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창4:10)
AC.376
이로부터‘피들이부르짖는것’(cryingofbloods)은죄책의고발을의미한다는것이따라나옵니다.폭력을가하는자들은죄책이있는것으로여겨지기때문입니다.시편에서는다음과같습니다. From this it follows that the“cryingofbloods”signifies the accusation of guilt; for those who use violence are held guilty.As in David:
AC.376은 앞의 AC.373-375에서 전개된 설명을 아주 짧게 결론짓습니다. AC.373에서는 ‘피들의소리’가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을, ‘피들이부르짖는것’이 죄책의 고발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AC.374에서는 왜 ‘피들’이 체어리티에 대한 폭력을 뜻하는지를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피는 특히 미움을 의미하며, 미움은 체어리티와 반대되고 할 수만 있다면 이웃을 해치고 죽이려 하기 때문입니다. AC.375에서는 ‘부르짖는소리’라는 표현이 말씀에서 여러 상황에 사용되지만 창4:10에서는 특별히 고발을 의미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376은 이 둘을 결합합니다. 체어리티에 폭력을 가한 자에게는 죄책이 있으므로, 그 폭력을 뜻하는 ‘피들’이 부르짖는다는 것은 바로 그 죄책이 고발되고 드러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죄책의고발’이라는 표현은 마치 아벨의 피가 주님 앞에서 가인을 고소하여 주님께서 비로소 범인을 알아내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가인은 ‘내가알지못하나이다’라고 말했지만 주님께서 모르셨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말씀은 악 자체가 그 악을 행한 사람의 상태를 드러낸다는 사실을 ‘피들이부르짖는다’는 이미지로 표현합니다. 인간은 자기 행동을 변명하거나 부인할 수 있지만, 실제로 체어리티에 가한 폭력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바로 그 폭력 자체가 그 사람의 죄책을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부르짖음’과 ‘고발’은 주님께 정보를 전달하는 행위라기보다, 행해진 악의 본질과 책임이 영적 질서 안에서 드러나는 것을 뜻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짧은 번호에서 시34:21을 인용하는 이유도 분명합니다. ‘의인을미워하는자는죄책이있으리로다’라는 말씀은 바로 앞 AC.374에서 설명한 ‘미움’과 이번 AC.376의 ‘죄책’을 직접 연결합니다. AC.374에서 미움은 체어리티와 반대되며 마음으로 형제를 죽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시편은 의인을 ‘미워하는자’가 죄책이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 미움은 단순히 마음속에서 지나가는 불쾌한 감정이 아니라, 그것이 의지 안에서 받아들여지고 굳어져 이웃의 선을 해치려는 방향으로 나아갈 때 실제 영적 책임과 연결되는 악입니다. 이 구절은 ‘미움→체어리티에대한폭력→죄책’이라는 AC.374-376의 흐름을 뒷받침합니다.
