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1:1)

 

AC.16

 

태고(太古, The most ancient time)를 ‘태초’(太初, the beginning)라고 합니다. 선지서 여러 곳에서는 이때를 ‘옛날’(days of old, [antiquitatis])이라 하기도 하고, ‘영원’(days of eternity)이라 하기도 합니다. ‘태초’(beginning)는 또한 거듭나는 중인 사람의 첫 번째 시기, 기간을 말하기도 하는데요, 이때 사람은 새롭게 태어나고, 생명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듭남 자체를 사람의 ‘새 창조’(new creation)라고도 하지요. 선지서들 가운데 거의 모든 곳에서 ‘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만들다’(make)라는 표현들은 그 상징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지만, 다 거듭남을 의미합니다. 이사야를 보면, The most ancient time is called “the beginning.” By the prophets it is in various places called the “days of old” [antiquitatis] and also the “days of eternity.” The “beginning” also involves the first period when man is being regenerated, for he is then born anew, and receives life. Regeneration itself is therefore called a “new creation” of man. The expressions to “create,” to “form,” to “make,” in almost all parts of the prophetic writings signify to regenerate, yet with a difference in the signification. As in Isaiah:

 

내 이름으로 불리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43:7) Everyone that is called by my name, I have created him for my glory, I have formed him, yea, I have made him (Isa. 43:7).

 

그리고 그래서 같은 선지서에서 주님은 ‘구속자’(redeemer), ‘태에서부터 지으신 이’(former from the womb), ‘만드신 이’(maker) 및 ‘창조자’(creator)라 일컬음을 받으십니다. And therefore the Lord is called the “redeemer,” the “former from the womb,” the “maker,” and also the “creator”; as in the same prophet: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 (43:15) I am Jehovah your holy one, the creator of Israel, your king (Isa. 43:15).

 

시편에서는 In David:

 

이 일이 장래 세대를 위하여 기록되리니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 (102:18) The people that is created shall praise Jah (Ps. 102:18).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104:30) Thou sendest forth thy spirit, they are created, and thou renewest the faces of the ground (Ps. 104:30).

 

‘천’(, heaven)은 속 사람을, ‘지’(, earth)는 아직 거듭나기 전인 겉 사람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어지는 내용들을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That “heaven” signifies the internal man and “earth” the external man before regeneration may be seen from what follows.

 

 

해설

 

AC.16은 창1:1의 “태초에”라는 한 단어가 담고 있는 영적 깊이를 풀어 주면서, “창조”라는 표현을 문자적 우주 기원에만 묶어 두지 않고 ‘태고교회와 개인의 거듭남’이라는 두 차원에서 동시에 읽도록 길을 열어 줍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태초(beginning)가 역사적으로는 ‘가장 옛 시대, 곧 태고교회의 시대’를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예언서들에서 자주 나오는 “옛날”, “영원”이라는 표현이 바로 이 시기를 가리키는데,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살던 인류 최초 교회의 시기입니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태초”라는 말이 단지 과거의 어떤 시점만을 의미하지 않고, ‘사람이 거듭남을 받기 시작하는 첫 시기’도 함께 포함한다고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거듭날 때, 그는 마치 다시 태어나는 것처럼 새로운 생명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거듭남 자체를 사람의 “새 창조(new creation)라고 부릅니다. 이때 “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make)라는 표현들은 예언서에 거의 빠짐없이 나오는데, 문자적으로는 세상과 민족의 형성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여도, 속뜻으로는 ‘사람을 새롭게 하시고, 속 사람을 재형성하시며, 겉 사람을 질서 안에 두시는 주님의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를 뜻합니다. 이 단락에서 인용하는 사43:7, “내 이름으로 불리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는 말씀은, 주님이 당신의 영광, 곧 사랑과 진리가 드러나도록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일을 “창조, 조성, 제작”이라는 세 표현으로 다르게 말해 준 예입니다. 또 같은 예언서에서 주님이 “구속자, 태에서부터 조성하신 이, 만드신 이, 창조자” 등으로 불리는 것 역시, 주님이 사람을 단순히 밖에서 도와주시는 분이 아니라, ‘그 사람의 존재 전체를 속에서부터 다시 빚으시는 분’임을 드러냅니다. 다윗의 시편에서도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102:18),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104:30)라고 할 때, 단순히 새로운 민족이 생겨난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영이 임하실 때 사람과 교회가 새롭게 거듭나고, 그 결과로 ‘땅의 얼굴’, 곧 인간의 겉 삶과 외적 상태가 새로워지는 것을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서, 창세기 1장에서 나오는 “하늘”과 “”도 문자 그대로만 보면 우주의 위, 아래를 가리키지만, 속뜻으로는 거듭남 이전에 존재하는 인간의 두 차원을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곧 “하늘”은 사람 안의 ‘속 사람’(내적 인간)을, “”은 ‘겉 사람’(외적 인간)을 상징합니다. 이 둘이 혼돈과 공허, 흑암 속에 있을 때 주님이 창조 사역을 시작하시는데, 이것이 곧 인간 개인에게서는 거듭남의 시작이며, 인류 전체에게서는 태고교회와 그 이후 교회들을 세워 가시는 주님의 역사입니다. 따라서 AC.16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짧은 말씀 속에, (1) 태고교회라는 가장 옛 시대의 시작과, (2) 오늘 여기서 각 사람이 주님 안에서 새로 시작하는 거듭남의 첫 단계,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열려 있음을 보여 주며, 성경의 “창조, 조성, 만듦”이라는 모든 언어가 궁극적으로는 ‘사람을 새롭게 빚으시는 주님의 내적 사역’, 곧 거듭남을 가리키는 것임을 가르쳐 줍니다.

