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 내용은 해당 유튜브를 먼저 보셔야 이해가 되니 참고하세요.
이 에피소드는 매우 인상적이지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몇 가지 중요한 점을 분별하여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응급상황에서 자녀를 살리려는 부모의 사랑은 선한 정서에서 나온 것이지만, 그 선한 정서가 곧바로 모든 행동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장로는 자신의 돈이 아니라 교회의 돈을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절박한 상황이라 하더라도 허락 없이 교회 재정을 개인 용도로 옮긴 것은 객관적으로는 잘못입니다. 본인도 그것을 인정하고 끝까지 변명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오히려 그의 양심이 살아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의 행위보다 먼저 그 행위의 ‘의도(intention)’와 ‘사랑(love)’을 봅니다. 같은 행동이라도 자기 이익을 위한 것인지, 타인을 위한 것인지에 따라 영적 성격은 전혀 달라집니다. 만약 이 장로가 교회 돈을 이용해 개인 사업을 하거나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 했다면 그것은 명백한 자기애와 탐욕에서 나온 것이며, 영적으로도 매우 위험한 상태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경우는 자신의 생명을 연장하거나 사치를 누리려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자녀를 살리려는 절박함 속에서 나온 행동이었습니다. 물론 이것이 규정 위반을 없애지는 않지만, 주님께서는 외적인 행동뿐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사랑의 질을 함께 보십니다. 이것이 말씀의 속뜻이 끊임없이 가르치는 심판의 원리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스베덴보리는 ‘선한 목적은 악한 수단을 거룩하게 만들지 않는다’는 점도 분명히 말합니다. 천국에서는 선과 진리가 언제나 함께 갑니다. 사랑만 있고 진리가 없으면 맹목적인 열심이 되고, 진리만 있고 사랑이 없으면 냉혹한 정의가 됩니다. 이 장로의 행동은 사랑은 있었지만 진리의 질서를 잠시 벗어난 경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끝까지 ‘제가 잘못했습니다’, ‘징계를 받아도 할 말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태도가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이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는 순간, 그 오류는 거듭남의 재료가 되기 시작합니다. 반대로 잘못을 합리화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자기애가 선을 집어삼키기 시작합니다.
한편 당회의 모습도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흥미롭게 볼 수 있습니다. 처음 장로들은 모두 원칙을 말합니다. 그것은 틀린 말이 아닙니다. 교회 재정은 거룩한 것이며, 신뢰는 반드시 지켜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처음에는 사건만 보았고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사건의 전말을 듣고 나서야 판단이 달라집니다. 이것은 단순히 감정적으로 약해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리가 더 많은 사실을 알게 되면서 더욱 완전한 판단을 하게 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지혜란 많은 사실을 하나의 선 안에서 질서 있게 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진리는 사실을 충분히 알수록 더욱 공정해집니다.
여기서 가장 주목할 사람은 당회장입니다. 그는 규정을 무시하자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실을 밝힌 뒤에 판단하자고 말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자주 말하는 ‘공정한 판단(just judgment)’의 정신과 상당히 닮아 있습니다. 주님은 결코 성급하게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의 외적인 행동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전 생애, 의도, 반복된 삶의 방향까지 모두 보신 후에 심판하십니다. 천국의 천사들도 누군가를 단 한 사건으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전체적인 사랑이 무엇인지, 삶이 어느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를 봅니다.
당회의 최종 결정도 흥미롭습니다. 공식 징계는 하지 않았지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넘어가지도 않았습니다. 재정부에서는 물러나게 하고 일정 기간 모든 직분을 내려놓게 했습니다. 이것은 사랑과 질서를 함께 살리려는 시도였습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으로 하면, 자비는 결코 질서를 파괴하지 않으며, 참된 질서는 언제나 자비를 품고 있습니다. 주님의 섭리 역시 죄를 죄가 아니라고 하지 않으시면서도 죄인을 회복시키기 위해 가장 적절한 길을 마련하십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마지막입니다. 장로는 직분을 다시 받을 기회가 왔지만 스스로 사양합니다. 그는 직분보다 주님과의 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스베덴보리라면 이것을 단순한 겸손 이상의 변화로 보았을 것입니다. 사람은 처음에는 직분을 사랑하고, 다음에는 직분을 통한 명예를 사랑하며, 마지막에는 직분과 상관없이 선 자체를 사랑하게 됩니다. 이 장로는 외적인 명예를 잃으면서 오히려 내적인 평안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이전보다 더 자유로운 얼굴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거듭남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람은 무언가를 더 많이 얻어서 평안을 얻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proprium이 한 겹 벗겨질 때 비로소 평안을 얻게 됩니다.
결국 이 에피소드는 ‘원칙이냐 사랑이냐’의 대립을 말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참된 원칙은 사랑을 살리기 위해 존재하며, 참된 사랑은 결코 원칙을 무너뜨리지 않습니다. 주님의 섭리는 언제나 이 둘을 함께 이루십니다. 사람의 눈은 흔히 규정과 자비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려 하지만, 주님의 지혜는 질서를 보존하면서도 한 영혼을 잃지 않는 길을 찾으십니다. 그래서 천국의 정의는 냉혹하지 않고, 천국의 자비는 무질서하지 않습니다. 이 균형이야말로 주님의 통치가 인간의 판단과 가장 크게 다른 점이며, 이 이야기 속에서 가장 깊이 묵상해야 할 영적 교훈이라 할 수 있습니다.
SY.5, ‘찬성 125표, 반대 193표’, 20년 섬긴 교회에서 쫓겨난 목사의 고백
※ 아래 내용은 해당 유튜브를 먼저 보셔야 이해가 되니 참고하세요. 이 에피소드는 앞선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상당한 울림을 주지만, 실제 목회 현실을 아는 사람의 눈으로 보면 몇 가지 어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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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3,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74세 목사님, 교회 문 닫는 날 일어난 일
※ 아래 내용은 해당 유튜브를 먼저 보셔야 이해가 되니 참고하세요. 이 이야기를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읽어 보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정말 있었던 실화인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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