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이 설교는 대한민국에서 JMS(기독교복음선교회)로 알려진 단체의 창설자 정명석의 설교입니다. 따라서 이 해설은 단순히 설교의 문장만을 떼어 놓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설교가 실제 어떤 신앙 체계 안에서 선포되고 있는지를 함께 고려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다만 출처만으로 모든 내용을 부정하거나, 반대로 일부 좋은 내용만 보고 전체를 긍정하는 태도 역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언제나 말씀 자체와 그 열매를 기준으로 분별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먼저 성경적인 요소는 인정하고, 이어서 어디에서부터 중심이 달라지는지를 차분히 살펴보겠습니다.
설교의 제목인 ‘깔짝거리지 말고 본격적으로 하라’는 표현은 매우 직설적입니다. 설교자는 신6:5의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와 마5:48의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를 본문으로 삼아, 신앙을 피상적으로 하지 말고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이러한 출발점 자체는 성경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부분적인 관심이 아니라 삶 전체를 포함해야 하며, 신앙 역시 말이나 감정에 머무르지 않고 실제 행동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신앙은 삶이 되어야 하며, 참된 믿음은 선한 삶과 분리될 수 없다고 거듭 강조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격적으로 하라’는 첫 번째 권면은 충분히 귀담아들을 만한 내용입니다.
설교는 이어서 ‘손과 얼굴만 씻지 말고 온몸을 씻어야 한다’, ‘휴지로 닦는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샤워하듯 깨끗이 씻어야 한다’는 비유를 반복합니다. 말씀의 속뜻으로 보면 이 비유는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씻음’은 단순한 육체의 청결이 아니라 악과 거짓으로부터 정결하게 되는 회개를 뜻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일부만 고치는 것이 아니라 생각과 의지와 행동 전체가 주님의 진리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설교가 ‘부분적인 신앙’을 경계하는 것은 긍정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앙은 주일 예배 한 시간만의 문제가 아니라 가정과 직장, 인간관계와 양심, 말과 행동까지 이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한 가지 중요한 차이도 함께 짚어야 합니다. 설교는 ‘온전하게 하라’는 말씀을 매우 강한 완전주의적 어조로 풀어 갑니다. 마치 한 번에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하고,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하는 것처럼 들리는 부분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거듭남은 평생에 걸쳐 이루어지는 질서 있는 과정입니다. 사람은 오늘 하나의 악을 버리고, 내일 또 다른 거짓을 깨닫고, 그렇게 조금씩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때로는 큰 결단이 필요하지만, 많은 경우에는 오랜 인내와 반복되는 회개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본격적으로’ 한다는 것은 반드시 단번에 완성된다는 뜻이 아니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진실하게 계속 나아간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말씀의 정신에 더 가깝습니다.
설교는 이후 월명동 개발 이야기를 길게 소개합니다. 앞산을 얼마나 깎아야 하는지, 어디까지 측량해야 하는지, 하나님께서 직접 기준을 정해 주셨다는 이야기, 거대한 바위를 옮기기 위해 대형 크레인을 사용했다는 이야기 등이 매우 자세하게 이어집니다. 처음 들으면 이것은 단순한 성공 사례처럼 보입니다. 작은 일도 대충 하지 말고 철저하게 준비하라는 교훈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어떤 일을 성실하고 책임감 있게 하는 자세는 신앙인에게도 필요한 덕목입니다.
