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5:22)

 

AC.519

 

그 당시에 태고교회와 그 뒤를 이은 교회들에서 퍼셉션의 대상이 되었던 것들로부터 교리를 구성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는 그러한 교리가 규범, 곧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진리인지를 알기 위한 규범으로 쓰이게 하려고 그런 건데, 이 일을 한 사람들을 가리켜 ‘에녹(Enoch)이라 하며, 이것이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였다(and Enoch walked with God)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구성한 교리를 또한 그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이는 ‘에녹’이라는 이름의 뜻이 ‘가르치다(instruct)라는 데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또한 이는 ‘동행하다(walk)라는 표현의 의미와, 그가 여호와가 아닌 하나님과 동행하였다(walked with God, not with Jehovah)라고 하는 사실에서도 분명해집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walk with God)은 신앙의 교리에 따라 가르치고, 또 살아가는 것을 뜻하지만, ‘여호와와 동행하는 것(walk with Jehovah)은 사랑의 삶(life)을 사는 것, 곧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무엇을 하든 그 동기가 ‘사랑하기 때문에’라는 것이지요. ‘동행하다(walk)라는 말은 살아가는 걸 의미하는 상용 표현으로, ‘율법 안에서 살아가다(walk in the law), ‘규례 안에서 살아가다(walk in the statutes), ‘진리 안에서 살아가다(walk in the truth)와 같은 표현이 그러합니다. ‘동행하다(walk)라는 표현은 본래 길과 관련된 말로서, 진리와 관련되며, 따라서 신앙이나 신앙의 교리와 관련됩니다. 성경에서 ‘동행하다(walking)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다음의 말씀들에서 어느 정도 분명해집니다. There were some at that time who framed doctrines from the things that had been matters of perception in the most ancient and succeeding churches, in order that such doctrine might serve as a rule whereby to know what was good and true: such persons were called “Enoch.” This is what is signified by the words, “and Enoch walked with God”; and so did they call that doctrine; which is likewise signified by the name “Enoch,” which means to “instruct.” The same is evident also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 expression to “walk,” and from the fact that he is said to have “walked with God,” not “with Jehovah”; to “walk with God” is to teach and live according to the doctrine of faith, but to “walk with Jehovah” is to live the life of love. To “walk” is a customary form of speaking that signifies to live, as to “walk in the law,” to “walk in the statutes,” to “walk in the truth.” To “walk” has reference properly to a way, which has relation to truth, consequently to faith, or the doctrine of faith. What is signified in the Word by “walking,” may in some measure appear from the following passages.

 

[2] 미가에서는 In Micah: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6:8) He hath showed thee, O man, what is good, and what doth Jehovah require of thee, but to do judgment and the love of mercy, and to humble thyself by walking with thy God? (Micah 6:8)

 

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walk with God)은 여기서 말씀하신 것들을 따라 사는 걸 뜻합니다. 다만 여기서는 ‘하나님과(with God)라고 되어 있고, 에녹에 대해서는 또한 ‘하나님으로부터(from with God)라는 의미를 지닌 다른 말이 쓰여, 그 표현이 다소 중의적으로 사용됩니다. 시편에서는 where to “walk with God” signifies to live according to the things here indicated; here, however, it is said “with God,” while of Enoch another word is used which signifies also “from with God,” so that the expression is ambiguous. In David: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56:13) Thou hast delivered my feet from impulsion, that I may walk before God in the light of the living, (Ps. 56:13)

 

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하나님 앞에 다니는 것(walk before God)은 신앙의 진리 안에서 동행하는 것을 뜻하며, 이것이 곧 ‘생명의 빛(light of the living)입니다. 이와 같이 이사야에서는 where to “walk before God” is to walk in the truth of faith, which is the “light of the living.” In like manner in Isaiah: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9:2) The people that walk in darkness see a great light. (Isa. 9:1)

 

라고 말합니다. 또 주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So the Lord says by Moses: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니라 (26:12) I will walk in the midst, and will be your God, and ye shall be my people, (Lev. 26:12)

 

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율법의 교리에 따라 사는 것을 뜻합니다. signifying that they should live according to the doctrine of the law.

