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4:18)

 

AC.332

 

이 하나의 이단에서 생겨난 여러 이단들 역시 각각 그 이름들로 불렸으며, 그 마지막이 라멕(Lamech)인데, 그 안에는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18) The heresies that sprang from this one are also called by their names, in the last of which, called Lamech, there was nothing of faith remaining. (verse 18)

 

 

해설

 

AC.332는 앞의 AC.331에서 말한 ‘이 이단의 확장’이 한 단계 더 진행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AC.331에서 ‘에녹’은 가인으로 표상된 이단, 곧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더욱 발전하고 확장된 상태를 의미했습니다. 이제 창4:18에는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는 계보가 이어집니다. 문자적으로는 가인의 후손들이 세대를 이어 가는 족보이지만, 속뜻으로는 가인으로부터 시작된 하나의 분리된 교리가 계속해서 새로운 형태의 교리들을 낳고, 그것들이 점차 더 변질되어 가는 과정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랏’, ‘므후야엘’, ‘므드사엘’, ‘라멕’은 속뜻으로는 단순히 네 사람의 이름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하나의 이단에서 생겨난 여러 이단들 역시 각각 그 이름들로 불렸다’고 합니다. 이것은 창세기 초기의 계보를 읽는 데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낳았다’는 말은 단순한 생물학적 출산만이 아니라, 하나의 교리적, 교회적 상태에서 다음 상태가 생겨나고, 그것이 다시 또 다른 상태를 낳는 영적 계승을 나타냅니다. 가인이라는 최초의 분리에서 에녹이 생겨났고, 그 에녹 상태에서 다시 여러 파생된 교리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여기서 ‘heresies’라는 복수형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였습니다. 곧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의 근본적인 분리가 일어나면 그 분리에서 여러 다른 교리적 왜곡들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면, 그다음에는 신앙과 행위의 관계가 왜곡될 수 있고, 선과 진리의 관계가 왜곡될 수 있으며, 주님과 인간의 관계, 예배와 삶의 관계도 차례로 왜곡될 수 있습니다. 하나의 근본적인 질서가 무너지면 그 질서에 연결되어 있던 다른 것들도 연쇄적으로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이라는 하나의 ‘heresy’에서 여러 ‘heresies’가 생겨났다는 것은 단순한 교파의 숫자 증가가 아니라, 최초의 분리가 점차 여러 형태의 교리적 왜곡으로 확산되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AC.331에서 살펴본 ‘amplification’, 곧 ‘확장’의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해 줍니다. 잘못된 교리는 처음부터 완성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점차 발전합니다. 처음에는 ‘신앙과 체어리티는 구별된다’는 생각이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우선한다’로 변하고, 다시 ‘체어리티는 신앙에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로 나아가며, 결국에는 체어리티가 완전히 소멸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형성된 교리는 다시 그로부터 여러 파생 교리를 만들어 냅니다. 창4의 계보는 바로 이러한 영적 변질의 연속을 ‘낳고, 낳고, 낳았다’는 족보의 언어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AC.332에서 가장 무거운 표현은 마지막의 ‘라멕’에 관한 설명입니다. ‘그 안에는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처음 가인은 비록 체어리티에서 분리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신앙’을 표상했습니다. 그래서 앞의 AC.330에서 주님께서는 가인을 완전히 멸하지 않으시고 ‘표’를 주어 보존하셨습니다. 훗날 체어리티가 다시 신앙을 통하여 심어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가인 계열이 계속 변질되어 라멕에 이르면 이제 처음에 가지고 있던 신앙의 본질마저 사라지고 맙니다. 출발점에서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었는데, 마지막에는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영적 원리를 보여 줍니다. 진리는 선에서 분리된다고 해서 그 순간 곧바로 진리의 외형까지 모두 잃어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한동안은 진리의 지식과 교리적 형식을 그대로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그것을 매우 강하게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가 계속 선에서 분리된 채 사용되면 점차 왜곡되고, 결국 처음에 가지고 있던 진리의 성질 자체마저 잃게 됩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은 처음에는 여전히 ‘신앙’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분리가 세대를 거쳐 계속 확대되면서 마침내 신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조차 남지 않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남아 있지 않았다’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사람들이 더 이상 어떤 교리를 믿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외적으로는 여전히 종교적 지식과 교리와 예배의 형식이 존재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안에 참된 신앙을 신앙답게 하는 내적 생명이 없어진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와 분리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체어리티가 완전히 소멸되고 거짓과 악이 지배하게 되면, 아무리 신앙의 언어와 형식이 남아 있어도 내적으로는 ‘신앙에 속한 것’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가인에서 라멕까지의 흐름은 단순한 ‘이단의 계보’가 아니라 하나의 영적 붕괴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사랑과 신앙의 관계에서 작은 질서의 전도가 일어납니다.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하고, 신앙을 체어리티보다 앞세웁니다. 그 결과 체어리티가 소멸되고, 교리가 왜곡되며, 거짓과 악이 생겨납니다. 그러나 그 상태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 발전하면, 마침내 처음에 그렇게 높이고 지키려 했던 ‘신앙’ 자체까지 잃어버리게 됩니다. 신앙을 체어리티보다 높임으로써 신앙을 지킨 것이 아니라, 결국 신앙마저 파괴한 것입니다.

