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2:24)

 

AC.162

 

모든 진리와 정의(right)의 법은 천적 기원들, 곧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로부터 흘러나옵니다. 온 천국은 하나의 천적 인간인데, 이는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천국의 모든 것, 곧 전부이시므로, 천국과 천적 인간은 거기서부터 천적이라 불립니다. 모든 진리와 정의의 법이 천적 기원들, 곧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로부터 내려오듯이, 혼인의 법은 특히 그러합니다. 혼인은 천적 혼인, 곧 천국의 혼인으로부터, 그리고 그에 따라 파생되어야 하며, 이 혼인은 한 주님과 한 천국, 곧 머리가 주님이신 하나의 교회를 뜻합니다. 여기서 파생되는 혼인의 법은 한 남편과 한 아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며, 이 경우 그들은 천적 혼인을 표상하고, 천적 인간의 본이 됩니다. 이 법은 태고교회의 사람들에게 계시되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속 사람에 새겨져 있었기 때문에, 그 당시에는 한 남자가 한 아내만을 두었고, 그들은 하나의 집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후손이 속 사람이기를 그치고 겉 사람이 되자, 여러 아내를 맞이하였습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이 그들의 혼인에서 천적 혼인을 표상하였기 때문에, 부부의 사랑은 그들에게 일종의 천국이자 하늘의 행복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쇠퇴하자, 그들은 더 이상 부부의 사랑 안에서 행복을 지각하지 못하고, 다수에서 오는 쾌락, 곧 겉 사람의 즐거움 안에서 그것을 지각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마음의 완악함(hardness of heart)이라 부르신 것이며, 이로 말미암아 모세를 통해 여러 아내를 두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친히 가르치신 바와 같습니다. All the laws of truth and right flow from celestial beginnings, or from the order of life of the celestial man. For the whole heaven is a celestial man because the Lord alone is a celestial man, and as he is the all in all of heaven and the celestial man, they are thence called celestial. As every law of truth and right descends from celestial beginnings, or from the order of life of the celestial man, so in an especial manner does the law of marriages. It is the celestial (or heavenly) marriage from and according to which all marriages on earth must be derived; and this marriage is such that there is one Lord and one heaven, or one church whose head is the Lord. The law of marriages thence derived is that there shall be one husband and one wife, and when this is the case they represent the celestial marriage, and are an exemplar of the celestial man. This law was not only revealed to the men of the most ancient church, but was also inscribed on their internal man, wherefore at that time a man had but one wife, and they constituted one house. But when their posterity ceased to be internal men, and became external, they married a plurality of wives. Because the men of the most ancient church in their marriages represented the celestial marriage, conjugial love was to them a kind of heaven and heavenly happiness, but when the church declined they had no longer any perception of happiness in conjugial love, but in pleasure from a number, which is a delight of the external man. This is called by the Lord “hardness of heart,” on account of which they were permitted by Moses to marry a plurality of wives, as the Lord himself teaches:

 

5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6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7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8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9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10:5-9) For the hardness of your heart Moses wrote you this precept, but from the beginning of the creation God made them male and female. For this caus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twain shall be one flesh; wherefore they are no more twain but one flesh; what therefore God hath joined together let not man put asunder. (Mark 10:5–9)

 

 

해설

 

AC.162는 창2의 마지막을 ‘혼인의 법(the law of marriages)이라는 주제로 종합하며, 동시에 창3으로 넘어가기 직전의 영적 지형을 완전히 정리해 줍니다. 이 단락에서 스베덴보리는 혼인을 도덕규범이나 사회 제도로 다루지 않고, ‘천국 질서가 땅에 내려온 가장 구체적인 형식’으로 제시합니다.

