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BU.005 | 불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고통의 원인은 갈애와 집착에 있다’ - 집성제의 통찰과 인간을 지배하는 사랑의 문제

 

해설

인간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때 괴로워하지만, 원하는 것을 얻었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어렵게 얻은 것을 잃을까 두려워하고, 이미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며, 더 많은 것을 얻으려는 욕망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사람이나 재물뿐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명예, 지위와 신념까지도 놓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불교는 이러한 인간의 현실을 깊이 관찰하면서 고통의 원인을 외부 환경에서만 찾지 않습니다. 불교의 근본 교리인 ‘사성제’(四聖諦, cattāri ariyasaccāni), 곧 고통의 현실과 원인, 소멸, 그리고 그 소멸에 이르는 길에 관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 가운데 두 번째인 ‘집성제’(集聖諦, samudaya-sacca)는 고통이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설명합니다. 그 핵심에는 ‘갈애’(渴愛, taṇhā), 곧 만족을 얻으려는 목마름과, ‘집착’(執著, upādāna), 곧 어떤 대상이나 견해를 자기 것으로 굳게 붙잡으려는 태도가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불교가 단순히 인간에게 욕망이 있기 때문에 모든 고통이 발생한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이 변하는 것에 영원한 만족을 기대하고, 그것을 놓지 못하며, 자신의 존재와 행복을 거기에 의존시키는 과정이 문제입니다. 따라서 집성제는 단순한 금욕주의가 아니라 인간의 욕망이 어떻게 고통을 지속시키는지 밝히려는 가르침입니다.

 

