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And at the end of days it came to pass that Cain brought of the fruit of the ground an offering to Jehovah. (창4:3)
AC.346
‘날들의 끝에’(end of days)는 시간이 흐른 뒤를 뜻하고, ‘땅의 소산’(fruit of the ground)은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를 뜻하며, ‘여호와께 제물로 드림’(an offering to Jehovah)은 거기에서 나온 예배를 뜻합니다. By the “end of days” is meant in process of time; by the “fruit of the ground,” the works of faith without charity; and by “an offering to Jehovah,” worship thence derived.
해설
AC.346부터 창4:3의 속뜻으로 들어갑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라는 짧은 말씀을 스베덴보리는 세 부분으로 나눕니다. ‘날들의 끝에’는 시간이 흐른 뒤를, ‘땅의 소산’은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를, ‘여호와께 제물로 드림’은 거기에서 나온 예배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AC.346의 가장 중요한 점은 가인에게도 ‘행위’가 있고 ‘예배’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라고 해서 반드시 아무런 종교적 행위도 하지 않거나 하나님께 예배하지 않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외적으로는 신앙에 속한 많은 행위와 예배가 그대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어디에서 나오며 무엇이 그 안에 생명을 주고 있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먼저 ‘날들의 끝에’는 이 번호에서는 ‘시간이 흐른 뒤’를 뜻합니다. 앞의 AC.338-345에서 가인이 의미하는 신앙의 성질이 차례로 밝혀졌습니다. 본래 태고교회에서는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이 사랑 안에 있었고 퍼셉션으로 알려졌지만,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에게서는 신앙이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인식되고 인정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전에는 마음에 새겨져 있던 것이 신앙에 관한 지식과 교리로 따로 인식되었으며, 그 신앙이 체어리티와 분리될 때 참된 신앙의 생명을 잃는다는 사실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창4:3에서는 그 신앙으로부터 무엇이 나오는지를 다룹니다. 다만 ‘날들의 끝에’라는 표현 자체가 어떤 영적 과정의 완성이나 특정 단계를 직접 의미한다고 여기기보다는, 여기서는 우선 스베덴보리의 설명 그대로 ‘시간이 흐른 뒤’라는 뜻을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이 표현의 의미는 바로 다음 AC.347에서 더 자세히 설명됩니다.
그다음 ‘땅의 소산’은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를 뜻합니다. 여기서 ‘땅의 소산’이라는 표현 자체를 언제나 부정적인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앞 AC.343에서 인용된 사30:23의 ‘땅의 소산의 양식’은 체어리티를 나타냈습니다. 따라서 말씀의 상응을 하나의 고정된 암호표처럼 사용하여 ‘땅의 소산=나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는 그것을 가져오는 사람이 ‘가인’이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의미하고, AC.345에서는 ‘농사하는 자’가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을 나타낸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경작한 땅에서 나온 소산은 그와 같은 신앙에서 나온 행위를 의미합니다. 같은 표현도 그것이 놓인 문맥과 연결된 영적 상태에 따라 의미를 살펴야 한다는 점을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사실이 드러납니다.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에서도 ‘행위’는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인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땅을 경작했고 소산을 거두었으며 그것을 여호와께 가져왔습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문제를 단순히 ‘선행을 하는 사람과 선행을 하지 않는 사람’의 대비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외적으로 선해 보이는 일을 한다는 사실만으로 그 행위의 내적 성질이 자동으로 결정되는 것도 아닙니다. 체어리티는 단지 어떤 종류의 외적 행동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받아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고 행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같은 종교적 봉사나 헌신처럼 보여도 그것이 자기 의와 자기 영광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을 이웃의 유익을 위해 행하는 것인지에 따라 그 내적인 성질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의 내면을 쉽게 판단할 수 없으므로, 이 원리는 무엇보다 자기 자신의 행위가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살피는 기준으로 사용하는 것이 옳습니다.
