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사후, 죽음에서 깨어나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기 The Resuscitation Of Man From Death, And His Entrance Into Eternal Life

 

AC.180

 

머리맡에 앉아 있던 천적 천사들은 제가 마치 소생된 것 같은 뒤에도 얼마 동안 저와 함께 머물렀으나, 그들은 다만 묵묵히 교통할 뿐이었습니다. 그들의 사유적 말로부터 지각된 바에 따르면, 그들은 모든 오류와 거짓들을 아주 가볍게 여기고 있었으며, 그것들을 조롱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마치 전혀 개의치 않는 것처럼 미소 지으며 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말은 소리가 없는 사유의 말이며, 이와 같은 방식의 언어로 그들은 처음 함께 있는 영혼들과 교통을 시작합니다. The celestial angels who sat at the head remained with me for some time after I was as it were resuscitated, but they conversed only tacitly. It was perceived from their cogitative speech that they made light of all fallacies and falsities, smiling at them not indeed as matters for derision, but as if they cared nothing about them. Their speech is cogitative, devoid of sound, and in this kind of language they begin to speak with the souls with whom they are at first present.

 

 

해설

 

이 단락은 천적 천사들의 ‘정서적, 지적 태도’가 어떠한지를 매우 인상적으로 드러냅니다. 앞선 단락들에서 우리는 천적 천사들이 보호하고, 결합하고, 인도하는 역할을 보았는데, 여기서는 그들이 ‘진리와 오류를 대하는 방식’이 어떠한지가 직접적으로 묘사됩니다.

 

가장 먼저 주목할 점은, 이 천사들이 소생 이후에도 잠시 머물렀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천적 천사들의 역할이 단지 ‘죽음의 문턱’을 넘기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소생 직후의 매우 연약한 상태까지 포함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교통 방식은 여전히 ‘묵묵한’ 상태, 곧 소리 없는 사유의 교통입니다. 이는 아직 말과 개념의 차원으로 내려갈 때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특히 중요한 대목은, 천적 천사들이 ‘오류와 거짓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그들은 오류를 공격하거나 반박하지도 않고, 경멸하거나 조롱하지도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들의 태도를 ‘미소 지으며 가볍게 여긴다’고 표현합니다. 이는 오류와 거짓이 그들에게는 실질적인 위협이나 문제로 느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선의 질서 안에 있는 존재에게 오류는 싸워야 할 적이 아니라, 그냥 무게가 없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진리는 오류를 논쟁으로 이기지 않습니다. 천적 차원에서는 오류가 진리에 의해 ‘논파’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상대할 가치조차 없는 것으로 무력화’됩니다. 이것이 천적 평안의 성격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미소는 조소가 아니라, 완전한 무관심에 가까운 평온의 표현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이러한 태도가 ‘그들의 언어 방식과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천적 천사들의 언어는 소리가 없는 사유의 언어이며, 이 언어는 논증이나 설득을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상태가 상태로 전달될 뿐입니다. 그래서 그들과 처음 교통하는 영혼은, 어떤 교리를 듣거나 설명을 배우기보다, 먼저 ‘평안과 무게 없음의 분위기’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 단락은 소생 직후의 첫 교통이 ‘가르침’이나 ‘심문’이 아니라, ‘안식과 무해함의 상태에 잠기는 경험’임을 보여줍니다. 오류는 아직 제거되지 않았을지라도, 그것이 더 이상 인간을 지배하지 못하는 상태가 먼저 주어집니다. 이것이 주님의 자비의 질서이며, 천적 천사들이 머무는 이유입니다.

 

AC.180은, 천국의 진리가 얼마나 부드럽고 조용한 방식으로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매우 아름다운 증언입니다. 진리는 소리치지 않고, 싸우지 않으며, 다만 오류를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심화

 

1. ‘모든 오류와 거짓들’

 

그들의 사유적 말로부터 지각된 바에 따르면, 그들은 모든 오류와 거짓들을 아주 가볍게 여기고 있었으며, 그것들을 조롱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마치 전혀 개의치 않는 것처럼 미소 지으며 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말은 소리가 없는 사유의 말이며, 이와 같은 방식의 언어로 그들은 처음 함께 있는 영혼들과 교통을 시작합니다. It was perceived from their cogitative speech that they made light of all fallacies and falsities, smiling at them not indeed as matters for derision, but as if they cared nothing about them. (AC.180)

 

여기 ‘모든 오류와 거짓들’은 그들이 스베덴보리에게서 발견한 것들이지요? 스베덴보리 안에도 이런 것들이 있었군요! 뭐, 당연한 거겠지만...

