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 영상의 가장 큰 장점은 성막을 단순히 고대 이스라엘의 종교 시설로 보지 않고,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보여 주는 하나의 거대한 상징 체계로 읽으려 한다는 점입니다. ‘성막 하나를 제대로 보면 성경 전체가 달리 보이기 시작한다’는 영상의 출발점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매우 의미 있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에게 성막은 단순한 예표 정도가 아니라, 그 구조와 재료와 기구와 방향과 의식 하나하나가 천국과 주님, 그리고 인간의 거듭남에 상응하도록 주어진 거룩한 표상입니다. 그러므로 성막을 자세히 설명하는 출애굽기의 긴 기록은 불필요한 건축 설명이 아니라, 말씀의 속뜻에서는 인간이 어떻게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며 어떻게 천국의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지를 보여 주는 영적 설계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상은 먼저 ‘미쉬칸’, 곧 장막을 하나님께서 인간 가운데 거하시는 장소로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높은 하늘에만 계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에게 가까이 오시고, 모세와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말씀하셨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 방향은 매우 좋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종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멀리 계신 하나님을 인간이 힘겹게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인간에게 끊임없이 가까이 오시는 주님을 인간이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사랑과 진리를 끊임없이 흘려보내십니다. 문제는 주님이 멀리 계신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그리고 거기서 나온 거짓들이 그 유입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상의 ‘우리의 기도가 하늘까지 힘겹게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곁에 계신 그분께 건네는 대화일지도 모른다’는 표현은 아름답고도 의미 있는 통찰입니다.

 

그러나 에덴을 설명하는 부분부터는 조금 더 조심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영상은 아담을 ‘ 번째 제사장’, 에덴을 ‘ 번째 성전’으로 설명하면서, 창세기 2장의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라는 표현과 성막 봉사에 사용되는 히브리어를 연결합니다. 성경신학적으로 흥미로운 연결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에덴은 무엇보다 실제 지리적 정원이나 최초의 성전 건물을 가리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에덴동산은 태고교회 사람들의 내적 상태, 곧 사랑과 퍼셉션을 통해 주님과 직접 교통하던 천적 상태를 표상합니다. 따라서 에덴이 ‘성전’이었다고 말한다면 건축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태고교회 사람의 내면 자체가 주님이 거하시는 성전이었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더 깊습니다. 성막은 잃어버린 에덴이라는 장소를 복원하는 모형이라기보다, 인간 안에서 무너진 천국의 질서를 주님께서 다시 세우시는 과정을 표상한다고 보는 편이 스베덴보리에 더 가깝습니다.

 

영상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뒤 에덴 동쪽에 그룹과 불칼이 놓였고, 훗날 성막의 휘장에도 다시 그룹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연결하면서 ‘쫓아내신 것으로 끝내신 아니라 돌아올 길을 다시 짜고 계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아름다운 연결이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에도 한 단계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창세기 3장의 그룹은 단순히 화난 하나님께서 인간의 귀환을 막기 위해 세워 놓으신 경비병이 아닙니다. ‘생명나무의 ’을 지키는 것은 타락한 인간이 거룩한 것에 함부로 접근하여 그것을 모독하지 못하도록 보호하는 주님의 자비로운 섭리입니다. 그러므로 닫힌 길조차 심판만이 아니라 보호입니다.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거룩함에 접근하여 더 깊은 모독에 빠지는 것보다, 한동안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으시는 것이 오히려 구원의 섭리인 것입니다. 성막 휘장의 그룹 역시 그런 의미에서 ‘거룩한 것의 보호’를 나타냅니다.

 

성막 뜰의 동쪽 문 하나를 강조하는 부분도 흥미롭습니다. 영상은 ‘제사장이든 평민이든 족장이든 하나로 들어가거나 아니면 들어가지 못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을 곧바로 ‘예수만이 유일한 ’이라는 교리적 공식으로만 읽기보다, 상응적으로 보면 더욱 풍성해집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길은 인간의 신분이나 지식이나 공로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특히 성경에서 ‘동쪽’은 주님과 주님을 향한 사랑에 상응합니다. 해가 뜨는 방향이라는 자연적 이유 때문이 아니라, 영계에서 천사들이 주님을 영적 태양으로 바라보는 질서와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막의 동쪽 입구는 단지 출입구 하나가 아니라 모든 영적 여정의 시작이 ‘주님을 향함’에 있음을 보여 주는 상응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번제단에 이르러서는 영상과 스베덴보리 사이에 중요한 차이가 나타납니다. 영상은 제물을 가져온 사람이 양의 머리에 손을 얹을 때 ‘ 죄가 바로 순간 양에게로 옮겨가고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전통적인 대속 신학에서 익숙한 설명이지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죄가 어떤 법적 실체처럼 한 존재에게서 다른 존재에게 이전된다고 이해하지 않습니다. 죄는 인간의 의지와 사랑, 그리고 실제 삶에 속한 것이므로 다른 존재에게 법적으로 옮겨질 수 없습니다. 제물과 피는 죄의 물질적 이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드려지는 사랑과 선,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과 정결을 표상합니다. 따라서 제사의 중심은 ‘죄인이 받을 형벌을 동물이 대신 받는다’는 데 있지 않고, 악으로 인해 무너진 인간의 질서가 주님께로 다시 돌아가고 회복되는 데 있습니다.

