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IS.008 | 이슬람(Islam)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알라의 아름다운 이름들은 그분의 속성을 나타낸다’ - 신적 이름과 신적 본질

 

해설

이슬람은 하나님께 아름다운 이름들이 있으며, 그 이름들은 하나님의 완전한 속성(屬性, attributes)을 나타낸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이름들을 ‘알아스마 알후스나’(al-asma al-husna), 곧 ‘가장 아름다운 이름들’이라고 부릅니다. 꾸란 7:180은 가장 아름다운 이름들이 하나님께 속하므로 그 이름들로 그분을 부르라고 가르치며, 17:110은 ‘알라’라고 부르든 ‘지극히 자비로우신 분’이라고 부르든 그분에게 아름다운 이름들이 속한다고 선언합니다. 꾸란 59:22–24에는 자비로우신 분, 거룩하신 분, 평화의 근원이신 분, 창조하시는 분, 형상을 주시는 분 등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이슬람에서 이러한 이름들은 서로 다른 신적 존재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한 분 하나님을 인간이 이해하고 경외할 수 있도록 그분의 여러 완전성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여기에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인정해야 할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이해되는 분이 아니라, 사랑과 자비와 지혜와 거룩함 등 그분의 신적 본성을 통하여 알려지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더 깊이 살펴보아야 할 질문은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것과 하나님 자신을 아는 것이 같은가, 그리고 여러 신적 속성은 하나님의 본질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슬람 전통에서는 하나님의 99가지 아름다운 이름이 특별히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사히흐 알부하리’(Sahih al-Bukhari) 2736에는 하나님께 99개의 이름이 있으며 이를 알고 헤아리는 사람이 낙원에 들어간다는 전승이 나옵니다. 다만 꾸란이 99개의 이름을 하나의 목록으로 제시하는 것은 아니며, 그 이름들의 구체적인 목록과 범위를 설명하는 방식에도 전승과 학파에 따른 차이가 있습니다. 또한 이 이름들을 안다는 것은 단순히 아랍어 명칭을 소리 내어 반복하는 행위만으로 환원되지 않습니다. 이슬람의 영적 전통에서는 그 이름들의 뜻을 묵상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자신이 허용된 범위에서 자비와 정의와 관대함을 실천하는 삶도 중요하게 여깁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을 자비로우신 분이라고 부르면서 이웃에게 잔인하게 행동하거나, 정의로우신 분이라고 고백하면서 불의를 행한다면, 그 이름을 안다는 고백과 실제 삶 사이에는 모순이 생깁니다. 따라서 아름다운 이름에 관한 이슬람의 신앙은 단순한 명칭의 수집이나 암송을 넘어,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이해하고 그분의 가르침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이름에 관한 가르침과 중요한 접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AC, 1749–1756) 2009항에서 말씀에 등장하는 ‘이름’(name)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그 존재의 성질(quality)을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주님의 이름은 그분에게 속한 모든 신적 성질, 곧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를 포함합니다. 영계에서는 어떤 존재를 단순한 이름이나 외적 명칭보다 그 존재의 내적 성질에 따라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같은 저작 2724항에서는 고대교회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을 단순히 특정한 명칭을 발음하는 행위로 이해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으며 그분을 예배하는 모든 것과 연결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예배의 내적 생명이 약해지고 외적 형식만 남자, 사람들은 이름 자체를 거룩하게 여기고 그 이름을 부르는 행위에 특별한 효력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름만을 예배하는 것은 참된 예배가 아니며, 그 이름이 나타내는 사랑과 신앙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따라서 이슬람의 아름다운 이름들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살펴볼 때에도 중요한 것은 이름의 수나 발음 자체가 아니라, 그 이름들이 어떤 신적 성질을 나타내며 인간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하나님의 속성과 본질(本質, essence)의 관계라는 문제가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 사랑과 지혜’(Divine Love and Wisdom, DLW, 1763) 28항에서 신적 본질 자체는 사랑과 지혜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36–38항에서는 하나님이 사랑 자체와 지혜 자체이시며, 사랑에서 선이 나오고 지혜에서 진리가 나온다고 가르칩니다. 이 가르침에 따르면 하나님의 자비와 정의, 거룩함과 선하심은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 하나님 안에서 때때로 경쟁하는 속성들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신적 사랑과 지혜라는 하나의 본질에 속하며, 인간이 하나님의 역사와 관계를 이해하는 여러 측면에서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자비로우신 분이라고 할 때에는 신적 사랑이 인간을 구원하려는 성질을 생각하게 되고, 지혜로우신 분이라고 할 때에는 그 사랑이 신적 진리와 질서에 따라 역사한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됩니다. 여러 이름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 안에 여러 독립된 본질이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점은 이슬람의 유일신 신앙과도 중요한 공통점을 가지지만, 그 이름들이 가리키는 신적 본질과 역사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에서는 신학적 차이가 남습니다.

 

