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2026/10/18)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8, ‘성도들아 찬양하자’, 찬131, ‘다 나와 찬송부르세’입니다.

 

오늘은 창5 절별 주석 그 두 번째, 6절로 14절, AC 글 번호로는 496번에서 509번입니다. 먼저 창세기 본문입니다.

 

 

6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7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8그는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9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10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1그는 구백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12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13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4그는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6-14)

 

 

제목은

 

흐려지는 퍼셉션, 변함없는 주님의 섭리

 

 

이며, 다음은 이 특별한 예배를 위한 ‘3분 요약’입니다.

 

오늘 리딩에 들어가기 전에, 지금까지의 큰 흐름을 잠깐 돌아보겠습니다. 우리는 스베덴보리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라틴 Arcana Coelestia, 영어 Secrets of Heaven, 天界秘義, 1749-1756, 창, 출 속뜻 주석, 총 10,837개 글)를 따라 창세기의 문자적 의미를 존중하면서 그 속뜻을 함께 읽고 있습니다. 창1에서는 천지창조를 인간의 거듭남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여섯 날의 과정을 통하여 사람을 영적으로 거듭나게 하시고, 일곱째 날의 안식에 이르러 사랑으로 살아가는 천적 인간으로 이끄십니다.

 

창2에서는 에덴동산을 통하여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알아차리는 ‘퍼셉션’(perception)을 지녔으며, 신앙은 사랑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창3에서는 사람이 주님보다 자신의 감각과 ‘프로프리움’(proprium)을 신뢰하면서 이 질서가 무너졌습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인간이 더 깊은 파멸에 이르지 않도록 보호하시며 구원의 길을 보존하셨습니다.

 

창4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charity)의 관계를 살펴보았습니다. 가인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을 통해 체어리티인 아벨이 죽임을 당했고, 그 계열은 라멕에 이르러 황폐해졌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가인의 표’를 통하여, 그러나 신앙 자체를 보존하시고, 셋과 에노스를 통하여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가 다시 이어지게 하셨습니다. 인간의 황폐보다 더 깊은 주님의 섭리를 보았습니다.

 

지난주 시작한 창5에서는 또 다른 계열인 셋 계열을 통해 아담에서 노아까지의 족보가 태고교회로부터 이어지는 여러 교회의 계승과 변화를 나타낸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최초의 태고교회에서는 사랑과 신앙이 하나였고,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퍼셉션하였습니다. 그러나 셋 교회에 이르면서 그 완전성에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오늘은 그 변화가 에노스와 게난으로 이어지면서 어떻게 깊어지는지 살펴봅니다. 특별히 기억할 것은 ‘참된 신앙의 생명은 진리를 아는 데만 있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으로 선을 행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마음으로 오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다음은 오늘 리딩 범위인 AC.496-509 요약입니다.

 

지난주 우리는 창5:1-5을 통하여, 태고교회가 어떤 교회였으며 그 뒤를 이은 셋(Seth) 교회가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태고교회는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부터 신앙이 나오는 천적 교회였습니다. 그들에게는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주님으로부터 내적으로 알아차리는 ‘퍼셉션’이 있었습니다. 신앙과 사랑은 여전히 결합되어 있었지만, 그러나 셋 교회에 이르면서 사랑의 중심성과 퍼셉션의 완전성에는 이미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오늘은 그다음 말씀인 창5:6-14, AC.496-509를 읽습니다. 여기에는 셋이 에노스(Enosh)를 낳고, 에노스가 게난(Kenan)을 낳으며, 게난이 다시 마할랄렐(Mahalalel)을 낳는 계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지난주와 마찬가지로 이름과 나이, 자녀들의 출생과 죽음이 반복되는 족보입니다. 그러나 속뜻으로는 태고교회로부터 이어진 여러 교회가 어떻게 서로 다른 상태를 거치며 변화해 갔는지를 보여 줍니다.

 

먼저 6절은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라고 합니다. AC.496-498에 따르면 여기서 ‘셋’은 태고교회의 뒤를 이은 두 번째 교회이며, ‘에노스’는 셋 교회로부터 이어져 나온 또 하나의 교회입니다. 셋 교회는 최초의 태고교회보다 덜 천적이었지만, 여전히 가장 오래된 교회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셋이 에노스를 낳았다는 것은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이 태어났다는 사실을 넘어, 한 교회로부터 다음 교회가 이어져 나왔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어졌다’는 사실과 ‘달라졌다’는 사실을 함께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에노스 교회는 셋 교회로부터 무엇인가를 이어받았지만, 셋 교회와 완전히 같은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앞선 교회가 지녔던 천적 생명과 퍼셉션이 후대의 교회에 그대로 전달된 것이 아니라, 그 본질적인 것들이 점차 감소하였습니다. 따라서 창5의 계보는 단순히 여러 교회가 차례로 생겨났다는 기록이 아니라, 교회의 내적 상태가 세대를 따라 어떻게 달라져 갔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AC.497은 이러한 변화를 ‘교회는 시간이 흐르고 세대가 지나면서 본질적인 것들에 있어 점차 감소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교회의 외적 모습이 반드시 먼저 사라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교회라는 이름도 남아 있고, 신앙의 형식도 남아 있으며, 앞선 세대가 전해 준 진리도 상당 부분 보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있어야 할 주님을 향한 사랑과 선을 행하는 생명, 그리고 그 사랑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퍼셉션하는 능력은 점차 약해질 수 있습니다. 이어 7절과 8절에서는 셋이 에노스를 낳은 뒤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고,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다고 합니다. AC.499는 여기서도 ‘날들’과 ‘연수’는 때와 상태들을, ‘아들들과 딸들’은 진리들과 선들을, ‘죽었다’는 것은 그 교회의 고유한 상태가 끝났음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셋 교회가 오래 살았다는 것은 그 교회가 일정한 상태들을 지나며 존속했다는 뜻이고, 자녀들을 낳았다는 것은 그 안에서 진리와 선이 생겨났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죽었다는 것은 셋 교회를 특징짓던 고유한 상태가 더 이상 계속되지 않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것의 완전한 소멸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셋으로부터 이미 에노스라는 다음 교회가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이제 9절은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라고 합니다. AC.500은 에노스를 세 번째 교회, 게난을 네 번째 교회라고 밝힙니다. 에노스는 셋보다 더욱 덜 천적이었지만, 여전히 가장 오래된 교회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이렇게 태고교회에서 셋으로, 셋에서 에노스로, 다시 에노스에서 게난으로 이어지면서 교회의 천적 상태는 점차 약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변화는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AC.501은 이를 설명하기 위하여 두 가지 비유를 사용합니다. 하나는 ‘열매와 씨앗’이고, 다른 하나는 ‘뇌와 그 덮개들’입니다. 열매나 씨앗의 가장 안쪽에는 생명을 품고 있는 중심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열매의 열매’, 또는 ‘씨앗의 씨앗’이라고 표현합니다. 그 중심에서 바깥으로 나아갈수록 본질적인 것은 점차 적어지고, 마침내 얇은 껍질과 덮개에 이릅니다. 뇌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내적인 섬세한 조직으로부터 점차 더 일반적이고 조밀한 덮개들이 이어져 마지막에는 두개골에 이릅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비유를 사용하는 이유는 태고교회 이후의 교회들이 서로 아무 관계 없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 앞선 교회로부터 일정한 질서를 따라 이어졌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최초의 가장 내적 중심으로부터 멀어질수록 그 본질적 생명은 점차 감소하였습니다. 태고교회에서 셋으로, 셋에서 에노스로, 다시 게난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바로 그러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것은 ‘껍질’이나 ‘덮개’ 자체가 악하다는 뜻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껍질은 열매를 보호하고 덮개는 그 안에 있는 것을 감쌉니다. 문제는 껍질이 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어야 할 생명이 점차 사라지는 데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리와 예배, 신앙의 형식과 전통은 모두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심에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가 살아 있지 않다면, 교회는 겉모습을 유지하면서도 그 본질적 생명은 잃어 갈 수 있습니다.

 

