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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4.04.03 AC.367, 창4: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AC.366-369) - 체어리티는 신앙의 '아우', 둘 사이 생득권, 장자권 분쟁
  2. 2024.04.03 AC.366, 창4: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AC.366-369) -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들’,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의 속뜻
  3. 2024.04.03 AC.365, 창4:7,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AC.361-365) -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의 속뜻
  4. 2024.04.03 AC.364, 창4:7,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AC.361-365) -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의 속뜻
  5. 2024.04.03 AC.363, 창4:7,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AC.361-365) - ‘낯을 들다’의 속뜻, 체어리티가 있다
  6. 2024.04.03 AC.362, 창4:7,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AC.361-365) - ‘가인’의 속뜻,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한 사람들
  7. 2024.04.03 AC.361, 창4:7,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AC.361-365) -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
  8. 2024.04.03 AC.360, 창4: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AC.359-360) -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의 속뜻
  9. 2024.04.03 AC.359, 창4: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AC.359-360) -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몹시 분하여 함’, ‘안색이 변함’의 속뜻
  10. 2024.04.03 AC.358, 창4: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AC.355-358) - ‘안색이 변하니’의 속뜻

 AC.367, 창4: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AC.366-369) - 체어리티는 신앙의 '아우', 둘 사이 생득권, 장자권 분쟁

 

8절,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And Cain talked to Abel his brother; and it came to pass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hat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r, and slew him.

 

367

체어리티가 신앙의 ‘아우’라는 것, 그리고 ‘’이 교리에 속한 것이면 무엇이든 의미한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말고는 굳이 말씀 내 유사 구절들을 찾아 이들을 컨펌할 필요는 없지 싶습니다. 체어리티가 신앙의 아우라는 사실은 신앙의 본성이나 본질상 누구에게나 자명합니다. 이 형제지간이 에서와 야곱으로 표현되었으며, 그 생득권(生得權, the birthright) 및 그로 인한 주도권 다툼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또한 유다로 말미암은 다말의 두 아들, 베레스와 세라로 (38:28-30), 또 에브라임과 므낫세로도 표현되었습니다 (48:13-14). 이 둘도 다른 유사한 경우들과 같이 장자권(長子權, the primogeniture)과 그로 인한 주도권 다툼이 있습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교회의 자식들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남자라 합니다. 본 장 1절의 가인처럼 말이지요. 그리고 체어리티는 아우라 합니다. 19:2, 13:14 및 다른 데서들처럼 말이지요. 신앙과 체어리티의 연합을 형제의 계약’(1:9)이라 합니다. 가인과 아벨의 상징과 비슷한 것이 방금 말씀드린 야곱과 에서의 상징이었습니다. 야곱 또한 그의 형 에서를 대신하고 싶어 했다는 점에서 그런데요, 호세아를 봐도 분명합니다. It is unnecessary to confirm these things by similar passages from the Word, except so far as to prove that charity is the “brother” of faith, and that a “field” signifies whatever is of doctrine. That charity is the “brother” of faith is evident to everyone from the nature or essence of faith. This brotherhood was represented by Esau and Jacob, and was the ground of their dispute about the birthright and the consequent dominion. It was also represented by Pharez and Zarah, the sons of Tamar by Judah (Gen. 38:28, 29, 30); and by Ephraim and Manasseh (Gen. 48:13, 14); and in both of these, as well as in other similar cases, there is a dispute about the primogeniture and the consequent dominion. For both faith and charity are the offspring of the church. Faith is called a “man,” as was Cain, in verse 1 of this chapter, and charity is called a “brother,” as in Isa. 19:2; Jer. 13:14; and other places. The union of faith and charity is called “the covenant of brethren.” (Amos 1:9) Similar to the signification of Cain and Abel was that of Jacob and Esau, as just said; in that Jacob also was desirous of supplanting his brother Esau, as is evident also in Hosea:

 