초기불교의 ‘상윳따 니까야’(相應部, Saṃyutta Nikāya) 56.11에 수록된 ‘초전법륜경’(初轉法輪經, Dhammacakkappavattana Sutta)은 고통의 발생 원인으로 다시 태어남을 지속시키는 갈애를 제시하며, 이를 세 가지로 구별합니다. 첫째는 감각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는 ‘욕애’(欲愛, kāma-taṇhā)이고, 둘째는 존재하거나 계속 살아 있으려는 ‘유애’(有愛, bhava-taṇhā)이며, 셋째는 존재하지 않거나 소멸하기를 바라는 ‘무유애’(無有愛, vibhava-taṇhā)입니다. 이 구별은 갈애가 단순히 재물이나 쾌락을 탐하는 욕망에 한정되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인간은 즐거움을 붙잡으려 할 뿐 아니라 자기 존재를 영속시키려 하거나, 반대로 견디기 어려운 상태가 사라지기만을 바라면서 또 다른 집착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갈애를 삶의 모든 의욕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불교에는 수행과 선행을 향한 건전한 의욕을 뜻하는 ‘찬다’(chanda)라는 개념도 있으며, 깨달음을 위한 바른 노력은 오히려 중요한 수행의 요소입니다. 따라서 불교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무기력한 상태가 아닙니다. 고통을 지속시키는 갈애에서 벗어나 지혜와 자비에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갈애와 집착의 관계는 ‘연기’(緣起, paṭiccasamuppāda), 곧 현상들이 일정한 원인과 조건에 의존하여 생겨난다는 불교의 설명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상윳따 니까야’ 12.2는 감각적 접촉에서 느낌이 생기고,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집착을 조건으로 다시 존재의 형성과 태어남이 이어진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갈애는 대상을 향한 목마름이고, 집착은 그 대상을 더욱 강하게 붙잡아 자기 것으로 삼는 태도입니다. 불교는 집착을 감각적 쾌락에 대한 집착, 견해에 대한 집착, 특정한 계율과 의례가 그 자체로 해탈을 보장한다고 여기는 집착, 그리고 고정된 자아에 대한 견해를 붙잡는 집착으로 구별합니다. 이 가운데 특히 주목할 것은 자신의 생각과 종교적 신념에 대한 집착입니다. 재물이나 쾌락에 대한 욕망은 쉽게 알아차리면서도, 자신이 옳다는 확신과 남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사실은 깨닫지 못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불교가 모든 견해나 종교적 실천 자체를 버리라고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바른 견해와 바른 수행을 해탈의 길로 삼으면서도 그것을 자기 우월감이나 새로운 집착의 대상으로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한 갈애가 고통의 발생 원인이라는 설명은 모든 질병과 재난, 타인에게서 당하는 피해가 그 사람 자신의 욕망 때문에 일어났다는 뜻이 아닙니다. 집성제는 고통과 윤회를 지속시키는 근본적인 조건을 설명하는 것이지, 개별적인 불행의 책임을 피해자에게 돌리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이러한 불교의 통찰은 말씀에서 인간의 욕망과 사랑을 다루는 방식과 비교할 가치가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마6:19)고 말씀하셨고, 이어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21)고 하셨습니다. 이는 재물을 소유한다는 사실 자체보다 인간의 마음이 무엇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무엇을 삶의 목적으로 삼는가 하는 문제를 드러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AC, 1749–1756) 10284번에서 인간의 사랑과 의지가 그가 추구하는 목적을 결정하며, 자기 자신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는 사랑과 주님 및 이웃을 향한 사랑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랑 자체를 제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사랑 없이 살아갈 수 없으며, 무엇을 사랑하는가에 따라 그의 삶이 형성됩니다. 불교가 고통을 지속시키는 갈애와 집착을 경계한다면, 새 교회의 교리는 인간의 사랑이 어떤 대상을 향하고 어떤 질서 안에 놓여 있는지를 중요하게 다룹니다. 두 설명 모두 자기중심적인 욕망이 인간을 속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만납니다. 그러나 불교의 갈애와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사랑은 동일한 개념이 아니며, 갈애의 소멸을 곧바로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의 형성이라고 해석해서도 안 됩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려면 인간의 ‘프로프리움’(proprium)을 살펴야 합니다. 프로프리움은 인간이 자기에게 고유하게 속한다고 여기는 것을 가리키며, 특히 자신의 지혜와 능력, 선과 생명을 독립적으로 소유하고 있다고 여기는 자기중심적인 성향과 연결됩니다. 인간은 다른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하면서도 자신이 인정받기를 원할 수 있고, 진리를 말하면서도 자신의 우월함을 드러내려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종교적으로 겸손한 모습을 보이면서 마음속으로는 남보다 거룩하다는 생각을 품을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AC.5660에서 거듭나는 사람이 처음에는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지만, 마침내 자유롭게 주님의 인도를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주님에게서 주어지는 새로운 의지를 통하여 인간의 삶의 목적이 자기 자신과 세상에서 이웃과 공동체, 주님의 나라와 주님 자신을 향하도록 변화한다고 밝힙니다. 여기서 거듭남은 자기를 완전히 없애 버리는 일이 아니라, 자기중심적인 삶의 목적이 주님과 이웃을 향한 선한 목적으로 바뀌는 과정입니다. 불교의 집착 극복과 비교할 수 있는 부분이 있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참된 선과 진리의 근원을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찾는다는 점입니다. 