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BU.007 | 불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팔정도에 있다’ - 도성제의 바른 삶과 주님에게서 오는 거듭남

 

해설

인간은 누구나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지만, 고통의 원인을 안다고 해서 저절로 그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욕망과 집착이 괴로움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깨달아도, 막상 욕망을 내려놓거나 오래된 습관을 바꾸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불교는 바로 이 문제에 대하여 구체적인 실천의 길을 제시합니다. 그것이 ‘팔정도’(八正道, ariya aṭṭhaṅgika magga), 곧 여덟 가지 바른 수행의 요소로 이루어진 길입니다. 팔정도는 불교의 근본 교리인 ‘사성제’(四聖諦, cattāri ariyasaccāni) 가운데 네 번째인 ‘도성제’(道聖諦, magga-sacca)의 핵심입니다. 사성제는 인간의 고통을 밝히는 고성제, 고통의 원인을 설명하는 집성제, 고통의 소멸 가능성을 가르치는 멸성제, 그리고 그 소멸에 이르는 실천의 길인 도성제로 이루어집니다. 여기서 불교가 말하는 ‘고’(苦, dukkha)는 단순한 육체적 통증이나 일시적인 슬픔을 넘어, 조건에 의존하는 삶이 영원하고 완전한 만족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근본적인 불만족까지 포함합니다. 또한 ‘열반’(涅槃, nibbāna)은 고통과 ‘윤회’(輪廻, saṃsāra)를 지속시키는 ‘갈애’(渴愛, taṇhā)와 ‘무명’(無明, avijjā)이 소멸한 해탈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팔정도는 단순히 마음을 편안하게 하거나 사회적으로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한 생활 수칙이 아닙니다. 불교가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로 이해하는 고통과 윤회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행의 길입니다.

 

초기불교의 ‘상윳따 니까야’(相應部, Saṃyutta Nikāya) 56.11에 수록된 ‘초전법륜경’(初轉法輪經, Dhammacakkappavattana Sutta)은 팔정도를 ‘중도’(中道, majjhimā paṭipadā), 곧 감각적 쾌락에 빠지는 삶과 자신의 몸을 지나치게 괴롭히는 고행이라는 두 극단을 벗어나는 길로 설명합니다. 그 여덟 요소는 ‘정견’(正見, sammā-diṭṭhi), 곧 사성제와 행위의 결과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 ‘정사유’(正思惟, sammā-saṅkappa), 곧 탐욕과 악의와 해치려는 마음에서 벗어난 바른 의도를 품는 것, ‘정어’(正語, sammā-vācā), 곧 거짓말과 이간질, 거친 말과 무익한 말을 삼가는 것, ‘정업’(正業, sammā-kammanta), 곧 살생과 도둑질과 잘못된 성적 행위를 멀리하는 것, ‘정명’(正命, sammā-ājīva), 곧 다른 생명에게 해를 끼치거나 부정한 방법으로 살아가지 않는 바른 생계, ‘정정진’(正精進, sammā-vāyāma), 곧 해로운 마음의 상태를 막고 버리며 선한 상태를 일으키고 유지하려는 노력, ‘정념’(正念, sammā-sati), 곧 몸과 느낌과 마음과 법을 바르게 알아차리며 살피는 것, 그리고 ‘정정’(正定, sammā-samādhi), 곧 마음을 바르게 집중하여 선정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여덟 요소는 서로 무관한 규칙들이 아니라, 바른 이해와 의도가 언어와 행동과 생계를 이끌고, 바른 노력과 알아차림과 집중이 지혜를 깊게 하는 하나의 수행 체계를 이룹니다.

 

팔정도의 구조를 더욱 정확히 이해하려면 불교에서 말하는 ‘삼학’(三學, tisso sikkhā), 곧 계율·선정·지혜의 세 가지 훈련을 살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정견과 정사유는 지혜에, 정어와 정업과 정명은 계율에, 정정진과 정념과 정정은 선정에 속하는 수행으로 정리합니다. 이는 올바른 생각만으로 깨달음에 이르는 것도 아니고, 외적인 행동만 바르게 하면 충분한 것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의도가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 살피면서 말과 행동을 바꾸고, 마음을 훈련하여 현실을 더욱 깊이 통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맛지마 니까야’(中部, Majjhima Nikāya) 117번의 ‘대사십경’(Mahācattārīsaka Sutta)은 정견을 다른 수행 요소에 앞서는 중요한 요소로 설명하면서, 정정진과 정념이 바른 견해와 의도를 확립하는 데 함께 작용한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정념은 아무런 판단 없이 순간의 느낌을 관찰하는 일로만 축소할 수 없으며, 정정 역시 단순한 휴식이나 심리적 안정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초기불교에서 이들은 해로운 상태를 버리고 바른 수행을 성숙시키며, 궁극적으로 고통을 소멸시키는 해탈의 길과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팔정도를 현대적인 스트레스 관리 방법이나 일반적인 도덕 교육으로만 이해한다면 불교가 본래 제시한 종교적 목적을 놓치게 됩니다.

