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4:25)

 

AC.435

여기서 ‘사람’(man)과 그의 ‘아내’(wife)가 앞에서 아다와 씰라로 나타낸 새 교회를 뜻한다는 것은 누구도 문자적 의미만으로는 알 수도, 추론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과 그의 아내’(man and his wife)는 앞에서는 태고교회와 그 후손을 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속뜻으로는 매우 분명하며, 또한 바로 다음 장인 창5:1-4에서 사람과 그의 아내, 그리고 그들이 셋을 낳는 일이 다시 언급되면서도 전혀 다른 말로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에서도 분명합니다. 그 경우에는 태고교회의 첫 후손이 뜻해집니다. 만일 지금 다루는 이 구절이 그와 다른 것을 뜻하지 않는다면, 같은 일을 여기서 다시 말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창세기 1장에서는 사람의 창조와 땅의 열매들과 짐승들의 창조가 다루어지고, 이어 2장에서 그것들이 다시 다루어집니다. 그 이유는 앞에서 말했듯이 1장에서는 영적 인간의 창조를 다루는 반면, 2장에서는 천적 인간의 창조를 다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동일한 사람이나 동일한 것이 반복하여 언급될 때에는 언제나 의미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뜻해지는지는 속뜻을 통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알 수 없습니다. 여기서는 문맥의 연결 자체가 앞에서 제시한 의미를 확증합니다. 여기에 더하여 ‘사람’[homo]과 ‘아내’(wife)는 지금 다루고 있는 모교회(parent church)를 뜻하는 일반적인 용어라는 점도 고려해야 합니다. That the “man” and his “wife” here mean the new church signified above by Adah and Zillah no one could know or infer from the literal sense, because the “man and his wife” had previously signified the most ancient church and its posterity; but it is very evident from the internal sense, as well as from the fact that immediately afterwards, in the following chapter (verses 1–4), the man and his wife, and their begetting Seth, are again mentioned, but in entirely different words, and in this case there is signified the first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If nothing else were signified in the passage before us, there would be no need to say the same thing here: in like manner as in the first chapter the creation of man, and of the fruits of the earth, and of the beasts, is treated of, and then in the second chapter they are treated of again, for the reason, as has been said, that in the first chapter it is the creation of the spiritual man that is treated of, whereas in the second chapter the subject is the creation of the celestial man. Whenever there is such a repetition in the mention of one and the same person or thing, it is always with a difference of signification, but what it is that is signified cannot possibly be known except from the internal sense. Here, the connection itself confirms the signification that has been given, and there is the additional consideration that man [homo] and wife are general terms which signify the parent church that is in question.

 

1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2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3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4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1-4)

 

해설

AC.435는 창4:25의 ‘사람과 그의 아내’를 왜 앞의 아다와 씰라로 나타낸 ‘새 교회’로 해석해야 하는지를 설명합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이들은 당연히 아담과 하와입니다. 더구나 바로 다음 장인 창5:1-4에서도 다시 아담과 그의 아내, 그리고 셋의 출생이 나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창4:25과 창5:1-4의 기록이 속뜻으로는 서로 다른 교회를 다룬다고 말합니다. 창4:25에서는 아다와 씰라로 앞서 나타낸 새 교회를, 창5:1-4에서는 태고교회의 첫 후손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이것은 문자적 의미만으로는 ‘알 수도, 추론할 수도 없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이것은 중요한 대목입니다. 독자가 창4:25의 ‘사람과 그의 아내’를 이전부터 등장한 아담과 하와로 이해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습니다. 실제로 앞에서는 같은 표현이 태고교회와 그 후손을 나타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말씀의 속뜻은 동일한 인물이나 표현에 언제나 하나의 고정된 의미만을 부여하지 않습니다. 지금 어떤 교회와 어떤 상태가 다루어지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그가 이 사실을 밝히는 중요한 단서가 말씀의 ‘반복’입니다. 창4:25에서 이미 사람과 그의 아내가 셋을 낳았다고 했는데, 창5:1-4에서는 사람과 그의 아내와 셋의 출생이 다시 기록됩니다. 만일 두 기록이 속뜻으로도 완전히 같은 내용을 말한다면 같은 이야기를 다시 기록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고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반복은 단순한 중복이 아니라, 겉으로 비슷한 기록을 통해 서로 다른 내적 내용을 다루고 있음을 알려 주는 표지가 됩니다.

