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4:15)

 

AC.393

 

우리는 지금 이 말씀들의 속뜻 설명을 더 깊이 계속하기에 앞서, 먼저 이 경우가 어떻게 신앙과 연결되는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태고교회는 사랑의 신앙 말고는 그 어떤 신앙도 인정하지 않는, 신앙이라는 걸 심지어 입에 올리는 것조차 꺼리는 그런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신앙에 속한 모든 걸 주님으로 말미암는 사랑(love from the Lord)으로 지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앞서 지금까지 말씀드린 천적 천사들 또한 그렇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인류는 이런 캐릭터로 계속 있을 수 없어 언젠가는 신앙을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에서 분리, 신앙 자체를 하나의 교리로 만들 것을 예견하시고는 다음과 같이 섭리하셨는데, 그것은, 그들, 곧 주님 사랑과 신앙이 실제로 분리되되 신앙을 통해서, 즉 신앙에 관한 지식을 통해서 주님으로 말미암는 체어리티(from the Lord charity)를 받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그러니까 지식이나 들음(hearing)이 먼저 오고, 그러고 나서 지식이나 들음을 통해 이번에는 체어리티, 곧 이웃을 향한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과 자비가 주님으로 말미암아 베풀어지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이 체어리티라는 건, 신앙과 분리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신앙의 원리(the principal of faith)를 구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태고교회 시절 그들에게 있었던 퍼셉션(perception) 대신 이제 그 자리를 양심(conscience)이 계승하게 되었습니다. 이 양심은 체어리티와 결합한 신앙(faith joined to charity)을 통해 얻는 것인데, 이 양심은 참된 걸(what is true) 딕테이트하는 게 아닌, 그것이 참이라는 사실을(that it is true) 딕테이트하는 것으로, 이는 말씀에서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런 줄 아는 것입니다. 홍수 후 교회들은 거의 대부분 이런 캐릭터였으며, 주님 초림 후 첫 교회인 초대교회 역시 그랬습니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영적 천사들이 천적 천사들로부터 구분되는 것입니다. Before we proceed to elucidate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s before us, it is necessary to know how the case is with faith. The most ancient church was of such a character as to acknowledge no faith except that which is of love, insomuch that they were unwilling even to mention faith, for through love from the Lord they perceived all things that belong to faith. Such also are the celestial angels of whom we have spoken above. But as it was foreseen that the human race could not be of this character, but would separate faith from love to the Lord, and would make of faith a doctrine by itself, it was provided that they should indeed be separated, but in such a way that through faith, that is, through the knowledges of faith, men might receive from the Lord charity, so that knowledge [cognitio] or hearing should come first, and then through knowledge or hearing, charity, that is, love toward the neighbor, and mercy, might be given by the Lord, which charity should not only be inseparable from faith, but should also constitute the principal of faith. And then instead of the perception they had in the most ancient church, there succeeded conscience, acquired through faith joined to charity, which dictated not what is true, but that it is true, and this because the Lord has so said in the Word. The churches after the flood were for the most part of this character, as also was the primitive or first church after the Lord’s advent, and by this the spiritual angels are distinguished from the celestial.  

 

해설

 

