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이 영상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이동엽 목사가 자신을 ‘교회지기’라고 부르며 목회자를 ‘등대지기’에 비유하는 대목입니다. 화려한 강대상 위에서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는 목회자보다 이름 없이 자기 자리를 지키며 생명을 위해 봉사하는 등대지기가 참된 목자의 모습에 더 가깝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이 출발점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천국의 질서는 ‘얼마나 높은 자리에 올랐는가’보다 ‘어떤 쓰임(use)을 사랑하여 수행하는가’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천사들도 자신의 지위나 영광을 위해 일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쓰임을 사랑하고, 그 쓰임을 통해 이웃에게 선이 흘러가기를 기뻐합니다. 그러므로 이름 없이 빛을 비추며 배들의 길을 지키는 ‘등대지기’라는 비유에는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천국적 삶의 중요한 한 면이 담겨 있습니다.

 

더욱 주목할 부분은 이동엽 목사가 과거 자신의 목회적 야망을 돌아보며 ‘그 꿈이 누구의 꿈이었는가?’라고 묻는 장면입니다. 그는 웅장한 교회를 세우고 수천, 수만 명을 모으며 능력 있게 설교하는 목회자가 되기를 원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꿈’이라기보다 ‘제 자아가 꾸는 꿈’이었다고 고백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proprium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인간은 선한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고, 그 일을 통해 인정과 명예와 영향력을 얻으려 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면서도 내면에서는 자신의 영광을 추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큰 교회를 세웠느냐 작은 교회를 섬겼느냐가 아닙니다. ‘누구를 위해 그것을 원하는가?’가 중요합니다. 대형 교회를 섬기면서도 주님과 이웃을 위해 자신을 낮출 수 있고, 작은 교회를 섬기면서도 ‘나는 세속적인 대형 교회 목사들과 다르다’는 영적 우월감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언제나 외적인 규모보다 그 일을 움직이는 ‘사랑의 방향’을 봅니다.

 

이 영상의 중심부에서 매우 흥미로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동엽 목사는 자신과 정치적 성향이 상당히 다른 한 집사님을 만납니다. 그는 전광훈 목사를 강하게 지지하는 보수적 신앙인이었지만, 동시에 이동엽 목사의 설교를 거의 모두 듣고, 그의 구원관과 여러 신앙적 주장에 깊이 공감합니다. 이동엽 목사는 이 만남을 통해 자신도 모르게 사람들을 ‘내 말에 동조하는 사람’과 ‘동조하지 않는 사람’으로 나누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보수주의자가 따로 있고, 진보주의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한 사람’이라는 중요한 통찰에 도달합니다.

 

이 대목은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와 상당히 잘 만납니다. 영계에서 사람의 본질을 결정하는 것은 그 사람이 지상에서 어느 정치적 진영에 속했는가가 아니라 그의 ‘지배적 사랑’입니다. 사람 안에는 수많은 생각과 의견과 지식과 감정이 함께 존재하지만, 그것들을 궁극적으로 하나로 묶는 중심은 그가 무엇을 가장 사랑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사람 안에도 진실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수 있고, 진보적인 사람 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대로 어느 쪽에 속하든 자기 자신과 자신의 집단만을 사랑하면서 상대를 멸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 사람은 보수니까 이런 사람’, ‘저 사람은 진보니까 저런 사람’이라고 규정하는 순간 우리는 한 인간의 내면을 그의 외적인 의견 몇 가지로 축소하게 됩니다.

 

이 점에서 이동엽 목사가 경험한 자기반성은 상당히 의미 있습니다. 그는 ‘하나 됨’을 말하면서도 자기 안에 사람을 나누는 마음이 있었다고 인정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도 바로 이런 식으로 진행됩니다. 거듭남은 사람이 처음부터 자신의 악을 모두 알고 그것을 제거하는 과정이 아닙니다. 주님은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proprium을 조금씩 드러내십니다. ‘나는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자신이 사람들을 분류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바로 그때 회개의 가능성이 열립니다. 그러므로 이 집사님과의 만남은 단순한 ‘뜻밖의 좋은 만남’이라기보다 이동엽 목사 자신의 내면을 비추어 준 하나의 거울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이 영상은 여기서 정치와 신앙의 관계라는 훨씬 어려운 문제로 들어갑니다. 이동엽 목사는 전광훈 목사의 개인적인 애국심이나 정치 활동 자체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예수님이 원하시는 일’, 곧 기독교인이 반드시 해야 하는 하나님의 일로 동일시하는 것을 문제 삼습니다. 이 구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연계의 질서와 시민적 삶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국가, 법률, 직업, 가정, 사회적 책임은 모두 인간이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장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것을 추구하려면 땅의 일에서 완전히 손을 떼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것 역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과는 맞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은 자신의 직업과 시민적 책임을 성실히 수행하면서 그 안에서 주님과 이웃을 섬겨야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이동엽 목사의 주장에 한 가지 중요한 보완이 필요합니다. 영상 후반에는 ‘기독교인이 세상의 일에서 벗어나 오로지 하늘에 소망을 두고 이 땅의 것들을 모두 희생하고 포기하고 내려놓아야 한다’는 방향의 표현이 나옵니다. 이 표현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스베덴보리의 관점과는 거리가 생깁니다. 천국을 준비하는 삶은 세상에서 도피하는 삶이 아니라 세상 한가운데서 자신의 의무를 신실하게 수행하되 그것을 자기애와 세상 사랑의 도구로 만들지 않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상인은 정직하게 장사하고, 공무원은 공정하게 직무를 수행하며, 정치인은 공공선을 위해 정치하고, 목회자는 영혼의 선을 위해 목회합니다. 중요한 것은 ‘세상의 일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아니라 ‘그 일을 어떤 사랑에서 하느냐’입니다.

