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가 미르사바 수도원을 바라보며 가장 깊이 주목하는 것은 ‘침묵’입니다. 영상 앞부분에는 물이 솟아난 이야기, 수도원 설립자 사바의 유해에서 향기가 난다는 이야기, 병자의 치유와 기도 응답 같은 여러 기적 이야기가 등장하지만, 정작 강문호 수도사가 이 수도원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붙드는 것은 그것들이 아닙니다. ‘침묵은 하는 침묵이 아니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침묵입니다.’ 이 한 문장이 사실상 영상 전체의 중심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아도 이번 영상에는 상당히 귀하게 받아들일 만한 것이 있습니다. 다만 그 침묵을 단순히 ‘말하지 않는 수도 규칙’에서 ‘의지와 생각까지 주님 앞에서 잠잠해지는 내적 상태’로 한 걸음 더 들어가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영상에 소개되는 미르사바 수도원의 극단적인 자연환경은 수도생활의 외적 모습을 매우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찾아보기 어려운 유대광야의 절벽 사이에서 사람들이 오랜 세월 기도하며 살아왔다는 사실 자체는 깊은 인상을 줍니다. 세상의 소음과 편의를 뒤로하고 하나님께 집중하려 했던 사람들의 열망을 가볍게 여길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광야의 진정한 의미는 단순히 사람이 없는 지리적 공간에 있지 않습니다. 말씀에서 ‘광야’는 흔히 진리와 선이 결핍된 상태, 또는 시험과 준비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실제 유대광야에 들어갔다고 해서 자동으로 내적 광야를 통과하는 것은 아닙니다. 서울 한복판에서도 자신의 악과 거짓을 직면하며 주님을 찾는 사람은 영적 광야를 통과할 수 있고, 반대로 깊은 수도원 안에서도 자기 생각과 자기 의로 가득하다면 내적으로는 아직 광야의 의미를 배우지 못할 수 있습니다.

 

영상에 소개되는 세 가지 ‘기적’에 대해서도 같은 원칙이 필요합니다. 수도원을 세운 뒤 많은 사람이 사용할 만큼 물이 솟아났다는 이야기, 사바의 유해에서 향기가 난다는 이야기, 그곳에서 병자가 치유되고 수많은 기도 응답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오랜 수도원 전승과 신앙적 증언의 차원에서 받아들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것들을 모두 사실이라고 확정해야 수도원의 영적 가치가 살아나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역사적으로 하나하나 입증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수도원에서 수많은 사람이 드린 기도와 헌신까지 무가치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더 중요한 것은 기적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사람을 어디로 이끄느냐입니다. 기적을 보고 주님을 더욱 사랑하고 악에서 돌아선다면 선한 쓰임이 있지만, 기적 자체를 신앙의 중심으로 삼거나 특별한 장소와 사람의 영적 권위를 입증하는 증거로 사용하기 시작하면 오히려 본질에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영상이 세 가지 기적을 지나 마침내 ‘침묵’으로 들어가는 것은 오히려 의미가 있습니다. ‘말을 배우는 데는 3년이 걸리고 침묵을 배우는 데는 50년이 걸린다’는 수도원의 격언은 인간의 영적 현실을 상당히 정확하게 건드립니다. 사람은 말을 배우는 것보다 자기 말을 멈추는 것을 훨씬 어려워합니다. 더욱이 입술만 멈추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옳다’, ‘ 생각을 알아주어야 한다’, ‘내가 설명해야 한다’, ‘내가 판단해야 한다’는 내면의 목소리를 멈추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외적 침묵은 내적 침묵을 위한 좋은 훈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서 다시 한 단계 깊어집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반드시 귀에 어떤 목소리가 들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무엇보다 말씀의 진리를 통해 인간의 이해성(understanding), 즉 이해하는 능력을 밝히시고, 그 진리를 삶에 적용하려는 사람의 의지(will)를 이끄십니다. 따라서 참된 침묵은 단순히 주변의 소리를 차단하여 어떤 신비한 음성을 기다리는 상태라기보다, 자신의 proprium에서 올라오는 욕망과 자기합리화와 자기주장을 잠잠하게 하고, ‘주님의 진리는 무엇을 말씀하는가’를 받아들이는 상태에 가깝습니다.

