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많이 하면 하나님께서 내 소원을 들어 주신다’

 

‘기도 많이 하면 하나님께서 내 소원을 들어 주신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이라면 매우 익숙한 말입니다. ‘기도하면 됩니다’, ‘끝까지 기도하세요’, ‘기도의 분량을 채우세요’, ‘하나님께 매달리면 반드시 응답하십니다’라는 권면도 자주 듣습니다. 실제로 성경은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가르칩니다. 주님께서는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7:7). 그러므로 간절히 기도하고 끈기 있게 주님을 찾는 것은 분명 귀한 신앙의 태도입니다.

 

문제는 ‘기도 많이 하면’과 ‘내 소원을 들어 주신다’ 사이에 우리가 어떤 인과관계를 만들어 놓느냐입니다. 자칫 기도의 양이 하나님의 결정을 움직이는 힘처럼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한 시간 기도했는데 응답이 없으면 세 시간을 기도하고, 일주일 기도했는데 이루어지지 않으면 사십 일을 기도하며, 많은 사람이 함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결국 마음을 바꾸실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기도는 주님과의 교제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사용하는 영적 수단이 되기 쉽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끈질긴 기도를 권하는 말씀도 있습니다. 눅18의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가 대표적입니다. 과부는 계속 찾아가 자신의 원한을 풀어 달라고 요청했고 결국 재판관은 그의 청을 들어줍니다. 그러나 이 비유를 ‘하나님도 계속 조르면 결국 들어주신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곤란합니다. 주님께서는 오히려 불의한 재판관과 하나님을 대조하십니다. 불의한 사람조차 끈질긴 호소를 듣는다면 하물며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의 부르짖음을 듣지 않으시겠느냐는 것입니다. 기도의 핵심은 하나님을 지치게 만드는 데 있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끝까지 그분을 향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에 관한 가장 중요한 장면 가운데 하나가 겟세마네입니다. 주님께서는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은 분명한 소원입니다. 고통을 앞두고 자신의 원함을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기도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이어집니다(마26:39).

 

이 한 문장 안에 기도의 본질이 거의 다 들어 있습니다. 기도는 원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아프면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고, 자녀의 문제가 해결되기를 기도할 수 있으며, 경제적인 어려움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취업, 결혼, 사업, 관계의 회복을 놓고 구체적으로 기도해도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이미 아시지만, 그 소원을 주님 앞에 가져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기도의 마지막에는 언제나 더 깊은 문이 하나 열려 있어야 합니다. ‘주님, 이것이 제가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알지 못하는 것이 있으니 제 뜻보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기도는 소원성취와 달라집니다. 소원성취의 중심에는 ‘내가 원하는 결과’가 있지만 기도의 중심에는 ‘주님’이 계십니다. 소원성취에서는 하나님이 내 목적을 이루어 주시는 수단이 되기 쉽지만, 참된 기도에서는 내가 원하는 것까지 주님 앞에 내려놓고 주님의 선하신 질서를 받아들이려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보면 이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주님의 신적 섭리는 인간의 순간적인 행복만을 목표로 하지 않고 그의 영원한 구원과 거듭남(regeneration)을 향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지금 당장 자기에게 무엇이 좋은지를 완전하게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돈이 생기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돈이 우리의 탐욕과 자기 사랑을 키울 수도 있습니다. 어떤 관계가 반드시 이루어져야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관계가 오히려 우리를 무너뜨릴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지금은 실패와 손실처럼 보이는 일이 훗날 우리를 더 큰 악에서 보호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고난은 모두 하나님께서 일부러 보내신 훈련이다’라고 단정해서도 안 됩니다. 여기에서도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허용하시는 것을 구별해야 합니다. 세상에는 인간의 악한 선택에서 생기는 고통도 있고, 자연계의 질서와 한계에서 발생하는 질병과 재난도 있으며, 다른 사람의 자유 때문에 우리가 겪게 되는 고통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 모든 악과 고통을 직접 만들어 보내신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허용된 것 안에서도 가능한 한 사람을 선으로 이끄시며, 영원한 것을 위하여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간절히 기도했는데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기도가 부족했다’고 결론 내릴 수 없습니다. 이것은 때때로 신앙인에게 매우 잔인한 말이 될 수 있습니다. 병든 가족을 위해 밤을 새워 기도했는데 결국 세상을 떠났다고 합시다. 그 사람에게 ‘조금만 더 믿고 기도했으면 나았을 텐데’라고 말한다면 남은 사람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죄책감을 씌울 수 있습니다. 기도의 응답 여부를 기도의 분량이나 믿음의 강도와 기계적으로 연결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도 자신의 ‘육체의 가시’를 놓고 주님께 세 번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받은 대답은 가시의 제거가 아니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고후12:9). 바울의 기도가 부족해서였을까요? 믿음이 약해서였을까요? 그렇게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는 분명히 구했고 주님께서는 응답하셨지만, 그 응답은 바울이 요청한 것과 다른 형태였습니다.

