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22 심화

1. 공주농아교회를 생각하며

 

이 글을 읽으면서 반대로 농아(聾啞)인들, 그러니까 못 듣고, 말 못 하는 분들 생각과, 그분들을 대상으로 목회하시는, 저의 친구 목사님 생각이 났습니다.  육체적 장애를 갖고 살아가시는 분들에 대해서 좀 깊이 다루어 주세요.

 

 

AC.322를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농인교회와 농인목회, 그리고 지상에서 듣고 말하는 육체적 기능에 제한을 지닌 채 살아가는 분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실제 한국 교계에서는 오랫동안 농아인교회’, ‘농아목회라는 명칭을 사용해 왔으므로 그 현장 용어를 존중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분들의 본질을 이해할 때에는 육체적 청각과 음성언어의 제한을 영 자체의 결핍과 혼동하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AC.322의 핵심은 감각 능력이 육체 안에서 나타나기는 하지만 감각하는 생명 자체가 육체에 속한 것은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사람이 육체 안에서 살 때에도 실제로 감각하는 것은 영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지상에서 청각기관의 제한으로 자연적 소리를 듣지 못하거나 음성언어를 자유롭게 사용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사람의 영이나 생각하고 사랑하고 다른 사람과 교통하는 인간적 능력 자체가 결여되어 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보고 듣고 말하는 육체적 기능이 뛰어난 사람을 더 온전한 사람처럼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에서 사람의 본질은 자연적 육체의 기능에 있지 않습니다. 사람은 의지와 이해, 사랑과 생각을 지닌 영적 존재이며, 자연적 육체는 그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활동하는 데 필요한 몸입니다. 그러므로 육체적 장애가 그 사람의 영적 가치나 인간으로서의 온전함을 결정하지 않습니다.

 

이 점에서 AC.322는 농인들의 사후 상태를 생각하는 데에도 중요한 원리를 제공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육체를 벗은 영에게 시각과 청각과 촉각이 있으며, 생각하고 말하는 능력도 지상에서보다 훨씬 더 완전하다고 말합니다. AC.322가 농인의 사후 경험을 별도로 설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원리에 따른다면 지상에서 자연적 청각에 제한이 있었다는 이유로 사후에도 그 사람의 영적 교통 능력이 제한된다고 볼 이유는 없습니다. 육체적 기관의 제한과 영 자체의 능력은 서로 구별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농인은 사후에 비로소 온전해진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농인은 지금 이 땅에서도 온전한 인간입니다. 수어는 부족한 몸짓이 아니라 생각과 감정, 신앙과 예배를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언어입니다. 청인이 음성언어로 말씀을 받고 기도하듯 농인은 수어와 시각적 언어를 통하여 말씀을 받고 기도하며 다른 사람과 깊이 교통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수어로 드리는 기도와 예배를 음성으로 드리는 기도와 예배보다 낮은 것으로 볼 이유가 없습니다.

 

성경에서 듣는다는 것 역시 육체적 청각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말씀을 영적으로 듣는다는 것은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에 순종하는 것과 연결됩니다. 육체의 귀로 말씀을 듣고도 삶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영적으로 듣지 않을 수 있으며, 자연적 소리를 듣지 못하더라도 말씀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사랑과 삶으로 응답하는 사람은 영적으로 듣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연적 청각과 영적 청각을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말한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교통을 음성을 내는 행위에만 한정할 수 없습니다. 농인이 손과 얼굴과 몸의 움직임으로 수어를 사용할 때 그는 분명히 자신의 생각과 애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오히려 AC.322에서 말하는 인간의 교통이 단순한 육체적 소리에만 의존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하게 합니다. 중요한 것은 소리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서 표현되고 전달되는 생각과 애정입니다.

