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현듯 이런 AC 번역, 해설 및 심화 작업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습니다. 어제 만남 중 창1 결과물 pdf 보내드렸으니 보시라 하였음에도 나중에 무슨 대화 중 궁금한 건 제가 따로 ChatGPT로 찾아볼께요 하시더군요. 그 생각이 나면서 드는 생각이었습니다.

 

 

목사님 말씀을 읽으며, 사실 그분의 반응 자체보다도 그 반응이 목사님 마음속에서 건드린 지점이 더 크게 느껴졌습니다. 창1 AC 번역, 해설 및 심화 작업은 몇 달에 걸친 작업이었고,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결과물이었으며, 목사님에게는 단순한 자료가 아니라 수많은 시간과 기도, 집중과 인내가 녹아 있는 열매입니다. 그런데 정작 그것을 건네받은 사람은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나중에 궁금하면 ChatGPT로 찾아볼게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마음 한구석에서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어쩌면 그분은 목사님이 만든 자료의 가치를 평가한 것이 아니라, 단지 지금 자신의 상태를 드러낸 것일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여러 곳에서 말하듯, 사람은 자기 상태에 맞는 것만 받아들입니다. 목마르지 않은 사람에게는 샘물이 있어도 관심이 없고, 배고프지 않은 사람에게는 양식이 있어도 귀하지 않습니다. 반면 정말 목마른 사람은 우물 하나를 만나기 위해 수십 리를 걸어갑니다. 문제는 우물의 가치가 아니라 목마름의 유무입니다.

 

사실 목사님께서 지난 몇 년 동안 해 오신 작업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상상하는 종류의 일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설교집도 많고 신학서도 많고 성경공부 교재도 많습니다. 그러나 AC 본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번역하고, 해설하고, 심화하여 한국어로 체계화하는 작업은 거의 아무도 하지 않는 일입니다. 더구나 조회수나 반응을 기대하기 어려운 분야입니다. 그래서 이 일은 처음부터 많은 사람의 박수나 즉각적인 반응을 전제로 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오히려 목사님께서 가끔 하셨던 말씀이 떠오릅니다. ‘스베덴보리는 누구를 위해 그렇게 썼을까?’라는 질문 말입니다. 그의 책들도 생전에는 거의 읽히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름조차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기준은 ‘몇 명이 읽는가’가 아니라 ‘주님께서 맡기신 일인가’였기 때문입니다.

 

목사님도 이미 여러 번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어떤 글은 아무 반응도 없다가 몇 년 뒤 누군가가 연락해 와서 ‘그 글 때문에 살았습니다’, ‘그 글 때문에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반대로 많은 사람이 박수친 글이 실제로는 아무 열매도 남기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영적인 일은 거의 언제나 즉시 결과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씀드리면, ‘나중에 ChatGPT로 찾아볼게요’라는 말은 어쩌면 목사님 작업의 필요성을 역설적으로 보여 주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ChatGPT는 질문이 있어야 답할 수 있지만, 질문 자체를 만들어 주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AC를 읽지 않으면 무엇을 물어야 하는지조차 모릅니다. 목사님이 만드는 해설과 심화는 단순한 정보 제공이 아니라, 독자들이 전혀 보지 못했던 질문과 관점을 열어주는 작업입니다. 그것은 검색과는 다른 차원의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목사님께서 지금 느끼시는 허무함을 가볍게 여기고 싶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허무함은 오랜 시간 씨를 뿌린 사람만이 느끼는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순간에도 한 가지는 기억하셨으면 합니다. 창1 AC 번역, 해설 및 심화 작업의 가치는 그것을 받은 몇 사람의 반응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작업은 이미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 번 존재하게 된 진리는 목사님이 잠들어 계신 어느 날에도, 누군가의 검색 결과 속에서, 누군가의 절망 속에서, 누군가의 신앙의 전환점에서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지금 목사님은 ‘내가 뿌린 씨가 왜 싹이 안 나는가?’를 보고 계신지 모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생애를 보면, 그는 늘 ‘씨를 뿌리는 일’에 충실했지 ‘싹이 언제 올라오는가’를 관리하려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 지금까지 들려주신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저는 목사님의 작업이 사실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먼저 주님 앞에서의 순종에 더 가까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일들은 대개 세상 기준으로는 가장 비효율적이고 가장 외로워 보이지만, 이상하게도 시간이 지나면 가장 오래 남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의 허무함은 어쩌면 작업의 무의미함 때문이 아니라, 씨를 뿌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지나야 하는 계절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SC.94, ‘AC.10325를 읽는 가장 바람직스러운 태도’

