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2026/07/26)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40, ‘찬송으로 보답할 수 없는’, 86, ‘내가 늘 의지하는 예수입니다.

 

오늘 3 여덟 번째, 본문은 창3:20-22이고, AC 글 번호로는 280번에서 304번입니다. 오늘과 다음 주는 창3 전체 세 본문 중 마지막 본문(3:20-24)을 다룹니다. 이 창3 마지막 본문은 창3 전체, 나아가서 창1-3 전체를 압축한, 그러니까 태고교회의 일생을 요약한 결론입니다.  

 

먼저 본문입니다. 본문이 다섯 절로 짧아 전체를 읽겠습니다.

 

20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22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23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24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3:20-24)

 

제목은

 

하와, 가죽옷, 영생할까 하노라

 

이며, 다음은 AC.280-304입니다. 먼저 오늘 범위에 대한 요약 설명입니다. 오늘 범위는 글 수에 비해 내용, 그러니까 심화가 많아 페이지가 제법 됩니다.

 

먼저 요약입니다.

 

AC.280-286 (개요) 요약

 

3 마지막 부분은 태고교회와 그 후손들의 영적 역사를 전체적으로 요약하는 결론입니다. 처음에는 주님으로부터 직접 인도받던 천적 교회가 있었으나, 점차 자기 자신을 신뢰하고 감각을 따르면서 본래의 상태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결과 교회는 세대를 거듭할수록 점진적으로 쇠퇴하여, 마침내 홍수 직전에 이르는 완전한 영적 파멸의 상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쇠퇴는 한순간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여러 세대를 거치며 단계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첫 번째 후손에게는 아직 천적 영적 선이 남아 있었고, 두 번째와 세 번째 후손에게는 자연적 선이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네 번째 후손에 이르러서는 자연적 선마저 소멸하기 시작하였고, 다섯 번째 후손은 선과 진리를 잃어버린 채 거듭나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갔습니다.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후손은 선과 진리에 관한 기억 지식마저 상실하여 자기 사랑과 그릇된 확신 속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도 주님의 섭리는 결코 멈추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각 세대의 영적 상태에 맞는 선을 보존하시고,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는 거룩한 것을 함부로 접하여 모독(profanation)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하셨습니다. 가죽옷은 타락한 인간에게 남겨 두신 외적 선과 보호를, 생명나무를 지키는 그룹과 두루 도는 불칼은 거룩한 것을 모독하지 못하도록 지키시는 주님의 자비로운 섭리를 나타냅니다.

 

이처럼 창3은 단순히 아담과 하와의 범죄를 기록한 장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형성에서 시작하여 그 점진적인 타락과 종말, 그리고 그 모든 과정 속에서도 인간을 끝까지 보존하시고 새로운 구원의 길을 마련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압축하여 보여주는 장입니다. 이는 동시에 모든 시대의 교회와 각 개인의 거듭남과 타락의 과정을 함께 비추어 주는 보편적인 영적 역사이기도 합니다.

 

AC.287-291 (20절) 요약

 

3:20은 창세기 1장부터 3장까지 이어져 온 태고교회의 역사를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보게 하는 전환점입니다. 앞에서는 교회의 타락과 심판이 강조되었다면, 이제부터는 그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새로운 생명의 길을 준비하시는 섭리가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아담은 단순한 한 개인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천적인 사람, 곧 천적 인간을,아내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또한 하와’,모든 산 자의 어머니는 생명 자체이신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세상에 전하는 최초의 교회를 상징합니다. 그녀를 모든 산 자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은 교회가 모든 영적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주님에 대한 신앙의 삶은 단순히 신앙생활을 하는 것, 믿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실제 삶으로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태고교회는 주님을 사랑하였기에 선을 행하였고, 그 선 안에서 진리를 지각하였습니다. 곧 사랑과 신앙, 삶과 진리가 하나였던 천적 교회였습니다.

