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작년에 이어 두 번째로 이곳 파주 크리스찬 메모리얼 파크에서 故 권성조(權聖祚, 1923 生 - 2015 卒, 享 91세), 김정자(金貞子, 1926 生 - 2005 卒, 享 79세), 두 분의 추모예배를 드리겠습니다.

 

 

찬송

301장

지금까지 지내 온 것’ 1절

 

 

본문

2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3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 (눅12:2-3)

 

 

설교

다들 오늘 특별히 삼일절(106주년) 아침, 원근 각처에서 서둘러 오시느라 수고들 많으셨습니다. 멀리 대전에선 6시에 출발했습니다. 주께서 그 귀한 걸음들 위에 복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은 고 권성조 우리의 아버지, 할아버지 10주기 기일이면서 동시에 우리 민족의 아주 특별한 날, 삼일절입니다. 특히 올 삼일절은 현 시국과 관련, 그 정신과 의미가 마치 106년 전 그날과 같아 저 자신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곳을 와야 하나 저곳을 가야 하나 고민할 정도였습니다. 그런 만큼, 오늘 이 예배가 짧지만, 큰 의미가 있는, 참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 되기를 축원합니다.

 

이곳은 묘원, 그러니까 돌아가신 분들을 모신 곳이며, 그러므로 이곳에 오면 자연스럽게 생과 사, 삶과 죽음, 사람의 사후 상태 등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그런 곳입니다. 그래서 저도 생각했습니다. 두 분은 지금 어떤 상태이실까? 사람의 사후, 영혼으로 가는 그 나라에서 두 분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계실까? 궁금했습니다.

 

다음은 주님의 허락으로 생전에 천국과 지옥 등 영계를 두루, 그러니까 그의 나이 57세 때부터 시작, 27년간 수시로 왕래한 모든 기록을 주님의 허락을 받아 라틴어 원고 수만 장으로 남긴, 스베덴보리(Emanuel Swendenborg, 1688-1772, 스웨덴)라는 분의 여러 저서 중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김은경 역)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중간 영계(The world of spirits)는 천국도 아니고 지옥도 아닌, 그 사이의 지역, 즉 상태(state)다. 사람이 죽으면 가장 먼저 도착하는 곳이 이곳이다. 여기서 필요한 만큼 머물고 난 후, 그 사람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는가에 따라서 천국으로 올라가거나(is raised up)지옥에 던져진다(is cast down). (HH.421)

 

중간 영계에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다. 모든 사람이 사후에 일단 그곳에서 만나고, 거기서 모든 사람이 조사를 받고, 준비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그곳에 머무는 기간은 일정하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들어가자마자 곧바로 천국이나 지옥으로 가고, 어떤 사람은 몇 주 또는 몇 년 동안 머문다. 그러나 삼십 년을 넘지는 않는다. 머무는 기간의 이런 차이는 사람의 내면과 외면이 상응하는가 않는가에 달려 있다. 이제 중간 영계에서 사람이 어떻게 여러 상태를 거치며 준비되는가를 설명하겠다. (HH.426)

 

사람들이 사후에 중간 영계에 들어가자마자 주님은 그들을 정확하게 분류하신다. 악인들은 이 세상에 살 때, 그들의 중심적 사랑(ruling love)으로 이어져 있던 바로 그 지옥 공동체에 즉시 연결되고, 선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사랑(love)과 체어리티(charity, 이웃 사랑), 그리고 신앙(faith)으로 이어져 있던 천국 공동체에 즉시 연결된다. 그러나 그렇게 나뉘어져 있지만, 이 세상에 살면서 친하게 알고 지냈던 모든 사람들, 특히 부부와 형제자매들은 원하면 언제든지 만나고, 함께 얘기한다. 나는 어떤 아버지가 여섯 아들을 알아보고 그들과 얘기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또 친척과 친구들을 만나 얘기하는 많은 이들도 보았다. 하지만 이 세상 삶에서 형성된 성격들(dispositions)이 서로 달랐기 때문에 얼마 안 가 그들은 곧 헤어졌다. 그러나 중간 영계를 지나 천국이나 지옥으로 들어간 영들은, 그들의 사랑과 거기서 비롯되는 성격이 서로 비슷하지 않으면 더 이상 서로를 보지 못하고, 알아보지도 못한다. 중간 영계에서는 서로를 알아보지만, 천국이나 지옥에서는 못 알아보는 이유는, 중간 영계에서는 육신 생활에서처럼 여러 상태를 거치지만, 그 후에는 자신의 중심적 사랑에 일치하는 항구적인 상태에 들어가기 때문이고, 그 상태에서는 서로의 사랑이 비슷해야만 서로를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서는 비슷하면 함께 있게 되고, 서로 다르면 멀어지게 된다. (HH.427)

 

내용이 이해되시나요? 살짝 보충 설명을 좀 드리자면,

 

① 영계는 이곳 자연계처럼 시공간의 나라가 아니라 상태와 그 변화의 나라다.

 

② 천국이든 지옥이든 순도(?) 100% 상태여야만 갈 수 있다.

 

③ 사람은 누구나 ‘’(善, good) 몇 %, ‘’(惡, evil) 몇 % 상태로 죽는다. 그래서 대부분 죽자마자 천국, 혹은 지옥으로 바로 갈 수는 없고, 어딘가 준비하는 곳이 필요한데, 거기가 바로 이 ‘중간 영계’, 곧 ‘영들의 세계’다.

 

④ 사람은 영과 육으로 되어 있는데, 육, 즉 몸은 그 안에 영을 담기 위한 그릇이며, 다른 말로는 영이 이 자연계에서 활동하기 위해 입고 다니는 옷이다.

 

⑤ 사람은 또한 ‘겉 사람’(external man, 外的)과 ‘속 사람’(internal man, 內的)으로 되어 있으며, 천국이든 지옥이든 가는 것은 속 사람이다.

 

⑥ 겉 사람은 몸을 포함, 영이 이 세상에서 지내는데 필요한 모든 것이다. 속 사람은 주님께 속하며, 주님은 이 속 사람을 통해 겉 사람에게 말씀하신다. 속 사람은 사람이 주님 사랑, 체어리티의 삶을 살 때, 그러니까 알고 있는 성경 말씀을 실천할 때 형성된다.

 

⑦ 영계는 겉과 속이 같은 상태로 지내는 곳이다. 이 세상은 겉과 속이 달라도 살아갈 수 있지만, 영계는 그렇지 않다. 영계에서는 속이 선하면, 겉도 선하며, 속이 악하면, 겉도 악하다.

 

⑧ 이 세상에서 겉 사람과 속 사람은 그 모습과 외관이 전혀 다를 수 있다. 겉은 무척 멋있거나 아름다워도 속은 괴물 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겉은 늙고 추해도 속은 천사처럼 빛나는 사람이 있다. 주님의 허락으로 다른 사람의 영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은 이런 광경을 보고 놀란다.

 

등... 이 외에도 계속 이어지지만 아직은 이 정도만 하지요. 이런 진리들은, 그러니까 비유하자면, 일종의 수학이라는 학문을 떠받치는 공리(公理) 같은 것입니다. 공리란 너무나 자명하여 굳이 증명이 필요없는 진리를 말하지요. 우리의 신앙은 이런 신학적 공리에 기초, 주님도, 천국도, 그리고 인간도 이해하는 것입니다.