AC.502는 이러한 쇠퇴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더욱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그것은 바로 ‘퍼셉션의 완전성이 감소하는 것’입니다. 최초의 태고교회인 ‘사람’, 곧 아담 교회와 그 뒤를 이은 셋과 에노스 교회는 모두 태고교회에 속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지닌 퍼셉션의 완전성은 서로 달랐습니다. 최초의 교회에서는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매우 명료하게 퍼셉션할 수 있었지만, 후대의 교회들에서는 그 능력이 점차 약해지고 더욱 일반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더욱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는 것은 퍼셉션의 범위가 넓어져 더 좋아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전에는 선과 진리의 차이와 그 성질을 매우 분명하고 세밀하게 알아차렸지만, 후대로 갈수록 그것을 점점 덜 명료하게, 보다 막연하게 퍼셉션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처음에는 분명했던 것이 점차 흐릿해졌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퍼셉션의 완전성이 ‘명료하게 퍼셉션하는 능력’에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퍼셉션이 더욱 일반적이고 흐릿한 것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이 줄어든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내적으로 받아들이고 분별하는 능력이 점차 약해진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AC.503에 이르면 퍼셉션에 관한 더욱 깊은 가르침이 나타납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은 단순히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아는 능력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선을 행함으로써 생기는 행복과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행복과 기쁨이 없다면 퍼셉션 능력에는 생명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무엇이 옳은지 알고 무엇이 선인지 분별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선을 실제로 행하기를 사랑하고, 선을 행할 때 기쁨을 느끼는 것이 살아 있는 퍼셉션의 본질이었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는 진리를 아는 것과 선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그 선을 행하는 것이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쓰임’이라는 개념을 소개합니다. 사랑은 단순히 마음속에 있는 좋은 감정이 아닙니다. 사랑은 실제로 선을 행하고 이웃에게 유익을 주는 쓰임으로 나타납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은 이러한 쓰임 안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특히 AC.503은 ‘주님께서는 쓰임으로부터, 쓰임을 통하여, 그리고 쓰임에 따라 생명을 주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생명의 근원이 인간의 행위에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생명의 근원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다만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과 선이 인간 안에서 실제적인 쓰임으로 나타날 때, 그 사랑과 신앙이 살아 있는 생명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단지 아는 것 자체에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진리를 행하는 것, 곧 쓰임 있는 사람이 되는 데서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AC를 읽는 목적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말씀의 속뜻을 많이 알고, 상응을 정확히 이해하며, 교리를 깊이 공부하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앎이 마지막 목적은 아닙니다. 그 진리가 실제 삶에서 사랑과 체어리티가 되고,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진리에 관한 지식은 많아질 수 있어도 그 안의 영적 생명은 그만큼 자라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지난주 살펴본 ‘천국의 기쁨은 쓰임에 있다’는 가르침과 오늘의 AC.503은 깊이 연결됩니다. 천국의 천사들이 이웃을 섬기는 데서 기쁨을 누리는 것처럼, 태고교회 사람들 역시 선을 행하는 데서 행복과 기쁨을 누렸습니다. 사랑은 선을 행하는 데서 기뻐하고, 그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퍼셉션합니다. 이것이 태고교회가 지녔던 천적 생명의 질서였습니다. 그러므로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쇠퇴했다는 것은 단지 특별한 영적 감각이 약해졌다는 뜻만은 아닙니다. 그 퍼셉션에 생명을 주던 사랑과 선한 쓰임의 기쁨 역시 약해져 갔다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사랑의 생명이 약해지면 그 사랑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보는 능력도 함께 흐려지기 때문입니다.

 

이제 10절과 11절에서는 에노스가 게난을 낳은 뒤 자녀들을 낳고, 구백오 세를 살고 죽었다고 합니다. AC.504-505는 여기서도 앞서 설명한 ‘날들과 연수’, ‘아들들과 딸들’, ‘죽음’의 의미가 그대로 적용된다고 밝힙니다. 그러나 AC.505는 한 가지 중요한 구별을 덧붙입니다. 최초의 ‘사람’ 교회와 셋, 에노스라는 세 교회는 뒤에 이어지는 교회들과 비교할 때 열매나 씨앗의 ‘알맹이’와 같았다는 것입니다. 반면 그 뒤에 이어지는 교회들은 그 알맹이를 둘러싼 ‘막과 같은 부분들’에 비유됩니다. 이것은 창5의 계보에 하나의 중요한 경계가 있음을 보여 줍니다. 최초의 사람 교회, 곧 아담 교회에서 셋과 에노스로 이어지는 동안에도 퍼셉션은 점차 감소했지만, 이 세 교회는 여전히 태고교회의 가장 내적 생명에 가까운 교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게난부터는 그 상태가 한층 더 외적인 것으로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이제 12절에서 ‘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라고 합니다. AC.506은 게난을 네 번째 교회, 마할랄렐을 다섯 번째 교회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AC.507에서는 게난 교회의 상태를 더욱 구체적으로 밝힙니다. 게난은 앞선 세 교회처럼 더 완전한 교회들 가운데 포함시키기 어려웠습니다. 앞선 교회들에서는 비교적 명료했던 퍼셉션이 게난에 이르러 더욱 일반적인 것이 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열매나 씨앗의 알맹이를 둘러싼 ‘첫 번째의 더 부드러운 막’에 비유합니다. 여기서도 변화는 갑작스러운 단절이 아닙니다. 게난 교회가 곧바로 가장 바깥의 딱딱한 껍질처럼 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직 알맹이에 가까운 부드러운 막에 해당했습니다. 다시 말해 최초의 태고교회가 지녔던 내적 생명으로부터 조금 더 멀어졌지만, 여전히 그 계승 안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퍼셉션의 상태에는 분명한 변화가 있었습니다. 이전에는 선과 진리를 비교적 명료하게 퍼셉션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 구체적인 차이와 성질을 이전처럼 분명하게 알아차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퍼셉션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점차 덜 명료하고 더욱 일반적인 것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앞으로 이어질 에녹(Enoch)과 노아(Noah)의 교회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인간이 태고교회와 같은 퍼셉션을 점차 유지하지 못하게 되자, 훗날 에녹을 통하여 퍼셉션에서 나온 것들이 교리의 형태로 보존되고, 마침내 노아에 이르러 새로운 교회의 질서가 준비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주님의 섭리를 보게 됩니다. 인간의 내적 상태가 약해지고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능력이 달라진다고 해서, 주님께서는 곧바로 인간을 버리시거나 교회의 역사를 끝내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에 맞추어 선과 진리를 계속 보존하시며, 다음 교회가 이어질 길을 마련하십니다.

 

이어 13절과 14절에서는 게난이 마할랄렐을 낳은 뒤 자녀들을 낳고,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다고 합니다. AC.508은 여기서도 ‘아들들과 딸들’이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차이가 있습니다. 게난 교회의 구성원들은 그 진리와 선을 ‘더욱 일반적인 방식으로’ 퍼셉션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앞선 교회에도 진리와 선이 있었고, 게난 교회에도 진리와 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이고 퍼셉션하는 상태는 같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같은 ‘아들들과 딸들’이라는 표현이 반복되어도, 그 표현이 나타내는 진리와 선의 구체적인 어떠함은 각각의 교회에 따라 달라집니다. ‘죽었다’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게난이 죽었다는 것은 게난 교회를 특징짓던 그러한 퍼셉션의 상태가 끝났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교회에 속했던 모든 선과 진리가 완전히 없어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미 게난으로부터 마할랄렐이라는 다음 교회가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AC.509는 이 모든 내용을 한 문장으로 정리합니다. ‘모든 것이 교회의 상태와의 관계에 따라 결정된다.’ 이 짧은 문장은 창5뿐 아니라 말씀의 상응을 이해하는 데도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아들들’은 진리를, ‘딸들’은 선을, ‘날들과 연수’는 때와 상태들을, ‘죽었다’는 것은 어떤 상태의 끝을 의미한다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응의 기본 의미를 안다고 해서 그 말씀이 나타내는 구체적인 속뜻까지 모두 알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같은 ‘아들들’이 진리를 의미하더라도 그것이 어떤 교회에서 나온 진리인지에 따라 그 진리의 질이 달라집니다. 같은 ‘딸들’이 선을 의미하더라도 그 선이 어떤 사랑과 퍼셉션의 상태에 속하는지에 따라 그 어떠함이 달라집니다. 그리고 같은 ‘죽었다’는 말씀도 무엇의 끝인지는 해당 교회의 고유한 상태에 따라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상응은 몇 가지 단어의 뜻을 외워서 성경에 기계적으로 대입하는 암호표가 아닙니다. 상응에는 일정한 질서와 기본 의미가 있지만, 그 구체적인 의미는 전체 문맥과 그것이 관계하는 영적 상태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말씀을 읽는 태도에도 중요한 가르침을 줍니다. 상응의 지식을 많이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상응을 통하여 주님께서 어떤 영적 상태를 드러내고 계시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같은 말씀을 읽더라도 그 말씀이 어떤 사랑과 선, 어떤 신앙과 진리의 상태에 관계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이렇게 오늘의 AC.496-509를 하나로 모아 보면, 창5의 계보에는 두 가지 흐름이 함께 나타납니다. 하나는 ‘퍼셉션의 점진적인 쇠퇴’입니다. 최초의 태고교회에서 셋으로, 셋에서 에노스로, 다시 게난으로 이어지면서 선과 진리를 내적으로 퍼셉션하는 능력이 점차 약해졌습니다. 처음에는 매우 명료했던 퍼셉션이 점점 덜 명료해지고, 더욱 일반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열매와 씨앗의 알맹이에서 그것을 둘러싼 부드러운 막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교회의 내적 상태도 점차 외적인 것으로 변화하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그 쇠퇴 속에서도 계속되는 주님의 보존과 계승’입니다. 한 교회의 고유한 상태가 끝나더라도 주님께서는 그 가운데 남아 있는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며 다음 교회가 이어지게 하십니다. 인간이 최초의 상태를 계속 유지하지 못하더라도, 주님께서는 그 인간이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에 맞추어 구원의 길을 계속 마련하십니다.