 

그 예가 바로 창1과 창2입니다. 두 장 모두 사람과 창조 세계를 다루기 때문에 문자적으로 보면 같은 창조 이야기가 반복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해석에서 창1은 영적 인간의 창조를, 창2는 천적 인간의 창조를 다룹니다. 동일하거나 비슷한 사람과 사물이 다시 등장하더라도 속뜻으로는 서로 다른 상태를 나타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원리를 창4:25과 창5:1-4에도 적용합니다.

 

이 설명은 창4의 가인 계열과 창5의 셋 계열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도 중요한 단서를 줍니다. 문자적인 족보만 따라가면 아담과 하와에게서 가인으로 이어지는 계열과 셋으로 이어지는 계열이 서로 나란히 진행된 두 혈통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창4에는 가인의 후손들이 이어지고, 창5에는 셋을 통한 아담의 계보가 이어지기 때문에 그렇게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AC.435는 이러한 문자적 계보 관계를 그대로 속뜻의 교회 역사에 옮겨 놓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창4:25의 사람과 아내와 셋을 설명하면서도, 곧이어 창5:1-4에 다시 등장하는 사람과 아내와 셋은 ‘태고교회의 첫 후손’을 뜻한다고 명시한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문자적으로는 같은 아담과 하와와 셋의 이야기라 하더라도, 속뜻으로는 서로 다른 교회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창4의 가인 계열과 창5의 셋 계열을 단순히 ‘한쪽은 악한 계열, 다른 한쪽은 선한 계열이며 두 계열이 처음부터 병행했다’는 식으로만 이해하기에는 어려움이 생깁니다.

 

그렇다고 반대로 창4의 모든 교회 상태가 시간적으로 완전히 끝난 다음 창5의 교회가 시작되었다고 이 글 하나만으로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AC.435가 직접 밝히는 것은 그보다 더 근본적인 원리입니다. 곧 말씀의 족보와 반복되는 인물들은 단순한 시간 순서나 혈통 관계를 기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서로 다른 교회와 그 교회의 상태들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4와 창5의 관계 역시 문자적인 계보의 선후 관계만으로 결정하기보다, 각 장에서 스베덴보리가 어떤 교회와 어떤 상태를 다루고 있는지를 따라가며 이해해야 합니다.

 

마지막 문장에서 스베덴보리는 이를 한 번 더 정리합니다. ‘사람’[homo]과 ‘아내’는 지금 다루고 있는 ‘모교회’(parent church)를 뜻하는 일반적인 용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과 아내’라는 표현 자체가 언제나 특정한 하나의 교회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창4:25에서는 아다와 씰라로 나타낸 새 교회가 지금 다루는 모교회이고, 창5:1-4에서는 태고교회의 첫 후손이 다루어집니다. 같은 표현이라도 문맥과 속뜻에서 다루는 대상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결국 AC.435는 창4:25을 이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창세기 초반 전체를 읽는 중요한 원리를 보여 줍니다. 말씀에서 같은 사람과 사건이 반복된다고 해서 반드시 같은 영적 내용을 반복하는 것은 아닙니다. 창1과 창2가 각각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창조를 다루듯, 창4:25과 창5:1-4의 사람과 아내와 셋도 속뜻으로는 서로 다른 교회적 내용을 다룹니다. 따라서 가인과 셋의 계보 역시 문자적인 두 혈통의 병행이라는 틀만으로 이해하기보다, 태고교회와 그 후손 가운데 일어난 여러 교회의 형성과 변화라는 더 큰 흐름 속에서 읽어야 합니다. AC.436-437은 이제 그 가운데 ‘셋’과 ‘다른 씨’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나타내는지를 더 밝혀 줄 것입니다. (AC.435 해설)  

 

심화

1. ‘가인 계열과 셋 계열은 처음부터 병행한 두 계열인가?’

 

AC.435 심화 1, ‘가인 계열과 셋 계열은 처음부터 병행한 두 계열인가?’

