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4:18)

 

AC.404

모든 이름은 가인(Cain)이라 불린 최초의 이단에서 파생된 이단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에 관하여는 이름들 외에는 전해지는 것이 없으므로, 그것들에 관하여 무엇인가 말하는 것은 불필요합니다. 이름들의 어원으로부터 어느 정도 있는 것이 있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랏(Irad) 그가 성읍에서 내려온다(descends from a city)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에녹(Enoch)이라 불린 이단에서 내려왔음을 의미합니다. 다른 이름들도 이와 같습니다. All these names signify heresies derived from the first, which was calledCain; but as there is nothing extant respecting them, except the names, it is unnecessary to say anything about them. Something might be gathered from the derivations of the names; for example, Iradmeans that hedescends from a city,thus from the heresy calledEnoch,and so on.

 

해설

AC.404는 창4:18에 이어지는 가인의 계보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간결하게 밝혀 줍니다. 가인에게서 에녹이 나왔고, 에녹에게서 이라드가 나왔으며, 그 뒤로 므후야엘, 므드사엘, 라멕이 이어집니다. 문자적 의미에서는 한 가문의 족보이지만, 스베덴보리는 이 모든 이름이 가인이라 불린 최초의 이단에서 파생된 여러 이단들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제 가인의 계보는 단순히 여러 세대가 이어지는 혈통이 아니라, 최초의 영적 분리가 계속 다른 형태로 파생되어 가는 하나의 교리적 계보로 읽힙니다.

 

이 설명은 앞의 AC.399-400과 직접 연결됩니다. AC.399에서는 가인이라는 분열 또는 이단이 자기 자신에게서 또 다른 분열을 산출했고 그것이 에녹이라 불렸다고 했습니다. AC.400에서는 그 원리를 더욱 일반화하여 하나의 이단이 잉태되면 거기에서 수많은 이단이 태어납니다라고 했습니다. AC.404는 바로 그 말이 실제 가인의 계보에서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가인에서 시작된 최초의 분리가 에녹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후의 여러 이름으로 계속 파생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최초의 이단이라는 표현은 가인의 본래 의미를 다시 기억하게 합니다. 가인은 단순히 어떤 잘못된 교리 하나를 표상한 것이 아니라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상태를 표상했습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이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었고 신앙은 사랑에 속해 있었지만,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에게서는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독립적인 위치를 차지하기 시작했습니다. AC.398의 표현대로 하면 의지 대신 이해가, 사랑 대신 신앙이 지배하게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최초의 분리에서 이후의 여러 이단이 파생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라드, 므후야엘, 므드사엘 등이 각각 정확히 어떤 교리를 주장했는지 알고 싶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스스로 멈춥니다. 그것들에 관하여는 이름들 외에는 전해지는 것이 없으므로, 그것들에 관하여 무엇인가 말하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합니다. 이것은 AC를 읽는 우리에게도 중요한 해석 태도를 보여 줍니다. 속뜻이 있다고 해서 본문이 제공하지 않는 세부 내용까지 자유롭게 만들어 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스베덴보리는 이름의 의미에서 어느 정도 추론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 예로 이라드를 듭니다. 이라드라는 이름은 성읍에서 내려온다는 의미를 가지므로, 속뜻에서는 앞의 성읍, 곧 에녹이라 불린 이단에서 파생되어 내려온 것을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AC.401에서 에녹은 시작되거나 형성되기 시작한 가르침과 연결되었고, AC.402에서 성읍은 교리적인 것 또는 이단적인 것을 의미했습니다. 따라서 이라드가 성읍에서 내려온다는 것은 앞서 형성된 에녹의 교리적·이단적 상태에서 또 다른 상태가 파생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이렇게 보면 가인의 계보에는 상당히 일관된 흐름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가인이라는 최초의 분리가 있습니다. 그 분리에서 에녹이라는 새로운 이단이 산출됩니다. 에녹은 가르침으로 시작되고 형성되는 상태와 관련되고, 그 이름을 따라 성읍이 세워지면서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 전체가 하나의 형태를 갖춥니다. 그리고 이제 그 성읍에서 이라드가 내려옵니다. 하나의 분리된 신앙이 가르침이 되고, 그 가르침이 교리적인 전체를 이루며, 그 교리적 전체에서 다시 새로운 형태의 분리가 파생되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AC.404에서 말하는 계보는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 앞의 상태가 뒤의 상태를 낳는 연속성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AC.400에서 이미 말한 잉태와 출생의 원리와 같습니다. 하나의 교리적 전제가 받아들여지면 그 안에서 다음 결론이 나오고, 그 결론에서 다시 다른 결론이 나옵니다. 처음의 근본 원리가 계속 후속적인 형태들을 산출하면서 하나의 계보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 번호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의 절제입니다. 그는 다른 이름들도 이와 같다고 말할 뿐, 각각의 이름에 대해 상세한 교리적 내용을 만들어 내지 않습니다. 이름의 어원에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는 있지만, 그 이상을 뒷받침할 내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상응을 다룰 때도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상응은 무엇이든 마음대로 영적 의미를 붙이는 작업이 아니라, 말씀 자체와 AC의 설명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읽어야 합니다.

