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영접 기도’ 안 하면 구원 못 받나

 

‘예수님을 영접하려면 이렇게 따라 기도하세요.’ 복음주의 교회에서 전도집회나 개인전도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매우 익숙한 장면입니다. ‘주 예수님, 저는 죄인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믿습니다. 지금 제 마음에 들어오셔서 저의 구주와 주님이 되어 주십시오.’ 표현은 조금씩 다르지만 흔히 ‘영접 기도’라고 부르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 자체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주님을 믿으며 앞으로 주님을 따르겠다고 진심으로 고백한다면 그것은 매우 귀한 회심의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 기도가 어느 순간 ‘구원이 성립되는 공식적인 절차’처럼 이해될 때 생깁니다. ‘나는 언제 영접 기도를 했으니까 구원받았다’, 혹은 반대로 ‘저 사람은 예수님을 좋아하고 성경 말씀대로 살려고 하지만 영접 기도를 정확하게 한 적이 없으니 아직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주님을 영접한다’는 성경의 깊은 의미가 특정한 문장을 한 번 말하는 행위로 축소될 수 있습니다.

 

먼저 ‘영접 기도’라는 특정한 기도 형식과 성경이 말하는 ‘주님을 영접함’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에는 오늘날 교회에서 사용하는 형태의 ‘영접 기도문’을 따라 해야 구원받는다는 명령이 없습니다. 물론 ‘영접한다’는 개념 자체는 분명 성경적입니다. 요한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합니다(요1:12). 따라서 주님을 영접하는 것은 구원에서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그러나 요한이 말하는 ‘영접’은 어떤 정해진 기도문을 낭독했다는 뜻으로 한정되지 않습니다. 주님을 믿고 받아들이는 삶 전체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계3:20도 영접 기도를 설명할 때 자주 사용됩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매우 아름다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직접적인 대상은 아직 한 번도 복음을 듣지 못한 불신자가 아니라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이미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문을 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히려 ‘한 번 주님을 영접했다고 고백했으니 이제 끝났다’는 생각을 흔듭니다.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실제 삶에서는 주님을 문밖에 세워 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롬10:9의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입술의 고백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진실한 신앙고백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특정한 문장을 한 번 말하면 그 순간부터 이후의 삶과 관계없이 구원이 법적으로 확정된다는 종교적 공식을 제시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예수를 주로 시인한다’는 것은 단지 ‘주님’이라는 호칭을 입술로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그분을 자신의 주로 받아들이는 것과 연결됩니다.

 

주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은 이 점을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셨습니다(마7:21). 여기서 주님은 고백을 무가치하게 만드시는 것이 아닙니다. 고백과 삶이 분리될 수 없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입술로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과 실제 삶에서 그분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거듭남’(regeneration)이 중요한 빛을 줍니다. 거듭남은 어느 날 한 번의 기도로 완성되는 사건이 아니라 일생에 걸쳐 진행되는 과정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악을 발견하고 그것을 죄로 인정하며, 주님께 도움을 구하고, 실제로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려 할 때 주님께서는 그 사람의 내면을 조금씩 새롭게 하십니다. 사람은 점점 자기 ‘프로프리움’(proprium)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상태에서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상태로 옮겨 갑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주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단지 ‘예수님, 제 마음에 들어오십시오’라고 말하는 것보다 훨씬 깊습니다. 주님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선과 진리로 오십니다. 내가 좋아하는 생각과 주님의 진리가 충돌할 때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내가 원하는 것이 악임을 알게 되었을 때 그것을 버리며, 하기 싫더라도 이웃에게 행해야 할 선을 선택하는 것이 실제 삶에서 주님께 문을 여는 일입니다. ‘나의 생각보다 주님의 진리가 옳습니다. 나의 욕망보다 주님의 선이 더 중요합니다.’ 이렇게 살아가기 시작할 때 ‘영접’은 한순간의 고백에서 삶의 질서로 내려옵니다.

