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RC.036 | 천주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마리아는 교회의 어머니이며 모든 신자의 영적 어머니다’ – 영적 생명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는가, 주님에게서 태어나는가?

 

해설

‘마리아는 교회의 어머니이며 모든 신자의 영적 어머니다.’ 이것은 천주교가 마리아에게 부여하는 ‘교회의 어머니’(Mother of the Church)와 ‘영적 모성’(靈的母性, spiritual motherhood)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천주교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은 육신의 어머니였다는 사실을 넘어,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자와 교회 전체에 대하여 특별한 어머니의 역할을 지닌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이해에서 마리아는 신자들을 모성적 사랑으로 돌보고, 그들이 그리스도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도록 도우며, 교회의 믿음과 순종을 보여 주는 특별한 모범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몇 가지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어머니였다는 역사적 사실이 어떻게 모든 신자의 어머니라는 결론으로 이어질까요? 성경은 마리아가 교회 전체의 영적 어머니라고 직접 가르칠까요? 사람이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주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일인데, 여기에 마리아의 영적 모성이라는 별도의 관계가 필요한 것일까요? 무엇보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에서 ‘어머니’가 교회를 나타낸다고 가르치는데, 교회의 영적 모성과 마리아 개인에게 부여된 모성적 지위를 어떻게 구별해야 할까요? 이러한 질문은 단순히 마리아에게 사용하는 존칭의 적절성을 넘어, 인간이 누구에게서 영적 생명을 받고 어떤 과정을 통하여 거듭나는가를 묻는 문제입니다. 따라서 이 명제를 검토하려면 천주교의 공식적인 가르침을 정확히 이해하고, 성경과 스베덴보리의 교회론 및 거듭남의 가르침에 비추어 그 의미와 한계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먼저 천주교의 공식적인 입장을 확인해야 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 53항은 마리아가 사랑으로 협력하여 그리스도의 지체인 신자들이 교회 안에서 태어나도록 도왔다는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지체들의 어머니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61항은 마리아가 순종과 믿음, 소망과 사랑으로 구세주의 구원 사업에 특별하게 협력했으므로 ‘은총의 질서 안에서 우리의 어머니’라고 가르칩니다. 62항은 그러한 모성적 역할이 마리아의 지상 생애에만 국한되지 않고 천상에서도 계속된다고 설명합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963–970항 역시 이 가르침을 계승합니다. 특히 968항은 마리아가 인간의 초자연적인 생명을 회복시키는 구속의 역사에 특별하게 협력했다고 설명하며, 969항은 그가 천상에서도 신자들을 위한 모성적 돌봄과 전구를 계속한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천주교의 영적 모성은 단순히 마리아를 존경할 만한 신앙의 선배로 기억한다는 뜻보다 적극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과 특별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오늘날에도 신자들의 영적 삶을 돕는 역할을 감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주교는 이러한 역할을 그리스도에게서 독립된 권능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교회헌장 60항은 그리스도의 중재가 유일하며, 마리아의 모든 구원적 영향력은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와 중재에 의존한다고 명확하게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천주교가 마리아를 영적 생명의 독립적인 근원으로 선언했다고 비판하는 것은 공식 교리의 실제 의미를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합니다.

 

