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PR.001 | 개신교인(Protestants)의 무의식 속 오류와 뒤섞인 신앙 100선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했으니 나는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다’ - 구원의 고백과 확신, 그리고 실제로 거듭나는 삶

 

해설

개신교 신앙에서 ‘나는 예수님을 믿으므로 구원받았다’는 고백은 매우 익숙하고 중요한 신앙 표현입니다. 많은 신자는 어느 날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기로 결심했으며, 그때부터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영접기도를 드린 날을 기억하고, 어떤 사람은 세례를 받거나 깊은 회심을 경험한 순간을 자신의 구원이 시작된 때로 받아들입니다. 이러한 고백에는 인간이 자신의 힘과 공로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믿고 의지해야 한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근본적인 질문이 생깁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했다는 사실과 실제로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은 언제나 동일한 것입니까? 주님을 구주로 인정하고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 인간의 내면에는 이미 구원이 완성된 것입니까? 만일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악을 사랑하고, 이웃을 해치며,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려 하지 않는다면 그의 구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질문을 통해 신앙고백의 의미를 더욱 깊이 살펴보도록 이끕니다. 그는 주님을 믿고 인정하는 일이 구원에서 중요하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믿음이 인간의 이해와 입술에만 머물고 의지와 삶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그것을 참된 구원의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고 설명합니다.

 

먼저 전통적인 개신교의 구원 이해를 정확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개신교는 일반적으로 인간이 자신의 선행이나 종교적 공로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고백합니다. 엡2:8-9는 구원이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이며,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롬10:9 역시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말씀은 구원의 근원이 인간의 업적이나 자격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에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그러나 개신교의 공식 교리 전체를 ‘입술로 고백하기만 하면 삶과 관계없이 구원이 완성된다’는 주장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1장 2항은 의롭다 하심을 받는 믿음이 사랑으로 역사하는 살아 있는 믿음이라고 설명하며, 제18장 1항은 참된 구원의 확신을 주님을 진실하게 사랑하고 선한 양심으로 살아가려는 삶과 연결합니다. 또한 개신교 안에는 구원의 확신과 견인, 성화의 관계를 서로 다르게 설명하는 여러 전통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검토해야 할 것은 모든 개신교가 단순한 말의 고백만으로 구원이 완성된다고 가르친다는 주장이 아닙니다. 오히려 개신교인이 실제 신앙생활에서 믿음의 고백과 구원의 확신을 지나치게 동일시하면서, 그 믿음이 자신의 내면과 삶을 얼마나 변화시키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소홀히 할 수 있다는 문제입니다.

 

성경 역시 믿음의 고백을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그 고백 자체를 구원의 충분한 증거로 삼는 일을 경계합니다. 마7:21에서 주님께서는 자신에게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어 마7:22-23에서는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조차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을 전혀 알지 못했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주님의 이름을 알고 있었으며, 그 이름을 근거로 자신들의 신앙적 정당성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이 실제로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물으십니다. 약2:17에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선언하며, 약2:19에서는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믿는다는 사실만으로 참된 믿음을 증명할 수 없다고 지적합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신앙고백과 실제 믿음 사이에 반드시 구별해야 할 문제가 있음을 보여 줍니다. 물론 이것이 인간이 자신의 선행으로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얻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참된 믿음이 단순한 종교적 지식이나 말의 동의에 머물지 않고, 인간의 의지와 삶을 변화시키는 살아 있는 믿음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새 예루살렘의 교리’(The New Jerusalem and Its Heavenly Doctrine, NJ, 1758) NJ.108-109에서 믿음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매우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그는 체어리티가 없는 곳에는 참된 믿음도 존재할 수 없으며, 믿음과 체어리티의 관계는 진리와 선, 이해와 의지의 관계와 같다고 가르칩니다. 인간은 자신의 이해를 통해 진리를 배우고 그것이 옳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진리를 이해하고 인정한다는 사실과 그 진리를 실제로 사랑하고 살아간다는 사실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을 알고, 그것이 참된 말씀이라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생활에서 자신의 이익이 걸려 있을 때마다 이웃을 속이거나 해치면서도 그 행동을 고치려 하지 않는다면, 그가 알고 있는 진리는 아직 그의 의지 안에서 선과 결합하지 못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차이를 통해 믿음이 단순히 인간의 기억과 이해 안에 저장된 진리의 지식이 아니라, 체어리티와 결합하여 생명을 얻는 진리여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체어리티는 단순히 불쌍한 사람을 돕거나 좋은 감정을 가지는 일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이웃에게 유익한 일을 행하려는 영적 삶의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과 그 믿음이 자신의 생명이 되었다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참된 믿음은 주님을 인정하는 이해와 그분의 뜻을 사랑하는 의지가 서로 결합할 때 살아 있는 믿음이 됩니다.