또한 이 변화는 단순히 집착을 억누르는 심리적 훈련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는 영적 변화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욕망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겠습니까? 여기서 욕망을 무조건 억제하거나 모든 즐거움을 포기하는 것이 영적인 삶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가족을 사랑하고, 건강을 돌보며, 일을 통하여 생계를 유지하고, 정당한 기쁨을 누리는 것은 그 자체로 악이 아닙니다. 문제는 이러한 것들을 다른 사람을 해치면서까지 얻으려 하거나, 자기의 행복과 우월함을 위한 최종 목적으로 삼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새 예루살렘을 위한 삶의 교리’(Doctrine of Life for the New Jerusalem, Life, 1763) 21–22번에서 인간이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할수록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행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악을 죄로 여긴다는 것은 단순히 자신에게 손해가 되거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에 어떤 행동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주님과 신적 질서에 반대되기 때문에 멀리한다는 뜻입니다. 또한 인간은 마치 자기 힘으로 악을 멀리하는 것처럼 노력해야 하지만, 실제로 그 악을 제거하고 선을 행할 능력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불교의 수행과 새 교회의 거듭남을 구별하는 중요한 지점입니다. 두 전통 모두 인간의 욕망을 무조건 따라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지만, 불교는 갈애와 무명의 소멸을 통한 ‘해탈’(解脫, vimutti)을 지향하는 반면, 새 교회의 교리는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하고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이는 거듭남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차이는 행복을 이해하는 방식에서도 드러납니다. 사람은 흔히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상태를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욕망을 조금도 거절하지 못하고, 남보다 더 많이 소유하거나 인정받지 못하면 견디지 못한다면, 그것은 참된 자유라기보다 욕망에 지배받는 상태일 수 있습니다. 불교는 갈애와 집착에서 벗어날수록 고통의 속박이 약해진다고 설명합니다. 이에 비해 스베덴보리가 밝힌 새 교회의 교리에서 참된 자유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에 따라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AC.5660은 주님의 인도를 받는 것이 참된 자유이며, 그 안에 평안과 행복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소유하고 얼마나 많은 즐거움을 누리는가보다, 어떤 사랑이 자신의 삶을 지배하는가가 더욱 중요합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삶의 최종 목적이 되면 인간은 끊임없이 비교하고 경쟁하며 불안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삶의 목적이 되면 재물과 능력, 지식과 사회적 지위도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이루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참된 변화는 욕망의 대상을 단순히 줄이는 데 그치지 않고 삶의 지배적인 사랑과 목적이 새롭게 되는 데 있습니다. 이 점에서 불교의 갈애 분석은 인간이 무엇에 사로잡혀 있는지 돌아보게 하는 유익한 통찰을 제공하지만, 새 교회의 교리는 그 자리에 어떤 사랑이 들어서야 하는지, 그리고 그 사랑이 누구에게서 오는지를 더욱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결국 ‘고통의 원인은 갈애와 집착에 있다’라는 명제는 불교의 집성제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가르침입니다. 인간이 변하는 것을 영원한 행복의 근거로 삼고, 자기의 욕망과 견해를 절대화하며, 붙잡을 수 없는 것을 끝까지 붙잡으려 할 때 고통이 깊어진다는 설명에는 분명한 통찰이 있습니다. 특히 재물과 쾌락뿐 아니라 자신의 지식과 신앙적 확신까지 집착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은 종교인에게도 중요한 성찰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불교의 갈애와 집착을 모든 욕망이나 사랑과 동일시해서는 안 되며, 모든 고난을 개인의 집착 때문에 발생한 결과로 해석해서도 안 됩니다. 말씀과 새 교회의 교리에 따르면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는 단지 원하는 것이 너무 많다는 사실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세상을 삶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자기의 것으로 여기려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욕망을 무조건 없애는 과정이 아니라, 악을 멀리하고 사랑의 질서가 새로워지는 과정입니다. 자신을 위한 사랑이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 아래 놓이고,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선한 쓰임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할 때 인간은 참된 자유와 평안을 경험하게 됩니다. 불교의 집성제가 인간이 무엇을 붙잡고 있기 때문에 괴로워하는지를 묻는다면, 말씀은 인간이 무엇을 가장 사랑하며 누구에게서 생명을 받아 살아가는지를 묻습니다. 참된 자유는 단순히 아무것에도 매이지 않는 데 있지 않고,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 안에서 선을 기쁘게 선택하며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BU.005 해설)

