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 제목의 ‘SY’는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라는 뜻입니다.
※ 여기 1강, 2강...은 실제 사경회 일정표가 아닌,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 순서를 말합니다.
2강 1부
2강에 들어서면서 강의는 1강에서 제시했던 큰 방향 가운데 ‘모형적 진리’를 본격적으로 펼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경의 사건을 단순히 과거에 일어난 역사로만 읽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다가 모세를 통하여 해방되고, 홍해를 건너 광야에 들어가며, 수많은 시험과 연단을 거쳐 마침내 가나안에 이르는 전체 여정을 한 사람의 구원과 성화 과정에 대한 모형으로 읽습니다. 따라서 출애굽은 ‘옛날 이스라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알려 주는 이야기인 동시에 ‘오늘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죄에서 불러내어 어떤 과정을 거쳐 변화시키시는가’를 보여 주는 영적 지도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경 읽기는 ‘핵심진리’ 전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 공동체가 강조하는 ‘애굽’, ‘홍해’, ‘광야’, ‘요단’, ‘가나안’, ‘할례’, ‘생명과’, ‘익은 열매’ 같은 표현들은 각각 따로 떨어진 교리 용어가 아니라 하나의 긴 구원 여정 속에 배치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애굽에서 나왔다고 곧바로 가나안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출애굽이라는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지만, 그 뒤에는 광야가 있고, 광야에서는 자기 안에 숨어 있던 불신과 원망과 욕망이 드러나며, 그것을 통과한 뒤에야 약속의 땅으로 들어갑니다. 강의가 이 구조를 강조하는 이유는 ‘예수를 믿었다’는 최초의 신앙 고백과 ‘그리스도의 성품이 실제로 이루어진 사람’ 사이에는 긴 영적 여정이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 지점에서 먼저 ‘모형’이라는 말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성경 자체도 구약의 사건들을 후대의 영적 현실과 연결하여 읽는 경우가 있습니다. 고전10에서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사건을 후대 사람들을 위한 ‘본보기’로 말합니다. 홍해를 건넌 사건과 만나를 먹고 반석에서 물을 마신 사건을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연결합니다. 따라서 출애굽을 단순한 민족사적 사건 이상으로 읽으려는 ‘핵심진리’의 시도 자체는 기독교 전통과 동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는 오랜 세월 애굽의 종살이를 죄의 속박과, 출애굽을 구원과, 광야를 시험과, 가나안을 약속된 삶과 연결하여 읽어 왔습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겹치면 놀라운 접점이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출애굽기 전체를 단순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로만 읽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그는 출애굽의 사건 하나하나에 영적인 의미가 들어 있다고 봅니다. 애굽과 바로, 모세와 아론, 열 재앙, 유월절, 홍해, 만나, 반석의 물, 시내산, 성막과 제사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이 주님과 인간의 거듭남, 그리고 천국의 질서에 관한 것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외적 역사와 내적 의미가 함께 있다는 ‘핵심진리’의 기본 직관은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가까운 곳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처음부터 기억해 둘 중요한 차이가 하나 있습니다. ‘핵심진리’가 주로 사용하는 것은 ‘모형’이라는 틀입니다. 과거의 어떤 사건이 훗날 이루어질 구원의 현실을 미리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보다 근본적으로 ‘상응’과 ‘표상’을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옛날 사건 A가 훗날 사건 B를 예고했다’는 관계보다 깊습니다.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에 창조 때부터 질서 있는 상응 관계가 있기 때문에, 말씀의 자연적 사건 안에 영적인 의미가 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형은 역사적 유사성을 중심으로 볼 수 있지만, 상응은 자연계와 영계 사이의 질서 자체에 근거합니다.
예를 들어 ‘애굽’을 단순히 ‘죄악 세상’이라고 대응시키는 것만으로는 스베덴보리의 속뜻에 충분히 들어가지 못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애굽은 문맥에 따라 기억지식, 자연적 지식, 말씀에 관한 지식 등을 나타낼 수 있으며, 좋은 의미와 나쁜 의미가 모두 있습니다. 지식이 주님의 질서 아래 있을 때에는 매우 유익하지만, 자연적 지식이 영적인 것을 지배하려 할 때에는 그것이 속박의 ‘애굽’이 됩니다. 그러므로 ‘애굽=세상’이라는 일대일 대응보다 훨씬 역동적입니다. 같은 표상이 사람의 영적 상태에 따라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점이 앞으로 ‘모형적 진리’를 해설할 때, 중요한 보완점이 될 것입니다. 모형적 해석은 성경 전체를 하나의 구원 이야기로 연결해 주는 큰 장점이 있지만, 모든 사건을 미리 정해 놓은 구원 단계에 하나씩 대응시키기 시작하면, 본문이 가진 훨씬 풍성한 영적 의미가 좁아질 수 있습니다. ‘애굽은 이것, 홍해는 이것, 광야는 이것, 요단은 이것, 가나안은 이것’이라는 도표가 이해하기에는 매우 편리하지만, 말씀의 속뜻은 언제나 그렇게 단선적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이 공동체가 출애굽의 모형을 통해 강조하는 핵심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그 핵심은 매우 실제적입니다. ‘애굽에서 나오는 것’과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은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앙생활에 적용하면, ‘죄 사함을 경험했다’와 ‘죄의 지배에서 실제로 벗어나 새로운 성품으로 살아간다’는 것도 같지 않습니다. 처음 구원을 경험한 사람이 곧바로 모든 욕망과 자기중심성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 뒤부터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자기 내면의 상태가 드러날 수 있습니다.
광야가 바로 그 자리입니다. 애굽에 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이 노예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자기들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충분히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애굽을 나온 뒤 먹을 것이 부족해지고, 물이 부족해지고, 앞길이 보이지 않자 원망과 두려움과 불신이 쏟아져 나옵니다. 이것을 영적으로 읽으면, 매우 현실적인 이야기가 됩니다. 사람이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에는 주님의 은혜가 크게 느껴지고,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시험이 오면 자기 안에 숨어 있던 것들이 드러납니다. ‘나는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왜 이렇게 쉽게 불안해지는가’, ‘나는 사랑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왜 저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가’, ‘나는 하나님을 따른다고 했는데, 왜 내 뜻이 꺾이면 이렇게 화가 나는가’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러한 과정을 거듭남의 시험으로 설명합니다. 시험은 주님께서 사람을 괴롭히기 위해 보내시는 고난이 아닙니다. 사람 안에 있는 악과 거짓이 드러나고, 주님께서 주신 선과 진리가 그것과 싸우는 과정입니다. 시험이 없을 때, 사람은 자기가 얼마나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붙들려 있는지 잘 모릅니다. 평온할 때에는 누구나 어느 정도 선한 사람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이익이 침해되고, 자존심이 상하며, 원하는 것이 좌절될 때, 무엇이 올라오는지를 보면 그 사람의 내적 상태가 드러납니다.
이런 점에서 ‘핵심진리’가 광야를 ‘연단’의 장소로 읽는 것은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어려움을 모두 ‘마귀가 방해한다’거나 ‘내 믿음이 부족해서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는 식으로만 보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 과정을 통해 사람의 내면을 드러내고 다루신다는 관점은 신앙을 상당히 성숙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고난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 상황 속에서 이전에는 몰랐던 자기 자신을 보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여기에서도 ‘연단’이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고통을 보내어 일정량의 고난을 견디게 한 뒤, 그 대가로 성화를 주신다고 생각하면 위험합니다. 고통 자체에는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능력이 없습니다. 같은 고난을 겪으면서 어떤 사람은 더 부드러워지고, 어떤 사람은 더 완고해질 수 있습니다. 고난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고난 가운데 드러난 자기 상태를 보고 주님께 돌아서며,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때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구별은 공용복 선생의 생애를 읽을 때에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의 엄청난 육체적 고통 자체가 그를 성화시킨 것이 아닙니다. 만일 고통 자체가 사람을 성화한다면 세상에서 가장 고통받은 사람이 가장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고통 가운데 사람이 어떤 방향으로 자기 자유를 사용했는가입니다. 절망과 원망과 자기연민으로만 닫힐 수도 있고, 반대로 그 상황에서 주님을 찾고, 자기 생명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병상의 증거자 공용복’을 읽으면서 우리가 귀하게 보는 것도 단순히 ‘얼마나 많이 아팠는가’가 아니라 그 병상에서 무엇을 붙들고 살아갔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광야와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같은 광야를 모두가 걸었지만, 모두가 같은 사람이 된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에게 광야는 불평과 반역의 장소가 되었고, 어떤 사람에게는 주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우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외적인 환경은 같았지만, 내적인 반응은 달랐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광야의 본질은 ‘얼마나 고생했는가’보다 ‘그 고생 가운데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선택했는가’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점에서 인간의 자유가 중요해집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남은 주님께서 사람을 일방적으로 조종하여 선하게 만드는 과정이 아닙니다. 사람은 진리와 거짓, 선과 악 사이에서 자유롭게 선택해야 합니다. 물론 선을 행할 능력 자체는 주님으로부터 오지만, 사람은 그것을 자기에게 주어진 것처럼 받아들이고, ‘마치 스스로 하는 것처럼’ 악을 피하고 선을 선택해야 합니다. 이 자유로운 협력이 없으면 선은 사람의 생명 안에 뿌리내릴 수 없습니다.
출애굽 이야기에서도 이것이 계속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끌어내셨지만, 광야에서 매 순간 그들을 기계처럼 움직이지 않으셨습니다. 만나를 주시고 물을 주시며 길을 보여 주셨지만, 그들은 끊임없이 선택해야 했습니다. 믿을 것인가 원망할 것인가, 앞으로 갈 것인가 애굽으로 돌아가고 싶어 할 것인가. 주님의 말씀을 따를 것인가 자기 욕망을 따를 것인가... 이런 선택들이 쌓이면서 그들의 내적 상태가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출애굽’은 구원의 시작이면서 동시에 거듭남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악의 직접적인 지배에서 건져 내신 뒤, 비로소 본격적인 내적 정돈이 시작됩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통찰입니다. 어떤 사람은 회심 직후, 자기 안에 이전보다 더 많은 문제를 발견하고 낙심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었는데, 왜 나는 여전히 이런 생각을 하는가’, ‘왜 예전보다 오히려 내 악이 더 잘 보이는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빛이 들어왔기 때문에 이전에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방 안이 어두울 때에는 먼지가 보이지 않습니다. 햇빛이 들어오면 공중에 떠다니는 먼지까지 보입니다. 먼지가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빛 때문에 드러난 것입니다. 영적인 삶도 비슷합니다. 주님의 진리가 들어올수록 사람은 자기 안의 이기심과 거짓, 지배욕과 인정욕을 더 섬세하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참된 거듭남이 진행될수록 사람이 자기 자신을 점점 더 대단하게 생각하기보다 오히려 주님의 자비를 더 필요로 하는 사람임을 깨닫게 되는 역설이 생깁니다.
