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셔. 그러니 일어난 일은 모두 하나님의 뜻이야’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셔. 그러니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결국 하나님의 뜻이야.’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일수록 이런 말을 자연스럽게 할 때가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이라고 가르치며, 참새 한 마리조차 하나님의 돌보심 밖에 있지 않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연처럼 보이는 일 속에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주님께서 여전히 다스리고 계심을 신뢰하는 것은 매우 귀한 신앙입니다.

 

문제는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와 ‘일어난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직접 원하셨다’를 같은 뜻으로 만들어 버릴 때 생깁니다. 이 둘은 같지 않습니다. 만일 세상에서 일어난 모든 사건이 그대로 하나님의 뜻이라면 살인과 전쟁, 학대와 배신, 거짓과 착취까지도 하나님께서 원하신 일이 되어 버립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악을 행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시니 이것도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악을 금하시는 분이면서 동시에 그 악이 일어나기를 원하시는 분이라는 모순에 빠집니다.

 

성경은 악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악을 행하는 자가 되지 말고 선을 행하는 자가 되라’고 하며(요삼1:11), 야고보는 더욱 분명하게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고 말합니다(약1:13). 주님께서는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살인하고 간음하고 거짓말할 때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하지 말라고 명하신 일을 주님께서 동시에 하기를 원하셨다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를 이해하려면 ‘주님께서 뜻하시는 것’과 ‘주님께서 허용하시는 것’을 구별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에서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뜻하시는 것은 언제나 선입니다. 주님은 사람이 악에서 돌이켜 선을 선택하고, 진리를 받아들이며, 마침내 천국의 생명을 받아들일 수 있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자유가 있기 때문에 사람은 주님의 뜻을 거부하고 악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악을 원하시지는 않지만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시기 위해 일정 범위에서 그것을 허용하십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께서는 악을 아예 막아 버리지 않으실까요? 이것은 인간의 ‘자유’(freedom)와 ‘합리성’(rationality)에 관계됩니다. 사람이 선을 선택하려면 악을 선택할 가능성도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사람이 악을 선택하려 할 때마다 초자연적으로 손을 붙잡아 막으신다면, 겉으로는 악이 없는 세상이 될지 몰라도 인간은 자유롭게 선을 사랑하는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선을 강제로 행하는 것은 참된 선이 될 수 없으며, 사랑 역시 강요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천국으로 끌고 가는 기계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자유와 합리성 안에서 주님을 향할 수 있는 인간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주님의 허용이 방관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허용하신다’는 말을 ‘상관하지 않고 내버려 두신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적 허용은 신적 섭리 밖에 존재하는 별도의 영역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악을 선으로 바꾸어 악이 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악이 발생하는 상황에서도 그것이 가능한 한 더 큰 악으로 번지는 것을 제한하시고, 그 결과 속에서도 인간을 선으로 돌이키기 위해 끊임없이 역사하십니다. 악은 인간과 지옥에서 나오지만, 악을 제한하고 그 가운데서 선한 가능성을 보존하시는 것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요셉의 이야기가 이 차이를 잘 보여 줍니다. 형들은 요셉을 미워했고 그를 죽이려 했으며 결국 노예로 팔았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해 버리면 형들의 악한 선택까지 하나님께서 원하셨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나 훗날 요셉은 형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50:20). 형들이 의도한 것은 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은 선이었습니다. 같은 사건 안에서도 인간의 악한 의도와 하나님의 선한 섭리는 구별됩니다.

 