 

요약

갈애와 집착이 고통을 지속시키는 중요한 원인이라는 불교의 집성제는 인간의 욕망과 자기중심성을 깊이 통찰한 가르침입니다. 특히 감각적 쾌락뿐 아니라 존재에 대한 집착과 자신의 견해에 대한 집착까지 경계한다는 점에서 인정할 만한 진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가 모든 의욕이나 사랑을 제거하려 한다고 이해하거나, 모든 고난을 개인의 집착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됩니다. 새 교회의 교리에 따르면 인간의 영적 문제는 사랑 자체가 아니라 사랑의 대상과 질서에 있으며, 거듭남은 자기중심적인 사랑을 버리고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을 받아들이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갈애와 집착에 대한 불교의 통찰을 인정하되, 참된 자유와 행복의 근원은 인간의 자기 통제만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 그리고 그에 따라 새롭게 되는 삶에 있음을 구별해야 합니다.

 

 

 

BU.004 ‘인생에는 피할 수 없는 고통과 불만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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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IS.005 | 이슬람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알라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 인간의 근본적인 의무다’ - 복종과 자유로운 사랑

 

해설

이슬람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삶의 태도 가운데 하나는 자신의 뜻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슬람’(Islam)이라는 말 자체가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고 복종한다는 의미와 깊이 관련되어 있으며, ‘무슬림’(Muslim)은 그렇게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꾸란 2:112는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면서 선을 행하는 사람에게 보상이 있다고 가르치며, 4:125 역시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고 선을 행하며 아브라함의 신앙을 따르는 삶을 높이 평가합니다. 따라서 이슬람의 복종을 단순히 절대적인 명령 앞에서 생각 없이 굴복하는 태도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에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삶의 궁극적인 주인으로 삼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인정하며 그분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인간은 생명과 선과 진리의 근원이 아니며, 모든 참된 선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므로 자기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려는 신앙의 방향 자체는 옳습니다. 다만 여기서 더 깊이 살펴보아야 할 질문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며, 그 복종이 인간의 자유와 사랑에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슬람의 복종에는 하나님의 명령을 실천하는 외적 행위뿐 아니라 마음의 진실함과 경건도 포함됩니다. 예배와 금식, 구제와 순례 같은 종교적 실천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구체적인 표현이며, 이러한 행위의 가치는 그것을 수행하는 의도와도 관련됩니다. 특히 꾸란 2:256에는 종교에 강제가 없다는 선언이 있습니다. 이 구절의 구체적인 적용 범위에 관해서는 이슬람 학자들 사이에 해석의 차이가 있었지만, 적어도 종교적 복종을 외부의 물리적 강제와 단순히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또한 이슬람에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감사, 자발적인 헌신을 강조하는 영적 전통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슬람은 오직 두려움과 강압으로만 사람들을 복종시키는 종교라고 규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종교적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과 그 의무를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은 서로 구별됩니다. 인간은 어떤 명령이 옳다고 믿기 때문에 순종할 수도 있고, 벌이 두려워 순종할 수도 있으며,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기꺼이 순종할 수도 있습니다. 겉으로는 같은 행위처럼 보여도 그 안에 있는 사랑과 의도는 서로 다릅니다. 바로 이 차이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중요한 검토 대상이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 DP, 1764) 71항에서 인간이 자유에 따라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신적 섭리(神的攝理, Divine Providence)의 법칙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자유(自由, freedom)는 단순히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는 자유방임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의지와 이해를 사용하여 선과 악을 분별하고 선택할 수 있는 영적 능력을 뜻합니다. 주님은 인간을 외부에서 강제로 조종하여 선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유롭게 진리를 받아들이고 선을 사랑하도록 인도하십니다. 같은 저작 129항에서는 종교에 관한 믿음과 사랑이 외적 강제에 의해 형성되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인간이 강요에 의해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그것이 곧바로 내면의 신앙이 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인간의 자유와 합리성을 보존하시는 이유는 그것들이 인간의 거듭남(再生, regeneration)에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의지로 진리를 선택하고 선을 행하는 것처럼 행동할 때, 주님은 그 자유로운 선택을 통하여 인간의 내면을 변화시키십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참된 순종은 자유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자유를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인간의 자유를 자기 뜻대로 살아갈 권리와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 섭리’ 43항에서 자유에는 지옥적 자유(infernal freedom)와 천국적 자유(heavenly freedom)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비롯되는 악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도 당사자에게는 자유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악의 지배를 받는 속박입니다. 반면 선을 사랑하여 선을 선택하고 실천하는 것은 참된 자유입니다. 이 가르침은 요8:34에서 주님이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말씀하신 것과 연결됩니다.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한다고 해서 반드시 자유로운 것이 아닙니다. 분노와 탐욕, 지배욕과 자기중심적인 사랑에 사로잡혀 행동한다면, 겉으로는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자신이 사랑하는 악에 끌려가는 것입니다. 반대로 주님의 계명을 따르기 위해 자기 욕망을 절제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사람은 외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제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악의 속박에서 벗어나 참된 자유를 향해 나아갑니다. 따라서 주님께 대한 순종과 영적 자유는 서로 반대되는 개념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선과 진리에 기꺼이 순종할수록 인간은 더욱 자유로워집니다.

