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3:21)

 

AC.293

 

이러한 의미들은 말씀을 겉으로만 읽어서는 결코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분명 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음이 분명합니다. 누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실제로 그들을 위해 가죽으로 된 옷을 만들어 입히셨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It could never appear from the letter that these things are signified; and yet there is evidently here enfolded some deeper meaning, for everyone must be aware that Jehovah God did not make a coat of skin for them.

 

 

해설

 

AC.293은 창3:21의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는 말씀을 해석하면서, 왜 말씀에는 반드시 내적 의미가 존재하는지를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지금까지 설명한 ‘가죽옷’의 의미는 말씀을 겉으로만 읽어서는 결코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창3:21을 겉으로만 읽으면,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위해 옷을 만들어 입혀 주신 역사적 사건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영적 선과 자연적 선, 그리고 타락한 인간을 향한 주님의 교육과 섭리가 담겨 있으며, 이러한 의미는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곧바로 중요한 사실을 덧붙입니다. 비록 겉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이 말씀 속에는 분명 더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내적 의미를 사람의 상상력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말씀 자체가 이미 더 깊은 뜻을 품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내적 의미, 즉 속뜻은 겉뜻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겉뜻에 감추어진 주님의 뜻을 밝혀 주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설명하는 스베덴보리의 논리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는 누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실제로 가죽으로 된 옷을 만들어 입히셨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주님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창세기가 여기서 전하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재단사가 되어 옷을 지어 입히셨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러한 표현 자체가 독자로 하여금 그 안에 담긴 더 깊은 뜻을 찾도록 이끌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말씀 해석 원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그는 말씀의 역사적 사건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역사 자체가 목적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말씀은 역사 속에 주님과 천국, 교회와 사람의 거듭남에 관한 영원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겉 글자는 그 진리를 담는 그릇이며, 내적 의미는 그 안에 담긴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겉 글자를 붙드는 것과 내적 의미를 찾는 것은 서로 대립하는 일이 아니라, 서로를 완성하는 일입니다.

 

3:20-24를 태고교회의 흥망성쇠를 압축한 결론으로 이해하면, 이 구절의 의미는 더욱 선명해집니다. 만일 이 다섯 절이 단순히 몇 가지 역사적 사건만 기록한 것이라면, ‘가죽옷’은 최초의 의복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다섯 절은 태고교회의 처음과 마지막, 그리고 그 전 과정을 압축하여 보여 주는 결론입니다. 그렇다면 ‘가죽옷’ 역시 단순한 옷이 아니라, 교회의 상태가 변화한 것을 보여 주는 영적 표지로 이해하는 것이 문맥에도 더욱 잘 어울립니다.

 

실제로 성경 전체를 살펴보면 ‘’은 거의 언제나 사람의 영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제사장의 거룩한 옷은 거룩한 직분을 의미하고, 흰옷은 진리와 순결을, 더러운 옷은 죄와 거짓을 의미합니다. 또한 스베덴보리는 천사들의 옷 역시 그들의 사랑과 지혜의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 여러 저술에서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창3:21의 ‘가죽옷’도 같은 상응의 원리 안에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것은 타락 이후 인간에게 허락된 새로운 영적 상태를 나타내는 상징입니다.

 

이 글은 오늘날 우리가 말씀을 대하는 태도에도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우리는 먼저 겉 글자를 소중히 읽어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멈추지 말고, 왜 주님께서 하필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셨는지를 겸손히 물어야 합니다.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 안에는 언제나 글자를 넘어서는 영원한 생명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남은 평생 추구했던 것도 바로 이러한 말씀의 깊이를 밝히는 일이었습니다.

 

AC.293은 창3:21 하나만 설명하는 글이 아니라, 말씀 전체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원리라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실제로 가죽옷을 만드셨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왜 성령께서 하필 ‘가죽옷’이라는 표현을 기록하게 하셨느냐는 것입니다. 그 질문을 따라갈 때, 우리는 글자 너머에서, 타락한 인간을 끝까지 가르치시고 보호하시며, 새로운 교회의 길을 열어 가시는 주님의 사랑과 섭리를 만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AC.293이 우리에게 전해 주는 중요한 교훈입니다.

 

 

 

AC.292, 창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AC.292-297)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And Jehovah God made for the man and for his wife coats of skin, and clothed them. (창3:21) AC.292 이 말씀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영적 선과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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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And Jehovah God made for the man and for his wife coats of skin, and clothed them. (3:21)

 

AC.292

 

이 말씀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가르쳐 주셨음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가르치신 것을 만드셨다(making)입히셨다(clothing), 그리고 가죽옷(coat of skin)으로는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표상하고 있습니다. These words signify that the Lord instructed them in spiritual and natural good; his instructing them is expressed by “making” and “clothing,” and spiritual and natural good, by the “coat of skin.”

