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5:14의 한글 개역개정과 영어Potts역이 다른 이유,그리고 스베덴보리는KJV를 사용했나?
계5:14를 보면 개역개정은 ‘네 생물이 이르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반면KJV는 ‘And the four beasts said, Amen. And the four and twenty elders fell down and worshipped him that liveth for ever and ever.’라고 하여,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께’라는 표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 차이가 단순히 번역 방식의 차이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사용한 성경 사본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KJV는16세기의 공인본문(Textus Receptus)을 바탕으로 번역되었기 때문에 계5:14의 마지막에 ‘him that liveth for ever and ever’라는 문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개역개정을 비롯하여NIV, ESV, NASB등 대부분의 현대 역본은 오늘날의 비평본문(Nestle-Aland, UBS계열)을 따르므로, 이 문구를 본문에서 제외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까지만 번역합니다. 현대 본문비평에서는 이 문장이 계4:10의 동일한 표현이 후대 필사 과정에서 반복되어 삽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두 본문을 영어로 나란히 놓고 보면 그 이유를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계4:10에는 ‘이십사 장로들이...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께 경배하고...’라는 표현이 나오고, 공인본문 계5:14에도 거의 동일하게 ‘장로들은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께 경배하더라’가 나타납니다. 이런 반복 때문에 현대 비평본문은 계5:14의 해당 부분을 원래 본문이 아니라 후대의 첨가로 판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더 중요한 문제가 생깁니다.AC.290에서 우리가 읽는 영어는KJV와도 완전히 일치하지 않습니다.Potts번역은 ‘Him who lives for ages of ages’라고 되어 있는데,KJV는 ‘him that liveth for ever and ever’라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 보면 스베덴보리가KJV를 그대로 사용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차이를 이해하려면 먼저 『천국의 비밀』의 원문이 무엇인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Arcana Coelestia』는 애초에 영어가 아니라 라틴어로 저술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는Potts판은John Faulkner Potts가19세기에 그 라틴어 원문을 영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좀 더 정확히는John Clowes의 번역(1774~1806)을John Faulkner Potts가 전면 개정, 편집한 것이지요. 따라서Potts의 영어 표현은 스베덴보리 자신의 영어가 아니라, 라틴어를 영어로 옮긴 결과입니다.
예를 들어 라틴어 원문에는 ‘vivit in saecula saeculorum’과 같은 표현이 사용됩니다.Potts는 이를 비교적 직역에 가깝게 ‘lives for ages of ages’라고 옮겼고,KJV는 영어의 전통적인 성경 표현을 따라 ‘liveth for ever and ever’라고 번역했습니다. 표현은 다르지만 의미상으로는 거의 동일합니다. 따라서Potts가KJV와 다른 표현을 사용했다고 해서 스베덴보리가KJV를 부정하거나 다른 신학적 의도를 가진 것은 아닙니다.
더 나아가 스베덴보리의 성경 사용 방식도 단순히 ‘KJV를 사용했다’는 한마디로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는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직접 읽을 수 있었고, 평생 성경 원문을 연구했습니다. 『천국의 비밀』을 비롯한 여러 저작에서는 히브리어 단어의 의미를 직접 설명하거나 헬라어 표현을 근거로 논증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실제 연구의 중심에는 히브리어 성경과 헬라어 신약, 그리고 라틴어 성경이 있었습니다.
『천국의 비밀』을 자세히 읽어 보면 스베덴보리는 성경을 인용할 때 반드시 어느 한 번역본만을 그대로 따르지는 않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히브리어의 의미를 직접 반영하고, 어떤 곳에서는 라틴어 성경(Vulgata)의 표현을 따르며, 또 어떤 곳에서는 기존 번역본과는 다른 어순이나 단어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는 번역을 임의로 바꾸기 위해서가 아니라, 영적 의미를 가장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한 선택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다만 여기에서 한 가지는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끔 ‘스베덴보리가 자신만의 성경을 새로 만들어 그것을 사용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하지만, 현재까지 알려진 자료만으로는 완성된 독립적인 ‘스베덴보리 성경’이 존재했다는 확실한 근거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히브리어 원문, 헬라어 원문, 라틴어 성경, 그리고 당시 사용되던 여러 번역본을 서로 대조하면서 가장 적절한 표현을 선택하여 인용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면 앞으로AC를 번역할 때, 가장 적절한 원칙도 자연스럽게 정리됩니다. 본문은 개역개정4판을 기본으로 삼되, 스베덴보리의 논증이 특정 단어 하나에 의존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라틴어 원문과Potts의 영어를 함께 확인하는 것이 좋습니다. 또한 개역개정과KJV또는Potts사이에 차이가 있을 경우에는 그 차이가AC의 해설에 실제 영향을 미칠 때만 간결하게 설명을 덧붙이면 됩니다.
네 생물이 이르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계5:14)And the four animals said,Amen.And the twenty four elders fell down and worshiped Him who lives for ages of ages(Rev. 5:14).
스베덴보리가AC.290에서 위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말씀에서 오직 주님만을‘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Him who lives for ages of ages)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증하기 위해서입니다.AC.290의 중심 주제는 생명의 근원이 오직 주님께 있다는 것입니다.따라서 스베덴보리는 요한계시록에서 반복되는 이 표현을 인용,주님만이 생명 자체이심을 성경 전체가 일관되게 증언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 구절은 계4:10과 매우 비슷한 장면입니다.그러나 계4이 하늘 보좌에 앉으신 주님께 드리는 경배를 보여 준다면,계5은 두루마리를 받으신 어린양께 모든 천상 세계가 경배하는 절정의 장면입니다.그 마지막에서 네 생물은‘아멘’이라고 화답하고,이십사 장로들은 다시 엎드려 영어 성경에 따르면‘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께 경배합니다.스베덴보리는 이러한 반복을 통하여,하늘 전체가 주님을 생명 자체이신 분으로 인정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주님께서 영원히 존재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주님은 시간을 무한히 살아가시는 분이 아니라,영원부터 영원까지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분입니다.사람과 천사는 생명을 받아 살아가지만,주님은 누구에게서도 생명을 받지 않으십니다.그러므로 이 이름은 오직 주님께만 사용할 수 있는 이름입니다.
