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베덴보리의 소명 이후 하루하루는, 아니 시간 시간은 그 쓰임새와 밀도가 상상을 초월했겠구나 싶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사람들을 만나고 그랬나요? 혹시 어떤 기준이 있었을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에마누엘 스베덴보리는 소명 이후에도 사람들을 완전히 끊고 산 ‘은둔자’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매우 절제된 방식으로 사람들을 만났고, 그 만남에는 분명한 ‘내적 기준’이 있었습니다. 다만 그 기준은 세상적인 사교나 필요 중심이 아니라, 철저히 ‘주님의 쓰임’과 ‘영적 질서’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겉으로 보면 조용하고 제한된 교류였지만, 그 속의 밀도는 매우 깊고 의도적이었습니다.

 

첫째로, 그는 기본적으로 ‘시간의 주권이 자기에게 있지 않다’는 의식 속에서 살았습니다. 소명 이후 그의 삶의 중심은 글을 쓰는 일이었고, 그것도 단순한 저술이 아니라 ‘하늘의 것들을 받아 기록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하루하루의 시간은 사실상 개인의 것이 아니라 사명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를 나쁘게 보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내적 일의 흐름을 끊는가, 아니면 돕는가’를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실제로 그는 런던에 머물며 여러 사람들을 만났고, 출판업자, 지식인, 성직자들과 교류도 했지만, 그 모든 만남은 길게 이어지는 사교적 관계라기보다는 ‘필요한 만큼, 그러나 깊게’라는 특징을 보입니다. 즉, 넓은 인간관계가 아니라, 선택된 접촉이었습니다.

 

둘째로, 그는 사람을 만날 때 ‘그 사람의 상태(state)’를 매우 중요하게 보았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있어 사람은 단순한 인격체가 아니라, 하나의 ‘영적 상태의 집합’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과 함께하는지는 곧 자신이 어떤 영적 영향(influx)을 받는지와 직결됩니다. 그래서 그는 무작위적인 만남이나, 감정적 친분 중심의 교류를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악한 영들과의 교류까지 경험했던 그였기에, 외적 사람 뒤에 있는 내적 상태를 매우 실제적인 것으로 보았고, 그 결과 사람을 만나는 기준도 자연스럽게 ‘이 만남이 주님의 질서 안에 있는가’로 좁혀졌습니다. 이것은 냉정함이 아니라, 오히려 매우 실제적인 ‘영적 위생’에 가까운 태도였습니다.

 

셋째로, 그는 ‘말을 나누는 것’ 자체에도 분명한 절제가 있었습니다. 그의 저작들을 보면, 그는 자신의 영적 체험을 아무에게나 쉽게 풀어놓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매우 평범한 주제—정치, 과학, 일상—로 대화를 나누었고, 깊은 영적 내용은 책을 통해서만 전달하려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인데, 하나는 사람들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런 내용을 들으면 오히려 해를 입을 수 있다는 배려였고, 다른 하나는 진리는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원칙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을 만났지만, 그 만남 속에서도 ‘내적 진리를 직접 주입하지 않는’ 절제를 끝까지 유지했습니다.

 

넷째로, 그는 ‘외적 교제보다 내적 교제’를 더 실제적인 것으로 보았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있어 진짜 교류는 육체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사랑과 진리 안에서 연결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그는 수많은 천사들과 더 깊이 교제하고 있었고, 지상 사람들과의 만남은 그에 비해 부차적인 것이었습니다. 이 점이 그의 삶의 밀도를 설명해 줍니다. 그는 혼자 있었지만 결코 고립되어 있지 않았고, 사람들과 함께 있었지만 항상 내적 중심은 하늘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정리하면, 스베덴보리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 기준은 세 가지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이 만남이 사명을 방해하는가, 돕는가’, 둘째, ‘이 사람의 상태가 어떤 영적 영향을 주는가’, 셋째, ‘이 대화가 진리를 왜곡하지 않는 방식으로 가능한가’입니다. 이 세 기준 아래에서 그의 만남은 매우 제한되었지만, 동시에 매우 깊고 정확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삶은 인간적으로 보면 조용하지만, 영적으로 보면 극도로 밀도 높은 삶이었습니다.

