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영접했으니 나는 구원받았다’

 

‘예수님을 영접했으니 나는 구원받았다.’ 한국 개신교회에서 매우 익숙한 말입니다. 전도집회나 부흥회에서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셨습니까?’라고 묻고, 영접기도를 따라 한 뒤에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셨습니다’, ‘오늘이 당신의 영적인 생일입니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 말에는 분명 소중한 진리가 있습니다. 신앙은 단순히 예수님에 관한 지식을 아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요한복음도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합니다(요1:12). 그러므로 주님을 영접한다는 표현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영접’이라는 성경의 깊은 말을 어느 한순간의 기도와 결단으로 축소하고, 그 사건이 일어났다는 사실만으로 한 사람의 영원한 구원이 이미 확정되었다고 생각할 때 생깁니다.

 

먼저 요한복음이 말하는 ‘영접’이 무엇인지 조금 더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은 단순히 어떤 사람이 입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하는 장면을 말하지 않습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오셨고(요1:9), 사람들은 그 빛을 받아들이기도 하고 거부하기도 합니다. 이어서 요한복음 전체는 그분을 믿는다는 것이 그분의 말씀 안에 거하고, 그분을 사랑하며, 그분의 계명을 지키고, 그분을 따라 살아가는 것과 분리될 수 없음을 계속 보여 줍니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고 하셨고(요14:15),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요13:17). 따라서 성경이 말하는 주님을 ‘영접함’은 단 한 번 마음의 문을 열었다고 고백하는 사건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그것이 실제 삶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지속적인 응답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구원 이해가 중요한 빛을 던집니다. 구원은 단순히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법적 지위가 바뀌는 사건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 실제로 변화되는 과정입니다. 이것이 거듭남(regeneration)입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자기 자신과 세상을 중심으로 살아가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프로프리움’(proprium), 곧 자기에게서 나온 것을 자기 생명의 전부라고 여기는 성향입니다. 주님은 사람의 자유를 없애고 어느 순간 강제로 그를 천국에 적합한 존재로 만들어 버리지 않으십니다. 말씀을 통해 진리를 보여 주시고, 선을 사랑하도록 이끄시며, 사람으로 하여금 ‘자유’(freedom)와 ‘합리성’(rationality) 안에서 악을 거절하고 선을 선택하게 하십니다. 이 과정에서 한 사람의 ‘지배적 사랑’(ruling love)이 서서히 달라집니다.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살아가던 사람이 점차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선한 쓰임을 기뻐하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이 우리 안에서 실제가 되어 가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날 진심으로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고백한 경험은 귀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실제 거듭남의 중요한 출발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삶의 방향이 완전히 달라지는 결정적인 회심의 순간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출발점과 완성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씨를 받아들였다고 해서 이미 열매를 거둔 것은 아닙니다. 주님도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말씀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마지막 상태를 보장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돌밭에 뿌려진 씨도 처음에는 ‘즉시 기쁨으로 받되’ 뿌리가 없어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 넘어집니다(마13:20-21).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인 말씀이 뿌리를 내리고 삶의 열매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나는 그날 예수님을 영접했으므로 이미 구원받았다’는 확신에는 조심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 확신이 ‘그러므로 이제 어떻게 살아도 상관없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주님은 입술의 한 고백을 근거로 이후의 삶을 보지 않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착한 일을 많이 해야 구원을 얻는다’는 말로 바꾸어서도 안 됩니다. 사람은 자기 힘과 자기 공로로 자신을 거듭나게 할 수 없습니다. 모든 선과 진리, 악을 이길 힘, 거듭남의 능력은 오직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일을 인간의 자유와 응답을 통하여 이루십니다. 인간은 마치 자기에게서 하는 것처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해야 하지만, 실제로 선을 행할 힘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인가 행위인가’라는 양자택일보다 더 깊은 질문은 ‘주님에게서 받은 믿음이 실제 나의 사랑과 삶을 변화시키고 있는가?’입니다.

