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2

‘양 떼의 처음 난 것’(firstlings of the flock, ‘양의 첫 새끼’)이 오직 주님께만 속한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표상교회에서 처음 난 것, 곧 장자에 관한 규례에서 분명합니다. 처음 난 것은 모두 거룩했는데, 이는 그것들이 오직 홀로 ‘장자’(firstborn)이신 주님을 가리켰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거기서 비롯된 신앙이 ‘장자’입니다. 모든 사랑은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며, 인간에게서 오는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주님만이 ‘장자’이십니다. 이것은 고대교회들에서 사람과 짐승의 처음 난 것을 여호와께 거룩한 것으로 드림으로써 표상되었습니다(출13:2, 12, 15). That the “firstlings of the flock” signify that which is of the Lord alone is evident from the firstlings or firstborn in the representative church, which were all holy, because they had relation to the Lord, who alone is the “firstborn.” Love and the faith thence derived are the “firstborn.” All love is of the Lord, and not one whit of it is of man, therefore the Lord alone is the “firstborn.” This was represented in the ancient churches by the firstborn of man and of beast being sacred to Jehovah; (Exod. 13:2, 12, 15)

 

2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태에서 처음 난 모든 것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 12너는 태에서 처음 난 모든 것과 네게 있는 가축의 태에서 처음 난 것을 다 구별하여 여호와께 돌리라 수컷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15그때에 바로가 완악하여 우리를 보내지 아니하매 여호와께서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난 모든 것은 사람의 장자로부터 가축의 처음 난 것까지 다 죽이셨으므로 태에서 처음 난 모든 수컷은 내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려서 내 아들 중에 모든 처음 난 자를 다 대속하리니 (출13:2, 12, 15)

 

또한 속뜻으로 사랑을 의미하는 레위 지파가, 비록 속뜻으로 신앙을 의미하는 르우벤과 시므온보다 나중에 태어났지만, 모든 장자를 대신하여 받아들여지고 제사장직을 맡게 된 것으로도 표상되었습니다(민3:40-45; 8:14-20). and by the tribe of Levi, which in the internal sense signifies love—though Levi was born after Reuben and Simeon who in the internal sense signify faith—being accepted instead of all the firstborn, and constituting the priesthood. (Num. 3:40–45; 8:14–20)

 

40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의 처음 태어난 남자를 일 개월 이상으로 다 계수하여 그 명수를 기록하라 41나는 여호와라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태어난 자 대신에 레위인을 내게 돌리고 또 이스라엘 자손의 가축 중 모든 처음 태어난 것 대신에 레위인의 가축을 내게 돌리라 42모세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대로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태어난 자를 계수하니 43일 개월 이상으로 계수된 처음 태어난 남자의 총계는 이만 이천이백칠십삼 명이었더라 44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45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태어난 자 대신에 레위인을 취하고 또 그들의 가축 대신에 레위인의 가축을 취하라 레위인은 내 것이라 나는 여호와니라 (민3:40-45)

 

14너는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구별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내게 속할 것이라 15네가 그들을 정결하게 하여 요제로 드린 후에 그들이 회막에 들어가서 봉사할 것이니라 16그들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게 온전히 드린 바 된 자라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초태생 곧 모든 처음 태어난 자 대신 내가 그들을 취하였나니 17이스라엘 자손 중에 처음 태어난 것은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내게 속하였음은 내가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태어난 자를 치던 날에 그들을 내게 구별하였음이라 18이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태어난 자 대신 레위인을 취하였느니라 19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취하여 그들을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주어 그들로 회막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봉사하게 하며 또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성소에 가까이 할 때에 그들 중에 재앙이 없게 하려 하였음이니라 20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께서 레위인에 대하여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을 다 따라 레위인에게 행하였으되 곧 이스라엘 자손이 그와 같이 그들에게 행하였더라 (민8:14-20)

 

주님께서 그분의 인성에 관하여 모든 것의 장자이심을 시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Of the Lord as the firstborn of all, with respect to his human essence, it is thus written in David:

 

26그가 내게 부르기를 주는 나의 아버지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 하리로다 27내가 또 그를 장자로 삼고 세상 왕들에게 지존자가 되게 하며 (시89:26-27) He shall call me, my Father, my God, and the rock of my salvation. I will also make him my firstborn, high above the kings of the earth. (Ps. 89:26–27)

 

또 계시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And in John: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계1:5) Jesus Christ the firstborn of the dead, and the prince of the kings of the earth. (Rev. 1:5)

 

예배에서 처음 난 것들은 주님을 의미하고, 교회의 처음 난 것은 신앙을 의미한다는 것을 유의해야 합니다. Observe that the firstborn of worship signify the Lord, and the firstborn of the church, faith.

 

해설

AC.352는 앞의 AC.350에서 ‘양 떼의 처음 난 것’이 왜 ‘오직 주님께만 속한 것’을 의미하는지를 자세히 설명합니다. 처음 난 것, 곧 장자가 거룩한 까닭은 자연적인 출생 순서에서 첫째라는 사실 자체에 어떤 신성함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표상교회에서 처음 난 것은 궁극적으로 오직 홀로 ‘장자’이신 주님을 가리켰기 때문에 거룩했습니다. 그래서 출13:2, 12, 15에서는 사람과 짐승의 처음 난 것을 여호와께 거룩히 구별하여 돌리라고 합니다. ‘이는 내 것이니라’라는 말이 반복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처음 난 것의 거룩함은 인간이나 짐승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표상하는 실재, 곧 모든 거룩함과 생명과 사랑의 근원이신 주님에게 있습니다.

 

이 번호의 중심 문장은 ‘사랑과 거기서 비롯된 신앙이 장자입니다’라는 말과 그 뒤에 이어지는 ‘모든 사랑은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며, 인간에게서 오는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라는 선언입니다. 여기서 ‘거기서 비롯된’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태고교회의 본래 질서에서 신앙은 사랑과 독립된 별개의 생명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 안에서 신앙에 속한 것들을 퍼셉션으로 알았으며, 그러므로 신앙은 사랑에서 비롯되고 사랑으로부터 생명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가인을 통하여 살펴본 문제와도 정확하게 맞닿아 있습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 자체가 존재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본래 사랑 안에서 살아 있던 신앙을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인식하고 점차 사랑에서 분리하여 독립적인 것으로 만든 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랑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말을 인간에게 실제 사랑이나 체어리티가 없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실제로 이웃을 사랑하고 자비를 베풀며 선을 행합니다. 다만 그 사랑의 최초 근원과 생명이 인간의 proprium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사랑과 선을 끊임없이 주시며, 인간은 그것을 자유롭게 받아 마치 자기에게서 사랑하고 행하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참된 체어리티는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수동성이 아니라, 실제로 사랑하고 선을 행하면서도 그 선의 생명을 자기 공로로 돌리지 않는 상태입니다. ‘내가 이만큼 사랑했고 이만큼 선을 행했다’는 자기 의보다 ‘이 선의 근원은 주님께 있습니다’라는 인정이 깊어지는 것이 참된 질서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아벨이 ‘양 떼의 처음 난 것’을 드렸다는 말도 단순히 가장 좋은 것을 하나님께 바쳤다는 도덕적 교훈보다 훨씬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아벨은 체어리티를 의미하고, 그가 드린 처음 난 것은 오직 주님께 속한 거룩한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체어리티 안에 있는 사람은 자기 안의 참된 사랑과 선을 자기 고유의 것으로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주님께서 주신 것을 우리가 소유했다가 다시 주님께 돌려드린다는 식으로 이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히려 선을 실제로 행하면서도 그 선의 생명과 근원이 처음부터 주님께 있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처음 난 것은 여호와의 것’이라는 표상이 가르치는 중요한 내적 질서입니다.

 

AC.352에서 특히 흥미로운 것은 레위 지파에 관한 설명입니다. 자연적인 출생 순서에서 야곱의 장자는 르우벤이고, 그다음이 시므온이며, 레위는 셋째입니다. 그런데 속뜻에서는 레위가 사랑을, 르우벤과 시므온이 신앙에 속한 것을 의미합니다. 실제 이스라엘 역사에서도 주님께서는 모든 처음 태어난 자 대신 레위인을 취하시고 그들에게 성막 봉사의 직무를 맡기셨습니다(민3:40-45; 8:14-20). AC.352가 이 말씀들을 인용하는 이유는 단순히 레위 지파의 제사장직 기원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자연적인 출생 순서와 영적인 내적 질서가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내적인 생명의 질서에서는 사랑이 신앙의 생명과 근원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사랑이 먼저다’라는 말을 시간적인 순서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이 언제 사랑을 느끼고 언제 신앙의 진리를 배우는가 하는 시간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후대의 영적 인간에게는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체어리티로 나아가는 중요한 길이 됩니다. 그러나 진리가 먼저 의식에 들어온다고 해서 진리가 선보다 본질적으로 우위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내적·생명적 질서에서는 선과 사랑이 진리에 생명을 줍니다. 이것이 르우벤과 시므온보다 나중에 태어난 레위가 모든 장자를 대신하는 표상을 통하여 드러나는 핵심입니다. 여기서는 태고교회의 천적 질서와 후대 영적 인간의 거듭남 순서를 하나의 시간 공식으로 섞기보다, ‘외적으로 먼저 나타나는 것’과 ‘내적으로 생명을 주는 것’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앞의 AC.342와도 연결됩니다. 거기서는 르우벤이 신앙을, 시므온이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을, 레위가 체어리티를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순서를 ‘신앙 → 행위 → 체어리티’라는 자동적인 세 단계 공식으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AC.352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연적인 출생에서는 르우벤과 시므온이 먼저이지만, 사랑을 의미하는 레위가 모든 장자를 대신합니다. 이것은 신앙이 불필요하다는 뜻이 아니라 신앙이 참된 신앙으로 살아 있으려면 사랑으로부터 생명을 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랑과 신앙은 서로 경쟁하여 하나가 다른 하나를 제거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을 이루어야 합니다. 다만 신앙이 사랑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이 신앙에 생명을 주고, 신앙의 진리는 그 사랑이 무엇이 참된 선인지를 알고 바르게 행하도록 섬깁니다.

 

이제 AC.352 마지막의 중요한 주의 사항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예배에서 처음 난 것들은 주님을 의미하고, 교회의 처음 난 것은 신앙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상응을 고정된 암호표처럼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좋은 예이기도 합니다. ‘장자’라는 말이 나온다고 언제나 기계적으로 하나의 의미만 대입할 수 없습니다. 예배에서 처음 난 것을 여호와께 거룩하게 드리는 표상에서는 그것이 궁극적으로 주님을 가리킵니다. 반면 교회에서 생겨나는 ‘처음 난 것’이라는 측면에서는 신앙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AC.338에서 가인을 태고교회의 첫 번째 자손, 곧 신앙이라고 한 것도 이 두 번째 의미와 연결됩니다. 그러나 교회의 처음 난 것이 신앙이라고 해서 신앙이 사랑보다 독립적이거나 우월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로 그 오해가 가인의 길입니다.

 

시89:26-27과 계1:5의 인용은 이 모든 ‘처음 난 것’의 표상이 궁극적으로 누구를 향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특히 주님의 인성에 관하여 그분이 모든 것의 장자이심을 말합니다. 시편은 ‘내가 또 그를 장자로 삼고 세상 왕들에게 지존자가 되게 하며’라고 하고,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분이라고 부릅니다. 이 두 말씀은 각각 별도의 장자론을 전개하기 위해 인용된 것이 아니라, 예배에서 처음 난 것이 왜 궁극적으로 주님을 표상하는지를 확증합니다. 따라서 출13장, 민3장과 8장, 시89편, 계1장의 여러 인용은 모두 ‘처음 난 것의 거룩함은 주님에게서 비롯된다’는 하나의 중심을 향합니다.

 

이렇게 보면 AC.352는 가인과 아벨의 대조를 한층 더 깊게 합니다. 가인의 길은 사랑에서 비롯된 신앙을 사랑과 분리하여 그 자체로 독립시키는 길이었습니다. 반면 아벨은 체어리티이고 그가 드리는 것은 ‘양 떼의 처음 난 것’, 곧 오직 주님께 속한 거룩한 것입니다. 따라서 아벨의 제물에는 ‘내 안에 있는 참된 사랑과 선의 근원은 내가 아니라 주님이시다’라는 내적 인정이 들어 있습니다. 가인이 신앙을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붙들었다면, 아벨의 예배는 선과 사랑의 생명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질서를 인정합니다. 그래서 두 제물의 차이는 단지 체어리티가 있느냐 없느냐뿐 아니라, 영적 생명의 근원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 하는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이 원리는 우리의 AC 공부와 신앙생활에도 매우 직접적입니다. 말씀의 속뜻을 알고 상응을 이해하며 신앙과 체어리티, 퍼셉션과 거듭남의 질서를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게 되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지식 때문에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깊은 진리를 알고 있다고 여기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자기 것으로 붙들 위험에 놓입니다. 반대로 진리를 알수록 자신의 선함과 지혜를 자기에게 돌리지 않고, 모든 참된 사랑과 진리의 근원이 주님께 있음을 더 깊이 인정하게 된다면 그 지식은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참된 지식은 인간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더욱 바라보게 합니다.

 

결국 AC.352의 중심은 매우 분명합니다. ‘왜 처음 난 것이 거룩한가?’ 그것이 자연적인 첫째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주님께 속한 것을 표상하기 때문입니다. ‘왜 사랑과 거기서 비롯된 신앙이 장자인가?’ 모든 사랑의 근원이 주님이시며 참된 신앙은 그 사랑으로부터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왜 장자가 아닌 레위가 모든 장자를 대신하는가?’ 자연적인 출생 순서보다 사랑과 신앙의 내적 질서가 더 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왜 주님만이 참으로 장자이신가?’ 모든 사랑과 선과 거룩함의 처음과 근원이 오직 주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벨이 양 떼의 처음 난 것을 드리는 장면은 결국 인간 안에 있는 모든 참된 선의 생명을 자기에게 돌리지 않고 주님께 인정하는 예배를 보여 줍니다. AC.352가 우리에게 남기는 질문도 여기에 있습니다. ‘내 안에서 발견하는 선과 사랑의 근원을 나는 누구에게 돌리고 있는가?’

 

 

 

AC.353, 창4:4, 아벨이 드린 ‘기름’은 무엇을 뜻하는가 - 사랑에 속한 천적인 것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3‘기름’(fat)은 천적인 것 자체를 의미하며, 이것 역시 주님께 속한 것입니다. 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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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1, 창4:4, ‘체어리티란? - 이웃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여기는 사랑’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1‘아벨’(Abel)이 체어리티를 의미한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했습니다. 체어리티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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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1

‘아벨’(Abel)이 체어리티를 의미한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했습니다. 체어리티는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를 뜻합니다.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이 고통을 당할 때에도 자신의 고통을 대하듯 그를 불쌍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That “Abel” signifies charity has been shown before. By charity is meant love toward the neighbor, and mercy; for he who loves his neighbor as himself is also compassionate toward him in his sufferings, as toward himself.

 

해설

AC.351은 매우 짧은 글이지만, 지금까지 계속 ‘아벨’이라고 불러 온 체어리티가 실제로 어떤 사랑인지를 매우 따뜻하고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앞에서는 아벨이 체어리티를 의미한다고 반복해서 설명했지만, 여기서는 ‘그러면 체어리티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직접 답합니다. 그것은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 자비가 무엇인지를 다시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이 고통을 당할 때에도 자신의 고통을 대하듯 그를 불쌍히 여긴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체어리티는 추상적인 신학 용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고통과 선이 나와 무관하지 않게 되는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먼저 체어리티를 단순히 ‘선행’이라고 번역하거나 이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선행은 체어리티가 외적으로 나타나는 중요한 열매이지만 체어리티 자체는 그보다 더 안쪽에 있습니다. 바로 앞 AC.348에서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에서도 행위가 나올 수 있으며 그러한 행위를 ‘죽은 행위’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외적으로 좋은 일을 했다는 사실만으로 그 행위의 내적 성질까지 곧바로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체어리티는 이웃의 참된 선을 바라는 사랑이며, 그 사랑이 실제 삶에서 행위와 쓰임으로 나타날 때 살아 있는 열매가 됩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와 선행은 분리되어서는 안 되지만 완전히 같은 말도 아닙니다. 체어리티는 선한 행위에 생명을 주는 내적인 사랑이고, 행위는 그 사랑이 자연계의 삶에서 나타나는 열매입니다.

