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And Cain talked to Abel his brother; and it came to pass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hat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r, and slew him. 9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And Jehovah said to Cain, Where is Abel thy brother? And he said, I know not, am I my brother’s keeper? (4:8-9)

 

AC.329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 신앙을 체어리티보다 앞세운 사람들한테서 체어리티가 소멸된 것을,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죽인 것(Cain slaying his brother Abel)이라고 합니다. (8-9) That charity was extinguished in those who separated faith, and set it before charity, is described by “Cain slaying his brother Abel.” (verses 8–9)

 

 

해설

 

AC.329는 지금까지 이어져 온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마침내 결정적인 지점에 도달했음을 보여 줍니다. AC.325에서는 사랑에서 신앙이 분리되어 ‘가인’이 되었고, 체어리티는 ‘아벨’이라 불렸습니다. AC.326에서는 이 분리가 예배에 나타나 ‘가인의 제물’과 ‘아벨의 제물’로 드러났으며, AC.327에서는 분리된 신앙에 속한 사람들의 상태가 악해져 가인의 ‘분함’과 ‘안색이 변함’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AC.328에서는 아직 마지막 가능성이 남아 있었습니다. 신앙이 자신을 주된 것으로 삼아 체어리티보다 높이지 않는다면, 체어리티는 여전히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AC.329에서는 그 질서가 끝내 회복되지 못하고, 신앙이 자신을 체어리티보다 앞세운 결과 체어리티 자체가 ‘소멸’되는 단계에 이릅니다. 이것이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죽였다’는 말씀의 속뜻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사용하는 ‘extinguished’라는 표현을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죽였다’는 창세기의 형제 살인 사건을 속뜻으로는 ‘체어리티가 소멸되었다’고 설명합니다. 불이 꺼지듯 체어리티의 생명이 꺼진 것입니다. 따라서 아벨의 죽음은 단순히 악한 신앙이 선한 체어리티를 공격했다는 정도가 아니라, 교회 안에서 체어리티가 더 이상 살아 있는 원리로 작용하지 못하게 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신앙에 관한 교리는 여전히 남아 있을 수 있고, 예배도 계속될 수 있으며, 하나님에 관한 말도 계속할 수 있지만, 그 안에서 이웃 사랑이라는 생명이 사라진 것입니다.

 

특히 AC.329는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것’과 ‘신앙을 체어리티보다 앞세운 것’을 구별하여 함께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첫 번째 단계는 ‘분리’입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본래 하나였는데 그것을 서로 떼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분리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일단 둘을 분리하면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하는 문제가 생기고, 마침내 신앙을 체어리티보다 ‘앞세우게’ 됩니다. 본래 사랑과 선을 섬겨야 할 신앙과 진리가 오히려 주된 자리를 차지하고, 체어리티는 부차적인 것으로 밀려납니다. 바로 이 질서의 전도가 결국 아벨의 죽음으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의 핵심은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앞섰다’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앞섰다’는 것은 단순히 순서를 먼저 두었다는 뜻이 아니라, 무엇이 교회의 본질이며, 무엇이 주된 것인가 하는 자리의 문제입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질서에서는 사랑이 생명이었고, 신앙은 그 사랑에서 나왔습니다. 선이 먼저이고, 진리는 그 선의 형체였습니다. 그런데 가인에게서는 이 질서가 뒤집혔습니다. 신앙이 스스로 주된 것이 되고, 체어리티는 그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체어리티는 처음에는 부차적인 것이 되고, 다음에는 불필요한 것이 되며, 마침내 완전히 사라집니다. 이것이 ‘아벨을 죽였다’는 말씀이 보여 주는 영적 과정입니다.

