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And Jehovah God cried unto the man [homo], and said unto him, Where art thou? And he said, I heard thy voice in the garden, and I was afraid, because I was naked; and I hid myself. (3:9-10)

 

AC.226

 

부르시며(crying),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the voice in the garden),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being afraid because they were naked), 그리고 숨었나이다(hiding themselves)의 의미는 이미 앞에서 설명하였습니다. 말씀에서는 주님께서 이미 모든 걸 미리 알고 계심에도 불구, 사람에게 먼저 네가 어디 있느냐?’ 또는 네가 무엇을 하고 있느냐?’ 하시는 일이 흔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물으시는 이유는 사람이 스스로 인정하고 고백하게(acknowledge and confess) 하기 위함입니다. The meaning of “crying,” of the “voice in the garden,” of their “being afraid because they were naked,” and of “hiding themselves” has been previously explained. It is common in the Word for man to be first asked where he is and what he is doing, although the Lord previously knew all things; but the reason for asking is that man may acknowledge and confess.

 

 

해설

 

AC.226은 창세기 39절의 ‘네가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의 의미를 설명하는 구절입니다. 이 질문은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들에게 의문을 던져 왔습니다. 전지하신 하나님께서 정말 아담의 위치를 모르셔서 물으셨을까요? 스베덴보리는 그렇지 않다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아담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도, 왜 숨었는지도, 그의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두 알고 계십니다. 따라서 이 질문은 정보를 얻기 위한 질문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물으셨을까요?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인정하고 고백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말씀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원리입니다. 주님은 사람의 자유를 존중하시기 때문에, 사람에게 자신의 상태를 스스로 보게 하시고, 입으로 시인하도록 이끄십니다.

 

영적 변화는 강제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너는 지금 이런 상태다’라고 선언하시는 것만으로는 사람의 내면이 변화되지 않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상태를 직접 깨닫고, 그것을 인정하며, 주님 앞에 고백할 때 비로소 회개의 문이 열립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이러한 질문이 자주 등장합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원하느냐?’, ‘네 믿음이 어디 있느냐?’와 같은 질문들은 모두 주님께서 모르셔서 묻는 것이 아니라, 사람 자신이 자기 내면을 직면, 직시하도록 하시는 질문들입니다.

 

이 점에서 ‘네가 어디 있느냐?’는 지리적 위치를 묻는 질문이 아니라 영적 상태를 묻는 질문입니다. ‘너는 지금 어떤 사랑 가운데 있느냐?’, ‘너는 지금 나와 얼마나 가까우냐, 혹은 얼마나 멀어졌느냐?’를 묻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이 질문은 계속됩니다. 주님은 우리의 삶 속에서도 ‘네가 어디 있느냐?’ 물으십니다. 그것은 우리를 책망하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자신의 상태를 돌아보고, 주님께 다시 나아오도록 초대하시는 사랑의 질문입니다.

 

결국 AC.226은 주님의 질문에는 언제나 자비가 담겨 있음을 보여 줍니다. 주님은 사람을 정죄하기 전에 먼저 스스로 말할 기회를 주십니다. 회개는 강요되지 않으며, 언제나 자유로운 인정과 고백에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네가 어디 있느냐?’는 심판의 선언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을 다시 찾으시는 목자의 첫 번째 부르심인 것입니다.

 

 

 

AC.227, 창3:9-10, 지각(perception), 내적 딕테이트(internal dictate), 양심(conscience) 및 시험(temptations)의 기

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And Jehovah God cried unto the man [homo], 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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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5, 창3:8, ‘동산 나무 사이’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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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f in the garden in the air of the day; and the man and his wife hid themselves from the face of Jehovah God in the midst of the tree of the garden. (3:8)

 

AC.225

 

동산 나무 사이(the midst of the tree of the garden)가 자연적 선(natural good)을 의미하며, 그 안에 얼마간의 지각(perception)이 있는데, 그것이 나무(tree)라고 불린다는 사실 역시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천적 인간(celestial man)이 거하던 동산(garden)으로부터 이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선과 진리는 동산(garden)이라고 불리는데, 다만 그것을 경작하는 사람의 상태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good)은 그 가장 안쪽(inmost)이 천적(celestial)이지 않으면 참된 선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천적인 것(celestial)으로부터, 또는 그것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지각(perception)이 옵니다. 이 가장 깊은 것, 곧 안쪽(inmost)이 여기서는 사이(midst)라고 불립니다. 말씀의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That the “midst of the tree of the garden” signifies natural good, in which there is some perception which is called a “tree,” is also evident from the “garden” in which the celestial man dwelt; for everything good and true is called a “garden,” with a difference according to the man who cultivates it. Good is not good unless its inmost is celestial, from which, or through which, from the Lord, comes perception. This inmost is here called the “midst,” as also elsewhere in the Word.

