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베덴보리 저작에서 금식 기도를 비롯, 각종 기도와 방언에 관한 언급이 상대적으로 적은 이유

 

 

1. 문제 제기의 출발점 : 왜 스베덴보리에게서는 열심의 표지가 잘 보이지 않는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의 깊이를 가늠할 때, 자연스럽게 몇 가지 외적 표지를 떠올립니다. 금식을 하는가, 얼마나 자주 기도하는가, 기도할 때 눈물과 통곡이 있는가, 방언이나 특별한 영적 체험이 있는가 같은 것들입니다. 실제로 교회사 속에서도 이런 요소들은 경건과 헌신의 징표처럼 받아들여져 왔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강한 설득력을 갖습니다.

 

그런데 에마누엘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읽다 보면, 이런 기대가 자주 어긋납니다. 그는 금식 기도를 체계적으로 설명하지도 않고, 기도의 방법론을 제시하지도 않으며, 방언에 대해서는 거의 침묵에 가깝습니다. 오히려 그는 ‘사랑’, ‘진리’, ‘’, ‘의지’, ‘지각’ 같은 단어들을 집요할 정도로 반복합니다.

 

이 차이는 단순한 개인적 취향이나 시대적 한계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스베덴보리가 ‘신앙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근본적으로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는 신앙을 ‘무엇을 하느냐’의 문제로 보지 않고, ‘어떤 존재 상태로 살아가느냐’의 문제로 보았습니다. 이 출발점의 차이가, 금식, 기도, 방언에 대한 그의 침묵을 만들어 냅니다.

 

 

2. 금식 기도 : 행위가 아니라 상태의 문제

 

성경에서 금식은 매우 중요하게 등장합니다. 모세, 엘리야, 다니엘, 그리고 주님 자신도 금식하셨습니다. 이런 본문들 때문에 많은 신자들은 금식을 ‘영적 능력을 끌어올리는 특별한 행위’로 이해해 왔습니다. 일정 기간 음식을 끊고 기도하면, 하늘의 문이 더 잘 열리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은 전혀 다릅니다. 그에게 금식은 결코 ‘음식의 문제’가 아닙니다. 음식은 단지 외적 상응일 뿐이며, 금식의 실제 내용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절제하는 내적 상태’입니다. 다시 말해, 입이 음식을 끊었는가가 아니라, ‘의지가 무엇을 끊었는가’가 핵심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며칠씩 금식하면서도,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자기 의를 붙들고 있고, 타인을 정죄하며, 자신이 더 거룩해졌다고 느낀다면, 그 금식은 영적으로는 오히려 해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 금식은 자아를 낮추는 대신, 자아를 더 강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금식을 하지 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는 금식을 ‘신앙의 중심 자리에 두지 않습니다’. 참된 금식은 매일의 삶 속에서, 악을 악으로 보고 그것을 거절하는 지속적인 내적 선택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그의 침묵은 무관심이 아니라, ‘초점의 이동’입니다.

 

 

3. 기도 일반 : 말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방향

 

기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기도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는 오히려 인간과 주님 사이의 연결을 매우 실제적인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그 연결은 기도의 ‘기술’이나 ‘강도’로 유지되지 않습니다.

 

그에 따르면, 기도의 본질은 언제나 그 사람의 삶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진리대로 살고, 선을 의지에서 선택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방향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면, 그 사람의 내면은 이미 하늘을 향해 열려 있습니다. 그런 사람의 짧은 기도, 혹은 말없는 탄식조차도 천국에서는 분명한 의미를 지닌 언어로 받아들여집니다.

 

반대로, 삶은 변하지 않은 채 기도만 늘어난다면, 그 기도는 소리로는 크지만 영적으로는 공허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지점을 경계합니다. 그래서 그는 통성 기도냐 묵상 기도냐, 중보 기도냐 개인 기도냐 같은 구분에 거의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런 구분은 외적 형식의 차이일 뿐, 기도의 실체를 결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중요한 질문은 언제나 이것입니다. ‘이 기도가 그 사람을 더 겸손하게 만드는가?’, ‘이 기도가 그 사람을 더 사랑하게 만드는가?’ 이 질문에 긍정적으로 답할 수 있다면, 그 기도는 형식이 무엇이든 참됩니다.