이 칭호의 역사적 발전도 중요합니다. 교황 바오로 6세는 1964년 11월 21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제3회기 폐막 연설에서 마리아를 ‘교회의 어머니’라고 선언했습니다. 여기서 교회란 성직자들만이 아니라 교회의 목자들과 모든 신자를 포함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합니다. 이후 이 칭호는 가톨릭의 전례와 신심 안에서 더욱 널리 사용되었으며, 2018년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결정에 따라 성령 강림 대축일 다음 월요일을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영적 모성이라는 생각이 1964년에 처음 만들어진 것은 아닙니다. 이 사상은 오랜 교회 전통 안에서 발전했으며, 마리아를 교회의 믿음과 사랑의 모범으로 이해하는 가르침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천주교 역시 교회의 설립자와 머리는 그리스도이시며, 교회의 생명은 그분의 구속과 성령의 역사에서 비롯된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마리아를 교회의 어머니라고 부른다는 사실만으로 그를 교회의 창설자나 최고 통치자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 칭호가 단순한 명예적 표현을 넘어 모든 신자와의 실제적인 영적 관계를 나타낸다고 설명한다면, 그러한 관계가 성경과 주님의 영적 질서에서 어떤 근거를 갖는지 별도로 검토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2025년 11월 4일 바티칸 신앙교리부가 발표한 ‘신자들의 어머니’(Mater Populi Fidelis)는 특히 주목할 만한 문서입니다. 이 문서의 34–37항은 마리아의 영적 모성이 그리스도의 어머니라는 역사적 사실에서 출발하지만,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의 모든 지체와 관계되는 모성으로 확장된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마리아가 단순히 과거의 모범에 머무르지 않고, 오늘날에도 신자들을 위한 모성적 협력과 ‘전구’(轉求, intercession)를 감당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 문서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유일한 중재를 약화시키거나, 마리아에게 그리스도와 나란히 서는 독립적인 구원적 역할을 부여하는 표현을 경계합니다. 특히 45–47항은 마리아가 하나님과 별도로 은총을 보관하거나 모든 은총이 반드시 그의 손을 통하여 전달되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설명합니다. 마리아의 역할은 신자들이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받아들이도록 돕는 모성적 협력이며, 실제로 영적 생명을 주시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인정해야 할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천주교의 공식 교리 자체가 마리아를 주님의 은총과 독립된 생명의 근원으로 만들지 않으려는 분명한 의도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구별을 인정하더라도 마리아 개인에게 모든 신자의 영원한 어머니라는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는 일이 신적으로 확정된 진리인지에 관한 질문은 여전히 남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천주교의 영적 모성론과 스베덴보리의 교회론을 비교해야 합니다.

 

