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221.심화

 

1. ‘9: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9:4) I must work the works of him that sent me, while it is day; the night cometh when no man can work (John 9:4).

 

 

이 구절을 AC.221에서 인용한 이유는, 말씀에서 ‘(day)은 신앙과 진리의 빛이 있는 상태를, ‘(night)은 신앙과 진리의 빛이 사라진 상태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주님께서 단순히 시간이 있을 때 일을 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시간보다 상태(state)를 봅니다. 그에 따르면 주님께서 말씀하신 ‘’은 해가 떠 있는 시간이 아니라 진리가 비추는 상태이며, ‘’은 해가 진 시간이 아니라 진리가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낮에는 일할 수 있다’는 말은 사람이 아직 진리를 듣고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에 있다는 뜻입니다. 양심이 살아 있고, 회개할 수 있으며, 주님의 인도를 따를 수 있는 상태입니다. 반면 ‘밤이 오면 아무도 일할 수 없다’는 말은 진리의 빛이 거부되고 신앙이 사라져 더 이상 영적 진보가 어려운 상태를 의미합니다.

 

AC.221의 문맥에서는 이것이 창3:8의 ‘그 날 바람이 불 때(the breath of the day)와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표현을 태고교회 후손들이 아직 얼마간의 지각(perception)을 보유하고 있던 상태로 해석합니다. 즉 완전한 낮은 아니지만, 아직 밤도 아닌 상태입니다. 빛은 약해지고 있었지만 완전히 꺼지지는 않았습니다.

 

따라서 요9:4 AC.221에서 매우 적절한 증거 구절이 됩니다. 주님 자신도 ‘’과 ‘’을 영적 상태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사용하셨기 때문입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처음에는 밝은 낮과 같은 퍼셉션 가운데 있었지만, 점차 ‘날의 서늘함’으로 내려왔고, 결국 밤에 가까워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 말씀은 거듭남의 과정에도 적용됩니다. 사람이 주님의 진리를 들을 수 있고, 양심의 소리에 응답할 수 있으며, 내적 딕테이트(interior dictate)를 느낄 수 있을 때가 바로 ‘’입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그 빛을 거부하면 점차 ‘’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낮이 있을 때 일하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창3:8의 아담과 하와는 이미 한낮의 밝은 퍼셉션은 잃었지만, 아직 완전한 밤에 들어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여호와의 음성을 들었고, 여전히 부끄러움을 느꼈으며, 여전히 자신들이 타락했다는 것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그 날 바람이 불 때’입니다.

 

그러므로 AC.221에서 요9:4를 인용한 이유는, 말씀의 ‘’과 ‘’이 시간의 개념이 아니라 신앙과 지각의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이며, 창3:8의 ‘그 날 바람이 불 때’가 아직 완전히 꺼지지 않은 영적 빛의 상태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태고교회의 후손들에게 남아 있던 마지막 퍼셉션의 빛은 이미 저물어 가고 있었지만, 아직 완전한 밤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AC.221, 창3:8, ‘그 날 바람이 불 때’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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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f in the garden in the air of the day; and the man and his wife hid themselves from the face of Jehovah God in the midst of the tree of the garden. (3:8)

 

AC.221

 

그 날 바람이 불 때(the air or breath of the day)란 교회가 아직 얼마간의 지각(perception)을 남겨두고 있던 시기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day)(night)의 의미로부터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태고인들(the most ancient people)은 교회의 상태들을 낮과 밤의 시간들에 비유하였는데, 교회가 아직 빛 가운데 있을 때의 상태를 낮의 시간에 비유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이 상태가 그 날 바람이 불 때에 비유된 것은, 그들에게 아직도 자신들이 타락하였음을 알 수 있는 얼마간의 지각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신앙(faith)의 상태는 (day), 신앙 없는 상태(no faith)(night)이라 하십니다. 요한복음에 이르기를, That by the “air” or “breath” “of the day” is signified a period when the church had still somewhat of perception remaining,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day” and of “night.” The most ancient people compared the states of the church to the times of the day and of the night, to the times of the day when the church was still in light, wherefore this state is compared to the breath or air “of the day,” because there was still some remnant of perception by which they knew that they were fallen. The Lord also calls the state of faith “day,” and that of no faith “night”; as in John: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9:4) I must work the works of him that sent me, while it is day; the night cometh when no man can work (John 9:4).

 

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같은 이유로 창세기 1장에 보면 사람의 거듭남(regeneration)의 상태들을 날들(days)이라 하고 있습니다. The states of the regeneration of man were for the same reason called “days” in chapter 1.

 

 

해설

 

AC.221은 창세기 38절의 ‘그 날 바람이 불 때’라는 표현을 설명하는 구절입니다. 문자적으로는 저녁 무렵의 선선한 바람이 부는 시간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시간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교회의 영적 상태에 대한 묘사로 해석합니다.

