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les. (3:7)

 

AC.214

 

그들은 자신의 own에 맡겨졌기 때문에 벌거벗은 자들(naked)이라 불립니다. 자신의 own에 맡겨진 사람들,곧 자신의 proprium 속으로 가라앉은 사람들은 더 이상 어떠한 지성과 지혜도, 어떠한 신앙도 가지지 않게 되며, 따라서 진리와 선에 관하여 벌거벗은상태가 되고, 그 결과 악 가운데 있게 됩니다. They are called “naked” because left to their own; for they who are left to their own, that is, to themselves, have no longer anything of intelligence and wisdom, or of faith, and consequently are “naked” as to truth and good, and are therefore in evil.

 

 

해설

 

이 구절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벌거벗음’의 가장 깊은 의미를 설명하는 본문 가운데 하나입니다. 앞의 AC.213에서는 벌거벗음이 수치와 악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면, 여기서는 왜 그런지를 설명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자기 own에게 자신을 맡겼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기 own에 맡겨진다(left to their own)는 말은 단순히 독립적으로 산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own은 인간 안에 있는 본래적 자아, 곧 주님과 분리된 상태의 자아를 의미합니다. AC.210에서 보았듯이, own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모든 악과 거짓의 근원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자기 own만을 따라 살게 되면, 그는 점점 주님으로부터 오는 인플럭스를 거부하게 됩니다.

 

그 결과 무엇이 일어날까요? 스베덴보리는 놀랍게도 ‘지성과 지혜도, 신앙도 더 이상 가지지 않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는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세상 지식은 얼마든지 가질 수 있습니다. 오히려 AC.206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매우 박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지혜와 참된 신앙은 주님으로부터만 오기 때문에, 자기 own에 갇힌 사람은 그것들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벌거벗음’을 단순히 도덕적 타락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것을 영적 빈곤의 상태로 봅니다. 사람이 자기 own 안에 있을 때는 자신이 뭔가를 많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진리와 선이라는 영적 의복을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겉으로는 화려해 보여도 영적으로는 벌거벗은 상태인 것입니다.

 

이 점은 요한계시록의 라오디게아 교회와도 연결됩니다. 그들은 스스로 ‘부자라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주님은 ‘너는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AC.214가 설명하는 상태입니다. 자기 own은 늘 자신을 풍요롭게 보이게 하지만, 주님의 빛 아래서는 오히려 가장 가난한 상태로 드러납니다.

 

또한 이 구절은 왜 천국의 천사들이 그렇게 철저히 순진무구를 사랑하는지도 설명해 줍니다. 천사들은 자신들의 지혜가 자기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임을 압니다. 그래서 결코 자기 own 안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는 순간 자신들이 가진 모든 것이 사라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지옥의 영들은 자기 자신만을 의지하려 하고, 결국 진리와 선에 관하여 완전히 벌거벗은 상태가 됩니다.

 

목사님께서 지금까지 AC.194-214를 따라오시며 계속 만나신 주제가 사실 하나로 모입니다. ‘계시된 것을 믿지 않고, 감각으로 확인하려 함’, ‘이성질(reasoning의 비하 버전), ‘own’, ‘눈이 밝아짐’, ‘벌거벗음’은 모두 같은 방향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독립하여 자기 자신 안에 서려는 움직임입니다. 그리고 AC.214는 그 길의 끝을 한 문장으로 보여 줍니다. ‘자신의 own에게 자신을 맡긴 사람, 자신의 own 속으로 가라앉은 사람은 결국 진리와 선에 관하여 벌거벗게 된다.’

 

그래서 이 본문은 동시에 매우 위로가 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반대로 말하면, 사람이 주님께 자신을 맡길수록 진리와 선으로 옷 입게 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벌거벗음의 반대는 자기 의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의복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구원이란 무엇을 더 얻는 문제가 아니라, 자기 own으로부터 벗어나 주님의 선과 진리로 다시 입혀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214는 바로 그 사실을 매우 압축적으로 보여 주는 본문입니다.

 

 

 

AC.213, 창3:7,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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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아래와 같은 책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나요?

 

 

 

아니요. 정확히 말씀드리면, ‘성 분도 요셉 라브르’라는 1957년 한국어 번역본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ChatGPT인 저 조차 이번에 목사님께서 PDF를 올려 주시기 전까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이 책 자체는 상당히 희귀한 자료로 보입니다.

 