 

이렇게 보면 ‘침묵에는 가지가 있다. 하나는 말하지 않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듣지 않는 것이다’라는 영상 속 표현도 흥미로워집니다. 문자적으로만 받아들이면 세상과 단절하라는 말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읽으면 매우 깊어질 수 있습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외부에서 들어오는 말과 자신의 내면에서 솟아나는 말에 영향을 받습니다. 명예욕, 경쟁심, 정욕, 탐욕, 분노, 자기연민, 자기과시를 부추기는 소리를 무분별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도 일종의 ‘듣지 않는 침묵’입니다. 모든 소리를 듣지 않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들을 것인가’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질서에 반하는 소리에는 귀를 닫고, 선과 진리를 향해서는 귀를 여는 것입니다.

 

영상에서 소개되는 ‘필요한 말은 짧게 낮은 목소리로 하라’, ‘병자를 위로하고 봉사하기 위한 말은 있다’는 원칙도 특히 눈에 들어옵니다. 여기에는 침묵의 목적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있습니다. 만일 침묵 그 자체가 최고의 덕이라면 병자를 위로하는 말도 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고통받는 사람을 위한 말에는 침묵의 규칙보다 우선권을 줍니다. 이것은 결국 ‘체어리티’가 외적 규율보다 위에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말하지 않는 것이 이웃에게 유익하면 침묵하고, 말하는 것이 이웃에게 유익하면 말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중요한 것은 ‘내가 말을 했는가, 하지 않았는가’가 아니라 ‘ 말과 침묵이 어떤 사랑에서 나왔는가’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가르침과도 매우 잘 만납니다. 말 자체는 인간 내면의 표현입니다. 같은 침묵이라도 사랑에서 나온 침묵과 미움에서 나온 침묵은 전혀 다릅니다. 누군가에게 화가 나서 입을 닫고 냉랭하게 외면하는 것도 침묵이고, 상대방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기 위해 말을 삼키는 것도 침묵입니다. 외적으로는 똑같이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하나는 악에서 나온 침묵이고, 다른 하나는 체어리티에서 나온 침묵입니다. 반대로 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말을 하더라도 이웃을 살리고 진리를 전하며 위로하기 위한 말이라면 선한 쓰임이 될 수 있고, 몇 마디 하지 않더라도 상대를 깎아내리고 자신을 높이는 말이라면 악한 쓰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혀가 길면 된다’는 수도원의 가르침도 단순히 말을 적게 하라는 규칙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야고보서가 혀를 작은 지체이면서도 큰 불을 일으킬 수 있는 것으로 말하듯, 인간의 말에는 그 사람의 내면이 흘러나옵니다. 하지만 입술만 통제한다고 내면이 정결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미움을 품고 있으면서 말하지 않는다고 미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교만하면서 입을 다문다고 교만이 겸손으로 변하는 것도 아닙니다. 참된 거듭남에서는 ‘악한 말을 하지 않는 단계’를 지나 ‘ 그런 말을 하고 싶어 하는가’를 살피게 됩니다. 결국 주님께서 다루시는 것은 혀보다 그 혀를 움직이는 사랑입니다.

 

영상 후반의 ‘최고의 달변은 없음’이라는 표현도 이런 관점에서 읽으면 좋겠습니다. 침묵을 말보다 우월한 영적 행위로 절대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때로 침묵하셨지만 때로는 가르치셨고, 책망하셨고, 위로하셨고, 진리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목표는 ‘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쓰실 있는 입술’을 갖는 것입니다. 말해야 할 때 말하고, 침묵해야 할 때 침묵하는 것입니다. 그 기준은 내 기분이나 체면이 아니라 선과 진리, 그리고 이웃의 유익입니다. 이것이 침묵을 ‘쓰임’의 관점에서 보는 방법입니다.

 

이 때문에 저는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가 마지막에 ‘이런 거룩한 수도원들이 우리나라에도 많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하는 부분도 조금 다르게 확장해서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실제 수도원이 많이 생기는 것도 하나의 쓰임이 될 수 있습니다. 바쁜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이 잠시 세상의 소음을 떠나 기도하고 말씀을 읽으며 자신을 돌아볼 공간은 분명 필요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더 중요한 것은 ‘수도원의 숫자’가 아니라 ‘수도원의 정신이 사람 안에서 어떻게 살아나는가’입니다.

