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안 다닌 사람은 결국 구원 받기 어려워’

 

‘교회 안 다닌 사람은 결국 구원받기 어려워.’ 오랫동안 교회생활을 해 온 사람이라면 이 말을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교회는 신앙생활에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교회에서 말씀을 듣고, 예배드리고, 기도하며, 다른 신자들과 교제하고, 자신의 신앙을 점검합니다. 혼자서는 알기 어려웠던 성경의 진리를 배우고, 신앙 공동체 안에서 사랑과 섬김을 실제로 연습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다니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를 구별해야 합니다. ‘교회가 구원의 중요한 통로다’라는 말과 ‘교회에 출석하지 않은 사람은 구원받기 어렵다’는 말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더 나아가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은 구원에 가깝고,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은 지옥에 가깝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교회를 주님보다 앞세우는 뜻밖의 문제가 생깁니다. 구원하시는 분은 교회가 아니라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아도 ‘교회 안’과 ‘교회 밖’이라는 외적 경계만으로 사람의 영적 상태를 판단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대표적입니다(눅10:25-37). 제사장과 레위인은 당시 종교 제도의 중심에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말씀을 알고 예배와 가까이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지나갔습니다. 반대로 종교적으로는 경계 밖에 있다고 여겨지던 사마리아인은 가던 길을 멈추고 그 사람을 돌보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사장과 레위인의 종교적 신분을 들어 그들을 칭찬하지 않으시고, 실제로 자비를 행한 사람이 ‘이웃이 되어 준 자’임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의 질문을 던집니다. ‘교회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입니다. 교회의 목적이 사람을 단지 ‘교인’으로 만드는 데 있다면 교회 출석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목적이 말씀을 통하여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고, 악을 죄로 알고 피하게 하며, 선과 진리를 사랑하고 이웃에게 체어리티(charity)를 행하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는 데 있다면 교회는 목적 그 자체라기보다 주님께서 사람을 구원으로 이끄시는 매우 중요한 수단이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보면 ‘교회’라는 개념은 건물이나 교단 명부보다 훨씬 깊습니다. 교회의 본질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 받아들여지는 데 있습니다. 외적 교회가 있고 동시에 사람 안에 형성되는 내적 교회가 있습니다. 사람이 말씀의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삶으로 받아들여 선을 행할 때 그 사람 안에 교회의 본질적인 것이 형성됩니다. 따라서 일요일마다 예배당에 앉아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 안에 교회가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것은 상당히 엄중한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은 50년 동안 한 번도 주일예배를 빠지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성경도 많이 알고, 찬송가도 잘 부르며, 교회 직분도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평생 자기 이익만 추구하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며, 거짓과 탐욕을 죄라고 여기지 않고, 이웃에게 해야 할 선을 외면한다면 ‘50년 교회 출석’이라는 기록 자체가 그 사람을 천국적 사람으로 만들지는 못합니다. 교회 안에 오래 있었다는 것과 주님께서 그 사람 안에 교회를 이루셨다는 것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여러 사정으로 평생 교회에 제대로 다녀 보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좋은 교회를 만날 기회도 없었으며, 어쩌면 그가 만난 그리스도인들의 모습 때문에 교회에 좋지 않은 인상을 갖게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양심을 따라 거짓말과 부정을 피하려 했고, 가족을 책임지고, 어려운 이웃을 돕고, 자신이 알고 있는 선을 따라 살려고 애썼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에게 단지 ‘교회 출석 기록이 없으므로 당신은 주님에게서 멀리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앞서 살펴본 ‘평생 착하게 살아도 예수님을 모르면 지옥 가’라는 문제와 여기서 다시 만나게 됩니다. 구원의 근원은 인간의 착함이 아니라 오직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사람이 그 사실을 명시적으로 알고 있지 않더라도 그가 받아들이는 모든 참된 선과 진리의 근원은 주님입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교회라는 외적 통로를 충분히 경험하지 못했다고 해서 주님께서 그 사람에게 접근하실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섭리는 인간이 만들어 놓은 교단과 건물의 경계보다 훨씬 넓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를 안 다녀도 착하게만 살면 된다’는 말일까요? 여기서도 그렇게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착하게 사니까 교회 같은 것은 필요 없어’라는 생각 속에는 또 다른 ‘프로프리움’(proprium)이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내가 스스로 충분히 판단할 수 있으며, 나 자신의 선함만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기 욕망을 선이라고 착각하기도 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일을 정의라고 합리화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넘어서는 진리가 필요합니다. 말씀이 필요하고, 가르침이 필요하며, 공동체 안에서 자신을 비추어 볼 필요도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교회의 귀중함입니다. 건강한 교회는 ‘우리 안에 들어와야 구원받는다’고 사람을 붙잡는 곳이 아니라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자신을 목적지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가리켜야 합니다. 말씀을 가르치고, 사람이 자신의 악을 보도록 도우며, 회개와 거듭남(regeneration)의 길을 걷게 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유용한 일을 행하도록 길러 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구원의 주인이 아니라 구원을 이루시는 주님을 섬기는 도구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교회 안에 있는 사람에게 더 큰 책임이 있습니다. 교회 밖의 사람보다 구원받을 확률이 높다는 뜻이 아니라, 더 많은 진리를 받았다는 뜻입니다. 말씀을 매주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과 말씀을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던 사람을 주님께서 똑같은 외적 잣대로 판단하신다고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주님께서는 각 사람이 무엇을 알고 있었으며, 무엇을 알 수 있었고, 자신에게 주어진 빛 안에서 무엇을 자유롭게 선택했는지를 보십니다.

