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고교회와 그 후속 교회들 전반에 걸쳐 그중 퍼셉션과 관련된 것들로부터 교리들을 추출, 뼈대를 세우며 조직하던 사람들이 그때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이런 일을 한 이유는, 이걸 기준으로 무엇이 선이요, 진리인지를 알게 하려는 것이었지요. 이 사람들이 바로 에녹입니다.

 

22절,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nd Enoch walked with God after he begat Methuselah three hundred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519

태고교회와 그 후속 교회들 전반에 걸쳐 그중 퍼셉션과 관련된 것들로부터 교리들을 추출, 뼈대를 세우며 조직하던 사람들이 그때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이런 일을 한 이유는, 이걸 기준으로 무엇이 선이요, 진리인지를 알게 하려는 것이었지요. 이 사람들이 바로 ‘에녹’입니다. ‘그리고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라는 표현이 상징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며, 그래서 그들은 그걸 가리켜 교리라 하였는데, 이것은 ‘에녹’이라는 이름이 상징하는 바와 비슷합니다. 이 이름의 뜻이 ‘가르치다’이기 때문입니다. ‘동행하다’라는 표현 역시 같은 걸 상징하는데요, 그를 일컬어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라 하지 ‘여호와와 동행하였다’라고는 하지 않는 걸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신앙의 교리를 따라 가르치며 사는 것이지만, ‘여호와와 동행하는 것’은 사랑의 삶을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行)하다, 걷다, 살다’라는 표현은 살아가는 걸 상징하는 일상적인 말투입니다. 예를 들면, ‘법대로 살다’, ‘규범 가운데 살다’, ‘진실하게 살다’처럼 말입니다. ‘행하는 것’은 어떤 길이나 삶, 방식에 대한 적절한 레퍼런스를 갖는 것인데, 이 레퍼런스는 진리, 결과적으로는 신앙이나 신앙의 교리와 관련됩니다. 말씀에서 ‘행함’이 상징하는 바는 이어지는 구절들을 보면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There were some at that time who framed doctrines from the things that had been matters of perception in the most ancient and succeeding churches, in order that such doctrine might serve as a rule whereby to know what was good and true: such persons were called “Enoch.” This is what is signified by the words, “and Enoch walked with God”; and so did they call that doctrine; which is likewise signified by the name “Enoch,” which means to “instruct.” The same is evident also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 expression to “walk,” and from the fact that he is said to have “walked with God,” not “with Jehovah”; to “walk with God” is to teach and live according to the doctrine of faith, but to “walk with Jehovah” is to live the life of love. To “walk” is a customary form of speaking that signifies to live, as to “walk in the law,” to “walk in the statutes,” to “walk in the truth.” To “walk” has reference properly to a way, which has relation to truth, consequently to faith, or the doctrine of faith. What is signified in the Word by “walking,” may in some measure appear from the following passages.

 

[2] 미가입니다. In Micah: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6:8) He hath showed thee, O man, what is good, and what doth Jehovah require of thee, but to do judgment and the love of mercy, and to humble thyself by walking with thy God? (Micah 6:8)

 

여기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상징하는 바는 여기서 가리키는 것들을 따라 그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 ‘하나님과 함께(with God)라는 표현에 대해서, 에녹에 대한 다른 성경(히브리 성경)에서는 ‘하나님과 함께로부터(from with God)를 상징하고 있는데, 이 표현은 좀 애매합니다. where to “walk with God” signifies to live according to the things here indicated; here, however, it is said “with God,” while of Enoch another word is used which signifies also “from with God,” so that the expression is ambiguous.

 

시편입니다. In David: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시56:13) Thou hast delivered my feet from impulsion, that I may walk before God in the light of the living, (Ps. 56:13)

 

여기 ‘하나님 앞에서 다니는 것’은 신앙의 진리, 곧 ‘생명의 빛’ 가운데 다니는 것입니다. where to “walk before God” is to walk in the truth of faith, which is the “light of the living.”