 

어쩌면 수도원의 가장 깊은 형태는 건물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 세워져야 할지도 모릅니다. 하루 종일 세상에서 일하고 사람을 만나며 가족을 돌보는 사람도 자기 안에 작은 ‘침묵의 ’을 가질 수 있습니다. 누군가의 말을 듣다가 즉시 반박하고 싶을 때 잠시 멈추는 것, 다른 사람의 허물을 말하고 싶을 때 입을 닫는 것, 자신의 공을 드러내고 싶을 때 그것을 주님께 돌리는 것, 분노가 올라올 때 바로 말하지 않고 자신의 의도를 살피는 것, 그리고 말씀 앞에서 ‘ 생각이 무엇인가’보다 ‘주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먼저 묻는 것, 이것들이 일상에서 이루어지는 수도입니다.

 

특히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침묵의 가장 깊은 적은 단순한 수다가 아니라 ‘proprium 목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proprium은 끊임없이 자신을 변호하고, 자신의 공을 세우고,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고,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 합니다. 입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마음속에서는 하루 종일 다른 사람을 판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외적 침묵보다 훨씬 어려운 것이 내적 침묵입니다. 그리고 그 내적 침묵은 생각을 없애는 무념무상의 상태가 아니라, 자기중심적 의지가 주님의 선과 진리 앞에서 한 걸음 물러나는 상태입니다.

 

이렇게 보면 미르사바 수도원의 오랜 침묵 전통은 우리에게 매우 좋은 하나의 ‘표지판’이 됩니다. 그러나 표지판 자체가 목적지는 아닙니다. 침묵은 거룩함 그 자체가 아니라 거룩함을 향하도록 도울 수 있는 그릇이며, 수도원은 천국 그 자체가 아니라 천국의 질서를 배우도록 도울 수 있는 학교입니다. 결국 사람이 배워야 하는 것은 ‘말하지 않는 ’만이 아니라 ‘ 말을 내려놓고,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입니다.

 

그래서 이번 영상의 마지막 질문은 ‘나는 얼마나 오래 침묵할 있는가?’보다 이것이면 좋겠습니다. ‘나는 안에서 끊임없이 말하고 있는 proprium 목소리를 얼마나 분별하고 있는가?’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나는 침묵 속에서 들은 주님의 진리를 이웃을 향한 선한 쓰임으로 살아내고 있는가?’입니다. 침묵 끝에 체어리티가 없다면 그것은 아직 완성된 침묵이 아닙니다. 그러나 침묵을 통해 자기주장이 낮아지고, 다른 사람의 말을 더 잘 듣게 되고, 판단이 줄어들며, 필요한 때에는 상처 입은 사람에게 따뜻한 한마디를 건넬 수 있게 된다면, 그 침묵은 이미 거듭남을 섬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미르사바 수도원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도 결국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세상의 소리를 얼마나 완벽하게 차단했는가’가 아니라 ‘자기의 소리를 낮추어 주님의 음성을 듣고, 들은 것을 삶으로 옮길 있는가.1,500년 넘게 이어진 광야의 침묵보다 더 깊은 침묵은 바로 인간의 proprium이 주님 앞에서 잠잠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침묵에서 다시 나오는 말이라면, 많든 적든 누군가를 살리고 위로하며 주님의 선과 진리를 전하는 말이 될 것입니다.

 

 

 

SY.92, 강문호 수도사, ‘게라시모스 수도원’ (20200114)

※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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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And Cain spake to Abel his brother; and it came to pass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hat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r, and slew him. (4:8)

 

AC.366

 

가인이 아벨에게 말하고(Cain spake to Abel) 시간의 간격을 상징합니다. 가인(Cain) 앞에서 말한 것처럼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아벨(Abel) 신앙의 형제인 체어리티를 상징하며, 이런 이유로 여기서는 아벨을 번이나 가인의 아우(brother)라고 부릅니다. (field) 교리에 속한 모든 것을 상징합니다.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r, and slew him)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음을 상징합니다. Cain spake to Abelsignifies an interval of time. Cain,as before stated, signifies faith separated from love; andAbelcharity, the brother of faith, on which account he is here twice called hisbrother. Afieldsignifies whatever is of doctrine.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r, and slew himsignifies that separated faith extinguished charity.

 

 

해설

 

AC.366에서 마침내 창4의 결정적인 사건, 곧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장면에 이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AC.338부터 이어진 설명을 따라왔다면, 이 사건이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 안에서 살아 있던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자신을 구별하기 시작했고, 그 구별이 점차 분리가 되었으며, 분리된 신앙에서 죽은 행위와 죽은 예배가 나왔습니다. 이어 체어리티가 떠나면서 가인의 분노가 일어나고 안색이 변했으며, 마침내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주도권을 가지려 했습니다. 이제 그 과정의 마지막 단계가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는 말씀으로 나타납니다.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입니다.