십자가는 이 문제를 가장 깊은 차원에서 보여 줍니다. 유다는 주님을 배신했고, 종교 지도자들은 거짓 증언을 이용했으며, 군병들은 주님을 조롱하고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들의 배신과 증오와 잔인함 자체를 ‘하나님의 선한 뜻’이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악은 악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행한 그 악조차 주님의 구원 역사를 무너뜨리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인간과 지옥의 가장 깊은 악을 맞아 그것을 이기시고 인류를 위한 구원의 길을 이루셨습니다. 여기에서 신적 섭리의 놀라운 깊이가 드러납니다. 주님은 악을 만들어 선을 이루시는 분이 아니라, 악이 일어나도 그것이 당신의 궁극적인 선을 좌절시키지 못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이 구별은 우리의 실제 삶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교통사고로 가족을 잃은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뜻이 있어서 데려가셨습니다’라고 말하거나, 범죄 피해자에게 ‘이 일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일어난 것입니다’라고 너무 쉽게 말하면 큰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특히 누군가의 악한 선택으로 고통받은 사람에게 그 악까지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말한다면, 피해자는 자신을 해친 사람뿐 아니라 하나님까지 두려워하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사건의 이유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너무 빨리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자연재해나 질병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진과 홍수, 암과 감염병, 갑작스러운 죽음이 발생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이것을 보내셨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자연계에는 주님께서 세우신 질서와 법칙이 있고, 그 자연적 질서 안에서 인간에게 고통스러운 일도 일어납니다. 또한 인간의 탐욕과 무책임, 폭력과 잘못된 판단 때문에 발생하는 고통도 있습니다. 모든 원인을 하나님의 직접적인 의지 하나로 환원하면 자연적인 원인과 인간의 책임을 지워 버릴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반대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전능하지 않으신가? 막으실 수 있는데도 허용하셨다면 결국 뜻하신 것과 같은 것 아닌가?’ 이것이 바로 이 문제에서 가장 어려운 지점입니다. 그러나 ‘막을 능력이 있음’과 ‘그 일을 원함’은 같지 않습니다. 부모가 성인이 된 자녀의 모든 잘못된 선택을 물리적으로 막을 능력이 없어서만 기다리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억지로 통제하는 것이 그 사람의 자유 자체를 파괴하기 때문에 고통스럽게 지켜보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물론 인간 부모와 주님의 섭리를 그대로 동일시할 수는 없지만, ‘허용 = 찬성’이 아니라는 점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것은 인간의 거듭남(regeneration)과 직접 연결됩니다. 주님의 목적은 단지 우리가 고통 없는 자연적 삶을 사는 데 있지 않습니다.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이 자유롭게 악을 거부하고 선을 선택하여 천국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적 섭리는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지 않는 방식으로 역사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께서 왜 당장 개입하지 않으시는가?’라고 묻지만, 주님의 섭리는 우리가 보는 한순간보다 인간의 영원한 삶 전체를 보고 움직입니다.

 

그렇다고 고통 앞에서 ‘다 하나님의 허용이니 받아들여라’라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허용의 교리는 고통받는 사람에게 체념을 강요하기 위한 교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악을 악이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게 해 주는 교리입니다. 학대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므로 벗어나야 하고, 폭력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므로 막아야 하며, 불의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므로 바로잡아야 합니다. 병이 생겼다면 치료해야 하고, 재난이 일어났다면 사람을 구조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여 악과 고통 앞에서 수동적으로 있는 것은 신적 섭리를 믿는 태도와 다릅니다.

 

여기에서 ‘체어리티’(charity)가 중요해집니다. 체어리티란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이 이웃을 향하여 실제적인 선과 유용한 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누군가 고통받고 있을 때 ‘이것도 하나님의 뜻일 거야’라고 설명하는 것보다 그 사람 곁에 서고, 필요한 도움을 주고, 악을 막으며, 가능한 선을 행하는 것이 훨씬 더 주님의 뜻에 가까울 수 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왜 하나님께서 이 일을 허락하셨을까?’를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상처를 싸매고 돌보았습니다(눅10:33-35).

 

