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의 속뜻

 

11절,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And now art thou cursed from the ground, which hath opened its mouth to receive thy brother’s bloods from thy hand.

 

378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는 그런 종교적 입장, 곧 스키즘(schism)을 통해 그가 외면을 자초하게 되었음을, 즉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하는 입장을 고수함으로써 스스로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음을, ‘그 입을 벌려’는 그 이단(heresy)이 그들을 가르쳤음을,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은 그것이 체어리티를 폭행, 사라지게 하였음을 말합니다. Cursed art thou from the ground” signifies that through the schism he had become averted; “which hath opened its mouth” signifies that the heresy taught them; to “receive thy brother’s bloods from thy hand” signifies that it did violence to charity, and extinguished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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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 속뜻, 전자는 종파나 이단을, 후자는 교리를 의미

 

10절,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And he said, What hast thou done? The voice of thy brother’s bloods crieth to me from the ground.

 

377

여기 ‘(ground)이 종파나 이단을 말한다는 건 ‘(field)이 교리를 가리키며, 그래서 들을 자신의 일부로 하는 ‘’은 일종의 종파라는 사실로 분명합니다. 사람 자체가 이요, 또한 입니다. 이런 것들이 사람 안에서 수정(受精)되기 때문인데요, 사람은 그 안에서 수정되는 게 무엇이냐에 따라 그런 사람이 됩니다. 선과 진리로 수정된 사람은 선하고 진실한 사람이 되고, 악과 거짓으로 수정된 사람은 악하고 거짓된 사람이 됩니다. 어떤 특별한 교리나 이단 가운데 있는 사람은 나중에 그 이름으로 부르게 되는데요, 그래서 지금 이 본문에 나오는 이라는 용어도 종종 사람의 어떤 종파나 이단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곤 하는 것입니다. That the “ground” here signifies a schism or heresy,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a “field” signifies doctrine, and therefore the “ground,” having the field in it, is a schism. Man himself is the “ground,” and also the “field,” because these things are inseminated in him, for man is man from what is inseminated in him, a good and true man from goods and truths, an evil and false man from evils and falsities. He who is in any particular doctrine or heresy is named from it, and so in the passage before us the term “ground” is used to denote a schism or heresy in 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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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소’, 소리의 속뜻

 

10절,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And he said, What hast thou done? The voice of thy brother’s bloods crieth to me from the ground.

 

375

호소’에 관한 두 표현, ‘voice crying’과 ‘voice of a cry’는 말씀에 흔히 나오는 표현 형식인데요, 어떤 동요(動搖)나 소란, 혼란, 또는 어떤 행복한 일이 일어난 경우 등에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출32:17, 18; 습1:9, 10; 사65:19; 렘48:3처럼 말입니다.) 본문에서는 고발을 가리킵니다. A “voice crying” and the “voice of a cry” are common forms of expression in the Word, and are applied to every case where there is any noise, tumult, or disturbance, and also on the occasion of any happy event (as in Exod. 32:17–18; Zeph. 1:9–10; Isa. 65:19; Jer. 48:3). In the present passage it denotes accusation.

 

 

17여호수아가 백성들의 요란한 소리를 듣고 모세에게 말하되 진중에서 싸우는 소리가 나나이다 18모세가 이르되 이는 승전가도 아니요 패하여 부르짖는 소리도 아니라 내가 듣기에는 노래하는 소리로다 하고 (출32:17, 18)

 

9그 날에 문턱을 뛰어넘어서 포악과 거짓을 자기 주인의 집에 채운 자들을 내가 벌하리라 10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어문에서는 부르짖는 소리가, 제 이 구역에서는 울음 소리가, 작은 산들에서는 무너지는 소리가 일어나리라 (습1:9, 10)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에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사65:19)

 

호로나임에서 부르짖는 소리여 황폐와 큰 파멸이로다 (렘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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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핏소리’, 의 속뜻, 증오

 

10절,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And he said, What hast thou done? The voice of thy brother’s bloods crieth to me from the ground.

