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9은 단순히 ‘다음날’이라고 하지 않고 굳이 ‘여덟째날에’라고 시작합니다. 앞 장에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이레 동안 회막 문에 머물며 위임식을 완성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이 표현은 더욱 눈에 들어옵니다. 일곱 날이 끝나고 여덟째 날이 시작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스베덴보리의 직접적인 설명이 있습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9228(출22:30)은 ‘일곱’이 완전한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에 제사장 위임이 이레 동안 계속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여덟째날’은 ‘그다음상태의첫단계’를 의미한다고 밝힙니다.
따라서 여덟째 날은 단순히 숫자 8의 신비한 힘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핵심은 ‘일곱이완성된뒤에오는새로운시작’입니다. 한 상태가 충만하게 완성되고 그 다음 상태가 열리는 것입니다.
레8과 레9의 관계가 정확히 그렇습니다. 레8에서 아론은 준비됩니다. 씻고, 옷을 입고, 기름 부음을 받고, 피를 바르고, 손에 제물을 받고, 이레 동안 회막 문에 머뭅니다. 그러나 레9의 여덟째 날이 되자 그 모든 준비가 실제 쓰임으로 전환됩니다. 아론이 직접 제단에 나아가 제사를 드리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거듭남을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어떤 상태를 충분히 형성하신 뒤 새로운 상태를 여십니다. 진리를 배우는 시간이 있고 그 진리를 실제 삶에서 행해야 하는 시간이 옵니다. 악을 깨닫는 시간이 있고 그것을 실제로 끊어 내야 하는 시간이 옵니다. 준비가 영원히 준비로만 남아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영적 삶에는 ‘일곱째날’도 필요하고 ‘여덟째날’도 필요합니다. 충분히 머물고 배우고 형성되는 시간이 필요하지만, 어느 순간에는 받은 것을 가지고 밖으로 나가 쓰임을 행해야 합니다. 계속 배우기만 하면서 살아가지 않는다면 준비는 목적을 잃습니다.
반대로 여덟째 날을 너무 빨리 만들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레8의 이레를 건너뛰고 곧바로 레9의 사역으로 뛰어갈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내면을 준비하시고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상태를 형성하시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충만함 없는 활동은 쉽게 proprium의 열심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레9의 ‘여덟째날’은 거듭남에서 매우 희망적인 표현입니다. 주님께서 한 상태를 완성하시면 거기서 끝내지 않으십니다. 완성은 다음 상태의 시작이 됩니다. 정결은 쓰임으로, 배움은 삶으로, 준비는 봉사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바로 그 새로운 상태에서 레9의 약속, ‘오늘여호와께서너희에게나타나실것임이니라’가 시작됩니다. (SW.레9심화1)
레위기 9장은 ‘여덟째날에’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 짧은 표현은 앞의 레8과 레9을 하나로 연결하는 열쇠입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이레 동안 회막 문을 떠나지 않고 위임식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 날, 이제 실제 제사장 사역이 시작됩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9228(출22:30)은 ‘일곱’이 완전한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에 제사장 위임이 이레 동안 계속되었다고 설명한 뒤, ‘여덟째날’은 ‘그다음상태의첫단계’를 의미한다고 밝힙니다. 따라서 레9의 여덟째 날은 단순히 달력상의 다음 날이 아닙니다. 준비가 완성된 뒤 새로운 상태가 시작되는 날입니다.
