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And unto the woman he said, I will greatly multiply thy sorrow and thy conception; in sorrow thou shalt bring forth sons, and thine obedience shall be to thy man [vir], and he shall rule over thee. (3:16)



AC.237

 

교회는 또한 여자(the woman)에 의해 더 자세히 묘사됩니다. 이 여자는 자기 자신(self) 또는 own을 너무 사랑하게 되어 더 이상 진리를 파악할 수 없게 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럼에도 그들에게는 자신들을 다스리게 되어 있는 이성(rational)이 주어져 있었습니다. (16) The church is further described by the “woman,” which so loved self or the own as to be no longer capable of apprehending truth, although a rational was given them that should “rule”. (verse 16)

 

 

해설

 

이 글은 창3:16의 내적 의미를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여자’를 한 개인으로 보지 않고 교회(church)의 한 상태로 봅니다. 이전에도 그는 ‘남자(man)를 이해(understanding) 또는 이성(rational)과 관련하여 설명했고, ‘여자(woman)를 의지(will) 또는 애정(affection)과 관련하여 설명해 왔습니다.

 

그런데 태고교회의 이 후손들은 점차 own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주님을 사랑했고, 그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지각(perception)했습니다. 그러나 타락이 시작되면서 사랑의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주님을 향하던 사랑이 자기 자신을 향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여자가 own을 너무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자존감이나 자기 보존 본능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삶의 중심에 두고, 자기 판단과 자기 욕망을 최고로 여기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 결과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더 이상 진리를 파악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진리는 단순히 머리로 이해하는 지식이 아닙니다. 진리는 사랑과 결합되어야 비로소 보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왜곡되면 이해도 왜곡됩니다. 자기 사랑이 강해질수록 사람은 진리를 진리로 보기 어려워집니다. 진리가 무엇이냐보다, 그것이 자기에게 유리하냐 불리하냐가 더 중요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을 완전히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비록 지각은 잃어버렸지만, 아직 ‘이성(rational)은 남겨 두셨습니다. 그래서 AC.237은 ‘그들에게는 자신들을 다스리게 되어 있는 이성이 주어져 있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다스린다(rule)는 건 억압하거나 강제한다는 게 아닙니다. 의지와 애정을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한다는 뜻입니다. 태고교회 초기에는 사랑 자체가 주님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별도의 이성적 통제가 크게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왜곡되기 시작하자, 주님께서는 인간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도록 이성이라는 새로운 수단을 사용하셨습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가 천적 인간(celestial man)과 영적 인간(spiritual man)을 구분하는 이유와도 연결됩니다. 천적 인간은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봅니다. 그러나 영적 인간은 먼저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통해 선으로 인도됩니다.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전자의 상태를 잃어버리고 후자의 상태로 이동하는 과정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AC.237은 단순한 심판 말씀이 아닙니다. 한편으로는 자기 사랑 때문에 진리를 잃어버린 교회의 비극을 말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주님께서 아직 이성이라는 수단을 남겨 두셨다는 희망도 보여줍니다.

 

결국 이 구절은 타락 이후 인간 상태의 중요한 변화를 설명합니다. 본래 인간은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지각했습니다. 그러나 own이 사랑의 중심이 되자 그 지각은 사라졌습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인간이 완전히 멸망하지 않도록 이성(rational)을 주셔서, 비록 예전처럼 직접 지각하지는 못하더라도 진리를 배우고 분별하며, 다시 주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마련해 두셨습니다. 이것이 AC.237에서 ‘여자’와 ‘다스리는 이성’이 의미하는 깊은 뜻입니다.

 

 

 

AC.238, 창3:14-19, ‘17절 개요’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And unto the man he 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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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36, 창3:14-19, ‘15절 개요’

15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And I will put enmity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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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And I will put enmity between thee and the woman, and between thy seed and her seed; he shall trample upon thy head, and thou shalt bruise his heel. (3:15)



AC.236

 

그러므로 모든 인류가 지옥으로 돌진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주님께서는 자신이 세상에 오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15) Therefore to prevent all mankind from rushing into hell, the Lord promised that he would come into the world. (verse 15)

 

 

해설

 

이 글은 창세기 3장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희망의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은 인간의 타락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자기 사랑이 생겼고, 감각과 자기 이성을 신뢰하기 시작했으며, 주님의 음성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점점 더 own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그 결과 태고교회는 스스로를 파괴하는 길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AC.236에 이르면 분위기가 갑자기 바뀝니다. 지금까지 인간이 한 일이 아니라, 이제 주님께서 하실 일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류는 단순히 약간 잘못된 길을 걷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대로 두면 ‘모든 인류가 지옥으로 돌진(rushing into hell)’할 정도의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 표현은 매우 강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과장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의 관점에서 인간은 중립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자연스럽게 지옥적 사랑들, 곧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교회가 계속 타락하면, 결국 인간은 천국과의 연결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따라서 주님의 강림은 단순히 새로운 종교를 세우기 위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인류 전체를 위한 구원의 개입이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러 곳에서, 만일 주님께서 세상에 오시지 않으셨다면 인간과 천국의 연결이 완전히 끊어졌을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창3:15는 흔히 ‘원복음(Protoevangelium)이라고 불립니다. 타락 직후에 이미 구원의 약속이 주어진 것입니다. 인간이 막 넘어졌을 때, 주님은 이미 회복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특히 스베덴보리의 시각에서는 이 약속이 단순히 미래의 한 사건 예고가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의 사랑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인간이 주님을 떠나기 시작한 바로 그 순간, 주님은 인간을 되찾기 위한 길을 준비하셨습니다. 인간의 타락보다 먼저 있었던 것은 주님의 사랑이며, 인간의 실패보다 더 강한 것은 주님의 구원 의지였습니다.

