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1,하나님의 나라대한민국이 하나로 겹쳐질 때

이 긴 예배와 설교를 처음부터 따라가다 보면 먼저 인정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집회에 참여한 사람들의 신앙을 단순히 ‘정치에 빠진 사람들의 종교적 열광’ 정도로 처리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배의 앞부분에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주님의 임재를 구하고, 말씀을 듣고, 죄 사함과 영생과 부활을 고백하는 전형적인 기독교 신앙의 언어가 분명히 있습니다. 사도신경을 고백한 뒤 이어지는 기도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죄 사함 받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천국 백성으로 살아가는 귀한 소망을 주시니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합니다. 이것만 떼어 놓고 보면 주님을 향한 신앙과 천국을 향한 소망이 중심에 놓여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이런 고백 자체를 가볍게 볼 이유는 없습니다. 사람이 주님을 인정하고, 자신의 생명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고백하며, 악에서 구원받기를 원하는 것은 신앙생활의 중요한 출발입니다. 더구나 나라와 가족과 자녀를 사랑하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무너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역시 그 자체로 악한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천국만 생각하면서 지상의 의무를 버리는 삶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각 사람이 자기 직분과 자리에서 공동의 선을 위하여 유용한 일을 성실히 행하는 ‘쓰임’의 삶을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따라서 국가의 질서와 자유, 가정의 안전, 후손들의 삶을 염려하는 것 자체를 ‘세속적이므로 신앙과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 예배에서는 매우 이른 시점부터 한 가지 중요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천국 백성’이라는 신앙의 언어와 ‘자유 대한민국’, ‘자유시장경제’, ‘한미동맹’, ‘기독교 입국론’이라는 정치·역사적 언어가 하나의 기도 안에서 거의 끊김 없이 결합되기 시작합니다. 이어서 광화문에 나온 사람들을 ‘하나님의 마음에 다 합한 자들’이라고 규정하고, 전광훈 목사가 이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며, 그를 통해 깨우침을 받아 오늘까지 싸워 왔다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815일의 대규모 집회를 ‘승리의 날, 기적의 날, 영광의 날’로 만들어 달라고 간구합니다.

 

바로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필요해집니다. 문제는 나라를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느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내가 사랑하는 ‘지상의 나라’를 얼마나 분명하게 구별하고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대한민국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자유민주적 질서를 귀하게 여길 수도 있고, 공산주의 체제를 위험하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한미동맹을 대한민국의 안보에 중요하다고 판단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시민으로서 가질 수 있는 정치적·역사적 판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과 ‘내가 옳다고 믿는 정치적 판단’ 사이에는 언제나 하나의 거룩한 간격이 남아 있어야 합니다. 그 간격이 사라지는 순간 인간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부르기 시작할 위험에 놓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나라는 무엇보다 ‘사랑과 지혜’, 또는 ‘선과 진리’의 나라입니다. 천국은 특정한 정치체제를 가진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 사랑의 질에 따라 질서 있게 살아가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지상에서는 서로 전혀 다른 국가와 정치제도 속에 살았던 사람들도 그들의 내면이 선을 사랑하고 진리를 사랑했다면 천국에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지상에서 아무리 ‘기독교 국가’, ‘자유’, ‘애국’, ‘성경’을 외쳤다 하더라도 그 사람의 내면을 지배한 것이 자기 사랑과 지배욕, 증오와 멸시였다면 그 외적 표어가 그의 천국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영계에서는 사람이 무엇을 주장했느냐보다 ‘무엇을 사랑했느냐’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자유’를 사랑한다고 할 때도 두 종류의 사랑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다른 사람도 자유롭게 선을 행할 수 있도록 하는 자유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내가 원하는 질서가 지배하는 상태’를 자유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둘 다 ‘자유’를 외치지만 내적 애정은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나라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라를 사랑하기 때문에 국민 전체의 선과 평화를 구할 수도 있고, 나라를 사랑한다는 이름으로 나와 정치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볼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바로 이 외적 언어 뒤의 ‘애정’을 봅니다.

 

그래서 이 기도에서 특히 조심스럽게 들여다볼 대목이 ‘광화문에 나와 외치는 모든 자들 하나님의 마음에 다 합한 자들인 줄로 믿습니다’라는 부분입니다. 이 표현에는 집회에 참여한 사람들의 충정과 헌신을 높이 평가하려는 마음이 담겨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그 가운데에는 나라와 자녀 세대를 걱정하여 먼 곳에서 올라오고, 자신의 시간과 돈을 들이며, 진심으로 기도하는 분들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개인들의 내면을 밖에 있는 사람이 함부로 재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그 집회에 나온 사람들’이라는 외적 소속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는 영적 상태를 곧바로 연결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사람의 영적 상태는 집단의 이름이나 외적 소속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같은 교회 안에서도 천국을 향하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으며, 같은 교리를 고백하면서도 전혀 다른 사랑 안에 있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똑같은 선한 행동을 하더라도 어떤 사람은 이웃 사랑에서 하고, 어떤 사람은 자기 명예를 위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광화문에 나왔다는 사실도, 반대로 광화문에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도 그 자체로 사람의 영적 상태를 말해 주지 않습니다.

 

이것은 반대편에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합니다. 광화문 집회에 참석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을 ‘극우’, ‘광신자’, ‘혐오 세력’이라고 한꺼번에 규정하는 것도 같은 종류의 오류가 될 수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우리 집회에 나온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하고, 반대쪽에서는 ‘저 집회에 나간 사람은 모두 잘못된 사람’이라고 한다면, 정치적 방향만 반대일 뿐 사람을 외적 소속으로 판단한다는 점에서는 구조가 같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영계 이해는 이런 집단적 판정을 매우 어렵게 만듭니다. 주님만이 각 사람의 내면에 있는 지배적 사랑을 완전히 아시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기도에서는 ‘공산주의 세력들 사라지게 하시고’, ‘방해하는 세력은 한 길로 왔다 일곱 길로 물러가게 하시고’라고 기도하며, ‘부정 선거가 밝혀졌습니다. 마귀들이 틈타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라는 표현도 등장합니다. 여기서 정치적 대립의 언어가 점차 영적 전쟁의 언어와 결합됩니다. 정치적 반대 세력과 ‘마귀’, 정치적 승리와 하나님의 승리, 집회의 성공과 기도의 응답 사이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실제로 영적 전쟁을 매우 중요하게 말합니다. 인간의 거듭남 자체가 악과 거짓에 맞서는 시험의 연속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전쟁의 가장 본질적인 전장은 놀랍게도 ‘’이 아니라 ‘내 안’입니다. 내가 싸워야 할 미디안과 블레셋과 애굽과 바벨론은 말씀의 속뜻에서 단순히 역사상의 적국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인간과 교회를 공격하는 여러 종류의 악과 거짓을 표상합니다. 따라서 말씀을 읽으면서 ‘저 사람들이 미디안이다’라고 말하기 전에 먼저 물어야 할 것은 ‘내 안의 미디안은 무엇인가?’입니다.

 

이 차이가 곧이어 등장하는 기드온 설교를 이해하는 핵심이 됩니다. 본문은 미디안의 압제 아래 있는 이스라엘과 기드온의 소명입니다. 기드온은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미쳤나이까’라고 묻고, 주님은 그에게 ‘너는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설교는 여기에서 곧바로 ‘제일 큰 일이 뭐예요?’라고 묻고 그 답을 ‘예수한국 복음통일이 제일 큰 일’이라고 제시합니다. 이어 ‘우리는 공산주의 사회에 살 수 없기 때문에’ 기드온과 같은 ‘큰 용사’가 필요하다는 방향으로 본문을 연결합니다.

 

여기에는 분명 설교적 힘이 있습니다. 두려움 가운데 숨어 있던 기드온에게 ‘큰 용사여’라고 부르신 하나님을 통해 낙심한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평범한 사람도 공동체를 위해 일어설 수 있다고 격려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시민적 책임의 차원에서 적용한다면 충분히 의미 있는 메시지가 될 수 있습니다. ‘나라가 어려울 때 그리스도인은 자기 안위만 생각하지 말고 공동의 선을 위해 책임 있게 행동해야 한다’는 정도의 적용이라면 스베덴보리의 쓰임의 관점에서도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 단계입니다. ‘기드온이 미디안과 싸웠다’에서 ‘그러므로 오늘의 기드온은 우리이고 오늘의 미디안은 우리가 지목하는 정치세력이다’로 곧바로 넘어가 버리면 말씀의 표상적·영적 차원이 특정 정치 상황에 포획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예수한국 복음통일’이라는 구체적인 정치·종교적 목표가 기드온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과 거의 같은 위치에 놓이면, 이제 그 목표에 동의하는 것이 신앙이 되고 그 목표에 반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반대하는 것처럼 느껴질 가능성이 생깁니다. 바로 여기서 정치적 확신이 영적 확신으로 변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성경 이해에서 사사기의 전쟁들을 포함한 구약의 전쟁은 훨씬 깊은 차원을 향합니다. 이스라엘과 이방 민족들의 전쟁은 속뜻에서 주님의 시험과 인간의 거듭남 과정에서 일어나는 영적 싸움을 표상합니다. 그렇다면 기드온 이야기를 읽을 때 가장 먼저 등장해야 할 질문은 ‘오늘날 어느 정치세력이 미디안인가?’가 아니라 ‘미디안이 내 안에서 무엇을 뜻하는가?’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드온의 ‘큰 용사’ 됨도 세상의 상대를 쓰러뜨리는 힘 이전에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로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이기는 능력으로 읽혀야 합니다.

 

이렇게 읽으면 기드온 이야기는 오히려 정치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인에게 훨씬 엄격한 말씀이 됩니다. ‘저 악한 세력과 싸워라’에서 끝나지 않고 ‘그 세력과 싸우는 동안 네 안에 일어나는 증오와 교만과 자기 의와 지배욕과도 싸워라’가 되기 때문입니다. 밖의 적을 이기는 것보다 이것이 더 어려운 싸움입니다. 밖의 적은 손가락으로 가리킬 수 있지만 proprium은 ‘하나님을 위해 싸운다’는 바로 그 열심 속에도 숨어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이 영상 전체를 관통하게 될 매우 중요한 분별 기준 하나가 생깁니다.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만 묻지 말고 ‘어떤 영으로 싸우는가?’를 함께 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유를 위해 싸운다고 해도 증오의 영으로 싸울 수 있고, 진리를 지킨다고 하면서 자기 의에 빠질 수 있으며, 교회를 지킨다고 하면서 지배욕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매우 단호하게 악을 거부하면서도 그 사람 자체의 구원을 바라고, 거짓을 반박하면서도 상대를 인간 이하로 멸시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이 둘은 겉으로 비슷한 ‘투쟁’처럼 보여도 영적으로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설교자가 뒤이어 국가를 ‘개인과 가정과 직장을 지켜주는 울타리’라고 말하는 부분은 그 자체로 충분히 귀담아들을 만합니다. 그는 ‘국가가 없으면 개인도 없고 가정도 없고 자녀도 없다’며 국가의 보호적 기능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그가 왜 정치 문제를 단순한 세상 이야기가 아니라 목회의 문제로 받아들이는지를 이해하게 해 줍니다. 그에게 국가의 위기는 곧 교인들의 가정과 자녀의 위기입니다. 그러므로 그 절박함 자체를 조롱하거나 단순한 정치욕으로만 해석해서는 이 설교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에서도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국가는 분명 울타리이지만 ‘구원자’는 아닙니다. 자유민주주의는 귀한 시민적 질서일 수 있지만 ‘천국’은 아닙니다. 공산주의의 폐해를 경계할 수 있지만 공산주의가 인간 안의 모든 악의 근원인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이 무너지지 않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는 대한민국이 번영하는 가운데서도 인간의 영혼은 얼마든지 무너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지상의 정치적 자유를 잃은 상황에서도 어떤 사람의 내면은 주님 안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수많은 신앙인이 바로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 첫 부분을 읽으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결론은 ‘정치 설교는 잘못이다’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보다 훨씬 섬세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나라를 사랑할 수 있고, 국가의 위기를 말할 수 있으며, 불의한 제도에 저항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행하는 동안 ‘주님의 나라’와 ‘내가 원하는 나라’를 구별해야 합니다. 이 둘이 완전히 겹쳐지는 순간 정치적 반대자는 영적 원수가 되고, 정치적 승리는 하나님의 승리가 되며, 정치 지도자나 운동 지도자는 하나님의 특별한 도구로 절대화되기 쉽습니다. 그렇게 되면 신앙이 정치를 비추는 것이 아니라 정치가 신앙을 해석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1부에서 붙들어야 할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예배 안에는 분명 ‘천국 백성으로 살아가고 싶다’는 고백이 있습니다. 동시에 ‘자유 대한민국을 지켜야 한다’는 절박함도 있습니다. 둘 다 진실한 마음에서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 둘 사이에 반드시 질서를 세웁니다. ‘대한민국이 주님의 나라 안에 있어야지, 주님의 나라가 대한민국 안에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국가와 정치와 이념은 더 높은 선을 섬기는 ‘쓰임’의 자리에 있을 때 제자리를 찾습니다. 그리고 그 더 높은 선은 언제나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그래서 기드온의 이야기를 오늘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어쩌면 가장 먼저 들어야 할 말씀은 ‘밖의 미디안을 찾아내라’가 아닐 것입니다. ‘네 안에서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내라. 네가 정의를 말할 때 그 정의 속에 자기 의가 섞이지 않았는지 보라. 나라를 사랑할 때 반대편 사람까지도 그 나라 안에서 함께 살아가야 할 이웃으로 사랑할 수 있는지 보라. 그리고 싸워야 한다면 먼저 네 안의 악과 거짓과 싸워라.’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해 조금 더 깊은 곳에서 들리는 기드온의 전쟁입니다.

