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IS.002 | 이슬람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알라에게는 동등한 존재도, 신적 아들도 없다’ - 신적 아들 됨과 하나님의 본질

 

해설

이슬람은 하나님이 오직 한 분이시며, 그분에게는 동등한 존재도 없고 어떤 신적 아들도 있을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꾸란 112:1–4는 하나님이 한 분이시고, 모든 존재가 그분께 의존하지만 그분은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으시며, 누구를 낳지도 않으셨고 누구에게서 태어나지도 않으셨으며, 그분과 동등한 존재가 없다고 선언합니다. 꾸란 19:35 역시 하나님이 아들을 두신다는 것은 그분의 존엄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며, 4:171은 예수를 메시아이자 하나님의 사도로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에게 아들이 있다는 주장을 거부합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하나님의 절대적 유일성을 강조하는 ‘타우히드’(tawhid)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인정할 수 있는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등한 별개의 신적 존재는 없으며, 신성은 여러 신에게 나뉘거나 분배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슬람이 이러한 진리에서 출발하여 신적 아들 됨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별도로 검토해야 할 문제입니다.

 

먼저 이슬람이 부정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슬람은 하나님이 인간처럼 자녀를 낳으신다는 생각을 거부할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신성을 인정하는 기독교의 가르침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통 기독교 역시 하나님이 육체적인 방법으로 아들을 낳으셨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따라서 양자의 차이를 단순히 하나님에게 생물학적인 아들이 있는가 하는 문제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문맥에 따라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고(출4:22),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립니다(요1:12).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를 때에는 그분의 탄생과 신성,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한 더욱 근본적인 문제가 제기됩니다. 결국 핵심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이 하나님과 구별되는 또 하나의 신적 존재를 뜻하는가, 아니면 한 분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을 나타내신 방식을 뜻하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주의 교리’(Doctrine of the Lord, DL, 1763) 19항에서 ‘하나님의 아들’(Son of God)은 주님이 세상에 오실 때 입으신 인성을 가리킨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영원 전부터 성부와 구별되어 존재하는 또 하나의 아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 자신이 영원부터 계셨다고 가르칩니다. 눅1:35에서 천사는 마리아에게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근거로 주님의 인성이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잉태되었으므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린다고 설명합니다.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92항에서도 세상에 오시기 위해 하나님이 입으신 인성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밝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은 여호와와 나란히 존재하는 별개의 신적 인격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입으신 인성을 가리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전통적인 기독교의 신적 아들 이해와 구별하여 강조하는 핵심입니다.

 

이러한 설명은 이슬람의 문제 제기와 흥미로운 접점을 가지면서도 결정적인 차이를 드러냅니다. 이슬람은 하나님의 유일성을 지키기 위해 신적 아들의 존재를 거부하고, 스베덴보리 역시 하나님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또 하나의 신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인간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주님이 지상 생애의 시험과 승리를 통하여 마리아에게서 받으신 인성을 영화롭게 하셨다고 설명합니다. ‘주의 교리’ DL.59에서는 주님이 어머니에게서 받은 인간적인 것을 벗으시고 신적 인성을 입으셨다고 하며, DL.60에서는 주님 안의 하나님과 인간이 영혼과 몸처럼 둘이 아니라 한 인격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인간의 거듭남과 주님의 영화는 구별해야 합니다. 인간은 주님에게서 선과 진리를 받아 거듭나지만, 그 인성 자체가 신성이 되지는 않습니다. 반면 주님은 자신의 신적 능력으로 인성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성육신과 영화는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이 된 사건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인간으로 오셔서 그 인성을 신성과 완전히 하나 되게 하신 사건입니다.

 

