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les. (3:7)

 

AC.213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knowing that they were naked), 그들이 이전처럼 더 이상 순진무구(innocence)한 상태에 있지 않고, 악 가운데 있음을 알게 되고 인정하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앞 장 마지막 절에서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더라(and they were both naked, the man and his wife, and were not ashamed)라고 말한 것으로부터 분명합니다. 거기서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더라(not to be ashamed because they were naked)는 순진무구함 가운데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절에서는 그 반대가 됩니다. 여기서는 그들이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hid themselves)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순진무구함이 없는 곳에서는 벌거벗음이 수치와 치욕이 되는데, 이는 악을 생각하고 있다는 의식이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말씀에서 벌거벗음(nakedness)은 수치와 악의 표상으로 사용되며, 타락한 교회에 대해 말할 때 적용됩니다. 에스겔서에는 By “knowing that they were naked” is signified their knowing and acknowledging themselves to be no longer in innocence as before, but in evil, as is evident from the last verse of the preceding chapter, where it is said, “and they were both naked, the man and his wife, and were not ashamed,” and where it may be seen that “not to be ashamed because they were naked” signifies to be innocent. The contrary is signified by their “being ashamed,” as in this verse, where it is said that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hid themselves”; for where there is no innocence, nakedness is a scandal and disgrace, because it is attended with a consciousness of thinking evil. For this reason “nakedness” is used in the Word as a type of disgrace and evil, and is predicated of a perverted church, as in Ezekiel:

 

네가 어렸을 때에 벌거벗은 몸이었으며 피투성이가 되어서 발짓하던 것을 (16:22) Thou wast naked and bare, and trampled on in thy blood (Ezek. 16:22).

 

그들이 너를 벌거벗은 몸으로 두어서 네 벗은 몸을 드러낼 것이라 (23:29) They shall leave her naked and bare, and the nakedness shall be uncovered (Ezek. 23:29).

 

요한계시록에서는 In John: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 (계3:18) I counsel thee to buy of me white raiment that thou mayest be clothed, and that the shame of thy nakedness do not appear (Rev. 3:18).

 

그리고 마지막 날 관련, And concerning the last day:

 

보라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16:15) Blessed is he who watcheth, and keepeth his garments, lest he walk naked and they see his shame (Rev. 16:15).

 

신명기에서는 In Deuteronomy:

 

사람이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줄 것이요 (24:1) If a man hath found some nakedness in his wife, let him write her a bill of divorcement (Deut. 24:1).

 

같은 이유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제단에 나아가 섬길 때, 벌거벗은 살을 가리기 위한 세마포 바지를 입도록 하체를 가리게 하라(cover the flesh of their nakedness,)는 명령을 받았는데, 이는 죄를 짊어진 채 죽지 않게 하기 위함(lest they should bear iniquity, and die)이었습니다 (28:42-43). For the same reason Aaron and his sons were commanded to have linen breeches when they came to the altar, and to minister, to “cover the flesh of their nakedness, lest they should bear iniquity, and die (Exod. 28:42–43).”

 

42또 그들을 위하여 베로 속바지를 만들어 허리에서부터 두 넓적다리까지 이르게 하여 하체를 가리게 하라 43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나 제단에 가까이하여 거룩한 곳에서 섬길 때에 그것들을 입어야 죄를 짊어진 채 죽지 아니하리니 그와 그의 후손이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 (28:42, 43)

 

 

해설

 

이 본문은 창3:7의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라는 말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것을 단순히 육체의 벗은 몸을 인식하게 된 사건으로 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영적 상태의 변화로 봅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변화는 옷이 없다는 사실을 새롭게 발견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순진무구함 가운데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창2:25와 창3:7을 의도적으로 대조합니다. 창2에서는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더라’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때는 순진무구함 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순진무구함이 있는 곳에서는 벌거벗음이 수치가 아닙니다. 어린아이가 자신의 벌거벗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처럼, 그들의 내면에는 숨겨야 할 악 의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창3에서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들은 같은 벌거벗음 속에 있으면서도 부끄러움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이제 그 안에 악에 대한 의식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매우 깊이 있게 설명합니다. 순진무구함이 사라지면 사람은 자신을 감추고 싶어집니다. 자신의 상태를 드러내기 두려워하고, 무언가로 가리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곧바로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게 됩니다.

 

이 때문에 말씀에서 ‘벌거벗음’은 점차 영적 의미를 갖게 됩니다. 순진무구함 가운데 있는 벌거벗음은 악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지만, 타락 이후의 벌거벗음은 선과 진리의 보호를 잃은 상태, 곧 영적 빈곤과 수치를 의미하게 됩니다. 그래서 에스겔과 요한계시록에서 ‘벌거벗음’은 타락한 교회의 상태를 상징하는 표현으로 사용됩니다.