 

하여튼 이런 진리들을 가지고 짐작컨대, 두 분은 여전히 함께 지내시거나 두 분 중 준비가 끝나 100% 상태가 되신 분은 먼저 해당 천국에 올라가 기다리고 계시지 싶습니다. 제 기억에 두 분은 참 선하고 진실하셨으며, 비슷하셨기 때문이지요.

 

천국이나 지옥을 가기 전, 이런 사전 준비가 필요한 이유는, 천국은 선 100%의 나라여서 천국 생활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악은 달고 갈 수 없어 떼어내야 하기 때문이며, 반대로 지옥은 악 100%의 나라여서 마찬가지로 지옥 생활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선을 역시 달고 갈 수 없어 떼어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이란, 주님으로부터 말미암는 모든 것이며, ''이란 모든 것의 근원되신 주님으로부터 시선을 돌려 자기를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모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라는 호칭은 삼위일체 하나님, 곧 우리의 영에 해당하는 '여호와 하나님'과 우리의 육에 해당하는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우리의 활동에 해당하는 '성령'을 한 분으로 모으는 호칭입니다.

 

위 427번 글에, ‘하지만 이 세상 삶에서 형성된 성격들이 서로 달랐기 때문에 얼마 안 가 그들은 곧 헤어졌다’는 건, 영계의 특성, 즉 ‘거기서는 비슷하면 함께 있게 되고, 서로 다르면 멀어지게 된다’ 때문입니다. 지상에서는 비록 같은 식구요, 호적상 같은 가족이었어도 영계에서는 선악의 문제, 진리와 거짓의 문제, 즉 주님 사랑의 삶을 살았느냐, 자기 사랑의 삶을 살았느냐에 따라 그 상태가 달라지기 때문에, 처음엔 반가움으로 만났어도 곧 헤어지게 되지요. 그러므로 부부의 경우나 가족의 경우, 사후에도 계속 함께하고프면 서로 비슷해져야 합니다.

 

하나 더, ‘중간 영계에서는 서로를 알아보지만, 천국이나 지옥에서는 못 알아보는 이유는, 중간 영계에서는 육신 생활에서처럼 여러 상태를 거치지만, 그 후에는 자신의 중심적 사랑에 일치하는 항구적인 상태에 들어가기 때문이고, 그 상태에서는 서로의 사랑이 비슷해야만 서로를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역시 같은데요, 앞서 ⑧번 설명을 보시면 됩니다. 우리는 자신의 영이 어떤 모습인지, 즉 자신의 속 사람이 어떤 모습인지 모릅니다. 본 적이 없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사후 이 두 번째 상태인 항구적인 상태에 들어가게 되면, 거기서는 속 사람의 모습으로 지내게 되는데, 생전에 나도 본 적 없는 내 속 사람 모습을 내 주변 사람들 역시 본 적이 없으므로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말씀으로 우리의 결론은, 인생의 목표는 천국 가는 것이요, 목적은 창조주의 뜻, 곧 나를 지으신 하나님의 뜻인 쓰임새(use)의 삶을 사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떤 쓰임새가 있어 창조하셨고, 우리의 요람에서 무덤까지 우리가 그 쓰임새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평생 곁에서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요즘 시절이 하 수상, 즉 나라의 일상이 평범하지가 않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악과 거짓, 불의가 횡행하고 있습니다. 예전엔 그나마 살짝 숨어서 했다면, 지금은 버젓이 드러내놓고 합니다. 정체를 숨기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마치 지옥이 ‘그래, 나는 지옥이다. 어쩔래?’ 하는 것 같습니다.

 

다음 글 역시 스베덴보리가 주님의 허락으로 영계에서 경험한 이야기입니다.

 

[1] 이 세상에서 지은 자기 죄와 악행을 부인하는 영들이 있었다. 따라서 그들이 스스로 결백하다고 믿지 못하도록 그들의 기억에서 생의 초기부터 말년까지의 모든 행위가 차례로 꺼내져 재현되었는데, 주로 간음과 음탕한 행위들이었다.

 

[2] 악한 기술로 남을 속이고 훔친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의 사기행각과 도둑질도 연달아 모두 드러났는데 그중 많은 것은 세상에서 자기 혼자만 알고 있던 것들이었다. 그들은 그것을 고백해야 했다. 그 당시 그들 마음속에 뒤섞여 있던 모든 생각, 의도, 즐거움과 두려움까지 낱낱이 백일하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3] 재판 관련, 뇌물을 받고 돈을 번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기억으로 조사받았고, 처음 직책을 맡은 때부터 그만둔 날까지의 모든 것이 드러났다. 자세한 뇌물의 액수와 가치, 받은 일시, 당시 그들의 마음 상태와 의도까지 수백 가지가 떠올라 눈앞에 상영되었다. 어떤 경우에는 놀랍게도 그들이 그런 행위를 기록해 둔 수첩까지 한장 한장 펼쳐져 읽힌다.

 

[4] 처녀들을 유혹해 수치스럽게 했거나 순결을 빼앗은 사람들도 이와 같은 심판을 받는다. 그들의 기억으로부터 범행이 자세하게 떠오르고 재현된다. 처녀들과 여자들의 얼굴, 장소, 그때 했던 말들과 의도가 실제처럼 나타난다. 이것은 어떤 장면을 눈으로 볼 때처럼 즉각 나타나고, 어떤 때는 그 상연이 몇 시간씩 계속된다.

 

[5] 남을 중상하는 것을 가볍게 여긴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그의 비방과 중상이 그때 사용한 단어들까지 그대로 재연되는 것을 들었다. 세상에서 그가 아주 조심스럽게 감추어 왔음에도, 비방의 대상이 된 사람과 그것을 듣고 있던 사람까지 모든 것이 생생하게 재생되고 상연되었다.

 

[6] 사기로 친척의 유산을 가로챈 사람이 있었다. 그도 같은 심판을 거쳐 판결을 받았다. 놀랍게도 그들 사이에 오간 서류와 편지가 읽히는 것이 내 귀에 들렸는데, 그것은 한 글자도 빠짐이 없다고 했다.

 

[7] 바로 그 사람은 죽기 얼마 전에 그의 이웃을 몰래 독살한 사람이었다. 이것이 밝혀진 과정은 이렇다. 그가 발밑에 구덩이를 파고 있는 모습이 나타났다. 그 구덩이에서 한 사람이 마치 무덤에서 나오듯이 나와서 그를 향해 외쳤다. “나에게 무슨 짓을 했는가?” 그러자 그 살인자가 친절하게 말을 거는 모습, 잔을 건네주는 모습, 게다가 그 행위를 하기 전에 그가 한 생각과 그 후에 일어난 일까지 모든 것이 드러났다. 그 모든 것이 다 드러나자 그는 지옥을 판결받았다.

 

[8] 한마디로, 모든 악한 영에게는 그의 모든 악과 범행과 약탈과 사기와 속임수가 다 드러나고, 그의 기억에서 떠올려져 죄과가 충분히 입증된다. 또 모든 상황이 전부 공개되므로 이것을 부인할 여지가 없다. 나는 사람의 기억을 천사가 조사할 때, 그가 한 달 동안 생각한 것이 하루하루 일어난 그대로 하나도 틀림없이 되살려지는 것도 보았다.

