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4:19)

 

AC.411

교회가 일어나기 전에 황폐의 마지막 때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주님께서 예언서들에서 자주 밝히신 바입니다. 그곳에서는 신앙의 천적인 것들과 관련하여 이를 황폐(vastation) 또는 황폐하게 (laying waste)이라 부르고, 신앙의 영적인 것들과 관련하여 황량(desolation)이라 부릅니다. 또한 완결(consummation) 끊어 버림(cutting off)이라고도 말합니다. 6:9, 11-12, 23:8-, 24, 42:15-18, 25, 8, 9:24-, 1, 32, 15-16 이후의 장들을 보십시오. That the last time of vastation must exist before a new church can arise, is frequently declared by the Lord in the prophets, and is there calledvastationorlaying waste,in reference to the celestial things of faith; anddesolation,in relation to the spiritual things of faith. It is also spoken of asconsummationandcutting off.(See Isa. 6:9, 1112; 23:8 to the end; 24; 42:1518; Jer. 25; Dan. 8; 9:24 to the end; Zeph. 1; Deut. 32; Rev. 15; 16; and following chapters.)

 

해설

AC.411은 앞의 AC.408-410에서 설명한 교회의 황폐와 새로운 시작의 질서를 말씀의 예언서들과 연결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새 교회가 일어나기 전에 이전 교회의 황폐가 마지막 때에 이르러야 한다고 설명해 왔습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이것이 가인의 계보에만 적용되는 해석이 아니라, 주님께서 예언서들에서 거듭 밝히신 교회의 상태와 관련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근거로 이사야서와 예레미야서, 다니엘서와 스바냐서, 신명기와 요한계시록의 여러 대목을 제시합니다.

 

먼저 황폐(vastation)황폐하게 (laying waste)은 이번 번호에서 신앙의 천적인 것들과 관련된 표현입니다. 천적인 것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에 관계됩니다. 따라서 신앙의 천적인 것들이 황폐해진다는 것은 교회 안에서 신앙에 생명을 주어야 할 사랑과 선이 사라지는 상태와 관련됩니다. 이는 앞에서 가인이 신앙을 사랑보다 앞세운 데서 시작된 분리가 라멕에게 이르러 신앙마저 남아 있지 않은 상태로 진행된 것과도 연결됩니다.

 

한편 황량(desolation)은 신앙의 영적인 것들과 관련됩니다. 영적인 것은 신앙의 진리와 그 진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일에 관계됩니다. 그러므로 황량은 교회 안에서 신앙의 진리가 더 이상 살아 있는 진리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태를 생각하게 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이번 번호에서 두 용어의 관계를 짧게 구별할 뿐, 각각에 해당하는 모든 영적 상태를 상세히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황폐와 황량을 서로 완전히 무관한 두 사건으로 나누기보다, 교회의 마지막 상태를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의 측면에서 구별하여 표현한 것으로 읽는 편이 적절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에 완결(consummation)끊어 버림(cutting off)이라는 표현도 덧붙입니다. 이 말들은 교회의 이전 상태가 끝에 이르는 모습을 가리키는 표현들입니다. 특히 이번 문맥에서 완결은 교회가 충만하고 온전해졌다는 긍정적인 뜻이 아니라, 이전 교회의 상태가 그 끝에 이르렀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다만 이번 번호는 이 두 표현의 세부적인 차이까지 정의하지 않으므로, 각각의 의미는 인용된 본문과 이어지는 AC의 설명을 함께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용어 구별은 말씀에 나타나는 심판과 종말의 표현을 읽을 때 중요합니다. 예언서에서 땅이 황폐해지고 성읍이 무너지며 모든 것이 끝나는 듯한 말씀이 나올 때,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외적인 재난의 묘사로만 읽지 않습니다. 그 말씀에 교회의 내적인 상태, 곧 사랑과 선, 신앙과 진리가 어떻게 쇠퇴하고 끝에 이르는가에 관한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예언서의 모든 황폐와 멸망의 표현을 언제나 하나의 고정된 뜻으로 바꾸어 읽어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각 말씀의 구체적인 속뜻은 해당 문맥 안에서 확인해야 합니다.