 

주님께서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고 말씀하신 것도 생각해 볼 만합니다(눅12:48). 교회에 오래 다녔다는 것은 단순히 구원에 유리한 경력을 많이 쌓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과 말씀과 선과 진리에 관하여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질문은 ‘나는 교회를 몇 년 다녔는가?’보다 ‘그동안 들은 말씀이 나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었는가?’가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매우 흥미로운 역전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흔히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을 ‘구원받은 사람’,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을 ‘구원받아야 할 사람’으로 구분합니다. 물론 복음을 전하고 사람을 교회로 초청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구분이 지나치게 굳어지면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지 않게 됩니다. ‘나는 이미 안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에게도 끊임없이 ‘회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주님께서 회개를 촉구하신 대상들도 세상 사람들이 아니라 교회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요? ‘저 사람은 아직 교회를 안 다니니 구원받기 어렵다’고 미리 판단하기보다 주님께서 그 사람의 삶 가운데 어떻게 역사하고 계시는지 인간은 다 알 수 없다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할 일은 그 사람을 겁주어 교회라는 울타리 안으로 데려오는 것보다, 우리의 삶을 통하여 그가 주님의 선하심을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을 만나면서 오히려 주님에게 가까워지고 싶어지게 만드는 것,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전도이겠습니까!

 

이것은 특히 교회가 상처의 장소가 된 사람들을 생각할 때 중요합니다. 교회 안에서 모욕을 당했거나, 권위주의적인 목회자를 만났거나,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강요와 정죄를 경험하여 교회를 떠난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예배당을 떠났다는 사실만으로 주님까지 떠났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상처 때문에 진리 자체까지 거부하게 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주님께서는 그 사람이 왜 떠났는지, 무엇을 경험했는지, 그 안에서 무엇을 여전히 찾고 있는지를 우리보다 훨씬 정확하게 아십니다.

 

반대로 교회를 떠난 자신의 선택을 언제나 정당화할 수도 없습니다. ‘교회에 상처받았으니 나는 이제 말씀도 공동체도 필요 없다’고 굳어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교회 안인가 밖인가’라는 위치만이 아닙니다. 나는 진리를 원하고 있는가, 악을 죄로 여기고 있는가,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받아들이고 있는가, 그리고 이웃을 향하여 체어리티를 행하는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입니다.

