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200.심화

 

2. ‘인간의 상태 변화’, 주님의 섭리

 

이러한 변화는 홍수 이후 세상이 멸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일어난 것입니다. Such was the change made after the flood to prevent the destruction of the world. (AC.200)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변화는 단순한 타락이나 퇴보로만 설명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변화가 세상이 멸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허용된 섭리적 전환이었다고 말합니다. 만일 태고교회의 방식, 곧 선에서 곧바로 진리를 보는 방식이 그 상태 그대로 타락과 결합되었다면, 인간은 돌이킬 수 없이 파괴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인간의 구조 자체를 바꾸어, 진리를 먼저 배우고 그로부터 선으로 나아가는 방식으로 인류를 보존하셨습니다. (AC.200 해설)

 

 

이 대목은 AC.200 전체뿐 아니라 스베덴보리의 교회 역사관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보통 우리는 태고교회에서 고대교회로, 천적 인간에서 영적 인간으로의 변화를 들으면 자연스럽게 ‘타락’, ‘쇠퇴’, ‘퇴보’라는 관점으로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실제로 어떤 의미에서는 맞습니다. 태고교회의 직접적인 지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즉시 아는 상태도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놀라운 말을 합니다. 이 변화는 단지 인간이 타락한 결과만이 아니라, 동시에 주님의 섭리 가운데 허용되고 준비된 변화였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태고교회 사람들은 선과 진리가 매우 깊이 결합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랑 안에서 진리를 지각했고, 진리를 안다는 것은 곧 그것을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그런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악을 사랑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그들은 단순히 진리를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진리를 알면서도 거스르는 사람이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상태가 영적으로 가장 위험한 상태 가운데 하나라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그래서 홍수 이전 인류의 비극은 단순히 악해졌다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높은 지각과 깊은 진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자기 own과 결합시켰다는 데 있었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홍수 전 인류의 멸망입니다. AC.310 이하에서 설명되는 ‘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도 바로 그런 상태를 가리킵니다.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생긴 악이 아니라, 진리를 알면서도 그것을 왜곡한 상태 말입니다.

 

이 때문에 주님께서는 인간 구조 자체를 바꾸시는 섭리를 행하셨습니다. 이제 인간은 더 이상 선에서 진리를 보는 존재가 아니라, 진리를 먼저 배우고, 그것을 통해 선으로 인도되는 존재가 됩니다. 즉, 사랑이 먼저이고, 신앙이 나중이었던 구조에서, 신앙이 먼저 주어지고, 사랑이 뒤따르는 구조로 바뀌게 됩니다.

 

표면적으로 보면, 이것은 낮아진 상태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인류를 위한 보호 장치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제 사람은 태고교회 사람들처럼 깊은 지각을 배반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천천히 배우고, 조금씩 이해하고, 점진적으로 거듭날 수 있게 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이전보다 덜 높아졌지만, 이전보다 훨씬 안전해졌습니다.

 

그래서 AC.200은 인간 역사 전체를 보는 스베덴보리의 독특한 관점을 보여 줍니다. 주님은 인간의 쇠퇴를 단순히 방치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쇠퇴 속에서도 인류가 계속 존재할 수 있도록 새로운 구조를 마련하셨습니다. 태고교회의 상실은 비극이지만, 동시에 홍수 이후 인류의 생존 조건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목사님께서 자주 감탄하시는 주님의 ‘점진성’과 ‘보호하시는 섭리’가 떠오릅니다. 우리는 흔히 ‘왜 주님은 인간을 처음 상태로 되돌리지 않으실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종종 가장 높은 상태를 즉시 회복시키기보다, 현재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상태 안에서 보존하는 길을 선택하십니다.

 

마치 중병을 앓은 사람이 예전의 건강을 당장 회복하지 못하더라도, 먼저 생명을 보존하고, 서서히 회복하도록 치료받는 것과 비슷합니다. 태고교회의 상실은 분명 손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손실 속에서도 인류 전체가 멸망하지 않도록 새로운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변화는 홍수 이후 세상이 멸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일어난 것입니다’라는 한 문장은 단순한 역사 설명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타락보다 더 크신 주님의 섭리를 보여 주는 선언입니다. 인간은 점점 낮아졌지만, 주님은 그 낮아진 상태에 맞추어 새로운 구원의 길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오늘날 우리가 말씀을 배우고, 진리를 익히고, 양심을 따라 조금씩 거듭나는 방식 자체가 바로 그 섭리의 결과인 것입니다.

