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And Jehovah said unto him, Therefore whosoever slayeth Cain, vengeance shall be taken on him sevenfold. And Jehovah set a mark upon Cain, lest any finding him should smite him. (4:15)

 

AC.392

가인을 죽이는 자는 누구든지 벌을 배나 받으리라(vengeance being taken sevenfold on anyone who slays Cain) 이처럼 분리된 신앙이라 할지라도 그것에 폭력을 가하는 것은 모독(sacrilege) 됨을 의미합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Jehovah set a mark upon Cain, lest any finding him should smite him) 주님께서 신앙을 특별한 방식으로 구별하셔서 그것이 보존되게 하셨음을 의미합니다. Byvengeance being taken sevenfold on anyone who slays Cainis signified that to do violence to faith even when thus separated would be a sacrilege; “Jehovah set a mark upon Cain, lest any finding him should smite himsignifies that the Lord distinguished faith in a particular manner, in order that it might be preserved.

 

해설

AC.392에서 드디어 창4장의 가장 수수께끼 같은 장면 가운데 하나인 가인의 가 등장합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였습니다. 속뜻에서는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예상되는 것은 가인의 완전한 제거입니다. 그런데 정반대의 일이 일어납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을 죽이는 자는 누구든지 벌을 배나 받으리라고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어 그가 죽임을 당하지 않도록 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이처럼 분리된 신앙이라 할지라도 그것에 폭력을 가하는 것은 모독이 된다는 것과 주님께서 신앙을 특별한 방식으로 구별하여 그것이 보존되게 하셨다는 의미로 풀이합니다.

 

여기서 가장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보존승인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인을 보존하셨다고 해서 가인으로 표상되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을 참된 신앙으로 인정하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앞의 여러 번호에서 그 신앙의 상태는 이미 충분히 밝혀졌습니다. 그것은 체어리티를 신앙 아래에 두고 마침내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며 소멸시킨 신앙입니다. AC.379에서는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 단지 지식이라고까지 했습니다. 따라서 AC.392의 보존은 교리가 옳으니 보호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보존하십니까? AC.392는 아직 그 이유 전체를 풀어놓지는 않지만 결정적인 단서를 줍니다. ‘이처럼 분리된 신앙이라 할지라도 그것에 폭력을 가하는 것은 모독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 안에 완전히 소멸시켜서는 안 되는 어떤 것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AC.384가 중요해집니다. 거기서 스베덴보리는 가인에게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AC.389에서는 악과 거짓이 사람을 죽인다는 것이 그에게 생명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게 하는 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392에서는 그 완전한 소멸을 막기 위해 신앙이 보존됩니다.

 

따라서 가인의 는 가인의 악을 승인하는 표가 아니라 보존의 표입니다. 주님께서는 잘못된 것을 잘못되지 않은 것으로 바꾸어 선언하시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상태 속에서도 아직 보존되어야 할 것을 구별하여 지키십니다. 이것은 주님의 섭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주님의 섭리는 언제나 완전한 상태만을 다루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이미 질서를 많이 무너뜨린 상태에서도 아직 남아 있는 선과 진리, 그리고 앞으로 회복의 가능성을 위해 필요한 것을 보존하십니다.

 

주님께서 신앙을 특별한 방식으로 구별하셨다는 표현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distinguished faith in a particular manner입니다. 즉 가인의 표는 단순히 몸에 어떤 표시를 새겼다는 문자적 이미지에 머물지 않습니다. 속뜻에서는 주님께서 이 신앙을 다른 것들과 구별하여 함부로 파괴되지 않도록 하셨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구별하셨는지는 뒤의 번호들을 더 읽어야 충분히 밝혀지겠지만, 적어도 AC.392에서는 구별하여 보존함이라는 두 요소가 핵심입니다.

