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273.심화

 

1. ‘9:6

 

보라 그들이 멸망을 피하여 갈지라도 애굽은 그들을 모으고 놉은 그들을 장사하리니 그들의 은은 귀한 것이나 찔레가 덮을 것이요 그들의 장막 안에는 가시덩굴이 퍼지리라 (9:6) Lo, they are gone away because of the vastation; Egypt shall gather them; Memphis shall bury them; their desirable things of silver, the nettle shall inherit them; the bramble shall be in their tents (Hos. 9:6).

 

 

스베덴보리가 AC.273에서 호9:6을 인용하는 이유는, 창3에 나오는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단순한 식물이 아니라, 선과 진리가 사라진 자리에 악과 거짓이 들어선 영적 황폐(vastation)의 상태를 상징한다는 사실을 성경 자체로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창세기에서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되었다는 말씀은, 호세아에서도 동일한 영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먼저 ‘애굽(Egypt)과 ‘(Memphis)은 영적 황폐가 일어나게 되는 원인을 보여줍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애굽’은 기억 지식을, ‘’은 그러한 기억 지식을 바탕으로 주님께 속한 것들(Divine things)을 자신의 지혜로 이해하고 판단하려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기억 지식 자체는 주님으로부터 주어진 유익한 도구이지만, 그것이 말씀을 섬기는 위치를 떠나 사람 자신의 지혜를 높이는 수단이 될 때에는 오히려 영적 생명을 메마르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이어지는 ‘그들의 은은 귀한 것이나 찔레가 덮을 것이요(their desirable things of silver, the nettle shall inherit them)라는 말씀도 같은 원리를 보여줍니다. 성경에서 ‘’은 진리를 상징하고, ‘귀한 것’은 소중히 간직해야 할 선과 진리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찔레’가 덮는다는 것은, 진리가 더 이상 사람의 삶을 다스리지 못하고, 그 자리를 거짓과 악이 뒤덮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열매를 맺어야 할 자리에 찔레가 무성해지는 것처럼, 진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 거짓이 자리 잡게 된 것입니다.

 

또한 ‘그들의 장막 안에는 가시덩굴이 퍼지리라(the bramble shall be in their tents)라는 말씀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성경에서 ‘장막’은 주님과 함께하는 거룩한 예배와 교회의 삶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장막 안에 가시덩굴이 퍼진다는 것은, 본래 거룩해야 할 예배와 신앙생활 속으로 거짓과 악이 점점 스며들어 영적 질서가 무너졌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교회의 외형은 남아 있지만, 그 중심에서는 주님보다 own과 자기 사랑이 지배하게 된 상태를 보여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통하여 황폐(vastation)가 단순히 선과 진리가 사라지는 상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빈자리를 악과 거짓이 대신 차지하는 상태임을 설명합니다. 영적 세계에는 공백이 오래 지속되지 않습니다.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를 거절하면, 그 자리는 곧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비롯된 거짓과 악으로 채워집니다. 이것이 바로 ‘찔레(nettle)와 ‘가시덩굴(bramble)이 상징하는 영적 의미입니다.

 

이러한 상징은 창3과도 직접 연결됩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땅에서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난다는 것은 단순히 자연환경이 척박해졌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의 겉 사람 안에서 선과 진리의 열매를 맺어야 할 자리에 거짓과 악이 자라기 시작하였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호9의 말씀은 창3의 상징을 다른 예언서를 통하여 다시 확인해 주는 중요한 증거가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호9:6을 인용하는 이유는, 영적 황폐란 선과 진리가 점차 사라지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를 거짓과 악이 대신 차지하는 상태임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애굽(Egypt)과 ‘(Memphis)은 자기 지혜를 의지하는 인간을, ‘찔레(nettle)와 ‘가시덩굴(bramble)은 그 결과 나타나는 영적 황폐를 상징합니다. 이를 통하여 스베덴보리는 창3의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말씀 전체를 관통하는 동일한 영적 언어이며, 주님으로부터 멀어진 사람과 교회의 상태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상징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AC.273, 창3:18, ‘가시덤불과 엉겅퀴’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And the thorn and the thistle shall it bring forth unto thee, and thou shalt eat the herb of the field. (창3:18)AC.273‘가시덤불과 엉겅퀴’(the t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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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3:18)