 

이러한 팔정도에는 말씀의 관점에서도 진지하게 살펴볼 만한 윤리적 통찰이 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높은 진리를 말하더라도 거짓말을 일삼고 다른 사람을 해치며 부정한 방법으로 살아간다면, 그가 알고 있다는 진리가 실제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물어야 합니다. 팔정도는 지식과 행동을 분리하지 않고, 바른 이해가 바른 말과 행동과 생계로 이어져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특히 정어와 정업과 정명은 인간의 도덕적 책임이 종교 의례나 명상 시간에만 국한되지 않고 일상생활 전체에 미친다는 사실을 일깨웁니다. 예수께서도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눅6:46)고 말씀하셨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새 예루살렘을 위한 삶의 교리’(Doctrine of Life for the New Jerusalem, Life, 1763) 1번에서 모든 종교는 삶에 관계되며 종교적인 삶은 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종교적인 삶은 특정한 신앙 지식을 소유하거나 교리를 정확하게 암송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자신이 진리라고 인정하는 것을 실제 의지와 행동으로 옮기는 삶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팔정도가 언어와 행위와 생계에 이르기까지 바른 실천을 강조하는 것은 귀중한 통찰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외적인 유사성이 불교의 팔정도와 말씀에서 가르치는 거듭남을 동일한 것으로 만든다는 뜻은 아닙니다. 두 전통이 바른 삶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해서 바름의 궁극적인 기준과 근원, 그리고 그 삶이 향하는 목적까지 같아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차이를 이해하려면 선한 행동의 외형과 내적 동기를 구별해야 합니다. 사람은 정직하게 말하면서도 자기의 평판을 높이려 할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면서도 그 대가로 인정과 존경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행동을 하면서도 자신의 공로를 앞세우지 않고 진실로 상대방의 유익을 바랄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329번에서 십계명의 금지 명령들이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에 어떻게 관계되는지 설명합니다. 사람은 살인과 도둑질, 간음과 거짓 증언 같은 악을 멀리해야 하며, 특히 그것들을 주님과 신적 질서에 반대되는 죄로 여겨 멀리할 때 사랑과 체어리티의 선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체어리티’(charity)는 단순한 자선이나 구제 활동이 아니라, 이웃의 참된 유익을 바라고 그 유익을 실제로 이루려는 사랑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악을 멀리하는 이유까지 중요하게 다룬다는 점에서 팔정도의 윤리와 비교할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도 바른 행동의 의도와 동기를 중요하게 여기며,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는 것을 수행의 핵심으로 삼습니다. 따라서 불교는 외적인 행동만 바르게 하면 충분하다고 가르치고 기독교만 내면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대조해서는 안 됩니다. 보다 근본적인 차이는 불교가 바른 행위와 수행을 갈애와 무명의 소멸 및 해탈의 길에서 이해하는 반면, 새 교회의 교리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분과 결합하는 거듭남의 질서에서 이해한다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 DP, 1764) 100번에서 설명한 원리는 이러한 차이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인간은 겉 사람의 악을 죄로 여겨 마치 자기 힘으로 멀리하는 것처럼 행동해야 하며, 그럴 때 주님께서 속 사람의 악을 제거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겉 사람’(external man)은 인간의 자연적 생각과 행동의 차원을, ‘속 사람’(internal man)은 그의 영적 내면을 가리킵니다. 또한 ‘거듭남’(regeneration)이란 단순히 행동 습관을 개선하거나 자기 통제 능력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인간의 사랑과 의지가 새로워지는 과정을 뜻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잘못을 살피고 악에 맞서 싸우며 선을 선택해야 하지만, 그 과정에서 참된 선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려서는 안 됩니다. 모든 참된 선과 진리의 근원은 주님이시며, 인간은 그것을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존재입니다. 이 점에서 불교의 정정진과 기독교의 거듭남은 모두 인간의 능동적인 참여를 중요하게 여긴다는 점에서 비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의 팔정도를 단순히 인간이 자기 힘만으로 자신을 구원하려는 시도라고 규정하는 것도 정확하지 않습니다. 불교 역시 바른 가르침과 스승, 수행 공동체와 여러 조건의 중요성을 인정하며, 대승불교의 일부 전통에서는 부처와 보살의 도움을 강조합니다. 다만 그것이 곧 주님을 생명 자체이시며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으로 인정하는 새 교회의 교리와 같다는 뜻은 아닙니다.

