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최근 충주봉쇄수도원의 강문호 목사님 유튜브 영상을 보았습니다. 영상의 핵심은 평생 성경을 연구해 온 자신의 여정을 돌아보며, 앞으로도 ‘오직 성경’만 연구하며 살겠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정교회 수도원과 가톨릭, 유대 랍비, 초대교회 문헌 등을 찾아다니며, 성경을 더 깊이 이해하려 애쓴 과정, 그리고 ‘40년 목회했지만 이제야 성경을 조금 알기 시작했다’는 겸손한 고백에는 진정성이 담겨 있었습니다. 진리를 더 깊이 알고자 하는 이러한 갈망은 누구라도 존중하게 됩니다.

 

그러나 영상을 끝까지 시청하면서 제 마음속에는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스베덴보리라면 이 영상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아마도 그는 먼저 그 열정을 귀하게 평가했을 것입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은 언제나 주님께서 사람 안에 심어 두시는 선한 애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한 걸음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을 것입니다. ‘성경을 깊이 안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오늘날 우리는 흔히 성경을 깊이 안다는 것을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배우고, 유대교 전승과 랍비 문헌을 연구하며, 초대교회 교부들과 수도원 전통을 익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러한 연구는 분명 유익합니다. 성경의 역사와 문화, 언어와 배경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이것은 어디까지나 말씀의 바깥층을 이해하는 일입니다. 말씀의 가장 깊은 차원은 인간의 학문이나 전통만으로는 결코 열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은 단순한 종교 문헌이 아니라, 그 문자 안에 천국 전체와 연결되는 영적 의미와 천적 의미를 담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성경론에서 말씀의 모든 구절에는 문자적 의미와 함께 영적 의미와 천적 의미가 들어 있으며, 바로 그 때문에 말씀이 천국과 사람을 연결하는 통로가 된다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말씀의 신성은 단지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사실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문자 속에 천국의 질서 자체가 담겨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천사들은 인간이 읽는 같은 말씀을 자신들의 차원에서는 영적 의미로 받아들이며, 이로 인해 말씀을 읽는 사람과 천국이 연결됩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성경의 깊이를 인간이 얼마나 많은 자료를 읽었느냐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말씀의 내적 의미를 얼마나 열어 주셨는가를 더 중요하게 봅니다. 아무리 많은 언어를 배우고, 아무리 방대한 문헌을 읽는다 해도 주님의 빛이 비추지 않으면 말씀은 여전히 문자에 머물 뿐입니다. 반대로 평범한 사람이라도 주님을 사랑하고 진리를 사랑하는 가운데 말씀을 읽는다면, 그 말씀은 그의 삶 속에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영상에서 특히 인상 깊었던 부분은 강문호 목사님이 유대 랍비로부터 ‘개신교 목사들이 성경을 가장 모른다’는 말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회상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에 일정 부분은 동의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그는 당시 교회가 말씀의 문자와 교리 논쟁에는 익숙했지만, 사랑과 거듭남이라는 말씀의 목적은 점점 잃어버렸다고 여러 곳에서 지적합니다. 말씀을 안다고 하면서도 말씀대로 살지 않는 상태는 스베덴보리가 가장 강하게 경계했던 모습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이렇게 덧붙였을 것입니다. ‘랍비가 성경을 많이 안다고 해서 곧 말씀의 가장 깊은 의미를 아는 것은 아니다.’ 히브리어를 잘 안다고 해서 곧 말씀의 속뜻을 아는 것은 아니며, 초대교회 문헌을 많이 읽었다고 해서 천국의 질서를 이해하는 것도 아닙니다. 랍비는 유대 전통을 알고, 교부는 교회의 역사를 알고, 정교회는 오랜 전례를 보존하며, 개신교는 종교개혁 이후의 교리를 발전시켜 왔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말씀을 둘러싼 외적인 이해입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는 어떤 인간 전통의 소유물이 아니라, 오직 주님께서 열어 주시는 계시의 영역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저작을 ‘새 예루살렘을 위한 교리’라고 부른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그는 새로운 교리를 만든 것이 아니라, 말씀 안에 이미 들어 있던 내적 의미를 주님께서 다시 열어 주셨다고 이해했습니다.