천주교가 마리아의 영적 모성을 설명할 때 가장 중요하게 사용하는 성경은 요19:26–27입니다. 십자가 위에 계신 주님께서는 자신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마리아에게는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고 말씀하시고 제자에게는 ‘보라 네 어머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 제자는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직접적인 역사적 문맥에서 주님은 자신의 어머니를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맡기시고, 그 제자에게 마리아를 어머니처럼 돌보도록 하십니다. 이는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도 어머니를 돌보셨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천주교는 여기에서 더 깊은 신학적 의미를 발견합니다. 사랑하시는 제자가 모든 신자를 대표하며, 주님께서 마리아를 그 제자의 어머니로 맡기신 것은 교회 전체에 마리아를 영적 어머니로 주신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마리아의 믿음과 순종을 교회의 삶과 연결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요19:26–27은 모든 시대의 신자들이 마리아를 반드시 영적 어머니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직접 선언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이 말씀만으로 마리아가 천국에서 모든 신자의 영적 생명을 지속적으로 돌보는 특별한 권위를 받았다고 확정하기도 어렵습니다. 따라서 성경이 직접 기록한 사건과 그 사건에 부여한 후대의 신학적 해석을 구별해야 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주님론은 중요한 관점을 제공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102항에서 주님께서 마리아에게서 취하신 인성을 영화하셨으므로, 영화 이후의 주님을 여전히 마리아에게서 비롯된 자연적인 인성에 의하여 규정해서는 안 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이러한 가르침의 근거 가운데 하나로 요19:26–27을 인용하며, 주님께서 마리아를 ‘어머니’가 아니라 ‘여자여’라고 부르신 사실에 주목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성경의 문자적 문맥과 스베덴보리의 신학적 해석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당시의 호칭 자체가 자연적인 모자 관계를 부정한다는 뜻은 아니며, 이 장면은 오히려 주님께서 마리아를 돌보시는 구체적인 사랑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것은 주님의 영원한 신적 정체성이 마리아에게서 받은 자연적인 인성에 종속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마리아가 주님의 지상 생애에서 실제로 어머니였다는 사실은 인정하되, 그 자연적인 모성을 근거로 영화된 주님과 교회 전체에 대한 영원한 모성적 권위를 도출하는 데에는 신중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마리아를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맡기신 사건과 마리아에게 모든 신자의 거듭남을 돌보는 보편적 직분이 부여되었다는 주장은 동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제 성경에서 ‘어머니’가 지니는 영적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AC, 1749–1756) 289–290항에서 창3:20의 하와가 ‘모든 산 자의 어머니’라고 불린 이유를 해설합니다. 그는 여기서 ‘어머니’가 교회를 나타내며, ‘산 자’는 생명 자체이신 주님에게서 오는 믿음과 생명을 가진 사람들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AC.289는 아내와 어머니가 교회, 넓은 의미에서는 하늘과 땅에 있는 주님의 나라를 나타낸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AC.290은 참된 생명이 오직 주님에게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 말씀에서 하와가 모든 산 자의 어머니라는 것은 어떤 한 여성이 모든 인간의 영적 생명을 직접 만들어 낸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고 전달하는 교회의 영적 역할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설명은 AC.2691과 2717항에서도 이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어머니를 교회와 연결하여 해석하며, 특히 진리에 대한 애정과 관계된 영적 교회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사용합니다. 따라서 말씀에서 어머니가 지니는 속뜻은 단순한 자연적 출생을 넘어, 주님의 선과 진리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그들이 영적으로 살아나는 과정과 관계됩니다. 이것은 마리아의 영적 모성을 검토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기준입니다. 성경에서 어머니가 교회를 나타낸다는 사실과 마리아라는 역사적 인물에게 모든 신자의 보편적인 영적 모성의 권위가 주어졌다는 주장은 구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영적 의미는 성경의 다른 말씀에서도 확인됩니다. 갈4:26에서 바울은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 자유자이며 우리의 어머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어머니는 특정한 인간 여성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오는 자유와 생명을 지닌 영적 공동체를 나타냅니다. 또한 계12:1의 해를 입은 여자에 관하여 스베덴보리는 ‘계시록 해설’(Apocalypse Revealed, AR, 1766) 533항에서 그 여인이 새 하늘에 있는 주님의 새 교회와 땅 위에 세워질 새 교회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어머니와 여자가 교회의 영적 상태를 나타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상응의 원리를 조심스럽게 적용해야 합니다. 어떤 여성이 교회를 나타내는 표상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사실이 그 여성 개인에게 교회의 모든 영적 권위가 실제로 부여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마리아가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순종한 모습은 교회가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모습을 아름답게 보여 주는 신앙적 모범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교회를 나타내는 모범이라는 주장과 그가 모든 신자의 영원한 어머니라는 주장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 원리는 역사적인 인물을 신격화하거나 그에게 특별한 종교적 권위를 부여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말씀 안에 담긴 주님의 선과 진리를 이해하도록 돕는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영적 출생의 근원을 살펴보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요3:3–8에서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으며,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또한 요1:12–13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나는 것이라고 증언합니다. 여기서 ‘거듭남’(regeneration)은 인간이 주님에게서 새로운 영적 생명을 받는 과정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인간은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악을 죄로 여겨 피하며 선을 행하는 삶으로 나아가는 만큼 영적으로 새로워집니다. 이 과정에서 교회는 말씀을 가르치고 진리의 삶으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영적인 어머니의 쓰임을 감당합니다. 그러나 교회 자체가 생명의 근원인 것은 아닙니다. 교회는 주님께서 말씀과 진리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곳이며, 실제로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마리아는 주님께서 인간으로 세상에 오시는 자연적인 출생에서 특별한 역할을 감당했지만, 다른 모든 인간의 영적 출생이 마리아에게서 비롯된다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스베덴보리의 교회론은 영적 모성의 중심을 특정한 역사적 인물보다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고 전하는 교회의 쓰임에 둡니다. 그리고 그 교회조차 모든 생명을 주님에게서 받는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천주교와 스베덴보리의 가르침 사이에 공통점과 차이가 함께 나타납니다. 천주교 역시 영적 생명의 유일한 근원이 마리아 자신이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마리아의 영적 모성은 그리스도의 구속과 은총에 종속되어 있으며, 신자들이 그리스도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도록 돕는 모성적 협력으로 설명됩니다. 그러나 천주교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마리아 개인에게 모든 신자를 향한 지속적인 모성적 역할이 실제로 주어졌다고 고백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의 직접적인 가르침에서 영적 어머니라는 표현은 우선 교회와 관계되며, 인간의 거듭남은 주님께서 말씀과 선과 진리를 통하여 이루시는 역사입니다. 따라서 마리아가 교회의 모범이라는 사실은 인정할 수 있지만, 그의 자연적인 모성을 모든 신자를 향한 보편적이고 영원한 영적 직분으로 확장하는 데에는 별도의 근거가 필요합니다. 특히 천주교가 마리아의 영적 모성을 천상에서 계속되는 전구와 돌봄의 역할로 설명하는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영계 이해와 함께 검토해야 합니다. 천국의 천사들이 서로 사랑하며 선한 쓰임을 감당한다는 사실과, 특정한 한 인간에게 모든 신자를 향한 특별한 모성적 권위가 부여되었다는 주장은 구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의 구체적인 내용은 마리아의 전구와 중재에 관한 후속 해설에서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TCR.827에서 자신이 영계에서 마리아와 만난 경험을 기록합니다. 그는 마리아가 자신은 주님의 어머니였지만 주님께서 어머니에게서 취하신 인간적인 것을 벗으시고 인성을 신적으로 만드셨으므로 이제는 그분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예배한다고 말했다고 전합니다. 이 기록은 성경에 기록된 사건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영적 경험으로 보고한 내용이므로, 자료의 성격을 정확하게 구별해야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마리아 이해를 직접 보여 주는 중요한 본문입니다. 여기서 마리아는 주님을 예배하는 영계의 인간으로 나타나며, 모든 신자의 영적 생명을 낳거나 보존하는 독립적인 권위자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다만 그 기록에 특별한 모성적 직분이 언급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마리아가 천국에서 어떠한 사랑이나 쓰임도 감당하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천국론에 따르면 모든 천사는 자신에게 맡겨진 선한 쓰임 안에서 주님의 사랑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마리아가 주님의 성육신을 위하여 특별한 쓰임을 감당했다는 사실과, 그가 영원히 모든 인간의 영적 어머니로서 특별한 천상 권위를 행사한다는 주장은 동일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전자는 성경과 스베덴보리의 저작이 직접 뒷받침하지만, 후자는 그의 직접적인 가르침으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이 문제는 실제 신앙생활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인간은 어머니의 사랑을 통하여 위로와 보호, 따뜻함과 돌봄을 경험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어머니의 사랑과 연결하여 이해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성경 역시 사49:15에서 어머니가 자기 자식을 잊을 수 있겠느냐고 말씀하시면서, 설령 어머니가 자식을 잊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잊지 않으신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어머니의 사랑은 주님의 사랑을 이해하도록 돕는 비유이지만, 주님의 사랑이 부족하여 다른 존재가 그것을 보충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참된 모성애의 근원은 주님 자신에게 있습니다. 따라서 마리아를 특별히 자비로운 영적 어머니로 생각하면서 주님께서는 멀고 엄격하시지만 마리아는 자신을 더 잘 이해하고 받아 주는 분이라고 여긴다면, 그 신앙적 이해는 다시 살펴야 합니다. 주님은 이미 무한한 사랑과 자비 자체이시며, 인간이 그분께 나아가기 위하여 반드시 다른 피조물의 모성적 보호를 거쳐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천주교의 공식 가르침과 개인적인 통념을 구별해야 합니다. 2025년 신앙교리부 문서는 마리아를 주님의 엄격한 심판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하는 별도의 피난처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경계합니다. 따라서 문제는 어머니의 사랑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묵상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랑의 표상을 주님과 인간 사이에 반드시 필요한 별도의 영적 권위나 관계로 확정하는 데 있습니다.

