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In the sweat of thy face shalt thou eat bread, till thou return unto the ground; for out of it wast thou taken; for dust thou art, and unto dust shalt thou return. (3:19)



AC.240

 

다음으로는 그들이 신앙(faith)과 사랑(love)에 속한 모든 것에 혐오(aversion)를 갖게 된 상태가 묘사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 인간(man)이었으나 더 이상 인간이 아니게 되었다는 사실도 묘사됩니다. (19) Next, their aversion to everything of faith and love; and that thus from being man they became not men. (verse 19)

 

 

해설

 

이 글은 AC.239의 연장선에 있으며, 태고교회 후손들의 타락이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매우 엄중한 말씀입니다. 앞에서는 저주(curse), 황폐(vastation), 그리고 짐승 같은 본성(ferine nature)이 언급되었습니다. 이제는 그 결과로 나타난 영적 상태가 설명됩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그들이 ‘신앙과 사랑에 속한 모든 것에 혐오를 갖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신앙이 약해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진리를 의심했고, 다음에는 자기 이성을 더 신뢰했으며, 그 후에는 진리를 부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한 단계 더 나아가, 이제는 신앙과 사랑 자체를 싫어하게 된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은 영적 세계의 중요한 법칙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사람이 진리를 거부하는 상태에 오래 머물면, 나중에는 진리 자체를 불편해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자기 사랑에 깊이 빠질수록 체어리티(charity)와 이웃 사랑은 부담스럽고 거슬리는 것으로 느껴지게 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단순한 무관심이었던 것이 점차 반감으로, 그리고 마침내 혐오로 발전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를 매우 심각하게 봅니다. 왜냐하면 인간을 인간 되게 하는 것은 바로 신앙과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외형이나 지능, 언어 능력이 인간성을 결정하는 게 아닙니다. 천국 관점에서는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 그리고 그것과 결합된 신앙이 인간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이었으나 더 이상 인간이 아니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것은 육체적으로 인간이 아니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은 여전히 사람처럼 말하고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영적인 의미에서는 인간성의 본질을 잃어버렸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 전체를 보면, 그는 인간(homo)을 ‘주님의 형상과 모양을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로 정의합니다. 따라서 사람이 주님과의 연결을 끊고, 사랑과 신앙을 거부하며,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만을 추구하게 되면, 외적으로는 인간일지라도 내적으로는 더 이상 참된 의미의 인간이 아니게 됩니다.

 

이 점은 AC.239에서 언급된 ‘짐승 같은 본성’과도 연결됩니다. 짐승은 본능에 따라 살아갑니다. 그러나 인간은 주님의 진리와 사랑에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창조되었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그 높은 차원을 잃어버리고 본능과 욕망만을 따라 살게 되면, 영적으로는 인간성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AC.240은 단순한 도덕적 비난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 존재의 본질에 관한 말씀입니다. 인간은 단순히 생각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인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에 인간입니다. 그래서 신앙과 사랑에 대한 혐오가 생기면, 바로 그 인간성의 핵심이 무너지게 됩니다.

 

따라서 AC.240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단순히 몇 가지 진리를 잃어버린 게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신앙과 사랑 자체를 싫어하게 되었고, 그 결과 영적 의미에서 인간성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들을 가리켜 ‘인간이었으나 더 이상 인간이 아니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타락의 최종 단계가 단순한 지적 오류가 아니라 인간 본성 자체의 변질임을 보여주는 매우 깊은 말씀입니다.

 

 

 

AC.241, 창3:14-19, ‘배경’

배경AC.241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천적 인간(celestial men)이었기 때문에, 세상이나 땅 위의 어떤 사물을 보더라도 단지 그것만 보는 게 아니라, 그 사물이 의미하거나 표상하는 천적이고 신적인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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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39, 창3:14-19, ‘18절 개요’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And the thorn and the thistle shall it bring forth unto thee, and thou shalt eat the herb of the field. (창3:18)AC.239 저주(curse)와 황폐(vastation)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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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And the thorn and the thistle shall it bring forth unto thee, and thou shalt eat the herb of the field. (3:18)



AC.239

 

저주(curse)와 황폐(vastation)가 묘사되며, 또한 그들의 짐승 같은 본성(ferine nature)도 묘사됩니다. (18) The curse and vastation are described, and also their ferine nature. (verse 18)

 

 

해설

 

이 글은 매우 짧지만, 창3:18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전체 해설 방향을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는 여기서 세 가지를 언급합니다. 곧 저주(curse), 황폐(vastation), 그리고 짐승 같은 본성(ferine nature)입니다.

 

먼저 ‘저주’는 주님께서 어떤 사람을 미워하시거나 벌을 내리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AC.223 등에서 반복해서 보았듯이, 주님은 결코 얼굴을 돌리지 않으시며, 언제나 자비와 평화 가운데 계십니다. 따라서 저주란 인간이 스스로 주님의 질서에서 벗어났을 때 나타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주님과의 연결이 약해질수록 인간 안의 선과 진리가 점점 말라 가는 상태가 바로 저주입니다.

