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70 심화

1.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 - 영계에도 시간이 있는가?

AC.70에는 조금 이상하게 느껴지는 표현이 있습니다. ‘육체의 죽음  사람이 다른  안에 있기까지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다른 곳에서 영계에는 자연계와 같은 시간과 공간이 없고, 천사들에게는 날과 해 대신 상태의 변화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하루는 무엇일까요? 정말 죽은 뒤 대략 24시간 정도가 지나서 영계에 들어간다는 뜻일까요, 아니면 하루 자체가 하나의 영적 상태를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 문제를 풀기 위해 먼저 두 가지 관점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연계에 아직 살아 있는 스베덴보리와 독자의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영계 안에서 살아가는 영과 천사의 관점입니다. AC.70의 문장은 자연계에서 육체를 가지고 살아 있는 스베덴보리가 역시 자연계의 독자에게 죽음 이후의 일을 설명하는 문장입니다. 그는 육체가 죽은  다른  안에 있기까지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여기서의 하루를 처음부터 영계의 상징적인 상태 주기라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실제로 천국과 지옥 162-165에서 영계의 시간에 대해 매우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천국에서도 사건들은 서로 이어지고 진행되지만 천사들에게는 자연계 사람과 같은 시간 개념이 없습니다. 자연계에는 해와 날이 있지만 천국에는 그 대신 상태의 변화가 있으며, 사람의 자연적 시간 관념이 천사에게 전달되면 천사는 그것을 시간 자체가 아니라 그것에 상응하는 상태로 지각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영계에는 자연계와 같은 24시간제의 하루가 있는가?라는 질문에는 그런 의미의 하루는 없다고 답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다음 단계가 있습니다. ‘영계에는 자연적 하루가 없다는 사실과 AC.70에서 스베덴보리가 자연적 시간 언어를 사용할  없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아직 자연계에 살고 있고 자연계의 독자에게 자신이 관찰한 사후 소생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이라는 자연계의 사건을 기준으로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는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굳이 하루라는 말은 사실 시간 뜻이 아니라 하나의 상태 주기라는 뜻이다라고 바꾸어 읽을 이유는 없습니다.

 

가령 스베덴보리가 나는 어떤 사람이 죽은  열두 시간 후에 그와 이야기했다고 자연계의 관찰자로서 말한다면, 그 사람이 영계에서 열두 시간을 시계로 재고 있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자연계에 남아 있는 관찰자가 자연계의 시간으로 경과를 표현한 것입니다. AC.70 거의 하루도 우선 이런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그렇다면 거의 하루는 모든 사람에게 반드시 24시간보다 짧다는 교리적 시간표일까요? 그렇게까지 읽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AC.70은 사망 시각부터 몇 시간 몇 분 만에 영적인 의식이 완전히 열리는지를 계산하기 위한 글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강조점은 훨씬 분명합니다. 죽음과 다른 삶 사이에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긴 공백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 뒤 곧바로 그 이유를 죽음은 삶의 연속이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AC들에서는 그 소생이 아무 과정도 없이 한순간에 완료되는 것은 아님을 보게 됩니다. 육체의 생명이 끝나고 영으로서 의식적으로 깨어나는 데에는 주님의 질서 아래 일정한 과정이 있으며, 천사들이 함께하는 단계들이 설명됩니다. 그러므로 삶의 연속 아무런 과정도 없다는 뜻이 아니라 존재와 생명이 끊어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즉시라는 말을 사용할 때에도 같은 구별이 필요합니다. 신학적으로 사람은 죽으면 즉시 영계에 들어간다고 말할 때의 즉시는 죽음과 사후생명 사이에 수백 년 동안 무의식 상태로 기다리는 별도의 삶의 공백이 없다는 뜻으로는 적절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심장이 멈추는 바로  0.001 뒤에 소생의  과정이 끝난다는 의미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AC.70 자체도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는다고 하여 어떤 질서 있는 전환 과정이 있음을 암시하고, 그 과정은 이어지는 글들에서 자세히 설명됩니다.