 

[9] 이상의 사례들로 사람은 자기의 기억을 전부 가지고 간다는 것과, 사후에 만인 앞에 드러나지 못하게 감출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음 주의 말씀도 그것을 의미한다.

 

2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3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 (눅12:2-3) (HH.462)

 

그러나 안심하세요. 이런 폭로는 오직 악한 영들, 즉 ‘이 세상에서 지은 자기 죄와 악행을 부인하는 영들’한테만 일어납니다. 주님은 선하고 진실한 삶, 의롭고 올바른 삶을 산, 겸손하고 주님을 시인하는 영들의 과거까지 무분별하게 들춰내시는 고약한 신이 아니십니다.

 

오늘 예배를 준비하면서 현 시국, 특히 정말 나라를 사랑하는, 정말 ‘의로움과 올바름’으로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자 하는 대통령을 탄핵, 끌어내리려는 모든 이상한 사람들이 생각났습니다. 일컬어 국가 전복 세력이라 할 수 있는 이 사람들이 끝내 돌이키지 않을 경우, 이들의 사후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참 안타깝습니다.

 

우리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도 말과 행실이 일치하지 않으면 저렇게 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순수한 사람은 ‘그렇게 하는 게 의롭고 올바르기 때문에’ 하는 사람입니다. 비록 종교가 다르거나 교회를 다니지 않아도, 예수 믿지 않아도 이런 ‘의로움과 올바름’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온 인류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았기 때문이며,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지요. 천국은 주님의 신성의 나라이며, 이 ‘의로움과 올바름’은 주님 신성의 다른 표현입니다. 그럼에도 ‘교회 다니세요, 예수 믿으세요’ 하는 이유는, 주님의 신성을 가장 잘 환히 비추는 성경 말씀이 기독교에, 교회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왕이면, 밝고 환한 빛 아래서 주님을 신앙하고 사랑하는 지름길의 삶을 사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다른 길, 다른 종교, 다른 가르침들은 비록 거기에도 여러 형태로 주님의 신성이 부분적으로 스며들어 있어도 마치 초롱불, 등잔불 불빛 같아 흐릿하여 쉽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여러 가지 사유로 비록 이 세상 살 때는 예수를 믿을 수 없었을지라도 사후 중간영계에서 천사들의 가르침을 받으면,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시인, 인정, 영접합니다. 그러므로 정말 중요한 건, 이 세상에서 교회 다녔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살았느냐, 즉 의롭고 올바른 삶을 살았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래야 비록 이 세상에서는 나름의 사정이 있어 예수를 믿지 못하였어도 사후 천사들의 가르침을 받을 때, 즐겁게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받아들입니다. 어찌어찌 어렵게라도 속 사람이 그렇게 형성된 사람들은 말입니다. 반면, 비록 이 세상에서 교회를 열심히 다녔어도 정작 삶이 엉망이어서 자기 속 사람 준비에 소홀했던 사람들은 사후 천사들의 가르침을 받을 때 등을 돌립니다. 거기서는 각 사람의 정체가 드러나며, 그걸 거스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직장 생활을 하든, 이제는 은퇴하여 남은 삶을 손주 돌보며, 조용히 지내든, 무엇을 하든 그 자리, 그 역할을 가지고 주님을 사랑하시고, 이웃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허락하시는 모든 상황, 모든 사람은 모두 나의 이웃입니다. 나의 핏줄과 혈육, 직장과 교회 등 모든 인간관계가 말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 건 이웃이 이뻐서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이웃 안에 깃든 주님의 신성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이웃 안에 깃든 주님의 신성 앞에 예의를 갖추는 것이지요. 선인이든 악인이든, 의인이든 불의한 자이든 그는 주님이 지으신 자이며, 그래서 그에게는 주님의 신성이 머물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꼭 죽어야만 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내 속 사람의 상태가 천국을 받을 수 있는 상태라면 지금 이렇게 살아서도 천국을 살 수 있습니다. 천국은 상상을 초월하는 모든 사랑과 지혜, 부유함과 능력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속 사람의 상태가 이런 천국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삶이 형통하며, 이 모든 것이 겉 사람으로도 흘러들어가 나이 들어 자연스런 노화, 노쇠의 상태로 평안히 눈을 감게 됩니다.

 

육체라는 둔탁한 옷을 벗으시고, 이제는 그 영적 오감이 몇 배나 더 활짝 열려 상상할 수도 없는 영광의 삶을 살고 계실 두 분을 기억하며, 내년 이맘때는 더욱 성숙한 모습으로 이곳을 다시 찾을 수 있기를 우리 주 여호와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찬송

301장, 지금까지 지내 온 것’ 2절, 3절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여호와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빛과 도우심의 그 은혜와 사랑이, 오늘 이 추모예배를 통해 들려주신 이 세상 삶의 목적과 목표, 곧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바에 대한 모든 것, 그리고 그래서 남은 생애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등에 관해, 그동안 안개처럼 흐리고 뿌옇던 시야가 맑아져 마음에 굳게 결심하고 돌아가는 모든 심령 가운데, 그리고 생활과 삶 가운데 이제부터 영원토록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2025-03-01(D7)

삼일절

파주 크리스찬 메모리얼 파크

변일국 목사

 

2025-03-01(D7)-추모예배(2586, 눅12,2-3), '2025 故 권성조(10주기), 김정자(20주기) 추모예배'.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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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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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의 속뜻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1:27)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창2:24)

 

 

천사 또는 사람 안에서 결합한 선과 진리는 둘이 아니라 하나이다. 왜냐하면 그때 선은 진리를 바탕으로 한 선이고, 진리는 선을 바탕으로 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 선과 진리의 결합은 마치 사람이 의도하는 것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것을 의도하는 것과 같고, 그때 생각과 의지가 하나의 마음이 되는 것과 같다. (천국과 지옥 372, 이순철 역) Good and truth conjoined in an angel or a man are not two but one, since good is then good of truth and truth is truth of good. This conjunction may be likened to a man’s thinking what he wills and willing what he thinks, when the thought and will make one, that is, one mind; (HH.372)

 

 

새 교회에서는 결혼은 남녀의 순결한 사랑으로부터 이루어져야 하고, 그러므로 거룩하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러한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결혼은 남녀의 정서적, 육체적 필요에 따른 결합이며, 자손을 번식하는 수단이라고 생각합니다. 결혼을 영적인 문제와 결부시켜 생각하는 사람은 더더욱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결혼했다 헤어지는 부부들이 많고, 또 결혼한 부부들 중에서도 순결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결혼에 대해 마태복음 19장 3절 이하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3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이르되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4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5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6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7여짜오되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8예수께서 이르시되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9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마19:3-9)

 

주님께서는 결혼한 부부 중 어느 하나가 순결의 의무를 깨지만 않는다면 결혼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서신서에 보면, 바울도 결혼에 대한 얘기를 많이 했습니다. 그는 결혼보다는 독신을 지지했던 것 같은데요, 그의 서신 몇몇 구절들에서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고린도 전서 7장에는 어떤 사람이 바울에게 편지를 보내 결혼에 대한 생각을 묻자 이렇게 대답합니다.