 

따라서 창3:20은 단순히 하와라는 이름이 정해진 사건이 아니라, 비록 타락의 이야기가 전개된 뒤에도 주님께서 교회를 완전히 버리지 않으시고, 생명을 이어 갈 새로운 소망을 준비하고 계심을 선언하는 말씀입니다. 이 절은 창3:20-24 전체의 출발점이자, 창세기 초반부를 관통하는 생명과 교회의 회복이라는 주제를 여는 첫 장면입니다.

 

AC.292-297 (21) 요약

 

3:21은 주님께서 타락한 인간을 버리지 않으시고, 그의 새로운 상태에 맞는 삶의 길을 마련해 주시는 장면입니다.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는 말씀은 단순히 몸을 가려 주셨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에게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가르치시고, 그것으로 살아가도록 인도하셨음을 의미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처음에는 주님으로부터 직접 퍼셉션을 받아 천적 선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러나 타락으로 그 상태를 잃자, 더 이상 내적 생명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그들의 현재 상태에 맞게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허락하시고, 그것을 통하여 다시 당신을 따를 수 있도록 새로운 삶의 질서를 마련하셨습니다.가죽옷은 바로 이러한 주님의 자비로운 교육과 보호를 상징합니다.

 

말씀의 이러한 의미는 겉 글자만으로는 드러나지 않습니다.가죽옷은 성경 전체에서 반복되는 상응의 한 예로서, 양과 숫양, 해달의 가죽, 성막의 덮개, 그리고 제사장의 의복 등과 서로 연결됩니다. 이들은 모두 체어리티(charity)에서 비롯된 영적 선과 자연적 선, 곧 사람의 내적 생명을 보호하고 삶 속에 나타나게 하는 외적 선을 의미합니다.

 

또한 태고교회가 처음에는 순진무구함(innocence)으로 인해 벌거벗었다 불렸으나, 타락 후에는 악을 의식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옷을 입었다는 것은 단순히 수치를 가렸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들을 악 가운데 그대로 두지 않으시고, 영적 선과 자연적 선으로 덮어 보호하셨음을 뜻합니다. 이는 교회의 생명이 가장 깊은 천적 상태에서 점차 외적인 상태로 옮겨 갔음을 보여줍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가장 깊은 천적 선은 옷이라는 걸 입지 않지만, 그보다 외적인 천적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은 의복으로 나타난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에스겔의 아름다운 옷, 이사야의 아름다운 옷’, 계시록의 흰옷은 모두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과 진리가 사람의 삶 속에 드러난 상태를 의미합니다. 반면 창3가죽옷은 아직 몸 안에 있는 인간에게 허락된 보다 외적인 선을 가리키며, 주님께서 타락한 인간을 끝까지 보호하시고 거듭남의 길을 이어 가시는 자비로운 섭리를 보여줍니다.

 

AC.298-304 (22) 요약

 

3:22는 주님께서 타락한 인간을 생명에서 배제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그를 더 깊은 영적 파멸로부터 보호하시는 자비로운 섭리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라는 말씀은 인간이 참으로 지혜로워졌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 선과 악을 판단하려는 상태에 이르렀음을 나타냅니다. 또한 우리라는 표현은 여러 신이나 여러 인격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천국과 하나 되어 당신의 신적 섭리를 이루시는 질서를 가리킵니다.

 

이어지는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는 말씀 역시 문자 그대로 영생을 막으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생명나무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생명 자체를 의미하며, 사람이 타락한 상태에서 그 거룩한 것에 참여하였다가 다시 그것을 거부하면 profanation에 빠져 돌이킬 수 없는 영적 파멸에 이르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막으신 것은 심판이 아니라 보호였습니다.

 

이 보호의 섭리는 이후의 성경 전체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주님께서 유대교회에 내적 진리를 모두 드러내지 않으시고, 복음서에서 많은 것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도 같은 이유였습니다. 사람의 영적 상태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을 때 깊은 진리를 충분히 알고도 그것을 부인하는 것은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profanation이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계시를 제한하신 것은 사람을 구원에서 제외하기 위함이 아니라, 장차 참된 회개와 거듭남의 가능성을 보존하시기 위한 자비였습니다.