 

이 점은 앞의 AC.403과도 잘 연결됩니다. 태고인들은 영적인 것들을 표상적 유형들 아래 역사 형식으로 배열했습니다. 따라서 가인의 계보에 등장하는 이름들도 영적인 상태들의 연속을 역사적 족보의 형태로 나타냅니다. 그러나 표상적 역사라고 해서 모든 이름의 세부 의미가 우리에게 자동으로 열리는 것은 아닙니다. 속뜻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우리가 그 속뜻의 모든 세부를 알고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AC.404는 한편으로는 매우 강하게 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매우 조심스럽게 말합니다. 강하게 말하는 것은 모든 이름은 가인이라는 최초의 이단에서 파생된 이단들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조심스럽게 말하는 것은 각각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이름 외에는 자료가 없으므로 자세히 말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 두 태도를 함께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교리 이해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잘못된 근본 원리는 여러 후속적인 오류를 낳을 수 있습니다. 특히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 진리를 선한 삶에서 분리하며, 이해를 사랑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시키는 원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교리적 형태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가 역사 속의 모든 교리나 교파를 임의로 가인의 어느 후손과 연결해서는 안 됩니다. AC.404 자체가 그런 과도한 추정을 경계하게 합니다.

 

오히려 가인의 계보를 우리 자신에게 적용하면 더욱 유익합니다. 하나의 잘못된 원리를 받아들였을 때 그것이 어떤 후속적인 생각들을 낳는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옳다는 것이 사랑하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원리가 마음에 자리 잡으면, 거기서 상대를 판단하는 생각이 나오고, 그 판단을 정당화하는 논리가 생기며, 마침내 사랑하지 않는 행동까지도 옳다고 설명하는 하나의 내적 성읍이 세워질 수 있습니다. 하나의 분리가 그 자체에서 후손을 낳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거듭남의 역사에서는 그 반대도 가능합니다. 잘못된 근본 원리가 발견되고 그것을 악으로 인정하여 피할 때, 주님께서는 진리를 다시 선과 결합시키십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를 섬기게 되고, 이해는 자기 지성에서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표현하는 수단이 됩니다. 가인의 계보를 읽는 목적은 단순히 옛 이단의 역사를 분류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신앙과 사랑의 질서가 어떻게 유지되거나 무너지는지를 보는 데 있습니다.

 

결국 AC.404는 가인의 후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상세히 해독하려 하기보다 그 계보 전체의 성격을 먼저 붙들게 합니다. 그들은 모두 가인이라 불린 최초의 이단에서 파생된 이단들을 나타냅니다. 이라드가 성읍에서 내려온다는 이름으로 에녹의 이단에서 파생된 상태를 보여 주듯, 뒤의 이름들도 같은 계보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세부 내용이 주어지지 않은 곳에서는 멈추어야 합니다. 말씀의 속뜻을 깊이 읽는 것과 말씀보다 앞서 나가는 것은 다른 일이기 때문입니다. AC.404는 바로 그 두 가지를 함께 가르쳐 주는 번호입니다. (AC.404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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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4:17)

 

AC.403

이제 우리는 성읍(city)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창세기의 부분 전체가 역사 형식(historical form)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문자적 의미(sense of the letter)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가인이 성읍을 세우고 그것을 에녹이라 불렀던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비록 문자적 의미로부터 그들은 또한 가인이 아담의 장자에 불과했음에도 이미 땅에 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을 없지만 말입니다. 역사적 연속(historical series)에는 이러한 것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태고인들(most ancient people) 모든 것을 표상적 유형들(representative types) 아래 역사 형식(form of a history)으로 배열하는 익숙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에게 지극히 즐거운 일이었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것이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We have now seen what acitysignifies. But as all this part of Genesis is put into a historical form, to those who are in the sense of the letter it must seem that a city was built by Cain, and was called Enoch, although from the sense of the letter they must also suppose that the land was already populous, notwithstanding that Cain was only the firstborn of Adam; the historical series has this in it. But as we observed above, the most ancient people were accustomed to arrange all things in the form of a history, under representative types, and this was to them delightful in the highest degree, for it made all things seem to be alive.

 

