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결혼을 포기하면 더 거룩해지는가?’ - 사제와 수도자의 독신을 바라보는 스베덴보리의 렌즈

 

1. 독신이라는 선택에 담긴 사랑과 헌신

 

‘신앙의 쉼터’ 영상은 가톨릭 사제와 수도자들이 왜 결혼하지 않는지를 설명하면서, 그 독신 생활을 단순한 금욕이나 교회법의 강제가 아니라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으로 소개합니다. 특히 ‘억제가 아니라 사로잡힘’이라는 표현은 이 영상의 중심 메시지를 잘 드러냅니다. 결혼이나 가정이 나쁘기 때문에 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에 사로잡혀 자신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을 기꺼이 내려놓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설명은 수도 생활을 단순히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구를 억누르는 삶으로 이해하는 시각을 넘어, 그 안에 담긴 신앙적 동기를 바라보게 합니다.

 

실제로 가톨릭교회는 사제의 독신을 변경할 수 없는 신앙 교리 자체가 아니라 오랜 전통을 통해 발전한 교회 규율로 이해합니다. 서방 가톨릭교회에서는 사제의 독신을 원칙적으로 요구하지만, 동방 가톨릭교회에서는 이미 결혼한 남성이 사제품을 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교구 사제의 독신 약속과 수도자의 정결·청빈·순명 서원은 제도적으로도 구별됩니다. 영상은 이러한 차이를 비교적 정확하게 소개하면서, 사제의 독신은 목자로서의 봉사와, 수도자의 정결은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는 축성 생활과 특별히 연결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먼저 인정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결혼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사람의 삶이 불완전하거나 사랑이 부족하다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병든 사람을 돌보고, 가난한 사람을 섬기고, 버림받은 이들의 친구가 되어 준 사제와 수도자들의 삶에는 분명히 귀한 사랑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에서도 어떤 사람의 영적 상태를 판단하는 기준은 그가 결혼했는지 독신으로 살았는지가 아니라, 그가 무엇을 사랑했고 어떤 선을 실제로 행했는지에 있습니다. 따라서 독신 생활의 신학적 의미를 검토하는 것과 그 생활을 선택한 사람들의 진실한 헌신을 존중하는 것은 서로 충돌하지 않습니다.

 

2. 독신이 하늘나라를 미리 보여 준다는 주장

 

영상에서 가장 깊이 검토해야 할 부분은 사제와 수도자의 독신이 ‘하늘나라를 미리 살아 보여 주는 표징’이라는 설명입니다. 가톨릭교회는 마태복음 22장 30절의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는 말씀을 중요한 성경적 근거로 삼습니다. 지상의 혼인은 아름답고 거룩하지만 영원한 삶에서는 그 형태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으며, 따라서 혼인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는 사람은 장차 완성될 하늘나라의 삶을 지금부터 미리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이 해석은 가톨릭 신학 안에서 일관된 의미를 가집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1758, HH)을 읽으면 전혀 다른 설명을 만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HH.366에서 천국에도 혼인이 있다고 명확하게 말합니다. 천사들은 모두 인간으로 살았던 사람들이며, 인간이 남자와 여자로 창조된 질서는 죽음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천국의 혼인은 지상의 혼인과 여러 면에서 다르지만, 그 본질에서는 더욱 깊고 완전한 사랑의 결합이라고 설명합니다.

 

HH.367에서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혼인을 두 사람이 하나의 마음을 이루는 결합이라고 설명합니다. 인간의 마음을 이루는 ‘이해’(understanding)와 ‘의지’(will)가 하나를 이룰 때 참된 인간의 마음이 형성되듯, 참된 혼인에서도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존재로 남아 있으면서 내적으로 하나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남녀가 함께 생활하거나 서로에게 애정을 느끼는 관계를 넘어섭니다. 선과 진리의 결합, 사랑과 지혜의 결합이 인간관계 안에 실제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참된 결혼애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은 결혼을 넘어선 독신의 세계가 아닙니다. 오히려 지상에서 불완전하게 경험했던 참된 결혼애가 그 내적 본질을 온전히 드러내는 세계입니다. 이는 가톨릭의 독신 이해와 단순한 강조점의 차이를 넘어, 영원한 삶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의 차이입니다. 가톨릭은 독신을 장차 완성될 하늘나라의 표징으로 이해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선과 진리가 결합하는 참된 혼인 자체에서 하늘나라의 질서를 발견합니다.