또한 이 구별은 인간의 책임을 보존합니다. 만일 일어난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내가 저지른 잘못도 결국 하나님께서 뜻하신 일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회개의 근거가 약해집니다. ‘내가 화를 내고 상처를 주었지만 이것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일어난 일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악의 책임을 주님께 돌릴 수 없습니다. 악은 인간이 자신의 ‘프로프리움’(proprium)에서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거부할 때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란 자신의 악을 하나님의 섭리 뒤에 숨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악으로 인정하고 주님의 도움을 받아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신다’는 고백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 고백을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더 깊게 이해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직접 원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과 지옥의 어떤 악도 주님의 궁극적인 선한 목적을 완전히 무너뜨릴 수 없으며, 주님께서는 허용된 모든 상황 속에서도 가능한 한 인간을 선과 구원으로 이끌고 계신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고통스러운 일이 일어났을 때 ‘왜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뜻하셨을까?’라고 묻는 것보다 때로는 질문을 바꾸는 편이 좋습니다. ‘주님께서 이것을 원하셨는지는 내가 함부로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이미 일어난 이 상황 속에서 주님께서는 어떤 선을 이루기 원하시는가? 그리고 나는 지금 어떤 선을 행해야 하는가?’라고 묻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악을 하나님의 뜻으로 만들지 않으면서도 신적 섭리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게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균형입니다. 한쪽 극단에는 ‘세상일은 모두 우연이고 하나님은 아무것도 관여하지 않으신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다른 쪽 극단에는 ‘일어난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직접 계획하고 원하신 것이다’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신적 섭리는 이 두 극단 사이에서 훨씬 섬세하게 움직입니다.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섭리하시지만 악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인간의 자유를 허용하시지만 인간을 버려두시지 않습니다. 악을 허용하시지만 그 악이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시니 일어난 일은 모두 하나님의 뜻이다’라는 말에는 귀한 신앙고백과 위험한 오해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신다’는 고백은 붙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그러므로 일어난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원하셨다’고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신적 섭리 밖에서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일어난 모든 것을 주님께서 직접 뜻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조금 더 깊이 압축하면 이것이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악을 뜻하시지 않지만 인간의 자유 때문에 악을 허용하시며, 허용된 악 속에서도 끊임없이 그것을 제한하고 인간을 가능한 선과 구원으로 이끄십니다.’

 

그래서 신앙은 비극을 만날 때마다 ‘이것도 하나님의 뜻이야’라고 설명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때로는 왜 이런 일이 허용되었는지 모른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 악이 주님의 선보다 강하지는 않다’고 믿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가 바로 그것을 보여 줍니다. 인간은 가장 깊은 악을 행했지만, 그 악이 주님의 사랑을 패배시키지는 못했습니다.

 

신적 섭리를 믿는다는 것은 모든 사건을 하나님의 직접적인 뜻으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건도 주님의 선한 목적을 최종적으로 좌절시킬 수 없음을 믿는 것입니다.

 

 

 

SL.27, ‘좋은 일이 생겼어? 그럼 하나님께 복 받은 거고, 나쁜 일이 생겼어? 그럼 뭔가 잘못한 거

‘좋은 일이 생겼어? 그럼 하나님께 복 받은 거고, 나쁜 일이 생겼어? 그럼 뭔가 잘못한 거지’ ‘좋은 일이 생겼어? 하나님께 복 받은 거야. 그런데 자꾸 나쁜 일이 생겨? 뭔가 잘못한 게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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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일이 생겼어? 그럼 하나님께 복 받은 거고, 나쁜 일이 생겼어? 그럼 뭔가 잘못한 거지’

 

‘좋은 일이 생겼어? 하나님께 복 받은 거야. 그런데 자꾸 나쁜 일이 생겨? 뭔가 잘못한 게 있는지 돌아봐야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매우 자연스럽게 듣는 말입니다. 취업이 되고, 사업이 잘되고, 건강이 회복되고, 자녀가 좋은 학교에 들어가고, 바라던 일이 이루어지면 ‘하나님께 복 받았다’고 말합니다. 반대로 병이 생기고, 사업이 어려워지고, 사고를 당하고, 자녀에게 문제가 생기면 ‘혹시 하나님 앞에 뭔가 잘못한 것이 있는 것 아닐까?’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에도 순종과 복, 불순종과 화를 연결하는 말씀들이 있기 때문에 이런 생각에는 분명 성경적인 뿌리가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너무 단순한 공식으로 만들어 ‘좋은 일 = 하나님의 복, 나쁜 일 = 내가 잘못한 결과’라고 모든 삶에 적용할 때 생깁니다.

 