AC.273

가시덤불과 엉겅퀴(the thorn and the thistle)가 저주와 황폐(vastation)를 의미한다는 것은, 추수(harvest)와 열매 맺는 나무(fruit tree)가 그 반대인 축복과 번성을 의미한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합니다. 또한 가시덤불’, ‘엉겅퀴’, ‘찔레(nettle), ‘가시덩굴(bramble), 그리고 쐐기풀이 이러한 의미를 가진다는 것은 말씀의 여러 곳에서 분명히 나타납니다. 호세아처럼 말입니다. That the “thorn and the thistle” signify curse and vastation, is evident from harvest and fruit tree denoting the opposites, which are blessings and multiplications. That the “thorn,” the “thistle,” the “brier,” the “bramble,” and the “nettle,” have such a signification, is evident from the Word, as in Hosea:

 

보라 그들이 멸망을 피하여 갈지라도 애굽은 그들을 모으고 놉은 그들을 장사하리니 그들의 은은 귀한 것이나 찔레가 덮을 것이요 그들의 장막 안에는 가시덩굴이 퍼지리라 (9:6) Lo, they are gone away because of the vastation; Egypt shall gather them; Memphis shall bury them; their desirable things of silver, the nettle shall inherit them; the bramble shall be in their tents (Hos. 9:6).

 

여기 애굽(Egypt)(Memphis)은 주님께 속한 것들(Divine things)을 자기 자신과 기억 지식으로 이해하려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호세아 다른 구절입니다. Here “Egypt” and “Memphis” denote such as seek to understand Divine things from themselves and their own memory-knowledges. In the same prophet:

 

이스라엘의 죄 곧 아웬의 산당은 파괴되어 가시와 찔레가 그 제단 위에 날 것이니 그때에 그들이 산 더러 우리를 가리라 할 것이요 작은 산 더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리라 (10:8) The lofty places of Aven, the sin of Israel, shall be destroyed; the thorn and the thistle shall come up upon their altars (Hos. 10:8),

 

여기 아웬의 산당(the lofty places of Aven)은 자기 사랑을 의미하며, ‘가시와 찔레가 그 제단 위에(the thorn and thistle on the altars)는 모독(profanation)을 의미합니다. 이사야입니다. where the “lofty places of Aven” signify the love of self; and the “thorn and thistle on the altars,” profanation. In Isaiah:

 

12그들은 좋은 밭으로 인하여 열매 많은 포도나무로 인하여 가슴을 치게 될 것이니라 13내 백성의 땅에 가시와 찔레가 나며 희락의 성읍, 기뻐하는 모든 집에 나리니 (32:12, 13) Mourning upon the paps for the fields of desire, for the fruitful vine; upon the ground of my people shall come up the briery thorn (Isa. 32:12–13).

 

그리고 에스겔입니다. And in Ezekiel:

 

이스라엘 족속에게는 그 사방에서 그들을 멸시하는 자 중에 찌르는 가시와 아프게 하는 가시가 다시는 없으리니 내가 주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28:24) There shall be no more a pricking brier unto the house of Israel, nor a painful thorn from all that are round about them (Ezek. 28:24).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창3:18의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해석하면서, 이것이 단순한 식물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영적 상태를 나타내는 상징임을 여러 성경 구절을 통하여 입증합니다. 그는 먼저 하나의 중요한 원리를 제시합니다. 곧 ‘추수’와 ‘열매 맺는 나무’가 축복과 영적 번성을 의미한다면, 그 반대인 ‘가시덤불’과 ‘엉겅퀴’는 저주와 황폐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상징은 언제나 서로 대응되는 질서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해석 원리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황폐(vastation)는 앞의 AC.272에서 살펴본 것처럼, 선과 진리가 점차 소멸하고 영적 생명이 메말라 가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가시덤불과 엉겅퀴는 단순히 고통이나 어려움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맺어야 할 자리에서 생명 대신 거짓과 악이 자라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본래 열매가 있어야 할 땅에 가시덤불이 무성해졌다는 것은, 사람이나 교회 안에서 선과 진리가 더 이상 자라지 못하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9에서 등장하는 애굽과 놉(멤피스)은 이러한 황폐의 원인을 잘 보여줍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애굽은 기억 지식을, 멤피스는 그 기억 지식을 중심으로 주님께 속한 것(Divine things)을 이해하려는 태도를 상징합니다. 기억 지식 자체는 주님으로부터 주어진 유익한 도구이지만, 그것이 말씀보다 앞서고, 사람 자신의 판단이 계시보다 우위에 놓일 때에는 오히려 영적 생명을 메마르게 합니다. 그 결과 보배로운 은은 찔레의 차지가 되고, 장막에는 가시덩굴이 자라게 됩니다. 이는 진리의 자리에 거짓이 들어서는 영적 황폐를 상징합니다.

