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 내용은 해당 유튜브를 먼저 보셔야 이해가 되니 참고하세요.

 

 

 

 

이 에피소드는 매우 인상적이지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몇 가지 중요한 점을 분별하여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응급상황에서 자녀를 살리려는 부모의 사랑은 선한 정서에서 나온 것이지만, 그 선한 정서가 곧바로 모든 행동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장로는 자신의 돈이 아니라 교회의 돈을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절박한 상황이라 하더라도 허락 없이 교회 재정을 개인 용도로 옮긴 것은 객관적으로는 잘못입니다. 본인도 그것을 인정하고 끝까지 변명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오히려 그의 양심이 살아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의 행위보다 먼저 그 행위의 ‘의도(intention)’와 ‘사랑(love)’을 봅니다. 같은 행동이라도 자기 이익을 위한 것인지, 타인을 위한 것인지에 따라 영적 성격은 전혀 달라집니다. 만약 이 장로가 교회 돈을 이용해 개인 사업을 하거나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 했다면 그것은 명백한 자기애와 탐욕에서 나온 것이며, 영적으로도 매우 위험한 상태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경우는 자신의 생명을 연장하거나 사치를 누리려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자녀를 살리려는 절박함 속에서 나온 행동이었습니다. 물론 이것이 규정 위반을 없애지는 않지만, 주님께서는 외적인 행동뿐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사랑의 질을 함께 보십니다. 이것이 말씀의 속뜻이 끊임없이 가르치는 심판의 원리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스베덴보리는 ‘선한 목적은 악한 수단을 거룩하게 만들지 않는다’는 점도 분명히 말합니다. 천국에서는 선과 진리가 언제나 함께 갑니다. 사랑만 있고 진리가 없으면 맹목적인 열심이 되고, 진리만 있고 사랑이 없으면 냉혹한 정의가 됩니다. 이 장로의 행동은 사랑은 있었지만 진리의 질서를 잠시 벗어난 경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끝까지 ‘제가 잘못했습니다’, ‘징계를 받아도 할 말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태도가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이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는 순간, 그 오류는 거듭남의 재료가 되기 시작합니다. 반대로 잘못을 합리화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자기애가 선을 집어삼키기 시작합니다.

 

한편 당회의 모습도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흥미롭게 볼 수 있습니다. 처음 장로들은 모두 원칙을 말합니다. 그것은 틀린 말이 아닙니다. 교회 재정은 거룩한 것이며, 신뢰는 반드시 지켜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처음에는 사건만 보았고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사건의 전말을 듣고 나서야 판단이 달라집니다. 이것은 단순히 감정적으로 약해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리가 더 많은 사실을 알게 되면서 더욱 완전한 판단을 하게 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지혜란 많은 사실을 하나의 선 안에서 질서 있게 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진리는 사실을 충분히 알수록 더욱 공정해집니다.

 

여기서 가장 주목할 사람은 당회장입니다. 그는 규정을 무시하자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실을 밝힌 뒤에 판단하자고 말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자주 말하는 ‘공정한 판단(just judgment)’의 정신과 상당히 닮아 있습니다. 주님은 결코 성급하게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의 외적인 행동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전 생애, 의도, 반복된 삶의 방향까지 모두 보신 후에 심판하십니다. 천국의 천사들도 누군가를 단 한 사건으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전체적인 사랑이 무엇인지, 삶이 어느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를 봅니다.

 

당회의 최종 결정도 흥미롭습니다. 공식 징계는 하지 않았지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넘어가지도 않았습니다. 재정부에서는 물러나게 하고 일정 기간 모든 직분을 내려놓게 했습니다. 이것은 사랑과 질서를 함께 살리려는 시도였습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으로 하면, 자비는 결코 질서를 파괴하지 않으며, 참된 질서는 언제나 자비를 품고 있습니다. 주님의 섭리 역시 죄를 죄가 아니라고 하지 않으시면서도 죄인을 회복시키기 위해 가장 적절한 길을 마련하십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마지막입니다. 장로는 직분을 다시 받을 기회가 왔지만 스스로 사양합니다. 그는 직분보다 주님과의 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스베덴보리라면 이것을 단순한 겸손 이상의 변화로 보았을 것입니다. 사람은 처음에는 직분을 사랑하고, 다음에는 직분을 통한 명예를 사랑하며, 마지막에는 직분과 상관없이 선 자체를 사랑하게 됩니다. 이 장로는 외적인 명예를 잃으면서 오히려 내적인 평안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이전보다 더 자유로운 얼굴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거듭남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람은 무언가를 더 많이 얻어서 평안을 얻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proprium이 한 겹 벗겨질 때 비로소 평안을 얻게 됩니다.