 

 

 

AC.200, 심화 1, ‘[quod scirent]’

AC.200.심화 1. ‘[quod scirent]’ 그리고 그들 가운데 매우 많은 이들에게는 아는 것[quod scirent]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and with very many among them there was scarcely anything but knowledge [quod sciren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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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0.심화

 

1. ‘[quod scirent]’

 

그리고 그들 가운데 매우 많은 이들에게는 아는 것[quod scirent]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and with very many among them there was scarcely anything but knowledge [quod scirent]. (AC.200)

 

많은 사람들에게는 이제 아는 것만 남고, 살아 있는 선과 사랑은 거의 사라지게 됩니다. (AC.200 해설)

 

 

이 대목은 짧지만 매우 무섭고도 슬픈 진단이라고 생각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원래 선으로부터 진리를 알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사랑이 먼저였고, 진리는 그 사랑 안에서 자연스럽게 지각되었습니다. 그들은 오늘날처럼 신앙을 공부해서 아는 사람들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진리를 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AC.200에서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후손들은 점차 그 상태를 잃어버립니다. 이제는 선으로부터 진리를 아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관한 지식으로부터 선을 배우려고 합니다.

 

여기까지는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실제로 홍수 이후의 영적 교회는 대부분 이런 방식으로 존재했습니다. 문제는 그다음에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들 가운데 매우 많은 이들에게는 아는 것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없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공부를 많이 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진리를 아는 것과 진리를 사랑하는 것이 분리되었다는 뜻입니다.

 

생각해 보면 사람은 얼마든지 선에 대해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랑에 대해 강의할 수 있습니다. 겸손의 중요성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천국에 대한 교리를 정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사랑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경고하는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진리가 삶이 되지 않고, 지식으로만 남아 있는 상태 말입니다.

 

그래서 아는 것만 남았다’는 말은 사실상 살아 있는 신앙이 죽어가고 있다’는 말과 비슷합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에게 신앙은 단순한 앎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있으며, 선을 사랑하는 삶 속에서 살아 움직입니다. 그런데 사랑은 점점 사라지고, 진리에 대한 기억만 남게 되면, 신앙은 생명을 잃은 껍데기가 됩니다.

 

저는 AC.200을 읽을 때마다 오늘날의 종교 현실도 떠오릅니다. 교리를 많이 아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성경 지식이 풍부한 사람도 많습니다. 신학을 공부한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라면 아마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그 지식이 사랑으로 살아 있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 상태는 태고교회 후손들에게 나타났던 바로 그 상태와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 대목이 목사님께 특별히 와닿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 같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오랫동안 AC를 번역하고 해설하시면서 단순히 아는 것’을 늘리는 작업을 하고 계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 지식이 삶이 되고, 사랑이 되고, 영적 상태가 되기를 바라며 작업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AC를 읽고도 단지 흥미로운 내용이네요 정도로 끝나 버릴 때, 아쉬움을 느끼시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입니다.

 

결국 AC.200의 경고는 지식 자체를 향한 것이 아닙니다. 지식은 필요합니다. 문제는 지식만 남는 것입니다. 사랑 없는 진리, 삶 없는 교리, 체어리티 없는 신앙, 지각 없는 지식이 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그들 가운데 매우 많은 이들에게는 아는 것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없었다’고 말할 때의 안타까움도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 한 문장은 단순한 역사적 진단이 아니라, 모든 시대의 교회를 향한 경고처럼 들립니다. ‘진리를 아는 것’에서 멈추지 말고, ‘진리로 사는 것’으로 나아가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진리를 많이 아는 사람들의 나라가 아니라, 진리를 사랑하여 삶이 되게 한 사람들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AC.200, 심화 2, ‘인간의 상태 변화’, 주님의 섭리

AC.200.심화 2. ‘인간의 상태 변화’, 주님의 섭리 이러한 변화는 홍수 이후 세상이 멸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일어난 것입니다. Such was the change made after the flood to prevent the destruction of the world.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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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0, 창3:2-3, 창2 ‘사랑’에서 창3 ‘신앙’으로 중심 이동을 허락하신 이유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And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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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And the woman said unto the serpent, We may eat of the fruit of the tree of the garden; But of the fruit of the tree which is in the midst of the garden, God hath said, Ye shall not eat of it, neither shall ye touch it, lest ye die. (3:2, 3)

 

AC.200

 

