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5:5)

 

AC.494

 

그가 ‘죽었다’(died)는 말의 의미가 그러한 퍼셉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음임은, ‘죽다’(die)라는 말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집니다. 이 말의 의미는 어떤 것이 이전과 같은 상태로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을 뜻하지요.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에서 That he “died” signifies that there was no longer such perception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 word “die,” which is, that a thing ceases to be such as it has been. Thus in John:

 

1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2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3:1, 2) Unto the angel of the church in Sardis write, These things saith he that hath the seven spirits, and the seven stars; I know thy works, that thou art said to live, but art dead; be watchful, and strengthen the things which remain, that are ready to die; for I have not found thy works perfect before God. (Rev. 3:1–2)

 

또 예레미야에서는 In Jeremiah:

 

내가 너와 너를 낳은 어머니를 너희가 나지 아니한 다른 지방으로 쫓아내리니 너희가 거기에서 죽으리라 (22:26) I will cast out thy mother that bare thee, into another country where ye were not begotten, and there shall ye die, (Jer. 22:26)

 

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어머니’(mother)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교회의 경우에는 감소하고 퇴화하며, 본래의 온전함을 잃게 되는데, 그 주된 이유는 유전적 악(hereditary evil)이 증가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각 세대의 부모는 자신이 물려받은 악에 더하여 새로운 악을 더하기 때문이지요. 부모 안에 있는 모든 실제적 악은 일종의 성질을 입게 되고, 그것이 반복될수록 그들에게는 자연적인 것이 되며, 이렇게 형성된 악은 그들이 물려받은 유전적 악에 더해져 자녀들에게 전해지고, 다시 후손들에게로 이어집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유전적 악은 후대에 이르면 매우 크게 증가하는데, 이것이 사실임은 자녀들의 악한 성향이 그 조상들의 성향과 정확히 닮아 있다는 사실을 보면 분명합니다. 아담에게서 우리에게 주입되었다고 주장되는 어떤 악 외에는 유전적 악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견해는 전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AC.313 참조). 진실은 이렇습니다. 각 사람은 자신의 실제적인 죄들로 유전적 악을 만들어내며, 그것을 자신이 물려받은 악들에 더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악은 축적되고, 모든 후손 안에 머물게 되며, 주님에 의해 거듭나고 있는 자들 안에서만 그것이 줄어듭니다. 모든 교회의 퇴화의 주된 원인이 바로 이것이며, 태고교회에서도 그랬습니다. where “mother” signifies the church. For as we have said, the case with the church is that it decreases and degenerates, and loses its pristine integrity, chiefly by reason of the increase of hereditary evil, for every succeeding parent adds new evil to that which he has inherited. All the actual evil in the parents puts on a kind of nature, and when it often recurs, becomes natural to them, and is added to their hereditary evil, and is transmitted into their children, and so to posterity. In this way the hereditary evil is immensely increased in the descendants. That this is so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the evil dispositions of children are exactly like those of their progenitors. Quite false is the opinion of those who think that there is no hereditary evil except that which they allege to have been implanted in us from Adam (see n. 313). The truth is that everyone makes hereditary evil by his own actual sins, and adds it to the evils that he has inherited, and in this way it accumulates, and remains in all the descendants, nor is it abated except in those who are being regenerated by the Lord. In every church this is the principal cause of degeneration, and it was so in the most ancient church.

 

 

해설

 

죽었다’는 표현은 이 글 전체에서 가장 결정적인 신학적 전환점을 이룹니다. 앞선 글들에서 스베덴보리는 ‘’과 ‘’를 통해 교회의 상태가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보여 주었고, 이제 AC.494에서는 그 변화의 종착점을 ‘죽음’이라는 말로 규정합니다. 그러나 이 죽음은 육체의 소멸이나 공동체의 해체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태고교회를 특징지었던 ‘퍼셉션이 더 이상 같은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죽다’라는 말의 의미를 ‘어떤 것이 이전과 같은 상태로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으로 정의합니다. 이 정의는 성경 전체에서 일관되게 적용됩니다. 요한계시록의 사데 교회는 외적으로는 살아 있는 교회처럼 보였지만, 주님께서는 그 교회를 ‘죽었다’고 선언하십니다. 이는 조직이나 활동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 교회 안에 있던 생명의 본질, 곧 퍼셉션과 그로부터 나온 삶이 더 이상 온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에서 ‘어머니가 다른 땅에서 죽는다’는 표현 역시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여기서 ‘어머니’는 개인이 아니라 교회를 뜻합니다. 교회가 ‘죽는다’는 말은, 그 교회가 더 이상 본래의 성질을 유지하지 못하고, 다른 상태로 전락했음을 뜻합니다. 이처럼 성경에서 죽음은 항상 상태의 변화, 특히 ‘영적 생명의 상실’을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제 그 원인을 매우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교회가 퇴화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유전적 악의 증가입니다. 각 세대는 이전 세대로부터 악을 물려받을 뿐 아니라, 거기에 자신의 실제적인 악을 더하여 다음 세대에 전합니다. 이렇게 실제적 악이 반복되면, 그것은 점차 성향과 습관이 되어 자연적인 것처럼 굳어집니다. 이로 인해 유전적 악은 세대를 거치며 누적되고 증폭됩니다.