이 점에서 이슬람의 신적 아들 부정에 담긴 진리와 오류의 경계가 분명해집니다. 하나님에게 그분과 동등한 별개의 신적 존재가 없다는 가르침은 참됩니다. 또한 하나님이 피조물의 방식으로 자녀를 낳으시거나, 어떤 인간이 자신의 능력으로 신성을 얻어 하나님과 동등하게 된다는 생각을 거부하는 것도 옳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인성을 입으실 수 없다는 결론으로 나아간다면,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중요한 진리를 부정하게 됩니다. 성육신은 인간이 하나님으로 높아진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을 나타내신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요1:14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선언하고, 골2:9는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들에 비추어 볼 때,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 외에 또 다른 신을 섬기는 일이 아니라, 신적 인성 안에서 자신을 나타내신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이슬람의 교리적 한계는 하나님의 유일성을 강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한 분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육신하셨다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의 신성을 인정하는 일과 인간의 구원을 판단하는 일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 318–328항에서 기독교 밖의 사람들도 자신이 알고 있는 종교적 진리에 따라 선하게 살아왔다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믿으며 정직과 자비를 실천하고, 악을 피하며,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에 따라 양심적으로 살아가는 무슬림의 내적 생명을 우리가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이것이 이슬람과 기독교의 교리가 동일하게 참되다거나, 주님의 신성을 인정하는 것과 부정하는 것이 아무 차이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교리적 진리의 충만함과 그 교리를 믿는 사람의 내적 상태는 서로 구별해야 합니다. 주님은 각 사람이 어떤 진리를 알고 있으며, 그것을 어떻게 사랑하고 삶으로 실천했는지를 아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슬람의 신적 아들 부정이라는 교리를 성경과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에 비추어 분별할 수 있지만, 그 교리를 믿는 개별 인간의 영원한 운명에 대한 판단은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이 문제는 기독교인 자신의 신앙에도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면서 실제로는 그분을 성부 하나님보다 낮은 또 하나의 신적 존재처럼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각각 독립된 인격으로 생각하면서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고 고백하는 데 머물고 있지는 않습니까? 스베덴보리는 참된 신적 일체성이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강조합니다. 주님은 요14:9에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외에 또 다른 하나님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진리를 안다고 해서 신앙이 완성되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의 신성을 인정하는 참된 믿음은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따라 악을 죄로 여기고 피하며, 선을 행하는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결국 이슬람의 ‘신적 아들’ 부정이 우리에게 제기하는 중요한 질문은 단순히 ‘하나님에게 아들이 있는가?’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란 정확히 누구이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분 하나님을 참되게 알고 예배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인간으로 오셨으며, 그 인성을 영화롭게 하여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완전히 하나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IS.002 해설)

 

요약

이슬람이 하나님에게 동등한 별개의 신적 존재가 없으며, 하나님이 피조물처럼 자녀를 낳으시는 분이 아니라고 가르치는 것은 참된 진리입니다. 그러나 이를 근거로 신적 아들 됨과 성육신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교리적 오류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여호와 하나님과 별개로 존재하는 또 하나의 신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세상에 오시기 위해 입으시고 영화롭게 하신 신적 인성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참된 신적 일체성은 성육신을 부정하는 데서가 아니라,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완전히 하나임을 인정하는 데서 온전히 이해됩니다.

 

 

 

IS.001. ‘알라는 오직 한 분이며, 그분 외에는 신이 없다’

SL.IS.001 | 이슬람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알라는 오직 한 분이며, 그분 외에는 신이 없다’ - 유일신 신앙과 신적 일체성 해설이슬람 신앙의 가장 근본적인 고백은 ‘알라는 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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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IS.001 | 이슬람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알라는 오직 한 분이며, 그분 외에는 신이 없다’ - 유일신 신앙과 신적 일체성

 

해설

이슬람 신앙의 가장 근본적인 고백은 ‘알라는 오직 한 분이며, 그분 외에는 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신의 숫자가 하나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은 유일하시고, 어떤 존재와도 비교할 수 없으며, 모든 피조물은 그분께 의존하지만 그분은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신적 유일성의 교리를 ‘타우히드’(tawhid)라고 합니다. 꾸란 112:1-4은 하나님이 한 분이시며, 누구를 낳지도 않으셨고, 누구에게서 태어나지도 않으셨으며, 그분과 동등한 존재가 없다고 선언합니다. 이슬람은 이를 근거로 하나님 외의 어떤 존재도 궁극적인 예배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에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인정할 수 있는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며, 신성은 나뉘거나 여러 신에게 분배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먼저 ‘알라’(Allah)라는 이름 자체를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알라는 아랍어에서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이며, 아랍어를 사용하는 기독교인들도 하나님을 이렇게 부릅니다. 따라서 이슬람은 알라를 믿고, 기독교는 전혀 다른 이름의 하나님을 믿는다는 식의 구별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같은 말로 하나님을 부른다고 해서 두 종교의 하나님 이해가 동일한 것도 아닙니다. 이슬람은 하나님의 절대적 유일성과 초월성을 강조하면서 신적 아들 됨과 성육신을 거부합니다. 반면 기독교는 하나님이 오직 한 분이심을 고백하면서도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나타내셨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핵심적인 차이는 하나님의 이름이나 숫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한 분 하나님은 누구시며, 어떻게 인간에게 자신을 나타내셨는가?’라는 질문에 있습니다.

