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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표면적으로는 ‘교회를 떠난 아들과 뒤늦게 깨닫는 장로’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들여다보면, 이것은 단순히 세대 갈등이나 교회 개혁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한 사람 안에서 ‘진리의 질서’가 ‘사랑의 질서’로 다시 태어나는 거듭남의 이야기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이란 잘못된 행동 몇 가지를 고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선과 진리를 바라보는 중심 자체가 바뀌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누구나 진리를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사실은 자신이 세워 놓은 질서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이 원고의 강인호 장로는 바로 그 지점에 서 있는 인물입니다. 그는 악한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누구보다 성실하고 충성스럽고 책임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반복하여 말하듯, 지옥은 악한 의도만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선이라고 믿는 것 안에 자기 자신을 섬기는 사랑이 섞여 있을 때도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악인과 선인의 대결이 아니라, ‘주님을 위한 신앙’과 ‘자신이 만든 신앙’을 구별해 가시는 주님의 섭리를 보여주는 과정입니다.

 

원고는 매우 의도적으로 ‘3040 세대가 조용히 사라진다’는 현실에서 시작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도 가장 흔히 듣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흥미로운 점은 이야기의 초점이 젊은 세대에게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카메라는 처음부터 끝까지 장로를 따라갑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조입니다. 우리는 흔히 ‘왜 젊은 사람들이 떠나는가’를 묻지만, 이 이야기는 ‘왜 남아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가’를 묻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은 자기 사랑 안에서만 세상을 본다고 말합니다. 즉, 자신이 사랑하는 것이 곧 자신의 눈이 됩니다. 그러므로 같은 교회를 보아도 청년은 다른 교회를 보고, 장로는 또 다른 교회를 봅니다. 문제는 누가 옳으냐가 아니라, 무엇을 사랑하느냐입니다.

 

강인호 장로는 처음부터 거의 완벽한 신앙인의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새벽기도 20년 개근, 가장 먼저 교회 문을 열고, 보일러를 켜고, 헌금을 관리하고, 회의록을 검토하고, 누구보다 책임감 있게 봉사합니다. 세상 기준으로는 본받을 만한 신앙인입니다. 실제로 이런 분들이 한국교회를 지탱해 온 것도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외적인 선행 자체를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 선행이 어디에서 흘러나오느냐입니다.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선인지, 아니면 자신의 proprium이 만들어 낸 질서인지는 오직 시험이 올 때 드러납니다. 시험이 없을 때는 둘 다 거의 똑같아 보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반드시 사람에게 시험을 허락하십니다. 시험이란 악인을 벌주는 시간이 아니라 선의 근원이 어디인지를 보여 주시는 시간입니다.

 

이 장로가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행동은 ‘항상 같은 자리에 앉는 것’입니다. 원고는 이것을 단순한 습관처럼 묘사하지만, 상응적으로는 훨씬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성경에서 ‘자리’는 단순한 의자가 아니라 상태를 의미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영적 상태를 사랑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과 판단이 가장 편안한 자리에 머무르려 합니다. 장로는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싸우지 않습니다. 대신 성경과 찬송가를 올려놓습니다. 겉으로는 신앙적인 행동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곳은 내 자리입니다’라는 무언의 선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자기애는 대개 매우 공손한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큰소리치지 않아도 자기 중심성은 충분히 작동합니다. 오히려 예의 바른 자기애가 더 깊고 교묘할 수도 있습니다.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반복해서 등장하는 ‘전통’입니다. 장로는 ‘전통을 지키는 것이 신앙’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라면 즉시 이렇게 질문할 것입니다. ‘무엇을 위한 전통인가?’ 전통은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생명을 희생시키면서 전통을 보존한다면 이미 전통은 껍데기가 됩니다. 천국에서는 질서가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그 질서는 사랑을 위한 질서입니다. 사랑을 억누르는 질서는 이미 천국의 질서가 아닙니다. 따라서 장로가 지키고 있던 것은 질서였지만, 주님이 세우시는 질서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질서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전도사의 청년부 개편안은 이야기 속에서 하나의 시험으로 등장합니다. 영상 설교, 소그룹, 청년들의 참여, 질문 가능한 구조 등은 원고 안에서는 단순한 프로그램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프로그램 자체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들을 수 있는가’입니다. 천국에서는 누구도 강요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자유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당회에서는 가장 먼저 ‘안 된다’는 결론이 내려집니다. 놀라운 것은 반대 이유가 악해서가 아니라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proprium의 특징이 드러납니다. 자기애는 언제나 자신을 정의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사람을 상하게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릅니다.