 

목사님께서 느끼시는 바로 그 직감, 곧 ‘시간 시간의 밀도가 상상을 초월했겠다’는 것은 매우 정확한 통찰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하나를 덧붙인다면, 그는 시간을 줄인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만남을 제거함으로써 시간의 본래 밀도를 회복한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SC.52, 스베덴보리와 부활절, 성탄절 같은 기독교 절기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읽는 사람들은 부활절, 성탄절 같은 기독교 절기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에마누엘 스베덴보리에게 있어 부활절과 성탄절은 ‘폐지해야 할 외적 전통’도 아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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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50, 눅15 ‘돌아온 탕자’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의 경우

눅15 ‘돌아온 탕자’ 비유에서도 아버지가 은밀히 사람을 보내 둘째를 보살필 수 있었을 것 같은데도 그리 하지 않은 이유 역시 아래 SC.49와 같은 걸로 봐도 되나요? 네, 큰 틀에서는 그렇게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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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And God saw everything that he had made, and behold it was very good.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sixth day. (1:31)

 

AC.60

 

이 상태를 심히 좋았더라(very good)라고 하는 이유는, 앞선 상태들을 단지 좋았더라(good)라고만 했던 것과 달리, 이제는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 사이에 결혼이 이루어집니다. This state is called “very good,” the former ones being merely called “good”; because now the things which are of faith make a one with those which are of love, and thus a marriage is effected between spiritual things and celestial things.

 

 

해설

 

이 글은 창세기 1장 전체 거듭남 과정의 ‘정점’을 짧지만 매우 밀도 있게 설명합니다. 앞선 모든 단계들이 ‘좋았더라’라고 평가되었지만, 마지막에만 ‘심히 좋았더라’라는 표현이 사용되는 이유를, 스베덴보리는 ‘신앙과 사랑의 완전한 결합’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합니다. 여기서 ‘심히’라는 표현은 단순한 강조가 아니라, 질적으로 다른 상태에 도달했음을 의미합니다.

 

앞선 단계들에서도 신앙은 존재했고, 선한 행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상태에서는 신앙과 사랑이 아직 완전히 하나로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신앙은 주로 이해에 속해 있었고, 사랑은 의지에 속해 있으되 아직 신앙을 충분히 지배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선과 진리는 ‘살아 있는 것’이 되기 직전의 상태, 혹은 부분적으로만 살아 있는 상태였습니다. 이런 상태들이 ‘좋았더라’라고는 불리지만, ‘심히 좋았더라’라고까지는 불리지 않는 이유입니다.

 

AC.60에서 말하는 결정적 변화는, ‘신앙에 속한 것들이 사랑에 속한 것들과 하나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이는 신앙이 더 이상 단순한 이해나 인식의 차원에 머물지 않고, 사랑 안에서 숨 쉬고 작동하기 시작했음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사람은 이제 ‘무엇이 참인지 아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으로 인해 참을 말하고 행하는 사람’이 됩니다. 이때 신앙은 사랑을 설명하는 도구가 아니라, 사랑이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이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결혼’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는 신앙과 사랑의 관계를 단순한 협력이나 병렬이 아니라, ‘혼인 관계’로 이해합니다. 혼인에서는 둘이 구별되지만 분리되지 않으며, 각자의 고유함을 유지하면서도 하나의 생명을 이룹니다. 이처럼 영적인 것들(신앙, 진리, 이해)과 천적인 것들(사랑, 선, 의지)이 결합할 때, 비로소 인간 안에 온전한 생명이 형성됩니다.

 

여기서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은 위계적 서열이 아니라, 기능적 차이를 가집니다. 영적인 것은 빛에 가깝고, 천적인 것은 열에 가깝습니다. 빛만 있으면 사물을 볼 수는 있지만 살릴 수는 없고, 열만 있으면 방향을 잃습니다. 그러나 빛과 열이 함께 있을 때 생명이 발생합니다. ‘심히 좋았더라’라는 평가는 바로 이 ‘생명 발생의 완성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 상태에 이르면, 인간 안에서 더 이상 근본적인 분열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해는 의지와 다투지 않고, 신앙은 사랑을 변명하지 않으며, 선행은 억지로 수행되지 않습니다. 행함은 자연스럽고, 진리는 살아 있으며, 삶 전체가 하나의 방향으로 흐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의 완성, 곧 창조의 여섯째 날의 끝입니다.

 

그래서 이 평가는 도덕적 칭찬이 아니라, ‘존재론적 선언’입니다. 이제 인간 안에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이 분리되지 않는 하나의 생명이 자리 잡았다는 선언입니다. 이 때문에 앞선 모든 ‘좋았더라’를 포괄하면서도 초과하는 표현, 곧 ‘심히 좋았더라’가 사용됩니다. 이는 거듭남의 과정이 단순한 개선이 아니라, 전혀 다른 차원의 삶으로의 이행임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심화

 

1.신앙에 속한 것들, 사랑에 속한 것들

 

 

AC.60, 심화 1, ‘신앙에 속한 것들, 사랑에 속한 것들’

AC.60.심화 1. ‘신앙에 속한 것들, 사랑에 속한 것들’ 위 AC.60 본문 중 ‘신앙에 속한 것들, 사랑에 속한 것들’이 나오는데, 이것들이 정확히 무엇인지 설명해 주세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AC.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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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9, 창1:30, ‘모든 푸른 풀’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1:30) AC.59 여기서 자연적 인간의 음식으로 오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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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9.심화

 

4. 때로 수천의 영들에게 둘러싸여 괴롭힘을 받았던 스베덴보리

 