 

25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스러운 자가 된 내가 의견을 말하노니 26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28그러나 장가 가도 죄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 가도 죄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 (고전7:25-26, 28)

 

그는 또 결혼이 좋지 않은 이유에 대해 말하는데,

 

32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 장가 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까 하되 33장가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까 하여 34마음이 갈라지며 시집 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까 하느니라 35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당하게 하여 흐트러짐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 (고전7:32-35)

 

서신서의 이러한 구절들을 통해 드는 생각은, 바울은 결혼에 대해 그렇게 긍정적이지는 않았구나 하는 생각입니다.

 

※ 바울은 ‘결혼’의 내적 의미, 곧 주님의 신성인 선과 진리의 결합이라는 속뜻에 대해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만일 그가 알고 있었다면, 이런 상담의 결과, 성도들로 하여금 그들이 당시와 같은 시대적 상황 속에서도 결혼을 생각할 때 변함없이 ‘속 사람’이라는 목표, 관점으로만 생각하도록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속 사람의 완성이 결혼이며, 그래야 천국에 올라가 그곳 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시대적 상황’이라 하면, 그때는 박해의 시대였고, 그리고 사도들은 주님이 곧 다시 오실 것으로 가르쳤으며, 그래서 당시 성도들은 ‘이제 잠시 후면 새 하늘과 새 땅이 시작되는데 굳이 결혼이라는 걸 해야 하나?’ 하는 식으로 좀 헷갈렸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이 그렇게 가르친 건 그들 역시 주님의 말씀을 겉 글자로만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결혼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요? 말씀에는 결혼에 대한 얘기가 굉장히 많이 나오는데요, 그중 오늘 본문은 주님께서 처음으로 남녀의 결혼에 대해 언급하신 내용입니다. 창세기 1장 27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1:27)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는데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주님이 인간을 물질적 존재로만 창조하시지 않고, 오히려 영적 존재로 창조하셨음을 나타냅니다. 왜냐하면 ‘자기 형상’은 사람의 영적 생명 중에서 신앙을, ‘하나님의 형상’은 사랑을, 그러니까 각각 진리와 선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는 것은, 사람은 폐의 호흡과 심장의 박동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사랑으로 살도록 창조하셨다는 뜻이며, 그걸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남자’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 또는 진리, 이해(understanding)를, ‘여자’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 또는 선, 의지(will)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이 누구인지, 그분에 대한 신앙은 무엇이고, 사랑은 무엇인지를 전혀 모르는 상태로 태어납니다. 창세기 1장 2절에는 그렇게 영적으로 무지한 상태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 했습니다. 그랬던 사람이 어느 순간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의 빛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그때 사람은 처음으로 주님의 존재를 알게 되고, 점점 주님을 믿고, 사랑하게 됩니다. 그때가 그의 마음에 남자와 여자가 창조되는 순간입니다. 남자와 여자로 표상되는 신앙과 사랑은 처음에는 사람의 속 사람 안에 생깁니다. 그리고 속 사람을 통해 최종적으로는 겉 사람 안에 생기지요.

 

주님에 대한 신앙과 사랑이 그렇게 속 사람으로부터 시작, 마지막에 겉 사람 안에까지 생기는 모습을 오늘 두 번째 본문인 창세기 2장 24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창2:24)

 

여기서 ‘부모’는 속 사람을 뜻합니다. 속 사람을 부모에 비유하는 것은, 거듭나는 동안 겉 사람 안에 뿌리내리는 모든 진리와 선은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남자가 부모를 떠나’라는 표현은 속 사람 안에 있던 진리, 또는 신앙이 겉 사람 안에 심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는 표현은 속 사람과 겉 사람 안의 자아가 하나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은 자아, 곧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자아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속 사람을 반대하던 자아가 속 사람에게 순종하는 자아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남자와 여자, 또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한 몸을 이루게 됩니다. 창세기 2장 21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기,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라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자아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단단하고 차갑기만 하던 자아가, 거듭나는 과정을 거치면서 주님의 생명이 들어있는 부드럽고 따뜻한 자아로 변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담의 단단한 ‘갈빗대’는 타고난 자아를 뜻하고, 그것을 들어낸 자리에 채워지는 ‘’은 주님의 생명이 담긴 따뜻한 자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자아가 변할 때, 겉 사람은 속 사람의 구애에 화답하고, 둘이 한 몸을 이루게 됩니다.

 

모두들 아시는 것처럼 창세기의 천지창조 이야기는 인류 최초의 교회인 태고교회 사람들의 거듭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과 직접 소통할 정도로 영이 맑고 순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남녀의 결혼이 육체의 결합일 뿐만 아니라 영적인 결혼을 의미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습니다. 영적 결혼이란 어떤 것입니까? 사람의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선과 진리의 결혼이고, 신앙과 사랑의 결혼이며, 속 사람과 겉 사람, 이성과 의지의 결혼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그것을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에 남녀의 순결한 결혼을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더 거룩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순수했던 태고교회가 무너지면서 결혼의 순수한 의미도 퇴색되어 버렸고, 그 결과 노아의 고대교회를 지나 모세의 유대교회에 이르러서는 결혼의 영적 의미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다음은 시작하면서 살핀 본문인데요,

 

3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이르되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4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5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6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7여짜오되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8예수께서 이르시되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9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마19:3-9)

 

위와 같은 대화가 저렇게 오갔다는 사실 자체가 그들이 결혼의 영적 의미에 대해 무지했다는 증거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자연계의 결혼이 선과 진리의 결합을 표상하며, 그러므로 결혼의 파기는 선과 진리의 분리를 의미한다는 것을 전혀 몰랐던 것입니다.

 

계시록 해설’ 710번 글의 20항을 보면, 주님이 보시기에 유대인들은 그렇게 선한 사람들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스스로 주님의 교회가 되기를 갈망했습니다.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만난 주님의 천사와 동이 틀 때까지 씨름을 한 이야기는 유대인들의 그런 집요함(tenacity)을 나타내는데요, 그러므로 유대인들에게 주님의 교회가 세워진 것은 주님이 그들을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집요한 요구를 주님께서 들어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를 통해 주님이 직접 밝히신 내용입니다.

 

신명기 9장 6절 말씀을 통해 우리는 유대인들에 대한 주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데요, 거기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공의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신9:6)

 

유대교회 사람들처럼 완악한 사람들은 순결한 결혼을 반대하고, 오히려 간음의 기쁨을 원합니다. 주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여러 명의 아내를 허락하신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하신 것입니다.

 

※ 위 ‘계시록 해설’ 710번 글(계12:2, ‘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의 속뜻 주석)의 20항에 의하면, 야곱과 그의 후손, 즉 열두 지파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모두 그저 자연적이기만 했으며, 그 결과 천국의 선과 교회, 양쪽에 모두 반대되는, 즉 안 맞는 사람들이었다(Jacob and his posterity even from their fathers down were merely natural, and therefore were opposed to the good of heaven and the church)고 하며, 그럼에도 그들이 성경에서 저런 위치에 있는 것은 그들의 성정이 집요하고 고집스러웠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실상은 그들은 선택된 게 아니라 하도 생떼를 부리는 바람에 할 수 없이 허락하신 거(That the Israelitish and Jewish nation was not chosen, but was accepted to represent a church, because of the tenacity with which their fathers and Moses persisted)라는 말이지요.