여기에서 ‘광야 연단’과 ‘성화’를 단계별 성취로만 이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광야를 통과하여 어느 날 ‘이제 나는 다 되었다’고 선언하는 것이 거듭남의 목표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남은 평생 계속되며, 천국에서도 사랑과 지혜의 완성은 끝없이 깊어집니다. 유한한 피조물이 무한하신 주님의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이는 데에는 끝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완덕’은 더 이상 성장할 것이 없는 종착점이라기보다, 주님의 질서 안에 들어가 계속해서 더욱 온전해지는 생명으로 이해하는 편이 좋습니다.
이렇게 보면 가나안 역시 단순히 ‘모든 시험이 끝난 완성 상태’라고만 볼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 이스라엘은 요단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간 뒤에도 싸움을 계속합니다. 여리고가 있고, 아이성이 있으며, 여러 민족과의 전쟁이 이어집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어떤 중요한 영적 문턱을 넘었다고 해서 모든 악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내적인 차원의 싸움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가나안이 특별히 주님의 나라, 교회, 그리고 인간 안의 천국적 상태를 표상합니다. 그러나 그 땅에 들어가는 과정과 그곳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사람이 선과 진리를 실제 자기 생명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악과 거짓이 어떻게 제거되어 가는지를 보여 줍니다. 따라서 출애굽-광야-가나안은 단순히 ‘불신자-신자-완전한 신자’라는 세 칸짜리 도표가 아니라, 한 사람 안에서 거듭남이 점점 더 깊어지는 역동적인 과정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여기서 ‘요단강’도 중요합니다. 강을 건너는 것은 경계를 넘어가는 사건입니다. 모형적 해석에서는 흔히 죽음이나 결정적인 성화의 문턱으로 읽힐 수 있지만, 스베덴보리에게 요단은 교회와 천국으로 들어가는 입구와 관련된 의미를 갖습니다. 특히 가장 외적인 진리, 곧 사람이 실제 삶으로 들어가기 위해 먼저 받아들여야 하는 기초적 진리를 나타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요단을 건넌다는 것은 단지 감정적으로 높은 영적 체험을 하는 것보다, 진리를 실제 삶 안으로 받아들이는 새로운 단계로 들어가는 것과 연결하여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차이를 알고 나면, ‘핵심진리’의 모형적 성경 읽기를 부정할 필요 없이 더 풍성하게 확장할 수 있습니다. ‘애굽은 구원 전, 광야는 연단, 가나안은 성화 후’라고 큰 지도를 먼저 이해하되, 그것을 절대적인 세 단계 공식으로 굳히지 않고, 말씀의 각 사건이 보여 주는 세밀한 영적 상태들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형적 진리가 상응의 세계로 열리기 시작합니다.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장점이 있습니다. 성경이 갑자기 ‘나의 이야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를 읽으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왜 저렇게 원망했을까’라고 남의 이야기를 읽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이스라엘은 지금 무엇 때문에 애굽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가’를 묻게 됩니다. 바로를 보면서 고대 이집트의 폭군만 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명령을 알면서도 자기 욕망을 놓지 않으려는 내 안의 완고함을 보게 됩니다. 만나를 보면서 고대의 기적적인 음식만 보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내 영혼에 필요한 선을 주님께서 어떻게 공급하시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가진 가장 큰 장점 가운데 하나가 나타납니다. 말씀의 속뜻은 사람에게 다른 사람을 판단할 자료를 주기보다 자기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됩니다. ‘바로는 저 악한 사람이다’, ‘애굽은 저 세속적인 사람들이다’, ‘광야에서 죽은 사람들은 저 믿음 없는 교인들이다’라고 외부를 향해 적용하는 순간, 말씀은 쉽게 심판의 도구가 됩니다. 그러나 ‘바로가 내 안에 있고, 애굽도 내 안에 있으며, 금송아지도 내 안에 있다’고 읽기 시작하면 말씀은 회개의 도구가 됩니다.
이것은 ‘핵심진리’가 추구하는 성화의 방향과도 잘 어울립니다. 다른 교회의 문제를 찾아내는 것보다 내 안의 애굽을 발견하는 것이 먼저이고, 다른 사람의 죄성을 지적하기보다 내 안에서 아직 주님께 순종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렇게 모형을 자기 내면으로 가져올 때, 출애굽 이야기는 단순한 종말의 예표나 교리적 도표를 넘어 매일의 거듭남을 위한 살아 있는 말씀이 됩니다.
그리고 이 관점에서 보면, 공용복 선생의 병상생활 역시 ‘광야’라는 말 하나로 단순화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 긴 세월에는 아마 수많은 종류의 영적 상태가 있었을 것입니다. 기대와 실망, 확신과 회의, 기도와 침묵, 감사와 고통이 있었을 것입니다. 실제 ‘병상의 증거자 공용복’도 그의 생애를 처음부터 흔들림 없는 영웅담으로만 묘사하지 않고 회의와 역경의 과정까지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그 삶을 귀하게 만드는 것은 ‘평생 고난을 견뎠다’는 한 문장이 아니라 그 긴 시간 동안 반복해서 하나님을 향하려 했다는 데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출애굽의 모형은 어느 한 번의 사건보다 ‘방향’을 가르쳐 줍니다. 애굽을 향하는가, 가나안을 향하는가. 넘어졌는가보다 다시 어느 방향으로 일어서는가가 중요합니다. 광야에서 원망한 적이 있는가보다 원망 가운데서 다시 주님을 바라보는가가 중요합니다. 거듭남은 완벽한 사람들의 행진이 아니라 넘어지고 드러나고 돌이키면서 점점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모형적 진리’를 다루는 2강의 출발은 상당히 귀합니다. 성경을 단지 지식으로 공부하지 않고 자기 생명의 지도처럼 읽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합니다. 그 지도는 단순한 단계표가 아니라 상응으로 이루어진 살아 있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한 사건 안에도 여러 깊이가 있고, 같은 표상도 문맥에 따라 서로 다른 상태를 나타내며, 그 모든 속뜻의 중심에는 궁극적으로 주님과 그분의 구원 역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2강 1부에서 붙들어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나는 지금 어느 단계인가?’보다 어쩌면 ‘주님께서는 지금 내 안에서 무엇을 보여 주고 계시는가?’일 것입니다. 전자는 자칫 자기 영적 수준을 측정하게 만들 수 있지만, 후자는 주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내가 광야에 있다고 느껴진다면 ‘나는 아직 낮은 단계구나’라고 낙심할 것이 아니라 ‘이 광야에서 주님께서 내 안의 무엇을 드러내시며, 무엇을 가르치고 계시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그렇게 읽을 때 출애굽은 수천 년 전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넘어 오늘의 이야기가 됩니다. 애굽에서 불러내시는 분도 주님이시고, 홍해를 가르시는 분도 주님이시며, 광야에서 만나를 내리시는 분도 주님이시고, 반석에서 물을 내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인간은 걷고 선택하고 싸우지만 구원의 처음부터 끝까지 실제 생명과 능력은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이것이 모형적 진리가 상응의 속뜻으로 더 깊어질 때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중심입니다.
그리고 이 중심을 붙들면 ‘핵심진리’가 강조하는 연단도 무겁고 두려운 수행의 길만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광야에서도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있었고, 만나가 있었으며, 반석의 물이 있었습니다. 시험보다 먼저 주님의 섭리가 있었고, 인간의 실패보다 더 오래 주님의 인도가 있었습니다. 거듭남의 길이 힘든 것은 사실이지만, 사람이 홀로 자기 힘으로 가나안까지 걸어가는 길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먼저 불러내시고, 동행하시며, 먹이시고, 가르치시고, 마침내 인도하십니다.
이렇게 2강의 첫 문을 열어 두면, 다음 부분부터 등장하는 출애굽의 여러 사건과 ‘핵심진리’의 구원 단계들을 보다 공정하게 볼 수 있겠습니다. 먼저 이 공동체가 왜 그것을 중요한 모형으로 읽는지 충분히 이해하고, 그다음 스베덴보리의 상응과 말씀의 속뜻을 통해 그 의미를 한 층씩 더 깊게 열어 보겠습니다. 그렇게 할 때 ‘모형적 진리’는 폐기해야 할 낡은 해석법이 아니라, 더 깊은 상응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하나의 의미 있는 입구가 될 수 있습니다.
2강 2부
2강의 두 번째 부분에서 강의는 출애굽과 광야라는 큰 모형을 인간의 내면으로 더 깊이 가져옵니다. 앞에서 광야가 단순히 고난의 장소가 아니라 사람 안에 숨어 있던 불신과 욕망과 자기중심성이 드러나는 자리라고 했다면, 이제 강사 목사님은 그 문제를 로마서 7장과 8장을 통해 설명합니다. 특히 로마서 7장을 ‘광야 성도들이 경험하는 내용’, 로마서 8장을 ‘생명과를 먹은 성도들이 경험하는 내용’으로 나누어 읽습니다. 강의에 따르면, 말씀을 철저히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서 비로소 자기 안의 깊은 죄성이 드러나며, 로마서 7장의 갈등은 바로 그 내면의 죄를 발견하는 상태를 보여 줍니다.
강사 목사님은 여기에서 ‘표면적인 죄’와 ‘내면의 죄’를 매우 분명하게 구별합니다. 표면적인 죄는 말과 행동으로 실제 밖에 드러나는 죄이고, 내면의 죄는 아직 행동으로 나타나기 전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악심과 탐심입니다. 강의는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괴로워하는 이유가 외적인 율법을 전혀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철저히 지키려고 할수록 그보다 더 안쪽에 있는 탐심을 발견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탐내지 말라’는 계명이 없었다면 자신 안의 탐심을 알지 못했을 것이라는 롬7:7을 특별히 강조합니다.
