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212.심화

 

7. ‘6:10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6:10) Shut their eyes, lest they see with their eyes (Isa. 6:10),

 

 

이 구절을 AC.212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이 육체적 시각이 아니라 이해(understanding)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문자적으로만 읽으면, 이 구절은 매우 이상하게 들립니다. 마치 주님께서 사람들이 진리를 보지 못하도록 일부러 눈을 감기시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그렇게 이해하지 않습니다. 말씀은 종종 인간 편에서 일어나는 일을 마치 주님께서 하시는 것처럼 표현하는데, 실제로는 사람들이 스스로 진리를 거부하고, 이해를 닫아 버리는 상태를 묘사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여기서 ‘눈을 감기게 하라’는 말은 육체의 시력을 빼앗는다는 뜻이 아니라, 이해가 더 이상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반대로 ‘눈으로 본다’는 것은 영적 진리를 이해하고 깨닫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사야의 말씀은 ‘그들이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영적 상태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AC.212에서 이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만일 ‘’이 단순히 육체의 눈이라면, ‘눈을 감기게 하라’는 말은 단지 시력을 잃게 하라는 뜻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이해를 의미한다면, 이 말씀은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과 관련된 매우 깊은 영적 의미를 갖게 됩니다.

 

특히 이 구절은 앞서 본 겔12:2와도 연결됩니다. 에스겔에서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한다’고 했고, 이사야에서는 ‘눈이 감기게 하라’고 말합니다. 두 경우 모두 핵심은 육체적 시각이 아니라 영적 이해입니다. 즉, 이해가 열리면 진리를 보고, 이해가 닫히면 진리를 보지 못합니다.

 

이것은 AC.211의 ‘interior dictate’와도 깊이 연결됩니다. 아담과 하와의 ‘눈이 밝아져’는 자신들의 상태를 이해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사야의 경우는 그 반대입니다. 이해가 닫혀 있기 때문에, 진리를 보아도 깨닫지 못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따라서 창3:7의 ‘눈 밝아짐’과 사6:10의 ‘눈 감김’은 서로 정반대의 영적 상태를 보여 줍니다.

 

더 깊이 보면,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인간의 자유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진리를 보여 주시지만, 사람이 자기 own과 자기 사랑을 붙들고 있으면, 이해가 어두워져 결국 보아도 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눈이 감기는 원인은 주님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상태에 있습니다.

 

결국 AC.212에서 사6:10을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 전체에서 ‘’이 이해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창3:7의 ‘눈이 밝아져’는 육체적 변화가 아니라 이해가 열려 자신들의 상태를 인식하게 된 것을 뜻합니다. 이사야의 ‘눈이 감기게 하라’는 말씀은 그 반대의 경우로서, 이해가 닫혀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상태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예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AC.212, 심화 8, ‘마치 주님께서 하시는 것처럼’

AC.212.심화 8. ‘마치 주님께서 하시는 것처럼’ 말씀은 종종 인간 편에서 일어나는 일을 마치 주님께서 하시는 것처럼 표현하는데, (AC.212 심화 7) 주님은 왜 저렇게 하시죠? ‘이건 네가 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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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2, 심화 6, ‘겔12:2’

AC.212.심화 6. ‘겔12:2’ 인자야 네가 반역하는 족속 중에 거주하는도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아니하나니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임이라 (겔12:2) 이 구절을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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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구독자 수가 거의 60만에 육박하는 어느 목사님이 최근 장로교 모 교단으로부터 이단 판정을 받으셨군요. 이 분은 KJV 성경에 오리엔티드되신 분입니다. 이 얘기를 하는데 누가 스베덴보리도 KJV 아닌가요?’ 하네요... 지상의 언어로 된 성경들에 대해 스베덴보리는 어떤 입장이며, 그는 저작 활동 시 어떤 성경을 곁에 두고 썼나요?

 

 

스베덴보리도 KJV 아닌가요?’라는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맞는 부분부터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가 살던 18세기 유럽에서는 영어권의 경우, King James Version이 널리 사용되고 있었고, 오늘날 영어권 새 교회(New Church)에서도 KJV를 많이 사용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를 읽는 사람들 가운데 KJV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결코 ‘KJV만이 하나님의 말씀이다’라는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관점은 정반대에 가깝습니다. 그는 말씀의 거룩함이 특정 언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의 ‘내적 의미’, 곧 영적, 천적 의미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히브리어 자체나 그리스어 자체가 거룩한 것이 아니라, 그 언어들을 통해 기록된 말씀 속에 주님의 신적 진리가 담겨 있기 때문에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종종 원어를 직접 언급합니다. 특히 히브리어 단어 하나, 동사의 시제 하나, 복수형, 단수형 하나까지도 해석의 근거로 사용합니다. 이는 그가 성경을 단순히 번역본으로만 읽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는 실제로 어떤 성경을 옆에 두고 저술했을까요?

