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먼저 영상에서 매우 강하게 느껴지는 것은 ‘거룩하게 살고 싶다’는 열망입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1,600년 동안 그곳에서 수도하다 세상을 떠난 수도자들의 유골을 보면서 끔찍함보다 오히려 ‘향기가 났다’, ‘고개를 숙이고 흠모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또 게라시모스가 기도하던 동굴과 그곳에 얽힌 이야기들을 소개하면서 마지막에는 자신도 ‘그런 영이 임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이 마음 자체는 가볍게 볼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무엇을 더 얻고 높아질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가까이 것인가’를 사모하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수도 전통이 오랜 세월 수많은 사람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것도 바로 이 지점일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서 ‘거룩함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한 번 더 묻게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룩함은 어떤 장소에서 오래 기도하고, 육체를 극도로 절제하고, 세상을 떠나 고독하게 산다는 사실 그 자체에서 생기지 않습니다. 사람을 거룩하게 하는 것은 오직 주님이며,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실제 삶에서 살아갈 때 그 삶이 거룩해집니다. 그러므로 수도원도 거룩함을 돕는 장소가 될 수 있고, 광야의 동굴도 그럴 수 있지만, 그것들이 그 자체로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수도원 안에서도 proprium은 얼마든지 살아 있을 수 있고, 오히려 ‘나는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산다’, ‘나는 이렇게 많이 기도한다’, ‘나는 이런 금욕을 견뎌 냈다’는 영적 자기의가 더 미세한 형태로 자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수도생활을 부정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수도생활을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제자리에 놓아 줍니다. 침묵, 금식, 기도, 독거, 절제, 단순한 생활은 모두 훌륭한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의 목적은 ‘수도자가 되는 ’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가 주님께 굴복하고, 악을 죄로 알고 피하며, 주님께 받은 선을 이웃에게 흘려보내는 데 있습니다. 결국 천국의 삶은 세상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었는가보다 ‘무엇을 사랑하며 살았는가’에 의해 결정됩니다.

 

이 영상에서 특별히 아름다운 대목은 게라시모스와 사자의 이야기입니다. 게라시모스가 발에 가시가 박힌 사자를 치료해 주었고, 그 뒤 사자가 그를 따르며 도왔으며, 마침내 게라시모스가 죽은 뒤에도 그의 무덤 곁을 떠나지 않았다는 전승입니다. 이것을 역사적으로 어디까지 사실로 받아들일 것인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영상 자체도 수도 전통에서 전해 내려오는 성인전적 이야기의 성격으로 읽는 것이 안전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이야기가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동물은 매우 흥미로운 존재입니다. 말씀의 속뜻에서 동물들은 인간의 여러 정서와 애정을 표상합니다. 온순하고 유익한 동물들은 선한 애정들을, 사납고 해로운 동물들은 악한 애정들을 표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고 현실의 사자 한 마리를 곧바로 어떤 하나의 영적 의미와 기계적으로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영적 그림은 상당히 아름답습니다. 인간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야생의 힘이 사랑과 돌봄 앞에서 적대성을 잃고 봉사하는 힘으로 바뀝니다. ‘가시를 주는 ’에서 시작하여 ‘곁을 지키는 ’으로 끝나는 이 이야기는, 인간 안의 거칠고 자연적인 것조차 주님의 질서 아래 들어오면 선을 섬기는 힘이 될 수 있다는 그림으로 읽어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도 한 가지는 조심해야 합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마지막에 ‘동물과도 친해지고, 동물도 알아주고, 하나님이 알아주는 것은 물론 사람들이 인정하는 신성한 ’을 구하는 취지로 기도합니다.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사람들이 알아보는 거룩함’이 아닙니다. 심지어 ‘동물까지 알아보는 성자 같은 사람이 되는 ’도 아닙니다. 우리가 구해야 하는 것은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는 ’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성자라고 생각하는지, 영성이 깊다고 인정하는지는 본질적으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차이는 작아 보이지만 대단히 중요합니다. ‘ 수도자처럼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지’라는 열망은 아름답게 출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중심이 ‘주님’에서 ‘거룩한 ’로 옮겨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끊임없이 인간의 proprium을 경계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거룩해졌는가’를 바라보는 순간, 거룩함은 어느새 자기 소유물이 되기 쉽습니다. 반대로 ‘ 안에는 선한 것이 하나도 없으며, 모든 선과 진리는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점점 깊이 인정하는 사람은 자신을 거룩한 사람으로 만들려고 애쓰기보다 주님께서 자기 안에서 일하시도록 자신을 내어 드리게 됩니다.

