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해설에‘연옥’이 나오는데요,사실 교회사도 그렇고,특히 개신교는 카톨릭의 이‘연옥’에 대해 몹시 불편해합니다.개신교인들은 사람이 죽었다가 눈 뜨면 바로 천국,아니면 지옥인 줄 알거든요.이‘연옥’에 대해,그리고 사후,‘잠시 머무르다 가는 상태’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이 문제는 아주 섬세하게 다루셔야 하는 주제입니다.결론부터 말씀드리면,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사후의‘중간 상태’는Catholic Church에서 말하는‘연옥’(purgatory)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개념이며,동시에Protestantism이 흔히 생각하는‘즉시 천국 또는 지옥’이라는 도식과도 다릅니다.그러나 이 둘 사이를 연결해 주는 중요한‘설명 틀’이 되기는 합니다.
먼저 가톨릭의‘연옥’부터 보면,이것은‘이미 구원받은 영혼이 남아 있는 죄의 형벌을 정화하기 위해 고통을 겪는 장소 또는 상태’로 이해됩니다.즉,기본적으로‘벌을 통한 정화’라는 개념이 중심입니다.이 때문에 개신교에서는 이것을‘은혜로 의롭다 하심’교리와 충돌하는 것으로 보고 강하게 거부해 왔습니다.구원이 은혜로 이루어진다면,왜 죽은 뒤에 다시 고통을 통해 정화되어야 하느냐는 문제 때문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사후 상태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접근합니다.그는 사람이 죽은 뒤 곧바로‘영들의 세계’(the world of spirits)라고 부르는 중간 영역에 들어간다고 말합니다.이곳은‘머무르기 위한 최종 장소’가 아니라, ‘드러나고 분리되는 과정의 상태’입니다.다시 말해,여기서 어떤 벌을 받아서 정화되는 것이 아니라,그 사람 안에 이미 있던 것이 점차 드러나고,그 결과 그 사람이 진정으로 속한 상태(천국 또는 지옥)로 스스로 들어가게 되는 과정입니다.
이 과정의 핵심은‘겉과 속의 일치’입니다.이 세상에서는 겉으로는 선한 척하면서 속으로는 다른 것을 사랑할 수 있지만,사후에는 그런 분리가 점점 불가능해집니다.처음에는 비교적 외적 상태를 유지하지만,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내적 상태가 드러나고,결국 그 사람의‘참된 사랑’이 전면에 나오게 됩니다.이때 선을 사랑하는 사람은 천국 공동체와 자연스럽게 결합되고,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은 그에 맞는 지옥 공동체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 점에서 보면,스베덴보리의 중간 상태는‘정화의 장소’라기보다‘분별의 상태’입니다.그리고 이 분별은 외부에서 강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그 사람 자신의 사랑과 선택이 드러나면서 이루어집니다.그래서 그는 반복해서‘사람은 자신의 사랑에 따라 간다’고 말합니다.이것이 가톨릭의 연옥과 가장 큰 차이입니다.거기에는‘벌을 통한 정화’가 중심이라면,여기에는‘사랑에 따른 자발적 귀속’이 중심입니다.
그렇다면 개신교에서 흔히 말하는‘즉시 천국 또는 지옥’과는 어떻게 다를까요?사실 스베덴보리의 설명은 이것을 완전히 부정한다기보다, ‘그 과정이 너무 단순화되어 이해되고 있다’고 보는 쪽에 가깝습니다.즉,최종적으로는 누구나 천국 아니면 지옥으로 간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그 사이에‘자신의 상태가 드러나고 정리되는 실제적인 과정’이 있다는 것입니다.이 과정을 무시하면,인간의 내적 복잡성과 자유,그리고 사랑의 형성이 충분히 설명되지 않습니다.