이것은 레8과 레9사이의 중요한 차이를 보여 줍니다. 레8에서 아론은 씻김을 받고, 옷을 입고, 기름 부음을 받고, 귀와 손과 발에 피를 바르고, 손에 제물을 받아 흔들고, 이레 동안 회막 문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아직 ‘준비’였습니다. 레9에서 비로소 아론은 제단 앞으로 나아가 자신이 직접 제사를 드립니다. 거듭남도 이와 같습니다. 진리를 배우고, 악을 살피고, 마음을 정돈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인간을 준비시키시는 목적은 결국 그 사람이 실제 삶에서 선한 쓰임을 행하게 하시는 데 있습니다. 여덟째 날은 준비된 선과 진리가 실제 삶으로 나가기 시작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새로운 상태의 첫 장면은 의외입니다. 아론이 제사장이 되었으니 곧바로 백성을 위한 제사부터 드릴 것 같지만, 먼저 ‘자기를위한속죄제’와 ‘자기를위한번제’를 드려야 합니다. 7절에서 모세는 ‘네속죄제와네번제를드려서너를위하여,백성을위하여속죄하고’라고 명령합니다. 8절부터 14절까지 실제로 아론 자신의 속죄제와 번제가 먼저 드려지고, 그 후 15절부터 백성을 위한 제사가 시작됩니다. 주님의 쓰임을 맡았다고 해서 인간 자신의 정결 과정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을 섬기기 전에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계속 주님 앞에 가져가야 합니다.
이 점은 모든 영적 쓰임에서 중요합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이 말씀의 심판을 받지 않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을 돌보는 사람이 자기 내면을 돌아볼 필요가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나는이제제사장이니백성의문제만다루면된다’가 아닙니다. 먼저 자신의 속죄제와 번제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악은 잘 보면서 자신의 악은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진리를 가르치면서 자신에게는 적용하지 않는다면 쓰임은 쉽게 proprium의 도구가 됩니다. 참된 쓰임은 자기 정결을 지나 다른 사람에게 흘러갑니다.
15절부터는 백성을 위한 속죄제, 번제, 소제, 화목제가 차례로 드려집니다. 레1-7에서 하나씩 배웠던 제사들이 이제 실제 제사장 사역 안에서 하나의 계열로 등장합니다. 먼저 죄와 관련된 정결이 있고, 이어 전체를 주님께 드리는 번제가 있으며, 선과 진리가 삶의 예물이 되는 소제가 있고, 마지막에는 주님과 인간의 결합을 나타내는 화목제가 있습니다. 이것을 기계적인 ‘거듭남의네단계’로 고정할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이 배열에는 분명한 영적 질서가 보입니다. 악과 거짓에서 정결하게 되는 것이 결합보다 먼저이며, 주님께 드려짐과 선한 삶을 거쳐 마침내 화목과 교통으로 나아갑니다.
18절로 21절의 화목제에서는 지금까지 배운 상응들이 다시 모입니다. 피는 제단 사방에 뿌려지고, 기름과 기름진 꼬리와 내장을 덮은 기름과 콩팥과 간 꺼풀이 제단에 올라갑니다. AC.10033(출29:13)은 제사의 피가 신적 진리를, 기름이 신적 선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제단에서 피와 기름이 함께 다루어지는 것은 진리와 선의 결합이라는 제사 전체의 중심을 다시 보여 줍니다. 그리고 가슴들과 오른쪽 뒷다리는 여호와 앞에 요제로 흔들립니다. 레7에서 보았듯 가슴은 체어리티의 영적 선과, 오른쪽 뒷다리는 더 내적인 천적 선과 연결됩니다. 레1-7에서 하나씩 배운 제사의 언어가 이제 레9의 실제 예배 안에서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22절에서 아론은 모든 제사를 마친 뒤 ‘백성을향하여손을들어축복’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전환입니다. 지금까지 아론의 손은 제물을 다루던 손이었습니다. 레8에서는 그 손에 제물을 올려놓아 요제로 흔들게 했고, 그 손에 있는 모든 것이 주님에게서 왔음을 인정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손이 백성을 향해 올라갑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것이 마침내 다른 사람을 향한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쓰임의 방향입니다. 주님에게서 받아 자기 안에 쌓아 두는 것이 아니라 이웃에게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축복’은 단순히 좋은 일이 생기기를 바라는 말보다 훨씬 깊습니다. AC.1422(창12:3)는 축복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 곧 천적·영적·자연적인 모든 좋은 것을 포함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아론이 손을 들어 백성을 축복하는 장면은 제사장 자신의 힘으로 복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선과 진리가 제사장의 쓰임을 통해 백성에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레8에서 ‘손을채우셨던’ 주님께서 이제 레9에서는 그 손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복을 흘려보내십니다.
