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414 심화

2. 초막절은 출애굽의 광야 생활을 기억하는 절기인데 태고교회의 사랑의 예배와 연결되는가?’

 

AC.414의 마지막 부분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 사람들이 장막에서 거룩한 예배를 드렸으며, 이를 기억하게 하는 절기로 초막절이 제정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레23:42-43은 이스라엘 자손이 초막에 거주해야 하는 이유를 분명히 밝힙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 그들을 초막에 거주하게 하셨다는 사실을 대대로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초막절은 출애굽과 광야 생활을 기억하는 절기입니까, 아니면 태고교회의 사랑의 예배를 기억하는 절기입니까? 이 질문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와 스베덴보리가 밝히는 표상적 의미를 어떻게 함께 읽을 것인가 하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먼저 레위기가 직접 밝히는 초막절의 기념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땅의 소산을 거두어들인 뒤 초막절을 지켰으며, 일정 기간 초막에 거주했습니다. 23:42-43은 그 이유를 출애굽 때의 초막 생활을 기억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초막절의 문자적 의미를 분명히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받아들인다는 이유로 초막절은 사실 출애굽과 관계가 없다거나 레위기가 밝힌 기념 이유는 겉으로만 내세운 설명이다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역사와 절기의 규례는 그 자체로 존중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는 왜 태고교회를 말합니까? AC.414에서 그는 초막절의 문자적 제정 이유를 다시 설명하기보다, ‘장막이라는 표상이 지닌 더 오래된 의미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태고교회 사람들은 각자의 가족 안에서 살면서 장막에서 거룩한 예배를 드렸습니다. 장막은 그 사랑의 예배와 연결되어 천적인 것과 사랑의 거룩한 것을 표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후대의 이스라엘 백성이 초막에 거주하는 절기를 지킬 때, 그 행위는 출애굽의 역사를 기억하는 동시에 장막이 오래전부터 지녀 온 거룩한 의미와도 연결될 수 있습니다. 하나의 표상에 문자적 역사와 속뜻이 함께 있다는 설명입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려면 무엇을 기념하라고 명령하셨는가? 기념에 사용된 장막은 무엇을 표상하는가?를 나누어 생각하면 도움이 됩니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레위기가 직접 답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나온 뒤 초막에 거주했던 일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AC.414가 답합니다. 장막은 태고교회의 거룩한 예배와 연결되어 사랑의 거룩한 것을 표상한다는 것입니다. 두 대답은 서로 다른 층위의 질문에 대한 것이므로, 하나를 인정하기 위해 다른 하나를 부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함께 인용한 신16:13도 이 관계를 살피는 데 도움이 됩니다. 이 말씀은 타작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출을 거두어들인 뒤 초막절을 지키라고 명령합니다. 23:39 역시 땅의 소산을 거두어들인 뒤 절기를 지키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초막절에는 광야 생활을 기억하는 일뿐 아니라 수확을 마친 뒤 주님 앞에서 절기를 지키는 일도 함께 들어 있습니다. 다만 AC.414는 타작마당이나 포도주 틀의 세부적인 속뜻을 여기서 풀이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심화에서는 그 물건들에 새로운 상응을 임의로 부여하기보다, 초막절이 출애굽의 기억과 수확의 기쁨을 함께 지닌 절기라는 문자적 문맥을 확인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12:9에서 주님은 다시 장막에 거주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구절도 AC.414가 초막절과 장막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인용한 본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장막 생활이 단지 과거의 불편한 생활 방식으로만 언급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말씀은 장막에 거주하는 모습을 다시 불러오며,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표현들을 사랑의 거룩한 것에 관한 장막의 의미와 연결합니다. 그러나 호세아서의 구체적인 역사적 문맥과 AC.414가 밝히는 속뜻을 구별하여 읽어야 합니다. 이 한 구절만으로 태고교회의 모든 예배 방식이나 초막절의 세부 규례를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목회적으로 중요한 질문은 오늘 우리도 초막에서 살아야 거룩한 예배를 드릴 있습니까?하는 것입니다. AC.414의 설명은 그런 결론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장막의 재료나 생활 방식 자체가 거룩함을 만들어 낸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장막이 사랑의 거룩한 것을 표상한다는 것은 그 장막과 연결된 예배의 내적인 의미를 살피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초막절을 읽는 성도는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주님의 역사를 기억하면서, 그 기억이 가리키는 주님의 사랑과 거룩함을 함께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외적인 절기의 형식을 그대로 되풀이하는 것과 그 절기가 나타내는 거룩한 것을 삶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결국 초막절의 문자적 기념 내용은 출애굽과 광야의 초막 생활이며, 스베덴보리가 AC.414에서 밝히는 표상적 의미는 장막에 담긴 태고교회의 사랑의 예배와 연결됩니다. 이 두 의미는 서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문자적 역사를 통해 주님의 인도하심을 기억하고, 장막의 속뜻을 통해 그분에게서 오는 사랑의 거룩함을 생각하게 합니다. 초막절을 읽으며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어느 시대의 장막이 중요합니까?라는 선택이 아니라, 말씀의 역사 속에서도 그 속뜻 안에서도 사람을 주님께로 이끄시는 분이 누구신가 하는 질문입니다. (AC.414 심화 2)