 

이 점에서 창4의 살인은 창4:8에서 갑자기 시작된 사건이 아닙니다. 이미 AC.325에서 사랑과 신앙이 분리되는 순간부터 아벨의 죽음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분리는 예배의 분리로 이어졌고, 예배의 분리는 사람의 내적 상태를 악하게 만들었으며, 그 악한 상태에서 신앙은 자신을 체어리티보다 높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창4의 몇 절 안에서 읽어 내는 것은 단순한 범죄의 진행이 아니라 교회가 영적으로 죽어 가는 과정입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다시 ‘신앙은 나쁘고, 체어리티만 중요하다’고 이해하면 AC.329의 핵심을 놓치게 됩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언제나 ‘separated faith’, 곧 ‘분리된 신앙’입니다. AC.328에서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고 한 것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아벨은 가인을 없애려 하지 않았습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을 배척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앙과 체어리티가 결합할 때, 교회의 생명이 이루어집니다. 문제는 가인이 아벨을 자신의 형제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을 그보다 앞세운 데 있습니다. 따라서 참된 회복은 가인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가인과 아벨의 본래 질서, 곧 신앙과 체어리티의 결합을 회복하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아우 아벨’이라는 표현도 의미심장합니다. 문자적으로 아벨은 가인의 동생이지만, 속뜻으로도 체어리티가 신앙보다 열등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AC.328-329의 설명에서는 체어리티가 주된 것이며, 신앙은 체어리티에 종속되어야 합니다. 말씀의 문자적 출생 순서와 영적 우선순위가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닙니다. 가인이 먼저 등장한다고 해서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본질적으로 앞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바로 그 신앙이 자신을 ‘앞세웠을’ 때 영적 질서가 뒤집히고, 체어리티가 소멸되었습니다.

 

4:9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는 주님의 질문도 이러한 맥락에서 매우 깊어집니다. 주님께서 아벨의 위치를 모르셔서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이 질문은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에게 ‘너희 안의 체어리티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시는 말씀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신앙도 있고, 교리도 있고, 예배도 있는데, 그 신앙이 낳아야 할 이웃 사랑은 어디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가인의 대답인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는 이후 AC에서 더 자세히 다루겠지만, 이미 체어리티에 대한 책임 자체를 부인하는 상태가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심화

 

1. ‘아벨의 죽음은 교회 안에서 어떻게 일어나는가?

 

 

AC.329, 심화 1, ‘아벨의 죽음’은 교회 안에서 어떻게 일어나는가?

AC.329.심화 1. ‘아벨의 죽음’은 교회 안에서 어떻게 일어나는가? AC.329를 오늘의 신앙생활에 비추어 보면, ‘아벨을 죽인다’는 것은 반드시 어떤 사람이 노골적으로 사랑과 선행을 반대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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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0, 창4:10-16, ‘창4:10-16 전체의 속뜻’

10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And he said, What hast thou done? The voice of thy brother’s bloods crieth to me from the ground. 11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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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8, 창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If thou doest well, art thou not exalted? And if thou doest not well,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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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원고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으면, 상당히 흥미로운 점이 하나 있습니다. 겉으로는 ‘이단 침투 사건’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더 깊이 들어가면 핵심은 단순히 ‘어느 교리가 옳고 어느 교리가 틀렸는가’만이 아닙니다. 사람의 외로움과 상처를 이용하여 관계를 만들고, 그 관계를 통해 신뢰를 장악한 다음, 기존의 영적 판단 기준을 서서히 무너뜨리고, 마침내 특정 집단과 특정 가르침에 사람을 종속시키는 과정이 이 원고 전체를 관통합니다. 스베덴보리라면 바로 이 지점을 매우 심각하게 보았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신학에서 인간의 영적 생명을 지탱하는 가장 근본적인 두 능력 가운데 하나가 ‘자유’이고 다른 하나가 rational, 곧 진리를 이해하고 분별하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원고 속 침투 방식은 사람을 노골적으로 강제하지 않으면서도, 정서적 의존과 ‘우리만 아는 특별한 진리’를 통해 그 두 능력을 점차 약화시키고 있습니다.