 

그리고 이 두 흐름의 중심에는 오늘 AC.503에서 살펴본 매우 중요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바로 ‘참된 영적 생명은 사랑이 선한 쓰임으로 나타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태고교회가 지녔던 퍼셉션의 생명은 단지 선과 진리를 아는 능력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 선을 행하는 데서 행복과 기쁨을 느끼는 사랑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교회의 참된 생명도 얼마나 많은 진리를 알고 있는가, 얼마나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는가, 얼마나 완전한 형식을 갖추고 있는가에만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의 중심에 주님을 향한 사랑이 살아 있으며, 그 사랑이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으로 나타나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읽고 진리를 배우며 신앙의 지식을 쌓아 갑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선을 행하는 기쁨이 점점 커지고 있는지, 아니면 아는 것은 많아지지만 실제로 사랑하고 섬기는 마음은 오히려 약해지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진리를 많이 아는 것과 그 진리로 살아가는 것은 서로 다른 일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에게는 태고교회와 같은 퍼셉션이 주어져 있지 않지만, 주님께서는 말씀과 진리를 통하여 양심이 형성되도록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말씀에서 배운 진리를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실제 삶에서 행할 때, 그 진리는 단순한 지식으로 머무르지 않고 우리 안에서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특별한 퍼셉션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미 주신 진리를 사랑하고 그 진리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아는 진리가 이웃을 판단하는 도구가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길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을 행하는 일을 무거운 의무로만 여기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이 흘러가는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오늘 창5:6-14은 우리에게 교회의 쇠퇴만을 보여 주지 않습니다. 그 쇠퇴의 한가운데서도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님을 보여 줍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점차 흐려지는 동안에도 주님께서는 선과 진리의 근원이기를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능력은 약해졌지만,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진리 자체가 약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달라진 것은 주님이 아니라 인간의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바로 그 달라진 상태를 아시고, 그 상태에 맞추어 다음 교회를 준비하셨습니다. 셋에서 에노스로, 에노스에서 게난으로, 다시 게난에서 마할랄렐로 이어지는 계보는 인간의 상태가 변하는 가운데서도 교회를 이어 가시는 주님의 오래 참으심과 섭리를 보여 줍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주님의 모습입니다. 주님은 인간이 처음의 완전한 상태를 잃어버렸다고 해서 곧바로 버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내적 상태가 약해지고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능력이 흐려질 때에도,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의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며 다시 생명의 길을 마련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신앙이 약해지는 것을 느낄 때에도 주님을 향한 소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과 진리를 붙들고, 그것을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으로 옮기며, 작은 일에서부터 이웃에게 선한 쓰임이 되는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진리를 아는 기쁨이 선을 행하는 기쁨으로 이어지고, 우리가 받은 사랑이 이웃을 위한 쓰임으로 나타날 때,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은 우리 안에서 살아 움직이게 됩니다. 창5의 계보는 그렇게 우리에게 묻습니다. ‘나는 얼마나 많은 진리를 알고 있는가?’를 넘어, ‘내가 아는 진리는 지금 어떤 사랑과 결합되어 있으며, 그 사랑은 누구를 위한 선한 쓰임으로 나타나고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 질문 앞에서 우리는 다시 주님을 바라봅니다. 우리의 신앙과 사랑을 살아 있게 하시는 분도 주님이시며, 우리 안에서 선과 진리의 열매가 맺히게 하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상태가 변하고 약해지는 가운데서도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며 다음 길을 준비하시는 분 역시 주님이십니다. 이것이 오늘 창5:6-14, AC.496-509를 통하여 우리가 배우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퍼셉션은 흐려져도 주님의 사랑과 섭리는 흐려지지 않으며, 참된 신앙의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이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으로 나타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이상 요약을 마치고, 아래는 AC 본문, 해설 및 심화입니다.

 

 

창5:6, AC.496, ‘셋으로부터 이어진 또 하나의 교회 에노스’(AC.496-498)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And Seth lived a hundred and five years, and begat Enosh. (창5:6) AC.496‘셋’(Seth)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두 번째 교회로서, 그 부모인 태고교회보다는 덜 천적이었지만,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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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6, AC.497, ‘시간이 흐르며 본질적인 것들이 감소하는 교회’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창5:6) AC.497‘셋’(Seth)이 그 부모인 태고교회보다는 덜 천적인 두 번째 교회이면서도, 여전히 가장 오래된 교회들 가운데 하나였다는 것은 위에서 셋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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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6, AC.498, ‘셋으로부터 이어져 나온 또 하나의 교회 에노스’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창5:6) AC.498그가 ‘에노스를 낳았다’(begat Enosh)는 것은 그들로부터 ‘에노스’(Enosh)라 하는 또 하나의 교회가 이어져 나왔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이 장에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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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7-8, AC.499, ‘날들과 연수, 아들들과 딸들, 그리고 죽음의 의미’

7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8그는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Seth lived after he begat Enosh eight hundred and seven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Seth were n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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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9, AC.500, ‘셋보다 더욱 덜 천적이었던 에노스와 그 뒤를 이은 게난’(AC.500-503)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And Enosh lived ninety years, and begat Kenan. (창5:9) AC.500 앞에서 말한 것처럼 ‘에노스’(Enosh)는 세 번째 교회를 의미하는데, 이 교회는 ‘셋’(Seth) 교회보다 더욱 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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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9, AC.501, ‘열매의 속과 씨앗에서 껍질로, 교회의 점진적인 쇠퇴’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창5:9) AC.501시간이 흐르면서 서로 뒤를 이어 나타났고, 하나가 다른 하나에게서 태어났다고 하는 교회들의 경우는 열매나 그 씨앗의 경우와 같았습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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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9, AC.502, ‘점차 흐려지고 일반적이 되어 간 태고교회의 퍼셉션’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창5:9) AC.502이 세 교회, 곧 ‘사람’(man), ‘셋’(Seth), ‘에노스’(Enosh)는 태고교회를 이루지만, 퍼셉션의 완전성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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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9, AC.503, ‘선을 행하는 기쁨과 쓰임 안에서 살아나는 퍼셉션’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창5:9) AC.503 태고교회의 퍼셉션 능력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퍼셉션하는 데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함으로써 생기는 행복과 기쁨에도 있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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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04, 창5:10-11, ‘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오 세를 살

10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1그는 구백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Enosh lived after he begat Kenan eight hundred and fifteen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Enosh w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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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05, 창5:10-11, ’에노스‘, '셋', '사람'(아담)의 퍼셉션 차이

10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1그는 구백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10, 11) AC.505 ‘에노스’(Enosh)는 앞서 관찰한 바와 같이 세 번째 교회를 의미하는데, 여전히 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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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06, 창5:12, ’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AC.506-507)

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And Kenan lived seventy years, and begat Mahalalel. (창5:12) AC.506 ‘게난’(Kenan)은 네 번째 교회를 의미하고, ‘마할랄렐’(Mahalalel)은 다섯 번째 교회를 의미합니다. 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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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07, 창5:12, ‘게난’, 퍼셉션의 성격이 달라지기 시작한 상태

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창5:12) AC.507 ‘게난’(Kenan)이라 하는 교회는, 앞의 세 더 완전한 교회들 가운데에 그렇게 많이 포함시킬 수는 없는데, 이는 이전의 교회들에서는 분명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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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08, 창5:13-14, ‘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십 세

13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4그는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Kenan lived after he begat Mahalalel eight hundred and forty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K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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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09, 창5:13-14, ‘모든 것은 언제나 교회의 상태에 따라’

13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4그는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13, 14) AC.509 여기서 단지 주목해야 할 것은, 모든 것들이 교회의 상태와의 관계에 따라 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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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AC 리딩 본문 전체는 여기까지이고, 아래는 오늘 범위 창5:6-14, AC.496-509 중 리딩 필독 세 편 링크입니다. 혹시 몹시 바쁘신 분들은 꼭 이 링크들만이라도 읽으시기 바랍니다.

 

 

창5:9, AC.501, ‘열매의 속과 씨앗에서 껍질로, 교회의 점진적인 쇠퇴’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창5:9) AC.501시간이 흐르면서 서로 뒤를 이어 나타났고, 하나가 다른 하나에게서 태어났다고 하는 교회들의 경우는 열매나 그 씨앗의 경우와 같았습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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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9, AC.502, ‘점차 흐려지고 일반적이 되어 간 태고교회의 퍼셉션’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창5:9) AC.502이 세 교회, 곧 ‘사람’(man), ‘셋’(Seth), ‘에노스’(Enosh)는 태고교회를 이루지만, 퍼셉션의 완전성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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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9, AC.503, ‘선을 행하는 기쁨과 쓰임 안에서 살아나는 퍼셉션’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창5:9) AC.503 태고교회의 퍼셉션 능력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퍼셉션하는 데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함으로써 생기는 행복과 기쁨에도 있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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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이며, 다음은 다음 주(20261025) 리딩 본문(창5:15-20, AC.510-515) 소개입니다.

 

다음 주에는 마할랄렐과 야렛, 그리고 에녹으로 이어지는 교회의 계승을 살펴보겠습니다. 마할랄렐 교회에서는 ‘쓰임에서 오는 기쁨’보다 ‘진리를 아는 기쁨’을 더 좋아하게 되면서 사랑과 퍼셉션의 생명이 더욱 약해졌습니다. 그리고 야렛을 거쳐 에녹에 이르면, 이전 교회들이 퍼셉션했던 진리들을 후대를 위해 교리로 보존하는 새로운 전환이 나타납니다. 다음 주에는 이 변화를 통하여 ‘진리를 아는 기쁨과 선을 행하는 기쁨 중 무엇이 앞서야 하는가’, 그리고 인간의 퍼셉션이 약해지는 가운데 주님께서 어떻게 진리를 보존하시는지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네, 이상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10-18(D1)

 

2673, 2, 창5.2, 2026-10-18(D1)-주일예배(창5,6-14, AC.496-509), ‘흐려지는 퍼셉션, 변함없는 주님의 섭리’.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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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10/11, 창5:1-5, AC.469-495), ‘하나님의 형상에서 모양으로, 그리고 시작된 변화’

※ 오늘(2026/10/11)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7, ‘사랑의 하나님’, 찬130, ‘찬란한 주의 영광은’입니다. 오늘은 창5 절별 주석 그 첫 번째, 1절로 5절, AC 글 번호로는 469번에서 495번입니다. 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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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2026/10/11)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7, ‘사랑의 하나님’, 찬130, ‘찬란한 주의 영광은’입니다.

 

오늘은 창5 절별 주석 그 첫 번째, 1절로 5절, AC 글 번호로는 469번에서 495번입니다. 먼저 창세기 본문입니다.

 

 

1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2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3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4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5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1-5)

 

 

제목은

 

하나님의 형상에서 모양으로, 그리고 시작된 변화

 

 

이며, 다음은 ‘3분 요약’입니다. 이 요약은 새로 오신 분들, 그리고 그동안 함께해오신 분들 모두를 위한, 지난 2월부터 시작한 이 특별한 주일예배를 위한, 그 흐름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한 시간입니다.

