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C.141, 창2:18,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AC.138-141)

 

18절,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And Jehovah God said, 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I will make him a help as with him.

 

141

인간의 오운(own, proprium, ~다움, ~스러움, 그에게 고유한 어떤 성질, 그를 딱 규정할 수 있는 어떤 거), 그 본성(nature)을 육적, 세속적 인간, 영적 인간, 그리고 천적 인간을 가지고 설명할 때, 무수히 많은 걸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육적, 세속적 인간의 경우, 그의 오운은 그가 가진 모든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오운에 대해서 말고는 아는 게 전혀 없으며, 앞서도 말씀드렸듯, 만에 하나 이 오운을 잃으면 자기는 망할 꺼라고 생각하지요. 영적 인간의 경우, 그의 오운 역시 비슷한데요, 그가 비록 주님을 모두의 생명이시며, 지혜와 이해를 주시고, 결과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힘 주시는 분으로 알고 있을지라도, 그러나 그의 이 지식은 아직은 그저 입술의 고백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음으로 믿는 게 아니고 말입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은 다릅니다. 그는 주님은 모두의 생명이시며, 생각하고 행동할 힘 주시는 분임을 분별합니다. 그가 이것이 과연 그러함을 지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결코 자신의 오운을 원치 않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한 오운을 그에게 주시는데, 주님이 주시는 이 새 오운은 선과 진리에 관한 모든 퍼셉션과, 그리고 모든 행복과 결합하는 오운입니다. 천사들이 바로 이런 오운 가운데 있으며, 동시에 가장 높은 평화와 평온함 가운데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오운 안에 주님의 것들이 있기 때문인데요, 주님은 그들의 오운을 다스리시거나, 그들의 오운으로 그들을 다스리는 분이십니다. 이 오운은 가장 천적인 그 자체입니다. 반면, 육적 인간의 것은 지옥적입니다. 이들의 오운 관련해서는 나중에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Innumerable things might be said about man’s own in describing its nature with the corporeal and worldly man, with the spiritual man, and with the celestial man. With the corporeal and worldly man, his own is his all, he knows of nothing else than his own, and imagines, as before said, that if he were to lose this own he would perish. With the spiritual man also his own has a similar appearance, for although he knows that the Lord is the life of all, and gives wisdom and understanding, and consequently the power to think and to act, yet this knowledge is rather the profession of his lips than the belief of his heart. But the celestial man discerns that the Lord is the life of all and gives the power to think and to act, for he perceives that it is really so. He never desires his own, nevertheless an own is given him by the Lord, which is conjoined with all perception of what is good and true, and with all happiness. The angels are in such an own, and are at the same time in the highest peace and tranquility, for in their own are those things which are the Lord’s, who governs their own, or them by means of their own. This own is the veriest celestial itself, whereas that of the corporeal man is infernal. But concerning this own more hereaf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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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에 나오는 ‘혼자 산다(to dwell alone)의 속뜻은 오직 주님의 인도하심만 구하며 산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그렇게 살기를 원하셔서 가나안 모든 족속을 다 쫓아내기를 원하셨고, 발람을 통해 다음과 같이 예언하게 하신 것입니다.

 

내가 바위 위에서 그들을 보며 작은 산에서 그들을 바라보니 이 백성은 홀로 살 것이라 그를 여러 민족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 (민23:9) Lo, the people dwelleth alone, and shall not be reckoned among the nations, (Num. 23:9)

 

즉, 위 창세기 말씀의 속뜻은 태고교회의 선조들(창2:1-17)과 달리 그 후손들(창2:18-25)은 슬슬 주님 한 분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대신 자신과 세상을 향해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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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140, 창2:18,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AC.138-141)

 

18절,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And Jehovah God said, 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I will make him a help as with him.

 

140

돕는 배필’이 사람의 오운(own, proprium, ~다움, ~스러움, 그에게 고유한 어떤 성질, 그를 딱 규정할 수 있는 어떤 거)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 오운의 본성 및 이어지는 내용 둘 다를 보면 분명한데요, 그러나 그리 멀리 갈 것도 없이 여기서 다루고 있는 교회에 속한 사람만 보아도 알 수 있는 게, 그는 좋은 성품이어서 또 하나의 오운이 그에게 허락되었다는 것, 그런데 허락된 새 오운이 얼마나 감쪽같은지 마치 처음부터 그의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는 것, 그래서 ‘돕는 배필’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That by “a help as with him” is signified man’s own, is evident both from the nature of this own, and from what follows. As however the man of the church who is here treated of was well disposed, an own was granted him, but of such a kind that it appeared as it were his own, and therefore it is said “a help as with 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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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새해 인사를 주님 말씀으로 올립니다.

