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PR.007 | 개신교인의 무의식 속 오류와 뒤섞인 신앙 100선
‘칭의를 받았으면 내 내면이 실제로 얼마나 변화했는가는 구원과 별개의 문제다’ -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주님은 왜 그 내면까지 새롭게 하시는가?
해설
개신교 신앙생활에서 ‘칭의’는 구원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입니다.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의로움이나 종교적 공로로 구원을 얻을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가르침입니다. 여기에는 구원의 근원이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라는 귀중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가르침이 ‘하나님께서 이미 나를 의롭다고 인정하셨으니 내 내면이 실제로 얼마나 변화했는가는 구원과 별개의 문제다’라는 생각으로 발전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의롭다고 인정하신다는 것은 단지 그 사람에 대한 법적인 판단을 바꾸신다는 뜻일까요? 아니면 그 사람이 실제로 의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내면까지 새롭게 하신다는 뜻일까요? 만일 하나님 앞에서는 의롭다고 인정받았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악을 사랑하고 이웃을 해치는 것을 즐거워한다면, 과연 그 사람 안에 구원의 생명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은 칭의와 성화의 관계를 넘어 주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목적 자체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먼저 개신교의 공식적인 칭의 교리를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종교개혁 전통은 일반적으로 칭의와 성화를 구별합니다. 칭의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믿는 죄인을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것이며, 성화는 그 사람이 실제 삶에서 거룩하게 변화되는 과정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1장 1항은 하나님께서 인간 안에 의를 주입하시는 방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하심으로써 죄인을 의롭다고 인정하신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같은 장 2항은 의롭다 하심을 받는 믿음이 사랑으로 역사한다고 가르치며, 제13장은 성화를 통해 인간이 실제로 새로워진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개혁주의의 공식 교리가 내면의 변화를 불필요하게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이러한 구별이 신앙생활에서 단순화되면서, 칭의만으로 구원의 본질적인 문제가 모두 해결되었고 실제적인 변화는 부차적인 일처럼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검토해야 할 것은 칭의와 성화를 구별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 구별을 근거로 구원과 거듭남을 사실상 분리하는 사고방식입니다.
성경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실제적인 변화는 함께 강조됩니다. 바울은 롬3:24에서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롬6:1-2에서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계속 머물러도 되느냐고 물은 뒤, 죄에 대하여 죽은 사람이 어떻게 그 가운데 더 살겠느냐고 반문합니다. 이어 롬6:4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고후5:17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을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부르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바울에게 은혜는 죄를 계속 사랑해도 된다는 허가가 아니라,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주님께서도 요3:3에서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이해할 때 하나님께서 죄인을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문제와, 그 사람이 실제로 어떻게 새로워지는가 하는 문제를 서로 무관하게 다루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는 이 문제를 개혁과 거듭남의 관계에서 설명합니다. TCR.571은 인간이 자연적 상태에서 영적 상태로 변화되는 과정을 두 단계로 구별합니다. 첫 번째인 개혁은 주로 이해를 통해 진리를 받아들이는 상태이며, 두 번째인 거듭남은 그 진리가 의지와 사랑에 받아들여지는 상태입니다. 사람은 먼저 진리를 배우고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이해했다고 해서 곧바로 그 사람의 사랑이 변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을 정확하게 알면서도 실제로는 이웃을 미워하고 이용할 수 있으며, 거짓말이 죄라는 사실을 이해하면서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말하는 것을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거듭남이란 이렇게 이해 속에 머물던 진리가 의지 안에 받아들여져 실제로 선을 사랑하는 새로운 생명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TCR.571에서 지상에서 개혁의 첫 번째 상태에 들어간 사람은 사후에 두 번째 상태로 인도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거듭남을 지상에서 반드시 완성해야 하는 도덕적 과제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진리를 통해 자신의 사랑이 변화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죄 사함 이해는 종교개혁 신학의 법정적 칭의 이해와 중요한 차이를 드러냅니다. TCR.611–614는 사람이 거듭나는 만큼 죄가 제거되며, 이러한 제거가 죄 사함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제거’는 인간이 저지른 악이 존재 자체를 잃고 완전히 사라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TCR.614는 악이 뿌리째 뽑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을 악에서 물러나게 하시고 선 안에 머물도록 보존하신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죄 사함은 단순히 과거의 죄를 더 이상 계산하지 않는 법적인 선언만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인간을 악의 지배에서 실제로 건져 내시고 새로운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역사와 결합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죄를 용서하시는 주님의 사랑이 부족하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사랑이 인간의 내면까지 새롭게 하기를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주님은 인간을 의로운 사람으로 간주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선을 사랑하고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내면의 변화를 강조하는 것은 결국 인간의 도덕적 성취에 따라 구원 여부를 결정하는 일이 아닐까요? 