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4:4)

 

AC.351

 

아벨’(Abel) 체어리티를 상징한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했습니다. 체어리티는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를 뜻합니다.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이 고통을 당할 때에도 자신의 고통을 대하듯 그를 불쌍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That “Abel” signifies charity has been shown before. By charity is meant love toward the neighbor, and mercy; for he who loves his neighbor as himself is also compassionate toward him in his sufferings, as toward himself.

 

 

해설

 

AC.351은 매우 짧은 글이지만, 스베덴보리가 ‘체어리티’(charity)를 무엇으로 이해하는지를 아주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앞에서는 ‘아벨’이 체어리티를 상징한다고 반복해서 설명했지만, 여기서는 한 걸음 더 들어가 ‘그러면 체어리티란 실제로 무엇인가?’를 말합니다. 그 답이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입니다.

 

먼저 주목할 것은 체어리티를 단순히 ‘선행’이라고 정의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선행은 체어리티가 외적으로 나타나는 중요한 모습이지만, 체어리티 그 자체는 그보다 안쪽에 있습니다. 그것은 ‘이웃을 향한 사랑’입니다. 따라서 어떤 행동이 외적으로 선해 보인다고 해서 그 자체로 곧 체어리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앞의 AC.348에서 보았듯이 행위의 생명은 그것이 어디에서 나오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체어리티에서 나온 행위라야 살아 있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AC.351은 ‘이웃을 향한 사랑’에 곧바로 ‘자비’(mercy)를 연결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체어리티는 이웃을 추상적으로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이웃이 고통을 당할 때 그의 고통에 마음이 움직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이 고통을 당할 때에도 자신의 고통을 대하듯 그를 불쌍히 여긴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자기 자신처럼’이라는 표현은 자연스럽게 ‘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웃의 고통을 단순히 ‘ 사람에게 일어난 ’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신의 일처럼 마음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다른 사람의 모든 감정과 고통을 문자 그대로 자신이 똑같이 느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핵심은 이웃의 어려움을 자기와 무관한 것으로 밀어내지 않는 데 있습니다.

 

이 점에서 ‘자비’는 체어리티의 매우 실제적인 모습입니다. 평안하고 아무 문제가 없을 때 ‘나는 이웃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웃이 고통 가운데 있을 때 그 고통을 보고 마음이 움직이며, 가능한 범위에서 그 사람의 선을 위해 무엇인가 하려는 데서 체어리티의 성질이 더욱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또한 여기서 말하는 자비는 단순한 감상이나 일시적인 연민에 머물지 않습니다. 바로 앞 AC.348-350의 흐름을 함께 보면 더욱 분명합니다. AC.348에서는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행위가 살아 있는 열매라고 했고, AC.349에서는 그러한 내적인 것이 외적 예배에 생명을 준다고 했으며, AC.350에서는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과 체어리티에 기초한 모든 예배가 주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51은 그 모든 것의 중심에 있는 체어리티가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라고 밝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흐름을 하나로 연결하면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체어리티는 이웃을 사랑하고 그의 고통을 자기 일처럼 돌아보는 내적 애정이며, 그 체어리티가 실제 행위로 나타나면 살아 있는 ‘열매’가 되고, 그 체어리티에서 주님을 향하면 살아 있는 ‘예배’가 됩니다. 결국 삶과 예배가 하나의 뿌리에서 나오는 셈입니다.

 

이것은 가인과 아벨의 대조를 더욱 깊게 이해하게 합니다. ‘아벨’이 체어리티라는 것은 단순히 아벨이 ‘’을 나타낸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아벨은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라는 교회의 생명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후 가인이 아벨을 죽인다는 것은 신앙이 어떤 추상적인 덕목 하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고 그의 고통을 자기 일처럼 여기는 바로 그 생명을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왜 ‘신앙이 아닌 신앙’이 되는지도 더욱 분명해집니다. 사람이 아무리 많은 진리를 알고 올바른 교리를 고백하더라도, 이웃의 고통에는 무관심하고 다른 사람의 선에는 관심이 없다면 그 신앙에는 신앙을 살아 있게 하는 생명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참된 신앙은 사람이 진리를 알수록 이웃을 더 깊이 바라보고, 그의 필요와 고통에 더욱 민감해지도록 이끕니다.