 

22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3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24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25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27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민6:22-27)

 

위 말씀은 그 속뜻으로는 영계를 포함, 이 모든 피조세계에 충만한 주님의 신성(神性, The Divine)에 관한 내용인데요, 곧 주님을 구하는 것이 복이며, 다음 시편 말씀하고도 연결되는 말씀입니다.

 

1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3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시1:1-3)

 

주님의 이런 돌보심이 2024년 올 한 해, 생생하게 체험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 혹시 위 민수기 말씀의 속뜻을 좀 더 자세히 알고싶으신 분은 아래 링크를 참고하세요.

 

 

‘민수기 6장 제사장 기도’의 속뜻 (2023/4/26)

‘민수기 6장 제사장 기도’의 속뜻 (2023/4/26) 24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25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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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11(D1)-주일예배(2529, 눅16,19-25),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속뜻 (1).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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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02-11(D1)-주일예배(2529, 눅16,19-25),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속뜻 (1).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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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유튜브는 오디오입니다. 참고하세요.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속뜻 (1)

 

 

19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20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21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 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22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그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25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눅16:19-25)

 

하나님의 신성이 천국으로부터 선한 사람들 안으로 유입될 때는 그들의 영적 마음이 열리어 신성을 받아들인다. 반면에 영적 마음이 없는 악한 사람들 안으로 유입될 때는 악과 거짓들이 있는 자연적 마음의 내면이 열리고, 그리하여 그곳의 악과 거짓들이 천국의 선을 혐오하고 진리를 증오하며, 온갖 죄의 욕망을 품는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그들은 선으로부터 분리되어 지옥으로 떨어진다. (계시록 해설, 504:18, 이순철 역) the Divine influx out of heaven opens, in the good, the spiritual mind, and fits it to receive; but in the evil, who have no spiritual mind, it opens the interiors of their natural mind, where evils and falsities reside, and from this they then have an aversion to every good of heaven, and hatred for truths, and a lust for every crime, and in consequence they are separated from the good, and then damned. (AE.504:18)

 

 

다음은 마태복음 15장에 나오는 유명한 수로보니게 여인에 관한 본문입니다.

 

21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22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23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24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25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27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28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마15:21-28)

 

주님께서 제자들과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시는 중에 한 여인이 주님을 큰 소리로 부르며, 귀신 들린 딸 고쳐주기를 청합니다. 그 여인은 동일 본문인 마가복음에 보면 헬라인으로서 수로보니게 족속 사람이었습니다. 수로보니게는 당시 시리아의 한 지방 이름인데요, 그러니까 그녀는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이었던 것이지요. 이런 상황에서, 그런데 주님께서 여인에게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하신 겁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7장 6절에서도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하신 적이 있는데요, 여기서 개, 돼지는 믿음 없는 이방인들, 혹은 교회 내 위선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따라서 주님이 여인에게 하신 말씀은, 이방인들의 경우, 차라리 진리를 모르는 것이 낫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믿음 없는 사람들은 본의 아니게 부지불식 중 진리를 더럽힐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그렇더라도 말씀의 내적 의미, 즉 속뜻을 모르는 이 이방 여인으로서는 주님이 대놓고 하시는 이 말씀은 큰 모욕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녀를 개에 비유한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여인은 성내지 않았고, 오히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이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그 대답을 들으시고는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면서 그의 딸이 나았다는 에피소드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었고, 그러므로 진리가 무엇인지, 선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을 텐데, 그럼에도 그는 주님을 믿었고, 주님 앞에 자신을 낮췄습니다. 그것은 진리 자체이신 주님을 믿는 것이요, 또 진리 앞에 지극히 겸손한 모습입니다. 진리를 많이 안다 자부하면서도 지키지 않는 유대인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지요. 그래서 주님은 여인과 그의 딸을 구원하셨습니다. 오늘 말씀도 그와 비슷한 내용인데요, 본문 19절에는 어떤 부자의 모습을 이렇게 그리고 있습니다.

