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40.심화

 

4. ‘29:35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가 그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출산이 멈추었더라 (29:35)

 

 

AC.340에서 스베덴보리가 창29:35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가 그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를 인용한 이유도 앞서 이스마엘, 르우벤, 시므온을 인용한 이유와 같습니다. 고대인들은 어떤 새로운 일이 생기거나 새로운 상태가 나타났을 때, 그 성질을 이름에 담아 표현했으며, 스베덴보리는 이 원리를 통해 창4의 ‘가인’이라는 이름 역시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그 이름으로 나타내는 교리의 성질을 담고 있음을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29:35에서는 이름과 그 이름을 붙인 이유가 본문 안에서 직접 연결됩니다. 레아는 넷째 아들을 낳은 뒤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고 말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의 이름을 ‘유다’라고 합니다. ‘유다’라는 이름은 ‘찬송하다’, ‘감사하다’라는 뜻의 히브리어와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유다’라는 이름에는 단순히 넷째 아들이라는 신분이 아니라, 그때 레아에게 있었던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는 상태가 담겨 있습니다.

 

특히 개역개정의 ‘이로 말미암아 그가 그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라는 표현은 AC.340에서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원리를 아주 잘 보여 줍니다. 먼저 어떤 상태가 있고, 그 상태를 말로 표현하며, ‘이로 말미암아’ 그에 맞는 이름을 붙입니다. 따라서 이름은 그 상태와 아무 관계 없이 임의로 정한 표지가 아니라, 그 상태를 한 이름 안에 담아 나타내는 역할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원리를 ‘가인’에게 적용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본래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을 사랑 안에서 퍼셉션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퍼셉션으로 알고 있던 신앙에 속한 것들을 따로 구별하여 하나의 신앙의 교리로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전에는 마음에 새겨져 있던 것이 이제는 지식으로 아는 것이 되었고, 그들은 그것을 마치 전에 없던 새로운 무엇을 발견하고 얻은 것처럼 여겼습니다. 그 상태를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고 표현했고, 그렇게 나타난 신앙의 교리를 ‘가인’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다와 가인이 나타내는 영적 의미가 같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유다의 속뜻을 가인의 속뜻과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이름을 붙이는 방식’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레아에게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는 상태가 있었고, 그 상태를 담아 ‘유다’라고 한 것처럼, 태고교회 안에서도 신앙을 하나의 독립된 교리로 얻었다고 여기는 상태가 생겼고, 그것을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곧 ‘가인’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보면 AC.340에서 이스마엘, 르우벤, 시므온, 유다를 연이어 제시한 의도도 더욱 분명해집니다. ‘이스마엘’에는 ‘여호와께서 들으셨다’는 것이, ‘르우벤’에는 ‘여호와께서 보셨다’는 것이, ‘시므온’에는 다시 ‘여호와께서 들으셨다’는 것이, ‘유다’에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는 것이 각각 이름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러 사례를 거듭 제시하면서, 말씀의 이름을 오늘날의 단순한 고유명사처럼 읽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특히 유다의 사례는 ‘가인’을 이해하는 데 한 가지를 더욱 선명하게 해 줍니다. 이름은 단순히 이미 존재하는 사람에게 나중에 의미를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태의 성질을 이름으로 표현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창4에서 ‘가인’이라는 이름을 만났을 때도 먼저 ‘가인이라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묻기보다 ‘왜 이것을 가인이라고 했는가?’, ‘이 이름에는 어떤 상태가 담겨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339에서 설명한 태고인들의 계보 작성 방식과도 이어집니다. 태고인들은 교회에 속한 것들에 이름을 붙이고, 그 이름으로 그것들의 성질을 나타냈습니다. 또한 하나가 다른 하나에게서 생겨나는 관계를 잉태와 출생과 자손과 계보의 형식으로 표현했습니다. 따라서 ‘하와가 가인을 낳았다’는 기록도 속뜻으로는 태고교회로부터 하나의 새로운 신앙의 교리가 생겨난 것을 나타내며, ‘가인’이라는 이름은 바로 그 교리의 성질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다의 사례를 가인과 나란히 놓으면 또 하나 흥미로운 사실이 보입니다. 이름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다는 사실 자체는 그 이름이 나타내는 상태가 선한지 악한지를 결정하지 않습니다. ‘유다’에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는 상태가 담기고, ‘가인’에는 신앙을 사랑에서 구별하여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상태가 담깁니다. 이름을 붙이는 형식은 같지만, 그 이름으로 나타내는 내용은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고대의 명명법은 어떤 특정한 교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상태와 성질을 이름에 담아 나타내는 하나의 표현 방식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유다’라는 이름의 속뜻 자체로 너무 깊이 들어갈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후반에서 유다와 그의 이름이 나타내는 것을 훨씬 더 깊게 다루지만, AC.340에서는 그것이 논점이 아닙니다. 여기서는 오직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는 말과 ‘유다’라는 이름이 직접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증거로 제시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야 독자가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는 말과 ‘가인’이라는 이름의 관계도 같은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창29:35 AC.340에서 인용한 이유를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레아가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는 자신의 상태를 표현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 아들의 이름을 ‘유다’라고 한 것처럼, 고대인들은 어떤 상태와 성질을 이름 안에 담아 나타냈습니다. 마찬가지로 ‘가인’이라는 이름에도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는 말로 표현된 태고교회의 어떤 상태가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본래 사랑 안에서 퍼셉션으로 알고 있던 신앙에 속한 것들을 따로 구별하여 하나의 교리로 만들고, 그것을 마치 새롭게 얻은 독립된 무엇처럼 인식하고 인정하기 시작한 상태입니다.

