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264.심화

 

5. ‘13:37-38

 

37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38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13:37, 38) He that soweth the good seed is the son of man; the field is the world and the seed are the sons of the kingdom (Matt. 13:37–38).

 

 

AC.264에서 스베덴보리가 마13:37-38을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아들들(sons)이 단순히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깊게는 선과 진리, 특히 신앙의 진리들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창3:16의 ‘고통 중에 아들을 낳으리라’는 말씀을 설명하면서, 성경 전체에서 ‘아들’이라는 표현이 영적으로는 진리의 태어남과 관련되어 사용된다는 점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비유를 설명하시면서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문자적으로는 천국에 속한 사람들을 가리키지만, 스베덴보리는 그보다 더 내적인 의미를 봅니다. 씨(seed)는 이미 AC.255에서 설명했듯이 신앙 또는 신앙의 씨앗인 진리를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그 씨로부터 나오는 ‘아들들’은 그 신앙에서 생겨난 선과 진리들, 또는 그 진리들을 받아들여 살아가는 상태를 의미하게 됩니다.

 

특히 이 구절은 ‘’와 ‘아들’의 관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씨앗은 땅에 심겨져 자라나고 열매를 맺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는 사람 안에 심겨져 성장하며, 그 결과 새로운 이해와 새로운 삶이 태어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 결과물을 ‘아들들’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천국의 아들들’은 천국으로부터 나온 진리들, 또는 그 진리들에 의해 형성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또한 주님께서 자신을 ‘인자(Son of Man)라 하시는 점도 AC.264의 중요한 논점입니다. 주님은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자’는 주님의 신적 진리(Divine Truth)를 나타내는 칭호입니다. 즉 주님께서는 교회 안에 진리의 씨를 뿌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씨로부터 ‘천국의 아들들’, 곧 진리들이 태어나게 됩니다.

 

반대로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라는 말씀도 같은 원리를 보여줍니다. 진리가 아들을 낳듯이 거짓도 아들을 낳습니다. 선한 씨는 천국의 진리들을 산출하지만, 악한 씨는 거짓과 악을 산출합니다. 따라서 말씀에서 ‘아들’은 단순히 출생한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근원으로부터 나온 것과 그 결과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한 이유는, ‘아들’이라는 표현이 말씀에서 일관되게 진리들과 관련되어 사용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창3:16의 ‘아들을 낳는다’는 말씀도 결국은 진리들을 낳는 것을 의미하며, 마태복음의 ‘천국의 아들들’ 역시 같은 상응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말씀에서 참된 ‘아들’은 육체적 자녀보다도 먼저, 주님께서 심으신 신앙의 씨로부터 태어나는 선과 진리의 열매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AC.264의 마지막 문장과 연결하면, 주님 자신이 참된 ‘’이시며, 참된 신앙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자신을 ‘인자’라고 부르십니다. 그리고 천국의 아들들은 바로 그 분으로부터 나온 진리들이며, 거듭나는 사람 안에서 태어난 새로운 신앙과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아들 = 진리’라는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신약성경에서 직접 뒷받침하는 대표적인 증거로 인용되고 있습니다.

 

 

 

AC.264, 심화 4, ‘사66:7-9’

AC.264.심화 4. ‘사66:7-9’ 7시온은 진통을 하기 전에 해산하며 고통을 당하기 전에 남아를 낳았으니 8이러한 일을 들은 자가 누구이며 이러한 일을 본 자가 누구이냐 나라가 어찌 하루에 생기겠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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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64.심화

 

4. ‘66:7-9

 

7시온은 진통을 하기 전에 해산하며 고통을 당하기 전에 남아를 낳았으니 8이러한 일을 들은 자가 누구이며 이러한 일을 본 자가 누구이냐 나라가 어찌 하루에 생기겠으며 민족이 어찌 한순간에 태어나겠느냐 그러나 시온은 진통하는 즉시 그 아들을 순산하였도다 9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아이를 갖도록 하였은즉 해산하게 하지 아니하겠느냐 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해산하게 하는 이인즉 어찌 태를 닫겠느냐 하시니라 (66:7-9) Before she travailed she bringeth forth; and before her pain came, she was delivered of a man child; who hath heard such a thing? Who hath seen such things? Shall the earth bring forth in one day, and shall I not cause to bring forth? saith Jehovah; shall I cause to bring forth, and close up? saith thy God (Isa. 66:7–9).

 

 

스베덴보리가 AC.264에서 사66:7-9을 인용한 이유는, ‘해산’, ‘낳음’, ‘남아’라는 표현이 말씀에서 육체적 출산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거듭남 가운데 진리가 새롭게 태어나는 영적 과정을 뜻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앞의 호세아와 사23 인용들이 진리가 태어나지 못하거나 잃어버려지는 상태를 보여 주었다면, 사66은 반대로 주님께서 새 교회와 새 생명을 급속히 일으키시는 긍정적 출산의 장면을 보여줍니다.

