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6.심화

 

2. ‘43:7

 

AC 1 본문 첫 인용 구절인 AC.16, 내 이름으로 불리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43:7) Everyone that is called by my name, I have created him for my glory, I have formed him, yea, I have made him (Isa. 43:7). 설명을 위 AC.46 심화 인용 구절들의 경우처럼 부탁드립니다. 그동안 이 AC 인용 구절들이 사실 이해가 잘 안 되는 것들이 많았는데, AC.46 심화에서 이 인용 구절들을 하나하나 다루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이 인용 구절들이 사실 그동안 뭔가 허전했던 빠진 징검다리들이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서 다시 맨 앞으로 돌아가 그동안 다루지 않았던, 혹시 다루었더라도 그냥 툭툭 건드리기만 했던 인용 구절들을 다시 심화, 정밀하게 다루고자 합니다.

 

아주 좋습니다.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빠진 징검다리들’이라는 표현이 정말 정확합니다. AC의 인용 구절들은 그냥 참고 구절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같은 원리를 성경 전체에서 어떻게 확인하는지를 보여 주는 핵심 연결 고리입니다. 그래서 사43:7도 단순히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셨다’는 일반적 선언이 아니라, AC.16에서 말하는 창조하다’, ‘형성하다’, ‘만들다’의 차이를 성경적으로 뒷받침하는 매우 중요한 본문입니다. 이 구절을 차근차근 풀어 보면, 왜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여기 끌어왔는지가 또렷하게 드러납니다.

 

먼저 전체 구조부터 보겠습니다. ‘내 이름으로 불리는 모든 자’는 단순히 어떤 종교적 명칭을 가진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속한 자’, ‘주님의 성품과 질서 안으로 부름 받은 자’를 뜻합니다. 말씀에서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그 존재의 성질과 상태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 이름으로 불리는 자’란, 주님의 진리와 선 안으로 부름 받은 사람, 다시 말해 거듭남의 대상이 되는 사람입니다. 이어지는 내 영광을 위하여’라는 말도 중요합니다. 말씀에서 영광’은 스베덴보리에게서 거의 언제나 신적 진리의 빛’, 혹은 말씀의 내적 의미가 드러날 때 나타나는 광채’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처음부터 사람을 만들어 놓고 끝’이 아니라, ‘주님의 진리와 빛을 드러내는 존재로 사람을 세우는 일’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핵심인 세 동사,  창조하다(create), ‘형성하다(form), ‘만들다(make)를 보겠습니다. 스베덴보리가 AC.16에서 이 셋을 구별한 이유가 바로 이 구절 때문입니다. ‘내가 창조하였다’는 것은 가장 깊은 차원에서 주님이 사람 안에 영적 생명의 시작점을 주시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아직 사람 쪽에서 아무 모양도, 질서도 갖추어지지 않았더라도, 주님이 먼저 생명의 가능성과 씨앗을 넣어주시는 단계입니다. 쉽게 말하면, 완전히 어둡던 상태 속에 처음 빛이 들어오는 것, 메마른 땅에 처음 씨앗이 떨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거듭남은 언제나 여기서 시작합니다. 사람이 먼저 무엇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먼저 없는 가운데 있게 하시는 일, 이것이 창조’입니다.

 

