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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자살

 

자살의 경우, 사후 이 사람은 참 괜찮은 삶을 살았는데 순간 판단 실수로 자살했으니 정상 참작의 여지가 있다 하여 구원받는 경우가 있나요?

 

 

네, 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저작들을 종합해 보면, 오히려 그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죽었는가’가 아니라 ‘어떤 사람으로 살았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사후에 들어가는 상태는 죽는 마지막 몇 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평생 형성된 지배적인 사랑(dominant love)에 의해 결정된다고 여러 곳에서 설명합니다. 죽음은 그 상태를 드러내는 계기이지, 그것을 새로 만들어 내는 사건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평생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위해 살았으며, 선량한 양심을 가지고 살아온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극심한 육체적 고통이나, 정신적 혼란, 극도의 절망 속에서 순간적으로 자살했다면,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그 한순간만으로 그의 평생의 내적 상태가 모두 무효가 되었다고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후에 그는 처음 며칠 동안 천사들의 보호를 받으며 점차 평정을 되찾고, 지상에서 마지막 순간에 있었던 혼란과 고통에서 벗어나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AC.182 이하에서 보듯이, 주님은 사람이 죽는 순간의 충격 속에서도 사랑의 가장 내적인 부분을 보호하십니다. 그 보호는 죽음의 방식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 무엇이 살아 있었는가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반대로 자살하지 않았다고 해서 모두 천국에 가는 것도 아닙니다. 평생 악한 삶을 살다가 자연사한 사람과, 평생 선하게 살다가 마지막에 극도의 절망 속에서 자살한 사람을 비교한다면, 스베덴보리의 기준은 사망 원인이 아니라 평생 형성된 사랑입니다.

 

이 점은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부분입니다. 역사적으로 일부 교회에서는 자살을 ‘용서받을 수 없는 죄’처럼 가르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런 식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사후 세계에서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을 언제나 그 사람의 전체 삶과 의지의 방향에 둡니다.

 

물론 이것이 자살을 가볍게 여긴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자살은 매우 비극적인 일이며, 많은 경우 깊은 절망과 혼란 속에서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 비극 자체가 곧 영원한 정죄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일반 교인들에게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사람이 어떻게 죽었는지만 보시는 분이 아니라, 어떤 사람으로 살아왔는지를 보십니다. 어떤 이는 순간의 극심한 절망 속에서 자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 안에 평생 주님을 향한 사랑과 선한 양심이 살아 있었다면, 주님께서는 그것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사후에는 지상의 혼란에서 벗어나 참된 상태가 드러나며, 모든 판단은 완전한 공의와 동시에 완전한 자비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이 답변은 AC.182 이하에서 보이는 ‘죽은 직후 이어지는 천사들의 보호’, HH에서 반복되는 ‘지배적 사랑에 따른 사후 상태’, 그리고 스베덴보리 전체 신학의 큰 원리와도 잘 일치합니다. 오히려 이런 관점은 유가족들에게도 막연한 정죄가 아니라, 주님의 공의와 자비를 함께 바라보게 하는 매우 중요한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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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가룟 유다

 

가룟 유다의 죄는 profanation으로 보아야 하나요?

 

 

스베덴보리의 profanation 개념에 비추어 보면, 가룟 유다의 죄는 단순한 배신을 넘어 profanation의 성격을 매우 강하게 지닌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다만 ‘유다라는 개인의 영원한 내적 상태가 profanation의 최종 단계였다’고 우리가 단정하기보다는, ‘복음서에 기록된 그의 행위가 profanation을 대표적으로 드러낸다’고 설명하는 편이 정확하고 안전합니다.

 

가룟 유다는 단순히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들은 외부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주님께 직접 부름받은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였고, 주님의 말씀을 들었으며, 주님의 이적과 삶을 가까이에서 보았습니다. 또한 다른 제자들과 함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치는 권능까지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거룩한 것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 채 범죄한 사람이 아니라, 매우 가까운 자리에서 주님의 거룩하심을 접하고, 어느 정도 인정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바로 그 거룩한 관계를 이용하여 주님을 넘겨주었습니다. 특히 배신의 표로 ‘입맞춤’을 사용했다는 점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입맞춤은 본래 사랑과 친교, 결합을 표시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유다는 사랑의 표지를 배신의 신호로 바꾸었습니다. 겉으로는 주님께 가까이 다가가 사랑과 존경을 표시하면서, 속으로는 주님을 원수들에게 넘겨주고 있었습니다. 거룩한 표상과 악한 의도를 하나의 행위 안에 결합했다는 점에서, 이는 profanation의 구조를 매우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또한 은 삼십을 받고 주님을 판 것은 단순히 스승 한 사람을 배신한 사건만이 아닙니다. 유다는 자신이 가까이에서 알고 따랐던 주님을 세속적 이익과 맞바꿨습니다. 다시 말해, 거룩한 것을 탐욕 아래에 두고, 주님과의 관계를 돈을 얻는 수단으로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거룩한 것을 부정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거룩한 것을 악한 사랑에 종속시킨 일이므로 profanation의 성격을 가집니다.

 

그러나 여기서 구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가룟 유다의 ‘행위’가 profanation의 표본이라는 것과, 그의 내면 전체와 사후의 영원한 상태를 우리가 확정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profanation은 단 한 번의 외적 행동만으로 기계적으로 판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거룩한 것을 얼마나 알고 인정했으며, 그것을 어떤 의도에서 악과 결합했는가 하는 내적 상태와 관련됩니다. 그 깊이는 오직 주님만 아십니다.

