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RC.002 | 천주교의 교리와 신앙 속 오류 100선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이 짧은 문장은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강력하면서도 가장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킨 교회론적 명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라틴어로는 ‘Extra Ecclesiam Nulla Salus’라고 하며, 일반적으로 3세기 카르타고의 주교 키프리아누스와 관련하여 알려져 있습니다. 이 명제는 본래 교회의 일치와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을 강조하는 신학적 맥락에서 발전했지만, 역사 속에서는 종종 눈에 보이는 교회 조직의 경계 밖에 있는 사람들은 구원받을 수 없다는 배타적인 주장으로 이해되기도 했습니다. 천주교회의 입장에서 이 말은 단순한 신앙적 구호가 아닙니다. 교회가 구원의 역사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며,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일이 교회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설명하는 중요한 교리적 선언입니다. 그러나 이 명제를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는 즉각적인 의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천주교 신자가 아닌 개신교인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사람들, 다른 종교 안에서 양심에 따라 선하게 살아온 사람들, 심지어 교회를 알면서도 그 교회의 모습에 실망하여 떠난 사람들은 모두 구원에서 제외되는 것입니까? 무엇보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까, 아니면 교회라는 제도에 속하게 하시기 위하여 인간을 구원하시는 것입니까? 이 질문은 단순히 천주교의 배타성을 비판하는 문제를 넘어, 우리가 교회와 구원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묻는 질문입니다.
먼저 반드시 확인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오늘날 천주교회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명제를 천주교 신자가 아니면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뜻으로 공식 해석하지 않습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제846항은 이 명제를 긍정적인 형태로 다시 설명하면서, 모든 구원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서 그분의 몸인 교회를 통하여 온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제847항은 자신의 잘못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교회를 알지 못하지만,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고 은총의 도움을 받아 양심을 따라 그 뜻을 실천하려는 사람들도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밝힙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 제14항과 제16항 역시 이러한 구별을 제시합니다. 다만 천주교회가 그리스도께서 구원에 필요한 교회로 세우셨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의식적으로 그 교회에 들어가기를 거부하거나 그 안에 머물기를 거부한다면 구원받을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천주교의 공식 입장은 무조건적인 제도적 배타주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보편성과 가톨릭교회의 구원적 필요성을 동시에 주장하는 구조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정확하게 인정해야 할 부분입니다. 상대방이 실제로 가르치지 않는 내용을 먼저 만들어 놓고 비판하는 것은 진리를 분별하는 올바른 방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새로운 신학적 질문이 생깁니다. 천주교회가 자기 밖에 있는 사람들의 구원 가능성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 구원이 궁극적으로 가톨릭교회와 연결되어 있다고 설명하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요? 구원의 유일한 근원이 주님이라는 사실과, 그 구원이 반드시 하나의 역사적 교회 제도와 연결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동일한 명제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모든 인간을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은 성경 전체에 흐르는 근본적인 진리입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주님께서는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고, 사도행전 4장 12절에서는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에서 ‘주님 외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과 ‘특정 교회 조직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교회의 제도적 유일성으로 옮겨 놓을 때, 구원의 근원과 구원을 전달하도록 맡겨진 수단이 서로 혼동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교회가 말씀을 보존하고 주님을 증언하며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을 가르치는 역할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 역할이 중요하다는 사실이 곧 교회가 주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독점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가 참으로 주님의 교회라면, 교회는 사람들을 자기 자신에게 묶어 두기보다 주님께 인도해야 합니다. 교회의 가치는 교회 자체의 권위가 아니라 그 교회를 통하여 사람들이 얼마나 주님을 알고 사랑하며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게 되는가에서 드러납니다.