 

AC.351은 여기에 ‘자비’(mercy)를 곧바로 연결합니다. 이것은 체어리티의 중요한 성질을 보여 줍니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단지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는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이웃이 고통을 당할 때 그 고통을 자기와 무관한 일로 밀어내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것이 다른 사람의 모든 감정과 고통을 문자 그대로 똑같이 느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의 성격과 감수성은 다르며, 타인의 고통을 완전히 동일하게 체험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중요한 것은 ‘저 사람의 일이니 나와 상관없다’고 외면하지 않고 그의 어려움과 선을 자신의 관심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비는 단순한 감상이나 순간적인 연민과도 다릅니다. 어떤 사람의 어려운 사정을 듣고 마음이 아픈 것은 귀한 출발일 수 있지만, 체어리티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 사람에게 실제로 무엇이 선한가?’를 묻게 합니다. 때로는 위로하고 곁에 있어 주는 것이 자비이고, 물질적으로 돕는 것이 자비일 수 있습니다. 때로는 잘못된 길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고 진실을 말하는 것이 오히려 그 사람의 참된 선을 위한 체어리티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체어리티는 무조건 상대가 원하는 것을 해 주는 사랑도 아니고, 고통을 없애 주는 것만을 목표로 하는 사랑도 아닙니다. 진리는 무엇이 이웃에게 참된 선인지를 분별하도록 하고, 체어리티는 그 선을 실제로 바라며 행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선과 진리, 체어리티와 신앙은 여기에서도 서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이 점에서 AC.348-351의 흐름은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AC.348에서는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행위가 살아 있는 열매라고 했고, AC.349에서는 외적인 예배가 내적인 것으로부터,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생명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AC.350에서는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과 체어리티에 기초한 모든 예배가 주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AC.351은 그 모든 것의 중심에 있는 체어리티를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라고 설명합니다. 다만 이것을 ‘체어리티 → 행위 → 예배’라는 기계적인 단계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신앙과 행위와 예배가 모두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인과 아벨의 대조도 훨씬 실제적으로 보게 합니다. 아벨이 체어리티를 의미한다는 것은 단지 ‘아벨=선’이라는 추상적인 공식이 아닙니다. 아벨은 이웃을 사랑하고 그의 고통을 자기 일처럼 돌아보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이후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의 속뜻도 더욱 무겁게 다가옵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소멸시키는 것은 단순히 ‘체어리티’라는 신학 용어 하나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선을 진심으로 바라며 그의 고통 앞에서 마음이 움직이는 교회의 생명입니다. 교리가 남고 신앙 고백이 남고 예배까지 남아 있으면서도 이웃의 고통과 선에는 무관심해질 수 있다는 것이 가인의 이야기가 보여 주는 위험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다른 사람을 쉽게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이 감정을 많이 표현하지 않는다고 해서 체어리티가 없다고 할 수 없고, 눈물을 잘 흘리거나 공감을 잘 표현한다고 해서 반드시 더 깊은 체어리티 안에 있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사람마다 성격과 표현 방식이 다릅니다. AC.351의 핵심은 감정 표현의 정도가 아니라 이웃의 고통과 선을 자기와 무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사랑입니다. 조용히 필요한 일을 해 주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잘못된 선택으로 더 큰 고통에 빠지지 않도록 단호하게 돕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체어리티의 외적인 모습은 다양할 수 있지만 그 안에는 이웃의 참된 유익을 원하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사랑의 근원을 인간 자신에게 돌리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로 앞 AC.350에서 ‘양 떼의 처음 난 것’이 의미하는 거룩한 것도, ‘기름진 것’이 의미하는 천적인 것도 오직 주님께 속한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참된 체어리티의 근원도 주님이십니다. 인간이 자기 힘으로 마음을 짜내어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받아들이고 자기중심적인 사랑을 물리치는 거듭남의 과정을 통하여 조금씩 이웃의 선을 자기 일처럼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선한 일을 했을 때에도 ‘나는 원래 사랑이 많은 사람이다’라고 자기에게 공로를 돌리기보다 그 선을 행할 수 있게 하신 주님을 인정하는 것이 체어리티의 질서와도 맞습니다.

 

AC.351은 목회와 교회의 삶을 돌아보는 데에도 매우 실제적인 기준을 줍니다. 교회는 진리를 가르쳐야 하고 바른 교리를 보존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사람을 이웃의 고통에 더 무감각하게 만들고, 교리적으로 다른 사람을 쉽게 멸시하게 하며, 어려움에 처한 사람의 형편보다 자기 입장의 옳음을 증명하는 데 더 몰두하게 한다면 우리는 그 신앙이 체어리티와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반대로 체어리티를 말한다는 이유로 진리를 중요하지 않게 여겨서도 안 됩니다. 참된 사랑은 이웃에게 실제로 무엇이 선한지를 알아야 하며, 그 분별에는 진리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체어리티를 인도하고 체어리티는 진리에 생명을 줍니다.

 

특히 ‘이웃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이라는 표현은 우리가 가까운 사람에게만 적용하기 쉽습니다. 가족이나 친한 사람의 아픔에는 자연스럽게 마음이 움직이지만, 나와 생각이 다르거나 나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의 고통에는 훨씬 쉽게 무관심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체어리티는 단순한 자연적 호감과 같지 않습니다. 누구에게나 똑같은 방식으로 행동한다는 뜻도 아니지만, 적어도 상대방을 하나의 영혼을 가진 이웃으로 보고 그의 참된 선을 바라는 데까지 우리를 이끕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체어리티는 자연적인 인정이나 친밀감을 넘어 영적인 사랑이 됩니다.

 

결국 AC.351은 ‘아벨’이라는 이름에 담긴 체어리티를 아주 실제적인 언어로 풀어 줍니다. 체어리티는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이며,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사람은 그의 고통을 자기와 무관한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단순한 감정적 연민으로 축소해서도 안 됩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주님에게서 오며, 진리의 인도를 받아 이웃의 참된 선을 바라며, 실제 삶에서 그 선을 위한 행위와 쓰임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결합은 두 신학 개념을 올바르게 배열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알고 믿는 진리가 마침내 다른 사람의 선과 고통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과 삶을 바꾸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AC.351이 우리에게 묻는 것은 매우 단순하면서도 깊습니다. ‘내게 이웃의 고통은 여전히 남의 일인가, 아니면 그의 참된 선이 나에게도 중요해지고 있는가?’입니다.

 

 

 

AC.352, 창4:4, ‘왜 장자가 거룩했는가 - 모든 사랑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2‘양 떼의 처음 난 것’(firstlings of the flock, ‘양의 첫 새끼’)이 오직 주님께만 속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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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0, 창4:4, ‘왜 주님께서는 아벨의 제물을 받으셨는가 - 체어리티에 기초한 참된 예배’(AC.350-3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And Abel, he also brought of the firstlings of his flock, and of the fat thereof; and Jehovah looked to Abel, and to his off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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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And Abel, he also brought of the firstlings of his flock, and of the fat thereof; and Jehovah looked to Abel, and to his offering. (창4:4)

 

AC.350

여기서 ‘아벨’(Abel)은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체어리티를 의미합니다. ‘양 떼의 처음 난 것’(firstlings of the flock, ‘양의 첫 새끼’)은 거룩한 것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오직 주님께만 속한 것입니다. ‘기름진 것’(fat, ‘기름’)은 천적인 것 자체를 의미하며, 이것 역시 주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셨다’(Jehovah looking unto Abel, and to his offering,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는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과 체어리티에 기초한 모든 예배가 주님을 기쁘시게 했음을 뜻합니다. By “Abel” here as before is signified charity; and by the “firstlings of the flock” is signified that which is holy, which is of the Lord alone; by “fat” is signified the celestial itself, which also is of the Lord; and by “Jehovah looking unto Abel, and to his offering,” that the things of charity, and all worship grounded in charity, were well-pleasing to the Lord.

 

해설

AC.350은 창4:4의 아벨의 제물을 개괄하면서 바로 앞에서 살펴본 가인의 제물과 정반대의 예배를 보여 줍니다. AC.346-349에서는 가인의 ‘땅의 소산’과 ‘제물’을 통하여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에서도 행위와 예배가 나올 수 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는 체어리티의 생명이 없기 때문에 ‘죽은 행위’이고, 내적인 것이 없는 외적 예배 역시 그 자체로 생명을 가진 예배가 아닙니다. 이제 아벨의 제물에서는 그 반대편이 나타납니다. ‘아벨’은 체어리티를, ‘양 떼의 처음 난 것’은 주님께만 속한 거룩한 것을, ‘기름진 것’은 역시 주님께 속한 천적인 것 자체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아벨의 제물은 단순히 가인의 것보다 더 좋은 물질을 드린 제사가 아니라 체어리티에 기초한 살아 있는 예배를 표상합니다.

 

먼저 ‘아벨’은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체어리티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아벨을 단순히 ‘착한 사람’, 가인을 ‘나쁜 사람’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아벨은 그 신앙의 생명이 되어야 할 체어리티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두 형제의 제물은 서로 다른 직업을 가진 두 개인이 서로 다른 물건을 하나님께 바친 사건의 차원을 넘어, 서로 다른 내적 근원에서 나오는 두 종류의 예배를 보여 줍니다. 가인의 예배에는 외적 행위와 제물이 있었지만 체어리티의 생명이 없었고, 아벨의 예배는 체어리티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곡식과 양 가운데 어느 것이 더 거룩한가가 아니라 그 예배를 살아 있게 하는 내적 생명이 무엇인가입니다.

 

‘양 떼의 처음 난 것’에서 스베덴보리는 ‘처음 난 것’이 거룩한 것을 의미한다고 하면서 곧바로 ‘그것은 오직 주님께만 속한 것’이라고 덧붙입니다. 이 짧은 말은 AC.350 전체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에게 참된 선과 사랑과 체어리티가 있다면 그 근원은 인간 자신에게 있지 않습니다. 인간이 자기 힘으로 거룩함을 생산하여 그것을 주님께 바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삶으로 행하면서, 그 선이 자기 자신의 고유한 선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 참된 질서입니다. 그러므로 아벨이 ‘처음 난 것’을 드린다는 것은 인간의 공로를 드러내는 장면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거룩함의 근원이 주님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선을 행하면서 ‘내가 선하다’고 자기에게 돌리는 것과, 마치 자기에게서 행하는 것처럼 자유롭게 행하면서도 그 선의 근원이 주님임을 인정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어지는 ‘기름진 것’은 ‘천적인 것 자체’를 의미합니다. 여기서도 스베덴보리는 다시 ‘이것 역시 주님께 속한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처음 난 것’의 거룩함도 주님의 것이고 ‘기름진 것’이 의미하는 천적인 것도 주님의 것입니다. 천적인 것은 이 문맥에서 주님을 향한 사랑과 그 사랑에 속한 선이라는 중심에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따라서 아벨이 양 떼의 처음 난 것과 그 기름진 것을 드렸다는 것은 단순히 가장 좋은 부분을 골라 바쳤다는 의미가 아니라, 예배의 내적 생명이 주님에게서 오는 거룩함과 사랑의 선에 있음을 나타냅니다. 여기서도 자연적인 제물의 품질보다 그것이 표상하는 내적인 것이 중심입니다.

 

이것은 AC.349의 핵심 원리와 정확하게 이어집니다. 거기서 스베덴보리는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들로부터 생명을 얻으며, 곧 그것들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생명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AC.350의 아벨의 제물은 바로 그 원리를 보여 줍니다. 외적으로는 양 떼의 처음 난 것과 기름진 것을 드리지만, 그 예배를 살아 있게 하는 것은 체어리티와 천적인 선이며 그 모든 것의 근원은 주님입니다. 따라서 외적 예배와 내적 예배를 서로 대립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을 담고 표현하는 그릇이며, 내적인 것이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을 때 그 외적인 예배 역시 살아 있는 예배가 됩니다. 문제는 외적인 예배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그 외적인 것 안에 무엇이 살아 있는가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셨다’는 말씀도 이 질서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과 체어리티에 기초한 모든 예배가 주님을 기쁘시게 했다’는 뜻으로 풀이합니다. 이것을 주님께서 어떤 종류의 제물을 보시고 마음이 바뀌어 아벨에게는 호의를 보이시고 가인에게는 호의를 거두셨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사랑과 선은 변하지 않습니다. 차이는 주님 쪽의 사랑이 아니라 인간 쪽의 받아들임에 있습니다. 체어리티에 기초한 예배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사랑을 받아들이는 질서 안에 있기 때문에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라고 표현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예배는 그 생명의 질서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특히 원문의 ‘체어리티에 기초한 모든 예배’(all worship grounded in charity)라는 표현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체어리티는 예배를 드린 뒤 별도로 추가하는 선행 하나가 아닙니다. 예배를 살아 있게 하는 내적 토대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이웃에게 착하게만 하면 예배나 신앙은 필요 없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체어리티 자체도 주님에게서 오며, 진리는 무엇이 참된 선이고 참된 이웃 사랑인지를 가르칩니다. 신앙의 진리와 체어리티의 선이 결합되고 그것이 외적인 예배 안에서 표현될 때 예배는 살아 있게 됩니다. 따라서 AC.350은 신앙을 체어리티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가 본래의 질서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함을 보여 줍니다.

 

이 점에서 가인과 아벨의 제물의 차이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둘 다 여호와께 제물을 드렸으므로 차이는 ‘예배를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가 아닙니다. 가인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제물을 드렸고, 아벨은 체어리티에 기초하여 제물을 드렸습니다. 따라서 창4:3-4를 곡식 제사와 동물 제사의 우열로 읽는 것은 속뜻의 중심을 놓치는 것입니다. 구약의 다른 곳에서는 곡식과 첫 열매 역시 거룩한 제물로 사용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양고기를 곡식보다 좋아하셨기 때문에 아벨의 제물을 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두 제물의 차이는 물질에 있지 않고 그것들이 표상하는 내적 상태에 있습니다.

 

AC.348-350을 함께 놓으면 이 질서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AC.348에서는 체어리티로부터 행하는 것을 살아 있는 열매라고 했습니다. AC.349에서는 외적인 예배가 내적인 것으로부터 생명을 얻으며 궁극적으로 주님에게서 생명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AC.350에서는 아벨의 제물을 통하여 체어리티에 기초한 예배가 주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합니다. 다만 이것을 ‘체어리티 → 행위 → 예배’라는 기계적인 세 단계 공식으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신앙과 행위와 예배가 모두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신앙과 살아 있는 행위와 살아 있는 예배의 생명은 서로 다른 세 근원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모두 주님에게서 옵니다.

