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은 앞서 살펴본 개별 수도사 이야기들과 성격이 조금 다릅니다. 강문호 수도사가 은퇴 후 약 7년 동안 수도원에서 무엇을 해왔는지 돌아보고, 수도학교와 잇사갈 성경대학, 봉쇄학당, 수도 영성가 연구, 방문객 교육과 부흥회 사역 등을 소개한 뒤, 자신이 생각하는 수도원 운동의 방향을 ‘청빈, 거룩, 오직 예수’라는 세 가지 말로 압축합니다. 그러므로 이번 편은 하나의 수도 일화라기보다 강문호 수도사가 생각하는 ‘개신교 수도원 운동의 자기소개와 비전’에 가깝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도 개별 사실 하나하나를 따지는 것보다 이 세 축이 과연 사람을 어디로 이끌려 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더 중요하겠습니다.

 

영상은 은퇴를 앞두고 ‘후반전이 아름답게 달라’고 기도했다는 고백에서 시작합니다. 이 출발점에는 귀한 것이 있습니다. 은퇴를 인생의 퇴장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남은 생애를 어떻게 주님께 드릴 것인가를 묻는 태도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인간의 영적 성장은 특정 나이에 끝나는 일이 아닙니다. 거듭남은 평생 계속되며, 이 세상에서 시작된 변화는 영원으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노년은 단순히 지난 업적을 정리하는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proprium, 곧 자기 자신에게 속한 것을 더욱 내려놓고 주님께로 향할 수 있는 중요한 시기입니다. 그런 점에서 ‘후반전이 아름다워야 한다’는 강문호 수도사의 소망은 충분히 공감할 만합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아름다운 후반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나 더 던집니다. 많은 일을 이루는 것이 아름다운 후반전일까요, 아니면 사람이 점점 더 주님 앞에서 작아지는 것이 아름다운 후반전일까요? 물론 둘은 서로 배척되지 않습니다. 수도원을 세울 수도 있고, 학교를 만들 수도 있고, 수백 권의 자료를 집필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 모든 외적 성취가 무엇을 향하고 있느냐입니다. 거듭남의 관점에서 마지막까지 남는 것은 ‘얼마나 많은 일을 이루었는가?’보다 ‘ 일을 하는 동안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얼마나 주님의 질서 아래 놓였는가?’입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수도원을 알기 위해 이스라엘의 수많은 수도원을 방문하고 여러 나라의 수도원을 답사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수도원에 대한 자신의 선입견이 깨졌다고 고백합니다. 이 대목 역시 의미가 있습니다. 자신이 속한 개신교 전통 밖으로 나가 오래된 기독교 수도 전통을 직접 보고 배우려 했다는 것은 적어도 ‘우리에게 없는 것이 다른 전통에는 있을 있다’는 열린 태도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개신교가 종교개혁 이후 수도원 제도와 상당히 멀어진 것을 생각하면, 오래된 기독교 전통 안에서 기도와 절제, 침묵, 공동생활, 노동의 가치를 다시 발견하려는 시도 자체는 귀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에서도 외적 수도생활과 내적 거듭남을 구별합니다. 수도원을 많이 방문했다고 수도의 본질을 아는 것은 아니며, 수도복을 입었다고 수도사가 되는 것도 아니고, 봉쇄된 공간에 오래 머물렀다고 내면의 자기 사랑까지 봉쇄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과의 접촉을 줄이면 이전에는 외부 활동에 가려져 있던 proprium이 더 선명하게 드러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참된 수도의 시험은 ‘얼마나 세상을 떠났는가?’가 아니라 ‘세상을 떠난 자리에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얼마나 떠나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영상에 나오는 새벽 4시의 기도실 이야기도 같은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자연 속 작은 기도실에 들어가 예수의 형상 아래 머리를 대고 ‘오늘 안수해 주세요’라고 기도하며 하루를 시작한다는 모습에는 주님께 의탁하려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어떤 형상 자체에 능력이 있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그것이 마음을 주님께 향하게 하는 외적 도움으로 사용된다면 그 자체를 굳이 문제 삼을 이유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형상이 아니라 그 순간 마음이 향하는 대상입니다. 더 나아가 아침에 주님의 인도를 구했다면 하루 동안 실제로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주님의 계명 아래 두려는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기도실에서의 ‘주님, 저를 지켜 주세요’가 생활 속에서는 ‘주님, 뜻보다 주님의 뜻을 따르게 주세요’가 되어야 합니다.

 

이어지는 수도학교 이야기는 강문호 수도사의 사역에서 상당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개신교 안에 수도사를 양성하는 학교를 만들고, 그 가운데 일부가 실제 수도사의 길을 택하고, 다시 일부가 수도원을 세우는 흐름을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시도를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무조건 긍정하거나 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수도제도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지만, 그것이 어떤 사람에게 기도와 자기 성찰, 절제와 쓰임을 훈련하는 환경이 될 수는 있습니다. 반대로 수도제도 자체가 영적 우월감이나 특별한 신분의식으로 변한다면 오히려 거듭남을 방해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제도가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제도 안에서 사람이 주님의 진리를 따라 악을 죄로 알고 피하며 선을 행할 때 거룩함이 형성됩니다.