 

그에 따르면 말씀에서 ‘(day)은 신앙과 진리의 빛 가운데 있는 상태를 의미하고, ‘(night)은 신앙과 진리가 사라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그 날 바람이 불 때’란 완전한 낮도 아니고, 완전한 밤도 아닌 상태, 곧 빛이 약해지고 어둠이 다가오고 있지만, 아직은 빛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타락 직후의 태고교회 상태였습니다. 그들은 이미 뱀의 설득을 받아 자기 자신을 신뢰하기 시작하였고,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완전히 타락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직도 자신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고, 양심의 소리와 퍼셉션의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 날 바람이 불 때’란 ‘자신들이 타락하였음을 알 수 있는 얼마간의 퍼셉션이 남아 있는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만일 그 퍼셉션마저 완전히 사라졌다면 그들은 숨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부끄러움도 느끼지 못하고, 잘못을 깨닫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주님의 음성을 두려워할 만큼의 영적 감각이 남아 있었습니다.

 

여기서 ‘서늘함’ 또는 ‘바람(breath, air)이라는 표현도 의미가 있습니다. 뜨거운 한낮의 강한 빛은 아닙니다. 이미 빛은 약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완전한 밤도 아닙니다. 마지막 남은 빛이 희미하게 남아 있는 황혼과 같은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교회의 역사뿐 아니라 개인의 영적 상태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봅니다. 사람이 처음 잘못된 길로 들어설 때에는 아직 양심이 살아 있습니다.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 마음이 찔리고, 악을 행하면 불편함을 느낍니다. 이것이 바로 ‘날의 서늘함’, 곧 ‘그 날 바람이 불 때’ 같은 상태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계속 그 음성을 무시하면 결국 밤이 찾아옵니다. 그때는 양심도 무디어지고, 진리에 대한 감각도 사라지며, 잘못을 잘못으로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의 창조의 날들도 같은 원리로 이해합니다. 거기서의 ‘첫째 날’, ‘둘째 날’ 등은 자연적인 24시간이 아니라 거듭남의 단계들입니다. 즉 말씀에서 ‘’은 흔히 영적 상태를 의미합니다.

 

결국 AC.221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주님의 음성을 들은 때는 완전한 밤이 아니었습니다. 아직은 ‘날의 서늘함’이 남아 있었습니다. 아직은 양심이 살아 있었고, 아직은 자신들이 타락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심판의 순간이라기보다,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영적 감각이 아직 완전히 꺼지지 않은 상태를 보여 주는 매우 자비로운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그 마지막 남은 빛을 통해 인간을 다시 부르고 계셨던 것입니다.

 

 

심화

 

1. ‘9:4

 

 

AC.221, 심화 1, ‘요9:4’

AC.221.심화 1. ‘요9: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요9:4) I must work the works of him that sent me, while it is day; the night 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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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2, 창3:8,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은지라’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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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0, 창3:8, ‘거니시는 소리’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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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0.심화

 

1. ‘40:3, 6

 

3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6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40:3, 6) The voice of one crying in the wilderness; the voice said, Cry (Isa. 40:3, 6).

 

 

이 구절을 AC.220에서 인용한 이유는, 말씀에서 ‘소리(voice)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주님의 오심을 알리는 계시와 내적 딕테이트(interior dictate)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AC.220에서 스베덴보리는 창3:8의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설명하면서, 그 음성이 타락 이후에도 남아 있던 지각(perception)의 희미한 흔적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사야 40장을 인용하여, 말씀 전체에서 ‘소리’가 어떤 의미로 사용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표현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입니다. 문자적으로는 세례 요한의 사역을 예언하는 말씀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실제로 신약은 이 구절을 세례 요한에게 적용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보다 더 깊은 의미를 봅니다.

 

그에 따르면 ‘광야(wilderness)는 단순한 사막이 아니라 신앙이 없는 교회, 또는 진리와 선이 희박해진 영적 상태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고, 교회가 황폐해진 상태입니다. 창3의 후손들이 점차 지각, 곧 퍼셉션을 잃어 가던 상태와도 통하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광야에서 ‘소리’가 들립니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주님의 음성은 모든 것이 풍성하고 밝을 때만 들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적 황폐 속에서 더욱 절실하게 들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음성을 ‘주님의 오심에 대한 선포’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외치라’는 명령도 중요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설교 행위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영적으로는 주님의 진리가 인간의 내면에 자신을 드러내고 알리는 작용을 의미합니다. 즉 사람이 주님을 찾기 전에, 먼저 주님께서 사람에게 다가오시고, 자신을 알리시는 것입니다.

