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25에서 특히 깊이 살펴볼 표현은 ‘태고교회는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다’는 첫 문장입니다. 오늘날의 신앙생활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먼저 말씀을 듣고,그것을 믿고,믿음에 따라 주님을 사랑하며 살아간다’는 순서가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에게는 그 순서가 달랐습니다. 그들은 주님에 대한 사랑을 가장 깊은 생명으로 가지고 있었으며, 그 사랑에서 진리를 지각했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먼저 논증하여 믿은 뒤 선을 행한 것이 아니라, 선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그 선에 속한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이것이 퍼셉션과도 직접 연결됩니다. 퍼셉션은 외부에서 배운 교리를 논리적으로 검토하여 결론을 내리는 능력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 안에서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내적으로 지각하는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태고교회에서는 사랑과 신앙을 서로 떼어 놓는 것 자체가 본래의 질서에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사랑 안에 진리가 있었고, 진리 안에는 그 진리를 낳은 사랑이 있었습니다. ‘사랑을 통하여 신앙하였다’는 말은 바로 이 하나 됨을 뜻합니다.
그런데 후손들에게서 이 천적 질서가 무너지면서 사람들은 사랑 안에서 진리를 지각하기보다, 진리를 사랑과 별개로 붙들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이 순간 ‘신앙에 관한 교리’가 독립적인 것이 되기 시작합니다. 교리가 생겼다는 사실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퍼셉션이 약해지는 사람에게는 진리를 가르치고 보존하기 위한 교리가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 교리가 사랑과 삶에서 분리되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믿는가’가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사는가’보다 우위에 서기 시작하는 데 있습니다.AC.325는 이 최초의 분리를 ‘가인’이라는 이름으로 표상합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교회를 돌아보게 하는 매우 강한 말씀입니다. 교리가 아무리 정교하고, 성경 지식이 아무리 풍부하며, 신앙 고백이 아무리 정확하더라도, 그것이 사람을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끌지 않는다면 가인의 원리가 다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이것은 교리를 가볍게 여기라는 뜻도 아닙니다. 아벨만 남기고, 가인을 없애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참된 질서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다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진리는 선을 섬기고, 신앙은 사랑을 표현하며, 사람이 아는 것은 그가 살아가는 것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따라서 창4의 첫 비극은 살인보다 먼저 일어났습니다. 아벨이 들에서 죽기 전에 이미 사랑과 신앙이 사람의 마음속에서 갈라졌습니다. 외적인 살인은 그보다 앞서 일어난 내적인 분리의 결과입니다. 이 점에서AC.325는 창4전체의 출발점을 매우 깊은 곳에 둡니다. 교회의 파괴는 밖에서 누군가 교회를 공격할 때, 먼저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진리가 선으로부터, 교리가 삶으로부터 분리될 때 이미 시작됩니다. 그리고 창4는 이제 그 작은 분리가 어디까지 진행될 수 있는지를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통하여 보여 주기 시작합니다.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vir], Jehovah.2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And she added to bear his brother Abel; and Abel was a shepherd of the flock, and Cain was a tiller of the ground. (창4:1-2)
개요
AC.325
태고교회는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한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를 ‘가인’(Cain)이라 하였고, 이웃을 향한 사랑인 체어리티를 ‘아벨’(Abel)이라 하였습니다. (1-2절)The most ancient church had faith in the Lord through love; but there arose some who separated faith from love. The doctrine of faith separated from love was called “Cain”; and charity, which is love toward the neighbor, was called “Abel.” (verses 1–2)
해설
AC.325는 창4의 속뜻을 이해하는 가장 기본적인 열쇠를 제시합니다. 창4의 가인과 아벨을 단순히 인류 최초의 두 형제에 관한 이야기로 읽는 데 머물지 않고, 태고교회 안에서 일어난 결정적인 영적 분리를 보여 주는 표상으로 읽게 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를, ‘아벨’은 이웃을 향한 사랑인 체어리티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후 전개되는 가인과 아벨의 관계는 단순한 형제 사이의 갈등이 아니라, 본래 하나였던 신앙과 사랑이 어떻게 분리되고, 마침내 신앙이 체어리티를 밀어내게 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교회의 영적 역사입니다.