23절에서는 모세와 아론이 함께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옵니다. 그리고 다시 백성을 축복합니다. 그때 마침내 ‘여호와의영광이온백성에게나타납니다.’ 회막 자체가 무엇을 나타내는지는 AC.9784(출27:20)가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회막은 ‘주님의임재’를 의미합니다. 회막이 바로 주님께서 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을 만나시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모세와 아론이 회막 안으로 들어갔다가 나와 축복하고 그 직후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는 순서는 매우 아름답습니다. 쓰임의 능력은 인간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습니다. 주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갔다가 그분에게서 받아 나올 때 비로소 다른 사람을 축복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호와의영광’은 무엇일까요? 스베덴보리는 이것도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AC.5922(창45:13)는 ‘여호와의영광’을 신적 진리와 연결하며, 천국에서 신적 진리가 빛과 영광으로 나타난다고 설명합니다. AC.10574(출33:18)는 더욱 분명하게 ‘여호와의영광’이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이며, 가장 참된 의미에서는 그 빛 가운데 나타나시는 주님 자신과 관련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레9에서 ‘여호와의영광이나타났다’는 것은 단순히 눈부신 초자연적 현상을 보았다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제사와 정결과 쓰임을 통해 주님의 신적 진리가 교회 가운데 드러나는 것을 표상합니다.
그리고 24절에서 절정이 찾아옵니다. ‘불이여호와앞에서나와제단위의번제물과기름을사른지라.’ 여기에서 인간이 피운 제단의 불과 구별되는 결정적인 사실이 있습니다. 이 불은 ‘여호와앞에서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불의 상응을 매우 일관되게 설명합니다. AC.6832(출3:2)는 제단 위에서 계속 타야 했던 불을 신적 사랑과 연결하고, 레6:12-13의 꺼지지 않는 불도 직접 인용합니다. 따라서 레9마지막에 여호와에게서 나온 불이 제물을 사르는 것은 모든 참된 예배의 생명이 결국 인간에게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신적 사랑에서 온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레6의 ‘꺼지지않는불’과도 아름답게 연결됩니다. 레6에서는 ‘불은끊임이없이제단위에피워꺼지지않게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주님의 영원한 사랑과 자비를 표상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레9에서는 그 불의 근원이 눈앞에 드러납니다. ‘불이여호와앞에서나옵니다.’ 인간이 제물을 준비하고, 제사장이 규례대로 행하고, 피를 뿌리고 기름을 놓지만 마지막으로 제사를 받아들이고 생명을 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인간이 예배의 형식을 준비할 수는 있지만 그 예배를 살아 있게 하는 불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이 장면은 거듭남에서도 결정적입니다. 인간은 말씀을 읽고, 악을 피하려고 노력하고, 선을 행하고, 이웃을 섬깁니다. 이런 협력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실제 영적 생명으로 만드는 것은 인간의 노력 자체가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이 그 안에 들어와야 합니다. 우리가 제단을 만들고 제물을 올려놓을 수는 있지만 불을 만들어 낼 수는 없습니다. 참된 사랑과 체어리티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내려옵니다.
그래서 백성의 마지막 반응도 의미가 깊습니다. 그들은 불을 보고 ‘소리지르며엎드립니다.’ 모든 준비와 모든 제사가 결국 인간의 자기 만족으로 끝나지 않고 주님 앞의 경배로 끝납니다. 제사장이 훌륭하게 의식을 마쳤으므로 사람들이 아론을 칭찬하는 장면이 아닙니다. 주님의 영광과 주님에게서 나온 불을 보고 모두가 엎드립니다. 참된 쓰임은 사람의 시선을 쓰임을 행한 사람에게 모으지 않고 주님께 돌립니다.