 

물두멍 역시 단순한 의식적 세척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성막으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물로 씻는 것은 말씀의 진리로 삶을 정결하게 하는 것을 표상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물은 특히 자연적 차원에서의 진리에 상응합니다. 사람이 주님께 가까이 간다는 것은 어떤 신비로운 감정만 깊어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진리를 통해 자신의 실제 생각과 말과 행동을 살피고 고치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영상이 ‘깨끗해져서 가는 것이 아니라 가면 자리에서 씻기는 구조’라고 말한 것은 목회적으로는 따뜻한 표현이지만, 여기에 한 가지를 덧붙여야 합니다. 주님은 있는 모습 그대로 인간을 받아 주시지만, 받아 주신 인간을 있는 모습 그대로 내버려 두지는 않으십니다. 성막의 길은 받아들임의 길인 동시에 정결과 거듭남의 길입니다.

 

성소 안으로 들어가면 등잔대와 진설병과 분향단이 등장합니다. 영상은 등잔대를 ‘나는 세상의 ’, 진설병을 ‘나는 생명의 ’이라는 주님의 말씀과 연결합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빛은 신적 진리를, 떡은 신적 선을 표상합니다. 인간에게 적용하면 등잔대의 빛은 이해를 밝혀 주는 진리이며, 떡은 의지를 살리고 영혼을 먹이는 사랑의 선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 신학 전체를 관통하는 ‘선과 진리’, 또는 ‘사랑과 지혜’의 결합과도 연결됩니다. 주님은 단순히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치시는 분만도 아니고, 사랑만 주시는 분도 아닙니다. 사랑과 지혜, 선과 진리가 주님 안에서는 완전히 하나이며, 거듭나는 인간 안에서도 이 둘이 다시 결합되어야 합니다.

 

향 역시 영상이 기도와 연결한 것처럼 성경에서 기도를 표상하지만, 스베덴보리에게는 단순히 인간의 말이 위로 올라가는 모습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참된 기도는 인간의 입술에서 나온 문장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있는 사랑과 신앙이 주님께 향하는 내적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향기가 올라간다는 것은 주님께서 인간의 아름다운 문장을 들으신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 안에서 주님을 향하는 선한 애정과 진실한 신앙을 받으신다는 뜻입니다. 말없이 드리는 기도도 기도이고, 때로는 무엇을 구해야 할지 몰라 침묵하는 것조차 주님을 향한 내적 애정이 있다면 깊은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지성소와 법궤에 대한 영상의 설명도 매우 인상적입니다. 다른 민족의 신전과 달리 이스라엘의 지성소에는 신상이 없고, 그룹 사이의 보이지 않는 공간이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낸다는 설명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어떤 자연적 형상으로 제한될 없는 ’이라는 중요한 진리를 보여 줍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에게는 여기서 놀라운 전환이 하나 더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결국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이시는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보이지 않는 신성을 ‘아버지’, 나타난 신적 인성을 ‘아들’, 그리고 그분에게서 나오는 신적 활동을 ‘성령’으로 이해합니다. 따라서 성막의 가장 깊은 곳에 임재하시는 여호와와 복음서에서 우리 가운데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서로 다른 두 신적 존재가 아니라 한 분 주님의 계시입니다.

 

여기에서 영상이 속죄소, 곧 카포렛 위에 피가 뿌려지는 장면을 ‘하나님이 위에서 내려다보실 보이는 깨어진 율법이 아니라 위를 덮은 피였다’고 설명하는 부분은 특별히 분별해서 읽어야 합니다. 이 표현은 감동적이지만, 자칫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의 실제 악은 그대로 두시면서 피를 보고 법적으로 죄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신다는 인상을 줄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구원은 그런 법적 선언이 아닙니다. 주님은 인간의 죄를 못 본 체하지 않으시며, 다른 존재의 의를 인간에게 외적으로 덮어씌우지도 않으십니다. 인간이 주님의 능력으로 악을 실제로 멀리하고 선을 행할 수 있도록 변화시키십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그러므로 ‘덮음’이 있다면 죄를 감추어 하나님께 보이지 않게 하는 덮음이라기보다, 주님의 자비와 선이 인간의 악을 제어하고 정복하며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대속죄일의 반복과 그리스도의 ‘단번에’ 이루신 일을 연결하는 영상의 흐름 역시 히브리서에 충실한 전형적인 기독교 해석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 ‘단번의 사건’을 형벌 대속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는 성난 아버지를 달래거나 인간에게 내려질 형벌을 대신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시 인간에게 압도적으로 밀려 들어오던 지옥의 세력을 직접 만나 싸우고 정복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주님의 지상 생애 전체는 연속적인 시험과 승리의 과정이었으며, 십자가는 그 마지막 시험이자 마지막 승리였습니다. 동시에 주님께서는 그 과정을 통해 자신이 입으신 인간성을 완전히 신성하게 하셨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구속’과 ‘영화’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 점에서 ‘휘장이 찢어졌다’는 영상의 장면은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더욱 깊어집니다. 휘장은 단순히 하나님께 들어가는 법적 장벽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인성을 영화롭게 하심으로써 신성과 인성 사이의 모든 분리가 사라지고, 동시에 인간이 주님의 신적 인성을 통해 신성에 접근할 수 있는 완전한 길이 열린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인간은 알 수 없는 절대자를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라, ‘나를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신 주님 안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화를 풀어 주신 순간이 아니라, 주님께서 지옥을 정복하시고 자신의 인성을 완전히 신성하게 하심으로 인간과 천국 사이의 질서를 회복하신 결정적인 승리입니다.