목사님께서 목회적으로 이 부분을 다루실 때 중요한 포인트는 이것입니다. ‘연옥’이라는 용어 자체를 방어하거나 설명하려 하기보다, ‘사람은 죽은 뒤 곧바로 자신의 참된 상태로 들어가기 전에,자신이 어떤 사람인지가 드러나는 과정을 거친다’는 점을 중심으로 설명하시는 것이 훨씬 안전하고 효과적입니다.그러면 불필요한 교리적 충돌을 피하면서도,스베덴보리의 핵심 통찰은 온전히 전달할 수 있습니다.
정리하면,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사후의‘잠시 머무르는 상태’는 벌을 통해 정화되는 연옥이 아니라,그 사람의 내적 사랑이 드러나 최종 상태로 정착되기까지의‘전이 상태’입니다.그리고 이 과정은 주님의 신적 자비 안에서,각 사람이 스스로의 사랑에 따라 자기 자리를 찾아가도록 허락되는 매우 질서 있고 실제적인 과정입니다.
이 세상‘하루’나 사후 세계인 저세상‘하루’나 동일한가요?아니,애초에 영계에‘하루’라는 게 존재하나요?영계는 자연계처럼 시공간의 나라가 아니라 상태의 나라라 들었는데,AC.70본문에서는‘하루’라는 게 있는 것처럼 기술하고 있어 좀 이상합니다.
아주 정확한 지점을 짚으신 질문입니다.결론부터 말씀드리면,영계에는 자연계와 같은 의미의‘시간으로서의 하루’는 존재하지 않지만, ‘하루와 같은 것’,곧 상태의 변화로 나타나는‘유사한 주기’는 분명히 존재합니다.그래서Arcana Coelestia나 다른 저작들에서‘하루’, ‘아침’, ‘저녁’같은 표현이 나오는 것은,물리적 시간이 아니라‘상태의 질서 있는 흐름’을 인간의 언어로 번역한 것이라고 이해하시면 가장 정확합니다.
먼저 원칙부터 보면,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영계는‘시간과 공간의 나라’가 아니라‘상태(state)의 나라’입니다.이 세상에서는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시간이 흐르고 하루가 나뉘지만,영계에는 자연적 태양이 없기 때문에 그런 의미의 시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대신 그곳에서는 사랑과 신앙,곧 의지와 이해의 상태가 변함에 따라‘시간처럼 느껴지는 것’이 생깁니다.그래서‘시간’은 실제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상태의 변화에 대한 지각’으로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왜‘하루’라는 표현이 나올까요?이유는 그 상태 변화가 단순히 불규칙한 것이 아니라,매우 질서 있고 반복적인‘주기’를 이루기 때문입니다.스베덴보리는 특히 천국에서‘아침–낮–저녁–밤’과 유사한 상태의 순환이 있다고 설명합니다.예를 들어,주님께 대한 사랑과 지혜가 더 밝게 열리는 상태가‘아침’,그 빛 안에서 활동하는 상태가‘낮’,점차 빛이 약해지는 상태가‘저녁’,그리고 비교적 어두워지고 휴식에 가까운 상태가‘밤’에 해당합니다.그러나 이것은 해가 뜨고 지는 것이 아니라, ‘내적 상태의 변화’가 그렇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AC.70에서‘하루’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은 전혀 모순이 아닙니다.오히려 스베덴보리는 의도적으로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자연적 시간 개념을 빌려,영적 상태의 질서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성경에서도‘하루’는 자주 단순한24시간이 아니라‘하나의 상태’또는‘하나의 과정’을 의미합니다.창세기의‘창조의6일’이 실제 시간이라기보다 거듭남의 단계들을 의미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차이를 하나 분명히 하시면 이해가 훨씬 또렷해집니다.이 세상의‘하루’는 외부 조건(태양의 운동)에 의해 강제로 흘러가는 시간입니다.반면 영계의‘하루’는 외부가 아니라 내부,곧 사랑과 생각의 상태 변화에 따라 형성됩니다.그래서 영계에서는 같은‘하루’라도 사람마다 다르게 경험될 수 있고,어떤 상태에서는 시간이 매우 빠르게,어떤 상태에서는 거의 느껴지지 않게 흐르는 것처럼 인식됩니다.