 

 

심화

 

1. 분리된 신앙은 결국 신앙 자체까지 잃게 되는가?

 

AC.332에서 특히 깊이 생각해 볼 부분은 바로 이것입니다. 가인의 출발점은 신앙을 없애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신앙을 체어리티보다 높이는 것이었습니다. 신앙을 너무 중요하게 여긴 나머지 그것을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 ‘주된 것’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길의 마지막인 라멕에서는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됩니다. 신앙을 높이려 했는데 결과적으로 신앙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 이유는 스베덴보리가 계속해서 말하는 선과 진리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선은 진리의 생명이고, 진리는 선의 형체입니다. 진리가 선에서 분리되면 처음에는 여전히 진리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기억 속에 성경 구절도 있고, 교리도 있고, 논리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선한 삶을 향하지 않고, 자기 사랑과 자기 지성, 자기 의를 섬기기 시작하면 조금씩 왜곡됩니다. 사람은 진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대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정당화하도록 해석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되면 처음에는 ‘진리는 가지고 있으나 선이 없는 상태’였던 것이, 마침내 ‘선도 없고 진리도 없는 상태’로 변하게 됩니다.

 

이것은 proprium과도 깊이 연결됩니다. 사람이 진리를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으로 인정하고, 그것을 선한 삶을 위해 사용할 때, 진리는 계속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공급받습니다. 그러나 ‘내가 안다’, ‘내 교리가 옳다’, ‘내 신앙이 우월하다’는 proprium이 진리를 소유하기 시작하면, 진리는 점차 자기 사랑을 섬기는 도구가 됩니다. 그러면 사람은 진리 때문에 자기 생각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지키기 위해 진리를 고치기 시작합니다. 이때부터 진리의 변질은 급속히 진행됩니다. 결국 남는 것은 신앙의 이름과 외형뿐이고, 그 안에는 참된 신앙의 생명이 없게 됩니다.

 

그래서 AC.332의 라멕은 상당히 엄중한 경고가 됩니다. 교회의 가장 위험한 상태는 반드시 ‘우리는 신앙을 버리겠다’고 선언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에서 시작될 수도 있습니다. 그 말 자체는 틀리지 않지만, 그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여 절대화하는 순간 문제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상태가 계속되면 역설적으로 처음에 그렇게 지키려고 했던 신앙 자체가 점점 변질되어 마침내 사라질 수 있습니다. ‘가인’에서 출발하여 ‘라멕’에 이르는 계보는 바로 그 과정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창4를 다른 사람이나 다른 교회를 판단하는 계보로 읽기보다 먼저 우리 자신의 내적 상태를 비추는 말씀으로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안에서도 진리가 선에서 분리될 수 있고, 아는 것이 사는 것보다 앞설 수 있으며, 신앙의 확신이 체어리티보다 높아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상태를 오래 방치하면 처음에는 주님을 더 잘 믿기 위해 붙들었던 진리가 어느 순간 자기 생각과 자기 의를 지키는 수단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4의 가인 계보는 ‘옛날에 이런 이단들이 있었다’는 기록만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질서가 무너질 때, 어떤 단계적 변질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영적 지도이기도 합니다.