또한 네 생물이‘아멘’이라고 하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아멘’은 단순한 응답이 아니라,주님의 진리와 생명이 참되다는 것을 온전히 인정하는 표현입니다.이어서 장로들이 엎드려 경배하는 것은,하늘의 모든 지혜와 모든 영광이 자기들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께로부터 왔음을 인정하는 모습입니다.결국‘아멘’과‘경배’는 모두 생명 자체이신 주님을 인정하는 천국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 장면은AC.290의 핵심 사상을 더욱 분명하게 해 줍니다.천사들은 결코 자기들이 살아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그들은 자신들의 사랑과 지혜,기쁨과 행복,그리고 생명 자체가 모두 주님으로부터 흘러 들어오는 것임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리며,오직 그분만을‘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로 경배합니다.
계4:10과 계5:14를 함께 인용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같은 표현이 두 번 반복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하늘의 모든 예배와 찬양의 중심이 언제나 생명 자체이신 주님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스베덴보리는 이러한 반복을 통하여,말씀 전체가 동일한 진리를 증언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가 계5:14를AC.290에서 인용하는 이유는,하늘의 모든 존재가 오직 주님만을‘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로 경배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이것은 모든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AC.290의 핵심 교리를 천국의 예배 장면을 통하여 확증하는 말씀입니다.따라서 참된 신앙이란 주님께 생명을 달라고 구하는 것에 앞서,지금도 내 안에 있는 모든 생명이 오직 주님으로부터 흘러오고 있음을 인정하고 감사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계4:10)the twenty and four elders fell down before Him who sat on the throne,and worshiped Him who lives for ages of ages,and cast their crowns before the throne,saying(Rev. 4:10),
스베덴보리가AC.290에서 위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말씀에서 오직 주님만을‘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Him who lives for ages of ages)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AC.290은 주님만이 생명 자체(Life Itself)이시며,모든 천사와 사람은 그 생명을 받아 살아간다고 설명합니다.이 구절은 그 진리를 하늘의 예배 장면을 통하여 증언하는 대표적인 말씀입니다.
계4은 하늘 보좌의 광경을 보여 줍니다.보좌에 앉으신 주님 앞에서 이십사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며,그분을‘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라고 찬양합니다.스베덴보리는 이 표현에 주목합니다.여기서‘살아 계시는 이’는 단순히 영원히 존재하시는 분이라는 뜻이 아니라,영원부터 영원까지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그러므로 이 이름은 오직 주님께만 적용됩니다.
특히 장로들이 자기들의 관을 보좌 앞에 내려놓는 모습도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관은 왕권과 영광을 상징하지만,장로들은 그것을 자기 것으로 주장하지 않고 모두 주님 앞에 내려놓습니다.이는 천사들이 자신들의 지혜와 사랑,그리고 행복이 자기들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모두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임을 인정하는 모습을 나타냅니다.다시 말해,생명뿐 아니라 생명에서 나오는 모든 선과 진리,그리고 영광도 오직 주님께 속한다는 고백입니다.
이 장면은AC.290의 중심 사상과 정확히 연결됩니다.스베덴보리는 사람이나 천사가 스스로 생명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고 거듭 말합니다.천국 천사들조차도 자신들의 생명을 자기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오히려 그들은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흘러 들어온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분명히 알기 때문에,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립니다.장로들이 관을 내려놓는 모습은 바로 이러한 천국 상태를 상징합니다.
또한‘경배한다’는 것도 단순히 예배 의식을 행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영적으로는 주님만이 생명 자체시며,자신은 그 생명을 받아 살아가는 존재임을 마음 깊이 인정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따라서 참된 경배는 입술의 찬양보다도,모든 생명의 근원이 오직 주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데 있습니다.
이 구절은 앞에서 인용된 렘5:2의‘살아 계신 여호와’,단4:34의‘영생하시는 이’와도 같은 흐름에 있습니다.예언서에서는 주님을‘살아 계신 여호와’라고 하고,다니엘에서는‘영생하시는 이’라고 하며,요한계시록에서는‘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라고 합니다.표현은 조금씩 다르지만 모두 동일한 진리를 증언합니다.곧 오직 주님만이 생명 자체이시며,영원한 생명의 유일한 근원이시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계4:10을 인용하는 이유는,천국 천사들까지도 오직 주님만을‘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로 경배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이것은 생명이 사람이나 천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께만 있음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는 하늘의 증언입니다.그러므로 태고교회를‘모든 산 자의 어머니’라 한 것도 그 교회 자체에 생명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사람들에게 전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기한이 차매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보았더니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이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이를 찬양하고 경배하였나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단4:34)And at the end of the days I,Nebuchadnezzar,lifted up my eyes to the heavens,and my knowledge returned to me,and I blessed the Most High and I praised and honored Him who lives to eternity,whose dominion is an eternal dominion,and His kingdom is with generation and generation(Dan.4:34);
스베덴보리가AC.290에서 위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주님을 ‘영생하시는 이’(Him who lives to eternity)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AC.290은 오직 주님만이 생명 자체(Life Itself)이시며, 모든 생명은 그분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그 진리를 증언하는 대표적인 성경 구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구절의 역사적 배경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교만 때문에 이성을 잃고 짐승처럼 살다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간이 지난 뒤 다시 총명을 회복하는 장면입니다. 그는 자신의 권세와 영광이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하였지만,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깨닫게 된 후 비로소 ‘영생하시는 이’를 찬양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특히 주목하는 표현은 ‘영생하시는 이’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주님께서 영원히 존재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은 생명을 오래 유지하시는 분에 그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생명 자체이시며, 영원부터 영원까지 모든 생명의 근원이신 분입니다. 따라서 ‘영생하시는 이’라는 이름은 사람이나 천사에게는 결코 사용할 수 없는, 오직 주님께만 속하는 이름입니다.
또한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보았더니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는 말씀도AC.290의 내용과 깊이 연결됩니다. 그의 총명이 회복된 것은 단순히 정신 상태가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는 비로소 자신의 생명과 권세가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영적으로는 생명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심을 깨닫는 상태입니다.
느부갓네살은 그 후 ‘그의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사람의 권세와 주님의 권세를 대조하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생명과 권세는 잠시 있다가 사라지지만, 주님의 생명과 나라는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참된 생명은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는 데 있지 않고, 영생하시는 주님을 인정하는 데 있습니다.
