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94 심화

2. 생명의 숨은 왜 ‘신앙과 사랑의 생명’을 뜻하는가?

 

창2:7의 ‘여호와 하나님이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는 말씀은 흔히 인간의 육체에 생물학적 생명이 주어진 장면으로 읽힙니다. 그러나 AC.94에서 스베덴보리는 ‘그의 콧구멍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을 ‘신앙과 사랑의 생명을 주시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왜 ‘생명의 숨’이 신앙과 사랑의 생명을 뜻하는 것일까요?

 

먼저 AC.94의 주제가 최초 인간의 육체가 어떻게 호흡을 시작했는지를 설명하는 데 있지 않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AC.89부터 계속 다루는 것은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창2:7의 ‘형성’, ‘생명의 숨’, ‘생령’도 이 거듭남의 과정 안에서 해석됩니다. ‘생명의 숨’을 받는 것은 이 문맥에서 사람에게 영적인 생명, 곧 신앙과 사랑의 생명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설명은 앞의 내용과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AC.83에서는 천적 인간이 될 때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며 사랑이 주된 것이 된다고 했습니다. AC.91에서는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평온이 겉 사람을 적신다고 했고, AC.92에서는 그 평온이 단지 싸움의 그침이 아니라 ‘내적인 평화에서 나오는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 안에서 신앙의 진리들과 사랑의 선들이 생명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이제 AC.94는 그 생명을 더욱 직접적으로 ‘신앙과 사랑의 생명’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숨’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공기의 출입 자체가 아닙니다. 본문에서 숨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불어넣으시는’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이 사람 자신에게 있지 않고 주님께 있다는 사실이 이 표현 안에 들어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 안에서 신앙과 사랑의 생명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그것을 받습니다.

 

이것은 AC.88에서 말한 새 창조와도 이어집니다. 새 창조, 곧 거듭남은 주님 홀로의 일입니다. AC.94에서도 사람을 형성하시는 분,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는 분, 그 결과 겉 사람까지 살아 있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숨’은 사람이 스스로 획득한 종교적 능력이나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낸 선함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신앙과 사랑을 서로 분리된 두 종류의 생명으로 이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지금까지의 흐름에서 천적 인간에게서는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며 사랑이 주된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신앙과 사랑의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사람 안에서 신앙과 사랑으로 살아 움직이는 상태를 가리킨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마지막의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는 말은 이 생명이 속 사람 안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AC.94는 이것을 ‘그의 겉 사람도 생명을 얻게 되었다’고 풀이합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앙과 사랑의 생명이 겉 사람에까지 미치면서 사람 전체의 삶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2:7의 ‘생명의 숨’은 단순한 육체적 호흡의 시작을 넘어, 현재의 속뜻에서는 주님께서 사람에게 주시는 신앙과 사랑의 생명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 생명이 겉 사람에까지 미칠 때 사람은 ‘생령’이 됩니다. 거듭남은 내면에 어떤 생각 하나가 더해지는 일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마침내 사람의 겉 삶에까지 이르는 과정입니다. (AC.94 심화 2)

 

 

 

AC.94, 창2:7,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 - 겉 사람도 살아 있게 되다’ (AC.94-9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And Jehovah God formed man, dust from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ves, and man became a l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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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4 심화 1, 왜 겉 사람은 이전에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하는가?

AC.94 심화1. 왜 겉 사람은 이전에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하는가? AC.94에는 처음 읽으면 상당히 낯설게 느껴지는 표현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지면의 흙으로 사람을 형성하셨다’는 것은 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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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4 심화

1. 왜 겉 사람은 이전에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하는가?

 

AC.94에는 처음 읽으면 상당히 낯설게 느껴지는 표현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지면의 흙으로 사람을 형성하셨다’는 것은 겉 사람을 형성하신 것이며, 그 겉 사람은 ‘이전에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겉 사람도 분명 그 사람의 일부인데, 왜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이전에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할까요?

