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43.심화

 

1. ‘천적 인간, 곧 천적 영적 인간

 

그리고 여기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은 천적 인간, 곧 천적 영적 인간이므로, 여기서 의미하는 것은 이러한 것들입니다. and as it is the celestial, or the celestial spiritual man, who is treated of, such are here meant.

 

위는 본문 내용인데요, 여기 천적 인간, 곧 천적 영적 인간이므로(as it is the celestial, or the celestial spiritual man)라는 이 표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천적 영적(celestial spiritual)이라는 표현이 무슨 뜻인가요?

 

 

이 표현은 처음 읽으면 거의 모순처럼 느껴집니다. ‘천적(celestial)과 ‘영적(spiritual)을 구분해 놓고, 다시 ‘천적 영적(celestial spiritual)이라고 하니 말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의 인간 구조에서는 이것이 아주 중요한 중간 개념입니다.

 

핵심부터 말씀드리면, ‘천적 영적 인간(celestial spiritual man)은 단순히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을 반씩 섞은 존재가 아니라, ‘사랑이 중심이면서도, 그 사랑이 영적 차원들을 통하여 표현되고 있는 상태의 인간’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가장 깊은 중심은 천적이지만, 그 작용과 표현은 영적인 층을 통하여 나타나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기본적으로 인간 안에 여러 층을 봅니다. 가장 깊은 층은 사랑과 의지의 층이며, 이것이 천적입니다. 그다음은 진리와 이해의 층이며, 이것이 영적입니다. 그런데 실제 인간 안에서는 이 둘이 완전히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습니다. 천적 인간 안에도 영적 요소가 있고, 영적 인간 안에도 천적 요소가 있습니다. 다만 어느 쪽이 중심이냐가 다릅니다.

 

그래서 ‘천적 영적 인간’이라는 표현은, ‘그 사람의 중심은 천적(사랑 중심)이지만, 그 천적 생명이 영적 기능들(이해, 진리, 지성)을 통하여 나타나는 상태’라고 이해하시면 가장 좋습니다.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천적 인간’은 사랑이 너무 직접적이고 깊어서, 거의 퍼셉션 자체로 살아갑니다. 반면 ‘영적 인간’은 진리와 이해를 통하여 사랑으로 갑니다. 그런데 ‘천적 영적 인간’은, 사랑이 중심이라는 점에서는 천적이지만, 그 사랑이 이해와 진리의 층을 거쳐 표현된다는 점에서는 영적입니다. 즉, 사랑과 진리가 서로 적대하지 않고, 사랑이 진리를 질서 있게 비추는 상태입니다.

 

이 표현이 AC.143에서 중요한 이유는, 지금 창세기 2장의 상태가 완전히 단순한 ‘순수 천적 상태’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미 ‘돕는 배필’, proprium, 이름 짓기, 애정들의 구별 같은 문제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는 사랑만의 직접적 퍼셉션 상태에서, 어느 정도 ‘이해와 분별의 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여기 인간을 단순히 celestial이라고만 하지 않고, celestial spiritual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천적 상태의 외연 확장’처럼 보셔도 좋습니다. 곧, 가장 깊은 중심은 여전히 사랑과 퍼셉션 안에 있지만, 그 상태가 영적 층들까지 질서 있게 흘러 들어가 작동하는 상태입니다.

 

나중에 스베덴보리는 천국 구조에서도 비슷한 말을 합니다. 가장 높은 천국은 천적 천국이고, 그 아래는 영적 천국입니다. 그런데 천적 천국에도 영적 요소가 있고, 영적 천국에도 천적 요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과 진리는 결코 완전히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적 영적’이라는 표현은 이렇게 이해하시면 됩니다.

 

천적’은 중심 생명의 성격, 곧 사랑 중심성을 말하고, ‘영적’은 그 사랑이 작동하고 표현되는 이해와 진리의 차원을 말합니다. 즉, ‘천적 영적 인간’이란, 주님 사랑이 중심이면서도, 그 사랑이 진리와 지성 안에서 질서 있게 살아 움직이는 인간이라고 말입니다.