이 부분은 ‘핵심진리’의 죄 이해에서 매우 중요한 진전입니다. 사람은 흔히 자신의 신앙 상태를 눈에 보이는 행동으로 평가합니다. 사람을 죽이지 않았고, 도둑질하지 않았고, 외적인 간음을 하지 않았고, 교회생활을 성실히 했으므로 자신을 비교적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빛이 더 깊이 들어오면 행동 이전의 마음이 보입니다. 실제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어도 누군가를 심하게 미워하고 있었고, 남의 것을 훔치지 않았어도 끊임없이 탐하고 있었으며, 겉으로 겸손해 보여도 속에서는 인정받고 높아지기를 갈망했던 자기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핵심진리’는 바로 이 층을 ‘내면의 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와 상당히 깊게 만나는 부분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거듭남은 외적 행동 몇 가지를 고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겉 사람을 계명에 맞추는 일이 필요합니다. 화가 나도 폭언을 하지 않고, 이익이 생겨도 거짓말하지 않고, 탐욕이 일어나도 부정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계속되면서 사람은 점점 더 ‘왜 나는 저 사람에게 이렇게 화가 나는가’, ‘왜 저 사람의 성공이 못마땅한가’, ‘왜 내 의견이 무시되면 견디기 힘든가’라는 더 깊은 사랑의 문제와 마주하게 됩니다. 행동의 뿌리에 있는 지배적인 사랑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로마서 7장의 경험을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려는 사람일수록 자기 안의 죄를 더 많이 발견하게 된다’고 읽는 강의의 통찰은 상당히 실제적입니다. 강사 목사님도 ‘철저히 노력하지 않으면 경험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역설처럼 보이지만 영적 삶에서는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주님의 빛이 약할 때에는 자기 안의 많은 것을 보지 못합니다. 빛이 밝아질수록 전에 보이지 않던 먼지가 보이듯, 진리를 진지하게 살려고 할수록 이전에는 문제라고 느끼지 못했던 작은 자기 사랑과 거짓까지도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거듭나기 시작하면 오히려 예전보다 자기가 더 악해진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악이 갑자기 더 많이 생긴 것이 아니라, 전에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는 자기상이 무너지고, 주님의 도움 없이는 자기 안의 악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이 점점 분명해집니다. 이런 의미에서는 로마서 7장의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라는 탄식이 단순한 영적 실패의 고백이라기보다 더 깊은 자기 인식이 시작된 상태를 보여 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구별 하나가 필요합니다. ‘마음에 악한 생각이나 충동이 떠올랐다’는 것과 ‘그 악을 내 것으로 받아들여 사랑했다’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인간의 생각과 애정에는 천국과 지옥으로부터 끊임없이 인플럭스가 들어옵니다. 사람이 원하지 않는 분노, 음란한 생각, 질투, 교만한 상상이 불쑥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타난 순간 곧바로 ‘이것이 곧 내 죄성이고, 내가 이 악을 범했다’고 자기에게 귀속시키면 지나친 자기 정죄로 흐를 수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생각을 어떻게 대하느냐입니다. 그것을 즐거워하고 붙잡으며 실제 의지로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이것은 주님의 질서에 맞지 않는다’고 보고 거절하는가입니다. 시험은 악이 전혀 떠오르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악과 선이 함께 의식 앞에 놓였을 때, 사람이 자유롭게 어느 쪽에 동의하는가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죄’를 세밀하게 살피는 ‘핵심진리’의 엄격함은 귀하지만, 모든 순간적 악한 생각을 곧바로 자기 본질로 동일시하지 않는 균형도 함께 필요합니다.
이 차이는 실제 영성생활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자기 내면을 진지하게 살피는 사람일수록 오히려 생각과 감정에 민감해지기 때문입니다. 화가 잠깐 올라온 것만으로 ‘나는 아직 전혀 변화되지 않았다’고 낙심할 수도 있고, 원치 않는 음란한 생각 하나 때문에 자신을 깊은 죄인으로 몰아붙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무엇이 떠올랐는가’만큼이나 ‘그것을 나는 사랑하는가, 미워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악이 보인다는 사실 자체가 오히려 그것과 싸울 수 있는 빛이 주어지고 있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이 점에서 ‘핵심진리’가 말하는 ‘범죄하기 쉬운 기회’라는 표현도 중요하게 볼 수 있습니다. 평온할 때에는 자기 안의 분노나 탐심이 잘 보이지 않지만, 실제 이해관계가 걸리고, 자존심이 상하고, 욕망이 자극되면 마음의 상태가 나타납니다. 강사 목사님은 바로 이런 환경에서 바울이 자기 안의 악심과 탐심을 발견했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1부에서 살핀 광야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광야는 새로운 악을 만들어 내는 곳이 아니라 이미 안에 있던 것이 밖으로 드러나는 곳입니다.
여기서 공용복 선생의 병상 생애를 조용히 떠올려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토록 극심한 육체적 제약 속에서는 평상시 건강한 사람이 좀처럼 마주하지 않을 수많은 내적 반응이 계속 일어났을 것입니다. ‘왜 나인가’, ‘왜 낫지 않는가’, ‘하나님께서는 왜 침묵하시는가’ 같은 질문 속에서 원망과 절망, 자기연민과 두려움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병상의 증거자 공용복’이 그의 삶을 처음부터 흔들림 없는 승리담으로만 기록하지 않고 ‘회의와 역경’까지 보여 준다는 사실은 오히려 의미가 있습니다. 내면의 싸움이 있었다는 것은 신앙이 없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런 싸움을 통하여 신앙이 실제 생명이 되어 갔을 가능성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강의는 로마서 7장의 상태를 이렇게 충분히 설명한 뒤 로마서 8장으로 넘어갑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매우 강한 전환을 제시합니다. ‘7장은 광야 성도들이 경험하는 내용’이고, ‘8장은 생명과를 먹은 성도들의 경험’이라는 것입니다. 롬8:1-2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를 읽으면서, 이제 생명의 성령의 법이 역사하면 죄의 법에서 실제로 해방되어 ‘범죄할 좋은 기회가 와도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에 ‘핵심진리’의 성화론이 아주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복음은 사람에게 죄를 지어도 계속 용서받는 길만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 지배 자체로부터 실제로 해방하는 능력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 제기입니다. 사람이 평생 같은 죄를 반복하면서도 ‘나는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았으니 괜찮다’고만 생각한다면 구원이 실제 삶의 변화와 분리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핵심진리’는 바로 이 점을 강하게 거부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이 방향에서는 매우 가까이 갑니다. 구원은 죄책을 법적으로 지워 주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사람이 악의 지배에서 실제로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악을 즐거워하던 사람이 그것을 싫어하게 되고, 선을 억지로 행하던 사람이 선을 기뻐하여 행하게 되는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진리가 외적 명령에서 내적 사랑이 되어 갈 때 사람은 점차 천국의 자유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해방’의 의미에서는 두 관점 사이에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핵심진리’의 설명은 뒤로 갈수록 죄성의 뿌리가 실제로 뽑히고, 그 결과 죄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는 상태를 매우 강하게 말합니다. 실제 강의는 광야 연단을 마치고, 마음과 행실이 정결해지면, 하나님께서 ‘영혼 속에 뿌리박힌 죄성을 뽑아내는 할례’를 베푸시며, 그 뒤 생명을 넣어 주어 생명과를 먹게 하신다고 설명합니다. 이 문제는 다음 3부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겠지만, 로마서 8장의 해석에도 이미 그 구조가 들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죄에서 해방된다’는 것은 악한 proprium이 존재론적으로 사라져 다시는 어떤 악한 충동도 생길 수 없게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더 정확히는 악이 사람을 지배하지 못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전에는 분노가 올라오면 거의 자동적으로 행동으로 이어졌다면, 거듭남이 진행된 사람은 그 분노를 보면서도 그것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더 깊어지면 악을 거절하는 일이 점점 자연스러워지고, 선을 행하는 것이 기쁨이 됩니다. 그러나 그는 그 선을 자기 능력의 결과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진정한 자유는 ‘나는 이제 악한 생각 자체가 전혀 없다’는 상태보다 ‘악이 다가와도 그것을 원하지 않고, 주님의 도움으로 따르지 않을 수 있다’는 상태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더욱 깊은 천국적 상태에서는 악을 따르지 않는 것이 억압이나 고통이 아니라 기쁨이 됩니다. 마치 정직한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싶지만 억지로 참는 것이 아니라, 거짓 자체가 자기 사랑과 맞지 않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진실을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로마서 7장과 8장을 서로 완전히 다른 두 종류의 사람으로 고정하는 데에는 조금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7장 사람’은 아직 죄성이 있고 ‘8장 사람’은 죄성이 완전히 제거된 사람이라고만 나누면 신앙생활이 지나치게 단계적인 자기판정으로 흐를 수 있습니다. 한 사람 안에서도 로마서 7장과 같은 경험과 로마서 8장과 같은 자유가 여러 층에서 반복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어떤 욕망에서는 상당한 자유를 얻었지만, 더 깊은 자기 사랑이 드러나면 다시 큰 싸움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에서 매우 중요한 특징입니다. 사람의 내면은 한 층이 아닙니다. 겉 사람의 어떤 악이 질서를 잡고 나면 더 내적인 원인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행동을 다스리고, 다음에는 생각을, 더 깊게는 그 생각을 낳는 애정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싸움이 완전히 사라지기보다 더 미세하고 내적인 형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물론 동시에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깊은 평안과 자유도 커집니다.
이 관점은 ‘완덕’을 생각할 때, 중요한 균형을 줍니다. 완덕을 ‘더 이상 자기 안에서 악을 발견하지 않는 상태’라고 생각하면 두 가지 위험이 생깁니다. 여전히 악을 느끼는 사람은 절망하고, 자기 안에서 악을 별로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가 높은 단계에 도달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영적 성숙은 오히려 자기에게는 선이 없으며, 모든 선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인식이 깊어지는 방향으로 갑니다. 자신감보다 주님께 대한 의존이 깊어집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신인 합일’이라는 이 공동체의 언어도 다시 돌아볼 수 있습니다. 가장 깊은 신인 합일은 ‘나는 이제 죄성이 없고, 신적 상태에 도달했다’는 자기 선언으로 나타나기보다, 자기 proprium을 덜 신뢰하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더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상태로 나타날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과 결합된 사람이라면, 자기 안의 선을 자기 공로로 여기기보다 오히려 더 겸손해질 것입니다.