 

이 설명에서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가 유전적 악을 단일한 기원에서만 설명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든 유전적 악이 ‘아담에게서 한 번 주입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는 이 견해를 단호히 부정합니다. 유전적 악은 단순히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의 실제적인 죄들에 의해 계속 만들어지고 강화’됩니다. 그래서 유전적 악은 고정된 게 아니라, 역사 속에서 계속 축적되는 것입니다.

 

이 누적의 결과는 후손들에게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자손들의 악한 성향이 조상들의 성향과 닮아 있다는 사실은, 유전적 악의 축적을 보여 주는 생생한 증거입니다. 태고교회 역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 교회는 가장 순수한 퍼셉션으로 시작했지만, 세대를 거치며 유전적 악이 증가했고, 그 결과 퍼셉션은 점차 흐려졌습니다. 마침내 성경은 그 상태를 ‘죽음’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 설명은 절망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말합니다. 유전적 악은 주님에 의해 거듭나고 있는 자들 안에서만 줄어듭니다. 다시 말해, 퇴화는 필연적이지만, 회복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태고교회의 죽음은 주님의 섭리가 끝났다는 뜻이 아니라, ‘다른 방식의 교회가 필요해졌음을 알리는 신호’였습니다.

 

모든 교회에서 퇴화의 주된 원인이 동일하다는 마지막 진술은, 이 논의를 오늘의 교회와 개인에게 직접 연결합니다. 태고교회만이 아니라, 모든 교회는 유전적 악의 증가로 인해 퇴화할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생명은 제도나 전통의 유지에 있지 않고, 퍼셉션의 회복과 거듭남에 있습니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인도의 필요성을 드러내는 상태’입니다.

 

결국 AC.494는 창세기 5장의 ‘죽었다’는 말을 통해, 성경이 말하는 생명과 죽음의 기준을 다시 한번 분명히 합니다. 생명은 퍼셉션이며, 죽음은 퍼셉션이 더 이상 같은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이 기준을 붙들 때, 태고교회의 종말은 단순한 실패가 아니라,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 필연적인 전환으로 이해됩니다.

 

 

 

AC.493, 창5:5, '숫자'의 겉뜻에서 물러나기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5) AC.493 ‘날’(days)과 ‘해’(years)가 시간과 상태를 의미한다는 사실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세상에서는 숫자를 적용할 수 있는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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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5:5)

 

AC.493

 

‘날’(days)과 ‘해’(years)가 시간과 상태를 의미한다는 사실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세상에서는 숫자를 적용할 수 있는 시간과 분량(measures)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만 덧붙일 수 있는데, 이는 그것들이 자연의 최외층(the ultimates of nature, 맨 끝단)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씀에서 숫자들이 적용될 때에는, 날과 해의 숫자들뿐 아니라 분량의 숫자들까지도 시간과 분량에서 추상(abstractedly), 즉 물러날 때 그 숫자가 지닌 속뜻에 따라 의미를 가집니다. 예를 들면, 엿새 동안 일하고 일곱째 날이 거룩하다고 말하는 경우, 앞에서 말한 바와 같습니다. 또 희년이 마흔아홉째 해마다 선포되고 쉰째 해에 거행되어야 했던 것, 이스라엘의 지파가 열둘이었고 주님의 사도들도 그와 같았던 것, 칠십 인의 장로들이 있었고 주님의 제자들도 그 수만큼 있었던 것, 그리고 이와 유사한 많은 경우들에서 숫자들은 그것들이 적용된 대상에서 물러나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그리고 이렇게 물러날 때, 숫자들의 속뜻에 의해 상태들이 의미됩니다. That by “days” and “years” are signified times and states needs no further explication, except to say that in the world there must needs be times and measures, to which numbers may be applied because they are in the ultimates of nature; but whenever they are applied in the Word, the numbers of the days and years, and also of the measures, have a signification abstractedly from the times and measures, in accordance with the signification of the number; as where it is said that there are six days of labor, and that the seventh is holy, of which above; that the jubilee should be proclaimed every forty-ninth year, and should be celebrated in the fiftieth; that the tribes of Israel were twelve, and the apostles of the Lord the same; that there were seventy elders, and as many disciples of the Lord; and so in many other instances where the numbers have a special signification abstractedly from the things to which they are applied; and when thus abstracted, then it is states that are signified by the numbers.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days)과 ‘(years)가 상태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더 이상 반복해서 증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미 충분히 설명되었다고 말하며, 논의를 한 단계 더 깊은 곳으로 옮깁니다. 이제 질문은 ‘왜 성경이 굳이 숫자를 사용하는가’로 이동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자연의 최외층(the ultimates of nature, 맨 끝단), 곧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시간과 분량(measures), 그리고 숫자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 안에서 사고하기 때문에, 말씀도 그 틀을 빌려 표현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중요한 전환이 일어납니다. 성경이 숫자를 사용한다고 해서, 그 숫자가 세속적 계산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말씀 안에서 숫자는 시간과 분량에서 ‘추상(abstractedly), 즉 물러납니다. 다시 말해, 숫자는 그것이 적용된 외적 대상과 분리되어, ‘그 자체의 의미’를 드러내는 표지가 됩니다. 날과 해, 길이와 무게는 외적 형식일 뿐이며, 그 안에 담긴 의미는 전혀 다른 차원에 있습니다.

