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내 백성의 도를 부지런히 배우며 살아 있는 여호와라는 내 이름으로 맹세하기를 자기들이 내 백성을 가리켜 바알로 맹세하게 한 것같이 하면 그들이 내 백성 가운데에 세움을 입으려니와(렘12:16)And it shall be,if learning they shall learn the ways of My people,to promise by My name,Living Jehovah,as they taught My people to promise by Baal,then shall they be built in the midst of My people(Jer. 12:16).
스베덴보리가AC.290에서 위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말씀에서 오직 주님만이‘살아 계신 여호와’로 불리신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AC.290의 중심 주제는 모든 생명의 근원이 오직 주님이시라는 것이며,이 구절은 그 사실을 잘 뒷받침하는 성경적 증거입니다.
이 구절의 역사적 배경은 이스라엘 주변 민족들에 대한 예언입니다.주님께서는 그들이 회개하여‘내 백성의 도’를 배우고,더 이상 바알을 두고 맹세하지 않고‘살아 있는 여호와라는 내 이름으로 맹세’한다면,그들도 주님의 백성 가운데 세움을 입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따라서 이 말씀은 이방 민족에게도 구원의 길이 열려 있음을 보여 주는 은혜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특별히 주목하는 것은‘살아 있는 여호와라는 내 이름으로’라는 표현입니다.이는 단순한 맹세의 관용구가 아닙니다. ‘살아 있는 여호와’라는 이름은 주님께서 생명 자체(Life Itself)이시며,모든 생명의 유일한 근원이심을 나타내는 이름입니다.그러므로 이 표현은 생명이 바알이나 다른 어떤 존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오직 주님께만 있음을 선포하는 신앙고백입니다.
반대로‘바알로 맹세하게 한 것같이’는 거짓 신을 숭배했다는 사실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영적으로는 생명의 근원을 주님이 아닌 다른 데서 찾는 모든 상태를 의미합니다.사람이 자기 자신이나 세상의 힘,거짓된 교리,또는 어떤 피조물을 생명의 근원처럼 의지할 때,그는 영적인 의미에서 바알을 따르는 것과 같은 상태에 있게 됩니다.
또한‘내 백성의 도를 부지런히 배우며’라는 말씀도 중요합니다.주님께서는 단순히 입으로‘여호와께서 살아 계신다’말하는 것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먼저 주님의 도를 배우고,그 진리 안에서 살아가며,그 결과로‘살아 있는 여호와’를 고백하는 삶을 원하십니다.따라서 이 구절은 살아 있는 신앙이란 단순한 고백이 아니라,주님의 진리를 배우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신앙임을 보여 줍니다.
이러한 이유로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AC.290에 인용합니다.그는 예레미야의 예언 자체를 해설하려는 것이 아니라,말씀이 오직 주님만을‘살아 계신 여호와’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증명하고자 합니다.그리고 그 이름은 곧 주님만이 생명 자체이시며,모든 참된 생명이 오직 그분으로부터 나온다는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렘12:16은AC.290의 핵심 사상을 잘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사람은 생명의 근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영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도 되고,죽은 사람도 됩니다.주님을 생명 자체이신‘살아 계신 여호와’로 인정하고 그분의 길을 배우며 살아가는 사람은 참된 생명 안에 거하게 됩니다.바로 이 점을 밝히기 위하여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할지라도 실상은 거짓 맹세니라(렘5:2)And though they say,Jehovah lives;still they promise falsely(Jer. 5:2).
스베덴보리가AC.290에서 위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오직 주님만이 참으로‘살아 계신 분’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그는 앞에서 생명은 오직 하나이며,그 생명은 주님으로부터만 나온다고 설명한 뒤,말씀이 실제로 주님을‘살아 계신 여호와’라고 부른다는 성경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살아 계신’이라는 표현입니다.스베덴보리에게 이것은 단순히‘존재하고 계신다’는 뜻이 아닙니다.그것은 주님께서 생명 자체(Life Itself)이시며,모든 천사와 사람의 생명의 근원이심을 나타내는 이름입니다.따라서 말씀이 주님을‘살아 계신 여호와’라고 부르는 것은,모든 생명이 오직 그 분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문맥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백성은 입으로는‘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한다’고 말하지만,실제로는‘거짓 맹세’를 하고 있습니다.다시 말해,그들은‘살아 계신 여호와’를 입술로는 인정하면서도 삶으로는 그분을 부인하고 있었습니다.신앙의 고백은 있었지만,그 안에는 참된 생명이 없었습니다.
바로 이 점이AC.290의 내용과 연결됩니다.스베덴보리는 생명은 단순히‘주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생명 자체이신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앙 안에 있을 때,비로소 사람 안에 역사한다고 설명합니다.그러므로 입으로 아무리‘여호와께서 살아 계신다’말해도,주님과 실제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그 신앙은 살아 있는 신앙이 아닙니다.
이 구절은 또한 살아 있는 신앙과 죽은 신앙의 차이를 보여 줍니다.살아 있는 신앙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사람의 삶 속에서 열매를 맺는 신앙입니다.반대로 죽은 신앙은 입술의 고백은 있지만,삶이 따르지 않는 신앙입니다.예레미야는 바로 이러한 상태를‘거짓 맹세’라는 말로 책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하는 목적은 예레미야 시대의 죄악을 설명하려는 것이 아닙니다.그는 말씀에서 주님을‘살아 계신 여호와’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동시에,참된 생명은 오직 주님으로부터 오며,그 생명은 참된 신앙 안에서만 역사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렘5:2는AC.290의 핵심 주제를 잘 뒷받침하는 말씀입니다.사람은 입술로 주님을 고백한다고 해서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생명 자체이신 주님과 실제로 연결될 때,비로소 영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이 됩니다.그래서 말씀은 오직 주님만을‘살아 계신 여호와’라고 하며,그분 안에 있는 사람만을 참된 의미에서‘산 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창3:20)
AC.290
교회를 ‘모든 산 자의 어머니’(mother of all living)라고 하는 것은, 생명 자체이신 주님에 대한 신앙을 그 교회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도 이미 앞에서 설명한 내용으로 분명합니다. 생명은 오직 하나이며, 모든 존재의 생명은 그 하나의 생명으로부터 옵니다. 또한 생명이라 할 만한 생명은 생명이신 주님에 대한 신앙을 통해서만 있을 수 있으며, 그 안에 생명이 있는 신앙도 오직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그 신앙 안에 계시지 않으면 그 신앙에는 생명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말씀은 오직 주님만을 ‘살아 계신 분’(living)이라고 하며, ‘살아 계신 여호와’(living Jehovah)라고 합니다(렘5:2; 12:16; 16:14-15; 23:7; 겔5:11). That she was called the “mother of all living” in consequence of possessing faith in the Lord, who is life itself, is also evident from what has been already shown. There cannot be more than one life, from which is the life of all, and there can be no life, which is life, except through faith in the Lord, who is the life, nor can there be faith in which is life, except from him, consequently unless he is in it. On this account, in the Word, the Lord alone is called “living,” and is named the “living Jehovah” (Jer. 5:2; 12:16; 16:14, 15; 23:7; Ezek. 5:11);
그들이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할지라도 실상은 거짓 맹세니라(렘5:2) And though they say, Jehovah lives; still they promise falsely (Jer. 5:2).
