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415에는 양 떼와 가축뿐 아니라 우리, 목초지, 떡, 밀, 기름, 새 포도주가 잇달아 등장합니다. 이 많은 표현을 하나씩 외우려 하면 정작 스베덴보리가 밝히려는 중심을 놓치기 쉽습니다. 그가 이 구절들을 인용한 목적은 모든 농경·목축 용어의 뜻을 빠짐없이 정리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야발의 ‘가축’이 사랑의 거룩한 것에서 나오는 선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말씀에서 그와 관련된 표현들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통해 밝히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각 구절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풀이한 표현을 확인하고, 그 표현들이 공통으로 드러내는 관계를 살펴보는 것이 좋습니다.
렘23:3에서 주님은 흩어진 양 떼의 남은 자들을 모아 다시 그 우리로 돌아오게 하시고, 그들이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양 떼는 스스로 길을 찾아 돌아오는 것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모으고 돌아오게 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우리’가 사랑의 선과 관련된다는 근거로 인용합니다. 따라서 우리를 단순한 축사의 울타리로만 생각하기보다, 주님께서 양 떼를 돌아오게 하시는 말씀 안에서 그 의미를 살펴야 합니다. 다만 이 구절의 ‘남은자’를 곧바로 개인 안에 보존된 선과 진리라는 기술적 의미의 ‘리메인스’로 확정하는 것은 AC.415의 직접 설명을 넘어섭니다. 여기서는 흩어진 양 떼를 다시 모으시는 주님의 행위와 그들이 돌아가는 우리에 주목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겔34:14는 이 관계를 더욱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주님은 양 떼를 좋은 꼴로 먹이시고, 이스라엘의 높은 산에 그들의 우리가 있게 하시며, 좋은 우리에 눕게 하고 살진 꼴을 먹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에서 ‘우리’와 ‘목초지’가 사랑의 선들을 나타내고, ‘기름짐’도 그러한 선들에 관하여 사용되는 표현이라고 직접 밝힙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이해할 때에는 ‘우리는보호,목초지는진리의공급,눕는것은안식’이라는 식으로 각 낱말에 별도의 뜻을 먼저 붙일 필요가 없습니다. 좋은 우리와 좋은 꼴, 살진 목초지가 함께 묘사하는 풍성함을 살피면서, 스베덴보리가 그것들을 사랑의 선과 연결했다는 사실을 붙드는 것이 이번 번호에 더 충실한 읽기입니다.
사30:23에서는 땅의 소산으로 만든 떡이 풍성하고 기름지며, 가축이 넓은 초장에서 먹는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떡’이 천적인 것을, 가축이 먹는 ‘기름진것’이 거기서 나오는 선들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설명은 야발의 장막과 가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비교가 됩니다. 장막과 가축이 나란히 놓였을 때 장막이 사랑의 거룩한 것을, 가축이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을 나타내듯이, 이사야서에서도 천적인 것과 거기서 나오는 선이 함께 나타납니다. 다만 비·씨·땅·넓은 초장에 각각 세부적인 상응을 부여하고 그것들을 하나의 거듭남 단계로 연결하는 것은 AC.415가 직접 제시한 논증이 아닙니다. 그러한 해석은 다른 근거를 확인한 뒤 별도로 다루어야 합니다.
렘31:11-12에서는 밀과 새 포도주와 기름, 양 떼와 소 떼의 새끼들이 함께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밀’과 ‘기름’이 여호와의 거룩한 것을 묘사하고, ‘새포도주’와 ‘양떼와소떼의새끼들’이 거기서 나오는 선들을 묘사한다고 밝힙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단순히 곡식과 가축이 풍성하다는 사실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여호와의 거룩한 것과 거기서 나오는 선을 구별하여 설명한다는 점입니다. 기존 심화에서 새 포도주를 별도의 설명 없이 ‘영적선’이나 ‘그사랑에서나오는진리’로 확정하면, 이번 번호가 직접 제시한 구별과 어긋날 수 있습니다. AC.415에서는 그가 실제로 밝힌 범위, 곧 새 포도주가 여기서 거룩한 것에서 나오는 선들을 묘사한다는 설명을 우선해야 합니다.