 

성경 연구에 대한 열정도 이번 영상의 큰 축입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한번 성경만 깊이 파보자’, ‘오직 예수 공부만 보자’며 여러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하여 수백 권의 소책자를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성경이 놀라울 정도로 깊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고백합니다. 이 지점은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깊게 만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말씀은 인간이 그 문자만 읽어서는 다 헤아릴 수 없는 깊이를 품고 있으며, 그 안에는 천국과 연결되는 내적 의미가 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깊다’는 발견 자체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크게 공감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매우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성경을 깊이 안다는 것은 희귀한 자료를 많이 알고, 고대 문헌을 많이 읽고, 사람들이 처음 듣는 정보를 많이 찾아낸다는 것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말씀의 깊이는 궁극적으로 ‘얼마나 놀라운 정보를 발견했는가?’에 있지 않고 그 말씀을 통해 주님을 더 알고, 자기 안의 악을 발견하며,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삶으로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속뜻을 그토록 방대하게 펼쳐 보인 목적도 지적 경탄을 일으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씀이 주님과 천국과 인간의 거듭남을 어떻게 품고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경악할 만큼 새로운 성경 지식’은 종착지가 아니라 출발점이어야 합니다. 그 지식이 사람의 생명을 바꾸지 못한다면 아직 말씀은 머리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영상 후반부에서 가장 주목되는 부분은 강문호 수도사가 마지막 때를 대비하는 수도원 영성을 ‘청빈, 거룩, 오직 예수’라는 세 가지로 정리하는 대목입니다. ‘ 대신 청빈, 음란 대신 거룩, 배교 대신 오직 예수’라는 구도입니다. 이것은 상당히 강렬하고 기억하기 쉬운 표어입니다. 그리고 각각에는 분명 기독교적 가치가 있습니다. 재물의 지배에서 자유로워지고, 성적 욕망의 무질서를 다스리며, 주님에게서 떠나지 않으려는 삶은 모두 중요한 영적 과제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 세 가지를 조금 다르게 깊이 들어갑니다. 먼저 ‘청빈’의 반대는 단순히 돈이 아닙니다. 돈 자체는 악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재물을 사랑하고 그것을 자기 자신을 높이는 수단으로 삼는 사랑입니다. 많은 재산을 가지고도 그것을 주님의 질서에 따라 선한 쓰임에 사용할 수 있으며, 아무 재산이 없어도 돈을 몹시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외적 청빈보다 더 깊은 것은 ‘소유에 대한 내적 자유’입니다. 내가 가진 것을 내 힘과 내 영광의 증거로 붙들지 않고, 주님에게서 맡겨진 것으로 보며 쓰임에 따라 사용하는 것입니다.

 

음란 대신 거룩’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적 절제는 중요하지만, 거룩은 단순한 금욕보다 훨씬 큽니다. 외적 행동을 억제했다고 내적 욕망까지 정돈된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결혼애의 질서는 오히려 매우 중요하며, 성 자체를 부정하거나 육체를 악한 것으로 보는 것이 거룩은 아닙니다. 거룩은 사랑의 질서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수도자의 독신도 그 자체가 더 높은 거룩함을 보증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 욕망을 중심에 놓지 않고 사랑을 주님의 질서 아래 두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배교 대신 오직 예수’는 세 표어 가운데 가장 중심적인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구호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오직 예수’를 반복한다고 주님 중심의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지 그분의 이름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계명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는 말씀처럼, 주님을 향한 사랑은 결국 삶에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의 가장 깊은 형태는 ‘내가 아니라 주님’입니다. 내 지식이 아니라 주님, 내 업적이 아니라 주님, 내 사역의 성공이 아니라 주님, 내가 세운 제도와 내가 만든 책과 내가 이룬 결과가 아니라 그 모든 선한 것의 근원이신 주님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번 영상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영상에는 ‘내가 방문했다’, ‘내가 수도원을 세웠다’, ‘내가 자료를 만들었다’, ‘내가 학교를 세웠다’는 식의 개인적 경험과 성취가 자연스럽게 많이 등장합니다. 이것 자체를 곧바로 자기 자랑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의 사역을 소개하는 영상이라면 당연히 자신이 한 일을 설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보다 한 단계 안쪽을 바라보게 합니다. ‘ 모든 일을 누가 이루셨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사람이 선한 일을 많이 할수록 더욱 깊어져야 할 고백은 ‘내가 했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허락하시고 이끄셨으며, 나는 쓰임을 위해 사용된 도구일 뿐이다’라는 고백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상 처음의 ‘후반전이 아름답게 달라’는 기도와 마지막의 ‘오직 예수’는 사실 하나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아름다운 후반전은 앞선 전반전보다 더 많은 업적을 쌓는 후반전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참으로 아름다운 후반전은 시간이 흐를수록 자기 이야기는 조금씩 작아지고 주님 이야기가 점점 커지는 후반전일 수 있습니다. 젊었을 때에는 ‘내가 무엇을 이루어야 하는가?’가 중요했다면, 영적 노년에는 ‘주님께서 나를 통해 무엇을 이루셨으며, 나는 얼마나 그분 앞에서 비워지고 있는가?’가 더 중요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수도원의 존재 이유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수도원은 세상에서 도망치는 장소도 아니고, 특별히 거룩한 사람들이 모여 자신들의 거룩함을 증명하는 장소도 아닐 것입니다. 수도원이 참으로 교회를 섬기려 한다면, 그곳은 사람이 조용히 자기 proprium을 직면하고, 주님 앞에서 그것을 내려놓으며, 다시 세상 속 이웃을 더 잘 사랑하고 섬기도록 준비되는 장소여야 합니다. 외적 침묵이 내적 침묵으로, 외적 청빈이 내적 자유로, 외적 독신과 절제가 사랑의 질서로, 성경 연구가 삶의 거듭남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이번 영상에서 제시된 ‘청빈, 거룩, 오직 예수’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조금 다듬어 다시 말한다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소유하지 않는 ’보다 ‘소유에 사로잡히지 않는 ’, ‘욕망을 억누르는 ’보다 ‘사랑의 질서가 회복되는 ’, 그리고 ‘오직 예수라고 말하는 ’보다 ‘자기 대신 주님이 중심이 되게 하는 ’입니다. 이 세 가지가 이루어진다면 수도원은 교회와 경쟁하는 또 하나의 제도가 아니라 교회를 섬기는 귀한 영적 훈련의 장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번 영상에서 가장 오래 붙들 만한 말은 처음에 나왔던 ‘후반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인생의 후반전은 단순한 제2의 성공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점점 더 ‘’에게서 ‘주님’으로 중심이 옮겨가는 시간입니다. 내가 무엇을 했는가보다 주님께서 무엇을 하셨는지가 크게 보이고, 내가 얼마나 알려졌는가보다 내가 얼마나 주님의 선한 쓰임에 사용되었는지가 중요해지는 시간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가장 아름다운 수도의 열매는 수도원 숫자도, 제자의 숫자도, 책의 숫자도 아닐 것입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한 사람의 말과 표정과 삶에서 ‘ 사람’보다 ‘주님’이 더 잘 보이게 되는 것, 어쩌면 그것이 ‘오직 예수’라는 고백이 마침내 한 인간 안에서 이루어 낸 가장 아름다운 후반전일 것입니다.