강사 목사님이 로마서 7장을 바울의 ‘마음의 죄 발견’으로 읽는 부분에서 또 하나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바울의 서신은 교회를 위한 매우 유익한 사도적 문헌이지만, 창세기와 출애굽기, 복음서, 요한계시록처럼 연속적인 속뜻과 아르카나를 가진 엄밀한 의미의 ‘말씀’에는 포함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로마서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로마서 7장과 8장을 애굽-광야-가나안이라는 말씀의 표상 구조와 일대일로 연결하여, 그 자체를 하나의 상응 체계처럼 읽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해석법과는 다릅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7장=광야’, ‘로마서 8장=가나안’이라는 대응은 ‘핵심진리’가 제시하는 유익한 교리적 비유로는 받아들일 수 있지만, 말씀의 속뜻 자체라고까지 말하는 데에는 구별이 필요합니다. 로마서가 설명하는 영적 갈등과 성령 안의 자유를 출애굽의 표상적 역사와 함께 묵상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양쪽이 본래부터 동일한 내적 상응 구조로 기록되었다고 보는 것은 별개의 주장입니다.
이 차이를 굳이 날카로운 비판으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두 자료의 역할을 구별하면 됩니다. 출애굽기는 말씀의 표상과 속뜻을 통하여 거듭남의 질서를 보여 주고, 로마서는 사도적 교훈을 통하여 인간 안의 죄와 은혜, 성령 안의 삶을 교리적으로 설명합니다. 둘을 서로 비추어 읽을 수 있지만, 그 영감의 구조와 속뜻의 성격까지 같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무엇보다 이번 부분에서 가장 귀하게 남는 것은 ‘행동 이전의 사랑을 보라’는 요청입니다. 강의는 바울의 탐심을 통하여 행동만 보아서는 죄를 충분히 알 수 없다고 강조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서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가 ‘그 탐심은 어떤 사랑에서 나오는가’를 묻습니다. 왜 남의 것을 원하는가. 왜 다른 사람보다 더 갖고 싶어 하는가. 왜 내 뜻이 이뤄지지 않으면 불안한가. 그 밑바닥에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여러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거듭남의 핵심은 바로 이 ‘지배적인 사랑’의 질서가 바뀌는 것입니다. 자기와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과 세상에 필요한 것을 돌보는 사랑은 질서 안에서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최고의 자리에 올라가 주님과 이웃을 이용하기 시작하면 악이 됩니다.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중심이 되고, 자기와 세상에 대한 사랑이 그 아래에서 쓰임을 섬길 때 비로소 질서가 회복됩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의 ‘생명의 성령의 법’도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새로운 지배적인 사랑의 법’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자기 사랑의 즐거움이 사람을 끌고 갔다면,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의 즐거움이 더 강해집니다. 억지로 죄를 안 짓는 것에서 벗어나,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악이 싫어지는 상태로 변화합니다. 이것이 참된 해방입니다.
이렇게 보면 로마서 7장과 8장의 관계를 ‘패배와 완전무결’보다 ‘싸움과 자유’의 관계로 보는 것이 더 깊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7장에서는 자기 안의 악을 발견하면서 ‘나는 내 힘으로 이것을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로마서 8장에서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 안에서 악의 지배가 깨지는 자유를 경험합니다. 그러나 그 자유의 근원은 끝까지 자기에게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공용복 선생의 생애를 바라볼 때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극심한 고통을 견뎌 냈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가운데 자기 힘의 한계를 어떻게 받아들였으며, 자기 생명의 근원을 어디에서 찾았는가일 것입니다. 거의 육체적 자율성을 잃어버린 상황은 역설적으로 ‘내가 내 힘으로 내 삶을 지배한다’는 자연적인 확신을 극단적으로 흔드는 자리였을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주님의 생명과 능력을 말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핵심진리’의 성화론이 단순한 인간 의지력 훈련으로만 구성된 것은 아니라는 점도 함께 기억하게 합니다.
그래서 이 강의를 ‘행위구원’이라는 한마디로 잘라 버리는 것도 공정하지 않습니다. 강의는 인간에게 실제 순종과 싸움을 강하게 요구하지만, 그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 그리스도의 생명을 강조합니다. 인간이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수동적인 은혜관을 거부하는 것이지, 하나님 없이 인간이 자기 힘으로 완덕을 획득한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인간의 노력과 주님의 생명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더 섬세하게 정리할 필요는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관계를 아주 독특하게 표현합니다. 사람은 ‘마치 자기 자신에게서 하는 것처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실제 힘은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사람의 자유로운 의지가 사라지면 결합도 없지만, 그 자유를 자기 고유한 능력이라고 생각하면 자기 공로로 흐릅니다. ‘내가 싸운다’와 ‘주님이 힘을 주신다’가 함께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이번 2강 2부의 가장 좋은 결론은 ‘마음의 죄까지 철저히 찾아내라’는 데서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내면의 악을 보는 목적은 자기 자신을 끝없이 정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악을 주님께 가져가기 위해서입니다. 빛이 더 밝아져 자기 안의 더 깊은 탐심과 교만을 발견했다면, 그것은 절망할 이유가 아니라 주님의 구원이 더 깊은 층에까지 들어오고 있다는 신호일 수도 있습니다.
로마서 7장의 탄식이 로마서 8장의 자유로 이어지는 중심에도 바로 이 사실이 있습니다. ‘나는 왜 이렇지?’라는 자기 분석에서 끝나지 않고, ‘누가 나를 건져 내랴’라는 질문이 주님께로 향합니다. 거듭남은 자기를 깊이 보는 일이지만, 끝없이 자기만 바라보는 일은 아닙니다. 자기 악을 본 뒤 시선을 주님께 돌리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표면의 죄’에서 ‘마음의 죄’로 깊어지는 이번 강의의 방향은 매우 귀합니다. 다만 그 내면 탐구가 자기정죄나 영적 완벽주의로 흐르지 않고, 모든 구원과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로 귀결되어야 합니다. 그때 로마서 7장의 괴로움과 로마서 8장의 자유는 서로 대립하는 두 계급의 영적 신분이 아니라 한 사람이 주님 안에서 점점 더 깊이 거듭나는 과정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다음 3부의 주제가 열립니다. ‘핵심진리’는 이 죄와의 싸움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연단’, ‘죄성과 정욕’, ‘영혼의 할례’, ‘생명과’라는 강한 언어로 설명합니다. 특히 광야 연단을 마친 뒤 ‘죄성의 뿌리를 뽑아내는 할례’가 이루어지고 생명과를 먹게 된다는 설명은 이 공동체 성화론의 핵심 중 핵심입니다. 다음 2강 3부에서는 그 가르침의 진지함을 충분히 존중하면서, 스베덴보리에게 악이 ‘제거된다’는 것은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proprium과 유전악, 실제악,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새로운 의지의 형성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2강 3부
2강의 세 번째 부분에 들어서면 ‘핵심진리’의 성화론이 가장 선명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앞의 2부에서 강의는 로마서 7장을 통하여 행동으로 드러나는 ‘표면의 죄’보다 더 안쪽에 있는 탐심과 악심, 곧 ‘마음의 죄’를 발견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제 질문은 자연스럽게 다음 단계로 넘어갑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발견된 죄성과 정욕은 어떻게 처리되는가?’입니다. 강의가 이에 대해 내놓는 핵심적인 대답은 ‘광야의 연단’이며, 그 연단의 끝에서 ‘영혼의 할례’가 이루어지고, 마침내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생명과’를 먹게 된다는 구조입니다. 이 부분은 ‘핵심진리’ 전체를 이해하는 데 대단히 중요합니다.
먼저 강의가 말하는 ‘연단’을 단순히 많은 고통을 겪는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연단의 본질은 ‘범죄하기 쉬운 환경에서 실제로 죄를 범하지 않고 말씀에 순종하는 훈련’에 있습니다. 모욕을 당했을 때 모욕으로 갚고 싶은 마음이 올라오고, 손해를 보았을 때 자기 이익을 지키고 싶은 욕망이 일어나며, 자기 뜻이 꺾였을 때 분노와 아집이 드러납니다. 바로 그 순간 자기 욕망을 그대로 따라가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하는 것이 연단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연단은 고생의 양을 측정하는 개념이 아니라 시험 속에서 어떤 선택을 했는가를 보는 개념에 가깝습니다.
이 점은 상당히 귀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는 것과 실제로 변화되었다는 것은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많이 들었고 기도를 많이 했으며, 교회에서 오래 봉사했다고 해서 자기를 거스르는 상황에서도 반드시 온유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실제 갈등의 순간에 무엇이 나오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평상시에는 친절하지만 자기 의견이 무시되면 크게 분노하고, 사랑을 말하면서도 손해가 생기면 이웃을 외면한다면 아직 진리가 의지와 충분히 결합하지 않은 것입니다. ‘핵심진리’가 연단을 실제 생활 속의 순종으로 보는 것은 바로 이런 자기기만을 막으려는 데 강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이 지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시험은 거듭남에 없어서는 안 될 과정입니다. 사람 안에는 오래된 proprium의 사랑과 주님으로부터 새롭게 받아들이는 선과 진리가 함께 존재하게 됩니다. 평온한 상태에서는 둘 사이의 충돌이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상황이 자기 사랑을 자극하면 숨어 있던 악한 애정이 올라오고, 동시에 양심과 진리가 그것을 거부하려 합니다. 그때 사람 안에서 실제 영적 싸움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먼저 중요한 균형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거룩하게 만들기 위해 일부러 악과 고통을 만들어 보내신다고 이해하면 안 됩니다. 주님에게서는 악이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다른 사람들의 자유로운 악, 그리고 지옥의 인플럭스로 인해 수많은 고통과 갈등이 일어납니다. 주님께서는 그것들을 원인으로 창조하시는 것이 아니라 허용하시며, 허용된 악조차 거듭남의 선한 결과를 위해 굽혀 사용하십니다. ‘주님께서 이 고통을 보내셨다’와 ‘주님께서 이 고통 속에서도 나를 버리지 않고 선을 이루신다’는 말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 구별은 공용복 선생님의 병상생활을 생각할 때도 매우 중요하겠습니다. 거의 온몸이 자유롭지 않은 상태로 장기간 살아간 그 고통을 ‘하나님께서 공용복 선생님을 성화시키기 위해 병을 주셨다’고 너무 간단히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하나님의 섭리를 지나치게 직접적인 원인으로 돌릴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병이라는 엄청난 제한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붙드시고, 그 고통조차 그의 신앙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실 수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병상의 증거자 공용복’에서 보이는 중요한 부분도 고통 자체의 크기보다, 그 고통 가운데 그가 어떤 방향으로 하나님을 찾았는가에 있을 것입니다.
