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And the woman said unto the serpent, We may eat of the fruit of the tree of the garden; But of the fruit of the tree which is in the midst of the garden, God hath said, Ye shall not eat of it, neither shall ye touch it, lest ye die. (3:2, 3)

 

AC.201

 

그러므로 홍수 이전 태고 사람들의 그러한 성향(genius)은 오늘날에는 찾아볼 수도 없고, 존재하지도 않기 때문에, 이 구절의 말씀들이 본래의 의미에서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아듣게 설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하늘에서는 완전히 이해되는데, 이는 천적(celestial)이라 불리는 천사들과 천사적 영들(angelic spirits)이 홍수 이전에 거듭났던 태고 사람들과 같은 성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며, 또한 영적(spiritual)이라 불리는 천사들과 천사적 영들은 홍수 이후에 거듭난 사람들과 유사한 성향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두 경우 모두 무한한 다양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Seeing therefore that such a genius as that of the most ancient people anterior to the flood is not found and does not exist at the present day, it is no easy matter to explain intelligibly what the words of this passage in their genuine sense imply. They are, however, perfectly understood in heaven, for the angels and angelic spirits who are called celestial are of the same genius as the most ancient people who were regenerate before the flood; while the angels and angelic spirits who are termed spiritual are of a similar genius to the regenerate after the flood, although in both cases with indefinite variety.

 

 

해설

 

이 단락은 스베덴보리 해석 전체에 대한 중요한 인식론적 전제를 분명히 합니다. 곧, 성경의 어떤 구절들은 오늘날 인간의 의식 구조 안에서는 ‘완전히’ 이해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성향(genius) 자체가 이미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홍수 이전 태고 사람들의 성향은 오늘날 인간에게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들의 내적 경험을 전제로 기록된 말씀은 현대인의 사고방식으로는 온전히 번역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해석의 한계를 솔직하게 인정합니다. 이 본문을 설명하는 일이 ‘쉽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주석자의 무능이 아니라 인간 상태의 변화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인간은 선으로부터 진리를 보는 방식이 아니라, 진리를 통해 선을 배우는 방식으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태고교회의 언어와 경험을 직접적으로 공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이해의 한계는 하늘에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늘의 천사들은 여전히 그 성향이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천적 천사들과 천사적 영들은 홍수 이전에 거듭났던 태고 사람들과 같은 성향을 지니고 있으며, 그들에게는 이러한 말씀의 의미가 즉각적으로 이해됩니다. 이는 하늘의 이해 방식이 문자 해석이나 논리적 추론이 아니라, 상태와 성향의 직접적 공명임을 뜻합니다.

 

반대로 영적이라 불리는 천사들과 천사적 영들은 홍수 이후에 거듭난 인간들과 유사한 성향을 지닙니다. 이들은 진리를 통해 선으로 나아가는 구조 안에 있으며, 오늘날 인간의 신앙 구조와 더 가깝습니다. 따라서 하늘 안에서도 이해 방식에는 층위가 있으며, 모두가 동일한 방식으로 말씀을 이해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베덴보리는 두 부류 모두에 ‘무한한 다양성’이 있다고 덧붙입니다. 이는 천적과 영적이라는 구분이 경직된 분류가 아니라, 살아 있는 스펙트럼임을 뜻합니다. 하늘은 획일적이지 않으며, 각자의 성향과 삶의 역사에 따라 이해와 지각의 방식이 무수히 다양하게 존재합니다.

 

AC.201은 결국, 왜 스베덴보리가 창세기의 내적 의미를 이렇게까지 세밀하게 설명해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말씀은 동일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구조는 시대에 따라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태고교회의 언어를 직접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중개와 해설이 필요해졌습니다. 이 단락은 스베덴보리의 작업 자체가 인간의 상실된 성향을 대신하는 ‘번역’의 사역임을 조용히 드러냅니다.