 

이 점에서 ‘영접’이라는 말은 오히려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깊습니다. 손님을 집에 영접한다는 것은 현관문을 한 번 열어 주고 다시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를 안으로 모셔 들이는 것입니다. 주님을 영접한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생각만이 아니라 의지와 사랑과 행동 안으로 들어오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진리를 옳다고 인정하면서 실제 삶에서는 계속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주인이 되어 있다면, 입술로는 주님을 영접했다고 하면서 삶에서는 여전히 주님을 문밖에 세워 두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자신의 악을 발견할 때마다 주님 앞에서 인정하고 그것을 떠나려 하며, 진리를 배우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고, 자신의 맡은 자리에서 유용한 사람이 되려고 애쓴다면 주님을 영접하는 일이 그의 삶 속에서 계속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체어리티(charity)가 중요해집니다. 체어리티란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이 이웃과 공동체를 향하여 실제적인 선과 유용한 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을 사기 위해 쌓는 공로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을 실제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열매입니다. 나무가 살아 있기 때문에 열매를 맺듯이,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그 생명이 이웃을 향한 선과 쓰임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마7:20). 열매가 나무를 살아 있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나무가 열매를 맺습니다. 믿음과 삶의 관계도 이와 같습니다.

 

그렇다면 구원의 확신은 전혀 가질 수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확신의 근거가 달라집니다. ‘나는 20년 전 영접기도를 했으니 괜찮다’는 자기 과거에 대한 확신보다 ‘주님은 지금도 나를 버리지 않고 선과 진리로 이끌고 계시며, 나는 오늘도 그분을 따라가기를 원한다’는 주님에 대한 신뢰가 더 깊은 신앙입니다. 구원의 확신은 자기 자신에게서 찾아내는 보증서가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신실하심을 신뢰하면서 그분의 인도하심에 응답하는 삶에서 자라납니다. 자신이 완전하기 때문에 안심하는 것도 아니고, 선행을 충분히 쌓았기 때문에 안심하는 것도 아닙니다. 아직 부족하고 넘어지면서도 악을 악으로 인정하고 주님께 돌이키며, 선과 진리를 따라 살기를 원하는 방향 자체가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보면 천국과 지옥의 문제도 결국 ‘과거 어느 순간 무엇을 고백했는가’만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사람은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선택을 통하여 자신이 무엇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인지를 형성해 갑니다. 그 사랑이 그의 내면을 이루고, 죽음 이후에도 그 사람 자신으로 남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문제는 단순히 ‘내가 예수님을 영접했는가?’에서 끝나지 않고 ‘내가 영접한 주님이 실제로 내 사랑의 질서를 바꾸고 계시는가?’로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을 입술로 부르는 것과 주님에게서 오는 것을 사랑하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영접했으니 나는 구원받았다’는 말은 절반의 진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영접하지 않고서는 참된 영적 생명이 시작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영접은 한 번의 종교적 행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평생의 거듭남으로 펼쳐져야 합니다. 어제 주님을 영접했다는 기억보다 오늘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오늘의 선택이 내일의 사랑을 형성하며, 그렇게 형성된 사랑이 마침내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질문을 조금 바꾸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나는 언제 예수님을 영접했는가?’만 묻지 말고 ‘나는 오늘 무엇을 영접하며 살아가고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영접하고 있는가, 아니면 내 욕망에 맞는 말씀만 받아들이고 있는가. 주님의 선을 영접하고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나 자신이 중심이 되는 삶을 고집하고 있는가. 주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결국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내 안에 거처를 얻도록 허락하는 것입니다.

 

한 문장으로 줄이면 이렇습니다. ‘주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어느 날 예수님을 받아들였다고 고백한 과거의 한 사건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우리의 사랑과 삶이 실제로 변화되어 가는 평생의 거듭남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영접했으니 나는 구원받았다’에서 멈추기보다 이렇게 고백하는 편이 더 온전하겠습니다. ‘나는 주님을 영접했고, 오늘도 주님을 영접하며, 주님께서 나의 사랑과 삶을 변화시키시도록 그분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구원은 우리가 한 번 주님께 문을 열었다는 사실을 붙들고 안심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끊임없이 문을 두드리실 때 그분을 받아들이고, 그분에게서 오는 생명이 우리의 사랑과 생각과 행동 속에서 실제 삶이 되어 가는 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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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종을 대적하면 벌받아’