 

 

 

SY.83, 강문호 수도사, ‘아토스 이비론 수도원, 주는 것과 받는 것을 잊지 말라’ (20200106)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가 소개하는 곳은 아토스의 이비론 수도원입니다. 아토스에 얽힌 전승과 이비론 수도원의 오래된 역사, 그리고 무엇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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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3.심화

 

1. ‘ 모세의 노래에는 젖과 기름과 밀과 포도주의 표현이 이토록 많이 나오는가 - 천적인 것들의 무수한 종류

 

소의 엉긴 젖과 양의 젖과 어린 양의 기름과 바산에서  숫양과 염소와 지극히 아름다운 밀을 먹이시며  포도즙의 붉은 술을 마시게 하셨도다 (32:14)

 

AC.353에서 스베덴보리는 신32:14을 인용한 뒤 매우 이례적으로 강한 말을 합니다. ‘이러한 표현들의 의미는 속뜻을 통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없습니다.’ 그리고 속뜻이 없다면 ‘소의 엉긴 ’, ‘양의 ’, ‘어린 양의 기름’, ‘숫양과 염소의 기름’, ‘바산의 아들들’, ‘밀의 콩팥의 기름’, ‘포도의 ’와 같은 표현들은 ‘단지 말들에 지나지 않을 ’이라고 합니다. 왜 이렇게까지 말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이 구절이 단순히 이스라엘이 풍요로운 땅에서 좋은 음식을 먹었다는 사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속뜻에서는 주님에게서 오는 ‘천적인 것들’의 헤아릴 수 없는 다양성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AC.353의 출발점을 다시 붙들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적인 것은 사랑에 속한 모든 ’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신앙 역시 사랑에서 비롯될 때에는 천적’이며, ‘체어리티는 천적인 ’, ‘체어리티의 모든 선은 천적인 ’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신32:14에 나오는 풍성한 음식들의 목록을 이해하려면 먼저 이것을 자연적인 음식의 목록이 아니라 사랑과 선에 속한 여러 천적 상태를 표현하는 말씀으로 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특별히 중요한 것이 AC.353 [3]의 첫 문장입니다. ‘천적인 것들은 헤아릴  없이 많은 종류와, 그보다도  헤아릴  없이 많은 세부 종류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이 신32:14을 인용하는 직접적인 이유입니다. 우리는 흔히 ‘사랑’, ‘’, ‘체어리티’라고 하면 각각 하나의 단순한 개념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천국에서 사랑과 선은 그렇게 단조로운 것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은 사람과 천사의 서로 다른 상태와 쓰임과 수용 정도에 따라 셀 수 없이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말씀은 그것을 하나의 자연물로만 표상하지 않고 젖, 기름, 밀, 포도즙 등 서로 다른 수많은 자연적 형상을 사용합니다.

 

소의 엉긴 (butter of kine)부터 보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 AC.353에서 이 표현 하나하나의 세부 상응을 아직 풀어 주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이 글만을 근거로 ‘소의 엉긴 젖은 정확히 이것이다’라고 지나치게 세분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이 글에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소의 엉긴 ’ 역시 천적인 것의 어떤 종류와 세부 종류를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연적인 젖이 아니라 그것이 담고 있는 선의 질입니다.

 

양의 ’도 마찬가지입니다. 젖은 생명을 먹이고 자라게 하는 음식입니다. 그러나 AC.353의 직접적인 초점은 각각의 식품에 고정된 사전식 의미를 부여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소의 엉긴 ’과 ‘양의 ’이 서로 다른 표현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합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은 하나이면서도 그것을 받는 상태에 따라 서로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하나 됨은 모든 것이 똑같아지는 획일성이 아니라,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선들이 하나의 주님을 중심으로 질서를 이루는 하나 됨입니다.