그러한 차이는 특히 하나님의 권능과 심판을 나타내는 이름들에서 드러납니다. 꾸란에는 자비와 용서의 이름뿐 아니라 절대적 권능과 주권, 심판과 위엄을 나타내는 이름들도 등장합니다. 이슬람은 이러한 이름들을 모두 하나님의 완전성에 속한 것으로 이해하며, 자비와 정의가 신적 본성에 함께 있음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신적 권능은 신적 사랑과 지혜에서 분리되어 작용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사랑 자체이시므로 누구에게도 악을 행하시거나 보복을 즐기시는 분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벌하시는 것처럼 나타나는 표현도 주님의 실제 본성과 인간이 악을 사랑하여 경험하는 결과를 구별하여 이해해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이름을 해석할 때에도 인간적인 분노와 지배욕, 보복심을 무한하게 확대하여 하나님의 속성으로 돌려서는 안 됩니다. 다만 이러한 구별이 이슬람의 권능과 심판에 관한 모든 해석을 인간적인 보복의 관념으로 환원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슬람 안에서도 하나님의 속성을 피조물의 감정이나 행동과 동일시하지 않으려는 신학적 전통이 존재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이름을 사용하느냐보다 그 이름을 통하여 어떤 하나님을 이해하고 예배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 문제는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한다는 성경의 가르침과도 연결됩니다. 주님은 마6:9에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비밀’ 2724항에서 이 말씀의 이름이 단순한 발음이나 명칭이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는 사랑과 신앙의 모든 것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요17:26에서 주님이 아버지의 이름을 사람들에게 알리셨다고 말씀하신 것도 단순히 이전에 알려지지 않았던 호칭을 가르쳐 주셨다는 의미로 한정할 수 없습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셨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그 계시의 충만함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납니다. 주님은 하나님에 관한 여러 진리를 전달하신 예언자에 머무르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인성을 입고 나타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참된 의미에서 주님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라는 이름을 알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신적 사랑과 지혜이신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그분의 계명에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는 이슬람의 아름다운 이름에 담긴 진리를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의 본성을 온전히 알기 위해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가 결정적이라는 스베덴보리의 신학적 입장을 보여 줍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지식과 참된 신앙의 삶은 구별되면서도 분리될 수 없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사랑이시며 자비로우시고 정의로우시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이웃을 미워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을 행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속성에 관한 체계적인 지식이 충분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정직하게 살고 어려운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전자는 이름을 알면서도 그 이름의 내적 성질을 삶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상태이며, 후자는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에 따라 선을 실천하려는 상태입니다. 물론 선한 행위의 궁극적인 근원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묵상하는 일은 단순한 지식의 증가나 종교적 만족에 머무르지 않고, 주님의 선과 진리를 실제 삶에서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특히 이름을 많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자신의 영적 우월성으로 삼거나, 자신이 사용하는 신적 명칭만이 참된 신앙의 증거라고 생각한다면 오히려 이름의 본질을 놓칠 위험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인간이 자랑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이 나타내는 신적 사랑과 진리를 알고 받아들이도록 주어진 것입니다.

 

결국 ‘알라의 아름다운 이름들은 그분의 속성을 나타낸다’는 이슬람의 고백에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 이름으로 불리시더라도 한 분이시며, 그 이름들은 인간이 그분의 자비와 거룩함과 지혜를 이해하고 경외하도록 돕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름에서 본질로, 지식에서 사랑으로, 외적 예배에서 내적 생명으로 나아가도록 우리를 인도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나타내며, 그 이름을 참되게 아는 것은 그분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삶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연결됩니다. 이러한 관점은 기독교인 자신에게도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예배하면서 실제로는 그분의 사랑과 진리를 거스르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자비로우시다고 고백하면서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고, 하나님이 진리이시라고 고백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진리를 왜곡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참된 신앙은 하나님의 이름을 얼마나 많이 아는가보다 그 이름이 나타내는 신적 성질을 얼마나 사랑하고 받아들이는가에서 드러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그 모든 신적 사랑과 지혜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이 문항이 남기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나는 하나님의 이름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가 아니라, ‘나는 그 이름이 나타내는 하나님을 얼마나 참되게 알고 사랑하며, 그분의 선과 진리를 내 삶에서 실천하고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IS.008 해설)

 

요약

이슬람이 하나님의 아름다운 이름들이 그분의 속성을 나타내며, 인간은 그 이름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고 경외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은 중요한 진리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말씀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그분의 성질과 그분을 향한 사랑과 신앙의 모든 것을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름을 암송하거나 속성에 관한 지식을 소유하는 것 자체가 참된 신앙의 완성은 아닙니다. 또한 신적 속성들은 서로 분리된 독립적인 본질이 아니라 신적 사랑과 지혜 안에서 하나를 이룹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본성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계시되며, 그분의 이름을 참되게 아는 것은 그분을 사랑하고 악을 피하며 선을 행하는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따라서 이슬람의 아름다운 이름에 관한 신앙 자체가 오류인 것은 아니지만, 그 이름들의 신적 본질을 이해하는 방식과 성육신하신 주님에 대한 인식에서는 중요한 교리적 차이가 존재합니다.

 

 

 

IS.009. ‘하나님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지만 자신의 뜻을 계시하신다’

SL.IS.009 | 이슬람(Islam)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하나님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지만 자신의 뜻을 계시하신다’ - 초월성과 계시, 이해와 신앙 해설이슬람은 하나님이 인간의 이해(

bygrace.kr

 

IS.007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참된 신앙의 중요한 기초다’

SL.IS.007 | 이슬람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참된 신앙의 중요한 기초다’ - 두려움과 사랑의 영적 질서 해설이슬람에서 하나님을 경외(敬畏, reverence)하는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SL.RC.008 | 천주교(Roman Catholic)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대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은 채 죽으면 지옥에 간다’ - 지옥을 결정하는 것은 죄의 종류인가, 끝까지 붙든 삶의 사랑인가?

 

해설

‘대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은 채 죽으면 지옥에 간다.’ 이것은 천주교가 죄와 회개, 인간의 영원한 운명에 관하여 가르치는 중요한 교리입니다. 천주교는 인간의 죄를 그 중대성에 따라 ‘대죄’(大罪, mortal sin)와 ‘소죄’(小罪, venial sin)로 구별하며, 대죄의 상태에서 회개하지 않고 죽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친교를 영원히 상실한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인간의 도덕적 선택이 단순히 현세의 삶에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과도 관계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어떤 죄가 대죄인지는 누가 결정하며, 그 죄를 지은 사람이 실제로 어떤 내적 상태에 있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사람이 중대한 죄를 지었다는 사실과 그 죄를 자신의 삶의 사랑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동일한 것일까요? 또한 죽기 직전에 회개했다는 사실만으로 오랜 세월 형성된 악한 사랑이 즉시 변화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 스베덴보리는 지옥을 주님께서 죄인을 던져 넣으시는 장소가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악한 사랑에 따라 스스로 들어가는 영적 상태로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천주교의 대죄와 회개에 관한 가르침은 이러한 이해와 어디에서 일치하고, 어디에서 달라질까요? 이번 명제는 지옥의 존재를 인정하는가 하는 문제를 넘어, 인간의 영원한 상태를 결정하는 것이 무엇이며 참된 회개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묻는 중요한 신학적 문제입니다.