 

오늘 리딩에 들어가기 전에 지금까지의 큰 흐름을 잠깐 돌아보겠습니다. 우리는 창세기의 문자적 의미, 그러니까 겉 글자의 뜻을 존중하면서, 스베덴보리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천국의 비밀, 창, 출 속뜻 주석)를 따라 그 속뜻을 함께 읽고 있습니다. 창1에서는 천지창조를 거듭남의 과정으로, 창2에서는 에덴동산을 천적 상태로, 창3에서는 사람이 주님보다 자기 감각과 proprium을 따르면서 그 질서가 무너지는 과정으로 읽었습니다.

 

창4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살펴보았습니다. 가인은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나타냈으며,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면서 아벨이 죽임을 당하고 그 계열은 라멕에 이르러 황폐해졌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가인의 표’를 통해 신앙을 보존하시고, 마침내 셋과 에노스를 통하여 신앙이 다시 체어리티와 결합되고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가 시작되게 하셨습니다. 인간의 황폐보다 주님의 섭리와 회복이 더 깊다는 것이 창4의 마지막 메시지였습니다.

 

오늘부터는 창5로 들어갑니다. 창5는 겉으로는 아담에서 노아까지 이어지는 족보이지만, 속뜻으로는 태고교회로부터 여러 교회가 어떻게 이어지고 변화되어 갔는지를 보여 줍니다. 오늘 첫 다섯 절에서는 그 출발점인 태고교회의 본래 모습을 먼저 살펴봅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영적으로 창조하시고 천적으로 만드시며, 신앙과 사랑을 하나로 결합하셨을 때 비로소 그들을 ‘사람’이라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셋에 이르면서 아주 미세한 변화가 시작됩니다. 셋 교회에서도 신앙은 여전히 사랑과 결합되어 있었지만, 태고교회에서처럼 ‘사랑이 그만큼 주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창5의 ‘날과 해’는 교회의 여러 상태를, ‘아들들과 딸들’은 그 안에서 생겨나는 진리와 선을 나타냅니다. 마침내 ‘죽었더라’는 말씀은 태고교회의 고유한 생명이었던 ‘퍼셉션’, 곧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알아차리던 상태가 점차 사라져 갔음을 보여 줍니다.

 

오늘은 이것을 마음에 두고 읽겠습니다. ‘교회의 생명은 신앙이 사랑과 어떤 관계를 이루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으로부터 신앙이 나왔고, 그 둘이 하나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그 질서에 작은 변화가 시작되면서 교회도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오늘은 창5의 첫 리딩을 통해 주님께서 이루신 태고교회의 본래 질서와, 그 질서 안에서 시작되는 변화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다음은 오늘 리딩 범위인 AC.469-495 요약입니다. 그전에 오늘부터는 그동안 창 각 장 앞뒤로 소개하던 ‘영계 체험’ 및 각 장이나 단락의 ‘개요’는 생략, 바로 각 장 본문으로 들어가기로 하였습니다만, 그러나 이 첫 요약에서만큼은 그 내용 역시 요약 버전으로 조금 언급하는 것이 그 연결성 면에서 적절할 것 같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AC.449-468을 리딩하시면 되겠습니다.

 

창세기 5장은 ‘아담 자손의 계보’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겉으로 보면 아담에서 노아까지 이어지는 사람들의 이름과 나이, 그리고 죽음이 반복되는 족보입니다. 그러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는 이 장을 단순히 오래전 사람들의 혈통을 기록한 족보로만 읽지 않습니다. 그 속뜻에서는 태고교회로부터 여러 교회가 어떻게 이어지고, 그 내적 상태가 어떻게 변화되어 마침내 노아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교회의 영적 역사’로 읽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5장 본문을 해설하기에 앞서, AC.449-459에서는 ‘천국과 천국의 기쁨’에 관한 영계 경험을 먼저 소개합니다. 이것은 창세기 5장의 각 절을 직접 풀이하는 부분은 아니지만, 이어질 태고교회와 그 후대 교회들의 상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사람들은 흔히 천국을 세상에서 경험하는 가장 좋은 것들이 끝없이 계속되는 곳으로 생각합니다.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 부족한 것 없이 풍요롭게 사는 것, 찬란한 빛 가운데 있는 것, 아무런 수고 없이 평안히 쉬는 것, 혹은 영원히 주님을 찬양하는 것 등을 천국의 행복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영계에서 만난 영들은 그러한 생각만으로는 천국의 참된 기쁨을 알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먼저 어떤 ‘장소’가 아니라, 사람 안에 형성된 사랑과 체어리티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AC.450은 천국을 높은 곳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관념을 다룹니다. 세상에서는 높은 자리에 오르고 다른 사람보다 위에 서는 것이 행복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려는 욕망 자체가 천국의 질서와 반대됩니다. 천국의 기쁨은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의 행복을 기뻐하고 그 행복을 위하여 섬기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높은 곳에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체어리티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AC.452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천국에서 ‘큰 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자신을 높이는 사람이 아니라,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행복을 원하며 그들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다만 그 섬김 역시 자신이 인정받거나 보상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랑 자체에서 나와야 합니다. 여기서 천국의 기쁨이 무엇인지가 드러납니다. 천국의 기쁨은 자기 자신을 위한 만족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이 이웃을 향하여 흘러가는 데서 오는 기쁨입니다.

 

그래서 AC.454는 천사들의 삶을 ‘쓰임’과 연결합니다. 천사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영원히 평안만 누리는 존재들이 아닙니다. 새로 영계에 들어온 영들을 가르치고, 사람들을 섬기며, 악한 영들의 영향을 억제하고, 사람들에게 선한 것을 불어넣으며, 이 세상을 떠난 영들을 영원한 생명으로 일으키고, 준비된 영들을 천국으로 인도합니다. 천사들의 행복은 이러한 쓰임과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쓰임 안에서, 쓰임으로부터, 그리고 쓰임에 따라 행복을 누립니다.

 

찬란한 빛을 보는 것만으로도 천국의 행복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놀라운 외적인 광경이라도 그것만 계속된다면 결국 익숙해집니다. 주님을 찬양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천국의 삶은 끝없이 입술로 찬양만 하는 삶이 아닙니다. 참된 찬양은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에서 나오는 결과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단지 입술의 찬양이 아니라, 주님께 받은 사랑이 실제로 이웃을 향한 선과 쓰임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천국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다양성이 있습니다. 모든 천사가 똑같이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수많은 천국 사회가 있고, 그 안에서도 각자의 사랑과 신앙에 따라 무수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모든 다양성은 하나를 이룹니다. 그 하나 됨의 근원은 ‘오직 주님’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이 서로 다른 존재들을 조화롭게 연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하나 됨은 모두가 똑같아지는 획일성이 아니라, 서로 다른 존재들이 주님 안에서 사랑으로 조화를 이루는 하나 됨입니다.

 

AC.459에서는 이러한 천국의 질서를 ‘천적’과 ‘영적’이라는 구분으로 마무리합니다. 천적인 존재는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부터 신앙을 받으며, 영적인 존재는 신앙의 지식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받습니다. 이 차이는 이제 창세기 5장을 읽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창세기 5장의 출발점인 태고교회는 바로 ‘천적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태고교회에서는 먼저 사랑이 있었고, 그 사랑으로부터 신앙이 나왔습니다. 진리를 먼저 배운 뒤 그것을 사랑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랑 안에서 무엇이 참인지 알았습니다.

 

이러한 배경 위에서 AC.460-468은 창세기 5장 전체의 지도를 먼저 보여 줍니다. 창세기 5장의 족보는 속뜻에서 태고교회로부터 홍수에 이르기까지 여러 교회가 차례로 이어지는 과정을 나타냅니다. ‘사람’, 곧 아담은 천적 교회였던 태고교회 자체를 나타내고, 셋은 그 뒤를 잇는 두 번째 교회, 에노스에서 므두셀라까지는 그 뒤를 이어 나타나는 여러 교회를 나타냅니다. 라멕은 아홉 번째 교회이며, 노아는 열 번째 교회로서 홍수 이후의 새로운 교회로 이어지는 출발점이 됩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5장에 나오는 이름들을 속뜻에서 읽을 때 중요한 것은 각각의 인물을 단순히 개인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이 나타내는 ‘교회의 상태’를 보는 것입니다. 각 교회는 앞선 교회로부터 무엇인가를 이어받았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았습니다. 특별히 그 차이는 ‘퍼셉션’의 차이에서 나타났습니다. 태고교회가 지녔던 퍼셉션이 후대의 교회들로 이어지면서 조금씩 달라지고 약해졌던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에녹은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내적으로 알아차리는 퍼셉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처럼 모든 것을 교리로 정리하여 배울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퍼셉션이 점차 사라질 것을 대비하여, 태고교회에서 받은 계시와 퍼셉션을 교리의 형태로 모아 보존하는 일이 필요해졌습니다. 이것을 나타내는 교회가 에녹입니다. 당시에는 아직 그 교리가 크게 필요하지 않았지만, 훗날을 위하여 보존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다’는 말씀도 이러한 보존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마침내 노아에 이르게 됩니다. 태고교회의 고유한 퍼셉션은 거의 사라졌지만 모든 것이 완전히 없어져 버린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남아 있는 것을 보존하셨습니다. 이것이 창세기 5장의 마지막에서 노아로 이어지는 중요한 의미이며, 여기서 ‘리메인스’라는 주제가 나타납니다. 주님께서는 교회가 쇠퇴하는 가운데서도 다음 교회를 위하여 필요한 선과 진리를 남겨 두십니다. 한 사람의 거듭남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살아오면서 주님께 받은 선과 진리, 순진함과 체어리티의 상태들을 주님께서 보존하시고, 훗날 거듭남을 위하여 사용하십니다.