 

아들 도훈은 끝까지 아버지를 공격하지 않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틀린 분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한 문장은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진리는 사랑 없이 전달되면 닫히지만, 사랑 안에서 전달되면 스스로 사람의 양심 속에서 역사한다고 말합니다. 도훈은 아버지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 변화가 시작됩니다. 만일 아들이 아버지가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했다면 장로는 끝까지 방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것을 보고 있습니다라는 표현은 아버지의 양심을 건드립니다. 사랑은 언제나 방어막을 통과합니다.

 

이야기의 전환점은 손자의 질문입니다. 아빠는 왜 교회 안 가요?어린아이의 질문은 신학도 아니고 논쟁도 아닙니다. 그런데 장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어린아이는 천국에서 오는 순수한 상태를 상징한다고 설명합니다. 어린아이의 질문은 논리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진실만 요구합니다. 그래서 장로는 처음으로 자신 안의 모순을 마주하게 됩니다. 시험은 언제나 가장 순수한 질문의 형태로 찾아옵니다.

 

결정적인 장면은 아들의 카카오톡 메시지를 예배당에서 다시 읽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원고는 매우 아름다운 상징을 사용합니다. 인쇄된 종이를 성경책 안에 끼워 두었다는 것입니다. 상응적으로 이것은 인간의 경험이 말씀 앞에 놓이는 순간을 의미합니다. 이전까지 장로는 말씀으로 사람을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사람의 고통을 가지고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이 순서가 바뀌는 순간 거듭남은 시작됩니다.

 

카페입니까?라고 말했던 자신의 음성이 되돌아오는 장면은 심판의 장면입니다. 그러나 이 심판은 하나님이 정죄하시는 심판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마지막 심판이란 하나님이 사람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 앞에서 사람이 자기 자신을 보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장로는 처음으로 자기 말을 자기 귀로 듣습니다. 그래서 무너집니다.

 

그가 무릎을 꿇으며 드리는 기도는 이 이야기의 중심입니다. 주님, 제가 지킨 게 뭡니까? 교회입니까, 제 자리입니까?이 질문은 사실 모든 종교인에게 던져지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신이 만든 자리를 지키고 있는가. 스베덴보리는 모든 거듭남은 이 질문에서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proprium을 선이라고 믿는 동안은 결코 변화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드러나는 순간부터 주님이 실제로 역사하십니다.

 

이어 등장하는 시편 127편,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은 단순한 위로의 말씀이 아닙니다. 원고는 처음부터 끝까지 ‘세운다’는 이미지를 반복합니다. 장로는 교회를 세운다고 믿었습니다. 전통도 세우고, 질서도 세우고, 권위도 세웠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가서야 그는 자신이 세운 것은 구조였고, 주님이 세우시는 것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것이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신학적 전환입니다.

 

이후의 변화는 더욱 의미심장합니다. 장로는 갑자기 개혁가가 되지 않습니다. 새벽기도도 계속하고, 가장 먼저 교회 문도 엽니다. 달라진 것은 행동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입니다. 거듭남은 직업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중심이 바뀌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자신이 먼저 말했고, 이제는 가장 마지막에 말합니다. 이전에는 빨간 펜으로 수정했고, 이제는 검은 볼펜으로 청년들의 말을 적습니다. 이전에는 사람을 교회에 맞추려 했고, 이제는 교회가 사람의 마음을 들을 수 있도록 돕습니다. 외형은 거의 같지만 내면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장로가 결국 아들이 등록한 교회를 묻지 않는 장면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포용이 아닙니다. 그는 이제 교회를 자기 소유로 보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교회는 조직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 안에 있다고 반복하여 말합니다. 그러므로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면 됐다라는 장로의 마지막 마음은 비로소 보편교회의 관점에 가까워진 것입니다. 그는 자기 교회보다 주님의 교회를 먼저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원고를 읽으며, 한 가지는 분명히 구분해야 합니다. 이 이야기가 곧 청년들이 원하는 대로 교회를 바꾸어야 한다는 결론으로 읽혀서는 안 됩니다. 원고가 말하려는 핵심도, 스베덴보리의 가르침도 그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천국에는 엄격한 질서가 있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질서 자체가 아니라, 그 질서가 사람을 살리는 질서인가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청년들의 요구 역시 모두 옳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진리는 시대에 따라 변하지 않습니다. 다만 진리를 전달하는 사랑과 경청의 방식은 끊임없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이 원고가 진정으로 말하는 것은 전통을 버리라도 아니고,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라도 아닙니다. 먼저 들으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먼저 들으셨고, 들으신 후에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이 이야기의 제목은 ‘교회를 떠난 아들’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떠난 장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장로가 떠난 것은 교회가 아니라 자신의 proprium이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자신이 주님의 집을 세우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가서야 주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을 통해, 손자의 질문을 통해, 귤 한 봉지를 들고 찾아온 친구를 통해, 아들의 담담한 메시지를 통해 이미 집을 세우고 계셨음을 깨닫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섭리의 방식입니다. 주님은 거대한 기적보다 일상의 작은 사건들을 엮어 한 사람의 사랑의 질서를 바꾸십니다. 그래서 참된 거듭남은 언제나 밖에서 보면 아주 조용하지만, 하늘에서는 한 영혼의 세계가 완전히 뒤집히는 가장 큰 사건입니다.

