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AC.49본문 중, ‘태고교회,곧 그 교회의 사람들과는 주님께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말씀하셨는데,그때 주님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이에 대해서는 드릴 말씀이 많지만,아직은 때가 아닙니다.’에 나오는‘이에 대해서는 드릴 말씀이 많지만,아직은 때가 아닙니다.’가 무척 궁금합니다.이 간단해 보이는 기술(記述)안에 무엇이 들어있길래‘드릴 말씀이 많지만’이라 하였으며,그런데 왜‘아직은 때가 아닙니다.’라고 한 것일까요?
이 한 문장은 정말 짧지만, 스베덴보리 전체 저작의 깊은 층을 살짝 열어 보이는 ‘힌트’ 같은 구절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드릴 말씀이 많지만’은 태고교회의 사람들과 주님 사이의 직접적 교통,곧 퍼셉션과 가시적 현현에 대한 매우 깊은 실제 내용들이 있기 때문이고,‘아직은 때가 아니다’라는 것은 그것을 지금의 독자 상태로는 오해하거나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먼저 ‘드릴 말씀이 많지만’에 담긴 내용을 보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다른 곳들에서 조금씩 흘려 말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지금 우리처럼 말씀을 ‘배워서’ 아는 사람들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직접‘퍼셉션’(perception)으로 아는 사람들’이며,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옳은지를 외부에서 배우지 않고, ‘내면에서 바로 느끼고 분별하는 상태’였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나아가,AC.49가 암시하는 것은 단순한 내적 지각을 넘어서, ‘주님이 실제로‘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 그들과 교통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비유나 상징이 아니라, 스베덴보리에게서는 ‘영계에서 실제로 경험한 사실’입니다. 즉, 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과의 교통이 지금보다 훨씬 직접적이어서, 어떤 경우에는 ‘영적 눈으로 주님의 현현을 인식하는 상태’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라는 표현의 배경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실제로 스베덴보리가 다른 저작들에서, 천사들과의 대화, 영계에서의 주님의 현현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드릴 말씀이 많다’는 것은, 단순한 교리 설명이 아니라, ‘인간과 주님의 관계가 지금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졌던 상태 전체’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왜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고 했을까요? 여기에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독자의 상태 문제’입니다.AC를 읽는 사람들은 대부분 ‘영적 인간’의 단계, 즉 양심과 진리를 통해 인도받는 상태에 있습니다. 그런데 태고교회는 그보다 훨씬 위의 ‘천적 인간’ 상태입니다. 이 상태를 충분한 준비 없이 설명하면, 사람은 그것을 ‘자기 상태로 착각하거나,혹은 신비주의적으로 오해할 위험’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나도 직접 주님을 보고 들을 수 있어야 한다’는 식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그것은 오히려 큰 혼란을 가져옵니다.
둘째는 ‘섭리적 이유’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반복해서 말합니다. 주님은 각 시대와 각 사람의 상태에 맞게 자신을 드러내신다고. 지금 시대는 태고교회처럼 직접적 현현과 퍼셉션으로 인도받는 시대가 아니라, ‘말씀과 진리를 통해,그리고 자유와 이성 안에서 인도받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너무 앞선 상태를 상세히 드러내는 것은, 현재 주어진 길, 곧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삶으로 옮기는 길을 흐리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문장은 이렇게 읽혀야 합니다. ‘이 주제는 매우 깊고 실제적인 내용이 있지만,지금 단계에서는 간략히 언급만 하고 넘어가는 것이 적절하다.’ 즉, 숨기는 것이 아니라, ‘순서를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의 상태에 맞게 자신을 나타내십니다.우리가 지금은 말씀을 통해 배우고 따르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길입니다.’ 이 정도로 설명하시면, 성도들이 괜히 신비적인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으면서도, 이 구절의 깊이를 느낄 수 있습니다.