 

이번 번호에 인용된 사6:9, 11-12는 그 연결을 이해하는 데 특히 도움이 됩니다. 이사야가 전하도록 명령받은 말씀에는 백성이 듣고도 깨닫지 못하며 보고도 알지 못하는 상태가 나타납니다. 이어 이사야가 언제까지 그러한 일이 계속되는지를 묻자, 성읍들이 황폐해지고 주민이 없어지며 땅이 황무해질 때까지라는 대답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본문을 인용한 이유는 단순히 황폐라는 낱말이 등장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진리를 듣고 보면서도 받아들이지 않는 상태가 교회의 황폐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바로 앞의 AC.410에서 알면서도 알려 하지 않고, 보면서도 보려 하지 않는상태를 설명한 내용과 맞닿아 있습니다.

 

9:24 이하의 말씀도 이번 논의와 연결됩니다. 그곳에는 허물이 그치고 죄가 끝나며 죄악이 용서되고 영원한 의가 드러나는 일과 함께, 정해진 기간과 끝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대목을 인용하는 것은 이전 상태의 끝과 새로운 질서의 시작이 서로 연결된다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AC.411은 다니엘서의 각 구절을 하나씩 풀이하지 않으므로, 이 인용만으로 다니엘서의 모든 예언을 특정한 역사적 시기나 사건에 대응시켜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요한계시록 15장과 16장 및 그 이후의 장들도 같은 맥락에서 인용됩니다. 그곳에는 재앙과 심판, 이전 상태의 끝을 나타내는 장면들이 이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말씀 역시 교회의 마지막 상태를 이해하는 데 관련된다고 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재앙의 장면 자체에만 시선을 머무르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AC.411이 인용하는 목적은 교회의 황폐가 마지막 때에 이른 뒤 새로운 교회가 일어난다는 앞의 설명을 뒷받침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이 본문들은 AC.408에서 말한 새로운 아침과도 함께 읽어야 합니다.

 

다른 인용 본문들도 각각의 문맥은 다르지만, 스베덴보리가 이번 번호에서 제시하는 공통된 논점은 분명합니다. 교회의 마지막 상태는 말씀에서 여러 표현으로 선포되며, 그 상태가 끝에 이르는 일은 새로운 교회의 출현과 연결됩니다. 그렇다고 이 모든 인용 구절이 동일한 사건을 똑같은 방식으로 묘사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각각의 예언을 자세히 해설하기보다, 말씀 전체에 이러한 질서가 반복해서 나타난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제 AC.408-411의 흐름을 함께 보면 논의가 정리됩니다. 이전 교회가 황폐해지기 전에는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이 모독적인 것들과 뒤섞여 있어 새로운 빛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 상태가 끝에 이르면 새로운 빛, 아침이 밝아 오고 새 교회가 일어납니다. AC.409는 이를 아다와 씰라로 표상되는 새 교회의 출현과 연결했고, AC.410은 새 교회가 진리를 알고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상태에 머무는 사람들 가운데서가 아니라 아직 진리를 알지 못했던 사람들 가운데서 일어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번 AC.411은 이러한 질서가 예언서들에서도 거듭 선포된다고 밝힙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일어나기 전에 황폐의 마지막 때가 있어야 한다는 말을 인간이 일부러 신앙과 체어리티를 잃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황폐를 권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황폐해진 교회의 마지막 상태와 그 이후 새로운 교회가 일어나는 질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빛은 황폐 자체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앞의 AC.407에서 살펴본 것처럼 교회의 어떤 핵심이 보존되고, 주님께서 새로운 시작의 길을 여시는 것입니다.