해설

AC.403은 창세기 4장을 읽는 데서만 중요한 번호가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창세기 초반부 전체를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보여 주는 중요한 해석 원리입니다. 앞의 AC.402에서는 성읍이 실제 성읍 자체보다 교리적인 것 또는 이단적인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왜 창세기 본문은 마치 실제 인물들이 태어나고, 성읍을 세우고, 그 성읍에 이름을 붙인 것처럼 역사 이야기의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AC.403은 바로 그 질문에 답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창세기의 부분 전체가 역사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문자적 의미만을 따라 읽으면 가인이 실제로 성읍을 세우고 그 이름을 에녹이라 불렀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본문이 그렇게 보이도록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 역사 형식을 문자 그대로만 밀어붙일 때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아담의 장자에 불과한데도 이미 성읍을 세울 만큼 많은 사람이 땅에 살고 있었다고 생각해야 하는 난점이 생긴다고 지적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관심은 단순히 가인의 아내는 어디에서 왔는가? 같은 역사적 난제를 해결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는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이야기는 처음부터 실제 사건들의 연대기적 기록만을 목적으로 쓰인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의 답은 그렇지 않다는 쪽입니다. 창세기 초반의 이 부분은 영적인 실재를 역사적인 형식 아래 배열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역사적 연속(historical series)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가인이 태어나고, 아벨을 죽이고, 놋 땅에 거하고, 에녹을 낳고, 성읍을 쌓는 일련의 이야기는 표면적으로는 하나의 연속된 역사처럼 전개됩니다. 그러나 그 속뜻에서는 교회의 상태들이 서로 이어지고, 하나의 교리적 상태가 다음 상태를 산출하며, 사랑과 신앙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하고 쇠퇴하는지가 하나의 영적 연속으로 펼쳐집니다. 문자적 역사 형식은 그 영적 연속을 담는 외적 그릇인 셈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태고인들의 사고방식에서 찾습니다. 태고인들은 모든 것을 표상적 유형들 아래 역사 형식으로 배열하는 익숙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표상적 유형들(representative types)이란 자연적인 인물, 장소, 사건, 사물 등을 통하여 영적이고 천적인 실재를 나타내는 형식을 말합니다. 곧 추상적인 교리나 영적 상태를 직접 개념적으로 설명하기보다 사람과 장소와 사건의 형태로 살아 있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태고교회의 퍼셉션적 성격과도 잘 연결됩니다. 태고인들은 영적인 것을 자연적인 것과 분리된 추상 개념으로만 보지 않았습니다. 자연계의 모든 것 속에서 영적인 의미를 느끼고 보았으며, 자연적인 형상들을 통해 천적이고 영적인 실재를 지각하는 데 익숙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영적 진리를 이야기와 인물과 장소의 형태로 표현하는 것이 단순한 문학적 장식이 아니라 매우 자연스러운 사고 방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방식이 그들에게 지극히 즐거운 이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모든 것이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AC.403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장 가운데 하나입니다. 영적 진리를 단지 추상적인 명제와 정의로만 전달하면 개념으로 머물 수 있지만, 그것을 사람과 사건과 장소의 형식으로 표현하면 진리가 움직이고 관계를 맺으며 살아 있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가인과 아벨, 에덴과 놋, 에녹과 성읍은 단순한 추상어가 아니라 영적 상태들이 살아 움직이는 하나의 이야기로 펼쳐지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창세기 초반의 서술은 일종의 살아 있는 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면 교리적 오류가 파생된다고 한 문장으로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그것을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나가고, 놋 땅에 거하고, 에녹을 낳고, 성읍을 쌓는 이야기로 펼쳐 보여 줍니다. 그러면 하나의 교리적 명제가 인간의 선택과 관계와 결과를 가진 살아 있는 서사가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AC.403을 근거로 창세기 초반은 역사적 의미가 전혀 없고 순전히 만들어 이야기다라고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강조하는 것은 역사 형식표상적 유형들입니다. 그의 관심은 문자적 형식 뒤에 있는 속뜻을 밝히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에서 우리가 안전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부분을 단순한 문자적 연대기로만 읽지 않고, 영적인 실재를 역사 형식 아래 배열한 말씀으로 읽는다는 정도입니다.

 

또한 역사 형식이라고 해서 내용이 임의적이거나 무질서하게 꾸며졌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가 역사적 연속이라고 부른 것처럼, 사건들의 순서와 관계 자체가 영적 상태들의 질서와 진행을 담고 있습니다. 가인이 아벨보다 먼저 나오고, 아벨을 죽인 뒤 놋 땅에 거하며, 그 뒤 에녹과 성읍이 나오는 순서는 임의적인 배열이 아닙니다. 각각이 앞의 상태에서 다음 상태로 이어지는 영적 연속을 표현합니다.

 

이 점은 AC.399-402의 흐름을 다시 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가인이라는 분열에서 에녹이라는 새로운 분열이 산출되고, 그것이 가르침으로 형성되며, 다시 성읍이라는 교리적 전체가 만들어졌습니다. 만일 이것을 추상적인 교리 설명으로만 기록했다면 매우 건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은 그것을 출생과 이름과 성읍 건설이라는 이야기로 표현했습니다. 바로 이렇게 함으로써 영적 변화가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따라서 AC.403은 우리가 창세기 초반을 읽는 태도에도 중요한 기준을 줍니다. 문자적 이야기를 무시하고 곧바로 속뜻으로 뛰어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그 이야기의 흐름을 충분히 따라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역사 형식 자체가 속뜻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먼저 나오고, 누가 누구를 낳고, 어디로 이동하며, 무엇을 세우고, 무엇이라 이름하는지가 모두 영적 연속을 담는 표상적 형식입니다.

 

동시에 문자적 이야기에서만 멈추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말씀의 깊이는 그 역사 형식 안에 교회의 상태, 인간의 거듭남, 사랑과 신앙의 관계, 선과 진리의 질서가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자적 의미와 속뜻은 경쟁하는 두 층위라기보다, 외적 형식과 그 안에 담긴 내적 생명의 관계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AC.403의 마지막 표현, 모든 것이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는 말은 우리가 왜 말씀의 표상과 상응을 공부하는지까지 생각하게 합니다. 상응을 공부하는 목적은 단어마다 뜻을 붙여 놓는 일종의 암호 해독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씀 속 인물과 사건과 장소가 영적 실재와 연결되면서 다시 살아 움직이도록 보는 데 있습니다. 가인 = 신앙, 아벨 = 체어리티, 성읍 = 교리라고 대응표만 외운다면 아직 태고인들이 느꼈던 그 생명성에 이른 것은 아닙니다. 그 관계들이 하나의 살아 있는 영적 서사로 움직이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AC.403은 창세기 초반의 속뜻을 읽는 하나의 중요한 안내문입니다. 태고인들은 영적 실재를 표상적 유형들 아래 역사 형식으로 배열했고, 그 방식은 모든 것을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게 했습니다. 따라서 창세기의 인물과 장소와 사건들은 단순한 이름과 지명이 아니라 교회의 상태와 인간 마음의 변화를 살아 있는 역사처럼 보여 주는 표상적 형식입니다.