 

영상이 요한복음 114절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를 성막과 연결한 부분은 매우 좋습니다. ‘거하다’에 사용된 헬라어가 장막을 치는 이미지와 연결된다는 것은 요한복음의 성육신 이해를 풍성하게 합니다. 광야에서 장막 가운데 임재하셨던 여호와께서 마침내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셨다는 흐름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성육신은 하나님께서 잠시 인간의 옷을 입으셨다가 벗으신 사건이 아닙니다. 주님은 어머니 마리아에게서 받은 유한한 인간적 요소를 시험과 승리를 통해 차례로 벗으시고, 그 자리에 자신 안의 신성으로부터 오는 신적 인간성을 입으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다시 이전의 보이지 않는 하나님으로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영원히 ‘신적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것이 성막이 가리키는 궁극적인 실체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리고 영상은 에덴에서 성막으로, 성막에서 성육신으로, 십자가에서 요한계시록 21장의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로 이야기를 이어 갑니다. 이 큰 방향은 아름답습니다. 다만 마지막의 ‘ 이상 성막이 필요하지 않은 ’은 단순히 먼 미래에 물리적인 새 지구가 만들어지고 그곳에서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산다는 그림으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요한계시록의 새 예루살렘은 새 교회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다’는 것은 주님께서 그 교회의 선과 진리 가운데 거하시며, 궁극적으로는 거듭난 인간의 내면 가운데 거하신다는 뜻입니다. 성막의 완성은 건축물이 사라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 주님의 성전이 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이 영상 전체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다시 바라보면, 성막은 ‘죄인이 피를 통해 법적으로 용서받아 하나님께 접근하는 과정’보다 훨씬 더 크고 깊은 것을 보여 줍니다. 뜰에서 성소로, 성소에서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은 인간의 겉 사람에서 점점 더 깊은 속 사람으로 들어가는 거듭남의 여정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놋에서 은으로, 다시 금으로 깊어지는 재료의 변화 역시 자연적 차원에서 영적 차원으로, 다시 천적 차원으로 깊어지는 질서를 생각하게 합니다. 물로 씻는 것은 진리에 의한 정결이며, 등잔대의 빛은 신앙의 진리이고, 떡은 사랑의 선이며, 향은 그 사랑과 신앙으로부터 올라가는 예배이고, 가장 깊은 지성소는 주님과 인간의 내적 결합을 향합니다.

 

따라서 영상의 마지막 문장, ‘하나님은 멀리 계신 적이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줄곧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계셨던 겁니다’는 이 영상 전체에서 가장 아름답게 건질 수 있는 문장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에 한 문장을 더 붙이고 싶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향해 오시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안으로 들어오셔서 그 사람을 자신의 형상과 모양으로 다시 만드시기를 원하십니다. 성막의 목적은 우리가 잠깐 하나님을 방문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인간의 마음 자체가 주님의 거처가 되는 데 있습니다.

 

처음 에덴에서 인간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지혜 안에 살았습니다. 그 질서가 무너지자 주님은 표상적인 성막과 성전을 통해 다시 천국의 질서를 보여 주셨고, 마침내 친히 세상에 오셔서 지옥을 정복하시고 자신의 인성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말씀을 통해 각 사람의 마음 안에서 또 하나의 성막을 세우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성막의 마지막 질문은 ‘성막의 기구가 무엇을 예표하는가?’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더 본질적인 질문은 이것입니다. ‘지금 안에서 주님이 거하실 성막은 어떻게 세워지고 있는가?