 

또한 팔정도의 여덟 요소를 모두 갖추었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구별해야 합니다. 불교에서 정견은 일반적인 상식이나 모든 종교가 공유하는 보편적인 도덕 관념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사성제와 ‘업’(業, kamma), 곧 의도적인 행위와 그 결과, 무상과 무아, 고통의 발생과 소멸에 관한 불교 특유의 세계 이해와 연결됩니다. 마찬가지로 정념과 정정은 단순히 마음을 차분하게 유지하는 기술이 아니라, 고통의 근본 원인을 통찰하고 해탈에 이르기 위한 수행입니다. 그러므로 팔정도의 각 요소를 기독교의 덕목과 하나씩 대응시키면서 정견은 올바른 성경 지식, 정어는 거짓말하지 않기, 정정은 기도와 같은 식으로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외적인 기능이 비슷해 보여도 그 안에서 이해하는 인간의 본질과 궁극적인 목적은 서로 다릅니다. 스베덴보리의 ‘삶의 교리’ 65번은 여러 나라와 종교의 사람들에게도 십계명과 유사한 도덕적 규범이 있으며, 자신이 믿는 종교에 따라 그러한 계명을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이 열려 있음을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종교의 교리가 동일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각 사람의 종교적 환경과 그가 받아들일 수 있는 진리 안에서 그를 인도하신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따라서 불교인이 팔정도를 실천하며 진실로 악을 멀리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할 때 그 선의 가치를 부정해서는 안 되지만, 그 행위의 외형만으로 그의 내적인 영적 상태나 영원한 운명까지 확정해서도 안 됩니다.

 

결국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팔정도에 있다’라는 명제는 불교의 도성제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가르침입니다. 팔정도는 바른 견해와 의도, 말과 행동, 생계와 노력, 알아차림과 집중을 통하여 인간의 삶 전체를 변화시키려는 수행의 길입니다. 그 안에는 진리를 아는 것과 진리에 따라 살아가는 것을 분리하지 않고, 인간의 욕망과 행동을 실제로 돌아보게 하는 귀중한 통찰이 있습니다. 특히 종교적 지식이나 의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바른 삶의 실천이 필요하다는 가르침은 기독교인에게도 중요한 성찰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불교의 팔정도와 말씀에서 가르치는 거듭남은 동일한 길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는 팔정도를 통하여 갈애와 무명을 소멸하고 윤회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해탈을 지향하지만, 새 교회의 교리는 인간이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하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그분과 결합하는 천국의 삶을 지향합니다. 따라서 두 전통의 차이는 한쪽은 실천을 중요하게 여기고 다른 한쪽은 믿음만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무엇을 바른 삶의 기준으로 삼으며, 그 삶을 가능하게 하는 생명의 근원을 어디에서 찾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말씀의 빛에서 참된 길은 단순히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행동하는 방법을 아는 데 머무르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14:6)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 길의 궁극적인 근원은 주님 자신이십니다. 인간은 주님에게서 받은 진리를 삶으로 실천해야 하며, 자신의 힘으로 선을 이루었다고 여기지 않고 그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왔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럴 때 바른 삶은 외적인 도덕적 성취를 넘어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깊어지며, 진리를 아는 삶과 선을 행하는 삶이 하나를 이루게 됩니다. (BU.007 해설)

 

요약

팔정도는 불교의 도성제를 이루는 핵심 수행의 길로서, 바른 이해와 의도, 언어와 행동, 생계와 노력, 알아차림과 집중을 통하여 고통과 윤회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을 지향합니다. 특히 지식과 행동을 분리하지 않고 삶 전체의 변화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귀중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팔정도를 단순한 도덕 수칙이나 심리적 안정의 방법으로 축소해서는 안 되며, 불교의 해탈과 말씀에서 말하는 거듭남을 동일시해서도 안 됩니다. 새 교회의 교리에 따르면 인간은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하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임으로써 거듭납니다. 그러므로 팔정도의 윤리적 통찰을 인정하되, 참된 선의 궁극적인 근원은 인간의 수행 자체가 아니라 주님이시며, 영적 삶의 목적은 그분과 결합하여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을 이루는 데 있음을 구별해야 합니다.

