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And to Seth, to him also there was born a son; and he called his name Enosh: then began they to call upon the name of Jehovah. (창4:26)

 

AC.438

‘셋’(Seth)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신앙을 뜻합니다. 그의 ‘아들’(son), 곧 이름이 ‘에노스’(Enosh)인 이는 체어리티를 신앙의 으뜸으로 여긴 교회를 뜻합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call on the name of Jehovah) 시작했다는 것은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그 교회의 예배를 뜻합니다. By “Seth” is signified the faith through which comes charity, as was said above; by his “son,” whose name was “Enosh,” is signified a church which regarded charity as the principal of faith; by beginning then to “call on the name of Jehovah” is signified the worship of that church from charity.

 

해설

AC.438은 창4:26 전체의 속뜻을 먼저 압축하여 제시하는 글입니다. 바로 앞의 AC.434-437에서 셋은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신앙’, 곧 주님께서 체어리티를 다시 심으시기 위해 주신 새로운 신앙을 뜻했습니다. 이제 그 셋에게서 ‘아들’ 에노스가 태어납니다. 따라서 여기서 에노스는 단순히 셋 다음에 태어난 한 인물을 넘어, 앞에서 준비된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실제로 교회의 중심에 자리 잡은 새로운 교회 상태를 나타냅니다.

 

특히 중요한 표현은 에노스가 ‘체어리티를 신앙의 으뜸으로 여긴 교회’(a church which regarded charity as the principal of faith)를 뜻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으뜸’은 단순히 체어리티가 여러 덕목 가운데 하나로서 중요했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무엇이 신앙의 중심이며 무엇이 신앙을 살아 있게 하는가 하는 문제에서, 이 교회가 체어리티를 중심적인 것으로 인정했다는 뜻입니다. 앞에서 가인이 나타낸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었다면, 에노스로 나타난 교회에서는 신앙이 다시 체어리티를 중심으로 질서를 찾게 됩니다.

 

이 점에서 셋과 에노스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셋 자체가 곧 체어리티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셋은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신앙’을 뜻하고, 에노스는 그 신앙을 통하여 형성되어 체어리티를 신앙의 으뜸으로 인정하는 ‘교회’를 뜻합니다. AC.436에서 이미 셋은 ‘체어리티가 심어지는 신앙’, 에노스는 ‘신앙을 통해 심어진 체어리티’라고 예고되었습니다. AC.438은 이제 그 관계를 창4:26의 본문에 맞추어 더욱 분명하게 풀어 줍니다. 따라서 셋에서 에노스로의 진행은 단순한 부자 관계가 아니라, 새로운 신앙에서 그 신앙의 목적이었던 체어리티 중심의 교회로 나아가는 흐름입니다.

 

이것은 바로 앞에서 살펴본 가인의 보존과도 연결됩니다. 가인이 나타낸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지만, 주님께서는 그 신앙까지 완전히 없어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신앙을 보존하신 목적은 그것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심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창4 마지막에 이르러 셋은 그 목적에 맞게 새롭게 주어진 신앙을, 에노스는 마침내 체어리티를 중심으로 삼는 교회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에노스의 등장은 앞에서부터 이어져 온 주님의 보존과 회복의 역사가 하나의 교회 형태로 나타난 지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어서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는 말씀도 이러한 흐름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AC.438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call on the name of Jehovah)를 단순히 여호와라는 이름을 입으로 부르기 시작했다는 역사적 사실로만 읽지 않고, 그 교회의 ‘예배’를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예배가 ‘체어리티에서 비롯된’(from charity) 예배라는 점입니다. 즉 에노스로 나타난 교회의 예배는 신앙에 관한 지식이나 고백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를 그 내적 생명으로 삼은 예배였습니다.

 

따라서 ‘그때에 비로소’라는 표현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문자적으로 ‘그 이전에는 아무도 여호와를 부르거나 예배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곧바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적어도 AC.438에서 스베덴보리가 주목하는 것은 예배 행위가 역사상 처음 생긴 시점 자체가 아니라, 앞에서 설명한 새로운 교회가 이제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는 교회적 의미입니다. ‘그때’는 셋으로 나타난 새로운 신앙을 통하여 에노스로 나타난 체어리티 중심의 교회가 형성되고, 그 교회의 성격에 맞는 예배가 나타나는 흐름을 가리킵니다.