 

영상에 등장하는 광풍도 이런 관점에서 흥미롭게 읽을 수 있습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앞을 제대로 보기 어려울 만큼 거센 바람과 먼지가 부는 날에도 동굴을 향해 걸어갔고, 안내자는 ‘게라시모스는 이런 날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 기도했던 성인’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분명 인상적인 장면입니다. 그러나 영적 삶에서 더 중요한 광풍은 바깥의 날씨가 아니라 인간 안에서 일어나는 시험입니다. 기도하기 좋은 분위기가 깨졌을 때, 사람에게 인정받지 못할 때, 내가 옳다고 생각한 것이 무너질 때, 자존심이 상할 때, 내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을 때에도 주님을 향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훨씬 깊은 문제입니다. 외적 광풍을 견디는 수도보다 ‘proprium 광풍’을 견디는 내적 싸움이 더 어렵습니다.

 

또 한 가지, 영상에는 한국 목회자들이 악천후에도 동굴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강문호 수도사가 ‘역시 한국 사람들은 한국 사람이구나’ 하며 감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역시 그 현장에서 느낀 반가움과 감동의 표현으로 받아들이면 충분하겠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누가 독하게 기도하는가’가 영성의 척도가 되지는 않습니다. 오랜 시간 기도하는 것도 귀하고, 새벽기도도 귀하며, 금식도 귀합니다. 그러나 기도의 열매는 결국 그 사람이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 나타납니다. 더 온유해졌는가, 자기 생각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는가, 타인의 허물을 덜 정죄하게 되었는가, 자신의 악을 더 분명하게 보게 되었는가, 이웃에게 더 유익한 사람이 되었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영상의 핵심을 ‘게라시모스처럼 되어야 한다’에서 한 걸음 더 안쪽으로 옮겨 읽고 싶습니다. 게라시모스의 동굴도, 1,600년의 수도 전통도, 수도자들의 유골도, 광풍 속의 기도도, 사자의 충성도 모두 우리를 감동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가리켜야 할 마지막 대상은 ‘위대한 수도자’가 아니라 ‘사람을 거룩하게 하시는 주님’이어야 합니다. 성자의 삶이 귀하다면 그것은 그 사람에게서 주님의 어떤 것이 비쳐 나왔기 때문이지, 그 사람이 스스로 거룩함의 원천이 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특히 사자 이야기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을 저는 ‘사자가 성인을 알아보았다’는 데서 찾기보다 ‘고통받는 존재의 가시를 주었다’는 데서 찾고 싶습니다. 이것은 아주 작은 차이 같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큰 차이입니다. 사자를 굴복시킨 영적 능력이 중심이 아니라, 아파하는 생명에게 다가가 그 고통의 원인을 제거해 준 체어리티가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발에 박힌 ‘가시’를 발견하고 그것을 빼 주는 사람, 상처받은 사람에게 다가가 고통을 덜어 주는 사람, 그리고 그 일을 자신의 공으로 돌리지 않는 사람이라면, 수도복을 입고 있든 평범한 옷을 입고 있든 이미 수도 영성의 깊은 중심에 가까이 가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영상에서 우리가 받아야 할 기도도 조금 달라질 수 있습니다. ‘주님, 사람들이 알아보는 성스러운 사람이 되게 하소서’라기보다 ‘주님, 안의 악을 보게 하시고, 그것을 죄로 알고 피하게 하시며, 제게 주시는 선을 것이라 여기지 않게 하시고, 오늘 곁에 있는 존재의 가시 하나라도 주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저는 이것이 게라시모스의 이야기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통과시켰을 때 남는, 더 조용하지만 더 깊은 수도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SY.87, 강문호 수도사, ‘수도학교’ (20200112)

