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295.심화

 

1. ‘저들과 우리의 차이

 

첫 번째 후손들 가운데는 아직 태고교회의 선이 어느 정도 남아 있었으며, 두 번째와 세 번째 후손들에게서는 그 선이 더욱 외적 형태로 변하였습니다. 그들은 태고교회 사람들처럼 주님으로부터 직접 퍼셉션을 받아 선과 진리를 아는 그런 상태는 아니었지만,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부여받아 교회의 상태를 이어 갈 수 있었습니다.’

 

위 해설 내용 중 나오는 위 표현은 거의 오늘날 우리 모습과 같아 보이는데요, 그렇다면 태고교회 범주에 속하는 저들과 고대교회, 유대교회 및 기독교회를 거치며, 거의 그 끝자락에 있는 것 같은 오늘 우리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언뜻 보면 AC.295의 설명은 오늘날 신앙인들의 상태와 거의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저작 전체를 연결해서 보면, 둘 사이에는 매우 큰 차이가 있습니다.

 

가장 큰 차이는 ‘남아 있는 선의 출처’입니다.

 

태고교회의 첫째, 둘째, 셋째 후손들은 비록 퍼셉션은 잃었지만, 여전히 태고교회라는 거대한 생명의 줄기에서 나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조상들로부터 이어받은 천적 생명의 흔적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받은 영적 선과 자연적 선도 태고교회의 천적 선을 바탕으로 형성된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중심은 아직 살아 있었고, 외적인 층만 점차 두꺼워진 것입니다.

 

반면 오늘날 우리는 태고교회의 생명에서 유구한 세월을 지나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고대교회와 유대교회, 그리고 기독교회를 거치면서 인류 전체의 상태는 계속 바뀌었습니다. 오늘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태고교회의 퍼셉션을 전혀 갖고 있지 않습니다. 선과 진리를 스스로 직관하는 능력도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말씀과 교리, 양심을 통하여 사람을 인도하십니다. 이것이 태고교회 후손들과 오늘 우리의 가장 큰 차이입니다.

 

또 하나의 차이는 ‘리메인스의 성격’입니다.

 

태고교회 후손들에게 남아 있던 것은 태고교회의 실제 생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지는 리메인스는 주님께서 각 사람의 일생 동안 조금씩 심어 주시는 선과 진리입니다. 어린 시절 순수한 애정, 부모를 신뢰하던 마음, 진실을 사랑했던 경험, 이웃을 불쌍히 여겼던 마음 등을 주님께서 보존하셨다가 거듭남의 기초로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리메인스는 태고교회의 유산이라기보다, 각 사람 안에서 새롭게 마련되는 씨앗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차이는 ‘교통의 방식’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처음에는 천사들과 거의 끊임없이 교통하였습니다. 퍼셉션을 잃은 뒤에도 그 교통은 아직 상당 부분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은 일반적으로 천사들과 의식적으로 교통하지 않습니다. 천사들은 우리 곁에 있지만, 우리는 그들의 존재를 거의 느끼지 못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자유를 보호하시기 위하여 그 교통을 의식 밖에서 이루어지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배우고, 양심을 통하여 선과 악을 분별하며, 자유롭게 선택하는 가운데 인도받습니다.

 

그렇다고 오늘날 사람이 반드시 더 열등한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여러 곳에서 주님께서는 각 시대에 맞는 구원의 길을 마련하신다고 말합니다. 태고교회에는 퍼셉션이 필요했고, 고대교회에는 표상과 상응이 필요했으며, 유대교회에는 의식과 희생 제사가 필요했습니다. 기독교회에는 말씀과 신앙이 주어졌고, 새교회에는 말씀의 속뜻이 열렸습니다. 시대마다 주어지는 은혜의 형태는 달라도,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하시려는 목적은 언제나 같습니다.

 

그래서 AC.295를 오늘 우리에게 적용하면 조금 다른 빛이 보입니다. 태고교회 후손들은 천적 선을 잃은 뒤, 사실은 희미해진 뒤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입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처음부터 퍼셉션을 모르고 태어나지만, 주님께서는 말씀과 리메인스, 그리고 양심을 통하여 우리에게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형성해 가십니다. 겉으로는 비슷해 보여도, 그들이 ‘천적 상태에서 영적 상태로 내려온 사람들’이라면, 우리는 ‘자연적 상태에서 영적 상태로 올라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방향이 정반대인 것입니다.

