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 제목의 SY’는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라는 뜻입니다.

 

 

 

 

이 이야기는 표면적으로는 ‘헌금을 돌려 달라’고 공개적으로 요구한 장로와, 그 과정을 통해 관계를 회복해 가는 목회 이야기입니다. 이야기의 긴장은 교회 재정 문제에서 시작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실제 중심에는 돈이 아니라 ‘상처 입은 사랑’이 놓여 있습니다. 장로는 재정을 문제 삼고 있지만, 그의 가장 깊은 고통은 사업 실패도, 경매 위기도 아니라 ‘아무도 자신의 무너짐을 알아주지 않았다’는 외로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모든 외적 행동 뒤에는 반드시 어떤 사랑과 정서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겉으로 드러난 말만 해석하면, 사건의 절반밖에 보지 못하지만, 그 말을 낳은 내면의 상태를 함께 볼 때, 비로소 사람을 이해하게 됩니다. 이 이야기 역시 ‘헌금을 돌려 달라’는 말보다 ‘나를 아무도 보지 않았다’는 침묵의 외침이 훨씬 중요한 핵심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반복되는 목사의 후회도 같은 맥락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는 여러 차례 ‘그때 찾아갔어야 했다’, ‘말의 속을 물었어야 했다’, ‘심방을 미루지 말았어야 했다’고 고백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이것은 단순한 목회 기술의 실패가 아니라, ‘겉 사람의 상태는 보았지만, 속 사람의 상태는 충분히 살피지 못했다’는 반성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천국의 천사들은 사람의 말보다 그 사람의 애정과 의도를 먼저 본다고 설명됩니다. 물론 인간은 천사처럼 타인의 마음을 직접 볼 수는 없지만, 적어도 사랑에서 나오는 관심은 작은 변화들을 놓치지 않게 만듭니다. 장로의 웃음이 달라지고, 앞자리가 뒷자리로 바뀌고, 찬양을 부르지 않고, 말수가 줄어드는 변화들은 모두 그의 내면이 무너지고 있다는 신호였습니다. 스베덴보리라면 이러한 외적 변화는 내적 상태가 자연계에서 드러나는 하나의 상응으로 이해했을 것입니다.

 

장로가 교회 재정을 의심하기 시작하는 과정도 흥미롭습니다. 이야기는 재정 자체에는 문제가 없었다는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그런데 장로는 점점 재정 자료를 요구하고, 외부 감사를 요청하고, 결국 공동의회에서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합니다. 이것을 단순히 ‘억지 의심’으로만 보면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강한 고통 속에 있을 때는 내적인 질서가 흔들리면서 외적인 판단도 왜곡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사랑이 상처를 입으면 생각도 그 상처의 색깔을 띠게 됩니다. 장로 역시 사업과 가정이 무너지는 가운데, 자신 안의 불안과 상실감을 교회 재정이라는 대상에 투사하고 있는 모습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의 행동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행동을 이해하는 길은 비난보다 먼저 그 상처를 보는 데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장점 가운데 하나는 목사를 완전한 인물로 그리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는 스스로를 여러 번 책망합니다. 설교보다 사람이 먼저였음을 뒤늦게 깨닫고, 자신이 회피했고, 두려워했고, 미루었다고 인정합니다. 이러한 자기 성찰은 상당히 건강한 요소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은 자신의 악과 한계를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고 반복하여 말합니다. 자신을 항상 옳다고 여기는 사람은 변화될 수 없지만,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사람은 주님께서 새롭게 이끄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목사의 변화 역시 장로만큼이나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문제를 해결하는 영웅이 아니라, 자신도 변화되어 가는 한 사람으로 그려집니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목사가 장로 앞에 먼저 무릎을 꿇는 장면은 상징성이 큽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무릎은 단순한 자세가 아니라 마음의 겸비와 주님 앞에서의 낮아짐을 상징합니다. 물론 실제로 사람 앞에 무릎을 꿇는 행동 자체를 영적으로 높게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외적 행동보다 그 안의 사랑입니다. 만일 그것이 사람을 조종하거나 감동시키기 위한 연출이었다면 아무런 영적 가치가 없겠지만, 진심으로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고 상대의 회복을 바라는 마음이었다면, 그 행동은 사랑의 표현이 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외적인 행위는 언제나 내적인 사랑에 의해 가치가 결정된다고 말합니다.

 

또 하나 눈에 띄는 점은 이야기가 여러 차례 ‘사람이 먼저였다’는 결론으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독자에게 상당한 공감을 줍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이 표현을 한 걸음 더 깊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을 먼저 사랑한다는 말은 곧 주님을 뒤로 미룬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사람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천국의 사랑은 인간 중심주의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위한 사랑도 결국은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사랑이어야 오래 지속될 수 있습니다. 인간 자신의 사랑만으로는 결국 지치고 실망하게 되지만,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은 상대가 변하지 않아도 계속 선을 원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또한 헌금에 대한 중요한 시사점도 담고 있습니다. 장로는 ‘헌금을 돌려 달라’고 요구하지만, 목사는 ‘헌금은 하나님께 드린 것이므로 돌려드릴 수 없다’고 답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진정한 헌금은 돈 자체보다 마음의 봉헌에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다만 그는 외적인 헌금이 곧 영적인 선을 의미한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사랑 없는 헌금은 단지 외적 행위에 머물 수 있고, 작은 헌금이라도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면 훨씬 큰 영적 가치를 가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장면은 단순히 ‘헌금은 반환할 수 없다’는 법적 원칙보다, ‘헌금은 본래 누구를 향해 드려진 것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계기가 됩니다.

 

한편 이 이야기는 전반적으로 감동적인 전개를 위해 상당히 소설적인 구성을 취하고 있습니다. 계절의 변화, 빛과 어둠의 대비, 반복되는 침묵, 결정적인 화해 장면 등은 실제 기록이라기보다 문학적 서사에 가깝습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를 실제 사건으로 대하기보다는 하나의 목회적 우화 또는 신앙적 메시지를 담은 이야기로 대하는 편이 더 적절해 보입니다. 그렇다고 그 메시지의 가치까지 줄어드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문학적 형식을 통해 ‘공동체 안에서 가장 먼저 돌보아야 하는 것은 문제보다 사람이며, 사람의 말보다 그 사람의 상처를 먼저 보아야 한다’는 교훈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결국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이 이야기의 핵심은 재정 투명성도, 헌금 반환도, 공동의회의 갈등도 아닙니다. 진정한 주제는 ‘주님께서는 한 영혼의 내면을 어떻게 회복시키시는가’입니다. 장로는 실패를 통해 자신의 교만을 보게 되고, 목사는 자신의 무관심을 보게 되며, 공동체는 재정보다 관계가 먼저라는 사실을 다시 배우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섭리는 언제나 인간의 영원한 생명을 목표로 하며, 때로는 실패와 오해와 낮아짐까지도 그 회복의 과정 속에 사용하신다고 설명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이 이야기는 단순히 갈등이 해결된 미담이 아니라, 겉으로는 무너지는 것처럼 보이는 사건 속에서도 사람의 속 사람을 새롭게 빚어 가시는 주님의 섭리를 묵상하게 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SY.43, ‘목사님 때문에 우리 가정이 망했어요’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이 이야기는 ‘목사님 때문에 우리 가정이 망했어요’라는 충격적인 말로 시작하지만, 이야기의 실제 중심은 어느 가정의 실패 자체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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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41, 신천지, ‘아밋대의 아들 요나’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이번 설교는 요나서 전체를 한 편으로 훑어가며, 하나님의 자비와 회개의 중요성을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전체적으로는 성경 본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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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제목의 SY’는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라는 뜻입니다.