 

여기서 도 눈에 띕니다. 그러나 이번 번호는 아직 일곱의 상응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지금 단계에서 일곱은 완전함을 뜻하므로 배의 복수는 완전한 형벌이다와 같은 식으로 미리 결론을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어지는 번호에서 그 의미를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따라가는 것이 안전합니다. 현재 AC.392에서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가인을 죽이는 ’, 곧 이처럼 분리된 신앙에 폭력을 가하는 일이 모독으로 간주된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모독이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모독은 단순한 오류나 악과 같지 않습니다. 거룩한 것과 관계된 것을 알고 인정하면서 그것을 침해하거나 더럽히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따라서 가인의 신앙이 이미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었다고 해서 그 안에 있는 신앙에 관한 모든 것을 아무렇게나 파괴해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잘못된 것 안에서도 말씀에서 나온 진리의 지식이나 거룩한 것과 관련된 어떤 것이 남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AC.392만으로 그 구체적인 구조를 모두 확정하기보다, 이어지는 설명을 기다리면서 우선 분리된 신앙에도 함부로 폭력을 가해서는 되는 이유가 있다는 데 머무는 것이 좋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교회나 다른 사람의 신앙을 바라볼 때에도 매우 조심스럽게 생각해 볼 만한 원리입니다. 어떤 사람의 신앙 안에 심각한 오류가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모든 신앙적 요소를 한꺼번에 부수는 것이 반드시 선한 일은 아닙니다. 오류는 오류로 분별해야 하지만, 그 사람 안에 주님께서 보존하고 계시는 진리나 선의 가능성까지 함께 파괴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이것은 AC.392의 직접적인 역사적 의미라기보다 그 원리에서 조심스럽게 생각해 볼 수 있는 적용입니다. 이번 본문의 직접적인 대상은 가인으로 표상되는 고대의 교회 상태입니다.

 

앞의 AC.389-391을 거쳐 이번 번호에 도달했다는 것도 중요합니다. AC.389에서는 체어리티를 잃으면 사람이 주님과의 결합에서 분리되어 자기의 것에 맡겨지고, 그 결과 악과 거짓이 생명에 속한 것을 소멸시킨다고 했습니다. AC.390에서는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자들이 끊임없이 죽임당할 것을 두려워한다고 했고, AC.391에서는 악과 거짓 자체가 그 안에 형벌을 품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가인은 결국 악과 거짓에 의해 완전히 소멸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주님의 보존이 개입합니다.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가인의 표는 형벌보다 자비의 측면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가인은 자신의 상태가 가져오는 결과를 겪습니다. 지면에서 쫓겨나고,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하며,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결과가 무제한적으로 진행되어 생명에 속한 모든 것이 소멸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섭리는 인간의 자유와 그 선택의 결과를 없애 버리지 않으면서도, 구원의 가능성을 위해 보존되어야 할 것을 지키십니다.

 

여기서 AC.384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다는 표현을 곧바로 기술적인 의미의 리메인스와 동일시하지 않는 것도 여전히 중요합니다. 원문은 그곳에서 remains라는 전문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가인의 표는 리메인스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지금 확정해 버리기보다는,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으며, 생명에 속한 것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도록 보존이 이루어졌다고 말하는 것이 현재 본문에 더 충실합니다. 이후 스베덴보리가 이 보존을 더 구체적으로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따라가면 됩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신앙을 보존하셨다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신앙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가인의 오류는 신앙이 존재했다는 데 있지 않고,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 그것을 체어리티보다 우위에 두었다는 데 있었습니다. 따라서 해결은 신앙을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 다시 체어리티와 올바른 관계를 이루도록 보존되어야 합니다. 진리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선을 섬기도록 질서를 회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점은 창4장의 가인 이야기를 읽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고 해서 이제 신앙은 나쁘고 체어리티만 남겨야 한다는 결론으로 갈 수 없습니다.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어느 하나를 제거하는 것이 해답이 아니라, 둘의 올바른 결합과 질서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가인은 그 질서를 뒤집었지만, 주님께서는 그렇다고 신앙 자체가 완전히 소멸되도록 두지 않으십니다. 신앙을 특별히 구별하여 보존하십니다.