이 구절은AC.290에서 계속 이어지는 ‘살아 계신 여호와’, ‘생명의 원천’, ‘생수의 근원’이라는 표현들과 같은 맥락에 있습니다. 말씀이 주님을 여러 이름으로 부르는 이유는 모두 하나입니다. 곧 오직 주님만이 생명 자체시며, 천사와 사람은 모두 그분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살아간다는 사실을 증언하기 위함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단4:34를 인용하는 이유는, 느부갓네살의 회개 자체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가 주님을 ‘영생하시는 이’라고 고백한 사실에 있습니다. 이것은 오직 주님만이 영원한 생명을 가지신 분이며, 모든 생명과 모든 권세는 그분으로부터 나온다는AC.290의 핵심 사상을 성경적으로 확증해 주는 중요한 증거가 됩니다.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모든 미운 물건과 모든 가증한 일로 내 성소를 더럽혔은즉 나도 너를 아끼지 아니하며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고 미약하게 하리니(겔5:11)Therefore,as I live,says the Lord Jehovih,shall it not be,because thou hast defiled My sanctuary with all thy detestable things,and with all thine abominations,that even I shall diminish thee;and My eye shall not spare,and even I will not have pity(Ezek. 5:11).
스베덴보리가AC.290에서 위 구절을 인용하는 직접적인 이유는,말씀에서 주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두고 말씀하시는 표현이 나오며,이를 통해 오직 주님만이 생명 자체이심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영어의‘as I live’는 개역개정의‘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에 해당합니다.
AC.290에서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단지 살아 계시는 한 존재가 아니라 생명 자체(Life Itself)시라고 설명합니다.사람과 천사는 생명을 받아 살아가지만,주님은 누구에게서도 생명을 받지 않으십니다.모든 생명은 오직 주님으로부터 나오므로,주님께서‘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라 말씀하시는 것은 그분의 말씀이 생명 자체의 권위에서 나온다는 뜻입니다.
이 구절의 역사적 배경은 예루살렘과 성소(sanctuary)의 모독에 대한 심판입니다.백성은‘모든 미운 물건과 모든 가증한 일’로 성소를 더럽혔습니다.그러나 스베덴보리가AC.290에서 이 구절을 인용하는 주된 목적은 성소의 모독이나 예루살렘의 심판을 자세히 해설하려는 것이 아닙니다.그는 이 구절 가운데‘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라는 표현에 주목,말씀이 주님께만 고유한 생명을 증언한다는 사실을 밝히려는 것입니다.
다만 이 구절의 문맥은AC.290의 생명에 관한 가르침을 더욱 선명하게 합니다.생명 자체이신 주님께서 성소의 모독을 심판하신다는 것은,거룩한 것을 더럽히는 일이 곧 생명의 근원을 거부하는 것임을 보여 줍니다.성소는 주님의 선과 진리가 있어야 할 곳인데,그 자리를 악과 거짓으로 채우면 사람과 교회는 생명 자체이신 주님과의 연결을 스스로 끊게 됩니다.
‘나도 너를 아끼지 아니하며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고 미약하게 하리니’라는 말씀도 주님께서 자비를 잃으셨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말씀은 사람의 눈에 나타나는 결과에 따라 그렇게 표현합니다.사람이 주님의 선과 진리를 끝까지 거부하면,주님으로부터 오는 보호와 생명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되고,그 결과 영적으로 약해지고 황폐해집니다.마치 주님께서 생명을 거두신 것처럼 보이지만,실제로는 사람이 생명의 유입을 스스로 막은 것,즉 자초한 것입니다.
이 구절은 앞서 인용한 렘5:2,렘12:16,렘16:14-15,렘23:7과도 같은 흐름에 있습니다.예레미야에서는‘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는 표현이 나왔고,겔5:11에서는 주님께서 친히‘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라고 말씀하십니다.이 모든 표현은 생명이 오직 주님께 있으며,주님의 생명이 모든 신적 말씀과 심판,그리고 구원의 근원임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가 겔5:11을AC.290에서 인용하는 이유는,오직 주님만이 스스로 살아 계시며,생명 자체시라는 사실을 말씀 자체로 확증하기 위해서입니다.사람과 천국,그리고 교회가 살아 있는 것은 그들 자체에 생명의 근원이 있어서가 아니라,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기 때문입니다.따라서 주님과의 연결 안에 있는 사람은‘산 자’가 되지만,거룩한 것을 더럽히고 주님의 생명을 거부하는 사람은 몸은 살아 있어도 영적으로는 죽은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그들이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지 아니하고(렘23:7)Therefore,behold,the days come,says Jehovah,that they shall no more say,Jehovah lives,who brought up the sons of Israel out of the land of Egypt(Jer. 23:7);
스베덴보리가AC.290에서 위 구절을 인용하는 직접적인 이유는,말씀이 주님을‘살아 계신 여호와’라고 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AC.290의 중심 주제는 오직 주님만이 생명 자체이시며,천사와 사람을 비롯한 모든 존재의 생명이 오직 그분으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이 구절의‘여호와의 사심으로’라는 표현이 바로 영어 본문의‘Jehovah lives’,곧‘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에 해당합니다.
렘23:7은 바로 앞에서 살펴본 렘16:14와 거의 같은 표현을 사용합니다.두 본문 모두 과거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자신들을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기억하며,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맹세하였으나,장차 주님께서 더 크고 새로운 구원을 이루실 것을 예언합니다.따라서 이 구절은 단지 과거의 출애굽을 회상하는 말씀이 아니라,살아 계신 주님께서 시대마다 자기 백성을 속박에서 건져 내시고,생명의 상태로 회복시키신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살아 계신 여호와’라는 표현은 단순히 여호와께서 존재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은 생명을 가지고 계신 분 가운데 한 분이 아니라,생명 자체(Life Itself)이십니다.사람과 천사는 생명을 받아 살아가지만,주님은 모든 생명의 원천이십니다.그러므로‘여호와께서 살아 계신다’는 고백은 모든 생명과 구원,그리고 회복의 근원이 오직 주님께 있다는 신앙고백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렘23:7만 짧게 인용하였지만,그 의미는 이어지는 렘23:8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주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을 북쪽 땅과 그들이 쫓겨났던 모든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시고,다시 그들의 땅에 살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역사적으로는 흩어진 백성의 귀환을 가리키지만,내적 의미로는 악과 거짓 가운데 흩어졌던 사람을 다시 모아 선과 진리의 질서 안으로 이끄시는 주님의 구원 역사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 구절에서‘살아 계신다’는 것은 정지된 속성이 아니라 실제로 구원하고 회복시키시는 신적 활동과 연결됩니다.살아 계신 주님은 사람을 단지 존재하게 하시는 데 그치지 않고,영적으로 죽은 상태에서 깨우시며,악의 종살이에서 건져 내시고,선과 진리 안에서 다시 살게 하십니다.주님께서 생명 자체이시라는 사실은 이처럼 사람을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역사 속에서 나타납니다.