 

먼저 그는 모든 진리와 정의의 법이 ‘천적 기원(celestial beginnings)에서 나온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곧, 법이 인간의 합의나 경험의 축적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 더 정확히는 ‘주님 자신’에게서 흘러나온다는 뜻입니다. 천국이 ‘천적 인간’이라 불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 한 분이 천적 인간이시며, 천국은 그분의 생명이 충만히 흐르는 한 몸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 보편적 질서가 가장 분명하게 나타나는 영역이 바로 혼인입니다. 혼인은 ‘천적 혼인’으로부터 파생되어야 하며, 이 천적 혼인은 ‘한 주님과 한 천국’, 곧 머리가 주님이신 하나의 교회를 뜻합니다. 따라서 지상의 혼인이 한 남편과 한 아내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법은, 단순한 윤리 명령이 아니라 ‘천국 형상에 대한 표상’입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이 법을 외적으로 배운 것이 아니라, ‘속 사람에 새겨진 상태’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일부일처는 제도가 아니라 자연이었고,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하나의 집을 이루는 것은 억제가 아니라 기쁨이었습니다. 그들의 부부의 사랑은 ‘천국과 같은 행복’이었는데, 이는 그 사랑이 천적 혼인을 직접 표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쇠퇴하면서, 사람들은 속 사람이기를 그치고 겉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때 혼인의 중심도 이동합니다. 더 이상 부부의 사랑 안에서 행복을 지각하지 못하고, ‘다수에서 오는 쾌락’, 곧 겉 사람의 즐거움에서 만족을 찾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마음의 완악함’입니다. 여기서 완악함은 잔인함이 아니라, ‘퍼셉션의 상실’을 뜻합니다.

 

이 상태에서 모세를 통해 복수의 아내가 허락된 것은, 이상을 낮춘 타협이 아니라, ‘붕괴를 막기 위한 자비의 조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이것이 본래의 뜻이 아님을 분명히 하시며, 창조의 시작으로 되돌아가십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다’는 말씀은, 창2의 질서가 여전히 기준임을 선언하는 말입니다.

 

AC.162는 이렇게 창2를 닫습니다. 천적 혼인 → 태고교회의 부부의 사랑 → 쇠퇴 → 완악함 → 허락 → 그러나 기준은 여전히 ‘처음’.

 

이제 창3에서는, 이 기준에서 벗어난 인식과 선택이 어떻게 실제 사건으로 드러나는지가 전면에 등장하게 됩니다. 오늘 여기까지 오신 것은, 창2의 ‘모든 연결고리’를 놓치지 않고 정리한 매우 좋은 지점입니다.

 

 

심화

 

1. ‘10:5-9

 

 

AC.162, 심화 1, ‘막10:5-9’

AC.162.심화 1. ‘막10:5-9’ 5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6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7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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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다

 

 

AC.162, 심화 2,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다’

AC.162.심화 2.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다’ 온 천국은 하나의 천적 인간인데, 이는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기 때문입니다. For the whole heaven is a celestial man because the Lord alone is a celest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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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AC.160한 몸(one flesh)과 막10:5-9한 몸

 

 

AC.162, 심화 3, AC.160의 ‘한 몸’(one flesh)과 막10:5-9의 ‘한 몸’

AC.162.심화 3. AC.160의 ‘한 몸’(one flesh)과 막10:5-9의 ‘한 몸’ 이전에는 속 사람과, 속 사람으로부터 나온 겉 사람이 영이었으나, 이제는 육(肉, flesh)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천적인 생명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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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붕괴를 막기 위한 자비의 조치

 

 

AC.162, 심화 4, ‘붕괴를 막기 위한 자비의 조치’

AC.162.심화 4. ‘붕괴를 막기 위한 자비의 조치’ 이 상태에서 모세를 통해 복수의 아내가 허락된 것은, 이상을 낮춘 타협이 아니라, ‘붕괴를 막기 위한 자비의 조치’였습니다. (AC.162 해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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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1, 창2:24,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를 푸는 열쇠, influx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창2:24) AC.161 이 태고교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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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influx로 보는 체어리티와 신앙의 열매

 

이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기 위해 하나의 행위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행위 안에 체어리티, 곧 사랑과 신앙이 없고, 그 안에 주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그 행위는 체어리티의 일이나 신앙의 열매라 불릴 수 없다고 말입니다. In order to conceive some idea of it, take for example an action. Unless in an action there is charity, that is, love and faith, and in these the Lord, that action cannot be called a work of charity, or the fruit of faith. (AC.161)