 

 

 

SY.27,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나요?’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복음을 한 번도 듣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이 질문은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오래되었고, 동시에 가장 어려운 질문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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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을 한 번도 듣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이 질문은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오래되었고, 동시에 가장 어려운 질문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질문 앞에는 늘 여러 이름들이 함께 등장합니다. ‘조선 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이순신 장군은?’, ‘세종대왕은?’, ‘아마존 밀림의 원주민은?’, ‘이슬람 국가에서 태어나 평생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조차 듣지 못한 사람들은?’ 그리고 더 나아가 ‘태중에서 죽은 아이들’, ‘어린아이’, ‘지적 장애로 복음을 이해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하는 질문으로까지 이어집니다. 이러한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닙니다. 그 배후에는 언제나 더 근본적인 질문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정말 공평하신 분이신가?’ 만일 주님께서 사람마다 전혀 다른 환경 속에 태어나게 하셨다면, 그 환경의 차이가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인간의 깊은 고민이 이 질문 속에 담겨 있습니다.

 

이번 강의 역시 바로 그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강사는 먼저 하나님의 ‘’와 ‘공의’를 설명하며,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옳으신 분이므로 결코 불공평하게 심판하지 않으신다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는 창조 세계와 양심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일반계시’가 주어졌으며, 그 빛에 충실히 반응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특별계시’를 허락하신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누구에게도 불공평하지 않으며, 결국 모든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빛에 따라 심판받는다는 것이 강의의 핵심 논지입니다.

 

먼저 말해야 할 것은, 이러한 문제의식 자체는 매우 귀한 출발점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과연 어떤 분이신가를 묻지 않고서는 구원의 문제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그의 저작들인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하나님의 섭리(Divine Providence) 전반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설명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공의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법정의 공정함보다 훨씬 깊고 넓습니다. 그는 주님의 공의를 결코 자비와 분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공의와 자비는 하나님의 두 성품이 아니라, 하나의 신적 사랑이 나타나는 두 측면입니다. 인간은 흔히 ‘공정하게 심판하는 하나님’과 ‘사랑으로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서로 다른 모습으로 생각하지만, 스베덴보리에게서는 둘이 결코 갈라지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랑이시기 때문에 언제나 가장 공정하시며, 가장 공정하시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사랑을 거두지 않으십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공의를 말하면 쉽게 형벌을 떠올리고, 사랑을 말하면 쉽게 관용만을 떠올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공의는 사람을 벌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기 위해 존재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훈계하는 이유가 자녀를 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르게 성장시키기 위해서인 것처럼, 주님의 모든 심판 역시 사랑에서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의 섭리에서 주님은 단 한 사람도 지옥으로 보내기를 원하지 않으시며, 모든 사람을 천국으로 이끄시는 것이 신적 섭리의 영원한 목적이라고 반복하여 말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끝내 천국을 거부한다면, 그것은 주님께서 사랑을 거두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이 끝까지 자신의 사랑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이해하는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강의와 스베덴보리의 관점은 조금씩 갈라지기 시작합니다. 강의에서는 하나님의 공의를 설명하기 위해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라는 틀을 사용합니다. 창조 세계와 양심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 빛을 따라 하나님을 찾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복음이 전달된다는 것입니다. 고넬료에게 베드로가 보내지고,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빌립이 보내진 것이 그 대표적인 예로 제시됩니다. 이것은 분명 성경이 보여 주는 아름다운 섭리의 사례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에 훨씬 더 광대한 차원을 덧붙입니다. 그는 주님의 섭리가 인간의 지상 생애로 끝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특별계시는 반드시 지상에서만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죽음 이후에도 계속해서 사람을 가르치시고 인도하십니다.