 

먼저 매우 흥미로운 것은 가인이 아벨에게 말하였고(Cain spake to Abel)를 스베덴보리가 시간의 간격(an interval of time)이라고 해석한다는 점입니다. 개역개정 창4: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라고 되어 있지만, 무엇을 말했는지는 기록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도 여기서 그 대화의 내용을 추측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표현이 하나의 상태에서 다음 상태로 넘어가기까지 일정한 시간이 있었음을 나타낸다고 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흐름에서 상당히 중요합니다. 가인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상태에 즉시 도달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AC.346에서는 이미 세월이 지난 후에가 시간의 진행을 뜻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AC.359-365에서는 가인이 분노하고 안색이 변한 뒤에도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며, 선을 행하면 얼굴을 들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고 경고하십니다. 체어리티 역시 여전히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벨의 죽음은 최초의 작은 구별이 생긴 바로 그 순간 일어난 일이 아니라,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로부터 점차 멀어져 마침내 그것을 완전히 배척하기에 이른 결과입니다.

 

이 점은 영적으로도 중요합니다. 인간의 내면에서 어떤 악이 완성되는 과정 역시 대개 한순간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하나의 생각이나 애정으로 나타나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확증하면서 점차 의지의 일부가 되며, 마침내 삶으로 굳어집니다. 물론 AC.366 자체가 이러한 거듭남의 심리적 단계를 상세히 설명하는 것은 아니므로 지나치게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가인의 상태가 시간의 진행을 거쳐 아벨을 소멸시키는 단계까지 왔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다음으로 스베덴보리는 다시 가인아벨의 의미를 확인합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faith separated from love)이고, 아벨은 신앙의 형제인 체어리티(charity, the brother of faith)입니다. 여기서 특별히 주목할 표현은 신앙의 형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때문에 이 절에서 아벨을 두 번이나 가인의 아우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361-365와 매우 깊이 연결됩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의 적이 아닙니다. 아벨은 가인의 적이 아니라 아우입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을 없애려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AC.365에서 보았듯이 신앙은 체어리티와 결합할 때, 비로소 참된 신앙이 됩니다. 따라서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것은 신앙이 자기의 적을 제거한 것이 아니라, 본래 자기와 하나를 이루어야 할 형제를 제거한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이 사건의 비극성이 있습니다.

 

더구나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체어리티가 사라지면, 신앙 자체도 결국 생명을 잃습니다. AC.365의 비유를 빌리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은 빛이 자기에게 생명을 주는 불꽃의 열을 제거하는 것과 같습니다. 빛은 잠시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교리도 있고, 종교적 지식도 있고, 예배도 계속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겨울의 입니다. 체어리티라는 열이 사라졌으므로 그 안에서는 결국 모든 것이 굳어지고 죽게 됩니다.

 

그리고 AC.366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중요한 상응이 (field)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들은 교리에 속한 모든 (whatever is of doctrine) 상징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일이 아무 곳에서나 일어난 것이 아니라 에서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속뜻으로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충돌이 바로 교리에 속한 것들가운데서 일어난 것입니다.

 

이 대목은 앞의 AC.362를 떠올리게 합니다.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은 신앙이라는 어떤 것을 붙잡아 그것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그들을 부풀게 하자 모든 것이 자기 생각과 일치하고 그것을 확증하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하나의 교리적 입장이 삶의 질서를 뒤집었습니다. 이제 AC.366에서는 바로 그 교리의 영역인 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입니다.

 

그러므로 은 교리 자체가 나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리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문제는 교리 안에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질서가 어떻게 세워져 있느냐입니다. 교리가 신앙을 체어리티와 결합시키고, 진리를 선으로 인도하며, 사람을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끈다면 그 교리는 생명을 섬깁니다. 그러나 교리가 신앙을 사랑으로부터 분리시키고, ‘무엇을 믿느냐어떻게 사느냐와 떼어 놓으며, 체어리티를 부차적인 것으로 밀어내기 시작한다면 바로 그 에서 아벨이 죽을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가인의 이야기는 교회의 역사에서도 반복될 수 있고, 개인의 신앙생활에서도 반복될 수 있습니다. 어떤 교리적 문제를 붙들고 그것이 너무 중요해진 나머지 그 교리를 지키기 위해 이웃을 미워하고, 정죄하고, 체어리티를 버린다면 외적으로는 진리를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내적으로는 가인이 아벨을 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진리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진리가 체어리티와 분리될 때 진리의 올바른 질서가 무너진다는 뜻입니다.