여기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tree of knowledge)동산 가운데에 있다(in the midst of the garden)고 하는 이유는, 앞서 창2:9에서는 생명나무가 동산 가운데에 있다 하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대해서는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인데, 이는 동산 가운데(midst)가 가장 내적인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천적 인간, 곧 태고교회의 가장 내적인 것은 생명나무(tree of lives)였는데, 이것은 사랑과 그로부터 나온 신앙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손인 지금 이 사람,천적인 동시에 영적인 사람(celestial spiritual man)이라 할 수 있는 이 후손에게서는 신앙이 동산 가운데(midst), 곧 가장 내적인 것이었습니다. 태고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어떠함(quality)에 대해서는 오늘날에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으므로, 그것을 더 충분히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들의 성향(genius)은 오늘날 어떤 사람에게서도 발견되는 것과는 완전히 달랐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들의 성향에 대해 어떤 개념을 전하기 위해 말하자면, 그들은 선으로부터 진리를 알았고, 사랑으로부터 신앙에 속한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세대가 사라진 뒤에는 전혀 다른 성향의 다른 세대가 뒤따랐는데, 그들은 선으로부터 진리를 분별하는 대신, 진리를 통해 선을 알게 되었고, 사랑으로부터 신앙을 아는 대신, 신앙의 지식들로부터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매우 많은 이들에게는 아는 것[quod scirent]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홍수 이후 세상이 멸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일어난 것입니다. The reason why the “tree of knowledge” is here spoken of as being “in the midst of the garden,” although previously (Gen. 2:9), the tree of lives was said to be in the midst of the garden, and not the tree of knowledge, is that the “midst” of the garden signifies the inmost; and the inmost of the celestial man, or of the most ancient church, was the “tree of lives,” which is love and the faith thence derived; whereas with this man, who may be called a celestial spiritual man, or with this posterity, faith was the “midst” of the garden, or the inmost. It is impossible more fully to describe the quality of the men who lived in that most ancient time, because at the present day it is utterly unknown, their genius being altogether different from what is ever found with anyone now. For the purpose however of conveying some idea of their genius, it may be mentioned that from good they knew truth, or from love they knew what is of faith. But when that generation expired, another succeeded of a totally different genius, for instead of discerning the true from the good, or what is of faith from love, they acquired the knowledge of what is good by means of truth, or what is of love from the knowledges of faith, and with very many among them there was scarcely anything but knowledge [quod scirent]. Such was the change made after the flood to prevent the destruction of the world.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2:9)

 

 

해설

 

이 단락은 창2와 창3의 중심이 무엇이었는지를 결정적으로 구분합니다. ‘동산 가운데’는 단순한 위치 개념이 아니라, 인간 안에서 가장 내적이며 주도적인 원리를 뜻합니다. 태고교회의 가장 내적인 것은 ‘생명나무’였고, 그것은 곧 사랑과 그 사랑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신앙이었습니다. 즉, 태고교회에서 중심은 언제나 사랑이었고, 신앙은 그 사랑의 열매이자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다루어지는 후손, 곧 ‘천적인 동시에 영적인 사람’에게서는 그 중심이 달라졌습니다. 이제 ‘동산 가운데’는 생명나무가 아니라, 신앙이 됩니다. 이는 사랑이 중심이었던 상태에서, 신앙이 중심이 되는 상태로의 이동을 의미합니다. 아직 신앙이 살아 있고, 주님으로부터 나오지만, 그것이 더 이상 사랑의 직접적 흐름으로만 유지되지는 않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차이를 오늘날의 인간에게는 거의 이해 불가능한 것으로 말합니다. 태고 시대 사람들의 성향은 오늘날 인간의 심리나 인식 구조와는 근본적으로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선을 먼저 살았고, 그 선 안에서 진리를 보았습니다. 사랑이 먼저 있었고, 신앙은 그 사랑 안에서 자명하게 인식되었습니다. 이것이 ‘선으로부터 진리를 안다’는 말의 실제 의미입니다.

 

그러나 그다음 세대에서는 방향이 완전히 바뀝니다. 그들은 진리를 통해 선을 배우고, 신앙의 지식들을 통해 사랑을 이해하려 했습니다. 이는 신앙이 지각이 아니라 학습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음을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를 가치중립적으로만 말하지 않고, 분명한 위험을 내포한 변화로 제시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이제 ‘아는 것’만 남고, 살아 있는 선과 사랑은 거의 사라지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변화는 단순한 타락이나 퇴보로만 설명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변화가 ‘세상이 멸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허용된 섭리적 전환이었다고 말합니다. 만일 태고교회의 방식, 곧 선에서 곧바로 진리를 보는 방식이 그 상태 그대로 타락과 결합되었다면, 인간은 돌이킬 수 없이 파괴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인간의 구조 자체를 바꾸어, 진리를 먼저 배우고 그로부터 선으로 나아가는 방식으로 인류를 보존하셨습니다.