 

처음 등장하는 ‘더 깊은 말씀이 있다고 들었습니다’라는 표현부터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아주 흥미롭습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 자신이야말로 성경의 문자적 의미 안에 ‘속뜻’이 있으며, 그 안에 무수한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고 말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더 깊은 말씀이 있다’는 말 자체를 이단의 표지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목사 입장에서 그 말을 들었다면 ‘무슨 뜻으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어디에서 배우셨습니까?’, ‘그 깊다는 말씀의 내용은 무엇입니까?’라고 차분히 물어보는 것이 맞았을 것입니다. 원고의 목사도 나중에 바로 그 질문을 하지 않은 것을 첫 번째 실수라고 회고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속뜻’과 이 원고에서 말하는 ‘더 깊은 말씀’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의 속뜻은 사람을 어떤 인간 지도자나 비밀 조직으로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주님과 그분의 나라, 거듭남, 사랑과 체어리티의 질서로 데려갑니다. 반면 원고 속 가르침은 ‘기존 교회의 목사는 진리를 다 알지 못한다’, ‘더 깊은 말씀을 아는 특별한 사람을 통해야 한다’, ‘우리 모임에만 구원의 완전함이 있다’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바로 여기서 성격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진리의 깊이가 사람을 주님께 더 직접적으로 의지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특정 집단과 지도자에게 더 종속시킨다면,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이미 매우 중대한 경고 신호입니다.

 

특히 원고 속 ‘박순자 씨’가 하는 일은 처음에는 모두 체어리티처럼 보입니다. 비 오는 날 예배에 참석하고, 한 시간을 걸어 새벽기도에 나오고, 화장실을 청소하고, 식사를 대접하고, 혼자 사는 권사에게 음식을 가져다주고, 사람의 고민을 끝까지 들어줍니다. 겉으로만 보면 선행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행위의 영적 성질은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 행위를 낳는 사랑과 목적에서 결정됩니다. 똑같이 음식을 가져다주어도 상대의 행복을 위해서 할 수 있고, 상대의 마음을 확보하기 위해서 할 수도 있습니다. 똑같이 눈물을 닦아주어도 진정한 체어리티일 수 있고, 상대의 신뢰를 얻기 위한 수단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례는 스베덴보리가 왜 그렇게 끊임없이 ‘의도’, ‘목적’, ‘지배적 사랑’을 강조하는지를 아주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이 점에서 원고의 ‘가장 따뜻한 얼굴로, 가장 부지런한 손으로, 가장 낮은 자세로 온다’는 표현은 다소 극적으로 쓰였지만 중요한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영적 악은 항상 노골적인 악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악한 영들도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진리를 말할 수 있고, 선한 것처럼 행동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모든 것이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입니다.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가, 아니면 지배하는가. 주님께 가까이 가게 하는가, 아니면 인간에게 종속시키는가. 선과 진리를 사랑하게 하는가, 아니면 자기 집단만 옳다고 믿게 하는가. 이 기준을 적용하면 원고 속 행동들의 성격이 점차 달리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저는 ‘스베덴보리라면 처음부터 저 사람을 알아봤을까?’라는 식으로 생각하기보다는, ‘스베덴보리의 원리를 따르는 목회라면 어느 지점에서 무엇을 확인했을까?’라고 묻는 편이 좋다고 봅니다. 첫 번째 확인점은 바로 ‘더 깊은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두 번째는 성도들과 목회자에게 알리지 않은 별도의 성경공부입니다. 세 번째는 교재를 공개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네 번째는 ‘목사도 모르는 진리가 있다’는 우월의식이 성도들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는 공동체 안의 인간관계가 공개적이고 자유로운 교제에서 비밀스럽고 폐쇄적인 관계로 변하는 것입니다. 원고에는 이 신호들이 상당히 일찍부터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비밀성’입니다. 천국의 질서는 빛의 질서입니다. 진리는 빛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누군가 ‘이것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다’, ‘목사에게는 말하지 말라’, ‘아직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는 알려 주면 안 된다’는 식으로 점점 폐쇄적인 구조를 만든다면 그 자체가 이미 의심해 볼 이유가 됩니다. 물론 모든 개인적 성경공부가 공개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한 공동체 안에서 사람을 은밀하게 선별하고, 지도자에게는 내용을 감추고, 구성원들에게 ‘너희는 이제 남들이 모르는 것을 안다’는 특별의식을 심는다면 그것은 자유로운 진리 탐구와는 완전히 다른 구조입니다.

