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And the serpent said unto the woman, Ye shall not surely die. For God doth know that in the day ye eat thereof, then your eyes shall be opened, and ye shall be as God, knowing good and evil. (3:4, 5)

 

AC.204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eyes being opened by eating of the fruit of the tree), 만일 그들이 감각과 지식[ex sensuali et scientifico], 곧 자기 자신으로부터 신앙에 속한 것들을 살펴본다면, 그것들을 마치 그릇된 것인 양 분명히 보게 될 것임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as God, knowing good and evil), 만일 그들이 그렇게 자기 자신으로부터 행한다면, 그들이 하나님과 같이 되어 스스로를 인도할 수 있다고 여기게 될 것임을 뜻합니다. Their “eyes being opened by eating of the fruit of the tree” signifies that if they were to examine the things of faith from what is of sense and knowledge [ex sensuali et scientifico], that is, from themselves, they would plainly see those things as if erroneous. And that they would be “as God, knowing good and evil,” denotes that if they did so from themselves, they would be as God, and could guide themselves.

 

 

해설

 

이 단락은 창3:4-5에서 제시되는 ‘유혹의 논리’가 어떤 방식으로 전개되는지를 정확히 해부합니다. 여기서 핵심은 ‘눈이 열린다’는 약속이 지각의 성숙이나 진리의 확장으로 제시된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열림’이 실제로는 참된 빛의 개방이 아니라, 감각과 지식이라는 제한된 기준에 의해 신앙을 재단하는 상태로의 전환임을 분명히 합니다.

 

신앙의 것들을 감각과 지식으로 살펴본다’는 것은, 신앙을 주님의 계시와 신뢰의 영역에 두지 않고, 인간 자신의 판단 능력 아래에 두는 것을 뜻합니다. 이때 일어나는 현상은 신앙이 더 명확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릇된 것처럼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신앙의 진리들이 실제로 오류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기준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감각과 지식은 신앙의 차원을 인식할 수 없기 때문에, 그 기준으로 보면 신앙은 필연적으로 비합리적이고 모순된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이 바로 ‘눈이 열린다’는 말의 역설적 의미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더 많이 보게 되었다고 느끼지만, 실제로는 더 낮은 차원의 시야로 옮겨간 것입니다. 앞선 단락들에서 말했듯이, 태고교회의 참된 ‘(seeing, 보는 것)은 사랑으로부터 오는 지각이었으나, 여기서의 ‘’은 감각적 명료함입니다. 이 명료함은 즉각적이고 설득력 있어 보이지만, 생명의 중심을 상실한 명료함입니다.

 

이어지는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는 약속은, 인간이 자기 판단을 최종 기준으로 삼게 될 때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자기 신격화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것은 전능해진다는 뜻이 아니라, 인도의 원천을 주님에게서 자기 자신에게로 옮긴다는 뜻입니다. 즉,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지를 더 이상 계시로부터가 아니라, 자기 판단으로 결정하려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를 매우 단호하게 규정합니다. 만일 인간이 그렇게 행한다면, 그는 ‘하나님과 같이 되어 스스로를 인도할 수 있다고 여기게 된다’고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여긴다’는 표현입니다. 이는 실제 능력이 아니라 착각이며, 바로 이 착각이 타락의 핵심입니다. 인간은 스스로를 인도할 수 있다고 믿는 순간, 실제로는 인도할 능력을 상실합니다.

 

AC.204는 결국 창3의 유혹을 지적 호기심이나 지식욕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신앙을 어디에서 판단할 것인가’라는 문제이며, ‘누가 인도의 주체인가’라는 문제입니다. 눈이 열린다는 약속은 인간을 더 자유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분리된 자율성이라는 가장 위험한 상태로 이끕니다. 이 단락은 신앙의 진위(眞僞)가 감각과 지식의 심문을 통과해야 한다고 여기는 태도가, 이미 타락의 한가운데에 있음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AC.205, 창3:4-5, 창3의 서술, ‘상태의 연속적 변화’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And the serpent said unto the woman, Ye shall n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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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3, 창3:2-3, ‘신앙’ 관련, 영적 천사들의 경우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And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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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3.심화

