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EO.001 |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신다’ - 하나님을 안다는 것과 알 수 없다는 것의 경계

 

해설

동방정교회 신학을 처음 접할 때 가장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가르침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신다’는 고백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이시며 지혜이시고, 전능하시며 전지하시고,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동방정교회는 이러한 고백들이 아무리 참되고 거룩하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하나님의 본질을 다 이해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고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이성과 언어와 경험을 통해 하나님을 설명하려 할 때, 그 설명은 언제나 인간의 유한한 이해 안에 머무릅니다. 이러한 한계를 인정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무지를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인간의 관념 속에 가두지 않으려는 신앙적 겸손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을 본질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면 우리는 과연 하나님을 얼마나 알 수 있으며, 그분을 어떻게 사랑하고 그분과 실제로 결합할 수 있습니까? 이것이 동방정교회의 신비신학과 스베덴보리의 신학이 만나는 첫 번째 질문입니다.

 

동방정교회는 이러한 문제를 오래전부터 ‘부정신학’(apophatic theology)이라는 전통 속에서 다루어 왔습니다. 부정신학이란 하나님께 무엇이 있다고 말하기보다, 하나님은 우리가 알고 있는 피조물의 어떤 개념으로도 완전히 규정할 수 없는 분이라고 고백하는 신학적 접근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선하시지만 인간이 경험하는 선함의 한계를 초월하시고, 지혜로우시지만 인간의 지성이 이해하는 지혜보다 무한히 높으시며, 존재하시지만 피조물들이 존재하는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으십니다. 이러한 설명은 하나님에게 선이나 지혜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모든 선과 지혜의 근원이시므로 인간이 사용하는 개념만으로는 그분을 충분히 표현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동방정교회는 이와 함께 하나님에 대해 긍정적으로 말하는 ‘긍정신학’(cataphatic theology)도 인정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생명이시고 진리이시라는 성경의 증언은 참되지만, 그러한 긍정적 진술조차 하나님의 무한하신 실재를 다 담아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정신학과 긍정신학은 서로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에 관해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의 경계를 함께 보여 줍니다.

 

