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5:5, AC.492-495 심화

2.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오늘날의 양심은 어떻게 다른가?’

 

AC.495는 태고교회가 ‘퍼셉션을 가진 교회’였으며 ‘오늘날에는 그러한 교회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말을 읽으면 질문이 생깁니다. 오늘날에도 사람은 기도하거나 말씀을 읽는 가운데 ‘이것은 옳다’, ‘이것은 해서는 안 된다’는 내적인 깨달음을 경험합니다. 어떤 때에는 이유를 길게 따져 보지 않아도 무엇이 선하고 진실한지를 깊이 확신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것도 태고교회의 ‘퍼셉션’(perception)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스베덴보리의 설명에 따르면 그렇지 않습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후대 영적 인간의 양심은 모두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에 관계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질서가 서로 다릅니다.

 

그 차이를 가장 간단히 말하면 이렇습니다. 천적 인간은 ‘선으로부터 진리를 퍼셉션’하지만, 영적 인간은 ‘배운 진리로부터 양심이 형성되어 선으로 인도’됩니다. AC.2831은 이 차이를 매우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천적 인간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주님으로부터 일종의 내적인 지각으로 즉시 알아차립니다. 그들이 주님과 사랑으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영적 인간에게는 그러한 퍼셉션이 없으며 그 대신 양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양심은 부모와 스승에게서 배우고, 교리와 말씀을 통하여 받아들인 선과 진리로부터 형성됩니다.

 

그러므로 퍼셉션은 단순히 ‘양심이 아주 강해진 상태’가 아닙니다. 둘은 주님께서 인간을 이끄시는 서로 다른 질서에 속합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에게는 사랑의 선이 먼저 있었고 그 선으로부터 무엇이 진리인지 퍼셉션되었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외부에서 먼저 배우고 논증하여 ‘이것이 참이므로 믿겠다’고 하는 방식이 중심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선 안에서 무엇이 진리인지 내적으로 알아차렸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계속 살펴온 ‘천적 질서’, 곧 사랑에서 신앙이 나오는 질서입니다.

 

반대로 영적 인간은 진리를 먼저 배웁니다. 말씀을 읽고, 가르침을 받고, 무엇이 주님의 뜻인지 배운 뒤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삶에서 행합니다. 이렇게 받아들인 진리가 사람의 속 사람에 깊이 새겨지고 삶으로 확증되면 그것이 양심을 형성합니다. AC.7935는 영적 교회 사람들의 양심이 그들이 어려서부터 배우고 이후 삶으로 확증한 교회의 진리들로부터 ‘태어나고 형성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렇게 진리가 내면에 자리 잡으면 사람은 그것에 따라 생각하고 원하고 행동하도록 내적으로 이끌립니다. 이것이 영적 인간에게 있는 양심입니다.

 

예를 들어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이 어떤 일을 마주했을 때에는 주님을 향한 사랑의 선으로부터 그것이 선인지 아닌지를 퍼셉션했습니다. 반면 오늘날 영적 질서 안에 있는 사람은 ‘주님께서 말씀에서 어떻게 가르치셨는가’, ‘이웃을 사랑하라는 진리에 비추어 이것은 옳은가’, ‘내가 알고 믿는 진리에 따라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통하여 양심의 인도를 받습니다. 처음에는 배운 진리를 기억하여 판단하지만, 그 진리에 따라 오래 살아가면 그것이 내면에 깊이 자리 잡아 일일이 논리를 펼치지 않아도 ‘이것은 해서는 안 된다’는 내적인 요구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양심 역시 단순한 사회적 죄책감이나 심리적 불편함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AC.2831은 시민 생활에서의 정의와 공정함을 지각하는 것, 도덕생활에서 명예로운 것을 지각하는 것과 신앙의 선과 진리에 관한 영적 퍼셉션을 구별합니다. 또한 사람의 양심은 그가 받아들인 선과 진리에 의해 형성되므로, 그가 배운 것이 충분히 참되지 않다면 양심 역시 불완전하게 형성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내 양심이 그렇게 말한다’는 사실만으로 그 판단이 언제나 절대적으로 참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양심도 말씀의 진리에 의해 계속 밝혀지고 바로잡혀야 합니다.

