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And Cain talked to Abel his brother; and it came to pass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hat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r, and slew him. 9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And Jehovah said to Cain, Where is Abel thy brother? And he said, I know not, am I my brother’s keeper? (창4:8-9)
AC.329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 신앙을 체어리티보다 앞세운 사람들한테서 체어리티가 소멸된 것을,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죽인 것’(Cain slaying his brother Abel)이라고 합니다. (8-9절) That charity was extinguished in those who separated faith, and set it before charity, is described by “Cain slaying his brother Abel.” (verses 8–9)
해설
AC.329는 지금까지 이어져 온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마침내 결정적인 지점에 도달했음을 보여 줍니다. AC.325에서는 사랑에서 신앙이 분리되어 ‘가인’이 되었고, 체어리티는 ‘아벨’이라 불렸습니다. AC.326에서는 이 분리가 예배에 나타나 ‘가인의 제물’과 ‘아벨의 제물’로 드러났으며, AC.327에서는 분리된 신앙에 속한 사람들의 상태가 악해져 가인의 ‘분함’과 ‘안색이 변함’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AC.328에서는 아직 마지막 가능성이 남아 있었습니다. 신앙이 자신을 주된 것으로 삼아 체어리티보다 높이지 않는다면, 체어리티는 여전히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AC.329에서는 그 질서가 끝내 회복되지 못하고, 신앙이 자신을 체어리티보다 앞세운 결과 체어리티 자체가 ‘소멸’되는 단계에 이릅니다. 이것이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죽였다’는 말씀의 속뜻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사용하는 ‘extinguished’라는 표현을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죽였다’는 창세기의 형제 살인 사건을 속뜻으로는 ‘체어리티가 소멸되었다’고 설명합니다. 불이 꺼지듯 체어리티의 생명이 꺼진 것입니다. 따라서 아벨의 죽음은 단순히 악한 신앙이 선한 체어리티를 공격했다는 정도가 아니라, 교회 안에서 체어리티가 더 이상 살아 있는 원리로 작용하지 못하게 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신앙에 관한 교리는 여전히 남아 있을 수 있고, 예배도 계속될 수 있으며, 하나님에 관한 말도 계속할 수 있지만, 그 안에서 이웃 사랑이라는 생명이 사라진 것입니다.
특히 AC.329는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것’과 ‘신앙을 체어리티보다 앞세운 것’을 구별하여 함께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첫 번째 단계는 ‘분리’입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본래 하나였는데 그것을 서로 떼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분리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일단 둘을 분리하면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하는 문제가 생기고, 마침내 신앙을 체어리티보다 ‘앞세우게’ 됩니다. 본래 사랑과 선을 섬겨야 할 신앙과 진리가 오히려 주된 자리를 차지하고, 체어리티는 부차적인 것으로 밀려납니다. 바로 이 질서의 전도가 결국 아벨의 죽음으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의 핵심은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앞섰다’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앞섰다’는 것은 단순히 순서를 먼저 두었다는 뜻이 아니라, 무엇이 교회의 본질이며, 무엇이 주된 것인가 하는 자리의 문제입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질서에서는 사랑이 생명이었고, 신앙은 그 사랑에서 나왔습니다. 선이 먼저이고, 진리는 그 선의 형체였습니다. 그런데 가인에게서는 이 질서가 뒤집혔습니다. 신앙이 스스로 주된 것이 되고, 체어리티는 그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체어리티는 처음에는 부차적인 것이 되고, 다음에는 불필요한 것이 되며, 마침내 완전히 사라집니다. 이것이 ‘아벨을 죽였다’는 말씀이 보여 주는 영적 과정입니다.
이 점에서 창4의 살인은 창4:8에서 갑자기 시작된 사건이 아닙니다. 이미 AC.325에서 사랑과 신앙이 분리되는 순간부터 아벨의 죽음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분리는 예배의 분리로 이어졌고, 예배의 분리는 사람의 내적 상태를 악하게 만들었으며, 그 악한 상태에서 신앙은 자신을 체어리티보다 높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창4의 몇 절 안에서 읽어 내는 것은 단순한 범죄의 진행이 아니라 교회가 영적으로 죽어 가는 과정입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다시 ‘신앙은 나쁘고, 체어리티만 중요하다’고 이해하면 AC.329의 핵심을 놓치게 됩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언제나 ‘separated faith’, 곧 ‘분리된 신앙’입니다. AC.328에서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고 한 것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아벨은 가인을 없애려 하지 않았습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을 배척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앙과 체어리티가 결합할 때, 교회의 생명이 이루어집니다. 문제는 가인이 아벨을 자신의 형제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을 그보다 앞세운 데 있습니다. 따라서 참된 회복은 가인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가인과 아벨의 본래 질서, 곧 신앙과 체어리티의 결합을 회복하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아우 아벨’이라는 표현도 의미심장합니다. 문자적으로 아벨은 가인의 동생이지만, 속뜻으로도 체어리티가 신앙보다 열등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AC.328-329의 설명에서는 체어리티가 주된 것이며, 신앙은 체어리티에 종속되어야 합니다. 말씀의 문자적 출생 순서와 영적 우선순위가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닙니다. 가인이 먼저 등장한다고 해서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본질적으로 앞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바로 그 신앙이 자신을 ‘앞세웠을’ 때 영적 질서가 뒤집히고, 체어리티가 소멸되었습니다.