 

19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여기서 부자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며, 그러므로 말씀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주님 당시에는 유대인들을 뜻하고, 오늘날에는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인들을 말합니다. 그들을 부자라 하는 것은 말씀에 대해 많이 알기 때문인데요, 이것이 영적으로는 부자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는 부자가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옷은 말씀으로부터 배우는 진리와 선에 관한 지식을 뜻하는데, 자색 옷은 선에 관한 지식을, 고운 베옷은 진리에 관한 지식을 뜻합니다. 주님 당시 유대인들이나 지금의 기독교인들 중에는 말씀 관련, 많은 지식을, 자랑은 하면서도 그러나 지키지는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오로지 지식만을 즐기는 사람들이 바로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호화롭게 즐기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부자의 집 문 앞에 한 거지가 버려진 채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20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0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부자가 말씀 관련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거지는 그렇지 않은 교회 밖 이방인을 뜻합니다. 그가 대문 앞에 버려졌다는 건 그가 교회에 입문할, 즉 교회의 일원이 될 기회를 얻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부모가 다른 종교를 믿거나, 또는 기독교 문화권이 아닌 곳에서 태어나거나, 그 밖에 다른 이유로 기독교인이 될 기회를 얻지 못한 경우가 되겠습니다. 그런 나사로에 대해 21절에서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21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 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부자의 상에서 떨어진 것으로 배를 채우려 한다는 건 거지 나사로가 앞에서 말씀드린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진리를 믿고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진리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종교나 교리에 구애받지 않고, 참된 진리가 나타나면 언제나 자신을 낮추고 배우려고 합니다. 그것이 자신의 면전에서 대놓고 자신을 개에 비유하는 모욕적인 말씀을 들었으나 오히려 진리 앞에 올바른 모습을 보인 수로보니게 여인이나 부자의 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로라도 배를 채우고자 했던 거지 나사로의 모습입니다.

 

※ 이는 마치 북한에서 태어나 아무것도 모르고 살다가 여러 사정으로 탈북, 국정원과 하나원 과정을 마치고, 드디어 대한민국의 품에 안긴, 탈북하신 분들과 비슷한데요, 이분들은 아주 사소하고 지극히 작은 것 하나로도 그렇게 감격, 감사하며 사시는데, 배정받은 LH 임대아파트에 드디어 입주하시는 날, 특히 그렇습니다. 가령, 이분들은 24시간 전기가 들어온다는 사실에, 언제나 수돗물이 나오며, 특히 온수가 늘 나온다는 사실에, 그리고 화장실이 집 안에 있다는 사실에, 전기밥솥에 늘 흰쌀밥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굉장히들 어리둥절해 하시며, 신기해들 하십니다. 그들은 음식점이든, 생산라인이든 수고로이 일했다고 주는 첫 일당이나 첫 월급을 받은 날, 밥 잠을 자지 못하며, 진심으로 감격해들 하시는데요. 자신들은 그렇게 온갖 일에 동원되었어도 늘 무보수였고, 그걸 또 당연하게 여기며 평생을 살아들 오셨기 때문입니다.

 

본문에는 그때 개들이 와서 그의 상처를 핥았다고 합니다. 개는 보통 교회 밖 이방인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교회 교인들 중 품성이 좋지 않은 사람을 뜻합니다. 품성이 좋지 않다는 건 자기는 진리를 안다 말은 많이 하면서도 정작 실천은 하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AC.7784) 그렇다면 개들이 거지의 상처를 핥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진리를 알면서 실천하지 않는 교회 안 사람이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잘못을 저지르는 교회 밖 사람을 비판하고 비웃는 걸 뜻합니다. 교회 밖 사람들은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수시로 잘못을 저지릅니다. 그러면서 또한 그것 때문에 상처를 받습니다. 거지 나사로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교회 밖 사람이라도 양심이 살아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인데요, 어떤 일을 몰라서 그렇게는 했지만, 양심상 왠지 그러면 안 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지요. 그런 사람을 자기는 진리를 안다는 이유만으로 비웃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나사로의 헌데를 핥는 교회 안 개들입니다. 22, 23절에는 그런 사람들의 사후 모습을 이렇게 그리고 있습니다.

 

22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그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거지는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된 후, 그는 음부에서 고통을 당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부자와 거지의 신세가 사후에는 뒤집힌 것입니다. 즉 진리를 안다 자부하던, 그러면서도 정작 그렇게는 안 살아온 교회 안의 사람은 지옥에 가고, 반대로 진리를 몰라 진리를 찾아 헤매던 교회 밖 사람은 사후, 천국에 계신 주님의 품으로 간 것입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은 주님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부자가 지옥에서 말합니다.