 

그러나 여기서 체어리티를 단순히 ‘불쌍한 사람을 보고 마음 아파하는 ’으로 축소해서도 안 됩니다. AC.351은 체어리티의 한 중요한 성질을 ‘자비’라는 측면에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체어리티는 궁극적으로 이웃의 참된 선을 바라고 그 선을 위해 행하는 삶 전체와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위로하고 돕는 것이 체어리티이고, 때로는 잘못을 그대로 방치하지 않는 것도 체어리티일 수 있습니다. 기준은 언제나 ‘이웃의 참된 선을 원하는가?’에 있습니다.

 

특히 ‘이웃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이라는 표현은 체어리티가 얼마나 깊은 결합의 사랑인지를 보여 줍니다. 이웃이 나와 아무 관계없는 타인이 아니라, 그의 선과 행복이 나에게도 중요해지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랑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 사람의 문제’로 밀어내지만, 체어리티는 그 경계를 넘어 이웃의 상태에 마음을 엽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의 근원 역시 앞의 AC.350에서 본 것처럼 인간 자신에게 있지 않습니다. ‘ 떼의 처음 ’과 ‘기름진 ’이 오직 주님께 속한다고 했듯이, 참된 체어리티 역시 주님에게서 옵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억지로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받아들이면서 점차 다른 사람의 선과 고통을 자기 일처럼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거듭남의 중요한 변화입니다.

 

결국 AC.351은 짧은 한 문장으로 ‘아벨’의 성격을 매우 따뜻하고 실제적으로 보여 줍니다. 아벨은 단순히 교리적으로 ‘체어리티’를 상징하는 이름이 아닙니다. 그 체어리티란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고, 이웃이 고통당할 자신의 고통을 대하듯 자비를 베푸는 ’입니다. 따라서 신앙과 체어리티가 결합한다는 것은 단지 두 신학 개념을 올바르게 연결한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가 알고 믿는 진리가 마침내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보고 마음이 움직이며 그의 선을 위해 살아가는 사랑으로 변해 가는 것을 뜻합니다.

 

 

 

AC.350, 창4:4, ‘왜 주님께서는 아벨의 제물을 받으셨는가 - 체어리티에 기초한 참된 예배’(AC.350-3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And Abel, he also brought of the firstlings of his flock, and of the fat thereof; and Jehovah looked to Abel, and to his offer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And Abel, he also brought of the firstlings of his flock, and of the fat thereof; and Jehovah looked to Abel, and to his offering. (4:4)

 

AC.350

 

여기서아벨’(Abel)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체어리티를 상징합니다. ‘ 떼의 처음 ’(firstlings of the flock, ‘양의 첫 새끼’) 거룩한 것을 상징하는데, 그것은 오직 주님께만 속한 것입니다. ‘기름진 (fat, ‘기름’) 천적인 자체를 상징하며, 이것 역시 주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리고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셨다’(Jehovah looking unto Abel, and to his offering,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것은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과 체어리티에 기초한 모든 예배가 주님을 기쁘시게 했음을 뜻합니다. ByAbelhere as before is signified charity; and by thefirstlings of the flockis signified that which is holy, which is of the Lord alone; byfatis signified the celestial itself, which also is of the Lord; and byJehovah looking unto Abel, and to his offering,” that the things of charity, and all worship grounded in charity, were well-pleasing to the Lord.

 

해설

 

AC.350은 창4:4의 ‘아벨은 자기도 양의 새끼와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라는 말씀의 속뜻을 간결하게 요약합니다. 바로 앞 AC.346-349가 가인의 ‘땅의 소산’과 ‘제물’을 통하여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행위와 거기서 나오는 예배를 설명했다면, 이제 아벨의 제물에서는 그와 정반대되는 예배가 나타납니다. 곧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살아 있는 예배입니다.

 

먼저 ‘아벨’은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체어리티를 상징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벨이 단순히 ‘선한 사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가인이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나타내는 것과 대응하여, 아벨은 신앙의 생명이 되어야 할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가인과 아벨의 두 제물은 두 사람이 서로 다른 물건을 하나님께 드린 사건을 넘어, 서로 다른 내적 근원에서 나오는 두 종류의 예배를 보여 줍니다.

 

떼의 처음 ’에서 ‘처음 ’은 거룩한 것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에 매우 중요한 말을 덧붙입니다. 그 거룩한 것은 ‘오직 주님께만 속한 ’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자기에게서 거룩한 것을 만들어 내어 주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인간 안에 있는 참된 선과 사랑, 체어리티와 신앙의 생명은 그 근원이 모두 주님에게 있습니다.