 

결국 스베덴보리가 유다의 이름까지 예로 든 목적은 ‘가인’이라는 이름을 읽는 법을 더욱 확실하게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유다’라는 이름 뒤에서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를 읽듯이, ‘가인’이라는 이름 뒤에서도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를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 뒤에서는 다시 태고교회 안에서 일어난 더 깊은 변화, 곧 마음에 새겨져 있던 신앙에 속한 것들이 사랑에서 구별되어 하나의 교리와 지식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변화를 읽어야 합니다. 이것이 창29:35 AC.340에서 하는 역할입니다.

 

 

 

AC.340, 심화 3, ‘창29:33’

AC.340.심화 3. ‘창29:33’ 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창29:33) AC.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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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29:33

 

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29:33)

 

 

AC.340에서 스베덴보리가 창29:33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를 인용한 이유는, 앞의 이스마엘과 르우벤의 경우처럼 고대인들이 어떤 이름을 붙일 때, 그 이름 안에 당시의 사건이나 상태, 그리고 그 상태의 성질을 담았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관심은 시므온의 속뜻 자체를 해설하는 데 있지 않고, ‘시므온’이라는 이름과 여호와께서 들으셨다’라는 말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29:33에서 레아는 자신이 야곱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처지에 있음을 말하면서,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아들의 이름을 시므온’이라고 합니다. ‘시므온’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어의 듣다’와 연결됩니다. 따라서 시므온’은 단순히 한 아이를 다른 아이와 구별하기 위해 붙인 이름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들으셨다’는 레아의 경험과 그때의 상태를 이름 안에 담아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앞 창29:32의 르우벤과 아주 비슷한 구조를 가집니다. 르우벤에서는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다’,  보셨다’는 것이 이름과 연결되고, 시므온에서는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다’는 것이 이름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는 이 사례들을 연이어 제시함으로써, 고대의 이름에는 그 이름으로 나타내고자 하는 어떤 성질이나 상태가 담겨 있었다는 사실을 점점 더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그리고 이것이 AC.340에서 중요한 이유는 결국 가인’이라는 이름 때문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본래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을 사랑 안에서 퍼셉션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퍼셉션으로 알고 있던 것들을 따로 구별하여 하나의 신앙의 교리’로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전에는 마음에 새겨져 있던 것을 이제는 지식으로 알게 되었고, 그것을 마치 새롭게 무엇인가를 얻은 것처럼 여겼습니다. 이 상태를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고 표현했고, 그렇게 나타난 신앙의 교리를 가인’이라고 한 것입니다.

