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통 교리를 믿으면 구원 받지만, 이단 교리를 믿으면 지옥 가’
‘정통 교리를 믿으면 구원받지만, 이단 교리를 믿으면 지옥 가.’ 개신교 안에서는 상당히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생각입니다. 실제로 교리는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믿느냐에 따라 신앙의 방향이 달라지고, 인간과 죄와 구원과 이웃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삶도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리는 아무래도 상관없고, 착하게만 살면 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거짓은 사람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 수 있으며, 진리는 사람이 선을 보고 그 선을 따라 살아가도록 밝혀 주는 빛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참된 교리는 구원에 중요하다’는 말과 ‘정통 교리를 가지고 있으면 구원받고 잘못된 교리를 가지고 있으면 지옥에 간다’는 말은 같은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전자는 진리의 중요성에 관한 말이지만, 후자는 자칫 구원을 일종의 ‘교리 시험’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죽은 뒤 주님 앞에서 신론, 기독론, 삼위일체론, 속죄론, 종말론에 관한 정답을 맞히면 천국에 들어가고, 몇 문제를 틀리면 지옥에 가는 것처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오히려 우리를 불편하게 합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여기 등장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주여 주여’라고 부르고,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했으며,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까지 행했다고 말합니다. 적어도 외적으로는 상당히 종교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들의 종교적 자기 인식보다 그들의 삶을 문제 삼으십니다.
이 점에서 사울은 매우 충격적인 사례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 스데반의 죽음에 찬성했던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이 하나님께 충성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 일에 찬성했습니다. 훗날 바울 자신도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많은 일을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고백합니다(행26:9). 그의 문제는 종교적 열심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진리라고 확신한 것이 실제 진리와 어긋나 있었다는 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더욱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사울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고 부르셨습니다(행9:4). 사울은 자신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박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너는 잘못된 교리를 믿었으므로 끝났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눈을 열어 주셨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먼저 그의 눈을 멀게 하심으로써 자신이 보고 있다고 믿었던 사람이 실제로는 보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셨고, 이후 다시 보게 하셨습니다.
이 장면은 ‘정통과 이단’의 문제를 생각할 때 매우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이 거짓을 진리라고 잘못 믿는 것과, 그것이 거짓임을 알면서도 자기 욕망을 지키기 위해 붙드는 것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태어난 가정과 사회와 종교적 환경에서 많은 것을 물려받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어떤 교리를 진리라고 배웠다면 그것을 의심하지 않고 평생 믿을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단지 그 사람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명제만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왜 그것을 믿었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빛 안에서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십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서 ‘거짓을 가지고 있는 것’과 ‘거짓을 사랑하는 것’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잘못된 것을 진리라고 믿고 있지만 마음으로는 선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 더 밝은 진리가 주어졌을 때 ‘내가 잘못 알고 있었구나’ 하며 기꺼이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매우 정확한 교리를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지위와 명예, 욕망을 지키기 위해 진리를 왜곡할 수 있습니다. 전자의 머릿속에는 거짓이 있지만 마음은 진리를 향해 열려 있을 수 있고, 후자의 머릿속에는 정통 교리가 있지만 마음은 진리를 이용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차이는 대단히 큽니다. 왜냐하면 사후세계에서는 인간이 가지고 있던 단순한 지식보다 그 지식을 무엇을 위해 사랑했는지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진리 자체와 선한 삶을 위해 사랑했던 사람은 잘못 알고 있던 부분이 있다면 그것을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그는 진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더 밝은 진리가 주어지면 기뻐합니다. 그러나 진리를 자기 우월감과 지배욕, 그리고 명예를 위해 사용했던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정통 교리조차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애초에 그가 사랑한 것은 진리가 아니라 진리를 소유한 ‘나’였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프로프리움’(proprium)이 종교 안으로 들어옵니다. 세속적인 프로프리움은 ‘내가 잘났다’고 말하지만, 종교적인 프로프리움은 훨씬 미묘합니다. ‘내가 옳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옳으신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자신이 이해한 것을 하나님 자신과 동일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내 교리에 반대한다’가 어느 순간 ‘하나님께 반대한다’가 되고, ‘내가 저 사람을 이단이라고 판단한다’가 ‘하나님께서 저 사람을 버리셨다’로 바뀝니다. 인간의 판단과 주님의 판단 사이의 경계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요16:2). 얼마나 두려운 말씀입니까. 사람을 죽이면서도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종교적 확신의 강도가 그 확신의 진실성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나는 진심으로 믿는다’와 ‘나는 진리를 믿는다’는 같은 말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단’이라는 구분 자체가 필요 없다는 뜻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교리는 분별해야 합니다. 주님이 누구신지,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선과 악이 무엇인지에 관한 거짓된 가르침은 실제로 사람을 해칠 수 있습니다. 사람의 탐욕과 음란, 지배욕을 정당화하는 교리라면 더욱 경계해야 합니다. 진리와 거짓의 차이를 없애 버리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무관심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 역시 모든 가르침이 똑같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무엇이 진리인지 더 깊이 분별하려는 작업입니다.
