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23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And God blessed them, saying,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fill the waters in the seas, and the fowl shall be multiplied in the earth.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fth day. (1:22, 23)

 

AC.43

 

주님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지니게 된 모든 것은 크게 열매 맺고 번성합니다. 이것은 사람이 육신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다지 드러나지 않지만, 다른 삶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그러합니다. 말씀에서 ‘열매 맺다(be fruitful)라는 표현은 사랑에 속한 것들에 대해 사용되고, ‘번성하다(multiply)라는 표현은 신앙에 속한 것들에 대해 사용됩니다. 사랑에 속한 ‘열매(fruit) 안에는 ‘(seed)가 들어 있는데, 이 씨로 인해 그것은 크게 번성합니다. 또한 말씀에서 주님의 ‘축복(blessing)은 열매 맺음과 번성을 뜻하는데, 이 모든 것이 축복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Everything that has in itself life from the Lord fructifies and multiplies itself immensely; not so much while the man lives in the body, but to an amazing degree in the other life. To “be fruitful,” in the Word, is predicated of the things that are of love, and to “multiply,” of the things that are of faith; the “fruit” which is of love contains “seed,” by which it so greatly multiplies itself. The Lord’s “blessing” also in the Word signifies fruitfulness and multiplication, because they proceed from it.

 

 

해설

 

이 글은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지닌 고유한 성질, 곧 ‘확장성과 충만성’을 다룹니다. 생명은 정체된 상태로 머무르지 않으며, 반드시 자신을 퍼뜨리고, 늘리고, 풍성하게 만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이 세상에서는 제한적으로 나타나지만, 사후의 생명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크게 드러난다고 말합니다. 이는 영적 생명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글에서 중요한 구분은 ‘열매 맺음’과 ‘번성함’의 차이입니다. 말씀에서 ‘열매 맺다’는 사랑에 속한 것들에 대해, ‘번성하다’는 신앙에 속한 것들에 대해 사용된다고 분명히 구분합니다. 이는 사랑과 신앙의 관계를 다시 한번 구조적으로 보여 줍니다. 사랑은 목적이고, 신앙은 수단이며, 사랑은 내용을 낳고, 신앙은 그 내용을 퍼뜨립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사랑의 열매 안에 ‘’가 들어 있다는 설명입니다. 열매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며, 사랑은 자기 안에 신앙을 낳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참된 사랑은 언제나 신앙을 포함하고, 그 신앙을 통해 자신을 배가시킵니다. 이 구조는 창세기의 자연 질서와 정확히 맞물립니다. 씨 없는 열매는 존재할 수 없듯이, 신앙 없는 사랑도 지속될 수 없습니다.

 

이 글은 또한 ‘주님의 축복’의 의미를 매우 분명히 해줍니다. 축복은 단순한 호의나 외적 형통이 아니라, ‘열매 맺고 번성하게 하는 능력 그 자체’입니다. 주님의 축복이 임할 때, 생명은 스스로를 늘리고 깊게 합니다. 그래서 축복은 생명의 작동 방식이며, 생명이 주님에게서 왔다는 증거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신앙이나 사랑이 정체되어 있고 확장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직 생명의 차원에 이르지 못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은 반드시 열매를 낳고, 그 열매는 다시 씨를 품어 더 큰 확장을 이끌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다섯째 날 이후에 등장하는 ‘번성하라’는 명령이 단순한 양적 증가가 아니라, ‘사랑과 신앙의 내적 증식’을 뜻한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은 언제나 풍성해지며, 그 풍성함은 다른 생명들을 살리는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그래서 생명은 결코 자기 안에만 머무르지 않고, 축복을 통해 끝없이 확장됩니다.

 

 

 

AC.42, 창1:21, ‘큰 바다짐승들’의 속뜻

하나님이 큰 바다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created great whales, and every living 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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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죽음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죽음 이후의 실제 상태를 조용히 밝혀 주는 설교입니다.

 

25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요11:25, 26)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 (시116:15)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고후5:1)

 

오늘 우리는 한 사람의 삶이 끝났다는 사실 앞에 모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오늘을 ‘’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땅의 장막을 벗고, 다른 집으로 옮겨 가는 날’이라고 말합니다. 장례 예배는 죽음을 애써 미화하는 자리가 아니며, 동시에 죽음을 두려움으로 덮어 버리는 자리도 아닙니다. 장례 예배는 ‘주님께서 인간을 어떻게 보시는가’를 다시 배우는 자리입니다.