 

먼저 천주교의 공식적인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1854–1855항은 대죄와 소죄를 구별하면서, 대죄는 하나님의 법을 중대하게 어겨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체어리티를 파괴하고 하나님에게서 돌아서게 하는 죄라고 설명합니다. 반면 소죄는 체어리티를 상하게 하고 약화시키지만 그것을 완전히 파괴하지는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천주교는 어떤 중대한 잘못을 저질렀다는 사실만으로 반드시 대죄가 성립한다고 판단하지 않습니다. 교리서 1857항은 대죄가 성립하려면 세 가지 조건이 함께 충족되어야 한다고 명시합니다. 첫째, 그 행위가 중대한 사안이어야 합니다. 둘째, 당사자가 그 행위가 중대한 죄임을 충분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셋째, 자신의 자유로운 의지로 그 행위에 의도적으로 동의해야 합니다. 따라서 겉으로 동일한 행동을 했더라도 그 사람의 인식과 자유, 의도에 따라 개인적인 책임의 정도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교리서 1860항은 무의식적인 무지나 외부의 강압, 심리적·병리적 장애 등이 행위의 자발성과 책임을 감소시키거나 제거할 수도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구별에는 인정해야 할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인간의 영적 상태는 겉으로 드러난 행동만으로 완전하게 판단할 수 없으며, 그의 이해와 의지, 자유로운 선택을 함께 고려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천주교는 대죄가 회개 없이 지속되면 인간을 지옥에 이르게 한다고 가르칩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1861항은 대죄가 체어리티와 성화 은총을 상실하게 하며, 회개와 하나님의 용서로 회복되지 않으면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한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1033항은 대죄의 상태에서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비로운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죽는 것을,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하나님과의 친교에서 영원히 분리되는 상태라고 정의합니다. 1035항은 지옥의 영원성을 가르치면서 그 가장 큰 고통을 하나님과의 영원한 단절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점은 1037항입니다. 천주교는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도 지옥에 가도록 예정하지 않으시며, 지옥에 이르기 위해서는 인간이 의도적으로 하나님에게서 돌아선 상태를 끝까지 고집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천주교의 지옥 교리를 하나님께서 죄를 지은 사람에게 분노하시어 임의로 지옥행을 선고하시는 것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천주교 역시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과 끝까지 지속되는 회개 거부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러한 점에서는 스베덴보리의 가르침과 중요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두 전통 모두 지옥을 인간의 악한 삶과 무관한 임의적인 처벌로 이해하지 않으며, 인간이 자유 가운데 무엇을 사랑하고 선택하는가가 영원한 운명과 깊이 관련된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죄를 지은 사람의 상태를 판단할 때에는 더욱 신중해야 합니다. 천주교는 어떤 행위가 객관적으로 중대한 악이라는 사실과 그 행위를 저지른 개인에게 대죄의 책임이 완전하게 성립한다는 사실을 구별합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1861항도 행위 자체의 중대성은 평가할 수 있지만, 그 사람에 대한 최종적인 판단은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에 맡겨야 한다고 명시합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중대한 죄를 지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반드시 대죄의 상태에 있으며, 지금 죽는다면 지옥에 갈 것이라고 선언하는 것은 천주교의 공식 교리에도 부합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구별은 실제 목회 현장에서도 중요합니다. 인간은 겉으로 드러난 행동을 볼 수 있지만, 그 사람이 무엇을 알고 있었는지, 어떤 내적 갈등과 압력 가운데 있었는지, 자신의 행동을 얼마나 자유롭게 선택했는지를 완전히 알 수는 없습니다. 또한 겉으로는 회개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자신의 내면에서 어떤 변화를 경험하고 있는지도 인간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의 심각성을 분명하게 가르치는 일과 특정한 사람의 최종적인 구원을 판단하는 일은 구별해야 합니다. 죄를 죄라고 말해야 하지만, 그 사람의 영원한 상태까지 결정하는 것은 주님의 몫입니다. 이러한 원칙은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인간의 내적인 사랑과 의지의 중요성을 이해할 때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이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지옥의 본질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 545–550항에서 주님께서는 아무도 지옥에 던져 넣지 않으시며, 악한 영이 자신의 악에 따라 스스로 지옥으로 들어간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HH.545에서 스베덴보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얼굴을 돌리시고 분노하여 지옥으로 내쫓으신다는 생각을 비판합니다. 주님은 선 자체이시며 사랑과 자비 자체이시므로 누구에게도 악을 행하지 않으시고, 누구도 자신에게서 내쫓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HH.547에서는 인간 안에 있는 악이 곧 그 사람 안의 지옥이라고 설명합니다. 인간은 자연계에서 자신이 사랑하고 의지한 악을 사후에도 사랑하며, 그 악을 자신의 생명처럼 붙들고 있기 때문에 그와 일치하는 영적 공동체를 찾아가게 됩니다. 따라서 지옥은 주님의 자비가 부족하여 생기는 결과가 아니라 인간이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거부하고 자신의 악한 사랑을 선택한 결과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지옥의 존재나 영원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지옥을 매우 실제적인 영계의 상태로 설명하지만, 그 근원을 주님의 분노가 아니라 인간이 자유롭게 받아들인 악한 사랑에서 찾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가르침은 죄와 회개가 인간의 영원한 운명에 관계된다는 천주교의 핵심적인 경고와 연결되면서도, 지옥이 형성되는 영적 원리를 더욱 깊이 설명합니다.

 

이러한 이해에서 결정적인 개념은 ‘지배적인 사랑’(ruling love)입니다. 스베덴보리는 HH.477–480에서 인간의 사후 상태가 지상에서 형성한 사랑과 의지에 따라 결정된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HH.480은 사람이 죽은 후에도 자신의 지배적인 사랑을 유지하며, 그 사랑이 영계에서 자신의 삶과 행동을 지배한다고 가르칩니다. 이 말은 인간이 생전에 한 번 중대한 잘못을 저질렀다는 사실만으로 그의 영원한 상태가 결정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어떤 악을 사랑하고 정당화하며, 그것을 자신의 삶의 목적으로 삼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탐욕으로 중대한 잘못을 저질렀지만 이후 자신의 악을 인정하고 피해를 바로잡으며 정직한 삶으로 돌아섰다면, 그의 상태를 그 한 번의 잘못만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겉으로는 큰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더라도 속으로는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해치려는 마음을 즐기며 그것을 자신의 삶의 목적으로 삼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참된 상태가 단순한 행동의 목록이 아니라 그 행동을 낳는 사랑과 의지에 있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어떤 죄가 중대한가를 분별하는 일은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 그 사람의 영원한 상태를 충분히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생애 전체를 통하여 형성된 사랑과 그 사랑에 따른 실제적인 삶을 함께 살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천주교의 대죄와 소죄의 구별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스베덴보리는 모든 악이 영적으로 동일한 무게를 지닌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사람을 죽이거나 속이고 착취하는 악,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을 의도적으로 파괴하는 악은 매우 중대한 영적 문제입니다. 또한 사람이 어떤 악을 진리와 양심을 거슬러 의도적으로 선택할수록 그 악은 자신의 의지와 더욱 깊이 결합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죄의 중대성과 의도적인 선택을 구별하는 천주교의 가르침에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인정할 수 있는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죄와 구원에 관한 가르침을 천주교의 대죄와 소죄라는 법적·성사적 분류에 그대로 대응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의 관점에서 결정적인 것은 특정한 죄목이 어떤 등급에 속하는가보다, 그 악이 인간의 사랑과 의지 안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악을 죄로 인정하고 주님의 도움으로 그 악을 피하며 새로운 삶으로 나아간다면, 그는 악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거듭남의 과정에 들어갑니다. 반대로 자신의 악을 정당화하고 즐기면서 끝까지 그것을 버리기를 거부한다면, 그는 그 악을 자신의 지배적인 사랑으로 굳혀 갑니다. 따라서 지옥에 관한 참된 경고는 특정한 죄의 등급을 확인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인간이 지금 무엇을 사랑하고 어떤 삶을 선택하고 있는가를 돌아보게 해야 합니다.