 

따라서 창세기 5장 전체에는 두 흐름이 함께 있습니다. 하나는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점차 쇠퇴하는 흐름이고, 다른 하나는 그 쇠퇴 속에서도 주님께서 필요한 것을 보존하시며 다음 교회를 준비하시는 흐름입니다. 인간의 상태만 보면 점점 내려가는 역사처럼 보이지만, 주님의 섭리에서 보면 그 안에서도 끊임없이 보존과 준비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실제 본문인 창세기 5장 1절에서 5절, AC.469-495로 들어갑니다. 첫 말씀은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입니다. AC.469는 여기서 ‘계보를 적은 책’이 태고교회에 속했던 교회들을 열거하는 것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제부터 나오는 이름과 숫자를 단순한 족보의 정보로만 읽지 않고, 태고교회로부터 이어지는 교회의 여러 상태를 나타내는 말씀으로 읽게 됩니다.

 

이어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라고 합니다. 여기서 ‘창조하다’와 ‘만들다’는 비슷해 보이지만 속뜻에서는 차이가 있습니다. AC.472에 따르면 ‘창조하다’는 사람이 새롭게 창조되어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 곧 거듭나는 것을 뜻합니다. 반면 ‘만들다’는 그 사람이 더욱 완전해져 천적인 사람이 되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우리가 이미 살펴본 거듭남의 질서와 연결됩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완성된 천적 존재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면서 먼저 영적인 사람이 되게 하시고, 더 나아가 천적인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영적인 사람은 주님의 ‘형상’이고, 천적인 사람은 주님의 ‘모양’입니다. 형상에서 모양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단순히 더 많은 진리를 알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알고 믿는 진리가 사랑 안으로 들어가고, 마침내 사랑으로부터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영적인 사람에게는 아직 신앙이 먼저 보입니다. 진리를 배우고, 그것이 옳기 때문에 믿으며, 그 진리를 따라 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천적인 사람에게서는 사랑이 먼저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무엇이 참인지 알고, 그 사랑에서 신앙이 나옵니다. 이것이 태고교회의 특징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신앙과 사랑은 서로 떨어진 두 가지가 아니라, 사랑 안에 신앙이 살아 있는 하나의 생명이었습니다.

 

그래서 AC.473은 ‘하나님의 모양’을 천적인 사람과 연결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영적인 사람과 연결합니다. 형상은 모양으로 나아가기 위한 준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람에게 진리를 주시는 목적도 단지 많은 것을 알게 하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진리를 통하여 사람의 의지와 삶이 변화되고, 마침내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 안에서 살도록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이어 2절에서는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고 합니다. 여기서 ‘남자’와 ‘여자’ 역시 단순히 성별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AC.475-476에 따르면 ‘남자’는 이해와 신앙을, ‘여자’는 의지와 사랑을 나타냅니다.

 

사람이 아직 영적인 상태에 있을 때에는 이해와 신앙이 앞서고 의지와 사랑이 뒤따르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진행되어 천적인 상태에 이르면 신앙과 사랑, 이해와 의지가 하나의 결혼을 이룹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다’고 합니다. 신앙만 따로 있어도 온전한 사람이 아니고, 사랑을 말하면서 진리를 떠나 있어도 온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진리와 선, 신앙과 사랑, 이해와 의지가 하나를 이룰 때 비로소 속뜻에서의 ‘사람’이 됩니다.

 

여기서 ‘사람’이라는 말은 매우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가장 높은 의미에서 오직 주님만이 참으로 ‘사람’이십니다. 교회가 ‘사람’이라 불릴 수 있는 것도 주님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 주님의 모양과 형상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참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사랑과 신앙, 선과 진리를 받아 그것들이 자기 안에서 하나를 이룰 때 참된 의미에서 사람이 되어 갑니다.

 

그러므로 ‘아담’이라는 이름 역시 이 속뜻에서는 한 남성 개인만을 가리키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AC.478-479는 ‘아담’이 ‘사람’을 뜻하며, 여기서는 특별히 태고교회를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다’는 표현 자체가 남자와 여자 모두를 함께 ‘사람’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본문의 중심이 한 개인의 전기가 아니라, 신앙과 사랑이 결합되어 하나를 이루었던 교회의 상태임을 보여 줍니다.

 

AC.480은 ‘그들이 창조되던 날’이라는 표현도 설명합니다. 여기서 ‘날’은 단순한 24시간의 하루가 아니라 하나의 영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창세기 1장의 여섯째 날 끝에서 사람은 ‘사람’이 되고, 이어지는 일곱째 날, 곧 안식일의 상태에서 천적인 사람이 됩니다. 결국 창세기 5장의 첫 두 절은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다루었던 거듭남의 전체 과정을 아주 압축된 형태로 다시 보여 주고 있는 셈입니다.

 

이제 3절에서 새로운 변화가 시작됩니다.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라고 합니다. 여기서 ‘백삼십 년’은 단순히 세속적인 시간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교회가 일어나기까지의 하나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교회가 ‘셋’입니다.

 

셋 교회는 태고교회와 전혀 다른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AC.484는 셋 교회가 태고교회와 ‘매우 비슷했다’고 설명합니다. 신앙도 여전히 사랑과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아주 중요한 차이가 하나 나타납니다. ‘사랑이 그만큼 주된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 차이는 겉으로 보면 매우 작아 보입니다. 신앙과 사랑이 아직 분리된 것도 아니고, 사랑이 사라진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태고교회의 가장 본래적인 질서에서는 사랑이 모든 것의 중심이었고 신앙은 그 사랑으로부터 나왔습니다. 셋 교회에서도 둘은 여전히 결합되어 있지만, 사랑의 중심성이 이전과 완전히 같지는 않았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교회의 상태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이 점은 창세기 4장에서 보았던 셋과도 구별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름은 같지만 속뜻에서 언제나 같은 교회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AC.485는 창세기 5장의 셋 교회가 창세기 4장 25절의 셋과는 다른 교회라고 분명히 설명합니다. 같은 이름이 사용되더라도 문맥과 계열에 따라 서로 다른 교리와 교회의 상태를 나타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4절에서는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라고 합니다. 여기서부터 창세기 5장을 읽을 때 반복해서 만나게 될 중요한 표현들이 등장합니다. 바로 ‘날’, ‘해’, 그리고 ‘아들들과 딸들’입니다.

 

AC.482와 AC.486 이하에서는 이러한 ‘해’와 숫자들이 교회의 상태를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시간은 상태와 연결됩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 몇 년 동안 지속되었는지를 생각하지만, 천사들은 말씀의 속뜻에서 그러한 시간보다 그 기간이 나타내는 영적 상태와 그 변화를 지각합니다. 그래서 창세기 5장의 긴 수명과 숫자들은 단순한 연대 계산을 넘어, 각 교회가 어떤 상태에 있었는지를 담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문자적 의미의 역사성을 단순히 지워 버린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가 여기서 집중하는 것은 말씀의 속뜻입니다. 속뜻에서 천사들은 세상의 시간과 숫자에 머무르지 않고 그것들이 나타내는 상태를 지각합니다. 따라서 우리 역시 이 장을 읽으면서 ‘몇 년을 살았는가?’만이 아니라 ‘그 숫자를 통하여 어떤 교회의 상태가 표현되고 있는가?’를 보게 됩니다.

 

‘아들들과 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AC.489-491에서 ‘아들들’은 진리를, ‘딸들’은 선을 나타냅니다.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원리가 있습니다. 교회가 살아 있으면 그 안에서 무엇인가가 태어납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신앙과 사랑이 결합되어 있으면 그 결합으로부터 새로운 진리와 선이 생겨납니다. 말씀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고, 그 진리가 삶에서 선한 행위와 쓰임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이 영적인 의미에서 ‘아들들과 딸들을 낳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들들과 딸들의 상태는 그들을 낳는 교회의 상태와 관계됩니다. 교회가 어떠한가에 따라 그 교회가 받아들이고 산출하는 진리와 선도 달라집니다. 사랑이 중심에 있는 교회가 받아들이는 진리와, 자기 자신이나 세상을 중심에 둔 교회가 받아들이는 진리는 겉으로 같은 말처럼 보여도 그 내적인 생명은 다를 수 있습니다. 진리의 생명은 그것이 어떤 사랑에서 나오는가와 깊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 개인의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같은 성경 말씀을 알고 같은 교리를 고백하더라도, 그것이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려는 마음에서 받아들여지는지 아니면 자신을 높이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 위하여 사용되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열매를 낳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진리를 많이 가지고 있는 것만이 아니라, 그 진리가 어떤 사랑과 결합되어 있으며 어떤 선을 낳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마침내 5절은 ‘그는 죽었더라’는 말로 끝납니다. 창세기 5장에서는 앞으로 이 표현이 계속 반복됩니다. 문자적으로는 한 사람의 생애가 끝났다는 뜻이지만, AC.492 이하에서는 이것을 교회의 내적 상태와 관련하여 설명합니다. 여기서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태고교회가 가지고 있던 것과 같은 퍼셉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태고교회의 가장 독특한 특징 가운데 하나가 바로 ‘퍼셉션’이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머리가 좋아서 진리를 빨리 이해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AC.495에 따르면 퍼셉션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참인지를 ‘주님으로부터’ 지각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주님을 향한 사랑의 선과 그분을 향한 신앙의 진리를 주님으로부터 내적으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오늘날 우리가 어떤 문제를 놓고 먼저 교리를 찾아보고 논리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선과 진리를 지각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사랑과 신앙이 깊이 하나 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랑으로부터 무엇이 참인지 지각하는 내적인 능력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천적 교회의 고유한 퍼셉션이었습니다.