 

이 점이 저는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태고교회 후손들은 높은 산에서 아래로 내려오면서도 아직 산의 공기를 품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반대로 오늘 우리는 골짜기에서 출발하여 주님의 인도를 따라 조금씩 산을 오르는 사람들입니다. 두 경우 모두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이 중요하지만, 하나는 잃은 것을 보호받는 과정이고, 다른 하나는 아직 없는 것을 새롭게 형성 받는 과정입니다. AC.295는 태고교회의 후손들을 설명하면서도, 동시에 오늘 우리 역시 주님께서 각자의 상태에 맞는 ‘가죽옷’을 입혀 주신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는 어느 시대의 사람도 그의 상태에 맞는 선을 마련하지 않으신 적이 없으며, 그 선을 통하여 언제나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이끌어 오셨습니다.

 

 

 

AC.295, 창3:21,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창3:21) AC.295 그들을 가리켜 ‘가죽옷을 입었다’(clothed with a coat of skin)고 한 까닭은 이렇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을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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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3:21)

 

AC.295

 

그들을 가리켜 가죽옷을 입었다(clothed with a coat of skin)고 한 까닭은 이렇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을 가리켜 그들은 순진무구함(innocence)으로 인해 벌거벗었다(naked)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걸 잃었을 때,그들은 자신들이 악 가운데 있음을 의식하게 되었는데, 이 역시 벌거벗음(nakedness)이라 합니다. 모든 것이 역사적으로 서로 이어져 보이게 하기 위해, 그러니까 태고교회 사람들의 말하는 방식에 따라, 여기서는 그들이 벌거벗지 않도록 옷을 입었다(clothed lest they should be naked), 다시 말해 악 가운데 있지 않도록 옷을 입었다 한 것입니다. 그들이 영적 선과 자연적 선 가운데 있었다는 것은 이 31절로 13절까지 그들에 관하여 앞에서 말한 내용으로 분명하며, 또한 여기서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을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Jehovah God made them a coat of skin, and clothed them) 한 사실로도 분명합니다. 여기서는 그 교회의 첫 번째 후손들, 그리고 특히 두 번째, 세 번째 후손들을 다루는데, 그들은 이러한 선을 부여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The reason why they are said to be “clothed with a coat of skin,” is that the most ancient people were said to be “naked,” on account of their innocence; but when they lost their innocence they became conscious that they were in evil, which also is called “nakedness.” That all things might appear to cohere historically (in accordance with the way of speaking of the most ancient people), they are here said to be “clothed lest they should be naked,” or in evil. Their being in spiritual and natural good is evident from what was remarked above concerning them, from verse 1 to 13 of this chapter, as well as from its being here related that “Jehovah God made them a coat of skin, and clothed them”; for it here treats of the first—and more especially of the second and third—posterities of the church, who were endowed with such good.

 

 

해설

 

AC.295는 ‘가죽옷’이라는 표현이 왜 사용되었는지를 먼저 태고교회의 ‘벌거벗음’과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태고교회 사람이 벌거벗었다는 것은 단순히 옷을 입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악을 감추거나 선한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마음이 없었으며,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서로 어긋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생각과 의지에는 위장과 꾸밈이 없었으므로, ‘벌거벗음’은 수치가 아니라 순진무구함(innocence)을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그랬던 태고교회 사람들이 순진무구함을 잃게 되자 ‘벌거벗음’의 뜻도 달라졌습니다. 이제 그들은 자신들이 악 가운데 있음을 의식하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 안에서 살았으므로 자기 상태를 감추려 하지 않았지만, proprium이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자신들의 악과 수치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타락 이후의 ‘벌거벗음’은 순진무구함이 아니라 선이 결여된 상태, 곧 악 가운데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이야기가 역사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기록되었다고 말합니다. 아담과 그의 아내가 벌거벗었으므로 하나님께서 옷을 지어 입히셨다는 외적 서술, 그러니까 무슨 스토리 텔링 같은 이런 서술은 하나의 역사적 사건처럼 읽힙니다. 그러나 이러한 서술 방식은 태고교회 사람들이 영적인 것들을 자연적인 사물로 표현하던 방식에 따른 것입니다. ‘벌거벗음’, ‘가죽’, ‘’, ‘입히심’은 모두 인간의 내적 상태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벌거벗지 않도록 옷을 입혔다’는 것은 그들을 악 가운데 그대로 버려두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옷은 사람의 내면을 덮고 보호하는 외적인 것을 나타냅니다. 인간이 천적 선과 퍼셉션을 잃은 뒤에도 주님께서는 그가 완전히 선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더 외적인 선을 주셨습니다. 그 선은 이전의 순진무구함과 같은 내적 선, 곧 천적 선은 아니었지만, 악을 억제하고 사람을 보존할 수 있는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이었습니다.