이 네 구절을 함께 놓으면 우리와 목초지와 가축의 의미를 이해하는 길이 열립니다. 렘23:3에서는 흩어진 양 떼를 다시 모으시는 주님을, 겔34:14에서는 좋은 우리와 목초지에서 먹이시는 주님을 봅니다. 사30:23과 렘31:11-12에서는 천적인 것 또는 여호와의 거룩한 것과, 거기서 나오는 선이 함께 묘사됩니다. 이 말씀들은 모두 동일한 장면을 말하지는 않지만, AC.415에서는 사랑의 거룩한 것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의 관계를 밝히는 근거로 모입니다. 가축의 속뜻은 동물이라는 외형만 보고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가축이 말씀 안에서 무엇과 함께 등장하는지를 살필 때 더욱 분명해집니다.
여기서 ‘사랑이먼저이고선이그다음’이라는 말을 시간적인 순서로만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이 먼저 마음속에 사랑을 완성한 뒤에야 비로소 선을 행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AC.415가 강조하는 것은 선의 근원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이 선의 근원이므로, 선을 그 사랑과 분리하여 독립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사랑을 말하면서도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에는 관심이 없다면, 장막과 가축을 함께 놓은 말씀의 관계를 충분히 받아들이지 못한 셈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야발의 속뜻을 ‘사랑의거룩한것들과그사랑에서나오는선들에관한교리’라고 함께 설명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결국 우리와 목초지와 가축은 성도에게 외워야 할 상응 용어를 늘려 주기 위해 등장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사랑의 거룩한 것에서 나오는 선이 무엇인지를 말씀의 여러 장면을 통해 생각하게 합니다. 흩어진 양 떼를 모으시고 먹이시는 분은 주님이시며, 그분에게서 오는 사랑은 선의 근원입니다. 그러므로 야발의 ‘가축의조상’이라는 표현을 읽을 때에는 목축의 기원을 설명하는 문자적 기록을 인정하면서도, 그 속뜻에서 사랑과 선이 서로 분리되지 않는 질서를 보아야 합니다. (AC.415심화1)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창4:20)
AC.415
‘가축의조상’(fatherofcattle)이사랑의거룩한것들에서나오는선을의미한다는사실은,이장2절에관하여앞에서설명한내용으로부터분명해집니다.거기서는‘양떼를치는자’(shepherdoftheflock)가체어리티의선을의미한다는것을밝혔습니다.그러나여기서는‘목자’(shepherd)대신‘조상’(father)이라는말을,‘양떼’(flock)대신‘가축’(cattle)이라는말을사용합니다.그리고야발이‘조상’(father)이라고불리는‘가축’(cattle)이라는말은‘장막’(tent)바로뒤에나옵니다.이로부터그것이사랑의거룩한것에서나오는선을의미한다는사실이분명해집니다.또한여기서뜻하는것은가축을위한거처나우리,곧장막과가축우리에거주하는사람들의조상이라는것도알수있습니다.이러한표현들이사랑의천적인것들에서나오는선들을의미한다는사실은말씀의여러구절에서분명해집니다.예레미야서에는다음과같이기록되어있습니다. That by the “fatherofcattle” is signified the good that is derived from the holy things of love, is evident from what was shown above, at verse 2 of this chapter, where it was shown that a “shepherdoftheflock” signifies the good of charity. Here however the term “father” is employed instead of “shepherd,” and “cattle” instead of “flock”; and the word “cattle,” of which Jabal is said to be the “father,” follows immediately after “tent,” whence it is evident that it signifies the good that comes from the holy of love, and that there is meant a habitation or fold for cattle, or the father of them that dwell in tents and in folds for cattle. And that these expressions signify goods from the celestial things of love, is evident from various passages in the Word. As in Jeremiah:
여기서‘우리들’(folds)과‘목초지들’(pastures)은사랑의선들을나타내며,‘기름짐’(fatness)도그러한선들에관하여말하는표현입니다.이사야서에는다음과같이기록되어있습니다. where “folds” and “pastures” denote the goods of love, of which “fatness” is predicated. In Isaiah:
여기서‘떡’(bread)은천적인것을의미하고,가축이먹는‘기름진것’(fat)은거기서나오는선들을의미합니다.예레미야서에는다음과같이기록되어있습니다. where by “bread” is signified what is celestial, and by the “fat” whereon the cattle should feed, the goods thence derived. In Jeremiah:
여기서는‘밀’(wheat)과‘기름’(oil)으로여호와의거룩한것을,‘새포도주’(newwine)와‘양떼와소떼의새끼들’(sonsoftheflockandoftheherd),곧‘가축’(cattle)으로거기서나오는선들을묘사합니다.또다른곳에는다음과같이기록되어있습니다. where the holy of Jehovah is described by “wheat” and “oil,” and the goods derived from it by “newwine” and the “sonsoftheflockandoftheherd,” or of “cattle.” Again:
‘딸시온’(daughterofZion)은천적교회를나타내며,‘장막들’(tents)과‘가축떼들’(flocksofcattle)은그교회에관하여사용되는표현입니다. The “daughterofZion” denotes the celestial church, of which “tents” and “flocksofcattle” are predicated.