스베덴보리는 가인과 그 표에 대한 내적 의미를 본격적으로 밝히기 전에, 먼저 ‘신앙이 무엇이며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이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태고교회는 사랑과 분리된 신앙이라는 개념 자체를 알지 못했으며, 오직 사랑에서 나온 신앙만을 인정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흘러오는 사랑 안에 있었기 때문에, 신앙에 속한 모든 진리를 배우거나 추론해서가 아니라 ‘직접적인 내적 지각’, 곧 ‘퍼셉션(perception)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신앙을 따로 말하지 않았고, 신앙은 사랑 안에 자연스럽게 포함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태는 천적 천사들의 상태와 동일하며, 이들은 진리를 외적으로 확인할 필요 없이 사랑 안에서 즉시 알아봅니다. 그러나 인류가 점차 겉 사람 중심으로 기울어지며 이러한 상태를 유지할 수 없게 될 것이 미리 보였기 때문에, 주님은 신앙과 사랑이 분리되는 과정을 허용하셨습니다. 다만 그 분리는 파괴가 아니라 ‘섭리적 조정’이었습니다. 신앙이 교리와 지식의 형태로 먼저 주어지고, 그 신앙의 지식을 통하여 주님께서 체어리티, 곧 이웃 사랑과 자비를 주시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때 체어리티는 신앙과 결코 분리되지 않아야 하며, 오히려 ‘신앙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본질’이 됩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태고교회의 지각은 사라지고, 대신 ‘신앙과 체어리티가 결합되어 형성된 양심’이 인간의 내적 안내자가 됩니다. 이 양심은 무엇이 참인지 스스로 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참이다라고 받아들이고 따르게 합니다. 홍수 이후의 교회들과 주님 강림 이후의 초대 교회는 대부분 이러한 성격을 지녔으며, 바로 이 점에서 영적 천사들은 천적 천사들과 구별됩니다. AC.393은 따라서 가인의 신앙이 왜 완전히 제거되지 않고 보존되어야 했는지를 이해하게 하는 핵심 열쇠로서, ‘사랑을 회복하기 위한 통로로서의 신앙’이라는 스베덴보리 신학의 중심 구조를 분명히 드러냅니다.

 

 

 

AC.394, 창4:15, '가인의 표와 마태복음 '고자' 이야기'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4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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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2, 창4: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AC.392-396)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And Jehovah said unto 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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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And Jehovah said unto him, Therefore whosoever slayeth Cain, vengeance shall be taken on him sevenfold. And Jehovah set a mark upon Cain, lest any finding him should smite him. (4:15)

 

AC.392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vengeance being taken sevenfold on anyone who slays Cain)는 심지어 그렇게 분리되었을지라도 신앙을 폭행하는 것은 일종의 신성모독(sacrilege)이 될 것임을,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Jehovah set a mark upon Cain, lest any finding him should smite him)는 주님은 신앙을 특별한 방식으로 구별하셔서 신앙이 보존될 수 있게 하셨음을 의미합니다. By “vengeance being taken sevenfold on anyone who slays Cain” is signified that to do violence to faith even when thus separated would be a sacrilege; “Jehovah set a mark upon Cain, lest any finding him should smite him” signifies that the Lord distinguished faith in a particular manner, in order that it might be preserved.  

 

해설

 

스베덴보리는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는 말이 단순한 형벌의 위협이 아니라, ‘사랑과 분리된 상태에 놓인 신앙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파괴하는 행위는 신성모독(sacrilege)’에 해당함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가인이 이미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을 상징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신앙을 폭력적으로 제거하거나 멸시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비록 왜곡되고 약화되었을지라도, 여전히 ‘주님께서 보존하시려는 질서 안의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칠 배’라는 표현을 완전함과 극대화를 의미하는 상징으로 보며, 이는 신앙에 가해지는 폭력이 단순한 오류가 아니라 ‘영적 질서 전체를 거스르는 중대한 훼손’임을 강조합니다. 이어서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사’라는 말씀은, 주님께서 이 신앙을 특별히 구별하여 보호하셨다는 뜻입니다. 이 ‘’는 가인을 정죄하기 위한 낙인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이 완전히 파괴되지 않도록 식별하고 보존하기 위한 주님의 섭리적 표식’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주님은 인간 안에 남아 있는 어떤 진리의 요소도 무분별하게 제거하지 않으시며, 특히 거듭남의 가능성과 연결될 수 있는 신앙의 틀은 더욱 그러합니다. 설령 체어리티가 사라져 신앙이 생명력을 잃은 상태라 하더라도, 그 신앙은 장차 다시 선과 결합될 수 있는 기반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주님은 그것을 특별한 방식으로 지켜 두십니다. 따라서 AC.392는 가인의 표를 ‘타락한 신앙에 대한 관용이나 승인’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분명히 합니다. 그것은 신앙의 현재 상태를 인정하되, ‘미래의 회복과 재결합을 위한 보존’을 목적으로 한 주님의 깊은 섭리입니다. 이 단락은 주님께서 인간의 내면에서 질서를 유지하시며, 악과 거짓 속에서도 가능한 한 생명의 흔적을 남겨 두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 줍니다.