그들이 내 백성의 도를 부지런히 배우며 살아 있는 여호와라는 내 이름으로 맹세하기를 자기들이 내 백성을 가리켜 바알로 맹세하게 한 것같이 하면 그들이 내 백성 가운데에 세움을 입으려니와(렘12:16) And it shall be, if learning they shall learn the ways of My people, to promise by My name, Living Jehovah, as they taught My people to promise by Baal, then shall they be built in the midst of My people (Jer. 12:16).
14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보라 날이 이르리니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지 아니하고15이스라엘 자손을 북방 땅과 그 쫓겨났던 모든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리라 내가 그들을 그들의 조상들에게 준 그들의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리라(렘16:14, 15) Therefore, behold, the days come, says Jehovah, that it shall no more be said, Jehovah lives, who brought up the sons of Israel out of the land of Egypt; but, Jehovah lives, who brought up the sons of Israel from the land of the north, and from all the lands whither He had compelled them; and I will return them onto their ground that I gave unto their fathers (Jer. 16:14-15).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그들이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지 아니하고(렘23:7) Therefore, behold, the days come, says Jehovah, that they shall no more say, Jehovah lives, who brought up the sons of Israel out of the land of Egypt (Jer. 23:7);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모든 미운 물건과 모든 가증한 일로 내 성소를 더럽혔은즉 나도 너를 아끼지 아니하며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고 미약하게 하리니(겔5:11) Therefore, as I live, says the Lord Jehovih, shall it not be, because thou hast defiled My sanctuary with all thy detestable things, and with all thine abominations, that even I shall diminish thee; and My eye shall not spare, and even I will not have pity (Ezek. 5:11).
또한 ‘영원히 살아 계시는 이’(he that liveth to eternity)라고 하며(단4:34; 계4:10; 5:14; 10:6), “he that liveth to eternity” (Dan. 4:34; Rev. 4:10; 5:14; 10:6);
그 기한이 차매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보았더니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이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이를 찬양하고 경배하였나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단4:34) And at the end of the days I, Nebuchadnezzar, lifted up my eyes to the heavens, and my knowledge returned to me, and I blessed the Most High and I praised and honored Him who lives to eternity, whose dominion is an eternal dominion, and His kingdom is with generation and generation (Dan.4:34);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계4:10) the twenty and four elders fell down before Him who sat on the throne, and worshiped Him who lives for ages of ages, and cast their crowns before the throne, saying (Rev. 4:10),
네 생물이 이르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계5:14) And the four animals said, Amen. And the twenty four elders fell down and worshiped Him who lives for ages of ages (Rev. 5:14).
세세토록 살아 계신 이 곧 하늘과 그 가운데에 있는 물건이며 땅과 그 가운데에 있는 물건이며 바다와 그 가운데에 있는 물건을 창조하신 이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되 지체하지 아니하리니(계10:6) and swore by Him who lives for ages of ages, who created heaven, and the things in it, and the earth, and the things in it, and the sea, and the things in it, that time shall be no longer (Rev. 10:6).
‘생명의 원천’(fountain of life)이라고 하고(시36:9), the “fountain of life” (Ps. 36:9);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시36:9) For with Thee is the spring of lives; In Thy light shall we see light (Ps. 36:9).
‘생수의 근원’(fountain of living waters)이라고 합니다(렘17:13). the “fountain of living waters” (Jer. 17:13).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렘17:13) O Jehovah, the hope of Israel, all who forsake Thee shall be ashamed, and they who turn aside away from Me shall be written in the earth, for they have forsaken Jehovah, the spring of living waters (Jer. 17:13).
주님으로 말미암아, 곧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얻는 천국은 ‘산 자의 땅’(land of the living)이라고 합니다(사38:11; 53:8; 겔26:20; 32:23-27, 32; 시27:13; 52:5; 142:5). Heaven (which lives by or from him) is called the “land of the living.” (Isa. 38:11; 53:8; Ezek. 26:20; 32:23–27, 32; Ps. 27:13; 52:5; 142:5)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뵈옵지 못하리니 산 자의 땅에서 다시는 여호와를 뵈옵지 못하겠고 내가 세상의 거민 중에서 한 사람도 다시는 보지 못하리라 하였도다(사38:11) I said, I shall not see Jah, Jah in the land of the living! I shall not look on man any more with the inhabitants of the world (Isa. 38:11)!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사53:8) From restraint and from judgment He was taken; and who shall contemplate His generation? For He was severed from the land of the living; on account of the transgression of My people a plague was upon Him (Isa. 53:8);
내가 너를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내려가서 옛적 사람에게로 나아가게 하고 너를 그 구덩이에 내려간 자와 함께 땅 깊은 곳 예로부터 황폐한 곳에 살게 하리라 네가 다시는 사람이 거주하는 곳이 되지 못하리니 살아 있는 자의 땅에서 영광을 얻지 못하리라(겔26:20) and I shall bring thee down with those who go down into the pit, to the people of an age, and shall cause thee to dwell in the lower earth, as in waste places of an age, with those who go down into the pit, so that thou not be dwelt in; and I shall put elegance in the land of the living (Ezek. 26:20);
23그 무덤이 구덩이 깊은 곳에 만들어졌고 그 무리가 그 무덤 사방에 있음이여 그들은 다 죽임을 당하여 칼에 엎드러진 자 곧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사람을 두렵게 하던 자로다 24거기에 엘람이 있고 그 모든 무리가 그 무덤 사방에 있음이여 그들은 다 할례를 받지 못하고 죽임을 당하여 칼에 엎드러져 지하에 내려간 자로다 그들이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두렵게 하였으나 이제는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수치를 당하였도다 25그와 그 모든 무리를 위하여 죽임을 당한 자 가운데에 침상을 놓았고 그 여러 무덤은 사방에 있음이여 그들은 다 할례를 받지 못하고 칼에 죽임을 당한 자로다 그들이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두렵게 하였으나 이제는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수치를 당하고 죽임을 당한 자 가운데에 뉘었도다 26거기에 메섹과 두발과 그 모든 무리가 있고 그 여러 무덤은 사방에 있음이여 그들은 다 할례를 받지 못하고 칼에 죽임을 당한 자로다 그들이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두렵게 하였으나 27그들이 할례를 받지 못한 자 가운데에 이미 엎드러진 용사와 함께 누운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이 용사들은 다 무기를 가지고 스올에 내려가서 자기의 칼을 베개로 삼았으니 그 백골이 자기 죄악을 졌음이여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용사의 두려움이 있던 자로다(겔32:23-27) whose graves are put in the flanks of the pit, and her assembly is around her grave; all of them slain, fallen by the sword, who put dismay in the land of the living. Elam is there, and all her crowd around her grave, all of them slain, fallen by the sword, who have gone down uncircumcised to the lower earth, who put their dismay in the land of the living; and they have borne their humiliation with those who go down to the pit. They have put a bed for her in the midst of the slain with all her crowd; her graves are all around him, all of them uncircumcised, slain by the sword, for their dismay was put in the land of the living, but they have borne their humiliation with them that go down to the pit. He is put in the midst of the slain. Meshech is there, Tubal, and all her crowd; her graves are all around him, all of them uncircumcised, pierced by the sword, for they put their dismay in the land of the living. And they shall not lie with the mighty who are fallen of the uncircumcised, who are gone down to hell with their weapons of war; and they have put their swords under their heads, but their iniquities shall be on their bones, as they were the dismay of the mighty in the land of the living (Ezek. 32:23-27).