 

이 원리는 정치 참여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 자체를 비기독교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불의한 제도를 바로잡고 약자를 보호하며 공동선을 위해 행동하는 일은 오히려 이웃 사랑의 한 형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기독교 신앙을 동원하거나, 특정 정치적 선택을 곧 ‘하나님의 뜻’과 동일시하거나, 자신과 다른 정치적 선택을 하는 사람을 신앙적으로 열등한 사람으로 규정하기 시작하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그 순간 정치적 확신이 신앙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정치적 확신을 섬기기 시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이동엽 목사가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와 땅의 나라를 뒤섞지 말라’는 문제의식에는 충분히 귀 기울일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에서도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단순히 ‘교회와 정치를 섞으면 안 된다’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무엇이 무엇을 지배하고 있는가?’입니다.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것을 섬기면 질서가 바로 서지만, 영적인 것이 자연적인 욕망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전락하면 질서가 뒤집힙니다. 정치 자체가 악한 것도 아니고 애국심 자체가 악한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자기 진영의 승리, 권력, 지배, 증오 같은 자연적 욕망을 ‘하나님의 뜻’이라는 이름으로 거룩하게 포장할 때 발생합니다. 반대로 정치적 행동이 진실과 정의와 공동선에 대한 사랑에서 나오고, 그 과정에서도 상대방을 인간으로 존중하며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다면 정치 역시 하나의 쓰임이 될 수 있습니다.

 

영상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정치적 힘과 대조하는 부분도 중요한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이동엽 목사는 로마의 압제 아래 있던 예수님이 정치적·군사적 힘으로 로마를 무너뜨리지 않고 오히려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십자가는 단순히 정치적 비폭력의 모범보다 훨씬 깊은 사건입니다. 주님은 세상 나라를 정복하려 오신 것이 아니라 지옥의 권세와 싸우고 인성을 신성하게 하시며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다시 여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싸움은 사람을 죽이는 싸움이 아니라 악과 거짓을 정복하는 영적 전쟁이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복음서를 정치적 승리의 프로그램으로 읽는 것은 복음의 중심을 놓칠 위험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영상에서 말하듯 ‘공산당이 싫으면 그들과 맞서 싸우지 말고 그들의 손에 우리가 죽어야 한다’는 표현까지 그대로 일반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자기희생을 강조하려는 강한 수사로 이해하는 편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악에 저항하지 말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선을 보호하기 위해 악을 제어해야 할 때가 있으며, 사회에는 법과 질서와 공적 정의가 필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악한 사람을 미워하기 때문에 악을 제어하는 것과, 선과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해 악을 제어하는 것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외적인 행동은 비슷해 보여도 내적인 동기는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악에 저항하지 않는 것’과 ‘악을 미워하지 않으면서 악을 제어하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구약의 전쟁과 진멸을 오늘날 문자 그대로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이동엽 목사의 지적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특히 중요한 대목입니다. 여기서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성경 해석이 이동엽 목사의 문제의식을 훨씬 더 깊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말씀의 문자적 의미 안에는 속뜻이 있으며, 특히 구약의 전쟁들은 인간 내면에서 선과 악, 진리와 거짓 사이에 일어나는 영적 전쟁을 표상합니다. 따라서 가나안 족속을 진멸하는 본문을 오늘날 다른 종교인이나 정치적 반대자를 공격하라는 명령으로 옮겨 오는 것은 말씀의 영적 목적을 심각하게 오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멸해야 할 ‘가나안 족속’은 무엇보다 우리 밖의 사람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주님을 대적하는 악과 거짓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불상을 부수거나 다른 종교의 성소를 훼손하면서 그것을 ‘우상 파괴’라고 부르는 행위에 대한 이동엽 목사의 비판도 훨씬 깊은 의미를 얻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가장 위험한 우상은 돌이나 나무로 만든 형상 자체보다 인간 안에서 하나님보다 높아진 자기애와 세상 사랑입니다. 밖의 우상을 깨뜨리면서 자기 안의 지배욕과 멸시와 증오를 그대로 품고 있다면 그는 영적으로 우상을 제거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종교적 열심이라는 이름 아래 proprium을 강화할 수도 있습니다. 참된 영적 전쟁의 전장은 먼저 자기 자신 안에 있습니다.

