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71.심화

 

1. 허락되었습니다

 

본문 끝에 어떤 순서대로 덧붙이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라고 하는데요,  허락이 어떤 건가요? 주님이 스베덴보리에게 직접 말씀하신 건가요, 아니면 퍼셉션이나 인플럭스 같은 걸로 그냥 어떤 느낌상 아는 건가요? 그게 허락인 줄을 스베덴보리는 어떻게 알은 건가요?

 

 

핵심부터 말씀드리면, AC.71 허락되었습니다’라는 표현은 어떤 음성으로 또렷이 들려온 지시’만을 가리킨다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일관되게 경험했다고 말하는 질서 안에서의 열림’, 곧 주님의 인도 아래에서 무엇을 말해도 되는지에 대한 내적 승인 상태를 가리킵니다. Emanuel Swedenborg의 저작 전반을 보면, 그는 이 허락’을 세 가지 층위에서 경험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균형 잡힙니다.

 

첫째는 직접적 교통’의 층위입니다. 그는 실제로 천사들과의 대화, 그리고 때로는 주님으로부터의 직접적인 가르침을 받았다고 증언합니다. 이 경우는 비교적 분명한 형태의 인식입니다. 다만 이것이 항상 외부에서 들려오는 음성’처럼만 주어지는 것은 아니고, 영계에서의 대화는 생각과 의미가 곧바로 전달되는 방식이기 때문에, 인간의 언어처럼 들리는 것과는 다르게 경험되기도 합니다.

 

둘째는 인플럭스(influx)의 층위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신적 진리와 질서가 그의 이해 안으로 흘러들어와, 무엇이 참이고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가 분명해지는 상태입니다. 이때 그는 어떤 내용을 스스로 생각해 낸 것’이 아니라, ‘주어졌다’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이것은 막연한 느낌이 아니라, 오히려 매우 또렷하고 흔들림 없는 인식으로 경험됩니다. 그래서 그는 반복해서 나로 하여금 알게 하셨다’, ‘보게 하셨다’라고 표현합니다.

 

셋째는 열림과 닫힘에 대한 인식’입니다. 이것이 허락’이라는 표현과 가장 직접적으로 연결됩니다. 그는 모든 것을 아무 때나 자유롭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어떤 때는 어떤 것들이 분명히 보이고 이해되지만, 또 어떤 때는 그것이 닫혀 있는 상태를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무엇인가를 기록하거나 밝힐 때, 그것이 지금 말해도 되는 것인지’, ‘아직은 아닌 것인지’가 내적으로 분명히 구분되었습니다.  열려 있음’이 바로 그가 말하는 허락’입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질문, ‘그것이 허락이라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인데,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특징이 드러납니다. 그는 이것을 자기 감정이나 충동으로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매우 엄격하게, 그것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외부로부터 주어진 것인지’를 분별하려 했습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은 몇 가지 특징을 가집니다. 첫째, 그것은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분명합니다. 둘째, 그것은 자신의 생각보다 더 질서 있고 일관됩니다. 셋째, 그것은 자기 영광이 아니라 진리 자체를 드러내는 방향으로 작용합니다.

 

그래서 그는 어떤 내용을 쓸 때, 그것이 자기 안에서 만들어진 생각’이 아니라 주어진 빛 안에서 보이는 것’일 때만 기록하려 했습니다. 이 점에서 그의 허락’은 단순한 느낌이나 영감이 아니라, 오랜 훈련과 분별 속에서 확립된 내적 인식의 기준’이라고 보셔야 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구분이 필요합니다. 목사님께서 언급하신 퍼셉션(perception)은 태고교회적 상태에서의 직관적 앎에 더 가깝고, 일반 인간에게는 그렇게 직접적으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의 경우는 특별한 사명 아래 열린 상태’이기 때문에, 퍼셉션과 인플럭스, 그리고 실제 교통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경우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일반적인 신앙 체험과 동일선상에 놓고 이해하시면 오해가 생길 수 있습니다.

 

정리하면, AC.71 허락되었습니다’는 단순히 주님이 이렇게 말하셨다’는 한 형태로만 이해하기보다, ‘주님의 질서 안에서 그것을 보고 이해하며 말할 수 있도록 열려 있는 상태가 주어졌다’는 의미로 보시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임의로 주장한 것이 아니라, ‘열릴 때와 닫힐 때의 분명한 차이’, 그리고 그로부터 오는 확신을 통해 그것이 허락’임을 인식했다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AC.71, 창2, 'AC 전개 방식'

AC.71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말씀 본문 안에 들어 있는 내용들 사이에 그대로 끼워 넣게 되면, 그것들은 흩어지고 서로 연결되지 않게 될 것이므로,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그것들을 각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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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1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말씀 본문 안에 들어 있는 내용들 사이에 그대로 끼워 넣게 되면, 그것들은 흩어지고 서로 연결되지 않게 될 것이므로,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그것들을 각 장의 처음과 끝에, 그리고 그밖에 부수적으로 삽입되는 것들로서, 어떤 순서대로 덧붙이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But as these matters would be scattered and disconnected if inserted among those contained in the text of the Word, it is permitted, of the Lord’s Divine mercy, to append them in some order, at the beginning and end of each chapter; besides those which are introduced incidentally.