 

특히 AC.220의 마지막 문장은 매우 아름답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광야의 외치는 소리’를 ‘거듭난 사람들에게 있는 내적 딕테이트’와 연결합니다. 즉 이사야의 예언은 단지 세례 요한에 관한 역사적 예언이 아니라, 모든 거듭남의 과정에서 반복되는 영적 경험을 묘사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다 보면, 어느 순간 설명하기 어려운 내적 촉구를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이 길은 아니다’, ‘돌아가야 한다’, ‘주님께 더 가까이 가야 한다’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런 내면의 부르심을 바로 이런 ‘음성’, ‘소리’로 이해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AC.220에서 이사야 40장을 인용한 이유는, 창3:8의 ‘여호와의 소리’가 단순한 청각적 소리가 아니라 주님의 오심을 알리는 내적 부르심이며, 신앙이 메마른 광야 같은 상태 속에서도 여전히 인간 안에 울려 퍼지는 계시와 양심의 음성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어쩌면 목사님께서 자주 말씀하시는 퍼셉션(perception)에 비추어 보면, 이 구절은 더욱 특별하게 읽힙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밝은 대낮처럼 주님의 뜻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타락 이후에는 그 빛이 희미해졌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제는 퍼셉션의 밝은 빛 대신, 광야에서 들려오는 한 음성처럼 사람을 부르십니다. AC.220은 바로 그 음성의 정체를 설명하는 본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가 아니라, 인간 영혼 깊은 곳에서 주님께서 계속 말씀하고 계시는 사랑의 부르심인 것입니다.

 

 

 

AC.220, 창3:8, ‘거니시는 소리’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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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f in the garden in the air of the day; and the man and his wife hid themselves from the face of Jehovah God in the midst of the tree of the garden. (3:8)

 

AC.220

 

거니시는 소리(the voice going to itself)란 지각(perception)이 거의 남아 있지 않고 다만 마치 홀로 존재하며,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남아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다음 절에서 여호와께서 아담을 부르시며(Jehovah called to the man)라고 하는 것으로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에도 이와 같이 말합니다. By the “voice going to itself,” is meant that there was but little perception remaining, and that alone as it were by itself and unheard, as is manifest also from the following verse where it is said, “Jehovah called to the man.” So in Isaiah:

 

3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6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40:3, 6) The voice of one crying in the wilderness; the voice said, Cry (Isa. 40:3, 6).

 

여기서 광야(wilderness)는 신앙이 없는 교회(a church where there is no faith)를 의미합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the voice of one crying)는 주님의 오심(the Lord’s advent)에 대한 선포를 의미하며, 일반적으로는 주님의 오심에 대한 모든 알림(announcement)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거듭난 사람들(the regenerate)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인데, 그들에게는 내적 딕테이트(an internal dictate)가 있기 때문입니다. The “wilderness” is a church where there is no faith; the “voice of one crying” is the annunciation of the Lord’s advent, and in general every announcement of his coming, as with the regenerate, with whom there is an internal dictate.

 

 

해설

 

AC.220은 창세기 38절의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라는 말씀을 더욱 깊이 설명하는 구절입니다. 앞의 AC.219에서 스베덴보리는 ‘여호와의 소리’를 양심, 내적 깨달음, 내적 책망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여기서는 특별히 ‘거니시는(going to itself)이라는 표현에 주목합니다.

 

그에 따르면 이것은 태고교회 사람들이 타락한 후에도 완전히 모든 영적 지각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었음을 의미합니다. 다만 그 지각이 거의 사라져 버렸고, 마치 멀리서 희미하게 들리는 소리처럼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홀로 존재하는 것처럼’,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남아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이 표현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음성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것을 듣지 못하게 되었음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여전히 말씀하시지만, 사람은 더 이상 그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마치 먼 곳에서 누군가 부르고 있는데도 자기 생각과 욕망에 사로잡혀 그 소리를 거의 듣지 못하는 상태와 같습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다음 절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셨음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숨었지만, 주님은 찾으십니다. 인간은 듣지 않지만, 주님은 계속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타락 이후에도 계속되는 주님의 자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서 이사야 40장을 인용합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는 신약에서는 흔히 세례 요한에 대한 예언으로 이해되지만, 스베덴보리는 더 넓은 의미로 해석합니다. 그에게 광야는 단순한 사막이 아니라 신앙이 사라진 교회를 의미합니다. 진리가 메말라 있고 영적 생명이 희박해진 상태입니다.

 

그런 광야에서 들리는 ‘외치는 소리’는 주님의 오심을 알리는 음성입니다. 즉 사람 안에 남아 있는 마지막 양심의 소리, 마지막 진리의 부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신앙이 쇠퇴하고 교회가 황폐해져도 주님은 여전히 부르고 계십니다.

 

특히 마지막 문장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거듭난 사람(the regenerate)에게는 ‘내적 딕테이트(internal dictate)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태고교회의 퍼셉션(perception)과는 다르지만, 양심(conscience)을 통해 주님께서 계속 역사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흔히 양심을 자신의 생각이나 도덕 교육의 결과 정도로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양심은 주님께서 사람 안에 심어 두신 영적 통로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선을 행하려 할 때 느끼는 내적 권고, 악을 피하려 할 때 느끼는 내적 경고는 단순한 심리 현상이 아니라 주님의 음성이 희미하게 울리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AC.220은 매우 따뜻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인간이 타락하여 주님의 음성을 거의 잃어버렸을 때조차 그 음성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비록 ‘거니시는 소리’처럼 희미해졌지만 여전히 남아 있었고, 주님은 계속 사람을 부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주님은 양심과 내적 깨달음을 통해 같은 방식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문제는 주님께서 말씀하시지 않는다가 아니라, 우리가 그 음성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라는 것입니다.

