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14.심화

 

1. ‘상대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만 말하기

 

그들은 언제나 그 사람의 상태와 자유를 존중, 그가 진심으로 필요로 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만을 제공합니다. 천국에서는 모든 도움이 사랑에서 나오며, 사랑은 결코 상대방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습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천사들이 그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만 저세상에 관한 것들을 알려 준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주님의 섭리 전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AC.314 해설)

 

 

내가 알려 주고픈 말보다 상대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말을 어떻게 하면 분별할 수 있을까요?

 

 

AC.314에서 특히 주목할 표현은 영적 천사들이 사후의 영혼에게 그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만 저세상의 일들을 알려 준다는 말씀입니다. 이 짧은 표현은 천사들의 교육 방법일 뿐 아니라, 주님의 섭리 전체를 이해하는 중요한 원리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사람의 상태를 먼저 보시고, 그 상태에 맞는 만큼만 진리를 허락하십니다.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가능한 한 많은 지식이 아니라, 현재의 상태에서 생명이 될 수 있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이 원리는 말씀 전체에서 반복하여 나타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는 퍼셉션을 주셨지만, 홍수 이후 사람들에게는 양심을 통하여 인도하셨습니다. 유대교회에는 모독(profanation)을 막기 위하여 말씀의 깊은 속뜻을 감추셨고, 주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16:12)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사후 영계에 들어가서도 천사들은 한꺼번에 모든 것을 보여주지 않고, 그 영혼이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만 가르칩니다. 시대는 달라도, 지상과 영계를 막론, 적용되는 원리는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사람을 대할 때, 어떻게 상대가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를 분별할 수 있을까요? AC.314는 직접 방법을 설명하지는 않지만, 천사들의 태도를 통하여 중요한 원칙을 보여줍니다. 천사들은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부터 먼저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 영혼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먼저 살핍니다. 본문에도 그가 원한다면(if he desires it)이라는 조건이 먼저 나옵니다. 이는 진리를 전하는 사람은 자기의 지식보다 상대방의 갈망을 먼저 보아야 함을 뜻합니다. 상대가 지금 무엇을 궁금해하는지,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는지, 무엇을 찾고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 먼저입니다.

 

또한 천사들은 사람의 지능보다 그 사람의 내적 상태를 봅니다. 같은 진리를 들어도 어떤 사람은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은 거부합니다. 그 차이는 지식의 많고 적음보다 사랑의 방향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전할 때에는 상대가 얼마나 많이 아는가보다, 그의 마음이 열려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설명을 들을수록 더욱 겸손해지고 더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면 조금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 반대로 점점 방어적이 되거나 마음이 닫힌다면, 비록 내용은 옳더라도 아직은 그 분량이 아닐 수 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천사들은 언제나 한 걸음씩 인도한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천국의 모든 비밀을 다 보여주지 않습니다. 하나를 받아들이면 다음 하나를 열어 주고, 그 진리가 삶이 되면 다시 더 깊은 진리를 보여줍니다. 주님의 거듭나게 하심도 언제나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우리 역시 사람을 돕고 가르칠 때에는 한 번에 많은 것을 전하기보다, 지금 그 사람에게 가장 유익한 한 가지를 전하는 것이 오히려 주님의 방법에 더 가까울 수 있습니다.

 

결국 AC.314는 진리를 전하는 사람의 기준을 바꾸어 줍니다. 우리는 흔히 얼마나 많이 알려 주었는가’를 성공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천사들의 기준은 다릅니다. 그들은 얼마나 많이 말했는가’보다 상대가 얼마나 받아들일 수 있었는가’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방법입니다. 사랑은 상대를 자기 수준으로 끌어올리려 하지 않고, 상대가 서 있는 자리까지 내려와 함께 걸어갑니다. 그래서 주님의 섭리는 언제나 사람보다 한 걸음 앞서가지만, 결코 사람을 억지로 끌고 가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목회나 전도에서도 가장 어려운 일은 무엇을 말할 것인가가 아니라, 언제 말하고 어디까지 말할 것인가를 분별하는 일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분별의 기준을 지식의 양이나 논리의 완전성에서 찾지 않고, 상대방의 영적 상태와 수용 능력에서 찾습니다. 천사들조차 그렇게 섬긴다면, 우리 역시 사람을 변화시키려 애쓰기보다 먼저 그의 상태를 이해, 그가 오늘 받아들일 수 있는 한 걸음만 함께 걸어가 주는 것이 주님의 섭리에 가장 가까운 목회의 모습일 것입니다.

