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4:6)

 

AC.360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Jehovah said unto Cain) 양심이 말해 주었음을 뜻한다는 것은 별도의 확증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와 비슷한 구절이 앞에서 이미 설명되었기 때문입니다. ThatJehovah said unto Cainmeans that conscience dictated, needs no confirmation, as a similar passage was explained above.

 

그들이 그날 바람이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3:8)

 

 

해설

 

AC.360은 한 문장뿐인 매우 짧은 글입니다. 그러나 바로 앞 AC.359에서 우리가 만난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 양심이 말해 주었다는 해석을 다시 한번 분명하게 확인해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별도의 성경 인용을 동원하여 입증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그 이유를 이와 비슷한 구절이 앞에서 이미 설명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AC.360의 핵심은 새로운 교리를 제시하는 데 있지 않고, AC.359의 해석을 앞에서 이미 세워 놓은 해석 원리에 연결하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우리가 AC.359 심화에서 살펴본 양심(conscience)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AC.360에서도 다시 conscience라는 말을 그대로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단순한 번역상의 우연이나 AC.359의 일회적인 표현으로 돌리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의도적으로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을 인간 안에서 양심이 말해 주는 과 연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근거로 가인은 홍수 고대교회의 영적 인간과 동일한 양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결론 내려서는 안 됩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은 퍼셉션에 의해 인도되었고, 홍수 후 고대교회의 영적 인간에게는 진리에 관한 지식을 기초로 양심이 형성된다는 큰 구별은 그대로 유지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AC.359-360conscience는 그 시대적 차이를 무시한 채 후대의 양심 개념을 그대로 가인에게 옮겨 놓기보다, 가인의 타락한 상태에서도 여전히 그의 내면에 잘못을 알리고 제지하는 내적 딕테이트가 있었다는 문맥에서 조심스럽게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오히려 AC.360에서 새롭게 눈여겨볼 부분은 이와 비슷한 구절이 앞에서 설명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에게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는 성경의 표현이 반드시 외부에서 음성으로 들려오는 말씀만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내적 상태에 따라 퍼셉션이나 내적 딕테이트, 그리고 후대 영적 인간에게는 양심을 통하여 선과 진리를 알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여호와께서 이르셨다는 표현을 만날 때에는 그때 그 사람 또는 교회의 내적 상태가 어떠했는지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이것은 가인의 현재 상태에서 특히 중요합니다. 가인은 이미 자기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분노했고, 그의 얼굴이 떨어졌습니다. 체어리티가 떠났고 내적인 것들이 변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아벨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때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즉 악이 이미 애정 안에서 움직이고 있지만 아직 완전히 행위로 굳어지기 전에, 그 악을 보게 하고 돌이킬 수 있도록 하는 내적 경고가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AC.359-360을 함께 읽으면 하나의 중요한 장면이 보입니다. 가인의 내적인 상태는 이미 나빠졌지만, 주님과의 모든 접점이 즉시 끊어진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여전히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이후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가인은 아무런 경고도 없이 갑자기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것이 아니라, 그 전에 자신의 상태를 돌아볼 기회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그 내적 경고를 따르지 않고 계속 자기 방향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할 때에는 시대적 차이를 구별하면서 그 원리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태고교회의 퍼셉션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홍수 후 영적 인간의 질서에 속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우리가 말씀에서 배우고 받아들인 선과 진리를 통하여 양심을 형성하시고, 그 양심을 통하여 우리의 애정과 생각과 행위를 돌아보게 하십니다. 특히 분노나 질투, 자기 의가 일어날 때 그 상태를 정당화하는 목소리만 듣지 않고, ‘이것이 정말 체어리티와 일치하는가?라고 묻게 하는 내적 경고에 귀 기울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AC.360은 짧기 때문에 별도의 심화가 필요한 글은 아니겠습니다. 오히려 이미 작성한 AC.359 심화 1, 양심은 홍수 고대교회부터인데 가인에게 양심이 말해 주었다고 하는가?’AC.360을 중요한 추가 근거로 반영하면 좋겠습니다. AC.359에서 한 번 사용된 conscienceAC.360에서 다시 확인된다는 사실은 그 심화의 문제의식을 더욱 분명하게 해 줍니다.

 

 

 

AC.361, 창4:6,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창4:6) AC.361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If thou doest well, an uplifting)에서 ‘낯을 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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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9, 창4: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다 - 양심을 통한 주님의 부르심’(AC.359-360)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And Jehovah said unto Cain, Why is thine anger kindled? And why are thy faces fallen? (창4:6) AC.35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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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2026/08/30)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1, ‘홀로 하나님께’, 91, ‘슬픈 마음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은 창4 절별 주석 그 두 번째, 3절로 5, AC 글 번호로는 346번에서 358번입니다. 먼저 본문니다.

 

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4:3-5)

 

제목은

 

가인과 아벨의 제물 - 무엇이 예배를 살아 있게 하는가?