 

이 원리는 우리의 예배에도 직접적인 자기 성찰의 기준이 됩니다. 예배의 형식과 말씀의 정확성, 기도와 찬송, 헌금과 봉사는 모두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우리 자신의 의와 경건을 증명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참된 예배는 주님에게서 받은 진리와 선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려 하기보다 그 근원이 주님임을 인정하게 하고, 자기 안의 악을 살펴 피하게 하며,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는 체어리티와 쓰임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그러므로 ‘아벨의 제물을 드린다’는 것을 오늘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무엇인가 특별한 종교적 행위를 더 많이 드린다는 뜻보다 내가 가진 선과 사랑의 근원이 주님임을 인정하고 그 선에 따라 살아가며 주님을 예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AC.350의 중심은 ‘왜 아벨의 제물을 주님께서 받으셨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아벨이라는 개인을 편애하셨기 때문도 아니고, 양의 제물이 땅의 소산보다 본질적으로 우월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아벨’은 체어리티를, ‘양 떼의 처음 난 것’은 오직 주님께만 속한 거룩한 것을, ‘기름진 것’은 역시 주님께 속한 천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셨다’는 것은 체어리티에 속한 것과 체어리티에 기초한 모든 예배가 주님의 질서와 합하며 그분을 기쁘시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체어리티와 거룩함과 천적인 선의 근원 역시 인간에게 있지 않고 주님께 있습니다. 이것이 가인의 예배와 아벨의 예배를 가르는 가장 깊은 차이이며, 동시에 살아 있는 예배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 주는 AC.350의 핵심입니다.

 

 

 

AC.351, 창4:4, ‘체어리티란? - 이웃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여기는 사랑’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1‘아벨’(Abel)이 체어리티를 의미한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했습니다. 체어리티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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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9, 창4:3, ‘제물이 예배를 뜻하는 이유 - 외적 예배는 내적인 것으로부터 생명을 얻습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4:3) AC.349‘제물’(offering)이 예배를 뜻한다는 것은 유대교회의 표상들에서 분명합니다. 그 교회에서는 온갖 종류의 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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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4:3)

 

AC.349

‘제물’(offering)이 예배를 뜻한다는 것은 유대교회의 표상들에서 분명합니다. 그 교회에서는 온갖 종류의 희생 제물뿐 아니라 땅과 그 모든 소산의 첫 열매, 그리고 처음 난 것을 드리는 것도 ‘제물’(offerings)이라 불렀으며, 그들의 예배는 이러한 것들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천국적인 것들을 표상했고, 모두 주님을 가리켰으므로, 이러한 제물들이 참된 예배를 상징했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명합니다. 표상하는 실재가 없다면 표상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또는 내적인 것이 없는 외적 종교가 우상과 같은 것, 죽은 것 외에 무엇이겠습니까?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들로부터 생명을 얻으며, 곧 그것들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생명을 얻습니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표상교회의 모든 제물은 주님을 향한 예배를 상징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에 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앞으로 이어지는 글들에서 각각 자세히 다룰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제물’(offerings)이 예배를 뜻한다는 것은 선지서 전반에서도 분명합니다. 말라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That by an “offering” is meant worship is evident from the representatives of the Jewish church, in which sacrifices of every kind, as well as the first fruits of the earth and of all its produce, and the oblation of the firstborn, were called “offerings,” in which their worship consisted. And as they all represented heavenly things, and all had reference to the Lord, it must be obvious to everyone that true worship was signified by these offerings. For what is a representative without the thing it represents? Or what is an external religion without an internal but a kind of idol and a thing of death? The external has life from things internal, that is, through these from the Lord. From these considerations it is evident that all the offerings of a representative church signify the worship of the Lord; and concerning these of the Lord’s Divine mercy we shall treat in particular in the following pages. That by “offerings” in general is meant worship, is evident in the prophets throughout, as in Malachi:

 

2그가 임하시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3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하게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공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바칠 것이라 4그 때에 유다와 예루살렘의 봉헌물이 옛날과 고대와 같이 나 여호와께 기쁨이 되려니와 (말3:2-4) Who shall abide the day of his coming? He shall sit as a refiner and purifier of silver, and he shall purify the sons of Levi, and purge them as gold and silver, and they shall offer unto Jehovah an offering in righteousness. Then shall the offering of Judah and of Jerusalem be pleasant unto Jehovah, as in the days of eternity, and as in ancient years. (Mal. 3:2–4)

 

‘공의로운 제물’(offering in righteousness)은 내적 제물이며, ‘레위 자손’(sons of Levi), 곧 거룩하게 예배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드릴 것입니다. ‘옛날’(days of eternity)은 태고교회를, ‘고대’(ancient years)는 고대교회를 뜻합니다. 에스겔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An “offering in righteousness” is an internal offering, which the “sons of Levi,” that is, holy worshipers, will offer. The “days of eternity,” signify the most ancient church, and the “ancient years,” the ancient church. In Ezekiel: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그 땅에 있어서 내 거룩한 산 곧 이스라엘의 높은 산에서 다 나를 섬기리니 거기에서 내가 그들을 기쁘게 받을지라 거기에서 너희 예물과 너희가 드리는 첫 열매와 너희 모든 성물을 요구하리라 (겔20:40) In the mountain of my holiness, in the mountain of the height of Israel, there shall all the house of Israel, all that land, worship me; there will I accept them, and there will I require your oblations, and the first fruits of your offerings, in all your sanctifyings. (Ezek. 20:40)

 

‘예물’(Oblations)과 ‘너희가 드리는 첫 열매와 너희 모든 성물’(first fruits of the offerings in the sanctifyings) 역시 주님으로 말미암아 체어리티로 거룩하게 된 행위를 뜻합니다. 스바냐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Oblations” and the “first fruits of the offerings in the sanctifyings” are likewise works sanctified by charity from the Lord. In Zephaniah:

 

내게 구하는 백성들 곧 내가 흩은 자의 딸이 구스 강 건너편에서부터 예물을 가지고 와서 내게 바칠지라 (습3:10) From beyond the rivers of Ethiopia my suppliants shall bring mine offering. (Zeph. 3:10)

 

‘구스’(Ethiopia)는 천적인 것들, 곧 사랑과 체어리티와 체어리티의 행위를 소유한 사람들을 뜻합니다. “Ethiopia” denotes those who are in possession of celestial things, which are love, charity, and the works of charity.

 

해설

AC.349는 AC.346에서 제시한 세 번째 표현, 곧 가인이 ‘여호와께 제물로 드렸다’는 말씀의 속뜻을 본격적으로 설명합니다. AC.346에서는 ‘제물’이 그 신앙에서 비롯된 ‘예배’를 뜻한다고 간단히 밝혔습니다. 이제 AC.349는 왜 말씀에서 제물이 예배를 의미하는지를 유대교회의 표상들을 통하여 설명합니다. 희생 제물뿐 아니라 땅과 그 모든 소산의 첫 열매, 처음 난 것을 드리는 것도 모두 ‘제물’이라고 불렀고, 그러한 것들이 유대교회 예배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외적인 제물 자체가 아닙니다. 그것들은 천국적인 것들을 표상했고 궁극적으로 모두 주님을 가리켰기 때문에 예배를 의미했습니다. 따라서 제물이 예배인 까닭은 제단 위에 어떤 물질을 올려놓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외적인 것이 내적인 거룩한 실재를 표상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표상하는 실재가 없다면 표상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표상은 그것이 가리키는 실재 때문에 의미가 있습니다. 외적인 의식이 사랑과 체어리티와 주님을 향한 예배를 표상한다면, 그 안에는 실제로 그 내적인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질문은 더욱 강합니다. ‘내적인 것이 없는 외적 종교가 우상과 같은 것, 죽은 것 외에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바로 앞 AC.348과 정확하게 연결됩니다. 거기서는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에서 나온 행위를 ‘죽은 행위’라고 했고, 이제 AC.349에서는 내적인 것이 없는 외적 종교를 ‘죽은 것’이라고 합니다. 행위든 예배든 외적인 형식 자체가 생명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을 ‘외적인 예배는 중요하지 않다’거나 ‘내적인 마음만 바르면 예배 형식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요점은 외적인 것을 폐기하는 데 있지 않고 외적인 것이 어디에서 생명을 얻는지를 밝히는 데 있습니다. AC.349의 핵심 문장은 바로 이것입니다.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들로부터 생명을 얻으며, 곧 그것들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생명을 얻습니다.’ 질서는 주님에게서 시작합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선이 사람의 내면에 받아들여지고, 그것이 외적인 예배와 행위 가운데 표현될 때 외적인 것은 살아 있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외적 예배와 내적 예배는 서로 경쟁하는 두 종류의 예배가 아니라, 내적인 것이 외적인 것 안에서 표현되고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하나의 질서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 원리는 가인의 제물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입니다. 가인도 제물을 드렸습니다. 따라서 가인의 문제는 예배가 없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AC.346에서 이미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에서도 행위와 예배가 나올 수 있음을 보았고, AC.348에서는 가인의 ‘땅의 소산’이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죽은 행위를 뜻한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AC.349에서는 그 소산을 여호와께 제물로 드리는 것이 그러한 상태에서 나온 예배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겉으로는 여호와께 드리는 제물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러나 외적 예배의 존재만으로 참된 예배가 성립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외적인 것에 생명을 주는 내적인 것이 무엇이며, 궁극적으로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고 있는가가 문제입니다.

 

말3:2-4, 겔20:40, 습3:10의 인용은 바로 이 한 가지 사실을 여러 방향에서 뒷받침합니다. 말라기의 ‘공의로운 제물’은 스베덴보리에게 ‘내적 제물’을 의미합니다. 그것을 드리는 ‘레위 자손’은 거룩하게 예배하는 사람들이며, ‘옛날’은 태고교회, ‘고대’는 고대교회를 뜻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과거의 제사 형식을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의 내적 본질입니다. 특히 레위가 등장하는 것은 앞의 AC.342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거기서 레위는 체어리티를 의미했고 그 때문에 레위 지파가 제사장직을 맡았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예배와 체어리티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외적인 의식의 정교함이 예배를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가 그 안에 있을 때 예배가 살아 있게 됩니다.

 

겔20:40은 이 관계를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예물’과 ‘첫 열매’를 ‘주님으로 말미암아 체어리티로 거룩하게 된 행위’라고 풀이합니다. 여기에는 AC.348과 AC.349를 연결하는 중요한 질서가 들어 있습니다. AC.348에서는 살아 있는 열매가 ‘체어리티로부터 행하는 것’이라고 했고, 이제 AC.349에서는 그 체어리티의 행위가 다시 ‘주님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체어리티를 인간 자신의 선한 성품이나 공로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참된 선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인간은 주님께서 주시는 선을 자유롭게 받아 마치 자기에게서 행하는 것처럼 행하지만, 그 선의 근원은 주님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행위가 참된 예물이 되고 그 행위와 결합된 외적 예배도 살아 있는 예배가 됩니다.

 

습3:10의 ‘구스’에 대한 설명도 같은 논증을 마무리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구스가 ‘천적인 것들, 곧 사랑과 체어리티와 체어리티의 행위를 소유한 사람들’을 뜻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AC.349에 인용된 여러 말씀을 각각 별개의 주제로 떼어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말라기의 ‘공의로운 제물’, 에스겔의 ‘예물과 첫 열매’, 스바냐의 ‘예물’은 모두 제물의 참된 영적 실재가 사랑과 체어리티와 그 행위에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 함께 인용되었습니다. 외적 제물이 참된 예배를 의미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내적 실재를 담고 표상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AC.346부터 AC.349까지의 흐름도 매우 선명해집니다. AC.346은 ‘날들의 끝에’, ‘땅의 소산’, ‘제물’을 각각 시간의 경과, 체어리티 없는 신앙의 행위, 거기에서 나온 예배라고 개괄했습니다. AC.347은 시간이 흐르면서 신앙이 사랑에서 점점 멀리 분리되는 상태를 설명했고, AC.348은 그 상태에서 나온 ‘땅의 소산’이 왜 죽은 행위인지를 밝혔습니다. 그리고 AC.349는 이제 그러한 행위에서 나온 외적 예배 역시 그 자체로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결국 창4:3 전체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교리 안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행위를 낳고, 더 나아가 예배의 형태까지 만들어 낼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 때문에 가인의 제물 이야기를 ‘가인은 나쁜 것을 드렸고 아벨은 좋은 것을 드렸다’는 물질적 차이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가인의 문제는 곡식을 드렸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땅의 소산 자체가 악한 것도 아니고, 곡식 제물이 본질적으로 열등한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그 제물이 어떤 내적 상태에서 나왔는가입니다. 바로 다음 AC.350부터는 아벨의 제물이 다루어집니다. 가인과 아벨 모두 외적으로는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지만, 하나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오고 다른 하나는 체어리티에 속한 것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두 제물의 차이는 제단 위에 놓인 물질보다 그 예배에 생명을 주는 내적인 것의 차이입니다.

 

오늘날의 예배를 돌아볼 때도 이 원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헌금하고 성찬에 참여하며 설교하고 봉사하는 외적 예배는 모두 소중합니다. 그러나 그 행위 자체가 자동으로 예배에 영적 생명을 부여하지는 않습니다. AC.349가 묻는 것은 ‘예배 형식을 갖추었는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외적인 것에 무엇이 생명을 주고 있는가?’입니다. 예배가 우리를 주님 앞에서 낮추고, 자기 안의 악을 죄로 보아 피하게 하며,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고 실제 체어리티와 쓰임으로 나아가게 한다면 내적인 것이 외적인 것 안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외적 예배는 정교하게 유지하면서도 자기 의와 지배욕과 다른 사람에 대한 멸시를 붙들고 있다면, 우리는 가인의 제물을 다른 사람에게서 찾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의 예배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결국 AC.349의 중심은 ‘예배의 생명은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한 질문으로 압축됩니다. 외적 형식이 스스로 예배를 살아 있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들로부터 생명을 얻으며, 곧 그것들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생명을 얻습니다.’ 이것이 이 번호의 중심 문장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예배는 외적인 것을 버리고 내적인 것만 추구하는 것도 아니고, 외적인 형식만 충실하게 지키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가 내적인 생명이 되고, 그 생명이 외적인 행위와 예배 가운데 표현되는 것이 참된 질서입니다. 가인의 제물은 바로 그 질서가 깨어졌을 때 외적 예배가 어떻게 남아 있을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이제 다음 절의 아벨의 제물은 그와 반대로 체어리티에 기초한 예배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게 됩니다.

 

 

 

AC.350, 창4:4, ‘왜 주님께서는 아벨의 제물을 받으셨는가 - 체어리티에 기초한 참된 예배’(AC.350-3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And Abel, he also brought of the firstlings of his flock, and of the fat thereof; and Jehovah looked to Abel, and to his off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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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8, 창4:3, 가인의 ‘땅의 소산’ - 체어리티 없는 죽은 행위와 살아 있는 열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4:3) AC.348‘땅의 소산’(fruit of the ground)이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를 뜻한다는 것은 이어지는 내용에서도 분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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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이 영상은 처음부터 매우 흥미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인간이 우주를 연구하면서 블랙홀과 빅뱅과 원자의 세계까지 파고들었지만, 정작 가장 가까이 있는 하나의 현상, 곧 ‘내가 지금 무엇인가를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리를 듣고, 색을 보고, 아픔을 느끼고,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그 모든 것을 ‘내가 경험하고 있다’고 압니다. 과학은 그 과정에서 어느 뉴런이 활성화되고 어떤 신경전달물질이 분비되는지를 점점 더 정밀하게 밝힐 수 있지만, 영상이 묻는 것은 그보다 한 걸음 더 깊은 질문입니다. ‘그런 물리적 과정이 왜 느낌을 동반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먼저 한 가지는 분명히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상 제목과 구성에는 리처드 파인만이 전면에 등장하지만, 영상에서 전개하는 ‘의식의 어려운 문제’, 펜로즈와 해머로프의 미세소관 이론, 의식과 양자현상의 관계 등은 파인만 자신의 의식 이론이 아닙니다. 영상 자체도 미세소관을 이용한 양자의식 이론은 파인만이 세상을 떠난 뒤 등장했으므로 그가 알지 못했을 것이라고 밝힙니다. 그러므로 이 영상을 ‘파인만이 말년에 의식의 비밀을 발견했다’는 식으로 읽어서는 곤란합니다. 오히려 파인만은 이 영상에서 하나의 ‘태도’를 대표한다고 보는 편이 좋겠습니다. 곧 자연 앞에서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인정하고, 아름다운 이론이라도 현실과 맞지 않으면 버릴 줄 아는 과학자의 태도입니다.