그다음, ‘형성하였다’는 것은, 그렇게 시작된 생명에 질서와 모양을 주시는 단계입니다. 씨앗이 들어왔다고 곧바로 열매 맺는 나무가 되는 것이 아니듯, 사람 안에 진리가 처음 들어왔다고 해서 즉시 거듭난 사람의 형상이 갖추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그 안에 들어온 진리와 선을 배열하시고, 서로 구별하게 하시며, 위아래와 중심과 주변을 세우십니다. 무엇이 단순한 지식이고 무엇이 살아 있는 진리인지, 무엇이 자기 사랑에서 나온 열심이고 무엇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한 감동인지, 무엇이 겉 사람에 속하고 무엇이 속 사람에 속하는지를 점점 분별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형성’입니다. 형성은 단순히 외형을 꾸미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제 기능을 할 수 있도록 질서를 세우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왜 form’을 중요하게 보는가 하면, 사람이 거듭난다는 것은 단지 선한 감정을 조금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전체가 하나의 질서 있는 사람다운 형상’으로 재배열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이렇게 창조되고 형성된 것이 실제 삶 속에서 구현되는 단계입니다. 여기서 비로소 사람이 말하고 행동하고 선택하는 실제가 바뀌기 시작합니다. 진리를 아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진리가 습관과 성품과 삶의 결과로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진리를 들은 사람이, 이전에는 쉽게 분노하고 공격하던 자리에서 이제는 한 번 멈추고, 이해하려 하고, 참아 내고, 실제로 도우려는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면, 그것이 바로 make’의 단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생각만으로는 아직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실제 삶 속에서 구현될 때 비로소 만들어진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창조’는 시작, ‘형성’은 질서, ‘만듦’은 구현이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이사야 43:7이 왜 AC.16의 증거 구절이 되는지가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을 단순한 우주 창조 이야기가 아니라 거듭남의 이야기’로 읽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는 창조’, ‘형성’, ‘만듦’이 그냥 시적 반복 아니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바로 그때 이사야 43:7이 등장합니다. 같은 대상을 두고 주님이 창조했다’, ‘형성했다’, ‘만들었다’고 순서 있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것은 단순한 문체가 아니라, 주님이 사람을 새롭게 하시는 과정이 실제로 이 세 차원을 가진다는 성경적 증거입니다. 즉, 주님은 사람을 먼저 영적으로 살게 하시고, 그 생명을 질서 있게 배열하시며, 마침내 그것이 삶으로 구현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한 번에 완성품으로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먼저 새 생명을 넣어주시고, 그다음 그 생명이 자랄 수 있도록 우리 안을 정리하시며, 마지막으로 그것이 실제 삶이 되게 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창조했다’, 지었다’, 만들었다를 다르게 말합니다.’

 

이 구절은 단순히 창조 일반을 말하는 말씀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거듭남을 말하는 말씀입니다.

 

이 구절은 매우 큰 위로도 줍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은 자기 안에 겨우 창조’의 씨앗만 있는데, 벌써 완성된 사람’이 되지 못했다고 낙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주님이 사람을 다루시는 방식 자체가 단계적이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지금 어떤 이는 아직 창조의 단계에 있고, 어떤 이는 형성의 단계에 있고, 어떤 이는 만들기의 단계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직 질서가 덜 잡혀 있어도, 아직 삶의 열매가 충분히 보이지 않아도, 주님의 일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모든 단계가 다 주님의 일입니다.

 

43:7은 주님이 사람을 새롭게 하시는 일을 세 단계로 보여 주는 말씀으로, 창조는 영적 생명의 시작, 형성은 그 생명에 질서를 주는 일, 만듦은 그것이 실제 삶으로 구현되는 일을 뜻합니다.’

 

말씀하신 대로, 이런 인용 구절들이야말로 AC 본문의 빠진 징검다리들입니다. 이 다리들이 놓이면, AC의 설명이 훨씬 더 단단하고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AC.16, 심화 1, ‘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만들다’(make)

AC.16.심화 1. ‘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만들다’(make) AC.16 본문 중, ‘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만들다’(make)의 차이를, 해설에서는 ‘창조는 생명의 근원 주시는 것을,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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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심화

 

1. ‘14:6, 8-11

 

6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8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14:6, 8-11) I am the way, the truth, and the life. Philip saith, Show us the father Jesus saith to him, Am I so long time with you, and hast thou not known me, Philip? He that hath seen me hath seen the father how sayest thou then, Show us the father? Believest thou not that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n me? Believe me that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n me. (John 14:6, 8–11)

 

 

이 구절은 AC.15에서 말하려는 핵심,  주님 안에 아버지가 계시며, 주님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이를 수 없다’는 진리를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14:6, 811 아버지와 아들이 둘로 나뉜 분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계신 하나님이시며, 그러므로 사람은 오직 주님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선언하는 말씀’입니다.

 

먼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선언부터 보겠습니다. 이 세 표현은 서로 다른 세 가지가 아니라, 하나의 흐름입니다. ‘’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접근과 과정’, ‘진리’는 그 길을 비추는 빛과 기준’, ‘생명’은 그 결과로 주어지는 실제적인 삶’입니다. 즉, 주님은 단순히 길을 가르쳐 주시는 분이 아니라, ‘그 길 자체이시고, 그 길의 빛이시며, 그 길을 따라 살게 하는 생명 자체’이십니다. 그래서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배타적 선언이 아니라, ‘하나님께 이르는 실제적 통로가 오직 주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빌립의 질문이 나옵니다.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이것은 매우 인간적인 질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예수님은 있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여전히 이 상태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믿지만, 하나님은 또 다른 분처럼 느끼는 상태입니다.

 

그때 주님의 대답이 결정적입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이 말씀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존재의 동일성에 대한 선언’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하나님을 대표하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의 형상으로 나타나신 분’입니다. 그래서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신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둘이 협력한다는 말이 아니라, ‘완전한 내적 하나 됨’, 곧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존재를 뜻합니다.