 

2부에서는 이 기드온의 ‘영적 전쟁’과 설교에서 점점 구체화되는 ‘공산주의와의 전쟁’, 그리고 설교자 자신과 광화문 운동을 기드온의 소명과 연결하는 방식이 어디까지 정당한 자연적 적용이고 어디에서부터 말씀의 속뜻과 뒤섞이기 시작하는지를 좀 더 깊이 살펴보겠습니다.

 

 

2, 기드온의 전쟁은 누구와의 전쟁인가

1부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 설교의 중심에는 두 개의 절박함이 함께 흐르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신앙적 열망이고, 다른 하나는 ‘대한민국을 지켜야 한다’는 정치적·역사적 절박함입니다. 이제 설교는 사사기의 기드온 이야기로 들어가면서 이 두 흐름을 본격적으로 하나로 연결합니다. 미디안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도록 부름받은 기드온을 오늘의 신앙인과 연결하고, 그 사명을 ‘예수한국 복음통일’과 공산주의로부터 대한민국을 지키는 일에 적용합니다. 여기서부터 이 설교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을 때 매우 중요한 문제가 등장합니다. 곧 ‘말씀에 기록된 전쟁을 오늘의 정치적 전쟁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먼저 설교자의 문제의식 자체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에게 공산주의는 단순히 여러 정치이념 가운데 하나가 아닙니다. 그것은 개인의 자유와 신앙의 자유를 억압하고, 가정과 교회를 위협하며,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존립 자체를 위험하게 만드는 체제로 인식됩니다. 따라서 그는 국가를 개인과 가정과 자녀를 보호하는 ‘울타리’로 설명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기드온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떠오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미디안에게 압제를 받았듯이 나라가 위험에 처해 있고, 하나님께서 두려움 속에 있던 기드온을 불러내셨듯이 오늘도 누군가 일어나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적용을 처음부터 잘못이라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말씀에는 자연적·도덕적 적용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용기를 통해 용기를 배울 수 있고, 요셉의 충성을 통해 직장에서의 성실을 배울 수 있으며, 기드온을 통해 공동체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 자세를 배울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기드온처럼 용기를 내어 공동의 선을 위해 일어나자’는 적용 자체에는 충분히 의미가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말씀의 궁극적인 의미가 되어 버릴 때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역사적 사건들, 특히 이스라엘의 전쟁들을 단순한 고대 근동의 전쟁 기록으로만 읽지 않습니다. 이 전쟁들은 속뜻에서 악과 거짓에 맞서는 주님의 전투, 그리고 인간의 거듭남 과정에서 일어나는 영적 전투를 표상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대 미디안’이라는 구도가 말씀의 속뜻에서는 ‘우리 편 대 저쪽 편’이라는 현대 정치구도로 곧바로 옮겨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전쟁터가 인간의 내면으로 들어옵니다. 미디안이 무엇을 표상하는지, 이스라엘이 무엇을 표상하는지, 기드온의 싸움이 거듭남의 어떤 상태를 나타내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 차이는 생각보다 큽니다. 자연적 독법은 ‘기드온은 누구인가? 우리다. 미디안은 누구인가? 우리의 적이다’라고 묻기 쉽습니다. 그러나 속뜻의 독법은 ‘내 안에서 주님의 질서를 억압하는 것은 무엇인가? 내 안에서 선과 진리를 약탈하는 악과 거짓은 무엇인가?’라고 묻게 합니다. 첫 번째 독법에서는 적이 밖에 있지만, 두 번째 독법에서는 적이 먼저 내 안에 있습니다. 첫 번째에서는 상대방을 이겨야 하지만, 두 번째에서는 내가 주님의 도움을 받아 변화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정치적 현실을 무시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연적 차원의 악도 분명히 악이라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폭정과 억압, 거짓과 부정, 종교의 자유를 파괴하는 체제가 있다면 그것을 분별하고 저항할 수 있습니다. 시민에게는 공동체의 질서를 지키는 쓰임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연적 악과 영적 표상을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이 정치세력이 미디안이다’, ‘저 정치인은 바로 아합이다’, ‘우리 지도자는 기드온이다’라고 특정하는 순간, 인간의 정치적 판단에 말씀의 신적 권위를 덧씌우게 될 위험이 생깁니다.

 

그 위험은 단순히 성경해석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을 바라보는 태도까지 바꿉니다. 상대가 나와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가진 시민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공격하는 미디안’이 되어 버리면, 그 사람과 대화할 이유가 점점 사라집니다. 그의 주장 가운데 옳은 부분이 있을 가능성도 생각하지 않게 됩니다. 더 나아가 그를 물리치는 일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하게 됩니다. 정치적 갈등이 영적 선악의 전쟁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의 영계 이해에서는 바로 이 지점이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진리를 가지고 있다는 확신만으로 천국적 상태가 되지 않습니다. 참된 진리는 반드시 선과 결합해야 합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와 분리되면 그것은 점차 자기확신과 자기 의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 창세기 4장에서 우리가 계속 보고 있는 ‘가인’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라는 자기 형제에게서 분리되면서 마침내 그 형제를 죽이는 단계까지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진리를 지키고 있다’는 확신이 강해질수록 오히려 ‘이 진리가 내 안에서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있는가?’를 더욱 엄격하게 살펴야 합니다.

 

기드온 이야기도 이 렌즈로 읽으면 훨씬 깊어집니다. 기드온은 처음부터 자신감 넘치는 영웅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두려워했고, 자신이 가장 작은 자라고 했으며, 하나님께 여러 번 표징을 구했습니다. 결국 승리의 능력도 기드온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그의 군대를 줄이셨습니다. 인간이 ‘내 힘으로 이겼다’고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점은 정치적 적용을 하더라도 대단히 중요한 영적 안전장치가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편이므로 우리가 이길 것이다’보다 기드온 이야기의 더 깊은 메시지는 ‘너희 자신의 힘을 신뢰하지 말라’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식으로 표현하면 여기에서 경계해야 할 것이 proprium입니다. proprium은 단순히 개인적 욕심이나 돈에 대한 탐욕으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종교적 열심 속에도 들어올 수 있고, 애국심 속에도 들어올 수 있으며, 정의를 위한 투쟁 속에도 들어올 수 있습니다. 오히려 ‘나는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나라를 위해 싸운다’고 확신할 때 proprium을 발견하기가 더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욕망을 하나님의 뜻으로 느끼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처음에는 ‘나라를 지켜야 한다’였습니다. 이것은 선한 애정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 지나면 ‘우리만 나라를 지킬 수 있다’가 됩니다. 그다음에는 ‘우리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은 나라를 망치는 사람들이다’가 되고, 더 나아가 ‘우리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이다’가 될 수 있습니다. 마지막에는 ‘우리의 승리가 하나님의 승리’라는 데까지 갈 수 있습니다. 처음과 마지막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지만, 인간의 proprium은 바로 이런 과정을 통해 선한 애정 속으로 아주 조용히 들어옵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묻는 것은 ‘전광훈 목사가 대한민국을 사랑하는가?’가 아닙니다. 그 사랑 자체를 의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가 자신의 방식으로 대한민국의 장래를 심각하게 걱정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그 나라 사랑이 어떤 질서 아래 놓여 있는가?’입니다. 나라 사랑이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 아래 놓여 있다면, 정치적으로 나와 반대되는 사람도 여전히 ‘대한민국 안에서 함께 살아가야 할 이웃’입니다. 그러나 나라 사랑이 최상위 사랑이 되어 버리면, 내가 생각하는 국가의 정체성에 맞지 않는 사람은 제거되어야 할 장애물처럼 보이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이웃 사랑’에 대한 이해가 매우 유용합니다. 체어리티는 무조건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감상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악한 사람에게 악을 행하도록 도와주는 것은 체어리티가 아닙니다. 공동체를 해치는 악을 제지하는 것도 더 큰 이웃을 위한 체어리티가 될 수 있습니다. 개인보다 공동체가 더 넓은 의미의 이웃이며, 국가 역시 하나의 이웃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국가를 파괴하는 실제 악이 있다면 그것을 막는 것은 충분히 체어리티의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실제 악’과 ‘내가 악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구별해야 합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사실로 확인된 간첩 행위, 폭력, 부정, 불법과 정치적으로 나와 다른 정책·사상·정당을 동일한 것으로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체어리티는 눈먼 관용이 아니지만 동시에 근거 없는 의심도 아닙니다. 진리는 사실을 사랑합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나 세력을 악이라고 판단하려면 그 판단 역시 진리의 빛 아래 있어야 합니다. 소문, 추측, 진영의 확신을 사실처럼 받아들이는 것은 아무리 목적이 애국이라 하더라도 진리와 결합된 체어리티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 점에서 영상 후반부에 반복되는 정치적 주장들은 별도로 조심해서 보아야 합니다. 선거 조작, 특정 세력의 국가 장악, 간첩의 광범위한 침투, 특정 정치인의 의도 등에 관한 여러 주장이 등장하고, 그것들이 상당히 확정적인 어조로 제시됩니다. 이번 해설의 목적은 그 주장 하나하나를 정치적 사실검증하는 것이 아니므로 여기서 어느 쪽의 결론을 대신 내려 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적어도 한 가지 원칙은 분명합니다. ‘내가 간절히 믿고 싶은 것’과 ‘진실인 것’은 반드시 구별되어야 합니다. 진리는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므로,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편에 불리한 사실도 진실이라면 받아들여야 하고 자기편에 유리한 주장도 근거가 없다면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내 편보다 진리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정치적 신앙인에게는 매우 어려운 시험입니다. 상대편의 거짓을 발견하면 기쁘지만 내 편의 거짓을 발견하면 덮고 싶어집니다. 상대편의 잘못에는 엄격한 증거를 요구하지 않으면서 내 편의 잘못에는 완벽한 증거가 나올 때까지 믿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천국의 진리는 좌우를 가리지 않습니다. 거짓은 내 편의 입에서 나와도 거짓이고, 진리는 반대편의 입에서 나와도 진리입니다. 이것이 가능한가 하는 것이 어쩌면 정치적 분열 시대를 살아가는 신앙인에게 주어진 가장 어려운 영적 시험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설교에서 강조하는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부분도 같은 맥락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다른 정탐꾼들과 달리 가나안 땅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다는 것을 근거로 ‘같은 사건을 보더라도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해야 한다. 그러면 현실이 긍정적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이것에는 낙심하지 않고 주님을 신뢰하라는 좋은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신앙은 현실을 긍정적으로 상상함으로써 현실을 긍정적으로 만드는 힘이 아닙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의 핵심은 ‘긍정적 사고’가 아니라 ‘여호와께서 함께하신다는 신뢰’였습니다.

 

따라서 ‘긍정’ 자체가 신앙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현실이 좋지 않으면 좋지 않다고 볼 수 있어야 하고, 자기편이 잘못했다면 잘못했다고 인정해야 합니다. 주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현실을 아름답게 포장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아무리 어둡더라도 선과 진리를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천국적 긍정은 ‘모든 일이 내가 원하는 대로 잘될 것이다’가 아니라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주님의 섭리 안에서 나는 선과 진리를 선택하겠다’에 더 가깝습니다.

 

‘감사하면 더 큰 감사할 일이 일어난다’는 설교의 강조도 비슷합니다. 감사는 매우 귀한 영적 상태입니다. 자기에게 있는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왔음을 인정하는 것은 천국적인 태도입니다. 그러나 감사가 ‘감사하면 더 큰 집과 땅과 복을 받는다’는 인과관계로 연결되기 시작하면 감사가 은밀하게 보상의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설교에서는 이스라엘의 불평과 불뱀 사건을 연결하면서 ‘무조건 감사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넓은 빌딩도 주시고 땅도 주신다’는 방향으로 이어집니다. 여기에서는 감사라는 내적 신앙의 상태가 자연적 번영과 너무 쉽게 결합될 위험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섭리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선한 사람에게도 고난이 오고, 악한 사람에게도 자연적 번영이 허용됩니다. 주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보시는 것은 인간의 영원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우리의 영원한 선을 위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참된 감사는 ‘감사하면 좋은 일이 생길 것이므로 감사합니다’가 아니라 ‘제가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주님이 저를 영원한 선으로 인도하심을 믿습니다’라는 상태에 더 가깝습니다. 이것은 훨씬 깊은 감사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문제는 다시 기드온에게 돌아옵니다. 기드온의 진정한 힘은 ‘긍정적 사고’에도, 군중의 숫자에도, 자신의 정치적 판단에 대한 확신에도 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주님의 명령에 의지하는 데 있었습니다. 군대가 3만 2천 명에서 300명으로 줄어드는 과정은 인간의 힘이 줄어들고 주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과정입니다. 자연적 의미에서도 이것은 놀라운 역설입니다. 하나님의 싸움이라면 사람의 숫자가 많아져야 할 것 같은데 하나님은 오히려 줄이십니다. 인간이 자기 힘을 하나님의 힘으로 착각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점에서 광화문에 ‘천만 명이 모여야 한다’는 반복적인 강조와 기드온의 이야기를 나란히 놓으면 흥미로운 긴장이 생깁니다. 물론 대규모 시민집회에서 많은 사람이 모이는 것은 정치적 영향력을 위해 중요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연적 차원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영적 승리의 척도로 가져오면 기드온 이야기가 오히려 반대 질문을 던집니다. ‘사람이 얼마나 많이 모였는가?’가 아니라 ‘그 사람들 안에서 주님이 얼마나 다스리고 계시는가?’가 더 중요한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300명이든 천만 명이든 그 안에 증오와 거짓과 자기 의가 가득하다면 숫자는 천국의 척도가 될 수 없습니다.