 

AC.325부터 AC.332까지를 이어 보면 그 흐름은 더욱 선명합니다. ‘사랑에서 신앙이 분리되고’, 그 분리가 ‘예배’에 나타나며, 분리된 신앙의 상태가 ‘악해지고’,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높아지며’, 마침내 ‘체어리티가 소멸됩니다.’ 그 결과 ‘교리가 왜곡되고, 거짓과 악이 생겨나며’, 그 왜곡된 교리가 ‘에녹’으로 확장되고, 다시 여러 이단을 낳아, 마지막 ‘라멕’에 이르러서는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됩니다. 처음의 작은 ‘분리’가 마지막에는 사랑뿐 아니라 신앙 자체까지 잃게 한 것입니다. 이것이 짧은 AC.332가 가인 계보를 통하여 보여 주는 매우 깊은 교회적, 개인적 경고입니다.

 

 

2. ‘를 주시면서까지 신앙을 보전하시려던 계획이 라멕 때문에 무산?

 

라멕에 이르러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되면, 그러면 처음 가인의 때, 그에게 를 주시면서까지 보호, 보전하고자 하셨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는 건가요?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되었으니, 신앙을 통해 체어리티로 갈 수 있게 하시려던 계획이 무산되었으니까요...

 

 

아닙니다. 바로 여기서 ‘가인의 표’를 ‘가인 계열 전체가 끝까지 신앙을 보존하도록 하신 약속’으로 이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라멕에게서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고 해서, 가인에게 표를 주신 주님의 섭리가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가인 계열 안에서는 신앙마저 끝내 소멸할 수 있도록 인간의 자유를 허용하시면서도, 인류 전체를 향한 섭리 안에서는 ‘신앙이라는 길’ 자체가 소멸하지 않도록 보존하셨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AC.330의 표현을 다시 정확히 보면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보존되었다’는 사실의 이유를 ‘이후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심어지게 될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특정한 ‘가인 교회’가 훗날 반드시 회복되어 체어리티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보존되어야 했던 것은 궁극적으로 ‘신앙’이라는 영적 기능과 질서입니다. 가인으로 표상된 것은 비록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었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신앙에 속한 어떤 것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그 자리에서 완전히 없애 버리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주님께서 ‘이제부터 가인 계열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신앙이 절대로 없어지지 않게 하겠다’고 강제하셨다는 뜻도 아닙니다. 그렇게 하신다면 인간의 자유가 사라집니다. 주님께서는 신앙을 보존하시되,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체어리티와 결합할 것인지, 아니면 계속 왜곡하여 마침내 신앙 자체마저 잃을 것인지는 자유 가운데 두십니다. 가인 계열은 후자의 길을 계속 걸었고, 그 결과 라멕에 이르러서는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표’와 ‘라멕에게 신앙이 남아 있지 않음’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하나는 주님의 섭리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이 그 섭리 안에서 자신의 자유를 어떻게 사용했는가의 차원입니다. 주님께서는 구원의 길을 보존하셨지만, 가인 계열의 사람들이 반드시 그 길을 걸어가도록 강제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주님의 계획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 그 특정 계열이 주님께서 보존하신 가능성을 끝까지 거절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창4와 창5를 함께 보아야 하는 이유가 드러납니다. 앞서 우리가 창4의 가인 계열과 창5의 셋 계열을 단순한 직선적 시간순으로만 읽지 말고, 태고교회 시대 안에서 전개된 서로 다른 교회적 흐름으로 볼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했지요. 가인 계열에서 신앙에 속한 것이 라멕에 이르러 완전히 소멸했다고 해서 ‘인류 전체에서 신앙이 소멸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가인으로부터 파생된 그 특정 교리적 계열이 그렇게 종말에 이르렀다는 뜻입니다.

