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5:12)

 

AC.507

 

‘게난’(Kenan)이라 하는 교회는, 앞의 세 더 완전한 교회들 가운데에 그렇게 많이 포함시킬 수는 없는데, 이는 이전의 교회들에서는 분명하던 퍼셉션이 이제는 일반적인 것이 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열매나 씨앗의 알맹이에 비해 처음의 부드러운 막질들이 차지하는 위치와 같은데, 이러한 상태는 여기서는 직접적으로 묘사되지는 않지만, 뒤따르는 내용, 곧 ‘에녹’(Enoch)과 ‘노아’(Noah)라 하는 교회들에 대한 설명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The church called “Kenan” is not to be so much reckoned among those three more perfect ones, inasmuch as perception, which in the former churches had been distinct, began now to become general, comparatively as are the first and softer membranes relatively to the kernel of fruits or seeds; which state is not indeed described, but still is apparent from what follows, as from the description of the churches called “Enoch” and “Noah.”

 

 

해설

 

이 글은 태고교회의 내부 구분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짚어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게난의 교회를 앞선 세 교회와 동일한 수준으로 취급하지 않으면서도, 그렇다고 해서 태고교회의 흐름에서 배제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게난의 교회를 태고교회 내부에 남아 있으되, 이미 ‘퍼셉션의 성격이 달라지기 시작한 상태’로 봅니다.

 

앞선 세 교회에서는 퍼셉션이 분명했습니다. 선과 진리는 거의 즉각적으로 인식되었고, 그 인식은 삶의 방향과 선택을 자연스럽게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게난이라는 교회에 이르러서는 퍼셉션이 더 이상 그렇게 분명하지 않고, 점차 일반적인 형태를 띠기 시작합니다. 이는 퍼셉션이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라, ‘작동 방식이 바뀌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다시 열매와 씨앗의 비유를 사용합니다. 앞선 세 교회는 알맹이에 가까웠다면, 게난의 교회는 알맹이를 둘러싼 첫 번째이자 비교적 부드러운 막질에 해당합니다. 이 막질은 알맹이보다 덜 본질적이지만, 여전히 생명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알맹이를 보호하고, 바깥으로의 전개를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상태가 여기서는 자세히 설명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일부러 게난의 교회를 길게 묘사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는 독자가 뒤에 나올 에녹과 노아에 대한 설명을 통해, 게난의 상태가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었는지를 스스로 파악하도록 합니다. 이는 성경 해석이 항상 즉각적인 설명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앞뒤 맥락 속에서 점차 분명해지는 과정’임을 보여 줍니다.

 

이 글은 태고교회의 쇠퇴가 단번에 일어난 것이 아님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줍니다. 퍼셉션은 먼저 분명함을 잃고 일반화되며, 그 다음 단계에서야 보다 뚜렷한 변화가 드러납니다. 게난의 교회는 바로 그 초기 단계에 해당합니다. 아직은 알맹이와의 연결이 유지되고 있지만, 중심에서 조금씩 멀어지고 있는 상태입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글은 신앙의 변화를 섬세하게 분별하도록 요구합니다. 신앙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고, 교회의 형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해서, 그 상태가 이전과 동일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퍼셉션이 분명한 상태에서 일반적인 상태로 옮겨가는 변화는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글은 교회의 평가 기준을 다시 한번 조정합니다. 게난의 교회는 더 이상 ‘가장 완전한 교회’로 불리지는 않지만, 여전히 태고교회의 흐름 안에 있으며, 나름의 쓰임새를 지닙니다. 모든 교회 상태가 동일한 역할을 수행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상태는 중심이 되고, 어떤 상태는 보호와 연결의 역할을 담당합니다.

 

개인의 신앙 여정에서도 이 글은 중요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어떤 시기에는 신앙의 퍼셉션이 매우 분명하여 거의 망설임 없이 선을 선택하지만, 어떤 시기에는 그 분명함이 줄어들고 더 일반적인 기준과 생각에 의존하게 됩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그 변화가 곧바로 신앙의 상실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다만 상태가 달라졌을 뿐입니다.

 

결국 AC.507은 태고교회 내부에서 일어난 미세한 변화의 시작을 가리킵니다. 게난의 교회는 더 이상 알맹이에 해당하지는 않지만, 알맹이를 둘러싼 첫 막질로서 여전히 생명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연결이 유지되는 한, 이후에 나타날 더 외적인 교회 상태들도 그 근원을 잃지 않게 됩니다.

 

 

 

AC.508, 창5:13-14, ‘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십 세

13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4그는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Kenan lived after he begat Mahalalel eight hundred and forty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K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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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06, 창5:12, ’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And Kenan lived seventy years, and begat Mahalalel. (창5:12) AC.506 ‘게난’(Kenan)은 네 번째 교회를 의미하고, ‘마할랄렐’(Mahalalel)은 다섯 번째 교회를 의미합니다. 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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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And Kenan lived seventy years, and begat Mahalalel. (5:12)

 

AC.506

 

‘게난’(Kenan)은 네 번째 교회를 의미하고, ‘마할랄렐’(Mahalalel)은 다섯 번째 교회를 의미합니다. By “Kenan” is signified a fourth church, and by “Mahalalel” a fifth.