이러한 전통을 대표하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8세기 신학자 다마스쿠스의 요한(John of Damascus)입니다. 그는 자신의 저서 ‘정통신앙 해설’(An Exposition of the Orthodox Faith) 제1권에서 하나님의 신성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며,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것 이상으로 그분의 본질을 규정하려 해서는 안 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완전한 무지 속에 남겨 두신 것은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영원하시고, 시작과 끝이 없으시며, 선하시고, 지혜로우시고, 모든 것의 창조주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 안에서 실제로 어떠한 분이신지를 피조물의 지성으로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구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관한 참된 지식을 얻는 것과 하나님의 무한한 본질 전체를 파악하는 것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전자는 계시를 통해 가능하지만, 후자는 피조물에게 불가능합니다. 미국 정교회(OCA)의 교리 해설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가장 내밀한 본질을 피조물에게 완전히 드러내지는 않으셨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충만하게 계시하셨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동방정교회가 고백하는 하나님의 불가해성은 결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영원히 넘을 수 없는 무지의 장벽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이 문제를 어떻게 가르치고 있습니까? 요1:18은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나 독생하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나타내셨다고 증언합니다. 출33:20에서는 주님께서 모세에게 사람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살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사55:8-9는 하나님의 생각과 길이 인간의 생각과 길보다 높다고 선언합니다. 이 말씀들은 인간이 자신의 자연적 이해만으로 하나님의 본질을 파악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그러나 성경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요14:9에서 예수께서는 빌립에게 자신을 본 사람이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시며, 요17:3에서는 유일하신 참하나님과 그분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가르치십니다. 따라서 성경에는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말씀과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말씀이 함께 있으며,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가르침과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는 가르침도 함께 있습니다. 이 두 가지를 단순한 모순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자연적 감각과 유한한 이성으로 포착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을 계시하실 때 인간은 그 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참되게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단순히 하나님에 관한 정보를 전달하신 분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을 알고 그분과 관계를 맺도록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신 분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이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 사랑과 지혜’(Divine Love and Wisdom, 1763) DLW.17에서 하나님 안에는 무한한 것들이 구별되면서 하나를 이루고 있으며, 인간은 자연적 관념으로 하나님의 무한한 것들을 완전히 지각할 수 없다고 설명합니다. 천사들 역시 인간보다 더 높은 영적 관념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의 무한하심 전체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동방정교회가 강조하는 하나님의 초월성과 중요한 공통점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인간은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자신의 이해 안에 모두 담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높은 천국에 있는 천사라도 피조물이며, 피조물은 결코 무한하신 창조주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는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이 하나님에 대한 참된 관념 자체를 가질 수 없다는 뜻은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무한한 본질을 모두 파악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신 방식에 따라 그분을 참되게 생각하고 사랑하며 그분과 결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관념은 무한을 유한한 개념 안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신을 드러내신 모습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 이 문제를 이해하는 핵심은 ‘하나님은 참으로 인간이시다’(God is very Man)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는 DLW.11에서 천국의 천사들이 하나님을 인간 형상으로 생각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연계의 인간처럼 물질적 신체를 가지셨다거나, 어떤 공간 속에 갇힌 유한한 존재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시며 지혜 자체이시고, 모든 인간적 생명의 원형이시라는 뜻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창1:26-27의 말씀도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닮은 것이지, 하나님께서 인간의 유한한 육체를 닮으신 것이 아닙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에게 자신을 보이셨다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서 있는 별개의 신적 존재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신성이 인간에게 보이도록 자신을 나타내신 ‘신적 인간’(Divine Human)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어떤 추상적 신성을 상상하는 데 머물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와 생명을 알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동방정교회와 스베덴보리의 차이를 지나치게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동방정교회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참되게 알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정교회의 신비신학은 하나님을 인간에게서 멀리 떨어진 추상적인 절대자로 남겨 두려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하나님의 본질을 소유하거나 파악할 수 없으면서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신적 에너지에 참여함으로써 그분과 실제로 결합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신적 에너지는 단순한 물리적 힘이나 하나님께서 만들어 내신 어떤 효과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창조되지 않은 역사하심을 가리킵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신적 사랑과 지혜가 주님에게서 흘러들어오는 ‘인플럭스’(influx)를 통해 인간에게 생명과 선과 진리를 공급한다고 설명합니다. 두 전통 모두 인간이 하나님을 자기 안에 소유하거나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동일해지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실제적인 신적 결합을 가르친다는 점에서 만납니다. 그러나 정교회의 ‘본질과 에너지의 구별’과 스베덴보리의 ‘신적 사랑과 지혜의 인플럭스’를 완전히 같은 교리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각각의 개념이 전제하는 신론과 인간론, 그리고 신적 결합의 구조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 차이는 이후 EO.006과 EO.007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게 됩니다.

 

그렇다면 두 전통의 차이가 실제 신앙생활에서는 어떻게 나타납니까? 어떤 신자가 하나님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시는 분이라는 말씀을 듣고, 자신은 하나님을 도저히 알 수 없으므로 모든 것을 신비로 남겨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무한하심 앞에서 겸손해지는 것은 옳지만, 그 겸손이 하나님을 알아 가려는 노력 자체를 포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어떤 신자가 성경과 교리를 많이 공부하여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충분히 갖추었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은 이미 하나님을 잘 알고 있다고 확신한다면 그것 역시 위험합니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소유하는 것과 하나님의 사랑 안에 실제로 살아가는 것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동방정교회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앎이 지적 정보의 축적을 넘어 그분과의 살아 있는 결합을 향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진리가 인간의 이해 안에만 머무르지 않고 의지와 삶에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참된 신앙은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인정하면서도 그분을 알아 가고, 하나님을 알아 가면서도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지 않으며, 자신이 이해한 진리를 실제 삶 속에서 사랑과 선으로 실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고백하면서도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을 쉽게 정죄하고, 하나님은 진리이시라고 고백하면서도 자신이 가진 교리적 지식을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는 증거로 삼는다면,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 있을지는 몰라도 그 이름에 담긴 생명을 충분히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에 관한 전문적인 신학 지식은 많지 않더라도,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려 애쓰고, 어려운 이웃을 외면하지 않으며,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을 살피면서 주님께 도움을 구하는 사람은 이미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만큼 하나님의 사랑을 실제 삶에 받아들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신학적 지식 자체가 중요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됩니다. 참된 진리는 인간에게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가르치며, 의지가 주님의 사랑을 올바르게 받아들이도록 안내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지식의 많고 적음보다 그 지식이 어떤 사랑과 결합하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인간의 영적 성숙은 진리를 많이 아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이해가 받아들인 진리가 의지의 사랑과 결합하여 삶의 선으로 나타날 때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은 결국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가르치시는 선을 행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십니까? 그렇습니다. 동방정교회의 이 고백에는 인간이 결코 잃어버려서는 안 될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지성으로 완전히 설명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시며, 천사조차 하나님의 무한하심 전체를 파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고백이 하나님을 참되게 알 수 없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면, 그것은 성경이 증언하는 계시의 목적과 어긋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영원히 알 수 없는 분으로 남아 계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자신을 알고 사랑하며 자신과 결합하도록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나타내셨기 때문입니다. 동방정교회는 이 신비를 성육신과 신적 에너지에의 참여라는 언어로 설명하고, 스베덴보리는 신적 인간과 신적 사랑 및 지혜의 인플럭스라는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두 전통의 차이를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인정하는 일과 하나님을 참되게 아는 일은 서로 대립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참된 겸손은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물러서는 데 있지 않고, 자신이 아는 하나님보다 하나님께서 무한히 크신 분임을 인정하면서도 그분이 주신 계시를 따라 계속 알아 가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결국 신앙의 목적은 하나님을 완전히 설명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알도록 허락하신 하나님을 참되게 알고 그분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EO.001 해설)