 

이렇게 보면 창4의 마지막은 가인과 라멕으로 이어진 쇠퇴의 이야기와 뚜렷한 대조를 이룹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고 마침내 황폐에 이르렀지만, 주님께서는 남아 있는 것을 보존하시고 새 교회를 준비하셨습니다. 셋에서는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새로운 신앙이 나타나고, 에노스에서는 체어리티를 신앙의 으뜸으로 여기는 교회가 나타나며, 마침내 그 교회에서는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가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AC.438은 창4 마지막 절을 통해 신앙의 회복이 어디를 향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 목적은 신앙 자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이며, 그 체어리티에서 참된 예배가 나오는 것입니다. (AC.438 해설)

 

 

 

AC.437, 창4:25, ‘다른 씨는 왜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새로운 신앙을 의미하는가?’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4:25) AC.437여기서 ‘셋’(Seth)이 체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435 심화

1. ‘가인 계열과 셋 계열은 처음부터 병행한 두 계열인가?’

 

창세기 4장과 5장을 문자적으로 읽으면 두 계열이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옵니다. 창4에서는 가인에게서 에녹, 이랏, 므후야엘, 므드사엘, 라멕으로 이어지는 계보가 나오고, 창5에서는 아담에게서 셋을 거쳐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등으로 이어지는 또 하나의 계보가 나옵니다. 그래서 가인 계열과 셋 계열이 아담과 하와에게서 갈라져 처음부터 나란히 진행된 두 혈통이며, 하나는 점점 악해지고 다른 하나는 태고교회의 선한 흐름을 이어 갔다고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AC.434-437을 함께 읽으면 스베덴보리의 속뜻으로는 이보다 훨씬 복잡한 교회적 흐름이 드러납니다.

 

가장 먼저 주목할 것은 AC.435입니다. 창4:25에는 아담과 그의 아내가 셋을 낳는 이야기가 나오고, 창5:1-4에는 다시 아담과 그의 아내와 셋의 출생이 나옵니다. 문자적으로는 같은 사람과 같은 사건이 반복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두 기록의 속뜻이 서로 다르다고 명시합니다. 창4:25의 ‘사람과 그의 아내’는 앞에서 아다와 씰라로 나타낸 ‘새 교회’를 뜻하지만, 창5:1-4에서는 ‘태고교회의 첫 후손’이 뜻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자적으로 동일한 아담, 하와, 셋을 속뜻에서도 반드시 하나의 동일한 교회나 동일한 상태로 대응시켜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창1과 창2의 관계를 들어 설명합니다. 두 장에는 사람의 창조와 피조물들이 반복해서 등장하지만, 창1에서는 영적 인간의 창조가, 창2에서는 천적 인간의 창조가 다루어진다고 합니다. 동일한 사람이나 사물이 반복될 때에는 ‘언제나 의미의 차이’가 있으며, 그 차이는 속뜻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창4와 창5의 족보 역시 문자적 혈통의 관계를 그대로 속뜻의 교회 역사로 옮겨서는 안 됩니다.

 