 

결국 이 에피소드는 ‘원칙이냐 사랑이냐’의 대립을 말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참된 원칙은 사랑을 살리기 위해 존재하며, 참된 사랑은 결코 원칙을 무너뜨리지 않습니다. 주님의 섭리는 언제나 이 둘을 함께 이루십니다. 사람의 눈은 흔히 규정과 자비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려 하지만, 주님의 지혜는 질서를 보존하면서도 한 영혼을 잃지 않는 길을 찾으십니다. 그래서 천국의 정의는 냉혹하지 않고, 천국의 자비는 무질서하지 않습니다. 이 균형이야말로 주님의 통치가 인간의 판단과 가장 크게 다른 점이며, 이 이야기 속에서 가장 깊이 묵상해야 할 영적 교훈이라 할 수 있습니다.

 

 

 

SY.5, ‘찬성 125표, 반대 193표’, 20년 섬긴 교회에서 쫓겨난 목사의 고백

※ 아래 내용은 해당 유튜브를 먼저 보셔야 이해가 되니 참고하세요. 이 에피소드는 앞선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상당한 울림을 주지만, 실제 목회 현실을 아는 사람의 눈으로 보면 몇 가지 어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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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3,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74세 목사님, 교회 문 닫는 날 일어난 일

※ 아래 내용은 해당 유튜브를 먼저 보셔야 이해가 되니 참고하세요. 이 이야기를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읽어 보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정말 있었던 실화인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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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를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읽어 보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정말 있었던 실화인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이 이야기가 전달하려는 영적 원리가 무엇인가?’를 보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성경을 읽을 때에도 역사적 사실 여부보다 그 안에 담긴 영적 의미를 더 중요하게 보았습니다. 같은 원칙은 이런 간증이나 에피소드에도 어느 정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한 편의 목회 간증으로 읽되, 그 안에서 인간과 하나님, 절망과 희망, 섭리와 자유 사이의 관계를 함께 살펴보는 것이 유익합니다.

 

첫째,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작은 충성은 결코 헛되지 않다’는 점입니다. 이야기 속 목사는 18년 동안 거의 아무런 외적 성과 없이 시골 교회를 지켰고, 세 명뿐인 성도들과 함께 신실하게 예배드렸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사람의 숫자나 외적인 성공이 아니라, 사람이 맡겨진 자리에서 어떤 사랑으로 살아가는가 하는 점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은 결과를 통제할 수 없지만, 자신의 의지와 삶의 방향은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진실한 사랑에서 비롯된 작은 선행 하나도 영적인 세계에서는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둘째, 세 명의 집사님이 차례로 세상을 떠나는 장면도 깊이 생각해 볼 만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이런 일을 실패나 상실로만 받아들이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읽다 보면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상태의 변화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이 끝나는 순간, 사람은 자신에게 가장 알맞은 영적 공동체로 옮겨집니다. 따라서 사랑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며 살아간 사람이 평안히 세상을 떠났다면, 그것을 단순한 비극으로만 볼 이유는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각 사람을 가장 적절한 때에 다음 삶으로 인도하신다고 보는 편이 스베덴보리의 사상에 더 가깝습니다.

 

셋째, 교회가 텅 비고 혼자 예배드리는 장면은 외적인 교회와 내적인 교회의 차이를 생각하게 합니다. 사람은 흔히 교인의 수나 건물의 규모를 보고 교회의 성공 여부를 판단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진정한 교회는 건물이나 조직이 아니라, 진리를 사랑하고 그것에 따라 살려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인이 한 사람도 없던 예배도, 주님을 향한 사랑과 순종으로 드려졌다면 결코 헛된 예배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넷째, 마지막 예배를 준비하던 날 한 여성이 찾아오는 장면은 많은 사람에게 가장 감동적인 부분입니다. 다만 여기에서는 조금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야기에서는 마치 하나님께서 그 여성을 정확히 그 시간에 보내신 것처럼 묘사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주님의 섭리를 매우 강하게 말하지만, 동시에 인간의 자유를 조금도 침해하지 않는 섭리라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는 사람을 강제로 움직이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자유롭게 선택하는 모든 과정 속에서도 가장 선한 결과가 나오도록 끊임없이 인도하십니다. 따라서 이 만남은 강제된 기적이라기보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의 자유로운 삶을 주님께서 하나의 선한 방향으로 연결하신 섭리로 이해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다섯째, 자살을 결심했던 여성이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장면 역시 스베덴보리의 관점과 잘 어울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의 생명은 오직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며, 사람이 아무리 절망 속에 있어도 주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선한 길을 마련하려 하신다고 말합니다. 물론 현실에서는 모든 사람이 이렇게 극적으로 회복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오랜 시간이 걸리고, 어떤 사람은 여러 번 넘어집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는 어느 누구도 쉽게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점입니다. 사람의 눈에는 끝처럼 보여도, 주님은 여전히 새로운 가능성을 준비하고 계실 수 있습니다.