 

 

 

 

이번 설교는 요나서 전체를 한 편으로 훑어가며, 하나님의 자비와 회개의 중요성을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전체적으로는 성경 본문의 흐름을 충실하게 따라가며, 하나님께서 악인이라도 멸망보다 회개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이러한 방향 자체는 요나서가 전달하려는 중요한 메시지 가운데 하나이며, 듣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긍휼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충분한 의미가 있습니다.

 

설교는 먼저 하나님께서 요나를 니느웨로 보내시는 장면을 설명합니다. 니느웨는 악이 가득한 성읍이었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심판을 경고하며 회개를 외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다시스로 도망합니다. 설교자는 이 부분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맡는 것이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인지,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인간의 연약함을 설명합니다. 모세 역시 처음에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사양했던 사실을 함께 언급하면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일이 인간적으로는 두렵고 부담스러울 수 있다는 점을 자연스럽게 연결합니다.

 

이 대목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상당 부분 공감할 수 있습니다. 말씀의 속뜻으로 보면, 요나는 단순히 한 사람의 선지자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인간 마음의 한 상태를 나타냅니다. 주님은 사람을 언제나 선을 향하도록 부르시지만, 사람 안에 있는 자기애와 세상 사랑은 그 부르심으로부터 도망하려고 합니다. 다시스로 향하는 길은 단순한 지리적 이동이 아니라, 영적으로는 자신에게 맡겨진 진리의 책임으로부터 멀어지려는 마음의 움직임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설교에서는 니느웨가 악한 성읍이므로 요나가 두려워했을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물론 문자적으로도 충분히 가능한 해석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성경의 도시와 나라는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인간 정신 안의 상태를 상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니느웨는 인간 안에 존재하는 왜곡되고 폭력적인 삶의 상태를, 요나는 그 상태를 향해 들어가야 하는 진리를 각각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주님은 우리에게도 우리 안의 ‘니느웨’를 외면하지 말고 직면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설교가 반복해서 ‘하나님은 아무도 멸망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귀한 강조입니다. 하나님을 심판만 하시는 분으로 이해하기보다, 끝까지 회개를 기다리시는 분으로 소개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요나서 전체도 하나님의 긍휼을 중심 주제로 삼고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여기에도 한 가지 중요한 보완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셨다는 표현은 하나님 자신의 마음이 변했다는 의미라기보다, 인간이 변화함으로써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상태가 달라졌음을 사람의 언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시며, 선 자체이시므로 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변하는 것은 언제나 인간이며, 인간이 악에서 돌아설 때, 비로소 동일한 하나님의 사랑이 자비로 경험됩니다. 그래서 말씀이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셨다’고 말하는 것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표현한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이 설교는 폭풍을 만난 배의 이야기도 비교적 자세히 설명합니다. 요나 때문에 폭풍이 일어나고, 결국 제비를 뽑아 요나가 원인임이 드러나는 과정, 그리고 요나가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고 말하는 장면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 얼마나 큰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설명합니다. 이 부분 역시 문자적인 교훈으로는 충분히 의미가 있습니다.

 

말씀의 속뜻으로 보면, 바다는 흔히 자연적인 사람의 마음과 수많은 거짓 생각이 요동치는 상태를 상징합니다. 주님의 질서를 거스르면, 인간의 내면 역시 폭풍우처럼 흔들리게 됩니다. 반대로 주님의 질서 안으로 다시 들어오기 시작하면, 외적인 환경은 당장 변하지 않더라도 마음속 혼란은 점차 잔잔해집니다. 그래서 요나의 이야기는 오래전 한 선지자의 모험담이 아니라, 거듭남을 시작하는 모든 사람 안에서 반복되는 영적 여정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이번 설교는 요나서를 비교적 충실하게 따라가며, 하나님의 긍휼을 전하고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사건의 역사성과 도덕적 교훈에 머무는 부분이 많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해 보면 요나의 도망, 폭풍, 바다, 큰 물고기, 니느웨는 모두 오늘 우리의 영적 상태를 비추는 살아 있는 상응으로 읽힙니다. 바로 그때 요나서는 과거의 기록을 넘어, 지금도 우리 안에서 계속 이루어지는 거듭남의 이야기로 새롭게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요나가 바다에 던져진 뒤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는 장면은 요나서 전체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 설교 역시 이 부분을 매우 중요하게 다루며, 요나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 원망하기보다 기도하고 감사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요나의 표적’을 연결하여, 요나가 사흘 동안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사건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예표한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오랜 기독교 전통에서도 널리 받아들여져 온 해석이며, 신약성경 자체가 요나를 그리스도의 표상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의미 있는 연결입니다.

 

특히 설교자는 요나가 ‘주께서 나를 깊은 바다 가운데 던지셨다’고 고백하면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는 점을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그리고 사람이 아무리 절망적인 환경에 처하더라도 기도와 감사를 잃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길을 열어 주신다는 교훈으로 연결합니다. 실제로 이러한 적용은 많은 성도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고난을 단순히 불행으로만 보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도록 권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 장면을 바라보면, 물고기 뱃속은 단순히 기적이 일어난 장소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매우 깊은 영적 상태를 상징합니다. 말씀의 속뜻으로는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기 전까지는 마치 자신의 거짓과 욕망 속에 갇혀 있는 것과 같습니다. 밖에서는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영적으로는 빛을 거의 보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큰 물고기는 그러한 상태를 보존하면서도 완전히 멸망하지 않도록 붙들어 주시는 주님의 섭리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요나를 죽이려 하신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폭풍도, 바다도, 물고기도 모두 결국은 요나를 살리기 위한 과정이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섭리를 언제나 구원의 방향으로 이해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심판처럼 보이는 일도, 실제로는 사람을 악에서 돌이켜 생명으로 이끄는 수단인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요나가 물고기에게 삼켜진 사건은 징벌이라기보다 회복을 위한 섭리의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욱 말씀 전체의 정신과도 조화를 이룹니다.

 

설교에서는 부모가 잘못한 자녀를 매로 징계하는 비유를 사용하면서, 자녀가 눈물로 회개하면 부모가 용서하듯 하나님도 요나를 용서하셨다고 설명합니다. 이 비유 역시 이해하기 쉽고 따뜻한 적용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하나님은 인간처럼 감정이 오르내리며 화를 냈다가 마음을 푸시는 분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동일한 사랑 자체이십니다. 그러므로 용서는 하나님 편에서 새롭게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로 변화될 때 비로소 경험되는 것입니다.