해설
AC.415는 야발에 관한 설명을 마무리하면서, 그가 왜 ‘가축의조상’이라고 불리는지를 밝힙니다. 앞의 AC.414에서는 ‘장막’이 사랑의 거룩한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말씀의 여러 구절로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장막 바로 뒤에 나오는 ‘가축’에 주목합니다. 창4:20에서 장막과 가축은 서로 무관한 두 가지 생업으로 나열된 것이 아닙니다. 장막이 사랑의 거룩한 것을 나타내고, 가축이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을 나타내기 때문에 두 표현이 함께 놓인 것입니다. 이 번호의 중심은 ‘가축이무엇을뜻하는가?’라는 질문뿐 아니라, ‘그선은어디에서나오는가?’라는 질문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창4:2의 아벨을 떠올리게 합니다. 아벨은 ‘양치는자’였고, 그 표현은 체어리티의 선을 의미한다고 앞에서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야발에 대해서는 ‘목자’ 대신 ‘조상’, ‘양떼’ 대신 ‘가축’이라는 말이 사용됩니다. 더구나 ‘가축’은 사랑의 거룩한 것을 나타내는 ‘장막’ 바로 뒤에 나옵니다. 따라서 두 인물을 단순히 ‘둘다가축을치므로같은뜻이다’라고 처리해서는 안 됩니다. 아벨의 경우에는 체어리티의 선이, 야발의 경우에는 장막이 나타내는 사랑의 거룩한 것에서 비롯되는 선이 강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표현과 그 배열을 함께 살펴 이러한 차이를 밝힙니다.
‘사랑에서나오는선’이라는 말은 사랑과 선을 서로 떨어진 두 가지로 생각하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여기서 사랑은 사람이 무엇을 진심으로 원하고 소중히 여기는가와 관계되며, 선은 그 사랑에서 비롯되는 좋은 것과 그에 따른 삶에 관계됩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 사랑에 따라 선을 원하고 행하도록 이끌립니다. 그러나 외적으로 좋은 일을 했다는 사실만으로 그 일의 내적인 근원까지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AC.415가 말하는 것은 모든 선행을 무조건 천적인 선이라고 부르자는 뜻이 아니라, 야발의 ‘가축’이 특별히 사랑의 거룩한 것에서 나오는 선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축의 속뜻을 알려면 그 앞에 놓인 장막의 의미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렘23:3에서 주님은 흩어진 양 떼의 남은 자들을 모아 다시 그 우리로 돌아오게 하시고, 그들이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겔34:14에서는 양 떼를 좋은 꼴로 먹이시고, 좋은 우리에 눕게 하시며, 살진 꼴을 먹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두 말씀을 통해 ‘우리’와 ‘목초지’가 사랑의 선들을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겔34:14의 ‘기름짐’도 그러한 선들에 관하여 사용되는 표현이라고 밝힙니다. 이 구절들에서 양 떼가 돌아오고 먹고 쉬는 모습은 주님께서 그들을 돌보시는 말씀과 함께 나타납니다. 따라서 우리는 단순한 울타리로, 목초지는 단순한 먹이의 장소로만 읽지 않고, 스베덴보리가 밝히는 사랑의 선과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사30:23과 렘31:11-12에서는 먹을 것과 가축이 함께 등장합니다. 이사야서는 땅의 소산으로 만든 풍성한 떡과 넓은 초장에서 먹는 가축을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떡’이 천적인 것을, 가축이 먹는 ‘기름진것’이 거기서 나오는 선들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예레미야서는 여호와께서 야곱을 구속하신 뒤 백성이 밀과 새 포도주와 기름, 양 떼와 소 떼의 새끼들을 위하여 모여들며 그 영혼이 물 댄 동산 같아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에서 ‘밀’과 ‘기름’으로 여호와의 거룩한 것을, ‘새포도주’와 ‘양떼와소떼의새끼들’로 거기서 나오는 선들을 설명합니다. 두 구절은 서로 다른 풍요의 모습을 그리지만, 이번 번호에서는 천적인 것과 그로부터 나오는 선의 관계를 밝히는 근거로 함께 사용됩니다.