 

따라서 농인목회도 단순히 청인의 음성 설교를 수어로 옮겨 주는 보조적 사역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농인의 언어와 문화와 삶의 경험 안에서 말씀이 받아들여지고, 공동체 안에서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실제 삶으로 나타나도록 섬기는 온전한 목회입니다. 교회 역시 농인을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아야 할 대상으로만 바라보기보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말씀을 받고 표현하는 같은 교회의 지체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또한 육체적 장애를 개인의 죄나 신앙의 부족과 직접 연결해서는 안 됩니다. 자연계의 몸은 여러 자연적 조건과 원인 아래 놓여 있으며, 육체의 기능만으로 사람의 내적인 상태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사람이 어떤 육체적 조건을 가지고 있는가만이 아니라, 그에게 주어진 조건 안에서 선과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주님과 이웃에게 어떻게 응답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농인을 위해 기도할 때에도 신체적 치유만을 유일한 목표로 삼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치유를 구하는 기도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 먼저 그 사람이 지금도 온전한 인격이며 그의 언어와 삶과 신앙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고립된 사람이 공동체 안에서 교통하고, 배제되던 사람이 한 지체로 받아들여지며, 자신의 언어로 말씀을 받고 주님을 예배할 수 있게 되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한 회복입니다.

 

AC.322의 마지막 말처럼 감각 능력이 어떠하냐에 따라 생명도 그러합니다.이것을 단순히 청력이나 시력 같은 자연적 감각기관의 성능을 평가하는 말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귀가 밝아도 이웃의 아픔을 듣지 못할 수 있고, 자연적 소리를 듣지 못해도 다른 사람의 마음과 필요에 깊이 응답할 수 있습니다. 영적 생명의 깊이는 청력의 수치나 발음의 정확성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받아들이며 주님과 이웃에게 어떻게 응답하는가와 관계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AC.322는 농인에게 언젠가 육체의 제한이 없어질 것이니 지금을 견디라고만 말하는 글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육체의 귀와 음성을 인간의 온전함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지 말라고 말하는 글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듣는 것은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참으로 말하는 것은 받은 선과 진리를 자신의 삶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농인교회와 농인목회는 바로 그 영적인 듣기와 말하기가 수어와 공동체의 삶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소중한 교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322, 창4 앞, 시각과 청각, 후각과 촉각, 욕망과 애정, 사고와 말의 능력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AC.322영들이 육체 안에서 살 때보다 훨씬 더 섬세한 감각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그릇된 생각을 조심해야 합니다. 저는 수천 번 반복된 경험을 통하여 사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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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AC.322

영들이 육체 안에서 때보다 훨씬 섬세한 감각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그릇된 생각을 조심해야 합니다. 저는 수천 반복된 경험을 통하여 사실은 반대임을 알고 있습니다. 영의 본성에 관하여 미리 형성된 관념 때문에 이것을 믿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저세상에 들어갔을 자신의 경험을 통해 배우게 하십시오. 그러면 믿지 않을 없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영들은 시각(sight)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가운데 살기 때문인데, 선한 영들과 천사적 영들, 그리고 천사들은 세상의 한낮 정오의 빛으로는 거의 비교할 없을 만큼 훨씬 밝은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들이 머물며 사물을 보는 빛에 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the Lords Divine mercy) 이후에 설명하겠습니다. 영들은 또한 청각(hearing) 가지고 있으며, 청각 또한 육체의 청각으로는 비교할 없을 만큼 섬세합니다. 그들은 여러 동안 거의 끊임없이 저와 말해 왔습니다. 다만 그들의 말에 관해서도 주님의 신적 자비로 이후에 설명하겠습니다. 그들에게는 후각(the sense of smell) 있으며, 이에 관해서도 역시 주님의 신적 자비로 이후에 다루고자 합니다. 그들에게는 지극히 섬세한 촉각(a most exquisite sense of touch) 있습니다. 지옥에서 겪는 고통과 고문도 촉각에서 비롯됩니다. 모든 감각은 촉각과 관련되며, 다른 감각들은 단지 촉각의 여러 차이와 다양한 형태일 뿐입니다. 그들은 또한 육체 안에 있을 가졌던 것들과는 비교할 없는 욕망과 애정들을 가지고 있는데, 이에 관해서도 주님의 신적 자비로 이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Beware of the false notion that spirits do not possess far more exquisite sensations than during the life of the body. I know the contrary by experience repeated thousands of times. Should any be unwilling to believe this, in consequence of their preconceived ideas concerning the nature of spirit, let them learn it by their own experience when they come into the other life, where it will compel them to believe. In the first place spirits have sight, for they live in the light, and good spirits, angelic spirits, and angels, in a light so great that the noonday light of this world can hardly be compared to it. The light in which they dwell, and by which they see, will of the Lords Divine mercy be described hereafter. Spirits also have hearing, hearing so exquisite that the hearing of the body cannot be compared to it. For years they have spoken to me almost continually, but their speech also will of the Lords Divine mercy be described hereafter. They have also the sense of smell, which also will of the Lords Divine mercy be treated of hereafter. They have a most exquisite sense of touch, whence come the pains and torments endured in hell; for all sensations have relation to the touch, of which they are merely diversities and varieties. They have desires and affections to which those they had in the body cannot be compared, concerning which of the Lords Divine mercy more will be said hereafter. Spirits think with much more clearness and distinctness than they had thought during their life in the body.