 

 

심화

 

1. ‘40:3, 6

 

 

AC.220, 심화 1, ‘사40:3, 6’

AC.220.심화 1. ‘사40:3, 6’ 3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6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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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9, 창3:8,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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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9.심화

 

6. ‘30:30-31

 

30여호와께서 그의 장엄한 목소리를 듣게 하시며 혁혁한 진노로 그의 팔의 치심을 보이시되 맹렬한 화염과 폭풍과 폭우와 우박으로 하시리니 31여호와의 목소리에 앗수르가 낙담할 것이며 주께서는 막대기로 치실 것이라 (30:30, 31) Jehovah shall cause the excellency of his voice to be heard, for through the voice of Jehovah shall Asshur be beaten down (Isa. 30:30–31).

 

 

이 구절을 AC.219에서 인용한 이유는, ‘여호와의 목소리(voice of Jehovah)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신적 진리의 계시와 내적 딕테이트(interior dictate)를 의미하며, 그 진리가 인간 own에서 나온 거짓된 추론을 무너뜨리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AC.219의 전체 목적은 창3:8의 ‘동산에서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음성을 단순한 청각적 소리로 보지 않고, 양심과 퍼셉션 속에 울리는 주님의 내적 부르심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그는 여러 성경 구절을 인용하며, 말씀 전체에서 ‘여호와의 음성’이 언제나 계시와 진리의 작용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30장의 경우, 특히 ‘앗수르(Asshur)가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 해석에서 앗수르는 흔히 이성적 능력, 추론 능력, 지성(intellectual reasoning)을 의미합니다. 원래 이것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이 자기 own 안에 머물면서 이성을 주님 위에 두게 되면, 앗수르는 진리를 섬기는 도구가 아니라 진리를 재판하는 주인이 됩니다.

 

바로 AC.194-206에서 본 뱀의 길이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믿는다’가 아니라, ‘내 감각과 내 이성이 납득해야 믿겠다’는 태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감각과 기억 지식으로 신앙의 신비를 판단하려는 상태로 설명합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목소리에 앗수르가 낙담할 것이며’라는 말은, 신적 진리가 인간 own의 교만한 추론을 무너뜨린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진리 앞에서는 인간의 가장 정교한 논리도 한계를 드러내게 됩니다. 마치 AC.215에서 말한 것처럼, 자기 지혜를 절대화한 사람은 결국 거짓의 심연으로 빠지게 되지만, 여호와의 음성은 그 거짓을 드러내고 깨뜨립니다.

 

또한 본문에 나오는 ‘화염’, ‘폭풍’, ‘폭우’, ‘우박’ 역시 단순한 기상 현상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런 표현들은 진리가 인간 안의 거짓과 악을 심판하고 정화하는 다양한 작용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음성은 부드러운 위로의 음성일 뿐 아니라, 때로는 인간의 자기 확신과 교만을 무너뜨리는 음성이기도 합니다.

 

이 점에서 창3의 아담과 하와가 들은 음성과도 연결됩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음성을 듣고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두려워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음성이 자기들의 상태를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언제나 숨겨진 것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자기 own 안에 있는 사람은 그 빛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래서 AC.219에서 사30:30-31을 인용한 이유는, ‘여호와의 음성’이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 역사하는 신적 진리이며, 특히 인간 own의 추론과 자기 지혜를 꺾고 진리 앞에 복종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어쩌면 AC.215의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와 이 구절은 서로 짝을 이루는 말씀처럼 보입니다. 전자는 자기 지혜를 의지하는 인간의 상태를 보여 주고, 후자는 그런 인간적 지혜를 무너뜨리는 여호와의 음성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창3의 이야기 전체는 바로 그 두 길, 곧 자신의 음성을 따르는 길과 주님의 음성을 따르는 길 사이의 갈림길을 그리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219, 창3:8,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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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9, 심화 5, ‘암사슴을 낙태하게 하시고’

AC.219.심화 5. ‘암사슴을 낙태하게 하시고’ 영어 성경과 달리 한글 성경에서는 ‘낙태’로 번역한 이유는? 좋은 질문입니다. 사실 여기에는 번역상의 문제라기보다 원문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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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9.심화

 

5. ‘암사슴을 낙태하게 하시고

 

영어 성경과 달리 한글 성경에서는 낙태로 번역한 이유는?

 

 

좋은 질문입니다. 사실 여기에는 번역상의 문제라기보다 원문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가 있습니다.

 

29:9의 히브리어는 전통적으로 두 가지로 번역되어 왔습니다.