 

그렇다면 이 거의 하루를 사람마다 다른 시간이라고 해야 할까요? AC.70 한 글만으로 개인마다 몇 시간씩 달라진다고 단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이후 소생에 관한 여러 기록을 읽으면서 각 상태의 차이를 더 살펴보아야 합니다. 지금 단계에서는 스베덴보리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정확한 사후 24시간 규칙을 제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죽음과 의식적인 다른 삶 사이가 매우 짧고 연속적이라고 증언하고 있다는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또 하나 피해야 할 것은 이 표현을 주님의 사흘 만에 부활하사와 곧바로 연결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나 셋째 이 충만함이나 완성을 뜻하는 경우가 있고, 스베덴보리도 그러한 상응을 여러 곳에서 설명합니다. 그러나 AC.70 거의 하루와 주님의 부활의 사흘을 동일한 사후 소생 원리로 연결하는 것은 이 본문이 하지 않는 설명입니다. 특히 주님의 영화와 부활은 보통 인간의 사후 소생과 그대로 동일시할 수 없는 고유한 사건이므로, 관련 AC에서 직접 다룰 때 별도로 살피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구별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인간의 사후 소생과 주님의 부활을 둘 다 죽음 이후의 깨어남이라는 말만으로 같은 구조에 넣으면, 주님의 신적 인성과 영화라는 스베덴보리의 독특한 가르침을 흐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AC.70에서는 일반 인간의 소생에 집중하고, 주님의 부활 문제는 관련 본문이 나올 때 그 자체의 문맥에서 다루는 것이 가이드 1.0에도 맞습니다.

 

그러면 영계에는 시간이 없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아무 순서도 없고 모든 것이 한순간에 일어난다는 뜻은 아닙니다. ‘천국과 지옥은 천국에서도 모든 것이 순차적으로 진행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다만 자연계처럼 태양의 운동을 기준으로 일정하게 반복되는 시계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영적 세계에서는 상태가 변화하면서 연속과 진행이 있으며, 그것이 자연계 사람에게는 시간과 비슷하게 표현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후세계 기록을 읽다가 하루’, ‘ 시간’, ‘오랫동안’, ‘’, ‘이후 같은 말을 만나면 두 가지를 함께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첫째, 스베덴보리가 자연계에 살면서 자신의 경험을 자연계 독자에게 설명할 때에는 자연적 시간 표현을 실제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둘째, 영들과 천사들이 그 세계 안에서 경험하는 연속은 자연계의 시계 시간과 동일하지 않고 상태의 변화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둘을 하나로 뭉뚱그리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따라서 AC.70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는 가장 먼저 죽음 이후 오랜 공백 없이 매우 짧은 과정 안에서 다른 삶의 의식 안에 있게 된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 하루를 반드시 24시간이라는 교리적 제한으로 고정할 필요도 없고, 반대로 하루는 시간과 전혀 관계없고 순전히 하나의 상태를 상징한다고 바꿀 필요도 없습니다.

 

무엇보다 스베덴보리가 이 표현을 사용한 목적은 영계의 하루가  시간인가를 알려 주는 데 있지 않습니다. 바로 다음 문장이 목적을 알려 줍니다. ‘죽음은 삶의 연속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죽은 뒤 오래도록 무의식적인 공백 속에 있다가 먼 훗날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과 매우 가까이 이어지는 과정에서 자신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경험합니다. 이것이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라는 표현에서 우리가 먼저 붙들어야 할 핵심입니다.

 

 

 

AC.70, 창2 앞, ‘죽음은 삶의 연속이다’

AC.70여러 해 동안 제가 듣고 보았던 것을 밝히는 것이 허락되었으므로, 여기에서는 먼저 사람이 ‘소생될 때’(when he is being resuscitated), 곧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the life of eternity)으로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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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6 심화

2. 모세가 창조와 에덴동산의 기록을 태고교회 후손들에게서 받았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AC.66에는 처음 읽는 독자를 상당히 놀라게 할 만한 문장이 있습니다. ‘창조, 에덴동산 등에 관한  모든 내용,  아브람 시대까지의 기록을 모세는 태고교회의 후손들로부터 전해 받았습니다. 우리는 흔히 창세기를 모세가 기록한 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에, 이 문장을 읽으면 곧 여러 질문이 생깁니다. ‘그러면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부터 아브람 이전까지의 내용을 모세가 직접 계시받아 기록한 것이 아니라고 보는가?’, ‘그렇다면  내용은 실제 역사가 아니라 전승된 이야기일 뿐이라는 뜻인가?