 

이어 ‘어린 양의 기름’이 나옵니다. 여기서는 AC.353 전체에서 이미 설명한 ‘기름’의 상응이 직접 적용됩니다. ‘기름’은 천적인 것 자체, 곧 사랑에 속한 선을 상징합니다. 특히 이 구절에서 중요한 것은 기름 하나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어린 양과 숫양과 염소 등 서로 다른 동물들과 관련된 표현들이 연이어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천적 선이 하나의 획일적인 선이 아니라 무수한 종류와 세부 종류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바산에서  숫양’이라는 표현도 흥미롭습니다. 문자적으로 바산은 풍요로운 목축지로 유명한 지역이므로 좋은 가축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AC.353에서 스베덴보리가 관심을 두는 것은 지리적 풍요 자체가 아닙니다. 그는 ‘바산의 아들들’까지 천적인 것들의 종류와 세부 종류를 나타내는 표현 가운데 하나로 포함합니다. 즉 말씀의 지명과 동물과 음식은 서로 무관하게 늘어놓은 장식적 표현이 아니라, 속뜻에서는 서로 구별되는 영적·천적 실재들을 담는 그릇입니다.

 

그리고 매우 독특한 표현이 나옵니다. 영어 원문은 ‘the fat of the kidneys of wheat’입니다. 문자적으로 옮기면 ‘밀의 콩팥의 기름’ 정도가 됩니다. 개역개정은 이를 자연스럽게 ‘지극히 아름다운 ’이라고 번역합니다. 성경의 문자적 문체만 생각하면 상당히 기이한 표현입니다. 밀에 무슨 콩팥이 있으며, 그 콩팥에 무슨 기름이 있겠습니까? 바로 이런 표현 때문에 스베덴보리가 ‘속뜻이 없으면 단지 말들에 지나지 않을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콩팥’과 ‘기름’이라는 표현은 가장 깊고 귀한 부분을 나타내는 표상적 언어이고, 여기에 ‘’이 결합됩니다. 다만 AC.353 자체에서는 ‘밀의 콩팥의 기름’이 구체적으로 어느 종류의 천적 선인지를 더 세분하여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스베덴보리보다 앞서 나가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확실한 것은 이 특이한 표현까지도 무의미한 시적 과장이 아니라 천적인 선의 특정한 종류를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에는 ‘포도의 ’가 등장합니다. 개역개정은 ‘포도즙의 붉은 ’이라고 번역하지만, AC.353의 영어 표현은 ‘the blood of the grape’입니다. 자연적인 포도에 ‘’가 있다고 말하는 것 역시 문자적으로만 보면 매우 특이합니다. 그러나 말씀의 표상적 언어에서는 포도에서 흘러나오는 붉은 즙을 ‘’라고 부르는 자연적 형상을 통해 더 깊은 실재를 담을 수 있습니다. AC.353은 이 역시 천적인 것들의 종류와 세부 종류 가운데 하나라고 밝힙니다.

 

여기서 우리는 스베덴보리의 ‘상응’을 읽는 방법에 관한 매우 중요한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상응을 단순히 ‘기름 = 사랑’, ‘포도주 = 신앙’ 같은 일대일 대응표로만 이해하면 말씀의 풍요로움을 오히려 축소할 수 있습니다. AC.353은 천적인 것 자체가 ‘헤아릴  없이 많은 종류와, 그보다도  헤아릴  없이 많은 세부 종류’를 가진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표상하는 자연계의 사물들도 그 차이를 표현하기 위해 무수히 다양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사랑이라고 해서 모두 같은 사랑은 아닙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 이웃의 선을 바라는 사랑, 어린아이를 돌보는 사랑,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 맡겨진 쓰임을 성실히 행하려는 애정 등은 모두 선과 사랑에 속하면서도 그 질과 쓰임이 서로 다릅니다. 더구나 각각의 사랑 안에도 다시 셀 수 없이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천국의 선은 하나의 무색무취한 ‘’이 아니라 주님의 무한한 선이 유한한 천사들과 인간들에게 받아들여지면서 나타나는 헤아릴 수 없는 다양성입니다.

 

이것은 천국의 다양성을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모든 천사가 선하다고 해서 모든 천사가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각 천사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자기 고유의 방식으로 받아들이며, 각 공동체도 서로 다른 주된 선과 쓰임을 중심으로 질서를 이룹니다. 그러면서도 그 모든 다양성은 한 분 주님에게서 나오기 때문에 하나의 천국을 이룹니다. 신32:14의 풍성한 음식들은 이러한 ‘하나 안의 무수한 다양성’을 자연적인 형상으로 보여 주는 말씀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필 음식으로 표현될까요? 음식은 사람의 몸 안으로 들어와 생명이 되고 힘이 됩니다. 영적인 차원에서도 선과 진리는 인간의 내면을 먹이고 살아 있게 합니다. 그래서 말씀에는 먹고 마시는 표현이 매우 자주 등장합니다. 신32:14에서도 이스라엘이 먹고 마시는 모습은 속뜻에서 주님께서 주시는 여러 종류의 선을 받아들이고 그것으로 내적 생명을 얻는 상태를 담아낼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신32:14은 바로 앞 AC.353 [2]의 시36:8-9와도 잘 연결됩니다. 거기서는 ‘주의 집에 있는 살진 것으로 풍족할 ’이며 ‘주의 복락의 강물을 마시게 하신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살진 ’과 ‘생명의 원천’을 사랑에 속한 천적인 것으로, ‘복락의 강물’과 ‘’을 사랑에서 비롯된 신앙에 속한 영적인 것으로 풀이했습니다. 먹고 마시고 만족하는 말씀의 표현들이 결국 인간의 속 사람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로 살아나는 것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더욱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천적인 것들의 근원입니다. AC.353은 첫머리에서 ‘기름’이 천적인 것을 뜻한다고 하면서 ‘이것 역시 주님께 속한 ’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앞의 AC.352도 ‘모든 사랑은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며, 인간에게서 오는 것은 조금도 없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신32:14에 펼쳐지는 이 풍성한 천적 선의 세계는 인간이 자기 안에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종류와 세부 종류의 선은 궁극적으로 주님에게서 옵니다.