첫 문장인 ‘태고교회는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습니다’는 특히 중요합니다. 여기서 ‘through love’를 단순히 ‘주님을 사랑하면서 믿었다’ 정도로 이해해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에게 사랑은 신앙에 덧붙여지는 하나의 덕목이 아니라 신앙의 근원이었습니다. 그들은 먼저 주님을 사랑했고, 그 사랑 안에서 무엇이 선이며 진리인지를 퍼셉션으로 지각했습니다. 다시 말해 사랑이 먼저이고, 신앙이 그 사랑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사랑과 신앙은 두 개의 독립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이것이 진리이므로 믿고, 그러므로 사랑해야 한다’는 순서보다 ‘주님을 사랑하므로 그 사랑 안에서 진리를 지각한다’는 천적 질서가 있었습니다.
이 점은 앞에서 살펴본 태고교회의 본성과 그대로 연결됩니다. 천적 인간에게는 의지와 이해가 하나를 이루고 있었으며, 선을 사랑하는 의지 안에서 진리를 지각하는 이해가 나왔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신앙은 오늘날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어떤 교리 내용을 지적으로 동의하고 인정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살아 있는 인식이었습니다. 그래서 AC.325의 ‘faith in the Lord through love’는 태고교회의 신앙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매우 압축적으로 보여 주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그러나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한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여기서 창4의 비극이 시작됩니다. 처음부터 신앙이 거짓이었던 것이 아닙니다. 신앙 자체는 참된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자신의 생명의 근원인 사랑에서 떨어져 나왔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나무에서 가지를 떼어 내는 것과 비슷합니다. 가지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줄기와 뿌리에서 분리되면서 생명을 잃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진리와 신앙은 선과 사랑 안에 있을 때는 살아 있지만, 그것들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독립적인 것이 되면 본래의 생명을 잃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것이 ‘가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을 단순히 ‘신앙’이라고 하지 않고,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라고 매우 정확하게 규정합니다. 이 구별은 앞으로 계속 기억해야 합니다. 창4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신앙 자체가 아니라 ‘분리된 신앙’입니다. 따라서 가인을 ‘악한 신앙’이라고 처음부터 단순화해서도 안 됩니다. 본래 교회 안에 있던 참된 신앙의 요소가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자기 스스로 서려 하기 시작한 상태가 가인입니다. 이후 그것이 점점 자신을 더 중요한 것으로 여기면서, 체어리티를 억압하고, 마침내 ‘아벨을 죽이는’ 단계까지 나아갑니다.
반면 ‘아벨’은 ‘체어리티, 곧 이웃을 향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체어리티는 단순한 친절이나 구제 활동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을 이웃에게 행하려는 사랑이며, 신앙이 실제 생명이 되게 하는 내적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가인과 아벨의 관계는 ‘교리와 선행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라는 단순한 경쟁 관계가 아닙니다. 본래 두 형제는 함께 있어야 합니다.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 있고, 체어리티는 진리를 통하여 무엇이 참된 선인지 분별합니다. 문제는 가인이 아벨과 함께 있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독립하려 했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AC.324에서 말한 ‘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온 교리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를 처음 보여 주는 사례이기도 합니다. 태고교회가 쇠퇴하면서 어느 날 갑자기 전혀 새로운 거짓 교리가 밖에서 들어온 것이 아니라, 본래 교회 안에 있던 하나의 요소인 신앙이 전체 생명인 사랑에서 분리되기 시작했습니다. 따라서 교회의 타락은 언제나 노골적인 거짓에서 시작되는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것의 일부를 전체에서 떼어 내어 그것만을 절대화하는 데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신앙은 참된 것이지만, ‘신앙만’이 되면 질서가 뒤집힙니다. 진리는 참된 것이지만, 사랑과 삶에서 떨어진 진리가 되면 점차 자기 지성과 자기 의를 섬기는 수단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proprium의 문제도 연결됩니다. 태고교회의 사람은 선과 진리가 모두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퍼셉션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기 시작하면,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를 점차 ‘자기의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나는 진리를 안다’, ‘나는 옳은 교리를 가지고 있다’, ‘나는 믿는다’는 의식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보다 앞서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되면 신앙은 주님께로 이끄는 수단이 아니라 자기 지성과 자기 의를 세우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가인의 길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가인’과 ‘아벨’을 단순히 ‘악과 선’으로 대응시키는 것은 아직 너무 이릅니다. 처음의 가인은 본래 교회의 신앙에서 나온 것이며, 아벨 역시 같은 교회 안의 체어리티입니다. 비극은 둘이 서로 다른 존재라는 데 있지 않고, 본래 하나여야 할 것이 분리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이 점을 붙들어야 앞으로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말씀의 속뜻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악이 선을 죽였다는 일반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자신을 교회의 본질로 높이면서 마침내 체어리티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게 되는 과정을 나타냅니다.