 

성막을 그렇게 읽기 시작하면 출애굽기의 낯설고 복잡한 치수와 재료와 기구와 의식들이 전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것들은 오래전에 사라진 종교 시설의 설계도가 아니라, 주님께서 한 사람의 겉 사람에서 시작하여 그의 가장 깊은 속 사람까지 들어오시며 그를 거듭나게 하시는 질서의 표상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길의 중심에는 인간의 공로나 제물의 피 자체가 아니라 한 분 주님이 계십니다. 성막도 주님을 가리키고, 제사도 주님을 가리키며, 빛도 떡도 향도 법궤도 주님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 주님께서 마침내 인간 가운데 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결국 성막의 이야기는 ‘어떻게 죄인이 무서운 하나님에게 가까이 있는가?’의 이야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더 깊게는 ‘어떻게 주님께서 타락한 인간 안으로 다시 들어오셔서 그를 천국의 형상으로 회복시키시는가?’의 이야기입니다. 그 관점에서 보면 성막은 건물이 아니라 거듭남의 지도이고, 지성소는 장소가 아니라 주님과 인간의 결합이며, 휘장이 열리는 것은 단순한 출입 허가가 아니라 인간의 가장 깊은 내면까지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들어올 길이 다시 열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지금도 각 사람 안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SY.16, 말씀나침반, ‘하나님은 '이것' 때문에 사탄을 창조했다’ (20260329)

※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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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사도행전 9장의 다비다 이야기를 ‘바늘로 천국을 만들었다’는 하나의 이미지로 풀어냅니다. 다비다가 과부들을 위해 속옷과 겉옷을 만들어 주었다는 성경의 짧은 기록에서 출발하여, 바늘의 작음, 꿰매는 기능, 소리 없음, 자신을 드러내지 않음, 이어 줌, 완성품을 만들어 냄, 흔적을 남김, 한 땀 한 땀 일함, 직접 손에 쥐고 일함, 일을 마치고 사라짐이라는 열 가지 영성을 끌어냅니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 ‘자기가 가진 아주 작은 것으로도 주변을 천국으로 만들 있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이번 영상은 최근 영상들 가운데서도 특히 ‘쓰임(use)이라는 중심 주제와 상당히 가까이 맞닿아 있습니다.

 

우선 다비다의 이야기를 ‘큰일을 사람’의 이야기보다 ‘자기 손에 있던 것으로 이웃에게 선을 행한 사람’의 이야기로 읽은 점은 매우 좋습니다. 다비다는 왕도 아니고 사도도 아니며, 거대한 조직을 세운 사람도 아닙니다. 성경이 기억하는 것은 그가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다’는 사실과, 그가 죽었을 때 과부들이 그에게서 받은 옷을 들고 울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쓰임’과 매우 가까운 장면입니다. 천국적인 삶은 반드시 거대한 일을 해야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받은 능력과 형편을 가지고 실제 이웃에게 유익을 주는 데서 나타납니다. 바늘 하나와 손재주가 누군가에게는 추위를 막아 주고, 존엄을 지켜 주며, ‘나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사랑의 표지가 될 수 있습니다.

 

특히 ‘바늘은 작은데 일을 한다’는 비유는 좋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주님의 나라에서는 외적 크기보다 그 안에 담긴 사랑과 쓰임이 중요합니다. 세상에서는 수천 명을 움직이는 일을 ‘큰일’이라고 부르고 한 사람의 옷을 꿰매 주는 일을 ‘작은 ’이라고 부르기 쉽지만, 천국의 질서는 그렇게 단순히 규모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진실한 체어리티에서 한 사람을 살리는 일이 주님 앞에서는 훨씬 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영상의 ‘작은 것을 무시하지 말자’는 메시지는 단지 ‘작게 시작하면 나중에 큰일을 있다’는 성공론으로 끝나기보다, ‘작은 쓰임도 자체로 주님의 나라에 속한다’는 데까지 가면 더 깊어집니다.

 

바늘은 헤어진 곳을 꿰맨다’는 비유는 더 직접적으로 체어리티와 연결됩니다. 상한 것을 꿰매고, 아픈 곳을 어루만지고, 배고픈 것을 채워 준다는 설명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매우 아름답습니다. 체어리티는 추상적인 호감이 아니라 구체적인 유익을 행하는 사랑입니다. 누군가의 삶이 찢어진 곳을 발견했을 때 정죄하기보다 가능한 범위에서 그것을 이어 주는 것, 관계가 끊어진 곳에서는 화해를 돕고, 가난한 곳에서는 필요한 것을 채우며, 외로운 사람에게는 곁이 되어 주는 것, 이것이 ‘바늘의 영성’을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실제 영적 삶으로 만드는 길입니다.

