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34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35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36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37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38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39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43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눅23:34–43)

 

 

오늘 본문에서는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많은 사람이 주님을 비웃고 희롱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사람들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에게 그런 짓을 했다는 게 놀랍습니다. 교회가 주님에게서 멀어질 때는 언제나 말씀을 왜곡했고, 그렇게 해서 말씀의 내적인 것, 곧 내용물인 사랑은 없애고, 외적인 것, 곧 그릇인 신앙만 남겨 놓았습니다. 아담의 태고교회가 그랬고, 노아의 고대교회와 모세의 유대교회가 그랬습니다. 그 결과 주님이 오셨을 때, 유대교회 사람들은 외적으로만 경건할 뿐 내적으로는 아주 부패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주님께서는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마23:25)라 하시며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34절 후반,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는 유대인들이 말씀의 진리를 왜곡하는 걸 의미하는데 이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정황이 요한복음 19장에 나옵니다. 23, 24절입니다.

 

23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24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인들은 이런 일을 하고 (요19:23, 24)

 

여기 겉옷은 나눠 가지고, 호지 아니하고 통으로 짠 속옷은 찢지 말고 제비를 뽑아 갖기로 했다 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옷의 속뜻이 진리임을 생각하면, 여기 주님의 겉옷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속옷은 그 문자적 의미 안에 감춰진 내적 의미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겉옷만 나누어 갖고, 속옷은 제비 뽑아 한 사람이 가지는 건, 마지막 때 교회들이 말씀의 문자적 의미만 훼손하고, 내적 의미는 훼손하지 못하는 걸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말씀의 내적인 것이 허락되지 않았고, 허락되지 않아 모르는 걸 훼손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 참고로 성서 시대 ‘’에 대한 말씀을 잠깐 드리면, 오늘날 우리와는 달리 이때는 샌들, 터번, 겉옷, 허리띠 및 속옷을 함께 ‘’이라 하였습니다. 여기서 ‘겉옷’은 여러 히브리 표현이 있지만, 공통적으로 ‘입는 옷’이 아니라 ‘덮는 옷’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창9:23,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룻3:9, ‘나는 당신의 여종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등에 나오는 옷에 대한 표현들이 그렇습니다. 특히 이 룻이 말한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의 의미가 현대 유대인 예배에도 그대로 이어져 예배 중 겉옷을 펼쳐서 가족을 보호하는 의미의 순서가 있습니다. 예배 중, 하잔이라 하는 찬양 인도자가 민6:24-26, 제사장의 축복을 낭송하면, 각 가정의 가장들은 그들 어깨에 걸친 기도 숄, 즉 탈릿을 펼치며, 이때 아내가 그 안으로 들어가 가장의 보호 아래 들어간다는 그런 순서가 있습니다.

 

※ 여기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에 대한 설명이 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일반적인 속옷은 씨줄과 날줄로 불리는 두 줄의 실로 짠 옷감으로 만들어졌는데, 두 개의 옷감을 붙여 끝에 솔기를 대어 꿰매면 완성되었다. 그런데 ‘호지 않고’(솔기를 대지 않고, seamless) 통으로 짠 예수님의 속옷은 분명 특별한 옷이었다. 이것은 ‘날줄’로만 짜서 만든 한 개의 옷감으로 된 옷으로, 실밥을 뜯어서 계속 풀다 보면 기다란 한 개의 실로 풀렸을 것이다. 이처럼 씨줄이 없이 ‘끝없는 날줄’로만 만들어진 옷은 고대의 여러 문화에서 성스러운 것으로 인식되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대제사장의 속옷은 호지 않고 통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끝없는 날실로 만들어진 옷을 강제로 찢는다는 것은 ‘신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인식되었다. 이처럼 고대인들의 ‘호지 않고 통으로 짠 옷’에 대한 개념으로 인해 로마 군인들도 함부로 이 옷을 찢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선교사 류모세 저, ‘열린다 성경 생활풍습 이야기’)

 

그 밖에도 오늘 본문을 보면, 군인들이 주님께 신 포도주를 드렸다고 했는데, 그것 또한 진리를 왜곡하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본래 포도주는 진리를 뜻하는데, 여기서 신 포도주는 말씀을 왜곡하고 조작해 만든 거짓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이라면 주님이 주신 진리를 실천, 진실한 삶으로 주님께 돌려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부패한 교회들은 말씀 안에 담긴 신앙과 사랑, 진리와 선을 서로 분리, 말씀을 변질시켰습니다. 그것이 이들이 주님께 신 포도주를 드리는 것입니다.