 

따라서 아벨이 ‘ 떼의 처음 ’을 드렸다는 말씀에는 참된 예배의 중요한 고백이 들어 있습니다. ‘내가 주님께 드리는 선도 본래 주님에게서 받은 것입니다.’ 사람은 그것을 자신의 자유 안에서 받아들이고 살아내며 주님께 돌려드리지만, 그 선의 최초 근원은 자신에게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참된 예배에서 인간의 공로가 배제되어야 하는 이유와도 연결됩니다. 선을 행하면서 그것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면 자기 의가 들어오지만, 그것이 주님에게서 왔음을 인정하면 감사와 겸손의 예배가 됩니다.

 

이어지는 ‘기름진 ’(fat)은 ‘천적인 자체’(the celestial itself)를 상징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적인 ’은 가장 깊은 의미에서 사랑의 선과 관련됩니다. 따라서 아벨이 양 떼의 처음 난 것과 그 기름진 것을 드렸다는 것은 단순히 좋은 품질의 제물을 골라 드렸다는 뜻을 넘어, 주님에게서 오는 거룩한 것과 사랑의 선으로 예배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여기서도 스베덴보리는 ‘이것 역시 주님께 속한 ’이라고 다시 강조합니다. ‘처음 ’도 주님의 것이고 ‘기름진 ’도 주님의 것입니다. 짧은 한 문장 안에서 같은 원리를 두 번 반복하는 셈입니다. 참된 예배에서 거룩함의 근원도 주님이고, 사랑의 선의 근원도 주님입니다. 인간은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마치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낸 것처럼 주님께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은 선을 인정하고 그것에 따라 살아가며 다시 주님께 돌려드립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349의 원리와 정확하게 이어집니다. 거기서 스베덴보리는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들로부터 생명을 얻으며, 그것들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생명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이제 아벨의 제물은 그 원리를 실제로 보여 줍니다. 외적으로는 양 떼의 처음 난 것과 기름진 것을 드렸지만, 그 외적 제물의 내적 생명은 체어리티와 천적인 선에 있고, 그 모든 것의 생명은 다시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셨다’는 말씀 역시 주님께서 어떤 물질적인 제물을 다른 제물보다 선호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과 체어리티에 기초한 모든 예배가 주님을 기쁘시게 했다’는 뜻으로 풀이합니다. 주님께서 돌아보신 것은 제물의 외형보다 그 제물 안에 있는 체어리티입니다.

 

여기서 특히 ‘체어리티에 기초한 모든 예배’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참된 예배는 체어리티와 별개의 종교 행위가 아닙니다. 예배와 삶이 분리되어 한쪽에서는 하나님을 섬기고 다른 한쪽에서는 이웃을 향한 사랑 없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향한 선과 사랑이라는 내적 생명이 예배 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그래서 체어리티는 단지 예배 외에 추가되는 하나의 덕목이 아니라 예배를 살아 있게 하는 내적 토대입니다.

 

이 점에서 가인의 제물과 아벨의 제물의 차이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둘 다 여호와께 제물을 드렸습니다. 따라서 차이는 ‘예배를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가 아닙니다. 가인의 제물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왔고, 아벨의 제물은 체어리티에서 나왔습니다. 외적으로는 둘 다 예배였지만 내적으로는 생명의 근원이 달랐던 것입니다.

 

AC.348-350을 함께 놓으면 매우 아름다운 질서가 보입니다. AC.348에서는 체어리티의 행위를 ‘살아 있는 열매’라고 했고, AC.349에서는 내적인 것이 외적인 예배에 생명을 주며 그 생명의 궁극적인 근원은 주님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AC.350에서는 바로 그 살아 있는 내적 예배가 아벨의 제물로 나타납니다. ‘체어리티체어리티의 행위체어리티에 기초한 예배’가 하나의 흐름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흐름의 처음과 끝에는 주님이 계십니다. 인간에게 체어리티를 주시는 분도 주님이고, 그 체어리티에서 선을 행할 수 있게 하시는 분도 주님이며, 그 선으로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하시는 분도 주님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예배는 인간이 자기 것을 주님께 바치는 것이라기보다,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주님의 것으로 인정하며 감사와 사랑으로 다시 돌려드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AC.350의 중심은 ‘ 아벨의 제물을 주님께서 받으셨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아벨이라는 개인을 편애하셨거나 양의 제물이 농산물보다 우월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아벨’은 체어리티를, ‘ 떼의 처음 ’은 주님께만 속한 거룩한 것을, ‘기름진 ’은 역시 주님께 속한 천적인 것을 나타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셨다’는 것은 체어리티에 속한 것과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예배가 주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보면 아벨의 제물은 참된 예배의 질서를 아주 짧고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선을 주님의 것으로 인정하고, 선을 체어리티의 삶으로 살아내며, 체어리티에서 주님을 예배하는 .’ 이것이 살아 있는 예배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가인의 예배와 아벨의 예배를 가르는 본질적인 차이입니다.

