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4:5)

 

AC.356

 

가인(Cain)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또는 그러한 분리를 인정하는 교리를 상징한다는 것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지 않으셨다(to his offering he looked not) 것이 그의 예배가 받아들여질 없었음을 상징한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했습니다. That byCainis signified faith separated from love, or a doctrine that admits of this separation; and thatto his offering he looked notsignifies that his worship was not acceptable, has been shown before.

 

 

해설

 

AC.356은 새로운 내용을 전개하는 글이라기보다 바로 앞 AC.355의 첫 부분을 확인하고 정리하는 짧은 연결 단락입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두 가지 모두 ‘앞에서 설명했다’고 밝히므로, 여기서는 이미 나온 내용을 길게 반복하기보다 앞으로 이어질 ‘분노’와 ‘안색이 변함’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한 전제를 다시 세워 놓았다고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첫 번째 전제는 ‘가인’입니다. 가인은 단순히 신앙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상징합니다. 더 정확하게는 ‘신앙과 사랑의 분리가 가능하다고 인정하는 교리’까지 포함합니다. 이 구별은 중요합니다. 처음에는 실제 삶에서 신앙과 사랑이 조금씩 멀어지는 상태일 수 있지만, 그것이 굳어지면 마침내 ‘사랑과 체어리티가 없어도 신앙은 신앙으로 온전히 존재할 있다’는 하나의 교리적 입장이 됩니다.

 

두 번째 전제는 ‘그의 제물을 돌아보지 않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가인이라는 개인에 대한 주님의 거절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오는 예배가 받아들여질 수 없음을 뜻합니다. 바로 앞 AC.349에서 보았듯이 외적 예배는 내적인 것으로부터 생명을 얻으며, 궁극적으로 주님에게서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라는 내적 생명에서 분리된 예배는 외적 형식을 아무리 갖추고 있어도 살아 있는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주의할 것은 ‘가인의 제물을 돌아보지 않으셨다’는 말씀을 ‘주님께서는 신앙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체어리티만 기뻐하신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문제는 신앙 자체가 아니라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입니다. AC.353에서는 오히려 ‘신앙 역시 사랑에서 비롯될 때에는 천적’이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 체어리티와 결합된 신앙은 살아 있는 신앙입니다.

 

따라서 가인과 아벨의 대비는 ‘신앙 체어리티’가 아닙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과 ‘체어리티와 결합된 살아 있는 신앙’의 대비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아벨이 상징하는 체어리티가 신앙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에 생명을 줍니다. 그래서 앞의 AC.341에서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가 없는 곳에는 신앙도 없다고까지 말했습니다.

 

이러한 전제를 AC.356에서 다시 확인하는 이유는 이제 가인의 더 깊은 내적 변화가 설명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보다 그 사실에 가인이 어떻게 반응하는지가 중요해집니다. 그는 자신을 돌아보고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하려 하지 않고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합니다.AC.355는 이것을 체어리티가 떠나고 내적인 것들이 변한 상태라고 미리 밝혔습니다.

 

따라서 AC.356은 짧지만 가인의 타락 과정에서 하나의 경계선과 같습니다. 지금까지는 ‘가인이 무엇을 상징하는가’, ‘그의 제물은 무엇인가’, ‘ 그의 예배가 받아들여질 없는가’를 설명했다면, 이제부터는 그러한 분리된 신앙이 인간의 내면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지를 살펴보게 됩니다.

 

결국 AC.356의 핵심은 이미 확인한 두 사실을 다시 붙드는 데 있습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며, ‘받아들여지지 않은 제물’은 그 분리된 신앙에서 나온 받아들여질 수 없는 예배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상태에서 다음 단계인 ‘분노’와 ‘안색의 변화’가 생겨납니다. 즉 잘못된 신앙과 예배의 질서는 결국 생각과 교리의 문제에만 머물지 않고 인간의 애정과 내적인 것들까지 변화시키기 시작합니다.