 

여기서 ‘가죽’은 인간의 가장 바깥쪽에 있는 것을 나타냅니다. 가죽, 그러니까 피부가 몸의 외부를 덮듯이, 가죽옷은 속 사람의 천적 생명이 사라진 뒤 인간에게 남겨진 겉 사람의 선을 뜻합니다. 이는 단순히 외형적 착함이나 세상에서 인정받는 도덕성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남아 있는 상태에 맞추어 주신 선이며, 이를 통하여 인간이 더 깊은 타락으로 빠지지 않도록 붙드시고 보호하신 것입니다.

 

AC.295는 이들이 영적 선과 자연적 선 가운데 있었다고 말합니다. 영적 선은 신앙의 진리에서 비롯, 이웃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게 하는 선이며, 자연적 선은 그러한 영적 선이 겉 사람의 생활과 행동 가운데 나타난 것입니다. 마음속에서 선을 인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으며, 질서 있고 유익하게 살아가는 모습으로 드러나는 선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은 서로 분리된 두 선이라기보다, 속에서 받은 선과 그것이 생활 속에 나타난 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태고교회 자체보다 그 교회의 후손들을 다룬다고 밝힙니다. 첫 번째 후손들 가운데는 아직 태고교회의 선이 어느 정도 남아 있었으며, 두 번째와 세 번째 후손들에게서는 그 선이 더욱 외적 형태로 변하였습니다. 그들은 태고교회 사람들처럼 주님으로부터 직접 퍼셉션을 받아 선과 진리를 아는 그런 상태는 아니었지만,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부여받아 교회의 상태를 이어 갈 수 있었습니다. ‘가죽옷’은 바로 이처럼 교회의 생명이 내적인 것에서 점차 외적인 것으로 옮겨 간 상태를 보여 줍니다.

 

AC.295는 ‘여호와 하나님이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는 말 속에 타락한 인간을 향한 주님의 섭리가 담겨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인간은 순진무구함과 천적 선을 잃었지만, 주님께서는 그를 벌거벗은 채, 곧 악 가운데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이 받아들일 수 있는 더 외적인 영적 선과 자연적 선으로 그를 덮고 보호하셨으며, 그 선을 통하여 새로운 교회의 후손들이 이어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심화

 

1. ‘저들과 우리의 차이

 

 

AC.295, 심화 1, ‘저들과 우리의 차이’

AC.295.심화 1. ‘저들과 우리의 차이’ ‘첫 번째 후손들 가운데는 아직 태고교회의 선이 어느 정도 남아 있었으며, 두 번째와 세 번째 후손들에게서는 그 선이 더욱 외적 형태로 변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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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4, 창3:21, ‘가죽옷‘과 체어리티, 그리고 양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창3:21) AC.294 또한 ‘가죽옷’(coat of skin)이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의미한다는 것도, 속뜻의 계시와 함께, 이어지는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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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3:21)

 

AC.294

 

또한 가죽옷(coat of skin)이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의미한다는 것도, 속뜻의 계시와 함께, 이어지는 말씀 가운데 이와 비슷한 표현들이 나오는 구절들을 서로 비교해 보지 않고서는 누구에게도 분명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서는 가죽(skin)이라는 일반적인 표현이 사용되었지만, 실제로는 염소 새끼나 양, 숫양의 가죽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동물들은 말씀에서 선에 대한 애정(affections)과 체어리티(charity), 그리고 체어리티에 속한 것을 의미하며, 희생 제사에 사용된 양들도 역시 같은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체어리티의 선, 곧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지닌 사람들을 (sheep)이라고 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양들의 목자(shepherd of the sheep)라 일컬음을 받으시며, 체어리티를 가진 사람들을 주님의 (sheep)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Neither would it be evident to anyone that a “coat of skin” signifies spiritual and natural good, except by a revelation of the internal sense, and a subsequent comparison of passages in the Word where similar expressions occur. The general term “skin” is here used, but that of a kid, sheep, or ram, is understood, which animals in the Word signify affections of good, charity, and that which is of charity, as was likewise signified by the sheep used in the sacrifices. Those are called “sheep” who are endowed with the good of charity, that is, with spiritual and natural good, and hence the Lord is called the “shepherd of the sheep,” and those who are endowed with charity are called his “sheep,” as everybody knows.