 

10은 그보다 더 깊은 원인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아웬의 산당’은 자기 사랑을 의미합니다. 산당은 원래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를 흉내 낸 곳이지만, 결국 자기 뜻대로 만든 예배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제단 위에 가시와 찔레가 자란다는 것은 예배 자체가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라, 거룩해야 할 예배가 자기 사랑과 거짓으로 오염되어 모독(profanation)에 이른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거룩한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자기 자신을 위해 사용하는 매우 심각한 영적 상태입니다.

 

32의 말씀도 같은 원리를 보여줍니다. 좋은 밭과 열매 많은 포도나무는 본래 선과 진리의 풍성한 열매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가시와 찔레가 자란다는 것은 교회 안에서 선과 진리가 점차 사라지고, 그 대신 악과 거짓이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상징을 통하여, 성경이 말하는 식물과 땅은 대부분 사람과 교회의 영적 상태를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반면 겔28은 회복의 약속을 담고 있습니다. ‘찌르는 가시와 아프게 하는 가시가 다시는 없으리니’라는 말씀은 단순히 평화로운 자연환경을 약속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교회를 회복시키실 때 거짓과 악이 더 이상 사람의 양심을 괴롭히지 못하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가시는 심판의 상징인 동시에, 그것이 제거되는 것은 구원과 회복의 상징이 됩니다.

 

이 글은 앞의 AC.272와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AC.272가 가시덤불과 엉겅퀴의 일반적인 영적 의미를 설명하였다면, AC.273은 여러 예언서를 통하여 그 의미를 성경 전체에서 입증합니다. 이를 통해 스베덴보리는 창세기의 상징이 어느 한 본문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를 관통하는 일관된 영적 언어임을 보여줍니다.

 

AC.273은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거부될 때 사람과 교회 안에 나타나는 영적 황폐를 상징한다는 사실을 밝히는 글입니다. 열매가 맺혀야 할 자리에 가시가 자라는 것은, 선과 진리가 거짓과 악으로 대체되었음을 뜻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에스겔의 약속처럼, 사람이 다시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들일 때에는 가시가 제거되고, 본래의 열매 맺는 생명이 회복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여러 예언서를 인용하여 강조하고자 하는 중심 가르침입니다.

 

 

심화

 

1. ‘9:6

 

 

AC.273, 심화 1, ‘호9:6’

AC.273.심화 1. ‘호9:6’ 보라 그들이 멸망을 피하여 갈지라도 애굽은 그들을 모으고 놉은 그들을 장사하리니 그들의 은은 귀한 것이나 찔레가 덮을 것이요 그들의 장막 안에는 가시덩굴이 퍼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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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0:8

 

이스라엘의 죄 곧 아웬의 산당은 파괴되어 가시와 찔레가 그 제단 위에 날 것이니 그때에 그들이 산 더러 우리를 가리라 할 것이요 작은 산 더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리라 (10:8) The lofty places of Aven, the sin of Israel, shall be destroyed; the thorn and the thistle shall come up upon their altars (Hos. 10:8),

 

 

스베덴보리가 AC.273에서 호10:8을 인용하는 이유는, 창3의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단순히 삶의 고난이나 저주의 상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려져야 할 거룩한 예배마저 악과 거짓으로 오염된 상태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 구절은 영적 황폐(vastation)가 사람의 삶뿐 아니라 교회의 예배와 신앙까지도 침범한 모습을 매우 강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먼저 ‘아웬(Aven)의 산당은 자기 사랑과 거짓 예배를 상징합니다. 산당은 원래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장소처럼 보였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주님께서 정하신 예배가 아니라 자기 뜻과 욕망에 따라 예배를 드리는 장소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아웬의 산당’은 주님을 위한 신앙이 아니라 own과 자기 사랑을 중심으로 세워진 종교를 의미합니다.

