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베덴보리가 ‘모독(冒瀆, profanation)을 이토록 엄중하게 다루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한 죄나 오류가 아니라 ‘인간의 영적 구조 자체를 파괴하여 회복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드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모독이란, 사람이 ‘주님의 진리와 선을 알고 인정하며 어느 정도 믿기까지 한 뒤에, 그것을 삶에서 의도적으로 거부하거나, 자기 욕망, 자기 영광, 권력, 이익을 위해 왜곡하여 사용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때 일어나는 가장 심각한 결과는, 인간 안에서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이 분리되지 못한 채 강제로 결합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속 사람에는 주님께서 보존하신 리메인스, 곧 선과 진리의 흔적이 저장되어 있고, 겉 사람에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온 악과 거짓이 자리 잡고 있는데, 모독은 이 둘을 억지로 섞어 버립니다. 그 결과 인간의 마음은 어느 한쪽으로도 돌아설 수 없는 상태, 즉 선을 완전히 택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악으로 완전히 떨어질 수도 없는 ‘내적 분열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상태를 ‘영혼이 찢어진다’는 표현으로 설명하는데, 이는 사후 세계에서 그 사람이 극심한 고통과 혼란 속에 놓이게 됨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영계에서는 사람의 내적 상태가 그대로 드러나므로, 선을 사랑하는 부분과 악을 사랑하는 부분이 동시에 활성화되어 서로를 끊임없이 공격하게 되기 때문이지요. 이 상태에 놓인 영들은 가장 깊은 불안과 자기혐오, 분노와 절망 속에 머물게 되는데,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지옥 가운데서도 가장 참혹한 상태’라고까지 말합니다. 더 심각한 것은, 모독이 반복될 경우, 주님께서 인간 안에 보존하신 리메인스 자체가 훼손될 위험이 생긴다는 점입니다. 리메인스는 거듭남의 유일한 토대이기에, 이것이 손상되면 주님께서 더 이상 그 사람을 새로운 상태로 인도하실 길이 거의 사라집니다. 바로 이 때문에 주님은 사람을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상태로라도 머물게 하시고, 심지어는 신앙 자체를 거의 잃게 되는 황폐(vastation)를 허락하시면서까지 ‘모독만은 피하도록’ 섭리하십니다. 차라리 알지 못하고 믿지 않는 상태는, 새 빛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지만, 알고 믿으면서도 거부하고 뒤섞는 모독의 상태는 그 가능성 자체를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독은 단순히 ‘나쁜 죄’ 정도가 아니라, ‘인간이 주님과 다시 연결될 수 있는 내적 구조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결정적 단절’이며, 이것이 바로 스베덴보리가 반복해서 말하듯, 주님께서 모독을 무엇보다 엄중히 금하시고, 역사 전체를 통해서까지 그것을 막으시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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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4:19)

 

AC.408

 

하나의 교회가 더 이상 그 어떤 신앙도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황폐해지면, 전과 다르게 새로움이 시작, 즉 새 빛이 발(發)하는데요, 말씀에서는 이걸 ‘아침’(morning)이라고 합니다. 이 새 빛, 곧 ‘아침’이 왜 교회가 황폐해질 때까지는 발하지 않는지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동안 신앙과 체어리티의 일들은 모독의 일들과 뒤엉킨 상태로 지내왔는데요, 계속 이런 상태에 있는 한, 무슨 빛이나 체어리티의 일이 시작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잡초들’(tares)이 모든 ‘좋은 씨’(good seed)를 파괴하기 때문이지요. When a church has been so vastated that there is no longer any faith, then and not before, it begins anew, that is, new light shines forth, which in the Word is called the “morning.” The reason why the new light or “morning” does not shine forth until the church is vastated, is that the things of faith and of charity have been commingled with things profane; and so long as they remain in this state it is impossible for anything of light or charity to be insinuated, since the “tares” destroy all the “good seed.”

 

※ 주님의 비유 한 말씀이 생각납니다.

