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1:31)

 

AC.62

 

인간의 거듭남에 속한 시간들과 상태들은, 일반적으로도, 그리고 개별적으로도 여섯 단계로 나눌 수 있으며, 이것들을 그의 창조의 날들(the days of his creation)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사람이 전혀 인간이라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출발, 처음에는 겨우 인간의 어떤 모습이 생기고,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 마침내 여섯째 날에 이르러 하나님의 형상(an image of God)이 되기 때문입니다. The times and states of man’s regeneration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are divided into six, and are called the days of his creation; for, by degrees, from being not a man at all, he becomes at first something of one, and so by little and little attains to the sixth day, in which he becomes an image of God.

 

 

해설

 

이 글은 창세기 1장의 ‘여섯 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가장 직접적으로 요약해 주는 핵심 문장 가운데 하나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이 시간의 길이나 역사적 연대를 뜻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합니다. 여섯 날은 인간 안에서 일어나는 거듭남의 상태들, 곧 영적 형성의 단계들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창조 이야기를 인간 내면의 재창조 이야기로 읽는 열쇠를 제공합니다.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여섯 단계가 ‘일반적으로도, 그리고 개별적으로도’ 적용된다는 점입니다. 이는 두 가지 의미를 함께 담고 있습니다. 하나는 인류 전체의 영적 역사 속에서도 이 여섯 단계가 반복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한 사람의 삶, 더 나아가 한 사람의 신앙 여정 속에서도 동일한 구조가 끊임없이 되풀이된다는 뜻입니다. 거듭남은 한 번에 완결되는 사건이 아니라, 전 생애에 걸쳐 세부적으로 반복되는 과정입니다.

 

이 글에서 특히 강하게 드러나는 표현은 ‘처음에는 전혀 인간이라 할 수 없는 상태’라는 말입니다. 이는 육체적 인간을 부정한다는 뜻이 아니라, 영적 의미에서의 인간을 말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참된 ‘인간’이란,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아 살아가는 존재를 의미합니다. 그 기준에서 볼 때, 거듭남 이전의 인간은 아직 인간의 본질을 갖추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는 생각하고 행동하지만, 그 근원은 자기 본성과 자기 사랑에 묶여 있습니다.

 

그래서 첫 단계에서 인간은 ‘겨우 인간의 어떤 모습’이 됩니다. 이는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가능성이 열리기 시작한 상태입니다. 빛이 비치기 시작, 선과 진리가 자기 것과 다르다는 사실을 희미하게 인식하는 단계입니다. 이때 인간은 아직 흔들리고 불안정하지만, 더 이상 완전히 닫힌 존재는 아닙니다.

 

조금씩 조금씩’이라는 표현은 거듭남의 본질을 정확히 짚어 줍니다. 거듭남은 급격한 도약이 아니라, 점진적 형성입니다. 이해가 먼저 열리고, 그다음 의지가 움직이며, 이 둘이 여러 번의 갈등과 반복을 거쳐 서서히 결합합니다. 이 과정에서 실패와 후퇴도 포함되며, 그 모든 것이 여섯 날이라는 구조 안에 포함됩니다.

 

여섯째 날에 이르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 됩니다. 여기서 형상이란, 주님을 닮았다는 외형적 의미가 아니라, 이해와 의지가 질서 있게 결합,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삶 전체를 다스리는 상태를 뜻합니다. 즉, 진리를 알 뿐 아니라 사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진리를 행하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여섯째 날의 핵심이며, 창조의 완성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여섯째 날이 끝이라고 해서 과정이 멈추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여섯째 날은 형상의 완성이며, 일곱째 날은 안식의 상태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이 글은 거듭남의 목적지를 제시하는 동시에, 그 여정이 얼마나 섬세하고 단계적인지를 분명히 보여 줍니다. 인간은 단번에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존재가 아니라, 날마다 다시 창조되어 가는 존재라는 것이 이 한 문장에 압축되어 있습니다.

 

 

심화

 

1.여섯째 날은 형상의 완성, 일곱째 날은 안식의 상태

 

 

AC.62, 심화 1, ‘여섯째 날은 형상의 완성, 일곱째 날은 안식의 상태’

AC.62.심화 1. ‘여섯째 날은 형상의 완성, 일곱째 날은 안식의 상태’ 위 해설 결론 부분, ‘여섯째 날은 형상의 완성이며, 일곱째 날은 안식의 상태로 이어집니다.’를 설명해 주세요. 만일, 모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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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처음부터 타고나는가?’

 

 

AC.62, 심화 2, ‘처음부터 타고나는가?’

AC.62.심화 2. ‘처음부터 타고나는가?’ 그럼, 처음부터 ‘영적 천국’에 갈 사람과 ‘천적 천국’에 갈 사람은 타고나는 거군요. ‘영적’으로 태어난 사람이 ‘천적’이 될 수는 없는 거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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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변화의 가능성, 완성의 방식

 

 

AC.62, 심화 3, ‘변화의 가능성, 완성의 방식’

AC.62.심화 3. ‘변화의 가능성, 완성의 방식’ 음... 위 설명은 좀 서로 충돌하는 것 같아요. ‘사랑이 중심이 되는 상태까지는 갈 수 있지만, 그 구조와 본질은 여전히 영적 방식 위에 있다’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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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변화의 가능성, 완성의 방식

 

 

AC.62, 심화 4, ‘천적 인간은 상대적으로 무척 적겠네요?’