겔22:4은 그 연결을 더욱 직접적으로 보여 줍니다. ‘네가흘린피로말미암아죄책이있게되었도다’라는 말씀에서는 ‘피’와 ‘죄책’이 한 문장 안에서 결합됩니다. 바로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창4:10의 ‘피들이부르짖는다’를 ‘죄책의고발’로 읽는 성경적 근거입니다. 피를 흘렸다는 것은 단지 외적인 살인 행위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앞의 설명에 따르면 미움과 무자비함과 거기서 솟아나는 여러 불의를 포함합니다. 그러므로 ‘피’가 있다는 것은 체어리티가 훼손되었다는 것이고, 그 피가 행위자에게 돌아가 죄책을 드러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균형도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폭력을가하는자들은죄책이있는것으로여겨진다’고 한다고 해서 외적으로 어떤 해로운 결과가 발생하기만 하면 언제나 동일한 정도의 영적 죄책이 있다는 뜻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영적인 죄책에는 인간의 의지와 자유, 알고도 선택한 악의 성질이 중요합니다. 이번 문맥에서 가인의 폭력은 우발적인 실수나 무지에서 나온 행동이 아닙니다. 앞에서 신앙을 체어리티와 분리하고,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해야 한다는 원리를 받아들이며, 마침내 체어리티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고 완전히 거부하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죄책은 그러한 내적 거부와 폭력의 결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피들의부르짖음’은 가인의 앞선 말과 강한 대조를 이룹니다. 가인은 ‘내가알지못하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자신과 아벨의 관계를 부인하고 ‘내가내아우를지키는자니이까?’라고 책임을 밀어냈습니다. 그러나 AC.372에서 보았듯이 신앙은 본래 체어리티의 ‘지키는자’, 곧 체어리티를 섬기는 것이어야 했습니다. 가인은 바로 그 질서를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AC.376에서는 그 거부와 폭력이 ‘죄책의고발’로 돌아옵니다. 책임을 부인한다고 책임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교리적으로 선언하더라도, 그 결과 체어리티가 훼손되었다면 그 결과 자체가 그 잘못을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AC.376은 ‘죄책’을 주님께서 밖에서 인간에게 덧씌우시는 어떤 것으로 보기보다 인간이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행한 악과 연결하여 읽게 합니다. 주님께서 가인에게 임의로 죄책을 만들어 부과하시는 것이 아니라, 가인이 아벨에게 가한 폭력 자체가 죄책을 드러냅니다. 앞의 AC.357에서 여호와의 진노가 실제로 주님 안에 있는 분노가 아니라 인간의 악한 상태에서 그렇게 나타나는 것이라고 했던 것과도 방향이 통합니다. 주님의 사랑과 자비가 악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의 질서를 거슬러 악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때 그 악에 따른 상태와 결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결국 AC.376은 매우 짧은 번호이지만 창4:10의 ‘피들의부르짖음’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완성합니다. 체어리티에 폭력이 가해졌고, 그 폭력에는 죄책이 있으며, 그러므로 그 ‘피들’이 부르짖는다는 것은 죄책이 고발되고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가인은 ‘알지못한다’고 말하지만 피들은 부르짖습니다. 인간은 자기 안의 미움과 악을 합리화하고 책임을 부인할 수 있지만, 주님의 질서 안에서는 체어리티에 가한 폭력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회개는 그 부르짖음을 억누르거나 변명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서 자기의 악을 악으로 인정하고 그것을 죄로 여겨 피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러나여기서는죄책의고발을의미합니다. In the present passage it denotes accusation.
해설