 

이 점은 이후 니느웨 사건을 이해하는 데에도 매우 중요합니다. 요나는 처음에는 하나님을 피해 달아났지만, 물고기 뱃속이라는 가장 깊은 절망 속에서 비로소 하나님만 바라보게 됩니다. 말씀의 속뜻으로는 인간이 자신의 능력과 지혜를 신뢰하는 동안에는 진정한 회개가 시작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주님만 바라보기 시작할 때, 비로소 새로운 영적 생명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요나가 다시 육지로 나오는 장면은 단순한 구조가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설교자는 이어 예수님께서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다’고 하신 말씀을 소개하며, 요나의 사흘이 예수님의 사흘을 예표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역시 매우 중요한 연결입니다. 하지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여기에도 한층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의 죽음과 부활은 단순히 미래의 천국을 보장하는 사건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자신의 옛 자아를 벗고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보여 주는 가장 완전한 모형입니다. 따라서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나오는 모습도 단순한 역사적 기적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거듭남을 보여 주는 살아 있는 상응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요나의 기도는 단순히 ‘어려울 때 기도합시다’라는 수준을 넘어섭니다. 그것은 사람이 자신의 모든 자만과 자기 신뢰가 무너진 자리에서 비로소 주님께 마음을 여는 순간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새로운 사명이 다시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의 명령을 취소하지 않으셨고, 요나 역시 이전과는 다른 마음으로 다시 니느웨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합니다.

 

이번 설교는 이 부분을 비교적 충실하게 설명하면서도, 중심을 ‘감사와 기도’에 두고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 귀한 적용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해 보면, 물고기 뱃속에서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환경의 변화가 아니라 사람 자체의 변화였습니다. 주님은 먼저 상황을 바꾸시는 분이 아니라 사람을 새롭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변화되기 시작할 때, 그 사람 앞에 놓인 사명도 비로소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됩니다. 이것이 요나서 2장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살아 있는 말씀으로 다가오는 이유입니다.

 

 

요나서 3장은 책 전체의 전환점입니다. 이번 설교 역시 이 장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과 회개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두 번째로 요나를 부르시고, 이번에는 요나가 순종하여 니느웨로 들어갑니다. 그는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고 외쳤고, 놀랍게도 니느웨 백성들은 그 말씀을 믿고 금식하며 굵은 베옷을 입고 회개합니다. 심지어 왕까지 자리에서 내려와 회개를 선포하고, 사람뿐 아니라 짐승에게까지 금식을 명합니다. 설교자는 이 장면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악인이라도 회개하면 기뻐하시며, 심판보다 구원을 원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힘 있게 전합니다.

 

이 부분은 설교 전체에서도 가장 따뜻한 대목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운 심판자로만 그리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 돌이켜 살기를 바라시는 아버지로 소개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회개가 단순히 눈물 흘리는 감정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바꾸는 일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도 충분히 귀한 적용입니다. 실제로 요나서 역시 니느웨 사람들이 ‘악한 길에서 돌이켰다’는 사실을 반복하여 말합니다. 따라서 설교의 이러한 중심은 본문과도 잘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여기에서 또 하나의 깊은 층이 열립니다. 말씀의 속뜻으로 니느웨는 단순히 고대 앗수르의 수도가 아니라, 인간 안에 있는 외적 삶 전체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겉으로 살아가는 생활과 내적으로 생각하고 사랑하는 세계를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거듭남은 내적인 믿음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외적인 삶까지 함께 변화될 때 비로소 완성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니느웨 전체가 회개하는 모습은 인간의 생활 전반이 말씀의 질서 안으로 들어오는 과정을 보여 준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설교에서는 왕이 자리에서 내려와 굵은 베옷을 입고 재에 앉은 모습을 소개합니다. 문자적으로는 왕의 겸손을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상응의 관점에서는 왕은 인간 안에서 다스리는 원리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왕이 자리에서 내려온다는 것은 자기 자신이 삶의 주인이 되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주님의 진리가 삶을 다스리도록 허락하는 상태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정치적 행동이 아니라 영적 질서의 변화입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부분은 설교가 반복해서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셨다’는 표현을 그대로 설명하는 점입니다. 물론 성경 본문도 그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표현을 인간의 이해 수준에 맞춘 ‘겉모습의 언어’로 이해합니다.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시므로 처음에는 심판하려다가 나중에는 용서하기로 마음을 바꾸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랑은 언제나 동일합니다. 달라지는 것은 인간입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악에서 떠났기 때문에, 동일한 하나님의 사랑이 이제는 심판이 아니라 자비로 경험되는 것입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감정에 따라 마음을 바꾸시는 분이라면,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처럼 변덕스러운 것이 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저작에서는 주님은 태양처럼 항상 같은 사랑과 같은 진리를 발하십니다. 햇빛은 변하지 않지만, 블라인드를 내리면 방이 어두워지고, 올리면 밝아집니다. 변화된 것은 태양이 아니라 블라인드, 한편으로는 창문입니다. 니느웨의 회개 역시 바로 이러한 원리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번 설교는 또한 하나님께서 악인이라도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강조합니다. 이것 역시 성경 전체와도 조화를 이루는 매우 귀한 메시지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지옥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내시는 곳이 아니라, 사람이 끝까지 자신의 사랑을 선택한 결과 도달하는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을 천국으로 이끄시려 하지만,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기에 그 자유를 억지로 빼앗지 않으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비와 인간의 자유는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존재합니다.

 

여기에서 신천지의 해석 방식과 스베덴보리의 접근은 미묘하게 갈라집니다. 이번 설교는 주로 ‘회개해야 구원받는다’는 교훈에 초점을 맞춥니다. 물론 그것은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회개를 단순한 결심이나 행동 수정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참된 회개는 자신의 악을 주님 앞에서 인정하고, 그것이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며, 주님께 도움을 구하지 않으면 결코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회개는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평생 계속되는 거듭남의 과정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니느웨의 회개는 단순히 한 도시가 살아난 역사적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 안에서 계속 반복되어야 하는 영적 사건입니다. 말씀을 듣고, 자신의 악을 인정하며, 삶을 바꾸고, 주님의 질서 안으로 조금씩 들어가는 과정이 바로 니느웨가 회개하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서 3장은 단순히 ‘회개하면 용서받는다’는 이야기보다 훨씬 깊습니다. 말씀의 속뜻으로는 인간의 외적 삶 전체가 주님의 질서 안으로 다시 배열되는 장면이며, 거듭남이 실제 생활 속에서 시작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니느웨는 오래전 사라진 도시가 아니라, 오늘도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변화되어야 할 삶의 세계’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지금도 그 니느웨를 향해 말씀을 보내고 계십니다.

 

 

요나서 4장은 매우 독특한 장입니다. 대부분의 예언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끝나지만, 요나서는 오히려 선지자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이번 설교 역시 이 부분을 중심으로, 하나님께서는 니느웨 사람들을 용서하셨지만, 정작 요나는 그것을 기뻐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재앙을 거두시자 요나는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차라리 죽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설교자는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요나의 모습이며, 결국 하나님께서 박넝쿨 사건을 통해 요나를 교육하시는 과정이라고 해설합니다.

 

이 부분은 설교의 적용도 비교적 분명합니다. 사람은 자기에게 피해를 준 사람을 쉽게 용서하지 못하고, 원수의 회개를 기뻐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악인이라도 회개하면 기뻐하시며 용서하시는 분이므로, 우리 역시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듣는 사람에게 충분히 울림을 줄 수 있는 권면입니다. 용서는 인간에게 가장 어려운 덕목 가운데 하나이며, 요나의 모습은 놀라울 만큼 오늘 우리의 모습과도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요나서의 절정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앞의 세 장이 니느웨의 이야기였다면, 네 번째 장은 사실상 요나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말씀의 속뜻으로 보면, 니느웨보다 더 변화되어야 했던 사람은 오히려 요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는 순종하게 되었지만, 하나님의 사랑에는 아직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해, 행동은 바뀌었지만 사랑은 아직 바뀌지 않은 것입니다.