 

이러한 구별을 하고 나면 오히려 영상의 진짜 가치가 더욱 잘 보입니다. 영상은 과학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과학이 엄청나게 성공했기 때문에 생겨난 새로운 질문을 보여 줍니다. 예를 들어 어머니가 어린아이에게 불러주던 자장가를 생각해 봅니다. 음파의 주파수도 측정할 수 있고, 고막의 진동도 분석할 수 있으며, 청각 신경에서 뇌까지 전달되는 전기적 신호도 추적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그 음악을 들을 때 활성화되는 뇌 영역까지 관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수십 년 뒤 같은 멜로디를 들었을 때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물이 나는 ‘그 느낌 자체’는 어디에 있습니까? 영상은 바로 이 틈을 집요하게 바라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바로 이 지점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은 육체만으로 완결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육체와 뇌가 중요하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살아 있는 동안 인간의 내적 생명은 자연계에서 육체를 통하여 나타나며, 감각기관과 신경계와 뇌는 그 생명이 자연계에서 활동하기 위한 정교한 기관입니다. 따라서 뇌에서 일어나는 물리적·화학적 변화를 발견했다고 해서 영적 인간을 부정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그러한 변화가 일어나도록 인간의 내적 생명이 어떻게 자연적 기관을 사용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이어집니다.

 

이 차이는 ‘원인’과 ‘수단’을 구별하면 조금 더 분명해집니다. 피아노 건반을 누르면 현이 진동하고 공기가 떨리며 우리의 고막도 진동합니다. 이 모든 것을 물리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피아노 내부를 아무리 분해해도 베토벤의 음악을 사랑하는 피아니스트의 마음 자체가 그 안에서 발견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피아노가 필요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피아니스트가 이 자연계에서 음악을 들려주려면 악기가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인간관에서 육체와 뇌도 이와 비슷한 위치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뇌는 하찮은 껍데기가 아니라 인간의 내적 생명이 자연계에서 나타나는 놀랍도록 정교한 기관입니다. 그러나 기관의 작동을 완전히 설명했다고 해서 그 기관을 통하여 나타나는 생명의 근원까지 설명한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영상이 말하는 이른바 ‘의식의 어려운 문제’가 스베덴보리와 뜻밖의 접점을 갖습니다. 빨간 사과를 볼 때 빛의 파장과 망막의 반응과 시각피질의 활동을 모두 설명했다고 합시다. 그래도 ‘왜 나는 빨강을 빨갛게 경험하는가?’라는 질문이 남습니다. 통증 신호가 척수를 따라 올라가는 과정을 모두 추적했다고 해도 ‘왜 그것이 나에게 아픔으로 느껴지는가?’라는 질문은 그대로입니다. 영상은 현대 과학이 바로 이 지점에서 아직 결정적인 답을 갖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라면 여기서 질문 자체를 조금 바꾸었을 것입니다. ‘물질이 어떻게 의식을 만들어내는가?’라고 묻기 전에 ‘과연 물질이 의식을 만들어내는 것인가?’라고 물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큰 차이입니다. 처음부터 뇌가 의식의 생산자라고 전제하면 연구의 방향은 ‘어떤 물질적 과정이 주관적 경험을 만들어내는가?’가 됩니다. 그러나 뇌가 의식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적 생명이 뇌를 통하여 자연계에 나타난다면, 뇌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신경학적 현상은 의식의 ‘생산 과정’이라기보다 의식이 육체적 차원에서 표현되는 ‘상응하는 과정’일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상응’을 단순한 비유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상응은 영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이 서로 닮았다는 정도가 아니라, 내적인 원인이 외적인 결과 안에서 질서 있게 표현되는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생각을 할 때 특정 뇌 영역이 활성화되고, 어떤 정서를 느낄 때 특정 신경전달물질의 변화가 나타난다는 사실은 스베덴보리의 관점과 충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대응 관계가 매우 정교하게 발견될수록 ‘속의 상태가 겉의 기관을 통하여 어떻게 표현되는가?’라는 문제가 더욱 흥미로워집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단계 더 들어가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의 영조차도 자기 안에 독립적으로 생명을 가진 존재는 아닙니다. 이것이 영상의 여러 가설과 스베덴보리의 관점이 결정적으로 갈라지는 곳입니다. 영상은 의식이 뇌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혹시 ‘우주의 가장 근본적인 법칙’과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묻습니다. 그리고 양자 붕괴와 의식을 연결하는 가능성까지 소개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까지는 매우 흥미로운 질문이지만, 여기에서 멈출 수 없습니다. 생명의 궁극적인 근원은 양자장이든 미세소관이든 우주의 어떤 물리적 구조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독특하면서도 핵심적인 가르침 가운데 하나가 바로 ‘생명의 유입’입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끊임없이 받아 살아갑니다. 궁극적으로 생명 자체이신 분은 오직 주님이며, 인간은 그 생명을 자신의 상태에 따라 받아들이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그 생명이 마치 자기 자신의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나는 지금 생각하고 있고, 사랑하고 있고, 선택하고 있으므로 당연히 ‘이 생각도 내 것이고 이 생명도 내 것’이라고 느낍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렇게 느낄 수 있도록 허락된 것이 인간의 자유와 합리성의 토대라고 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영상이 반복해서 말하는 ‘내 안에 진짜 누군가가 있다’는 느낌도 새롭게 읽힙니다. 영상은 마지막 부분에서 ‘이 말들을 듣고 있는 동안 여러분의 그 몸속 안에 진짜 누군가가 존재한다’고 표현합니다. 이 표현은 매우 인상적이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약간의 보완이 필요합니다. 마치 육체라는 상자 안에 영혼이라는 작은 사람이 들어 있는 것처럼 이해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영은 몸 안에 들어 있는 또 하나의 물체가 아닙니다. 오히려 살아 있는 인간 전체의 내적 차원이 영이고, 육체는 그것이 자연계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주어진 외적 형식이라고 이해하는 편이 가깝습니다.

 

따라서 죽음 역시 ‘의식이 꺼지는 사건’으로만 이해되지 않습니다. 육체라는 자연적 기관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는 것이지 인간의 내적 생명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영계에서 만났다고 기록한 사람들은 자신이 여전히 생각하고, 보고, 듣고, 느끼고, 기억하며 살아 있다는 사실을 경험합니다. 오히려 자연계에 있을 때보다 자신이 더욱 온전하게 살아 있다고 느낀다고 그는 거듭 말합니다. 그렇다면 지상에서 뇌와 의식이 그토록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도 다르게 보입니다. 뇌가 영을 만들어내기 때문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영이 활동하려면 뇌와 신경계라는 자연적 기관을 통하여야 하기 때문에 둘의 관계가 그렇게 긴밀하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영상 중간에 등장하는 펜로즈와 해머로프의 ‘조화 객관 환원’, 곧 Orch-OR 이론도 이 점에서 흥미롭습니다. 영상은 뇌세포 내부의 미세소관에서 양자적 과정이 일어나고, 일정한 순간에 양자상태가 붕괴하면서 의식의 순간이 발생할 가능성을 소개합니다. 동시에 뇌처럼 따뜻하고 습하며 복잡한 환경에서 그런 양자적 상태가 충분히 유지될 수 있느냐는 반론도 소개하고, 설령 양자현상이 실제로 존재하더라도 ‘왜 그것이 느낌이 되는가?’라는 근본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고 인정합니다. 바로 이 마지막 인정이 중요합니다.

 

양자역학을 영혼의 증거로 사용하려는 유혹은 상당히 조심해야 합니다. 고전물리학으로 설명하기 어려우니 양자역학을 가져오고, 양자역학이 신비하니 거기에 영혼이나 하나님을 집어넣는 식의 논증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아직 과학이 설명하지 못했다’와 ‘그러므로 영적 세계가 존재한다’ 사이에는 논리적 간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과학이 언젠가 미세소관의 양자현상을 완전히 설명한다고 해서 영계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며, 반대로 Orch-OR 이론이 폐기된다고 해서 영혼이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영적 실재의 근거를 현재 과학의 미해결 영역에 세워 놓으면 과학이 발전할 때마다 신앙의 자리가 줄어드는 이상한 결과가 생깁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훨씬 근본적인 구별을 요구합니다. ‘물질적 과정이 얼마나 정교한가?’와 ‘생명의 근원은 무엇인가?’는 같은 질문이 아닙니다. 과학이 전자를 연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후자는 존재론적인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연적인 것은 그 자체에서 생겨난 독립적 실재가 아니라 영적인 것의 종착점이며 효과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자연계의 가장 미세한 양자현상까지 내려간다고 해서 자동으로 영계에 도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작은 물질도 여전히 자연적 차원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영상이 의식을 ‘우주의 근본적 구성요소’일 가능성으로 확장하는 대목도 흥미롭지만 조심스럽게 읽어야 합니다. 의식을 단순한 뇌의 부산물로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스베덴보리와 가까워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의식을 우주 자체의 속성으로 돌려버리면 자칫 범심론적인 방향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우주는 스스로 살아 있는 신적 존재가 아닙니다. 생명은 주님에게서 나오며, 피조세계는 그 생명을 질서에 따라 받아들입니다. 그러므로 ‘우주가 의식을 갖는다’와 ‘모든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유입된다’는 말은 전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영상 후반의 동물 의식 이야기도 이 점에서 재미있습니다. 문어와 까마귀와 박쥐와 상어는 인간과 다른 감각세계 안에서 살아갑니다. 영상은 이를 통해 인간의 경험만이 의식의 유일한 형태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오만을 낮추는 좋은 지적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단순히 ‘의식의 양’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인간에게는 자연적 감각을 넘어 영적 진리와 선을 받아들이고, 주님을 향하며,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자유와 합리성 안에서 영원한 목적을 향해 형성될 수 있는 내적 차원이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단순히 인간의 ‘의식 볼륨’이 더 크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리고 저는 이 영상에서 특히 AI에 관한 대목이 오늘날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고 봅니다. 영상은 인간의 기억과 행동과 말투를 컴퓨터가 완벽하게 복제한다고 해도 그것이 곧 ‘나’의 의식이 옮겨갔다는 뜻은 아닐 수 있다고 말합니다. 또한 인간처럼 행동하는 기계와 실제로 인간처럼 경험하는 존재를 구별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구별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인간은 정보의 집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평생 쓴 글과 설교와 편지와 음성과 영상을 모두 AI에 학습시켰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 AI가 그 사람의 말투를 완벽하게 재현하고, 가족에게 그 사람이 생전에 했을 법한 말을 하며, 심지어 과거의 기억에 관한 질문에도 정확하게 대답한다고 합시다. 그래도 그것은 그 사람 자신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의 정체성은 단순한 기억 데이터의 총합보다 훨씬 깊습니다. 인간의 중심에는 그가 실제로 사랑하는 것이 있으며, 그의 의지와 이해가 있고, 궁극적으로 그의 지배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사후에도 인간의 인격을 이루는 중심입니다.

 

그래서 ‘마인드 업로딩’을 통한 디지털 불멸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애초부터 불멸의 방향을 잘못 찾은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정보를 컴퓨터에 복사함으로써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영적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육체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 살아갑니다. 문제는 ‘어떻게 나를 복제하여 죽지 않을 것인가?’가 아니라 ‘나는 지금 무엇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형성되고 있는가?’입니다. 사후에 계속되는 것은 컴퓨터에 저장된 내 정보가 아니라 바로 그렇게 형성된 ‘나’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이 영상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스베덴보리의 인간론에 아주 가까운 문 앞까지 옵니다. 영상은 계속해서 ‘정보만으로는 부족하다’, ‘구조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 ‘기계적 처리와 실제 경험은 다르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당신은 종이에 적힌 글씨가 가득한 책이 아니며, 차갑게 재생되는 녹음기도 아니고, 단순히 정보만 처리하는 기계회로도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에 한 문장을 더 붙일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을 살아 있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여기서 과학의 질문과 영적인 질문이 갈라지면서도 서로를 향해 열립니다. 과학은 뇌에서 무엇이 일어나는지를 연구합니다. 그것은 계속 연구되어야 합니다. 뉴런도 연구하고 미세소관도 연구하고 양자현상도 연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 모든 연구를 방해하는 대신 훨씬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그 모든 기관을 통하여 생각하고 사랑하고 느끼는 생명 자체는 어디에서 오는가?’

 

그의 대답은 ‘주님으로부터’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과학이 모르는 자리에 ‘하나님’을 집어넣는 답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은 과학으로 아직 발견하지 못한 하나의 원인이 아니라 ‘생명 자체’이십니다. 모든 피조물은 그분으로부터 존재하며 순간순간 존속합니다. 특히 인간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이도록 창조되었고, 그것을 마치 자기 자신의 것처럼 받아 자유롭게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내가 살아 있다’는 경험은 단순한 생물학적 착각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내가 독립적인 생명의 원천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이렇게 보면 영상의 마지막 장면은 상당히 아름답게 다시 읽힙니다. 밤하늘의 별을 보고, 뺨을 스치는 바람을 느끼고, 어느 순간 문득 ‘아, 내가 지금 살아 있구나’라고 느끼는 평범한 순간을 영상은 ‘우주가 숨겨둔 가장 깊은 비밀’과 연결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그 경탄을 굳이 꺾을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더 깊게 가져갈 수 있습니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은 정말 신비로운 일입니다. 다만 그 신비의 최종 목적지는 ‘우주가 스스로 의식을 갖는다’는 데 있지 않고, ‘나는 생명 자체이신 주님에게서 지금 이 순간에도 생명을 받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신앙의 문제는 의식의 수수께끼보다 한층 더 깊어집니다. 중요한 것은 단지 ‘왜 내가 의식을 가지고 있는가?’가 아닙니다. ‘그렇게 주어진 의식과 자유와 합리성을 가지고 나는 무엇을 사랑하며 살아갈 것인가?’입니다. 인간에게 의식이 있다는 것만으로 천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성과 자기의식이 아무리 뛰어나도 그것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만을 섬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의 영적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의식의 정교함이 아니라 그의 의지와 사랑이 어느 방향으로 형성되는가입니다.

 

그러므로 이 영상의 질문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과시켜 마지막까지 밀고 가면 질문은 세 번 바뀝니다. 처음에는 ‘뇌는 어떻게 의식을 만들어내는가?’입니다. 그다음에는 ‘과연 뇌가 의식을 만들어내는 것인가?’가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내가 지금 받아 누리고 있는 이 생명을 나는 무엇을 위해 사용하고 있는가?’가 됩니다.

 

첫 번째는 뇌과학의 질문이고, 두 번째는 인간 존재에 관한 철학적·영적 질문이며, 세 번째는 거듭남의 질문입니다.

 

그래서 이 영상의 가장 큰 가치는 어떤 양자의식 이론이 옳다는 데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오히려 현대 과학이 인간의 뇌를 그토록 깊이 들여다보고도 마침내 ‘느끼고 있는 나’라는 문 앞에서 다시 질문하기 시작했다는 데 있습니다. 과학은 그 문 앞에서 계속 실험하고 측정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문을 지나 한 걸음 더 안으로 들어가 인간의 속 사람과 겉 사람, 영과 몸, 사랑과 지혜, 그리고 그 모든 생명이 끊임없이 유입되는 근원을 이야기합니다.