 

이제 회개의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천주교는 회개를 단순히 죄를 입술로 고백하는 행위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1451항은 ‘통회’(痛悔, contrition)를 자신의 죄를 슬퍼하고 미워하며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또한 1452항은 하나님을 모든 것보다 사랑하는 데서 비롯된 ‘완전한 통회’(perfect contrition)가 대죄의 용서를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다만 여기에는 가능한 한 빨리 고해성사를 받겠다는 결심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천주교가 사망 직전에 고해성사를 받지 못하면 언제나 지옥에 간다고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자비를 받아들이는 진정한 회개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회개의 필요성을 매우 강하게 강조합니다.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520–524항에서는 사람이 자신의 악을 회개를 통하여 제거하지 않는 한 그 악 안에 머물며, 악 안에 계속 머무는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TCR.528–531에서는 실제적인 회개가 자기 성찰과 죄의 인정, 주님께 드리는 기도, 그리고 새로운 삶의 시작으로 이루어진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회개하지 않고 악 가운데 머무는 사람이 구원받을 수 없다는 가르침은 스베덴보리에게서도 분명하게 확인됩니다. 이번 명제를 단순히 천주교만의 잘못된 지옥 교리라고 규정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사망 직전의 회개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문제에서는 더욱 깊은 구별이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이 오랜 세월 악을 사랑하며 살다가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죄를 두려워하고 용서를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기도를 무조건 거짓되거나 무가치하다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자신의 생애 마지막 순간에도 주님의 자비를 구할 수 있으며, 주님께서는 그 사람의 가장 깊은 내면을 아십니다. 그러나 죽음이 두려워 죄를 후회하는 감정과 실제로 그 악을 미워하고 버리려는 사랑의 변화는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거듭남은 인간이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악을 죄로 여겨 피하며 삶을 변화시키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마지막 순간에 죄를 고백했다는 외적인 사실만으로 오랜 세월 형성된 지배적인 사랑이 실제로 달라졌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그 사람이 사망 직전에 충분한 말이나 행동으로 자신의 변화를 보여 주지 못했다고 해서 아무런 참된 회개도 없었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이 지점에서 필요한 것은 회개의 진정성을 가볍게 판단하지 않는 신중함입니다. 천주교의 완전한 통회에 관한 가르침과 스베덴보리의 실제적인 거듭남에 관한 가르침은 모두 내적인 변화의 중요성을 인정하지만, 그 변화가 죄의 용서와 영원한 상태에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설명하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여기서 죽음 이후의 상태에 관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도 중요합니다. 그는 HH.491–520에서 인간이 죽은 후 ‘영들의 세계’(world of spirits)를 거쳐 자신의 내적인 상태가 드러나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죽었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사람이 즉시 최종적인 천국이나 지옥의 공동체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며, 영들의 세계에서 겉으로 드러났던 모습과 내적인 사랑이 점차 구별됩니다. 특히 HH.499–511에서 그는 사람이 사후에 자신의 속 사람의 상태로 들어가면서 지상에서 형성된 실제적인 사랑과 의지가 분명하게 나타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것을 사후에 누구나 자유롭게 새로운 삶을 선택하여 자신의 지배적인 사랑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후에 인간의 내적인 사랑이 드러나고 그에 따른 상태가 전개된다고 설명하며, HH.480에서는 지배적인 사랑이 사후에도 지속된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영들의 세계는 생전에 형성된 사랑과 무관하게 구원의 기회를 새롭게 얻는 장소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지상에서 실제로 어떤 사랑을 받아들이고 살아왔는지가 드러나는 세계입니다. 이러한 이해에서 영원한 운명은 단순히 사망 순간의 외적인 종교적 상태나 마지막 고백의 유무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생애를 통하여 형성된 내적인 사랑과 주님께서 그 사람 안에서 이루신 거듭남의 상태가 중심이 됩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목회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어떤 사람이 중대한 죄를 지었다는 이유로 그에게 이미 지옥행이 확정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인간이 어떤 악을 사랑하고 고집하더라도 결국 모두 천국에 들어간다고 안심시키는 것 역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무한한 사랑과 자비 자체이시지만,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여 그가 사랑하지도 않는 선을 억지로 사랑하게 만들지는 않으십니다. 따라서 지옥의 가능성은 실제적이며, 인간이 악을 죄로 여겨 피해야 할 이유도 매우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의 최종적인 상태를 알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이 겉으로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그가 어떤 내적 갈등을 겪고 있는지, 주님께서 그를 어떻게 인도하고 계시는지 완전하게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지옥의 두려움을 이용하여 사람을 조종하기보다, 악이 인간의 영혼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진지하게 가르치고 주님의 자비 안에서 실제적인 회개로 나아가도록 도와야 합니다. 참된 회개는 처벌을 피하기 위한 외적인 종교 행위에 머물지 않고, 죄를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는 내적인 변화로 이어져야 합니다. 죄의 심각성을 낮추지 않으면서도 사람의 최종적인 심판은 주님께 맡기는 것, 이것이 지옥과 회개를 가르칠 때 반드시 지켜야 할 태도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번 명제의 참된 의미를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이 악을 사랑하고 끝까지 회개하지 않은 채 살아간다면 그 악은 그의 삶을 지배하며, 사후에는 그 사랑에 상응하는 영적 상태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러한 점에서 회개하지 않은 악이 인간을 지옥으로 이끈다는 천주교의 가르침은 스베덴보리의 영계 이해와 깊이 연결됩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단순히 대죄에 해당하는 행동을 저질렀는가, 사망 전에 고해성사나 통회를 마쳤는가 하는 외적인 기준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천주교 역시 대죄가 성립하려면 충분한 인식과 의도적인 동의가 필요하며, 개인의 최종 심판은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영원한 상태를 그의 지배적인 사랑과 실제적인 삶의 성격에서 설명합니다. 주님께서는 누구도 지옥으로 던지지 않으시며, 인간이 악을 사랑하는 만큼 스스로 지옥의 상태에 가까워집니다. 반대로 인간이 주님의 도움으로 악을 죄로 여겨 피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나아갈 때, 그는 천국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됩니다. 따라서 지옥을 피하는 가장 중요한 길은 자신의 죄가 어떤 등급에 해당하는지를 계산하거나 마지막 순간의 회개만을 기대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늘 자신의 사랑과 의지를 돌아보고, 주님의 말씀에 따라 악을 피하며 선을 행하는 삶을 시작하는 데 있습니다. 참된 회개는 언젠가 죽기 직전에 해결해야 할 종교적 절차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부터 주님의 은총으로 살아가야 할 거듭남의 삶입니다. 결국 인간을 천국으로 이끄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시며, 인간을 지옥에 묶어 두는 것은 그가 끝까지 붙들고 버리기를 거부한 악한 사랑입니다. (SL.RC.008 해설)

