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28.심화

 

1. ‘신앙의 질은 체어리티로부터 알 수 있다

 

이 한 문장은 오늘날 신앙을 돌아보는 데에도 매우 중요한 기준을 제공합니다. 우리는 흔히 어떤 사람의 신앙을 그의 신앙 고백이나 성경 지식, 교리적 입장, 기도와 예배의 열심으로 판단합니다. 물론 이러한 것들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AC.328은 그보다 더 깊은 곳을 보라고 합니다. 그 신앙이 그 사람을 어떤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가를 보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신앙이 실제로 사람을 겸손하게 하고, 악을 멀리하게 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용서하고 섬기게 한다면 그 신앙 안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반대로 신앙을 강하게 주장할수록 더 교만해지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며, 자기의 옳음을 세우고, 체어리티를 부차적인 것으로 여긴다면 바로 그 열매가 그 신앙의 질을 드러냅니다.

 

이것은 ‘행위를 보고 구원 여부를 판단하자’는 단순한 도덕주의와도 다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체어리티는 겉으로 착한 일을 많이 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체어리티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사랑하고, 그 선에 따라 이웃에게 유익을 행하려는 내적 애정입니다. 따라서 겉으로 많은 선행을 하면서도 속으로 자기 명예와 공로를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참된 체어리티가 아닐 수 있습니다. 반대로 눈에 띄는 큰일을 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자리에서 정직하게 의무를 행하고, 악을 죄로 여겨 피하며, 이웃의 유익을 진실하게 바란다면 그 안에 체어리티가 있을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체어리티가 신앙의 내적 질을 보여 줍니다.

 

특히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는 말은 기억해 둘 만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을 처음 접하면 자칫 ‘신앙보다 체어리티가 중요하니 결국 신앙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아닌가?’라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328은 정반대를 말합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을 없애려 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오직 신앙이 ‘주된 것’이 되어 자신을 체어리티 위에 세우는 데 있습니다. 참된 질서는 신앙 없는 체어리티도, 체어리티 없는 신앙도 아니라 둘의 결합입니다. 다만 그 결합에는 질서가 있습니다. 선이 주된 것이고, 진리는 그 선을 섬기며, 사랑이 생명이고, 신앙은 그 사랑에 형체와 방향을 줍니다.

 

따라서 AC.325에서 시작된 흐름을 여기까지 이어 보면 매우 선명합니다. 처음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고, 그 사랑과 신앙은 하나였습니다. 그 후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가인’이 되었고, 체어리티는 ‘아벨’이라 불렸습니다. 분리는 예배에까지 이어졌고, 가인의 상태는 점차 악해졌습니다. 그러나 AC.328에 이르러 주님께서는 아직 한 번 더 길을 열어 놓으십니다. ‘아벨’은 아직 ‘가인’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신앙이 자기 자리를 낮추고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한다면 아직 회복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신앙이 끝내 자신을 주된 것으로 높이고 체어리티 위에 서려 한다면, 다음에 일어날 일은 이미 예고되어 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4의 비극은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해서 일어난 비극이 아니라, 본래 하나여야 할 둘 사이의 질서가 뒤집힘으로써 일어난 비극입니다.

 

 

 

AC.328, 창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If thou doest well, art thou not exalted? And if thou doest not well,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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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If thou doest well, art thou not exalted? And if thou doest not well, sin lieth at the door; and to thee is his desire, and thou rulest over him. (4:7)

 

AC.328

 

그리고 신앙의 질은 체어리티로부터 알 수 있으며, 신앙이 주된 것이 되어 체어리티보다 높임을 받지만 않는다면,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7절) And that the quality of the faith is known from the charity; and that charity wishes to be with faith, if faith is not made the principal, and is not exalted above charity. (verse 7)

 

 

해설

 

AC.328은 앞의 AC.325-327에서 계속되어 온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 문제를 한층 더 깊이 다룹니다. AC.325에서는 태고교회가 본래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으나, 이후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한 사람들이 생겨났다고 하였습니다. AC.326에서는 그 분리가 예배에까지 나타나 ‘가인의 제물’과 ‘아벨의 제물’이라는 두 종류의 예배가 되었고, AC.327에서는 분리된 신앙에 속한 사람들의 상태가 점차 악해져 가인의 ‘분함’과 ‘안색이 변함’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AC.328에서는 매우 중요한 사실 하나가 덧붙여집니다. 아직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완전히 밀어내고 자신을 그 위에 세우지만 않는다면, 체어리티는 여전히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는 사실입니다.