 

이러한 구별은 NJ.115-116에서 구원의 확신과 관련하여 더욱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영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주님께 구원받는다는 확신이 있을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자신을 믿고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며, 자신을 거듭나게 하시고 천국에 합당한 존재로 준비시키시는 분이 오직 주님이심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는 말씀과 교회의 가르침을 믿으면서도 그것에 따라 살아가지 않는 사람의 믿음은 겉보기에는 믿음처럼 보일 수 있지만, 참된 구원의 믿음은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구원의 확신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인간이 주님의 자비를 신뢰하고 영원한 생명을 소망하는 일을 인정합니다. 다만 그 확신이 자신의 영적 상태를 이미 완성된 것으로 단정하는 자기 확신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주님께서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과 자신의 내면이 이미 충분히 거듭났다고 판단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전자는 주님을 향한 신뢰이지만, 후자는 자신에 대한 판단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외적인 행동과 생각의 일부를 살펴볼 수 있지만, 자신의 내면을 지배하는 모든 사랑과 동기를 완전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확신은 주님의 자비와 능력을 신뢰하는 데서 나와야 하며, 자신의 신앙고백이나 과거의 종교적 경험을 근거로 구원이 이미 확정되었다고 단정하는 데서 나와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구원이 실제로 인간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스베덴보리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TCR.571 이하에서 인간의 개혁과 거듭남을 구별하여 설명합니다. 개혁은 인간의 이해가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진리에 따라 생각하기 시작하는 과정과 관계되며, 거듭남은 그 진리가 의지 안에서 선과 결합하여 인간의 사랑과 삶 자체가 변화되는 과정과 관계됩니다. 물론 이 두 과정은 서로 완전히 분리되어 진행되는 기계적인 단계가 아닙니다. 인간은 진리를 배우면서 자신의 잘못을 발견하고, 그것을 고치려 노력하면서 다시 진리를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별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신앙의 출발과 영적 생명의 성숙을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이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심하고 복음을 받아들였다면, 그 일은 그의 영적 삶에서 매우 중요한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부터 자신의 모든 악한 사랑이 사라지고 선과 진리가 완전히 결합된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자기중심적인 욕망과 잘못된 판단, 오래된 습관과 악한 성향이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러한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가 진리를 배우고 자신의 악을 발견하며 새로운 삶을 시작하도록 계속 인도하십니다. 따라서 구원은 단지 어느 한순간에 믿음의 고백을 했다는 사실로 설명될 수 없으며, 주님께서 인간을 실제로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특별히 강조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TCR.509-510은 참된 믿음과 체어리티가 회개 없이 존재할 수 없으며, 인간 안에 교회가 실제로 세워지는 일도 회개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TCR.528-530은 참된 회개가 자기 자신을 살피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며, 주님께 도움을 구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회개는 단순히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거나 죄를 지었다고 말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반복해서 고백하더라도 자신이 실제로 어떤 악을 사랑하고 있는지 살피지 않으며, 그 악을 계속 정당화하고 고치려 하지 않는다면 그의 회개는 아직 삶의 변화로 이어지지 못한 것입니다. 반대로 자신의 교만과 분노, 거짓과 탐욕을 깨닫고 그것들을 주님 앞에서 죄로 인정하며, 실제로 멀리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거듭남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이 자신의 힘만으로 악을 제거하거나 스스로 영적 생명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모든 참된 선과 진리, 회개하고 변화할 수 있는 능력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능력을 마치 자기 자신의 것처럼 자유롭게 사용하면서 악을 멀리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인간을 거듭나게 하신다는 사실이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과 책임을 없애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자신의 자유 안에서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거듭남의 중요한 질서입니다.

 