 

 

 

BU.006 ‘갈애와 집착을 소멸하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SL.BU.006 | 불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갈애와 집착을 소멸하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 멸성제의 해탈과 주님에게서 오는 참된 자유 해설인간은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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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IS.007 | 이슬람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참된 신앙의 중요한 기초다’ - 두려움과 사랑의 영적 질서

 

해설

이슬람에서 하나님을 경외(敬畏, reverence)하는 마음은 참된 신앙을 이루는 중요한 기초입니다. 이러한 경외와 깊이 연결되는 아랍어 개념이 ‘타크와’(taqwa)입니다. 타크와는 흔히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번역되지만, 단순히 형벌을 무서워하는 감정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의식하고 그분의 명령을 존중하며, 악을 경계하고 올바르게 살아가려는 경건함과 도덕적 책임까지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꾸란 3:102는 하나님을 마땅히 경외해야 한다고 가르치며, 49:13은 하나님 앞에서 가장 존귀한 사람이 가장 경건한 사람이라고 선언합니다. 특히 꾸란 2:177은 참된 의로움이 단순히 예배의 방향을 지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가난한 사람을 도우며 약속을 지키고 어려움 가운데 인내하는 삶과 관련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이슬람의 경외를 단순히 하나님의 형벌을 두려워하는 신앙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 안에는 하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자신의 욕망과 행동을 돌아보며, 선한 삶을 추구해야 한다는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서 한 가지 더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이 두려워서 그분을 거스르지 않는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의 뜻에 어긋나는 일을 피하는 것입니까?

 

성경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신앙의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잠1:7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선언하며, 잠8:13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또한 시111:10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경외는 하나님 앞에서 공포에 사로잡혀 판단과 의지를 잃어버리는 상태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이심을 인정하고, 그분의 거룩하심을 존중하며, 그분께 어긋나는 악을 멀리하는 태도입니다. 성경은 한편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가르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요일4:18은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라고 선언합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두려움의 성격을 구별하면 그 의미가 드러납니다. 형벌을 당할까 두려워하는 마음과 사랑하는 분을 거스르거나 그분에게서 받은 선을 해칠까 염려하는 마음은 같지 않습니다. 전자는 자기 자신이 당할 손해와 고통에 중심을 두지만, 후자는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과 그 사랑의 관계를 소중히 여깁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AC, 1749–1756) 3718항에서 두려움을 크게 두 종류로 구별합니다. 하나는 거룩하지 않은 두려움이고, 다른 하나는 거룩한 두려움(holy fear)입니다. 전자는 악인에게서 나타나는 두려움으로서 형벌이나 명예와 재산의 상실, 자신의 이익이 손상되는 일을 염려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반면 후자는 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두려움으로서 주님과 이웃에게 해를 끼치거나, 선과 진리를 손상시키는 일을 염려하는 마음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거룩한 두려움을 사랑에서 비롯되는 경외라고 설명합니다. 더 나아가 사랑에 거룩한 경외가 전혀 없다면 마치 소금이 빠진 음식처럼 그 사랑에 중요한 무엇이 결여된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경외는 사랑의 반대가 아니라 사랑 안에 있는 거룩한 조심스러움입니다. 사랑이 깊어질수록 상대를 잃을까 두려워하는 자기중심적인 불안은 줄어들지만, 그 사랑을 해치지 않으려는 마음은 오히려 깊어집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참된 경외의 본질은 형벌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사랑을 보호하려는 마음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같은 저작 5459항에서 예배의 상태에 따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의 성격도 달라진다고 설명합니다. 내적 예배가 없는 외적 예배에서는 두려움이 중심이 될 수 있지만, 영적 예배에서는 사랑과 거룩한 두려움이 함께하며, 천적 예배에서는 사랑과 거룩한 경외가 더욱 깊이 결합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단순히 두려움에서 사랑으로 교체된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이 변화함에 따라 두려움 자체의 성격이 달라진다는 뜻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벌이 두려워 악을 피하던 사람이 점차 악이 주님의 선과 진리를 거스르기 때문에 그것을 미워하게 되고, 마침내 선을 사랑하는 가운데 악을 피하게 됩니다. 이러한 변화가 거듭남(再生, regeneration)과 깊이 관련됩니다. 그러나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 언제나 무가치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직 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악의 결과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악을 멈추게 하는 외적 동기가 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두려움 자체가 참된 경외의 완성은 아닙니다. 주님은 인간이 두려움에 머무르지 않고 선을 이해하며 사랑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천국의 비밀’ 8925항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출20:20의 ‘하나님을 경외하여 범죄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는 말씀을 해설하면서, 거룩한 두려움은 사랑의 한 형태라고 설명합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부모와 자녀, 부부가 서로의 사랑을 해치는 일을 염려하는 마음과 같으며, 주님을 거스르거나 계명을 어기는 일을 피하려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경외는 하나님이 언제 자신을 벌하실지 몰라 불안해하는 상태가 아닙니다. 주님이 선 자체이시고 사랑 자체이시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분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소중히 여기는 상태입니다. 또한 이러한 경외는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랑하는 것을 자유롭게 지키려는 내적 의지에서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형벌을 피하려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면 그의 행동은 외적으로 정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짓 자체가 이웃을 해치고 주님의 진리를 거스르는 악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미워한다면, 그의 정직은 더욱 깊은 영적 토대를 갖게 됩니다. 이처럼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룩한 경외는 악을 피하는 행위와 선을 사랑하는 내적 생명이 결합된 상태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슬람의 타크와에 담긴 진리와 그 신학적 한계를 구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식하며 악을 경계하고, 정의와 자비를 실천하며,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려는 마음은 참된 경외와 연결될 수 있는 중요한 선입니다. 특히 타크와를 단순한 종교적 복종이 아니라 양심과 선행을 포함하는 삶의 태도로 이해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가르침과 일정한 접점을 가집니다. 그러나 경외를 하나님이 내리실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나 외적 명령의 준수에만 머물게 한다면, 그 경외는 아직 사랑의 내적 상태에 충분히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이슬람 신앙 전체의 오류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슬람에도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자발적인 경건을 강조하는 깊은 영적 전통이 있으며, 기독교에서도 형벌에 대한 두려움과 종교적 의무감에 머무는 신앙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판단해야 할 것은 특정 종교에 속해 있다는 사실보다 그 경외가 실제로 어떤 사랑에서 비롯되며, 어떤 삶의 열매를 맺는가 하는 점입니다. 다만 하나님을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나타내신 분으로 이해하는가 하는 신학적 차이는 여전히 남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 주님을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으로 인정하고 사랑하는 것이 참된 경외의 충만한 기초라고 가르칩니다.