 

35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36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37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주님이 고초를 당하시는 동안, 백성은 서서 구경하고, 관리들과 군인들은 비웃고 희롱했습니다. 백성과 관리, 군인은 각각 어떤 사람들일까요? 백성(people)은 영적 의미로는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면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를 분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주님을 서서 구경만 하고 있었을까요? 대중은 보통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진리의 편을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떤 사회를 이끄는 진리, 또는 질서가 와해 된다면 그로 인한 피해는 온전히 구성원의 몫이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대중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당장 자신의 안전만 생각합니다. 바로 그들이 십자가 위의 주님을 구경만 하는 백성입니다. 백성이 그러고 있을 때, 관리들과 군인들은 주님을 비웃고 희롱했습니다. 여기서 관리(ruler)는 교회의 지도자인 성직자를 뜻합니다. 그리고 군인은 교리에 밝은 사람, 이를테면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같은 사람입니다. 교리에 밝은 사람, 또는 추상적인 의미로 교리를 군인으로 표현하는 것은, 교회가 진리 아닌 것과 맞서 싸울 때 교리를 내세워 싸우기 때문입니다. 유대교회의 마지막 때 교회가 주님과 사도들을 핍박한 것처럼 오늘날에도 진리에 대한 핍박은 여전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들은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라고 비웃고 희롱합니다. 말씀의 속뜻으로 오신 주님을 믿는 우리에 대한, 말씀을 겉뜻으로만 믿어 온 기존 교회들의 태도가 저런 것입니다.

 

군중들이 주님을 비난하는 가운데 주님이 달리신 십자가 위에 유대인의 왕이라는 패가 붙었습니다. 그것에 대해 본문 38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38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이에 대해 요한복음 19장에서는

 

19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20예수께서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요19:19-20)

 

유대인의 왕이라고 할 때, 유대는 선을 뜻하고, 왕은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의 왕은 주님은 선에서 비롯한 진리이며, 그러므로 신적 진리 자체이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신적 진리는 진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바탕에 선이 있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곧 신적 진리 자체이신 분이라는 사실을 히브리어와 헬라어, 로마, 즉 라틴어로 패에 적어 십자가 위에 붙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신 주님의 섭리는 무엇일까요? 이것에 대해서는 성(聖) 문서에 특별한 설명이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이해하기는, 구약과 신약의 말씀과 그 내적 의미를 통해 신적 진리이며 말씀 자체이신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고난을 받으시고, 그렇게 해서 영화롭게 되신 것을 세상에 널리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구약의 말씀은 히브리어로 처음 기록되었고, 신약의 말씀은 헬라어로 기록되었으며, 말씀의 내적 의미는 라틴어로 처음 기록된 후 나중에 다른 여러 언어로 옮겨 퍼져나갔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보면, 유대의 관리들 말고도 주님을 비웃는 사람이 또 있었습니다. 바로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들 중 한 사람인데요, 그에 대해 39절 이하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39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43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 중 하나는 끝내 주님을 인정하지 않고 조롱했습니다. 반면에 다른 사람은 주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인정할 뿐 아니라 주님 앞에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했습니다. 그가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라고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간구했습니다. 주님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며 그를 구원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세상에 계시는 동안 수많은 사람에게 진리를 전하시고, 병을 고치셨으며, 때로는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을 위로하시고, 함께 우시기도 했습니다. 주님이 가시는 데마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였습니다. 그럼에도 정작 십자가에 달리실 때는 모두가 주님을 외면했습니다. 주님을 따르던 그 많은 사람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 오늘 설교는 전반적으로 복음서에 나오는, 주님께 병 고침을 받은 사람들까지도 전부 포함해서 결국은 주님을 배반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 같은데요, 그러나 저는 이 부분에서 좀 한 번 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주님의 영육 간 치유하시는 능력이 흘러 들어가 병 고침의 효력이 발생했다는 것은 고침 받은 사람의 내면이 어떠했음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즉 나중에 배신할, 그런 사람에게 주님의 능력이 흘러 들어갈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지요. 수많은 사람이 주님을 육안으로 보고 구경했지만, 복음서에 기록된 고침 받은 사람의 수는 극히 제한되었던 것으로 보아 이들은 끝까지 주님을 배신하지 않았을 것으로 저는 보고요, 그러므로 유대인 전체, 유대교회 전체를 거론할 때, 가급적 이들은 빼고 언급해야 하지 않나 저는 생각합니다.

 

새 교회 가르침 ‘참된 기독교’ 539번은 신앙인의 의무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에게 지워진 두 가지 의무가 있으니, 그것은 자기 자신을 검토한 다음 (주님께) 간구하고 고백하는 일이다. 간구는 주님의 자비를 구하는 것이고, 자기가 뉘우치는 악에 대항할 힘과 선을 행하고자 하는 성향과 애정을 구하는 것이다.... 고백은 자신의 악을 보고,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이며, 자기가 비천한 죄인임을 아는 것이다. (참된 기독교 539, 이순철 역) There are two duties incumbent on man, to be done after examination, namely, supplication and confession. The supplication should be that the Lord may be merciful, that he may give power to resist the evils that have been repented of, and that he will provide inclination and affection for doing good,

 

Since apart from the Lord man can do nothing (John 15:5).