 

여기에서 ‘기도 응답’이라는 말 자체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흔히 내가 원한 일이 일어나면 ‘응답받았다’고 말하고, 일어나지 않으면 ‘아직 응답받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응답의 기준이 언제나 ‘내 소원이 이루어졌는가’가 됩니다. 주님께서 ‘그것은 네게 좋지 않다’고 하시는 것도 응답일 수 있고, ‘아직 아니다’도 응답일 수 있으며, 바울에게처럼 ‘그것을 없애 주는 대신 그것을 견딜 은혜를 주겠다’는 것도 응답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오래 기도해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모르시기 때문도 아니고, 하나님을 설득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도 아닙니다. 오히려 긴 기도 속에서 변화되는 쪽은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주님, 이것을 꼭 주십시오’라고 시작했던 기도가 어느 순간 ‘주님, 이것이 정말 제게 선한 것입니까?’로 바뀌고, 더 깊어지면 ‘주님, 제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선을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로 바뀔 수 있습니다. 기도가 소원을 주님께 관철하는 과정에서 주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으로 내가 변화되는 과정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유’(freedom)와 ‘합리성’(rationality)의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고 판단하고 선택하는 능력을 없애지 않으십니다. 기도했다고 해서 해야 할 일을 대신 해 주시는 것도 아닙니다. 취업을 위해 기도했다면 이력서를 써야 하고, 관계의 회복을 위해 기도했다면 사과해야 할 것이 있으면 사과해야 하며, 건강을 위해 기도했다면 필요한 치료와 생활의 변화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기도는 인간의 책임을 대신하는 마법이 아닙니다.

 

그래서 ‘기도했으니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 주시겠지’라는 태도와 참된 신뢰도 구별해야 합니다. 주님께 맡긴다는 것은 내가 할 일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자유와 합리성 안에서 성실하게 행하되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결과를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체념이 아니라 신뢰입니다.

 

여기에도 ‘프로프리움’(proprium)이 숨어들 수 있습니다. 아주 역설적이지만 기도를 많이 하면서도 자기 뜻을 더 강하게 붙들 수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오래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왜 안 들어 주시는가?’라는 생각 속에는 어느 순간 ‘내가 이 정도 기도했으니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해 주셔야 한다’는 거래의식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기도의 분량이 일종의 공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조차 자기 뜻을 관철하기 위한 수단이 됩니다.

 

