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272.심화

 

1. ‘황폐(vastation)

 

여기서 황폐(vastation)란 단순히 무엇인가가 사라지는 상태가 아니라, 선과 진리가 점차 소멸, 영적 생명이 메말라 가는 과정을 뜻합니다. ( AC.272 해설 중)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황폐(vastation)는 단순히 무엇인가가 없어지거나 황량해지는 상태를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람 안에 있던 선과 진리가 점차 그 기능을 잃어가고, 그 결과 영적 생명이 메말라 가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황폐는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흐름을 사람이 지속적으로 거부함으로써 서서히 진행되는 영적 변화입니다.

 

황폐를 이해하려면 먼저 거듭남의 반대 과정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거듭남에서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 조금씩 심어지고 자라나며, 그 결과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점차 하나로 결합됩니다. 반대로 황폐는 이와 정반대의 과정입니다. 사람이 own과 세상 사랑을 선택할수록 속 사람과 겉 사람의 연결은 점차 약해지고, 선과 진리는 점점 힘을 잃어갑니다. 이것이 황폐의 본질입니다.

 

그러나 황폐는 곧바로 모든 선과 진리가 사라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사람 안에 리메인스를 언제나 보존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황폐란 주님께서 선과 진리를 거두어 가시는 상태가 아니라, 사람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삶 속에서 점점 작용하지 못하게 만드는 상태를 말합니다. 마치 샘은 여전히 물을 내보내고 있지만, 그 물길이 흙과 돌로 막혀 물이 흐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문제는 샘이 아니라, 물길이 막힌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황폐를 주님의 심판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영적 질서의 필연적 결과입니다. 사람이 계속하여 거짓을 진리보다 사랑하고, 자기 자신을 주님보다 앞세우며, 감각과 own만을 따라 살아가면, 선과 진리는 점점 설 자리를 잃게 됩니다. 결국 영혼은 주님의 생명을 느끼지 못하는 메마른 상태에 이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황폐입니다.

 

성경에서 황폐한 땅, 메마른 광야, 가시덤불과 엉겅퀴, 무너진 성읍과 같은 표현들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이러한 표현들은 단순히 자연환경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진리가 사라져 영적 생명이 더 이상 열매를 맺지 못하는 교회와 사람의 상태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황폐는 언제나 생명의 결핍을 의미하며,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과의 연결이 약해진 결과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황폐는 언제나 절망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경우 주님께서는 사람이 자기 자신을 신뢰하는 상태를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 황폐를 허락하십니다. 사람이 자신의 지혜와 능력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닫고 다시 주님을 바라보게 될 때, 황폐는 새로운 거듭남의 출발점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말씀에서는 황폐 뒤에 회복과 새 창조가 이어지는 장면이 자주 나타납니다.

 

개인의 신앙생활에서도 황폐는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말씀을 읽으면 기쁨이 있었고, 기도에도 생명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 모든 것이 메마르고 주님의 임재가 느껴지지 않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주님께서 떠나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여전히 속 사람 안에서 리메인스를 보존하시며, 사람이 자기 자신을 의지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더욱 깊이 주님께 나아가도록 인도하고 계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황폐는 때로는 영적 죽음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주님께서 사람을 더욱 깊은 생명으로 이끄시는 섭리의 과정이 되기도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황폐(vastation)는 선과 진리가 점차 힘을 잃고 영적 생명이 메말라 가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러나 그 근본 원인은 언제나 주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유입을 거부하는 데 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사람 안의 리메인스를 결코 버리지 않으시며, 황폐 가운데서도 회복의 가능성을 보존하십니다. 그러므로 황폐는 단순한 파괴나 종말이 아니라, 사람이 주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선택하느냐에 따라 죽음으로도 이어질 수 있고, 새로운 거듭남으로도 이어질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영적 상태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272, 창3: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AC.272-274)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And the thorn and the thistle shall it bring forth unto thee, and thou shalt eat the herb of the field. (창3:18)AC.272‘가시덤불과 엉겅퀴’(the t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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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And the thorn and the thistle shall it bring forth unto thee, and thou shalt eat the herb of the field. (3:18)