 

이사야에서도 같습니다. In like manner in Isaiah: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9:2) The people that walk in darkness see a great light. (Isa. 9:1)

 

그래서 주께서 모세를 통해 말씀하시기를 So the Lord says by Moses: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니라 (레26:12) I will walk in the midst, and will be your God, and ye shall be my people, (Lev. 26:12)

 

율법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야 할 것을 상징합니다. signifying that they should live according to the doctrine of the law.

 

[3] 예레미야입니다. In Jeremiah:

 

그들이 사랑하며 섬기며 뒤따르며 구하며 경배하던 해와 달과 하늘의 뭇 별 아래에서 펼쳐지게 하리니 (렘8:2) They shall spread them before the sun, and the moon, and to the armies of the heavens, whom they have loved, and whom they have served, and after whom they have walked, and whom they have sought, (Jer. 8:2)

 

여기 보면, 사랑에 속한 것들과 신앙에 속한 것들 사이 뚜렷한 차이를 두는데요, 전자는 ‘사랑하며’와 ‘섬기며’로, 후자는 ‘뒤따르며’와 ‘구하며’로 각각 표현하고 있습니다. 모든 예언서들을 보면, 모든 표현들을 아주 정교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어떤 용어가 다른 것의 자리에 대신 사용되는 일조차 절대 없습니다. 말씀에서 ‘여호와와 함께 걷다’나 ‘여호와 앞에’라는 표현은 사랑의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where a manifest distinction is made between the things of love, and those of faith; the things of love being expressed by “loving” and “serving”; and those of faith by “walking” and “seeking.” In all the prophetical writings every expression is used with accuracy, nor is one term ever used in the place of another. But to “walk with Jehovah,” or “before Jehovah,” signifies, in the Word, to live the life of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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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동행’, 자녀들을 낳았다’의 속뜻

 

22절,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nd Enoch walked with God after he begat Methuselah three hundred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518

하나님과 동행’은 신앙에 관한 교리를 상징합니다. 그가 ‘자녀들을 낳았다’는 것은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적인 것들을 상징합니다. To “walk with God” signifies doctrine concerning faith. That he “begat sons and daughters” signifies doctrinal matters concerning truths and goo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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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이라는 교회의 퀄러티

 

21절,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And Enoch lived sixty and five years, and begat Methuselah.

 

517

에녹’이라는 교회의 퀄러티는 이어지는 절들에서 설명합니다. The quality of the church “Enoch” is described in the following ver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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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 일곱 번째 교회, ‘므두셀라, 여덟 번째 교회

 

21절,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And Enoch lived sixty and five years, and begat Methuselah.

 

516

전에 말씀드린 대로, ‘에녹’은 일곱 번째 교회를, ‘므두셀라’는 여덟 번째 교회를 상징합니다. By “Enoch,” as before said, is signified a seventh church; and by “Methuselah” an eigh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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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14(D1)-주일예배(2539, 눅18,9-14), ‘자기를 높이는 자, 자기를 낮추는 자’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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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04-14(D1)-주일예배(2539, 눅18,9-14), ‘자기를 높이는 자, 자기를 낮추는 자’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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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높이는 자, 자기를 낮추는 자’의 속뜻

 

 

9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눅18:9-14)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을 통해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선과 진리는 인간으로부터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말하고, 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선한 것, 진실한 것, 성실하고 공정한 것을 속 사람과 관계없이 오직 겉 사람으로부터 행한다면 그것은 인간 자신으로부터 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들은 모두 악이다. (계시록 해설 794:3, 이순철 역) all good and truth are from the Lord and not from man, because they are done from the internal through the external. But when a man does and speaks what is good, true, sincere, and just, for the sake of self and the world he does and speaks them from self, because from the external man without the internal; and such deeds or works are all evil (AE.794:3)

 

 