성경은 실제로 죄와 그 결과를 연결합니다. 사람이 악을 선택하면 그 악 자체가 삶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거짓말을 반복하면 신뢰를 잃고, 탐욕에 사로잡히면 관계가 깨지며, 무절제하게 살면 삶의 여러 영역이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려움이 닥쳤을 때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닙니다. ‘혹시 내가 고쳐야 할 것이 있는가?’, ‘내가 잘못 선택한 것은 없는가?’라고 주님 앞에서 자신을 살펴보는 것은 오히려 거듭남에 필요한 태도입니다. 문제는 ‘어려움이 생겼다’는 사실만으로 ‘그러므로 네가 뭔가 잘못했다’고 결론 내리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가장 강력하게 다루는 성경이 욥기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바로 이 공식을 가지고 욥을 바라보았습니다. 욥에게 엄청난 재난이 닥쳤으니 반드시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재산을 잃고, 자녀들을 잃고, 건강까지 무너졌으니 욥이 하나님 앞에서 뭔가 큰 잘못을 했음이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엘리바스는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라고 말합니다(욥4:7). 얼핏 들으면 상당히 경건하고 논리적인 말입니다. 그러나 욥기의 서두에서 독자는 이미 욥의 고난을 그런 식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욥의 친구들이 끝없이 욥의 숨은 죄를 찾아내려 했던 이유는 ‘나쁜 일이 일어났다면 반드시 그 사람에게 나쁜 원인이 있어야 한다’는 공식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도 이 사고방식을 직접 바로잡으셨습니다. 요9에서 제자들은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고 묻습니다.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요9:2). 제자들의 머릿속에는 고난이 있다면 반드시 그 고난에 상응하는 죄인을 찾아야 한다는 전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고 답하십니다(요9:3). 주님은 고난을 보고 곧바로 죄의 크기를 역산하는 인간의 습관을 깨뜨리십니다.

 

눅13에서는 더 충격적인 사례가 나옵니다.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열여덟 사람이 죽었습니다. 당시 사람들도 아마 ‘그들에게 무슨 죄가 있었기에 저런 일을 당했을까?’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희는 이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고 하십니다(눅13:4-5). 비극을 당한 사람의 죄가 다른 사람보다 더 컸기 때문에 그런 일을 당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고, 질병, 재난, 실패를 보고 그 사람의 영적 상태를 판단하는 것은 주님의 가르침과 맞지 않습니다.

 

반대편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일이 많이 생긴다고 해서 그 사람이 하나님께 특별히 인정받고 있다는 뜻도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고 말씀하십니다(마5:45). 자연계에서는 선한 사람에게도 비가 내리고 악한 사람에게도 비가 내립니다. 선한 사람도 성공할 수 있고 악한 사람도 성공할 수 있으며, 선한 사람도 병들 수 있고 악한 사람도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습니다. 자연계의 형편만 보고 한 사람의 영적 상태를 읽어 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시73의 시인은 바로 이 문제 때문에 흔들렸습니다. 그는 악인의 형통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라고 탄식합니다(시73:4-5). 만일 ‘잘되는 사람 = 하나님께 복 받은 사람’이라는 공식이 옳다면 시인이 본 악인들은 하나님께 가장 큰 복을 받은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결국 외적인 형통과 인간의 궁극적인 영적 상태가 같지 않음을 깨닫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복’은 무엇일까요? 물론 자연적인 복도 있습니다. 건강과 일용할 양식, 좋은 관계와 안전, 필요한 물질은 모두 감사할 수 있는 선물입니다. 우리는 좋은 일이 생겼을 때 굳이 ‘이것은 복이 아니다’라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건강이 회복되면 감사하고, 어려운 문제가 해결되면 감사하며, 자녀에게 좋은 일이 생기면 함께 기뻐하면 됩니다. 문제는 자연적인 좋은 일을 ‘복의 전부’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복 있는 사람’을 말씀하시는 장면을 보면 복의 의미가 크게 달라집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하십니다(마5:3-10). 세상적인 기준으로 보면 가난하고 애통하고 박해받는 상태를 ‘복 받았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바로 그런 사람들을 향해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복은 외적인 환경이 얼마나 편안한가보다 인간이 주님과 천국을 향하여 어떤 내적 상태에 있는가와 더 깊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구별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자연계에서 우리가 좋은 것이라고 느끼는 것과 영원한 관점에서 실제로 선한 것이 언제나 같지는 않습니다. 돈이 많이 생기는 것이 자연적으로는 좋은 일이지만, 그 돈 때문에 탐욕과 교만이 더욱 강해진다면 그 사람의 영적 삶에는 오히려 위험이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경제적인 어려움 자체는 분명 고통스럽고 그것을 선이라고 부를 수 없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의 교만을 보고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며 주님을 더 깊이 의지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주님께서 그 사람을 겸손하게 만들려고 일부러 가난이나 실패를 보내셨다고 단정해서도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허용된 모든 상황 속에서도 인간을 선으로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주님께서 허용하시는 것’을 구별해야 합니다. 모든 질병과 사고, 실패와 재난을 ‘하나님께서 뜻하셨다’고 말하면 하나님을 악과 고통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만들 위험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에서 주님의 목적은 언제나 선이며 인간의 영원한 구원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자유가 있고, 자연계에는 자연적인 질서와 인과관계가 있으며, 사람들의 잘못된 선택과 악으로 인해 수많은 고통이 일어납니다. 주님께서는 악을 악으로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허용하시면서도 가능한 한 선한 결과로 이끄십니다.