 

마리아의 믿음과 순종을 존중하는 일은 이러한 신학적 구별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눅1:38에서 마리아는 자신을 주의 여종이라고 부르며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고백합니다. 눅1:46–47에서는 자신의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하나님 자신의 구주를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요2:5에서 가나의 혼인 잔치에 참석한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마리아가 교회의 믿음과 순종을 보여 주는 중요한 모범이 될 수 있음을 알려 줍니다. 그는 자신의 특별한 지위를 주장하기보다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도록 이끄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를 교회의 믿음과 순종의 본보기로 기억하는 데에는 귀중한 신앙적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과 순종이 모든 신자에게 마리아와의 직접적이고 영원한 모자 관계를 형성한다는 사실까지 증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인간의 참된 위대함은 특별한 칭호나 지위를 받았는가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얼마나 받아들이고 그것을 실제적인 삶에서 실천하는가에 있습니다. 마리아가 참으로 복된 여인인 것도 그가 주님의 성육신을 위하여 선택되었고, 그 말씀을 믿음과 순종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를 진정으로 존중한다면 그의 삶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 방향, 곧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태도를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교회의 참된 영적 모성이 무엇이며 인간이 누구에게서 새롭게 태어나는가를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은 위에 있는 예루살렘을 우리의 어머니라고 부르며, 스베덴보리는 말씀에서 어머니가 교회를 나타낸다고 가르칩니다. 교회는 주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선과 진리를 전하며, 사람들이 그 말씀을 받아들여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도록 돕는 영적인 어머니의 역할을 감당합니다. 그러나 교회조차 생명의 근원은 아닙니다. 교회가 참된 교회인 것은 오직 주님께서 그 안에 계시고, 그분의 선과 진리가 사람들의 삶 속에서 받아들여지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주님께서 인간으로 오시기 위하여 선택하신 복된 어머니였으며, 그의 믿음과 순종은 교회가 본받아야 할 귀중한 모범입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을 영적으로 낳고 거듭나게 하시는 분은 마리아가 아니라 주님 자신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어떤 특별한 인간과 영적인 모자 관계를 맺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교회의 어머니이며 모든 신자의 영적 어머니다’라는 명제를 검토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마리아의 모성적 지위를 높이거나 낮추는 데 있지 않습니다. 어머니라는 영적 표상을 통하여 주님의 사랑과 교회의 참된 쓰임을 이해하고, 모든 영적 생명의 근원이 오직 주님 한 분이심을 더욱 분명하게 깨닫는 데 있습니다. 교회는 그 생명을 받아들이고 전하는 영적인 어머니의 쓰임을 감당하지만, 그 모든 생명과 사랑의 시작과 끝은 언제나 주님 자신이십니다. (SL.RC.036 해설)