 

 

 

AC.355, 창4:5,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한 이유 - 체어리티가 떠날 때 내면에 일어나는 변화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But to Cain and his offering he looked not; and Cain’s anger was kindled exceedingly, and his faces fell. (창4:5) AC.355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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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But to Cain and his offering he looked not; and Cain’s anger was kindled exceedingly, and his faces fell. (4:5)

 

AC.355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가인(Cain)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또는 그러한 분리가 가능하다고 인정하는 교리를 상징합니다. 그의 제물을 돌아보지 않으셨다(offering not being looked to) 것은 앞에서와 같이 그의 예배가 받아들여질 없었음을 상징합니다. 가인이 몹시 분하여 그의 안색이 변했다(Cains anger being kindled exceedingly, and his faces falling) 것은 내적인 것들이 변했음을 상징합니다. 분노(anger) 체어리티가 떠났음을 뜻하고, 안색(faces) 내적인 것들을 뜻하는데, 그것들이 변할 안색이 떨어졌다(fall) 말합니다. ByCain,as has been stated, is signified faith separated from love, or such a doctrine as admits of the possibility of this separation; by hisoffering not being looked tois signified as before that his worship was unacceptable. ByCains anger being kindled exceedingly, and his faces fallingis signified that the interiors were changed. Byangeris denoted that charity had departed; and by thefaces,the interiors, which are said tofallwhen they are changed.

 

 

해설

 

AC.355부터 창4:5의 속뜻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앞의 AC.346-354에서는 가인과 아벨이 각각 무엇을 드렸으며, 왜 아벨의 제물은 받아들여지고, 가인의 제물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는지를 설명했습니다. 이제 말씀의 초점은 ‘ 결과 가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로 이동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한 감정적 분노가 아니라, 교회의 ‘내적인 것들이 변하는’ 과정으로 읽습니다.

 

먼저 ‘가인’에 대한 정의가 조금 더 정밀해졌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상징할 뿐 아니라 ‘그러한 분리가 가능하다고 인정하는 교리’도 상징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단순히 어떤 사람이 사랑 없이 신앙생활을 하는 상태를 넘어, ‘신앙은 사랑과 분리되어도 참된 신앙일 있다’고 교리적으로 인정하는 단계까지 나아간 것입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처음부터 가인이 극단적으로 타락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AC.347에서는 처음에는 가인이라 불리는 교리가 그렇게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로 보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신앙이 사랑에서 지금처럼 멀리 분리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처음의 작은 구별이 점차 실제적인 분리가 되고, 이제는 그 분리 자체를 하나의 교리로 인정하는 데까지 이릅니다.

 

따라서 ‘그의 제물을 돌아보지 않으셨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거절하셨다는 의미에 머물지 않습니다. AC.349에서 ‘제물’은 예배를 상징한다고 했으므로,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오는 예배는 주님께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외적으로 아무리 예배의 형식을 갖추고 있어도 그 안에 체어리티라는 생명이 없다면 참된 예배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가인의 반응이 나타납니다. ‘가인이 몹시 분하여.’ 스베덴보리는 이 ‘분노’를 단순히 기분이 상했다거나 질투했다는 자연적인 감정으로만 읽지 않습니다. ‘분노는 체어리티가 떠났음을 뜻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가인 이야기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왜 분노가 체어리티의 떠남을 나타낼까요? 체어리티가 있는 동안에는 다른 사람의 선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웃의 선을 기뻐하고 그의 선을 원합니다. 그러나 신앙이 자신을 사랑보다 높이고, 자신의 교리적 위치를 지키려 할 때, 체어리티는 점점 설 자리를 잃습니다. 특히 자신의 예배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아벨의 예배는 받아들여지는 상황에서 가인이 아벨을 향하여 분노한다는 것은, 신앙이 체어리티를 자기 형제로 받아들이기는커녕, 이제 그것을 적대하기 시작하는 상태를 보여 줍니다.

 