레8과 레9을 함께 놓으면 하나의 아름다운 거듭남의 계열이 보입니다. 레8에서는 주님께서 인간을 씻으시고, 진리를 입히시고, 사랑의 기름을 부으시고, 귀와 손과 발을 거룩하게 하시며, 손에 선과 진리를 채우십니다. 그리고 이레의 충만한 준비가 끝난 뒤 레9의 여덟째 날이 옵니다. 이제 인간은 받은 것을 실제 쓰임으로 행합니다. 먼저 자신을 계속 정결하게 하고, 그 다음 다른 사람을 위해 섬기며, 마침내 손을 들어 축복합니다. 그때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주님에게서 불이 나옵니다. 거듭남은 자기 자신을 완성하는 프로젝트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한 사람을 준비하여 그 사람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선이 흘러가게 하시고, 마침내 그 모든 선의 근원이 주님이심이 드러나게 하시는 과정입니다. ‘오늘여호와께서너희에게나타나실것임이니라.’ 레9의 이 약속은 바로 그렇게 성취됩니다. (SW.레9해설)
아론은 이미 레8에서 제사장으로 위임되었습니다. 물로 씻었고 거룩한 옷을 입었으며 관유를 받았고, 귀와 손과 발에 위임식 숫양의 피까지 발랐습니다. 그런데 레9에서 실제 사역을 시작하려 하자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이 또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한 속죄제와 번제를 드리는 것입니다.
모세는 아론에게 ‘네속죄제와네번제를드려서너를위하여,백성을위하여속죄하라’고 합니다. 실제 순서도 아론 자신의 제사가 먼저이고 그 후 백성의 제사가 이어집니다. 이것은 제사장이라는 직분이 인간 자신을 자동으로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님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레4에서 보았듯 속죄제는 악과 거짓에서의 정결을 표상합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을 위해 거룩한 쓰임을 행하는 사람도 계속해서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주님 앞에서 살펴야 합니다. 직분은 거듭남을 대신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영적 쓰임을 많이 맡을수록 이 원리는 더 중요해집니다. 다른 사람의 문제를 다루다 보면 자기 문제를 보지 못하기 쉽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말씀을 적용하다 보면 그 말씀이 먼저 자기 자신에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회개를 말하면서 자기 분노와 교만과 자기애는 정당화할 수도 있습니다.
이때 쓰임은 아주 미묘하게 proprium의 도구가 됩니다. ‘나는가르치는사람이다’, ‘나는돕는사람이다’, ‘나는영적인사람이다’라는 자기상이 오히려 자기 악을 보지 못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레9의 첫 실제 제사장 사역은 남을 위한 제사가 아니라 자신을 위한 속죄제로 시작합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완벽하게깨끗해진뒤에야다른사람을도울수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도 계속 주님의 정결을 필요로 하는 사람임을 인정하면서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 인정은 오히려 체어리티를 깊게 합니다. 내가 주님의 자비 없이는 설 수 없는 사람임을 알수록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쉽게 정죄하기 어렵습니다. 자기 속죄제를 먼저 드린 제사장이 백성의 속죄제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레9의 순서는 모든 영적 쓰임에 하나의 원리를 줍니다. ‘먼저네자신을주님앞에세우라.’ 남의 악을 보기 전에 자기 악을 보고, 남에게 말씀을 적용하기 전에 자신에게 적용하며, 다른 사람을 정결하게 하려 하기 전에 자신도 주님의 정결하심 아래 있는 사람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때 쓰임은 자기 의가 아니라 체어리티에서 흘러나올 수 있습니다. (SW.레9심화2)
3.‘여호와의영광이나타난다는것은무엇일까?’
레9에는 같은 약속이 두 번 나옵니다. 6절에서 모세는 ‘여호와의영광이너희에게나타나리라’고 말하고, 23절에서는 모든 제사가 끝난 뒤 실제로 ‘여호와의영광이온백성에게나타났다’고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여호와의영광’은 무엇일까요?
스베덴보리는 ‘영광’을 단순한 눈부신 광채로만 보지 않습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5922(창45:13)는 여호와의 영광을 신적 진리와 연결합니다. 천국에서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가 빛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그것이 ‘영광’으로 표현된다는 것입니다.