 

이 사실은 신32:14을 모세의 노래 전체 문맥에서 볼 때 더욱 아름답습니다. 이스라엘이 소의 엉긴 젖과 양의 젖과 기름과 밀과 포도즙을 스스로 만들어 자기에게 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인도하시고 먹이신 분은 여호와이십니다. 속뜻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며 여러 종류의 사랑과 선으로 그의 속 사람을 먹이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인간은 그것을 받아들이며 마치 자기 것으로 느끼고 자유롭게 살아가지만, 그 생명의 근원은 주님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다시 창4:4의 아벨에게 돌아옵니다. 아벨은 ‘양의  새끼와  기름’을 드렸습니다. AC.352에서 ‘처음  ’은 오직 주님께 속한 거룩한 것을 뜻했고, AC.353에서 ‘기름’은 오직 주님께 속한 천적인 것, 곧 사랑의 선을 뜻합니다. 따라서 신32:14의 긴 인용은 창4:4의 짧은 ‘기름’이라는 한 단어 안에 얼마나 광대한 천적 실재가 담겨 있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 제시된 것입니다.

 

아벨이 드린 ‘기름’을 단순히 ‘좋은 마음’ 정도로 이해해서는 부족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 ‘기름’ 안에는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의 헤아릴 수 없는 종류와 상태가 압축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주님께서는 사람 안에서 단 하나의 선만 키우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 전체, 관계 전체, 쓰임 전체에 서로 다른 선들을 질서 있게 형성해 가십니다.

 

그래서 AC.353의 신32:14 인용은 스베덴보리의 말씀 이해를 보여 주는 매우 좋은 사례이기도 합니다. 문자적 의미에서 보면 젖과 기름과 밀과 포도즙으로 이루어진 풍요의 노래입니다. 그러나 그 문자 안에는 천국의 사랑과 선의 무수한 종류들이 담겨 있습니다. 자연적인 음식의 다양성이 영적인 생명을 이루는 선의 다양성을 담는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상응입니다.

 

결국 신32:14의 핵심은 ‘어떤 음식이 정확히 어떤 선을 뜻하는가?’를 하나하나 외우는 데 있지 않습니다. AC.353이 특별히 강조하는 더 큰 원리는 ‘천적인 것들은 헤아릴  없이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은 하나이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천국과 인간 안에서는 무수한 선과 쓰임으로 펼쳐집니다. 그래서 말씀 역시 그 풍요를 ‘소의 엉긴 ’, ‘양의 ’, ‘어린 양의 기름’, ‘바산의 숫양’, ‘염소’, ‘밀의 콩팥의 기름’, ‘포도의 ’라는 서로 다른 자연적 형상들 속에 담아 놓았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우리에게 말씀을 읽는 태도에 대해서도 중요한 것을 가르쳐 줍니다. 문자적으로 낯설고 이상해 보이는 표현을 만나더라도 ‘ 성경에 이런 표현이 필요할까?’ 하며 쉽게 지나쳐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바로 그런 세부에 아르카나가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AC.353의 표현대로 속뜻이 없다면 그것들은 ‘단지 말들에 지나지 않을 ’입니다. 그러나 상응을 통하여 열어 보면, 그 낯선 말들 하나하나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선의 헤아릴 수 없는 풍요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풍요의 중심에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모든 사랑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신32:14의 풍성한 식탁도, 아벨이 드린 ‘기름’도 결국 이것을 향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을 주시고, 그 선을 무수한 형태의 체어리티와 쓰임으로 살아내게 하시며, 우리는 그 모든 것이 주님에게서 왔음을 인정하여 다시 주님께 돌려드립니다. 이것이 아벨의 제물 안에 들어 있는 천적인 질서이며, 신32:14의 풍성한 표현들이 열어 보여 주는 사랑의 세계입니다.

 

 

 

AC.353, 창4:4, 아벨이 드린 ‘기름’은 무엇을 뜻하는가 - 사랑에 속한 천적인 것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3 ‘기름’(fat)은 천적인 것 자체를 상징하며, 이것 역시 주님께 속한 것입니다. 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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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4:4)

 

AC.353

 

기름(fat) 천적인 자체를 상징하며, 이것 역시 주님께 속한 것입니다. 천적인 것은 사랑에 속한 모든 것입니다. 신앙 역시 사랑에서 비롯될 때에는 천적입니다. 체어리티는 천적인 것입니다. 체어리티의 모든 선도 천적인 것입니다. 모든 것은 희생 제사에서 여러 종류의 기름으로 표상되었는데, 구체적으로는 간을 덮는 기름 또는 간에 붙은 꺼풀, 콩팥 위의 기름, 내장을 덮는 기름과 내장 위의 기름으로 표상되었습니다. 이것들은 거룩한 것이었으며 제단 위에서 번제로 드려졌습니다. (29:13, 22; 3:3-4, 14; 4:8-9, 19, 26, 31, 35; 8:16, 25) Byfatis signified the celestial itself, which is also of the Lord. The celestial is all that which is of love. Faith also is celestial when it is from love. Charity is the celestial. All the good of charity is the celestial. All these were represented by the various kinds of fat in the sacrifices, and distinctively by that which covered the liver, or the caul; by the fat upon the kidneys; by the fat covering the intestines, and upon the intestines; which were holy, and were offered up as burnt offerings upon the altar. (Exod. 29:13, 22; Lev. 3:3, 4, 14; 4:89, 19, 26, 31, 35; 8:16, 25)