또한 출애굽과 포로에서의 귀환은 모두 거듭남의 과정을 나타냅니다. ‘애굽 땅’은 사람이 자연적 지식과 외적인 것에 매여 있는 상태와 관련되고,흩어졌던 여러 나라에서 돌아오는 것은 악과 거짓으로 분산되었던 생각과 애정이 주님의 질서 아래 다시 모이는 것을 나타냅니다.이 모든 회복을 이루시는 분이‘살아 계신 여호와’이시므로,사람은 자기 능력으로 영적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으로부터 받아 살아납니다.
이 구절은 렘5:2와도 의미 있는 대조를 이룹니다.렘5:2에서는 사람들이 입으로‘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맹세하면서도 실제로는 거짓되게 살았습니다.그러나 렘23:7-8에서는 살아 계신 여호와께서 실제로 백성을 구원하시고 회복시키시는 일이 나타납니다.따라서 참된 고백은 단지‘주님께서 살아 계신다’고 말하는 데 있지 않고,생명 자체이신 주님의 구원을 받아 그분의 생명 안으로 들어가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렘23:7을 인용하는 이유는,말씀에서 주님만을‘살아 계신 여호와’라고 한다는 사실을 확증하기 위해서입니다.동시에 이 구절은 주님께서 생명 자체이실 뿐 아니라,악과 거짓 가운데 흩어진 사람을 다시 모으고 영적 죽음에서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구원자이심을 보여 줍니다.그러므로 태고교회가‘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될 수 있었던 것도 그 교회 자체에 생명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살아 계신 여호와,곧 생명 자체이신 주님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4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보라 날이 이르리니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지 아니하고15이스라엘 자손을 북방 땅과 그 쫓겨났던 모든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리라 내가 그들을 그들의 조상들에게 준 그들의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리라(렘16:14, 15)Therefore,behold,the days come,says Jehovah,that it shall no more be said,Jehovah lives,who brought up the sons of Israel out of the land of Egypt;but,Jehovah lives,who brought up the sons of Israel from the land of the north,and from all the lands whither He had compelled them;and I will return them onto their ground that I gave unto their fathers(Jer. 16:14-15).
스베덴보리가AC.290에서 위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오직 주님만을 ‘살아 계신 여호와’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AC.290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 오직 주님이시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으며, 이 구절은 그 진리를 더욱 깊은 차원에서 보여 줍니다.
이 구절의 역사적 배경은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예언입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기억하며, 주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장차 그보다 더 큰 구원이 이루어질 것이며, 백성은 ‘북방 땅과 그 쫓겨났던 모든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기억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역사적으로는 포로에서의 귀환을 가리키지만, 영적으로는 주님께서 사람을 악과 거짓의 모든 속박에서 건져 내시는 더 큰 구원을 나타냅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특별히 주목하는 것은 역시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이라는 표현입니다. 주님께서는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실 때도, 포로 된 백성을 다시 돌아오게 하실 때도 동일한 ‘살아 계신 여호와’이십니다. 다시 말해, 시대와 사건은 달라져도 생명의 근원은 언제나 오직 주님 한 분뿐입니다. 이것이AC.290의 중심 사상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또한 이 구절은 주님께서 단순히 생명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잃어버린 생명을 회복시키는 분이심을 보여 줍니다. 애굽에서의 구원은 종살이에서의 해방을 의미하고, 북방 땅과 여러 나라에서의 귀환은 흩어진 백성을 다시 모으시는 회복을 의미합니다. 영적으로 이것은 사람이 악과 거짓 가운데 있다가 주님에 의해 다시 신앙과 생명의 상태로 인도되는 과정을 상징합니다.
특히 ‘북방’은 말씀에서 진리의 빛이 희미해진 상태나 영적 어둠을 상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북방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다’는 것은 단순한 지리적 이동이 아니라, 영적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을 다시 진리의 빛 가운데로 이끄시는 주님의 역사를 의미합니다. 그 결과 사람은 다시 ‘그들의 땅’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이것은 영적으로는 본래 주님께서 의도하신 교회와 생명의 상태를 회복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처럼 이 구절은 ‘살아 계신 여호와’라는 이름과 함께, 그 살아 계신 주님께서 실제로 사람을 구원하시고 회복시키시는 분이라는 사실까지 보여 줍니다. 따라서 생명은 단순히 존재하는 힘이 아니라, 사람을 끊임없이 악에서 선으로, 거짓에서 진리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끄시는 주님의 역사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렘16:14-15를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이 주님을 ‘살아 계신 여호와’라고 부르는 또 하나의 중요한 증거를 제시하기 위해서입니다. 동시에 이 구절은 생명 자체이신 주님께서 사람을 모든 영적 속박에서 구원하여 참된 생명의 상태로 회복시키시는 분임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AC.290에서 말하는 ‘산’(living)은 단순히 존재를 유지하는 힘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을 끊임없이 새롭게 하시고, 당신께로 이끄시는 구원의 생명인 것입니다.
그들이 내 백성의 도를 부지런히 배우며 살아 있는 여호와라는 내 이름으로 맹세하기를 자기들이 내 백성을 가리켜 바알로 맹세하게 한 것같이 하면 그들이 내 백성 가운데에 세움을 입으려니와(렘12:16)And it shall be,if learning they shall learn the ways of My people,to promise by My name,Living Jehovah,as they taught My people to promise by Baal,then shall they be built in the midst of My people(Jer. 12:16).
스베덴보리가AC.290에서 위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말씀에서 오직 주님만이‘살아 계신 여호와’로 불리신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AC.290의 중심 주제는 모든 생명의 근원이 오직 주님이시라는 것이며,이 구절은 그 사실을 잘 뒷받침하는 성경적 증거입니다.
이 구절의 역사적 배경은 이스라엘 주변 민족들에 대한 예언입니다.주님께서는 그들이 회개하여‘내 백성의 도’를 배우고,더 이상 바알을 두고 맹세하지 않고‘살아 있는 여호와라는 내 이름으로 맹세’한다면,그들도 주님의 백성 가운데 세움을 입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따라서 이 말씀은 이방 민족에게도 구원의 길이 열려 있음을 보여 주는 은혜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특별히 주목하는 것은‘살아 있는 여호와라는 내 이름으로’라는 표현입니다.이는 단순한 맹세의 관용구가 아닙니다. ‘살아 있는 여호와’라는 이름은 주님께서 생명 자체(Life Itself)이시며,모든 생명의 유일한 근원이심을 나타내는 이름입니다.그러므로 이 표현은 생명이 바알이나 다른 어떤 존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오직 주님께만 있음을 선포하는 신앙고백입니다.
