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And Cain said unto Jehovah, Mine iniquity is greater than can be taken away. (4:13)

 

AC.383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Cain said unto Jehovah) 어떤 내적 고통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가운데 있음을 어느 정도 고백한 것을 의미합니다. 죄악이 너무 커서 사함을 받을 없나이다(mine iniquity is greater than can be taken away) 그로 인한 절망을 의미합니다. Cain said unto Jehovahsignifies a certain confession that he was in evil, induced by some internal pain; “mine iniquity is greater than can be taken awaysignifies despair on that account.

 

해설

AC.383은 창4:13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의 속뜻을 설명하면서 가인의 상태에 새로운 변화가 나타났음을 보여 줍니다. 앞에서는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도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대답했습니다. 체어리티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라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어떤 내적 고통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가운데 있음을 어느 정도 고백한 이라고 설명합니다. 완전한 회개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이전의 완강한 부인과는 다른 상태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기서 a certain confession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자기의 악을 고백했다고 단정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제한된 표현을 사용합니다. 또한 그 고백이 some internal pain’, 어떤 내적 고통에 의해 일어났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것을 곧바로 참된 회개나 거듭남의 시작이라고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가인은 자신이 처한 상태 때문에 내적으로 고통을 느꼈고, 그 고통 가운데 적어도 자기가 악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앞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와 비교하면 분명한 변화이지만, 아직 그 악에서 돌이켜 선을 향하는 완전한 회개라고 말할 단계는 아닙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이 자기 악 때문에 고통을 느낀다고 해서 그 고통이 언제나 악 자체를 미워하는 회개의 고통인 것은 아닙니다. 악의 결과가 두렵기 때문에 괴로울 수도 있고, 자기에게 닥친 손실이나 형벌 때문에 괴로울 수도 있으며, 자기 상태가 회복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절망할 수도 있습니다. 참된 회개에서는 때문에 내가 고통스럽다는 데서 더 나아가 이것이 주님을 거스르는 악이므로 이상 원하지 않는다는 방향 전환이 필요합니다. AC.383은 아직 가인에게 그 전체 과정이 일어났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의 고백이라는 제한된 표현이 적절합니다.

 

이어지는 죄악이 너무 커서 사함을 받을 없나이다그로 인한 절망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가인의 시선은 자신의 악을 인정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이것은 이상 제거될 수도, 용서될 수도 없다는 절망으로 내려갑니다. 악을 악으로 보는 것과 나는 악에서 결코 벗어날 없다고 믿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전자는 회개의 출발점이 될 수 있지만, 후자는 오히려 사람을 움직이지 못하게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악을 보지 않는 것도 위험하지만, 자기 악을 보고 주님의 자비보다 그것을 더 크게 여기는 것 역시 위험합니다.

 

이 점에서 AC.383은 앞의 AC.379-382와도 연결됩니다. 체어리티가 소멸되면서 주님과 사람을 연결하는 결속이 끊어지고,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결실하지 못하며, 결국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알지 못하여 피하며 유리하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그런 상태에 놓인 가인이 이제 자기 악의 결과를 느끼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체어리티와의 살아 있는 결합을 잃었기 때문에 그 인식은 곧바로 주님의 자비를 향한 신뢰로 나아가기보다 절망으로 기울어집니다. 악을 깨달았지만 그 악보다 크신 주님의 자비를 아직 바라보지 못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도 한 가지 균형이 필요합니다. AC.383절망을 모든 영적 절망에 대한 일반론으로 곧바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다른 곳에서는 거듭남 과정의 시험 가운데 사람이 자기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절실히 느끼는 상태도 다룹니다. 그러한 상태는 주님만을 의지하도록 이끄는 과정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가인의 문맥에서 말하는 절망은 체어리티를 소멸시키고 선과 진리의 방향을 잃은 결과로 나타나는 절망입니다. 따라서 다른 종류의 영적 고통이나 시험과 섞어 해석하기보다 우선 이 문맥 자체를 따라가는 것이 안전합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가인이 다시 여호와께말한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이후의 전개를 보기 위해 중요하게 남겨 둘 필요가 있습니다. 가인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고 악 가운데 있으며 절망한다고 해서 주님과의 모든 관계가 이야기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는 여호와께 자기 상태를 말하고 있으며, 이어지는 구절에서는 자신의 두려움을 호소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후에는 가인을 죽이지 못하도록 를 주시는 주님의 보존이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AC.383의 절망만을 보고 가인이 완전히 버림받았다고 결론짓는 것은 이후의 흐름과 맞지 않습니다.