 

 

해설

 

이 글은 지금까지의 증언과 내용 전개를 잠시 멈추고, 스베덴보리가 ‘글을 쓰는 방식 자체’를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메타적 설명입니다. 그는 여기서 ‘무엇을 말하는가’가 아니라, ‘왜 이런 형식으로 말하는가’를 밝힙니다. 이 한 문장은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는 독자에게, 이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미리 가르쳐 주는 안내문과 같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선 글들에서 사후 삶, 영적 교통, 소생의 상태 같은 내용을 비교적 직접적으로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이런 내용들을 성경 본문 해설 한가운데에 그대로 끼워 넣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렇게 하면 그 내용들이 ‘흩어지고 서로 연결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즉, 말씀의 내적 의미를 따라가던 독자의 인식 흐름이 끊기게 되고, 성경 본문과 증언 사이의 질서가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스베덴보리가 성경 본문을 얼마나 엄중하게 다루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그는 자신이 보고 들은 것, 다시 말해 그 어떤 독자에게도 충격적일 수 있는 내용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성경 본문 위에 덧씌우거나 본문을 가로막는 방식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말씀은 말씀대로, 그 고유한 흐름과 질서를 따라 해설되어야 하며, 개인적 증언이나 추가 설명은 그 질서를 침범해서는 안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방식이 바로, ‘각 장의 처음과 끝에 덧붙이는 것’입니다. 이는 임의적 선택이 아니라, 매우 의도적인 구조입니다. 장의 처음은 독자의 인식을 열어 주는 자리이고, 장의 끝은 그 인식을 가라앉히고 확장하는 자리입니다. 그 사이, 즉 본문 해설의 중심부에는 철저히 말씀의 문자와 그 내적 의미만이 놓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아르카나는 하나의 혼합된 글이 아니라, ‘서로 다른 층위가 질서 있게 공존하는 책’이 됩니다.

 

또한 그는 ‘부수적으로 삽입되는 것들’이 있다고 덧붙입니다. 이는 영적 세계에 대한 설명이 완전히 분리된 부록처럼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할 때마다 본문 해설과 자연스럽게 맞물려 등장할 수 있음을 뜻합니다. 그러나 그조차도 무질서하게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라, 전체 구조 속에서 기능적으로 배치됩니다. 다시 말해,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증언을 ‘드러내고 싶은 만큼’ 드러내지 않고, ‘말씀의 질서가 허락하는 만큼만’ 드러냅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반복되는 표현이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입니다. 이 표현은 단순한 경건한 수사가 아닙니다. 그는 이 책의 내용뿐 아니라, ‘형식과 배열의 권한조차도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고 고백’합니다. 무엇을 말할지 뿐 아니라, 어디에 말할지, 어떻게 말할지까지도 허락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 태도는 스베덴보리가 스스로를 계시의 주체가 아니라, ‘질서 안에서 봉사하는 증언자’로 이해하고 있음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이 글을 이해하면, 아르카나를 읽다가 느끼게 되는 독특한 리듬, 그러니까 본문 해설과 영적 세계에 대한 설명이 교차하면서도 결코 뒤섞이지 않는 리듬이 왜 그렇게 구성되었는지가 선명해집니다. 그것은 글솜씨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의 질서를 보호하기 위한 배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독자가 한꺼번에 너무 많은 차원을 동시에 붙잡으려다 모두 놓쳐 버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AC.71은 독자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이 책을 서두르지 말라’, ‘각 층위를 그 자리에 두고 읽으라’, ‘말씀과 증언을 섞지 말고, 연결하되 혼동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이는 단지 아르카나를 위한 독서 지침이 아니라, ‘말씀을 대하는 태도 전체에 대한 교훈’이기도 합니다.

 

앞선 AC.70에서 ‘죽음은 삶의 계속, 연속’이라는 거대한 주제가 제시되었다면, AC.71은 그 주제를 어떻게 질서 있게 풀어 갈 것인지를 보여 줍니다. 내용의 진실성만큼이나, 그것을 담는 형식과 위치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스베덴보리는 이 짧은 문장 안에 담아 두었습니다.  