반대로‘바알로 맹세하게 한 것같이’는 거짓 신을 숭배했다는 사실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영적으로는 생명의 근원을 주님이 아닌 다른 데서 찾는 모든 상태를 의미합니다.사람이 자기 자신이나 세상의 힘,거짓된 교리,또는 어떤 피조물을 생명의 근원처럼 의지할 때,그는 영적인 의미에서 바알을 따르는 것과 같은 상태에 있게 됩니다.
또한‘내 백성의 도를 부지런히 배우며’라는 말씀도 중요합니다.주님께서는 단순히 입으로‘여호와께서 살아 계신다’말하는 것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먼저 주님의 도를 배우고,그 진리 안에서 살아가며,그 결과로‘살아 있는 여호와’를 고백하는 삶을 원하십니다.따라서 이 구절은 살아 있는 신앙이란 단순한 고백이 아니라,주님의 진리를 배우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신앙임을 보여 줍니다.
이러한 이유로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AC.290에 인용합니다.그는 예레미야의 예언 자체를 해설하려는 것이 아니라,말씀이 오직 주님만을‘살아 계신 여호와’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증명하고자 합니다.그리고 그 이름은 곧 주님만이 생명 자체이시며,모든 참된 생명이 오직 그분으로부터 나온다는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렘12:16은AC.290의 핵심 사상을 잘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사람은 생명의 근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영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도 되고,죽은 사람도 됩니다.주님을 생명 자체이신‘살아 계신 여호와’로 인정하고 그분의 길을 배우며 살아가는 사람은 참된 생명 안에 거하게 됩니다.바로 이 점을 밝히기 위하여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할지라도 실상은 거짓 맹세니라(렘5:2)And though they say,Jehovah lives;still they promise falsely(Jer. 5:2).
스베덴보리가AC.290에서 위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오직 주님만이 참으로‘살아 계신 분’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그는 앞에서 생명은 오직 하나이며,그 생명은 주님으로부터만 나온다고 설명한 뒤,말씀이 실제로 주님을‘살아 계신 여호와’라고 부른다는 성경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살아 계신’이라는 표현입니다.스베덴보리에게 이것은 단순히‘존재하고 계신다’는 뜻이 아닙니다.그것은 주님께서 생명 자체(Life Itself)이시며,모든 천사와 사람의 생명의 근원이심을 나타내는 이름입니다.따라서 말씀이 주님을‘살아 계신 여호와’라고 부르는 것은,모든 생명이 오직 그 분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문맥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백성은 입으로는‘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한다’고 말하지만,실제로는‘거짓 맹세’를 하고 있습니다.다시 말해,그들은‘살아 계신 여호와’를 입술로는 인정하면서도 삶으로는 그분을 부인하고 있었습니다.신앙의 고백은 있었지만,그 안에는 참된 생명이 없었습니다.
바로 이 점이AC.290의 내용과 연결됩니다.스베덴보리는 생명은 단순히‘주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생명 자체이신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앙 안에 있을 때,비로소 사람 안에 역사한다고 설명합니다.그러므로 입으로 아무리‘여호와께서 살아 계신다’말해도,주님과 실제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그 신앙은 살아 있는 신앙이 아닙니다.
이 구절은 또한 살아 있는 신앙과 죽은 신앙의 차이를 보여 줍니다.살아 있는 신앙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사람의 삶 속에서 열매를 맺는 신앙입니다.반대로 죽은 신앙은 입술의 고백은 있지만,삶이 따르지 않는 신앙입니다.예레미야는 바로 이러한 상태를‘거짓 맹세’라는 말로 책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하는 목적은 예레미야 시대의 죄악을 설명하려는 것이 아닙니다.그는 말씀에서 주님을‘살아 계신 여호와’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동시에,참된 생명은 오직 주님으로부터 오며,그 생명은 참된 신앙 안에서만 역사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렘5:2는AC.290의 핵심 주제를 잘 뒷받침하는 말씀입니다.사람은 입술로 주님을 고백한다고 해서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생명 자체이신 주님과 실제로 연결될 때,비로소 영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이 됩니다.그래서 말씀은 오직 주님만을‘살아 계신 여호와’라고 하며,그분 안에 있는 사람만을 참된 의미에서‘산 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창3:20)
AC.290
교회를 ‘모든 산 자의 어머니’(mother of all living)라고 하는 것은, 생명 자체이신 주님에 대한 신앙을 그 교회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도 이미 앞에서 설명한 내용으로 분명합니다. 생명은 오직 하나이며, 모든 존재의 생명은 그 하나의 생명으로부터 옵니다. 또한 생명이라 할 만한 생명은 생명이신 주님에 대한 신앙을 통해서만 있을 수 있으며, 그 안에 생명이 있는 신앙도 오직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그 신앙 안에 계시지 않으면 그 신앙에는 생명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말씀은 오직 주님만을 ‘살아 계신 분’(living)이라고 하며, ‘살아 계신 여호와’(living Jehovah)라고 합니다(렘5:2; 12:16; 16:14-15; 23:7; 겔5:11). That she was called the “mother of all living” in consequence of possessing faith in the Lord, who is life itself, is also evident from what has been already shown. There cannot be more than one life, from which is the life of all, and there can be no life, which is life, except through faith in the Lord, who is the life, nor can there be faith in which is life, except from him, consequently unless he is in it. On this account, in the Word, the Lord alone is called “living,” and is named the “living Jehovah” (Jer. 5:2; 12:16; 16:14, 15; 23:7; Ezek. 5:11);
그들이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할지라도 실상은 거짓 맹세니라(렘5:2) And though they say, Jehovah lives; still they promise falsely (Jer. 5:2).
그들이 내 백성의 도를 부지런히 배우며 살아 있는 여호와라는 내 이름으로 맹세하기를 자기들이 내 백성을 가리켜 바알로 맹세하게 한 것같이 하면 그들이 내 백성 가운데에 세움을 입으려니와(렘12:16) And it shall be, if learning they shall learn the ways of My people, to promise by My name, Living Jehovah, as they taught My people to promise by Baal, then shall they be built in the midst of My people (Jer. 12:16).
