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C.9 심화

4. 아론은 제사를 마친 손을 들어 백성을 축복했을까?’

 

9:22에서 아론은 속죄제와 번제와 화목제를 모두 마친 뒤 백성을 향하여 손을 들어 축복합니다. 제사장으로 위임된 아론이 처음으로 실제 사역을 수행한 뒤 행한 마지막 행동이 축복이라는 점은 매우 의미가 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축복을 단순히 좋은 일이 일어나기를 비는 종교적 인사로 보지 않습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422(12:3)축복이 주님에게서 오는 모든 선과 진리, 곧 천적·영적·자연적 차원의 좋은 것들을 포괄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제사장이 백성을 축복한다는 것은 아론 자신이 복을 만들어 백성에게 주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제사장의 쓰임을 통해 백성에게 전달되는 것을 표상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레8의 장면을 기억하면 더욱 아름답습니다. 8에서는 아론의 에 위임식의 제물들이 놓였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것이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의 것이며 주님에게서 온다는 인정을 나타낸다고 설명했습니다. 그 손이 레9에서는 백성을 향해 올라갑니다.

 

즉 먼저 받아야 줄 수 있습니다. 8에서는 손이 주님에게서 받고, 9에서는 그 손이 백성을 향해 축복합니다. 이것이 쓰임의 질서입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자기 것으로 움켜쥐지 않고 이웃에게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영적 쓰임의 기준은 내가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가?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은 것이 나를 통해 얼마나 선한 쓰임으로 흘러가는가?입니다. 진리를 많이 알고 있다면 그것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돕는 데 사용해야 하고, 물질을 받았다면 선한 쓰임에 사용하며, 경험과 지혜를 받았다면 다른 사람을 살리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론은 손을 들어축복합니다. 손이 능력과 행함을 나타낸다는 스베덴보리의 일반적인 상응을 생각하면 축복은 말만의 행위가 아니라 선을 실제로 전달하는 쓰임과 잘 연결됩니다. 진정한 축복은 받으십시오라고 말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내가 가진 것을 통해 실제로 이웃에게 선이 전달되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레9의 첫 제사장 사역은 자기 영광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아론이 제사를 성공적으로 마쳤으니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손이 백성을 향해 올라갑니다. 그리고 곧이어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이것이 주님의 쓰임에 부름받은 사람의 방향입니다. 주님에게서 받고 이웃에게 흘려보내며, 마지막에는 사람의 시선이 자신에게 머물지 않고 주님께 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8에서 채워진 손이 레9에서 축복하는 손이 되는 것, 이것이 위임에서 쓰임으로 나아가는 거듭남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SW.9 심화 4)

 

 

 

SWC.레9 심화5, ‘왜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제물을 살랐을까?’

SWC.레9 심화5. ‘왜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제물을 살랐을까?’ 레9의 마지막은 장엄합니다. 아론이 모든 제사를 마치고 백성을 축복하고,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 다시 백성을

bygrace.kr

 

SWC.레9 심화3,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난다는 것은 무엇일까?’

SWC.레9 심화3.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난다는 것은 무엇일까?’ 레9에는 같은 약속이 두 번 나옵니다. 6절에서 모세는 ‘여호와의 영광이 너희에게 나타나리라’고 말하고, 23절에서는 모든 제사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SWC.9 심화

3.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난다는 것은 무엇일까?’

 

9에는 같은 약속이 두 번 나옵니다. 6절에서 모세는 여호와의 영광이 너희에게 나타나리라고 말하고, 23절에서는 모든 제사가 끝난 뒤 실제로 여호와의 영광이 백성에게 나타났다고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여호와의 영광은 무엇일까요?

 

스베덴보리는 영광을 단순한 눈부신 광채로만 보지 않습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5922(45:13)는 여호와의 영광을 신적 진리와 연결합니다. 천국에서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가 빛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그것이 영광으로 표현된다는 것입니다.

 

AC.10574(33:18)는 더욱 깊이 들어갑니다. 여호와의 영광은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이며, 가장 참된 의미에서는 그 신적 빛 가운데 나타나시는 주님 자신과 관련됩니다. 또한 말씀과 교회와 예배의 속뜻, 곧 그 안에 있는 신적 실재가 영광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레9에서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났다는 것은 단순히 백성 앞에 굉장한 초자연적 빛이 나타났다는 데 의미가 머물지 않습니다. 표상적으로는 주님의 신적 진리가 교회와 예배 가운데 드러나고, 그 진리 안에서 주님의 임재가 지각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 영광이 언제 나타나는지가 중요합니다. 9 시작부터 즉시 나타나지 않습니다. 아론의 속죄제와 번제가 있고, 백성의 속죄제와 번제와 소제와 화목제가 있고, 아론의 축복이 있으며,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옵니다. 그 후에야 영광이 나타납니다.