 

이 점은 퍼셉션과 개인적인 직감을 구별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을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강하게 떠오르는 것’, ‘내적으로 어떤 음성을 듣는 것’, ‘설명하기 어렵지만 확신이 드는 것’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의 강한 느낌은 자기애, 욕망, 두려움, 선입견에서도 나올 수 있습니다. AC.2515는 퍼셉션에서 나오는 생각, 양심에서 나오는 생각, 양심 없이 욕망과 환상에서 나오는 생각을 분명히 구별합니다. 따라서 확신의 강도가 그 근원이 주님이라는 보증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퍼셉션과 양심에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둘의 근원은 궁극적으로 주님이며, 둘 다 인간을 선과 진리로 이끄시는 방식입니다. 차이는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질서에 있습니다. 천적 인간에게는 사랑의 선이 의지 안에 자리 잡아 그 선으로부터 진리를 퍼셉션하는 질서가 있었고, 영적 인간에게는 진리가 먼저 이해 안에 받아들여지고 그 진리에 따라 새로운 의지가 형성되면서 양심이 생기는 질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퍼셉션과 양심은 서로 무관한 두 능력이 아니라 주님께서 서로 다른 상태의 인간을 이끄시는 서로 다른 방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차이를 알면 왜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사라지는 것이 그렇게 중대한 ‘죽음’이었는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교회의 생명은 주님을 향한 사랑 안에서 선과 진리를 직접 퍼셉션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의지가 악으로 물들면서 그 질서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선에서 진리를 퍼셉션하던 통로가 변질되면, 자기 욕망을 주님의 뜻으로 오인하는 훨씬 위험한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타락한 인간에게 옛 퍼셉션을 그대로 유지시키시는 대신 진리를 외적으로 배우고 그것으로 새로운 내면을 형성하는 영적 질서, 곧 신앙과 양심의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태고교회의 퍼셉션을 억지로 회복하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도 주님으로부터 직접 무엇이 진리인지 느끼고 싶다’며 특별한 내적 감각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말씀의 진리를 겸손히 배우고 그것을 삶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진리가 삶으로 확증될수록 그것은 단순히 머릿속에 기억된 지식으로 머물지 않고 우리의 내면을 형성하며, 마침내 양심을 통하여 생각과 의지와 행동을 이끄는 살아 있는 진리가 됩니다.

 

그렇다고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모든 신앙생활이 계속 외적인 규칙 확인에만 머문다는 뜻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더 높은 형태의 양심과 선으로부터의 지각도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성급하게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특별한 체험을 했는가’가 아니라 주님께서 말씀을 통해 가르치신 진리가 우리의 삶 안에서 선과 결합되고 있는가입니다. AC.495가 퍼셉션을 설명하면서 마지막에 ‘삶으로 확증되는 신앙고백’을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결국 퍼셉션과 양심의 차이는 창세기 초반 전체를 관통하는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의 차이’를 보여 줍니다. 천적 인간은 사랑에서 신앙으로, 선에서 진리로 나아갔고, 영적 인간은 진리를 받아들여 신앙으로 삼고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선으로 인도됩니다. 방식은 다르지만 두 경우 모두 생명의 근원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잃어버린 태고교회의 상태를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과 신앙과 양심의 길을 따라 주님께서 우리를 이끄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진리가 삶이 되고 신앙이 사랑과 결합될 때, 주님은 우리를 영적 인간에서 더욱 온전한 사랑의 질서로 계속 이끌어 가십니다. (AC.492-495 심화 2)

 

 

 