 

그래서 ‘나쁜 일이 생겼으니 내가 뭔가 잘못했나?’라는 질문도 조금 바꾸어야 합니다. 자기성찰은 필요합니다. 병에 걸렸다고 해서 ‘내가 무슨 죄를 지었지?’라고 자책할 필요는 없지만, 삶의 습관 가운데 고쳐야 할 것이 있는지는 살펴볼 수 있습니다. 사업이 실패했다고 해서 ‘하나님께 벌 받았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지만, 자신의 판단과 욕심, 준비 부족을 돌아볼 수는 있습니다. 관계가 깨졌다고 무조건 ‘하나님께서 심판하셨다’고 할 필요는 없지만, 내가 상대에게 잘못한 것이 없는지는 살펴야 합니다. 이것이 사건을 미신적으로 해석하는 것과 거듭남을 위해 자신을 성찰하는 것의 차이입니다.

 

특히 다른 사람에게 이 공식을 적용할 때는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병든 사람에게 ‘뭔가 하나님 앞에 잘못한 것이 있지 않느냐’고 말하거나, 자녀에게 어려움이 생긴 부모에게 ‘기도가 부족해서 그런 것 아니냐’고 말하거나, 사업이 실패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치신 것 같다’고 말하는 것은 욥의 친구들과 같은 자리에 설 위험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의 고통이 왜 허용되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은 원인을 함부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아파하고, 필요한 도움을 주며, 그 사람이 고통 속에서도 주님을 향할 수 있도록 곁에 있는 ‘체어리티’(charity)입니다.

 

반대로 좋은 일을 경험한 사람도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니까 사업이 잘된다’, ‘내가 믿음이 좋으니까 자녀가 잘된다’, ‘기도를 많이 해서 건강하다’는 생각은 자기도 모르게 ‘프로프리움’(proprium)을 키울 수 있습니다. 더 위험한 것은 거기에서 ‘그러므로 잘 안 되는 사람은 나보다 뭔가 문제가 있다’는 판단으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자연적인 성공을 영적 우월함의 증거로 삼는 순간, 감사가 교만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 받은 자연적인 좋은 것에 대한 가장 건강한 반응은 ‘내가 하나님께 인정받았다는 증거’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면서 선한 쓰임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돈이 생겼다면 그것을 어떻게 선하게 사용할 것인지, 건강하다면 그 건강으로 누구에게 유용한 사람이 될 것인지, 지위와 능력을 얻었다면 그것을 자기 영광이 아니라 이웃을 위해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를 묻는 것입니다. 자연적인 복이 영적인 복과 연결되는 지점은 바로 여기입니다.

 

결국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진정한 복은 단순히 좋은 사건이 많이 생기는 상태가 아닙니다. 가장 깊은 복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우리의 ‘지배적 사랑’(ruling love)이 천국을 향하여 변화되는 것입니다. 자연적인 형편이 좋을 때도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형편이 어려울 때도 악을 악으로 알고 피하며 선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가는 것, 이것이 거듭남(regeneration)의 관점에서 훨씬 깊은 복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일이 생기면 감사하면 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그러나 그 일이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의롭거나 더 사랑받는다는 증거라고 생각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나쁜 일이 생기면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를 벌하시는구나’, ‘내 믿음에 문제가 있구나’라고 자동으로 결론 내리지도 말아야 합니다. 더구나 다른 사람의 고난을 보고 그의 죄와 믿음을 추측해서는 안 됩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좋은 일은 감사할 선물이 될 수 있고 나쁜 일은 자신을 돌아볼 계기가 될 수 있지만, 사건의 좋고 나쁨 자체가 그 사람의 영적 상태에 대한 하나님의 판정표는 아닙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조금 더 깊이 압축하면 이것이겠습니다.

