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7의 화목제에는 아주 미묘한 시간 차이가 있습니다. 감사함으로 드린 화목제의 고기는 반드시 그날 먹어야 하며 아침까지 남겨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서원이나 자원으로 드린 화목제는 그날뿐 아니라 이튿날에도 먹을 수 있습니다. 본문이 의도적으로 두 경우를 구별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감사는 하루이고 서원과 자원은 이틀일까요? 이것 역시 현재 확인된 스베덴보리의 1차 원전에서 레7:15-16의 차이를 직접 풀어 주는 강한 대목은 찾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첫째날은정확히무엇,둘째날은정확히무엇’이라고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상응 원리에서는 중요한 방향을 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날’은 단순한 24시간보다 상태를 나타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제물을 먹을 수 있는 날의 차이도 단순한 식품 보관 규정 이상의 대표적 의미가 있었다고 보는 것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특히 감사는 이미 받은 선을 즉시 주님께 돌려드리는 응답입니다. 어떤 은혜를 경험하고 그 선의 근원이 주님임을 바로 인정하는 상태입니다. 그런 감사는 살아 있는 현재의 상태입니다. 어제 받은 감사를 저장해 두었다가 오늘 자기 공로처럼 꺼내 쓰는 것이 아닙니다.
서원과 자원에는 인간의 의지와 약속이라는 요소가 조금 더 들어옵니다. 서원은 앞으로 행할 것을 약속한 뒤 이루어진 상태와 관련되고, 자원제는 인간이 자유롭게 드리는 응답과 관련됩니다. 따라서 감사제와 정확히 같은 시간 규정을 갖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 세 종류의 화목제가 서로 다른 영적 상태를 표상했음을 보여 줍니다.
다만 여기서 ‘감사제는더높고서원제는더낮다’는 식으로 순위를 매길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인간의 다양한 선한 상태를 하나의 획일적인 방식으로 다루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즉각 솟아나는 감사도 있고, 약속을 지키는 신실함도 있으며, 자유롭게 선을 선택하는 기쁨도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경우에 공통된 한계가 있습니다. 셋째 날까지는 갈 수 없습니다. 아무리 거룩한 선이라도 인간이 그것을 붙잡아 proprium의 소유로 만들기 시작하면 처음의 살아 있는 교통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화목제의 선은 살아 있는 상태에서 받아들여지고 누려져야 합니다.
따라서 레7:15-16은 거듭남이 ‘한번받은은혜를저장하여평생소비하는삶’이 아님을 생각하게 합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은 언제나 살아 있으며 인간도 날마다 새롭게 그것을 받아야 합니다. 감사든 서원이든 자원이든, 중요한 것은 주님의 선이 현재의 삶 안에서 살아 있는 선이 되는 것입니다. (SWC.레7심화2)
레7:12-13은 레2를 읽은 사람에게 아주 뜻밖의 장면입니다. 감사의 화목제에는 기름 섞은 무교병과 기름 바른 무교전병과 고운 가루에 기름 섞은 과자를 드립니다. 여기까지는 레2와 익숙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또유교병을화목제의감사제물과함께’ 드리라고 합니다. 레2에서는 ‘누룩을넣어서는안된다’고 하셨는데, 왜 감사의 화목제에는 누룩 있는 빵이 등장하는 것일까요? 본문상 이 차이는 분명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무교는 순수하고 정결한 것을 나타내며, 누룩은 여러 문맥에서 거짓이나 불순한 것이 섞이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레2의 소제에서 누룩이 금지된 것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제단에서 여호와께 화제로 올라가는 것은 순수한 선과 진리를 표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레7의 유교병에 대해서는 중요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제가 확인한 범위에서는 스베덴보리가 레7:13을 직접 들어 ‘감사화목제에유교병을넣은이유는정확히이것이다’라고 해설하는 강한 원전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누룩=악이므로화목제에악도함께드린다’와 같은 식의 해석은 피해야 합니다. 그것은 상응을 기계적으로 역산하는 것이 됩니다.