정리하면,영계에는 자연적 시간 단위로서의‘하루’는 없지만,상태의 변화가 만들어 내는 질서 있는 순환이 있으며,그것이 인간의 언어로 표현될 때‘하루’라는 말로 번역됩니다.따라서AC.70의‘하루’는 시간 개념이 아니라‘상태의 한 주기’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하시면 가장 정확합니다.
여러 해 동안 제가 듣고 보았던 것을 밝히는 것이 저에게 허락되었으므로, 여기에서는 먼저 사람이 ‘소생될 때’(when he is being resuscitated), 곧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the life of eternity)으로 들어갈 때, 그 상태가 어떠한지를 말하고자 합니다. 사람들이 죽은 뒤에도 살아 있음을 제가 알 수 있도록, 저는 육체 안에 사는 동안 알고 지내던 많은 사람들과 말하고, 그들과 함께 있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그것도 하루나 한 주에 그친 것이 아니라, 여러 달 동안, 거의 일 년 동안이나 이 세상에서처럼 똑같이 말하고 교제했습니다. 그들은 육체 안에 사는 동안 자기들이 그랬듯, 또 지금도 매우 많은 사람들이 죽은 뒤에도 삶은 계속될 거라고 믿지 않는 그러한 불신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몹시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사실상 육체의 죽음 이후에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 사람은 ‘다른 삶’(the other life) 안에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삶의 연속’(a continuation of life)이기 때문입니다.As it is permitted me to disclose what for several years I have heard and seen, it shall here be told, first, how the case is with man when he is being resuscitated; or how he enters from the life of the body into the life of eternity. In order that I might know that men live after death, it has been given me to speak and be in company with many who were known to me during their life in the body; and this not merely for a day or a week, but for months, and almost a year, speaking and associating with them just as in this world. They wondered exceedingly that while they lived in the body they were, and that very many others are, in such incredulity as to believe that they will not live after death; when in fact scarcely a day intervenes after the death of the body before they are in the other life; for death is a continuation of life.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이제 서론의 방향을 분명히 바꿉니다. AC.67-69가‘이런 증언이 가능한 이유’와‘인간 본성의 구조’를 설명했다면, AC.70은 그 전제 위에서‘구체적인 내용’으로 들어가겠다는 선언입니다.그는‘이제 무엇을 말할 것인가’를 밝힙니다.그 첫 주제가 바로‘사람이 소생될 때’,다시 말해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는 과정 중 일어나는 일입니다.여기서 이미 스베덴보리는 죽음을 단절이나 소멸로 보지 않습니다.그는 처음부터 죽음을‘들어감’으로,곧 이동이 아니라‘상태의 전환’으로 규정합니다.
특히 눈여겨볼 표현은‘소생될 때’(when he is being resuscitated)라는 표현입니다.이 말은 죽음을 끝이 아니라 깨어남으로 이해하게 만듭니다.사람은 죽어서 무언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이미 살아 있던 상태가‘다른 방식으로 의식화된다’는 것입니다.그래서 스베덴보리는‘사후 세계’라는 표현보다, ‘영원한 삶으로 들어간다’라는 말을 씁니다.시간의 연장이 아니라,삶의 차원이 바뀌는 것입니다.
이제 그는 자신의 증언이 어떻게 확인되었는지를 말합니다.매우 구체적이고,그래서 더 충격적입니다.그는 육체 안에 살 때 알고 지내던 많은 사람들과 사후에 다시 말하고,함께 있었으며,그 시간이 하루나 한 주가 아니라‘여러 달’,심지어‘거의 일 년’에 이르렀다고 말합니다.그리고 그 교제의 방식은‘이 세상에서와 똑같이’였습니다.이는 사후 세계가 막연한 안개 속의 상태가 아니라, ‘의식, 기억, 관계가 지속되는 실제적 삶’임을 강하게 드러냅니다.