 

2. ‘악 안에 있는 상태

 

하지만 그들은 그러한 근거들로부터 신앙의 문제들에 대해 결론을 내리지는 않는데, 그렇게 하는 자들은 악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but they never form their conclusions concerning matters of faith on such grounds: those who do this are in evil. (AC.203)

 

 

이 구절은 얼핏 읽으면 매우 강한 표현처럼 보입니다. 특히 그렇게 하는 자들은 악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라는 말은 자칫하면 이성을 사용하는 사람은 모두 악하다’는 뜻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AC.203 전체 문맥을 보면 스베덴보리의 의도는 전혀 다릅니다.

 

그는 바로 앞에서 영적 천사들이 신앙에 대해 서로 대화하고, 지성과 이성, 기억 지식을 사용하여 신앙의 진리들을 확증한다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문제는 이성을 사용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성을 출발점’으로 삼아 신앙을 심판하는 데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주님께서 말씀하셨으니 참일 것이다. 이제 그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해 보자’라고 접근하는 것은 영적 천사들의 방식입니다. 그러나 먼저 내 감각과 이성으로 납득이 되어야만 참으로 인정하겠다’고 접근하는 것은 전혀 다른 방식입니다. 여기서는 인간의 지성이 주님의 진리 위에 올라앉아 재판관 역할을 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악 안에 있다’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악은 단순히 도덕적 범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own이 주님의 자리를 차지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진리가 자신을 판단하도록 두는 대신, 자신이 진리를 판단하려는 상태입니다.

 

3의 뱀이 바로 이것을 상징합니다. ‘정말 그런가?’, ‘내가 직접 확인해 보겠다’, ‘내가 판단하겠다’는 태도 자체가 문제인 것입니다. 물론 질문하거나 탐구하는 것이 문제는 아닙니다. 문제는 질문의 중심에 주님이 아니라 자기 own이 자리 잡는 것입니다.

 

그래서 AC.203의 이 문장은 사실 매우 중요한 영적 원리를 가르칩니다. 인간의 이성과 기억 지식은 진리를 이해하는 데 사용되어야지, 진리의 최종 기준으로 사용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성이 빛을 받는 창문은 될 수 있지만, 태양 자체가 될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우리 삶에서도 이런 차이를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씀을 읽으며 왜 그럴까?’를 묻습니다. 이것은 이해를 구하는 질문입니다. 반면 어떤 사람은 내가 인정할 수 없으니 틀렸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심판을 내리는 질문입니다. 겉으로는 둘 다 질문처럼 보이지만, 내적 상태는 매우 다릅니다.

 

그래서 AC.203의 핵심은 이성을 버려라’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성을 올바른 자리에 두어라’입니다. 주님과 말씀으로부터 출발하여 이성으로 이해를 깊게 하는 것은 영적 천사들의 길입니다. 그러나 이성과 감각을 출발점으로 삼아 주님의 진리를 판정하려는 것은 뱀의 길입니다.

 

결국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말하는 ’은 생각의 능력 자체가 아니라 생각의 질서가 뒤집힌 상태입니다. 주님이 중심이어야 할 자리에 자기 own이 들어앉고, 진리가 심판해야 할 자리에 인간의 판단이 들어앉을 때, 그는 그것을 악 안에 있는 상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신앙과 이성의 대립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이성 사이의 올바른 질서를 말하는 구절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정확할 것입니다.

 

 

 

AC.203, 창3:2-3, ‘신앙’ 관련, 영적 천사들의 경우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And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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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3, 심화 1, ‘확증’과 ‘결론’

AC.203.심화 1. ‘확증’과 ‘결론’ 그러나 영적 천사들은 신앙에 관해 서로 대화하며, 또한 지성과 이성, 그리고 기억에 속한 것들로 신앙의 일들을 확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한 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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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3.심화

 

1. ‘확증 결론

 

그러나 영적 천사들은 신앙에 관해 서로 대화하며, 또한 지성과 이성, 그리고 기억에 속한 것들로 신앙의 일들을 확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한 근거들로부터 신앙의 문제들에 대해 결론을 내리지는 않는데, 그렇게 하는 자들은 악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The spiritual angels, however, converse about faith, and even confirm the things of faith by those of the intellect, of the reason, and of the memory, but they never form their conclusions concerning matters of faith on such grounds: those who do this are in evil. (AC.203)

 

확증 결론은 어떻게 다른가요?