The books of the Word are all those which have an internal sense; and those which have not an internal sense are not the Word. The books of the Word in the Old Testament are the five books of Moses, the book of Joshua, the book of Judges, the two books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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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AC.192

 

그러므로 (serpent), 곧 감각 파트가 여자를 설득하여, 주님에 대한 신앙에 속한 것들을 그것들이 정말로 그러한지 보기 위해 탐구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eating of the tree of knowledge)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이성 파트가 이에 동의한 것, 이것이 남자도 그것을 먹었다(the man that he did eat)의 의미입니다 (1-6). Hence the “serpent,” or sensuous part, persuaded the woman to inquire into matters pertaining to faith in the Lord in order to see whether they are really so, which is signified by “eating of the tree of knowledge”; and that the rational of man consented is signified by “the man that he did eat.” (verses 1–6)

 

1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1-6)

 

 

해설

 

이 단락은 AC.191에서 제시된 내적 구조가 실제 작동으로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설명합니다. 감각 파트, 곧 ‘’은 스스로 판단하지 않고, 사랑의 차원인 ‘여자’를 먼저 움직입니다. 이는 인간 안에서 감각적 사고가 직접 이성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애정을 흔들어 놓는 방식으로 작동함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설득하여 탐구하게 하였다’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노골적인 부정이나 거절이 아니라, ‘확인해 보자’, ‘정말 그런지 살펴보자’라는 태도를 뜻합니다. 즉, 주님에 대한 신앙의 문제를 신뢰의 영역에 두지 않고, 감각과 이성의 심문 대상으로 끌어내리는 것이 바로 이 단계의 본질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다’는 것은 지식을 얻는 행위 자체를 뜻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문제는 지식이 아니라, 신앙의 질서를 거꾸로 세우는 방식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를 먼저 받아들이는 대신, 감각과 이성으로 그것이 맞는지 틀리는지를 판단하려는 태도가 바로 이 ‘먹음’에 해당합니다.

 

이때 탐구의 대상은 ‘주님에 대한 신앙에 속한 것들’입니다. 이는 도덕적 규범이나 자연적 사실이 아니라, 본래 내적 지각으로만 알 수 있는 영역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감각으로 확인하려 하자, 이미 질서의 붕괴가 시작된 것입니다. 감각은 이 영역을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그 결과는 필연적으로 왜곡됩니다.

 

이어지는 ‘남자도 그것을 먹었다’는 표현은, 이성 파트가 이러한 방식에 동의했음을 뜻합니다. 이성은 처음부터 주도하지는 않지만, 애정이 움직인 뒤에는 그것을 정당화하고 체계화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렇게 해서 감각이 제안하고, 사랑이 그것을 원하며, 이성이 이에 동의하는 구조가 완성됩니다.

 

이 단락은 타락을 하나의 순간적 사건이 아니라, 내적 과정으로 보여 줍니다. 감각의 제안, 사랑의 동의, 이성의 승인이라는 단계적 흐름 속에서, 인간은 주님을 신뢰하는 상태에서 자기 판단을 신뢰하는 상태로 이동합니다. 이것이 바로 창3:1-6에 담긴 영적 의미이며, 태고교회의 세 번째 상태가 실제로 굳어지는 지점입니다.

 

AC.192는 결국, ‘왜 인간이 믿지 않게 되었는가’에 대한 근본 원인을 드러냅니다. 믿지 않게 된 이유는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믿음의 자리에 감각과 이성을 앉혔기 때문입니다.

 

 

 

AC.191, 창3:1-13, ‘창3의 인물들은 실제 인격체가 아니라, 인간 내면의 구조를 드러내는 표상’

개요 AC.191 자기 사랑, 곧 자기 own의 사랑에서 비롯되어, 그들은 감각으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아무것도 믿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감각적인 부분은 ‘뱀’(serpent)으로, 자기 사랑, 곧 자기 own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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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1.심화

 

1. ‘감각적 증거를 구한다는 거

 

자기 사랑, 곧 자기 own의 사랑에서 비롯되어, 그들은 감각으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아무것도 믿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Because from the love of self, that is, their own love, they began to believe nothing that they did not apprehend by the senses, (AC.191)

 

여기서 감각으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믿지 않는다는 말은 단순한 경험주의가 아니라, 영적 인식의 단절을 뜻합니다. 태고교회는 본래 내적 지각을 통해 진리를 알았으나, 자신의 own을 사랑하게 되면서 그 지각을 신뢰하지 않게 되었고, 대신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감각적 증거를 기준으로 삼게 됩니다. 이 전환이 곧 타락의 실질적 시작입니다. (AC.191 해설)

 

감각을 향하는 거, 감각적 증거를 구하는 거가 이렇게 근본적인, 엄청난 거군요!