 

이 문제는 종교적 권위와 인간의 양심을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이유로 종교 지도자의 말을 무조건 따르거나, 자신의 양심과 합리적인 판단을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참된 경외와 구별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 DP, 1764) 71항에서 인간이 자유에 따라 이성적으로 행동하도록 하는 것이 신적 섭리의 법칙이라고 설명합니다. 주님은 인간을 강제로 복종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유와 합리성 안에서 선을 선택하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참된 경외는 분별을 금지하거나 인간을 공포로 억압하는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일수록 자신이 행하는 일이 과연 선한지, 이웃에게 유익한지, 주님의 계명에 합당한지를 더욱 진지하게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가 깊다고 하면서 이웃을 멸시하거나 자신과 신앙이 다른 사람을 함부로 정죄한다면, 그 경외가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는 데서 비롯되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참된 경외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만드는 동시에 이웃 앞에서도 자신의 교만과 지배욕을 경계하게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이웃을 해치지 않으려는 마음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참된 신앙의 중요한 기초다’라는 이슬람의 고백에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인정해야 할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경외의 완성은 하나님을 얼마나 무서워하는가에 있지 않고,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며 그분의 선과 진리를 소중히 여기는가에 있습니다. 처음에는 형벌이 두려워 악을 피할 수 있지만,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악을 피하는 이유는 달라져야 합니다. 악이 자신에게 불이익을 가져오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을 해치기 때문에 그것을 멀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거룩한 두려움과 경외의 본질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도 같은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무서워서 순종합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이 기뻐하시는 선을 행하고 그분의 사랑을 해치는 악을 피합니까? 우리는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 정직하게 살아갑니까, 아니면 정직과 진실 자체를 사랑하기 때문에 거짓을 피합니까? 참된 경외는 하나님을 두려운 존재로만 바라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사랑 자체이시며 선 자체이심을 깊이 깨닫게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 안에서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도록 이끕니다. 그러므로 경외는 사랑에 이르기 위한 일시적인 단계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깊어질수록 더욱 거룩해지는 신앙의 내적 태도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장 깊은 이유는 그분이 우리를 벌하실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의 모든 선과 생명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IS.007 해설)

 

요약

이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피하고 정의와 선행을 실천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은 중요한 진리입니다. 특히 타크와를 경건과 양심, 도덕적 책임을 포함하는 삶의 태도로 이해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가르침과 접점을 가집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참된 경외는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나 외적 의무의 준수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거룩한 경외는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랑을 해치는 악을 피하려는 마음이며,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두려움은 사랑 안에서 거룩한 경외로 변화됩니다. 따라서 이슬람의 경외 자체가 오류인 것은 아니며, 경외를 공포와 외적 복종에만 한정하는 이해가 영적 한계를 지닙니다. 참된 경외의 완성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선과 진리의 근원으로 인정하고, 그분의 사랑에 따라 악을 피하며 선을 행하는 삶에 있습니다.