 

더욱이 주님의 섭리는 그보다 훨씬 긴 시야를 가지고 있습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은 본래 ‘사랑에서 신앙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이 질서가 인류에게 더 이상 지속될 수 없게 되자, 주님께서는 결국 홍수 이후 고대교회를 통하여 ‘신앙에서 체어리티로’ 나아가는 새로운 거듭남의 질서를 세우십니다. 사람이 말씀을 통하여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체어리티가 형성되는 질서입니다. AC.330의 ‘이후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심어지게 될 것이었으므로’라는 말은 궁극적으로 바로 이 방향을 내다보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인의 표’를 조금 더 넓게 이렇게 이해하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보존하신 것은 ‘가인주의’가 아닙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는 왜곡을 영구히 보존하신 것도 아닙니다. 그 왜곡된 상태 안에도 아직 남아 있던 ‘신앙에 속한 것’을 완전히 파괴되지 않도록 보호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천적 퍼셉션을 잃은 뒤에는 장차 진리와 신앙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에 이를 길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어떤 것이 현재 잘못 사용되고 있다고 해서 그 기능 자체까지 없애 버리지 않는 것과 비슷합니다. 주님께서는 그 기능을 장차 올바른 질서 안에서 다시 사용하실 수 있도록 보존하십니다.

 

오히려 여기에는 아주 깊은 섭리의 원리가 하나 있습니다. 주님의 섭리는 ‘한 계열이 반드시 성공해야만 전체 계획이 이루어지는’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자유 가운데 어떤 길을 끝까지 거절하더라도 주님께서는 그 자유를 깨뜨리지 않으시면서 다른 길을 통하여 구원의 가능성을 계속 보존하십니다. 가인 계열이 라멕에 이르러 완전히 소진되었다고 해서 주님의 구원 역사가 함께 막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한 교회가 종말에 이를 때 다른 교회를 일으키시는, AC 전체에서 반복되는 질서가 여기서 이미 보이기 시작합니다. 태고교회의 한 계열이 소멸해도 주님께서는 리메인스를 보존하시고, 그것을 통하여 다음 교회를 준비하십니다.

 

이렇게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 역설이 생깁니다. ‘가인의 표’는 ‘가인이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라는 보장이 아니라, ‘가인이 실패하더라도 주님의 구원 섭리는 실패하지 않는다’는 표에 더 가깝습니다. 인간은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할 수 있고, 그것을 왜곡할 수 있으며, 심지어 라멕에 이르러 신앙에 속한 것마저 모두 소멸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실패가 주님의 섭리를 무산시키지는 못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으시면서도, 그 실패들 사이에서 리메인스를 보존하시고,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시며, 마침내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지는’ 새로운 거듭남의 질서를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AC.330과 AC.332를 함께 읽을 때 ‘가인에게 표를 주셨는데 왜 라멕에게서는 신앙마저 없어졌는가?’라는 질문의 답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가인의 표’는 가인 계열의 영구 보존을 뜻한 것이 아니라, 장차 인간을 다시 체어리티로 이끄는 데 필요할 ‘신앙’이 완전히 제거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님의 섭리를 나타냅니다. 가인 계열은 자유 가운데 그것마저 잃어버렸지만, 주님께서는 인류 전체의 구원 질서 안에서 신앙을 보존하시고, 마침내 그것을 새로운 교회에서 체어리티로 가는 길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AC.332의 라멕은 ‘주님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자리’라기보다, ‘한 교리적 계열은 끝까지 타락할 수 있어도 주님의 섭리는 그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보게 하는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자유 때문에 한 교회는 종말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실패 때문에 주님의 구원 계획 자체가 종말에 이르는 일은 없습니다.

 

 

 

AC.331, 창4:17, ‘에녹’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And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and he was building a city, and 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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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1.심화

 

1. 4 에녹과 창5 에녹은 같은 의미인가?

 

AC를 처음 읽는 분에게는 여기서 또 하나 매우 중요한 혼란이 생길 수 있습니다. 창4에도 ‘에녹’이 나오고 창5에도 ‘에녹’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창4의 에녹은 가인의 계열에 속하지만, 창5의 에녹은 야렛의 아들이며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고 기록된 인물입니다. 이름은 같지만, 두 에녹이 표상하는 교회적 상태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 사실 자체가 창세기 초반의 이름들을 단순히 개인의 이름으로만 읽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름의 철자가 같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그 이름이 놓인 계열과 문맥, 그리고 그것이 표상하는 교회적 상태입니다. 창4의 에녹은 ‘가인’으로 표상되는 분리된 신앙의 이단이 더욱 확장된 것을 나타냅니다. 반면 창5의 에녹은 전혀 다른 교회적 계승선 안에서 등장하며, 후에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듯 태고교회의 퍼셉션으로 알게 된 것들을 수집하여 교리적 지식으로 보존한 사람들 또는 교회를 표상합니다.