이러한 이해는 ‘나는 이미 구원받았다’는 고백을 대하는 태도에도 변화를 가져옵니다. 어떤 사람이 오래전에 예수님을 믿기로 결심한 뒤 지금까지 교회에 다니고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는 자신이 언제 영접기도를 했는지 기억하고 있으며, 세례를 받았고, 성경의 중요한 교리에도 동의합니다. 그러나 일상에서는 다른 사람을 쉽게 비난하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며, 가족에게 상처를 주면서도 자신은 이미 구원받았으므로 영원한 생명에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과거의 신앙고백을 더욱 강하게 반복하는 일만이 아닙니다. 자신이 지금 무엇을 사랑하고 있으며, 주님의 진리가 자신의 삶을 얼마나 변화시키고 있는지 돌아보는 일입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자신의 부족함과 반복되는 잘못 때문에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쉽게 갖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악을 발견할 때마다 괴로워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어제보다 조금이라도 더 정직하고 선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합니다. 우리는 두 사람 가운데 누가 최종적으로 구원받을 것인지 단정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내면과 최종적인 영적 상태를 완전하게 아시는 분은 주님뿐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해설에 따르면 구원의 중요한 표지는 신앙고백의 확신이 얼마나 강한가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실제로 받아들이고 악에서 돌아서려는 삶이 존재하는가에 있습니다. 구원의 확신은 회개를 중단하게 하는 근거가 아니라, 주님을 더욱 신뢰하며 거듭남의 길을 계속 걷게 하는 힘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은 반드시 눈에 띄는 도덕적 성과를 보여야 하며, 그렇지 못하면 구원을 의심해야 한다고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거듭남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속도와 모습으로 나타나는 과정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오랫동안 붙들고 있던 악한 습관에서 비교적 빨리 벗어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은 오랜 시간 반복되는 시험과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회적으로 큰일을 하면서 자신의 선한 삶을 드러낼 수 있지만, 어떤 사람은 가정에서 조용히 이웃을 돌보고 자신의 분노를 절제하며 작은 정직을 실천하는 방식으로 변화할 수 있습니다. 또한 외적으로 선한 행동을 많이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의 내면이 반드시 선하다고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명예나 이익, 다른 사람의 인정 때문에도 선한 행동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선한 행위의 영적 성격이 단순히 외적인 규모와 결과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를 움직이는 내적인 사랑과 목적에 관계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참된 구원의 믿음을 살핀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행동을 기준으로 구원받을 사람과 구원받지 못할 사람을 나누는 일이 아닙니다. 자신이 어떤 사랑을 따라 살아가는지 정직하게 돌아보고, 주님께서 주시는 진리가 자신의 의지와 행동 안에서 선한 생명으로 나타나도록 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구원의 확신은 자기 영혼에 대한 최종 판결이 아니라, 주님께서 자신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계속 인도하신다는 사실에 대한 신뢰와 소망이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의 고백을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고 그분을 구주로 믿는 일은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서 구원의 근원을 찾지 않고 주님을 바라보게 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고백이 참되려면 입술과 이해에 머무르지 않고 의지와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요14:15에서 주님께서는 자신을 사랑한다면 자신의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시며, 요15:5에서는 주님 안에 거하는 사람이 열매를 맺는다고 가르치십니다. 또한 요일3:18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라고 권면합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참된 믿음과 사랑과 삶이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거나, 그분이 나를 위해 구원의 일을 이루셨다는 교리에 동의하는 것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진리를 자신의 삶의 기준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악을 멀리하며,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과 지혜 안에서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이 자신의 행동으로 구원의 공로를 쌓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이 참으로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그에게 선을 행할 능력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인간은 그 선을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실제로 행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삶은 구원의 공로를 둘러싸고 서로 경쟁하는 관계가 아니라, 주님의 은혜가 인간 안에서 살아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 나타나는 하나의 영적 과정에 속합니다.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했으니 나는 이미 구원받은 사람입니까? 이 고백에는 인간의 구원이 오직 주님에게서 오며, 그분을 믿고 의지하는 일이 영원한 생명과 관계된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또한 자신을 구원하시는 주님의 자비와 능력을 신뢰하는 일은 참된 신앙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믿음의 고백 자체를 구원의 완성과 동일시하거나, 과거에 예수님을 영접했다는 사실만으로 자신의 영원한 상태가 이미 확정되었다고 판단하는 것은 바른 이해가 아닙니다. 참된 믿음은 체어리티와 결합해야 하며, 구원은 주님께서 인간을 실제로 개혁하고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진리를 가르치실 뿐 아니라 그 진리가 의지 안에서 사랑과 결합하도록 인도하시며, 인간이 자신의 악을 죄로 인정하고 멀리함으로써 천국의 생명을 받아들이도록 하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단지 ‘나는 언제 예수님을 믿기로 결심했는가?’ 또는 ‘나는 구원받았다는 확신이 있는가?’가 아닙니다. ‘나는 지금 주님을 얼마나 참되게 믿고 있는가? 주님께서 가르치신 진리가 내 생각과 사랑과 행동을 실제로 변화시키고 있는가? 그리고 나는 자신의 악을 살피고 멀리하며,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거듭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구원의 참된 확신은 자신의 과거 고백이나 현재의 신앙적 자신감에 근거하여 스스로에게 내리는 최종 판결이 아니라, 자신을 구원하고 거듭나게 하시는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신뢰하면서 그분의 인도하심에 자유롭게 응답하는 삶에서 깊어집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내가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얼마나 확신하는가보다, 지금도 나를 구원하시는 주님을 믿고 그분의 사랑과 진리 안에서 실제로 새로운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 하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본 믿음의 고백과 구원의 확신, 그리고 참된 거듭남의 의미입니다. (PR.001 해설)