 

이 점은 거듭남의 과정에서도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사람은 얼마든지 겉으로는 올바른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말씀도 전하고, 봉사도 하고, 진리를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자기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용서하지 못하고, 자신과는 다른, 그런 사람의 구원을 달갑지 않게 여길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러한 속 사람의 변화가 거듭남의 핵심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요나서가 마지막 장에서 요나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설교에서는 하나님께서 박넝쿨을 준비하시고, 다음 날에는 벌레를 준비하시고, 이어 뜨거운 동풍까지 준비하셨다고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교육하기 위한 과정이라는 해석입니다. 이것 역시 본문의 흐름과 잘 맞습니다. 그러나 상응의 관점에서는 박넝쿨, 벌레, 동풍 모두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라 인간의 내적 상태를 보여 주는 상징으로 읽힙니다.

 

박넝쿨은 하루아침에 자라 요나에게 시원한 그늘을 제공합니다. 그것은 사람이 자신의 생각과 감정 속에서 느끼는 일시적인 위안이나 만족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영원한 생명이 아니라, 매우 쉽게 사라질 수 있는 자연적인 위안입니다. 그래서 벌레 하나가 그것을 갉아먹자 곧 시들어 버립니다. 인간이 자기 위안을 삶의 중심으로 삼으면, 그것은 아주 작은 시험에도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벌레 역시 흥미로운 상징입니다. 말씀에서는 벌레가 종종 안에서부터 갉아먹는 거짓이나 왜곡된 사랑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안에서는 이미 생명이 약해지고 있는 상태입니다. 박넝쿨이 밖에서 잘려 나간 것이 아니라 안에서부터 시들어 간 것처럼, 사람도 외적인 환경보다 내적인 사랑이 무너지면 결국 영적인 생명력을 잃게 됩니다.

 

이어지는 동풍은 더욱 의미가 깊습니다. 성경에서 동쪽은 대체로 주님과 사랑의 근원을 상징하지만, 뜨거운 동풍은 그 사랑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오히려 견디기 어려운 상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동일한 태양빛도 건강한 눈에는 빛이 되지만 병든 눈에는 고통이 되듯이, 하나님의 사랑도 인간의 상태에 따라 전혀 다르게 경험됩니다. 요나가 견디지 못했던 것은 태양 자체가 아니라, 아직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 되지 못한 자신의 마음이었습니다.

 

이번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적용은 하나님께서 마지막에 하시는 질문입니다.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설교자는 이것을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넓은지를 보여 주는 말씀으로 설명합니다. 실제로 이 결론은 매우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구분하는 ‘내 편’, ‘네 편’을 넘어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게 해 줍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마지막 질문이 단순한 도덕적 교훈을 넘어섭니다. 주님은 요나를 꾸짖기보다 질문하십니다. 이는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시는 주님의 방식과도 연결됩니다. 주님은 강제로 사람을 바꾸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보게 하시고, 스스로 선택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참된 거듭남의 질서입니다. 사랑은 강요될 수 없으며, 자유 안에서만 참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요나서의 마지막은 미완성처럼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독자에게 질문을 남기며 끝납니다. ‘너는 누굴 더 닮고 있는가? 니느웨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인가, 아니면 회개한 니느웨를 끝내 받아들이지 못하는 요나인가?’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여기에 한 질문을 더 보탭니다. ‘나는 하나님의 일만 하고 있는 사람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사랑까지 닮아 가고 있는 사람인가?’ 이 마지막 질문이야말로 요나서 전체가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깊은 영적 물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 설교는 요나서 전체를 비교적 충실하게 따라가면서 하나님의 자비와 회개의 중요성을 전하려는 점에서 긍정적인 면이 적지 않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죄인의 멸망보다 회개를 기뻐하신다는 사실, 원수까지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 그리고 우리 역시 그러한 사랑을 배워야 한다는 권면은 요나서의 핵심과도 잘 맞닿아 있습니다. 또한 요나의 표적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결한 부분 역시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는 해석으로서 무리가 없습니다.

 

이러한 점만 놓고 보면, 이번 설교는 비교적 정통적인 기독교 설교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인상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신천지의 많은 설교는 처음에는 성경 본문의 역사적 의미와 일반적인 교훈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처음 접하는 사람은 특별한 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신천지와 스베덴보리의 접근은 본질적으로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신천지는 성경의 비유와 상징을 매우 중요하게 해석하는 단체입니다. 이것만으로는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에는 실제로 상징과 표상이 매우 많이 존재합니다. 문제는 그 상징을 해석하는 기준입니다. 신천지는 상당수의 상징을 특정 시대의 역사, 특정 인물, 특정 단체, 그리고 자기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건들에 대응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결국 성경 전체가 현대의 특정 공동체를 증명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쉽습니다.

 

반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상응은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집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상응은 특정 단체를 설명하기 위한 암호가 아닙니다. 그것은 창조 전체를 관통하는 영원한 질서입니다. 물은 언제나 진리를, 빛은 언제나 신적 진리를, 불은 언제나 사랑을, 산은 사랑의 높은 상태를, 바다는 자연적 인간을 나타내는 식입니다. 이러한 상응은 어느 시대에도 동일하며, 어느 교단에도 독점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말씀의 속뜻 역시 어느 특정 조직을 증명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거듭남을 보여 주기 위해 존재합니다.

 

이 차이는 요나서를 이해하는 데에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이번 설교에서는 요나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로 설명하고, 니느웨를 회개해야 할 악한 성읍으로 설명합니다. 물론 문자 그대로는 맞는 설명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요나는 곧 우리 자신입니다. 니느웨 역시 우리 자신입니다. 다시스도 우리 안에 있습니다. 폭풍도 우리 안에서 일어납니다. 물고기도 우리 안의 영적 상태입니다. 박넝쿨도 우리 마음속에 자라는 자연적 위안입니다. 벌레도 우리 안의 미세한 자기애입니다. 동풍도 주님의 사랑 앞에서 드러나는 우리의 상태입니다. 다시 말해 요나서는 과거 어느 한 선지자의 기록이 아니라, 오늘도 우리 안에서 계속 반복되는 영적 여정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는 성경을 읽을 때, 언제나 시선을 밖에서 안으로 돌립니다. ‘저 사람이 잘못했다’, ‘저 단체가 니느웨다’, ‘저 시대가 심판받는다’라고 읽기보다 먼저 ‘내 안에 요나가 있는가?’, ‘내 안에도 아직 순종하지 않는 마음이 있는가?’, ‘나는 하나님의 사랑보다 내 정의를 더 붙들고 있지는 않은가?’를 묻게 합니다. 그래서 말씀은 언제나 타인을 심판하는 책이 아니라,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됩니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이번 설교가 마지막까지 ‘회개하고 사랑을 실천하자’는 권면으로 마무리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충분히 귀한 결론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여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참된 회개는 단순히 죄를 인정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참된 회개는 자신의 사랑 자체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용서하려 합니다. 다음에는 용서해야 한다고 이해합니다. 마침내는 용서하고 싶은 사람이 됩니다. 처음에는 선을 행하려고 애씁니다. 나중에는 선을 사랑하게 됩니다. 결국 거듭남이란 행동의 변화가 아니라 사랑의 변화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사랑의 변화는 오직 주님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생명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이번 설교는 하나님의 긍휼을 비교적 따뜻하게 전하고 있으며, 요나서를 처음 접하는 사람도 이해하기 쉽게 설명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나 도덕적 교훈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들이 일관되게 보여 주듯이, 성경의 참된 목적은 과거의 사건을 아는 데 있지 않고, 오늘 우리의 영혼이 어떻게 주님의 형상으로 새롭게 되어 가는지를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나서는 단지 ‘회개한 니느웨’의 이야기가 아니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사랑이 어떻게 한 사람의 완고한 마음을 천천히 변화시키시는지를 보여 주는 놀라운 거듭남의 기록입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2,700여 년 전, 니느웨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각자의 삶 속에서 계속 쓰여지고 있습니다.