 

영상의 또 다른 핵심은 ‘오직 성경’이라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영상을 자세히 보면 강문호 목사님의 실제 연구 방법은 문자 그대로의 ‘오직 성경’이라기보다 성경을 중심에 두고 유대교와 초대교회, 정교회와 수도원 전통을 함께 참고하는 방식입니다. 이것은 결코 비판할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을 더욱 깊이 이해하려는 진지한 노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엄밀하게 말하면, 이것은 종교개혁 당시의 ‘오직 성경’과는 조금 다른 모습입니다. 실제로는 ‘성경을 중심으로 다양한 전통을 참고하는 연구’라고 표현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반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오직 말씀’은 전혀 다른 차원을 가리킵니다. 그는 말씀이 다른 문헌들에 의해 완성되는 책이라고 보지 않았습니다. 말씀은 그 자체 안에 이미 완전한 신적 질서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외부 문헌보다 말씀 자체가 말씀을 해석하도록 했습니다. 창세기의 한 구절은 복음서와 연결되고, 선지서는 요한계시록과 연결되며, 모든 연결의 중심에는 상응과 내적 의미가 있습니다. 인간이 말씀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자체가 스스로를 드러내도록 하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해석 원리입니다.

 

영상 후반부에서 강문호 목사님은 ‘성경은 하나님이 아니면 쓸 수 없는 책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고백은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전적으로 공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왜 하나님만이 말씀을 쓰실 수 있는가? 그것은 성경의 모든 단어와 표현이 천국의 실재와 상응하도록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산과 강, 나무와 양, 성막과 예루살렘은 단순한 역사적 대상이 아니라 천국의 실재를 담고 있습니다. 인간은 이러한 상응의 구조를 설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은 단순한 종교 문헌이 아니라, 천국 전체가 문자 속에 담겨 있는 신적 계시입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AC)는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문자 하나하나 속에 이러한 천국의 질서가 어떻게 담겨 있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 기록된 방대한 해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무엇보다 강조하는 것은 말씀의 목적입니다. 그는 성경론에서 말씀은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기 위한 책이 아니라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기 위한 책이라고 설명합니다. 말씀은 사람을 변화시키고, 거듭나게 하며, 천국과 연결하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 연구의 마지막 목적은 박식함이 아니라 거듭남입니다.

 

영상의 마지막에서 강문호 목사님은 ‘죽을 때까지 성경만 연구하며 살겠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말은 매우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라면 여기에 조용히 한 문장을 덧붙였을 것 같습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목적은 성경을 많이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사람을 새롭게 만드는 데 있다.’ 말씀을 이해하는 정도는 결국 주님을 사랑하는 정도와 이웃을 사랑하는 정도에 비례합니다. 사랑 없는 지식은 기억 속에 머물지만, 사랑과 함께 받아들인 진리는 생명이 되어 사람의 의지와 삶을 변화시킵니다.

 

결국 스베덴보리에게 성경 연구의 끝은 학문이 아니라 삶이며, 정보가 아니라 거듭남입니다. 인간의 모든 학문과 전통은 말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의 궁극적인 깊이는 어떤 인간의 전통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께서 여시는 말씀의 내적 의미와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삶 안에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오직 성경’이라는 말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볼 때 얻게 되는 가장 중요한 통찰이라고 생각합니다.

 

참고로 스베덴보리의 여러 저작 가운데 이 주제를 가장 직접적으로 다루는 책은 성경론입니다. 특히 ‘말씀 안에 내적 의미가 있다’, ‘말씀은 천국과 사람을 연결한다’, ‘말씀은 신적 진리 자체이다’, ‘교리는 말씀에서 나와야 한다’, ‘주님만이 말씀을 여신다’는 내용은 이 저작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사상입니다. 여기에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AC)를 함께 읽으면, 그 원리가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실제 본문 속에서 어떻게 구현되는지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SY.7, ‘수도실에 들어서면’