 

요약

‘대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은 채 죽으면 지옥에 간다’라는 명제는 그 핵심에서 반드시 오류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악을 사랑하고 회개하지 않은 채 그 악 안에 머무른다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가르침은 스베덴보리의 TCR.520–524와 HH.545–550에서도 분명하게 확인됩니다. 천주교는 대죄가 성립하려면 중대한 사안과 충분한 인식, 의도적인 동의가 함께 필요하다고 가르치며, 죄의 상태에서 회개하지 않고 죽는 것을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에 따른 하나님과의 영원한 단절로 이해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도 지옥에 가도록 예정하지 않으시며, 개인의 최종적인 심판은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에 맡겨야 한다고 명시합니다. 이러한 공식적인 가르침은 정확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인간의 영원한 상태를 설명하는 핵심은 대죄와 소죄라는 분류 자체가 아니라, 인간이 지상에서 형성하고 사후에도 유지하는 지배적인 사랑입니다. HH.480은 인간의 지배적인 사랑이 사후에도 지속된다고 설명하며, HH.547은 악을 사랑하는 인간이 스스로 그 악에 상응하는 지옥의 상태로 들어간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TCR.528–531은 실제적인 회개가 자신의 죄를 성찰하고 인정하며 주님께 도움을 구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오류로 검토해야 할 핵심은 회개하지 않은 악이 인간을 지옥으로 이끈다는 가르침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특정한 죄목의 분류나 사망 직전의 외적인 고백만으로 개인의 영원한 상태를 확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지옥을 주님께서 분노하여 인간에게 강제로 부과하시는 형벌로 이해하는 데 있습니다. 다만 천주교의 공식 교리 역시 그러한 단순화를 경계하므로, 이러한 오류를 천주교 전체의 가르침으로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두 전통의 중요한 차이는 죄와 회개의 필요성보다 인간의 영원한 상태가 무엇에 의하여 형성되고 드러나는가를 설명하는 방식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사후의 상태는 지상에서 형성된 내적인 사랑과 실제적인 거듭남에 따라 전개되며, 어떤 사람의 최종 상태를 인간이 임의로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명제는 ‘악을 사랑하고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지옥의 상태에 이른다’는 의미에서는 참되지만, 이를 단순한 죄목의 분류와 마지막 종교적 절차에 의하여 운명이 결정된다는 이해로 축소한다면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판정해야 합니다. 참된 신앙은 지옥의 두려움에만 머무르지 않고,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신뢰하며 지금부터 악을 죄로 여겨 피하고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으로 나아가는 데 있습니다.

 

 

 

RC.009. ‘교회가 정한 신앙의 진리를 믿고 지키는 것이 올바른 신앙이다’

SL.RC.009 | 천주교(Roman Catholic)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교회가 정한 신앙의 진리를 믿고 지키는 것이 올바른 신앙이다’ - 진리의 근거는 교회의 권위에 있는가, 주님의 말씀에 있는

bygrace.kr

 

EO.007. ‘하나님의 본질은 알 수 없지만 그 에너지에는 참여할 수 있다’

SL.EO.007 |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하나님의 본질은 알 수 없지만 그 에너지에는 참여할 수 있다’ - 신적 참여와 주님의 인플럭스 해설동방정교회가 ‘하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SL.EO.008 |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모든 개념과 형상을 초월하신다’ - 부정신학과 신적 인격의 문제

 

해설

동방정교회의 신학을 살펴보면 하나님에 관하여 끊임없이 강조하는 가르침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만들어 낸 모든 개념과 형상을 초월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이시며 지혜이시고, 전능하시며 전지하시고,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그분의 손과 얼굴, 눈과 음성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동방정교회는 이러한 표현들이 아무리 성경적이고 신앙적으로 중요하더라도 하나님의 무한하신 본질을 인간의 생각 속에 완전히 담아낼 수는 없다고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모든 피조물의 범주를 초월하시며, 인간의 언어와 관념으로 제한할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처음 접하면 하나님에 관하여 아무것도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는 뜻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교회가 의도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부정하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에 관하여 무엇을 안다고 말할 때, 인간이 이해한 그 내용과 하나님 자신의 무한한 실재를 동일시하지 않도록 경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적 개념과 형상을 초월하신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하나님을 마음속에 생각하며 기도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인간적인 형상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까? 그렇다면 성경이 하나님을 인간의 모습과 언어로 나타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본 사람이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신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바로 이 질문에서 동방정교회의 ‘부정신학’(apophatic theology)과 스베덴보리의 신적 인성에 관한 가르침이 중요한 만남과 차이를 드러냅니다.