마지막으로 렘6:3에서는 목자들과 가축 떼가 ‘딸시온’에게 와서 그 주위에 장막을 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딸시온’이 천적 교회를 나타내며, 그 교회에 관하여 ‘장막’과 ‘가축떼’라는 표현이 사용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본문의 문자적 문맥도 함께 기억해야 합니다. 렘6장은 예루살렘을 향한 위협을 선포하므로, 목자들이 장막을 치는 장면 자체를 평화로운 목축이나 천국의 안식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에서 직접 밝히는 것은 ‘딸시온’이 천적 교회를 나타내며, 그와 관련하여 ‘장막’과 ‘가축떼’라는 표현이 함께 사용된다는 점입니다. 말씀의 속뜻을 살피는 일은 문자적 문맥을 지우는 일이 아닙니다.
이제 AC.412-415의 흐름을 돌아보면 야발의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AC.412는 야발이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들에 관한 교리를 의미한다고 밝혔습니다. AC.413은 이 교리가 천적인 것에 속한다는 점을 설명했습니다. AC.414는 장막이 사랑의 거룩한 것을 나타내는 근거를 제시했고, 이번 AC.415는 가축이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을 나타내는 근거를 제시합니다. 그러므로 야발은 단순히 장막 생활과 목축을 시작한 사람이라는 문자적 기록을 넘어, 사랑의 거룩한 것과 거기서 나오는 선에 관한 교리를 나타냅니다. 성도들이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장막은사랑,가축은선’이라는 대응표만이 아닙니다. 선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그 근원으로 삼는다는 질서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장막과 가축을 함께 살펴보는 이유입니다. (AC.415해설)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 영상의 기본 설정은 흥미롭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IT 개발자로 살던 한 남자가 갑자기 수인들이 살아가는 원시 세계로 이동합니다. 그곳에서는 불을 피우는 기술조차 ‘샤먼’이라는 특별한 존재가 독점하고 있으며, 불씨가 꺼지면 다른 부족에게 많은 식량을 바치고 다시 얻어 와야 합니다. 질병이 생겨도 원인을 알지 못하고, 사냥은 주로 힘과 머릿수에 의존하며, 깨끗한 물과 배설물 처리 같은 기본적인 위생 개념조차 없습니다. 그런데 현대 문명의 지식을 가진 주인공이 등장하면서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그는 불을 직접 피우고, 열병을 치료하고, 창을 만들고, 사냥을 조직화하며, 물을 끓여 마시게 하고, 배설물과 쓰레기를 주거지에서 분리합니다. 한 사람이 가진 ‘지식’이 부족 전체의 생존 방식을 바꾸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지식의해방’입니다. 불을 피우는 방법은 원래 샤먼만 알고 있으며 그 지식은 후계자에게만 전수됩니다. 그러나 주인공은 그것을 모든 부족민에게 가르치겠다고 합니다. 이 장면은 의외로 상당히 좋은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지식을 권력의 근거로 독점하지 않고 공동체 전체의 유익을 위해 나누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지식 자체는 목적이 아닙니다. 모든 진리는 결국 삶을 향해야 하며, 더 정확히 말하면 ‘쓰임’(use)을 향해야 합니다. 무엇을 많이 아느냐보다 그것을 가지고 누구를 살리고 무엇을 유익하게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불 피우는 지식이 한 사람의 신비한 권위를 높이는 데 사용될 때 그것은 권력이 되지만, 부족 전체가 혹한을 견디게 하는 데 사용될 때 그것은 쓰임이 됩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주인공이 공동체를 강하게 만드는 방식입니다. 