 

 

 

AC.414, 창4:20, ‘장막에 거주한다는 것은 왜 사랑의 거룩한 것을 뜻하는가? - 말씀의 장막과 성막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창4:20) AC.414‘장막에 거주한다’(dwell in tents)는 것이 사랑의 거룩한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말씀에서 ‘장막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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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4 심화 1, ‘장막·성막·성전은 같은 의미라면서 왜 서로 다른 시대에 세워졌는가?’

AC.414 심화1. ‘장막·성막·성전은 같은 의미라면서 왜 서로 다른 시대에 세워졌는가?’ AC.414를 읽으면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장막과 성막과 성전이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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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4 심화

1. 장막·성막·성전은 같은 의미라면서 서로 다른 시대에 세워졌는가?’

 

AC.414를 읽으면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장막과 성막과 성전이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말하면서도, 고대에는 장막에서 예배를 드렸고 그 장막이 모독되기 시작하자 성막이 세워졌으며, 그 후에는 성전이 세워졌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세 가지가 같은 의미를 지닌다는 것은 무엇이며, 예배의 장소가 바뀌어야 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질문을 풀려면 무엇을 표상하는가?어떤 역사적 상태에서 사용되었는가?를 구별해야 합니다.

 

먼저 같은 의미를 지닌다는 것은 세 건축물이 문자적으로 동일하다거나, 그 안에서 행해진 예배의 모든 절차가 같다는 뜻이 아닙니다. 장막은 가족이 거주할 수 있는 처소이고,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생활 가운데 세워진 예배의 처소이며, 성전은 이후에 세워진 건축물입니다. 이 차이는 문자적인 역사에서 그대로 인정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공통된 의미는 이 서로 다른 처소들이 모두 주님에게 속한 거룩함을 표상한다는 데 있습니다. 외적인 형태는 달라져도 그 형태가 가리키는 거룩함의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장막이 사랑의 거룩한 것을 표상하게 된 이유를 태고교회의 예배에서 찾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각자의 가족 안에서 살며 장막에서 거룩한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여기서 장막은 단지 비바람을 막아 주는 생활 도구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삶과 예배가 이루어지는 처소였고, 스베덴보리는 그 예배를 사랑의 거룩함과 연결합니다. 따라서 장막의 의미를 이해할 때에는 천막이라는 물건 자체보다, 그 안에서 주님을 향하여 드려졌던 예배와 그 예배에 속한 사랑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AC.414는 사람들이 장막에서 불경한 예배를 행하며 그것을 모독하기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장막이라는 물건이 더러워졌으므로 하나님께서 좋은 건물을 요구하셨다는 식으로 이해하지 않는 것입니다. 문제는 천막의 재료나 구조가 아니라 예배의 상태에 있었습니다. 거룩한 예배를 위해 사용되던 처소가 그와 반대되는 예배에도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와 관련하여 성막이 세워지고, 그 후에는 성전이 세워졌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예배 장소의 변화가 단순한 건축 기술의 발전만으로 설명될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그렇다면 성막과 성전은 장막보다 더 높은 수준의 거룩함을 지닌 것입니까? AC.414는 오히려 태고교회의 장막이 후에 모독된 성전보다 더 거룩하게 여겨졌다고 말합니다. 이 대목은 매우 중요합니다. 건물이 더 크고 견고해졌다는 사실이 그 안에서 드리는 예배까지 더 거룩해졌다는 증거는 아니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태고교회의 장막을 특별히 언급하는 이유는 그 장막이 연결되어 있던 사랑의 예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장막·성막·성전의 순서를 외적인 규모나 화려함에 따라 영적 우열을 매기는 순서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27:4-6은 이 세 표현의 공통된 의미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근거입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집에 살기를 구하고 성전에서 주님을 사모하며, 환난 날에는 초막과 장막 안에서 보호받고 장막에서 제사를 드리겠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에는 여러 이름의 거룩한 처소가 등장하지만, 다윗이 구하는 중심은 하나입니다. 