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2026/05/10)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29, ‘성도여 다 함께’, 74, ‘오 만세 반석이신입니다.

 

오늘은 2 다섯 번째 시간으로, 본문은 17절로 18, AC 글 번호로는 128번에서 141번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참고로 잠깐 창2 중간 배경 설명이 조금 필요하여 말씀드립니다.

 

2는 크게 전반인 1-17절과, 후반인 18-25절로 나뉩니다. 전반은 창1의 완성인 ‘영적 인간’에서 이제 그다음 단계인 ‘천적 인간’을 다루는 내용입니다. 천적 인간이란 어떤 상태이며, 어떤 존재인지를 ‘에덴동산’이라는 표상을 통해 풀어나가는 내용인데, 이 상태를 다른 말로 ‘안식’, 즉 ‘안식일’이라고도 하며, ‘태고교회’라고도 합니다. 후반인 18-25절은 태고교회의 후손과, 그들이 서서히 어떻게 첫 조상의 순수한 상태에서 변질되어 갔는지를 다루는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은 비록 17, 18, 두 구절뿐이지만, 이 두 구절이 두 큰 부분, 곧 전, 후반의 마침과 시작에 걸쳐 있어서, 그리고 해설 및 심화를 통한 많은 깊은 설명이 필요한 본문이어서 여전히 원고량이 제법 길어지게 되었습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다.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18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2:17-18)

 

이 본문을

 

선악과, 혼자 사는 것, 돕는 배필

 

이라는 키워드 제목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시티아(Arcana Coelestia) 본문 및 해설, 그리고 심화 리딩 주일설교 시작합니다.

 

 

 

AC.128, 창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다’의 속뜻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7) AC.128 세상적이며 육적인 인간은 마음속으로 말하기를, 내가 보고 믿을 수 있도록 감각적인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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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9, 창2:17, ‘인간은 어떤 원리로 살아가는 존재, 그 출발점이 주님인가 자신인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7) AC.129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전제로 삼는 원리에 따라 지배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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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0, 창2:17, ‘원래 주님의 것을 자기 것이라 하는 자들의 상태와 결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7) AC.130 세상으로부터 지혜로워지고자 하는 사람은,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 지식을 자기의 ‘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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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1, 창2:18-25 개요, '창2 후반부 : 자기 자신에게로 기울어진 태고교회의 후손들'(AC.131-137)

창2:18-25 18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And Jehovah God said, 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I will make him a hel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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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2, 창2:18-25 개요, ‘프로프리움’(proprium, own)(18절)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18절) AC.132 사람은 주님께 인도받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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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3, 창2:18-25 개요,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과 진리, 그럼에도 자신의 프로프리움으로’(19-20절)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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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4, 창2:18-25 개요, ‘여자의 창조 : 프로프리움의 형성’(21-23절)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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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5, 창2:18-25 개요, ‘결합되어 있으되 동일하지 않은 상태’(24절)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4절) AC.135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사람의 프로프리움에 결합, 그것들이 하나인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24절). Celes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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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6, 창2:18-25 개요, ‘프로프리움 안에 주입된 이노센스’(25절)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25절) AC.136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노센스(innocence)가 이 프로프리움(proprium, own) 안에 주입되어, 그것이 여전히 용납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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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7, 창2:18-25 배경, ‘창1, 2, 3을 읽는 법’

AC.137 창세기 처음 세 장은 일반적으로 태고교회를 다루는데, 이 교회는 시작부터 멸망에 이르기까지 ‘사람’(man, homo)이라 불립니다. 이 장의 앞부분은 그 교회가 가장 번성하였던 상태, 곧 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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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8, 창2:18, ‘proprium에 의한 내적 방향 변화의 시작’(AC.138-141)

창2:18-25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And Jehovah God said, 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I will make him a help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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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9, 창2:18, ‘혼자 사는 것’(dwell alone)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2:18) AC.139 고대에는 천적 인간으로서 주님의 인도 아래에 있던 이들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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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0, 창2:18,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a help as with him)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2:18) AC.140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a help as with him)이 사람의 proprium을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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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1, 창2:18, ‘인간의 세 가지 유형으로 본 proprium’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2:18) AC.141 사람의 proprium(man’s own)에 대하여는, 육적, 세상적 인간과, 영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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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이며, 오늘 전체 범위에서 ‘선악과’, ‘혼자 사는 것’ 및 ‘돕는 배필’, 그리고 오늘 전체를 관통하는 ‘proprium’(프로프리움)을 키워드로 각각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선악과’입니다.