 

성경 역시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신6:4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라고 선언하며, 사45:5는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 밖에 신이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8–9항에서 하나님이 계시며, 그분이 한 분이시라는 인식이 인간의 영혼에 신적으로 유입된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9항에서는 이슬람 신자들도 한 분 하나님을 인정한다고 명시합니다. 이것은 이슬람의 유일신 고백을 단순히 기독교 밖의 잘못된 주장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중요한 근거입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진리는 특정 종교가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주어진 보편적 신적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한 분 하나님이 계심을 인정하는 것과 그분의 본성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서로 구별해야 합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스베덴보리 역시 전통적인 기독교의 삼위일체 이해를 비판한다는 점입니다. 그는 ‘주의 교리’(Doctrine of the Lord, DP, 1764) 54–60항에서 하나님은 본질에서뿐 아니라 인격에서도 한 분이시라고 설명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서로 독립된 세 신적 인격으로 이해하면서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고백하면, 실제 생각 속에는 세 하나님에 대한 관념이 생겨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의 문제의식은 이슬람의 삼위일체 비판과 일정 부분 만납니다. 그러나 두 입장의 결론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이슬람은 신적 아들 됨과 성육신을 거부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인간으로 오셨으며 그분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가르칩니다. 성부는 주님 안의 신성 자체이고, 성자는 그분의 신적 인성이며, 성령은 그분에게서 나오는 신적 역사입니다. 이것들은 서로 다른 세 하나님이 아니라 한 분 주님 안에 있는 신적 삼위입니다.

 

이 차이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이슬람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친밀함, 자비와 영적 교제를 강조하므로, 그 신앙을 단순히 멀리 계신 절대자에 대한 복종으로만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결정적인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실 뿐 아니라 인간이 알고 사랑하며 다가갈 수 있도록 자신을 나타내셨다는 사실입니다. 요1:14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선언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이것은 하나님과 별개의 신적 존재가 인간이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인성을 입고 세상에 오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지상 생애의 시험과 승리를 통하여 그 인성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는 또 하나의 신이 아니라, 인간에게 자신을 나타내신 바로 그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이슬람의 유일신 신앙에는 분명한 진리가 있으면서도,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중요한 신학적 한계가 있습니다. 하나님 외의 다른 신을 섬겨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은 참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예배하는 것은 또 다른 신을 섬기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적 인성 안에서 자신을 나타내신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요10:30에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말씀하시고, 요14:9에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러한 신적 일체성을 이해하는 중요한 근거입니다. ‘주의 교리’ DP.60 역시 하나님과 인간이 주님 안에서 둘이 아니라 한 인격을 이룬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이슬람의 신학적 한계는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강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한 분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육신하셨다는 진리를 인정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교리의 한계를 분별하는 것과 그 종교에 속한 사람들의 구원을 판단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 318–328항에서 기독교 밖에 있는 사람들도 자신이 알고 있는 종교에 따라 선하게 살아왔다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참된 기독교’ TCR.832에서는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인정하고, 종교적 신념에 따라 정의를 사랑하며, 선을 행하는 이슬람 신자들의 천국에 관하여 직접 언급합니다. 물론 그 설명에서도 주님에 대한 인정이 중요하게 다루어집니다. 따라서 이 가르침을 모든 종교의 교리가 동일하게 참되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정직하게 살고, 이웃을 돕고, 악을 피하며,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에 따라 양심적으로 살아가는 무슬림을 단순히 기독교의 교리를 고백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정죄해서도 안 됩니다. 교리의 진위는 분별하되, 개별 인간의 내적 상태와 영원한 운명은 오직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이 첫 번째 문항은 기독교인 자신에게도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고 고백하면서 실제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서로 다른 세 신처럼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또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삶에서는 자기 자신과 세상의 이익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참된 유일신 신앙은 하나님의 숫자를 하나라고 고백하는 데서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 한 분 하나님이 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알고, 그분의 계명을 따라 악을 죄로 여기고 피하며,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삶으로 받아들이는 데서 완성됩니다. 따라서 이슬람의 유일신 고백에 담긴 진리는 존중해야 하지만, 신적 일체성에 대한 온전한 이해는 성육신하신 주님을 아는 데서 이루어진다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입니다. 결국 이 문항이 우리에게 남기는 질문은 ‘하나님은 몇 분이신가?’가 아니라, ‘내가 믿고 예배하는 그 한 분 하나님은 누구시며, 나는 그분을 얼마나 참되게 알고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는가?’입니다. (IS.001 해설)

 