 

 

해설

 

AC.294에서 스베덴보리는 앞 글의 논의를 한 걸음 더 발전시킵니다. 앞에서는 ‘가죽옷’에 내적 의미, 곧 속뜻이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였다면, 여기서는 왜 그것이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의미하는지를 말씀 전체를 통해 증명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의 구절만 떼어 놓고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에 일관되게 흐르는 상응의 법칙을 따라 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말씀 해석 방법 가운데 가장 중요한 원리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는 먼저 ‘속뜻의 계시와 함께, 이어지는 말씀의 여러 구절을 서로 비교하지 않고서는 이 의미를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두 단계가 있습니다. 첫째는 주님께서 그 말씀의 속뜻을 계시해 주시는 것이고, 둘째는 그 계시에 따라 말씀 전체를 서로 비교하며 확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말씀의 속뜻은 사람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계시를 기초로 하여 말씀 전체의 일관성을 통해 검증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언제나 창세기만 설명하지 않고, 시편과 선지서, 복음서 등 말씀 전체를 끊임없이 인용합니다.

 

이어서 그는 여기서 사용된 ‘가죽’이 아무 동물의 가죽이 아니라, 실제 의미로는 염소 새끼와 양, 그리고 숫양의 가죽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설명입니다. 성경에서 희생 제사에 사용되는 동물은 아무 동물이나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특별히 지정하신 동물들, 곧 모두 특정한 선과 진리를 상징하는 동물들입니다. 따라서 그 가죽 역시 같은 상응을 지닙니다. 창세기 본문은 단순히 ‘가죽’이라고만 기록하지만, 속뜻으로는 희생 제사에 사용되는 깨끗한 짐승의 가죽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하필 양(sheep)과 숫양(ram)일까요?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이 동물들은 모두 선에 대한 애정과 체어리티를 상징합니다. 특히 양은 체어리티 자체를 가장 대표적으로 나타내는 동물입니다. 체어리티란 단순한 자선 행위가 아니라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삶 전체를 말합니다. 따라서 양은 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상태를 나타내며, 숫양은 그러한 선이 보다 힘 있게 작용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가죽은 그러한 선이 가장 바깥 삶 속에 나타난 상태를 의미하게 됩니다.

 

이 점에서 앞 절의 ‘가죽옷’의 의미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가죽은 몸의 가장 바깥을 덮는 것이며, 양은 체어리티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가죽옷’은 체어리티의 선이 인간의 겉 생활, 그러니까 일상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태고교회는 처음처럼 천적 퍼셉션 안에서 살아갈 수는 없게 되었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체어리티를 따라 살아가는 새로운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가죽옷’은 단순한 보호의 상징이 아니라 체어리티를 실천하는 새로운 삶의 질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해석의 근거로 주님께서 스스로를 ‘선한 목자(10:11)라 하신 사실을 제시합니다. 만일 양이 단순히 동물에 불과하다면, 주님께서 사람들을 ‘’이라 하시고, 자신을 ‘선한 목자’라 하신 말씀은 깊은 의미를 잃게 됩니다. 그러나 양이 체어리티 안에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면, 목자는 그들을 사랑과 진리로 인도하시는 주님을 의미하게 됩니다. 따라서 복음서의 ‘선한 목자’와 창3의 ‘가죽옷’은 서로 다른 이야기가 아니라 동일한 상응 원리 위에 서 있는 말씀입니다.

 

목사님께서 제안하신 것처럼 창3:20-24를 태고교회의 흥망성쇠를 압축한 요약, 결론으로 이해하면, 이 글의 의미는 더욱 풍성해집니다. 태고교회는 천적 상태를 잃었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을 완전히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선한 목자’이신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체어리티의 삶을 다시 가르치시고, 그 삶을 상징하는 ‘가죽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창3:21은 단순히 수치를 가리는 장면이 아니라, 새로운 교회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AC.294는 성경 전체가 하나의 일관된 상응 체계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주는 아름다운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의 ‘가죽옷’, 희생 제사의 ‘’, 복음서의 ‘’과 ‘선한 목자’는 각각 다른 시대와 다른 문맥에서 기록되었지만 모두 하나의 영적 진리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언제나 체어리티 안에 있는 사람들을 당신의 양으로 삼으시고, 그들을 사랑으로 입히시며, 끝까지 목자처럼 인도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가죽옷’은 타락 이후 인간이 입게 된 가장 외적인 옷이면서도, 동시에 주님의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가는 새로운 삶의 시작을 알리는 은혜의 옷이기도 합니다.

 

 

 

AC.293, 창3:21, ‘가죽옷 이야기‘, 우리를 속뜻의 세계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창3:21) AC.293 이러한 의미들은 말씀을 겉으로만 읽어서는 결코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분명 더 깊은 의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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