AC.346이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지점은 ‘여호와께 제물로 드림’을 ‘거기에서 나온 예배’라고 풀이하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거기에서’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예배가 앞에서 말한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와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태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의 예배와 그의 내적 생명은 서로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가인도 여호와께 제물을 드립니다. 그는 하나님을 부정하는 사람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 때문에 가인의 이야기는 더 깊은 경고가 됩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도 종교적인 형태를 갖출 수 있고, 행위를 만들어 낼 수 있으며, 심지어 여호와께 드리는 예배의 형태까지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344의 설명과 매우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거기서는 신앙에 관한 기억 지식과 인식 지식과 교리가 사람을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만들고 체어리티라는 목적에 이르게 하지 못한다면 ‘텅 빈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AC.346에서는 문제가 단지 머릿속의 지식과 교리에만 머물지 않을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도 자기 나름의 삶과 종교적 행위를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외적인 활동의 양만 가지고 신앙의 생명을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많은 종교 활동을 하고 있는가보다 그 신앙과 행위가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있는가가 더 근본적인 질문이 됩니다.
이것은 이어질 가인과 아벨의 제물을 이해하는 데도 매우 중요합니다. 겉으로 보면 두 사람 모두 여호와께 제물을 드립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을 가져오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가져옵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를 ‘식물 제사는 나쁘고 동물 제사는 좋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자연적인 제물의 종류가 주님의 반응을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AC.346이 이미 가인의 제물을 설명하면서 그 배후에 있는 신앙과 행위의 성질을 먼저 밝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가인의 제물은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에서 나온 예배이고, 뒤에서 아벨의 제물은 체어리티에서 나온 예배로 설명됩니다. 두 예배의 차이는 외적인 물건의 차이보다 그것을 낳은 내적 상태의 차이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AC.346은 예배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도 바꾸어 놓습니다. 우리는 흔히 예배를 드렸다는 사실 자체에 큰 의미를 둡니다. 물론 예배는 중요합니다.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찬송하며 주님께 마음을 돌리는 것은 신앙생활의 소중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AC.346은 ‘예배를 드렸는가?’와 함께 ‘그 예배는 어떤 신앙과 사랑에서 나오고 있는가?’를 묻게 합니다. 이것은 예배 중에 감정이 얼마나 뜨거웠는지, 형식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얼마나 많은 것을 드렸는지를 평가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배가 우리를 주님 앞에서 낮추고, 자기 안의 악을 보아 피하게 하며,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와 실제 쓰임으로 나아가게 하고 있는지를 살피라는 뜻에 가깝습니다. 예배와 삶은 서로 다른 두 세계가 아니라 같은 내적 생명에서 흘러나와야 합니다.
특히 가인의 제물이 무거운 이유는 그가 ‘예배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예배했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도 교리는 남을 수 있고, 종교적 행위도 남을 수 있으며, 예배도 남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외적인 종교생활이 활발하다는 사실만으로 신앙과 체어리티가 결합되어 있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이것을 다른 교회나 다른 사람의 예배를 의심하고 정죄하는 도구로 사용해서도 안 됩니다. 사람의 내적 사랑을 완전히 아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AC.346은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나는 예배하고 있는가?’에서 멈추지 않고 ‘내 예배와 신앙은 나를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끌고 있는가?’를 묻게 하는 말씀입니다.
결국 AC.346의 흐름은 매우 간결합니다. ‘시간이 흐른 뒤 →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 → 거기에서 나온 예배’입니다. 앞의 AC.338-345가 사랑에서 신앙이 분리되는 상태의 성질을 설명했다면, 이제 AC.346-349는 그 상태에서 나온 행위와 예배를 다루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벌써 중요한 사실 하나가 분명해집니다. ‘행위가 있다’는 것과 ‘체어리티가 있다’는 것은 언제나 같은 말이 아니며, ‘예배가 있다’는 것과 ‘예배의 내적 생명이 살아 있다’는 것도 언제나 같은 말이 아닙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와 결합되어야 하고, 참된 행위는 그 체어리티의 선을 나타내며, 참된 예배 역시 그 생명에서 흘러나와야 합니다. 그러므로 AC.346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나는 무엇을 드리고 있는가?’보다 더 깊습니다. ‘내가 드리는 예배는 어디에서 나오고 있는가?’입니다.
AC.347, 창4:3, ‘세월이 지난 후에 - 신앙이 사랑에서 점점 멀어질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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