 

 

해설

 

AC.292는 창3:21의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는 말씀의 가장 핵심적인 의미를 설명하는 구절입니다. 일반적으로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의 수치를 가려 주셨다는 이야기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장면을 단순한 자비의 행동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그는 이것을 주님께서 타락한 인간을 새로운 상태에 맞게 다시 교육하시고 인도하시는 장면으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이 절의 중심은 ‘가죽옷’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만드시고 입히시는 주님’께 있습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만드셨다’와 ‘입히셨다’는 두 동사를 모두 ‘가르치셨다’는 의미로 풀이합니다. 말씀에서 주님께서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만들어 주시거나 입혀 주시는 행위는 단순한 외적 행동이 아니라, 그 사람의 상태에 알맞은 선과 진리를 공급하시고, 그에 따라 살아가도록 인도하시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께서는 단순히 인간을 보호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타락 이후의 인간이 살아갈 수 있도록 새로운 삶의 질서를 친히 가르쳐 주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변화가 나타납니다. 태고교회는 처음부터 천적 사랑 안에 있었기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퍼셉션을 통해 직접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타락 이후에는 이러한 퍼셉션을 거의 잃어버렸습니다. 이제는 이전처럼 내적 생명만으로 살아갈 수가 없게 되었고, 보다 외적인 방법을 통해 주님의 인도를 받아야 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가르치심’은 이전 천적 상태를 위한 것이 아니라, 타락 이후의 인간을 위한 새로운 교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죽옷’이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영적 선’은 신앙을 따라 행하는 선이며, ‘자연적 선’은 일상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도덕적이고 질서 있는 선을 말합니다. 인간은 비록 태고교회가 누리던 천적 선을 잃어버렸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이 완전히 악으로 무너지지 않도록 영적 선과 자연적 선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가죽옷’은 바로 그러한 새로운 삶의 상태를 상징합니다.

 

왜 하필 ‘가죽옷’일까요? 가죽은 몸의 가장 바깥을 덮는 것입니다. 상응적으로도 이는 가장 외적 차원의 삶을 의미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처음에는 내적 생명 안에서 살았지만, 이제는 그 상태를 거의 잃었기 때문에 가장 바깥 단계에서부터 보호와 인도를 받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이전 천적 상태에 알맞은 옷이 아니라, 현재의 상태에 맞는 ‘가죽옷’을 입히십니다. 이것은 이전보다 낮은 상태를 의미하지만, 동시에 그 상태에서도 여전히 구원의 길이 열려 있음을 보여 주는 주님의 자비로운 배려이기도 합니다.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창3:20-24를 태고교회의 흥망성쇠를 요약한 결론으로 이해한다면, 21절은 그 가운데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20절이 교회의 처음, 곧 ‘생명’으로 시작된 모습을 보여 준다면, 21절은 타락 이후에도 교회를 버리지 않으시는 주님의 섭리를 보여 줍니다. 교회는 처음의 그 천적 영광을 잃었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의 현재 상태에 맞는 새로운 삶의 질서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다시 말해 교회의 본래 상태는 사라졌지만, 교회 자체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새로운 방식으로 교회를 보존하시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이 장면은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깊은 의미를 줍니다. 우리는 처음 믿었을 때의 뜨거운 사랑이나 밝은 깨달음을 잃었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역사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처음과 같은 상태는 아니더라도 주님께서는 우리의 현재 형편에 맞는 선과 진리를 끊임없이 공급하십니다. 때로는 일상의 의무와 양심, 그리고 신앙의 실천을 통해 우리를 조금씩 인도하십니다. 어쩌면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님께서 입혀 주시는 ‘가죽옷’일지도 모릅니다.

 

AC.292는 ‘가죽옷’을 단순히 수치를 가리는 옷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타락한 인간에게 맞추어진 주님의 교육이며, 새로운 삶의 질서이자 새로운 교회의 출발입니다. 천적 상태를 잃은 인간에게 주님께서는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가르치시고, 그 선 안에서 다시 당신과 함께 살아가도록 인도하십니다. 따라서 ‘가죽옷’은 인간의 실패를 보여 주는 표지가 아니라, 실패한 인간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사랑과 섭리를 증언하는 은혜의 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AC.293, 창3:21, ‘가죽옷 이야기‘, 우리를 속뜻의 세계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창3:21) AC.293 이러한 의미들은 말씀을 겉으로만 읽어서는 결코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분명 더 깊은 의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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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1, 창3:20, ‘창3:20-24는 태고교회 전 생애에 대한 요약’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창3:20) AC.291 이 절에서는 교회가 처음으로 젊음의 꽃을 피우던 때, 곧 가장 아름답고 순수한 상태에 있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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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3:20)

 

AC.291

 

이 절에서는 교회가 처음으로 젊음의 꽃을 피우던 때, 곧 가장 아름답고 순수한 상태에 있었던 때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상태는 천적 결혼(the heavenly marriage)을 나타내기 때문에, 교회는 여기서 결혼(a marriage)으로 묘사되며, ‘생명(life)을 뜻하는 말에서 유래한, ‘하와(Eve)라는 이름으로 부릅니다. In this verse is described the first time, when the church was in the flower of her youth, representing the heavenly marriage, on which account she is described by a marriage, and is called “Eve,” from a word meaning “life.”