 

먼저 ‘신앙의 질은 체어리티로부터 알 수 있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質, quality)은 그 신앙이 어떤 성질의 신앙인가, 곧 참되고 살아 있는 신앙인가, 아니면 외형만 신앙인 죽은 신앙인가 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판단하는 기준이 신앙 자체의 주장이나 교리적 정교함이 아니라 ‘체어리티’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얼마나 많은 진리를 알고 있는지, 얼마나 확신 있게 신앙을 고백하는지, 얼마나 열심히 예배에 참여하는지만으로는 그 신앙의 참된 질을 알 수 없습니다. 그 신앙이 실제로 이웃을 사랑하게 하는지, 악을 죄로 여기고 멀리하게 하는지, 선을 행하게 하는지,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게 하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알 수 있듯, 체어리티를 보고 신앙의 질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을 낮게 평가하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를 밝혀 주는 말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앙은 체어리티와 함께 있을 때, 비로소 살아 있는 신앙입니다. 진리는 선이 무엇인지 가르치고, 신앙은 사람이 그 진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합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실제 의지와 삶 안으로 들어가 체어리티가 되지 않는다면, 아직 온전한 신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질은 체어리티로부터 알 수 있다’는 말은 신앙을 체어리티와 경쟁시키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본래 무엇을 위하여 존재하는지를 밝혀 줍니다. 신앙은 사람을 선으로, 곧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으로 인도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이어지는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는 표현은 더욱 의미심장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마치 체어리티를 살아 있는 존재처럼 표현합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을 제거하려 하지 않습니다. 아벨은 본래 가인의 적이 아닙니다. 이것이 창4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문제는 ‘신앙이냐 체어리티냐’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본래 둘은 함께 있어야 합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을 필요 없는 것으로 여기지 않으며, 참된 신앙 역시 체어리티를 떠나려 하지 않습니다. 진리는 선과 함께 있기를 원하고, 선은 진리를 통하여 형체를 얻습니다. 둘의 결합이 바로 교회의 생명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하나의 조건이 붙습니다. ‘신앙이 주된 것이 되어 체어리티보다 높임을 받지만 않는다면’입니다. 바로 이것이 가인의 문제입니다. 신앙이 존재한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신앙이 자신을 ‘principal’, 곧 주된 것으로 삼고 체어리티 위에 올라서려는 것이 문제입니다. 본래 천적 질서에서는 사랑이 먼저이고, 신앙이 그 사랑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이 질서가 뒤집히면 신앙이 스스로 주인이 되고, 체어리티는 부차적인 것으로 밀려납니다. ‘무엇을 믿느냐가 가장 중요하고, 어떻게 사느냐는 그 다음이다’, 더 나아가 ‘올바르게 믿기만 하면 체어리티의 삶은 구원에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라는 방향으로 나아갈 때, 가인의 원리가 점점 강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AC.328은 가인과 아벨의 관계를 단순한 대립으로 이해하지 못하게 합니다. 아벨은 가인을 죽이려 하지 않습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을 몰아내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가인이 자신을 아벨보다 높이는 순간, 문제가 생깁니다. 이것은 이후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의 속뜻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체어리티가 신앙을 제거한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인 분리된 신앙이 결국 체어리티를 제거합니다. 창4의 비극은 두 원리가 서로 존재하기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그 둘의 질서가 뒤집혔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4:7의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는 말씀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에게 아직 길이 열려 있음을 보여 주십니다. 신앙이 다시 선을 향하고 체어리티와 결합한다면 회복될 수 있습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을 가졌다는 데 있지 않았으므로 신앙 자체를 버릴 필요가 없습니다. 필요한 것은 신앙이 다시 자신의 본래 자리를 찾는 것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섬기고, 진리가 선을 향하며, 사람이 알고 믿는 것이 실제 삶으로 이어질 때, ‘가인’으로 표상된 신앙도 본래의 질서 안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AC.328은 앞의 AC.327에서 보았던 주님의 질문, 곧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가 단순한 책망이 아니었음을 더욱 분명히 합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의 상태가 악해지고 있음에도 그에게 회복의 길을 보여 주십니다. 아직 아벨은 살아 있고, 아직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하며, 아직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이지 않는다면 둘은 다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4:7은 심판의 선언이라기보다 분리된 것을 다시 결합시키려는 주님의 자비로운 부르심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심화