 

다만 영상에서 ‘유대교는 그렇게 할 수 있다’, ‘구약만을 믿는 유대교는 그렇게 투쟁할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부분은 조심해서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현대 유대교 전체를 구약의 진멸 전쟁과 직접 연결하는 것은 지나친 일반화가 될 수 있고, 특정 민족이나 종교 전체를 하나의 성향으로 묶는 것은 이 영상 앞부분에서 이동엽 목사 자신이 깨달았던 ‘사람을 하나의 범주로 나누지 말자’는 통찰과도 긴장됩니다. 한 사람을 ‘보수’나 ‘진보’라는 한 단어로 규정해서는 안 되듯, 유대교나 이슬람이나 어떤 종교 집단 전체도 몇 가지 역사적 사건이나 극단적 사례로 규정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도 앞부분의 깨달음을 끝까지 밀고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또한 ‘기독교 정신은 정말 진보적이다’라는 표현도 그 의도는 이해할 수 있지만 조금 더 정교하게 다듬을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복음은 현대 정치의 ‘진보’나 ‘보수’ 가운데 어느 한쪽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약자를 보호하고 인간의 존엄을 존중하며 억압을 거부하는 면에서는 오늘날 진보적 가치와 만날 수 있고, 개인의 책임과 도덕적 질서, 가정과 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면에서는 보수적 가치와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의 선과 진리는 어느 정치 진영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오히려 양쪽 모두 자기에게 유리한 부분만 복음에서 가져가 자신의 정치적 정당성을 강화하려는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보수다’도 위험하지만 ‘기독교는 본래 진보다’ 역시 같은 종류의 환원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영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오히려 정치에 관한 결론보다 그 정치 이야기를 가능하게 만든 ‘만남’ 자체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로 정치적 입장이 다른 두 사람이 상대를 적으로 규정하지 않았습니다. 집사님은 자신이 존경하는 목사를 비판한 이동엽 목사의 말을 끝까지 들었고, 이동엽 목사도 자신과 다른 정치적 신념을 가진 집사님의 신앙과 삶을 존중했습니다. 두 사람은 상대방에게 ‘당신이 틀렸다’고 말하기 전에 ‘당신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만남을 통해 적어도 한 사람은 자기 안의 숨은 판단을 발견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체어리티가 진리의 차이를 다루는 방식과 가까운 모습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교리적 차이가 있다고 해서 곧 교회가 갈라지는 것은 아니며, 체어리티가 중심에 있다면 서로 다른 교리적 견해 가운데서도 하나 됨이 가능하다는 취지의 가르침을 반복합니다. 이것을 오늘날의 상황에 적용하면 정치적 견해의 일치가 교회의 하나 됨의 조건일 수는 없습니다. ‘나와 같은 후보를 지지해야 형제이고, 나와 같은 정치적 판단을 해야 참된 그리스도인이다’라는 순간 교회는 체어리티보다 정치적 신념을 더 높은 자리에 올려놓게 됩니다. 반대로 서로 다른 판단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상대방 안에 있는 선을 인정하고 함께 주님을 바라볼 수 있다면 외적인 차이 아래 더 깊은 하나 됨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내용을 처음의 ‘등대지기’로 다시 가져오면 영상 전체가 하나의 원을 그립니다. 등대는 바다 위의 모든 배를 자기에게 오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배들을 자기 편으로 만들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내가 옳으니 나에게로 오라’고 외치는 것이 아니라 빛을 비추어 각각의 배가 안전하게 자기 길을 가도록 돕습니다. 참된 목회도 어쩌면 그렇습니다. 목회자가 사람들을 자기 정치관, 자기 신학적 취향, 자기 영향력 아래 모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빛이 사람들의 길을 비추도록 자신은 한 자리에서 묵묵히 쓰임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 영상을 읽을 때 저는 이동엽 목사의 모든 주장에 그대로 동의하는 것보다, 이 영상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하나의 더 깊은 방향을 주목하고 싶습니다. ‘큰 목회’를 꿈꾸던 사람이 ‘교회지기’를 꿈꾸기 시작하고,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하나의 정치적 범주로 보던 사람이 ‘그냥 한 사람’을 보기 시작하며, 세상의 힘으로 상대를 이기는 신앙에서 십자가의 자기 비움으로 시선을 돌리는 흐름입니다. 아직 몇몇 표현에는 정치적 이분법이 남아 있고, ‘세상에서 벗어남’이나 ‘악에 저항하지 않음’에 대해서는 신학적으로 보완할 부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밑바닥에서 흐르는 방향, 곧 ‘자기를 높이는 데서 쓰임으로, 판단에서 이해로, 지배에서 섬김으로, 외적인 적과의 싸움에서 자기 안의 악과의 싸움으로’ 향하려는 움직임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의 방향과 상당히 깊이 만납니다.

