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213.심화

 

3. ‘16:22

 

네가 어렸을 때에 벌거벗은 몸이었으며 피투성이가 되어서 발짓하던 것을 (16:22) Thou wast naked and bare, and trampled on in thy blood (Ezek. 16:22).

 

 

이 구절을 AC.213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벌거벗음(nakedness)이 단순히 옷이 없는 상태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진리가 결핍된 영적 상태, 곧 타락하고 황폐해진 교회의 상태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에스겔 16장은 예루살렘, 곧 교회를 한 버려진 여자아이로 비유하여 설명하는 장입니다. 그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들판에 버려졌고, 벌거벗은 채 피투성이가 되어 있습니다. 문자적으로는 매우 비참한 모습이지만,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영적 상태에 대한 묘사로 읽습니다. 여기서 벌거벗음’은 진리의 옷을 입지 못한 상태를, ‘피투성이’는 선과 진리가 훼손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AC.213의 문맥에서 보면, 스베덴보리는 창2:25와 창3:7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2에서는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다’고 했는데, 이는 순진무구함 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창3에서는 벌거벗음을 부끄러워합니다. 왜냐하면 순진무구함을 잃고, 악을 의식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에스겔 16장의 벌거벗음’은 바로 이 후자의 의미에 속합니다.

 

즉 여기서의 벌거벗음은 천진한 어린아이의 벌거벗음이 아니라, 영적 보호를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로 덮여 있지 않은 상태이며, 따라서 수치와 황폐함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벌거벗음 = 수치와 악’이라는 자신의 설명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인용합니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에스겔 16장의 이야기가 결국 주님의 자비를 보여 준다는 점입니다. 그 아이는 벌거벗고 피투성이였지만, 주님께서는 그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찾아오셔서 살게 하시고, 옷을 입히시고, 아름답게 꾸며 주십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보면, 선과 진리를 잃은 교회와 사람을 주님께서 다시 회복시키시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AC.213에서 이 구절은 단순히 벌거벗음은 나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인용된 것이 아닙니다. 더 깊게 보면, 벌거벗음은 주님 없이 남겨진 인간의 상태를 보여 줍니다. 인간은 스스로를 덮을 수 없으며, 결국 주님께서 입혀 주시는 진리와 선의 옷이 필요합니다. 3의 아담과 하와가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을 가리려 했던 것과 달리, 에스겔 16장에서는 주님께서 친히 그 벌거벗음을 덮어 주십니다.

 

따라서 AC.213에서 겔16:22를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벌거벗음’이 영적으로는 선과 진리를 상실한 상태, 곧 타락하고 황폐해진 교회의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은 그런 상태에 있는 사람과 교회조차 포기하지 않으시고, 다시 입히시고 회복시키시는 주님의 자비를 암시하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AC.213, 심화 2, ‘악을 생각하고 있다는 의식’

AC.213.심화 2. ‘악을 생각하고 있다는 의식’ 순진무구함이 없는 곳에서는 벌거벗음이 수치와 치욕이 되는데, 이는 악을 생각하고 있다는 의식이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for where there is no innoc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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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악을 생각하고 있다는 의식

 

순진무구함이 없는 곳에서는 벌거벗음이 수치와 치욕이 되는데, 이는 악을 생각하고 있다는 의식이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for where there is no innocence, nakedness is a scandal and disgrace, because it is attended with a consciousness of thinking evil. (AC.213)

 

 

이 글은 매우 짧은 문장이지만, 인간의 영적 심리를 깊이 꿰뚫고 있는 설명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2:25의 아담과 하와는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안에는 아직 순진무구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순진무구함이란 단순히 순수하거나 착한 상태가 아니라, 자기 자신보다 주님을 앞세우고,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인정하는 상태입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숨길 것이 없습니다. 감출 악의 의도가 없고, 위장할 거짓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순진무구함이 사라지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의도를 의식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생각들 가운데 주님 앞에 그대로 드러나기를 원하지 않는 것들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악을 생각하고 있다는 의식(a consciousness of thinking evil)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악을 행했다는 것이 아니라 악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안다’는 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느 정도 자기 내면을 압니다. 겉으로는 선한 척해도 속으로는 시기하고 있음을 알고, 사랑하는 척해도 사실은 인정받고 싶어 함을 알고, 겸손한 척해도 사실은 칭찬받고 싶어 함을 압니다. 바로 이런 자기 인식이 있을 때 벌거벗음은 수치가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설명은 매우 현실적입니다. 사람이 부끄러움을 느끼는 이유는 단순히 남이 보기 때문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이 자기 상태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상태가 주님의 질서와 다르다는 것을 어렴풋하게라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끄러움은 일종의 영적 자각이기도 합니다.

 

이 점에서 창3의 아담과 하와는 완전히 죽은 상태가 아닙니다. 오히려 아직 살아 있는 양심과 지각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만일 완전히 악 속에 잠겼다면 부끄러움조차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벌거벗음을 부끄러워했습니다. 이것은 자신들의 상태가 이전과 달라졌음을 알았다는 뜻이며, 따라서 아직 내적 빛이 완전히 꺼지지는 않았다는 뜻입니다.