창4:9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는 주님의 질문도 이러한 맥락에서 매우 깊어집니다. 주님께서 아벨의 위치를 모르셔서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이 질문은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에게 ‘너희 안의 체어리티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시는 말씀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신앙도 있고, 교리도 있고, 예배도 있는데, 그 신앙이 낳아야 할 이웃 사랑은 어디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가인의 대답인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는 이후 AC에서 더 자세히 다루겠지만, 이미 체어리티에 대한 책임 자체를 부인하는 상태가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심화
1. ‘아벨의 죽음’은 교회 안에서 어떻게 일어나는가?
AC.329를 오늘의 신앙생활에 비추어 보면, ‘아벨을 죽인다’는 것은 반드시 어떤 사람이 노골적으로 사랑과 선행을 반대한다고 선언하는 데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훨씬 미묘하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올바른 신앙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이것은 맞는 말입니다. 다음에는 ‘올바른 신앙이 가장 중요하다’고 합니다. 여기서부터 조심해야 합니다. 그다음에는 ‘올바르게 믿는다면 삶은 그다음 문제다’라고 생각하게 되고, 마침내 ‘구원은 신앙의 문제이므로 체어리티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라고 여기게 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아벨의 생명이 꺼지기 시작합니다.
더 무서운 것은 아벨이 죽은 뒤에도 가인은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즉 체어리티가 소멸된 뒤에도 신앙의 교리는 계속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AC.329가 보여 주는 매우 엄중한 영적 현실입니다. 교회가 체어리티를 잃었다고 해서 곧바로 모든 종교적 활동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교리도 남아 있고, 예배도 남아 있고, 신앙고백도 남아 있으며, 성경에 관한 많은 지식도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외적으로는 교회가 여전히 활발해 보이는데, 그 안에서 아벨만 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말하지만, 서로 사랑하지 않고, 진리를 말하지만, 그 진리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며, 신앙을 지킨다고 하면서, 자기 의와 자기 우월성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는 질문은 시대를 넘어 모든 교회와 모든 신앙인에게 향하는 질문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네가 고백하는 신앙이 어디 있느냐?’가 아니라 ‘그 신앙 안의 체어리티가 어디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말씀을 많이 읽었는데, 그 말씀으로 인해 이웃을 더 사랑하게 되었는가, 교리를 깊이 알게 되었는데, 그 지식 덕분에 더 겸손해졌는가, 예배를 오래 드렸는데, 그 예배로 인해 악을 더 미워하고, 선을 더 사랑하게 되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이러한 열매가 바로 AC.328에서 말한 ‘신앙의 질’을 드러냅니다.
동시에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이나 다른 교회를 ‘가인’이라고 지목하기 전에, 먼저 자기 안을 살피게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속뜻은 언제나 우리 자신의 거듭남에 적용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옳은 것을 알고 있다’는 만족이 ‘나는 그것을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밀어내는 순간, 우리 안에서도 가인이 아벨보다 높아질 수 있습니다. 내가 가진 진리가 나를 더 사랑하게 하고, 더 겸손하게 만드는 대신,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나의 옳음을 증명하는 수단이 된다면, 가인의 원리가 이미 작용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결국 AC.325에서 AC.329까지는 하나의 연속적인 영적 과정을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사랑과 신앙의 분리’였고, 다음에는 ‘예배의 분리’, 이어서 ‘내적 상태의 악화’, 그리고 ‘신앙을 체어리티보다 높이는 질서의 전도’가 일어났으며, 마침내 ‘체어리티의 소멸’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이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죽였다’는 말씀의 속뜻입니다. 그러므로 창4의 첫 살인은 단순히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의 육체적 생명을 빼앗은 이야기를 넘어, 교회 안에서 진리가 선과 분리되고, 신앙이 사랑보다 높아질 때, 마침내 교회의 참된 생명인 체어리티가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보여 주는 매우 깊은 영적 역사입니다.
AC.328, 창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If thou doest well, art thou not exalted? And if thou doest not well,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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