 

24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25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26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27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28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29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30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13:24-30)

 

그러나 신앙이라는 게 전혀 없으면, 신앙은 더 이상 모독(冒瀆, profaned) 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선포된 걸 더 이상 믿지 않기 때문이며, 시인도 안 하고 믿지도 않는, 대신 알기만 하는 사람들은 위에서 관찰한 것처럼, 모독이라는 걸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가 바로 오늘날 유대인들의 경우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살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시인하는 주님이 바로 그동안 자기들이 그토록 고대하며 기다려 왔고, 지금도 여전히 기다리고 있는 바로 그 메시아이심을 분명히 깨달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들은 이 사실을 시인하지도, 믿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사실을 모독할 수 없습니다.그리고 주님에 대하여 들은 모하메드인들(무슬림)과 이방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대 교회가 아무것도 시인하지도, 믿지도 않을 때까지는 주님이 세상에 오실 수 없었던 이유였습니다. But when there is no faith, faith can no longer be profaned, because men no longer believe what is declared unto them; and those who do not acknowledge and believe, but only know, cannot profane, as was observed above. This is the case with the Jews at the present day, who in consequence of living among Christians must be aware that the Lord is acknowledged by Christians to be the messiah whom they themselves have expected, and still continue to expect, but yet they cannot profane this because they do not acknowledge and believe it. And it is the same with the Mohammedans and gentiles who have heard about the Lord. It was for this reason that the Lord did not come into the world until the Jewish church acknowledged and believed nothing.

 

 

해설

 

스베덴보리는 교회가 ‘완전히 황폐(vastation)’되어 더 이상 신앙이 남아 있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새로운 시작이 가능해지며, 이때 비추기 시작하는 새 빛을 성경이 ‘아침(morning)이라 부른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그 이유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것이 ‘속된 것과 섞여 있는 상태’, 곧 거룩한 것을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왜곡하고 이용하는 상태가 지속되는 한, 주님으로부터 오는 어떤 참된 빛이나 사랑도 사람 안에 스며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혼합 상태에서는 복음의 씨앗이 뿌려져도, 비유에서 말하는 ‘가라지’가 좋은 씨를 질식시키듯, 참된 신앙과 체어리티가 자라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에서는 더 이상 신앙을 ‘모독(profanation)할 위험이 없게 되는데, 이는 사람들이 무엇이 참이라고 선언되는지를 알기만 할 뿐, 그것을 인정하고 믿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안다(knowing)는 것과 ‘믿는다(believing)는 것을 엄격히 구분하며, 믿지 않는 사람은 모독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 원리를 그는 유대인과 무슬림, 그리고 이방인들의 사례로 설명하는데, 이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메시아로 믿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으나, 그것을 자신들의 신앙으로 받아들이지는 않기 때문에, 그 지식이 거룩한 것을 훼손하는 모독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주님께서는 유대교회가 이미 메시아에 대한 참된 신앙을 완전히 상실한 시점, 곧 더 이상 거룩한 것을 모독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 비로소 세상에 오셨습니다. 만일 그 이전에 오셨다면, 그들은 알면서도 왜곡하고 이용함으로써 가장 깊은 모독에 빠졌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AC.408이 말하는 황폐는 단순한 타락이나 심판이 아니라, ‘새 교회와 새 빛을 가능하게 하는 필연적 정화 과정’입니다. 신앙이 어설프게 남아 있어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이 뒤섞여 있을 때보다, 차라리 신앙이 전무한 상태가 되어 새롭게 주어지는 진리와 체어리티를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주님의 빛은 다시 ‘아침’으로 떠오릅니다. 이로써 스베덴보리는 교회의 역사와 개인의 영적 여정 모두에서, ‘완전한 황폐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의 조건’임을 분명히 하며, 라멕 이후 노아로 이어지는 전환의 신학적 근거를 이 단락에서 결정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AC.409, 창4:19, '라멕의 두 아내, 아다와 씰라'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09 시간이 가면서 황폐해진, ‘가인’(Cain)이라 하던 이단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는데요, 이들은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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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7, 창4:19, 라멕의 상태, ‘황폐’(vastation)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07 일반적으로 어떤 교회의 상태는 상황에 따라 달라집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교회는 참 신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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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질문은 ‘창세기 족보 구조’, ‘스베덴보리의 표상적 역사 읽기’, 그리고 ‘시간 개념 자체’를 함께 풀어야만 비로소 답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라멕 이후 곧바로 노아가 등장하는 것처럼 보이는 AC.407의 설명은, ‘창세기 본문의 문자적 시간 순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내적 상태들이 어떻게 이어지고 겹치는지를 설명하는 영적 서술’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의 족보들을 연대기적 역사로 보지 않고, ‘동시에 존재하며 병행했던 영적 상태들의 계보’로 읽습니다. 그래서 가인의 계보와 셋의 계보는 ‘앞뒤로 교대하는 한 줄의 역사’가 아니라, ‘같은 시대 안에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 두 흐름’입니다. 가인의 계보는 태고교회 안에서 ‘신앙이 체어리티와 분리되어 점점 황폐(vastation)에 이르는 흐름’을 표상하고, 셋의 계보는 같은 태고교회 안에서 ‘주님에 의해 보존된 리메인스가 이어지는 흐름’을 표상합니다. 따라서 라멕은 가인의 계보에서 나타나는 황폐의 최종 상태를 상징하지만, 그 시점에 셋의 계보가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이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라멕으로 대표되는 황폐가 극에 달할수록, 그와 병행하여 주님께서 보존하신 작은 핵(nucleus), 곧 리메인스의 중요성은 더욱 커집니다.’