 

어쩌면 이 영상의 처음에 나온 ‘그 꿈이 누구의 꿈이었는가?’라는 질문이 전체를 관통하는 질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대형 교회를 세우려는 꿈에도 물을 수 있고, 나라를 구하려는 꿈에도 물을 수 있으며, 진보적 사회를 만들려는 꿈에도 물을 수 있고, 심지어 ‘올바른 기독교’를 세우겠다는 꿈에도 물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정말 주님의 뜻을 사랑해서 품은 것인가, 아니면 내가 옳다는 것을 세상에 관철하고 싶은 proprium의 꿈인가?’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결국 우리를 상대편에게서 자기 자신에게로 돌려세웁니다. 그리고 바로 거기서부터 참된 영적 전쟁과 거듭남이 시작됩니다.

 

 

 

SY.66, 강문호 목사, ‘아토스 수도 자치국’ (20191212)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은 어떤 수도사의 일화를 중심으로 하기보다, 강문호 목사님이 왜 수도원을 공부하게 되었고, 그 가운데 특히 아토스산 수도 공동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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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4:1)

 

AC.340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I have gotten a man, Jehovah)라는 말은 가인(Cain)이라 하는 사람들에게서 신앙이 자체로 하나의 으로 인식되고 인정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장의 처음에서 말한 것으로 분명합니다. 이전에는 그들이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을 퍼셉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신앙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마치 알지 못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신앙에 관한 구별된 교리를 만들기 시작했을 , 이전에 퍼셉션으로 알고 있던 것들을 가져다가 교리로 정리하였고, 그것을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마치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라도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하여 이전에는 마음에 새겨져 있던 것이 이제는 단지 지식으로 아는 것이 되었습니다. 고대에는 새로운 것이 생길 때마다 그것에 이름을 붙였으며, 이런 식으로 이름 안에 담긴 것들을 나타냈습니다. 그래서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여호와께서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라는 말로 설명되고(16:11), That the wordsI have gotten a man, Jehovahsignify that with such as are calledCainfaith is recognized and acknowledged as a thing by itself, is evident from what was said at the beginning of this chapter. Previously, they had been as it were ignorant of what faith is, because they had a perception of all the things of faith. But when they began to make a distinct doctrine of faith, they took the things they had a perception of and reduced them into doctrine, calling itI have gotten a man, Jehovah,” as if they had found out something new; and thus what was before inscribed on the heart became a mere matter of knowing. In ancient times they gave every new thing a name, and in this way set forth the things involved in the names. Thus the signification of the name Ishmael is explained by the saying, “Jehovah hath heard her affliction;” (Gen. 16:11)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16:11)

 

르우벤은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므로(Jehovah hath looked upon my affliction)라는 말로(29:32), that of Reuben, by the expression, “Jehovah hath looked upon my affliction;” (Gen. 29:32)

 

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29:32)

 

시므온은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Jehovah hath heard that I was less dear)라는 말로(29:33), the name Simeon, by the saying, “Jehovah hath heard that I was less dear;” (Gen. 29:33)

 

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아들도 주셨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29:33)

 

유다는 이번에는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This time will I praise Jehovah)라는 말로 설명됩니다(29:35). and that of Judah by, “This time will I praise Jehovah;” (Gen. 29:35)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가 그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출산이 멈추었더라 (29:35)

 

또한 모세는 자신이 세운 제단을 여호와 닛시’, 여호와는 나의 깃발(Jehovah my banner)이라고 불렀습니다(17:15). and an altar built by Moses was called, “Jehovah my banner.” (Exod. 17:15)

 

모세가 제단을 쌓고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17:15)

 

이와 같은 방식으로 여기서는 신앙의 교리를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I have gotten a man, Jehovah), 가인(Cain)이라고 것입니다. In like manner the doctrine of faith is here denominatedI have gotten a man, Jehovah,orCain.