AC.10574(출33:18)는 더욱 깊이 들어갑니다. 여호와의 영광은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이며, 가장 참된 의미에서는 그 신적 빛 가운데 나타나시는 주님 자신과 관련됩니다. 또한 말씀과 교회와 예배의 속뜻, 곧 그 안에 있는 신적 실재가 ‘영광’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레9에서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났다는 것은 단순히 백성 앞에 굉장한 초자연적 빛이 나타났다는 데 의미가 머물지 않습니다. 표상적으로는 주님의 신적 진리가 교회와 예배 가운데 드러나고, 그 진리 안에서 주님의 임재가 지각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 영광이 언제 나타나는지가 중요합니다. 레9시작부터 즉시 나타나지 않습니다. 아론의 속죄제와 번제가 있고, 백성의 속죄제와 번제와 소제와 화목제가 있고, 아론의 축복이 있으며,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옵니다. 그 후에야 영광이 나타납니다.
이 순서는 주님의 임재를 인간이 의식으로 ‘불러낸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신적 질서에 따라 정결하게 되고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쓰임 안으로 들어갈 때, 이미 항상 임재하시는 주님이 인간에게 ‘나타날수있는상태’가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태양은 계속 빛나지만 창문이 닫혀 있으면 방 안은 어둡습니다. 창문을 연다고 태양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회개와 정결과 예배가 주님의 임재를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들은 인간이 주님의 임재를 받아들이고 지각할 수 있는 상태로 준비되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레9의 영광은 거듭남의 아름다운 결과입니다. 진리를 단지 문자로 알고 있던 사람이 어느 순간 그 안에서 주님의 사랑과 지혜를 보기 시작합니다. 예배가 단순한 의무가 아니라 주님과 만나는 자리가 되고, 이웃을 섬기는 일이 단순한 도덕이 아니라 주님의 선이 흘러가는 쓰임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말씀 안의 ‘영광’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결국 ‘여호와의영광이나타난다’는 것은 멀리 계시던 하나님이 갑자기 가까이 오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의 상태가 변화하면서 언제나 임재하시던 주님의 신적 진리와 사랑이 비로소 지각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말씀과 예배와 이웃 안에서 주님의 영광을 보는 눈이 열립니다. (SW.레9심화3)
4.‘왜아론은제사를마친뒤손을들어백성을축복했을까?’
레9:22에서 아론은 속죄제와 번제와 화목제를 모두 마친 뒤 백성을 향하여 손을 들어 축복합니다. 제사장으로 위임된 아론이 처음으로 실제 사역을 수행한 뒤 행한 마지막 행동이 ‘축복’이라는 점은 매우 의미가 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축복을 단순히 좋은 일이 일어나기를 비는 종교적 인사로 보지 않습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422(창12:3)는 ‘축복’이 주님에게서 오는 모든 선과 진리, 곧 천적·영적·자연적 차원의 좋은 것들을 포괄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제사장이 백성을 축복한다는 것은 아론 자신이 복을 만들어 백성에게 주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제사장의 쓰임을 통해 백성에게 전달되는 것을 표상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레8의 장면을 기억하면 더욱 아름답습니다. 레8에서는 아론의 ‘손’에 위임식의 제물들이 놓였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것이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의 것이며 주님에게서 온다는 인정을 나타낸다고 설명했습니다. 그 손이 레9에서는 백성을 향해 올라갑니다.