 

이 사실은 스베덴보리 신학 전체를 이해하는 열쇠 가운데 하나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죽음을 모든 결정이 끝나는 마지막 순간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사람은 육체를 벗는 순간부터 비로소 자신의 참된 내면이 드러나는 세계로 들어갑니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과 비슷한 사랑을 가진 영들과 만나고, 천사들의 가르침도 받으며, 자신이 평생 사랑했던 것이 무엇인지 점점 분명하게 드러내게 됩니다. 따라서 지상에서 복음을 듣지 못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영원한 운명이 결정되는 일은 없습니다. 주님의 섭리는 인간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오래, 훨씬 더 세밀하게 역사합니다.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에서 스베덴보리가 가장 놀랍게 기록하는 내용 가운데 하나도 바로 이것입니다. 그는 수많은 이방인들과 직접 대화했다고 증언합니다. 그들은 지상에서 성경을 읽어 본 적도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역사적으로 알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선을 사랑했고, 거짓보다 진실을 사랑했으며, 이웃을 해치기보다 돕기를 원했습니다. 천사들이 그들에게 주님을 설명해 주었을 때, 그들은 오히려 기쁜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평생 사랑해 왔던 진리와 선이 바로 주님으로부터 나온 것이었음을 즉시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이러한 이방인들이 세상 교회 안에서 살면서도 자기애와 위선 속에 있었던 사람들보다 더 쉽게 천국의 삶을 받아들이는 경우를 여러 차례 기록합니다.

 

이 대목은 우리가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이라는 질문을 다시 생각하게 만듭니다. 어쩌면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일지도 모릅니다. ‘그 사람은 평생 무엇을 사랑했는가?’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은 지식을 시험 보는 장소가 아닙니다. 천국은 사랑의 나라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먼저 그 사람이 어떤 교리를 얼마나 많이 알고 있었는지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알고 있는 진리를 얼마나 사랑했으며, 그것을 삶으로 살려고 했는지를 보십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교회 밖에도 천국 백성이 많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사실을 설명하면서 매우 중요한 원리를 하나 제시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에게 결코 ‘가지지 않은 것’을 요구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참된 기독교를 관통하는 원리이기도 합니다. 사람마다 태어난 시대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며, 교육 수준이 다르고, 종교적 환경도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어려서부터 말씀을 가까이하며 성장하고, 어떤 사람은 평생 성경이라는 책의 존재조차 모른 채 살아갑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차이를 누구보다도 정확히 아십니다. 따라서 심판의 기준은 동일하지만, 그 기준이 적용되는 방식은 각 사람의 상태에 따라 완전히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주님의 무한한 섭리라고 설명합니다. 무한한 사랑은 획일적으로 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마다 가장 적절한 방식으로 인도하기 때문에 무한한 사랑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강의에서 반복되는 ‘주어진 빛에 따라 심판하신다’는 표현은 스베덴보리 안에서 훨씬 풍성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강의에서는 이 빛을 주로 창조 세계와 양심을 통하여 주어진 일반계시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은 단순한 자연의 증거가 아닙니다. 그는 빛을 언제나 ‘진리’와 연결합니다. 더욱이 그 진리는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인간의 사랑을 비추는 빛입니다. 그래서 같은 말씀을 읽어도 어떤 사람은 생명을 얻고, 어떤 사람은 오히려 더 깊은 자기 확신 속으로 들어갑니다. 차이는 말씀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랑에 있습니다. 말씀은 언제나 같은 빛이지만, 그 빛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상태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여기에서 스베덴보리가 자주 사용하는 ‘리메인스’라는 개념이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천국의 비밀에서 그는 리메인스를 주님께서 어린 시절부터 사람 안에 저장해 두시는 선과 진리의 모든 흔적이라고 설명합니다. 사람은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주님께서는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아이가 부모의 따뜻한 사랑을 받으며 느낀 순수한 기쁨, 거짓말을 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꼈던 순간, 누군가를 불쌍히 여겨 도와주고 싶었던 마음, 진실을 사랑했던 작은 선택들까지도 주님께서는 모두 보존하십니다. 이것이 리메인스입니다. 훗날 사람이 거듭날 수 있는 이유도, 천사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도, 사후 세계에서 새로운 진리를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도 모두 여기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는 사람 안에 천국의 씨앗을 먼저 심어 두신 뒤 평생 그것을 보호하시며 자라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에게 양심은 단순한 도덕 감각이 아닙니다. 강의에서는 양심을 거의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옳고 그름의 판단 능력으로 설명합니다. 물론 이것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양심을 훨씬 더 깊이 이해합니다. 참된 양심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가 사람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양심은 단순히 ‘이것은 나쁘다’고 말하는 마음속 목소리가 아니라, ‘주님께서 이것을 원하지 않으신다’는 내적인 감각입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도 이러한 양심은 형성될 수 있습니다. 비록 성경을 모르더라도 진실을 사랑하고, 정의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 역시 주님께서 역사하시는 통로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는 교회 밖 사람들의 선을 결코 가볍게 보지 않습니다. 다만 그 선 역시 궁극적으로는 모두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로마서 1장을 다시 읽으면 매우 흥미로운 차이가 나타납니다. 강의에서는 바울의 말을 따라 ‘창조 세계를 보면 누구나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점을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물론 바울은 분명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자연이 하나님을 직접 증명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연은 하나님의 신성을 직접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질서를 상응적으로 반영하는 세계입니다. 다시 말해, 해와 달과 별은 그 자체가 계시가 아니라 계시를 담는 그릇입니다. 자연 속의 질서를 보고 창조주의 질서를 깨닫는 사람도 있지만, 같은 자연을 보면서도 오히려 자연만을 절대화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조 세계는 인간 안에 있는 사랑과 결합될 때 비로소 계시가 됩니다. 자연은 언제나 같은 자연이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의 사랑은 결코 같지 않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변명할 수 없다’는 말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단순히 하나님을 몰라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이 되었기 때문에 진리를 거부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천국의 비밀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입니다. 악은 무지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왜곡된 사랑에서 시작됩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주님 사랑보다 위에 올라갈 때, 인간은 진리를 보아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무지는 원인이 아니라 결과입니다. 사람은 먼저 사랑을 잘못 선택하고, 그 결과 진리가 점점 보이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적 실명입니다.