 

요약

개신교인들이 고백하는 ‘예수님을 믿으므로 나는 구원받았다’는 말에는 구원이 인간의 공로나 선행에서 비롯되지 않고 주님의 은혜로 주어진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고백과 실제적인 구원의 완성을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전통적인 개신교의 공식 교리 역시 단순한 입술의 고백을 참된 믿음의 충분한 증거로 삼지 않으며, 살아 있는 믿음이 사랑과 선한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새 예루살렘의 교리’ NJ.108-109에서 믿음과 체어리티가 진리와 선, 이해와 의지처럼 결합되어야 한다고 설명하며, NJ.115-116에서는 주님의 구원을 확신하는 영적인 믿음과 삶의 변화가 없는 외적인 믿음을 구별합니다. 또한 ‘참된 기독교’ TCR.571 이하에서는 인간의 이해가 진리를 받아들이는 개혁과, 그 진리가 의지와 사랑을 변화시키는 거듭남을 설명합니다. 특히 TCR.509-510과 TCR.528-530은 회개가 참된 믿음과 거듭남에서 필수적이며, 회개란 자신의 죄를 살피고 인정하며 주님께 도움을 구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구원의 확신은 과거의 영접기도나 신앙고백을 근거로 자신의 영원한 상태를 이미 확정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을 구원하시는 주님의 자비를 신뢰하면서 그분의 진리를 실제 삶에 받아들이는 일과 관계됩니다. 참된 믿음은 입술과 이해에만 머물지 않고 의지와 삶 안에서 체어리티와 결합해야 하며, 인간은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주님의 능력으로 악을 멀리하고 선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결국 우리가 살펴야 할 것은 자신이 얼마나 확실하게 구원받았다고 고백하는가보다,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실제로 자신의 내면과 삶을 변화시키고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PR.002. ‘예수님을 영접한 날이 내 영적 생명이 시작된 날이다’

SL.PR.002 | 개신교인(Protestants)의 무의식 속 오류와 뒤섞인 신앙 100선 ‘예수님을 영접한 날이 내 영적 생명이 시작된 날이다’ - 회심의 순간과 영적 출생, 거듭남은 언제 시작되는가? 해설개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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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종을 대적하면 벌받아’

 

‘하나님의 사람을 대적하면 결국 벌받아.’ 교회 안에서 종종 듣는 말입니다. 목회자나 선교사, 영적 지도자에게 심각한 비판을 제기하면 ‘주의 종을 함부로 대하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람에게 대적하다가 잘된 사람이 없다’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성경에도 모세를 대적한 고라 일당이 심판을 받고(민16), 미리암이 모세를 비방한 뒤 나병에 걸리며(민12), 엘리사를 조롱한 아이들이 큰 화를 당하는 장면이 나옵니다(왕하2:23-24). 이런 본문들을 읽으면 ‘하나님의 사람을 건드리면 하나님께서 직접 벌하신다’는 생각이 생기는 것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분명 붙들어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맡기신 선한 일을 악의적으로 방해하고, 거짓으로 사람을 모함하며, 진리를 미워하여 그것을 전하는 사람을 박해하는 것은 가벼운 일이 아닙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호칭 자체에 일종의 영적 면책특권을 부여할 때 생깁니다. ‘저 사람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람이니 그의 말과 행동을 비판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한 인간에게 주님의 권위를 거의 그대로 옮겨 놓게 됩니다.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맡은 사람이라고 해서 그의 모든 판단과 행동이 자동으로 하나님의 뜻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함부로 죽이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였지만(삼상24:6), 그렇다고 사울의 모든 행동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실제로 다윗을 죽이려 했고, 자신의 왕권을 지키기 위해 잘못된 행동을 거듭했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죽여 자신의 손으로 왕위를 차지하지는 않았지만, 사울의 악한 행동에 순종하지도 않았습니다. 존중과 복종은 같은 말이 아니며, 직분을 존중하는 것과 그 직분자의 모든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도 같은 말이 아닙니다. 더 분명한 사례는 바울과 베드로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직접 사도로 세우신 사람이었지만, 안디옥에서 이방인들과 함께 먹다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물러났을 때, 바울은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고 말합니다(갈2:11). 만일 ‘하나님의 사람을 비판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라는 공식이 옳다면 바울은 사도 베드로를 책망해서는 안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오히려 이 사건을 기록하여 하나님의 사람도 잘못할 수 있고, 그 잘못은 진리에 따라 바로잡혀야 함을 보여 줍니다.

