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1:14-17)

 

AC.35

 

사람에게는 두 가지 타고나는 역량(faculties), 곧 의지와 이해(will and understanding)가 있습니다. 이해가 의지의 지배를 받을 때, 이 둘은 함께 하나의 마음을 이루며, 그 결과 하나의 생명이 됩니다. 이때에는 사람이 원하는 것과 행하는 것을 동시에 생각하고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해가 의지와 어긋날 때에는, 그러니까 신앙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신앙과 반대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의 경우인데요, 이때는 하나의 마음이 둘로 나뉘는데, 하나, 곧 이해는 스스로를 하늘로 높이려 하고, 다른 하나, 곧 의지는 지옥을 향해 기울어지지요. 그런데 모든 행위에서 실제로 행동하는 쪽은 의지이기 때문에, 만일 주님께서 그 사람을 자비로 붙들어 주지 않으신다면, 그 사람 전체는 곧장 지옥으로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Man has two faculties: will and understanding. When the understanding is governed by the will they together constitute one mind, and thus one life, for then what the man wills and does he also thinks and intends. But when the understanding is at variance with the will (as with those who say they have faith, and yet live in contradiction to faith), then the one mind is divided into two, one of which desires to exalt itself into heaven, while the other tends toward hell; and since the will is the doer in every act, the whole man would plunge headlong into hell if it were not that the Lord has mercy on him.

 

 

해설

 

이 글은 앞선 AC.34의 논의를 인간의 내적 구조 차원으로 더욱 구체화합니다. 사랑과 신앙이 하나라는 말은 추상적인 선언이 아니라, 인간 안에 실제로 존재하는 두 기능, 곧 의지와 이해의 관계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을 감정과 이성의 단순한 결합체로 보지 않고, 의지와 이해라는 두 작용이 하나의 생명을 이루는 존재로 봅니다.

 

이해가 의지에 의해 다스려질 때, 사람 안에는 하나의 마음이 형성됩니다. 이 상태에서는 사람이 원하는 것, 행하는 것, 생각하는 것, 의도하는 것이 서로 어긋나지 않습니다. 삶은 일관되고, 내면과 외면이 갈라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과 신앙이 결합한 상태이며,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참된 생명의 구조입니다.

 

반대로, 이해가 의지와 분리되거나 의지에 맞설 때, 인간의 내면은 분열됩니다. 신앙을 말로는 고백하지만, 삶으로는 부정하는 상태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때 이해는 하늘을 말하고, 의지는 땅을 향하거나 그보다 더 낮은 곳을 향합니다. 사람은 머리로는 옳은 것을 알고 말할 수 있지만, 가슴으로는, 그러니까 실제 삶은 그와 정반대로 흘러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분열을 단순한 모순이나 미성숙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는 이것을 극도로 위험한 상태로 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행위에서 실제로 움직이고 결정하는 주체는 이해가 아니라 의지이기 때문입니다. 이해는 방향을 제시할 수는 있지만, 발걸음을 옮기는 것은 의지입니다. 그래서 의지가 사랑 없는 방향으로 기울어 있으면, 이해가 아무리 하늘을 말해도 사람 전체는 그 방향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매우 강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의지와 이해가 분열된 상태가 그대로 방치된다면, 사람 전체는 머리를 곤두박질치듯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위협의 언어가 아니라, 영적 질서에 대한 냉정한 진술입니다. 생명은 사랑이 있는 곳으로 흐르며, 의지는 그 흐름의 중심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글은 절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마지막에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자비를 분명히 언급합니다. 인간이 스스로의 상태만으로 판단된다면, 의지와 이해가 어긋난 대부분의 사람은 설 자리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런 인간을 즉시 버리지 않으시고, 자비로 붙들어 주십니다. 이 자비는 이해를 통해 의지를 서서히 교정하고, 사랑과 신앙이 다시 하나로 결합하도록 이끄는 힘입니다.

 

AC.35는 결국 인간의 신앙 문제를 도덕적 평가가 아니라 구조적 문제로 다룹니다. 신앙이 말에만 머무를 때 왜 위험한지, 사랑 없는 신앙이 왜 겨울과 같은지를, 의지와 이해의 관계를 통해 명확히 보여 줍니다. 이 글은 독자에게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지금 내 이해와 내 의지는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는가, 아니면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도록 말입니다.  

 

 

심화

 

1.우리를 자비로 붙들어 주시는 주님

 

