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59.심화

 

3. 찾아오지 않는 성도

 

위 심화 2 본문 중 어떤 성도가 반복적인 문제를 가지고 찾아옵니다.’라고 하는데... 만일, 안 찾아올 경우는 어떻게 하나요?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 가령, 목회자에게 실망했다든지, 목회자를 비롯, 다른 제삼자가 자기 사정 아는 걸 프라이버시 침해로 여긴다든지 등의 이유로 말이지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찾아오지 않는 성도’에 대한 목회의 핵심은 ‘끌어내려 하기보다, 안전한 거리에서 관계의 문을 열어 두고, 스스로 돌아올 수 있는 통로를 지켜 주는 것’입니다. AC.59의 원리에 그대로 연결하면, 주님도 사람을 억지로 끌어내지 않으시고, 그 상태를 허용하시되 길을 열어 두시며, 때를 기다리십니다. 목회도 같은 결을 가져야 합니다.

 

먼저 가장 중요한 것은 ‘접근 방식의 전환’입니다. 찾아오지 않는 사람을 억지로 상담 자리로 끌어내려 하면, 그 사람에게는 ‘압박’이나 ‘감시’로 느껴지기 쉽습니다. 특히 목회자에게 실망했거나, 자신의 사정을 드러내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경우라면 더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때 필요한 것은 ‘문제 해결 시도’보다 ‘관계 회복의 최소 단위’입니다. 아주 짧은 안부, 부담 없는 인사, 설교 후 가벼운 대화, 혹은 전혀 종교적이지 않은 일상적 접촉이 더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핵심은 ‘이 사람은 나를 바꾸려는 사람이 아니라, 나를 존중하는 사람이다’라는 느낌을 주는 것입니다.

 

그다음은 ‘프라이버시에 대한 존중을 분명히 보여 주는 것’입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태도로 드러나야 합니다. 예를 들어, 그 사람의 상황을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다 하더라도, 먼저 꺼내지 않는 것입니다. 대신 상대가 열 때까지 기다립니다. 그리고 혹시 말을 꺼냈을 때도, ‘더 말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라는 여지를 항상 남겨 두어야 합니다. 이것이 쌓이면, 그 사람 안에 ‘여기는 안전하다’는 감각이 생깁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직접 상담이 아니라 간접 통로를 여는 것’입니다. 설교, 글, 소그룹, 혹은 다른 신뢰하는 성도를 통한 연결 등입니다. 어떤 사람은 목회자와 1:1로는 마음을 열지 않지만, 말씀이나 다른 관계를 통해 서서히 열립니다. 주님도 직접 말씀하시기도 하지만, 비유와 사건과 다른 사람을 통해 우회적으로 일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목회도 그렇게 유연해야 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필요한 태도가 ‘기다림’입니다. 이것이 가장 어렵지만 가장 중요합니다. AC.59의 원리대로라면, 사람은 자기 상태 안에서 충분히 겪고, 느끼고, 고민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 시간이 없이 바뀐 것은 오래 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지금 당장 해결되지 않아도, 주님이 그 사람 안에서 일하고 계신다’는 신뢰를 가져야 합니다. 이 신뢰가 없으면 조급해지고, 결국 관계를 더 닫히게 만듭니다.

 

이걸 아주 실제적으로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어떤 성도가 교회에 나오지만, 거리를 둡니다. 이때 ‘요즘 왜 그러세요?’라고 바로 묻기보다, ‘요즘 건강은 괜찮으세요?’, ‘요즘 바쁘시죠?’ 정도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짧게라도 반응하면, 거기서 멈추고, 더 밀어붙이지 않습니다. 대신 시간이 지나면서 반복적으로 ‘안전한 접촉’을 쌓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 사람이 먼저 말을 꺼낼 수 있습니다. 그때가 ‘문이 열린 순간’입니다.

 

물론 끝까지 안 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때도 억지로 열려고 하지 않는 것이 원칙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의 본질은 언제나 ‘자유 안에서의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목회자는 끝까지 ‘길이 열려 있는 상태’를 유지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언제 돌아와도, 어색하지 않게 들어올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래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찾아오지 않는 성도에게는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말고, 관계를 안전하게 유지하며, 프라이버시를 존중하고, 간접적인 통로를 열어 두고, 주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이 가장 실제적인 목회입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찾아오지 않는 성도는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돌아올 수 있도록 안전한 거리에서 문을 열어 두고 기다리는 것이 주님의 방식에 가까운 목회입니다.’

 

 

 

AC.59, 심화 2, ‘적용’

AC.59.심화 2. ‘적용’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주님의 위와 같은 방법을 혹시 목회에 적용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AC.59에서 본 주님의 방식은 목회에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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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적용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주님의 위와 같은 방법을 혹시 목회에 적용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AC.59에서 본 주님의 방식은 목회에 그대로 옮기면 이렇게 요약됩니다. ‘사람을 한 번에 바꾸려 하지 말고, 지금의 상태를 인정한 채, 그 안에서 진리와 선이 자라도록 돕고, 선택할 수 있는 공간을 지켜 주는 것’입니다. 즉, ‘제거’가 아니라 ‘전환’, ‘압박’이 아니라 ‘성장’, ‘통제’가 아니라 ‘동행’입니다.