 

구약의 선지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왕에게 순종만 하지 않았습니다. 나단은 다윗에게 ‘당신이 그 사람이라’고 말하며 그의 죄를 직면하게 했고(삼하12:7), 엘리야는 아합의 악을 책망했습니다. 하나님의 권위 아래 있는 사람일수록 오히려 하나님의 진리 아래 있어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고라가 모세를 대적한 사건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고라 사건의 핵심을 단순히 ‘하나님의 지도자를 비판했다’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고라와 그 무리는 모세의 개인적인 실수를 지적하거나 책임 있는 질문을 제기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세우신 질서에 맞서 자기들의 권력과 지위를 요구하며 반역했습니다. 따라서 이 사건을 오늘날 ‘목회자를 비판하면 고라처럼 심판받는다’는 식으로 곧바로 적용하는 것은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모세의 지위와 현대 교회의 목회자 직분을 아무 설명 없이 동일시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습니다. 민12의 미리암과 아론 사건 역시 단순히 모세와 의견이 달랐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고 하며(민12:2) 모세에게 주어진 고유한 사명을 시기하고 자기들의 위치를 높이려 했습니다. 본문은 이어서 모세가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고 기록합니다(민12:3). 이것은 자기 권위를 지키기 위해 ‘나를 건드리면 하나님께 벌받는다’고 위협하는 지도자의 모습과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람을 대적하는 것’과 ‘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그 사람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과 ‘주님을 대적하는 것’도 같은 일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진리를 미워하기 때문에 선한 사역자를 거짓으로 모함하고 악의적으로 방해한다면 그것은 분명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목회자의 잘못된 가르침을 성경에 비추어 질문하거나, 재정 비리를 지적하거나, 권력 남용과 부당한 행동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까지 ‘하나님의 사람을 대적하는 일’이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특히 ‘나를 대적하면 하나님께서 가만두지 않으신다’, ‘나를 떠난 사람들은 결국 잘되지 않았다’, ‘주의 종에게 손대면 자녀에게까지 화가 간다’는 식의 말을 지도자 자신이 사용한다면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을 자기 권위를 지켜 주는 보복자로 만들고, 사람으로 하여금 주님보다 목회자를 두려워하게 할 위험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문제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모든 참된 권위는 ‘선’(good)과 ‘진리’(truth)를 섬기기 위한 권위입니다. 직분 그 자체가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라는 직함, 안수, 교회의 규모, 오랜 사역 경력, 많은 추종자가 그 사람의 모든 말을 주님의 말씀으로 바꾸어 주지 않습니다. 직분은 선과 진리를 섬기도록 맡겨진 ‘쓰임’(use)이며, 그 권위 역시 그 쓰임을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영적 지도자에게 중요한 질문은 ‘사람들이 나에게 얼마나 순종하는가?’가 아니라 ‘나는 주님의 선과 진리를 얼마나 충실하게 섬기고 있는가?’입니다. 성도에게 중요한 질문도 ‘저 사람은 유명한 하나님의 사람이니까 무조건 따라야 하는가?’가 아니라 ‘그가 말하고 행하는 것이 주님의 선과 진리에 합당한가?’입니다. 사람을 중심에 놓으면 신앙은 인물 숭배로 흐르기 쉽지만, 선과 진리를 중심에 놓으면 지도자와 성도 모두 주님 아래 서게 됩니다.

 