 

요약

동방정교회가 고백하는 하나님의 불가해성은 인간이 하나님의 무한한 본질을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는 참된 겸손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과 하나님을 참되게 알 수 없다는 주장은 구별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하나님은 무한하시므로 피조물이 그분을 모두 이해할 수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나타내신 신적 인간으로서 인간이 알고 사랑하며 결합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결국 참된 신앙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포기하는 것도, 그 지식을 완전하다고 여기는 것도 아니라, 주님께서 계시하신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사랑과 선한 삶으로 실현하는 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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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BU.007 | 불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팔정도에 있다’ - 도성제의 바른 삶과 주님에게서 오는 거듭남

 

해설

인간은 누구나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지만, 고통의 원인을 안다고 해서 저절로 그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욕망과 집착이 괴로움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깨달아도, 막상 욕망을 내려놓거나 오래된 습관을 바꾸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불교는 바로 이 문제에 대하여 구체적인 실천의 길을 제시합니다. 그것이 ‘팔정도’(八正道, ariya aṭṭhaṅgika magga), 곧 여덟 가지 바른 수행의 요소로 이루어진 길입니다. 팔정도는 불교의 근본 교리인 ‘사성제’(四聖諦, cattāri ariyasaccāni) 가운데 네 번째인 ‘도성제’(道聖諦, magga-sacca)의 핵심입니다. 사성제는 인간의 고통을 밝히는 고성제, 고통의 원인을 설명하는 집성제, 고통의 소멸 가능성을 가르치는 멸성제, 그리고 그 소멸에 이르는 실천의 길인 도성제로 이루어집니다. 여기서 불교가 말하는 ‘고’(苦, dukkha)는 단순한 육체적 통증이나 일시적인 슬픔을 넘어, 조건에 의존하는 삶이 영원하고 완전한 만족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근본적인 불만족까지 포함합니다. 또한 ‘열반’(涅槃, nibbāna)은 고통과 ‘윤회’(輪廻, saṃsāra)를 지속시키는 ‘갈애’(渴愛, taṇhā)와 ‘무명’(無明, avijjā)이 소멸한 해탈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팔정도는 단순히 마음을 편안하게 하거나 사회적으로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한 생활 수칙이 아닙니다. 불교가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로 이해하는 고통과 윤회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행의 길입니다.