 

3. 스베덴보리가 영구 독신 서원을 경계한 이유

 

이 문제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 주는 저작은 ‘결혼애’(Conjugial Love, 1768, CL)입니다. 특히 CL.155와 CL.156은 사제와 수도자의 독신을 살펴볼 때 피할 수 없는 본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CL.155에서 영구적인 독신을 서원했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에게 참된 정결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고 설명합니다. 참된 정결은 단순히 성적 행위를 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인간 안에 있는 결혼애가 올바른 질서에 따라 보존되고 정화되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구별이 있습니다. 인간은 외적 행동을 억제할 수 있지만, 외적인 억제가 곧 내적 사랑의 변화를 뜻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결혼하지 않고 평생 정결하게 생활한다고 해도, 그 내면이 욕망과 자기중심적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 독신 자체가 그를 거룩하게 만들지는 못합니다. 반대로 결혼한 사람이 배우자를 진실하게 사랑하고, 자신의 이기심을 버리며, 상대방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처럼 여기게 된다면 그 사람은 혼인 생활을 통하여 내적으로 정화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CL.156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혼인의 상태가 독신의 상태보다 우선한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혼인이 창조 때부터 세워진 질서이며, 선과 진리의 결합에서 비롯되고, 주님과 교회의 결합에 상응하기 때문입니다. 이 주장은 모든 사람이 반드시 결혼해야 한다거나, 독신자는 영적으로 열등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혼인의 거룩함을 독신보다 낮은 것으로 여기는 종교적 사고를 근본적으로 바로잡으려는 가르침입니다.

 

더욱 주목할 부분은 CL.155에서 수도원 생활을 했던 사람들도 죽음 이후에는 지상에서 했던 서원에서 풀려나 자유롭게 자신의 삶을 선택하게 된다고 설명한다는 사실입니다. 참된 결혼애를 원하는 사람은 그에 맞는 혼인 생활로 인도되고, 독신 생활을 원하는 사람은 자신의 사랑과 상태에 맞는 공동체에서 생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외적인 종교 제도가 영원한 삶의 형태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적 사랑이 드러나 그에 상응하는 삶을 이루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이 대목은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수도 생활의 헌신 자체를 무가치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구적 독신 서원을 영적으로 더 높은 상태의 보증처럼 이해하는 것은 분명하게 경계합니다. 천국의 질서는 인간이 지상에서 어떤 종교적 약속을 했는지보다, 그 약속을 지키는 동안 어떤 사랑을 자신의 생명으로 받아들였는지에 따라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4. ‘나를 비워야 하나님이 들어오신다’는 말의 속뜻

 

영상의 후반부에는 매우 인상적인 표현이 등장합니다. ‘내가 나로 가득 차 있으면 하느님이 들어오실 자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외로움의 십자가를 견디며 자신을 비울 때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으로 흘러나온다고 설명합니다. 이 말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에 관한 가르침과 깊이 연결될 수 있습니다. 다만 무엇을 비워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더욱 세밀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인간이 비워야 할 것은 결혼이나 재산, 가족관계와 같은 외적 삶의 형태 자체가 아닙니다. 인간이 참으로 버려야 할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고, 자신을 모든 판단과 사랑의 중심에 놓으려는 ‘프로프리움’(proprium)입니다. 인간은 혼자 살면서도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일 수 있고, 가족과 함께 살면서도 자신을 버리고 이웃을 위해 살아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거듭남은 외적 관계의 수를 줄이는 일이 아니라, 그 관계들 안에서 자신의 사랑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변화시키는 일입니다.

 

이 점에서 독신 생활과 결혼 생활은 서로 다른 환경이지만, 동일한 영적 과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독신자는 자신의 시간과 자유를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에 바칠 수도 있고, 자신의 안락함과 독립성을 지키는 데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결혼한 사람 역시 배우자와 자녀를 자신의 소유물처럼 여기며 살아갈 수도 있고, 그들을 주님께서 맡기신 이웃으로 받아들이며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싸움은 같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한 사랑이 중심이 될 것인가, 아니면 주님께 받은 사랑으로 이웃을 섬길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비운다’는 말은 세상에서 물러나거나 인간적인 사랑을 포기한다는 뜻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때로는 가정을 이루고 평생 한 사람을 사랑하는 과정이야말로 자기중심적 사랑을 내려놓는 가장 구체적이고 끈질긴 훈련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배우자의 약함을 받아들이고, 서로의 잘못을 용서하며, 자신이 원하는 것보다 상대방에게 참으로 유익한 것을 선택하는 일은 단순한 감정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이 실제 행동으로 나타나면서 인간의 내면을 변화시키는 거듭남의 과정입니다.