 

AC.200은 그러므로 창3의 중심 이동을 단순한 하락으로만 읽지 못하게 합니다. 사랑 중심에서 신앙 중심으로의 이동은 손실이면서 동시에 보호 장치였습니다. 이는 태고교회의 종말과 고대교회의 시작을 가르는 결정적 전환점이며, 오늘날 인간의 신앙 구조가 왜 지금과 같은 형태를 띠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핵심 대목입니다.  

 

 

심화

 

1. ‘[quod scirent]’

 

 

AC.200, 심화 1, ‘[quod scirent]’

AC.200.심화 1. ‘[quod scirent]’ 그리고 그들 가운데 매우 많은 이들에게는 아는 것[quod scirent]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and with very many among them there was scarcely anything but knowledge [quod sciren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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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인간의 상태 변화’, 주님의 섭리

 

이러한 변화는 홍수 이후 세상이 멸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일어난 것입니다. Such was the change made after the flood to prevent the destruction of the world. (AC.200)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변화는 단순한 타락이나 퇴보로만 설명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변화가 ‘세상이 멸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허용된 섭리적 전환이었다고 말합니다. 만일 태고교회의 방식, 곧 선에서 곧바로 진리를 보는 방식이 그 상태 그대로 타락과 결합되었다면, 인간은 돌이킬 수 없이 파괴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인간의 구조 자체를 바꾸어, 진리를 먼저 배우고 그로부터 선으로 나아가는 방식으로 인류를 보존하셨습니다. (AC.200 해설)

 

 

이 대목은 AC.200 전체뿐 아니라 스베덴보리의 교회 역사관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보통 우리는 태고교회에서 고대교회로, 천적 인간에서 영적 인간으로의 변화를 들으면 자연스럽게 ‘타락’, ‘쇠퇴’, ‘퇴보’라는 관점으로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실제로 어떤 의미에서는 맞습니다. 태고교회의 직접적인 지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즉시 아는 상태도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놀라운 말을 합니다. 이 변화는 단지 인간이 타락한 결과만이 아니라, 동시에 주님의 섭리 가운데 허용되고 준비된 변화였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태고교회 사람들은 선과 진리가 매우 깊이 결합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랑 안에서 진리를 지각했고, 진리를 안다는 것은 곧 그것을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그런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악을 사랑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그들은 단순히 진리를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진리를 알면서도 거스르는 사람이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상태가 영적으로 가장 위험한 상태 가운데 하나라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그래서 홍수 이전 인류의 비극은 단순히 악해졌다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높은 지각과 깊은 진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자기 own과 결합시켰다는 데 있었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홍수 전 인류의 멸망입니다. AC.310 이하에서 설명되는 ‘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도 바로 그런 상태를 가리킵니다.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생긴 악이 아니라, 진리를 알면서도 그것을 왜곡한 상태 말입니다.

 

이 때문에 주님께서는 인간 구조 자체를 바꾸시는 섭리를 행하셨습니다. 이제 인간은 더 이상 선에서 진리를 보는 존재가 아니라, 진리를 먼저 배우고, 그것을 통해 선으로 인도되는 존재가 됩니다. 즉, 사랑이 먼저이고, 신앙이 나중이었던 구조에서, 신앙이 먼저 주어지고, 사랑이 뒤따르는 구조로 바뀌게 됩니다.

 

표면적으로 보면, 이것은 낮아진 상태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인류를 위한 보호 장치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제 사람은 태고교회 사람들처럼 깊은 지각을 배반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천천히 배우고, 조금씩 이해하고, 점진적으로 거듭날 수 있게 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이전보다 덜 높아졌지만, 이전보다 훨씬 안전해졌습니다.

 

그래서 AC.200은 인간 역사 전체를 보는 스베덴보리의 독특한 관점을 보여 줍니다. 주님은 인간의 쇠퇴를 단순히 방치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쇠퇴 속에서도 인류가 계속 존재할 수 있도록 새로운 구조를 마련하셨습니다. 태고교회의 상실은 비극이지만, 동시에 홍수 이후 인류의 생존 조건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목사님께서 자주 감탄하시는 주님의 ‘점진성’과 ‘보호하시는 섭리’가 떠오릅니다. 우리는 흔히 ‘왜 주님은 인간을 처음 상태로 되돌리지 않으실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종종 가장 높은 상태를 즉시 회복시키기보다, 현재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상태 안에서 보존하는 길을 선택하십니다.