 

첫 번째는 현재 개역개정처럼 ‘여호와의 소리가 암사슴을 낙태하게 하시고’라는 번역입니다. 두 번째는 영어 성경들 가운데 적지 않은 번역처럼 ‘여호와의 소리가 암사슴으로 하여금 새끼를 낳게 하시고’ 또는 ‘해산하게 하시고’라는 번역입니다. 예를 들어, KJV는 다음과 같습니다.

 

The voice of the LORD maketh the hinds to calve, and discovereth the forests.’

 

여기서 ‘calve’는 ‘새끼를 낳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사용한 라틴어 번역도 바로 이 계열입니다.

 

The voice of Jehovah maketh the hinds to calve and uncovereth the forests.’

 

그래서 AC.219에서 스베덴보리는 ‘암사슴을 새끼 낳게 한다’는 의미를 전제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한글 성경은 ‘낙태’라고 번역했을까요? 히브리어 원어의 동사 ‘חול(chul) 또는 관련 형태는 본래 ‘몸을 떨다’, ‘산고를 겪다’, ‘해산하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런데 고통스러운 진통을 강조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일부 고대 번역 전통에서는 ‘조산’, ‘유산’, ‘낙태’의 뉘앙스로 이해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한국어 번역자들은 문맥상 천둥과 폭풍의 위력을 강조하는 시편 29편의 분위기를 고려하여, ‘여호와의 음성이 너무 강력하여 암사슴마저 놀라 새끼를 떨어뜨린다’는 의미로 번역한 것입니다. 즉 ‘낙태하게 하신다’는 번역은 자연계의 폭풍우가 동물들에게 미치는 충격을 강조한 번역입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내적 의미를 보기 때문에 전혀 다르게 읽습니다. 그에게 암사슴(hinds)은 선한 애정(good affections)을 의미합니다. 새끼를 낳는 것(calve)은 그 애정으로부터 선한 행위와 진리가 태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는 ‘여호와의 음성이 암사슴을 새끼 낳게 한다’는 의미를 취합니다.

 

흥미롭게도 바로 다음 구절이 ‘삼림을 말갛게 벗기시니(uncovereth the forests)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내면에 숨어 있던 것들을 드러내신다’는 의미로 해석합니다. 즉 주님의 진리는 한편으로는 선한 애정이 열매 맺게 하고(암사슴이 새끼를 낳음), 다른 한편으로는 숨겨진 거짓과 악을 드러낸다(숲을 벗김)는 것입니다.

 

따라서 AC.219의 문맥에서는 개역개정의 ‘낙태’보다 KJV의 ‘새끼를 낳게 하신다’가 스베덴보리의 해석과 훨씬 잘 맞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 저작을 번역하거나 해설할 때는 이 구절을 보통 다음과 같이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여호와의 음성은 선한 애정들(암사슴들)로 하여금 열매를 맺게 하고, 사람 안에 숨겨진 것들(삼림)을 드러내신다.’

 

 

 

AC.219, 심화 6, ‘사30:30-31’

AC.219.심화 6. ‘사30:30-31’ 30여호와께서 그의 장엄한 목소리를 듣게 하시며 혁혁한 진노로 그의 팔의 치심을 보이시되 맹렬한 화염과 폭풍과 폭우와 우박으로 하시리니 31여호와의 목소리에 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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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9, 심화 4, ‘시29:3-5, 7-9’

AC.219.심화 4. ‘시29:3-5, 7-9’ 3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우렛소리를 내시니 여호와는 많은 물 위에 계시도다 4여호와의 소리가 힘 있음이여 여호와의 소리가 위엄차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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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29:3-5, 7-9

 

3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우렛소리를 내시니 여호와는 많은 물 위에 계시도다 4여호와의 소리가 힘 있음이여 여호와의 소리가 위엄차도다 5여호와의 소리가 백향목을 꺾으심이여 여호와께서 레바논 백향목을 꺾어 부수시도다, 7여호와의 소리가 화염을 가르시도다 8여호와의 소리가 광야를 진동하심이여 여호와께서 가데스 광야를 진동시키시도다 9여호와의 소리가 암사슴을 낙태하게 하시고 삼림을 말갛게 벗기시니 그의 성전에서 그의 모든 것들이 말하기를 영광이라 하도다 (29:3-5, 7-9) The voice of Jehovah is upon the waters; the voice of Jehovah is in power; the voice of Jehovah is in glory; the voice of Jehovah breaketh the cedars; the voice of Jehovah divideth the flames of fire; the voice of Jehovah maketh the wilderness to shake; the voice of Jehovah maketh the hinds to calve and uncovereth the forests (Ps. 29:3–5, 7–9).