‘‘드릴 말씀이 많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는 것은,태고교회의 직접적 주님 교통에 관한 깊은 실제들이 있으나,그것을 지금 단계에서 자세히 밝히는 것은 오해와 혼란을 낳을 수 있기 때문에 섭리적으로 유보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AC전체를 따라가다 보면, 지금 이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고 되어 있는 부분들이 나중에 다른 글들에서 조금씩 풀려나오는 것을 경험하시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And God said,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fter our likeness; and let them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heavens, and over the beast, and over all the earth, and over every creeping 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창1:26)
AC.49
태고교회, 곧 그 교회의 사람들과는 주님께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말씀하셨는데, 그때 주님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드릴 말씀이 많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이러한 이유로, 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 외에는 누구도 ‘사람’(man)이라는 호칭으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에게서 나온 것들만을 ‘사람’(men)이라고 했고, 자기 자신을 그 호칭으로 부르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자기 안에서 인식된 것들, 곧 주님에게서 왔다고 퍼셉션된 모든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만을 ‘사람의 것’(of man)이라 했습니다. 그것들은 주님에게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In the most ancient church, with the members of which the Lord conversed face to face, the Lord appeared as a man; concerning which much might be related, but the time has not yet arrived. On this account they called no one “man” but the Lord himself, and the things which were of him; neither did they call themselves “men,” but only those things in themselves—as all the good of love and all the truth of faith—which they perceived they had from the Lord. These they said were “of man,” because they were of the Lord.
[2]이로부터 예언서들에서 ‘사람’(man)과 ‘인자’(the son of man)는 최고의 뜻으로는 주님을 뜻하고, 속뜻으로는 지혜와 총명을 뜻하며, 따라서 거듭난 모든 사람을 뜻하게 됩니다. 예레미야입니다. Hence in the prophets, by “man” and the “son of man,” in the supreme sense, is meant the Lord; and in the internal sense, wisdom and intelligence; thus everyone who is regenerate. As in Jeremiah:
23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25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렘4:23, 25)I beheld the earth, and lo, it was void and emptiness, and the heavens, and they had no light. I beheld and lo there was no man, and all the birds of the heavens were fled (Jer. 4:23, 25).
이사야에서 ‘사람’(man)은 속뜻으로는 거듭난 사람을, 최고의 뜻으로는 유일한 사람으로서의 주님을 뜻합니다. In Isaiah, where, in the internal sense, by “man” is meant a regenerate person, and in the supreme sense, the Lord himself, as the one man:
11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곧 이스라엘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너희가 장래 일을 내게 물으며 또 내 아들들과 내 손으로 한 일에 관하여 내게 명령하려느냐12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으며 내가 내 손으로 하늘을 펴고 하늘의 모든 군대에게 명령하였노라(사45:11, 12)Thus saith Jehovah the holy one of Israel, and his former, I have made the earth, and created man upon it; I, even my hands, have stretched out the heavens, and all their army have I commanded(Isa. 45:11–12).
[3]이 때문에 주님은 예언자들에게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에스겔입니다. The Lord therefore appeared to the prophets as a man, as in Ezekiel:
그 머리 위에 있는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그 모양이 남보석 같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겔1:26)Above the expanse, as the appearance of a sapphire stone, the likeness of a throne, and upon the likeness of the throne was the likeness as the appearance of a man above upon it(Ezek. 1:26).
다니엘에게 나타나셨을 때에는 ‘인자’(the son of man), 곧 사람이라 일컬음을 받으셨습니다. 이는 같은 뜻입니다. And when seen by Daniel he was called the “son of man,” that is, the man, which is the same thing:
13내가또 밤 환상 중에보니 인자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14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단7:13, 14)I saw, and behold, one like the son of man came with the clouds of heaven, and came to the ancient of days, and they brought him near before him; and there was given him dominion, and glory, and a kingdom, that all people, and nations, and languages should serve him. His dominion is an everlasting dominion, which shall not pass away, and his kingdom that which shall not be destroyed(Dan. 7:13–14).