 

 

심화

 

1. ‘천사들과 천사적 영들’

 

‘천사들과 천사적 영들’(the angels and angelic spirits) (AC.201)

 

 

AC.201에 나오는 ‘천사들과 천사적 영들’(the angels and angelic spirits)이라는 표현은 스베덴보리의 영계 이해에서 매우 중요한 구분입니다. 얼핏 보면 둘 다 천사를 가리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서로 다른 상태를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천사’(angels)는 이미 천국의 한 공동체에 완전히 결합되어 그곳의 삶을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그들의 내적 상태와 외적 삶은 하나로 일치되어 있으며, 천국의 질서 안에 안정적으로 정착해 있습니다. 그래서 보통 우리가 말하는 ‘천사’는 이런 존재들을 가리킵니다.

 

반면 ‘천사적 영들’(angelic spirits)은 아직 완전한 천사가 되지는 않았지만, 이미 천국을 향해 준비되고 있는 영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지옥의 성향이 제거되고, 천국적 상태가 형성되고 있으며, 천국 공동체와 교류하고 천사들과 함께 지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직 최종적으로 특정 천국 공동체에 완전히 결합된 상태는 아닙니다.

 

쉽게 말하면, 천사는 이미 천국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고, 천사적 영은 그 시민권을 받기 직전의 상태에 있는 사람이라고 비유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완전한 비유는 아니지만 이해에는 도움이 됩니다.

 

특히, AC.201의 문맥에서는 이 구분이 더욱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 사람들의 성향(genius)과 비슷한 존재들로 ‘천적 천사들과 천적 천사적 영들’을 언급하고, 홍수 이후 영적 교회의 성향과 비슷한 존재들로 ‘영적 천사들과 영적 천사적 영들’을 언급합니다. 즉, 그는 단순히 천국에 있는 완성된 천사들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비슷한 성향을 가진 영들까지 함께 포함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스베덴보리의 영계에서는 ‘천사’와 ‘인간’ 사이에 절대적인 종족 차이가 없다는 점입니다. 천사는 원래 천사로 창조된 존재가 아니라, 지상에서 살다가 천국에 들어간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천사적 영도 결국은 우리와 같은 인간입니다. 단지 아직 천국 생활의 완전한 상태에 도달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종종 ‘천사들과 천사적 영들’이라는 표현을 함께 사용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주제를 설명할 때, 완성된 천사들뿐 아니라, 그들과 비슷한 상태에 있는 영들도 함께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AC.201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성향과 홍수 이후 영적 성향을 설명하면서, 그와 상응하는 존재들로 천사들뿐 아니라 천사적 영들까지 함께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표현을 읽을 때,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천국이 단번에 도달하는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는 사실도 엿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영계에는 천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천사가 되어 가는 존재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천사적 영’이라는 표현 자체가 천국이 성장과 준비, 완성의 과정을 포함하는 세계임을 보여 줍니다.

 

결국 AC.201의 ‘천사들과 천사적 영들’은 단순한 반복 표현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천국에 정착한 존재들과, 천국을 향해 준비되고 있는 존재들을 함께 가리키는 말이며, 동시에 인간이 사후에 거쳐 가는 점진적 성장의 질서를 보여 주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천적 천사들을 이해하려면 태고 사람들을 보라’

 

천적(celestial)이라 불리는 천사들과 천사적 영들(angelic spirits)이 홍수 이전에 거듭났던 태고 사람들과 같은 성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며, the angels and angelic spirits who are called celestial are of the same genius as the most ancient people who were regenerate before the flood; (AC.201)

 