 

‘주님의 복은 내 삶에 좋은 일만 일어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 안에서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천국의 사랑을 가진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시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좋은 일이 생겼어? 하나님께 복 받은 거야. 나쁜 일이 생겼어? 뭔가 잘못한 거지’라는 말은 절반의 진리를 담고 있지만 그대로 공식으로 만들면 위험합니다. 좋은 것은 주님께 감사하고, 어려움 앞에서는 자신을 겸손히 살피되, 형통한 사람을 의인으로 높이지도 말고 고난받는 사람을 죄인으로 판단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의 고난을 너무 빨리 설명했습니다. 주님은 고난당하는 사람의 사정을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깊이 아십니다. 그러므로 고통 앞에서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심판을 대신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를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좋은 일이 생겼을 때에도 ‘나는 복 받은 사람인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물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이것을 나는 무엇을 위해 사용할 것인가?’

 

어쩌면 그 질문에 대한 우리의 대답이, 좋은 일이 생겼다는 사실 자체보다 훨씬 더 중요한 영적 문제가 될 것입니다.

 

 

 

SL.28,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셔. 그러니 일어난 일은 모두 하나님의 뜻이야’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셔. 그러니 일어난 일은 모두 하나님의 뜻이야’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셔. 그러니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결국 하나님의 뜻이야.’ 신앙생활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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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26, ‘일이 계속 막히네...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시는 건가?’

‘일이 계속 막히네...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시는 건가?’ ‘이상하다. 기도하면서 시작한 일인데 왜 이렇게 계속 막히지?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인가?’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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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계속 막히네...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시는 건가?’

 

‘이상하다. 기도하면서 시작한 일인데 왜 이렇게 계속 막히지?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인가?’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이런 생각을 해 보았을 것입니다. 한두 번이 아니라 계속 일이 어긋납니다. 사람도 안 만나지고, 돈도 마련되지 않고, 계획했던 일정도 틀어지고,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연달아 생깁니다. 처음에는 ‘조금만 더 해 보자’고 생각하지만 막힘이 반복되면 마음속에 신앙적인 질문이 생깁니다. ‘혹시 하나님께서 이 길을 막고 계시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 자체는 잘못이 아닙니다. 실제로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사람이 가려는 길을 막으시는 장면이 있습니다. 바울 일행은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려 했지만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고, 비두니아로 가려고 애썼지만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고 했습니다(행16:6-7). 그 뒤 바울은 밤에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보고 마게도냐로 향합니다. 여기서는 분명 어떤 길이 막힌 것이 방향을 바꾸라는 주님의 인도하심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일이 계속 막힐 때 ‘혹시 내가 방향을 다시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라고 묻는 것은 건강한 신앙적 태도입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막혔다’는 사실에서 곧바로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신다’는 결론으로 뛰어갈 때입니다. 성경을 보면 주님의 뜻을 따라가는 길에도 놀라울 만큼 많은 장애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을 다시 세우는 일은 분명 선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을까요? 산발랏과 도비야의 조롱과 방해가 있었고, 대적들은 성벽 공사를 중단시키려 했으며, 내부에서도 어려움이 일어났습니다. 느헤미야와 백성들은 한 손으로 일을 하고 한 손에는 병기를 잡아야 할 정도였습니다(느4:17). 만일 느헤미야가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렇게 계속 막힐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면 성벽 재건은 중단되었을 것입니다.

 