 

먼저 AC.66의 문장을 약화시키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창조와 에덴동산 등을 포함하여 아브람 시대까지의 내용을 모세가 태고교회의 후손들로부터 받았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적어도 스베덴보리 자신의 설명에서는 이 부분의 자료가 모세에게서 처음 생겨난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전해져 내려온 것입니다. 이것은 AC.66이 직접 말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문장을 이해하려면 바로 앞의 첫째 스타일 설명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땅과 세상의 것을 말하면서 동시에 그것들이 표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생각했고, 그러한 표상들을 일종의 역사적 연속으로 엮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설명 뒤에 한나와 시편을 인용한 다음, 창조와 에덴동산 등의 내용을 모세가 태고교회 후손들로부터 받았다고 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전승은 단순히 후대 사람들이 꾸며 낸 민담이라는 뜻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표상적 표현 방식과 연결된 오래된 자료입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이어지는 둘째 스타일과의 구별입니다. 아브람 이후의 모세오경과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기, 열왕기에 대해서는 스베덴보리가 역사적 사실들은 문자적 의미에 나타난 그대로라고 명시합니다. 반면 아브람 이전의 첫째 스타일에 대해서는 표상들을 일종의 역사적 연속으로 만들었다고 표현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두 부분을 의도적으로 다르게 설명하고 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아브람 이전은 역사가 아니고 아브람 이후부터만 역사이다라고 한 줄로 정리해도 될까요? AC.66 하나만으로 그렇게까지 단정하는 것도 조심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이 글은 첫째 스타일과 둘째 스타일의 차이를 분명히 하지만, 창세기 앞부분의 각각의 인물과 사건이 어느 의미에서 역사적이며 어느 의미에서 표상적 구성인지를 세세하게 판정하지는 않습니다. ‘아담은 실제 개인이 아니었다’, ‘노아 홍수는 실제 사건이 아니었다 같은 결론을 AC.66 한 문장에서 바로 끌어내는 것은 본문보다 앞서가는 것입니다.

 

반대로 이 문장을 없었던 것처럼 만들어 1부터 모든 내용은 아브람 이후와 똑같은 의미에서 문자 그대로의 역사라고 스베덴보리도 가르친다고 하는 것도 정확하지 않습니다. AC.66은 분명히 서로 다른 두 스타일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익숙한 선입견에 맞추어 그 구별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스베덴보리가 아담, 노아, 홍수, 족보 등을 실제로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따라가면서 조금씩 구체화하는 것입니다.

 

또 이것을 곧 현대 성서학의 문서설이나 구전 전승론과 동일시할 필요도 없습니다. 현대 성서학도 모세오경의 자료와 전승을 연구하지만, 그 학문적 이론과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태고교회 후손들로부터 받은 표상적 역사는 출발점과 목적이 다릅니다. 용어상 전승된 자료라는 공통점이 있다고 해서 같은 이론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AC.66은 현대적인 문헌비평을 제시하는 글이 아니라 말씀의 네 가지 스타일과 그 속뜻을 설명하는 글입니다.

 

그러면 모세가 이전 자료를 받았다는 것이 말씀의 신적 권위를 약화시키는 것일까요? 반드시 그렇다고 볼 이유는 없습니다. 성경의 권위가 성경의 모든 문장이 기록자의 머릿속에 아무 선행 자료 없이 직접 받아쓰기처럼 들어왔다는 방식에만 의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AC.66에서 중요한 것은 모세 이전부터 태고교회의 표상들이 전해졌고, 그것이 말씀의 창세기 앞부분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심은 자료의 인간적 전달 경로를 밝혀 말씀을 낮추는 데 있지 않고, 그 오래된 표상적 기록 속에 영적이고 천적인 의미가 들어 있음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오히려 이 설명은 지금까지 창세기 1장을 왜 그렇게 읽었는지를 돌아보게 합니다. 빛과 궁창과 물, 식물과 광명체, 물고기와 새와 짐승, 사람의 창조를 스베덴보리가 거듭남의 상태로 읽은 것은 후대의 문자 기록에 임의로 상징을 붙인 것이라고 그 자신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AC.66에 따르면 바로 이런 방식으로 자연적인 것을 말하면서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생각하던 태고교회의 표현 방식이 창세기 앞부분의 배경에 있습니다.

