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 특히 아버지를 부끄러워한다는 건... (2025/9/10)

 

제목 그대롭니다. 자기 부모를 부끄러워한다는 건 좀... 그러니까 비유하자면, 마치 각종 금은보화, 보물이 가득한 집에 열쇠 없는, 그래서 절대 열 수 없는 큰 자물쇠를 채우는 것과 같습니다. 열쇠가 없으니 아무리 값비싼 재물이 가득해도 열고 들어갈 수가 없고, 결국 그런 집, 그런 창고가 있어 봐야 아무 소용이 없겠지요.

 

어떻게 자식이 자기 부모를 부끄러워하겠나, 어떻게 자기 부모를 수치스러워하겠나 싶지만, 실제로는 그런 일이 일어나는데요, 가령, 부모, 특히 아버지가 너무 무책임하여 자기 하고픈 것만 하며 사느라 가정을 돌보지 않은 경우가 되겠습니다. 이럴 경우, 연약한 어머니가 가정의 경제적 책임을 고스란히 짊어지는 모습을 어려서부터 보아온 자녀는 장성한 후에 그 아버지를 부끄러워할 수 있습니다. 무시하고, 하찮게 여길 수 있지요. 본인도 괴로워하면서 말입니다.  

 

※ 위 경우는 주님의 부르심 있어 따르고자 했던 것입니다. 가정을 이루고 나서 일어난 일이라 부득이하였고, 이후 더욱 크신 전능하신 하늘 아버지께서 가장의 책임을 감당하신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러나 그렇더라도 그러면 안 됩니다. 뭐 당연한 결론이지만 말입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세상 모든 부모는, 특히 아버지는 하나님의 대리인, 그러니까 표상(表象, representative)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내 아버지의 모습으로 지금 내 곁에, 지금까지 내 삶 가운데 계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상 아버지에 대한 나의 태도가 곧 하늘 아버지이신 하나님에 대한 태도이며, 그렇다면 천국 창고인 저 보물창고의 문을 여는 열쇠는 하늘 아버지이신 하나님에 대한 태도, 곧 지상 아버지에 대한 태도가 됩니다. 마치 어느 나라 대사에 대한 태도가 그를 파송한 그 나라에 대한 태도인 것처럼 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선인이든 악인이든 비유하자면 저마다 하늘 보물 창고가 있습니다. 이 보물 창고를 열고 거기 가득한 보물을 꺼내 쓸 수 있느냐 없느냐로 저마다의 인생이 크게 달라질 것입니다. 문제는 이 창고를 여는 열쇠는 오직 천국의 주인이신 하나님에 대한 태도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주인 마음에 들어야 그 창고가 열리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래서 누구에게나 아버지를 주시고, 그 아버지에 대한 태도를 보시는 것입니다.  

 

45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48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5:45, 48)

 

굳이 세상 아버지가 꼭 선인일 필요는 없습니다. 내 아버지가 선인이든 악인이든 상관없이 그 아버지를 하나님의 표상,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여기고 하나님을 대하듯 아버지를 대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식이 부모에게 제 할 도리만 다하면 된다는 것이지요. 부모의 죄를 굳이 자식인 내가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건 그런 부모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큰 불경이 되기 때문에 아주 조심해야 합니다. 지상 아버지가 선인이든 악인이든 그 상과 벌은 하나님이 따로 매기실 것입니다.

 

비록 현실적으로 그간 살면서 봐온 정말 맘에 안 드는 모습 때문에 아버지를 공경할 마음이 우러나지 않더라도 눈 딱 감고 자식 된 도리, 주께 하듯 아버지를 대하면 하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마음이 동하여 기꺼이 그 창고 열쇠를 주실 것입니다. 삶이 계속 막히고, 경제적 어려움이 끊임없이 계속된다 싶으면 이 ‘아버지’라는, ‘부모’라는 일종의 치트 키를 잘 사용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치트 기마저 없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5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6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7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8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 (6:5-8)

 

22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23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24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25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심이 없느니라 (3: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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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이나 인터넷을 도무지 절제할 수 없다면 (2025/9/9)

 

잠깐 쉰다고 무심코 스마트폰이나 PC를 켜 웹툰이나 유튜브, 인터넷이나 게임 등을 하느라 잠시도 쉬지 않고 세상일에 몰두하는 것은,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그 영적 실상을 알게 되면 정신이 번쩍 나는 아주 안타까운 습관입니다. 우리는 못 느끼지만, 이때 하늘, 곧 천국을 향한 창이 닫히기 때문인데, 그렇게 되면, 천국 입류(入流, influx)의 유입이 끊기고, 그리고 그렇게 되면, 우리는 지옥의 각종 위험에 노출, 무방비 상태가 되기 때문입니다.