 

그렇다고 과거의 회심이나 영접 기도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영접 기도를 드린 바로 그날이 실제로 삶의 방향이 바뀐 중요한 순간일 수 있습니다. 이전까지 주님을 외면하던 사람이 진심으로 회개하며 ‘이제 주님을 따르겠습니다’라고 고백했다면 그것은 매우 귀한 시작입니다. 다만 ‘시작’과 ‘완성’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씨앗을 심은 날은 중요하지만 씨앗을 심었다는 사실만으로 열매까지 이미 맺힌 것은 아닙니다. 그 고백이 이후의 삶에서 자라나야 합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이 오늘날 교회가 사용하는 ‘영접 기도’를 정확하게 따라 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주님께서 그를 외면하신다고 생각할 근거도 없습니다. 더 나아가 이것은 ‘그러면 자연계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들어 볼 기회조차 없었던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라는 문제로 이어집니다. 만일 특정한 기도문이나 특정한 형태의 언어적 고백이 구원의 절대적인 형식 조건이라면 복음을 접할 기회 자체가 없었던 수많은 사람의 운명이라는 매우 어려운 문제가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모든 구원의 근원이 오직 주님에게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동시에 주님의 구원 역사를 교회의 외적 경계나 인간이 만든 종교적 절차 안에 가두지 않습니다. 교회 밖에서 태어나 예수님의 이름을 알지 못했더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종교적·도덕적 빛 안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며, 양심을 따라 진리를 받아들이려 살아간 사람은 사후에 더 분명한 진리를 배우고 주님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예수님 없이도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구원은 오직 주님에게서 오지만, 주님께서 사람에게 다가가시는 길을 우리가 만든 하나의 절차로 제한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예수님 영접 기도를 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하는가?’라는 질문에는 ‘그렇지 않다’고 답할 수 있습니다. 영접 기도는 신앙의 아름답고 의미 있는 표현이며 어떤 사람에게는 실제 회심의 중요한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구원을 작동시키는 주문도 아니고, 한 번 발급받으면 이후의 삶과 관계없이 효력이 유지되는 천국 입장권도 아닙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나는 과거 어느 날 영접 기도를 했는가?’가 아니라 ‘나는 오늘 주님을 영접하며 살고 있는가?’입니다. 진리를 받아들일 때, 악을 죄이기 때문에 피할 때, 이웃에게 선을 행할 때, 자기 뜻보다 주님의 뜻을 앞세울 때 우리는 실제 삶에서 주님께 문을 엽니다. 그리고 이것은 한 번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 일생에 걸쳐 깊어지는 거듭남의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구원은 특정한 영접 기도문을 한 번 따라 했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구원의 유일한 근원이신 주님을 믿고 그분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삶으로 살아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더 짧게 압축한다면 이것이겠습니다.

 

‘참된 영접은 한 번의 기도가 아니라 일생에 걸친 거듭남입니다.’

 

 

 

SL.4, ‘참된 이단’은 누구인가

 

‘참된 이단’은 누구인가 - 교리의 경계보다 더 깊은 주님의 판단 기독교에서 ‘이단’이라는 말은 대개 ‘정통 교리에서 벗어난 사람이나 집단’을 뜻합니다.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신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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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2, ‘자살하면 무조건 지옥 가나’

 

자살하면 무조건 지옥에 가는가 - 마지막 행위와 영원한 운명 ‘자살하면 무조건 지옥에 간다’고 단정하는 것은 성경적으로도,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신중하지 못한 말입니다. 자살은 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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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하면 무조건 지옥에 가는가 - 마지막 행위와 영원한 운명

 

‘자살하면 무조건 지옥에 간다’고 단정하는 것은 성경적으로도,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신중하지 못한 말입니다. 자살은 분명 생명을 스스로 끊는 매우 비극적인 행위이며 가볍게 여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그의 생애 마지막 한 행위만 떼어 놓고 자동적으로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인간은 다른 사람의 내면 전체를 알 수 없으므로, 특정한 사람이 자살했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은 지옥에 갔다’고 판정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근본적인 기준은 ‘어떤 방식으로 죽었는가’가 아니라 ‘어떤 사랑을 자신의 삶으로 만들었는가’입니다. 사람은 이 세상을 떠난 뒤 자신이 지상에서 형성한 ‘지배적인 사랑’에 따라 살아갑니다.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삶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 사람은 천국의 질서와 결합하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모든 것 위에 두며 악을 기꺼이 선택해 온 사람은 그와 상응하는 지옥의 질서에 이끌립니다. 따라서 죽음의 순간만으로 그 사람의 영원한 상태를 기계적으로 판정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인간관과 맞지 않습니다.