여기에서 ‘프로프리움’(proprium)은 특별히 위험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종교적 권위를 가진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직분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기 쉽습니다. ‘주님께서 이 사역을 맡기셨다’는 고백이 어느 순간 ‘그러므로 나를 반대하는 것은 주님을 반대하는 것이다’로 변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자신의 판단과 주님의 뜻 사이의 경계가 흐려집니다. 종교적 프로프리움은 자신의 욕망과 권위를 ‘하나님의 뜻’이라는 이름으로 보호할 수 있다는 점에서 특히 위험합니다. 그러나 반대편에도 같은 문제가 있습니다. ‘목회자도 사람인데 뭐’라며 하나님께서 맡기신 직분과 선한 사역 자체를 가볍게 여기거나,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선한 사역을 무너뜨리려 하거나, 진리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그것을 전하는 사람을 공격하는 것도 악입니다. 비판하는 사람 역시 ‘나는 정말 진리를 위해 이 말을 하는가, 아니면 그 사람이 싫어서 공격하고 싶은 것인가?’를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지도자도 비판자도 자신의 프로프리움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 양쪽 모두 누가 더 높은 위치에 있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참된가를 기준으로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누군가가 주님의 선한 일을 악의적으로 대적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악에는 결과가 있습니다. 거짓을 사랑하면 거짓이 그 사람의 내면을 형성하고, 미움과 지배욕을 반복해서 선택하면 그것이 점점 그의 ‘지배적 사랑’(ruling love)이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이것이 훨씬 더 깊은 의미의 ‘벌’입니다. 하나님께서 화가 나서 밖에서 보복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유롭게 선택하고 사랑한 악이 결국 그 자신의 생명과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을 대적했으니 하나님께서 사업을 망하게 하셨다’, ‘목회자를 비판했더니 병에 걸렸다’, ‘주의 종을 떠났더니 집안에 문제가 생겼다’는 식으로 사건을 연결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그런 인과관계를 알 수 없습니다. 자연계의 불행을 하나님의 보복으로 해석하는 것은 신적 섭리의 원리와도 맞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오히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5:44). 주님께서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주님의 종을 비판한 사람에게 병과 실패를 보내어 보복하시는 분으로 주님을 이해한다면 주님 자신이 가르치신 사랑과 충돌하게 됩니다.

 

스데반과 사울의 이야기는 이 점을 아주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참여한 사울은 실제로 주님의 사람을 대적했습니다. 그가 한 일은 분명 악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사울에게 즉시 보복하여 멸망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다메섹 길에서 그를 만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고 물으셨고(행9:4), 그를 돌이켜 훗날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사용하셨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목적이 보복이 아니라 구원임을 보여 줍니다. 여기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네가 어찌하여 내 사람들을 박해하느냐’가 아니라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고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스데반과 성도들을 향한 박해가 주님을 향한 박해가 된 것은 그들이 특별한 신분의 ‘주의 종’이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진리 때문에 박해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심은 사람의 지위가 아니라 그 사람 안에서 역사하는 주님의 선과 진리였습니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부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호칭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실제로 주님의 선과 진리를 섬기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대하는 우리 역시 그 사람의 인격이나 지위보다 그를 통해 나타나는 선과 진리를 존중해야 합니다. 동시에 그가 선과 진리에서 벗어날 때에는 사람을 우상화하지 않고, 그것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사람을 대적하면 결국 벌받는다’는 말은 그대로 공식으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진리를 미워하여 선한 사람을 박해하는 것은 분명 심각한 악이며 그 악은 인간의 내면에 결과를 남깁니다. 그러나 어떤 종교 지도자에게 반대하거나 그의 잘못을 지적했다는 이유만으로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자연적인 불행을 보내신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주님께서 맡기신 선과 진리를 악의적으로 대적하는 것은 영적으로 심각한 일이지만, 어떤 “하나님의 사람”에게 반대했다는 이유만으로 주님께서 보복하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조금 더 깊이 압축하면 이것이겠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사람을 건드려 벌받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보느라 그 사람 안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선과 진리를 거부하거나, 반대로 사람을 주님과 동일시하여 그의 잘못까지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목회자와 영적 지도자에게 가장 안전한 자리는 ‘나를 대적하지 말라’고 말하는 자리가 아니라 자신 역시 언제나 주님의 선과 진리 아래 있음을 기억하는 자리입니다. 성도에게 가장 안전한 자리 역시 지도자를 무조건 따르거나 무조건 의심하는 자리가 아니라, 사람을 존중하되 주님께 속한 선과 진리를 기준으로 분별하는 자리입니다.

 

사람은 틀릴 수 있습니다. 직분자도 틀릴 수 있고, 비판하는 사람도 틀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선과 진리는 사람보다 높습니다. 그래서 결국 질문은 ‘누가 하나님의 사람인가?’에서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지금 나는 사람의 편을 들고 있는가, 아니면 주님의 선과 진리를 따르고 있는가?’ 그 질문 앞에서는 목회자도 성도도 함께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SL.29, ‘하나님께 맡겼으니 이제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거야’

‘하나님께 맡겼으니 이제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거야’ ‘하나님께 맡겼으니 이제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거야.’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참 많이 하는 말입니다. 걱정하던 문제를 놓고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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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맡겼으니 이제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거야’

 

‘하나님께 맡겼으니 이제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거야.’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참 많이 하는 말입니다. 걱정하던 문제를 놓고 기도한 뒤 ‘이제 주님께 맡기자’고 마음먹으면 불안했던 마음이 편안해지기도 합니다. 성경에도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라는 말씀이 있고(시37:5),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는 말씀도 있습니다(벧전5:7). 그러므로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집착을 내려놓고 주님을 신뢰하는 것은 분명 신앙의 중요한 모습입니다.

