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CR.286

 

그 법 안에는 이처럼 큰 거룩함과 능력이 있었는데, 이는 그것이 종교에 속한 모든 것의 총체이기 때문입니다. 그 법은 두 돌판에 기록되었는데, 그 중 하나는 하나님을 향한 모든 것을 총괄하고 있고, 다른 하나는 인간을 향한 모든 것을 총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법의 계명들은 열 말씀(Ten Words)이라 불립니다 (34:28; 4:13; 10:4). 이렇게 불리는 것은 (ten)이 모든 것을 의미하고, ‘말씀들(words)은 진리들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것들은 단순히 열 개의 말씀이 아니라 그 이상입니다. ‘이 모든 것을 의미하며, 십일조(tithes, tenths)가 그러한 의미 때문에 제정되었다는 것은 Apocalypse Revealed 101번에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그 법이 종교의 모든 것의 총체라는 사실은 이어지는 내용에서 보게 될 것입니다. Such great holiness and power were in that law, because it was the complex of all things of religion. It was written on two tables, one of which contained in the complex all things that look to God, and the other in the complex all things that look to man. Therefore the commandments of that law are called the “Ten Words” (Exod. 34:28; Deut. 4:13; 10:4). They were so called because “ten” signifies all, and “words” signify truths; for they were more than ten words. That “ten” signifies all things, and that tithes (tenths) were instituted on account of that signification, may be seen in Apocalypse Revealed (n. 101); and that that law is the complex of all things of religion, will be seen in what follows.

 

 

해설

 

이 본문은 십계명이 왜 ‘열 개의 규칙’이 아니라 ‘전체를 담은 말씀’인지 그 구조를 명확하게 밝혀 줍니다. 먼저 핵심은 이것입니다. ‘십계명은 종교의 모든 것의 총체이다.’ 이것은 단순한 강조가 아니라, 십계명이 신앙과 삶 전체를 포괄하는 ‘압축된 구조’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뒤에 나오는 TCR.289에서 말한 것처럼, 신앙과 체어리티의 모든 것이 이 안에 들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즉, 십계명은 어떤 부분적인 교훈이 아니라 ‘전체의 요약’입니다.

 

특히 ‘두 돌판’에 대한 설명이 여기서 다시 등장하는데, 이번에는 그 의미가 더 분명해집니다. 한 돌판은 하나님을 향한 것, 다른 하나는 인간을 향한 것을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종교의 본질이 두 방향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는 하나님과의 관계, 다른 하나는 이웃과의 관계입니다. 다시 말해, 참된 신앙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완성됩니다. 이 두 가지가 함께 있을 때만 전체가 됩니다. 그래서 두 돌판은 단순한 물리적 구분이 아니라, 종교의 구조 자체를 나타냅니다.

 

또한 ‘열 말씀’이라는 표현도 매우 중요합니다. 일반적으로는 ‘십계명’이라고 부르지만, 여기서는 ‘열 말씀(ten words)이라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표현 속에서 ‘= 전체’를 읽어냅니다. 즉, 열이라는 숫자는 단순한 수량이 아니라 ‘완전한 전체’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십계명은 단순히 열 개의 조항이 아니라, ‘종교 전체를 담고 있는 완전한 말씀’이 됩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십일조(십 분의 일)도 ‘전체를 하나님께 드린다’는 의미를 갖게 됩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말씀(words) = 진리’라는 연결입니다. 이것은 십계명이 단순한 명령이 아니라 ‘진리의 집합’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십계명은 무엇을 하지 말라는 금지 목록이 아니라,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참된 질서’, 곧 진리의 체계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들을 따라 살 때 인간은 점점 하나님과 일치하는 상태로 나아가게 됩니다.

 

결국 이 본문은 이렇게 정리됩니다. ‘십계명은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모든 관계를 포함하는 종교 전체의 요약이며, 그 안에는 진리와 삶의 모든 질서가 압축되어 있다.’ 그래서 이 열 말씀은 단순한 출발점이 아니라, 신앙의 처음이자 끝이며, 거듭남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이 됩니다.

