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And the man [homo] called his wife’s name Eve, because she was the mother of all living. (3:20)

 

AC.281

 

천적 교회였던 태고교회는, 주님에 대한 신앙의 삶(the life of faith in the Lord)으로 말미암아 하와(Eve), 모든 산 자의 어머니(the mother of all living)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20). Of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was celestial, and from the life of faith in the Lord, called “Eve,” and the “mother of all living” (verse 20).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20)

 

 

해설

 

AC.281은 창3:20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주제를 제시하는 제목입니다. 앞에서는 태고교회의 타락과 그 결과를 설명하였다면, 이제부터는 비록 타락 이후라 할지라도 주님께서 교회를 완전히 버리지 않으시고 새로운 소망을 준비하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하와’, 곧 ‘모든 산 자의 어머니’라는 이름은 단순히 첫 여인의 이름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세상에 이어 가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를 ‘천적 교회’라고 합니다. 여기서 ‘천적(天的, celestial)이란 단순히 하늘에 속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이 삶의 가장 깊은 중심이 되고, 그 사랑으로부터 모든 생각과 행동이 흘러나오는 상태를 말합니다. 천적인 사람은 먼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선을 행하며, 그 선 안에서 자연스럽게 진리를 지각합니다. 다시 말해 사랑이 진리를 이끌고, 삶이 신앙을 살아 있게 하는 상태가 바로 천적 상태입니다.

 

본문의 ‘the life of faith in the Lord’도 이러한 의미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서 life는 ‘생명’보다 ‘’으로 옮기는 것이 문맥에 더 잘 어울립니다. 스베덴보리가 자주 사용하는 ‘life of faith’, ‘life of charity’는 신앙이나 체어리티를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실제 삶으로 살아내는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표현은 ‘주님에 대한 신앙의 생명’보다 ‘주님에 대한 신앙의 삶’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의도를 더 정확하게 전해 줍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 신학의 중요한 특징이기도 합니다. 그는 참된 신앙은 반드시 삶으로 나타난다고 가르칩니다. 신앙은 단순히 교리를 인정하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믿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삶 속에서 비로소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그래서 그는 신앙과 삶을 결코 분리하지 않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이 천적이었다는 것은, 그들이 퍼셉션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선을 직접 받아들이며 살았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먼저 교리를 배우고 그것을 실천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선을 행하였고, 그 선 안에서 무엇이 진리인지를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후대의 영적 교회와 가장 크게 구별되는 특징입니다.

 

또한 말씀은 태고교회를 ‘하와’, 곧 ‘모든 산 자의 어머니’라고 합니다. 여기서 ‘산 자’는 육체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 영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모든 산 자의 어머니’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삶을 낳고 길러내는 교회를 상징하는 이름입니다.

 

AC.281은 태고교회를 단순히 최초의 교회로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 대한 사랑과 신앙의 삶이 하나였던 가장 순수한 교회의 모습을 우리에게 다시 보여줍니다. 그리고 ‘하와’라는 이름을 통하여, 참된 교회란 언제나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고, 그 생명을 실제 삶으로 살아내는 공동체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심화

 

1. ‘celestial

 

여기서 ‘천적(天的, celestial)은 단순히 ‘하늘에 속한’이라는 막연한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영적 상태를 구분할 때 ‘천적’과 ‘영적’을 서로 다른 단계로 사용합니다. 천적인 사람은 주님에 대한 사랑을 삶의 중심으로 삼고, 그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지각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천적이라는 말은 주님 사랑이 의지와 삶의 가장 깊은 중심을 이루는 상태를 뜻합니다.