 

결국 AC.392에서 가인의 는 주님의 섭리가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 주는 표상으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인간은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내려갔지만, 주님께서는 그 잘못된 상태 안에서도 보존할 수 있는 것을 찾으시고 그것을 구별하여 지키십니다. 인간의 악을 선이라고 부르시지는 않지만, 악 때문에 아직 남아 있는 모든 선과 진리까지 함께 멸망하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가인을 죽이는 자는 누구든지 벌을 배나 받으리라여호와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셨다는 말씀은 단순한 범죄자 보호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속뜻에서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는 심각하게 손상된 교회 상태 속에서도 주님께서 신앙을 특별히 구별하여 보존하시는 섭리를 보여 줍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목적은 가인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인간 안에서 생명에 속한 것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도록 지키시고 마침내 선과 진리의 질서가 다시 이어질 길을 남겨 두시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AC.393, 창4:15,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홍수 후 교회의 양심 - 신앙과 체어리티의 새로운 질서’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3지금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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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1, 창4:14, ‘악과 거짓은 그 자체 안에 형벌을 품고 있습니다 - 악령들이 서로 두려워하는 이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91악과 거짓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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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4:14)

 

AC.391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자들이 모든 사람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저세상에서 악령들의 상태를 보면 가장 분명하게 있습니다. 스스로 모든 체어리티를 빼앗아 버린 자들은 이리저리 유리하며 이곳에서 저곳으로 도망합니다. 그들이 어디로 가든 어떤 공동체에 가게 되면, 공동체는 그들이 오는 것만으로도 즉시 그들의 성질을 알아차립니다. 저세상에는 그러한 퍼셉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들을 쫓아낼 아니라 심하게 벌하기도 하며, 수만 있다면 죽이려 만큼 적의를 품습니다. 악령들은 서로 벌하고 괴롭히는 데서 가장 즐거움을 느끼며, 그것이 그들에게는 최고의 만족입니다. 지금까지는 악과 거짓 자체가 이러한 일의 원인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누구든지 다른 사람에게 바라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오기 때문입니다. 거짓은 자체 안에 거짓의 형벌을 가지고 있고, 악은 자체 안에 악의 형벌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형벌들에 대한 두려움도 자체 안에 가지고 있습니다. The state of evil spirits in the other life shows most clearly that those who are in evil and falsity are afraid of everybody. Those who have deprived themselves of all charity wander about, and flee from place to place. Wherever they go, if to any societies, these at once perceive their character by their mere coming, for such is the perception that exists in the other life; and they not only drive them away, but also severely punish them, and with such animosity that they would kill them if they could. Evil spirits take the greatest delight in punishing and tormenting one another; it is their highest gratification. Not until now has it been known that evil and falsity themselves are the cause of this, for whatever anyone desires for another returns upon himself. Falsity has in itself the penalty of falsity, and evil has in itself the penalty of evil, and consequently they have in themselves the fear of these penalties.

 

해설

AC.391은 앞의 AC.390에서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자들은 죽임을 당할 것에 대한 끊임없는 두려움 가운데 있다고 한 설명을 스베덴보리가 사후세계에서 관찰한 악령들의 상태를 통해 더욱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모든 체어리티를 스스로 빼앗아 버린 악령들은 이곳저곳을 유리하며 계속 도망합니다. 어떤 공동체에 들어가도 그곳의 영들은 그들이 오는 것만으로 그들의 성질을 알아차리고 그들을 쫓아내며 심하게 벌합니다. 그런데 이번 번호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이러한 영계의 장면 자체보다 그 장면을 설명하는 마지막 원리입니다. ‘거짓은 자체 안에 거짓의 형벌을 가지고 있고, 악은 자체 안에 악의 형벌을 가지고 있다.이것이 AC.391의 중심입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저세상에는 사람의 내적 성질을 알아차리는 퍼셉션이 있다고 말합니다. 자연계에서는 사람의 내면이 외적인 말과 행동에 의해 상당 부분 가려질 수 있습니다. 악한 의도를 품으면서도 친절하게 말할 수 있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면서도 선한 목적을 가진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묘사하는 영계에서는 이러한 내적 성질이 훨씬 직접적으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악령이 어떤 공동체에 접근하면 그 공동체는 그들이 오는 것만으로도그 성질을 알아차린다고 합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이것을 영계에 존재하는 퍼셉션이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이 perception은 우리가 태고교회의 퍼셉션을 설명할 때 사용하는 교회시대적 의미와 문맥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번에는 사후세계에서 영들의 성질을 알아차리는 영적 지각을 설명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퍼셉션이라는 단어가 나왔으므로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완전히 동일한 현상이다라고 곧바로 등치하기보다, 같은 어휘가 영적 상태를 직접 알아차리는 능력이라는 넓은 의미망 안에서 사용되고 있다고 보는 편이 안전합니다.