 

따라서 ‘에녹이라는 이름 자체가 언제나 하나의 고정된 영적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상응을 처음 접할 때 생기기 쉬운 오해이기도 합니다. 말씀의 속뜻은 단순히 ‘A라는 이름은 언제나 B를 뜻한다’는 암호표를 적용하여 해독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각 인물과 장소와 사물은 전체 문맥과 계열 안에서 그 의미가 정해지며, 특히 창세기 초기의 계보에서는 각각의 이름이 서로 다른 교회와 교리의 상태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AC.331은 앞서 살펴본 ‘4와 창5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라는 문제에도 좋은 실제 사례가 됩니다. 창4의 가인 계열과 창5의 셋 계열은 하나의 족보를 시간순으로 이어 붙인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 시대 안에서 전개된 서로 다른 교회적 계열들을 각각 보여 줍니다. 그래서 두 계열에 ‘에녹’이라는 같은 이름이 등장한다고 해서 하나의 에녹을 억지로 동일한 계보 안에 맞추려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각각의 에녹이 자기 계열 안에서 어떤 영적 상태를 표상하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AC.331의 짧은 문장을 상당히 중요하게 만듭니다. 이제부터 가인의 후손들을 읽을 때, 우리는 단순히 ‘가인의 아들, 그 아들의 아들, 다시 그 아들의 아들’이라는 생물학적 계보만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는 최초의 원리가 시간이 흐르며, 어떤 교리적 형태들로 발전하고 변질되어 가는가’를 따라가게 됩니다. 가인이 하나의 씨앗이라면 에녹은 그 씨앗에서 자라난 첫 번째 확대된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계열이 계속 이어지면서 창4는 분리된 신앙이 교회 안에서 어떤 결과들을 낳게 되는지를 점점 더 구체적으로 보여 주게 됩니다.

 

 

 

AC.331, 창4:17, ‘에녹’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And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and he was building a city, and 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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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And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and he was building a city, and called the name of the city after the name of his son, Enoch. (4:17)

 

AC.331

 

이 이단의 확장을 에녹(Enoch)이라 합니다. (17) The amplification of this heresy is called “Enoch.” (verse 17)

 

 

해설

 

AC.331은 매우 짧은 한 문장이지만, 창4의 계보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중요한 글입니다. 창4:17에는 ‘가인이 그의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문자적으로는 가인의 아들 에녹의 출생을 말하지만, 속뜻으로는 앞에서 ‘가인’이라 했던 교리, 곧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이제 하나의 독립된 교리적 체계로 더욱 발전하고 확장되는 과정을 나타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the amplification of this heresy’, 곧 ‘이 이단의 확장’이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amplification’을 단순히 사람의 수가 많아졌다거나 가인의 후손이 번성했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확장은 앞에서 생겨난 분리된 신앙의 교리가 더욱 전개되고 발전하여 하나의 구체적인 교리적 형태를 갖추어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AC.324에서 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온 교리들, 곧 ‘heresies’가 창4의 중요한 주제라고 하였고, AC.325에서는 그 가운데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를 ‘가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에녹’은 그 가인적 교리가 한 단계 더 전개되고 확장된 상태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살펴본 창4와 창5의 계보를 읽는 방식과도 직접 연결됩니다. AC를 처음 접하는 독자라면 ‘가인이 에녹을 낳았다’는 말씀을 먼저 한 개인이 다른 개인을 낳은 족보로 읽게 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속뜻으로 보는 ‘낳음’은 교회와 교리의 발생과 계승을 의미합니다. 어떤 교리적 상태에서 또 다른 교리적 상태가 발생하고, 그것이 다시 발전하여 새로운 형태를 이루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인이 에녹을 낳았다’는 것은 속뜻으로는 ‘가인’이라는 분리된 신앙의 교리로부터 ‘에녹’이라 불리는 더욱 발전된 교리적 형태가 생겨났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이단의 확장’이라고 하면 오늘날 어떤 이단 단체가 포교하여 신도 수를 늘리고 조직을 확장했다는 식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물론 외적으로 그런 현상과 연결하여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AC.331의 직접적인 의미는 그보다 깊습니다. 이것은 교리의 내적 발전을 말합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신앙과 체어리티를 서로 구별할 수 있다’는 정도였던 생각이 점차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중요하다’로 발전하고, 더 나아가 ‘체어리티와 관계없이 신앙만으로도 충분하다’는 하나의 독립된 교리 체계를 형성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의 분리가 논리와 설명과 가르침을 갖추어 점차 체계화되는 것이 여기서 말하는 ‘확장’에 가깝습니다.