 

해설

AC.340은 바로 앞 AC.338에서 말한 신앙이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인식되고 인정되었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설명합니다. 여기서 가장 먼저 주의할 것은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이 처음부터 전혀 새로운 거짓 신앙을 만들어 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그들이 교리로 정리한 것은 이전부터 태고교회 안에 있었던 신앙에 속한 것들이었습니다. 달라진 것은 진리의 내용 자체라기보다 그것을 알고 받아들이는 방식이었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 안에서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을 퍼셉션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역설적으로 그들이 신앙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마치 알지 못하는 것과 같았다고 합니다. 신앙에 무지했다는 뜻이 아니라, 신앙이 사랑과 분리된 하나의 독립적인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것을 따로 떼어 정의하고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들에게 신앙에 속한 것은 이미 사랑과 생명 안에 들어 있었고, 말하자면 마음에 새겨져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전에는 사랑 안에서 퍼셉션으로 알고 있던 신앙에 속한 것들을 하나씩 따로 꺼내어 구별하고, 그것들을 신앙에 관한 교리로 정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변화를 이전에 마음에 새겨져 있던 것이 이제는 단지 지식으로 아는 것이 되었다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말입니다. 그들이 정리한 모든 내용이 갑자기 거짓이 되었다는 뜻도 아니고, 교리를 만들었다는 행위 자체가 악이었다는 뜻도 아닙니다. 문제는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에서 본래 사랑 안에 살아 있던 신앙이 점차 사랑으로부터 구별되고, 마침내 자체로 하나의 처럼 인식되기 시작했다는 데 있습니다. AC.338에서 보았듯 가인의 문제는 신앙 자체가 아니라 사랑 안에 있어야 할 신앙을 사랑과 별개로 성립할 수 있는 무엇으로 세우기 시작한 데 있습니다. AC.340은 그 분리가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퍼셉션으로 알던 지식으로 알게 의 대비를 통하여 보여 줍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발견한 것처럼 여겼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에 전혀 몰랐던 진리를 처음 발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사랑 안에서 퍼셉션으로 알고 있던 것을 따로 꺼내어 교리적으로 정리하고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는 말로 표현됩니다. 무엇인가를 새로 얻었다고 여겼고, 그렇게 얻었다고 여긴 신앙의 교리를 가인이라 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미묘한 역설이 있습니다. 그들은 무엇인가를 얻었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전에 가지고 있던 더 내적인 앎의 방식을 잃어 가고 있었습니다. 이전에는 진리를 사랑 안에서 살아서 알았는데 이제는 그것을 자기 앞에 하나의 대상으로 세워 지식으로 알기 시작했습니다. 신앙이 생명 안에서 알려지는 것에서 신앙에 관하여 아는 것으로 옮겨 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퍼셉션은 좋고 지식은 나쁘다’, 또는 교리가 없는 신앙이 교리가 있는 신앙보다 높다는 일반적인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태고교회의 특수한 천적 상태를 설명하는 문맥이기 때문입니다. AC.337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 사람들에게서는 사랑이 먼저였고 그 사랑을 통하여 신앙에 속한 모든 것에 대한 퍼셉션이 주어졌다고 설명하면서, 곧이어 오늘날에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고 했습니다. 후대의 인간에게서는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서며, 주님께서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말씀을 배우고 교리를 공부하며 선과 진리를 구별하여 지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거듭남에 필요한 과정입니다. 문제는 그 진리가 지식에만 머물러 체어리티와 결합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태고교회에서는 마음에 새겨져 있던 것이 단지 지식이 되어 가는 방향으로 쇠퇴가 나타났다면, 후대 인간에게서는 주님께서 지식과 신앙으로 받아들인 진리를 다시 사랑과 삶 안으로 이끄셔서 체어리티와 결합하게 하십니다. 따라서 두 시대의 질서를 단순히 같은 공식으로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AC.340 후반에 이스마엘, 르우벤, 시므온, 유다, 그리고 여호와 닛시가 차례로 인용되는 이유도 바로 이 가인이라는 이름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마엘은 여호와께서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는 말과 함께 이름이 주어지고(16:11), 르우벤은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므로라는 말과 연결되며(29:32), 시므온은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라는 말과 연결됩니다(29:33). 