 

그런데 악령들을 몰아내고 벌하는 자들도 악령들이며, 스베덴보리는 그들이 서로 벌하고 괴롭히는 데서 가장 즐거움을 느낀다고까지 말합니다. 이 장면은 상당히 충격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천사들이 악령들을 고문한다거나 주님께서 악령들에게 고통을 주도록 명령하신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악 자체의 성질을 보여 주는 묘사입니다. 악은 자기만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수단으로 삼으며, 지배하고 해치고 보복하는 데서 즐거움을 찾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사랑을 선택한 영들이 함께 있게 되면 각자가 다른 사람에게 행하려는 바로 그 악이 서로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바로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누구든지 다른 사람에게 바라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온다고 합니다. 이것을 외부에서 작동하는 기계적인 인과응보 법칙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면 자연계에서 반드시 똑같은 일을 당한다는 공식도 아닙니다. 문맥은 악의 사랑이 지배하는 영적 공동체의 질서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괴롭히고 파괴하려는 사랑 안에 있다면, 나와 같은 사랑 안에 있는 자들 역시 나를 그렇게 대하려 합니다. 결국 내가 다른 사람에게 향하게 한 악의 성질이 내가 살아가는 영적 환경의 성질이 되어 나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짓은 자체 안에 거짓의 형벌을 가지고 있고, 악은 자체 안에 악의 형벌을 가지고 있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형벌이 악과 전혀 관계없이 밖에서 덧붙여지는 것이 아니라 악 자체가 파괴적인 결과를 품고 있습니다. 미움은 관계를 파괴하고, 속임은 신뢰를 파괴하며, 지배욕은 서로의 자유를 파괴합니다. 거짓은 사람이 현실과 진리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고, 그 잘못된 판단에 따라 더 깊은 악으로 들어가게 합니다. 따라서 악과 거짓은 그 자체 안에서 고통과 불안과 충돌의 원인을 만들어 냅니다.

 

이 원리는 주님의 형벌을 이해할 때도 매우 중요합니다. 말씀의 문자에는 여호와께서 진노하시고 벌하시며 멸하시는 것처럼 보이는 표현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더 깊은 설명에서는 주님은 선 자체, 사랑 자체, 자비 자체이시며 누구에게도 악을 행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이 악을 선택하고 그 악의 질서 안으로 들어갈 때 그 악 자체가 가진 결과를 경험합니다. 물론 주님의 섭리는 그 결과조차 가능한 한 제한하고 선한 목적을 위해 다스리지만, 악의 고통을 주님에게서 나오는 악으로 돌려서는 안 됩니다.

 

AC.391의 마지막에 따라서 그들은 형벌들에 대한 두려움도 자체 안에 가지고 있다고 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악령이 다른 악령을 두려워하는 까닭은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품고 있는 악의 성질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기회만 있으면 상대를 속이고 지배하고 괴롭히려 하므로 상대도 자신에게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끊임없는 불안을 만들어 냅니다. 체어리티가 없으면 서로를 연결하는 사랑과 자비의 결속이 없고, 결국 각자가 서로에게 잠재적인 위협이 됩니다.