AC.375는 바로 앞 AC.373에서 ‘피들이부르짖는것’이 ‘죄책의고발’을 의미한다고 한 해석을 보충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부르짖는소리’라는 표현 자체가 언제나 죄책이나 고발을 뜻한다고 단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씀에서 ‘부르짖는소리’와 ‘부르짖음의소리’는 매우 넓게 사용되며, 소음이나 소동이나 혼란이 있을 때뿐 아니라 기쁜 일이 있을 때에도 사용된다고 먼저 밝힙니다. 그런 다음 ‘그러나여기서는죄책의고발을의미한다’고 범위를 한정합니다. 이것은 말씀의 상응과 속뜻을 읽는 데 매우 중요한 해석 원리를 보여 줍니다. 어떤 단어나 표현에 하나의 뜻을 기계적으로 대입하는 것이 아니라, 그 표현이 놓인 문맥과 그것이 결합하고 있는 다른 표상들을 함께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출32:17-18을 인용하는 이유는 ‘소리’가 반드시 한 종류의 영적 상태만을 가리키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모세와 여호수아가 산에서 내려올 때 진영에서 들려오는 큰 소리가 있었고, 여호수아는 그것을 싸우는 소리로 생각했지만 모세는 승리하거나 패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아니라 ‘노래하는소리’라고 말합니다. 즉 ‘소리’는 어떤 집단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강한 상태가 외적으로 드러나는 표현입니다. 그 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그 소리 자체만으로 결정되지 않고, 무엇 때문에 그 소리가 일어났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습1:9-10과 렘48:3에서는 소리가 재앙과 파괴와 혼란에 연결됩니다. 심판과 황폐의 상태가 ‘부르짖는소리’로 표현됩니다. 반면 사65:19에서는 정반대의 문맥이 나타납니다. 새롭게 된 예루살렘에서는 ‘우는소리와부르짖는소리가그가운데에서다시는들리지아니할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도 소리와 부르짖음은 어떤 내적 상태가 외부로 드러나는 것을 나타내지만, 그 구체적인 의미는 문맥에 따라 결정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이 네 구절을 인용하는 목적은 각각의 구절에 독립적인 새로운 교리를 붙이려는 것이 아니라, ‘소리’와 ‘부르짖음’이라는 표현이 말씀에서 여러 상태에 사용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4:10의 ‘네아우의핏소리가땅에서부터내게호소하느니라’에서 ‘부르짖는소리’가 죄책의 고발을 의미하는 이유도 단어 하나만 떼어 내서는 알 수 없습니다. 여기서 부르짖는 것은 바로 아벨의 ‘피들’입니다. 앞의 AC.374에서 보았듯이 ‘피들’은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 특히 미움과 그 미움에서 솟아나는 온갖 불의하고 가증한 것들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그 ‘피들’이 부르짖는다는 것은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이 그 자체로 죄책을 드러내고 고발한다는 뜻이 됩니다. 가인은 ‘내가알지못하나이다’라고 부인했지만, 그가 소멸시킨 아벨의 피들은 침묵하지 않습니다. 행해진 악의 영적 성질 자체가 그 죄책을 드러냅니다.
여기서 ‘고발’ 역시 주님께서 어떤 외부의 증언을 들어야 비로소 가인의 죄를 아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말씀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도록 그렇게 표현합니다. 주님 앞에서는 인간의 내적 상태가 이미 드러나 있으며,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은 그 자체의 결과와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피들의부르짖음’은 주님께 새로운 정보를 전달하는 고발이라기보다, 가인이 부인하고 감추려 한 악이 주님의 질서 안에서는 감추어질 수 없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인간은 말로 ‘알지못합니다’라고 할 수 있지만, 그가 사랑하고 의도하며 행한 것은 그의 영적 상태 안에 남아 있습니다.
AC.375는 짧지만 스베덴보리의 상응을 읽을 때 주의해야 할 중요한 점도 가르쳐 줍니다. ‘소리= 고발’, ‘부르짖음= 죄책’이라고 사전식으로 외워서는 안 됩니다. 같은 표현도 문맥에 따라 싸움이나 소동, 혼란, 슬픔, 기쁨 등 서로 다른 상태와 연결될 수 있습니다. 상응은 단어와 뜻을 일대일로 기계적으로 치환하는 암호표가 아니라, 말씀 전체의 연결과 그 안에서 표현되는 영적 상태를 함께 살피는 것입니다. AC.375에서 스베덴보리 자신이 ‘말씀에서는여러경우에사용되지만여기서는죄책의고발을의미한다’고 구별하는 것은 바로 이 점을 잘 보여 줍니다.