 

The confession will be that he sees, recognizes, and acknowledges his evils, and finds himself to be a miserable sinner. (TCR.539)

 

신앙인이라면 늘 자신의 생각과 의도를 살피면서 잘못이 있으면 반성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받아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유대교회 사람들은 그런 면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주님에게서 멀어졌고, 끝내는 주님을 대적하고 죽이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서 반성이나 회개 같은 신앙의 습관이 나중에 얼마나 큰 차이를 만드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주님이 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은 단순히 기적을 보이시려는 게 아닙니다. 오직 주님에 의해서만 거듭나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22:31절에서,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에 의해 거듭난 사람은 사후에 영으로 부활해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산다는 것입니다. 또 눅16:22절 이하에서도 거지 나사로는 사후에 천국에 있고, 부자는 지옥에 던져지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사후에 영으로 부활하는 것과 영생이 있다는 걸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주님의 왼편에 있던 행악자가 죽음의 문턱에서도 주님을 조롱한 것은 신앙만 있고,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완고하게 진리를 대적하는지를 나타냅니다. 반면에 주님의 오른편에 있던 행악자는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하는 것은 체어리티의 신앙 안에 있는 사람의 간구와 고백을 나타냅니다. 주님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시고,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라고 화답하셨습니다. 주님의 오른편에 있었던 행악자처럼 우리도 진실한 간구와 고백으로 매일 살아나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42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43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눅23:42-43)

 

아멘

 

2023-03-12(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11-24(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4-11-24(D1)-주일예배(2571, 눅23,34-43),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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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11-24(D1)-주일예배(2571, 눅23,34-43),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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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천사들처럼 읽을 수 있으려면 (2024/11/19)

 

천사들은 내적(內的, internal, 속, 영) 존재들이어서 우리가 읽는 이 말씀(The Word, 성경 66권 중 그 안에 속뜻, 즉 아르카나가 담긴 성경들)도 우리처럼 외적(外的, external, 겉, 육)으로 읽는 게 아니라 내적으로 읽습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는 아래 글을 참고하세요.

 

 

성경 66권 중 말씀(The Word)은...

성경 66권 중에서 속뜻(internal sense, inner meaning)이 있는 성경을 '말씀'(The Word, 총 34권)이라 하며, 다음과 같습니다.  구약 : 창, 출, 레, 민, 신, 수, 삿, 삼상, 삼하, 왕상, 왕하, 시, 사, 렘, 애, 겔, 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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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자신의 외모는 평생 보아오고 있어 잘 알지만, 자신의 영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잘 모르듯, 말씀 또한 그렇습니다. 우리는 말씀의 겉 글자만 평생 읽어 왔지, 말씀의 영, 곧 말씀의 겉 글자에 담긴 아르카나(arcana, 秘義)는 한 번도 접한 적이 없어 거의 모르지요.

 

그러면 왜 천사들처럼 말씀을 읽는 게 필요하고, 또 중요할까요? 그것은 우리의 사후(死後), 이어질 삶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이민을 앞둔 사람의 경우와 같은데요, 다른 나라로 살러 가는 사람들은 더 이상 지금 살고 있는 이 나라의 일에 계속 목숨 걸기보다는 앞으로 가서 살게 될 나라를 더 공부하고 준비하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떠나기 전까지 어느 정도는 계속 병행해야 하지만 말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그런 겁니다.

 

그래서 천국 천사들은 말씀을 어떻게 읽나 알아보고 아직 시간이 있을 때, 우리도 부지런히 그들처럼 말씀 읽는 법을 익혀 말씀에서 가르치고 있는 천국에 대해, 먼저 어떻게 해야 그곳에 들어갈 수 있으며, 그곳에서의 삶은 어떤 삶인지를 미리 준비할 수 있으면 좋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왕이면 아무래도 아직 못 가 본 우리 중 어떤 사람들의 말보다 주님의 허락으로 미리 가 본 사람이 전하는 그곳 현지 생생한 소식으로 말입니다.

 

이를 위해 천국의 주인이신 우리 주님이 우리, 곧 인류를 사랑하셔서 이 마지막 때에 이 모든 걸 삼백 년 전에 미리 준비하셨다는 사실! 여러분,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이 사람이 바로 ‘스베덴보리’(Emanuel Swendenborg, 1688-1772)입니다. 이분에 대해서는 아래 링크를 참조하세요.

 

 

에마누엘 스베덴보리(Emanuel Swendenborg, 1688-1772)

다음은 제가 번역하는 책들의 저자에 대한 간단한 소개입니다. 에마누엘 스베덴보리는 1688년,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서 출생, 웁살라대학에서 언어학, 수학, 광물학, 천문학, 생리학, 신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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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주님의 섭리로 스베덴보리를 한 지 어느덧 7년 된 지금, 제가 깊이 느끼는 한 가지는, 이 길을 수십 년 전부터 앞서가신 분들이 전하시는 말씀처럼 이 계시, 이 가르침은 사람들이 쉽게 접하기가 너무 ‘어렵다’는 것입니다. 네, 정말 어렵습니다. 육체 안에서 평생 겉의 삶, 외적 삶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과연 내적 존재인 천사들의 말이 선뜻 와닿을 수 있을까요? 더 나아가 ‘내적’이라는 게 어떤 건지 가늠이 되시나요? 네, 정말 쉽지 않은 말씀입니다. 심지어 저는 이 길을 걷기 전, 주님의 섭리로 몇 번의 영적 체험 및 수도원 공부를 먼저 여러 해 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고민 끝에 소위 ‘입문’(入門)을 위한 순서를 생각해 보았는데요, 이 순서는 사실은 주님이 저를 이끄신 순서이기도 합니다. 바로 다음과 같습니다.