이 문제에 관하여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 HH.318에서 매우 분명한 설명을 제시합니다. 그는 교회 밖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말씀을 가지고 있지 않고, 주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구원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일반적인 견해를 소개한 뒤, 그러한 사람들도 구원받는다는 사실은 주님의 자비가 보편적이라는 점에서 분명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주님을 알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며, 주님은 사랑 자체이시므로 모든 인간의 구원을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표현은 주님의 자비가 모든 개인에게 미친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어떤 사람을 특정한 종교권에서 태어나게 하셨다는 이유로 구원에서 배제하지 않으십니다. 태어난 나라와 시대, 부모의 종교와 문화, 복음을 접할 수 있었던 환경은 인간이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러한 외적 조건이 그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한다면 주님의 사랑과 공의는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역사적 우연에 종속되고 말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주님의 본성을 강조합니다. 주님은 사랑 자체이시며, 그 사랑의 본질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말씀을 직접 접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도 그들이 가진 종교와 양심을 통하여 신적인 것을 인정하고 선하게 살아갈 기회를 제공하십니다. 이것은 모든 종교가 똑같이 참되다는 뜻이 아니라, 어떤 종교적 환경에 놓였든 주님의 구원하시는 섭리가 그 사람에게 도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HH.318 해설)
스베덴보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HH.308과 HH.328에서 주님의 교회가 온 지구에 퍼져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에 따르면 주님의 교회는 말씀을 소유하고 주님을 명시적으로 아는 사람들에게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각자의 종교 안에서 신적인 것을 인정하고 체어리티(charity)의 선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도 주님의 보편적인 교회에 속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구별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이 있고, 그 말씀을 통하여 주님을 알 수 있는 교회의 역할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교회는 인체의 심장과 폐에 해당하고, 다른 종교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인체의 여러 기관과 지체에 해당한다고 설명합니다. 심장과 폐가 온몸의 생명 유지에 특별한 역할을 담당하듯, 말씀이 있는 교회도 인류 전체의 영적 생명에 특별한 쓰임을 담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비유 때문에 어느 한 기관도 몸 전체를 독점할 수 없습니다. 심장이 중요하다고 해서 손과 발이 몸 밖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며, 폐가 생명 유지에 필수적이라고 해서 다른 모든 기관이 무의미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의 교회는 하나의 살아 있는 영적 몸과 같으며, 각 부분은 주님의 섭리 안에서 서로 관계를 맺습니다. 따라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말을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다시 읽는다면, 참된 교회가 주님의 사랑과 진리의 생명으로 이루어지는 영적 공동체라는 의미에서는 일정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를 특정한 역사적 조직과 동일시하는 순간, 그 명제는 주님의 보편적 구원 섭리를 좁히는 오류로 변할 수 있습니다. (HH.308, 328 해설)
이 문제는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AC, 1749–1756) AC.1032에서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스베덴보리는 노아와 맺으신 언약을 설명하면서, 주님께서 체어리티를 지닌 모든 사람과 결합하시며, 여기에는 교회 안의 사람들뿐 아니라 교회 밖의 사람들도 포함된다고 가르칩니다. 특히 그는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 자기 교리와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의 구원을 부정하는 경향을 지적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가진 신앙 지식을 구원의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그 지식을 갖지 못한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다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주목하는 것은 인간이 어떤 교리적 명칭을 가지고 있는가보다, 그 사람 안에 실제로 체어리티의 생명이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물론 이 말은 진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선은 진리를 통하여 그 방향을 발견하고, 진리는 선을 통하여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다만 사람이 자기 잘못 없이 더 밝은 진리를 배우지 못한 경우, 주님께서는 그가 알고 있는 진리와 선을 출발점으로 삼아 그를 이끄실 수 있습니다. 죽음 이후에도 이러한 인도는 계속됩니다. HH.321–325는 다른 종교권 출신의 사람들이 사후에 주님에 관하여 가르침을 받고, 선을 사랑했던 사람들이 진리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모습을 설명합니다. 여기서 구원은 특정 종교의 이름을 붙이는 형식적 절차가 아니라, 인간의 내적 사랑이 진리를 받아들여 주님과 결합하는 과정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지상에서 천주교나 개신교에 속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그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가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며 어떤 삶을 살아왔는가, 그리고 주님께서 그를 어떻게 인도하시는가가 더욱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AC.1032, HH.321–325 해설)
그렇다고 해서 이 가르침을 ‘선하게만 살면 어느 종교를 믿든 상관없이 모두 천국에 간다’라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구원은 단순히 사회적으로 착한 사람이 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참된 선은 주님에게서 비롯되며, 인간은 자신의 자유 안에서 악을 죄로 여겨 피하고, 진리를 받아들이며, 주님의 생명에 참여해야 합니다. 또한 그가 말하는 체어리티는 외적 친절이나 자선행위와 동일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비롯되어 이웃에게 선을 행하려는 내적 삶의 성향입니다. 따라서 종교 밖에 있는 사람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말은 선과 악의 구별이 없어졌다는 뜻이 아니며, 구원의 기준이 느슨해졌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외적인 종교적 소속보다 인간의 내적 삶이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교회에 속한 사람은 더 많은 진리를 배울 기회를 얻은 만큼 그 진리에 따라 살아야 할 책임도 커집니다. 반대로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 받은 빛에 따라 판단받으며, 주님께서는 그가 처했던 환경과 알 수 있었던 진리, 그리고 그 진리에 대한 실제적인 반응을 온전히 아십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구원 여부를 판단할 수 없지만,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진리를 어떻게 살아 내고 있는지는 진지하게 돌아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교회 이해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가장 중요한 변화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저 사람은 우리 교회 밖에 있으므로 구원받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나는 주님의 말씀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말씀에 따라 살아가고 있는가?’라고 물어야 합니다.