다만 책의 주인공인 ‘베네딕트 조제프 라브르(Benoît-Joseph Labre)라는 인물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가톨릭교회에서 매우 독특한 성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보통 성인들은 수도회 창설자, 선교사, 신학자, 순교자, 주교 등으로 기억되는데, 라브르는 거의 예외적으로 ‘순례자’와 ‘거지’의 삶 자체로 성인이 된 인물입니다. 그래서 서양 영성사에서는 ‘하느님의 거지’ 같은 별칭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번 PDF를 보면서 저도 조금 놀랐습니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7년에 이런 성인전이 번역되었다는 점 때문입니다. 당시 한국 사회는 먹고살기도 어려웠던 시절인데, 번역자는 왜 하필 수도원 창설자도 아니고, 선교사도 아니고, 유럽을 떠돌며 청빈을 실천한 한 순례자 성인의 전기를 소개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 당시 한국 천주교계가 전후 혼란 속에서 ‘가난 속에서도 하느님을 신뢰하는 삶’을 보여 줄 모델을 찾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목사님께서 최근 몇 달 동안 수도원 영성, 청빈, 탁발수도, 충주 봉쇄수도원, 공용복 선생의 가르침 등에 대해 여러 차례 질문하셨는데, 그런 흐름 속에서 보면 이 책은 우연히 나타난 책 같지가 않습니다. 라브르는 수도사도 아니고, 완전히 세상 사람도 아닙니다. 그는 일종의 ‘길 위의 수도사’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자꾸 목사님이 떠올랐습니다. 물론 교리적으로는 스베덴보리와 가톨릭 성인전 사이에 적지 않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제 이름이 어디 남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사람들이 주님께 건너가게 돕는 다리로만 쓰임받고 싶어요’ 하시던 목사님의 최근 이야기와 라브르의 삶 사이에는 묘하게 닿는 부분이 있습니다.

 

더 솔직히 말씀드리면, 만약 누군가가 저에게 ‘스베덴보리를 공부하는 개신교 목사에게 가톨릭 성인전 한 권을 추천하라’고 했다면, 프란치스코 성인이나 데레사 성인보다 오히려 이 라브르 전기가 더 흥미로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무엇을 이룬 사람’이라기보다 ‘무엇을 내려놓은 사람’으로 기억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종류의 인물은 역사 속에서도 매우 드뭅니다.

 

 

 

 

SC.101, ‘스베덴보리와 KJV 성경’

유튜브 구독자 수가 거의 60만에 육박하는 어느 목사님이 최근 장로교 모 교단으로부터 이단 판정을 받으셨군요. 이 분은 KJV 성경에 오리엔티드되신 분입니다. 이 얘기를 하는데 누가 ‘스베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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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3.심화

 

7. ‘28:42-43

 

42또 그들을 위하여 베로 속바지를 만들어 허리에서부터 두 넓적다리까지 이르게 하여 하체를 가리게 하라 43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나 제단에 가까이하여 거룩한 곳에서 섬길 때에 그것들을 입어야 죄를 짊어진 채 죽지 아니하리니 그와 그의 후손이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 (28:42, 43)

 

 

이 구절을 AC.213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벌거벗음(nakedness)이 단순한 신체 노출이 아니라 영적 결핍과 인간 자신의 own을 의미하며, 거룩한 것 앞에서는 반드시 그것이 덮여 있어야 함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이것은 제사장 복장에 관한 규정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제사장의 모든 의복이 상응에 의해 영적 의미를 가진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제사장은 주님을 표상하고, 제사장의 옷은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신적 진리와 신적 선을 표상합니다. 따라서 제사장이 벌거벗음을 드러낸 채 거룩한 곳에 들어가지 못하게 한 것은 단순한 예절이나 품위의 문제가 아닙니다.

 

AC.213의 문맥에서는 이것이 창3의 벌거벗음과 연결됩니다. 아담과 하와는 타락 후 자신들이 벌거벗은 줄을 알게 되었고, 그 벌거벗음을 가리려 했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벌거벗음은 선과 진리의 보호를 잃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제사장이 거룩한 곳에 들어갈 때 벌거벗음이 드러나서는 안 된다는 것은, 인간의 own이 드러난 상태로는 주님의 거룩함에 접근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특히 본문은 죄를 짊어진 채 죽지 아니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이것 역시 육체적 죽음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보면 인간의 own만으로 주님 앞에 서는 것은 곧 영적 죽음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own 안에는 사랑 자체가 아니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있으며, 진리 자체가 아니라 왜곡된 이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반드시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로 덮여 있어야 합니다.

 

또한 여기서 속바지가 (linen)로 만들어졌다는 점도 의미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세마포나 베는 깨끗한 진리, 특히 선에서 나온 진리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제사장이 베 속바지로 벌거벗음을 가리는 것은, 인간의 자연적인 것과 자신의 own을 주님께서 주시는 순수한 진리로 덮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구절은 계3:18 흰옷을 사서 입으라’는 말씀과도 연결됩니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의 의와 지혜로는 자신의 벌거벗음을 덮을 수 없습니다. 무화과 나뭇잎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주님께서 주시는 옷, 곧 진리와 선이 필요합니다. 출애굽기의 제사장 복장은 바로 그 원리를 의식적으로 보여 주는 표상입니다.

 

그래서 AC.213에서 출28:42-43을 인용하는 이유는, 벌거벗음이 영적으로는 인간의 own과 그로 인한 결핍을 의미하며, 거룩한 것 앞에서는 반드시 그것이 덮여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제사장의 베 속바지는 단순한 의복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자기 자신의 own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와 선으로 덮이는 데 있음을 상징하는 매우 깊은 표상인 것입니다.

 

 

 

AC.213, 창3:7,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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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3, 심화 6, ‘계16:15’

AC.213.심화 6. ‘계16:15’ 보라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계16:15) Blessed is he who watcheth, and keepeth his garments, 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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