새 교회의 가르침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 선하고 진실한 사람인지 아니면 악하고 거짓된 사람인지는 오직 주님만 아신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는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판단할 때는 겉으로 드러나는 몇 가지 행동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되고, 살아오면서 그가 했던 일들을 잘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그와 관련이 있는 말씀입니다. 본문 10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0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주님 당시 유대교회 안에는 신학적 견해가 다른 몇 개의 분파들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바리새파나, 사두개파, 에세네파 같은 사람들인데, 그 중 바리새파 사람들은 토라라고 하는, 모세의 오경을 글자 그대로 지키는 경건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대중들의 신망이 아주 높았고, 그들 스스로도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에 비해 세리는 유대 사회에서 천대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세금을 징수하는 일을 했기 때문에 나름 전문직이었고 무식한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만, 그럼에도 천대를 받았던 까닭은 그들의 직업이 돈을 만지는 일이었고, 그러다 보니 부정을 저지르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며, 또 당시는 로마 제국의 식민지로서 아무래도 세리는 지배 계급의 수족 역할을 할 때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두 사람이 같은 시간에 성전에서 기도 하게 되었습니다. 바리새인이 먼저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11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바리새인들은 십계명을 글자 그대로 철저히 지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로 토색을 하거나 간음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토색이란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의 것을 억지로 빼앗는 것인데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또 소득의 십분의 일을 십일조로 바쳤으며, 유대교회의 전통인 이른바 장로의 전통에 따라 일주일에 두 번 금식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겉으로 보기에는 누구보다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그 역시 토색질하는 자요 간음자였습니다. 말씀에서 간음은 영적 의미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인간의 생각을 섞어 왜곡하는 것을 뜻합니다. 말씀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런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바리새인처럼 많이 아는 사람들이 말씀을 왜곡했고, 또한 그것으로 교인들을 가르쳤는데, 그것은 결과적으로는 교인들에게서 진리와 선을 빼앗는 일이었습니다. 영적으로 볼 때는, 그것이 바로 간음이요 토색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바리새인들은 겉으로는 경건한 자들이었지만, 속으로는 토색하는 자요, 간음자였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세리를 내려다보며,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다음은 세리의 기도입니다.

 

13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세리는 자신이 저지른 악과 거짓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감히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죄를 고백했습니다.  

 

참고로, 이 기도는 특히 정교회에서 아주 유명한, 그리고 가장 기본이 되는 기도입니다. 정교회에서는 이를 ‘예수기도’라고 하는데 묵주를 한알 한알 돌리며, 밤을 새워 이 문장만 반복합니다.

 

주님께서 두 사람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14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바리새인들은 말씀의 영적 의미는 몰랐기 때문에, 오로지 문자적인 뜻만을 지켰습니다. 그것만으로도 능히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단순한 신앙 안에 있는 사람, 이를테면 말씀의 문자적인 뜻을 잘 지키며, 이웃에게 겸손한 사람들도 구원을 받습니다. 비록 속뜻을 모르더라도 말이지요. 그러나 오늘 말씀에 나오는 바리새인처럼 계명을 지킨다고 자랑하며, 함부로 이웃을 업신여기는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을 자신의 공으로 돌리는 사람들에 대해 마태복음 7장 22, 23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22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7:22-23)

 

겉으로 보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 같은데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고,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그것에 대해 잠깐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영적인 마음과 자연적인 마음, 두 마음이 있습니다. 영적인 마음을 다르게 말하면 속 사람(internal man)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주님과 연결된 마음입니다. 그에 비해 자연적 마음은 겉 사람(external man)이라 불리고, 이는 세상과 연결된 마음입니다. 여기서 사람이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모두 겉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다만 겉 사람이 하되 속 사람으로부터 하는 행동이 있고, 속 사람과 관계없이 겉 사람 혼자 하는 행동이 있습니다. 전자의 경우, 즉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을 통해 하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하는 행동입니다. 그러나 후자, 즉 겉 사람 혼자서 하는 것은 인간의 자아로부터 하는 행동입니다. 주님으로부터 하는 행동은 겉과 속이 같으며, 그러므로 진실하고 선합니다. 반대로 인간의 자아로부터 하는 행동은 겉과 속이 다르며, 그러므로 악하고 위선적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악하고 거짓된 것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 중에도 니고데모와 같은 사람은 진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요3:2) 하였고, 거듭남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바리새인들은 겉과 속이 다른, 교활하고 교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 11장에서 주님은 그들에게

 

39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40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41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눅11:39-41)

 