내가 바로로 하여금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사람을 두렵게 하게 하였으나 이제는 그가 그 모든 무리와 더불어 할례를 받지 못한 자 곧 칼에 죽임을 당한 자와 함께 누이리로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겔32:32) For I have put My dismay in the land of the living; and he shall be laid down in the midst of the uncircumcised with them that are slain with the sword, even Pharaoh and all his multitude, says the Lord Jehovih (Ezek. 32:32).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확실히 믿었도다(시27:13)
그런즉 하나님이 영원히 너를 멸하심이여 너를 붙잡아 네 장막에서 뽑아내며 살아 있는 땅에서 네 뿌리를 빼시리로다(시52:5)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시142:5)
또한 주님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을 ‘산 자’(living)라고 합니다. 시편에And those are called “living” who are in faith in the Lord; as in David:
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 (시66:9) Who putteth our soul among the living (Ps. 66:9).
또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생명책’(in the book of lives)에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시69:28; 계13:8; 17:8; 20:15). And those who possess faith are said to be “in the book of lives”(Ps. 69:28), and “in the book of life.”(Rev. 13:8; 17:8; 20:15)
그들을 생명책에서 지우사 의인들과 함께 기록되지 말게 하소서(시69:28) Let them be wiped out of the Book of Lives, And not be written with the just (Ps. 69:28).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계13:8) And all who dwell on the earth shall worship him, whose names are not written in the book of life of the Lamb slain from the founding of the world (Rev. 13:8).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 땅에 사는 자들로서 창세 이후로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이 이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을 보고 놀랍게 여기리라(계17:8) The beast that thou sawest was and is not, and is about to come up out of the abyss, and to go away into destruction; and they who dwell on the earth shall marvel, whose names were not written on the book of life from the founding of the world, looking at the beast that was and is not, and yet is (Rev. 17:8).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져지더라(계20:15) And if anyone was not found written in the book of life, he was cast into the lake of fire (Rev. 20:15).
그러므로 주님 신앙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살아난다’(made alive)고 합니다(호6:2; 시85:6). Wherefore also those who receive faith in him are said to be “made alive.” (Hos. 6:2; Ps. 85:6)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호6:2) After two days He will make us live; in the third day He will raise us up, and we shall live before Him (Hos. 6:2).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사 주의 백성이 주를 기뻐하도록 하지 아니하시겠나이까(시85:6) Wilt Thou not return, wilt Thou not make us live, That Thy people may be glad in Thee? (Ps. 85:6)
반대로 주님 신앙 안에 있지 않은 사람을 말씀은 ‘죽은 자’(dead)라고 합니다. 이사야에 말입니다. On the other hand it follows that those who are not in faith are called “dead”; as in Isaiah:
그들은 죽었은즉 다시 살지 못하겠고 사망하였은즉 일어나지 못할 것이니 이는 주께서 벌하여 그들을 멸하사 그들의 모든 기억을 없이하셨음이니이다 (사26:14) The dead shall not live; the Rephaim shall not rise again, because thou hast visited and destroyed them (Isa. 26:14),
여기서 ‘죽은 자들’은 자기 사랑으로 부풀어 오른 사람들을 의미하며, ‘일어난다’(rise again)는 것은 생명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뜻합니다. 말씀은 그들을 ‘죽임을 당한 자들’(pierced)이라고도 합니다 (겔32:23-26, 28-31). meaning those who are puffed up with the love of self; to “rise again” signifies to enter into life. They are also said to be “pierced.” (Ezek. 32:23–26, 28–31)
23그 무덤이 구덩이 깊은 곳에 만들어졌고 그 무리가 그 무덤 사방에 있음이여 그들은 다 죽임을 당하여 칼에 엎드러진 자 곧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사람을 두렵게 하던 자로다 24거기에 엘람이 있고 그 모든 무리가 그 무덤 사방에 있음이여 그들은 다 할례를 받지 못하고 죽임을 당하여 칼에 엎드러져 지하에 내려간 자로다 그들이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두렵게 하였으나 이제는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수치를 당하였도다 25그와 그 모든 무리를 위하여 죽임을 당한 자 가운데에 침상을 놓았고 그 여러 무덤은 사방에 있음이여 그들은 다 할례를 받지 못하고 칼에 죽임을 당한 자로다 그들이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두렵게 하였으나 이제는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수치를 당하고 죽임을 당한 자 가운데에 뉘었도다 26거기에 메섹과 두발과 그 모든 무리가 있고 그 여러 무덤은 사방에 있음이여 그들은 다 할례를 받지 못하고 칼에 죽임을 당한 자로다 그들이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두렵게 하였으나 (겔32:23-26) whose graves are put in the flanks of the pit, and her assembly is around her grave; all of them slain, fallen by the sword, who put dismay in the land of the living. Elam is there, and all her crowd around her grave, all of them slain, fallen by the sword, who have gone down uncircumcised to the lower earth, who put their dismay in the land of the living; and they have borne their humiliation with those who go down to the pit. They have put a bed for her in the midst of the slain with all her crowd; her graves are all around him, all of them uncircumcised, slain by the sword, for their dismay was put in the land of the living, but they have borne their humiliation with them that go down to the pit. He is put in the midst of the slain. Meshech is there, Tubal, and all her crowd; her graves are all around him, all of them uncircumcised, pierced by the sword, for they put their dismay in the land of the living. (Ezek. 32:23-26).
28오직 너는 할례를 받지 못한 자와 함께 패망할 것임이여 칼에 죽임을 당한 자와 함께 누우리로다 29거기에 에돔 곧 그 왕들과 그 모든 고관이 있음이여 그들이 강성하였었으나 칼에 죽임을 당한 자와 함께 있겠고 할례를 받지 못하고 구덩이에 내려간 자와 함께 누우리로다 30거기에 죽임을 당한 자와 함께 내려간 북쪽 모든 방백과 모든 시돈 사람이 있음이여 그들이 본래는 강성하였으므로 두렵게 하였으나 이제는 부끄러움을 품고 할례를 받지 못하고 칼에 죽임을 당한 자와 함께 누웠고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수치를 당하였도다 31바로가 그들을 보고 그 모든 무리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을 것임이여 칼에 죽임을 당한 바로와 그 온 군대가 그러하리로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겔32:28-31) And thou shalt be broken in the midst of the uncircumcised, and shalt lie with those slain by the sword. There is Edom, her kings, and all her chiefs, which with their might are put with those slain by the sword; they shall lie with the uncircumcised, and with those who go down to the pit. There be the princes of the north, all of them, and all the Zidonians, who have gone down with the slain; by their dismay they are ashamed of their might; and they lie uncircumcised with those slain by the sword, and bear their humiliation with those who go down to the pit. Pharaoh shall see them, and shall comfort himself over all his crowd; Pharaoh and all his host are slain by the sword, says the Lord Jehovih (Ezek. 32:28–31).