 

바늘은 소리를 내지 않는다’, ‘바늘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두 대목은 이번 영상에서 특히 중요합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예수님은 드러나고 나는 드러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아주 중요한 원칙입니다. 선을 행하고 나서 ‘내가 이것을 했다’는 공로의식이 강해질수록 선 안에 proprium이 섞이기 쉽습니다. 선의 근원은 주님이고 인간은 그 선이 흘러가는 그릇이라는 것을 인정할 때, 사람은 자기가 한 일을 자랑하기보다 감사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늘은 옷을 만들고 나면 보이지 않는다’는 이미지는 이번 영상 전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비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다만 여기에도 미세한 차이는 있습니다. ‘자신을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외적으로 완전히 숨어야 한다는 규칙으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쓰임은 공개적으로 해야 하고, 가르치는 사람은 앞에 서야 하며, 지도자는 책임 있게 자신의 이름으로 말해야 합니다. 문제는 ‘보이는가, 보이지 않는가’가 아니라 ‘누구의 영광을 구하는가’입니다. 사람들 앞에 서 있으면서도 마음으로는 주님께 공을 돌릴 수 있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봉사하면서도 마음속으로 ‘나는 겸손한 사람’이라고 자기를 높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감추어짐은 외적 익명성보다 내적 비공로성에 있습니다.

 

바늘은 이어 준다’는 부분도 좋습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다비다와 과부들, 다비다와 예수, 과부들과 천국을 바늘이 이어 주었다는 식으로 설명합니다. 비유적 표현으로 받아들이면 의미가 있습니다. 다비다가 만든 옷은 단지 직물이 아니라 사랑의 관계를 남겼습니다. 사람이 죽은 뒤 과부들이 그 옷을 들고 울었다는 것은 다비다가 그들의 삶 속에 실제 쓰임으로 남아 있었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공동체를 실제로 결속시키는 것도 교리적 구호가 아니라 선과 진리가 삶에서 만날 때입니다. 진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보여 주고, 선은 그것을 행하게 하며, 체어리티는 사람과 사람을 살아 있는 관계로 연결합니다.

 

바늘은 완성될 때까지 일한다’, ‘ 순서를 지킨다’는 대목은 거듭남과 연결해서 읽을 만합니다. 거듭남은 한 번의 감동이나 한 번의 결단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이루어지는 질서 있는 과정입니다. 인간은 하루아침에 전혀 다른 존재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의 악을 보고, 그것을 죄로 인정하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며 피하고, 그 자리에 선한 습관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반복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 ’은 상당히 좋은 비유입니다. 다만 ‘매뉴얼대로, 규정대로’라는 표현은 영적 삶에서는 조금 조심해서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거듭남에는 주님의 질서가 있지만 모든 사람의 외적 과정이 동일한 매뉴얼을 따르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섭리는 각 사람의 상태와 자유를 따라 놀랍도록 개별적으로 역사합니다.

 

바늘이 지나간 자리에는 실이 남는다’는 표현도 생각할 거리를 줍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바울이 지나간 자리에는 교회가 남고, 사람 역시 어디를 지나갔든 어떤 흔적을 남겨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 역시 ‘업적을 남겨야 한다’는 쪽으로 흐르지만 않는다면 좋은 가르침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무엇을 남겼는가’보다 ‘어떤 상태를 남겼는가’가 중요합니다. 내가 지나간 자리에 내 이름과 기념물이 남는 것보다, 한 사람이 더 평안해지고, 한 관계가 회복되고, 한 사람이 주님께 더 가까워졌다면 그것이 훨씬 귀한 흔적입니다. 다비다가 남긴 가장 중요한 흔적은 바느질 공동체의 규모가 아니라 과부들이 몸으로 기억하고 있던 사랑이었습니다.

 

손은 일하고 마음은 하나님께 드린다’는 아홉 번째 원칙 역시 이번 영상에서 매우 좋은 문장입니다. 이것은 수도원적 영성과 일상적 쓰임을 연결할 수 있는 접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세상 일을 버리고 종교적 명상에만 몰두하는 삶보다, 자신의 직업과 가정과 사회적 의무 안에서 정직하게 쓰임을 행하는 삶을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그러므로 바느질을 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음식을 만들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청소하고, 가르치고, 운전하고, 돌보고, 행정을 하는 동안에도 주님의 선을 이웃에게 전달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다비다는 수도원 밖에서 수도 영성의 핵심을 살았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영상에는 성경 본문과 설교적 확대를 구별해야 할 부분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에서 여제자는 다비다 명이다’라는 말은 사도행전 936절에서 실제로 다비다에게 여성형 ‘제자’에 해당하는 표현이 사용된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지만, 그것을 근거로 다비다가 ‘예수님과 행동을 완전히 똑같이 하는 특별한 완전한 ’이라는 하나의 신분명처럼 설명하는 것은 본문보다 많이 나아간 해석입니다. 본문이 분명히 보여 주는 것은 다비다가 제자였고 선행과 구제가 많았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상은 설교적 적용으로 구별해서 듣는 것이 좋겠습니다.