 

이 점에서 강의가 강조하는 우상숭배도 조금 더 깊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강의에서는 조각상을 만들고 별과 해를 섬기는 것을 우상숭배의 대표적인 예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우상숭배를 훨씬 넓게 정의합니다. 사람 안에서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곧 우상입니다. 돈이 우상이 될 수도 있고, 명예가 우상이 될 수도 있으며, 학문이나 권력, 심지어 자신의 신학까지도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상은 나무나 돌로 만든 형상이 아니라 마음속 왕좌에 앉은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도 우상숭배는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으며, 반대로 교회 밖에도 진실을 사랑하는 마음은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시각입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강의를 들으며 자연스럽게 생기는 또 하나의 질문을 만나게 됩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왜 필요한가? 선하게만 살면 되는 것 아닌가?’ 스베덴보리는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교회의 존재를 누구보다 중요하게 여깁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단순히 사람 몇 명을 구원하기 위한 기관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위한 영적 심장과 폐의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천국과 지옥에서 말하는 ‘거대한 인간(Grand Man)의 개념처럼, 교회는 인류 전체를 향해 진리와 선을 순환시키는 중심 기관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없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존재 이유는 ‘교회 밖 사람은 모두 잃어버렸다’고 선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의 생명을 세상 전체에 흘려보내기 위해서입니다. 선교 역시 같은 의미를 갖습니다. 선교는 하나님의 사랑이 부족해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모든 사람에게 역사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인간이 기쁨으로 동참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선교 이해는 전통적인 개신교와 매우 다른 깊이를 보여 줍니다. 일반적으로 선교는 ‘복음을 모르기 때문에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구원받게 하는 일’로 설명됩니다. 물론 이것도 중요한 측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선교는 그보다 훨씬 더 큰 의미를 가집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온 인류를 향해 쉬지 않고 역사하고 계십니다. 어느 민족이든, 어느 시대이든, 어느 종교권이든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흐름이 끊어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선교사는 그 생명을 처음 만들어 내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역사하고 계시는 주님의 섭리에 기꺼이 동역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선교는 하나님의 사랑을 대신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참여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관점은 선교를 더욱 겸손하게 만들며, 동시에 더욱 절실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님께서 이미 일하고 계시는 밭으로 부름을 받는 것이지, 주님께서 아직 시작하지 않으신 일을 대신 시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강의에서는 고넬료와 에티오피아 내시를 특별계시의 대표적인 사례로 제시합니다. 이것은 성경이 분명히 보여 주는 아름다운 섭리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사건들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것입니다. 그는 이 사람들이 갑자기 선택된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주님의 섭리 안에서 준비되어 온 사람들이라고 설명할 것입니다. 고넬료는 이미 기도와 구제를 통하여 선을 사랑하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에티오피아 내시는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예루살렘까지 와서 하나님을 찾고 있었으며, 돌아가는 길에도 이사야서를 읽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특별계시는 아무에게나 갑자기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마음이 준비된 사람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시기 때문에, 먼저 사람 안에 진리를 향한 갈망이 형성되도록 인도하신 후 그 갈망에 가장 적절한 진리를 만나게 하십니다. 이것이 섭리의 방식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하나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환경’을 사용하시지만, 결코 ‘환경’에 사람을 묶어 두지 않으십니다. 인간은 흔히 환경을 운명처럼 생각합니다. ‘나는 기독교 국가에 태어나지 않았으니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었으니 책임이 없다’고 말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섭리가 환경보다 훨씬 깊다고 설명합니다. 사람은 환경의 산물이 아니라 사랑의 존재입니다. 환경은 사랑을 형성하는 하나의 도구일 뿐이며, 최종적으로 사람을 규정하는 것은 그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게 되었는가입니다. 그래서 같은 환경에서도 한 사람은 주님을 향해 열리고, 다른 사람은 더욱 자기 자신만을 향해 닫힙니다. 이것이 자유의 신비이며, 동시에 섭리의 신비입니다.