이 점에서 ‘몹시’라는 표현도 그냥 지나치기 어렵습니다. 분리는 이제 단순한 개념상의 구별이 아닙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와 분리된 뒤, 체어리티를 불편하게 여기고, 마침내 그것을 향해 분노하는 단계까지 왔습니다. 처음에는 ‘신앙도 사랑과 별개로 하나의 독립된 것이 아닌가?’라는 작은 변화에서 시작했지만, 그 질서가 계속 뒤집히자, 이제 사랑과 체어리티 자체가 신앙의 자기주장을 방해하는 것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의 안색이 변했다’는 말씀은 이 변화가 겉으로 드러난 모습을 나타냅니다. 영어 원문은 ‘his faces falling’, 문자적으로는 ‘그의 얼굴들이 떨어졌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얼굴(faces)을 인간의 ‘내적인 것들’로 해석합니다. 얼굴은 사람의 내면에 있는 애정과 생각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기뻐하면 얼굴이 밝아지고, 슬프거나 분노하면 얼굴이 달라지는 것처럼 얼굴은 내적 상태의 외적 표현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안색이 변했다’는 것은 단순히 가인이 화난 표정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내적인 것들이 변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변화입니다. 처음에는 신앙과 사랑의 관계에 관한 교리적 변화로 시작했지만, 이제 그 잘못된 질서가 인간의 내면 자체를 바꾸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흐름을 AC.338부터 연결해서 보면 가인의 타락 과정이 상당히 선명하게 보입니다. 처음에는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이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인식되고 인정’되기 시작합니다. 그다음 신앙이 사랑에서 점차 분리되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 분리가 하나의 교리로 굳어집니다. 그러자 체어리티 없는 신앙에서 죽은 행위와 받아들여질 수 없는 예배가 나오고, 이제 그 결과로 체어리티가 떠나면서 내적인 것들까지 변합니다. 이후에는 결국 아벨을 죽이는 단계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따라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은 어느 날 갑자기 발생한 영적 파국이 아닙니다. AC.355는 그 직전의 내적 과정을 보여 줍니다. 먼저 질서가 생각과 교리에서 뒤집히고, 그 뒤 애정이 변하며, 마침내 삶의 행위로 나타납니다. 잘못된 교리가 단순히 머릿속의 잘못된 생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래 지속되면 인간의 애정과 의지까지 바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오늘날의 신앙에도 매우 중요한 경고가 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잘못 이해하는 것은 단지 신학 시험에서 답 하나를 틀리는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바른 교리를 믿고 있으므로 어떻게 살아가든 신앙 자체는 온전하다’는 생각이 굳어지면, 처음에는 작은 교리적 분리처럼 보여도 점차 삶과 애정의 질서를 바꿀 수 있습니다. 심지어 자기의 옳음을 지키기 위해 체어리티를 오히려 방해물처럼 여기게 될 수도 있습니다.

 

특히 종교적 분노를 돌아볼 때 AC.355는 날카로운 기준을 제공합니다. 물론 모든 분노가 곧 체어리티의 상실이라는 식으로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악과 불의에 대한 의로운 분개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 신앙과 교리가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선이 오히려 인정받기 때문에’, ‘내가 옳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분노라면 그 안에 가인의 상태가 들어오고 있지 않은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인의 분노에서 특히 두려운 것은 그가 여전히 종교적인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그는 여호와께 제물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을 부정하거나 예배를 폐기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바로 그 종교성 안에서 체어리티가 떠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외적 종교생활이 계속된다는 사실만으로 내적 상태가 안전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진리를 말하고,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체어리티가 떠날 수 있다는 것이 가인의 이야기가 보여 주는 비극입니다.

 

반대로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가 살아 있는지를 끊임없이 살핍니다. 내가 진리를 더 알게 될수록 이웃을 더 사랑하는가, 더 자비로워지는가, 다른 사람의 선을 기뻐할 수 있는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낮아질 수 있는가를 살피는 것입니다. 신앙의 진리가 체어리티에 생명을 주는 주님의 선과 결합하고 있다면 사람의 내적인 것들도 점차 주님을 향해 열립니다.

 

결국 AC.355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는 ‘분노’보다 그 뒤에 있는 ‘내적인 것들의 변화’입니다. 가인의 얼굴이 변하기 전에 그의 내면이 변했습니다. 그리고 그 내면이 변한 근본 이유는 체어리티가 떠났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고, 그 분리가 교리로 굳어지며, 그 교리에서 예배하고, 마침내 체어리티 자체를 향하여 분노하게 될 때, 인간의 내적인 얼굴은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AC.355는 가인의 타락이 본격적으로 외적 행동으로 나타나기 직전의 결정적인 지점을 보여 줍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중립적인 상태로 머물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체어리티를 밀어내고, 체어리티가 떠나면 인간의 내적인 것들이 변합니다. 그리고 다음 말씀에서 주님께서는 바로 그 가인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하십니다. 아직 아벨을 죽이기 전입니다. 이것은 가인의 내면이 변하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도 주님께서 그를 버리지 않으시고 돌이킬 길을 열어 두고 계심을 이후의 글에서 살펴볼 중요한 출발점이 됩니다.

 

 

 

AC.356, 창4:5, ‘가인의 제물을 돌아보지 않으신 이유 -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예배’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4:5) AC.356 ‘가인’(Cain)이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또는 그러한 분리를 인정하는 교리를 상징한다는 것과, ‘그의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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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4, 창4:4, ‘주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신 이유 - 체어리티에 기초한 예배’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4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셨다’(Jehovah looked to Abel, and to his offe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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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4:4)

 

AC.354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셨다(Jehovah looked to Abel, and to his offering) 것은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과 체어리티에 기초한 모든 예배가 주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이는 아벨(Abel) 그의 제물(offering) 관하여 앞에서 이미 설명한 바와 같습니다. ThatJehovah looked to Abel, and to his offering,signifies that the things of charity, and all worship grounded therein, are pleasing to the Lord, has been explained before, as regards bothAbel,and hisoffering.