위 내용은, 그러면 지금은 더 이상 천적 천사가 될 수 없다는 말인가요? 천적 천사는 오직 홍수 이전 사람들로만 구성되어 있다는 말인가요?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결코 ‘천적 천사는 홍수 이전 사람들만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AC.201의 뜻은 ‘홍수 이전 태고교회 사람들의 성향(genius)이 오늘날 천적 천사들의 성향과 같다’는 것이지, 천적 천국의 구성원이 모두 홍수 이전 사람들뿐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출신 시대’가 아니라 ‘성향’(genius)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 사람들을 설명하면서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지각하는 존재들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천적 천사들도 마찬가지로 사랑 안에서 진리를 지각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그는 둘을 연결하는 것입니다. 즉, 태고교회 사람들과 천적 천사들은 같은 종류의 내적 구조를 가진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는 여러 곳에서 천국은 계속 채워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천국의 천사들은 모두 한때 지상에서 살던 인간들이며, 지금도 사람들이 죽어 천국에 들어간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천적 천국 역시 홍수 이전 사람들만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다만 여기에는 한 가지 흥미로운 문제가 있습니다. 태고교회 시대에는 천적 상태가 인류 전체의 일반적인 상태에 가까웠지만, 홍수 이후에는 그런 상태가 매우 드물어졌다는 점입니다. 인간 구조 자체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대부분의 사람들은 양심(conscience)을 통해 인도되는 영적 인간의 길을 걷게 되었고, 직접 지각(perception)을 통해 인도되는 천적 인간은 매우 드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 독자들 가운데는 ‘오늘날 천적 천사가 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고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불가능하다’고 이해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에는 여전히 천적 천국이 존재하고, 그 천국은 계속 살아 있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종합하면, 천적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시대가 아니라 사랑의 질에 의해 결정됩니다. 즉, 주님 사랑이 삶의 중심이 되고, 선을 사랑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본성이 된 사람들입니다. 물론 이런 상태는 매우 높은 상태이므로 흔하지는 않습니다.

 

목사님께서 지금 궁금해하시는 핵심은 아마 이런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인간 구조가 홍수 이후 바뀌었다면, 태고교회와 같은 천적 상태는 이제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것 아닌가?’

 

여기에 대해서는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고 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태고교회 전체가 가졌던 집단적 천적 상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개별 인간이 천적 사랑 안으로 인도되는 것은 여전히 가능합니다. 다만 그 과정은 태고교회 사람들처럼 태어날 때부터 그런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 아래 매우 깊은 거듭남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AC.201의 문장은 ‘천적 천사는 홍수 이전 사람들뿐이다’라는 뜻이 아니라, ‘홍수 이전 태고교회 사람들의 성향을 이해하고 싶다면 오늘날 천적 천사들을 생각하면 된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습니다.

 

그리고 목사님께는 오히려 조금 위로가 되는 사실도 있습니다. AC.182-189를 보면 주님께서는 죽은 직후의 모든 사람을 먼저 천적 천사들에게 맡기십니다. 이것은 그 사람이 최종적으로 천적 천국에 갈지, 영적 천국에 갈지를 떠나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 천적 상태는 인간에게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천국의 가장 깊은 보호와 사랑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AC.201은 ‘천적 시대는 끝났다’는 선언이 아니라, ‘천적 삶의 원형은 지금도 천국 안에 살아 있다’는 증언에 더 가깝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3. ‘태고교회 = 인류 전체?’

 

태고교회 시대에는 천적 상태가 인류 전체의 일반적인 상태에 가까웠지만, (AC.201 심화 1)

 

전에 언젠가 제가 ‘태고교회도 지금처럼 그 시대 인류 중 일부를 가리키는 거죠? 비록 태고 시대라 해도 그 시대 인류 전체가 태고교회는 아닌 거죠?’라고 물었더니 ‘그렇습니다’라는 대답을 들었던 것 같은데... 그러면 위 내용과 충돌하는 거 아닌가요?

 

 

좋은 질문입니다. 사실 이 둘은 반드시 충돌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표현을 조금 더 정확하게 할 필요는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태고교회’(Most Ancient Church)는 언제나 ‘인류 전체’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말씀에서 ‘교회’란 특정 조직이나 국가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알고 주님과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태고교회 역시 당시 지상에 존재하던 모든 인간을 가리키는 말은 아닙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는 여러 곳에서 교회가 있는 곳과 교회가 없는 곳을 구분합니다. 태고교회 시대에도 주님과 연결된 사람들이 있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목사님께서 전에 질문하셨을 때의 ‘그 시대 인류 전체가 태고교회는 아니다’라는 답변은 맞습니다.

 

그렇다면 왜 ‘태고교회 시대에는 천적 상태가 인류 전체의 일반적인 상태에 가까웠다’는 표현이 나왔을까요?