바울의 경우는 더욱 극적입니다. 주님께서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셨지만 그의 사역에는 끊임없이 막힘이 있었습니다. 박해를 받고,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고, 배가 파선하고, 복음을 전하려는 곳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런데 그 장애물들은 ‘이 일을 하지 말라’는 신호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바로 그 어려움들을 통과하면서 자신의 부르심을 수행했습니다. 행16에서도 흥미로운 대조가 나타납니다. 어떤 길은 성령께서 막으셨지만, 마게도냐로 간 뒤 빌립보에서 감옥에 갇힌 것은 ‘마게도냐로 가지 말라’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같은 ‘막힘’처럼 보여도 그 의미는 전혀 달랐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모든 장애물이 같은 종류의 장애물이 아닙니다. 어떤 막힘은 방향을 바꾸라는 섭리적 인도일 수 있고, 어떤 막힘은 선한 일을 이루기 위해 견디고 통과해야 하는 어려움일 수 있습니다. 또 어떤 막힘은 내가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길 수도 있고, 판단을 잘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으며, 다른 사람의 자유로운 선택이나 자연계의 여러 조건 때문에 생길 수도 있습니다. 겉으로는 모두 ‘일이 안 풀린다’는 모습이지만 그 내적 의미까지 같은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를 생각하면 이 구별은 더욱 중요해집니다. 주님의 섭리는 우리가 매 순간 외적인 사건을 암호처럼 해독하여 ‘하라’, ‘하지 말라’를 알아맞히게 하는 체계가 아닙니다. 주님의 섭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을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시고, 자유와 합리성 안에서 선과 진리를 선택하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시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섭리를 믿는다는 것은 일어난 모든 사건에 즉시 하나님의 특별한 메시지를 붙이는 것과 다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업을 시작하려는데 자금 조달이 계속 실패한다고 해 보겠습니다. 그것이 ‘하지 말라’는 주님의 뜻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다시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사업계획 자체가 현실성이 부족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아직 준비가 덜 되었거나 시기가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매우 선하고 필요한 일을 시작했는데도 주변 사람들의 반대와 예상하지 못한 문제 때문에 계속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그때 모든 장애물을 ‘하나님이 막으신다’고 해석하여 포기한다면, 오히려 끝까지 해야 할 선한 일을 중단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서 ‘자유’(freedom)와 ‘합리성’(rationality)이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를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과, 그것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지 환경의 신호만 기다릴 것이 아니라 생각해야 합니다. 정보를 살펴보고, 경험 있는 사람의 조언을 듣고, 자신의 능력과 형편을 점검하고, 예상되는 결과를 검토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일이 선과 진리에 합당한지를 살펴야 합니다. 이것 역시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이 힘든 분별을 피하고 싶어 합니다. ‘세 번 막혔으니 하나님 뜻이 아니야’, ‘기도했는데 계속 문제가 생기니 그만두라는 뜻이야’라고 결론 내리면 오히려 편합니다. 내가 판단하고 책임져야 할 부담을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에 넘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자신의 판단과 책임을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빛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성실하게 판단하고 선택하면서 결과를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반대편의 위험도 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포기하기 싫어서 모든 막힘을 무조건 ‘시험’이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주변에서 충분한 이유를 들어 만류하고, 객관적으로도 문제가 반복해서 드러나며, 자신의 능력과 조건을 보아도 계속하는 것이 지혜롭지 않은데 ‘하나님께서 내 믿음을 시험하시는 것이다. 끝까지 밀어붙이면 문이 열릴 것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 역시 신앙적 분별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때로는 멈추는 것이 믿음일 수 있고, 방향을 바꾸는 것이 순종일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프로프리움’(proprium)을 살펴야 합니다. 인간의 자기중심성은 ‘포기하고 싶을 때’에도, ‘포기하고 싶지 않을 때’에도 하나님의 뜻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기 싫은 일에는 ‘하나님께서 막으시는 것 같다’고 말하고, 꼭 하고 싶은 일에는 ‘사탄의 방해가 심한 것을 보니 반드시 하나님의 뜻인가 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놀랍게도 같은 장애물을 자기 욕망에 따라 정반대로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복되는 막힘 앞에서 가장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은 ‘몇 번 막혔는가?’가 아닙니다. ‘내가 하려는 일이 그 자체로 선하고 참된가?’입니다. 성경의 분명한 선과 진리에 어긋나는 일이라면 일이 잘 풀리든 막히든 하지 않아야 합니다. 반대로 분명히 선한 일이라면 장애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즉시 포기해서도 안 됩니다. 그 다음에는 ‘나는 왜 이 일을 하려 하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정말 이웃에게 필요한 선을 이루려는 것인지, 아니면 성공과 인정, 자기만족을 원하는 것인지 자신의 동기를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질문을 더 해 볼 수 있습니다. ‘이 막힘은 나에게 무엇을 다시 보게 하는가?’입니다. 당장 ‘하라, 하지 말라’는 답을 얻으려 하기보다, 그 장애를 통하여 계획의 허점이 드러났는지, 내 욕심이 드러났는지, 준비 부족이 드러났는지, 아니면 정말로 포기하지 말고 인내해야 할 선이 더욱 분명해졌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막힘은 단순한 신호가 아니라 분별을 깊게 만드는 계기가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이것은 거듭남(regeneration)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외적인 사건을 보고 정답을 맞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진리를 사랑하여 자유롭게 그것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결정마다 하늘에서 ‘YES’나 ‘NO’가 떨어진다면 우리는 순종하는 것처럼 보일 수는 있어도 내적으로 분별하는 사람으로 성장하기는 어렵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로봇처럼 움직이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답게, 자유와 합리성 안에서 이끄십니다.