14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보라 날이 이르리니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지 아니하고15이스라엘 자손을 북방 땅과 그 쫓겨났던 모든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리라 내가 그들을 그들의 조상들에게 준 그들의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리라(렘16:14, 15) Therefore, behold, the days come, says Jehovah, that it shall no more be said, Jehovah lives, who brought up the sons of Israel out of the land of Egypt; but, Jehovah lives, who brought up the sons of Israel from the land of the north, and from all the lands whither He had compelled them; and I will return them onto their ground that I gave unto their fathers (Jer. 16:14-15).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그들이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지 아니하고(렘23:7) Therefore, behold, the days come, says Jehovah, that they shall no more say, Jehovah lives, who brought up the sons of Israel out of the land of Egypt (Jer. 23:7);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모든 미운 물건과 모든 가증한 일로 내 성소를 더럽혔은즉 나도 너를 아끼지 아니하며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고 미약하게 하리니(겔5:11) Therefore, as I live, says the Lord Jehovih, shall it not be, because thou hast defiled My sanctuary with all thy detestable things, and with all thine abominations, that even I shall diminish thee; and My eye shall not spare, and even I will not have pity (Ezek. 5:11).
또한 ‘영원히 살아 계시는 이’(he that liveth to eternity)라고 하며(단4:34; 계4:10; 5:14; 10:6), “he that liveth to eternity” (Dan. 4:34; Rev. 4:10; 5:14; 10:6);
그 기한이 차매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보았더니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이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이를 찬양하고 경배하였나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단4:34) And at the end of the days I, Nebuchadnezzar, lifted up my eyes to the heavens, and my knowledge returned to me, and I blessed the Most High and I praised and honored Him who lives to eternity, whose dominion is an eternal dominion, and His kingdom is with generation and generation (Dan.4:34);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계4:10) the twenty and four elders fell down before Him who sat on the throne, and worshiped Him who lives for ages of ages, and cast their crowns before the throne, saying (Rev. 4:10),
네 생물이 이르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계5:14) And the four animals said, Amen. And the twenty four elders fell down and worshiped Him who lives for ages of ages (Rev. 5:14).
세세토록 살아 계신 이 곧 하늘과 그 가운데에 있는 물건이며 땅과 그 가운데에 있는 물건이며 바다와 그 가운데에 있는 물건을 창조하신 이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되 지체하지 아니하리니(계10:6) and swore by Him who lives for ages of ages, who created heaven, and the things in it, and the earth, and the things in it, and the sea, and the things in it, that time shall be no longer (Rev. 10:6).
‘생명의 원천’(fountain of life)이라고 하고(시36:9), the “fountain of life” (Ps. 36:9);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시36:9) For with Thee is the spring of lives; In Thy light shall we see light (Ps. 36:9).
‘생수의 근원’(fountain of living waters)이라고 합니다(렘17:13). the “fountain of living waters” (Jer. 17:13).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렘17:13) O Jehovah, the hope of Israel, all who forsake Thee shall be ashamed, and they who turn aside away from Me shall be written in the earth, for they have forsaken Jehovah, the spring of living waters (Jer. 17:13).
주님으로 말미암아, 곧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얻는 천국은 ‘산 자의 땅’(land of the living)이라고 합니다(사38:11; 53:8; 겔26:20; 32:23-27, 32; 시27:13; 52:5; 142:5). Heaven (which lives by or from him) is called the “land of the living.” (Isa. 38:11; 53:8; Ezek. 26:20; 32:23–27, 32; Ps. 27:13; 52:5; 142:5)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뵈옵지 못하리니 산 자의 땅에서 다시는 여호와를 뵈옵지 못하겠고 내가 세상의 거민 중에서 한 사람도 다시는 보지 못하리라 하였도다(사38:11) I said, I shall not see Jah, Jah in the land of the living! I shall not look on man any more with the inhabitants of the world (Isa. 38:11)!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사53:8) From restraint and from judgment He was taken; and who shall contemplate His generation? For He was severed from the land of the living; on account of the transgression of My people a plague was upon Him (Isa. 53:8);
내가 너를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내려가서 옛적 사람에게로 나아가게 하고 너를 그 구덩이에 내려간 자와 함께 땅 깊은 곳 예로부터 황폐한 곳에 살게 하리라 네가 다시는 사람이 거주하는 곳이 되지 못하리니 살아 있는 자의 땅에서 영광을 얻지 못하리라(겔26:20) and I shall bring thee down with those who go down into the pit, to the people of an age, and shall cause thee to dwell in the lower earth, as in waste places of an age, with those who go down into the pit, so that thou not be dwelt in; and I shall put elegance in the land of the living (Ezek. 26:20);
23그 무덤이 구덩이 깊은 곳에 만들어졌고 그 무리가 그 무덤 사방에 있음이여 그들은 다 죽임을 당하여 칼에 엎드러진 자 곧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사람을 두렵게 하던 자로다 24거기에 엘람이 있고 그 모든 무리가 그 무덤 사방에 있음이여 그들은 다 할례를 받지 못하고 죽임을 당하여 칼에 엎드러져 지하에 내려간 자로다 그들이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두렵게 하였으나 이제는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수치를 당하였도다 25그와 그 모든 무리를 위하여 죽임을 당한 자 가운데에 침상을 놓았고 그 여러 무덤은 사방에 있음이여 그들은 다 할례를 받지 못하고 칼에 죽임을 당한 자로다 그들이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두렵게 하였으나 이제는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수치를 당하고 죽임을 당한 자 가운데에 뉘었도다 26거기에 메섹과 두발과 그 모든 무리가 있고 그 여러 무덤은 사방에 있음이여 그들은 다 할례를 받지 못하고 칼에 죽임을 당한 자로다 그들이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두렵게 하였으나 27그들이 할례를 받지 못한 자 가운데에 이미 엎드러진 용사와 함께 누운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이 용사들은 다 무기를 가지고 스올에 내려가서 자기의 칼을 베개로 삼았으니 그 백골이 자기 죄악을 졌음이여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용사의 두려움이 있던 자로다(겔32:23-27) whose graves are put in the flanks of the pit, and her assembly is around her grave; all of them slain, fallen by the sword, who put dismay in the land of the living. Elam is there, and all her crowd around her grave, all of them slain, fallen by the sword, who have gone down uncircumcised to the lower earth, who put their dismay in the land of the living; and they have borne their humiliation with those who go down to the pit. They have put a bed for her in the midst of the slain with all her crowd; her graves are all around him, all of them uncircumcised, slain by the sword, for their dismay was put in the land of the living, but they have borne their humiliation with them that go down to the pit. He is put in the midst of the slain. Meshech is there, Tubal, and all her crowd; her graves are all around him, all of them uncircumcised, pierced by the sword, for they put their dismay in the land of the living. And they shall not lie with the mighty who are fallen of the uncircumcised, who are gone down to hell with their weapons of war; and they have put their swords under their heads, but their iniquities shall be on their bones, as they were the dismay of the mighty in the land of the living (Ezek. 32:23-27).