AC.62.심화 4. ‘천적 인간은 상대적으로 무척 적겠네요?’ 그러면... 천적 인간은 상대적으로 무척 적겠어요. 천성적으로 ‘사랑스런’ 사람, 처음부터 사랑으로 출발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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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곱 번째 상태에 이르는 이는 거의(scarcely) 없습니다

 

 

AC.62, 심화 5, ‘일곱 번째 상태에 이르는 이는 거의(scarcely) 없습니다’

AC.62.심화 5. ‘일곱 번째 상태에 이르는 이는 거의(scarcely) 없습니다’ ‘천적 인간’, 곧 ‘일곱째 날’에 대한 위와 같은 생각은 AC.13, ‘거듭남 과정 중인 모든 사람이 이 상태에 이르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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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3, 창1:31, '여섯째 날이 어떤 상태인지, 그리고 그 상태가 어떻게 완성되는지'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1:31) AC.63 그동안 주님은 계속해서 인간을 위하여 악과 거짓에 맞서 싸우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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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1, 창1:31, 영적(靈的, spiritual), 천적(天的, celestial)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1:31) AC.61 신앙에 관한 지식에 속하는 모든 것은 영적(靈的, spiritual)이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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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1.심화

 

1. understanding에 대한 번역

 

understanding에 대한 번역으로 저는 단순히 이해’(理解)를 선호합니다. 이해력’, 사고력 등 여러 번역이 있고, 그 이유와 배경이 충분히 이해되지만 말입니다.  이해라는 번역이 많이 낯설어 꼭 다른 번역이 필요하다면, 저는 이해하는 능력으로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때는 의지 또한 의도하는 능력으로 같이 바꾸고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목사님께서 understanding’을 이해’로 두시려는 방향은 충분히 타당하고, 오히려 AC 전체를 일관되게 읽어 나가는 데에도 좋은 선택입니다. 다만 핵심은 이해’를 단순한 결과(알아진 상태)가 아니라 작동하는 기능(능력)’으로 읽히도록 어떻게 보완하느냐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해’로 두되, 필요할 때 이해하는 능력’으로 풀어 주시는 방식은 매우 균형 잡힌 접근입니다.

 

먼저 왜 이해’가 낯설게 느껴지는지를 짚어보면 분명해집니다. 한국어에서 이해’는 보통 이미 알아버린 상태’, 즉 결과로 느껴집니다. 반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understanding’은 단순히 알고 있음’이 아니라, ‘판단하고,분별하고, 받아들이고, 연결하고, 형성하는 살아 있는 기능’입니다. 그래서 번역자들이 이해력’, ‘지성’, ‘사고력 같은 표현을 고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번역들도 완벽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이해력’은 능력은 살리지만 딱딱하고, ‘지성’은 철학적으로 들리고, ‘사고력’은 범위가 너무 넓어집니다. 반면 이해’는 가장 자연스럽고, 성경 읽는 흐름에도 잘 붙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처럼 이해’를 기본으로 두고, 독자가 오해할 수 있는 지점에서만 이해하는 능력’으로 풀어 주는 방식이 실제 목회와 설교에서는 매우 유익합니다.

 

이제 의지’와의 짝을 보시면 더 또렷해집니다. 스베덴보리의 구조는 항상 understanding - will’입니다. 이것을 이해 - 의지’로 두면 간결하고 좋습니다. 그런데 이 둘이 기능’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을 때는 이해하는 능력 - 의도하는 능력’으로 풀어 주는 것도 아주 정확한 접근입니다. 특히 처음 접하는 분들에게는 이 설명이 훨씬 와닿습니다.

 

다만 한 가지 조심하실 점이 있습니다. 매번 이해하는 능력’, ‘의도하는 능력’으로 풀면 문장이 무거워집니다. 그래서 가장 좋은 방식은 이렇게 보입니다. 기본 텍스트에서는 이해 - 의지’를 유지하고, 처음 설명할 때 한 번만 여기서 이해는 단순한 앎이 아니라 이해하는 능력입니다’라고 풀어 주고, 이후에는 자연스럽게 이해’로 계속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독자와 청중 모두에게 가장 부담이 적습니다.

 

이걸 실제 설교 흐름으로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처음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여기서 이해는 단순히 아는 것이 아니라, 판단하고 분별하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의지는 단순한 의욕이 아니라, 무엇을 원하고 선택하는 능력입니다.’ 이렇게 한 번만 정확히 잡아 주면, 이후에는 이해’와 의지’만 써도 청중이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그래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이해’라는 번역은 충분히 적절하며, 다만 그것이 살아 있는 기능’이라는 점을 초기에만 분명히 밝혀 주면 됩니다. 그리고 필요할 때 이해하는 능력’으로 풀어 주는 것은 매우 좋은 보완 방식입니다. ‘의지 - 의도하는 능력’과의 짝도 구조적으로 잘 맞습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understanding 이해로 번역하는 것은 적절하며, 다만 그것이 단순한 결과가 아니라 이해하는 능력이라는 점을 보완 설명으로 살려 주는 것이 가장 균형 잡힌 방법입니다.’