 

 

 

TCR, '십계명의 층 구조'

십계명이 자연적 의미로는 교리와 삶의 일반적인 계명들을 담고 있지만, 영적, 천적 의미로는 모든 계명들을 보편적으로 담고 있다 In the sense of the letter the Decalogue contains the general precepts of doctr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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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CR.285, ‘언약 = 결합(conjunction)’

TCR.285 그 법으로 말미암아 주님과 인간 사이에 결합(conjunction)이 이루어지며, 또 인간과 주님 사이에 결합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것은 ‘언약’(The Covenant)이라 불리고, 또한 ‘증거’(The Testi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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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CR.285

 

그 법으로 말미암아 주님과 인간 사이에 결합(conjunction)이 이루어지며, 또 인간과 주님 사이에 결합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것은 언약(The Covenant)이라 불리고, 또한 증거(The Testimony)라 불립니다. ‘언약이라 하는 것은 그것이 결합을 이루기 때문이며, ‘증거라 하는 것은 그 언약의 조항들을 확증하고 증언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에서 언약은 결합을, ‘증거는 그 조항들의 확증과 증언을 의미합니다. 이 때문에 두 돌판이 있었는데, 하나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을 위한 것입니다. 결합은 주님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인간이 자기의 돌판에 기록된 것을 행할 때에만 이루어집니다. 주님은 끊임없이 임재하시며 들어오기를 원하시지만, 인간은 주님에게서 받은 자유로 그분께 문을 열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Because by that law there is a conjunction of the Lord with man and of man with the Lord, it is called “The Covenant” and “The Testimony”; the covenant because it effects conjunction, and the testimony because it confirms the articles of the covenant; for “covenant” signifies in the Word conjunction, and “testimony” the confirmation and witnessing of its articles. For this reason there were two tables, one for God and the other for man. Conjunction is effected by the Lord, but only when man does what is written in his table; for the Lord is continually present and wishes to enter in, but man, by the freedom which he has from the Lord, must open to him, for the Lord says: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3:20) Behold I stand at the door and knock; if any man hear my voice and open the door, I will come in to him, and will sup with him, and he with me (Rev. 3:20).

 

그 법이 기록된 돌판들이 언약의 돌판(the tables of the covenant)이라 불렸고, 그것 때문에 법궤가 언약궤(the ark of the covenant)라 불렸으며, 그 법 자체도 언약(the covenant)이라 불렸다는 것은 민10:33,4:13, 23; 5:2, 3; 9:9,3:11, 왕상8:21,11:19 등에서 볼 수 있습니다. ‘언약이 결합을 의미하기 때문에 주님에 대하여 That the tables of stone on which the law was written, were called the tables of the covenant, and because of them the ark was called the ark of the covenant, and the law itself was called the covenant, may be seen in Num. 10:33; Deut. 4:13, 23; 5:2, 3; 9:9; Josh. 3:11; 1 Kings 8:21; Rev. 11:19, and elsewhere. Since “covenant” signifies conjunction, it is said of the Lord,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42:6) That he shall be a covenant for the people (Isa. 42:6; 49:8–9).

 

8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내가 장차 너를 보호하여 너를 백성의 언약으로 삼으며 나라를 일으켜 그들에게 그 황무하였던 땅을 기업으로 상속하게 하리라 9내가 잡혀 있는 자에게 이르기를 나오라 하며 흑암에 있는 자에게 나타나라 하리라 그들이 길에서 먹겠고 모든 헐벗은 산에도 그들의 풀밭이 있을 것인즉 (49:8, 9)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 (3:1) He is called also the messenger of the covenant (Mal. 3:1).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6:28) And his blood is called the blood of the covenant (Matt. 26:28; Zech. 9:11; Exod. 24:4–10);

 

또 너로 말할진대 네 언약의 피로 말미암아 내가 네 갇힌 자들을 물 없는 구덩이에서 놓았나니 (9:11)

 

4모세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산 아래에 제단을 쌓고 이스라엘 열두 지파대로 열두 기둥을 세우고 5이스라엘 자손의 청년들을 보내어 여호와께 소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게 하고 6모세가 피를 가지고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제단에 뿌리고 7언약서를 가져다가 백성에게 낭독하여 듣게 하니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8모세가 그 피를 가지고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9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인이 올라가서 10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니 그의 발 아래에는 청옥을 편 듯하고 하늘같이 청명하더라 (24:4-10)

 

그러므로 말씀은 구약(the old covenant)신약(the new covenant)이라 불립니다. 이는 언약이 사랑과 우정과 결합을 위하여 맺어지기 때문입니다. and therefore the Word is called the old and the new covenant [testament]; for covenants are made for the sake of love, friendship, affiliation, and conjunction.