참된 기도는 그 반대 방향으로 갑니다. 오래 기도할수록 ‘내 뜻대로 되어야 한다’는 마음이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는 나보다 더 멀리 보신다’는 신뢰가 깊어집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절대화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의 가장 깊은 열매는 반드시 ‘원하는 것을 얻는 것’만이 아니라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해도 주님을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주기도문도 이것을 잘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중심은 ‘내 소원이 이루어지이다’가 아니라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입니다(마6:10). 물론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는 간구도 있습니다. 필요한 것을 구합니다. 그러나 그 간구를 둘러싸고 있는 더 큰 질서는 주님의 이름, 주님의 나라, 주님의 뜻입니다. 우리의 필요가 주님의 뜻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기도를 많이 한다는 것은 분명 귀한 일입니다. 문제는 ‘얼마나 오래 기도했는가?’보다 그 기도를 통하여 ‘누구의 뜻을 구하게 되었는가?’입니다. 한 시간을 기도하고도 자기 뜻만 더욱 완강하게 붙들 수 있고, 짧게 ‘주님, 제가 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을 따르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면서 깊은 신뢰로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기도의 깊이는 반드시 시간의 길이와 비례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라는 약속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것을 하나님께 무엇이든 요구하면 그대로 받을 수 있다는 백지수표로 이해하기보다는, 주님을 향하여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사람에게 주님께서 참으로 필요한 선을 주신다는 약속으로 읽는 것이 더 온전합니다. 실제로 눅11의 병행 본문에서는 결론이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십니다(눅11:13). 가장 깊은 응답은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것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 많이 하면 하나님께서 내 소원을 들어 주신다’는 말에는 귀한 진리가 있습니다. 주님께 구해야 하고, 포기하지 않고 기도해야 하며, 우리의 가장 구체적인 필요와 소원까지 주님 앞에 가져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기도의 양이 충분하면 하나님께서 결국 내 뜻대로 해 주신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기도의 방향이 뒤집힙니다.

 

기도는 주님을 내 뜻으로 움직이는 기술이 아니라, 주님 앞에서 내 뜻이 정화되고 주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내가 변화되는 거룩한 관계입니다.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기도의 목적은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관철하는 데 있지 않고, 내가 원하는 것까지 주님께 아뢰면서 무엇이 참으로 선한지를 주님에게서 배우고 그분의 뜻을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글의 핵심을 더 짧게 표현한다면 이것이겠습니다.

 

‘기도를 많이 해서 주님의 뜻을 내 뜻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면서 내 뜻이 주님의 뜻을 향하여 움직이는 것입니다.’

 

겟세마네의 주님께서 그 모든 것을 한 문장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SL.22, ‘선행을 강조하면 행위구원인데...’

‘선행을 강조하면 행위구원인데...’ ‘선행을 강조하면 행위구원인데....’ 개신교 안에서는 상당히 민감하게 들리는 말입니다. 설교자가 ‘선을 행해야 합니다’,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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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행을 강조하면 행위구원인데...’

 

‘선행을 강조하면 행위구원인데....’ 개신교 안에서는 상당히 민감하게 들리는 말입니다. 설교자가 ‘선을 행해야 합니다’,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악을 버리고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라고 반복해서 강조하면 누군가는 금방 걱정합니다. ‘저러다가 행위구원으로 가는 것 아닌가?’ 특히 종교개혁 이후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을 중요하게 여겨 온 개신교 전통에서는 인간의 행위를 구원의 조건처럼 말하는 것에 강한 경계심이 있습니다. 그 경계심에는 분명 지켜야 할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선행을 쌓아서 하나님께 구원을 요구할 수 없습니다. ‘나는 평생 착하게 살았습니다’, ‘헌금도 많이 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도 도왔습니다’, ‘교회 봉사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나를 천국에 보내셔야 합니다’라고 말한다면 선행을 일종의 구원 대금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바울이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라고 한 말씀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자랑과 공로를 철저히 무너뜨립니다(엡2:8-9).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매우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선행으로 구원을 살 수 없다’는 것과 ‘그러므로 선행을 강조해서는 안 된다’라는 것은 전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전자는 인간의 공로를 부정하는 것이지만, 후자는 자칫 주님께서 끊임없이 명하신 선한 삶 자체를 약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행위구원을 피하려다가 어느 순간 ‘행위’를 피하게 되는 이상한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읽어 보면 선한 삶에 대한 요구는 결코 주변적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셨습니다(마5:16). 또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라고 하셨으며(마7:16),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신 뒤에는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라고 하셨습니다(눅10:37). 주님께서는 선을 행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행위구원이라고 걱정하지 않으셨습니다.

 

마태복음 25장은 더욱 직접적입니다. 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사람에게 마시게 하고, 나그네를 영접하고, 헐벗은 사람을 입히며, 병든 사람과 갇힌 사람을 돌본 일이 마지막 심판의 장면에 등장합니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마25:40). 만일 선행을 강조하는 것 자체가 행위구원이라면 이 말씀부터 설명하기 어려워집니다.

