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5 심화

4. ‘ 속죄제의 고운 가루에는 기름과 유향을 넣지 않았을까?

 

5:11은 레2를 이미 읽은 사람이라면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2의 소제에서는 고운 가루에 반드시 기름을 붓고 유향을 놓았습니다. 그런데 레5에서는 형편이 어려워 비둘기조차 드릴 수 없는 사람이 고운 가루 십분의 일 에바를 속죄제로 가져오도록 하면서 정반대로 명령합니다. ‘이는 속죄제인즉 위에 기름을 붓지 말며 유향을 놓지 말고.같은 고운 가루인데 왜 소제에서는 기름과 유향을 더하고, 속죄제에서는 그것들을 의도적으로 빼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는 놀랍게도 스베덴보리가 거의 그대로 답한 대목이 있습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137(29:40)은 여러 소제의 규정을 설명하다가 레5:11을 직접 인용합니다. 그리고 죄와 허물을 위한 제사의 소제에는 십분의 일 에바의 고운 가루를 사용하되 위에 기름이나 유향을 두지 않았다고 한 뒤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기름은 사랑의 선을, ‘유향은 그 선에 속한 진리를 의미하지만, 속죄제와 속건제는 악과 거기에서 나오는 거짓으로부터의 정결과 속죄를 의미하기 때문에, 그것들이 선 및 선에서 나오는 진리와 섞여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레5:11을 직접 다루는 원전이므로 이 부분의 상응은 매우 확실합니다.

 

이 설명을 이해하려면 레2를 잠시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2에서 고운 가루와 기름과 유향은 함께 있었습니다. 고운 가루는 선에서 나오는 진리와 연결되고, 기름은 사랑의 선을, 유향은 그 선에서 나오는 진리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소제는 주님께서 주신 선과 진리가 인간의 삶 안에서 결합되어 예배와 쓰임으로 나타나는 아름다운 상태를 보여 주었습니다. 거기에서는 기름과 유향이 빠질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들이 함께 있어야 소제가 나타내는 영적 상태가 온전히 표현됩니다.

 

그러나 레5의 상황은 다릅니다. 지금 인간은 이미 선과 진리가 조화롭게 결합된 상태를 표현하려고 제단 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안에서 악과 거짓이 드러났고 그것으로부터 정결하게 되어야 하는 상태에 있습니다. 그래서 같은 고운 가루를 가져오지만 거기에 기름과 유향을 넣지 않습니다. 이것은 사람에게 사랑의 선과 진리가 전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 이 제사가 표상하는 중심 사건이 선과 진리의 결합이 아니라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정결이라는 뜻입니다. 제사의 재료는 같아도 제사의 목적과 계열이 달라지면 상응의 배열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이 레위기의 상응을 읽는 데 매우 중요한 원칙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흔히 기름 = 사랑’, ‘유향 = 진리’, ‘고운 가루 = 진리와 같이 대응표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기계적으로 대입하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상응은 그렇게 단순한 암호풀이가 아닙니다. 무엇이 무엇과 함께 있는지, 어떤 제사 안에 놓여 있는지, 그 제사가 전체적으로 무엇을 표상하는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AC.10137의 설명이 바로 그 좋은 예입니다. 기름과 유향 자체는 선한 것을 표상하지만, 속죄제에서는 바로 그 선한 것들을 넣지 않는 까지 의미가 있습니다. 악과 거짓을 정결하게 하는 과정과 이미 정결해진 선과 진리의 상태를 뒤섞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거듭남에서도 매우 실제적입니다. 자기 안에서 악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 너무 빨리 그것을 좋은 것으로 포장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화를 내고도 정의를 위한 분노였다고 하고, 사람을 지배하려 하고도 사람을 사랑해서 그랬다고 하며, 인정받으려는 욕망을 주님의 영광을 위한 열심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악을 악 그대로 보지 못합니다. 속죄제의 고운 가루에 기름과 유향을 넣지 않는 장면은 영적으로 이런 혼합을 경계하는 모습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금 정결해야 할 것은 먼저 정결해야 합니다. 악을 선이라고 부르거나 거짓을 좋은 의도라고 포장하지 않고 주님의 빛 앞에서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레2와 레5의 차이는 매우 아름답습니다. 2에서는 고운 가루에 기름을 붓고 유향을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선과 진리가 결합되어 주님께 드려지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레5에서는 기름을 붓지 말며 유향을 놓지 말라고 하십니다. 지금은 악과 거짓으로부터 정결하게 되는 일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거듭남을 통해 이루어지는 선과 진리의 결합을 보여 주고, 다른 하나는 그 결합을 방해하는 악과 거짓을 제거하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서로 반대되는 제사가 아니라 거듭남이라는 하나의 큰 역사 안에서 서로 다른 일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왜 레위기의 그토록 사소해 보이는 규정 하나까지 함부로 지나칠 수 없는지를 보여 줍니다. ‘기름을 넣는다기름을 넣지 않는다’, ‘유향을 놓는다유향을 놓지 않는다의 차이 안에 인간의 거듭남에서 정결결합을 구별하는 아르카나가 숨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악과 거짓을 선과 진리로 위장하지 않고 드러내어 정결하게 하시며, 그렇게 깨끗하게 된 자리에서 비로소 선과 진리가 참으로 결합되게 하십니다. 5:11의 비어 있는 고운 가루는 그래서 결핍의 표상이 아니라, 거듭남의 질서를 정확하게 보여 주는 제물입니다. (SW.7 5 심화 4)