2야곱을 그 행실대로 벌하시며 그의 행위대로 그에게 보응하시리라 3야곱은 모태에서 그의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호12:2-3) To visit upon Jacob his ways, according to his doings will he recompense him; he supplanted his brother in the womb. (Hos. 12:2–3)

 

그러나 에서, 곧 에서로 표현된 체어리티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주도권을 쥘 것이라는 내용이 그들의 아버지 이삭의 예언을 보면 나옵니다. But that Esau, or the charity represented by Esau, should nevertheless at length have the dominion, appears from the prophetic prediction of their father Isaac: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 하였더라 (창27:40) By thy sword shalt thou live, and shalt serve thy brother; and it shall come to pass, when thou hast the dominion, that thou shalt break his yoke from off thy neck. (Gen. 27:40)

 

또한 같은 건데요, 이방인들의 교회, 혹은 새 교회는 에서로, 유대인들의 교회는 야곱으로 표현됩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형제로 인정해야 한다는 말을 그렇게 자주 듣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의 교회, 혹은 원시 교회에서는 체어리티로 말미암아 모두 서로를 형제라 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도 누가복음에서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들을 형제라 하고 계십니다. (8:21)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신앙의 사람들이요, 말씀을 행하는 사람들은 체어리티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들으면서, 혹은 신앙을 가졌다고 하면서 행함은 없는, 혹은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형제가 아닙니다. 주님이 이런 사람들을 어리석은 사람들에 비유하셨기 때문입니다. (7:24, 26)  Or what is the same, the church of the gentiles, or new church, is represented by Esau, and the Jewish church is represented by Jacob; and this is the reason for its being so often said that the Jews should acknowledge the gentiles as brethren; and in the church of the gentiles, or primitive church, all were called brethren, from charity. Such as hear the Word and do it are likewise called brethren by the Lord (Luke 8:21); those who hear are such as have faith; those who do are such as have charity; but those who hear, or say that they have faith, and do not, or have not charity, are not brethren, for the Lord likens them unto fools (Matt. 7:24, 26).

 

 

28해산할 때에 손이 나오는지라 산파가 이르되 이는 먼저 나온 자라 하고 홍색 실을 가져다가 그 손에 매었더니 29그 손을 도로 들이며 그의 아우가 나오는지라 산파가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터뜨리고 나오느냐 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베레스라 불렀고 30그의 형 곧 손에 홍색 실 있는 자가 뒤에 나오니 그의 이름을 세라라 불렀더라 (창38:28-30)

 

13오른손으로는 에브라임을 이스라엘의 왼손을 향하게 하고 왼손으로는 므낫세를 이스라엘의 오른손을 향하게 하여 이끌어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매 14이스라엘이 오른손을 펴서 차남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왼손을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엇바꾸어 얹었더라 (창48:13-14)

 

내가 애굽인을 격동하여 애굽인을 치리니 그들이 각기 형제를 치며 각기 이웃을 칠 것이요 성읍이 성읍을 치며 나라가 나라를 칠 것이며 (사19:2)

 

또 그들로 피차 충돌하여 상하게 하되 부자 사이에도 그러하게 할 것이라 내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사랑하지 아니하며 아끼지 아니하고 멸하리라 하셨다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13:14)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두로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그 형제의 계약을 기억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로잡은 자를 에돔에 넘겼음이라 (암1: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하시니라 (눅8:21)

 

24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6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마7:2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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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366, 창4: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AC.366-369) -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의 속뜻

 

8절,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And Cain talked to Abel his brother; and it came to pass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hat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r, and slew him.

 

366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는 일종의 시간 간격, 즉 시간이 흘렀음을 말합니다. 가인은 앞서 기술(記述)처럼,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 곧 신앙의 아우를 말하며, 그래서 여기 그는 두 번 아우라 언급되고 있는 것입니다. (field)은 무엇이든지 교리에 속한 것이면 다 입니다.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는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의 불을 꺼트렸음을, 즉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음을, 끝장냈음을 말합니다. Cain spake to Abel” signifies an interval of time. Cain,” as before stated, signifies faith separated from love; and “Abel” charity, the brother of faith, on which account he is here twice called his “brother.” A “field” signifies whatever is of doctrine.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r, and slew him” signifies that separated faith extinguished char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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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365, 창4:7,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AC.361-365) -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의 속뜻

 

7절,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If thou doest well, art thou not exalted? And if thou doest not well, sin lieth at the door; and to thee is his desire, and thou rulest over him.