 

영들은 육체 안에서 때보다 훨씬 맑고 분명하게 생각합니다. 그들의 생각에 속한 하나의 관념 안에는 세상에서 가졌던 개의 관념 안에 들어 있던 것보다 많은 것이 담겨 있습니다. 그들은 매우 예리하고 섬세하며, 명민하고 분명하게 서로 말합니다. 만일 사람이 그것 가운데 무엇이라도 지각할 있다면 크게 놀랄 것입니다. 요컨대 영들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으나, 육체와 , 그리고 그것들에 따르는 불완전함을 제외하면 훨씬 완전한 방식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육체 안에서 때에도 실제로 감각한 것은 영이었음을 인정하고 지각합니다. 감각 능력이 육체 안에서 나타나기는 했지만, 그것이 육체에 속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육체를 벗어 버리면 감각은 훨씬 섬세하고 완전해집니다. 생명은 감각의 활동으로 이루어집니다. 감각이 없다면 생명도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감각 능력이 어떠하냐에 따라 생명도 그러합니다. 이것은 누구나 관찰할 있는 사실입니다. There are more things contained within a single idea of their thought than in a thousand of the ideas they had possessed in this world. They speak together with so much acuteness, subtlety, sagacity, and distinctness, that if a man could perceive anything of it, it would excite his astonishment. In short, they possess everything that men possess, but in a more perfect manner, except the flesh and bones and the attendant imperfections. They acknowledge and perceive that even while they lived in the body it was the spirit that sensated, and that although the faculty of sensation manifested itself in the body, still it was not of the body; and therefore that when the body is cast aside, the sensations are far more exquisite and perfect. Life consists in the exercise of sensation, for without it there is no life, and such as is the faculty of sensation, such is the life, a fact that anyone may observe.

 

해설

AC.322는 앞의 AC.321에서 간략하게 제시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펼칩니다. 스베덴보리는 영이 육체를 벗으면 감각을 잃거나 희미한 존재가 된다는 생각을 그릇된 생각이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수천 번에 걸친 경험을 근거로 오히려 그 반대라고 증언합니다. 영들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접촉하며, 욕망하고 사랑하고 생각하고 말합니다. 더구나 이러한 능력들은 육체 안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섬세하고 완전하다고 합니다.

