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창4:16)
AC.398
‘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나가는 것’(go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이 사랑의 신앙에 속한 선에서 분리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14절의 해설에서 볼 수 있습니다. ‘놋 땅에 거하는 것’(dwell in the land of Nod)이 진리와 선 밖에 있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놋’(Nod)이라는 말의 의미에서 분명한데, 그것은 유리하며 피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리하며 피하는 자’(wanderer and fugitive)가 되는 것이 진리와 선을 빼앗긴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은 앞에서 볼 수 있습니다. ‘에덴 동쪽’(toward the east of Eden)이 전에 사랑이 지배하던 이해의 마음(intellectual mind) 가까이, 그리고 전에 체어리티가 지배하던 합리적 마음(rational mind) 가까이를 의미한다는 것은 ‘에덴 동쪽’의 의미에 관하여 앞에서 말한 것으로부터 분명합니다. 곧 ‘동쪽’(east)은 주님을, ‘에덴’(Eden)은 사랑을 의미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서는 의지와 이해로 이루어진 마음이 하나였습니다. 의지가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었기 때문에 이해는 의지에 속해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의지에 속한 사랑과 이해에 속한 신앙을 구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었고 신앙은 사랑에 속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에게서와 같이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된 후에는 더 이상 의지가 지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에서 의지 대신 이해가, 곧 사랑 대신 신앙이 지배하게 되었으므로, 그가 ‘에덴 동쪽에 거하였다’고 한 것입니다. 방금 말한 것처럼 신앙이 구별되었기 때문입니다. 곧 신앙에 ‘표가 주어져’ 인류의 쓰임을 위하여 보존되게 하신 것입니다. That to “go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 signifies to be separated from the good of the faith of love may be seen in the explication of verse 14; that to “dwell in the land of Nod” signifies outside of truth and good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 word “Nod,” which is to be a wanderer and a fugitive; and that to be “a wanderer and a fugitive” is to be deprived of truth and good, may be seen above. That “toward the east of Eden” signifies near the intellectual mind, where love had previously reigned, and also near the rational mind, where charity had previously reigned, is evident from what has been said of the signification of “the east of Eden,” namely, that “the east” is the Lord, and “Eden” love. With the men of the most ancient church, the mind, consisting of the will and the understanding, was one; for the will was the all in all, so that the understanding was of the will. This was because they made no distinction between love, which is of the will, and faith, which is of the understanding, because love was the all in all, and faith was of love. But after faith was separated from love, as was the case with those who were called “Cain,” no will reigned any longer, and as in that mind the understanding reigned instead of the will, or faith instead of love, it is said that he “dwelt toward the east of Eden”; for as was just now observed, faith was distinguished, or “had a mark set upon it,” that it might be preserved for the use of mankind.
해설
AC.398은 앞의 AC.397을 상세히 설명하면서 가인으로 표상되는 변화가 인간 마음의 구조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를 보여 줍니다. 처음 두 표현은 앞에서 이미 설명된 의미를 다시 확인합니다. ‘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나가는 것’은 사랑의 신앙에 속한 선에서 분리되는 것이고, ‘놋 땅에 거하는 것’은 진리와 선 밖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 번호의 중심은 세 번째 표현인 ‘에덴 동쪽’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의지와 이해, 사랑과 신앙의 관계를 설명한 뒤, 가인에게서 그 주도권이 어떻게 뒤바뀌었는지를 밝힙니다.