 

이러한 구별은 순종의 동기(動機, motive)를 살펴볼 때 더욱 분명해집니다. 사람은 처음에는 하나님의 벌이 두렵거나, 잘못을 저지르면 불행해질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악을 피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두려움이 악에서 돌아서는 출발점이 될 수도 있지만, 그것만으로 거듭남이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새 예루살렘과 그 천적 교리’(The New Jerusalem and Its Heavenly Doctrine, NJHD, 1758) 141–143항에서 자유는 사랑과 의지에서 비롯되며, 사랑으로 선을 행하는 것이 참된 자유라고 설명합니다. 특히 143항에서는 자유롭게 받아들인 것은 인간의 생명 안에 남지만, 강제로 받아들인 것은 그렇게 남지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이는 하나님이 계명을 지키는 행위만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 계명에 담긴 선을 사랑하게 되기를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처음에는 의무감으로 정직하게 행동하던 사람이 점차 정직 자체를 사랑하고, 처음에는 명령 때문에 이웃을 돕던 사람이 마침내 이웃의 행복을 자신의 기쁨으로 여기게 된다면, 그의 순종은 외적 의무에서 내적 사랑으로 깊어진 것입니다. 참된 거듭남은 바로 이러한 변화와 관련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은 이슬람의 복종 개념에 담긴 진리를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평가하는 보다 근본적인 기준을 제시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는 참됩니다. 인간이 자기 욕망을 절대화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며, 정직과 자비를 실천해야 한다는 가르침 역시 중요합니다. 그러나 종교적 복종의 가치를 외적 명령의 이행만으로 판단하거나, 권위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을 신앙의 완성으로 생각한다면 문제가 생깁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이러한 문제가 이슬람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기독교에서도 목회자의 명령이나 교회의 관습을 하나님의 뜻과 동일시하거나, 질문과 분별을 불순종으로 여기며, 두려움을 이용해 신앙을 강요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이러한 외적 강제는 참된 거듭남의 원리가 아닙니다. 인간이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자유롭게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그의 내적 생명으로 온전히 자리 잡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슬람의 복종을 평가할 때에도 중요한 것은 그 복종이 단순한 외적 의무에 머무는가, 아니면 선과 진리를 이해하고 사랑하여 자발적으로 실천하는 삶으로 이어지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이슬람과 스베덴보리의 신학 사이에 남아 있는 더 근본적인 차이도 있습니다. 그것은 순종의 대상인 하나님을 누구로 이해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슬람은 알라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강조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성육신하신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이시며, 인간은 그분을 인정하고 그분의 계명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요14:15에서 주님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사랑과 순종의 관계를 잘 보여 줍니다. 참된 사랑은 계명을 불필요하게 만들지 않으며, 계명에 대한 참된 순종 역시 사랑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또한 주님의 계명은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을 악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여 사랑의 자유 안으로 인도하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순종의 완성은 단순히 자신보다 높은 권위에 굴복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신적 사랑과 지혜이신 주님을 알고, 그분의 뜻이 참으로 선하다는 것을 이해하며, 그 선을 자신의 삶에서 기꺼이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결국 ‘알라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 인간의 근본적인 의무다’라는 고백에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분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순종이 어떤 내적 상태에서 이루어지는지를 묻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억지로 명령을 지키는 사람과,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기꺼이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외적으로 같은 행동을 하더라도 영적으로 같은 상태에 있지 않습니다. 참된 신앙은 의무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의무를 사랑으로 변화시키는 과정입니다. 주님은 인간의 자유를 빼앗아 복종시키는 분이 아니라, 인간이 자유와 합리성 안에서 선을 선택하도록 끊임없이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자신에게서 선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선이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그 선을 실천할 때, 주님과 인간 사이에는 더욱 깊은 결합(結合, conjunction)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이 문항이 우리에게 남기는 질문은 ‘나는 하나님의 명령에 얼마나 철저히 복종하는가?’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것은 ‘나는 무엇을 사랑하기 때문에 순종하며, 그 순종을 통해 주님의 선과 진리가 실제로 내 삶이 되어 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참된 순종은 자유로운 사랑을 파괴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사랑 안에서 완성됩니다. (IS.005 해설)

