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35 심화
1. ‘가인’도 신앙이고, ‘셋’도 신앙이라면, 무엇이 신앙을 참된 신앙답게 하는가?
AC.335는 매우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가인도 ‘신앙’을 의미하고 셋도 ‘신앙’을 의미한다면, 무엇이 한 신앙을 가인으로 만들고 다른 신앙을 셋으로 만드는 것일까요? ‘신앙’이라는 이름 자체만으로는 그 신앙의 질을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가인에게도 신앙에 속한 것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신앙 자체가 아니라 그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었다는 데 있었습니다. 가인은 신앙을 체어리티와 구별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체어리티보다 높여 주된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체어리티가 소멸되었고, 그 분리된 상태는 점차 왜곡되어 마지막에는 신앙에 속한 것마저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반면 셋은 ‘주님께서 주신 새로운 신앙’이며,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집니다. 따라서 셋으로 의미되는 신앙의 특징은 신앙 자체를 최종 목적으로 삼지 않는 데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 신앙을 사용하여 사람 안에 체어리티를 형성하실 수 있는 신앙입니다.
이것은 AC.328에서 제시된 원리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그곳에서는 ‘신앙의 질은 체어리티로부터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많은 교리를 알고 있는지, 얼마나 정확한 신조를 고백하는지, 얼마나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지만으로는 그 신앙의 내적 질을 충분히 알 수 없습니다. 그 신앙이 실제로 어떤 사랑과 삶을 낳는지가 중요합니다.
다만 이 원리를 다른 사람의 내면을 판정하는 잣대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한 사람의 외적 행동 몇 가지를 보고 그의 신앙 전체가 참인지 거짓인지 최종적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AC.328의 원리는 무엇보다 자신의 신앙을 살피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내가 믿는 진리가 실제로 나를 어디로 이끌고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은 사람으로 하여금 악을 죄로 알고 피하게 하며, 주님의 뜻을 자기 뜻보다 앞세우게 하고,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게 합니다. 그렇다고 체어리티를 단순히 외적인 선행의 양으로 측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체어리티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의도하고 행하는 내적 사랑이며, 외적인 행위는 그 사랑이 삶 속에서 나타나는 형식입니다.
따라서 가인과 셋의 차이는 ‘교리를 가진 신앙’과 ‘교리가 없는 사랑’의 차이가 아닙니다. 셋 역시 신앙입니다. 신앙과 진리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 진리가 어떤 질서 안에 놓여 있는가입니다. 진리가 선을 향하고 신앙이 체어리티의 형성을 향할 때 신앙은 자신의 참된 기능을 수행합니다.
이 점에서 ‘신앙이 체어리티를 섬긴다’는 표현을 사용할 수도 있지만, 더 정확하게는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심으신다고 말하는 것이 좋습니다. 체어리티는 인간이 자기 힘으로 신앙을 이용하여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선과 체어리티의 근원은 주님이며, 신앙의 진리는 주님께서 그 선을 인간 안에 형성하시는 수단이 됩니다.
그러므로 셋의 신앙도 인간의 공로가 아닙니다. AC.335는 ‘새로운 신앙이 주님에 의해 주어졌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가인의 실패 이후 인간이 스스로 더 나은 종교 체계를 만들어 셋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새로운 신앙을 주셨고, 그 신앙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심으셨습니다.
이것은 신앙의 목적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말씀을 배우는 목적은 단지 더 많은 정보를 아는 데 있지 않습니다. 교리를 정확히 이해하는 목적도 논쟁에서 이기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그 진리를 통하여 우리의 생각을 바로잡고, 악을 보게 하며, 선을 의도하고 행하는 삶으로 이끄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신앙이 사람을 더 교만하게 만들고 다른 사람을 낮추어 보게 하며, 자기 옳음을 지키는 도구가 된다면 그 방향을 경계해야 합니다. 반대로 진리를 더 알수록 자신 안의 악을 더 분명히 보고, 주님의 자비를 더 의지하며, 이웃의 유익을 더 지혜롭게 구하게 된다면 그 신앙은 체어리티와 결합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AC와 말씀의 속뜻을 공부하는 사람에게 이 질문은 매우 실제적입니다. 속뜻과 상응을 많이 안다는 사실 자체가 셋의 신앙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그 지식이 자신의 영적 우월감을 키우면 가인의 방향으로 기능할 수 있고, 반대로 그 진리가 자신을 낮추고 주님을 더 의지하며 실제 체어리티와 쓰임으로 나아가게 한다면 셋의 방향으로 기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내 안의 가인, 내 안의 셋’이라는 표현을 너무 문자적으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가인과 셋은 본래 태고교회 안의 서로 다른 교리적, 교회적 상태를 표상합니다. 우리는 그 속뜻에서 드러나는 영적 원리를 자신의 신앙생활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역사적 표상과 개인적 적용을 구별하면서 읽는 것이 좋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셋의 새로운 신앙을 곧바로 홍수 이후 영적 인간의 신앙 질서와 동일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셋과 에노스는 여전히 태고교회 문맥 안에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우선 ‘주님께서 새로운 신앙을 주셨고,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심으셨다’는 AC.335의 직접 진술을 중심에 두는 것이 안전합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AC.336에서 그 신앙을 통하여 심어진 체어리티가 ‘에노스’라고 불립니다. 이것은 셋의 신앙이 어디를 향하는지를 매우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셋에서 이야기가 끝나지 않습니다. 셋의 목적은 에노스, 곧 체어리티가 심어진 새로운 교회적 상태로 이어지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이 신앙을 참된 신앙답게 하는가?’라는 질문에 AC.335는 매우 분명한 방향을 제시합니다. 신앙을 참된 신앙답게 하는 것은 신앙이 자기 자신을 얼마나 크게 주장하는가가 아니라, 주님께서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얼마나 살아 있게 하실 수 있는가에 있습니다.
가인의 신앙은 체어리티를 소멸시켰고, 셋의 신앙은 체어리티가 심어질 수 있는 길이 되었습니다. 둘 다 ‘신앙’이지만 그 생명과 방향은 전혀 다릅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의 표지는 신앙 자체를 높이는 데 있지 않고, 주님께서 그 신앙을 통하여 인간 안에 선과 체어리티를 이루실 수 있도록 올바른 질서 안에 놓이는 데 있습니다.
AC.335, 창4:25, ‘셋’(Seth)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And the man knew his wife again, and she bare a 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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