 

이런 비슷한 일이 현 기독교, 개신교에서도 여전히 비일비재합니다. 가령, 자신의 그 무엇을 관철하기 위해 40일 금식기도를 한다든지, 그것도 여러 번을 말이죠, 무슨 솔로몬의 일천번제, 즉 천일예배나 천일기도를 드려 주님의 보좌를 흔든다든지 등, 소위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식의 신앙생활로 말이지요. 그리고 그걸 또 무슨 영적 계급장처럼 자랑하고 다닌다든지... 물론 이런 것도 그 속뜻을 따라 하는 것이면 그 순기능이 크지만, 저들 유대인들처럼 그저 자연적이기만 한 사람들이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 뜻 이루기 위해서가 아닌, 그저 자신의 그 어떤 걸 이루기 위해서 저렇게 집요하게, 저렇게 고집부리며 무리를 하는 것이라면, 나중에 혹시 그게 이루어지더라도... 글쎄요, 그게 과연 ‘이루어진 것’이며, ‘기도 응답’이라 할 수 있을까요?

 

저런 일련의 모든 황소고집 같은 태도는 그 결과, 자신의 속 사람의 성장, 내면의 열림 등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임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솔로몬의 일천번제 후, 그의 꿈에 여호와께서 하나님으로 그에게 나타나시는데요, 그것은 그의 내면이 한 단계 열려 비로소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즉 그전까진 자연적이기만 했던 솔로몬이 비로소 영적 인간이 된 것이죠. 우리 역시 어떤 큰 기도, 정말 진지한 나아감이 필요할 때는 저들 야곱의 후손들처럼 집요하고 고집스러운, 생떼를 쓰는 태도가 아니라, 참으로 주님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기를, 참으로 우리를 변화시켜 주셔서 우리 내면이 한 단계 더욱 높이, 그리고 깊이 열리기를 구하는 그런 태도여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주님의 모든 복은 우리 내면, 우리의 속 사람의 크기만큼만 담기기 때문입니다. 혹시 그동안 내 삶이 정말 많이 불행했다면 그것은 그저 내 속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복을 조금도 담을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었구나 하시면 틀림없으며, 그렇다면 지금 당장 이런 내 모습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 저 우주공간 햇볕처럼 영원히 공급되는 주님의 복을 넘치도록 담는 그런 속 사람의 태도로 변화를 도모해야 할 것입니다.

 

이상은 왜 유대인들은 결혼을 자연적으로만 생각했는지, 그들이 사실은 얼마나 집요한 사람들인지에 대한 배경 설명이었습니다.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결혼이 신성한 이유는 순결한 결혼은 천국을 만드는 온상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순결한 부부 사이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이들은 나중에 천국의 천사들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왜냐하면 부부의 순결한 사랑 안으로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가 끊임없이 흘러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선과 진리는 어떤 방법으로 결혼한 부부에게로 흘러들어올까요? 새 교회의 가르침에 의하면, 주님께서는 먼저 남편에게 진리를 보내주시고, 그것이 남편의 지혜를 사랑하는 아내에게로 흘러 들어가 거기서 진리와 사랑이 하나가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진리와 결합한 사랑이 다시 남편에게로 흘러 들어가 남편의 생명이 됩니다. 그렇게 될 때, 아내를 순결하게 사랑하는 남편에게는 사랑이 있는 진리가 생기고, 남편을 순결하게 사랑하는 아내에게는 진리가 있는 사랑이 생겨납니다. 그것이 순결한 부부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선과 진리의 결합입니다. 남녀의 결혼을 거룩하다 하는 것은 바로 그런 까닭입니다.

 

그러나 남녀의 결합이라 하더라도 불순한 결합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간음이나 불륜 같은 것입니다. 간음은 배우자가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탐내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혼만을 허락하는 하나님의 질서에 반하는 행동입니다. 순결한 부부의 사랑이 모든 천국의 기쁨의 원천이라면, 간음의 사랑은 지옥의 모든 기쁨의 원천입니다. 그러므로 이 둘은 절대로 가까워질 수도, 섞여서도 안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십계명을 통해 간음하지 말라 하시고, 이웃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 하신 것입니다.

 

14간음하지 말라, 17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출20:14, 17)

 

천국과 지옥’ 384번 글은, 간음을 즐기는 사람에게는 천국이 닫히며, 일단 천국이 닫히게 되면, 하나님의 존재나 교회의 신앙을 인정하지 않게 된다고 말합니다. And this is why heaven is closed up to man when he commits adultery from delight; and when heaven is closed man no longer acknowledges the Divine nor anything of the faith of church. (HH.384)

 

그러므로 간음은 인류를 지옥으로 이끄는 가장 위험한 악이라고 하겠습니다. 반면에 순결한 결혼의 사랑은 천국의 모든 기쁨과 자유와 평화와 순진함의 원천이며, 그러므로 신성한 것입니다.

 

남녀의 결혼이 이렇게 거룩하고 아름다운 것이라면, 세상 사람들은 모두 자기에게 맞는 짝을 만나 결혼을 해야 합니다. 주님은 능히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스베덴보리 같은 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웁살라 대학교 재학 시절, 친구인 크리스토퍼 풀하임의 여동생을 연모했으나, 풀하임의 아버지가 교제를 허락했음에도 불구, 여자 쪽의 지나친 수줍음으로 둘 사이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후 그의 일생에 두 번 다시 무슨 여자 이야기가 등장하지는 않는데요, 이렇게 이런 분들이 혼자 사는 이유는 주님만이 아시는 개인의 사정과 그에 따른 주님의 어떤 특별한 섭리가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를테면, 개인의 영적 특성이 거듭나는 데 있어 결혼하는 것보다 독신으로 사는 것이 유리하다든가, 아니면 주님이 맡기시는 어떤 특별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독신으로 사는 게 더 나은 경우 같은 섭리 말입니다. ‘결혼애’ 229항에는 독신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주님은 참된 결혼의 사랑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비슷한 배우자를 보내주신다. 그러나 세상에서 만나지 못하면 천국에서 맺어 주신다. (CL.229, 이순철 역) That for those who desire love truly conjugial the Lord provides similitudes; and if they are not given on earth, he provides them in the heavens. (CL.229, Warren 역)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결혼한 부부들은 배우자에 대한 순결한 사랑을 통해 주님과 더욱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독신으로 사는 사람들은 어떨까요? 그들은 주님이 맡겨주시는 일을 통해 주님과 결합하고, 그 결합을 통해 천국의 기쁨과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새 교회의 모든 성도들과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계19:7)

 

아멘

 

 

2020-10-18(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5-02-23(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2-23(D1)-주일예배(2585, 창1,27, 2,24), '결혼'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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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5-02-23(D1)-주일예배(2585, 창1,27, 2,24), '결혼'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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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므온이 주의 그리스도를 보다

 

 

21할례할 팔 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잉태하기 전에 천사가 일컬은 바러라

 

※ 21절은 누가복음 전체 강해 원본에서 누락되어 있습니다.