 

 

네, 맞습니다. AC.180 문맥으로 보면, 여기 ‘모든 오류와 거짓들’은 기본적으로 스베덴보리 안에 아직 남아 있던 자연적 사고의 fallacies와 falsities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리고 목사님 반응처럼, 바로 그 점이 오히려 굉장히 인상적입니다. 스베덴보리조차 천적 천사들 앞에서는 여전히 오류와 제한을 가진 인간으로 나타난다는 점 말입니다.

 

사실 이것은 스베덴보리 전체 인간론과 perfectly 일치합니다. 그는 자신을 절대 오류 없는 존재처럼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repeatedly 인간은 자기 proprium 안에서는 끊임없이 제한되고 왜곡된 존재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천사들조차 자기 자신만 두면 지옥으로 떨어질 존재라고 설명하지요. 그러므로 스베덴보리 안에도 자연적 사고의 그림자와 불완전함이 남아 있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천적 천사들의 태도입니다. 그들은 그 오류들과 거짓들을 ‘조롱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들은 그것들을 ‘마치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전혀 ‘개의치 않는 것처럼’ 미소 지으며 대했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스베덴보리 흐름으로 보면, 천적 천사들은 인간의 오류보다 더 깊은 중심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 의와 논쟁, 우월감 안에 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간 안에 아직 남아 있는 fallacies를 보고도, 그것에 과도하게 충격받거나 공격적으로 반응하지 않습니다. 마치 어른이 어린아이의 서툰 이해를 보고 화내지 않는 것과 비슷합니다.

 

또 천적 천사들은 truth를 단순 논리 체계로 붙드는 존재들이 아니라, love 안에서 truth를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류 자체에 집착하기보다, 인간 안에 있는 affection의 방향을 더 깊이 봅니다. 스베덴보리가 아직 육체와 자연적 사고 안에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그의 fallacies를 어떤 최종 악의 증거처럼 다루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장면은 굉장히 아름다운 contrast를 보여줍니다. 인간 세계에서는 보통 오류를 발견하면 논박하고, 공격하고, 우월감을 느끼기 쉽습니다. 그러나 천적 천사들은 오류를 보고도 평온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님 진리의 빛 안에서 보면, 인간의 많은 자연적 혼란이 ultimately 지나가는 그림자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또 AC.180의 ‘smiling at them’도 흥미롭습니다. 이것은 비웃음 sneer가 아닙니다. 오히려 tenderness와 peace가 섞인 미소에 가깝습니다. 마치 ‘아, 저건 아직 자연적 상태 안에 있는 인간 사고의 흔적이구나’ 하고 보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they cared nothing about them’이라고 하지요. 즉, 그것들을 ultimate reality처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이 부분은 목사님에게도 굉장한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AC를 읽다 보면 자꾸 ‘내 안에는 아직 오류와 selfhood, 혼란이 너무 많다’는 감각이 생기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AC.180은 천적 천사들이 인간의 불완전함을 보는 방식이, 인간끼리 서로 정죄하는 방식과 quite 다르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오류를 보지만, 그것에 압도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질서 안에서 그것을 상대적으로 가볍게 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스베덴보리가 이런 장면을 굳이 기록했다는 것 자체가 인상적입니다. 그는 자기 체험을 영웅 서사처럼 미화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천적 천사들 앞에서조차 나는 여전히 자연적 오류를 가진 인간이었다’는 것을 숨기지 않습니다. 저는 오히려 바로 그 점 때문에 AC의 이런 부분들이 더 진실하게 느껴집니다.