다만 화목제의 전체 구조는 중요한 단서를 줍니다. 번제는 전부 제단에서 불살라지지만 화목제는 제사장과 제물을 드린 사람이 함께 먹습니다. 즉 화목제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이 인간의 실제 삶과 공동체의 기쁨 안으로 들어와 함께 누려지는 제사입니다. 그래서 레7의 감사제에는 제단에 직접 올라가는 거룩한 부분과 인간이 함께 먹는 부분이 구별되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무교병과 유교병이 함께 있다는 사실은 적어도 화목제가 ‘인간이이미완전히천사처럼순수해진뒤에만가능한교통’은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게 합니다. 아직 자연적 인간의 삶을 살아가며 불완전함이 남아 있는 사람도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감사하며 이웃과 함께 누릴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은 레7:13에 대한 직접적인 스베덴보리의 해설이 아니라 화목제 전체와 누룩의 일반 상응을 바탕으로 한 ‘유력한독법’ 정도로 두는 것이 안전합니다.
오히려 이 구절의 아름다움은 바로 그 조심스러운 경계에 있습니다. 레2의 무교 소제는 주님께 드려지는 선과 진리의 순수함을 강조하고, 레7의 감사 화목제는 그 선이 인간의 실제 생활 속 기쁨과 교제 안으로 내려오는 장면을 보여 줍니다. 거듭남은 자연적 삶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삶을 주님의 질서 안으로 데려오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감사는 완전해진 사람이 마지막에 드리는 제사가 아닙니다. 아직 거듭나는 과정 가운데 있는 사람이 주님께서 주신 선을 발견하고 ‘이것은주님에게서왔습니다’라고 인정하며 누리는 것이 감사입니다. 레7의 무교병과 유교병이 한 상에 놓이는 장면은 그 사실을 생각하게 합니다. 다만 그 이상의 세부 상응은 원전이 더 발견될 때까지 열어 두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가장 정직하게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SWC.레7심화1)
레위기 7장은 레1부터 시작된 제사의 첫 큰 단락을 마무리합니다. 37절은 지금까지 나온 것을 ‘번제와소제와속죄제와속건제와위임식과화목제의규례’라고 한꺼번에 열거합니다. 그래서 레7은 새로운 제사 하나를 소개하는 장이라기보다 앞에서 배운 제사들을 다시 제사장의 관점에서 정리하고, 특히 화목제를 자세히 설명하면서 제사의 목적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장입니다. 죄를 깨닫고 정결하게 되는 것만이 끝이 아닙니다. 악과 거짓이 제거된 인간은 마침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이웃과 함께 누리며, 주님과 결합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1절로 7절은 속건제를 다시 다룹니다. 속건제물은 번제물을 잡던 곳에서 잡고 피는 제단 사방에 뿌리며, 기름과 기름진 꼬리와 내장을 덮은 기름, 두 콩팥과 그 기름, 간에 덮인 꺼풀을 제단에서 불사릅니다. 이것들은 레3의 화목제에서 이미 만났던 요소들입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033(출29:13)은 피를 신적 진리와, 기름을 신적 선과 연결하며, AC.10072(출29:22)는 내장을 덮은 기름을 가장 낮은 것 안에 있는 선과 연결합니다. AC.10074(출29:22)는 콩팥을 자연적 인간의 내적 진리와 연결합니다. 그러므로 속건제가 단순히 ‘잘못에대한벌금’을 지불하는 제사가 아님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실제 삶에서 손상된 것을 바로잡게 하실 뿐 아니라 자연적 인간의 가장 안쪽과 바깥쪽까지 선과 진리의 질서로 다시 세우십니다.
6절과 7절에서는 속건제가 ‘지극히거룩하다’고 다시 선언되며 제사장들이 그것을 먹습니다. 레6에서 보았듯이 거룩한 제물을 먹는 것은 단순한 식사가 아닙니다. AC.2187(창18:8)은 제사 음식을 먹는 것을 교통, 결합, 자기 것으로 삼음과 연결합니다. 악과 거짓에서 정결하게 되는 것만으로 거듭남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정결해진 자리에 주님의 선이 들어와 인간의 실제 생명이 되어야 합니다. 죄를 버리는 것은 비움이고, 주님의 선을 받아 살아가는 것은 채움입니다. 레위기의 제사들은 이 두 방향을 계속 함께 보여 줍니다.
8절로 10절에서는 번제물의 가죽과 여러 소제물이 제사장에게 돌아갑니다. 이것은 제사의 모든 것이 제단 위에서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드려진 것 가운데 어떤 것은 제사장을 통해 다시 인간에게 돌아온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다만 레7:8의 ‘가죽’ 자체를 이 문맥에서 무엇이라고 정확히 상응시키는지에 대해서는 이번에 충분한 직접 원전을 확보하지 못했으므로 세밀하게 단정하지 않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7절로 10절 전체에 ‘돌아갈것이요’, ‘제사장에게로돌아갈것이니’, ‘균등하게분배할것이니라’가 반복된다는 사실입니다. 제사는 인간이 주님께 무엇을 빼앗기는 행위가 아니라, 모든 것이 주님에게서 왔음을 인정한 뒤 다시 그분에게서 받아 올바르게 누리는 질서를 가르칩니다.