주님께서도 그들을 ‘죽은 자들’(dead)이라고 하셨습니다 (마4:16; 요5:25; 8:21, 24, 51-52). They are also called “dead” by the Lord. (Matt. 4:16; John 5:25; 8:21, 24, 51, 52)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마4:16) the people who sat in darkness saw great light; and to them who sat in the country and shadow of death, light has risen (Matt. 4:16).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요5:25) Amen, amen, I say to you, that an hour comes, and now is, when the dead shall hear the voice of the Son of God, and they who hear shall live (John 5:25).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요8:21) Then Jesus said again to them, I go, and you shall seek Me, and shall die in your sin. Whither I go, you cannot come (John 8:21).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요8:24) I said then to you that you shall die in your sins; for unless you believe that I am, you shall die in your sins (John 8:24).
51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52유대인들이 이르되 지금 네가 귀신 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 (요8:51, 52) Amen, amen, I say to you, If anyone keep My word, he shall not behold death for eternity. Then the Jews said to Him, Now we know that Thou hast a demon. Abraham is dead, and the prophets, and Thou sayest, If anyone keep My word, he shall not taste death into the ages (John 8:51, 52).
또한 말씀은 지옥을 ‘사망’(death)이라고 합니다 (사25:8; 28:15). Hell also is called “death.” (Isa. 25:8; 28:15)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사25:8) He shall swallow up death perpetually; and the Lord Jehovih shall wipe away the tear from all the faces; and the reproach of His people shall He remove from all the earth; for Jehovah has spoken (Isa. 25:8).
너희가 말하기를 우리는 사망과 언약하였고 스올과 맹약하였은즉 넘치는 재앙이 밀려올지라도 우리에게 미치지 못하리니 우리는 거짓을 우리의 피난처로 삼았고 허위 아래에 우리를 숨겼음이라 하는도다 (사28:15) for you have said, We have cut a covenant with death, and with hell have we made a vision; when the whip of inundation passes through, it shall not come to us; for we will set a lie as our protection, and in falsity will we hide ourselves (Isa. 28:15).
해설
AC.290은 왜 태고교회를 ‘모든 산 자의 어머니’라고 하는지를 ‘생명’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여기서 ‘산 자’는 단순히 육체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을 뜻하지 않습니다. 호흡하고 움직이며 생각한다고 해서 곧 말씀의 의미로 살아 있는 것은 아닙니다. 참된 생명은 생명 자체이신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 있으며, 주님과 연결된 사람만이 영적으로 살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생명이 여럿일 수 없다 말합니다. 사람과 천사가 저마다 자기 생명을 따로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생명의 근원은 오직 하나입니다. 모든 존재는 주님으로부터 끊임없이 생명을 받아 살아갑니다. 사람은 생명을 소유한 존재가 아니라 생명을 받아들이는 존재이며, 주님만이 생명 자체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 힘으로 생각하고 사랑하고 살아간다고 믿는 것은 겉으로 느껴지는 현상일 뿐, 생명의 실제 근원은 언제나 주님께 있습니다.
본문은 이어서 ‘생명이라 할 만한 생명’은 주님에 대한 신앙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신앙은 단순히 교리를 사실로 인정하는 지적 동의가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주님과 연결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신앙 안에 생명이 있으려면 그 신앙이 반드시 주님으로부터 와야 하며, 주님께서 그 안에 계셔야 합니다. 주님과 분리된 신앙은 지식이나 확신일 수는 있어도 살아 있는 신앙은 아닙니다.
이 때문에 말씀은 오직 주님만을 ‘살아 계신 여호와’, ‘영원히 살아 계시는 이’, ‘생명의 원천’, ‘생수의 근원’이라고 합니다. 이런 표현들은 모두 주님께서 생명을 다른 곳에서 받아 가지신 분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 그 자체이심을 보여 줍니다. 주님으로부터 사랑이 나오고, 그 사랑으로부터 지혜와 진리가 나오며, 그 모든 것이 천사와 사람의 영적 생명이 됩니다.
천국을 ‘산 자의 땅’이라고 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천국이 살아 있는 것은 천사들이 스스로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기쁘게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천국은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받아들여지고 살아 움직이는 상태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지상에 있으면서도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인다면, 그는 이미 어느 정도 ‘산 자의 땅’에 속해 있는 셈입니다.
‘생명책’이라는 표현도 문자 그대로 어떤 장부에 이름이 기록된다는 뜻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생명책에 있다는 것은 사람의 속 사람 안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새겨져 있다는 뜻입니다. 주님에 대한 신앙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살아난다’는 말씀 역시 육체가 다시 움직인다는 뜻이 아니라, 이전에는 닫혀 있던 영적 생명이 열리고, 주님과의 연결이 회복된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말씀에서 ‘죽은 자’는 육체적으로 죽은 사람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완전히 사로잡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몸은 살아 있어도 영적으로는 죽은 상태에 있습니다. 특히 사26:14의 ‘죽은 자들’은 자기 사랑으로 부풀어 오른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자기 사랑이 사람의 중심을 차지하면 주님의 생명이 들어올 자리가 닫히기 때문에, 그 상태를 말씀은 죽음이라고 합니다.
이 점에서 지옥을 ‘사망’이라고 하는 이유도 분명해집니다. 지옥의 영들도 존재하며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지만, 그들의 삶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참된 생명을 거꾸로 받아 자기 사랑과 악으로 바꾼 상태입니다. 그들은 생명의 흐름 자체를 없앨 수는 없지만, 그것을 왜곡하여 죽음과 같은 삶으로 만듭니다. 그러므로 지옥은 존재의 소멸이 아니라, 생명 자체이신 주님으로부터 의지와 사랑이 돌아선 상태입니다.
AC.290의 중심은 ‘살아 있다’는 말의 영적 의미에 있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생명 자체이시며, 천국과 교회와 사람은 모두 그분으로부터 생명을 받습니다. 태고교회를 ‘모든 산 자의 어머니’라고 하는 것은 그 교회가 생명의 근원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생명 자체이신 주님에 대한 신앙을 받아들이고, 사람들을 그 생명으로 인도한 최초의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참된 교회의 사명도 사람을 자기 조직이나 지식에 묶는 것이 아니라, 오직 생명 자체이신 주님께 연결하는 데 있습니다.