 

374

핏소리’가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행임이 분명한 것은 말씀에 나오는 많은 본문들 때문입니다. 거기에 보면 ‘소리’는 어떤 것에 대한 고발을, ‘’는 어떤 종류의 죄, 특히 증오(hatred)를 가리킵니다. 주님의 가르치심 대로 누구든지 형제를 향하여 증오를 품는 사람은 마음으로는 그를 죽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That the “voice of bloods” signifies that violence had been done to charity is evident from many passages in the Word, in which “voice” denotes anything that accuses, and “blood” any kind of sin, and especially hatred; for whosoever bears hatred toward his brother, kills him in his heart; as the Lord teaches:

 

21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마5:21-22) Ye have heard that it was said to them of old, thou shalt not kill, and whosoever shall kill shall be in danger of the judgment; but I say unto you, that whosoever is angry with his brother rashly shall be in danger of the judgment; and whosoever shall say to his brother, Raca, shall be in danger of the council; but whosoever shall say, thou fool, shall be in danger of the hell of fire, (Matt. 5:21–22)

 

이 말씀들은 증오의 등급을 의미합니다. 증오는 체어리티와 정반대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만일 직접 안 되면, 간접적으로라도 죽입니다. 증오는 오직 직접적인 외적 규제로만 저지됩니다. 이런 이유로 예레미야에서처럼 모든 증오는 입니다. by which words are meant the degrees of hatred. Hatred is contrary to charity, and kills in whatever way it can, if not with the hand, yet in spirit, and is withheld only by external restraints from the deed of the hand. Therefore all hatred is “blood,” as in Jeremiah:

 

33네가 어찌 사랑을 얻으려고 네 행위를 아름답게 꾸미느냐 그러므로 네 행위를 악한 여자들에게까지 가르쳤으며 34또 네 옷단에는 죄 없는 가난한 자를 죽인 피가 묻었나니 그들이 담 구멍을 뚫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이 모든 일 때문이니라 (렘2:33-34) Why makest thou thy way good to seek love? Even in thy skirts are found the bloods of the souls of the needy innocent ones. (Jer. 2:33–34)

 

[2] ‘’ 하면 증오이듯 모든 종류의 불법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증오는 모든 불법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호세아에서처럼 And as hatred is denoted by “blood,” so likewise is every kind of iniquity, for hatred is the fountain of all iniquities. As in Hosea:

 

2오직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요 포악하여 피가 피를 뒤이음이라 3그러므로 이 땅이 슬퍼하며 거기 사는 자와 들짐승과 공중에 나는 새가 다 쇠잔할 것이요 바다의 고기도 없어지리라 (호4:2-3) Swearing falsely, and lying, and killing, and stealing, and committing adultery, they rob, and bloods, in bloods have they touched; therefore shall the land mourn, and everyone that dwelleth therein shall languish. (Hos. 4:2–3)

 

그리고 에스겔에서 무자비함을 말씀하시면서 And in Ezekiel, speaking of unmercifulness:

 

2인자야 네가 심판하려느냐 이 피흘린 성읍을 심판하려느냐 그리하려거든 자기의 모든 가증한 일을 그들이 알게 하라 3너는 말하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자기 가운데에 피를 흘려 벌 받을 때가 이르게 하며 우상을 만들어 스스로 더럽히는 성아 4네가 흘린 피로 말미암아 죄가 있고 네가 만든 우상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혔으니 네 날이 가까웠고 네 연한이 찼도다 그러므로 내가 너로 이방의 능욕을 받으며 만국의 조롱 거리가 되게 하였노라, 6이스라엘 모든 고관은 각기 권세대로 피를 흘리려고 네 가운데에 있었도다, 9네 가운데에 피를 흘리려고 이간을 붙이는 자도 있었으며 네 가운데에 산 위에서 제물을 먹는 자도 있었으며 네 가운데에 음행하는 자도 있었으며 (겔22:2-4, 6, 9) Wilt thou judge the city of bloods, and make known to her all her abominations, a city that sheddeth bloods in the midst of it? Thou art become guilty through thy blood that thou hast shed. (Ezek. 22:2–4, 6, 9)