 

이 순서는 주님의 임재를 인간이 의식으로 불러낸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신적 질서에 따라 정결하게 되고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쓰임 안으로 들어갈 때, 이미 항상 임재하시는 주님이 인간에게 나타날 있는 상태가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태양은 계속 빛나지만 창문이 닫혀 있으면 방 안은 어둡습니다. 창문을 연다고 태양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회개와 정결과 예배가 주님의 임재를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들은 인간이 주님의 임재를 받아들이고 지각할 수 있는 상태로 준비되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레9의 영광은 거듭남의 아름다운 결과입니다. 진리를 단지 문자로 알고 있던 사람이 어느 순간 그 안에서 주님의 사랑과 지혜를 보기 시작합니다. 예배가 단순한 의무가 아니라 주님과 만나는 자리가 되고, 이웃을 섬기는 일이 단순한 도덕이 아니라 주님의 선이 흘러가는 쓰임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말씀 안의 영광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결국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난다는 것은 멀리 계시던 하나님이 갑자기 가까이 오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의 상태가 변화하면서 언제나 임재하시던 주님의 신적 진리와 사랑이 비로소 지각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말씀과 예배와 이웃 안에서 주님의 영광을 보는 눈이 열립니다. (SW.9 심화 3)

 

 

 

SWC.레9 심화4, ‘왜 아론은 제사를 마친 뒤 손을 들어 백성을 축복했을까?’

SWC.레9 심화4. ‘왜 아론은 제사를 마친 뒤 손을 들어 백성을 축복했을까?’ 레9:22에서 아론은 속죄제와 번제와 화목제를 모두 마친 뒤 백성을 향하여 손을 들어 축복합니다. 제사장으로 위임된

bygrace.kr

 

SWC.레9 심화2, ‘왜 아론은 백성을 위한 제사보다 자기 속죄제를 먼저 드려야 했을까?’

SWC.레9 심화2. ‘왜 아론은 백성을 위한 제사보다 자기 속죄제를 먼저 드려야 했을까?’ 아론은 이미 레8에서 제사장으로 위임되었습니다. 물로 씻었고 거룩한 옷을 입었으며 관유를 받았고, 귀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SWC 무엇인가 - SWC성경 해설의 원칙과 독법(讀法)

 

 

SWCSwedenborg Word Commentary의 약어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 해설을 뜻합니다. 여기서 Word는 단순히 성경이라는 책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일관되게 말한 말씀(the Word)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SWC에서 해설의 대상은 스베덴보리가 아니라 바로 이 말씀입니다. SWC는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요약하거나 그의 신학을 성경 본문 위에 덧씌우는 작업이 아니라, 주님이 스베덴보리를 통해 밝히신 말씀의 내적 의미와 상응의 질서를 길잡이로 삼아 다시 성경 본문으로 들어가, 그 안에 흐르는 주님의 구원 역사와 인간의 거듭남을 통합적으로 읽으려는 성경 해설 작업입니다.

 

SWC의 첫 번째 원칙은 말씀의 중심은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말씀의 가장 깊은 의미에서는 주님과 주님의 신적 인성의 영화가 다루어지며, 상대적 의미에서는 그 질서를 따라 이루어지는 인간의 거듭남과 교회의 형성이 다루어집니다. 그러므로 SWC는 성경을 인간의 도덕적 교훈이나 자기계발의 이야기로 축소하지 않습니다. 창조와 족장들의 이야기, 출애굽과 광야 여정, 제사와 정결 규례 등 서로 전혀 달라 보이는 본문들도 가장 깊은 곳에서는 주님께서 인성을 신성하게 하신 영화의 역사와 연결되며, 그로부터 인간이 어떻게 악과 거짓에서 건짐을 받아 선과 진리 안에서 새롭게 되는가를 보여 줍니다. 인간의 거듭남은 독립된 이야기가 아니라 주님께서 먼저 이루신 영화의 질서를 따라 이루어지는 역사입니다.

 

두 번째 원칙은 문자적 의미에서 출발하되 문자적 의미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SWC는 성경의 역사적·문법적 문맥을 건너뛰어 곧바로 영적 의미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누가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지, 본문의 사건과 규례가 문자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먼저 살펴봅니다. 그러나 동시에 말씀의 문자 안에는 그보다 깊은 영적·천적 실재가 담겨 있다고 봅니다. 문자적 의미는 버려야 할 껍질이 아니라 내적 의미를 담고 지탱하는 그릇입니다. 따라서 SWC의 기본적인 움직임은 문자를 버리고 영으로가 아니라 문자를 통하여 안의 영으로입니다.