‘핵심진리’는 이러한 연단의 결과를 매우 강한 표현으로 설명합니다. 광야에서 마음과 행실이 정결해지면 하나님께서 ‘영혼의 할례’를 베푸시고, 그 할례를 통하여 영혼 안에 뿌리박힌 죄성을 제거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성이 제거된 뒤 하나님의 생명이 사람 안에 들어오며, 이것을 ‘생명과를 먹는다’고 설명합니다. 이 구조에서는 광야 연단-정결-영혼의 할례-생명과라는 분명한 진행이 형성됩니다. 따라서 ‘성화’는 조금 더 착하게 살아가는 정도가 아니라 인간 안의 죄 문제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사건으로 이해됩니다.
여기서 ‘할례’라는 이미지는 성경적으로도 매우 강력합니다. 육체의 불필요한 부분을 베어 내듯, 영적으로는 하나님과의 결합을 방해하는 부정한 것을 제거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특히 신10:16의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라는 말씀이나 렘4:4의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라는 표현은 외적인 종교의 표지가 아니라 마음 자체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런 의미에서 ‘영혼의 할례’라는 ‘핵심진리’의 표현은 매우 적절한 영적 직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할례는 매우 중요한 표상입니다. 할례는 특별히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불결한 사랑을 제거하는 것을 표상합니다. 가장 외적이고 감각적인 자기 사랑이 주님의 질서에 복종하도록 제거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핵심진리’가 할례를 죄성의 처리와 연결하는 큰 방향 자체는 스베덴보리의 상응과 상당히 가까이 갑니다.
그러나 ‘제거된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서는 매우 중요한 차이가 생깁니다. ‘핵심진리’의 문장을 문자적으로 따라가면, 죄성이 마치 인간 영혼 속에 박혀 있는 어떤 뿌리나 물질과 같고, 영적 할례를 받으면 그것이 뽑혀 나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처럼 이해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뒤의 ‘이기는 자’ 가르침과 결합되면 ‘죄 문제를 완전히 해결한 상태’라는 표현이 상당히 강해집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거듭남론은 조금 다른 그림을 제시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에게 있는 악한 proprium은 지상생활에서 존재론적으로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악들을 제거하여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게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사람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옆으로 밀어내고 제어하십니다. 동시에 주님으로부터 새로운 의지가 형성되어 선이 지배적인 사랑이 되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악은 여전히 인간 proprium의 가능성으로 남아 있지만, 주님께 결합되어 있는 동안 그것은 통치권을 행사하지 못합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악이 ‘없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안에서 다시 분노나 탐심이나 교만이 올라왔을 때 두 가지 극단으로 갈 수 있습니다. 하나는 ‘나는 아직 영혼의 할례를 받지 못했구나’ 하고 지나치게 낙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나는 이미 죄성이 제거되었으니 지금 올라오는 것은 죄가 아니다’라고 자기 상태를 잘못 판단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설명은 이 두 위험을 모두 피하게 해 줍니다. 악한 충동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다시 지배권을 잡도록 내가 동의하느냐입니다.
오히려 거듭난 사람일수록 자기 안에서 나오는 것이 본질적으로 선하지 않다는 사실을 더 깊이 깨닫습니다. 천사들 역시 자신들에게 있는 선과 지혜를 자기 소유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 오며,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은 악이라고 인정합니다. 이것은 천사들이 스스로를 증오한다는 뜻이 아니라, 생명의 원천을 정확하게 안다는 뜻입니다. 가장 높은 상태에 이를수록 자기 성취에 대한 확신보다 주님께 대한 의존이 깊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죄성이 뿌리 뽑힌다’는 ‘핵심진리’의 표현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가장 선하게 읽는다면, ‘죄성이 더 이상 지배적인 사랑이 되지 못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이전에는 모욕을 받으면 분노가 주인이었지만, 이제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이 더 강하여 그 분노를 거절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돈을 더 갖고 싶은 욕망이 모든 판단을 움직였지만, 이제는 정직과 이웃의 유익이 더 중요한 사랑이 됩니다. 악의 가능성이 제거되었다기보다 생명의 왕좌가 바뀐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 거듭남의 핵심입니다. ‘무엇이 내 안에 존재하는가’보다 ‘무엇이 내 삶을 지배하는가’입니다. 사람 안에 여러 종류의 충동과 생각이 들어올 수 있지만, 그중 무엇을 자기 의지로 받아들여 생명의 중심에 놓느냐가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으로는 ‘지배적인 사랑’이 인간 전체를 형성합니다. 사람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가장 사랑하는가에 따라 나머지 생각과 행동이 그 사랑을 섬기도록 배열됩니다.
따라서 성화는 인간에게서 모든 자연적인 욕구를 제거하는 과정도 아닙니다. ‘핵심진리’에서 정욕을 강하게 경계하기 때문에 여기 역시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먹고 싶은 욕구, 쉬고 싶은 욕구, 재산을 갖고 싶은 마음, 인정받고 싶은 자연적인 감정 자체가 모두 악한 것은 아닙니다. 이것들은 질서 안에서는 인간 생활에 필요한 것들입니다. 악은 그것들이 더 높은 사랑을 지배하게 될 때 생깁니다.
예를 들어 돈을 사랑하는 것에도 질서가 있습니다. 가족을 부양하고 맡겨진 쓰임을 충실히 수행하며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재산을 관리하는 것은 선한 질서 안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돈 자체가 생명의 목적이 되어 정직과 이웃을 희생하기 시작하면 세상 사랑이 주님과 이웃 사랑을 지배하게 됩니다. 성화는 돈을 완전히 버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돈이 제 자리에 있도록 사랑의 질서를 회복하는 데 있습니다.
이 점은 수도적 영성을 이해할 때 특히 중요합니다. 금식, 절제, 수면 제한, 재산 포기 같은 외적인 자기 부인은 어떤 사람에게 매우 유익한 영적 훈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외적 고행 자체가 거룩함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많은 것을 포기하면서도 ‘나는 이렇게까지 했다’는 자기 의를 키울 수 있습니다. 반대로 평범한 가정과 직업생활을 하면서 자기 욕망을 절제하고 이웃에게 유익한 쓰임을 수행하는 사람이 매우 깊은 체어리티의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정욕을 죽인다’는 표현 역시 자연적인 인간 전체를 파괴하는 의미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자연적인 사람은 버려야 할 악한 껍데기가 아니라 영적인 것이 자연계에서 쓰임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그릇입니다. 거듭남은 자연적인 사람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질서 아래 두는 것입니다. 속사람에서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과 진리가 겉 사람을 질서 있게 다스릴 때 자연적인 욕구와 능력은 오히려 선한 쓰임의 훌륭한 도구가 됩니다.
이러한 관점으로 ‘생명과’를 보면 의미가 더 분명해집니다. ‘핵심진리’에서는 광야 연단을 마치고 영혼의 할례를 받은 뒤 하나님께서 생명을 넣어 주시고 비로소 생명과를 먹게 되는 구조가 강합니다. 즉 생명과가 일종의 성화 완성 이후 주어지는 결정적인 생명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생명은 거듭남 마지막에 처음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 회개할 마음이 생긴 순간부터, 악을 악으로 볼 수 있는 빛이 생긴 순간부터, 선을 행하고 싶은 작은 애정이 생긴 순간부터 이미 주님의 생명이 역사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 생명이 없으면 광야 자체를 통과할 수 없습니다. 악을 볼 수 있는 빛도 주님으로부터 오고, 그것을 싫어할 수 있는 양심도 주님께서 보존하신 리메인스를 통하여 움직이며, 악을 거절할 힘도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그러므로 생명과는 광야의 끝에 처음 주어지는 상이라기보다 광야를 처음부터 끝까지 걷게 하는 생명의 원천이라고 보는 편이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에 더 가깝습니다.
이 차이는 에덴의 생명나무를 이해할 때 더욱 선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생명나무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퍼셉션, 궁극적으로는 주님 자신을 나타냅니다. 태고교회 인간이 생명나무 가운데 살았다는 것은 그들이 자기 지혜로 살기보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으로 살았다는 뜻입니다. 타락은 그 생명을 아직 한 번도 받아 보지 못했다가 나중에 얻을 기회를 잃은 사건이라기보다, 주님으로부터 살던 사람이 자기 proprium과 감각적 판단으로 선악을 결정하려 한 사건입니다.
따라서 생명과를 먹는다는 것은 ‘이제 충분히 정결해졌으므로 하나님께서 특별한 생명을 넣어 주신다’는 한 번의 사건으로만 제한하기보다, 주님의 선과 진리를 자기 의지와 삶으로 받아들이는 전 과정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진리를 듣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사랑하여 행할 때, 영적으로 ‘먹는’ 일이 일어납니다. 먹은 음식이 몸의 일부가 되듯, 받아들인 선과 진리가 사람의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혼의 할례-생명과’의 관계도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주님의 생명을 받은 뒤에야 악을 제거할 수 있는 것이지, 인간이 먼저 자기 안의 모든 악을 깨끗하게 제거한 다음 빈 마음에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순서는 아닙니다. 주님의 생명이 먼저 역사하기 때문에 사람이 악을 볼 수 있고, 그것을 멀리할 수 있으며, 그 생명이 더 깊이 자리 잡으면서 악의 지배가 약해집니다. 은혜는 성화의 마지막 상이 아니라 성화 전체의 원인입니다.