 

 

 

SW.7 심화 5, ‘모르고 지은 죄도 죄인가? - 무지와 이노센스, 그리고 책임의 문제’

SW.7 심화5. ‘모르고 지은 죄도 죄인가? - 무지와 이노센스, 그리고 책임의 문제’ 레5:17은 읽는 사람을 멈추게 하는 말씀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를 부지중에 범하여도 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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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7 심화 3, ‘죄를 깨닫고 자복한다는 것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할까?’

SW.7 심화3. ‘죄를 깨닫고 자복한다는 것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할까?’ 레4와 레5를 이어 읽으면 매우 중요한 변화가 보입니다. 레4에서 반복되는 말은 ‘그가 범한 죄를 깨달으면’이고, 레5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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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죄를 깨닫고 자복한다는 것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할까?’

 

4와 레5를 이어 읽으면 매우 중요한 변화가 보입니다. 4에서 반복되는 말은 그가 범한 죄를 깨달으면이고, 5에 들어오면 잘못하였노라 자복하고가 더해집니다. 깨달음에서 자복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성경 본문 자체도 죄를 인식한 뒤 그것을 고백하도록 명시합니다.

 

그러나 죄를 깨닫는 자복하는 은 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기 잘못을 알아도 그것을 자기 죄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가 말을 심하게 것은 맞지만 사람이 먼저 시작했다’, ‘내가 거짓말한 것은 맞지만 상황상 어쩔 없었다’, ‘내가 화낸 것은 맞지만 그것은 정의로운 분노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악을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자복은 이 방어를 내려놓는 데서 시작합니다. ‘ 사람이 무엇을 했는가보다 먼저 나는 주님 앞에서 무엇을 했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을 무조건 비난하는 자기혐오와 다릅니다. 오히려 매우 정확한 자기 인식입니다. 내가 하지 않은 죄까지 내 것으로 짊어질 필요는 없지만 내가 실제로 행한 악은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지 않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회개 교리에서 이것은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회개는 죄를 입술로 열거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인간은 자기 삶을 살피고, 악을 발견하고, 그것을 죄라고 인정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실제로 그 악을 피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자복의 진실성은 결국 다음 삶에서 드러납니다. 같은 상황이 다시 왔을 때 이전과 다른 선택을 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죄를 깨닫게 되는 순간은 두려운 순간이면서 동시에 은혜의 순간입니다. 주님께서 인간에게 악을 보여 주시는 목적은 그 사람을 절망시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악은 피할 수 없지만 보이기 시작한 악은 주님의 도움을 받아 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듭남이 진행될수록 자기 자신이 점점 더 완벽해 보이기보다 오히려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미세한 자기애와 세상 사랑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빛이 밝아졌기 때문에 먼지가 더 잘 보이는 것입니다.

 

5는 바로 그 순간에 자복하라고 합니다. 숨기지 말고, 다른 이름을 붙이지 말고, 남의 탓으로 돌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미움이면 미움이라고, 거짓이면 거짓이라고, 지배욕이면 지배욕이라고 주님 앞에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것을 피하려는 실제 싸움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자복은 저는 형편없는 죄인입니다라는 막연한 자기비하보다 훨씬 구체적입니다. ‘주님, 저는 사람을 미워하고 있습니다’, ‘제가 인정받고 싶은 마음 때문에 일을 했습니다’, ‘제가 손해 보기 싫어서 진실을 숨겼습니다처럼 말씀의 빛에서 발견된 실제 악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가 구체적일수록 무엇을 피해야 하는지도 구체적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레5 후반의 속건제가 보여 주듯 자복은 마침내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내가 잘못한 것을 인정했다면 가능한 경우 바로잡습니다. 그래서 레5에는 매우 아름다운 하나의 흐름이 있습니다. ‘깨닫는다 자복한다 피한다 바로잡는다.이것은 죄책감의 계단이 아니라 자유의 계단입니다. 한 단계씩 올라갈수록 악은 인간을 붙잡을 힘을 잃고 주님의 선과 진리가 그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죄를 깨닫는 것은 거듭남의 실패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죄를 전혀 보지 못하는 것이 더 위험합니다. 주님께서 보여 주신 것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잘못하였노라자복하며, 그 악을 죄로 여겨 피하고, 가능한 것은 바로잡을 때 인간은 실제로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5의 자복은 입술에서 끝나는 고백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돌리는 고백입니다. (SW.7 5 심화 3)

 

 

 

SW.7 심화 4, ‘왜 속죄제의 고운 가루에는 기름과 유향을 넣지 않았을까?’