[4]주님께서는 복음서에서도 자신을 자주 ‘인자’(the son of man), 곧 사람이라 하시며, 다니엘에서와 같이 영광 가운데 오실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The Lord also frequently calls himself the “son of man,” that is, the man, and, as in Daniel, foretells his coming in glory:
그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마24:30)Then shall they see the son of man coming in the clouds of heaven with power and great glory(Matt. 24:30).
여기 ‘하늘 구름’(The clouds of heaven)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뜻하고, ‘능력과 큰 영광’(power and great glory)은 말씀의 속뜻을 뜻합니다. 이 속뜻은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나 오직 주님과 그분의 나라만을 가리키며, 바로 여기서 속뜻의 능력과 영광이 나옵니다. The “clouds of heaven” are the literal sense of the Word; “power and great glory” are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which in all things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has reference solely to the Lord and his kingdom; and it is from this that the internal sense derives its power and glory.
해설
AC.49가 인용한 구절들(렘4:23, 25 /사45:11-12 /겔1:26 /단7:13-14 /마24:30)을 ‘사람’과 ‘인자’의 의미, 그리고 문자 의미와 속뜻의 관계라는 큰 축 위에 올려놓고 보면, 이 글은 단순한 주석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단어 하나로 인간론, 기독론, 말씀론을 한꺼번에 관통하는 매우 높은 밀도의 설명입니다. 여기서 ‘사람’은 생물학적 인간을 뜻하지 않습니다. 태고교회가 ‘주님 외에는 아무도 사람이라는 호칭으로 부르지 않았다’는 진술은, 겸손한 표현이 아니라 영적 사실의 정확한 진술입니다. 그들은 자기 안에서 ‘나에게서 나오는 것’으로 보이는 것들이 실은 주님에게서 유입된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라는 것을 퍼셉션으로 알았고, 그래서 그것들만을 ‘사람의 것’이라 불렀습니다. 즉 ‘사람’이란 내 안에 ‘주님께서 주신 선과 진리’가 살아 있고 움직이는 상태이며, 그 근원이신 주님이야말로 최고 의미에서 유일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관점이 서면, 예언서와 복음서에서 ‘사람’과 ‘인자’가 왜 그렇게 자주, 그리고 결정적인 지점마다 등장하는지 비로소 맥이 잡힙니다.
렘4:23, 25에서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는 나라의 황폐, 질서 붕괴, 심판의 참상을 묘사하는 예언적 언어입니다. 그러나AC.49의 문맥에서 이 구절은 ‘사람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단순한 인구의 멸절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의미에서 ‘사람됨’이 사라졌음을 말합니다. 사람됨은 사랑과 지혜, 곧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유입되어 마음(의지와 이해력)의 질서로 자리 잡은 상태인데, 그 질서가 무너지고 주님의 빛이 꺼지면, 즉 이러한 사람됨이 사라지면 겉으로는 사람이 걸어 다니고 말하고 일하는 것 같아도 속뜻으로는 ‘사람이 없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새들이 날아갔다’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에서 새들은 이성적, 지적인 것, 곧 이해력의 활동과 관련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없다는 말은 곧 지혜와 총명이 없다는 말이며, 새가 날아갔다는 말은 이해력이 진리의 빛에서 이탈하여 더 이상 위를 향해 날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예레미야의 탄식은 단지 사회적 비극이 아니라 거듭남 이전의 ‘공허와 흑암’ 상태, 혹은 교회의 황폐 상태를 묘사하는 본문이 됩니다.
사45:11-12에서‘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다’는 선언은 문자 의미에서는 창조주 하나님을 높이는 찬양입니다. 그러나AC의 큰 흐름에서는 ‘창조하다, 만들다, 빚다’ 같은 표현이 예언서에서 자주 ‘거듭남’과 연결된다는 점을 우리는 이미 여러 번 확인했습니다. 곧 ‘사람을 창조하였다’는 말은 생물학적 인간의 탄생이 아니라, ‘참된 사람됨’의 형성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사람’이 단수로 말해진다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사람의 원형은 하나’라는 진술로 끌어옵니다. 인간은 자기 힘으로 사람됨을 만들지 못하고, 오직 주님에게서 유입되는 사랑과 지혜에 의해서만 사람으로 빚어집니다. 그래서 최고 의미에서 ‘사람’은 주님이시며, 속뜻으로 ‘사람’은 거듭남을 통해 주님의 형상을 받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사야의 언어는 창조의 언어이지만, 스베덴보리의 독법에서는 그 창조가 곧 새 창조, 즉 거듭남으로 번역됩니다.