이것은 ‘핵심진리’가 가진 강한 연단론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연단의 힘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더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실제로 선택해야 합니다. 화가 날 때 참아야 하고, 탐욕이 올라올 때 정직을 선택해야 하며, 자기 뜻이 꺾일 때 주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주님이 알아서 바꾸실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거듭남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모든 선택을 가능하게 하는 빛과 힘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도 동시에 인정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두 가지를 ‘마치 스스로 하는 것처럼’이라는 독특한 원리로 설명합니다. 사람은 마치 자신의 힘으로 하는 것처럼 자유롭게 싸워야 합니다. 주님께서 대신 화를 참아 주시는 것이 아니고, 사람을 기계처럼 선하게 움직이시는 것도 아닙니다. 실제로 선택하는 사람은 인간입니다. 그러나 싸움에서 이길 능력을 자기에게 돌려서는 안 됩니다. 그 능력은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이 두 가지가 함께 있을 때 인간의 자유도 보존되고 주님의 신성한 역사도 인정됩니다.
이 관점은 공용복 선생님의 생애를 바라볼 때도 한층 더 의미가 있습니다. 거의 전신이 자유롭지 않은 사람이었다면 ‘인간의 노력’이라는 말 자체가 건강한 사람과는 전혀 다르게 들렸을 것입니다. 외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극도로 제한된 상태에서는 ‘나는 이것을 해냈다’는 자기 능력의 환상이 훨씬 일찍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의 자유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몸을 움직일 자유는 크게 제한되었어도 마음으로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하나님을 향할 것인가, 원망에만 머물 것인가 하는 내적 자유의 문제가 남아 있었습니다. 이 점은 인간의 자유가 단순한 육체적 행동 능력과 같지 않다는 것을 매우 깊게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 부분은 ‘리메인스’의 관점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시험을 받을 때 완전히 빈 상태에서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사람에게 선과 진리의 상태들을 보존해 두십니다. 부모에게서 받은 사랑, 하나님에 대한 순진한 신뢰, 이웃에게 선을 행했을 때의 기쁨, 말씀을 통해 받아들인 진리 같은 것들이 리메인스로 남습니다. 이후 시험에서 주님께서는 그것들을 사용하여 사람의 양심을 움직이고 악과 싸울 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랜 세월 같은 ‘핵심진리’를 반복해서 듣는 일도, 그것이 삶과 선한 애정에 결합된다면 단순한 정보의 반복 이상이 될 수 있습니다. 진리가 사람 안에 보존되어 훗날 시험의 순간에 쓰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반복된 진리가 자기 교리의 확신만 강하게 만들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척도가 된다면 방향은 달라집니다. 리메인스의 핵심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선과 진리가 결합된 상태입니다. ‘나는 이 진리를 안다’보다 ‘이 진리 때문에 나는 조금 더 온유하고 정직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되었는가’가 중요합니다. 진리가 기억에만 있으면 지식이지만, 의지에 들어가 삶이 되면 영적 생명이 됩니다.
이 점에서 ‘핵심진리’가 연단의 결과를 반드시 ‘빛의 열매’로 확인하려 하는 태도는 귀합니다. 말로 ‘나는 많이 연단받았다’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자기를 모욕한 사람을 위해 기도하며, 말씀을 따라 선을 선택하는 열매가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기준은 영적 단계에 대한 자기과시를 상당 부분 견제할 수 있습니다. 높은 체험을 말하기보다 실제 생활의 열매를 보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열매’를 공로로 바꾸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선한 열매는 천국 입장 점수를 얻기 위한 행위가 아닙니다. 나무가 살아 있기 때문에 열매가 맺히듯,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은 사람이 그 생명에 따라 살 때 자연스럽게 선한 열매가 나타납니다. 따라서 열매는 구원을 ‘구매하는 조건’이라기보다 주님과의 결합이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결과입니다.
이렇게 보면 ‘영혼의 할례’도 인간이 자기에게 칼을 대어 죄성을 제거하는 영적 수술이 아니라, 사람이 주님의 진리에 순종하여 악을 멀리할 때 주님께서 자기 사랑의 지배를 점점 약화시키시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악을 보고 거절해야 하지만, 그 악을 실제로 분리하고 새 질서를 세우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이 차이가 있어야 성화가 자기완성의 프로젝트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완덕’이라는 말도 가장 건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완덕은 ‘나는 더 이상 죄의 가능성이 없는 사람이다’라는 완전무결 선언이 아니라, 주님의 선과 진리가 점점 더 자유롭게 사람 안에서 하나가 되어 삶으로 나타나는 상태입니다. 사람은 유한하기 때문에 끝없이 성장할 수 있으며, 천국에서도 사랑과 지혜는 영원히 깊어집니다. 그러므로 완전함은 성장의 정지가 아니라 주님께 계속 열려 있는 질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공용복 선생님과 그 제자들의 관계를 생각할 때도 의미가 있습니다. 만일 그분들이 스승에게서 배운 ‘성화’를 단지 어떤 특별한 단계에 도달하는 기술로만 받아들였다면 수십 년의 반복은 경직된 단계론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승의 병상과 삶, 그가 강조했던 순종과 자기 부인을 기억하면서 ‘나도 실제로 저 말씀처럼 살아야 한다’고 반복해서 자신을 돌아본다면 같은 문장을 수십 번 듣는 일의 의미는 전혀 달라집니다. 특히 생전 공용복 선생님의 육성을 기억하는 원로들에게는 그 문장이 단순한 정의가 아니라 ‘저 말씀을 하던 사람이 실제 어떻게 살았는가’와 함께 들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보정 작업에서는 ‘핵심진리’의 강한 성화 언어를 너무 쉽게 완벽주의나 행위구원으로 이름 붙이지 않는 것이 중요하겠습니다. 이 공동체가 실제로 강조하는 것은 ‘자기 힘으로 완전해져라’라기보다 말씀과 성령의 도움 가운데 실제로 죄와 싸우고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 변화의 종착점을 ‘죄성이 뿌리째 제거된 단계’로 얼마나 절대화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사람 스스로 판정할 수 있는지는 별도의 신학적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여기서 제공하는 가장 중요한 보완은 ‘제거’에서 ‘질서의 변화’로 시선을 옮기는 것입니다. 내 안에 악이 있는가 없는가만 보지 않고, 지금 무엇이 내 삶의 주인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이 왕좌에 앉아 있는가, 아니면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왕좌에 있는가. 악이 일어나는 순간이 있는가보다 그 악을 즐거워하며 살고 있는가, 아니면 그것을 싫어하고 주님의 도움으로 멀리하려 하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이 기준은 신앙인을 훨씬 겸손하게 만듭니다. 자신의 상태를 ‘완성’이라고 선언하기 어렵게 만들면서도 동시에 작은 악이 나타났다고 절망하지 않게 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직 화가 올라온다. 그러니 거듭나지 않았다’가 아니라 ‘화가 올라왔지만 나는 그것을 정당화하지 않고 주님께 도움을 구해 거절하고 있는가’를 보게 됩니다. 이것이 악의 지배에서 자유로워지는 실제 과정입니다.
그리고 이런 자유가 깊어지면 처음에는 억지로 했던 선이 점점 기쁨이 됩니다. 처음에는 이를 악물고 원수를 용서하려 했다면, 나중에는 정말 그 사람의 선을 바랄 수 있게 됩니다. 처음에는 계명 때문에 정직했다면 나중에는 진실 자체를 사랑하게 됩니다. 바로 이때 ‘생명과를 먹는다’는 표현이 매우 아름답게 살아납니다. 진리가 더 이상 외부의 명령으로만 있지 않고 자기 사랑과 의지의 생명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2강 3부에서 ‘핵심진리’와 스베덴보리는 상당히 가까이 걸어갑니다. 양쪽 모두 구원이 실제 인간의 변화여야 한다고 말하고, 악을 죄로 알고 피해야 하며, 시험 가운데 자유로운 선택과 싸움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핵심진리’는 광야 연단의 완성-영혼의 할례-죄성 제거-생명과라는 비교적 뚜렷한 성화의 문턱을 말하는 반면, 스베덴보리는 악의 proprium이 존재론적으로 사라진다기보다 주님으로부터 새로운 의지가 형성되면서 악이 지배력을 잃고 선이 지배적인 사랑이 되는 점진적 거듭남을 강조합니다.
이 두 관점의 차이를 가장 간단하게 표현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핵심진리’는 ‘죄의 뿌리가 얼마나 제거되었는가’를 묻는 경향이 강하고, 스베덴보리는 ‘지금 나를 실제로 지배하는 사랑이 무엇인가’를 묻습니다. 전자의 질문은 사람을 철저한 자기 성찰과 정결로 이끄는 힘이 있고, 후자의 질문은 그 정결이 자기 공로와 영적 자기판정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주님께 시선을 돌리게 합니다.
두 질문을 함께 품는다면 ‘연단’은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들어 완전한 인간이 되는 수행이 아니라, 시험 가운데 자기 proprium의 실상을 보고 그것을 주님의 질서 아래 두며,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생명이 점점 자기 삶을 자유롭게 다스리도록 하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해한다면 공용복 선생님이 병상에서 붙들었던 ‘성화’라는 주제도 고통의 신격화가 아니라, 인간의 외적 능력이 극도로 제한된 상황에서도 주님께서 속사람을 어떻게 다루시고 생명을 형성하실 수 있는가라는 훨씬 깊은 질문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제 2강 마지막 4부에서는 이 모든 구조가 집중되는 ‘이기는 자’를 살펴보겠습니다. ‘핵심진리’가 말하는 ‘이기는 자’는 광야의 연단을 통과하고, 영혼의 할례를 받아 죄성이 처리되며, 생명과를 먹고, 흰옷과 인침을 받은 특별한 성도들로 설명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14만 4천, 처음 익은 열매, 휴거와 연결됩니다. 다음에는 이러한 강한 단계론이 실제 어떤 신앙적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를 먼저 충분히 이해한 뒤, 요한계시록에서 ‘이기는 자’, ‘흰옷’, ‘인침’, ‘14만 4천’이 스베덴보리의 상응에서는 무엇을 뜻하는지를 차분하게 비교해 보겠습니다.