 

강의 후반부에서는 노아 시대와 소돔과 고모라, 그리고 바벨탑 사건이 반복해서 언급됩니다. 강사는 이 사건들을 통해 인류가 얼마나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해 왔는지를 설명합니다. 성경의 큰 흐름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설명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천국의 비밀을 읽고 나면 이 본문들은 전혀 새로운 깊이를 갖게 됩니다. 창세기의 초기 역사는 단순한 고대사의 기록이 아니라, 인간 영혼의 역사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노아 홍수는 단순히 물이 온 세상을 덮은 사건이 아닙니다. 말씀의 속뜻으로는 인간의 거짓과 악한 욕망이 영혼 전체를 뒤덮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원래 퍼셉션(perception)을 통하여 직접 주님의 인도를 받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점점 강해지면서 그 거룩한 인식을 잃어버렸고, 결국 거짓된 persuasion이 모든 것을 삼켜 버렸습니다. 이것이 홍수의 본질입니다. 그러므로 홍수는 단순한 형벌의 이야기가 아니라, 한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거듭남의 질서가 시작되는 이야기입니다. 주님께서는 심판을 위해 홍수를 허락하신 것이 아니라, 남아 있는 리메인스를 보존하여 새로운 교회를 세우기 위해 홍수를 허락하셨습니다. 심판 속에서도 언제나 중심은 구원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흔히 소돔을 특정한 죄의 상징으로만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소돔은 훨씬 근본적인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자기 사랑이 극도로 심화되어 선과 진리를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입니다. 외적인 죄는 그 내적 상태가 밖으로 드러난 결과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소돔을 읽을 때 중요한 것은 ‘저 사람들이 얼마나 악했는가’가 아니라 ‘내 안에도 주님의 음성을 거부하는 소돔은 없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말씀은 언제나 우리를 타인에게로 보내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의 마음으로 데려갑니다.

 

바벨탑 역시 같은 원리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바벨을 인간 문명의 교만으로 이해합니다. 물론 그것도 맞습니다. 그러나 천국의 비밀에서는 바벨을 ‘자기 이름을 높이려는 종교’로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위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영광을 위하는 종교가 바벨입니다. 이러한 바벨은 고대 메소포타미아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의 교회 안에도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습니다. 설교가 주님보다 설교자를 높이고, 교리가 주님보다 교단을 높이며, 신앙이 주님보다 자기 의를 높인다면, 그것이 바로 바벨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바벨을 역사 속 한 도시가 아니라 모든 시대의 영적 위험으로 읽습니다.

 

이러한 해석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강의를 듣다 보면 자연스럽게 ‘누가 구원받고 누가 구원받지 못하는가’에 관심이 집중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질문 자체를 바꾸어 놓습니다. 그는 ‘저 사람이 구원받는가?’보다 ‘나는 지금 어떤 사랑을 선택하고 있는가?’를 먼저 묻습니다. 이것이 말씀의 속뜻이 우리를 향하는 방식입니다. 말씀은 언제나 타인의 운명을 판단하는 책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강의의 후반부에서는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 같은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질문도 함께 다루어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궁금해하는 이유는 이해할 만합니다. 그들은 분명 훌륭한 삶을 살았고, 민족을 위해 헌신했지만, 역사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영원한 운명은 어떻게 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라면 이 질문 자체를 매우 조심스럽게 다룰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최종 상태를 아시는 분은 오직 주님 한 분뿐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람의 외적인 생애는 알 수 있지만, 그 사람의 가장 깊은 사랑과 양심, 그리고 주님께서 평생 동안 어떻게 섭리하셨는지는 결코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특정 인물이 천국에 있다거나 지옥에 있다고 단정하는 것은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영역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여러 영들을 만났다고 기록하면서도 개별 인물에 대해 극도로 신중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심판은 인간의 지식이 아니라 주님의 전지(全知)에 속한 일입니다.