 

특히 자살이라는 외적인 행위가 같아 보여도 그 내면의 상태는 매우 다를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타인에게 복수하거나 책임을 회피하려는 의도에서 자신의 생명을 끊을 수 있고, 누군가는 극심한 절망과 공포, 판단력의 붕괴 속에서 그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심각한 정신적 고통이나 질환으로 현실을 정상적으로 판단할 능력이 크게 손상된 경우도 있습니다. 외적으로는 모두 ‘자살’이라는 한 단어로 기록되지만, 주님 앞에서는 그 사람의 자유와 이성, 의도와 책임의 정도가 똑같을 수 없습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악이 진정으로 사람의 것이 되려면 단순히 어떤 행동이 발생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그것이 악임을 알고도 자유롭게 원하고 선택하여 자기 삶의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문제가 함께 고려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자유와 합리적 판단 능력이 크게 훼손된 상태에서 일어난 행동과, 충분한 자유 속에서 악을 사랑하여 의도적으로 선택한 행동을 동일한 영적 책임으로 다룰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볼 수 없는 바로 그 내면을 보십니다.

 

성경에도 ‘자살한 사람은 반드시 지옥에 간다’는 교리는 없습니다. 성경에는 사울, 아히도벨, 시므리, 가룟 유다처럼 스스로 죽음을 택한 사람들이 등장하지만, 이 사례들로부터 ‘자살 = 자동적 지옥행’이라는 보편적 구원론을 만들 수는 없습니다. 특히 어떤 죄 하나가 죽기 직전에 발생했다는 이유로 그 사람의 평생의 내적 삶과 주님과의 관계를 모두 지워 버린다는 식의 교리는 성경이 직접 가르치는 내용이 아닙니다.

 

흔히 ‘자살하면 회개할 시간이 없으므로 지옥에 간다’는 설명도 듣습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구원을 지나치게 법률적이고 시간적인 공식으로 만드는 위험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평생 주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섬기다가 극심한 정신적 고통 속에서 판단력을 잃고 자신의 생명을 끊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마지막 몇 분 동안의 행위가 그 사람 안에서 오랫동안 형성된 모든 사랑을 자동적으로 뒤집어 놓는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반대로 마지막 순간에 특정한 말을 했다는 사실만으로 평생 자발적으로 사랑해 온 악이 기계적으로 사라진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사후의 상태는 그렇게 형식적인 계산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반대편으로 지나가서도 안 됩니다. ‘그러니까 자살해도 괜찮다’는 결론은 전혀 아닙니다. 자연계에서의 생명은 주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것이며, 이 세상에서 사람은 자유롭게 선과 진리를 선택하면서 자신의 영원한 인격을 형성합니다. 따라서 자신의 생명을 의도적으로 끊는 것은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닙니다. 자살을 낭만화하거나 고통에서 벗어나 영계로 옮겨 가는 하나의 방법처럼 생각하는 것은 특히 위험합니다. 죽음은 문제를 해결하는 기술이 아니며,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 역시 현세의 고통을 피해 가는 ‘비상구’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주님의 심판은 인간의 심판보다 훨씬 깊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외적인 행동을 봅니다. 주님께서는 그 행동이 나온 사랑과 의도, 그 순간의 자유, 이성의 상태, 그 사람이 감당했던 고통, 그리고 평생 형성되어 온 내면 전체를 아십니다. 따라서 유가족에게 ‘자살했으니 지옥 갔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알 수도 없고 판단할 권한도 없는 영역을 침범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는 앞서 살펴본 ‘부자는 지옥에 가는가?’라는 질문과도 뜻밖에 같은 원리로 연결됩니다. ‘부자 = 지옥’, ‘가난한사람 = 천국’, ‘자살 = 지옥’처럼 하나의 외적 조건으로 사람의 영원한 상태를 판정하려는 것은 모두 지나치게 단순한 공식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계속해서 외적인 모습에서 그 사람의 ‘사랑’으로 시선을 옮깁니다. ‘그 사람이 무엇을 했는가?’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깊이 ‘그 사람은 무엇을 사랑했고, 무엇을 의도했으며, 얼마나 자유롭게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삼았는가?’를 묻게 합니다.