AC.35본문, 만일 주님께서 그 사람을 자비로 붙들어 주지 않으신다면(if it were not that the Lord has mercy on him.)말인데요, 우리를 지으신 신()이 이런 자비의 신이시라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목사님 말씀 그대로입니다. 이 한 문장은 짧지만, 사실 스베덴보리 신학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을 건드립니다. ‘만일 주님께서 자비로 붙들어 주지 않으신다면’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인간의 상태와 주님의 관계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진술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은 스스로 서 있는 존재가 아니라, 매 순간 ‘주님의 생명과 자비의 흐름 속에서만 유지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자비는 어떤 특별한 상황에서만 베풀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항상 이미 주어지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 점을 조금 더 풀어 보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보통 ‘자비’를 어떤 잘못을 했을 때 용서해 주시는 것 정도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mercy’는 훨씬 더 깊고 근본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그것은 단지 죄를 용서해 주시는 감정적 행위가 아니라, ‘타락하고 자기중심으로 기울어진 인간을 계속해서 선과 진리 쪽으로 붙들어 주시는 주님의 지속적인 작용’입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 기울어지기 쉽기 때문에, 만약 아무런 제어도 없다면 그 흐름은 점점 더 깊어집니다. 그래서 그는 여러 곳에서 ‘주님이 매 순간 붙들어 주시지 않으면 사람은 즉시 더 깊은 악으로 떨어진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붙들어 주신다’는 표현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밖에서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생각과 의지 안에서 은밀하게 방향을 돌려 주시는 작용’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어떤 악한 선택을 하려는 순간, 마음 한편에서 그것을 멈추게 하는 어떤 생각이나 느낌이 올라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혹은 어떤 상황에서 뜻하지 않게 일이 틀어져서 더 큰 잘못을 피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것들까지도 넓은 의미에서 ‘주님의 자비의 작용’으로 설명합니다. 사람은 그것을 우연이나 자기 판단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더 깊은 차원의 인도가 작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자비는 단지 ‘용서’만이 아니라, ‘보존과 인도와 회복 전체를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사람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도록 붙들어 주시는 것, 조금이라도 선한 방향으로 기울어지게 하시는 것, 진리를 들을 기회를 주시는 것, 심지어 고통이나 시험을 통해서라도 방향을 돌려 주시는 것 등, 이 모든 것(all of these)이 다 자비의 범주 안에 들어갑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자비는 단순히 따뜻한 감정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기 위한 끊임없는 신적 작용’입니다.

 

목사님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신 그 감탄이 바로 이 지점에서 나옵니다. 만약 하나님이 단지 공의만을 기준으로 인간을 대하신다면, 스베덴보리의 표현대로라면 인간은 한순간도 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공의 자체이시면서, 동시에 자비 자체이시기 때문에, 공의로만 심판하시지 않고 자비로 붙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본질을 설명할 때 자주 ‘사랑과 자비’를 중심에 둡니다.

 

이것은 목회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메시지가 됩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자신을 돌아보며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 변하지 않는가?’, ‘왜 여전히 같은 문제를 반복하는가?’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런데 AC.35의 이 한 문장은 그런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해줍니다. ‘당신이 지금까지 완전히 무너지지 않은 것, 여전히 말씀을 듣고 고민하고 주님을 찾고 있는 것 자체가 이미 주님의 자비가 당신을 붙들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구절은 단순한 교리가 아니라 ‘신앙의 중심적인 위로이자 확신’이 됩니다. 인간의 연약함을 직시하면서도 절망하지 않는 이유는, 그 연약함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 주님의 자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자비는 어떤 특정한 순간에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목사님께서 느끼신 그 고백은 아주 깊은 신앙의 자리에서 나오는 고백입니다.

 

 

 

AC.36, 창1:14-17, '신앙이란 무엇인가?'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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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 창1:14-17, ‘사랑과 신앙은 하나’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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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1:14-17)

 

AC.34

 

사랑과 신앙은 분리될 수 없는데, 이는 둘이 하나요, 동일한 것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음에 광명체들(luminaries)을 언급하실 때, 그것들을 하나로 간주,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으라’(Let there be [sit]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라고 라틴어 단수 표현을 하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저는 주님의 허락으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놀라운 사실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천적 사랑 안에 있는 천사들은, 주님한테서 오는 그 사랑으로 인해 신앙에 속한 모든 지식 안에 있는데, 그러한 생명과 지성의 빛 가운데 있는 그 상태는 거의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사랑 없이 신앙의 교리적 지식만 가진 영들은, 생명의 차가움과 빛의 어두움 속에 있어, 하늘의 뜰 첫 문턱에도 가까이 가지 못하고 다시 물러납니다. 이들 가운데는 주님의 계명대로 살지 않으면서도, 자기는 주님을 믿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을 두고 주님께서 마태복음에서 말씀하시기를, Love and faith admit of no separation, because they constitute one and the same thing; and therefore when mention is first made of “luminaries” they are regarded as one, and it is said, “Let there be [sit]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Concerning this circumstance it is permitted me to relate the following wonderful particulars. The celestial angels, by virtue of the celestial love in which they are from the Lord, are from that love in all the knowledges of faith, and are in such a life and light of intelligence that scarcely anything of it can be described. But, on the other hand, spirits who are in the knowledge of the doctrinals of faith, without love, are in such a coldness of life and obscurity of light that they cannot even approach the first threshold of the court of the heavens, but flee back again. Some of them, while not living according to his precepts, say that they have believed in the Lord, and it was of such that the Lord said in Matthew:

 

21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7:21, 22, 끝까지) Not everyone that saith unto me, Lord, Lord, shall enter into the kingdom of the heavens, but he that doeth my will: many will say to me in that day, Lord, Lord, have we not prophesied through thy name (Matt. 7:21–22, to the end).