 

제일 먼저는, 저는  스베덴보리의 위대한 선물’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아래 책인데요, 사실 이 책에 대해서는 평들이 분분합니다만, 저는 단지 스베덴보리’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역사적으로 알기 위해서 읽었습니다. 저도 처음엔 글 내용이 너무 이상, 도저히 더 진도를 나가기가 꺼려져 그냥 멈추고 쓰레기통에 던질까 했던 적들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아니야, 그래도 혹시 주님의 이끄심이면...’ 하면서, 그러니까 주님의 보호하심을 구하면서 다 읽을 수 있었습니다.

 

 

위대한 선물 | 스베덴보리 - 교보문고

위대한 선물 | 스웨덴 태생의 신비적 신학자 스베덴보리의 『위대한 선물』. 47세에 심력적 체험을 겪은 후 하늘의 소명을 받고 신비적 신학자로 전향하여 27년간 영계를 자유롭게 오가며 지옥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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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래는 이 책 관련 댓글들에 대해 제법 시간이 흐른 후 작성한 글인데, 혹시 시간 되시면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개신교의 구원 시스템, 주님의 구원 시스템

개신교의 구원 시스템, 주님의 구원 시스템 (2024/3/16) 다음은 교보문고 웹사이트에서 검색한 책, ‘위대한 선물’(스베덴보리 연구회 편역)에 달린 후기들에 대한 통계인데요, 총 48개의 후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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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Heaven and Its Wonders and Hell From Things Heard and Seen)을 읽었습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여러 번!

 

 

HH.1, '저자 서문(序文)'(Author’s Preface)(HH.1)

※ 주께서 마지막 날(the final period of the church)에 관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있다. ※ HH : Heaven and Hell ※ 본 번역은 김은경 역입니다. 단, 주석들은 원 John C. Ager 주석들이며, 저의 번역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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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종이책이 필요하시면, 아래로 가셔서 구입하시면 됩니다. 특별히 김은경 역을 추천하는 이유는 제가 이 번역으로 읽었기 때문인데, 실제로도 여러 번역 중 저한테는 이게 제일 괜찮았기 때문입니다.

 

 

천국과 지옥

천국과 지옥, 그 중간의 영인들의 세계의 구조, 현상, 그곳 사람들의 상태와 생활을 보여준다. 사람이 사후 겪게되는 세계를 스베덴보리의 천사와의 대화, 관찰과 기록을 통해 알게되며 영의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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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꼭 좀 당부드리고픈 것은, 이 책을 읽으실 때마다 문장 문장, 쉬지 말고 주님의 빛 비추심을 구하시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천국에 관한 기록들, 소식과 사실들은 천국에 충만한 주님의 신성의 빛, 곧 신적 진리(Divine Truth)의 빛으로 비추임을 받지 않고는 깨달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스베덴보리 저,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The heavenly arcana contained in the Holy Scripture or Word of the Lord unfolded, beginning with the book of Genesis, 창세기, 출애굽기 속뜻 주석) 리딩을 병행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던 창세기, 출애굽기와 너무나 달라 당혹스러우실 꺼라는 말씀부터 드리지 않을 수가 없군요.

 

 

AC.1, 서문, 'Arcana Coelestia, 창, 출 속뜻 주석을 시작하며'(AC.1-5)

1구약 말씀을 단순히 그 겉 글자로만(the mere letter of the Word), 즉 기록된 글자 그대로만 읽어서는 아무도 다음과 같은 사실들, 곧 말씀의 이면(裏面, this part of the Word)에는 천국의 깊은 비밀들(deep 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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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저는 위 두 번째 책은 읽기도 하고, 듣기도 하기를 한글과 영어로 대략 열 번 이상은 한 것 같고, 세 번째 책은 창3까지는 번역을 끝냈고, 창4부터는 일단 리딩부터 쭉 하고 있는 중입니다. 한 가지, 7년이나 되었음에도 겨우 요만큼 밖에 진도를 못 나갔다는 건 무슨 뜻일까요? 물론 다른 많은 저작 역시 병행하여 읽고는 있지만 말입니다. ㅎㅎㅎ, 아, 참고로 스베덴보리의 저작들(Writings)은 아래 글에 가시면 접하실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서들(Writings)

다음은 스베덴보리의 저서목록(Writings)입니다. 인류사에 존재했던 사람 중 가장 지능이 높은 사람으로 기네스 북에는 밀턴, 괴테 그리고 스베덴보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 생전에 가장 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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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두 번째, 세 번째는 둘 다 위 제 블로그에 올렸으니 우선은 그걸로 읽으시고, 나중에 책 제본 나오면 그때 종이책으로 읽으시면 되겠습니다. 위 세 번째 책인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는 번역본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영어가 좀 되시면 그냥 영어로 읽으시기 바랍니다. 이 번역본의 경우, 분명 우리말임에도 정말 읽기가 어려운, 아주 초창기 수준 번역기를 돌렸나 싶을 정도여서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번역하신 취지가 선하고 의로우시니 너무 저거하시지는 말기 바랍니다.