 

원고에서 목사가 교육관의 비밀 모임을 보고도 바로 들어가지 않고 돌아서는 장면은 생각해 볼 부분이 있습니다. 그는 ‘들어가면 감시하는 목사가 될 것 같다’, ‘더 큰 갈등을 만들 것 같다’고 염려합니다. 인간적으로 이해되는 반응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사랑은 반드시 지혜와 결합되어야 합니다. 이미 교회 시설에서, 목회자에게 알리지 않은 채, 정체를 감춘 교재로 조직적인 교육이 진행되고 있다는 상당한 근거가 확보되었다면 그 시점에는 단순한 관망보다 질서 있는 개입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자유를 존중한다는 것은 거짓된 방법으로 다른 사람의 자유를 빼앗도록 방치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도들이 충분한 정보를 가지고 자유롭게 판단하도록 사실을 제공하는 것이 자유를 보호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라면 어떻게 했을까?’라는 목사님의 질문에 제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답은 이렇습니다. 아마도 ‘사람을 몰아붙이지는 않았겠지만, 거짓은 아주 명확하게 밝혔을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저작에서 기존 교회의 잘못이라고 판단한 교리들을 상당히 직설적으로 비판합니다. 삼위일체 이해, 오직 신앙, 대속 개념, 인간의 자유와 행위 등에 대해서 그는 결코 ‘다 좋게 생각합시다’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체어리티를 ‘교리적 차이는 따지지 않고 사람을 품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사람에 대해서는 체어리티를 강조하지만, 거짓된 교리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합니다.

 

다만 ‘사람’과 ‘그 사람이 받아들인 거짓’을 구별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원고에서는 처음 돌아온 성도에게 목사가 ‘어리석은 것이 아닙니다. 속은 것입니다. 그 둘은 다릅니다’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 대목이 이번 원고에서 가장 좋은 부분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사람이 거짓을 받아들였다고 해서 그 사람 자체를 곧바로 악한 사람으로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거짓은 무지 때문에 받아들이고, 어떤 것은 신뢰하던 사람에게 속아서 받아들이며, 어떤 것은 상처와 외로움 때문에 붙잡습니다. 특히 사람이 진심으로 선을 원하면서도 거짓을 진리라고 믿은 경우에는 주님께서 그 거짓을 바로잡아 주실 여지가 충분합니다.

 

그러므로 이미 마음이 기운 성도들을 공개석상에서 논리로 꺾으려 하지 않은 것도 일면 지혜로운 선택이었습니다. 원고의 목사는 ‘마음이 이미 기울어진 사람에게 논리는 닿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을 절대적인 명제로 만들 필요는 없지만, 심리적 현실은 상당히 정확합니다. 사람의 이해성, 그러니까 이해하는 능력은 의지와 애정의 영향을 받습니다. 스베덴보리식으로 말하면 사람이 어떤 것을 사랑하기 시작하면 그 이해성은 그 사랑을 지지하는 이유들을 찾기 쉽습니다. 그래서 그 순간에는 열 가지 논박보다 관계를 끊지 않고, 돌아올 문을 열어두며, 시간이 지나 실제 열매를 경험하도록 기다리는 것이 더 지혜로울 수도 있습니다.

 

김복순 권사에게 ‘언제든 돌아오고 싶으실 때 문은 열려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억지로 붙잡지 않은 장면도 이 점에서 좋습니다. 스베덴보리라면 사람의 자유를 억압하여 진리를 받아들이게 할 수 없다고 했을 것입니다. 아무리 옳은 진리라도 강제로 받아들인 것은 사람의 것이 되지 못합니다. 목회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사실을 보여 주고, 거짓의 구조를 설명하고, 선택의 결과를 알려 주고,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는 그 사람이 자유 안에서 선택하도록 두어야 합니다. 이것이 냉정한 방임과 다른 것은, 떠난 뒤에도 사랑의 문이 닫히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고 원고처럼 성도들이 떠난 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만 할 필요는 없었을 것 같습니다. 스베덴보리식으로 본다면 ‘논쟁’보다 ‘교육’이 중요합니다. 특정 집단의 교리를 항목별로 공격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왜 사람은 ‘우리만 아는 진리’에 매혹되는지, 왜 비밀지식이 영적 우월감을 주는지, 왜 외로운 사람에게 친절이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는지, 말씀의 속뜻과 인간이 만들어 낸 비밀 교리를 어떻게 구별하는지, 참된 자유와 종교적 지배는 어떻게 다른지를 평소에 가르쳐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이단 예방 교육 자체가 단순한 ‘이단 목록 암기’가 아니라 영적 분별 훈련이 됩니다.