 

365

세 번째입니다.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는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지내기를 무척 원하지만 그럴 수가 없는 게, 신앙은 오히려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기 때문이며, 그것은 질서에 역행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이 주도권을 쥐려 하는 한, 그런 건 신앙이 아닙니다. 오직 체어리티의 지배하에서만 신앙이 됩니다. 위에서 보여드린 것처럼, 체어리티가 신앙보다 주(, the principal)이기 때문입니다. 체어리티를 불에 비유할 수 있겠는데요, 불은 열과 빛의 본질이지요. 열과 빛이 불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분리 상태에 있는 신앙은 마치 빛은 빛인데 열 없는 빛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빛은 있어도 만물이 무기력하게 죽어가는 겨울철 빛 말입니다. In the third place it is said, “Unto thee is his desire, and thou rulest over him,” by which is signified that charity is desirous to abide with faith, but cannot do so because faith wishes to rule over it, which is contrary to order. So long as faith seeks to have the dominion, it is not faith, and only becomes faith when charity rules; for charity is the principal of faith, as was shown above. Charity may be compared to flame, which is the essential of heat and light, for heat and light are from it; and faith in a state of separation may be compared to light that is without the heat of flame, when indeed there is light, but it is the light of winter in which everything becomes torpid and d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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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364, 창4:7,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AC.361-365) -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의 속뜻

 

7절,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If thou doest well, art thou not exalted? And if thou doest not well, sin lieth at the door; and to thee is his desire, and thou rulest over him.

 

364

두 번째로,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는 만일 네가 선을 행할 마음이 없는 사람이라면 너는 체어리티의 사람이 아니고 대신 악인이라는 것입니다. 누구나 알 수 있는 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가 안으로 들어가고자 준비를 마치고 대기 중인 악을 말한다는 사실입니다. 체어리티가 모두 사라지게 되면, 그때는 오직 무자비함과 증오, 결과적으로는 모든 악만 남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죄를 가리켜 악마(the devil)라고 하지요, 이 악마는 체어리티가 결핍된 사람에게 아주 가까이 와 있는, 지옥과도 같이 끔찍한 그의 동료입니다. 마음 문 앞에 와 있는 이 악마와 그의 동료를 쫓아버리는 유일한 방법은 주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Secondly, it is said, “If thou doest not well, sin lieth at the door,” which signifies, If thou art not well disposed, there is no charity present, but evil. Everybody can see that “sin lying at the door” is evil ready and desirous to enter; for when there is no charity there are unmercifulness and hatred, consequently all evil. Sin in general is called the “devil,” who, that is, his crew of infernals, is ever at hand when man is destitute of charity; and the only means of driving away the devil and his crew from the door of the mind is love to the Lord and toward the neighb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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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363, 창4:7,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AC.361-365) - 낯을 들다의 속뜻, 체어리티가 있다

 

7절,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If thou doest well, art thou not exalted? And if thou doest not well, sin lieth at the door; and to thee is his desire, and thou rulest over him.

