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PR.001 | 개신교인(Protestants)의 무의식 속 오류와 뒤섞인 신앙 100선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했으니 나는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다’ - 구원의 고백과 확신, 그리고 실제로 거듭나는 삶
해설
개신교 신앙에서 ‘나는 예수님을 믿으므로 구원받았다’는 고백은 매우 익숙하고 중요한 신앙 표현입니다. 많은 신자는 어느 날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기로 결심했으며, 그때부터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영접기도를 드린 날을 기억하고, 어떤 사람은 세례를 받거나 깊은 회심을 경험한 순간을 자신의 구원이 시작된 때로 받아들입니다. 이러한 고백에는 인간이 자신의 힘과 공로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믿고 의지해야 한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근본적인 질문이 생깁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했다는 사실과 실제로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은 언제나 동일한 것입니까? 주님을 구주로 인정하고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 인간의 내면에는 이미 구원이 완성된 것입니까? 만일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악을 사랑하고, 이웃을 해치며,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려 하지 않는다면 그의 구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질문을 통해 신앙고백의 의미를 더욱 깊이 살펴보도록 이끕니다. 그는 주님을 믿고 인정하는 일이 구원에서 중요하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믿음이 인간의 이해와 입술에만 머물고 의지와 삶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그것을 참된 구원의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고 설명합니다.
먼저 전통적인 개신교의 구원 이해를 정확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개신교는 일반적으로 인간이 자신의 선행이나 종교적 공로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고백합니다. 엡2:8-9는 구원이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이며,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롬10:9 역시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말씀은 구원의 근원이 인간의 업적이나 자격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에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그러나 개신교의 공식 교리 전체를 ‘입술로 고백하기만 하면 삶과 관계없이 구원이 완성된다’는 주장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1장 2항은 의롭다 하심을 받는 믿음이 사랑으로 역사하는 살아 있는 믿음이라고 설명하며, 제18장 1항은 참된 구원의 확신을 주님을 진실하게 사랑하고 선한 양심으로 살아가려는 삶과 연결합니다. 또한 개신교 안에는 구원의 확신과 견인, 성화의 관계를 서로 다르게 설명하는 여러 전통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검토해야 할 것은 모든 개신교가 단순한 말의 고백만으로 구원이 완성된다고 가르친다는 주장이 아닙니다. 오히려 개신교인이 실제 신앙생활에서 믿음의 고백과 구원의 확신을 지나치게 동일시하면서, 그 믿음이 자신의 내면과 삶을 얼마나 변화시키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소홀히 할 수 있다는 문제입니다.
성경 역시 믿음의 고백을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그 고백 자체를 구원의 충분한 증거로 삼는 일을 경계합니다. 마7:21에서 주님께서는 자신에게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어 마7:22-23에서는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조차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을 전혀 알지 못했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주님의 이름을 알고 있었으며, 그 이름을 근거로 자신들의 신앙적 정당성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이 실제로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물으십니다. 약2:17에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선언하며, 약2:19에서는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믿는다는 사실만으로 참된 믿음을 증명할 수 없다고 지적합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신앙고백과 실제 믿음 사이에 반드시 구별해야 할 문제가 있음을 보여 줍니다. 물론 이것이 인간이 자신의 선행으로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얻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참된 믿음이 단순한 종교적 지식이나 말의 동의에 머물지 않고, 인간의 의지와 삶을 변화시키는 살아 있는 믿음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새 예루살렘의 교리’(The New Jerusalem and Its Heavenly Doctrine, NJ, 1758) NJ.108-109에서 믿음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매우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그는 체어리티가 없는 곳에는 참된 믿음도 존재할 수 없으며, 믿음과 체어리티의 관계는 진리와 선, 이해와 의지의 관계와 같다고 가르칩니다. 인간은 자신의 이해를 통해 진리를 배우고 그것이 옳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진리를 이해하고 인정한다는 사실과 그 진리를 실제로 사랑하고 살아간다는 사실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을 알고, 그것이 참된 말씀이라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생활에서 자신의 이익이 걸려 있을 때마다 이웃을 속이거나 해치면서도 그 행동을 고치려 하지 않는다면, 그가 알고 있는 진리는 아직 그의 의지 안에서 선과 결합하지 못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차이를 통해 믿음이 단순히 인간의 기억과 이해 안에 저장된 진리의 지식이 아니라, 체어리티와 결합하여 생명을 얻는 진리여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체어리티는 단순히 불쌍한 사람을 돕거나 좋은 감정을 가지는 일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이웃에게 유익한 일을 행하려는 영적 삶의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과 그 믿음이 자신의 생명이 되었다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참된 믿음은 주님을 인정하는 이해와 그분의 뜻을 사랑하는 의지가 서로 결합할 때 살아 있는 믿음이 됩니다.