 

 

 

IS.006 ‘알라는 지극히 자비로우시며 완전하게 정의로우시다’

SL.IS.006 | 이슬람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알라는 지극히 자비로우시며 완전하게 정의로우시다’ - 신적 자비와 정의의 관계 해설이슬람은 알라를 지극히 자비로우시면서도 완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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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BU.006 | 불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갈애와 집착을 소멸하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 멸성제의 해탈과 주님에게서 오는 참된 자유

 

해설

인간은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지만, 고통을 일으키는 바깥의 조건이 사라진다고 해서 마음의 괴로움까지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가난에서 벗어나면 더 많은 재물을 원하고, 원하는 지위를 얻으면 그것을 잃을까 두려워하며,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조차 언젠가 헤어져야 한다는 불안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불교는 이러한 인간의 현실을 살피면서 고통의 궁극적인 해결을 단순히 외부 환경을 변화시키는 데서 찾지 않습니다. 불교의 근본 교리인 ‘사성제’(四聖諦, cattāri ariyasaccāni)는 고통의 현실을 밝히는 고성제, 그 원인을 설명하는 집성제, 고통의 소멸 가능성을 가르치는 멸성제, 그리고 그 소멸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는 도성제로 이루어집니다. 이 가운데 세 번째인 ‘멸성제’(滅聖諦, nirodha-sacca)는 고통의 근본 원인이 소멸하면 고통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갈애’(渴愛, taṇhā)란 감각적 즐거움과 존재의 지속, 또는 존재의 소멸을 갈망하는 목마름을 뜻하고, ‘집착’(執著, upādāna)은 그러한 대상을 자기 것으로 굳게 붙잡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불교가 말하는 소멸은 인간의 모든 감정이나 활동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갈애와 집착에 사로잡혀 고통을 반복하는 근본적인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가르침을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고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무감각한 상태를 추구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초기불교의 ‘상윳따 니까야’(相應部, Saṃyutta Nikāya) 56.11에 수록된 ‘초전법륜경’(初轉法輪經, Dhammacakkappavattana Sutta)은 멸성제를 갈애가 남김없이 사라지고, 그것을 버리고 놓아 자유로워지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고통을 일으키는 조건이 사라지면 그 결과도 소멸한다는 ‘연기’(緣起, paṭiccasamuppāda)의 원리입니다. 연기란 어떤 현상도 독립적으로 발생하지 않고 원인과 조건에 의존하여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같은 경전집의 SN 12.2는 ‘무명’(無明, avijjā), 곧 고통과 그 원인 및 소멸의 길을 바르게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여러 조건이 이어져 고통이 발생하며, 무명이 소멸하면 그에 의존하던 조건들도 소멸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과정에서 갈애가 소멸하면 집착이 소멸하고, 집착이 소멸하면 다시 존재하고 태어나는 과정도 멈추게 됩니다. 불교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열반’(涅槃, nibbāna)은 이러한 갈애와 무명, 고통과 ‘윤회’(輪廻, saṃsāra)의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열반은 단순히 마음이 편안해지는 심리적 안정과 같지 않습니다. 또한 열반을 인간이 완전히 없어지는 허무한 상태라고 단정하는 것도 불교의 설명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불교는 열반을 조건 지어진 존재의 반복적인 속박에서 벗어난 해방으로 이해하며, 그 궁극적인 상태를 일반적인 존재와 비존재의 개념으로 단순화하는 것을 경계합니다.