 

 

해설

 

이 글은 매우 짧지만, 태고교회의 전개 방식에 대해 중요한 사실을 다시 확인시켜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게난(Kenan)과 ‘마할랄렐(Mahalalel)을 개인 이름으로 취급하지 않고, 앞선 경우들과 동일하게 각각 하나의 교회 상태로 이해합니다. 이는 창세기 5장의 이름들이 일관되게 교회들의 연속을 가리킨다는 해석 원리가 여기서도 흔들림 없이 적용된다는 뜻입니다.

 

게난으로 상징되는 네 번째 교회는, 에노스 이후에 나타난 상태를 대표합니다. 앞선 글들에서 이미 밝혀졌듯이, 태고교회의 흐름은 퍼셉션이 점차 덜 분명해지고 더 일반화되는 방향으로 진행됩니다. 게난의 교회 역시 이 흐름 안에 있으며, 여전히 태고교회의 범주에 속하지만, 퍼셉션의 즉각성과 선명함은 앞선 교회들보다 더 약화된 상태에 해당합니다.

 

마할랄렐로 상징되는 다섯 번째 교회는 그 다음 단계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더 이상의 설명을 덧붙이지 않는 이유는, 이미 충분히 확립된 해석 틀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들은 이전 교회의 상태로부터 연속적으로 나타나며, 각 단계는 퍼셉션의 정도와 작동 방식에 차이를 가질 뿐, 동일한 생명 흐름 안에 있습니다.

 

이 간결한 진술은 태고교회의 쇠퇴가 급격한 단절이나 붕괴가 아니라, 매우 점진적인 변화였음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줍니다. 네 번째, 다섯 번째 교회라는 표현은 단순한 번호 매김이 아니라, 퍼셉션이 중심에서 바깥으로 이동해 가는 과정을 표시하는 표지와 같습니다. 각 교회는 이전 교회가 지니고 있던 생명의 흔적을 여전히 품고 있으며, 다만 그것이 더 외적인 방식으로 표현됩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이 글은 짧지만 분명한 메시지를 줍니다. 신앙과 교회의 변화는 어느 순간 갑자기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거의 알아차리기 어려울 정도로 서서히 진행됩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어느 번호의 교회에 속해 있는가가 아니라, 그 상태 안에서 퍼셉션이 어떤 방식으로 살아 있는가입니다.

 

또한 이 글은 창세기 5장을 읽을 때 성급하게 의미를 과도하게 채워 넣지 말라는 암묵적인 가르침도 담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어떤 이름들에 대해서는 길게 설명하고, 어떤 이름들에 대해서는 한 문장으로만 처리합니다. 이는 모든 교회 상태가 동일한 비중으로 설명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각 상태가 전체 흐름 안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관점을 드러냅니다.

 

개인의 신앙 여정에서도 이 구조는 그대로 적용됩니다. 어떤 상태는 삶의 방향을 크게 바꾸는 전환점이 되지만, 어떤 상태는 그 전환 이후의 지속과 정착을 보여 주는 단계일 수 있습니다. 게난과 마할랄렐은 바로 그러한 지속과 진행의 상태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AC.506은 태고교회의 연속성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고 있음을 아주 간결하게 확인해 줍니다. 네 번째 교회와 다섯 번째 교회가 등장했다는 사실 자체가, 태고교회의 생명이 여전히 다양한 형태로 유지되고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이 짧은 글은 그 연속성을 놓치지 말라는 조용하지만 분명한 안내입니다.

 

 

 

AC.507, 창5:12, ‘게난’, 퍼셉션의 성격이 달라지기 시작한 상태

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창5:12) AC.507 ‘게난’(Kenan)이라 하는 교회는, 앞의 세 더 완전한 교회들 가운데에 그렇게 많이 포함시킬 수는 없는데, 이는 이전의 교회들에서는 분명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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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05, 창5:10-11, ’에노스‘, '셋', '사람'(아담)의 퍼셉션 차이

10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1그는 구백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10, 11) AC.505 ‘에노스’(Enosh)는 앞서 관찰한 바와 같이 세 번째 교회를 의미하는데, 여전히 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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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1그는 구백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5:10, 11)

 

AC.505

 

‘에노스’(Enosh)는 앞서 관찰한 바와 같이 세 번째 교회를 의미하는데, 여전히 태고교회들 가운데 하나이지만 ‘셋’(Seth)의 교회보다 덜 천적이며, 그 결과 퍼셉션도 더 적습니다. 또한 이 셋의 교회 역시 ‘사람’(man)이라 불리는 부모 교회만큼 천적이지도 않고 퍼셉션이 풍성하지도 않았습니다. 이 세 교회가 태고교회를 이루는 것들이며, 이들은 뒤이어 나타난 교회들에 비하면 열매나 씨앗의 알맹이와 같고, 그 이후의 교회들은 이에 비해 막질로 된 부분들과 같습니다. Enosh,” as before observed, is a third church, yet one of the most ancient churches, but less celestial, and consequently less perceptive, than the church “Seth”; and this latter was not so celestial and perceptive as the parent church, called “man.” These three are what constitute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relatively to the succeeding ones, was as the kernel of fruits, or seeds, whereas the succeeding churches are relatively as the membranaceous parts of these.

