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213.심화

 

6. ‘16:15

 

보라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16:15) Blessed is he who watcheth, and keepeth his garments, lest he walk naked and they see his shame (Rev. 16:15).

 

 

이 구절을 AC.213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garments)은 진리와 선을, ‘벌거벗음(nakedness)은 그것들을 상실한 상태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특히 이 구절은 벌거벗음’이 단순히 결핍의 상태를 뜻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영적 경계와 깨어 있음의 문제와도 연결된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요한계시록의 이 말씀은 주님의 재림과 영적 심판을 다루는 문맥 속에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여기서 깨어 있으라 하시며, 동시에 자기 옷을 지키라 하십니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의 상응에 따르면, 사람이 깨어 있다는 것은 단순히 잠을 자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경계하며, 진리 안에 머무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옷을 지킨다’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진리와 선을 보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거듭남의 과정에서 많은 진리를 배우고 깨닫지만, 그것을 삶 속에서 지키지 않으면 점차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영적으로 벌거벗게 됩니다. 즉 선과 진리의 보호를 잃고 자신의 own이 드러나게 됩니다.

 

AC.213의 문맥에서 보면, 이것은 창3의 아담과 하와와 직접 연결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벌거벗은 줄 알게 되었고, 급히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을 가렸습니다. 그러나 계16:15에서는 인간이 만든 무화과 나뭇잎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을 지키는 것이 강조됩니다. 즉 영적 안전은 자기 변명이나 자기 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진리 안에 머무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여기서 부끄러움(shame)이라는 표현은 AC.213의 핵심 개념과 일치합니다. 2:25에서는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순진무구함 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타락 이후에는 벌거벗음이 곧 수치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 악에 대한 의식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란, 자신의 악을 감추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 안에서 보호받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더 깊이 보면, 이 구절은 모든 신앙인의 평생 과제를 말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깨어 있으라’, ‘옷을 지키라’는 말씀은 단순히 마지막 날을 준비하라는 뜻이 아니라, 매일 자신의 사랑과 생각을 살피며, 주님께 받은 진리를 잃지 말라는 권면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own은 끊임없이 진리의 옷을 벗기려 하고, 자신을 중심에 두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AC.213에서 계16:15를 인용하는 이유는, ‘벌거벗음’이 영적 수치와 결핍을 의미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동시에, 그 상태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깨어 있음’과 옷을 지킴’, 곧 주님으로부터 받은 진리와 선 안에 머무는 삶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음을 깨달은 장면이 인간 타락의 시작을 보여 준다면, 요한계시록의 이 말씀은 그 반대로 영적 경계와 보존의 길을 보여 주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213, 심화 5, ‘계3:18’

AC.213.심화 5. ‘계3: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 (계3:18) I counsel thee to buy of me white raiment that thou mayest be clothed, and that the shame of thy naked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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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3.심화

 

5. ‘3: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 (3:18) I counsel thee to buy of me white raiment that thou mayest be clothed, and that the shame of thy nakedness do not appear (Rev. 3:18).

 

 

이 구절을 AC.213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벌거벗음(nakedness)이 선과 진리를 상실한 영적 상태를 의미하고, 반대로 (raiment)은 그 상태를 덮어 주는 진리와 선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 구절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어진 말씀입니다. 그들은 스스로는 나는 부자라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주님께서는 오히려 그들이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외적으로는 풍요롭고 종교적으로도 부족함이 없어 보였지만, 내적으로는 진리와 선이 결핍된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흰옷을 사서 입으라’고 권하십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에 따르면 ’은 진리를 의미합니다. 사람이 육체를 옷으로 가리듯, 영혼은 진리로 덮여 보호받습니다. 특히 흰옷’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순수한 진리를 뜻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문자 그대로 옷을 사라는 뜻이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진리를 받아들이라는 초청입니다.

 

AC.213의 문맥에서 보면 이것은 창3:7과 직접 연결됩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이 벌거벗은 줄 알고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을 가리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이 만든 덮개였습니다. 반면 계3:18에서는 주님께서 친히 내게서 흰옷을 사서 입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인간이 스스로 만든 변명과 자기 의로는 벌거벗음을 덮을 수 없고, 주님께로부터 오는 진리만이 그것을 덮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특히 여기서 벌거벗은 수치(shame of thy nakedness)라는 표현은 AC.213의 핵심을 잘 보여 줍니다. 2:25에서는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순진무구함 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창3 이후에는 벌거벗음이 수치가 되었습니다. 선과 진리의 보호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은 바로 그 상태를 가리켜 벌거벗은 수치’라고 부릅니다.

