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10:8-9에서 우상은 다시스의 은과 우바스의 금, 청색 실과 옷으로 화려하게 꾸며집니다. 스베덴보리는 AC.424에서 이 장면을 거짓을 가르치는 사람이 자기 생각으로 만들어 낸 것을 꾸미기 위해 말씀에서 여러 내용을 모아들이는 상태로 풀이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거짓을 가르치는 사람이 말씀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말씀의 내용을 가져와 자기 가르침을 꾸민다는 사실입니다.
이 설명은 말씀을 인용하는 행위와 말씀의 참된 뜻을 가르치는 일을 구별하게 합니다. 어떤 사람이 성경 구절을 많이 알고 정확하게 인용하더라도, 그 구절들을 자신의 생각에 맞추어 모아 놓는다면 그 인용만으로 가르침의 참됨이 보장되지는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예레미야의 우상 제작을 설명하면서 지적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방식입니다. 먼저 자기 생각으로 만들어 낸 것이 있고, 그다음에 그것을 꾸미기 위해 말씀의 내용들을 모아들이는 것입니다.
이사야의 ‘새긴우상’과 예레미야의 ‘헛된것들의교훈’은 이 문제를 함께 보여 줍니다. 이사야에서는 사람이 자기 상상으로 거짓을 만들어 진리처럼 보이게 가르칩니다. 예레미야에서는 그 거짓을 꾸미기 위해 말씀에서 여러 내용을 모아들입니다. 두 구절 모두 거짓이 단순히 아무런 근거 없이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정교하게 만들어지고 장식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다만 AC.424는 모든 잘못된 해석이 반드시 의도적인 속임수에서 비롯된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직접 설명하는 대상은 자기 생각으로 만든 거짓을 꾸미고 가르치는 사람들입니다.
금과 은의 의미도 이 문맥에서 살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금이 우상을 선처럼 보이게 하고, 은이 진리처럼 보이게 한다고 설명합니다. 금과 은이 귀한 재료라는 사실이 우상을 참된 것으로 바꾸어 주지는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선하고 참된 말씀의 표현을 가져와 장식한다고 해서, 그 표현들로 꾸민 가르침의 중심까지 저절로 참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의 구절이 실제로 무엇을 말하는지 살피는 일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이 점은 AC번역과 해설을 작성하는 우리의 작업에도 적용하여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해석이 마음에 든다는 이유로 관련 구절을 찾아 덧붙이는 것과, 해당 구절의 문맥 및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밝힌 뜻을 확인하는 것은 다릅니다. 본문이 직접 말한 내용, 관련 저작에서 확인한 내용, 그리고 우리가 그로부터 생각해 낸 적용을 구별하면 말씀을 자기 생각의 장식으로 사용하는 위험을 줄일 수 있습니다. 이는 해석의 자유를 없애자는 뜻이 아니라, 해석의 근거를 분명히 하자는 뜻입니다.
결국 예레미야의 우상 제작 장면은 ‘성경구절이들어있으니참된가르침이다’라는 판단이 충분하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가 지적하는 문제는 말씀의 내용을 가져와 이미 만들어 놓은 거짓을 꾸미는 데 사용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인용할 때 그 구절이 실제로 무엇을 말하는지 먼저 살피고, 자신의 생각과 본문의 뜻을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AC.424심화1)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창4:22)
AC.424
말씀에서‘세공업자’(artificer)는지혜롭고총명하며지식을갖춘사람을뜻합니다.여기서‘놋과쇠를다루는모든세공업자’(everyartificerinbrassandiron)는자연적선과진리를아는사람들을가리킵니다.계시록에서는다음과같이말합니다. By an “artificer” in the Word is signified a wise, intelligent, and well-informed [sciens] man, and here by “everyartificerinbrassandiron” are signified those who are acquainted with natural good and truth. As in John:
여기서‘거문고타는자들’(harpers)은앞에서와같이진리들을,‘나팔부는자들’(trumpeters)은신앙의선들을뜻합니다.‘어떠한종류의세공업자’(artificerofanycraft)는선과진리를아는사람,또는선과진리에관한기억지식을가리킵니다.이사야에서는다음과같이말합니다. “Harpers” here as above signify truths; “trumpeters,” the goods of faith; an “artificerofanycraft,” one who knows, or the memory-knowledge of truth and good. In Isaiah:
이말씀은자기상상으로거짓,곧‘새긴우상’(gravenimage)을만들어내고,그것을진리처럼보이도록가르치는사람들에관한것입니다.예레미야에서는다음과같이말합니다. speaking of those who from fantasy forge for themselves what is false—a “gravenimage”—andteach it so that it appears true. In Jeremiah:
이는거짓을가르치면서자기생각으로만들어낸것을꾸미기위해말씀에서여러내용을모아들이는사람을뜻합니다.그래서이말씀은그것을‘헛된것들의교훈’(doctrineofvanities)이자‘지혜로운자들의작품’(workofthewise)이라고부릅니다. 고대에는이러한사람들을우상을만드는세공업자들로표상했습니다.그들은우상,곧거짓을만들어놓고금으로장식하여선처럼보이게하며,은으로장식하여진리처럼보이게합니다.또한청색실과옷으로꾸미는데,이는겉으로보기에그거짓과일치하는듯한자연적인것들을나타냅니다. signifying one who teaches falsities, and collects from the Word things with which to forge his invention, wherefore it is called a “doctrineofvanities,” and the “workofthewise.” Such persons were represented in ancient times by artificers who forge idols, that is, falsities, which they adorn with gold, that is, with a semblance of good; and with silver, or an appearance of truth; and with blue and with raiment, or such natural things as are in apparent agreement.