 

 

심화

 

1.허락되었습니다

 

 

AC.71, 심화 1, ‘허락되었습니다’

AC.71.심화 1. ‘허락되었습니다’ 본문 끝에 ‘어떤 순서대로 덧붙이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라고 하는데요, 이 ‘허락’이 어떤 건가요? 주님이 스베덴보리에게 ‘직접 말씀’하신 건가요,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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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2, 창2, '이런 방식을 이 장 끝에서부터 적용'

AC.72 그러므로 이 장의 끝에서, 사람이 어떻게 죽음에서 일으켜 세워져 영원한 삶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지를 말해도 좋다는 허락을 저는 받았습니다. At the end of this chapter, accordingly, I am allowed to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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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0, 창2, ‘소생’, 곧 ‘영원한 삶’(the life of eternity)으로 들어갈 때

AC.70 여러 해 동안 제가 듣고 보았던 것을 밝히는 것이 저에게 허락되었으므로, 여기에서는 먼저 사람이 ‘소생될 때’(when he is being resuscitated), 곧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the life of eter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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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0.심화

 

3.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

 

위 본문에 사실상 사람은 다른 삶(the other life) 안에 있게 됩니다.’라는 부분 말인데요, 왜 이런 중간 텀이 있는 건가요? 마치 이 방문 열고 나가 바로 저 방문 열고 들어가듯 즉시가 아니고 말입니다. 여기서는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라 했지만, 사람마다 다른 건지, 하여튼 이 깨어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리더군요. 혹시 주님의 사흘 만에 부활하사도 이런 건가요?

 

 

아주 중요한 연결을 보셨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AC.70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라는 표현은 자연적 시간의 지연을 말한다기보다, ‘상태가 전환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과정’을 인간의 시간 언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시계로 재는 몇 시간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넘어가기까지의 질서 있는 이행’이라고 이해하시는 것이 정확합니다.

 

먼저 왜 즉시’가 아니냐를 보면, 스베덴보리의 전체 설명은 일관되게 이 점을 말합니다. 사람은 죽는 순간 존재가 끊어졌다가 다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중심이 이동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육체가 멈추면 곧바로 영으로 깨어나기는 하지만, 처음에는 여전히 자연적 기억과 감각의 여운 속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즉시 또렷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마치 여전히 이 세상에 있는 것처럼 느끼는 상태가 잠시 이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그 중간 텀’의 실질적인 내용입니다.

 

이 과정이 필요한 이유는 연속성 때문입니다. 주님은 인간의 의식이 끊어지거나 단절되는 방식으로 인도하지 않으십니다. 만일 완전히 다른 상태로 순간 이동’하듯 들어가게 된다면, 그것은 인간에게 혼란과 충격을 주고, 자유로운 수용이 아니라 강제적인 전환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죽음 이후의 깨어남은 마치 잠에서 서서히 깨어나는 것처럼, 아주 부드럽고 연속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은 죽음 직후에도 자신이 여전히 살아 있으며, 오히려 더 또렷하게 살아 있음을 느낀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사람마다 다르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는 모두에게 같은 질서가 적용되지만, 체감되는 방식과 길이는 상태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매우 부드럽고 밝은 상태로 거의 즉시 깨어나는 반면, 어떤 이는 더 혼란스럽거나 어두운 상태를 거치며 점진적으로 깨어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길이’가 아니라 질서’입니다. 모든 사람은 주님의 인도 아래, 자신의 상태에 가장 적합한 방식으로 이 전환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제 목사님께서 연결하신 사흘 만에 부활’과의 관계를 보면, 이 역시 단순한 시간 사건이라기보다 상태의 충만한 완성’을 의미하는 상징으로 이해하시는 것이 더 깊은 해석입니다. 성경에서 사흘 또는 셋째 날’은 매우 자주 완전한 과정의 끝’, 또는 새로운 상태로의 완전한 전환’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부활을 단순히 72시간 후의 사건’으로만 보기보다, ‘모든 시험과 죽음을 통과하여 완전히 새로운 상태로 들어가신 것’으로 보는 것이 내적 의미에 더 가깝습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개인의 사후 전환 과정과도 연결이 됩니다. 사람도 죽음 이후 곧바로 영으로 깨어나지만, 자신의 참된 상태로 완전히 자리 잡기까지는 일정한 과정의 충만’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어떤 이에게는 매우 빠르게, 어떤 이에게는 더 길게 느껴질 수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모두 상태의 질서’를 따라 이루어집니다.

 

정리하면,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라는 표현은 실제 시간의 지연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이 끊어지지 않은 채 부드럽게 전환되는 상태의 이행’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주님의 사흘 만에 부활 역시 같은 원리 안에서, ‘완전한 상태 전환의 성취’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말씀으로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시면, 자연적 시간과 영적 상태 사이의 긴장이 하나의 질서로 풀리게 됩니다.

 

 

 

AC.70, 창2, ‘소생’, 곧 ‘영원한 삶’(the life of eternity)으로 들어갈 때

AC.70 여러 해 동안 제가 듣고 보았던 것을 밝히는 것이 저에게 허락되었으므로, 여기에서는 먼저 사람이 ‘소생될 때’(when he is being resuscitated), 곧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the life of eter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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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0, 심화 2, ‘연옥’(purgatory)

AC.70.심화 2. ‘연옥’(purgatory) 위 해설에 ‘연옥’이 나오는데요, 사실 교회사도 그렇고, 특히 개신교는 카톨릭의 이 ‘연옥’에 대해 몹시 불편해합니다. 개신교인들은 사람이 죽었다가 눈 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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