 

그들이 여호와의 산에서 떠나 삼 일 길을 갈 때에 여호와의 언약궤가 그 삼 일 길에 앞서가며 그들의 쉴 곳을 찾았고 (10:33)

 

13여호와께서 그의 언약을 너희에게 반포하시고 너희에게 지키라 명령하셨으니 곧 십계명이며 두 돌판에 친히 쓰신 것이라, 23너희는 스스로 삼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을 잊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금하신 어떤 형상의 우상도 조각하지 말라 (4:13, 23)

 

2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호렙산에서 우리와 언약을 세우셨나니 3이 언약은 여호와께서 우리 조상들과 세우신 것이 아니요 오늘 여기 살아 있는 우리 곧 우리와 세우신 것이라 (5:2, 3)

 

그때에 내가 돌판들 곧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돌판들을 받으려고 산에 올라가서 사십 주 사십 야를 산에 머물며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더니 (9:9)

 

보라 온 땅의 주의 언약궤가 너희 앞에서 요단을 건너가나니 (3:11)

 

내가 또 그곳에 우리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에 그들과 세우신 바 여호와의 언약을 넣은 궤를 위하여 한 처소를 설치하였노라 (왕상8:21)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우레와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 (11:19)

 

 

해설

 

이 본문은 십계명을 ‘언약’이라는 개념으로 풀어내면서, 신앙의 본질을 매우 명확하게 드러냅니다. 먼저 ‘언약 = 결합(conjunction)’이라는 정의가 핵심입니다. 일반적으로 언약을 계약이나 약속 정도로 이해하기 쉽지만,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하나님과 인간이 실제로 연결되는 상태’로 봅니다. 따라서 십계명은 단순한 규칙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을 이어 주는 매개’입니다. 이것이 앞서 계속 강조된 ‘왜 십계명이 그렇게 거룩한가’에 대한 또 하나의 해답입니다.

 

특히 ‘두 돌판’에 대한 설명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을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결합이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적인 것’임을 보여줍니다. 주님은 항상 임재하시며 들어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인간 쪽에서 응답이 있어야 결합이 이루어집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자유’가 등장합니다. 인간은 강제로 하나님과 연결되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문을 열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인용된 계3:20의 말씀은 이 교리를 가장 잘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주님은 문을 부수고 들어오지 않으시고, 두드리실 뿐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자기 돌판에 기록된 것을 행할 때에만 결합이 이루어진다’는 말은 매우 결정적입니다. 이것은 신앙을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끌어올립니다. 단순히 믿는 것이 아니라 ‘행하는 것’, 특히 십계명의 삶, 곧 악을 죄로 알고 거부하는 삶이 있을 때에만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연결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결합은 감정이나 선언이 아니라 ‘삶의 상태’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또한 ‘언약’과 ‘증거’의 구분도 의미가 깊습니다. 언약은 결합 자체이고, 증거는 그것이 참됨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계명은 단순한 요구가 아니라, ‘이 길을 따르면 하나님과 연결된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말씀입니다. 이 점에서 말씀 전체가 ‘구약과 신약’, 곧 ‘옛 언약과 새 언약’으로 불리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결국 말씀 전체가 ‘하나님과 인간의 결합’을 목표로 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언약은 사랑과 우정과 결합을 위해 맺어진다’는 구절은 매우 따뜻한 결론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단순한 법적 관계가 아니라, 사랑의 관계입니다. 십계명도 억압적인 규칙이 아니라, 그 사랑의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질서입니다. 그래서 이 본문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십계명은 하나님이 인간과 사랑으로 연결되기 위해 주신 언약이며, 인간이 그것을 삶으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그 결합이 이루어진다.’