유다는 이번에는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는 말에서 그 이름이 주어지고(29:35), 모세가 세운 제단에는 여호와 닛시라는 이름이 붙습니다(17:15).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들을 인용한 것은 여기서 이스마엘이나 르우벤, 시므온, 유다의 속뜻을 각각 해설하거나 여호와 닛시의 상응을 따로 밝히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이 모든 예가 보여 주는 공통점은 고대에는 어떤 상태나 사건의 성질을 이름 안에 담아 나타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인역시 단순한 호칭으로만 읽을 것이 아니라,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는 말로 표현된 교회적, 교리적 상태를 담고 있는 이름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바로 앞 AC.339와도 정확히 이어집니다. AC.339에서는 태고인들이 이름을 붙이고 그 이름으로 어떤 것들을 의미하게 하였으며, 교회에 속한 것들이 자연적인 출생처럼 하나가 다른 하나로부터 잉태되고 태어나는관계를 이루기 때문에 그러한 이름들로 계보를 구성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340에서는 그 원리를 실제 성경의 여러 이름을 통하여 확인합니다. 그러므로 이 다섯 인용구절은 각각 독립된 다섯 가지 주제를 여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설명을 여러 사례로 뒷받침합니다. ‘이스마엘’, ‘르우벤’, ‘시므온’, ‘유다’, ‘여호와 닛시가 각각 그 이름과 관련된 상태와 의미를 담고 있듯이, ‘가인이라는 이름에도 태고교회 안에서 일어난 특정한 변화가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AC.339AC.340은 서로 떨어진 설명이 아니라, ‘교회에 속한 것들이 어떻게 이름과 계보로 표현되는가를 설명하는 하나의 연속된 해석 원리가 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는 가인의 시작이 얼마나 미묘한지를 다시 보게 됩니다. 처음부터 사랑은 필요 없다’, ‘체어리티는 중요하지 않다고 선언한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신앙에 속한 것을 따로 구별하여 알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본래 사랑 안에서 살아 있던 것을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면서, 신앙은 점차 사랑으로부터 독립된 위치를 갖게 됩니다. 이후 창4의 흐름에서 이 분리는 더 분명해져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이고, 마침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곧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상태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AC.340은 단순히 옛사람들은 이름을 어떻게 지었는가?를 설명하는 글이 아닙니다. 가인이라는 교리적 상태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중요한 번호입니다. 마음에 새겨져 있던 신앙이 지식의 대상이 되고, 그 지식이 사랑 안에 다시 머물지 않고 그 자체로 하나의 것이 될 때 신앙과 사랑의 본래 질서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이 대목은 AC를 읽고 공부하는 우리에게도 매우 실제적인 경고가 됩니다. 우리는 상응’, ‘퍼셉션’, ‘리메인스’, ‘ 사람과 사람’,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같은 개념을 배우면서 이전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이 아는 것과 그 진리가 우리 안에서 살아 있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영적 지식이 많아질수록 그것을 내가 얻은 으로 여기고, 그 지식 때문에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더 밝은 사람으로 생각하는 위험도 생길 수 있습니다. 진리는 우리가 소유하여 자신을 높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수단입니다. 배운 진리를 통하여 자기 안의 악을 보고 그것을 죄로 여겨 피하며, 주님을 더 사랑하고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는 체어리티와 쓰임으로 나아갈 때 그 진리는 비로소 우리 안에서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그러므로 AC.340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나는 얼마나 많은 진리를 알고 있는가?보다 더 깊습니다. ‘내가 아는 진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머리에만 있는가, 아니면 주님의 역사하심으로 마음과 삶에도 새겨지고 있는가?바로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가인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의 신앙을 판단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 안에 살아 있는지를 살피게 하는 말씀으로 읽게 됩니다.