 

363

가인’이라 부르는 신앙의 교리의 본성을 본 절 그 부분 설명을 보면 알 수 있는데요, 거기 보면 체어리티는 신앙이 아닌 체어리티가 주(主, the dominion)가 되기 위해서라면 신앙과 조인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가 먼저 언급되는 것입니다. 네가 선을 행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체어리티의 사람일 수 있다는 뜻으로 말이지요. ‘선을 행하다의 속뜻이 기꺼이 선을 행하고자 함이기 때문인데요, 선한 일을 행함은 기꺼이 선한 일을 의도함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고대에는 행위와 의지는 하나였습니다. 어떤 행위를 보면 그 의지를 알 수 있었지요. 그때는 위선이 뭔지도 몰랐습니다. 낯을 들다가 체어리티가 있다임은 얼굴에 대해 이미 드린 말씀을 보시면 분명한데요, 거기 보시면 낯을 들다는 체어리티가 있음을, 그리고 낯을 떨구다는 그 반대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The nature of the doctrine of faith that was called “Cain” is seen from the description of it in this verse, from which it appears that charity was capable of being joined to faith, but so that charity and not faith should have the dominion. On this account it is first said, “If thou doest well art thou not uplifted?” signifying, If thou art well disposed, charity may be present; for to “do well” signifies, in the internal sense, to be well disposed, since doing what is good comes from willing what is good. In ancient times action and will made a one; from the action they saw the will, dissimulation being then unknown. That an “uplifting” signifies that charity is present is evident from what has been already said about the face, that to “lift up the face” is to have charity, and that for the “face to fall” is the contr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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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362, 창4:7,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AC.361-365) - 가인의 속뜻,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한 사람들

 

7절,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If thou doest well, art thou not exalted? And if thou doest not well, sin lieth at the door; and to thee is his desire, and thou rulest over him.

 

362

가인’이라 하는 신앙의 교리를 여기서 설명하고 있는데요,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하면 그 결과, 체어리티에서도 분리됩니다. 체어리티는 사랑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어디든지 교회가 있는 곳이면 이단들이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신앙의 어떤 특별한 신조에 과도한 관심을 기울이다가 그만 그걸 메인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런 게 바로 인간 사고의 본성, 즉 사람은 어떤 것 하나에 과도한 관심을 보이다가 그걸 다른 모든 것보다 우선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며, 이런 경향은 특히 그가 오버한 나머지 그걸 자신의 고유한 발견이라고 주장할 때라든지, 그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 부풀어 올랐을 때 그렇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때부터는 모든 것이 다 그것에 들어맞는 것 같고, 그것을 컨펌하는 것 같아서 그는 결국 그것이 맞다 맹세까지 하게 됩니다. 심지어 그것이 거짓이더라도 말이지요. 바로 이런 식으로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은 신앙을 사랑보다도 더 본질적인 걸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결과적으로 사랑 없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런 삶에서 비롯된 자아와 환상 둘 다에 대한 사랑으로 그들은 어이없게도 그런 컨펌 가운데 있게 된 것입니다. The doctrine of faith called “Cain” is here described, which in consequence of separating faith from love, separated it also from charity, the offspring of love. Wherever there is any church, there arise heresies, because while men are intent on some particular article of faith they make that the main thing; for such is the nature of man’s thought that while intent on some one thing he sets it before any other, especially when his imagination claims it as a discovery of his own, and when the love of self and of the world puff him up. Everything then seems to agree with and confirm it, until at last he will swear that it is so, even if it is false. Just in this way those called “Cain” made faith more essential than love, and as they consequently lived without love, both the love of self and the fantasy thence derived conspired to confirm them in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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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361, 창4:7,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AC.361-365) -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의 속뜻

 

7절,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If thou doest well, art thou not exalted? And if thou doest not well, sin lieth at the door; and to thee is his desire, and thou rulest over him.

 

361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는 만일 네가 선을 행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너는 체어리티의 사람이라는 것이며,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는 만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체어리티의 사람이 아니고 대신 악인이라는 말입니다.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는 체어리티는 너와 함께 있기를 무척 원하지만 그럴 수가 없는 게, 너는 오히려 그것에 대한 지배를 무척 원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If thou doest well, an uplifting” signifies that if thou art well disposed, thou hast charity; “if thou doest not well, sin lieth at the door” signifies that if thou art not well disposed, thou hast no charity, but evil. To thee is his desire, and thou rulest over him” signifies that charity is desirous to be with thee, but cannot because thou desirest to rule over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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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360, 창4: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AC.359-360) -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의 속뜻

 

6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And Jehovah said unto Cain, Why art thou wroth, and why are thy faces fallen?