 

이며, 다음은 오늘 범위인 AC.346-358 요약입니다.

 

AC.346-358 앞의 AC.338-345에서 밝혀진 가인 아벨, 사랑에서 분리되기 시작한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가 이제 실제 행위와 예배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보여 줍니다. 4:3-5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드리고, 아벨은 양의 새끼와 기름으로 드렸으며,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 말씀을 하나씩 풀면서, 스베덴보리는 예배의 참된 성질이 외적인 형식이나 제물 자체에 있지 않고 그것이 어떤 내적 사랑에서 나오는가에 있음을 밝힙니다. 그리고 차이가 마침내 가인의 분함 안색이 변함으로 이어지면서,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인간의 내적인 것들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보여 줍니다.

 

AC.346-347에서 먼저 주목할 것은 세월이 지난 후에, 원문으로는 날들의 끝에라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자연적인 시간이 흘렀다는 것만이 아니라, 앞에서 시작된 가인의 분리가 점차 진행되어 이제 결과가 행위와 예배로 나타날 단계에 이르렀음을 보여 줍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가인으로 표상된 교리가 처음부터 완전히 타락해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처음에는 단순함 있었고, 신앙도 후대처럼 사랑에서 멀리 분리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처음의 작은 구별이 점차 분리가 되고, 분리가 굳어져 하나의 교리와 삶의 방식이 됩니다. 이것은 참된 교리도 시간이 흐르면서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상태에 따라 본래의 사랑과 목적에서 멀어질 있다는 중요한 경고입니다.

 

따라서 가인의 변화는 갑작스러운 타락이라기보다 점진적인 과정입니다. 처음에는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자체로 하나의 으로 바라보았을 뿐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신앙은 사랑 없이도 독립적으로 존재할 있다고 여기게 되고, 마침내 신앙으로부터 행위와 예배까지 만들어 냅니다. 흐름은 내적 분리에서 행위로, 행위에서 예배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AC.346 가인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땅을 경작하고, 소산을 거두며, 심지어 그것을 여호와께 제물로 드립니다. 문제는 종교적 행위가 없다는 있지 않고, 행위와 예배를 살아 있게 하는 체어리티가 안에 없다는 있습니다.

 

AC.348 이것을 땅의 소산이라는 표현을 통해 더욱 깊이 설명합니다. 땅의 소산 여기서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를 뜻하며, 스베덴보리는 그러한 행위를 죽은 행위라고 부릅니다. 체어리티 없는 신앙도 얼마든지 외적인 행위를 만들어 있습니다. 예배하고, 봉사하고, 헌금하고, 종교적인 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오직 사람에게만 속하고 사람의 사랑과 결합되어 있지 않다면 영적인 생명은 없습니다. 그래서 12장의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들의 마음은 머니이다라는 말씀이 가인의 상태를 보여 줍니다. 입으로는 주님을 가까이하고 외적으로는 열매까지 맺는 것처럼 보이지만, 행위의 뿌리가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있습니다.

 

여기서 뿌리와 열매 관계가 매우 중요합니다. 행위는 사람의 내적인 사랑에서 나오는 열매입니다. 따라서 외적으로 무엇을 했느냐만으로 행위의 영적 성질을 판단할 없습니다. 같은 봉사와 헌신이라도 자기 의와 명예, 인정과 보상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것인지에 따라 전혀 다른 열매가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37:31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으리니 인용하면서 위로 열매를 맺는다 것은 체어리티로부터 행하는 이라고 설명합니다. 살아 있는 행위는 사람 안에 주님께서 심으신 선이 사람의 실제 삶과 쓰임으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AC.349 여기에서 걸음 나아가 외적인 예배와 내적인 예배의 관계를 밝힙니다. 외적인 것은 자체로 생명을 가진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들로부터 생명을 얻으며, 궁극적으로는 내적인 것들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제사나 기도나 찬송이나 예배라는 외적인 형식 자체가 예배를 살아 있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안에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가 있을 외적인 예배도 생명을 얻습니다. 이것이 가인의 제물이 외적으로는 여호와께 드리는 제물이면서도 받아들여질 없었던 이유입니다. 문제는 제물을 드렸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제물이 어디에서 나왔느냐에 있습니다.

 

AC.350-354에서는 이제 아벨의 제물이 가인의 제물과 대조됩니다. 아벨 체어리티를, 떼의 처음 , 양의 새끼 거룩한 것을, 기름진 천적인 자체를 나타내며,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주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벨의 제물이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주님께서 동물 제물을 곡식 제물보다 좋아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셨다 것은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과 체어리티에 기초한 모든 예배가 주님을 기쁘시게 했다는 뜻입니다. 제물의 종류가 아니라 예배의 내적 생명이 핵심입니다.