 

파인만이 칠판에 남겼다는 유명한 문장, ‘내가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은 내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도 그런 의미에서 이 영상과 절묘하게 어울립니다. 다만 그것을 파인만 자신의 의식론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영상 역시 당시 파인만이 다른 물리학적 문제를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인정합니다. 그럼에도 그 문장을 오늘의 의식 문제에 하나의 비유로 가져오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인간은 뇌의 구조를 모방하고 언어를 생성하는 기계를 만들며 인간 행동의 놀라운 부분까지 재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살아 있음’ 그 자체를 만들어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보면 어쩌면 그것은 당연합니다. 생명은 인간이 조립하는 물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 자신조차 자기 생명의 원천이 아닙니다. 우리는 생명을 소유한 독립적 근원이 아니라 생명을 받아들이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가 그 생명을 빌려 쓰는 것처럼 느끼게 하지 않으시고 놀랍게도 완전히 ‘나의 생명’인 것처럼 느끼게 하십니다. 그래야 사랑할 수도 있고, 생각할 수도 있고, 선택할 수도 있으며, 그 선택을 통하여 실제로 하나의 인격으로 형성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왜 의식이 있는가?’라는 현대 과학의 거대한 질문 앞에서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영혼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짧게 답하고 끝내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더 놀라운 방향으로 우리를 데려갈 것입니다. ‘당신이 지금 생각하고 사랑하고 느끼며 살아 있다는 그 모든 생명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리고 그것이 마치 완전히 당신 자신의 것처럼 주어진 까닭은 무엇인가?’

 

그 질문 끝에서 의식의 신비는 마침내 거듭남의 문제와 만납니다. 생명이 어디서 왔는지를 아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생명을 가지고 어떤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의식은 그 자체로 인간의 최종 목적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삶으로 살아낼 수 있도록 주어진 놀라운 그릇입니다.

 

그렇게 보면 밤하늘을 바라보다 문득 ‘내가 지금 살아 있구나’ 하고 느끼는 순간은 정말 경이로운 순간입니다. 그러나 그 경이로움의 중심에는 ‘의식을 가진 우주’가 아니라 ‘생명을 주시는 주님과 그 생명을 받아 살아가는 인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관계 안에서, 과학이 아직 풀지 못한 ‘의식의 신비’는 스베덴보리에게 단순한 지적 미스터리를 넘어 인간이 누구이며 어디에서 생명을 받고 무엇을 향해 살아가도록 창조되었는지를 묻는 영적인 질문으로 바뀝니다.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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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아토스산 수도 공동체를 방문했을 때, 깊은 인상을 받았던 한 러시아 수도사의 삶을 소개합니다. 자동자막에는 이름이 ‘티흔’, ‘티온’ 등으로 흔들려 나오지만, 생애의 연대와 특징을 대조해 보면 인물은 러시아 출신의 아토스 수도자 ‘티혼 골렌코프’(Tikhon Golenkov, 1884-1968), 흔히 ‘캅살라의 티혼’ 또는 ‘아토스의 티혼’이라 불리는 인물로 보입니다. 그는 1884년 러시아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수많은 수도원을 순례했고, 이후 아토스산에 정착하여 수십 년 동안 매우 엄격한 금욕과 기도생활을 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훗날 아토스의 성 파이시오스에게 영적 지도를 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영상 초반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자신이 머문 수도원을 아토스에서 매우 오래되고 큰 수도원 가운데 하나로 소개합니다. 자동자막의 ‘이비로 수도원’은 아마 ‘이비론 수도원’(Iviron Monastery)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비론은 10세기 말 조지아계 수도사들에 의해 세워졌으며, 오늘날 아토스산 20개 주요 수도원 가운데 서열상 세 번째에 해당하는 유서 깊은 수도원입니다. 다만 티혼이 평생 이비론 수도원의 대표 수도사였다고 이해하기보다는, 아토스산 여러 지역에서 수행하다가 특히 캅살라와 카룰리아 등 은수 지역에서 살았던 러시아 수도자로 보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강문호 수도사가 티혼의 삶에서 가장 먼저 강조하는 것은 그의 극단적인 금욕입니다. 밤을 새워 기도하고, 졸음을 이기기 위해 몸을 불편하게 하며, 딱딱한 곳에서 잠을 자고, 매우 적은 음식을 먹고, 추위와 더위를 견디며, 옷도 최소한으로 소유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실제 전승에서도 티혼은 매우 엄격한 금욕가로 묘사됩니다. 긴 시간 기도하고, 누더기에 가까운 옷을 입으며, 단순한 음식으로 살고, 거친 환경에서 수행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런 삶을 접하면 자연스럽게 ‘저 정도로 자신을 절제해야 진정한 수도자인가?’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에서 외적 금욕과 내적 거듭남을 반드시 구별하게 합니다. 금식과 절제, 그리고 고독은 인간의 욕망을 돌아보고 마음을 주님께 집중시키는 유익한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적게 먹는 것 자체가 사람을 거룩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딱딱한 침대에서 잔다고 자기 사랑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며, 추위를 견딘다고 proprium이 자동으로 죽는 것도 아닙니다. 외적 절제는 내적 사랑의 질서가 바뀌도록 돕는 수단일 때 비로소 영적 의미를 갖습니다.

 

영상에서 티혼은 ‘탐식은 모든 죄가 들어오는 현관’이라는 취지로 말하며, 먹는 것을 극도로 줄였다고 소개됩니다. 욕망을 절제해야 한다는 뜻에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육체적 욕망에 끌려갈수록 그것이 다른 욕망과 결합하여 삶 전체를 지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자연적 욕구 그 자체를 악으로 보지 않습니다. 먹고 마시고 쉬고 몸을 돌보는 것은 창조질서에 속합니다. 문제는 그것이 목적이 되어 사람을 지배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듭남은 음식 자체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음식과 쾌락을 자기 삶의 중심으로 삼으려는 무질서한 사랑을 바른 위치로 돌려놓는 일입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은 극도로 금식하면서도 ‘나는 이렇게 절제하는 사람’이라는 자기 의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좋은 음식을 감사히 먹으면서도 탐욕에 지배되지 않고 이웃과 나누며 살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영성의 척도는 얼마만큼 먹느냐가 아니라 무엇이 그 사람의 지배적인 사랑인가에 있습니다. 금욕은 사랑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한 수단이지, 그 자체가 천국의 상태는 아닙니다.

 

그런데 영상이 중반으로 들어가면서 티혼의 모습 가운데 훨씬 따뜻한 부분이 나타납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티혼이 동물들을 매우 사랑했다고 전합니다. 쥐가 많은 곳에서 살면서도 동물들을 해치지 않고, 여우와 가까이 지내며, 멧돼지가 와서 새끼를 낳으면 보호하고, 사냥꾼이 오면 다른 곳으로 보내어 동물을 지켜 주었다는 일화들입니다. 실제 티혼의 전승에서도 그가 산짐승들과 친숙하게 지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매우 흥미롭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동물 세계 역시 인간의 애정과 상응한다고 설명합니다. 자연계의 동물들은 각기 다른 종류의 애정과 성향을 표상하며, 창조세계 전체는 영적 세계의 질서를 반영합니다. 그러므로 동물을 사랑한다는 것이 곧 높은 영성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생명을 함부로 대하지 않고, 창조된 존재를 사랑과 책임으로 돌보는 태도에는 분명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특히 티혼이 자기에게 다가오는 동물을 단순한 방해물로 여기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 대했다는 전승은 그의 금욕과는 또 다른 얼굴을 보여 줍니다. 영성이 자기 몸을 혹독하게 다루는 데만 머문 것이 아니라 주변 생명을 부드럽게 바라보는 방향으로 나타났다면, 바로 그 부분에서 우리는 금욕의 열매를 볼 수 있습니다. 참된 영성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다른 존재를 더 거칠게 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온유하게 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강문호 수도사가 영상에서 ‘하나님과 합일의 관계’라고 표현하는 대목과도 연결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인간이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하나가 되는 식의 ‘합일’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인간은 영원히 피조물이고, 주님은 창조주이십니다. 그러나 사람의 의지(will)와 이해성(understanding)이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면서 주님과 ‘결합’(conjunction)될 수는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즐겨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자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지혜를 받아 그분과 결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도의 목표도 특별한 황홀경이나 신비체험 자체라기보다 주님의 선과 진리가 사람의 삶을 실제로 다스리게 되는 데 있다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 결합이 깊어지면 사람은 더 많이 사랑하고, 더 진실해지고, 더 온유해지며, 자기 공로를 덜 주장하게 됩니다. 결국 주님과의 결합은 삶의 열매로 드러나야 합니다.

 

영상에는 티혼의 초상화를 마른 우물에 던져 넣고 기도했더니 샘물이 솟아올라 초상화가 물 위로 떠올랐다는 기적 이야기도 나옵니다. 이런 이야기는 수도원 전승에서 성인의 거룩함을 기억하는 방식 가운데 하나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런 기적담을 굳이 하나하나 해부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오히려 그 이야기의 중심이 무엇인지 보면 됩니다. 수도원 공동체가 자신들이 존경하던 수도자의 삶을 기억하며, 주님께 도움을 구했고, 그 경험을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가 반복해서 보여 주듯, 기적 자체가 영성의 증거는 아닙니다. 물이 솟았는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수도자의 삶에서 어떤 선이 흘러나왔는가입니다. 어떤 사람이 놀라운 기적과 연결되어 있어도 자기 사랑과 지배욕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것이 천국적인 상태를 보증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아무 기적도 없지만 일평생 조용히 악을 피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했다면 그 삶은 주님 앞에서 훨씬 깊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인의 기적담은 사람을 숭배하게 하기보다 그 사람을 통하여 일하신 주님께 시선을 돌리게 할 때, 가장 건강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영상 후반에는 아토스 수도원의 식사 장면이 소개됩니다. 여러 수도사가 함께 앉고, 수도원장이 기도한 뒤 식사를 시작하며, 식사 중에는 말을 하지 않고 한 사람이 성경을 읽는다고 합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이를 ‘입으로는 육신의 양식을 먹고, 귀로는 영의 양식을 먹는다’고 표현합니다. 이 모습은 수도생활의 한 가지 아름다운 질서를 보여 줍니다. 자연적인 필요와 영적인 필요를 서로 적대시키지 않고, 한 식탁 안에서 함께 놓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은 본래 서로 적이 아닙니다. 자연적인 것은 영적인 것이 표현되고 실현되는 바탕입니다. 육체가 음식을 먹는 동안 마음이 말씀을 듣는다는 장면은 그래서 상징적으로도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식사시간에 반드시 성경을 소리 내어 읽어야 한다는 형식이 아니라, 자연적 삶이 영적 삶의 질서 아래 놓여 있어야 한다는 원리입니다. 먹고 일하고 쉬고 대화하는 평범한 일상 자체가 주님의 선과 진리를 표현하는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영상에는 포도주를 마시는 수도사들의 모습도 자연스럽게 등장합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자신은 술을 마시지 않아 옆의 미국인에게 잔을 건네주었다는 일화를 웃으며 소개합니다. 이 장면은 오히려 수도 전통을 지나치게 엄숙하고 비현실적인 것으로만 보지 않게 해 줍니다. 수도자들도 먹고 마시고 웃고 서로를 배려하며 살아가는 인간입니다. 영성은 인간성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연적인 삶을 바른 질서 안에 두는 것입니다.

 

이번 영상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티혼의 극단적인 수행이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오히려 더 오래 붙들고 싶은 것은 그 뒤에 나타나는 온유함입니다. 밤을 새워 얼마나 오래 기도했는가보다 동물을 어떻게 대했는가, 얼마나 적게 먹었는가보다 다른 존재를 어떻게 바라보았는가, 얼마나 많이 고행했는가보다 자기 삶에서 주님을 어떻게 드러냈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금욕은 겉사람을 다루지만 거듭남은 속 사람의 사랑을 바꿉니다.

 

여기에서 proprium의 문제도 다시 등장합니다. 수도생활은 세상의 재산과 명예를 버리는 삶이지만, 그것만으로 proprium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나는 다른 사람이 하지 못하는 수행을 한다’, ‘나는 평생을 수도에 바쳤다’, ‘나는 특별한 영적 경험을 했다’는 형태로 proprium이 다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깊은 수도는 외적인 소유를 버리는 것보다 자신이 행한 선과 수행을 자기 공로로 소유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참된 선은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인간은 그것을 마치 자기 힘으로 행하는 것처럼 힘써 살아야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 선의 근원이 자신이 아니라 주님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티혼의 삶에서 우리가 보아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도 ‘얼마나 대단한 수도를 했는가?’가 아니라 ‘그 수행을 통해 자기 자신은 얼마나 뒤로 물러나고, 주님의 선이 얼마나 드러났는가?’일 것입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아토스산을 직접 방문한 경험 자체에도 큰 감동을 표현합니다. 다른 문화와 전통 속에서 오랜 세월 수도생활을 이어 온 사람들을 직접 보고, 함께 먹고, 이야기하고, 그들의 기도와 생활을 가까이에서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다른 기독교 전통을 이렇게 직접 만나는 것은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개신교가 익숙하게 여겨 온 방식만이 기독교 영성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몸으로 발견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오래된 전통이라고 해서 자동으로 더 깊은 것은 아니며, 극단적인 수행이라고 해서 자동으로 더 거룩한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언제나 같은 기준으로 돌아갑니다. ‘이것이 사람 안의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자라게 하는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바른 위치로 돌려놓는가? 선과 진리가 실제 삶의 쓰임으로 나타나는가?’ 이것이 수도원이든 교회든, 금식이든 기도든, 설교든 신학이든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는 기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티혼의 삶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혹독한 금욕의 정도만은 아닐 것입니다. 젊은 시절 수많은 수도원을 찾아다니면서도 단순히 ‘좋은 수도원’을 찾기보다 자신을 제대로 지도해 줄 영적 스승을 찾았고, 이후 오랜 수도생활을 거쳐 다른 사람을 지도하는 위치에 이르렀다는 점 역시 중요합니다. 실제 자료에서도 티혼은 훗날 아토스의 성 파이시오스에게 영적 영향을 준 인물로 기억됩니다.

 

이것은 영적 성숙이 개인의 완성으로 끝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과 진리는 결국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한 쓰임으로 흘러가야 합니다. 혼자 깊은 동굴에서 기도하는 시간도 귀할 수 있지만, 그 기도가 사람을 더 부드럽고 지혜롭게 만들어 다른 사람을 선으로 이끄는 쓰임으로 이어질 때 그 열매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이번 영상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담는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티혼의 엄격한 금욕은 그 자체가 거룩함의 척도라기보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벗어나 주님께 더 온전히 향하려는 하나의 수도적 수단이었으며, 그 수행의 참된 열매는 극단적인 고행보다 온유함과 사랑, 그리고 다른 존재를 위한 쓰임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영상에서 ‘극한의 수도’를 바라보며 한마디를 더 덧붙이고 싶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가장 깊은 금식은 음식만 줄이는 것이 아니라 proprium이 먹고 싶어 하는 자기 명예와 자기 공로를 줄이는 것이며, 가장 깊은 청빈은 물건을 적게 갖는 데서 끝나지 않고, 자신에게 있는 모든 선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않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외적 금욕이 내적 거듭남으로 이어질 때, 수도는 특별한 사람들의 기이한 삶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각자의 자리에서 걸을 수 있는 ‘내적 수도’의 길을 보여 주게 됩니다.