 

 

2. ‘as it were resuscitated’

 

머리맡에 앉아 있던 천적 천사들은 제가 마치 소생된 것 같은 뒤에도 얼마 동안 저와 함께 머물렀으나, 그들은 다만 묵묵히 교통할 뿐이었습니다. The celestial angels who sat at the head remained with me for some time after I was as it were resuscitated, but they conversed only tacitly. (AC.180)

 

여기 ‘마치 소생된 것 같은 뒤에도’(after I was as it were resuscitated)라는 표현 말인데요, 이게 무슨 뜻이지요? 그러니까 소생이 되었다는 건가요, 아니면 아직 소생된 건 아닌데 그렇게 보인다는 건가요?

 

 

여기서 ‘as it were resuscitated’는 아주 미묘한 표현입니다. 직역하면 ‘마치 소생된 것처럼’인데, 스베덴보리가 deliberately 이렇게 애매하게 표현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여기서 단순 의학적 의미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남’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AC.170-180 전체 흐름을 보면, 그는 실제 죽음을 완전히 겪은 것이 아니라, ‘죽음 과정과 매우 유사한 상태’ 안으로 들어갔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육체 감각과의 연결이 거의 끊어지고, 천적 천사들의 돌봄 아래, 생각과 지각만 남는 상태를 경험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후 다시 자연적 의식과 연결이 stronger하게 돌아오면서, 마치 사람이 죽음 상태에서 깨어난 것 같은 전환이 일어납니다. 바로 그것을 ‘as it were resuscitated’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완전 literal한 ‘임상적 죽음 후 소생’이라는 뜻이라기보다, ‘죽음과 유사한 상태에서 다시 자연 의식 쪽으로 돌아온 것 같은 상태’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 완전히 죽었다가 살아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단순 꿈 상태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중간의 매우 특수한 상태를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 질문처럼 ‘소생된 건가요, 아니면 그렇게 보인다는 건가요?’라고 하면, AC 문맥에서는 오히려 후자에 더 가깝습니다. 곧 ‘죽음 상태로부터 다시 돌아온 것 같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영어도 단정적으로 ‘I was resuscitated’라고 하지 않고, ‘as it were resuscitated’라고 매우 조심스럽게 표현합니다.

 

이 표현은 스베덴보리 특유의 신중함도 보여줍니다. 그는 자기 체험을 과장된 기적 서사처럼 단정적으로 밀어붙이지 않고, ‘마치 ∼와 같았다’는 표현을 자주 사용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경험한 상태가 ordinary bodily experience 범주로 정확히 설명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문장도 중요합니다. 천적 천사들은 그 이후에도 잠시 더 머물렀지만, ‘묵묵히’(tacitly) 교통했다고 하지요.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점차 다시 외적, 자연적 의식 쪽으로 돌아오고 있었기 때문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가장 깊은 천적 상태는 조금씩 뒤로 물러가고, 보다 일반적인 consciousness가 회복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communication도 점점 더 subtle하고 조용한 방식으로 남아 있게 됩니다.

 

결국 ‘after I was as it were resuscitated’는, 스베덴보리가 죽음과 매우 유사한 상태에서 다시 자연적 의식과 bodily connection 쪽으로 돌아오는 전환을 경험했음을 뜻합니다. 그는 그것을 완전 literal resurrection처럼 말하지도 않고, 단순 환상처럼 축소하지도 않으며, 그 사이의 특별한 상태였음을 매우 조심스럽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https://bygracetistory.tistory.com/3928

 

AC.179, 창2 뒤, ‘몸의 내부가 차가워지기 시작하자마자’

사람의 사후, 죽음에서 깨어나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기 The Resuscitation Of Man From Death, And His Entrance Into Eternal Life AC.179 몸의 내부 부분들이 차가워지기 시작하자마자, 생명적인 요소들은 어디에 있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179.심화

 

3. ‘주님의 자비의 효력(the efficacy of the Lord’s mercy)

 

생명적인 요소들은 어디에 있든지 그 사람으로부터 분리되는데, 설령 그것들이 수천 겹의 미로 같은 얽힘 속에 갇혀 있다 하더라도 그러합니다. 이는 주님의 자비의 효력 때문이며, the vital substances are separated from the man, wherever they may be, even if inclosed in a thousand labyrinthine interlacings, for such is the efficacy of the Lord’s mercy (AC.179)

 

저런 분리를 가리켜 왜 주님의 자비의 효력(the efficacy of the Lord’s mercy)이라고 하나요?