 

요약

이슬람이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인정하고 그분의 명령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은 중요한 진리입니다. 특히 복종을 진실한 의도와 선행에 연결하는 가르침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순종은 외적 의무의 이행이나 권위에 대한 무조건적인 굴복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은 자유와 합리성 안에서 악을 죄로 여기고 피하며, 선을 사랑하여 주님의 계명을 실천할 때 거듭납니다. 또한 이슬람과 스베덴보리의 신학 사이에는 그 순종의 대상인 하나님을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해하는가 하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따라서 복종 자체가 오류인 것은 아니며, 복종을 강제나 외적 형식으로 환원하는 이해가 문제입니다. 참된 순종은 주님을 향한 자유로운 사랑 안에서 완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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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는 피할 수 없는 고통과 불만족이 있다’ - 고성제의 통찰과 거듭남을 향한 주님의 섭리

 

해설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원하지만, 아무리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도 고통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습니다. 건강한 사람도 병들고, 젊은 사람도 늙으며,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나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해 괴로워하기도 하고, 어렵게 얻은 것을 잃어버릴까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불교는 인간의 이러한 현실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데서 출발합니다. 특히 ‘사성제’(四聖諦, cattāri ariyasaccāni), 곧 고통의 현실과 원인, 소멸, 그리고 소멸에 이르는 길에 관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 가운데 첫 번째인 ‘고성제’(苦聖諦, dukkha ariyasacca)는 인간의 삶이 고통과 불만족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음을 밝힙니다. 여기서 ‘고’(苦, dukkha)는 단순히 육체적인 통증이나 정신적인 슬픔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즐거운 경험조차 영원히 지속되지 않으며, 조건에 의존하여 존재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완전한 만족을 보장할 수 없다는 의미까지 포함합니다. 따라서 불교가 인생을 고통이라고 말할 때, 그것을 모든 순간이 불행하고 기쁨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주장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인간이 의지하고 붙잡으려는 세상의 행복이 왜 끝내 완전한 만족을 주지 못하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초기불교의 ‘상윳따 니까야’(相應部, Saṃyutta Nikāya) 56.11에 수록된 ‘초전법륜경’(初轉法輪經, Dhammacakkappavattana Sutta)은 고성제를 설명하면서 태어남과 늙음, 병듦과 죽음,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괴로움,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괴로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설명을 ‘오취온’(五取蘊, pañcupādānakkhandhā), 곧 집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무더기가 고통이라는 말로 요약합니다. 여기서 다섯 무더기란 인간의 경험을 구성하는 물질적 요소인 색(色)과 느낌인 수(受), 지각인 상(想), 의지적 형성 작용인 행(行), 의식인 식(識)을 가리킵니다. 불교는 이러한 요소들이 조건에 따라 생겨나고 변하며 사라지기 때문에, 그것들을 영원한 자기 자신이나 변하지 않는 행복의 근거로 붙잡을 때 고통이 발생한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상윳따 니까야’ 38.14는 고통을 직접적인 괴로움, 변화에서 오는 괴로움, 조건 지어진 존재의 불안정성에서 오는 괴로움이라는 세 차원으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병이나 상실처럼 직접 경험하는 고통이고, 둘째는 행복했던 상태가 변하거나 사라지는 데서 오는 불만족이며, 셋째는 당장 괴롭지 않더라도 조건에 의존하는 존재 자체가 궁극적인 안정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불교의 고성제는 삶의 불행한 사건들을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고통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와 경험의 구조를 살피는 가르침입니다.