 

이어지는 ‘가시와 찔레가 그 제단 위에 날 것이니(the thorn and the thistle shall come up upon their altars)는 말씀이 이 구절의 핵심입니다. 성경에서 ‘제단’은 주님께 대한 사랑과 예배를 상징하는 가장 거룩한 장소입니다. 그런데 그 제단 위에 ‘가시와 찔레’가 자란다는 것은, 본래 선과 진리가 있어야 할 자리를 악과 거짓이 대신 차지하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예배의 형식은 남아 있지만, 그 안의 생명은 사라진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상태를 ‘모독(profanation)이라고 설명합니다. 모독이란 단순히 진리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알고도 그것을 own과 자기 사랑을 위해 사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제단 위에 가시와 찔레가 자란다는 것은, 거룩한 것이 더러운 것으로 바뀌었다는 뜻이며, 교회의 가장 깊은 부분까지 영적 황폐가 스며들었음을 나타냅니다.

 

이 점에서 이 구절은 호9:6보다 한 단계 더 심각한 상태를 보여줍니다. 호9에서는 찔레와 가시덩굴이 사람의 소유와 장막을 덮습니다. 그러나 호10에서는 마침내 제단까지 가시와 찔레가 뒤덮습니다. 이는 영적 황폐가 사람의 삶을 넘어 예배와 신앙의 중심까지 침투하였음을 뜻합니다.

 

이러한 상징은 창3과도 깊이 연결됩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땅에서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나게 되었다는 것은 단순히 자연의 저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선과 진리가 자라야 할 자리에 악과 거짓이 자라기 시작하였음을 뜻합니다. 호세아는 이 상징을 더욱 발전, 이제는 그 악과 거짓이 예배의 중심인 제단에까지 이르렀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호10:8을 인용하는 이유는,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영적 황폐의 가장 깊은 단계를 상징한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사람이 고난을 겪는 상태가 아니라, 자기 사랑과 own이 주님을 대신하여 예배의 중심을 차지한 상태이며, 그 결과 거룩해야 할 제단마저 악과 거짓으로 뒤덮이게 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를 통하여 스베덴보리는 창3의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라, 사람과 교회의 가장 깊은 영적 상태를 드러내는 말씀의 상징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3. ‘모독(profanation)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상태를 모독(profanation)이라고 설명합니다. 모독이란 단순히 진리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알고도 그것을 own과 자기 사랑을 위해 사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AC.273 심화 2)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말하는 ‘모독(profanation)은 단순히 하나님을 모욕하거나 불경한 말을 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말씀의 의미를 알고, 진리를 어느 정도 깨달은 사람이 그것을 받아들이고도, 결국에는 own과 자기 사랑을 위하여 그 진리를 왜곡하거나 거스르는 상태를 말합니다. 따라서 모독은 무지에서 비롯되는 죄가 아니라, 빛을 받은 후 그 빛을 거슬러 어둠을 선택하는 데서 생겨나는 더 깊은 영적 상태입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모독을 매우 심각하게 다룹니다. 진리를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은 잘못을 범하더라도 언젠가 진리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알고도 그것을 의도적으로 자기 욕망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하면, 사람 안에서 선과 진리의 결합이 끊어지고,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이 뒤섞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모독의 본질입니다.

 

모독이 위험한 이유는, 그것이 사람의 겉 행동보다 훨씬 깊은 곳에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입으로는 말씀을 인정하고,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마음속에서는 own과 자기 사랑을 최고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말씀은 더 이상 삶을 변화시키는 진리가 아니라, 자기 생각과 욕망을 뒷받침하는 수단으로 전락합니다. 거룩한 것을 이용하여 거룩하지 않은 목적을 이루려는 것이 바로 모독입니다.