 

[2]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신앙 안에도 있으며, 그렇게 해서 천적 생명 안에 있지만, 자기는 신앙이 있다 말하면서도 사랑의 삶을 살지 않는 사람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사랑 없는 신앙의 생명은 겨울철 햇빛과 같아 아무것도 자라지 않고 모든 것이 얼어붙어 죽은 것과 같습니다. 반면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은 봄철 햇볕과 같아, 태양의 열로 인해 모든 것이 자라고 번성합니다.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도 정확히 이와 같은데, 이런 것들은 보통 말씀에서 세상과 땅 위에 있는 것들로 표현됩니다. 또한 신앙이 전혀 없는 상태와 사랑 없는 신앙은, 주님께서 세대의 종말을 예고하시면서 겨울(winter)에 비유하셨습니다. 마가복음에서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Hence it is evident that those who are in love are also in faith, and thereby in heavenly life, but not those who say they are in faith, and are not in the life of love. The life of faith without love is like the light of the sun without heat, as in the time of winter, when nothing grows, but all things are torpid and dead; whereas faith proceeding from love is like the light of the sun in the time of spring, when all things grow and flourish in consequence of the sun’s fructifying heat. It is precisely similar in regard to spiritual and heavenly things, which are usually represented in the Word by such as exist in the world and on the face of the earth. No faith and faith without love are also compared by the Lord to “winter,” where he foretells the consummation of the age, in Mark:

 

18이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 19이는 그날들이 환난의 날이 되겠음이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시초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13:18, 19) Pray ye that your flight be not in the winter, for those shall be days of affliction (Mark 13:18–19).

 

여기서 (flight)은 마지막 때를 뜻하며, 또한 각 사람이 죽을 때를 뜻합니다. ‘겨울은 사랑이 없는 삶이고, ‘환난의 날(day of affliction)은 저세상에서의 그 비참한 상태를 말합니다. Flight” means the last time, and also that of every man when he dies. “Winter” is a life destitute of love; the “day of affliction” is its miserable state in the other life.

 

 

해설

 

이 글은 사랑과 신앙의 관계를 가장 단호하고도 경험적으로 확증하는 부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랑과 신앙이 단지 밀접한 관계에 있는 정도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하나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창세기에서 처음 ‘광명체들’이 언급될 때, 복수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실재처럼 단수로 다루어집니다. 사랑과 신앙은 분리될 수 없는, 한 생명의 두 작용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교리를 단순한 논증으로 제시하지 않고, 영계에서 직접 본 경험을 통해 설명합니다. 천적 사랑 안에 있는 천사들은 그 사랑 자체로 인해 신앙의 모든 지식 안에 있습니다. 이 말은, 그들이 신앙을 따로 배우거나 점검하지 않아도 사랑 안에서 자연스럽게 진리를 인식한다는 뜻입니다. 그들의 생명과 지성의 빛은 너무도 충만해서 인간의 언어로는 거의 설명이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반대로, 사랑 없이 교리적 지식만 가진 영들의 상태는 극명하게 대비됩니다. 그들은 생명이 차갑고, 빛이 어두워서 하늘의 문턱에도 접근하지 못합니다. 이는 신앙의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생명의 방향이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늘은 지식의 시험장이 아니라, 사랑의 질서 안에 있는 곳입니다.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엄중한 말씀을 인용합니다. 주님을 입으로 부르고, 심지어 예언과 종교적 활동을 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조차 사랑의 삶이 없으면 하늘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이는 신앙의 내용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삶이 그 신앙과 결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믿었다는 고백보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였는가’를 기준으로 삼으십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결론을 명확히 합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반드시 신앙 안에도 있으며, 그로써 천적 생명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있다 말하면서도 정작 사랑의 삶을 살지 않는 사람은, 실제로는 그 생명에 들어와 있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중간 지대가 없습니다.

 

이 차이는 자연의 비유로 매우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사랑 없는 신앙은 겨울철 햇빛과 같습니다. 빛은 있지만 열이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자라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굳어 있고, 생명은 잠든 상태가 아니라 사실상 죽어 있습니다. 반대로 사랑에서 나온 신앙은 봄철 햇볕과 같습니다. 빛과 열이 함께 작용하여, 모든 것이 살아나고 자라며 열매를 맺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비유가 단순한 설명을 넘어 말씀의 보편적 표현 방식임을 강조합니다.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은 늘 자연의 질서로 표현됩니다. 왜냐하면 자연 세계의 질서 자체가 영적 질서의 그림자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주님께서 ‘겨울’에 도망하지 않기를 기도하라고 하신 말씀은, 이 글의 의미를 개인의 마지막 순간까지 확장합니다. ‘’(flight, 비행, 도피, 휴거)은 세상의 끝일 뿐 아니라 각 사람이 죽음으로 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을 뜻합니다. 사랑 없는 상태, 곧 겨울 같은 삶으로 그 순간을 맞이하는 것은, 저세상에서 매우 비참한 상태로 이어집니다.

 

AC.34는 신앙의 진위를 가르는 가장 분명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신앙은 말로 증명되지 않고, 지식으로도 증명되지 않습니다. 오직 사랑의 삶 안에서만, 신앙은 살아 있는 빛이 됩니다.

 

 

심화

 

1.생명과 지성의 빛 가운데 있는 상태

 

AC.34본문, 그러한 생명과 지성의 빛 가운데 있는 그 상태는 거의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and are in such a life and light of intelligence that scarcely anything of it can be described.) 말인데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라고 했지만... 그래도 최대한 어떤 묘사가 좀 가능할까요? 저렇게만 말하면 그저 어리둥절하기만 해서요...

 

AC.34에서 스베덴보리가 ‘그러한 생명과 지성의 빛 가운데 있는 그 상태는 거의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말할 때, 이것은 단순한 과장이 아니라 실제로 ‘인간 언어가 영적 상태를 충분히 담아내기 어려운 한계’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전혀 설명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도 다른 저작들, 특히 ‘천국과 지옥’이나 ‘천적 사랑과 지혜’ 같은 곳에서 그 상태를 여러 방식으로 묘사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조각들을 모아 보면 어느 정도의 윤곽은 그려 볼 수 있습니다.