 

사후세계에서는 교적부도, 출석부도, 직분도 가져가지 못합니다. 장로였는지, 권사였는지, 집사였는지, 어느 교단에 속했는지가 그 자체로 천국의 신분이 되지 않습니다. 자연계에서 살아가는 동안 무엇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형성되었는지가 드러납니다. 교회생활이 참으로 귀한 것은 바로 그 삶을 통하여 주님께서 우리의 사랑을 변화시키시고,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도록 준비시키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회 안 다닌 사람은 결국 구원받기 어려워’라는 말에는 절반의 진리와 상당한 오해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교회와 말씀과 신앙 공동체 없이 혼자 신앙의 길을 걷는 것은 분명 쉽지 않습니다. 참된 교회는 인간에게 엄청난 영적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곧바로 ‘그러므로 교회에 다니지 않은 사람은 구원받기 어렵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구원은 교회 출석률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각 사람의 내면에서 이루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질문을 조금 바꾸어야 합니다. ‘교회를 다녔는가?’보다 더 깊은 질문은 ‘교회를 통하여 주님을 만났는가?’입니다. 그리고 교회를 다니는 사람에게는 한 가지 질문이 더 따라옵니다. ‘나는 수십 년 동안 교회를 다니면서 실제로 어떤 사람이 되었는가?’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교회는 구원의 주인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을 말씀과 선과 진리로 이끄시는 귀중한 통로이며, 교회 출석 자체가 사람을 구원하는 것도, 교회 밖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사람을 구원에서 제외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더 짧게 말한다면 이것이겠습니다.

 

‘주님께서 마지막에 물으시는 것은 너는 교회에 몇 년 다녔느냐가 아니라, 그 모든 빛을 받으며 너는 어떤 사랑의 사람이 되었느냐입니다.’

 

 

 

SL.18, ‘평생 착하게 살아도 예수님을 모르면 지옥 가’

‘평생 착하게 살아도 예수님을 모르면 지옥 가’ ‘평생 착하게 살아도 예수님을 모르면 지옥 가.’ 많은 개신교인이 별다른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말입니다. ‘예수 외에는 구원이 없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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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착하게 살아도 예수님을 모르면 지옥 가’

 

‘평생 착하게 살아도 예수님을 모르면 지옥 가.’ 많은 개신교인이 별다른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말입니다. ‘예수 외에는 구원이 없다’는 성경의 분명한 선언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고(요14:6), 베드로도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고 선포했습니다(행4:12). 따라서 ‘예수님을 몰라도 착하게만 살면 구원받는다’고 말한다면 기독교 신앙의 중심을 놓치게 됩니다. 구원의 근원은 인간의 착함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매우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다’는 말과 ‘살아 있는 동안 예수라는 이름과 기독교 교리를 명시적으로 알지 못한 사람은 모두 지옥에 간다’는 말은 정말 같은 말일까요? 얼핏 보면 같은 말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전자는 ‘구원의 근원이 누구인가?’에 대한 대답이고, 후자는 ‘그 구원이 인간에게 어떤 방식으로 전달될 수 있는가?’에 대한 대답입니다.

 

예를 들어 기독교 복음이 전해지기 수백 년 전에 다른 대륙에서 살다 죽은 사람이 있다고 해 보겠습니다. 그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예수’라는 이름을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그에게는 성경도 없었고 교회도 없었으며 선교사도 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자기 종교와 양심을 따라 거짓말과 살인을 악으로 여기고, 부모를 공경하며, 어려운 이웃을 도우며, 자신이 알고 있는 선을 따라 성실하게 살려고 노력했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사람에게 ‘당신은 예수라는 이름을 알지 못했으므로 지옥에 갑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더 어려운 경우도 있습니다. 기독교를 들어 보기는 했지만 그에게 전달된 기독교가 심하게 왜곡되어 있었던 경우입니다. 그가 만난 그리스도인들이 잔혹하거나 탐욕스러웠고, 그들에게서 들은 하나님은 인간을 증오하고 다른 종교인을 모두 멸망시키는 신처럼 소개되었다고 해 보겠습니다. 그 사람이 그런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사실과, 주님 자신을 알고도 의도적으로 거부했다는 것을 동일하게 볼 수 있을까요? 인간은 겉으로 ‘그 사람은 예수를 믿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주님께서는 그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알고 있었고 무엇을 알 수 없었는지까지 보십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문제가 매우 분명해집니다. 구원은 오직 주님에게서 옵니다. 선의 근원도 주님이시고 진리의 근원도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선하게 살았다고 해서 그 자신의 도덕적 공로가 그를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그것을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그의 안에 있는 모든 참된 선의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햇빛을 받는 사람이 태양의 이름을 몰라도 빛은 태양에서 오는 것과 비슷합니다. 빛의 근원을 모른다는 사실 때문에 그 빛이 다른 곳에서 온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몰라도 착하게 살면 구원받는다’는 표현도 정확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자칫 ‘인간은 자기 선행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는 뜻으로 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님의 이름을 명시적으로 알지 못했더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진리를 따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며 살았다면, 그 선의 실제 근원은 자신이 알지 못했던 주님이며, 그런 사람은 사후에도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해야 합니다.