 

이러한 상태는 교회 안에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읽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모든 것이 주님을 사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명예와 권세, 이익과 만족을 위한 것이라면, 외형은 거룩하여도 내면은 이미 own이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모독을 단순한 불신앙보다 더 깊은 영적 문제로 설명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호세아의 ‘가시와 찔레가 그 제단 위에 날 것이니(the thorn and the thistle shall come up upon their altars)라는 말씀은 매우 상징적입니다. 제단은 본래 주님께 드리는 사랑과 예배를 상징하는 가장 거룩한 장소입니다. 그런데 그 제단 위에 ‘가시와 찔레’가 난다는 것은, 거룩한 예배의 자리까지 악과 거짓이 침투하였음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예배 자체가 own과 자기 사랑에 오염되어 모독의 상태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3에서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사람의 삶 전체에 나타난 결과를 보여준다면, 호10은 그 결과가 마침내 예배의 중심인 제단에까지 미쳤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영적 황폐(vastation)가 가장 깊은 단계에 이르렀음을 의미합니다. 이제 사람은 선과 진리를 잃었을 뿐 아니라, 거룩한 것까지 자기 사랑을 위하여 사용하는 상태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람을 이러한 상태에 그대로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주님께서는 사람이 모독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때로는 진리를 충분히 알지 못하도록 허용하시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진리를 잊게 하시거나 외적인 상태에 머물게 하시기도 합니다. 이는 사람을 버리시기 때문이 아니라, 거룩한 것을 끝내 모독하는 더 큰 악으로부터 보호하시기 위한 자비입니다. 그러므로 모독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은 단순한 경고가 아니라, 사람의 영혼을 끝까지 지키려는 주님의 깊은 섭리를 함께 보여주는 교리이기도 합니다.

 

 

4. ‘32:12-13

 

12그들은 좋은 밭으로 인하여 열매 많은 포도나무로 인하여 가슴을 치게 될 것이니라 13내 백성의 땅에 가시와 찔레가 나며 희락의 성읍, 기뻐하는 모든 집에 나리니 (32:12, 13) Mourning upon the paps for the fields of desire, for the fruitful vine; upon the ground of my people shall come up the briery thorn (Isa. 32:12–13).

 

 

스베덴보리가 AC.273에서 사32:12-13을 인용하는 이유는, ‘가시’와 ‘찔레’가 선과 진리의 결핍, 곧 영적 황폐(vastation)를 상징한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본문은 본래 열매가 풍성해야 할 ‘좋은 밭’과 ‘열매 많은 포도나무’의 자리에 ‘가시와 찔레’가 나는 상태를 말하고 있으므로, 창3의 ‘가시덤불과 엉겅퀴’와 같은 영적 의미를 다른 예언서의 표현으로 보여줍니다.

 

좋은 밭으로 인하여 열매 많은 포도나무로 인하여 가슴을 치게 될 것이니라(Mourning upon the paps for the fields of desire, for the fruitful vine)라는 말씀에서 ‘좋은 밭’은 선이 자라야 할 교회의 상태를, ‘열매 많은 포도나무’는 진리로부터 맺히는 영적 열매를 의미합니다. 밭과 포도나무는 본래 축복과 번성, 곧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열매 맺는 상태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이어서 ‘내 백성의 땅에 가시와 찔레가 나며(upon the ground of my people shall come up the briery thorn)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내 백성의 땅’은 단순한 토지가 아니라 교회와 사람의 겉 사람, 곧 선과 진리가 심기고 자라야 할 삶의 자리를 의미합니다. 그 땅에 ‘가시와 찔레’가 난다는 것은, 본래 선과 진리의 열매가 있어야 할 곳에 악과 거짓이 자라기 시작했음을 뜻합니다.

 

이 구절이 중요한 이유는, 황폐가 단순히 아무것도 없는 빈 상태가 아니라는 점을 잘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영적 황폐는 열매가 사라진 자리에 곧바로 가시와 찔레가 자라는 상태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자리는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own과 자기 사랑에서 나오는 거짓과 악으로 채워집니다.

 

스베덴보리는 AC.273에서 여러 본문을 나란히 인용하면서, ‘가시’, ‘찔레’, ‘가시덩굴’ 같은 표현들이 모두 같은 계열의 상징임을 보여줍니다. 호9에서는 찔레와 가시덩굴이 장막과 은을 덮고, 호10에서는 가시와 찔레가 제단 위에 나며, 사32에서는 내 백성의 땅에 가시와 찔레가 납니다. 표현은 본문마다 다르지만, 모두 선과 진리가 물러난 자리에 악과 거짓이 자라는 영적 황폐를 가리킵니다.