 

 

 

TCR.286, '십계명은 종교의 모든 것의 총체'

TCR.286 그 법 안에는 이처럼 큰 거룩함과 능력이 있었는데, 이는 그것이 종교에 속한 모든 것의 총체이기 때문입니다. 그 법은 두 돌판에 기록되었는데, 그 중 하나는 하나님을 향한 모든 것을 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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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CR.284, 성경 전체를 통해 ‘십계명이 얼마나 중심에 있었는가’를 보여줌

TCR.284 위에서 그 법의 공포와 거룩함과 능력에 관하여 말한 것은 말씀의 다음 구절들에서 확인됩니다. What has been above presented respecting the promulgation, holiness, and the power of that law, is found in the follow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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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삼하6:7)

 

 

이 구절은 성경 전체를 통틀어도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 중 하나입니다. 겉으로 보면, 넘어지려는 궤를 붙들어 넘어지지 않게 하려던 웃사가 즉시 죽임을 당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선한 의도로 한 행동인데 왜 이렇게까지 엄중한 결과가 오는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그러나 에마누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이 장면은 ‘하나님의 성물’과 ‘인간의 자연적 상태’ 사이의 관계를 드러내는 매우 깊은 상응의 사건으로 이해됩니다. 여기서 핵심은 ‘행동의 겉모습’이 아니라 ‘상태(state)입니다.

 

먼저 궤, 곧 ‘여호와의 언약궤’는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주님의 신적 임재’, 더 정확히는 ‘신적 진리와 선의 결합된 임재’를 상징합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인간이 임의로 다루거나 손댈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오직 ‘정해진 질서와 상태 안에서만’ 가까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에서도 궤는 반드시 레위인, 그것도 특정한 방식으로만 운반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의식 규정이 아니라, ‘거룩한 것은 인간의 자연적 자아가 직접 붙잡을 수 없다’는 영적 질서를 표현한 것입니다.

 

웃사의 경우를 보면, 겉으로는 궤가 넘어질까 봐 붙든 것이지만, 내적 의미에서는 ‘자연적 인간이 자기 힘으로 신적인 것을 지탱하거나 다룰 수 있다고 여기는 상태’를 상징합니다. 스베덴보리식으로 말하면, 이것은 ‘자기 사랑과 자기 지성에서 나온 개입’, 즉 ‘주님의 것을 자기 것으로 붙잡으려는 상태’입니다. 그는 여러 곳에서, 사람이 아직 정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신적 진리에 직접 손대면 그것이 오히려 파괴적으로 작용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신적인 것은 본질적으로 순수한 질서인데, 그것이 왜곡된 상태와 접촉할 때 충돌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감정적으로 화를 내어 치셨다’기보다는, ‘질서의 법칙이 그대로 작용했다’는 이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성경에 나타나는 ‘진노’, ‘치심’ 같은 표현들을 인간의 시각에서 본 현상적 언어로 설명합니다. 실제로는 주님에게 분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적 질서와 어긋날 때 그 결과가 ‘심판’처럼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마치 불이 따뜻함을 주지만, 같은 불에 무질서하게 손을 넣으면 화상을 입는 것과 같습니다. 불이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그 성질과 인간의 상태가 맞지 않기 때문에 결과가 그렇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또 하나 깊이 보아야 할 점은, 이 사건이 다윗이 궤를 옮기는 과정에서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즉 ‘주님의 임재를 더 가까이 가져오려는 시도’ 속에서 발생한 사건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영적 교훈을 줍니다. 사람이 진리를 더 가까이하고자 할 때, 반드시 ‘올바른 방식과 준비된 상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열심이나 선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신적인 것에 급히 접근하면, 그것이 축복이 아니라 충격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후 다윗이 두려워하며 과정을 멈추고, 다시 질서에 맞게 궤를 옮기는 장면이 이어집니다. 이것은 ‘열심이 질서로 교정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결국 이 본문은 ‘하나님은 무서운 분이다’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거룩한 것은 질서 안에서만 접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더 깊이 들어가면, 우리 각자의 신앙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는 종종 선한 의도로 주님의 것을 붙잡고 다루려 하지만, 그 안에 ‘자기 의’나 ‘자기 주도성’이 섞여 있을 때가 많습니다. 스베덴보리라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주님의 것은 주님이 지키신다. 인간은 그것을 붙드는 것이 아니라, 그 질서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다.” 그래서 웃사의 사건은 단순한 비극이 아니라, 신적 질서와 인간 상태 사이의 관계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입니다.

 

 

 

SC.55, ‘삼상5, 블레셋 사람들의 이상한 행동’

삼상5에 보면, 이스라엘 하나님의 궤를 빼앗은 블레셋 사람들이 그 궤를 자기들의 신 다곤의 신전에 두면서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고, 그리고 아스돗 사람들에게 큰 재앙이 닥칩니다. 그래서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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