결국 AC.375의 핵심은 마지막 한 문장에 있습니다. ‘그러나여기서는죄책의고발을의미합니다.’ 창4:10에서는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체어리티에 폭력을 가하여 흘리게 된 ‘아벨의피들’이 부르짖고 있기 때문입니다. AC.373이 ‘피들의부르짖음= 죄책의고발’이라는 뜻을 먼저 제시하고, AC.374가 ‘피들’이 무엇인지 자세히 설명했다면, AC.375는 이제 ‘부르짖는소리’가 왜 이 문맥에서 고발이 되는지를 확인합니다. 가인은 자신의 책임을 부인하지만,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결과 자체가 그의 죄책을 드러냅니다.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창4:10)
AC.374
‘피들의소리’(voiceofbloods)가체어리티에폭력이가해졌음을의미한다는것은말씀의많은구절에서분명합니다.그구절들에서‘소리’(voice)는고발하는어떤것을,‘피’(blood)는온갖종류의죄,특히미움을의미합니다.누구든지자기형제를미워하는사람은마음으로그를죽이는것이기때문입니다.주님께서다음과같이가르치십니다. That the“voiceofbloods”signifies that violence had been done to charity is evident from many passages in the Word, in which“voice”denotes anything that accuses, and“blood”any kind of sin, and especially hatred; for whosoever bears hatred toward his brother, kills him in his heart; as the Lord teaches:
이말씀은미움의여러정도를의미합니다.미움은체어리티와반대되는것이며,할수만있다면어떤방식으로든죽입니다.손으로죽이지못하더라도영으로는죽이며,외적인제약에의해서만손으로행하는것이억제됩니다.그러므로모든미움은‘피’(blood)입니다.예레미야에서는다음과같습니다. by which words are meant the degrees of hatred.Hatred is contrary to charity, and kills in whatever way it can, if not with the hand, yet in spirit, and is withheld only by external restraints from the deed of the hand.Therefore all hatred is“blood,”as in Jeremiah:
[2] 그리고‘피’(blood)가미움을의미하므로,마찬가지로온갖종류의불의를의미합니다.미움은모든불의의근원이기때문입니다.호세아에서는다음과같습니다. And as hatred is denoted by“blood,”so likewise is every kind of iniquity, for hatred is the fountain of all iniquities.As in Hosea:
[3] 마지막때의무자비함과미움역시계시록에서는‘피’(blood)로묘사됩니다(계16:3-4). The unmercifulness and hatred of the last times are also described by“blood”in the Revelation (16:3, 4).
‘피들’(bloods)이복수형으로언급되는것은사랑에서모든선하고거룩한것들이솟아나오듯이,미움에서는모든불의하고가증한것들이솟아나오기때문입니다.그러므로이웃을미워하는사람은할수만있다면그를죽일것이며,실제로자기가할수있는모든방식으로그를죽입니다.이것이그에게폭력을가하는것이며,바로이것이여기서‘피들의소리’(voiceofbloods)가본래의미하는것입니다. “Bloods”are mentioned in the plural, because all unjust and abominable things gush forth from hatred, as all good and holy ones do from love.Therefore he who feels hatred toward his neighbor would murder him if he could, and indeed does murder him in any way he can; and this is to do violence to him, which is here properly signified by the“voiceofbloods.”
해설
AC.374는 바로 앞 AC.373에서 제시한 ‘피들의소리는체어리티에폭력이가해졌음을의미한다’는 해석을 말씀의 여러 구절을 통해 입증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의 논증을 따라가 보면 ‘피’의 속뜻이 단순히 살인이나 유혈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피’가 온갖 종류의 죄, 특히 ‘미움’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매우 분명합니다. ‘누구든지자기형제를미워하는사람은마음으로그를죽이는것이기때문입니다.’ 따라서 창4에서 가인이 아벨의 피를 흘린 사건은 속뜻에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사건이며, 그 뿌리에는 체어리티와 정반대되는 미움이 있습니다.
