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01.심화

 

10. ‘profanation 관련 대표 구절들

 

스베덴보리의 저작 전체를 하나의 일관된 신학 체계로 읽는 관점에서 보면, 성경에는 profanation을 직접 또는 표상적으로 다루는 본문들이 생각보다 많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몇몇 본문은 스베덴보리의 교리를 이해하는 데 중심축이 되는 위치를 차지합니다. 각각의 본문은 서로 다른 시대와 문맥에서 기록되었지만, 모두 ‘거룩한 것을 알고도 그것을 악과 결합하는 상태’라는 하나의 영적 원리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본문은 창3:22-24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에덴동산에서 내보내시고,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칼로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신 사건은, AC.301 이하에서 profanation 교리의 출발점으로 해설됩니다. 여기서 그룹은 사람을 천국에서 쫓아내는 존재가 아니라, 사람이 더 깊은 거룩한 것에 들어가 그것까지 profanation하는 일을 막으시는 주님의 자비로운 섭리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창3은 성경 전체에서 profanation의 원리를 가장 먼저 표상으로 보여주는 본문입니다.

 

신약에서 이 원리를 가장 직접적으로 말씀하신 곳은 마12:31-32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 하셨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성령’은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신적 진리의 역사와 작용을 의미하므로, 성령을 모독한다는 것은 단순히 입으로 하나님을 욕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인정한 신적 진리를 의도적으로 거부하고, 악과 결합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신약에서 profanation을 가장 직접적으로 경고하는 본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이 교리를 매우 깊이 설명합니다. 히6:4-6에서는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을 말합니다. 또한 히10:26-29에서는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이라는 표현과 함께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를 말합니다. 두 본문 모두 공통적으로 먼저 거룩한 것을 알고 체험한 뒤 그것을 의도적으로 거스르는 상태를 말하고 있으며, 이는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profanation의 정의와 거의 일치합니다.

 

베드로후서와 누가복음도 같은 원리를 다른 각도에서 보여줍니다. 벧후2:20-22에서는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다’ 말합니다. 눅11:24-26에서는 더러운 귀신이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 이전보다 더 악한 귀신들과 함께 그 사람 안에 거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두 본문 모두 거룩한 것이 한때 사람 안에 들어왔으나 다시 악이 그것을 차지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으며, profanation의 영적 구조를 잘 보여줍니다.

 

구약의 예언서들 역시 이 주제를 반복해서 다룹니다. 겔22에서는 제사장들이 ‘내 성물을 더럽히며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지 아니하였다’ 책망받습니다. 말1에서는 더러운 제물을 주님의 제단에 드리는 일이 꾸짖음을 받습니다. 유1:4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방탕의 기회로 바꾸는 자들이 등장합니다. 이러한 본문들은 단순히 종교의식을 잘못 행한 것이 아니라, 거룩한 것을 자기 욕망과 결합시키는 상태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profanation과 깊이 연결됩니다.

 

이 모든 본문을 종합해 보면, profanation을 연구할 때 가장 중심이 되는 본문은 다섯 곳으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창3:22-24 profanation을 미리 막으시는 주님의 섭리를 보여주고, 마12:31-32는 성령을 모독하는 죄를 통해 그 원리를 직접 선언합니다. 히6:4-6과 히10:26-29는 이미 거룩한 것을 체험한 사람이 그것을 배반하는 상태를 설명하며, 벧후2:20-22는 알고 난 뒤 다시 악으로 돌아가는 위험을 경고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대표적인 본문들이 모두 하나의 동일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먼저 사람이 진리와 거룩한 것을 알고, 그것을 어느 정도 인정하거나 체험한 뒤, 마지막으로 그것을 악과 결합하거나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과정이 반복됩니다. 바로 이 구조가 AC.301에서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profanation의 본질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따라서 창세기의 그룹과 불칼, 주님의 성령 모독에 대한 경고, 그리고 히브리서와 베드로후서의 엄중한 권면은 각각 따로 떨어진 말씀이 아니라, 하나의 동일한 영적 원리를 여러 시대와 여러 방식으로 계시한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저작 전체를 하나의 일관된 신학 체계로 읽는 관점에 가장 부합하는 해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301, 창3:22, 두 번째 아르카나,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3:22) AC.301 또 하나의 아르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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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1, 심화 9, ‘성령 모독’(마12:31, 32)

AC.301.심화 9. ‘성령 모독’(마12:31, 32) 31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32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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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성령 모독(12:31, 32)

 

31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32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12:31, 32)

 

 

위 주님 말씀도 profanation 관련 말씀인가요?