 

특히 앞서 AC.362에서 살펴본 이단의 형성과 연결하면 더욱 선명합니다. 이단은 반드시 처음부터 완전한 거짓을 선택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하나의 신앙 항목을 전체보다 앞세워 주된 으로 만드는 데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이 한 일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고, 마침내 교리의 영역에서 체어리티를 소멸시키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므로 가인이 들에서 아벨을 죽였다는 것은 단순히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죽였다는 이야기를 넘어, 교리 안에서 신앙이 체어리티를 배제하는 비극적인 교회적 상태를 묘사합니다.

 

여기서 소멸시켰다(extinguished)는 표현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체어리티가 약해졌다거나 뒤로 밀려났다고 하지 않습니다.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고 합니다. 이것은 가인의 상태가 이제 결정적인 단계에 이르렀음을 보여 줍니다. AC.361에서는 체어리티가 아직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했습니다. AC.364에서는 죄가 아직 문에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AC.366에서는 그 문턱을 넘어섭니다. 체어리티를 지배하려던 신앙이 마침내 체어리티를 제거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AC.359-366의 흐름은 매우 엄중합니다. 얼굴이 떨어졌을 때, 곧 안색이 변했을 때에도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죄가 문에 있을 때에도 경고하셨습니다. 체어리티는 여전히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했습니다. 아직 돌아설 수 있는 여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계속 자기의 주도권을 고집하면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갑니다. 악은 처음부터 완성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반복하여 받아들이고 확증할수록 점차 자기 것이 되고 결국 삶의 질서 자체를 바꾸어 놓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앞서 우리가 살펴본 가인의 진행 과정이 이제 거의 완전한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처음에는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이 하나의 것으로 구별되었습니다. 그 구별 자체가 곧 악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을 자체로 어떤 으로 여기면서 사랑으로부터 분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체어리티 없는 행위가 나타났고, 체어리티 없는 예배가 나타났으며, 체어리티가 떠나자 분노와 내적 상태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어 신앙은 체어리티보다 위에 서려고 했고, 자기 사랑과 환상으로 자신의 입장을 확증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교리의 에서 체어리티를 소멸시킵니다.

 

구별 분리 죽은 행위 죽은 예배 분노와 내적 상태의 변화 체어리티에 대한 지배 체어리티의 소멸.

 

이 흐름을 보면 왜 처음의 구별과 이후의 분리를 정확히 구별해야 하는지도 다시 분명해집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서로 구별될 수 있습니다. 신앙은 진리에 속하고, 체어리티는 선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별된 것이 분리되어서는 안 됩니다. 서로 다른 기능을 가지면서 하나의 생명을 이루어야 합니다. 눈의 빛과 몸의 열이 다르다고 해서 생명에서 떼어 놓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읽어 온 창4의 속뜻을 매우 실제적인 질문으로 돌려놓습니다. ‘나는 가인인가, 아벨인가?라고 사람을 두 종류로 나누어 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안의 신앙이 체어리티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진리가 이웃을 사랑하도록 이끌고 있는지, 아니면 그 진리를 가지고 이웃을 판단하고 있는지,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교리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더욱 살아 있게 하는지, 아니면 그 교리를 지키기 위해 체어리티를 희생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특히 AC를 읽는 우리에게 이 말씀은 더욱 조심스럽게 다가옵니다. 말씀의 속뜻을 알고, 기존의 성경 해석과 다른 깊은 의미를 발견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가인의 위험은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것을 알고, 사람들은 모른다는 자기 사랑이 들어오면, 매우 높은 진리조차 겨울의 빛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진리를 가지고 다른 교회나 다른 그리스도인을 낮추고 체어리티를 잃는다면,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말씀을 해설하면서 바로 그 일을 우리 안에서 반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교리는 언제나 아벨을 살려야 합니다. 진리는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무기가 아니라 체어리티가 더욱 지혜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비추는 빛이어야 합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지배하는 주인이 아니라 체어리티와 함께 주님의 뜻을 이루는 형제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둘이 올바른 질서 안에서 하나가 될 때, 신앙은 더 이상 겨울의 빛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따뜻한 빛이 됩니다.