 

특히 사32의 경우, ‘좋은 밭’과 ‘열매 많은 포도나무’가 먼저 언급된 뒤 곧바로 ‘가시와 찔레’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대조가 매우 선명합니다. 본래 교회는 열매 맺는 밭과 포도나무 같아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잃으면, 같은 땅이라도 더 이상 열매를 내지 못하고, 가시와 찔레를 내는 상태가 됩니다. 이것이 창3 이후 겉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타락의 결과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사32:12-13을 인용하는 이유는, ‘가시’와 ‘찔레’가 말씀 전체에서 영적 황폐를 나타내는 일관된 상징임을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좋은 밭과 열매 많은 포도나무는 축복과 번성을, 가시와 찔레는 저주와 황폐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창3의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단순한 자연의 변화가 아니라, 사람과 교회 안에서 선과 진리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악과 거짓이 차지하게 된 영적 상태를 의미한다는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뒷받침합니다.

 

 

5. ‘28:24

 

이스라엘 족속에게는 그 사방에서 그들을 멸시하는 자 중에 찌르는 가시와 아프게 하는 가시가 다시는 없으리니 내가 주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28:24) There shall be no more a pricking brier unto the house of Israel, nor a painful thorn from all that are round about them (Ezek. 28:24).

 

 

스베덴보리가 AC.273에서 겔28:24을 인용하는 이유는, 앞에서 호세아와 이사야를 통하여 ‘가시’, ‘찔레’, ‘가시덩굴’,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영적 황폐(vastation)를 상징한다는 사실을 설명한 데 이어, 이 구절에서는 그러한 것들이 제거되는 모습을 통하여 교회의 회복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앞의 예언들이 황폐의 상태를 묘사한다면, 에스겔은 주님께서 이루시는 회복의 결과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족속에게는 그 사방에서 그들을 멸시하는 자 중에 찌르는 가시와 아프게 하는 가시가 다시는 없으리니(There shall be no more a pricking brier unto the house of Israel, nor a painful thorn from all that are round about them)라는 말씀은, 자연 속 가시나무가 사라진다는 뜻이 아니라, 교회를 괴롭히던 악과 거짓의 세력이 더 이상 그들을 해치지 못하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찌르는 가시’와 ‘아프게 하는 가시’는 영적 생명을 상하게 하는 악과 거짓을 상징합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족속’은 단순히 역사적 이스라엘 민족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참된 교회와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또한 ‘그 사방에서 그들을 멸시하는 자’는 교회 밖에서 끊임없이 참된 신앙을 대적하고 무너뜨리려는 악과 거짓의 세력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주님께서 교회를 보호하시어 그러한 세력이 더 이상 교회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실 것을 약속하는 말씀입니다.

 

찌르는 가시’와 ‘아프게 하는 가시’라는 표현은 악과 거짓의 성질을 잘 보여줍니다. 가시는 사람을 찌르고 상처를 남기듯이, 거짓은 사람의 이해를 왜곡하고, 악은 사람의 의지를 병들게 합니다. 그 결과 선과 진리는 자라지 못하고, 영적 생명은 점차 메말라 갑니다. 그러므로 가시는 단순한 고통이 아니라, 영적 황폐를 일으키는 원인을 상징합니다.

 

스베덴보리는 AC.273에서 이 구절을 마지막에 인용, 매우 아름다운 대조를 보여줍니다. 호세아에서는 찔레와 가시덩굴이 장막을 덮고, 또 가시와 찔레가 제단 위에 나며, 이사야에서는 내 백성의 땅에 가시와 찔레가 돋아납니다. 그러나 에스겔에서는 마침내 찌르는 가시와 아프게 하는 가시가 다시는 없게 됩니다. 이는 말씀 전체가 타락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회복과 새 교회의 소망까지 함께 증언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겔28:24은 창3과도 깊이 연결됩니다. 창세기에서는 사람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되었지만, 에스겔에서는 주님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교회를 괴롭히던 ‘찌르는 가시와 아프게 하는 가시’가 다시는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하나는 타락의 결과를 보여주고, 다른 하나는 회복의 완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 전체에서 ‘가시’, ‘찔레’, ‘가시덩굴’,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모두 악과 거짓, 그리고 영적 황폐를 상징한다는 사실을 밝히는 동시에, 주님께서 교회를 회복하실 때에는 그러한 것들이 완전히 제거되어 다시 선과 진리가 평안 가운데 열매를 맺게 됨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겔28:24AC.273의 결론을 이루는 말씀으로, 영적 황폐보다 더 크신 주님의 회복의 능력을 증언하는 중요한 본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AC.272, 창3: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AC.272-274)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And the thorn and the thistle shall it bring forth unto thee, and thou shalt eat the herb of the field. (창3:18)AC.272‘가시덤불과 엉겅퀴’(the t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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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72.심화

