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영접했으니 나는 구원받았다’
‘예수님을 영접했으니 나는 구원받았다.’ 한국 개신교회에서 매우 익숙한 말입니다. 전도집회나 부흥회에서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셨습니까?’라고 묻고, 영접기도를 따라 한 뒤에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셨습니다’, ‘오늘이 당신의 영적인 생일입니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 말에는 분명 소중한 진리가 있습니다. 신앙은 단순히 예수님에 관한 지식을 아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요한복음도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합니다(요1:12). 그러므로 주님을 영접한다는 표현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영접’이라는 성경의 깊은 말을 어느 한순간의 기도와 결단으로 축소하고, 그 사건이 일어났다는 사실만으로 한 사람의 영원한 구원이 이미 확정되었다고 생각할 때 생깁니다.
먼저 요한복음이 말하는 ‘영접’이 무엇인지 조금 더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은 단순히 어떤 사람이 입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하는 장면을 말하지 않습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오셨고(요1:9), 사람들은 그 빛을 받아들이기도 하고 거부하기도 합니다. 이어서 요한복음 전체는 그분을 믿는다는 것이 그분의 말씀 안에 거하고, 그분을 사랑하며, 그분의 계명을 지키고, 그분을 따라 살아가는 것과 분리될 수 없음을 계속 보여 줍니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고 하셨고(요14:15),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요13:17). 따라서 성경이 말하는 주님을 ‘영접함’은 단 한 번 마음의 문을 열었다고 고백하는 사건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그것이 실제 삶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지속적인 응답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구원 이해가 중요한 빛을 던집니다. 구원은 단순히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법적 지위가 바뀌는 사건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 실제로 변화되는 과정입니다. 이것이 거듭남(regeneration)입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자기 자신과 세상을 중심으로 살아가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프로프리움’(proprium), 곧 자기에게서 나온 것을 자기 생명의 전부라고 여기는 성향입니다. 주님은 사람의 자유를 없애고 어느 순간 강제로 그를 천국에 적합한 존재로 만들어 버리지 않으십니다. 말씀을 통해 진리를 보여 주시고, 선을 사랑하도록 이끄시며, 사람으로 하여금 ‘자유’(freedom)와 ‘합리성’(rationality) 안에서 악을 거절하고 선을 선택하게 하십니다. 이 과정에서 한 사람의 ‘지배적 사랑’(ruling love)이 서서히 달라집니다.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살아가던 사람이 점차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선한 쓰임을 기뻐하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이 우리 안에서 실제가 되어 가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날 진심으로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고백한 경험은 귀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실제 거듭남의 중요한 출발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삶의 방향이 완전히 달라지는 결정적인 회심의 순간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출발점과 완성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씨를 받아들였다고 해서 이미 열매를 거둔 것은 아닙니다. 주님도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말씀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마지막 상태를 보장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돌밭에 뿌려진 씨도 처음에는 ‘즉시 기쁨으로 받되’ 뿌리가 없어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 넘어집니다(마13:20-21).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인 말씀이 뿌리를 내리고 삶의 열매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나는 그날 예수님을 영접했으므로 이미 구원받았다’는 확신에는 조심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 확신이 ‘그러므로 이제 어떻게 살아도 상관없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주님은 입술의 한 고백을 근거로 이후의 삶을 보지 않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착한 일을 많이 해야 구원을 얻는다’는 말로 바꾸어서도 안 됩니다. 사람은 자기 힘과 자기 공로로 자신을 거듭나게 할 수 없습니다. 모든 선과 진리, 악을 이길 힘, 거듭남의 능력은 오직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일을 인간의 자유와 응답을 통하여 이루십니다. 인간은 마치 자기에게서 하는 것처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해야 하지만, 실제로 선을 행할 힘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인가 행위인가’라는 양자택일보다 더 깊은 질문은 ‘주님에게서 받은 믿음이 실제 나의 사랑과 삶을 변화시키고 있는가?’입니다.