이러한 구별은 NJ.115-116에서 구원의 확신과 관련하여 더욱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영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주님께 구원받는다는 확신이 있을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자신을 믿고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며, 자신을 거듭나게 하시고 천국에 합당한 존재로 준비시키시는 분이 오직 주님이심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는 말씀과 교회의 가르침을 믿으면서도 그것에 따라 살아가지 않는 사람의 믿음은 겉보기에는 믿음처럼 보일 수 있지만, 참된 구원의 믿음은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구원의 확신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인간이 주님의 자비를 신뢰하고 영원한 생명을 소망하는 일을 인정합니다. 다만 그 확신이 자신의 영적 상태를 이미 완성된 것으로 단정하는 자기 확신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주님께서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과 자신의 내면이 이미 충분히 거듭났다고 판단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전자는 주님을 향한 신뢰이지만, 후자는 자신에 대한 판단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외적인 행동과 생각의 일부를 살펴볼 수 있지만, 자신의 내면을 지배하는 모든 사랑과 동기를 완전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확신은 주님의 자비와 능력을 신뢰하는 데서 나와야 하며, 자신의 신앙고백이나 과거의 종교적 경험을 근거로 구원이 이미 확정되었다고 단정하는 데서 나와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구원이 실제로 인간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스베덴보리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TCR.571 이하에서 인간의 개혁과 거듭남을 구별하여 설명합니다. 개혁은 인간의 이해가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진리에 따라 생각하기 시작하는 과정과 관계되며, 거듭남은 그 진리가 의지 안에서 선과 결합하여 인간의 사랑과 삶 자체가 변화되는 과정과 관계됩니다. 물론 이 두 과정은 서로 완전히 분리되어 진행되는 기계적인 단계가 아닙니다. 인간은 진리를 배우면서 자신의 잘못을 발견하고, 그것을 고치려 노력하면서 다시 진리를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별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신앙의 출발과 영적 생명의 성숙을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이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심하고 복음을 받아들였다면, 그 일은 그의 영적 삶에서 매우 중요한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부터 자신의 모든 악한 사랑이 사라지고 선과 진리가 완전히 결합된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자기중심적인 욕망과 잘못된 판단, 오래된 습관과 악한 성향이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러한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가 진리를 배우고 자신의 악을 발견하며 새로운 삶을 시작하도록 계속 인도하십니다. 따라서 구원은 단지 어느 한순간에 믿음의 고백을 했다는 사실로 설명될 수 없으며, 주님께서 인간을 실제로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특별히 강조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TCR.509-510은 참된 믿음과 체어리티가 회개 없이 존재할 수 없으며, 인간 안에 교회가 실제로 세워지는 일도 회개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TCR.528-530은 참된 회개가 자기 자신을 살피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며, 주님께 도움을 구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회개는 단순히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거나 죄를 지었다고 말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반복해서 고백하더라도 자신이 실제로 어떤 악을 사랑하고 있는지 살피지 않으며, 그 악을 계속 정당화하고 고치려 하지 않는다면 그의 회개는 아직 삶의 변화로 이어지지 못한 것입니다. 반대로 자신의 교만과 분노, 거짓과 탐욕을 깨닫고 그것들을 주님 앞에서 죄로 인정하며, 실제로 멀리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거듭남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이 자신의 힘만으로 악을 제거하거나 스스로 영적 생명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모든 참된 선과 진리, 회개하고 변화할 수 있는 능력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능력을 마치 자기 자신의 것처럼 자유롭게 사용하면서 악을 멀리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인간을 거듭나게 하신다는 사실이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과 책임을 없애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자신의 자유 안에서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거듭남의 중요한 질서입니다.