 

이처럼 창3:22는 타락 이후의 인간을 향한 주님의 가장 깊은 보호의 섭리를 밝히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시면서도, 그가 감당할 수 없는 거룩한 것에 함부로 참여하여 영원한 파멸에 이르지 않도록 필요한 만큼만 진리를 허락하십니다. 이어지는 창3:24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칼은 바로 이러한 자비로운 보호가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보여주는 표상입니다.

 

 

이상 요약을 마치고, 아래는 AC 본문, 해설 및 심화입니다.

 

 

AC.280, 창3:20-24, ‘창3:20-24 본문, 개요’(AC.280-286)

창3:20-24 20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And the man [homo] called his wife’s name Eve, because she was the mother of all living.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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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81, 창3:20-24, ‘창3:20 개요’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And the man [homo] called his wife’s name Eve, because she was the mother of all living. (창3:20) AC.281 천적 교회였던 태고교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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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82, 창3:20-24, ‘창3:21 개요’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And Jehovah God made for the man and for his wife coats of skin, and clothed them. (창3:21) AC.282 그 첫 번째 후손에 관하여, 그 안에는 천적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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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83, 창3:20-24, ‘창3:22 개요’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And Jehovah God said, Behold, the man is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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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84, 창3:20-24, ‘창3:23 개요’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Therefore Jehovah God sent him forth from the garden of Eden, to till the ground from which he was taken. (창3:23) AC.284 다섯 번째 후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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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85, 창3:20-24, ‘창3:24 개요’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And he cast out the man; and he made to dwell from the east toward the garden of Eden c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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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86, 창3:20-24, ‘배경’

AC.286 이 장에서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은 태고 사람들과 그들의 거듭남에 관한 것입니다. 먼저 들짐승처럼 살던 사람들이 마침내 영적인 사람이 되는 과정을 다루었고, 이어서 천적인 사람이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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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87, 창3:20,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AC.287-291)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And the man [homo] called his wife’s name Eve, because she was the mother of all living. (창3:20) AC.287 여기서 ‘아담’(man, homo)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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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88, 창3:20, ‘아담’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창3:20) AC.288 ‘아담’(man, homo)이 태고교회의 사람, 곧 천적 인간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설명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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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89, 창3:20, ‘어머니’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창3:20) AC.289 ‘아내’(wife)가 교회를 의미한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설명했습니다. 또한 가장 넓은 의미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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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0, 창3:20, ‘산’(living)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창3:20) AC.290 교회를 ‘모든 산 자의 어머니’(mother of all living)라고 하는 것은, 생명 자체이신 주님에 대한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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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1, 창3:20, ‘창3:20-24는 태고교회 일생 요약본’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창3:20) AC.291 이 절에서는 교회가 처음으로 젊음의 꽃을 피우던 때, 곧 가장 아름답고 순수한 상태에 있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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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2, 창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AC.292-297)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And Jehovah God made for the man and for his wife coats of skin, and clothed them. (창3:21) AC.292 이 말씀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영적 선과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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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3, 창3:21, ‘가죽옷‘ 이야기, 우리를 속뜻의 세계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창3:21) AC.293 이러한 의미들은 말씀을 겉으로만 읽어서는 결코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분명 더 깊은 의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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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4, 창3:21, ‘가죽옷‘과 체어리티, 그리고 양(sheep)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창3:21) AC.294 또한 ‘가죽옷’(coat of skin)이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의미한다는 것도, 속뜻의 계시와 함께, 이어지는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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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5, 창3:21,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창3:21) AC.295 그들을 가리켜 ‘가죽옷을 입었다’(clothed with a coat of skin)고 한 까닭은 이렇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을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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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6, 창3:21, ‘가죽‘의 상응 원리, 성경 전체를 관통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창3:21) AC.296 새끼 염소와 양, 염소, 그리고 해달(badgers)과 숫양의 가죽이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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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7, 창3:21, ‘옷‘, 영적, 자연적 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창3:21) AC.297 천적 선은 옷 입지 않습니다. 그것은 가장 깊고 순진무구하기 때문입니다. 옷 입는 선은 천적 영적 선부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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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8, 창3:22,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AC.298-304)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And Jehovah God said, Behold, the man is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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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9, 창3:22, ‘두 가지 아르카나’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3:22) AC.299 여기에는 두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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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0, 창3:22, 첫 번째 아르카나, ‘여호와 하나님’(Jehovah God)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3:22) AC.300 첫 번째 아르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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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1, 창3:22, 두 번째 아르카나,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3:22) AC.301 또 하나의 아르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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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2, 창3:22, ‘AC.301 계속’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3:22) AC.302 이것이 바로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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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3, 창3:22, ‘AC.301-302의 결론’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3:22) AC.303 사람은 자신이 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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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4, 창3:22, ‘영생’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3:22) AC.304 이 모든 것으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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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다음 주에, 이어지는 본문인 23-24(AC.305-313)을 끝으로 창3 전체를 마치겠습니다. 다음 주(8/2)는 월의 첫 주 성찬 있습니다.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07-26(D1)