 

 

4. 방언 : 영적 언어에 대한 전혀 다른 이해

 

방언 문제는 특히 민감합니다. 많은 교회에서 방언은 성령의 임재를 보여 주는 강력한 표지로 여겨져 왔고, 어떤 공동체에서는 방언 경험이 사실상 신앙의 성숙도를 가늠하는 잣대처럼 작동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영적 세계의 언어를 실제로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는 천사들의 언어를 듣고, 그 의미를 이해하며, 그 구조를 설명했습니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천사의 언어는 결코 무질서하지 않으며, 의미 없는 소리도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과 진리의 상태가 즉각적으로 의미로 전달되는, 매우 정합적이고 질서 있는 언어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볼 때, 말하는 본인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음성 발화가 ‘고등한 영적 상태’의 증거라는 주장은, 스베덴보리에게 설득력을 갖기 어렵습니다. 그는 그런 현상을 전면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것을 ‘구원의 기준이나 교회의 중심 표지로 삼는 것’에는 분명한 거리를 둡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언제나 결과입니다. 방언을 했는가가 아니라, 그 이후에 그 사람이 더 사랑하게 되었는가, 더 진리 안에서 살게 되었는가, 더 이웃을 품게 되었는가가 기준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 현상은 영적으로 중립적이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하위 영역의 영향일 수도 있습니다.

 

 

5. 왜 이런 주제들에 대해 의도적으로 조용했는가

 

여기서 핵심 질문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왜 스베덴보리는 이런 주제들에 대해 체계적인 설명이나 강조를 남기지 않았을까요? 그 이유는 그의 사명이 ‘신앙 실천 매뉴얼을 만드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사명은, 인간이 영적으로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사랑과 진리가 어떻게 사람 안으로 들어오고, 어떻게 왜곡되며, 어떻게 다시 회복되는지를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방법’을 가르치기보다, ‘분별의 기준’을 남겼습니다.

 

금식, 기도, 방언, 찬양은 모두 시대와 문화에 따라 형태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과 진리의 구조는 변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 변하지 않는 구조를 남기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외적 열심을 조직하거나 장려하지 않고, 그것들이 참된지 거짓된지를 가려낼 수 있는 ‘내적 잣대’를 제공했습니다.

 

 

6.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주는 깊은 도전

 

이 모든 논의는 오늘 우리에게 매우 현실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무엇을 신앙의 중심에 두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금식과 기도가 많아질수록, 방언과 감정적 고양이 강해질수록, 우리는 더 신앙적인 사람이 되고 있는가, 아니면 더 미묘한 자기만족에 빠지고 있는가를 스스로 점검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우리에게 금식하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다. 기도하지 말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방언을 무조건 부정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그는 끊임없이 이렇게 묻습니다. ‘그 모든 것이 너를 더 사랑하게 만들고 있는가?’, ‘그 모든 것이 너를 더 겸손하게 만들고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 그는 일부러 조용해졌습니다. 그리고 그 침묵 속에, 오늘의 교회와 신자들이 스스로 답해야 할 깊은 숙제를 남겼습니다.

 

 

7. 맺음말 : 외적 열심을 넘어 내적 실재로

 

결국 스베덴보리가 금식 기도와 각종 기도, 방언에 대해 강조하지 않은 이유는 단순합니다. 그것들이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것들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이 어떤 사랑 안에 살고 있는가, 어떤 진리를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그의 저작이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이유도 분명해집니다. 그는 우리가 붙들고 싶은 외적 확신의 표지들을 하나씩 내려놓게 하고, 대신 삶 전체를 신앙의 자리로 끌어오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침묵은 가장 강력한 메시지가 됩니다.

 

 

 

오늘날 기독교, 개신교 예배 음악, 찬양에 대하여

개신교를 비롯, 전체 기독교에서는 예배와 생활 속에서 교회 음악과 찬양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스베덴보리 저작을 보면 상대적으로 언급이 적은 것 같아요. 왜 그런 건가요? 1. 문제 제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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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said, Let the earth bring forth the living soul after its kind; the beast, and the thing moving itself, and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after its kind; and it was so. And God made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after its kind, and the beast after its kind, and everything that creepeth on the ground after its kind;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1:24, 25)

 

AC.44

 