 

그리고 이 원고에는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았을 때 반드시 한 번 걸러야 할 대목도 있습니다. 발견된 자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신 다른 무언가가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는 것을 이단 판별의 결정적 기준처럼 묘사합니다. 일반 복음주의적 관점에서는 이해되는 표현이지만,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는 이것을 그대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하나님 아버지가 인간의 죄값을 대신 갚기 위해 아들을 형벌하셨다’는 식의 대속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라면 ‘십자가를 중심에 두느냐’ 하나로 참과 거짓을 판정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더 근본적으로 물었을 것은 ‘주님을 누구라고 하는가’, ‘그분의 신성과 인성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말씀을 어떻게 대하는가’, ‘회개와 거듭남을 어떻게 말하는가’,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하는가’, ‘선한 삶이 실제로 요구되는가’, ‘사람의 자유를 보존하는가’, ‘한 인간이나 조직을 구원의 필수 중개자로 세우는가’ 같은 질문들이었을 것입니다. 바로 이 기준으로 보면 원고 속 집단의 문제는 훨씬 더 분명해집니다. 문제는 단순히 기존 교회와 해석이 다르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자유로운 양심과 분별을 약화시키고 특정 집단에 구원을 독점시키며, 인간관계를 도구로 사용한다는 데 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이단에 빠진 사람을 어떻게 회복시킬 것인가’입니다. 원고의 후반에서 떠났던 성도가 2년 뒤 돌아와 삶이 무너졌다고 고백할 때 목사가 따지지 않고 기다려 주고, ‘왜 내 말을 안 들었습니까?’라고 하지 않고, 다시 올 수 있다고 말하는 장면은 상당히 좋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체어리티는 바로 이런 데서 빛을 발합니다. 진리를 지킬 때에는 단호하지만, 사람이 돌아올 때에는 그 사람의 과거 오류를 자신의 우월성을 확인하는 재료로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옳았고 당신이 틀렸다’가 아니라 ‘이제 다시 일어서면 됩니다’가 되어야 합니다.

 

다만 회복도 단순히 ‘다시 우리 교회로 돌아왔다’는 것으로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이라면 더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게 되었느냐입니다. 이전 집단을 미워하고 원래 교회를 다시 좋아하게 되었다고 해서 자동으로 거듭난 것은 아닙니다. 그 경험을 통해 거짓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거짓됨 자체를 미워하고, 사람을 지배하려는 욕망을 경계하며, 말씀의 진리를 자유롭게 배우고,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돌아오는 것이 진정한 회복입니다. ‘이단 탈퇴’는 출발점이지 거듭남의 완성은 아닙니다.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스베덴보리라면 저런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에 대해 한 문장으로 압축한다면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거짓을 사랑의 이름으로 방치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진리의 이름으로 사람의 자유를 짓밟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거짓은 밝히고, 침투 행위는 중단시키고, 교회의 질서는 보호하되, 이미 넘어간 사람에게는 돌아올 자유를 남겨두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도들이 목사를 맹목적으로 믿도록 하는 대신, 왜 그것이 거짓인지 말씀과 이성으로 스스로 볼 수 있도록 가르쳤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원고에서 가장 중요한 교훈을 ‘이단을 경계하자’에서 한 걸음 더 깊이 가져가고 싶습니다. 교회가 가장 안전한 때는 성도들이 목사를 무조건 믿을 때가 아닙니다. 성도 각자가 진리를 사랑하고, 말씀 앞에서 생각하며, 선과 악을 분별하고, 사람의 친절과 영적 진리를 혼동하지 않을 때입니다. 목회자의 임무도 성도들을 자기 울타리 안에 단단히 붙잡아 두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와서 아무리 따뜻하게 손을 잡고 ‘더 깊은 진리’를 말하더라도 스스로 그 열매와 방향을 살펴볼 수 있는 사람으로 세우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이 이야기는 앞서 우리가 이야기했던 rational과도 연결됩니다. 정상적인 능력을 가진 성도에게 목회자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보호는 모든 답을 대신 주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분별할 수 있는 내적 기반’을 길러 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자유와 이해성을 보호하면서, 그것이 거짓에 이용되지 않도록 진리로 형성하는 것, 저는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본 이 사건의 가장 깊은 목회적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SY.63, 심령부흥대사경회(79차) 10강 (7/31), 시흥영성수련원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여기 1강, 2강...은 실제 사경회 일정표가 아닌,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 순서를 말합니다. 10강 1부‘좁은 길’에서 계시록 13, 14장까지 : 종말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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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8.심화