먼저 ‘놋’이라는 이름 자체가 ‘유리하며 피하는 자’의 상태와 연결됩니다. 앞의 AC.380, AC.382, AC.388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는 무엇이 진리이고 선인지 알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가인이 놋 땅에 거했다는 것은 단순히 에덴을 떠나 다른 지역에 정착했다는 지리적 진술에 머물지 않습니다. 속뜻에서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진리와 선의 살아 있는 질서 밖에 놓인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에덴 동쪽’은 그보다 훨씬 미묘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동쪽’은 주님을, ‘에덴’은 사랑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인이 에덴 동쪽에 거했다는 것을 ‘전에 사랑이 지배하던 이해의 마음 가까이’이며 동시에 ‘전에 체어리티가 지배하던 합리적 마음 가까이’라고 설명합니다. AC.397에서는 이해의 마음만 언급했는데, 이번 번호에서는 합리적 마음까지 덧붙입니다. 따라서 가인의 상태를 이해하려면 ‘사랑-신앙’뿐 아니라 ‘의지-이해’라는 인간 마음의 구조까지 함께 보아야 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서는 의지와 이해가 하나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하나였다’는 것은 두 기능을 개념적으로 전혀 구별할 수 없었다는 뜻이라기보다, 서로 대립하거나 독립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의지가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었기 때문에 이해가 의지에 속해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즉 의지가 중심이었고 이해는 그 의지의 질서 안에서 움직였습니다.
그 이유는 다시 사랑과 신앙의 관계에서 설명됩니다. 사랑은 의지에 속하고 신앙은 이해에 속합니다. 그런데 태고교회 사람들은 사랑과 신앙을 서로 독립된 두 가지로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사랑이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었고 신앙은 사랑에 속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AC.393에서 ‘태고교회는 사랑에 속한 신앙 외에는 어떠한 신앙도 인정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신앙을 따로 언급하려 하지도 않았다’고 한 설명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따라서 태고교회의 질서는 ‘의지에서 이해로’, 그리고 ‘사랑에서 신앙으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인간 자신의 의지가 본래 선했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사랑과 선의 근원도 주님이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이 의지를 채우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랑 안에서 이해가 진리를 퍼셉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심은 인간의 의지 자체가 아니라 그 의지를 지배하던 주님으로부터의 사랑입니다.
가인에게서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된 후에는 더 이상 의지가 지배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 변화를 매우 대칭적인 문장으로 표현합니다. ‘의지 대신 이해가, 곧 사랑 대신 신앙이 지배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인의 분리가 가져온 마음의 구조적 변화입니다.
따라서 가인의 문제를 단순히 ‘신앙을 너무 강조했다’는 정도로 이해해서는 부족합니다. 문제는 주도권의 역전입니다. 본래 신앙은 사랑에 속해 있었고 이해는 의지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면서 이해가 독립적인 지배 위치에 올라섰습니다. 진리가 선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진리라고 여기는 것이 선 위에 서고, 신앙이 체어리티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체어리티를 판단하고 지배하려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앞의 AC.362-363에서 설명한 가인의 교리와도 정확히 맞닿습니다. 거기서 가인으로 표상되는 교리는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으며,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체어리티가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AC.398에서는 그 문제가 더 깊은 인간 마음의 차원에서 설명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 중 무엇이 먼저인가?’라는 교리적 논쟁의 배후에는 ‘이해와 의지 중 무엇이 지배하는가?’라는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매우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AC.393에서 스베덴보리는 홍수 후의 영적 인간에게서는 신앙의 지식이 먼저 오고, 그 지식을 통하여 주님께서 체어리티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AC.398의 ‘이해가 지배하게 되었다’는 말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말은 서로 다른 차원을 말합니다. 영적 인간에게 신앙의 지식이 ‘먼저 온다’는 것은 배우고 거듭나는 순서에 관한 것이며, 신앙이 사랑보다 ‘지배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식은 먼저 올 수 있지만 체어리티가 신앙에서 주된 것이 되어야 합니다.