 

결국 AC.411은 라멕에게서 드러난 황폐를 말씀 전체의 교회 역사와 연결하는 번호입니다. ‘황폐황폐하게 은 신앙의 천적인 것들과, ‘황량은 신앙의 영적인 것들과 관련되며, ‘완결끊어 버림역시 이전 교회가 끝에 이르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표현들이 예언서들에 거듭 등장한다는 사실을 통해, 이전 교회의 마지막 때와 새 교회의 출현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처럼 말씀은 교회의 황폐를 말하면서도 그 이후에 비칠 새로운 아침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AC.411 해설)

 

 

 

AC.410, 창4:19, ‘교회의 황폐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 알면서 거부하는 상태와 아직 알지 못하는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10황폐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알면서도 알려 하지 않거나, 보면서도 보려 하지 않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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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4:19)

 

AC.410

황폐에는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알면서도 알려 하지 않거나, 보면서도 보려 하지 않는 사람들의 황폐입니다. 옛날의 유대인들과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이 그러합니다. 둘째는 무지로 말미암아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사람들의 황폐입니다. 고대와 오늘날의 이방인들이 그러합니다. 알면서도 알려 하지 않는 사람들, 보면서도 보려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황폐의 마지막 때가 이르면, 그들 가운데서가 아니라 그들이 이방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 가운데서 교회가 새롭게 일어납니다. 홍수 이전의 태고교회에서도, 홍수 이후의 고대교회에서도, 유대교회에서도 이러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새로운 빛이 이전이 아니라 바로 그때 비치는 이유는 앞에서 말한 것과 같습니다. 그때에는 사람들이 계시된 것들이 참되다는 사실을 인정하거나 믿지 않으므로, 이상 그것들을 모독할 없기 때문입니다. Vastation is of two kinds; first, of those who know and do not wish to know, or who see and do not desire to see, like the Jews of old, and the Christians of the present day; and secondly, of those who, in consequence of their ignorance, neither know nor see anything, like both the ancient and modern gentiles. When the last time of vastation comes upon those who know and do not desire to know, that is, who see and do not desire to see, then a church arises anew, not among them, but with those whom they call gentiles. This occurred with the most ancient church that was before the flood, with the ancient church that was after that event, and also with the Jewish church. The reason why new light shines forth then and not before is, as has been said, that then they can no longer profane the things revealed, because they do not acknowledge and believe that they are true.

 

해설

AC.410은 교회의 황폐를 두 종류로 구별합니다. 하나는 진리를 알면서도 알려 하지 않고, 보면서도 보려 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다른 하나는 무지로 말미암아 아직 진리를 알지도 보지도 못하는 상태입니다. 겉으로 보면 두 경우 모두 참된 신앙이 없는 상태이지만, 스베덴보리는 그 원인이 서로 다르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첫째는 이미 접한 진리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상태이고, 둘째는 진리를 받아들일 기회나 지식 자체가 없었던 상태입니다.

 