 

 

2661, 8, 창3.8, 2026-07-26(D1)-주일예배(창3,20-22, AC.280-304), ‘하와, 가죽옷, 영생할까 하노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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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7/19, 창3:16-19, AC.261-279), ‘주님을 떠난 사람, 끝까지 붙드시는 주님’

※ 오늘(2026/07/19)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39, ‘주 은혜를 받으려’, 찬85, ‘구주를 생각만 해도’입니다. 오늘은 창3 일곱 번째, 본문은 창3:16-19이고, AC 글 번호로는 261번에서 279번입니다.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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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4.심화

 

1. ‘13:18-19

 

18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사람의 영혼을 사냥하려고 손목마다 부적을 꿰어 매고 키가 큰 자나 작은 자의 머리를 위하여 수건을 만드는 여자들에게 화 있을진저 너희가 어찌하여 내 백성의 영혼은 사냥하면서 자기를 위하여는 영혼을 살리려 하느냐 19너희가 두어 움큼 보리와 두어 조각 떡을 위하여 나를 내 백성 가운데에서 욕되게 하여 거짓말을 곧이 듣는 내 백성에게 너희가 거짓말을 지어내어 죽지 아니할 영혼을 죽이고 살지 못할 영혼을 살리는도다 (13:18, 19) Ye hunt souls for my people, and save souls alive for yourselves, and ye have profaned me among my people, to slay souls that will not die, and to make souls live that will not live (Ezek. 13:18–19).

 

 

스베덴보리가 AC.304에서 겔13:18-19를 인용한 이유는 매우 분명합니다. 그는 앞에서 ‘영원히 산다’는 것이 단순히 존재가 계속된다는 뜻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상태 또는 영원한 죽음의 상태를 의미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를 성경 자체로 증명하기 위해, ‘살다’와 ‘죽다’가 영적 상태를 가리키는 대표적인 본문인 에스겔을 인용한 것입니다.

 

13은 거짓 선지자들을 책망하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는 대신, 거짓된 평안을 약속하고, 사람들의 영혼을 미혹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을 향해 ‘죽지 아니할 영혼을 죽이고 살지 못할 영혼을 살리는도다’ 말씀하십니다. 겉으로만 보면 이 말씀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죽지 아니할 영혼을 죽인다는 것도 이상하고, 살지 못할 영혼을 살린다는 것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육체의 생명과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생명과 영적 죽음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죽지 아니할 영혼들을 죽인다’는 것은, 원래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을 거짓 교리와 거짓 삶으로 미혹, 영적 생명을 잃게 만드는 것을 뜻합니다. 반대로 ‘살지 못할 영혼들을 살린다’는 것은, 실제로는 영적으로 죽어 있는 사람들에게 ‘너희는 안전하다’, ‘너희는 살아 있다’는 거짓 확신을 심어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거짓을 진리처럼, 죽음을 생명처럼 뒤바꾸는 것입니다.

