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8의 제사장 위임식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순서입니다. 모세는 아론에게 화려한 에봇이나 흉패부터 입히지 않습니다. 먼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물로그들을씻깁니다.’ 그 다음에야 속옷과 띠와 겉옷과 에봇과 흉패와 관을 입힙니다. 왜 거룩한 옷보다 씻음이 먼저일까요?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002(출29:4)는 이 장면을 매우 직접적으로 해설합니다. ‘물로씻는것’은 신앙의 진리들을 통한 정결을 의미합니다. 물은 진리를 나타내며, 인간의 정결과 거듭남은 진리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먼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말씀을 통해 보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씻음이 옷보다 먼저라는 것은 중요한 영적 질서를 보여 줍니다. 인간이 진리를 많이 ‘입는것’과 그 진리에 의해 실제로 정결하게 되는 것은 다릅니다. 성경 지식과 교리와 신학을 많이 가지고 있어도 그것이 자기 악을 비추고 씻는 데 사용되지 않는다면, 거룩한 옷은 입었지만 몸은 씻지 않은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말씀의 진리는 먼저 우리를 꾸미기 위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씻기 위해 주어집니다. ‘이말씀으로다른사람을어떻게가르칠까?’보다 먼저 ‘이말씀은내안에서무엇을드러내고있는가?’라고 물어야 합니다. 분노와 교만과 탐욕과 자기애를 비추고, 그것이 죄임을 인정하게 하며, 주님의 도움을 구하여 피하게 하는 것이 말씀의 첫 쓰임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 후에 옷이 입혀집니다. AC.10003(출29:5)은 아론의 옷을 주님의 영적 나라의 표상으로 설명합니다. 정결하게 된 사람에게 진리가 입혀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악을 제거하는 소극적 과정이 아니라 새로운 진리를 받아 새로운 삶의 형태를 갖추는 적극적 과정입니다.
따라서 거듭남에는 ‘씻음’과 ‘입음’이 모두 필요합니다. 씻기만 하고 아무것도 입지 않으면 비어 있게 되고, 씻지 않은 채 옷만 입으면 겉만 종교적인 사람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진리로 우리를 씻으시고 다시 진리로 우리를 입히십니다. 같은 진리가 처음에는 악을 드러내는 물이 되고, 그 다음에는 새로운 삶을 형성하는 옷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레8의 첫 위임 행위가 물로 씻는 것이라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의 쓰임을 감당하는 사람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직책도, 지식도, 권위도 아닙니다. 말씀의 진리가 자기 자신에게 적용되어 악과 거짓으로부터 정결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된 위임은 먼저 씻김에서 시작됩니다. (SW.레8심화1)
레위기 8장은 새로운 큰 단락을 엽니다. 레1-7에서는 번제와 소제와 화목제와 속죄제와 속건제의 규례를 배웠습니다. 이제 레8에서는 그 제사를 실제로 섬길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제사장으로 위임됩니다. 그래서 장면도 달라집니다. 제물을 가지고 오는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온 회중이 회막 문에 모인 가운데 씻음, 옷 입힘, 기름 부음, 속죄제, 번제, 위임식의 숫양, 피, 요제, 먹음, 그리고 이레 동안 회막 문에 머무는 긴 위임 절차가 이어집니다. 겉으로 보면 고대 이스라엘의 성직 임명식이지만, 스베덴보리의 원전을 따라 들어가면 이것은 훨씬 더 깊은 것을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 인간을 정결하게 하시고 선과 진리를 입히시며, 마침내 그 선과 진리를 실제 쓰임 안에서 살아갈 수 있게 하시는 거듭남의 질서입니다.
특히 레8을 이해하는 열쇠는 출29입니다. 레8에서 모세가 시행하는 거의 모든 절차는 이미 출29에서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9999이하에서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 출29의 제사장 위임식을 매우 상세하게 해설합니다. 그 최고 의미에서는 아론이 주님의 신적 선을, 그의 아들들이 거기서 나오는 신적 진리를 표상하며, 위임식 전체는 주님의 신적 인성과 그분에게서 나오는 신적 선과 진리가 천국에서 어떻게 전달되고 받아들여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일관된 원리에 따라 이것은 상대적으로 인간의 거듭남에도 적용됩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인성을 영화롭게 하신 질서가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는 질서의 원형이기 때문입니다.
6절에서 그 첫 행동은 ‘씻음’입니다. 모세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물로 씻깁니다. AC.10002(출29:4)는 이것을 매우 직접적으로 ‘신앙의진리들을통한정결’이라고 설명합니다. 물은 진리를 의미하며 인간의 정결과 거듭남은 진리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제사장이 먼저 직분을 받고 나중에 씻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씻음이 먼저입니다. 쓰임을 맡기 전에 정결이 있고, 선을 행하기 전에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진리로 분별하는 일이 있습니다. 주님의 일을 한다는 이유로 인간의 악과 거짓이 자동으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쓰임에 들어갈수록 인간은 말씀의 물로 계속 씻김을 받아야 합니다.