창5:5, AC.495, ‘태고교회의 쇠퇴를 이해하는 열쇠, 퍼셉션’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5) AC.495태고교회가 어떻게 쇠퇴하였는지는 퍼셉션(perception)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태고교회는 퍼셉션을 가진 교회였으며, 오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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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5, AC.492-496 심화 1, ‘유전적 악은 어떻게 대대로 누적되며, 우리는 조상의 죄까지 책임져야

창5:5, AC.492-496 심화1, ‘유전적 악은 어떻게 대대로 누적되며, 우리는 조상의 죄까지 책임져야 하는가?’ AC.494는 태고교회가 쇠퇴한 주된 원인을 설명하면서 ‘유전적 악’(hereditary evil)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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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5, AC.492-495 심화

1. ‘유전적 악은 어떻게 대대로 누적되며, 우리는 조상의 죄까지 책임져야 하는가?’

 

AC.494는 태고교회가 쇠퇴한 주된 원인을 설명하면서 ‘유전적 악’(hereditary evil)이라는 매우 중요한 문제를 다룹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사람은 부모와 조상으로부터 악으로 기울어지는 성향을 물려받으며, 자신이 실제로 행하고 반복한 악을 거기에 더합니다. 반복된 악은 점차 그 사람의 본성처럼 되고, 이렇게 형성된 성향이 다시 자녀와 후손에게 전달됩니다. 그래서 세대가 계속되면서 유전적 악이 축적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질문이 생깁니다. ‘내가 조상의 악을 물려받았다면 조상의 죄에 대한 책임도 내가 져야 하는가?’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분명히 ‘아니다’입니다. 유전되는 것과 개인에게 책임이 돌아가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사람은 유전적 악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그 악 자체 때문에 책망받지는 않습니다. AC.4563은 이 점을 아주 명확하게 설명합니다. 유전적 악은 사람이 성장하여 자신의 이해와 의지로 그것을 실제로 행하기 전까지는 숨어 있으며, ‘주님의 자비로 아무도 유전적인 것 때문에 책망받지 않고 실제적인 것 때문에 책망받는다’고 합니다. 따라서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악한 성향과 내가 자유롭게 받아들여 실제로 행한 악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쉽게 분노하는 성향, 지나친 자기중심성, 물질에 대한 강한 집착과 같은 기울어짐을 물려받았다고 하더라도, 그 성향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 사람의 개인적인 죄는 아닙니다.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 의도적으로 즐기고 행할 때 비로소 ‘실제적인 악’(actual evil)이 됩니다. 그러므로 유전적 악은 우리에게 주어진 출발 조건에 가깝고, 실제적인 악은 그 조건 안에서 우리가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행함으로써 자신의 것으로 만든 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아담 한 사람의 범죄에서 모든 인류의 유전적 악이 시작되었다는 견해를 부정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AC.313은 오늘날 존재하는 모든 유전적 악이 최초의 한 사람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고 명시합니다. 각 사람이 실제 죄를 반복함으로써 자신의 본성에 악을 더하고, 그것이 자녀에게 전달되며, 다시 그 자녀가 자신의 실제 악을 더함으로써 후손에게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 인류의 유전적 악은 한 조상의 한 번의 범죄가 모든 사람에게 법적인 죄책으로 전가되는 구조라기보다, 수많은 세대의 실제 삶에서 형성된 악의 성향이 계속 축적되어 내려오는 구조입니다.