 

이 점에서 노아는 ‘라멕 다음에 새로 등장한 인물’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해 오던 보존된 교회의 대표 이름’입니다. 창5에서 노아가 라멕의 아들로 등장하는 서술은, 자연적 시간 순서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보존된 리메인스가 이제 더 이상 숨겨진 상태로 머물 수 없고, 새로운 시대의 대표, 표상으로 전면에 나서야 할 시점이 되었음’을 보여 주는 문학적, 표상적 장치입니다. 다시 말해, 가인의 계보가 라멕에서 완전히 황폐되었기 때문에, 그와 병행하여 존재하던 셋의 계보 중에서 ‘노아로 대표되는 흐름만이 다음 시대(홍수 이후의 교회)로 이어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라멕 이후 노아’라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동시적으로 존재하던 두 흐름 중 하나가 종결되고, 다른 하나가 역사 전면으로 부각되는 전환점’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구조를 이해하면, 창세기 족보가 왜 그렇게 길고 반복적으로 보이는지도 풀립니다. 그것은 ‘아버지가 아들을 낳았다’는 생물학적 기록이 아니라, ‘한 교회 안에서 어떤 영적 성향이 지속되었고, 어떤 성향이 단절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지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라멕에서 노아로 곧바로 이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AC.407의 서술은, 시간의 점프가 아니라 ‘시대의 중심축이 이동하는 장면’이며, 가인의 계보와 셋의 계보가 병행했다는 이전 설명과 전혀 모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설명이 있어야만, 라멕–노아 연결이 정확히 이해됩니다.

 

요약하면, ‘가인의 계보는 황폐의 계보로서 라멕에서 끝나고’, ‘셋의 계보는 보존의 계보로서 노아를 통해 다음 시대를 잇습니다’. 두 계보는 순차가 아니라 병행이었고, 창세기의 서술은 이를 시간의 언어로 배열했을 뿐, 실제 영적 역사에서는 ‘항상 황폐와 보존이 동시에 존재’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교회사 이해의 핵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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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4:19)

 

AC.407

 

