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1:20)

 

AC.40

 

물들이 번성하게 하는 것들(creeping things which the waters bring forth)은 겉 사람에 속한 기억-지식을 뜻하고, ‘새들(birds)은 일반적으로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을 뜻하는데, 이 가운데 지적인 것들은 속 사람에 속합니다. ‘물 속에서 돌아다니는 것들(creeping things of the waters), 곧 ‘물고기들(fishes)이 기억-지식을 뜻한다는 사실은 이사야를 보면 분명합니다. By the “creeping things which the waters bring forth” are signified the memory-knowledge which belong to the external man; by “birds” in general, rational and intellectual things, of which the latter belong to the internal man. That the “creeping things of the waters,” or “fishes,” signify memory-knowledges is plain from Isaiah:

 

2내가 왔어도 사람이 없었으며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음은 어찌 됨이냐 내 손이 어찌 짧아 구속하지 못하겠느냐 내게 어찌 건질 능력이 없겠느냐 보라 내가 꾸짖어 바다를 마르게 하며 강들을 사막이 되게 하며 물이 없어졌으므로 그 물고기들이 악취를 내며 갈하여 죽으리라 3내가 흑암으로 하늘을 입히며 굵은 베로 덮느니라 (50:2, 3) I came and there was no man; at my rebuke I dry up the sea, I make the rivers a wilderness; their fish shall stink because there is no water and shall die for thirst; I clothe the heavens with blackness (Isa. 50:2–3).

 

[2] 그러나 이 의미는 에스겔을 보면 더 분명한데, 거기서 주님은 새 성전, 곧 일반적으로는 새 교회를, 그리고 교회에 속한 사람인 거듭난 사람을 묘사하십니다. 거듭난 사람은 누구나 주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But it is still plainer from Ezekiel, where the Lord describes the new temple, or a new church in general, and the man of the church, or a regenerate person; for everyone who is regenerate is a temple of the Lord:

 

8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쪽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되살아나리라 9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10또 이 강가에 어부가 설 것이니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곳이 될 것이라 그 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큰 바다의 고기 같이 심히 많으려니와 (47:8-10) The Lord Jehovih said unto me, These waters that shall issue to the boundary toward the east, and shall come toward the sea, being led into the sea, and the waters shall be healed;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every living soul that shall creep forth, whithersoever the water of the rivers shall come, shall live, and there shall be exceeding much fish, because those waters shall come thither, and they shall heal, and everything shall live whither the river cometh;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fishers shall stand upon it from En-gedi to En-eglaim, with the spreading of nets shall they be; their fish shall be according to its kind, as the fish of the great sea, exceeding many (Ezek. 47:8–10).

 

여기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의 어부들(Fishers from En-gedi unto En-eglaim)과 ‘그물 치는 것(spreading of nets)은 자연적인 사람을 신앙의 진리로 가르칠 사람들을 뜻합니다. Fishers from En-gedi unto En-eglaim,” with the “spreading of nets,” signify those who shall instruct the natural man in the truths of faith.

 

[3]새들(birds)이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을 뜻한다는 점도 선지자들을 보면 분명합니다. 이사야에 보면, That “birds” signify things rational and intellectual is evident from the prophets; as in Isaiah:

 

내가 동쪽에서 사나운 날짐승을 부르며 먼 나라에서 나의 뜻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 내가 말하였은즉 반드시 이룰 것이요 계획하였은즉 반드시 시행하리라 (46:11) Calling a bird from the east, the man of my counsel from a distant land (Isa. 46:11).

 

예레미야에서도 And in Jeremiah:

 

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4:25) I beheld and lo there was no man, and all the birds of the heavens were fled (Jer. 4:25).

 

에스겔서에서는 In Ezekiel:

 

22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백향목 꼭대기에서 높은 가지를 꺾어다가 심으리라 내가 그 높은 새 가지 끝에서 연한 가지를 꺾어 높고 우뚝 솟은 산에 심되 23이스라엘 높은 산에 심으리니 그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백향목이 될 것이요 각종 새가 그 아래에 깃들이며 그 가지 그늘에 살리라 (17:22, 23) I will plant a shoot of a lofty cedar, and it shall lift up a branch, and shall bear fruit, and be a magnificent cedar; and under it shall dwell every fowl of every wing, in the shadow of the branches thereof shall they dwell (Ezek. 17:22–23).