 

특히 양의 새끼 기름 아벨의 예배가 자기에게서 나온 선을 주님께 내놓는 예배가 아니라, 모든 거룩함과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하는 예배임을 보여 줍니다. 처음 주님께 속한다는 것은 선의 시작과 근원이 주님께 있다는 것이며, 기름 천적인 것을 나타낸다는 것은 선의 가장 내적인 생명이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참된 예배는 내가 주님께 무엇을 드리는가?보다 내가 드리는 모든 선한 것의 근원이 누구인가? 인정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아벨의 제물 안에는 바로 질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인과 아벨의 대비를 신앙 체어리티 이해해서는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문제 삼는 것은 신앙 자체가 아니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입니다. 아벨이 상징하는 체어리티는 신앙을 없애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에 생명을 줍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를 향하고,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따라서 제물의 대비는 신앙의 예배와 사랑의 예배라는 단순한 대립보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죽은 신앙의 예배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살아 있는 예배 대비로 이해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AC.355부터 말씀의 초점은 제물 자체에서 결과 가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옮겨갑니다.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라는 4:5 말씀에서 스베덴보리는 가인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뿐 아니라 그러한 분리가 가능하다고 인정하는 교리로까지 설명합니다. 처음에는 사랑과 신앙 사이에 작은 간격이 있었지만 이제는 신앙은 체어리티와 분리되어도 참된 신앙일 있다 생각 자체가 하나의 교리로 굳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교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가인에게 분노가 일어나고 그의 내적인 것들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AC.356 지금까지의 논리를 다시 확인합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며, 받아들여지지 않은 제물은 분리된 신앙에서 나온 예배입니다. 이것은 이후의 분함 안색의 변화 이해하기 위한 전제입니다. 잘못된 신앙과 예배의 질서는 단순히 머릿속의 교리 문제에 머물지 않습니다. 결국 인간의 애정과 내적인 것들을 변화시킵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 정당성을 주장하기 시작하면, 진리의 문제는 사랑의 문제로 깊어집니다.

 

AC.357 가인이 몹시 분하여 바로 변화를 보여 줍니다. 체어리티가 떠날 분노가 일어납니다. 이것은 단순히 가인이라는 개인이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기분이 상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자신이 인정받지 못하고 체어리티가 받아들여지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신앙이 본래 체어리티를 섬겨야 자기 위치를 잊고 스스로 주된 것이 되려 , 체어리티는 형제가 아니라 경쟁자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여기에서 이후 아벨을 죽이는 사건의 씨앗이 이미 드러납니다.

 

AC.358 안색이 변하니, 문자적으로는 얼굴이 떨어졌다 표현은 결과 인간의 내적인 것들이 변했다는 뜻입니다. 고대인들에게 얼굴은 단순한 외모가 아니라 내적인 것들을 나타냈습니다. 특히 태고교회 사람들은 속과 겉이 일치했기 때문에 마음의 애정과 상태가 얼굴에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얼굴이 떨어졌다는 것은 화난 표정 하나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떠남으로써 그의 내적인 상태 전체가 변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것과 반대되는 것이 말씀에서 여호와께서 얼굴을 들어 비추신다 표현입니다. 여호와의 얼굴 주님의 자비를 나타내며, 주님께서 얼굴을 들어 인간에게 비추신다는 것은 자비로 인간에게 체어리티를 주시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가인의 얼굴이 떨어짐 주님의 자비가 사라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변한 것은 주님이 아니라 가인입니다. 주님의 사랑과 자비는 변함없이 인간을 향하지만, 인간이 체어리티에서 떠나 자기 사랑과 분리된 신앙으로 향할 사랑을 받아들이는 그의 내적인 상태가 변합니다.

 

따라서 AC.346-358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는 외적인 것의 생명은 어디에서 오는가?입니다. 가인에게도 행위가 있었고 예배가 있었으며 제물이 있었습니다. 아벨에게도 행위와 예배와 제물이 있었습니다. 겉으로만 보면 여호와께 예배드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왔고, 다른 하나는 체어리티에서 나왔습니다. 외적인 행위와 예배는 자체로 살아 있지 않으며, 사람의 사랑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을 비로소 살아 있게 됩니다. 이것이 가인의 땅의 소산 아벨의 양의 새끼와 기름 가르는 본질적인 차이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신앙과 예배에도 매우 직접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예배드리는가?, 나는 봉사하는가?, 나는 말씀을 공부하고 가르치는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디에서 나오고 있는가? 물어야 합니다. 진리를 많이 알고 정확한 교리를 고백하며 종교적 활동을 열심히 하더라도 그것이 자기 의와 인정 욕구, 교리적 우월성, 다른 사람을 판단하려는 마음에서 나온다면 외적인 종교생활은 풍성해도 안의 생명은 약해질 있습니다. 반대로 작은 행위라도 주님에게서 받은 선을 이웃에게 돌려주는 체어리티에서 나온다면 그것은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는 살아 있는 행위가 됩니다.