일반적으로 어떤 교회의 상태는 상황에 따라 달라집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교회는 참 신앙으로부터 멀어지다가 ‘황폐해졌다’(vastated)라고 하는, 결국 신앙이라는 것이 완전히 사라지는 지경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런 일이 태고교회의 경우는 가인이라고 하는 사람들(Cainites) 사이에서, 또 홍수 후 고대교회와 유대교회의 경우에서도 있었습니다. 주의 강림(降臨, the Lord’s advent)의 때, 종말이 바로 이런 황폐한 상태였는데요, 그들은 자기들을 구원하러 오시기로 예정되어 있던 주님에 관하여 아무것도 몰랐으며, 그분을 향한 신앙에 대해서는 더욱더 아는 게 없었습니다. 초대 기독교회, 곧 주님 강림 후 있었던 교회 역시 그랬으며, 오늘날(※ 1750년대 유럽)교회도 그 안에 아무런 신앙이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철저하게 황폐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핵은 언제나 늘 조금은 남아 있는데, 이것은 신앙에 관해 황폐해진 사람들은 인식하지 못하는 사실입니다. 태고교회의 경우가 그랬는데, 그 남은 자들은 홍수 때와 홍수 후까지도 계속해서 있었습니다. 이들 그 교회의 남은 자들이 바로 ‘노아’(Noah)입니다. The state of a church in general is thus circumstanced. In process of time it departs from the true faith until at last it comes to be entirely destitute of faith, when it is said to be “vastated.” This was the case with the most ancient church among those who were called Cainites, and also with the ancient church after the flood, as well as with the Jewish church. At the time of the Lord’s advent this last was in such a state of vastation that they knew nothing about the Lord, that he was to come into the world for their salvation, and they knew still less about faith in him. Such was also the case with the primitive Christian church, or that which existed after the Lord’s advent, and which at this day is so completely vastated that there is no faith remaining in it. Yet there always remains some nucleus of a church, which those who are vastated as to faith do not acknowledge; and thus it was with the most ancient church, of which a remnant remained until the time of the flood, and continued after that event. This remnant of the church is called “Noah.”

 

 

해설

 

스베덴보리는 교회의 상태가 전반적으로 겪는 영적 흐름을 설명하며, 모든 교회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참된 신앙에서 점차 이탈하여 마침내는 ‘신앙이 거의 혹은 완전히 소멸된 황폐(vastation)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고 말합니다. 가인의 계보에서 나타난 태고교회의 황폐가 그 첫 사례이며, 홍수 이후의 고대교회, 그리고 유대교회 역시 동일한 과정을 겪었습니다. 특히 주님의 강림 당시 유대교회는 극도의 황폐 상태에 있었기에, 메시아가 오신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고, 주님을 믿는 신앙이 무엇인지도 거의 상실한 상태였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흐름이 초대 기독교회에도 반복되었으며, 더 나아가 오늘날의 교회 역시 신앙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황폐되었다고 단언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교회가 황폐되었다고 해서 주님의 구원 역사가 완전히 끊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언제나 교회의 중심부에는 ‘보이지 않는 핵(nucleus)’, 곧 주님께서 직접 보존하시는 ‘리메인스’가 남아 있으며, 황폐된 다수는 이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태고교회 역시 전반적으로는 가인의 계열로 황폐되었지만, 그 안에 남아 있던 이 리메인스가 홍수까지 이어졌고, 그 보존된 핵이 바로 ‘노아’로 상징됩니다. 따라서 AC.407은 교회의 황폐를 비관적으로만 보지 않고, ‘황폐 한가운데서도 주님은 항상 다음 시대를 위한 씨앗을 숨겨 두신다’는 섭리의 원리를 분명히 보여 주며, 이것이 역사 속에서 교회가 끊어지지 않고 계속 새롭게 일어날 수 있는 근거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AC.408, 창4:19, '모독'(冒瀆, profanation)의 속뜻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08 하나의 교회가 더 이상 그 어떤 신앙도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황폐해지면, 전과 다르게 새로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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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6, 창4:19, 라멕의 상태, ‘황폐’(vastation)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06 ‘라멕’이 황폐함, 즉 어떤 신앙도 없는 상태와 상응한다는 것은 이어지는 23, 24절을 보면 분명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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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station’은 스베덴보리 신학에서 핵심 개념 중 하나인데, 단순히 ‘타락’이나 ‘심판’으로 번역하면 그 깊이가 사라집니다.