 

5.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상징과 실제 결혼애

 

영상은 수도자가 자신의 온 삶을 그리스도께 봉헌한다는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상징을 사용합니다. 가톨릭 수도 전통에서 이러한 표현은 깊은 신앙적 의미를 지니며, 실제 혼인을 뜻하기보다 주님께 대한 온전한 사랑과 충실함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상응 이해를 적용할 때는 이러한 상징을 특정한 생활 형태에만 독점적으로 연결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로 표현되는 것은 교회가 주님에게서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분과 결합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별이나 혼인 여부가 아니라 주님과 인간 사이에 이루어지는 영적 결합입니다. 교회가 신부라는 것은 교회가 주님을 다른 그 어떤 걸로도 대신할 수 없는 사랑의 근원으로 받아들이며, 그분의 진리를 자신의 생명으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독신 수도자만이 특별한 의미에서 주님의 신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에 따라 살아가는 모든 사람과 교회가 이 상응의 의미에 참여합니다.

 

그렇다면 참된 결혼애는 오히려 이 영적 진리를 더욱 풍성하게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남편과 아내 사이의 참된 결합은 주님과 교회의 결합에 상응하고, 궁극적으로 선과 진리의 결합에서 그 생명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결혼은 주님께 대한 사랑을 방해하는 세속적인 관계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참된 결혼애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이 인간 사이에서 가장 내밀하고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방식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구별해야 할 것은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와 참된 결혼애입니다. 결혼했다고 해서 누구나 자동으로 거룩한 사랑을 경험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독신으로 살았다고 해서 참된 결혼애를 이해할 가능성이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마음속에 선과 진리가 결합할 수 있는 질서가 형성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내적 질서가 지상의 결혼 생활에서도, 독신으로 수행하는 이웃 사랑의 삶에서도 주님을 향한 참된 사랑의 기준이 됩니다.

 

6. ‘혼자 사는 사제가 부부를 상담할 수 있는가?’

 

영상은 처음에 제기한 현실적인 질문, 곧 결혼하지 않은 사제가 어떻게 부부 문제를 상담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도 답합니다. 사제는 많은 가정의 기쁨과 고통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때로는 당사자보다 더 넓은 관점에서 갈등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설명에는 충분한 타당성이 있습니다. 결혼 경험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한 사람의 통찰이나 상담 능력을 부정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나 반대 방향의 과장도 경계해야 합니다. 많은 부부를 상담했다는 사실만으로 결혼의 내적 경험을 모두 이해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부부 사이에는 함께 살아 보지 않고서는 온전히 알기 어려운 관계의 깊이와 책임, 친밀함과 갈등이 있습니다. 따라서 목회적 상담에서는 성경과 신학에 대한 이해뿐 아니라 인간관계에 대한 실제적 지식, 심리적 통찰, 경청하는 태도, 그리고 필요할 때 전문적 도움을 연결하는 겸손이 함께 요구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더욱 중요한 질문은 상담자가 결혼했는지 독신인지가 아니라, 그가 부부에게 어떤 사랑을 가르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뜻을 상대방에게 관철시키는 것을 사랑이라고 가르치는가, 아니면 서로의 자유와 인격을 존중하면서 선과 진리 안에서 하나 되어 가는 길을 가르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부부를 단지 이혼하지 않고 함께 살아야 하는 사람들로 보는가, 아니면 서로를 통해 내적으로 변화되고 거듭나도록 부름받은 사람들로 보는가 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참된 목회적 지혜는 어떤 삶을 경험했다는 사실 하나에서 자동으로 생기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인간을 어떻게 사랑하시며, 그 사랑이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질서를 이루어야 하는지 이해하고 실제로 살아가려는 노력에서 자랍니다. 그런 의미에서 결혼한 목회자도 배워야 하고 독신 사제도 배워야 합니다. 무엇보다 상담받는 사람들의 내면을 자신이 모두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7. 하늘나라의 예고편은 독신인가, 사랑인가?

 

영상은 사제와 수도자들의 독신을 ‘지상에 먼저 도착한 하늘나라의 예고편’이라고 표현합니다. 매우 아름답고 인상적인 비유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천국관을 적용하면 그 비유의 중심을 조금 다르게 놓게 됩니다. 하늘나라를 미리 보여 주는 것은 독신이라는 생활 형태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삶 안에 실제로 나타나는 천국의 사랑입니다.