요약

이슬람의 유일신 고백은 하나님이 오직 한 분이시라는 중요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그 한 분 하나님은 성육신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성부·성자·성령은 그분 안에 있는 신적 삼위입니다. 이슬람은 하나님의 유일성을 인정하면서도 성육신과 주님의 신성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교리적 한계를 지닙니다. 다만 이러한 신학적 차이를 이유로 이슬람 신자 개인의 내적 신앙이나 구원을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IS.002 ‘알라에게는 동등한 존재도, 신적 아들도 없다’

SL.IS.002 | 이슬람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알라에게는 동등한 존재도, 신적 아들도 없다’ - 신적 아들 됨과 하나님의 본질 해설이슬람은 하나님이 오직 한 분이시며, 그분에게는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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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PR.007 | 개신교인의 무의식 속 오류와 뒤섞인 신앙 100선

 

‘칭의를 받았으면 내 내면이 실제로 얼마나 변화했는가는 구원과 별개의 문제다’ -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주님은 왜 그 내면까지 새롭게 하시는가?

 

해설

개신교 신앙생활에서 ‘칭의’는 구원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입니다.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의로움이나 종교적 공로로 구원을 얻을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가르침입니다. 여기에는 구원의 근원이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라는 귀중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가르침이 ‘하나님께서 이미 나를 의롭다고 인정하셨으니 내 내면이 실제로 얼마나 변화했는가는 구원과 별개의 문제다’라는 생각으로 발전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의롭다고 인정하신다는 것은 단지 그 사람에 대한 법적인 판단을 바꾸신다는 뜻일까요? 아니면 그 사람이 실제로 의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내면까지 새롭게 하신다는 뜻일까요? 만일 하나님 앞에서는 의롭다고 인정받았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악을 사랑하고 이웃을 해치는 것을 즐거워한다면, 과연 그 사람 안에 구원의 생명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은 칭의와 성화의 관계를 넘어 주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목적 자체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먼저 개신교의 공식적인 칭의 교리를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종교개혁 전통은 일반적으로 칭의와 성화를 구별합니다. 칭의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믿는 죄인을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것이며, 성화는 그 사람이 실제 삶에서 거룩하게 변화되는 과정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1장 1항은 하나님께서 인간 안에 의를 주입하시는 방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하심으로써 죄인을 의롭다고 인정하신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같은 장 2항은 의롭다 하심을 받는 믿음이 사랑으로 역사한다고 가르치며, 제13장은 성화를 통해 인간이 실제로 새로워진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개혁주의의 공식 교리가 내면의 변화를 불필요하게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이러한 구별이 신앙생활에서 단순화되면서, 칭의만으로 구원의 본질적인 문제가 모두 해결되었고 실제적인 변화는 부차적인 일처럼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검토해야 할 것은 칭의와 성화를 구별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 구별을 근거로 구원과 거듭남을 사실상 분리하는 사고방식입니다.

 

성경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실제적인 변화는 함께 강조됩니다. 바울은 롬3:24에서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롬6:1-2에서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계속 머물러도 되느냐고 물은 뒤, 죄에 대하여 죽은 사람이 어떻게 그 가운데 더 살겠느냐고 반문합니다. 이어 롬6:4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고후5:17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을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부르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바울에게 은혜는 죄를 계속 사랑해도 된다는 허가가 아니라,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주님께서도 요3:3에서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이해할 때 하나님께서 죄인을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문제와, 그 사람이 실제로 어떻게 새로워지는가 하는 문제를 서로 무관하게 다루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는 이 문제를 개혁과 거듭남의 관계에서 설명합니다. TCR.571은 인간이 자연적 상태에서 영적 상태로 변화되는 과정을 두 단계로 구별합니다. 첫 번째인 개혁은 주로 이해를 통해 진리를 받아들이는 상태이며, 두 번째인 거듭남은 그 진리가 의지와 사랑에 받아들여지는 상태입니다. 사람은 먼저 진리를 배우고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이해했다고 해서 곧바로 그 사람의 사랑이 변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을 정확하게 알면서도 실제로는 이웃을 미워하고 이용할 수 있으며, 거짓말이 죄라는 사실을 이해하면서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말하는 것을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거듭남이란 이렇게 이해 속에 머물던 진리가 의지 안에 받아들여져 실제로 선을 사랑하는 새로운 생명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TCR.571에서 지상에서 개혁의 첫 번째 상태에 들어간 사람은 사후에 두 번째 상태로 인도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거듭남을 지상에서 반드시 완성해야 하는 도덕적 과제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진리를 통해 자신의 사랑이 변화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죄 사함 이해는 종교개혁 신학의 법정적 칭의 이해와 중요한 차이를 드러냅니다. TCR.611–614는 사람이 거듭나는 만큼 죄가 제거되며, 이러한 제거가 죄 사함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제거’는 인간이 저지른 악이 존재 자체를 잃고 완전히 사라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TCR.614는 악이 뿌리째 뽑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을 악에서 물러나게 하시고 선 안에 머물도록 보존하신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죄 사함은 단순히 과거의 죄를 더 이상 계산하지 않는 법적인 선언만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인간을 악의 지배에서 실제로 건져 내시고 새로운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역사와 결합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죄를 용서하시는 주님의 사랑이 부족하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사랑이 인간의 내면까지 새롭게 하기를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주님은 인간을 의로운 사람으로 간주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선을 사랑하고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내면의 변화를 강조하는 것은 결국 인간의 도덕적 성취에 따라 구원 여부를 결정하는 일이 아닐까요? 스베덴보리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모든 참된 선은 오직 주님에게서 오며, 인간의 의지를 새롭게 하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 DP, 1764) 100–128항은 사람이 자신의 악을 마치 스스로 제거하는 것처럼 노력해야 하지만, 실제로 악을 제거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TCR.576–578은 주님께서 인간을 새롭게 하시되 인간의 자유로운 협력이 필요하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주님과 인간이 구원의 공로를 나누어 가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구원의 모든 능력은 주님에게서 오지만,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와 합리성을 존중하시면서 그 능력이 인간 안에 받아들여지도록 역사하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악을 살피고 그것을 죄로 인정하며, 주님께 도움을 구하여 그 악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이러한 노력은 자기 공로로 구원을 획득하는 행위가 아니라, 주님의 구원하시는 역사에 자유롭게 협력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내면의 변화를 강조하는 것은 인간의 공로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가 얼마나 깊이 인간의 생명 안에서 역사하는지를 보여 주는 일입니다.