 

야고보는 더 대담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라고 말하고(약2:17),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라고까지 말합니다(약2:24). 이 구절 때문에 종교개혁 이후 많은 논쟁이 있었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성경 자체는 ‘행위’를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행위가 있느냐 없느냐만이 아니라 그 행위가 어디에서 나오며,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매우 유용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선한 행위를 구원의 대가로 보지 않습니다. 모든 참된 선의 근원은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서 독립적으로 발생한 순수한 선이 있어서 그것을 주님께 가져가고 ‘제가 이것을 했으니 상을 주십시오’라고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행하는 참된 선은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 실제 삶에서 표현한 것입니다.

 

따라서 문제는 ‘선을 행했는가’보다 ‘그 선을 누구의 것으로 여기고 있는가’입니다. 선을 행한 뒤 ‘내가 했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선하다. 나는 이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더 높은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프로프리움’(proprium)이 그 선을 자기 것으로 붙잡기 시작합니다. 겉으로는 선행이지만 그 안에 자기 의와 명예욕, 그리고 공로 의식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경계하는 공로적 선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해결책을 ‘그러니 선을 강조하지 말자’로 잡으면 이상해집니다. 자기 자랑이 생길 위험이 있으니 이웃을 돕지 말자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해결책은 선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선의 근원을 바로 아는 것입니다. 사람은 선을 실제로 행해야 합니다. 악을 죄로 알고 피해야 하고, 어려운 이웃을 도와야 하며, 자신의 직분과 책임 안에서 유용한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이 선의 능력과 근원은 주님에게서 온다’고 인정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매우 중요한 원리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은 마치 자기가 하는 것처럼(as if from self) 선을 행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대신 정직해 주시기를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내가 거짓말을 하지 않아야 하고, 내가 용서해야 하며, 내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행한 뒤에는 그 선의 근원과 능력이 자기에게 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자유롭게 내가 행하지만, 선 자체는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freedom)와 ‘합리성’(rationality)을 동시에 보존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꼭두각시처럼 선하게 만들지 않으십니다. 무엇이 선하고 참된지를 이해하고 합리적으로 판단하며, 그것을 자유롭게 선택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거듭남(regeneration)은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과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은 적극적으로 악과 싸우고 선을 행합니다. 다만 그 싸움에서 이길 힘과 선을 행할 능력이 궁극적으로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배워 갑니다.

 

여기에서 ‘행위구원’이라는 말을 좀 더 정확하게 사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선을 행해야 한다’고 말한다고 해서 곧 행위구원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자기 힘으로 선행을 쌓아 그 공로로 구원을 얻는다’라고 말할 때 행위구원 문제가 생깁니다. 이 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선행은 필요 없다’와 ‘선행에는 공로가 없다’도 전혀 다른 말입니다.

 

이 차이를 놓치면 이상한 역설이 생깁니다.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라고 아주 정확하게 고백하면서 실제 삶에서는 거짓과 탐욕과 미움과 음란을 계속 붙들어도, 선한 삶을 강조하는 사람보다 자신이 더 복음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해야 합니다’라는 설교를 듣고 ‘저건 복음이 아니라 율법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수없이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라고도 하셨습니다(요13:17).

 