※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4:7)

 

AC.363

 

가인(Cain)이라 불린 신앙의 교리가 어떤 성질의 것이었는지는 절에 대한 설명에서 있습니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체어리티가 신앙과 결합될 수는 있었으나,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권을 가져야 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먼저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If thou doest well art thou not uplifted)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네가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면 체어리티가 함께 있을 있다 뜻입니다. 선을 행한다(do well) 것은 속뜻으로 선한 의도를 가지는 뜻하는데, 선을 행하는 것은 선을 의도하는 데서(from willing what is good) 나오기 때문입니다. 고대에는 행위와 의지가 하나를 이루었습니다. 사람들은 행위를 보고 의지를 알았는데, 당시에는 위선이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낯을 (uplifting) 체어리티가 함께 있음을 뜻한다는 것은 앞에서 얼굴에 관하여 설명한 것으로 분명합니다. 얼굴을 든다(lift up the face) 것은 체어리티를 가지는 것이며, 얼굴이 떨어진다(face to fall) 것은 반대입니다. The nature of the doctrine of faith that was calledCainis seen from the description of it in this verse, from which it appears that charity was capable of being joined to faith, but so that charity and not faith should have the dominion. On this account it is first said, “If thou doest well art thou not uplifted?signifying, If thou art well disposed, charity may be present; for todo wellsignifies, in the internal sense, to be well disposed, since doing what is good comes from willing what is good. In ancient times action and will made a one; from the action they saw the will, dissimulation being then unknown. That anupliftingsignifies that charity is present is evident from what has been already said about the face, that tolift up the faceis to have charity, and that for theface to fallis the contrary.

 

 

해설

 