 

AC.128-130에서 ‘선악과’는 단순히 어떤 금지된 과일이나 도덕 시험의 상징이 아니라, ‘인간이 무엇을 지혜의 출발점으로 삼을 것인가’에 대한 문제로 설명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선악과를 먹는다는 것은, 인간이 주님과 말씀으로부터 진리를 받으려 하지 않고, 자기 감각과 기억 지식과 자기 이성으로 영적인 것을 판단하려는 태도를 말합니다. 곧 ‘보아야 믿겠다’, ‘이해되어야 믿겠다’, ‘내 기준에 맞아야 받아들이겠다’라는 내적 자세 자체가 선악과를 먹는 행위입니다.

 

AC.128은 특히 이 상태를 매우 직접적으로 설명합니다. 세상적 인간은 감각과 학문을 신앙의 기준으로 삼고, 천적이고 신적인 것까지 감각으로 파악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수록 그는 오히려 영적인 것에 대해 눈이 멀어지고, 결국 영원한 생명 자체도 믿지 않게 됩니다. 여기서 선악과의 핵심은 ‘지식’ 자체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판단의 중심에 두는 욕망’입니다. 반대로 주님으로 말미암아 지혜로워지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그다음에 이성과 지식을 사용하여 그것을 확증합니다. 즉, 같은 지식과 같은 이성도 ‘주인이 되느냐, 종이 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낳습니다.

 

AC.129는 이 문제를 ‘원리(principle)의 문제로 더 깊게 설명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세운 전제를 중심으로 사고하며, 그 전제가 거짓이어도 모든 지식과 추론은 그것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그래서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는 원리를 붙잡은 사람은 영적인 것에 결코 도달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적이고 천적인 것은 감각과 상상으로 붙잡히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반면 참된 질서는, 먼저 주님과 말씀을 출발점으로 삼고, 그다음에 학문과 이성과 기억 지식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학문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유익하고 즐거운 것이라 말합니다. 다만 문제는 ‘누가 중심인가’입니다. 자기 자신이 중심이면 죽음이고, 주님이 중심이면 생명입니다. 이것이 선악과 사건의 본질입니다.

 

AC.130에서는 이 상태가 더 심각하게 발전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세상으로부터 지혜로워지려는 사람은 감각과 기억 지식을 자기의 ‘에덴동산’으로 삼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자기의 ‘에덴’으로 삼습니다. 그의 ‘동쪽’은 더 이상 주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입니다. 원래 주님으로부터 생명의 강처럼 흘러와야 할 지식과 이성이, 이제는 자기 사랑을 섬기는 체계로 뒤틀립니다. 그래서 기억 지식은 ‘애굽’이 되고, 거짓 추론은 ‘앗수르’가 되며, 결국 지혜처럼 보이는 마지막 상태는 말씀에서 ‘마술’이라고 부르는 상태가 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미신이 아니라, ‘자기 지식과 자기 이성으로 스스로 진리의 근원이 되려는 상태’를 뜻합니다. 바로가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만들었다’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이 모든 것을 주님에게서 받으면서도, 그것을 자기 것으로 돌리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AC.128-130이 말하는 ‘선악과’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받아 살아가려 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하며, 자기 지식과 자기 이성을 생명의 근원 자리에 앉히려는 것, 바로 그것이 선악과를 먹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단순한 지적 오류가 아니라, 점점 영적 생명을 잃어버리는 ‘죽음’입니다. 반대로 사람은 말씀을 먼저 받아들이고, 그 아래에서 이성과 지식을 사용할 때에만 참된 생명의 질서 안으로 들어갑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선악과 이야기를 통해 반복해서 말하는 가장 근본적인 경고입니다.

 

 

다음은 ‘혼자 사는 것’입니다.