 

이 점은 오늘날 우리의 신앙에도 매우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우리는 때때로 ‘저 사람은 구원받았을까?’, ‘저 사람은 구원받지 못했을 것이다’라는 판단을 쉽게 내립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러한 태도 자체가 인간을 말씀의 중심에서 벗어나게 만든다고 말합니다. 말씀은 다른 사람의 운명을 판정하는 책이 아니라, 내 자신의 사랑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심판자의 자리를 맡기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자신을 살피고, 악을 버리며, 이웃을 사랑하라는 삶을 맡기셨습니다. 결국 다른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추측하는 일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오늘 내가 주님께 더 가까워지고 있는가를 묻는 일입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선교의 필요성을 결코 약화시키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의 자비를 결코 좁게 만들지 않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려 합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크게 말하면 선교의 필요성이 약해질 것 같고, 선교를 강조하면 하나님의 자비가 좁아질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서는 이 둘이 서로 충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서로를 더욱 빛나게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선교를 명하십니다. 그리고 선교는 주님의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 사랑을 더 분명하게 알게 하는 은혜로운 통로입니다. 말씀을 직접 알고, 주님의 이름을 알고, 거듭남의 길을 분명히 배우는 것은 분명 큰 특권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특권이지, 다른 사람을 정죄할 권리가 아닙니다. 많이 받은 사람은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섬길 책임을 받을 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강의 전체를 하나의 더 큰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강사는 하나님의 공의를 변호하기 위해 애씁니다. 그리고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며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불공평하지 않으시다는 확신은 성경 전체가 증언하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 공의를 한 걸음 더 깊은 자리까지 이끌어 갑니다. 그의 눈에 하나님의 공의는 단순히 ‘공평하게 심판하시는 공의’가 아닙니다. 그것은 ‘단 한 사람도 잃지 않으려는 사랑의 공의’입니다. 주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의 환경을 아시고, 기질을 아시며, 받을 수 있는 진리의 정도를 아시고, 자유의 한계를 아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에게 가장 적절한 방식으로, 가장 적절한 시기에, 가장 적절한 진리를 허락하십니다. 어떤 이는 지상에서, 어떤 이는 사후 세계에서, 그러나 누구도 주님의 사랑 밖으로 버려진 채 방치되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보편적 섭리입니다.

 

이러한 스베덴보리의 구원론은 자칫 ‘모두가 결국 구원받는다’는 보편구원론으로 오해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스베덴보리의 사상을 정확하게 이해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인간의 자유를 강조합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천국으로 이끄시기를 원하시지만, 누구의 자유도 강제로 꺾지 않으십니다. 끝까지 자기 사랑을 사랑하는 사람은 결국 그 사랑을 따라 살 수 있는 공동체를 스스로 선택하게 됩니다. 그것이 지옥입니다. 반대로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랑과 같은 천국 공동체로 이끌립니다. 그러므로 천국과 지옥은 임의적인 선고가 아니라, 사람이 평생 자유 가운데 길러 온 사랑이 영원한 삶의 형태를 이루는 결과입니다. 이처럼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과 인간의 절대적인 자유를 동시에 붙들고 설명합니다. 어느 한쪽도 희생하지 않습니다.

 

결국 이 강의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볼 때, 가장 크게 달라지는 것은 질문의 방향입니다. 강의는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 질문을 더 깊은 질문으로 이끕니다. ‘주님은 과연 어떤 분이신가?’ 만일 주님께서 무한한 사랑 자체이시라면, 그 사랑은 어느 민족과 어느 시대도 제외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주님께서 무한한 지혜 자체이시라면, 사람마다 가장 적절한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만일 주님께서 무한한 공의 자체이시라면, 누구에게도 없는 것을 요구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주님께서 무한한 자비 자체이시라면, 사람이 마지막까지 자유롭게 천국을 선택할 수 있도록 평생, 그리고 사후 세계에서도 끊임없이 역사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라는 질문은 결국 ‘주님은 얼마나 크신 분이신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우리에게 보여 주는 주님은 인간의 교파나 국경 안에 갇혀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창세 전부터 모든 사람을 아시고, 세상 끝날까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며, 영원 속에서도 모든 사람을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교회는 그 사랑을 독점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증언하는 공동체이며, 선교는 그 사랑을 대신하는 일이 아니라 함께 기뻐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구원론은 하나님의 공의를 조금도 약하게 만들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그 공의를 무한한 사랑 안에서 이해하게 합니다.

 

결국 이 강의는 하나님의 공평함을 설명하려는 진지한 시도였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보면 우리는 그 공평함의 배후에 있는 훨씬 더 넓은 풍경을 보게 됩니다. 그 풍경의 중심에는 언제나 주님께서 계십니다. 사람을 정죄하기보다 살리기를 원하시고, 버리기보다 붙드시기를 원하시며, 한 영혼이라도 더 천국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지금 이 순간에도 쉼 없이 섭리하시는 주님 말입니다. 이러한 주님을 바라볼 때, 비로소 우리는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라는 질문 앞에서도 두려움보다 신뢰를 갖게 됩니다. 우리의 지식은 제한되어 있지만 주님의 사랑은 제한되지 않으며, 우리의 판단은 부분적이지만 주님의 섭리는 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평생의 저작을 통해 증언하고자 했던 하나님의 모습이며, 동시에 이 강의를 넘어 우리가 끝내 바라보아야 할 가장 큰 진리입니다.