 

참고로, 이 영역본은 요즘 나오는 여러 AI 번역기로 번역을 하셔도 이게 다분히 영서(靈書)라 좀 손이 많이 가실 겁니다. NCE(New Century Edition)라고 비교적 최신판도 있어 이 경우, 요즘 영어라 읽기는 쉬운데요, 거의 의역 수준이라 권하기가 좀... 그렇습니다.

 

혹시 그래도... 하시는 분들은 아래 링크로 가셔서 직접 연락하시면 받으실 수 있으니 참고하세요. 오랜 세월, 수십년간 이 길을 걸으시는 두 분 부부 장로님, 권사님의 정말 너무나도 귀한 걸작들, 더 나아가 귀한 번역 유산을 접하실 수 있습니다.

 

 

BaysideChurch.org - 도서 구입 안내

도서 구입 안내 아래 도서들의 대부분은 발행자, 역자가 출판의 모든 과정을 직접 완료한 책이므로 우선 많은 책이 쌓여 있지 않고 부족할 때마다 몇 십권씩 추가로 출판하고 있습니다. 또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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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리딩 및 번역을 제가 어떻게 중도포기 안 하고 계속 할 수 있었을까를 몇 줄로 요약한 것입니다.

 

첫째, 처음엔 수도 없이, 그리고 끊임없이 ‘주님, 제가 이 사람의 글 읽는 것이 참으로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이지요? 제가 무슨 이단의 글을 읽는 건 아니지요? 만일 그렇다면 주님이 저를 말려주시고, 이 길로부터 저를 지켜 보호하여 주세요...’ 하는 기도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만큼 충격의 연속이었으니까요! 말씀을 겉 글자가 아닌, 거기 담긴 영으로 읽는다는 건 그런 것입니다.

 

둘째, 계시(啓示)는 내면이 열리는 만큼만 보입니다. 계시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주님의 신적 진리(Divine Truth)의 빛으로만 깨달을 수 있는데, 그럴려면 내면이 열려 그 빛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거든요. 한번은 주님이 맹인을 고치실 때, 그가 단번에 낫지 않아 다시 안수하신 후라야 그가 모든 것을 밝히 볼 수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저는 창세기 처음 세 장을 한 일곱 번 정도 번역했습니다. 그만큼 저는 머리 신앙의 사람, 내면의 열림이 매우 더딘 사람이었답니다.

 

셋째, 이 길을 걸은 지 7년, 제게 가장 큰 보람과 상급, 영광과 감사는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천국이 어떤 곳인지를 거의 마치 천사들처럼 느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태고교회에 허락하셨던 퍼셉션(perception, 태고교회에 허락하셨던, 지금도 천국 주님과 천사들 사이 사용하는 내적 커뮤니케이션 능력, 주님의 신성을 지각할 수 있는 역량)을 나름 아직은 좀 일반적이지만, 아니 매우 여전히 투박하지만, 그러나 아주 조금이라도 허용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퍼셉션이라는 영적 역량의 회복이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있어야 천국에 충만한 주님의 신성(The Divine)을 알 수 있는데, 그 결과 주님이 누구이시며, 어떤 분이신지를 정말 정말 확실히, 투명하게, 천사들처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학습으로 얻는 게 아닌, 주님이 거저 주시는, 오직 주님으로만 말미암는 것입니다. 특별히 주님을 사랑하여 선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말입니다.

 

이 외에도 많지만, 우선은 이 정도로 하겠습니다. 분명한 건, 저는 7년을 한결같이 주님이 주시는 기쁨으로 매일 이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이 길을 걸으며 그간 많은 일이 있었지만 말입니다... ㅎㅎㅎ

 

그럼에도 여러분, 천사들처럼 말씀을 영으로, 즉 속뜻으로 읽는 법을 익혀 다시 오실, 사실은 말씀의 속뜻으로 이미 오신, 주님의 새 교회, 계시록 주님의 새 예루살렘 교회의 일원이 되지 않으시겠습니까?