 

 

 

SY.42, ‘목사님, 그동안 제가 낸 헌금 모두 돌려주십시오’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이 이야기는 표면적으로는 ‘헌금을 돌려 달라’고 공개적으로 요구한 장로와, 그 과정을 통해 관계를 회복해 가는 목회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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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40, 변승우 목사, ‘생명의 성령의 법과 죄와 사망의 법’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변승우 목사는 로마서 8장 2절을 중심으로 매우 긴 설교를 이어 갑니다. 설교의 핵심은 ‘죄와 사망의 법’과 ‘생명의 성령의 법’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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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제목의 SY’는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라는 뜻입니다.

 

 

 

 

변승우 목사는 로마서 82절을 중심으로 매우 긴 설교를 이어 갑니다. 설교의 핵심은 ‘죄와 사망의 법’과 ‘생명의 성령의 법’입니다. 그는 이 두 ‘’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로마서 7장과 8장을 오가며 오랜 시간 설명합니다. 원어를 검토하고, 여러 신학자의 견해를 비교하며, 자신이 내린 결론을 성도들에게 전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연구 태도 자체는 진지하며, 본문을 깊이 이해하려는 노력도 충분히 엿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해 이 설교를 바라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의외로 로마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창세기입니다. 스베덴보리라면 아마 로마서를 펼치기 전에 먼저 창세기 2장과 3장을 펼쳤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영적 원리는 이미 창세기의 내적 의미 안에 모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새로운 영적 질서를 만들어 낸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서 태초부터 말씀 안에 심어 두신 질서를 교회에 적용하여 설명한 사람입니다.

 

예를 들어, 바울은 ‘죄와 사망의 법’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법은 로마서에서 갑자기 등장한 개념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이 법은 선악과를 먹는 사건에서 이미 시작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처음부터 악을 사랑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 살았고, 선과 진리를 거의 본능처럼 분별하는 ‘퍼셉션(perception)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뱀으로 상징되는 감각적 자아가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인간 안에는 전혀 다른 질서가 자리 잡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던 질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살아가려는 질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proprium’이라고 부릅니다. 흔히 ‘자아’라고 번역되지만, 단순한 개성이 아니라 ‘주님 없이 스스로 살려고 하는 자기 생명’입니다. 바로 이것이 죄의 뿌리입니다. 따라서 죄는 단순히 몇 가지 나쁜 행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중심이 주님에게서 자기 자신으로 옮겨진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죄와 사망의 법’은 어떤 법률 조항이 아니라, 자기 사랑이 인간 안에서 하나의 질서가 되어 버린 상태를 가리킵니다.

 

반대로 바울은 ‘생명의 성령의 법’을 말합니다. 이것 역시 로마서에서 처음 계시된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2장에서 주님께서 사람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는 장면이 그 원형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그 생기는 단순한 호흡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인간 안으로 흘러 들어오는 유입(influx)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자기 안에 생명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성령의 법’은 새로운 교리가 아니라, 인간이 본래 창조될 때부터 예정되어 있던 생명의 질서입니다.

 

이렇게 보면 로마서는 창세기를 설명합니다. 바울은 창세기의 영적 역사를 다른 언어로 다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죄와 사망의 법’이라고 말하지만, 창세기는 그것을 ‘선악과를 먹음’으로 보여 줍니다. 바울은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고 말하지만, 창세기는 그것을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보여 줍니다. 하나는 교리적인 언어이고, 다른 하나는 표상과 상응의 언어입니다. 그러나 그 내용은 하나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성경 읽기가 현대 개신교와 크게 달라집니다. 오늘날 많은 설교는 로마서를 중심으로 창세기를 이해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창세기의 속뜻을 먼저 열고, 그 빛으로 로마서를 읽습니다. 다시 말해, 창세기는 원형이고, 로마서는 그 원형을 설명하는 적용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가장 깊은 샘은 언제나 창세기와 복음서 안에 있으며, 바울은 그 샘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교회가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안내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이번 설교를 읽기 시작하면, 관심의 중심도 조금 달라집니다. 설교자가 로마서의 단어 하나하나를 어떻게 해석하는가도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바울이 지금 창세기의 어떤 영적 질서를 설명하고 있는가?입니다. 이 질문이 열리는 순간, 로마서는 더 이상 독립된 교리서가 아니라, 태초부터 말씀 안에 감추어져 있던 주님의 생명의 질서를 증언하는 또 하나의 창이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이번 설교는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해 한층 더 깊고 넓은 의미를 갖기 시작합니다.

 

 

이제 말씀의 원형이라는 관점을 마음에 두고, 설교 자체를 살펴보겠습니다. 변승우 목사는 로마서 82절의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다’는 말씀을 중심으로 설교를 전개합니다. 특히 그는 여기서 말하는 ‘’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오랫동안 연구했다고 말하며, 여러 신학자의 견해를 검토한 끝에 자신이 내린 결론을 성도들에게 설명합니다. 설교를 읽어 보면 단순히 감동적인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이 아니라, 본문을 가능한 한 정확하게 이해하려는 노력이 곳곳에서 드러납니다. 원어를 살피고, 로마서 7장과 8장의 문맥을 연결하며, 여러 주석가들의 견해를 비교하는 모습은 일반적인 주일설교에서는 흔히 보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이러한 연구 태도는 존중받을 만합니다. 말씀을 가볍게 다루지 않고, 본문이 실제 무엇을 말하는지를 확인하려는 자세는 분명 귀한 일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말씀을 함부로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한 구절을 설명하기 위해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관련 구절을 모두 연결하고, 하나의 단어가 다른 곳에서는 어떻게 사용되는지까지 세심하게 살폈습니다. 그런 점에서 말씀을 깊이 연구하려는 자세 자체는 두 사람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차이가 나타납니다. 변승우 목사는 로마서를 연구하여 창세기를 이해하려고 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창세기의 속뜻을 먼저 이해한 다음, 그 빛으로 로마서를 읽습니다. 얼핏 보기에는 순서만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성경 전체를 바라보는 관점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설교자는 ‘죄와 사망의 법’이 무엇인지 설명하기 위해 로마서 7장을 자세히 분석합니다. ‘내 지체 속에 있는 다른 법’, ‘죄의 법’, ‘하나님의 법’을 서로 비교하면서 바울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밝히려 합니다. 이것은 본문을 충실히 읽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라면 아마 이렇게 질문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왜 어떻게 이런 표현을 사용할 수 있었는가? 그 원형은 어디에, 그리고 이미기록되어 있는가?’