 

vastation’(황폐, 荒廢)이란 스베덴보리가 사용하는 전문 용어로, 한 사람이나 한 교회 안에서 ‘선과 진리, 곧 체어리티와 신앙이 점진적으로 소멸되어 가는 영적 과정’을 뜻합니다. 이것은 갑작스러운 파괴나 외적 심판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사랑을 버리고 거짓과 악을 선택함으로써 ‘내면이 비워지고 메말라 가는 상태의 누적’입니다. ‘거듭남(regeneration)이 단계적으로 진행되듯이, 황폐 역시 단계적으로 진행되며, 처음에는 선이 약해지고 진리가 흐려지다가, 나중에는 참과 선이 더 이상 인식되지 않는 지점에 이르게 됩니다. 중요한 점은 황폐가 단순한 끝이나 절망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 안에서 허용되는 과정’이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사람 안에 남아 있는 거짓과 악이 드러나고 제거되지 않으면 새로운 선과 진리를 심으실 수 없기 때문에, 먼저 기존의 왜곡된 신앙과 사랑을 비워내도록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황폐는 종종 포로기, 광야, 어둠, 밤, 침묵, 일곱 번의 징계 같은 이미지로 표현됩니다. 창세기에서 가인의 계보가 라멕에 이르러 황폐의 극점에 도달하는 것은,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이 더 이상 생명을 낳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렀음을 뜻하며, 동시에 바로 그 지점에서 ‘새로운 교회의 씨앗이 준비되는 전환점’이 됩니다. 즉 vastation은 파괴 그 자체가 아니라, ‘거짓된 것을 비워 새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영적 정화의 과정’이며, 주님께서 결코 방임이 아니라 구원을 위해 사용하시는 깊은 섭리의 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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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4:19)

 

AC.406

 

‘라멕’이 황폐함, 즉 어떤 신앙도 없는 상태와 상응한다는 것은 이어지는 23, 24절을 보면 분명한데요, 거기 보면,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slew a man to his wounding, and a little one to his hurt)라는 라멕의 말이 나오는데, 여기서 ‘사람’(man)은 신앙과, ‘어린아이’(little one), 즉 ‘소년’(little child)은 체어리티와 상응하기 때문입니다. That by “Lamech” is signified vastation, or that there was no faith, is evident from the following verses (23–24), in which it is said that he “slew a man to his wounding, and a little one to his hurt”; for there, by a “man” is meant faith, and by a “little one” or “little child,” charity.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24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4:23, 24)

 

 

해설

 

스베덴보리는 라멕이 ‘황폐(vastation)를 상징한다는 점을, 이어지는 23, 24절의 고백을 통해 분명히 드러낸다고 설명합니다. 라멕이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고 말하는데, 여기서 ‘사람(man)은 ‘신앙’을, ‘소년(little one, little child)는 ‘체어리티’를 뜻합니다. 즉 라멕의 상태는 단순히 사랑이 사라진 단계가 아니라, ‘신앙마저 상처 입고 제거된 상태’, 곧 교회 안에서 선과 진리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황폐의 극점입니다. 가인에게서는 아직 두려움과 자각이 있었지만, 라멕에게서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모두 ‘죽임을 당했다’ 노래 될 정도로, 영적 생명이 사실상 소멸된 상태입니다. 이로써 라멕은 가인의 계보가 이르는 최종 상태, 곧 ‘신앙의 완전한 공허’를 표상하며, 이 지점 이후에야 비로소 주님께서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신다는 전환의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AC.407, 창4:19, 라멕의 상태, ‘황폐’(vastation)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07 일반적으로 어떤 교회의 상태는 상황에 따라 달라집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교회는 참 신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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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5, 창4:19,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405-411)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And Lamech took unto him two wives; the name of the one was Adah, and the name of the other Zillah. (창4:19) AC.405 가인으로부터 순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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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And Lamech took unto him two wives; the name of the one was Adah, and the name of the other Zillah. (4:19)

 

AC.405

 

가인으로부터 순서상 여섯 번째인 ‘라멕’(Lamech)은 황폐함(vastation)과 상응합니다. 더 이상 그 어떤 신앙도 없는 상태이지요. 그의 ‘두 아내’(two wives)는 새 교회의 도래, 일어남과 상응하는데, ‘아다’(Adah)는 그 교회의 천적, 영적인 것들의 어머니와, ‘씰라’(Zillah)는 자연적인 것들의 어머니와 상응합니다. By “Lamech,” who was the sixth in order from Cain, is signified vastation, in consequence of there being no longer any faith; by his “two wives” is signified the rise of a new church; by “Adah,” the mother of its celestial and spiritual things; and by “Zillah,” the mother of its natural things.