 

그러나 세대를 거치면서 이러한 퍼셉션은 점차 쇠퇴합니다. AC.494는 그 배경에서 유전적인 악을 다룹니다. 인간의 실제적인 악이 계속되면서 그것이 후대에 영향을 미치고, 인간의 내적 상태는 점점 더 이전의 순수한 상태에서 멀어집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아담 한 사람의 죄 때문에 모든 사람이 악해졌다’는 식으로만 이해하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이 실제로 선택하고 행하는 악이 쌓이고 이어지면서 유전적인 악의 경향도 더욱 강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AC.494는 여기서 절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유전적인 악이 있다고 해서 인간이 거듭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거듭나게 하심으로 그 악을 억제하고 약화시키십니다. 사람 자신의 힘으로 악의 뿌리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 안에 보존하신 선과 진리를 통하여 그를 새롭게 하십니다. 이것은 앞서 창세기 5장 전체 개요에서 살펴본 ‘리메인스’와도 연결됩니다.

 

이렇게 보면 이번 주에 읽는 모든 내용이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집니다. 먼저 천국의 참된 기쁨은 자기 자신을 위한 행복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과 체어리티가 이웃을 위한 쓰임이 되는 데 있음을 보았습니다. 천국의 모든 다양성도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 안에서 하나를 이룹니다. 그리고 천적인 존재에게서는 바로 그 사랑으로부터 신앙이 나옵니다.

 

그러한 천적 질서를 지상에서 가장 온전히 나타냈던 교회가 태고교회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영적으로 창조하시고, 더 나아가 천적인 사람으로 완성해 가십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에서 ‘하나님의 모양’으로 나아가며, 그 과정에서 신앙과 사랑, 이해와 의지가 하나를 이룹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함께 ‘사람’이라 부르셨습니다. 참된 사람은 진리만 가진 사람도 아니고 사랑만 말하는 사람도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진리와 선, 신앙과 사랑이 하나의 생명을 이루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결합으로부터 ‘아들들과 딸들’, 곧 진리와 선이 계속 태어납니다. 살아 있는 교회는 진리와 선을 낳습니다. 살아 있는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믿는 것이 실제 사랑으로 이어지고, 그 사랑이 다시 삶의 선과 쓰임으로 나타날 때 신앙은 살아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창세기 5장 앞의 ‘천국의 기쁨은 쓰임에 있다’는 가르침과 오늘 본문의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는 말씀이 서로 만납니다.

 

그러나 동시에 변화도 시작됩니다. 셋 교회에서도 신앙과 사랑은 아직 결합되어 있지만 사랑의 중심성은 태고교회와 조금 달라집니다. 교회가 계속 이어지면서 상태가 변하고, 마침내 태고교회가 지녔던 고유한 퍼셉션도 점차 쇠퇴합니다. ‘그는 죽었더라’는 짧은 한마디 안에 한 사람의 죽음뿐 아니라, 한 교회의 고유한 내적 생명이 더 이상 이전과 같지 않게 되는 깊은 변화가 담겨 있습니다.

 

그럼에도 창세기 5장의 이야기는 단순한 쇠퇴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교회가 달라지고 퍼셉션이 사라져 가는 가운데서도 주님께서는 필요한 것을 보존하십니다. 태고교회의 계시와 퍼셉션은 에녹을 통하여 교리로 보존되고, 마지막에는 노아라는 새로운 교회를 준비하십니다. 인간에게서 무엇인가가 사라질 때마다 주님의 일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는 남아 있는 선과 진리를 붙드시고 그것을 통하여 다음 단계를 준비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읽으며 우리는 ‘나는 얼마나 많은 진리를 알고 있는가?’만을 묻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내가 알고 믿는 진리는 어떤 사랑에서 나오고 있는가?’, ‘내 신앙과 사랑은 서로 결합되어 있는가?’, ‘내가 받은 진리는 실제 삶에서 선을 낳고 있는가?’, 그리고 ‘그 선은 이웃을 위한 쓰임으로 이어지고 있는가?’를 묻게 됩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은 오늘날 우리에게 그대로 주어져 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퍼셉션의 근원은 여전히 같습니다. 선과 진리는 주님에게서 옵니다. 우리의 거듭남도 주님에게서 옵니다. 신앙과 사랑을 하나 되게 하시는 분도 주님이시며, 우리 안에서 진리와 선의 열매가 태어나게 하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상태가 약해지고 이전에 가졌던 것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 남겨 두신 것을 보존하시며 다시 거듭남의 길을 여십니다.

 

이것이 오늘 창세기 5장 첫 다섯 절을 통해 보게 되는 큰 그림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새롭게 창조하시고 자신의 형상에서 모양으로 이끄십니다. 그 과정에서 신앙과 사랑을 하나 되게 하시고, 그 결합으로부터 진리와 선이 삶 가운데 태어나게 하십니다. 교회의 상태가 변하고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점차 쇠퇴하는 가운데서도 주님께서는 남아 있는 것을 보존하시며 다음 교회를 준비하십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5장의 족보는 단지 ‘누가 누구를 낳고 몇 년을 살다가 죽었다’는 반복되는 기록이 아닙니다. 그 이름과 날과 해, 아들들과 딸들, 그리고 ‘죽었더라’는 말씀 속에는 사람과 교회의 내적 상태가 어떻게 변화해 가는지, 그리고 그 모든 변화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어떻게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며 구원의 역사를 계속 이어 가시는지가 담겨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다시 주님을 바라봅니다. 우리의 신앙이 사랑에서 떨어지지 않게 하시고, 우리가 아는 진리가 삶의 선으로 이어지게 하시며, 그 선이 이웃을 위한 쓰임이 되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 안의 좋은 것들이 약해지고 사라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때에도,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깊은 곳에서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며 다시 생명의 길을 준비하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창세기 5장은 바로 그 주님의 오래 참고 보존하시며 이어 가시는 섭리 속에서 이제 첫걸음을 시작합니다.

 

 

이상 요약을 마치고, 아래는 AC 본문, 해설 및 심화입니다.

 

 

AC.469, 창5:1, '계보의 책, 영적으로 창조되어 천적으로 된 태고교회'(AC.469-474)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This is the book of the births of man. In the day that God created man, in the likeness of God made he him. (창5:1) AC.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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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0, 창5:1, ‘이름들은 사람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들을 뜻한다’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0‘계보의 책’(book of the births)이 태고교회에 속했던 사람들을 열거한 것이라는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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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1, 창5:1, ‘집과 가족과 민족으로 구별되어 살았던 이유’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1그들이 이처럼 따로 떨어져 살면서 오직 집과 가족과 민족으로 구별되어 있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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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2, 창5:1, ‘창조함과 만드심,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2‘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날’(day in which God created man)이 그가 영적으로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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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3, 창5:1, ‘하나님의 형상에서 하나님의 모양으로’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3‘하나님의 모양’(likeness of God)이 천적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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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4, 창5:1,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로 나아간 태고교회’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4그러므로 여기서 다루는 주제는 태고교회의 출생 또는 번성(birth or propagation)이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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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5, 창5:2, ‘신앙과 사랑의 결혼을 이룬 교회’(AC.475-480)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and blessed them, and called their name man, in the day when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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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6, 창5:2, ‘남자와 여자에서 하나의 사람으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5:2) AC.476‘남자와 여자’(male and female)가 신앙과 사랑 사이의 결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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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7, 창5:2, ‘오직 주님만이 참된 사람이시며, 교회는 그분의 형상과 모양’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5:2) AC.477‘사람’(man)이 태고교회를 의미한다는 것은 앞에서 자주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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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8, 창5:2, ‘아담이라는 한 사람이 아니라 태고교회’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5:2) AC.478그를 ‘아담’(Adam)이라 하는 이유는 히브리어 ‘아담’(Ad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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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9, 창5:2, ‘흙에서 취하여 거듭나고 참된 사람이 된 태고교회’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5:2) AC.479말씀에서 ‘이름을 부르다’(calling a name) 또는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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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80, 창5:2, ‘여섯째 날의 끝과 안식일의 시작에 이른 사람’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5:2) AC.480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사람’이라 일컬어졌다는 것은 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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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3, AC.481, '태고교회와 닮은 새 교회 셋(Seth)'(AC.481-485)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And man lived a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begat into his likeness, after his image, and called his name Seth. (창5:3) AC.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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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3, AC.482, ‘해(years)와 연수(numbers of years)는 교회의 상태를 의미’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5:3) AC.482이 장에 나오는 ‘해’(years)와 ‘연수’(numbers of years)가 속뜻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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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3, AC.483, ‘퍼셉션(perception)의 차이로 구별된 태고교회의 여러 교회’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5:3) AC.483뒤이어 나오는 ‘셋’(Seth), ‘에노스’(Enosh), ‘게난’(Kenan), ‘마할랄렐’(Mahalalel), ‘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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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3, AC.484, ‘사랑이 여전히 신앙과 결합되어 있었던 셋 교회’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5:3) AC.484‘셋’(Seth)이라 하는 교회가 태고교회와 매우 비슷했다는 것은, 사람이 자기의 모양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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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3, AC.485, ‘창4의 셋과 창5의 셋은 서로 다른 교회’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5:3) AC.485여기서 ‘셋’(Seth)이 앞에서 묘사된 교회(창4:25)와는 다른 교회를 의미한다는 것은 AC.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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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4, AC.486, '날들과 해들, 아들들과 딸들의 의미'(AC.486-491)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nd the days of man after he begat Seth were eight hundred years, and he begat sons and daughters. (창5:3) AC.486‘날들’(days)은 일반적인 시간과 상태를 의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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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4, AC.487, ‘날들과 해들에 기록된 교회의 상태 변화’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87‘날들’(days)이 일반적인 시간과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은 1장에서 보여 주었습니다. 거기서 창조의 ‘날들’은 다른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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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4, AC.488, ‘천사들에게 시간은 상태와 그 변화’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88‘날들’(days)이 일반적인 상태를, ‘해들’(years)이 특별한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에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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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4, AC.489, ‘교회가 낳는 아들들과 딸들, 진리와 선’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89‘아들들과 딸들’(sons and daughters)이 그들이 퍼셉션한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하며, 특히 ‘아들들’(sons)은 진리들을,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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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4, AC.490, ‘딸들이 의미하는 사랑과 신앙의 선’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90말씀에서 ‘딸들’(daughters)은 자주 선들을 의미합니다. 시편에서는, In the Word “daughters” frequently denote goods; as in David: 9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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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4, AC.491, ‘교회의 어떠함에 따라 달라지는 아들들과 딸들’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91이 장에서 ‘아들들’(sons)과 ‘딸들’(daughters)(4, 7, 10, 13, 16, 19, 26, 30절)도 같은 것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어떠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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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5, AC.492, ‘사라진 퍼셉션을 의미하는 사람의 죽음’(AC.492-495)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all the days that man lived were nine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he died. (창5:5) AC.492여기서 ‘날들’(days)과 ‘해들’(years)은 위에서와 같이 시대들과 상태들을 의미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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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5, AC.493, ‘시간과 척도를 넘어 상태를 나타내는 말씀의 숫자’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5) AC.493‘날들’(days)과 ‘해들’(years)이 시대들과 상태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더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세상에서는 시간들과 척도들이 반드시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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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5, AC.494, ‘퍼셉션의 죽음과 유전적 악의 누적’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5) AC.494그가 ‘죽었다’(died)는 것이 그러한 퍼셉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죽다’(die)라는 말의 의미에서 분명합니다. 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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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5, AC.495, ‘태고교회의 쇠퇴를 이해하는 열쇠, 퍼셉션’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5) AC.495태고교회가 어떻게 쇠퇴하였는지는 퍼셉션(perception)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태고교회는 퍼셉션을 가진 교회였으며, 오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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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AC 리딩 본문 전체는 여기까지이고, 아래는 오늘 범위 창5:1-5, AC.469-495 중 리딩 필독 3편 링크입니다. 혹시 몹시 바쁘신 분들은 꼭 이 3개 링크만이라도 읽으시기 바랍니다.