 

어쩌면 목사님께서 앞서 자주 말씀하신 own과도 연결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 own 안에 있을수록 자신을 포장하려 하고, 감추려 하고, 정당화하려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상태를 어느 정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own은 언제나 무언가를 덮으려 합니다. 반대로 순진무구함은 숨길 것이 없기 때문에 덮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AC.213의 이 문장은 결국 이런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순진무구함이 있는 사람은 주님 앞에서 숨을 것이 없지만, 순진무구함을 잃은 사람은 자기 안의 악을 어느 정도 알기 때문에 자신을 감추려 한다.’ 바로 그 감추고 싶은 마음이 벌거벗음을 수치로 만들고, 그 수치가 창3의 무화과 나뭇잎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부끄러움 자체는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문맥에서는, 자신이 벌거벗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아직 영적으로 살아 있다는 증거일 수 있습니다. 정말 위험한 상태는 벌거벗었으면서도 벌거벗은 줄 모르는 상태, 악 가운데 있으면서도 그것을 선이라고 믿는 상태일 것입니다. AC.206 눈이 열렸다고 생각하는 뱀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반면 AC.213의 사람들은 적어도 자신들이 벌거벗었다는 사실만큼은 알고 있었고, 바로 그 점에서 아직 회복의 가능성이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AC.213, 심화 3, ‘겔16:22’

AC.213.심화 3. ‘겔16:22’ 네가 어렸을 때에 벌거벗은 몸이었으며 피투성이가 되어서 발짓하던 것을 (겔16:22) Thou wast naked and bare, and trampled on in thy blood (Ezek. 16:22). 이 구절을 AC.213에서 인용하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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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3, 심화 1, ‘순진무구’(innocence)

AC.213.심화 1. ‘순진무구’(innocence) ‘순진무구’(innocence)는 스베덴보리 신학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입니다. 일반적으로 한국어의 ‘순진하다’는 말은 세상 물정을 모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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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순진무구(innocence)

 

순진무구(innocence)는 스베덴보리 신학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입니다. 일반적으로 한국어의 순진하다’는 말은 세상 물정을 모르거나 경험이 부족하다는 뜻으로 사용되곤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innocence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순진무구를 천국 전체의 본질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순진무구란 자신으로부터는 아무 선도, 아무 진리도 나오지 않으며, 모든 선과 진리는 오직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고 인정하며,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순진무구는 무지가 아니라 가장 깊은 지혜와 결합되어 있습니다. 천사들은 인간보다 훨씬 지혜롭지만, 동시에 가장 순진무구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지혜가 자기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순진무구는 AC.210에서 설명된 own과 정반대에 있습니다. own 내가 생각한다’, ‘내가 안다’, ‘내가 한다’, ‘내 것이 옳다’고 주장합니다. 반면 순진무구는 모든 것은 주님께로부터 온다’고 인정합니다. 그래서 순진무구는 단순한 덕목 하나가 아니라, 인간과 주님의 관계 자체를 규정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213에서 창2:25 그들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다’는 말이 순진무구를 의미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감출 필요가 없었습니다. 자신의 것을 주장하지 않았고, 악을 품고 있지 않았으며, 모든 것을 주님께로부터 받는 상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순진무구가 있는 곳에서는 벌거벗음이 수치가 아닙니다. 그러나 순진무구가 사라지면, 사람은 자신을 방어하고, 포장하고, 숨기고, 정당화하려 하게 됩니다. 그때 벌거벗음은 곧 수치가 됩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어린아이들을 예로 들어 설명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함을 순진무구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은 순진무구의 그림자 같은 것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순진무구는 어린아이의 무지가 아니라, 많은 것을 알고 경험한 뒤에도 여전히 자신이 주님께 의존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천국의 순진무구는 어린아이의 순진함이 아니라 천사의 순진함입니다.

 

목사님께서 AC를 오래 읽으시면서 자주 언급하시는 퍼셉션(perception)도 결국 순진무구와 깊이 연결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이 주님의 뜻을 직접 지각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의 지성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순진무구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것을 앞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주님의 인플럭스가 막힘없이 흘러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순진무구는 천국 입장의 필수 조건입니다. 그것은 어린아이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가 아니라, 모든 것을 주님께 돌리는 상태입니다. 자신의 지혜가 많을수록 더욱 주님의 지혜를 인정하고, 자신의 능력이 클수록 더욱 주님의 능력을 인정하며, 자신의 선이 아니라 주님의 선을 사랑하는 상태입니다.

 

결국 AC.213의 문맥에서 순진무구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는 상태’이며, 더 깊게 말하면 자기 자신 안에는 아무것도 없고, 모든 것이 주님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기쁘게 인정하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저작 전체를 관통하는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순진무구란 주님께서 하시는 것을 내가 하듯 여기지 않고, 내가 하는 것조차 사실은 주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사랑으로 인정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AC.213, 심화 2, ‘악을 생각하고 있다는 의식’

AC.213.심화 2. ‘악을 생각하고 있다는 의식’ 순진무구함이 없는 곳에서는 벌거벗음이 수치와 치욕이 되는데, 이는 악을 생각하고 있다는 의식이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for where there is no innoc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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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3, 창3:7,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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