 

우리는 흔히 ‘사람이 죽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과 천국의 관점에서 보면, 정확한 표현은 ‘사람이 이 땅에서의 역할을 마쳤다’입니다. 사람은 본질적으로 육체가 아니라 영이며, 육체는 이 세상에서 잠시 사용하는 도구요 옷과 같습니다. 오늘 우리는 한 벌의 옷이 벗겨진 것을 보고 있지만, 그 사람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장래의 어떤 먼 사건을 가리키는 말씀이 아닙니다. 부활은 이미 지금 여기에서 시작되며, 죽음은 그것을 완성시키는 문과 같습니다. 사람이 죽는 순간, 그는 무(無)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분명한 ‘자기 자신’으로 깨어납니다.

 

스베덴보리가 반복해서 증언한 것 중 하나는 이것입니다. ‘사람은 죽은 직후에도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는 여전히 생각하고, 느끼고, 말하고, 기억하고,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지 더 이상 육체의 무게와 시간의 제약 속에 있지 않을 뿐입니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죽음’이라는 말을 거의 사용하지 않습니다. 대신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의 이동’, 혹은 ‘외적 삶에서 내적 삶으로의 전환’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겪는 이 이별은, 그분의 관점에서는 ‘분리’가 아니라 ‘이동’입니다.

 

우리는 종종 장례 자리에서 ‘이제 고인의 모든 고통이 끝났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부분적으로만 옳습니다. 육체의 고통은 끝났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여전히 자기 삶의 방향과 성향, 사랑의 질을 그대로 지니고 살아갑니다. 천국은 ‘선한 사람을 갑자기 선하게 만드는 장소’가 아니라, ‘사람이 평생 사랑해 온 것을 드러내는 세계’입니다.

 

이 점에서 장례 예배는 남아 있는 우리에게 더 직접적인 말씀을 던집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는 무엇을 사랑하며 살아왔는가?’ 이것은 신앙 고백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실제 문제입니다. 사람은 죽은 후, 자신이 입으로 말한 신앙이 아니라, 마음 깊이 붙들고 살았던 사랑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이 두려움의 날이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진실한 위로의 날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어느 누구도 혼자 죽게 두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죽음의 순간에 천사들과 영적 세계의 인도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낯선 어둠 속으로 던져지는 것이 아니라, 질서와 배려 속에서 다음 삶으로 안내됩니다.

 

성경이 말하는 ‘경건한 자들의 죽음이 귀하다’는 말은, 그 죽음이 슬픔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그 사람의 삶 전체를 소중히 여기시며,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직접 돌보신다는 뜻입니다. 주님 앞에서는 그 어떤 인생도 하찮지 않으며, 그 어떤 생도 허무하게 끝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눈물 흘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눈물은 절망의 눈물이 아니라, 사랑의 눈물이었습니다. 그분은 이미 나사로가 살아날 것을 알고 계셨지만, 남아 있는 사람들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슬픔은 믿음 없음의 증거가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의 증거입니다. 다만 주님은 우리에게 이 슬픔이 ‘절망으로 굳어지지 않도록’ 진리를 주십니다. ‘너희는 소망 없는 자와 같이 슬퍼하지 말라’는 말씀은 ‘슬퍼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슬픔이 끝내 모든 것을 삼키게 두지 말라’는 뜻입니다.

 

고린도후서에서 말하는 ‘하늘에 있는 집’은 추상적인 비유가 아닙니다. 그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삶의 터전입니다. 그곳에서 사람은 더 이상 시간에 쫓기지 않고, 비교에 시달리지 않으며, 자기 자신을 꾸미지 않아도 됩니다. 그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자기와 맞는 공동체 안에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오늘 고인을 떠나보내지만, 주님은 고인을 ‘받아들이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 두 사건은 동시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의 작별과, 저편에서의 환영이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흘리는 눈물 위에, 천국의 평안이 이미 겹쳐지고 있습니다.

 

장례 예배는 죽은 이를 위한 예배이기보다, 산 자를 깨우는 예배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 각자의 마음에 조용히 말씀하십니다. ‘너의 생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너는 무엇을 영원으로 가져갈 것인가?’ 우리가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랑의 질, 사랑의 퀄리티’뿐입니다.