즉 먼저 받아야 줄 수 있습니다. 레8에서는 손이 주님에게서 받고, 레9에서는 그 손이 백성을 향해 축복합니다. 이것이 쓰임의 질서입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자기 것으로 움켜쥐지 않고 이웃에게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영적 쓰임의 기준은 ‘내가얼마나많이가지고있는가?’가 아니라 ‘주님에게서받은것이나를통해얼마나선한쓰임으로흘러가는가?’입니다. 진리를 많이 알고 있다면 그것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돕는 데 사용해야 하고, 물질을 받았다면 선한 쓰임에 사용하며, 경험과 지혜를 받았다면 다른 사람을 살리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론은 ‘손을들어’ 축복합니다. 손이 능력과 행함을 나타낸다는 스베덴보리의 일반적인 상응을 생각하면 축복은 말만의 행위가 아니라 선을 실제로 전달하는 쓰임과 잘 연결됩니다. 진정한 축복은 ‘복받으십시오’라고 말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내가 가진 것을 통해 실제로 이웃에게 선이 전달되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레9의 첫 제사장 사역은 자기 영광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아론이 제사를 성공적으로 마쳤으니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손이 백성을 향해 올라갑니다. 그리고 곧이어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이것이 주님의 쓰임에 부름받은 사람의 방향입니다. 주님에게서 받고 이웃에게 흘려보내며, 마지막에는 사람의 시선이 자신에게 머물지 않고 주님께 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레8에서 채워진 손이 레9에서 축복하는 손이 되는 것, 이것이 위임에서 쓰임으로 나아가는 거듭남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SW.레9심화4)
5.‘왜불이여호와앞에서나와제물을살랐을까?’
레9의 마지막은 장엄합니다. 아론이 모든 제사를 마치고 백성을 축복하고,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 다시 백성을 축복하자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갑자기 ‘불이여호와앞에서나와제단위의번제물과기름을’ 사릅니다. 백성은 그것을 보고 소리 지르며 엎드립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불’만이 아니라 ‘여호와앞에서나와’입니다. 제단에는 이미 불이 있었고 제사장들도 제물을 불살랐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에 제사의 참된 근원이 어디인지를 보여 주듯 불이 주님에게서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불을 사랑과 매우 깊게 연결합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6832(출3:2)는 불이 좋은 의미에서는 신적 사랑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레6:12-13의 ‘제단의불은항상피워꺼지지않게하라’는 말씀을 직접 인용하면서 그 영속적인 제단 불이 신적 선 자체, 곧 신적 사랑을 표상한다고 밝힙니다.
따라서 레9마지막의 불을 인간의 종교적 열심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이 자기 힘으로 뜨거워져서 제사가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불은 ‘여호와앞에서’ 나옵니다. 예배에 생명을 주는 사랑의 근원은 인간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이것은 레6의 ‘꺼지지않는불’을 한층 더 깊게 이해하게 합니다. 레6에서는 제단의 불을 끄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불은 주님의 영원하고 끊임없는 사랑과 자비를 표상합니다. 레9에서는 이제 그 불의 출처가 명시됩니다. 그 사랑은 인간에게서 시작되어 하나님께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인간에게 내려옵니다.
인간이 하는 일도 분명히 있습니다. 제물을 가져오고, 잡고, 피를 뿌리고, 씻고, 제단에 올리고, 규례에 따라 행합니다. 거듭남에서도 인간은 악을 죄로 여겨 피하고, 말씀을 배우고, 선을 행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노력 자체가 영적 생명을 만들어 내지는 못합니다.
주님의 사랑이 그 안에 들어올 때 비로소 선은 살아 있는 선이 됩니다. 같은 구제를 해도 자기 명예를 위해 할 수 있고 체어리티에서 할 수 있습니다. 같은 설교를 해도 자기 지식을 보이기 위해 할 수 있고 사람의 영적 선을 위해 할 수 있습니다. 외적 행위가 같아도 그 안에 어떤 ‘불’이 있는지가 다릅니다.
따라서 레9의 불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무엇을하고있는가?’만이 아니라 ‘그일을움직이는불은어디에서오는가?’입니다. 자기애와 세상 사랑의 불도 사람을 열심히 움직이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의 불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불이 내려왔을 때 백성은 아론을 칭찬하지 않습니다. ‘온백성이이를보고소리지르며엎드렸더라.’ 모든 예배와 모든 쓰임의 마지막 방향이 여기 있습니다. 참된 신적 사랑이 나타날 때 인간의 proprium은 자신을 높이지 않고 주님 앞에 엎드립니다.