 

또 다비다의 회복과 고넬료 사건을 연결하여 ‘다비다의 바늘 하나 때문에 해외 선교가 시작되었다’고 하는 표현도 설교적 연결로서는 흥미롭지만, 사도행전 자체가 그렇게 인과관계를 명시하지는 않습니다. 베드로가 다비다 사건 이후 욥바에 머물렀고 그곳에서 고넬료의 사람들을 만나 가이사랴로 간 것은 본문 흐름상 맞습니다. 그러나 ‘다비다 때문에 이방 선교가 시작되었다’고 단정하면 성경이 말하는 것보다 한 걸음 더 나갑니다. 오히려 ‘다비다 사건을 계기로 베드로가 욥바에 머무르게 되었고, 바로 시기에 고넬료 사건이 이어진다. 하나의 쓰임이 주님의 섭리 안에서 예상하지 못한 다음 쓰임과 연결될 있다’ 정도로 말하면 훨씬 깊고 안전합니다.

 

죽은 다비다를 두고 사람들이 ‘베드로가 오면 반드시 살아날 것을 믿었다’고 해석하는 부분 역시 본문은 그렇게까지 분명히 말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은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지체 말고 달라’고 간청했다고 기록하지만, 그들이 이미 확실하게 부활을 기대했다고 명시하지는 않습니다. 결과적으로 베드로의 기도를 통해 다비다가 살아난 것은 분명하지만, 그 이전 사람들의 내면을 ‘반드시 살아날 것을 믿었다’고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런 부분은 설교의 감동을 줄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말씀 자체와 우리의 아름다운 추론을 구별하기 위해서입니다.

 

반면 영상 후반에 강문호 수도사가 다비다에 관한 후대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지금부터 이야기는 믿을 아니라 참고만 하는 전승, 전설’이라고 명확하게 선을 긋는 것은 매우 좋습니다. 다비다가 부활 후 더욱 열심히 구제했고 ‘욥바의 어머니’라 불렸다는 이야기, 사람들이 다비다의 집에 모여 ‘바늘 공동체’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성경과 같은 권위로 말하지 않고 전승으로 구별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이런 구별은 중요합니다. 전승은 영적 묵상의 재료가 될 수 있지만 그것을 계시된 사실과 동일한 층위에 놓을 필요는 없습니다.

 

이번 영상에서 조금 더 주의 깊게 바라볼 부분은 후반전 이야기입니다. 다비다의 전승을 소개한 뒤 강문호 수도사는 모세, 예수, 아브라함을 들어 ‘후반전이 커야 한다’고 말하고, 자신의 아버지가 은퇴 후 29년 동안 해외에서 더 크게 일했다는 이야기, 그리고 자신도 ‘은퇴한 7년째인데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지 않습니까?’라고 자신의 현재 활동을 연결합니다. 이 부분은 노년과 은퇴를 소극적 퇴장으로 여기지 않고 남은 삶에서도 쓰임을 찾자는 뜻에서는 매우 귀합니다. 사람은 몇 살이 되었든 주님께서 허락하신 상태 안에서 계속 이웃에게 유익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후반전은 앞보다 커야 한다’는 표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조금 바꾸어 듣는 편이 좋겠습니다. 주님 앞에서 후반전이 더 ‘커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더 많은 책을 쓰고, 더 많은 나라를 다니고, 더 많은 일을 해야 영적으로 더 큰 삶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후반전은 오히려 외적으로 작아지면서 내적으로 더 깊어질 수도 있습니다. 예전에는 수천 명 앞에서 설교하던 사람이 노년에는 한 사람에게 따뜻한 말을 건네는 것이 마지막 쓰임일 수도 있고,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병상에서 자신의 성급함과 자기의지를 내려놓는 것이 평생의 가장 깊은 거듭남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영상 안에는 묘한 대비가 있습니다. 앞에서는 ‘바늘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일을 하면 바늘은 사라진다’, ‘예수님은 드러나고 나는 드러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후반에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아버지의 큰 사역과 자신의 은퇴 후 활동을 예로 듭니다. 이것을 곧바로 모순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의 경험을 예화로 사용하는 것은 설교에서 흔한 일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이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가장 조용히 비추어 볼 만한 자리이기도 합니다. ‘바늘의 영성’을 말하는 사람에게 가장 어려운 시험은 어쩌면 ‘내가 바늘처럼 일했다는 사실조차 말하고 싶어지는 마음’을 살피는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proprium은 노골적인 자랑으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나는 겸손합니다’, ‘나는 주님만 드러내고 싶습니다’, ‘나는 은퇴 후에도 쉬지 않고 일합니다’라는 종교적으로 선한 문장 안에도 아주 미세하게 들어올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강문호 수도사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 글을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 모두에게 해당합니다. 참된 ‘바늘의 영성’은 내가 얼마나 많은 천국을 만들었는지를 세는 것이 아니라, 일을 마친 뒤 ‘ 일을 하게 하신 분도 주님이고, 선을 주신 분도 주님이며, 내가 것은 주님께서 주신 것을 받아 사용한 것뿐입니다’라고 더 깊이 인정하는 데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늘로 천국을 만들었다’는 제목도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한 번 더 깊게 읽을 수 있습니다. 인간이 천국을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천국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인간 안에 형성됩니다. 그러나 다비다의 바늘은 그 천국적 선이 자연계에서 하나의 구체적 쓰임으로 나타나는 도구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다비다가 바늘로 천국을 만들었다’기보다 ‘주님께서 다비다의 사랑과 바늘을 통해 천국의 어떤 것을 이웃의 가운데 나타내셨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이번 영상에서 결국 ‘바늘’보다 ‘옷을 들고 울던 과부들’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비다가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기록한 이력서가 남은 것이 아니라,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그의 사랑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한 인간의 쓰임에 대한 매우 아름다운 증언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떠난 뒤 누군가가 ‘ 사람은 굉장한 사람이었다’고 말하는 것보다 ‘ 사람이 내가 힘들 나를 도와주었다’, ‘ 사람 때문에 내가 다시 일어날 있었다’고 말한다면, 그것이 훨씬 천국적인 흔적일 것입니다.