 

세 번째 원칙은 상응은 임의적인 상징 붙이기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물이 등장한다고 해서 독자가 마음대로 의미를 붙이고, 불이나 산이나 나무가 등장할 때마다 그럴듯한 영적 상징을 만들어 내는 것이 상응 해석은 아닙니다. 상응은 자연계와 영계 사이에 주님께서 세우신 질서이며, 스베덴보리의 방대한 저작에는 말씀의 여러 사물과 인물, 장소와 숫자, 행위가 무엇을 상응하고 대표하는지 실제 본문을 따라 매우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SWC는 가능한 한 이 원전의 근거를 확인한 뒤 해설합니다. 상응은 해석자의 상상력을 자유롭게 하는 장치가 아니라 오히려 해석자의 자의성을 제한하는 질서입니다.

 

이와 연결되는 네 번째 원칙은 근거의 강도만큼만 말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해당 성경 구절이나 요소를 직접 설명한 경우에는 그 근거 위에서 분명하게 해설합니다. 해당 구절을 직접 다루지는 않았더라도 여러 저작에서 일관되게 밝혀진 상응과 교리로 충분히 뒷받침되는 경우에는 그에 맞는 절제된 언어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원전의 근거가 충분하지 않은 세부는 그럴듯하다는 이유만으로 의미를 만들어 내지 않습니다. 필요한 경우에는 판단을 보류합니다. 따라서 SWC의 원전 사용 원칙은 원전상 확실한 ’, ‘일반적인 상응에 비추어 유력한 ’, ‘근거가 부족하여 보류할 을 가능한 한 구별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아르카나 앞에서는 많이 말하는 것보다 어디까지 말할 수 있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섯 번째 원칙은 개별 상응을 전체 서사 안에서 읽는다는 것입니다. 소가 무엇을 뜻하고, 피가 무엇을 뜻하며, 물과 불과 기름이 각각 무엇을 상응하는지를 아는 것만으로 말씀의 내적 의미를 읽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개별 상응은 하나의 더 큰 신적 질서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정결하게 되고, 무엇이 제거되며, 어떤 선과 진리가 심기고, 그것들이 어떻게 결합하여 삶으로 내려오는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SWC이것은 무엇을 상징하는가?라는 질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것이 주님의 영화와 인간의 거듭남이라는 전체 과정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는가?를 묻습니다. 상응 하나하나는 점이고, SWC가 보고자 하는 것은 그 점들이 이어져 이루는 말씀의 서사입니다.

 

여섯 번째 원칙은 내적 의미를 오늘의 외적 사람에게 거꾸로 적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특히 구약의 정결법, 신체에 관한 규정, 성적 질서, 전쟁과 형벌, 제사장과 희생제사 등의 본문에서는 이 원칙이 중요합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많은 제도와 규례는 영적·천적 실재를 외적으로 대표하도록 주어진 것이므로, 그 외적 형식을 오늘날 사람에게 그대로 옮겨 그의 영적 상태나 인간적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육체적 흠이 대표적 예배에서 특정한 영적 결핍을 나타냈다고 해서 오늘날 같은 신체 상태를 가진 사람에게 그 영적 의미를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상응은 사람을 판단하기 위한 암호표가 아니라 말씀 안에 담긴 신적 질서를 이해하기 위한 열쇠입니다.

 

일곱 번째 원칙은 거듭남은 인간의 자기완성이 아니라 주님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악을 살피고 회개하며 진리를 배우고 선을 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에서 악을 실제로 제거하시고, 진리를 밝히시며, 선을 심고 자라게 하시고, 선과 진리를 결합시키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SWC에서 거듭남을 말할 때 인간의 노력만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말씀의 명령은 힘으로 자신을 완성하라는 요구가 아니라 인간이 자유롭게 주님의 역사에 응답하고 협력하도록 부르시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먼저 역사하시고 인간은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행하되, 그 능력과 선의 근원이 주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거듭남의 질서입니다.

 

여덟 번째 원칙은 내적 의미는 결국 삶으로 내려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의 아르카나를 많이 알고 상응에 관한 지식을 풍부하게 갖는 것 자체가 거듭남은 아닙니다. 진리는 선을 향하고,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으며, 속사람에서 받아들인 것이 겉 사람의 말과 행동과 쓰임으로 내려와야 합니다. 그러므로 SWC는 해설의 마지막에 언제나 같은 종류의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주님은 말씀을 통해 안에서 무엇을 보게 하시는가? 무엇을 제거하고 정결하게 하시려는가? 어떤 선과 진리를 심고 결합시키려 하시는가? 그리고 그것이 오늘 나의 이웃 사랑과 쓰임 안에서 어떻게 살아나야 하는가?내적 의미는 삶에서 멀어지기 위한 깊이가 아니라 더 깊이 삶으로 돌아오기 위한 깊이입니다.