 

 

AC.203을 이해하는 핵심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확증(confirm) 결론(conclude)의 차이입니다. 얼핏 보면 둘 다 생각하고 판단하는 과정처럼 보이기 때문에 구별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는 매우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결론을 내린다’는 것은 이성과 감각, 기억 지식을 출발점으로 삼아 신앙의 진위를 판단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이해되면 믿고, 이해되지 않으면 믿지 않겠다’, ‘증명되면 받아들이고, 증명되지 않으면 거부하겠다’는 태도입니다. 이 경우 이성과 감각은 증인이 아니라 재판관이 됩니다. 신앙이 이성 앞에 서서 심사를 받는 구조입니다.

 

반면, ‘확증한다’는 것은 이미 말씀과 주님으로부터 받아들인 진리를 더 깊이 이해하고 밝히기 위해 이성과 기억 지식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출발점이 다릅니다. 이성과 기억 지식은 재판관이 아니라 조력자입니다. 진리를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더 분명히 보도록 돕습니다.

 

예를 들어, 영적 천사는 먼저 주님은 사랑이시다’는 것을 받아들입니다. 그러고 나서 천국의 질서, 인간의 경험, 말씀의 여러 구절, 영계의 실제 사례들을 통해 왜 주님이 사랑이신가’를 더 깊이 이해합니다. 이것이 확증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먼저 내가 납득할 수 있어야 하겠다. 사랑이라는 것이 논리적으로 증명되면 주님을 믿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결론을 내리는 방식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확증은 믿기 때문에 이해하려는 것’이고, 결론은 이해되어야 믿겠다는 것’입니다.

 

이 차이는 스베덴보리 저작 전체에 흐르는 매우 중요한 원리와도 연결됩니다. 그는 참된 질서는 신앙에서 이해로 가는 것이지, ‘이해에서 신앙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물론 맹목적으로 믿으라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해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다만 이해가 신앙의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목사님께서 AC를 번역하시며 경험하시는 일도 비슷할 수 있습니다. 어떤 아르카나를 처음 접했을 때는 도대체 이런 뜻이 성경 안에 있었다고?’ 하며 놀라게 됩니다. 그런데 계속 읽고 묵상하고 관련 구절들을 살펴보면 점점 그 의미가 연결되고 밝아집니다. 이것은 확증의 과정입니다. 이미 받아들인 진리가 점점 더 이해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이 처음부터 내 이성으로 전부 설명되지 않으면 거짓이다’라고 접근한다면, 그는 진리를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심판하려는 것입니다. AC.203에서 스베덴보리가 그렇게 하는 자들은 악 안에 있다’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문제는 이성을 사용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성을 주님의 자리 위에 올려놓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한마디로 정리하면, ‘확증’은 말씀과 주님으로부터 온 진리를 이성과 기억 지식으로 더 밝히는 것이고, ‘결론’은 이성과 기억 지식으로 신앙의 진위를 최종 판정하는 것입니다. 전자는 영적 천사들의 길이고, 후자는 창3의 뱀이 제안하는 길입니다.

 

어쩌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참된 신학의 길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내가 이해했기 때문에 참이다’가 아니라, ‘참이기 때문에 점점 더 이해하게 된다’는 길 말입니다. 이것이 AC.203에서 말하는 확증’과 결론’의 가장 중요한 차이입니다.

 

 

 

AC.203, 심화 2, ‘악 안에 있는 상태’

AC.203.심화 2. ‘악 안에 있는 상태’ 하지만 그들은 그러한 근거들로부터 신앙의 문제들에 대해 결론을 내리지는 않는데, 그렇게 하는 자들은 악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but they never form their concl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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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3, 창3:2-3, ‘신앙’ 관련, 영적 천사들의 경우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And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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