이것을 밝히기 위해 스베덴보리가 가장 먼저 인용하는 말씀이 마5:21-22입니다. 주님께서는 ‘살인하지말라’는 계명을 단순히 육체적인 살인 행위에만 한정하지 않으시고, 형제를 향한 분노와 멸시와 모욕의 내적 상태까지 들어가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미움의여러정도’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살인은 어느 날 갑자기 아무런 내적 원인 없이 손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먼저 시작됩니다. 체어리티가 이웃의 선을 바라는 사랑이라면 미움은 그 반대입니다. 이웃에게 선이 있기를 바라지 않고, 그의 선을 싫어하며, 더 나아가 그가 없어지기를 바라는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그러므로 외적인 살인이 실행되지 않았더라도 그 내적 의지 안에는 이미 살인의 본질이 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미움은할수만있다면어떤방식으로든죽인다’고 말하는 것도 바로 이 뜻입니다. 이것을 모든 순간적인 화나 불쾌감까지 곧바로 영적인 살인으로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에게는 자연적인 분노가 일어날 수 있고, 불의에 대한 정당한 분개도 있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이웃의 악을 미워하는 것과 이웃이라는 사람 자체를 미워하여 그의 선과 행복을 원하지 않는 상태를 구별하지 않은 채 모든 분노를 정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핵심은 이웃을 향한 악의가 의지 안에서 자리 잡아 그를 해치고 제거하기를 원하는 ‘미움’입니다. 외적인 법과 체면과 두려움 때문에 손으로 실행하지 않을 뿐, 기회가 주어지면 해치고 싶어 하는 의지가 있다면 그 미움 안에는 살인의 본질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모든미움은피’라고 말합니다. 렘2:33-34에서 옷단에 가난하고 죄 없는 자들의 피가 발견된다는 말씀은 바로 그러한 내적 악이 외적인 삶에 나타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어 호4:2-3에서는 거짓 맹세, 거짓말, 살인, 도둑질, 간음과 함께 ‘피가피를뒤잇는’ 상태가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피’가 미움뿐 아니라 ‘온갖종류의불의’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미움은모든불의의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체어리티가 이웃의 선을 원하여 여러 형태의 선한 행위로 흘러나오는 것처럼, 미움은 이웃의 선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여러 형태의 불의와 가증한 것으로 흘러나옵니다.
겔22장과 겔7:23을 인용하는 이유도 같습니다. ‘피흘린성읍’, ‘피흘리는죄가가득한땅’, ‘포악이가득한성읍’이라는 표현에서 피와 포악이 함께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히 실제 살인 사건의 통계로 읽는 것이 아니라 무자비함과 미움이 지배하는 영적 상태로 읽습니다. 체어리티가 사라지면 이웃은 더 이상 사랑하고 섬겨야 할 대상이 아니라 자기 욕망을 위해 이용하거나 방해가 되면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앞 AC.372의 ‘신앙은체어리티를섬겨야한다’는 질서와도 연결됩니다. 체어리티를 섬기기를 거부한 신앙은 결국 이웃을 향한 살아 있는 사랑을 잃고, 그 자리에 자기 사랑에서 나오는 무자비함과 미움이 들어설 수 있습니다.
애4:13-14와 사4:4, 사59:3역시 같은 논증 안에 있습니다.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이 의인의 피를 흘렸다는 것, 예루살렘의 피가 씻겨야 한다는 것, 손과 손가락이 피와 죄악으로 더러워졌다는 것은 ‘피’가 단순한 육체적 유혈보다 넓은 영적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특히 사4:4에서 주님께서 ‘예루살렘의피’를 씻으신다는 표현은 피가 제거되어야 할 죄악과 불의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 구절들은 각각 별개의 주제를 말하는 인용들이 아니라 ‘피=미움과거기서나오는불의’라는 하나의 상응을 여러 방향에서 입증하는 증거들입니다.
겔16:6, 22의 ‘피투성이가되어’라는 표현도 같은 맥락에서 인용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예루살렘의 가증한 것들을 ‘피들’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도 피는 한 가지 죄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여러 가증한 악들이 한꺼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AC.374마지막에서 ‘왜피가복수형bloods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이어집니다. 사랑에서 모든 선하고 거룩한 것들이 솟아 나오듯이 미움에서는 모든 불의하고 가증한 것들이 솟아 나오기 때문에 ‘피들’이라고 복수형으로 표현된다는 것입니다. AC.373에서는 이 복수형의 이유를 아직 설명하지 않았지만, 이제 AC.374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그 이유를 밝혀 줍니다.