 

오늘의 이별은 마지막이 아닙니다. 다만 서로 다른 세계에서의 잠정적인 분리일 뿐입니다. 주님 안에 있는 관계는 결코 끊어지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맺어진 것은 죽음으로 해체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형태를 바꿀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슬픔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 한 사람의 생이 주님 앞에서 헛되지 않았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삶도 여전히 주님의 손 안에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말씀을 마음에 남기고자 합니다. ‘죽음은 삶의 반대가 아니라, 삶의 연장이다.’ 단지 무대가 바뀌고, 빛이 더 분명해질 뿐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살아 계시며, 산 자와 죽은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주님께 우리의 눈물과 질문, 그리고 남은 날들을 맡깁니다. 아멘.

 

2026-01-17(D7)

 

 

 

AC.521 해설 중 ‘극히 미세하고 개별적인 인식’이라는 게 무엇인지?

위 521 해설 중 ‘퍼셉션은 일반적 개념이 아니라, 상태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극히 미세하고 개별적인 인식이기 때문에, 언어로 고정해 설명하는 순간 이미 그 본질을 놓치게 됩니다.’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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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큰 바다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created great whales, and every living soul that creepeth, which the waters caused to creep forth after their kinds, and every winged fowl after its kind;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1:21)

 

AC.42

 

앞서 말했듯이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every living soul that creepeth, which the waters caused to creep forth, Fishes)은 주님에게서 오는 신앙으로 이제 생명을 얻은 기억-지식을 뜻합니다. 그리고 ‘큰 바다짐승들(great whales, Whales)은 그러한 지식들의 일반 원리를 뜻하는데, 개별적인 것들은 이 일반 원리 아래에 있으며, 또 거기에서 나옵니다. 우주 안에 있는 그 어떤 것도 어떤 일반 원리 아래 있지 않은 것은 없는데, 그래야 그것이 존재하고 유지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래(Whales)나 ‘큰 물고기(great fishes)는 선지자들에 의해 종종 언급되며, 그때마다 기억-지식의 일반 원리를 뜻합니다. 애굽 왕 바로는 인간의 지혜나 총체적인 지성, 곧 일반적인 지식을 대표하는데, 그래서 ‘큰 악어(great whale)라고 합니다. 에스겔을 보면, Fishes,” as before said, signify memory-knowledges, now animated by faith from the Lord, and thus alive. “Whales” signify their general principles, in subordination to which, and from which, are the particulars; for there is nothing in the universe that is not under some general principle, as a means that it may exist and subsist. “Whales,” or “great fishes,” are sometimes mentioned by the prophets, and they there signify the generals of memory-knowledges. Pharaoh the king of Egypt (by whom is represented human wisdom or intelligence, that is, knowledge [scientia] in general), is called a “great whale.” As in Ezekiel:

 

너는 말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애굽의 바로 왕이여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너는 자기의 강들 가운데에 누운 큰 악어라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 하는도다 (29:3) Behold, I am against thee, Pharaoh king of Egypt, the great whale that lieth in the midst of his rivers, that hath said, my river is mine own, and I have made myself (Ezek. 29:3).

 

[2] 또 다른 곳에서는 And in another place:

 

인자야 너는 애굽의 바로 왕에 대하여 슬픈 노래를 불러 그에게 이르라 너를 여러 나라에서 사자로 생각하였더니 실상은 바다 가운데의 큰 악어라 강에서 튀어 일어나 발로 물을 휘저어 그 강을 더럽혔도다 (32:2) Take up a lamentation for Pharaoh king of Egypt, and say unto him, thou art as a whale in the seas, and hast gone forth in thy rivers, and hast troubled the waters with thy feet (Ezek. 32:2),

 

이 말씀은 기억-지식을 수단으로 삼아, 그러니까 자기 자신으로부터 신앙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이사야에서는 by which words are signified those who desire to enter into the mysteries of faith by means of memory-knowledges, and thus from themselves. In Isaiah:

 

그날에 여호와께서 그의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 (27:1) In that day Jehovah, with his hard and great and strong sword, shall visit upon leviathan the longish [oblongum] serpent, even leviathan the crooked serpent, and he shall slay the whales that are in the sea (Isa. 27:1).