 

먼저 이것은 그 사람이 이전까지 인간이 아니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AC.94의 문법상 ‘이전에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은 바로 앞의 ‘그의 겉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 근거로 창2:5의 ‘지면을 경작할 사람이 없었다’는 말씀을 듭니다. 따라서 질문의 초점은 ‘인간이 언제 인간이 되었는가?’가 아니라 ‘왜 겉 사람을 아직 사람이라고 하지 않는가?’에 있습니다.

 

그 답을 이해하려면 AC.90-93의 흐름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영적 인간일 때의 겉 사람은 아직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려 하지 않으며, 그 때문에 싸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이 되면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기 시작하고,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평화의 생명을 받습니다. 따라서 겉 사람이 여기서 ‘사람’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겉 사람이라는 기능이나 기관이 처음 생긴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이 주님의 질서 안에서 참으로 살아 있는 인간적인 것이 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사람’이라는 말은 단순히 생물학적 인간을 지칭하는 말보다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겉 사람은 감각과 이성과 기억지식 등을 가지고 활동할 수 있지만, 그것들이 속 사람과 분리되어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움직인다면 아직 AC.94가 말하는 의미에서 살아 있는 ‘사람’이 된 것이 아닙니다.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 그 생명에 따라 활동할 때 비로소 겉 사람도 살아 있는 인간적 질서 안에 들어갑니다.

 

이것은 겉 사람을 멸시하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주님께서 거듭나게 하시는 목적은 겉 사람을 버리는 데 있지 않고 겉 사람까지 살아 있게 하는 데 있습니다. AC.94의 마지막은 ‘그의 겉 사람도 생명을 얻게 되었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감각과 이성과 기억지식과 외적인 삶 자체가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앙과 사랑의 생명을 받아 참된 질서 안에서 살아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전에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표현은 인간의 존엄이나 인간됨을 부정하는 말이 아니라 거듭남의 질서를 묘사하는 말입니다. 사람 안의 어떤 것이 단지 존재하고 활동한다고 해서 곧 영적으로 살아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 속 사람과 하나의 질서 안에서 활동할 때, 겉 사람까지 참으로 살아 있는 것이 됩니다.

 

창2:5의 ‘지면을 경작할 사람이 없었다’는 말씀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면’은 천적 인간의 겉 사람과 연결되고, 이제 그 지면을 경작할 ‘사람’이 형성됩니다. 결국 주님께서 이루시는 거듭남은 사람의 내면 어느 한 부분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마침내 그의 겉 사람과 실제 삶까지 생명 있게 하시는 역사입니다. (AC.94 심화 1)

 

 

 

AC.94 심화 2, 생명의 숨은 왜 ‘신앙과 사랑의 생명’을 뜻하는가?

AC.94 심화2. 생명의 숨은 왜 ‘신앙과 사랑의 생명’을 뜻하는가? 창2:7의 ‘여호와 하나님이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는 말씀은 흔히 인간의 육체에 생물학적 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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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4, 창2:7,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 - 겉 사람도 살아 있게 되다’ (AC.94-9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And Jehovah God formed man, dust from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ves, and man became a l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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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3 심화

2. 왜 ‘새벽’, ‘비’, ‘들의 성장’이 천적 인간의 상태를 함께 묘사하는가?

 

AC.93에 인용된 말씀들을 보면 서로 다른 선지서에서 ‘새벽’, ‘비’, ‘들의 성장’, ‘여호와께서 심으신 가지’와 같은 표현들이 잇따라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왜 이러한 말씀들을 한데 모아 천적 인간의 상태를 설명하는 것일까요?

 

그 실마리는 앞의 AC.90-92에 있습니다. AC.90에서는 ‘비’와 ‘안개’가 싸움이 그칠 때의 ‘평화의 평온’이라고 했고, AC.91에서는 그 평온이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을 적시고 이슬로 촉촉하게 하는 수증기와 같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적셔진 겉 사람에서 ‘들의 관목’과 ‘들의 초목’이 산출됩니다. AC.92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평온을 ‘내적인 평화에서 나오는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AC.93의 ‘비’는 단순히 자연계의 비를 아름다운 비유로 가져온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앞에서 설명한 평화의 생명이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에게 미치는 상태와 연결됩니다. 에스겔에서 ‘복된 소낙비’가 내리자 ‘들의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이 그 소산을 낸다’고 하는 것도 같은 흐름입니다. 비가 내리고, 땅이 적셔지고, 그 결과 생명이 자라납니다.