 

 

AC.473, 창5:1, ‘하나님의 형상에서 하나님의 모양으로’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3‘하나님의 모양’(likeness of God)이 천적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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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6, 창5:2, ‘남자와 여자에서 하나의 사람으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5:2) AC.476‘남자와 여자’(male and female)가 신앙과 사랑 사이의 결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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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5, AC.495, ‘태고교회의 쇠퇴를 이해하는 열쇠, 퍼셉션’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5) AC.495태고교회가 어떻게 쇠퇴하였는지는 퍼셉션(perception)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태고교회는 퍼셉션을 가진 교회였으며, 오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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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이며, 다음은 다음 주 본문 소개입니다.

 

다음 주에는 창5:6-14, AC.496-509를 읽습니다. 셋에서 에노스로, 다시 에노스에서 게난으로 이어지는 족보를 통해, 이 이름들이 단순한 개인들이 아니라 태고교회 이후 차례로 이어진 서로 다른 교회들을 나타냄을 살펴보겠습니다. 특히 한 교회가 다음 교회로 이어지면서도 ‘본질적인 것들’은 점차 감소해 가는 모습과, 그럼에도 그 흐름을 끊지 않으시고 교회를 계속 이어 가시는 주님의 섭리를 살펴보겠습니다.

 

 

네, 이상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10-11(D1)

 

2672, 1, 창5.1, 2026-10-11(D1)-주일예배(창5,1-5, AC.469-495), ‘하나님의 형상에서 모양으로, 그리고 시작된 변화’.pdf
1.22MB

 

 

 

주일예배(2026/10/18, 창5:6-14, AC.496-509), ‘흐려지는 퍼셉션, 변함없는 주님의 섭리’

※ 오늘(2026/10/18)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8, ‘성도들아 찬양하자’, 찬131, ‘다 나와 찬송부르세’입니다. 오늘은 창5 절별 주석 그 두 번째, 6절로 14절, AC 글 번호로는 496번에서 509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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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10/04, 창4:25-26, AC.434-442), ‘보존된 신앙에서 체어리티의 예배로’

※ 오늘(2026/10/04)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6, ‘은혜로신 하나님 우리 주 하나님’, 찬230, ‘우리의 참되신 구주시니’, 찬96, ‘예수님은 누구신가’입니다. 오늘은 창4 절별 주석 그 일곱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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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이번 ‘존버리즘’ 영상의 제목은 상당히 자극적입니다. ‘남자들 국제결혼 좀 그만해 - 국제결혼 때문에 분노하는 한국 여자들의 진짜 현실.’ 영상은 40대 중반의 지방 중소기업 직장인 남성이 한국에서 여러 차례 결혼 상대자로 선택받지 못하다가 베트남 파견근무 중 한 여성을 만나 사랑하고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리고 그 결혼을 반대했던 세 여성, 곧 친누나와 결혼정보회사 매니저와 직장 여성 동료가 사실은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끌고 갑니다. 마지막에는 ‘국제결혼을 그만하라고 하기 전에 왜 이 남자들이 한국에서는 한 번도 선택받지 못했는지부터 물어야 한다’는 결론을 제시합니다.

 

영상이 던지는 문제에는 분명 생각할 부분이 있습니다. 주인공은 결혼정보회사에서 ‘지방, 중소기업, 40대’라는 조건 때문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상대 여성들이 그를 거절할 자유가 있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누구도 원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해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문제는 인간이 어느 순간부터 ‘한 사람’을 만나기 전에 그 사람의 직장, 거주지역, 주택 소유 여부, 연봉, 나이 같은 조건표부터 읽기 시작한다는 데 있습니다. 영상에서 그는 자신의 전세보증금이 스스로 모은 돈이라고 설명하지만 상대방에게 돌아오는 말은 ‘그럼 결혼하면 대출부터 시작이네요’였습니다. 그 한마디에는 오늘날 결혼시장이 사람을 바라보는 한 단면이 압축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보다 ‘당신은 내 삶에 무엇을 제공할 수 있습니까?’가 먼저 묻히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서 영상의 편을 그대로 들어 줄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한국 여성들은 조건만 따지고 베트남 여성들은 사람 자체를 본다’고 결론 내린다면 영상 속 결혼정보회사가 했던 것과 똑같은 일을 다시 하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개인을 ‘한국 여자’, ‘베트남 여자’라는 다른 조건표에 집어넣는 것입니다. 영상이 보여 주는 것은 어디까지나 영상이 구성한 몇 사람의 사례입니다. 그것을 ‘한국 여자들의 진짜 현실’ 전체로 확대할 근거는 이 자료 안에는 없습니다. 국제결혼에도 진실한 사랑이 있고 이해관계로 맺어진 결혼이 있으며, 국내결혼에도 조건 중심의 결혼과 깊은 인격적 사랑이 함께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렌즈가 물어야 할 것은 ‘어느 나라 여자가 더 좋은가?’가 아니라 ‘나는 배우자를 무엇으로 보고 있는가?’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영상 속 린이라는 여성이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두 사람이 가까워진 계기는 처음부터 결혼조건이 아니었습니다. 직장에서 주인공이 잘못 작성한 주문서의 숫자 하나를 그녀가 발견하면서 서로의 능력과 성품을 알기 시작했고, 함께 일하고 식사하고 이야기하면서 관계가 자라났습니다. 더욱 인상적인 장면은 주인공이 한국의 18평 전세집을 영상통화로 보여 주며 ‘이게 지금 내 전부예요’라고 말했을 때입니다. 이전 만남에서 약점처럼 취급되었던 바로 그 집을 보고 린은 ‘둘이 살기에 딱 좋네요. 커튼만 바꾸면 돼요’라고 대답합니다. 이 장면이 마음을 건드리는 이유는 베트남 여성이어서가 아닙니다. 한쪽은 ‘이것밖에 없습니까?’라고 보았던 것을 다른 한쪽은 ‘여기서 함께 시작할 수 있겠네요’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참된 결혼애의 관점에서 보면 이 차이는 상당히 중요합니다. 결혼은 상대방에게서 무엇을 획득할 것인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거래가 아니라 두 사람의 내면이 서로에게 열리고, 상대의 선을 자신의 기쁨으로 받아들이며 점차 하나를 이루어 가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현실적인 조건을 살피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직업, 경제력, 건강, 나이, 가족환경은 실제 결혼생활에 영향을 줍니다. 그러나 ‘조건을 보는 것’과 ‘조건으로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전자는 지혜의 문제가 될 수 있지만 후자는 인간을 수단으로 바라보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쉽습니다.