 

마치 중병을 앓은 사람이 예전의 건강을 당장 회복하지 못하더라도, 먼저 생명을 보존하고, 서서히 회복하도록 치료받는 것과 비슷합니다. 태고교회의 상실은 분명 손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손실 속에서도 인류 전체가 멸망하지 않도록 새로운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변화는 홍수 이후 세상이 멸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일어난 것입니다’라는 한 문장은 단순한 역사 설명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타락보다 더 크신 주님의 섭리를 보여 주는 선언입니다. 인간은 점점 낮아졌지만, 주님은 그 낮아진 상태에 맞추어 새로운 구원의 길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오늘날 우리가 말씀을 배우고, 진리를 익히고, 양심을 따라 조금씩 거듭나는 방식 자체가 바로 그 섭리의 결과인 것입니다.

 

 

3. ‘더 낮아졌지만 더 안전해진’

 

왜냐하면 이제 사람은 태고교회 사람들처럼 깊은 지각을 배반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AC.200 해설)

 

 

이 문장은 얼핏 보면 이상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보통 우리는 ‘깊은 지각을 가진 사람이 더 안전하지 않은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반드시 그렇지 않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오늘날 사람들처럼 ‘믿어야 한다’, ‘배워야 한다’, ‘연구해야 한다’의 상태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랑 안에서 진리를 직접 지각했습니다. 다시 말해, 어떤 것이 주님께 속한 것인지, 어떤 것이 선한 것인지, 어떤 것이 진리인지를 내적으로 알았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말씀을 공부하여 알게 되는 것을 그들은 마치 눈으로 보는 것처럼 알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문에 그들의 타락은 훨씬 위험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르고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알면서 죄를 짓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사람은 진리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잘못을 범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태고교회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거스르는지 알면서도 그것을 거스르게 됩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 어떤 사람이 주님의 섭리를 의심한다면, 그 사람은 실제로는 주님의 섭리를 거의 보지 못한 상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의 인도를 내적으로 지각하면서도 자기 own을 사랑하는 쪽으로 돌아설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배반은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의식적인 반전(反轉)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여러 곳에서 말하는 ‘선과 진리를 알면서도 그것을 거스르는 상태’의 위험성입니다. 그는 이런 상태를 영적 세계에서 가장 치유하기 어려운 상태 가운데 하나로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진리 자체가 악과 결합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반면 홍수 이후 인간은 그렇게 높은 지각을 갖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배우고, 이해하고, 믿고, 실천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따라서 넘어질 수도 있고, 오해할 수도 있고, 심지어 한동안 잘못된 길로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회복될 여지도 훨씬 많습니다. 왜냐하면 태고교회 사람들처럼 깊은 지각 자체를 뒤집어 버리는 상태까지는 잘 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어린아이가 부모를 배신하는 것과, 모든 사랑을 다 받고 자란 성인이 의식적으로 부모를 배신하는 것의 차이와 비슷합니다. 후자의 배신이 훨씬 깊고 심각한 이유는, 무엇을 배반하는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홍수 이후 인간의 상태를 단순한 하락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분명 태고교회보다 낮은 상태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더 보호받는 상태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이전만큼 높이 오를 수는 없게 되었지만, 이전만큼 깊이 추락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왜냐하면 이제 사람은 태고교회 사람들처럼 깊은 지각을 배반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라는 말은 단순한 능력의 감소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보호를 의미합니다. 인간은 더 이상 태고교회 수준의 지각을 갖지 못하지만, 그 대신 그 지각을 완전히 뒤집어 멸망에 이르는 위험에서도 어느 정도 보호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AC.200의 맥락에서 보면, 홍수 이후 인간은 영적으로 더 낮아졌지만 동시에 더 안전해졌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세상이 멸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인간 구조가 바뀌었다고 말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에게서 어떤 것을 거두어 가신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보존하기 위해 감당할 수 있는 상태로 조정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AC.200이 보여 주는 매우 깊은 섭리의 한 모습입니다.

 

 

 

AC.199, 창3:2-3, ‘나무’와 ‘열매’, 태고교회의 상태 변화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And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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