 

문제는 ‘맡긴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결과를 주님께 맡긴다’는 것과 ‘내가 해야 할 일까지 주님께 맡긴다’는 것을 혼동합니다. 기도했으니 이제 내가 할 것은 없다고 생각하거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면 알아서 사람도 보내 주시고 돈도 마련해 주시며 문제도 해결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해야 할 결정과 책임을 미루면서도 그것을 ‘믿음’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주님을 의지하는 것과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같은 뜻이 아닙니다.

 

느헤미야가 좋은 예입니다. 그는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 하나님 앞에서 울며 금식하고 기도했습니다(느1:4). 그러나 기도한 뒤 ‘하나님께 맡겼으니 하나님께서 알아서 성벽을 세우시겠지’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왕에게 무엇을 요청할지 준비했고, 예루살렘에 도착한 뒤에는 밤에 직접 성벽의 상태를 살폈으며, 사람들을 조직하여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대적들이 공격하려 하자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들로 말미암아 파수꾼을 두어 주야로 방비’했습니다(느4:9). 이 한 구절에 맡김의 균형이 아주 잘 나타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동시에 ‘파수꾼을 두었습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었지만 그것 때문에 현실적인 행동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행27에서 배가 풍랑을 만나 모두가 죽을 위험에 처했을 때 바울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생명을 보존하실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선원들이 배에서 몰래 도망하려 하자 바울은 백부장과 군인들에게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고 말합니다(행27:31). 하나님께서 살려 주신다는 약속을 받았으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신적 섭리에 대한 신뢰와 인간이 해야 할 적절한 행동은 서로 반대가 아니었습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가 해야 할 일을 대신해 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시험을 앞둔 사람이 기도한 뒤 공부하지 않는 것을 믿음이라고 할 수 없고, 건강 문제를 놓고 기도하면서 필요한 치료와 생활 습관의 변화를 거부하는 것도 맡김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깨어진 관계를 위해 기도하면서 자신이 사과해야 할 것은 사과하지 않고 상대방만 변화되기를 기다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제적인 문제를 하나님께 맡겼다고 하면서 자신의 지출과 책임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그것은 신뢰라기보다 책임 회피가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우리가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아무리 준비하고 노력해도 우리의 손에 있지 않은 것이 많습니다. 자녀에게 좋은 말을 해 줄 수는 있지만 자녀 대신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병원에 가고 치료를 받을 수는 있지만 결과까지 명령할 수는 없습니다. 사업계획을 세우고 성실하게 일할 수는 있지만 시장과 다른 사람의 선택을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진심으로 사과할 수는 있지만 그 사람이 반드시 용서하도록 만들 수는 없습니다. 바로 이 경계에서 참된 ‘맡김’이 시작됩니다.

 

내가 해야 할 것은 내가 하되, 내가 할 수 없는 것까지 붙잡고 하나님 노릇을 하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이 문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이 인간의 ‘자유’(freedom)와 ‘합리성’(rationality)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무엇이 선하고 참된지를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과, 그것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이 능력들은 거듭남(regeneration)을 위해 필수적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생각과 선택과 행동을 대신해 버리신다면 인간은 주님과 자유롭게 결합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선을 행할 때 ‘마치 자기에게서 하는 것처럼’ 행해야 한다는 역설적인 원리를 강조합니다. 나는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심하고, 노력하고, 악을 거절하며 선을 행해야 합니다. 그 순간에는 실제로 내가 하는 것처럼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선을 행할 능력과 생명 자체가 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은 ‘내가 한다’와 ‘주님께서 하신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두 차원을 함께 붙드는 신앙입니다.

 

여기에서 ‘프로프리움’(proprium)의 두 가지 상반된 모습도 드러납니다. 한쪽에서는 ‘내가 다 해야 한다. 내가 해결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자신을 모든 결과의 주인으로 만드는 프로프리움입니다. 그러나 반대편에서는 ‘나는 하나님께 맡겼으니 이제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 역시 다른 모습의 프로프리움이 될 수 있습니다. 책임을 져야 할 자리에서 책임을 피하면서 그것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기 때문입니다.

 

참된 신뢰는 이 두 극단 사이에 있습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다하면서도 결과의 주인이 되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에서도 이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마26:39). 이것은 수동적인 체념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기도하신 뒤 당신 앞에 놓인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맡김은 행동의 중단이 아니라 끝까지 그 길을 살아 내는 순종으로 이어졌습니다.