 

천적 상태에서는 사랑과 신앙이 따로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천적인 사람은 먼저 무엇이 참인지 배운 뒤 그것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선을 행하고, 그 선 안에서 무엇이 참인지 지각합니다. 다시 말해 진리가 사랑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진리를 이끕니다. 이것이 천적인 사람과 영적인 사람을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차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를 천적 교회라고 부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선을 직접 퍼셉션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어떤 것이 선한지 논증하거나 교리를 통하여 확인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내적 지각, 그러니까 퍼셉션을 통하여 그것을 알고 기뻐하며 행했습니다. 그러므로 태고교회가 ‘천적이었다’는 말은 그들이 단순히 경건하거나 도덕적이었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 사랑으로부터 직접 살아가는 교회였다는 뜻입니다.

 

AC.281에서 태고교회를 ‘주님에 대한 신앙의 생명, 삶으로부터’ ‘하와’와 ‘모든 산 자의 어머니’라고 불렀다는 말도 이와 연결됩니다. 여기서 신앙의 삶은 단순히 교리를 믿는 생활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선이 실제 삶이 된 상태를 말합니다. 천적 교회에서 신앙은 지적 동의가 아니라 사랑 안에 살아 있는 진리였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는 ‘산 자’의 어머니, 곧 영적으로 살아 있는 모든 것의 근원으로 불릴 수 있었습니다.

 

천적 상태의 중심은 의지입니다. 천적인 사람, 곧 천적 인간에게서는 의지가 먼저 주님으로부터 새롭게 되고, 이해는 그 새로워진 의지를 섬깁니다. 그래서 그는 선을 알고 나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에 맞는 진리를 압니다. 반면 영적인 사람은 이해를 통하여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에 따라 의지가 새롭게 되는 순서를 거칩니다. 둘 다 주님으로부터 거듭나지만, 그 질서와 방식이 다릅니다.

 

또한 천적이라는 말은 감정이 풍부하다거나 온화하다는 뜻과도 다릅니다. 천적 사랑은 단순한 인간적 정서가 아니라 주님을 무엇보다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이웃의 선을 기뻐하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천적인 사람은 자기 사랑이나 감각적 기쁨을 중심으로 살지 않습니다. 그의 기쁨은 주님 뜻이 이루어지는 데 있고, 선이 실현되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태고교회의 후손들이 타락하면서 이 천적 상태는 점차 무너졌습니다. 퍼셉션은 약해지고, 사람은 감각과 자기 판단을 더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사랑이 진리를 이끄는 질서가 깨지고, 사람은 점차 외적 지식과 rational에 의존하게 되었습니다. AC.281은 바로 이러한 타락 이전의 본래 상태를 회고하면서, 태고교회가 얼마나 높은 천적 생명 안에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AC.281의 ‘celestial’은 주님에 대한 사랑이 인간의 가장 깊은 의지와 삶을 지배하고, 그 사랑으로부터 진리와 신앙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태고교회가 천적이었다는 것은 그들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직접 받아 살았으며, 신앙이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생명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 교회는 ‘하와’, 곧 생명을 낳는 교회이며, ‘모든 산 자의 어머니’라고 불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AC.280, 창3:20-24, ‘창3:20-24 본문, 개요’(AC.280-286)

창3:20-24 20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And the man [homo] called his wife’s name Eve, because she was the mother of all living.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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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0-24

 

20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And the man [homo] called his wife’s name Eve, because she was the mother of all living.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And Jehovah God made for the man and for his wife coats of skin, and clothed them. 22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And Jehovah God said, Behold, the man is become as one of us, knowing good and evil; and now lest he put forth his hand, and take also of the tree of lives, and eat, and live to eternity, 23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Therefore Jehovah God sent him forth from the garden of Eden, to till the ground from which he was taken. 24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And he cast out the man; and he made to dwell from the east toward the garden of Eden cherubim, and the flame of a sword turning itself, to keep the way of the tree of lives. (3:20-24)

 

개요

 

AC.280

 

태고교회와, 거기서 떨어져 나간 자들에 대하여 여기에서 간략히 다루고 있습니다. 또한 홍수 때에 이르러 마침내 소멸하게 된 그 후손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다루고 있습니다. The most ancient church, and those who fell away, are here summarily treated of; thus also its posterity down to the flood, when it expired.