 

따라서 시므온의 사례와 가인의 경우는 의미 자체가 같은 것이 아니라 이름을 붙이는 방식’이 같습니다. 시므온에게서는 여호와께서 들으셨다’는 상태가 먼저 있고, 그 상태를 시므온’이라는 이름에 담았습니다. 가인의 경우에는 신앙에 속한 것들을 따로 구별하여 하나의 독립된 교리로 얻었다고 여기는 상태가 먼저 있고, 그것을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는 말과 가인’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시므온은 무엇을 상징하는가?’라는 질문으로 곧바로 넘어가면 AC.340에서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한 직접적인 목적에서는 조금 벗어나게 됩니다. 물론 창세기 후반에서 스베덴보리는 시므온의 이름에 담긴 속뜻을 별도로 아주 깊이 해설합니다. 그러나 AC.340에서는 그 내용까지 다루려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는 오직 이름에는 그 이름을 붙이게 된 상태와 의미가 담긴다’는 원리를 보여 주는 증거로 시므온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특히 스베덴보리가 이스마엘, 르우벤, 시므온을 차례로 인용하는 것을 보면 하나의 공통된 형식이 더욱 또렷하게 드러납니다. 이스마엘은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다’, 르우벤은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다’, 시므온은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다’라는 말과 각각 연결됩니다. 이름이 먼저 있고, 나중에 임의로 뜻을 붙인 것이 아니라, 어떤 사건과 상태가 있었고, 그것을 나타내기 위해 그에 맞는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이것은 AC.339에서 설명한 태고인들의 이름과 계보를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인들이 교회에 속한 것들에 이름을 붙이고, 그 이름으로 그것들의 성질을 나타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창4에서 가인’, ‘에녹’, ‘이랏’, ‘므후야엘 같은 이름들이 이어질 때, 우리는 그것들을 단순한 개인들의 이름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으로 어떤 교리와 신앙의 모습을 나타내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AC.340의 여러 성경 인용은 바로 이러한 독법이 말씀의 이름 사용 방식과 동떨어진 것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또 한 가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듣다’라는 매우 일상적인 동사가 하나의 이름에 담긴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고대의 이름이 반드시 복잡한 신학적 개념을 직접 표현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어떤 사건 가운데 경험한 주님의 역사하심, 어떤 상태에서 느낀 것, 그때 일어난 중요한 일이 이름에 담길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들으셨다’는 경험이 시므온’이라는 이름이 되고, ‘여호와께서 보셨다’는 경험이 르우벤’이라는 이름과 연결됩니다.

 

이렇게 보면 하와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도 훨씬 자연스럽게 이해됩니다. 그 말은 단순히 가인을 낳고 한 감탄이 아니라, 속뜻으로는 태고교회 안에서 일어난 하나의 중요한 변화를 표현합니다. 이전에는 사랑 안에서 퍼셉션으로 알고 있던 신앙에 속한 것들을 따로 구별하여 교리로 만들고, 그것을 우리가 무엇인가를 얻었다’고 여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신앙의 교리를 가인’이라고 한 것입니다.

 

따라서 창29:33 AC.340에서 인용한 이유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시므온’이라는 이름에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다’는 상태와 의미를 담았듯이, ‘가인’이라는 이름에도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는 말로 표현된 태고교회의 어떤 상태가 담겨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결국 스베덴보리는 시므온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이름을 이름으로만 읽지 말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왜 이 이름을 붙였는가?’, ‘이 이름에 어떤 상태가 담겨 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원리를 가지고 다시 창4로 돌아가면 가인’이라는 이름은 한 개인의 호칭이 아니라, 본래 사랑 안에서 살아 있던 신앙을 따로 구별하여 하나의 교리로 세우고, 그것을 독립된 무엇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태고교회의 중대한 변화를 담고 있는 이름으로 읽히게 됩니다.

 

 

 

AC.340, 심화 2, ‘창29:32’

AC.340.심화 2. ‘창29:32’ 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창29:32) AC.340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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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9:32

 

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29:32)

 

 

AC.340에서 스베덴보리가 창29:32 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를 인용한 직접적인 이유는, 앞서 이스마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고대에는 이름을 단순한 호칭으로 붙인 것이 아니라, 그 이름으로 어떤 일이나 상태, 성질을 나타냈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 창4 가인’이라는 이름 역시 그 이름으로 나타내는 어떤 영적인 내용을 담고 있음을 설명하려는 것입니다.