 

아, 그렇다고 말씀을 겉 글자로 읽는 것이 무슨 나쁘다거나 틀렸다는 건 절대 아닙니다. 아직 내면이 열리지 않아 지상의 언어로밖에는, 기록된 겉 글자로밖에는 읽을 수 없는 99.99%의 분들한테는 이렇게라도 말씀을 가까이하는 게 유일한 방법이시니까요! 겉 글자는 그릇이요, 속뜻은 거기 담기는 내용입니다. 주님은 주님의 신령한 것을 아무 그릇에나 담는 분이 아니심을 생각할 때, 그만큼 그릇 역할을 하는 이 겉 글자 또한 매우 중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주님을 순수하게 사랑하며, 주님을 향한 애정 안에 있는 사람들은 겉 글자로도 충분히 일상에서 선을 행하며, 그로 말미암은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는 사실, 즉 그러면서 서서히 내면이 열린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리 되면, 덩달아 속뜻을 보는 눈, 곧 영안이 열리며, 주님의 말씀을 천사들처럼 읽고픈 소망이 시작된다는 사실이지요! 아멘아멘,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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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26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27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28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29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30그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31푸른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32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가니라 33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눅23:26-33)

 

 

‘잉태하지 못한 자’와 ‘해산하지 못한 배’는 사랑의 선에 속한 진리가 없는 사람을 뜻하고, ‘먹이지 못한 젖’은 인애의 선에 속한 진리가 없는 사람을 뜻한다. (AE.710:8, 이순철 역) the barren,” and “the bellies that have not borne,” signify those who have not received genuine truths, that is, truths from the good of love, and “the breasts that have not given suck” signify those who have not received genuine truths from the good of charity. (AE.710:8)

 

 

유대 성직자들의 요구로 주님을 심문했던 총독 빌라도는 여러 번 저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눅23:4)

 

14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 15보라 그가 행한 일에는 죽일 일이 없느니라 (눅23:14-15)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눅23:22)

 

그러나 저들은 한사코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집요하게 주님을 십자가에 매달기를 원했고, 마침내 빌라도는 손을 들었습니다. 주님을 저들 손에 맡겨 저들 뜻대로 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은 십자가를 지고 해골이라 하는 처형장으로 끌려가십니다.

 

26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주님은 그 전날 대제사장의 군사들에게 체포되던 때부터 날밤을 새우시며 욕을 당하시고, 이리저리 끌려다니셨습니다. 그래서인지 주님은 무거운 십자가로 기진하셨고, 주님의 그런 모습을 본 병사들이 행인 중에서 시몬이라는 사람을 붙잡아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합니다. 말씀에서 시몬이라는 이름은 진리에 대한 순종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제자 베드로의 이름이 시몬인 것도 그런 까닭입니다. 본문에는 시몬에 대해 시골에서 온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킹 제임스 영어 성경 표현이고, 새 교회에서 사용하는 영어 성경에는 밭에서 온 사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 새 교회에서 사용하는 영어 성경은 스베덴보리가 히브리, 헬라 성경을 라틴어로 직접 번역한 성경을 사람들이 나중에 다시 영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기존 성경을 속뜻을 염두에 두고 번역, 자신의 모든 저술에서 그 성경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일부 확인한 바에 의하면, 기존 성경에서 너무 엉뚱하게, 즉 원어대로 번역하기엔 너무 이상한 나머지 살짝 손을 댄 그런 부분들만 바로 잡았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가령, 창세기 2장 16절,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같은 부분인데요, 원래대로라면 ‘열매’를 빼고 그냥 ‘나무는 네가 임의로 먹되’ 해야 합니다. 여기 ‘나무’는 퍼셉션(perception)을 의미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이런 속뜻을 알 수 없었던 번역자들은 나무를 먹는다는 게 너무 이상한 나머지 살짝 보조 설명을 추가한 건데, 이렇게 되면 살짝 정도가 아니라 전체가 흔들리기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새로 번역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 누가복음에는 지금 주님을 둘러싸고 진행되는 일이 하룻밤 사이에 일어나는 일처럼 기술되어 있지만, 문제는 사 복음서 전체를 놓고 보면, 누가복음에는 누락된 다른 일들도 많은데, 그 일이 다 일어나기에는 세 시간 정도로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세 시간이라 함은 만약 이 모든 일이 당일에 일어났다 가정할 경우, 이제 오전 아홉 시면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놓고 학자들 사이에 몇 가지 입장들이 있는데, 아래는 이와 관련한 글 일부 인용입니다. 역사 드라마로 읽는 성경 (류모세 저) 인용입니다.

 

...둘째, 예수님이 금요일 새벽에 체포되신 후 금요일 아침에 심자가형을 언도받았다고 하면 다음과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시간은 오전 9시였다. 그렇다면 금요일 새벽 체포된 시간이 대략 동틀녘인 6시라고 할 때, 새벽 6시부터 아침 9시까지의 짧은 3시간 동안 다음에 나오는 모든 사건이 벌어져야 한다.

 

안나스의 심문 - 가야바의 심문 - 산헤드린의 유죄 판결 - 유다의 후회와 죽음 - 1차 빌라도의 심문 - 헤롯 안티파스의 심문 - 2차 빌라도의 심문 - 십자가형 언도 - 로마 군병들의 조롱 -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심 - 도중에 쓰러지고 구레네 시몬이 대신 십자가를 짐 - 마침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에 도착...