 

하나 중요한 것은 가인의 타락 과정이 다시 한번 점진적이라는 사실입니다. AC.338에서 시작된 작은 분리가 AC.346-358 이르면 하나의 분명한 연쇄를 이루게 됩니다. 처음에는 신앙을 사랑에서 따로 바라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구별이 분리가 됩니다. 분리된 신앙에서 체어리티 없는 행위가 생깁니다. 행위에서 체어리티 없는 예배가 생깁니다. 예배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분노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마침내 인간의 내적인 것들 자체가 변합니다. 이후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은 갑자기 일어난 비극이 아니라 이미 과정 속에서 준비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AC.346-358 중심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물은 받으셨는가?라는 질문에 있지 않습니다. 깊은 질문은 무엇이 행위와 예배를 살아 있게 하는가?입니다. 답은 체어리티이며, 궁극적으로는 체어리티를 통하여 인간에게 유입되는 주님의 생명입니다.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에서 생명을 받고, 내적인 것은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습니다. 따라서 참된 예배는 외적인 종교 행위를 정교하게 만드는 데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과 선이 사람에서 사람으로 흘러나와 실제 삶과 예배를 하나로 만들 이루어집니다.

 

결국 AC.346-358 우리에게 남기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나는 무엇을 주님께 드리고 있는가?보다 내가 드리는 것은 어디에서 나오고 있는가?입니다. 가인도 제물을 드렸고 아벨도 제물을 드렸지만, 예배의 내적 근원은 달랐습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은 행위와 예배까지 만들어 있지만 안에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없다면 결국 죽은 열매가 됩니다. 반대로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행위와 예배는 모든 거룩함과 선이 주님께 속한다는 것을 인정하며, 주님에게서 받은 생명을 다시 이웃을 향한 선과 쓰임으로 나타냅니다. 이것이 아벨의 살아 있는 예배입니다.

 

따라서 이번 구간은 앞의 AC.338-345에서 시작된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 단계 깊게 보여 줍니다. 구간이 가인과 아벨은 무엇인가? 밝혔다면, AC.346-358 둘의 차이가 실제 삶과 예배에서 어떻게 드러나는가? 보여 줍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있으면 행위도 살아 있고 예배도 살아 있으며 인간의 얼굴, 내적인 것들에도 주님의 자비가 비칩니다. 그러나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면 교리와 행위와 예배의 외형은 남아 있어도 생명은 점차 사라지고, 마침내 인간의 내적인 것들까지 변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루시는 거듭남은 우리가 가진 신앙과 진리가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살아 있는 행위와 예배가 되게 하시는 과정이며, 그때 우리의 전체가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는 하나의 예배가 되어 갑니다.

 

 

이상 요약을 마치고, 아래는 AC 본문, 해설 및 심화입니다.

 

 

AC.346, 창4:3, ‘체어리티 없는 신앙에서도 행위와 예배는 나올 수 있습니다’(AC.346-349)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And at the end of days it came to pass that Cain brought of the fruit of the ground an offering to Jehovah. (창4:3) AC.346 ‘날들의 끝에’(end of days)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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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7, 창4:3, ‘세월이 지난 후에 - 신앙이 사랑에서 점점 멀어질 때’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4:3) AC.347 ‘세월이 지난 후에’(end of days, ‘날들의 끝에’)가 ‘시간이 흐른 뒤’를 뜻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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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8, 창4:3, 가인의 ‘땅의 소산’ - 체어리티 없는 죽은 행위와 살아 있는 열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4:3) AC.348 ‘땅의 소산’(fruit of the ground)이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를 뜻한다는 것은 이어지는 내용에서도 분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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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9, 창4:3, ‘제물이 예배를 뜻하는 이유 - 외적 예배는 내적인 것으로부터 생명을 얻습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4:3) AC.349 ‘제물’(offering)이 예배를 뜻한다는 것은 유대교회의 표상들에서 분명합니다. 그 교회에서는 온갖 종류의 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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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0, 창4:4, ‘왜 주님께서는 아벨의 제물을 받으셨는가 - 체어리티에 기초한 참된 예배’(AC.350-3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And Abel, he also brought of the firstlings of his flock, and of the fat thereof; and Jehovah looked to Abel, and to his off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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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1, 창4:4, ‘체어리티란? - 이웃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여기는 사랑’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1 ‘아벨’(Abel)이 체어리티를 상징한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했습니다. 체어리티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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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2, 창4:4, ‘왜 장자가 거룩했는가 - 모든 사랑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2 ‘양의 첫 새끼’(firstlings of the flock, ‘양 떼의 처음 난 것’)는 오직 주님께만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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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3, 창4:4, 아벨이 드린 ‘기름’은 무엇을 뜻하는가 - 사랑에 속한 천적인 것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3 ‘기름’(fat)은 천적인 것 자체를 상징하며, 이것 역시 주님께 속한 것입니다. 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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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4, 창4:4, ‘주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신 이유 - 체어리티에 기초한 예배’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4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셨다’(Jehovah looked to Abel, and to his offe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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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5, 창4:5,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한 이유 - 체어리티가 떠날 때 내면에 일어나는 변화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But to Cain and his offering he looked not; and Cain’s anger was kindled exceedingly, and his faces fell. (창4:5) AC.355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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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6, 창4:5, ‘가인의 제물을 돌아보지 않으신 이유 -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예배’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4:5) AC.356 ‘가인’(Cain)이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또는 그러한 분리를 인정하는 교리를 상징한다는 것과, ‘그의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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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7, 창4:5, ‘가인의 분노는 무엇을 뜻하는가 - 자기 사랑과 체어리티의 떠남’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4:5) AC.357 ‘가인의 분노가 타올랐다’(Cain’s anger was kindled)는 것이 체어리티가 떠났음을 상징한다는 것은, 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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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8, 창4:5, ‘가인의 안색이 변했다는 것은 무엇인가 - 얼굴에 나타나는 내적 상태’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4:5) AC.358 ‘안색이 변했다’(faces falling)는 것이 내적인 것들이 변했음을 상징한다는 것은 ‘얼굴’(face)과 얼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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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AC 리딩 본문 전체는 여기까지이고, 이 가운데 필수 리딩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AC.349, 창4:3, ‘제물이 예배를 뜻하는 이유 - 외적 예배는 내적인 것으로부터 생명을 얻습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4:3) AC.349 ‘제물’(offering)이 예배를 뜻한다는 것은 유대교회의 표상들에서 분명합니다. 그 교회에서는 온갖 종류의 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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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8, 창4:5, ‘가인의 안색이 변했다는 것은 무엇인가 - 얼굴에 나타나는 내적 상태’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4:5) AC.358 ‘안색이 변했다’(faces falling)는 것이 내적인 것들이 변했음을 상징한다는 것은 ‘얼굴’(face)과 얼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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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8, 심화 1, ‘여호와께서 그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신다는 것은 무엇인가 - 주님의 얼굴과

