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3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And he said, Who told thee that thou wast naked? Hast thou eaten of the tree whereof I commanded thee that thou shouldest not eat? And the man said, The woman whom thou gavest to be with me, she gave me of the tree, and I did eat. And Jehovah God said unto the woman, Why hast thou done this? And the woman said, The serpent beguiled me, and I did eat. (3:11-13)

 

AC.229

 

이 말씀의 의미는 앞에서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분명합니다. 곧 인간의 이성 파트가 자신의 own, 즉 자기 사랑(the love of self)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스스로 속임을 당하도록 내버려두었고, 그 결과 자신이 보고 느낄 수 있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알 수 있듯, 여호와 하나님께서 실제 뱀에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며, 사실 그런 뱀도 없었습니다. 또한 그분께서는 (serpent)으로 의미되는 감각 파트(the sensuous part) 자체에게 말씀하신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 말씀은 다른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곧 그들은 자신들이 감각들(the senses)에 의해 속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고 있었음에도 불구, 자기 사랑(self-love) 때문에 주님(the Lord)과 그분에 대한 신앙(faith)에 관하여 들은 것들이 참된 것인지 아닌지를 먼저 확인하고 나서야 믿으려 하였다는 것입니다. The signification of these words is evident from what has been explained before, namely, that the rational of man suffered itself to be deceived by its own, because this was dear to him (that is, by the love of self), so that he believed nothing but what he could see and feel. Everyone can see that Jehovah God did not speak to a serpent, and indeed that there was no serpent, neither did he address the sensuous part that is signified by the “serpent”; but that these words involve a different meaning, namely, that they perceived themselves to be deluded by the senses, and yet, in consequence of self-love, were desirous of ascertaining the truth of what they had heard concerning the Lord, and concerning faith in him, before they believed it.

 

 

해설

 

AC.229는 창세기 3장의 뱀 이야기를 문자적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 주는 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실제 뱀이 말을 하였고, 하나님께서 그 뱀과 대화하셨다 생각하는 것은 말씀의 본래 의미를 놓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에게 뱀(the serpent)은 인간의 감각 파트, 곧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만을 기준으로 삼으려는 인간의 가장 바깥 부분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뱀의 유혹이란 결국 인간 안 감각적 사고가 이성을 설득, 주님보다 자기 자신을 더 신뢰하도록 만드는 과정을 뜻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중요한 영적 원리를 하나 설명합니다. 인간이 진리를 거부하는 가장 깊은 이유는 지적 부족함이 아니라 자기 사랑(self-love)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종종 ‘증거가 부족해서 믿지 못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믿고 싶지 않기 때문에 증거를 요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원래 퍼셉션(perception)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를 직접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타락이 시작되자 그들은 더 이상 주님으로부터 직접 받는 빛을 신뢰하지 않고, 자기 감각과 자기 이성을 기준으로 삼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태도는 사실상 다음과 같았습니다.

 

내가 직접 보고 이해할 수 있어야 믿겠다.’

 

내 경험과 내 판단으로 확인되면 받아들이겠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는 이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바로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타락의 핵심입니다.

 

물론 스베덴보리는 이성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이성이 주님의 빛 아래에서 봉사하는 자리가 아니라 심판자의 자리에 앉는 것입니다. 참된 이성은 진리를 이해하기 위해 사용되지만, 타락한 이성은 진리가 옳은지 틀린지를 자기 기준으로 재판하려 합니다.

 

그래서 AC.229는 매우 현대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도 종종 ‘과학적으로 증명되면 믿겠다’, ‘내가 납득되면 받아들이겠다’, ‘내 경험에 맞지 않으면 인정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물론 건강한 질문과 탐구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경고하는 것은, 자기 사랑이 숨어 있는 이성은 결코 충분한 증거를 얻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문제는 증거의 부족이 아니라 받아들이려는 의지의 부족이기 때문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스베덴보리가 태고교회 사람들이 이미 자신들이 속고 있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고 말하는 부분입니다. 그들은 감각이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것을 완전히 모르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 자기 사랑 때문에 그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결국 창세기 3장의 질문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대로 주어집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이성을 사용하는가, 아니면 주님의 말씀을 재판하기 위해 이성을 사용하는가? 우리는 믿기 위해 이해하려 하는가, 아니면 이해될 때만 믿으려 하는가?