사람은 땅과 같아서, 신앙의 지식(knowledges)이 먼저 그 안에 뿌려지지 않으면 어떤 선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그래야 무엇을 믿어야 하고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듣는 것은 이해의 역할이고, 그 말씀을 행하는 것은 의지의 역할입니다.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것은,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그 믿음에 따라 살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을 분리하게 되고, 그 결과 마음이 나뉘어, 주님께서 다음 말씀에서 ‘어리석은 사람(foolish)이라 하신 사람들에 속하게 됩니다. Man, like the earth, can produce nothing of good unless the knowledges of faith are first sown in him, whereby he may know what is to be believed and done. It is the office of the understanding to hear the Word, and of the will to do it. To hear the Word and not to do it, is like saying that we believe when we do not live according to our belief; in which case we separate hearing and doing, and thus have a divided mind, and become of those whom the Lord calls “foolish” in the following passage:

 

24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6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7:24, 26) Whosoever heareth my words, and doeth them, I will liken unto a wise man who built his house upon a rock; but everyone that heareth my words, and doeth them not, I liken to a foolish man, who built his house upon the sand (Matt. 7:24, 26).

 

이해에 속한 것들은 앞서 보인 것처럼 ‘물들이 내는 기는 것들(the creeping things which the waters bring forth)과 ‘땅 위의 새들(the fowl upon the earth), 그리고 ‘하늘의 궁창에 있는 새들(upon the faces of the expanse)로, 그리고 의지에 속한 것들은 여기 ‘땅이 내는 생물(the living soul which the earth produces)과 ‘가축(the beast)과 ‘기는 것(the creeping thing), 그리고 ‘땅의 짐승(the wild animal of that earth)으로 각각 가리키고 있습니다. The things that belong to the understanding are signified—as before shown—by the “creeping things which the waters bring forth,” and also by the “fowl upon the earth,” and “upon the faces of the expanse”; but those which are of the will are signified here by the “living soul which the earth produces,” and by the “beast” and “creeping thing,” and also by the “wild animal of that earth.”

 

 

해설

 

이 글은 거듭남의 과정에서 ‘지식과 행위, 이해와 의지의 결합이 왜 필수적인가’를 매우 실제적인 언어로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을 땅에 비유하면서, 어떤 선도 저절로 생겨나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땅이 씨 없이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사람도 신앙의 지식이 먼저 뿌려지지 않으면 선을 낳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지식은 목적이 아니라 준비이며, 삶을 향한 출발점입니다.

 

이 글의 핵심은 이해와 의지의 역할 분담에 있습니다. 말씀을 듣는 것은 이해의 기능이고, 그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은 의지의 기능입니다. 이 둘은 역할이 다르지만,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으면,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단순한 인식에 그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을 분리하면 마음이 나뉜다’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반석 위의 집과 모래 위의 집 비유는, 이 글의 요지를 가장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반석은 진리 위에 세워진 삶을 뜻하고, 모래는 지식만 있고 삶이 따르지 않는 상태를 뜻합니다. 두 사람 모두 말씀을 들었습니다. 차이는 오직 하나, 행했느냐 하지 않았느냐입니다. 그래서 어리석음은 무지에서 나오지 않고, 행하지 않음에서 나옵니다.

 

이 글은 다시 한번 창세기 1장의 상징들을 인간 내면의 구조와 연결합니다. 이해에 속한 것들은 물과 새로 표현됩니다. 물은 지식의 저장과 흐름을, 새는 생각과 이성을 뜻합니다. 이는 모두 ‘아는 것’의 영역입니다. 그러나 의지에 속한 것들은 땅에서 나오는 생물과 가축, 그리고 짐승으로 표현됩니다. 이는 선택하고 행하며 살아 움직이는 영역입니다.

 

이 구분은 신앙생활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은 이해의 차원에서는 얼마든지 풍성해질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많이 알고, 교리를 정확히 이해하며, 깊은 설명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의지의 영역, 곧 삶의 선택과 행위로 내려오지 않으면, 그 신앙은 아직 생물이 되지 못합니다.

 

이 글은 결국 이렇게 말합니다. 거듭남은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이해에서 의지로 내려오는 과정입니다. 신앙의 지식은 씨앗이고, 의지 안에서 행해질 때 비로소 생명이 됩니다. 그래서 참된 신앙은 언제나 삶으로 드러나며, 이해와 의지가 하나가 될 때 사람은 비로소 온전한 마음과 하나의 삶을 갖게 됩니다.

 

 

 

AC.43, 창1:22-23,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22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23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And God blessed them, say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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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를 비롯, 전체 기독교에서는 예배와 생활 속에서 교회 음악과 찬양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스베덴보리 저작을 보면 상대적으로 언급이 적은 것 같아요. 왜 그런 건가요?

