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8그는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Seth lived after he begat Enosh eight hundred and seven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Seth were nine hundred and twelve years, and he died. (5:7, 8)

 

AC.499

 

‘날’(days)과 ‘해’(years)의 숫자들은 여기서도 앞에서와 같이 시간과 상태를 의미합니다. ‘자녀들’(sons and daughters) 또한 앞에서와 같은 의미를 가지며, 그가 ‘죽었더라’(died)는 진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The “days” and numbers of “years” signify here as before the times and states. “Sons and daughters” too have the same signification as before; and so likewise as the statement that he “died.”

 

 

해설

 

이 글은 AC.492에서 AC.498까지 이어진 해석을 하나로 묶어 주는 정리 문장과 같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새로운 내용을 제시하기보다, 이미 확립된 해석 원리가 여기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이는 창세기 5장의 족보가 부분적으로만 상징적이거나, 어떤 구절은 문자적으로 읽어야 한다는 식의 혼합 해석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선언과도 같습니다.

 

먼저 ‘(days)과 ‘(years)의 숫자들이 다시 언급됩니다. 이는 독자로 하여금 연대적 시간 해석으로 되돌아가려는 유혹을 차단합니다. 앞에서 충분히 밝혀졌듯이, 날과 해는 교회의 지속 기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거쳐 간 ‘상태의 흐름과 질서’를 말합니다. AC.499는 이 원리가 예외 없이 계속 적용됨을 확인합니다.

 

자녀들(sons and daughters)에 대한 언급도 동일합니다. 여기서도 그것들은 생물학적 자녀가 아니라, 그 교회 상태 안에서 퍼셉션된 진리와 선을 의미합니다. 중요한 점은, 이 진리와 선이 ‘항상 교회의 상태에 상응한다는 사실’입니다. 교회가 어떠한 상태에 있느냐에 따라, 그 교회가 낳는 진리와 선의 성격도 달라집니다. 따라서 ‘자녀들을 낳았으며’라는 말은, 그 교회가 여전히 영적으로 생산적인 상태에 있었음을 뜻합니다.

 

이어지는 그가 ‘죽었더라(died)는 진술 역시 앞에서 설명된 의미와 동일합니다. 이것은 한 개인의 생물학적 죽음을 뜻하지 않고, ‘그 교회 상태를 특징짓던 퍼셉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AC.499는 이 점을 반복함으로써, 창세기 5장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개념이 바로 퍼셉션의 유지와 소멸임을 분명히 합니다.

 

이 반복은 불필요한 중언부언이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독자가 한 번이라도 문자적 이해로 되돌아가 이 족보를 읽지 않도록, 같은 원리를 여러 번 확인시킵니다. 특히 ‘죽었다’는 표현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육체의 죽음으로 오해될 수 있기 때문에, 그는 앞선 해석을 그대로 다시 적용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신학적으로 보면, 이 문단은 교회의 생명과 죽음을 판단하는 기준을 명확히 고정합니다. 교회의 생명은 제도의 존속이나 인원의 지속이 아니라, ‘퍼셉션의 존재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퍼셉션이 살아 있을 때, 교회는 날과 해의 상태를 지나며 자녀들, 곧 진리와 선을 낳습니다. 그러나 퍼셉션이 사라질 때, 성경은 그것을 ‘죽음’이라고 부릅니다.

 

이 원리는 태고교회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AC.499를 통해, 이후에 등장하는 모든 교회들에도 동일한 해석 원리가 적용된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즉, 교회사는 외형의 흥망이 아니라, ‘퍼셉션 변화사’입니다. 어느 시대, 어느 교회든, 퍼셉션이 살아 있으면 그 교회는 살아 있고, 퍼셉션이 소멸되면 그 교회는 죽은 것입니다.

 

설교적으로 이 문단은 매우 강한 메시지를 지닙니다. 우리는 흔히 교회의 죽음을 출석 감소나 사회적 영향력 상실로 판단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기준은 전혀 다릅니다. 퍼셉션이 사라지고, 선과 진리가 더 이상 주님으로부터 살아 있는 것으로 인식되지 않을 때, 그때가 바로 교회의 죽음입니다. 반대로 외적으로는 미약해 보여도, 퍼셉션이 살아 있다면 그 교회는 여전히 생명 가운데 있습니다.