 

반대로 단 한 사람이라도 주님 앞에서 자기 악을 보고 돌이킨다면 영적으로는 엄청난 사건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교회의 진정한 갱신은 먼저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한민국을 바꾸자’보다 먼저 ‘주님께서 나를 바꾸시게 하자’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사회참여를 포기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회참여의 영적 뿌리를 정결하게 하자는 말입니다. 내 안에서 시작되지 않은 개혁은 밖의 세상을 바꾸는 동안 또 다른 지배욕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전광훈 목사의 설교가 던지는 질문은 생각보다 훨씬 깊습니다. ‘나라가 위험할 때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 자체는 피할 수 없습니다. 신앙인은 세상의 악을 보고도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에 또 하나의 질문을 붙일 것입니다. ‘그 악과 싸우는 동안 너 자신은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

 

저는 이것이 2부의 가장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공산주의와 싸우다가 증오하는 사람이 되어 버린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자유를 지키다가 다른 사람의 자유를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버린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거짓을 폭로하다가 확인되지 않은 말을 퍼뜨리는 사람이 되어 버린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대한민국을 사랑하다가 대한민국보다 주님을 더 사랑해야 한다는 질서를 잃어버린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확신하다가 ‘내 뜻’과 ‘하나님의 뜻’을 구별하지 못하게 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바로 그 순간 기드온의 전쟁은 광화문에서 내 마음으로 돌아옵니다. ‘미디안이 누구냐?’는 질문도 필요할 수 있지만, 그보다 먼저 ‘내 안의 미디안은 무엇인가?’를 묻게 됩니다. 두려움인가, 증오인가, 자기 의인가, 지배욕인가,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완고함인가, 상대편이 망하는 것을 보며 느끼는 은밀한 기쁨인가. 그것들이 내 안의 이스라엘, 곧 주님에게서 받은 선과 진리를 약탈하고 있지는 않은가를 살펴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기드온의 칼을 빼앗지 않습니다. 다만 그 칼끝을 먼저 자기 안으로 돌려놓습니다. 밖의 악을 분별하되 내 안의 악을 먼저 보고, 나라를 지키되 내 영혼을 잃지 않으며, 진리를 말하되 체어리티와 분리하지 않고, 싸우되 상대의 파멸보다 선의 회복을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할 때 자연적 싸움도 더 높은 질서 아래 놓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다음 문제가 등장합니다. 영상 후반으로 갈수록 설교자는 단순히 ‘그리스도인이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수준을 넘어 ‘성경 전체가 정치 이야기’라고 주장하고, 모세와 다윗과 아브라함을 정치가로 설명하며, 한국 교회가 정교분리를 잘못 이해했기 때문에 무너졌다고 진단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매우 중요한 성경관의 문제입니다. 과연 성경은 본질적으로 정치 이야기일까요? 아니면 성경의 역사와 정치와 전쟁 자체가 훨씬 더 깊은 영적 실재를 담기 위한 그릇일까요? 3부에서는 바로 이 문제, 곧 ‘성경 전체가 정치 이야기다’라는 주장과 스베덴보리의 ‘말씀의 속뜻’을 정면으로 마주 놓고 살펴보겠습니다.

 

 

3, ‘성경 전체가 정치 이야기다라는 주장과 말씀의 속뜻

앞의 1부와 2부에서 우리는 이 설교를 단순히 ‘정치 설교’라는 한마디로 잘라내지 않고, 왜 이런 설교가 한국 현대사의 경험을 통과한 일부 그리스도인들에게 강한 호소력을 갖는지까지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좌우 대립, 6·25전쟁과 분단, 북한의 종교 탄압, 전후의 극심한 가난과 국가 재건을 실제 삶으로 지나온 세대에게 ‘나라를 잃으면 신앙의 자유도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은 단순한 관념이 아닙니다. 따라서 나라를 지키는 일을 신앙의 책임으로 느끼는 마음 자체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문제는 그 역사적 기억과 애국적 열망이 ‘말씀을 읽는 렌즈’ 자체가 되었을 때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아주 중요한 구별을 요청합니다.

 

설교자는 성경의 인물들과 사건들을 정치의 언어로 매우 적극적으로 읽습니다. 모세와 다윗 같은 인물들은 국가를 이끌었던 지도자들이고, 이스라엘의 역사는 국가의 흥망성쇠와 전쟁으로 가득하며, 따라서 신앙과 정치를 분리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는 논리입니다. 이 관점에는 일리가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실제로 구약의 이스라엘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의미에서 종교와 정치가 분리된 사회가 아니었습니다.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 율법과 국가 질서, 전쟁과 신앙이 서로 얽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마치 개인의 내면생활만을 다루는 책인 것처럼 읽는 것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는 여기서 결정적인 한 단계가 더 있습니다. 성경에 정치가 등장하는 것과 ‘성경의 본질이 정치’라는 것은 전혀 다른 말입니다. 성경에 왕이 등장하고 전쟁이 등장하며 영토와 국가와 민족이 등장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들이 말씀 안에 들어간 궁극적인 이유는 정치학이나 국가경영의 원리를 가르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것들은 모두 자연적·역사적 차원에서 실제 사건과 인물인 동시에, 속뜻에서는 주님과 그분의 나라, 교회와 인간의 거듭남, 선과 진리, 악과 거짓 사이에서 일어나는 영적 일들을 담아내는 ‘표상’의 그릇이 됩니다.

 

이 차이를 놓치면 성경의 방향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이야기를 자연적 차원에서만 읽으면 ‘하나님의 백성이 적을 몰아내고 땅을 차지했다’가 됩니다. 여기에 오늘의 정치상황을 곧바로 대입하면 ‘우리도 하나님의 편에 서서 우리의 적을 몰아내야 한다’는 결론으로 쉽게 갑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가나안은 단순한 영토가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의 나라와 교회를 표상하고, 개인의 차원에서는 거듭난 인간의 내적 상태와 연결됩니다. 그렇다면 가나안에 들어가는 이야기는 우선적으로 ‘누구를 대한민국에서 몰아낼 것인가’가 아니라 ‘주님께서 내 안에서 무엇을 몰아내고 무엇을 세우셔야 하는가’를 묻게 합니다.

 

이 점에서 이번 설교의 본문인 여호수아 15장의 ‘땅 나누기’는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말씀 이해와 대단히 잘 만나는 본문입니다. 자연적인 문자만 읽으면 지명이 끝없이 나오는 매우 건조한 본문입니다. 유다 지파가 받은 땅의 남쪽 경계가 어디에서 시작하여 어디를 지나고, 동쪽과 북쪽과 서쪽 경계가 어디까지 이르는지를 장황하게 기록합니다. 오늘날 독자에게는 ‘왜 하나님의 말씀에 이런 지명과 경계선이 이렇게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어야 하는가?’라는 의문이 생길 만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본문 때문에 스베덴보리의 ‘말씀의 속뜻’이라는 관점이 빛을 발합니다. 만일 성경이 단지 이스라엘 민족의 정치사와 영토사를 기록한 책이라면, 오늘의 신앙인에게 여호수아 15장의 세세한 경계선은 거의 아무 의미가 없어집니다. 그러나 그 모든 장소와 방향과 경계가 교회와 천국, 인간의 내적 상태와 연결된 영적 실재를 표상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자연적 지리 안에 영적 지리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땅을 나누어 준다’는 것 자체도 스베덴보리의 세계에서는 매우 깊은 주제와 연결됩니다. 천국은 모두가 똑같은 상태가 되는 곳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하나의 생명을 받으면서도 각 천사와 공동체는 서로 다른 선과 진리의 상태, 서로 다른 쓰임을 가집니다. 그러므로 ‘각 지파가 자기 몫을 받는다’는 그림은 단순히 부동산을 배분하는 장면을 넘어, 주님의 나라 안에서 각자가 자기 상태와 쓰임에 맞는 자리를 받는 질서를 생각하게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최근 계속 살펴보고 있는 ‘천국은 상태가 같아야 들어갈 수 있는 나라’라는 스베덴보리의 설명과도 연결됩니다. 천국의 장소는 임의적으로 배정되는 것이 아니라 내적 상태와 상응합니다.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 것과 진리로 받아들인 것에 따라 자신과 같은 상태의 공동체로 이끌립니다. 따라서 여호수아서의 ‘기업’이라는 개념을 가장 깊은 차원에서 읽는다면, 그것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더 넓은 땅과 더 좋은 땅을 주셨다’는 식의 자연적 보상 개념을 넘어섭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 그리고 그 상태는 주님의 나라에서 무엇과 상응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설교에서 반복되는 ‘하나님께서 광야생활 동안 어느 지파가 잘했는지 못했는지를 다 아시고 그에 따라 땅을 주셨다’는 설명도 조금 조심해서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든 상태를 아신다는 고백 자체는 귀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잘한 사람에게 더 넓은 땅을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자연적 보상 체계로 단순화하면, 말씀의 훨씬 깊은 질서를 놓칠 수 있습니다. 특히 이것이 ‘감사하면 하나님께서 넓은 빌딩도 주시고 땅도 주신다’는 식으로 이어지면, 가나안의 기업이 자연적 번영의 약속으로 축소될 위험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기업’은 훨씬 깊습니다. 주님에게서 받는 선과 진리, 그리고 그것으로 이루어지는 천국적 삶이 진정한 기업입니다. 자연적 재산은 많을 수도 적을 수도 있습니다. 큰 집을 가진 사람이 지옥적인 사랑 안에 있을 수도 있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 천국적인 사랑 안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다 지파가 받은 땅’을 오늘의 부동산이나 경제적 성공과 직접 연결하기보다,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과 쓰임의 영역으로 읽는 것이 말씀의 속뜻에 훨씬 가까운 방향입니다.

‘제비뽑기’에 대한 설교자의 강조도 같은 구별이 필요합니다. 설교에서는 ‘제비를 뽑아도 하나님의 의지가 들어가 있다’는 말이 계속 반복되고, 이것이 결국 ‘세상의 모든 역사에도 하나님의 의지가 들어 있다’는 주장으로 확대됩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섭리를 고백하려는 강한 신앙이 있습니다. 우연처럼 보이는 일조차 하나님의 주권 밖에 있지 않다는 고백입니다. 이것 자체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섭리’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그렇게 되도록 의지하셨다’는 의미와는 다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주님의 신적 섭리는 언제나 선을 목적으로 하며, 궁극적으로 인간의 구원과 천국을 향합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자유가 있기 때문에 악도 일어납니다. 주님께서는 악을 원하시지 않지만 인간의 자유 때문에 그것을 허용하시며, 허용된 악조차 가능한 한 선한 결과를 향하도록 끊임없이 굽혀 인도하십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허용의 법칙’과 섭리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그러므로 ‘일어났으니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전쟁이 일어났다고 하나님께서 전쟁을 원하신 것이 아니고, 독재자가 등장했다고 하나님께서 독재를 원하신 것이 아니며, 사람이 범죄를 저질렀다고 하나님께서 그 범죄를 예정하신 것도 아닙니다. 악은 악으로부터 나오지만 주님께서는 그 악 가운데서도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지 않으면서 가능한 최대의 선을 끌어내십니다. 이것은 모든 사건을 하나님의 직접적인 의지로 설명하는 것보다 훨씬 섬세한 섭리 이해입니다.

 

따라서 설교에서 칼빈주의의 주권과 예정론을 설명하면서 ‘구원받을 사람과 구원받지 않을 사람을 천지가 창조되기 전에 이미 하나님이 정해 놓으셨다’고 반복하는 대목에서는 스베덴보리와 매우 분명한 차이가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의미의 이중예정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의 구원을 원하시며, 누구도 지옥을 위해 창조하시지 않습니다. 지옥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미리 버리셨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유 가운데 지속적으로 선택하고 자기 것으로 만든 지배적 사랑의 결과입니다.

 

이것은 작은 교리 차이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달라집니다. 어떤 사람은 태어나기도 전에 구원하기로 정하고 다른 사람은 구원하지 않기로 정한 하나님과, 모든 사람을 천국으로 인도하시되 인간의 자유를 끝까지 존중하시는 하나님은 인간에게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적 전능은 인간의 자유를 무시하고 원하는 대로 사람을 천국이나 지옥에 배치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 자체이신 주님께서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면서도 끊임없이 선으로 인도하시는 전능입니다.

 

이 관점은 정치 문제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말과 ‘내가 지지하는 정치적 사건이 하나님의 뜻이다’라는 말은 전혀 다릅니다. 전자는 섭리에 대한 신앙고백일 수 있지만 후자는 인간이 하나님의 섭리를 자기 정치적 판단과 동일시할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선거에서 내가 지지하는 사람이 이겼다고 ‘하나님의 뜻’이고, 졌다고 ‘사탄의 역사’라고 단정하기 시작하면 신적 섭리는 어느새 우리 진영의 승패를 설명하는 언어가 됩니다.

 

그런데 주님의 섭리는 훨씬 더 높고 깊습니다. 한 나라의 흥망도, 정권의 교체도, 전쟁과 평화도 주님께서 영원한 관점에서 허용하시고 굽혀 인도하시는 거대한 질서 안에 있지만, 우리는 그 전체를 볼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신적 섭리를 말하면서 인간에게 요청하는 중요한 태도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섭리를 뒤에서 보라’는 것입니다. 일이 일어나기 전에 자기 욕망과 예측을 ‘하나님의 섭리’라고 선언하지 말고, 지나온 길을 돌아보며 주님께서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겸손하게 인식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치적 예언과도 연결됩니다. ‘이 사람이 반드시 이길 것이다’, ‘이 정권은 반드시 무너질 것이다’, ‘이 사건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것이다’라고 말한 뒤 그것을 신앙의 이름으로 보증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신적 섭리의 전체를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자신의 강한 희망이나 두려움을 하나님의 뜻으로 오인하기 쉽습니다. proprium은 종교적 확신의 옷을 입을 때 가장 발견하기 어려워집니다.