사실 신앙이 살아 있는지를 확인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곳이 삶입니다. 사과나무가 살아 있는지는 ‘나는 사과나무입니다’라는 팻말로 확인하지 않습니다. 때가 되면 열매를 봅니다. 그렇다고 열매를 가지에 접착제로 붙인다고 나무가 살아나는 것도 아닙니다. 뿌리와 줄기에 생명이 있어야 열매가 나옵니다. 믿음과 선행도 이와 비슷합니다. 외적 선행을 많이 붙인다고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실제로 사람 안에 있다면 그 생명은 결국 어떤 형태로든 삶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래서 선행은 구원의 ‘가격’이 아니라 구원의 ‘열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열매는 단순히 나무가 살아 있다는 증거만이 아닙니다. 나무가 존재하는 목적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것은 그 사람이 자기 혼자 천국에 들어가 행복하게 살게 하기 위해서만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을 이웃에게 흘려보내며 선하고 유용한 일을 하는 사람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이것이 ‘체어리티’(charity)입니다. 체어리티는 단순히 돈을 기부하거나 불쌍한 사람을 돕는 좁은 의미의 자선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이 이웃과 공동체를 향하여 실제적인 선과 유용한 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바르게 돌보는 것, 직장에서 정직하게 책임을 다하는 것, 환자를 성실하게 치료하는 것, 학생을 진실하게 가르치는 것,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는 것, 때로는 상대에게 해로운 일을 단호하게 거절하는 것까지도 체어리티의 삶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에게 ‘믿음과 체어리티’는 서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를 보게 하고, 체어리티는 그것을 사랑하게 하며, 행위는 그 사랑을 실제 세계에서 구현합니다. 진리가 선과 결합하고, 선이 유용한 일(use, 쓰임새)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살아 있는 신앙입니다.

 

여기에서 종교개혁이 경계했던 공로주의와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선한 삶 사이의 차이도 분명해집니다. ‘내가 선을 행했으니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셔야 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내 행위에는 공로가 없으니 어떻게 살아도 구원과는 상관없다’는 생각도 버려야 합니다. 첫 번째는 인간의 선행을 주님보다 높이고, 두 번째는 주님께서 인간을 실제로 거듭나게 하시는 일을 약화시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장면은 이 점을 아름답게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섬김에 관한 교리를 설명하시는 데서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직접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그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라고 하셨습니다(요13:14). 참된 진리는 결국 행위로 내려옵니다. 사랑은 행동할 때 비로소 자연계 안에서 모습을 드러냅니다.

 

따라서 ‘선행을 강조하면 행위구원이야’라는 생각의 가장 큰 위험은 선과 행위를 신앙에서 밀어내 버릴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면 신앙은 머리에서 동의하는 교리가 되고, 구원은 그 교리를 믿었다는 신분이 되며, 실제 삶은 ‘가능하면 잘 살면 좋은 것’ 정도로 낮아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남은 사람의 생각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의지와 사랑, 그리고 삶을 변화시키는 주님의 역사입니다.

 

물론 여기에서도 완벽주의로 가서는 안 됩니다. 선행을 강조한다는 것이 ‘완벽하게 선하게 살아야 구원받는다’라는 뜻은 아닙니다. 거듭나는 사람도 넘어지고 실패합니다. 중요한 것은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악을 악이라고 인정하고, 그것을 정당화하지 않으며, 다시 주님께 도움을 구하고 선을 향하여 일어서는 것입니다. 선한 삶은 구원을 얻기 위한 시험 점수가 아니라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거듭남의 과정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아주 중요한 역설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참된 선을 행할수록 사람은 오히려 ‘내가 선하다’는 생각에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자기 안의 선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점점 더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내가 저 사람을 도왔다’고 생각하지만,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주님께서 내게 사랑할 마음과 도울 기회, 그리고 능력을 주셨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선행이 많아질수록 공로 의식이 커지는 것이 아니라 감사가 깊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국적 선과 공로적 선의 차이입니다.

 

그러므로 ‘행위구원’을 가장 정확하게 경계하는 방법은 선행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선을 힘껏 행하면서도 그 선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습니다. 그래야 은혜입니다’가 아니라 ‘나는 주님께서 명하신 선을 힘껏 행하겠습니다. 그러나 그 선의 능력과 공로를 내 것으로 주장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은혜’와 ‘행위’도 더 이상 경쟁하지 않습니다. 은혜는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이 선을 행할 수 있게 하는 모든 생명과 능력이 먼저 주님에게서 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 은혜를 자유롭게 받아 실제 삶에서 사용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아 이웃에게 흘려보내는 것, 그것이 체어리티이며 유용한 삶입니다.

 

따라서 ‘선행을 강조하면 행위구원이야’라는 말에는 중요한 경계심이 있지만, 그것을 지나치게 확대하면 오히려 성경이 강조하는 삶을 약화시킬 수 있습니다. 경계해야 할 것은 선행이 아니라 ‘공로 의식’입니다. 버려야 할 것은 행위가 아니라 ‘내 행위가 나를 구원한다’는 생각입니다.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선행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니지만,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님은 반드시 우리를 선을 사랑하고 행하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십니다.’