 

초기불교의 ‘상윳따 니까야’(相應部, Saṃyutta Nikāya) 56.11에 수록된 ‘초전법륜경’(初轉法輪經, Dhammacakkappavattana Sutta)은 팔정도를 ‘중도’(中道, majjhimā paṭipadā), 곧 감각적 쾌락에 빠지는 삶과 자신의 몸을 지나치게 괴롭히는 고행이라는 두 극단을 벗어나는 길로 설명합니다. 그 여덟 요소는 ‘정견’(正見, sammā-diṭṭhi), 곧 사성제와 행위의 결과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 ‘정사유’(正思惟, sammā-saṅkappa), 곧 탐욕과 악의와 해치려는 마음에서 벗어난 바른 의도를 품는 것, ‘정어’(正語, sammā-vācā), 곧 거짓말과 이간질, 거친 말과 무익한 말을 삼가는 것, ‘정업’(正業, sammā-kammanta), 곧 살생과 도둑질과 잘못된 성적 행위를 멀리하는 것, ‘정명’(正命, sammā-ājīva), 곧 다른 생명에게 해를 끼치거나 부정한 방법으로 살아가지 않는 바른 생계, ‘정정진’(正精進, sammā-vāyāma), 곧 해로운 마음의 상태를 막고 버리며 선한 상태를 일으키고 유지하려는 노력, ‘정념’(正念, sammā-sati), 곧 몸과 느낌과 마음과 법을 바르게 알아차리며 살피는 것, 그리고 ‘정정’(正定, sammā-samādhi), 곧 마음을 바르게 집중하여 선정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여덟 요소는 서로 무관한 규칙들이 아니라, 바른 이해와 의도가 언어와 행동과 생계를 이끌고, 바른 노력과 알아차림과 집중이 지혜를 깊게 하는 하나의 수행 체계를 이룹니다.

 

팔정도의 구조를 더욱 정확히 이해하려면 불교에서 말하는 ‘삼학’(三學, tisso sikkhā), 곧 계율·선정·지혜의 세 가지 훈련을 살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정견과 정사유는 지혜에, 정어와 정업과 정명은 계율에, 정정진과 정념과 정정은 선정에 속하는 수행으로 정리합니다. 이는 올바른 생각만으로 깨달음에 이르는 것도 아니고, 외적인 행동만 바르게 하면 충분한 것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의도가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 살피면서 말과 행동을 바꾸고, 마음을 훈련하여 현실을 더욱 깊이 통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맛지마 니까야’(中部, Majjhima Nikāya) 117번의 ‘대사십경’(Mahācattārīsaka Sutta)은 정견을 다른 수행 요소에 앞서는 중요한 요소로 설명하면서, 정정진과 정념이 바른 견해와 의도를 확립하는 데 함께 작용한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정념은 아무런 판단 없이 순간의 느낌을 관찰하는 일로만 축소할 수 없으며, 정정 역시 단순한 휴식이나 심리적 안정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초기불교에서 이들은 해로운 상태를 버리고 바른 수행을 성숙시키며, 궁극적으로 고통을 소멸시키는 해탈의 길과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팔정도를 현대적인 스트레스 관리 방법이나 일반적인 도덕 교육으로만 이해한다면 불교가 본래 제시한 종교적 목적을 놓치게 됩니다.

 