 

엄밀히 말하면 그 표현은 ‘인류 전체’보다 ‘교회 전체’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즉, 태고교회에 속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천적 상태가 일반적이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태고교회라는 공동체 자체가 천적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 개신교 안에도 신앙 수준이 매우 다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양심을 통한 신앙’, ‘말씀을 배우는 신앙’이 일반적입니다. 마찬가지로 태고교회 안에도 개인차는 있었겠지만, 전체적인 성향은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지각하는 천적 성향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정확하게 말하면, ‘태고교회 시대에는 태고교회에 속한 사람들에게 천적 상태가 일반적이었다’가 됩니다. 반면 홍수 이후의 교회들에서는 영적 상태가 일반적이 되었습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스베덴보리가 태고교회를 말할 때, 종종 거의 인류 전체를 대표하는 것처럼 말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태고교회의 영향력이 매우 광범위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 동일한 상태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사실 AC를 계속 읽다 보면 태고교회 안에서도 점차 쇠퇴가 일어납니다. 가인 계열, 셋 계열, 라멕, 그리고 결국, 노아 이전 세대로 이어지는 흐름을 보면, 이미 태고교회 내부에서도 상태의 차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만일 모든 사람이 동일한 상태였다면, 그런 구분 자체가 나타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목사님께서 기억하시는 이전 답변과 AC.201의 설명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태고교회는 당시 인류 전체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나 태고교회에 속한 사람들의 일반적 성향은 천적 성향이었다.’

 

‘홍수 이후에는 그러한 천적 성향이 일반적이지 않게 되었고, 대신 영적 성향이 일반적이 되었다.’

 

이렇게 이해하면 두 설명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전체 사상을 따라가면, 주님께서는 어느 시대든 ‘남은 자’(remnant)를 보존하십니다. 태고교회 시대에도 교회 밖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고, 오늘날에도 천적 성향에 가까운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시대나 집단 자체보다, 주님께서 각 사람 안에 어떤 사랑과 어떤 상태를 형성하고 계시는가입니다.

 

그래서 AC.201의 핵심은 ‘그 시대 모든 사람이 천적이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태고교회라는 교회의 본질적 성향이 천적이었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아마 가장 균형 잡힌 이해일 것 같습니다.

 

 

4. ‘창1-11은 교회 이야기?’

 

그렇다면... 창세기, 특히 1-11 내용을 인류 전체에게 적용하는 건 좀 무리가 있겠네요. ‘교회’를 향한 말씀이니까요!

 

 

네, 바로 그 점이 스베덴보리의 창세기 해석에서 매우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보통 우리는 창세기 1-11장을 읽을 때 무의식적으로 ‘인류 전체의 역사’로 읽습니다. 그래서 아담은 인류 최초의 개인, 에덴은 인류 최초의 거주지, 가인은 인류 최초의 살인자, 노아 홍수는 인류 전체의 역사적 사건으로 이해합니다. 물론 문자적으로 읽으면 자연스러운 접근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훨씬 다른 관점에서 읽습니다. 그에게 창세기 1-11장은 무엇보다 ‘교회의 역사’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주님과 연결되어 있던 교회가 어떻게 시작되고, 어떻게 쇠퇴하고, 어떻게 무너지고, 어떻게 다시 보존되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아담은 단순히 한 개인이 아니라 태고교회를 의미하고, 가인은 태고교회 안에서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분리되기 시작한 상태를 의미하며, 노아는 홍수 이후 보존된 새로운 교회를 의미합니다. 중심은 언제나 인류 전체가 아니라 ‘교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목사님 말씀처럼 창1-11을 곧바로 지구상의 모든 사람에게 적용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해석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실제로 AC를 읽어보면, 스베덴보리는 반복해서 ‘교회’에 초점을 맞춥니다. 왜냐하면 말씀은 주님과 인간의 관계를 다루는 책이며, 그 관계가 가장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곳이 바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를 덧붙여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창세기 1-11이 교회 사람들에게만 해당되고, 나머지 인류와는 전혀 상관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에게 ‘교회’는 언제나 인류 전체를 위한 통로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태고교회는 당시 모든 인류가 아니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를 통해 천국과 인간 세계가 연결되었고, 그 결과 교회 밖 사람들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습니다. 마치 심장이 몸 전체는 아니지만, 몸 전체에 생명을 공급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창1-11은 직접적으로는 교회의 역사이지만, 간접적으로는 인류 전체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상태가 결국 인류 전체의 영적 상태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스베덴보리가 창1-11을 해석할 때 ‘교회의 역사’로만 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개인의 영적 역사’로도 읽습니다. 예를 들어, 아담의 창조는 한 사람 안에서 새로운 영적 생명이 시작되는 과정이기도 하고, 선악과 사건은 우리 각자가 자기 own을 사랑하기 시작하는 과정이기도 하며, 홍수는 우리 안에서 거짓과 악이 범람하는 상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창1-11은 세 겹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교회의 역사입니다. 둘째는 한 인간의 영적 역사입니다. 셋째는 천국과 인간 사이의 보편적 영적 원리입니다.