해설
AC.424는 앞의 AC.421-423에서 설명한 두발가인의 의미를 ‘세공업자’라는 말에 집중하여 밝힙니다. 두발가인은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를 나타내며, ‘놋’은 자연적 선을, ‘쇠’는 자연적 진리를 뜻합니다.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세공업자’가 지혜와 총명과 지식을 갖춘 사람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놋과쇠를다루는모든세공업자’는 자연적 선과 진리를 아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세공업자의 의미를 확인하기 위해 계시록과 이사야, 예레미야의 말씀을 차례로 인용합니다.
먼저 계18:21-22는 바벨론이 무너진 뒤 거문고와 퉁소와 나팔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고 세공업자도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에서 ‘거문고타는자들’을 진리들로, ‘나팔부는자들’을 신앙의 선들로 풀이합니다. 이어 ‘어떠한종류의세공업자’는 선과 진리를 아는 사람, 또는 선과 진리에 관한 기억지식을 뜻한다고 밝힙니다. 앞의 AC.420에서 악기들이 선과 진리에 관련된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면, 이번에는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과 세공업자가 함께 등장하는 말씀을 통해 ‘세공업자’의 의미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다만 이번 번호는 바벨론의 멸망에 관한 예언 전체를 해설하지 않으므로, 이 인용만으로 그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의 지식이 실제로 어떻게 되었는지까지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어서 사40:19-20은 세공업자가 ‘새긴우상’을 만드는 장면을 보여 줍니다. 앞의 계시록 인용에서 세공업자는 선과 진리를 아는 사람 또는 그 기억지식을 나타냈지만, 이사야에서는 세공업자가 거짓을 만들어 내는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우상을 사람이 자기 상상으로 만들어 낸 거짓이라고 설명합니다. 세공업자는 그렇게 만든 것을 진리처럼 보이도록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의 핵심은 세공 기술 자체가 아니라, 사람이 자기 생각으로 만든 거짓을 지식과 이해를 동원하여 그럴듯하게 꾸미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지혜로운장인’이라는 표현을 문자 그대로 참된 지혜에 대한 칭찬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사야의 장인은 흔들리지 않을 우상을 만들기 위해 불려 온 사람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장면을 거짓을 만들어 진리처럼 보이게 하는 사람들에 관한 말씀으로 풀이합니다. 이는 사람이 지식을 갖추고 정교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가 가르치는 내용의 참됨까지 보장되지는 않는다는 점을 생각하게 합니다. 다만 ‘흔들리지않는우상’이 어떤 특정한 교리 체계나 논증 방식을 뜻한다고까지 이번 번호가 세부적으로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렘10:1, 8-9는 이 문제를 한층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이 말씀에는 ‘헛된것들의교훈’, ‘나무토막’, 다시스에서 가져온 은, 우바스에서 가져온 금, 세공업자와 금을 다루는 자, 청색 실과 옷이 함께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이 거짓을 가르치는 사람이 자기 생각으로 만들어 낸 것을 꾸미기 위해 말씀에서 여러 내용을 모아들이는 상태를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말씀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말씀의 내용들을 가져와 자신이 만들어 놓은 거짓을 뒷받침하는 데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모습을 고대의 우상 제작에 연결합니다. 세공업자들은 우상을 만들어 놓고 금으로 장식하여 선처럼 보이게 하며, 은으로 장식하여 진리처럼 보이게 합니다. 청색 실과 옷은 그 거짓과 겉으로 일치하는 듯한 자연적인 것들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금과 은은 거짓 자체를 뜻한다기보다, 거짓에 선과 진리의 외관을 입히는 데 사용됩니다. 특히 청색 실과 옷에 관해서는 이번 번호가 ‘겉으로보기에일치하는듯한자연적인것들’이라고 설명하는 데 그치므로, 이를 근거 없이 특정한 영적 상태나 교리로 더 세분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세 인용을 함께 읽으면 ‘세공업자’라는 표현이 왜 중요한지 분명해집니다. 세공업자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과 이해를 나타내지만, 그 지식을 사용하는 사람이 언제나 참된 것을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계시록의 인용은 세공업자가 선과 진리에 관한 기억지식과 관련된다는 점을 보여 주고,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인용은 사람이 그러한 지식과 이해를 동원하여 거짓을 만들어 내거나 꾸밀 수도 있음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는 ‘세공업자’라는 단어 하나에 고정된 도덕적 평가를 붙이기보다, 그가 무엇을 만들고 가르치는지에 따라 문맥을 살피게 합니다.