 

여기에서 다시 ‘성경 전체가 정치 이야기다’라는 주장으로 돌아가면,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오히려 그 문장을 뒤집어 볼 수 있게 합니다. 성경에 정치 이야기가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말씀은 정치 이야기를 통해 정치보다 더 깊은 것을 말합니다. 왕은 통치의 원리를 표상하고, 나라는 교회와 주님의 나라를 표상하며, 전쟁은 영적 전투를 표상하고, 가나안은 천국과 교회를 표상하며, 예루살렘은 교회의 교리와 영적 중심을 표상합니다. 자연적 역사가 영적 실재를 담는 그릇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을 정치적으로만 읽는 것은 성경을 너무 높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낮추는 결과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한민국의 정국을 설명하는 책으로 만드는 순간, 영원한 말씀이 특정 시대와 특정 정당과 특정 정치인의 문제 속에 갇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도 중요하고 자유민주주의도 중요하며 신앙의 자유도 소중합니다. 그러나 말씀은 대한민국이 생기기 전에도 말씀이었고,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언젠가 역사에서 사라진 뒤에도 영원히 말씀입니다. 말씀의 중심은 어떤 국가도, 어떤 체제도, 어떤 민족도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이것은 애국심을 부정하는 말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국가도 ‘이웃’입니다. 사람은 자기 나라를 사랑하고 공동선을 위해 봉사해야 합니다. 더 큰 공동체를 사랑하는 것은 개인 몇 사람만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넓은 체어리티가 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나라를 지키고 법과 질서를 보호하며 자유와 정의를 위해 일하는 것은 훌륭한 쓰임이 될 수 있습니다. 군인과 경찰, 공직자와 정치인, 시민이 각자의 자리에서 공동선을 위해 일하는 것도 체어리티의 삶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라 사랑에는 반드시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나라는 주님보다 위에 있지 않고, 민족도 주님보다 위에 있지 않으며, 정치적 이념도 선과 진리보다 위에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대한민국’이라는 말도 매우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합니다. 만일 그것이 ‘복음의 선과 진리가 이 땅에 널리 퍼지고 사람들이 자유롭게 주님을 섬기기를 바란다’는 소망이라면 아름다운 뜻을 담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기독교인이 국가권력을 장악하여 다른 사람들을 지배해야 한다’는 의미로 변하면 전혀 다른 것이 됩니다. 전자는 쓰임을 향하지만 후자는 지배를 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성직자의 지배욕을 매우 심각하게 다루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종교적 권위와 세속적 권력이 결합될 때 인간의 proprium은 자신을 ‘하나님의 대리자’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자기에게 복종하는 것을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으로 여기고, 자기에게 반대하는 것을 하나님께 반대하는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이 단계에 이르면 처음에는 하나님을 위해 시작한 일이 어느새 자기 권위와 자기 집단을 지키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정치에 관해 말하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정의와 자유가 침해되고 약자가 억압받으며 국가가 실제 위험에 처한다면 목회자도 시민이자 영적 지도자로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더욱 필요한 것은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치에 적용하고 있는가, 아니면 내 정치를 하나님의 말씀 속에 집어넣고 있는가?’라는 자기점검입니다. 이 두 가지는 겉으로 매우 비슷해 보여도 영적으로는 전혀 다릅니다.

 

이번 설교에서 성경 이야기와 현대 정치 이야기가 계속 교차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가장 조심해야 할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광야세대의 불평, 기드온의 전쟁, 제비뽑기,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 대한민국의 현대 정치가 하나의 연속된 이야기처럼 이어집니다. 청중에게는 강력한 서사가 만들어집니다. ‘이스라엘이 이방 세력과 싸웠듯 우리도 싸우고 있으며, 그때 하나님께서 기드온과 여호수아를 세우셨듯 오늘도 지도자를 세우시고, 하나님의 백성이 순종하면 승리한다’는 구조입니다.

 

하지만 바로 여기서 속뜻이 우리를 멈추게 합니다. 말씀의 인물과 사건을 오늘의 정치지도와 일대일로 대응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누가 여호수아인가? 누가 기드온인가? 누가 미디안인가? 누가 가나안 족속인가?’를 오늘의 정치인 이름으로 채우기 시작하면 말씀의 신성이 인간의 정치적 판단에 종속될 수 있습니다. 오히려 물어야 합니다. ‘내 안에서 여호수아가 표상하는 진리는 무엇인가? 내 안의 가나안 족속은 무엇인가? 내가 아직 몰아내지 못한 악은 무엇인가? 주님께서 내게 맡기시는 기업은 무엇인가?’

 

그렇게 읽으면 여호수아서가 갑자기 정치적 동원에서 영적 거듭남의 말씀으로 돌아옵니다. 가나안 정복은 상대 진영을 제거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내 안의 악과 거짓이 제거되는 이야기가 되고, 땅 나누기는 정치적 전리품의 분배가 아니라 주님께서 각 사람에게 선과 진리와 쓰임의 자리를 마련하시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실패는 ‘저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을 안 들어서 망했다’가 아니라 ‘나도 주님에게서 받은 진리를 알면서 악과 타협하고 있지 않은가?’라는 자기성찰이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정치적으로 격렬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도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렌즈는 우리에게 역사를 잊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6·25를 잊으라고 하지도 않고, 북한 체제의 실상을 외면하라고 하지도 않으며, 나라를 사랑하지 말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기억하되 그 기억을 주님보다 위에 두지 말라고 합니다. 분별하되 증오하지 말고, 경계하되 거짓을 사용하지 말며, 싸워야 할 때 싸우더라도 자기편을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 목사님께서 처음 이 설교를 제게 가져오시면서 던지셨던 질문과도 가장 깊이 연결됩니다. 지난 60~70년을 대한민국에서 살아온 사람에게 ‘그냥 정치를 내려놓으십시오’라는 말은 너무 쉽습니다. 몸으로 겪은 역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기억을 없애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기억까지도 거듭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나는 공산주의가 두렵다’에서 멈추지 않고 ‘그 두려움 때문에 내가 누구를 미워하게 되었는가’를 볼 수 있고, ‘나는 자유대한민국을 사랑한다’에서 더 나아가 ‘그 사랑이 주님에게서 오는 이웃 사랑의 질서 안에 있는가’를 살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정치적 입장을 갖고 있으면서도 정치가 내 영혼의 주인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나라를 사랑하면서도 반대편 사람을 지옥 갈 사람처럼 보지 않을 수 있고, 북한 체제의 악을 분명히 말하면서도 북한 주민을 사랑할 수 있으며, 내가 지지하는 진영의 거짓도 거짓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편이 이기는 것’보다 ‘주님의 선과 진리가 이루어지는 것’을 더 원할 수 있게 됩니다.

 

그때 ‘대한민국을 지켜 주십시오’라는 기도도 조금 달라질 것입니다. 단지 ‘내가 지지하는 사람들이 승리하게 해주십시오’가 아니라, ‘주님, 이 나라 안에서 거짓은 어느 편에 있든 드러나게 하시고, 악은 어느 편에 있든 제어되게 하시며, 선한 사람들이 어느 편에 있든 보호받게 하시고, 저 자신도 진영의 분노와 두려움과 자기 의에 사로잡히지 않게 하시며, 이 나라가 주님의 선한 쓰임을 감당하게 하옵소서’라는 기도가 될 것입니다.

 

그 기도라면 보수도 드릴 수 있고 진보도 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바로 그 자리에서 정치가 비로소 주님의 질서 아래로 내려옵니다. 정치가 신앙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정치를 정화하고, 나라 사랑이 증오를 낳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이웃을 위한 체어리티의 쓰임으로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다음 4부에서는 이 설교에서 매우 강하게 반복되는 또 하나의 축, 곧 ‘예수 믿는 사람은 이미 예정된 사람이다’,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로 이루어진다’, ‘감사하면 더 큰 감사의 일이 일어난다’는 흐름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신적 섭리’, ‘인간의 자유’, ‘허용’, ‘예정’은 이 설교의 신학과 상당히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차이를 살펴보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는 고백을 유지하면서도 어떻게 운명론에 빠지지 않고, 동시에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온전히 보존할 수 있는지가 훨씬 선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4, 기드온의 300, ‘두려움본능’, 그리고 하나님께 쓰임 받는다는 것

먼저 한 가지 바로잡고 이어가겠습니다. 3부 끝에서 제가 다음 4부를 ‘예정과 섭리’의 문제로 예고했는데, 다시 이번 영상 원문 자체를 따라가 보니 그것은 앞선 여호수아 설교의 내용이 일부 섞여 들어간 것이었습니다. 이번 영상의 실제 후반부 중심은 예정론이 아니라 ‘기드온의 300명’, ‘두려움’, ‘본능에 굴복하지 않는 사람’, ‘우상숭배’, 그리고 이어지는 천국·지옥과 입신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이번 4부부터는 현재 영상의 실제 흐름에 맞추어 해설하겠습니다. 이번 설교에서는 기드온의 군대가 3만 2천 명에서 1만 명, 다시 300명으로 줄어드는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등장합니다. 설교자는 ‘두려워하는 사람은 돌아가라’는 말씀에서 두려움은 사탄이 주는 것이며, 삶의 전쟁에서 두려워하면 이길 수 없다고 강조합니다. 이어 물가에서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신 사람과 손으로 물을 떠 핥아 마신 사람을 구별하면서, 전자는 ‘본능에 굴복한 사람’, 후자는 총사령관 기드온의 명령을 살피는 사람으로 해석합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본능에 굴복하지 않는’ 300명을 사용하셨다는 것이 설교의 핵심입니다.

 

이 대목에는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상당히 중요한 영적 직관이 들어 있습니다. 무엇보다 ‘사람이 많다고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점입니다. 기드온의 군대가 줄어드는 이유를 성경 자체가 분명하게 밝힙니다. 이스라엘이 승리한 뒤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고 자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설교자도 이 말씀을 읽습니다. 여기서 가장 먼저 나타나는 영적 원리는 ‘인간의 힘을 비우고 주님의 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신학과 매우 깊이 만납니다. 인간에게서 나오는 proprium은 선을 행하고도 그것을 자기 공로로 돌리고, 진리를 알고도 자기 지혜라고 여기며, 승리하고도 ‘내가 했다’고 생각하려 합니다. 거듭남은 바로 이 proprium이 점차 내려가고,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실제 삶에서 인정하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기드온의 300명 이야기를 가장 깊은 곳에서 읽으면 핵심은 ‘정예 소수의 강한 전사’가 아닙니다. 오히려 ‘내 힘으로 이겼다고 말할 수 없게 되는 상태’입니다. 사람이 많을수록, 조직이 클수록, 영향력이 커질수록 인간은 자기 능력을 신뢰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때때로 인간의 힘이 충분하지 않다고 느껴지는 상태까지 허용하십니다. 그래야 사람이 자기 힘이 아니라 주님의 힘을 의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영적 시험에서도 똑같습니다. 처음에는 ‘나는 이것쯤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반복해서 넘어지면서 마침내 ‘나는 주님 없이는 이 악을 이길 수 없습니다’라는 상태에 도달합니다. 바로 그때부터 진짜 영적 전투가 시작됩니다.

 

이 점에서 기드온의 300명은 광화문의 ‘천만 명’이라는 숫자와도 흥미롭게 대비됩니다. 설교 앞부분에서는 ‘10월 3일에는 천만 명이 모여야 한다’고 거듭 강조합니다. 많은 사람이 모이는 것은 정치집회라는 자연적 차원에서는 당연히 의미가 있습니다. 시민운동은 숫자로 영향력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기드온의 영적 원리와 연결한다면 오히려 숫자의 크기는 하나님의 역사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기드온 이야기는 정반대로 ‘숫자를 줄이시는 하나님’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 중요한 것은 군중의 크기가 아니라 그 안에서 누가 참으로 주님을 의지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광화문에 천만 명이 모인다고 해서 그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 입증되는 것도 아니고, 몇백 명밖에 모이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의 일이 아닌 것도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대형교회라고 하나님의 임재가 더 강한 것도 아니고 작은 교회라고 더 순수한 것도 아닙니다. 외적인 규모는 영적 상태를 직접 보여 주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의 판단 기준은 언제나 ‘사랑의 질’과 그 사랑에서 나온 진리와 쓰임입니다. 수백만 명이 한목소리를 내더라도 그 안에 자기 의와 증오가 지배할 수 있고, 아주 적은 수의 사람들이라도 겸손과 체어리티 속에서 주님의 뜻을 행할 수 있습니다.

 

설교자가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길 수 없다’, ‘두려움은 사탄이 주는 것’이라고 말한 부분도 조금 세밀하게 나누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영적 전투에서 두려움이 사람을 마비시키는 경우는 분명히 있습니다. 악한 영들은 사람에게 절망을 불어넣고 ‘너는 절대로 이길 수 없다’, ‘하나님은 너를 버렸다’, ‘모든 것이 끝났다’는 생각을 주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을 신뢰함으로 두려움을 넘어서는 것은 중요한 신앙의 태도입니다. 기드온 자신도 처음에는 두려워했고, 미디안을 피해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주님께서 ‘큰 용사여’라고 부르신 것은 현재의 모습보다 그 안에서 주님께서 이루실 가능성을 보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두려움을 ‘사탄이 주는 것’이라고 단정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두려움에는 여러 종류가 있기 때문입니다. 양심에서 오는 두려움도 있고, 위험을 감지하는 자연적 두려움도 있으며,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려는 경외심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전쟁터에서 총탄을 두려워하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병을 두려워하거나 가족의 안전을 걱정하는 것도 인간의 자연적 감정입니다. 중요한 것은 두려움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그 두려움이 나를 무엇으로 이끄는가’입니다. 두려움 때문에 거짓말을 하고 악을 행한다면 문제가 되지만,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주님을 신뢰하고 옳은 일을 선택한다면 오히려 그것이 용기입니다.

 

참된 용기는 두려움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두려움이 있는데도 선과 진리를 선택하는 상태입니다. 기드온도 처음부터 무서움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표징을 여러 번 요구했고, 밤에 바알의 제단을 헐었으며, 미디안 진영에 내려갈 때도 하나님께서 그의 두려움을 아시고 종을 데리고 내려가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드온 이야기를 ‘두려워하면 하나님께 쓰임 받지 못한다’로만 읽으면 정작 기드온 자신의 모습과도 맞지 않습니다. 주님은 두려움이 전혀 없는 사람만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 가운데서도 주님의 말씀을 따라 한 걸음을 내딛는 사람을 변화시켜 사용하십니다.