그는 주님 가까이에 머물며 그분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그분의 보호 안에서 예배드리기를 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러한 문맥을 통해 장막과 성막과 성전이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설명합니다. 각각의 건축물을 따로 떼어 놓고 이름만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무엇을 구하고 누구에게 나아가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AC.414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가장 높은 의미에서 주님께서 그분의 인성의 본질에 관하여 장막이시며 성막이시고 성전이시라고 말합니다. 이 설명에 이르면 세 처소가 공통으로 가리키는 중심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거룩함은 장막이나 성막이나 성전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거룩함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그분을 표상하는 처소가 거룩한 의미를 지니는 것입니다. 또한 천적 사람을 주님의 장막이나 성전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 사람이 독립적으로 거룩해졌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거룩함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장막과 성막과 성전은 역사적으로 서로 다른 처소이고, 그것들이 사용된 예배의 상태도 같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밝히는 속뜻에서 그 처소들은 모두 주님과 그분에게서 오는 거룩함을 표상한다는 공통점을 지닙니다. 따라서 같은 의미라는 말은 역사적 차이를 지우는 말이 아니며, ‘서로 다른 시대에 세워졌다는 사실도 그 공통된 속뜻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성도들이 이 말씀에서 붙들어야 할 것은 어느 시대의 건물이 가장 거룩했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예배가 외적인 처소에 머무르지 않고 그 처소가 가리키는 주님과 그분의 사랑을 향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AC.414 심화 1)

 

 

 

AC.414 심화 2, ‘초막절은 출애굽의 광야 생활을 기억하는 절기인데 왜 태고교회의 사랑의 예배와

AC.414 심화2. ‘초막절은 출애굽의 광야 생활을 기억하는 절기인데 왜 태고교회의 사랑의 예배와 연결되는가?’ AC.414의 마지막 부분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 사람들이 장막에서 거룩한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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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4, 창4:20, ‘장막에 거주한다는 것은 왜 사랑의 거룩한 것을 뜻하는가? - 말씀의 장막과 성막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창4:20) AC.414‘장막에 거주한다’(dwell in tents)는 것이 사랑의 거룩한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말씀에서 ‘장막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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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4:20)

 

AC.414

장막에 거주한다(dwell in tents) 것이 사랑의 거룩한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말씀에서 장막들(tents) 뜻하는 바를 보면 분명해집니다. 다윗의 시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That todwell in tentssignifies what is holy of love,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tentsin the Word. As in David:

 

1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누구오니이까 2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15:1, 2) Jehovah, who shall abide in thy tent? Who shall dwell in the mountain of thy holiness? He that walketh upright, and worketh righteousness, and speaketh the truth in his heart, (Ps. 15:12)

 

말씀에서는 장막에 거주한다(dwell in the tent) , 또는 성산에 거주한다(in the mountain of holiness) 것이 무엇인지를 사랑의 거룩한 것들, 정직하게 행하고 공의를 실천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다른 시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in which passage, what it is todwell in the tentorin the mountain of holinessis described by holy things of love, namely, the walking uprightly, and working righteousness. Again:

 

그의 소리가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19:4) Their line is gone out through all the earth, and their discourse to the end of the world. In them hath he set a tent for the sun, (Ps. 19:4)

 

여기서 (sun) 사랑을 나타냅니다. 다른 시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where thesundenotes love. Again: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머물며 내가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리이다 (61:4) I will abide in thy tent to eternities, I will trust in the covert of thy wings, (Ps. 61:4)

 

여기서 장막(tent) 천적인 것을, 날개 아래의 그늘(covert of wings) 거기서 나오는 영적인 것을 나타냅니다. 이사야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where thetentdenotes what is celestial, and thecovert of wingswhat is spiritual thence derived. In Isaiah:

 

다윗의 장막에 인자함으로 왕위가 굳게 것이요 위에 앉을 자는 충실함으로 판결하며 정의를 구하며 공의를 신속히 행하리라 (16:5) By mercy the throne has been made firm, and one hath sat upon it in truth, in the tent of David, judging and seeking judgment, and hasting righteousness, (Isa. 16:5)

 

여기서도 장막(tent) 사랑의 거룩한 것을 나타냅니다. 이는 공의로 판결함(judging judgment) 공의를 신속히 행함(hasting righteousness) 언급되는 데서 있습니다. 다른 곳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where also thetentdenotes what is holy of love, as may be seen by the mention ofjudging judgment,andhasting righteousness.Again:

 

우리 절기의 시온성을 보라 눈이 안정된 처소인 예루살렘을 보리니 그것은 옮겨지지 아니할 장막이라 말뚝이 영영히 뽑히지 아니할 것이요 (33:20) Look upon Zion, the city of our appointed feast; thine eyes shall see Jerusalem a quiet habitation, a tent that shall not be moved away, (Isa. 33:20)

 

이는 하늘의 예루살렘에 관한 말씀입니다. speaking of the heavenly Jerusalem.

 

[2] 예레미야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In Jeremiah: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야곱 장막의 포로들을 돌아오게 것이고 거처들에 사랑을 베풀 것이라 성읍은 폐허가 언덕 위에 건축될 것이요 (30:18) Thus said Jehovah, Behold, I bring again the captivity of Jacobs tents, and will have mercy on his dwelling places, and the city shall be builded upon her own heap; (Jer. 30:18)

 

장막의 포로 (captivity of tents) 천적인 , 사랑의 거룩한 것들이 황폐해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아모스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thecaptivity of tentssignifies the vastation of what is celestial, or of the holy things of love. In Amos:

 

그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고 그것들의 틈을 막으며 허물어진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9:11) In that day will I raise up the tabernacle of David which is fallen; and will fence up the breaches thereof, and I will raise up its ruins, and I will build it as in the days of eternity, (Amos 9:11)

 

여기서도 성막(tabernacle) 천적인 것과 거기에 속한 거룩한 것들을 나타냅니다. 예레미야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where thetabernaclein like manner denotes what is celestial and the holy things thereof. In Jeremiah:

 

패망에 패망이 연속하여 땅이 탈취를 당하니 나의 장막과 휘장은 갑자기 파멸되도다 (4:20) The whole land is laid waste, suddenly are my tents laid waste, and my curtains in a moment. (Jer. 4:20)

 

장막이 무너지고 나의 모든 줄이 끊어졌으며 자녀가 나를 떠나가고 있지 아니하니 장막을 세울 자와 휘장을 자가 다시 없도다 (10:20) My tent is laid waste, and all my cords are plucked out, my sons are gone forth from me, and they are not; there is none to stretch my tent anymore, and to set up my curtains, (Jer. 10:20)

 

여기서 장막(tent) 천적인 것들을, 휘장들(curtains) 줄들(cords) 거기서 나오는 영적인 것들을 의미합니다. 다른 곳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where thetentsignifies celestial things, andcurtainsandcordsspiritual things thence derived. Again:

 