 

 

 

AC.314, 창3 뒤, ‘사람이 영생에 들어감에 관하여 (계속)’(AC.314-319)

사람이 영생에 들어감에 관하여 (계속) Continuation Concerning Man’s Entrance Into Eternal Life AC.314 되살아난(resuscitated) 사람, 곧 영혼이 주위를 둘러볼 수 있도록 빛의 사용이 허락되면, 앞에서 말한 영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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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영생에 들어감에 관하여 (계속) Continuation Concerning Man’s Entrance Into Eternal Life

 

AC.314

 

되살아난(resuscitated) 사람, 곧 영혼이 주위를 둘러볼 수 있도록 빛의 사용이 허락되면, 앞에서 말한 영적 천사들은 그 상태에서 그가 바라는 모든 것을 가능한 한 친절하게 도와줍니다. 또한 그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만 저세상에 관한 것들을 알려 줍니다. 만일 그가 살아생전에 신앙 가운데 있었고, 그것을 원한다면, 그들은 그에게 천국의 놀랍고도 장엄한 광경들을 보여줍니다. After the use of light has been given to the resuscitated person, or soul, so that he can look about him, the spiritual angels previously spoken of render him all the kindly services he can in that state desire, and give him information about the things of the other life, but only so far as he is able to receive it. If he has been in faith, and desires it, they show him the wonderful and magnificent things of heaven.

 

 

해설

 

AC.314는 사람이 사후 처음 의식을 회복한 뒤, 영적 천사들과 어떤 관계를 맺게 되는지를 매우 따뜻한 분위기로 묘사합니다. 앞선 글들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죽은 직후에도 여전히 사람이며, 천사들의 보호 아래 의식을 회복한다 설명하였습니다. 이제 여기서는 그 보호가 단순히 생명을 유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세계에 적응하도록 돕는 교육과 안내의 단계로 이어짐을 보여줍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빛의 사용이 허락되면’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은 단순한 자연계의 빛이 아니라, 영적 세계에서 사물을 분별하고 이해할 수 있는 의식의 빛을 뜻합니다. 사람은 사후 곧바로 모든 것을 완전하게 인식하는 것이 아닙니다. 앞선 AC.184에서는 희미한 빛 가운데 있었고, AC.185에서는 사랑과 애정이 보호되는 상태를 거쳤으며, 이제 AC.314에서는 비로소 주변을 둘러보고, 새로운 환경을 이해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른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는 영적 각성이 한 단계 더 진행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이때 곁에 있는 존재가 바로 영적 천사들입니다. 이들은 이미 AC.182 이하에서 등장하였던 천사들로, 사람이 두려움 없이 새로운 생명에 적응하도록 섬기는 역할을 맡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들이 ‘그가 바라는 모든 것을 가능한 한 친절하게 도와준다’고 말합니다. 이는 천사들이 일방적으로 지시하거나 명령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언제나 그 사람의 상태와 자유를 존중, 그가 진심으로 필요로 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만을 제공합니다. 천국에서는 모든 도움이 사랑에서 나오며, 사랑은 결코 상대방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습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천사들이 ‘그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만’ 저세상에 관한 것들을 알려 준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주님의 섭리 전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사람의 수용 능력에 맞추어 진리를 주십니다. 지나치게 많은 빛은 오히려 혼란을 가져오고, 아직 준비되지 않은 진리는 유익보다 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천사들은 새로운 영혼에게 천국과 영계의 모든 것을 한꺼번에 보여주지 않습니다. 마치 교사가 어린아이에게 그의 성장 단계에 맞추어 가르치듯이, 영혼의 내적 상태에 맞추어 조금씩 인도합니다.

 

이 원리는 지상에서의 계시와도 동일합니다. 주님께서는 태고교회에는 퍼셉션을 주셨고, 후대의 영적 교회에는 양심을 주셨으며, 유대교회에는 모독(profanation)을 막기 위해 말씀의 속뜻을 감추셨습니다. 이처럼 계시의 정도는 사람의 수용 능력에 따라 달라집니다. 사후에도 같은 원리가 계속 적용됩니다. 천사들은 사람의 이해력을 기준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사랑과 준비된 상태를 기준으로 가르칩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그가 신앙 가운데 있었고 그것을 원한다면’ 천사들은 그에게 천국의 놀랍고 장엄한 것들을 보여준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표현은 ‘그것을 원한다면’입니다. 천국에서는 강요가 없습니다. 천국을 보고 배우는 것조차도 사람의 자유로운 소망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천사들은 천국을 자랑하거나 억지로 설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사람 안에 이미 주님과 진리를 향한 사랑이 있다면, 그 사랑을 따라 자연스럽게 더 깊은 세계로 인도합니다.