 

 

 

SY.28, ‘이게 교회입니까, 카페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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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26, ‘인류 역사 최고의 성경 : 킹 제임스 스터디 성경’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이 영상은 단순히 ‘무료 성경을 나누어 준다’는 광고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들여다보면 훨씬 근본적인 질문이 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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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이 영상은 단순히 ‘무료 성경을 나누어 준다’는 광고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들여다보면 훨씬 근본적인 질문이 드러납니다. 그것은 ‘말씀을 안다는 것’과 ‘말씀으로 거듭나는 것’은 같은 일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화자는 성경을 더욱 깊이 공부하도록 돕기 위해 관주, 지도, 연대기, 성경사전, 교리 도표 등을 풍성하게 제공한다고 설명합니다. 실제로 이런 자료들은 성경의 역사적, 문헌적 이해를 돕는 유익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성경의 문자적 의미를 소홀히 하지 않았으며, 문자의 의미가 모든 영적 의미를 담는 그릇이라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따라서 성경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려는 태도 자체는 충분히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동시에 문자의 지식과 영적 지혜를 엄격히 구분합니다. 관주를 많이 알고, 연대기를 외우고, 지도와 도표를 이해한다고 해서 곧 말씀의 생명이 사람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은 단순한 역사책도, 교리집도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과 결합하시기 위해 준비하신 살아 있는 매개체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읽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아는가’가 아니라 ‘주님께서 이 말씀으로 내 안의 무엇을 고치려 하시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대로라면, 말씀은 먼저 인간의 의지와 사랑을 변화시키기 위해 주어진 것이지, 기억 속 지식을 늘리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영상에서 ‘공부를 해야 한다’, ‘성경을 파야 한다’는 강조도 같은 맥락에서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은 이해를 거쳐야 하지만, 이해는 반드시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연구는 출발점이지 목적지가 아닙니다. 성경을 수천 번 읽고도 자기애와 세상 사랑이 그대로라면 그는 말씀을 읽은 것이 아니라 문자만 읽은 것입니다. 반대로 학문적으로는 많이 알지 못해도, 매일 주님의 계명을 따라 악을 버리려 애쓰는 사람은 이미 말씀의 내적 의미 안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화자는 한국 성경에는 관주가 부족하고 미국 성경은 공부하기 좋게 만들어졌다고 비교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라면 진정한 관주는 성경 구절끼리 연결되는 것만이 아니라, 말씀과 인간의 삶이 연결되는 것이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는 단지 최초의 인물이 아니라 내 마음의 상태이며, 애굽은 단지 한 나라가 아니라 자연적 인간의 상태이고, 출애굽은 단지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죄의 종살이에서 벗어나는 거듭남의 과정입니다. 이러한 상응의 눈이 열리지 않는다면, 아무리 많은 참고 자료를 곁들여도 말씀은 여전히 역사책으로 머물 가능성이 큽니다.

 

특히 영상 후반부에서 사탄의 역사와 지옥을 설명하는 도표를 소개하면서 특정 정치 이념이나 집단을 직접 연결하는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다소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대목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기준은 특정 정치적 입장이나 사회적 소속이 아니라 사랑의 질입니다. 사람을 천국으로 이끄는 것은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며, 지옥으로 이끄는 것은 자기 자신만을 중심에 두는 사랑입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이념을 가졌는가보다 훨씬 근본적인 것은 그의 삶을 지배하는 사랑이 무엇인가입니다. 따라서 외적 범주만으로 영원한 운명을 단정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영계 묘사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영상 말미에 장례식 소책자를 무료로 제공하는 부분에서는 오히려 귀한 의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죽음 앞에 선 사람들에게 복음과 위로를 전하려는 마음 자체는 목회적으로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라면 장례의 위로를 단지 마지막 순간의 결단에 두기보다, 죽음 이후에도 계속되는 영적 삶과 주님의 지속적인 인도하심을 함께 전했을 것입니다. 그는 죽음을 끝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로의 깨어남이라고 설명하며,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가능한 한 천국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섭리하신다고 말합니다.

 

결국 이 영상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성경을 더 잘 연구하도록 돕는 다양한 도구는 귀하지만, 그 도구들이 인간을 거듭나게 하지는 않는다. 말씀의 참된 목적은 지식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의 사랑을 변화시키시는 데 있으며, 문자를 통해 속뜻으로, 속뜻을 통해 삶의 변화로 나아갈 때 비로소 성경은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SY.27,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나요?’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복음을 한 번도 듣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이 질문은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오래되었고, 동시에 가장 어려운 질문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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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25, ‘천국에서 가족을 만날 수 있을까? 성경이 밝히는 놀라운 진실’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첫머리부터 이 원고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질문을 매우 효과적으로 제기합니다. ‘천국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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