 

 

 

AC.341, 창4: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AC.341-345)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And she added to bear his brother Abel; and Abel was a shepherd of the flock, and Cain was a tiller of the ground. (창4:2) AC.341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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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9, 창4:1, ‘창4의 계보를 읽는 매우 중요한 해석 원리’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창4:1) AC.339앞의 세 장에서 ‘아담과 그의 아내’(man and his wife)가 태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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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이번 영상은 어떤 수도사의 일화를 중심으로 하기보다, 강문호 수도사가 왜 수도원을 공부하게 되었고, 그 가운데 특히 아토스산 수도 공동체에서 무엇을 인상 깊게 보았는지를 소개하는 내용입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은퇴를 앞두고 기도하던 중 수도원의 영성을 세상에 전해야 한다는 사명을 받았다고 이해했고, 그 후 이스라엘과 이집트, 여러 나라의 수도원을 직접 찾아다니며 수도 전통을 공부했다고 말합니다. 그 가운데 가장 강한 인상을 받은 곳이 그리스의 아토스산(Mount Athos)이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아토스산은 그리스 영토 안에 있으면서 특별한 자치권을 가진 정교회 수도 공동체이며, 현재 20개의 주요 수도원이 있습니다. 수도 전통은 적어도 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여성의 출입을 제한하는 ‘아바톤(avaton) 전통도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아토스산을 ‘수도사들의 나라’처럼 묘사합니다. 표현 자체는 다소 과장될 수 있지만, 그곳이 일반적인 수도원 하나와 다른 독특한 공동체라는 점은 맞습니다. 아토스산은 하나의 반도 전체에 여러 수도원과 스케테, 은수처가 분포하며, 행정적으로도 자치적인 수도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약 20개의 수도원이 존재하고, 천 명이 넘는 수도사들이 생활하고 있습니다. UNESCO도 아토스산을 오랜 정교회 수도 전통의 중심지로 소개합니다.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가 특히 놀라워하는 것은 ‘여성이 들어오지 않는 남성 수도 공동체가 천 년 넘게 유지되어 왔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아토스산에는 여성의 출입을 금지하는 전통이 있으며, 이는 중세부터 제도화되어 오늘날까지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여기서 즉시 한 가지 구별이 필요합니다. 여성과의 접촉을 차단하는 외적 환경은 수도자의 정결을 돕는 하나의 수단이 될 수 있지만, 그 자체가 정결을 만들어 주지는 않습니다. 사람의 음란과 욕망은 외부의 대상이 있기 때문에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의 애정과 사랑의 질서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성이 전혀 없는 장소에서도 사람은 음란한 상상과 자기 사랑을 품을 수 있고, 반대로 남녀가 함께 살아가는 사회 안에서도 주님으로부터 순결한 결혼애와 절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영상에서 어떤 수도사가 ‘하와 한 명만 들어와도 이곳은 무너진다’는 취지로 말했다는 이야기는 수도 전통 안에서는 이해될 수 있지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상당히 조심해서 받아들여야 합니다. 여성을 남성 수도자의 영성을 무너뜨릴 수 있는 외적 위험 요소처럼 보는 순간, 인간 안의 욕망에 대한 책임이 외부 대상에게 옮겨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음란의 근원은 ‘여자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 안의 사랑이 왜곡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순결은 여성을 보지 않는 데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욕망의 대상으로 소유하려는 사랑이 변화되어 상대를 하나의 인격과 영적 존재로 존중하게 되는 데서 형성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남성과 여성의 관계는 특히 중요한 주제입니다. 그는 남녀의 차이를 창조질서 안에서 매우 긍정적으로 보고, 참된 결혼애를 천국의 가장 깊은 사랑 가운데 하나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여성 자체를 영적 위험으로 이해하는 수도적 감수성과 스베덴보리의 결혼 이해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수도자의 독신은 개인의 소명과 훈련이 될 수 있지만, 남녀의 결합 자체가 더 낮은 영적 삶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참된 결혼애는 선과 진리의 결합을 표상하며, 천국의 질서와 깊은 상응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상에는 아토스산 수도사들이 죽으면 일정 기간 매장한 뒤 뼈를 다시 꺼내 납골당에 보존하는 관습도 소개됩니다. 이러한 관습은 실제 아토스산의 수도 전통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육체의 덧없음을 기억하고 죽은 수도사들을 공동체 안에서 계속 기억하기 위한 방식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죽음을 기억하는 것은 분명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육체의 해골과 뼈는 인간의 참된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는 영으로 계속 살아가며, 자연적 육체만 세상에 남습니다. 그러므로 수도자의 뼈를 바라볼 때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나도 언젠가 뼈가 된다’가 아니라 ‘내가 이 육체를 벗은 뒤에도 그대로 가지고 갈 사랑은 지금 무엇인가’일 것입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아토스산 수도자들의 모습을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사는 모습’으로 이해하며 큰 감동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에는 상당히 귀한 면이 있습니다. 세상의 성공과 재물과 명예에서 거리를 두고 하나님께 집중하려는 삶은 우리 자신의 욕망을 비추어 보는 거울이 될 수 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무엇을 더 소유하고, 더 경험하고, 더 유명해질 것인가가 삶의 중심이 되기 쉽기 때문에, 그것과 정반대 방향으로 살아가는 수도자의 모습은 사람에게 강한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과연 무엇 때문에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오직 하나님만 바라본다’는 것은 하나님을 생각하는 시간이 많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삶은 결국 이웃을 향한 선한 쓰임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서로 떨어질 수 없습니다. 사람이 하루 종일 기도하면서도 옆 사람을 업신여기고, 자신의 영적 수준을 자랑하며, 다른 사람의 부족함을 정죄한다면 그 기도는 아직 사랑과 결합되지 않은 것입니다. 반대로 생활 속에서 맡은 일을 정직하게 수행하고, 다른 사람을 존중하며, 자신의 악을 피하는 사람은 외적으로 수도원에 살지 않아도 실제로 주님을 바라보며 살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아토스산의 수도 전통을 바라볼 때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외적 극단성을 영적 깊이와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천 년 동안 여성이 들어오지 않았다는 사실, 수도사들이 평생 독신으로 산다는 사실, 죽은 뒤 뼈를 다시 거두어 납골당에 둔다는 사실, 세상과 단절된 산속에서 기도한다는 사실은 모두 강렬한 이미지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사람의 영적 수준을 판단하는 기준은 이런 외적인 희생의 크기가 아닙니다. 그 안에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실제로 얼마나 약해졌으며,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얼마나 자라났는가가 기준입니다.