 

이것은 목회적으로도 중요한 차이입니다. 교회 안에서 ‘두려움은 마귀가 주는 것이다’라는 말이 너무 강하게 사용되면, 실제로 불안하고 두려운 사람은 두 번 고통받을 수 있습니다. 상황 자체 때문에 힘든 데다가 ‘내가 두려워하니 믿음이 없는가 보다’라는 죄책감까지 갖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겟세마네의 주님께서 극심한 고뇌를 겪으신 것처럼, 인간이 느끼는 두려움 자체를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두려움 속에서 누구를 붙들 것인가를 보십니다. 그러므로 ‘두려운 마귀는 물러가라’는 선언보다 더 깊은 신앙의 언어는 ‘주님, 제가 두렵습니다. 그러나 이 두려움 속에서도 주님을 의지하여 선을 선택하게 해주십시오’일 수 있습니다.

 

이제 더 중요한 것은 물을 마시는 300명에 대한 해석입니다. 설교자는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신 사람을 ‘본능에 굴복한 사람’으로 보고, 손으로 물을 떠 개처럼 핥은 사람은 기드온의 눈치를 보고 명령을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본능에 굴복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사용하지 않는다’는 원리를 끌어냅니다. 금식하라고 하면 배고픔이라는 본능을 이기고 금식해야 한다는 적용까지 이어집니다.

 

이 해석은 설교적으로는 매우 기억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본문 자체가 ‘무릎을 꿇은 사람은 본능에 굴복했고, 손으로 물을 떠 마신 사람은 기드온의 명령을 주시했다’고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설교자가 본문에 부여한 해석입니다. 그러므로 이를 하나님의 말씀 자체와 동일하게 받아들이기보다 하나의 적용으로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기드온의 눈치를 본 사람’이라는 설명이 자칫 ‘지도자의 명령을 잘 살피고 즉시 복종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정예병’이라는 메시지로 이어진다면 더욱 신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이 궁극적으로 순종해야 할 분은 인간 지도자가 아니라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영적 지도자와 목회자는 사람을 자기에게 묶어 두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으로 인도하는 사람입니다. 목회자의 말이 말씀과 진리에 부합할 때 따를 수 있지만, 그가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모든 판단에 복종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의 자유와 이성은 주님께서 주신 것이며, 주님은 그것을 파괴하지 않으십니다.

 

이 설교에서는 기드온을 ‘기름부음을 세게 받은 사사’라고 설명하면서 300명의 선택을 기드온의 영적 분별력과 연결합니다. 그러나 사사기 7장의 본문 자체에서는 선택의 주체가 기드온의 특별한 직감이라기보다 하나님입니다. ‘거기서 내가 너를 위하여 그들을 시험하리라’고 말씀하시는 분은 여호와이십니다. 따라서 이 장면의 중심은 ‘기름부음 받은 지도자가 충성스러운 사람을 골라낸다’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의 자랑을 제거하시고 당신의 목적에 맞는 도구를 선택하신다’에 있습니다. 이 차이는 작아 보이지만 매우 중요합니다.

 

특히 종교와 정치가 강하게 결합된 집단에서는 ‘지도자의 명령을 주시하는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위험하게 작동할 수 있습니다. 지도자가 자신을 하나님의 사명을 받은 기드온과 같은 사람으로 이해하고, 구성원들이 ‘기드온의 300용사’라고 자신을 이해하기 시작하면 지도자의 판단에 대한 비판이나 질문이 신앙의 부족처럼 느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본능에 굴복하지 말라’, ‘지도자의 명령을 주시하라’, ‘우리는 300용사다’라는 말들이 서로 결합하면 강력한 결속력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천국의 질서는 맹목적인 결속이 아니라 자유 가운데 이루어지는 선과 진리의 결합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천국에는 강제가 없습니다. 천사들은 주님의 뜻에 놀랍도록 순종하지만 그 순종은 두려움에 의한 복종이 아닙니다.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유롭게 순종합니다. 천국에서는 ‘해야 하니까 한다’는 상태보다 ‘그것이 선하기 때문에 하고 싶다’는 상태가 더 높습니다. 그러므로 지상 교회도 사람을 강한 지도자 아래 복종시키는 방향보다, 각 사람이 말씀을 이해하고 선을 사랑하여 자유롭게 행하도록 돕는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300명의 ‘본능에 굴복하지 않음’을 어떻게 영적으로 읽을 수 있을까요? 스베덴보리의 언어로 옮기면 여기에는 충분히 좋은 적용 가능성이 있습니다. 자연적 욕구가 영적 질서를 지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먹고 싶은 욕구, 성적 욕망, 돈과 명예에 대한 욕망, 안전하려는 욕구 자체가 모두 악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주님의 선과 진리보다 위에 올라갈 때 문제가 됩니다. 배고픔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라 배고픔 때문에 양심을 버리는 것이 문제이고, 재물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라 재물을 주님과 이웃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 점에서 설교는 곧바로 우상숭배 문제로 넘어갑니다. 바알과 아세라, 아스다롯 등을 언급한 뒤 ‘육신의 우상만 우상이 아니고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영적 우상이다’, ‘세상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면 두 마음을 품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이 부분은 이번 설교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매우 가까이 만나는 대목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상숭배의 핵심을 외적 형상보다 ‘사랑의 질서’에서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영적 우상은 돌이나 나무로 만든 신상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지배적 사랑이 주님의 자리를 차지하면 그것이 우상이 됩니다. 재물이 우상이 될 수 있고, 명예가 우상이 될 수 있으며, 권력이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가족도, 교회도, 국가도, 심지어 ‘진리’라고 내가 믿는 교리나 신학도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 자체가 악해서가 아니라 주님보다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할 때 그렇습니다.

 

여기서 이번 설교 전체에 아주 중요한 질문을 되돌려 적용할 수 있습니다. 설교자는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지 말라’고 매우 강하게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 기준은 정치에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합니다.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것이 선한 애국심일 수 있지만, 대한민국이 주님의 자리를 차지하면 국가도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자유민주주의를 귀하게 여길 수 있지만 그것을 천국 자체와 동일시하면 정치체제도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공산주의를 경계할 수 있지만 ‘공산주의를 물리치는 것’이 복음의 목적보다 더 중심이 되면 반공주의조차 신앙의 자리를 점유할 수 있습니다. 특정 목회자나 정치지도자를 주님의 특별한 종으로 존중할 수 있지만 그의 판단을 말씀보다 높은 권위로 받아들이면 사람도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가진 날카로움입니다. 이 렌즈는 언제나 설교자가 다른 사람에게 적용한 말씀을 먼저 설교자와 우리 자신에게 되돌려 줍니다. ‘제사하지 마라’, ‘세상을 우상으로 섬기지 마라’고 말할 때 우리는 ‘그러면 나는 무엇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가?’라고 물어야 합니다. 그것이 돈일 수도 있지만 정치적 승리일 수도 있습니다. 자녀일 수도 있지만 교회 성장일 수도 있고, 명예일 수도 있지만 ‘내가 옳다는 확신’일 수도 있습니다.

 

특히 ‘나라가 망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두려움이 신앙을 지배하기 시작하면 국가의 안위가 인간의 영원한 구원보다 더 큰 문제가 되는 역전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나라가 매우 중요하지만 주님의 나라는 한 국가의 운명보다 큽니다. 초대교회는 로마제국 안에서 박해를 받았지만 주님의 나라는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북한처럼 종교의 자유가 극도로 억압되는 곳에서도 주님께서는 사람의 내면에 접근하실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국가의 자유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어떠한 국가도 하나님의 구원을 좌우하는 궁극적인 권세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지 말라’는 설교자의 말은 오히려 이번 예배 전체에 던져진 매우 강력한 자기검증의 말씀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유대한민국을 사랑하지만 주님보다 사랑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광화문 운동을 귀하게 여기지만 그것을 교회 자체와 동일시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어떤 지도자를 존경하지만 그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 사이의 거룩한 간격을 보존하고 있는가?’ ‘우리는 공산주의를 악이라고 판단하면서도 그 악과 싸우는 과정에서 미움 자체를 사랑하게 된 것은 아닌가?’

 

여기서 ‘두 마음’의 문제는 더욱 깊어집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 안의 갈등은 단순히 ‘하나님을 사랑할 것인가 세상을 사랑할 것인가’라는 외적 선택만이 아닙니다. 사람은 겉으로 하나님을 위한다고 말하면서 속으로 자기 명예와 지배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교회 일을 열심히 하면서도 그 일을 통해 인정받기를 원할 수 있고, 나라를 위해 헌신한다고 하면서 자기 진영이 승리하는 데서 쾌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외적 행위는 똑같아도 그 안의 목적이 다르면 영적 성질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기드온의 300명 이야기를 ‘선택받은 정예집단’이라는 쪽으로만 읽기보다 ‘자기 힘을 내려놓는 사람’의 이야기로 읽는 편이 더 안전하고 깊습니다. 300명이라는 적은 숫자는 ‘우리가 특별히 선택받았다’는 선민의식을 만들어내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너희가 이긴 것이 아니다’라는 말씀을 새기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군대를 줄이신 이유가 바로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는 자긍을 막기 위해서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누군가 자신을 ‘기드온의 300용사’라고 부르고 싶다면, 첫 번째 표지는 용맹이나 지도자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자랑하지 않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나라를 살렸다’보다 ‘주님께서 허락하셨다’가 되어야 하고, 더 나아가 ‘우리도 틀릴 수 있다’는 겸손이 있어야 합니다. 승리했을 때 반대편을 조롱하는 것이 아니라 더 두려운 마음으로 자신의 악을 살펴야 합니다. 이것이 기드온 300명의 본래 문맥에 훨씬 가까운 태도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정치운동을 하는 신앙인에게 아주 중요한 영적 질문 하나가 나옵니다. ‘내가 싸우는 대상이 사라진 뒤에도 나는 주님을 똑같이 사랑할 것인가?’ 공산주의가 사라지고, 내가 반대하던 정치인이 모두 물러나고, 내가 원하는 정치체제가 완벽하게 세워졌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때 내 신앙은 더 깊어질까요? 아니면 싸울 적이 없어져 신앙의 열기도 함께 식을까요? 만일 후자라면 그동안 나를 움직인 가장 깊은 사랑이 주님이 아니라 ‘적과 싸우는 열정’이었을 가능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천국에는 우리가 지상에서 그렇게 격렬하게 싸우던 정당도, 선거도, 국가 간 대립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영원히 남습니다. 그러므로 지상에서의 모든 싸움은 결국 그 영원한 사랑을 준비하는 쓰임이 되어야 합니다. 나라를 지키는 일도, 교회를 지키는 일도, 진리를 변증하는 일도 그것을 통해 내가 더 겸손하고 정직하고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 가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만일 ‘승리’를 거듭할수록 더 거칠고, 더 교만하고, 더 미워하고, 더 쉽게 거짓을 믿는 사람이 되어 간다면 외적 승리와 내적 승리는 서로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번 기드온 이야기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붙잡아야 할 중심이라고 생각합니다. ‘큰 용사’란 두려움을 전혀 느끼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두려움 가운데서도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300용사’란 지도자의 말에 무조건 복종하는 정예조직이 아닙니다. 자기 힘을 자랑하지 않고 주님에게서 오는 힘을 의지하는 사람의 상태를 생각하게 합니다. ‘본능을 이긴다’는 것은 육체의 모든 욕구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 욕구를 영적 질서 아래 두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상을 버린다’는 것은 제사상만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돈과 권력, 국가와 정치이념, 지도자와 자기 확신까지도 주님의 자리에는 올려놓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드온의 300명이 우리에게 가장 깊이 묻는 말은 아마 이것일 것입니다. ‘너는 무엇과 싸우고 있느냐?’보다 먼저 ‘그 싸움 속에서 누구를 의지하고 있느냐?’입니다. 내 힘인가, 사람의 숫자인가, 강한 지도자인가, 정치적 조직인가, 아니면 주님인가. 그리고 이어서 ‘그 싸움 때문에 너는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느냐?’입니다. 더 선하고 더 진실하고 더 겸손하고 더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 간다면 그 싸움은 주님의 질서 아래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반대로 더 교만하고 더 증오하고 더 잔인해지고 있다면, 밖의 적과 싸우는 동안 내 안의 미디안에게 땅을 빼앗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번 영상의 다음 흐름은 여기서 아주 흥미롭게 바뀝니다. 설교자는 ‘세상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라’, ‘우리는 하늘나라를 바라보고 살아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천국, 죽음, 순교, 입신, 면류관, 하늘의 집, 그리고 ‘천국은 일곱 군데, 지옥은 여섯 군데’라는 매우 구체적인 사후세계 설명으로 넘어갑니다. 실제로 원고에서도 ‘세상은 잠시 왔다 가는 안개와 같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바라봐야 한다’, ‘땅에는 부자로 살아도 희망이 없다’는 고백에 이어 천국과 지옥의 구조에 대한 체험적 주장까지 펼쳐집니다.