AC.272

가시덤불과 엉겅퀴(the thorn and the thistle)는 저주와 황폐(curse and vastation)를 의미합니다. 또한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thou shalt eat the herb of the field)은 사람이 들짐승과 같은 삶을 살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의 속 사람이 겉 사람으로부터 분리, 다만 가장 일반적인 방식으로만 겉 사람에게 작용하게 되면, 사람은 들짐승처럼 살아가게 됩니다. 사람을 사람 되게 하는 것은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받는 것이기 때문이며, 반대로 사람을 들짐승과 같게 하는 것은 겉 사람으로부터 나옵니다. 속 사람과 분리된 겉 사람은 그 자체로는 들짐승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 본성도, 욕망도, 탐욕도, 환상도, 감각도 서로 비슷하며, 그 기관의 구조까지도 비슷합니다. 그럼에도 불구, 사람이 추론할 수 있고, 또 자기 스스로는 매우 예리하게 생각한다 여기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생명의 유입을 받는 영적 실체(spiritual substance)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 안에서는 그 생명이 왜곡, 악의 생명이 되며, 그것이 곧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그를 가리켜 죽은 사람(dead man)이라고 합니다. By the “thorn and the thistle” are meant curse and vastation; and by “thou shalt eat the herb of the field” is signified that he should live as a wild animal. Man lives like a wild animal when his internal man is so separated from his external as to operate upon it only in a most general manner, for man is man from what he receives through his internal man from the Lord, and is a wild animal from what he derives from the external man, which, separated from the internal, is in itself no other than a wild animal, having a similar nature, desires, appetites, fantasies, and sensations, and also similar organic forms. That nevertheless he is able to reason, and, as it seems to himself, acutely, he has from the spiritual substance by which he receives the influx of life from the Lord, which is however perverted in such a man, and becomes the life of evil, which is death. Hence he is called a dead man.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창3:18의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이라는 말씀을 영적 의미로 해석합니다. 그는 먼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단순한 식물이 아니라, 저주와 황폐를 상징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황폐(vastation)란 단순히 무엇인가가 사라지는 상태가 아니라, 선과 진리가 점차 소멸, 영적 생명이 메말라 가는 과정을 뜻합니다. 따라서 가시덤불과 엉겅퀴는 거듭남의 열매 대신 거짓과 악이 자라나는 영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어지는 ‘먹을 것은 밭의 채소’라는 말씀도 단순히 식물성 음식을 먹게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의 AC.270에서 스베덴보리는 ‘먹는다’는 것이 곧 ‘산다’를 의미한다 설명하였습니다. 따라서 ‘먹을 것은 밭의 채소’라는 것은 사람이 더 이상 본래의 인간다운 생명을 살지 못하고, 들짐승과 같은 수준의 삶을 살아가게 됨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육체가 짐승으로 변한다는 뜻이 아니라, 삶의 중심과 질서가 짐승과 다르지 않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는 왜 이러한 사람을 들짐승에 비유할까요? 그 이유는 사람을 진정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몸이나 지능이 아니라,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끊임없이 흘러드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주님과 연결되어 있을 때에는 사랑과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가 됩니다. 그러나 그 연결이 끊어지고 겉 사람만 남게 되면, 사람의 삶은 결국 본능과 욕망, 감각과 자기 보존을 중심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들짐승처럼 산다’ 말하는 이유입니다.

 

여기서 특히 주목할 것은 ‘속 사람이 완전히 사라진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속 사람이 여전히 겉 사람에게 작용하지만, ‘가장 일반적인 방식으로만’ 작용한다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유입은 완전히 끊어지지 않습니다. 다만 사람이 그것을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그 영향은 매우 제한적으로만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은 주님의 사랑이 결코 사람을 떠나지 않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말입니다.

 

또한 스베덴보리는 겉 사람만으로 살아가는 인간은 짐승과 거의 같은 본성을 갖게 된다고 말합니다. 욕망과 탐욕, 감각적 즐거움을 추구하는 성향은 짐승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러한 설명은 인간을 비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주님과의 연결을 잃을 때 무엇을 상실하는지를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사람과 짐승을 근본적으로 구별하는 것은 육체나 지능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영적 생명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스베덴보리는 덧붙입니다. 그런 사람도 여전히 추론할 수 있으며, 자기 자신은 매우 총명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rational이 여전히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rational은 이제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빛을 충분히 받지 못하고, own과 감각을 섬기는 방향으로 사용됩니다. 그래서 논리와 추론은 더욱 정교해질 수 있지만, 그것은 참된 지혜와는 다른 것이 됩니다.

 

마지막 문장은 이 글의 결론입니다. 사람은 여전히 주님으로부터 생명의 유입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생명이 사람 안에서 왜곡, 악의 생명이 되면, 그것은 더 이상 참된 생명이 아니라 영적인 죽음이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죽은 사람(dead man)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상태입니다. 육체는 살아 있지만,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own에 의해 끊임없이 왜곡되고 있기 때문에, 영적으로는 이미 죽은 상태라는 것입니다.