 

 

 

AC.351, 창4:4, ‘체어리티란? - 이웃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여기는 사랑’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1 ‘아벨’(Abel)이 체어리티를 상징한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했습니다. 체어리티는 이

bygrace.kr

 

AC.349, 창4:3, ‘제물이 예배를 뜻하는 이유 - 외적 예배는 내적인 것으로부터 생명을 얻습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4:3) AC.349 ‘제물’(offering)이 예배를 뜻한다는 것은 유대교회의 표상들에서 분명합니다. 그 교회에서는 온갖 종류의 희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3)

 

AC.349

 

제물’(offering) 예배를 뜻한다는 것은 유대교회의 표상들에서 분명합니다. 교회에서는 온갖 종류의 희생 제물뿐 아니라 땅과 모든 소산의 열매, 그리고 처음 것을 드리는 것도제물’(offerings)이라 불렀으며, 그들의 예배는 이러한 것들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은 천국적인 것들을 표상했고, 모두 주님을 가리켰으므로, 이러한 제물들이 참된 예배를 상징했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명합니다. 표상하는 실재가 없다면 표상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또는 내적인 것이 없는 외적 종교가 우상과 같은 , 죽은 외에 무엇이겠습니까?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들로부터 생명을 얻으며, 그것들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생명을 얻습니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표상교회의 모든 제물은 주님을 향한 예배를 상징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에 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앞으로 이어지는 글들에서 각각 자세히 다룰 것입니다. 일반적으로제물’(offerings) 예배를 뜻한다는 것은 선지서 전반에서도 분명합니다. 말라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That by anofferingis meant worship is evident from the representatives of the Jewish church, in which sacrifices of every kind, as well as the first fruits of the earth and of all its produce, and the oblation of the firstborn, were calledofferings,” in which their worship consisted. And as they all represented heavenly things, and all had reference to the Lord, it must be obvious to everyone that true worship was signified by these offerings. For what is a representative without the thing it represents? Or what is an external religion without an internal but a kind of idol and a thing of death? The external has life from things internal, that is, through these from the Lord. From these considerations it is evident that all the offerings of a representative church signify the worship of the Lord; and concerning these of the Lords Divine mercy we shall treat in particular in the following pages. That byofferingsin general is meant worship, is evident in the prophets throughout, as in Malachi:

 

2그가 임하시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3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하게 하는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되 ,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공의로운 제물을 여호와께 바칠 것이라 4 때에 유다와 예루살렘의 봉헌물이 옛날과 고대와 같이 여호와께 기쁨이 되려니와 (3:2-4) Who shall abide the day of his coming? He shall sit as a refiner and purifier of silver, and he shall purify the sons of Levi, and purge them as gold and silver, and they shall offer unto Jehovah an offering in righteousness. Then shall the offering of Judah and of Jerusalem be pleasant unto Jehovah, as in the days of eternity, and as in ancient years. (Mal. 3:24)

 

공의로운 제물’(offering in righteousness) 내적 제물이며, ‘레위 자손’(sons of Levi), 거룩하게 예배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드릴 것입니다. ‘옛날’(days of eternity) 태고교회를, ‘고대’(ancient years) 고대교회를 뜻합니다. 에스겔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Anoffering in righteousnessis an internal offering, which thesons of Levi,” that is, holy worshipers, will offer. Thedays of eternity,” signify the most ancient church, and theancient years,” the ancient church. In Ezekiel: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이 땅에 있어서 거룩한 이스라엘의 높은 산에서 나를 섬기리니 거기에서 내가 그들을 기쁘게 받을지라 거기에서 너희 예물과 너희가 드리는 열매와 너희 모든 성물을 요구하리라 (20:40) In the mountain of my holiness, in the mountain of the height of Israel, there shall all the house of Israel, all that land, worship me; there will I accept them, and there will I require your oblations, and the first fruits of your offerings, in all your sanctifyings. (Ezek. 20:40)