 

‘하나님의 사람을 대적하면 결국 벌받아.’ 교회 안에서 종종 듣는 말입니다. 목회자나 선교사, 영적 지도자에게 심각한 비판을 제기하면 ‘주의 종을 함부로 대하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람에게 대적하다가 잘된 사람이 없다’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성경에도 모세를 대적한 고라 일당이 심판을 받고(민16), 미리암이 모세를 비방한 뒤 나병에 걸리며(민12), 엘리사를 조롱한 아이들이 큰 화를 당하는 장면이 나옵니다(왕하2:23-24). 이런 본문들을 읽으면 ‘하나님의 사람을 건드리면 하나님께서 직접 벌하신다’는 생각이 생기는 것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분명 붙들어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맡기신 선한 일을 악의적으로 방해하고, 거짓으로 사람을 모함하며, 진리를 미워하여 그것을 전하는 사람을 박해하는 것은 가벼운 일이 아닙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호칭 자체에 일종의 영적 면책특권을 부여할 때 생깁니다. ‘저 사람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람이니 그의 말과 행동을 비판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한 인간에게 주님의 권위를 거의 그대로 옮겨 놓게 됩니다.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맡은 사람이라고 해서 그의 모든 판단과 행동이 자동으로 하나님의 뜻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함부로 죽이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였지만(삼상24:6), 그렇다고 사울의 모든 행동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실제로 다윗을 죽이려 했고, 자신의 왕권을 지키기 위해 잘못된 행동을 거듭했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죽여 자신의 손으로 왕위를 차지하지는 않았지만, 사울의 악한 행동에 순종하지도 않았습니다. 존중과 복종은 같은 말이 아니며, 직분을 존중하는 것과 그 직분자의 모든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도 같은 말이 아닙니다. 더 분명한 사례는 바울과 베드로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직접 사도로 세우신 사람이었지만, 안디옥에서 이방인들과 함께 먹다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물러났을 때, 바울은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고 말합니다(갈2:11). 만일 ‘하나님의 사람을 비판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라는 공식이 옳다면 바울은 사도 베드로를 책망해서는 안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오히려 이 사건을 기록하여 하나님의 사람도 잘못할 수 있고, 그 잘못은 진리에 따라 바로잡혀야 함을 보여 줍니다.

 

구약의 선지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왕에게 순종만 하지 않았습니다. 나단은 다윗에게 ‘당신이 그 사람이라’고 말하며 그의 죄를 직면하게 했고(삼하12:7), 엘리야는 아합의 악을 책망했습니다. 하나님의 권위 아래 있는 사람일수록 오히려 하나님의 진리 아래 있어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고라가 모세를 대적한 사건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고라 사건의 핵심을 단순히 ‘하나님의 지도자를 비판했다’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고라와 그 무리는 모세의 개인적인 실수를 지적하거나 책임 있는 질문을 제기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세우신 질서에 맞서 자기들의 권력과 지위를 요구하며 반역했습니다. 따라서 이 사건을 오늘날 ‘목회자를 비판하면 고라처럼 심판받는다’는 식으로 곧바로 적용하는 것은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모세의 지위와 현대 교회의 목회자 직분을 아무 설명 없이 동일시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습니다. 민12의 미리암과 아론 사건 역시 단순히 모세와 의견이 달랐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고 하며(민12:2) 모세에게 주어진 고유한 사명을 시기하고 자기들의 위치를 높이려 했습니다. 본문은 이어서 모세가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고 기록합니다(민12:3). 이것은 자기 권위를 지키기 위해 ‘나를 건드리면 하나님께 벌받는다’고 위협하는 지도자의 모습과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람을 대적하는 것’과 ‘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그 사람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과 ‘주님을 대적하는 것’도 같은 일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진리를 미워하기 때문에 선한 사역자를 거짓으로 모함하고 악의적으로 방해한다면 그것은 분명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목회자의 잘못된 가르침을 성경에 비추어 질문하거나, 재정 비리를 지적하거나, 권력 남용과 부당한 행동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까지 ‘하나님의 사람을 대적하는 일’이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특히 ‘나를 대적하면 하나님께서 가만두지 않으신다’, ‘나를 떠난 사람들은 결국 잘되지 않았다’, ‘주의 종에게 손대면 자녀에게까지 화가 간다’는 식의 말을 지도자 자신이 사용한다면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을 자기 권위를 지켜 주는 보복자로 만들고, 사람으로 하여금 주님보다 목회자를 두려워하게 할 위험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문제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모든 참된 권위는 ‘선’(good)과 ‘진리’(truth)를 섬기기 위한 권위입니다. 직분 그 자체가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라는 직함, 안수, 교회의 규모, 오랜 사역 경력, 많은 추종자가 그 사람의 모든 말을 주님의 말씀으로 바꾸어 주지 않습니다. 직분은 선과 진리를 섬기도록 맡겨진 ‘쓰임’(use)이며, 그 권위 역시 그 쓰임을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영적 지도자에게 중요한 질문은 ‘사람들이 나에게 얼마나 순종하는가?’가 아니라 ‘나는 주님의 선과 진리를 얼마나 충실하게 섬기고 있는가?’입니다. 성도에게 중요한 질문도 ‘저 사람은 유명한 하나님의 사람이니까 무조건 따라야 하는가?’가 아니라 ‘그가 말하고 행하는 것이 주님의 선과 진리에 합당한가?’입니다. 사람을 중심에 놓으면 신앙은 인물 숭배로 흐르기 쉽지만, 선과 진리를 중심에 놓으면 지도자와 성도 모두 주님 아래 서게 됩니다.