 

[3] 예레미야에서는 In Jeremiah:

 

그들이 사랑하며 섬기며 뒤따르며 구하며 경배하던 해와 달과 하늘의 뭇별 아래에서 펼쳐지게 하리니 (8:2) They shall spread them before the sun, and the moon, and to the armies of the heavens, whom they have loved, and whom they have served, and after whom they have walked, and whom they have sought, (Jer. 8:2)

 

라고 말씀하시는데, 여기서는 사랑의 것들과 신앙의 것들이 분명히 구별됩니다. 사랑의 것들은 ‘사랑하며(loving)와 ‘섬기며(serving)로 표현되고, 신앙의 것들은 ‘뒤따르며(walking)와 ‘구하며(seeking)로 표현됩니다. 모든 예언서에서는 모든 표현이 정확하게 사용되며, 어느 한 용어도 다른 용어를 대신하여 쓰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말씀에서 ‘여호와와 동행하다(walk with Jehovah) 또는 ‘여호와 앞에서 행하다(before Jehovah)라는 것은 사랑의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where a manifest distinction is made between the things of love, and those of faith; the things of love being expressed by “loving” and “serving”; and those of faith by “walking” and “seeking.” In all the prophetical writings every expression is used with accuracy, nor is one term ever used in the place of another. But to “walk with Jehovah,” or “before Jehovah,” signifies, in the Word, to live the life of love.

 

 

해설

 

이 글은 ‘에녹’의 교회가 왜 태고교회 흐름 속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지를 매우 분명하게 밝혀 줍니다. 에녹의 교회는 퍼셉션 그 자체로 살아가던 교회가 아니라, ‘퍼셉션의 내용으로부터 교리를 구성하여 보존하려 했던 교회’였습니다. 퍼셉션이 점차 약화되면서,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진리인지를 즉각적으로 알 수 없게 되자, 그것을 대신할 규범이 필요해졌고, 그 결과 교리가 형성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교리를 단순한 인간적 산물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는 주님의 섭리 안에서 허락된 보존의 방식이었습니다. 에녹이라 불린 사람들은, 이전 교회들에서 살아 있던 퍼셉션의 내용을 붙잡아, 그것을 가르칠 수 있는 형태로 정리한 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에녹(Enoch)이라는 이름 자체가 ‘가르치다(instruct)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구분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다’와 ‘여호와와 동행하다’의 차이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신앙의 교리에 따라 살고 가르치는 것을 뜻합니다. 반면 여호와와 동행하는 것은 사랑의 삶, 곧 쓰임새의 삶을 직접 사는 것을 뜻합니다. 이 구분은 결코 사소하지 않습니다. 이는 교회의 중심이 퍼셉션과 사랑의 삶에서 교리와 신앙의 삶으로 이동했음을 보여 주는 결정적 표시입니다.

 

동행하다(walk)라는 표현 자체도 이 변화를 잘 드러냅니다. 동행은 길과 관련된 말이며, 길은 진리와 연결됩니다. 그래서 말씀에서 ‘동행하다’는 주로 신앙과 교리, 진리의 길을 따라 사는 것을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러 예언서의 구절들을 통해, 이 표현이 얼마나 일관되고 정확하게 사용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사랑과 관련된 표현과, 신앙과 관련된 표현이 결코 뒤섞여 쓰이지 않는다는 점이 특히 강조됩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글은 오늘날 교회의 현실을 깊이 비추는 거울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감정적 친밀감이나 개인적 체험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에녹의 교회가 보여 주는 동행은, ‘교리를 통해 신앙의 방향을 유지하는 삶’입니다. 이는 살아 있는 퍼셉션이 약해진 시대에, 신앙을 지키는 매우 현실적인 방식입니다.

 

동시에 이 글은 교리의 한계도 암시합니다. 교리는 생명을 대신할 수는 없지만, 생명이 사라지는 것을 막는 그릇이 될 수는 있습니다. 에녹의 교회는 바로 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퍼셉션이 직접 작동하던 시대는 지나가고 있었지만, 그 진리들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도록, 교리라는 형태로 다음 시대에 전해지도록 준비한 것입니다.