다만 ‘교리를 분별하는 것’과 ‘그 교리를 믿는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판결하는 것’을 구별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가르침은 성경과 맞지 않는다’, ‘이 부분은 거짓이라고 판단한다’, ‘이 가르침을 따라가면 이런 위험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그렇게 말해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곧바로 ‘그러므로 저 사람은 지옥 간다’고 넘어가면 우리는 교리의 분별에서 인간의 영원한 내면에 대한 심판으로 영역을 넘어간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를 대하는 태도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전통적 개신교의 기준으로 스베덴보리를 ‘이단’이라고 규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들이 스베덴보리를 이단이라고 하니 오히려 그들이 진짜 이단이다’라고 되받아친다면 똑같은 구조 안에 들어가 버립니다. 중요한 것은 이름표를 뒤집어 붙이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이 실제로 무엇을 말하는지 살피고, 그것이 성경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검토하며, 그 가르침이 사람을 주님께 더 가까이 가게 하는지, 악을 죄로 알고 피하게 하는지, 이웃을 사랑하고 체어리티(charity)를 행하게 하는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정통’이라는 말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통 교리를 소유하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진리는 빛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빛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그 빛 가운데 걷는 것은 다릅니다. 손에 등불을 들고 있으면서 정반대 방향으로 걸어갈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더 많은 진리를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더 큰 책임이 따릅니다. 무엇이 선인지 알면서 행하지 않고, 무엇이 악인지 알면서 의도적으로 행한다면 그 지식 자체가 사람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정통 교리를 가진 사람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나는 정통이므로 안전하다’는 생각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앞서 살펴본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으므로 안전하다’, ‘한번 구원받았으므로 안전하다’, ‘나는 교회 안에 있으므로 안전하다’와 놀랍도록 비슷합니다. 구원의 확신이 어느 순간 자기 성찰을 멈추게 하는 신분증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이단이고 나는 정통이다’라는 구분이 ‘그러므로 저 사람보다 나는 주님께 가깝다’는 결론으로 넘어가는 순간, 진리는 자신을 비추는 빛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재단하는 도구가 됩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훨씬 깊습니다. 어떤 사람이 무엇을 배울 기회를 가졌는지, 무엇을 진리라고 진실하게 믿었는지, 더 밝은 진리를 만났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려 했는지, 아니면 자기 사랑 때문에 거부했는지, 그리고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를 실제 삶에서 어떻게 사용했는지를 보십니다. 인간은 교리의 문장을 볼 수 있지만 주님께서는 그 교리를 품고 있는 사람의 사랑을 보십니다.
그렇다고 사랑만 있으면 진리는 필요 없다는 것도 아닙니다. 선은 진리를 필요로 하고 진리는 선을 향해야 합니다. 사랑만 강조하면서 무엇이 선인지 분별하지 않으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악을 허용할 수도 있고, 진리만 강조하면서 사랑을 잃으면 진리를 가지고 사람을 정죄하고 상처 입힐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끊임없이 말하는 선과 진리의 결합은 바로 이 지점에서 중요합니다. 참된 신앙은 ‘정확하게 아는 것’과 ‘선하게 사는 것’을 서로 떼어 놓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정통 교리를 믿으면 구원받지만, 이단 교리를 믿으면 지옥 가’라는 말에는 중요한 진리와 위험한 비약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진리는 분명 구원에 중요합니다. 그러나 진리를 소유한 것이 곧 구원을 소유한 것은 아닙니다. 거짓 역시 위험합니다. 그러나 잘못된 교리를 물려받았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인간이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결정적인 것은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진리와 선을 어떻게 받아들이며, 궁극적으로 무엇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형성되어 가느냐입니다.
그래서 질문은 ‘나는 정통인가, 저 사람은 이단인가?’에서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진리를 사랑하는가, 아니면 내가 옳다는 것을 사랑하는가?’입니다. 이 둘은 겉으로 매우 비슷해 보이지만 영적으로는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 틀렸다는 사실이 밝혀져도 진리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옳다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은 진리가 자기 생각을 무너뜨리면 진리와 싸우기 시작합니다. 사울이 다메섹 길에서 맞닥뜨린 것이 바로 이 경계였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진짜 이단’의 문제도 여기에서 다시 보아야 합니다. 가장 두려운 것은 어떤 교단의 이단 목록에 내 이름이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진리를 보여 주시는데도 내 욕망과 체면, 지위를 지키기 위해 그것을 거부하고, 내가 원하는 악을 선이라 부르며, 거짓을 진리라고 고집하는 상태입니다. 교리적 오류보다 더 깊은 곳에는 사랑의 왜곡이 있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질문에는 이렇게 답하고 싶습니다. ‘정통 교리는 구원의 귀중한 빛이지만 구원 그 자체는 아닙니다. 잘못된 교리는 사람을 어둡게 할 수 있지만, 그것을 잘못 배웠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을 지옥에 있다고 판결할 수도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사람이 무엇을 알고 있었는지만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선과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떤 사랑의 사람이 되었는지를 보십니다.’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정통 교리를 소유하는 것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를 받아들여 그 진리가 우리의 사랑과 삶을 변화시키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번 글의 핵심을 가장 날카롭게 압축한다면 이것이겠습니다.
‘주님 앞에서 더 중요한 질문은 나는 정통인가가 아니라 나는 진리를 사랑하는가, 아니면 내가 옳다는 것을 사랑하는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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