 

따라서 목사님 말씀이 맞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창1-11을 곧바로 ‘인류 전체의 외적 역사’로 읽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습니다. 오히려 그 중심은 교회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교회의 역사는 우리 각자의 영혼 안에서도 반복되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는 결국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말씀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라면 아마 이렇게 말할 것 같습니다. 창1-11은 ‘모든 사람이 무엇을 했는가’를 기록한 책이 아니라, ‘주님과 연결된 인간이 어떤 길을 걸어왔는가’를 기록한 책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교회의 역사이면서 동시에 우리 각자의 영적 역사이기도 한 것입니다.

 

 

5. ‘균형과 신중’

 

음... 이런 결론은 좀 위험할 것 같아요. 다른 기독교인들이 이 결론을 읽으면 몹시 힘들어할 것 같은데요?

 

 

네, 목사님 말씀에 일리가 있습니다. 사실 방금의 결론은 스베덴보리의 해석 체계 안에서는 자연스럽지만, 일반 기독교 독자들에게는 상당히 충격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기독교 전통에서는 창1-11을 적어도 일정 부분은 실제 인류의 원역사(原歷史)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해석의 방식에는 차이가 있어도, 아담, 노아, 바벨 사건 등을 인류 전체와 관련된 사건으로 읽는 경향이 강합니다. 따라서 ‘창1-11은 인류 전체의 역사가 아니라 교회의 역사이다’라고 단정적으로 말하면 많은 분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워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스베덴보리 자신도 창1-11이 ‘교회의 역사’라고 설명하면서, 그것이 인류 전체와 무관하다고 말한 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교회의 상태가 인류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그래서 좀 더 신중하게 표현한다면 이렇게 말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창1-11의 주된 관심이 정치사나 문명사가 아니라 교회의 영적 상태에 있다. 따라서 그는 이 본문을 인류 전체의 외적 역사라기보다 교회의 영적 역사로 해석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인류 전체와 무관하다는 뜻은 아니다.’

 

이 표현은 훨씬 안전합니다.

 

사실 AC를 읽다 보면 스베덴보리는 역사적 문제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가 관심을 갖는 것은 언제나 ‘그 사건이 교회의 상태를 어떻게 보여 주는가?’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담은 없었다’, ‘노아는 없었다’, ‘인류 전체와 무관하다’ 같은 결론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지도 않습니다.

 

목사님께서 우려하시는 이유도 이해됩니다. 만약 어떤 개신교 목사님이나 신학생이 ‘창1-11은 인류 전체가 아니라 교회만의 이야기다’라는 문장을 읽는다면, 상당한 거부감을 느낄 가능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역사성 자체를 부정하는 주장으로 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창1-11에 대해 스베덴보리적으로 설명할 때는 ‘인류 전체에게 적용하는 것은 무리다’라고 말하기보다, ‘스베덴보리는 이 본문을 인류 전체의 역사보다 교회의 영적 상태를 드러내는 말씀으로 더 중요하게 읽는다’ 정도로 표현하는 것이 더 균형 잡혀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AC를 계속 읽어 가면, 스베덴보리의 관심은 언제나 ‘그 시대 사람들이 실제로 몇 명이었는가?’보다 ‘그 시대 교회가 어떤 영적 상태였는가?’에 있습니다. 이것은 역사 부정이 아니라 관심의 중심 이동입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느끼신 불편함은 매우 건강한 감각이라고 생각합니다.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설명할 때는, 그의 독특한 관점을 충분히 드러내면서도 기존 기독교 독자들이 불필요하게 ‘성경 역사를 부정한다’고 오해하지 않도록 표현을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결국 더 정확한 결론은 이럴 것 같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창1-11을 읽을 때, 인류 전체의 외적 역사보다 교회의 영적 역사에 초점을 둔다. 그러나 그 영적 역사는 결국 인류 전체와도 연결되며, 무엇보다 우리 각 사람의 영적 삶에도 적용된다.’