 

그리고 바로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직접 비교해 볼 수 있는 매우 흥미로운 대목입니다. 설교자의 ‘입신’과 천국 체험 이해는 스베덴보리가 수십 년 동안 기록한 영계의 질서와 어디에서 만나고 어디에서 크게 달라지는지, ‘예수 안 믿는 사람은 다 지옥 간다’는 말은 스베덴보리의 이방인의 구원 이해와 어떻게 다른지, ‘천국 일곱 군데·지옥 여섯 군데’라는 구조는 스베덴보리의 세 천국과 무수한 공동체 이해와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면류관을 크게 받을 것 같다’는 상급 이해 속에 proprium의 문제는 없는지를 5부에서 본격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5, 천국과 지옥, 입신과 면류관, 그리고 예수 안 믿으면 다 지옥 간다는 말

이번 5부는 앞선 1~4부와 조금 다른 성격을 가집니다. 지금까지는 나라, 정치, 공산주의, 기드온, 영적 전쟁 같은 주제가 중심이었다면, 후반부에서는 설교의 초점이 갑자기 ‘죽음 이후의 세계’로 이동합니다. 설교자는 ‘이 세상은 잠시 왔다 가는 안개와 같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한 뒤, 한 신자의 ‘입신’ 경험과 면류관, 황금마차, 천국과 지옥의 구조를 상세히 이야기합니다. 이어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다 지옥 간다’, ‘지옥은 여섯 군데’, ‘천국은 일곱 군데’라고 단정하고, 그 근거 가운데 하나로 자신의 입신 경험을 제시합니다. 실제 원고에도 ‘내가 입신을 해봐서 다 알아요’라는 표현이 분명히 나옵니다.

 

먼저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설교자가 이 세상의 삶을 궁극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천국을 바라보도록 회중을 이끄는 점입니다. ‘땅에는 잘 살아도 못 살아도 부자로 살아도 아무 희망이 없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바라봐야 한다’는 말은 세상과 재물을 최종 목적으로 삼지 말라는 강한 권면입니다. 앞부분에서 나라와 정치 이야기가 매우 큰 비중을 차지했던 것과 비교하면 오히려 여기서는 시선이 다시 영원한 삶으로 올라갑니다. ‘돈 갖고도 못 간다’, ‘벼슬로도 못 간다’, ‘거듭나야 가는 나라’라는 찬송도 같은 방향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출발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이 세상은 영원한 목적지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지상의 삶이 하찮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 세상은 사람이 자기의 영원한 사랑을 형성하는 결정적인 장입니다. 사후에 사람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형성된 지배적 사랑을 가지고 영계로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버리고 천국만 바라보라’보다 더 정확한 말은 ‘이 세상의 모든 일을 천국을 준비하는 방식으로 살라’가 됩니다. 가정도, 직장도, 정치적 책임도, 재물도 버릴 대상이 아니라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쓰임의 자리입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만일 세상이 단지 ‘헛된 곳’이고 천국만이 진짜라고 생각하면, 현실의 책임을 가볍게 여기거나 고난을 피하기 위해 천국을 도피처처럼 바라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자연계는 영계를 준비하는 학교이자 작업장과 같습니다. 사람이 여기서 자유롭게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실제 행위와 습관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천국은 이 세상을 버린 사람이 가는 곳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천국적 사랑을 자기 생명으로 만들어 간 사람이 들어가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설교는 곧 ‘입신’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한 신자가 죽음을 시도한 뒤 새벽기도에 참석했고, 하늘에서 빛과 면류관과 황금마차가 내려오는 것을 보았으며, 그 면류관이 결국 그 사람에게 맞았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후 두 번째 입신에서 지옥에 있는 사람을 보았다는 간증도 이어집니다. 이런 종류의 체험담은 한국 교회 안에서도 오랫동안 존재해 왔고, 천국과 지옥을 실재로 받아들이는 데 강한 영향을 주어 왔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런 체험담을 처음부터 거짓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영계가 열리고 천사와 영들과 교통하며 천국과 지옥의 상태를 보았다고 기록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누군가 영적 체험을 말했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비성경적이라고 잘라내는 방식은 스베덴보리의 경험과도 맞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체험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체험이 주님의 질서와 진리에 부합하는가’, ‘그것이 사람을 어떤 사랑과 삶으로 이끄는가’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기록을 읽다 보면 영계에서 보이는 많은 것들이 단순한 물리적 사물이 아니라 내적 상태의 ‘상응’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집, 옷, 빛, 정원, 보석, 왕관 같은 것들은 그 사람의 사랑과 지혜, 선과 진리의 상태와 상응하여 나타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누군가 영적 체험 중에 ‘면류관’을 보았다고 할 때, 그것을 자연계의 왕관 하나가 하늘 어딘가에서 실제로 내려와 머리에 씌워지는 사건처럼만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면류관은 진리를 따라 선을 행하고 시험을 이긴 결과의 상태를 표상할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설교자의 ‘나는 애국운동을 했기 때문에 면류관을 크게 받을 것 같다’는 말은 조심스럽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은 농담과 확신이 섞인 표현으로 보이지만, 영적으로는 매우 민감한 지점입니다. 천국의 상급은 내가 얼마나 큰 일을 했는가에 대한 자기평가로 결정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특히 스베덴보리에게 공로를 자기에게 돌리는 마음은 천국적 사랑과 반대 방향으로 갑니다. 선을 행한 천사는 ‘내가 이 선을 행했다’고 생각하지 않고,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왔음을 인정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일을 많이 했으니 큰 면류관을 받을 것이다’라는 생각은 바로 proprium이 들어오기 쉬운 자리입니다. 실제로 기드온 300명의 이야기에서도 하나님께서 군대를 줄이신 이유는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고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원리를 천국의 상급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내가 나라를 위해 이만큼 했으니 상급이 클 것이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나 같은 사람을 쓰임에 사용해 주셨다면 그것 자체가 은혜다’라는 태도가 더 천국적입니다.

 

천국의 면류관은 자기 공로를 확인해 주는 훈장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이 자기 공로를 내려놓고 주님에게서 받은 선과 진리를 사랑하게 된 상태의 표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면류관을 많이 받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보다, 자기가 받을 면류관이 있는지조차 생각하지 않고 자기에게 맡겨진 쓰임을 기쁨으로 행하는 사람이 오히려 천국의 정신에 더 가까울 수 있습니다.

 

이후 설교는 더욱 직접적인 천국·지옥 구조론으로 나아갑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다 지옥 간다’, ‘지옥은 여섯 군데’, ‘천국은 일곱 군데’라고 말합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와 매우 큰 차이를 보입니다.

 

먼저 ‘천국은 일곱 군데, 지옥은 여섯 군데’라는 식의 고정된 숫자 구조는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영계와 맞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을 크게 세 천국, 곧 천적 천국, 영적 천국, 자연적 천국으로 구분하지만, 그 안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공동체가 존재한다고 설명합니다. 사람들은 각자의 지배적 사랑과 선과 진리의 상태에 따라 자신과 상응하는 공동체로 모입니다. 지옥도 마찬가지입니다. 몇 개의 고정된 구획으로 단순히 나뉘는 것이 아니라 악과 거짓의 종류에 따라 무수한 사회와 공동체가 있습니다.

 

따라서 ‘천국 일곱 곳, 지옥 여섯 곳’이라는 숫자를 영계의 객관적인 지리처럼 가르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영계는 자연계처럼 지도로 나눌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상태에 따라 장소처럼 보이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말씀에서 ‘일곱’은 거룩함, 완전함, 충만함 등을 표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문자적으로 ‘천국에 일곱 개 구역이 있다’고 바꾸면 상응의 의미가 자연적 숫자로 굳어집니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다 지옥 간다’는 주장입니다. 이것은 전통적 복음주의 안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표현이지만, 스베덴보리의 구원 이해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교회 밖의 사람, 곧 기독교를 알지 못했던 이방인이라고 해서 자동으로 지옥에 가는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들이 자기 종교 안에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양심에 따라 선하게 살았으며, 자신이 아는 진리에 충실했다면 사후에 천국의 진리를 가르침 받고 받아들일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라는 이름을 자연계에서 들었느냐’보다 그 사람이 실제로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인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구원의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스베덴보리가 이방인의 구원을 말한다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 없이도 다른 종교가 독립적으로 구원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주님에게서 옵니다. 다만 주님께서 구원하시는 방식이 인간이 생각하는 교회적 경계보다 훨씬 넓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기독교를 한 번도 제대로 접하지 못했지만, 자기가 알고 있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정직하고 자비롭게 살고 이웃을 사랑했다면 그 안의 선은 궁극적으로 주님에게서 온 것입니다. 사후에는 그 사람이 진리를 더욱 온전히 배울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입으로 ‘예수 믿는다’고 고백하면서 실제 삶에서는 증오와 탐욕과 지배욕을 사랑했다면 그 외적 고백만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결합’입니다. 신앙은 입술의 고백이나 교리의 동의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 진리가 삶의 선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 믿느냐 안 믿느냐’를 단 하나의 외적 표지처럼 사용하여 천국과 지옥을 즉시 나누는 것은 인간의 내적 상태를 지나치게 단순화할 위험이 있습니다.

 

이 점을 이번 설교의 정치적 맥락과 함께 생각하면 더욱 중요합니다. 앞에서는 자유대한민국과 공산주의라는 외적 구분이 매우 강하게 나타났고, 이제 후반에서는 ‘예수 믿는 사람’과 ‘예수 안 믿는 사람’이라는 또 하나의 강한 이분법이 등장합니다. 이런 이분법은 사람들에게 명료함과 확신을 줍니다. ‘우리와 저들’, ‘천국과 지옥’, ‘자유와 공산’, ‘믿는 자와 안 믿는 자’가 분명하게 나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영계 이해는 훨씬 섬세합니다. 주님은 사람을 외적 집단의 이름보다 내적 사랑의 상태로 보십니다.

 

그렇다고 선과 악의 구분이 흐려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더 엄격해집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과 지옥은 실제로 존재하며, 사람은 결국 어느 한쪽을 자기 사랑으로 선택합니다. 그러나 그 선택을 판별하는 기준은 ‘어느 교회 명부에 이름이 있었는가’, ‘어느 정치진영에 속했는가’, ‘어떤 문장을 입으로 고백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사랑했고 그 사랑을 어떻게 살았는가입니다.

 

이것은 구원에 관한 우리의 태도도 크게 바꿉니다. ‘저 사람은 예수 안 믿으니 지옥 간다’라고 쉽게 말할 수 없게 됩니다. 주님만이 그 사람의 내면 전체를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할 수 있고 주님을 증언해야 하지만, 사람의 최종 운명을 미리 판결하는 권한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오히려 ‘저 사람이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나는 어떤 체어리티를 보여야 하는가’를 묻게 됩니다.

 

설교에서는 또 ‘하늘나라에서도 기도한다’는 말이 나옵니다. 죽은 장로가 며느리를 하늘나라로 불러 달라고 기도했다는 간증을 통해, 천국에 있는 사람들이 지상의 사람들을 위해 기도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부분도 세밀하게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영계에서는 사후에도 인간의 인격과 사랑, 관심이 계속되며 천사들은 인간을 돕는 주님의 섭리에 참여합니다. 따라서 천국 존재들이 지상 인간의 선을 원하고 주님의 뜻에 따라 돕는다는 생각 자체는 낯설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죽은 사람이 특정한 가족을 하늘나라로 불러 달라고 계속 기도해서 입신이 일어났다’는 구체적인 설명은 그 체험담 자체에 의존하는 주장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기준으로 보면 천국의 천사들은 독립적으로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거나 자기 뜻대로 누군가를 영계 체험에 불러들이는 존재가 아닙니다. 모든 인도는 주님에게서 옵니다. 천사는 주님의 선과 진리가 흘러가는 도구입니다. 그러므로 천국 존재를 거의 중보적 권능을 가진 존재처럼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하늘에 있는 집’에 대한 설교자의 설명은 흥미로운 접점도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의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을 읽으면서 ‘이게 상상입니까, 실제입니까?’라고 묻고 실제라고 강조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천국에 집과 도시와 길과 정원 같은 것들이 실제로 보이고 경험된다고 기록합니다. 천사들은 추상적인 구름 속에 떠다니는 존재가 아니라 공동체를 이루고 생활합니다. 이런 점에서 설교자의 ‘천국도 실제 세계다’라는 직관은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가까운 부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다시 상응이 중요합니다. 천국의 집은 자연계의 건축물처럼 인간이 재산으로 소유하는 부동산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천사의 내적 상태와 상응하여 나타나는 환경입니다. 선과 지혜의 상태가 바뀌면 외적인 환경도 그 상태와 상응하여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천국에 좋은 집을 얻는다’는 것도 자연계의 부동산 사고방식으로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천국에서의 ‘좋은 집’은 더 큰 평수나 더 많은 황금보다 더 깊은 사랑과 지혜의 상태를 뜻합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면류관, 황금마차, 천국의 집을 하나의 원리로 묶어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영계에서는 외적으로 보이는 것들이 내적 상태를 드러냅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보았느냐’보다 ‘그것이 어떤 영적 상태와 상응하느냐’입니다. 영적 체험을 자연계처럼 문자적으로만 설명하면 그 체험은 쉽게 호기심의 대상이 됩니다. ‘천국에 뭐가 있더라’, ‘지옥이 몇 층이더라’, ‘면류관 크기가 어떻더라’가 중심이 됩니다. 그러나 상응을 이해하면 질문이 바뀝니다. ‘그 집은 어떤 사랑을 나타내는가’, ‘그 빛은 어떤 진리를 나타내는가’, ‘그 면류관은 어떤 승리의 상태를 나타내는가’가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영계 기록과 일반적인 천국·지옥 간증 사이에서 자주 나타나는 중요한 차이입니다. 일반 간증은 흔히 ‘내가 무엇을 보았다’가 중심이 되지만, 스베덴보리는 ‘왜 그것이 그렇게 보이는가’를 계속 설명합니다. 영계의 외적 형상이 인간의 사랑과 생각과 어떻게 상응하는지를 밝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영계 설명은 단순한 관광기나 체험담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 대한 거대한 해설이 됩니다.