 

그 질문의 답은 창세기입니다. 창세기 3장은 단순히 최초의 인간이 선악과를 먹었다는 역사적 기록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그것은 인간 안에 두 가지 질서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보여 주는 영원한 표상입니다. 하나는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사는 질서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자신에게서 생명을 얻으려는 질서입니다. 선악과를 먹는다는 것은 단순한 불순종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을 주님에게서 자기 자신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부터 자기 사랑은 하나의 법처럼 인간 안에서 작용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보면 바울이 말하는 ‘죄와 사망의 법’은 새로운 개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창세기에서 이미 상징으로 보여 준 내용을 교리적인 언어로 다시 설명한 것입니다. 따라서 로마서를 읽을 때 가장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은 ‘바울이 무엇을 새롭게 말하는가?’가 아니라, ‘바울은 창세기의 어떤 영적 사실을 설명하고 있는가?’가 됩니다.

 

바로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의 성경관은 매우 독특합니다. 그는 사도들의 서신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교회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글이라고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서신들은 이미 계시된 진리를 설명하고 적용하는 글이지, 창세기나 복음서처럼 모든 단어 안에 연속적인 아르카나(arcana)가 담겨 있는 말씀 자체는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서신을 연구하는 일은 중요하지만, 그 연구는 언제나 말씀의 원형 위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번 설교를 접하면서 특히 흥미로운 점은, 설교자가 수십 분 동안 설명하는 내용의 상당 부분이 사실은 스베덴보리에게는 창세기 2장과 3장의 속뜻 안에서 이미 설명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죄의 지배, 인간의 내적 갈등, 성령의 생명, 거듭남, 자유로운 선택과 같은 주제들은 모두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창, 출 속뜻 주석)의 창세기 해설에서 이미 긴 흐름으로 다루어집니다. 다시 말해, 바울은 그 긴 이야기를 교회의 현실 속에서 압축하여 설명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 점은 앞으로 설교를 읽는 방식에도 중요한 통찰을 줍니다. 만일 우리가 먼저 로마서를 읽고 창세기를 이해하려 한다면, 창세기는 바울의 교리를 설명하는 책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길을 따르면 순서는 반대입니다. 먼저 창세기의 내적 의미를 통해 인간과 주님, 타락과 거듭남의 전체 구조를 이해합니다. 그리고 나서 로마서를 읽으면, 바울의 한 문장 한 문장이 이미 알고 있던 영적 질서를 교회의 삶에 적용하는 살아 있는 해설처럼 들리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번 설교는 새로운 의미를 갖습니다. 우리는 이제 설교자가 로마서를 얼마나 논리적으로 설명하는가만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의 설명이 창세기의 원형과 어디에서 만나고, 어디에서 조금씩 갈라지는지를 함께 살펴보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단순한 평가가 아니라, 말씀 전체의 빛 속에서 설교를 다시 읽게 하는 새로운 독서법이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읽다 보면 처음에는 다소 의아하게 느껴지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는 바울을 매우 존중하면서도, 바울의 서신을 창세기나 복음서와 같은 위치에 두지 않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신약성경의 중심이 바울서신처럼 여겨지지만, 스베덴보리에게 중심은 언제나 ‘말씀(The Word)입니다. 다시 말해, 내적 의미가 처음부터 끝까지 연속적으로 흐르는 책들, 곧 모세 오경을 비롯, 여호수아, 사사기, 열왕기, 시편 및 선지서들과 복음서들, 그리고 계시록이 중심이며, 사도들의 서신은 그 말씀을 교회의 현실 속에 적용한 글입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는 순간, 이번 설교를 바라보는 시선도 자연스럽게 달라집니다.

 

변승우 목사는 로마서를 매우 깊이 연구합니다. 그는 로마서 7장과 8장을 오가며 ‘죄와 사망의 법’, ‘생명의 성령의 법’, ‘하나님의 법’이라는 표현들이 각각 무엇을 의미하는지 오랫동안 설명합니다. 이러한 연구는 분명 성실하며, 본문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는 노력도 곳곳에서 드러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입장에서 보면, 이 모든 연구는 어디까지나 ‘적용’을 연구하는 것입니다. 원형은 이미 다른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이번 설교의 핵심인 ‘죄와 사망의 법’이라는 표현은 로마서에서 처음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그 원형은 이미 창세기 3장에 있습니다. 뱀이 여자를 유혹하고, 사람이 선악과를 먹으며,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모든 과정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 중심의 질서에서 자기 중심의 질서로 옮겨 가는 영적 과정을 보여 주는 표상입니다. 바울은 이 긴 영적 역사를 ‘죄와 사망의 법’이라는 한 문장으로 압축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생명의 성령의 법’도 바울이 처음 만든 표현은 아닙니다. 창세기에서 주님께서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시는 장면, 노아 시대에 남겨 두시는 리메인스(remains),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과정, 이삭과 야곱의 생애, 출애굽의 여정, 광야의 시험, 가나안 입성에 이르기까지, 말씀 전체는 주님께서 인간 안에 새로운 생명을 형성하시는 과정을 다양한 표상으로 보여 줍니다. 바울은 그 긴 흐름을 교회의 언어로 다시 설명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바울을 이해하려면 먼저 말씀을 이해해야 한다고 봅니다. 오늘날에는 로마서를 중심으로 창세기를 해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칭의’, ‘성화’, ‘육신’, ‘성령’과 같은 바울의 용어를 기준으로 구약을 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방법은 정반대입니다. 먼저 창세기의 속뜻을 통해 인간의 창조와 타락, 거듭남과 구원의 질서를 이해합니다. 그런 다음 로마서를 읽으면, 바울은 새로운 교리를 세우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계시된 진리를 교회가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교사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 점은 바울의 권위를 낮추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바울의 위치를 더욱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바울 자신도 자신의 복음을 주님께 받은 것으로 말하며, 끊임없이 구약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그는 자신이 새로운 종교를 시작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주님 안에서 성취된 진리를 유대인과 이방인 교회에 설명하는 사명을 감당했다고 이해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의 서신은 말씀과 경쟁하는 책이 아니라, 말씀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독자는 자연스럽게 이런 순서를 따르게 됩니다. 먼저 창세기에서 인간이 어떻게 타락했는지를 읽고, 복음서에서 주님께서 어떻게 그 타락한 인간성을 입으시고, 영화(榮化)의 길을 걸으셨는지를 읽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울을 읽으면, 로마서의 한 절 한 절이 훨씬 깊고 입체적으로 살아납니다. 더 이상 추상적인 교리 문장이 아니라, 말씀 전체를 관통하는 영적 질서를 요약하는 증언으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번 설교를 다시 바라보면, 설교자가 수십 분 동안 로마서의 단어 하나를 붙들고 씨름하는 모습도 새로운 의미를 갖습니다. 그것은 분명 귀한 연구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한 걸음을 더 나아가 이렇게 질문할 것입니다. ‘바울이 설명하는 이 진리를 주님께서는 창세기에서 어떤 표상으로 이미 보여 주셨는가?’ 바로 이 질문이 열릴 때, 우리는 바울의 설명을 넘어 말씀 자체가 품고 있는 더 깊은 아르카나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스베덴보리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성경 읽기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설교의 핵심 본문인 로마서 8장을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다시 바라보겠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바울은 새로운 영적 원리를 계시한 사람이 아니라 이미 말씀 안에 들어 있던 진리를 교회의 언어로 설명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로마서 8장은 창세기의 어떤 영적 질서를 다시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바로 이 질문이 이번 해설의 중심입니다.