 

이 점은 앞에서 살펴본 저주의 의미와도 연결됩니다. 저주는 주님께서 사람에게서 돌아서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악으로 말미암아 선에서 돌아서는 상태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돌아섰다고 해서 주님의 자비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여전히 그 사람의 보존과 궁극적인 선을 위해 역사하십니다. 가인의 절망은 죄악은 너무 커서 제거될 없다고 느끼지만, 이어지는 이야기는 인간의 절망이 주님의 섭리와 자비의 마지막 말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줄 준비를 합니다.

 

목회적으로도 이 구별은 중요합니다. 자기 안의 악을 발견하는 것은 거듭남에서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악을 발견하는 목적은 나는 이렇게 악하니 끝났다는 결론에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힘으로는 악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주님께 돌이키는 데 있습니다. 자신의 악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면서도 그 악을 주님의 구원 능력보다 더 크게 만들어서도 안 됩니다. 참된 겸손은 자기 악을 정확히 보면서 동시에 모든 선과 구원의 능력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 있습니다.

 

결국 AC.383은 가인의 내면에서 일어난 미묘하지만 중요한 변화를 보여 줍니다.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책임을 부인하던 상태에서 이제는 어떤 내적 고통 때문에 자기가 악 가운데 있음을 어느 정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인정은 아직 주님의 자비를 신뢰하는 회개로 나아가지 못하고 죄악이 너무 커서 사함을 받을 없다는 절망으로 기울어집니다. 악을 인정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절망이 마지막이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의 악보다 주님의 사랑과 자비가 크며, 이후 가인에게 주어지는 보존의 표는 바로 이 절망 뒤에서도 주님의 섭리가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 주게 됩니다.

 

 

 

AC.382, 창4:12, ‘피하며 유리하는 자란 누구인가? - 선과 진리를 알지 못하게 된 신앙’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창4:12) AC.382‘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가 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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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번 영상은 앞서 다루었던 202015일의 티혼 수도사 이야기와 상당 부분 겹칩니다. 다만 이번에는 티혼 수도사의 극단적 금욕생활뿐 아니라 그가 연결되어 소개되는 아토스의 이비론 수도원, 그곳의 공동생활과 식사 규칙, 기도와 금식, 그리고 강문호 수도사가 실제로 그곳에서 경험한 일들까지 함께 펼쳐집니다. 따라서 이번 글에서는 앞서 이미 살핀 ‘금욕과 거듭남’의 문제를 되풀이하기보다, 영상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과 하나 되는 ’, ‘외적 질서와 내적 질서’, 그리고 ‘거룩한 공동체란 무엇인가’에 조금 더 초점을 맞추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먼저 역사적으로 한 가지는 구별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영상에서는 1884년 러시아에서 태어난 티혼 수도사가 여러 수도원을 찾아다닌 끝에 이비론 수도원에 이르러 그곳에서 수도한 인물처럼 소개됩니다. 그러나 현재 확인되는 정교회 자료에서 티혼 골렌코프(1884-1968)는 아토스의 카프살라에서 살았던 러시아계 은수자로, 말년에는 스타브로니키타 수도원에 속한 성십자가 켈리에서 살았으며, 훗날 성 파이시오스의 영적 스승으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2026년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청이 그를 공식 성인 명부에 올렸습니다. 그러므로 티혼을 이비론 수도원이 ‘배출한 대표적 수도사’로 직접 연결하는 것은 역사적으로는 조금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Cloud of Witnesses) 이것은 영상의 영적 메시지를 무너뜨리는 문제가 아니라, 수도원과 인물의 실제 관계를 구별해 두자는 정도입니다.