 

여기에서 ‘프로프리움’(proprium)은 특별히 위험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종교적 권위를 가진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직분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기 쉽습니다. ‘주님께서 이 사역을 맡기셨다’는 고백이 어느 순간 ‘그러므로 나를 반대하는 것은 주님을 반대하는 것이다’로 변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자신의 판단과 주님의 뜻 사이의 경계가 흐려집니다. 종교적 프로프리움은 자신의 욕망과 권위를 ‘하나님의 뜻’이라는 이름으로 보호할 수 있다는 점에서 특히 위험합니다. 그러나 반대편에도 같은 문제가 있습니다. ‘목회자도 사람인데 뭐’라며 하나님께서 맡기신 직분과 선한 사역 자체를 가볍게 여기거나,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선한 사역을 무너뜨리려 하거나, 진리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그것을 전하는 사람을 공격하는 것도 악입니다. 비판하는 사람 역시 ‘나는 정말 진리를 위해 이 말을 하는가, 아니면 그 사람이 싫어서 공격하고 싶은 것인가?’를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지도자도 비판자도 자신의 프로프리움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 양쪽 모두 누가 더 높은 위치에 있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참된가를 기준으로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누군가가 주님의 선한 일을 악의적으로 대적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악에는 결과가 있습니다. 거짓을 사랑하면 거짓이 그 사람의 내면을 형성하고, 미움과 지배욕을 반복해서 선택하면 그것이 점점 그의 ‘지배적 사랑’(ruling love)이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이것이 훨씬 더 깊은 의미의 ‘벌’입니다. 하나님께서 화가 나서 밖에서 보복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유롭게 선택하고 사랑한 악이 결국 그 자신의 생명과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을 대적했으니 하나님께서 사업을 망하게 하셨다’, ‘목회자를 비판했더니 병에 걸렸다’, ‘주의 종을 떠났더니 집안에 문제가 생겼다’는 식으로 사건을 연결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그런 인과관계를 알 수 없습니다. 자연계의 불행을 하나님의 보복으로 해석하는 것은 신적 섭리의 원리와도 맞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오히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5:44). 주님께서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주님의 종을 비판한 사람에게 병과 실패를 보내어 보복하시는 분으로 주님을 이해한다면 주님 자신이 가르치신 사랑과 충돌하게 됩니다.