이 구별은 앞의 AC.409에서 교회가 왜 황폐해진 사람들 가운데 머물지 않고, 진리를 아직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옮겨지는지를 설명한 내용과 연결됩니다. 진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과, 진리를 알지 못하여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들은 같은 상태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새로운 교회가 후자의 사람들 가운데서 일어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들은 아직 진리를 알지 못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처음으로 진리를 받아들일 길도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 종류의 황폐를 설명할 때 스베덴보리는 알면서도 알려 하지 않는다는 표현에 이어 보면서도 보려 하지 않는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여기서 본다는 것은 단순히 눈으로 무엇을 본다는 뜻이 아니라, 진리를 이해하거나 알아차리는 일과 관련됩니다. 따라서 이 표현은 진리를 접하거나 이해할 수 있는 상태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태도를 강조합니다. 다만 어떤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알고 이해하는지, 무엇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는지는 외적인 소속이나 행동만으로 쉽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첫째 종류의 사례로 옛날의 유대인들과 자신의 시대의 기독교인들을, 둘째 종류의 사례로 고대와 자신의 시대의 이방인들을 듭니다. 이 사례들은 그가 교회의 황폐와 이전을 설명하기 위해 제시한 신학적 구분입니다. 특히 원문의 오늘날AC가 집필되던 스베덴보리의 시대를 가리킵니다. 이를 오늘날의 유대인이나 기독교인, 또는 다른 종교에 속한 모든 사람의 실제 신앙 상태에 대한 일괄적인 판정으로 옮겨서는 안 됩니다. 이번 번호에서 살펴야 할 것은 집단에 붙인 명칭보다 진리를 알고도 받아들이지 않는 상태아직 알지 못하는 상태사이의 차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첫째 종류의 황폐가 마지막에 이르면 교회가 그들 가운데서가 아니라 그들이 이방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 가운데서 새롭게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홍수 이전의 태고교회, 홍수 이후의 고대교회, 유대교회에서 이러한 일이 일어났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교회가 일어난다는 것은 단순히 기존 교회의 명칭이나 조직이 바뀐다는 뜻이 아닙니다. 새로운 빛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 가운데 교회의 생명이 새롭게 시작된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왜 새로운 빛은 그 이전이 아니라 황폐의 마지막 때에 비치는 것일까요? 스베덴보리는 앞의 AC.408에서 제시한 이유를 다시 듭니다. 그때에는 사람들이 계시된 것들이 참되다는 사실을 더 이상 인정하거나 믿지 않으므로, 그것들을 더 이상 모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앞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이 모독적인 것들과 뒤섞여 있는 동안 새로운 빛이나 체어리티가 스며들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번 번호는 그 설명을 이어받아, 그러한 상태가 끝난 뒤에 새로운 시작이 가능해지는 이유를 밝힙니다.

 

여기서 알면서도 알려 하지 않는 단지 알고 있을 인정하거나 믿지 않는 을 혼동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의 AC.408에서 어떤 진리를 단지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을 모독하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했습니다. 이번 AC.410에서도 모독할 수 없게 되는 이유를 계시된 것들이 참되다는 사실을 더 이상 인정하거나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를 진리에 관하여 들었거나 지식이 있는 사람은 모두 모독하고 있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모독의 문제는 거룩한 것을 어떻게 인정하고 믿으며, 그것을 무엇과 결합시키는가에 관계됩니다.

 

또한 무지 자체가 신앙보다 낫다거나, 진리를 배우지 않는 편이 안전하다는 결론을 내려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무지가 영적 목표라는 뜻이 아니라, 진리를 아직 알지 못한 사람에게 새로운 신앙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과 체어리티를 받아들이는 것이 새 교회의 시작이지, 계속 무지 가운데 머무는 것이 새 교회의 완성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번 번호의 두 종류의 황폐는 진리를 아는 일의 가치를 낮추기 위한 구별이 아니라, 진리를 대하는 서로 다른 상태를 밝히기 위한 구별입니다.

 

이제 AC.407-410을 함께 읽으면 논의의 흐름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교회는 시간이 흐르면서 참된 신앙에서 떠나 황폐해질 수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교회의 어떤 핵심은 보존됩니다. 이전 교회에서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이 모독적인 것들과 뒤섞인 상태가 끝나면 새로운 빛, 아침이 밝아 옵니다. 그리고 새 교회는 진리를 알고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상태에 머무는 사람들 가운데서가 아니라, 아직 진리를 알지 못했던 사람들 가운데서 일어납니다. AC.410은 바로 이 마지막 구별을 명확히 하는 번호입니다.