 

영상의 티혼 수도사 묘사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극단적인 금욕입니다. 잠들지 않기 위해 목에 끈을 걸고 밤새 기도하고, 아주 적은 음식만 먹으며, 딱딱한 잠자리와 한 장의 담요로 겨울과 여름을 지낸 것으로 소개됩니다. 또한 ‘탐식은 모든 죄가 들어오는 현관문’이라는 생각 아래 배부름을 경계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전해지는 티혼의 생애에서도 극심한 가난과 지속적인 기도와 금욕은 중요한 특징으로 나타납니다. (Cloud of Witnesses) 이런 삶을 바라볼 때 우리는 먼저 그 진지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가까워지기를 갈망하여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고 기도에 생애를 바친 사람의 열망 자체를 가볍게 볼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언제나 여기서 한 걸음 더 안으로 들어갑니다. 적게 먹는 것이 곧 탐욕을 제거하는 것은 아니며, 딱딱한 침대에서 자는 것이 곧 proprium을 제거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은 하루에 열매 반쪽만 먹으면서도 자기 금욕을 자랑할 수 있고, 좋은 음식을 먹으면서도 감사와 절제 가운데 살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음식의 양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지배하는 사랑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은 육체를 가능한 한 괴롭히는 과정이 아니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악한 욕망이 주님의 질서 아래 놓이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외적 절제는 내적 거듭남을 돕는 좋은 도구가 될 수 있지만, 둘을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배부르면 음란해지고, 배부르면 교만해지고, 배부르면 자기 자랑을 하게 된다’는 영상의 설명도 이런 구별이 필요합니다. 과식과 탐식이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고 영적 집중력을 흐릴 수 있다는 수도 전통의 경험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죄의 근원이 음식이나 배부름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악의 뿌리는 인간의 proprium 안에서 주님과 이웃보다 자신을 사랑하려는 질서의 전도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탐식을 절제했는데도 사람을 지배하려 하고, 인정받기를 원하고, 자기 공로를 높이고, 타인을 업신여긴다면 근본적인 싸움은 아직 남아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음식에 대한 절제도 결국 이러한 내적 악과 싸우는 데 봉사할 때 영적 의미를 갖습니다.

 

티혼과 동물들의 관계를 전하는 부분은 따뜻합니다. 여우가 찾아오고, 멧돼지 새끼들을 보호하며, 사냥꾼에게 동물을 숨겨 주고, 심지어 곤충들에게 자신의 피를 먹게 했다는 성인전적 이야기까지 소개됩니다. 이런 세부를 모두 역사적으로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가 전달하려는 방향은 분명합니다. 수도자의 거룩함이 인간에게만 친절한 데서 끝나지 않고 피조물 전체에 대한 온유함으로 확장되었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론에서도 동물은 인간의 다양한 애정들을 표상합니다. 그렇다고 실제 여우나 멧돼지를 곧바로 특정 애정과 일대일 대응시킬 필요는 없지만, 인간 안의 거칠고 자연적인 것까지 주님의 질서 아래 평화롭게 놓이는 모습을 연상하게 하는 장면으로는 충분히 읽을 수 있습니다.

 

영상은 이런 혹독한 훈련 끝에 티혼이 ‘하나님과 합일의 단계’에 들어갔다고 말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중요한 구별을 하나 더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동일해지는 의미에서 ‘합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언제나 생명 자체이시고 인간은 그 생명을 받아 살아가는 유한한 피조물입니다. 인간이 주님과 가까워질수록 오히려 ‘ 안의 선은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임을 더욱 깊이 인정하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참된 결합은 ‘내가 어떤 높은 영적 단계에 올랐다’는 자기의식보다, 자신의 생명과 선이 전적으로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점점 더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상태에 가깝습니다.