 

여섯째,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작은 교회가 다시 살아나는 장면은 희망을 주는 결말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라면 여기에서도 교회가 커진 것 자체를 가장 큰 축복으로 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교회가 여전히 두세 사람뿐이었다 하더라도, 그 사람들이 진실한 사랑 가운데 있었다면 이미 충분히 살아 있는 교회였을 것입니다. 반대로 수천 명이 모여도 사랑과 진리가 없다면 외형만 남은 교회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야기의 핵심은 교인이 많아졌다가 아니라, 절망하던 한 사람이 다시 삶을 선택했고, 그 사랑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어졌다는 데 있습니다.

 

결국 이 이야기에서 가장 가치 있는 메시지는 끝이라고 생각한 자리에서 새로운 시작이 열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특정 교단이나 신학을 떠나 많은 그리스도인이 공감할 수 있는 주제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언어로 표현하면, 주님의 섭리는 언제나 사람을 더 선한 상태로 이끌기 위해 일하며, 사람의 자유를 존중하면서도 끊임없이 생명의 길을 마련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눈앞의 실패만 보지만, 주님은 그 실패까지도 더 큰 선을 위한 과정으로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에피소드를 읽으며 가장 오래 남는 장면은 교회가 다시 붐비게 된 마지막 장면이 아니라,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예배당 문이 조용히 열리던 순간입니다. 그 문은 단순히 한 사람의 출입문이 아니라, 절망이 희망으로, 포기가 사명으로, 끝이 새로운 시작으로 바뀌는 전환점을 상징하는 장면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변화는 특별한 기적을 경험한 사람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도 자신의 자리에서 조용히 선을 선택하며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삶 속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영적 원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SY.4, ‘교회 계좌에서 4천만 원이 개인 계좌로 이체됐습니다’

※ 아래 내용은 해당 유튜브를 먼저 보셔야 이해가 되니 참고하세요. 이 에피소드는 매우 인상적이지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몇 가지 중요한 점을 분별하여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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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2, ‘전 재산 10억 헌금한 장로가 2년 뒤 법원에 간 이유’

※ 아래 내용은 해당 유튜브를 먼저 보셔야 이해가 되니 참고하세요. 이 이야기의 핵심은 ‘10억을 잃은 장로’가 아닙니다. 말씀의 속뜻으로는 ‘사람을 믿던 신앙이 무너지고, 주님을 믿는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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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의 핵심은 ‘10억을 잃은 장로’가 아닙니다. 말씀의 속뜻으로는 ‘사람을 믿던 신앙이 무너지고, 주님을 믿는 신앙으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입니다. 처음에는 너무 비극처럼 보이지만, 영적인 눈으로 보면 하나의 시험(temptation)의 이야기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시험을 통해 이 사람의 신앙을 더 깊고 순결한 상태로 인도하십니다.

 