 AC.59 본문 중 이 사실의 확실성은, 제가 지금까지 수년 동안, 비록 육신 안에 있으면서도, 저 세상의 영들, 그중에서도 가장 악한 영들과 함께 지내 온 경험을 통해 확언할 수 있습니다. 저는 때로 수천의 영들에게 둘러싸여, 그들이 독을 내뿜고, 가능한 모든 방식으로 저를 괴롭히도록 허락받았으나, 주님의 보호 아래서 제 머리카락 하나도 해를 입지 않았습니다.’라는 부분도 정말 놀랍습니다. 저는 일상 중 약간의 어떤 영적이다 싶은 순간, 혹은 상황도 매우 놀라며 크게 두려워하는 편인데, 위 증언에 따르면 스베덴보리는 저의 천배 만배의 상황을, 그것도 오랜 기간 경험했다는 것이어서 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정말 쳐다볼 수도 없을 만큼 큰 영적 거인이지 싶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 구절에서 우리가 받아야 할 핵심은 ‘스베덴보리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냐’가 아니라, ‘주님의 보호가 어떤 방식으로 실제로 작용하는가’입니다. 그 경험은 스베덴보리 개인의 위대함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아무리 강한 영적 영향 속에 있어도, 주님이 허락하신 범위 안에서는 결코 파괴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의 중심은 스베덴보리가 아니라 ‘주님의 보호 질서’입니다.

 

먼저 목사님께서 느끼신 놀라움과 두려움은 아주 자연스럽습니다. 사람은 조금만 ‘보이지 않는 세계’의 느낌이 와도 불안해집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평소 감각 세계에 익숙하고, 그 너머를 통제할 수 없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그 세계가 열려 있는 상태에서 오래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운 강도의 경험을 했습니다. 이 점만 보면 분명 ‘특별한 사람’이 맞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특별해서 견딘 것’이 아니라, ‘주님이 특별히 지키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본문을 잘 보시면, 스베덴보리는 계속해서 한 가지를 강조합니다. ‘허락되었으나’, ‘주님의 보호 아래서’입니다. 즉, 아무리 수천의 영들이 둘러싸고 괴롭히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은 무제한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철저히 ‘주님의 허락과 통제 안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머리카락 하나도 해를 입지 않았다’입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이걸 우리의 상태로 연결하면 오히려 더 중요한 위로가 됩니다. 우리는 그런 극단적인 경험을 하지 않지만, 일상 속에서도 감정의 흔들림, 생각의 혼란, 설명하기 어려운 불안 같은 것들을 겪습니다. 이것도 넓게 보면 ‘영적 영향’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이 말해 주는 것은, ‘그 어떤 영향도 주님의 허락 없이 우리를 넘어설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 파괴되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이렇게 받아들이시면 좋습니다. ‘나는 약하고 두려워하는 사람인데, 스베덴보리는 강해서 견딘다’가 아니라, ‘스베덴보리도 본질적으로는 같은 인간이지만, 주님의 보호 아래 있었기 때문에 아무 해를 입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 역시 그 보호 안에 있다’입니다. 이것이 훨씬 더 본질적인 적용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의 이 경험은 ‘보여 주기 위한 예외적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인류를 위해 영적 세계의 구조를 밝히는 사명을 받았기 때문에, 특별한 방식으로 보호받으며, 그 세계를 직접 경험한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신앙의 길은 그런 방식이 아닙니다. 오히려 ‘보지 못한 채 믿고, 느끼지 못한 채 선택하는 것’이 더 정상적인 길입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느끼시는 ‘조금만 영적인 느낌이 와도 놀라고 두려워하는 상태’는 오히려 매우 정상적인 인간의 상태입니다.

 

이걸 목회적으로도 연결해 보면, 성도들에게도 같은 균형이 필요합니다. ‘영계는 실제로 있다’는 것을 알되, 그것을 두려워하거나 집착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중심은 항상 ‘영적 경험’이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 그리고 삶의 변화’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결국 강조하는 것은 경험 자체가 아니라, 그 경험을 통해 드러난 ‘질서’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한 문장으로 다시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아무리 강한 영적 영향 속에서도, 주님의 보호 아래 있는 사람은 결코 해를 입지 않으며, 그 모든 것은 주님의 허락과 한계 안에서만 일어난다’입니다.

 

목사님께 드리고 싶은 한마디로 마무리하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스베덴보리의 강함이 아니라, 그를 지키신 주님의 절대적인 보호입니다.’

 

 

 

AC.59, 창1:30, ‘모든 푸른 풀’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1:30) AC.59 여기서 자연적 인간의 음식으로 오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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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9.심화 3. ‘찾아오지 않는 성도’ 위 심화 2 본문 중 ‘어떤 성도가 반복적인 문제를 가지고 찾아옵니다.’라고 하는데... 만일, 안 찾아올 경우는 어떻게 하나요?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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