 

영상 중간의 우물 이야기에서도 같은 원칙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가뭄으로 우물이 말랐을 때 성자의 초상화를 우물에 넣고 수도자들이 기도하자 물이 차올라 초상화가 떠올랐다는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그리고 강문호 수도사는 ‘기도는 응답이다. 기도는 되는 것을 되게 하고,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고, 닫힌 문을 연다’는 취지로 강조합니다. 이 이야기는 수도원 전승으로 받아들이면 충분하겠습니다. 그러나 기도의 본질을 ‘내가 바라는 불가능한 일을 하나님이 이루어 주시는 능력’으로만 이해하면 기도가 어느새 인간의 뜻을 관철하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참된 기도는 주님의 뜻을 내 뜻에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내 뜻이 주님의 섭리와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응답이 내가 요구한 형태로 오지 않을 때에도 주님을 신뢰할 수 있는가가 오히려 더 깊은 기도의 시험일 수 있습니다.

 

이번 영상에서 매우 흥미로운 부분은 이비론 수도원의 공동 식사입니다. 원장이 먹기 시작하면 모두 함께 먹고, 원장이 수저를 놓으면 아직 다 먹지 못했어도 모두 수저를 놓으며, 식사 중에는 한 사람이 성경을 읽어 육신의 양식과 영의 양식을 함께 취한다는 설명입니다. 여기에 담긴 질서와 절제는 충분히 인상적입니다. 그러나 ‘수도원장이 모든 것의 표준’이라는 표현은 영적으로 조금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공동체의 운영에는 외적 질서가 필요하고 수도자는 자발적으로 그 질서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양심과 진리의 최종 기준은 인간 지도자가 아니라 주님과 말씀입니다. 인간 지도자에게 대한 순종이 주님께 대한 순종을 돕는 수단이라면 좋은 질서가 되지만, 지도자의 의지가 곧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한다면 외적 순종이 내적 자유를 침범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수도원 밖의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은 강제로 거듭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와 이성을 보존하시면서 그가 선과 진리를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도록 이끄십니다. 따라서 가장 깊은 순명은 ‘ 인간이 시키는 대로 하는 ’이 아니라, 자기 의지를 내려놓고 주님의 선과 진리에 기꺼이 순종하는 것입니다. 외적 규율이 그것을 훈련해 줄 수는 있지만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원장이 숟가락을 놓았기 때문에 나도 숟가락을 놓는 훈련보다 더 깊은 것은, 내 욕망이 ‘조금 먹고 싶다’, ‘ 뜻대로 하고 싶다’, ‘나는 예외이고 싶다’고 말할 때 그것을 주님의 질서 아래 놓는 내적 순종입니다.

 