 

너는 쇠사슬을 만들라 이는 피 흘리는 죄가 그 땅에 가득하고 포악이 그 성읍에 찼음이라 (겔7:23) The land is full of the judgment of bloods, and the city is full of violence. (Ezek. 7:23)

 

그리고 예레미야 애가에서 And in Jeremiah:

 

13그의 선지자들의 죄들과 제사장들의 죄악들 때문이니 그들이 성읍 안에서 의인들의 피를 흘렸도다 14그들이 거리 거리에서 맹인 같이 방황함이여 그들의 옷들이 피에 더러워졌으므로 그들이 만질 수 없도다 (애4:13-14) For the sins of the prophets of Jerusalem, and the iniquities of her priests, that have shed the blood of the righteous in the midst of her, they wander blind in the streets, they have been polluted with blood. (Lam. 4:13–14)

 

이사야에서 In Isaiah:

 

이는 주께서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기시며 예루살렘의 피를 그 중에서 청결하게 하실 때가 됨이라 (사4:4) When the Lord shall wash away the filth of the daughters of Zion, and shall have purged the bloods of Jerusalem from the midst, with the spirit of judgment, and with the spirit of burning. (Isa. 4:4)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워졌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냄이라 (사59:3) Your palms are defiled in blood, and your fingers in iniquity. (Isa. 59:3)

 

에스겔에서 예루살렘의 혐오스러운 것들, 곧 ‘’라 하는 것들을 말씀하시면서 In Ezekiel, speaking of the abominations of Jerusalem, which are called “bloods:”

 

6내가 네 곁으로 지나갈 때에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하고, 22네가 어렸을 때에 벌거벗은 몸이었으며 피투성이가 되어서 발짓하던 것을 기억하지 아니하고 네가 모든 가증한 일과 음란을 행하였느니라 (겔16:6, 22) I passed by thee, and saw thee trampled in thine own bloods, and I said unto thee, Live in thy bloods, yea, I said unto thee, Live in thy bloods. (Ezek. 16:6, 22)

 

[3] 계시록에 보면, 마지막 때의 무자비함과 증오 또한 ‘’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계16:3, 4) 는 영어로 bloods라 하여 복수로 언급되는데요, 모든 불공정하고 혐오스러운 것들이 증오로부터 솟구쳐 나오기 때문입니다. 마치 모든 선하고 거룩한 것들이 사랑으로부터 그렇게 나오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이웃을 향하여 증오를 느끼는 사람은 만일 그가 할 수만 있다면 그를 죽일 것입니다. 실제로 그는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그렇게 할 것입니다. 이런 것이 이웃을 폭행하는 것이며, 그것을 여기서 아주 적절하게 ‘핏소리’라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The unmercifulness and hatred of the last times are also described by “blood” in the Revelation (16:3, 4). Bloods” are mentioned in the plural, because all unjust and abominable things gush forth from hatred, as all good and holy ones do from love. Therefore he who feels hatred toward his neighbor would murder him if he could, and indeed does murder him in any way he can; and this is to do violence to him, which is here properly signified by the “voice of bloods.”

 

 

3둘째 천사가 그 대접을 바다에 쏟으매 바다가 곧 죽은 자의 피 같이 되니 바다 가운데 모든 생물이 죽더라 4셋째 천사가 그 대접을 강과 물 근원에 쏟으매 피가 되더라 (계16: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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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아우의 핏소리’, 피의 호소’, ’의 속뜻

 

10절,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And he said, What hast thou done? The voice of thy brother’s bloods crieth to me from the ground.