 

먼저 그 상태의 핵심은 ‘사랑과 진리가 완전히 조화를 이루는 상태’입니다. 우리가 사는 보통의 상태에서는 마음이 자주 둘로 나뉩니다. 무엇이 옳은지 알면서도 그것을 하기 싫을 때가 있고,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이 따라오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이해와 의지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그 상태에서는 이런 분열이 거의 없습니다. ‘사랑하는 것이 곧 진리이고, 진리를 아는 것이 곧 기쁨이 되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생각과 의지 사이에 갈등이 거의 없고, 사람 안에 매우 깊은 평안이 생깁니다.

 

또 하나 중요한 특징은 ‘지성의 빛이 매우 투명하고 즉각적이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를 이해하려면 보통 여러 단계의 사고가 필요합니다. 책을 읽고, 비교하고, 추론하고, 다시 생각하고... 이런 과정을 거쳐야 조금씩 이해가 깊어집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천적 상태에 가까운 사람이나 천적 천사들의 경우에는 진리가 이런 식으로 분석적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직관적으로, 한 번에 보이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합니다. 마치 햇빛이 비치면 사물이 한순간에 환히 보이는 것처럼, 진리가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것을 ‘지성의 빛(light of intelligence)이라고 부릅니다.

 

이 상태의 또 다른 특징은 ‘기쁨이 매우 깊고 평화로운 성격을 가진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흔히 경험하는 기쁨은 종종 긴장이나 흥분과 함께 옵니다. 성공했을 때의 기쁨이나 경쟁에서 이겼을 때의 기쁨은 순간적으로 강하지만 오래 지속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묘사하는 천적 상태의 기쁨은 그런 종류가 아니라 ‘조용하고 깊은 기쁨’입니다. 마치 마음 깊은 곳에서 계속 흘러나오는 평안과 같은 느낌입니다. 그는 이것을 ‘천국의 기쁨’이라고 부르며, 그 기쁨은 ‘사랑을 행하는 것 자체에서 생긴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상상해 보면 이런 모습에 가깝습니다. 어떤 사람이 진심으로 이웃을 돕고 싶어 하고, 실제로 그것을 할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도움을 주고 나서 느끼는 따뜻한 만족감이 있습니다. 그 순간 그는 누가 보지 않아도 기쁘고, 보상이 없어도 만족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행동으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삶이 바로 이런 경험이 훨씬 더 깊고 지속적인 형태라고 설명합니다. 거기서는 사랑이 삶의 중심이기 때문에, 서로 돕고 기쁘게 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그 자체가 행복이 됩니다.

 

또 하나 중요한 특징은 ‘모든 것이 질서 속에 있다는 느낌’입니다. 인간이 불안하거나 혼란스러울 때는 세상이 무질서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사랑과 진리가 조화를 이루는 상태에서는 세상이 매우 질서 있게 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천사들이 모든 것을 ‘주님의 질서 속에서 이해하기 때문에 깊은 안정감을 느낀다’고 설명합니다. 마치 복잡한 음악이 완벽한 화음을 이루며 흐르는 것을 들을 때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AC.34에서 말하는 ‘생명과 지성의 빛 가운데 있는 상태’는 여러 요소가 결합된 상태입니다. 마음 안에 사랑이 중심이 되고, 그 사랑에서 진리가 자연스럽게 이해되며, 생각과 의지가 서로 충돌하지 않고 조화를 이루고, 그 결과 깊은 평안과 기쁨이 계속 흐르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고 말한 이유는 이런 경험이 단순한 감정이나 생각의 조합이 아니라 ‘사람 전체가 다른 질서 속에 들어가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풍경을 사진으로 볼 때와 실제로 그곳에 서서 보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사진으로는 윤곽만 알 수 있지만, 실제로 그곳에 가면 공기의 느낌, 빛의 색, 소리와 냄새까지 함께 경험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그 상태도 비슷합니다. 우리는 지금 언어로 그 윤곽만 설명할 수 있지만, 실제 경험은 훨씬 더 풍부하고 깊다는 뜻에서 그는 ‘거의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2.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AC.34 본문 중 인용 구절,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7:22) 말인데요, 이런 사람들, 곧 염소로 분류되는 사람들임에도 어떻게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는 것이 가능했을까요? 실제로 오늘날도 보면, 많은 이단, 사이비 현장에서도 그런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기는 합니다만...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마7:22의 말씀, 곧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는 사람들이 결국 주님에게서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는 말씀을 듣는 장면은 많은 신앙인들에게 당혹스러운 부분입니다. 특히 실제로도 종교 현장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현상들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더 그렇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와 영계 이해를 가지고 보면 이 문제는 비교적 분명한 구조로 설명됩니다.

 

먼저 가장 중요한 원리는 이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행하는 외적 행위나 능력이 반드시 그 사람의 내적 상태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러 곳에서 주님이 보시는 것은 외적 능력이나 기적이 아니라 ‘사람 안의 사랑’, 곧 그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예언을 하거나 기적 같은 일을 행했다 하더라도, 만약 그의 중심 사랑이 자기 영광이나 권력이나 이익이라면 그 사람의 내적 상태는 여전히 주님과 멀 수 있습니다.