강문호 수도사가 만난 일본 수도사가 ‘한국에서 수도사가 없다. 한국과 아토스의 고리를 만들어 달라’며 자신을 붙들었다는 일화도 흥미롭습니다. 여기에는 ‘한국에도 이런 수도 영성이 생겼으면 좋겠다’는 강문호 수도사의 오랜 열망이 드러납니다. 영상 마지막에도 ‘우리나라에도 이런 교회 수도사들이 많이 배출되어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났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이 소망 자체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현대교회가 활동, 성장, 재정, 조직, 프로그램에 치우칠 때 기도와 절제와 하나님 중심의 삶을 회복하자는 요청은 귀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수도사가 많이 배출되는 ’과 ‘거듭난 사람이 많아지는 ’을 같은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수도복을 입은 사람의 수가 많아져도 자기 사랑과 공로의식과 지배욕이 그대로라면 천국이 가까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수도사라는 이름을 한 번도 가져 본 적 없는 사람이 가정과 직장과 교회에서 자신의 악을 죄로 알고 피하며,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정직한 쓰임을 행한다면 그는 실질적으로 천국의 질서를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수도 영성을 바라보면서 계속 외적 형식과 내적 상태를 구별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영상 마지막의 ‘하나님하고 가까이하는 사람들이 많으면 사막이 도시가 된다’, ‘아름다운 사람들이 살기 때문에 그곳이 아름답다’는 취지의 말은 상당히 좋습니다. 다만 ‘아름다운 사람’의 기준을 다시 주님께 돌려놓으면 훨씬 깊어집니다. 사람 자체가 스스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이 삶으로 흘러나올 때 그 사람을 통해 천국의 아름다움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묘사하는 천국의 아름다움도 천사들이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그들 안에 있는 주님의 사랑과 지혜가 외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 점에서 이번 영상은 앞서 살핀 티혼 수도사 이야기보다 조금 더 넓은 질문을 우리에게 남깁니다. ‘거룩한 수도자가 되는 ’보다 ‘거룩한 공동체가 어떻게 형성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극단적인 금식, 긴 기도, 엄격한 규칙, 침묵, 수도원장의 권위가 공동체를 특별하게 보이게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적 공동체의 진정한 표지는 구성원들이 얼마나 서로 사랑하며, 상대의 자유를 존중하고, 자신의 공을 내려놓으며, 각자의 쓰임을 통해 전체의 선을 섬기는가에 있습니다. 외적 질서가 이러한 내적 질서를 보호한다면 매우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외적 질서 자체가 거룩함의 증표가 되는 순간 수도원 역시 세상의 다른 조직과 크게 다르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이번 영상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가장 주의 깊게 바라보게 되는 문장은 어쩌면 ‘지독한 훈련 끝에 드디어 하나님과 합일의 단계에 들어갔다’는 표현일 것입니다. 인간의 거듭남은 ‘지독하게 하면 도달하는 영적 고지’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자신의 악과 거짓을 인식하고 그것을 주님 앞에서 버리며, 주님께서 우리 안에 새 의지와 새 이해를 형성하시도록 허용하는 평생의 과정입니다. 인간이 노력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의 노력 자체를 구원의 원인으로 만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가장 깊이 거듭난 사람일수록 ‘내가 여기까지 올라왔다’보다 ‘주님께서 나를 여기까지 이끄셨다’고 말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티혼의 극단적 금욕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이 이 영상에서 우리가 취할 결론일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의 삶에서 받아들일 것은 ‘하나님을 무엇보다 우선하고 싶었던 갈망’, ‘욕망에 끌려다니지 않으려 했던 절제’, ‘기도를 삶의 중심에 두려 했던 태도’, ‘피조물에게까지 미친 온유함’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오늘 우리의 형편 속에서 더 내적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음식을 조금 덜 먹는 것보다 탐욕을 덜 먹이고, 말을 조금 덜 하는 것보다 자기 자랑을 덜 말하며, 세상을 떠나 동굴로 들어가는 것보다 자기 안의 proprium을 발견하고 주님께 맡기는 것이 더 깊은 수도가 될 수 있습니다.

 

결국 아토스의 숲과 수도원이 ‘천국 같은 ’인 이유가 있다면 건물이나 금식 규칙이나 수도복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 그것을 서로를 향한 사랑과 쓰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곳에 천국의 어떤 것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천국은 아토스에만 세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의 식탁에서도, 작은 교회에서도, 직장에서도, 병실에서도 주님의 질서가 인간의 의지와 생각 속에 받아들여지면 천국의 어떤 것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수도원의 외적 아름다움을 지나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바라보게 하는 더 깊은 수도원, 곧 인간 안에 주님께서 세우시는 내적 질서일 것입니다.

 

 

 

SY.96, 강문호 수도사, ‘바늘로 천국을 만들었다’ (20260901)

※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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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4:12)

 

AC.382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 된다는 것이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알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에서 유리하는 (wandering) 피하여 달아나는 (fleeing away) 의미로부터 분명합니다. 예레미야애가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That to be a 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 signifies not to know what is good and true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wandering and fleeing away in the Word. As in Jeremiah:

 

13그의 선지자들 죄들과 제사장들 죄악들 때문이니 그들이 성읍 안에서 의인들의 피를 흘렸도다 14그들이 거리 거리에서 맹인 같이 방황함이여 그들의 옷들이 피에 더러워졌으므로 그들이 만질 없도다 (4:13, 14) The prophets and priests wander blind in the streets, they have been polluted in blood; the things they cannot do they touch with garments, (Lam. 4:1314)

 

여기서 선지자들(prophets) 가르치는 자들을, 제사장들(priests) 그에 따라 사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거리에서 맹인 같이 방황하는 (wander blind in the streets) 무엇이 진리고 선인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where prophets are those who teach, and priests, those who live accordingly; to wander blind in the streets is not to know what is true and good.