7절로 9절에서는 아론에게 제사장의 옷을 입힙니다. 속옷과 띠와 겉옷과 에봇과 흉패, 우림과 둠밈, 관과 금 패가 차례로 놓입니다. AC.9999-10008은 이 옷들을 하나의 장식이 아니라 주님의 신적 선에서 나오는 신적 진리의 여러 층위를 표상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특히 AC.10003(출29:5)은 아론의 옷이 주님의 영적 나라를 표상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거듭남에서도 중요한 순서입니다. 씻음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악과 거짓을 제거한 인간에게 주님께서는 진리를 ‘입히십니다’. 벗겨 내는 것만이 구원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입는 것이 구원입니다. 거짓을 버린 자리에 진리가 들어오고, 악한 삶을 버린 자리에 선한 삶이 들어와야 합니다.
10절로 12절에서는 관유가 등장합니다. 모세는 성막과 그 안의 모든 것, 제단과 기구와 물두멍에 관유를 바르고, 아론의 머리에는 관유를 붓습니다. AC.9999의 요약과 이어지는 해설에서 관유는 신적 선으로의 취임을 표상하며, 아론의 머리에 기름을 붓는 것은 주님의 인성 전체에 있는 신적 선을 표상합니다. 기름이 사랑의 선을 의미한다는 것은 앞의 제사들에서도 계속 확인했습니다. 따라서 제사장직의 가장 깊은 근원은 지식이나 권한이 아니라 선, 곧 사랑입니다. 진리를 많이 알고 의식을 정확하게 수행하는 것만으로 제사장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진리와 쓰임의 생명이 사랑에서 나와야 합니다.
14절로 21절에서는 속죄제의 수송아지와 번제의 숫양이 차례로 드려집니다. 이것은 레4와 레1에서 이미 보았던 제사들이지만 이제는 ‘제사장위임’이라는 문맥 안에 놓입니다. 제사장 자신도 먼저 속죄를 받아야 하고, 그 후 전부를 드리는 번제가 이어집니다. 속죄제의 수송아지 가죽과 고기와 똥은 진영 밖에서 불살라지고, 번제의 숫양은 내장과 정강이를 물로 씻은 뒤 전부 제단에서 불사릅니다. AC.10057이하가 설명하듯 이 일련의 과정은 최고 의미에서 주님의 영화와 관련되고, 상대적으로 인간에게는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정결과 선과 진리의 결합, 곧 거듭남을 나타냅니다. ‘직분을받았으므로거룩하다’가 아니라 먼저 정결하게 되고, 그 다음 자신의 전체가 주님의 사랑의 질서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22절부터 레8의 절정인 ‘위임식의숫양’이 등장합니다. 출29에서는 이것을 ‘손을채우는숫양’이라고 표현하며, 스베덴보리는 이 ‘손을채움’을 대단히 중요하게 다룹니다. AC.10076은 ‘손을채우는것’이 주님의 신적 선에서 나오는 신적 진리의 전달과 받아들임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성경의 ‘위임’은 단순히 직책을 부여한다는 의미보다 훨씬 깊습니다. 인간의 빈손에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채워지고, 그것을 가지고 실제 쓰임을 행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위임은 권력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아 섬길 것을 받는 것입니다.