 

※ 천사들은 내적 존재여서 지상 만물이 모두 그 내적 의미로만 보입니다. 예를 들면, 지상에 걸어 다니는 모든 사람 역시 그들 눈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즉 그 안에 주님의 신성, 곧 주님으로 말미암은 선과 진리 여부에 따라 빛으로, 또는 까만 덩어리로 보이는 식이지요. 심지어 갓난아이조차 그렇습니다. 그들에겐 사람들의 이름이나 외모, 출신 지역이나 배경 등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읽을 때, 그들에겐 ‘시몬’이라는 이름의 내적 의미만 보이지, 그가 베드로인지, 여기 구레네 시몬인지는 중요하지도, 보이지도 않습니다. 시간(time) 개념 또한 그렇습니다. 천국은 시공간의 나라가 아닌, 상태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이라는 표현이 중요한 까닭은, 밭은 진리의 씨가 뿌려지는 교회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시몬이 밭에서 왔다는 것은 그가 교회에 속한 사람임을 나타냅니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우리는 시몬이 어떤 성격의 사람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즉 시몬은 교회에 속한 사람으로 진리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새 교회 가르침에 의하면 주님은 세상에서의 모든 시험을 홀로 싸워 이기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는 왜 시몬이 주님의 시험에 참여하는 것으로 그렸을까요? 그 이유는, 첫째, 시험을 통한 주님의 영화(glorification)와 인간의 거듭남(regeneration)은 원인과 결과처럼 서로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의 영화가 없으면 인간의 거듭남도 없는 것입니다. 둘째, 인간이 시험을 당할 때 혼자 싸우는 것 같지만 사실은 주님과 함께 싸우기 때문이며, 셋째, 시험에 관한 이런 진실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라야 주님과 함께 시험에서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시몬이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27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주님께서 처형장으로 끌려가실 때, 한 무리의 여인들이 주님을 따라가며 통곡하고 슬퍼했습니다. 말씀의 문자적인 뜻으로만 보면, 이 여자들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실제로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속뜻으로는 좀 다른데요, 속뜻으로는, 이들은 주님 당시 유대교회, 또는 더 나아가 말세에 타락한 교회들을 나타냅니다. 말씀에서 ‘여자’, ‘여인’은 교회를 뜻하기 때문인데요, 그렇다면 그들은 왜 그렇게 통곡하고 슬퍼했을까요? 영적 의미로, 통곡하는 건 교회 안에 사랑이 없다는 뜻이고, 애통해하는 건 교회 안에 진정한 진리, 또는 진정한 신앙이 없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 당시 유대교회는 이른바 장로의 전통이라는 인간의 교리를 만들어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그때 교회로부터 신성한 선과 진리들이 사라지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인들이 주님을 따라가며 통곡하고 애통해하는 것,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것’은 교회가 그렇게 황폐해진 것을 의미합니다.

 

28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앞 절에 나오는 여인이나 여기 ‘예루살렘의 딸들’은 모두 마지막 때 기울어져 가는 교회들을 뜻합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향해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하십니다. 여기서 ‘자녀’는 교회들이 생산해 내는 모든 선하고 진실한 것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우는 것’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선과 진리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하시는 것은 앞으로 교회 안에 선과 진리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교회가 말씀의 진리를 거짓으로 변질시킬 때, 필연적으로 주님과의 연결이 끊어집니다. 그것은 더 이상 주님에게서 선과 진리를 받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교회들이 영적으로 황폐해지는 것은 그래서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9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이 말씀에 대해 ‘계시록 해설’ 710번 글 8항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는 사랑의 선에 속한 진리가 없는 사람을 뜻하고, ‘먹이지 못한 젖’은 인애(仁愛, charity)의 선에 속한 진리가 없는 사람을 뜻한다.

 