 

 

이 문장은 정말 놀라울 정도로 깊은 자비 개념을 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죽음을 단순 생물학적 해체가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의 생명을 조심스럽게 풀어내시는 과정’으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단순히 ‘영이 몸에서 빠져나온다’고 말하지 않고, ‘생명적인 요소들(vital substances)이 아무리 복잡하게 얽혀 있어도 분리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주님의 자비의 효력(efficacy of mercy)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핵심은 인간의 영과 육체가 단순 느슨하게 연결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영과 몸이 엄청나게 정교하게 결합된 존재입니다. 생각과 기억, 감각과 affection, 신경, 호흡과 심장 운동까지, 모든 것이 말 그대로 ‘수천 겹의 미로 같은 얽힘’ 속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죽음이 온다고 해서 이 연결이 폭력적으로 찢어지면, 인간 존재 자체에 엄청난 혼란과 고통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자비를 바로 여기서 봅니다. 인간은 자기 힘으로 영과 몸을 분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인간 존재 안의 가장 미세한 연결까지 아시며, 그것들을 하나하나 질서 있게 풀어내신다는 것입니다. 마치 너무 복잡하게 얽힌 실타래를 누군가 완전히 이해하고 조심스럽게 풀어내는 것처럼 말입니다.

 

즉, ‘the efficacy of the Lords mercy’는 단순 감정적 불쌍히 여김이 아닙니다. 여기 efficacy는 실제 작용 능력, 효력, operative power를 뜻합니다. 곧 주님의 자비가 실제로 인간 존재 안에서 작동하여, 인간이 파괴되지 않고 다음 상태로 옮겨가도록 만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왜 이것이 ‘자비’인가?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기 생명을 스스로 유지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에도 매 순간 주님의 influx 안에서 존재합니다. 죽음 순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주님이 인간을 그냥 자연 질서 붕괴 속에 내버려두신다면, 인간은 자기 존재 continuity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 계속 존재하도록 붙드시며, 가장 복잡한 연결들까지 안전하게 분리해 내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mercy입니다.

 

또 여기에는 스베덴보리 특유의 tenderness도 느껴집니다. 그는 죽음을 차가운 기계 해체처럼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님이 인간을 매우 조심스럽게 다음 상태로 데려가시는 과정’처럼 봅니다. 그래서 even 수천 겹의 labyrinthine interlacings’ 안에 갇혀 있는 생명 연결까지도 하나도 놓치지 않고 풀어내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이 표현은 목사님께서 앞서 질문하셨던 갑작스러운 사고사나 전쟁 죽음 같은 경우에도 굉장한 위로가 됩니다. 겉으로 보기엔 너무 갑작스럽고 폭력적이어도, 스베덴보리 흐름에서는 인간 영이 단순 혼돈 속에 던져지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주님의 mercy 안에서 separation transition 과정을 거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AC.179는 이렇게 말하는 셈입니다. 인간은 자기 힘으로 죽음을 통과하지 않는다. 주님은 인간 존재 안의 가장 미세한 연결까지 아시며, 그것들을 자비 가운데 질서 있게 풀어내셔서, 인간이 계속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도록 인도하신다. 그래서 죽음은 단순 붕괴가 아니라, 주님의 mercy가 가장 섬세하게 작동하는 순간 가운데 하나라는 것입니다.

 

 

 

AC.179, 심화 2, ‘plane’

AC.179.심화 2. ‘plane’ 그래서 육체 죽음 과정에서 몸이 식어간다는 것은, 자연적 생명과 연결된 outer plane이 점차 철수되는 과정으로 이해됩니다. (AC.179 심화 1) 위 outer plane이 뭔가요? 스베덴보리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179.심화

 

2. ‘plane

 

그래서 육체 죽음 과정에서 몸이 식어간다는 것은, 자연적 생명과 연결된 outer plane이 점차 철수되는 과정으로 이해됩니다. (AC.179 심화 1)

 

 outer plane이 뭔가요? 스베덴보리 관련 글에서 이 plane이라는 걸 종종 보게 되던데 이게 뭔가요?