 

 

 

AC.143, 창2:19-20, ‘성경이 끊임없이 동물의 언어로 말하는 이유’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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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2:19-20)

 

AC.143

 

고대에는 짐승들(beasts)동물들(animals)이 사람 안의 애정들과 그와 같은 것들을 뜻하였다는 점이 오늘날에는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시대의 사람들은 천적 관념 안에 있었고, 그러한 것들이 영계에서는 동물들로, 실제로는 그것들과 닮은 동물들로 나타나기 때문에, 그들이 그렇게 말할 때에는 다른 어떤 걸 말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또한 말씀에서 짐승들이 일반적으로든 구체적으로든 언급되는 모든 곳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언서 전체는 이러한 것들로 가득 차 있으므로, 각각의 짐승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말씀에 담긴 내적 의미를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다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짐승에는 두 종류가 있어 악한 짐승 또는 해로운 짐승들과 선한 짐승 또는 해롭지 않은 짐승들이 있으며, 선한 짐승들로는 선한 애정들을 의미합니다. 예컨대 양들, 어린양들, 비둘기들이 그러하지요. 그리고 여기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은 천적 인간, 곧 천적 영적 인간이므로, 여기서 의미하는 것은 이러한 것들입니다. ‘짐승들(beasts)이 일반적으로 애정들을 뜻한다는 점은 앞에서 말씀의 몇몇 구절들로 확인되었으므로 (45, 46), 더 이상의 확증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That by “beasts” and “animals” were anciently signified affections and like things in man, may appear strange at the present day; but as the men of those times were in a celestial idea, and as such things are represented in the world of spirits by animals, and in fact by such animals as they are like, therefore when they spoke in that way they meant nothing else. Nor is anything else meant in the Word in those places where beasts are mentioned either generally or specifically. The whole prophetic Word is full of such things, and therefore one who does not know what each beast specifically signifies, cannot possibly understand what the Word contains in the internal sense. But, as before observed, beasts are of two kinds— evil or noxious beasts, and good or harmless ones—and by the good beasts are signified good affections, as for instance by sheep, lambs, and doves; and as it is the celestial, or the celestial spiritual man, who is treated of, such are here meant. That “beasts” in general signify affections may be seen above, confirmed by some passages in the Word (n. 45–46), so that there is no need of further confirmation.

 

 

해설

 

이 단락은 왜 성경이 끊임없이 동물의 언어로 말하는지를 ‘근본적인 인식 구조의 차이’로 설명합니다. 오늘날 독자에게 동물은 외적 자연의 일부이지만, 태고의 사람들에게 동물은 곧바로 ‘내적 상태의 형상’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연을 분리된 대상처럼 보지 않았고, 인간 안의 애정이 자연 안에서 그대로 형상을 취해 나타난다고 보았습니다.

 

스베덴보리가 특히 강조하는 것은, 이것이 단순한 비유나 문학적 장치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영계에서는 실제로 애정과 성향에 따라 동물의 형상으로 나타나며, 그것도 임의적인 형상이 아니라 ‘그 애정과 닮은 동물’로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고대인들이 사람의 애정을 말하면서 동물을 말했을 때, 그들은 상징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본 그대로를 말한 것’에 가깝습니다.

 

이 점을 모르면 예언서 전체가 닫혀 버립니다. 스베덴보리는 매우 단호하게 말합니다. 각 짐승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하면, 말씀의 내적 의미는 결코 이해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는 과장이 아니라, 예언서의 언어가 전면적으로 상응의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사자, 양, 염소, 소, 비둘기, 독수리 하나하나가 애정과 성향의 질을 담고 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구분이 제시됩니다. 짐승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악한 짐승과 선한 짐승입니다. 이는 외형의 문제가 아니라, ‘애정의 질’에 따른 구분입니다. 해로운 짐승은 악한 애정들을, 해롭지 않은 짐승은 선한 애정들을 뜻합니다. 양과 어린양, 비둘기가 반복해서 등장하는 이유는, 그것들이 가장 순한 선의 애정들을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강조되는 점은, 본문이 다루는 대상이 ‘천적 인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짐승들은 본질적으로 선한 애정들입니다. 창2:19-20의 장면은 야생의 위협을 묘사하는 장면이 아니라, 인간 안에 이미 풍성히 존재하는 선한 애정들의 질서와 분별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AC.143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이 동물의 언어로 말할 때, 그것은 인간을 자연으로 낮추기 위함이 아니라, 인간의 내적 세계가 자연과 분리되지 않았던 가장 깊은 상태를 드러내기 위함이며, 이 언어를 이해할 때에만 말씀의 내적 세계가 열리기 시작한다고 말입니다.