라고 말씀하십니다. 잔은 포도주를 담는 그릇이므로 영적으로는 진리와, 그리고 대접은 떡을 담는 그릇이므로 영적으로는 선과 각각 관련됩니다. 포도주와 떡은 각각 진리와 선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겉으로만 보면 진리를 말하고 선을 행하는 것 같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악과 거짓이 가득하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는 모든 행동은 모두 속 사람으로부터 하는 것이 아니라 겉 사람으로부터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주님으로부터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아로부터 하는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고 하셨습니다.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는 것은 이웃에게 선을 베풀 때는 속 사람으로부터 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의 의미를 통해 우리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때로는 바리새인처럼 자신을 높이고 다른 사람을 업신여긴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세리의 심정으로 가슴을 치며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반성한 적도 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14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하면 자기를 낮추는 자가 될 수 있을까요? 계시록해설 794:3항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을 통해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선과 진리는 인간으로부터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말하고 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직 겉 사람으로부터 행한다면 그것은 인간 자신으로부터 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들은 모두 악이다.

 

일이 뜻대로 안 되면 자기도 모르게 거친 말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말만 그럴듯하고 진심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겉으로는 축복을 하면서 속으로는 안 되기를 바랄 때도 있습니다. 이런 모든 것이 인간의 자아로부터 나오는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매사가 뜻대로 안 될 때는 니고데모처럼 은밀하게 말씀이신 주님을 찾아가야 합니다. 주님의 도우심을 받아 무슨 일이든 겉 사람 혼자 하던 버릇을 버리고 겸손하게 속 사람의 뜻을 따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때 속 사람과 겉 사람의 모든 것이 깨끗해진다고 하십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또한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형제에게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6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7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사58:6-7)

 

아멘

 

2021-12-05(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4-14(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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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천국 전체는 모두 합해서 한 사람의 형상을 이룬다

All Heaven in the Aggregate Reflects a Single Man

 

천국과지옥.1.8.59-67.'천국 전체는 사람의 형상을 이룬다'.scan.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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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H.59, '8장, 천국 전체는 한 사람 모습이다'(HH.59-67)

※ 천국의 총합이 한 사람의 모양이라는 것은 지금까지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은 신비지만, 천국에서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사실과 그에 관련된 세부 사항들을 아는 것이 천사의 지성을 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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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H.60, '8장, 천국 전체는 한 사람 모습이다'(HH.59-67)

※ 그러나 그들이 알아야 할 것은, 사람은 선한 것을 의도하고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그런 사고력과 의지(understanding and willing)가 바로 사람을 이루는 영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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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H.61, '8장, 천국 전체는 한 사람 모습이다'(HH.59-67)

※ 천사들은 사람이 그 몸으로 하는 행동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그 행동의 동기가 되는 의지만을 본다. 천사들은 의지를 사람 자체라고 하고, 사고력은 의지와 일치하는 한에 있어서만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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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H.62, '8장, 천국 전체는 한 사람 모습이다'(HH.59-67)

※ 사실 천사들은 천국 전체가 사람 모양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볼 수는 없다. 천국 전체는 어떤 천사의 시야에도 다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그들은 수천의 천사들로 된 공동체가 멀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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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H.63, '8장, 천국 전체는 한 사람 모습이다'(HH.59-67)

※ 천국의 형상이 그렇기 때문에, 천국은 주님에 의해 단 한 사람처럼, 즉 한 단위로 다스려진다.  8천국 전체는 한 사람 모습이다All Heaven in the Aggregate Reflects a Single Man 63천국의 형상이 그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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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H.64, '8장, 천국 전체는 한 사람 모습이다'(HH.59-67)

※ 사람 안에 있는 많은 부분이 하나로 움직이는 것은, 사람 안에 있는 것은 모두 전체의 유익을 위해 뭔가 기여하고, 쓰임새 없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전체는 부분들로 구성되고,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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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H.65, '8장, 천국 전체는 한 사람 모습이다'(HH.59-67)