AC.363은 앞의 AC.361-362에서 제시된 가인의 문제를 한층 더 정확하게 밝혀 줍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 자체에 있지 않았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글 첫머리에서 체어리티가 신앙과 결합될 있었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문제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함께 있느냐 없느냐만이 아니라, 둘이 함께 있을 때 어느 것이 주도권을 가지느냐였습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 그대로라면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권을 가져야(charity and not faith should have the dominion) 했습니다. 이것은 체어리티가 신앙을 억누르거나 무가치하게 만든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본래 결합되어야 하지만, 그 결합 안에서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기고 체어리티로 인도해야 하며, 체어리티가 신앙에 생명과 방향을 주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362의 설명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은 신앙을 버린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을 사랑보다 본질적인 으로 만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신앙을 사랑보다 앞세우자, 신앙은 사랑에서 나오는 체어리티에서도 분리되었고, 결국 사랑 없이 살게 되었습니다. AC.361에서는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하지만, 가인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기 때문에 함께 있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63은 그 반대의 정상적인 질서를 명시합니다. 체어리티와 신앙은 결합되어야 하되,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해야 합니다. 바로 이 질서가 뒤집힌 것이 가인의 교리였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먼저 하신 말씀이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에게 너는 이미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했으므로 끝났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아직 체어리티가 다시 신앙과 결합할 가능성이 남아 있습니다. 가인이 다시 선을 향한다면 체어리티가 그와 함께 있을 수 있고, 떨어졌던 얼굴도 다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4:7은 단순한 책망이나 심판의 선언이라기보다 가인에게 주어진 회복의 초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선을 행한다(to do well)는 것을 단순히 외적으로 선한 행동을 한다는 뜻으로 해석하지 않습니다. 속뜻으로는 선한 의도를 가지는 (to be well disposed)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선을 행하는 것은 선을 의도하는 것에서(from willing what is good) 나오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행위의 외적 모양보다 그 행위가 흘러나오는 내적 의지입니다. 선한 행위가 참으로 선하려면 그 안에 선을 향하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살펴본 가인의 제물과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가인에게도 행위가 있었습니다. 그는 땅을 경작했고, 그 소산으로 여호와께 제물을 드렸습니다. 겉으로 보면 예배도 드렸습니다. 그러나 AC.348-349에서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 없는 신앙에서 나온 행위를 죽은 행위, 내적인 것이 없는 외적 예배를 죽은 예배로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가인에게 선을 행하라고 하신 말씀은 단순히 이번에는 좋은 행동을 하라거나 합당한 제물을 드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외적 행위의 근원이 되는 내적 의지가 먼저 선을 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스베덴보리는 고대에는 행위와 의지가 하나를 이루었다고 말합니다. 당시에는 사람의 행위를 보면 그 사람의 의지를 알 수 있었는데, 그 이유를 위선(dissimulation)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즉 마음속으로 원하는 것과 밖으로 행하는 것이 오늘날처럼 쉽게 서로 갈라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의지에 있는 것이 행위로 나타났고, 행위는 그 사람 안에 있는 의지를 드러냈습니다. 그래서 선을 행한다는 것과 선을 의도한다는 것이 서로 분리된 두 가지가 아니라 하나의 상태를 안과 밖에서 표현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여기서 고대에는이라는 표현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일반적인 고대사 전체에 대한 진술이라기보다, 이 문맥에서 다루고 있는 태고교회 사람들의 특유한 내적 상태와 연결하여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고대에 살았던 모든 사람이 역사적으로 거짓말이나 위선을 전혀 몰랐다는 뜻으로 확대하기보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는 의지와 행위가 아직 하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행위를 보면 그 사람의 의지를 알 수 있었으며, 속마음을 감추고 그와 다른 모습을 밖으로 꾸미는 위선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AC.363의 관심은 고대 인류 전체의 사회사를 설명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 사람들의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었는지를 설명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앞의 AC.358에서 살펴본 얼굴의 의미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얼굴은 인간의 내적인 것들을 상징합니다. 특히 태고교회와 관련해서는 내적인 애정과 상태가 얼굴에 그대로 나타났기 때문에 얼굴이 그 사람의 내면을 표상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가인의 얼굴이 떨어졌다는 것은 단순히 화가 나서 표정이 어두워졌다는 뜻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떠남으로써 그의 내적인 것들이 변했다는 뜻이었습니다.

 

그 반대가 바로 AC.363낯을 (an uplifting)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얼굴을 든다는 것을 체어리티가 함께 있는 것으로 풀이합니다. 그러므로 창4:6-7에는 매우 선명한 대조가 있습니다. 가인의 얼굴은 떨어졌습니다. 체어리티가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하십니다. 다시 말해 가인이 선을 의도하고, 체어리티가 다시 그와 함께 있게 된다면, 변해 버린 그의 내적인 것들도 다시 올바른 질서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얼굴을 은 곧 체어리티의 회복이며, 그에 따른 내적인 것들의 회복입니다.

 

여기서 AC.358 심화에서 살펴본 여호와의 얼굴까지 연결해 보면 더욱 깊은 그림이 나타납니다. 여호와의 얼굴은 주님의 자비를 뜻하며, 주님께서 그 얼굴을 들어 사람에게 비추신다는 것은 그 자비가 사람에게 유입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얼굴이 다시 들리는 것도 인간이 자기 힘으로 스스로를 개선하여 얻는 결과라고만 볼 수 없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자비를 받아 그것이 사람 안에서 체어리티가 될 때, 떨어졌던 인간의 얼굴, 곧 그의 내적인 것들이 다시 들리는 것입니다. 주님의 얼굴은 언제나 자비로 우리를 향하고 있으며, 문제는 인간이 그 자비를 받아 체어리티 안으로 돌아오느냐에 있습니다.