 

그리고 호세아에서는 새 교회, 곧 거듭난 사람에 대해 말하면서, And in Hosea, speaking of a new church, or of a regenerate man:

 

그날에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 하고 그들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2:18) And in that day will I make a covenant for them with the wild beast of the field, and with the fowls of heaven, and with the moving thing of the ground (Hos. 2:18).

 

여기서 ‘들짐승(wild beast)이 실제 짐승을 뜻하지 않고, ‘(bird)도 실제 새를 뜻하지 않는다는 점은, 주님께서 그것들과 ‘새 언약을 맺는다(make a new covenant)고 하는 것만 봐도 누구나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That “wild beast” does not signify wild beast, nor “bird” bird, must be evident to everyone, for the Lord is said to “make a new covenant” with them.

 

 

해설

 

이 글은 다섯째 날에 등장하는 생명체들이 인간의 거듭남 과정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매우 정밀하게 풀어 줍니다. 여기서 처음으로 ‘생명이 있는 것들’이 등장하지만, 그 생명은 무작위적인 생명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구조에 정확히 대응되는 생명입니다. 물 속 기는, 그러니까 돌아다니는 것들, 곧 물고기들은 겉 사람에 속한 기억-지식을 뜻하고, 새들은 이성적, 지적 작용을 뜻합니다.

 

먼저 ‘물들이 번성하게 하는 것들’이 기억-지식을 뜻한다는 설명은, 지식이 생겨나는 자리와 방식에 주목하게 합니다. 기억-지식은 겉 사람의 영역에 속하며, 외부 세계와의 접촉을 통해 축적됩니다. 그것은 물처럼 유동적이고, 방향이 정해지지 않으면 쉽게 썩거나 말라 버립니다. 이사야에서 바다가 말라 물고기가 죽는 장면은, 지식이 생명의 흐름과 분리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물이 없다는 것은 단순한 정보의 부족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의 유입이 끊어진 상태를 뜻합니다.

 

에스겔의 새 성전 환상은 이 의미를 한층 더 분명하게 합니다. 거기서 물은 성전에서 흘러나와 바다로 들어가고, 그 결과 바다가 치유되며 물고기가 넘쳐납니다. 이는 주님에게서 나오는 진리가 인간의 기억 영역으로 흘러들어 갈 때, 그 지식들이 비로소 살아난다는 뜻입니다. 물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많아진다는 표현은, 지식이 무질서하게 쌓이는 것이 아니라, 질서 안에서 분류되고 기능을 갖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특히 ‘어부들’과 ‘그물을 펼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상징입니다. 이는 단순한 전도가 아니라, 자연적인 사람, 곧 겉 사람을 신앙의 진리로 가르치는 사역을 뜻합니다. 어부는 바다에서 생명을 끌어올리는 사람이며, 그물은 진리를 질서 있게 적용하는 수단입니다. 여기서 기억-지식은 버려지거나 초월되는 것이 아니라, 가르침과 질서를 통해 생명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 글은 이어서 ‘새들’의 의미를 다룹니다. 새들은 물에서 나오지 않고 하늘을 날며, 이는 생각이 지식의 차원을 넘어 이성과 지성의 차원으로 올라간 상태를 뜻합니다. 이사야에 ‘동쪽에서 부르는 새’는 사랑의 근원에서 나오는 지적 인식을 뜻하며, 예레미야에서 새들이 날아가 버린 상태는 지성과 판단력이 사라진 황폐한 상태를 뜻합니다.

 

에스겔의 백향목 아래 깃드는 새들의 모습은, 진리의 질서가 세워질 때 지성과 이해가 그 안에서 안식을 얻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는 억지로 붙잡힌 생각이 아니라, 진리의 그늘 아래에서 자연스럽게 머무는 이해입니다. 호세아에서 들짐승과 새들과 기는 것들과 언약을 맺는 장면도 같은 맥락입니다. 주님은 인간 안의 모든 층위, 곧 감각적, 자연적, 지적 기능과 새 질서를 맺으십니다.