이러한 팔정도에는 말씀의 관점에서도 진지하게 살펴볼 만한 윤리적 통찰이 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높은 진리를 말하더라도 거짓말을 일삼고 다른 사람을 해치며 부정한 방법으로 살아간다면, 그가 알고 있다는 진리가 실제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물어야 합니다. 팔정도는 지식과 행동을 분리하지 않고, 바른 이해가 바른 말과 행동과 생계로 이어져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특히 정어와 정업과 정명은 인간의 도덕적 책임이 종교 의례나 명상 시간에만 국한되지 않고 일상생활 전체에 미친다는 사실을 일깨웁니다. 예수께서도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눅6:46)고 말씀하셨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새 예루살렘을 위한 삶의 교리’(Doctrine of Life for the New Jerusalem, Life, 1763) 1번에서 모든 종교는 삶에 관계되며 종교적인 삶은 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종교적인 삶은 특정한 신앙 지식을 소유하거나 교리를 정확하게 암송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자신이 진리라고 인정하는 것을 실제 의지와 행동으로 옮기는 삶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팔정도가 언어와 행위와 생계에 이르기까지 바른 실천을 강조하는 것은 귀중한 통찰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외적인 유사성이 불교의 팔정도와 말씀에서 가르치는 거듭남을 동일한 것으로 만든다는 뜻은 아닙니다. 두 전통이 바른 삶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해서 바름의 궁극적인 기준과 근원, 그리고 그 삶이 향하는 목적까지 같아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차이를 이해하려면 선한 행동의 외형과 내적 동기를 구별해야 합니다. 사람은 정직하게 말하면서도 자기의 평판을 높이려 할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면서도 그 대가로 인정과 존경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행동을 하면서도 자신의 공로를 앞세우지 않고 진실로 상대방의 유익을 바랄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329번에서 십계명의 금지 명령들이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에 어떻게 관계되는지 설명합니다. 사람은 살인과 도둑질, 간음과 거짓 증언 같은 악을 멀리해야 하며, 특히 그것들을 주님과 신적 질서에 반대되는 죄로 여겨 멀리할 때 사랑과 체어리티의 선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체어리티’(charity)는 단순한 자선이나 구제 활동이 아니라, 이웃의 참된 유익을 바라고 그 유익을 실제로 이루려는 사랑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악을 멀리하는 이유까지 중요하게 다룬다는 점에서 팔정도의 윤리와 비교할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도 바른 행동의 의도와 동기를 중요하게 여기며,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는 것을 수행의 핵심으로 삼습니다. 따라서 불교는 외적인 행동만 바르게 하면 충분하다고 가르치고 기독교만 내면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대조해서는 안 됩니다. 보다 근본적인 차이는 불교가 바른 행위와 수행을 갈애와 무명의 소멸 및 해탈의 길에서 이해하는 반면, 새 교회의 교리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분과 결합하는 거듭남의 질서에서 이해한다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 DP, 1764) 100번에서 설명한 원리는 이러한 차이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인간은 겉 사람의 악을 죄로 여겨 마치 자기 힘으로 멀리하는 것처럼 행동해야 하며, 그럴 때 주님께서 속 사람의 악을 제거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겉 사람’(external man)은 인간의 자연적 생각과 행동의 차원을, ‘속 사람’(internal man)은 그의 영적 내면을 가리킵니다. 또한 ‘거듭남’(regeneration)이란 단순히 행동 습관을 개선하거나 자기 통제 능력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인간의 사랑과 의지가 새로워지는 과정을 뜻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잘못을 살피고 악에 맞서 싸우며 선을 선택해야 하지만, 그 과정에서 참된 선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려서는 안 됩니다. 모든 참된 선과 진리의 근원은 주님이시며, 인간은 그것을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존재입니다. 이 점에서 불교의 정정진과 기독교의 거듭남은 모두 인간의 능동적인 참여를 중요하게 여긴다는 점에서 비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의 팔정도를 단순히 인간이 자기 힘만으로 자신을 구원하려는 시도라고 규정하는 것도 정확하지 않습니다. 불교 역시 바른 가르침과 스승, 수행 공동체와 여러 조건의 중요성을 인정하며, 대승불교의 일부 전통에서는 부처와 보살의 도움을 강조합니다. 다만 그것이 곧 주님을 생명 자체이시며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으로 인정하는 새 교회의 교리와 같다는 뜻은 아닙니다.

 

또한 팔정도의 여덟 요소를 모두 갖추었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구별해야 합니다. 불교에서 정견은 일반적인 상식이나 모든 종교가 공유하는 보편적인 도덕 관념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사성제와 ‘업’(業, kamma), 곧 의도적인 행위와 그 결과, 무상과 무아, 고통의 발생과 소멸에 관한 불교 특유의 세계 이해와 연결됩니다. 마찬가지로 정념과 정정은 단순히 마음을 차분하게 유지하는 기술이 아니라, 고통의 근본 원인을 통찰하고 해탈에 이르기 위한 수행입니다. 그러므로 팔정도의 각 요소를 기독교의 덕목과 하나씩 대응시키면서 정견은 올바른 성경 지식, 정어는 거짓말하지 않기, 정정은 기도와 같은 식으로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외적인 기능이 비슷해 보여도 그 안에서 이해하는 인간의 본질과 궁극적인 목적은 서로 다릅니다. 스베덴보리의 ‘삶의 교리’ 65번은 여러 나라와 종교의 사람들에게도 십계명과 유사한 도덕적 규범이 있으며, 자신이 믿는 종교에 따라 그러한 계명을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이 열려 있음을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종교의 교리가 동일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각 사람의 종교적 환경과 그가 받아들일 수 있는 진리 안에서 그를 인도하신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따라서 불교인이 팔정도를 실천하며 진실로 악을 멀리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할 때 그 선의 가치를 부정해서는 안 되지만, 그 행위의 외형만으로 그의 내적인 영적 상태나 영원한 운명까지 확정해서도 안 됩니다.