 

조금 더 날카롭게 말하면 이것이겠습니다.

 

‘행위구원의 반대말은 ‘행위 없음’이 아니라 ‘공로 없음’입니다.’

 

그리고 이번 글의 핵심을 가장 ‘스베덴보리의 렌즈’답게 표현한다면 이것이겠습니다.

 

‘선을 행하되 그것을 내 공로로 여기지 않는 것, 마치 내가 하는 것처럼 힘껏 행하되 모든 참된 선의 근원은 주님이심을 인정하는 것, 이것이 은혜와 삶이 만나는 자리입니다.’

 

 

 

SL.23, ‘기도 많이 하면 하나님께서 내 소원을 들어 주신다’

‘기도 많이 하면 하나님께서 내 소원을 들어 주신다’ ‘기도 많이 하면 하나님께서 내 소원을 들어 주신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이라면 매우 익숙한 말입니다. ‘기도하면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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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21,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거야. 삶과 행위는 부차적인 거고’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거야. 삶과 행위는 부차적인 거고’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거야. 삶과 행위는 부차적인 거고.’ 개신교 신앙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매우 자연스럽게 들리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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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거야. 삶과 행위는 부차적인 거고’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거야. 삶과 행위는 부차적인 거고.’ 개신교 신앙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매우 자연스럽게 들리는 말입니다. 바울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라고 말하고(롬3:28), 에베소서에는 더욱 분명하게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엡2:8-9). 그러므로 인간이 자기 선행을 쌓아 하나님께 구원의 대가를 지불한다는 생각은 분명 복음과 맞지 않습니다. 구원의 근원은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주님입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구원은 우리의 행위에 대한 대가가 아니다’라는 말과 ‘그러므로 사람이 어떻게 사느냐는 구원에서 부차적이다’라는 말은 같은 것일까요? 바로 여기에서 매우 큰 비약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인간의 공로를 부정한 것을 인간의 삶 자체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로 바꾸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믿음’은 구원을 얻는 결정적인 조건이 되고, 실제 삶은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 가능하면 잘 살아야 하는 일종의 후속 과정처럼 밀려납니다.

 

그런데 에베소서의 말씀도 9절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바로 다음 절은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라고 말합니다(엡2:10). 선한 행위 때문에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만, 구원하시는 주님의 역사는 사람을 선한 삶으로 이끕니다. 다시 말해 선한 행위는 구원을 사는 가격이 아니지만, 구원이 사람 안에서 실제로 역사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삶의 열매입니다.

 

야고보서는 더욱 직접적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라고 하고(약2:17),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라고까지 말합니다(약2:26). 야고보가 바울과 반대되는 또 다른 구원론을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인간이 자기 행위를 공로로 삼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주장하는 것을 거부하고, 야고보는 삶과 분리된 지적 신앙을 살아 있는 믿음이라고 부르는 것을 거부합니다. 서로 다른 오류를 겨냥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행위’라는 말을 조금 조심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행위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헌금, 봉사, 구제, 전도, 새벽기도 같은 종교적 활동을 먼저 떠올립니다. 그러면 ‘행위 구원’이라는 경계심이 곧바로 생깁니다. 그러나 성경과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더 근본적인 문제는 ‘내가 선행 몇 개를 했는가’가 아니라 ‘나는 어떤 사랑을 따라 살아가고 있는가’입니다. 삶과 행위는 그 사람 안에 무엇이 사랑으로 자리 잡고 있는지를 밖으로 나타냅니다.