 

AC.363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의지입니다. 참된 선은 단순히 행동의 외적 모양만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선을 향하는 의지에서 선한 행위가 나와야 합니다. 다만 이 태고교회의 상태를 오늘날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홍수 후 영적 인간의 질서에서는 의지 자체가 처음부터 선을 직접 지각하여 행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말씀에서 선과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이해성(understanding) 안에서 받아들이며, 그 진리에 따라 양심적으로 살아가는 과정을 통하여 새로운 의지가 형성됩니다. 바로 앞 AC.359-360에서 우리가 퍼셉션과 양심의 차이를 조심스럽게 살펴본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는 마음이 아직 충분히 원하지 않더라도 이것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선이기 때문에 행해야 한다고 진리와 양심에 따라 순종하는 단계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주님께서는 그 진리를 점차 의지 안에 심으십니다. 처음에는 해야 하기 때문에행하던 선을 나중에는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행하게 하십니다. 그렇게 진리가 선과 결합되고, 신앙이 체어리티와 결합되며, 아는 것과 원하는 것과 행하는 것이 점차 하나를 향하게 됩니다. 태고교회의 행위와 의지가 하나였다는 상태를 오늘날 우리가 그대로 되풀이하는 것은 아니지만, 거듭남을 통하여 속과 겉이 주님의 질서 안에서 점차 하나가 되어 간다는 원리는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합니다.

 

이렇게 보면 가인의 길은 거듭남의 방향과 정확히 반대입니다.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사랑에서 구별한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었지만, 그 구별을 분리로 만들었고, 분리된 신앙을 사랑과 체어리티보다 위에 세웠으며, 마침내 체어리티를 자기 아래에 두고 지배하려 했습니다. 그러면서 외적인 행위와 예배는 남아 있었지만, 그 안의 생명은 점차 사라졌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그 가인에게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말씀하십니다. 다시 체어리티를 받아들이고, 신앙을 체어리티와 결합시키며, 외적 행위가 선을 향한 내적 의지에서 흘러나오게 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AC.363의 핵심은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하라는 데 있지 않습니다. 둘은 반드시 결합되어야 합니다. 다만 그 결합에는 주님의 질서가 있습니다. 신앙이 체어리티 위에 서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해야 하며, 진리는 선을 섬기고, 신앙은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면 가인의 질서가 되지만, 체어리티가 신앙에 생명과 방향을 주면 신앙은 비로소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얼굴을 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떨어진 얼굴을 다시 들게 하는 것은 더 많은 지식이나 더 강한 교리적 확신이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을 받아 체어리티가 다시 신앙과 함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직 가인은 아벨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아직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할 길이 열려 있습니다. 그래서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는 말씀은 책망인 동시에 자비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체어리티에서 떠나 얼굴이 떨어진 가인에게도 여전히 돌아올 길을 보여 주고 계십니다.

 

 

 

AC.362, 창4:6,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든 가인의 교리’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창4:6) AC.362 여기서는 ‘가인’(Cain)이라 하는 신앙의 교리가 묘사됩니다. 이 교리는 신앙을 사랑에서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4:7)

 

AC.362

 