 

스마트폰이나 인터넷을 멀리할 수 없다면 차라리 그걸로 창세기부터 말씀을 읽거나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와있는 천사들은 말씀에 들어있는 아르카나(arcana, 秘義, 주님이 겉 글자 안에 담아두신 속뜻, 천국 천사들이 사용하는 성경은 이 아르카나로 기록되어 있음)를 통해 크게 감동, 주님이 자기들한테 주신 큰 능력과 권능으로 우리를 지켜 보호할 수 있게 됩니다. 즉 더 이상 무방비 상태가 아니게 되는 것입니다,

 

혹시 이상하게 일상 중 일이 계속 꼬이고, 악과 거짓의 사람들을 자주 만나게 되며, 늘 불안하고 초조하다면, 지금 내 상태가 지옥 영들이 가까이하기 알맞은 상태는 아닌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천국, 지옥은 모두 상태의 나라입니다. 그리고 비슷하면 가까이, 다르면 멀어지는 나라입니다. 그러니까 내 속 사람의 상태가 어떠하냐에 따라 천국이 내게 열릴 수도, 지옥이 나를 찾아올 수도 있다는 말이지요.

 

우리는 일상 중에도 늘 천국과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늘 천국과 연결되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말씀 생활입니다. 스마트폰과 인터넷, 유튜브, 게임 등으로 보내는 시간들이 제법들 되실 텐데, 이제는 의지를 사용하셔서 조금씩 스마트폰의 역기능이 아닌, 순기능의 일상들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편리하게 말씀을 가까이할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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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창2:3까지를 창1로 했어야 하는 이유 (2025/9/8)

 

사실 개인적으로는 창세기 23절까지를 창세기 1장으로 했었어야 맞지 않나 싶습니다. 바로 ‘하나님’이라는 호칭 때문인데, 아직 영적으로 죽어있는, 즉 아직 거듭남의 과정이 시작도 안 된 사람들(1:2 혼돈, 공허, 흑암의 상태)이거나 영적 인간(靈的, spiritual man)이 되어가는 중인 사람들, 곧 거듭남의 과정 중인 사람들(1:3-2:3)한테는 주님의 신성(神性, The Divine)의 두 호칭인 ‘여호와’와 ‘하나님’ 중 후자가 해당되며, 그래서 창세기 1장에서는 내내 ‘하나님’으로 호칭하는데 그것이 창세기 23절까지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라는 호칭은 24절부터 나옵니다. 그러니까 전혀 다른 것이죠. 창1:1-창2:3까지가 하나, 창2:4부터가 또 하나, 이 둘은 완전히 다른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 하지만 그럼에도 아래 말씀처럼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2:2, 3)

 

일곱째 날’이라는 표현 또한 분명히 나오는 걸로 보아 그렇다면 분명 천적 인간의 시작이기도 하여 좀 어리둥절한 게 사실입니다. 이 ‘하나님’이라는 호칭과 ‘일곱째 날’이라는 표현이 함께 쓰인 데에는 무슨 아르카나가 있는 건지 아직은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면 공유하겠습니다.

 

참고로 이 두 호칭, ‘여호와’와 ‘하나님’은 각각 선(good)과 진리(truth) 혹은 사랑(love)과 신앙(faith)으로 연결되며, 거듭남이 완료되어 ‘일곱째 날’, 곧 천적 인간(天的, celestial man)이 되기 전까지는 사람은 일단은 진리로, 그러니까 신앙으로 먼저 주님을 접하게 됩니다. 사람으로 치면, 의지(will)와 이해(understanding) 중 먼저 이해로 접근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선은 ‘하나님’ 호칭이 나오는 것이지요.

 

주님의 신성 호칭인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이런 것처럼, 주님의 신적 인성(人性, The Divine Human) 호칭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예수’는 선 또는 사랑, ‘그리스도’는 진리 또는 신앙으로 연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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