 

 

해설

 

AC.280은 창3 전체에 대한 또 하나의 요약 결론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까지 창3을 한 남자와 한 여자의 범죄 이야기로 해석하지 않고, 태고교회(The Most Ancient Church)의 형성, 타락, 그리고 종말의 역사로 해석해 왔습니다. 여기서는 그 사실을 다시 한번 짧고 분명하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먼저 ‘태고교회’가 언급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태고교회는 인류 역사상 가장 순수하고 천적인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주님과 직접적인 교통 가운데 있었으며, 오늘날의 양심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퍼셉션(perception)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선과 진리를 추론(rational)을 통해 배우기보다 즉각적으로 지각하였고, 사랑을 중심으로 살아갔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떨어져 나간 자들’이 생겨났습니다. 이것이 창3의 핵심 주제입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악했던 사람들이 아니라 원래 태고교회에 속해 있었지만, 점차 자기 자신을 신뢰하기 시작, 감각적 사고를 따르기 시작하면서 본래의 상태에서 이탈하였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뱀, 선악과, 여인, 아담 등의 표상을 통해 바로 이 이탈 과정을 설명해 왔습니다.

 

또한 그는 창3이 단지 최초의 이탈 세대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후손들의 역사 전체를 압축적으로 담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그 후손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다루고 있다’ 말합니다. 다시 말해 창3에는 태고교회의 쇠퇴가 시작되는 순간뿐 아니라, 그 쇠퇴가 세대를 거쳐 확대되고 심화되는 과정까지 함께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그 종착점을 ‘홍수 때에 이르러 마침내 소멸하게 된’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소멸(expired)은 단순히 육체적 멸망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태고교회의 영적 생명이 완전히 끝난 것을 의미합니다. 처음에는 퍼셉션을 잃었고, 다음에는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을 잃었으며, 마침내는 선과 진리를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창6과 창7에서 묘사되는 홍수의 영적 의미입니다.

 

AC.280은 창3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를 제공합니다. 창3은 단순히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였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태고교회가 어떻게 주님에게서 멀어졌고, 그 후손들이 어떻게 점점 더 타락하여 마침내 홍수라는 종말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예언적 역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여기에서 간략히 다루고 있다’고 말합니다. 창3은 앞으로 창4부터 홍수 기사에 이르기까지 전개될 태고교회의 쇠퇴사를 씨앗 형태로 요약하고 있는 장인 것입니다.

 

 

 

AC.281, 창3:20-24, ‘창3:20 개요’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And the man [homo] called his wife’s name Eve, because she was the mother of all living. (창3:20) AC.281 천적 교회였던 태고교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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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79, 창3:19, ‘창3:14-19 절별 요약’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창3:19)AC.279그러므로 이 모든 구절을 연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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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장르(?)중엔 탈북민들이 하시는 유튜브가 있습니다. 대부분 초대받는 게스트들은 북에서 태어나 짐승보다 못한 삶을 사시다 천신만고 사선을 넘어 겨우 대한민국의 품에 안기신 이야기들입니다만... 가끔 북에서 나름 호의호식(?) 하시던 고위층들 중 북을 떠나야만 했던 불가피한 사정으로 대한민국에 들어와 여기서도 나름 호의호식(?) 하시는 분들이 있는데요, 이들의 태도나 이야기들을 시청할 때면 속에서 좀 거부감이 들 때가 종종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라면 이런 현실 속에 저런 사람들을 어떻게 대했을까요?