레8에서 인간의 귀와 손과 발이 준비되었습니다. 레9에서 그 준비된 인간이 실제 쓰임을 행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서 성경은 다시 분명히 합니다. 거듭남을 시작하시고 완성하시며 쓰임에 생명을 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인간은 제물을 제단에 올리지만 불은 여호와 앞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지만 그 선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바로 이것이 레9마지막 한 절에 담긴 거듭남의 가장 깊은 아르카나입니다. (SW.레9심화5)
레8의 모든 의식이 끝났는데도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곧바로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위임식이끝나는날까지이레동안은회막문에나가지말라’고 하시며, 다시 ‘칠주야를회막문에머물라’고 명령하십니다. 왜 제사장 위임에는 이레가 필요했을까요?
여기에는 매우 분명한 원전이 있습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9228(출22:30)은 ‘일곱’이 완전한 상태를 의미한다고 설명하면서 바로 레8:33-34를 직접 인용합니다. 제사장으로 위임받은 사람들이 이레 동안 회막을 떠나지 않았던 것도 바로 이 완전성과 충만함을 표상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AC.10102(출29:30)도 같은 원리를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이레’는 ‘충만하고완전한인정과받아들임’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레 동안의 위임은 단순히 일주일간의 훈련 기간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신적 선과 진리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하나의 완전한 상태를 표상합니다.
이것은 거듭남에 매우 중요한 사실을 보여 줍니다. 영적 변화는 한순간의 결단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어떤 진리를 깨닫고 크게 감동했다고 해서 그 진리가 즉시 우리의 의지와 삶 전체에 자리 잡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는 반복해서 받아들여지고, 시험을 통과하고, 실제 행동으로 내려오면서 비로소 삶이 됩니다.
그래서 레8에서는 하루 동안 엄청난 의식이 진행된 뒤에도 ‘아직끝난것이아니다’라고 말하는 셈입니다. 씻었고, 옷을 입었고, 기름을 부었고, 피를 발랐고, 제물을 손에 받았지만 그것이 완전한 상태로 자리 잡기까지 이레의 충만함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그렇습니다. 어떤 설교를 듣고 ‘이제부터이렇게살아야겠다’고 결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실제 성품이 되려면 다음 날에도, 그 다음 날에도, 어려운 상황에서도 같은 진리를 선택해야 합니다. 한 번의 깨달음이 반복되는 선택을 통해 삶의 형태가 되는 것입니다.
‘회막문을떠나지말라’는 말씀도 이 맥락에서 인상적입니다. 위임의 상태가 완성되기 전에 자기 마음대로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의 임재와 말씀의 질서 안에 머물면서 받은 것을 충분히 자기 삶에 받아들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거듭남에는 그래서 ‘머무름’이 있습니다. 우리는 늘 새로운 것을 알고 싶어 하지만 때로는 이미 받은 하나의 진리 안에 충분히 오래 머물러야 합니다. 용서하라는 진리를 알았다면 그것을 실제 용서가 될 때까지, 이웃을 사랑하라는 진리를 알았다면 그것이 실제 체어리티가 될 때까지 그 말씀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이레가 지나면 여덟째 날이 옵니다. AC.9228은 일곱이 완성된 상태를 나타내기 때문에 여덟째 날은 그 다음 새로운 상태의 시작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바로 다음 레9이 ‘여덟째날’로 시작한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닙니다. 레8의 이레 동안의 위임이 완성된 뒤 레9에서는 실제 제사장 사역이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레8의 이레는 기다림의 시간이 아니라 형성의 시간입니다. 주님께서 인간을 어떤 쓰임에 사용하시기 전에 선과 진리가 그 사람 안에서 충분히 받아들여지고 하나의 삶이 되게 하시는 과정입니다. 참된 위임은 순간적인 임명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것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하나의 완성된 상태입니다. 그리고 그 충만함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새로운 ‘여덟째날’, 곧 실제 쓰임의 새로운 상태가 시작됩니다. (SW.레8심화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