 

 

 

AC.61, 창1:31, 영적(靈的, spiritual), 천적(天的, celestial)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1:31) AC.61 신앙에 관한 지식에 속하는 모든 것은 영적(靈的, spiritual)이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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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1:31)

 

AC.61

 

신앙에 관한 지식에 속하는 모든 것은 영적(靈的, spiritual)이라 하고,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 속한 모든 것은 천적(天的, celestial)이라 합니다. 전자는 인간의 이해(understanding)에 속하고, 후자는 그의 의지(will)에 속합니다. All things relating to the knowledges of faith are called spiritual, and all that are of love to the Lord and our neighbor are called celestial; the former belong to man’s understanding, and the latter to his will.

 

 

해설

 

이 글은 스베덴보리의 인간론과 거듭남 교리를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결정적인 구분’을 아주 간결하게 제시합니다.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의 구분은 단순한 단계 차이나 신앙 수준의 차이가 아니라, 인간 안에 존재하는 두 근본 능력, 곧 이해와 의지의 차이에 근거합니다. 이 구분을 놓치면 이후 AC 전반의 논의가 흐릿해집니다.

 

먼저, ‘영적인 것’이란 신앙에 관한 지식들, 곧 진리가 무엇인지 알고 분별하며 이해하는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 여기에는 교리, 말씀에 대한 인식, 선과 악, 참과 거짓을 가르는 사고의 능력이 포함됩니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의 이해에 속합니다. 이해는 빛의 영역에 가깝고, 사물을 드러내고 구별하며 설명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영적인 것은 ‘아는 것’, ‘깨닫는 것’, ‘분별하는 것’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반면 ‘천적인 것’은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데 속한 모든 것을 말합니다. 이는 단순한 감정이나 호의가 아니라, 삶의 중심이 어디에 놓여 있는가, 무엇을 기꺼이 행하려 하는가와 관련된 영역입니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의 의지에 속하며, 의지는 열의 영역에 가깝습니다. 의지는 움직이게 하고, 선택하게 하며, 실제 행동을 낳는 근원입니다. 그래서 천적인 것은 ‘사랑하는 것’, ‘원하는 것’, ‘즐거워하는 것’과 연결됩니다.

 

이 구분에서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가 영적인 것을 낮게 보거나, 천적인 것을 단순히 ‘더 좋은 영적 상태’로 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는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을 ‘기능적으로 구별’합니다. 영적인 것은 진리를 받아들이는 그릇이고, 천적인 것은 그 진리에 생명을 부여하는 원천입니다. 이해는 방향을 제시하고, 의지는 그 방향으로 실제로 걷게 합니다.

 

이 때문에 거듭남의 과정에서 사람은 먼저 영적인 상태를 거치게 됩니다. 즉, 진리를 배우고, 신앙의 지식들을 이해 안에 쌓아 가는 단계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단계에만 머물면 사람은 여전히 영적 인간에 머물며, 천적 인간이 되지는 못합니다. 천적 상태란, 그 이해한 진리가 의지 속으로 내려와 사랑이 되고, 삶의 동력이 되는 상태입니다.

 

AC.61은 바로 이 점을 분명히 합니다. 신앙에 관한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그것이 이해에만 머물러 있고 의지로 내려오지 않으면, 그것은 여전히 영적 차원에 머무는 것입니다. 반대로 사랑이 의지에 자리 잡으면, 그 사랑은 이해를 통해 진리를 찾고 받아들이며, 진리는 다시 사랑을 섬기는 형태로 작동합니다. 이때 비로소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이 하나로 결합합니다.

 

그래서 이 짧은 문장은 단순한 정의가 아니라, ‘인간 내적 구조의 지도’를 제공합니다. 무엇이 이해에 속하는지, 무엇이 의지에 속하는지를 분별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자신의 신앙이 아직 ‘영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는지, 아니면 ‘천적인 방향’으로 실제로 이동하고 있는지를 살필 수 있게 됩니다. AC 전체에서 반복되는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구분은 바로 이 이해와 의지, 신앙과 사랑의 구분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심화

 

1.understanding에 대한 번역

 

 

AC.61, 심화 1, ‘understanding’에 대한 번역

AC.61.심화 1. ‘understanding’에 대한 번역 ‘understanding’에 대한 번역으로 저는 단순히 ‘이해’(理解)를 선호합니다. ‘이해력’, ‘사고력’ 등 여러 번역이 있고, 그 이유와 배경이 충분히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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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2, 창1:31, '여섯째 날'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1:31) AC.62 인간의 거듭남에 속한 시간들과 상태들은, 일반적으로도, 그리고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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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0, 창1:31, ‘심히 좋았더라’(AC.60-63)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And God saw everything that he had made, and behold it was very good.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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