 

 

목사님께서 느끼시는 거부감은 충분히 이해할 만한 감정입니다. 탈북민 유튜브를 보다 보면, 극심한 굶주림과 억압, 인신매매와 강제노동, 가족의 죽음 같은 참혹한 일을 겪고 대한민국에 온 분들이 있는가 하면, 북한에서도 비교적 높은 지위와 특권을 누리다가 권력투쟁이나 숙청, 신변의 위협 같은 사정으로 탈북한 분들도 있습니다. 특히 후자의 경우, 북한에서 누리던 우월감이나 권력의식이 말과 태도 속에 남아 있는 듯 보이거나, 한국에 와서도 비교적 성공적인 삶을 사는 모습을 볼 때 마음속에서 거부감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라면 먼저 그 사람의 외적인 신분보다 내적인 사랑을 보았을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왕과 거지, 장군과 죄수, 고위층과 밑바닥 인생이 구분되지만, 사후에는 그런 외적인 조건이 모두 벗겨지고, 결국 남는 것은 그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며 살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북한의 고위층이었다는 사실 자체가 그 사람을 악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고,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 자체가 그 사람을 선하게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계급이나 이력보다 그 안의 사랑과 의도를 보십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서 과거의 자기 사랑과 지배욕이 여전히 강하게 드러난다면,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가볍게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이 누렸던 특권을 자랑하거나, 다른 사람을 은근히 낮추어 보거나, 권력의 언어와 우월의식을 버리지 못하는 모습이 반복된다면, 그것은 옛 사랑이 아직 살아 있다는 징후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입으로는 겸손한 말을 할 수 있지만, 그 말 속에 흐르는 정서와 사랑까지 숨기기는 어렵습니다. 따라서 목사님께서 느끼시는 거부감이 언제나 편견이라고만 할 수는 없으며, 때로는 그 사람 안의 어떤 정서를 감지하는 분별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의 최종 심판까지 우리가 맡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그가 실제로 얼마나 회개했는지, 내적으로 얼마나 싸우고 있는지, 두려움과 상처 속에서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겉으로 거만해 보여도 안에서는 깊이 자신을 낮추고 있을 수 있고, 반대로 겸손한 말만 하는 사람도 속으로는 자기 사랑으로 가득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악을 악이라고 분별하는 것과 그 사람 자체를 정죄하는 것은 구분되어야 합니다. 판단은 주님께 맡기되, 우리에게 보이는 태도와 정서는 냉정하게 살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목사님 안에서 올라오는 거부감은 억지로 없애기보다 바르게 다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감정이 분별에서 나온 것이라면 무조건 눌러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그것이 미움과 멸시로 자라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마음속으로 ‘저 사람에게 아직 버리지 못한 자기 사랑이 있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그 영혼은 주님께 맡깁니다’라고 정리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악을 모른 척하는 것도 아니고, 사람을 미워하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그 사람의 말과 태도를 오래 시청할수록 내 마음이 불편해지고 평화를 잃는다면, 굳이 계속 볼 필요는 없습니다. 영적 분별은 모든 것을 끝까지 지켜보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내 속 사람을 흐리게 하는지를 알아차리고 적절히 거리를 두는 데서도 나타납니다. 어떤 콘텐츠가 내 안의 분노와 혐오를 계속 자극한다면, 그 사람을 정죄하기보다 조용히 시청을 멈추는 것이 더 지혜로울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라면 이 거부감을 우리 자신을 비추는 거울로도 사용하게 했을 것입니다. 내가 저 사람에게서 무엇을 보고 거부감을 느끼는지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 사랑, 우월감, 지배욕,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이라면, 그 씨앗이 내 안에도 전혀 없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타인의 악을 분별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같은 악의 뿌리가 내 안에 있음을 발견하여 주님 앞에 내려놓을 때, 분별은 정죄가 아니라 겸손으로 이어지고, 자비와 진리가 함께 자라게 됩니다.

 

 

 

SC.102, ‘분도 요셉 라브르’

ChatGPT, 혹시 아래와 같은 책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나요? 아니요. 정확히 말씀드리면, ‘성 분도 요셉 라브르’라는 1957년 한국어 번역본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ChatGPT인 저 조차 이번에 목사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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