 

 

1. 문제 제기의 출발점: ‘왜 스베덴보리에게서 찬양과 음악은 조용한가

 

개신교를 포함한 현대 기독교의 예배를 떠올리면, 음악과 찬양은 거의 예배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설교보다 찬양 시간이 더 길고, 예배의 성패가 ‘찬양의 은혜로움’에 의해 평가되기도 합니다. 신앙 간증 역시 ‘찬양 중에 울었다’, ‘찬양하다가 은혜를 받았다’는 표현으로 가득합니다. 이런 풍경에 익숙한 눈으로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펼치면, 자연히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왜 이렇게 찬양 이야기가 적은가’, ‘왜 교회 음악에 대해 거의 말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이 질문은 스베덴보리가 무엇을 중요하게 보았는지를 정확히 겨누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음악을 몰랐거나, 예술을 무시했거나, 혹은 감성이 메마른 신학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신학 전체가 애초에 외적 예배 요소를 중심에 두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면, 스베덴보리는 ‘찬양 없는 메마른 신학자’로 오해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해하고 나면, 오히려 오늘날 교회의 예배 구조가 얼마나 ‘외적 형식’에 무게를 두고 있는지를 거꾸로 성찰하게 됩니다.

 

 

2. 스베덴보리 신학의 중심축: ‘예배란 무엇인가

 

에마누엘 스베덴보리에게서 ‘예배’는 특정 시간, 특정 공간, 특정 형식으로 한정되지 않습니다. 그의 저작 전반에서 예배는 ‘삶 전체의 방향’이며, 더 정확히 말하면 ‘의지와 이해가 주님을 향해 정렬된 상태’입니다. 다시 말해, 예배는 행위가 아니라 상태입니다. 이 상태가 있을 때, 말과 행동과 의식이 뒤따르는 것이지, 반대로 의식을 행한다고 해서 그 상태가 자동으로 만들어지지는 않습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음악과 찬양은 예배의 본질이 아니라 예배의 ‘표현 양식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그는 외적 예배 행위를 평가할 때 항상 한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이것이 그 사람 안의 사랑과 진리의 결합에서 나온 것인가, 아니면 단지 습관, 문화, 감정의 산물인가’. 이 질문 앞에서 음악은 특권을 갖지 않습니다. 찬송이든 기도든 설교든, 모두 동일한 기준 앞에 서게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저작에서는 예배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하나하나 분석하거나, 어떤 형식이 더 좋다고 제안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보다 훨씬 근본적인 문제, 곧 ‘사람 안에 무엇이 살아 있는가’를 묻습니다. 이 질문에 비하면, 음악의 비중은 자연히 작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3. 찬양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라는 급진적 전환

 

현대 교회 문화에서 찬양은 종종 ‘영적 변화를 일으키는 수단’으로 이해됩니다. 찬양을 하면 마음이 열리고, 은혜가 임하고, 성령이 역사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예배 초반에 찬양으로 분위기를 만들고, 사람들의 감정을 끌어올린 뒤, 그 상태에서 말씀을 전하려 합니다. 이 구조는 너무 익숙해서 의심조차 잘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시각에서 보면, 이 구조는 순서가 뒤집혀 있습니다. 그는 일관되게 말합니다. ‘내적 상태가 먼저 있고, 외적 표현은 그 다음에 온다’. 참된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결합될 때, 그 상태가 자연스럽게 말과 행동과 심지어 노래로까지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노래가 상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상태가 노래를 낳습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찬양은 결코 무시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찬양은 매우 중요한 ‘지표’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측정 도구’이지 ‘발전 장치’가 아닙니다. 찬양이 아름답고 감동적이라는 사실은, 그 찬양이 표현하고자 하는 내적 상태가 실제로 존재할 때에만 영적 의미를 가집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단지 자연적 감정의 울림일 뿐입니다.

 

 

4. 천국의 음악과 지상의 교회 음악의 본질적 차이

 

혹시 스베덴보리가 음악 자체에 관심이 없었다고 생각하신다면, 그것은 오해입니다. 그는 천국에서의 소리와 노래, 말의 리듬과 조화에 대해 매우 인상적인 묘사를 남겼습니다. 다만, 그가 말하는 천국의 음악은 우리가 생각하는 ‘연주되는 음악’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천국에서는 사랑과 진리의 상태가 곧 소리로 드러납니다. 천사들이 말할 때, 그 말에는 이미 음악성이 깃들어 있으며, 그 울림은 그들의 내적 상태와 완전히 일치합니다. 거기에는 연습도 없고, 연출도 없고, 감정을 유도하려는 의도도 없습니다. 상태가 곧 소리이고, 소리가 곧 상태입니다.