 

‘들의 성장’도 마찬가지입니다. AC.90에서는 들의 관목과 초목을 일반적으로 겉 사람이 산출하는 모든 것이라 했고, AC.91에서는 구체적으로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에스겔에서 교회가 ‘들의 풀 같이’ 자란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수가 많아지거나 외적으로 번성한다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AC.93의 문맥에서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에 의해 사람이 자라고 새로운 것을 산출하는 상태와 연결됩니다.

 

‘새벽’은 또 다른 측면을 보여 줍니다. AC.86에서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기 시작하는 상태를 ‘안식일의 저녁’이라 하고, 천적 인간은 ‘아침’이라고 했습니다. 당시에는 왜 천적 인간이 아침인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AC.93의 호세아 인용에서는 사람이 셋째 날에 살아나고 일으켜져 주님 앞에서 살게 되는 것과 함께, 주님의 나타나심이 ‘새벽빛’과 같다고 합니다. 이어서 그분은 ‘비와 같이’ 사람에게 임하십니다.

 

이렇게 보면 ‘새벽’과 ‘비’와 ‘들의 성장’은 서로 떨어진 세 개의 상응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 과정처럼 이어집니다. 새벽은 새로운 상태가 밝아오는 것을 보여 주고, 비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평화의 생명이 사람에게 미치는 것을 보여 주며, 들의 성장은 그 생명으로 인해 겉 사람에서 실제로 새로운 것이 산출되는 것을 보여 줍니다. 새로운 날이 밝고, 비가 내리며, 들에서 생명이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새벽 = 이것, 비 = 저것, 들 = 저것’이라는 고정된 상응표로만 기억해서는 안 됩니다. AC.93에서 중요한 것은 이 표현들이 서로 어떤 관계를 이루는가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살리시고 일으키시며, 그분의 생명이 사람에게 임하고, 그 생명으로 사람이 자라 열매를 맺습니다. 자연계의 새벽과 비와 성장의 질서가 천적 인간의 형성과 놀랍도록 맞물려 있습니다.

 

마지막에 인용된 ‘여호와께서 심으신 가지’와 ‘여호와 하나님의 손으로 하신 일’은 이 모든 과정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다시 밝혀 줍니다. 사람이 스스로 자기 안에 새벽을 만들고 비를 내리며 자신을 자라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AC.87에서는 주님 홀로 사람을 위하여 싸우신다고 했고, AC.88에서는 새 창조, 곧 거듭남은 주님 홀로의 일이라고 했습니다. AC.93의 새벽과 비와 성장도 바로 그 주님의 역사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새벽’, ‘비’, ‘들의 성장’은 각각 따로 외워야 할 상응어라기보다 천적 인간에게 일어나는 하나의 살아 있는 과정을 함께 보여 줍니다. 주님으로부터 새로운 생명의 상태가 밝아오고, 내적인 평화의 생명이 겉 사람에게 미치며, 그 생명으로부터 선과 진리에 속한 것들이 자라 열매 맺습니다. 이것이 AC.93이 여러 선지서의 말씀을 한자리에 모아 보여 주는 천적 인간의 모습입니다. (AC.93 심화 2)

 

 

 

AC.93, 창2:5-6, ‘평화의 언약과 복된 비, 셋째 날에 일으켜지는 천적 인간’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창2:5, 6)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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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3 심화 1, 왜 ‘셋째 날’은 ‘일곱째 날’과 같은 것을 뜻하는가?

AC.93 심화1. 왜 ‘셋째 날’은 ‘일곱째 날’과 같은 것을 뜻하는가? AC.93에서 스베덴보리는 호6:2-3을 인용하면서 천적 인간의 이 상태가 ‘셋째 날’에 이루어지며, ‘셋째 날’은 말씀에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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