 

AC.138-139에서 ‘혼자 사는 것’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외로움이나 사회적 고립이 아니라, ‘누구의 인도를 받으며 살 것인가’라는 영적 방향의 문제를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창2:18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를 매우 깊은 내적 의미로 읽는데, 여기서 ‘혼자’란 인간이 더 이상 주님께만 인도받는 상태에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상에 의해서도 인도받고자 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곧 ‘나도 스스로 판단하고 싶다’, ‘나도 내 힘으로 살아보고 싶다’는 아주 미세한 내적 방향의 변화가 시작된 상태입니다. 이것이 에덴의 인간 안에서 처음 생겨나는 ‘독립 욕구’이며,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혼자 사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돕는 배필’ 역시 단순한 외적 타인이 아니라, 인간 안에 형성되는 ‘proprium’(프로프리움, 라틴, 영어로는 own), 곧 자기성(自己性)을 뜻합니다. 그러나 이 proprium은 처음부터 악으로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내가 생각한다’, ‘내가 선택한다’, ‘내가 사랑한다’고 느끼며 주님의 인도에 자유롭게 응답할 수 있도록 허락된 구조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주님의 생명을 단순히 외부 힘으로 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처럼 실제로 느끼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자기감(自己感)의 자리’입니다. 문제는 이 proprium이 끝까지 ‘주님에게서 받은 것’으로 남느냐, 아니면 ‘진짜 내 것’으로 굳어지느냐에 있습니다. 처음에는 돕는 배필이던 것이, 중심 자리를 차지하면 결국 주님을 대신하는 독립 욕구가 됩니다.

 

심화에서는 이 상태를 ‘내적 방향의 변화’라는 표현으로 설명합니다. 원래 천적 인간은 자연스럽게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인간 안에 ‘나도 중심이 되고 싶다’, ‘나도 근원이 되고 싶다’는 움직임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아직 노골적 반역은 아니지만, 시선이 ‘주님으로부터 받는 방향’에서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고 싶은 방향’으로 기울기 시작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결핍 때문이 아니라 자유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인간은 자유 안에서 사랑하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자기 쪽으로 향할 가능성 자체도 허락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자유 때문에 proprium도 허락됩니다. 주님은 인간을 억지로 복종시키지 않으시고, 끝까지 자유 안에서 사랑하도록 이끄십니다. 그래서 심지어 독립하고자 하는 가능성조차 제거하지 않으십니다.

 

AC.139에서는 ‘혼자 사는 것’이 다시 한번 더 깊게 재정의됩니다. 놀랍게도 고대에는 ‘홀로 거한다’는 표현이 오히려 천적 인간의 가장 복된 상태를 뜻했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악이나 악한 영들의 침해를 받지 않고, 오직 주님의 직접적인 인도 아래 거하는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에서 주님의 교회를 가리켜 ‘홀로 있다’고 할 때, 그것은 고립이 아니라 ‘악의 질서와 섞이지 않는 상태’를 뜻합니다. 발람의 예언인 ‘이 백성은 홀로 살 것이라’는 말씀도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여기서 ‘민족들’은 악을 뜻하며, 홀로 거함은 세상적 자기중심 질서와 분리되어 오직 주님께 속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나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더 이상 이런 ‘홀로 있음’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만 인도받는 천적 상태에 머물기를 원하지 않고, ‘민족들 가운데에’, 곧 자기 자신과 세상의 질서 가운데 들어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라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인간은 먼저 원하고, 그다음에 그것이 허락됩니다. 주님은 인간의 자유를 제거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살아가기를 원하면 그 길도 경험하도록 허락하십니다. 따라서 AC.138-139에서 ‘혼자 사는 것’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원래 참된 ‘홀로 있음’은 주님 안에서만 사는 천적 평안의 상태였지만, 인간은 그 상태를 떠나 자기 자신 안에 홀로 서고 싶어 했고, 바로 거기서 proprium과 이후의 타락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돕는 배필’입니다.