 

이 설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실제로 감각하는 것은 이라는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입니다. 우리는 눈이 보고 귀가 듣는다고 생각하지만,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육체의 감각기관은 자연계의 것을 인간의 내적인 생명에 전달하는 기관입니다. 감각 능력이 육체를 통하여 나타나기는 하지만 감각하는 생명 자체가 육체에 속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육체가 죽는다고 인간의 감각까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적 육체의 제약을 벗으면서 영의 감각은 더욱 섬세하고 완전하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시각을 예로 듭니다. 영들은 빛 가운데 살며, 특히 선한 영들과 천사적 영들, 천사들은 이 세상의 한낮과 거의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밝은 빛 가운데 있다고 합니다. 청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영들과 거의 끊임없이 대화했다고 말하면서, 그들의 청각이 육체의 청각보다 훨씬 섬세하다고 증언합니다. 후각과 촉각 역시 존재하며, 특히 모든 감각이 어떤 의미에서는 촉각과 관계된다는 흥미로운 설명도 덧붙입니다. 다만 이러한 각각의 감각과 영계의 빛과 언어에 관한 자세한 설명은 이후에 하겠다고 여러 차례 예고합니다.

 

여기서 감각만큼 중요한 것이 욕망과 애정입니다. 영들은 육체 안에서 가졌던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한 욕망과 애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후의 인간이 생각만 남은 추상적인 정신적 존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사람의 생명에는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사랑하는가가 본질적으로 포함되어 있으며, 육체의 죽음이 그러한 애정의 생명을 없애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후에도 인간은 감각하고 생각할 뿐 아니라 원하고 사랑하는 사람으로 계속 살아갑니다.

 

사고와 언어에 관한 설명은 더욱 놀랍습니다. 영들의 하나의 관념에는 지상에서 가졌던 천 개의 관념보다 더 많은 것이 들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생각은 훨씬 더 맑고 분명하며, 서로 말할 때에도 예리하고 섬세하며 명민하고 분명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려는 것은 단순히 사후에 머리가 좋아진다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계의 육체와 그 제약 안에서 표현되던 인간의 내적인 생각이 영의 상태에서는 훨씬 풍부하고 직접적으로 활동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인상적인 결론을 내립니다. 영들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으나, 육체와 , 그리고 그것들에 따르는 불완전함을 제외하면 훨씬 완전한 방식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AC.320부터 계속된 설명의 핵심을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 사후의 인간은 지상 인간에게서 무엇인가가 크게 빠져나간 불완전한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이 여전히 보고 듣고 생각하고 말하고 원하고 사랑하는 온전한 사람임을 경험합니다.

 

마지막으로 생명은 감각의 활동으로 이루어진다는 말은 AC.322 전체를 압축합니다. 여기서 감각은 단순히 육체의 오감만을 뜻한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이 글 전체가 시각과 청각뿐 아니라 욕망과 애정, 사고와 언어까지 함께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받아들이고 느끼고 원하고 사랑하고 생각하며 다른 존재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감각 능력이 어떠하냐에 따라 생명도 그러하다고 말합니다.

 

AC.320-322를 함께 읽으면 하나의 흐름이 선명해집니다. AC.320에서는 사람이 죽은 뒤에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자기 자신으로 살아 있기 때문에 처음에는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AC.321에서는 사후의 감각과 사고와 말의 능력이 오히려 더 탁월하다고 했고, AC.322에서는 그것을 구체적인 감각과 애정과 사고의 경험으로 펼쳐 보였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반복해서 전하려는 것은 분명합니다. 죽음은 인간의 생명이 희미해지는 과정이 아닙니다. 육체를 벗은 뒤에도 인간은 여전히 감각하고 원하고 사랑하고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심화

1. 공주농아교회를 생각하며

 