AC.435 심화1. ‘가인 계열과 셋 계열은 처음부터 병행한 두 계열인가?’ 창세기 4장과 5장을 문자적으로 읽으면 두 계열이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옵니다. 창4에서는 가인에게서 에녹, 이랏, 므후야

bygrace.kr

 

 

 

AC.436, 창4:25, ‘가인에서 셋과 에노스까지, 신앙과 체어리티는 어떻게 다시 이어지는가?’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4:25) AC.436그 여자의 ‘아들’(son),

bygrace.kr

 

AC.434, 창4:25, ‘셋은 왜 새로운 신앙을 의미하는가?’ (AC.434-437)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And the man [homo] knew his wife again, and she ba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And the man [homo] knew his wife again, and she bare a son, and called his name Seth; for God hath appointed me another seed instead of Abel, for Cain slew him. (창4:25)

 

AC.434

여기서 ‘사람’(man)과 그의 ‘아내’(wife)는 앞에서 ‘아다와 씰라’(Adah and Zillah)로 나타낸 새 교회를 뜻합니다. 그리고 그 여자의 ‘아들’(son), 곧 이름을 셋이라 한 아들은 체어리티를 얻을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신앙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God appointed another seed instead of Abel, whom Cain slew)는 것은 가인이 분리하여 소멸시켰던 체어리티가 이제 주님에 의해 이 교회에 주어졌다는 뜻입니다. The “man” and his “wife” here mean the new church signified above by “Adah and Zillah”; and by her “son,” whose name was Seth, is signified a new faith, by which charity might be obtained. By “God appointed another seed instead of Abel, whom Cain slew,” is signified that charity, which Cain had separated and extinguished, was now given by the Lord to this church.

 

해설

AC.434는 라멕으로 끝난 계보 뒤에 왜 다시 아담과 그의 아내, 그리고 셋의 탄생 이야기가 나오는지를 설명하는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앞의 AC.432-433까지는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 그리고 마침내 라멕에게서 신앙과 체어리티가 모두 소멸되는 황폐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창4:25은 갑자기 다시 ‘아담이 그의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히 가족 계보가 다시 이어지는 장면으로만 보지 않고, 황폐 이후에 주님께서 새 교회를 일으키시는 장면으로 읽습니다.

 

먼저 여기서 ‘사람’과 그의 ‘아내’는 앞에서 ‘아다와 씰라’로 나타난 새 교회를 뜻합니다. 이것은 문자적으로 아담과 하와가 곧 아다와 씰라라는 뜻이 아닙니다. 속뜻으로는 서로 다른 인물들이 같은 교회의 새로운 상태를 나타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앞의 라멕 계열에서 아다와 씰라가 등장한 뒤, 이제 ‘사람과 그의 아내’라는 표현을 통해 그 새 교회가 다시 언급됩니다. 따라서 창4:25은 이야기의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 준비된 새 교회의 흐름을 이어 갑니다.

 

그런데 이 새 교회에는 ‘아들’이 태어납니다. 그의 이름은 셋(Seth)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셋을 ‘체어리티를 얻을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신앙’으로 풀이합니다. 이 표현은 특히 주의 깊게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셋은 단순히 가인을 대신하는 또 하나의 ‘신앙’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앞의 가인은 결국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을 나타냈습니다. 반면 셋이 나타내는 새로운 신앙은 체어리티를 다시 얻을 수 있게 하는 신앙입니다. 같은 ‘신앙’이라 하더라도 체어리티와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창4:25의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는 말이 중요해집니다. 아벨은 앞에서 체어리티를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것은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고 마침내 체어리티가 소멸되었다는 뜻이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다른 씨’를 주셨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가인이 분리하고 소멸시킨 체어리티가 주님에 의해 이 새 교회에 다시 주어진 것으로 설명합니다. 인간이 잃어버린 것을 인간 스스로 되살린 것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 다시 주어졌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셋 자신이 곧 체어리티라고 하지 않고, 셋은 ‘체어리티를 얻을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신앙’이라고 한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씨’가 아벨을 대신한다는 말씀의 목적은 단순히 아벨이라는 인물을 셋이라는 인물이 대신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아벨이 나타냈던 체어리티가 다시 교회에 주어지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신앙이 셋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셋의 등장은 신앙이 다시 체어리티를 향하도록 질서가 회복되는 새로운 시작입니다.