 

[2] 아모스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In Amos:

 

7어떤 성읍에는 내리고 어떤 성읍에는 내리지 않게 하였더니 부분은 비를 얻고 부분은 비를 얻지 못하여 말랐으매 8 성읍 사람이 어떤 성읍으로 비틀거리며 물을 마시러 가서 만족하게 마시지 못하였으나 (4:7, 8) A part of the field was rained upon, and the part of the field whereupon it rained not withered; so two or three cities shall wander unto one city to drink waters, and shall not be satisfied, (Amos 4:78)

 

여기서 비가 내린 밭의 부분(part of the field on which it rained)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신앙의 교리를 의미하고, 비가 내리지 않은 밭의 부분(part or piece of the field on which it did not rain) 체어리티 없는 신앙의 교리를 의미합니다. 물을 마시려고 유리하는 (wander to drink the waters) 역시 진리를 찾는 것을 의미합니다. where by the part of the field on which it rained is signified the doctrine of faith from charity; and by the part or piece of the field on which it did not rain, the doctrine of faith without charity. To wander to drink the waters likewise denotes to seek after truth.

 

[3] 호세아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In Hosea:

 

16에브라임은 매를 맞아 뿌리가 말라 열매를 맺지 못하나니 비록 아이를 낳을지라도 내가 사랑하는 태의 열매를 죽이리라 17그들이 듣지 아니하므로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시리니 그들이 여러 나라 가운데에 떠도는 자가 되리라 (9:16, 17) Ephraim is smitten, their root is dried up, they shall bear no fruit; my God will cast them away, because they did not hearken unto him; and they shall be wanderers among the nations. (Hos. 9:16, 17)

 

여기서 에브라임(Ephraim) 진리에 대한 이해, 신앙을 의미하는데, 이는 그가 요셉의 장자였기 때문입니다. 말라 버린 뿌리(root which was dried up) 열매를 맺을 없는 체어리티를 의미하고,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떠도는 자들(wanderers among the nations) 무엇이 진리고 선인지 알지 못하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Ephraim here denotes the understanding of truth, or faith, because he was the firstborn of Joseph; the root which was dried up denotes charity that cannot bear fruit; wanderers among the nations are those who do not know what is true and good.

 

[4] 예레미야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In Jeremiah:

 

28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게 공격을 받은 게달과 하솔 나라들에 대한 말씀이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일어나 게달로 올라가서 동방 자손들을 황폐하게 하라, 30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솔 주민아 도망하라 멀리 가서 깊은 곳에 살라 이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너를 모략과 너를 계책을 세웠음이라 (49:28, 30) Go ye up against Arabia, and devastate the sons of the east. Flee, wander ye exceedingly; the inhabitants of Hazor have let themselves down into the deep for a habitation. (Jer. 49:28, 30)

 

아라비아(Arabia) 동방의 아들들(sons of the east) 천적인 부요함, 사랑에 속한 것들을 소유함을 의미합니다. 이것들이 황폐해질 그들은 피하고(flee) 유리한다(wander), 선한 것을 전혀 행하지 않을 피하며 유리하는 자들(fugitives and wanderers) 된다고 말합니다. 하솔 주민들(inhabitants of Hazor), 영적인 부요함인 신앙에 속한 것들을 소유한 자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깊은 곳으로 내려간다(let themselves down into the deep) 하는데, 이는 그들이 멸망한다는 뜻입니다. “Arabia and the sons of the east, signify the possession of celestial riches, or of the things that are of love, which, when vastated, are said to flee, and wander, that is, to be fugitives and wanderers, when they do nought of what is good. Of the inhabitants of Hazor, or those who possess spiritual riches, which are those of faith, it is said that they let themselves down into the deep, that is, they perish.