23그 무덤이 구덩이 깊은 곳에 만들어졌고 그 무리가 그 무덤 사방에 있음이여 그들은 다 죽임을 당하여 칼에 엎드러진 자 곧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사람을 두렵게 하던 자로다 24거기에 엘람이 있고 그 모든 무리가 그 무덤 사방에 있음이여 그들은 다 할례를 받지 못하고 죽임을 당하여 칼에 엎드러져 지하에 내려간 자로다 그들이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두렵게 하였으나 이제는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수치를 당하였도다 25그와 그 모든 무리를 위하여 죽임을 당한 자 가운데에 침상을 놓았고 그 여러 무덤은 사방에 있음이여 그들은 다 할례를 받지 못하고 칼에 죽임을 당한 자로다 그들이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두렵게 하였으나 이제는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수치를 당하고 죽임을 당한 자 가운데에 뉘었도다 26거기에 메섹과 두발과 그 모든 무리가 있고 그 여러 무덤은 사방에 있음이여 그들은 다 할례를 받지 못하고 칼에 죽임을 당한 자로다 그들이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두렵게 하였으나 (겔32:23-26) whose graves are put in the flanks of the pit, and her assembly is around her grave; all of them slain, fallen by the sword, who put dismay in the land of the living. Elam is there, and all her crowd around her grave, all of them slain, fallen by the sword, who have gone down uncircumcised to the lower earth, who put their dismay in the land of the living; and they have borne their humiliation with those who go down to the pit. They have put a bed for her in the midst of the slain with all her crowd; her graves are all around him, all of them uncircumcised, slain by the sword, for their dismay was put in the land of the living, but they have borne their humiliation with them that go down to the pit. He is put in the midst of the slain. Meshech is there, Tubal, and all her crowd; her graves are all around him, all of them uncircumcised, pierced by the sword, for they put their dismay in the land of the living. (Ezek. 32:23-26).
AC.290에서 스베덴보리가 에스겔 32장 23-26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산 자들의 땅(the land of the living)’이라는 표현이 단순히 육체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을 의미하지 않고,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는 교회와 천국의 영역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앞에서 주님을 ‘생명의 원천’, ‘생수의 근원’, ‘영원히 살아 계시는 분’으로 설명한 뒤, 그분에게서 생명을 받는 사람들이 있는 곳을 ‘산 자들의 땅’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여러 성경 구절로 입증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는 반복적으로 ‘그들이 산 자들의 땅에서 두려움을 끼쳤다(for they put their dismay in the land of the living)’는 말이 나옵니다. 만일 ‘산 자들의 땅’이 단순히 지상의 인간 사회를 의미한다면, 이러한 반복은 특별한 의미를 갖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산 자들’이 주님의 생명 안에 있는 사람들을 뜻한다고 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거짓과 악이 교회 안에서 선과 진리를 압박하고 혼란시키는 상태를 묘사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엘람, 메섹, 두발 등은 단순한 역사적 민족들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 해석에서 이들은 각각 진리가 왜곡된 상태, 외적인 지식에만 머무르는 상태, 또는 신앙 없는 지성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이들이 ‘칼에 죽임을 당한 자들’로 묘사되는 것은 거짓으로 인해 영적 생명을 상실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말씀에서 칼은 진리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반대 의미에서는 진리를 파괴하는 거짓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본문은 이들이 ‘구덩이’, ‘지하’, ‘무덤’, ‘죽임당한 자들’ 가운데 있다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이것은 모두 영적 죽음의 상태를 묘사하는 표현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태가 특별히 ‘산 자들의 땅’과 대조되어 나타납니다. 다시 말해, 이 구절은 생명의 영역과 죽음의 영역을 의도적으로 대비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하는 직접적인 목적은 엘람이나 메섹에 대한 해석을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의 관심은 반복해서 나타나는 ‘산 자들의 땅’이라는 표현에 있습니다. 말씀 자체가 교회와 천국을 ‘산 자들의 땅’이라고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생명 자체이신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AC.290의 핵심 사상을 부정적인 대조를 통해 보여줍니다.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산 자들’이며 그들이 속한 곳은 ‘산 자들의 땅’입니다. 반면 거짓과 악 가운데 머무는 사람들은 비록 세상에서는 강하고 두려운 존재처럼 보일지라도, 영적으로는 ‘칼에 죽임당한 자들’, ‘구덩이에 내려간 자들’로 묘사됩니다.
그러므로 에스겔 32장 23-26절은 ‘산 자들의 땅’이라는 표현의 의미를 설명하는 중요한 증거 구절입니다. 이 말씀은 참된 생명이 주님에게서 나오며, 주님의 생명 안에 있는 교회와 천국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산 자들의 땅’이라 불린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AC.290에서 인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29. ‘겔32:28-31’
28오직 너는 할례를 받지 못한 자와 함께 패망할 것임이여 칼에 죽임을 당한 자와 함께 누우리로다 29거기에 에돔 곧 그 왕들과 그 모든 고관이 있음이여 그들이 강성하였었으나 칼에 죽임을 당한 자와 함께 있겠고 할례를 받지 못하고 구덩이에 내려간 자와 함께 누우리로다 30거기에 죽임을 당한 자와 함께 내려간 북쪽 모든 방백과 모든 시돈 사람이 있음이여 그들이 본래는 강성하였으므로 두렵게 하였으나 이제는 부끄러움을 품고 할례를 받지 못하고 칼에 죽임을 당한 자와 함께 누웠고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수치를 당하였도다 31바로가 그들을 보고 그 모든 무리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을 것임이여 칼에 죽임을 당한 바로와 그 온 군대가 그러하리로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겔32:28-31) And thou shalt be broken in the midst of the uncircumcised, and shalt lie with those slain by the sword. There is Edom, her kings, and all her chiefs, which with their might are put with those slain by the sword; they shall lie with the uncircumcised, and with those who go down to the pit. There be the princes of the north, all of them, and all the Zidonians, who have gone down with the slain; by their dismay they are ashamed of their might; and they lie uncircumcised with those slain by the sword, and bear their humiliation with those who go down to the pit. Pharaoh shall see them, and shall comfort himself over all his crowd; Pharaoh and all his host are slain by the sword, says the Lord Jehovih (Ezek. 32:28–31).
AC.290에서 스베덴보리가 에스겔 32장 28-31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앞선 23-27절과 마찬가지로 ‘산 자들의 땅(the land of the living)’과 대조되는 영적 죽음의 상태를 보여 줌으로써, 참된 생명이 무엇인지를 더욱 분명히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비록 이 부분에서는 ‘산 자들의 땅’이라는 표현이 직접 나오지 않지만, 바로 앞 구절들에서 반복적으로 언급된 그 주제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본문에는 에돔, 북쪽의 방백들, 시돈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 해석에서 에돔은 자기 사랑에 의해 왜곡된 선을, 북쪽은 진리의 빛이 결핍된 상태를, 시돈은 신앙의 지식을 가졌으나 그것을 삶에 적용하지 못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들은 모두 한때는 강하고 영향력이 있었으나 결국 ‘칼에 죽임을 당한 자들’, ‘할례받지 못한 자들’, ‘구덩이에 내려간 자들’ 가운데 놓이게 됩니다.
특히 반복되는 ‘할례받지 못한 자들’이라는 표현은 중요합니다. 할례는 말씀에서 외적인 의식 자체보다 내적 정결, 곧 악한 사랑이 제거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할례받지 못했다는 것은 마음이 정결하게 되지 못한 상태, 곧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모두 죽음과 황폐의 영역으로 묘사됩니다.