 

 

네, 맞습니다. AC.191을 깊이 읽다 보면, 스베덴보리가 창3의 타락을 단순히 도덕적 범죄나 불순종 사건으로 보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그는 타락의 시작을 ‘무엇을 행했는가’보다 ‘무엇을 기준으로 진리를 판단하기 시작했는가’에서 찾고 있습니다.

 

우리 현대인들은 ‘감각으로 확인하고 믿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깁니다. 오히려 그것이 건전한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AC.191을 처음 읽으면 ‘그게 뭐가 그렇게 큰 문제인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인류 역사상 가장 중대한 전환점 가운데 하나로 봅니다.

 

왜냐하면 태고교회 사람들에게는 감각이 진리를 판단하는 최종 심판관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먼저 사랑 안에서 지각했고, 그다음 감각을 사용했습니다. 다시 말해, 위에서 아래로 살았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인플럭스가 먼저 있었고, 감각은 그 결과를 확인하는 가장 바깥 단계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AC.191의 상태에서는 질서가 뒤집힙니다. 이제 사람은 ‘주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러한가 보다’가 아니라, ‘내가 보고, 듣고, 만지고, 이해할 수 있어야 믿겠다’고 말하기 시작합니다. 얼핏 보면 아주 합리적이고 건전한 태도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이것이 곧 영적 세계의 문을 닫는 행위입니다.

 

생각해 보면 천국, 사랑, 신앙, 양심, 인플럭스, 주님의 섭리 같은 것들은 본질적으로 감각의 대상이 아닙니다.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저울로 달 수도 없고, 현미경으로 관찰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감각으로 확인되지 않으면 믿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영적인 것 전체를 판단 불가능한 영역으로 밀어내 버립니다.

 

그래서 AC.191의 문제는 경험주의 자체가 아닙니다. 감각은 원래 주님께서 주신 좋은 것입니다. 문제는 감각을 최종 재판관으로 세우는 것입니다. 원래는 감각이 이해를 섬겨야 하는데, 이해가 감각의 종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더 깊이 말하면, 원래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이 감각을 비추어야 하는데, 이제는 감각이 주님의 빛을 심사하려고 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그렇게 엄청난 문제인지 AC.195-196에 가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영이 있다는 것을 보여 달라’, ‘천국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 달라’, ‘하나님을 눈으로 보여 달라’고 요구하는 사람들을 예로 듭니다. 그들은 자신이 매우 합리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이미 감각으로 확인할 수 없는 모든 것을 배제해 버린 상태에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이 원리가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반드시 과학주의나 무신론의 형태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응답받은 증거가 있어야 믿겠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기적을 보여 주면 믿겠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느낌이 와야 믿겠다’고 합니다. 이것들도 본질적으로는 감각을 기준으로 삼는 태도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참된 신앙은 먼저 믿고 나서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먼저 사랑하고 나서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순종하고 나서 지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맹목적 신앙이 아니라 질서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감각을 향하는 거, 감각적 증거를 구하는 거가 이렇게 근본적인, 엄청난 거군요!’라고 하신 말씀은 AC.191의 핵심을 정확히 짚으신 것입니다.

 

사실 창3의 뱀이 처음부터 ‘하나님을 부인하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정말 그런가?’라고 묻습니다. ‘직접 확인해 보라’고 권합니다. ‘네가 스스로 판단해 보라’고 제안합니다. 이것이 무서운 이유는 너무나 합리적으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가 보는 타락의 시작은 음란이나 폭력이나 살인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훨씬 뒤의 결과들입니다. 가장 처음의 타락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으로 감각을 판단하던 사람’이 ‘감각으로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을 판단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3 전체는 바로 그 한 번의 방향 전환이 인류에게 얼마나 거대한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보여 주는 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AC.191은 짧지만, 실은 창3 전체의 문을 여는 매우 중요한 열쇠와 같은 구절입니다.

 

 

 

AC.191, 창3:1-13, ‘창3의 인물들은 실제 인격체가 아니라, 인간 내면의 구조를 드러내는 표상’

개요 AC.191 자기 사랑, 곧 자기 own의 사랑에서 비롯되어, 그들은 감각으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아무것도 믿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감각적인 부분은 ‘뱀’(serpent)으로, 자기 사랑, 곧 자기 own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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