 

360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가 양심의 소리를 의미한다는 건 앞서 설명한 비슷한 구절(창3:8, AC.219)이 있어 더 이상 컨펌할 필요는 없지 싶습니다. That “Jehovah said unto Cain” means that conscience dictated, needs no confirmation, as a similar passage was explained above.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창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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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359, 창4: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AC.359-360) -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몹시 분하여 함’, ‘안색이 변함의 속뜻

 

6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And Jehovah said unto Cain, Why art thou wroth, and why are thy faces fallen?

 

35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는 양심이 말했음을, 그의 ‘몹시 분하여 함’, ‘안색이 변함’은 앞서와 같이 체어리티가 떠났음, 그리고 내면이 변했음을 의미합니다. Jehovah said unto Cain,” means that conscience dictated; that his “anger was kindled, and that his countenance fell,” signifies as before that charity had departed, and that the interiors were changed.

 

※ ‘dictated’를 NCE 역에서는 ‘spoke’로 번역, 저도 이 번역을 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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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358, 창4: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AC.355-358) - 안색이 변하니의 속뜻

 

5절,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And unto Cain and unto his offering he looked not, and Cain’s anger was kindled exceedingly, and his faces fell.

 

358

안색이 변하니’가 내면이 변했음이라는 것은 ‘얼굴’과 ‘변함’의 상징을 보면 분명합니다. 얼굴은, 고대인들에게는, 내면을 상징했습니다. 내면이 얼굴을 통해서 밖으로 반영되기 때문인데요, 태곳적 사람들은 그 얼굴이 내면과 완전히 일치하는 그런 사람들이었고, 그래서 어떤 사람의 얼굴을 보고 그 사람의 기질이나 마인드를 알 수 있었던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얼굴로는 이런 표정을 하면서 속으로는 다른 거 생각하는 걸 무슨 괴물 같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무슨 척, 무슨 체 하는 것과 속이는 것을 그래서 혐오스럽게 여겼고, 그래서 얼굴은 속, 곧 내면의 상징이었습니다. 체어리티가 얼굴을 통해 빛날 때는 그 얼굴을 위로 들린다 하였고, 그 반대는 아래로 떨군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축복기도문에서 주님을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시는 주님으로 서술하는 것입니다. (6:26; 4:6) 이것은 주님이 사람에게 체어리티(cherity)를 베푸심을 상징합니다. 얼굴을 떨굼의 의미는 예레미야에 보면 이렇습니다. That by the “faces falling” is signified that the interiors were changed,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 “face” and of its “falling.” The face, with the ancients, signified internal things, because internal things shine forth through the face; and in the most ancient times men were such that the face was in perfect accord with the internals, so that from a man’s face everyone could see of what disposition or mind he was. They considered it a monstrous thing to show one thing by the face and think another. Simulation and deceit were then considered detestable, and therefore the things within were signified by the face. When charity shone forth from the face, the face was said to be “lifted up”; and when the contrary occurred, the face was said to “fall”; wherefore it is also predicated of the Lord that he “lifts up his faces upon man,” as in the benediction (Num. 6:26; and in Ps. 4:6), by which is signified that the Lord gives charity to man. What is meant by the “face falling,” appears from Jeremiah: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3:12) I will not make my face to fall toward you, for I am merciful, saith Jehovah. (Jer. 3:12)

 

여호와의 얼굴’은 자비입니다. 그가 누굴 향해 ‘그 얼굴을 드심’은 그가 자비하셔서 그를 향해 체어리티를 베푸심을, 그 반대는 그가 ‘얼굴을 떨구심’, 즉 사람의 안색이 변할 때입니다. The “face of Jehovah” is mercy, and when he “lifts up his face” upon anyone, it signifies that out of mercy he gives him charity; and the reverse when he “makes the face to fall,” that is, when man’s face falls.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민6:26)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시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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