 

스데반과 사울의 이야기는 이 점을 아주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참여한 사울은 실제로 주님의 사람을 대적했습니다. 그가 한 일은 분명 악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사울에게 즉시 보복하여 멸망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다메섹 길에서 그를 만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고 물으셨고(행9:4), 그를 돌이켜 훗날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사용하셨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목적이 보복이 아니라 구원임을 보여 줍니다. 여기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네가 어찌하여 내 사람들을 박해하느냐’가 아니라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고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스데반과 성도들을 향한 박해가 주님을 향한 박해가 된 것은 그들이 특별한 신분의 ‘주의 종’이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진리 때문에 박해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심은 사람의 지위가 아니라 그 사람 안에서 역사하는 주님의 선과 진리였습니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부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호칭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실제로 주님의 선과 진리를 섬기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대하는 우리 역시 그 사람의 인격이나 지위보다 그를 통해 나타나는 선과 진리를 존중해야 합니다. 동시에 그가 선과 진리에서 벗어날 때에는 사람을 우상화하지 않고, 그것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사람을 대적하면 결국 벌받는다’는 말은 그대로 공식으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진리를 미워하여 선한 사람을 박해하는 것은 분명 심각한 악이며 그 악은 인간의 내면에 결과를 남깁니다. 그러나 어떤 종교 지도자에게 반대하거나 그의 잘못을 지적했다는 이유만으로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자연적인 불행을 보내신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주님께서 맡기신 선과 진리를 악의적으로 대적하는 것은 영적으로 심각한 일이지만, 어떤 “하나님의 사람”에게 반대했다는 이유만으로 주님께서 보복하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조금 더 깊이 압축하면 이것이겠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사람을 건드려 벌받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보느라 그 사람 안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선과 진리를 거부하거나, 반대로 사람을 주님과 동일시하여 그의 잘못까지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목회자와 영적 지도자에게 가장 안전한 자리는 ‘나를 대적하지 말라’고 말하는 자리가 아니라 자신 역시 언제나 주님의 선과 진리 아래 있음을 기억하는 자리입니다. 성도에게 가장 안전한 자리 역시 지도자를 무조건 따르거나 무조건 의심하는 자리가 아니라, 사람을 존중하되 주님께 속한 선과 진리를 기준으로 분별하는 자리입니다.

 

사람은 틀릴 수 있습니다. 직분자도 틀릴 수 있고, 비판하는 사람도 틀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선과 진리는 사람보다 높습니다. 그래서 결국 질문은 ‘누가 하나님의 사람인가?’에서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지금 나는 사람의 편을 들고 있는가, 아니면 주님의 선과 진리를 따르고 있는가?’ 그 질문 앞에서는 목회자도 성도도 함께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SL.29, ‘하나님께 맡겼으니 이제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거야’

‘하나님께 맡겼으니 이제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거야’ ‘하나님께 맡겼으니 이제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거야.’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참 많이 하는 말입니다. 걱정하던 문제를 놓고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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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맡겼으니 이제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거야’

 

‘하나님께 맡겼으니 이제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거야.’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참 많이 하는 말입니다. 걱정하던 문제를 놓고 기도한 뒤 ‘이제 주님께 맡기자’고 마음먹으면 불안했던 마음이 편안해지기도 합니다. 성경에도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라는 말씀이 있고(시37:5),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는 말씀도 있습니다(벧전5:7). 그러므로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집착을 내려놓고 주님을 신뢰하는 것은 분명 신앙의 중요한 모습입니다.

 

문제는 ‘맡긴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결과를 주님께 맡긴다’는 것과 ‘내가 해야 할 일까지 주님께 맡긴다’는 것을 혼동합니다. 기도했으니 이제 내가 할 것은 없다고 생각하거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면 알아서 사람도 보내 주시고 돈도 마련해 주시며 문제도 해결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해야 할 결정과 책임을 미루면서도 그것을 ‘믿음’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주님을 의지하는 것과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같은 뜻이 아닙니다.