 

이것은 앞의 라멕 이야기를 지나온 독자에게 상당히 중요한 장면입니다. 라멕에게서는 ‘사람’과 ‘어린아이’가 모두 죽었습니다. 곧 신앙과 체어리티가 모두 소멸되어 ‘성한 곳이 없는’ 황폐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말씀은 그 황폐로 창4를 끝내지 않습니다. 바로 뒤에서 ‘하나님이 다른 씨를 주셨다’고 합니다. 황폐 이후에도 주님께서는 체어리티가 다시 존재할 수 있도록 새로운 신앙을 일으키시고, 그것을 통해 새 교회를 세우십니다. AC.434는 이 전환을 보여 주는 번호입니다.

 

결국 셋의 탄생은 단순한 족보의 연장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소멸된 뒤 주님께서 새 교회에 그것을 다시 주시는 장면입니다.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은 체어리티를 분리했고 아벨을 죽였지만, 셋이 나타내는 새로운 신앙은 체어리티를 얻을 수 있게 하는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AC.434에서 중심에 계신 분은 셋 자체라기보다 새 교회를 일으키시는 주님이십니다. 인간에게서 신앙과 체어리티가 황폐해진 뒤에도 ‘다른 씨’를 주시고, 다시 사랑과 신앙이 함께할 수 있는 길을 여시는 분이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AC.434 해설)

 

 

 

AC.435, 창4:25, ‘같은 사람과 아내가 다시 나오는데 왜 다른 교회를 의미하는가?’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4:25) AC.435여기서 ‘사람’(man)과 그

bygrace.kr

 

AC.433, 창4:24, ‘일흔일곱 배의 보복은 왜 가장 거룩한 것의 침해를 뜻하는가?’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창4:24) AC.433가인이 ‘일곱 배로 보복을 받을 것’(avenged sevenfold)이라는 말이 ‘가인’(Cain)이 나타내는 분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116 심화

1. ‘비손은 지성을 뜻하는데 왜 첫째 강은 의지에 관계한다고 하는가?’

 

AC.110에서는 첫째 강 ‘비손’을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지성’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AC.116에 이르면 마음은 의지와 이해로 이루어져 있으며 ‘첫째 강에 관하여 말한 것은 의지에 관계하고, 이 둘째 강에 관하여 말한 것은 이해에 관계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의문이 생깁니다. 지성은 일반적으로 이해와 관계되는 것처럼 보이는데, 왜 비손은 지성을 뜻하면서도 의지에 관계한다고 하는 것일까요? 얼핏 보면 AC.110과 AC.116의 설명이 서로 어긋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문제를 이해하려면 먼저 AC.110이 비손을 단순히 ‘지성’이라고 하지 않았다는 점을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확한 표현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지성’입니다. 여기서 지성이라는 한 단어만 떼어 내어 곧바로 이해에 배정하면, 스베덴보리가 앞에서부터 설명해 온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를 놓치게 됩니다. 비손의 지성은 사랑과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지성이 아니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에 속한 지성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천적 인간을 설명한 내용과 그대로 연결됩니다. AC.99에서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이 주된 것이며, 주님께서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통하여 그의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흘러드신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천적 인간에게 지성과 신앙이 있다고 해서 그것들이 사랑과 별개의 근원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 주된 것이고, 신앙과 지성은 그 사랑에서 생명을 받습니다. 비손이 ‘지성’을 뜻하면서도 첫째 강에 관한 것이 의지에 관계한다고 하는 것은 이러한 천적 인간의 질서 안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AC.110-115의 흐름도 이 점을 더욱 분명하게 해 줍니다. 금은 사랑의 선을 뜻하고, 보석들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에 속한 것들을 표상합니다. 그리고 AC.115에서는 아론의 에봇에 있는 호마노가 금테로 둘러싸여 있는 것에서 ‘사랑의 선이 신앙의 진리 안으로 흘러들어야 한다’는 것을 퍼셉션한다고 했습니다. 즉 첫째 강을 설명하는 전체 문맥의 중심에는 사랑의 선이 있으며, 신앙의 진리는 그 사랑의 선에서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선의 유입을 받습니다. 따라서 비손이 나타내는 지성도 그 근원을 사랑의 선에 두고 있습니다.