 

이것은 AC.304의 주제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죽음’은 존재의 소멸이 아니라 ‘정죄와 지옥의 상태’이며, ‘생명’은 단순한 무엇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신앙의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에스겔의 ‘죽인다’와 ‘살린다’ 역시 육체의 생사 여부가 아니라, 사람을 영적 생명으로 인도하느냐, 영적 죽음으로 인도하느냐를 뜻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 인용은 창3 전체의 흐름과도 긴밀히 연결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사랑과 신앙의 깊은 진리를 알고도 그것을 자기 사랑에 종속시킴으로써 profanation에 빠졌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겉으로는 살아 있었지만, 영적으로는 죽음의 상태에 들어갔습니다. 이것이 바로 스베덴보리가 ‘영원히 산다’를 ‘영원한 정죄 가운데 산다’ 해석하는 이유입니다. 사람은 영원히 존재하지만, 그 존재가 주님의 생명을 누리는 생명일 수도 있고, 자기 사랑과 거짓 속에 머무는 ‘죽음의 삶’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에스겔의 거짓 선지자들은 이러한 상태를 더욱 굳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그들은 악한 사람에게는 거짓된 생명을 약속하고, 선을 향하는 사람에게는 낙심과 절망을 안겨 줍니다. 다시 말하면, 생명과 죽음의 기준을 사람의 눈으로 뒤집어 버립니다. 이것이야말로 창3에서 뱀이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말했던 거짓과 같은 본질입니다. 하나님께서 죽음이라 하신 것을 생명이라 부르고, 참된 생명을 가리키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겔13을 인용한 이유는 하나입니다. 성경에서 ‘살다’와 ‘죽다’라는 말은 본래 영적 상태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창3:22의 ‘영생’ 역시 육체의 불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선택한 사랑의 상태 안에서 영원히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일 그 상태가 주님을 떠난 자기 사랑과 거짓이라면, 그것은 존재는 계속되지만 실상은 ‘죽음의 삶’이며, 이것이 AC.304에서 말하는 ‘영생’의 역설적인 의미입니다.

 

 

 

AC.304, 창3:22, ‘영생’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3:22) AC.304 이 모든 것으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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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3:22)

 

AC.304

 

이 모든 것으로부터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lest he put forth his hand, and take also of the tree of lives, and eat, and live to eternity)라는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가 분명해집니다. ‘생명나무에서 따 먹는다(take of the tree of lives and eat)는 것은 사랑과 신앙에 속한 것들을 알고, 더 나아가 그것들을 인정하는 것까지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생명들(lives)이 복수형으로 쓰인 것은 사랑과 신앙을 뜻하기 때문이며, ‘먹는다(eat)는 것은 앞에서와 같이 안다를 의미합니다. ‘영생한다(live to eternity)는 것은 육체 안에서 영원히 사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 영원한 정죄 가운데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을 죽은 상태에 있는(dead)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육체의 생명이 끝난 뒤 존재가 소멸되기 때문이 아니라, 죽음의 삶을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죽음(death)은 정죄와 지옥을 의미합니다. 이와 비슷한 의미로 에스겔에서도 살다(live)라는 표현이 사용됩니다. From all this it is evident what is meant by the words, “lest he put forth his hand, and take also of the tree of lives, and eat, and live to eternity.” To “take of the tree of lives and eat” is to know even so as to acknowledge whatever is of love and faith; for “lives” in the plural denote love and faith, and to “eat” signifies here as before, to know. To “live to eternity” is not to live in the body to eternity, but to live after death in eternal damnation. A man who is “dead” is not so called because he is to die after the life of the body, but because he will live a life of death, for “death” is damnation and hell. The expression to “live,” is used with a similar signification by Ezekiel:

 

18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사람의 영혼을 사냥하려고 손목마다 부적을 꿰어 매고 키가 큰 자나 작은 자의 머리를 위하여 수건을 만드는 여자들에게 화 있을진저 너희가 어찌하여 내 백성의 영혼은 사냥하면서 자기를 위하여는 영혼을 살리려 하느냐 19너희가 두어 움큼 보리와 두어 조각 떡을 위하여 나를 내 백성 가운데에서 욕되게 하여 거짓말을 곧이 듣는 내 백성에게 너희가 거짓말을 지어내어 죽지 아니할 영혼을 죽이고 살지 못할 영혼을 살리는도다 (13:18, 19) Ye hunt souls for my people, and save souls alive for yourselves, and ye have profaned me among my people, to slay souls that will not die, and to make souls live that will not live (Ezek. 13:18–19).