 

변승우 목사는 로마서 82절을 설명하면서 ‘죄와 사망의 법’과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는 두 질서가 인간 안에서 서로 대립하고 있다고 강조합니다. 그는 죄가 사람을 사망으로 이끌고, 성령께서 그 죄의 권세에서 사람을 해방하신다고 반복해서 설명합니다. 이러한 설명은 바울의 논리를 충실하게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 대립이 언제 시작되었는지를 먼저 봅니다. 그의 시선은 다시 창세기 3장으로 향합니다.

 

창세기의 속뜻에서 뱀은 단순한 동물이 아닙니다. 가장 바깥 자연적 인간, 곧 감각과 자기 판단만을 신뢰하려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여자가 뱀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바라보는 순간, 인간 안에서는 하나의 전환이 일어납니다. 이전까지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러하다’는 질서로 살았지만, 이제는 ‘내가 보기에는 좋다’는 질서로 살아가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 변화가 죄의 시작입니다. 따라서 죄는 어떤 행동을 먼저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중심이 주님에게서 자기 자신으로 이동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죄를 설명할 때 언제나 ‘사랑’을 먼저 말합니다. 사람은 결국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것을 따라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합니다. 자기 사랑이 중심이 되면 그 뒤에 수많은 죄가 열매처럼 맺히고, 주님에 대한 사랑이 중심이 되면 선과 진리가 자연스럽게 자라납니다. 바울이 말하는 ‘죄와 사망의 법’도 결국 이러한 자기 사랑의 질서가 인간 안에서 굳어진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생명의 성령의 법’은 무엇일까요? 많은 설교에서는 이것을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으로 설명합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보다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설명합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은 주님께서 인간 안에 새로운 사랑과 새로운 의지를 만들어 가시는 질서입니다. 다시 말해, 죄를 억누르는 힘 이전에 선을 사랑하는 새로운 마음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악이 즐거웠다면 이제는 선이 즐거워지고, 이전에는 자신을 높이는 것이 기뻤다면 이제는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기쁨이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해방입니다.

 

이 점에서 로마서 8장은 창세기의 거듭남을 다른 언어로 설명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서는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나는 것으로, 이삭이 제단 위에 올라가는 것으로, 야곱이 씨름하는 것으로, 요셉이 시험을 통과하는 것으로 거듭남을 보여 줍니다. 모두 서로 다른 역사처럼 보이지만, 속뜻으로는 한 사람이 자기 사랑에서 벗어나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나타냅니다. 바울은 이러한 긴 영적 역사를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는 간결한 표현으로 요약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또 하나 중요한 차이가 드러납니다. 설교에서는 죄와 성령의 싸움이 비교적 직접적으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 싸움이 곧바로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먼저 리메인스(remains)가 보존되고 자라나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주님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사람 안에 선과 진리의 씨앗을 남겨 두시고, 거듭남의 때가 되면 그것들을 하나씩 깨우십니다. 그래서 영적 전투는 갑자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되어 온 주님의 섭리 위에서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천국의 비밀에서 반복해서 강조되는 중요한 주제입니다.

 

이러한 관점으로 보면 로마서 8장의 분위기도 조금 달라집니다. 그것은 죄와 성령이 힘겨루기를 하는 장면이라기보다, 주님께서 오래전부터 준비해 오신 거듭남의 역사가 마침내 사람 안에서 본격적으로 열리는 순간입니다. 죄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삶의 중심이 아닙니다. 생명의 질서가 조금씩 그 자리를 대신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해방’이며,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의 실제 모습입니다.

 

결국 로마서 8장을 창세기의 속뜻으로 다시 읽으면, 본문은 훨씬 넓은 풍경 속에 놓이게 됩니다. 바울은 단지 교리 하나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에덴동산에서 시작되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지나, 복음서에서 주님 자신 안에서 완성된 거대한 구원의 역사를 한 사람의 마음속에서 다시 일어나는 사건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로마서는 비로소 창세기와 하나가 되고, 설교 역시 그 원형의 빛 속에서 더욱 깊고 풍성하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제 이번 설교 자체를 조금 더 가까이 들여다보겠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변승우 목사는 로마서 8장을 매우 진지하게 연구합니다. 원어를 검토하고, 여러 주석가들의 견해를 비교하며, 본문의 문맥을 세밀하게 따라갑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이 정도로 본문 자체를 붙들고 설교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따라서 말씀을 깊이 연구하려는 자세와, 죄와 성화를 가볍게 다루지 않으려는 태도는 충분히 존중받아야 합니다. 이러한 점은 이번 설교의 분명한 장점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이번 설교에는 한 가지 근본적인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것은 연구의 깊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연구의 출발점이 말씀의 원형이 아니라 바울의 설명이라는 점입니다. 설교자는 로마서 안에서 답을 찾기 위해 로마서를 계속 파고듭니다. 로마서 7장을 읽고 다시 8장을 읽으며, 바울의 표현 하나하나를 분석합니다. 하지만 스베덴보리라면 같은 시간을 들여 창세기와 복음서를 먼저 펼쳤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 자신도 결국 그 말씀 위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이 차이는 단순한 성경 해석의 차이가 아니라, 성경관의 차이입니다. 만일 바울의 서신을 신앙의 출발점으로 삼으면, 성경 전체는 바울의 교리를 설명하는 자료처럼 읽히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정반대의 길을 갑니다. 창세기와 복음서가 먼저 있고, 바울은 그 말씀을 교회의 현실 속에 적용하는 증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중심이 아니라 안내자입니다. 안내자는 소중하지만, 목적지는 아닙니다.

 

이 점은 이번 설교의 여러 부분에서도 드러납니다. 설교자는 ‘죄와 사망의 법’이라는 표현을 길게 설명하지만, 정작 왜 인간 안에 그런 ‘’이 생겼는지에 대해서는 바울의 설명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곧바로 태고교회와 선악과, 자기 사랑과 퍼셉션의 상실을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그는 죄를 교리의 문제로 보기 전에 존재의 문제로 봅니다. 인간이 어떤 법 아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사랑 아래 있기 때문에 그런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설교는 성령의 역사도 매우 강조합니다. 이것 역시 귀한 내용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성령의 역사를 단순히 죄를 이기는 능력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성령의 역사를 주님의 끊임없는 유입(influx)으로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매 순간 사람의 의지와 이해 안으로 선과 진리를 흘려보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어느 날 갑자기 강한 체험을 하는 사건이 아니라, 평생 동안 주님의 생명이 사람 안에서 질서를 회복해 가는 과정입니다. 이 설명은 로마서만으로는 얻기 어려운 깊이이며, 바로 말씀의 속뜻이 열릴 때 비로소 보이는 풍경입니다.