 

 

 

SY.83, 강문호 수도사, ‘아토스 이비론 수도원, 주는 것과 받는 것을 잊지 말라’ (20200106)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가 소개하는 곳은 아토스의 이비론 수도원입니다. 아토스에 얽힌 전승과 이비론 수도원의 오래된 역사, 그리고 무엇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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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80, 강문호 수도사, ‘그리심산 수도원, 예수님의 길을 걸으며 비로소 나그네를 보다’ (20191231)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이스라엘의 여러 수도원을 찾아다니던 중 그리심산의 수도원을 방문했던 경험에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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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4:3)

 

AC.348

‘땅의 소산’(fruit of the ground)이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를 뜻한다는 것은 이어지는 내용에서도 분명합니다.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는 신앙이 없는 행위이며, 그 자체로 죽은 행위입니다. 그것들은 오직 겉 사람에게만 속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에 관하여 예레미야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That by the “fruit of the ground” are meant the works of faith without charity, appears also from what follows; for the works of faith devoid of charity are works of no faith, being in themselves dead, for they are solely of the external man. Of such it is written in Jeremiah:

 

1여호와여 내가 주와 변론할 때에는 주께서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이니이까 2주께서 그들을 심으시므로 그들이 뿌리가 박히고 장성하여 열매를 맺었거늘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들의 마음은 머니이다, 4언제까지 이 땅이 슬퍼하며 온 지방의 채소가 마르리이까 짐승과 새들도 멸절하게 되었사오니 이는 이 땅 주민이 악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그가 우리의 나중 일을 보지 못하리라 함이니이다 (렘12:1-2, 4) Wherefore doth the way of the wicked prosper? Thou hast planted them, they also have taken root; they have gone on, they also bear fruit; thou art near in their mouth, and far from their reins; how long shall the land mourn, and the herb of every field wither? (Jer. 12:1–2, 4)

 

‘입에는 가까우나 마음에는 멀다’(near in the mouth, but far from the reins)는 것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을 뜻하며, 그들에 관하여 ‘땅이 슬퍼한다’(the land mourns)고 말합니다. 같은 선지서에서는 그러한 행위를 ‘행위의 열매’(fruit of works)라고 부릅니다. “Near in the mouth, but far from the reins” denotes those who are of faith separated from charity, concerning whom it is said that “the land mourns.” In the same prophet such works are called the “fruit of works”:

 

9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10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렘17:9, 10) The heart is deceitful [supplantativum] above all things, and it is desperate, who can know it? I Jehovah search the heart, I try the reins, even to give to every man according to his ways, and according to the fruit of his works. (Jer. 17:9–10)

 

미가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In Micah:

 

그 땅은 그 주민의 행위의 열매로 말미암아 황폐하리로다 (미7:13) The land shall be desolate because of them that dwell therein, for the fruit of their works. (Micah 7:13)

 

그러한 ‘열매’(fruit)는 열매가 아니며, 그러한 ‘행위’(work)는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열매와 뿌리가 모두 멸망하는 것을 아모스에서는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That such “fruit” is no fruit, or that the “work” is dead, and that both fruit and root perish, is thus declared in Amos:

 

내가 아모리 사람을 그들 앞에서 멸하였나니 그 키는 백향목 높이와 같고 강하기는 상수리나무 같으나 내가 그 위의 열매와 그 아래의 뿌리를 진멸하였느니라 (암2:9) I destroyed the Amorite before them, whose height was like the height of the cedars, and he was strong as the oaks; yet I destroyed his fruit from above, and his roots from beneath. (Amos 2:9)

 

시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And in David:

 

왕이 그들의 후손을 땅에서 멸함이여 그들의 자손을 사람 중에서 끊으리로다 (시21:10) Their fruit shalt thou destroy from the earth, and their seed from the sons of man. (Ps. 21:10)

 

그러나 체어리티의 행위는 살아 있으며, 그것들에 관하여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는다’(take root downward, and bear fruit upward)고 선언합니다. 이사야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But the works of charity are living, and of them it is declared that they “take root downward, and bear fruit upward;” as in Isaiah:

 

유다 족속 중에 피하여 남은 자는 다시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으리니 (사37:31) The remnant that is escaped of the house of Judah shall again take root downward, and bear fruit upward. (Isa. 37:31)

 

‘위로 열매를 맺는다’(bear fruit upward)는 것은 체어리티로부터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열매를 같은 선지서에서는 ‘아름답고 영화로운 열매’(fruit of excellence)라고 부릅니다. To “bear fruit upward” is to act from charity. Such fruit is called the “fruit of excellence,” in the same prophet:

 

그날에 여호와의 싹이 아름답고 영화로울 것이요 그 땅의 소산은 이스라엘의 피난한 자를 위하여 영화롭고 아름다울 것이며 (사4:2) In that day shall the shoot of Jehovah be beautiful and glorious, and the fruit of the earth excellent and comely for them that are escaped of Israel. (Isa. 4:2)

 

그것은 또한 ‘구원의 열매’(fruit of salvation)이며, 같은 선지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부릅니다. It is also the “fruit of salvation,” and is so called by the same prophet:

 

하늘이여 위로부터 공의를 뿌리며 구름이여 의를 부을지어다 땅이여 열려서 구원을 싹트게 하고 공의도 함께 움 돋게 할지어다 나 여호와가 이 일을 창조하였느니라 (사45:8) Drop down, ye heavens, from above, and let the skies pour down righteousness; let the earth open, and let them bring forth the fruit of salvation, and let righteousness spring up together; I Jehovah will create it. (Isa. 45:8)

 

해설

AC.348은 앞의 AC.346에서 간략하게 밝힌 가인의 ‘땅의 소산’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본격적으로 설명합니다. AC.346에서는 그것이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를 뜻한다고 했고, 이제 AC.348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러한 행위를 ‘신앙이 없는 행위’이며 ‘그 자체로 죽은 행위’라고 단언합니다. 이것은 상당히 강한 표현입니다. 가인에게 행위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인은 땅을 경작하고 소산을 거두어 여호와께 제물로 드립니다. 외적으로 보면 행위도 있고 예배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묻는 것은 행위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그 행위 안에 어떤 생명이 있는가입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으로부터 나온 행위는 겉으로 아무리 종교적이고 선해 보여도 신앙의 참된 생명이 없기 때문에 ‘죽은 행위’라고 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그것들은 오직 겉 사람에게만 속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외적인 행위 자체가 나쁘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체어리티는 결국 자연계의 실제 삶에서 말과 행동과 쓰임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굶주린 사람을 먹이고, 어려운 사람을 돕고, 자기 직분을 성실하게 수행하며, 예배하고 봉사하는 일은 모두 겉 사람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문제는 그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과 결합되어 있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는 외적인 형태만 있을 뿐 그것을 안에서 살아 있게 하는 사랑의 생명이 없습니다. 따라서 AC.348의 ‘겉 사람에게만 속한다’는 말은 외적 행동을 낮추는 말이 아니라, 외적 행동이 내적 생명과 결합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렘12:1-2, 4가 첫 번째 증거로 인용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악한 사람들도 ‘뿌리가 박히고 장성하여 열매를 맺습니다.’ 외적으로만 보면 생명과 번영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곧이어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들의 마음은 머니이다’라는 결정적인 말씀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입으로는 주님을 말할 수 있고, 신앙을 고백할 수 있으며, 외적인 종교 행위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신앙이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있지 않다면 입에 있는 신앙과 내적인 생명 사이에는 거리가 생깁니다. 따라서 ‘열매를 맺는다’는 표현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열매가 살아 있는 선의 열매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어떤 내적 상태에서 그 열매가 나왔는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이어지는 렘17:9-10과 미7:13도 같은 사실을 다른 각도에서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시고 각 사람에게 그의 길과 ‘행위의 열매’에 따라 갚으십니다. 미가에서도 땅이 ‘그 주민의 행위의 열매로 말미암아’ 황폐하게 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말씀에서 ‘열매’라는 말이 나온다고 해서 언제나 자동으로 좋은 행위를 뜻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악과 거짓에서도 그것에 맞는 행위가 나오며, 말씀은 그것 역시 ‘행위의 열매’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열매라는 외적 명칭이 아니라 그 열매의 질입니다. 이것은 가인의 ‘땅의 소산’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소산이 있다는 것만으로 그것이 주님께 받아들여지는 살아 있는 열매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암2:9과 시21:10에서 스베덴보리는 그러한 열매가 결국 멸망한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아모스에서는 ‘위의 열매’와 ‘아래의 뿌리’가 함께 언급됩니다. 여기서 AC.348이 직접 강조하는 것은 체어리티가 없는 행위는 참된 의미에서 살아 있는 열매가 아니며 결국 그 열매와 뿌리가 함께 사라진다는 사실입니다. 뿌리와 열매의 이미지를 통해 행위에는 그것을 낳는 근원이 있다는 점도 자연스럽게 생각할 수 있지만, 이 번호에서 뿌리를 특정한 영적 기능과 일대일로 대응시켜 지나치게 세분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논지는 훨씬 단순하고 강합니다.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에서 나오는 행위는 외적인 모양을 가지고 한동안 자라고 열매를 맺는 것처럼 보여도 그 안에 영적인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AC.348은 죽은 행위를 설명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사37:31부터는 정반대의 열매, 곧 살아 있는 체어리티의 행위로 전환합니다.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으리니’라는 말씀에 대해 스베덴보리는 ‘위로 열매를 맺는 것은 체어리티로부터 행하는 것’이라고 매우 명확하게 풀이합니다. 이것이 AC.348 전체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 가운데 하나입니다. 참된 열매는 단순히 외적으로 좋은 일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로부터’ 행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인의 땅의 소산과 이사야의 ‘위로 맺는 열매’는 둘 다 겉으로는 열매이지만 영적으로는 전혀 다릅니다. 하나는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에서 나온 죽은 행위이고, 다른 하나는 체어리티로부터 나온 살아 있는 행위입니다.

 

사4:2와 사45:8은 이 살아 있는 열매의 성질을 더욱 밝힙니다. 이사야는 그것을 ‘아름답고 영화로운’ 열매라고 하고, 이어 ‘구원의 열매’라고 표현합니다. 특히 사45:8의 마지막 ‘나 여호와가 이 일을 창조하였느니라’는 말씀은 체어리티로부터 행한다는 것이 인간이 자기 힘으로 선한 마음을 만들어 선행한다는 뜻이 아님을 분명하게 해 줍니다. 모든 참된 선과 체어리티의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선을 주시고 인간은 그것을 자유롭게 받아 삶으로 행합니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행위의 생명은 인간 자신의 공로나 선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인간은 마치 자기에게서 행하는 것처럼 선을 행하지만, 그 선의 근원은 주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스베덴보리가 반복해서 가르치는 질서입니다.

 

이 점에서 AC.348은 ‘행위’를 평가하는 매우 섬세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단순히 ‘행위를 많이 하는 사람이 좋은 신앙인이다’라고 말하지도 않고, 반대로 ‘행위는 중요하지 않고 신앙만 있으면 된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와 행위가 하나의 살아 있는 질서 안에 있어야 합니다. 신앙의 진리는 사람이 무엇이 선인지 알도록 하고 체어리티를 향하게 하며, 주님께서 주시는 체어리티는 실제 삶에서 행위라는 열매를 맺습니다. 따라서 참된 행위는 신앙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신앙이 체어리티와 결합하여 밖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반대로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도 외적인 행위를 만들어 낼 수 있지만,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죽은 행위’라고 합니다.

 

이것은 종교적인 행위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예배, 헌금, 봉사, 구제, 전도, 설교, 성경 공부와 같은 일은 모두 귀한 쓰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348은 그 외적인 모양만 보고 그 행위의 영적 성질을 판단하지 말라고 합니다. 같은 행위라도 자기 의와 명예와 인정, 다른 사람보다 낫다는 의식에서 행할 수도 있고, 주님께 받은 것을 이웃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려는 체어리티에서 행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다른 사람의 내적 동기를 완전히 알 수 없으므로 이 말씀을 타인의 행위를 심판하는 도구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나는 왜 이것을 하고 있는가?’, ‘내가 하는 이 일이 정말 이웃의 참된 유익을 향하고 있는가?’를 자신에게 묻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특히 AC.348은 앞의 AC.344-346과 함께 읽을 때 더욱 선명해집니다. AC.344에서는 신앙에 관한 모든 지식과 교리의 목적이 체어리티라고 했습니다. AC.345에서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참된 신앙이 아니라고 했고, AC.346에서는 그러한 신앙에서도 행위와 예배가 나올 수 있음을 보았습니다. 이제 AC.348은 그 행위의 영적 성질을 밝힙니다.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에서 나온 행위는 아무리 열매처럼 보여도 죽은 행위이고, 체어리티에서 나온 행위는 살아 있는 열매입니다. 따라서 창4에서 문제 되는 것은 ‘가인이 아무 열매도 맺지 못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가인에게도 ‘땅의 소산’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열매에 체어리티의 생명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AC.348은 ‘열매의 생명을 결정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답은 열매의 크기나 외형이나 사람들의 평가가 아니라, 그것이 체어리티로부터 나오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 체어리티의 근원은 다시 주님께 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이 사람 안에서 신앙의 진리와 결합되고 실제 삶의 쓰임으로 나타날 때 행위는 살아 있는 열매가 됩니다. 그러므로 이 번호는 우리에게 단순히 ‘더 많은 선행을 하라’고 말하기보다 ‘네 행위의 생명은 어디에서 오는가?’라고 묻습니다. 가인의 ‘땅의 소산’과 이사야의 ‘위로 맺는 열매’는 겉으로 모두 열매이지만 그 생명은 전혀 다릅니다. 바로 그 차이를 분별하는 것이 AC.348의 핵심입니다.

 

 

 

AC.348, 창4:3, 가인의 ‘땅의 소산’ - 체어리티 없는 죽은 행위와 살아 있는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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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7, 창4:3, ‘세월이 지난 후에 - 신앙이 사랑에서 점점 멀어질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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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4:3)

 

AC.347

‘세월이 지난 후에’(end of days, ‘날들의 끝에’)가 ‘시간이 흐른 뒤’를 뜻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명합니다. 처음에는, 그리고 그 교리 안에 단순함이 있었을 때에는, 여기서 ‘가인’(Cain)이라 하는 교리가 후에 그렇게 된 것만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그들이 자기들의 자손을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a man Jehovah, ‘여호와인 사람’)라고 했다는 사실에서도 분명합니다. 따라서 처음에는 신앙이 ‘날들의 끝에’, 곧 시간이 흐른 뒤에 이르렀을 때만큼 사랑에서 멀리 분리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참된 신앙의 모든 교리에서 흔히 일어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That by the “end of days” is signified in process of time, is evident to all. At first, and while there was simplicity in it, the doctrine here called “Cain” does not appear to have been so unacceptable as it became afterwards, as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they called their offspring a “man Jehovah.” Thus at first faith was not so far separated from love as at the “end of days,” or in process of time; as is wont to be the case with every doctrine of true faith.