 

여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slaying the whales that are in the sea)는 그런 사람들이 진리의 일반 원리조차 알지 못하게 된 상태를 뜻합니다. 예레미야에서도 By “slaying the whales that are in the sea” is signified that such persons are ignorant of even the general principles of truth. So in Jeremiah: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나를 먹으며 나를 멸하며 나를 빈 그릇이 되게 하며 큰 뱀 같이 나를 삼키며 나의 좋은 음식으로 그 배를 채우고 나를 쫓아내었으니 (51:34) Nebuchadnezzar the king of Babylon hath devoured me, he hath troubled me, he hath made me an empty vessel, he hath swallowed me as a whale, he hath filled his belly with my delicacies, he hath cast me out (Jer. 51:34),

 

여기 ‘좋은 음식(delicacies)이라 한 것은 신앙의 지식(knowledges)을 뜻하며, 요나를 삼킨 고래처럼 그것들을 삼켰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큰 뱀(whale)은 신앙의 지식에 관한 일반 원리를 단지 기억-지식으로만 지니고, 그런 방식으로 행하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denoting that he had swallowed the knowledges of faith, here called “delicacies,” as the whale did Jonah; a “whale” denoting those who possess the general principles of the knowledges of faith as mere memory-knowledges, and act in this manner.

 

 

해설

 

이 글은 다섯째 날에 창조된 생명들 가운데서, 특히 ‘고래’라는 상징이 왜 등장하는지를 매우 정밀하게 설명합니다. 앞선 글에서 물고기들이 기억-지식을 뜻한다면, 이 글은 그 기억-지식들 위에 놓인 ‘구조’를 다룹니다. 곧 개별적인 지식들 위에 자리 잡은 일반 원리의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어떤 일반 원리 아래 있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는 단순한 논리적 주장이라기보다, 영적 질서에 대한 진술입니다. 개별적인 지식이나 사실은 스스로 의미를 가지지 못하고, 반드시 그것들을 묶고 방향을 정하는 일반 원리 안에 있을 때 비로소 기능합니다. 이 일반 원리를 상징하는 것이 바로 ‘고래’, 즉 본문의 ‘큰 바다짐승’입니다.

 

그래서 고래는 단순히 큰 물고기가 아니라, 기억-지식 전체를 지배하는 틀, 곧 일반 원리를 뜻합니다. 문제는 이 일반 원리가 어디에서 오느냐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일반 원리는 지식을 질서 있게 살리고, 생명으로 인도합니다. 그러나 사람에게서 나온 일반 원리는 지식을 자기 지혜의 재료로 삼아, 오히려 신앙의 신비를 삼켜 버립니다.

 

에스겔에서 애굽 왕 바로가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고 말하는 큰 고래(본문에서는 ‘큰 악어’)로 묘사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애굽은 기억-지식의 땅이며, 바로는 그 지식을 지배하는 인간 지성을 뜻합니다. 이 지성이 자신을 근원으로 삼을 때, 그는 고래처럼 모든 것을 삼키며, 물을 흐리게 만듭니다. 이는 지식이 많아서가 아니라, 그 지식의 일반 원리가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생기는 혼란입니다.

 

이사야에서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라는 표현도 같은 맥락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폭력적으로 지식을 제거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 지혜를 근원으로 삼아 신앙의 신비를 파고들던 사람들이 결국 진리의 일반 원리조차 상실하게 된 상태를 뜻합니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한 일반 원리는 결국 자기 자신을 무너뜨립니다.

 

예레미야의 고래 비유는 특히 인상적입니다. 느부갓네살이 ‘좋은 음식’, 곧 신앙의 지식(knowledges)을 삼켰다고 하는데, 이는 요나를 삼킨 고래의 이야기와 자연스럽게 겹칩니다. 요나가 고래 뱃속에 들어간 것은 파멸이 아니라, 방향 전환을 위한 정지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여기 고래는 신앙의 지식을 삼켜 자기 배를 채우고 버리는 존재로 묘사됩니다. 이는 지식을 삶으로 돌리지 않고, 자기 확증의 재료로만 소비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 글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경고를 줍니다. 기억-지식이 많아지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그 지식을 묶고 해석하는 ‘일반 원리’가 어디에 있느냐입니다. 그 일반 원리가 주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일 때, 지식은 생명을 낳지 못하고, 오히려 신앙의 신비를 삼켜 버립니다.

 

그래서 AC.42는 지식의 양보다 지식의 구조를 묻는 글입니다. 물고기가 살아 있으려면 물이 필요하듯, 지식이 살아 있으려면 주님에게서 오는 일반 원리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고래는 생명을 지키는 존재가 아니라, 모든 것을 삼키는 존재가 됩니다.

 

 

 

AC.43, 창1:22-23,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22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23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And God blessed them, say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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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 창1:20, ‘사람 본성에 속한 것’ vs '주님에게서 오는 것'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창1:20) AC.41 사람의 본성(own, proprium)에 속한 것은 그 자체로는 생명이 없으며, 그것을 눈으로 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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