 

결국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팔정도에 있다’라는 명제는 불교의 도성제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가르침입니다. 팔정도는 바른 견해와 의도, 말과 행동, 생계와 노력, 알아차림과 집중을 통하여 인간의 삶 전체를 변화시키려는 수행의 길입니다. 그 안에는 진리를 아는 것과 진리에 따라 살아가는 것을 분리하지 않고, 인간의 욕망과 행동을 실제로 돌아보게 하는 귀중한 통찰이 있습니다. 특히 종교적 지식이나 의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바른 삶의 실천이 필요하다는 가르침은 기독교인에게도 중요한 성찰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불교의 팔정도와 말씀에서 가르치는 거듭남은 동일한 길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는 팔정도를 통하여 갈애와 무명을 소멸하고 윤회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해탈을 지향하지만, 새 교회의 교리는 인간이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하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그분과 결합하는 천국의 삶을 지향합니다. 따라서 두 전통의 차이는 한쪽은 실천을 중요하게 여기고 다른 한쪽은 믿음만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무엇을 바른 삶의 기준으로 삼으며, 그 삶을 가능하게 하는 생명의 근원을 어디에서 찾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말씀의 빛에서 참된 길은 단순히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행동하는 방법을 아는 데 머무르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14:6)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 길의 궁극적인 근원은 주님 자신이십니다. 인간은 주님에게서 받은 진리를 삶으로 실천해야 하며, 자신의 힘으로 선을 이루었다고 여기지 않고 그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왔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럴 때 바른 삶은 외적인 도덕적 성취를 넘어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깊어지며, 진리를 아는 삶과 선을 행하는 삶이 하나를 이루게 됩니다. (BU.007 해설)

 

요약

팔정도는 불교의 도성제를 이루는 핵심 수행의 길로서, 바른 이해와 의도, 언어와 행동, 생계와 노력, 알아차림과 집중을 통하여 고통과 윤회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을 지향합니다. 특히 지식과 행동을 분리하지 않고 삶 전체의 변화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귀중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팔정도를 단순한 도덕 수칙이나 심리적 안정의 방법으로 축소해서는 안 되며, 불교의 해탈과 말씀에서 말하는 거듭남을 동일시해서도 안 됩니다. 새 교회의 교리에 따르면 인간은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하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임으로써 거듭납니다. 그러므로 팔정도의 윤리적 통찰을 인정하되, 참된 선의 궁극적인 근원은 인간의 수행 자체가 아니라 주님이시며, 영적 삶의 목적은 그분과 결합하여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을 이루는 데 있음을 구별해야 합니다.

 

 

 

BU.006 ‘갈애와 집착을 소멸하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SL.BU.006 | 불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갈애와 집착을 소멸하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 멸성제의 해탈과 주님에게서 오는 참된 자유 해설인간은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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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IS.007 | 이슬람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참된 신앙의 중요한 기초다’ - 두려움과 사랑의 영적 질서

 

해설

이슬람에서 하나님을 경외(敬畏, reverence)하는 마음은 참된 신앙을 이루는 중요한 기초입니다. 이러한 경외와 깊이 연결되는 아랍어 개념이 ‘타크와’(taqwa)입니다. 타크와는 흔히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번역되지만, 단순히 형벌을 무서워하는 감정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의식하고 그분의 명령을 존중하며, 악을 경계하고 올바르게 살아가려는 경건함과 도덕적 책임까지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꾸란 3:102는 하나님을 마땅히 경외해야 한다고 가르치며, 49:13은 하나님 앞에서 가장 존귀한 사람이 가장 경건한 사람이라고 선언합니다. 특히 꾸란 2:177은 참된 의로움이 단순히 예배의 방향을 지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가난한 사람을 도우며 약속을 지키고 어려움 가운데 인내하는 삶과 관련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이슬람의 경외를 단순히 하나님의 형벌을 두려워하는 신앙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 안에는 하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자신의 욕망과 행동을 돌아보며, 선한 삶을 추구해야 한다는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서 한 가지 더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이 두려워서 그분을 거스르지 않는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의 뜻에 어긋나는 일을 피하는 것입니까?