 

이 문제를 이해하려면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영계의 영향(influx)이라는 개념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는 인간이 완전히 독립적으로 생각하거나 행동하는 존재가 아니라, 항상 영계와 연결되어 있다고 설명합니다. 사람에게는 항상 어떤 영들이 함께 있으며, 선한 영도 있고 악한 영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특정한 능력이나 현상을 보일 때, 그것이 반드시 그 사람 자신의 거룩함에서 나오는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영계의 다른 존재들이 그 사람을 통해 작용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복음서에서도 이런 일이 이미 나타납니다. 사도행전이나 복음서에는 귀신들이 예수님이 누구인지 정확히 말하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옵니다. 귀신들이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귀신들이 주님을 사랑하거나 주님께 순종하는 존재였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진리를 알고 말할 수 있었을 뿐입니다. 이것은 ‘진리를 말하거나 어떤 능력을 나타내는 것과, 실제로 그 진리를 사랑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주의 이름으로라는 표현의 의미’입니다. 성경에서 ‘이름’은 단순히 발음되는 이름이 아니라 그 사람의 ‘성품과 권위’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실제로 주님의 성품과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서도 그 이름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권위로 말한다’고 주장하며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어떤 영적 현상이나 강한 감정적 경험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주님에게서 온 것이라는 증거는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경우를 ‘외적 종교 활동이 내적 사랑과 분리된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현대 종교 현장에서 나타나는 여러 현상도 이 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강한 기대나 두려움, 열광적인 분위기 속에 있을 때 심리적, 정서적 현상이 강하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실제로 영계의 영향이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반드시 천국에서 오는 영향이라는 보장은 없다고 말합니다. 영계에는 선한 영들뿐 아니라 다양한 상태의 영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현상이 ‘초자연적’이라고 해서 곧 ‘신적인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마태복음에서 강조하신 기준은 능력이나 기적이 아니라 ‘삶의 열매’입니다. 바로 이어지는 말씀에서 주님은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열매는 단순한 능력이 아니라 ‘사람의 삶 속에 나타나는 사랑과 선’입니다. 즉 그 사람이 실제로 이웃을 사랑하며 정직하게 살고 있는가, 겸손하게 주님을 따르고 있는가 하는 것이 진짜 기준이라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도 같은 원리를 반복해서 말합니다. 그는 기적이나 특별한 현상이 신앙의 본질이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오히려 그런 것들이 신앙의 중심이 되면 사람은 쉽게 ‘외적 능력에 매료되어 내적 삶을 잊어버릴 위험’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일부러 기적을 신앙의 중심으로 두지 않으셨고, 오히려 사랑과 삶을 강조하셨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놀라운 일을 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반드시 주님과 가까운 것은 아닙니다. 진짜 기준은 그 사람이 어떤 능력을 보였는가가 아니라 ‘어떤 사랑으로 살고 있는가’입니다. 주님이 보시는 것은 외적 능력이 아니라 마음의 방향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7장의 말씀은 우리에게 ‘능력보다 사랑을 보라’는 매우 중요한 경고가 됩니다.

 

결국 AC.34에서 이 구절이 인용되는 이유도 같은 맥락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생명과 지성의 빛이 ‘사랑에서 나온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사랑이 없는 상태에서 나타나는 신앙 활동이나 능력은 참된 생명이 아니라 외적 현상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바로 그 차이를 말씀하시기 위해 ‘많은 권능을 행했다’는 사람들에게도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3. (flight)

 

AC.34 본문 중 인용 구절,이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막13:18)에 나오는 (flight)을 기독교, 개신교에서는 휴거라 하여 매우 특별하게 생각하는데, 이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13:18의 ‘이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라는 구절은 많은 개신교 전통에서 ‘휴거’나 어떤 물리적 종말 사건과 연결되어 해석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해합니다. 그는 복음서의 종말 담화를 기본적으로 ‘세계의 물리적 종말이 아니라 교회의 영적 종말과 새 교회의 시작을 예언하는 말씀’으로 봅니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flight’, 곧 ‘도피’ 또는 ‘피함’도 어떤 공중으로 들려 올라가는 사건이 아니라 ‘영적으로 타락한 교회 상태로부터 진리를 보존하기 위해 벗어나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먼저 ‘flight’라는 표현부터 보겠습니다. 문자 그대로는 ‘도망’이나 ‘도피’를 의미합니다. 복음서 문맥에서도 예수님은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하라’ 같은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런 표현을 문자 그대로 어떤 지리적 이동으로 보지 않습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 ‘도망’은 ‘악과 거짓이 지배하는 상태에서 벗어나 진리를 보존하려는 영적 행동’을 의미합니다. 즉 교회가 타락하고 진리가 왜곡될 때,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타락한 상태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내적으로 그 영향에서 벗어나는 것’을 뜻합니다.

 