주인공은 교회에 처음 나갔을 때 진심으로 주님을 찾았습니다. 외로운 청년 시절, 말씀을 들으며 눈물을 흘렸고, 교회에서 아내를 만나고, 가정을 이루고, 평생 교회를 섬겼습니다. 이러한 모든 시작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그의 마음속에 심어 두신 선한 애정과 리메인스(remains)가 역사한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아주 미묘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교회가 제 삶 자체였어요.’ 이 한 문장은 말씀의 속뜻으로 보면 매우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교회 자체가 잘못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문제는 교회라는 외적 형식과 주님 자신이 서서히 동일시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교회는 건물이나 조직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진리를 따라 살려는 사람들 안에 있다고 반복하여 말합니다. 외적 교회는 내적 교회를 위한 그릇이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이 장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주님을 섬긴다’는 것과 ‘교회를 떠받친다’는 것을 거의 같은 의미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부르시면 언제든지 갔다’, ‘교회를 뒷받침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 믿었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악해서가 아니라 아직 미성숙한 신앙의 모습입니다.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마음은 더욱 교회에 의지하게 됩니다. 집은 텅 비어 있었지만, 교회는 그 빈자리를 메워 주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봉사도 더 열심히 하고, 새벽기도도 더 열심히 하고, 당회도 빠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말씀의 속뜻으로 보면, 이 시기는 동시에 가장 위험한 시기이기도 합니다. 슬픔 속에 있는 사람은 위로를 간절히 찾기 때문입니다. 그 자체는 자연스럽지만, 그 위로가 주님에게서 오는지, 사람에게서 오는지를 분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바로 그때 건축헌금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집을 짓는 일에 하나님은 반드시 채워 주십니다’, ‘먼저 내어 놓으면 두세 배로 갚아 주십니다’, ‘하늘나라에 쌓는 보물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닙니다. 사람의 가장 깊은 사랑을 움직이는 방식입니다. 이 장로는 돈 때문에 움직인 것이 아니라 아내를 향한 사랑, 주님을 잘 섬기고 싶다는 소원, 40년 동안 교회를 섬긴 충성, 장로로서의 책임감이 하나로 묶여 움직였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선한 애정이 주님께 직접 향하지 않고, 한 사람의 권위와 결합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악은 언제나 선한 것을 정면으로 공격하기보다, 선한 것을 이용한다고 설명합니다. 자기 사랑은 거짓말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사랑과 경건한 마음까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용할 줄 압니다. 그래서 이 장면은 단순한 헌금 이야기가 아니라 ‘거룩한 것을 이용하는 자기애’라는 영적 주제를 보여 주는 장면으로 읽어야 합니다.

 

이 장로가 결국 10억 원을 헌금하게 되는 과정은 단순히 ‘사기를 당했다’는 사건으로만 볼 수 없습니다. 말씀의 속뜻으로는, 인간 안에 있는 선한 의지와 자기 판단이 어떻게 뒤섞일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매우 중요한 장면입니다. 그는 억지로 돈을 빼앗긴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유 가운데, 그것도 주님을 사랑한다고 믿는 마음으로 결정했습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더욱 깊은 시험이 시작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은 거듭나는 동안 자신의 선과 주님의 선을 구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처음에는 누구나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선’을 행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주님께서는 그 사람이 붙들고 있던 것들을 하나씩 흔드십니다. 그것은 사람의 교만을 꺾기 위해서가 아니라, 참된 선의 근원이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심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 장로에게는 그것이 ‘교회’였습니다. 그는 교회를 사랑했고, 목사도 사랑했고, 성도들도 사랑했습니다. 그 자체는 아름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의 신앙의 중심축이 주님이 아니라 교회라는 외적 제도에 너무 강하게 묶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기둥이 흔들리자 그의 세계 전체가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건축비가 예상과 다르게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듣게 됩니다. 처음에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럴 리가 없다’, ‘분명 오해일 것이다.’ 그는 오히려 소문을 막으려 했습니다. 이것은 오랫동안 신뢰해 온 사람을 쉽게 의심하지 않는 자연스러운 마음입니다. 하지만 의혹은 점점 사실로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건축헌금이 교회 건축보다 다른 용도로 사용되었고, 자신이 절대 신뢰했던 목회자가 그 중심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여기서 이 장로가 받은 충격은 단순히 돈 때문이 아닙니다. 돈보다 훨씬 큰 것이 무너졌습니다. ‘내가 평생 믿었던 것이 무엇이었는가’, ‘내 인생은 무엇이었는가’, ‘내 신앙은 거짓이었는가.’ 이 질문들이 한꺼번에 밀려온 것입니다. 영적으로 보면 이것은 외적인 교회가 무너지는 시험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시험이란 단순히 고난을 겪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 거짓이 사람 안에서 실제로 충돌하는 상태라고 말합니다. 이 장로도 바로 그 상태에 들어갑니다.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쌓아 온 신뢰와 추억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눈앞의 사실이 있습니다. 사랑과 진실이 서로 충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합니다. 부정도 해 보고, 변명도 찾아보고, 기다려도 봅니다. 그러나 결국 사실을 외면할 수 없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은 거듭남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사랑하던 것을 하루아침에 빼앗지 않으십니다. 먼저 스스로 살펴보게 하시고, 여러 번 확인하게 하시며, 자유롭게 판단하도록 허락하십니다. 그렇게 하여 사람이 진리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인도하십니다.