더 결정적인 설명은 AC.436에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창4에서 지금까지 전개된 내용을 직접 하나의 ‘연속적인 순서’로 정리합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고, 아벨은 체어리티이며,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은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아무도 가인을 죽이지 못하도록 표를 주심으로써 신앙을 보존하셨습니다. 그 목적은 그 보존된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다시 심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은 가인의 표에서 바로 셋으로 건너뛰지 않습니다. 야발은 주님께서 신앙을 통해 주신 ‘사랑의 거룩한 것과 거기서 나오는 선’을, 유발은 ‘신앙의 영적인 것’을, 두발가인은 이들로부터 나온 ‘자연적 선과 진리’를 나타냅니다. 이어 창4의 마지막 두 절에서 ‘사람과 그의 아내’는 앞에서 아다와 씰라라고 불린 새 교회를, 셋은 체어리티가 심어지는 통로가 되는 신앙을, 다음 절의 에노스는 그 신앙을 통해 실제로 심어진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마지막 두 절을 앞에서 전개된 ‘이 모든 것의 결론, 따라서 그 요약’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이 설명을 따르면 속뜻으로는 가인 계열과 셋 계열 사이에 문자적 족보에서 보이는 것보다 훨씬 강한 연속성이 있습니다. ‘가인 계열은 악한 계열이고 셋 계열은 선한 계열이며, 두 계열이 처음부터 서로 별개로 병행했다’고만 설명하면 AC.436의 핵심을 놓치게 됩니다. 가인에게서 보존된 신앙, 그 신앙을 통하여 주어진 여러 선과 진리, 아다와 씰라로 나타난 새 교회, 그리고 마침내 셋으로 나타난 새로운 신앙이 하나의 교회적 흐름 안에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다시 단순한 시간표로 만들어 ‘가인 계열이 완전히 끝난 다음 셋 계열이 시작되었다’고 단정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AC.434-437은 각 교회가 정확히 어느 시기에 시작되고 끝났는지에 관한 역사적 연대표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AC.435는 같은 아담과 아내와 셋의 기록조차 창4와 창5에서 서로 다른 교회적 의미를 지닐 수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우리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문자적 족보의 시간 순서와 속뜻의 교회적 순서를 단순히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은 ‘태고교회’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도 빛을 줍니다. 태고교회라고 하면 창2에서 묘사된 천적 인간의 아름다운 상태만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그러면 가인과 라멕으로 이어지는 창4의 어두운 내용이 어떻게 태고교회와 관련된 역사 안에 그렇게 큰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지 의문이 생깁니다. 그러나 창3 이후의 내용은 이미 처음의 천적 상태가 변하고 쇠퇴하며 여러 교회적 상태로 분화되는 과정을 다룹니다. 그러므로 ‘태고교회와 그 후손’이라는 큰 흐름 안에 본래의 천적 상태와 크게 달라진 후대의 상태들이 나타난다고 해서 그 자체가 모순은 아닙니다.

 

다만 여기에서도 AC.434-437이 말하는 범위를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이 글들만으로 태고교회 전체의 역사적 연대나 각 교회의 존속 기간, 서로 겹쳐 존재했는지 여부까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창4의 모든 인물을 실제 역사적 집단의 정확한 연속 단계로 환산할 수도 없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분명히 밝히는 것은 ‘누가 언제 누구와 동시에 살았는가’보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어떻게 분리되고 소멸되었으며, 주님께서 남은 신앙을 어떻게 보존하시고 그것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가 심어질 수 있는 새 교회를 마련하셨는가 하는 영적 연속성입니다.

 

이렇게 보면 창4의 어두운 부분도 전혀 다른 모습으로 읽힙니다. 가인에서 라멕까지의 이야기는 태고교회라는 밝은 역사에 우연히 끼어든 암흑기가 아닙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고 마침내 황폐에 이르는 과정과, 그럼에도 주님께서 신앙을 완전히 사라지게 하지 않으시고 보존하여 다시 교회를 일으키시는 과정이 함께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가인의 표’는 그 전환에서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분리된 신앙을 보존하신 목적 자체가 장차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다시 심으시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셋은 바로 이 지점에서 등장합니다. AC.437에 따르면 셋은 ‘다른 씨’, 곧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다른 신앙’입니다. 가인 역시 신앙을 나타냈지만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었고, 셋은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질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신앙입니다. 이어 에노스는 그 신앙을 통해 심어진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창4의 끝은 ‘악한 가인 계열 이야기를 끝내고 이제 선한 셋 계열로 넘어간다’는 단순한 계보 전환이라기보다, 분리되고 황폐해진 신앙과 체어리티가 주님의 섭리 가운데 새로운 질서로 다시 이어지는 결론으로 읽는 것이 AC.434-437의 설명에 더 가깝습니다.