 

 

이 구절을 AC.219에서 인용한 이유는, 말씀에서 ‘여호와의 소리(voice of Jehovah)가 단순한 음향이나 천둥소리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 작용하는 신적 진리와 계시, 그리고 내적 딕테이트(interior dictate)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문자적으로 이 시편은 폭풍우가 지나가는 장면처럼 보입니다. 천둥이 울리고, 백향목이 꺾이고, 광야가 흔들리고, 불꽃이 갈라지는 장엄한 자연 현상이 묘사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자연 현상에 대한 시적 묘사로만 보지 않습니다. 그는 여기에 인간의 영혼과 교회 안에서 역사하는 신적 진리의 작용이 담겨 있다고 봅니다.

 

먼저 ‘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다’는 말에서 ‘’은 말씀의 진리와 신앙의 지식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음성이 물 위에 있다는 것은 신적 진리가 인간의 이해와 신앙 위에 역사하는 것을 뜻합니다.

 

여호와의 소리가 힘 있음이여, 위엄차도다’라는 것은 진리 자체가 가진 능력을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진리는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사람을 변화시키는 영적 힘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음성은 언제나 힘 있고 영광스럽습니다.

 

여호와의 소리가 백향목을 꺾으신다’는 표현도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백향목은 말씀에서 흔히 인간의 높은 지성과 자랑스러운 이성적 능력을 상징합니다. 특히 레바논의 백향목은 인간이 자랑하는 지혜와 학식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음성이 그것을 꺾는다는 것은, 주님의 진리가 인간 own의 교만한 지혜와 자기 확신을 무너뜨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호와의 소리가 화염을 가르신다’는 말에서 화염은 사랑과 욕망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진리가 인간 안의 사랑과 욕망을 분별하고 드러내는 작용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진리는 무엇이 천국적 사랑이고, 무엇이 자기 사랑인지를 밝혀 줍니다.

 

또한 ‘여호와의 소리가 광야를 진동시킨다’라는 것은 영적으로 황폐한 상태를 흔들어 깨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광야는 진리와 선이 부족한 상태를 상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음성은 죽어 있는 양심을 흔들고, 잠든 영혼을 깨우는 역할을 합니다.

 

특히 AC.219의 문맥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여호와의 소리가 암사슴을 낙태하게 하시고 삼림을 벗기신다’는 구절입니다. 오늘날 번역으로는 다소 낯설게 들리지만,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영적 출산의 이미지로 읽습니다. 암사슴은 선한 애정과 순수한 정서를 상징하며, 새끼를 낳게 한다는 것은 선한 것들이 실제 삶 속에 태어나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면 숲을 벗긴다는 것은 감추어진 것들을 드러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시29 전체는 폭풍의 시가 아니라, 여호와의 음성이 인간 안에서 어떻게 역사하는지를 보여 주는 시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물 위에서 진리를 가르치고, 교만한 백향목을 꺾고, 광야를 흔들고, 새로운 생명을 태어나게 하며, 숨겨진 것들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AC.219에서 이 구절을 인용한 이유는, 창3:8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동산에서 거니시는 음성’이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 음성은 아담과 하와 안에 남아 있던 마지막 지각, 곧 퍼셉션의 흔적을 깨우는 내적 딕테이트였으며, 시29의 여호와의 음성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내면을 비추고, 흔들고, 드러내고, 때로는 책망하는 신적 진리의 작용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여호와의 음성’은 귀로 듣는 소리라기보다, 영혼이 듣는 진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AC.219는 바로 그 사실을 시29를 통해 입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AC.219, 심화 5, ‘암사슴을 낙태하게 하시고’

AC.219.심화 5. ‘암사슴을 낙태하게 하시고’ 영어 성경과 달리 한글 성경에서는 ‘낙태’로 번역한 이유는? 좋은 질문입니다. 사실 여기에는 번역상의 문제라기보다 원문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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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9, 심화 3, ‘시68:32-33’

AC.219.심화 3. ‘시68:32-33’ 32땅의 왕국들아 하나님께 노래하고 주께 찬송할지어다 33옛적 하늘들의 하늘을 타신 자에게 찬송하라 주께서 그 소리를 내시니 웅장한 소리로다 (시68:32, 33) Sing unto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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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68:32-33

 

32땅의 왕국들아 하나님께 노래하고 주께 찬송할지어다 33옛적 하늘들의 하늘을 타신 자에게 찬송하라 주께서 그 소리를 내시니 웅장한 소리로다 (68:32, 33) Sing unto God, sing praises unto the Lord, who rideth upon the heavens of heavens which were of old; lo, he shall send out his voice, a voice of strength (Ps. 68:32–33).

 

 

이 구절을 AC.219에서 인용한 이유는, 말씀에서 ‘음성(voice)이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계시(revelation)와 내적 딕테이트(interior dictate)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특별히 이 구절 가운데 ‘옛적 하늘들의 하늘(the heavens of heavens which were of old)이라는 표현에 주목합니다. 그는 이것을 단순히 아주 높은 하늘이라는 뜻으로 보지 않고, 태고교회(Most Ancient Church)의 지혜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후대 사람들과 달리 지각(perception)을 통해 주님의 뜻을 직접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옛적 하늘들의 하늘을 타신 자’라는 표현은 태고교회에 알려졌던 주님의 신적 통치와 인도를 가리키며, 이어지는 ‘그가 그의 음성을 내신다’는 말은 단순한 소리의 발성이 아니라 주님의 계시와 내적 가르침을 의미합니다.