AC.358.심화 1. ‘여호와께서 그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신다는 것은 무엇인가 - 주님의 얼굴과 체어리티’(민6:26; 시4: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민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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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08-30(D1)

 

2666, 3, 창4.3, 2026-08-30(D1)-주일예배(창4,3-5, AC.346-358), ‘가인과 아벨의 제물 - 무엇이 예배를 살아 있게 하는가’.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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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8/23, 창4:1-2, AC.338-345), ‘가인과 아벨, 사랑에서 분리되기 시작한 신앙과 체어리티

※ 오늘(2026/08/23)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0, ‘전능왕 오셔서’, 찬90, ‘주 예수 내가 알기 전’입니다. 오늘부터 창4 절별 주석을 시작, 오늘은 그 첫 번째, 1절로 2절, AC 글 번호로는 338번에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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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이번 설교에서 가장 먼저 귀하게 볼 수 있는 것은 ‘교회의 본질과 비본질을 구별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입니다. 박요한 목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복음을 본질로, 조직과 제도와 건물과 직분 같은 것은 비본질로 구분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이 구별은 상당히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교회를 단순히 외적인 조직이나 제도로 보지 않고, 사람 안에서 선과 진리가 결합되어 주님의 생명이 받아들여지는 상태와 깊이 연결하여 봅니다. 그러므로 건물, 직제, 교단, 예배 형식 등은 교회를 위한 외적 그릇일 수는 있어도, 그 자체가 교회의 생명은 아닙니다.

 

누가복음의 ‘ 포도주와 가죽 부대’ 비유를 박요한 목사가 교회의 제도와 형식의 갱신 문제에 적용한 것도 나름의 설교적 힘이 있습니다. 오래된 제도가 본래의 목적을 잃고 스스로 절대화될 때, 오히려 새롭게 역사하는 생명을 억압할 수 있다는 지적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외적인 것은 반드시 내적인 것을 섬겨야 합니다. 외적 형식이 내적 생명을 담는 그릇으로 기능하면 좋은 것이지만, 그릇 자체가 목적이 되는 순간 질서가 뒤집힙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가죽 부대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 가죽 부대가 포도주를 담고 있는가’입니다.

 

이 점에서 박요한 목사가 직분을 ‘계급’으로 변질시키는 것을 비판한 대목은 의미가 있습니다. 장로, 권사, 안수집사 등의 직분이 본래는 섬김을 위한 기능이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명예와 권세와 특권의 상징으로 변할 수 있다는 지적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모든 직분과 지위는 ‘용도(use)’를 위해 존재합니다. 직분 자체가 사람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그 직분을 통해 얼마나 선한 용도를 수행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따라서 직분이 ‘나는 이만큼 높은 사람이다’라는 자기 확장의 수단이 된다면, 외적으로는 교회 직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내적으로는 proprium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갈 수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균형은 필요합니다. 직분이나 제도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닙니다. 계급화될 수 있다는 이유로 모든 구조를 제거하는 것이 곧 영적으로 더 높은 상태를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제도가 없어도 사람의 자기 사랑과 지배욕은 얼마든지 다른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제도가 없을수록 특정 개인의 영향력이 더 커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직분이 없는 교회’라는 형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직분이 있든 없든 권한을 자기 영광이 아니라 용도를 위해 사용하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구조의 유무보다 그 구조를 움직이는 사랑의 성질을 더 중요하게 봅니다.