 

그가 가장 많이 사용한 것은 라틴어 성경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Biblia Sacra로 알려진 학술용 라틴어 성경을 주로 사용했습니다. 그의 거의 모든 저작이 라틴어로 쓰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를 상당히 읽을 수 있었으며, 특히 창세기와 출애굽기 해설인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을 보면 원문을 직접 검토한 흔적이 매우 자주 나타납니다. 그는 필요할 때, 히브리어 본문과 칠십인역, 라틴어 번역 등을 비교하며 설명합니다.

 

따라서 그의 작업 환경을 상상하면, 오늘날 어떤 KJV 유일주의 목사가 KJV 한 권만 펴 놓고 연구하는 모습과는 많이 달랐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는

 

* 히브리어 구약 원문

* 그리스어 신약 원문

* 라틴어 성경

* 여러 주석서와 사전

 

등을 함께 활용한 학자에 가까웠습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스베덴보리에게 중요한 질문은 ‘어느 번역본이 유일하게 옳은가?’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관심은 ‘이 구절 안에 주님과 천국에 관한 어떤 내적 의미가 들어 있는가?’였습니다.

 

그래서 만일 누군가가 ‘스베덴보리도 KJV를 사용했으니 KJV 유일주의자였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스베덴보리를 상당히 오해한 것입니다.

 

반대로 스베덴보리는 KJV를 포함하여 여러 번역본을 존중할 수는 있었겠지만, 어떤 특정 번역본 하나를 절대화하는 태도에는 동의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보기에 말씀의 신성은 영어 표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표현을 통해 드러나는 주님의 신적 진리와 그 안에 담긴 내적 의미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누군가에게 짧게 답하신다면 이렇게 말씀하셔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스베덴보리는 KJV를 사용하던 시대 사람이기는 했지만, KJV 유일주의자는 아닙니다. 그는 특정 번역본보다 히브리어, 그리스어 원문과 그 안의 내적 의미를 더 중요하게 보았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중요한 것은 어느 영어 성경인가가 아니라, 그 말씀 안에 담긴 주님의 신적 진리였습니다.’

 

 

 

SC.100, ‘ChatGPT에게 공정하게 질문하기’

그럼 캘빈의 TULIP을 절대적으로 믿는 침례교 목사가 스베덴보리에 대해 ChatGPT에게 물어보겠다 해도 그 결과가 저에게 우호적일 것이라고 믿는 건 좀 위험할 수 있겠군요! 그분의 해석 체계 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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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2.심화

 

6. ‘12:2

 

인자야 네가 반역하는 족속 중에 거주하는도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아니하나니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임이라 (12:2)

 

 

이 구절을 AC.212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이 단순한 육체의 눈이 아니라 이해(understanding)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문자 그대로 읽으면 이 말씀은 이상한 표현입니다. 그들은 분명 눈이 있었고, 실제로 사물을 보고 있었습니다. 또한 귀도 있었고, 사람들의 말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그들을 가리켜 볼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여기서 보다’와 듣다’는 육체적 감각 작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이해와 수용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점에 주목합니다. 사람은 눈으로 말씀을 읽을 수 있고, 귀로 설교를 들을 수 있으며, 입으로 신앙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해가 닫혀 있고, 의지가 거부하고 있다면, 영적으로는 여전히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스겔의 백성들은 육체적으로는 정상인이었지만, 영적으로는 맹인과 귀머거리였습니다.

 

이것은 AC.211 interior dictate’와도 연결됩니다. 3:7에서 아담과 하와의 눈이 밝아져’는 이해가 어떤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겔12:2의 사람들은 눈은 있으나 이해가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보지 못합니다. 즉 한쪽은 내적 인식이 열리는 상태이고, 다른 한쪽은 내적 인식이 닫혀 있는 상태입니다.

 

특히 본문은 그 이유를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임이라’고 밝힙니다. 다시 말해, 문제는 지능 부족이 아닙니다. 정보를 몰라서도 아닙니다.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의지가 진리 받아들이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자주 말하는 원리와도 일치합니다.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따라 보게 되고,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은 보아도 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AC.212에서 이 구절은 매우 중요한 증거가 됩니다. 만일 눈이 단순히 육체의 기관만을 의미한다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한다’는 말씀은 성립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눈이 이해를 의미한다면 이 말씀은 매우 자연스러워집니다. 그들은 육체의 눈으로는 보았지만, 이해의 눈으로는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결국 스베덴보리가 겔12:2를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이 이해를 상징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창3:7 눈이 밝아져’도 육체적 시력 문제가 아니라 이해의 문제이며, 자신들의 상태를 인식하게 된 내적 자각을 의미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성경적 근거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에스겔의 백성들은 눈이 있으면서도 보지 못한 사람들이고, 3:7의 사람들은 비로소 자신들의 상태를 보게 된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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