※ 아래 내용은 해당 유튜브를 먼저 보셔야 이해가 되니 참고하세요. 강문호 목사님의 이번 영상은 앞선 ‘오직 성경’ 영상보다 훨씬 더 직접적으로 그분의 수도 영성과 죽음 묵상을 보여 줍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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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5, ‘찬성 125표, 반대 193표’, 20년 섬긴 교회에서 쫓겨난 목사의 고백

※ 아래 내용은 해당 유튜브를 먼저 보셔야 이해가 되니 참고하세요. 이 에피소드는 앞선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상당한 울림을 주지만, 실제 목회 현실을 아는 사람의 눈으로 보면 몇 가지 어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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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에피소드는 앞선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상당한 울림을 주지만, 실제 목회 현실을 아는 사람의 눈으로 보면 몇 가지 어색한 부분이 눈에 띕니다. 신학교를 졸업한 지 석 달밖에 되지 않은 스물여덟 살의 인물이 곧바로 담임목사로 청빙되어 처음부터 모두에게 ‘목사님’으로 불리는 설정, 20년 동안 담임목회를 하고도 재신임 부결 직후 곧바로 생계를 위해 일반 회사에 취직하는 전개, 퇴직금이나 사례비 정산, 교회의 최소한의 생활 지원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점 등은 실제 한국 교회에서는 다소 개연성이 떨어집니다. 또한 이야기는 한 인물의 내적 변화를 중심으로 전개되기 위해 현실의 복잡한 교회 제도와 절차를 상당 부분 단순화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이러한 현실적 허점을 먼저 따지기보다, 이야기 전체가 무엇을 상징하도록 구성되었는지를 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말씀 역시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면서도 동시에 그 안에 영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를 하나의 실제 사건이라기보다, 한 목회자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영적 변화 과정을 보여 주는 비유적 서사로 읽는다면 훨씬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처음 목회의 모습입니다. 그는 작은 교회에서 시작하여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찾아가고, 병든 사람을 위로하며, 말씀을 준비하는 데 일주일을 쏟습니다. 그때의 기쁨은 교회의 규모가 아니라 사람을 사랑하는 데 있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을 빌리면, 처음에는 체어리티가 신앙을 이끌고 있었습니다. 즉, 사랑이 먼저이고 일은 그 사랑의 열매였습니다. 사람은 이 상태에 있을 때 주님의 생명이 비교적 자유롭게 흘러들어옵니다.

 

그러나 교회가 성장하면서 중심이 조금씩 이동하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주님의 교회가 성장한다’는 감사였지만, 어느 순간 ‘내가 잘해서 이렇게 되었다’는 생각이 마음속에 자리 잡습니다. 이야기 속 주인공도 바로 그 지점을 스스로 고백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proprium이 다시 머리를 드는 과정으로 설명합니다. 사람은 거듭남의 길을 걷고 있어도 자기 공로와 자기 지혜를 자신의 것으로 여기기 시작하면, 이전보다 더 미묘한 자기애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외적인 성공보다 더 위험한 이유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주님께서 즉시 그를 넘어뜨리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먼저 권사의 입을 통해, 장로의 입을 통해, 아내의 입을 통해 반복해서 신호를 보내십니다. ‘목사님이 예전 같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섭리가 사람을 갑자기 꺾기보다, 먼저 양심을 일깨우는 작은 경고들을 여러 차례 허락하신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이 그 신호를 처음에는 오해하거나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 역시 바로 그 영적 질서를 잘 보여 줍니다.

 

재신임 투표 역시 단순한 교회 정치 사건으로만 볼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그것은 주님께서 한 사람의 겉 사람을 무너뜨리심으로 속 사람을 살리시는 과정처럼 읽힙니다. 사람은 자신의 명예와 지위가 안전할 때는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가장 의지하던 것이 무너질 때 비로소 자신이 무엇을 사랑했는지가 드러납니다. 말씀에서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한 뒤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게 되었던 것처럼, 이 목회자 역시 재신임 부결이라는 사건을 통해 자기 안에 숨어 있던 사랑의 질을 비로소 보기 시작합니다.