 

그러므로 ‘조상의 죄가 내게 유전된다’는 말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조상이 범한 구체적인 죄의 행위와 그 죄책이 그대로 내 것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전달되는 것은 그 악에서 형성된 기울어짐입니다. 나는 그것을 선택하여 태어난 것도 아니고 그것이 내 안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정죄받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내 안에서 일어날 때 그것을 받아들이고 실제로 행할 것인지, 아니면 악으로 인정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물리칠 것인지 하는 문제는 나의 자유와 책임의 영역으로 들어옵니다. 이 때문에 유전적 악의 교리는 인간의 책임을 없애지도 않고, 반대로 조상의 책임을 후손에게 떠넘기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AC.494가 말하는 ‘유전적 악의 증가’는 왜 교회의 쇠퇴와 연결될까요? 한 세대가 악을 반복하여 그것을 본성처럼 만들면 다음 세대는 이전보다 더 복잡하고 강해진 악의 기울어짐을 출발점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다음 세대가 그것을 다시 실제 악으로 만들고 새로운 악을 더한다면 그 흐름은 더욱 강해집니다. 태고교회에서도 이러한 일이 세대를 거쳐 일어났고, 그 결과 처음의 온전한 퍼셉션이 점차 변질되어 마침내 소멸하게 되었다는 것이 AC.494의 설명입니다. 교회의 쇠퇴는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인간이 자유 안에서 선택한 악이 세대를 지나며 누적된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이 설명의 마지막은 결코 숙명론이 아닙니다. AC.494는 유전적 악이 ‘주님에 의해 거듭나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감소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아무리 오랫동안 악의 성향이 가문과 세대를 따라 내려왔다 하더라도 그것이 한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주님은 각 사람에게 선과 진리를 공급하시고, 사람이 자신의 악을 보고 인정하며 그것에 맞서도록 이끄십니다. 거듭남은 바로 이 오래된 악의 흐름이 한 사람 안에서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지배하지 못하도록 주님께서 새 질서를 세워 가시는 과정입니다.

 

여기서 부모의 책임도 새롭게 보입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완전한 상태만을 물려줄 수 없습니다. 자신도 여러 세대로부터 받은 유전적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부모에게 절망이나 과도한 죄책을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삶에서 발견되는 악을 그대로 방치하고 반복하여 굳히느냐, 아니면 주님 앞에서 그것을 인정하고 거듭남의 길을 걷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가 모든 과거를 바꿀 수는 없지만, 주님께서 내 안에서 역사하시도록 허용함으로써 나를 통하여 계속되던 악의 흐름이 이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이어지지 않게 할 수는 있습니다.

 

따라서 유전적 악의 교리는 ‘나는 원래 이런 집안에서 태어났으니 어쩔 수 없다’는 운명론도 아니고, ‘조상이 죄를 지었으니 나도 그 죄에 책임이 있다’는 집단적 죄책의 교리도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의 현실을 매우 깊이 인정하면서도 자유와 거듭남의 가능성을 동시에 붙듭니다. 우리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많은 성향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주님은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를 만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성향을 자신의 삶으로 확정하지 않고 주님께 돌이킬 때, 세대를 지나며 축적된 악의 힘은 거듭남 가운데 감소하기 시작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AC.494가 말하는 태고교회의 역사는 오늘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한 세대의 삶은 그 세대에서 완전히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반복하여 자신의 본성으로 만드는 것은 다음 세대에도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악의 역사가 세대를 넘어간다고 해서 주님의 역사가 거기에서 멈추는 것은 아닙니다. 유전적 악보다 더 근원적인 것은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주님의 사랑이며, 거듭남은 바로 그 사랑이 한 사람의 자유 안에서 악의 오래된 흐름을 꺾고 새로운 생명의 질서를 세워 가시는 역사입니다. (AC.492-495 심화 1)

 

 

 

창5:5, AC.492-495 심화 2,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오늘날의 양심은 어떻게 다른가?’

창5:5, AC.492-495 심화2.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오늘날의 양심은 어떻게 다른가?’ AC.495는 태고교회가 ‘퍼셉션을 가진 교회’였으며 ‘오늘날에는 그러한 교회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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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5, AC.495, ‘태고교회의 쇠퇴를 이해하는 열쇠, 퍼셉션’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5) AC.495태고교회가 어떻게 쇠퇴하였는지는 퍼셉션(perception)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태고교회는 퍼셉션을 가진 교회였으며, 오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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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4, AC.486-491 심화

1, ‘천국에는 시간이 없다면 천사들은 변화와 영원을 어떻게 경험하는가?’