 

1. ‘신앙의 질은 체어리티로부터 알 수 있다

 

이 한 문장은 오늘날 신앙을 돌아보는 데에도 매우 중요한 기준을 제공합니다. 우리는 흔히 어떤 사람의 신앙을 그의 신앙 고백이나 성경 지식, 교리적 입장, 기도와 예배의 열심으로 판단합니다. 물론 이러한 것들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AC.328은 그보다 더 깊은 곳을 보라고 합니다. 그 신앙이 그 사람을 어떤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가를 보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신앙이 실제로 사람을 겸손하게 하고, 악을 멀리하게 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용서하고 섬기게 한다면 그 신앙 안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반대로 신앙을 강하게 주장할수록 더 교만해지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며, 자기의 옳음을 세우고, 체어리티를 부차적인 것으로 여긴다면 바로 그 열매가 그 신앙의 질을 드러냅니다.

 

이것은 ‘행위를 보고 구원 여부를 판단하자’는 단순한 도덕주의와도 다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체어리티는 겉으로 착한 일을 많이 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체어리티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사랑하고, 그 선에 따라 이웃에게 유익을 행하려는 내적 애정입니다. 따라서 겉으로 많은 선행을 하면서도 속으로 자기 명예와 공로를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참된 체어리티가 아닐 수 있습니다. 반대로 눈에 띄는 큰일을 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자리에서 정직하게 의무를 행하고, 악을 죄로 여겨 피하며, 이웃의 유익을 진실하게 바란다면 그 안에 체어리티가 있을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체어리티가 신앙의 내적 질을 보여 줍니다.

 

특히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는 말은 기억해 둘 만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을 처음 접하면 자칫 ‘신앙보다 체어리티가 중요하니 결국 신앙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아닌가?’라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328은 정반대를 말합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을 없애려 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오직 신앙이 ‘주된 것’이 되어 자신을 체어리티 위에 세우는 데 있습니다. 참된 질서는 신앙 없는 체어리티도, 체어리티 없는 신앙도 아니라 둘의 결합입니다. 다만 그 결합에는 질서가 있습니다. 선이 주된 것이고, 진리는 그 선을 섬기며, 사랑이 생명이고, 신앙은 그 사랑에 형체와 방향을 줍니다.

 

따라서 AC.325에서 시작된 흐름을 여기까지 이어 보면 매우 선명합니다. 처음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고, 그 사랑과 신앙은 하나였습니다. 그 후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가인’이 되었고, 체어리티는 ‘아벨’이라 불렸습니다. 분리는 예배에까지 이어졌고, 가인의 상태는 점차 악해졌습니다. 그러나 AC.328에 이르러 주님께서는 아직 한 번 더 길을 열어 놓으십니다. ‘아벨’은 아직 ‘가인’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신앙이 자기 자리를 낮추고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한다면 아직 회복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신앙이 끝내 자신을 주된 것으로 높이고 체어리티 위에 서려 한다면, 다음에 일어날 일은 이미 예고되어 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4의 비극은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해서 일어난 비극이 아니라, 본래 하나여야 할 둘 사이의 질서가 뒤집힘으로써 일어난 비극입니다.

 

 

 

AC.328, 창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If thou doest well, art thou not exalted? And if thou doest not well,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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