 

요약

‘마리아는 교회의 어머니이며 모든 신자의 영적 어머니다’라는 명제에는 마리아가 주님의 성육신을 위하여 선택된 복된 여인이며, 그의 믿음과 순종이 교회와 신자들에게 중요한 모범이 된다는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천주교는 마리아의 영적 모성을 그리스도에게서 독립된 생명의 근원으로 설명하지 않으며, 그의 역할을 그리스도의 유일한 구속과 은총에 종속된 모성적 협력으로 가르칩니다. 특히 2025년 신앙교리부 문서는 마리아에게 독립적인 구원적 권위나 모든 은총의 필수적 전달자라는 지위를 부여하는 이해를 경계합니다. 이러한 공식적인 구별은 정확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요19:26–27에서 주님께서 마리아를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맡기신 사건을 모든 시대의 신자에게 적용하고, 그에게 영원한 영적 모성의 직분이 부여되었다고 확정하는 것은 성경 본문의 직접적인 진술을 넘어서는 신학적 해석입니다. 스베덴보리는 AC.289–290과 2691·2717항에서 어머니가 교회를 나타내며, 모든 참된 영적 생명은 오직 주님에게서 비롯된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TCR.102와 827에서는 영화된 주님과 마리아의 자연적인 모자 관계를 구별하고, 마리아를 주님을 예배하는 영계의 인간으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오류로 검토해야 할 핵심은 마리아를 복된 어머니로 존중하거나 교회의 믿음과 순종의 모범으로 삼는 데 있지 않습니다. 마리아의 역사적 모성을 교회 전체의 보편적이고 영원한 영적 모성으로 확대하고, 그에게 모든 신자를 향한 특별한 천상 직분을 신적으로 확정하는 데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가 이 칭호를 직접적으로 반박했다고 주장할 근거는 부족하며, 이러한 판단은 그의 주님론과 교회론, 거듭남의 가르침에 근거한 신학적 평가입니다. 성경에서 어머니가 나타내는 중요한 영적 의미는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전달하는 교회이며, 실제로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 자신이십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를 교회의 믿음과 사랑을 보여 주는 귀중한 모범으로 존중할 수는 있지만, 인간의 영적 출생과 구원을 이해하기 위하여 마리아의 별도 모성적 권위를 반드시 믿어야 할 진리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모든 인간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분은 오직 주님 한 분이시며, 참된 교회는 그 생명을 받아들이고 이웃에게 전하는 영적인 어머니의 쓰임을 감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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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RC.035 | 천주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마리아는 하늘의 여왕으로 공경받는다’ – 천국의 참된 왕권은 누구에게 있으며, 마리아의 특별한 지위는 어디까지 인정할 수 있는가?