 

결국 AC.403이 말하는 것은 역사를 버리고 상징만 보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말씀의 역사적 형식이 왜 그렇게 구성되었는지를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그 형식 안에서 영적 실재가 인물과 사건과 장소를 통하여 살아 움직입니다. 가인의 성읍도 바로 그렇게 읽어야 합니다. 단순히 고대의 한 사람이 세운 도시가 아니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어떻게 가르침을 낳고 교리적 세계를 형성해 갔는지를 살아 있는 역사 형식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태고인들이 즐겨 사용했던 표상적 서술 방식이며, 스베덴보리가 창세기 초반의 속뜻을 읽는 기본 관점입니다. (AC.403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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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4:17)

 

AC.402

가인이 쌓은 성읍(city that was built) 이단에서 나온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전체를 의미한다는 사실은 말씀에서 성읍의 이름이 나오는 모든 구절로부터 분명합니다. 어느 곳에서도 성읍 자체를 의미하지 않고, 언제나 어떤 교리적인 또는 이단적인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은 성읍이 무엇인지, 어떤 성읍의 이름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앞에서 보여 것처럼 그들의 관념은 영적이고 천적이기 때문에 성읍에 대한 어떤 관념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가질 수도 없습니다. 그들은 오직 성읍과 이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만 퍼셉션합니다. 따라서 거룩한 (holy city), 거룩한 예루살렘(holy Jerusalem) 일반적으로는 주님의 나라를, 특별히는 나라가 안에 있는 개인을 의미합니다. 성읍 시온(city) 시온산(mountain of Zion)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이해되는데, 후자는 신앙의 천적인 것을, 전자는 신앙의 영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That by thecity that was builtis signified all the doctrinal and heretical teaching that came from that heresy, is evident from every passage of the Word in which the name of a city occurs; for in none of them does it ever mean a city, but always something doctrinal or else heretical. The angels are altogether ignorant of what a city is, and of the name of any city; since they neither have nor can have any idea of a city, in consequence of their ideas being spiritual and celestial, as was shown above. They perceive only what a city and its name signify. Thus by theholy city,which is also called theholy Jerusalem,nothing else is meant than the kingdom of the Lord in general, or in each individual in particular in whom is that kingdom. Thecityandmountain of Zionalso are similarly understood; the latter denoting the celestial of faith, and the former its spiritual.

 

[2] 천적인 것과 영적인 자체도 성읍들(cities), 궁전들(palaces), 집들(houses), 성벽들(walls), 성벽의 기초들(foundations of walls), 방벽들(ramparts), 성문들(gates), 빗장들(bars), 그리고 가운데 있는 성전(temple)으로 묘사됩니다. 에스겔 48장과 The celestial and spiritual itself is also described bycities,” “palaces,” “houses,” “walls,” “foundations of walls,” “ramparts,” “gates,” “bars,and thetemplein the midst; as in Ezekiel 48;

 

1모든 지파의 이름은 이와 같으니라 북쪽 끝에서부터 헤들론 길을 거쳐 하맛 어귀를 지나서 다메섹 경계선에 있는 하살에논까지 북쪽으로 하맛 경계선에 미치는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단의 몫이요 2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아셀의 몫이요 3아셀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납달리의 몫이요 4납달리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므낫세의 몫이요 5므낫세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에브라임의 몫이요 6에브라임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르우벤의 몫이요 7르우벤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유다의 몫이요 8유다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너희가 예물로 드릴 땅이라 너비는 이만 오천 척이요 길이는 다른 몫의 동쪽에서 서쪽까지와 같고 성소는 중앙에 있을지니 9 너희가 여호와께 드려 예물로 삼을 땅의 길이는 이만 오천 척이요 너비는 척이라 10 드리는 거룩한 땅은 제사장에게 돌릴지니 북쪽으로 길이가 이만 오천 척이요 서쪽으로 너비는 척이요 동쪽으로 너비가 척이요 남쪽으로 길이가 이만 오천 척이라 중앙에 여호와의 성소가 있게 하고 11 땅을 사독의 자손 중에서 거룩하게 구별한 제사장에게 돌릴지어다 그들은 직분을 지키고 이스라엘 족속이 그릇될 때에 레위 사람이 그릇된 것처럼 그릇되지 아니하였느니라 12땅의 예물 중에서 그들이 예물을 받을지니 레위인의 접경지에 관한 가장 거룩한 예물이니라 13제사장의 경계선을 따라 레위 사람의 몫을 주되 길이는 이만 오천 척이요 너비는 척으로 할지니 구역의 길이가 이만 오천 척이요 너비가 각기 척이라 14그들이 땅을 팔지도 못하며 바꾸지도 못하며 땅의 처음 익은 열매를 남에게 주지도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께 거룩히 구별한 것임이라 15 이만 오천 다음으로 너비 오천 척은 속된 땅으로 구분하여 성읍을 세우며 거주하는 곳과 전원을 삼되 성읍이 중앙에 있게 할지니 16 크기는 북쪽도 사천오백 척이요 남쪽도 사천오백 척이요 동쪽도 사천오백 척이요 서쪽도 사천오백 척이며 17 성읍의 들은 북쪽으로 이백오십 척이요 남쪽으로 이백오십 척이요 동쪽으로 이백오십 척이요 서쪽으로 이백오십 척이며 18예물을 삼아 거룩히 구별할 땅과 연접하여 남아 있는 땅의 길이는 동쪽으로 척이요 서쪽으로 척이라 예물을 삼아 거룩하게 구별할 땅과 연접하였으며 땅의 소산을 성읍에서 일하는 자의 양식을 삼을지라 19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에 성읍에서 일하는 자는 땅을 경작할지니라 20그런즉 예물로 드리는 땅의 합계는 길이도 이만 오천 척이요 너비도 이만 오천 척이라 너희가 거룩히 구별하여 드릴 땅은 성읍의 기지와 합하여 네모반듯할 것이니라 21거룩하게 구별할 땅과 성읍의 기지 좌우편에 남은 땅은 군주에게 돌릴지니 거룩하게 구별할 땅의 동쪽을 향한 경계선 이만 오천 척과 서쪽을 향한 경계선 이만 오천 척이라 다른 몫들과 연접한 땅이니 이것을 군주에게 돌릴 것이며 거룩하게 구별할 땅과 성전의 성소가 중앙에 있으리라 22그런즉 군주에게 돌려 그에게 속할 땅은 레위 사람의 기업 좌우편과 성읍의 기지 좌우편이며 유다 지경과 베냐민 지경 사이에 있을지니라 23 나머지 모든 지파는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베냐민의 몫이요 24베냐민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시므온의 몫이요 25시므온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잇사갈의 몫이요 26잇사갈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스불론의 몫이요 27스불론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갓의 몫이며 28 경계선 다음으로 남쪽 경계선은 다말에서부터 므리바가데스 샘에 이르고 애굽 시내를 따라 대해에 이르나니 29이것은 너희가 제비 뽑아 이스라엘 지파에게 나누어 주어 기업이 되게 땅이요 이것들은 그들의 몫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0 성읍의 출입구는 이러하니라 북쪽의 너비가 사천오백 척이라 31 성읍의 문들은 이스라엘 지파들의 이름을 따를 것인데 북쪽으로 문이 셋이라 하나는 르우벤 문이요 하나는 유다 문이요 하나는 레위 문이며 32동쪽의 너비는 사천오백 척이니 또한 문이 셋이라 하나는 요셉 문이요 하나는 베냐민 문이요 하나는 문이며 33남쪽의 너비는 사천오백 척이니 또한 문이 셋이라 하나는 시므온 문이요 하나는 잇사갈 문이요 하나는 스불론 문이며 34서쪽도 사천오백 척이니 또한 문이 셋이라 하나는 문이요 하나는 아셀 문이요 하나는 납달리 문이며 35 사방의 합계는 팔천 척이라 후로는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 하리라 (48)