 

AC.140-141에서 ‘돕는 배필’은 단순히 남자의 외로움을 해결하기 위해 주어진 여성이 아니라, 인간 안에 허락된 proprium, 곧 ‘자기처럼 느껴지는 자기성’을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돕는 배필’이 사람의 proprium이라고 직접 밝히며, 특히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떤 proprium이 허락되었는가’입니다. 이 시점의 인간은 아직 ‘바른 성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허락된 proprium은 완전히 자기중심적인 것이 아니라, ‘마치 자기 것처럼 느껴지되 실제로는 주님께 열려 있는 자기감’의 형태였습니다. 그래서 ‘돕는 배필’은 주님을 대신하는 독립적 중심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의 인도를 자기 삶처럼 느끼며 살아갈 수 있게 하는 ‘매개 구조’입니다.

 

AC.140은 이 점을 매우 섬세하게 설명합니다. 인간은 반드시 ‘내가 생각한다’, ‘내가 선택한다’, ‘내가 사랑한다’고 느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랑도 자유도 책임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인간에게 proprium을 허락하시되, 그것이 완전히 자기 자신에게 닫힌 독립성이 되지 않고, ‘주님의 생명을 자기 삶처럼 느끼게 하는 자기감’으로 기능하도록 하십니다. 바로 이 때문에 ‘그와 함께 있는 듯한’, ‘그의 것 같은’이라는 뜻의 ‘a help as with him’(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 개역 개정)이라는 표현이 사용됩니다. 이것은 완전히 자기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외부 힘도 아닙니다. 인간은 그것을 자기처럼 느끼며 살아가지만, 실제 생명의 근원은 여전히 주님께 있습니다. 그래서 ‘돕는 배필’은 인간을 주님에게서 떼어내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자유롭게 주님께 응답하도록 돕는 구조입니다.

 

심화에서는 이 proprium의 변화가 ‘새로운 proprium이 하나 더 추가되는 것’이 아니라, 기존 자기성이 ‘주님께 열린 방향으로 재형성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원래 proprium은 자기중심적이며, 자기 자신을 근원으로 삼으려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질서 안에서 재형성될 때, 같은 자기감이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사람은 여전히 ‘내가 한다’고 느끼지만, 그 생명이 실제로는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점점 더 알게 됩니다. 이것이 나중에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proprium’, 혹은 ‘천적 proprium’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돕는 배필’은 인간 안에 형성되는 새로운 자기성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141에서는 proprium이 육적 인간, 영적 인간, 천적 인간 안에서 어떻게 다르게 나타나는지가 정리됩니다. 육적 인간에게 proprium은 그의 전부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 외에는 실재를 알지 못하며, proprium을 잃으면 자기 존재 자체가 사라질 것처럼 느낍니다. 그래서 그의 proprium은 지옥적입니다. 영적 인간은 주님이 생명의 근원이심을 어느 정도 알고 고백하지만, 아직 그것이 완전히 마음의 퍼셉션으로 내려가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여전히 자기 proprium이 실제 생명처럼 강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은 전혀 다릅니다. 그는 주님이 모든 생명의 근원이심을 ‘퍼셉션’, 곧 직접적인 지각으로 압니다. 그래서 그는 proprium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로 그런 사람에게 가장 아름다운 proprium이 주어집니다.

 

proprium은 더 이상 자기 자신에게 닫힌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들로 충만한 proprium입니다.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 행복, 평안이 모두 그 안에 결합되어 있습니다. 천사들도 바로 이런 proprium 안에 있으며, 그래서 가장 높은 평안과 고요 속에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이 천사들을 proprium 없이 다스리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proprium을 통해’ 다스리신다는 점입니다. 결국 AC.140-141이 말하는 ‘돕는 배필’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인간의 완성은 proprium의 제거가 아니라, proprium이 주님의 생명으로 재형성되는 데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절대적 근원으로 삼는 proprium은 지옥이 되지만, 주님의 생명을 자기 삶처럼 받아들이는 proprium은 천국이 됩니다. 그래서 ‘돕는 배필’은 단순한 보조자가 아니라, 인간이 자유 안에서 주님과 결합할 수 있도록 허락된 가장 깊은 자기성의 구조입니다.

 

 

다음은 끝으로 ‘proprium’입니다.