 

이와 비교하면, 지상의 교회 음악은 필연적으로 ‘기술과 연출과 반복 훈련’을 필요로 합니다. 이것 자체가 나쁘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이 둘을 동일 선상에 놓지 않습니다. 그는 천국의 음악을 설명하기 위해 지상의 찬양을 끌어오지 않고, 오히려 지상의 찬양이 얼마나 쉽게 천국의 것을 ‘흉내만 낼 수 있는지’를 경계합니다.

 

 

5. 감정의 문제: ‘울림변화는 다르다

 

스베덴보리가 교회 음악을 다룰 때 조심스러운 또 하나의 이유는, 인간이 ‘자연적 감정’과 ‘영적 상태’를 매우 쉽게 혼동하기 때문입니다. 음악은 그 자체로 인간의 감정을 강하게 자극합니다. 조율된 화음, 반복되는 후렴, 점점 고조되는 리듬은 누구에게나 눈물과 전율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반응은 반드시 영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는 감정의 고양이 곧 영적 상태의 증거가 되는 것을 강하게 경계합니다. 왜냐하면, 감정은 삶을 바꾸지 않고도 얼마든지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배당을 나서는 순간 다시 예전의 삶으로 돌아간다면, 그 감동은 영적이라기보다 심리적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묻습니다. ‘그 찬양 이후에 무엇이 달라졌는가’, ‘이웃을 대하는 태도에 변화가 있었는가’, ‘악을 멀리하고 선을 선택하는 힘이 생겼는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찬양은, 아무리 아름다워도 그의 신학에서는 중심에 설 수 없습니다.

 

 

6. 말씀의 이해가 찬양보다 앞서는 이유

 

스베덴보리 저작이 음악보다 압도적으로 ‘말씀의 구조와 의미’에 집중하는 이유도 여기에서 분명해집니다. 그는 사람의 내적 상태가 변하는 유일한 길은, 말씀을 이해하고, 그 이해에 따라 삶을 개혁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찬양은 이 과정을 보조할 수는 있지만,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채 부르는 찬양은, 진리 없는 열심에 가깝습니다. 반대로, 말씀을 이해하고 그 의미가 삶 속에서 살아 움직일 때, 굳이 많은 찬양이 없어도 그 삶 자체가 예배가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예배는 ‘주일의 음악적 행사’가 아니라, ‘매일의 선택과 행동’입니다.

 

그래서 그의 저작은 자연히 음악을 분석하기보다는, 말씀의 속뜻, 상응, 내적 논리, 인간 정신의 구조를 집요하게 파고듭니다. 이것이 그의 신학이 ‘차갑다’고 느껴질 수 있는 이유이지만, 동시에 가장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합니다.

 

 

7. 맺음말: 침묵은 부정이 아니라 방향 설정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스베덴보리 저작에서 교회 음악과 찬양의 언급이 적은 것은 결핍이 아니라 선택입니다. 그는 의도적으로 신앙의 중심을 ‘느낌’이 아니라 ‘상태’, ‘형식’이 아니라 ‘’, ‘행위’가 아니라 ‘사람 그 자체’에 두었습니다. 음악은 그 전체 구조 속에서 자연히 자리를 찾을 뿐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를 깊이 읽을수록, 우리는 이런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나는 찬양을 통해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가’, ‘내가 말하는 은혜는 삶으로 이어지고 있는가’, ‘예배의 중심이 정말 주님과 말씀인가, 아니면 나의 감정인가’.

 

이 질문이야말로, 스베덴보리가 음악에 대해 말하지 않음으로써 우리에게 남긴 가장 큰 ‘말씀’일지도 모릅니다.

 

2026-01-18(D1)

 

 

 

오늘날 기독교, 개신교의 금식 기도와 방언에 대하여

스베덴보리 저작에서 금식 기도를 비롯, 각종 기도와 방언에 관한 언급이 상대적으로 적은 이유 1. 문제 제기의 출발점 : 왜 스베덴보리에게서는 ‘열심의 표지’가 잘 보이지 않는가 많은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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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 버전 장례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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