 

천국은 외적인 신분이나 종교적 직책에 따라 이루어지는 세계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묘사하는 천국에서는 모든 천사가 주님에게서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며, 자신에게 주어진 고유한 쓰임 안에서 기쁨을 누립니다. 그 기쁨의 중심에는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다른 존재의 행복을 위한 사랑이 있습니다. 이러한 천국의 원리는 지상의 수도원에서도 나타날 수 있고, 병원이나 학교에서도 나타날 수 있으며, 자녀를 돌보는 평범한 가정에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독신 수도자가 가난한 이들의 상처를 돌보며 기쁨을 누리는 모습은 분명 하늘나라의 사랑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늙고 병든 배우자를 오랜 세월 돌보는 남편이나 아내의 모습 역시 같은 사랑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장애가 있는 자녀를 평생 품고 살아가는 부모의 헌신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리에서 이웃을 위해 묵묵히 일하는 사람의 삶도 그러합니다. 이 모든 삶에서 중요한 것은 사랑의 대상이 얼마나 많은가가 아니라 그 사랑이 얼마나 진실하며, 얼마나 자신을 내려놓고 상대방의 선을 구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특히 주목할 것은 결혼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사랑이 단순히 여러 사랑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는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입니다. 참된 결혼애는 선과 진리의 결합이라는 천국의 가장 깊은 질서와 연결됩니다. 물론 이것이 모든 기혼자가 독신자보다 영적으로 우월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참된 결혼애를 잃어버린 혼인은 외적인 관계만 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혼의 본질을 하나님과의 결합에 대한 장애물처럼 이해하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제시하는 창조와 천국의 질서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합니다.

 

8.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어떤 삶인가?

 

이 영상을 통하여 우리는 사제와 수도자들의 헌신을 새롭게 존중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그들의 삶을 존중하는 것과 그 독신 생활에 부여된 모든 신학적 의미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임을 분별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종교적 금욕이나 자기희생의 외적인 크기보다, 그 안에서 실제로 어떤 사랑이 형성되고 있는지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이는 종교적 헌신을 평가절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헌신을 더욱 깊은 기준 앞에 세우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모든 재산을 내놓고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고 해도, 그 내면에서 자기 의로움이나 영적 우월감을 키우고 있다면 그 외적 희생은 참된 거듭남으로 이어지지 못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세상 사람들 눈에는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가정생활을 하면서도, 날마다 자신의 이기심을 돌아보고 배우자와 자녀와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그 일상 속에서 주님의 나라를 향해 자라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포기했는지만이 아니라, 그 포기를 통하여 무엇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시 영상의 마지막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당신이 진짜로 찾는 행복은 어디에 있느냐, 그리고 당신의 사랑은 결국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 이 질문은 독신자와 기혼자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 질문을 한 걸음 더 깊이 이끕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인간적 사랑을 포기해야 하는가, 아니면 하나님께 받은 사랑으로 인간적 관계 자체를 정화하고 거룩하게 만들어 가야 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하지 않는다’는 고백에는 진실한 헌신이 담겨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배우자를 더욱 진실하게 사랑한다’는 고백에도 똑같이,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설명에 따르면 참된 결혼애의 질서 안에서 더욱 깊이 드러나는 영적 진리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인간적 사랑을 모두 버린 채 홀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사랑을 주님으로부터 받아 선한 질서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독신인가 결혼인가 하는 외적인 구분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삶을 통하여 어떤 사랑을 이루고 계시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독신의 헌신도, 결혼의 헌신도 그 자체가 구원의 공로나 거룩함의 보증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사랑으로 자신과 이웃의 삶을 변화시켜 가는 거듭남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가 보여 주는 천국은 바로 그러한 사랑이 가장 온전한 형태로 실현되는 곳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은 누가 더 많은 것을 포기했는가가 아니라, 누구의 삶에서 주님의 사랑이 더욱 진실하게 나타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독신자의 조용한 헌신 속에서 나타나든, 부부가 평생 서로를 사랑하는 삶 속에서 나타나든, 모든 참된 선의 근원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 영상에서 인용한 가톨릭의 독신 교회법과 그리스도론적·교회론적·종말론적 근거는 바오로 6세의 1967년 회칙 ‘사제 독신 생활’과 교회법 제277조에서 확인됩니다. 다만 ‘1139년에 독신이 처음 시작되었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서방 교회의 독신 규율은 그 이전부터 발전해 왔으며 제2차 라테라노 공의회는 그 제도화에서 중요한 단계였습니다.