 

특히 계3:18의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는 말씀은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에 따르면 옷은 진리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벌거벗음은 진리의 보호를 잃은 상태이고, 흰옷을 입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진리를 받아들이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문제는 육체의 옷이 아니라 영혼의 옷입니다.

 

또한 출애굽기의 제사장 복장 규정도 같은 원리로 설명됩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제단에 나아갈 때, 벌거벗음을 가리도록 명령받은 것은 단순한 예절 문제가 아니라, 거룩한 것 앞에서는 인간 자신의 own이 드러나지 않아야 함을 상징합니다. 인간은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로 덮여 있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영적 벌거벗음이 드러나게 됩니다.

 

결국 AC.213의 핵심은 매우 아름답고도 깊습니다. 창2의 벌거벗음은 순진무구함의 상징이었지만, 창3의 벌거벗음은 순진무구함의 상실을 의미합니다. 같은 ‘벌거벗음’이라는 표현이지만, 상태가 달라졌기 때문에 의미도 달라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부끄러움을 느꼈다는 사실은 아직 완전히 죽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벌거벗었다는 것을 알고 부끄러워할 수 있다는 것은, 여전히 자신의 상태를 인식하는 내적 빛이 남아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AC.213은 단순히 수치의 이야기가 아니라, 타락 속에서도 아직 남아 있는 지각의 흔적과 회복의 가능성을 보여 주는 본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심화

 

1. ‘순진무구(innocence)

 

 

AC.213, 심화 1, ‘순진무구’(innocence)

AC.213.심화 1. ‘순진무구’(innocence) ‘순진무구’(innocence)는 스베덴보리 신학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입니다. 일반적으로 한국어의 ‘순진하다’는 말은 세상 물정을 모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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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악을 생각하고 있다는 의식

 

 

AC.213, 심화 2, ‘악을 생각하고 있다는 의식’

AC.213.심화 2. ‘악을 생각하고 있다는 의식’ 순진무구함이 없는 곳에서는 벌거벗음이 수치와 치욕이 되는데, 이는 악을 생각하고 있다는 의식이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for where there is no innoc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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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6:22

 

 

AC.213, 심화 3, ‘겔16:22’

AC.213.심화 3. ‘겔16:22’ 네가 어렸을 때에 벌거벗은 몸이었으며 피투성이가 되어서 발짓하던 것을 (겔16:22) Thou wast naked and bare, and trampled on in thy blood (Ezek. 16:22). 이 구절을 AC.213에서 인용하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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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23:29

 

 

AC.213, 심화 4, ‘겔23:29’

AC.213.심화 4. ‘겔23:29’ 그들이 너를 벌거벗은 몸으로 두어서 네 벗은 몸을 드러낼 것이라 (겔23:29) They shall leave her naked and bare, and the nakedness shall be uncovered (Ezek. 23:29). 이 구절을 AC.213에서 인용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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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3:18

 

 

AC.213, 심화 5, ‘계3:18’

AC.213.심화 5. ‘계3: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 (계3:18) I counsel thee to buy of me white raiment that thou mayest be clothed, and that the shame of thy naked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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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16:15

 

 

AC.213, 심화 6, ‘계16:15’

AC.213.심화 6. ‘계16:15’ 보라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계16:15) Blessed is he who watcheth, and keepeth his garments, 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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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출28:42-43’

 

42또 그들을 위하여 베로 속바지를 만들어 허리에서부터 두 넓적다리까지 이르게 하여 하체를 가리게 하라 43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나 제단에 가까이하여 거룩한 곳에서 섬길 때에 그것들을 입어야 죄를 짊어진 채 죽지 아니하리니 그와 그의 후손이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 (출28:42, 43)

 

 

‘또 그들을 위하여 베로 속바지를 만들어 허리에서부터 두 넓적다리까지 이르게 하여 하체를 가리게 하라.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나 제단에 가까이하여 거룩한 곳에서 섬길 때에 그것들을 입어야 죄를 짊어진 채 죽지 아니하리니 그와 그의 후손이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출28:42-43)를 AC.213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벌거벗음(nakedness)’이 단순한 신체 노출이 아니라 영적 결핍과 인간 자신의 own을 의미하며, 거룩한 것 앞에서는 반드시 그것이 덮여 있어야 함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이것은 제사장 복장에 관한 규정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제사장의 모든 의복이 상응에 의해 영적 의미를 가진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제사장은 주님을 표상하고, 제사장의 옷은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신적 진리와 신적 선을 표상합니다. 따라서 제사장이 벌거벗음을 드러낸 채 거룩한 곳에 들어가지 못하게 한 것은 단순한 예절이나 품위의 문제가 아닙니다.