 

 

해설

 

앞글인 AC.303에서는 주님께서 왜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셨는지가 설명되었다면, 본문인 AC.304에서는 ‘영생한다’는 말의 참뜻이 무엇인지가 밝혀집니다. 사람은 흔히 ‘영원히 산다’는 표현을 긍정적인 의미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말씀에서는 반드시 그렇지 않습니다. 천국에서도 영원히 살고, 지옥에서도 영원히 삽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말하는 ‘영생한다’는 것은 영원한 생명(blessed eternal life)이 아니라, 영원한 정죄의 상태가 계속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생명나무에서 먹는다’는 표현을 설명합니다. 여기서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알고 인정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또한 ‘생명들(lives)이 복수형으로 쓰인 것은 말씀에서 참된 생명이 사랑과 신앙이라는 두 요소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생명나무를 먹는다는 것은 사랑과 신앙의 가장 깊은 진리들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이 그러한 거룩한 진리를 받아들인 뒤에도 악한 사랑을 버리지 않는 경우입니다. 그때 그 진리는 사람 안에서 생명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profanation의 대상이 됩니다. 이미 인정한 진리를 의도적으로 거스르고 부정하게 되면,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이 한 사람 안에 뒤섞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앞글, 그리고 뒤에 나오는 24절에서 주님께서 그룹과 두루 도는 불칼로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신 이유였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볼 때, 본문의 ‘영원히 산다’는 표현은 매우 역설적입니다. 사람은 죽어서 존재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삶이 주님과 함께하는 생명이 될 수도 있고, 자기 사랑과 거짓 가운데 머무는 ‘죽음의 삶’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이란 존재가 사라진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는 지옥의 생명을 살아가는 사람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스베덴보리의 독특한 ‘죽음’의 개념을 보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죽음은 육체의 생명이 끝나는 사건을 의미하지만, 말씀의 내적 의미로 죽음은 주님으로부터 분리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반대로 생명이란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신앙 안에서 사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천국과 지옥의 차이는 존재의 유무가 아니라, 어떤 생명을 살아가느냐의 차이입니다.

 

이 때문에 에스겔의 말씀도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됩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가리켜 ‘죽지 아니할 영혼을 죽이고 살지 못할 영혼을 살리는도다’ 말합니다. 이는 그들이 사람들의 영적 상태를 뒤바꾸어, 주님께 속한 사람들을 넘어지게 하고, 거짓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거짓된 안전을 주는 일을 의미합니다. 곧 생명과 죽음의 기준을 사람의 판단으로 뒤집어 놓는 것입니다.

 

AC.304는 생명과 죽음의 참된 의미를 다시 정의합니다. 참된 생명은 단순히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신앙 안에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반대로 참된 죽음은 존재의 소멸이 아니라, 주님과 분리된 사랑 가운데 영원히 머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신 것은 사람에게 생명을 빼앗으시기 위함이 아니라, 가장 거룩한 진리가 profanation 되어 영원한 죽음의 삶으로 굳어지는 것을 막으시기 위한 자비의 섭리였음을 본문은 다시 한번 보여줍니다.

 

 

심화

 

1. ‘13:18-19

 

 

AC.304, 심화 1, ‘겔13:18-19’

AC.304.심화 1. ‘겔13:18-19’ 18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사람의 영혼을 사냥하려고 손목마다 부적을 꿰어 매고 키가 큰 자나 작은 자의 머리를 위하여 수건을 만드는 여자들에게 화 있을진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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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3, 창3:22, ‘AC.301-302의 결론’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3:22) AC.303 사람은 자신이 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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