이번 설교는 앞서 살펴본 ‘하나님께 묻는 삶’보다 서사라 목사의 영성을 훨씬 더 깊은 곳까지 보여 주는 설교입니다. 첫 설교에서 중심이 ‘하나님께 묻고 응답을 받는 삶’이었다면, 이번에는 그 응답과 만남이 이루어지는 영적 장소를 ‘지성소’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설교자는 역대하 5장의 솔로몬 성전과 언약궤, 그룹들, 지성소를 출발점으로 삼아 성막의 뜰과 성소와 지성소를 기도의 깊이에 대응시킵니다. 그리고 회개 역시 뜰에서 이루어지는 회개, 성소에서 이루어지는 회개, 지성소에서 이루어지는 회개가 서로 다르다고 설명합니다. 그 가운데 가장 깊은 ‘지성소의 회개’는 단순히 죄를 고백하거나 눈물을 흘리는 회개가 아니라, 성령의 강한 역사로 죄를 깊이 깨닫고 그 죄에서 실제로 돌아서 다시는 그 죄에 지배되지 않게 되는 회개라고 말합니다.
먼저 이 설교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서 놀라게 되는 것은, ‘뜰-성소-지성소’라는 구조를 인간의 영적 깊이와 연결하려는 발상 자체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에게 매우 익숙한 방식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성막은 단순히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제사를 드리던 건축물이 아닙니다. 그 구조와 기구와 재료와 배치 전체가 천국과 주님, 그리고 거듭나는 인간의 내면을 표상합니다.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갈수록 더욱 내적인 것, 더욱 높은 천국의 것, 궁극적으로 주님에게 속한 것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서사라 목사가 성막을 설명하면서 ‘뜰에 머무는 신앙이 있고, 성소까지 들어가는 신앙이 있으며, 지성소까지 들어가는 신앙이 있다’는 식으로 영적 적용을 시도하는 것 자체는 스베덴보리의 상응적 성경 이해와 의외로 가까운 출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같은 출발점에서 곧 같은 길을 가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차이가 나타납니다. 서사라 목사는 이 구조를 주로 ‘기도의 깊이’와 연결합니다. 특히 방언으로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기도하면서 점점 깊이 들어가 마침내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경험적 구조를 제시합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근거로 한 시간 정도 기도하면 어느 단계까지 가고, 두세 시간 방언기도를 계속하면 지성소에 들어가는 경험이 나타날 수 있다는 취지로 설명하며, 이미 오래 훈련된 사람은 더 자주 그 상태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바로 여기에서 상당히 신중해집니다. 왜냐하면 성막의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본질적으로 ‘기도시간의 양적 증가’를 표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뜰에서 성소로, 성소에서 지성소로 들어간다는 것은 인간의 자연적 차원에서 영적 차원으로, 그리고 더욱 내적인 천적 차원으로 들어가는 질서를 나타냅니다. 이것은 몇 시간을 기도했느냐보다 인간의 사랑과 의지가 얼마나 주님에게로 돌이켜졌느냐와 관계됩니다. 한 시간 기도한 사람이 뜰에 있고 세 시간 기도한 사람이 지성소에 있다는 식의 공간적·시간적 대응은 스베덴보리의 상응 원리와는 상당히 다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장시간 기도 자체를 가볍게 볼 이유는 없습니다. 오랫동안 세상 생각에서 벗어나 마음을 주님께 집중하고, 자기 욕망과 잡념을 내려놓으며 기도하는 것은 분명 인간의 내면을 정돈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하나의 영적 공식으로 만드는 데 있습니다. ‘오래 기도하면 더 깊은 영적 공간에 들어간다’는 공식이 형성되면, 영적 상태의 깊이가 기도시간이나 체험의 강도로 측정될 위험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영적 깊이를 결정하는 것은 체험의 강도가 아니라 사랑의 질입니다. 천국의 가장 깊은 곳은 가장 강렬한 환상을 보는 사람이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 주님을 가장 깊이 사랑하고 그 사랑에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번 설교의 중심인 ‘회개’로 들어가면 서사라 목사와 스베덴보리 사이의 거리가 갑자기 상당히 좁아집니다. 설교자는 회개를 세 단계처럼 설명합니다. 첫 번째는 입술로 죄를 고백하지만 실제로는 그 죄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고 다시 반복하는 상태입니다. 두 번째는 정말 죄를 짓지 않으려고 결심하고 진심으로 회개하지만,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다시 넘어지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그가 ‘지성소에서 드리는 회개’라고 부르는 것은 성령의 빛 가운데 자기 죄의 실상을 너무나 깊이 깨닫고 통회하며, 그 결과 실제로 그 죄에서 벗어나 다시 그 죄에 지배되지 않는 상태입니다.