 

결국 법정까지 가게 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신앙이 완전히 실패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오히려 여기서부터 진짜 신앙이 시작됩니다. 왜냐하면 이제 그는 더 이상 사람을 붙잡고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목사를 붙잡을 수도 없고, 장로라는 직분도 붙잡을 수 없으며, 교회라는 이름도 붙잡을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 붙잡을 수 있는 자리로 인도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우상이 무엇이든 그것을 허무시는 분이 아니라, 그것보다 더 크고 참된 것을 주시기 위해 허락하시는 분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너무 의지하던 것이 무너질 때, 비로소 주님께 대한 직접적인 신뢰가 시작됩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의 중심은 ‘10억을 잃었다’가 아니라 ‘주님 외에는 영원히 의지할 분이 없음을 배우기 시작했다’는 데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아름다운 전환점은 법정 장면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인공이 마음속에서 깨닫기 시작하는 한 가지 진리입니다. ‘내가 믿은 것은 하나님이어야 했는데, 어느새 사람을 믿고 있었구나.’ 이 깨달음은 매우 아픈 것이지만, 동시에 거듭남의 중요한 시작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신앙은 사람이나 조직이나 직분을 통하여 시작될 수는 있지만, 결국에는 반드시 주님께 직접 연결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사람은 언제든 넘어질 수 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목회자도 사람이며, 아무리 건강한 교회도 외적인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때때로 우리가 잘못 붙들고 있던 지팡이를 허락 가운데 빼앗으십니다. 벌을 주시려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부러질 지팡이를 의지하지 않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주인공은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를 떠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다시 돌아온 것 같았습니다.’ 이 고백은 매우 깊은 영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그는 교회를 잃었고, 명예도 잃었으며, 평생 모은 재산도 잃었고, 사람들의 신뢰도 잃었습니다. 그러나 말씀의 속뜻으로는, 그는 외적인 것들을 잃으면서 내적인 것을 얻기 시작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이 진행될수록 사람은 외적인 신앙보다 내적인 신앙을 더 사랑하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처음에는 예배당이 중요하고, 목회자가 중요하며, 직분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점차 주님의 임재는 건물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에 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기도는 특정 장소가 아니라 마음에서 드려질 수 있고, 예배는 형식만이 아니라 삶으로 드려질 수 있으며,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임을 배우게 됩니다. 이러한 변화는 신앙이 약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깊어진 것입니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주인공이 결국 모든 목회자를 미워하는 사람이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배신을 경험한 사람은 쉽게 극단으로 갑니다. ‘목사는 다 그렇다’, ‘교회는 다 거짓이다’, ‘신앙 자체가 속임수였다’ 이렇게 결론 내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까지 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과 사람을 구별하기 시작합니다. 사람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선하심까지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영적 분별입니다. 스베덴보리도 교회는 언제나 순수한 사람들과 불순한 사람들이 함께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것처럼, 외적인 교회 안에는 선한 사람도 있고 악한 사람도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의 악을 보고 곧바로 주님의 교회 전체를 부정하는 것은 또 다른 오류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또한 ‘거룩한 것의 모독(profanation)이라는 주제도 생각하게 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과 말씀, 헌신과 사랑을 자신의 명예와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다면, 그것은 단순한 재정 비리가 아니라 거룩한 것을 자기 사랑에 종속시키는 일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기 사랑이 가장 위험한 이유는 세상의 것만 원하는 데 있지 않고, 거룩한 것까지 자신의 목적에 이용하려는 데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의 진짜 비극은 10억 원이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의 순수한 신앙과 헌신이 다른 사람의 자기 사랑에 이용당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섭리는 여기에서도 멈추지 않습니다. 악한 사람은 선한 것을 이용하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 이용당한 선까지도 결국에는 그 사람의 거듭남을 위해 다시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모든 것을 잃은 것처럼 보였던 이 장로는 마지막에는 돈보다 훨씬 귀한 것을 얻게 됩니다. 그것은 ‘사람을 통하여 믿던 신앙’에서 ‘주님을 직접 믿는 신앙’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이 간증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깊은 영적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SY.3,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74세 목사님, 교회 문 닫는 날 일어난 일

※ 아래 내용은 해당 유튜브를 먼저 보셔야 이해가 되니 참고하세요. 이 이야기를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읽어 보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정말 있었던 실화인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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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1, ‘집사님, 우리 교회에서 나가주시겠습니까?’

아래는 어제 본 ‘집사님, 우리 교회에서 나가주시겠습니까?’라는 제목의 유튜브입니다. 전반적으로는 지난날 나름의 소목회를 해봤던 저로서는 감동과 함께 ‘나라면 저 상황에서 어떻게 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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