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6 심화

5. 토기는 깨뜨리고 유기는 닦아 물로 씻어야 했을까?’

 

6:28은 문자로만 읽으면 위생 규정처럼 보입니다. 속죄제 고기를 토기에 삶았으면 그 그릇을 깨뜨리고, 유기에 삶았으면 그릇을 닦아 물로 씻으라고 합니다. 왜 하나는 아예 깨뜨려 버리고 다른 하나는 씻어서 다시 사용할 수 있게 했을까요?

 

놀랍게도 이 구절에는 스베덴보리의 매우 직접적인 해설이 있습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105(29:31)는 레6:28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토기는 선과 결합하지 않는 거짓을 의미하고, 유기는 안에 선이 있는 교리적인 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속죄제와 속건제의 고기를 그 안에서 삶는 것은 악과 거기에서 나오는 거짓으로부터 정결하게 되기 위한 준비를 의미한다고 밝힙니다.

 

이 설명에 따르면 왜 두 그릇의 처리가 달랐는지가 분명해집니다. 선과 결합하지 않는 거짓은 씻어서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깨뜨려야 합니다. 거짓 자체를 조금 깨끗하게 만들어 계속 가지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거짓은 버려야 합니다. 반면 유기가 나타내는 것은 선이 들어 있는 교리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버려야 할 것이 아니라 잘못 붙어 있는 것을 제거하고 정결하게 하여 다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 차이는 거듭남에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모든 과거의 생각과 종교적 지식을 다 버려야 거듭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똑같이 처리하지 않으십니다. 악과 결합되어 진리를 완전히 왜곡시키는 거짓은 깨뜨리십니다. 그러나 불완전하게 이해했을 뿐 그 안에 선을 향한 마음이 있고 진리를 받을 수 있는 교리는 씻고 바로잡아 사용하십니다.

 

AC.10105삶는다는 것 자체도 설명합니다. 고기를 삶는 것은 선을 삶에 사용하기 위해 교리의 진리들을 통해 준비하는 것을 의미하며, 물은 진리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유기를 닦고 물로 씻는 은 단순한 세척이 아니라 교리적인 것을 진리로 정결하게 하여 선한 삶에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매우 아름다운 표상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잘못 알고 있던 교리가 있다고 합시다. 그 안에 완전히 거짓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표현이 불완전하거나 이해가 부족했을 뿐 그 중심에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려는 선이 있었다면 모든 것을 파괴할 필요는 없습니다. 말씀의 물로 씻고, 거짓된 부분을 제거하고, 더 밝은 진리 안에서 다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토기와 유기의 차이는 사람을 판단하는 데도 조심성을 줍니다. 어떤 사람의 신앙 이해가 잘못되어 있다고 해서 그 사람 안의 모든 것을 토기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만이 그 안에 선이 있는지 아십니다. 선과 결합할 수 없는 거짓은 깨뜨리시지만, 선을 품고 있으면서 아직 불완전한 이해는 진리를 통해 정결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레6:28은 거듭남이 단순한 파괴가 아니라 분별의 과정임을 보여 줍니다. 무엇을 버려야 하고 무엇을 씻어야 하는지 구별하는 것입니다. 악과 결합된 거짓은 깨뜨리되, 선을 섬길 수 있는 것은 진리로 씻어 보존합니다. 토기는 깨뜨리고 유기는 물로 씻으라는 짧은 한 절 안에 주님께서 우리의 생각과 교리를 어떻게 정결하게 하시는가라는 놀라운 아르카나가 숨어 있습니다. (SW.6 심화 5)

 

 

 

SW.레6.심화4, ‘왜 제사장은 제물을 먹어야 했을까? - 거룩한 것을 자기 삶으로 삼는다는 것’

SW.레6.심화4. ‘왜 제사장은 제물을 먹어야 했을까? - 거룩한 것을 자기 삶으로 삼는다는 것’ 레6에는 현대 독자에게 조금 낯선 장면이 반복됩니다. 하나님께 드린 소제와 속죄제의 일부를 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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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6 심화

4. 제사장은 제물을 먹어야 했을까? - 거룩한 것을 자기 삶으로 삼는다는

 

6에는 현대 독자에게 조금 낯선 장면이 반복됩니다. 하나님께 드린 소제와 속죄제의 일부를 제사장이 먹습니다.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는데 왜 그 제물을 다시 사람이 먹는 것일까요? 단순히 제사장들의 생활을 위한 식량 공급 규정만으로 보면 이 반복되는 먹음의 영적 의미를 놓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부분을 매우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2177(18:6)은 레6:13-17을 직접 인용하면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소제의 나머지를 먹는 것은 인간의 상호성자기 것으로 삼음을 표상하며, 그 결과 사랑과 체어리티를 통한 결합이 이루어진다고 설명합니다.

 

AC.2187(18:8)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먹는 자체가 교통과 결합과 자기 것으로 삼음을 의미한다고 설명하면서 레6:16, 18, 26을 직접 열거합니다. 거룩한 제물을 먹는 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천적·영적 선을 받아들여 그것이 인간 안의 실제 생명이 되는 것을 표상한 것입니다.