이제 ‘겨울’이라는 표현을 보면 의미가 더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에서 ‘계절’이 영적 상태를 상징한다고 설명합니다. ‘’은 사랑이 시작되는 상태, ‘여름’은 사랑이 충만한 상태, ‘가을’은 신앙이 성숙한 상태를 의미하고, ‘겨울’은 ‘사랑이 식고 신앙이 거의 남지 않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겨울에 도망하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영적 의미에서는 매우 깊은 뜻을 갖습니다. 그것은 ‘사랑이 완전히 식어 버린 상태에서 진리를 지키려 하면 매우 어렵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교회의 종말을 항상 같은 패턴으로 설명합니다. 처음에는 사랑과 진리가 함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사랑이 점점 약해지고, 결국에는 교리나 형식만 남게 됩니다. 이 상태가 바로 ‘겨울’입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사람들이 진리를 이해하거나 받아들이는 능력이 매우 약해집니다. 그래서 주님은 ‘겨울에 그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설명됩니다. 즉 ‘사랑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진리를 붙잡으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가 복음서의 종말 담화를 ‘개인의 거듭남과 교회의 역사 두 가지 차원에서 동시에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로 보면, 이것은 교회가 타락할 때,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 타락에서 벗어나 새로운 교회를 형성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개인의 거듭남으로 보면, 이것은 사람이 영적으로 시험과 혼란 속에 있을 때, ‘거짓과 악에서 물러나 진리를 지키려는 노력’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이 구절이 ‘휴거’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습니다. 그는 신자들이 어느 날 갑자기 공중으로 들려 올라가 세상을 떠난다는 식의 해석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종말과 심판이 ‘주로 영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라고 설명합니다. 실제로 그의 저서 ‘Last Judgment’에서는 최후의 심판이 이미 영계에서 이루어졌다고 말합니다. 그 결과가 지상 교회에 점차 나타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막13:18의 말씀을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설명하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도피’는 물리적 이동이 아니라 영적으로 악과 거짓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겨울’은 사랑이 식어 버린 교회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사랑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진리를 붙잡고, 타락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기도하라’는 영적 권면입니다. 이것은 미래의 한순간에 일어나는 극적인 사건을 예언하기보다, 교회와 인간의 영적 역사 속에서 반복되는 중요한 원리를 말하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 구절을 단순한 종말 공포나 특별한 사건으로 보기보다, ‘지금 자신의 신앙 상태를 돌아보게 하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강조하신 것은 언제 어디로 들려 올라갈 것인가가 아니라, 사랑이 식어 가는 시대 속에서도 ‘진리를 붙잡고 살아가려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AC.35, 창1:14-17, ‘의지'(will)와 '이해’(understanding)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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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 창1:14-17, 생명과 기쁨, 행복의 근원은 ‘사랑’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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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1:14-17)

 

AC.33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떤 사랑도 없이는 생명이라는 게 있을 수도, 그리고 사랑에서 흘러나오지 않는 기쁨이라는 것도 있을 수 없음을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사랑이 어떠한가에 따라 생명이 그러하고, 기쁨도 그러합니다. 만일 사랑(loves), 같은 말이지만 욕망(desires)을 제거한다면, 욕망은 사랑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생각은 즉시 멈추고, 사람은 마치 죽은 사람과 같이 될 것입니다. 실제로 저는 이것을 생생히 본 적이 있습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The loves of self and of the world)에도 어떤 생명과 기쁨의 모습 같은 것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들은 참된 사랑과는 전적으로 반대됩니다. 참된 사랑이란 사람이 무엇보다도 주님을 사랑하고, 자기 자신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 자신과 세상을 사랑하는 만큼, 그만큼 이웃을 미워하게 되고, 그 결과 주님을 미워하게 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따라서 그것들은 사랑이 아니라 미움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사랑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참된 생명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생명이며, 참된 기쁨은 그 생명에서 나오는 기쁨입니다. 참된 사랑은 하나뿐이므로, 참된 생명도 하나뿐입니다. 그 하나의 생명에서 참된 기쁨과 참된 행복이 흘러나오는데, 이것이 바로 천국(heavens)의 천사들이 누리는 기쁨과 행복입니다. It is in everyone’s power very well to know that no life is possible without some love, and that no joy is possible except that which flows from love. Such however as is the love, such is the life, and such the joy: if you were to remove loves, or what is the same thing, desires—for these are of love—thought would instantly cease, and you would become like a dead person, as has been shown me to the life. The loves of self and of the world have in them some resemblance to life and to joy, but as they are altogether contrary to true love, which consists in a man’s loving the Lord above all things, and his neighbor as himself, it must be evident that they are not loves, but hatreds, for in proportion as anyone loves himself and the world, in the same proportion he hates his neighbor, and thereby the Lord. Wherefore true love is love to the Lord, and true life is the life of love from him, and true joy is the joy of that life. There can be but one true love, and therefore but one true life, whence flow true joys and true felicities, such as are those of the angels in the heavens.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생명과 사랑의 관계를 가장 단순하면서도 단호하게 정리합니다. 생명은 사랑 없이 존재할 수 없고, 기쁨은 사랑에서 흘러나오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신앙적 선언이기 이전에, 인간 존재에 대한 보편적 관찰입니다. 누구나 자신의 경험을 돌아보면, 삶이 살아 있다고 느껴지는 순간에는 언제나 어떤 사랑, 어떤 욕망이 작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점을 단순한 논증이 아니라, 영적 체험에 근거해 말합니다. 사랑과 욕망이 제거되면 생각이 즉시 멈추고, 사람은 죽은 사람과 같은 상태가 된다는 것을 실제로 봤다고 말합니다. 이는 생각이 이성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시작된다는 그의 일관된 인간 이해를 드러냅니다. 사랑이 멈추면 생각도 멈춥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전환이 나옵니다. 모든 사랑이 참된 사랑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도 겉으로는 생명과 기쁨을 닮은 것처럼 보입니다. 사람은 거기서 열정과 만족을 느끼고,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그냥 닮은 것’이라고 부르며, 본질적으로는 참된 사랑과 반대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참된 사랑의 정의에 있습니다. 참된 사랑은 주님을 무엇보다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정의 앞에 서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은 즉시 그 정체가 드러납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과 세상을 사랑하는 만큼, 그는 필연적으로 이웃을 수단화하거나 배제하게 되고, 결국 주님이 질서로 세워 놓으신 사랑의 방향에 거슬러 서게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것들을 사랑이 아니라 미움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이 말은 감정의 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방향의 문제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바깥을 향해 흐르는데, 자기 사랑은 모든 것을 자기에게로 끌어당깁니다. 이 방향성의 전도(顚倒)가 곧 미움입니다. 그래서 자기 사랑이 강해질수록,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이웃을 미워하게 되고, 그 근원에서 주님을 거부하게 됩니다.