 

그래서 이 글은 강조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짐승과 새는 자연적 존재가 아닙니다. 만일 그것들이 문자 그대로의 동물이라면, 주님께서 그들과 언약을 맺으신다는 말은 성립할 수 없습니다. 이 언약은 인간 안의 생명 구조와 맺는 언약입니다.

 

AC.40은 다섯째 날의 생명이 단순한 ‘생물의 창조’가 아니라, 기억-지식과 지성의 생명화를 뜻한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지식은 버려지지 않고, 지성은 억제되지 않으며, 모든 것은 주님에게서 나오는 진리의 흐름 안에서 새롭게 살아납니다. 이 글은 신앙이 무지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참된 질서 안에서 지성과 지식을 되살리는 과정임을 깊이 있게 보여 줍니다.

 

 

 

AC.39, 창1:20,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AC.39-41)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And God said, Let the waters cause to creep forth the creeping thing, the living soul; and let fowl fly above the earth upon the f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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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And God said, Let the waters cause to creep forth the creeping thing, the living soul; and let fowl fly above the earth upon the faces of the expanse of the heavens. (1:20)

 

AC.39

 

큰 광명체들이 불이 붙어 속 사람 안에 놓이고, 겉 사람이 그 빛을 받게 되면, 그러면 사람은 비로소 살기 시작합니다. 그 이전까지는 그를 가리켜 거의 살아있다 할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그때는 그가 선을 행해도 그 선은 자기에게서 나온 걸로 알았고, 진리를 말해도 그 진리 역시 자기에게서 나온 거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상은, 사람이란 자기 자신으로서는 죽어 있으며, 그 안에는 악과 거짓밖에 없기 때문에, 자기에게서 나오는 건 그게 무엇이든 생명이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로부터는 그 자체로 선한 그런 선을 절대로 행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선한 것을 생각하거나, 선한 것을 원하거나, 따라서 선한 것을 행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주님에게서만 온다는 사실은, 신앙의 교리로 보아도 누구에게나 분명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마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After the great luminaries have been kindled and placed in the internal man, and the external receives light from them, then the man first begins to live. Heretofore he can scarcely be said to have lived, inasmuch as the good which he did he supposed that he did of himself, and the truth which he spoke that he spoke of himself; and since man of himself is dead, and there is in him nothing but what is evil and false, therefore whatsoever he produces from himself is not alive, insomuch that he cannot, from himself, do good that in itself is good. That man cannot even think what is good, nor will what is good, consequently cannot do what is good, except from the Lord, must be plain to everyone from the doctrine of faith, for the Lord says in Matthew:

 

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13:37) He that soweth the good seed is the son of man (Matt. 13:37).

 

또한 선은 오직 하나뿐인 참된 선의 근원에서만 올 수 있는데, 주님께서는 다른 곳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Nor can any good come except from the real fountain of good, which is one only, as he says in another place: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18:19) None is good save one, God (Luke 18:19).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사람을 다시 살리실 때, 곧 거듭남으로 생명으로 일으키실 때에는, 처음에는 사람이 자기가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한다고 생각하도록 허락하십니다. 이때 사람은 달리 생각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며, 그런 방식이 아니고서는 그를 이끌어 나중에 모든 선과 모든 진리가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믿고, 더 나아가 퍼셉션으로 알 수 있도록 인도하실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고 있는 동안, 그의 진리와 선은 ‘(tender grass), ‘씨 맺는 채소(herb yielding seed), 그리고 마지막으로 ‘열매 맺는 나무(tree bearing fruit)에 비유되는데, 이것들은 모두 생명이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가 사랑과 신앙으로 생명을 얻게 되고, 자기가 행하는 모든 선과 자기가 말하는 모든 진리가 주님께서 이루시는 것임을 믿게 되면, 그는 먼저 ‘물 속의 기는 것들(creeping things of the water)과 ‘땅 위를 나는 새들(fowls which fly above the earth)에 비유되고, 또한 ‘짐승들(beasts)에 비유되는데, 이것들은 모두 생명이 있는 것들이며, 이것들을 가리켜 ‘생물(living souls)이라고 합니다. Nevertheless when the Lord is resuscitating man, that is, regenerating him, to life, he permits him at first to suppose that he does what is good and speaks what is true from himself, for at that time he is incapable of conceiving otherwise, nor can he in any other way be led to believe, and afterwards to perceive, that all good and truth are from the Lord alone. While man is thinking in such a way his truths and goods are compared to the “tender grass,” and also to the “herb yielding seed,” and lastly to the “tree bearing fruit,” all of which are inanimate; but now that he is vivified by love and faith, and believes that the Lord works all the good that he does and all the truth that he speaks, he is compared first to the “creeping things of the water,” and to the “fowls which fly above the earth,” and also to “beasts,” which are all animate things, and are called “living souls.”