 

유다가 뒤에 뉘우쳐 은 삼십을 돌려주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도 신중히 보아야 합니다. 그의 후회가 참된 회개였는지, 아니면 자신이 저지른 일의 결과와 공포를 견디지 못한 절망이었는지는 복음서의 기록만으로 완전히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참된 회개는 악을 미워하고 주님께 돌아가는 것이지만, 절망은 자기 행위의 결과에 압도되어 자신을 파괴하는 방향으로 흐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마지막 행동만으로 구원이나 멸망을 단정해서도 안 됩니다.

 

설교나 교인들과의 대화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면 좋겠습니다. ‘가룟 유다의 배신은 일반적인 세속적 배신과 다릅니다. 그는 주님을 가까이에서 알고 따랐으며, 사랑의 표인 입맞춤을 사용하여 주님을 팔았습니다. 따라서 그의 행위는 거룩한 것을 탐욕과 배신에 결합한 것으로서 profanation을 대표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러나 유다 개인의 내면과 영원한 운명에 대한 최종 판단은 주님께 속합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유다만을 정죄하는 데서 끝내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유다의 사건은 오늘날에도 사람이 주님의 이름과 말씀, 그리고 교회의 신뢰를 자기 명예, 재물, 권력의 수단으로 사용할 때 동일한 profanation의 방향으로 갈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가룟 유다의 죄가 두려운 까닭은 그가 멀리서 주님을 미워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 곁에 있으면서 그 거룩한 가까움을 악을 이루는 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점이 AC.301의 경고와 깊이 맞닿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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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태고교회 후손들

 

태고교회 후손들은 비록 타락은 했어도 종교적이었나 봅니다. 타락 후 바로 profanation 문제가 대두되는 걸 보면 말입니다.

 

 

네, 바로 그 점을 보신 것이 맞습니다. 태고교회 후손들은 타락했다고 해서 곧바로 무신론자나 비종교인이 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여전히 태고교회로부터 전해 내려온 거룩한 지식과 천국에 관한 인식, 주님에 관한 가르침, 선과 진리의 내적 의미를 어느 정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런 거룩한 것들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자기애와 감각적 욕망 아래로 끌어내려 섞기 시작했다는 데 있었습니다.

 

태고교회는 본래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을 통해 선과 진리를 직접 지각하던 교회였습니다. 그러므로 그 후손들은 단순히 교리 몇 가지를 머리로 배운 정도가 아니라, 천국과 영적 생명에 관한 매우 깊은 인식의 유산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비록 세대가 지나면서 퍼셉션 자체는 점차 사라졌어도, 그 퍼셉션에서 비롯된 지식과 표상, 예배 형태와 거룩한 전승은 상당 기간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그들의 타락은 단순한 무지나 야만화가 아니라, 이미 알고 있던 거룩한 것들을 자기중심적 추론과 욕망에 종속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되었습니다.

 

3에서 뱀이 여자에게 말을 걸고, 여자가 나무의 열매에 관하여 대답하며, 마침내 사람이 선악을 아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과정도 이를 보여줍니다. 그들은 거룩한 것에 관하여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명령도 알고 있었고, 생명나무가 뜻하는 천적 생명의 질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지각하는 대신 감각과 memory-knowledge를 출발점으로 삼아 거룩한 것들을 판단하려 했습니다. 타락은 종교 자체를 버리는 것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종교적이고 거룩한 것을 proprium의 지배 아래 놓는 것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타락 직후 profanation의 위험이 곧바로 대두됩니다. 그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면 profanation의 위험도 그만큼 크지 않았을 것입니다. profanation은 거룩한 것을 알고 인정한 사람이 그것을 악과 결합할 때 성립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생명나무의 길이 막힌 것은 이미 충분히 거룩한 것을 알고 있던 상태에서 더 깊은 천적 아르카나까지 접하게 될 경우, 그것마저 자기애와 거짓에 섞어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이를 위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태고교회 후손들의 타락은 오늘날 흔히 생각하는 종교의 상실과는 다릅니다. 그들은 종교를 버렸다기보다 종교를 변질시켰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대신 자신을 높이기 위해 거룩한 것을 사용했고, 천국의 질서를 따르는 대신 자신의 욕망을 정당화하는 데 영적 지식을 동원했습니다. 외형상으로는 여전히 예배와 거룩한 말, 그리고 종교적 표상을 간직했을 수 있지만, 그 안의 중심은 주님 사랑에서 자기 사랑으로 바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창3:22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라는 말씀은 단순히 사람이 지식을 많이 얻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지각하던 사람이 이제 그것들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판단하고 결정하려 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거룩한 영역을 떠난 것이 아니라 거룩한 영역 안에서 자기 자신을 주인으로 세우려 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profanation으로 이어질 수 있는 가장 위험한 문턱이었습니다.

 

따라서 말씀하신 대로, 태고교회 후손들은 타락한 뒤에도 매우 종교적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다만 그 종교성은 점차 주님을 향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한 종교성으로 변해 갔습니다. 그들은 거룩한 것을 부정해서만 타락한 것이 아니라, 거룩한 것을 붙들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proprium과 결합했기 때문에 더욱 위험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룹과 두루 도는 불칼은 단순히 죄인을 낙원 밖에 가두는 형벌이 아니라, 거룩한 것의 마지막 깊이까지 profanation하지 못하도록 막으시는 주님의 자비로운 섭리였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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