또한 ‘칼에 죽임을 당한 자들’이라는 표현도 반복됩니다. 말씀에서 칼은 반대 의미로 거짓을 의미하므로, 칼에 죽임을 당했다는 것은 거짓이 진리를 파괴하여 영적 생명을 잃어버린 상태를 뜻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육체적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죽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31절에서는 바로가 이들을 보고 위로를 받는다고 말합니다. 문자적으로는 함께 멸망한 자들을 보고 위안을 얻는다는 뜻처럼 보이지만, 영적 의미에서는 같은 종류의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자들이 서로를 통해 자기 상태를 정당화하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천국적 위로가 아니라, 같은 영적 상태에 있는 자들끼리의 왜곡된 연대감에 가깝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AC.290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결국 동일합니다. 그는 ‘산 자들’, ‘산 자들의 땅’, ‘생명책’ 등의 표현을 설명하면서, 동시에 그 반대 상태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의 생명 안에 있는 자들은 산 자들이고, 그들이 속한 곳은 산 자들의 땅입니다. 반대로 자기 사랑과 거짓 안에 머무는 자들은 아무리 세상에서 강해 보일지라도 결국 ‘구덩이에 내려간 자들’, ‘칼에 죽임을 당한 자들’로 묘사됩니다.
따라서 에스겔 32장 28-31절은 앞선 구절들과 함께, 주님의 생명에서 분리된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본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통해 참된 생명은 오직 주님에게서만 오며, 주님과 결합된 사람들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산 자들’이라 불릴 수 있다는 AC.290의 중심 가르침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30. ‘마4:16’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마4:16) the people who sat in darkness saw great light; and to them who sat in the country and shadow of death, light has risen (Matt. 4:16).
AC.290에서 스베덴보리가 마태복음 4장 16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사망(death)’이 단순한 육체적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과 진리에서 분리된 영적 상태를 의미하며, 반대로 ‘빛(light)’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과 진리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앞에서 주님에 대한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이 ‘산 자들’이라고 불리고, 주님의 생명에서 분리된 사람들은 ‘죽은 자들’이라고 불린다고 설명한 뒤, 이제 그 죽음의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흑암에 앉은 백성’과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을 말합니다. 문자적으로는 갈릴리 지방에 복음이 전파된 사건을 설명하는 예언의 성취이지만, 스베덴보리는 그 안에서 더욱 깊은 영적 의미를 봅니다. 여기서 ‘흑암’은 진리에 대한 무지와 거짓을 의미하며, ‘사망의 땅’은 주님의 생명이 결핍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들은 단순히 가난하거나 고난받는 사람들이 아니라, 영적으로 생명의 빛을 잃어버린 상태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특히 ‘사망의 땅과 그늘’이라는 표현은 AC.290의 주제와 직접 연결됩니다. 앞에서 천국은 ‘산 자들의 땅’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반대 상태가 ‘사망의 땅’으로 묘사됩니다. 산 자들의 땅이 주님의 생명이 역사하는 곳이라면, 사망의 땅은 그 생명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두 표현은 서로 반대되는 영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본문의 중심은 어둠이나 죽음이 아니라 ‘큰 빛’입니다.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라는 말씀은, 주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 영적 죽음 가운데 있던 사람들에게 생명과 진리를 가져오셨음을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의 해석에서 빛은 언제나 신적 진리를 뜻하며, 그 진리는 생명 자체이신 주님에게서 나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단순히 복음 전파의 시작을 알리는 말씀이 아니라, 주님의 강림 자체가 영적 죽음에서 영적 생명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사망의 땅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빛을 본다는 것은, 거짓과 무지 가운데 있던 사람들이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살아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AC.290에서 인용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산 자들’이라는 표현을 설명하면서 동시에 ‘죽은 자들’과 ‘사망의 땅’이라는 표현도 함께 설명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생명의 의미는 죽음의 상태와 대조될 때 더욱 분명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4장 16절은 AC.290의 핵심 사상을 복음서의 언어로 보여주는 중요한 구절입니다. 사람은 본래 흑암과 사망의 땅에 앉아 있었지만, 주님께서 오심으로 큰 빛이 비추었습니다. 그 빛은 곧 주님의 신적 진리이며, 그 진리를 받아들일 때 사람은 죽은 자의 상태에서 벗어나 산 자가 됩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오직 주님만이 생명 자체이시며, 그분에게서 오는 진리와 신앙 안에 있는 자들만이 참으로 살아 있는 자들이다’라는 AC.290의 가르침을 아름답게 증언하는 말씀으로 인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31. ‘요5: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요5:25) Amen, amen, I say to you, that an hour comes, and now is, when the dead shall hear the voice of the Son of God, and they who hear shall live (John 5:25).
AC.290에서 스베덴보리가 요한복음 5장 25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죽은 자(dead)’와 ‘산 자(living)’라는 표현이 육체적 죽음과 생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상태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앞에서 주님에 대한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이 ‘산 자들’이라고 불린다는 여러 구절을 제시하였는데, 이 말씀은 그 의미를 주님 자신의 입을 통해 직접 증언하는 구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특별히 주목해야 할 것은 ‘곧 이 때라(now is)’라는 표현입니다. 만일 이 말씀이 육체적으로 죽은 사람들의 마지막 부활만을 의미한다면, ‘곧 이 때라’는 말은 성립하기 어렵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실 당시에도 이미 그 시간이 와 있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여기서의 ‘죽은 자들’을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로 이해합니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은 주님의 생명과 진리에서 멀어진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육체적으로는 살아 있지만, 말씀의 의미에서는 죽은 자들입니다. 앞서 이사야 26장 14절의 ‘죽은 자들은 살지 못하겠고’가 영적 죽음을 의미했던 것처럼, 여기서도 죽음은 영적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는다고 합니다. 말씀에서 ‘음성(voice)’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신적 진리, 곧 말씀 자체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어지는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they who hear shall live)’는 AC.290 전체의 핵심을 그대로 요약하는 말씀입니다. 생명은 인간 안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옵니다.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일 때, 죽은 자는 산 자가 됩니다. 그래서 ‘살아난다’는 것은 단순한 생존이 아니라 영적 생명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이 구절은 앞서 살펴본 호세아 6장 2절의 ‘그가 우리를 살리시며’, 시편 85편 6절의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사’, 시편 66편 9절의 ‘우리 영혼을 산 자들 가운데 두신다’는 말씀과도 완전히 일치합니다. 모두가 생명의 근원이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라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또한 이 구절은 AC.290에서 가장 중요한 증거 가운데 하나입니다. 앞서 인용된 많은 구절들은 시편, 예언서, 계시록의 말씀들이었지만, 여기서는 주님께서 친히 ‘죽은 자들이 살아나리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그 생명의 조건은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생명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는 요한복음 5장 25절을 통해, ‘산 자들’이란 육체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을 받은 사람들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반대로 ‘죽은 자들’은 육체의 죽은 자들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에서 분리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음성, 곧 신적 진리를 받아들일 때 그들은 살아나게 됩니다. 이 때문에 이 구절은 AC.290의 중심 가르침인 ‘오직 주님만이 생명 자체이시며, 주님의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만이 참으로 살아 있는 자들이다’라는 진리를 가장 직접적으로 증언하는 말씀 가운데 하나로 인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32. ‘요8:21’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요8:21) Then Jesus said again to them, I go, and you shall seek Me, and shall die in your sin. Whither I go, you cannot come (John 8:21).