이 대목에서 스베덴보리는 어떤 감상이나 신비적 분위기를 전혀 더하지 않습니다.오히려 그는 지나치게 담담합니다.그 담담함 자체가 이 경험을‘비범한 사건’이 아니라‘확인된 사실’로 제시합니다.마치 누군가가‘나는 그곳에 가서 그 사람을 만났다’고 말하듯,그는‘나는 그들과 말했고, 함께 지냈다’고 말합니다.이 어조는 독자에게 불편함을 주지만,동시에 진술의 무게를 크게 만듭니다.
사후에 만난 이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보인 반응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그들은 자신들이 육체 안에 살 때,그리고 여전히 이 땅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죽으면 더 이상 삶이 지속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는 사실을‘몹시 이상하게’여겼다고 합니다.여기에는 어떤 책망이나 비난도 없습니다.다만 순수한 놀라움이 있습니다.그들에게 사후의 삶은 너무나 자명한 현실이었기에,그것을 부정하던 과거의 자신과 타인의 상태가 오히려 이해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는 사후 세계에 대한 인간의 불신을 지적하지만,그것을 도덕적 문제로 다루지 않습니다.그는 그것을‘무지의 문제’,더 정확히는‘겉 사람에 너무 깊이 잠긴 상태의 결과’로 암시합니다.육체의 감각과 세상의 질서에 지나치게 몰입해 있으면,생명이 그 너머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하게 됩니다.그러나 막상 육체를 벗어나면,그 불신은 즉시 사라집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문장은 이 글의 정점입니다. ‘사실상 육체의 죽음 이후에 하루도 거의 지나지 않아 사람은 다른 삶 안에 있게 된다.’여기에는 어떤 중간 지대나 긴 공백이 없습니다.스베덴보리는 연옥이나 무의식 상태를 전제하지 않습니다.그는 죽음과 사후 삶 사이에 거의 시간적 간격이 없다고 말합니다.그리고 그 이유를 단 한 문장으로 정리합니다. ‘죽음은 삶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이 문장은 스베덴보리 사후관 전체를 요약하는 문장입니다.죽음은 삶의 반대가 아니라,삶의 다른 국면입니다.끊어지는 것은 육체와의 관계이지,의식과 존재 자체가 아닙니다.사람은 살아 있는 채로 다른 삶의 양식 안으로 들어갑니다.그래서 사후 세계는 낯선 곳이 아니라,이미 이 땅에서 형성되어 온 삶의 성향과 애정이 그대로 이어지는 자리입니다.
AC.70은 그래서 독자에게 조용하지만,결정적인 질문을 던집니다.우리는 죽음을 무엇으로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만약 죽음을 끝으로 이해한다면,삶은 필연적으로 불안과 집착으로 채워질 수밖에 없습니다.그러나 죽음을‘계속, 지속, 연속’으로 이해한다면,이 땅의 삶은 준비이자 전개가 됩니다.스베덴보리는 지금,아르카나 전체를 통해 말하려는 이야기를 이 글에서 이미 예고하고 있습니다. ‘이 삶은 다음 삶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앞서AC.67-69가‘말씀이 왜 다른 삶, 즉 사후 시작되는 삶을 향하는가’를 설명했다면, AC.70은 이제 그 다른 삶이 무엇인지,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그 안으로 들어가는지를 실제 경험에 근거해 말하기 시작합니다.여기서부터 아르카나는 더 이상 추상적 논의가 아니라, ‘삶과 죽음의 연속성에 대한 상세한 증언’으로 전개됩니다.
위 본문에‘사실상 사람은‘다른 삶’(the other life)안에 있게 됩니다.’라는 부분 말인데요,왜 이런‘중간 텀’이 있는 건가요?마치 이 방문 열고 나가 바로 저 방문 열고 들어가듯‘즉시’가 아니고 말입니다.여기서는‘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라 했지만,사람마다 다른 건지,하여튼 이 깨어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리더군요.혹시 주님의‘사흘 만에 부활하사’도 이런 건가요?