 

먼저 가장 중요한 원리는 이것입니다. 주님은 사람의 욕정과 그에 따른 생각을 당장 없애지 않으십니다. 목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성도의 문제를 보면서 ‘이건 빨리 고쳐야 합니다’, ‘이건 틀렸습니다’라고 바로 제거하려 들면, 겉으로는 잠깐 눌릴 수 있어도, 결국 더 깊은 반발이나 위선, 혹은 무력감으로 돌아옵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이 상태가 지금 이 사람의 삶 전체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출발점입니다.

 

그다음 단계는 ‘진리를 심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방식이 중요합니다. 진리를 ‘강요’하면 그 사람의 기존 구조와 부딪혀 버립니다. 대신 ‘비추어 주어야’ 합니다. 즉, 그 사람이 스스로 ‘, 이런 길도 있구나’를 보게 해야 합니다. 설교든 상담이든, 결론을 밀어붙이기보다 ‘보게 하는 것’, ‘깨닫게 하는 것’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도 항상 그렇게 하십니다.

 

그리고 반드시 필요한 것이 ‘시간을 허락하는 것’입니다. 거듭남은 구조 자체가 바뀌는 일이기 때문에,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목회 현장에서는 이 부분이 가장 어렵습니다. 당장 변화가 보이지 않으면 답답하고, 때로는 실망도 됩니다. 그러나 AC의 관점에서는 ‘지금 변화가 더딘 것처럼 보여도, 그 안에서 구조가 바뀌고 있는 중일 수 있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속도를 조절하는 사람’이 아니라 ‘과정을 지켜 주는 사람’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선택의 자리’를 남겨 두는 것입니다. 주님은 악한 영들의 자극까지도 허용하시며 사람에게 선택의 공간을 주십니다. 목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두지 않고, 모든 것을 대신 판단해 주거나 강하게 통제하면, 겉으로는 정돈된 것처럼 보여도 실제 변화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이 길이 옳습니다’라고 말하되, 동시에 ‘선택은 당신이 해야 합니다’라는 자리를 남겨 두어야 합니다.

 

이걸 아주 실제적인 목회 장면으로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어떤 성도가 반복적인 문제를 가지고 찾아옵니다. 이때 ‘왜 또 그러십니까’가 아니라, ‘그 마음이 왜 그렇게 움직이는지 함께 들여다보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리고 그 상태를 인정한 위에서, ‘이럴 때 이런 선택도 가능하다’는 진리를 제시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실제로 선택하고 경험할 수 있도록 기다립니다. 이 과정을 반복하면서, 조금씩 중심이 이동합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의 방식에 가까운 목회’입니다.

 

또 하나 덧붙이면, 목회자는 ‘변화를 만들어 내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역사를 방해하지 않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주님은 이미 각 사람 안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목회자가 할 일은 그 일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이 일어날 수 있도록 환경을 지켜 주고, 때로는 방향을 비추고, 때로는 넘어지지 않도록 붙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체를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첫째, 성도의 현재 상태를 서둘러 제거하려 하지 말고 인정한다. 둘째, 진리를 강요하지 않고 비추어 준다. 셋째, 시간이 걸리는 과정을 견딘다. 넷째, 선택의 자리를 남겨 둔다. 다섯째, 주님의 일하심을 신뢰하고 그 통로가 된다.

 

한 줄로 정리하면, ‘주님의 거듭남 방식에 따른 목회는 사람을 억지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스스로 진리를 선택하며 서서히 변화될 수 있도록 동행하고 지켜 주는 것입니다.’

 

 

 

AC.59, 심화 3, ‘찾아오지 않는 성도’

AC.59.심화 3. ‘찾아오지 않는 성도’ 위 심화 2 본문 중 ‘어떤 성도가 반복적인 문제를 가지고 찾아옵니다.’라고 하는데... 만일, 안 찾아올 경우는 어떻게 하나요?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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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9, 심화 1, ‘욕정, 거짓 및 악한 영들을 허락하시는 주님’

AC.59.심화 1. ‘욕정, 거짓 및 악한 영들을 허락하시는 주님’ 위 AC.59 본문 중 ‘거듭나기 전에는 욕정들이 지배권을 가지는데, 이는 인간 전체가 욕정들과 거기에서 나온 거짓들로 이루어져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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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욕정, 거짓 및 악한 영들을 허락하시는 주님

 