 

사람은 세상을 떠나면서도 세상 사랑을 가지고 갈 수 있습니다. 수도원 안에서 재산을 소유하지 않으면서도 명예를 사랑할 수 있고,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은수자가 되면서도 ‘나는 특별한 수도자’라는 자기 의식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proprium의 매우 미세한 모습입니다. 반대로 큰 도시에서 직업을 가지고 돈을 벌며 살아도 자신의 재물을 주님께서 맡기신 것으로 여기고, 정직하게 사용하며, 이웃을 위해 유용하게 쓴다면 그 사람의 자연적 삶 안에는 천국적인 질서가 들어올 수 있습니다.

 

영상에서는 강문호 수도사 자신이 ‘한국 사람으로서 이곳을 밟은 최초의 사람’이라는 말을 수도원마다 들었다고 소개합니다. 이 부분은 영상 자체에서 단순한 여행 경험이나 놀라움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러한 종류의 경험에서도 아주 조용한 경계를 하나 세웁니다. 영적인 길에서 ‘내가 최초다’, ‘내가 특별한 곳에 갔다’, ‘나는 남들이 경험하지 못한 것을 경험했다’는 사실은 영성의 증거가 아닙니다. 오히려 특별한 경험을 많이 할수록 그것을 자기 특별함의 근거로 삼지 않도록 더 깊은 겸손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특별한 경험을 허락하셨다면 그것은 그 사람을 다른 사람보다 높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어떤 선한 쓰임을 위해 주어진 것이라고 보는 편이 영적 질서에 맞습니다.

 

영상에서 언급되는 ‘성 뽀르피리오스’는 아마 현대 정교회에서 널리 존경받는 성 포르피리오스(St. Porphyrios)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그의 수도생활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아토스산에 대한 갈망이 커졌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에서도 중요한 것은 어떤 수도자의 비범한 체험이나 영적 능력 자체보다, 그 삶을 통해 주님과 이웃 사랑이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수도자의 신비한 체험을 동경하기 시작하면 신앙은 쉽게 특별한 현상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흐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영계를 실제로 보고 천사와 영들과 대화한 사람이었지만, 흥미롭게도 자신의 독자들에게 그런 체험을 추구하라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람에게 가장 안전한 길은 말씀을 읽고, 계명을 따라 악을 피하며, 자신의 직업과 관계 속에서 선한 쓰임을 행하는 것이라고 반복합니다. 영적 세계를 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자연계에서 어떤 사랑으로 살아가는가입니다. 이런 점에서 수도사들의 신비 체험 역시 ‘어떻게 그런 체험을 할 수 있을까?’보다 ‘그 체험 때문에 그 사람은 더 겸손하고 더 선한 사람이 되었는가?’라는 질문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영상 마지막에서 아토스산과 같은 수도 영성이 한국 교회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소개하고 싶어 이 유튜브 채널을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이런 취지는 충분히 의미가 있습니다. 한국 개신교는 종교개혁 이후의 전통에 익숙한 반면, 그보다 훨씬 오래된 동방교회의 수도 전통이나 초기 기독교의 금욕적 영성은 상대적으로 낯설기 때문입니다. 다른 기독교 전통을 접하는 것은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다만 다른 전통이 오래되었다거나 낯설고 신비롭다는 이유로 자동적으로 더 깊은 영성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모든 전통은 결국 말씀과 주님의 질서라는 기준 아래에서 분별되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수도원 영성이 한국 교회에 던질 수 있는 가장 좋은 질문은 ‘우리도 수도원에 들어가야 하는가?’가 아니라 ‘우리는 세상 사랑에 얼마나 붙들려 있는가?’일 것입니다. 수도자들이 재산과 명예와 결혼을 포기한 모습을 보며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이 핵심이 아니라, 나는 내가 가진 재산과 지위와 관계를 어떤 사랑으로 사용하고 있는지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수도자의 외적 포기는 모든 사람에게 요구되는 형식이 아니지만,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내려놓는 내적 포기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됩니다.

 

그리고 아토스산의 가장 깊은 영성을 스베덴보리식으로 다시 표현한다면, ‘세상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오직 하나님만 생각하며 사는 것’보다 ‘자기에게 있는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그것을 이웃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는 것’에 더 가까울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의 삶이어야 합니다. 주님께 가까워질수록 사람에게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을 더 순수하게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이 영상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아토스산의 천 년 수도 전통과 철저한 금욕은 현대의 신앙인에게 강한 질문을 던지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참된 수도의 깊이는 얼마나 세상과 단절했는가가 아니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얼마나 자유로워져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강문호 수도사가 감탄했던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삶’이라는 말을 조금 더 깊게 다듬는다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참으로 오직 주님만 바라보는 사람은 세상을 보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 속 모든 사람과 모든 쓰임을 주님의 질서 안에서 바라보기 시작하는 사람입니다.’

 

 

 

SY.65, 강문호 목사, ‘이영길 수도사’ (20191210)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은 ‘이영길 수도사’라는 한 인물을 통해 수도의 완성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강문호 목사님은 전남 화순의 깊은 산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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