 

이 점에서 AC.236AC.223과도 연결됩니다. 인간은 주님의 얼굴을 피하여 숨었지만, 주님은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은 주님에게서 돌아섰지만, 주님은 인간에게서 돌아서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최종 표현이 바로 성육신(Incarnation), 곧 주님의 세상 강림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창3:15는 단순한 예언 구절이 아니라, 성경 전체의 중심을 미리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창세기 첫 부분에서 이미 복음의 핵심이 선포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을 만큼 깊이 타락했지만, 주님은 모든 인류가 지옥으로 돌진하는 것을 막기 위해 친히 세상에 오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따라서 AC.236은 창세기 3장의 어두운 흐름 속에 처음 비치는 새벽빛과 같습니다. 타락 이야기가 절망으로 끝나지 않는 이유는, 인간의 역사보다 더 깊은 곳에서 이미 주님의 구원 계획이 시작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창3은 단순히 죄의 시작에 관한 장이 아니라, 동시에 구원의 시작이 선포되는 장이기도 한 것입니다.

 

 

 

AC.237, 창3:14-19, ‘16절 개요’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And unto the woman he said, I will greatly m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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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35, 창3:14-19, ‘14절 개요’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And Jehovah God said unto the serpent, Bec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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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And Jehovah God said unto the serpent, Because thou hast done this, thou art cursed above every beast, and above every wild animal of the field; upon thy belly shalt thou go, and dust shalt thou eat all the days of thy life. (3:14)

 

 

AC.235

 

감각(the senses)으로 파악될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믿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의 감각 파트, 이걸 (serpent)이라 한 건데, 이 감각 파트는 스스로를 저주하였고, 지옥(infernal)이 되었습니다. (14) Being unwilling to believe anything that could not be apprehended by the senses, the sensuous part which is the “serpent” cursed itself, and became infernal. (verse 14)

 

 

해설

 

이 글은 지금까지 AC.229-233에서 계속 설명해 온 내용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는 말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의 ‘뱀이 저주를 받았다’는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습니다. 실제 뱀이 저주를 받았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 안의 감각 수준(sensuous level)이 자기 본래의 자리를 벗어나 지배권을 행사하게 되었을 때, 어떤 결과가 일어나는지를 설명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감각의 존재’,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감각은 주님께서 주신 것이며, 자연계를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합니다. 문제는 감각이 최종 판단자가 되는 것입니다. 원래 감각은 이해를 섬기고, 이해는 신앙을 섬기며, 신앙은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그런데 타락이 시작되면서 이 질서가 뒤집혔습니다. 사람은 ‘주님께서 말씀하셨으니 그러하다’가 아니라, ‘내가 보고 만지고 이해할 수 있어야 믿겠다’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것을 뱀의 상태라고 봅니다. 감각은 본래 가장 바깥 단계에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가장 위에 올라가 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은 점점 부정되고, 결국 몸과 세상에 속한 것만 실재처럼 보이게 됩니다.

 

특히 AC.235에서 눈에 띄는 표현은 ‘스스로를 저주하였다(cursed itself)는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은 누구도 저주하지 않으십니다. 이전 AC.223에서도 보았듯이, 주님은 결코 얼굴을 돌리지 않으시며, 언제나 자비와 평화 가운데 계십니다. 따라서 저주란 주님께서 어떤 존재를 미워하시거나 벌하시는 행위가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주님의 질서에서 벗어남으로써 초래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마치 사람이 태양을 등지고, 깊은 동굴로 들어간 뒤 어둠에 갇혔다고 해서 태양이 그 사람을 벌한 것은 아닌 것과 같습니다. 그는 스스로 빛을 떠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뱀의 저주도 이와 같은 원리로 이해합니다. 감각이 주님과 신앙을 섬기는 자리에 머물렀다면 선한 도구가 되었겠지만, 스스로 주인이 되려 했기 때문에, 결국 지옥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AC.235는 단순히 뱀에 대한 심판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시대의 인간에게 주어지는 경고입니다. 인간이 감각과 자기 이성을 신앙 위에 두기 시작하면, 처음에는 단지 ‘확인해 보고 믿겠다’는 정도로 시작, 결국에는 ‘감각으로 증명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데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 영적인 것은 사라지고, 몸과 세상만 남게 됩니다.

 

따라서 AC.235의 핵심은 ‘감각을 사용하지 말라’가 아니라, ‘감각을 주인으로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감각은 훌륭한 종이 될 수 있지만, 본래 자리를 벗어나면 나쁜 주인이 됩니다.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바로 이 점에서 넘어졌고, 그 결과 감각적 인간은 스스로를 저주, 지옥 상태로 떨어지게 되었다고 스베덴보리는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AC.236, 창3:14-19, ‘15절 개요’

15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And I will put enmity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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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34, 창3:14-19, ‘창3:14-19 본문, 개요’(AC.234-279)

창3:14-19 14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And Jehovah God said unto the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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