여기서는 가인(Cain)이라 하는 신앙의 교리가 묘사됩니다. 교리는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함으로써, 사랑에서 나오는 체어리티에서도 신앙을 분리하였습니다. 교회가 있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이단들이 생겨납니다. 사람들이 신앙의 어떤 특정 조항 하나에 몰두하면 그것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사고에는 이런 성향이 있어서, 어떤 가지에 몰두하면 그것을 다른 모든 것보다 앞세우며, 특히 그것을 자기 자신이 발견한 것이라고 상상할 , 그리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그를 부풀게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생각과 일치하고 그것을 확증하는 것처럼 보이게 되며, 마침내 그것이 거짓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참이라고 맹세할 정도에 이르게 됩니다. 바로 이런 식으로 가인(Cain)이라 하던 사람들은 신앙을 사랑보다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으며, 결과 사랑 없이 살게 되자 자기 사랑과 거기서 비롯된 환상이 서로 결탁하여 그들을 생각 가운데 더욱 굳어지게 하였습니다. The doctrine of faith calledCainis here described, which in consequence of separating faith from love, separated it also from charity, the offspring of love. Wherever there is any church, there arise heresies, because while men are intent on some particular article of faith they make that the main thing; for such is the nature of mans thought that while intent on some one thing he sets it before any other, especially when his imagination claims it as a discovery of his own, and when the love of self and of the world puff him up. Everything then seems to agree with and confirm it, until at last he will swear that it is so, even if it is false. Just in this way those calledCainmade faith more essential than love, and as they consequently lived without love, both the love of self and the fantasy thence derived conspired to confirm them in it.

 

 

해설

 

AC.362는 가인의 문제가 어떻게 하나의 교리로 굳어졌는지를 본격적으로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글입니다. 앞의 AC.361에서 우리는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하지만, 가인으로 표상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자기 아래에 두고 지배하려 하기 때문에 함께 할 수 없다는 설명을 보았습니다. 이제 AC.362에서는 한 걸음 더 들어가 어떻게 그런 생각이 생겼으며, 어떻게 그것이 하나의 확고한 교리가 되었는가?를 설명합니다.

 

첫 문장이 전체를 압축합니다. ‘가인은 단순히 신앙 자체가 아니라 신앙의 교리입니다. 그런데 그 교리는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했고, 그 결과 사랑의 자손인 체어리티에서도 신앙을 분리했습니다. 여기서 체어리티는 사랑의 자손(the offspring of love)이라는 표현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이 내적인 근원이라면 체어리티는 그 사랑이 이웃을 향하여 나타나는 삶입니다. 따라서 신앙을 사랑에서 떼어 놓는 순간 그것은 자연스럽게 체어리티에서도 떨어져 나갑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를 서로 독립된 것으로 만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이 문제를 가인이라는 고대의 한 이단에만 한정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있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이단들이 생겨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사고에는 어떤 하나의 진리를 붙잡았을 때, 그것을 전체로 만들어 버리는 성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단이 반드시 처음부터 완전히 거짓된 생각에서 시작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신앙처럼 실제로 중요하고 참된 것을 붙잡고, 그것을 다른 모든 것보다 앞세울 때 문제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앞에서 살펴본 가인의 시작과 정확히 맞닿습니다. 가인은 처음부터 거짓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태고교회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에 속한 것을 하나의 구별되는 것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데서 출발했습니다. 문제는 그 구별분리가 되고, 분리된 것이 마침내 주된 이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AC.362에서는 바로 그 과정의 심리적 원인을 설명합니다. 인간은 어떤 하나에 몰두하면 그것을 다른 모든 것보다 앞세우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매우 날카로운 대목이 그것을 자기 자신이 발견한 것이라고 상상할 입니다. 어떤 진리를 단순히 주님에게서 받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내가 이것을 발견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다른 내적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후자의 경우 그 진리가 점차 나의 진리가 됩니다. 그러면 그 진리를 내려놓거나 수정하는 것은 단순히 생각 하나를 수정하는 일이 아니라 를 부정하는 일처럼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자기 사랑이 그 교리와 결합합니다.