 

성경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신앙의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잠1:7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선언하며, 잠8:13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또한 시111:10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경외는 하나님 앞에서 공포에 사로잡혀 판단과 의지를 잃어버리는 상태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이심을 인정하고, 그분의 거룩하심을 존중하며, 그분께 어긋나는 악을 멀리하는 태도입니다. 성경은 한편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가르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요일4:18은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라고 선언합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두려움의 성격을 구별하면 그 의미가 드러납니다. 형벌을 당할까 두려워하는 마음과 사랑하는 분을 거스르거나 그분에게서 받은 선을 해칠까 염려하는 마음은 같지 않습니다. 전자는 자기 자신이 당할 손해와 고통에 중심을 두지만, 후자는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과 그 사랑의 관계를 소중히 여깁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AC, 1749–1756) 3718항에서 두려움을 크게 두 종류로 구별합니다. 하나는 거룩하지 않은 두려움이고, 다른 하나는 거룩한 두려움(holy fear)입니다. 전자는 악인에게서 나타나는 두려움으로서 형벌이나 명예와 재산의 상실, 자신의 이익이 손상되는 일을 염려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반면 후자는 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두려움으로서 주님과 이웃에게 해를 끼치거나, 선과 진리를 손상시키는 일을 염려하는 마음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거룩한 두려움을 사랑에서 비롯되는 경외라고 설명합니다. 더 나아가 사랑에 거룩한 경외가 전혀 없다면 마치 소금이 빠진 음식처럼 그 사랑에 중요한 무엇이 결여된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경외는 사랑의 반대가 아니라 사랑 안에 있는 거룩한 조심스러움입니다. 사랑이 깊어질수록 상대를 잃을까 두려워하는 자기중심적인 불안은 줄어들지만, 그 사랑을 해치지 않으려는 마음은 오히려 깊어집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참된 경외의 본질은 형벌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사랑을 보호하려는 마음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같은 저작 5459항에서 예배의 상태에 따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의 성격도 달라진다고 설명합니다. 내적 예배가 없는 외적 예배에서는 두려움이 중심이 될 수 있지만, 영적 예배에서는 사랑과 거룩한 두려움이 함께하며, 천적 예배에서는 사랑과 거룩한 경외가 더욱 깊이 결합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단순히 두려움에서 사랑으로 교체된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이 변화함에 따라 두려움 자체의 성격이 달라진다는 뜻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벌이 두려워 악을 피하던 사람이 점차 악이 주님의 선과 진리를 거스르기 때문에 그것을 미워하게 되고, 마침내 선을 사랑하는 가운데 악을 피하게 됩니다. 이러한 변화가 거듭남(再生, regeneration)과 깊이 관련됩니다. 그러나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 언제나 무가치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직 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악의 결과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악을 멈추게 하는 외적 동기가 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두려움 자체가 참된 경외의 완성은 아닙니다. 주님은 인간이 두려움에 머무르지 않고 선을 이해하며 사랑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천국의 비밀’ 8925항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출20:20의 ‘하나님을 경외하여 범죄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는 말씀을 해설하면서, 거룩한 두려움은 사랑의 한 형태라고 설명합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부모와 자녀, 부부가 서로의 사랑을 해치는 일을 염려하는 마음과 같으며, 주님을 거스르거나 계명을 어기는 일을 피하려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경외는 하나님이 언제 자신을 벌하실지 몰라 불안해하는 상태가 아닙니다. 주님이 선 자체이시고 사랑 자체이시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분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소중히 여기는 상태입니다. 또한 이러한 경외는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랑하는 것을 자유롭게 지키려는 내적 의지에서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형벌을 피하려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면 그의 행동은 외적으로 정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짓 자체가 이웃을 해치고 주님의 진리를 거스르는 악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미워한다면, 그의 정직은 더욱 깊은 영적 토대를 갖게 됩니다. 이처럼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룩한 경외는 악을 피하는 행위와 선을 사랑하는 내적 생명이 결합된 상태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슬람의 타크와에 담긴 진리와 그 신학적 한계를 구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식하며 악을 경계하고, 정의와 자비를 실천하며,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려는 마음은 참된 경외와 연결될 수 있는 중요한 선입니다. 특히 타크와를 단순한 종교적 복종이 아니라 양심과 선행을 포함하는 삶의 태도로 이해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가르침과 일정한 접점을 가집니다. 그러나 경외를 하나님이 내리실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나 외적 명령의 준수에만 머물게 한다면, 그 경외는 아직 사랑의 내적 상태에 충분히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이슬람 신앙 전체의 오류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슬람에도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자발적인 경건을 강조하는 깊은 영적 전통이 있으며, 기독교에서도 형벌에 대한 두려움과 종교적 의무감에 머무는 신앙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판단해야 할 것은 특정 종교에 속해 있다는 사실보다 그 경외가 실제로 어떤 사랑에서 비롯되며, 어떤 삶의 열매를 맺는가 하는 점입니다. 다만 하나님을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나타내신 분으로 이해하는가 하는 신학적 차이는 여전히 남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 주님을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으로 인정하고 사랑하는 것이 참된 경외의 충만한 기초라고 가르칩니다.