 

22모세의 법대로 정결 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23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24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25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눅2:22-27)

 

 

그렇게 무덥던 여름이 지나고 선선한 10월이 왔습니다. 오늘은 누가복음 2장 22절에서 27절까지 말씀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아기 예수의 부모가 관례에 따라서 첫아기를 주께 드리기 위해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내용입니다.

 

22모세의 법대로 정결 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정결 예식의 날이란 레위기 12장 6절과 7절에 나오는 규례와 관련이 있습니다. 즉 아기를 출산한 여인에 대한 규례인데요,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6아들이나 딸이나 정결하게 되는 기한이 차면 그 여인은 번제를 위하여 일 년 된 어린 양을 가져가고 속죄제를 위하여 집비둘기 새끼나 산비둘기를 회막 문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7제사장은 그것을 여호와 앞에 드려서 그 여인을 위하여 속죄할지니 그리하면 산혈이 깨끗하리라 이는 아들이나 딸을 생산한 여인에게 대한 규례니라 (레12:6-7)

 

이 말씀에서 아기를 낳는 것은 선과 진리의 결합을 통해 새로운 선과 진리가 태어나는 것입니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이렇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있는 선한 애정 안으로 진리로 오실 때, 속 사람 안에서 선과 진리가 하나가 되는데, 그때 그것은 다시 겉 사람 안에 새로운 선과 진리를 낳는다는 것입니다. 겉 사람 안에 태어나는 새로운 선과 진리란, 악한 습관을 끊는 것이고, 이웃을 위하여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새로 태어나는 아기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처음에는 그렇게 순수하지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겉으로 보면 경건하고 사랑이 넘치는 것 같은 행위 안에도 사실은 자아에 속한 것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으로부터가 아니라 자기 힘으로 선을 행한다 생각하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순수한 선과 진리가 아닙니다. 따라서 자아에 속한 이런 불순한 것들이 사라지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그 시간이 바로 출산한 여인이 견뎌야 하는 정결의 기한입니다. 말씀에는 그 기간을 아들을 낳을 경우, 7일로 정하고 있지만, 실제의 삶에서는 상당히 긴 시간이 걸립니다. 그러니까 말씀에서 7일이란 물리적인 7일이 아니고요, 불결한 것이 완전히 없어질 때까지의 시간입니다. 그 시간, 그 기간이 지나야 비로소 삶의 행위 가운데 있는 불순한 것들이 완전히 사라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정결의 기한이 찬 다음에 당신께 속죄제를 드리라 하셨습니다. 속죄제란 순수한 선과 진리로 주님께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동안 자아에 속한 불순한 것으로 주님을 예배한 것에 대한 반성을 담아 순수한 진리와 선으로 예배드리는 것이 주님께 드리는 속죄제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내아이를 8일째 되는 날 할례를 시켰다는 것과 아들을 낳은 여인이 7일의 정결 기한 후에 속죄제를 드리는 것은 서로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23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여기 ‘주의 율법’이란 출애굽기 22장 29절에 나오는 말씀, 즉

 

너는 네가 추수한 것과 네가 짜낸 즙을 바치기를 더디하지 말지며 네 처음 난 아들들을 내게 줄지며 (출22:29)

 

라는 말씀을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왜 장자를 거룩하다 하시고, 또 당신의 것이라 하셨을까요? ‘장자’(長子), 즉 ‘첫 태에 처음 난 남자’, ‘처음 난 아들’은 사랑이 있는 신앙, 또는 체어리티(charity)를 바탕으로 한 진리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는 사랑 또는 체어리티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나 체어리티에서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나옵니다. 인간의 자아에서 나오는 것은 모두 악이며, 그러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그러한 악들은 주님의 신성한 빛이 흘러들어올 때, 그냥 흩어져 버리고 맙니다. 마치 빛이 있는 곳에 어둠이 사라지는 것처럼 그렇게 흩어집니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것은 빛이지, 어둠이 아닙니다. 그리고 모든 존재하는 것은 사랑과 체어리티로부터 태어납니다. 그래서 태는 사랑이요 체어리티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태어난 진리와 신앙, 그것이 장자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오시기 전에 우리에게 있던 신앙, 또는 진리는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사랑이 없는 신앙이고 진리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새로 생긴 신앙은 사랑이 있는 신앙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장자라고 하고, 주님의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은 신앙인들이 이제 새로 생긴 신앙, 즉 사랑이 있는 신앙을 가지고 주님을 예배하러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배드리는 곳이 예루살렘이라고 합니다. 왜 예루살렘에 가서 예배를 드릴까요? ‘예루살렘’은 천적 영적 교회(celestial spiritual church)를 나타냅니다. 천적 영적 교회란 사랑이 있는 진리 위에 세워진 교회란 뜻입니다. 사랑과 신앙으로 예배드리는 사람들이 사랑과 진리 위에 세워진 교회에서 예배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24절에서는 속죄제를 드리는 방법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24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일반적으로 ‘’는 진리나 신앙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여기서 ‘비둘기’는 선과 진리를 모두 나타냅니다. 그러니까 비둘기 한 쌍으로 드리는 예배는 진리와 선 또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삶을 한데 묶어 드리는 예배입니다. 주님께서 왜 그런 규례를 정해주셨는지는 할례 시킨 아이와 정결의 기한이 지난 여인의 영적 의미를 통해 알 수 있는데요, 그것은 영적으로 할례를 받고, 정결의 기한이 지나야 비로소 순수한 선과 진리로 주님을 예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그들은 비둘기 한 쌍을 가지고 속죄제를 드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예배는 이제 진리만 가지고 드리는 예배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끔찍이도 준수하는 율법에 사실은 이런 내적 의미가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의 외적인 것에만 치중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의 규례를 아주 세세한 것까지 잘 지킨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내적 의미 없는 외적 행위만으로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없음을 몰랐습니다.

 

※ 가령 이런 것이죠. 누가복음 18장 세리의 기도 본문입니다.

 

9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눅18:9-14)

 

그래서 바울은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3:28)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개신교 교리를 만든 사람들은 바울이 말한 율법의 행위를 체어리티의 삶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해를 한 것이죠. 그래서 믿음만의 교리가 생겨난 것이며, 그 결과 구원은 체어리티의 삶이 아니라 오직 믿음만으로 이루어진다 믿게 된 것입니다.

 

※ 다음은 스베덴보리가 영계에서 루터를 만나 이 주제를 가지고 나눈 대화입니다.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796번 글입니다.

 

루터(Luther)

 

그는 영계에 처음 들어오면서부터 자기의 독단 교리(dogmas)의 극렬한 창조자였고, 변론자였다. 그리고 그 입장에서 그와 의견을 같이하는 자들이 오는 수에 따라 그 열정이 더해갔다. 그는 세상에 있을 때, 아이슬레벤(Eisleben)에 가지고 있었던 것과 같은 집 한 채가 주어졌고, 거기서 추종자들이 와서 그의 의견과 일치하는 정도에 따라, 자기 자리에 가깝게 또는 멀리 자리를 잡을 수 있게 했다.