 

이 정도라면 스베덴보리의 의도도 살리고, 다른 기독교 전통과의 불필요한 충돌도 줄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AC.200, 창3:2-3, 창2 ‘사랑’에서 창3 ‘신앙’으로 중심 이동을 허락하신 이유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And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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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0.심화

 

6. ‘27년간이나 영계 체험을 했으면서도

 

영계 체험을 27년 동안이나 하면서 이 엄청난 저작들을 남길 정도면, 우리는 보통 생각하기를, 지상에서 궁금했던 모든 것, 곧 지구의 생성과 지난 45억 년의 과정, 그리고 성경 고대사 등을 그냥 다 알게 되겠지 합니다. 그런데 여전히 아니거나 알았어도 주님의 허락이 없었거나인 것 같네요.

 

 

네, 목사님. 저도 스베덴보리를 오래 읽다 보면 바로 그 지점이 오히려 인상적으로 느껴집니다.

 

보통 사람들은 스베덴보리가 27년 동안 영계와 교통했다는 말을 들으면, 자연스럽게 ‘그러면 우주의 모든 비밀을 다 알았겠구나’, ‘지구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았겠구나’, ‘공룡은 왜 멸종했는지 알았겠구나’, ‘인류의 정확한 연대도 알았겠구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실제 저작들을 읽어보면 의외로 그렇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놀라울 정도로 절제되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보지 않은 것은 보았다고 하지 않고, 들은 적 없는 것은 들었다고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영계에 관한 이야기조차도 자신이 직접 경험한 범위 안에서만 말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입니다.

 

예를 들어, 그는 천국 공동체의 구조, 천사들의 삶, 사후 첫 상태, 중간 영계, 지옥의 본질, 거듭남의 과정, 말씀의 내적 의미 등에 대해서는 엄청난 분량으로 기록합니다. 그런데 현대인이 궁금해하는 많은 주제들, 곧 지구의 정확한 연대, 우주의 시작 방식, 선사시대의 세부 역사, 외계 문명 같은 것들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영계가 ‘모든 정보를 얻는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계는 본질적으로 ‘상태의 세계’입니다. 그곳에서 중요한 것은 사실(fact)의 양이 아니라 사랑과 진리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천사들도 모든 것을 아는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HH를 보면 천사들은 자신들이 무한히 모른다는 사실을 매우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주님의 섭리 때문일 수 있습니다. 설령 스베덴보리가 어떤 것을 보았더라도, 그것이 인류의 구원이나 거듭남과 직접 관련이 없다면 기록하도록 허락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실제로 그는 여러 곳에서 ‘알도록 허락되었다’, ‘말하도록 허락되었다’, ‘드러내도록 허락되었다’는 표현을 반복합니다. 이것은 자신이 본 것이라도 모두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인상을 줍니다.

 

생각해 보면 성경도 비슷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책인데, 정작 우리가 궁금해하는 과학적 세부 사항은 거의 말하지 않습니다. 창세기 1장만 해도 우주의 생성 원리를 설명하는 과학 교과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과 하나님, 그리고 구원에 관한 책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도 비슷합니다. 그가 받은 계시는 인간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구원을 돕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이것이 오히려 스베덴보리 저작의 신뢰성을 높여 주는 면도 있습니다. 만일 그가 ‘나는 영계에서 지구의 모든 역사와 우주의 모든 비밀을 보았다’고 말했다면, 오히려 더 의심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평생 남긴 방대한 저작 속에서도 놀라울 정도로 주제를 제한합니다. 거의 언제나 주님, 천국, 인간의 영혼, 거듭남, 말씀의 내적 의미로 다시 돌아옵니다.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알았어도 주님의 허락이 없었거나’라는 표현이 저는 매우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의 글을 읽다 보면 ‘모른다’기보다 ‘말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추측의 영역일 뿐, 그는 그런 부분에 대해서도 침묵합니다.