 

동방정교회의 부정신학은 하나님께서 무엇이신지를 인간이 완전히 규정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출발합니다. 여기서 ‘부정’이란 하나님을 부인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에 관한 인간의 표현들이 지닌 유한성과 한계를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선하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선하시다는 말은 인간이 경험하는 선한 사람의 성품을 무한히 확대하면 하나님의 본질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선의 근원이시며, 피조물이 경험하는 선함을 무한히 초월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혜로우시다고 말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지혜는 제한된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형성되지만, 하나님의 지혜는 모든 지혜의 근원이므로 인간의 지성과 동일한 범주에 놓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동방정교회는 하나님께 관하여 긍정적으로 말하는 ‘긍정신학’(cataphatic theology)과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된 개념을 초월하신다고 말하는 부정신학을 함께 인정합니다. 긍정신학은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사랑과 선과 지혜와 거룩함을 고백하고, 부정신학은 그 고백을 인간의 유한한 관념으로 절대화하지 않도록 이끕니다. 따라서 부정신학의 목적은 하나님을 알 수 없는 추상적 존재로 남겨 두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이 만든 하나님에 관한 개념을 하나님 자신과 혼동하지 않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이 점에서 동방정교회의 가르침에는 인간이 자신의 지식과 이해를 지나치게 신뢰하지 말아야 한다는 중요한 신앙적 겸손이 담겨 있습니다.

 