 

이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성경의 많은 제도와 규례는 이해 불가능한 부담으로 남게 됩니다. 엿새 동안 일하고 일곱째 날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명령을 문자 그대로만 이해한다면, 그것은 단순한 노동 규칙이나 휴식 제도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숫자들이 상태를 향해 물러날 때, 여섯은 준비와 수고의 상태를, 일곱은 완성과 거룩의 상태를 의미하게 됩니다. 그러면 안식일은 시간의 하루가 아니라, ‘주님 안에서 완성된 상태’를 가리키는 표지가 됩니다.

 

희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마흔아홉 해마다 선포되고 쉰째 해에 거행되는 희년을 문자적으로만 이해하면, 고대 사회의 독특한 사회 제도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숫자들이 물러날 때, 희년은 해방과 회복, 곧 교회 상태의 새출발을 의미합니다. 중요한 것은 연도가 아니라, ‘회복의 상태가 도래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희년은 숫자로 기억되지만, 그 본질은 상태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와 주님의 열두 사도 역시 같은 원리로 이해됩니다. 이 숫자는 우연이나 행정적 편의의 결과가 아닙니다. 열둘이라는 숫자는 교회의 모든 것을 포괄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지파의 수와 사도의 수가 같다는 것은, 구약과 신약의 교회가 본질적으로 동일한 질서 위에 서 있음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의 수가 아니라, ‘교회 상태의 완전성’입니다.

 

칠십 장로와 칠십 제자의 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숫자는 충만함과 확장을 의미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장로들이든 제자들이든, 그 숫자가 말하는 것은 조직의 규모가 아니라, 주님께서 교회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사역의 범위와 충만함입니다. 숫자는 그 사역의 성격을 드러내는 상징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처럼 성경 전반에서 숫자가 적용된 많은 사례들을 열거하며, 공통된 원리를 분명히 합니다. 숫자는 외적으로는 시간과 분량에 붙어있지만, 내적으로는 언제나 상태를 의미합니다. 숫자가 대상에서 물러날 때, 비로소 말씀이 말하고자 하는 깊이가 드러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경은 끝없는 규칙과 계산의 집합으로 오해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원리는 창세기 5장의 족보를 읽는 데 결정적인 기준을 제공합니다. 그곳에 나오는 날과 해, 그리고 수백 년에 이르는 숫자들은 인간의 수명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어떤 상태를 거쳐 왔는지를 말하려는 것입니다. 숫자는 그 상태들의 질서와 흐름을 인간이 이해할 수 있도록 표시한 기호입니다.

 

결국 AC.493은 성경을 읽는 우리의 시선을 다시 한번 교정합니다. 성경의 숫자를 볼 때, 우리는 ‘얼마나 오래’라는 질문보다 ‘어떤 상태로 지속’이라는 질문을 먼저 던져야 합니다. 그럴 때 숫자는 더 이상 걸림돌이 아니라, ‘말씀의 깊이를 여는 열쇠’가 됩니다. 숫자가 시간과 분량에서 물러날 때, 성경은 비로소 살아 있는 영적 언어로 우리 앞에 서게 됩니다.

 

 

 

AC.494, 창5:5, '죽었더라', 해당 교회의 퍼셉션이 끝난 상태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5) AC.494 그가 ‘죽었다’(died)는 말의 의미가 그러한 퍼셉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음임은, ‘죽다’(die)라는 말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집니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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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92, 창5:5,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AC.492-495)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all the days that man lived were nine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he died. (창5:5) AC.492 여기서도 ‘날’(days)과 ‘해’(years)는 시간과 상태를 의미하는데, 이는 위에서 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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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all the days that man lived were nine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he died. (5:5)

 

AC.492

 

여기서도 ‘날’(days)과 ‘해’(years)는 시간과 상태를 의미하는데, 이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습니다. 그리고 ‘그는 죽었더라’는 말은 그러한 퍼셉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By “days” and “years” are here signified times and states, as above; by “man’s dying” is signified that such perception no longer existed.