 

373

네 아우의 핏소리’는 체어리티에 폭행이 가해졌음을 말합니다. ‘피의 호소’는 유죄 고발(the accusation of guilt)이며, ‘’은 어떤 종파(schism)나 이단(heresy)을 말합니다. The “voice of thy brother’s bloods” signifies that violence had been done to charity; the “crying of bloods” is the accusation of guilt, and “ground” signifies a schism or here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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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은 체어리티를 지키는 자’, 그러나 안타깝게도 신앙은 자기가 체어리티를 지배해야 한다, ‘가인이라는 교리를 원리로 삼아 따르고 말음

 

9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And Jehovah said to Cain, Where is Abel thy brother? And he said, I know not, am I my brother’s keeper?

 

372

지키는 자’가 된다는 건 유대 교회의 ‘문지기’나 ‘수위’(문지방을 지키는 자)처럼 섬기는 걸 말합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지키는 자라고 합니다. 그것이 원래 신앙의 의무이니까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신앙은 자기가 체어리티를 지배해야 한다는, ‘가인이라 하는 교리를 원리로 삼아 따르고 말았습니다. 7절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말입니다. To be a “keeper” signifies to serve, like “door keepers” and “porters” (that is, the keepers of the threshold) in the Jewish church. Faith is called the “keeper” of charity, from the fact that it ought to serve it, but it was according to the principles of the doctrine called “Cain” that faith should rule, as was said in verse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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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태고인들의 퍼셉션, 홍수 후 양심으로 대체됨. 양심 역시 일종의 딕테이션이지만 방식이 다름

 

9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And Jehovah said to Cain, Where is Abel thy brother? And he said, I know not, am I my brother’s keeper?

 

371

태고인들은 자신들의 퍼셉션을 ‘여호와의 스피킹’이라는 워딩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이런 퍼셉션 역량을 주신 분이 주님이심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퍼셉션은 사랑이 주(主, the principal)일 동안은 계속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을 향한(to) 사랑이 식고 그 결과, 이웃을 향한(toward) 사랑 또한 식으면 퍼셉션은 사라졌습니다만, 그러나 아직 사랑이 남아 있는 한은 퍼셉션도 남아 있었습니다. 이러한 퍼셉션 역량은 태고교회에 맞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홍수 후 세대처럼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고,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해서 주어지자 양심이라는 게 그 뒤를 이었습니다. 이 양심이라는 것 또한 일종의 딕테이트를 주는 건데 방식은 다릅니다. 이에 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양심이 딕테이트할 때, 그것은 말씀에 나오는 ‘여호와께서 이르시되’와 같은 식입니다. 양심은 계시와 지식, 그리고 말씀으로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말씀(the Word) 말씀하시거나(speaks) 딕테이트하실 때, 말씀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런 까닭에 심지어 오늘날에조차 양심, 혹은 신앙에 관한 걸 언급하면서 ‘주께서 말씀하십니다’라고 하는 것보다 더 일반적인 표현은 없습니다. By the “speaking of Jehovah” the most ancient people signified perception, for they knew that the Lord gave them the faculty to perceive. This perception could continue no longer than while love was the principal. When love to the Lord ceased, and consequently love toward the neighbor, perception perished; but insofar as love remained, perception remained. This perceptive faculty was proper to the most ancient church, but when faith became separated from love, as in the people after the flood, and charity was given through faith, then conscience succeeded, which also gives a dictate, but in a different way, of which, by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When conscience dictates, it is in like manner said in the Word that “Jehovah speaks”; because conscience is formed from things revealed, and from knowledges, and from the Word; and when the Word speaks, or dictates, it is the Lord who speaks; hence nothing is more common, even at the present day, when referring to a matter of conscience, or of faith, than to say, “the Lord s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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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의 속뜻

 

9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And Jehovah said to Cain, Where is Abel thy brother? And he said, I know not, am I my brother’s keeper?