 

 

해설

 

이 글은 넷째 날 이후에 비로소 ‘생명’이 시작된다는 점을 인간의 거듭남 관점에서 분명히 밝힙니다. 앞선 단계들에서 사람은 빛을 받고, 선과 진리를 배우며, 겉으로는 신앙적이고 선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 상태를 아직 ‘살아있다’, 즉 ‘살아있는 상태’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 그 사람이 여전히 선과 진리의 근원을 자기 자신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단호하게 말합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으로서는 죽어 있으며, 그 안에는 악과 거짓밖에 없다고 말입니다. 이것은 인간을 비하하려는 표현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을 정확히 규정하는 말입니다. 생명은 주님에게서만 오기 때문에, 그 근원과 단절된 상태에서는 아무리 선해 보이는 행위도 본질적으로는 생명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는 참된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이 점은 성경 말씀으로도 확증됩니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이시며, 선한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라는 주님의 말씀은, 선과 진리의 근원이 인간이 아니라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들을 단순한 교리적 인용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구조를 설명하는 핵심 근거로 사용합니다.

 

그럼에도 이 글은 매우 중요한 전환을 보여 줍니다. 주님은 사람을 거듭남으로 이끄실 때, 처음부터 그에게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까 그런 성숙한 태도를 요구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이지요. 오히려 처음에는 사람이 자기가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한다고 생각하도록 허락하십니다. 이는 사람의 한계 때문이며, 동시에 주님의 지혜 때문입니다. 사람은 그런 단계가 아니고서는 다음 단계로 인도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상태에서 사람의 선과 진리는 연한 풀과 씨 맺는 채소, 그리고 열매 맺는 나무에 비유됩니다. 이것들은 성장과 생산성을 지니고 있지만, 아직 못 움직이는, 생명 없는 것들로 묘사됩니다. 이는 선과 진리가 아직 사랑과 신앙의 생명으로 살아 움직이지 않는 상태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 준비는 되었지만, 아직 불이 붙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러나 사랑과 신앙이 결합하고, 사람이 선과 진리의 주체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게 될 때는, 상황은 근본적으로 달라집니다. 그때부터 사람은 생명 있는 존재로 묘사됩니다. 물 속의 기는 것들, 하늘을 나는 새들, 그리고 짐승들은 모두 움직이고, 반응하고, 생명을 표현하는 존재들입니다. 이때 비로소 사람은 ‘생물(living souls)이 됩니다.

 

이 글은 거듭남이 단번에 이루어지는 사건이 아니라, 매우 섬세한 주님의 섭리 안에서 단계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임을 보여 줍니다. 사람의 오해조차도 주님은 사용하십니다. 자기가 선을 행한다고 생각하는 그 상태조차, 더 깊은 진리와 퍼셉션으로 이끌기 위한 통로가 됩니다. 그래서 이 글은 인간의 무능을 말하면서도, 동시에 주님의 자비와 지혜를 가장 깊이 드러내는 글입니다.