 

이것은 AC.390쫓는 자가 없어도 도망한다는 말씀의 이미지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두려움의 가장 깊은 원인이 외부의 추격자가 아니라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악과 거짓은 세상을 적대적인 곳으로 보게 하고, 다른 사람의 의도를 의심하게 하며,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품고 있는 악을 다른 사람도 자신에게 품고 있을 것이라고 느끼게 합니다. 그러므로 외부의 위험을 제거한다고 해서 그 두려움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근원이 되는 사랑의 성질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설명을 자연계의 모든 불안이나 두려움에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불안장애, 트라우마, 질병, 실제적인 위험 등으로 두려움을 겪는 사람에게 당신 안에 악과 거짓이 있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라고 적용하는 것은 AC.391의 문맥을 벗어난 해석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설명하는 것은 체어리티를 완전히 빼앗아 버리고 악과 거짓을 자기 삶의 지배적인 원리로 삼은 악령들의 영적 상태입니다. 따라서 이 번호는 다른 사람의 심리 상태를 판단하는 잣대가 아니라 악 자체의 내적 성질을 이해하는 교리로 읽어야 합니다.

 

또한 이번 번호의 서로 죽이려 한다는 묘사도 자연계의 모든 악한 사람이 실제 살인을 원한다는 뜻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앞의 AC.374AC.390에서 살펴보았듯이 스베덴보리는 미움의 가장 깊은 성질 안에 상대의 선과 생명을 파괴하려는 방향이 있다고 봅니다. 영계에서는 외적인 사회 규범과 체면 때문에 감추어졌던 지배적인 사랑이 더 직접적으로 드러나므로 그 성질이 더욱 노골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 그의 설명입니다.

 

AC.389-391을 함께 읽으면 하나의 매우 일관된 구조가 보입니다. AC.389에서는 체어리티를 잃으면 주님과의 결합에서 분리되고 자기의 것에 맡겨지며, 그 결과 생각은 거짓이 되고 의지는 악이 되어 생명에 속한 것을 소멸시킨다고 했습니다. AC.390에서는 그러한 악과 거짓의 상태가 끊임없는 두려움과 도망으로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91에서는 사후세계의 악령들을 통해 그 원인을 더욱 깊이 설명합니다. 악과 거짓은 외부에서 형벌이 붙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 안에 형벌과 그 형벌에 대한 두려움을 품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제 곧 나올 가인의 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가인을 위협하는 악과 거짓은 주님께서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가인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상태로 내려가면서 악과 거짓의 파괴적인 질서에 노출된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상태를 방치하여 남아 있는 모든 것까지 파괴되게 하지 않으시고 가인을 보존하십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표는 악을 승인하는 표가 아니라, 악과 거짓 자체가 가진 파괴력으로부터 아직 보존되어야 할 것을 지키시는 주님의 섭리라는 방향으로 이해할 준비가 더욱 갖추어집니다.

 

결국 AC.391은 형벌에 대한 매우 중요한 관점을 제시합니다. 악의 가장 깊은 형벌은 주님께서 악인에게 악을 돌려주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악 자체가 사람을 주님과 이웃에게서 분리하고 서로를 적으로 만들며 두려움과 고통의 세계를 형성하는 데 있습니다. 반대로 체어리티는 주님과 사람을 결합시키고 사람과 사람을 결합시킵니다. 그러므로 천국과 지옥의 차이는 단순히 한쪽에는 상이 있고 다른 쪽에는 벌이 있다는 차이보다 훨씬 깊습니다. 하나는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자비 안에서 서로의 선을 원하는 질서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사랑과 악 안에서 서로를 해치려는 질서입니다. AC.391의 악령들이 경험하는 두려움과 형벌은 바로 그들이 선택하고 사랑한 악의 질서가 어떤 세계를 만들어 내는지를 보여 줍니다.