 

결국 AC.366에서 아벨의 죽음은 육체적인 죽음의 장면을 넘어 체어리티가 교회 안에서 소멸되는 상태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사랑에서 신앙을 떼어내고, 신앙을 사랑보다 높이며, 그 신앙을 자기 사랑으로 확증하는 작은 질서의 전도가 계속될 때, 마침내 일어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가인에게 미리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아직 죄가 문에 있을 때, 아직 아벨이 살아 있을 때, 아직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하고 있을 때, 돌아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AC.366은 지금까지의 가인 이야기에 하나의 무거운 마침표를 찍습니다.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였다는 것은 결국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는 것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잃으면 체어리티만 죽는 것이 아닙니다. AC.365에서 보았듯이 신앙 자신도 생명의 열을 잃습니다. 아벨을 죽인 가인은 결국 자기 신앙의 생명까지 죽이는 길로 들어선 것입니다.

 

 

 

AC.365, 창4:7,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겨울의 빛과 같습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7) AC.365 셋째로,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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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93.심화

바울은 왜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을 이렇게 말했을까?

 

앞의 신성종 목사의 설교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살펴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사람이 죽은 뒤 다시 자연적 육체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죽음과 함께 영계에서 영적 몸으로 깨어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바울은 왜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마치 죽은 육체가 장차 다시 살아나는 것처럼 말했을까요?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는 질문에 씨앗을 예로 들고,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난다’고 말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이 문제를 다룰 때 가장 먼저 조심해야 할 것은 ‘그러면 바울이 틀렸다는 말인가?’라고 너무 빨리 결론짓는 것입니다. 반대로 ‘바울도 사실 스베덴보리와 완전히 똑같은 사후세계관을 가르쳤다’고 만드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을 쓴 역사적 상황과 목적을 먼저 살펴보고, 그가 무엇을 말하려 했으며 무엇까지 말하지 않았는지를 구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의 직접적인 문제는 바울 자신이 12절에서 밝힙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여기서 고린도교회 일부 사람들이 부인하고 있었던 것은 일차적으로 그리스도의 부활 자체라기보다 ‘죽은 자의 부활’이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이 장에서 가장 먼저 지키려고 했던 것은 사후세계의 세밀한 구조나 부활의 물리적 메커니즘이 아니라 ‘죽음이 인간의 생명을 끝내지 못한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분에게 속한 사람들의 부활은 분리될  없다’는 기독교 신앙의 근본적인 소망이었습니다.

 

이 점을 놓치면 고린도전서 15장을 마치 ‘마지막  무덤  시체가 어떤 과정을 거쳐 다시 만들어지는가’를 설명하는 장처럼 읽게 됩니다. 그러나 실제로 바울은 그런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그는 흩어진 뼈와 육체의 원소가 어떻게 다시 모이는지 말하지 않고 오히려 ‘씨앗’을 이야기합니다.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뿐이로되 하나님이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종자에게  형체를 주시느니라’고 합니다. 여기에는 분명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함께 있습니다. 심어진 것과 나타나는 것이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심어진 바로 그 형체가 그대로 되돌아오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바울의 씨앗 비유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도토리를 땅에 심었는데 나중에 땅에서 거대한 참나무가 올라왔다고 합시다. 도토리와 참나무는 모양도, 크기도, 기능도 전혀 다릅니다. 그렇다고 참나무가 그 도토리와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생명의 연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비유를 통해 부활을 단순한 ‘원상복구’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신다’고 합니다.

 