이 부분은 이번 설교에서 가장 귀하게 보아야 할 대목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회개는 감정이 아니라 삶의 변화로 확인되어야 한다’는 매우 중요한 통찰이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단순한 입술의 고백이나 순간적인 죄책감을 진정한 회개라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살피고, 자기 안에서 특정한 악을 발견하고, 그것이 하나님께 죄임을 인정하며, 주님께 도움을 구하고, 실제 생활에서 그 악과 싸워 그것을 피해야 합니다. 결국 회개의 진실성은 ‘얼마나 슬퍼했는가’보다 ‘그 악을 실제로 죄로 여기고 떠나는가’에서 드러납니다.
서사라 목사는 심지어 ‘눈물이 나오지 않으면 회개가 안 된 것이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진심으로 죄를 자백했다면 하나님의 용서를 믿어야 하며, 눈물이 나지 않았다고 해서 용서받지 못한 것이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중요한 균형입니다. 설교 전체에는 통곡과 강렬한 성령 체험이 상당히 강조되어 있지만, 적어도 눈물 자체를 구원의 조건이나 회개의 절대 기준으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야 합니다. 서사라 목사의 설명에서는 가장 깊은 회개가 이루어질 때 ‘회개의 영’이 강하게 임하고, 죄가 너무나 선명하게 보이며, 통곡이 터지고, 그 결과 그 죄를 다시 짓지 않는 능력이 주어진다는 구조가 나타납니다. 이것은 매우 강력하고 아름다운 회심 경험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사람에게 어떤 악의 추함이 갑자기 너무나 분명하게 보이고, 그것을 진심으로 혐오하게 되어 삶이 크게 바뀌는 순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거듭남 전체를 이 한 번의 강렬한 체험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거듭남은 대체로 훨씬 길고 깊은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악을 깨닫고 버리기로 결심했는데도 다시 넘어질 수 있습니다. 다시 일어나 싸우고, 또 넘어지고, 다시 주님께 도움을 구합니다. 그 과정에서 인간에게 숨어 있던 더 깊은 동기와 자기애와 세상 사랑이 차례로 드러납니다. 자신은 이미 어떤 악을 이겼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니 그 악의 더 깊은 뿌리가 남아 있음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진짜 회개를 했으면 다시는 그 죄를 짓지 않는다’는 표현은 회개의 지향점을 말하는 것으로는 매우 좋지만, 거듭남의 실제 과정을 설명하는 명제로 사용하면 지나치게 단순해질 수 있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에게 매우 중요한 것은 ‘싸움’입니다. 악을 제거하시는 분은 주님이시지만, 인간은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는 것처럼 악과 맞서야 합니다. 이것이 영적 유혹입니다. 그리고 싸움이 반복되면서 이전에 즐거웠던 악이 점차 싫어지고, 처음에는 힘들게 행했던 선이 점차 자연스러워집니다. 결국 주님께서 인간의 사랑 자체를 바꾸십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이기는 능력이 단번에 외부에서 주입되는 것처럼 설명하기보다, 주님께서 인간의 자유와 이성 안에서 끊임없이 역사하시며 그의 사랑의 질서를 바꾸어 가신다고 보는 것이 더 스베덴보리적입니다.
여기서 ‘지성소’의 의미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서사라 목사에게 지성소는 상당히 체험적인 공간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때로는 자신의 영이 하나님의 영과 함께하는 것을 경험하는 곳처럼 묘사됩니다. 설교 후반에는 자신이 하나님께 ‘얼굴을 보여 달라’고 구했던 개인적 체험까지 언급합니다.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본질이 사랑임을 깨달았다는 취지로 이야기합니다.
