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5

 

이 모든 말이 사실이라는 것은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미리 말씀드릴 것은,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저는 이제 수년 동안 끊임없이, 그리고 중단됨 없이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지내게 되어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또 제가 그들에게 말을 할 수 있는, 그런 은혜를 입었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하여 저는, 지금까지 어떤 인간에게도 알려진 적이 없고, 그의 관념 속에조차 들어온 적이 없는, 다른 삶, 곧 사후세계의 놀라운 것들을 듣고 보게 된 것입니다. 저는 여러 종류의 영들에 관하여, 죽음 이후 영혼의 상태에 관하여, 지옥 곧 불신앙 가운데 있는 자들의 비참한 상태에 관하여, 천국 곧 신앙 안에 있는 자들의 복된 상태에 관하여, 그리고 특히 온 하늘에서 인정되고 있는 신앙의 교리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주제들에 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이어지는 페이지들에서 더 말할 것입니다. That this is really the case no one can possibly know except from the Lord. It may therefore be stated in advance that of the Lord’s Divine mercy it has been granted me now for some years to be constantly and uninterruptedly in company with spirits and angels, hearing them speak and in turn speaking with them. In this way it has been given me to hear and see wonderful things in the other life which have never before come to the knowledge of any man, nor into his idea. I have been instructed in regard to the different kinds of spirits; the state of souls after death; hell, or the lamentable state of the unfaithful; heaven, or the blessed state of the faithful; and especially in regard to the doctrine of faith which is acknowledged in the universal heaven; on which subjects, of the Lord’s Divine mercy, more will be said in the following pages.

 

 

해설

 

스베덴보리는 이 글에서 Arcana Coelestia 전체의 권위를 뒷받침하는 핵심 전제를 밝히는데, 그것은 말씀의 내적 의미와 영계의 실제는 인간 스스로 탐구하거나 추론하여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에게서만’ 배울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인식 위에서 그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자신에게 주어진 독특한 소명을 조심스럽지만 단호하게 진술합니다. 즉, 수년 동안 중단됨 없이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지내며 그들의 말을 듣고 또한 그들에게 말을 건넬 수 있는 특별한 상태 속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일시적 환상이나 신비적 황홀경이 아니라, 그가 깨어 있는 동안 지속적이고 실제적인 의식의 개방—영계와 자연계를 동시에 지각하는 이중 의식(dual consciousness)—을 의미하며, 스베덴보리 저술 전체가 이러한 체험적 기반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그는 이 과정을 통해 인간이 죽은 뒤 맞이하는 실재적 삶을 보고 들었으며, 지금까지 인류의 사상 속에조차 들어온 적 없는 영계의 질서, 천사들의 삶, 지옥의 비참한 상태, 천국의 복된 질서, 다양한 영들의 종류와 속성, 그리고 무엇보다 ‘온 하늘이 공통으로 인정하는 참된 신앙의 교리’에 대해 가르침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 ‘하늘의 보편 교리’는 스베덴보리 신학의 중심축을 이루며, Arcana Coelestia를 포함한 모든 저작에서 일관되게 드러나는 영적 원리의 근거가 됩니다. 그는 이어서 이러한 주제들에 대해 주님의 자비로 앞으로 더 자세히 말할 것이라고 예고하며, 이를 통해 자신이 밝히려는 모든 교리가 인간의 사유나 철학적 체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이 여신 영계에서 직접 듣고 배운 것임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이 글은 스베덴보리 신학의 ‘계시적 성격’을 선언하는 자리로서, 내적 의미가 단순한 상징 해석이나 영적 묵상이 아니라 ‘영계의 실제와 주님의 직접적인 빛’에서 비롯된 것임을 분명히 하고, 그의 주석 전체를 신적 기원 위에 세우는 역할을 합니다. 목회자 입장에서 본다면, 이는 스베덴보리가 성경의 내적 의미를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허락하심 가운데 영계의 실상을 체험하며 그 구조를 실제로 본 증인으로서 기록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며, Arcana Coelestia의 모든 해석이 단순한 학문적 견해가 아니라 “하늘에서 들려온 것”이라는 본래적 자리를 명확히 드러내는 부분입니다.