 

 

 

AC.17, 창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AC.17-19)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And 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s of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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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 창1, '천국 전체가 오직 주님 외에는' (AC.6-15)

AC.15 천국 전체가 오직 주님 외에 무슨 다른 아버지라는 건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과 아버지는 하나이시기 때문인데요, 이는 아래와 같이 그분 자신 친히 말씀하신 사실입니다. In the univers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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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

 

천국 전체가 오직 주님 외에 무슨 다른 아버지라는 건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과 아버지는 하나이시기 때문인데요, 이는 아래와 같이 그분 자신 친히 말씀하신 사실입니다. In the universal heaven they know no other father than the Lord, because he and the father are one, as he himself has said:

 

6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8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14:6, 8-11) I am the way, the truth, and the life. Philip saith, Show us the father Jesus saith to him, Am I so long time with you, and hast thou not known me, Philip? He that hath seen me hath seen the father how sayest thou then, Show us the father? Believest thou not that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n me? Believe me that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n me. (John 14:6, 8–11)

 

 

해설

 

AC.15는 천국의 실제 신앙 고백을 직접적으로 밝히는 대목으로, 천사들이 예배하는 대상으로서의 ‘주님(Lord)이 누구이신지에 대해 스베덴보리가 명백히 천국의 증언을 기록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천국 전체는 예수 그리스도를 단순히 ‘하나님의 아들’이나 ‘메시아’가 아니라, 곧 ‘하나님 자신’, 즉 ‘아버지이신 여호와가 인성을 입고 나타나신 분’으로 알고 믿습니다. 천사들은 결코 성부, 성자, 성령을 세 인격으로 분리하여 예배하지 않으며, 삼위의 구분을 오직 ‘하나의 인격 안에서의 세 가지 신적 본질(신성 자체, 신적 진리, 신적 작용)’로 이해합니다. 이 구절에서 스베덴보리가 인용한 요한복음 14장은 이 사실을 가장 강력하게 증언합니다. 빌립이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고 요청하였을 때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의 인성 속에 아버지의 신성이 완전히 하나 되어 나타났다는 사실, 즉 성육신을 통해 하나님이 인간에게 보이시고 접근 가능해졌다는 ‘기독론적 절정’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이라고 하심으로써, 두 분이 분리된 존재나 두 인격이 아님을 분명히 하십니다. 천국의 천사들은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그러나 동시에 영적으로 이해하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의 신성과 사랑의 전체 충만이 거하며, 그분을 보는 것이 곧 아버지를 보는 것이라는 진리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에서는 하나님을 ‘성부, 성자, 성령’으로 각기 따로 호명하거나 분리하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주님(Lord)이라고 부르며 예배합니다. 왜냐하면 그분 안에 삼위 전체의 신성이, 사랑과 지혜와 능력, 즉 여호와의 모든 신적 본질이 일체로 거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단순한 교리적 해석이 아니라 ‘천국의 실제 체험적 인식’이라고 강조하며, 천국 전체가 ‘주님’을 아버지로 알고, 또 그렇게 예배한다는 사실을 반복하여 증언합니다. 따라서 AC.15는 스베덴보리 신학의 기초인 ‘주님 이해’(高基督論)를 선언하는 핵심 문장으로, 말씀 속에서의 ‘아버지’라는 표현도 속뜻에서는 언제나 주님의 신성 자체를 의미하며, 예수님께서 바로 그 아버지를 인간에게 계시하시고 그분을 볼 수 있게 하신 유일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밝힙니다.