 

 

 

AC.393, 창4:15, '가인 : 체어리티를 회복하기 위한 통로로서의 신앙'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3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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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1, 창4:14, '내세에 있는 악한 영들의 상태'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91 내세(來世,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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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4:14)

 

AC.391

 

내세(來世, the other life)에 있는 악한 영들의 상태를 보면, 분명히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모든 사람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게서 모든 체어리티를 박탈한 사람들은 정처 없이 떠돌며, 이리저리 도망 다닙니다. 그들이 어디를 가든지, 가령 어느 무리든지 그들은 이들이 그저 다가오기만 할 뿐인데도 이들의 캐릭터를 즉시 지각합니다. 그런 것이 내세에는 존재합니다. 그들은 이들을 쫓아낼 뿐만 아니라, 할 수만 있으면 죽이려고까지 하는 적대감을 품고 너무하다 할 정도로 잔인하게 대합니다. 악한 영들은 서로를 잔인하게 대하며 학대하는 데서 가장 큰 기쁨을 얻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가장 큰 만족감이기 때문입니다. 악과 거짓 자체가 이런 것의 원인이라는 사실이 지금까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 무엇을 원하든 자기한테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거짓은 그 안에 거짓에 대한 형벌이 들어 있으며, 악도 그 안에 악에 대한 형벌이 들어 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자기들 안에 이런 형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The state of evil spirits in the other life shows most clearly that those who are in evil and falsity are afraid of everybody. Those who have deprived themselves of all charity wander about, and flee from place to place. Wherever they go, if to any societies, these at once perceive their character by their mere coming, for such is the perception that exists in the other life; and they not only drive them away, but also severely punish them, and with such animosity that they would kill them if they could. Evil spirits take the greatest delight in punishing and tormenting one another; it is their highest gratification. Not until now has it been known that evil and falsity themselves are the cause of this, for whatever anyone desires for another returns upon himself. Falsity has in itself the penalty of falsity, and evil has in itself the penalty of evil, and consequently they have in themselves the fear of these penalties.

 

해설

 

스베덴보리는 악과 거짓 안에 있는 자들이 왜 끊임없이 두려움 속에 사는지를, ‘사후 세계에서의 악한 영들의 실제 상태’를 통해 가장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체어리티를 완전히 스스로 제거한 자들은 다른 생애에서 정착하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떠돌며 방황하는데, 이는 외적 처벌 이전에 이미 그들의 내적 상태가 안정과 평화를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어떤 사회(영적 공동체)에 가까이 가기만 해도, 그 사회는 즉시 그들의 성품을 알아차리는데, 이는 사후 세계에서는 내적 상태가 숨겨질 수 없고 곧바로 인식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이들은 즉시 쫓겨나며, 때로는 극심한 형벌과 응징을 받게 되는데, 악한 영들은 가능하다면 서로를 죽이고자 할 정도의 적대감을 품습니다. 더 나아가 스베덴보리는 악한 영들이 서로를 괴롭히고 고통스럽게 하는 데서 ‘최대의 즐거움’을 느낀다고까지 말합니다. 이는 외부에서 강제로 주어진 형벌이 아니라, ‘악과 거짓 그 자체의 본성’에서 비롯된 현상입니다. 이전에는 악과 거짓이 곧바로 자기 자신에게 형벌로 되돌아온다는 사실이 명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스베덴보리는 영계의 실상을 통해 이를 밝힙니다. 즉, 사람이 타인에게 바라거나 행하려는 것이 그대로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며, 거짓에는 거짓 자체의 형벌이, 악에는 악 자체의 형벌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악과 거짓 안에 있는 자들은 외부의 보복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이미 내재된 형벌과 그 결과를 끊임없이 예감하며 살아가는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이 두려움이 바로 모든 사람을 두려워하는 상태이며, 이는 주님과의 결합을 잃고 체어리티에서 완전히 분리된 영혼이 피할 수 없이 겪게 되는 영적 현실입니다.

 

 

 

AC.392, 창4: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AC.392-396)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And Jehovah said unto 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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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0, 창4: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AC.385-391)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90 악과 거짓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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