 

바울의 로마서에는 이 문제를 생각하게 하는 놀라운 구절이 있습니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롬2:14-15). 바울은 율법을 소유하고 있는가만 보지 않고, 그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빛 안에서 어떻게 살았는가를 말합니다. 이것이 곧 ‘착하면 자동 구원’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똑같은 외적 정보량만으로 심판하신다는 단순한 도식에는 신중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도 의미심장합니다(눅10:25-37). 제사장과 레위인은 종교적으로는 올바른 공동체 안에 있었지만 강도 만난 사람을 지나쳤습니다. 반면 유대인의 관점에서 종교적으로 바깥에 있던 사마리아인은 그 사람에게 실제로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누가 올바른 종교적 명칭을 가지고 있었느냐?’고 묻지 않으시고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교리의 중요성을 없애는 말씀이 아니라, 참된 진리가 결국 사랑과 체어리티(charity)의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는 더욱 놀랍습니다. 주님께서는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자에게 마시게 하고, 나그네를 영접하고, 헐벗은 자를 입히고, 병든 자와 갇힌 자를 돌본 사람들에게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마25:40). 그런데 그들은 놀라서 묻습니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나이까?’ 그들은 자신들이 주님께 그렇게 했다는 사실조차 몰랐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들이 이웃에게 행한 선을 자신에게 행한 것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이 대목은 ‘주님을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입으로 ‘예수님’을 정확하게 발음하는 것과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받아들이는 것이 언제나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 ‘주여, 주여’라고 부르면서도 주님의 뜻과 반대로 살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주님의 이름을 제대로 알 기회조차 없었지만 양심에 주어진 진리를 따라 악을 피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눈에는 전자가 ‘신자’이고 후자가 ‘불신자’일 수 있지만, 주님께서는 그보다 훨씬 깊은 곳을 보십니다.

 

그렇다면 선교와 복음 전도는 필요 없다는 말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참된 진리를 아는 것은 엄청난 축복입니다. 내가 행하는 선의 근원이 누구인지 알고, 주님을 인격적으로 알고, 말씀을 통하여 악과 선을 더 분명하게 분별하며, 자신의 힘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힘을 받아 거듭남(regeneration)의 길을 걸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단지 ‘예수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에게 천국 비밀번호를 알려 주는 일’이 아닙니다. 사람을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께 더 분명하게 연결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밝혀 주는 진리의 빛을 전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많이 받은 사람에게는 오히려 더 큰 책임이 생깁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알고, 성경을 가지고 있고, 평생 설교를 듣고, 선과 악에 관하여 많은 것을 배운 사람이 그 모든 진리를 알면서도 자기 사랑과 탐욕과 미움을 붙들고 살아간다면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니까’라는 명칭 자체가 그를 천국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주지는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라고 하셨습니다(마7:21). 많이 안다는 것은 특권인 동시에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갈 더 큰 기회와 책임을 받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점에서 ‘평생 착하게 살아도 예수님을 모르면 지옥 간다’는 말은 뜻밖에도 위험한 신앙적 안도감을 줄 수 있습니다. 나는 기독교인이며 예수님의 이름을 알고 있으므로 저 사람보다 안전하다고 생각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질문의 방향을 바꿉니다. ‘저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을 아느냐?’를 묻기 전에 ‘나는 예수님의 이름을 알면서 실제로 그분이 가르치신 선을 사랑하고 있는가?’를 묻게 합니다. 이름을 아는 것과 그 이름이 뜻하는 생명을 받아들이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종교가 똑같다는 결론으로 가서도 안 됩니다. 진리와 거짓의 차이는 실제로 중요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삶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 수 있고, 참된 진리는 사람이 선을 더 분명하게 보고 선택하도록 돕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진리를 중요하게 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태어난 문화와 종교 때문에 불완전한 진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과, 진리를 알면서 자기 욕망을 지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거짓을 선택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거짓을 알고 있는 상태’와 ‘거짓을 사랑하는 상태’를 구별해야 합니다.