 

예물’(Oblations)너희가 드리는 열매와 너희 모든 성물’(first fruits of the offerings in the sanctifyings) 역시 주님으로 말미암아 체어리티로 거룩하게 행위를 뜻합니다. 스바냐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Oblationsand thefirst fruits of the offerings in the sanctifyingsare likewise works sanctified by charity from the Lord. In Zephaniah:

 

내게 구하는 백성들 내가 흩은 자의 딸이 구스 건너편에서부터 예물을 가지고 와서 내게 바칠지라 (3:10) From beyond the rivers of Ethiopia my suppliants shall bring mine offering. (Zeph. 3:10)

 

구스(Ethiopia) 천적인 것들, 사랑과 체어리티와 체어리티의 행위를 소유한 사람들을 뜻합니다. “Ethiopiadenotes those who are in possession of celestial things, which are love, charity, and the works of charity.

 

 

해설

 

AC.349AC.346에서 제시한 세 번째 표현, 곧 가인이 ‘여호와께 제물로 드렸다’는 말씀의 속뜻을 본격적으로 설명합니다. AC.346에서는 ‘제물’이 그 신앙에서 비롯된 ‘예배’를 뜻한다고 간단히 밝혔습니다. 이제 AC.349는 왜 말씀에서 제물이 예배를 상징하는지를 유대교회의 희생 제사와 첫 열매, 처음 난 것을 드리는 제도를 통해 설명합니다.

 

여기서 가장 먼저 붙들어야 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유대교회의 제사 자체를 참된 예배의 본질로 보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희생 제물과 첫 열매와 처음 난 것을 드리는 모든 외적 의식은 ‘천국적인 것들’을 표상했고, 궁극적으로 모두 주님을 가리켰습니다. 따라서 그 의식의 가치는 동물이나 곡식이라는 물질 자체에 있지 않고, 그것이 표상하는 내적 실재에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매우 날카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표상하는 실재가 없다면 표상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표상은 그것이 가리키는 실재 때문에 의미가 있습니다. 제물이 사랑을 표상한다면 사랑이 있어야 하고, 첫 열매가 주님께 속한 선을 표상한다면 실제 삶 안에 그 선이 있어야 합니다. 표상만 남고 그것이 가리키는 실재가 사라지면 껍데기만 남습니다.

 

이어지는 두 번째 질문은 더욱 강합니다. ‘내적인 것이 없는 외적 종교가 우상과 같은 , 죽은 외에 무엇이겠습니까?’ 여기서 AC.348AC.349가 정확하게 만납니다. AC.348에서는 체어리티 없는 신앙의 행위를 ‘죽은 행위’라고 했습니다. 이제 AC.349에서는 내적인 것이 없는 외적 종교를 ‘죽은 ’이라고 합니다. 행위도 예배도 외적인 형식만으로는 살아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외적인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뜻으로 읽으면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요점은 외적인 것을 버리는 데 있지 않고 외적인 것에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밝히는 데 있습니다. 그는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들로부터 생명을 얻으며, 그것들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생명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AC.349의 핵심 문장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질서가 있습니다. 생명의 근원은 주님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선이 사람의 내면에 받아들여지고, 그것이 외적인 예배와 행위로 나타날 때 그 외적인 것은 살아 있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외적 예배의 생명은 외적 형식 자체에 있지 않고, 그 안에서 역사하는 내적인 것에 있으며, 더 깊게는 그 내적인 것의 근원이신 주님에게 있습니다.

 

이 원리는 가인의 제물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입니다. 가인도 제물을 드렸습니다. 따라서 외적 예배가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예배가 어디에서 나왔는가 하는 것입니다. 앞의 AC.346-348에서 보았듯이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나타내며, 그의 ‘땅의 소산’은 체어리티 없는 신앙의 행위를 뜻합니다. 그렇다면 그 소산을 여호와께 드리는 ‘제물’은 자연스럽게 그러한 상태에서 나온 예배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문제는 ‘예배를 드리지 않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배를 드렸다는 사실 때문에 더 깊은 문제가 드러납니다. 외적 예배가 존재한다고 해서 그 예배가 자동으로 참된 예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배의 내적 생명이 무엇인가를 보아야 합니다.