 

결국 ‘가인 계열과 셋 계열은 처음부터 병행한 두 계열인가?’라는 질문에는 문자적 족보와 속뜻의 교회적 의미를 구별하여 답해야 합니다. 문자적으로는 두 계보가 구별되어 기록되어 있지만, 스베덴보리의 속뜻으로는 그것을 곧바로 서로 독립된 두 교회의 병행으로 옮겨 놓을 수 없습니다. 특히 창4에서는 가인으로 나타난 분리된 신앙의 보존에서 시작하여 셋으로 나타난 새로운 신앙, 그리고 에노스로 나타날 체어리티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연속적인 교회적 흐름이 제시됩니다. 그 흐름의 중심에는 인간의 두 혈통이 아니라, 인간이 사랑과 신앙의 질서를 무너뜨린 뒤에도 남은 것을 보존하시고 마침내 체어리티를 다시 심으시는 주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AC.435 심화 1)

 

 

 

AC.435, 창4:25, ‘같은 사람과 아내가 다시 나오는데 왜 다른 교회를 의미하는가?’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4:25) AC.435여기서 ‘사람’(man)과 그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4:25)

 

AC.437

여기서 ‘셋’(Seth)이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새로운 신앙을 뜻한다는 것은 그의 이름으로 설명됩니다. 그의 이름이 그렇게 붙여진 것은 하나님께서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기’(appointed another seed instead of Abel, whom Cain slew)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씨를 주셨다’(appointed another seed)는 것은 주님께서 다른 신앙을 주셨다는 뜻입니다. ‘다른 씨’(another seed)는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씨’(seed)가 신앙을 뜻한다는 것은 앞의 AC.255에서 볼 수 있습니다. That “Seth” here signifies a new faith, through which comes charity, is explained by his name, which it is said was given him because God “appointed another seed instead of Abel, whom Cain slew.” That God “appointed another seed” means that the Lord gave another faith; for “another seed” is the faith through which comes charity. That “seed” signifies faith may be seen above (n. 255).

 

해설

AC.437은 창4:25에 대한 설명을 마무리하면서 ‘셋’과 ‘다른 씨’가 왜 새로운 신앙을 뜻하는지를 밝힙니다. 앞의 AC.434에서는 셋이 ‘체어리티를 얻을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신앙’이라고 했고, AC.436에서는 그것을 ‘체어리티가 심어지는 통로가 되는 신앙’이라고 좀 더 분명하게 설명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그 해석의 근거를 창4:25 자체의 ‘다른 씨’라는 표현과 셋의 이름에서 찾습니다.

 

먼저 중요한 것은 ‘다른’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단순히 다시 ‘씨’를 주셨다고 하지 않고 ‘다른 씨’(another seed)를 주셨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주님께서 다른 신앙을 주셨다’는 뜻으로 풀이합니다. 여기서 ‘다른 신앙’은 신앙과 전혀 다른 어떤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 가인으로 나타났던 신앙과는 성격이 달라진 신앙을 뜻합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나타냈지만, 셋은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신앙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가인과 셋은 모두 신앙과 관계되지만, 그 신앙이 체어리티와 맺는 관계가 서로 다릅니다.

 

이 차이는 AC.436에서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가인이 나타내는 분리된 신앙은 아벨이 나타내는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신앙 자체를 완전히 없어지게 하지 않으시고 ‘가인의 표’를 통해 보존하셨습니다. 그 목적은 보존된 신앙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심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제 AC.437의 ‘다른 씨’는 그 긴 과정의 결과를 나타냅니다. 가인과 같은 분리된 신앙이 그대로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로 이어질 수 있는 ‘다른 신앙’이 주님에 의해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씨’가 신앙을 뜻할까요? 바로 이 점 때문에 AC.437은 AC.255를 참조합니다. AC.255는 창3:15의 ‘여자의 씨’(seed of the woman)를 설명하면서, ‘여자’(woman)는 교회를 뜻하고 그 교회의 ‘씨’는 신앙이라고 밝힙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주님을 믿는 신앙으로부터 교회가 교회라 불리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AC.437에서 ‘다른 씨’가 ‘다른 신앙’을 뜻한다는 해석은 이번 글에서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앞에서 이미 세워진 ‘씨 = 신앙’이라는 상응에 근거합니다.