 

 

네, 스베덴보리의 저작 전체를 하나의 일관된 신학 체계로 읽는 관점에서는, 12:31-32는 단순히 입으로 성령을 욕하는 죄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는 profanation을 가리키는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 이유는 먼저 주님께서 죄를 세 종류로 구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일반적인 죄입니다. 둘째는 사람을 향한 모독이나 인자를 거역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성령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앞의 두 가지는 용서받을 수 있지만, 마지막 것은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말의 강도가 더 세다는 뜻이 아니라, 죄의 성격 자체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성령’은 단순히 삼위일체의 한 위격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신적 진리의 역사와 작용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성령을 모독한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을 욕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인정한 신적 진리를 의도적으로 거부하고, 그것을 악과 결합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것이 바로 profanation의 정의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여러 저작에서 용서받지 못하는 죄’를 profanation과 연결합니다. 물론 주님께서 용서하시기를 거부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이 스스로 거룩한 것과 악을 하나로 결합해 버렸기 때문에, 그 상태에서는 회개와 분리가 거의 불가능해진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용서가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용서를 받아들일 내적 구조 자체가 무너진 것입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인자를 거역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는다’고 하신 말씀도 매우 중요합니다. ‘인자’는 말씀의 외적 모습, 곧 사람들이 아직 충분히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는 진리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무지에서 비롯된 반대나 오해는 회개와 함께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이미 사람 안에서 역사하고 있는 신적 진리입니다. 그것을 알고 인정한 뒤 의도적으로 거부하고 악에 이용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profanation이 발생합니다.

 

이 점은 창3:22-24와도 놀랍도록 연결됩니다. 주님께서 그룹과 두루 도는 불칼로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신 이유는 사람이 더 깊은 거룩한 것에 들어가 그것마저 profanation하는 일을 막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12:31-32는 그 원리를 교리적으로 말씀하신 것이고, 3:22-24는 그것을 역사적 표상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다시 말해, 창세기에서는 주님께서 profanation을 미리 막으시는 섭리를 보여주시고, 복음서에서는 이미 그것이 무엇인지를 직접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순간적으로 입에서 나온 거친 말 한마디를 뜻하지 않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수많은 사람이 영원히 소망이 없어질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이미 주님의 진리를 알고 인정한 사람이 그것을 끝내 악과 결합하여 자신의 삶의 도구로 삼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profanation이며, 주님께서 가장 경계하신 죄입니다.’

 

이렇게 보면 AC.301과 마12:31-32는 서로 다른 내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영적 원리를 각각 창세기의 표상과 복음서의 직접적인 가르침으로 드러낸 말씀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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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blasphemy profanation

 

이 둘은 서로 관련은 있지만 같은 개념은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는 둘을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blasphemy’는 보통 ‘신성모독’으로 번역됩니다. 이는 거룩한 것에 대해 욕하거나 모욕, 또는 하나님이나 말씀을 공개적으로 비방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주로 말과 행동의 차원에서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주님의 이름을 조롱하거나, 말씀을 모욕하거나, 거룩한 것을 악의적으로 비웃는 것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반면 ‘profanation’은 ‘거룩한 것의 모독’ 또는 ‘거룩한 것의 더럽힘’으로 번역되며, 스베덴보리 신학에서는 훨씬 더 깊은 개념입니다. 이는 단순히 거룩한 것을 욕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인정한 거룩한 것을 의도적으로 악과 결합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profanation은 말보다 삶과 의지의 상태에 관한 개념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무신론자가 하나님을 욕한다면, 그것은 blasphemy일 수는 있어도 반드시 profanation은 아닙니다. 그가 거룩한 것을 진심으로 인정한 적이 없었다면, profanation의 핵심 조건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이 목사이거나 장로로서 성경을 잘 알고, 주님의 진리를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자신의 탐욕이나 권력, 사기를 위해 이용한다면, 그는 겉으로는 하나님을 욕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룩한 것을 악과 결합하고 있으므로 profanation의 위험이 매우 큽니다.

 

가룟 유다가 좋은 예입니다. 그는 주님을 공개적으로 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며 입맞춤까지 했습니다. 겉으로는 존경을 표시했지만, 바로 그 거룩한 친교의 표를 배신의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blasphemy보다 훨씬 깊은 의미의 profanation을 보여줍니다.

 

성경에도 이 둘은 어느 정도 구별되어 나타납니다. 복음서에서 주님께서는 성령을 ‘모독하는 것(blasphemy against the Holy Spirit, 12:31-32)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히 입으로 욕하는 차원이 아니라, 인정한 신적 진리를 끝내 거부하고 악과 결합하는 상태, 곧 profanation과 깊이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따라서 성경의 ‘blasphemy’ 가운데는 스베덴보리의 의미로 보면 profanation을 포함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blasphemy’는 거룩한 것을 비방하거나 욕하는 행위, 즉, ’과 관련된 모독이라면, profanation’은 거룩한 것을 알고 인정하면서 그것을 악과 결합하는 내적 상태, 곧 ’과 관련된 모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profanation에는 어느 정도의 신성모독적 요소가 포함될 수 있지만, 모든 blasphemy profanation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특별히 두려워한 것은 후자였습니다. 왜냐하면 profanation은 사람의 가장 깊은 영적 차원에서 거룩한 것과 악이 하나로 섞이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창3:22-24에서 주님께서 그룹과 두루 도는 불칼로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신 근본 이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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