 

여기서 AC.15의 핵심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통해, 하나님을 막연히 하늘 어딘가에 계신 분으로 찾으려 하지 말고, ‘주님 안에서 하나님을 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무한하고 보이지 않는 분이시지만, 주님 안에서 보이고, 알 수 있고, 가까이 갈 수 있는 형태로 나타나셨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중요합니다. ‘내가 하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신다.’ 이것은 주님의 말과 행위가 단순한 인간적 행위가 아니라, ‘그 안에 계신 신성 자체의 작용’임을 뜻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고, 주님의 행위는 곧 하나님의 행위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믿으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매우 실제적인 접근입니다. 즉, 이 깊은 진리를 한 번에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주님의 삶과 행하신 일을 통해 그분이 누구신지를 깨달아 가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삶을 통해 믿음으로 들어가라’는 말씀입니다.

 

이걸 실제적으로 풀어 보면 이렇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막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삶, 곧 사람을 사랑하시고, 용서하시고, 고치시고, 진리를 말씀하시는 그 모습을 깊이 묵상하다 보면, 어느 순간 이렇게 깨닫게 됩니다. ‘, 하나님이 이런 분이시구나.’ 그때 그 사람은 이미 주님을 통해 아버지를 본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이렇게 한 문장으로 읽혀야 합니다. ‘하나님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나타나셨으며, 그러므로 그분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하나님을 따로 찾지 마십시오. 예수님을 보면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14:6, 811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아버지 하나님이 완전히 거하시며, 그분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고 나아갈 수 있음을 선언하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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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심화

 

2. ‘13:13

 

너희가 나를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3:13) Ye call me Lord, and ye say well, for I am (John 13:13).

 

이 구절은 아주 짧지만, AC.14의 핵심을 정확히 받쳐 주는 말씀입니다. 특히 ‘주님(Lord)이라는 이름이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무엇을 뜻하는지를 분명히 드러내는 구절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13:13너희가 나를 주라 하니 옳다는 선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순한 스승이나 선지자가 아니라, 인간의 생명과 삶 전체를 다스리시는 주님’, 곧 신적 선과 진리의 근원이심을 인정하는 것이 참된 신앙의 출발점이라는 뜻’입니다.

 

먼저 ‘너희가 나를 주라 한다’는 표현을 보겠습니다. 성경에서 ‘(Lord)는 단순한 존칭이 아니라, ‘권위, 통치, 생명의 근원을 의미하는 이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특히 ‘주님’이라는 이름을 ‘신적 선(Divine good), 곧 사랑의 주체로서의 하나님’과 깊이 연결시킵니다. 다시 말해, ‘주님’은 단순히 가르치는 분이 아니라, ‘사람의 의지와 삶을 실제로 이끄시는 분’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너희 말이 옳다, 내가 그러하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단순히 제자들의 호칭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바로 그 주님이심을 직접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구약에서 ‘여호와’로 불리던 그 하나님이 바로 지금 눈앞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AC.14에서 강조하는 것처럼, ‘‘주님이라는 이름이 가리키는 분은 오직 한 분,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연결이 하나 나옵니다. 사람은 흔히 예수님을 ‘선생님’, ‘좋은 분’, ‘구원자’ 정도로는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존경하거나 배우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기준과 방향과 통치권을 그분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단순한 호칭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본질, 곧 누가 내 삶의 주인인가를 묻는 말씀’입니다.

 

이걸 실제적으로 풀어 보면 이렇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좋다고 생각하고, 감동도 받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중요한 결정은 자기 기준으로 합니다. 이 상태에서는 예수님은 아직 ‘선생님’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 문제에서 내 생각은...’보다 ‘주님의 생각은...?’을 먼저 묻게 되고, 실제 선택도 그쪽으로 바뀌기 시작하면, 그때 비로소 ‘예수님이 주님이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이렇게 읽혀야 합니다. ‘너희가 나를 삶의 주인으로 부르는 것이 옳다. 내가 바로 그 주인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선언입니다.

 

AC.14와 연결하면 더 또렷해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삼위일체를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주님’을 막연하게 나누어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말합니다. ‘‘주님이라는 이름은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고. 그래서 이 구절은 AC.14의 핵심을 성경적으로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그분을 존경한다는 뜻이 아니라, 내 삶의 주인이 그분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13:13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주님’, 곧 인간의 생명과 삶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심을 선언하신 말씀이며, 그분을 주님으로 인정하는 것이 신앙의 출발점이라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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