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210.심화

 

2. ‘own에 갇힌 자들의 생생한 실존을 보고

 

실제로 지옥에 가서 이 own에 갇힌 자들의 생생한 실존, 곧 비참한 상태를 본 스베덴보리로서는 더더욱 이 own 설명이 생생했겠어요...

 

 

그렇습니다. 저는 AC.210 같은 본문을 읽을 때마다, 이것이 단순히 책상 앞에서 세운 신학 이론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습니다. 스베덴보리는 own은 지옥적이며 저주받은 것이다’라고 추상적으로 말하고 끝내지 않습니다. 그는 이후 수많은 저작들에서 실제 영계와 지옥의 주민들을 관찰한 내용을 반복해서 기록합니다. 그래서 그의 own 설명은 철학자의 정의라기보다 목격자의 증언에 가깝게 느껴집니다.

 

특히 스베덴보리가 지옥에서 본 사람들은 대개 자신들이 악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가장 옳고, 가장 지혜롭고, 가장 정당하다고 확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중심에 두고 모든 것을 해석하기 때문에, 미움을 사랑이라 부르고, 지배욕을 정의라 부르고, 복수를 정당한 권리라 부르며,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을 가장 합리적인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AC.210 그들은 미움을 사랑이라 부르고, 어둠을 빛이라 부른다’는 말은 바로 이런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지옥의 고통이 외부에서 가해지는 형벌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들은 자기 own 안에 갇혀 있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남보다 위에 서고 싶어 하고, 인정받고 싶어 하며, 지배하고 싶어 하고, 자신이 중심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똑같이 그렇게 원하기 때문에, 결국 서로 충돌하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속이고, 공격하게 됩니다. 그 결과가 바로 지옥의 비참함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own은 단순한 성격상의 결함이나 작은 이기심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을 주님으로부터 분리시키고, 동시에 다른 사람들로부터도 분리시키는 원리입니다. 주님과의 연결이 끊어지고, 이웃과의 연결도 끊어지며, 결국 자기 자신만 남게 됩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자기 자신만 남은 상태가 바로 가장 깊은 고독과 불행의 상태가 됩니다.

 

이 점에서 보면, 스베덴보리가 own을 그렇게 강하게 표현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단지 교리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끝이 어디로 가는지를 실제로 보았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마치 절벽 아래를 직접 내려다본 사람이 그 길로 가지 마시오’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 말은 이론적 경고가 아니라 체험적 경고입니다.

 

한편으로는, 스베덴보리가 own을 가장 강하게 비판하는 만큼 주님의 자비도 가장 강하게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는 인간 안에 own이 얼마나 깊이 뿌리박혀 있는지를 보았고, 또한 그 own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주님께서 얼마나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지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저작을 읽다 보면, 인간에 대한 평가는 매우 엄격하지만, 주님에 대한 평가는 끝없이 따뜻하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어쩌면 목사님 말씀처럼, 실제로 지옥에 가서 own에 갇힌 영들의 삶을 보고 돌아온 사람이라면 AC.210 같은 문장을 이렇게밖에 쓸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는 단순히 own은 나쁘다’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그것이 끝내 어떤 모습이 되는지를 보았다’를 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AC.210의 무게는 단순한 교리의 무게가 아니라, 영원한 세계를 목격한 증인의 무게처럼 다가오는 것입니다.

 

 

 

AC.210, 창3:6,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own’의 정의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And the woman saw t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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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0, 심화 1, ‘그저 악과 거짓이 될 뿐’(become mere evil and falsity)

AC.210.심화 1. ‘그저 악과 거짓이 될 뿐’(become mere evil and falsity) 사람은 이렇게 함으로써 그저 악과 거짓이 될 뿐이며, In this way men become mere evil and falsity, (AC.210) 이 문장은 처음 읽으면 매우 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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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0.심화

 

1. ‘그저 악과 거짓이 될 뿐(become mere evil and falsity)

 

사람은 이렇게 함으로써 그저 악과 거짓이 될 뿐이며, In this way men become mere evil and falsity, (AC.210)

 

 

이 문장은 처음 읽으면 매우 충격적으로 들립니다. 마치 스베덴보리가 인간 안에는 선한 것이 전혀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의도는 인간 존재 자체를 정죄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는 여기서 ‘주님으로부터 분리된 인간’, 곧 own 안에만 머무는 인간이 어떤 상태가 되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문장의 앞부분에 있는 ‘이렇게 함으로써(In this way)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갑자기 악과 거짓이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이미 앞에서 그 과정을 설명했습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중심에 두고, 주님보다 자기 자신을 신뢰하며, 감각과 기억 지식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기 시작하면, 사람은 점차 모든 것을 자기 own의 관점으로 판단하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렇게 함으로써’ 사람은 악과 거짓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은 사랑의 왜곡을 의미하고, ‘거짓’은 이해의 왜곡을 의미합니다. 사랑이 왜곡되면 악이 되고, 이해가 왜곡되면 거짓이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인간 안의 의지와 이해가 모두 own에 의해 지배될 때, 사람 전체가 악과 거짓의 방향으로 기울게 된다고 말합니다.