 

결국 AC.519는 에녹의 교회를 ‘보존의 교회’, ‘가르침의 교회’로 규정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말은, 신앙의 교리를 따라 살고 그것을 가르친다는 뜻이며, 이는 퍼셉션이 약화된 시대 속에서도 주님께서 교회의 생명을 이어 가시는 섭리의 한 방식이었습니다. 이 글은 교회 역사뿐 아니라, 오늘 우리의 신앙이 어디에 서 있는지를 성찰하게 만드는 깊은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AC.518, 창5: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C.518-519)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nd Enoch walked with God after he begat Methuselah three hundred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창5:22) AC.518 ‘하나님과 동행하며’(walk with 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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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nd Enoch walked with God after he begat Methuselah three hundred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5:22)

 

AC.518

 

‘하나님과 동행하며’(walk with God)는 신앙에 관한 교리를, ‘자녀들을 낳았으며’(begat sons and daughters)는 진리와 선에 관한 교리적인 것들을 의미합니다. To “walk with God” signifies doctrine concerning faith. That he “begat sons and daughters” signifies doctrinal matters concerning truths and goods.

 

 

해설

 

이 글은 ‘에녹(Enoch)이라는 교회가 지닌 성격을 아주 분명한 방향으로 규정해 줍니다. 여기서 핵심은, 이전 교회들처럼 퍼셉션 그 자체가 중심이 아니라, ‘교리(doctrine)가 중심으로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표현을 삶의 친밀함이나 경건의 정서로 읽기 쉽지만, 스베덴보리는 이를 신앙에 관한 교리로 해석합니다. 이는 에녹의 교회가 신앙의 내용을 ‘체계적으로 보존하고 전수하는 단계’에 이르렀음을 뜻합니다.

 

퍼셉션이 살아 있던 초기 태고교회에서는,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굳이 교리로 정리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퍼셉션, 곧 선과 진리에 관한 인식이 직접적이었기 때문이에요. 그냥 알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주님으로 말미암아서요. 그러나 퍼셉션이 점차 약화되면서 선과 진리에 관한 주님의 뜻을 알기가 어렵게 되었고, 이걸 그대로 두었다가는 교회의 생명이 사라질 위험이 커졌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교리가 필요해집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말이 교리를 뜻한다는 것은, 신앙이 더 이상 즉각적인 인식, 곧 퍼셉션이 아니라 ‘배워야 하고 지켜야 할 내용’으로 정리되기 시작했음을 보여 줍니다.

 

자녀들을 낳았다는 표현 역시 같은 흐름 안에 놓여 있습니다. 앞선 교회들에서는 자녀들이 퍼셉션된 진리와 선 자체를 가리켰다면, 여기서는 그것들이 ‘교리적 형태’로 나타납니다. 즉, 퍼셉션으로 그때그때 직접 인식하는 진리와 선이 아니라, 가르칠 수 있고 전달할 수 있는 교리로서의 진리와 선으로 말입니다.

 

이 점에서 에녹의 교회는 매우 중요한 전환점에 있습니다. 퍼셉션의 생명이 약해졌지만, 그 대신 교리를 통해 신앙의 핵심을 보존하려는 시도가 시작됩니다. 이것은 쇠퇴의 증거이면서 동시에 은혜의 방편입니다. 생명이 사라져 가는 상황 속에서, 주님께서는 교리를 통해 다음 시대를 위한 씨앗을 남기신 것입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글은 신앙의 두 가지 양식을 분명히 구분해 줍니다. 하나는 살아 있는 퍼셉션에 의해 이끌리는 신앙이고, 다른 하나는 교리를 통해 길을 찾는 신앙입니다. 천사들처럼 퍼셉션으로 하는 신앙생활이 계속 가능했다면 더 좋았겠지만, 전자가 사라졌다고 해서 후자가 무가치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점점 어두워져 가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는 에녹의 교회처럼, 교리는 다음 시대를 준비하는 유일한 ‘보존의 그릇’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모습도 이와 닮아 있어요. 많은 경우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말할 때, 마음의 느낌이나 개인적 체험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동행을 교리로 설명합니다. 이는 신앙이 감정이나 분위기에 머무르지 않고, 분명한 내용과 구조를 가져야 함을 일깨워 줍니다.