 

그렇다면 갈애가 소멸하면 인간은 더 이상 아프지도 않고 슬퍼하지도 않으며, 육체적인 고통도 전혀 경험하지 않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불교에서도 살아 있는 동안 깨달음에 이른 사람에게 육체적 통증과 질병, 늙음과 죽음이 여전히 나타날 수 있음을 인정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경험을 자기 존재에 대한 집착과 결합하여 새로운 괴로움으로 증폭시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상윳따 니까야’ 36.6에 나오는 ‘화살의 비유’는 이 차이를 잘 설명합니다. 가르침을 받지 못한 사람은 육체적인 고통을 경험할 때 정신적인 괴로움까지 더하여 마치 두 개의 화살을 맞는 것과 같지만, 바르게 수행한 사람은 육체적인 고통을 겪더라도 거기에 새로운 집착과 정신적 고통을 덧붙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멸성제를 ‘깨달으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불행이 사라진다’는 약속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누군가가 심한 슬픔이나 불안을 겪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에게 수행이 부족하다거나 집착이 많다고 판단해서도 안 됩니다. 불교의 멸성제는 고통받는 사람을 책망하기 위한 가르침이 아니라, 고통을 지속시키는 내적인 조건에서 벗어날 가능성을 보여 주는 가르침입니다. 여기에는 인간이 자기의 감정과 욕망에 무조건 끌려다닐 필요가 없으며, 그것들을 바르게 살피고 다스리는 가운데 새로운 자유를 경험할 수 있다는 귀중한 통찰이 있습니다.

 

이러한 통찰은 말씀에서 인간의 욕망과 자유를 다루는 방식과 비교할 만합니다. 예수께서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고 말씀하셨고, 이어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8:34)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자유는 단순히 원하는 것을 마음껏 하는 상태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을 지배하는 악에서 벗어나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 477–480번에서 인간의 삶을 결정하는 ‘지배적인 사랑’(ruling love)에 관하여 설명합니다.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사랑이 있지만 그 사랑들을 지배하고 하나의 방향으로 이끄는 중심적인 사랑이 있으며, 죽음 이후에도 그 사랑의 성격이 그의 영적 상태를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재물이나 명예를 사랑한다는 사실만으로 그의 내면을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그것들을 무엇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며, 무엇을 삶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사랑하는가에 있습니다. 자기 자신과 세상을 모든 것보다 앞세우면 다른 사람을 자신의 만족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기 쉽지만,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중심이 되면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과 재물도 선한 쓰임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불교의 멸성제가 갈애의 소멸을 통하여 속박에서 벗어나는 길을 설명한다면, 말씀은 인간을 지배하는 사랑의 질서가 바로잡힐 때 참된 자유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밝혀 줍니다. 두 설명은 자기중심적인 욕망이 인간을 속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만납니다. 그러나 불교의 갈애 소멸과 말씀에서 말하는 죄로부터의 자유를 곧바로 동일한 과정으로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이 차이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은 ‘거듭남’(regeneration)의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 DP, 1764) 83번에서 인간이 본래의 자연적 상태에서 영적 상태로 변화하는 거듭남을 설명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사랑과 욕망을 따라 살아가면서 그것이 자신에게 기쁨을 준다는 이유로 악을 선이라고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악을 인식하고 그것을 죄로 여겨 멀리하기 시작할 때 개혁이 시작되며, 주님의 도움으로 악과 싸워 이길 때 거듭남이 이루어집니다. 같은 저작 DP.100은 주님께서 인간의 속 사람 안에서 악을 제거하시려면 인간이 먼저 겉 사람 안에서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해야 한다는 신적 섭리의 법칙을 설명합니다. 여기서 ‘속 사람’(internal man)은 인간의 영적 내면을, ‘겉 사람’(external man)은 자연적 삶과 외적인 생각 및 행동의 차원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인간이 자기 힘만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은 마치 자기 힘으로 악을 멀리하는 것처럼 자유롭게 행동해야 하지만, 실제로 악을 제거하고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또한 거듭남은 모든 욕망과 개성을 없애는 과정이 아닙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랑이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 아래 놓이고, 인간의 의지와 이해가 선과 진리의 질서에 따라 새로워지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불교가 갈애와 무명의 소멸을 통하여 해탈을 설명한다면, 새 교회의 교리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사랑과 삶의 방향이 변화하는 거듭남을 설명합니다. 두 전통이 모두 인간의 내적 변화를 중요하게 여기더라도 그 변화의 궁극적인 근원과 목적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갈애와 집착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통해 얻는 평안과, 말씀에서 말하는 천국의 평안은 같은 것입니까? 두 평안 사이에도 구별이 필요합니다. 불교에서 갈애의 소멸은 집착에 따른 불안과 속박에서 벗어나는 해방과 연결되지만, 새 교회의 교리에서 천국의 평안은 주님과 결합하고 그분에게서 오는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이는 삶과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새 예루살렘을 위한 삶의 교리’(Doctrine of Life for the New Jerusalem, Life, 1763) 21–22번은 인간이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할수록 주님 안에 있게 되고, 그만큼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행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악을 멀리하는 목적은 단순히 마음의 불편함을 줄이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인간 안에서 악이 지배하던 자리에 주님에게서 오는 선이 역사하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이 점에서 참된 자유는 자기 자신만을 위한 욕망에서 벗어나는 소극적인 상태에 머무르지 않고, 선을 사랑하고 기쁘게 행하는 적극적인 삶으로 나타납니다. 가족을 사랑하고 일을 하며 정당한 즐거움을 누리는 것도 그 자체로 영적인 삶에 반대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사랑과 활동이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의 질서 안에 놓일 때 선한 쓰임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불교의 해탈을 아무런 적극적 사랑이나 자비도 없는 상태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불교 역시 자비와 이타적인 실천을 중요하게 여기며, 특히 대승불교에서는 다른 중생의 해탈을 돕는 보살의 삶을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양쪽의 차이는 한쪽에는 자비가 있고 다른 쪽에는 없다는 데 있지 않고, 그 자비와 선의 궁극적인 근원 및 영원한 삶의 목적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있습니다.