AC.322 심화 1, 공주농아교회를 생각하며

AC.322 심화1. 공주농아교회를 생각하며 이 글을 읽으면서 반대로 농아(聾啞)인들, 그러니까 못 듣고, 말 못 하는 분들 생각과, 그분들을 대상으로 목회하시는, 저의 친구 목사님 생각이 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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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3, 창4 앞, 사후의 삶을 다르게 생각했던 사람들의 사례를 이 장 끝에서 살펴봅니다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AC.323이 장의 끝에서는,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 이와 다르게 생각했던 사람들의 몇 가지 사례를 제시하겠습니다. At the end of the chapter, several examples will be gi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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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1, 창4 앞, 육체를 벗은 뒤 감각과 사고와 말의 능력은 더욱 뛰어납니다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AC.321두 번째 일반적인 사실은 영이 육체 안에서 살 때보다 훨씬 더 뛰어난 감각 기능을 누리며, 생각하고 말하는 능력 또한 훨씬 더 탁월하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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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 영상은 매우 강한 메시지를 담고 있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몇 가지 중요한 구분이 필요합니다. 가장 먼저 말할 것은, 이 이야기의 핵심은 ‘신학교가 타락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교만한 마음은 어디에 가든 같은 세상을 만들어 낸다’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이 먼저 장소가 아니라 인간 안에 형성되는 사랑의 상태라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따라서 김성준 장로가 신학교에서 본 세속성과 권력욕은 특별히 신학교라는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proprium’, 곧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생명인 것처럼 느끼는 자기애의 본성이 드러난 사례일 뿐입니다. 같은 자기애는 교회 안에서도, 신학교 안에서도, 일반 회사에서도, 심지어 수도원에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영상을 보는 사람은 신학교를 비판하기보다 먼저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영상의 가장 큰 장점은 김성준 장로의 외적인 행동보다 내적인 동기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고 간다는 점입니다. 처음 그는 새벽기도를 빠짐없이 하고, 교회를 위해 헌신하며, 성도들에게 존경받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외적 선행 자체보다 그 선행 속에 무엇을 사랑하는지가 훨씬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같은 봉사를 하면서도 주님을 사랑하여 할 수도 있고, 자기 명예를 위하여 할 수도 있으며, 두 동기가 오랫동안 섞여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젊은 목사의 비판이 그의 마음을 뒤흔든 이유는 단순히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동안 자신도 알지 못했던 자기 사랑이 상처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시련은 새로운 악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안에 숨어 있던 악을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이 점에서 젊은 목사는 그의 적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 안에서 그의 속 사람을 비추는 거울이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특히 주목할 부분은 ‘복수심으로 신학교에 입학했다’는 대목입니다. 외적으로는 ‘더 배우고 싶다’는 아름다운 명분을 가지고 있지만, 내적으로는 ‘상대를 이기겠다’는 사랑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동일한 행동이라도 그것을 움직이는 사랑이 다르면, 영계에서는 전혀 다른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신학을 공부하는 행위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닙니다. 그것이 사랑에서 나왔는지, 명예욕에서 나왔는지가 결정적인 문제입니다. 이 영상은 바로 그 점을 비교적 잘 드러냅니다. 김성준 장로는 진리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높이기 위해 진리를 이용하려 했습니다. 이것은 말씀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자기애의 도구로 사용하는 모습입니다.

이 영상에서 신학교의 부패를 묘사하는 장면들은 상당히 자극적입니다. 교수의 금전 거래, 성적 조작, 목회의 취업화, 유튜브 알고리즘 중심의 설교 등은 현대 교회의 여러 병폐를 압축해 놓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부분을 조금 더 절제해서 읽는 것이 좋습니다. 실제 특정 신학교나 목회 현장을 일반화하는 근거로 삼기보다, 모든 인간 안에 있는 ‘세속적 사랑이 거룩한 것을 지배하려는 경향’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장면으로 읽는 편이 더 적절합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는 거룩한 직분일수록 자기 사랑이 침투하면 가장 심각한 형태의 모독(profanation)이 일어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문제는 신학교가 아니라 ‘거룩한 것을 자기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은 평신도에게도, 목회자에게도, 신학자에게도 동일하게 존재할 수 있습니다.