 

이번 설교를 접하면서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설교자가 죄를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는 회개를 강조하고, 성화를 강조하며, 죄와 타협하는 신앙을 경계합니다. 이러한 메시지는 오늘날 한국교회에 꼭 필요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 보탤 것입니다. 죄를 끊는 것 자체가 목적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죄 없는 존재로만 만들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천국의 사랑을 품은 존재로 만드시려 합니다. 따라서 거듭남의 목표는 단순히 악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설교를 읽으며 가장 크게 떠오른 비유가 하나 있습니다. 설교자는 마치 큰 나무의 가지를 하나하나 살펴보는 식물학자와 같습니다. 가지의 모양을 자세히 설명하고, 잎의 구조를 분석하며, 열매가 어떻게 맺히는지를 세심하게 관찰합니다. 그것은 결코 헛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먼저 그 나무가 어떤 뿌리에서 자라고 있는지를 봅니다. 뿌리를 알면 가지도 이해되지만, 가지만 오래 연구해서는 뿌리까지는 알기 어렵습니다. 이번 설교를 읽으며 느낀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결국 변승우 목사의 설교는 로마서를 매우 성실하게 읽은 설교입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라면 로마서를 읽기 전에 창세기와 복음서를 먼저 읽었을 것입니다. 이 두 방법은 서로 적대적인 것이 아니라, 출발점이 다릅니다. 그러나 그 출발점의 차이는 설교 전체의 방향을 바꾸어 놓습니다. 하나는 바울을 통해 말씀을 이해하려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말씀을 통해 바울을 이해하려는 길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일관되게 후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번 설교는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해 읽을 때 더욱 풍성해집니다. 설교 자체의 장점은 그대로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말씀의 원형인 창세기와 복음서의 빛 속에 다시 놓아 볼 때, 비로소 바울이 말하려 했던 진정한 깊이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때 로마서는 독립된 교리서가 아니라, 태초부터 말씀 안에 감추어져 있던 주님의 구원의 질서를 교회의 언어로 아름답게 증언하는 글로 읽히기 시작합니다.

 

 

이번 설교를 끝까지 듣고 난 뒤 가장 크게 남는 인상은 설교자의 진지함입니다. 그는 로마서 82절을 가볍게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죄와 사망의 법’과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는 표현 하나를 이해하기 위해 오랫동안 연구하고,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비교하며,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결론을 성도들에게 전하려고 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분명 말씀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날처럼 본문보다 이야기나 예화를 앞세우는 설교가 많아지는 시대에는 이러한 진지한 연구 자체가 귀한 가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해 이 설교를 다시 바라보면, 더욱 근본적인 질문이 하나 떠오릅니다. ‘왜 우리는 로마서를 이렇게까지 연구하는가?’입니다. 물론 로마서는 중요한 책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바울은 새로운 하늘의 비밀을 처음 계시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이미 말씀 안에 계시되어 있던 진리를 교회의 현실에 맞게 풀어 설명한 사도입니다. 그렇다면 연구의 중심은 언제나 말씀 자체여야 하며, 사도들의 서신은 그 말씀을 이해하도록 돕는 귀한 안내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 점은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의 성경 읽기와는 적지 않은 차이를 보입니다. 우리는 흔히 로마서를 기준으로 창세기를 읽고, 갈라디아서를 기준으로 율법을 이해하며, 에베소서를 기준으로 복음서를 정리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언제나 반대 방향으로 갑니다. 그는 창세기와 복음서를 먼저 읽고, 그 빛으로 바울을 읽습니다. 그래서 그의 저작을 읽다 보면 창세기의 한 절을 설명하는 데 수십 페이지를 할애하면서도, 바울의 한 절을 놓고 같은 방식의 연속적인 속뜻을 전개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미 원형은 창세기와 복음서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점을 받아들이면 이번 설교도 전혀 다르게 보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변승우 목사가 로마서를 어떻게 해석했는가’만을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창세기의 어떤 영적 질서를 교회에 설명하고 있는가’를 먼저 보게 됩니다. 그러면 ‘죄와 사망의 법’은 선악과 사건으로 연결되고, ‘생명의 성령의 법’은 생기를 불어넣으시는 창조와 거듭남의 역사로 연결됩니다. 또한 ‘육신’과 ‘성령’의 대립도 단순한 윤리적 갈등이 아니라, 자기 사랑과 주님 사랑이라는 두 생명의 질서가 인간 안에서 어떻게 서로 다른 방향으로 작용하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으로 읽히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말씀은 하나’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창세기와 복음서, 선지서와 요한계시록은 서로 다른 책들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처럼 연결되어 있습니다. 바울 역시 그 생명 밖에서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생명을 교회의 언어로 증언했습니다. 따라서 바울을 깊이 이해하는 가장 좋은 길은 바울을 끝없이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의지하고 있는 말씀의 원형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번 설교를 통해 오히려 다시 확인하게 되는 사실도 있습니다. 설교자는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았고, 회개와 성화를 강조했으며,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삶을 힘주어 말했습니다. 이러한 방향은 스베덴보리의 사상과도 결코 멀지 않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스베덴보리는 그 모든 주제를 언제나 말씀 전체의 흐름 안에서 바라본다는 점입니다. 그는 창세기에서 시작하여 복음서에서 완성되는 주님의 구원 역사를 먼저 본 다음, 그 빛으로 바울을 읽습니다. 그래서 그의 성경 읽기는 언제나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향하고, 교리가 아니라 생명을 향합니다.

 

아마 이것이 앞으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지향해야 할 가장 중요한 특징일 것입니다. 어떤 설교를 만나든 먼저 ‘이 설교가 어떤 본문을 설명하는가’를 묻기보다, ‘이 설교가 설명하는 영적 원형은 말씀 어디에 있는가’를 먼저 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설교는 단순히 옳고 그름을 평가하는 대상이 아니라, 말씀 전체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게 됩니다.

 

이번 설교 역시 그런 시선으로 읽을 때 더욱 깊어집니다. 로마서는 여전히 귀한 책이고, 바울은 여전히 위대한 사도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깊은 곳에는 창세기에서 시작하여 복음서에서 완성되는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바울은 그 말씀을 대신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말씀을 증언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성경관은 우리를 언제나 그 증언 너머, 말씀 자체이신 주님께로 이끕니다.

 

아마 이것이 이번 설교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통찰일 것입니다. 설교를 바울의 눈으로만 읽는 것이 아니라, 먼저 말씀의 눈으로 읽고, 그다음 바울을 읽는 것 바로 그때 로마서는 하나의 독립된 교리서가 아니라, 창세기에서 시작된 거듭남의 역사를 교회의 삶 속에 다시 들려주는 살아 있는 증언으로 새롭게 다가옵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스베덴보리가 우리에게 남겨 준 가장 독창적이며 가장 성경적인 성경 읽기의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SY.39, JMS 정명석, ‘깔짝거리지 말고 하라, 본격적으로 하라’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이 설교는 대한민국에서 JMS(기독교복음선교회)로 알려진 단체의 창설자 정명석의 설교입니다. 따라서 이 해설은 단순히 설교의 문장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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