 

느헤미야가 좋은 예입니다. 그는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 하나님 앞에서 울며 금식하고 기도했습니다(느1:4). 그러나 기도한 뒤 ‘하나님께 맡겼으니 하나님께서 알아서 성벽을 세우시겠지’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왕에게 무엇을 요청할지 준비했고, 예루살렘에 도착한 뒤에는 밤에 직접 성벽의 상태를 살폈으며, 사람들을 조직하여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대적들이 공격하려 하자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들로 말미암아 파수꾼을 두어 주야로 방비’했습니다(느4:9). 이 한 구절에 맡김의 균형이 아주 잘 나타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동시에 ‘파수꾼을 두었습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었지만 그것 때문에 현실적인 행동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행27에서 배가 풍랑을 만나 모두가 죽을 위험에 처했을 때 바울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생명을 보존하실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선원들이 배에서 몰래 도망하려 하자 바울은 백부장과 군인들에게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고 말합니다(행27:31). 하나님께서 살려 주신다는 약속을 받았으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신적 섭리에 대한 신뢰와 인간이 해야 할 적절한 행동은 서로 반대가 아니었습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가 해야 할 일을 대신해 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시험을 앞둔 사람이 기도한 뒤 공부하지 않는 것을 믿음이라고 할 수 없고, 건강 문제를 놓고 기도하면서 필요한 치료와 생활 습관의 변화를 거부하는 것도 맡김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깨어진 관계를 위해 기도하면서 자신이 사과해야 할 것은 사과하지 않고 상대방만 변화되기를 기다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제적인 문제를 하나님께 맡겼다고 하면서 자신의 지출과 책임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그것은 신뢰라기보다 책임 회피가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우리가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아무리 준비하고 노력해도 우리의 손에 있지 않은 것이 많습니다. 자녀에게 좋은 말을 해 줄 수는 있지만 자녀 대신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병원에 가고 치료를 받을 수는 있지만 결과까지 명령할 수는 없습니다. 사업계획을 세우고 성실하게 일할 수는 있지만 시장과 다른 사람의 선택을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진심으로 사과할 수는 있지만 그 사람이 반드시 용서하도록 만들 수는 없습니다. 바로 이 경계에서 참된 ‘맡김’이 시작됩니다.

 

내가 해야 할 것은 내가 하되, 내가 할 수 없는 것까지 붙잡고 하나님 노릇을 하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이 문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이 인간의 ‘자유’(freedom)와 ‘합리성’(rationality)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무엇이 선하고 참된지를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과, 그것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이 능력들은 거듭남(regeneration)을 위해 필수적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생각과 선택과 행동을 대신해 버리신다면 인간은 주님과 자유롭게 결합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선을 행할 때 ‘마치 자기에게서 하는 것처럼’ 행해야 한다는 역설적인 원리를 강조합니다. 나는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심하고, 노력하고, 악을 거절하며 선을 행해야 합니다. 그 순간에는 실제로 내가 하는 것처럼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선을 행할 능력과 생명 자체가 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은 ‘내가 한다’와 ‘주님께서 하신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두 차원을 함께 붙드는 신앙입니다.

 

여기에서 ‘프로프리움’(proprium)의 두 가지 상반된 모습도 드러납니다. 한쪽에서는 ‘내가 다 해야 한다. 내가 해결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자신을 모든 결과의 주인으로 만드는 프로프리움입니다. 그러나 반대편에서는 ‘나는 하나님께 맡겼으니 이제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 역시 다른 모습의 프로프리움이 될 수 있습니다. 책임을 져야 할 자리에서 책임을 피하면서 그것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기 때문입니다.

 

참된 신뢰는 이 두 극단 사이에 있습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다하면서도 결과의 주인이 되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에서도 이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마26:39). 이것은 수동적인 체념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기도하신 뒤 당신 앞에 놓인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맡김은 행동의 중단이 아니라 끝까지 그 길을 살아 내는 순종으로 이어졌습니다.

 