AC.290에서 스베덴보리가 요한복음 8장 21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죄 가운데 죽는다(die in your sin)’는 표현이 단순한 육체적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거부함으로써 영적 생명을 잃은 상태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앞에서 ‘산 자들’, ‘산 자들의 땅’, ‘생명책’ 등의 표현을 통해 주님 안에 있는 사람들이 참으로 살아 있는 자들이라고 설명하였고, 이제는 그 반대 상태가 무엇인지를 주님의 말씀을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주님은 그들이 육체적으로 죽을 것을 예언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결국 육체적으로 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특별히 ‘죄 가운데서’ 죽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죄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곧 주님과 결합되지 못한 채 영적 생명을 잃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어지는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는 말씀도 같은 의미를 가집니다. 여기서 주님이 가시는 곳은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신적 생명과 사랑과 진리가 충만한 상태, 곧 천국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그들이 주님께 나아오지 못한다는 것은 주님께서 막으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상태가 주님의 생명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은 요한복음 5장 25절과 아름다운 대조를 이룹니다. 거기서는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고 하셨습니다. 즉 주님의 음성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살아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주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사람들에 대해 ‘죄 가운데서 죽는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에 머무는 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구절들을 통해 ‘생명’과 ‘죽음’이 본질적으로 주님과의 관계를 가리킨다고 설명합니다. 주님은 생명 자체이시므로, 그분과 결합된 사람은 살아 있는 자입니다. 반대로 주님을 거부하고 자기 자신과 세상을 더 사랑하는 사람은 비록 육체적으로 살아 있어도 영적으로는 죽은 자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AC.290의 핵심 주제를 매우 직접적으로 드러냅니다. ‘죄 가운데서 죽는다’는 것은 단순히 죄를 지은 상태에서 육체의 생을 마친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지 못한 상태에 머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는 말씀은, 천국이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주님의 생명과 사랑 안에 있는 상태임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는 요한복음 8장 21절을 통해, 말씀에서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참된 죽음은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분리되는 것이며, 참된 생명은 주님과 결합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이 구절은 AC.290에서 ‘오직 주님만이 생명 자체이시며, 주님 안에 있는 사람들만이 참으로 살아 있는 자들이다’라는 가르침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증거로 인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33. ‘요8: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요8:24) I said then to you that you shall die in your sins; for unless you believe that I am, you shall die in your sins (John 8:24).
AC.290에서 스베덴보리가 요한복음 8장 24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참된 생명이란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믿음으로써 그분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며, 반대로 주님을 믿지 않는 상태는 ‘죄 가운데 죽는 것’으로 불린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앞에서 주님에 대한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이 ‘산 자들’이라고 불리고, 주님의 생명에서 분리된 사람들은 ‘죽은 자들’이라고 불린다는 사실을 설명해 왔습니다. 이 구절은 그 이유를 주님 자신의 말씀으로 직접 밝히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고 말씀하신 뒤, 그 이유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이라고 설명하십니다. 여기서 핵심은 ‘믿지 아니하면’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앙은 단순히 어떤 교리를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누구신지를 인정하고, 그분에게서 생명과 진리가 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며, 그에 따라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주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단순한 지적 오류가 아니라 생명의 근원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특히 주님은 ‘내가 그인 줄(I am)’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단순히 ‘내가 메시아다’라는 뜻을 넘어서는 표현입니다. 말씀 전체에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I AM)’라는 표현은 여호와 자신을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주님은 자신이 생명 자체이신 분임을 암시하고 계십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모든 생명은 주님에게서 나오므로, 그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생명 자체를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단순히 ‘믿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고 말하지 않고, ‘죄 가운데서 죽는다’고 말합니다. 죽음의 원인은 주님께서 형벌을 내리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에게서 스스로 돌아서는 데 있습니다. 마치 태양빛을 등지면 어둠 속에 있게 되는 것처럼, 주님을 거부하면 영적 죽음 가운데 있게 됩니다.
이 구절은 앞서 살펴본 요한복음 5장 25절과 요한복음 8장 21절을 더욱 선명하게 설명해 줍니다. 5장에서는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고 하셨고, 8장 21절에서는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왜 죽는지 그 이유를 밝히십니다.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죽는다는 것입니다. 즉 생명과 죽음의 갈림길은 주님에 대한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AC.290에서 인용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산 자들’이라는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설명하면서, 동시에 왜 어떤 사람들은 말씀에서 ‘죽은 자들’이라고 불리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육체적으로 죽었기 때문이 아니라, 생명 자체이신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8장 24절은 AC.290의 핵심 사상을 매우 직접적으로 증언하는 말씀입니다. 참된 생명은 주님에게서 오며,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 생명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반대로 주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생명의 근원을 거부하는 것이므로, 사람은 ‘죄 가운데서 죽게’ 됩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통해 ‘오직 주님만이 생명 자체이시며, 주님 안에 있는 사람들만이 참으로 살아 있는 자들이다’라는 진리를 더욱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34. ‘요8:51-52’
51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52유대인들이 이르되 지금 네가 귀신 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 (요8:51, 52) Amen, amen, I say to you, If anyone keep My word, he shall not behold death for eternity. Then the Jews said to Him, Now we know that Thou hast a demon. Abraham is dead, and the prophets, and Thou sayest, If anyone keep My word, he shall not taste death into the ages (John 8:51, 52).
AC.290에서 스베덴보리가 요한복음 8장 51-52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죽음(death)’이 육체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죽음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앞에서 주님에 대한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이 ‘산 자들’이라 불리고, 주님의 생명에서 분리된 사람들이 ‘죽은 자들’이라 불린다고 설명하였는데, 이 구절은 그 사실을 주님 자신의 말씀으로 직접 증언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즉시 반박합니다.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들은 죽음을 육체의 죽음으로만 이해하였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생각으로는 아브라함도 죽었고 선지자들도 죽었으므로, 주님의 말씀은 사실과 맞지 않는 것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점을 중요하게 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죽음은 육체의 죽음이 아닙니다. 만일 육체의 죽음을 의미한다면, 아브라함도 선지자들도 사도들도 모두 죽었으므로 주님의 말씀이 성립하지 않게 됩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죽음은 영적 죽음, 곧 주님에게서 분리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내 말을 지킨다’는 것도 단순히 말씀을 암기하거나 외적으로 순종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삶 속에서 실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말씀 안에는 그분의 생명이 있기 때문에,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주님의 생명 안에 있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특히 ‘죽음을 본다(behold death)’와 ‘죽음을 맛본다(taste death)’는 표현은 영적 체험을 가리킵니다. 말씀에서 본다는 것은 인식하는 것이고, 맛본다는 것은 실제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말씀 안에 있는 사람은 영적 죽음을 자신의 상태로 경험하지 않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생명 자체이신 주님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은 앞서 살펴본 요한복음 5장 25절의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는 말씀과도 연결됩니다. 거기서는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이 강조되었고, 여기서는 살아난 사람이 더 이상 죽음을 보지 않는 것이 강조됩니다. 두 구절 모두 영적 생명에 대한 말씀입니다.