 

이 원리를 이번 설교에도 적용하면, ‘입신을 했으니 사실이다’라는 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설교자는 ‘내가 입신을 해봐서 다 안다’고 말하지만 , 영적 체험도 분별이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무엇인가 보였다는 사실과 그 사람이 그것을 정확하게 해석했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꿈을 꾸었다는 것과 그 꿈의 의미를 정확히 안다는 것이 다른 것과 같습니다. 영적 체험이 강할수록 오히려 겸손이 필요합니다. ‘나는 이렇게 보았다’와 ‘그러므로 영계는 객관적으로 반드시 이렇게 되어 있다’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에게도 이 점이 중요했습니다. 그의 핵심은 ‘나는 보았으니 무조건 믿으라’가 아니라, 자신이 본 것들을 말씀의 속뜻과 상응의 질서, 사랑과 지혜의 구조 안에서 설명했다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누군가 천국과 지옥을 체험했다고 주장할 때도 그 체험의 권위보다 그것이 주님과 말씀의 질서에 얼마나 부합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문제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천국을 왜 원하는가’입니다. 설교에서는 천국을 사모하고 이 세상을 헛되게 여기며 죽음 이후를 준비하라고 강하게 권합니다. 이것은 귀한 권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천국에 가고 싶어 하는 것과 천국의 삶을 사랑하는 것을 구별하게 합니다. 사람은 고통이 없는 곳, 아름다운 집, 면류관과 상급이 있는 곳이기 때문에 천국을 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자기 사랑일 수 있습니다.

 

참으로 천국을 사랑한다는 것은 천국의 ‘환경’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천국의 ‘사랑’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의 선을 기뻐하며 쓰임을 행하고 자기 공로를 주장하지 않는 삶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만일 사람이 천국의 황금집과 면류관은 원하면서 이웃을 용서하는 것은 싫어하고, 자기 의견을 내려놓는 것은 싫어하며, 상대를 사랑하는 것은 싫어한다면 그는 천국의 장소를 원할지는 몰라도 천국의 상태를 사랑하는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천국에 가고 싶습니까?’보다 더 깊은 질문은 ‘천국의 사랑으로 살고 싶습니까?’입니다. ‘지옥에 가기 싫습니까?’보다 더 깊은 질문은 ‘지옥을 이루는 자기애와 지배욕과 증오를 지금 버리고 싶습니까?’입니다. 사후의 장소는 결국 지금 형성되는 사랑의 상태와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설교 후반부의 천국과 지옥 이야기는 단순히 틀렸다고 밀어낼 필요도 없고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도 없습니다. ‘천국과 지옥은 실제다’, ‘이 세상만이 전부가 아니다’, ‘거듭남이 필요하다’,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해서는 안 된다’, ‘천국을 사모해야 한다’는 중심에는 매우 중요한 신앙적 진리가 있습니다. 반면 ‘예수 안 믿는 사람은 모두 지옥’, ‘천국은 일곱 곳, 지옥은 여섯 곳’, ‘입신했으니 내가 안다’, ‘내 애국운동 때문에 큰 면류관을 받을 것이다’ 같은 표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상당한 수정과 분별이 필요합니다.

 

더 깊은 천국의 복음은 이렇습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 하십니다. 어느 누구도 지옥을 위해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천국은 특정 종교집단에 주어지는 외적 특권이 아니라 주님의 선과 진리가 사람의 사랑과 삶이 된 상태입니다. 지옥도 하나님께서 사람을 밀어 넣는 형벌장이 아니라 사람이 끝까지 붙든 악한 사랑과 거짓이 형성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천국의 상급은 자기 공로의 보상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더 깊이 사랑하고 더 넓은 쓰임을 기쁨으로 행하는 능력 그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을 바라보는 사람일수록 이 세상에서 더 겸손해야 합니다. 사후세계에 대해 많이 안다고 생각할수록 더욱 조심스럽게 말해야 하고, 자신이 구원받았다고 믿을수록 다른 사람의 구원을 더 넓게 바라보아야 하며, 면류관을 기대하기보다 자기에게 맡겨진 작은 쓰임을 충실히 행해야 합니다. ‘나는 천국에 갈 사람이고 저 사람은 지옥에 갈 사람’이라고 사람을 나누기보다, ‘오늘 내 안에서 천국의 사랑이 자라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이렇게 보면 이번 영상의 정치적 전쟁과 천국·지옥 이야기가 사실 하나의 지점에서 만납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어느 편에 서 있는가’보다 ‘어떤 사랑 안에 있는가’입니다. 자유대한민국 편에 서 있다고 해서 자동으로 천국적이지 않고,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자동으로 천국적이지 않으며, 광화문에 나갔다고 해서 자동으로 하나님의 편도 아닙니다. 반대로 그 어느 것도 자동으로 지옥적인 것도 아닙니다. 주님은 그 모든 외적 표지 너머에서 인간의 지배적 사랑을 보십니다.

 

그래서 이 긴 설교 전체를 지나오며 마지막에 남는 질문은 의외로 정치적인 질문이 아닐 수 있습니다. ‘나는 누구를 지지하는가?’가 아니라 ‘나는 무엇을 사랑하는가?’입니다. ‘나는 어느 진영에 속하는가?’가 아니라 ‘나의 기쁨은 무엇에서 오는가?’입니다. 상대가 망할 때 기쁜가, 아니면 그 사람도 진리와 선으로 돌아오기를 원하는가. 내가 옳다는 것이 증명될 때 기쁜가, 아니면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기쁜가. 내가 큰 상을 받는 것이 기쁜가, 아니면 주님의 나라에서 쓰임을 행하는 것 자체가 기쁜가.

 

이 질문 앞에서는 전광훈 목사도, 광화문에 모인 어르신들도, 그들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그리고 이 설교를 듣고 해설하는 우리도 모두 같은 자리에 섭니다. 누구도 자기 진영의 이름으로 천국을 소유할 수 없고, 누구도 다른 사람의 최종 운명을 판결할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각 사람의 내면을 아시며, 우리의 모든 역사와 상처와 신앙과 정치적 열정 속에서도 끝까지 하나의 목적, 곧 우리를 지옥의 사랑에서 건져 천국의 사랑으로 이끄시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번 설교를 마무리하며 붙들 수 있는 말은 이것일 것입니다. ‘천국은 우리가 죽은 뒤 찾아가야 할 일곱 번째 장소가 아니라, 오늘부터 주님과 이웃을 사랑함으로 우리 안에 형성되어야 할 삶의 상태입니다. 지옥 역시 먼 훗날 떨어질 어느 여섯 번째 구덩이보다, 지금 내가 자기애와 증오와 지배욕을 사랑할 때 이미 내 안에서 형성되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을 준비한다는 것은 죽음을 기다리는 일이 아니라 오늘의 사랑을 거듭나게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아마 이것이 이 영상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깊은 분별점일 것입니다. ‘나라를 지키는가’보다 더 깊게는 ‘나라를 지키는 동안 내 영혼을 지키고 있는가’, ‘진리를 외치는가’보다 더 깊게는 ‘그 진리가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있는가’, ‘천국을 사모하는가’보다 더 깊게는 ‘천국의 사랑을 지금 살고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이 세 질문을 놓치지 않는다면, 정치적으로 아무리 격렬한 시대를 살아가더라도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우리를 특정 진영이 아니라 주님의 시선으로 계속 돌려놓을 수 있을 것입니다.

 

 

 

SY.54, 전광훈 목사, 20260809, ‘자유통일을 위한 120만 광화문 전국 주일 연합예배’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설교의 성경적 출발점은 사사기 3장 1절의 매우 인상적인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에게 ‘전쟁을 가르쳐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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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https://youtu.be/ycpr_QuUjbc?si=heNUWptbnsCcOZsH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동방정교회에 전해 내려오는 ‘시오도르’ 수도사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영상 소개문 역시 이를 ‘동방 정교회의 성스러운 전설 중 하나인 시오도르의 일화’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다만 이 이야기는 동방교회의 여러 여성 수도 성인 전승, 특히 남장을 하고 남자 수도원에서 수도생활을 하다가 임신에 관한 누명을 쓰고, 죽은 뒤에야 여성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마리나 또는 테오도라 계열의 성인전과 매우 유사합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역사적 인물을 섣불리 특정하기보다, 영상이 부르는 대로 ‘시오도르’라고 하면서 이 이야기가 전하려는 수도적 의미 자체를 살펴보는 편이 안전하겠습니다.

 

이야기는 어머니의 죽음에서 시작합니다. 아내를 잃은 아버지는 재혼하지 않고 수도원에 들어가 하나님께 자신의 남은 생애를 드리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딸에게는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든지, 수녀원에 들어가 수도생활을 하든지 선택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딸은 어느 쪽도 원하지 않고 아버지와 함께 살기를 원합니다. 남자 수도원에 여성이 들어갈 수 없으므로 결국 딸은 남장을 하고 남자 수도사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렇게 ‘시오도르’의 수도생활이 시작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여기서 먼저 생각하게 되는 것은 수도생활의 외적 형식과 내적 본질의 차이입니다. 수도복을 입고 수도원에 들어가는 것은 외적인 선택입니다. 그러나 거듭남은 장소와 옷과 생활양식이 아니라 사람의 사랑이 변화되는 일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떠나 깊은 산속 수도원에 들어갔다고 해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까지 수도원 밖에 두고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수도원에 들어가지 않고 가정과 직장과 사회 안에서 살아도 자기 안의 악을 죄로 여기며 피하고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그는 내적으로 거듭남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시오도르가 ‘수도원에 들어갔다’는 사실 자체보다 그곳에서 어떤 사람이 되어 갔는가입니다.

 

시오도르는 수도원에서 다른 수도사들과 함께 생활합니다. 수도원이 깊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한 달에 한 번 몇 명의 수도사가 며칠씩 걸리는 시장으로 내려가 식량을 구해 왔다고 합니다. 시오도르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일을 잘했기 때문에 이 일에 자주 뽑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시장으로 내려갔던 수도사들이 묵었던 여관 주인의 딸이 임신하게 되고, 그 딸은 수도사 가운데 한 사람이 자신을 임신시켰다고 주장합니다. 수도원장은 식량을 사러 갔던 수도사들을 불러 누가 그런 일을 했는지 추궁하지만 아무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바로 여기서 이야기의 중심 사건이 일어납니다. 아무도 나서지 않자 수도원장은 관련된 수도사들을 모두 추방하려 하고, 그러자 시오도르가 자신이 그 일을 했다고 나섭니다. 실제로는 여성이므로 그 아이의 아버지일 수 없지만, 다른 수도사들이 함께 벌을 받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이 죄를 지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 결과 다른 수도사들은 수도원으로 돌아가고 시오도르만 추방되어 수도원 문밖에서 오랫동안 참회의 생활을 하게 됩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바로 이 장면을 매우 깊은 자기희생으로 바라봅니다. 자신이 짓지 않은 죄를 뒤집어쓰고 다른 사람들을 살린 사람, 자신의 명예와 억울함을 내려놓고 묵묵히 고통을 감수한 수도자의 모습입니다. 인간의 자연적인 마음은 억울한 일을 당하면 본능적으로 자신을 변호합니다. 특히 하지 않은 일을 했다고 누명을 쓰면 더욱 그렇지요. 그런데 시오도르는 오히려 자기에게 있지도 않은 죄를 인정합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오랫동안 수도 전통 안에서 극단적인 겸손과 자기 부정의 한 모습으로 전해졌을 것입니다.

 

여기에는 분명 아름다운 면이 있습니다. 만일 영상이 전하는 것처럼 시오도르가 다른 수도사들이 모두 추방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의 명예를 희생했다면, 그 행동에는 자기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특히 자신이 무고하다는 사실을 이용하여 다른 사람보다 우월한 위치에 서려 하지 않고 오히려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갔다는 점은 깊이 생각할 만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체어리티 역시 자기의 유익보다 이웃의 참된 유익을 사랑하는 데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 감동적인 장면 앞에서도 한 가지 중요한 구별을 요구합니다. ‘자신이 하지 않은 일을 했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과연 선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선과 진리는 서로 떨어질 수 없습니다. 천국적인 삶은 선만 있는 삶도 아니고 진리만 있는 삶도 아니라, 선과 진리가 결합된 삶입니다. 아무리 선한 의도에서 시작되었다 하더라도 거짓을 사실이라고 말하는 행위를 그 자체로 영적 완성의 표준으로 삼기는 어렵습니다.

 

시오도르가 침묵하거나 거짓된 죄를 인정함으로써 다른 수도사들은 구제를 받았지만, 동시에 수도원장은 거짓된 정보를 진실로 믿게 되었습니다. 공동체 역시 무고한 사람을 죄인으로 알고 살게 되었고, 실제로 책임져야 할 사람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피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억울해도 참는다’는 것과 ‘진실을 감춘다’는 것은 언제나 동일한 선이 아닙니다. 때로는 침묵이 사랑일 수 있지만, 때로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 더 큰 사랑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신앙생활에도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교회 안에서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믿는 사람은 참아야 한다’, ‘예수님도 변명하지 않으셨다’, ‘겸손한 사람은 자기를 변호하지 않는다’는 말을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절대적인 영적 원칙으로 만들면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어떤 불의나 거짓이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피해를 주고 있다면 진실을 밝히는 것이 오히려 체어리티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체어리티는 악을 방치하는 것이 아니며, 진리를 희생하여 평화를 유지하는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참된 겸손은 ‘무조건 내가 잘못했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한 것이 있다면 인정하고, 하지 않은 일이라면 하지 않았다고 말하면서도 상대방을 미워하지 않는 것이 더 어려운 겸손일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겸손의 핵심은 자기 자신을 거짓되게 낮추는 데 있지 않고, 자기에게 있는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인정하는 데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는 말을 많이 하는 것이 겸손이 아니라, 실제로 선한 일을 하고도 그것을 자기 공로로 돌리지 않는 것이 더 깊은 겸손입니다.

 

시오도르에게 내려진 벌도 매우 가혹합니다. 그는 수도원 밖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며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죄를 지었다고 고백해야 했다고 영상은 전합니다. 겨울의 추위와 여름의 더위를 견디면서 수도원 문밖에서 참회의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다시 수도원 안으로 받아들여진 뒤에도 조용히 수도생활을 계속합니다.