 AC.59 본문 중 거듭나기 전에는 욕정들이 지배권을 가지는데, 이는 인간 전체가 욕정들과 거기에서 나온 거짓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거듭남의 과정에서 이 욕정들과 거짓들은 한순간에 제거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 전체가 파괴되고 말기 때문인데, 이는 그가 지금까지 획득해 온 유일한 생명이 바로 그런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악한 영들이 오랜 시간 동안 그 사람과 함께 있도록 허락되며, 이들은 그의 욕정들을 자극합니다.’라는 내용이 놀랍습니다. 놀라우면서도 선뜻 이해가 잘 안되는데, 설명 부탁드려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 문장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사람의 옛 상태(욕정과 거기서 나온 거짓)는 단순히 나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 자체’, 곧 생명의 그릇처럼 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한 번에 없애면 사람이 더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것을 즉시 제거하지 않으시고, 그대로 둔 채 서서히 바꾸시며, 그 과정에서 악한 영들의 작용까지도 허용하신다는 뜻입니다.

 

먼저 ‘욕정들이 지배권을 가진다’는 말을 아주 현실적으로 보셔야 합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그리고 살아오면서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끌리는 것, 집착하는 것’이 쌓입니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 비교하는 마음, 편하고 싶은 마음, 내 방식대로 하고 싶은 마음 등입니다. 이것들이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그 사람의 선택과 판단을 실제로 끌고 가는 힘입니다. 그래서 ‘지배권을 가진다’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인간 전체가 욕정들과 거기서 나온 거짓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이 어렵게 들리지만, 이렇게 보시면 이해가 됩니다. 사람은 자기 욕구에 맞게 생각을 만들고 정당화합니다. 예를 들어, ‘이 정도는 괜찮지’, ‘상황이 이러니까 어쩔 수 없어’, ‘나는 틀리지 않았어’ 같은 생각들이죠. 이것이 ‘욕정에서 나온 거짓’입니다. 즉, 우리의 생각과 판단조차 상당 부분은 이미 욕구에 맞춰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단순히 ‘조금 고쳐야 할 부분’이 아니라, ‘삶 전체의 구조’가 여기에 얽혀 있다는 뜻입니다.

 

이제 왜 ‘한순간에 제거될 수 없다’는지가 중요합니다. 만약 주님이 우리의 욕정과 그에 따른 생각들을 한 번에 다 없애 버리신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러면 무엇이 남겠습니까? 그 사람은 지금까지 그것으로 느끼고, 생각하고, 선택해 왔기 때문에, 그것이 사라지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 일종의 공허한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렇게 되면 인간 전체가 파괴된다’고까지 말합니다. 이것은 과장이 아니라, ‘기존의 생명 구조가 완전히 붕괴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없애는 것이 아니라 ‘바꾸십니다’. 즉, 기존의 욕정과 생각을 그대로 두신 채, 그 위에 새로운 진리와 선을 조금씩 심으시고, 그것이 점점 자라 기존의 것을 대신하도록 하십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이제 가장 놀라운 부분입니다. ‘그래서 악한 영들이 오랜 시간 동안 그 사람과 함께 있도록 허락된다.’ 이 말은 처음 들으면 충격적이지만, 구조를 보면 이해가 됩니다. 악한 영들은 사람의 욕정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욕정들을 계속 자극합니다. 그런데 이게 왜 허락되느냐 하면, 사람이 자기 상태를 실제로 느끼고, 선택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걸 실제적으로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어떤 상황에서 내 안에 강한 욕구가 올라옵니다. 화, 욕심, 비교, 인정욕 같은 것들입니다. 이때 그것을 그냥 없애 버리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내 안에 있구나’를 분명히 느끼게 하시고, 동시에 ‘이렇게 하는 것이 옳다’는 다른 길도 함께 보이게 하십니다. 이 두 흐름 사이에서 사람이 선택하게 됩니다. 바로 이 과정에서 거듭남이 일어납니다.

 

만약 욕정이 아예 올라오지 않는다면, 사람은 선택할 기회도 없습니다. 그냥 자동으로 ‘좋은 상태’처럼 보일 뿐, 실제로는 자기 것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악한 영들의 자극은 단순히 방해가 아니라, ‘자유와 선택의 장’을 형성하는 역할을 합니다. 물론 주님은 그 자극이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지 않도록 항상 제한하십니다.

 

그래서 이 전체를 하나로 묶으면 이렇게 됩니다. 사람은 원래 욕정과 거짓으로 이루어진 상태에서 시작합니다. 이것은 곧바로 제거될 수 없고, 오히려 그 상태 위에서 변화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그 상태를 유지한 채, 악한 영들의 자극 속에서 진리와 선을 선택하는 과정을 통해, 점점 새로운 생명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걸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주님은 사람의 옛 상태를 한 번에 없애지 않으시고, 그 상태를 유지한 채 선택과 싸움을 통해 서서히 새로운 생명으로 바꾸시며, 그 과정에서 악한 영들의 작용까지도 제한적으로 사용하십니다.’

 

 

 

AC.59, 창1:30, ‘모든 푸른 풀’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1:30) AC.59 여기서 자연적 인간의 음식으로 오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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