 

그러므로 ‘자살하면 무조건 지옥에 가는가?’라는 질문에는 분명하게 ‘그렇다고 말할 수 없다’고 답해야 합니다. 동시에 ‘그러므로 자살은 영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자살이라는 행위의 심각성과 자살한 사람의 영원한 운명에 대한 판정은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전자는 생명의 거룩함 때문에 엄중하게 보아야 하지만, 후자는 그 사람의 내면 전체를 아시는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렇습니다. ‘자살이라는 마지막 행위 하나가 그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자동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는 그 사람이 평생 어떤 사랑을 형성했는지와 그 행위가 일어날 당시의 자유와 의도와 내면의 상태까지 완전하게 보시고 판단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아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태도도 정죄보다는 경외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자살이라는 비극을 가볍게 여기지 않되, 그 사람의 영원한 상태까지 대신 판결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모든 사정을 아시는 주님께 맡긴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이것이 생명을 엄중하게 여기면서도 주님의 사랑과 공의를 동시에 신뢰하는 태도입니다.

 

 

 

SL.3, ‘예수님 영접 기도’ 안 하면 구원 못 받나

‘예수님 영접 기도’를 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하는가 - 기도문이 아니라 삶으로 받아들이는 주님 한국 개신교회에서는 오랫동안 ‘예수님을 영접했습니까?’라는 질문과 함께 일정한 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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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1, ‘결혼을 꼭 해야 하나’

결혼은 꼭 해야 하는가 - 결혼의 의무보다 더 깊은 ‘결합’의 질서 성경은 결혼을 매우 귀하게 말합니다. 창세기 2장 18절에서 주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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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꼭 해야 하나’

 