 

 

해설

 

스베덴보리는 가인의 계보에서 여섯째에 해당하는 ‘라멕’을, 더 이상 신앙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 일어나는 ‘황폐(vastation)를 상징한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거듭남의 여섯 단계 이후 일곱째에 이르는 질서와 대응되듯, 황폐 역시 단계적으로 진행되어 마침내 거의 모든 신앙이 소멸된 상태에 이르렀음을 뜻합니다. 그런데 라멕이 두 아내를 취했다는 사실은 단순한 도덕적 문제가 아니라, ‘이 황폐의 끝에서 새로운 교회가 싹트기 시작함’을 암시합니다. 아다는 그 새 교회의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 곧 사랑과 신앙의 상위 차원을 낳는 어머니를 의미하고, 씰라는 그 교회의 ‘자연적인 것들’, 곧 외적 삶과 실천의 영역을 낳는 어머니를 의미합니다. 이는 주님께서 신앙이 거의 사라진 지점에서도, 완전한 단절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고 계심’을 보여주는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AC.406, 창4:19, 라멕의 상태, ‘황폐’(vastation)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06 ‘라멕’이 황폐함, 즉 어떤 신앙도 없는 상태와 상응한다는 것은 이어지는 23, 24절을 보면 분명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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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4, 창4:18, 첫 이단 '가인'에서 유래된 이단들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창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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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4:18)

 

AC.404

 

이 이름들은 모두 ‘가인’(Cain)이라 하는 첫 이단에서 유래된 이단들을 말합니다. 이들에 관해서는 이름들밖에는 현존하는 무슨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이들에 대해 무슨 언급을 하는 건 적절치 않아 보입니다. 다만 이 이름들의 기원들을 가지고 뭔가 건질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예를 들면, ‘이랏’(Irad)은 ‘성의 후손’(descends from a city)이라는 것, 그렇다면 ‘에녹’(Enoch)이라는 이단에서 비롯되었나? 뭐 그런 것입니다. All these names signify heresies derived from the first, which was called “Cain”; but as there is nothing extant respecting them, except the names, it is unnecessary to say anything about them. Something might be gathered from the derivations of the names; for example, “Irad” means that he “descends from a city,” thus from the heresy called “Enoch,” and so on.

 

 

해설

 

스베덴보리는 창4:18에 나열되는 이름들이 모두 가인에서 시작된 첫 번째 분열, 곧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이라는 이단적 상태에서 파생된 여러 이단적 형태들’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 이름들에 대해 성경이 더 이상의 설명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각각의 세부 내용을 추정하거나 확대해석할 필요는 없다고 말합니다. 다만 이름의 어원은 그 흐름을 암시하는 정도의 의미는 지니는데, 예를 들어 ‘이랏(Irad)이라는 이름은 ‘성읍에서 내려온 자(descends from a city)를 뜻하여, 앞서 말한 에녹이라는 교리적 성읍, 곧 이단적 체계에서 파생된 또 하나의 분열된 교리 상태임을 시사하는 식이지요. 이는 가인의 신앙이 하나의 오류로 끝나지 않고, ‘교리에서 교리로, 체계에서 체계로 연쇄적으로 분화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며, 결국 사랑을 잃은 신앙이 스스로를 기준 삼아 끝없이 새로운 분파를 만들어 내는 영적 구조를 드러낸다는 걸 볼 수 있습니다.