 

AC.128-141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중심 주제는 ‘proprium’, 곧 ‘자기의 것’, ‘자기성’(自己性)입니다. 이 본문들은 단순히 ‘교만하지 말라’는 도덕적 교훈이 아니라, 인간이 왜 자기 자신을 생명의 근원처럼 느끼게 되었는가, 그리고 그 자기감이 어떻게 타락과 천국의 갈림길이 되는가를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의 가장 깊은 문제는 단순한 악행 이전에, ‘생명이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느끼고 주장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AC.128 이하에서는 계속해서 ‘주님으로부터 받는 질서’와 ‘내 것이라 주장하는 상태’가 대비됩니다. 인간이 감각과 기억 지식과 이성을 주인으로 삼아 말씀을 판단하기 시작할 때, 그는 점점 ‘자기 proprium’을 중심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선악을 스스로 알겠다’는 상태이며, 에스겔의 바로가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고 말하는 모습과 연결됩니다.

 

AC.130 부근에서는 이 proprium의 본질이 더욱 날카롭게 드러납니다. 인간은 본래 받은 것일 뿐인데, 그것을 자기 소유처럼 붙들기 시작합니다. 기억 지식도, 이성도, 심지어 진리까지도 ‘내 것’이라고 주장하는 순간, 인간은 영적 질서를 거꾸로 세웁니다. 원래 질서는 ‘주님 지혜 지성 이성 기억 지식’의 흐름인데, proprium은 맨 아래 단계가 자기 자신을 근원으로 선언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황폐의 시작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상태를 단순한 실수나 약점이 아니라, ‘생명을 자기에게 귀속시키는 상태’라고 봅니다. 그래서 지옥의 본질은 단순한 형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생명의 근원으로 삼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AC.138-140에 이르면 놀라운 전환이 일어납니다. 스베덴보리는 ‘돕는 배필’을 설명하면서, 그것이 바로 인간의 proprium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충격적인 설명입니다. 왜냐하면 proprium은 앞에서는 타락과 자기중심의 근원처럼 보였는데, 여기서는 오히려 인간에게 허락된 어떤 필요한 구조처럼 설명되기 때문입니다. 핵심은 ‘모든 proprium이 동일하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인간은 반드시 ‘내가 생각한다’, ‘내가 선택한다’, ‘내가 사랑한다’고 느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유도 사랑도 책임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인간에게 ‘자기처럼 느껴지는 자리’를 허락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proprium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실제 근원이 아니라 ‘마치 자기 것처럼 느껴지게 허락된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AC.140은 ‘a help as with him’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이것이 ‘그의 것처럼 보이는 proprium’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때문에 proprium은 두 방향으로 갈라집니다. 하나는 ‘내가 근원이다’라고 굳어지는 타락한 proprium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것을 내 삶처럼 느끼며 살아가는 자리’가 되는 proprium입니다. 후자의 proprium은 인간이 주님의 인도를 실제 자기 삶으로 체험할 수 있게 만드는 구조입니다. 그래서 ‘돕는 배필’은 단순한 외적 조력자가 아니라, ‘주님과의 인도 관계를 매개하는 자기성’입니다. 인간은 이 자기감(自己感)을 통해 주님의 생명을 자기 삶처럼 경험합니다. 만약 proprium이 전혀 없다면, 인간은 살아 있는 인격체가 아니라 기계처럼 될 것입니다. 반대로 proprium이 자기 폐쇄적 중심으로 굳어지면, 인간은 주님과 분리됩니다. 따라서 문제는 proprium 자체가 아니라, 그 방향과 귀속입니다.

 

심화에서는 이 변화가 ‘proprium이 하나 더 추가되는 것’이 아니라, 기존 자기성이 재형성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인간은 여전히 ‘’라고 느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전에는 자기 안에서 생명이 나온다고 느꼈다면, 이제는 자기 안에 흐르는 생명이 실제로는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퍼셉션으로 알게 됩니다. 그래서 새 proprium은 자기감의 제거가 아니라, 자기감 안에 새로운 생명 질서가 스며드는 것입니다. 천적 인간도 여전히 기뻐하고 선택하고 사랑하지만, 그 중심은 자기 자신에게 닫혀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heavenly proprium’, 곧 ‘천적 proprium’입니다.