그러나 설교가 계속될수록 그 중심은 조금씩 달라집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라’는 말씀이 중심이었지만, 점차 월명동이라는 특정 장소와 ‘선생’이라 불리는 특정 인물의 경험이 설교의 중심으로 자리 잡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월명동을 직접 측량하셨고, 월명동은 하나님의 특별한 성전이며, 지구에서 가장 좋은 길지이고, 하나님께서 시대의 사명자를 그곳에 세우셨다는 내용이 반복됩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며 창조주의 지혜를 찬양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특정 장소의 아름다움이 특정 인물의 절대적 사명을 입증하는 근거가 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참된 성전은 건물이 아닙니다. 더욱이 특정 지역이나 특정 지형도 아닙니다. 참된 성전은 주님께서 선과 진리 가운데 거하시는 인간의 마음이며, 그러한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훌륭한 건축물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곧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증명하지는 않습니다. 반대로 이름 없는 작은 교회라 하더라도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이 있다면 그곳이야말로 참된 성전입니다. 장소는 거룩함의 원인이 아니라, 거룩함을 담는 그릇일 뿐입니다.
설교에는 개인적인 꿈과 영적 체험도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꿈에서 배설물을 닦는 장면을 보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성령께서 이렇게 계시하셨다’는 식으로 전개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사람의 양심을 깨우치시고 깊은 깨달음을 주시는 일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개인의 꿈과 느낌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체험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직접 계시인지 여부는 반드시 말씀과 그 열매를 통해 분별되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영계의 영향을 누구보다 자세히 설명했지만, 동시에 사람이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각과 감동을 곧바로 하나님의 음성으로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고 여러 곳에서 경고합니다. 영적 체험은 언제나 주님의 진리와 사랑을 기준으로 검증되어야 합니다.
이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분기점은 바로 여기서 나타납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이 중심이지만, 설교가 후반부로 갈수록 ‘선생을 증거하라’, ‘선생을 제대로 증거하지 못한다’, ‘선생의 정신같이 하라’, ‘기준은 한 명이다’, ‘항상 기준에 줄 맞추라’, ‘맞추지 않으면 서열에서 나와야 한다’는 표현들이 반복됩니다. 설교의 중심축이 하나님에게서 특정 인간 지도자에게로 이동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표현상의 문제가 아니라, 설교 전체의 방향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변화입니다.
여기서 이 설교가 JMS라는 배경에서 선포된 설교라는 사실이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이 설교 속 ‘선생’은 추상적인 스승이 아니라 정명석 자신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선생을 증거하라’, ‘선생과 같이 하라’, ‘기준은 한 명이다’는 말은 일반적인 신앙 권면이 아니라, 실제 조직 안에서 지도자를 중심에 두는 신앙 구조를 반영하는 언어입니다. 처음 듣는 사람은 이를 단순한 열심의 권면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배경을 알고 읽으면 설교의 무게중심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읽어 보면, 천국의 모든 천사는 자신을 바라보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통하여 주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천사는 자기 이름을 증거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줄을 맞추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모든 선과 진리는 오직 주님에게서 오며, 천사는 그 선과 진리를 전달하는 통로일 뿐입니다. 그래서 참된 영적 지도자는 사람을 자기에게 묶지 않고 주님께 인도합니다. 사람을 자기 기준으로 평가하지 않고, 말씀을 기준으로 스스로 분별하도록 돕습니다. 만일 설교가 점점 지도자의 권위를 중심으로 재편된다면, 그것은 이미 영적 질서가 뒤바뀌기 시작한 신호일 수 있습니다.