 

그리고 그는 줄곧 이야기를 계속했으나, 간혹 그는 자기의 설교자로서의 인기에 의해서 청중들에게 마법을 거는 기술을 습득했다. 이 술법은 고대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아주 강력해서 영계에서는 모든 반대를 물리칠 수 있었다. 그것은 자아애(the love of self)로부터 발생하고, 발언자로 하여금 그의 반대자의 의견뿐 아니라, 그 인격까지 공격하도록 강요된다. 그러므로 이 술법을 쓰는 것이 금지되었으므로, 그의 청중들의 이성에 호소하는 그의 예전 방법으로 바꾸었다.

 

이것이 1757년에 영계에서 행해진 최후 심판의 때까지, 루터가 살아온 생활 상태였다. 그 이듬해에 그는 처음 집에서 다른 집으로 옮겨졌으며, 따라서 동시에 그의 심정 상태도 변해졌다. 그리고 내가 자연계에 있으면서 영계 안에 있는 자들과 대화를 한다는 것을 듣고, 여러 번 추종자(從者)들을 거느리고 나를 만나러 왔다. 몇몇의 질문들을 하고 내 대답들을 듣고는, 그가 지금 옛 교회의 종말과 다니엘서와 복음서들 안에서 하신 주님의 말씀에 의하여 예언된 새 교회의 시작이라는 것을 지각했다. 그는 또한 이 새 교회가 계시록에 새 예루살렘에 의하여 표상되었음과, 또 천국 한 가운데를 나는 천사가 지상에 살고 있는 자들에게 전파한 영원한 복음으로 표상되었음도 지각했다(계14:6). 처음에는 그는 격분해서 폭언을 퍼부었다. 그러나 곧 새 하늘이 마태복음의 주님의 말씀(마28:18)에 의하여 주님만을 하늘과 땅의 하나님으로 시인하는 자들로써 형성되고 있음을 보았다. 그때 그는 욕설을 중지하고 나 있는 곳을 찾았으며, 나와 전보다 친숙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기의 ‘믿음만으로 의롭게 된다’는 독단교리(his chief dogma of justification by faith alone)가 말씀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총명에서 창안한 것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됐을 때, 주님, 인애, 참 믿음, 자유의지, 그리고 구속에 관해서 말씀에 의하여 교육받기를 원했다.

 

마침내 새 교회가 기초를 놓아야 할 진리들에 찬성하며, 점진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이때에 날마다 나와 함께 있었으며, 그가 새 교회의 진리들을 받아들임에 따라, 가끔 자기의 옛 견해가 말씀에 직접 반대되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스스로 자신이 했던 일들에 대해서 자신을 비웃었다. 그리고 나는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내가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는 독단교리들, 즉 영적인 것들에 있어서의 자유의지의 부정, 체어리티의 영적 본질의 부정 등을 설교했다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마시오. 왜냐하면 내 목적은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고는 그 목적이 관철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히려 내가 오류를 범했다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한 미친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미치게 할 수 있었다는 것이 이상하며, 그들이 이 독단교리들 안에 내포된 명확한 성경 말씀과의 모순들을 볼 수 없었다는 것이 이상할 따름이요.’ 여기서 그는 자기 옆에 서 있는 약간의 유명한 교리학자들을 향해서 경멸의 눈길을 던졌다.

 

나는 검문하는 천사들(the examining angels)에게 루터가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는 이신득의 교리로 자신들의 믿음을 굳힌 많은 다른 자들보다, 훨씬 전에 회심하였다고 알려주었다. 왜냐하면 그는 젊어서 기독교 개혁이 시작되기 전에, 체어리티의 중요성에 관한 교리에 정통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글로나 설교로 체어리티를 훌륭하게 가르칠 수 있었던 이유다. 즉 믿음만이라는 교리가 그의 겉 사람에게는 심겼으나, 그의 내적, 영적 속 사람(영혼) 속에는 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젊어서부터 믿음만에 의한 이신득의에 찬동하는 교리로 체어리티의 영적 특성에 반대하고, 스스로 그 교리에 굳어진 자들의 경우는 다르다. 나는 삭소니(Saxony) 후작과 대화한 적이 있는데, 그는 루터와 세상에서 사귄 사람이었다. 그는 루터가 특히 체어리티를 믿음으로부터 분리한 것을 비난했다고 내게 일러주었다. 왜냐하면 루터는 체어리티를 믿음과 분리시켰고, 체어리티가 아니라 믿음이 구원하는 것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 둘을 결합해서 구원의 방편이라고 제시한다. 바울은 체어리티를 믿음 위에 놓고 말하기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고전13:13)고 했다. 그러나 루터는 로마 가톨릭 신도들 때문에 다르게 할 수 없었고, 일반적인 대답을 했다고 부언했다. 이 후작은 축복받은 자들 가운데 있다. //

 

그러나 바울의 의도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내적 의미와 동떨어진 율법의 모든 외적 행위,

 

※ 그러니까 위 성전에서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했던, 이런 율법 준수의 동기가 주님 사랑이 아닌, 자기 사랑, 자기 자랑이었던,

 

그런 영혼 없는 율법 행위를 부정했을 뿐, 체어리티의 삶을 부정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다른 곳에서 말한 걸 보면 알 수 있는데요, 예를 들면, 갈라디아서 5장 6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할례는 모세 율법에서 가르치는 아주 중요한 행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적 행위를 모르는 상태, 즉 이 할례를 명하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상태에서 할례받는 것은 구원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무엇이 중요하다고 합니까? 믿음만 중요하다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이 주장하는 믿음은 그냥 말로만 믿는 것이 아니라, 이웃 사랑에 근거한 삶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의 말을 ‘오직 믿음’ 교리의 근거로 삼는 것은 그의 의도를 철저히 왜곡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의 내적 의미를 아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를 알게 되면, 주님이 주시는 규례의 의미를 알게 되고, 그리고 그것을 삶 가운데 어떻게 담아내야 하는지를 저절로 알게 되며, 그렇게 되면 주님을 사랑하되 속에서 우러나는 마음으로 사랑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25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예루살렘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신앙인들의 내면에 세워진 천적 영적 교회입니다. 즉 사랑과 신앙 위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예루살렘을 천적 영적 교회라고 말씀드린 까닭은, 사람의 내면으로 주님이 오시게 되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체어리티의 삶을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교회는 신앙만 있는 교회가 아니고요, 사랑과 신앙에 기초한 교회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제사를 드리는 예루살렘입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에 있다는 시므온은 누구를 말할까요? 전 시간에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야곱의 아들 요셉과 같은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에서는 사람의 이름을 특정인과 연관 짓지 않고, 이름 자체가 가지는 의미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시므온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문의 시므온은 야곱의 아내 레아가 낳은 둘째 아들 시므온과 같은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러면 ‘시므온’의 영적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 의미는 레아가 시므온을 낳았을 때 말한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는데요, 창세기 29장 33절 말씀입니다. 레아가 말하기를,

 

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창29:33)

 

이 말씀에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은 신앙은 있는데 그에 따라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 신앙인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신앙에 따라 살지 못할 때,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죠. 그런 상태가 바로 시므온이 태어나기 전의 상태입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을 들으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는 뜻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실천하지 못하는 신앙을 붙들고 힘겨워하는 사람에게 주님께서 새로운 신앙을 주신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시므온은 새로운 신앙을 뜻합니다. 새로운 신앙이란 전처럼 이성에 속한 신앙이 아니고요, 의지에 속한 신앙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께서 머릿속에만 있던 신앙을 의지 가운데 있도록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머리 신앙이 가슴 신앙이 된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신앙에 따라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전에는 그렇지 못했죠. 이성에 속한 신앙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머리로는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는데... 생각하면서도 정작 행동하질 못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의지 가운데 신앙을 심어주실 때, 우리는 그 새로운 신앙에 따라 능동적으로 진리를 행할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시므온이란 의미는 의지에 속한 신앙입니다.