 

21:15부터 마지막 절까지가 그러하며, 21:2,10에서는 그것을 또한 거룩한 예루살렘이라 부릅니다. in Revelation 21:15 to the end, where it is also called the holy Jerusalem, verses 2, 10;

 

15내게 말하는 자가 성과 문들과 성곽을 측량하려고 갈대 자를 가졌더라 16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길이와 너비가 같은지라 갈대 자로 성을 측량하니 이천 스다디온이요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더라 17 성곽을 측량하매 백사십사 규빗이니 사람의 측량 천사의 측량이라 18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19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셋째는 옥수요 넷째는 녹보석이요 20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한째는 청옥이요 열두째는 자수정이라 21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문마다 개의 진주로 되어 있고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 22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 전능하신 이와 어린 양이 성전이심이라 23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등불이 되심이라 24만국이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 25낮에 성문들을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에는 밤이 없음이라 26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겠고 27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 (21:15-27)

 

2 내가 보매 거룩한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같더라, 10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예루살렘을 보이니 (21:2, 10)

 

31:38 그러합니다. and in Jeremiah 31:38.

 

보라, 날이 이르리니 성은 하나넬 망대로부터 모퉁이에 이르기까지 여호와를 위하여 건축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1:38)

 

시편에서는 하나님의 , 지존자의 장막의 성소(the city of God, the holy place of the tabernacles of the most high)(46:4)라고 하며, In David it is calledthe city of God, the holy place of the tabernacles of the most high;”(Ps. 46:4)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지존하신 이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46:4)

 

에스겔에서는 성읍의 이름은 여호와삼마라 하리라(the city, Jehovah there), 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48:35)라고 합니다. 그리고 성읍에 관하여 이사야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in Ezekiel, the city, Jehovah there,”(Ezek. 48:35) and of which it is written in Isaiah:

 

사방의 합계는 팔천 척이라 후로는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 하리라 (48:35)

 

10내가 노하여 너를 쳤으나 이제는 나의 은혜로 너를 불쌍히 여겼은즉 이방인들이 성벽을 쌓을 것이요 그들의 왕들이 너를 섬길 것이며, 14너를 괴롭히던 자의 자손이 몸을 굽혀 네게 나아오며 너를 멸시하던 모든 자가 아래에 엎드려 너를 일컬어 여호와의 성읍이라,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의 시온이라 하리라 (60:10, 14) The sons of the stranger shall build thy walls, all they that despised thee shall bow themselves down at the soles of thy feet, and they shall call thee the city of Jehovah, the Zion of the holy one of Israel. (Isa. 60:10, 14)

 

스가랴에서는, In Zechariah: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시온에 돌아와 예루살렘 가운데에 거하리니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겠고 만군의 여호와의 산은 성산이라 일컫게 되리라 (8:3) Jerusalem shall be called the city of truth; and the mountain of Zion, the mountain of holiness, (Zech. 8:3)

 

여기서 진리의 성읍(city of truth), 예루살렘(Jerusalem) 신앙의 영적인 것들을 의미하고, 성산(mountain of holiness), 시온산(of Zion) 신앙의 천적인 것들을 의미합니다. where thecity of truth,orJerusalem,signifies the spiritual things of faith; and themountain of holiness,orof Zion,the celestial things of faith.