이 대조는 매우 중요합니다. 한쪽에는 ‘사랑’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미움’이 있습니다. 사랑은 하나의 내적 근원이지만 거기에서 자비, 용서, 섬김, 정직, 인내, 선한 행위와 같은 수많은 선하고 거룩한 것들이 흘러나옵니다. 반대로 미움 역시 하나의 내적 근원이지만 거기에서 거짓, 모욕, 보복, 기만, 폭력, 무자비함과 같은 수많은 불의하고 가증한 것들이 흘러나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단수 ‘피’가 아니라 복수 ‘피들’이라는 표현에 주목합니다. 가인이 아벨에게 가한 폭력은 단 하나의 잘못으로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의 반대인 미움에서 흘러나오는 악의 전체 계열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계16:3-4을 인용하여 마지막 때의 무자비함과 미움 역시 ‘피’로 묘사된다고 하는 것도 이 원리를 말씀 전체에 연결하기 위해서입니다. 창세기의 가인과 아벨에서 시작된 ‘피’의 상응이 선지서에 나타나고 다시 계시록에까지 이어집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 창4:10의 아벨의 피는 고립된 고대 살인 사건의 이미지가 아니라, 체어리티가 파괴될 때 말씀 전체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영적 표상입니다. 사랑이 사라지고 미움이 지배할 때 그 결과는 ‘피’로 표현됩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선과 체어리티의 근원이 인간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사랑에서 모든 선하고 거룩한 것이 솟아 나온다고 할 때 그 사랑의 최초 근원은 인간의 proprium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인간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받아들이는 만큼 체어리티 안에 있게 되고, 그 체어리티에서 여러 선한 쓰임이 흘러나옵니다. 반대로 인간이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거부하고 자기 사랑을 중심에 놓을수록 이웃을 경쟁자나 방해물로 보기 쉬워지고, 그 상태가 굳어지면 미움과 거기서 나오는 여러 불의가 나타납니다. 따라서 사랑과 미움의 대조는 단순한 감정의 대조가 아니라 인간이 어떤 근원과 질서를 받아들이고 살아가느냐의 문제입니다.
이 점에서 AC.374는 앞의 가인 이야기를 더욱 내면으로 가져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는 쉽게 ‘나는사람을죽인적이없으므로이말씀은나와거리가멀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마5:21-22에서 계명을 마음의 상태까지 가져가십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 말씀을 통해 미움 자체가 체어리티에 대한 폭력임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은 단지 ‘나는누구에게물리적인폭력을행사했는가?’가 아니라 ‘내마음속에서누구의선을원하지않고있는가?누구의실패를기뻐하고있는가?누구를마음에서지워버리고싶은가?’가 됩니다. 다만 이런 자기 성찰도 다른 사람을 정죄하기 위한 잣대가 아니라 자기 안의 미움을 주님 앞에서 발견하고 피하기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결국 AC.374의 마지막 문장이 전체를 압축합니다. 이웃을 미워하는 사람은 할 수만 있다면 그를 죽이며, 실제로 자기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를 죽입니다. 이것이 이웃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이며, 바로 그것이 ‘피들의소리’가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벨의 피가 부르짖는다는 것은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이 주님의 질서 안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이고 ‘내가알지못하나이다’라고 했지만, 피들은 부르짖습니다. 체어리티를 거부하는 교리가 아무리 자신을 정당화해도 그 안에서 발생한 미움과 불의는 그 자체로 죄책을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은 단지 손으로 살인하지 않는 데 머무르지 않고, 주님께서 마음속의 미움까지 보게 하실 때 그것을 죄로 인정하고 피하며, 그 자리에 주님에게서 오는 체어리티가 자리 잡도록 하는 신앙이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