이러한 이해는 ‘나는 이미 구원받았다’는 고백을 대하는 태도에도 변화를 가져옵니다. 어떤 사람이 오래전에 예수님을 믿기로 결심한 뒤 지금까지 교회에 다니고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는 자신이 언제 영접기도를 했는지 기억하고 있으며, 세례를 받았고, 성경의 중요한 교리에도 동의합니다. 그러나 일상에서는 다른 사람을 쉽게 비난하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며, 가족에게 상처를 주면서도 자신은 이미 구원받았으므로 영원한 생명에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과거의 신앙고백을 더욱 강하게 반복하는 일만이 아닙니다. 자신이 지금 무엇을 사랑하고 있으며, 주님의 진리가 자신의 삶을 얼마나 변화시키고 있는지 돌아보는 일입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자신의 부족함과 반복되는 잘못 때문에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쉽게 갖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악을 발견할 때마다 괴로워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어제보다 조금이라도 더 정직하고 선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합니다. 우리는 두 사람 가운데 누가 최종적으로 구원받을 것인지 단정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내면과 최종적인 영적 상태를 완전하게 아시는 분은 주님뿐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해설에 따르면 구원의 중요한 표지는 신앙고백의 확신이 얼마나 강한가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실제로 받아들이고 악에서 돌아서려는 삶이 존재하는가에 있습니다. 구원의 확신은 회개를 중단하게 하는 근거가 아니라, 주님을 더욱 신뢰하며 거듭남의 길을 계속 걷게 하는 힘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은 반드시 눈에 띄는 도덕적 성과를 보여야 하며, 그렇지 못하면 구원을 의심해야 한다고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거듭남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속도와 모습으로 나타나는 과정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오랫동안 붙들고 있던 악한 습관에서 비교적 빨리 벗어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은 오랜 시간 반복되는 시험과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회적으로 큰일을 하면서 자신의 선한 삶을 드러낼 수 있지만, 어떤 사람은 가정에서 조용히 이웃을 돌보고 자신의 분노를 절제하며 작은 정직을 실천하는 방식으로 변화할 수 있습니다. 또한 외적으로 선한 행동을 많이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의 내면이 반드시 선하다고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명예나 이익, 다른 사람의 인정 때문에도 선한 행동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선한 행위의 영적 성격이 단순히 외적인 규모와 결과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를 움직이는 내적인 사랑과 목적에 관계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참된 구원의 믿음을 살핀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행동을 기준으로 구원받을 사람과 구원받지 못할 사람을 나누는 일이 아닙니다. 자신이 어떤 사랑을 따라 살아가는지 정직하게 돌아보고, 주님께서 주시는 진리가 자신의 의지와 행동 안에서 선한 생명으로 나타나도록 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구원의 확신은 자기 영혼에 대한 최종 판결이 아니라, 주님께서 자신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계속 인도하신다는 사실에 대한 신뢰와 소망이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의 고백을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고 그분을 구주로 믿는 일은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서 구원의 근원을 찾지 않고 주님을 바라보게 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고백이 참되려면 입술과 이해에 머무르지 않고 의지와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요14:15에서 주님께서는 자신을 사랑한다면 자신의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시며, 요15:5에서는 주님 안에 거하는 사람이 열매를 맺는다고 가르치십니다. 