 

결국 AC.518은 에녹의 교회를 ‘교리의 교회’로 또렷하게 규정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교리 속에서 유지되고, 자녀들은 그 교리가 담고 있는 진리와 선입니다. 이 글은 퍼셉션이 약화된 시대에도, 주님께서 교리를 통해 신앙의 생명을 이어 가신다는 사실을 조용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AC.519, 창5:22, ‘하나님과 동행하며’(walk with God)의 속뜻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22) AC.519 그 당시에 태고교회와 그 뒤를 이은 교회들에서 퍼셉션의 대상이 되었던 것들로부터 교리를 구성한 사람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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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17, 창5:21, ‘에녹’(Enoch) 이야기를 시작하며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창5:21) AC.517 ‘에녹’(Enoch)이라 하는 교회의 퀄러티는 이어지는 절들에서 설명드리겠습니다. The quality of the church “Enoch” is described in the following ver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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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said, Let there be an expanse in the midst of the waters, and 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in the waters. And God made the expanse, and made a distinction between the waters which were under the expanse, and the waters which were above the expanse; and it was so. (1:6, 7)

 

AC.24

 

하나님의 영, 곧 주님의 자비가 참되고 선한 지식을 낮으로 이끌어 내시고, 첫 빛, 곧 주님이 계시며, 그분이 선 자체이시고 진리 자체이시며, 그분으로 말미암지 않는 선과 진리는 없는 그런 빛을 주신 후, 주님은 속 사람과 겉 사람, 곧 속 사람 안에 있는 지식과 겉 사람에 속한 기억 지식(2)을 구별하십니다. 속 사람을 ‘궁창’(expanse), 속 사람 안에 있는 지식을 ‘궁창 위의 물’(the waters above the expanse)이라 하며, 겉 사람의 기억 지식은 ‘궁창 아래의 물’(the waters beneath the expanse)이라 합니다. After the spirit of God, or the Lord’s mercy, has brought forth into day the knowledges of the true and of the good, and has given the first light, that the Lord is, that he is good itself, and truth itself, and that there is no good and truth but from him, he then makes a distinction between the internal man and the external, consequently between the knowledges [cognitiones] that are in the internal man, and the memory-knowledges [scientifica] that belong to the external man.2 The internal man is called an “expanse”; the knowledges which are in the internal man are called “the waters above the expanse”; and the memory-knowledges of the external man are called “the waters beneath the expanse.”

 

2. ‘지식’(knowledges, cognitiones)이란 우리가 실제로 알고 있는 것들을 뜻하는데, 예를 들면 우리가 ‘나는 단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안다’라고 말할 때의 그 앎입니다. 반면 ‘기억 지식’(memory-knowledges, scientifica)은 외적 기억 속에 들어 있는 것들로, 신학적인 것이든 그 밖의 것이든 온갖 종류가 대량으로 축적되어 있는 것들을 말합니다. 이 두 용어에 대한 스베덴보리 자신의 정확한 정의는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27번, 896번, 1486번, 2718번, 5212번을 보시고, 또 편집자의 서문 주해도 참고하세요. Knowledges [cognitiones] are what we really know, as when we say “I do not merely think so, I know it.” Memory-knowledges [scientifica] are what we have in the external memory—a vast accumulation of all kinds, theological and otherwise. For precise definitions of these words by Swedenborg himself, see Arcana Coelestia, n. 27, 896, 1486, 2718, 5212. See also the Reviser’s Prefatory Notes. [Reviser]

 