 

 

해설

 

AC.354는 매우 짧으며, 사실상 앞의 AC.350-353을 마무리하는 결론 역할을 합니다. 새로운 상응을 제시하기보다는 창4:4의 마지막 부분인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셨다’는 말씀의 속뜻을 다시 확인합니다. ‘아벨’은 체어리티이고, 그의 ‘제물’은 체어리티에 기초한 예배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셨다’는 것은 체어리티에 속한 것과 거기서 나오는 모든 예배가 주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특별히 중요한 표현은 ‘체어리티에 기초한 모든 예배’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단지 ‘체어리티가 주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하지 않고 예배의 근거, 곧 예배가 무엇에 ‘기초하고 있는가’를 봅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349에서 말한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들로부터 생명을 얻으며, 그것들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생명을 얻는다’는 원리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외적인 예배의 형식이 아무리 온전해 보여도 그 안에 체어리티라는 내적 생명이 없다면 그것은 살아 있는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체어리티에 기초한 예배는 살아 있습니다. 왜냐하면 체어리티 자체의 근원이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AC.352에서는 ‘모든 사랑은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며, 인간에게서 오는 것은 조금도 없다’고 했고, AC.353에서는 ‘기름’이 천적인 것, 곧 사랑에 속한 것을 나타내며 이것 역시 주님께 속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벨의 제물이 주님을 기쁘시게 했다는 것은 인간이 자기에게서 어떤 훌륭한 것을 만들어 주님께 바쳤기 때문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과 선을 주님의 것으로 인정하고, 그것을 체어리티의 삶과 예배로 다시 주님께 돌려드렸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여호와께서 돌아보셨다’는 표현도 주님께서 가인이라는 사람보다 아벨이라는 사람을 개인적으로 더 좋아하셨다는 뜻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주님께서 ‘돌아보시는’ 것은 아벨이 표상하는 체어리티와 그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예배입니다. 따라서 가인과 아벨의 제물에 대한 주님의 서로 다른 반응은 사람에 대한 편애가 아니라 두 종류의 내적 상태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점은 곧 이어질 가인의 반응을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가인 역시 제물을 드렸습니다. 외적으로는 예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온 예배였습니다. 반면 아벨의 예배는 체어리티에 기초했습니다. 결국 두 제물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을 드렸는가?’보다 ‘어디에서부터 드렸는가?’입니다. 한쪽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오고, 다른 한쪽은 체어리티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창4:4의 ‘돌아보셨다’는 말씀은 오늘날 우리의 예배에도 매우 직접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가 어떤 형식으로 예배하는가, 얼마나 정확한 교리를 고백하는가, 얼마나 많은 종교적 활동을 하는가도 중요하지만, 그 모든 것의 내적 근원이 무엇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예배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어지고, 진리를 알수록 체어리티의 삶으로 나아간다면 그 예배에는 아벨의 생명이 있습니다.

 

AC.354는 짧지만 AC.350-353 전체를 한 문장으로 압축합니다. ‘아벨 = 체어리티’, ‘처음 = 오직 주님께 속한 거룩한 ’, ‘기름 = 주님께 속한 천적인 사랑의 ’, 그리고 이 모든 것으로 드리는 ‘제물 = 체어리티에 기초한 예배’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셨다는 것은 결국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이 체어리티가 되고, 체어리티에서 예배가 나오는 질서’를 주님께서 기뻐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까지 계속 살펴온 가인과 아벨의 문제를 다시 가장 단순한 자리로 돌려놓습니다. 문제는 신앙이냐 행위냐의 대립이 아닙니다. ‘신앙과 예배 안에 체어리티의 생명이 있는가?’입니다. 신앙이 사랑에서 생명을 받고, 예배가 체어리티에 기초할 때, 그것은 주님께서 ‘돌아보시는’ 살아 있는 신앙과 예배가 됩니다.

 

 

 

AC.353, 창4:4, 아벨이 드린 ‘기름’은 무엇을 뜻하는가 - 사랑에 속한 천적인 것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3 ‘기름’(fat)은 천적인 것 자체를 상징하며, 이것 역시 주님께 속한 것입니다. 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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