 

수도 전통에서는 이런 장면이 인간의 자기 부정과 인내를 극적으로 보여 줍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고통의 양 자체가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얼마나 춥게 살았는가, 얼마나 굶었는가, 얼마나 오랫동안 모욕을 견뎠는가가 영적 상태를 직접 결정하지 않습니다. 고통은 때로 proprium을 깨뜨리는 수단이 될 수 있지만, 고통 자체가 선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고통 가운데 사람의 사랑이 어떻게 변화되는가입니다.

 

더욱 인상적인 것은 시오도르가 자신에게 씌워진 누명 때문에 생겨난 아이와 관련된 책임까지 감당한다는 전승입니다. 여기에서는 이야기가 한층 더 깊어집니다. 그 아이는 아무 죄가 없습니다. 어른들의 거짓과 욕망 때문에 태어났지만 아이 자신에게 책임은 없습니다. 만일 시오도르가 그 아이를 받아 돌보았다면,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오히려 이 부분이 이야기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 가운데 하나일 수 있습니다. 자기를 모함한 사람에게 복수하는 대신 그 사건으로 가장 약한 처지에 놓인 생명을 돌보았기 때문입니다.

 

체어리티는 관념이 아니라 쓰임으로 나타납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느끼는 것만으로 체어리티가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 사람에게 필요한 선을 행할 때 체어리티가 삶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를 먹이고 돌보고 키우는 일은 수도원의 극단적인 고행보다 오히려 훨씬 평범하면서도 깊은 체어리티일 수 있습니다. 특별한 기적이나 영적 체험이 아니라 매일 한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고, 씻기고, 보호하고, 책임지는 반복적인 쓰임 속에서 사랑이 실제 삶이 되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시오도르는 죽습니다. 수도사들이 장례를 준비하기 위해 시신을 씻기려다가 그제야 그가 여성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영상은 전합니다. 그 순간 그동안의 모든 오해가 풀립니다. 아이의 아버지가 될 수 없는 사람이 그 모든 누명과 벌을 말없이 감당했다는 사실이 비로소 밝혀지는 것입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바로 이러한 삶을 ‘사람 같지 않은 사람들의 삶’, 평범한 사람은 상상하기 어려운 성스러운 삶으로 바라봅니다.

 

그런데 이 장면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또 하나의 깊은 의미를 생각하게 합니다. 자연계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내면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외모와 행동과 소문과 평판을 보고 사람을 판단합니다. 그러나 영계에서는 외적인 것이 벗겨지고 그 사람의 실제 사랑과 의도가 드러납니다. 세상에서 죄인으로 알려진 사람이 주님 앞에서는 전혀 다른 사람일 수 있고, 반대로 세상에서 거룩한 사람으로 존경받던 사람이 영계에서는 전혀 다른 내면을 드러낼 수도 있습니다. 사람의 참된 상태는 결국 주님만이 아십니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의 마지막은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진다’는 교훈보다 더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는가?’보다 ‘주님 앞에서 나는 실제로 어떤 사람인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평판을 관리할 수 있고 자신의 이야기를 아름답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배적인 사랑은 숨길 수 없습니다. 사후에는 자신이 무엇을 사랑했으며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가 드러납니다. 그런 의미에서 수도의 핵심도 결국 외적인 수도복이나 고행이 아니라 주님 앞에서의 내적 진실성입니다.

 

여기에서 강문호 수도사의 ‘사람 같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표현도 조금 다듬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수도자의 목표는 인간을 초월하여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남은 오히려 사람이 더 참된 인간이 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지배될수록 인간다운 질서는 무너지고,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회복될수록 사람은 창조된 본래의 인간다움으로 돌아갑니다. 천사조차 인간과 전혀 다른 종류의 존재가 아니라 지상에서 인간으로 살다가 거듭나 영계에서 천사가 된 사람입니다.

 

따라서 수도자의 위대함은 ‘보통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얼마나 많이 했는가’로 측정할 수 없습니다. 가장 오래 금식한 사람, 가장 오랫동안 침묵한 사람, 가장 큰 누명을 참은 사람이 자동으로 가장 거룩한 것은 아닙니다. 한 사람이 가정에서 배우자를 오래 참고 사랑하고, 자녀를 책임지고, 직장에서 정직하게 일하며, 자신에게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하고,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삶 역시 주님 앞에서는 매우 깊은 수도가 될 수 있습니다. 수도의 외적 형태는 서로 달라도 거듭남의 본질은 같습니다.

 

특히 이 이야기를 잘못 받아들이면 ‘억울해도 말하지 않는 것이 높은 영성’이라는 결론으로 흐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진실을 말해야 다른 사람이 보호받을 수 있고 공동체의 악이 중단될 수 있다면 침묵은 더 이상 체어리티가 아닐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자기 명예를 지키기 위해 싸우기를 원하시는 것도 아니지만, 거짓을 거짓이라고 말하지 않기를 원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선은 진리와 함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오도르의 행동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누명을 쓰면 침묵하라’가 아닙니다. 더 깊은 것은 ‘자기 명예를 최고의 선으로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진실을 밝혀야 한다면 밝히되 자기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상대를 파괴하려 하지 않고, 침묵해야 한다면 침묵하되 그것을 자기 의나 영적 우월감으로 만들지 않는 것입니다. 어느 경우든 중심에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의 선과 진리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이 이야기는 proprium의 문제와도 만납니다. 인간의 proprium은 억울한 일을 당하면 즉시 ‘내가 옳다’, ‘내가 인정받아야 한다’, ‘저 사람이 잘못했다’는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그런데 proprium은 반대편에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억울한데도 참고 있다’, ‘나는 남의 죄까지 짊어지는 사람이다’라는 영적 자기 의 역시 proprium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자기 부정은 자신을 높이는 것도 아니고 자신을 낮추는 모습을 통해 다시 자신을 높이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 자신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주님과 이웃의 선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시오도르 이야기에서 가장 귀하게 남는 것은 극단적인 고행보다 ‘자기 자신을 중심에 놓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옳다는 것을 세상에 증명하는 데 생을 소비하지 않았고, 자신에게 닥친 고통 속에서도 다른 사람을 증오하는 삶으로 빠져들지 않았으며, 자신에게 맡겨진 약한 생명을 돌보았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 안에는 분명 체어리티의 향기가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 아름다운 전승을 그대로 영적 규범으로 만들기보다 선과 진리의 결합이라는 기준으로 다시 바라보게 합니다. 침묵도 진리를 위한 침묵이어야 하고, 희생도 선을 위한 희생이어야 하며, 겸손도 주님을 높이는 겸손이어야 합니다. 고통 자체가 사람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 가운데서도 주님의 질서에 따라 사랑하고 진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사람을 거듭나게 합니다.

 

그래서 이 수도사 이야기를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시오도르의 아름다움은 자신이 하지 않은 죄를 뒤집어쓴 사실 자체에 있다기보다, 자기 명예를 삶의 중심에 놓지 않고 억울함 속에서도 증오와 복수에 자신을 내어주지 않으며 가장 약한 존재를 돌보는 삶을 살았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을 더 보태고 싶습니다. ‘참된 수도는 자기를 무조건 낮추는 데 있지 않고, 자기가 높아지든 낮아지든 그것에 붙들리지 않은 채 주님의 선과 진리가 요구하는 것을 행하는 데 있습니다.’ 그것이 수도원 안에서든 가정과 직장과 세상 한복판에서든, 어쩌면 주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바라시는 가장 깊은 ‘내적 수도’일 것입니다.

 

 

 

SY.66, 강문호 목사, ‘아토스 수도 자치국’ (20191212)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은 어떤 수도사의 일화를 중심으로 하기보다, 강문호 목사님이 왜 수도원을 공부하게 되었고, 그 가운데 특히 아토스산 수도 공동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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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0.심화

 

5. ‘17:15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17:15)

 

 

AC.340에서 스베덴보리가 출17:15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를 인용한 이유는 앞서 이스마엘, 르우벤, 시므온, 유다의 이름을 인용한 이유와 기본적으로 같습니다. 고대에는 어떤 새로운 사건이나 상태가 나타났을 때, 그 의미와 성질을 이름에 담아 표현했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다만 앞의 네 사례가 모두 사람의 이름’이었다면, 이번에는 제단의 이름’을 예로 듭니다. 따라서 이 마지막 사례는 이름에 의미를 담는 고대의 방식이 사람에게만 적용된 것이 아니라 사물이나 장소에도 적용되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17의 배경은 이스라엘과 아말렉의 전쟁입니다. 여호수아가 아말렉과 싸우는 동안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겼으며, 아론과 훌이 모세의 손을 붙들어 마침내 이스라엘이 승리합니다. 그 후 모세는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고 합니다. ‘여호와 닛시’는 여호와는 나의 깃발’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모세가 제단에 아무 의미 없이 하나의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니라, 그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신 분이 여호와이심을 그 이름에 담아 나타낸 것입니다.

 

여기서 AC.340의 논점은 여호와 닛시’의 속뜻 자체를 깊이 해설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주목하는 것은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했다’는 명명의 방식입니다. 어떤 중요한 일이 일어나고, 그 일의 의미를 하나의 이름으로 표현하여 기억하고 나타내는 것입니다. 앞에서 사람에게 이름을 붙일 때 보았던 것과 같은 원리가 이번에는 제단에도 적용됩니다.

 

이 사례가 특별히 중요한 이유는 이름’의 의미를 단순한 개인 이름의 어원 문제로 한정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마엘, 르우벤, 시므온, 유다까지만 예로 들었다면 성경 시대에는 아이가 태어났을 때 출생 상황에 맞추어 이름을 지었구나 정도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마지막에 사람도 아닌 제단’을 가져옵니다.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것을 여호와 닛시’라고 한 것입니다. 이로써 이름은 단순한 사람의 호칭을 넘어 어떤 대상의 성질과 의미, 그와 관련된 상태를 표현하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그리고 이것이 다시 가인’이라는 이름을 이해하는 열쇠가 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본래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을 사랑 안에서 퍼셉션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신앙에 속한 것들을 따로 구별하여 하나의 신앙의 교리로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전에는 마음에 새겨져 있던 것이 이제는 지식으로 아는 것이 되었고, 그들은 그것을 마치 새로운 무엇을 발견하고 얻은 것처럼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 상태를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고 표현하고, 그렇게 나타난 신앙의 교리를 가인’이라고 한 것입니다.

 

따라서 여호와 닛시’와 가인’이 같은 것을 의미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두 이름의 속뜻을 서로 연결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비교하는 것은 오직 이름을 붙이는 방식’입니다. 모세가 여호와께서 승리하게 하신 일을 나타내기 위해 제단에 여호와 닛시’라는 이름을 붙였듯이, 태고인들도 새롭게 나타난 어떤 교리와 상태의 성질을 이름에 담아 표현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AC.340에 나온 사례들을 한꺼번에 놓고 보면 스베덴보리의 논증 방식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하갈의 고통을 여호와께서 들으셨다’는 것을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에 담았고, 레아의 괴로움을 여호와께서 보셨다’는 것을 르우벤’이라는 이름에 담았으며, 자신이 사랑받지 못함을 여호와께서 들으셨다’는 것을 시므온’이라는 이름에 담았습니다. 또한 이번에는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는 상태를 유다’라는 이름에 담았고, 아말렉과의 싸움에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깃발이 되어 주셨다는 사실을 제단의 이름 여호와 닛시’에 담았습니다. 그리고 같은 원리에 따라, 태고교회에서 신앙의 교리를 마치 새롭게 얻은 것처럼 여긴 상태를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가인’이라고 한 것입니다.

 

특히 출17:15의 사례는 바로 앞 AC.339와 연결해서 읽을 때 더욱 의미가 있습니다. AC.339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인들이 이름을 붙이고, 그 이름으로 어떤 것들을 나타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AC.340에서는 실제 말씀 안에서 이름이 어떻게 그런 역할을 하는지 여러 사례를 들어 보여 줍니다. ‘여호와 닛시’는 그 가운데 마지막 사례로서, 이름이 단순한 사람의 호칭이 아니라 어떤 영적 의미를 담아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이었다는 사실을 더욱 넓게 확인시켜 줍니다.

 

그러므로 출17:15 AC.340에서 인용한 이유를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모세가 아말렉과의 싸움에서 나타난 여호와의 도우심과 승리를 제단의 이름에 담아 여호와 닛시’라고 한 것처럼, 고대인들은 어떤 새로운 일이나 상태가 나타나면 그 성질을 이름에 담아 표현했습니다. 따라서 가인’이라는 이름 역시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는 말로 표현된 태고교회의 어떤 상태와 교리의 성질을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마지막 사례에는 한 가지 중요한 효과가 있습니다. ‘가인’이라는 이름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가인이라는 역사적 개인이 왜 그런 이름을 얻었는가?’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제단도 여호와 닛시’라는 이름을 통해 그와 관련된 상태와 의미를 나타낼 수 있었듯이, 태고인들은 교회에 속한 어떤 교리나 영적 상태에도 이름을 붙여 그 성질을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AC.339에서 설명한 창4의 계보를 이해하는 방식과 정확히 이어집니다.

 

결국 여호와 닛시’는 AC.340에 나온 여러 예 가운데 마지막이면서,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가장 넓게 열어 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름은 단지 사람을 부르는 호칭이 아니라 어떤 것의 성질과 상태를 담아 나타낼 수 있다.’ 이 원리를 확인하고 다시 창4로 돌아가면, ‘가인’은 단순한 이름이 아니라 태고교회 안에서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에 속한 것들을 따로 구별하여 교리로 만들고, 그것을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인식하고 인정하기 시작한 변화를 담아 나타내는 이름이라는 AC.340의 설명이 훨씬 자연스럽게 이해됩니다.

 

 

 

AC.340, 창4:1,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창4:1) AC.340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I have gotten a man, Jehov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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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0, 심화 4, ‘창29:35’

AC.340.심화 4. ‘창29:35’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가 그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출산이 멈추었더라 (창29:35) AC.340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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