성경은 결혼을 매우 귀하게 말합니다. 창2에서 주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고 말씀하시고(창2:18),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루는 질서를 세우십니다(창2:24). 스베덴보리 역시 결혼을 단순히 인간 사회를 유지하거나 자녀를 낳기 위한 제도로 보지 않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참된 결합에는 더 깊은 영적 원형이 있으며, 그것은 ‘선’(good)과 ‘진리’(truth)의 결합이고, 가장 높은 차원에서는 주님과 교회의 결합에 그 근원을 둡니다. 이런 의미에서 결혼은 인간이 필요에 따라 만들어 낸 사회제도가 아니라 창조 질서 안에 놓인 매우 깊고 거룩한 결합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반드시 구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결혼이 창조 질서에 속한다’는 것과 ‘모든 사람이 이 세상에서 반드시 결혼해야 한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성경 자체가 모든 개인에게 결혼을 의무로 부과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여러 이유로 결혼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음을 말씀하셨고(마19:12), 바울도 고전7에서 독신의 삶을 인정합니다. 그러므로 결혼은 주님께서 세우신 선하고 귀한 질서이지만, 결혼 여부 자체가 구원의 조건은 아닙니다. 결혼하지 않았다고 해서 창조 질서에서 벗어난 사람도 아니며, 결혼했다고 해서 자동으로 더 온전한 영적 상태에 들어가는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결혼애’(Conjugial Love, 1768)를 통해 보면 이 문제는 한층 깊어집니다. 스베덴보리가 중요하게 보는 것은 단순히 ‘남자와 여자가 함께 산다’는 외적 형태가 아니라 두 사람 안에서 이루어지는 참된 ‘결합’입니다. 선은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는 선을 표현합니다. 참된 결혼 사랑도 이와 상응하여 두 사람이 서로를 소유하거나 이용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의 선을 원하고, 서로의 행복에서 자신의 행복을 발견하며, 점점 하나의 삶을 이루어 가는 사랑입니다. 따라서 결혼의 영적 의미는 단순히 배우자를 ‘얻는 것’보다 자기중심적인 사랑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과 참으로 결합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가는 데 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결혼은 ‘거듭남’(regeneration)과도 깊이 연결됩니다. 한 사람과 평생을 함께 산다는 것은 낭만적인 감정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자기 뜻을 내려놓아야 할 때가 있고, 상대방의 필요를 자신의 필요보다 먼저 생각해야 할 때도 있으며, 용서하고 기다리고 책임져야 할 때도 있습니다. 물론 모든 결혼이 실제로 이런 모습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결혼이라는 외적 형태 안에서도 지배욕, 소유욕, 자기 사랑이 더욱 강하게 드러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혼인신고가 두 사람의 내면을 자동으로 하나로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결혼은 참된 결합이 이루어질 수 있는 귀한 질서이지만, 그 질서 안에서 실제로 어떤 사랑을 형성하느냐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이 ‘결합’의 질서에서 제외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독신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자신의 직분에서 선한 쓰임을 행하며, 자기중심성을 내려놓고 다른 사람의 행복을 바라는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반대로 ‘혼자가 편하니까’, ‘누구에게도 맞추고 싶지 않으니까’, ‘내 자유를 침해받고 싶지 않으니까’라는 이유로 모든 깊은 관계와 책임을 거부한다면 그 내면의 동기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문제는 ‘결혼했는가, 하지 않았는가’보다 어떤 사랑을 선택하며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프로프리움’(proprium)의 문제도 드러납니다. 인간의 프로프리움은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끌어당기려 합니다. 배우자마저 ‘나를 행복하게 해 줄 사람’, ‘내 필요를 채워 줄 사람’으로만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결혼했어도 참된 결합과는 멀어집니다. 반대로 결혼하지 않았더라도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지 않고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을 이웃을 위한 선과 유용한 일로 살아간다면, 그 사람 안에는 참된 결합을 받아들일 수 있는 내적 토대가 형성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결혼 여부라는 외적 상태만으로 한 사람의 영적 성숙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에 관한 설명도 의미가 있습니다. 그는 참된 결혼 사랑이 자연계에서 몇십 년 함께 사는 사회적 계약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삶과 연결된다고 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결혼하지 못했다고 해서 결혼 사랑의 가능성이 영원히 닫히는 것은 아닙니다. 천국에 적합한 내적 삶을 형성한 사람은 사후에도 자신과 내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배우자와 결합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현세에서 결혼하지 않아도 천국에 가서 짝을 만나면 된다’는 식으로 가볍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현세에서 배우자를 확보했느냐가 아니라 내가 참된 결합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느냐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한 가지 중요한 성경적 질문이 따라옵니다. 주님께서는 부활에 관하여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22:30). 그렇다면 천국에는 결혼이 없다는 뜻일까요?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천국에서 남녀의 결합 자체가 사라진다는 뜻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의 문맥은 일곱 형제와 차례로 혼인한 한 여인이 부활 후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는 사두개인들의 질문입니다. 곧 지상의 혈통과 법적 관계를 그대로 영계에 옮겨 놓으려는 사고방식을 주님께서 바로잡으신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연계의 혼인제도와 천국에서의 내적이고 영적인 결합을 구별합니다. 따라서 ‘천국에도 결혼이 있는가?’라는 문제는 별도로 더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지만, 적어도 마22:30 하나만으로 천국에서 모든 남녀의 결합이 사라진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결국 ‘결혼을 꼭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할 수 있습니다. 결혼은 주님께서 세우신 매우 귀한 창조 질서이며, 참된 결혼 사랑은 선과 진리의 결합이라는 깊은 영적 질서에 상응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자연계에서 반드시 결혼해야 하는 것은 아니며, 결혼 여부가 구원을 결정하지도 않습니다. 결혼한 사람에게는 배우자를 소유하거나 이용하지 않고 서로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으로 여기며 참된 결합을 이루어 가는 길이 있고, 결혼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선한 쓰임을 행하며 참된 결합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으로 거듭나 가는 길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질문을 조금 바꾸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반드시 결혼해야 하는가?’보다 더 깊은 질문은 ‘나는 누군가와 참으로 하나 될 수 있는 사람으로 거듭나고 있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결혼의 궁극적인 의미는 단순히 배우자를 얻는 데 있지 않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랑에서 벗어나 선과 진리가 결합하듯 다른 사람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되어 가는 데 있습니다.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결혼은 모든 사람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중심성을 넘어 참된 결합의 사랑을 배울 수 있도록 주님께서 창조 질서 안에 두신 거룩한 길입니다.’

 

 

 

SL.2, ‘자살하면 무조건 지옥 가나’

자살하면 무조건 지옥에 가는가 - 마지막 행위와 영원한 운명 ‘자살하면 무조건 지옥에 간다’고 단정하는 것은 성경적으로도,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신중하지 못한 말입니다. 자살은 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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