 

사후세계에서도 이 차이는 중요합니다. 자연계에서 주님을 명시적으로 알지 못했지만 선을 사랑하며 양심을 따라 살아온 사람은 사후에 진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이미 선을 사랑하고 있다면 그 선과 조화를 이루는 진리를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결국 모든 천국의 중심에는 주님이 계시므로,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은 궁극적으로 주님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예수 없이도 구원받는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구원하시는 역사는 인간이 자연계에서 예수라는 이름을 명시적으로 알고 있었는가보다 훨씬 넓고 깊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서 참으로 아름다운 사실 하나가 드러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에게 그가 받을 수 없었던 것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아프리카의 어느 마을에서 태어난 사람, 기독교가 전해지기 전 시대에 살았던 사람, 기독교에 관하여 심각하게 왜곡된 모습만 접했던 사람과, 평생 성경을 읽고 복음을 들은 사람을 똑같은 외적 기준으로 재단하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는 각 사람이 어떤 빛을 받았으며, 그 빛 안에서 무엇을 자유롭게 선택했는지를 완전하게 아십니다. 이것이 인간의 판결과 주님의 심판이 다른 이유입니다.

 

결국 ‘평생 착하게 살아도 예수님을 모르면 지옥 가’라는 말에는 반드시 수정이 필요합니다. ‘예수님 없이도 착하게 살면 자기 선행으로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도 아니고, ‘예수라는 이름을 생전에 듣지 못했으니 아무리 선을 사랑했어도 지옥에 간다’는 것도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나 주님의 구원하시는 사랑은 인간이 태어난 시대와 나라와 종교적 환경보다 큽니다.

 

그래서 이 질문에는 이렇게 답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몰랐다고 해서 그 사람을 주님께서 모르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사람은 자기의 착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지만, 주님께서는 생전에 자신의 이름을 명시적으로 알 기회가 없었던 사람도 그가 받은 진리와 양심 안에서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시며 구원의 길로 이끄십니다.’

 

조금 더 ‘스베덴보리의 렌즈’답게 압축한다면 이것이겠습니다.

 

‘천국의 문을 여는 것은 ‘예수’라는 이름을 알고 있었느냐는 지식의 양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빛 안에서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얼마나 자유롭게 받아들였느냐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과 구원자는 오직 주님이십니다.’

 

 

 

SL.19, ‘교회 안 다닌 사람은 결국 구원 받기 어려워’

‘교회 안 다닌 사람은 결국 구원 받기 어려워’ ‘교회 안 다닌 사람은 결국 구원받기 어려워.’ 오랫동안 교회생활을 해 온 사람이라면 이 말을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실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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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17, ‘임종 전에라도 예수 믿으면 천국 가’

‘임종 전에라도 예수 믿으면 천국 가는 거 아닌가.’ 많은 개신교인에게 이 질문의 답은 거의 당연하게 ‘그렇다’일 것입니다. 평생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거나 심지어 큰 죄를 지으며 살았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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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 직전에라도 예수 믿으면 천국 가’

 

‘임종 직전에라도 예수 믿으면 천국 가는 거 아닌가.’ 많은 개신교인에게 이 질문의 답은 거의 당연하게 ‘그렇다’일 것입니다. 평생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거나 심지어 큰 죄를 지으며 살았더라도 죽기 직전 진심으로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십자가에 달린 강도입니다. 그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 예수님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했고, 주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23:42-43). 그렇다면 이 본문이 ‘죽기 5분 전이라도 예수 믿으면 천국에 간다’는 교리를 확증하는 것일까요?