 

시온은 진통을 하기 전에 해산하며 고통을 당하기 전에 남아를 낳았으니’라는 말씀은 매우 역설적입니다. 보통은 산고가 있고, 그다음 출산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고통이 오기 전에 먼저 낳았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본문을 인용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영적 출산은 인간의 힘과 계산으로만 진행되는 자연적 과정이 아니라, 주님의 역사로 이루어질 때에는 사람의 예상과 순서를 넘어갑니다. 진리의 태어남은 본질적으로 주님께서 일으키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남아를 낳았다’는 표현에서 ‘남아, 곧 사내아이’는 신앙의 진리, 또는 강건하게 세워지는 진리를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아들’은 진리를 상징하므로, 여기의 사내아이는 거듭남이나 새 교회 안에서 태어나는 참된 진리를 가리킵니다. 사66은 단지 한 아이의 출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가 교회 안에 새롭게 태어나는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라가 어찌 하루에 생기겠으며 민족이 어찌 한순간에 태어나겠느냐(Shall the earth bring forth in one day,)라는 말씀은 새 교회의 형성과 거듭남의 놀라움을 말합니다. ‘나라’로 옮긴 ‘(earth)은 교회가 세워지는 터, 또는 교회 자체를 의미할 수 있고, ‘나라’는 진리와 선으로 이루어진 영적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주님께서 교회를 새롭게 하실 때, 단순히 개인의 생각 하나를 고치시는 정도가 아니라 새로운 영적 질서 전체를 태어나게 하신다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본문은 AC.261에서 말한 ‘임신’과 ‘출산’의 구별도 더 분명하게 해줍니다. 임신은 진리가 생각과 의도 안에서 형성되는 단계이고, 출산은 그 진리가 실제 생명과 삶으로 나타나는 단계입니다. 사66은 그 출산이 주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질 때, 인간이 생각하는 고통과 지연의 질서를 넘어 새 생명이 태어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를 거듭남을 다루는 본문으로 인용합니다.

 

또한 ‘내가 아이를 갖도록 하였은즉 해산하게 하지 아니하겠느냐?’라는 말씀은 주님의 섭리에 대한 강한 위로입니다. 주님께서 어떤 사람이나 교회 안에서 참된 진리를 잉태하게 하셨다면, 그 목적은 그것이 실제로 태어나게 하는 데 있습니다. 주님은 시작만 하시고 끝내지 않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거듭남의 과정에서 진리가 아직 완전히 삶으로 나타나지 않은 사람에게도, 주님의 역사가 계속되고 있음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23의 시돈은 신앙의 지식을 가지고도 그것을 기억 지식으로 파괴하여 끝내 해산하지 못하는 상태를 보여주었습니다. 반면 사66은 주님께서 친히 역사하실 때 임신과 출산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상태를 보여줍니다. 두 본문은 서로 대조를 이룹니다. 인간의 지식과 자기 지혜가 앞설 때는 영적 불임이 오지만, 주님의 신적 작용이 중심이 될 때는 새 진리와 새 교회가 태어납니다.

 

AC.264에서 사66:7-9을 인용한 이유는, ‘아들을 낳는다’는 표현이 말씀에서 신앙의 진리가 태어나는 것을 의미하며, 그 태어남은 궁극적으로 주님께서 이루시는 거듭남과 새 교회의 탄생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구절은 창3:16의 ‘고통 가운데 아들을 낳는다’는 말씀을 단지 형벌의 언어로 읽지 않게 해줍니다. 오히려 타락 이후에도 주님께서 사람 안에 진리를 잉태하게 하시고, 때가 되면 그것을 삶으로 태어나게 하시는, 구원의 질서를 보여주는 본문입니다.

 

 

 

AC.264, 심화 5, ‘마13:37-38’

AC.264.심화 5. ‘마13:37-38’ 37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38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마13:37, 38) He that soweth the good seed 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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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64, 심화 3, ‘사23:4-5’

AC.264.심화 3. ‘사23:4-5’ 4시돈이여 너는 부끄러워할지어다 대저 바다 곧 바다의 요새가 말하기를 나는 산고를 겪지 못하였으며 출산하지 못하였으며 청년들을 양육하지도 못하였으며 처녀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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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64.심화

 

3. ‘23:4-5

 

4시돈이여 너는 부끄러워할지어다 대저 바다 곧 바다의 요새가 말하기를 나는 산고를 겪지 못하였으며 출산하지 못하였으며 청년들을 양육하지도 못하였으며 처녀들을 생육하지도 못하였다 하였음이라 5그 소식이 애굽에 이르면 그들이 두로의 소식으로 말미암아 고통 받으리로다 (23:4, 5) Blush, O Zidon, for the sea hath spoken, the fortress of the sea, saying, I have not travailed, nor brought forth, nor have I brought up young men, nor caused girls to grow up; as at the report concerning Egypt, they shall bring forth according to the report of Tyre (Isa. 23:4–5),