 

13내장에 덮인 모든 기름과 위에 있는 꺼풀과 콩팥과 위의 기름을 가져다가 제단 위에 불사르고, 22 너는 숫양의 기름과 기름진 꼬리와 그것의 내장에 덮인 기름과 위의 꺼풀과 콩팥과 그것들 위의 기름과 오른쪽 넓적다리를 가지라 이는 위임식의 숫양이라 (29:13, 22)

 

3그는 화목제의 제물 중에서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4 콩팥과 위의 기름 허리 쪽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떼어낼 것이요, 14그는 그중에서 예물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3:3-4, 14)

 

8 속죄 제물이 수송아지의 모든 기름을 떼어낼지니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9 콩팥과 위의 기름 허리 쪽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떼어내되, 19그것의 기름은 떼어 제단 위에서 불사르되, 26 모든 기름은 화목제 제물의 기름 같이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같이 제사장이 범한 죄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 31 모든 기름을 화목제물의 기름을 떼어낸 같이 떼어내 제단 위에서 불살라 여호와께 향기롭게 할지니 제사장이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 35 모든 기름을 화목제 어린 양의 기름을 같이 내어 제단 여호와의 화제물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같이 제사장이 그가 범한 죄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 (4:8-9, 19, 26, 31, 35)

 

16 내장에 덮인 모든 기름과 꺼풀과 콩팥과 기름을 가져다가 모세가 제단 위에 불사르고, 25그가 기름과 기름진 꼬리와 내장에 덮인 모든 기름과 꺼풀과 콩팥과 기름과 오른쪽 뒷다리를 떼어내고 (8:16, 25)

 

그러므로 이것들을여호와께 향기로운 화제의 음식이라 했습니다. (3:14, 16) They were therefore called thebread of the offering by fire for a rest unto Jehovah.” (Lev. 3:14, 16)

 

14그는 그중에서 예물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16제사장은 그것을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로 드리는 음식이요 향기로운 냄새라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3:14, 16)

 

같은 이유로 유대 백성은 짐승의 어떤 기름도 먹지 못하도록 금지되었으며, 이것을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 하였습니다. (3:17; 7:23, 25) For the same reason the Jewish people were forbidden to eat any of the fat of the beasts by what is calleda perpetual statute throughout your generations.” (Lev. 3:17; 7:23, 25)

 

너희는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 이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3:17)

 

23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소나 양이나 염소의 기름을 먹지 것이요, 25사람이 여호와께 화제로 드리는 제물의 기름을 먹으면 먹는 자는 자기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 (7:23, 25)

 

이유는 교회가 내적인 것조차 인정하지 않았으며, 천적인 것은 더더욱 인정하지 않는 그러한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This was because that church was such that it did not even acknowledge internal, much less celestial things.

 

[2]기름(fat) 천적인 것들과 체어리티의 선들을 상징한다는 것은 선지서에서도 분명합니다. 이사야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That “fat” signifies celestial things, and the goods of charity, is evident in the prophets; as in Isaiah: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55:2) Wherefore do ye weigh silver for that which is not bread, and your labor for that which satisfieth not? Attend ye diligently unto me, and eat ye that which is good, and let your soul delight itself in fatness. (Isa. 55:2)

 

예레미야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And in Jeremiah:

 

내가 기름으로 제사장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며 복으로 백성을 만족하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1:14) I will fill the soul of the priests with fatness, and my people shall be satiated with my good, (Jer. 31:14)

 

여기서기름진 문자 그대로의 기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천적·영적 선을 뜻한다는 것은 매우 분명합니다. 다윗의 글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where it is very evident that fatness is not meant, but celestial spiritual good. So in David:

 

8그들이 주의 집에 있는 살진 것으로 풍족할 것이라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물을 마시게 하시리이다 9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36:8-9) They are filled with the fatness of thy house, and thou makest them drink of the river of thy deliciousnesses. For with thee is the fountain of lives; in thy light we see light. (Ps. 36:89)

 

여기서살진 (fatness)생명의 원천(fountain of lives) 사랑에 속한 천적인 것을 상징하고, ‘복락의 강물(river of deliciousnesses)(light) 사랑에서 비롯된 신앙에 속한 영적인 것을 상징합니다. 다시 다윗의 글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Herefatnessand thefountain of livessignify the celestial, which is of love; and theriver of deliciousnesses,andlight,the spiritual, which is of faith from love. Again in David: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나의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나의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 (63:5) My soul shall be satiated with marrow and fatness, and my mouth shall praise thee with lips of songs, (Ps. 63:5)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로기름진 (fat) 천적인 것을, ‘찬송하는 입술(lips of songs) 영적인 것을 뜻합니다. 그것이 영혼을 만족하게 한다고 하였으므로 천적인 것을 뜻한다는 것이 매우 분명합니다. 같은 이유로 땅의 처음 것인 열매들도기름(fat)이라고 합니다. (18:12) where in like mannerfatdenotes the celestial, andlips of songsthe spiritual. That it is what is celestial is very evident, because it will satiate the soul. For the same reason the first fruits, which were the firstborn of the earth, are calledfat.” (Num. 18:12)

 

그들이 여호와께 드리는 소산 제일 좋은 기름과 제일 좋은 포도주와 곡식을 네게 주었은즉 (18:12)

 

[3] 천적인 것들은 헤아릴 없이 많은 종류와, 그보다도 헤아릴 없이 많은 세부 종류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모세가 백성 앞에서 읊은 노래에서는 그것들을 다음과 같이 총괄적으로 묘사합니다. As celestial things are of innumerable genera, and still more innumerable species, they are described in general in the song which Moses recited before the people:

 

소의 엉긴 젖과 양의 젖과 어린 양의 기름과 바산에서 숫양과 염소와 지극히 아름다운 밀을 먹이시며 포도즙의 붉은 술을 마시게 하셨도다 (32:14) Butter of kine, and milk of the flock, with fat of lambs and of rams, the sons of Bashan, and of goats, with the fat of the kidneys of wheat; and thou shalt drink the blood of the grape, unmixed. (Deut. 32:14)

 

이러한 표현들의 의미는 속뜻을 통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없습니다. 속뜻이 없다면소의 엉긴 (butter of kine), ‘양의 (milk of sheep), ‘어린 양의 기름(fat of lambs), ‘숫양과 염소의 기름(fat of rams and goats), ‘바산의 아들들(sons of Bashan), ‘밀의 콩팥의 기름(fat of the kidneys of wheat), ‘포도의 (blood of the grape) 같은 표현들은 단지 말들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표현 하나하나는 천적인 것들의 종류와 세부 종류를 상징합니다. It is impossible for anyone to know the signification of these expressions except from the internal sense. Without the internal sense, such expressions as the “butter of kine,” the “milk of sheep,” the “fat of lambs,” the “fat of rams and goats,” the “sons of Bashan,” the “fat of the kidneys of wheat,” and the “blood of the grape,” would be words and nothing more, and yet they all and each signify genera and species of celestial things.

 

 

해설

 

AC.353은 앞의 AC.350에서 아벨이 드린 ‘기름진 ’이 ‘천적인 자체이며, 이것 역시 주님께 속한다’고 한 내용을 본격적으로 풉니다. 그리고 첫 문장부터 핵심을 매우 명료하게 제시합니다. ‘천적인 것은 사랑에 속한 모든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기름’은 단순히 풍요나 좋은 것을 막연하게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사랑에 속한 선, 곧 천적인 것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문장이 중요합니다. ‘신앙 역시 사랑에서 비롯될 때에는 천적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가인과 아벨을 통해 계속 살펴온 신앙과 사랑의 관계를 다시 한번 정확하게 정리해 줍니다. 신앙 자체를 배척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될 때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반대로 신앙이 사랑에서 비롯되고 사랑과 결합되어 있다면 그 신앙 역시 천적인 성질을 가집니다. 따라서 가인의 문제는 ‘신앙’이 아니라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었습니다.

 

이어 ‘체어리티는 천적인 것입니다. 체어리티의 모든 선도 천적인 것입니다’라고 합니다. 이로써 사랑, 사랑에서 비롯된 신앙, 체어리티, 체어리티의 선이 하나의 생명 질서 안에 놓입니다. 이것들은 서로 고립된 별개의 종교 요소가 아니라 모두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이라는 하나의 근원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바로 앞 AC.352에서 ‘모든 사랑은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며, 인간에게서 오는 것은 조금도 없다’고 했으므로, AC.353의 ‘기름’ 역시 인간 자신의 선이나 공로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천적 선을 가리킵니다.

 

이 때문에 희생 제사에서 기름이 특별히 여호와께 드려졌습니다. 간을 덮는 기름, 콩팥 위의 기름, 내장을 덮는 기름 등은 모두 거룩한 것으로 구별되어 제단 위에서 불살라졌습니다. 문자적, 그러니까 겉으로만 보면 왜 동물의 특정 부위에 붙은 기름을 이처럼 세밀하게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도록 하셨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표상의 관점에서는 그 세밀한 규례들이 인간 안에 있는 여러 종류와 정도의 사랑과 선을 나타내는 외적 표상이 됩니다.

 

특히 이것들이 ‘여호와께 향기로운 화제의 음식’이라고 불렸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자연적인 음식이나 기름을 필요로 하신다는 뜻일 수는 없습니다. 제물이 ‘음식’이라고 불리는 것은 그것이 주님과 인간 사이의 사랑과 결합에 관한 것을 표상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제단 위에서 드려지는 기름의 거룩함은 물질 자체에 있지 않고, 그것이 표상하는 천적 선에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문제가 생깁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은 그 기름을 먹어서는 안 되었을까요? AC.353은 그 이유를 상당히 강하게 설명합니다. 당시 유대교회는 ‘내적인 것조차 인정하지 않았으며, 천적인 것은 더더욱 인정하지 않는’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장 내적인 사랑의 선을 표상하는 기름은 그들에게 속한 것으로 취하여 먹게 하지 않고, 오직 여호와께 돌리도록 한 것입니다. 이것 역시 ‘천적인 것은 오직 주님께 속한다’는 원리를 표상적으로 보존하는 장치였습니다.

 

[2]에서 스베덴보리는 이제 제사법에서 선지서로 이동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름진 ’이 문자 그대로의 지방이나 풍부한 음식만을 의미할 수 없는 구절들을 제시한다는 점입니다. 사55:2의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는 말씀은 육체가 아니라 영혼의 만족을 말합니다. 렘31:14 역시 ‘ 백성을 나의 선으로 만족하게 한다’는 것과 제사장들의 심령을 ‘기름’으로 만족하게 한다는 표현을 병행합니다. 따라서 ‘기름’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으로 영혼이 채워지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36:8-9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나란히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살진 ’과 ‘생명의 원천’을 사랑에 속한 천적인 것으로, ‘복락의 강물’과 ‘’을 사랑에서 비롯된 신앙에 속한 영적인 것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에는 천적·영적 질서가 매우 아름답게 나타납니다. 먼저 생명과 사랑이 있고, 그 사랑에서 진리와 신앙의 빛이 나옵니다. ‘주의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본다’는 것은 인간이 자기 지성에서 진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과 사랑 안에서 참된 진리를 본다는 질서와도 잘 연결됩니다.