 

 

 

AC.392, 창4:15,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시다 - 분리된 신앙까지 보존하시는 이유’ (AC.392-396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And Jehovah said unto 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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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0, 창4:14,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사람은 왜 끊임없이 두려워하는가?’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90악과 거짓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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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4:14)

 

AC.390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자들은 죽임을 당할 것에 대한 끊임없는 두려움 가운데 있는데, 이는 레위기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됩니다. Those who are in evil and falsity are in continual dread of being slain, as is thus described in Moses:

 

33내가 너희를 여러 민족 중에 흩을 것이요 내가 칼을 빼어 너희를 따르게 하리니 너희의 땅이 황무하며 너희의 성읍이 황폐하리라, 36너희 남은 자에게는 원수들의 땅에서 내가 그들의 마음을 약하게 하리니 그들은 바람에 불린 잎사귀 소리에도 놀라 도망하기를 칼을 피하여 도망하듯 것이요 쫓는 자가 없어도 엎드러질 것이라 37그들은 쫓는 자가 없어도 앞에 있음같이 서로 짓밟혀 넘어지리니 너희가 원수들을 맞설 힘이 없을 것이요 (26:33, 36-37) Your land shall be a desolation, and your cities a waste, and upon them that are left of you I will bring softness into their heart in the land of their enemies, and the sound of a driven leaf shall chase them, and they shall flee as fleeing from a sword, and they shall fall when none pursueth, and shall stumble everyone upon his brother, as it were before a sword, when none pursueth. (Lev. 26:33, 3637)

 

이사야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In Isaiah:

 

16땅끝에서부터 노래하는 소리가 우리에게 들리기를 의로우신 이에게 영광을 돌리세 하도다 그러나 나는 이르기를 나는 쇠잔하였고 나는 쇠잔하였으니 내게 화가 있도다 배신자들은 배신하고 배신자들이 크게 배신하였도다 17땅의 주민아 두려움과 함정과 올무가 네게 이르렀나니 18두려운 소리로 말미암아 도망하는 자는 함정에 빠지겠고 함정 속에서 올라오는 자는 올무에 걸리리니 이는 위에 있는 문이 열리고 땅의 기초가 진동함이라 19땅이 깨지고 깨지며 땅이 갈라지고 갈라지며 땅이 흔들리고 흔들리며 20땅이 취한 같이 비틀비틀하며 원두막같이 흔들리며 위의 죄악이 중하므로 떨어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리라 (24:16-20) The treacherous deal treacherously, yea, in the treachery of the treacherous they deal treacherously.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he who fleeth from the noise of the fear shall fall into the pit, and he that cometh up out of the midst of the pit shall be taken in the snare; the transgression thereof shall be heavy upon it, and it shall fall, and not rise again. (Isa. 24:1620)

 

예레미야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In Jeremiah: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두려움을 사방에서 네게 오게 하리니 너희 사람이 앞으로 쫓겨 나갈 것이요 도망하는 자들을 모을 자가 없으리라 (49:5) Behold, I bring a dread upon thee, from all thy circuits shall ye be driven out every man toward his faces, and none shall gather up him that wandereth. (Jer. 49:5)

 

이사야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In Isaiah:

 

16이르기를 아니라 우리가 타고 도망하리라 하였으므로 너희가 도망할 것이요 이르기를 우리가 빠른 짐승을 타리라 하였으므로 너희를 쫓는 자들이 빠르리니 17 사람이 꾸짖은즉 사람이 도망하겠고 다섯이 꾸짖은즉 너희가 도망하고 너희 남은 자는 겨우 산꼭대기의 깃대 같겠고 산마루 위의 기치 같으리라 하셨느니라 (30:16-17) We will flee upon the horse, therefore shall ye flee; and, we will ride upon the swift, therefore shall they that pursue you be rendered swift; one thousand shall flee at the rebuke of one, at the rebuke of five shall ye flee. (Isa. 30:1617)

 

말씀의 구절들과 밖의 여러 구절에서 거짓과 가운데 있는 자들은 도망하는 자들(fleeing), 그리고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하는 자들(fear of being slain) 묘사됩니다. 그들은 자기를 보호해 자가 아무도 없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자들은 모두 이웃을 미워하므로 서로 죽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In these and other passages of the Word, those who are in falsity and evil are described asfleeing,and as infear of being slain. They are afraid of everybody, because they have no one to protect them. All who are in evil and falsity hate their neighbor, so that they all desire to kill one another.