 

[5] 이사야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In Isaiah:

 

너의 관원들도 함께 도망하였다가 활을 버리고 결박을 당하였고 너의 멀리 도망한 자들도 발견되어 함께 결박을 당하였도다 (22:3) All thy foremost ones wander together, they are bound before the bow, they have fled from far, (Isa. 22:3)

 

이는 환상의 골짜기(valley of vision), 체어리티 없는 신앙이 가능하다는 환상을 두고 말입니다. 이로부터 뒤의 절에서 그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을 고백하는 자를 피하며 유리하는 (fugitive and a wanderer), 선과 진리에 관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자라고 말한 이유가 분명해집니다. speaking of the valley of vision, or the fantasy that faith is possible without charity. Hence appears the reason why it is said, in a subsequent verse (Isa. 22:14), that he who professes faith that is apart from charity is a fugitive and a wanderer, that is, knows nothing of good and truth.

 

만군의 여호와께서 친히 귀에 들려 이르시되 진실로 죄악은 너희가 죽기까지 용서하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2:14)

 

해설

AC.382AC.380에서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알지 못하는 을 의미한다고 한 해석을 말씀의 여러 구절을 통해 확증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유리한다는 것을 단순히 장소를 옮겨 다니는 것으로 읽지 않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예레미야애가, 아모스, 호세아, 예레미야, 이사야를 차례로 인용하면서 말씀에서 유리함피하여 달아남이 영적으로 방향을 잃은 상태, 특히 선과 진리를 알지 못하는 상태를 나타낸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인용은 가인의 문제, 곧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결과와 연결됩니다.

 

첫 번째 인용인 애4:13-14에서는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이 거리에서 맹인 같이 방황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선지자들을 가르치는 자들로, ‘제사장들을 그 가르침에 따라 사는 자들로 해석합니다. 따라서 가르침과 삶을 대표하는 두 부류가 모두 맹인처럼 거리를 방황한다는 것은 단순히 길을 잃었다는 뜻이 아니라 무엇이 진리이고 선인지 알지 못하게 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거리는 사람들이 오가는 길인데, 영적으로 방향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그 거리에서 방황한다는 이미지는 진리와 선을 분별하지 못하는 상태를 매우 생생하게 보여 줍니다. 이것이 가인이 유리하는 가 된다는 말과 연결됩니다.

 

두 번째 암4:7-8은 이번 번호에서 특히 중요합니다. 한 밭에는 비가 내리고 다른 밭에는 비가 내리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비가 내린 밭을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신앙의 교리, 비가 내리지 않은 밭을 체어리티 없는 신앙의 교리로 해석합니다. 여기서 두 종류의 신앙이 아주 선명하게 대비됩니다. 하나는 체어리티에서 생명을 받는 신앙이고, 다른 하나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입니다. 후자는 비를 받지 못한 밭처럼 말라 버립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물을 마시려고 이 성읍 저 성읍으로 유리하지만 만족하지 못합니다. 물은 여기서 그들이 찾고 있는 진리와 연결됩니다. 즉 체어리티를 잃은 신앙은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실제로는 계속 진리를 찾아 헤매며 만족하지 못하는 상태에 이릅니다.

 

이것은 AC.379-381의 흐름을 그대로 이어 줍니다. AC.379에서는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 단지 지식이라고 했고, AC.380에서는 그런 신앙이 결국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알지 못하게 된다고 했으며, AC.381에서는 그 땅이 결실하지 못하는 이유가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참된 신앙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암4장의 물을 마시려고 유리하지만 만족하지 못하는사람들은 그 상태를 하나의 이미지로 보여 줍니다. 체어리티와 결합되지 않은 신앙은 지식을 계속 더할 수는 있어도 그 지식이 생명으로 이어지지 않으므로 참된 영적 만족에 이르지 못합니다.

 