 

아홉 번째 원칙은 스베덴보리에서 끝나지 않고 다시 말씀으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SWC에서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를 비롯한 스베덴보리의 여러 저작은 매우 중요한 길잡이입니다. 그러나 SWC의 목적은 독자를 스베덴보리의 문장 앞에 멈춰 세우는 데 있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밝힌 것을 통해 이전에는 지나쳤던 성경의 한 단어와 한 장면이 새롭게 보이고, 그 빛을 가지고 다시 말씀을 읽으며, 마침내 말씀 안에서 주님을 더욱 분명하게 만나는 것이 목적입니다. 따라서 SWC의 기본 흐름은 성경 본문 SWC 통합 해설 스베덴보리 원전의 근거 다시 성경 본문과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원칙 때문에 SWC는 기존에 진행해 온 스베덴보리 원전 번역·해설 작업과도 구별됩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한 항목씩 읽고 번역하고 해설하는 작업에서는 스베덴보리의 원전 자체가 직접적인 연구 대상입니다. 반면 SWC에서는 성경의 한 장 또는 하나의 본문이 중심에 놓이고, 스베덴보리의 여러 저작은 그 본문 안에 흐르는 내적 의미를 밝히기 위해 함께 사용됩니다. 전자가 스베덴보리의 원전을 따라 말씀의 깊은 곳으로 내려가는 작업이라면, SWC는 그동안 밝혀진 원전의 빛을 모아 성경 본문 전체를 다시 조망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두 작업은 서로 경쟁하지 않고 서로를 보완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SWC는 하나의 본문이나 한 권의 성경에 한정된 작업이 아니라, 말씀의 여러 책을 차례로 읽어 가는 연속적인 성경 해설 시리즈를 지향합니다. 창세기와 출애굽기에는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라는 방대한 연속 해설이 있고, 요한계시록에는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1757-1759, AE)계시록 밝히기(Apocalypse Revealed, 1766, AR)라는 직접적인 해설이 있는 반면, 말씀의 다른 책들에 관한 내적 의미와 상응의 설명은 스베덴보리의 여러 저작 곳곳에 흩어져 있습니다. SWC는 이러한 차이를 존중하면서, 직접적인 연속 해설이 있는 책에서는 그 원전을 충실한 중심축으로 삼고, 그렇지 않은 책에서는 여러 저작에 흩어진 관련 원전들을 찾아 연결하여 성경 본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연속적으로 읽어 가고자 합니다. 이는 스베덴보리가 남기지 않은 주석을 대신 완성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그가 밝혀 놓은 말씀의 내적 의미와 상응의 빛을 따라 말씀의 여러 책을 다시 읽어 보려는 시도입니다.

 

따라서 SWC의 각 성경책은 가능하면 들어가며에서 그 책을 읽는 기본 관점과 중심 주제를 살피고, 각 장의 본문을 차례로 해설한 뒤, 마지막 총평에서 그 책 전체를 관통해 온 내적 흐름을 다시 조망하는 방식으로 구성합니다. 한 장 한 장의 상응을 밝히는 데 그치지 않고, 한 권 전체가 어떤 영적 서사를 이루는지를 함께 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이 여러 성경책으로 이어질수록 서로 떨어져 보이던 율법과 역사, 시와 예언의 말씀들이 어떻게 하나의 신적 중심, 곧 주님과 그분의 나라를 향하고 있는지도 조금씩 더 선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SWC를 읽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상응을 기억하는 것도, 수많은 저작 번호를 익히는 것도 아닙니다. 한 가지 질문을 끝까지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을 통해 무엇을 이루고 계시는가?이 질문을 가지고 말씀의 문자에서 출발하여 내적 의미로 들어가고, 주님의 영화에서 인간의 거듭남을 바라보며, 다시 우리의 실제 삶과 체어리티로 돌아오는 것이 SWC가 지향하는 독법입니다. SWC의 목적은 성경을 더 복잡하게 만드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서로 흩어져 보이던 말씀들이 주님을 중심으로 하나의 신적 질서를 이루고 있음을 발견하고, 그 말씀 앞에서 우리의 속과 겉의 삶이 함께 새로워지는 데 있습니다. (SWC 소개)

 

 

※ 아래는 SWC 시리즈 첫 작업으로 레위기’ 편입니다. 읽어 보시고, 어렵게만 느껴졌던 레위기 안에 주님이 베풀어 두신 너무나 크고 놀라운, 향기롭고 깊은 사랑을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SWC.레-목차색인포함.pdf
2.64MB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