 

 

해설

 

이 글은 태고교회의 내부 구성을 다시 한번 분명하게 정리해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에노스, 셋, 사람(아담)이라는 이름을 통해 세 교회를 구분하지만, 동시에 이 셋이 함께 태고교회를 이룬다고 말합니다. 이는 태고교회가 하나의 동일한 상태로만 존재한 것이 아니라, 퍼셉션의 정도가 서로 다른 여러 상태들이 함께 존재하며 형성되었음을 뜻합니다. 마치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와 아들 부부, 딸 부부 세대, 그리고 손주 세대가 같이 사는 것처럼 말입니다.

 

사람이라 불리는 부모 교회는 가장 천적인 상태였고, 퍼셉션이 가장 분명했습니다. 이 상태에서는 선과 진리가 주님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인식되었고, 그 인식은 삶 전반에 자연스럽게 스며 있었습니다. 셋의 교회는 여전히 태고교회의 범주에 속하지만, 이미 퍼셉션은 이전보다 덜 즉각적이 되었고, 조금 더 매개된 방식, 그러니까 뭔가 보조 설명이 필요한 방식으로 작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에노스의 교회에 이르러서는 퍼셉션이 더욱 일반적인 형태를 띠게 되었고, 선과 진리를 인식하는 분명함도 더 줄어들었습니다.

 

이 차이는 가치의 우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태의 차이를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어느 교회도 부정하거나 배제하지 않습니다. 그는 각 교회가 주님의 섭리 안에서 허락된 고유한 위치를 지니며, 그 위치에 맞는 퍼셉션과 역할을 지녔다고 봅니다. 덜 천적이고 덜 퍼셉션적이라는 말은, 생명이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라 생명이 작동하는, 즉 움직이는 방식이 달라졌다는 뜻입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열매와 씨앗의 비유를 다시 사용합니다. 태고교회의 세 교회는 이후 교회들과 비교할 때 알맹이에 해당합니다. 알맹이는 생명의 중심이 자리한 곳이며, 이후의 모든 전개는 이 중심으로부터 나옵니다. 반면, 이후에 나타난 교회들은 막질과 같은 부분으로 비유되는데, 이는 알맹이를 감싸고 보호하며 생명이 바깥으로 전개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하지요. 여기에는 각기 다른 쓰임새가 있을 뿐, 우열의 판단은 없습니다.

 

이 비유는 교회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을 균형 있게 잡아 줍니다. 태고교회의 알맹이적 상태는 가장 분명한 퍼셉션을 지녔지만, 그것만으로 인류 전체의 영적 여정을 감당할 수는 없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며 더 많은 외적 구조와 매개가 필요해졌고, 그에 따라 교회의 형태도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타락의 이야기라기보다, 인간 상태에 맞추어진 섭리의 전개입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볼 때, 이 글은 교회를 평가하는 기준을 다시 묻게 합니다. 교회가 알맹이에 해당하는 상태에 있느냐, 막질에 해당하는 상태에 있느냐가 핵심이 아니라, 그 막질이 여전히 알맹이를 품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외적인 제도와 형식이 중심이 되더라도, 그 안에 태고교회로부터 이어진 생명의 핵심이 살아 있다면, 그 교회는 여전히 주님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신앙에도 이 원리는 그대로 적용됩니다. 어떤 시기에는 주님에 대한 사랑과 퍼셉션이 매우 분명하게 느껴질 수 있고, 어떤 시기에는 더 많은 생각과 규칙, 형식을 통해 신앙을 유지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그 형식들이 여전히 안쪽의 생명을 보호하고 있는지, 아니면 형식 자체가 목적이 되어 버렸는지입니다.

 

결국 이 글은 태고교회의 세 교회를 하나의 연속된 생명 흐름으로 보게 합니다. 사람, 셋, 에노스는 서로 다른 퍼셉션의 정도를 지녔지만, 함께 태고교회를 이루었고, 이후 교회들의 생명적 근원이 되었습니다. 이 연결이 유지되는 한, 교회는 형태가 달라져도 생명을 잃지 않습니다.

 

 

 

AC.506, 창5:12, ’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And Kenan lived seventy years, and begat Mahalalel. (창5:12) AC.506 ‘게난’(Kenan)은 네 번째 교회를 의미하고, ‘마할랄렐’(Mahalalel)은 다섯 번째 교회를 의미합니다. 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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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04, 창5:10-11, ‘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오 세를 살

10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1그는 구백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Enosh lived after he begat Kenan eight hundred and fifteen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Enosh w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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