 

또한 ‘신앙 가운데 있었다’는 말도 단순히 교리를 알고 있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앙은 언제나 삶과 결합된 신앙입니다. 살아생전 주님을 믿고 그 믿음에 따라 살기를 힘썼던 사람은 사후에도 같은 사랑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천국의 아름다움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그런 사랑이 없는 사람에게는 천국의 영광이 오히려 낯설고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천국은 누구에게나 같은 모습으로 보이는 장소가 아니라, 각 사람이 사랑하는 것에 따라 다르게 경험되는 세계입니다.

 

AC.314는 사후 세계가 갑작스러운 심판의 장소가 아니라, 주님의 자비로운 인도 아래 새로운 생명에 적응해 가는 과정임을 보여줍니다. 사람은 죽는 순간 홀로 내던져지는 것이 아니라, 영적 천사들의 따뜻한 돌봄 속에서 조금씩 빛을 받고, 조금씩 새로운 세계를 배우며, 자신의 상태에 맞는 만큼 천국을 경험하게 됩니다. 여기에는 서두름도 없고 강요도 없습니다. 오직 사람의 자유와 수용 능력을 끝까지 존중하시는 주님의 섭리가 천사들의 섬김을 통하여 조용하고도 질서 있게 이루어질 뿐입니다.  

 

 

심화

 

1. ‘상대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만 말하기

 

 

AC.314, 심화 1, ‘상대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만 말하기’

AC.314.심화 1. ‘상대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만 말하기’ 그들은 언제나 그 사람의 상태와 자유를 존중, 그가 진심으로 필요로 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만을 제공합니다. 천국에서는 모든 도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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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89, 창3 앞, ‘완만하게 위로 경사진 길’

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기 (계속) AC.189 그 후에는 완만하게 위로 경사진 길들이 보였는데, 이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과 자기 인식을 통해 그가 점차적으로 천국을 향해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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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3:24)

 

AC.313

 

여기서 첫 사람에 관하여 말한 것으로부터, 오늘날 존재하는 모든 유전악(hereditary evil)이 그 한 사람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일반적인 생각이 잘못되었음이 분명합니다. 여기서 사람(man)이라는 이름으로 다루어지는 것은 태고교회(the most ancient church)이며, 그가 아담(Adam)이라 불리는 것은 사람이 (adamah)에서 나왔기 때문이며, 다시 말해 사람이 아니었던 상태에서 주님에 의한 거듭남을 통하여 사람이 되었음을 뜻합니다. 이것이 아담이라는 이름의 기원이며, 그 의미입니다. 그러나 유전악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누구든지 실제로 죄를 범하면, 그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안에 하나의 본성(nature)을 형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본성에서 나온 악은 그의 자녀들에게 심겨 유전적인 것이 됩니다. 이 유전악은 아버지와 할아버지와 증조부, 그리고 그 이전의 조상들로부터 차례차례 내려오며, 세대를 거듭할수록 계속 더해지고 증대됩니다. 그래서 각 사람 안에 남아 있을 뿐 아니라, 그 사람이 스스로 범하는 실제의 죄들로 인해 더욱 커집니다. 그리고 이러한 유전악은 주님에 의해 거듭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결코 완전히 제거되어 무해한 상태가 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깊게 살펴보면, 부모의 악한 성향(inclinations)이 자녀들에게 분명히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며, 그 때문에 한 가문은 다른 가문과, 심지어 한 민족은 다른 민족과도 구별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이 진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From what is here said of the first man, it is evident that all the hereditary evil existing at the present day did not come from him, as is falsely supposed. For it is the most ancient church that is here treated of under the name of “man”; and when it is called “Adam,” it signifies that man was from the ground, or that from being nonman he became man by regeneration from the Lord. This is the origin and signification of the name. But as to hereditary evil, the case is this. Everyone who commits actual sin thereby induces on himself a nature, and the evil from it is implanted in his children, and becomes hereditary. It thus descends from every parent, from the father, grandfather, great-grandfather, and their ancestors in succession, and is thus multiplied and augmented in each descending posterity, remaining with each person, and being increased in each by his actual sins, and never being dissipated so as to become harmless except in those who are being regenerated by the Lord. Every attentive observer may see evidence of this truth in the fact that the evil inclinations of parents remain visibly in their children, so that one family, and even an entire race, may be thereby distinguished from every other.