너희는 그들의 장막과 떼를 빼앗으며 휘장과 모든 기구와 낙타를 빼앗아다가 소유로 삼고 (49:29) Their tents and their flocks shall they take; they shall carry off for themselves their curtains, and all their vessels, and their camels, (Jer. 49:29)

 

이는 아라비아와 동방의 자손들에 관한 말씀인데, 이들은 천적인 또는 거룩한 것을 지닌 사람들을 표상합니다. 다른 곳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speaking of Arabia and the sons of the east, by whom are represented those who possess what is celestial or holy. Again:

 

시온의 장막에 그의 노를 불처럼 쏟으셨도다 (2:4) Into the tent of the daughter of Zion the Lord hath poured out his wrath like fire, (Lam. 2:4)

 

이는 신앙의 천적인 또는 거룩한 것들이 황폐해지는 상태에 관한 말씀입니다. speaking of the vastation of the celestial or holy things of faith.

 

[3] 말씀에서 장막(tent)이라는 말을 천적인 것과 사랑의 거룩한 것들을 표상하는 사용하는 이유는, 고대에 사람들이 장막에서 거룩한 예배 의식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불경한 종류의 예배로 장막을 모독하기 시작하자 성막이 세워졌고, 후에는 성전이 세워졌습니다. 따라서 장막은 후에 성막이, 그리고 그다음에는 성전이 나타내게 모든 것을 표상했습니다. 같은 이유로 거룩한 사람도 주님의 장막(tent), 성막(tabernacle), 성전(temple)이라고 불립니다. 장막(tent) 성막(tabernacle) 성전(temple) 같은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은 다윗의 시편에서 분명해집니다. The reason why the termtentis employed in the Word to represent the celestial and holy things of love is that in ancient times they performed the holy rites of worship in their tents. But when they began to profane the tents by profane kinds of worship, the tabernacle was built, and afterwards the temple, and therefore tents represented all that was subsequently denoted first by the tabernacle, and afterwards by the temple. For the same reason a holy man is called atent,atabernacle,and atempleof the Lord. That atent,atabernacle,and atemplehave the same signification, is evident in David:

 

4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가지 그것을 구하리니 내가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5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 6이제 머리가 나를 둘러싼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의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며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27:4-6) One thing have I asked of Jehovah, that will I seek after, that I may remain in the house of Jehovah all the days of my life, to behold Jehovah in sweetness, and to visit early in his temple; for in the day of evil he shall hide me in his tabernacle; in the secret of his tent shall he hide me; he shall set me up upon a rock. And now shall my head be lifted up against mine enemies round about me, and I will offer in his tent sacrifices of shouting. (Ps. 27:46)

 

[4] 가장 높은 의미에서 주님은 그분의 인성의 본질에 관하여 장막(tent)이시며, 성막(tabernacle)이시고, 성전(temple)이십니다. 여기서 모든 천적 사람도 그렇게 불리며, 천적이고 거룩한 모든 역시 그렇게 불립니다. 태고교회는 뒤를 이은 교회들보다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으며, 당시 사람들은 각자 자기 가족 안에서 따로 살면서 장막에서 그토록 거룩한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장막은 후에 모독된 성전보다 거룩하게 여겨졌습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초막절이 제정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땅의 소산을 거두어들일 초막절을 지켰으며, 기간에는 태고교회 사람들처럼 장막에서 거주했습니다. (23:39-44, 16:13, 12:9) (AC.414) In the supreme sense, the Lord as to his human essence is thetent,” thetabernacle,” and thetemple”; hence every celestial man is so called, and also everything celestial and holy. Now as the most ancient church was better beloved of the Lord than the churches that followed it, and as men at that time lived alone, that is, in their own families, and celebrated so holy a worship in their tents, therefore tents were accounted more holy than the temple, which was profaned. In remembrance thereof the feast of tabernacles was instituted, when they gathered in the produce of the earth, during which, like the most ancient people, they dwelt in tents. (Lev. 23:3944; Deut. 16:13; Hosea 12:9)

 

해설

AC.414는 앞의 AC.412-413에서 제시한 야발의 속뜻을 말씀의 여러 구절로 뒷받침합니다. 야발은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고, 스베덴보리는 그가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들에 관한 교리를 의미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은 당연히 장막에 사는 일이 사랑의 거룩함과 관계됩니까?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이번 번호는 바로 그 질문에 답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장막이라는 물건의 모양이나 용도만으로 뜻을 정하지 않고, 말씀에서 장막이 어떤 말들과 함께 등장하며 어떤 상태를 묘사하는지를 여러 본문에 걸쳐 살핍니다. 이 번호를 읽을 때 중요한 것은 인용 구절의 수를 따라가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구절들이 어떤 공통된 의미를 드러내는지 이해하는 것입니다.