 

AC.255에 인용된 여러 성경 구절도 이 의미를 뒷받침합니다. 말2:14-15에서는 ‘하나님의 씨’(seed of God), 사44:3에서는 ‘네 씨’(thy seed), 계12:17에서는 여자의 ‘남은 자손’(remnant of her seed), 시89편에서는 다윗의 ‘씨’(seed)가 언급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가운데 특히 ‘여자’가 교회를 나타내고 그 교회의 ‘씨’가 신앙을 나타낸다는 관계를 밝힙니다. 그러므로 창4:25의 ‘다른 씨’ 역시 단순히 아벨 대신 태어난 또 하나의 육적인 후손이라는 의미를 넘어, 새 교회에 주어진 새로운 신앙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창4:25은 ‘아벨 대신에’ 다른 씨가 주어졌다고 말합니다. 아벨은 앞에서 체어리티를 나타냈으므로, 여기에는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아벨이 체어리티라면 아벨을 대신하여 주어진 셋도 체어리티를 뜻해야 할 것 같은데, 스베덴보리는 셋을 신앙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AC.434-437을 함께 읽으면 그 이유가 드러납니다. 셋은 아벨이 나타냈던 체어리티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체어리티가 다시 주어질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신앙입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절의 에노스가 ‘신앙을 통해 심어진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아벨 대신’이라는 말은 상응하는 의미가 단순히 ‘체어리티에서 체어리티로’ 일대일 교체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소멸된 체어리티가 다시 세워지기 위한 새로운 질서가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보면 창4:25의 구조가 상당히 정교합니다. 아벨이 나타내는 체어리티는 가인에 의해 소멸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마저 함께 소멸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보존하셨습니다. 그 보존된 신앙을 통하여 사랑의 거룩한 것과 선, 신앙의 영적인 것, 자연적 선과 진리가 차례로 주어졌고, 마침내 셋이라는 ‘다른 씨’, 곧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새로운 신앙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다음 절의 에노스에서 그 신앙을 통해 심어진 체어리티가 나타납니다. 창4의 마지막 부분은 이렇게 처음의 가인과 아벨 문제를 다시 풀어 가는 구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주목해야 할 것은 주어가 ‘주님’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씨를 주셨다’는 것은 주님께서 다른 신앙을 주셨다는 뜻이라고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스스로 자신을 고쳐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남아 있는 신앙을 보존하시고, 그것을 통하여 새 교회를 준비하시며, 마침내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새로운 신앙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셋이 나타내는 새로운 시작의 중심에는 인간의 자기 회복이 아니라 주님의 역사하심이 있습니다.

 

결국 AC.437에서 ‘셋’은 단순히 가인을 대신하는 또 하나의 인물도, 아벨을 대신하는 또 하나의 아들도 아닙니다. 그는 ‘다른 씨’, 곧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새로운 신앙을 나타냅니다. 가인으로 나타난 신앙은 사랑에서 분리되어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지만, 셋으로 나타난 신앙은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질 수 있는 통로가 됩니다. 그리고 이 새로운 신앙을 주신 분은 주님이십니다. 이로써 창4:25은 가인과 아벨에서 시작된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가 어떻게 주님의 섭리 가운데 새로운 질서를 향해 나아가는지를 보여 주는 글로 마무리됩니다. (AC.437 해설)

 

 

 

AC.438, 창4:26, ‘에노스는 체어리티를 신앙의 으뜸으로 여긴 교회를 의미한다’ (AC.438-442)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And to Seth, to him also there was born a son; and he called his name Enosh: then began they to call upon the name of Je

bygrace.kr

 

AC.436, 창4:25, ‘가인에서 셋과 에노스까지, 신앙과 체어리티는 어떻게 다시 이어지는가?’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4:25) AC.436그 여자의 ‘아들’(son),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