 

또한 이 구절은 스베덴보리의 구원관을 잘 보여 줍니다. 주님은 단순히 너는 벌거벗었으니 부끄러운 존재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내게서 흰옷을 사서 입으라’고 하십니다. 즉 주님은 인간의 결핍을 폭로하시기만 하는 분이 아니라, 동시에 그것을 채우시는 분입니다. 벌거벗음을 드러내시면서도 그 벌거벗음을 덮을 옷도 함께 주십니다.

 

그래서 AC.213에서 계3:18을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벌거벗음’이 영적 수치와 결핍을 의미하고, ‘흰옷’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와 선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창세기에서 인간은 벌거벗음을 깨닫고 스스로 무화과 나뭇잎을 엮었지만, 요한계시록에서는 주님께서 친히 내게서 흰옷을 사서 입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어쩌면 이 두 본문 사이에는 인간의 모든 종교적 노력과, 그 노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주님의 은혜가 함께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AC.213, 심화 6, ‘계16:15’

AC.213.심화 6. ‘계16:15’ 보라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계16:15) Blessed is he who watcheth, and keepeth his garments, 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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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3, 심화 4, ‘겔23:29’

AC.213.심화 4. ‘겔23:29’ 그들이 너를 벌거벗은 몸으로 두어서 네 벗은 몸을 드러낼 것이라 (겔23:29) They shall leave her naked and bare, and the nakedness shall be uncovered (Ezek. 23:29). 이 구절을 AC.213에서 인용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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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3.심화

 

4. ‘23:29

 

그들이 너를 벌거벗은 몸으로 두어서 네 벗은 몸을 드러낼 것이라 (23:29) They shall leave her naked and bare, and the nakedness shall be uncovered (Ezek. 23:29).

 

 

이 구절을 AC.213에서 인용하는 이유 역시, 말씀에서 벌거벗음(nakedness)이 단순한 육체적 상태가 아니라 선과 진리를 상실한 영적 상태, 곧 타락한 교회의 수치와 악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에스겔 23장은 오홀라와 오홀리바라는 두 여인을 통해 이스라엘과 유다의 영적 음행, 곧 진리를 버리고 거짓과 우상을 받아들인 상태를 묘사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벌거벗음이 드러난다’는 것은 단순히 신체가 노출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이 감추고 있던 영적 실상이 드러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순진무구함 가운데 있는 사람은 벌거벗었어도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2:25가 바로 그런 상태입니다. 그러나 순진무구함을 잃고 악과 거짓 가운데 들어가면 벌거벗음은 곧 수치가 됩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감추고 싶은 것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3:7에서는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을 가리게 되고, 에스겔 23장에서는 그 감추어진 상태가 폭로되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특히 벌거벗은 몸으로 두어서 네 벗은 몸을 드러낼 것이라’는 표현은, 인간이 외적으로는 경건과 신앙을 가장하고 있을 수 있으나, 결국 내면의 사랑과 의도가 드러난다는 의미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영계에서는 사람의 내면이 감추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여러 저작에서 설명하듯, 사후에는 각 사람이 실제로 사랑한 것이 겉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 점에서 에스겔 23장의 벌거벗음은 단순히 선과 진리가 없는 상태’만이 아니라, ‘그 상태가 드러나는 것’을 강조합니다. 악과 거짓이 숨겨져 있을 때는 사람 스스로도 자신을 속일 수 있지만, 벌거벗음이 드러나면 더 이상 숨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영적 심판과도 관련된 표현입니다.

 

AC.213의 문맥에서는 바로 이 의미가 중요합니다. 3:7에서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이 벌거벗은 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상태를 자각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에스겔 23장에서는 그 상태가 외적으로도 드러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벌거벗음’이 영적 수치와 악의 상징이라는 사실을 더욱 강하게 보여 주는 예로 사용됩니다.

 

결국 AC.213에서 겔23:29를 인용하는 이유는, 벌거벗음이 단순한 신체적 노출이 아니라 선과 진리의 상실, 그리고 그로 인한 영적 수치가 드러나는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입니다. 2의 벌거벗음이 순진무구함의 상징이었다면, 에스겔 23장의 벌거벗음은 순진무구함을 잃은 교회의 참모습이 드러난 상태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통해 벌거벗음’이 말씀에서 어떻게 반대 의미로 사용되는지를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AC.213, 심화 5, ‘계3:18’

AC.213.심화 5. ‘계3: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 (계3:18) I counsel thee to buy of me white raiment that thou mayest be clothed, and that the shame of thy naked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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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3, 심화 3, ‘겔16:22’

AC.213.심화 3. ‘겔16:22’ 네가 어렸을 때에 벌거벗은 몸이었으며 피투성이가 되어서 발짓하던 것을 (겔16:22) Thou wast naked and bare, and trampled on in thy blood (Ezek. 16:22). 이 구절을 AC.213에서 인용하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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