 

이야기 가운데 가장 스베덴보리적인 장면은 뜻밖에도 회사에 취직하는 부분이 아니라, 작은 교회의 맨 뒷자리에 아무 직분 없이 앉아 예배를 드리는 장면입니다. 그는 더 이상 설교자가 아니라 듣는 사람이 됩니다. 더 이상 중심 인물이 아니라 평범한 성도가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에서 가장 큰 사람은 가장 많이 섬기는 사람이며,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낮은 자리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이라고 설명합니다. 직분은 사람을 거룩하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직분 없이도 주님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진정으로 직분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특히 요한복음 21장을 읽다가 ‘내가 실패했다고 내가 너를 버렸느냐’는 음성을 들었다는 대목은, 사실 여부와는 별개로 매우 중요한 영적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는 누구도 버리지 않으시며, 사람이 스스로 떠날 뿐이라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주님은 사람의 성공보다 사랑을, 업적보다 의지를 보십니다. 따라서 주님의 부르심은 외적인 성공으로 끝나지 않고, 오히려 실패를 통해 더욱 순수한 사랑으로 정화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후 작은 교회에서의 목회는 이전과 전혀 다릅니다. 이제 그는 교회를 성장시키려 하기보다 사람을 사랑하려 합니다. 숫자를 자랑하지 않고, 심방에서 먼저 들으려 하며, 사례비를 줄이는 일도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교회는 오히려 조금 줄어들지만, 그는 이전보다 더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외적인 성공에서 내적인 평안으로 중심이 이동한 모습입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으로 하면, 선행 자체보다 ‘선을 사랑하는 상태’가 형성된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평안을 경험하게 됩니다.

 

결국 이 이야기는 ‘큰 교회가 나쁘고 작은 교회가 좋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참된 주제는 규모가 아니라 사랑의 방향입니다. 사람은 작은 교회에서도 자기애에 빠질 수 있고, 큰 교회에서도 끝까지 겸손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주님께서는 어떤 사람에게는 성공을 통해 시험하시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실패를 통해 정결하게 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외적인 결과가 아니라, 그 과정을 거치면서 사람의 사랑이 자기 자신에게서 주님과 이웃에게로 실제로 옮겨 갔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 이야기의 가장 큰 교훈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공이 사람을 천국으로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성공과 실패를 모두 사용하셔서 사람의 사랑을 새롭게 하실 때 비로소 참된 거듭남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SY.6, ‘성경에 생명을 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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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4, ‘교회 계좌에서 4천만 원이 개인 계좌로 이체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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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에피소드는 매우 인상적이지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몇 가지 중요한 점을 분별하여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응급상황에서 자녀를 살리려는 부모의 사랑은 선한 정서에서 나온 것이지만, 그 선한 정서가 곧바로 모든 행동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장로는 자신의 돈이 아니라 교회의 돈을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절박한 상황이라 하더라도 허락 없이 교회 재정을 개인 용도로 옮긴 것은 객관적으로는 잘못입니다. 본인도 그것을 인정하고 끝까지 변명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오히려 그의 양심이 살아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의 행위보다 먼저 그 행위의 ‘의도(intention)’와 ‘사랑(love)’을 봅니다. 같은 행동이라도 자기 이익을 위한 것인지, 타인을 위한 것인지에 따라 영적 성격은 전혀 달라집니다. 만약 이 장로가 교회 돈을 이용해 개인 사업을 하거나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 했다면 그것은 명백한 자기애와 탐욕에서 나온 것이며, 영적으로도 매우 위험한 상태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경우는 자신의 생명을 연장하거나 사치를 누리려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자녀를 살리려는 절박함 속에서 나온 행동이었습니다. 물론 이것이 규정 위반을 없애지는 않지만, 주님께서는 외적인 행동뿐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사랑의 질을 함께 보십니다. 이것이 말씀의 속뜻이 끊임없이 가르치는 심판의 원리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스베덴보리는 ‘선한 목적은 악한 수단을 거룩하게 만들지 않는다’는 점도 분명히 말합니다. 천국에서는 선과 진리가 언제나 함께 갑니다. 사랑만 있고 진리가 없으면 맹목적인 열심이 되고, 진리만 있고 사랑이 없으면 냉혹한 정의가 됩니다. 이 장로의 행동은 사랑은 있었지만 진리의 질서를 잠시 벗어난 경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끝까지 ‘제가 잘못했습니다’, ‘징계를 받아도 할 말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태도가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이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는 순간, 그 오류는 거듭남의 재료가 되기 시작합니다. 반대로 잘못을 합리화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자기애가 선을 집어삼키기 시작합니다.