여기에는 매우 아름다운 결론과 조심해야 할 과정이 함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결론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거나 어떤 영적 형상을 경험했다는 문제에서는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훨씬 세밀해집니다. 영계에서는 모든 것이 상응을 따라 형상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영적 상태에서 빛이나 얼굴이나 인물이나 장소를 보았다고 해서, 그 보이는 형상을 곧바로 하나님의 본체 자체와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영적 경험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질 수 있지만, 그 경험을 해석하는 문제는 별개의 단계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서사라 목사의 천국·지옥 체험을 살펴볼 때 매우 중요할 것입니다. ‘무언가를 보았다’와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정확히 안다’는 서로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구별을 할 수 있는 매우 독특한 자료를 제공합니다. 영계의 현상 자체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영계에서 보이는 것들이 어떻게 상응을 따라 나타나는지, 영들이 어떻게 자신을 드러내는지, 인간이 그 경험을 어떻게 오해할 수 있는지를 매우 상세하게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서사라 목사의 체험을 처음부터 ‘거짓이다’라고 배척할 필요도 없고, 반대로 ‘직접 보았다니 그대로 사실이다’라고 받아들일 필요도 없습니다.
이번 설교에서 방언기도를 다루는 부분 역시 같은 원칙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설교자는 로마서 8장의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는 말씀을 장시간 방언기도와 연결하며,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모르더라도 성령께서 자신을 위해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신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방언기도 시간을 늘려 갈 것을 상당히 강하게 권합니다. 여기에는 ‘내가 하나님의 뜻을 다 알지 못한다’는 겸손한 전제가 있습니다. 이것은 앞 설교의 ‘하나님께 묻는 삶’과도 연결됩니다. 인간의 지혜보다 하나님의 지혜가 높으므로 자기 판단만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만 로마서 8장의 이 구절을 곧바로 장시간 방언기도의 기술적 근거로 연결하는 것은 별도의 해석적 검토가 필요합니다. 더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바울서신은 창세기와 출애굽기, 복음서, 계시록처럼 연속적인 속뜻을 가진 말씀의 범주와 동일하게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번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로마서의 한 구절에서 영적 세계의 구조를 세밀하게 끌어내기보다, 서사라 목사가 이 구절을 통해 말하려는 핵심, 곧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알지 못하므로 성령의 도움을 구해야 한다’는 원리를 중심으로 받아들이는 편이 더 적절합니다.
그리고 이번 설교에서 제가 가장 주목하는 대목은 사실 ‘지성소 체험’도 ‘방언 세 시간’도 아닙니다. 그것은 설교자가 성소 단계의 회개를 설명하면서 ‘나는 정말 다시는 화를 내고 싶지 않았는데 또 화를 내고 말았다’는 식으로 인간의 연약함을 말하는 부분입니다. 바로 여기에 거듭남의 실제 현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선을 원하지만 옛 욕망이 다시 일어납니다. 진리를 알고 있지만 그것대로 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기 힘의 한계를 경험합니다. 서사라 목사는 이것을 ‘자기 절망’이라고 표현하는데, 이 대목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인간은 거듭나는 과정에서 자기 힘으로는 악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배웁니다. 처음에는 ‘내가 결심하면 되겠지’라고 생각하지만 실제 싸움에 들어가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이 절망의 목적은 인간을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proprium에 대한 신뢰를 꺾는 것입니다. ‘내가 선해질 수 있다’는 자기 의를 내려놓고, 선의 능력이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실제 경험으로 배우게 됩니다. 이 점에서는 서사라 목사가 말하는 ‘자기 절망 → 성령의 도움 → 죄를 이기는 능력’이라는 흐름과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 사이에 상당히 의미 있는 접점이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여기에 ‘리메인스’, ‘유혹’, ‘자유’, ‘이성’, ‘선과 진리의 결합’이라는 훨씬 긴 과정을 더합니다. 인간의 변화는 어느 순간 강력한 영이 임하여 이전의 악을 단숨에 없애는 사건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주님께서 저장해 두신 선과 진리의 상태들, 이후 받아들인 말씀의 진리들, 삶에서 겪는 수많은 영적 싸움들이 서로 연결되면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지성소는 어떤 황홀한 영적 경험의 ‘최종 방’이라기보다,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서 주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을 표상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훨씬 깊습니다.