 

따라서 이번 영상의 ‘바늘의 영성’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담는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주님께 받은 작은 능력을 가지고 상한 것을 이어 주며, 소리 없이 이웃의 필요를 채우고, 선을 자신의 공으로 돌리지 않은 , 끝까지 쓰임을 행하는 .’ 그렇게 살다가 일이 끝났을 때 바늘은 조용히 놓이고 옷만 남습니다. 그리고 더 깊이 보면 옷조차 우리의 공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 손을 빌려 누군가에게 입혀 주신 사랑의 흔적일 것입니다.

 

 

 

SY.94, 강문호 수도사, ‘미르사바 수도원’ (20200119)

※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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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4.심화

1. 천상의 결혼이란 무엇인가?

 

AC.54에는 매우 중요한 표현 하나가 등장합니다. ‘천상의 결혼(heavenly marriage)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자기들의 결혼이 주는 행복이 이 천상의 결혼에서 온다고 퍼셉션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천상의 결혼은 무엇일까요? 천국에 간 남자와 여자가 이루는 결혼을 말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이해와 의지의 결합을 말하는 것일까요?

 

먼저 AC.54가 직접 말하는 것부터 구별해야 합니다. 이 글은 태고교회 사람들의 실제 결혼이 그들에게 행복과 기쁨의 주된 근원이었고, 그들이 외적인 것에서 내적인 것을 보았기 때문에 자기들의 결혼을 통해 천상의 결혼을 생각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결혼의 행복이 그 천상의 결혼에서 온다고 퍼셉션했다고 합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영적 인간 안의 이해를 남자’, 의지를 여자라고 불렀으며 둘이 하나로 작동할 때 그것을 결혼이라고 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AC.54 안에서만 보아도 결혼이라는 말은 자연적인 남녀 관계에만 머물지 않고 인간 내면의 두 기능이 하나로 작동하는 관계까지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천상의 결혼 = 이해와 의지의 결합이라고 완전히 동일시하는 것도 조금 조심해야 합니다. AC 전체에서 천상의 결혼이라는 개념은 여러 층위에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해와 의지의 결합, 진리와 선의 결합, 신앙과 사랑의 결합 등이 서로 연결되며, 궁극적으로 모든 참된 결합의 근원은 주님에게 있습니다.

 

따라서 천상의 결혼을 하나의 평면적인 등식으로 외우기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의 참된 결합이 여러 차원에서 나타나는 질서라는 방향으로 이해하는 편이 좋습니다. 다만 이 표현 역시 AC.54 자체의 문장을 넘어선 전체 AC의 관점에서 정리한 설명이라는 점은 구별해야 합니다.

 

AC.54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볼 수 있는 형태는 이해와 의지의 결합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해를 남자, 의지를 여자라고 하고  둘이 하나로 작동할  그것을 결혼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둘 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이해는 이해이고 의지는 의지인 채로, 둘이 하나로 작동합니다.

 

이것은 결혼이라는 상응의 중요한 성질을 보여 줍니다. 참된 결합은 차이를 없애는 동일화가 아니라 구별된 것들이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해와 의지가 결합한다고 해서 이해가 의지가 되거나 의지가 이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서로 다른 두 기능이 하나의 생명을 이루어 작동합니다.

 

앞의 AC.53과 연결하면 신앙과 사랑의 관계도 여기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AC.53은 이해에 속한 신앙과 의지에 속한 사랑을 구별했습니다. 따라서 이해와 의지의 결혼은 자연스럽게 신앙과 사랑의 결합과도 연결됩니다. 이후 AC.475-476에서도 스베덴보리는 남자와 여자가 신앙과 사랑의 결혼을 뜻한다고 다시 설명합니다.

