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37

 

창세기 처음 세 장은 일반적으로 태고교회를 다루는데, 이 교회는 시작부터 멸망에 이르기까지 사람(man, homo)이라 불립니다. 이 장의 앞부분은 그 교회가 가장 번성하였던 상태, 곧 천적 인간이었을 때를 다루었고, 여기서는 이제 자기의 프로프리움(proprium, own)으로 기울어진 자들과 그들의 후손들을 다룹니다. The first three chapters of Genesis treat in general of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is called “man” [homo] from its first period to its last, when it perished; the preceding part of this chapter treats of its most flourishing state, when it was a celestial man; here it now treats of those who inclined to their own, and of their posterity.

 

 

해설

 

이 단락은 창세기 1, 2, 3장을 읽는 ‘해석의 지평을 단번에 정리해 주는 총괄 문장’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개별 사건을 넘어, 말씀 전체가 무엇을 그리고 있는지를 한 문장으로 압축합니다. 곧, 이 세 장은 역사 서술이 아니라 ‘태고교회라는 하나의 인간의 일생’을 다룬다는 선언입니다.

 

먼저 주목할 점은 태고교회가 ‘사람(homo)이라 불린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특정 개인을 뜻하지 않습니다. 태고교회 전체가 하나의 유기적 인간처럼 존재했고, 그 내적 상태의 변화가 곧 말씀의 이야기로 전개된다는 뜻입니다. 시작은 탄생, 중간은 성숙, 끝은 쇠퇴와 소멸입니다. 창세기 1, 2, 3장은 이 전 과정을 한 호흡으로 다룹니다.

 

이 장, 곧 창세기 2장은 그중에서도 ‘가장 절정의 순간’을 담고 있었습니다. 앞부분에서는 태고교회가 천적 인간이었을 때, 즉 주님과 직접 결합, 퍼셉션(perception)으로 살던 가장 번성한 상태가 묘사되었습니다. 에덴동산, 생명나무, 네 강, 평화의 안식은 모두 이 절정 상태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지점은 다릅니다. 이제 본문은 ‘자기의 것, proprium으로 기울어진 자들’을 다룹니다. 이는 곧 태고교회가 더 이상 순수한 천적 상태에 머물지 못하고, 자기의식과 자기중심이 서서히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했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 기울어짐은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후손에게로 이어지는 방향성’이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가 이 변화를 갑작스러운 붕괴로 묘사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매우 차분하게 말합니다. 앞부분은 가장 번성한 상태였고, 지금은 proprium으로 기울어진 상태를 다룬다고 말합니다. 즉, 타락은 한순간의 추락이 아니라, ‘방향의 변화가 누적된 결과’입니다.

 

AC.137은 독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창세기 1, 2, 3장을 따로따로 읽지 말고, 하나의 생명 이야기로 읽으라는 것입니다. 창조는 이상화된 과거가 아니라, 인간이 어떤 존재로 시작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근원이고, 에덴은 회상이 아니라 목표이며, 타락은 신화가 아니라 인간 내면에서 반복되는 구조입니다.

 

이 문장은 동시에 지금까지의 창세기 2장을 ‘아름답게 닫아 줍니다’. 천적 인간의 찬란함을 본 뒤에, 그 찬란함이 어떻게 proprium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는지를 보여주었고, 이제 독자는 다음 장에서 그 기울어짐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보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모든 것을 ‘한 사람의 일생’으로 읽도록 우리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AC.136, 창2:18-25 개요, ‘프로프리움 안에 주입된 이노센스’(25절)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25절) AC.136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노센스(innocence)가 이 프로프리움(proprium, own) 안에 주입되어, 그것이 여전히 용납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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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6.심화

 

2. ‘not be unacceptable

 

위 본문 영역에, ‘so that it still might not be unacceptable이라고 부정을 부정했어요. 그냥 간단하게 긍정 표현해도 될 걸 굳이 이렇게 한 이유가 뭔가요?

 

 

아주 예리한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문장에서는 이런 ‘부정을 통한 표현’이 꽤 자주 나오는데, 그냥 단순 긍정보다 훨씬 미묘한 상태를 전달하려 할 때 그렇습니다. AC.136의 ‘so that it still might not be unacceptable’을 단순히 ‘acceptable’(받아들일 만한)이라고 하지 않고, 굳이 ‘받아들일 수 없는 건 아닌’ 식으로 표현한 이유는, 그 상태가 완전히 긍정적이거나 완전히 안전한 상태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여기에는 어떤 ‘긴장’이 남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 proprium, 곧 자기감과 자기성을 설명하고 있는데, 인간에게 이것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동시에 매우 위험한 요소라는 사실도 놓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좋다’, ‘완전히 허용된다’라고 강하게 긍정하지 않고, 아주 조심스럽게 ‘그래도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는 아니다’라는 식으로 말합니다.

 

이 뉘앙스는 우리말로 하면 이런 느낌에 가깝습니다.

 

완전히 안전한 것은 아니지만, 질서 안에서는 허용될 수 있다.’

 

본래 위험 요소를 포함하지만, 올바르게 놓이면 거부해야 할 정도는 아니다.’

 

자체로 절대 선한 것은 아니지만, 필요하고 유익하게 사용될 수 있다.’

 

즉, 이 표현은 proprium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매우 미묘한 태도를 드러냅니다. 그는 proprium을 단순히 ‘’이라고도 하지 않고, 그렇다고 무조건 긍정하지도 않습니다. 인간은 자기감 없이 존재할 수 없고, 자유와 사랑도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proprium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언제든 자기중심으로 굳어질 수 있는 위험성을 품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상태는 ‘적극적 찬양’의 대상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질서 안에서 허용되는 상태’입니다.