 

박요한 목사가 ‘교회 주인은 하나님’이라고 강조한 것도 핵심을 잘 짚은 부분입니다. 교회의 주인이 목사도, 장로도, 특정 헌금자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교회관과도 잘 맞습니다. 참된 교회는 주님에게 속하며, 사람은 그 안에서 맡겨진 용도를 수행할 뿐입니다. 어느 한 사람이 교회를 ‘ 교회’, ‘ 성도’, ‘ 조직’으로 소유하려는 순간, 주님의 것이 인간의 proprium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박요한 목사는 전통 교회의 문제를 주로 장로 중심 구조나 당회 구조에서 찾습니다. 이 부분도 조금 더 넓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 정치의 문제는 장로교의 당회라는 특정 제도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가 독점적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교회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날 수 있고, 회중제가 강한 교회에서는 다수의 여론이 또 다른 권력이 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는 정치가 없는 교회’라고 선언한 공동체에서도 비공식적인 영향력과 인간관계가 정치처럼 작동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치가 없는 교회를 만드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권력을 사랑하지 않는 교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임직헌금에 대한 비판도 이 설교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박요한 목사는 장로나 권사, 안수집사를 세우면서 상당한 금액의 임직예물을 요구하거나 자발적 감사헌금이라는 이름으로 사실상 경쟁을 유도하는 관행을 문제 삼습니다. 이 지적 역시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깊이 생각할 만합니다. 돈과 영적 지위를 연결하면, 외적 재산이 내적 가치와 섞이기 쉽습니다. 헌금 자체는 선한 용도가 될 수 있지만, ‘내가 이만큼 냈으므로 이만큼 인정받아야 한다’는 마음이 들어오면 그 헌금은 오히려 proprium을 강화하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박요한 목사가 ‘헌금을 많이 하지 말라’고까지 말하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입니다. 그 취지는 헌금 액수와 영적 권위를 연결하지 말라는 데 있습니다. 이 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시 핵심은 액수 자체가 아니라 동기입니다. 적게 드린다고 자동으로 겸손한 것도 아니고, 많이 드린다고 자동으로 교만한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행위의 외형보다 그 행위를 움직이는 사랑을 봅니다. 많은 헌금을 하면서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오직 선한 용도를 위해 할 수 있고, 반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나는 제도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사람’이라는 자기 의를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헌금 문제에서도 결국 중요한 것은 ‘얼마를 드렸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사랑하여 드렸는가’입니다.

 

박요한 목사가 주일 예배와 교회 활동을 다루는 방식도 흥미롭습니다. 그는 지나치게 많은 교회 활동이 오히려 사람을 지치게 하고, 예배의 본질을 잃게 만들 수 있다고 봅니다. 하루 종일 교회에서 봉사하고 정작 예배 시간에 졸게 되는 상황을 예로 들며 ‘예배가 중심’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외적 활동이 내적 목적을 압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설교 전체의 논리와 일관됩니다. 교회 봉사 자체가 주님과의 관계를 깊게 하는 용도가 아니라 ‘나는 이렇게 열심히 하는 사람이다’라는 자기 의를 만드는 수단이 된다면, 외적 종교 활동이 오히려 내적 신앙을 가릴 수도 있습니다.

 

특히 시아버지의 중요한 가족 행사보다 제자훈련 참석을 더 높이 평가하는 문화를 비판한 대목은 체어리티의 관점에서 생각할 만합니다. 신앙생활은 교회 프로그램에 많이 참석하는 것으로만 측정할 수 없습니다. 가족에 대한 책임, 이웃에 대한 성실함, 직장에서의 정직함 역시 모두 신앙이 삶으로 나타나는 자리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예배는 성전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에서 이루어집니다. 주일의 예배가 삶을 바꾸지 못하고, 오히려 가족을 무시하거나 일상의 의무를 경시하게 만든다면 외적인 종교성과 실제 체어리티 사이에 균열이 생긴 것입니다.