따라서 ‘맡김’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책임 있게 행동하면서 결과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농부는 씨를 뿌리고 밭을 돌봅니다. 그러나 비를 내리게 할 수는 없습니다. 의사는 환자를 진찰하고 최선의 치료를 합니다. 그러나 생명 자체를 지배할 수는 없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고 가르치고 필요한 경계를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인이 된 자녀의 마음과 선택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영역과 할 수 없는 영역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히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에서는 이 구별이 더욱 필요합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지만 그 사람을 강제로 변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진실을 말할 수 있지만 상대방에게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강제할 수는 없습니다. 필요한 도움을 줄 수 있지만 상대방의 인생을 대신 살아 줄 수는 없습니다. 여기에서 ‘주님께 맡긴다’는 것은 그 사람을 포기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내가 해야 할 사랑과 체어리티(charity)는 계속 행하되, 그 사람의 자유와 최종적인 내면까지 내가 책임지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체어리티는 ‘하나님께 맡겼으니 나는 관여하지 않겠다’는 무관심과 다릅니다. 배고픈 사람을 보고 ‘하나님께서 알아서 먹이시겠지’라고 하는 것이 체어리티일 수 없습니다. 야고보는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라고 묻습니다(약2:15-16). 기도는 행동을 대신하는 수단이 아니라 선한 행동을 낳아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반대편으로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내가 할 일을 해야 한다’는 말을 ‘결국 내가 해결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다시 자기 의존으로 돌아갑니다. 내가 최선을 다했다고 해서 원하는 결과가 반드시 오는 것도 아닙니다. 바로 그때 맡김이 필요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선을 행한 뒤에도 결과가 내 뜻과 다르게 나타날 수 있음을 받아들이고, 그 결과 속에서도 주님의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도와 행동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기도한 뒤 행동하고, 행동하면서 다시 기도합니다. 기도는 내가 해야 할 일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하는지 더 바르게 보게 합니다. 행동은 기도를 불필요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님에게서 받은 빛을 실제 삶으로 옮기는 과정입니다. 기도와 행동은 서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어떤 문제를 하나님께 맡길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이 문제에서 내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사과해야 한다면 사과하고, 공부해야 한다면 공부하고, 치료받아야 한다면 치료받고,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면 요청하며, 잘못된 습관을 고쳐야 한다면 고쳐야 합니다. 그다음에는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 이미 지나간 과거, 내가 통제할 수 없는 환경, 그리고 최종적인 결과는 내 손에 있지 않습니다.

 

그 경계가 보일 때 맡김은 훨씬 구체적인 신앙이 됩니다.

 

‘주님, 제가 해야 할 것은 피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할 수 없는 것까지 붙잡고 두려워하지 않겠습니다.’

 

이것이 맡김입니다.

 

그리고 결과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오지 않았다고 해서 ‘내가 제대로 맡기지 못했나?’라고 자책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결과를 하나님께서 대신 보장해 주신다는 계약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원하는 결과와 주님의 섭리가 다를 수도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주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주님의 섭리는 인간의 자연적인 성공만을 목표로 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궁극적으로 보시는 것은 우리가 어떤 사랑의 사람이 되어 가는가입니다. 어떤 문제는 해결되면서 우리를 가르치고, 어떤 문제는 오래 남아 있으면서 우리를 가르칠 수도 있습니다. 어떤 관계는 회복되고, 어떤 관계는 우리가 최선을 다해도 이전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모든 과정에서 우리가 악을 피하고 선을 선택하며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맡겼으니 이제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거야’라는 말에는 귀한 진리가 있습니다. 내가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교만과 불안을 내려놓고 주님의 섭리를 신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이 ‘그러니 이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되는 순간 맡김은 영적 방임으로 바뀝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내가 해야 할 책임까지 주님께 넘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해야 할 선을 성실히 행한 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결과를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조금 더 깊이 압축하면 이것이겠습니다.

 

‘참된 맡김은 마치 자기에게서 하는 것처럼 최선을 다하면서도, 선을 행할 힘과 결과의 궁극적인 주권은 모두 주님에게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맡겼다’는 말 뒤에는 두 문장이 함께 따라와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러나 결과까지 내가 지배하려 하지는 않겠습니다.’

 

이 두 문장 가운데 하나라도 빠지면 균형이 무너집니다. 첫 번째가 빠지면 영적 방임이 되고, 두 번째가 빠지면 자기 의존이 됩니다.

 

신앙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움직이시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모든 것을 내가 해결하려고 애쓰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빛과 힘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을 자유롭게 행하면서,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평안히 주님의 손에 놓는 것입니다.

 

어쩌면 ‘하나님께 맡긴다’는 말의 가장 깊은 뜻은 바로 이것일 것입니다.

 

‘주님, 제 몫은 피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몫까지 제가 붙들고 있지도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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