 

[3] 신앙의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이 성읍으로 표상되는 것처럼, 유다와 이스라엘의 성읍들은 모든 교리적인 것들을 의미합니다. 성읍들은 각각 이름이 언급될 어떤 교리적인 것에 관한 고유한 의미를 가지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속뜻으로부터가 아니면 아무도 없습니다. 성읍들(cities) 교리적인 것들을 의미하므로 이단들도 역시 성읍들로 의미되며, 경우 각각의 성읍은 이름에 따라 어떤 특정한 이단적 견해를 의미합니다. 지금은 다음 말씀의 구절들로부터 일반적으로 성읍(city) 어떤 교리적인 또는 이단적인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만을 보여 주고자 합니다. As the celestial and spiritual things of faith are represented by a city, so also are all doctrinal things signified by the cities of Judah and of Israel, each of which when named has its own specific signification of something doctrinal, but what that is no one can know except from the internal sense. As doctrinal things are signified bycities,so also are heresies, and in this case every particular city, according to its name, signifies some particular heretical opinion. At present we shall only show from the following passages of the Word, that in general acitysignifies something doctrinal, or else heretical.

 

[4] 이사야에서는 다음과 같이 읽습니다. Thus we read in Isaiah:

 

날에 애굽 땅에 가나안 방언을 말하며 만군의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는 다섯 성읍이 있을 것이며 하나를 멸망의 성읍이라 칭하리라 (19:18) In that day there shall be five cities in the land of Egypt speaking with the lip of Canaan, and swearing to Jehovah Zebaoth; one shall be called the city Heres, (Isa. 19:18)

 

여기서는 주님의 강림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에 관한 기억지식(memory-knowledge) 다룹니다. 환상의 골짜기, 환상(fantasy) 다루는 곳에서는, where the subject treated of is the memory-knowledge of spiritual and celestial things at the time of the Lords advent. So again, when treating of the valley of vision, that is, of fantasy:

 

소란하며 떠들던 , 즐거워하던 고을이여 너의 죽임을 당한 자들은 칼에 죽은 것도 아니요 전쟁에 사망한 것도 아니라 (22:2) Thou art full of tumults, a tumultuous city, an exulting city. (Isa. 22:2)

 

예레미야에서는 남방에 있는 자들(in the south), 진리의 가운데 있으면서 그것을 버리는 자들을 말하면서, In Jeremiah, speaking of those who arein the south,that is, in the light of truth, and who extinguish it:

 

네겝의 성읍들이 봉쇄되어 자가 없고 유다가 잡혀가되 온전히 잡혀가도다 (13:19) The cities of the south have been shut up, and none shall open them. (Jer. 13:19)

 

예레미야 애가에서는,

 

8여호와께서 시온의 성벽을 헐기로 결심하시고 줄을 띠고 무너뜨리는 일에서 손을 거두지 아니하사 성벽과 성곽으로 통곡하게 하셨으매 그들이 함께 쇠하였도다 9성문이 땅에 묻히며 빗장이 부서져 파괴되고 왕과 지도자들이 율법 없는 이방인들 가운데에 있으며 성의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묵시를 받지 못하는도다 (2:8, 9) Jehovah hath purposed to destroy the wall of the daughter of Zion; therefore he maketh the rampart and the wall to lament; they languished together. Her gates are sunk into the ground; he hath destroyed and broken her bars, (Lam. 2:89)

 

여기서 성벽(wall), 방벽(rampart), 성문(gates), 빗장(bars) 오직 교리적인 것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누구나 있습니다. where anyone may see that by awall,arampart,” “gates,andbars,doctrinal things only are meant.

 

[5] 이와 마찬가지로 이사야에서는, In like manner in Isaiah:

 

1 날에 유다 땅에서 노래를 부르리라 우리에게 견고한 성읍이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구원을 성벽과 외벽으로 삼으시리로다 2너희는 문들을 열고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나라가 들어오게 할지어다 (26:1, 2) This song shall be sung in the land of Judah, We have a strong city; salvation will set the walls and the bulwark; open ye the gates, that the righteous nation which keepeth fidelities may enter in. (Isa. 26:12)

 

1여호와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오리니 주는 기사를 옛적에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이라 2주께서 성읍을 돌무더기로 만드시며 견고한 성읍을 황폐하게 하시며 외인의 궁성을 성읍이 되지 못하게 하사 영원히 건설되지 못하게 하셨으므로 3강한 민족이 주를 영화롭게 하며 포학한 나라들의 성읍이 주를 경외하리이다 (25:1-3) I will exalt thee, I will confess to thy name, for thou hast made of a city a heap, of a defensed city a ruin; a palace of strangers shall not be built of the city forever. Therefore shall the strong people honor thee, the city of the terrible nations shall fear thee, (Isa. 25:13)

 

구절에서는 어떤 특정한 성읍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발람의 예언에서는, in which passage there is no reference to a particular city. In the prophecy of Balaam:

 

18그의 원수 에돔은 그들의 유산이 되며 그의 원수 세일도 그들의 유산이 되고 그와 동시에 이스라엘은 용감히 행동하리로다 19주권자가 야곱에게서 나서 남은 자들을 성읍에서 멸절하리로다 하고 (24:18, 19) Edom shall be an inheritance, and out of Jacob shall one have dominion, and shall destroy the residue of the city. (Num. 24:1819)

 

여기서 성읍(city) 실제 성읍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명할 것입니다. 이사야에서는, where it must be plain to everyone thatcityhere does not mean a city. In Isaiah:

 

10약탈을 당한 성읍이 허물어지고 집마다 닫혀서 들어가는 자가 없으며 11포도주가 없으므로 거리에서 부르짖으며 모든 즐거움이 사라졌으며 땅의 기쁨이 소멸되었도다 (24:10, 11) The city of emptiness is broken; every house is shut, that the cry over wine in the streets cannot enter, (Isa. 24:1011)