 

주님께서는 나무와 열매의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라고 하셨고,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라고 하셨습니다(마7:16-17). 열매가 나무를 좋은 나무로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좋은 나무라면 그 생명이 결국 열매로 나타납니다. 마찬가지로 선한 행위를 많이 쌓아서 그 양으로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지만,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실제로 받아들인 사람이라면 그것이 언젠가는 삶의 열매로 나타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믿음과 체어리티(charity)를 분리하지 않습니다. 진리는 사람이 무엇이 선인지 볼 수 있도록 빛을 주고, 선은 그 진리를 실제 삶으로 옮깁니다. 믿음이 ‘무엇이 참인지 아는 것’에만 머물고 그 진리가 의지와 삶으로 내려가지 않는다면 아직 완전한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진리는 선을 향하고, 믿음은 체어리티를 향해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과 체어리티는 서로 경쟁하는 두 가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한 영적 생명의 두 측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아주 단순하게 말하면 ‘믿음은 선을 보는 눈이고, 체어리티는 그 선을 행하려는 마음이며, 행위는 그 마음이 실제 삶에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눈만 있고 걸어가지 않는다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눈 없이 무작정 걸어가는 것도 위험합니다. 진리 없는 선은 무엇이 참된 선인지 분별하기 어렵고, 선 없는 진리는 머릿속 지식으로 굳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선과 진리의 결합은 거듭남(regeneration)의 핵심 질서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보면 삶이 결코 부차적인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마지막 심판을 묘사하는 마태복음 25장에서 주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신앙고백의 문장을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굶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 헐벗은 자, 병든 자, 갇힌 자에게 어떻게 했는지를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라고 하십니다(마25:40). 그렇다고 이 말씀이 ‘선행 점수가 높은 사람이 천국에 간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 행위들을 통하여 그 사람 안에 어떤 사랑이 있었는지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도 반복되는 표현이 있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주님께서는 교회들의 교리만을 평가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실제 상태와 삶을 보십니다. 이것은 행위가 믿음과 경쟁하는 별도의 구원 수단이기 때문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사랑과 믿음이 보이는 삶에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행위는 내면과 무관하게 천국 입장권을 사는 공적이 아니라 내면의 사랑이 몸을 입은 모습입니다.

 

따라서 ‘믿음이냐 행위냐’라는 질문 자체가 어느 정도 잘못 설정된 질문일 수 있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 ‘심장이 중요합니까, 혈액순환이 중요합니까’라고 묻는 것과 비슷합니다. 둘을 분리하면 생명이 유지되지 않습니다. 참된 믿음은 삶으로 향하고, 참된 선행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로부터 나옵니다. 성경이 경계하는 것은 ‘행위’ 자체가 아니라 행위를 자기 공로로 소유하는 태도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프로프리움’(proprium)의 문제가 등장합니다. 인간은 선을 행하고 나면 ‘내가 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나는 이만큼 봉사했다’, ‘나는 이만큼 헌금했다’, ‘나는 평생 교회를 섬겼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착하게 살았다’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주님 앞에 자신의 공로처럼 내놓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행위 구원의 깊은 위험입니다. 그러나 해결책은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선을 힘껏 행하되 그 선의 근원과 능력이 주님에게서 왔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중요한 원리가 여기에서 빛을 발합니다. 사람은 마치 자기에게서 하는 것처럼 자유롭게 선을 선택하고 행해야 하지만, 실제 선의 근원은 주님이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와 ‘합리성’(rationality)을 없애지 않으면서 동시에 인간의 공로를 제거합니다. 나는 악을 죄로 알고 피해야 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해야 하며, 내가 해야 할 일을 실제로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이 선은 내 소유이며 이것 때문에 나는 구원받을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의 반대말이 ‘행위로 구원받는다’일 필요는 없습니다. 더 깊은 대안은 ‘살아 있는 믿음’입니다. 살아 있는 믿음은 주님을 신뢰하면서 주님께서 가르치신 것을 실제 삶으로 받아들입니다. 악을 죄로 알고 피하고, 용서해야 할 사람을 용서하려 애쓰고, 정직해야 할 때 정직을 선택하며, 자신의 책임을 감당하고, 이웃에게 필요한 선을 행합니다. 이 모든 것은 천국을 사기 위한 대가가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사람 안에서 열매 맺어 가는 과정입니다.