 

제가 이번 영상에서 가장 주목한 것은 ‘독신으로 살면 장차 천국에서 누릴 삶을 미리 살아가는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천국관과 정면으로 만나는 주제이기 때문에, 단순히 가톨릭과 개신교의 독신에 대한 입장 차이로 이해하기보다 ‘천국에서 인간의 사랑은 어떤 모습으로 완성되는가?’라는 문제로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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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응답이 안 일어나는 건 네 믿음이 부족해서야’

 

‘기도응답이 안 일어나는 건 네 믿음이 부족해서야.’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의외로 자주 듣게 되는 말입니다. 병이 낫지 않거나, 자녀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거나, 무너진 관계가 회복되지 않을 때 ‘더 믿어야 합니다’, ‘의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기도하세요’라는 권면을 듣습니다. 이런 말에는 분명 성경적인 면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믿음을 강조하셨고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마21:22). 실제로 불신앙 때문에 주님의 역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향에서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시니라’라고 한 말씀도 있습니다(마13:58).

 

그러나 ‘믿음이 중요하다’는 것과 ‘기도한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그건 분명히 믿음이 부족해서다’는 전혀 같은 말이 아닙니다. 후자의 공식을 적용하면 성경에서 가장 믿음이 깊었던 사람들의 기도조차 설명하기 어려워집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바울입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있는 ‘육체의 가시’가 떠나가기를 세 번이나 주님께 간구했습니다(고후12:8). 그러나 가시는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대신 주님께서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고후12:9). 바울의 믿음이 부족해서였을까요? 본문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요청한 것과 주님께서 주신 응답의 형태가 달랐던 것입니다.

 

더 결정적인 장면은 겟세마네입니다. 주님께서는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어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마26:39). 결국 그 잔은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감히 주님의 믿음이 부족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 장면만으로도 ‘내가 원하는 결과가 일어나지 않음 = 믿음 부족’이라는 공식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자신의 원함을 아뢰면서도 그것을 아버지의 뜻 아래 두는 가장 깊은 기도를 보여 주셨습니다.

 

따라서 믿음과 기도응답의 관계를 좀 더 섬세하게 보아야 합니다. 불신앙은 사람이 주님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 장애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내가 구한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그 원인을 내 믿음의 부족에서 찾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섭리 전체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다른 사람의 선택이 관계된 문제에서는 인간의 자유도 고려해야 합니다. 부모가 아무리 간절히 기도한다고 해도 주님께서 성인이 된 자녀의 자유를 제거하고 강제로 마음을 바꾸시는 것은 아닙니다.

 

눅15의 둘째 아들이 좋은 예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했지만 먼 나라에 있는 아들을 강제로 끌고 오지 않았습니다. 아들이 ‘스스로 돌이켜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리라’라고 해야 했습니다(눅15:17-18). 이것은 부모의 기도가 무의미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부모의 기도를 통하여 자녀에게 수많은 길을 열어 주시고 선과 진리를 공급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 자체를 강제로 심어 넣지는 않으십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freedom)와 ‘합리성’(rationality)을 보존하시면서 사람을 이끄시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문제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주님의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는 내가 지금 원하는 결과 하나만을 향하지 않고 나의 영원한 구원과 거듭남(regeneration)을 향합니다. 우리는 눈앞의 한 장면을 보지만 주님께서는 삶 전체를 보십니다. 그래서 내가 보기에 분명히 좋은 것처럼 보이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고, 반대로 지금은 실패와 손실처럼 보이는 일이 훗날 전혀 다른 의미를 드러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고통을 ‘하나님께서 일부러 보내신 훈련’이라고 해석해서도 안 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인간의 자유 및 자연계의 질서 안에서 허용하시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이 점을 놓치면 ‘믿음이 부족해서 응답받지 못했다’는 말은 고통받는 사람에게 매우 잔인한 말이 될 수 있습니다. 중병에 걸린 자녀를 위해 부모가 밤낮으로 기도했다고 합시다. 교회도 함께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결국 아이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부모에게 ‘조금만 더 믿었으면 하나님께서 살려 주셨을 텐데’라고 말한다면 자녀를 잃은 슬픔 위에 ‘내 믿음이 부족해서 아이가 죽었다’는 또 하나의 짐까지 얹는 셈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런 판결권을 주지 않았습니다.

 

암 환자가 낫지 않았다고 해서 믿음이 부족했다고 단정할 수 없고, 자녀가 돌아오지 않았다고 해서 부모의 기도가 부족했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무너진 결혼이 회복되지 않았다고 해서 어느 한 사람의 믿음이 부족했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 상황에 작용하는 수많은 조건과 사람들의 자유를 모두 알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무엇을 허용하시고 그 허용된 상황 속에서 어떤 영원한 선을 이루어 가시는지도 다 알지 못합니다.