 

 

 

AC.16, 창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AC.16 태고(太古, The most ancient time)를 ‘태초’(太初, the beginning)라고 합니다. 선지서 여러 곳에서는 이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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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 창1, ''주님'이라는 호칭' (AC.6-15)

AC.14 이어지는 글 가운데서 ‘주님’(the Lord)이라는 이름은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오직 그분만 의미합니다. 그분은 앞뒤 무슨 다른 이름을 덧붙이는 거 없이 오직 ‘주님’으로만 일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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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

 

이어지는 글 가운데서 ‘주님’(the Lord)이라는 이름은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오직 그분만 의미합니다. 그분은 앞뒤 무슨 다른 이름을 덧붙이는 거 없이 오직 ‘주님’으로만 일컬음을 받으십니다. 온 천국에 걸쳐 그분은 주님으로 인정되시며, 사랑과 공경을 받으십니다. 모든 천국과 지상에서 오직 그분만이 모든 권세를 가진 분이시기 때문이지요. 그분은 제자들에게 친히 자신을 그렇게 부르라 명하셨습니다. In the following work, by the name Lord is meant the savior of the world, Jesus Christ, and him only; and he is called “the Lord” without the addition of other names. Throughout the universal heaven he it is who is acknowledged and adored as Lord, because he has all sovereign power in the heavens and on earth. He also commanded his disciples so to call him, saying,

 

너희가 나를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3:13) Ye call me Lord, and ye say well, for I am (John 13:13).

 

그래서 그분의 부활 후, 제자들은 그분을 오직 ‘주님’(the Lord)으로만 불렀습니다. And after his resurrection his disciples called him “the Lord.

 

 

해설

 

AC.14 글은 Arcana Coelestia 전체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Lord) 개념을 규정하는 자리이며, 스베덴보리 신학의 그리스도론을 가장 명확하게 요약한 선언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후 모든 주석에서 ‘(Lord)라고 말할 때, 그것은 ‘오직 세상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을 의미한다’고 분명히 밝힙니다. 즉, ‘Lord’라는 호칭은 삼위 가운데 하나를 가리키는 부분 명칭이 아니라, ‘성육하신 하나님의 전체성(Deus Homo)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다른 이름을 덧붙이지 않고, 단독으로 “(Lord)라고 부르며, 이는 곧 천국 전체가 사용하는 호칭과 일치합니다. 그는 “온 천국에서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아는 천사는 단 한 명도 없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천국의 영들은 예수님이 곧 여호와이시며, 아버지와 아들은 두 인격이 아니라 한 분의 신성 안에서 구별되는 두 면일 뿐이라는 사실을 ‘직관적 지각(perception)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에서는 주님의 신성이 사랑(선)과 지혜(진리)로 무한히 흘러나오며 모든 천적, 영적 생명의 원천이 되기 때문에, 그분만이 절대적 주권을 가지시는 분으로 인식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종교적 고백이 아니라, 천국의 존재들이 실제로 체험하는 실재(reality)입니다. 또한 스베덴보리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을 “”라고 부르라고 명령하신 요한복음 1313절을 인용하며, 이는 예수께서 스스로 자신의 신성을 드러내신 직접적 선언으로 봅니다. “너희가 나를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는 말씀은 단순한 존칭을 허락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곧 아버지와 하나이신 신성 자체임을 밝히시는 자기 계시’입니다. 부활 이후 제자들이 예수님을 “”라 부르게 된 것도, 그분의 ‘신적 인성(Divine Human)을 직접 목도한 이후에 생긴 자연스러운 반응이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초기 교회가 “예수는 주시다(Kyrios Iesous)라는 고백을 신앙의 중심에 둔 것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가 ‘Lord’라는 말을 통해 ‘삼위일체의 분리적 이해(성부-성자-성령을 세 인격으로 보는 관점)’를 넘어, 아버지의 신성과 아들의 인성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하나가 된 신적 통일을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AC 전반에서 “여호와”나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나올 때에도 그 속뜻에서는 항상 “주님—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이 글은 창세기 해설을 넘어, 스베덴보리 신학 전체의 신학적 틀을 제시하는 선언으로서, 이후 모든 구절에서 “”라는 말이 나타날 때마다, 그것이 단순한 존칭이 아니라 ‘성육하신 여호와, 곧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의 신적 주권과 자비, 사랑의 임재’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는 근본 원칙을 제공합니다.

 

 

 

AC.15, 창1, '천국 전체가 오직 주님 외에는' (AC.6-15)

AC.15 천국 전체가 오직 주님 외에 무슨 다른 아버지라는 건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과 아버지는 하나이시기 때문인데요, 이는 아래와 같이 그분 자신 친히 말씀하신 사실입니다. In the univers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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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 창1, '오늘날 대부분은 첫 번째 상태까지만' (AC.6-15)

AC.13 거듭나는 중인 사람들이 모두 이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대부분은 첫 번째 상태까지만입니다. 그중 일부만 두 번째, 그 밖의 사람들이 세 번째, 네 번째와 다섯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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