 

스베덴보리에게 타락의 시작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곧 ‘주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참이다’라는 자리에서 ‘내가 납득해야 참이다’라는 자리로 이동하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뱀이 인간의 이성을 설득한 방식이었다고 그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AC.228, 창3:9-10, '천사들의 지각(perception)의 정교함'

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And Jehovah God cried unto the man [homo], 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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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4.심화

 

1. ‘신앙의 진리(the truth of faith), 사랑의 선(the good of love)

 

이 표현은 스베덴보리를 처음 읽는 분들뿐 아니라 오래 읽은 분들도 한동안 손에 잘 잡히지 않는 개념입니다. 이유는 우리가 보통 진리’와 신앙’을 거의 같은 뜻처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는 둘 사이에 미묘하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먼저 진리(truth)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참된 내용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주님만이 생명이시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악은 피해야 한다’, ‘사랑 없는 신앙은 죽은 신앙이다 같은 것들입니다.

 

반면 신앙(faith)은 그런 진리를 사람이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만든 상태를 말합니다. 즉 진리가 객관적인 내용이라면, 신앙은 그 진리를 믿고 붙드는 인간 쪽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진리(the truth of faith)란, 단순히 참된 명제가 아니라, 사람이 믿고 받아들여 신앙의 내용이 된 진리를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그 자체로는 진리(truth)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것을 주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나는 아직 그렇게 살지 못하지만, 이것이 주님의 뜻이며 참된 길이다’라고 믿는다면, 그 진리는 그 사람 안에서 신앙의 진리(the truth of faith)가 됩니다.

 

즉, 진리(truth)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하늘의 진리이고, ‘신앙의 진리(the truth of faith)는 사람이 믿고 받아들여 자신의 신앙 안에 들어온 진리인 것입니다.

 

반대로 사랑의 선(the good of love)은 무엇일까요? 예를 들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라는 것을 믿는 단계는 신앙의 진리(the truth of faith)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누군가를 용서하고, 돕고, 섬기고, 희생한다면 그것은 이미 삶 속에 구현된 사랑의 선(the good of love)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자주 이 둘을 짝으로 말합니다.  신앙의 진리(the truth of faith) 사랑의 선(the good of love)입니다. 이는 마치 씨앗과 열매의 관계와도 같습니다. ‘이웃 사랑이 중요하다’라고 아는 것은 씨앗이고, 실제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열매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특별했습니다. 그들은 사랑(love)으로부터 진리(truth)를 알았습니다. 즉 사랑이 먼저였고, 그 사랑 안에서 무엇이 참인지 곧바로 지각(perception)했습니다. 반면 홍수 이후의 영적 인간은 순서가 반대였습니다. 먼저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를 믿고, 그 진리에 따라 살려고 애쓰며, 마침내 체어리티(charity)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종종 태고교회를 설명할 때는 사랑의 선(the good of love)을 강조하고, 고대교회 이후를 설명할 때는 신앙의 진리(the truth of faith)를 강조합니다.

 

조금 거칠게 표현하면, 천적 인간(celestial man) 왜 그런지는 설명하기 어렵지만 이것이 선한 것임을 안다 하는 사람이고, 영적 인간(spiritual man)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으니 이것이 옳다고 믿는다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AC.228에서 천사들이 지키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두 가지입니다. 천사들은 어떤 생각이 사람 안으로 들어올 때, 이것이 신앙의 진리(the truth of faith)를 허무는 것인가, 혹은 사랑의 선(the good of love)을 파괴하는 것인가를 즉시 알아차립니다.

 

예를 들면, ‘용서는 약한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어온다면, 그것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신앙의 진리(the truth of faith)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도와줄 가치가 없다’라는 냉혹한 마음이 들어온다면, 그것은 사랑의 선(the good of love)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천사들은 이러한 움직임을 사람 자신보다 훨씬 먼저, 그리고 훨씬 더 섬세하게 지각한다고 스베덴보리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AC를 읽으실 때는, ‘신앙의 진리(the truth of faith)를 간단히 사람이 믿고 붙들고 있는 주님의 진리’, 혹은 신앙의 내용이 되는 진리 정도로 이해하시면 대부분의 문맥에서 자연스럽게 읽히실 것입니다.