 

르우벤의 경우에는 이 관계가 본문 안에 매우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레아는 야곱에게 라헬보다 사랑받지 못하는 처지에서 아들을 낳은 뒤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다’고 말하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합니다. ‘르우벤’이라는 이름에는 히브리어의 보다’라는 의미가 들어 있으며, 따라서 레아가 경험한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보셨다’는 사건과 그때의 상태를 그 이름 안에 담은 것입니다. 이름과 그것을 붙이게 된 이유가 서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AC.340에서 주목하는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그는 르우벤의 속뜻 자체를 여기서 해설하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태가 생김  그 상태를 말로 표현함  그 표현에 해당하는 이름을 붙임’이라는 고대의 명명 방식을 보여 줍니다. 29:32에서는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다’는 것이 먼저 있고, 그것을 나타내는 이름으로 르우벤’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을 창4의 가인에게 적용하면 AC.340의 논리가 훨씬 선명해집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본래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을 사랑 안에서 퍼셉션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신앙에 속한 것들을 따로 구별하여 하나의 교리로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전에는 마음에 새겨져 있던 것을 이제는 지식으로 알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이것을 마치 새로운 무엇을 얻은 것처럼 여겼고, 그 상태를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나타난 신앙의 교리를 가인’이라고 한 것입니다.

 

따라서 르우벤과 가인 사이에는 이런 공통된 구조가 있습니다. 레아에게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다’는 경험과 상태가 있었고, 그것을 르우벤’이라는 이름에 담았다면, 태고교회에서는 신앙에 속한 것들을 하나의 독립된 교리로 얻었다고 여기는 상태가 생겼고, 그것을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는 말과 가인’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르우벤의 사례를 통해 독자가 가인’이라는 이름도 이런 방식으로 읽도록 돕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점도 있습니다. ‘르우벤’과 가인’이 같은 영적 의미를 가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두 이름을 서로 상응시키는 것도 아닙니다. 르우벤은 여기서 오직 이름에 그 이름으로 나타내는 상태와 의미를 담는 고대의 방식’을 보여 주는 사례로 등장합니다. 따라서 AC.340의 관심은 르우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보다 왜 레아가 그 상태에서 아들의 이름을 르우벤이라고 했는가?’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예는 앞의 이스마엘보다 한 가지를 더 생생하게 보여 줍니다. 29:32에는 단순히 이름의 어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자신의 상태를 말하고  이름을 붙이는 과정이 한 절 안에 함께 나타납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339에서 스베덴보리가 설명한 잉태’, ‘출생’, ‘자손’, ‘이름’, ‘계보’의 원리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어떤 새로운 상태가 생겨나고, 그것이 밖으로 나타나며, 그 성질에 따라 이름을 붙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AC.339 AC.340은 서로 아주 긴밀하게 이어집니다. AC.339에서는 태고인들이 교회에 속한 것들에 이름을 붙이고, 하나가 다른 하나에게서 생겨나는 관계를 잉태와 출생과 계보로 표현했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AC.340에서는 이스마엘과 르우벤, 시므온, 유다, ‘여호와 닛시’를 실제 사례로 제시하면서 말씀 안에서 이름이 이렇게 사용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 결과 독자는 창4 가인’을 단순한 사람 이름으로 읽는 데서 벗어나, 그 이름에 담긴 교리의 성격을 볼 수 있게 됩니다.

 

특히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라는 레아의 말과 르우벤’이라는 이름의 관계를 이해하고 나면, 하와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와 가인’의 관계도 한결 자연스러워집니다. 하와의 말은 단순히 출산 후의 감탄사가 아니라, 속뜻으로는 태고교회 안에서 새롭게 구별하여 세운 신앙의 교리가 어떤 성격을 지녔는지를 표현하는 말이 됩니다.

 

그러므로 창29:32 AC.340에서 인용한 이유를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르우벤’이라는 이름에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다’는 상태와 의미를 담아 이름을 붙였듯이, ‘가인’이라는 이름에도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는 말로 표현된 상태가 담겨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가인의 경우 그 상태란, 본래 사랑 안에서 마음에 새겨져 있던 신앙에 속한 것들을 따로 구별하여 하나의 교리로 만들고, 그것을 마치 새롭게 얻은 독립된 무엇처럼 인식하고 인정하기 시작한 상태입니다.

 

결국 스베덴보리가 르우벤을 여기서 데려온 목적은 르우벤’을 설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인’을 읽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이름을 보거든 단순히 누구의 이름인가만 보지 말고, 왜 그 이름을 붙였으며 그 이름 안에 어떤 상태를 담았는지를 보라.’ 이것이 창29:32의 인용을 통해 AC.340이 우리에게 건네는 중요한 독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340, 심화 3, ‘창29:33’

AC.340.심화 3. ‘창29:33’ 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창29:33) AC.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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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0, 심화 1, ‘창16:11’

AC.340.심화 1. ‘창16:11’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창16:11) AC.340에서 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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