 

 

 

AC.38, 창1:18-19,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18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9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And to rule in the day, and in the night, and to distinguish between the 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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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9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And to rule in the day, and in the night, and to distinguish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ourth day. (1:18, 19)

 

AC.38

 

(day)은 선을, ‘(night)은 악을 뜻하며, 그래서 선(goods)을 가리켜서는 ‘낮의 일(works of the day)이라 하고, 악(evils)을 가리켜서는 ‘밤의 일(works of the night)이라 합니다. 또한 ‘(light)은 진리를, ‘어둠(darkness)은 거짓을 뜻합니다. 주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By the “day” is meant good, by the “night,” evil; and therefore goods are called works of the day, but evils works of the night; by the “light” is meant truth, and by the “darkness” falsity, as the Lord says:

 

19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1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3:19, 21) Men loved darkness rather than light. He that doeth truth cometh to the light (John 3:19, 21).

 

 

해설

 

이 글은 앞선 논의를 한 문장으로 응축한 핵심 정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스베덴보리는 낮과 밤, 빛과 어둠, 해와 달을 시간이나 자연 현상으로 읽지 말고, 인간 내면의 상태와 삶의 질서로 읽어야 한다고 반복해서 말해 왔습니다. AC.38은 그 모든 설명을 매우 간결한 대응 관계, 상응 관계로 정리합니다. 낮은 선이고, 밤은 악이며, 빛은 진리이고, 어둠은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선과 악이 추상적인 도덕 개념이 아니라, 실제로 ‘행위’로 드러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선을 가리켜서는 ‘낮의 일’이라 하고, 악은 ‘밤의 일’이라 합니다. 이는 사람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는 그가 무엇을 행하는지를 통해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낮에 속한 사람은 선을 행하고, 밤에 속한 사람은 악을 행합니다. 상태는 행동 속에서 가시화됩니다.

 

빛과 어둠의 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빛은 단순한 지적 명료함이 아니라 진리이며, 어둠은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거짓입니다. 진리는 주님에게서 나오기 때문에 드러내고 밝히는 성질을 가지지만, 거짓은 자기에게서 나오기 때문에 숨기고 흐리게 만드는 성질을 가집니다. 그래서 빛은 스스로를 감추지 않고, 어둠은 늘 자신을 가리려 합니다.

 

이 점을 주님의 말씀은 아주 날카롭게 드러냅니다.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다고 하십니다. 이는 사람들이 진리를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알면서도 피한다는 뜻입니다. 진리는 삶을 바꾸라고 요구하기 때문에,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머물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불편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연스럽게 어둠을 선택합니다.

 

반대로 주님은 진리를 행하는 사람은 빛으로 나온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행한다’는 말이 결정적입니다. 진리는 생각 속에만 머물 때는 빛이 되지 않습니다. 삶 속에서 행해질 때 비로소 빛이 됩니다. 그래서 빛은 단순히 ‘아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입니다. 진리를 행하는 사람은 숨지 않고 드러나며, 자신의 삶이 빛 가운데 놓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 글은 신앙과 행위의 관계를 다시 한번 분명히 합니다. 선은 낮에 속하고, 진리는 빛에 속합니다. 그런데 낮과 빛은 언제나 함께 움직입니다. 마찬가지로 선과 진리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선 없는 진리는 빛 없는 낮이 될 수 없고, 진리 없는 선은 방향 없는 열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낮–선–행위와 빛–진리–인식을 하나의 묶음으로 제시합니다.

 

AC.38은 우리에게 아주 실제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지금 내가 행하고 있는 것은 낮의 일인가, 밤의 일인가. 그리고 내가 붙들고 있는 생각은 빛에 속한 진리인가, 아니면 어둠에 속한 거짓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판단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방향 전환을 위한 질문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빛으로 나오라고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AC.38은 창세기 1장의 언어를 통해, 인간 삶의 가장 기본적인 영적 분별 기준을 제시합니다. 낮과 밤, 빛과 어둠은 멀리 있는 상징이 아니라, 매일의 선택과 행위 속에서 계속해서 드러나는 현재의 상태입니다.

 

 

 

AC.39, 창1:20,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AC.39-41)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And God said, Let the waters cause to creep forth the creeping thing, the living soul; and let fowl fly above the earth upon the f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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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 창1:14-17,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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