내가 바로로 하여금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사람을 두렵게 하게 하였으나 이제는 그가 그 모든 무리와 더불어 할례를 받지 못한 자 곧 칼에 죽임을 당한 자와 함께 누이리로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겔32:32) For I have put My dismay in the land of the living; and he shall be laid down in the midst of the uncircumcised with them that are slain with the sword, even Pharaoh and all his multitude, says the Lord Jehovih (Ezek. 32:32).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확실히 믿었도다(시27:13)
그런즉 하나님이 영원히 너를 멸하심이여 너를 붙잡아 네 장막에서 뽑아내며 살아 있는 땅에서 네 뿌리를 빼시리로다(시52:5)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시142:5)
또한 주님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을 ‘산 자’(living)라고 합니다. 시편에And those are called “living” who are in faith in the Lord; as in David:
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 (시66:9) Who putteth our soul among the living (Ps. 66:9).
또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생명책’(in the book of lives)에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시69:28; 계13:8; 17:8; 20:15). And those who possess faith are said to be “in the book of lives”(Ps. 69:28), and “in the book of life.”(Rev. 13:8; 17:8; 20:15)
그들을 생명책에서 지우사 의인들과 함께 기록되지 말게 하소서(시69:28) Let them be wiped out of the Book of Lives, And not be written with the just (Ps. 69:28).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계13:8) And all who dwell on the earth shall worship him, whose names are not written in the book of life of the Lamb slain from the founding of the world (Rev. 13:8).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 땅에 사는 자들로서 창세 이후로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이 이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을 보고 놀랍게 여기리라(계17:8) The beast that thou sawest was and is not, and is about to come up out of the abyss, and to go away into destruction; and they who dwell on the earth shall marvel, whose names were not written on the book of life from the founding of the world, looking at the beast that was and is not, and yet is (Rev. 17:8).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져지더라(계20:15) And if anyone was not found written in the book of life, he was cast into the lake of fire (Rev. 20:15).
그러므로 주님 신앙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살아난다’(made alive)고 합니다(호6:2; 시85:6). Wherefore also those who receive faith in him are said to be “made alive.” (Hos. 6:2; Ps. 85:6)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호6:2) After two days He will make us live; in the third day He will raise us up, and we shall live before Him (Hos. 6:2).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사 주의 백성이 주를 기뻐하도록 하지 아니하시겠나이까(시85:6) Wilt Thou not return, wilt Thou not make us live, That Thy people may be glad in Thee? (Ps. 85:6)
반대로 주님 신앙 안에 있지 않은 사람을 말씀은 ‘죽은 자’(dead)라고 합니다. 이사야에 말입니다. On the other hand it follows that those who are not in faith are called “dead”; as in Isaiah:
그들은 죽었은즉 다시 살지 못하겠고 사망하였은즉 일어나지 못할 것이니 이는 주께서 벌하여 그들을 멸하사 그들의 모든 기억을 없이하셨음이니이다 (사26:14) The dead shall not live; the Rephaim shall not rise again, because thou hast visited and destroyed them (Isa. 26:14),
여기서 ‘죽은 자들’은 자기 사랑으로 부풀어 오른 사람들을 의미하며, ‘일어난다’(rise again)는 것은 생명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뜻합니다. 말씀은 그들을 ‘죽임을 당한 자들’(pierced)이라고도 합니다(겔32:23-26, 28-31). meaning those who are puffed up with the love of self; to “rise again” signifies to enter into life. They are also said to be “pierced.” (Ezek. 32:23–26, 28–31)
23그 무덤이 구덩이 깊은 곳에 만들어졌고 그 무리가 그 무덤 사방에 있음이여 그들은 다 죽임을 당하여 칼에 엎드러진 자 곧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사람을 두렵게 하던 자로다 24거기에 엘람이 있고 그 모든 무리가 그 무덤 사방에 있음이여 그들은 다 할례를 받지 못하고 죽임을 당하여 칼에 엎드러져 지하에 내려간 자로다 그들이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두렵게 하였으나 이제는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수치를 당하였도다 25그와 그 모든 무리를 위하여 죽임을 당한 자 가운데에 침상을 놓았고 그 여러 무덤은 사방에 있음이여 그들은 다 할례를 받지 못하고 칼에 죽임을 당한 자로다 그들이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두렵게 하였으나 이제는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수치를 당하고 죽임을 당한 자 가운데에 뉘었도다 26거기에 메섹과 두발과 그 모든 무리가 있고 그 여러 무덤은 사방에 있음이여 그들은 다 할례를 받지 못하고 칼에 죽임을 당한 자로다 그들이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두렵게 하였으나(겔32:23-26) whose graves are put in the flanks of the pit, and her assembly is around her grave; all of them slain, fallen by the sword, who put dismay in the land of the living. Elam is there, and all her crowd around her grave, all of them slain, fallen by the sword, who have gone down uncircumcised to the lower earth, who put their dismay in the land of the living; and they have borne their humiliation with those who go down to the pit. They have put a bed for her in the midst of the slain with all her crowd; her graves are all around him, all of them uncircumcised, slain by the sword, for their dismay was put in the land of the living, but they have borne their humiliation with them that go down to the pit. He is put in the midst of the slain. Meshech is there, Tubal, and all her crowd; her graves are all around him, all of them uncircumcised, pierced by the sword, for they put their dismay in the land of the living. (Ezek. 32:23-26).
28오직 너는 할례를 받지 못한 자와 함께 패망할 것임이여 칼에 죽임을 당한 자와 함께 누우리로다 29거기에 에돔 곧 그 왕들과 그 모든 고관이 있음이여 그들이 강성하였었으나 칼에 죽임을 당한 자와 함께 있겠고 할례를 받지 못하고 구덩이에 내려간 자와 함께 누우리로다 30거기에 죽임을 당한 자와 함께 내려간 북쪽 모든 방백과 모든 시돈 사람이 있음이여 그들이 본래는 강성하였으므로 두렵게 하였으나 이제는 부끄러움을 품고 할례를 받지 못하고 칼에 죽임을 당한 자와 함께 누웠고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수치를 당하였도다 31바로가 그들을 보고 그 모든 무리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을 것임이여 칼에 죽임을 당한 바로와 그 온 군대가 그러하리로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겔32:28-31) And thou shalt be broken in the midst of the uncircumcised, and shalt lie with those slain by the sword. There is Edom, her kings, and all her chiefs, which with their might are put with those slain by the sword; they shall lie with the uncircumcised, and with those who go down to the pit. There be the princes of the north, all of them, and all the Zidonians, who have gone down with the slain; by their dismay they are ashamed of their might; and they lie uncircumcised with those slain by the sword, and bear their humiliation with those who go down to the pit. Pharaoh shall see them, and shall comfort himself over all his crowd; Pharaoh and all his host are slain by the sword, says the Lord Jehovih (Ezek. 32:28–31).