 

1. ‘신앙의 질은 체어리티로부터 알 수 있다

 

 

AC.328, 심화 1, ‘신앙의 질은 체어리티로부터 알 수 있다’

AC.328.심화 1. ‘신앙의 질은 체어리티로부터 알 수 있다’ 이 한 문장은 오늘날 신앙을 돌아보는 데에도 매우 중요한 기준을 제공합니다. 우리는 흔히 어떤 사람의 신앙을 그의 신앙 고백이나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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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9, 창4:8-9,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And Cain talked to Abel his brother; and it came to pass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hat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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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7, 창4:5-6,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And unto Cain and unto his offering he looked not, and Cain’s anger was kindled exceedingly, and his faces fell. 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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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7.심화

 

1.  분리가 결국 이 되는가?

 

AC.327에서 가장 깊이 생각해 볼 문제는 이것입니다. 사랑과 신앙을 분리한 것이 왜 결국 사람의 상태를 ‘악하게’ 만드는가 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교리적으로 사랑과 신앙의 관계를 잘못 이해했다고 해서 반드시 사람이 악해져야 하는 것일까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여기서 ‘선과 진리의 결합’이라는 근본 질서를 보아야 합니다. 선은 진리의 생명이며, 진리는 선의 형체입니다. 둘은 서로를 위하여 존재합니다. 신앙의 진리가 체어리티의 선에서 분리되면, 진리는 생명의 근원을 잃고, 결국 사람의 proprium이 그것을 자기 목적을 위하여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이 때문에 ‘분리된 신앙’은 처음부터 노골적인 거짓이나 악으로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히려 매우 신앙적이고, 교리적으로도 정확해 보일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많이 알고, 진리를 강하게 주장하고, 예배에도 열심일 수 있습니다. 가인 역시 제물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체어리티가 없으면, 신앙은 점차 ‘내가 무엇을 아는가’, ‘내가 얼마나 옳은가’, ‘내 신앙이 얼마나 정통인가’를 중심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그러면 진리는 자기 성찰의 빛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사용되고, 마침내 자신의 신앙이 인정받지 못할 때 분노하게 됩니다. AC.327은 바로 이 내적 변질의 순간을 ‘가인의 분함’으로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분노는 단순한 감정 문제가 아니라 영적 질서가 뒤집힌 결과입니다. 사랑이 신앙의 생명이었을 때에는 진리가 사람을 겸손하게 하고, 이웃을 사랑하도록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자 동일한 진리가 오히려 proprium을 강화하는 도구가 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분리’가 ‘’으로 발전하는 이유입니다. 진리 자체가 악해지는 것이 아니라, 선에서 분리된 진리가 자기 사랑의 손에 들어가 악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창4의 진행은 매우 정교합니다. AC.325에서는 ‘사랑과 신앙의 분리’, AC.326에서는 ‘예배의 분리’, AC.327에서는 ‘내적 상태의 악화’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제 그 악화된 상태가 계속되면, 다음에는 체어리티 자체를 제거하려는 단계, 곧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상태로 나아가게 됩니다. 따라서 창4의 최초 살인은 어느 순간 갑자기 폭발한 사건이 아닙니다. 속뜻으로 보면, 그 살인은 이미 오래전, 신앙이 사랑에서 떨어져 나가는 순간부터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AC.327이 짧은 한 문장으로 보여 주는 창4의 매우 깊은 영적 경고입니다.

 

 

 

AC.327, 창4:5-6,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And unto Cain and unto his offering he looked not, and Cain’s anger was kindled exceedingly, and his faces fell. 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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