 

해설

‘마리아는 하늘의 여왕으로 공경받는다.’ 이것은 천주교의 마리아 신앙에서 널리 사용되는 ‘하늘의 여왕’(Regina Caeli, Queen of Heaven)이라는 칭호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천주교 신자들은 마리아를 ‘천상 모후’(天上母后)라고 부르며, 성모상에 왕관을 씌우거나 왕좌에 앉은 마리아의 모습을 성화와 조각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묵주기도의 영광의 신비 마지막 단에서는 마리아가 하늘의 모후로 관을 받으시는 일을 묵상합니다. 이러한 신심에는 마리아가 주님의 어머니로서 특별한 영광을 받았으며, 천국의 모든 성인과 천사 가운데 뛰어난 지위를 차지한다는 믿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을 접하면 몇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천국의 왕은 오직 주님 한 분이신데, 어떻게 마리아를 하늘의 여왕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마리아가 하늘의 여왕이라는 말은 단순한 존칭일까요, 아니면 실제로 천국에서 특별한 권위를 행사한다는 뜻일까요? 무엇보다 천국의 모든 생명과 권능이 오직 주님에게서 나온다면, 마리아에게 별도의 왕적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 과연 정당할까요? 이 문제는 단순히 마리아에게 사용하는 칭호의 적절성을 넘어, 천국이 어떤 질서로 이루어져 있는지, 천사와 성인들의 영적 권위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그리고 모든 예배의 중심이 누구에게 있어야 하는지를 묻는 중요한 신학적 문제입니다.

 

먼저 천주교가 말하는 마리아의 왕권(王權, queenship)을 정확히 이해해야 합니다. 교황 비오 12세는 1954년 10월 11일 회칙 ‘하늘의 여왕께’(Ad Caeli Reginam)를 발표하면서 마리아를 하늘의 여왕으로 공경하는 신학적 근거를 설명하고, 마리아의 왕권을 기념하는 축일을 제정했습니다. 처음에는 5월 31일에 지냈지만, 현재 로마 가톨릭 전례력에서는 성모 승천 대축일로부터 여드레 뒤인 8월 22일에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을 지냅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1954년의 회칙이 마리아의 왕권을 처음으로 새로운 신앙의 교의로 선포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비오 12세는 회칙 6항에서 새로운 신앙의 진리를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교회의 전통과 전례 안에서 인정되어 온 마리아의 왕적 지위를 더욱 분명히 설명하려 한다고 밝혔습니다. 따라서 마리아의 왕권을 1954년에 갑자기 만들어 낸 교리라고 설명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랜 전통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 전통이 실제로 주님의 계시에 근거한 진리인가는 별도로 검토해야 합니다. 특히 마리아의 왕권은 단순히 존칭으로만 이해되지 않습니다. 천주교는 마리아에게 그리스도에게서 비롯되는 특별한 왕적 존엄과 영향력이 있으며, 그가 신자들을 위하여 모성적으로 전구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명예로운 칭호와 실제적인 천상 권위에 관한 주장을 함께 살펴야 합니다.

 

천주교가 마리아의 왕권을 설명하는 첫 번째 근거는 그가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라는 사실입니다. 눅1:32–33에서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실 예수님이 다윗의 왕위를 받으시고 영원히 다스리실 것이라고 전합니다. 또한 눅1:43에서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내 주의 어머니’라고 부릅니다. 천주교는 이 말씀들을 근거로 영원한 왕이신 그리스도의 어머니에게도 특별한 왕실적 존엄이 주어졌다고 이해합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왕실에서 왕의 어머니가 차지한 지위 역시 이러한 해석과 연결됩니다. 왕상2:19에서는 솔로몬이 어머니 밧세바를 위하여 일어나 절하고, 자신의 오른쪽에 자리를 마련해 주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천주교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마리아를 왕이신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자 특별한 영광을 받은 여인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성경이 직접 증언하는 내용과 후대의 신학적 적용을 구별해야 합니다. 눅1:32–33은 예수님께서 영원히 다스리실 왕이심을 분명하게 가르치지만, 마리아에게 천국의 왕권이 부여된다고 직접 선언하지는 않습니다. 왕상2:19 역시 고대 이스라엘 왕실에서 왕의 어머니가 존중받았다는 역사적 사례이지, 마리아가 천국에서 모든 천사와 성인을 다스린다는 사실을 직접 가르치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마리아의 왕권은 이러한 성경 본문들을 연결하여 형성된 신학적 해석이며, 성경이 명시적으로 선언하는 주님의 영원한 왕권과는 구별해야 합니다.

