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22 심화
1. 공주농아교회를 생각하며
이 글을 읽으면서 반대로 농아(聾啞)인들, 그러니까 못 듣고, 말 못 하는 분들 생각과, 그분들을 대상으로 목회하시는, 저의 친구 목사님 생각이 났습니다. 이 ‘육체적 장애’를 갖고 살아가시는 분들에 대해서 좀 깊이 다루어 주세요.
AC.322를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농인교회와 농인목회, 그리고 지상에서 듣고 말하는 육체적 기능에 제한을 지닌 채 살아가는 분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실제 한국 교계에서는 오랫동안 ‘농아인교회’, ‘농아목회’라는 명칭을 사용해 왔으므로 그 현장 용어를 존중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분들의 본질을 이해할 때에는 육체적 청각과 음성언어의 제한을 영 자체의 결핍과 혼동하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AC.322의 핵심은 감각 능력이 육체 안에서 나타나기는 하지만 감각하는 생명 자체가 육체에 속한 것은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사람이 육체 안에서 살 때에도 실제로 감각하는 것은 영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지상에서 청각기관의 제한으로 자연적 소리를 듣지 못하거나 음성언어를 자유롭게 사용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사람의 영이나 생각하고 사랑하고 다른 사람과 교통하는 인간적 능력 자체가 결여되어 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보고 듣고 말하는 육체적 기능이 뛰어난 사람을 더 온전한 사람처럼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에서 사람의 본질은 자연적 육체의 기능에 있지 않습니다. 사람은 의지와 이해, 사랑과 생각을 지닌 영적 존재이며, 자연적 육체는 그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활동하는 데 필요한 몸입니다. 그러므로 육체적 장애가 그 사람의 영적 가치나 인간으로서의 온전함을 결정하지 않습니다.
이 점에서 AC.322는 농인들의 사후 상태를 생각하는 데에도 중요한 원리를 제공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육체를 벗은 영에게 시각과 청각과 촉각이 있으며, 생각하고 말하는 능력도 지상에서보다 훨씬 더 완전하다고 말합니다. AC.322가 농인의 사후 경험을 별도로 설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원리에 따른다면 지상에서 자연적 청각에 제한이 있었다는 이유로 사후에도 그 사람의 영적 교통 능력이 제한된다고 볼 이유는 없습니다. 육체적 기관의 제한과 영 자체의 능력은 서로 구별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농인은 사후에 비로소 온전해진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농인은 지금 이 땅에서도 온전한 인간입니다. 수어는 부족한 몸짓이 아니라 생각과 감정, 신앙과 예배를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언어입니다. 청인이 음성언어로 말씀을 받고 기도하듯 농인은 수어와 시각적 언어를 통하여 말씀을 받고 기도하며 다른 사람과 깊이 교통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수어로 드리는 기도와 예배를 음성으로 드리는 기도와 예배보다 낮은 것으로 볼 이유가 없습니다.
성경에서 ‘듣는다’는 것 역시 육체적 청각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말씀을 영적으로 듣는다는 것은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에 순종하는 것과 연결됩니다. 육체의 귀로 말씀을 듣고도 삶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영적으로 듣지 않을 수 있으며, 자연적 소리를 듣지 못하더라도 말씀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사랑과 삶으로 응답하는 사람은 영적으로 듣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연적 청각과 영적 청각을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말한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교통을 음성을 내는 행위에만 한정할 수 없습니다. 농인이 손과 얼굴과 몸의 움직임으로 수어를 사용할 때 그는 분명히 자신의 생각과 애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오히려 AC.322에서 말하는 인간의 교통이 단순한 육체적 소리에만 의존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하게 합니다. 중요한 것은 소리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서 표현되고 전달되는 생각과 애정입니다.
따라서 농인목회도 단순히 청인의 음성 설교를 수어로 옮겨 주는 보조적 사역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농인의 언어와 문화와 삶의 경험 안에서 말씀이 받아들여지고, 공동체 안에서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실제 삶으로 나타나도록 섬기는 온전한 목회입니다. 교회 역시 농인을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아야 할 대상으로만 바라보기보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말씀을 받고 표현하는 같은 교회의 지체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또한 육체적 장애를 개인의 죄나 신앙의 부족과 직접 연결해서는 안 됩니다. 자연계의 몸은 여러 자연적 조건과 원인 아래 놓여 있으며, 육체의 기능만으로 사람의 내적인 상태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사람이 어떤 육체적 조건을 가지고 있는가만이 아니라, 그에게 주어진 조건 안에서 선과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주님과 이웃에게 어떻게 응답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농인을 위해 기도할 때에도 신체적 치유만을 유일한 목표로 삼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치유를 구하는 기도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 먼저 그 사람이 지금도 온전한 인격이며 그의 언어와 삶과 신앙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고립된 사람이 공동체 안에서 교통하고, 배제되던 사람이 한 지체로 받아들여지며, 자신의 언어로 말씀을 받고 주님을 예배할 수 있게 되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한 회복입니다.
AC.322의 마지막 말처럼 ‘감각 능력이 어떠하냐에 따라 생명도 그러합니다.’ 이것을 단순히 청력이나 시력 같은 자연적 감각기관의 성능을 평가하는 말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귀가 밝아도 이웃의 아픔을 듣지 못할 수 있고, 자연적 소리를 듣지 못해도 다른 사람의 마음과 필요에 깊이 응답할 수 있습니다. 영적 생명의 깊이는 청력의 수치나 발음의 정확성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받아들이며 주님과 이웃에게 어떻게 응답하는가와 관계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AC.322는 농인에게 ‘언젠가 육체의 제한이 없어질 것이니 지금을 견디라’고만 말하는 글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육체의 귀와 음성을 인간의 온전함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지 말라’고 말하는 글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듣는 것은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참으로 말하는 것은 받은 선과 진리를 자신의 삶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농인교회와 농인목회는 바로 그 영적인 듣기와 말하기가 수어와 공동체의 삶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소중한 교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322, 창4 앞, 시각과 청각, 후각과 촉각, 욕망과 애정, 사고와 말의 능력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AC.322영들이 육체 안에서 살 때보다 훨씬 더 섬세한 감각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그릇된 생각을 조심해야 합니다. 저는 수천 번 반복된 경험을 통하여 사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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