처음 부족민들은 강함을 거의 육체적인 힘으로 이해합니다. 강한 종족은 큰 짐승을 잡고, 많은 전사를 가진 부족은 더 많은 먹이를 차지합니다. 그러나 주인공은 전혀 다른 원리를 가르칩니다. ‘정보를수집하라. 환경을이용하라. 퇴로를확보하라. 각자의장점을살려라. 무기를개선하라. 역할을나누어라.’ 특히 ‘너희가약했던게아니라사냥방식이잘못됐던거였어’라는 대목은 이 이야기 전체를 압축하는 문장처럼 들립니다. 힘이 부족해서 패배하는 것이 아니라 질서와 지혜가 없어서 힘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천국의 질서와도 묘하게 접점이 있습니다. 천국 역시 모두가 똑같은 능력을 가진 사회가 아니라 서로 다른 기능과 쓰임을 가진 존재들이 하나의 목적 아래 조화를 이루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렌즈’를 조금 더 깊이 들이대야 합니다. 이 콘텐츠에서 문명 발전의 방향은 거의 일관되게 ‘더많이알고, 더효율적으로생산하고, 더강한무기를만들고, 더잘조직하고, 더강한부족이되는것’으로 향합니다. 그래서 보다 강한 적을 물리치고 영토를 확보하며, 식량을 저장하고, 방어벽과 초소를 세우고, 다른 부족보다 우월한 생존 체계를 갖추는 과정이 곧 ‘진보’로 그려집니다. 여기에서 목사님이 느끼신 중국적 색채도 어느 정도 이해됩니다. 다만 이것을 곧바로 ‘중화사상’이라고 단정하기보다는, ‘혼란한주변세계를뛰어난지식과질서를가진중심인물이조직하고교화하여더큰질서안으로편입시킨다’는 서사 구조에 주목하는 편이 정확하겠습니다. 중국 역사문화에서 오래 반복되어 온 ‘문명과주변’, ‘질서와혼란’, ‘교화와편입’의 상상력과 닮은 부분이 분명히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특히 주인공은 단순히 좋은 아이디어를 하나씩 제공하는 조언자가 아닙니다. 시간이 갈수록 그는 ‘무엇이옳은지를아는사람’이 되고, 공동체는 그가 제시하는 방식을 받아들일수록 강해집니다. 처음에는 ‘저사람말이맞을까?’라고 의심하던 이들이 결국 그의 지식과 성과를 경험하면서 그를 신뢰하고 따르게 됩니다. 여기에는 매우 오래된 인간의 꿈이 숨어 있습니다. ‘현명하고유능한한사람이올바른지식으로공동체를이끈다면세상은훨씬좋아질것이다.’ 이것은 중국만의 생각도 아닙니다. 플라톤의 철인정치에서 현대의 기술관료주의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끊임없이 품어 온 꿈입니다. 문제는 스베덴보리에게 인간 사회의 근본 문제는 ‘지식부족’이 아니라 ‘사랑의질서가뒤집힌것’이라는 데 있습니다. 인간은 무엇이 좋은지 몰라서만 악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와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보다 위에 있기 때문에 자신이 아는 진리마저 자기 목적을 위해 사용합니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가장 조심해서 보아야 할 것은 바로 ‘지식→문명→힘→선’이라는 연결입니다. 깨끗한 물을 마시게 하고, 병자를 치료하고, 식량을 저장하고, 혹한에서 살아남을 집을 짓는 것은 분명 좋은 쓰임입니다. 반면 더 치명적인 창을 만들고, 독을 이용하고, 더 효과적으로 적을 죽이고, 더 넓은 영역을 확보하는 능력 역시 동일한 ‘지식’에서 나옵니다. 지식은 그 자체로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을 움직이는 사랑이 무엇인가에 따라 천국적인 쓰임이 될 수도 있고 지옥적인 도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지성과 지혜의 차이도 바로 여기에서 드러납니다. 많이 아는 사람이 반드시 지혜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진리를 사용하고, 그 진리로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끼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이 점에서 저는 오히려 이 중국 AI 이야기가 의도하지 않은 중요한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고 봅니다. 