 

24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부자를 고통스럽게 하는 지옥의 불은 물질을 태우는 불이 아닙니다. 주님에 대한 반감과 증오의 불이며, 그러므로 진리와 선을 파괴하는 불입니다. 주님께서는 천국의 천사나 지옥의 악마에게나 똑같이 선과 진리를 보내주십니다. 그때 천사들은 사랑과 믿음으로 그것들을 받아들이지만, 지옥의 악마들은 거꾸로 뒤집어서 받아들입니다. 즉 선을 악으로 받아들이고, 진리를 거짓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악마들이 진리와 선을 미워하고 파괴하는 것은 그래서입니다. 그들은 진리와 선을 파괴할 때, 기쁨을 느끼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부자는 지옥의 불 속에서 행복을 느껴야 하는데, 왜 고통을 호소할까요?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주님이 주시는 자유와 평화 안에 영원히 있지만, 악과 거짓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일시적으로는 기쁨을 느끼지만 결국은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영원히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자는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라고 말하는 것이며, 그것은 그가 진리를 통해 이 괴로운 욕망의 불에서 구원받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나사로의 손가락 끝에 찍은 물은 진리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25절에서 부자의 말을 듣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25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부자는 세상에 살 때 진리를 만나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안다는 것에만 만족하고, 정작 지키지는 않았습니다. 진리를 모른다는 이유로, 교회 밖 사람들을 업신여기기도 했는데요, 그것은 개나 돼지가 진주를 짓밟는 것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스스로 천국을 발로 차버렸습니다. 반대로 거지 나사로는 진리를 모르는 이방인이었지만, 진리를 믿고 사랑했습니다. 참된 진리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쫓아가 배우려 했고, 진리를 통해 거듭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국 천국에 들어갔습니다. 주님께서 지옥에 있는 부자에게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라고 하신 것은 그런 뜻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 사람 몸의 심장과 폐의 역할을 세상에서는 교회가 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진리의 등불인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많은 종교에도 진리가 있지만, 교회가 가진 말씀의 밝은 빛에 비하면, 그것은 희미한 등잔불 빛 같은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 희미한 등잔불 빛 아래에서조차도 감사하며 살다가 구원받는 사람들이 있는데요,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거지 나사로와 같은 사람입니다.

 

※ 천국은 속 사람으로 가는 곳인데, 속 사람의 상태가 세상 살면서 이미 천국인 사람이 가는 곳입니다. 속 사람의 상태가 이미 천국 상태가 되려면, 그 사람 안에서 사랑과 신앙, 즉 주님의 선과 진리가 하나, 합일되어야 하며, 이는 오직 주님이 주시는 능력을 힘입어 사랑으로 신앙을 실천하며, 선으로 진리를 행하는 것입니다.

 

※ 천국은 주님의 신성으로 이루어진 나라입니다. 생전에 우리는 이 세상 대기 가운데 폐 호흡을 합니다. 마치 물고기가 물속에서 아가미 호흡을 하듯 말이지요. 그러다가 사후 천국에서는 주님의 신성으로 신성 호흡을 합니다. 비유하자면 말입니다. 신성 호흡이란, 이미 살아생전, 내 안에 주님의 신성, 곧 주님의 선과 진리가 준비되어 있어야 사후, 주님 나라에 들어가 그곳 대기를 호흡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유대인들의 자부심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오직 자기들만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교회 밖 이방인들을 천대하고 업신여긴 건 그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진리에 대한 자부심만 있고, 행하지는 않는 유대인들보다는 어떻게 해서든 진리를 배우고, 배운 만큼 행하기를 원하는 순진한 이방인들이 주님에게는 더 귀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방인들과 자주 식사를 하시기도, 말씀을 가르치시고 그들의 병을 고치시기도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부자와 거지가 그들입니다. 부자는 주님 당시 유대인들을 뜻하고, 거지 나사로는 진리에 목마른 이방인을 뜻합니다. 그렇다고 부자가 꼭 유대인을 가리키는 것만은 아닙니다. 부자는 오늘날 기독교인들 중에도 있고, 심지어 새 교회인들 중에도 있습니다. 참된 진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선용하지 않거나 악용하는 사람은 모두 부자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지옥에 떨어진 부자에게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진리를 안다고 해서 모두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며, 또한 진리를 모르는 이방인이라고 해서 모두 지옥에 가는 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천국에 들어갈까요? 진리를 알기 전이나 안 다음에나 한결같이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일은 고난이 따릅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행하려고 할 때 시험이 오기 때문입니다. 시험의 고통을 피하지 않는 사람들은 나중에 천국에서 주님으로부터 위로를 받습니다. 반대로 진리를 위한 싸움은 피하고, 대신 쉽고 편한 길을 가는 사람에게는 나중에 지옥 불의 고통이 기다립니다. 그러므로 진리 앞에 항상 겸손하고 진리를 위한 싸움을 마다하지 않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눅6:38)

 

아멘

 

원본

2021-07-11(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4-02-11(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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