 

또 하나 기억할 것은 모세가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직접 받은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후손들에게서 받았다고 한다는 점입니다. 즉 매우 오래된 표상적 자료가 후손들을 통해 보존되어 모세에게 전해졌다는 그림입니다. 그 구체적인 전승 과정이 몇 세대를 거쳤고 어떤 형태의 문헌이었는지 AC.66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 빈칸을 우리가 상상으로 채울 필요도 없습니다.

 

처음에는 이런 설명이 성경에 대한 익숙한 생각을 흔드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를 읽는 과정에서는 바로 이런 곳에서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무엇을 말하는가를 먼저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미리 가지고 있던 성경관에 맞지 않는다고 문장을 약화시키지도 않고, 반대로 한 문장을 가지고 AC가 아직 말하지 않은 결론까지 확대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현 단계에서 가장 정확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조와 에덴동산 등을 포함하여 아브람 시대까지의 기록을 모세가 태고교회 후손들로부터 받았다고 실제로 말합니다. 그는 그 부분을 태고교회의 표상적 스타일과 연결하며, 아브람 이후의 역사적 스타일과 구별합니다. 그러나 이 한 문장만으로 창세기 앞부분의 개별 인물과 사건의 역사성 여부를 모두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앞으로 관련 AC들이 직접 설명하는 내용을 따라가며 판단해야 합니다.

 

이렇게 읽으면 이 문장은 말씀의 권위를 낮추기보다 오히려 창세기 1장을 지금까지 왜 거듭남의 아르카나를 담은 표상적 연속으로 읽어 왔는지를 이해하게 해 줍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에게 중요한 독법 하나를 가르쳐 줍니다. 성경의 권위를 존중하는 것과 스베덴보리가 성경의 형성과 스타일에 대해 실제로 한 말을 정직하게 읽는 것은 서로 반대되는 일이 아닙니다.

 

 

 

AC.66, 창1, 말씀의 네 가지 스타일 : 태고교회, 역사, 예언, 시편

AC.66말씀에는 전반적으로 네 가지 서로 다른 스타일이 있습니다. 첫째는 태고교회의 스타일입니다. 그들의 표현 방식은 이 땅의 것과 세상의 것을 말할 때, 그것들이 표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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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6 심화1. 왜 AC의 삼상2:3 인용은 개역개정과 이렇게 다른가?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삼상2:3) Speak what is high! high! Let what is ancient come 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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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5 심화

2.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 무엇인가?

AC.65에서 특히 눈에 띄는 표현 가운데 하나가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the nearest interior sense)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씀을 읽고 있을 때 하늘의 첫 입구 뜰까지 들려 올라간 이들은 말씀의 단어나 글자를 이해하지 못하고 오직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에서 뜻하는 만을 이해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왜 그냥 내적 의미라고 하지 않고 가장 가까운이라고 했을까요? 이 말은 말씀 안에 여러 층의 내적 의미가 있다는 뜻일까요?

 

먼저 AC.65가 직접 말하는 범위부터 분명히 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 글은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가 정확히 몇 번째 층이며 그보다 더 안쪽에 어떤 의미들이 몇 단계로 존재하는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표현 하나만 가지고 문자적 의미  영적 의미  천적 의미라는 완성된 층위표를 만들고, AC.65의 사람들이 그 가운데 정확히 어느 단계에 있었다고 확정하는 것은 본문보다 앞서가는 설명입니다.

 

그러나 가장 가까운이라는 말이 아무 의미 없이 붙은 것도 아닙니다. 적어도 이 표현은 그들이 지각한 내적 의미를 말씀의 문자와의 관계에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내적 의미라고 하지 않고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라고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내적 의미에 더 깊은 차원이나 질서가 있을 가능성을 생각하게 하는 표현인 것은 분명합니다.

 

바로 앞 AC.64에서도 천사들은 말씀의 말과 이름에서 완전히 떠나 그것들이 의미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지각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AC.64-65를 함께 보면 말씀의 문자적 의미와 천사들이 지각하는 내적 의미가 구별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 내적 의미 안의 세부적인 층위와 서로의 관계는 스베덴보리가 그것을 직접 설명하는 다른 본문들을 함께 보아야 정확합니다.