 

해설

AC.390은 바로 앞 AC.389에서 설명한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의 의미를 말씀의 여러 구절을 통해 확증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죽임을 당할 것에 대한 끊임없는 두려움가운데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레위기, 이사야, 예레미야에서 사람들이 쫓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고, 작은 소리에도 놀라며, 두려움에서 달아나다가 함정에 빠지고, 사방으로 흩어지는 장면들을 가져옵니다. 이 인용들의 공통점은 실제로 누군가가 그들을 죽이려고 쫓아오는가보다 쫓는 자가 없어도 도망한다는 데 있습니다. 두려움의 근원이 외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내적 상태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26:33,36-37은 이 점을 특히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바람에 불린 잎사귀 소리만 들어도 칼을 피해 달아나는 것처럼 도망하고, 심지어 쫓는 자가 없어도엎드러집니다. 실제 위험의 크기와 그들이 느끼는 공포가 일치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상태 자체가 사람 안에 불안을 만들기 때문에 외부의 작은 자극도 자신을 위협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24:16-20에서도 같은 구조가 나타납니다. 두려움에서 벗어나려고 도망하지만 함정에 빠지고, 함정에서 올라오면 다시 올무에 걸립니다. 이것은 단순히 불운이 계속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사람이 자기 힘으로 안전을 확보하려 할수록 또 다른 두려움 속으로 들어가는 영적 상태를 묘사합니다. 주님과의 결합에서 오는 내적인 안전을 잃었기 때문에 장소를 바꾸거나 외적인 조건을 바꾸는 것만으로는 두려움의 근본 원인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49:5두려움이 사방에서 온다는 표현도 같은 상태를 보여 줍니다. 사방이 모두 위협으로 느껴지고 각자가 흩어지지만 도망하는 자들을 모을 가 없습니다. 그리고 사30:16-17에서는 빠른 것을 타고 도망하겠다고 하지만 오히려 쫓는 자들이 더 빨라지고, 한 사람의 꾸짖음에도 천 사람이 도망합니다. 자기 힘으로 위험에서 더 빨리 벗어나려 할수록 두려움도 함께 빨라지는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모든 장면을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사람의 내적 상태를 보여 주는 말씀의 표상으로 읽습니다.

 