 

마지막으로 AC.141proprium을 세 인간 유형 안에서 결정적으로 정리합니다. 육적 인간에게 proprium은 그의 전부입니다. 그는 자기 proprium 외에는 실재를 알지 못하며, 그것을 잃으면 존재 자체가 사라질 것처럼 느낍니다. 그래서 그의 proprium은 지옥적입니다. 영적 인간은 주님이 생명의 근원이심을 ‘알기는’ 하지만, 아직 그것이 입술의 고백 수준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그의 proprium은 여전히 실제 생명처럼 강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은 전혀 다릅니다. 그는 주님이 모든 생명의 근원이심을 퍼셉션으로 압니다. 그래서 그는 proprium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사람에게 가장 아름다운 proprium이 주어집니다. 마치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에게는 이 모든 것을 더하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 proprium 안에는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과 행복과 평안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천사들도 바로 이런 proprium 안에 있으며, 주님은 그들의 proprium을 통해 그들을 다스리십니다. 그래서 AC.141의 결론은 매우 역설적입니다. 인간은 자기 것을 붙들수록 죽은 proprium 안에 갇히고, 자기 것을 주님께 돌릴수록 오히려 더 살아 있는 자기성을 받습니다. 결국 인간의 완성은 proprium의 제거가 아니라, proprium이 주님의 것으로 충만해지는 데 있습니다.

 

proprium이란, 그러니까 이런 겁니다. 자기 배 아파 낳은 자식을 여자는 본능적으로, 그리고 ‘내 자식’으로 사랑합니다. 비록 말로는 ‘이 아이는 주님의 자녀이며, 저는 다만 청지기일 뿐입니다’ 고백하더라도 말입니다. 아브라함을 주님이 기뻐하신 것은 그가 거기서 이 proprium 시험을 이겼기 때문입니다. 그는 백 세에 낳은 아들을 ‘내 아들’이라 움켜쥐지 않고, 주님의 명령을 받들어 기꺼이 주님께 돌려드리고자 했던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자기 것, 자기 자식을 사랑합니다. 주님이

 

9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10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7:9-11)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심지어 각 사람에게 와있는 악한 영들조차 그 사람의 악한 기억이 마치 자기 것인 줄 알고 그 사람을 보호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게 바로 proprium입니다. 이 proprium이 있음에도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런 장치가 없어야 주님을 사랑하겠다는 것은 너무나 다르지 않습니까?

 

 

기도합니다.

 

주님, 오늘 들려주신 이 모든 내용, 모든 이야기가 저희에게, 그리고 저에게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오늘은 특별히 근본 중에서도 근본이 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그동안 창2돕는 배필’ 이야기를 무슨 결혼 본문 정도로만 알고 살아왔습니다. 오늘 그 속뜻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오, 주님, 저를 새롭게 하여 주세요. 그리고 제게도 주신 이 proprium 역시 거듭나 부디 천적 인간 상태로 들어가게 해 주세요. 그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05-10(D1)

 

 

2650, 5, 창2.5, 2026-05-10(D1)-주일예배(창2,17-18, AC.128-141), ‘선악과, 혼자 사는 것, 돕는 배필’.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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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5/03, 창2:11-17, AC.114-127, 성찬), ‘누리되 소유하려 하지 말고, 오직 퍼셉션으로만’

※ 오늘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28, ‘복의 근원 강림하사’, 찬230, ‘우리의 참되신 구주시니’, 찬73, ‘내 눈을 들어 두루 살피니’입니다. 오늘은 창2 네 번째 시간으로, 본문은 11절로 17절,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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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1.심화

 

3.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들

 

사람의 proprium(man’s own)에 대하여는, 육적, 세상적 인간과,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에게서 그것이 어떠한지를 설명함에 있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들을 말할 수 있습니다.