2강 4부
2강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지금까지 다룬 출애굽, 광야, 로마서 7장과 8장, 연단, 영혼의 할례, 생명과라는 흐름이 모두 ‘이기는 자’라는 표현으로 모입니다. ‘핵심진리’의 체계에서 ‘이기는 자’는 단순히 예수를 믿는 모든 성도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광야의 연단을 통과하고, 죄성과 정욕의 문제에서 깊은 정결을 경험하며, 생명과를 먹고, 흰옷을 입고, 하나님의 인침을 받은 성도들을 가리키는 매우 특별한 명칭으로 사용됩니다. 이들은 ‘처음 익은 열매’와 연결되고, 요한계시록의 14만 4천과도 연결되며, 종말론적으로는 대환난을 면하고 휴거될 준비가 된 성도들로 설명됩니다. 이 구조만 놓고 보면 ‘핵심진리’의 성화론과 종말론이 이 지점에서 완전히 하나로 합쳐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이 가르침의 신앙적 의도를 충분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기는 자’를 강조하는 목적이 단순히 ‘특별한 소수의 엘리트 성도’를 만들어 내는 데 있다고만 보면 이 공동체의 실제 관심을 놓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강의의 전체 흐름을 보면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습니다. ‘나는 예수를 믿었으니 이미 다 되었다’고 안주하지 말고, 실제로 자기 안의 죄와 싸우며,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고, 끝까지 주님께 붙들려야 한다는 강한 요청이 중심입니다. 그러므로 ‘이기는 자’라는 말은 명예로운 신분을 얻기 위한 칭호라기보다 실제 삶의 변화를 요구하는 긴장된 영적 언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공동체의 오랜 반복 훈련과도 연결됩니다. 같은 ‘핵심진리’를 수십 번 듣는 이유가 단순히 교리를 더 많이 외우기 위해서라면 그 반복은 곧 지루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실제로 이 말씀을 살고 있는가’, ‘내 안의 혈기와 탐욕과 자기 의가 줄어들고 있는가’, ‘원수를 사랑하고 손해 속에서도 정직을 선택하는가’를 계속 점검하기 위해 같은 말씀을 다시 듣는다면 반복의 성격은 전혀 달라집니다. 특히 생전 공용복 선생님의 육성과 삶을 직접 기억하는 원로들에게 ‘이기는 자’라는 말은 단순한 요한계시록의 용어가 아니라, 자신들이 보았던 한 스승의 오랜 신앙 여정과 겹쳐 들릴 수 있습니다.
강의가 ‘작은 승리’를 중요하게 보는 점도 주목할 만합니다. ‘이기는 자’라고 하면 흔히 엄청난 영적 전쟁을 치르고 기적적인 승리를 거둔 사람을 떠올리기 쉽지만, 실제 영적 싸움은 매우 사소한 일상에서 일어납니다. 피곤할 때 짜증을 내지 않는 것, 누가 내 말을 무시했을 때 즉시 방어하지 않는 것, 손해가 생겨도 거짓말하지 않는 것, 인정받지 못해도 맡은 일을 충실히 하는 것, 나를 불편하게 한 사람의 선을 바라는 것 같은 작은 선택들이 쌓입니다. 이런 작은 승리를 강조한다는 점은 ‘핵심진리’의 성화론이 적어도 실제 생활을 상당히 중시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이 지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거듭남은 대개 극적인 체험보다 작은 일상의 선택에서 이루어집니다. 사람의 지배적인 사랑은 한두 번의 큰 결단으로만 형성되지 않고, 매일 반복되는 수많은 작은 선택을 통해 점점 굳어집니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정직한가, 상대가 나를 불편하게 해도 선을 선택하는가, 자기 공로를 말하고 싶은 순간에 조용히 물러설 수 있는가, 이런 작은 선택들이 결국 한 사람의 영적 방향을 만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작은 일에서 이겨야 한다’는 강조는 매우 깊은 영적 현실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기는 자’를 하나의 완성된 별도 계급으로 고정하는 데에는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에 반복되는 ‘이기는 자’라는 표현은 각기 다른 상태의 신앙인 모두에게 주어집니다. 첫사랑을 잃은 에베소 교회에도, 환난을 견디는 서머나 교회에도, 미지근한 라오디게아 교회에도 ‘이기는 자’가 되라는 말씀이 주어집니다. 이것은 이미 모든 싸움을 끝낸 사람만을 가리킨다기보다, 자기 상태 안에서 주님의 도움으로 악과 거짓을 이겨 가는 사람을 가리킨다고 보는 편이 자연스럽습니다.
여기에서 ‘이긴다’는 말의 주체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실제로 이기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인간은 악을 죄로 알고 피하고, 진리를 따라 실제로 선택하고 행동해야 하지만, 그 싸움에서 선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은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따라서 참된 ‘이기는 자’의 특징은 ‘나는 이제 충분히 강해졌다’는 자기 확신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께서 붙들어 주시지 않으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깊은 의존입니다. 영적 승리가 깊어질수록 자기 공로 의식은 줄고 주님께 대한 감사가 커지는 것이 더 천국적인 방향입니다.
이 점은 ‘흰옷’과도 연결됩니다. ‘핵심진리’에서는 흰옷이 매우 특별한 상태의 표지로 설명됩니다. 모든 죄 문제가 해결되고, 의롭다 하심이 단지 법적 선언이 아니라 실제 삶의 정결로 나타난 성도에게 주어지는 표지처럼 이해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에게 ‘옷’은 진리를 나타내고, ‘흰색’은 진리의 빛과 정결함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흰옷을 입는다는 것은 주님의 진리가 그 사람의 삶을 덮고 있으며, 그 진리가 실제 행실에 나타나는 상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이제 나는 죄 문제가 완전히 끝난 사람이다’라는 자기 인증서로 읽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오히려 흰옷의 본질은 자기 의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진리’에 있습니다. 천사가 아름다운 옷을 입는 것은 자기 공로를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진리의 상태가 외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흰옷은 ‘내가 깨끗해졌다’는 선언보다 ‘주님이 주신 진리가 내 삶에 나타나고 있다’는 의미로 읽는 것이 더 스베덴보리적입니다. 그렇게 보면 ‘흰옷’도 인간의 성취보다 주님의 선물이라는 방향으로 시선이 옮겨집니다.
‘인침’도 마찬가지입니다. ‘핵심진리’에서는 14만 4천의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과 어린양의 이름이 기록되는 것을 특별한 ‘이기는 자’의 표지로 봅니다. 이들은 일반 성도와 구별되는 처음 익은 열매이며, 종말의 특별한 역할을 맡은 사람들로 설명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이름’은 단순한 문자 이름이 아니라 그 존재의 성질을 나타내고, ‘이마’는 사랑과 의지의 가장 깊은 것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마에 주님의 이름이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의 지배적인 사랑과 의지가 주님께 속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 해석은 매우 중요합니다. ‘인침’을 특수한 사람에게 외적으로 찍히는 표식처럼 생각하는 대신, ‘내 가장 안쪽의 사랑이 주님께 속해 있는가’를 묻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영계에서 진짜 표지는 외부에서 붙이는 명찰이 아니라 사람의 사랑 자체입니다. 천국의 영들은 서로의 외모와 말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의 애정을 느끼고, 비슷한 사랑을 가진 이들이 함께 모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인침을 받는다는 것도 본질적으로는 그 사람의 내적 사랑이 주님과 결합된 상태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가장 중요한 14만 4천의 문제가 나옵니다. ‘핵심진리’에서는 이 숫자를 실제 예정된 인원수로 이해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이들은 교회 시대의 특별한 ‘이기는 자’이며 처음 익은 열매로서 휴거되고, 이후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습니다. 이 숫자를 실제 인원으로 받아들이면 신앙의 질문은 자연스럽게 ‘나는 그 수 안에 들어갈 수 있는가’라는 방향으로 가기 쉽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14만 4천은 실제 인원수가 아닙니다. ‘열둘’은 선과 진리에 속한 모든 것을 나타내고, 그것이 확대된 ‘일만 이천’과 ‘14만 4천’은 주님의 교회 안에 있는 선과 진리의 충만함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숫자가 ‘몇 명’이냐를 묻는 대신 ‘어떤 상태’냐를 묻게 됩니다.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충만하게 결합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이 해석은 ‘특별한 소수’보다 ‘주님께 속한 완전한 영적 상태’를 강조합니다.
이 차이는 신앙생활에 상당히 큰 영향을 줍니다. 실제 숫자로 이해하면 ‘나는 선택된 집단에 들어갈 수 있는가’라는 경쟁적 긴장이 생길 수 있습니다. 반대로 상응으로 읽으면 ‘내 안에서 선과 진리가 얼마나 결합되고 있는가’를 보게 됩니다. 전자는 다른 사람과 비교할 가능성이 크고, 후자는 자기 내면을 돌아보게 합니다. 앞서 이 공동체가 ‘작은 승리’를 중요하게 본다는 점을 생각하면, 오히려 후자의 질문이 그 실제 영성훈련과도 상당히 잘 어울립니다.
‘처음 익은 열매’라는 표현도 비슷합니다. ‘핵심진리’에서는 특별히 먼저 완성된 성도들을 가리키는 단계적 명칭으로 사용됩니다. 그러나 성경의 열매 이미지를 더 넓게 보면 ‘익음’의 본질은 그 열매가 자기 힘으로 완성되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나무가 생명을 받아 열매를 맺듯, 사람도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선의 열매를 맺습니다. 따라서 ‘처음 익은 열매’의 강조가 지나치게 자기완성의 성취로 읽히지 않고, 주님께서 사람 안에서 먼저 이루신 결실로 이해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공용복 선생님의 생애가 다시 조용히 배경으로 들어옵니다. 거의 온몸이 마비되는 극심한 제약 속에서 오랜 세월을 산 사람에게 ‘이긴다’는 말이 단순히 성공하고 능력을 발휘하는 의미였을 가능성은 낮습니다. 외적으로는 아무것도 이겨낸 것처럼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병은 계속되었고, 육체의 제한은 커졌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승리’가 의미를 가지려면 결국 상황을 정복하는 승리보다 상황 속에서 자기 내면이 어떻게 주님께 향했는가 하는 승리여야 할 것입니다. 이 점은 ‘이기는 자’라는 말을 권력적·영웅적으로 읽지 않게 해 줍니다.
그래서 참된 ‘이기는 자’의 모습은 강한 사람이라기보다 ‘끝까지 주님께 붙드는 사람’에 더 가깝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시험이 사라진 사람이 아니라 시험 속에서도 주님을 떠나지 않는 사람, 악한 생각이 전혀 없는 사람이 아니라 악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 한 번도 넘어지지 않은 사람이 아니라 넘어졌을 때 회개하고 다시 주님께 돌아서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이긴다’는 말은 자기 공로의 선언이 아니라 주님의 승리에 참여한다는 뜻이 됩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의 ‘이기는 자’라는 표현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계시록의 모든 승리는 궁극적으로 어린양의 승리입니다. 사람은 자기 힘으로 용과 짐승을 이기지 않습니다. 어린양의 피와 증언의 말씀으로 이긴다고 하는 것도 결국 주님의 구속과 진리 안에서 승리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기는 자’의 중심은 ‘내가 무엇을 성취했는가’가 아니라 ‘주님의 승리가 내 삶 안에서 얼마나 실제가 되었는가’입니다.