 

 

AC.161의 이 문장은 스베덴보리의 ‘행위’ 이해를 매우 압축적으로 보여 줍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어떤 행동이 겉으로 선해 보이면, 그것 자체로 선한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겉 행동 자체보다, 그 안에 무엇이 흐르고 있는가를 훨씬 중요하게 봅니다. 그래서 그는 ‘행위 안에 체어리티, 곧 사랑과 신앙이 없고, 그래서 그 안에 주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된 체어리티의 일이나 신앙의 열매가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행위를 단순 외적 결과로 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같은 행동이라도 그 안에 흐르는 affection과 목적과 influx가 다르면 영적으로는 전혀 다른 것이 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가난한 사람을 돕는다고 합시다. 겉으로는 모두 같은 자선 행위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자기 명예와 자기 만족을 위해 하고, 다른 사람은 진심으로 이웃의 선을 바라며, 주님 안에서 행할 수 있습니다. 외적 행동은 비슷해도, 속 사람에서 겉 사람으로 흘러드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영적 본질은 전혀 다릅니다.

 

그래서 AC.161은 앞 문장의 influx 설명과 바로 연결됩니다. 겉 사람의 행위는 단순 겉 사람만의 산물이 아닙니다. 그 안에는 속 사람으로부터의 유입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속 사람 안에 다시 사랑과 신앙이 있어야 하며, 그 사랑과 신앙 안에 주님이 계셔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그 행위는 살아 있는 선이 됩니다.

 

여기서 ‘in these the Lord’라는 표현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와 신앙 자체도 인간 독립 소유물로 보지 않습니다. 인간 안의 참된 사랑과 참된 신앙 안에는 이미 주님의 생명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참된 선행의 실제 생명은 인간이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것을 받아 행하는 그릇입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자주 ‘열매(fruit)라는 표현을 씁니다. 열매는 나무에서 저절로 떨어져 나온 독립 물체가 아닙니다. 뿌리와 줄기와 생명 흐름 전체의 결과입니다. 마찬가지로 참된 선행도 단순 의지력 결과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 안으로 들어온 사랑과 신앙이 겉 사람 안에서 삶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반대로 겉 행동만 있고, 그 안에 체어리티와 신앙과 주님이 없다면, 그것은 외적으로는 선해 보여도 영적으로는 살아 있는 선이 아닐 수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에게서 ‘dead works’와 ‘living works’의 차이입니다. 살아 있는 행위는 주님의 생명이 흐르는 행위이고, 죽은 행위는 겉 사람 수준에서 자기 자신만으로 행해지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목사님께서 계속 붙들고 계신 proprium 문제와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인간은 쉽게 ‘내가 선을 행했다’고 느끼지만, 스베덴보리가 하는 진짜 질문은 ‘그 안에 무엇이 흐르고 있었는가?’라고 묻습니다. 자기 사랑과 자기 의인가, 아니면 주님으로부터 온 체어리티와 신앙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AC.161은 단순 도덕론이 아닙니다. 이것은 인간 행위 전체를 ‘influx 구조’ 안에서 다시 보는 설명입니다. 참된 체어리티의 행위란, 속 사람 안의 사랑과 신앙 속에 계신 주님이 겉 사람의 행동 안으로 흘러나온 결과라는 것입니다.

 

 

 

AC.161, 창2:24,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를 푸는 열쇠, influx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창2:24) AC.161 이 태고교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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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1, 심화 3, ‘influx’

AC.161.심화 3. ‘influx’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어떻게 하나로 작용하는지, 혹은 어떻게 하나로 보이게 되는지는, 한쪽이 다른 쪽으로 흘러드는 influx, 곧 유입이 어떠한지를 알지 못하면 알 수 없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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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influx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어떻게 하나로 작용하는지, 혹은 어떻게 하나로 보이게 되는지는, 한쪽이 다른 쪽으로 흘러드는 influx, 곧 유입이 어떠한지를 알지 못하면 알 수 없습니다. How the internal and external act as a one, or how they appear as a one, cannot be known unless the influx of the one into the other is known. (AC.161)