 

특히 AC.218-219의 흐름 속에서 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창3:8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동산에서 거니시는 음성’은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내적 딕테이트였습니다. 따라서 AC.219는 여러 성경 구절을 인용하여 ‘음성’이 원래부터 계시와 양심, 내적 깨달음을 의미하는 표현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여기서 ‘웅장한 소리(a voice of strength)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히 큰 소리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strength)은 진리가 가진 능력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진리는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을 깨우고, 거짓을 무너뜨리고, 선을 일으키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음성은 언제나 ‘힘 있는 음성’입니다.

 

더 나아가 이 구절은 태고교회와의 연결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습니다. AC.218에서는 타락한 후손들에게도 아직 퍼셉션의 잔재가 남아 있었음을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AC.219에서는 ‘옛적 하늘들의 하늘’을 언급함으로써, 그 퍼셉션이 원래 어디에서 왔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것은 태고교회가 누렸던 주님과의 직접적인 교통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따라서 AC.219에서 시68:32-33을 인용한 이유는, ‘여호와의 음성’이 단순한 청각적 소리가 아니라 계시와 내적 딕테이트를 의미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이며, 특별히 ‘옛적 하늘들의 하늘’이라는 표현을 통해 태고교회 사람들이 가졌던 지각(perception)과 주님의 계시 사이의 관계를 암시하기 위해서입니다.

 

어쩌면 목사님께서 지금까지 AC.190 이후 계속 따라오신 흐름 속에서 보면, 이 구절은 매우 아름답게 읽힙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의 음성을 바깥에서 들은 것이 아니라 안에서 알았습니다. 그것이 퍼셉션이었습니다. 그리고 타락 후에도 그 흔적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창3:8에서 아담과 하와가 두려워했던 바로 그 ‘음성’은, 사실 태고교회 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주님의 내적 부르심의 마지막 메아리였던 것입니다.

 

 

 

AC.219, 심화 4, ‘시29:3-5, 7-9’

AC.219.심화 4. ‘시29:3-5, 7-9’ 3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우렛소리를 내시니 여호와는 많은 물 위에 계시도다 4여호와의 소리가 힘 있음이여 여호와의 소리가 위엄차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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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9, 심화 2, ‘계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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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0:7

 

일곱째 천사가 소리 내는 날 그의 나팔을 불려고 할 때에 하나님이 그의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하나님의 그 비밀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 (10:7) In the days of the voice of the seventh angel the mystery of God shall be consummated (Rev. 10:7).

 

 

이 구절을 AC.219에서 인용한 이유는, 말씀에서 ‘음성(voice)이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는 계시와 진리의 선포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창3:8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동산에서 거니시는 음성’을 설명하면서, ‘음성’이 말씀 전체에서 어떤 의미로 사용되는지를 여러 구절을 통해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계10:7을 인용하며, ‘일곱째 천사의 음성’ 역시 단순한 발성 행위가 아니라 신적 진리의 계시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일곱째 천사의 음성’과 ‘하나님의 비밀이 이루어진다’는 말이 연결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만일 음성이 단순한 소리라면, 왜 그 음성과 함께 하나님의 비밀이 성취되겠습니까?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점을 근거로, 음성이란 계시의 전달, 진리의 선포, 주님의 뜻이 드러나는 작용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또한 ‘일곱째’라는 표현은 스베덴보리의 상응 체계에서 완성이나 충만함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일곱째 천사의 음성’은 하늘의 진리가 완전하게 드러나는 마지막 상태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비밀’은 주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해 미리 알려 주셨던 구원의 계획과 교회의 참된 상태가 밝혀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AC.219의 문맥에서는 이것이 창3의 내적 의미와 연결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들은 ‘여호와의 음성’은 자기들의 상태를 깨닫게 하는 내적 지시, 딕테이트였습니다. 마찬가지로 계10:7의 ‘일곱째 천사의 음성’도 진리를 드러내고 숨겨진 것을 밝히는 계시의 음성입니다. 규모는 다르지만, 원리는 같습니다. 음성은 언제나 무엇인가를 알게 하고 드러내며 깨닫게 하는 작용입니다.