 

 

해설

 

이 짧은 문장은 창세기 5장, 더 정확히 말하면 태고교회의 종말을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결정적인 선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선 여러 글에서 ‘(days)과 ‘(years)는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상태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확증해 왔고, 여기 AC.492에서는 그 논의를 한 지점으로 수렴시킵니다. 이제 더 이상 숫자나 기간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상태가 끝났음을 선언하는 문장이기 때문입니다.

 

’과 ‘’가 상태를 의미한다는 전제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죽었더라’는 표현 앞에 자연스럽게 생물학적 죽음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단호하게 방향을 바꿉니다. 창세기 5장에서 말하는 ‘사람의 죽음’은 육체의 소멸이 아니라, ‘퍼셉션의 소멸’을 뜻한다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 태고교회를 특징짓던 즉각적이고 분명한 퍼셉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한다는 말입니다.

 

이 점은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에서 ‘사는 것’과 ‘죽는 것’은 언제나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정의됩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퍼셉션을 통해 주님과 직접 연결되어 있었고, 그 퍼셉션이 그들의 생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퍼셉션이 사라지는 순간, 성경은 그것을 ‘죽음’이라고 부릅니다. 육체는 여전히 존재하고, 사회와 문화도 지속되었겠지만, 교회의 생명은 그 시점에서 끝난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는 태고교회의 종말을 어떤 갑작스러운 재앙이나 사건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 ‘죽음’은 한순간에 일어난 붕괴가 아니라, 퍼셉션이 점차 약화되고 흐려진 끝에 도달한 상태입니다. 창세기 5장은 바로 그 과정을 ‘’과 ‘’라는 언어로 천천히 보여 주다가, 마침내 ‘죽었더라’는 말로 결론을 맺습니다. 이것은 연대기의 마침표가 아니라, ‘하나의 영적 상태의 종결 선언’입니다.

 

이 선언은 절망의 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는 이미 앞에서,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주님께서 새로운 교회를 준비하셨음을 보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셋의 교회가 바로 그 증거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죽었다’는 말은 주님의 섭리가 실패했다는 뜻이 아니라, ‘한 형태의 교회가 끝나고 다른 형태의 교회가 시작될 준비가 되었음’을 뜻합니다.

 

이 구절은 매우 날카로운 질문을 우리에게 던집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에서 ‘죽음’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성경적 의미에서 죽음은 단순히 활동이 줄어들거나 제도가 약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퍼셉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 곧 진리와 선을 살아 있는 것으로 느끼고 분별하는 내적 능력이 사라질 때, 성경은 그것을 죽음이라고 부릅니다.

 

반대로 말하면, 규모가 작고 외적으로 미약해 보여도, 퍼셉션이 살아 있다면 그 교회는 살아 있는 교회라는 말입니다. 태고교회의 죽음은 외형의 붕괴가 아니라, 퍼셉션의 소멸이었고, 오늘날 교회의 생명 역시 같은 기준으로 판단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창세기 5장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핵심 중 하나입니다.

 

또한 이 구절은 개인의 신앙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한 사람 안에도 태고교회적 상태가 있을 수 있고, 그 상태는 퍼셉션으로 특징지어집니다. 그러나 그 퍼셉션이 사라지고, 진리와 선이 더 이상 살아 있는 현실로 느껴지지 않을 때, 그 상태는 ‘죽은 상태’가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님께서 그 사람을 버리신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때부터 다른 방식의 인도, 다른 단계의 신앙이 시작됩니다.

 

결국 AC.492는 창세기 5장의 한 절을 통해, 성경이 말하는 생명과 죽음의 기준을 분명히 합니다. 생명은 퍼셉션이며, 죽음은 퍼셉션의 상실입니다. 이 관점을 붙들 때, 우리는 족보의 끝에 나오는 ‘죽었다’는 말을 더 이상 두려운 말로 읽지 않게 됩니다. 그것은 끝이 아니라,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 한 상태의 완결’을 알리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AC.493, 창5:5, '숫자'의 겉뜻에서 물러나기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5) AC.493 ‘날’(days)과 ‘해’(years)가 시간과 상태를 의미한다는 사실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세상에서는 숫자를 적용할 수 있는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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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91, 창5:4, '자녀들'은 해당 교회의 퍼셉션을 반영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91 이 장(4, 7, 10, 13, 16, 19, 26, 30절)에서도 ‘아들들’(sons)과 ‘딸들’(daughters)은 동일한 것들을 의미하는데, 곧 교회가 어떠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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