 

이러한 이해는 목회 현장에서도 중요한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어떤 신자가 오랫동안 교회에 다니고 칭의에 관한 교리를 정확하게 알고 있지만, 가정에서 가족들을 함부로 대하고 직장에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속이면서도 ‘나는 이미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내 구원에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의 신앙 이해를 다시 살펴야 합니다. 물론 그 사람의 최종적인 영적 상태를 인간이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의 신앙고백과 실제 삶 사이에 심각한 분리가 있다는 사실은 외면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자신의 악과 연약함을 발견하고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아직 충분히 변화되지 않았으므로 구원받지 못했다고 단정하는 것 역시 잘못입니다. 거듭남은 완성된 도덕적 상태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 안에서 이루어 가시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변화 정도를 계산하는 일이 아니라, 악을 죄로 인정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실제로 선을 사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자신의 악을 발견하고 그것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는 사람과, 악을 사랑하고 정당화하면서도 이미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안심하는 사람은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습니다.

 

결국 ‘칭의를 받았으면 내 내면이 실제로 얼마나 변화했는가는 구원과 별개의 문제다’라는 말에서 바로잡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신뢰가 아니라, 그 은혜가 인간 안에서 실제로 이루려는 목적에 대한 이해입니다. 주님께서는 단지 죄인을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데 그치지 않고 그의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겔36:26-27에서 하나님께서 새 마음과 새 영을 주시고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여 살 같은 마음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말씀은 이러한 구원의 본질을 잘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변화되지 않은 인간에게 새로운 신분만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새로운 사랑과 새로운 생명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나는 이미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괜찮다’는 안도감이 아니라, 오늘도 자신의 의지와 이해를 새롭게 하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참된 구원의 확신은 내면의 변화를 외면하는 데서 깊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실제로 거듭나게 하시는 주님을 신뢰하는 데서 깊어집니다. (PR.007 해설)

 

요약

칭의와 성화를 구별하는 것 자체가 오류는 아니며, 개혁주의의 공식 교리도 내면의 변화를 불필요하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칭의를 받았다는 이유로 실제적인 거듭남과 내면의 변화를 구원과 별개의 문제로 여기는 것은 오류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죄 사함은 주님께서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면서 악의 지배에서 물러나게 하시는 역사와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구원은 법적인 지위만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와 이해가 새로워지고 선과 진리가 실제 생명으로 받아들여지는 과정입니다. 이 모든 변화의 근원은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주님의 은혜입니다.

 

 

 

PR.006. ‘선행을 강조하면 행위구원이다’

SL.PR.006 | 개신교인의 무의식 속 오류와 뒤섞인 신앙 100선 ‘선행을 강조하면 행위구원이다’ - 주님이 명하신 선한 삶을 왜 경계하게 되었는가? 해설개신교 신앙생활에서 선행의 중요성을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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