 

 

스베덴보리가 AC.264에서 사23:4-5을 인용한 이유는, 창3:16의 ‘해산’과 ‘자식을 낳는 것’이 육체적 출산이 아니라, 신앙의 진리와 선을 낳는 영적 과정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또 하나의 성경 본문으로 입증하기 위해서입니다. 앞에서는 호세아를 통해 ‘임신’과 ‘자식’의 영적 의미를 설명하였다면, 여기서는 ‘출산하지 못함’과 ‘자녀를 기르지 못함’을 통해 진리를 더 이상 낳지 못하는 교회의 상태를 보여줍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시돈(Zidon)을 신앙의 지식(knowledges of faith)을 가진 사람들로 해석합니다. 시돈은 고대에 무역으로 유명한 도시였는데, 상응적으로는 여러 지식과 정보를 축적하는 기능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시돈은 말씀과 교회의 진리를 배우고 알고 있는 상태를 의미하지만, 아직 그것이 생명으로 결합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즉, 지식은 있지만 아직 그 지식이 사랑과 삶으로 연결되어야 하는 단계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의 시돈이 ‘기억 지식(memory-knowledges) 때문에 영적으로 메마르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기억 지식은 단순한 학문이나 일반 지식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비판하는 것은 기억 지식이 신앙을 섬기는 도구가 아니라, 신앙을 심판하는 기준이 되는 상태입니다. 사람이 감각과 세속적 학문만으로 말씀을 판단하기 시작하면, 신앙의 지식은 점차 생명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시돈은 ‘나는 해산하지도 않았고, 아이를 낳지도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지식을 전혀 갖지 못했다는 뜻이 아니라, 지식은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지식으로부터 어떠한 영적 진리도 산출하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AC.261에서 스베덴보리는 ‘임신’을 생각의 형성으로, ‘출산’을 진리가 실제 삶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설명하였습니다. 그런데 시돈은 그 과정 자체가 멈추어 버린 것입니다.

 

이어지는 ‘청년들을 양육하지도 못하였으며 처녀들을 생육하지도 못하였다’라는 말씀도 같은 맥락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에서 ‘청년들’은 강건한 진리들을, ‘처녀들’은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순수한 애정들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교회 안에서 진리도 자라지 않고,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도 자라지 않는 상태를 묘사합니다. 영적 출생도 없고, 영적 성장도 없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시돈과 함께 언급되는 ‘애굽(Egypt)과 ‘두로(Tyre)도 이러한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애굽은 기억 지식 전반을, 두로는 신앙에 관한 지식들을 상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원래 기억 지식은 신앙을 돕기 위해 존재하고, 신앙의 지식은 주님께 나아가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러나 기억 지식이 신앙을 지배하기 시작하면, 두로와 시돈이 상징하는 영적 지식은 결국 생명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이러한 교회의 황폐를 애통하며 묘사하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AC.259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한 현대인의 상태와도 연결됩니다. 그는 오늘날 뱀이 사람을 공격하는 주요 수단 가운데 하나로 ‘감각’, ‘기억 지식’, 그리고 ‘철학’을 언급하였습니다. 물론 기억 지식과 철학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주님의 계시보다 위에 놓일 때, 사람은 말씀을 믿기 전에 먼저 자기 이성과 학문으로 재단하게 됩니다. 그 결과 지식은 많아도 진리는 태어나지 못하는 영적 불임 상태에 빠질 수 있습니다.

 

AC.264에서 사23:4-5을 인용한 이유는, 창3:16의 ‘임신’과 ‘해산’이 영적으로는 진리를 낳는 것을 의미하며, 반대로 ‘출산하지 못함’은 신앙의 지식은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삶의 진리로 열매 맺지 못하는 교회의 황폐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시돈을 통해 단순한 지식의 부족이 아니라, 기억 지식이 신앙을 지배함으로써 진리도, 진리를 사랑하는 애정도 더 이상 태어나지 못하는 상태를 경고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참된 영적 출산은 오직 주님과의 살아 있는 결합 속에서만 이루어진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AC.264, 심화 4, ‘사66:7-9’

AC.264.심화 4. ‘사66:7-9’ 7시온은 진통을 하기 전에 해산하며 고통을 당하기 전에 남아를 낳았으니 8이러한 일을 들은 자가 누구이며 이러한 일을 본 자가 누구이냐 나라가 어찌 하루에 생기겠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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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64, 심화 2, ‘호13:13’

AC.264.심화 2. ‘호13:13’ 해산하는 여인의 어려움이 그에게 임하리라 그는 지혜 없는 자식이로다 해산할 때가 되어도 그가 나오지 못하느니라 (호13:13) The sorrows of one in travail have come upon him, he is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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