오래전부터 한국 여성들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을 죄로 여겼습니다. 심지어 이혼 사유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제 왜 그랬는지 짐작됩니다. 그러니까 한국인들에게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건 자연적인 의미 이상의 그 무엇이었던 겁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이 진리와 관련이 있다면, 앞에서 말한 사랑의 선에 속한 진리(truths from the good of love)와 인애의 선에 속한 진리(truths from the good of charity)의 차이는 뭘까요? 전자는 진리의 바탕에 주님에 대한 사랑, 또는 선에 대한 사랑이 있는 것을 의미하고, 후자 즉 인애, 체어리티(charity)의 선에 속한 진리는 진리의 바탕에 이웃 사랑, 또는 진리에 대한 사랑이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주님 사랑에 속한 진리를 가진 사람은 일을 할 때 그 일의 목적인 선을 먼저 생각하고, 다음에 일의 절차와 방법인 진리를 따집니다. 그에 비해 이웃 사랑에 속한 진리를 가진 사람은 일의 목적이나 유익 같은 선보다는 절차와 방법의 합리성, 즉 진리를 먼저 고려합니다. 이 두 가지 진리가 바로 영적인 진리입니다. 즉 사랑의 선에 속한 진리와 체어리티의 선에 속한 진리가 영적 진리들인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에 아기를 출산하지 못했거나, 젖을 먹인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영적 진리를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 즉 교회 밖 이방인들을 뜻합니다. 그러면 교회 밖의 사람들도 어쨌든 진리를 가졌을 텐데, 그렇다면 그들이 가진 진리는 무엇입니까? 영적인 진리라기보다는 도덕적 진리에 가깝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님이 어떤 분이시고, 이웃이 누군지 정확히 모르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이방 종교의 진리는 모호한 진리입니다. 진리가 모호하면 그에 따라 삶도 모호해집니다. 그럼에도 이들에게 복이 있다 하신 이유는, 영적 진리를 알고도 더럽히는 것보다는, 차라리 모르는 채 도덕적으로 사는 편이 낫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전자의 사람은 구원받지 못하지만, 후자의 사람은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속 사람의 나라인데, 전자의 사람은 속 사람이 영원히 뒤집히는 상태가 되지만, 후자의 사람은 사후 살짝 교정 및 떼어내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30그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본문에서 말하는 그때는 부활하신 주님이 참된 진리로 다시 오시는 때이며, 그 진리를 가지고 낡고 부패한 교회들을 심판하시는 때입니다. 다시 오신 주님으로 표상되는 진리란 어떤 것일까요? 말씀의 문자적 의미 안에 담긴 신성한 내적 진리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적 진리로 충만한 말씀의 문자적 의미가 바로 다시 오신 주님이신 것입니다. 내적 진리로 다시 오신 주님께서 친히 낡고 부패한 교회들을 심판하십니다. 그때 거짓 진리를 가지고 참된 진리를 대적하던 교회들은 참된 진리의 눈부신 빛을 감당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악 속에 숨어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됩니다. 본문에 ‘그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리라’ 한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산은 본래 사랑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반대로 인간의 악을 뜻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진리를 마주하기보다 차라리 자신의 악에 숨는 것이 오히려 편하다는 것입니다.

 

31푸른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천국의 천사들조차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성한 진리의 빛을 직접 날 것으로 마주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각 천사와 사람에게 맞는 순화된 빛으로 오십니다. 그럴진대 악한 사람들이 어떻게 참된 진리의 빛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 빛을 마주 대하는 순간, 숨을 쉴 수 없을 것 같은 고통을 느낄 것입니다.

 

끝으로 32절과 33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32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33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주님의 고난의 장소는 해골, 즉 골고다라 하는 곳이었습니다. 주님은 왜 그곳에서 마지막 시험을 당하셨을까요? 해골은 머리를 둘러싼 뼈이고, 뼈는 영적으로 가장 차원이 낮은 것을 뜻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여기서 해골은 이른바 기억 지식(memory-knowledge [scientia])이라고 하는 가장 낮은 차원의 진리를 뜻합니다. 주님은 바로 그 기억 지식을 통해 들어오는 세상의 거짓 및 온갖 욕망과 마지막 순간까지 싸우셨고, 결국 이기셨습니다. 주님께서 해골이라 불리는 곳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그래서입니다. 말씀에는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두 강도도 함께 달렸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강도는 재림하신 주님 앞에서 심판받는 모든 인간을 나타냅니다. 인간의 본성은 모두 강도와 같기 때문입니다. 심판과 관련, 마태복음 25장 32, 33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32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33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마25:32-33)

 

여기서 오른편 양은 순진한 마음으로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왼편 염소는 그 반대, 즉 끝까지 진리를 인정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전자의 사람들은 구원받았고, 후자의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인정하고 시험에 동참한 자는 구원을 받았고, 반대로 주님을 끝까지 부인한 자는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주님을 십자가에 매단 사람과 주님과 십자가를 함께 짐으로써 구원의 길을 가는 사람의 극명한 대비를 봤습니다. 인생을 사는 것은 모두 십자가를 지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런 중에도 생명의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있고, 영원한 죽음에 이르는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중일까요? 입으로는 주님을 믿는다 하면서 이해관계가 생기면 주님을 버리고 자기 욕심대로 하는 건 아닐까요? 진리 앞에서 굴복하지 않고, 인간의 얕은 지식을 내세워 오히려 진리를 내려다보는 건 아닐까요? 나를 내려놓고 주님을 우러러보고 순종하는 것은 너무나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게 왜 그렇게 힘든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앞에서 잠시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의 본성은 본시 강도와 같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님이 세상에서 입으신 인성 안에도 그런 본성이 있었고, 그래서 주님은 필사적으로 그것들과 싸워 이기셨습니다. 십자가의 시험은 그 마지막 시험이었습니다. 주님은 그 싸움에서 이기심으로 해서 인류에게 생명의 부활을 주셨습니다. 주님이 이기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께 의지해 나를 버리는 싸움에서 이겨야 합니다. 그리하여 어렵게 찾은 이 진리를 헛되게 만들지 않고 끝까지 지켜야 합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모든 성도와, 또한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에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사65:19)

 

아멘.

 

 

2023-03-05(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11-17(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4-11-17(D1)-주일예배(2570, 눅23,26-33),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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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11-17(D1)-주일예배(2570, 눅23,26-33),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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