그 신앙은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었습니다.신앙과 체어리티의 결합이 무너지면서 교회적 생명도 무너졌고,그 분리는 마침내 체어리티의 소멸과 신앙 자체의 변질로 이어졌습니다.
반면AC.335에서는 주님께서 새로운 신앙을 주셨고,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심으셨다고 합니다.그 새로운 신앙이 셋이며,이제AC.336에서는 그렇게 심어진 체어리티를 에노스라고 합니다.그리고 바로 그 에노스를‘또하나의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신앙과 체어리티가 다시 올바른 관계 안에 놓이면서 하나의 교회적 생명이 형성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신앙만 따로 존재하거나 체어리티와 분리된 상태에서는 교회의 생명이 온전하지 않지만,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심으시고 그 둘이 다시 결합될 때 하나의 살아 있는 교회적 상태가 형성됩니다.
그러므로‘또하나의사람’이라는 말은 단지 에노스라는 개인에게 붙여진 별명이 아닙니다.AC.336은 바로 이어서‘이것이그교회의이름’이라고 말합니다.에노스는 한 개인의 이름인 동시에 속뜻에서는 그 상태를 가진 교회의 이름입니다.다시 말해 주님께서 체어리티를 다시 심으심으로써 교회가 다시‘사람’이라고 불릴 수 있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됨의 근원이 인간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인간이 스스로 신앙과 체어리티를 만들어 결합시키는 것이 아닙니다.새로운 신앙도 주님께서 주셨고,체어리티 역시 주님께서 심으십니다.인간이 참으로 사람이 되는 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의 생명을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사람’이라는 말에는 인간의 영적 존엄과 함께 인간의 전적인 의존도 담겨 있습니다.우리는 우리 자신의proprium으로 참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받아들이는 만큼 사람다운 생명을 갖게 됩니다.교회 역시 조직이나 이름 때문에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라,그 안에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살아 있을 때 참된 교회가 됩니다.
가인의 상태에서는 신앙이 체어리티와 분리되었습니다.그래서 외적으로는 신앙에 관한 교리와 예배가 있어도 그 안의 생명은 점차 무너질 수 있었습니다.반면 에노스에서는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지고,그 결과 새로운 교회가‘또하나의사람’이라는 이름을 받습니다.이것은 신앙과 체어리티의 결합이 교회의 인간다운 형상을 이루는 데 얼마나 본질적인지를 보여 줍니다.
다만 이‘또하나의사람’을 최초의 태고교회와 완전히 같은 상태의 회복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에노스 역시 태고교회의 흐름 안에 있지만,앞선 상태와 동일한 교회라는 뜻은 아닙니다.스베덴보리가‘anotherman’,곧‘또하나의사람’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새로운 교회적 상태를 가리킵니다.그 구체적인 성격과 변화는 이어지는AC의 설명을 따라가며 확인해야 합니다.
또한 셋과 에노스의 관계를 곧바로 홍수 이후 영적 인간의 일반적인 거듭남 단계로 옮겨 놓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먼저진리를배우고신앙으로행하다가나중에체어리티가생긴다’는 식의 단계는 후대 영적 인간의 거듭남을 설명할 때 중요한 의미를 가지지만,AC.336의 에노스는 아직 태고교회 문맥 안에 있습니다.
바로 다음AC.337에서도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를 천적 인간이라고 하며,그들에게는 사랑으로부터 주님께 받은 신앙,곧 신앙에 속한 것들을 아는 퍼셉션이 있었다고 설명합니다.그러므로AC.336에서는 우선‘주님께서주신새로운신앙을통하여체어리티가심어졌고,그체어리티와교회가에노스,곧또하나의사람이라불렸다’는 직접 진술을 중심에 두는 것이 좋습니다.
물론 이 원리를 우리의 거듭남에 적용할 수는 있습니다.그러나‘내안에서셋단계가지나면에노스단계가온다’는 식의 고정된 시간표로 적용하기보다,참된 인간의 생명은 신앙과 체어리티가 주님 안에서 결합될 때 나타난다는 영적 원리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 안전합니다.
이것은 오늘의 교회를 바라볼 때에도 중요합니다.교회가 교리를 정확히 가지고 있고 많은 지식을 가르친다고 해서 그것만으로‘사람’이라 불릴 만한 살아 있는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그 진리가 실제로 선과 결합되고,신앙이 체어리티와 결합되어,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사람들의 삶 안에 나타나야 합니다.
반대로 체어리티를 말한다고 해서 진리를 불필요한 것으로 만드는 것도 올바른 질서가 아닙니다.에노스는 셋을 없앤 뒤 나타난 것이 아니라 셋으로 의미된 신앙을 통하여 심어진 체어리티입니다.따라서 신앙과 체어리티는 서로를 제거하는 경쟁 관계가 아니라,주님께서 하나의 살아 있는 교회 안에서 결합시키시는 것입니다.
결국AC.336의‘또하나의사람’이라는 짧은 표현은 참된 인간과 참된 교회가 무엇인지를 압축해서 보여 줍니다.참된 사람은 자기 지식이나 자기 선으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그 둘이 결합된 생명을 사는 사람입니다.그리고 그러한 상태가 공동체 안에 이루어질 때 그 교회 역시 하나의‘사람’이라 불릴 수 있습니다.
가인에게서 무너졌던 신앙과 체어리티의 결합이 셋과 에노스에서 다시 나타납니다.그러나 그 회복의 중심에는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주님이 계십니다.새로운 신앙을 주시는 분도 주님이시고,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심으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바로 그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교회가‘에노스’,곧‘또하나의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