이 점에서 ‘영접’이라는 말은 오히려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깊습니다. 손님을 집에 영접한다는 것은 현관문을 한 번 열어 주고 다시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를 안으로 모셔 들이는 것입니다. 주님을 영접한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생각만이 아니라 의지와 사랑과 행동 안으로 들어오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진리를 옳다고 인정하면서 실제 삶에서는 계속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주인이 되어 있다면, 입술로는 주님을 영접했다고 하면서 삶에서는 여전히 주님을 문밖에 세워 두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자신의 악을 발견할 때마다 주님 앞에서 인정하고 그것을 떠나려 하며, 진리를 배우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고, 자신의 맡은 자리에서 유용한 사람이 되려고 애쓴다면 주님을 영접하는 일이 그의 삶 속에서 계속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체어리티(charity)가 중요해집니다. 체어리티란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이 이웃과 공동체를 향하여 실제적인 선과 유용한 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을 사기 위해 쌓는 공로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을 실제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열매입니다. 나무가 살아 있기 때문에 열매를 맺듯이,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그 생명이 이웃을 향한 선과 쓰임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마7:20). 열매가 나무를 살아 있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나무가 열매를 맺습니다. 믿음과 삶의 관계도 이와 같습니다.
그렇다면 구원의 확신은 전혀 가질 수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확신의 근거가 달라집니다. ‘나는 20년 전 영접기도를 했으니 괜찮다’는 자기 과거에 대한 확신보다 ‘주님은 지금도 나를 버리지 않고 선과 진리로 이끌고 계시며, 나는 오늘도 그분을 따라가기를 원한다’는 주님에 대한 신뢰가 더 깊은 신앙입니다. 구원의 확신은 자기 자신에게서 찾아내는 보증서가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신실하심을 신뢰하면서 그분의 인도하심에 응답하는 삶에서 자라납니다. 자신이 완전하기 때문에 안심하는 것도 아니고, 선행을 충분히 쌓았기 때문에 안심하는 것도 아닙니다. 아직 부족하고 넘어지면서도 악을 악으로 인정하고 주님께 돌이키며, 선과 진리를 따라 살기를 원하는 방향 자체가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보면 천국과 지옥의 문제도 결국 ‘과거 어느 순간 무엇을 고백했는가’만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사람은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선택을 통하여 자신이 무엇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인지를 형성해 갑니다. 그 사랑이 그의 내면을 이루고, 죽음 이후에도 그 사람 자신으로 남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문제는 단순히 ‘내가 예수님을 영접했는가?’에서 끝나지 않고 ‘내가 영접한 주님이 실제로 내 사랑의 질서를 바꾸고 계시는가?’로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을 입술로 부르는 것과 주님에게서 오는 것을 사랑하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영접했으니 나는 구원받았다’는 말은 절반의 진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영접하지 않고서는 참된 영적 생명이 시작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영접은 한 번의 종교적 행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평생의 거듭남으로 펼쳐져야 합니다. 어제 주님을 영접했다는 기억보다 오늘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오늘의 선택이 내일의 사랑을 형성하며, 그렇게 형성된 사랑이 마침내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질문을 조금 바꾸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나는 언제 예수님을 영접했는가?’만 묻지 말고 ‘나는 오늘 무엇을 영접하며 살아가고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영접하고 있는가, 아니면 내 욕망에 맞는 말씀만 받아들이고 있는가. 주님의 선을 영접하고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나 자신이 중심이 되는 삶을 고집하고 있는가. 주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결국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내 안에 거처를 얻도록 허락하는 것입니다.
한 문장으로 줄이면 이렇습니다. ‘주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어느 날 예수님을 받아들였다고 고백한 과거의 한 사건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우리의 사랑과 삶이 실제로 변화되어 가는 평생의 거듭남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영접했으니 나는 구원받았다’에서 멈추기보다 이렇게 고백하는 편이 더 온전하겠습니다. ‘나는 주님을 영접했고, 오늘도 주님을 영접하며, 주님께서 나의 사랑과 삶을 변화시키시도록 그분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구원은 우리가 한 번 주님께 문을 열었다는 사실을 붙들고 안심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끊임없이 문을 두드리실 때 그분을 받아들이고, 그분에게서 오는 생명이 우리의 사랑과 생각과 행동 속에서 실제 삶이 되어 가는 데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