23절과 24절은 그래서 레8전체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입니다. 모세는 위임식 숫양의 피를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오른쪽귓부리’, ‘오른쪽엄지손가락’, ‘오른쪽엄지발가락’에 바릅니다. 이것은 막연히 ‘듣는것,일하는것,걸어가는것을하나님께바친다’는 정도의 상징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훨씬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AC.10060(출29:20)은 이 피를 주님의 신적 선에서 나오는 신적 진리라고 하고, AC.10061(출29:20)은 오른쪽 귀를 선에서 나오는 진리를 지각하는 능력과 연결합니다. AC.10062(출29:20)는 오른손 엄지를 선에서 나오는 진리의 능력 및 그에 따른 이해와 연결하며, AC.10063(출29:20)은 오른발 엄지를 가장 바깥 또는 최종 단계에서의 이해와 연결합니다. 더 깊게는 귀·손·발이 각각 가장 안쪽 천국, 중간 천국, 가장 바깥 천국에 상응합니다. 위임식의 피가 인간 존재의 안에서 밖까지 내려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간의 거듭남에 적용하면 매우 아름다운 질서가 드러납니다. 먼저 주님의 진리를 ‘듣고지각하는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듣기만 해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진리는 손으로 내려와 실제 능력과 행동이 되어야 하고, 다시 발까지 내려와 일상의 가장 바깥 삶과 행보가 되어야 합니다. 귀에서는 경건한데 손에서는 이기적이고, 손에서는 봉사하는데 발이 실제 삶에서는 다른 길로 간다면 아직 온전한 위임이 아닙니다. 주님의 신적 진리는 우리의 지각과 이해와 행동, 그리고 일상의 최종적인 삶까지 관통해야 합니다. 제사장의 귀와 손과 발에 같은 피가 발라지는 것은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하나의 신적 질서 아래 놓이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25절로 28절에서는 또 놀라운 장면이 이어집니다. 숫양의 기름과 오른쪽 뒷다리, 그리고 무교병과 기름 섞은 떡과 전병을 모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손’에 올려놓고 여호와 앞에서 흔들게 합니다. AC.10077-10080은 이 떡들이 천적 선의 안쪽·중간·바깥 층위를 나타낸다고 설명하고, AC.10082(출29:24)는 이 모든 것을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손바닥 위에 놓는 것이 ‘이모든것은주님의것이며주님에게서온다’는 인정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이어 AC.10083(출29:24)은 그것을 흔드는 요제가 그 인정으로부터 오는 ‘신적생명’을 의미한다고 밝힙니다.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아직 생명이 아닙니다. ‘이선과진리는내것이아니라주님에게서온것입니다’라고 인정할 때 그것이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이 점에서 ‘위임’의 의미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인간의 손이 채워지지만 그 순간 인간은 오히려 ‘이것은내것이아니다’라고 인정합니다. 주님께서 능력을 주셨는데 인간이 ‘내능력’이라고 하면 위임의 의미를 잃습니다. 말씀을 가르칠 능력, 이웃을 섬길 능력, 체어리티를 행할 능력, 교회를 섬길 능력 모두 주님에게서 옵니다. AC.10082가 손바닥 위에 놓인 제물들을 ‘주님의것이며주님에게서온다는인정’으로 설명하는 것은 그래서 매우 중요합니다. 참된 위임은 자기 권한의 확대가 아니라 자기 능력의 근원을 주님께 돌리는 데서 시작됩니다.
30절에서는 관유와 제단 위의 피가 함께 아론과 그의 옷, 그의 아들들과 그들의 옷에 뿌려집니다. AC.10067-10069의 출29병행 해설에서 피는 신적 진리, 관유는 신적 사랑의 선을 나타내며, 이 둘의 결합은 신적 선과 신적 진리의 상호적 결합을 표상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매우 중요한 말을 덧붙입니다. 실제 피나 기름이라는 물질 자체가 사람을 거룩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을 거룩하게 하는 것은 오직 주님에게서 오는 신앙의 진리와 사랑의 선이라는 것입니다. 거룩함은 의식 자체에서 자동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함의 근원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31절과 32절에서는 위임식 숫양의 고기와 광주리의 떡을 회막 문에서 먹고, 남은 것은 불사릅니다. AC.10105(출29:31)는 고기를 삶는 것을 ‘주님의빛가운데교리의진리를통해선을삶의쓰임에맞게준비하는것’이라고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이어 AC.10106-10109는 그 고기와 떡을 먹는 것이 정결하게 된 사람에게 주님의 선이 자기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도 위임은 단순한 직책 임명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선을 실제 삶의 쓰임으로 준비하고, 그것을 자기 의지 안에 받아들여 살아가는 상태입니다.
마지막 33절로 35절에서는 이 모든 위임이 하루 만에 끝나지 않습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이레동안’ 회막 문을 떠나지 않아야 합니다. AC.9228은 바로 레8:33-34를 인용하면서 ‘일곱’이 완전한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에 제사장 위임이 이레 동안 계속되었다고 설명합니다. AC.10102(출29:30)도 ‘이레’를 ‘충만하고완전한인정과받아들임’이라고 풀이합니다. 그러므로 위임은 순간적인 감동이나 한 번의 결단이 아닙니다. 인간 존재 전체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도록 하나의 상태가 충만해지는 과정입니다.