 

63:5에서도 ‘기름진 ’은 영혼을 만족시키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천적인 것을 뜻한다는 것이 분명하다고 합니다. 육체의 배부름이 아니라 영혼의 만족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찬송하는 입술’은 영적인 것을 나타냅니다. 다시 말해 내적인 사랑의 선이 먼저 있고, 그 선에서 나오는 진리의 고백과 찬송이 뒤따릅니다. 여기에서도 사랑이 신앙보다 내적으로 먼저라는 AC.352의 질서가 그대로 이어집니다.

 

18:12에서 첫 열매가 ‘기름’으로 불리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앞의 AC.352에서 처음 난 것이 오직 주님께 속한 거룩한 것을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그 처음 난 것과 ‘기름’이 서로 연결됩니다. 처음 난 것이 주님의 것인 것처럼, 그 안의 가장 좋은 것, 곧 사랑과 선의 생명 역시 주님의 것입니다. 결국 ‘처음 ’과 ‘기름진 ’을 함께 드린 아벨의 제물은 ‘거룩한 것과 천적인 것은 모두 주님에게서 온다’는 하나의 고백을 두 상응을 통해 표현하고 있는 셈입니다.

 

[3]에서는 신32:14가 등장하면서 이야기가 더욱 깊어집니다. ‘소의 엉긴 ’, ‘양의 ’, ‘어린 양의 기름’, ‘바산에서 숫양’, ‘염소’, ‘지극히 아름다운 ’, ‘포도즙의 붉은 ’ 같은 표현은 문자적으로 읽으면 풍요로운 음식의 목록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들이 각각 천적인 것들의 서로 다른 종류와 세부 종류를 상징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원리가 하나 나옵니다. ‘천적인 것들은 헤아릴 없이 많은 종류와, 그보다도 헤아릴 없이 많은 세부 종류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사랑’이나 ‘’을 하나의 단순한 개념처럼 생각하지만, 천국의 사랑과 선은 단조로운 하나의 상태가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나오는 선은 무한하며, 그것을 받아들이는 천사와 인간의 상태에 따라 셀 수 없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말씀도 그것을 단 하나의 상징으로 표현하지 않고 여러 동물과 음식과 기름과 젖과 곡식과 포도주를 통하여 서로 다른 종류의 선을 표현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상응을 읽을 때에도 중요합니다. ‘기름 = 사랑’이라는 등식 하나를 외우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어떤 기름인지, 어떤 동물의 기름인지, 어떤 제사에서 사용되는지, 어떤 다른 표현들과 함께 등장하는지에 따라 더 구체적인 의미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상응은 단순한 암호표가 아니라 천국의 질서와 인간 내면의 무수한 상태들이 자연적 형상 속에 표현되는 살아 있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신32:14에 대해 ‘속뜻이 없다면 이러한 표현들은 단지 말들에 지나지 않을 ’이라고 강하게 말합니다. 이것은 문자적 의미가 무가치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왜 말씀의 문자에 이토록 세밀하고 때로는 낯선 표현들이 들어 있는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문자 안에는 천국의 실재들이 담겨 있으며, 그래서 인간에게는 이상하게 보이는 세부 사항 하나하나도 속뜻에서는 의미를 가집니다.

 

AC.353을 다시 아벨의 제물로 돌아가 읽으면 창4:4의 짧은 표현이 놀랍도록 깊어집니다. ‘아벨은 자기도 양의 새끼와 기름으로 드렸더니.’ ‘처음 ’은 오직 주님께 속한 거룩한 것을 나타내고, ‘기름’은 오직 주님께 속한 천적인 것, 곧 사랑의 선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아벨 자체는 체어리티입니다. 따라서 아벨의 제물 전체가 하나의 질서를 이룹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과 선을 주님의 것으로 인정하며, 그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주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가인의 제물과 아벨의 제물의 차이는 더욱 분명해집니다. 가인에게도 ‘소산’이 있었고 ‘제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소산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행위였고, 그 제물은 그러한 신앙에서 나온 예배였습니다. 반면 아벨의 제물에는 ‘처음 ’과 ‘기름’이 있습니다. 곧 모든 거룩함과 사랑의 선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인정이 있고,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예배가 있습니다. 두 제물의 차이는 물질의 차이가 아니라 내적 생명의 차이입니다.

 

그러므로 AC.353의 핵심을 ‘기름은 천적인 것을 뜻한다’는 상응 하나로만 기억해서는 아쉽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 기름이 천적인 것을 뜻하는가?’입니다. 천적인 것은 사랑에 속한 것이고, 모든 참된 사랑은 주님에게서 오기 때문입니다. 신앙도 그 사랑에서 나올 때 살아 있고, 체어리티와 체어리티의 모든 선도 그 사랑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결국 ‘기름’은 인간의 종교적 성취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흘러들어오는 사랑의 생명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바라보는 기준도 바꾸어 줍니다. 진리를 많이 아는가, 예배를 얼마나 드리는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는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 안에 ‘기름’이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곧 그 신앙과 예배와 행위 안에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의 생명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신앙이 사랑에서 나오고, 예배가 체어리티에서 나오며, 행위가 주님에게서 받은 선에서 나올 때, 그것은 아벨이 드린 ‘기름진 ’과 같은 살아 있는 예배가 됩니다.

 

 

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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