 

 

해설

 

AC.291에서 스베덴보리는 ‘이 절에서는 교회가 처음으로 젊음의 꽃을 피우던 때가 묘사된다’고 말합니다. 처음 읽으면 조금 의아합니다. 바로 앞 절에서는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라는 심판이 선포되었는데, 갑자기 ‘교회의 젊은 시절’과 ‘생명’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시간의 흐름으로 읽기보다 창세기 첫 세 장 전체의 결론으로 읽으면, 이 표현은 매우 자연스러워집니다. 창3:20은 새로운 사건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 전 생애를 다시 바라보게 하는 첫 장면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창3:20-24는 태고교회의 흥망성쇠를 다섯 구절로 압축하여 보여 주는 결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20절은 교회가 처음 생명을 받던 때를, 21절은 타락 이후에도 주님께서 보호하시는 섭리를, 22절은 모독을 막기 위한 자비로운 제한을, 23절은 에덴에서의 추방을 통한 교회의 종말을, 그리고 24절은 그룹과 두루 도는 불칼로 거룩한 것을 보존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각각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이 다섯 절은 단순한 다섯 사건이 아니라, 한 교회의 처음과 끝을 요약한 영적 결론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20절을 보자마자 교회의 ‘처음’을 말합니다. ‘젊음의 꽃을 피우던 때’란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상태를 말합니다. 봄에 꽃이 막 피어날 때가 식물의 가장 아름다운 시기인 것처럼, 태고교회 역시 처음에는 주님과 가장 가까이 결합한 천적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생명을 직접 받아들이며 살았고, 선과 진리를 분리하지 않았으며, 사랑과 지혜가 하나 된 상태 안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를 ‘천적 결혼(the heavenly marriage)을 나타내는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천적 결혼이란 단순히 남녀의 결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선과 진리가 하나 되는 천국의 질서를 말합니다. 사람 안에서는 의지와 이해, 사랑과 신앙, 선과 진리가 서로 조화를 이루는 상태가 바로 천적 결혼입니다. 교회는 이러한 결합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참된 교회가 되므로, 성경은 교회를 신부와 아내로 자주 표현하며, 여기에서도 교회를 결혼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아담의 아내는 ‘하와’라는 이름을 받습니다. ‘하와(Eve)는 ‘생명’을 뜻하는 말에서 나온 이름이며, 이어지는 말씀에서 ‘모든 산 자의 어머니’라고 설명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육체적 생명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영적 생명입니다. 태고교회는 처음에 바로 이러한 생명 안에서 존재하였으며, 그 생명을 통하여 천국과 직접 연결된 교회였습니다. 그러므로 ‘하와’라는 이름은 한 여인의 이름을 넘어, 교회가 처음 받았던 주님의 생명을 상징하는 이름이 됩니다.

 

이렇게 보면, 창3:20은 창3:19와 모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과 ‘생명’을 나란히 보여 주면서, 한 교회의 처음과 마지막을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생명’으로 시작했던 교회가 결국 ‘흙으로 돌아감’으로 끝나게 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장면은 시간적으로 과거로 되돌아간 것이 아니라, 이미 서술된 태고교회의 역사를 처음부터 다시 조망하는 결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AC.291에서 스베덴보리가 갑자기 ‘교회의 젊은 시절’을 언급하는 이유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결론은 단순히 과거를 회상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창3:20-24 전체를 보면, 태고교회의 역사는 인간의 실패로 끝났지만, 주님의 섭리는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생명을 주신 분도 주님이시고, 타락 이후에도 가죽옷으로 입히시는 분도 주님이시며, 생명나무를 함부로 범하지 못하게 막으시는 분도 주님이시고, 그룹과 두루 도는 불칼로 거룩한 것을 보존하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다섯 절은 태고교회의 흥망성쇠를 요약하는 동시에, 그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한순간도 교회를 떠나지 않으신 주님의 구원 섭리를 함께 증언하는 아름다운 결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AC.292, 창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AC.292-297)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And Jehovah God made for the man and for his wife coats of skin, and clothed them. (창3:21) AC.292 이 말씀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영적 선과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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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0, 창3:20, ‘산’(living)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창3:20) AC.290 교회를 ‘모든 산 자의 어머니’(mother of all living)라고 하는 것은, 생명 자체이신 주님에 대한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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