 

여기에 세상 사랑까지 더해집니다. 어떤 교리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그것으로 명성을 얻고, 자기 집단의 정체성과 권위를 세울 수 있게 되면 이제 그 교리를 지키는 데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함께 작동합니다. 처음에는 이것이 진리인가?를 물었지만, 나중에는 내가 틀릴 있는가?’, ‘우리가 틀릴 있는가?의 문제가 됩니다. 진리를 사랑해서 교리를 붙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교리를 붙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매우 위험한 단계가 시작됩니다. ‘모든 것이 그것과 일치하고 그것을 확증하는 것처럼 보입니다.이것은 오늘날 말하는 단순한 지적 오류보다 훨씬 깊은 영적 현상입니다. 이미 사랑이 방향을 정했기 때문에 이해성(understanding)이 그 사랑을 섬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결론을 먼저 정해 놓고, 말씀과 경험과 논리를 모두 그 결론을 지지하는 증거로 읽습니다. 반대되는 것은 보이지 않거나 중요하지 않게 여기고, 자기 생각을 지지하는 것은 작은 것까지 크게 보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거짓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참이라고 맹세할정도가 됩니다. 이것은 단순히 정보를 잘못 알고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거짓이 자기 사랑과 결합하여 확증된 상태입니다. 처음에는 나는 이것이 옳다고 생각한다였지만, 나중에는 이것은 반드시 옳아야 한다가 됩니다. 그리고 결국 이것과 다른 것은 틀렸다가 됩니다. 여기에서 교리적 차이는 쉽게 상대방을 향한 분노와 배척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가인의 길입니다. 가인들은 신앙을 버린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신앙을 지나치게 높였습니다. 신앙을 사랑보다 본질적인 (more essential)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표현이 AC.362의 핵심입니다. 문제는 신앙을 중요하게 여긴 것이 아니라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든 것입니다. 수단이 목적보다 위에 올라간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앞의 AC.361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너는 그를 다스릴지니라는 가인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는 상태였습니다. AC.362는 그 지배가 어떻게 교리적으로 정당화되는지를 설명합니다. ‘신앙이 본질적이다라고 정하면 체어리티는 자연스럽게 신앙 아래로 내려갑니다. 사랑과 선한 삶은 있으면 좋은 ’, ‘신앙의 결과’, 또는 부차적인 이 되고, 무엇을 믿고 어떤 교리를 고백하는지가 가장 중요한 것이 됩니다.

 

그런데 그 결과를 스베덴보리는 아주 간결하게 말합니다. ‘ 결과 그들은 사랑 없이 살았다.교리의 질서가 삶의 질서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사랑보다 신앙을 앞세운 것이 단순한 신학적 순서 문제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실제 삶에서 사랑이 사라졌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왜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그토록 엄중하게 다루는지를 보여 줍니다. 교리의 잘못된 질서는 결국 삶의 잘못된 질서가 됩니다.

 

더 심각한 것은 사랑이 사라진 빈자리가 비어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과 거기서 비롯된 환상이 그들을 확증했습니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떠난 자리에 자기 사랑이 들어옵니다. 그리고 이해성은 그 자기 사랑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계속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신앙이 사랑보다 중요하다는 교리는 단순한 지적 오류가 아니라 자기 사랑을 보호하고 강화하는 체계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fantasy를 단순히 상상정도로 이해하면 약합니다. 여기서는 자기 사랑에서 생겨난 왜곡된 사고, 곧 자기가 원하는 것을 참이라고 여기고, 그에 맞추어 현실과 말씀을 보는 일종의 환상입니다. 그래서 자기 사랑과 환상이 conspired’, 곧 서로 결탁합니다. 사랑이 거짓된 방향을 원하고, 사고가 그것을 끊임없이 합리화합니다. 결국 악한 사랑과 거짓된 사고가 서로를 강화하는 구조가 됩니다.