 

이런 경우 영어에서는 단순 긍정보다 ‘부정을 부정하는 방식’이 훨씬 섬세한 중간 지대를 표현합니다. 예를 들어 ‘not impossible’, ‘not unreasonable’, ‘not unacceptable’ 같은 표현들은, 단순히 가능, 합리, 수용 가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유보와 긴장을 남긴 채 제한적으로 인정한다’는 느낌을 줍니다.

 

스베덴보리가 굳이 이렇게 쓴 이유는, proprium이 바로 그런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완전히 제거되어야 할 것도 아니고, 그대로 믿고 맡겨도 될 것도 아닙니다. 인간은 그것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지만, 동시에 끝없이 주님께 돌려야 합니다. 그래서 그는 단순한 긍정 대신, 조심스러운 ‘부정을 통한 제한적 긍정’을 사용한 것입니다.

 

정리하면, ‘so that it still might not be unacceptable’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문체의 문제가 아니라, proprium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신학적 태도를 그대로 반영합니다. 곧, proprium은 위험하지만 필수적이며, 본래적으로 안전하지는 않지만, 주님의 질서 안에서는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AC.136, 창2:18-25 개요, ‘프로프리움 안에 주입된 이노센스’(25절)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25절) AC.136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노센스(innocence)가 이 프로프리움(proprium, own) 안에 주입되어, 그것이 여전히 용납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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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6, 심화 1, ‘자기의 것, 자기성, 자기감과 프로프리움’

AC.136.심화 1. ‘자기의 것, 자기성, 자기감과 프로프리움’ 위 해설에 계속 반복적으로 ‘자기의 것’, ‘자기성’, ‘자기감’ 등이 나오는데 이를 모두 ‘프로프리움’으로 치환해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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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6.심화

 

1. ‘자기의 것, 자기성, 자기감과 프로프리움

 

위 해설에 계속 반복적으로 자기의 것’, ‘자기성’, ‘자기감 등이 나오는데 이를 모두 프로프리움으로 치환해도 될까요?

 

 

네, 기본적으로는 그렇게 보셔도 됩니다. AC.136 해설에서 반복되는 ‘자기의 것’, ‘자기성’, ‘자기감’ 등은 모두 결국 proprium의 여러 측면을 풀어 설명하는 표현들입니다. 다만 완전히 동일한 단어로 기계적으로 치환하기보다는, 각각이 proprium의 어느 측면을 강조하느냐를 살려 읽으시면 훨씬 정확해집니다.

 

예를 들어 ‘자기의 것’은 proprium의 가장 직접적인 의미, 곧 ‘내 것이라고 여기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귀속의 문제입니다. ‘이 생각은 내 것이다’, ‘이 선은 내가 행한 것이다’, ‘이 지혜는 내 것이다’라고 느끼는 방향입니다.

 

반면 ‘자기성’은 proprium이 단순한 소유 개념이 아니라, 사람 안에 형성된 어떤 ‘자기중심적 성향’ 혹은 ‘자기다움의 방향성’이라는 점을 강조할 때 더 어울립니다. 곧, 사람이 무엇이든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고 자기중심으로 해석하려는 성질입니다.

 

그리고 ‘자기감’은 가장 섬세한 표현입니다. 이것은 proprium의 ‘느낌’ 차원을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매우 중요한 점은, 인간은 실제로 ‘내가 생각한다’, ‘내가 원한다’, ‘내가 사랑한다’고 느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자기처럼 느끼는 감각’이 바로 자기감입니다. 이것 자체는 반드시 악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유와 사랑의 조건입니다. 문제는 그 자기감을 ‘진짜 독립된 자기’로 굳혀 버릴 때입니다.

 

그래서 셋 다 proprium과 연결되지만, 약간씩 강조점이 다릅니다. ‘자기의 것’은 ‘귀속’, ‘자기성’은 ‘방향성과 성질’, ‘자기감’은 ‘체험되는 느낌’에 더 가깝습니다.

 

그런데 AC.136 해설 전체 흐름에서는 이 셋이 결국 하나의 중심으로 모입니다. 곧, 인간이 ‘자기 자신처럼 느끼며 살아가도록 허락된 상태’, 그리고 그 상태가 주님께 열려 있느냐 아니면 자기중심으로 굳어지느냐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큰 틀에서는 모두 proprium의 설명이라고 보셔도 무방합니다.

 

오히려 목사님처럼 AC를 계속 읽어 가실 때는, ‘프로프리움’이라는 원어 개념을 중심축으로 잡아 두시고, 문맥에 따라 그것이 지금은 ‘자기감’을 말하는지, ‘자기 중심성’을 말하는지, ‘내 것이라 여기는 귀속 의식’을 말하는지 분별해 읽으시면 훨씬 입체적으로 보이실 것입니다.

 

정리하면, 네, AC.136의 ‘자기의 것’, ‘자기성’, ‘자기감’은 모두 proprium의 변주들로 이해하셔도 됩니다. 다만 각각은 proprium의 다른 얼굴, 곧 ‘소유됨’, ‘자기 중심성’, ‘자기처럼 느껴지는 감각’을 조금씩 다르게 비추는 표현이라고 보시면 가장 정확합니다.

 

 

 

AC.136, 심화 2, ‘not be unacceptable’

AC.136.심화 2. ‘not be unacceptable’ 위 본문 영역에, ‘so that it still might not be unacceptable’이라고 ‘부정을 부정’했어요. 그냥 간단하게 ‘긍정’ 표현해도 될 걸 굳이 이렇게 한 이유가 뭔가요?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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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6, 창2:18-25 개요, ‘프로프리움 안에 주입된 이노센스’(25절)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25절) AC.136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노센스(innocence)가 이 프로프리움(proprium, own) 안에 주입되어, 그것이 여전히 용납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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