 

먼저 시15:1-2주의 장막에 머무를 가 누구인지 묻고,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고 마음에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라고 답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말씀을 첫 근거로 제시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장막에 거한다는 것이 단순히 거룩한 장소에 들어가는 일이라면, 시편의 대답은 건물에 출입할 자격이나 예배 절차에 관한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은 그 사람의 삶을 말합니다. 정직하게 행하고 공의를 실천하며 마음에 진실을 말하는 것은 사랑이 실제 삶에서 선으로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장막에 거주한다는 속뜻은 거룩한 공간을 소유하거나 그 안에 머무는 외적인 행위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받아 그 사랑에 따라 살아가는 상태와 관련됩니다. 이것이 야발을 사랑의 거룩한 것들에 관한 교리와 연결하는 첫 번째 근거입니다.

 

다른 인용 구절들은 장막이 사랑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여러 방향에서 보여 줍니다. 19:4에서는 해를 위하여 장막을 베푸셨다고 하는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해가 사랑을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61:4에서는 주의 장막에 머무는 것과 주의 날개 아래 피하는 것이 함께 나오며, 그는 장막을 천적인 것, 날개 아래의 그늘을 거기서 나오는 영적인 것으로 구별합니다. 16:5에서는 다윗의 장막 안에서 인자함으로 굳게 선 왕위와 공의로운 판결이 나타납니다. 33:20에서는 시온과 예루살렘을 옮겨지지 아니할 장막으로 묘사합니다. 이 구절들이 모두 같은 장면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장막이 사랑과 거룩함, 그리고 그 사랑에 속한 삶과 연결된다는 점에서는 서로를 비추어 줍니다. 특히 장막과 날개 아래의 그늘을 구별한 시61:4는 천적인 것과 거기서 나오는 영적인 것이 서로 떨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예레미야서와 아모스서의 인용은 장막의 의미를 반대 방향에서도 보여 줍니다. 30:18은 야곱의 장막이 포로 된 상태에서 돌아오는 일을 말하고, 9:11은 무너진 다윗의 장막을 다시 세우는 일을 말합니다. 반면 렘4:20과 렘10:20에서는 장막이 무너지고 휘장과 줄이 사라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장막의 포로 됨을 사랑의 거룩한 것들이 황폐해진 상태로 설명하며, 장막은 천적인 것들을, 휘장과 줄은 거기서 나오는 영적인 것들을 의미한다고 밝힙니다. 이때 장막의 회복과 파괴를 단순히 천막의 재건이나 손실로만 읽지 않는 이유가 분명해집니다. 장막이 사랑의 거룩한 것을 나타내므로, 장막이 무너지는 말씀은 교회 안에서 그 사랑에 속한 것들이 황폐해지는 상태를 이해하는 근거가 되고, 장막을 다시 세우는 말씀은 그와 반대되는 회복의 모습을 생각하게 합니다. 다만 이번 번호가 인용된 모든 물건과 인물의 속뜻까지 각각 풀이하는 것은 아니므로, 휘장··자녀·낙타 등의 의미를 이 자리에서 임의로 세분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어서 스베덴보리는 왜 하필 장막이 그러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는지 역사적인 이유를 설명합니다. 고대 사람들은 장막에서 거룩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장막이 불경한 예배로 모독되기 시작하자 성막이 세워졌고, 그 뒤에는 성전이 세워졌습니다. 그래서 장막은 나중에 성막과 성전이 표상하게 된 거룩한 것들을 먼저 나타내는 표상이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장막이라는 재료나 건축 방식 자체가 성막이나 성전보다 거룩하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장막의 거룩함은 그것이 태고교회의 사랑의 예배와 연결되어 있다는 데 있습니다. 예배 장소가 장막에서 성막과 성전으로 바뀌어도, 그 장소들이 가리켜야 할 중심은 주님과 그분에게서 오는 거룩함입니다.