 

여기서 신앙과 사랑의 결혼은 교리를 많이 알면서 사랑도 조금 더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앙과 사랑이 참으로 결합한다는 것은 사람이 아는 진리와 그가 실제로 사랑하고 원하는 선이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은 상태와 관계됩니다. 이해가 한 방향을 보고 의지가 정반대 방향을 향한다면 둘이 하나로 작동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곧바로 아는 대로 완벽하게 살아야만 결혼이 이루어진다는 도덕적 완전주의로 바꾸어서도 안 됩니다. 거듭남은 진행되는 과정이며, AC.54는 그 과정의 세부 단계를 설명하는 글이 아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참된 영적 질서가 이해와 의지의 분리에 있지 않고 그 결합에 있다는 것입니다.

 

천상의 결혼이라는 말을 선과 진리의 관계에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해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기능과, 의지는 선을 사랑하고 행하는 기능과 깊이 관계되므로 이해와 의지의 결합은 진리와 선의 결합과 분리되어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술 전체에서 선과 진리의 결합은 천국과 거듭남을 이해하는 매우 근본적인 원리가 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남자 = 진리’, ‘여자 = 이라는 하나의 기계적인 공식으로 모든 성경 구절에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상응은 문맥을 따라 보아야 합니다. AC.54가 직접 말하는 것은 영적 인간 안에서 남자 = 진리’, ‘여자 = 이며, 둘이 하나로 작동할 때 그것을 결혼이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관련된 더 넓은 대응은 이후의 AC 설명과 함께 확인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태고교회 사람들의 실제 결혼은 이 내적인 결혼과 어떤 관계였을까요? AC.54의 표현은 매우 아름답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결혼에서 누리는 행복이 천상의 결혼에서 온다고 퍼셉션했습니다. 즉 자연적인 결혼 자체를 행복의 최종 근원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 결합의 행복 안에서 더 높은 결합의 질서를 보았고, 그 근원을 천적인 것과 궁극적으로 주님에게서 찾았습니다.

 

그렇다고 자연적인 결혼을 단순한 그림자나 중요하지 않은 외피로 취급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의 결혼이 행복과 기쁨의 주된 근원이었다고 AC.54가 직접 말합니다.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을 참으로 표상할 때 외적인 것은 버려야 할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을 담고 드러내는 귀한 형식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태고교회 사람들이 무엇이든 결혼에 비유할 수 있으면 결혼에 비유했던 이유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됩니다. 그들에게 결혼은 단순히 사회제도 하나가 아니라 서로 구별되는 것들이 하나를 이루는 행복을 경험하게 하는 매우 깊은 표상이었습니다.

 

또 이 때문에 말씀에서 교회 자체도 ’, ‘처녀’, ‘아내라는 결혼의 언어로 표현됩니다. AC.54는 그 이유를 교회의 선에 대한 애정에서 찾습니다. 이후 말씀에서 주님과 교회의 관계가 혼인과 부부의 언어로 나타날 때에도 이 천상의 결혼이라는 큰 주제가 배경에 놓이게 됩니다.

 

그러면 천국에서의 실제 남녀 결혼과 천상의 결혼은 아무 관계가 없을까요? 그렇다고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다른 저술에서 천국의 결혼과 결혼애를 별도로 매우 깊게 다룹니다. 다만 AC.54 천상의 결혼을 처음부터 사후세계의 부부생활만을 뜻하는 용어로 제한하면 이번 글의 중심을 놓치게 됩니다. 여기서는 자연적인 결혼의 행복이 더 내적인 천상의 결합에서 온다는 방향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결합의 궁극적인 근원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AC.54에서 태고교회 사람들의 생각은 외적인 것에서 내적인 것으로, 내적인 것에서 천적인 것으로, 그리고 마침내 그들의 모든 이신 주님께로 향했습니다. 따라서 천상의 결혼도 인간이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내는 완전한 조화가 아닙니다. 모든 참된 선과 진리와 생명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앞의 AC.39 이후의 원리는 여기에서도 그대로 유지됩니다.

 

그래서 천상의 결혼을 가장 안전하게 기억하는 방법은 하나의 단단한 등식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중심 질서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서로 구별되는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 의지와 이해가 주님에게서 오는 질서 안에서 하나로 결합하여 작동하는 것입니다. AC.54에서는 그 가운데 특별히 이해와 의지가 하나로 작동하는 것을 결혼이라고 부릅니다.

 

결국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실제 결혼의 행복은 그 자체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더 내적인 결합을 비추었고, 그 결합은 다시 천적인 것으로, 궁극적으로 주님께 시선을 돌리게 했습니다. 이것이 AC.54에서 남자와 여자의 속뜻을 설명하면서 굳이 태고교회의 결혼의 행복과 천상의 결혼을 함께 이야기하는 이유입니다.

 

 

 

AC.54, 창1:27, ‘남자와 여자’ : 이해와 의지가 하나로 작동하는 결혼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1:27) AC.54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남자와 여자’(male and female)가 속뜻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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