 

1. ‘황폐(vastation)

 

여기서 황폐(vastation)란 단순히 무엇인가가 사라지는 상태가 아니라, 선과 진리가 점차 소멸, 영적 생명이 메말라 가는 과정을 뜻합니다. ( AC.272 해설 중)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황폐(vastation)는 단순히 무엇인가가 없어지거나 황량해지는 상태를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람 안에 있던 선과 진리가 점차 그 기능을 잃어가고, 그 결과 영적 생명이 메말라 가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황폐는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흐름을 사람이 지속적으로 거부함으로써 서서히 진행되는 영적 변화입니다.

 

황폐를 이해하려면 먼저 거듭남의 반대 과정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거듭남에서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 조금씩 심어지고 자라나며, 그 결과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점차 하나로 결합됩니다. 반대로 황폐는 이와 정반대의 과정입니다. 사람이 own과 세상 사랑을 선택할수록 속 사람과 겉 사람의 연결은 점차 약해지고, 선과 진리는 점점 힘을 잃어갑니다. 이것이 황폐의 본질입니다.

 

그러나 황폐는 곧바로 모든 선과 진리가 사라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사람 안에 리메인스를 언제나 보존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황폐란 주님께서 선과 진리를 거두어 가시는 상태가 아니라, 사람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삶 속에서 점점 작용하지 못하게 만드는 상태를 말합니다. 마치 샘은 여전히 물을 내보내고 있지만, 그 물길이 흙과 돌로 막혀 물이 흐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문제는 샘이 아니라, 물길이 막힌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황폐를 주님의 심판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영적 질서의 필연적 결과입니다. 사람이 계속하여 거짓을 진리보다 사랑하고, 자기 자신을 주님보다 앞세우며, 감각과 own만을 따라 살아가면, 선과 진리는 점점 설 자리를 잃게 됩니다. 결국 영혼은 주님의 생명을 느끼지 못하는 메마른 상태에 이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황폐입니다.

 

성경에서 황폐한 땅, 메마른 광야, 가시덤불과 엉겅퀴, 무너진 성읍과 같은 표현들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이러한 표현들은 단순히 자연환경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진리가 사라져 영적 생명이 더 이상 열매를 맺지 못하는 교회와 사람의 상태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황폐는 언제나 생명의 결핍을 의미하며,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과의 연결이 약해진 결과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황폐는 언제나 절망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경우 주님께서는 사람이 자기 자신을 신뢰하는 상태를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 황폐를 허락하십니다. 사람이 자신의 지혜와 능력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닫고 다시 주님을 바라보게 될 때, 황폐는 새로운 거듭남의 출발점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말씀에서는 황폐 뒤에 회복과 새 창조가 이어지는 장면이 자주 나타납니다.

 

개인의 신앙생활에서도 황폐는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말씀을 읽으면 기쁨이 있었고, 기도에도 생명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 모든 것이 메마르고 주님의 임재가 느껴지지 않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주님께서 떠나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여전히 속 사람 안에서 리메인스를 보존하시며, 사람이 자기 자신을 의지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더욱 깊이 주님께 나아가도록 인도하고 계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황폐는 때로는 영적 죽음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주님께서 사람을 더욱 깊은 생명으로 이끄시는 섭리의 과정이 되기도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황폐(vastation)는 선과 진리가 점차 힘을 잃고 영적 생명이 메말라 가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러나 그 근본 원인은 언제나 주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유입을 거부하는 데 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사람 안의 리메인스를 결코 버리지 않으시며, 황폐 가운데서도 회복의 가능성을 보존하십니다. 그러므로 황폐는 단순한 파괴나 종말이 아니라, 사람이 주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선택하느냐에 따라 죽음으로도 이어질 수 있고, 새로운 거듭남으로도 이어질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영적 상태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272, 창3: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AC.272-274)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And the thorn and the thistle shall it bring forth unto thee, and thou shalt eat the herb of the field. (창3:18)AC.272‘가시덤불과 엉겅퀴’(the t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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