 

다만 박요한 목사가 ‘주일 예배도 번씩 빠지는 것이 좋다’, ‘오기 싫으면 유튜브로 드려도 된다’고 말하는 부분은 조금 더 신중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외적 예배를 절대화하지 말자는 취지는 이해할 수 있지만, 외적 예배를 가볍게 여기게 되는 반대편의 위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외적 예배를 무의미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외적 예배는 내적 예배를 담고 유지하는 중요한 그릇입니다. 문제는 형식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형식 안에 생명을 넣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당에 반드시 나와야 구원받는다’는 식의 압박도 잘못이지만, ‘마음만 있으면 형식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방향으로 가는 것도 균형을 잃을 수 있습니다.

 

이 설교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 가운데 하나는 ‘유튜브가 교회다’라는 선언입니다. 박요한 목사는 온라인으로 실시간 예배를 드리는 사람도 현장 참석자와 동일하게 성도로 인정하며, 유튜브를 오프라인 교회로 끌어오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오늘의 교회 형태 변화 속에서 상당히 새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교회는 반드시 특정 장소에 모여야 하는가?’ ‘ 공간에 있지 않아도 교회적 공동체가 가능한가?’라는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교회의 본질은 장소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주님을 향한 신앙과 체어리티가 사람 안에 있고, 그 사람들이 진리와 선 안에서 연결될 때 교회가 형성됩니다. 따라서 건물이 없다고 교회가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이 점에서 박요한 목사의 ‘예배당 건물이 교회가 아니다’, ‘내가 교회다’라는 강조에는 상당한 진실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의 ‘너희는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말씀을 사람 자신에게 적용한 것도 방향상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교회다’라는 말 역시 조금 더 정확히 해야 합니다. 개인 한 사람이 독립적으로 교회 전체가 되는 것이라기보다, 주님이 그 사람 안에서 선과 진리를 결합시키실 때 그 사람 안에 교회의 형상이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이 서로 연결될 때 더 넓은 의미의 교회가 형성됩니다. 그러므로 ‘건물이 교회가 아니다’에서 멈추지 않고, ‘그렇다면 안에 정말 교회가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가야 합니다. 내 안에서 진리와 선이 결합되어 있는가, 신앙과 체어리티가 하나 되어 있는가, 주님이 중심인가, 아니면 나 자신이 중심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박요한 목사가 ‘오무’를 강조하지만, 사실 더 중요한 것은 뒤이어 제시하는 ‘이유’입니다. 무엇을 없앴는가보다 무엇이 살아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계급이 없고, 정치가 없고, 임직헌금이 없고, 건물이 없어도, 그 안에 주님의 생명과 체어리티가 없다면 그것만으로 참된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직분과 건물이 있고 제도가 있어도, 그것들이 주님의 선과 진리를 섬기고 있다면 얼마든지 좋은 외적 질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이번 설교의 ‘오무’는 목적이라기보다 정리 작업에 가깝습니다. 낡은 가죽 부대의 불필요한 부분을 걷어내는 일입니다. 그러나 비워낸 그 자리에 무엇이 들어오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박요한 목사는 그것을 ‘십자가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십자가를 단순히 교리적으로 믿는 데서 그치지 않고 주님을 따르는 삶, 곧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오는 악을 물리치고 선을 행하는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설교에서 바울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는 구절을 강조하는 부분은 복음주의적 설교의 중심을 잘 보여줍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십자가를 ‘대속 교리의 문장’으로만 축소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주님께서 지옥들과 싸워 이기시고 인성을 영화롭게 하신 완성의 사건이며, 동시에 사람이 주님을 따를 때 겪는 시험과 자기 부인의 삶을 보여주는 표상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오직 십자가’라는 말이 참으로 깊어지려면 ‘십자가를 믿는다’에서 ‘십자가의 길을 따른다’로 나아가야 합니다.

 

설교 후반의 ‘목사가 노동하는 교회’라는 강조도 스베덴보리의 ‘용도’ 개념과 접점이 있습니다. 박요한 목사는 자신의 육체노동이 영적 건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말합니다. 노동을 통해 현실 감각을 잃지 않고, 게으름을 피하며, 삶의 현장에서 성도들의 어려움을 더 이해하게 된다는 취지입니다. 이것은 노동 그 자체를 영적 수행으로 절대화할 필요는 없지만, 선한 용도를 성실하게 수행하는 삶이 영적 성장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습니다.

 

다만 설교에서는 질병이나 경제적 어려움 같은 고난을 ‘메기’에 비유하면서 영혼을 깨우는 축복의 도구라고 설명합니다. 이 역시 일부 사람에게는 실제로 그렇게 작용할 수 있습니다. 어려움을 통해 자기 삶을 돌아보고 주님께 돌아오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질병과 고난을 ‘하나님이 영적 각성을 위해 보내신 도구’라고 단정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섭리론에서 주님은 악이나 고통 자체를 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다만 이미 발생한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도 가능한 선을 끌어내시고, 그것을 사람이 거듭나는 방향으로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이 고통을 보내셨다’보다 ‘주님은 고통 속에서도 선을 이루신다’고 표현하는 편이 더 적절합니다.