 

여기서 혼돈의 성읍(city of emptiness) 교리의 공허함을 의미하며, 거리들(streets) 여기서도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성읍에 속한 것들, 거짓들이나 진리들을 의미합니다. 계시록에서는, where thecity of emptinessdenotes emptinesses of doctrine; andstreetssignify here as elsewhere the things which belong to the city, whether falsities or truths. In John:

 

17일곱째 천사가 대접을 공중에 쏟으매 음성이 성전에서 보좌로부터 나서 이르되 되었다 하시니, 19 성이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 (16:17, 19) When the seventh angel poured out his vial, the great city was divided into three parts, and the cities of the nations fell. (Rev. 16:17, 19)

 

성읍(great city) 어떤 이단적인 것을 의미하며 만국의 성읍들(cities of the nations) 역시 그러하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명할 것입니다. 또한 성읍은 요한이 여자라고 설명되어 있으며(17:18), That thegreat citydenotes something heretical, and that thecities of the nationsdo so too, must be evident to everyone. It is also explained that the great city was the woman that John saw; (Rev. 17:18)

 

네가 여자는 땅의 왕들을 다스리는 성이라 하더라 (17:18)

 

여자가 그러한 성격의 교회를 의미한다는 것은 앞에서 보여 바와 같습니다. and that the woman denotes a church of that character has been shown before.

 

해설

AC.402는 가인이 에녹의 이름을 따라 세운 성읍이 왜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 전체를 의미하는지를 말씀 전체의 용례를 통하여 설명합니다. AC.399에서는 이 의미를 간단히 제시했지만, 이번 번호에서는 거룩한 예루살렘과 시온에서부터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시편, 스가랴, 민수기,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많은 구절을 인용하여 성읍이라는 표상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따라서 많은 성경 인용에 압도되기보다 스베덴보리가 무엇 하나를 입증하기 위해 이 모든 구절을 모으고 있는지를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하나의 명제는 성읍은 교리적인 또는 이단적인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매우 강하게 말씀에서 성읍은 어느 곳에서도 성읍 자체를 의미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말씀의 속뜻을 설명하는 그의 방식에서 나온 진술입니다. 문자적 의미에서 실제 예루살렘이나 시온이나 여러 성읍이 역사적 장소로 존재했다는 것을 부정하는 말이라기보다, 천사들이 받아들이는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는 그러한 자연적 장소가 영적인 실재를 표상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따라서 이 문장을 근거로 말씀의 문자적·역사적 의미가 무가치하다고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가 집중하는 것은 성읍의 속뜻입니다.

 

그는 이 점을 천사들의 관념을 통하여 설명합니다. 천사들은 성읍이 무엇인지 또는 어떤 성읍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며, 그들의 관념은 영적이고 천적이기 때문에 자연계의 성읍에 관한 관념을 갖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들이 퍼셉션하는 것은 그 성읍과 이름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말씀 이해에서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자연적 이미지가 말씀을 통하여 천국에 이를 때 천사들은 그 자연적 형태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상응하는 영적·천적 실재를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거룩한 예루살렘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거룩한 성, 곧 거룩한 예루살렘이 일반적으로는 주님의 나라를 의미하고, 특별히는 그 나라가 그 안에 있는 각 개인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주님의 나라는 단지 인간 밖에 존재하는 천국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질서가 한 사람 안에 세워질 때 그 사람 안에도 주님의 나라가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룩한 예루살렘이라는 성읍은 주님의 나라가 교리와 진리의 질서 안에서 형성된 모습을 나타냅니다.

 

이어 시온산성읍 시온을 구별합니다. 산은 신앙의 천적인 , 성읍은 신앙의 영적인 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천적인 것은 사랑과 선에 더 직접적으로 관련되고, 영적인 것은 그 사랑과 선에서 나오는 진리와 신앙에 관련됩니다. 산이 높은 곳으로서 사랑의 천적 상태를 나타낸다면, 성읍은 그 안에 질서 있게 배치된 길과 집과 성벽과 문을 가진 구조로서 진리와 교리의 영적 질서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2]에서는 성읍뿐 아니라 궁전, , 성벽, 성벽의 기초, 방벽, 성문, 빗장, 성전이 한꺼번에 등장합니다. 에스겔 48장과 계시록 21장의 거룩한 성이 대표적입니다. 이것들은 단순한 천국 건축물의 설계도가 아니라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이 어떻게 하나의 질서를 이루는지를 자연적 이미지로 표현합니다. 특히 성벽과 성문과 기초는 성읍을 이루고 보호하며 출입을 규정하는 요소들이므로 교리의 진리들과 그 질서에 관련된 표상으로 이해됩니다.

 

시편의 하나님의 , 에스겔의 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 이사야의 여호와의 성읍, 스가랴의 진리의 성읍도 모두 같은 논증에 사용됩니다. 특히 슥8:3에서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 시온산은 성산이라고 한 구절은 스베덴보리의 구별을 매우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그는 예루살렘, 곧 진리의 성읍을 신앙의 영적인 것들로 보고, 시온산을 신앙의 천적인 것들로 봅니다. 성읍이 진리와 교리의 질서와 연결된다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보여 주는 구절인 셈입니다.