 

또한 개인의 신앙에도 이 원리는 그대로 적용됩니다. 한 사람 안에도 날과 해, 자녀들, 그리고 죽음에 해당하는 상태들이 있습니다. 어떤 시기에는 진리와 선이 풍성히 퍼셉션되지만, 어떤 시기에는 그것이 희미해질 수 있습니다. AC.499는 이러한 변화를 도덕적 실패로만 해석하지 않고, ‘상태의 변화’로 읽도록 인도합니다.

 

결국 AC.499는 창세기 5장의 족보를 읽는 독자에게 하나의 안정된 해석 틀을 제공합니다. 날과 해, 자녀들, 그리고 죽음은 모두 같은 언어 체계 안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그 중심에는 퍼셉션이 있습니다. 이 틀을 붙들 때, 우리는 족보의 반복 속에서 지루함이 아니라, 교회의 생명 리듬을 읽게 됩니다.

 

 

 

AC.500, 창5:9,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AC.500-503)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And Enosh lived ninety years, and begat Kenan. (창5:9) AC.500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에노스’(Enosh)는 ‘셋’(Seth)이라는 교회보다 더 덜 천적(still less celestial)인 세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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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98, 창5:6, ‘에노스를 낳았고’(begat Enosh)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창5:6) AC.498 그가 ‘에노스를 낳았다’(begat Enosh)는 말은, 그들로부터 ‘에노스’(Enosh)라 하는 또 다른 교회가 이어졌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이 장에서 이름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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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5:6)

 

AC.498

 

그가 ‘에노스를 낳았다’(begat Enosh)는 말은, 그들로부터 ‘에노스’(Enosh)라 하는 또 다른 교회가 이어졌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이 장에서 이름들이 교회들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합니다. That he “begat Enosh” signifies that from them there descended another church called “Enosh”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in this chapter the names signify nothing else than churches.

 

 

해설

 

이 문단은 짧지만, 창세기 5장을 해석하는 데 있어 매우 결정적인 원리를 다시 한번 명시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에노스를 낳았다(begat Enosh)는 표현을, 개인의 출생으로 읽지 말고 ‘교회의 출현’으로 읽어야 한다고 단언합니다. 그 근거는 단순합니다. 이 장에서 등장하는 이름들은 어느 것도 개인을 의미하지 않으며, 오직 ‘교회의 상태들’만을 의미한다는 점입니다.

 

이 진술은 앞선 모든 해석을 한 줄로 요약하는 역할을 합니다. 만일 이름들이 개인이라면, 창세기 5장은 긴 수명과 혈통을 기록한 고대 연대기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름들이 교회라면, 이 장은 태고교회가 어떻게 여러 상태로 분화되고, 그 상태들이 어떻게 서로를 ‘낳으며’ 이어졌는지를 보여 주는 ‘영적 계보’가 됩니다. AC.498은 후자의 관점을 확정합니다.

 

낳았다’는 말이 교회의 계승을 뜻한다는 점은, 앞서 반복적으로 확립된 원리입니다. 한 교회가 다른 교회를 낳는다는 것은, 한 상태 안에서 형성된 진리와 선의 퍼셉션이 다음 상태로 전이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 전이는 단절이 아니라 연속이며, 외형의 변화보다 ‘내적 생명의 이동’에 초점이 있습니다.

 

에노스(Enosh)라는 이름 자체도 이 점을 보강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다른 곳에서 ‘에노스’가 상대적으로 연약한 인간 상태, 곧 스스로에 대한 자각이 더해진 상태와 연결된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셋의 교회보다 한 단계 더 내려온, 그러니까 더 흐릿해진 상태를 암시합니다. 즉, 에노스의 교회는 여전히 태고교회의 범주 안에 있지만, 퍼셉션의 즉각성과 충만함, 또렷함은 더 약화된 상태입니다.