 

AC.213의 문맥에서는 이것이 창3장의 벌거벗음과 연결됩니다. 아담과 하와는 타락 후 자신들이 벌거벗은 줄을 알게 되었고, 그 벌거벗음을 가리려 했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벌거벗음은 선과 진리의 보호를 잃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제사장이 거룩한 곳에 들어갈 때 벌거벗음이 드러나서는 안 된다는 것은, 인간 자신의 것(own)이 드러난 상태로는 주님의 거룩함에 접근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특히 본문은 ‘죄를 짊어진 채 죽지 아니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이것 역시 육체적 죽음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보면 인간 자신의 것만으로 주님 앞에 서는 것은 곧 영적 죽음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인간 자신의 것 안에는 사랑 자체가 아니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있으며, 진리 자체가 아니라 왜곡된 이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반드시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로 덮여 있어야 합니다.

 

또한 여기서 속바지가 ‘베(linen)’로 만들어졌다는 점도 의미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세마포나 베는 깨끗한 진리, 특히 선에서 나온 진리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제사장이 베 속바지로 벌거벗음을 가리는 것은, 인간의 자연적인 것과 자신의 것을 주님께서 주시는 순수한 진리로 덮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구절은 계3:18의 ‘흰 옷을 사서 입으라’는 말씀과도 연결됩니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의 의와 지혜로는 자신의 벌거벗음을 덮을 수 없습니다. 무화과 잎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주님께서 주시는 옷, 곧 진리와 선이 필요합니다. 출애굽기의 제사장 복장은 바로 그 원리를 의식적으로 보여 주는 표상입니다.

 

그래서 AC.213에서 출28:42-43을 인용하는 이유는, 벌거벗음이 영적으로는 인간 자신의 것과 그로 인한 결핍을 의미하며, 거룩한 것 앞에서는 반드시 그것이 덮여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제사장의 베 속바지는 단순한 의복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와 선으로 덮이는 데 있음을 상징하는 매우 깊은 표상인 것입니다.

 

 

 

AC.212, 창3:7, ‘interior dictate’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이해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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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2.심화

 

12. ‘검색이 없던 시절

 

스마트폰, PC가 없어 검색이라는 걸 할 수 없었을 스베덴보리는 어떻게 어느 성경 몇 장 몇 절에 어떤 말씀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까요?

 

 

목사님 같은 의문은 스베덴보리를 오래 읽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반드시 하게 되는 질문인 것 같습니다. AC를 읽다 보면 정말 놀라울 정도로 성경 전체를 자유롭게 오가며 인용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를 해설하다가 갑자기 시편, 이사야, 에스겔, 신명기, 복음서를 넘나들며 몇 구절씩 정확하게 끌어오는 모습을 보면, ‘도대체 검색도 없던 시대에 이게 가능한가?’ 하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우선 가장 현실적인 답부터 말하자면, 스베덴보리는 당대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학자였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라틴어, 히브리어, 그리스어 교육을 받았고, 평생 독서와 연구 속에서 살았습니다. 오늘날의 대학 교수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성경과 고전 문헌 연구에 쏟아부은 사람입니다. 당시 학자들은 지금처럼 검색창에 입력하는 대신, 중요한 구절들을 직접 필사하고, 주제별로 정리하고, 머릿속에 축적하는 훈련을 했습니다.

 

또한 당시에는 성경 자체가 현대인보다 훨씬 삶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특히 성직자나 학자들은 성경을 반복해서 읽고 암송했습니다. 실제로 17, 18세기 유럽의 신학자들 가운데는 성경의 상당 부분을 암송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스베덴보리 정도의 독서량과 기억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특정 주제와 관련된 구절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는 느낌도 듭니다. 왜냐하면 AC를 읽다 보면 단순히 많이 외운 수준을 넘어서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한 상응을 설명하기 위해 성경 여러 권에서 같은 상응을 가진 구절들을 정확하게 모아 오는 모습을 보면, 단순 암기 이상의 체계성이 보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를 연구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그가 평소 만들어 두었던 방대한 노트와 색인(index)을 활용했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실제로 당시 학자들은 오늘날 데이터베이스 대신 공통 주제집(commonplace book)이라는 것을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예를 들어, ‘’, ‘’, ‘’, ‘’, ‘’, ‘ 같은 주제를 적어 두고, 관련 구절들을 계속 정리하는 방식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비슷한 작업을 했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 자신의 입장에 서면 또 다른 설명이 나옵니다. 그는 여러 곳에서 천사들과의 교통 가운데 말씀의 내적 의미를 보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천사들에게서 성경 구절 번호를 받아 적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먼저 성경을 철저히 알고 있었고, 그 위에서 내적 의미가 열렸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실제로 AC를 읽어보면 스베덴보리는 천사가 내게 이 구절을 알려주었다’기보다, ‘말씀 전체가 하나의 유기체처럼 연결되어 있음을 보았다’는 식으로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치 숙련된 음악가가 악보를 보며, 곡 전체의 구조를 한눈에 파악하듯, 그는 말씀 전체 안에서 상응의 연결망을 보았던 것 같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스베덴보리가 영계 체험을 27년이나 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천사들이 모든 것을 즉석에서 알려주었다면 그렇게 방대한 본문 인용과 문헌 작업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AC를 보면 그는 놀라울 정도로 꼼꼼하게 성경 본문을 대조하고, 단어를 분석하고, 상응을 추적합니다. 즉 영계 체험이 그의 학문을 대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존의 학문과 성경 연구를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린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어느 성경 몇 장 몇 절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 수 있었던 것은 첫째, 원래부터 비범한 학자적 기억력과 평생의 성경 연구 때문이었고, 둘째, 방대한 노트와 색인 작업 때문이었으며, 셋째, 영계 체험을 통해 말씀 전체의 내적 연결성을 이전보다 훨씬 선명하게 보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입니다.