 

 

심화

 

1. ‘천적 인간, 곧 천적 영적 인간

 

 

AC.143, 심화 1, ‘천적 인간, 곧 천적 영적 인간’

AC.143.심화 1. ‘천적 인간, 곧 천적 영적 인간’ 그리고 여기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은 천적 인간, 곧 천적 영적 인간이므로, 여기서 의미하는 것은 이러한 것들입니다. and as it is the celestial, or the 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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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2, 창2:19-20, ‘이름을 주었으나 여전히 기울어지는’(AC.142-146)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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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2.심화

 

3. ‘사랑이 바르고

 

바로 위에 천적 인간은 먼저 사랑이 바르고에서 이 사랑이 바르고가 무슨 뜻인가요?

 

 

여기서 ‘사랑이 바르다’는 말은, 단순히 감정이 착하다거나 성격이 온순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구조에서는 ‘무엇을 가장 중심적으로 사랑하느냐’, 그리고 그 사랑의 방향이 ‘주님과 이웃을 향하느냐, 아니면 자기 자신을 향하느냐’가 핵심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바르다’는 것은, 인간 안의 가장 깊은 중심 사랑이 자기 자신에게 닫혀 있지 않고, 주님과 선을 향해 질서 있게 놓여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무엇보다 먼저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고’, ‘선 자체를 사랑하며’, ‘진리를 자기 자랑이 아니라 생명을 위해 받아들이는 상태’입니다.

 

천적 인간은 바로 이 사랑의 방향이 먼저 바로잡혀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진리를 배울 때도, 먼저 ‘옳은가?’보다 ‘선한가?’, ‘주님께 속한 건가?’를 중심으로 움직입니다. 그에게 진리는 사랑을 섬기는 빛입니다.

 

예를 들어, 같은 ‘용서’라는 진리를 두 사람이 듣는다고 해보겠습니다. 영적 인간은 먼저 ‘왜 용서해야 하는가’, ‘말씀은 무엇을 말하는가’를 이해하며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 천적 인간은 더 깊은 자리에서 ‘사랑은 원래 그렇게 움직이는 것’처럼 느낍니다. 물론 둘 다 귀한 상태지만, 중심이 다릅니다.

 

그래서 ‘사랑이 바르다’는 말은 결국, 사랑의 대상과 방향과 질서가 바르다는 뜻입니다. 곧, 자기 자신이 중심이 아니라 주님이 중심이시고, 소유와 자기 영광보다 선 자체를 더 사랑하며, 진리를 자기 우월감이 아니라 생명을 위해 받아들이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바로 천적 인간의 특징입니다. 그는 먼저 사랑의 방향이 주님 쪽으로 열려 있기 때문에, 그다음의 생각과 이해도 그 방향을 따라 질서 있게 움직입니다. 반대로 사랑의 중심이 자기 자신에게 있으면, 아무리 훌륭한 진리를 알아도 결국 자기 확증 쪽으로 기울기 쉽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서 인간의 핵심은 ‘얼마나 많이 아는가’ 이전에, ‘무엇을 가장 사랑하는가’입니다. ‘사랑이 바르다’는 것은 바로 그 가장 깊은 중심 사랑이 주님의 질서 안에 놓여 있다는 뜻입니다.

 

 

 

AC.142, 창2:19-20, ‘이름을 주었으나 여전히 기울어지는’(AC.142-146)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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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2, 심화 2, ‘천적 애정들’, ‘영적 애정들’

AC.142.심화 2. ‘천적 애정들’, ‘영적 애정들’ ‘짐승’(beasts)은 천적 애정들을 뜻하고, ‘하늘의 새’(fowls of the heavens)는 영적 애정들을 뜻하는데 윗글은 AC.142 본문 내용인데요, 여기 ‘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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