 

해설

AC.347은 바로 앞 AC.346의 ‘세월이 지난 후에’라는 표현을 설명하면서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의 분리가 한순간에 완성된 것이 아니라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심해졌다는 사실을 밝혀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처음에 그 교리 안에 ‘단순함’이 있었을 때에는 여기서 ‘가인’이라 하는 교리가 후에 그렇게 된 것만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처음에는 신앙이 시간이 흐른 뒤에 이르렀을 때만큼 사랑에서 멀리 분리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가인 해석을 더욱 정교하게 만들어 줍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의미하지만, 그 분리가 처음부터 마지막 상태와 똑같은 정도였던 것은 아닙니다. 이미 신앙을 사랑 안에 있는 것으로만 보지 않고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구별하여 인식하는 방향이 시작되었지만, 처음에는 사랑과의 거리가 아직 그렇게 멀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거리가 더욱 벌어졌고, 결국 체어리티 없는 신앙의 행위와 예배가 나타나는 상태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단순함’(simplicity)을 단순히 지식이 적거나 사고가 미숙한 상태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AC.347의 문맥에서는 아직 신앙에 관한 교리가 자기 자신을 독립적인 것으로 강하게 세우면서 사랑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초기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이 초기 상태를 곧 ‘가인은 처음에는 온전한 참된 신앙이었다’고 표현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AC.338에서 이미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에게서는 신앙이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인식되고 인정되기 시작했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AC.340에서도 이전에는 사랑 안에서 퍼셉션으로 알고 있던 신앙에 속한 것들을 따로 꺼내어 구별된 교리로 만들기 시작했다고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가인의 성격은 처음부터 이미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다만 AC.347이 새롭게 알려 주는 것은 그 분리가 처음부터 최종적인 형태로 완성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점차 심화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에서 ‘구별’과 ‘분리’를 다시 정확히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과 사랑을 개념적으로 구별하여 이해하는 것 자체가 악은 아닙니다. 특히 후대의 인간에게는 진리를 배우고 신앙에 관한 교리를 분명하게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구별된 신앙이 사랑과 결합되어 있어야 한다는 본래 질서를 잃고, 점차 사랑과 별개로 존재할 수 있는 독립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데 있습니다. AC.347의 표현을 빌리면 문제는 신앙이 사랑에서 점점 ‘멀리 분리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간격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자신을 사랑과 체어리티에 의해 살아 있게 되는 것으로 보지 않고 그 자체로 충분한 것으로 여기기 시작하면, 그 거리는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커질 수 있습니다. 결국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이고, 마침내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밀어내는 상태에까지 이를 수 있습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라는 표현은 바로 이 점에서 중요합니다. AC.346에서는 이 말을 우선 단순하게 ‘시간이 흐른 뒤’라고 설명했습니다. AC.347은 이제 그 시간이 흐르는 동안 신앙과 사랑의 관계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신앙이 후대만큼 사랑에서 멀리 분리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분리가 심해졌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창4:3에서 가인은 ‘땅의 소산’을 여호와께 제물로 가져옵니다. AC.346에서 이것은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와 거기에서 나온 예배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세월이 지난 후에’는 단순히 달력상의 어느 기간이 지나갔다는 사실만을 알려 주는 데 그치지 않고, 이 문맥에서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의 상태가 시간이 흐르면서 어떻게 더 멀리 사랑에서 분리되었는지를 이해하게 해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초기 상태가 후대만큼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는 아니었다는 근거로 그들이 자기들의 자손을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고 했다는 사실을 듭니다. 이것은 앞의 AC.338과 AC.340에서 이미 자세히 살펴본 창4:1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표현을 근거로 ‘초기의 가인은 완전한 신앙이었다’고 되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직 신앙이 사랑에서 아주 멀리 떨어지지 않았고, 그들이 신앙에 속한 것을 주님과 관련하여 인식하는 상태가 남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상태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한 덩어리의 완성된 악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신앙을 따로 인식하기 시작한 작은 분리가 있었고, 그 분리가 점차 깊어져 나중에는 신앙이 체어리티와 멀리 떨어지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AC.347의 마지막 문장은 이 문제를 가인이라는 특정 교리에만 한정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참된 신앙의 모든 교리에서 흔히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엄중한 경고입니다. 참된 교리는 처음부터 거짓이기 때문에 타락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신앙에 속한 것을 담고 있는 교리도 그것을 받아들이고 사용하는 사람들의 상태에 따라 본래의 사랑과 생명에서 점점 멀어질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주님을 더 잘 알고, 말씀을 더 바르게 이해하며, 이웃에게 선을 행하도록 돕기 위해 교리를 분명하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관심이 ‘이 진리에 따라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누가 이 교리를 더 정확하게 알고 고백하는가?’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그 교리가 자기 집단의 우월성을 증명하거나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사용된다면, 교리의 문장은 그대로 남아 있어도 그것을 움직이는 사랑의 성질은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교리가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타락한다거나, 교리를 명료하게 정리하고 보존하는 것 자체가 위험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문제는 교리 그 자체보다 그것과 사랑의 관계입니다. 참된 교리를 보존한다는 것은 문장을 정확하게 전승하는 것과 함께 그 교리가 지향하는 생명도 보존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고, 자기 안의 악을 죄로 보아 피하게 하며,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와 실제 쓰임으로 나아가게 하기 위해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교리를 정확하게 보존하면서도 그 교리가 체어리티와 결합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교리적 정확성을 지키는 일과 사랑을 지키는 일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본래 함께 가야 합니다. 진리는 선을 보호하고 방향을 주며, 선은 진리에 생명을 줍니다.

 

이 원리는 개인의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경고가 됩니다. 처음 말씀을 배우거나 AC를 공부할 때에는 ‘주님을 더 알고 싶다’, ‘내 삶을 고치고 싶다’, ‘말씀의 속뜻을 통하여 주님의 뜻을 더 잘 따르고 싶다’는 마음으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식이 쌓이고 익숙해지면서 어느 순간 관심이 ‘나는 이것을 안다’는 데로 옮겨 갈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자신이 가진 지식을 다른 사람을 평가하고 자신의 영적 우월성을 확인하는 데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진리 자체가 거짓으로 변한 것은 아니지만, 그 진리와 우리의 사랑 사이의 관계가 달라진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AC.347은 다른 교회나 다른 시대의 교리 타락을 분석하는 도구가 되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의 신앙을 살피는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특히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AC 번역과 해설 작업에도 이 원리는 매우 직접적입니다. 처음에는 말씀의 속뜻을 더 정확하게 알고 그것을 삶과 목회에 사용하기 위해 시작한 공부가 시간이 지나면서 ‘정확한 번역’, ‘정확한 상응’, ‘정확한 교리’를 갖추는 것 자체에만 만족하게 될 위험은 언제든 있습니다. 물론 정확성은 중요하며 결코 가볍게 여길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정확성이 우리를 주님께 더 가까이 이끌고, 자기 안의 proprium을 더 분명히 보게 하며,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는 체어리티와 쓰임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AC.344에서 말한 신앙의 목적을 놓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진리를 보존하는 일과 그 진리의 생명을 보존하는 일을 함께 붙들어야 합니다.

 

결국 AC.347이 보여 주는 것은 ‘처음의 상태가 끝의 상태를 자동으로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은 처음부터 후대와 똑같이 사랑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신앙을 사랑과 별개의 것으로 세우는 방향이 계속되면서 그 거리는 점점 커졌습니다. 그래서 ‘세월이 지난 후에’ 이르러서는 체어리티가 없는 행위와 예배가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신앙의 생명을 한 번 얻고 끝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진리는 계속 사랑을 향하고, 신앙은 계속 체어리티와 결합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AC.347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나는 처음에 무엇을 믿었는가?’에 머물지 않습니다. ‘시간이 흐른 지금, 내가 가진 신앙은 사랑과 더 가까워지고 있는가, 아니면 점점 멀어지고 있는가?’입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라는 짧은 표현 속에 바로 이 엄중한 자기 성찰이 담겨 있습니다.

 

 

 

AC.348, 창4:3, 가인의 ‘땅의 소산’ - 체어리티 없는 죽은 행위와 살아 있는 열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4:3) AC.348‘땅의 소산’(fruit of the ground)이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를 뜻한다는 것은 이어지는 내용에서도 분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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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6, 창4:3, ‘체어리티 없는 신앙에서도 행위와 예배는 나올 수 있습니다’(AC.346-349)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And at the end of days it came to pass that Cain brought of the fruit of the ground an offering to Jehovah. (창4:3) AC.346‘날들의 끝에’(end of days)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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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And at the end of days it came to pass that Cain brought of the fruit of the ground an offering to Jehovah. (창4:3)

 

AC.346

‘날들의 끝에’(end of days)는 시간이 흐른 뒤를 뜻하고, ‘땅의 소산’(fruit of the ground)은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를 뜻하며, ‘여호와께 제물로 드림’(an offering to Jehovah)은 거기에서 나온 예배를 뜻합니다. By the “end of days” is meant in process of time; by the “fruit of the ground,” the works of faith without charity; and by “an offering to Jehovah,” worship thence derived.

 

해설

AC.346부터 창4:3의 속뜻으로 들어갑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라는 짧은 말씀을 스베덴보리는 세 부분으로 나눕니다. ‘날들의 끝에’는 시간이 흐른 뒤를, ‘땅의 소산’은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를, ‘여호와께 제물로 드림’은 거기에서 나온 예배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AC.346의 가장 중요한 점은 가인에게도 ‘행위’가 있고 ‘예배’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라고 해서 반드시 아무런 종교적 행위도 하지 않거나 하나님께 예배하지 않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외적으로는 신앙에 속한 많은 행위와 예배가 그대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어디에서 나오며 무엇이 그 안에 생명을 주고 있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먼저 ‘날들의 끝에’는 이 번호에서는 ‘시간이 흐른 뒤’를 뜻합니다. 앞의 AC.338-345에서 가인이 의미하는 신앙의 성질이 차례로 밝혀졌습니다. 본래 태고교회에서는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이 사랑 안에 있었고 퍼셉션으로 알려졌지만,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에게서는 신앙이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인식되고 인정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전에는 마음에 새겨져 있던 것이 신앙에 관한 지식과 교리로 따로 인식되었으며, 그 신앙이 체어리티와 분리될 때 참된 신앙의 생명을 잃는다는 사실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창4:3에서는 그 신앙으로부터 무엇이 나오는지를 다룹니다. 다만 ‘날들의 끝에’라는 표현 자체가 어떤 영적 과정의 완성이나 특정 단계를 직접 의미한다고 여기기보다는, 여기서는 우선 스베덴보리의 설명 그대로 ‘시간이 흐른 뒤’라는 뜻을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이 표현의 의미는 바로 다음 AC.347에서 더 자세히 설명됩니다.

 

그다음 ‘땅의 소산’은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를 뜻합니다. 여기서 ‘땅의 소산’이라는 표현 자체를 언제나 부정적인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앞 AC.343에서 인용된 사30:23의 ‘땅의 소산의 양식’은 체어리티를 나타냈습니다. 따라서 말씀의 상응을 하나의 고정된 암호표처럼 사용하여 ‘땅의 소산=나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는 그것을 가져오는 사람이 ‘가인’이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의미하고, AC.345에서는 ‘농사하는 자’가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을 나타낸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경작한 땅에서 나온 소산은 그와 같은 신앙에서 나온 행위를 의미합니다. 같은 표현도 그것이 놓인 문맥과 연결된 영적 상태에 따라 의미를 살펴야 한다는 점을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사실이 드러납니다.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에서도 ‘행위’는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인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땅을 경작했고 소산을 거두었으며 그것을 여호와께 가져왔습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문제를 단순히 ‘선행을 하는 사람과 선행을 하지 않는 사람’의 대비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외적으로 선해 보이는 일을 한다는 사실만으로 그 행위의 내적 성질이 자동으로 결정되는 것도 아닙니다. 체어리티는 단지 어떤 종류의 외적 행동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받아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고 행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같은 종교적 봉사나 헌신처럼 보여도 그것이 자기 의와 자기 영광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을 이웃의 유익을 위해 행하는 것인지에 따라 그 내적인 성질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의 내면을 쉽게 판단할 수 없으므로, 이 원리는 무엇보다 자기 자신의 행위가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살피는 기준으로 사용하는 것이 옳습니다.

 

AC.346이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지점은 ‘여호와께 제물로 드림’을 ‘거기에서 나온 예배’라고 풀이하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거기에서’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예배가 앞에서 말한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와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태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의 예배와 그의 내적 생명은 서로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가인도 여호와께 제물을 드립니다. 그는 하나님을 부정하는 사람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 때문에 가인의 이야기는 더 깊은 경고가 됩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도 종교적인 형태를 갖출 수 있고, 행위를 만들어 낼 수 있으며, 심지어 여호와께 드리는 예배의 형태까지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344의 설명과 매우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거기서는 신앙에 관한 기억 지식과 인식 지식과 교리가 사람을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만들고 체어리티라는 목적에 이르게 하지 못한다면 ‘텅 빈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AC.346에서는 문제가 단지 머릿속의 지식과 교리에만 머물지 않을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도 자기 나름의 삶과 종교적 행위를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외적인 활동의 양만 가지고 신앙의 생명을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많은 종교 활동을 하고 있는가보다 그 신앙과 행위가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있는가가 더 근본적인 질문이 됩니다.

 

이것은 이어질 가인과 아벨의 제물을 이해하는 데도 매우 중요합니다. 겉으로 보면 두 사람 모두 여호와께 제물을 드립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을 가져오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가져옵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를 ‘식물 제사는 나쁘고 동물 제사는 좋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자연적인 제물의 종류가 주님의 반응을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AC.346이 이미 가인의 제물을 설명하면서 그 배후에 있는 신앙과 행위의 성질을 먼저 밝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가인의 제물은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에서 나온 예배이고, 뒤에서 아벨의 제물은 체어리티에서 나온 예배로 설명됩니다. 두 예배의 차이는 외적인 물건의 차이보다 그것을 낳은 내적 상태의 차이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AC.346은 예배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도 바꾸어 놓습니다. 우리는 흔히 예배를 드렸다는 사실 자체에 큰 의미를 둡니다. 물론 예배는 중요합니다.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찬송하며 주님께 마음을 돌리는 것은 신앙생활의 소중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AC.346은 ‘예배를 드렸는가?’와 함께 ‘그 예배는 어떤 신앙과 사랑에서 나오고 있는가?’를 묻게 합니다. 이것은 예배 중에 감정이 얼마나 뜨거웠는지, 형식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얼마나 많은 것을 드렸는지를 평가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배가 우리를 주님 앞에서 낮추고, 자기 안의 악을 보아 피하게 하며,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와 실제 쓰임으로 나아가게 하고 있는지를 살피라는 뜻에 가깝습니다. 예배와 삶은 서로 다른 두 세계가 아니라 같은 내적 생명에서 흘러나와야 합니다.

 

특히 가인의 제물이 무거운 이유는 그가 ‘예배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예배했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도 교리는 남을 수 있고, 종교적 행위도 남을 수 있으며, 예배도 남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외적인 종교생활이 활발하다는 사실만으로 신앙과 체어리티가 결합되어 있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이것을 다른 교회나 다른 사람의 예배를 의심하고 정죄하는 도구로 사용해서도 안 됩니다. 사람의 내적 사랑을 완전히 아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AC.346은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나는 예배하고 있는가?’에서 멈추지 않고 ‘내 예배와 신앙은 나를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끌고 있는가?’를 묻게 하는 말씀입니다.

 

결국 AC.346의 흐름은 매우 간결합니다. ‘시간이 흐른 뒤 →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 → 거기에서 나온 예배’입니다. 앞의 AC.338-345가 사랑에서 신앙이 분리되는 상태의 성질을 설명했다면, 이제 AC.346-349는 그 상태에서 나온 행위와 예배를 다루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벌써 중요한 사실 하나가 분명해집니다. ‘행위가 있다’는 것과 ‘체어리티가 있다’는 것은 언제나 같은 말이 아니며, ‘예배가 있다’는 것과 ‘예배의 내적 생명이 살아 있다’는 것도 언제나 같은 말이 아닙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와 결합되어야 하고, 참된 행위는 그 체어리티의 선을 나타내며, 참된 예배 역시 그 생명에서 흘러나와야 합니다. 그러므로 AC.346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나는 무엇을 드리고 있는가?’보다 더 깊습니다. ‘내가 드리는 예배는 어디에서 나오고 있는가?’입니다.