 

27:4-6은 이러한 연결을 한 본문 안에서 보여 줍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집에 살기를 구하고, 성전에서 사모하며, 환난 날에는 초막과 장막 안에서 보호받고, 장막에서 제사를 드리겠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근거로 장막과 성막과 성전이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고 문자적인 건축물들이 동일하거나 말씀의 모든 문맥에서 각 표현의 세부 의미까지 언제나 같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본문에서는 서로 다른 이름의 거룩한 처소들이 모두 주님께 나아가고 그분의 보호 안에 머무르며 예배드리는 일과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어느 건물이 거룩한가?보다 건물이 나타내는 거룩함은 어디에서 오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설명에 따르면 그 거룩함의 근원은 건물 자체가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이번 번호의 마지막 부분은 그 의미를 가장 높은 차원까지 끌어올립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장 높은 의미에서 주님께서 그분의 인성의 본질에 관하여 장막이시며 성막이시고 성전이시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천적 사람과 천적이고 거룩한 모든 것도 그렇게 불린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사람을 주님의 장막이나 성전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사람이 스스로 거룩함의 근원이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거룩함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야발의 장막에 거주하는 라는 표현도 단순히 옛사람들의 생활 방식에 관한 기록을 넘어섭니다. 그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거룩한 것들에 관한 교리가 새 교회 안에 존재한다는 설명으로 이어집니다.

 

끝으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 사람들이 각자의 가족 안에서 살며 장막에서 거룩한 예배를 드렸고, 이를 기억하게 하는 절기로 초막절이 제정되었다고 설명합니다. 23:39-44와 신16:13은 수확 후 초막절을 지키는 일을 말하며, 12:9는 다시 장막에 거주하게 하시겠다는 말씀을 전합니다. 레위기 본문은 출애굽 때 이스라엘 자손이 초막에 거주했던 일을 기억하게 한다고도 분명히 말합니다. 따라서 문자적인 절기의 기념 내용과 스베덴보리가 밝히는 태고교회의 사랑의 예배에 관한 표상적 의미를 서로 지워 버리지 않고 함께 읽어야 합니다. AC.414의 결론은 분명합니다. 장막은 그 자체가 거룩함의 근원이어서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그 사랑 안에서 드리는 거룩한 예배를 표상하기 때문에 사랑의 거룩한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야발의 속뜻을 이해하기 위해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여러 장막을 길게 살펴본 이유입니다. (AC.414 해설)

 

심화

1. 장막·성막·성전은 같은 의미라면서 서로 다른 시대에 세워졌는가?’

 

AC.414 심화 1, ‘장막·성막·성전은 같은 의미라면서 왜 서로 다른 시대에 세워졌는가?’

AC.414 심화1. ‘장막·성막·성전은 같은 의미라면서 왜 서로 다른 시대에 세워졌는가?’ AC.414를 읽으면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장막과 성막과 성전이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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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초막절은 출애굽의 광야 생활을 기억하는 절기인데 태고교회의 사랑의 예배와 연결되는가?’

 

AC.414 심화 2, ‘초막절은 출애굽의 광야 생활을 기억하는 절기인데 왜 태고교회의 사랑의 예배와

AC.414 심화2. ‘초막절은 출애굽의 광야 생활을 기억하는 절기인데 왜 태고교회의 사랑의 예배와 연결되는가?’ AC.414의 마지막 부분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 사람들이 장막에서 거룩한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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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3, 창4:20, ‘아다가 신앙의 천적인 것들의 어머니인 이유 - 야발이 뜻하는 사랑과 선’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창4:20) AC.413‘아다’(Adah)가 신앙의 천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의미한다는 사실은, 그의 맏아들 야발이 ‘장막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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