주인공이 부족에게 불을 주고, 의술을 주고, 무기를 주고, 위생을 주고, 조직을 주고, 정착지를 주었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그는 그들에게 ‘더좋은사람’이 되는 법도 주었을까요? 기술이 발전하면 시기와 탐욕도 사라질까요? 식량이 풍부해지면 이웃 부족을 사랑하게 될까요? 무기가 강해지면 그것을 약자를 보호하는 데만 사용할까요? 바로 이 지점에서 자연적 문명과 영적 거듭남은 갈라집니다. 외적인 삶은 놀라울 정도로 문명화되었는데 내면은 여전히 지배욕과 소유욕과 자기 우월감에 붙들려 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외적으로는 매우 소박하게 살아도 이웃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처럼 기뻐하는 사람은 천국의 질서에 훨씬 가까울 수 있습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렌즈’로 이 작품을 보면 문명의 진정한 척도 자체가 달라집니다. ‘얼마나강한부족인가?’가 아니라 ‘그힘을무엇을위해사용하는가?’입니다. ‘얼마나많은지식을가졌는가?’가 아니라 ‘그지식이누구를살리는가?’입니다. ‘얼마나잘조직되어있는가?’가 아니라 ‘그질서의중심에자기집단의우월함이있는가, 아니면공동의선과이웃에대한사랑이있는가?’입니다. 주인공이 불 피우는 방법을 독점하지 않고 모두에게 가르쳐 주는 순간에는 천국적인 원리가 비칩니다. 병든 사람을 살리고, 부족원 가운데 단 한 명도 다치지 않기를 바라며 사냥법을 개선하는 순간에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지식과 기술이 ‘우리부족을가장강하게만드는것’으로 중심을 옮기는 순간, 같은 지식 안으로 인간의 proprium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어쩌면 그래서 이 작품은 단순한 중국식 문명 우월 판타지로만 읽기에는 조금 아깝습니다. 그 안에는 인간 문명의 오래된 모순이 압축되어 있습니다. 불을 발견한 인간은 추위를 이겼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의 집을 불태울 수도 있게 되었고, 금속을 다루게 된 인간은 농기구와 칼을 동시에 만들었으며, 현대 과학은 질병을 치료하는 기술과 대량살상 기술을 함께 만들어 냈습니다. 결국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더많은지식’ 자체가 아닙니다. 지식을 움직이는 사랑이 바뀌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은 바로 그 중심의 변화입니다. ‘나와우리를위해무엇을더가질것인가’에서 ‘주님께받은것을가지고누구에게어떤쓰임이될것인가’로 삶의 중심이 이동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영상을 보면서 느껴지는 ‘중화사상’의 흔적보다 더 근원적인 것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중국인의 문제라기보다 인간 proprium의 보편적인 꿈입니다. ‘내가더많이알고, 더강해지고, 더잘조직하면세상을바로잡을수있다’는 꿈입니다. 주님은 그것보다 훨씬 깊은 곳을 보십니다. 세상을 바꾸기 전에 사랑의 방향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식이 많아지는 것이 문명의 시작이라면, 그 지식을 자기 자신보다 이웃의 행복을 위해 기꺼이 사용하는 것은 천국의 시작입니다. 이 콘텐츠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어쩌면 거대한 짐승을 쓰러뜨리는 순간이 아니라, 한 사람이 자신이 알고 있는 ‘불피우는법’을 더 이상 자기만의 힘으로 붙잡지 않고 모두에게 가르쳐 주겠다고 말하는 순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으로는직접피우면되니까불씨를얻으려고음식을바칠필요없어.’ 바로 그때 지식은 권력에서 쓰임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이가진불은누구를따뜻하게하고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