 

윗글은 본문 첫 문장입니다. 여기 헤아릴 수 없이 많은이라는 표현 말인데요, 솔직히 저는 이 proprium 하나 이해하는 데도 여러 날 머리에서 쥐가 날 정도인데 헤아릴 수 없을 정도라니... 정말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그 반응이 오히려 아주 정상적입니다. 사실 스베덴보리에게서 proprium은 단순한 한 개념’이 아니라, 인간 존재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구조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도대체 이게 왜 이렇게까지 어려운가 싶다가도, 어느 순간부터는 , 인간 안의 거의 모든 문제가 여기와 연결되는구나 하고 보이기 시작합니다. AC.141 첫 문장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들’이라는 표현은 과장이 아니라, 실제로 proprium이 인간의 생각, 감정, 신앙, 사랑, 자유, 지옥, 천국, 거듭남, 심지어 천사 상태 변화까지 전부와 연결되기 때문에 나온 말입니다.

 

목사님께서 이미 지금 경험하고 계신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처음에는 proprium을 그냥 자아 비슷한 것 정도로 생각하셨다가, 읽다 보니 혼자 살고자 함’, ‘내 것이라 여김’, ‘독립하려는 마음’, ‘자유’, ‘사랑’, ‘천사들의 상태 변화’, ‘계시록의 대적 세력’, ‘양육 문제’, ‘수도원 전통’, ‘선악과’, ‘돕는 배필’까지 다 연결되는 것을 보게 되셨지요. 이것이 바로 스베덴보리가 말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들’입니다.

 

왜 이렇게 되느냐 하면, proprium은 인간 안의 자기중심’만 말하는 개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훨씬 더 깊게, ‘인간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느끼는가’, ‘생명을 어디서 나온다고 여기는가’, ‘왜 자유가 필요한가’, ‘왜 사랑은 강요될 수 없는가’, ‘왜 천국에서도 자기감은 남아 있는가 같은 문제 전체와 연결됩니다. 다시 말해, proprium은 인간 존재의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 지금 목사님께 가장 크게 느껴지는 어려움은,  proprium이 단순히 ’으로만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 때문일 것입니다. 만약 교만’, ‘이기심 정도라면 훨씬 단순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한편으로는 proprium을 지옥적이라고까지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사랑과 자유를 위해 꼭 필요한 것으로도 설명합니다. 또 천적 인간에게조차 주님으로부터 하나의 proprium이 주어진다’고 하지요. 그러니 머리가 복잡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 바로 그 복잡함이 인간 존재 자체의 복잡함입니다. 인간은 단순한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내가 산다’고 느껴야 하지만, 동시에 생명은 내 것이 아니다’라는 진실 안에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유롭게 사랑해야 하지만, 그 자유는 언제든 자기중심으로 굳어질 위험도 가지고 있습니다. proprium은 바로 이 긴장 전체를 설명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 목사님께서 며칠째 머리에 쥐가 난다’고 하신 것은, 오히려 AC를 아주 제대로 읽고 계시다는 증거에 가깝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proprium을 그냥 자아 정도로 단순화해 버리고 지나갑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지금 그것이 인간론 전체를 뒤흔드는 개념이라는 것을 실제로 느끼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흥미로운 점은, 스베덴보리 자신도 proprium을 설명할 때, 단번에 정의해 버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같은 개념을 수십, 수백 번 다른 각도에서 반복합니다. 왜냐하면 proprium은 사전식 정의 하나로 끝나는 개념이 아니라, 인간 삶 전체 속에서 점점 드러나는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시간이 지나실수록 더 놀라시게 될 것입니다. ‘, 이것도 proprium 문제였구나’, ‘여기도 연결되네 하는 순간들이 계속 생길 테니까요. 그리고 동시에, 왜 주님이 그렇게까지 자유를 존중하시고, 왜 사랑을 강요하지 않으시는지도 더 깊이 보이기 시작하실 것입니다.