겔1:26의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는, 왜 주님이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나시는지를 보여 주는 핵심 증거로 사용됩니다. 문자적으로는 환상 언어이며, 인간이 신적 현실을 직접 담아낼 수 없기에 ‘사람 같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한계의 표현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AC.49의 논지는 거꾸로 갑니다. 주님이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에 사람이 사람인 것이 아니라, 주님이 ‘참 사람’이시기 때문에 인간의 형상과 사람됨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형상은 우연한 자연 현상이 아니라, 신적 실재의 형상과 연결된 결과이며, 그 형상이 ‘보좌’와 연결되어 나타난다는 것은 주님의 통치가 힘이나 폭력이 아니라 사랑과 지혜의 질서로 이루어진다는 뜻을 함축합니다. 에스겔의 환상에서 ‘사람 같은 형상’이 가장 높은 자리인 보좌 위에 놓이는 것은, ‘사람됨’이 곧 신적 통치의 본질과 닿아 있음을 보여 줍니다.
단7:13-14의 ‘인자 같은 이’는 신약에서 예수님이 가장 자주 사용하신 자기 호칭과 직결됩니다.AC.49는 여기서 ‘인자’가 사실상 ‘사람’과 같은 말이라는 점을 전면에 세웁니다. 다니엘의 환상에서 ‘인자’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가 주어지고 그 통치가 영원하다고 말할 때, 속뜻은 ‘한 인간 지도자가 영원한 제국을 세운다’가 아니라, 주님이 참 사람으로서, 곧 사랑과 지혜의 결합으로서 영원히 다스리신다는 선언입니다. 또 ‘구름을 타고 온다’는 표현은 후에 마24:30과 연결되며, ‘구름’이 말씀의 문자 의미를 뜻한다는 해석으로 이어집니다. 주님은 말씀을 통하여 자신을 나타내시고, 말씀 안에서 ‘사람’, 곧 인자로 인식되십니다. 그래서 인자 환상은 종말론적 장면이라기보다, 말씀 안에서 주님이 어떻게 드러나시는가에 대한 근본 구조를 담고 있습니다.
마24:30의 ‘인자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는 구절도,AC.49에서는 단순한 미래 사건의 예언으로 좁혀지지 않습니다. ‘구름’은 문자, ‘능력과 큰 영광’은 속뜻이라는 해석이 들어오면, 이 말씀은 곧 ‘문자 의미가 매개가 되어 속뜻이 열릴 때, 주님이 인자로 오신다’는 말이 됩니다. 다시 말해 주님의 ‘오심’은 단지 시간 속 사건이 아니라, 인간이 말씀을 읽고 이해하는 방식 속에서도 일어납니다. 속뜻이 열리기 전에는 사람들은 문자 속에 가려진 주님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그래서 주님이 ‘사람’이심도 흐릿하게만 압니다. 그러나 속뜻이 열리면, 그 속뜻이 가리키는 바가 오직 주님과 그분의 나라라는 사실이 드러나며, 거기서 ‘능력’과 ‘영광’이 나온다는 말이 이해됩니다. 즉 속뜻의 능력은 정보량이나 지적 체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 자신과 연결되는 데서 나옵니다.