더욱 주목할 구절은 44절입니다.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신령한 몸도 있느니라.’ 여기서 바울은 ‘’과 ‘영혼’을 대조하지 않습니다. 헬라어로 양쪽 모두 ‘소마(sōma)’, 곧 ‘’입니다. ‘소마 프쉬키콘(sōma psychikon)’과 ‘소마 프뉴마티콘(sōma pneumatikon)’, 곧 한 종류의 몸과 다른 종류의 몸을 대조합니다. 따라서 바울이 말하는 부활은 ‘몸을 버리고  없는 영혼이 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이 점에서는 신성종 목사의 지적도 귀담아들을 만합니다. 그는 ‘신령한 ’을 흐릿하고 비물질적이며 유령 같은 무엇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 이해와도 중요한 접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사후의 인간을 몸 없이 떠다니는 의식이나 그림자 같은 존재로 설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사후에도 완전한 인간이며, 인간의 형상을 가진 영적 몸으로 보고, 듣고, 말하고, 걷고, 다른 사람들과 만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지점에서 전통적인 육체 부활론과 스베덴보리의 설명이 갈라집니다. ‘신령한 ’이 있다는 것과 ‘무덤에 들어간 자연적 육체가  훗날 다시 살아나  신령한 몸으로 변한다’는 것은 같은 명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전자를 강하게 말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후대 기독교가 그 말씀을 바탕으로 발전시킨 ‘마지막  시체의 재결합과 육체 부활’이라는 구체적인 그림까지 바울이 이 장에서 모두 설명했다고 보아야 하는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특히 고린도전서 15 50절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받을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바울 자신이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연적 상태의 ‘혈과 ’이 그대로 하나님 나라를 상속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고린도전서 15장의 중심을 단순히 ‘현재의 물질적 육체가 다시 돌아온다’는 명제로 축소하면 바울 자신의 언어가 가진 훨씬 풍부한 긴장을 놓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설명이 매우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스베덴보리도 ‘부활’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인간이 죽음 후에 부활한다고 매우 분명하게 말합니다. 다만 ‘무엇이 부활하는가?’와 ‘언제 부활하는가?’에 대한 설명이 전통적인 육체 부활론과 다릅니다. 부활하는 것은 무덤 속에 남겨진 자연적 육체가 아니라 ‘ 사람 자신’이며, 그 부활은 수천 년 뒤 우주의 마지막 날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죽은 뒤 자연계에서 영계로 깨어날 때 일어납니다. 자연적 육체는 자연계에 남지만 사람 자신은 영적 몸으로 영계에서 계속 살아갑니다.

 

이렇게 보면 ‘몸은 소중하다’는 말과 ‘자연적 육체가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말을 반드시 동일시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연적 몸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체어리티와 쓰임을 행하도록 주어진 귀한 도구입니다. 그러므로 몸을 악한 것, 영혼을 가두어 놓은 감옥, 아무 가치 없는 껍데기로 여기는 것은 기독교적인 인간 이해와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연적 몸이 귀하다는 사실이 곧 그 몸의 물질이 영원히 보존되거나 마지막 날 다시 조립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자연적 몸은 자연계에 속하고, 영적 몸은 영계에 속합니다.

 