 

그런데 시므온이라는 새로운 신앙을 얻기까지는 많은 시련이 있습니다. 시험에서 이기지 못할 때도 있었고, 그래서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시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두려움에 떨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얼마나 많은 시련을 겪어야 지혜롭고 강단 있게 주님의 뜻을 받들 수 있을까 하는 고민도 했습니다. 그런 고민을 오늘 말씀에서는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이 말은 시므온에 대해 하는 말입니다. 즉 영적 교회의 사람들이 기다리던 주님의 위로가 곧 시므온이라는 새로운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며 주님이 이스라엘에 주시는 위로는 어떤 것입니까? 새로운 신앙을 통해 지혜 안에 있는 것이고, 사랑의 기쁨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제까지 우리가 기다렸던 이스라엘의 위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부터 시므온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26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주님이 우리 속에 오시면 그때부터 우리는 성령의 인도를 본격적으로 받기 시작합니다. 성령은 주님의 신적 인성으로부터 나오는 영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시므온에게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지시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 안의 시므온이라는 신앙이 성령으로부터 계시를 받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령이 그냥 그리스도라 하지 않고, ‘주의 그리스도’라고 말한 것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주의 그리스도’는 그냥 진리로 오신 주님이 아니고요, 부활하셔서 당신 안에 여호와의 신성과 인성이 하나 되신 신적 인성(Divine Human)이신 주님이십니다. 왜냐하면 ‘’라는 말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는 주님이라는 말을 거의 쓰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신약에서부터 주라는 말을 썼습니다. 왜냐하면 신약에서 주님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신약의 그리스도는 곧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만약 주님에 대해 주라고 부르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불렀다면 주님은 사람들에게 진리를 가르치실 수도 없었을 것이고, 병자를 고치실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당신 스스로 ‘내가 여호와다!’ 하시자마자 바로 유대인들에게 돌을 맞으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주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주 그리스도라는 말은 당신 안의 신적 진리와, 여호와이신 신적 선이 하나가 되신 주님, 즉 신적 진리로부터 신적 선이 되신 주님을 나타내고요, 그러므로 주님의 신적 인성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또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이라고 했는데, 이 ‘본다’는 말은 주님을 받아들이고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하면, 주님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성령이 시므온에게 하신 말씀, 즉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의 의미는 ‘너의 영이 죽지 않고 결국 주님의 신적 인성을 믿게 될 것이다’라는 예언입니다. 생각해 보면, 신앙인들에게 큰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 중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으로만 믿지, 그분 안에 여호와의 신성이 계심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또 이 진리를 아는 많은 분들 가운데도 그것을 머리로는 이해하는데 영으로는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주님이 여호와이심을 영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신앙과 삶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신앙과 삶을 하나로 만들지 못하는 것은 진리이신 그리스도와 그분 안에 신적 선으로 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분리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주님이세요. 그리고 체어리티 역시 주님이세요. 그러므로 신앙과 삶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은 그의 내면에 주님을 온전히 모시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신 주님과 사랑이신 주님을 분리시키는 것이죠. 그래서 그것은 주님이 아닌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고요, 영적으로는 주님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구원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자의 영으로 주님의 인성 안에 신성이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 신앙으로 우리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 성령이 시므온에게 ‘네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라고 지시하시는 것은 ‘네가 주님의 신적 인성을 반드시 영으로 인정하게 될 것이다’라는 뜻이며, 그러므로 죽지 않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이 말씀은 신앙인들에게 큰 위로가 되는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27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이 말씀은 시므온이 성령의 인도를 통해 아기 예수를 만나는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신앙, 즉 의지에 속한 신앙 가운데 있는 신앙인들이 신적 인성이신 주님을 그의 영으로 받아들이는 순간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예수라고 불렀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신적 선이신 주님을 표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이 ‘율법의 관례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일들이 신적 질서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마음의 할례를 받는 일이나, 내면의 교회 안에 불순한 것들이 제거되는 일이나, 그의 신앙이 이성에 속한 신앙에서 의지에 속한 신앙으로 바뀌는 일이나, 그리고 새로운 신앙을 통해 신적 인성이신 주님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일이나, 그 모든 것이 주님의 신적 질서에 따라 잘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은 내면에 주님이 오신 사람들의 거듭남의 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아이가 할례를 받는 것과 아기 어머니가 정결의 기한을 채우는 것은 모두 주님이 오신 다음에 삶의 행위 가운데 있는 불순한 것들이 제거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통해 새로 생기는 신앙, 즉 의지에 속한 신앙을 본문에서는 시므온이라는 사람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신앙이 머리에 머물러 있을 때에는 체어리티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에 의해서 그것이 의지에 심어질 때 비로소 체어리티의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본래 시므온은 레아의 첫 번째 아들 르우벤 다음에 태어난 두 번째 아들입니다. 첫째 아들 르우벤은 영적 의미로 이성에 속한 신앙을 뜻합니다. 즉 머리에 들어있는 신앙이라는 것이죠. 처음에 신앙은 그렇게 사람의 이성 가운데 씨가 떨어지듯 떨어집니다. 그런 다음 우리가 신앙에 따라 살기를 간절히 원할 때, 주님께서는 이성 가운데 있는 신앙을 의지라는 밭으로 마치 모종 옮기듯 옮겨주십니다. 그것이 레아가 낳은 두 번째 아들 시므온입니다. 시므온이 그런 뜻을 가졌기 때문에, 오늘 아기 예수님을 만난 사람의 이름도 시므온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이 시므온의 상태일 때, 우리는 비로소 영으로 주님을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체어리티의 삶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때 레아는 세 번째 아들 레위를 낳죠. 레위는 체어리티의 선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내용을 알면 오늘 말씀을 이해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시험 가운데서 불안을 느낍니다. 자신의 영이 살아 있음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말씀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데도 시험이 많고, 일이 잘 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렇게 시험이 깊어지면, 자신이 영적으로 죽은 자 같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 말씀하세요.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은 주님의 예언입니다. 주님의 예언은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 없습니다. 주께서 ‘네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믿으시고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신적 인성이신 주님을 우리들의 영으로 믿는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주님의 그러한 가호가 우리 성도님들과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그가 내게 부르기를 주는 나의 아버지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 하리로다 (시89:26)

 

아멘

 

 

 

원본

2016-10-02(D1)

청주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10(D6)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011. 2023-03-10(D6)-매일예배(2428, 눅2,22-27), '시므온이 주의 그리스도를 보다'.pdf
0.49MB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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