 

비오 12세의 회칙은 마리아의 왕권을 그리스도의 어머니라는 지위에만 근거하지 않습니다.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에 특별하게 협력했다는 사실도 중요한 근거로 제시합니다. 회칙 34–39항은 마리아가 구속주이신 그리스도와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었으며, 그분의 고난과 승리에 특별한 방식으로 참여했기 때문에 왕적 존엄을 받는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회칙 39항은 엄밀하고 완전한 의미에서 참된 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마리아는 제한적이고 유비적인 의미에서 그 왕권에 참여한다고 분명하게 구별합니다. 여기서 마리아의 왕권은 그리스도에게서 독립된 신적 통치권이 아니라, 그분에게서 비롯되는 종속적인 권위라는 것입니다. 또한 천주교는 하나님께만 드리는 ‘흠숭’(欽崇, adoration)과 성인들에게 드리는 ‘공경’(恭敬, veneration)을 구별하며, 마리아에게는 다른 성인들보다 특별한 공경을 드린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구별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 66항과 ‘가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971항에서도 확인됩니다. 그러므로 천주교가 공식적으로 마리아를 주님과 동등한 신으로 숭배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검토가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마리아의 왕권이 주님의 왕권에 종속되어 있다고 설명하더라도, 그에게 부여된 특별한 천상 권위와 신자들을 위한 ‘전구’(轉求, intercession)가 과연 성경과 천국의 영적 질서에 근거하는지는 별도로 살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하늘의 여왕’이라는 표현이 다른 문맥에서도 나타납니다. 렘7:18과 렘44:17–19에서는 유다 백성이 하늘의 여왕에게 제물을 바치고 분향하며 전제를 드리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하여 이러한 행위를 강하게 책망하십니다. 이 말씀을 근거로 천주교가 마리아를 하늘의 여왕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곧 구약의 우상숭배와 동일하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교에서는 역사적 대상과 신학적 의미를 구별해야 합니다. 예레미야서의 하늘의 여왕은 고대 근동의 여신 숭배와 관계된 표현인 반면, 천주교가 마리아를 하늘의 여왕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리스도의 어머니에게 주어진 특별한 영광을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같은 표현을 사용한다고 해서 그 대상과 의미가 자동으로 동일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이 구절들을 마리아 공경에 대한 직접적인 역사적 판정으로 사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다만 여기에는 우리가 반드시 살펴야 할 영적 원칙이 있습니다. 인간이 주님께만 속한 신적 권능과 영광을 다른 존재에게 돌리고, 그 존재를 신적 생명과 구원의 근원처럼 의지한다면 그것은 참된 예배의 질서를 벗어나는 일이 됩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질문은 마리아에게 사용하는 칭호가 고대 여신의 명칭과 같다는 사실이 아니라, 실제로 누구를 모든 사랑과 자비, 권능과 구원의 궁극적인 근원으로 여기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천국의 왕권을 살펴보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 2–6항에서 천국의 하나님은 오직 주님 한 분이시라고 가르칩니다. 천국의 모든 천사는 주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며, 그분과 나란히 독립적인 신적 통치권을 지니는 존재는 없습니다. 또한 HH.7–8에서는 천국을 천국 되게 하는 것이 천사들 자신에게서 비롯되는 거룩함이나 권능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흘러나와 천사들이 받아들이는 신적 선과 진리라고 설명합니다. 천사들은 자신들이 행하는 모든 참된 선과 자신들이 이해하는 모든 참된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식합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어떤 천사도 자신의 능력과 지혜로 천국을 이루거나 유지하지 않습니다. 천국의 모든 생명은 주님에게서 흘러들어오며, 천사들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만큼 천국의 생명에 참여합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마리아의 왕권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기준을 제공합니다. 설령 마리아가 천국에서 매우 높은 상태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에게 독립적인 신적 권능이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어떤 천사가 특별한 지혜와 사랑을 지니고 있다고 해서 그가 다른 천사들에게 신적 생명을 부여하는 근원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천국의 참된 통치권은 오직 주님에게 속하며, 모든 천사와 인간은 그분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자신에게 맡겨진 쓰임을 감당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94항에서 마리아를 높이는 당시 로마 가톨릭의 신심을 직접적으로 비판합니다. 그는 기독교인들이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기보다 마리아의 아들로 생각하는 경향을 지적하면서, 로마 가톨릭이 마리아를 다른 모든 성인보다 높이고 여신이나 성인들의 여왕처럼 받들었다고 비판합니다. 원문에는 마리아를 ‘여신 또는 여왕’(goddess or queen)으로 높였다는 강한 표현이 실제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평가와 천주교의 공식 교리를 구별해야 합니다. 천주교는 마리아를 여신이라고 가르치지 않으며, 그에게 주님과 동등한 신적 왕권이 있다고 선언하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TCR.94의 비판을 오늘날 천주교의 공식 교리를 그대로 설명한 문장으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이 본문은 스베덴보리가 당시의 마리아 신심에서 발견한 영적 위험을 보여 주는 자료입니다. 그가 특히 경계한 것은 주님의 신적 정체성을 마리아에게서 비롯된 자연적인 모자 관계 안에 가두거나, 마리아에 대한 공경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주님의 유일한 신성이 흐려지는 현상이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마리아에게서 자연적인 인성을 취하셨지만, 그 인성을 점차 영화하여 온전히 신적으로 만드셨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영화 이후의 주님을 여전히 마리아에게서 비롯된 자연적인 인성에 의하여 규정하거나, 그 모성에서 마리아의 영원한 왕적 권위를 도출하는 일은 그의 주님론에 비추어 다시 검토해야 합니다.