 

 

 

AC.405, 창4:19,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405-411)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And Lamech took unto him two wives; the name of the one was Adah, and the name of the other Zillah. (창4:19) AC.405 가인으로부터 순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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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3, 창4:17, 태고교회 사람들의 서술 방식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창4:17) AC.403 우리는 지금까지 ‘성’(城, city)이 뭘 상징하는지 보았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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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4:17)

 

AC.403

 

우리는 지금까지 ‘성’(, city)이 뭘 상징하는지 보았습니다. 하지만 창세기 이 부분들은 모두 일종의 역사서술식으로 되어 있어서 말씀을 겉 글자의 뜻, 곧 실제 역사, 실제 일어난 일로만 읽으시는 분들한테는 이 모든 게 틀림없이, 예를 들면, 가인이 성 하나를 건설하였고, 그 이름을 에녹이라 하였다는 식일 것입니다. 그럴 경우, 분명히 그 땅에는 이미 인구가 많았음을 가정해야 하는데... 가인이 단지 아담의 첫 번째 아들일 뿐임을 생각하면, 이 많은 사람은 갑자기 다 어디서 나타난 걸까요? 또 가인의 아내는 누가 낳은 딸인가요? 역사 서술식 기록들, 즉 창세기 12장, 아브람 전까지 기록들을 실제 일어난 역사로 읽을 경우는 다 그 안에 이런 문제점들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앞에서 관찰한 것처럼, 태곳적 사람들은 모든 걸 이렇게 일종의 역사적 형태를 띠는 이야기체, 일종의 스토리텔링식으로 정리하는 데 아주 익숙했는데요, 이런 일이 그들에게는 굉장히 고차원적 즐거움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모든 걸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We have now seen what a “city” signifies. But as all this part of Genesis is put into a historical form, to those who are in the sense of the letter it must seem that a city was built by Cain, and was called Enoch, although from the sense of the letter they must also suppose that the land was already populous, notwithstanding that Cain was only the firstborn of Adam; the historical series has this in it. But as we observed above, the most ancient people were accustomed to arrange all things in the form of a history, under representative types, and this was to them delightful in the highest degree, for it made all things seem to be alive.

 

 

해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4장의 이 부분이 역사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문자적 의미에 머무는 사람에게는 가인이 실제로 성읍을 세우고 그 이름을 에녹이라 불렀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문자 그대로 읽을 경우, 가인이 아담의 첫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땅이 인구로 가득 차 있어 성읍을 세울 수 있었다고 상정해야 하는 모순이 생깁니다. 이 점은 본문이 자연적 역사를 기록하려는 의도가 아님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모든 영적 상태와 변화를 ‘대표, 그러니까 표상적 형상과 역사적 서사로 배열하는 방식’에 익숙했으며, 이러한 서술은 그들에게 단순한 설명이 아니라, 영적 실재를 살아 움직이듯 체험하게 하는 표현 방식이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상태, 신앙의 분열, 교리의 형성 같은 내적 과정을 인물과 사건의 역사로 풀어내었고, 이를 통해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를 ‘생동감 있게 드러내는 것’을 가장 큰 기쁨으로 여겼습니다.

 

 

 

AC.404, 창4:18, 첫 이단 '가인'에서 유래된 이단들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창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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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2, 창4:17, 가인이 쌓은 '성'(城, city)의 속뜻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창4:17) AC.402 ‘성을 쌓고’(city that was built)는 그 이단에서 나오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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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창4에 나오는 가인 계보인 이단의 범주에 오늘날 대한민국의 통일교, 신천지, 하나님의교회, JMS 같은 이단들을 포함해도 되나요? 한국에서 스베덴보리 오래 하신 분들 보면 이 부분이 좀 선명하지가 않은 느낌들을 받았거든요...

 

이 질문은 ‘목회적으로도, 신학적으로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지점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포함해도 되는가?’라는 질문에는 ‘예, 그러나 방식이 중요하다’가 정확한 답입니다. 스베덴보리의 틀은 ‘특정 단체 낙인찍기가 아니라 영적 구조 분별’이기 때문입니다.

 

첫째,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이단’은 ‘교리 구조’이지 ‘명단’이 아니다

 

먼저 분명히 해야 할 점은, AC.399-403에서 말하는 ‘이단(heresy)은 특정 조직이나 이름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이 스스로를 체계화한 교리 구조’를 뜻한다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단이란 ‘틀린 주장을 하는 집단’이 아니라, ‘사랑보다 신앙, 지식, 교리, 계시 체계를 우위에 두고, 그 체계를 ‘성읍’처럼 방어, 확장하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어떤 단체가 이 범주에 들어가는지는 ‘이름이 무엇이냐’가 아니라, ‘그 단체의 중심 동력이 체어리티인가, 아니면 분리된 신앙과 지식인가’로 판단해야 합니다. 이 점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오용됩니다.