 

그러나 이 약화가 곧바로 죽음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에노스의 교회 역시 살아 있는 교회였고, 진리와 선을 퍼셉션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그 퍼셉션은 이전보다 덜 직접적이고, 더 많은 반성과 매개를 필요로 하는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이처럼 교회의 변화는 항상 단계적이며, 각 단계는 저마다 고유한 성격을 지닙니다.

 

AC.498이 강조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점은, ‘이 장 전체의 해석 원리의 일관성’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장에서 이름들이 교회들 외에 다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말함으로써, 부분적 상징 해석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아담, 셋, 에노스, 그 이후의 모든 이름들은 동일한 규칙 아래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 일관성이 무너지면, 장 전체의 구조도 함께 무너집니다.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교회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상태의 연속’이라는 것이지요. 한 교회가 다음 교회를 낳는다는 말은, 오늘의 교회가 내일의 교회를 준비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살아 있는 교회는 자신 안에 머무르지 않고, 다음 상태를 위한 씨앗을 품습니다.

 

개인의 신앙 여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람 안에도 여러 ‘이름’의 상태들이 있습니다. 어떤 시기의 신앙은 셋과 같고, 어떤 시기는 에노스와 같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변화가 곧바로 실패나 타락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다른 방식으로 인도하고 계신다는 표지’일 수 있습니다. 질러갈 걸 좀 돌아가는 걸 수도 있지만 말입니다. 그 인생이 끝에 가서 아주 잃어버리는 인생이 되지만 않는다면 말입니다.

 

결국 AC.498은 창세기 5장을 읽는 독자에게 분명한 선택을 요구합니다. 이 장을 개인들의 전기로 읽을 것인가, 아니면 교회의 생명사가 기록된 말씀, 곧 교회의 영적 계보로 읽을 것인가 하는 선택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단호하게 후자를 선택합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교회와 신앙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살아 있는 상태로 이해하게 만듭니다.

 

이 관점을 붙들 때, ‘에노스를 낳았다(begat Enosh)는 말은 더 이상 낯선 족보 문장이 아니라, ‘섭리 안에서 이어지는 교회의 맥박’으로 들리게 됩니다.

 

 

 

AC.499, 창5:7-8,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7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8그는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Seth lived after he begat Enosh eight hundred and seven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Seth were n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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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97, 창5:6, '교회의 쇠퇴와 회복은 점진적으로'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창5:6) AC.497 ‘셋’(Seth)이 부모 교회인 태고교회보다 덜 천적이지만, 여전히 태고교회들 가운데 하나인 두 번째 교회라는 사실은, 셋에 관해 위에서 말한 내용(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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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5:6)

 

AC.497

 

‘셋’(Seth)이 부모 교회인 태고교회보다 덜 천적이지만, 여전히 태고교회들 가운데 하나인 두 번째 교회라는 사실은, 셋에 관해 위에서 말한 내용(3)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That “Seth” is a second church less celestial than the most ancient church, its parent, yet one of the most ancient churches, may appear from what was said above concerning Seth (verse 3).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5:3)

 

교회들의 경우는, 우리가 말해 온 바와 같이, 위에서 언급한 원인으로 인해 본질적인 것들에 있어 점진적으로, 그리고 시간의 경과에 따라 쇠퇴하게 됩니다. The case with churches, as we have said, is that by degrees, and in process of time, they decrease as to essentials, owing to the cause above mentioned.

 

 

해설

 