 

또한 이 표현은 인간에게서 주님께 속한 것을 제거하고 생각해 보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러 곳에서 인간 안에 있는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 오며, 인간 안에 있는 모든 진리도 주님으로부터 온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만일 사람이 그것들을 모두 자기 것으로 돌리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거부한다면 무엇이 남겠습니까? 바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악과 거짓뿐이라는 것이 그의 논리입니다.

 

그래서 AC.210의 이 문장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혐오스러운 존재라는 선언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생명과 진리의 근원이 될 수 없다는 선언에 가깝습니다. 인간은 달과 같아서 스스로 빛을 만들어 내는 존재가 아니라, 빛을 받아 비추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달이 태양과의 연결을 끊고 자기 스스로 빛을 내겠다고 하면 결국 어둠만 남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런 상태를 ‘그저 악과 거짓일 뿐(mere evil and falsity)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이 말은 동시에 주님의 자비를 더욱 크게 드러냅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은 자기 힘으로 선해지는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주님의 생명을 받아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희망은 자기 own에 있지 않고, 주님께 있습니다. AC.210의 강한 표현은 인간을 절망시키기 위한 말이 아니라, 인간이 어디를 바라보아야 하는지를 보여 주기 위한 말입니다.

 

따라서 ‘이와 같이 사람은 그저 악과 거짓이 될 뿐입니다’라는 말은 ‘인간은 본래 쓸모없는 존재다’라는 뜻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분리된 own만 남게 되면, 결국 악과 거짓밖에 남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의도에 가장 가깝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그는 인간의 own을 경계하면서도, 동시에 주님의 인플럭스와 자비를 끊임없이 강조하는 것입니다.

 

 

 

AC.210, 심화 2, ‘own에 갇힌 자들의 생생한 실존을 보고’

AC.210.심화 2. ‘own에 갇힌 자들의 생생한 실존을 보고’ 실제로 지옥에 가서 이 own에 갇힌 자들의 생생한 실존, 곧 비참한 상태를 본 스베덴보리로서는 더더욱 이 own 설명이 생생했겠어요... 그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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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0, 창3:6,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own’의 정의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And the woman saw t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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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And the woman saw that the tree was good for food, and that it was pleasant to the eyes, and a tree to be desired to give intelligence, and she took of the fruit thereof and did eat, and she gave also to her man [vir] with her, and he did eat. (3:6)

 

AC.210

 

사람의 own이 무엇인지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own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비롯되는 모든 악과 거짓이며, 주님이나 말씀을 믿지 않고, 자기 자신을 믿는 데서 나오는 것이고, 또한 감각과 기억 지식[sensualiter et scientifice]으로 파악할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는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렇게 함으로써 그저 악과 거짓이 될 뿐이며, 따라서 모든 것을 왜곡된 시선으로 보게 됩니다. 악한 것을 선한 것으로, 선한 것을 악한 것으로 보며, 거짓된 것을 참된 것으로, 참된 것을 거짓된 것으로 봅니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아무것도 아닌 것은 모든 것인 양 여깁니다. 그들은 미움을 사랑이라, 어둠을 빛이라 부르며, 죽음을 생명이라, 그 반대로도 부릅니다. 말씀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저는 자(lame)맹인(blind)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own인데, 이것은 그 자체로 지옥이며, 저주받은 것입니다. What man’s own is may be stated in this way. Man’s own is all the evil and falsity that springs from the love of self and of the world, and from not believing in the Lord or the Word but in self, and from supposing that what cannot be apprehended sensuously and by means of memory-knowledge [sensualiter et scientifice] is nothing. In this way men become mere evil and falsity, and therefore regard all things pervertedly; things that are evil they see as good, and things that are good as evil; things that are false they see as true, and things that are true as false; things that really exist they suppose to be nothing, and things that are nothing they suppose to be everything. They call hatred love, darkness light, death life, and the converse. In the Word, such men are called the “lame” and the “blind.” Such then is the own of man, which in itself is infernal and accursed.