 

다음으로 ‘황폐(vastation)는 더욱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황폐란 단순히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게 아니라, 본래 가지고 있던 선과 진리가 점차 제거되어 텅 비게 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처음부터 완전히 악한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밝은 지각(perception)을 가지고 있었고, 주님과의 살아 있는 연결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사랑과 감각의 지배를 받아들이면서 그 선과 진리가 하나씩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AC.239는 바로 그 과정을 ‘황폐’라는 단어로 표현합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눈에 띄는 표현은 ‘짐승 같은 본성(ferine nature)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거칠고 난폭한 성격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ferine’은 야생 짐승 같은, 본능에 지배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원래 인간은 주님의 사랑과 진리에 의해 인도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잃어버리면 점차 더 낮은 수준의 욕망과 충동에 의해 움직이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과 짐승의 가장 큰 차이를 이성 그 자체가 아니라, 주님을 향해 열릴 수 있는 능력에서 찾습니다. 그런데 AC.238에서 보았듯이 이성이 추론(ratiocination)으로 타락하고, AC.239에서 선과 진리가 황폐되기 시작하면, 인간은 점점 더 본능과 욕망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이것이 ‘짐승 같은 본성’입니다.

 

물론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사람이 실제 동물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외적으로는 여전히 인간처럼 생각하고 말하지만, 내적으로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의해 움직이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그는 다른 곳에서도 자기 사랑에 완전히 지배된 사람들을 영적으로는 맹수나 독사와 비슷한 상태로 설명하곤 합니다.

 

따라서 AC.239는 창3의 타락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중간 요약과 같습니다. 주님의 질서에서 벗어난 결과로 저주가 생기고, 그 저주로 인해 선과 진리가 황폐되며, 그 결과 인간은 점점 더 영적인 인간이 아니라 본능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존재가 되어 갑니다.

 

이처럼 AC.239는 단순히 형벌을 설명하는 구절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멀어질 때, 어떤 영적 변화가 일어나는지를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저주는 그 결과이고, 황폐는 그 과정이며, 짐승 같은 본성은 그 최종적인 모습인 것입니다.

 

 

 

AC.240, 창3:14-19, ‘19절 개요’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In the sweat of thy face shalt thou eat bread, till th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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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38, 창3:14-19, ‘17절 개요’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And unto the man he 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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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And unto the man he said, Because thou hast hearkened unto the voice of thy wife, and hast eaten of the tree of which I commanded thee, saying, Thou shalt not eat of it; cursed is the ground for thy sake; in great sorrow shalt thou eat of it all the days of thy life. (3:17)



AC.238

 

그다음에는 이성(rational)의 상태가 어떻게 되었는지가 묘사됩니다. 곧 그것이 동의(consent)하였고, 그 결과 스스로를 저주하였으며, 지옥(infernal)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참된 이성(reason)은 남아 있지 않고, 단지 추론(ratiocination)만 남게 되었습니다. (17) The quality of the rational is then described, in that it consented, and thus cursed itself, and became infernal, so that reason no longer remained, but ratiocination. (verse 17)

 

 

해설

 

이 글은 AC.237의 연속입니다. 앞 구절에서는 교회를 의미하는 ‘여자’가 own을 사랑하게 되어 진리를 파악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여자를 다스려야 했던 ‘이성(rational) 자체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설명합니다.

 

원래 이성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을 받아 진리를 분별하는 능력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참된 이성(reason)은 자기 스스로 진리를 만들어 내는 능력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능력입니다. 따라서 이성은 주님의 빛 아래 있을 때 가장 건강하게 작용합니다.

 

그런데 이성은 의지와 애정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것을 막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에 동의(consent)하였습니다. 이것이 결정적인 타락입니다. 감각이 먼저 유혹했고, 의지가 그것을 좋아했으며, 마지막으로 이성이 그것을 정당화한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성이 스스로를 저주하였다’고 말합니다. 이것 역시 주님께서 저주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성이 자신의 본래 기능을 버리고, 자기 사랑과 감각의 종이 되었기 때문에, 스스로 지옥 상태로 떨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reason’과 ‘ratiocination’의 차이입니다. 한국어로는 둘 다 ‘이성’ 또는 ‘추리’로 번역되기 쉽지만, 스베덴보리는 두 단어를 엄격히 구분합니다.

 

Reason’은 주님의 빛 안에서 진리를 분별하는 참된 이성입니다. 반면 ‘ratiocination’은 이미 결론을 정해 놓고,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논리를 사용하는 추론입니다. 다시 말해, reason은 진리를 찾기 위해 생각하지만, ratiocination은 자기 생각을 옹호하기 위해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겸손한 사람은 ‘무엇이 진리인가?’를 묻습니다. 이것은 reason입니다. 그러나 자기 사랑에 사로잡힌 사람은 ‘내 생각이 왜 옳은가?’를 증명하려 합니다. 이것은 ratiocination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타락 이후 인간에게 이성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참된 이성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끝없는 추론과 논쟁이 대신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 점에서 AC.238AC.229-233의 내용을 한 단계 더 발전시킨 것입니다. 처음에는 감각을 신뢰했고, 다음에는 own을 사랑했으며, 이제는 그 잘못된 사랑을 이성이 정당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인간은 진리를 찾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변호하는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타락한 인간의 가장 큰 문제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잘못된 전제 위에서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성을 진리를 향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사랑을 보호하기 위해 사용합니다.

 

이것이 AC.238의 핵심입니다.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단순히 의지가 타락한 것이 아니라, 이성까지도 그 타락에 동의하였습니다. 그 결과 더 이상 참된 의미의 이성(reason)은 남아 있지 않고,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는 추론(ratiocination)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것을 인간 정신이 지옥 상태로 떨어지는 중요한 단계 가운데 하나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AC.239, 창3:14-19, ‘18절 개요’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And the thorn and the thistle shall it bring forth unto thee, and thou shalt eat the herb of the field. (창3:18)AC.239 저주(curse)와 황폐(vastation)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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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37, 창3:14-19, ‘16절 개요’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And unto the woman he said, I will greatly m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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