 

따라서 ‘맡김’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책임 있게 행동하면서 결과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농부는 씨를 뿌리고 밭을 돌봅니다. 그러나 비를 내리게 할 수는 없습니다. 의사는 환자를 진찰하고 최선의 치료를 합니다. 그러나 생명 자체를 지배할 수는 없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고 가르치고 필요한 경계를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인이 된 자녀의 마음과 선택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영역과 할 수 없는 영역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히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에서는 이 구별이 더욱 필요합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지만 그 사람을 강제로 변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진실을 말할 수 있지만 상대방에게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강제할 수는 없습니다. 필요한 도움을 줄 수 있지만 상대방의 인생을 대신 살아 줄 수는 없습니다. 여기에서 ‘주님께 맡긴다’는 것은 그 사람을 포기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내가 해야 할 사랑과 체어리티(charity)는 계속 행하되, 그 사람의 자유와 최종적인 내면까지 내가 책임지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체어리티는 ‘하나님께 맡겼으니 나는 관여하지 않겠다’는 무관심과 다릅니다. 배고픈 사람을 보고 ‘하나님께서 알아서 먹이시겠지’라고 하는 것이 체어리티일 수 없습니다. 야고보는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라고 묻습니다(약2:15-16). 기도는 행동을 대신하는 수단이 아니라 선한 행동을 낳아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반대편으로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내가 할 일을 해야 한다’는 말을 ‘결국 내가 해결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다시 자기 의존으로 돌아갑니다. 내가 최선을 다했다고 해서 원하는 결과가 반드시 오는 것도 아닙니다. 바로 그때 맡김이 필요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선을 행한 뒤에도 결과가 내 뜻과 다르게 나타날 수 있음을 받아들이고, 그 결과 속에서도 주님의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도와 행동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기도한 뒤 행동하고, 행동하면서 다시 기도합니다. 기도는 내가 해야 할 일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하는지 더 바르게 보게 합니다. 행동은 기도를 불필요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님에게서 받은 빛을 실제 삶으로 옮기는 과정입니다. 기도와 행동은 서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어떤 문제를 하나님께 맡길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이 문제에서 내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사과해야 한다면 사과하고, 공부해야 한다면 공부하고, 치료받아야 한다면 치료받고,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면 요청하며, 잘못된 습관을 고쳐야 한다면 고쳐야 합니다. 그다음에는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 이미 지나간 과거, 내가 통제할 수 없는 환경, 그리고 최종적인 결과는 내 손에 있지 않습니다.

 

그 경계가 보일 때 맡김은 훨씬 구체적인 신앙이 됩니다.

 

‘주님, 제가 해야 할 것은 피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할 수 없는 것까지 붙잡고 두려워하지 않겠습니다.’

 

이것이 맡김입니다.

 

그리고 결과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오지 않았다고 해서 ‘내가 제대로 맡기지 못했나?’라고 자책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결과를 하나님께서 대신 보장해 주신다는 계약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원하는 결과와 주님의 섭리가 다를 수도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주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주님의 섭리는 인간의 자연적인 성공만을 목표로 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궁극적으로 보시는 것은 우리가 어떤 사랑의 사람이 되어 가는가입니다. 어떤 문제는 해결되면서 우리를 가르치고, 어떤 문제는 오래 남아 있으면서 우리를 가르칠 수도 있습니다. 어떤 관계는 회복되고, 어떤 관계는 우리가 최선을 다해도 이전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모든 과정에서 우리가 악을 피하고 선을 선택하며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맡겼으니 이제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거야’라는 말에는 귀한 진리가 있습니다. 내가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교만과 불안을 내려놓고 주님의 섭리를 신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이 ‘그러니 이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되는 순간 맡김은 영적 방임으로 바뀝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내가 해야 할 책임까지 주님께 넘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해야 할 선을 성실히 행한 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결과를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조금 더 깊이 압축하면 이것이겠습니다.

 

‘참된 맡김은 마치 자기에게서 하는 것처럼 최선을 다하면서도, 선을 행할 힘과 결과의 궁극적인 주권은 모두 주님에게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맡겼다’는 말 뒤에는 두 문장이 함께 따라와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러나 결과까지 내가 지배하려 하지는 않겠습니다.’

 

이 두 문장 가운데 하나라도 빠지면 균형이 무너집니다. 첫 번째가 빠지면 영적 방임이 되고, 두 번째가 빠지면 자기 의존이 됩니다.

 

신앙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움직이시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모든 것을 내가 해결하려고 애쓰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빛과 힘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을 자유롭게 행하면서,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평안히 주님의 손에 놓는 것입니다.

 

어쩌면 ‘하나님께 맡긴다’는 말의 가장 깊은 뜻은 바로 이것일 것입니다.

 

‘주님, 제 몫은 피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몫까지 제가 붙들고 있지도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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