 

결국 이번 번호는 교회의 새로운 시작을 이해할 때 진리를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만을 기준으로 삼을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중요한 것은 그 진리를 받아들이려 하는가, 그리고 받아들인 진리가 삶 안에서 신앙과 체어리티로 살아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황폐해진 교회의 끝에서 새로운 빛이 비치고, 그 빛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 가운데 새 교회가 일어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이 AC.410이 앞의 아침 교회에 관한 설명에 더하는 핵심입니다. (AC.410 해설)

 

 

 

AC.411, 창4:19, ‘새 교회가 일어나기 전에 왜 황폐의 마지막 때가 오는가? - 예언서에 나타난 황폐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11새 교회가 일어나기 전에 황폐의 마지막 때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주님께서 예언서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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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9, 창4:19, ‘아다와 씰라는 왜 라멕의 아내인가? - 속 교회와 겉 교회는 하나입니다’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09‘가인’(Cain)이라 불린 이단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이단은 시간이 흐르면서 황폐해졌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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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4:19)

 

AC.409

가인(Cain)이라 불린 이단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단은 시간이 흐르면서 황폐해졌습니다. 사랑을 인정하기는 했지만 신앙을 으뜸으로 삼아 사랑보다 앞세웠기 때문입니다. 이단에서 파생된 이단들은 점차 그것에서 벗어났으며, 가인으로부터 순서상 여섯 번째인 라멕은 마침내 신앙마저 완전히 부인했습니다. 이때가 되자 새로운 , 아침이 밝아 왔고, 여기서 아다와 씰라(Adah and Zillah) 불리는 교회가 이루어졌습니다. 이들은 라멕의 아내들(wives of Lamech)이라 불립니다. 라멕에게는 아무런 신앙도 없었지만 이들이 그의 아내들이라 불리는 것은, 역시 아무런 신앙도 없었던 유대인들의 교회와 교회가 말씀에서 아내들(wives)이라 불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들은 야곱의 아내인 레아와 라헬로 표상되는데, 레아는 교회를, 라헬은 교회를 표상합니다. 교회들은 둘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일 뿐입니다. 교회에서 분리된 교회, 표상적 교회는 우상 숭배적인 또는 죽은 것과 같지만, 교회와 교회가 함께 있을 하나의 교회를, 실로 동일한 하나의 교회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아다와 씰라도 그러합니다. 그러나 야곱과 그의 후손들은 라멕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신앙도 없었으므로, 교회가 그들에게 머물 없었고 불신앙이 아니라 무지 가운데 살고 있던 이방인들에게 옮겨졌습니다. 교회가 황폐해졌으면서도 자기들 가운데 진리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머무는 일은 드물며, 있다 하더라도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진리들에 관하여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옮겨집니다. 이들은 앞의 사람들보다 신앙을 훨씬 쉽게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The case was the same with the heresy calledCain,which in process of time was vastated, for although it acknowledged love, yet it made faith the chief and set it before love, and the heresies derived from this one gradually wandered from it, and Lamech, who was the sixth in order, altogether denied even faith. When this time arrived, a new light, or morning, shone forth, and a new church was made which is here namedAdah and Zillah,who are called thewives of Lamech.They are called the wives of Lamech, although he possessed no faith, just as the internal and external church of the Jews, who also had no faith, are also in the Word calledwives,being represented by Leah and Rachel, the two wives of JacobLeah representing the external church and Rachel the internal. These churches, although they appear like two, are yet only one; for the external or representative, separate from the internal, is but as something idolatrous, or dead, whereas the internal together with the external constitute a church, and even one and the same church, as Adah and Zillah do here. As however Jacob and his posterity, like Lamech, had no faith, the church could not remain with them, but was transferred to the gentiles, who lived not in infidelity but in ignorance. The church rarely, if ever, remains with those who when vastated have truths among them [apud se] but is transferred to those who know nothing at all of truths, for these embrace the faith much more easily than the former.

 