 

3:2-4의 ‘공의로운 제물’은 이 점을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 주님께서는 레위 자손을 금과 은처럼 연단하여 깨끗하게 하시고, 그 후에 그들이 ‘공의로운 제물’을 드립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내적 제물’이라고 풀이합니다. 참된 예배는 단순히 제단 위에 무엇을 올려놓는 행위가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의 내면을 정결하게 하신 결과로 나오는 예배라는 것입니다.

 

특히 ‘레위 자손’을 스베덴보리가 ‘거룩하게 예배하는 사람들’로 풀이하는 것은 앞의 AC.342와도 연결됩니다. 거기서 레위는 체어리티를 나타냈고, 바로 그 때문에 레위 지파가 제사장직을 받았다고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참된 예배와 체어리티는 서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예배의 거룩함은 외적 의식의 정교함보다 그 안에 있는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나옵니다.

 

또한 ‘옛날’이 태고교회를, ‘고대’가 고대교회를 뜻한다는 설명도 의미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예배의 원형을 교회의 가장 초기 상태와 연결합니다. 특히 태고교회는 사랑을 중심으로 주님을 예배했던 천적 교회였습니다. 따라서 ‘옛날과 고대와 같이’ 제물이 다시 기쁨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옛 제사 제도를 복원한다는 뜻이 아니라 예배가 다시 그 내적 본질을 회복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20:40에서는 ‘예물’과 ‘ 열매’가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주님으로 말미암아 체어리티로 거룩하게 행위’라고 풀이합니다. 이 표현은 AC.348AC.349를 이어 주는 매우 중요한 연결고리입니다. 앞에서는 살아 있는 행위가 ‘체어리티로부터 행하는 ’이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그 행위가 주님으로 말미암아 체어리티로 거룩하게 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사람이 선을 행한다고 해서 그 선을 자기 것으로 돌려서는 안 됩니다. 참된 체어리티의 행위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받아 행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것을 자유롭게 받아 자신의 삶에서 실천하지만, 그 선의 생명과 근원은 주님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그 행위가 예물이 되고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습3:10에서 ‘구스’가 천적인 것들, 곧 사랑과 체어리티와 체어리티의 행위를 소유한 사람들을 뜻한다는 설명은 AC.349 전체를 아름답게 마무리합니다. 참된 제물은 결국 사랑, 체어리티, 그리고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행위와 연결됩니다. 제물이라는 외적인 형식이 가리키던 실재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AC.346부터의 흐름이 매우 선명해집니다. ‘땅의 소산’은 체어리티 없는 신앙의 행위를 나타내고, 그 소산을 ‘제물’로 드리는 것은 그 행위에서 나온 예배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가인의 예배는 외적인 형식을 갖추고 있었지만 그 생명의 근원이 되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예배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헌금하고 성찬에 참여하는 모든 외적 예배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외적 예배가 주님에게서 오는 내적 사랑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면서도 이웃을 미워하고, 자기 의를 높이며, 진리를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도구로 사용한다면 외적 예배와 내적 삶 사이에 분리가 생깁니다.

 

반대로 참된 예배는 예배 시간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주님께 받은 선이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와 실제 쓰임으로 흘러나갈 때 삶 자체가 예배의 연장이 됩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에게 예배와 삶, 신앙과 체어리티,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은 서로 따로 떨어진 영역이 아닙니다. 내적인 사랑이 외적인 행위와 예배 안에서 표현되고, 그 모든 것이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을 때 하나의 살아 있는 질서를 이룹니다.

 

결국 AC.349의 핵심은 ‘예배의 생명은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질문으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외적 형식이 예배에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으로부터 생명을 얻고, 내적인 것은 주님에게서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예배는 단순히 무엇을 주님께 드리는 행위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과 선을 다시 삶과 체어리티의 행위로 주님께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AC.350, 창4:4, ‘왜 주님께서는 아벨의 제물을 받으셨는가 - 체어리티에 기초한 참된 예배’(AC.350-3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And Abel, he also brought of the firstlings of his flock, and of the fat thereof; and Jehovah looked to Abel, and to his offer

bygrace.kr

 

AC.348, 창4:3, 가인의 ‘땅의 소산’ - 체어리티 없는 죽은 행위와 살아 있는 열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4:3) AC.348 ‘땅의 소산’(fruit of the ground)이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를 뜻한다는 것은 이어지는 내용에서도 분명합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