또한 요한복음 8장 24절의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는 말씀과도 정확히 대응됩니다. 주님을 믿지 않으면 죄 가운데서 죽고, 주님의 말씀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습니다. 하나는 영적 죽음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영적 생명의 길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AC.290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매우 분명합니다. 그는 말씀에서 ‘죽음’이라는 말이 대개 영적 의미로 사용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참된 죽음은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분리되는 것이며, 참된 생명은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은 육체적으로는 죽더라도 영적으로는 결코 죽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이 구절은 ‘오직 주님만이 생명 자체이시며, 주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영원히 살아 있는 자들이다’라는 AC.290의 핵심 가르침을 가장 직접적으로 증언하는 말씀 가운데 하나로 인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35. ‘사25:8’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사25:8) He shall swallow up death perpetually; and the Lord Jehovih shall wipe away the tear from all the faces; and the reproach of His people shall He remove from all the earth; for Jehovah has spoken (Isa. 25:8).
AC.290에서 스베덴보리가 이사야 25장 8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사망(death)’이 단순한 육체적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죽음을 의미하며, 주님께서 오심으로 그 죽음을 정복하시고 생명을 회복시키신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앞에서 주님 안에 있는 사람들이 ‘산 자들’이라 불리고, 주님의 생명에서 분리된 사람들이 ‘죽은 자들’이라 불린다는 사실을 설명해 왔는데, 이 구절은 그러한 죽음이 결국 주님에 의해 폐하여진다는 약속을 담고 있습니다.
본문은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만일 여기서 사망이 육체적 죽음을 의미한다면, 이 말씀은 문자적으로 성취되지 않은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후에도 사람들은 계속 육체적으로 죽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는 여기서의 사망을 영적 죽음으로 이해합니다. 영적 죽음이란 주님에게서 분리된 상태, 곧 선과 진리의 생명을 잃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사망을 삼켜 버리신다(swallow up death)’는 것은, 인간을 지배하던 지옥의 권세와 영적 죽음의 세력을 정복하신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 주님의 지상 생애는 단순한 도덕적 모범의 삶이 아니라 지옥 전체와의 끊임없는 전투였으며, 그 승리를 통해 인류에게 다시 천국으로 나아갈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사망이 멸해진다는 것은 육체가 죽지 않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영적 생명이 다시 가능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어지는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라는 말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됩니다. 말씀에서 눈물은 단순한 슬픔이 아니라 영적 고통과 황폐함을 의미합니다. 주님으로부터 멀어진 상태에서는 불안과 두려움과 공허함이 생기지만, 주님의 생명이 다시 유입될 때 그러한 영적 슬픔은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친히 눈물을 씻기신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또한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는 말씀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수치는 단순한 체면 손상이 아니라, 선과 진리가 상실된 상태에서 오는 영적 부끄러움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수치가 제거된다는 것은 주님께서 사람을 다시 생명과 진리의 상태로 회복시키신다는 뜻입니다.
이 구절은 앞서 살펴본 요한복음 8장 51절의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는 말씀과도 연결됩니다. 거기서는 개인의 차원에서 죽음이 정복되는 것이 말해졌다면, 여기서는 보다 보편적인 차원에서 사망 자체가 폐하여지는 것이 말해지고 있습니다. 둘 다 동일한 진리, 곧 주님께서 영적 죽음을 이기셨다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이사야 25장 8절을 AC.290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말하는 ‘생명’과 ‘죽음’의 참된 의미를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참된 죽음은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분리되는 것이고, 참된 생명은 주님과 결합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심으로써 그 영적 죽음을 정복하셨고, 그 결과 주님 안에 있는 사람들은 더 이상 죽음의 권세 아래 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오직 주님만이 생명 자체이시며, 그분께서 영적 죽음을 영원히 멸하셨다’는 AC.290의 핵심 사상을 웅장하게 선언하는 말씀으로 인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36. ‘사28:15’
너희가 말하기를 우리는 사망과 언약하였고 스올과 맹약하였은즉 넘치는 재앙이 밀려올지라도 우리에게 미치지 못하리니 우리는 거짓을 우리의 피난처로 삼았고 허위 아래에 우리를 숨겼음이라 하는도다 (사28:15) for you have said, We have cut a covenant with death, and with hell have we made a vision; when the whip of inundation passes through, it shall not come to us; for we will set a lie as our protection, and in falsity will we hide ourselves (Isa. 28:15).
AC.290에서 스베덴보리가 이사야 28장 15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사망(death)’과 ‘스올(hell, 지옥)’이 단순한 육체적 죽음이나 무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거짓과 악 가운데 있는 영적 상태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앞에서 주님 안에 있는 사람들이 ‘산 자들’이라고 불리고, 주님의 생명에서 분리된 사람들이 ‘죽은 자들’이라고 불린다는 사실을 설명하였는데, 이 구절은 그러한 영적 죽음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말씀입니다.
본문에서 사람들은 ‘우리는 사망과 언약하였고 스올과 맹약하였다’고 말합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매우 이상한 표현입니다. 누가 실제로 죽음과 계약을 맺고 지옥과 조약을 체결하겠습니까? 바로 이 점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영적으로 이해합니다. 여기서 ‘사망’은 영적 죽음, 곧 진리와 선을 거부한 상태를 의미하며, ‘스올’은 그러한 상태가 궁극적으로 연결되는 지옥적 삶을 의미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들이 왜 그런 말을 하는가입니다. 그들은 ‘넘치는 재앙이 밀려올지라도 우리에게 미치지 못하리라’고 말합니다. 즉 자신들은 안전하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그 안전의 근거가 무엇입니까? 본문은 ‘우리는 거짓을 우리의 피난처로 삼았고 허위 아래에 우리를 숨겼음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그들은 진리가 아니라 거짓을 의지하고 있으며, 그것을 안전과 보호의 근거로 삼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이것은 영적 죽음의 본질을 매우 정확하게 보여줍니다. 영적 죽음은 단순히 진리를 모르는 상태가 아니라, 거짓을 진리처럼 믿고 그 안에서 안전을 찾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신이 죽어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합니다. 오히려 자신이 가장 안전하고 가장 지혜롭다고 생각합니다.
이 구절은 앞서 살펴본 요한복음 8장 24절의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는 말씀과도 연결됩니다. 주님을 거부하면 죄 가운데서 죽게 되는데, 여기서는 그 죽음의 상태가 ‘거짓을 피난처로 삼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즉 죽음은 단순한 상태가 아니라 거짓과 악 속에서 살아가는 삶의 방식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왜 어떤 사람들이 ‘죽은 자들’이라고 불리는지도 설명해 줍니다. 그들은 육체적으로는 살아 있지만,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 대신 거짓을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말씀에서는 이미 ‘사망과 언약한 자들’로 불립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적 죽음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이사야 28장 15절을 AC.290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사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사망은 단순한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거짓을 진리보다 사랑하고 주님보다 자기 자신을 의지하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태는 ‘사망과 언약하고 스올과 맹약하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AC.290의 중심 사상을 부정적인 측면에서 강하게 증언합니다. 주님은 생명 자체이시며, 그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산 자들입니다. 반대로 거짓과 허위를 피난처로 삼는 사람들은 비록 살아 있는 것처럼 보여도, 말씀의 의미에서는 이미 사망과 연합한 자들입니다. 이 때문에 이사야 28장 15절은 ‘생명’과 ‘죽음’의 영적 의미를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증거 구절로 인용되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