매우 인상적인 부분은 김성준 장로가 신학교를 떠난 뒤 빈 예배당에서 자신의 교만을 보는 장면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참된 시험의 결말과 상당히 닮아 있습니다. 시험은 상대방이 틀렸음을 증명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결국 자신의 악을 보게 만드는 데서 끝납니다. 처음에는 ‘저 사람이 교만하다’고 생각하지만, 시험이 깊어질수록 ‘내 안에도 같은 교만이 있었다’는 사실이 보입니다. 이것이 회개의 시작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인간에게 악을 보여 주시는 이유는 정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분리하고 제거하시기 위해서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김성준 장로가 흘리는 눈물은 실패의 눈물이 아니라 거듭남의 첫 번째 눈물입니다. 그는 신학교에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이 히브리어나 조직신학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보게 된 것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습니다.

영상 후반부에서 빌립보서 2장을 통하여 ‘자기를 비우신 그리스도’를 묵상하는 부분도 매우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다만 ‘자기를 비웠다’는 표현을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조금 더 조심스럽게 이해해야 합니다. 그것은 신성이 비워졌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 본성을 입으신 상태에서 끝까지 자신을 낮추며, 시험을 통하여 영광화의 길을 걸으셨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자기를 비움’은 신성을 버린 사건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가장 낮은 자리까지 내려가신 순종의 모습입니다. 이 점을 덧붙인다면 신학적으로도 훨씬 균형 잡힌 설명이 될 것입니다.

젊은 목사와 장로가 서로 회개하는 장면 역시 좋은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특히 둘 다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고, 서로에게 배우겠다고 말하는 부분은 천국 공동체의 원리를 잘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에서는 누구도 자신이 가장 지혜롭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오히려 모든 지혜가 주님께로부터 흘러온다는 사실을 깊이 알기 때문에 서로 배우는 기쁨 속에서 산다고 설명합니다. 장로의 경험과 젊은 목사의 학문이 경쟁하지 않고,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는 모습은 바로 이러한 질서를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그러나 마지막 결론인 ‘진정한 신학은 학교가 아니라 삶에서 배운다’는 문장은 약간의 보완이 필요합니다. 그대로 읽으면 마치 신학 공부 자체가 불필요한 것처럼 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결코 지식을 경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방대한 신학을 평생 연구한 사람입니다. 다만 그는 지식이 사랑을 섬길 때만 살아 있는 지혜가 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더 정확한 표현은 ‘진정한 신학은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과 삶 속에서 배우는 사랑이 하나 될 때 완성된다’일 것입니다. 지식 없는 사랑은 쉽게 미신이 되고, 사랑 없는 지식은 쉽게 교만이 됩니다. 천국은 이 둘이 하나 되는 곳입니다.

이 영상 전체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젊은 목사의 교만보다 먼저 김성준 장로 자신의 교만을 보게 하셨고, 신학교의 세속성보다 먼저 그의 마음속 세속성을 드러내셨으며, 결국 그를 높은 자리의 신학자가 아니라 가장 낮은 자리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셨다.’ 이것이 이 이야기의 진짜 중심입니다. 참된 거듭남은 환경이 바뀌는 데 있지 않고 사랑이 바뀌는 데 있습니다. 신학교를 떠났기 때문에 변화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사랑하던 사람이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방향을 돌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변화된 것입니다. 그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의 본질이며, 이 이야기에서 가장 깊이 읽어야 할 영적인 의미입니다.

 

 

 

SY.34, ‘시흥영성수련원, 79차 심령부흥대사경회’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모형에서 상응으로긴 강의를 모두 들은 뒤에야 비로소 이 글을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 몇 시간만 듣고 글을 썼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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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32, ‘그냥 성경만 공부하고 싶네요’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강문호 목사님의 이번 영상은 ‘그냥 성경만 공부하고 싶다’는 고백에서 시작하여, 잇사갈 지파가 시대를 분별하고, 이스라엘이 마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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