 

이 문제는 실제 신앙생활에도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사람은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종교를 찾을 수 있습니다. 병이 낫기를 원하고, 경제적인 어려움이 해결되기를 바라며, 가족 간의 갈등이나 마음의 불안이 사라지기를 기도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소망 자체를 무조건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종교생활의 궁극적인 목적이 자기의 모든 소원을 이루는 데 머문다면, 종교는 오히려 자기중심적인 욕망을 강화하는 수단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 불교의 멸성제는 이러한 욕망의 구조를 돌아보게 하며, 원하는 것을 끝없이 얻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속박하는 갈애에서 벗어나는 길을 제시합니다. 말씀 역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33)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의 필요와 고통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먼저 사랑하고 무엇을 최종 목적으로 삼아야 하는지를 바로잡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고통받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며, 고통의 소멸 자체를 경계해야 할 일로 여기시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인간의 영원한 행복은 외적인 문제가 모두 해결되는 데 있지 않고,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여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삶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의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구하는 동시에 다른 사람의 고통을 덜어 주는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마음의 평안을 얻는 것과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은 서로 분리된 두 목적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인간의 내면과 외적인 삶에 함께 나타나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결국 ‘갈애와 집착을 소멸하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라는 명제는 불교의 멸성제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가르침입니다. 불교는 인간이 끊임없이 원하는 것을 얻는 방식으로는 궁극적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그 고통을 지속시키는 갈애와 집착의 근본적인 조건이 소멸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자기중심적인 욕망을 성찰하고, 변하는 것을 영원한 행복의 근거로 붙잡지 않도록 경계하는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멸성제를 모든 감정과 사랑의 제거로 이해하거나, 깨달은 사람에게 더 이상 육체적인 고통이나 슬픔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불교의 열반과 말씀에서 말하는 천국의 생명을 동일시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기록한 새 교회의 교리에 따르면 인간의 참된 자유는 단순히 어떤 욕망이 사라진 상태가 아니라,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하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사랑과 의지가 새로워진 상태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악을 버려야 하지만, 그 자리에 참된 선을 주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불교의 멸성제가 인간을 속박하는 갈애에서 벗어나는 길을 보여 준다면, 말씀은 인간이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할 뿐 아니라 누구를 사랑하며 어떤 생명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밝혀 줍니다. 참된 자유는 자기의 욕망에 더 이상 끌려다니지 않는 데서 시작하여,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 안에서 선을 기쁘게 선택하고 이웃에게 유익을 이루는 삶으로 완성됩니다. (BU.006 해설)

 

요약

갈애와 집착의 소멸을 통하여 고통의 근본적인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불교의 멸성제에는 인간의 욕망과 자기중심성을 성찰하게 하는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다만 갈애의 소멸을 모든 의욕과 감정의 제거로 이해하거나, 열반을 단순한 무감각 또는 존재의 소멸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멸성제가 육체적 질병이나 외적인 불행의 완전한 제거를 약속하는 것도 아닙니다. 새 교회의 교리에 따르면 인간의 참된 자유는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하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임으로써 사랑과 의지가 새로워지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불교의 해탈과 말씀의 거듭남 사이에 있는 자기중심적 욕망의 극복이라는 공통점을 인정하되, 변화의 궁극적인 근원과 목적은 구별해야 합니다. 참된 자유와 천국의 평안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받아들여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으로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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