 

이와 비슷하게 설교 초반에서 스트레스와 근심이 당뇨, 비만, 암 등의 가장 큰 원인인 것처럼 말하는 부분도 설교의 영적 주제와는 별도로 신중해야 합니다. 육체 질병은 여러 복합적인 원인을 갖기 때문에 영적 상태나 심리적 스트레스 하나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비본질에 매달리다가 삶의 중요한 것을 잃을 있다’는 설교적 비유는 이해할 수 있지만, 의학적 인과관계까지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런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 해설에서도 설교의 중심 진리와 주변의 과도한 표현을 구별해서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번 설교에서 제가 가장 중요하게 보고 싶은 대목은 ‘묵은 것을 얼마나 벗어내느냐’라는 표현입니다. 박요한 목사는 신앙생활을 오래할수록 오히려 익숙한 형식에 갇힐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과도 깊이 연결할 수 있습니다. 거듭남은 한 번의 결단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낡은 proprium의 습관과 사랑을 벗어가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 가죽 부대’는 새 예배 형식이나 새 교회 모델보다 먼저 ‘새로워지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설교 전체를 조금 더 깊게 뒤집어 볼 수 있습니다. 전통 교회의 장로 제도, 당회, 임직헌금, 건물 중심주의를 낡은 가죽 부대라고 비판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런 것을 없앤 새로운 교회를 한다’는 생각 자체도 시간이 흐르면 또 하나의 묵은 포도주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교회와 다르다’, ‘우리는 본질적이다’, ‘우리는 제도를 벗어났다’는 자의식이 굳어지는 순간, 새로움을 추구하던 개혁 자체가 새로운 제도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낡은 가죽 부대는 언제나 ‘저쪽 교회’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새롭게 시작한 교회도 내일이면 낡을 수 있고, 제도를 비판하는 사람도 자기 방식에 집착하면 새로운 제도주의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개혁은 외적 형식을 한 번 바꾸는 사건이 아니라, 주님의 진리 앞에서 계속 자기 자신을 수정하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자면, 새 포도주는 주님에게서 오는 새로운 생명과 진리이고, 새 가죽 부대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새로워진 사람의 마음과 삶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때 핵심은 교회 제도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유연해지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옳다고 믿었던 것을 주님의 진리 앞에서 다시 살펴볼 수 있는가, 내 전통과 경험보다 주님의 뜻을 앞세울 수 있는가, 내가 가진 지위와 익숙함을 내려놓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박요한 목사 자신에게도, 설교를 듣는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장로들이 문제다’, ‘전통 교회가 문제다’, ‘건물 교회가 문제다’라고 말하는 순간, 다시 나단의 ‘당신이 사람이라’는 말씀을 떠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비판하는 그 제도주의와 자기 의가 내 안에는 없는가? ‘나는 개혁적이다’라는 자기 의는 없는가? ‘나는 본질을 안다’는 교만은 없는가? 개혁의 영은 남의 낡음을 벗겨내는 것이 아니라 먼저 자기 안의 낡음을 벗겨내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이번 설교의 중심 문장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다시 표현한다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참된 가죽 부대는 새로운 제도나 새로운 교회 모델이 아니라, 주님 앞에서 계속 자기 proprium 벗어내고 새롭게 되는 사람이며, 참된 교회 개혁은 외적 형식을 제거하는 데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안에 신앙과 체어리티가 다시 살아나게 하는 데서 완성됩니다.

 

박요한 목사가 마지막에 ‘내가 교회다’라고 말한 것도 바로 이런 방향에서 읽으면 더 깊어집니다. ‘예배당이 교회가 아니다’라는 부정적인 선언보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교회인가?’라는 질문이 더 중요합니다. 내 안에 주님이 거하시는가, 내 안에 주님의 진리가 있는가, 그 진리가 체어리티의 삶으로 나타나는가, 내 삶이 다른 사람에게 선한 용도가 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건물이 없어도 교회가 아닐 수 있고, 이것이 있다면 작은 공간에서도 참된 교회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결국 이번 설교에서 가장 귀한 부분은 ‘무엇을 없앴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남기려 하는가’입니다. 조직과 제도와 건물은 모두 바뀔 수 있습니다. 오늘의 새 가죽 부대도 내일은 낡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과 진리는 언제나 새롭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과제는 끊임없이 새로운 외형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새 생명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사람 자신이 계속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오무를 추구하는 교회’라는 표어도 결국 ‘오무’(五無)보다 ‘일유(一有)가 더 중요해집니다. 무엇을 다섯 가지 없앴는가보다, 그 모든 것을 벗겨낸 뒤 ‘주님이 계시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계신다는 것은 단지 입술로 예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선과 진리가 실제 삶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교회의 가장 깊은 자리이고, 이번 설교가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지점이라고 봅니다.

 

 

 

SY.89, 박요한 목사, ‘극우 정치병자 소굴이 된 한국교회의 비참한 실상’ (20260710)

※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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