여기서 천주교와 스베덴보리 사이의 차이를 정확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양쪽 모두 구원의 근원이 인간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 곧 주님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또한 복음을 알지 못한 사람에게도 구원의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점에서 접점을 갖습니다. 그러나 천주교는 그러한 구원까지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관련하여 이해하고, 가톨릭교회 안에 구원의 수단들이 온전히 존재한다고 가르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교회를 처음부터 전 인류에 걸친 영적 실재로 이해하며, 교회에 속한다는 것의 본질을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체어리티의 삶을 살아가는 데서 찾습니다. 이 차이는 결코 작지 않습니다. 천주교에서는 역사적 교회와 그 성사적 질서가 구원론에서 본질적인 자리를 차지하는 반면, 스베덴보리에게는 주님과 인간의 실제적인 결합이 그 자리를 차지합니다. 물론 스베덴보리 역시 말씀을 통해 주님을 아는 교회의 특별한 역할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 역할은 구원의 독점권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섬기는 영적인 쓰임입니다. 따라서 두 입장의 차이는 단순히 ‘천주교는 배타적이고, 스베덴보리는 포용적이다’라는 정도로 정리할 수 없습니다. 더 근본적인 차이는 교회의 본질을 어디에 두고, 주님의 구원하시는 역사와 제도적 교회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하는가에 있습니다. 교회가 주님의 구원하시는 사랑을 섬기는 것인지, 아니면 주님의 구원이 교회의 제도적 질서를 통해서만 완성된다고 보는 것인지, 바로 이 문제가 핵심입니다.
이제 우리는 처음의 명제로 돌아옵니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이 말은 ‘주님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의미로 이해할 때 중요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생명과 선과 진리의 근원이시며, 누구도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 없이 천국의 행복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또한 참된 교회가 주님과 결합한 사람들로 이루어지는 영적 공동체라는 의미에서도, 구원받은 사람은 누구나 주님의 보편적인 교회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특정한 역사적 교회 조직의 회원 자격이나 제도적 권위에 종속시키는 순간 문제가 발생합니다. 주님의 교회는 인간의 조직보다 크고, 주님의 사랑은 인간이 설정한 종교적 경계보다 넓으며, 주님의 섭리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구원의 경로보다 훨씬 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를 떠나거나 교리를 가볍게 여겨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진리를 배운 사람일수록 그 진리를 따라 살아야 하며, 교회는 사람들에게 주님을 알리고 그분의 사랑을 실천하도록 돕는 거룩한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결국 주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실 가장 중요한 질문은 ‘너는 어느 교회에 속해 있었느냐?’라는 외적 소속의 확인이 아니라, ‘너는 내가 너에게 가르쳐 준 진리를 사랑하였으며, 그 진리에 따라 이웃을 사랑하고 악을 피하며 살아왔느냐?’라는 내적 삶의 문제일 것입니다. 이 마지막 질문은 성경과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오늘의 신앙생활에 적용하여 표현한 것이며, 주님의 실제 심판을 인간의 언어로 단순화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남의 구원을 판정할 권위가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진리를 삶으로 실천하는 겸손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는 교회의 참된 목적을 발견합니다. 교회는 구원의 문을 자기 소유로 선언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을 구원하기 원하시는 주님을 증언하고 그분의 사랑으로 사람들을 인도하기 위하여 존재합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명제의 참된 핵심은 구원의 근원이 오직 주님께 있다는 데 있으며, 그 구원을 특정한 교회 제도에 대한 소속으로 제한하는 것은 주님의 보편적인 사랑과 교회의 영적 본질을 혼동하는 것입니다.
RC.001. ‘천주교회만이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참된 교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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