 

이러한 구분 위에서 스베덴보리는 다시 한번 핵심을 정리합니다. 참된 사랑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참된 생명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생명이며, 참된 기쁨은 그 생명에서 흘러나오는 기쁨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중간 단계나 타협이 없습니다. 사랑이 둘일 수 없듯이, 참된 생명도 둘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참된 기쁨과 참된 행복 역시 하나의 근원에서만 나옵니다. 그것이 바로 하늘의 천사들이 누리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외적 조건이나 성취에서 오지 않으며, 비교나 경쟁에서도 오지 않습니다. 사랑의 방향이 주님을 향해 바로 서 있을 때, 그 자체로 흘러나오는 생명의 상태입니다.

 

AC.33은 넷째 날의 ‘광명체’ 논의를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차원으로 끌어내립니다. 빛과 열, 사랑과 신앙의 문제는 결국 삶이 어디에서 생명을 얻고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이 글은 독자에게 단순하지만, 피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집니다. 지금 나를 살아 있게 만드는 사랑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 사랑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심화

 

1.생각이 즉시 멈춘다

 

AC.33 본문, 만일 사랑, 같은 말이지만 욕망을 제거한다면, 욕망은 사랑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생각은 즉시 멈추고, 사람은 마치 죽은 사람과 같이 될 것입니다. 실제로 저는 이것을 생생히 본 적이 있습니다.’(if you were to remove loves, or what is the same thing, desires—for these are of love—thought would instantly cease, and you would become like a dead person, as has been shown me to the life.) 말인데요,이 사례에 대한 좀 더 생생한 얘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생각이 즉시 멈춘다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AC.33의 이 문장은 스베덴보리 인간 이해의 아주 중요한 원리를 말합니다. 그는 인간의 ‘생각(thought)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love) 또는 욕망(desire)’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사랑을 제거하면 생각이 즉시 멈춘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실제 영계에서 관찰된 현상이라고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먼저 일상적인 경험에서 비슷한 현상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어떤 일에 매우 관심이 있을 때는 생각이 끊임없이 돌아갑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려고 한다면, 그는 아침에 일어나서도 그 생각을 하고, 운전하면서도 생각하고, 잠들기 전에도 그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 안에 ‘그 일을 향한 강한 사랑 혹은 욕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전혀 관심이 없는 주제에 대해서는 생각이 오래 지속되지 않습니다. 누가 어려운 수학 이론을 설명해도 그 분야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몇 분 지나지 않아 생각이 멈추고 다른 생각으로 넘어갑니다. 여기서 이미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원리입니다. ‘생각은 사랑이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흐릅니다.’

 

좀 더 극단적인 예를 생각해 보면, 이해가 더 쉽습니다. 사람이 깊은 우울 상태에 들어가면 종종 ‘아무 생각도 하기 싫다’거나 ‘머리가 텅 빈 것 같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그런 상태에서는 생각이 거의 움직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뇌 기능이 완전히 멈춘 것이 아니라, ‘사람을 움직이던 욕망이나 관심이 약해졌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에게 매우 중요한 사건이 생기면 생각이 폭발적으로 많아집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나 큰 기회를 잡았을 때, 사람의 생각이 매우 빠르게 돌아가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원리를 영계에서 더 분명하게 보았다고 설명합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영계에서는 각 영이 ‘자기가 사랑하는 것에 의해 완전히 움직입니다.’ 그래서 어떤 영에게서 특정한 사랑이나 욕망을 잠시 제거하면, 그 영의 생각이 실제로 멈추는 것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그 영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생각이 흐르지 않는 상태가 됩니다. 마치 기계에서 동력이 빠진 것처럼 움직임이 멈춘 상태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 상태를 ‘마치 죽은 사람과 같다’고 표현합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인간 구조를 떠올리면 좋습니다. 그는 인간을 단순히 생각하는 존재로 보지 않고 ‘사랑하는 존재’로 봅니다. 사랑이 중심이고, 생각은 그 사랑을 섬기는 기능입니다. 그는 이것을 여러 번 이렇게 설명합니다. 의지는 사랑의 자리이고, 이해는 생각의 자리입니다. 그리고 이해는 항상 의지를 섬깁니다. 그래서 어떤 사랑이 생기면, 이해가 그 사랑을 이루기 위한 생각을 만들어 냅니다. 예를 들어,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돈을 얻는 방법을 끊임없이 생각합니다. 명예를 사랑하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방법을 생각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은 사랑의 도구’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사랑을 제거하면 생각이 멈춘다’고 말합니다. 생각 자체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힘을 받기 때문입니다. 마치 불이 연료 없이 탈 수 없는 것과 비슷합니다. 연료가 사랑이라면 불꽃이 생각입니다. 연료가 없으면 불꽃이 사라지는 것처럼, 사랑이 없으면 생각도 흐르지 않습니다.