그렇게 보면 이 설교에서 말하는 ‘뜰-성소-지성소’를 조금 다르게 다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뜰은 아직 외적인 종교생활에 가까운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라고 하니까 죄라고 하고, 회개하라고 하니까 회개하지만 아직 그 진리가 자기 내면의 사랑과 충분히 연결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성소로 들어가면 진리가 인간의 이해성과 양심에 들어옵니다. ‘이것은 정말 악이다. 나는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진심으로 깨닫고 싸우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지성소에 해당하는 더욱 내적인 상태에서는 그 진리가 단지 ‘해야 할 의무’에 머무르지 않고 사랑과 결합합니다. 이제 악을 피하는 이유가 벌이 두렵거나 명령을 받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악 자체가 주님을 거스르고 이웃을 해치는 것이어서 싫어집니다. 반대로 선은 명령받았기 때문에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선 자체가 좋아집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서사라 목사가 말하고 싶었던 ‘지성소의 회개’도 오히려 더욱 깊어집니다. ‘한 번 크게 울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게 되었다’보다 더 깊은 변화가 됩니다. 악을 사랑하던 사람이 악을 싫어하게 되고, 선을 억지로 행하던 사람이 선을 사랑하게 되는 것, 이것이 거듭남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외적 행동 하나가 고쳐지는 것을 넘어 그 행동을 낳던 애정 자체가 바뀌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첫 번째 설교와 두 번째 설교가 하나로 연결됩니다. 첫 설교에서는 ‘하나님께 물어라’였습니다. 이번 설교에서는 ‘지성소까지 들어가 하나님을 만나라’입니다. 두 설교 모두 서사라 목사의 영성에서 매우 강한 한 특징을 보여 줍니다. 신앙을 하나님에 관한 지식으로 머물게 하지 않고, 실제 하나님과의 교통과 경험으로 가져가려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의 설교가 많은 사람에게 강하게 다가가는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신 교리적 대상이 아니라 지금 묻고, 듣고, 만나고, 경험할 수 있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놀랍게도 하나님을 추상적 교리 안에 가두지 않습니다. 인간의 모든 순간에 주님에게서 생명이 흘러들어오고 있으며, 천국 전체가 주님의 신성으로 살아 있고, 인간은 그 인플럭스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런 점에서는 둘 사이에 매우 깊은 공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 ‘만남’을 특별한 체험에 집중시키지 않습니다. 주님과의 가장 깊은 결합은 무엇을 보고 듣는 데 있지 않고, 주님의 선과 진리가 인간의 의지와 이해성 안에 받아들여져 그의 삶이 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설교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으로 압축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서사라 목사가 말하는 ‘지성소까지 들어가라’는 권면의 방향은 귀하지만, 그 지성소를 ‘장시간 방언기도 끝에 도달하는 특별한 영적 체험의 장소’로 이해하기보다 ‘주님의 선과 진리가 인간의 가장 깊은 사랑에까지 들어가 그의 삶을 변화시키는 상태’로 이해할 때 그 의미가 더욱 깊어집니다.
그러면 ‘지성소에서 드리는 회개’도 달라집니다. 그것은 가장 많이 울어 본 회개도 아니고, 가장 강렬한 임재를 체험한 회개도 아니며, 가장 오래 방언기도한 사람이 도달하는 회개도 아닙니다. 자신의 악을 주님 앞에서 죄로 인정하고, 주님의 힘을 의지하여 실제 삶에서 그것을 피하며,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 싸우고, 그렇게 오랜 거듭남을 통하여 마침내 이전에 사랑하던 악을 싫어하고 이전에는 억지로 행하던 선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변화된 사랑 안에서 주님과 인간이 결합합니다.
그 의미에서 서사라 목사의 이 설교에는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무언가를 잘라내기보다 한 단계 더 깊게 가져갈 수 있는 내용이 상당히 많습니다. ‘회개는 실제로 죄에서 돌아서는 데까지 가야 한다’, ‘자기 힘으로는 그것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신앙은 외적인 종교행위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중심 메시지는 귀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다만 ‘뜰-성소-지성소’를 기도시간과 체험의 단계로 고정하고, 강렬한 회개 체험이 곧 악의 완전한 제거를 보증하는 것처럼 이해하는 부분에서는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상응과 거듭남의 질서가 중요한 보완을 제공합니다.
결국 성막의 가장 깊은 곳에 언약궤가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아름다운 표상입니다.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해야 할 것은 ‘내가 무엇을 보았는가’, ‘얼마나 오래 기도했는가’, ‘얼마나 강한 체험을 했는가’가 아니라 주님의 선과 진리입니다. 그 선과 진리가 인간의 가장 깊은 사랑 안에 자리 잡고, 거기에서부터 생각과 말과 행동을 다스리기 시작할 때, 비로소 성막 전체가 주님의 거처가 되어 갑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지성소에 들어간다’는 말의 가장 깊고도 실제적인 의미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