 

앞의 AC.330에서 ‘가인의 표’가 주어진 것도 이 대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을 완전히 소멸시키지 않으셨습니다. 훗날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다시 심어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앙 자체는 보존되었습니다. 그러나 보존되었다고 해서 당시의 ‘분리된 신앙’이라는 왜곡된 상태가 곧바로 바로잡힌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역사적으로는 그 교리가 계속 발전하고 여러 형태로 확장될 수 있었습니다. 바로 그 첫 번째 확장이 ‘에녹’으로 표상됩니다. 주님께서 어떤 것을 섭리 가운데 보존하신다는 것과 그 상태 자체를 승인하신다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임을 여기서도 볼 수 있습니다.

 

4:17에는 또 하나 중요한 내용이 이어집니다. 가인은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였습니다. 이어지는 AC에서 자세히 다루겠지만, 말씀에서 ‘’은 흔히 교리적인 것을 표상합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면 ‘에녹’이 단순한 한 사람의 이름을 넘어, 가인으로 시작된 분리된 신앙이 이제 일정한 교리적 구조와 체계를 갖추게 된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처음에는 하나의 분리된 생각이었지만, 이제 그것을 둘러싼 ‘’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이 과정은 교회의 타락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매우 섬세하게 보여 줍니다. 잘못된 교리는 처음부터 완성된 체계로 나타나는 경우가 드뭅니다. 처음에는 참된 것 가운데 어느 한 부분을 다른 것에서 떼어 내는 작은 분리에서 시작됩니다. AC.325의 가인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신앙 자체가 거짓이었던 것이 아니라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그 분리가 지속되면 사람들은 그것을 설명하고 정당화하기 시작합니다. 논리가 만들어지고, 교리가 형성되고, 그것을 지지하는 여러 생각들이 덧붙여집니다. 마침내 처음의 작은 분리가 하나의 독립적인 교리적 세계를 형성합니다. AC.331의 ‘에녹’은 바로 이러한 발전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proprium의 작용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진리가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있을 때, 사람은 그 진리를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으로 여기며, 그것을 선한 삶을 위하여 사용합니다. 그러나 진리가 선에서 분리되면, 인간의 proprium은 그 진리를 자기 것으로 붙들고 체계화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논리를 만들고, 자신의 입장을 방어하기 위해 또 다른 교리를 세우며, 마침내 그 안에 하나의 ‘’을 쌓습니다. 그러면 처음에는 작은 분리였던 것이 점점 견고한 교리적 구조가 되어, 오히려 그 안에 갇혀 밖의 진리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심화

 

1. 4에녹과 창5에녹은 같은 의미인가?

 

 

AC.331, 심화 1, 창4의 ‘에녹’과 창5의 ‘에녹’은 같은 의미인가?

AC.331.심화 1. 창4의 ‘에녹’과 창5의 ‘에녹’은 같은 의미인가? AC를 처음 읽는 분에게는 여기서 또 하나 매우 중요한 혼란이 생길 수 있습니다. 창4에도 ‘에녹’이 나오고 창5에도 ‘에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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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2, 창4:17, ‘라멕’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창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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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0, 창4:10-16, ‘창4:10-16 전체의 속뜻’

10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And he said, What hast thou done? The voice of thy brother’s bloods crieth to me from the ground. 11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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