 

여기에서 ‘체어리티’가 중요합니다. 체어리티는 단순한 구제나 자선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이 이웃과 공동체를 향하여 실제적인 선과 유용한 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직장에서 맡은 일을 정직하게 하는 것, 가족에게 책임을 다하는 것,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것,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 때로는 상대에게 해로운 요구를 거절하는 것까지도 참된 선을 목적으로 한다면 체어리티의 영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신앙은 바로 이런 삶 속에서 몸을 얻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일까요? 정반대입니다. 믿음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진리를 모르면 무엇이 선인지 제대로 분별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목적은 단지 ‘내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믿게 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진리는 우리의 삶을 밝혀 악을 보게 하고, 선을 알게 하며, 주님께로 향하게 합니다. 믿음은 삶을 위한 진리입니다.

 

이 때문에 ‘삶과 행위는 부차적’이라는 말은 생각보다 위험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신앙고백은 구원의 본질이고 삶은 그다음 문제라고 생각하면, 신앙과 삶 사이에 커다란 틈이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 물론 성질도 못 고쳤고, 사람을 미워하고, 돈 앞에서 거짓말도 하지만 그것은 성화의 문제이지 구원과는 별개다.’ 이런 식의 사고가 가능해집니다. 그러면 믿음은 거듭남을 촉진하는 진리가 아니라 거듭나지 않아도 안심할 수 있게 해 주는 방패가 됩니다.

 

이것은 앞서 살펴본 ‘한번 구원받으면 끝’이라는 생각과도 연결됩니다. 믿음을 삶에서 떼어 놓는 순간 구원은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과거 어느 시점에 무엇을 믿었다고 고백했는가’의 문제가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루시는 구원은 사람의 명칭만 바꾸는 일이 아니라 사람 자체를 변화시키는 일입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지배되던 사람을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그 변화는 완벽함을 뜻하지 않습니다. 거듭나는 사람도 넘어지고, 화를 내고, 잘못 판단하고, 죄를 짓습니다. 중요한 것은 ‘완벽하게 살았느냐’가 아니라 악을 발견했을 때 그것을 정당화하는가, 아니면 죄로 인정하고 주님께 돌아가 다시 싸우는가입니다. 한 번의 실패가 그 사람의 ‘지배적 사랑’(ruling love)을 결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악을 계속 사랑하고 정당화하면서 ‘그래도 나는 믿음으로 구원받았으니 괜찮다’고 한다면 믿음이 오히려 프로프리움을 보호하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과 행위를 이렇게 이해하면 바울과 야고보 사이의 긴장도 상당 부분 풀립니다. ‘내 선행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셔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에게는 바울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반대로 ‘나는 믿으니까 어떻게 살아도 구원에는 상관없다’고 말하는 사람에게는 야고보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하나는 인간의 공로를 무너뜨리고, 다른 하나는 삶 없는 신앙을 무너뜨립니다.

 

결국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믿음인가 행위인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를 믿고, 그 진리가 사랑이 되어, 사랑이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믿음은 체어리티와 결합하고, 체어리티는 행위와 유용한 일(use, 쓰임새) 속에서 실제가 됩니다. 이것이 선과 진리의 결합이며 거듭남의 삶입니다.

 

따라서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거야. 삶과 행위는 부차적인 거고’라는 말에는 매우 중요한 진리와 매우 위험한 비약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인간의 행위가 구원의 공로가 아니다’라는 앞부분은 붙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그러므로 삶은 구원 문제에서 부차적이다’라고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삶은 믿음의 경쟁자가 아니라 믿음이 살아 있는지를 드러내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선한 행위를 대가로 구원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에게서 구원받지만, 주님에게서 받은 참된 믿음은 반드시 체어리티와 결합하여 삶 속에서 선한 열매를 맺으려 합니다.’

 

그리고 이번 글의 핵심을 더 짧게 압축한다면 이것이겠습니다.

 

‘행위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님은 우리의 삶을 그대로 내버려 두시지도 않습니다.’

 

어쩌면 가장 ‘스베덴보리의 렌즈’다운 표현은 이것일 것입니다.

 

‘믿음과 삶 가운데 어느 것이 구원에 더 중요한지를 묻기보다, 삶으로 내려오지 않는 믿음을 과연 살아 있는 믿음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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