 

한편 당회의 모습도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흥미롭게 볼 수 있습니다. 처음 장로들은 모두 원칙을 말합니다. 그것은 틀린 말이 아닙니다. 교회 재정은 거룩한 것이며, 신뢰는 반드시 지켜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처음에는 사건만 보았고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사건의 전말을 듣고 나서야 판단이 달라집니다. 이것은 단순히 감정적으로 약해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리가 더 많은 사실을 알게 되면서 더욱 완전한 판단을 하게 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지혜란 많은 사실을 하나의 선 안에서 질서 있게 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진리는 사실을 충분히 알수록 더욱 공정해집니다.

 

여기서 가장 주목할 사람은 당회장입니다. 그는 규정을 무시하자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실을 밝힌 뒤에 판단하자고 말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자주 말하는 ‘공정한 판단(just judgment)’의 정신과 상당히 닮아 있습니다. 주님은 결코 성급하게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의 외적인 행동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전 생애, 의도, 반복된 삶의 방향까지 모두 보신 후에 심판하십니다. 천국의 천사들도 누군가를 단 한 사건으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전체적인 사랑이 무엇인지, 삶이 어느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를 봅니다.

 

당회의 최종 결정도 흥미롭습니다. 공식 징계는 하지 않았지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넘어가지도 않았습니다. 재정부에서는 물러나게 하고 일정 기간 모든 직분을 내려놓게 했습니다. 이것은 사랑과 질서를 함께 살리려는 시도였습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으로 하면, 자비는 결코 질서를 파괴하지 않으며, 참된 질서는 언제나 자비를 품고 있습니다. 주님의 섭리 역시 죄를 죄가 아니라고 하지 않으시면서도 죄인을 회복시키기 위해 가장 적절한 길을 마련하십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마지막입니다. 장로는 직분을 다시 받을 기회가 왔지만 스스로 사양합니다. 그는 직분보다 주님과의 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스베덴보리라면 이것을 단순한 겸손 이상의 변화로 보았을 것입니다. 사람은 처음에는 직분을 사랑하고, 다음에는 직분을 통한 명예를 사랑하며, 마지막에는 직분과 상관없이 선 자체를 사랑하게 됩니다. 이 장로는 외적인 명예를 잃으면서 오히려 내적인 평안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이전보다 더 자유로운 얼굴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거듭남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람은 무언가를 더 많이 얻어서 평안을 얻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proprium이 한 겹 벗겨질 때 비로소 평안을 얻게 됩니다.

 

결국 이 에피소드는 ‘원칙이냐 사랑이냐’의 대립을 말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참된 원칙은 사랑을 살리기 위해 존재하며, 참된 사랑은 결코 원칙을 무너뜨리지 않습니다. 주님의 섭리는 언제나 이 둘을 함께 이루십니다. 사람의 눈은 흔히 규정과 자비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려 하지만, 주님의 지혜는 질서를 보존하면서도 한 영혼을 잃지 않는 길을 찾으십니다. 그래서 천국의 정의는 냉혹하지 않고, 천국의 자비는 무질서하지 않습니다. 이 균형이야말로 주님의 통치가 인간의 판단과 가장 크게 다른 점이며, 이 이야기 속에서 가장 깊이 묵상해야 할 영적 교훈이라 할 수 있습니다.

 

 

 

SY.5, ‘찬성 125표, 반대 193표’, 20년 섬긴 교회에서 쫓겨난 목사의 고백

※ 아래 내용은 해당 유튜브를 먼저 보셔야 이해가 되니 참고하세요. 이 에피소드는 앞선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상당한 울림을 주지만, 실제 목회 현실을 아는 사람의 눈으로 보면 몇 가지 어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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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3,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74세 목사님, 교회 문 닫는 날 일어난 일

※ 아래 내용은 해당 유튜브를 먼저 보셔야 이해가 되니 참고하세요. 이 이야기를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읽어 보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정말 있었던 실화인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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