 

여기에는 ‘프로프리움’(proprium)의 위험도 숨어 있습니다. ‘나는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반드시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확신이 얼핏 강한 믿음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동일시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기도는 주님의 뜻을 구하는 일이 아니라 내 뜻에 하나님의 이름을 붙이는 일이 됩니다. 결과가 다르게 나타났을 때에는 자신을 정죄하거나 다른 사람의 믿음을 정죄하게 됩니다.

 

참된 믿음은 오히려 더 겸손합니다. ‘주님, 저는 이것을 간절히 원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것이 선합니다. 그러나 저는 모든 것을 알지 못합니다. 주님께서는 제가 보지 못하는 것까지 보시니 제 뜻보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믿음이 약한 기도가 아닙니다. 겟세마네에서 주님께서 친히 보여 주신 기도의 질서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느부갓네살 앞에서 한 고백도 이 점을 놀랍도록 잘 보여 줍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풀무불에서 건져 내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자신들은 우상에게 절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단3:18). 이것은 ‘내 믿음이 충분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내가 원하는 결과를 주실 것이다’라는 믿음보다 훨씬 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역사하시지 않더라도 하나님을 신뢰하겠다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가 믿음의 깊이를 가장 잘 보여 주는 표현 가운데 하나인지도 모릅니다. 믿음은 결과를 통제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결과를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주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응답이라는 말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요청한 일이 그대로 이루어졌을 때만 ‘응답받았다’고 말한다면 바울의 기도는 실패한 기도가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바울에게 분명히 응답하셨습니다. 다만 문제를 제거하지 않고 그 문제 가운데 살아갈 은혜를 주셨습니다. 응답은 때로 상황의 변화일 수도 있고, 상황을 견딜 힘일 수도 있으며, 내가 원했던 문을 여는 대신 다른 길로 인도하시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이 생애 동안 왜 그렇게 되었는지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자신을 돌아볼 필요는 있습니다. 내가 욕심으로 구하고 있지는 않은지, 악한 목적을 위해 기도하고 있지는 않은지, 기도만 하면서 내가 해야 할 책임을 피하고 있지는 않은지, 주님의 뜻보다 내 뜻을 고집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야 합니다. 야고보도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약4:3). 그러나 이 말씀은 먼저 나 자신을 살피기 위한 말씀이지, 고통받는 다른 사람에게 ‘네 믿음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판결하기 위한 무기가 아닙니다.

 

따라서 ‘기도응답이 안 일어나는 건 네 믿음이 부족해서야’라는 말에는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진리가 들어 있지만, 그것을 모든 미응답에 적용하는 순간 위험한 단순화가 됩니다. 믿음의 부족이 주님의 역사를 받아들이는 데 장애가 되는 경우는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한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 사람의 믿음을 판정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조건이 있기 때문입니다.

 

목회적으로도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네 믿음이 부족하다’고 원인을 찾아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곁에서 함께 견디는 것입니다. 함께 기도하고, 지금 할 수 있는 선을 찾고, 그 사람이 자기 자신을 정죄하지 않도록 돕고, 결과를 주님의 지혜와 사랑에 맡길 수 있도록 곁에 있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체어리티(charity)에 더 가깝습니다.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믿음의 부족이 기도를 방해할 수는 있지만, 내가 구한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내 믿음이 부족했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번 글의 핵심은 더 짧게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믿음은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어 내는 능력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결과가 오지 않을 때에도 주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그것을 단 한마디로 보여 주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단3:18)

 

 

 

SL.23, ‘기도 많이 하면 하나님께서 내 소원을 들어 주신다’

‘기도 많이 하면 하나님께서 내 소원을 들어 주신다’ ‘기도 많이 하면 하나님께서 내 소원을 들어 주신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이라면 매우 익숙한 말입니다. ‘기도하면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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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많이 하면 하나님께서 내 소원을 들어 주신다’

 

‘기도 많이 하면 하나님께서 내 소원을 들어 주신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이라면 매우 익숙한 말입니다. ‘기도하면 됩니다’, ‘끝까지 기도하세요’, ‘기도의 분량을 채우세요’, ‘하나님께 매달리면 반드시 응답하십니다’라는 권면도 자주 듣습니다. 실제로 성경은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가르칩니다. 주님께서는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7:7). 그러므로 간절히 기도하고 끈기 있게 주님을 찾는 것은 분명 귀한 신앙의 태도입니다.