스베덴보리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모든 참된 선은 오직 주님에게서 오며, 인간의 의지를 새롭게 하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 DP, 1764) 100–128항은 사람이 자신의 악을 마치 스스로 제거하는 것처럼 노력해야 하지만, 실제로 악을 제거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TCR.576–578은 주님께서 인간을 새롭게 하시되 인간의 자유로운 협력이 필요하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주님과 인간이 구원의 공로를 나누어 가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구원의 모든 능력은 주님에게서 오지만,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와 합리성을 존중하시면서 그 능력이 인간 안에 받아들여지도록 역사하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악을 살피고 그것을 죄로 인정하며, 주님께 도움을 구하여 그 악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이러한 노력은 자기 공로로 구원을 획득하는 행위가 아니라, 주님의 구원하시는 역사에 자유롭게 협력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내면의 변화를 강조하는 것은 인간의 공로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가 얼마나 깊이 인간의 생명 안에서 역사하는지를 보여 주는 일입니다.
이러한 이해는 목회 현장에서도 중요한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어떤 신자가 오랫동안 교회에 다니고 칭의에 관한 교리를 정확하게 알고 있지만, 가정에서 가족들을 함부로 대하고 직장에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속이면서도 ‘나는 이미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내 구원에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의 신앙 이해를 다시 살펴야 합니다. 물론 그 사람의 최종적인 영적 상태를 인간이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의 신앙고백과 실제 삶 사이에 심각한 분리가 있다는 사실은 외면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자신의 악과 연약함을 발견하고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아직 충분히 변화되지 않았으므로 구원받지 못했다고 단정하는 것 역시 잘못입니다. 거듭남은 완성된 도덕적 상태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 안에서 이루어 가시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변화 정도를 계산하는 일이 아니라, 악을 죄로 인정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실제로 선을 사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자신의 악을 발견하고 그것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는 사람과, 악을 사랑하고 정당화하면서도 이미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안심하는 사람은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습니다.
결국 ‘칭의를 받았으면 내 내면이 실제로 얼마나 변화했는가는 구원과 별개의 문제다’라는 말에서 바로잡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신뢰가 아니라, 그 은혜가 인간 안에서 실제로 이루려는 목적에 대한 이해입니다. 주님께서는 단지 죄인을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데 그치지 않고 그의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겔36:26-27에서 하나님께서 새 마음과 새 영을 주시고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여 살 같은 마음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말씀은 이러한 구원의 본질을 잘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변화되지 않은 인간에게 새로운 신분만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새로운 사랑과 새로운 생명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나는 이미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괜찮다’는 안도감이 아니라, 오늘도 자신의 의지와 이해를 새롭게 하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참된 구원의 확신은 내면의 변화를 외면하는 데서 깊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실제로 거듭나게 하시는 주님을 신뢰하는 데서 깊어집니다. (PR.007 해설)
요약
칭의와 성화를 구별하는 것 자체가 오류는 아니며, 개혁주의의 공식 교리도 내면의 변화를 불필요하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칭의를 받았다는 이유로 실제적인 거듭남과 내면의 변화를 구원과 별개의 문제로 여기는 것은 오류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죄 사함은 주님께서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면서 악의 지배에서 물러나게 하시는 역사와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구원은 법적인 지위만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와 이해가 새로워지고 선과 진리가 실제 생명으로 받아들여지는 과정입니다. 이 모든 변화의 근원은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주님의 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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