 

 

해설

 

AC.313은 기독교 역사에서 오랫동안 널리 받아들여져 온 ‘오늘날 모든 유전악은 아담 한 사람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이해를 바로잡는 매우 중요한 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창세기의 ‘아담’을 인류 최초의 한 개인으로 해설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창세기에서 ‘사람(man)이라는 이름으로 다루어지는 것은 태고교회이며, ‘아담’이라는 이름 역시 주님께서 세우신 그 최초의 교회를 나타내는 표상적 이름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창세기 2장과 3장은 한 개인의 생애를 기록한 역사라기보다, 태고교회가 어떻게 주님에 의해 세워졌고, 어떻게 타락하였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또한 ‘아담’이라는 이름도 단순한 고유명사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이 이름은 ‘(adamah)과 관련되어 있으며, 사람이 본래 참된 사람이 아니었으나 주님에 의한 거듭남을 통하여 비로소 참된 ‘사람’이 되었음을 나타냅니다. 말씀에서 ‘사람’은 단순히 인간이라는 생물학적 존재를 뜻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새롭게 된 영적 인간, 곧 거듭난 사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아담’은 한 개인을 지칭하는 이름이라기보다, 주님께서 세우신 최초의 교회와 그 교회의 영적 상태를 나타내는 표상적 이름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스베덴보리는 유전악의 형성과 전승 원리를 설명합니다. 유전악은 단 한 사람의 죄가 모든 후손에게 법적으로 전가되는 것이 아니라, 각 세대 사람들이 실제로 행한 악이 그들의 성품을 형성하고, 그 성향이 자녀들에게 이어짐으로써 계속 축적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유전악은 인류 역사 속에서 세대를 거듭하며 쌓여 온 영적 유산입니다. 각 사람은 이미 수많은 조상들로부터 여러 형태의 유전악을 물려받아 태어나며, 거기에 자신의 실제 죄를 더함으로써 그 유전악을 더욱 강화합니다. 그래서 인류의 타락은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쳐 점점 깊어져 온 과정입니다.

 

이러한 설명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도 중요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만일 모든 사람이 단지 한 사람의 죄 때문에 정죄받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심판은 개인의 삶과 무관하게 이루어지는 셈이 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유전악과 실제의 죄를 분명히 구별합니다. 사람은 유전악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그것 때문에 곧바로 정죄받는 것은 아닙니다. 정죄는 그 유전악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사랑하며, 실제 삶 속에서 행할 때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사람은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성향 자체보다, 그것을 자신의 자유 가운데 어떻게 선택하고 살아갔는가에 대해 책임을 집니다.

 

또한 스베덴보리는 유전악은 사람의 힘만으로는 제거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교육이나 훈련을 통하여 외적인 행동을 어느 정도 절제할 수는 있지만, 유전적으로 내려온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뿌리 자체를 뽑아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에 의해 거듭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결코 무해하게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무해하게 된다’는 것은 유전악 자체가 완전히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것을 더 이상 사람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억제하시고, 새로운 의지와 새로운 생명으로 다스리신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다른 여러 글에서도 거듭난 사람에게도 유전악은 남아 있지만, 더 이상 그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주님의 질서 아래 놓이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누구나 확인할 수 있는 경험적 사실을 근거로 제시합니다. 부모의 성향이 자녀들에게 이어지는 것은 일상에서도 쉽게 관찰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한 가문이나 한 민족에서도 공통된 성향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이것을 단순한 육체적 유전 현상만이 아니라 영적 성향까지 포함한 유전으로 이해합니다. 물론 이것은 어떤 가문이나 민족이 본질적으로 더 우월하거나 더 열등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사람은 서로 다른 형태의 유전악을 가지고 태어나며, 그 누구도 자신의 혈통이나 타고난 본성으로는 참된 사람이 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결국 AC.313은 인간의 타락과 구원을 하나의 거대한 영적 역사 속에서 바라보게 합니다. 유전악은 아담이라는 한 개인의 죄가 기계적으로 전가된 결과가 아니라, 인류가 오랜 세월 실제의 악을 반복하여 선택함으로써 축적해 온 영적 유산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거듭남 역시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습니다. 유전악은 사람의 출발점일 뿐 최종 운명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거듭남을 통하여 각 사람 안에 새로운 생명을 심으시고, 그를 다시 참된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AC.313에서 밝히는 유전악과 구원에 관한 핵심 메시지입니다.

 

 

 

AC.312, 창3:24, ‘창3 마지막 절의 표현 하나하나’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4) AC.312 이 구절에서는 홍수 이전 사람들의 상태가 충분히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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