 

이 문제는 종교적 권위와 인간의 양심을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이유로 종교 지도자의 말을 무조건 따르거나, 자신의 양심과 합리적인 판단을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참된 경외와 구별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 DP, 1764) 71항에서 인간이 자유에 따라 이성적으로 행동하도록 하는 것이 신적 섭리의 법칙이라고 설명합니다. 주님은 인간을 강제로 복종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유와 합리성 안에서 선을 선택하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참된 경외는 분별을 금지하거나 인간을 공포로 억압하는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일수록 자신이 행하는 일이 과연 선한지, 이웃에게 유익한지, 주님의 계명에 합당한지를 더욱 진지하게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가 깊다고 하면서 이웃을 멸시하거나 자신과 신앙이 다른 사람을 함부로 정죄한다면, 그 경외가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는 데서 비롯되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참된 경외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만드는 동시에 이웃 앞에서도 자신의 교만과 지배욕을 경계하게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이웃을 해치지 않으려는 마음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참된 신앙의 중요한 기초다’라는 이슬람의 고백에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인정해야 할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경외의 완성은 하나님을 얼마나 무서워하는가에 있지 않고,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며 그분의 선과 진리를 소중히 여기는가에 있습니다. 처음에는 형벌이 두려워 악을 피할 수 있지만,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악을 피하는 이유는 달라져야 합니다. 악이 자신에게 불이익을 가져오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을 해치기 때문에 그것을 멀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거룩한 두려움과 경외의 본질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도 같은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무서워서 순종합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이 기뻐하시는 선을 행하고 그분의 사랑을 해치는 악을 피합니까? 우리는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 정직하게 살아갑니까, 아니면 정직과 진실 자체를 사랑하기 때문에 거짓을 피합니까? 참된 경외는 하나님을 두려운 존재로만 바라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사랑 자체이시며 선 자체이심을 깊이 깨닫게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 안에서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도록 이끕니다. 그러므로 경외는 사랑에 이르기 위한 일시적인 단계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깊어질수록 더욱 거룩해지는 신앙의 내적 태도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장 깊은 이유는 그분이 우리를 벌하실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의 모든 선과 생명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IS.007 해설)

 

요약

이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피하고 정의와 선행을 실천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은 중요한 진리입니다. 특히 타크와를 경건과 양심, 도덕적 책임을 포함하는 삶의 태도로 이해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가르침과 접점을 가집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참된 경외는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나 외적 의무의 준수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거룩한 경외는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랑을 해치는 악을 피하려는 마음이며,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두려움은 사랑 안에서 거룩한 경외로 변화됩니다. 따라서 이슬람의 경외 자체가 오류인 것은 아니며, 경외를 공포와 외적 복종에만 한정하는 이해가 영적 한계를 지닙니다. 참된 경외의 완성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선과 진리의 근원으로 인정하고, 그분의 사랑에 따라 악을 피하며 선을 행하는 삶에 있습니다.

 

 

 

IS.006 ‘알라는 지극히 자비로우시며 완전하게 정의로우시다’

SL.IS.006 | 이슬람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알라는 지극히 자비로우시며 완전하게 정의로우시다’ - 신적 자비와 정의의 관계 해설이슬람은 알라를 지극히 자비로우시면서도 완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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