 

 

해설

 

이 본문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own’의 정의 가운데 가장 강렬하고도 중요한 대목 중 하나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own’을 단순히 ‘자기 자신’, ‘개성’, ‘자아’ 정도로 이해하기 쉽지만, 스베덴보리에게 own은 훨씬 더 깊고 심각한 의미를 가집니다. 그것은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스스로 존재하고 스스로 판단하며 스스로 살아간다고 믿는 상태 전체를 가리킵니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own을 단순한 도덕적 악행으로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는 그 뿌리를 ‘주님을 믿지 않고, 자기 자신을 믿는 것’에서 찾습니다. 다시 말해, 문제의 핵심은 행동 이전에 중심의 이동입니다. 원래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생명과 빛을 받아 살아야 하는 존재인데, own은 그 자리에 자기 자신을 앉혀 놓습니다. 그래서 ‘내가 판단하겠다’, ‘내가 결정하겠다’, ‘내가 기준이다’라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이와 연결하여 스베덴보리는 또 하나의 특징을 지적합니다. own은 감각과 기억 지식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AC.194-209에서 계속 설명된 창3의 뱀의 원리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즉, 감각으로 보이지 않으면 믿지 않고, 학문적으로 증명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태도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것은 단순한 지적 오류가 아니라 own이 작동하는 방식입니다.

 

그 결과 사람은 현실을 거꾸로 보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본문의 중심입니다. 그는 악을 선으로, 선을 악으로 보며, 거짓을 진리로, 진리를 거짓으로 봅니다. 이것은 단순한 판단 실수가 아닙니다. 영적 시력이 뒤집힌 상태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없는 것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모든 것처럼 여긴다고 말합니다.

 

특히 ‘그들은 미움을 사랑이라, 어둠을 빛이라, 죽음을 생명이라 부른다’는 표현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own의 본질을 드러내는 설명입니다. own은 선을 악으로, 악을 선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까지 바꾸어 버립니다. 그래서 자신이 미워하면서도 사랑한다고 믿고, 어둠 속에 있으면서도 빛 가운데 있다고 생각하며, 영적으로 죽어 있으면서도 자신이 가장 살아 있다고 확신합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말씀에서 이런 사람들을 ‘저는 자’와 ‘맹인’이라고 부른다고 설명합니다. 저는 자는 바르게 걸을 수 없는 사람이며, 맹인은 바르게 볼 수 없는 사람입니다. 영적으로 말하면, 그들은 진리의 길을 제대로 걸을 수 없고, 선과 진리를 올바로 분별할 수도 없습니다. 문제는 눈이 없어서가 아니라, 눈이 있으면서도 잘못 보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마지막 문장은 매우 강렬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바로 사람의 own이며, 그것은 그 자체로 지옥이요, 저주받은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그는 인간 자체를 저주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주님과 분리될 때, 남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서 주님의 생명과 빛을 제거하면 남는 것은 자율성과 독립성이 아니라, 왜곡된 사랑과 왜곡된 판단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AC.210은 단순한 인간 비관론이 아닙니다. 이 본문은 오히려 인간이 왜 주님을 필요로 하는지를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반복해서 말하는 것처럼, 인간 안에 있는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그리고 인간이 그것을 자기 것으로 착각하는 순간, 곧 own이 중심이 되는 순간, 그는 점차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을 뒤바꾸어 보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AC.210이 경고하는 own의 본질이며, 동시에 창세기 3장 전체가 보여 주는 타락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심화

 

1. ‘그저 악과 거짓이 될 뿐(become mere evil and falsity)

 

 

AC.210, 심화 1, ‘그저 악과 거짓이 될 뿐’(become mere evil and falsity)

AC.210.심화 1. ‘그저 악과 거짓이 될 뿐’(become mere evil and falsity) 사람은 이렇게 함으로써 그저 악과 거짓이 될 뿐이며, In this way men become mere evil and falsity, (AC.210) 이 문장은 처음 읽으면 매우 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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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own에 갇힌 자들의 생생한 실존을 보고

 

 

AC.210, 심화 2, ‘own에 갇힌 자들의 생생한 실존을 보고’

AC.210.심화 2. ‘own에 갇힌 자들의 생생한 실존을 보고’ 실제로 지옥에 가서 이 own에 갇힌 자들의 생생한 실존, 곧 비참한 상태를 본 스베덴보리로서는 더더욱 이 own 설명이 생생했겠어요... 그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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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1, 창3: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AC.211-21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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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9, 창3:6, ‘창3의 표현들이 의지, 애정의 언어들인 이유’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And the woman saw t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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