해설

AC.409는 가인의 계보에서 일어난 황폐와 새로운 교회의 출현을 설명하면서, 교회의 속과 겉이 어떤 관계에 있어야 하는지를 밝힙니다. 앞의 AC.405에서는 라멕이 신앙의 황폐를 의미하고 그의 두 아내 아다와 씰라가 새 교회의 출현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AC.408에서는 이전 교회가 황폐해진 뒤에야 새로운 빛, 아침이 밝아 온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번 번호는 이 두 설명을 연결하여, 가인에게서 시작된 분리가 라멕에게서 신앙의 소멸에 이르렀을 때 새로운 교회가 나타났다고 말합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가인이라 불린 이단이 처음부터 사랑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그들은 사랑을 인정하기는 했지만 신앙을 으뜸으로 삼아 사랑보다 앞세웠습니다. 이것이 최초의 분리였습니다. 참된 질서에서는 신앙이 사랑에 속하고 사랑으로부터 생명을 얻어야 하지만,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은 그 질서를 뒤집어 신앙이 사랑보다 우위에 있다고 여겼습니다. 이후 그 이단에서 파생된 이단들은 점차 최초의 상태에서 더 멀어졌고, 마침내 여섯 번째인 라멕에게서는 신앙마저 완전히 부인되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서 가인의 처음 상태와 라멕의 마지막 상태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인은 사랑을 인정하면서도 신앙을 사랑보다 앞세웠습니다. 반면 라멕은 신앙마저 부인했습니다. 따라서 가인의 계보는 처음부터 모든 신앙과 사랑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사랑의 질서가 뒤집힌 데서 시작하여 그 분리가 점차 진행된 끝에 신앙 자체도 소멸하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AC.409는 이러한 진행을 점차 그것에서 벗어났다는 말로 압축합니다.

 

바로 그때 새로운 빛, 곧 아침이 밝아 왔고 새 교회가 이루어졌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새 교회를 아다와 씰라라고 부릅니다. AC.405에서 아다는 새 교회의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의 어머니이며, 씰라는 자연적인 것들의 어머니라고 했습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이 구별을 교회의 속과 겉이라는 관점에서 더욱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새 교회는 내적인 것만을 가진 교회도 아니고 외적인 것만을 가진 교회도 아닙니다. 속과 겉이 함께 하나의 교회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라멕에게 아무런 신앙도 남아 있지 않았다면, 왜 새 교회를 나타내는 아다와 씰라가 하필 라멕의 아내들이라고 불리는 것일까요? 스베덴보리는 이 문제를 야곱의 두 아내 레아와 라헬에 비교하여 설명합니다. 그의 해석에서 야곱과 그의 후손들에게도 참된 신앙이 없었지만, 그들과 관련된 교회의 속과 겉은 말씀에서 아내들로 표상됩니다. 따라서 아다와 씰라가 라멕의 아내들이라고 불린다는 사실만으로 라멕 자신에게 참된 신앙이 있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비교에서 레아는 겉 교회를, 라헬은 속 교회를 표상합니다. 겉 교회는 예배의 형식과 의식, 말씀의 외적인 표현과 생활의 자연적인 차원에 관계되고, 속 교회는 그 안에 있어야 할 주님을 향한 사랑과 체어리티,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살아 있는 신앙에 관계됩니다. 물론 이번 번호가 레아와 라헬의 모든 상응을 상세히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두 아내의 표상을 통하여 교회의 속과 겉이 구별되면서도 하나를 이루어야 한다는 원리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는 이 원리를 매우 분명하게 말합니다. 속 교회와 겉 교회는 둘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교회입니다. 교회의 속과 겉은 서로 독립하여 따로 존재하는 두 교회가 아닙니다. 속 교회가 겉 교회에 생명을 주고, 겉 교회는 속 교회가 자연적인 삶 가운데 나타나는 형식이 됩니다. 따라서 둘은 구별되지만 분리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앞에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설명할 때 확인한 원리와도 통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구별된다고 해서 서로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듯, 교회의 속과 겉도 구별되지만 하나의 교회를 이루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속 교회에서 분리된 겉 교회, 곧 표상적 교회는 우상 숭배적인 또는 죽은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외적인 예배 형식 자체가 악하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문제는 그 형식이 속에 있는 사랑과 신앙에서 분리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예배와 의식이 아무리 정교하고 말씀의 외적인 형식을 충실히 보존하더라도, 그 안에 주님을 향한 사랑과 체어리티가 없다면 그것은 살아 있는 교회의 외적 표현이 되지 못합니다. 반대로 속 교회와 겉 교회가 함께 있을 때에는 하나의 살아 있는 교회를 이룹니다.