 

이 점은 AC를 읽을 때 중요한 독법 하나를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의 한 단어가 더 큰 교리를 암시한다고 해서 그 자리에서 우리가 그 교리 전체를 완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가장 가까운이라는 말을 발견하면 , 그렇다면 내적 의미에도  깊은 질서가 있을  있겠구나 하고 기억해 두고, 뒤에서 스베덴보리가 그 질서를 직접 설명할 때 연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들이 지각한 것은 문자 자체가 아니라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였을까요? AC.65가 직접 알려 주는 것은 그 결과입니다. 그 의미는 너무 아름다웠고, 연속의 질서가 너무 완전했으며, 그들을 깊이 감동시켰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을 영광이라고 불렀습니다. 즉 이번 글의 초점은 그 의미가 내적 의미의 몇 번째 층인가를 분류하는 데 있기보다, 문자에서 드러나지 않는 그 의미가 천사적 지각에서 얼마나 아름답고 질서 있는 것이었는가에 있습니다.

 

특히 연속의 질서라는 표현과 함께 읽으면 도움이 됩니다. 내적 의미는 단어마다 임의의 상징 하나를 붙여 놓은 사전처럼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이어지는 질서 가운데 지각됩니다. 창세기 1장에서 우리가 지금까지 읽어 온 것도 좋은 예가 됩니다. , 궁창, 식물, 광명체, 생물, 사람이라는 각각의 표현이 따로 흩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거듭남이라는 연속된 흐름 안에서 설명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를 단순히 문자 바로 밑에 숨어 있는  번째 암호처럼 상상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내적 의미는 비밀 암호를 해독하듯 단어 하나를 다른 단어 하나로 바꾸는 작업보다 훨씬 깊습니다. AC.65의 표현대로 아름다움과 연속의 질서를 가지고 천사들을 깊이 감동시키는 의미입니다.

 

또 이것을 인간이 노력하면 곧 천사처럼 직접 지각할 수 있는 어떤 단계라고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AC.65는 그곳에 들려 올라간 이들이 무엇을 이해했는지를 말하는 것이지, 독자에게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를 직접 지각하는 훈련법을 가르치는 글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연계에서 말씀의 문자를 읽고, AC를 통하여 스베덴보리가 밝힌다고 주장하는 속뜻을 배우며, 그 말씀을 삶에서 받아들입니다. 천사적 지각 자체를 재현하려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라는 표현 때문에 말씀의 문자를 낮추어서도 안 됩니다.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는 바로 무엇의 내적 의미인가 하면 말씀의 내적 의미입니다. 문자와 아무 관계 없이 따로 존재하는 영적 지식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말씀의 문자 안에 이러한 깊이가 있다는 것이 AC.65의 놀라운 주장입니다.

 

따라서 현 단계에서 가장 안전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라는 표현은 말씀의 문자와 구별되는 내적 의미 가운데 문자에 가장 가까운 어떤 의미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지만, AC.65는 그보다 더 깊은 의미들의 수나 정확한 구조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 문제는 관련 본문에서 더 분명해질 때까지 열어 두는 것이 좋습니다.

 

오히려 AC.65가 우리에게 먼저 보여 주려는 것은 그 내적 의미의 위치보다 그 성질입니다. 그것은 아름답고, 완전한 연속의 질서를 가지며, 천사들을 깊이 감동시키는 것이어서 그들이 영광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한 장면만으로도 스베덴보리가 왜 바로 앞 AC.64에서 속뜻을 말씀의 가장 참된 생명이라고 불렀는지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65, 창1, ‘영광’이라 불리는 말씀의 내적 의미 : 천사들의 지각

AC.65제가 말씀을 읽고 있을 때, 어떤 이들이 하늘의 첫 입구 뜰까지 들려 올라갔고, 그곳에서 저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는 말씀 속의 어떤 단어나 글자도 전혀 이해할 수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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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5 심화 1, 천사들이 단어나 글자를 이해하지 않는다면 ‘원어 연구’는 필요 없는가?

AC.65 심화1. 천사들이 단어나 글자를 이해하지 않는다면 ‘원어 연구’는 필요 없는가?AC.65를 읽으면 성경을 깊이 공부해 온 독자에게 매우 자연스러운 질문이 생깁니다. 천사들은 하늘에서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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