11절부터 장의 중심인 화목제 규례가 시작됩니다. 레3에서 화목제의 기본 구조를 보았다면 여기서는 화목제가 ‘감사’, ‘서원’, ‘자원’이라는 서로 다른 상태에서 어떻게 드려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감사의 화목제에는 기름 섞은 무교병과 기름 바른 무교전병, 고운 가루에 기름 섞은 과자가 함께 드려집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13절에는 ‘유교병’, 곧 누룩이 들어간 빵도 함께 등장합니다. 레2에서는 누룩을 제단의 화제로 드리지 말라고 했는데, 화목제의 감사 식사에서는 유교병이 함께 놓이는 것입니다. 본문 자체가 감사 화목제에 무교병과 유교병이 함께 있음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여기서는 조심스러운 구별이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누룩은 문맥에 따라 거짓이나 불순한 것을 의미할 수 있으며, 무교는 순수함과 연결됩니다. 그러나 레7:13의 유교병이 왜 특별히 감사 화목제에 허용되는지를 직접 풀어 주는 강한 AC원전은 이번 검색에서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유교병은정확히이것을뜻한다’고 단정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문자적 구조만으로도 중요한 차이는 분명합니다. 번제처럼 모든 것을 불살라 주님께 올리는 제사와 달리 화목제는 제사장과 제물을 드린 사람이 함께 먹는 제사입니다. 즉 인간의 실제 삶과 기쁨과 감사가 주님 앞의 교제 안으로 들어오는 제사입니다. 이 점은 별도 심화에서 원전상 확실한 부분과 해석상 유력한 부분을 구별하여 더 살펴보겠습니다.
15절로 18절은 더욱 흥미롭습니다. 감사로 드린 화목제의 고기는 반드시 그날 먹어야 하고 아침까지 남겨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서원이나 자원으로 드린 화목제는 이튿날까지 먹을 수 있습니다. 단 셋째 날에는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되며 남은 것은 불살라야 합니다. 실제 본문은 감사제와 서원·자원제 사이에 이 시간 차이를 명확히 둡니다. 여기에는 ‘오늘의선을어제의것으로살아서는안된다’는 매우 매력적인 영적 독법이 가능하지만, 스베덴보리의 직접 해설로 확인되지 않은 세부를 확정적인 상응으로 만들지는 않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거룩한 선을 받아들이고 누리는 데에도 상태와 질서와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인간의 proprium이 붙들어 자기 소유로 만들기 시작하면 처음의 거룩한 교통이 변질될 수 있습니다.
19절로 21절은 그래서 ‘먹는사람의상태’를 강조합니다. 화목제 고기가 부정한 것에 접촉되면 먹지 못하며, 부정한 상태에 있는 사람이 거룩한 화목제물을 먹어서도 안 됩니다. 앞에서 ‘먹음’이 교통과 결합과 자기 것으로 삼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받아들이는가뿐 아니라 ‘어떤상태에서받아들이는가’도 중요합니다. 거룩한 진리를 많이 알고 입으로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자동으로 거룩한 삶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악을 붙든 채 거룩한 것을 자기 것으로 삼으려 하면 오히려 거룩한 것과 부정한 것을 섞게 됩니다. 그래서 정결은 결합보다 먼저 옵니다. 레4-6의 속죄제와 속건제가 레7의 화목제보다 앞에 놓여 있는 것도 이런 큰 질서와 잘 어울립니다.
22절로 27절에서는 레3마지막에서 이미 보았던 ‘기름과피를먹지말라’는 명령이 다시 매우 강하게 반복됩니다. AC.5943(창45:18)은 바로 레7:23-26을 직접 인용하면서 제사의 기름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선, 곧 천적인 신성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레3에서 확인했듯이 피는 신적 진리와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기름과 피를 먹지 못하게 한 것은 선과 진리를 인간의 proprium이 자기 것으로 주장해서는 안 된다는 원리와 연결됩니다. 선은 주님의 것이고 진리도 주님의 것입니다. 인간은 그것들을 받아 살아갈 수 있지만 그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릴 수는 없습니다. ‘내가선하다’, ‘내가진리를소유한다’고 하는 순간 주님에게서 온 것을 proprium의 것으로 바꾸기 시작합니다.