바로 이 차이를 놓치면 가인의 신앙과 홍수 후 영적 교회의 신앙을 동일하게 만들어 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가인은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하여 이해가 의지 대신 지배하게 만든 상태입니다. 반면 주님께서 섭리하신 영적 교회의 질서는 신앙의 지식이 먼저 주어지더라도 그 신앙이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되고, 마침내 체어리티가 신앙에서 주된 것이 되는 질서입니다. 따라서 ‘신앙이 먼저 온다’와 ‘신앙이 지배한다’는 전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이 구별 때문에 AC.398 마지막의 ‘가인의 표’가 다시 중요해집니다. 주님께서는 사랑 대신 신앙이 지배하게 된 잘못된 질서를 승인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해와 신앙을 완전히 소멸시키지도 않으셨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구별되었고, 곧 신앙에 표가 주어져 인류의 쓰임을 위하여 보존되었다’고 다시 말합니다. 여기서 ‘for the use of mankind’, 곧 ‘인류의 쓰임을 위하여’라는 표현이 AC.395의 설명을 더욱 분명하게 해 줍니다.
왜 신앙을 보존해야 했습니까? AC.393에서 이미 답을 보았습니다. 인간이 더 이상 태고교회처럼 사랑으로부터 직접 진리를 퍼셉션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사람에게는 진리를 먼저 듣고 배우는 길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므로 이해와 신앙에 속한 지식이 보존되어야 했습니다. 그것을 통하여 주님께서 다시 체어리티를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인의 신앙은 잘못된 분리에서 시작되었지만, 주님께서는 그 안에서 앞으로 인류에게 쓰임이 될 수 있는 것을 구별하여 보존하셨습니다.
이제 ‘에덴 동쪽에 거하였다’는 표현도 훨씬 선명해집니다. 가인은 에덴 안에 있지 않습니다. 사랑이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며 신앙이 사랑에 속해 있던 본래의 천적 질서에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에덴과 아무 관계도 없는 완전한 소멸 상태로 사라진 것도 아닙니다. 그는 ‘에덴 동쪽’, 곧 전에 사랑이 지배하던 이해의 마음과 전에 체어리티가 지배하던 합리적 마음 가까이에 있습니다. 분리는 일어났지만 이해와 신앙이 보존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가까이’라는 표현은 AC.397에 이어 여전히 중요합니다. 그것은 가인의 상태가 선하고 정상적이었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 안에서 신앙이 앞으로 다시 선과 결합될 수 있는 쓰임을 위해 보존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사랑과 신앙의 본래적 하나 됨은 깨어졌지만, 신앙 자체가 제거되지는 않았습니다. 인간은 이제 그 보존된 신앙의 지식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받아들이는 다른 길로 인도될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AC.398은 태고교회에서 가인으로 넘어가는 변화와, 다시 홍수 후 영적 교회의 질서가 가능해지는 배경을 한꺼번에 보여 주는 중요한 번호입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의지와 이해가 하나였고, 사랑이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었으며 신앙은 사랑에 속해 있었습니다. 가인에게서는 그 결합이 깨져 이해가 의지 대신, 신앙이 사랑 대신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신앙을 없애지 않고 인류의 쓰임을 위해 구별하여 보존하셨습니다.
결국 가인의 문제는 ‘이해가 존재한다’거나 ‘신앙이 존재한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해가 의지에서,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스스로 지배하려 한 것이 문제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섭리는 그 뒤집힌 질서를 승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도 이해와 신앙을 보존하여 다시 선과 사랑을 받아들이는 수단으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인이 진리와 선 밖의 ‘놋 땅’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에덴 동쪽’, 곧 전에 사랑과 체어리티가 지배하던 마음 가까이에 거한다고 한 깊은 이유입니다. (AC.398 해설)
AC.399, 창4:17, ‘가인이 에녹을 낳고 성을 쌓다 - 분리된 신앙이 새로운 교리 체계를 낳다’ (AC.399-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And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and he was building a city, and 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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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7, 창4:16, ‘가인이 에덴 동쪽 놋 땅에 거하다 - 사랑이 지배하던 이해의 마음 가까이에 남은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And Cain went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 and dwelt in the land of Nod, toward the east of Eden. (창4:16) AC.397‘가인이 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나갔다’(Cain 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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