[2] 사람은 거듭남이 시작되기 전에는 속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며, 더욱이 그 성질과 상태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서로 구별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 속에 깊이 잠겨 있으며, 그 결과 속 사람에 속한 것들까지 그 안에 잠기게 하여, 서로 구별되는 것들을 혼란스럽고 어두운 하나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으라’(Let there be an expanse in the midst of the waters) 하시고, 그 다음에 ‘물과 물로 나뉘라’(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in the waters) 하시는 것입니다. 이후 나오는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라’(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which are under the expanse and the waters which are above the expanse)고는 아직은 아니고 말입니다. Man, before he is being regenerated, does not even know that any internal man exists, much less is he acquainted with its nature and quality. He supposes the internal and the external man to be not distinct from each other. For, being immersed in bodily and worldly things, he has also immersed in them the things that belong to his internal man, and has made of things that are distinct a confused and obscure unit. Therefore it is first said, “Let there be an expanse in the midst of the waters,” and then, “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in the waters”; but not, “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which are under the expanse and the waters which are above the expanse,” as is afterwards said in the next verses: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8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1:7, 8) And God made the expanse, and made a distinction between the waters which were under the expanse, and the waters which were above the expanse, and it was so. And God called the expanse heaven (Gen. 1:7–8).

 

[3] 따라서 사람이 거듭남의 과정에서 다음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은, 속 사람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속 사람 안에 있는 것들은 오직 주님께 속한 선과 진리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거듭남을 받는 동안, 그의 겉 사람은 여전히 자기가 행하는 선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자기가 말하는 진리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깁니다. 이런 실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국 이러한 자기 본성, 곧 이런 자신의 것들을 통해 주님에 의해 인도되어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먼저 궁창 아래의 물들의 구별이 언급되고, 그 다음에 궁창 위의 물들이 언급됩니다. 또한 이것은 천국의 아르카나인데, 사람은 감각의 착각이나 욕정과 같은 자기 자신의 것들에 의해서도 주님에 의해 참된 것과 선한 것들로 이끌리고 굽혀진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거듭남의 모든 움직임과 순간은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나 저녁에서 아침으로, 곧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또는 ‘땅’(earth)에서 ‘하늘’(heaven)로 진행되며, 이런 이유로 이제 궁창, 곧 속 사람을 가리켜 ‘하늘’(heaven)이라 하는 것입니다. The next thing therefore that man observes in the course of regeneration is that he begins to know that there is an internal man, or that the things which are in the internal man are goods and truths, which are of the Lord alone. Now as the external man, when being regenerated, is of such a nature that he still supposes the goods that he does to be done of himself, and the truths that he speaks to be spoken of himself, and whereas, being such, he is led by them of the Lord, as by things of his own, to do what is good and to speak what is true, therefore mention is first made of a distinction of the waters under the expanse, and afterwards of those above the expanse. It is also an arcanum of heaven, that man, by things of his own, as well by the fallacies of the senses as by cupidities, is led and bent by the Lord to things that are true and good, and thus that every movement and moment of regeneration,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proceeds from evening to morning, thus from the external man to the internal, or from “earth” to “heaven.” Therefore the expanse, or internal man, is now called “heaven.”

 

 

해설

 

이 글은 창세기 1장의 둘째 날, 곧 ‘궁창’의 창조가 인간 거듭남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가장 체계적으로 풀어 주는 핵심 본문입니다. 앞선 글들에서 주님의 자비가 리메인스(remains)를 품고, 빛이 처음 인식되기 시작했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내적 구조의 분화’, 곧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구별이 시작됩니다. 이것은 거듭남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질서를 분명히 합니다. 주님은 참되고 선한 지식을 ‘’으로 이끌어 내시고, 주님 자신이 선 자체이시며, 진리 자체이시고, 모든 선과 진리가 그분으로 말미암는, 그런 첫 빛을 주신 뒤에야, 비로소 속 사람과 겉 사람을 구별하십니다. 다시 말해, ‘구별은 빛 이후에만 가능’합니다. 빛이 없으면 모든 것이 섞여 있고, 구별은 혼란을 낳을 뿐입니다.