 

문제는 ‘기도 많이 하면’과 ‘내 소원을 들어 주신다’ 사이에 우리가 어떤 인과관계를 만들어 놓느냐입니다. 자칫 기도의 양이 하나님의 결정을 움직이는 힘처럼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한 시간 기도했는데 응답이 없으면 세 시간을 기도하고, 일주일 기도했는데 이루어지지 않으면 사십 일을 기도하며, 많은 사람이 함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결국 마음을 바꾸실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기도는 주님과의 교제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사용하는 영적 수단이 되기 쉽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끈질긴 기도를 권하는 말씀도 있습니다. 눅18의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가 대표적입니다. 과부는 계속 찾아가 자신의 원한을 풀어 달라고 요청했고 결국 재판관은 그의 청을 들어줍니다. 그러나 이 비유를 ‘하나님도 계속 조르면 결국 들어주신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곤란합니다. 주님께서는 오히려 불의한 재판관과 하나님을 대조하십니다. 불의한 사람조차 끈질긴 호소를 듣는다면 하물며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의 부르짖음을 듣지 않으시겠느냐는 것입니다. 기도의 핵심은 하나님을 지치게 만드는 데 있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끝까지 그분을 향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에 관한 가장 중요한 장면 가운데 하나가 겟세마네입니다. 주님께서는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은 분명한 소원입니다. 고통을 앞두고 자신의 원함을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기도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이어집니다(마26:39).

 

이 한 문장 안에 기도의 본질이 거의 다 들어 있습니다. 기도는 원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아프면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고, 자녀의 문제가 해결되기를 기도할 수 있으며, 경제적인 어려움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취업, 결혼, 사업, 관계의 회복을 놓고 구체적으로 기도해도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이미 아시지만, 그 소원을 주님 앞에 가져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기도의 마지막에는 언제나 더 깊은 문이 하나 열려 있어야 합니다. ‘주님, 이것이 제가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알지 못하는 것이 있으니 제 뜻보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기도는 소원성취와 달라집니다. 소원성취의 중심에는 ‘내가 원하는 결과’가 있지만 기도의 중심에는 ‘주님’이 계십니다. 소원성취에서는 하나님이 내 목적을 이루어 주시는 수단이 되기 쉽지만, 참된 기도에서는 내가 원하는 것까지 주님 앞에 내려놓고 주님의 선하신 질서를 받아들이려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보면 이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주님의 신적 섭리는 인간의 순간적인 행복만을 목표로 하지 않고 그의 영원한 구원과 거듭남(regeneration)을 향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지금 당장 자기에게 무엇이 좋은지를 완전하게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돈이 생기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돈이 우리의 탐욕과 자기 사랑을 키울 수도 있습니다. 어떤 관계가 반드시 이루어져야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관계가 오히려 우리를 무너뜨릴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지금은 실패와 손실처럼 보이는 일이 훗날 우리를 더 큰 악에서 보호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고난은 모두 하나님께서 일부러 보내신 훈련이다’라고 단정해서도 안 됩니다. 여기에서도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허용하시는 것을 구별해야 합니다. 세상에는 인간의 악한 선택에서 생기는 고통도 있고, 자연계의 질서와 한계에서 발생하는 질병과 재난도 있으며, 다른 사람의 자유 때문에 우리가 겪게 되는 고통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 모든 악과 고통을 직접 만들어 보내신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허용된 것 안에서도 가능한 한 사람을 선으로 이끄시며, 영원한 것을 위하여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간절히 기도했는데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기도가 부족했다’고 결론 내릴 수 없습니다. 이것은 때때로 신앙인에게 매우 잔인한 말이 될 수 있습니다. 병든 가족을 위해 밤을 새워 기도했는데 결국 세상을 떠났다고 합시다. 그 사람에게 ‘조금만 더 믿고 기도했으면 나았을 텐데’라고 말한다면 남은 사람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죄책감을 씌울 수 있습니다. 기도의 응답 여부를 기도의 분량이나 믿음의 강도와 기계적으로 연결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도 자신의 ‘육체의 가시’를 놓고 주님께 세 번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받은 대답은 가시의 제거가 아니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고후12:9). 바울의 기도가 부족해서였을까요? 믿음이 약해서였을까요? 그렇게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는 분명히 구했고 주님께서는 응답하셨지만, 그 응답은 바울이 요청한 것과 다른 형태였습니다.