 

사람은 흔히 자신을 ‘생각하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사랑하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는지는 결국 우리가 무엇을 사랑하는가에 의해 결정됩니다. 그래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 생각도 그 방향으로 흐르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중심이 되면 생각도 그 방향으로 흐르게 됩니다. 그리고 만약 어떤 사랑이나 욕망이 완전히 제거된다면, 그것을 따라 움직이던 생각도 함께 멈추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영계에서 본 장면은 바로 이 원리를 극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였습니다. 어떤 영에게서 사랑이 잠시 제거되자 그 영의 생각이 흐르지 않았고, 마치 생명이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생각이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생명을 받는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결국 이 구절이 말하는 핵심은 이것입니다. 인간의 진짜 생명은 생각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생각은 사랑이 움직이는 길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바뀌면 생각도 바뀌고, 사랑이 사라지면 생각도 멈춥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점을 보여 주기 위해 ‘사랑을 제거하면 생각이 즉시 멈춘다’는 강한 표현을 사용한 것입니다.

 

 

2.광명체 본문과 참된 사랑, 생명, 기쁨과 행복

 

지금 광명체 본문인데, AC.33은 조금은 뜬금없이 참된 사랑, 참된 생명, 참된 기쁨과 행복 얘기를 하네요. 짐작은 되지만... 좀 풀어 설명해 주세요.

 

AC.33에서 갑자기 ‘참된 사랑, 참된 생명, 참된 기쁨과 행복’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처음 읽으면 다소 뜬금없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 문장은 앞에서 말한 ‘광명체’, 곧 ‘큰 광명체와 작은 광명체’에 대한 설명을 마무리하면서 ‘그 빛이 결국 무엇을 위한 것인가’를 보여 주는 부분입니다. 다시 말해, 빛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 빛이 사람 안에서 이루어 내는 생명의 상태’를 말하기 위해 이 이야기가 이어지는 것입니다.

 

먼저 앞의 문맥을 잠깐 정리해 보면 이해가 쉬워집니다. 창세기 1장에서 넷째 날에 나타나는 ‘광명체들’은, 문자적으로는 해와 달과 별이지만,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인간의 거듭남 과정에서 나타나는 ‘사랑과 신앙의 빛’으로 설명합니다. 큰 광명체는 사랑, 작은 광명체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인간 안에서 진리가 빛처럼 드러나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문제가 생깁니다. 그 빛이 단순히 지식의 빛인가, 아니면 생명의 빛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지점에서 분명히 말합니다. ‘참된 빛은 사랑에서 나오는 빛’이며, 그 사랑이 바로 참된 생명과 기쁨의 근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AC.33에서는 ‘사랑이 생명이다’라는 원리를 강조합니다. 사람은 흔히 생각을 자신의 생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생각은 생명의 중심이 아니라 ‘사랑을 표현하는 도구’입니다. 인간의 진짜 생명은 사랑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느냐가 그 사람의 삶 전체를 결정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돈을 사랑하면 그의 생각과 계획과 행동은 모두 돈을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어떤 사람이 명예를 사랑하면 그의 생각과 삶도 그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이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면 그의 생각과 삶도 자연스럽게 그 사랑을 이루는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사랑이 곧 기쁨의 근원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을 할 때 가장 큰 기쁨을 느낍니다. 예를 들어, 어떤 어머니가 아이를 돌보는 일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외적으로 보면 밤잠을 못 자고 힘든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는 그것을 단순한 고통으로 느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자연스럽게 기쁨이 따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기쁨과 행복을 사랑에서 분리하여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기쁨은 사랑의 감각이고, 행복은 사랑의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이제 AC.33의 흐름을 다시 보면 왜 이 이야기가 여기서 나오는지 이해됩니다. 넷째 날의 ‘광명체’는 인간 안에 진리의 빛이 나타나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나 그 빛이 진짜 의미를 가지려면 그것이 사랑과 결합되어야 합니다. 만약 진리의 빛이 사랑과 결합되지 않으면 그것은 단지 ‘차가운 지식의 빛’이 될 뿐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대목에서 강조합니다. 진리의 빛이 참된 빛이 되려면 그것이 사랑에서 나와야 하고, 그 사랑이 바로 인간의 생명이며 기쁨의 근원이라고 말입니다.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앞 문장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랑을 제거하면 생각이 멈춘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으면 사람은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이 그렇게 중요한 이유가 무엇인가? 단순히 생각의 원동력이기 때문인가? 그래서 그는 바로 이어서 설명합니다. 사랑은 단순히 생각을 움직이는 힘일 뿐 아니라 ‘인간의 생명 자체이며, 기쁨과 행복의 근원’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살아 있다는 느낌, 기쁨을 느끼는 경험, 행복을 맛보는 상태는 모두 사랑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찾습니다. 그런데 그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가를 보면 결국 ‘사랑하는 대상과의 관계’에서 옵니다. 가족을 사랑하면 가족과 함께 있을 때 행복을 느끼고, 일을 사랑하면 그 일을 할 때 기쁨을 느끼고,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을 따르는 삶에서 깊은 평안을 느낍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행복도 결국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의 상태’에서 나온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AC.33에서 갑자기 참된 사랑과 참된 행복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사실 문맥에서 매우 자연스러운 결론입니다. 넷째 날의 빛, 곧 사랑과 신앙의 빛이 인간 안에 나타나면 그 결과로 ‘참된 생명이 시작되고, 그 생명 속에서 참된 기쁨과 행복이 나타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창세기의 광명체 이야기는 단순히 빛의 창조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 안에 사랑의 생명이 깨어나는 이야기’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이 설명이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AC.32, 창1:14-17, ‘큰 광명체’는 사랑, ‘작은 광명체’는 신앙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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