 

이러한 통찰은 인간의 삶을 정직하게 돌아보게 합니다. 사람은 흔히 현재의 어려움만 해결되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경제적으로 안정되면, 건강을 회복하면, 자녀가 잘되면, 원하는 것을 이루면 더 이상 걱정할 일이 없으리라고 기대합니다. 그러나 하나의 문제가 해결되면 또 다른 걱정이 생기고, 한때 커다란 기쁨을 주었던 일이 시간이 지나면 당연한 일상이 되기도 합니다. 불교가 강조하는 ‘무상’(無常, anicca), 곧 조건에 따라 생겨난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한다는 사실은 바로 이러한 인간 경험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세상의 기쁨이 반드시 악하거나 무가치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변하는 것을 영원한 것으로 여기고, 유한한 것에서 무한한 만족을 얻으려 할 때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기독교인도 귀 기울일 만한 진리가 있습니다. 인간은 물질적인 풍요와 성공, 건강과 인간관계만으로 자신의 가장 깊은 갈망을 완전히 채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불교의 고성제와 기독교의 인간관을 곧바로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불교는 조건 지어진 존재의 특성과 그것에 대한 집착을 분석하지만, 말씀과 새 교회의 교리는 인간이 창조된 존재로서 자신의 생명과 행복의 근원을 어디에서 받아들이는가 하는 문제를 함께 제기합니다. 세상의 행복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과, 모든 참된 생명과 행복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서로 관련되지만 동일한 주장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말씀은 인간의 고통을 어떻게 바라봅니까? 예수께서는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신앙을 가지면 고통이 사라진다는 약속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도 세상에서 환난을 겪을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정합니다. 그러나 불교의 고성제가 고통을 발생시키는 조건과 집착의 구조를 밝히는 데서 출발한다면, 말씀은 인간이 고통 가운데서도 주님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것인가 하는 문제를 중요하게 다룹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AC, 1749–1756) 762번에서 영적 시험과 자연적 고난을 구별합니다. 영적 시험은 단순히 몸이 아프거나 불행한 사건을 겪는 것이 아니라, 인간 안의 선과 진리를 둘러싸고 악과 거짓이 대립하는 내적인 싸움입니다. 반면 질병이나 불행, 자연적인 원인에서 비롯된 슬픔과 불안은 그 자체로 영적 시험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러한 고난이 인간의 자기중심적인 욕망을 약화시키고 삶을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고통을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보내신 훈련이라고 설명하거나, 고통의 크기를 그 사람의 영적 성숙도와 연결해서는 안 됩니다. 고통을 겪는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이 거듭나고 있다고 판단할 수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AC.1692에서 영적 시험이 어떻게 인간의 거듭남에 쓰임이 되는지를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영적 시험을 통하여 인간 안에 있는 악과 거짓이 드러나고, 그것들에 대한 애착이 약해지며,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양심이 더욱 굳건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험 자체가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내면에서 악과 거짓에 맞서 싸우시고, 인간이 자유롭게 선과 진리의 편에 서도록 역사하시기 때문에 거듭남이 가능해집니다. ‘거듭남’(regeneration)이란 인간이 단순히 고난을 견디거나 마음의 평정을 얻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랑과 의지가 변화하여 주님과 이웃을 향한 선한 삶으로 나아가는 영적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적 관점에서 고통의 의미를 판단할 때에는 그 고통이 얼마나 컸는가보다 그 과정을 통하여 인간이 무엇을 사랑하고 어떤 사람이 되어 가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다만 이 설명을 모든 고난에 기계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어린아이의 질병이나 무고한 사람의 피해, 전쟁과 재난으로 인한 고통을 그 사람의 영적 결함이나 성장의 필요성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섭리는 악과 고통을 선 자체로 여기시는 데 있지 않고, 악이 허용되는 현실 속에서도 인간을 구원으로 인도하시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불교의 고통 이해와 새 교회의 교리 사이에는 중요한 공통점과 차이가 드러납니다. 두 전통 모두 세상의 쾌락이나 물질적 만족만으로는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또한 자기중심적인 욕망에 사로잡힐수록 인간이 더욱 깊은 불안과 고통을 경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비교할 만한 통찰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고통은 ‘갈애’(渴愛, taṇhā)와 ‘무명’(無明, avijjā), 집착과 조건 지어진 존재의 특성이라는 틀 안에서 이해되며, 그 궁극적인 해결은 갈애의 소멸과 ‘해탈’(解脫, vimutti), 곧 고통과 윤회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데 있습니다. 이에 비해 스베덴보리가 밝힌 새 교회의 교리에서는 인간의 궁극적인 행복이 생명 자체이신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이고, 그 사랑을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으로 실현하는 데 있습니다. 불교의 해탈을 아무런 감정도 없는 무감각한 상태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며, 기독교의 천국을 세상에서 이루지 못한 욕망이 모두 충족되는 장소로 이해하는 것 역시 잘못입니다. 두 전통의 차이는 단순히 고통을 없애려 하는가, 행복을 얻으려 하는가에 있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 무엇을 고통의 속박으로 이해하며, 무엇을 자유와 행복의 완성으로 보는가에 있습니다.