 

여기서 자기 것으로 삼음은 선의 근원이 인간 자신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인간이 자유롭게 받아들여 마치 자기 의지에서 행하는 것처럼 살아가는 상태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이 밖에 놓인 교리로만 남아 있지 않고 내가 실제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읽고 좋은 말씀이구나라고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아직 먹은 것이 아닙니다. 용서하라는 말씀을 읽었다면 실제 용서하려고 싸우고, 정직하라는 말씀을 읽었다면 손해가 와도 정직을 선택하며,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읽었다면 실제 이웃의 필요를 돌아볼 때 비로소 그 진리가 삶의 일부가 됩니다.

 

그래서 제사장은 거룩한 것을 아무 곳에서나 먹지 않고 거룩한 ’, 곧 회막 뜰에서 먹습니다. 주님의 선을 자기 것으로 삼는 일은 proprium이 그것을 차지하는 일이 아니라 주님의 임재와 질서 안에서 받아들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선을 행하지만 그 선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듭남의 중요한 목표입니다. 주님의 진리가 계속 내 밖에 있는 명령으로만 남아 있으면 우리는 억지로 순종합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선과 결합하여 우리 안에 받아들여지면 어느 순간 그 일을 사랑해서 행하기 시작합니다. 밖에 있던 말씀이 안으로 들어와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레6에서 제사장이 제물을 먹는 장면은 제사의 부수적인 뒤처리가 아닙니다. 제단에서 주님께 드려진 것이 다시 인간에게 돌아와 인간의 생명이 되는 순간입니다. 거듭남은 악을 버리는 것으로만 완성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그것을 먹고, 자기 삶으로 삼고, 마침내 사랑과 체어리티로 살아가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SW.6 심화 4)

 

 

 

SW.레6.심화5, ‘왜 토기는 깨뜨리고 유기는 닦아 물로 씻어야 했을까?’

SW.레6.심화5. ‘왜 토기는 깨뜨리고 유기는 닦아 물로 씻어야 했을까?’ 레6:28은 문자로만 읽으면 위생 규정처럼 보입니다. 속죄제 고기를 토기에 삶았으면 그 그릇을 깨뜨리고, 유기에 삶았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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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레6.심화3, ‘왜 번제의 재까지 거룩하게 다루어야 했을까?’

SW.레6.심화3. ‘왜 번제의 재까지 거룩하게 다루어야 했을까?’ 번제가 모두 타고 나면 남는 것은 재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제사는 끝났고 재는 치워야 할 폐기물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레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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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6 심화

3. 번제의 재까지 거룩하게 다루어야 했을까?’

 

번제가 모두 타고 나면 남는 것은 재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제사는 끝났고 재는 치워야 할 폐기물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레6은 그 재를 처리하는 일까지 매우 세밀하게 규정합니다. 제사장은 세마포 긴 옷과 세마포 속바지를 입고 재를 제단 곁에 두었다가, 다시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그 재를 진영 바깥 정결한 으로 가져갑니다.

 

여기서 가장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세마포의 의미입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9959(28:42)는 세마포를 외적 진리, 곧 자연적 진리와 연결하면서 바로 레6:10-11의 이 장면을 직접 인용합니다. 제사장이 재를 처리할 때조차 세마포 옷을 입어야 했던 것은 이 마지막 외적 처리까지 진리의 질서 안에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본문은 재를 단순히 진영 에 버리라고 하지 않습니다. ‘진영 바깥 정결한 으로 가져가라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제물은 이미 불에 완전히 살라졌지만 그 결과물까지 아무렇게나 취급되지 않습니다. 제사가 끝난 뒤 남은 것에도 질서가 있는 것입니다.

 

다만 여기에서는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번에 확보한 스베덴보리 원전 가운데 레6자체를 직접적으로 세밀하게 풀이하는 강한 근거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재는 정확히 무엇을 상응한다고 하나의 공식으로 못 박지는 않겠습니다. 오히려 확실한 본문의 구조를 붙드는 편이 좋습니다. 거룩한 제사의 마지막 결과까지 정결한 질서 속에서 처리되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거듭남에도 좋은 통찰을 줍니다. 어떤 악과의 싸움이 끝났다고 해서 그 경험 전체를 무가치한 것으로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어떤 시험에서 건져 내셨다면 그 과정에서 배운 진리와 겸손, 자기 인식은 이후의 삶에 남습니다. 그러나 지나간 악 자체를 계속 붙잡고 살아갈 필요도 없습니다. 끝난 것은 끝난 자리로 옮겨야 합니다.

 

특히 다른 옷을 입고진영 밖으로 나가는 장면은 제단에서 봉사하는 일과 그 결과를 밖으로 옮기는 일이 서로 다른 외적 질서를 필요로 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모든 영적 경험을 같은 방식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각 상태에 맞는 질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번제의 재는 적어도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남깁니다. ‘주님께서 이미 태워 없애신 것을 나는 아직 제단 위에 붙들고 있지는 않은가?입니다. 회개한 죄를 끝없이 되씹고, 이미 지나간 실패를 자기 정체성으로 붙들고 있는 것은 정결의 완성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끝내신 것은 정결한 질서 가운데 제자리로 옮겨 놓고, 제단에서는 다시 새로운 불과 새로운 번제가 시작되어야 합니다. (SW.6 심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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