이러한 신학적 전통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하나가 8세기 신학자 다마스쿠스의 요한(John of Damascus)입니다. 그는 ‘정통신앙 해설’(An Exposition of the Orthodox Faith) 제1권 1장과 4장에서 하나님의 신성이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며, 하나님 자신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피조물이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전적인 무지 속에 남겨 두신 것은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영원하시고, 창조되지 않으셨으며, 선하시고, 지혜로우시고, 모든 것의 근원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이러한 지식이 하나님의 무한한 본질을 완전히 파악한 결과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몸이 없으시며, 공간의 경계 안에 갇히거나 물질적인 요소들로 구성된 존재가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빛이라고 부를 때 그 빛을 자연계의 물리적 광선과 동일시해서는 안 되며,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된 빛을 초월하신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하나님에 관한 모든 언어는 참된 계시를 전달할 수 있으면서도 동시에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더 깊은 실재를 가리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을 인간의 자연적 감각과 상상력으로 만들어 낸 우상과 구별하려는 중요한 의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마스쿠스의 요한은 동시에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인간의 눈에 보이셨다는 사실도 인정합니다. 그러므로 정교회의 부정신학을 하나님은 어떠한 방식으로도 자신을 나타내실 수 없다는 가르침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와 연결하여 동방정교회에서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 ‘성화상’(icon)입니다. 정교회 예배당에 들어가면 예수 그리스도와 마리아, 여러 성인의 모습을 나타낸 성화상들을 볼 수 있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든 형상을 초월하신다는 가르침과 모순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형상으로도 표현할 수 없다고 하면서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림으로 나타내고 그 앞에서 공경을 표시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정교회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신적 본질을 그림 속에 가두거나 묘사할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실제 인간으로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나타낼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787년 제2차 니케아 공의회는 성화상 공경에 관한 논쟁에서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중요한 근거로 제시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 분으로만 남아 계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제 인간으로 나타나셨으므로, 그분의 성육신을 시각적인 형상으로 증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교회는 성화상에 대한 공경과 하나님께만 드리는 예배를 구별하며, 성화상의 물질 자체를 하나님으로 숭배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정교회의 성화상 전통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부정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초월하시는 하나님께서 성육신을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셨다는 사실을 보존하려는 신앙적 표현입니다. 물론 성화상 공경이 신학적으로 정당한가 하는 문제는 별도의 검토가 필요하지만, 정교회가 인간의 형상으로 하나님의 무한한 본질을 완전히 표현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성경 역시 하나님께서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신다는 사실과 동시에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모습으로 자신을 나타내신다는 사실을 함께 증언합니다. 출33:20에서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사람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살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사55:8-9에서는 하나님의 생각과 길이 인간의 생각과 길보다 높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창1:26-27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기록하며, 창18장에서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세 사람의 모습 가운데 여호와의 임재가 증언됩니다. 또한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손과 눈, 얼굴과 팔에 관한 표현을 여러 차례 사용합니다. 이러한 표현들을 모두 자연계의 물질적 신체에 관한 설명으로 이해하면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제한하게 됩니다. 반대로 이러한 표현들이 단순히 인간의 상상력에서 만들어진 것이므로 하나님에 관한 참된 내용을 전달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면, 성경이 인간에게 말씀을 주신 목적을 이해하기 어렵게 됩니다. 특히 요1:18은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나 독생하신 하나님께서 그분을 나타내셨다고 증언하며, 요14:9에서는 주님께서 자신을 본 사람이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인간에게 나타나신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자연적 개념을 초월하시지만, 인간이 자신을 알 수 없도록 영원히 감추어 두신 분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그분과 결합할 수 있도록 자신을 계시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문제는 하나님을 어떤 형상으로든 생각해서는 안 되는가 하는 데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을 드러내신 방식을 어떻게 올바르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데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신학은 동방정교회의 부정신학과 중요한 공통점을 가지면서도 근본적인 차이를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 사랑과 지혜’(Divine Love and Wisdom, 1763) DLW.7-10에서 하나님은 공간 안에 존재하지 않으시며, 그분의 무한하심을 자연계의 시간과 공간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디에나 계시다는 것은 물질적 신체가 우주 전체에 퍼져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공간을 초월하시며, 그분의 신적 사랑과 지혜는 모든 피조물에게 생명을 공급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자연계의 한 장소에 거주하시거나 어떤 물질적인 형상 속에 갇혀 계신 분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 역시 동방정교회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자연적 관념을 하나님께 그대로 적용하는 일을 경계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형상을 초월하시므로 하나님을 형상 없이 생각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을 인간 형상으로 이해하는 것이 천국적인 하나님 관념의 핵심이라고 가르칩니다. DLW.11에서 그는 천국의 모든 천사가 하나님을 인간 형상으로 생각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연계의 인간처럼 유한한 육체를 가지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랑 자체이시며 지혜 자체이시고, 모든 인간적 생명의 원형이시기 때문에 가장 완전한 의미에서 인간이시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하나님을 인간의 형상으로 제한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형상 자체가 하나님의 신적 사랑과 지혜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을 밝히려는 것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하나님은 참으로 인간이시다’(God is very Man)는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간이라고 말할 때에는 육체를 가지고 태어나 성장하고 늙고 죽는 유한한 존재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하나님을 인간이라고 부를 때에는 이러한 자연적 인간의 한계를 하나님께 적용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DLW.285-289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이시라는 사실을 자연적인 공간과 시간의 관념에서 벗어나 이해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지혜 자체이시며,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이십니다. 사랑과 지혜는 아무런 주체도 없는 추상적인 성질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존재의 본질적인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사랑 자체이시며 지혜 자체이신 하나님은 모든 인간적인 것의 근원이시고, 피조된 인간은 그분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된 존재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닮은 것이지, 하나님께서 인간의 유한한 육체와 동일한 방식으로 존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인간 형상을 이루고, 천사들이 모두 완전한 인간 형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도 이러한 신적 질서와 연결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천국의 인간 형상이나 천사들의 인간 형상은 하나님과 별도로 존재하는 우주적 신체를 뜻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천국의 모든 천사에게 사랑과 지혜를 공급하시기 때문에 천국 전체가 인간의 형상과 상응하는 질서를 이룬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하나님의 인간 형상은 자연적인 육체의 형태가 아니라 신적 사랑과 지혜의 질서를 이해하는 근본적인 열쇠가 됩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관념은 왜 중요합니까? 그는 DLW.13에서 하나님에 대한 관념이 모든 종교적 생각의 중심에 있으며, 참된 하나님 관념이 없으면 천국과의 교통도 올바르게 이루어질 수 없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에 관한 모든 신학적 문제를 완전히 이해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자신의 기도와 예배에서 실제로 어떤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아무런 형상도 없는 무한한 공간이나 막연한 우주적 힘으로만 생각한다면, 인간의 생각은 분명한 인격적 대상을 향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고백하면서도 그 사랑을 누구에게서 받아들이는지 알 수 없다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점차 추상적인 관념에 머물 수 있습니다. 반면 하나님을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나타내신 한 분 하나님으로 생각한다면, 인간은 자신의 기도와 사랑을 분명한 대상에게 향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1771) TCR.787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보이는 하나님 안에 영혼이 몸 안에 있듯 계시며, 인간이 이처럼 나타나신 하나님을 통하여 그분과 상호적인 결합을 이룰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보이는 하나님은 단순히 자연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물질적 존재라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신적 인성 안에서 인간이 알아볼 수 있도록 자신을 나타내셨으며, 그분이 바로 우리가 알고 사랑하고 예배해야 할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참된 관념은 추상적인 신학적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주님과 실제로 결합하는 신앙의 중요한 토대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를 설명하면서 동방정교회가 하나님을 아무런 인격도 없는 추상적인 신적 원리로 이해한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동방정교회 역시 하나님을 살아 계신 인격적인 분으로 고백하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적 위격적 관계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하나님이시며 참사람이시고, 성육신을 통하여 하나님 자신을 인간에게 나타내셨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정교회의 부정신학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인격적 관계를 부정하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하나님을 자신의 유한한 관념 속에 가두지 않으면서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참된 친교를 이루도록 안내하는 가르침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와 동방정교회 사이에는 하나님의 인격적 일치를 이해하는 방식에서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정교회는 하나의 신적 본질 안에 영원히 구별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세 위격이 존재한다고 가르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하나님께서 본질에서뿐 아니라 인격에서도 한 분이시며, 성부는 주님 안의 근원적인 신성이시고, 성자는 그 신성이 취하시고 영화롭게 하신 신적 인성이시며, 성령은 그 한 분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역사하심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정교회가 하나님의 초월성과 세 위격의 실재를 함께 고백한다면,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인정하면서도 그분의 신적 인격적 단일성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드러난다고 강조합니다. 이러한 차이는 단순히 하나님을 묘사하는 언어의 차이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어떤 분으로 이해할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신론의 차이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형상과 스베덴보리의 ‘상응’(correspondence)에 관한 가르침을 함께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손과 얼굴과 눈과 발, 그리고 빛과 불과 구름에 관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러한 표현들을 모두 자연적인 의미로만 이해하면 하나님께서 물질적인 신체를 가지셨거나 자연계의 현상과 동일한 분이시라는 오해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상응 원리에 따르면 성경의 자연적 표현들 안에는 영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손은 신적 능력과 역사하심을, 하나님의 얼굴은 그분의 사랑과 자비의 임재를, 빛은 신적 진리를, 불은 문맥에 따라 신적 사랑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는 문맥과 속뜻에 따라 구별해야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자연적인 형상이 영적인 실재를 나타내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간적인 표현으로 말씀하신다는 이유만으로 그 표현들이 모두 부정확한 인간의 상상력이라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신적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자연적인 언어와 형상을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성경의 문자적 의미는 인간의 이해를 위해 주어진 외적인 옷과 같으며, 그 안에는 천국의 영적 의미와 주님의 신적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자연적인 형상으로 제한하는 일과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형상 속에서 영적인 진리를 발견하는 일은 전혀 다릅니다. 참된 성경 해석은 형상을 우상으로 만들지 않으면서도, 그 형상을 통하여 주님께서 나타내신 진리를 발견하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동방정교회의 성화상과 스베덴보리의 상응은 같은 원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정교회의 성화상은 성육신의 신학적 의미와 교회의 전례적 전통 속에서 이해됩니다. 성화상에 대한 공경은 그 물질 자체를 하나님으로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형상이 가리키는 원형을 향하는 행위로 설명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의 상응은 자연계의 대상과 현상들이 영계의 실재와 맺는 관계, 그리고 성경의 문자적 의미 안에 담긴 영적 의미를 설명하는 원리입니다. 따라서 두 전통 모두 눈에 보이는 형상이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실재를 가리킬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그 형상의 권위와 기능을 이해하는 방식은 다릅니다. 정교회가 성화상을 교회의 예배와 공경 안에서 사용하는 반면, 스베덴보리의 상응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영적으로 이해하고 자연계와 영계의 관계를 밝히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또한 상응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어떤 종교적 그림이나 조각이 예배의 대상으로 정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형상이 영적인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는 것과 그 형상에 종교적 공경을 드려야 한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정교회의 성화상 전통과 스베덴보리의 상응을 비교할 때에는 공통점만을 강조하여 두 개념을 동일시하지 말고, 각각의 신학적 목적과 역할을 구별해야 합니다. 이러한 문제는 이후 EO.057-059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다루게 될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신학적 차이가 실제 신앙생활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든 이해를 초월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하나님에 관하여 무엇을 분명하게 알고자 하는 노력 자체를 교만한 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자신이 성경과 교리를 충분히 공부했으므로 하나님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고 확신하며, 자신의 신학적 설명과 다른 생각을 모두 잘못된 것으로 단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태도는 모두 신중하게 검토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시지만, 인간이 자신을 알 수 없도록 감추어 두신 분은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참된 진리를 계시하셨다고 해서 인간이 하나님의 무한하심 전체를 자신의 지성으로 소유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동방정교회의 부정신학은 이러한 점에서 인간에게 신앙적 겸손을 가르칩니다.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은 그 겸손이 하나님에 대한 막연한 관념에 머물지 않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신 한 분 하나님을 참되게 알고 사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한 가지를 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에 관한 올바른 관념이 중요하다고 하여 그것이 곧 한 사람의 최종적인 영적 상태를 판단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어떤 교리를 받아들이게 되었는가는 그가 태어나고 자란 환경과 교육과 종교적 전통에 크게 영향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의 하나님 관념을 검토하고 그 안에 담긴 진리와 오류를 분별할 수는 있지만, 그 사람의 내면에 있는 사랑과 신앙의 최종적인 상태까지 자신이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결국 하나님에 대한 참된 이해는 우리의 삶에서 어떤 열매를 맺어야 합니까? 어떤 사람이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모든 개념을 초월하시는 분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자신의 생각과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자신의 신학적 지식을 자랑한다면 그의 고백은 아직 삶의 겸손으로 충분히 이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이 하나님은 인간 형상으로 자신을 나타내셨으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분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이해하면서도, 실제 삶에서는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을 정당화하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역시 자신이 아는 진리를 삶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인간의 영적 성숙은 진리를 얼마나 정교하게 이해하는가에 의해서만 결정되지 않습니다. 이해가 받아들인 진리가 의지의 사랑과 결합하고, 그 사랑이 실제적인 선한 쓰임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참되게 안다는 것은 하나님에 관한 올바른 설명을 소유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그분께서 사랑하시는 선을 사랑하고 그분께서 가르치시는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교만과 분노와 이기심을 버리려 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하나님 관념은 아직 자신의 내면을 충분히 변화시키지 못한 것입니다. 반대로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이웃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정직과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려는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를 실제 삶에 받아들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올바른 하나님 관념은 인간을 자신의 지식에 대한 확신으로 높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대한 겸손과 이웃 사랑으로 이끌어야 합니다.