28절로 36절은 레7의 절정 가운데 하나입니다. 화목제물을 드리는 사람은 기름과 가슴을 ‘자기손으로’ 가져옵니다. 가슴은 여호와 앞에서 흔들어 요제로 삼고, 기름은 제단에서 불사르며, 가슴은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돌아갑니다. 또 오른쪽 뒷다리는 거제로 제사장에게 줍니다. 여기에는 매우 직접적인 원전이 있습니다. AC.10087(출29:26)은 가슴을 ‘체어리티의선’, 더 높은 의미에서는 신적 영적인 것과 연결합니다. 가슴이 심장과 폐가 있는 부분이며, 중간 또는 둘째 천국의 영적 선과 상응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가슴을 흔드는 것은 그 선이 살아나게 되는 것과 연결됩니다.
오른쪽 뒷다리에 대해서도 원전이 놀랍도록 분명합니다. AC.10075(출29:22)는 오른쪽 넓적다리 또는 뒷다리를 가장 내적인 천적 선과 연결하고, 레7:32, 34-35를 직접 인용하면서 가슴은 영적 선, 오른쪽 뒷다리는 천적 선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가슴은 둘째 천국의 체어리티의 선을, 오른쪽 뒷다리는 가장 안쪽 셋째 천국의 천적 선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이 둘이 제사장에게 돌아가는 것은 단순한 제사장의 몫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영적 선과 천적 선의 교통과 받아들임을 표상합니다.
더구나 AC.10093(출29:27)은 ‘흔드는것’과 ‘들어올리는것’의 차이까지 설명합니다. 가슴을 흔드는 것은 신적 진리가 ‘인정되어살아있게되는것’을, 오른쪽 뒷다리를 들어 올리는 것은 주님에게만 속한 신적 선이 ‘지각되고받아들여지는것’을 나타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차이를 영적 천국과 천적 천국의 차이와 연결합니다. 영적 천국에서는 신적 진리를 이해를 통해 ‘인정’하고, 천적 천국에서는 신적 선을 의지를 통해 ‘지각’합니다. 레7의 가슴과 오른쪽 뒷다리, 요제와 거제의 작은 동작 안에 천국의 두 큰 질서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화목제의 ‘화목’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화목은 단지 하나님께서 화가 나셨다가 제물을 보고 마음을 푸시는 사건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신적 선과 진리가 인간에게 전달되고,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이며, 그것이 체어리티와 사랑의 삶으로 자기 것이 되고, 다시 주님께 그 근원을 인정하는 교통과 결합의 상태입니다. 제단에는 기름이 올라가고, 제사장에게는 가슴과 오른쪽 뒷다리가 돌아가며, 깨끗한 사람들은 화목제의 고기를 함께 먹습니다. 주님과 제사장과 백성이 하나의 제사 안에서 연결되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37절과 38절은 레1-7전체를 아주 아름답게 닫습니다. 번제, 소제, 속죄제, 속건제, 위임식, 화목제가 모두 여호와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하나의 질서 안에 있습니다. ‘참된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1771, TCR) 506도 레7:1, 11, 37을 직접 인용하면서 이러한 제사 규례들을 모세를 통해 주어진 율법에 속한 것으로 열거합니다. 각각의 제사는 따로 떨어진 종교 행위가 아니라 인간을 주님과 결합시키는 하나의 거듭남의 질서를 여러 각도에서 보여 줍니다.
레1의 번제에서 인간 전체가 주님의 사랑에 드려지는 모습을 보았고, 레2의 소제에서 선과 진리가 삶의 예물이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레3의 화목제에서는 선과 진리의 결합을, 레4와 5의 속죄제에서는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정결을, 레5와 6의 속건제에서는 잘못을 인정하고 실제로 회복하는 삶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레7은 다시 화목제로 돌아와 그 모든 과정의 목적을 보여 줍니다. 거듭남의 목적은 죄 없는 사람처럼 자신을 관리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 그것이 자기 삶이 되고, 그 선을 이웃과 함께 나누며, 모든 선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인정하는 결합의 삶에 있습니다. 그래서 레7의 마지막 모습은 제물을 잃어버린 인간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함께 먹고 누리는 인간입니다. 정결은 화목을 향하고, 회개는 결합을 향하며, 거듭남은 마침내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을 향합니다. (SWC.레7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