 

AC.488은 처음 읽는 독자에게 상당히 낯선 말을 합니다. 천사들은 지상에서와 같은 시간을 알지 못하며, 날들과 해들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고 오직 ‘상태와 그 변화’를 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즉시 질문이 생깁니다. ‘시간이 없다면 천국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가? 어떤 일이 먼저 일어나고 다른 일이 나중에 일어나는 순서도 없는가? 천사가 배우고 성장하고 상태가 변한다면 그것 자체가 결국 시간 아닌가? 그리고 영원히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먼저 ‘천국에는 시간이 없다’는 말을 ‘천국에는 변화나 연속성이 없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1758, HH) 154-161은 아예 한 장 전체의 제목을 ‘천국에서 천사들의 상태 변화’로 두고 있습니다. 천사들은 사랑과 신앙,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지혜와 총명의 상태가 계속 변화합니다. 어떤 때에는 사랑과 지혜가 더 충만하고 밝은 상태에 있고, 어떤 때에는 상대적으로 덜 충만한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모든 것이 한순간에 얼어붙어 있는 정지된 세계가 아닙니다. 천사들에게도 ‘이 상태에서 저 상태로’ 이어지는 분명한 연속성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상의 시간과 무엇이 다를까요? HH.162-169는 ‘천국의 시간’을 따로 설명하면서 그 차이를 분명히 합니다. 지상에서 우리의 시간은 해와 지구의 운동을 바탕으로 해, 달, 주, 날, 시간 등 일정한 단위로 측정됩니다. 그러나 천국의 해는 그런 방식으로 날과 해를 만들어 내지 않습니다. 그래서 천사들은 ‘몇 시’, ‘며칠 후’, ‘몇 년 전’이라는 자연적 시간의 관념으로 삶을 경험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지상의 시간에 해당하는 것은 ‘상태와 그 상태의 변화’입니다. 그러므로 ‘시간이 없다’는 것은 ‘전후의 연속성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 연속성을 지상의 시계와 달력의 단위로 경험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도 이 사실을 아주 희미하게나마 경험합니다. 즐겁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두 시간이 마치 몇 분처럼 지나가기도 하고, 고통이나 불안 속에서 기다릴 때에는 몇 분이 한 시간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시계가 가리키는 객관적인 시간은 같지만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는 시간의 길이는 마음의 상태에 따라 크게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경험을 시간의 근원이 상태와 깊이 관련되어 있음을 엿볼 수 있는 하나의 단서로 설명합니다(HH.168). 천국에서는 자연적 시간의 외적 척도가 사라지고 그 근원에 해당하는 상태와 그 변화가 직접적으로 경험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사에게도 ‘먼저’와 ‘나중’에 해당하는 질서는 있습니다. 다만 그것은 시계의 숫자가 앞뒤로 배열되는 방식이 아니라 상태가 연속적으로 변화하는 질서입니다. AC.4901도 영들과 천사들의 생명이 ‘시간 안에서 진행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사람처럼 시간으로 생각하지 않고 ‘생명의 상태들’로 생각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천국에는 시간이 없다’는 표현보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천국에는 지상과 같은 자연적 시간이 없으며, 그에 대응하는 상태의 연속과 변화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을 이해하면 AC.488에서 왜 ‘날’과 ‘해’가 상태를 의미하는지도 분명해집니다. 사람이 말씀을 읽을 때 ‘날’, ‘해’, ‘오늘’, ‘내일’, ‘어제’라고 하면 자연스럽게 시간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천사는 그러한 표현에서 그 시간에 상응하는 영적 상태를 지각합니다(HH.165-166). 아침과 봄은 사랑과 지혜가 새롭게 밝아지는 상태를, 저녁과 가을은 다른 상태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말씀의 문자에 있는 시간 표현이 천국에서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겨 있던 영적인 실재인 ‘상태’로 열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설명은 더욱 흥미롭습니다. HH.167은 천사들이 ‘영원’을 사람과 다르게 이해한다고 설명합니다. 사람은 흔히 영원을 ‘끝없이 계속되는 시간’으로 상상합니다. 지금부터 1억 년, 1조 년, 그보다 더 긴 시간이 지나도 끝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큰 숫자를 붙여도 그것은 여전히 시간의 연장일 뿐입니다. 천사들은 영원을 이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고 ‘무한한 상태’라는 관점에서 지각합니다.