 

이제 처음의 고백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모든 개념과 형상을 초월하십니까? 그렇습니다. 동방정교회의 이 가르침에는 인간이 결코 잃어버려서는 안 될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한하시며, 피조물인 인간이 자신의 유한한 관념과 상상력으로 그분의 본질 전체를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진리가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참된 형상도 없으시며 인간이 그분을 분명하게 생각할 수도 없다는 주장으로 확대된다면 문제가 생깁니다. 실제로 동방정교회 자체도 이러한 결론을 내리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을 참되게 나타내셨다고 고백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여기에서 더욱 근본적인 가르침을 제시합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인간의 형상으로 자신을 드러내신 분이 아니라, 모든 인간적인 것의 신적 원형이신 참된 인간이시며, 그 한 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신적 인성을 완전하게 나타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든 개념을 초월하신다는 사실과 하나님을 인간 형상으로 참되게 생각할 수 있다는 사실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든 분명한 관념이 아니라, 하나님을 자연계의 유한한 인간처럼 생각하거나 자신이 만든 관념 속에 가두려는 태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신 한 분 하나님을 참되게 알고 사랑하며, 그분의 신적 사랑과 지혜가 우리의 의지와 이해 안에 흘러들어와 실제 삶의 선으로 열매 맺도록 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참되게 아는 일은 하나님의 무한하심 앞에서 겸손해지는 것과 그분께서 자신을 나타내신 신적 인성을 바라보는 일이 함께 이루어질 때 온전한 방향을 찾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관념은 그분을 인간의 생각 안에 가두는 관념이 아니라, 인간의 생각과 사랑을 그분께로 이끄는 관념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본 하나님의 초월성과 신적 인격의 문제입니다. (EO.008 해설)

 

요약

동방정교회는 하나님께서 인간이 만들어 낸 모든 개념과 형상을 초월하시므로, 인간은 하나님의 무한한 본질을 자신의 언어와 지성으로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부정신학에는 하나님을 인간의 유한한 관념 속에 가두지 않으려는 참된 겸손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정교회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인식이나 인격적 관계를 부정하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셨다고 고백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하나님께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무한하신 분임을 인정하지만, 하나님을 형상 없는 추상적인 실재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사랑 자체이시며 지혜 자체이신 참된 인간이시고, 모든 인간적인 것의 신적 원형이시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화된 신적 인성으로 자신을 나타내셨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두 전통은 하나님의 초월성과 인간의 유한성을 함께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참된 관념과 신적 인격의 일치를 설명하는 방식에서는 차이를 보입니다. 특히 스베덴보리에게 하나님을 인간 형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자연적인 육체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신 신적 사랑과 지혜를 한 분 하나님으로 알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결국 참된 신앙은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인정하는 겸손과 하나님을 분명하게 알고 사랑하는 신앙을 함께 보존하며, 그분께 받은 진리를 실제 삶의 선과 이웃 사랑으로 실천하는 데서 완성되어야 합니다.

 

 

 

EO.009.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동시에 거룩한 심판자이시다’

SL.EO.009 |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동시에 거룩한 심판자이시다’ - 신적 사랑과 심판의 관계 해설기독교 신앙에서 하나님에 관하여

bygrace.kr

 

EO.007. ‘하나님의 본질은 알 수 없지만 그 에너지에는 참여할 수 있다’

SL.EO.007 |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하나님의 본질은 알 수 없지만 그 에너지에는 참여할 수 있다’ - 신적 참여와 주님의 인플럭스 해설동방정교회가 ‘하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