 

먼저 아주 중요한 것은 ‘임종 직전에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반대편의 또 다른 교리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구원은 인간이 정한 시간표에 갇히지 않습니다. 사람이 마지막 순간에 주님을 향하여 진실하게 돌아설 가능성을 우리가 부정할 수도 없습니다. 특히 우리는 어떤 사람의 내면에서 평생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겉으로는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살았던 것처럼 보여도 그 안에 어떤 선과 진리가 보존되어 있었는지, 마지막 순간 어떤 내적 변화가 일어났는지는 주님만 아십니다. 따라서 ‘너무 늦었다’고 인간이 선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전혀 다른 질문이 생깁니다. ‘마지막 순간 진실한 회심이 가능하다’는 것과 ‘평생 어떻게 살았든 죽기 직전에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면 자동으로 천국에 간다’는 것은 같은 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후자의 생각은 구원을 마치 임종 직전에 사용할 수 있는 마지막 비상카드처럼 만들어 버립니다. 평생 자기 사랑과 탐욕과 미움과 거짓을 사랑하며 살아도 마지막 순간 특정한 신앙고백만 하면 그 사람의 영원한 상태가 즉시 반전된다는 생각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보면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이 ‘지배적 사랑’(ruling love)입니다. 사람은 자연계에서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선택을 통하여 자신이 무엇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인지를 형성해 갑니다. 선을 알고도 계속 악을 선택하고, 그 악을 즐기고 정당화하며 반복한다면 그것은 점차 그 사람의 의지와 사랑의 일부가 됩니다. 반대로 넘어지고 실패하더라도 악을 죄로 여기며 주님께 도움을 구하고 다시 선을 향한다면 그 사람 안에서는 다른 방향의 사랑이 형성됩니다. 사후에 드러나는 것은 단순히 ‘마지막으로 무슨 말을 했는가?’가 아니라 자연계의 삶을 통하여 실제로 ‘어떤 사람이 되었는가?’입니다.

 

이 때문에 임종 직전의 회개를 생각할 때 ‘말’과 ‘내면의 변화’를 구별해야 합니다. 죽음이 눈앞에 다가오면 누구라도 두려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 살려 주세요’, ‘예수님 믿겠습니다’, ‘제 죄를 용서해 주세요’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 기도를 무가치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형벌을 피하고 싶어 하는 것과 악 자체를 미워하여 주님께 돌아서는 것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입술의 고백이 순간적으로 가능하다고 해서 수십 년 동안 자유롭게 형성해 온 사랑의 방향까지 반드시 그 순간 바뀌었다고 인간이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의 강도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우리는 그 사람의 전 생애를 모릅니다. 성경도 그의 생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마지막 장면뿐입니다. 그런데 그 짧은 장면에서도 한 가지 중요한 차이가 나타납니다. 다른 행악자는 예수님을 비방하며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하지만, 이 사람은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고 말합니다(눅23:39-41). 그는 자신의 악을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주님의 무죄함을 인정하며, 주님의 나라를 인정하고 자신을 주님께 맡깁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을 단순히 ‘마지막 순간에 예수 믿는다는 말 한마디를 해서 천국에 갔다’고 축소하면 오히려 본문에 나타난 강도의 내적 태도를 놓칠 수 있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그 강도의 내면을 완전히 알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위에서 그가 한 몇 마디만 듣지만 주님께서는 그의 전 생애와 내면을 보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신 말씀은 ‘누구든지 죽기 직전에 이와 비슷한 문장을 말하면 동일한 결과를 얻는다’는 구원 공식을 제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볼 수 없는 한 사람의 내면까지 완전히 아시는 주님께서 그 사람의 상태를 보시고 하신 말씀이라고 이해하는 편이 더 깊습니다.

 