그러므로 신성종 목사의 설교에 등장하는 ‘화장하면 어머니의 몸은 나중에 어떻게 부활합니까?’라는 질문에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조금 다른 대답을 할 수 있습니다. 화장하든 매장하든 어머니 자신에게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어머니 자신이 그 자연적 육체 속에 남아 부활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연적 몸은 자연계에 남겨지지만 그 사람 자신은 이미 영적 몸으로 영계에서 깨어납니다. 그러므로 화장이 부활을 방해할 수도 없고, 매장이 부활을 더 안전하게 보장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바울은 이것을 ‘사람은 죽는 즉시 영계에서 영적 몸으로 깨어난다’고 스베덴보리처럼 명료하게 설명하지 않았을까요? 여기서는 바울 서신의 성격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독특한 이해를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도들의 서신을 모세오경과 예언서, 복음서와 계시록처럼 연속적인 내적 의미, 곧 아르카나가 들어 있는 ‘말씀’과 동일한 범주에 두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사도서신을 무가치하거나 잘못된 글이라고 보는 것도 아닙니다. 사도들은 초기 기독교회를 세우고 사람들에게 주님에 대한 신앙과 체어리티의 삶을 가르치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따라서 바울을 영계의 구조와 사후 인간의 상태를 완전히 계시받아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사람으로 읽기보다는, 당시 교회가 처한 문제 속에서 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언어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가르치는 사도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의 가장 큰 관심은 ‘죽은  정확히  단계의 상태를 거쳐 천국에 들어가는가?’가 아닙니다. 그의 관심은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셨으며 너희도 그분 안에서 살아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안에서 살아가는 너희의 삶은 헛되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실제로 바울 자신의 다른 글들을 보면 사후 상태에 관한 표현이 언제나 하나의 완성된 조직신학 체계처럼 나타나는 것도 아닙니다. 그는 고린도후서에서는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을 말하고, 빌립보서에서는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말합니다. 이런 표현들은 죽은 사람이 아주 먼 미래의 부활 때까지 사실상 아무런 삶도 없이 기다린다는 그림과는 잘 맞지 않습니다. 반면 고린도전서 15장과 데살로니가전서에서는 미래의 부활과 주님의 오심이라는 종말론적 언어를 강하게 사용합니다. 후대 기독교 신학은 이러한 여러 표현을 종합하여 ‘죽음  영혼의 중간 상태  마지막   육체 부활’이라는 체계를 세웠지만, 그 완성된 체계를 그대로 바울 자신의 명시적인 설명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서 또 하나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사실 스베덴보리와 똑같은 사후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표현만 다르게 했다’고 주장해서도 안 됩니다. 그것은 역사적 바울에게 스베덴보리의 계시를 거꾸로 투영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당시 유대교의 부활 신앙과 초기 기독교의 종말론적 언어 속에서 말하고 있으며, 스베덴보리는 훨씬 후대에 사후 인간의 깨어남, 영적 몸, 중간영계, 천국과 지옥의 상태 등을 매우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둘 사이에는 실제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균형 있게 말한다면 이렇습니다. ‘바울은 부활이라는 진리를 강력하게 가르쳤지만, 사후세계의 메커니즘 전체를 밝힌 것은 아닙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붙들고 있는 핵심은 인간이 죽음으로 소멸하지 않는다는 것, 주님의 부활이 우리의 생명과 분리된 사건이 아니라는 것, 부활한 인간에게는 ‘’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몸은 지금의 썩고 약하고 죽는 자연적 상태와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부활’과 ‘영적 ’이 실제로 무엇이며 인간에게 언제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훨씬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고린도전서 15장의 씨앗 비유도 새로운 의미로 다가옵니다. 씨앗과 나무 사이에는 분명한 연속성이 있지만 동일한 외적 형체가 반복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연적 몸과 영적 몸 역시 동일한 물질의 재조립이라는 의미에서 하나가 아닙니다. 그러나 죽기 전의 사람과 죽은 뒤의 사람이 서로 다른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 사람’이라는 인격과 생명의 연속성은 그대로 이어집니다. 죽음은 한 인간을 없애고 나중에 복제품을 만드는 사건이 아니라 자연계에서의 삶이 영계에서의 삶으로 이어지는 경계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고린도전서 15장의 마지막 58절이 매우 중요해집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안에서 헛되지 않은  앎이라.’ 바울은 부활에 관한 긴 논의를 ‘그러므로 죽은 뒤의 일을 많이 연구하라’로 끝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주의 일에 힘쓰라’고 끝냅니다. 사후의 생명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현재의 삶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체어리티와 쓰임의 가르침과도 깊이 만납니다. 사람이 영원으로 가지고 가는 것은 자연적 육체를 구성했던 물질이 아니라 그가 세상에서 무엇을 사랑했고, 무엇을 의도했으며, 그 사랑을 어떻게 실제 삶의 쓰임으로 나타냈는가 하는 그의 내적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병든 사람을 돌본 손, 배고픈 사람에게 음식을 건넨 손, 교회와 가정과 사회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을 묵묵히 감당한 손으로 행한 사랑은 헛되지 않습니다. 물질적인 그 손 자체가 영원히 보존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손을 움직였던 사랑과 의도와 삶이 그 사람 자신 안에 영원히 남기 때문입니다.

 

결국 고린도전서 15장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다는 것은 바울을 틀렸다고 버리는 것도 아니고, 바울의 모든 표현을 억지로 스베덴보리와 일치시키는 것도 아닙니다. 바울이 당시 고린도교회를 향해 증언한 부활의 핵심 진리를 먼저 존중하고, 그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은 사후세계의 실상을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을 통해 더 깊이 살펴보는 것입니다.

 

바울의 외침은 분명합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에 매우 구체적인 설명을 더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죽음과 함께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영계에서 영적 몸을 지닌 완전한 인간으로 깨어납니다.’ 그리고 두 가르침은 마침내 삶을 향한 한 질문 앞에서 만납니다. ‘그렇다면 나는 오늘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 답 역시 고린도전서 15장의 마지막에 이미 놓여 있습니다. ‘너희 수고가  안에서 헛되지 않은  앎이라.’ 죽음 이후에도 생명이 계속되기 때문에 오늘의 사랑이 중요하고, 영원이 있기 때문에 지금의 체어리티와 쓰임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부활에 관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어쩌면 ‘ 몸의 물질이 마지막  어떻게 다시 모일 것인가?’가 아니라 ‘영원으로 이어질 오늘의 삶을 나는 어떤 사랑으로 살아가고 있는가?’일 것입니다.

 

 

 

SY.93, 신성종 목사, ‘성경은 화장에 대해 정말로 말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15장, 오늘날 교회의

※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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