 

 

 

AC.6, 창1, '본문, 개요' (AC.6-15)

창1 개요 AC.6 6일이라는 기간은, 사람의 거듭남 전 과정 가운데 연이어 일어나는 수많은 상태를 말하는데, 보통은 다음과 같습니다. The six days, or periods, which are so many successive states of the regene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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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 서문, '말씀 안에 들어있는 아르카나(arcana)' (AC.1-5)

AC.4마음이 문자적 의미에만 붙어 있는 동안에는, 그 안에 이런 내용들이 들어 있다는 것을 그 어떤 사람도 볼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의 첫 장들에서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 발견할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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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

 

마음이 문자적 의미에만 붙어 있는 동안에는, 그 안에 이런 내용들이 들어 있다는 것을 그 어떤 사람도 볼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의 첫 장들에서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해야 세상의 창조, 낙원이라고 하는 에덴동산, 그리고 처음 창조된 사람이라는 아담에 관한 이야기뿐입니다. 누가 그 이상의 무언가를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뒤따르는 페이지들에서 충분히 입증될 텐데요, 곧, 이 내용들 안에는 지금까지 결코 드러난 적이 없는 비밀들(arcana)이 들어 있으며, 실상 창세기 1장은 그 속뜻으로는 일반적으로 사람의 새로운 창조, 즉 그의 거듭남에 관한 것을, 구체적으로는 ‘태고교회’(the Most Ancient Church)에 관한 것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방식은, 그 장의 가장 작은 표현 하나까지도 이런 내용들을 표상하고 의미하며, 그 속에 품고 있을 정도라는 사실입니다. While the mind cleaves to the literal sense alone, no one can possibly see that such things are contained within it. Thus in these first chapters of Genesis, nothing is discoverable from the sense of the letter other than that the creation of the world is treated of, and the garden of Eden which is called paradise, and Adam as the first created man. Who supposes anything else? But it will be sufficiently established in the following pages that these matters contain arcana which have never yet been revealed; and in fact that the first chapter of Genesis in the internal sense treats in general of the new creation of man, or of his regeneration, and specifically of the most ancient church; and this in such a manner that there is not the least expression which does not represent, signify, and enfold within it these things.

 

 

해설

 

스베덴보리는 이 글에서 말씀을 문자 그대로만 붙들고 있을 때 인간이 빠지는 결정적인 한계를 지적합니다. 마음이 문자적 의미에만 머물러 있으면, 그 속에 무엇이 내포되어 있는지—곧 영적, 천적 의미가 어떻게 포개어져 있는지—결코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첫 장들을 보더라도, 문자적으로는 단지 천지 창조, 에덴동산(낙원), 그리고 최초의 인간 아담이라는 서술만 보일 뿐이며, 대부분의 사람은 그 이상의 무언가를 떠올리지 못합니다. 실제로 기독교 세계에서도 창세기 1장을 우주의 기원에 관한 ‘역사적 보고’로만 이해하는 경우가 많으며, 에덴 이야기도 고대 근동의 신화적 표현으로 치부되기 일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이해가 말씀을 외피 수준에서만 읽는 시각이며, 문자 안에 담긴 진짜 의미는 전혀 인식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 내용들이 사실은 지금까지 한 번도 드러난 적 없는 비밀(arcana)을 담고 있음을 이어지는 주석 전체를 통해 충분히 입증하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창세기 1장의 내적 의미, 곧 속뜻은 우주의 물리적 창조가 아니라, 사람의 새로운 창조—즉 영혼의 거듭남(regeneration)—을 다루고 있으며, 더 구체적으로는 태고교회(The Most Ancient Church)의 형성과 그 영적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고 밝힙니다. 창세기의 6일 창조는 인간이 영적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혼란에서 질서로, 분리에서 결합으로 나아가는 여섯 단계의 내적 과정을 상징하며, 안식일은 주님과의 결합이라는 최종 상태를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장의 모든 표현—빛, 궁창, 물과 땅의 분리, 해와 달, 생물의 등장 등—하나하나가 이 영적 과정을 표상하고 의미하며 그 비밀을 내포한다고 말합니다. 즉, 성경의 문자적 이야기 뒤에는 ‘영혼의 창조기’가 숨어 있으며, 이것이야말로 말씀의 진정한 목적이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말씀의 외적 이야기(창조, 동산, 아담)는 내적 의미를 담는 그릇일 뿐이며, 내적 의미가 열릴 때에만 말씀은 살아 있는 신적 계시로 빛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단락은 Arcana Coelestia 전체 연구의 출발점이 되는 핵심 주장으로서, 스베덴보리는 창세기의 모든 표현이 주님의 구원 질서—태고교회의 형성, 인간의 거듭남, 주님과의 결합—을 상징한다는 사실을 앞으로의 전편에서 하나씩 해명하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AC.5, 서문, '주님의 허락으로 사후 세계에서 경험한 모든 것' (AC.1-5)