 

영상에는 이것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 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린의 아버지가 결혼을 앞둔 한국인 사위에게 묻는 질문입니다. ‘한국에 가면 내 딸이 일을 할 수 있습니까?’ 돈을 얼마나 벌며 집이 있는지를 먼저 묻지 않고, 자기 딸이 결혼 후에도 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를 묻습니다. 주인공은 ‘린 씨가 원하는 일을 하게 돕겠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영상의 서술에 따르면 결혼비용도 두 사람이 나누어 부담합니다. 이 대목은 국제결혼을 바라볼 때 특히 중요합니다. 참된 혼인은 ‘한 나라의 남자가 다른 나라의 여자를 데려오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각자의 자유와 인격을 가진 채 함께 삶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상 속 국제결혼을 둘러싼 편견 역시 그냥 지나치기 어렵습니다. 친누나는 ‘국적 따면 끝이야’라고 말하고, 직장에서는 ‘1,500 주고 데려온다’, ‘국적 받으면 바로 이혼한다’는 소문이 돕니다. 물론 실제 국제결혼에는 언어와 문화의 차이, 경제적 격차, 체류자격 문제 등 국내결혼과 다른 현실적인 위험요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문제를 살피는 것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아직 만나 보지도 않은 한 사람을 국적 하나만으로 ‘돈 받고 온 여자’, ‘국적을 따면 떠날 여자’라고 규정한다면 그것은 분별이 아니라 편견입니다. 한 인간의 내면을 국적으로 대신 판단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더욱 의미심장한 것은 친누나가 결혼을 반대한 이유가 뒤늦게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영상에 따르면 누나는 베트남 여성 자체가 싫었던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미혼이던 남동생이 어머니를 주로 돌봐 왔는데, 동생이 결혼하면 그 부담이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결국 누나는 ‘국제결혼’이라는 명분 뒤에 자신의 부담과 두려움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매우 중요한 장면입니다. 인간의 겉으로 드러난 주장과 그 주장을 움직이는 내적 동기가 항상 같은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는 저 사람을 걱정해서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더 깊은 곳에서는 내 편안함, 내 이익, 내 체면이 위협받는 것이 싫어서 반대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결혼정보회사의 모습도 비슷합니다. 매니저는 국제결혼은 문화가 달라 후회한다며 주인공을 말렸지만, 회사 홈페이지에는 ‘베트남 국제결혼 전문 상담’ 상품이 걸려 있었다고 영상은 말합니다. 이것이 영상의 서술대로라면 ‘국제결혼이 위험하다’는 원칙 자체보다 자기 회사를 통한 거래인가 아닌가가 판단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을 생각하게 합니다. 여기에서도 문제는 국제결혼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프로프리움(proprium)’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마치 객관적인 원칙인 것처럼 포장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영적 분별에서는 ‘저 말이 옳은가?’뿐 아니라 ‘나는 왜 이 말을 하고 있는가?’도 함께 살펴야 합니다.

 

직장 동료 소영의 경우 영상은 더 노골적인 해석을 내놓습니다. 과거에는 지방 중소기업에 다니며 전세에 산다는 이유로 주인공을 배우자로 생각하지 않았던 사람이 몇 년 뒤 ‘괜찮은 사람은 다 베트남, 일본 가서 결혼한다’, ‘남자들이 그렇게 다 외국으로 가 버리면 여기 남은 여자들은 어떡하느냐’고 말합니다. 영상은 이를 ‘우리가 거절한 남자들이 다른 데서 행복해지지 말라’는 심리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렌즈는 한 걸음 멈춰야 합니다. 그 해석은 영상 제작자의 해석이지 모든 국제결혼 비판자나 모든 미혼 여성의 내면을 설명하는 사실은 아닙니다.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은 주님만 아십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영상이 제시한 말과 행동의 모순을 살피는 데까지입니다.

 

그럼에도 이 장면에서 발견할 수 있는 영적 문제는 있습니다. 그것은 ‘소유하지 않았으면서도 소유권을 주장하는 마음’입니다. 내가 선택하지 않았던 사람이 다른 곳에서 사랑받고 행복해졌을 때 불편해지는 마음이 실제로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자기애에 더 가깝습니다. 사랑은 ‘내가 원하지 않았던 사람이라도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하기를’ 바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자기애는 ‘나는 당신을 원하지 않지만 당신이 나 없이 행복해지는 것도 싫다’는 모순된 감정을 품을 수 있습니다. 이 문제는 남녀 어느 한쪽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남성 역시 자신이 거절했던 여성이 더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해지는 모습을 보며 같은 질투와 소유욕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한국 여자들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프로프리움의 문제입니다.

 

앞서 마태복음 19장을 통해 살펴본 ‘둘이 한 몸’이라는 말씀과 연결하면 이번 영상은 더욱 흥미로워집니다. ‘한 몸’이 된다는 것은 두 사람이 서로를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조건 묶음으로 소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혼할 사람을 ‘연봉 얼마’, ‘집 몇 평’, ‘직업 무엇’, ‘나이 몇 살’, ‘국적 어디’로 분해하는 순간 우리는 아직 ‘한 사람’을 보고 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조건은 필요하지만 조건들의 합계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 앞에서 한 인간은 그런 외적 조건보다 훨씬 깊은 존재입니다.

 

이것은 국제결혼을 생각하는 남성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합니다. ‘한국 여성은 조건을 따지니 순종적인 동남아 여성을 만나겠다’는 식으로 국제결혼을 선택한다면 그것 역시 참된 결혼애와 거리가 멉니다. 그런 사람은 한국 여성을 조건으로 판단하는 문화를 비판하면서 자신도 외국 여성을 ‘젊음, 순종, 저렴한 결혼비용’ 같은 다른 조건으로 바라보고 있을 수 있습니다. 특히 경제적·연령적 격차가 큰 국제결혼에서는 상대방의 자유가 실제로 존중되고 있는지 더욱 세심하게 살펴야 합니다. 영상 속 린이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도 ‘베트남 여자라서 순종적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직업을 가지고 있었고, 뛰어난 한국어 능력과 전문성을 갖추었으며, 한국에 온 뒤에도 일을 계속하고 싶어 했고, 남편 역시 그것을 존중했기 때문입니다. 영상에서 그녀는 수동적으로 ‘데려온 여성’이 아니라 자기 선택을 하는 한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그래서 이 영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국적 취득이나 새 아파트 당첨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집의 보일러가 고장 났을 때 린이 서비스센터에 연락하고 전기장판과 핫팩을 들고 찾아가 밤까지 곁을 지키는 장면, 그리고 가족센터에서 다른 베트남 결혼이민자들의 병원과 관공서 일을 통역해 주는 장면입니다. 여기에서 한 사람의 가치는 ‘어느 나라에서 왔는가’가 아니라 ‘어떤 선을 사랑하고 실제 삶에서 행하는가’를 통해 드러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결국 사람의 영적 품질을 드러내는 것은 국적도 학력도 재산도 아닌 그 사람이 사랑하는 선과 그것을 삶으로 행하는 방식입니다.

 

동시에 이 장면은 앞서 살펴본 ‘이혼, 책임, 자유 그리고 주님의 섭리’와도 묘하게 연결됩니다. 참된 혼인은 한쪽이 다른 쪽의 삶을 대신 살아 주는 관계도 아니고, 한쪽이 다른 쪽을 자신의 필요를 채우는 도구로 사용하는 관계도 아닙니다. 서로 독립된 자유로운 두 사람이 상대의 선을 기뻐하며 점차 하나를 이루는 관계입니다. 그래서 린의 아버지가 ‘내 딸이 한국에서도 일을 할 수 있느냐’고 물은 것은 단순한 취업 문제가 아니라 중요한 질문이 됩니다. ‘결혼한 뒤에도 내 딸은 한 사람으로 존중받을 것인가?’라는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번 ‘존버리즘’ 영상의 제목인 ‘국제결혼 때문에 분노하는 한국 여자들의 진짜 현실’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과하면서 조금 다른 질문으로 바뀝니다. ‘왜 한국 남자들이 국제결혼을 하는가?’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우리는 결혼할 사람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입니다. 그리고 ‘한국 여자들은 왜 그러는가?’보다 더 깊은 질문은 ‘나는 사람을 조건으로 보고 있지는 않은가?’입니다.

 

결혼정보회사에서 주인공에게 ‘지방, 중소기업, 40대’라는 세 개의 조건표가 붙었습니다. 직장 사람들은 린에게 ‘베트남 여자, 돈 받고 온 여자, 국적 따면 떠날 여자’라는 또 다른 조건표를 붙였습니다. 서로 정반대처럼 보이지만 영적으로는 같은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양쪽 모두 한 인간을 만나기 전에 먼저 ‘라벨’을 읽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실제로 서로를 알아가기 시작한 곳에는 그런 라벨이 없었습니다. 주문서에 잘못 붙은 ‘0’ 하나를 발견해 준 사람, 자기의 실수를 고맙게 받아들인 사람, 야근 뒤 함께 쌀국수를 먹은 사람, 작은 전세집을 보여 주며 ‘이게 내 전부’라고 말할 수 있었던 사람, 그리고 그 집을 보고 ‘둘이 살기에 딱 좋네요. 커튼만 바꾸면 돼요’라고 대답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참된 결혼애는 바로 거기서 시작되는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내 조건에 얼마나 맞습니까?’가 아니라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라고 묻는 데서 말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당신이 내게 무엇을 줄 수 있습니까?’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어떤 선을 이루며 살아갈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 데서 시작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영상의 마지막에 남겨야 할 질문은 ‘한국 여자와 결혼할 것인가, 외국 여자와 결혼할 것인가?’가 아닙니다. 국적을 바꾼다고 자기애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국제결혼을 한다고 참된 결혼애가 저절로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 앞에서는 한국인과 베트남인이라는 구별보다 훨씬 깊은 구별이 있습니다. 상대를 이용하려는 사랑인가, 상대의 선을 기뻐하는 사랑인가. 상대를 내 삶의 조건으로 보는가, 주님 앞에 선 하나의 영혼으로 보는가.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이번 영상에서 발견하는 핵심은 그래서 국제결혼의 승리도, 한국 여성에 대한 비판도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을 ‘조건표’로 바꾸어 버리는 우리의 시선에 대한 경고입니다. 사람을 조건으로 평가하기 시작하면 한국 남성도 상품이 되고 한국 여성도 상품이 되며 베트남 여성도 상품이 됩니다. 그러나 한 사람을 ‘한 사람’으로 보기 시작하면 결혼은 시장에서 다시 관계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는 말씀을 향해 가는 가장 첫걸음인지도 모릅니다. 한 몸이 되기 전에 먼저 상대를 ‘한 사람’으로 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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