 

여기에서 ‘기도 응답’이라는 말 자체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흔히 내가 원한 일이 일어나면 ‘응답받았다’고 말하고, 일어나지 않으면 ‘아직 응답받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응답의 기준이 언제나 ‘내 소원이 이루어졌는가’가 됩니다. 주님께서 ‘그것은 네게 좋지 않다’고 하시는 것도 응답일 수 있고, ‘아직 아니다’도 응답일 수 있으며, 바울에게처럼 ‘그것을 없애 주는 대신 그것을 견딜 은혜를 주겠다’는 것도 응답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오래 기도해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모르시기 때문도 아니고, 하나님을 설득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도 아닙니다. 오히려 긴 기도 속에서 변화되는 쪽은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주님, 이것을 꼭 주십시오’라고 시작했던 기도가 어느 순간 ‘주님, 이것이 정말 제게 선한 것입니까?’로 바뀌고, 더 깊어지면 ‘주님, 제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선을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로 바뀔 수 있습니다. 기도가 소원을 주님께 관철하는 과정에서 주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으로 내가 변화되는 과정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유’(freedom)와 ‘합리성’(rationality)의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고 판단하고 선택하는 능력을 없애지 않으십니다. 기도했다고 해서 해야 할 일을 대신 해 주시는 것도 아닙니다. 취업을 위해 기도했다면 이력서를 써야 하고, 관계의 회복을 위해 기도했다면 사과해야 할 것이 있으면 사과해야 하며, 건강을 위해 기도했다면 필요한 치료와 생활의 변화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기도는 인간의 책임을 대신하는 마법이 아닙니다.

 

그래서 ‘기도했으니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 주시겠지’라는 태도와 참된 신뢰도 구별해야 합니다. 주님께 맡긴다는 것은 내가 할 일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자유와 합리성 안에서 성실하게 행하되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결과를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체념이 아니라 신뢰입니다.

 

여기에도 ‘프로프리움’(proprium)이 숨어들 수 있습니다. 아주 역설적이지만 기도를 많이 하면서도 자기 뜻을 더 강하게 붙들 수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오래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왜 안 들어 주시는가?’라는 생각 속에는 어느 순간 ‘내가 이 정도 기도했으니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해 주셔야 한다’는 거래의식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기도의 분량이 일종의 공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조차 자기 뜻을 관철하기 위한 수단이 됩니다.

 

참된 기도는 그 반대 방향으로 갑니다. 오래 기도할수록 ‘내 뜻대로 되어야 한다’는 마음이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는 나보다 더 멀리 보신다’는 신뢰가 깊어집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절대화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의 가장 깊은 열매는 반드시 ‘원하는 것을 얻는 것’만이 아니라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해도 주님을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주기도문도 이것을 잘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중심은 ‘내 소원이 이루어지이다’가 아니라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입니다(마6:10). 물론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는 간구도 있습니다. 필요한 것을 구합니다. 그러나 그 간구를 둘러싸고 있는 더 큰 질서는 주님의 이름, 주님의 나라, 주님의 뜻입니다. 우리의 필요가 주님의 뜻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기도를 많이 한다는 것은 분명 귀한 일입니다. 문제는 ‘얼마나 오래 기도했는가?’보다 그 기도를 통하여 ‘누구의 뜻을 구하게 되었는가?’입니다. 한 시간을 기도하고도 자기 뜻만 더욱 완강하게 붙들 수 있고, 짧게 ‘주님, 제가 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을 따르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면서 깊은 신뢰로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기도의 깊이는 반드시 시간의 길이와 비례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라는 약속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것을 하나님께 무엇이든 요구하면 그대로 받을 수 있다는 백지수표로 이해하기보다는, 주님을 향하여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사람에게 주님께서 참으로 필요한 선을 주신다는 약속으로 읽는 것이 더 온전합니다. 실제로 눅11의 병행 본문에서는 결론이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십니다(눅11:13). 가장 깊은 응답은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것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 많이 하면 하나님께서 내 소원을 들어 주신다’는 말에는 귀한 진리가 있습니다. 주님께 구해야 하고, 포기하지 않고 기도해야 하며, 우리의 가장 구체적인 필요와 소원까지 주님 앞에 가져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기도의 양이 충분하면 하나님께서 결국 내 뜻대로 해 주신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기도의 방향이 뒤집힙니다.

 

기도는 주님을 내 뜻으로 움직이는 기술이 아니라, 주님 앞에서 내 뜻이 정화되고 주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내가 변화되는 거룩한 관계입니다.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기도의 목적은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관철하는 데 있지 않고, 내가 원하는 것까지 주님께 아뢰면서 무엇이 참으로 선한지를 주님에게서 배우고 그분의 뜻을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글의 핵심을 더 짧게 표현한다면 이것이겠습니다.

 

‘기도를 많이 해서 주님의 뜻을 내 뜻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면서 내 뜻이 주님의 뜻을 향하여 움직이는 것입니다.’

 

겟세마네의 주님께서 그 모든 것을 한 문장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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