AC.5 이 모든 말이 사실이라는 것은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미리 말씀드릴 것은,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저는 이제 수년 동안 끊임없이, 그리고 중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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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 서문, '말씀의 겉과 속, 사람의 육체와 영' (AC.1-5)

본문AC.3이러한 생명이 없으면, 말씀은 글자(letter)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이 점에서 말씀의 상태는 사람의 경우와 동일합니다. 기독교 세계에서도 알고 있듯이, 사람은 내적 사람, 곧 속 사람(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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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

 

이러한 생명이 없으면, 말씀은 글자(letter)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이 점에서 말씀의 상태는 사람의 경우와 동일합니다. 기독교 세계에서도 알고 있듯이, 사람은 내적 사람, 곧 속 사람(internal man)과 외적 사람, 곧 겉 사람(external man), 이렇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속 사람과 분리된 겉 사람은 단지 몸, 그러니까 육체일 뿐이며, 그러므로 죽은 상태입니다. 분리되었다 했으니까요. 겉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은 속 사람 때문인데, 이 속 사람이 곧 영혼이기 때문입니다. 말씀도 이와 같습니다. 글자만을 놓고 보면, 영혼 없는 몸과 같은 것입니다. Without such a life, the Word as to the letter is dead. The case in this respect is the same as it is with man, who—as is known in the Christian world—is both internal and external. When separated from the internal man, the external man is the body, and is therefore dead; for it is the internal man that is alive and that causes the external man to be so, the internal man being the soul. So is it with the Word, which, in respect to the letter alone, is like the body without the soul.

 

 

해설

 

스베덴보리는 이 글에서 말씀의 문자, 곧 겉뜻과 내적 의미, 곧 속뜻의 관계를 인간의 몸과 영혼의 관계에 비유하며, 말씀의 본질적 구조를 가장 명확하게 드러냅니다. 그는 “이러한 생명”—즉 말씀 안에 있는 속뜻, 곧 주님을 향한 영적, 천적 내용—이 없으면, “말씀은 글자 그대로는 죽은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이는 문자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문자만으로는 말씀의 생명에 닿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기독교 세계 누구나 아는 인간의 이중 구조를 예로 듭니다. 인간은 내적 사람, 곧 속 사람과 외적 사람, 곧 겉 사람,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겉 사람만 따로 떼어놓으면 단지 육체일 뿐이고 살아 있지 않으며, 오히려 죽음을 의미합니다. 겉 사람이 움직이며 말하고 행동하는 이유는 속 사람이—즉 영혼이—그에게 생명을 주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영혼이 떠난 몸은 그 형체만 남아 있을 뿐 더 이상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도 이와 같다고 말합니다. 말씀의 문자적 의미인 겉뜻은 겉 사람, 즉 몸에 해당하고, 내적 의미인 속뜻은 영혼에 해당합니다. 겉뜻이 아무리 아름답고 감동적이라 해도, 그 안에 영혼(주님을 향한 속뜻, 아르카나)이 없다면 말씀은 실제로는 생명이 없는 외형적 글자에 불과합니다. 이는 문자적 해석(Literalism)이나 단순한 윤리, 역사적 해석에 머물러 있는 신앙이 왜 사람의 영적 삶을 변화시키지 못하는지, 왜 구약의 많은 부분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이해되지 않고 먼 책’처럼 느껴지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문자만을 읽는 것은 죽은 몸을 바라보는 것과 비슷하여, 그 속에 담긴 진짜 생명—하늘의 질서, 영혼의 거듭남 과정, 주님의 신성—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말씀을 살아있는 말씀으로 읽으려면 속뜻 안으로 들어가야 하고, 이것이 곧 주님을 보는 영적 시야가 열리는 과정입니다. 결국 이 글은 말씀의 본질이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영혼을 가진 생명체”이며, 그 생명은 주님에게서 오고 내적 의미, 곧 속뜻 안에 놓여 있다는 스베덴보리 신학의 핵심을 인간의 구조를 통해 쉽게, 그러나 매우 강하게 설명하는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AC.4, 서문, '말씀 안에 들어있는 아르카나(arcana)' (AC.1-5)

AC.4마음이 문자적 의미에만 붙어 있는 동안에는, 그 안에 이런 내용들이 들어 있다는 것을 그 어떤 사람도 볼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의 첫 장들에서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 발견할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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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 서문, '말씀은 그 안에 영적, 천적인 것들이 들어 있다' (AC.1-5)

본문AC.2그러나 기독교 세계는 아직도 말씀의 모든 것, 곧 총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아니 가장 작은 요소들, 그러니까 가장 미세한 이오타(iota) , 즉 일점일획에 이르기까지 영적이고 천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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