SW.7 심화4. ‘왜 속죄제의 고운 가루에는 기름과 유향을 넣지 않았을까?’ 레5:11은 레2를 이미 읽은 사람이라면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레2의 소제에서는 고운 가루에 반드시 기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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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7 심화 2, ‘왜 자복만으로 끝나지 않고 보상까지 해야 했을까?’

SW.7 심화2. ‘왜 자복만으로 끝나지 않고 보상까지 해야 했을까?’ 레5 전반부에는 ‘잘못하였노라 자복하고’라는 말씀이 나오지만 후반부의 속건제에 들어가면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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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자복만으로 끝나지 않고 보상까지 해야 했을까?’

 

5 전반부에는 잘못하였노라 자복하고라는 말씀이 나오지만 후반부의 속건제에 들어가면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성물에 잘못을 범한 사람은 그 잘못을 보상하고 거기에 오분의 일을 더하여제사장에게 주어야 합니다. 실제 손상이 발생했다면 실제 회복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회개를 마음의 상태로만 생각하면 우리는 내가 잘못했다는 것을 깨달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으니 끝났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나의 악이 다른 사람이나 어떤 질서에 실제 손상을 입혔다면 그 결과는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훔친 물건은 여전히 상대에게 없고, 거짓말로 훼손된 명예는 여전히 손상되어 있으며, 내가 회피한 책임은 누군가가 대신 짊어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실한 회개는 가능한 경우 그 손상을 바로잡는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이 점에서 속건제는 매우 실제적인 거듭남의 제사입니다. 회개가 진실한지는 감정의 강도만으로 알 수 없습니다. 때로는 눈물을 많이 흘리고 죄책감을 크게 느끼면서도 실제 행동은 하나도 바뀌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감정 표현은 크지 않아도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고 돌려줄 것을 돌려주며 다시 같은 악을 행하지 않도록 삶을 바꾸는 사람이 있습니다. 5의 속건제는 후자의 방향을 가리킵니다.

 

특히 오분의 일을 더하여라는 말씀이 흥미롭습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649(6:15)는 레5:16을 직접 인용하면서 보상 후 더해지는 오분의 일을 말씀에서 다섯이 어떤 것 또는 조금을 의미하는 사례와 연결합니다. 그리고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1757-1759, AE) 548(9:5)은 레5:16을 비롯하여 율법에서 오분의 일을 더하도록 한 여러 경우를 직접 열거하면서, 양과 관련된 이 오분의 충분한 만큼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규정을 단순한 고대의 벌금제도로만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잘못을 대충 덮어 두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로잡기에 충분하도록 회복하려는 태도와 연결하여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을 모든 잘못에는 반드시 20퍼센트를 갚아야 한다는 식으로 오늘날 문자적으로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상응의 핵심은 숫자를 현대의 계산식으로 옮기는 데 있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회개가 최소한의 면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과했으니 됐지’, ‘원금은 돌려줬으니 됐지가 아니라 내가 일으킨 손상을 진실하게 바라보고 가능한 범위에서 충분히 바로잡으려는 마음입니다.

 

물론 모든 손상을 되돌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에게 직접 사과할 수 없을 수도 있고, 오래전의 말 한마디가 남긴 상처를 완전히 없앨 수도 없습니다. 이런 경우 회개가 불가능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선을 찾는 것입니다. 같은 악을 반복하지 않고, 비슷한 상황에서 이제는 진실을 선택하며, 과거에 해쳤던 종류의 이웃을 이제는 돕는 방향으로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불가능한 과거 복원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자유 안에서 삶의 방향이 실제로 바뀌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레5에서 자복보상은 서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자복은 속의 인정이고 보상은 가능한 경우 그 인정이 겉의 삶으로 내려온 것입니다. 속 사람에서 내가 잘못했습니다라고 인정한 것이 겉 사람의 행동에서는 그러므로 내가 바로잡겠습니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계속 살펴보고 있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결합입니다.

 

5의 속건제는 우리에게 아주 간단하지만 피하기 어려운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 용서를 구한 가운데 아직 내가 바로잡을 있는 것이 남아 있는가?입니다. 있다면 회개는 거기까지 가야 합니다. 주님의 사함은 책임으로부터 도망치게 하는 은혜가 아니라, 진실을 직면하고 가능한 것을 바로잡으며 새로운 삶을 시작할 힘을 주시는 은혜입니다. ‘잘못하였노라 자복하고에서 시작된 회개가 잘못을 보상하되에까지 이르는 것, 그것이 레5가 보여 주는 살아 있는 거듭남의 모습입니다. (SW.7 5 심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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