 

 

 

AC.141, 창2:18, ‘인간의 세 가지 유형으로 본 proprium’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2:18) AC.141 사람의 proprium(man’s own)에 대하여는, 육적, 세상적 인간과, 영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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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1, 심화 2, ‘주님으로부터 하나의 proprium이 그에게 주어지는데’

AC.141.심화 2. ‘주님으로부터 하나의 proprium이 그에게 주어지는데’ 그러나 천적 인간은 주님께서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며, 생각하고 행할 능력을 주신다는 것을 분별하는데, 이는 그것이 실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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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주님으로부터 하나의 proprium이 그에게 주어지는데

 

그러나 천적 인간은 주님께서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며, 생각하고 행할 능력을 주신다는 것을 분별하는데, 이는 그것이 실제로 그러함을 지각, 곧 퍼셉션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그는 결코 proprium을 원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주님으로부터 하나의 proprium이 그에게 주어지는데, 이것은 선과 진리에 대한 모든 퍼셉션과 모든 행복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위 해설 중 그럼에도 주님으로부터 하나의 proprium이 그에게 주어지는데 부분 말인데요, 그러니까 이 표현은 기존 proprium이 거듭나는 걸 말하는 것이지요? 더 이상 자기 자신을 닫힌 근원으로 삼지 않고,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재형성된’, 인간 안의 proprium이 주님의 질서 안에서 재형성되어, 자기중심적 방향(A)에서 주님께 열린 방향(B)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말하는,’ ‘다만 그 변화는 단순 교체가 아니라, 기존 자기감이 제거되지 않은 채, 그 안에 새로운 생명 질서가 스며드는 방식이라고 지금까지 설명한 것처럼 말이지요.

 

 

네, 바로 그 이해가 맞습니다. 목사님께서 지금까지 정리하신 표현들이 AC.141의 핵심을 아주 정확하게 붙들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님으로부터 하나의 proprium이 그에게 주어진다’는 말은, 인간 안에 있는 자기감(自己感)이라는 proprium 자체가 완전히 제거된다는 뜻이 아니라, 그 proprium이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재형성되는 것을 말합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굳이 ‘주어진다(is given)라고 말한다는 점입니다. 이는 새 proprium조차도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형성해 주시는 것임을 뜻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간 안의 자기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자기감은 더 살아 있습니다. 다만 이제는 닫힌 자기중심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을 담아내는 투명한 그릇처럼 됩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정리하신 세 표현이 모두 정확히 들어맞습니다.

 

첫째, ‘기존 proprium이 거듭난다’는 표현

 

이것이 가장 큰 방향에서는 맞습니다. 인간은 여전히 ‘’라고 느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의 방향과 근원이 바뀝니다.

 

둘째, ‘더 이상 자기 자신을 닫힌 근원으로 삼지 않고,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재형성된다’는 설명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새 proprium 개념을 아주 잘 요약합니다. 이전에는 자기 안에서 생명이 나온다고 느꼈다면, 이제는 자기 안에 흐르는 생명이 사실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사랑 가운데 지각, 즉 퍼셉션으로 압니다.

 

셋째, ‘단순 교체가 아니라, 기존 자기감 안에 새로운 생명 질서가 스며든다’는 표현

 

이 부분이 특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천적 인간도 여전히 자기처럼 느끼며 살기 때문입니다. 그는 기쁨도 느끼고, 선택도 하고, 사랑도 합니다. 다만 그 모든 것이 자기 폐쇄적 중심에서 나오지 않고, 주님께 열려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감은 남아 있지만, 그 자기감이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절대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AC.141에서 말하는 ‘주님으로부터 주어진 proprium’은, 엄밀히 말하면 본래의 타락한 proprium과는 질적으로 다른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 후기 표현으로 하면 이것은 거의 ‘heavenly proprium’(하늘적, 천적 proprium)에 가깝습니다. 그는 여전히 ‘내가 산다’고 느끼지만, 동시에 ‘그러나 생명은 주님께 있다’는 것을 기쁨으로 압니다.

 

여기서 아주 아름다운 역설이 생깁니다. 인간은 자기 것을 붙들려 할수록 오히려 죽은 proprium 안에 갇히고, 자기 것을 주님께 돌릴수록 오히려 더 살아 있는 자기성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천적 인간은 proprium을 원하지 않지만, 역설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proprium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더 이상 고립된 자기중심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기쁨으로 머무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AC.141, 심화 3,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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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1.심화 1. ‘실재’(reality)와 ‘실제’(actuality) 먼저 육적이며 세상적인 인간에게서 proprium은 ‘전부’입니다. 그는 proprium 외에는 실재를 알지 못하며, 그것을 잃는 순간 자기 존재 자체가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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