 

여기서 속 사람을 가리켜 ‘궁창(expanse)이라고 합니다. 궁창을 가리켜 위와 아래를 나누는 중간 영역이면서, 동시에 하늘이라고 하는데요, 이는 속 사람이라는 것이 단순히 마음의 깊은 층이라는 심리적 개념이 아니라, 주님의 선과 진리가 머무는 하늘의 영역임을 뜻합니다. 속 사람 안에 있는 지식은 ‘궁창 위의 물’이라 하고, 겉 사람의 기억 지식은 ‘궁창 아래의 물’이라 합니다. 이 구분은 지식의 내용 차이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근원의 차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거듭남 이전의 인간은 이 구별을 전혀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속 사람의 존재 자체를 모르고, 혹시 알아도 속 사람과 겉 사람은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 속에 깊이 잠겨 있고, 그 결과 속 사람의 것들까지도 동일한 차원으로 끌어내려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것들이 섞이면, 명확한 구별은 사라지고, 모든 것이 혼탁한 하나로 느껴집니다. 이것이 거듭남 이전 인간의 내면 상태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본문에서도 매우 섬세한 표현이 사용됩니다. 처음에는 ‘물 가운데 궁창이 있으라’라고만 하십니다. 곧바로 위와 아래의 물을 명확히 나누라고는 하지 않으시고요. 이는 사람이 처음에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을 어렴풋이 인식할 뿐, 그 안의 질서와 차이를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후에야 비로소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의 구별이 명확히 언급되는데, 이런 문장 순서 자체가 인간 거듭남의 실제 진행 순서를 그대로 반영합니다.

 

이 단계에서 사람은 중요한 인식을 하나 얻게 됩니다. 속 사람이 존재하며, 그 안에 있는 것들은 주님께 속한 선과 진리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겉 사람은 여전히 자기중심적입니다. 이 와중에도 그는 자기가 행하는 선을 자기에게서 나온 걸로 여기고, 자기가 말하는 진리도 자기 생각의 산물로 여깁니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한데,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문제 삼기보다는 오히려 ‘주님의 섭리의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주님은 사람이 여전히 자기 자신의 것이라고 느끼는 그 선과 진리를 통해서도, 사람을 실제로 선과 진리로 이끄십니다. 즉, 주님은 인간의 본성과 착각을 즉시 제거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것을 통로로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먼저 궁창 아래의 물, 곧 겉 사람의 지식과 활동이 언급되고, 그 다음에야 궁창 위의 물이 언급됩니다. 이는 인간의 경험 순서에 맞춘 주님의 배려, 신적 배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천국의 아르카나를 밝힙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의 것들, 곧 감각의 착각과 욕정에 의해서조차, 주님에 의해 참되고 선한 것들한테로 이끌리고 굽혀진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인간의 오류와 약함마저도 주님의 섭리 안에 있다는 뜻이지요. 물론 이것이 자기중심적 삶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지만, 거듭남의 실제 과정이 얼마나 점진적이고 주님의 인내로 가득한지를 보여 줍니다.

 

이 때문에 거듭남의 모든 움직임은 ‘저녁에서 아침으로’ 진행됩니다. 이는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방향성의 선언입니다.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땅에서 하늘로,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것이 주님의 불변의 방식입니다. 이 과정은 단번에 일어나지 않고, 수없이 반복되며 점점 더 깊어집니다.

 

그래서 마침내 궁창, 곧 속 사람은 ‘하늘’이라 불립니다. 이는 인간 안에 하늘이 세워졌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하늘과 연결될 수 있는 내적 영역이 열렸다는 뜻입니다. 이 하늘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주님이 질서와 자비로 세우신 것입니다. AC.24는 이처럼 거듭남의 구조적 중심을 밝혀 주며, 창세기 1장의 둘째 날이 단순한 우주론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재조직에 대한 계시임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AC.25, 창1:6-7, ‘하늘을 폈으며 땅을 펼쳤고’(spread out the earth and stretch out the heavens)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1:6, 7) AC.25 ‘하늘을 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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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3, 창1:5, 말씀에 나오는 '날'(day)의 속뜻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창1:5) AC.23 말씀에서 ‘날’(day)이 시간 자체를 뜻하는 용례보다 더 흔한 것은 없습니다. 이사야에 보면, Nothing is more common in the Word than for “day” 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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