 

370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는 그들에게 체어리티, 혹은 ‘아우 아벨’에 관하여 일종의 딕테이트(dictate)를 준 어떤 퍼셉션 같은 것(perceptivity)을 말합니다. 가인의 대답,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는 신앙이 체어리티를 뭣도 아닌 걸로 여겼음을, 그리고 체어리티가 원하는 대로 하는 걸 마음에 내켜 하지 않았고 그 결과, 체어리티와 관련된 모든 걸 거부했다는 말입니다. 그런 게 그들의 교리가 되었습니다. Jehovah said unto Cain” signifies a certain perceptivity from within that gave them a dictate concerning charity or the “brother Abel.” Cain’s reply, “I know not, am I my brother’s keeper?” signifies that faith considered charity as nothing, and was unwilling to be subservient to it, consequently that faith altogether rejected everything of charity. Such did their doctrine bec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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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369, 창4: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AC.366-369) -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의 속뜻

 

8절,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And Cain talked to Abel his brother; and it came to pass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hat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r, and slew him.

 

369

그래서 이상으로부터 이어지는 내용은 본문,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의 의미인데요, 그것은 신앙과 체어리티는 둘 다 교리적으로는 신앙의 교리로부터 말미암았음에도 불구, 신앙, 얘가 문젠데... 곧 애써 자기를 사랑에서 분리 및 체어리티를 무시, 반드시 체어리티를 지배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그래서 결국은 체어리티의 불을 꺼트리고야 마는 게 신앙이라는 내용인데요, 오늘날의 경우, 체어리티의 실천은 없이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입장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런 경우입니다. 바로 이런 걸로 그들은 체어리티의 불을 꺼트리기 때문인데요, 아무리 그들이 사랑 없이 신앙 만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고, 입술로 고백할지라도 말입니다. From this then it follows that the words “Cain rose up against his brother Abel, and slew him,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ogether,” denote that while both faith and charity were from the doctrine of faith, yet faith separate from love could not but disregard and thereby extinguish charity; as is the case at the present day with those who maintain that faith alone saves, without a work of charity, for in this very supposition they extinguish charity, although they know and confess with their lips that faith is not saving unless there is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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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368, 창4: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AC.366-369) - ’의 속뜻

 

8절,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And Cain talked to Abel his brother; and it came to pass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hat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r, and slew him.

 

368

’이 교리를, 그리고 결과적으로 신앙과 체어리티의 교리에 속한 것이면 무엇이든 의미한다는 것은 다음 예레미야 말씀을 보면 분명합니다. That a “field” signifies doctrine, and consequently whatever belongs to the doctrine of faith and charity, is evident from the Word, as in Jeremiah:

 

들에 있는 나의 산아 네 온 영토의 죄로 말미암아 내가 네 재산과 네 모든 보물과 산당들로 노략을 당하게 하리니 (렘17:3) O my mountain in the field, I will give thy possessions [facultates] and all thy treasures for a spoil. (Jer. 17:3)

 

이 구절에서 ‘’은 교리를, ‘재산’과 ‘보물’은 신앙의 영적인 부(富), 혹은 신앙의 교리에 속한 것들을 가리킵니다. 다음 말씀도 같습니다. In this passage “field” signifies doctrine; “possessions” and “treasures” denote the spiritual riches of faith, or the things that belong to the doctrine of faith. In the same:

 

레바논의 눈이 어찌 들의 바위를 떠나겠으며 먼 곳에서 흘러내리는 찬물이 어찌 마르겠느냐 (렘18:14) Shall the snow of Lebanon fail from the rock of my field? (Jer. 18:14)

 

시온을 향하여 선포하시기를, 신앙의 교리가 결핍되면 ‘시온은 밭 같이 경작지가 될 것’이라 하십니다. (렘26:18; 미3:12) 에스겔에서 It is declared concerning Zion, when destitute of the doctrine of faith, that she shall be “plowed like a field.” (Jer. 26:18, Micah 3:12) In Ezekiel:

 

그 땅의 종자를 꺾어 옥토에 심되 수양버들 가지처럼 큰 물 가에 심더니 (겔17:5) He took of the seed of the land, and set it in a field of sowing, (Ezek. 17:5)

 

교회와 교회의 신앙을 다루면서 말입니다. 교리를 일컬어 그 안에 종자, 씨가 심긴 ‘’이라 하기 때문입니다. 같은 본문에서 treating of the church and of its faith; for doctrine is called a “field” from the seed in it. In the same:

 

들의 모든 나무가 나 여호와는 높은 나무를 낮추고 낮은 나무를 높이며 푸른 나무를 말리고 마른 나무를 무성하게 하는 줄 알리라 나 여호와는 말하고 이루느니라 하라 (겔17:24) And let all the trees of the field know that I Jehovah bring down the high tree. (Ezek. 17:24)

 

요엘입니다. In Joel:

 

10밭이 황무하고 토지가 마르니 곡식이 떨어지며 새 포도주가 말랐고 기름이 다하였도다 11농부들아 너희는 부끄러워할지어다 밭의 소산이 다 없어졌음이로다 12밭의 모든 나무가 다 시들었으니 (욜1:10-12) The field is laid waste, the ground mourneth, for the corn is wasted, the new wine is dried up, the oil languisheth, the husbandmen are ashamed, the harvest of the field is perished, all the trees of the field are withered, (Joel 1:10–12)

 

여기 ‘’은 교리를, ‘나무’는 지식들을, ‘농부들’은 예배자들을 말합니다. 시편에서 where the “field” signifies doctrine, “trees” knowledges, and “husbandmen” worshipers. In David:

 

밭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즐거워할지로다 그 때 숲의 모든 나무들이 여호와 앞에서 즐거이 노래하리니 (시96:12) The field shall exult and all that is therein; then shall all the trees of the forest sing, (Ps. 96:12)

 

여기 ‘’이 어떻게 기뻐 어쩔 줄 몰라 하겠으며, ‘숲의 모든 나무들’이 어떻게 노래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사람 안에 있는 것들, 곧 신앙에 관한 지식들 얘기임이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예레미야에서 where it is perfectly evident that the field cannot exult, nor the trees of the forest sing; but things that are in man, which are the knowledges of faith. In Jeremiah:

 

언제까지 이 땅이 슬퍼하며 온 지방의 채소가 마르리이까 (렘12:4) How long shall the land mourn, and the herb of every field wither? (Jer. 12:4)

 

여기서도 분명한 것은 ‘’도, ‘지방의 채소’도 슬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표현들은 황폐한 상태 가운데 있는 사람의 어떤 것에 관한 것입니다. 비슷한 구절이 이사야에도 나옵니다. where it is also evident that neither the land nor the herbs of the field can mourn; but that the expressions relate to something in man while in a state of vastation. A similar passage occurs in Isaiah:

 

산들과 언덕들이 너희 앞에서 노래를 발하고 들의 모든 나무가 손뼉을 칠 것이며 (사55:12) The mountains and the hills shall break forth before you into singing, and all the trees of the field shall clap their hands. (Isa. 55:12)

 

주님 또한 세상 종말 관련 예언 가운데 신앙의 교리를 가리켜 ‘’이라 하십니다. The Lord also in his prediction concerning the consummation of the age calls the doctrine of faith a “field:”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마24:40; 눅17:36) Then shall two be in the field, the one shall be taken and the other left, (Matt. 24:40; Luke 17:36)

 

※ 개역개정 한글 성경에는 눅17:36 본문이 ‘(없음)’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 ‘’은 신앙의 교리, 곧 참된 교리, 거짓된 교리 둘 다를 의미합니다. ’이 교리를 가리키기 때문에, 신앙의 씨앗을 받아들이는 그 누구든, 그것이 사람이든, 교회든, 아니면 세상이든 또한 일컬어 ‘’이라 합니다. where by a “field” is meant the doctrine of faith, both true and false. As a “field” signifies doctrine, whoever receives a seed of faith, whether a man, the church, or the world, is also called a “field.”

 

 

유다의 왕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가 유다의 모든 백성에게 예언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시온은 밭 같이 경작지가 될 것이며 예루살렘은 돌 무더기가 되며 이 성전의 산은 산당의 숲과 같이 되리라 하였으나 (렘26:18)

 

이러므로 너희로 말미암아 시온은 갈아엎은 밭이 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이 되리라 (미3:12)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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