이것은 포도원 품꾼의 비유와도 연결됩니다. 어떤 사람은 아침부터 일했고 어떤 사람은 거의 일이 끝날 무렵 들어왔지만 모두 한 데나리온을 받았습니다(마20:1-16). 주님의 은혜는 ‘너는 너무 늦었다’며 문을 닫지 않습니다. 인생의 황혼에 주님을 만난 사람이라고 해서 젊어서부터 신앙생활을 한 사람보다 구원에서 불리하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늦게 온 품꾼은 포도원 밖에 그대로 있으면서 품삯만 요구한 것이 아닙니다. 늦게라도 주인의 부름을 받고 포도원으로 들어왔습니다. 중요한 것은 ‘몇 시에 불렸느냐’만이 아니라 부름에 응답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문제는 회심의 ‘시각’보다 회심의 ‘실재’입니다. 열 살에 주님을 믿었다고 해서 자동으로 천국에 적합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여든 살에 주님을 알았다고 해서 너무 늦은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달력상의 날짜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입니다. 다만 자연계의 삶이 중요한 까닭은 바로 이곳에서 우리의 사랑이 선택과 행동을 통하여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기 전에만 믿으면 되지’라는 생각은 매우 위험합니다. 그것은 회개를 미래로 미루면서 오늘의 악을 계속 사랑해도 된다는 허가증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회개하면 되지’라는 생각에는 또 하나의 함정이 있습니다. 우리는 미래의 내가 무엇을 사랑하게 될지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악을 반복할수록 그 악은 습관이 되고, 습관은 성향이 되며, 성향은 점차 사랑의 일부가 됩니다. 젊어서 평생 자기만을 위해 살다가 죽기 직전에 마음속 스위치를 한 번 눌러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겠다고 계획할 수는 없습니다. 거듭남(regeneration)은 주님께서 인간의 자유와 ‘합리성’(rationality)을 보존하시면서 사람의 사랑과 삶의 질서를 변화시키시는 실제적인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그러면 임종 직전 회개는 가짜라는 말인가?’라는 반론도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그것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마지막 순간의 주님을 향한 돌이킴이 그 사람의 내면에 오래 보존되어 있던 선과 진리가 마지막에 드러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리메인스’(remains), 곧 주님께서 사람 안에 보존하시는 선과 진리의 상태를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눈에는 평생 하나님과 멀리 살았던 사람처럼 보여도 주님께서는 우리가 전혀 알지 못했던 내면의 역사를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임종의 회개를 가볍게 여겨서도 안 되고, 그것을 기계적인 구원 공식으로 만들어서도 안 됩니다.

 

이 원리는 앞서 이야기했던 자살한 사람의 장례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우리는 사람의 마지막 몇 분만 보고 그 사람의 영원한 상태를 판정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 행동 하나 때문에 ‘지옥에 갔다’고 단정해서도 안 되고, 마지막 고백 한마디 때문에 ‘틀림없이 천국에 갔다’고 단정해서도 안 됩니다. 두 경우 모두 인간이 볼 수 있는 마지막 장면 하나를 가지고 주님만이 보실 수 있는 한 사람의 전 생애와 내면을 판결하려는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마지막 순간은 중요하지만, 마지막 순간만이 그 사람 전체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할 때도 ‘지금 예수님을 영접하기만 하면 오늘 죽어도 천국 갑니다’라는 말만으로 구원을 설명하는 데에는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는 첫걸음이 될 수 있지만, 자칫 구원을 ‘죽은 뒤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자격 확보’로 축소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목적은 단지 죽은 뒤 우리의 위치를 지옥에서 천국으로 변경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여기서 우리를 악에서 건져 내시고, 우리의 사랑을 변화시키시며,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천국적인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십니다.

 

그래서 ‘임종 전에라도 예수 믿으면 천국 가는 거 아닌가?’라는 질문에는 두 가지를 동시에 대답해야 합니다. ‘아무리 늦어도 주님께 돌아가기에는 늦지 않습니다.’ 이것은 복음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러니 지금은 어떻게 살아도 되고 마지막에 믿으면 됩니다’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주님의 자비에는 ‘너무 늦었다’는 시간이 없지만, 그 자비를 핑계로 오늘의 거듭남을 미루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결국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몇 분 전까지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는가?’가 아닙니다. 그런 시간의 경계선을 찾는 것 자체가 구원을 너무 외적으로 이해한 질문일 수 있습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오늘 주님께서 나를 부르고 계실 때 나는 왜 내일로 미루는가?’입니다. 주님은 임종의 순간에도 사람을 사랑하시지만, 바로 지금도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마지막 순간에도 주님께 진실하게 돌아설 가능성을 인간이 닫을 수는 없지만, 마지막 순간의 신앙고백 하나가 평생 자유롭게 형성해 온 사랑과 삶에 관계없이 자동으로 천국을 보장한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강도를 생각하며 더 짧게 말한다면 이것이겠습니다. ‘주님의 자비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 없지만, 그렇다고 회개를 마지막 순간까지 미루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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