 

특히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비밀’은 결코 사람들에게서 영원히 숨겨져 있는 비밀이 아닙니다. 그것은 적절한 때가 되면 계시되어야 하는 진리입니다. 따라서 ‘음성’은 단순한 전달 수단이 아니라, 숨겨진 것을 드러내는 신적 작용 자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AC.219에서 이 구절은 ‘음성’이 곧 계시와 내적 딕테이트를 의미한다는 증거로 사용됩니다. 창세기에서는 그 음성이 양심과 퍼셉션의 형태로 들렸고, 요한계시록에서는 천사의 선포와 비밀의 성취라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둘 다 본질적으로는 주님께서 인간에게 진리를 알리시고, 숨겨진 것을 드러내시며, 사람을 깨우시는 동일한 신적 작용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한 핵심 이유는, 말씀의 ‘음성’이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계시와 진리의 전달이며, 사람의 내면에서는 양심과 내적 딕테이트로, 교회 전체 차원에서는 하나님의 비밀을 드러내는 선포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는 창3:8의 ‘여호와의 음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왜냐하면 아담과 하와가 들은 것도 결국 그들의 상태를 비추어 주는 주님의 계시의 음성이었기 때문입니다.

 

 

 

AC.219, 심화 3, ‘시68:32-33’

AC.219.심화 3. ‘시68:32-33’ 32땅의 왕국들아 하나님께 노래하고 주께 찬송할지어다 33옛적 하늘들의 하늘을 타신 자에게 찬송하라 주께서 그 소리를 내시니 웅장한 소리로다 (시68:32, 33) Sing unto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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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9, 심화 1, ‘계10:3’

AC.219.심화 1. ‘계10:3’ 사자가 부르짖는 것같이 큰 소리로 외치니 그가 외칠 때에 일곱 우레가 그 소리를 내어 말하더라 (계10:3) The angel cried with a loud voice, as a lion roareth, and when he had cried seven th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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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0:3

 

사자가 부르짖는 것같이 큰 소리로 외치니 그가 외칠 때에 일곱 우레가 그 소리를 내어 말하더라 (10:3) The angel cried with a loud voice, as a lion roareth, and when he had cried seven thunders uttered their voices (Rev. 10:3),

 

 

이 구절을 AC.219에서 인용한 이유는, 말씀에서 ‘음성(voice)이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는 계시, 진리의 선포, 그리고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내적 딕테이트(interior dictate)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창3:8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동산에서 거니시는 음성’을 설명하면서, 말씀 전체에서 ‘여호와의 음성’이 어떤 의미로 사용되는지를 여러 구절을 통해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계10:3입니다.

 

여기서 ‘천사가 큰 소리로 외친다’는 것은 단순한 발성 행위가 아닙니다. 천사는 하늘로부터 오는 계시와 진리를 전달하는 매개자를 의미합니다. 또한 ‘사자가 부르짖는 것같이’라는 표현은 신적 진리가 강력하게 선포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사자는 말씀에서 종종 진리의 능력과 권세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일곱 우레가 자기 음성을 발한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우레(thunder)는 단순한 기상 현상이 아니라, 하늘의 진리가 외적으로는 강력한 소리처럼, 내적으로는 계시와 깨달음처럼 작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AC.219에서는 이 구절을 가리켜 ‘외적 음성과 내적 음성이 함께 있었음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즉 천사의 외침은 외적 계시를, 우레의 음성은 그 계시가 사람의 내면에 울리는 작용을 의미합니다. 외부에서 진리가 선포될 뿐 아니라, 그것이 내면에서도 반향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이 구절은 창3:8과 연결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들은 ‘여호와의 음성’도 단순한 외부의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들의 상태를 깨닫게 하는 내적 딕테이트였습니다. 계10:3의 우레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요한 것은 소리 자체가 아니라, 그 소리가 전달하는 영적 의미와 내적 각성입니다.

 

또한 숫자 ‘일곱’도 의미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 해석에서 ‘일곱’은 충만함, 완전함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일곱 우레’는 진리의 충만한 선포, 또는 하늘로부터 오는 완전한 증언을 상징합니다.

 

흥미롭게도 요한은 이어서 그 우레들이 말한 내용을 기록하려 하자 기록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10:4). 스베덴보리는 이런 부분들을 통해, 어떤 영적 진리들은 단순히 문자로 기록되거나 자연적 언어로 완전히 표현될 수 없음을 시사한다고 보았습니다. 천사들의 언어와 내적 의미의 세계에는 문자적 언어를 초월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AC.219에서 이 구절을 인용한 이유는, ‘음성’이 단순한 청각적 소리가 아니라 신적 진리의 전달이며, 외적으로는 계시로, 내적으로는 양심과 퍼셉션, 내적 딕테이트로 작용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창세기의 아담이 들은 ‘여호와의 음성’과 요한계시록의 ‘일곱 우레의 음성’은 형태는 다르지만, 같은 영적 원리를 가리킵니다. 곧 주님께서 인간에게 진리를 알리시고, 그 진리가 인간의 내면을 흔들고 깨우는 작용인 것입니다.

 

 

 

AC.219, 심화 2, ‘계10:7’

AC.219.심화 2. ‘계10:7’ 일곱째 천사가 소리 내는 날 그의 나팔을 불려고 할 때에 하나님이 그의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하나님의 그 비밀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 (계10:7) In the days 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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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9, 창3:8,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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