 

이것이 아다와 씰라에게도 적용됩니다. 아다는 새 교회의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과 관련되고, 씰라는 자연적인 것들과 관련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서로 경쟁하는 두 교회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두 사람은 새 교회의 서로 다른 차원을 나타내며, 그 차원들이 함께 하나의 교회를 이룹니다. 따라서 아다와 씰라의 의미를 이해할 때에는 어느 한쪽만을 참된 교회로 여기거나 다른 한쪽을 불필요한 것으로 보지 않아야 합니다. 새 교회는 내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이 함께 있어야 온전한 하나의 교회가 됩니다.

 

이어서 스베덴보리는 왜 교회가 야곱과 그의 후손들에게 머물지 못하고 이방인들에게 옮겨졌는지를 설명합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야곱과 그의 후손들은 라멕과 마찬가지로 참된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므로, 교회가 그들에게 계속 머물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교회가 옮겨졌다는 것은 어떤 민족의 혈통이나 문화가 본질적으로 더 우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영적 상태의 차이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차이는 불신앙무지의 구별에서 드러납니다. 이번 번호에서 불신앙은 단순히 진리를 아직 알지 못하는 상태가 아닙니다. 이미 진리들이 자기들 가운데 있으면서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상태와 관련됩니다. 반면 무지는 진리 자체를 아직 알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진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미 진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황폐해진 사람들보다 신앙을 훨씬 더 쉽게 받아들인다고 설명합니다. 진리를 처음 접하는 사람은 그것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열려 있지만, 이미 진리를 알고도 거부하는 상태에서는 새로운 신앙을 받아들이기가 더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 구별은 앞의 AC.408에서 설명한 모독의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거룩한 것을 인정하고 믿으면서 모독적인 것과 뒤섞는 상태에서는 새로운 빛과 체어리티를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아직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러한 방식으로 거룩한 것을 모독한 상태에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새로운 진리를 받아들일 길이 열려 있습니다. AC.409에서 교회가 무지 가운데 있던 이방인들에게 옮겨졌다고 하는 것은 이러한 영적 질서와 관련됩니다.

 

다만 이 설명을 오늘날 특정 종교나 민족에 속한 사람들의 실제 신앙 상태를 일괄적으로 판정하는 근거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그의 신학적 해석 안에서 교회의 황폐와 이전을 설명하는 원리입니다. 실제로 한 사람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인정하며 어떻게 살아가는지는 외적인 소속만으로 알 수 없습니다. 또한 진리를 많이 배웠다는 사실 자체가 새로운 신앙을 받아들이는 데 장애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이미 알고 있는 진리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이제 AC.405-409의 흐름을 함께 보면 라멕과 두 아내의 의미가 한층 선명해집니다. 가인에게서는 사랑을 인정하면서도 신앙을 사랑보다 앞세우는 분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분리는 여러 이단을 낳으며 진행되었고, 라멕에게서는 신앙마저 부인되는 황폐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그때 새로운 아침이 밝아 왔고 아다와 씰라로 표상되는 새 교회가 이루어졌습니다. 그 새 교회는 천적이고 영적인 내적 차원과 자연적인 외적 차원이 함께 하나를 이루는 교회입니다.

 

결국 AC.409는 두 가지 질서를 함께 보여 줍니다. 하나는 신앙을 사랑보다 앞세우는 분리가 계속될 때 결국 신앙마저 소멸할 수 있다는 황폐의 질서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전 교회의 황폐 이후에도 새로운 빛이 비치고, 속과 겉이 함께 하나를 이루는 새 교회가 일어난다는 회복의 질서입니다. 이때 참된 교회의 본질은 외적인 형식만을 보존하는 데 있지 않고, 그 형식 안에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가 살아 있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아다와 씰라는 바로 그 내적·외적 질서가 함께 이루는 하나의 새 교회를 보여 줍니다. (AC.409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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