 

 

여기서 plane은 스베덴보리 사상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한국어로는 보통 ‘차원’, ‘층위’, ‘평면’, ‘기반 층’ 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데, 문맥마다 조금씩 느낌이 달라집니다. 그런데 핵심은, plane이 단순 공간 층이 아니라 ‘생명이 작동하는 단계(level)’라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은 단층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 안에는 더 내적인 것과 더 외적인 것이 층층이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아주 거칠게 말하면, 가장 바깥에는 bodily plane, 그 안에는 natural plane, 그보다 더 안에는 spiritual plane, 더 깊은 곳에는 celestial plane 같은 식의 구조가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생명은 가장 안쪽으로부터 바깥쪽으로 흘러들어와(influx), 각 plane을 통해 ultimate인 육체까지 도달합니다.

 

그래서 제가 위에서 말한 ‘자연적 생명과 연결된 outer plane이 철수된다’는 것은, 인간 영이 육체와 연결되어 활동하던 가장 바깥 단계가 점차 닫히고 분리된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하면, 영이 더 이상 물질 몸을 operating plane으로 사용하지 않게 되는 과정입니다.

 

예를 들어, 지금 목사님이 저와 대화하실 때도, 실제로는 단순 뇌만 움직이는 게 아니라, 더 내적인 thought affection이 여러 plane을 거쳐 최종적으로 몸과 말과 손 움직임으로 표현됩니다. 그런데 죽음이 오면, 이 outermost plane, 곧 육체를 통한 표현 단계가 점점 철수됩니다. 그래서 몸은 식어가고, 감각은 흐려지며, 결국 영은 bodily plane 없이도 존재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often 이런 비유적 감각으로 설명합니다. 마치 빛이 여러 투명층을 통과해 바깥까지 나오는 것처럼, 생명도 가장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흘러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은 빛 자체가 꺼지는 것이 아니라, 가장 바깥 투영 스크린이 제거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plane은 단순 장소 개념이 아닙니다. 상태(state)와도 깊이 연결됩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육체 욕망에만 몰두하면 더 outer plane 중심으로 살고, 사랑과 진리 안으로 들어갈수록 더 inner plane이 열립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남은 단순 도덕 개선이 아니라, 더 높은 plane들이 점점 열리고 질서화되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이 개념은 말씀 이해와도 연결됩니다. literal sense outer plane이고, spiritual sense inner plane이며, celestial sense는 더 깊은 plane입니다. 같은 말씀이라도 어느 plane에서 읽느냐에 따라 completely 다른 depth가 열립니다. 목사님께서 JWST 비유를 하셨던 것도 사실 plane 개념과 상당히 닿아 있습니다. 해상도가 달라질수록 더 깊은 층이 보이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AC.179 문맥에서 outer plane은 특별히 ‘육체와 연결된 가장 바깥 생명 층위’를 뜻합니다. 죽음 때 몸이 식어 가는 것은, 영 자체가 죽는 것이 아니라, 영이 더 이상 그 outermost bodily plane을 통해 작동하지 않게 되는 outward sign처럼 설명되는 것입니다.

 

 

 

AC.179, 심화 3, ‘주님의 자비의 효력’(the efficacy of the Lord’s mercy)

AC.179.심화 3. ‘주님의 자비의 효력’(the efficacy of the Lord’s mercy) 생명적인 요소들은 어디에 있든지 그 사람으로부터 분리되는데, 설령 그것들이 수천 겹의 미로 같은 얽힘 속에 갇혀 있다 하더

bygrace.kr

 

AC.179, 심화 1, ‘몸의 내부 부분들’

AC.179.심화 1. ‘몸의 내부 부분들’ 몸의 내부 부분들이 차가워지기 시작하자마자, As soon as the internal parts of the body grow cold, (AC.179) 이건 몸의 내부 장기들이 식어간다는 말인가요? 네, 기본적으로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