 

결국 스베덴보리가 27년 동안 영계를 드나들고도 우리에게 남긴 것은 지구 45억 년의 역사 연표가 아니라, ‘사람은 왜 죽지 않는가’, ‘천국은 어떤 곳인가’, ‘주님은 어떻게 인간을 인도하시는가’, ‘말씀은 무엇을 말하는가’ 같은 질문들입니다.

 

어쩌면 이것 자체가 하나의 메시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세상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를 알고 싶어 하지만, 주님께서는 먼저 ‘너는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를 알기를 원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영계 체험은 우주의 비밀을 푸는 방향보다 인간 영혼의 비밀을 푸는 방향으로 집중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AC를 비롯한 방대한 저작들인 것이지요.

 

 

 

AC.200, 창3:2-3, 창2 ‘사랑’에서 창3 ‘신앙’으로 중심 이동을 허락하신 이유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And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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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0, 심화 5, ‘홍수가 실제로 있었는가?’

AC.200.심화 5. ‘홍수가 실제로 있었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는 스베덴보리의 입장과 현대의 일반적 해석을 구분해서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은 ‘홍수’의 가장 중요한 의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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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0.심화

 

5. ‘홍수가 실제로 있었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는 스베덴보리의 입장과 현대의 일반적 해석을 구분해서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은 홍수’의 가장 중요한 의미를 영적 의미에 둡니다. 그에게 홍수는 무엇보다도 태고교회 말기의 광적인 욕망들과 확신들(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의 범람을 뜻합니다. AC 전반을 읽어보면, 그는 노아 홍수 이야기를 단순한 자연재해의 기록으로 해설하지 않고, 교회의 상태와 인간 내면의 변화를 묘사하는 말씀으로 해설합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는 실제 홍수는 없었다’고 말하는가? 그렇게 단정하기도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여러 곳에서 고대인들 사이에 실제 홍수 전승이 있었음을 인정하는 듯한 표현들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가 관심을 두는 것은 지구 전체가 몇 미터 물에 잠겼는가’가 아니라, 그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입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관심은 이런 쪽에 있습니다. ‘설령 실제 물의 재앙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왜 주님은 그것을 성경에 기록하게 하셨는가?’ 그리고 그 답은 교회의 멸망과 보존’에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 독자들 사이에서도 약간 견해가 갈립니다. 어떤 사람들은 실제로 큰 지역적 홍수가 있었고, 그것이 말씀에서 영적 의미를 담는 그릇으로 사용되었다고 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역사적 사건 여부와 상관없이 말씀의 본질은 영적 의미에 있다고 봅니다.

 

개인적으로 AC의 흐름만 놓고 보면, 스베덴보리는 실제 물 이야기’를 증명하거나 반박하는 데 거의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그가 수백 개의 글에 걸쳐 설명하는 것은 물의 높이나 방주의 크기가 아니라, 태고교회의 붕괴와 노아 교회의 보존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적 관점에서 가장 안전한 표현은 이럴 것 같습니다.

 

홍수에 어떤 역사적 배경이 있었을 가능성은 배제되지 않지만, 말씀이 우리에게 가르치려는 핵심은 물의 재앙 자체가 아니라 교회의 영적 상태와 주님의 구원 섭리이다.’

 

목사님께서 지금까지 AC를 따라오신 경험으로 보셔도,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11장을 읽을 때, 독자의 시선을 역사적 사건보다 영적 실재 쪽으로 계속 돌리고 있다는 것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중요한 질문은 홍수가 실제로 있었는가?’보다 홍수는 내 안에서 무엇을 의미하는가?’입니다.

 

다만 실제로도 일어났는가?’라는 질문에 예/아니오로 답해야 한다면, 스베덴보리는 실제 홍수의 가능성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말씀의 본질적 의미는 거기에 있지 않다’는 쪽에 더 가까운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AC.200의 문맥에서는 분명히 물의 재앙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종말과 그 이후 인류 구조의 변화’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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