 

이것은 앞으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을 이해하는 데도 결정적입니다. 아벨을 죽이는 것은 단순히 신앙이 체어리티를 싫어했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이미 그 전에 신앙이 사랑보다 본질적이다라는 교리가 형성되었습니다. 그 교리는 자기 사랑에 의해 확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는 이제 단순한 형제가 아니라 그 교리의 정당성을 위협하는 존재가 됩니다. 그렇게 되면 다음 단계는 체어리티를 제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AC.362이단이 어떻게 생기는가?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매우 중요한 설명이기도 합니다. 이단은 반드시 성경을 버린 데서만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의 어떤 한 진리를 붙잡아 그것을 전체 질서에서 떼어내고 절대화할 때 생길 수 있습니다. 신앙도 진리입니다. 사랑도 진리입니다. 체어리티도 진리입니다. 그러나 신앙을 붙잡아 사랑체어리티를 그 아래에 종속시키면, 참된 것 하나를 붙잡고서 전체를 왜곡할 수 있습니다.

 

이 원리는 신앙과 체어리티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 어떤 특정 교리, 성경 번역, 예배 형식, 성례 이해, 종말론, 은사, 교회 정치, 특정 신학자의 가르침 등 무엇이든 그것을 전체보다 앞세우면 같은 위험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이 처음에는 상당 부분 참되더라도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가 되고, 이어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잘못되었다가 되고, 마침내 그것을 중심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체어리티를 잃는다면 구조적으로 가인의 길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질문은 교리가 맞는가?만이 아닙니다. ‘ 교리가 나를 어디로 데려가고 있는가?도 물어야 합니다. 참된 교리는 인간을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인도합니다. 진리를 더 많이 알수록 겸손해지고,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하며, 선한 쓰임을 더 충실히 행하게 해야 합니다. 반대로 진리를 많이 알수록 자기 우월감이 커지고, 다른 사람을 쉽게 정죄하며, 자기 해석을 지키기 위해 체어리티를 희생하게 된다면, 그 교리가 아무리 정교해도 이미 가인의 위험이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스베덴보리를 읽는 우리에게도 예외가 아닙니다. ‘아르카나를 많이 알고 상응과 퍼셉션과 체어리티의 질서를 정확히 설명한다고 해서 자동으로 가인의 위험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나는 말씀의 속뜻을 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질서를 안다는 생각이 자기 사랑과 결합하면 스베덴보리의 가르침 자체도 자기 우월성을 확증하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체어리티가 신앙의 생명이라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체어리티를 잃는 역설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AC.362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진리를 적게 알라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언제나 그 목적 안에 두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사랑을 섬겨야 하고, 진리는 선을 섬겨야 하며, 교리는 삶을 섬겨야 합니다. 내가 발견했다고 생각하는 어떤 진리도 전체 말씀과 교회의 질서, 그리고 무엇보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목적 아래 놓여 있어야 합니다.

 

결국 AC.362는 가인의 비극이 신앙을 버린 데서시작된 것이 아니라 신앙을 지나치게 높인 데서시작되었다는 역설을 보여 줍니다.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고, 그 결과 사랑 없이 살게 되었으며, 사랑이 떠난 자리에 자기 사랑이 들어왔고, 자기 사랑에서 나온 환상이 그 교리를 계속 확증했습니다. 그렇게 참된 것 하나를 전체보다 앞세운 작은 질서의 뒤집힘이 마침내 체어리티 자체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그래서 AC.362의 경고를 한 문장으로 압축한다면 이렇겠습니다. ‘이단은 언제나 거짓을 사랑하는 데서만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하나의 진리를 너무 사랑하여 그것을 다른 모든 진리의 질서 위에 올려놓는 데서 시작됩니다.다만 그때 실제로 사랑하는 것은 어느 순간부터 그 진리 자체가 아니라 진리를 발견하고 소유한 가 될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신앙의 교리는 가인의 교리가 됩니다.

 

 

 

AC.363, 창4:6,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권을 가져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창4:6) AC.363 ‘가인’(Cain)이라 불린 신앙의 교리가 어떤 성질의 것이었는지는 이 절에 대한 설명에서

bygrace.kr

 

AC.361, 창4:6,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창4:6) AC.361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If thou doest well, an uplifting)에서 ‘낯을 듦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