주님께서도 그들을 ‘죽은 자들’(dead)이라고 하셨습니다(마4:16; 요5:25; 8:21, 24, 51-52). They are also called “dead” by the Lord. (Matt. 4:16; John 5:25; 8:21, 24, 51, 52)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마4:16) the people who sat in darkness saw great light; and to them who sat in the country and shadow of death, light has risen (Matt. 4:16).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5:25) Amen, amen, I say to you, that an hour comes, and now is, when the dead shall hear the voice of the Son of God, and they who hear shall live (John 5:25).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요8:21) Then Jesus said again to them, I go, and you shall seek Me, and shall die in your sin. Whither I go, you cannot come (John 8:21).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요8:24) I said then to you that you shall die in your sins; for unless you believe that I am, you shall die in your sins (John 8:24).
51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52유대인들이 이르되 지금 네가 귀신 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요8:51, 52) Amen, amen, I say to you, If anyone keep My word, he shall not behold death for eternity. Then the Jews said to Him, Now we know that Thou hast a demon. Abraham is dead, and the prophets, and Thou sayest, If anyone keep My word, he shall not taste death into the ages (John 8:51, 52).
또한 말씀은 지옥을 ‘사망’(death)이라고 합니다(사25:8; 28:15). Hell also is called “death.” (Isa. 25:8; 28:15)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사25:8) He shall swallow up death perpetually; and the Lord Jehovih shall wipe away the tear from all the faces; and the reproach of His people shall He remove from all the earth; for Jehovah has spoken (Isa. 25:8).
너희가 말하기를 우리는 사망과 언약하였고 스올과 맹약하였은즉 넘치는 재앙이 밀려올지라도 우리에게 미치지 못하리니 우리는 거짓을 우리의 피난처로 삼았고 허위 아래에 우리를 숨겼음이라 하는도다(사28:15) for you have said, We have cut a covenant with death, and with hell have we made a vision; when the whip of inundation passes through, it shall not come to us; for we will set a lie as our protection, and in falsity will we hide ourselves (Isa. 28:15).
해설
AC.290은 왜 태고교회를 ‘모든 산 자의 어머니’라고 하는지를 ‘생명’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여기서 ‘산 자’는 단순히 육체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을 뜻하지 않습니다. 호흡하고 움직이며 생각한다고 해서 곧 말씀의 의미로 살아 있는 것은 아닙니다. 참된 생명은 생명 자체이신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 있으며, 주님과 연결된 사람만이 영적으로 살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생명이 여럿일 수 없다 말합니다. 사람과 천사가 저마다 자기 생명을 따로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생명의 근원은 오직 하나입니다. 모든 존재는 주님으로부터 끊임없이 생명을 받아 살아갑니다. 사람은 생명을 소유한 존재가 아니라 생명을 받아들이는 존재이며, 주님만이 생명 자체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 힘으로 생각하고 사랑하고 살아간다고 믿는 것은 겉으로 느껴지는 현상일 뿐, 생명의 실제 근원은 언제나 주님께 있습니다.
본문은 이어서 ‘생명이라 할 만한 생명’은 주님에 대한 신앙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신앙은 단순히 교리를 사실로 인정하는 지적 동의가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주님과 연결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신앙 안에 생명이 있으려면 그 신앙이 반드시 주님으로부터 와야 하며, 주님께서 그 안에 계셔야 합니다. 주님과 분리된 신앙은 지식이나 확신일 수는 있어도 살아 있는 신앙은 아닙니다.
이 때문에 말씀은 오직 주님만을 ‘살아 계신 여호와’, ‘영원히 살아 계시는 이’, ‘생명의 원천’, ‘생수의 근원’이라고 합니다. 이런 표현들은 모두 주님께서 생명을 다른 곳에서 받아 가지신 분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 그 자체이심을 보여 줍니다. 주님으로부터 사랑이 나오고, 그 사랑으로부터 지혜와 진리가 나오며, 그 모든 것이 천사와 사람의 영적 생명이 됩니다.
천국을 ‘산 자의 땅’이라고 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천국이 살아 있는 것은 천사들이 스스로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기쁘게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천국은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받아들여지고 살아 움직이는 상태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지상에 있으면서도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인다면, 그는 이미 어느 정도 ‘산 자의 땅’에 속해 있는 셈입니다.
‘생명책’이라는 표현도 문자 그대로 어떤 장부에 이름이 기록된다는 뜻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생명책에 있다는 것은 사람의 속 사람 안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새겨져 있다는 뜻입니다. 주님에 대한 신앙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살아난다’는 말씀 역시 육체가 다시 움직인다는 뜻이 아니라, 이전에는 닫혀 있던 영적 생명이 열리고, 주님과의 연결이 회복된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말씀에서 ‘죽은 자’는 육체적으로 죽은 사람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완전히 사로잡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몸은 살아 있어도 영적으로는 죽은 상태에 있습니다. 특히 사26:14의 ‘죽은 자들’은 자기 사랑으로 부풀어 오른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자기 사랑이 사람의 중심을 차지하면 주님의 생명이 들어올 자리가 닫히기 때문에, 그 상태를 말씀은 죽음이라고 합니다.
이 점에서 지옥을 ‘사망’이라고 하는 이유도 분명해집니다. 지옥의 영들도 존재하며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지만, 그들의 삶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참된 생명을 거꾸로 받아 자기 사랑과 악으로 바꾼 상태입니다. 그들은 생명의 흐름 자체를 없앨 수는 없지만, 그것을 왜곡하여 죽음과 같은 삶으로 만듭니다. 그러므로 지옥은 존재의 소멸이 아니라, 생명 자체이신 주님으로부터 의지와 사랑이 돌아선 상태입니다.
AC.290의 중심은 ‘살아 있다’는 말의 영적 의미에 있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생명 자체이시며, 천국과 교회와 사람은 모두 그분으로부터 생명을 받습니다. 태고교회를 ‘모든 산 자의 어머니’라고 하는 것은 그 교회가 생명의 근원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생명 자체이신 주님에 대한 신앙을 받아들이고, 사람들을 그 생명으로 인도한 최초의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참된 교회의 사명도 사람을 자기 조직이나 지식에 묶는 것이 아니라, 오직 생명 자체이신 주님께 연결하는 데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