 

AC.228, 창3:9-10, '천사들의 지각(perception)의 정교함'

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And Jehovah God cried unto the man [homo], 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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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And Jehovah God cried unto the man [homo], and said unto him, Where art thou? And he said, I heard thy voice in the garden, and I was afraid, because I was naked; and I hid myself. (3:9-10)

 

AC.228

 

천사들이 신앙의 진리(the truth of faith)사랑의 선(the good of love)에 반대되는 어떤 것이 사람 안으로 들어오는지를 얼마나 섬세하게 알아차리는지는 이루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무엇이 들어오는지, 또 언제 들어오는지를 사람 자신보다도 천 배나 더 완전하게 지각합니다. 사람은 그것에 대하여 거의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사람의 생각 가운데 가장 미세한 것까지도 천사들은 그 사람 자신이 자기 안에서 가장 그레이트하게 아는 것보다 더 분명하게 지각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가장 확실한 진실입니다. It is impossible to describe the exquisite perception whereby the angels discover whether anything gains admission that is contrary to the truth of faith and the good of love. They perceive the quality of what enters, and when it enters, a thousand times more perfectly than the man himself, who scarcely knows anything about it. The least of thought in a man is more fully perceived by the angels than the greatest is by himself. This is indeed incredible, yet is most true.

 

 

해설

 

AC.228은 천사들의 지각(perception)이 얼마나 정교한지를 보여 주는 매우 놀라운 글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천사들은 단순히 사람의 겉모습이나 행동만 보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들은 사람 안으로 들어오는 생각과 애정의 가장 미세한 움직임까지도 즉시 알아차립니다.

 

특히 천사들이 주목하는 것은 어떤 생각이나 욕망이 ‘신앙의 진리(the truth of faith)와 ‘사랑의 선(the good of love)에 일치하는지, 아니면 그것에 반대되는지를 분별하는 일입니다. 그들은 어떤 거짓이나 악이 사람 안으로 들어오려는 순간, 그리고 그것이 어느 정도 받아들여지고 있는지를 매우 섬세하게 지각합니다.

 

반면 인간은 자기 마음을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떤 생각이 왜 떠올랐는지, 어떤 감정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생각과 충동은 의식의 문턱을 스쳐 지나가며, 대부분은 거의 알아차리지 못한 채 흘려보냅니다.

 

그러나 천사들은 그 가장 미세한 움직임까지도 분명히 지각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자기 안의 가장 그레이트한 생각을 아는 것보다 천사들이 사람 안의 가장 작은 생각을 더 분명하게 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천사들의 지각이 사람의 자기 인식보다 훨씬 깊고 정확하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설명은 AC.227의 내용과도 이어집니다. 사람은 영적 세계와 끊임없이 연결되어 있으며, 천사들은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선을 보호하고 성장시키기 위해 역사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사람의 내면 상태를 매우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천사들의 지각은 인간의 자기 인식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섬세합니다.

 

물론 이것은 천사들이 사람을 감시하거나 정죄하기 위해 살핀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설명에 따르면 천사들의 관심은 오직 주님의 선과 진리를 보존하고, 사람을 보호하는 데 있습니다. 마치 숙련된 의사가 환자의 미세한 증상까지 알아차려 병이 깊어지기 전에 치료하려는 것처럼, 천사들은 사람 안에 들어오는 악과 거짓을 민감하게 지각하여 주님의 섭리 아래 그것을 막고 선을 북돋우려 합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현대인에게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믿기 어렵지만 가장 확실한 진실’이라고 덧붙입니다. 이는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자신이 수년간 영계에서 직접 경험한 사실에 근거한 증언이라는 의미입니다.

 

결국 AC.228은 인간이 혼자 살아가는 존재가 아님을 다시 한번 일깨워 줍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주님께서는 천사들을 통하여 우리 안의 가장 작은 선까지도 보호하시고, 가장 미세한 악의 침입까지도 살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영적 생활은 거창한 결단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는 생각 하나, 애정 하나까지도 주님의 섭리 안에서 다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심화

 

1. ‘신앙의 진리(the truth of faith),사랑의 선(the good of love)

 

 

AC.228, 심화 1, ‘신앙의 진리’(the truth of faith), ‘사랑의 선’(the good of love)

AC.224.심화 1. ‘신앙의 진리’(the truth of faith), ‘사랑의 선’(the good of love) 이 표현은 스베덴보리를 처음 읽는 분들뿐 아니라 오래 읽은 분들도 한동안 손에 잘 잡히지 않는 개념입니다.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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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9, 창3:11-13,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AC.229-233)

11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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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7, 창3:9-10, 지각(perception), 내적 딕테이트(internal dictate), 양심(conscience) 및 시험(temptations)의 기

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And Jehovah God cried unto the man [homo], 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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