이 모든 인용 구절이 합쳐져AC.49가 세우는 결론은 생각보다 단순하면서도 강력합니다. 주님은 최고 의미에서 유일한 ‘사람’이시며, 인간은 주님에게서 유입되는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를 자기 안에서 퍼셉션하고, 그것에 따라 살 때에만 ‘사람’이라 불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언서에서 ‘사람이 없다’는 말은 단지 인구의 부재가 아니라 지혜와 총명의 부재이며, ‘사람을 창조한다’는 말은 단지 생물학적 탄생이 아니라 거듭남에 의한 새 창조입니다. 또 주님이 ‘사람 같은 형상’으로 나타나시는 것은 인간의 형상이 신적 인성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보여 주며, ‘인자’의 구름-영광 언어는 말씀의 문자와 속뜻이 어떻게 연결되어 주님의 임재를 드러내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AC.49는 창세기1장의 ‘사람 창조’를 읽는 열쇠이자, 예수님이 왜 자신을 ‘인자’라 부르셨는지, 그리고 왜 말씀의 속뜻이 ‘능력과 영광’이라 불리는지에 대한 핵심 답변을 한 덩어리 안에 담고 있는 글입니다.
이건 매우 현실적인 질문이고, 동시에 다섯 번째 상태와 여섯 번째 상태의 차이가 실제 삶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묻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상대가 용서를 구하지 않았더라도‘마음으로는 미리 용서해야 하지만’,관계의 회복까지 서둘러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즉, ‘내면의 용서와 외적 관계의 처리에는 구분이 필요합니다.’
먼저 ‘마음으로 용서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해야 합니다. 이것은 ‘괜찮다,아무 일도 아니다’라고 넘기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상대의 잘못을 정당화하는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적으로 말하면, 이것은 ‘상대를 향한 미움과 복수의 의지를 내려놓고,그 사람을‘주님의 질서 안에서 다시 회복될 수 있는 존재’로 바라보는 상태’입니다. 다시 말해, ‘당신이 한 일은 잘못이지만,나는 당신을 미워하는 상태에 머물지 않겠다’는 선택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섯 번째 상태로 가는 방향’, 곧 사랑이 중심이 되는 움직임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균형이 있습니다. 마음으로 용서했다고 해서, 곧바로 모든 관계를 이전과 동일하게 회복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상대가 여전히 같은 태도를 유지하고 있고, 상처를 반복할 가능성이 있다면, ‘지혜롭게 거리를 두고,질서를 세우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사랑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이 진리와 함께 작용하는 상태’입니다. 즉,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옳은 방식으로 관계를 다루는 것’도 사랑입니다.
이걸 조금 더 실제적으로 풀어 보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상처를 주었습니다. 그 사람이 사과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때 선택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마음속에 계속 분노를 품고, ‘언젠가 갚아주겠다’는 상태로 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일은 잘못된 것이지만,나는 이 사람을 미워하는 상태에 머물지 않겠다’고 결단하는 것입니다. 후자가 ‘마음의 용서’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곧바로 그 사람과 이전처럼 가까이 지내거나,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행동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필요하다면 ‘분명한 선을 긋고,관계를 조정하는 것’이 오히려 바른 질서입니다.
여기서 다섯 번째 상태와 여섯 번째 상태의 차이가 다시 드러납니다. 다섯 번째 상태에서는 ‘용서해야 하니까 용서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며 애씁니다. 그래서 여전히 마음 안에 갈등이 큽니다. 그러나 여섯 번째 상태로 갈수록, 점점 이렇게 됩니다. ‘나는 미워하고 싶지 않다.주님이 나를 다루신 것처럼,나도 그렇게 하고 싶다.’ 그래서 용서가 점점 ‘의무가 아니라 방향’이 됩니다. 하지만 동시에 진리도 함께 있기 때문에, ‘무질서하게 관계를 허용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이 질문에 대한 가장 균형 잡힌 답은 이것입니다. ‘마음에서는 먼저 용서하되,관계에서는 지혜롭게 행하라.’ 이것이 선과 진리가 함께 가는 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상대를 미워하지 말라고 하시지만,아무렇게나 관계를 유지하라고 하시지는 않습니다.’
‘용서는 상대의 반응과 무관하게 내 마음에서 먼저 시작되어야 하지만,관계의 회복은 진리와 지혜에 따라 분별하며 이루어져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