아주 중요한 연결을 보셨습니다.결론부터 말씀드리면, AC.70의‘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라는 표현은 자연적 시간의 지연을 말한다기보다, ‘상태가 전환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과정’을 인간의 시간 언어로 표현한 것입니다.그래서 이것은 시계로 재는 몇 시간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넘어가기까지의 질서 있는 이행’이라고 이해하시는 것이 정확합니다.
먼저 왜‘즉시’가 아니냐를 보면,스베덴보리의 전체 설명은 일관되게 이 점을 말합니다.사람은 죽는 순간 존재가 끊어졌다가 다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중심이 이동하는 과정’을 거칩니다.육체가 멈추면 곧바로 영으로 깨어나기는 하지만,처음에는 여전히‘자연적 기억과 감각의 여운’속에 머물러 있습니다.그래서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즉시 또렷하게 인식하지 못하고,마치 여전히 이 세상에 있는 것처럼 느끼는 상태가 잠시 이어집니다.이것이 바로 그‘중간 텀’의 실질적인 내용입니다.
이 과정이 필요한 이유는‘연속성’때문입니다.주님은 인간의 의식이 끊어지거나 단절되는 방식으로 인도하지 않으십니다.만일 완전히 다른 상태로‘순간 이동’하듯 들어가게 된다면,그것은 인간에게 혼란과 충격을 주고,자유로운 수용이 아니라 강제적인 전환이 될 수 있습니다.그래서 죽음 이후의 깨어남은 마치 잠에서 서서히 깨어나는 것처럼,아주 부드럽고 연속적으로 이루어집니다.이 점에서 스베덴보리는‘사람은 죽음 직후에도 자신이 여전히 살아 있으며,오히려 더 또렷하게 살아 있음을 느낀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사람마다 다르냐’는 질문에 대해서는,원칙적으로는 모두에게 같은 질서가 적용되지만,체감되는 방식과 길이는 상태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어떤 이는 매우 부드럽고 밝은 상태로 거의 즉시 깨어나는 반면,어떤 이는 더 혼란스럽거나 어두운 상태를 거치며 점진적으로 깨어납니다.그러나 중요한 것은‘길이’가 아니라‘질서’입니다.모든 사람은 주님의 인도 아래,자신의 상태에 가장 적합한 방식으로 이 전환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제 목사님께서 연결하신‘사흘 만에 부활’과의 관계를 보면,이 역시 단순한 시간 사건이라기보다‘상태의 충만한 완성’을 의미하는 상징으로 이해하시는 것이 더 깊은 해석입니다.성경에서‘사흘’또는‘셋째 날’은 매우 자주‘완전한 과정의 끝’,또는‘새로운 상태로의 완전한 전환’을 의미합니다.그러므로 주님의 부활을 단순히‘72시간 후의 사건’으로만 보기보다, ‘모든 시험과 죽음을 통과하여 완전히 새로운 상태로 들어가신 것’으로 보는 것이 내적 의미에 더 가깝습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개인의 사후 전환 과정과도 연결이 됩니다.사람도 죽음 이후 곧바로 영으로 깨어나지만,자신의 참된 상태로 완전히 자리 잡기까지는 일정한‘과정의 충만’이 필요합니다.그것이 어떤 이에게는 매우 빠르게,어떤 이에게는 더 길게 느껴질 수 있지만,본질적으로는 모두‘상태의 질서’를 따라 이루어집니다.
정리하면,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라는 표현은 실제 시간의 지연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의식이 끊어지지 않은 채 부드럽게 전환되는‘상태의 이행’을 가리킵니다.그리고 주님의‘사흘 만에 부활’역시 같은 원리 안에서, ‘완전한 상태 전환의 성취’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말씀으로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이렇게 보시면,자연적 시간과 영적 상태 사이의 긴장이 하나의 질서로 풀리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