세 번째 호9:16-17에서는 에브라임이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에브라임을 진리에 대한 이해, 신앙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뿌리가 말라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을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체어리티와 연결합니다. 이것은 앞의 땅이 효력을 내지 않는다는 설명과 거의 같은 구조입니다. 뿌리가 마르면 나무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에서 체어리티라는 생명이 사라지면 신앙도 영적인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 결과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떠도는 가 됩니다. 다시 말해 신앙은 남아 있다고 주장하지만 무엇이 진리고 선인지 알지 못하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네 번째 렘49장의 아라비아동방의 아들들은 조금 더 깊은 층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들을 천적인 부요함’, 곧 사랑에 속한 것들을 소유한 상태와 연결합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황폐해지면 피하고 유리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를 선한 것을 전혀 행하지 않는 과 연결합니다. 이것은 선과 진리를 알지 못한다는 상태가 단순한 지적 혼란이 아니라 삶의 선이 사라진 상태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선을 행하는 삶과 분리된 신앙은 결국 무엇이 선인지도 제대로 알 수 없게 됩니다. ‘하솔 주민들이 가진 영적인 부요함, 곧 신앙에 속한 것들 역시 결국 깊은 곳으로 내려간다’, 즉 멸망하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영적 지식은 스스로 생명을 보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사22장의 환상의 골짜기는 이 모든 설명을 가인의 핵심 문제에 직접 연결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체어리티 없는 신앙이 가능하다는 환상이라고 규정합니다. 여기서 fantasy라는 말이 매우 강합니다.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떼어 놓고도 그것이 여전히 살아 있는 신앙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영적인 환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가인의 교리가 걸어온 길입니다. 신앙을 체어리티와 구별하는 데서 시작하여 둘을 분리하고, 신앙을 체어리티 위에 놓으며,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 신앙이 더 순수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알지 못하는 피하며 유리하는상태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역설이 드러납니다. 가인은 신앙을 지키려다가 신앙의 방향을 잃었습니다. 체어리티를 제거하면 진리만 더욱 순수하게 남을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진리를 분별할 능력까지 잃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선을 향하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를 알려 주는 것은 선이며, 신앙에 생명을 주는 것은 체어리티입니다. 목적을 잃은 진리는 지식으로는 남아 있을 수 있지만 살아 있는 진리로 기능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물을 찾아 이리저리 다니면서도 만족하지 못하고, 길을 걷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됩니다.

 

그렇다고 체어리티가 있으면 교리적 진리를 몰라도 된다는 반대 극단으로 가서도 안 됩니다. AC.382의 결론은 진리를 버리고 선만 붙들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선과 진리가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체어리티는 진리를 필요로 합니다. 무엇이 실제로 이웃에게 선한 것인지 분별하려면 진리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진리는 체어리티를 필요로 합니다. 진리가 무엇을 위해 사용되어야 하는지를 체어리티가 그 방향으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가인의 문제는 이 둘을 구별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분리한 데 있었습니다.

 

이번 번호의 여러 성경 인용을 하나씩 별개의 교리로 떼어 읽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다섯 인용을 가져온 목적은 하나입니다. 말씀에서 방황하고’, ‘유리하고’, ‘피하여 달아나는이미지들이 영적인 방향 상실과 연결되며, 그 방향 상실은 선과 진리를 알지 못하는 상태라는 것을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애가에서는 맹인처럼 방황하고, 아모스에서는 물을 찾아 유리하며, 호세아에서는 열매 없는 에브라임이 여러 나라 가운데 떠돌고, 예레미야에서는 사랑과 신앙의 부요함을 잃은 자들이 피하고 유리하며, 이사야에서는 체어리티 없는 신앙이라는 환상속에서 사람들이 도망합니다. 서로 다른 장면이지만 모두 하나의 영적 상태를 비춥니다.

 

따라서 창4:12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는 것은 단순히 가인에게 내려진 외적인 유랑 형벌이 아닙니다. 속뜻에서는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신앙이 결국 자기 안에서 선과 진리의 방향을 잃게 되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가인의 교리가 맞이한 가장 깊은 비극 가운데 하나입니다. 신앙만을 높이려 했는데 결국 신앙 자체가 무엇이 참인지 알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를 버릴 때 순수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체어리티와 결합될 때 비로소 살아 있으며 선과 진리를 분별하는 올바른 방향을 얻게 됩니다.

 

 

 

AC.383, 창4:13,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 악을 인정하게 한 내적 고통과 절망’ (AC.3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And Cain said unto Jehovah, Mine iniquity is greater than can be taken away. (창4:13) AC.383‘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Cain said unto Jehovah)는 어떤 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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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1, 창4:12,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왜 결실이 없는가?’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창4:12) AC.381‘땅을 가는 것’(till the ground)이 이 분열 또는 이단을 배양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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