그렇다면 왜 악과 거짓은 이러한 두려움을 만들어 냅니까? AC.389가 이미 그 근본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사람이 체어리티를 스스로 빼앗아 버리면 자신을 주님에게서 분리하고, 주님과 분리되면 자기 자신, 곧 자기의 것에 맡겨집니다. 그 상태에서는 생각이 거짓으로, 의지가 악으로 향합니다. 이제 AC.390은 그 상태가 인간관계에서는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여 줍니다. ‘자기를 보호해 자가 아무도 없다고 느끼게 되고, 그래서 모든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여기서 자기를 보호해 자가 아무도 없다는 말은 단순히 사회적으로 친구나 후원자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더 깊게는 주님과의 결합에서 오는 영적 보호와 질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체어리티는 사람을 주님과 결합시키는 동시에 이웃과도 결합시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단순히 자기에게 유익한가 해로운가에 따라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체어리티가 사라지면 관계의 중심에 자기 사랑이 놓이게 되고, 다른 사람도 경쟁자나 위협으로 보이기 쉬워집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을 해칠 수 있는 마음으로 바라보므로 다른 사람도 자신을 그렇게 바라볼 것이라고 두려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마지막에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자들은 모두 이웃을 미워하므로 서로 죽이고자 한다고 매우 강하게 말합니다. 이것은 악한 상태에 있는 모든 사람이 자연계에서 실제 살인을 계획한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AC.374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스베덴보리는 미움을 살인의 내적 뿌리와 연결합니다. 외적인 법, 명예, 손실에 대한 두려움, 사회적 규범 등의 제약 때문에 손으로 살인을 행하지 않을 수 있지만, 상대가 없어지기를 바라거나 그의 선을 파괴하려 하고 그의 불행을 기뻐하는 미움 속에는 영적인 의미에서 상대를 제거하려는 성질이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AC.390두려움도 모든 자연적인 두려움에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위험한 상황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인간의 정상적인 보호 반응입니다. 질병이나 사고, 전쟁이나 범죄 앞에서 두려움을 느낀다고 해서 그 사람이 악과 거짓 가운데 있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이번 번호에서 말하는 것은 악과 거짓이 지배적인 원리가 되었을 때 생기는 영적인 두려움입니다. 실제로 쫓는 자가 없어도 모두를 적으로 느끼고, 자기 안의 미움과 불신 때문에 다른 사람도 자신을 해칠 것이라고 끊임없이 의심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 점에서 가인의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도 새롭게 보입니다. 문자적으로는 살인을 저지른 가인이 이제 자신도 살해당할까 두려워하는 장면입니다. 속뜻에서는 체어리티를 소멸시키고 주님과의 결합에서 멀어진 신앙이 악과 거짓에 의해 자신에게 남아 있는 생명마저 파괴될 것을 두려워하는 상태입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였고 이제 자신이 죽임당할 것을 두려워합니다. 체어리티를 파괴하는 원리가 결국 자기 자신에게도 죽음의 위협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번호의 목적은 악인은 항상 공포 속에 사니 그것이 벌이다라고 말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악과 거짓 자체가 왜 평안과 안전을 만들어 낼 수 없는지를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악은 다른 사람과의 결합을 깨뜨리고, 거짓은 현실과 진리에 대한 시야를 왜곡합니다. 그 결과 사람은 점점 자기 자신 안에 갇히고 다른 사람을 신뢰하지 못하며 모든 것을 자기에게 대한 위협으로 해석하게 됩니다. 악과 거짓의 형벌은 외부에서 임의로 덧붙여지는 것만이 아니라 그 자체 안에 이미 파괴와 두려움의 결과를 품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는 결합을 만듭니다. 이것이 모든 자연적 위험을 없애 주거나 신앙인이 어떤 두려움도 느끼지 않게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영적인 중심에서는 차이가 생깁니다. 자기 자신만을 의지하여 모든 사람을 잠재적 위협으로 바라보는 대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이웃과의 관계를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AC.389체어리티가 사람을 주님과 결합시킨다고 한 뒤 AC.390이 두려움을 설명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대조를 보여 줍니다.

 

이번에 인용된 네 성경 구절도 각각 독립적인 새로운 교리를 제시하기 위해 나온 것이 아닙니다. 레위기의 쫓는 자가 없어도 도망함’, 이사야의 두려움에서 도망하다 함정에 빠짐’, 예레미야의 사방에서 임하는 두려움’, 다시 이사야의 사람의 꾸짖음에도 사람이 도망함은 모두 하나의 상태를 서로 다른 모습으로 보여 줍니다.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사람은 내적인 결합과 보호를 잃었기 때문에 외부 전체를 위협으로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네 인용은 하나의 증거 묶음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결국 AC.390은 가인의 두려움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설명합니다. 가인을 두렵게 만드는 가장 깊은 원인은 밖에서 그를 찾아다니는 어떤 적이 아니라, 체어리티를 소멸시키고 주님과의 결합에서 멀어진 그의 영적 상태입니다. 악과 거짓은 사람을 다른 사람과 분리하고, 그 분리는 불신과 두려움을 낳으며, 마침내 남아 있는 생명까지 파괴하려 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지점에서 다음 이야기는 예상 밖의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가인이 죽임당할 것을 두려워할 때 주님은 그를 버려두시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를 주어 보존하십니다. 따라서 AC.390가인의 직전에서 인간의 두려움과 주님의 보존을 극명하게 대비시키는 마지막 준비라고 볼 수 있습니다.

 

 

 

AC.391, 창4:14, ‘악과 거짓은 그 자체 안에 형벌을 품고 있습니다 - 악령들이 서로 두려워하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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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9, 창4:14,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 체어리티를 잃으면 왜 악과 거짓에 맡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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