또한 요일3:18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라고 권면합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참된 믿음과 사랑과 삶이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거나, 그분이 나를 위해 구원의 일을 이루셨다는 교리에 동의하는 것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진리를 자신의 삶의 기준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악을 멀리하며,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과 지혜 안에서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이 자신의 행동으로 구원의 공로를 쌓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이 참으로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그에게 선을 행할 능력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인간은 그 선을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실제로 행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삶은 구원의 공로를 둘러싸고 서로 경쟁하는 관계가 아니라, 주님의 은혜가 인간 안에서 살아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 나타나는 하나의 영적 과정에 속합니다.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했으니 나는 이미 구원받은 사람입니까? 이 고백에는 인간의 구원이 오직 주님에게서 오며, 그분을 믿고 의지하는 일이 영원한 생명과 관계된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또한 자신을 구원하시는 주님의 자비와 능력을 신뢰하는 일은 참된 신앙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믿음의 고백 자체를 구원의 완성과 동일시하거나, 과거에 예수님을 영접했다는 사실만으로 자신의 영원한 상태가 이미 확정되었다고 판단하는 것은 바른 이해가 아닙니다. 참된 믿음은 체어리티와 결합해야 하며, 구원은 주님께서 인간을 실제로 개혁하고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진리를 가르치실 뿐 아니라 그 진리가 의지 안에서 사랑과 결합하도록 인도하시며, 인간이 자신의 악을 죄로 인정하고 멀리함으로써 천국의 생명을 받아들이도록 하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단지 ‘나는 언제 예수님을 믿기로 결심했는가?’ 또는 ‘나는 구원받았다는 확신이 있는가?’가 아닙니다. ‘나는 지금 주님을 얼마나 참되게 믿고 있는가? 주님께서 가르치신 진리가 내 생각과 사랑과 행동을 실제로 변화시키고 있는가? 그리고 나는 자신의 악을 살피고 멀리하며,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거듭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구원의 참된 확신은 자신의 과거 고백이나 현재의 신앙적 자신감에 근거하여 스스로에게 내리는 최종 판결이 아니라, 자신을 구원하고 거듭나게 하시는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신뢰하면서 그분의 인도하심에 자유롭게 응답하는 삶에서 깊어집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내가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얼마나 확신하는가보다, 지금도 나를 구원하시는 주님을 믿고 그분의 사랑과 진리 안에서 실제로 새로운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 하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본 믿음의 고백과 구원의 확신, 그리고 참된 거듭남의 의미입니다. (PR.001 해설)
요약
개신교인들이 고백하는 ‘예수님을 믿으므로 나는 구원받았다’는 말에는 구원이 인간의 공로나 선행에서 비롯되지 않고 주님의 은혜로 주어진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고백과 실제적인 구원의 완성을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전통적인 개신교의 공식 교리 역시 단순한 입술의 고백을 참된 믿음의 충분한 증거로 삼지 않으며, 살아 있는 믿음이 사랑과 선한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새 예루살렘의 교리’ NJ.108-109에서 믿음과 체어리티가 진리와 선, 이해와 의지처럼 결합되어야 한다고 설명하며, NJ.115-116에서는 주님의 구원을 확신하는 영적인 믿음과 삶의 변화가 없는 외적인 믿음을 구별합니다. 또한 ‘참된 기독교’ TCR.571 이하에서는 인간의 이해가 진리를 받아들이는 개혁과, 그 진리가 의지와 사랑을 변화시키는 거듭남을 설명합니다. 특히 TCR.509-510과 TCR.528-530은 회개가 참된 믿음과 거듭남에서 필수적이며, 회개란 자신의 죄를 살피고 인정하며 주님께 도움을 구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구원의 확신은 과거의 영접기도나 신앙고백을 근거로 자신의 영원한 상태를 이미 확정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을 구원하시는 주님의 자비를 신뢰하면서 그분의 진리를 실제 삶에 받아들이는 일과 관계됩니다. 참된 믿음은 입술과 이해에만 머물지 않고 의지와 삶 안에서 체어리티와 결합해야 하며, 인간은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주님의 능력으로 악을 멀리하고 선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결국 우리가 살펴야 할 것은 자신이 얼마나 확실하게 구원받았다고 고백하는가보다,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실제로 자신의 내면과 삶을 변화시키고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PR.002. ‘예수님을 영접한 날이 내 영적 생명이 시작된 날이다’
SL.PR.002 | 개신교인(Protestants)의 무의식 속 오류와 뒤섞인 신앙 100선 ‘예수님을 영접한 날이 내 영적 생명이 시작된 날이다’ - 회심의 순간과 영적 출생, 거듭남은 언제 시작되는가? 해설개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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