이 관점에서는 ‘휴거’에 대한 이해도 조금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핵심진리’에서는 이기는 자가 대환난을 면하고 특별한 방식으로 들림받는 구조가 강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성경의 ‘들림’이나 ‘올라감’을 단순한 육체적 공간 이동으로만 읽지 않고, 더 높은 영적 상태로 들어가는 의미를 볼 수 있습니다. 영계에서 ‘위로 올라간다’는 것은 사랑과 지혜의 상태가 더 내적으로 높아지는 것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들림받는다’는 말의 핵심도 공간보다 상태일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핵심진리’의 휴거 이해와 분명히 다른 방향입니다. 이 차이를 억지로 좁힐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각각 무엇을 강조하는지를 분명히 보는 것이 좋습니다. ‘핵심진리’는 역사적 종말과 실제 사건의 연속성 속에서 ‘이기는 자’를 설명하고,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상응을 통해 그 상태가 모든 시대의 사람 안에서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봅니다. 하나는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다른 하나는 ‘이 말씀이 지금 내 안에서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더 강하게 묻습니다.
그렇다고 미래 소망을 무의미하게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도 인간의 사후 생명과 천국의 실재, 교회의 역사적 변화, 최후의 심판과 새 교회의 도래를 실제적인 것으로 봅니다. 다만 그것을 자연적인 시간표와 사건의 순서에만 가두지 않습니다. 말씀은 모든 시대의 사람에게 살아 있어야 하며, 요한계시록도 어느 한 마지막 세대에게만 의미 있는 책이 아니라 지금의 교회와 각 사람의 영적 상태를 비추는 말씀이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이기는 자’라는 말은 매우 현재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어느 미래 집단에 들어갈 것인가’보다 ‘오늘 나는 무엇을 이겨야 하는가’입니다. 오늘의 분노, 오늘의 인정욕, 오늘의 두려움, 오늘의 게으름, 오늘의 자기 의를 주님의 도움으로 어떻게 대할 것인가가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싸움에서 한 번 승리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층이 열리면 또 다른 싸움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거듭남의 길에서는 ‘나는 이기는 자가 되었다’는 선언보다 ‘오늘도 주님께 붙들려야 한다’는 태도가 더 안전합니다. 특히 자기 상태를 영적 단계로 분류하는 가르침에서는 이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완전히 알지 못합니다. 더구나 다른 사람의 내적 상태를 판정할 수는 없습니다. 외적으로 매우 미숙해 보이는 사람 안에 주님을 향한 깊은 사랑이 있을 수 있고, 반대로 영적 언어를 능숙하게 사용하는 사람 안에 자기 사랑이 강하게 숨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핵심진리’의 오랜 공동체적 전승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생전 공용복 선생님을 기억하는 원로들이 ‘핵심진리’를 들을 때, 만일 ‘이기는 자’라는 말을 스승의 특별한 지위나 신비한 능력으로만 기억한다면 그 가르침은 영적 영웅주의로 흐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병상에서 실제 고통을 겪으면서도 하나님을 향하려 했던 한 사람의 삶을 함께 기억한다면 ‘이긴다’는 말은 전혀 다른 울림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외적인 환경을 정복했다는 말이 아니라, 환경에 짓눌려도 주님을 놓지 않았다는 뜻으로 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인간 스승과 주님을 구별하면서도 제자도에서 배울 수 있는 지점입니다. 제자는 스승의 특별한 체험이나 명성을 모방하는 사람이 아니라, 스승에게서 보았던 주님을 향한 방향을 자기 삶에서 이어 가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공용복 선생님의 제자들이 ‘핵심진리’의 문장을 보존하는 것보다 더 깊은 과제는 그 문장이 요구하는 삶을 실제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주님의 열두 제자도 결국 주님의 말씀을 정확히 암기한 사람들이 아니라, 그 말씀을 자기 생명으로 받아 세상에 증언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기는 자’의 가장 안전한 표지는 특별한 지식이나 체험이 아니라 삶의 열매일 것입니다. 더 온유해졌는가, 더 진실해졌는가, 다른 사람의 선을 더 기뻐하는가, 자기 공로를 덜 주장하는가, 맡겨진 쓰임을 더 충실히 수행하는가, 자기에게 해를 준 사람을 위해서도 선을 바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나는 이기는 자다’, ‘나는 생명과를 먹었다’, ‘나는 인침을 받았다’는 말은 아무리 높아도 다시 살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천국관에서는 천사가 높을수록 자기 자신을 낮게 여긴다고 설명합니다. 그들이 자기 비하에 빠져 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에게 있는 모든 선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더 분명히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이기는 자’라는 가르침이 사람을 더 겸손하게 만들고 주님께 더 의존하게 한다면 그 가르침은 천국적 방향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나는 일반 성도와 다르다’는 영적 우월감을 키운다면 그 순간 그 가르침의 목적과 멀어질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14만 4천도 ‘특별한 자격을 가진 소수’라는 외적인 그림보다 ‘주님께 속한 선과 진리가 충만하게 결합된 상태’로 읽을 때 매우 아름다워집니다. 그렇게 읽으면 숫자가 사람을 나누는 벽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거듭남의 목표가 됩니다. 어느 시대, 어느 민족, 어느 교파에 속했든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받아 삶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그 영적 의미 안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새 예루살렘’과의 연결도 자연스럽습니다. ‘핵심진리’에서는 이기는 자가 새 예루살렘과 특별히 연결되는 구조가 강하지만, 스베덴보리에게 새 예루살렘은 주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새 교회와 그 교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새 예루살렘에 들어간다는 것은 특정한 천국 수도의 시민권을 얻는 것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새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진리대로 살아가는 상태에 들어가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기는 자’와 ‘새 예루살렘’의 관계도 결국 주님의 진리를 사랑하고 삶으로 받는 사람이라는 방향으로 깊어집니다.
이렇게 보면 2강 전체가 하나의 큰 질문으로 묶입니다. ‘구원받았다고 고백한 뒤 실제로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입니다. 1부의 출애굽과 광야, 2부의 로마서 7장과 8장, 3부의 연단과 영혼의 할례, 4부의 이기는 자는 모두 이 한 질문을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합니다. 신앙은 단지 출발점이 아니라 실제 생명의 변화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핵심진리’가 던지는 매우 귀하고도 강한 요청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 요청을 약화시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깊게 가져갑니다. 다만 변화의 기준을 ‘특별한 단계에 도달했는가’보다 ‘어떤 사랑이 나를 지배하고 있는가’에 두고, 모든 변화의 실제 원천을 인간의 연단 성취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에 둡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의 숫자와 옷과 인침을 외적 신분표보다 내적 상태의 상응으로 읽습니다.
그렇게 보면 ‘이기는 자’는 더 이상 완성된 소수의 영적 엘리트가 아닙니다. 악이 나타날 때마다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거절하고, 실패하면 회개하고, 다시 선을 선택하며, 받은 선을 자기 공로로 돌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 힘을 자랑하지 않고 주님께 붙듭니다. 오히려 싸움이 깊어질수록 ‘내가 이겼다’보다 ‘주님께서 나를 붙들어 주셨다’고 말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마 이것이 공용복 선생님의 생애를 알고 난 뒤 ‘이기는 자’를 읽을 때 가장 달라지는 부분일 것입니다. 외적으로는 몸의 거의 모든 자유를 잃어 간 사람을 두고 ‘이긴다’는 말을 쓴다면, 승리의 의미는 세상의 성공이나 능력과 완전히 달라져야 합니다. 주님의 승리는 육체적 상황을 반드시 제거하는 데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 속에서도 한 사람의 속사람이 주님께 향하고, 사랑을 잃지 않으며, 자기 존재의 의미를 하나님 안에서 다시 찾는 데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2강의 최종 질문은 ‘나는 이기는 자인가?’를 자기 영적 등급 판정으로 묻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나는 무엇 앞에서 주님께 붙들려야 하는가?’로 묻는 것이 좋겠습니다. 오늘 화낼 자유가 있었지만 선을 선택했는가, 오늘 자기 이익을 위해 거짓말할 수 있었지만 진실을 선택했는가, 오늘 누군가를 낮추어 내가 높아질 수 있었지만 그 사람의 선을 바랐는가, 그리고 그 모든 선을 내가 잘해서라고 생각하지 않고 주님께 돌리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이라면 ‘이기는 자’라는 가르침은 사람을 나누기보다 모두를 주님 앞에 세웁니다. 높은 체험이 있는 사람도, 평범한 일상을 사는 사람도, 병상에 있는 사람도, 세상에서 쓰임을 수행하는 사람도 각자의 자리에서 같은 질문을 받습니다. ‘당신의 생명은 지금 어느 사랑을 향하고 있는가?’
이렇게 2강은 마무리해도 좋겠습니다. ‘핵심진리’의 강한 성화 의지와 실제 삶의 열매를 요구하는 진지함은 충분히 귀하게 남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 진지함을 주님 중심으로 더 내면화합니다. 죄의 뿌리가 완전히 사라졌는가를 자기 스스로 판정하기보다, 주님의 생명이 얼마나 내 사랑과 의지 안에서 자유롭게 역사하고 있는가를 보고, 14만 4천이라는 숫자 안에 들어갈 자격보다 오늘 주님의 선과 진리가 내 안에서 결합하고 있는지를 살피게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이기는 자’의 가장 깊은 모습은 더 이상 싸울 필요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 싸움이 올 때마다 누구에게 의지해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마지막 고백은 ‘내가 이겼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이기셨고, 나는 그분 안에서 살게 되었다’가 될 것입니다.
SY.34, 시흥영성수련원, ‘79차 심령부흥대사경회(20260727-1)’
※ 위 제목의 ‘SY’는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라는 뜻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성경 가운데서도 가장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는 책입니다. 어떤 이는 세계 역사의 마지막을 보여 주는 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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