 

둘째, 대한민국의 주요 이단 단체들은 ‘가인의 성읍’ 구조에 해당하는가?

 

질문하신 통일교, 신천지, 하나님의교회, JMS 등은 ‘스베덴보리적 범주에서 ‘가인의 계열’로 분류할 수 있는 구조적 특징’을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습니다. 이들은 대체로 특별한 계시자, 중개자, 시대적 선택을 강조하고, 교리를 단계화, 교육화하며 (에녹의 의미), 내부 논리를 외부 비판으로부터 방어하는 체계를 강하게 구축합니다. 특히 ‘구원, 진리, 종말, 하나님의 역사’를 특정 교리 구조 안에 가두고, 체어리티(이웃 사랑, 자유, 양심, 겸손)를 ‘교리 복종의 하위 개념’으로 전락시킬 때, 이는 AC.402에서 말하는 ‘성읍으로 조직된 이단적 교리’의 전형적 모습과 정확히 겹칩니다. 이런 의미라면 ‘구조적으로는 포함해도 무방’합니다.

 

셋째, 그러나 ‘모든 구성원’을 동일하게 판단해서는 안 된다

 

스베덴보리의 중요한 균형점은 여기입니다. 그는 ‘이단적 교리 구조’와 ‘그 안에 있는 개인의 영적 상태’를 철저히 구분합니다. AC 전반에서 반복되듯, 어떤 사람은 이단적 체계 안에 있으면서도 ‘체어리티의 선을 따라 살고’, 주님에 대한 단순한 신앙과 양심을 지닌 채 보호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가인의 표’와 직접 연결됩니다. 즉, ‘잘못된 성읍 안에 있어도, 주님은 그 사람 안의 신앙을 ‘구별하여’ 보존’하십니다. 따라서 목회적으로는 ‘그 단체는 가인의 성읍적 구조를 가졌다’라는 진단과, ‘그 안에 있는 사람은 모두 동일하다’라는 판단을 절대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후자를 단호히 거부합니다.

 

넷째, 한국 스베덴보리 연구에서 이 부분이 흐릿한 이유

 

목사님이 느끼신 ‘한국에서 오래 하신 분들조차 이 부분이 선명하지 않다’는 인상은 매우 정확합니다. 그 이유는 대체로 세 가지입니다. 첫째, 스베덴보리를 ‘영적 체험가’나 ‘신비주의자’로만 읽고, 그의 ‘교회론, 이단론, 교리 비판의 날카로움’을 의도적으로 완화시켜 온 경향이 있습니다. 둘째, 한국 교회 현실에서 ‘이단’이라는 말이 지나치게 정치화, 감정화되어 있기 때문에, 반대로 ‘침묵이나 모호성으로 회피’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셋째, 스베덴보리의 이단 비판은 ‘도덕적 비난이 아니라 구조 분석’이기 때문에, 이를 이해하려면 최소한 AC.1번 글부터 AC.400번 대 글까지를 읽고 거기 나오는 교회론을 충분히 소화해야 하는데, 그 작업이 매우 어렵습니다. 그 결과 핵심을 흐리는 설명들이 반복되어 온 것입니다.

 

다섯째, 목회적으로 어떻게 말하는 것이 가장 스베덴보리적인가?

 

가장 스베덴보리적인 방식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이단은 특정 단체 명단이 아니라,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교리와 체계로 굳어진 상태’입니다. 오늘날 한국의 여러 이단 단체들은 이 구조적 특징을 분명히 보여주지만, 주님은 그 안에 있는 사람 하나하나를 동일하게 보지 않으시며, 각 사람 안의 신앙과 체어리티의 가능성을 구별하여 다루십니다.

 

이렇게 말할 때, ‘분별은 분명하고, 정죄는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가인의 표를 주신 주님의 방식이며, 스베덴보리의 길입니다. ‘단체와 사람을 구별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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