이 설명은 두발가인을 이해하는 데도 필요합니다. AC.421에서 두발가인은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를 나타냈고, AC.423에서는 이전부터 있던 자연적인 것들이 이제 내적인 것들에 적용되었기 때문에 그를 ‘아버지’가 아닌 ‘스승’이라고 부른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번 번호는 그 ‘스승’이 가르치는 대상인 세공업자들이 자연적 선과 진리를 아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밝힙니다. 이와 동시에 말씀에 관한 지식이 있다는 사실과 그 지식을 참되게 사용한다는 사실을 구별하게 합니다. 말씀의 내용을 모아 설명하더라도, 그것이 이미 정해 놓은 거짓을 꾸미는 데 사용된다면 ‘헛된것들의교훈’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AC.424의 중심은 ‘세공업자’가 지혜와 총명과 지식을 갖춘 사람을 뜻하며, 두발가인과 관련해서는 자연적 선과 진리를 아는 사람들을 가리킨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우상 제작 장면은 지식이 거짓을 진리처럼 보이게 하는 데 사용될 수도 있음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지식을 많이 갖추었는가뿐 아니라, 그 지식으로 무엇을 가르치고 무엇을 드러내려 하는가를 함께 살펴보게 됩니다. (AC.424해설)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창4:22)
AC.423
두발가인은야발과유발의경우처럼‘아버지’(father)가아니라‘온갖기구를만드는자의스승’(instructorofeveryartificer)이라고불립니다.그이유는이전에는천적인것들과영적인것들,곧내적인것들이존재하지않았기때문입니다.야발과유발에게‘아버지’라는표현을사용한것은그러한내적인것들이그때처음생겨났음을나타내기위해서입니다.반면자연적인것들,곧외적인것들은이전에도존재했지만,이제내적인것들에적용되었으므로두발가인을‘아버지’가아니라‘온갖기구를만드는자의스승’이라고부릅니다. Tubal-Cain is called the “instructorofeveryartificer,” and not the “father,” as was the case with Jabal and Jubal; and the reason is that before there were no celestial and spiritual or internal things. And the term “father” is applied to Jabal and Jubal, to denote that such internal things then first began to exist; whereas natural or external things did exist before, but were now applied to internal things, so that Tubal-Cain is not called the “father,” but the “instructor,ofeveryartificer.”
해설
AC.423은 창4:20-22에서 야발과 유발에게는 ‘아버지’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두발가인에게는 ‘스승’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앞의 AC.421에서 두발가인은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를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이번 번호는 그 교리가 왜 새로운 것의 ‘아버지’가 아니라 이미 있는 것을 가르치는 ‘스승’으로 표현되는지 밝힙니다. 핵심은 내적인 것들이 처음 생겨나는 일과, 이전부터 있던 외적인 것들이 그 내적인 것들에 적용되는 일의 차이입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야발과 유발에게 ‘아버지’라는 표현을 사용한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들이 나타내는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 곧 내적인 것들이 그때 처음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처음’이라는 말은 인류 역사상 사랑과 신앙이 그때 비로소 생겨났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AC.423은 앞에서 설명해 온 ‘이새교회’의 상태를 다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표현은 그 교회에 내적인 것들이 생겨나는 과정을 가리킨다고 이해해야 합니다.
반면 자연적인 것들, 곧 외적인 것들은 그전에도 존재했습니다. 그러므로 두발가인이 나타내는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는 내적인 것들과 똑같은 의미에서 새로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달라진 것은 외적인 것들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그것들이 내적인 것들에 적용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차이 때문에 두발가인을 ‘아버지’가 아닌 ‘스승’이라고 부른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적용되었다’는 표현을 주의 깊게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AC.423은 자연적인 것들이 내적인 것들에 적용되었다고 말하지만, 그 적용이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 이루어지는지까지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앞의 AC.422에서 내적 교회는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로, 외적 교회는 자연적인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밝힌 내용을 함께 읽으면, 이번 번호가 교회의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사이의 관계를 계속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외적인 것들이 이전부터 있었다는 사실과 그것들이 이제 내적인 것들에 적용된다는 사실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구별은 자연적인 것들을 무조건 낮게 보거나 불필요한 것으로 여기는 해석도 경계하게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연적인 것들이 이전부터 존재했다는 이유로 그것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번 번호에서는 그 자연적인 것들이 내적인 것들에 적용되었다고 말합니다. 다만 자연적인 것들이 내적인 것들에 적용되었다는 사실만으로, 그 교회의 모든 외적인 것이 이미 온전해졌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번 번호가 직접 설명하는 범위는 두발가인에게 ‘스승’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이유입니다.
결국 AC.423에서 ‘아버지’와 ‘스승’의 차이는 단순한 호칭의 차이가 아닙니다. ‘아버지’는 이 새 교회에서 천적·영적인 내적 요소들이 처음 생겨났음을 나타내고, ‘스승’은 이전부터 존재하던 자연적·외적 요소들이 이제 내적인 것들에 적용되었음을 나타냅니다. 두발가인이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를 의미한다는 앞 번호의 설명도 이 구별 안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423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