 

그러나 성읍이 언제나 좋은 교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3]부터의 중요한 전환입니다. 성읍이라는 상응은 교리적인 것을 나타내므로, 그 교리가 거짓과 악에서 나온 경우에는 이단적인 것을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성읍 자체가 선하거나 악한 상응이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어떤 성읍인지, 어떤 문맥에 있는지, 어떤 이름으로 불리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유다와 이스라엘의 각각의 성읍도 각기 다른 교리적인 것을 의미하며,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속뜻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고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이것은 앞의 AC.386에서 확인한 중요한 원리와도 통합니다. 상응은 기계적인 일대일 암호표가 아닙니다. 성읍 = 참된 교리라고 고정할 수도 없고 성읍 = 거짓 교리라고 고정할 수도 없습니다. 보다 근본적으로 성읍은 교리적인 을 나타내며, 그것의 영적 질은 그 성읍이 놓인 전체 문맥과 이름에 따라 결정됩니다. 거룩한 예루살렘은 주님의 나라와 참된 교리의 질서를 나타내지만, 가인의 에녹 성읍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온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 전체를 나타냅니다.

 

[4][5]의 수많은 인용은 바로 이 원리를 양쪽 방향에서 입증합니다. 애굽 땅의 다섯 성읍, 환상의 골짜기의 떠들썩한 성읍, 닫힌 남방의 성읍들, 시온의 성벽과 성문과 빗장, 견고한 성읍, 혼돈의 성읍, 계시록의 큰 성읍과 만국의 성읍들이 차례로 등장합니다. 각각의 구절을 별개의 주제로 떼어 심화하기보다, 모두 성읍과 구성 요소들이 교리적 상태를 표현한다는 하나의 증거군으로 읽는 것이 이번 번호의 논지를 가장 잘 살립니다.

 

특히 사24:10혼돈의 성읍은 이해하기 좋은 예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교리의 공허함이라고 풀이합니다. 실제 건물들이 비어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진리가 사라져 교리가 텅 빈 상태를 성읍의 황폐함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읍의 거리들은 성읍에 속한 것, 곧 문맥에 따라 거짓이나 진리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하나의 성읍이 전체적인 교리의 질서를 나타낸다면 그 안의 거리와 성벽과 문과 집들도 그 전체를 구성하는 개별적인 것들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16장의 성읍이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읍들이 무너졌다는 말씀도 같은 방식으로 읽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단순히 어떤 거대한 도시가 물리적으로 세 부분으로 갈라지는 사건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단적인 교회 상태와 그 교리적 구조의 붕괴를 나타낸다고 봅니다. 17:18에서는 그 큰 성읍이 요한이 본 여자라고 설명되며, 스베덴보리는 그 여자가 그러한 성격의 교회를 의미한다고 연결합니다. 따라서 성읍여자교회가 서로 다른 자연적 표상을 통하여 하나의 영적 실재를 여러 측면에서 보여 주게 됩니다.

 

이제 이 모든 설명을 다시 가인의 성읍으로 가져오면 AC.399-402의 흐름이 선명해집니다. 가인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는 분열을 표상합니다. 그 가인에게서 에녹이라는 또 다른 분열이 태어났습니다. AC.401에서는 에녹이라는 이름이 시작되거나 형성되기 시작한 가르침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에녹의 이름을 따라 성읍이 세워집니다. 즉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하나의 새로운 가르침을 낳고, 그 가르침에서 다시 여러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들이 형성되어 하나의 전체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가인이 성읍을 쌓았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단계입니다. 처음에는 사랑과 신앙의 관계가 뒤집힌 하나의 원리였습니다. 그 원리가 새로운 분열을 낳았고, 그 분열이 가르침이 되었으며, 이제 그 가르침이 하나의 교리적 세계를 형성합니다. 잘못된 영적 원리가 개인적인 생각의 수준을 넘어 전승되고 조직될 수 있는 구조를 갖추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교리 체계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거룩한 예루살렘 역시 성읍입니다. 즉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질서 있게 결합되어 이루는 참된 교리도 성읍으로 표상됩니다. 문제는 성읍을 세우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 성읍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과 체어리티를 중심으로 진리가 질서를 이루면 거룩한 성읍이 될 수 있지만,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원리가 중심이 되면 가인의 성읍이 됩니다.

 

이 점은 교리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도 중요한 기준을 줍니다. 교리는 필요합니다. 인간이 태고교회의 퍼셉션을 잃은 뒤에는 진리를 배우고 이해하며 그것을 통하여 주님께 인도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앞의 AC.393-398에서 신앙이 인류의 쓰임을 위하여 보존된 이유도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교리가 많다는 것도, 교리가 체계적이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 교리가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있는지, 그리고 사람을 실제 사랑과 선한 삶으로 이끄는지가 중요합니다.

 

AC.402가 보여 주는 가장 아름다운 대조는 결국 가인의 성읍거룩한 예루살렘입니다. 둘 다 성읍이며 둘 다 교리적인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하나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으로부터 형성된 교리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나라가 그 안에 이루어진 교리적·영적 질서입니다. 외적으로는 모두 성읍이지만 그 안에 거하는 사랑이 다릅니다.

 

그러므로 성읍의 속뜻을 이해하는 핵심은 건물의 규모나 성벽의 견고함이 아니라 그 성읍을 이루는 진리들이 어떤 선과 결합되어 있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진리는 사랑과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을 때 주님의 나라를 이루는 거룩한 성읍이 됩니다. 반대로 진리가 사랑에서 분리되어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조직될 때에는 아무리 견고한 성벽과 정교한 구조를 갖추더라도 가인의 성읍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AC.402가 수많은 말씀의 성읍들을 통하여 가인이 쌓은 한 성읍의 속뜻을 밝혀 주는 이유입니다. (AC.402 해설)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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