 

반면 둘째 강 기혼에 이르면 강조점이 달라집니다. AC.116은 기혼을 ‘선과 진리, 또는 사랑과 신앙에 속한 모든 것에 관한 앎’이라고 설명한 뒤, 이러한 앎들은 이해에 속한다고 직접 말합니다. 여기서는 선과 진리에 관한 것들을 알고 이해하는 능력 자체가 전면에 나옵니다. 그래서 둘째 강에 관한 것은 이해에 관계합니다. 첫째 강과 둘째 강의 차이는 단순히 ‘첫째는 감정이고 둘째는 지성’이라는 식의 구분이 아니라, 하나의 마음 안에서 의지와 이해가 각각 어떤 방식으로 사랑과 신앙의 생명을 받아 나타내는가 하는 차이로 보는 것이 적절합니다.

 

이렇게 보면 AC.111의 설명도 중요해집니다. 의지와 이해는 ‘하나의 마음’을 이루지만 서로 같은 것이 아니라 ‘참으로 가장 뚜렷하게 구별’됩니다. 따라서 첫째 강이 의지에 관계하고 둘째 강이 이해에 관계한다고 해서 둘 사이에 아무런 연결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의 마음 안에서 서로 구별되면서 결합되어 있습니다. 첫째 강에서 설명되는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지성, 그리고 둘째 강에서 설명되는 선과 진리에 관한 앎은 서로 단절된 두 영역이 아니라 하나의 천적 인간 안에서 질서 있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의지에 관계한다’는 말을 ‘비손 자체가 곧 의지이다’라고 바꾸어 읽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AC.116의 표현은 첫째 강에 관하여 말한 것이 의지에 ‘관계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둘째 강에 관한 것이 이해에 관계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는 비손이라는 상응의 의미를 AC.110에서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지성’이라고 해 놓고 AC.116에서 그것을 ‘의지’로 변경한 것이 아닙니다. 첫째 강을 둘러싼 전체 설명이 마음의 두 능력 가운데 어느 쪽에 관계하는지를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 차이를 인정하면 두 번호 사이의 겉보기 모순은 상당 부분 풀립니다.

 

그리고 이 모든 질서의 근원에는 다시 주님이 계십니다. 천적 인간에게 사랑이 주된 것이라고 해서 그 사랑의 근원이 인간의 의지 자체라는 뜻은 아닙니다. 앞의 AC.105는 모든 사랑과 신앙과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나온다고 했고, AC.112는 지혜와 지성, 선과 진리 역시 결국 모두 주님으로부터 온다고 거듭 강조했습니다. 그러므로 첫째 강이 의지에 관계하고 둘째 강이 이해에 관계한다는 것은 인간 안에 서로 독립된 두 생명의 근원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에덴에서 하나의 강이 흘러나온 뒤 여러 강으로 갈라지는 것처럼, 하나의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인간 안에서 서로 구별되는 의지와 이해의 질서 안에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비손은 지성을 뜻하는데 왜 의지에 관계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핵심은 비손의 ‘지성’만을 떼어 보지 않는 데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지성’이며,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이 주된 것이고 신앙과 지성이 그 사랑에서 생명을 받습니다. 그래서 첫째 강에 관한 전체 설명은 의지에 관계할 수 있습니다. 반면 기혼은 선과 진리에 관한 앎들을 나타내며, 그 앎들은 이해에 속하므로 둘째 강은 이해에 관계합니다. 이렇게 읽을 때 AC.110과 AC.116은 서로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마음 안에서 사랑과 신앙, 의지와 이해가 서로 구별되면서도 하나의 생명 질서를 이루는 모습을 서로 다른 측면에서 보여 줍니다. (AC.116 심화 1)

 

 

 

AC.116, 창2:13, ‘기혼은 선과 진리에 속한 모든 것에 관한 앎을 뜻함’ (AC.116-117)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을 둘렀고 And the name of the second river is Gihon; the same is it that compasseth the whole land of Cush. (창2:13) AC.116‘둘째 강’(second river), 곧 ‘기혼’(Gihon)은 선과 진리, 또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