 

AC.1382도 같은 점을 매우 인상적으로 설명합니다. 사람은 시간 속에 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원조차 끝없는 시간으로 상상하기 쉽지만, 천사들에게는 수천 년조차 우리가 생각하는 식의 긴 시간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과거와 미래를 현재와 전혀 단절된 것으로 경험하지 않으며, 그들의 현재 안에는 주님의 영원과 무한에 대한 지각이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천국의 영원한 생명은 ‘끝없이 오래 버텨야 하는 삶’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끊임없이 생명을 받아 새로운 사랑과 지혜의 상태로 나아가는 삶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천사가 ‘영원’을 무한한 상태로 지각한다고 해서 천사가 무한한 존재가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무한과 영원은 본래 주님께 속합니다. 천사들은 유한한 피조물이며, 다만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끝없이 받아들이면서 계속해서 완전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영원은 천사가 어느 순간 완성되어 더 이상 아무 변화도 없는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무한한 선과 진리를 유한한 존재로서 계속 받아들이며 더 깊은 사랑과 지혜로 나아가는 삶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제 창5의 ‘날들과 해들’로 돌아오면 AC.486-491의 의도가 훨씬 선명해집니다. 창5가 ‘팔백 년’, ‘구백삼십 년’과 같은 숫자를 기록할 때 속뜻의 중심은 단순히 지상의 달력으로 얼마만큼 오래 살았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AC.487-488이 강조하는 것은 그 ‘날들과 해들’ 안에 교회의 상태와 그 변화가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지상의 독자는 시간을 읽지만, 천국은 그 시간 안에 담긴 상태를 읽습니다. 이것이 창5의 족보를 단순한 연대 기록을 넘어 교회의 내적 역사로 읽게 하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결국 ‘천국에는 시간이 없다’는 말은 천국이 변화 없는 정지 상태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천국에는 사랑과 지혜, 선과 진리의 끊임없는 상태 변화가 있습니다. 다만 그 변화를 해와 달과 시계와 달력으로 재지 않을 뿐입니다. 우리는 ‘몇 년을 살았는가’를 먼저 묻지만 천국의 관점에서는 ‘어떤 상태를 지나왔으며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가’가 더 본질적인 질문이 됩니다.

 

이것은 우리의 거듭남을 바라보는 시선도 바꾸어 줍니다. 주님 앞에서 중요한 것은 단지 신앙생활을 ‘몇 년 했는가’가 아닙니다. 그 세월 동안 우리의 사랑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이게 되었는지,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살던 상태에서 얼마나 주님과 이웃을 향하는 상태로 옮겨졌는지가 중요합니다. 지상에서 우리는 날과 해를 지나지만, 주님은 그 날과 해 안에서 우리의 상태를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창5의 ‘날들과 해들’은 단순히 오래된 사람들의 기이하게 긴 수명을 기록한 표현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시간 속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실제로 이루어 가시는 것은 ‘시간의 축적’이 아니라 ‘상태의 변화’, 곧 거듭남이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AC.486-491 심화 1)

 

 

 

창5:4, AC.491, ‘교회의 어떠함에 따라 달라지는 아들들과 딸들’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91이 장에서 ‘아들들’(sons)과 ‘딸들’(daughters)(4, 7, 10, 13, 16, 19, 26, 30절)도 같은 것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어떠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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