 

 

 

AC.347, 창4:3, ‘세월이 지난 후에 - 신앙이 사랑에서 점점 멀어질 때’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4:3) AC.347‘세월이 지난 후에’(end of days, ‘날들의 끝에’)가 ‘시간이 흐른 뒤’를 뜻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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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5, 창4:2,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농사하는 자’ 가인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5‘농사하는 자’(tiller of the ground)가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을 나타낸다는 것, 곧 사랑에서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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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이스라엘의 여러 수도원을 찾아다니던 중 그리심산의 수도원을 방문했던 경험에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영상은 앞선 수도사 전승들과 조금 다릅니다. 다른 수도사의 특별한 삶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강문호 수도사 자신의 체험이 중심입니다. 그리심산에서 나사렛과 예루살렘 방향을 바라보며 ‘예수님은 이 길을 얼마나 많이 걸으셨을까?’ 생각했고, 그 생각이 결국 자신도 예수님의 길을 몸으로 한번 걸어 보고 싶다는 결심으로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걷기가 단순한 순례 체험을 넘어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이후 가난한 사람과 나그네를 바라보는 눈이 달라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영상 초반의 ‘사람이 계획을 세운다 할지라도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구나’라는 고백은 이 이야기 전체를 여는 좋은 문장입니다. 수도원으로 향하던 중 자동차가 고장 나 계획이 두 시간가량 어그러졌는데, 강문호 수도사는 그 작은 사건을 통해 ‘아무리 내가 서둘러도 하나님의 속도에 맞추어야 한다’고 깨닫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섭리는 단순히 내가 세운 일정이 잘 풀리게 해 주시는 주님의 도움을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알지 못하는 수많은 길을 통해 주님께서 사람을 선으로 이끄시는 신적 질서에 가깝습니다. 때로는 내가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는 것도 섭리 안에 있지만, 지연되고 막히고 예상과 달라지는 것 역시 섭리 안에서 쓰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왜 하나님께서 차를 고장 나게 하셨는가?’를 섣불리 단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통해 내가 무엇을 배우고 어떤 선으로 인도되는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그리심산 꼭대기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예수께서 걸으셨을 것으로 생각되는 길을 바라보다 자기 자신에게 시선을 돌립니다. 이 대목은 이번 영상에서 상당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는 아버지를 닮았다는 말은 평생 수없이 들었는데 ‘강문호 목사, 예수님 닮았구나’라는 말은 한 번도 듣지 못했다고 고백합니다. ‘나는 과연 예수님을 얼마나 닮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이것은 수도생활을 하든 하지 않든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본질적인 질문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에서 ‘예수님을 닮는다’는 말을 조금 더 깊이 들어가게 합니다. 주님을 닮는다는 것은 외적으로 주님이 걸으셨던 길을 걷거나, 주님처럼 가난하게 살거나, 주님께서 겪으셨던 육체적 고생을 비슷하게 경험하는 것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그런 외적 실천은 귀한 영적 계기가 될 수 있지만, 그 자체가 거듭남은 아닙니다. 주님을 닮는다는 것은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사람의 의지와 삶 속으로 들어와 그 사람의 사랑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어디를 걸으셨는가?’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가 ‘주님께서는 왜 그 길을 걸으셨는가? 누구를 사랑하셨고, 누구를 섬기셨으며, 무엇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셨는가?’를 묻게 됩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그래서 서울의 아직은 섬기시던 갈보리교회에서 충주봉쇄수도원까지 거리를 재어 봅니다. 약 146킬로미터였습니다. 예수께서 걸으셨던 길을 생각하며 이 정도 거리를 자신도 한번 걸어 보겠다고 결심합니다. 더욱이 일부러 더운 7월을 택하고 돈도 없이 길을 나섭니다. 배낭에는 빈 양재기와 잠잘 때 필요한 최소한의 물품을 넣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 행동 자체를 일반적인 신앙의 모범으로 만들지 않는 것입니다. 누구나 돈 없이 146킬로미터를 걸어야 예수님을 닮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강문호 수도사가 자기 자신에게 적용한 하나의 수도적 훈련입니다. 외적인 수도 훈련의 가치는 그 외형의 강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속 사람이 어떻게 변화되느냐에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변화가 뜻밖에도 첫날부터 시작됩니다. 점심때가 되어 배가 고파졌지만 아무 집에나 들어가 ‘밥 좀 주십시오’라고 말하지 못합니다. 음식점들이 즐비해 있는데도 돈이 없으니 들어갈 수 없습니다. 빈 양재기를 가지고 나왔지만 막상 그것을 내밀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자신 안의 무언가가 깨지기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평생 목회자로서 사람들에게 대접받는, 그것도 보통 극진히 대접받던 자리에 익숙해져 있었는데, 이제 자신이 누군가에게 한 끼를 부탁해야 하는, 그러니까 구걸해야 하는 처지가 되자 그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처음 몸으로 알게 된 것입니다.

 

이 대목은 이번 영상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가장 주목할 만한 장면 가운데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외적인 가난이 잠시나마 내적인 proprium을 건드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나는 겸손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제로는 자신의 지위와 역할, 평판과 대우 속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벗겨지는 상황에 놓이면 미처 알지 못했던 자기 모습이 드러납니다. ‘밥 한 끼를 달라는 말을 못 하겠더라’는 고백은 사소해 보이지만 오히려 매우 정직합니다. 평생 베푸는 위치에 있던 사람이 받는 위치에 서 보는 순간입니다. 베푸는 사람에게는 아직 자존심을 유지할 여지가 있지만, 도움을 청해야 하는 사람은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길가에서 절 하나를 발견합니다. 그 앞에는 ‘식사 제공합니다’라는 현수막이 붙어 있었습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목사가 배고프다고 절에 들어가 밥을 먹을 수 있겠느냐는 생각으로 그냥 지나갑니다. 그런데 그 뒤로 교회들도 몇 곳 지나쳤지만 ‘식사 제공합니다’라는 현수막을 내건 교회는 하나도 없었다고 회고합니다. 이 장면은 굳이 불교와 기독교를 비교하여 어느 쪽이 낫다고 판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체어리티라는 관점에서 우리 자신에게 질문을 돌리는 편이 훨씬 유익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배고픈 사람이 실제로 들어와 밥을 먹을 수 있는 신앙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체어리티는 단순한 호의나 감정이 아닙니다. 선은 반드시 쓰임으로 내려와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진리를 알고 있는 것과 실제로 배고픈 사람에게 밥 한 그릇을 내어주는 것은 다릅니다. 전자는 이해 속에 있는 진리이고, 후자는 삶이 된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절 앞의 ‘식사 제공합니다’라는 작은 문구가 강문호 수도사에게 남긴 인상은 충분히 의미가 있습니다. 신앙은 결국 사람에게 어떤 선을 행하고 있는가를 통해 그 생명력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저녁이 되고 어두워지면서 문제는 더욱 현실적으로 변합니다. 이제 배고픔뿐 아니라 ‘오늘 밤 어디에서 자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다가 멀리 교회 십자가가 보이고, 그곳에서 아는 후배 목사를 만나 숙식의 도움을 받습니다. 하루 종일 굶은 뒤 먹은 그 밥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여기에도 중요한 변화가 있습니다. 평소라면 평범했을 한 끼가 그날은 잊을 수 없는 은혜가 되었습니다. 대상은 똑같은 밥인데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상태가 달라진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영적 삶을 이해할 때 ‘상태’(state)를 매우 중요하게 다룹니다. 같은 말씀을 읽어도 사람의 상태에 따라 전혀 다르게 받아들여지고, 같은 선물을 받아도 자기 충족 속에 있을 때와 궁핍 속에 있을 때 그 의미가 다릅니다. 배고픔을 경험하기 전에는 ‘밥을 대접한다’는 것이 하나의 친절이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하루 종일 굶고 나면 밥 한 그릇이 사람을 살리는 체어리티라는 것을 몸으로 알게 됩니다. 지식이 경험을 통과하면서 삶의 인식으로 내려온 것입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하루 약 14시간씩 사흘을 걸어 충주봉쇄수도원에 도착했다고 회고합니다. 그리고 잔디밭에 엎드려 한없이 울었다고 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 눈물이 ‘내가 해냈다’는 성취의 눈물이 아니었다는 그의 설명입니다. 한번 걸었을 뿐인데 이렇게 힘든데 예수께서는 얼마나 많이 걸으셨겠느냐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영상은 외적인 순례에서 내적인 성찰로 들어갑니다.

 

바로 이 지점은 매우 소중하면서도 동시에 조심해서 붙들어야 할 지점입니다. 수도적 훈련에는 언제나 두 방향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내가 이만큼 걸었다, 내가 이만큼 금식했다, 내가 이만큼 버텼다’는 자기 공로로 향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그 경험을 통하여 ‘나는 얼마나 약한 존재인가, 주님께서는 얼마나 낮아지셨는가’를 깨닫는 길입니다. 똑같이 146킬로미터를 걸어도, 아니 정확히는 그보다는 많이 적은, 왜냐 하면, 서울 갈보리교회에서 인도로 걸을 수 있는 데가 근처에는 없어 할 수 없이 차로 이동, 좀 서울 외곽에서 출발해야 해서... 전자는 proprium을 키우고 후자는 proprium을 낮춥니다. 외적인 행위가 영적 가치를 자동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를 통해 어떤 사랑이 형성되느냐가 결정적입니다.

 

이 점에서 강문호 수도사가 ‘내가 승리했다고 하는 기쁨의 눈물은 아니었다’고 굳이 말한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아도 수도의 가장 중요한 기준은 ‘얼마나 대단한 일을 했는가?’가 아니라 ‘그 일을 통해 자기 자신에게서 얼마나 멀어지고 주님과 이웃에게 얼마나 가까워졌는가?’입니다. 수행의 양보다 애정의 방향이 중요합니다.

 

그 후 강문호 수도사는 프랑스 생장피에드포르에서 스페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약 800킬로미터의 순례길도 걸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번 영상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몇 킬로미터를 걸었느냐가 아닙니다. 그가 그 경험의 결과로 무엇이 달라졌다고 말하느냐입니다. 그는 ‘자아가 깨집니다. 인생은 나그네라는 것이 절실하게 느껴집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다음 말이 오히려 이번 영상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뒤부터는 누가 찾아오면 밥을 주고 싶고, 잘 곳이 없는 사람에게 잠자리를 마련해 주고 싶고, 돈이 없는 사람을 보면 여관비라도 주고 싶어졌다는 것입니다. 집에 빈방이 있으면 집 없는 사람을 생각하고, 입지 않는 옷이 있으면 헐벗은 사람을 생각하고, 지갑에 돈이 있으면 돈 없는 사람을 생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순례’가 ‘체어리티’로 바뀝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이것이야말로 이 영상에서 가장 귀한 대목입니다. 146킬로미터를 걸었다는 사실보다 ‘배고픈 사람을 보게 되었다’는 변화가 더 중요합니다. 800킬로미터를 걸었다는 사실보다 ‘빈방을 보면 집 없는 사람을 생각하게 되었다’는 변화가 더 중요합니다. 외적 수도가 내적 체어리티로 열매 맺은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적 삶을 세상을 떠나는 삶으로 보지 않습니다. 자기 직업과 가정과 사회적 책임을 버리는 것이 그 자체로 더 거룩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 가운데서 맡겨진 쓰임을 성실하게 행하면서 악을 죄로 알고 피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삶이 천국을 준비하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순례길에서 받은 감동이 참으로 영적인 것이었는지를 판단하는 가장 좋은 기준은 ‘그 뒤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가?’입니다. 이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가 들려주는 후반부의 변화는 바로 그 기준에 상당히 잘 부합합니다.

 

특히 ‘빈방이 있으면 집 없는 사람을 생각하고, 입지 않는 옷이 있으면 헐벗은 사람을 생각하고, 지갑에 돈이 있으면 돈 없는 사람을 생각하게 되었다’는 고백은 단순하지만 깊습니다. 사람의 시선이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에서 ‘내가 가진 것이 누구에게 쓰일 수 있는가?’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소유를 버리는 것보다 더 깊은 변화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재산 그 자체는 악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재산을 사랑하는 질서입니다. 내가 가진 것을 자기만족과 지배를 위해 사용하는가, 아니면 주님께서 맡기신 쓰임을 위해 사용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영상 마지막에 강문호 수도사는 이스라엘의 어떤 가정에서는 밥을 조금 넉넉하게 지어 놓고 식사 전에 자녀에게 문밖에 나가 지나가는 가난한 사람이 있는지 살펴보게 하며, 있다면 불러 함께 먹는다는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사실관계의 일반화 여부는 별도로 확인할 필요가 있겠지만, 이 일화가 전달하려는 영적 뜻은 아름답습니다. ‘내 식탁에 아직 한 자리가 남아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체어리티는 거창한 사업에서만 시작되지 않습니다. 내 밥상 한 자리, 내 방 한 칸, 내 옷 한 벌, 내 지갑의 얼마가 다른 사람을 위한 쓰임이 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면, ‘예수님을 닮는다’는 영상 초반의 질문과 후반부가 하나로 연결됩니다. 처음에는 강문호 수도사가 ‘나는 예수님 닮았다는 말을 한 번도 듣지 못했다’며 예수께서 걸으셨던 거리를 실제로 걸어 보려 합니다. 그러나 영상이 끝날 무렵에는 예수님을 닮는 것이 ‘예수님이 걸으신 거리를 걷는 것’에서 ‘예수님이 바라보셨던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으로 이동합니다. 저는 이것이 이번 영상의 가장 아름다운 흐름이라고 봅니다.

 

주님의 발자국을 그대로 따라 걷는 것은 누구에게나 가능하지 않습니다. 나사렛에서 예루살렘까지 갈 수도 없고,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을 수도 없는 사람이 훨씬 많습니다. 그러나 배고픈 사람을 바라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외로운 사람에게 다가가고, 내게 있는 것을 필요한 사람과 나누고, 자신의 자리에서 정직하게 쓰임을 감당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예수님을 따라 걷는다’는 말의 가장 깊은 뜻은 예수님의 이동 경로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이 향했던 방향으로 우리의 사랑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앞서 살펴본 크리스토포로스 이야기와도 묘하게 맞닿아 있습니다. 크리스토포로스는 그리스도를 찾다가 강을 건너지 못하는 사람들을 등에 업어 주는 쓰임 속에서 마침내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예수님의 길을 몸으로 따라가려다가 자신이 배고파 보고, 잘 곳이 없어 보고, 도움받아 보고 나서 비로소 배고픈 사람과 나그네를 새롭게 보기 시작합니다. 두 이야기 모두 결국 ‘주님을 찾는 길이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로 열린다’는 곳에서 만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더 묻게 합니다. 이런 체험은 한 번의 감동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이후의 삶에서 계속 검증되어야 합니다. 순례 중에 눈물을 흘리는 것은 소중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보고 마음 아파하는 것도 소중합니다. 그러나 거듭남은 순간의 감동보다 반복되는 선택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내 proprium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자기 명예와 편안함과 이익을 앞세우려 할 때마다 그것을 내려놓고 주님의 선을 선택하는 일이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참된 수도는 어떤 특별한 장소나 특별한 며칠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매 순간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이번 영상은 그래서 외적인 수도 훈련의 한계를 보여 주기보다는, 오히려 외적인 수도 훈련이 제대로 쓰였을 때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이야기로 읽고 싶습니다. ‘걷기’가 목적이 아니라 ‘눈이 열리는 것’이 목적입니다. ‘고생’이 목적이 아니라 ‘이웃의 고생을 알아보게 되는 것’이 목적입니다. ‘나는 이만큼 했다’가 목적이 아니라 ‘주님께서 내게 주신 것으로 이제 누구를 섬길 것인가?’가 목적입니다. 외적인 훈련이 여기까지 사람을 데려간다면 그 훈련은 귀한 쓰임을 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번 영상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그분이 걸으셨던 거리를 재현하는 데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 길에서 주님께서 바라보셨던 가난한 자와 나그네를 나도 바라보고 사랑하며, 내게 맡겨진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체어리티의 삶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그 속뜻을 얻습니다.’

 

그래서 저는 영상 초반의 ‘강문호 목사, 예수님 닮았구나 하는 말을 한 번도 듣지 못했다’는 고백에 대한 답이 어쩌면 영상 후반부에 이미 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닮았다는 것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해 주는 데 있지 않습니다. 굳이 누군가에게 ‘예수님을 닮았다’는 말을 들을 필요도 없습니다. 배고픈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치던 눈이 그를 돌아보는 눈으로 바뀌고, 내 빈방이 나만의 여분 공간이 아니라 누군가 쉴 수 있는 방으로 보이며, 내 지갑 속 돈이 내 것만이 아니라 누군가를 살리는 쓰임으로 보이기 시작한다면, 바로 그런 변화 속에서 주님의 형상이 조금씩 사람 안에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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