 

특히 새 교회의 교리에서 천국의 행복은 단순히 고통이 없는 상태로만 설명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 387–394번에서 천국의 삶이 이웃을 위한 쓰임과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설명합니다. 천사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영원한 안락함을 누리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과 지혜를 각자의 쓰임을 통하여 실현하는 존재들입니다. 여기서 ‘쓰임’(use)이란 단순한 노동이나 활동량을 뜻하지 않고, 사랑이 실제적인 선으로 나타나는 목적과 행위를 가리킵니다. 천국의 기쁨은 자기 자신만을 만족시키려는 욕망에서 나오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선을 행하며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나누는 삶에서 비롯됩니다. 따라서 고통을 이해하는 문제 역시 결국 인간이 무엇을 사랑하며 살아가는가 하는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불교의 고성제가 변하는 것에 집착하는 인간의 불안정성을 드러낸다면, 말씀은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을 향하여 사랑과 삶의 방향을 바꾸도록 요청합니다. 그렇다고 지상의 기쁨이나 가족에 대한 사랑, 건강과 물질적 안정을 무가치하게 여겨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러한 것들도 주님에게서 오는 선한 질서 안에서 이웃을 사랑하고 유익을 이루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들을 사랑하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것들을 삶의 궁극적인 목적과 행복의 근원으로 삼는 데 있습니다.

 

결국 ‘인생에는 피할 수 없는 고통과 불만족이 있다’라는 명제는 인간의 현실을 깊이 통찰한 불교의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고성제는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순간이 불행하다고 선언하는 비관주의가 아니라, 조건에 의존하는 존재와 경험이 영원하고 완전한 만족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일깨웁니다. 그 안에는 인간의 집착과 자기중심성을 돌아보고, 물질과 쾌락을 절대화하지 않도록 경계하는 귀중한 진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의 고성제와 말씀에서 밝히는 인간의 거듭남은 같은 문제를 같은 방식으로 해결하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불교는 고통의 발생과 소멸을 연기와 갈애의 관계에서 설명하지만, 새 교회의 교리는 인간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사랑과 의지가 새롭게 되는 과정을 강조합니다. 또한 모든 고통이 영적으로 유익한 것은 아니며, 어떤 고난도 그 자체로 거룩하거나 구원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고통을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지 않으시며, 인간이 자유롭게 선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유익을 이루는 천국의 삶으로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통을 부정하지도, 고통 자체를 신성하게 만들지도 않아야 합니다. 오히려 고통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자신과 이웃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불교의 고성제가 인간의 행복이 얼마나 불안정한 토대 위에 놓일 수 있는지를 일깨운다면, 말씀은 그 행복의 궁극적인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밝혀 줍니다. 참된 행복은 세상의 모든 문제가 사라진 뒤에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으로 나타날 때 이미 그 생명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BU.004 해설)

 

요약

인생에 피할 수 없는 고통과 불만족이 있다는 불교의 고성제는 인간의 유한성과 변화, 집착의 문제를 깊이 통찰한 가르침입니다. 특히 세상의 행복을 영원한 것으로 붙잡으려는 인간의 욕망을 경계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의 고성제를 모든 삶이 불행하다는 비관주의로 이해하거나, 불교의 해탈을 단순한 무감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새 교회의 교리에 따르면 인간의 고통은 그 자체로 신성하거나 구원을 보장하지 않으며, 영적 시험과 자연적 고난도 구별해야 합니다. 주님은 인간의 악과 고통을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러한 현실 속에서도 인간을 거듭남과 천국의 행복으로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고통의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참된 행복의 근원은 고통의 단순한 부재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지혜, 그리고 그것을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으로 실현하는 삶에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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