이 글은 AC.496에서 제시된 진술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그 원리를 보다 일반적인 교회론으로 확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셋이 태고교회의 두 번째 교회이며, 부모 교회보다 덜 천적이라는 점을 새로운 주장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미 앞에서 충분히 설명된 사실을 다시 상기시키며, 이제 그것을 ‘모든 교회에 적용되는 보편 원리’로 정식화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표현은 ‘덜 천적이지만 여전히 태고교회들 가운데 하나’라는 규정입니다. 이는 교회의 변화가 흑백 논리로 설명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합니다. 셋의 교회는 태고교회의 최초 상태와 동일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전혀 다른 종류의 교회로 전락한 것도 아닙니다. 본질은 유지되었으되, 그 강도와 방식이 달라졌습니다. 다시 말해, 퍼셉션은 여전히 존재했지만, 그 퍼셉션이 작동하는 깊이와 즉시성이 부모 교회에 비해서 좀 약화 되었다는 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점을 개인의 타락이나 도덕적 실패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교회들의 경우는 점진적으로 쇠퇴한다’고 말하며, 이 쇠퇴를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필연적 과정’으로 제시합니다. 이는 인간의 본성, 특히 유전적 악의 축적이라는 원인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처음에는 순수한 상태로 시작하지만, 세대를 거치며 그 순수함을 유지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집니다.

 

이 ‘점진적 쇠퇴’라는 개념은 매우 중요합니다. 태고교회의 쇠퇴는 급격한 붕괴나 단번의 배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미세한 변화들이 누적되면서, 본질적인 것들이 조금씩 약화 되는 식이었지요. 사랑이 중심이던 상태에서 신앙이 점점 더 두드러지게 되고, 그렇게 해서 퍼셉션이 처음처럼 즉각적이고 또렷하기보다는 덜 즉각적, 덜 또렷해지는 방향으로 이동한 것이지요. 셋의 교회는 바로 이런 변화의 초기 단계에 해당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과정을 ‘본질적인 것들에 있어 쇠퇴한다’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본질적인 것들(essentials)이란 교회의 생명, 곧 주님과의 직접적인 연결과 퍼셉션을 말합니다. 외적 형식이나 제도는 여전히 유지될 수 있지만, 본질적인 것이 약화 될 때, 교회는 이미 쇠퇴의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교회의 쇠퇴는 외적 변화보다 ‘내적 생명의 변화’로 판단되어야 합니다.

 

이 글은 태고교회의 역사만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후 모든 교회의 운명을 암시합니다. 태고교회 다음에 등장하는 교회들 역시, 동일한 원리에 따라 시작과 전성기, 그리고 쇠퇴의 과정을 겪게 됩니다. 차이는 형태와 정도일 뿐, 그 구조는 동일합니다. 그래서 셋의 교회는 단순한 역사적 사례가 아니라, ‘교회 변화의 전형’을 보여 주는 그 첫 사례가 됩니다.

 

이 말씀은 매우 현실적인 통찰을 제공합니다. 우리는 종종 교회의 쇠퇴를 특정 사건이나 외부 환경 탓으로만 돌리려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보다 더 깊은 원인을 제시합니다. 교회의 쇠퇴는 내부에서, 그것도 본질적인 차원에서 서서히 진행됩니다. 퍼셉션이 약화되고, 사랑이 덜 중심이 될 때, 교회는 이미 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시에 이 진술은 절망적인 숙명론으로 흐르지는 않습니다. 쇠퇴가 점진적이라는 말은, ‘회복 역시 단계적으로 가능하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셋의 교회가 여전히 태고교회들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었던 것은, 퍼셉션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섭리가 교회를 단번에 버리지 않으시고, 가능한 한 오래 생명을 유지하도록 인도하신다는 증거입니다.

 

개인의 신앙 여정에도 이 원리는 그대로 적용됩니다. 한 사람 안에서도 초기의 열정과 사랑이 시간이 지나며 변화할 수 있습니다만, 그러나 그렇다고 그 변화가 곧바로 죽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변화 속에서도 퍼셉션이 살아 있는지, 곧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여전히 살아 있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지 하는 것입니다. 셋의 교회는 그 가능성을 보여 줍니다.

 

결국 AC.497은 태고교회의 두 번째 단계인 셋의 교회를 통해, 교회의 쇠퇴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지를 분명히 합니다. 그것은 단절이나 파멸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본질의 약화’입니다. 이 인식을 가질 때, 우리는 교회의 역사와 오늘의 교회를 보다 차분하고 깊이 있게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AC.498, 창5:6, ‘에노스를 낳았고’(begat Eno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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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96, 창5:6,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AC.496-4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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