 

어쩌면 오늘날 우리가 검색창에 단어를 입력해 구절을 찾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검색’을 하지만, 그는 기억’하고, ‘연결’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AC를 읽다 보면, 마치 성경 전체가 그의 머릿속에서 하나의 살아 있는 유기체처럼 움직이고 있었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그것이야말로 현대인이 가장 부러워해야 할 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검색 능력이 아니라, 말씀 자체가 내면에 살아 있었던 상태 말입니다.

 

 

 

AC.212, 창3:7, ‘interior dictate’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이해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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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2, 심화 11, ‘사29:18’

AC.212.심화 11. ‘사29:18’ 그날에 못 듣는 사람이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볼 것이며 (사29:18) 이 구절을 AC.212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듣는다’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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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2.심화

 

11. ‘29:18

 

그날에 못 듣는 사람이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볼 것이며 (29:18)

 

 

이 구절을 AC.212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듣는다’는 것이 단순히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고, ‘본다’는 것이 단순히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해(understanding)를 통해 진리를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문자 그대로 읽으면, 이 구절은 귀머거리와 맹인이 기적적으로 회복되는 장면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영적인 상태에 관한 예언으로 봅니다. 왜냐하면, 본문은 단순히 육체의 장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책의 말을 듣는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은 말씀을 가리키며, 따라서 듣는다’는 것은 말씀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이해하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마찬가지로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본다’는 표현도 육체적 시력 회복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어둠과 캄캄함은 영적으로는 무지와 거짓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런 상태에 있던 사람이 이제 보게 된다는 것은, 이해가 열려 진리의 빛을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맹인’은 단순히 육체적 장애인이 아니라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던 사람을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점 때문에 이 구절을 AC.212에 인용합니다. 3:7 눈이 밝아져’라는 표현이 단순한 시력의 문제가 아니라 이해의 문제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사야 29장에서도 맹인의 눈이 본다’는 말은 이해가 밝아진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으므로, 3:7 역시 같은 원리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 구절은 AC.211 interior dictate’와도 잘 연결됩니다. 사람은 진리의 빛이 비칠 때, 비로소 자신의 상태와 주님의 뜻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전에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해를 밝히실 때, 이전에는 어둠으로 보이던 것들이 의미를 갖기 시작하고, 이전에는 들리지 않던 말씀의 소리가 마음에 들리기 시작합니다.

 

또한 이 구절은 AC.212 전체의 논증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역할도 합니다. 발람의 눈이 열린 사람’, 요나단의 눈이 밝아졌다’, 다윗의 눈을 밝히소서’, 에스겔의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한다’, 이사야의 눈을 감기게 하라’, 모세의 보는 눈을 주지 아니하셨다’, 그리고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힌다’는 말씀까지 모두 하나의 원리를 증언합니다. 곧 말씀에서 ’은 이해를 뜻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AC.212에서 사29:18을 인용하는 이유는, ‘맹인의 눈이 본다’는 표현이 이해의 계몽과 진리의 인식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창3:7 눈이 밝아져’라는 표현 역시 육체적 변화가 아니라 이해가 열려 자신의 상태를 인식하게 된 것을 뜻한다는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사야가 말하는 맹인의 눈이 본다’는 것은 단순한 기적의 약속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의 이해를 열어 진리의 빛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구원의 약속인 것입니다.

 

 

 

AC.212, 심화 10, ‘사42:7’

AC.212.심화 10. ‘사42:7’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사42:7) 이 구절을 AC.212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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