 

AC.272는 사람이 무엇으로 사람이 되는지를 근본적으로 묻는 글입니다.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은 뛰어난 지능이나 논리력이 아니라,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그 연결이 유지될 때 사람은 참된 인간으로 살아가지만, 그 연결이 약해지고 겉 사람만이 삶을 지배하게 되면, 아무리 뛰어난 rational을 가지고 있어도 결국 본능과 욕망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들짐승과 같은 삶에 머물게 됩니다. 그러므로 창세기의 ‘가시덤불’, ‘엉겅퀴’, 그리고 ‘먹을 것은 밭의 채소’라는 말씀은 타락한 인간의 외적 삶을 묘사하는 동시에, 참된 생명은 언제나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통하여 흘러 들어온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일깨워 주는 말씀입니다.

 

 

심화

 

1. ‘황폐(vastation)

 

 

AC.272, 심화 1, ‘황폐’(vastation)

AC.272.심화 1. ‘황폐’(vastation) 여기서 황폐(vastation)란 단순히 무엇인가가 사라지는 상태가 아니라, 선과 진리가 점차 소멸, 영적 생명이 메말라 가는 과정을 뜻합니다. (위 AC.272 해설 중) 스베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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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73, 창3:18, ‘가시덤불과 엉겅퀴’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And the thorn and the thistle shall it bring forth unto thee, and thou shalt eat the herb of the field. (창3:18)AC.273‘가시덤불과 엉겅퀴’(the t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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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71, 창3:17, ‘네 평생에’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창3:17)AC.271‘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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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3:17)



AC.271

네 평생에(all the days of thy life)라는 말이 그 교회의 날들의 끝, 곧 교회의 종말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여기서 다루어지고 있는 대상이 한 개인이 아니라 교회와 그 상태라는 점으로부터 분명합니다. 그 교회의 날들의 끝은 홍수의 때였습니다. That “all the days of thy life” signifies the end of the days of the church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the subject here treated of is not an individual man, but the church and its state. The end of the days of that church was the time of the flood.

 

 

해설

 

AC.271은 창3:17 끝부분에 나오는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는 말씀을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글입니다. 문자적으로 읽으면, 이것은 아담 개인의 남은 생애를 가리키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초반부의 아담과 하와를 한 개인으로 보지 않고, 태고교회(the Most Ancient Church)를 대표하는 표상으로 보기 때문에, 여기서도 ‘평생에’는 개인의 수명이 아니라 교회의 존속 기간 전체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점은 창3 전체를 이해하는 열쇠 가운데 하나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창1과 창2은 태고교회의 형성과 완성을, 창3은 그 교회의 타락 과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아담’은 개인 아담이 아니라 태고교회이며, ‘네 평생’ 역시 한 사람의 일생이 아니라 그 교회가 존재하는 전 기간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는 말씀은 아담 개인이 죽을 때까지 고생한다는 뜻이 아니라, 타락한 태고교회가 종말에 이를 때까지 점점 더 영적 수고와 비참함 가운데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균열로 시작되었던 자기 사랑과 자기 지혜가 세대를 거치면서 점점 커졌고, 결국 교회 전체가 무너지는 지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종말을 ‘홍수(the Flood)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홍수는 단순한 자연재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거짓과 악이 인간 정신을 완전히 압도한 상태를 상징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원래 퍼셉션 가운데 살았지만, 후손들이 점차 자기 지성을 신뢰, 감각을 따라 살게 되면서 마침내 속 사람과 겉 사람 간 연결이 거의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창6과 창7에서 묘사되는 홍수의 영적 의미입니다.

 

따라서 AC.271은 앞의 AC.267-270을 하나의 역사적 흐름 속에 위치시켜 줍니다. ‘땅이 저주를 받고’,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비참함과 불안이 계속되는 상태’는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태고교회가 종말에 이를 때까지 지속된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이 바로 홍수였습니다.

 

더 깊이 보면,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말씀의 독특한 시간 개념도 보여줍니다. 말씀에서 ‘(days)은 흔히 시간 자체보다 상태(states)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네 평생에’는 단순한 연대기적 기간이 아니라, 그 교회가 겪어야 할 영적 상태 전체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타락이 시작된 이후부터 완전한 종말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상태를 포함하는 표현입니다.

 

AC.271의 핵심은, 창3의 심판 선언들이 아담 개인에 대한 형벌이 아니라 태고교회 전체의 쇠퇴와 종말에 대한 예언이라는 것입니다. ‘네 평생에’는 한 사람의 남은 생애가 아니라, 타락한 교회가 홍수라는 최종 종말에 이를 때까지의 전 역사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 글은 창3이 개인의 범죄 이야기가 아니라 교회의 흥망성쇠를 기록한 거대한 영적 역사서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고 있는 것입니다.

 

 

 

AC.272, 창3: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AC.272-274)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And the thorn and the thistle shall it bring forth unto thee, and thou shalt eat the herb of the field. (창3:18)AC.272‘가시덤불과 엉겅퀴’(the t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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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70, 창3:17,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창3:17)AC.270‘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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