 

 

해설

 

AC.225는 창세기 38절의 ‘동산 나무 사이’라는 표현을 더욱 깊이 설명하는 구절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특별히 ‘사이(midst, 가운데)라는 말에 주목합니다. 말씀에서 ‘가운데’는 단순한 공간적 중심이 아니라 가장 깊은 것(inmost), 가장 본질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앞 절들에서 스베덴보리는 아담의 후손들이 타락했지만 아직 자연적 선(natural good)과 얼마간의 지각(perception)을 남겨 두고 있었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동산 나무 사이’는 바로 그 남아 있는 자연적 선과 지각의 중심부를 가리킵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선은 그 가장 안쪽이 천적(celestial)이지 않으면 참된 선이 아니다’라는 말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모든 참된 선의 근원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입니다. 외적으로는 선해 보여도 그 가장 깊은 곳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완전한 의미의 선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친절을 베푼다고 하더라도, 그 동기가 칭찬받기 위함인지, 이익을 얻기 위함인지, 아니면 진정으로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인지에 따라 그 선의 질이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가장 깊은 동기, 가장 안쪽의 사랑을 ‘가운데(midst)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동산(garden)은 단순히 진리와 선의 집합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심으신 선과 진리가 살아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동산의 중심에는 언제나 천적(celestial), 곧 주님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이 구절은 퍼셉션(perception)의 근원도 설명합니다. 지각은 단순한 지식이나 추론 능력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천적 사랑을 통하여 생겨나는 직접적인 영적 인식입니다. 그래서 태고교회 사람들은 진리를 논리적으로 증명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선을 사랑함으로써 진리를 곧바로 알 수 있었습니다.

 

결국 AC.225에서 말하는 ‘동산 나무 사이’는 타락 이후에도 아직 남아 있던 자연적 선의 중심, 그리고 그 안에 희미하게 남아 있던 천적 요소와 지각의 흔적을 의미합니다. 아담의 후손들은 이미 많은 것을 잃었지만, 아직 그 중심이 완전히 파괴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고, 자신의 상태를 부끄러워할 수도 있었으며, 숨을 수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모든 영적 생명의 핵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선의 진정한 가치는 외적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가장 깊은 중심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연결되어 있을 때, 비로소 그 선은 살아 있는 선이 되며, 그로부터 참된 지각(perception)도 흘러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AC.226, 창3:9-10,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AC.226-228)

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And Jehovah God cried unto the man [homo], 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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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4, 창3:8, ‘숨은지라’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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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4.심화

 

2. ‘양심의 흔적

 

3에서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이 벌거벗었다는 것을 알고 두려워했으며, 무화과 잎으로 몸을 가리고 숨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한 공포가 아니라 아직 남아 있는 자연적 선의 증거로 해석합니다. 그들은 타락했지만, 완전히 타락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양심의 흔적이 있었고, 자기 상태를 부끄러워할 줄 알았습니다. (AC.224 심화 1)

 

위 문장에서 창3은 아직 퍼셉션의 시대인데 왜 양심의 흔적 같은 표현이 나오나요? 양심은 홍수 후 고대교회 때 시작되는 거 아닌가요?

 

 

아주 정확한 지적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목사님 말씀대로 창세기 3장의 아담과 하와, 즉 태고교회(the Most Ancient Church)는 기본적으로 퍼셉션(perception)의 시대에 속합니다. 따라서 엄밀하게 말하면 AC.224를 해설하면서 제가 사용한 ‘양심의 흔적’이라는 표현은 스베덴보리의 교리 체계에 비추어 볼 때 다소 부정확한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태고교회의 특징은 양심(conscience)이 아니라 퍼셉션(perception)이었습니다. 그들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진리인지를 추론이나 교육을 통해 배우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직접 지각했습니다. 반면 홍수 이후의 고대교회(Ancient Church)는 퍼셉션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대신 양심(conscience)이 주어졌습니다. 양심은 진리의 지식(knowledges of truth)을 바탕으로 주님께서 사람 안에 형성하시는 내적 판단 능력입니다.

 

따라서 창세기 3장의 사람들을 두고 ‘양심이 아직 남아 있었다’고 말하면, 신학적으로는 시대가 뒤섞이는 문제가 생깁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다음과 같이 표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들은 타락했지만 아직 완전히 타락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퍼셉션(perception)이 크게 약해졌지만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으며, 자신들의 상태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아직 지각할 수 있었습니다.’

 

또는

 

그들은 여전히 얼마간의 퍼셉션(perception)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벌거벗음을 부끄러워하고 숨었습니다.’

 

실제로 AC.220 AC.221에서도 스베덴보리는 반복해서 ‘아직 얼마간의 퍼셉션이 남아 있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다만 제가 ‘양심의 흔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이유는 현대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려다 보니 나온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에게 남아 있는 가장 가까운 경험이 양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엄밀한 AC 해설이나 심화 원고에서는 그것보다 ‘퍼셉션의 잔재’, ‘남아 있는 지각’, ‘약해진 퍼셉션’이라고 표현하는 편이 훨씬 정확합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인용하신 문장은 다음과 같이 수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3에서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이 벌거벗었다는 것을 알고 두려워했으며, 무화과 잎으로 몸을 가리고 숨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한 공포가 아니라 아직 남아 있는 자연적 선과 퍼셉션(perception)의 잔재의 증거로 해석합니다. 그들은 타락했지만 완전히 타락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자신들의 상태가 잘못되었음을 지각할 수 있었고, 자기 상태를 부끄러워할 줄 알았습니다.’

 

이 표현이 스베덴보리의 인간 시대 구분, 즉 태고교회 = 퍼셉션(perception), 고대교회 = 양심(conscience)이라는 구조와 더 잘 맞습니다. 목사님께서 짚어 주신 부분은 AC 해설을 장기적으로 정리할 때, 매우 중요한 신학적 정확성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AC.224, 창3:8, ‘숨은지라’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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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4, 심화 1, ‘렘8:12-13’

AC.224.심화 1. ‘렘8:12-13’ 12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질 자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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