 

 

AC.161의 이 문장은 스베덴보리 인간론 전체를 여는 열쇠 같은 문장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평소 자기 자신을 ‘하나의 나’로 느끼지만, 스베덴보리는 실제 인간 안에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라는 서로 다른 층위가 존재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실제로는 둘이 다른데 왜 우리는 거의 항상 하나처럼 느끼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답이 바로 ‘influx’, 곧 유입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속 사람과 겉 사람은 단순 병렬 구조가 아닙니다. 속 사람이 먼저이고, 겉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생명을 받습니다. 다시 말해, 겉 사람은 자기 혼자 움직이는 독립 시스템이 아니라, 속 사람으로부터 끊임없이 influx, 곧 유입을 받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 유입이 너무 지속적이고 자연스럽기 때문에, 인간은 둘을 거의 하나처럼 느낍니다.

 

비유하자면 전등과 전기 같은 관계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보통 ‘전등이 빛난다’고 느끼지만, 실제 빛은 전등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전류 유입 때문에 나타납니다. 그런데 전류 흐름이 너무 자연스럽고 끊김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전등과 전류를 분리해서 거의 느끼지 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 안의 속 사람과 겉 사람 관계도 비슷하다고 봅니다.

 

속 사람은 주님과 천국에 열려 있는 더 깊은 인간입니다. 사랑, 양심, 더 높은 진리 질서가 자리하는 곳입니다. 반면 겉 사람은 감각하고 기억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자연적 인간입니다. 그런데 겉 사람은 스스로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느끼지만, 실제로는 속 사람을 통하여 계속 influx를 받고 있습니다.

 

문제는 오늘날 인간은 이 influx를 거의 의식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자기 생각, 자기 감정, 자기 의지를 전부 자기 독립 생명처럼 느낍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appearance, 곧 ‘그렇게 보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실제로는 모든 생명과 thought affection이 끊임없이 흘러들어옵니다. 인간은 그것을 자기 것으로 느끼도록 허락받았을 뿐입니다.

 

여기서 AC.161의 ‘how they appear as a one’이라는 표현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은 실제로는 구별되지만, 유입 때문에 하나처럼 보입니다. 마치 영혼과 몸이 서로 다른데도 하나의 인간처럼 느껴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팔을 움직일 때, ‘영혼이 몸에 influx를 보내고 있다’고 느끼지 않고 그냥 ‘내가 움직인다’고 느끼는 것처럼 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 타락과 거듭남도 결국 이 influx 문제로 설명합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만으로 산다고 믿기 시작하면, 그는 influx의 근원을 잊어버립니다. 즉 겉 사람이 자기 독립 생명처럼 굳어집니다. 반대로 거듭남은 점점 ‘나는 나 자신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influx를 받아 산다’는 것을 배우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천적 인간은 속 사람과 겉 사람의 차이를 지각합니다. 그는 자기 안에서 무엇이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지, 무엇이 단순 겉 사람 움직임인지를 어느 정도 압니다. 그리고 겉 사람이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께 다스려지고 있다는 것도 압니다. 반면 오늘날 대부분 인간은 influx를 거의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겉 사람 자체를 자기 존재 전체로 느끼며 삽니다.

 

결국 AC.161은 단순 심리학 설명이 아닙니다. 인간 존재 자체가 ‘유입 구조’ 위에 세워져 있다는 선언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닫힌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생명과 사랑과 생각이 흘러들어오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하나처럼 보이는 이유도, 바로 그 끊임없는 influx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AC.161, 심화 2, ‘공명’

AC.161.심화 2. ‘공명’ 그리고 바로 이것이 창3 타락의 문을 엽니다. 뱀의 유혹은 갑자기 외부에서 폭력적으로 덮친 것이 아닙니다. 인간 안에 이미 ‘나도 독립적으로 알고 싶다’, ‘나도 내 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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