※ 천국 전체가 한 사람으로 보이고, 가장 큰 형태의 신적, 영적인 사람(a Divine spiritual man) 모습이기 때문에, 천국에도 사람에게 있는 모든 지체와 기관들이 같은 이름으로 존재한다. 천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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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H.66, '8장, 천국 전체는 한 사람 모습이다'(HH.59-67)

※ 천국 가기 전 단계에 있는 영들은 천국이 위에만이 아니라 아래에도 있다는 말에 놀란다. 그들도 세상에 사는 사람들처럼, 천국은 위에만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8천국 전체는 한 사람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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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H.67, '8장, 천국 전체는 한 사람 모습이다'(HH.59-67)

※ 천국이 ‘가장 큰 사람’(the greatest man)임을 밝힌 이유는, 이것을 먼저 알지 않으면, 앞으로 천국에 대해 설명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8천국 전체는 한 사람 모습이다All Hea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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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 말씀드리지만, 이 햇수들은 어떤 개인의 수명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해당 교회의 때와 상태들을 상징합니다.

 

19-20절, 19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0그는 구백육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Jared lived after he begat Enoch eight hundred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Jared were nine hundred sixty and two years; and he died.

 

515

이들 말씀들의 상징들 또한 위 비슷한 말씀들의 것들과 유사합니다. 야렛이 구백육십이 세를 살았다, 므두셀라는 구백육십구 세를 살았다 하여 대홍수 이전 사람들이 실제로 이렇게 엄청나게 오래 살았었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아야 하며, 이 사실은 다음 장 3절,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창6:3)라는 말씀을 통해 특별히 주님의 신적 자비로 모두에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이 햇수들은 어떤 개인의 수명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해당 교회의 때와 상태들을 상징합니다. The signification of these words also is similar to that of the like words above. That the ages of the antediluvians were not so great, as that of Jared nine hundred and sixty-two years, and that of Methuselah nine hundred and sixty-nine years, must appear to everyone, especially from what of the Lord’s Divine mercy will be said at verse 3 of the next chapter, where we read, “Their days shall be a hundred and twenty years”; so that the number of the years does not signify the age of any particular man, but the times and states of the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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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렛이라는 교회, 마할랄렐 에녹 둘 사이에 있었던 교회

 

18절, 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And Jared lived a hundred sixty and two years, and begat Enoch.

 

514

야렛’이라는 교회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진 게 없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가 대략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그 앞 교회였던 ‘마할랄렐’과, 그 뒤 교회인 ‘에녹’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교회는 그 둘 사이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Concerning the church called “Jared” nothing is related; but its character may be known from the church “Mahalalel” which preceded it, and the church “Enoch” which followed it, between which two it was intermedi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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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렛’, 여섯 번째 교회, ‘에녹’, 일곱 번째 교회

 

18절, 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And Jared lived a hundred sixty and two years, and begat Enoch.

 

513

야렛’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여섯 번째 교회를, ‘에녹’은 일곱 번째 교회를 상징합니다. By “Jared,” as before said, is signified a sixth church; by “Enoch” a seven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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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표현들은 앞의 비슷한 표현들과 같은 의미입니다.

 

16-17절, 16야렛을 낳은 후 팔백삼십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And Mahalalel lived after he begat Jared eight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17그는 팔백구십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all the days of Mahalalel were eight hundred ninety and five years; and he d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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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표현들은 앞의 비슷한 표현들과 같은 의미입니다. It is the same with these words as with the like words before.

 

※ 팔백구십오(895)라는 숫자가 문자 그대로 실제로 895년을 뜻하는 게 아닌, 어떤 긴 시간의 흐름, 혹은 상태와 그 상태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분명한 사실은, 주님은 게난에 이어 마할랄렐로 이어지는, 점점 더 안 좋은 쪽으로 기울어지는 시대의 흐름을 그대로 허용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편의상, 구백 년으로 보면, 실제로는 그 이상이었겠지만, 거의 천년의 세월 동안 수많은 인물과 사건, 사상의 부침이 있었을 텐데도, 노아의 홍수라는 종말을 향해 유유히 흘러가는 그 장강, 대하의 물결을 주님은 의도적으로 간섭하시거나 개입하셔서 강제로 돌리지 않으십니다.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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