레8은 결국 ‘누가주님의쓰임을감당할수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합니다. 씻김을 받은 사람, 진리를 입은 사람, 사랑의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 악과 거짓에서 정결하게 된 사람, 주님의 진리를 귀로 받아들이고 손으로 행하며 발로 살아가는 사람, 그리고 자기 손에 놓인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의것이며주님에게서온다’고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목회자나 성직자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모든 거듭나는 사람은 주님의 나라에서 어떤 쓰임을 위해 준비됩니다. 거듭남은 단지 ‘내가구원받는것’으로 끝나지 않고, 주님께서 나를 통해 이루시려는 선한 쓰임으로 나아갑니다. 그래서 레8의 위임식은 인간에게 권위를 부여하는 의식이 아니라 인간 전체를 주님의 선과 진리의 통로로 준비시키는 거룩한 과정입니다. 귀에서 듣고, 손에서 행하고, 발에서 살아가며, 그 모든 힘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인정하는 것, 이것이 제사장 위임식에 감추어진 거듭남과 쓰임의 아르카나입니다. (SW.레8해설)
레7:30-34에는 레위기의 상응을 읽는 재미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장면 가운데 하나가 있습니다. 화목제물을 가져온 사람은 기름과 함께 가슴을 자기 손으로 가져옵니다. 가슴은 여호와 앞에서 흔들어 ‘요제’로 삼고, 오른쪽 뒷다리는 들어 올려 ‘거제’로 드립니다. 그리고 두 부분 모두 제사장에게 돌아갑니다. 본문도 가슴과 오른쪽 뒷다리가 제사장에게 주어진 영원한 몫이라고 명시합니다.
이 장면은 스베덴보리가 놀라울 정도로 직접 해설합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087(출29:26)은 ‘가슴’이 체어리티의 선을 의미하며, 가장 높은 의미에서는 신적 영적인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인간의 가슴 안에는 심장과 폐가 있고, 그 상응에 따라 가슴은 둘째 또는 중간 천국의 영적 선, 곧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의 선과 연결됩니다.
반면 오른쪽 뒷다리는 더 안쪽의 선을 나타냅니다. AC.10075(출29:22)는 오른쪽 뒷다리를 가장 내적인 선, 곧 천적 선과 연결하면서 레7:32, 34-35를 직접 인용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가슴은 영적 선을, 오른쪽 뒷다리는 천적 선을 표상하기 때문에 이 두 부분이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주어졌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부위만 다른 것이 아니라 동작도 다르다는 것입니다. 가슴은 ‘흔들고’, 오른쪽 뒷다리는 ‘들어올립니다’. AC.10091(출29:27)은 가슴을 흔드는 것을 ‘인정에의해살아있게됨’과 연결합니다. 영적 인간은 진리를 이해하고 인정하면서 그 진리로부터 선에 이릅니다.
AC.10092-10093(출29:27)은 오른쪽 뒷다리를 들어 올리는 것을 신적 천적인 것, 곧 주님에게만 속한 신적 선이 천국과 교회에서 지각되고 받아들여지는 것과 연결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에서 영적 천국과 천적 천국의 차이를 설명합니다. 영적 천국에서는 신적 진리가 이해의 영역에서 ‘인정’되고, 천적 천국에서는 신적 선이 의지의 영역에서 ‘지각’됩니다.
그러므로 ‘가슴을흔들고뒷다리를들어올린다’는 것은 단순한 고대의 제의 동작이 아닙니다. 인간이 주님에게서 오는 영적 선과 천적 선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더 나아가 천국의 두 큰 질서가 어떻게 다른지를 몸의 두 부분과 두 동작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작은 제사 동작 하나 안에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차이까지 숨어 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두 부분이 결국 제사장에게 주어진다는 것도 중요합니다. AC.10090(출29:26)은 제사에서 모세나 아론에게 몫으로 주어진 것이 거룩한 신성의 ‘교통’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주님의 선은 주님에게만 머물러 있는 선이 아니라 인간에게 전달되고 받아들여져 인간의 생명이 되는 선입니다.
그래서 레7의 화목제는 정말 ‘화목’의 제사입니다. 가슴의 체어리티와 오른쪽 뒷다리의 천적 선이 주님에게서 인간에게 전달되고, 인간은 그것을 인정하고 지각하며 받아들입니다. 화목은 단순히 적대 관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선이 인간 안으로 흘러들어 와 인간의 사랑과 체어리티가 되고, 인간이 그 선의 근원을 다시 주님께 인정하는 살아 있는 교통입니다.
레7의 마지막에 이 장면이 놓인 것은 그래서 매우 아름답습니다. 레1부터 수많은 동물과 피와 기름과 제단과 불과 씻음과 속죄와 보상을 지나왔는데, 마침내 남는 것은 ‘가슴’과 ‘오른쪽뒷다리’입니다. 체어리티의 선과 천적 사랑의 선입니다. 악을 정결하게 하고 거짓을 제거하는 것은 목적이 아니라 이 사랑을 받을 수 있게 하는 준비였습니다. 거듭남의 최종 목적은 결국 사랑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그 사랑이 모두 주님에게서 왔음을 기쁘게 인정하는 삶입니다. (SW.레7심화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