 

그렇다면 일이 계속 막힐 때 실제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선 멈추어 살펴보는 것은 좋습니다. 기도하고, 말씀의 선과 진리에 비추어 보고, 자신의 동기를 살피고, 현실적인 조건을 다시 검토해야 합니다. 필요하면 믿을 만하고 지혜로운 사람의 조언도 들어야 합니다. 그런 뒤 ‘계속해야 할 선인가, 방법을 바꾸어야 하는가, 때를 기다려야 하는가, 아니면 정말 내려놓아야 하는가’를 판단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막힘 자체를 하나님의 음성으로 등치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판단한 뒤에는 어느 정도 책임 있게 걸어가야 합니다. 모든 장애가 나타날 때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하나님 뜻인가 아닌가’를 묻기 시작하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선하고 옳다고 충분히 판단했다면 어려움이 있어도 견딜 때가 있습니다. 반대로 충분히 살펴본 결과 자신의 욕망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붙잡고 있었다는 것이 드러나면 미련 없이 내려놓을 수도 있어야 합니다. 둘 다 믿음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이 문제에서도 가장 깊은 기준을 보여 줍니다. 겟세마네에서 골고다까지 모든 상황은 막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배신, 체포, 거짓 증언, 조롱, 채찍질, 십자가가 이어졌습니다. 외적인 상황만 읽었다면 ‘이 길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라고 결론 내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길에서 주님의 사랑과 구원의 역사가 가장 깊이 드러났습니다. 그러므로 고난과 장애 자체는 주님의 뜻에서 벗어났다는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모든 고난을 ‘하나님께서 일부러 보내신 것’이라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인간의 악과 잘못된 선택, 다른 사람의 자유, 자연계의 질서 속에서 수많은 고통과 장애가 생깁니다. 주님께서는 악 자체를 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다만 허용된 상황 속에서도 인간을 선으로 이끄시며, 우리가 자유롭게 주님을 향하여 돌아설 수 있도록 섭리하십니다. ‘주님께서 원하신 것’과 ‘주님께서 허용하시면서 선으로 이끄시는 것’을 구별해야 합니다.

 

결국 ‘일이 계속 막히는데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인가?’라는 질문에는 단순히 ‘그렇다’거나 ‘아니다’라고 답할 수 없습니다. 반복되는 막힘은 분명 멈추어 살펴보라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정말 방향을 바꾸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막힘 그 자체가 곧 하나님의 금지 명령은 아닙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반복되는 막힘은 하나님의 뜻을 다시 분별하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지만, 그 자체가 곧 “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뜻을 증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조금 더 깊이 압축하면 이것이겠습니다.

 

‘주님의 섭리를 믿는다는 것은 모든 장애물을 하나님의 암호로 해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장애물 앞에서도 자유와 합리성을 사용하여 무엇이 선하고 참된지를 분별하고 그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이 계속 막힐 때 이렇게 물어보는 편이 더 좋습니다.

 

‘하나님, 왜 자꾸 막으십니까?’라고 단정하기 전에, ‘주님, 이 상황에서 제가 보아야 할 선과 진리는 무엇입니까? 계속해야 한다면 견딜 지혜와 힘을 주시고, 멈추어야 한다면 제 욕심을 내려놓을 수 있게 하시며, 방법을 바꾸어야 한다면 그것을 알아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막힘이 곧 하나님의 ‘NO’는 아닙니다. 때로는 ‘기다려라’일 수 있고, ‘방법을 바꾸어라’일 수도 있으며, ‘끝까지 가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우리가 그 의미를 당장 알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은 모든 사건의 숨은 뜻을 알아맞히는 능력이 아닙니다. 알 수 없는 것까지 억지로 해석하지 않으면서도, 지금 내가 알 수 있는 선과 진리를 붙들고 주님을 신뢰하며 한 걸음씩 걸어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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