설교는 또한 ‘하나님과 그 사명자에게 관심 없는 자는 대가를 받는다’, ‘선생을 제대로 증거하지 못한다’, ‘제자가 아니라 아저씨다’와 같은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신6:5가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느 인간 지도자에게 같은 방식으로 충성을 바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인간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는 있지만, 인간에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어떤 지도자도 주님을 대신할 수 없으며, 어떤 지도자도 신앙의 절대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이 설교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황금 신부천국’, ‘신부답게 영도 육도 깨끗이 하라’, ‘신앙생활을 본격적으로 하지 않은 자는 천국에 간 자가 없다’와 같은 표현입니다. 경건한 삶과 거룩함을 강조하는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들이 지도자 중심의 신앙과 결합될 때는 매우 신중한 분별이 필요합니다. 더욱이 이 설교자는 대한민국 법원에서 성범죄에 대해 유죄가 확정된 인물입니다. 그러므로 ‘신부’와 ‘깨끗함’을 반복하는 언어는 일반적인 성경적 권면만으로 읽을 수 없으며, 실제 역사적 맥락과 함께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개인의 흠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의 삶과 설교의 일치 여부를 묻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의 말보다 삶을 더 중요하게 봅니다. 아무리 천국을 말하고, 거룩함을 말하고, 사랑을 말하더라도 실제 삶이 그것과 반대라면 그 사람의 말은 점차 생명을 잃게 됩니다. 참된 진리는 반드시 삶으로 증명됩니다. 그러므로 영적 지도자를 평가할 때도 화려한 언변이나 많은 계시 주장보다, 그의 삶이 주님의 계명과 얼마나 일치하는지를 먼저 살펴야 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선과 진리의 결합’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설교 전체를 한마디로 무가치하다고 말하는 것도 공정하지는 않습니다. ‘신앙을 대충 하지 말라’, ‘회개를 형식적으로 하지 말라’, ‘맡은 일을 성실하게 하라’, ‘분별력을 가지고 사람과 일을 살펴보라’는 권면에는 충분히 귀 기울일 만한 요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성경적 요소들은 설교 후반으로 갈수록 특정 지도자의 권위를 강화하는 논리 속으로 흡수됩니다. 좋은 성경 구절과 생활의 지혜가 결국 인간 지도자를 절대화하는 구조를 떠받치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이 설교의 가장 큰 문제는 ‘깔짝거림’이 아닙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님께만 향해야 할 사랑과 신뢰와 순종이 점차 한 인간에게 집중된다는 점입니다. 거듭남은 지도자를 얼마나 열심히 증거했느냐가 아니라, 자기 안의 자기애와 지배욕, 거짓과 탐욕을 얼마나 주님의 능력으로 버려 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주님은 사람을 자신에게 묶으시는 분이 아니라 자유 가운데 진리를 선택하도록 이끄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은 두려움이나 맹목적인 충성이 아니라, 사랑과 자유, 그리고 이성 안에서 자라갑니다.
결국 이 설교가 말하는 ‘본격적으로 하라’는 권면은 방향만 바로 잡는다면 매우 귀한 교훈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본격성’의 대상은 특정 지도자도, 특정 장소도, 특정 조직도 되어서는 안 됩니다. 본격적으로 해야 할 것은 오직 주님을 사랑하는 일이며, 말씀의 진리 앞에서 자신을 정직하게 돌아보는 일이며, 매일의 삶 속에서 악을 버리고 선을 선택하는 거듭남의 길입니다. 그것이 신6:5가 말하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이며, 또한 스베덴보리가 평생 일관되게 증언한 참된 신앙의 길입니다.
SY.38, ‘자유통일을 위한 120만 광화문 전국 주일 연합예배’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설교의 출발점인 여호수아의 ‘땅 나누기’는 말씀의 속뜻으로 볼 때 매우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가나안 땅은 단순히 이스라엘 민족
bygrace.kr
'즐겨찾기 > 스베덴보리의 렌즈' 카테고리의 다른 글
| SY.38, 전광훈 목사, ‘자유통일을 위한 120만 광화문 전국 주일 연합예배’ (1) | 2026.08.06 |
|---|---|
| SY.37, 이동원 목사, ‘약속을 지켜야 할 사람들’ (0) | 2026.08.06 |
| SY.36, 이재철 목사, ‘기도 열심히 했더니 하나님이 복을 주셨다? 이런 간증은 엉터리입니다’ (0) | 2026.08.06 |
| SY.35, ‘요즘 교회가 가장 두려워 하는 6가지 질문’ (0) | 2026.08.05 |
| SY.34, 시흥영성수련원, ‘79차 심령부흥대사경회’ (0) | 2026.08.05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