 

이러한 구별은 TCR.827에서도 확인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영계에서 흰옷을 입은 마리아를 보았으며, 마리아가 자신은 주님의 어머니였지만 주님께서 어머니에게서 취하신 인간적인 것을 벗으시고 인성을 신적으로 만드셨으므로 이제는 그분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예배한다고 말했다고 기록합니다. 또한 마리아는 주님 안에 모든 신성이 있으므로 사람들이 그분을 여전히 자신의 아들로 이해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고 전합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영적 경험으로 보고한 내용입니다. 따라서 성경의 증언과 동일한 종류의 자료로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마리아 이해를 직접적으로 보여 주는 중요한 기록입니다. 여기서 마리아는 천국의 왕좌에 앉아 다른 천사와 성인을 다스리는 존재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그는 주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예배하는 영계의 인간으로 나타납니다. 다만 이 기록이 마리아의 천국 내 모든 관계와 쓰임을 완전하게 설명하는 것은 아니므로, 마리아에게 어떠한 특별한 영적 상태나 영예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주님과 구별되는 피조물이며, 자신의 하나님으로 오직 주님을 예배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이해는 천국의 모든 선과 생명이 오직 주님에게서 비롯된다는 HH.7–8의 가르침과 일치합니다.

 

그렇다면 천국에서 높은 지위나 특별한 권위를 갖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는 흔히 자연계의 왕권을 기준으로 천국의 질서를 상상합니다. 자연계에서 왕이나 여왕은 영토와 백성을 다스리는 통치자이며, 높은 지위에는 더 큰 권력과 영향력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천국의 질서는 그러한 자연적인 권력 구조와 동일하지 않습니다. 천국에도 서로 다른 천사 사회와 질서가 있으며, 천사들은 각자의 상태와 쓰임에 따라 다양한 역할을 감당합니다. 그러나 참된 권위는 자기 자신을 높이거나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는 데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이고, 그 사랑과 지혜로 다른 사람을 섬기는 선한 쓰임에서 나타납니다. 주님께서는 막10:42–45에서 세상의 집권자들이 사람들을 주관하지만, 제자들 가운데서는 크고자 하는 사람이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천국의 참된 높음은 바로 이러한 섬김의 질서와 관계됩니다. 따라서 마리아의 특별한 영적 상태를 인정하더라도, 그것을 다른 모든 천사와 성인을 지배하는 독립적인 권력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마리아의 복됨은 주님께서 맡기신 거룩한 쓰임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뜻에 순종한 데서 이해해야 합니다. 천국의 어떤 존재도 자신의 권능으로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는 만큼 참된 사랑과 지혜 안에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천주교의 공식적인 설명과 실제 신앙생활에서 형성될 수 있는 통념을 다시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천주교는 마리아의 왕권이 주님의 왕권에 종속되어 있으며, 마리아에 대한 공경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나아가도록 돕는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공식적인 교리의 구별을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실제 신앙생활에서도 언제나 그 구별이 올바르게 유지된다고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신자가 마리아를 주님보다 더 자비로운 존재로 생각하거나, 주님께서는 엄격하시지만 마리아가 그분의 마음을 움직여 자신에게 필요한 은총을 얻어 준다고 이해한다면, 그것은 별도로 검토해야 할 신앙적 통념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주님론은 매우 중요한 진리를 밝힙니다. 주님은 무한한 사랑과 지혜 자체이시며, 모든 자비와 구원의 근원이십니다. 주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고 도우시기 위하여 어떤 피조물에게 설득을 받으셔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마리아를 통하여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더욱 깊이 깨닫는 것과, 마리아가 주님보다 더 자비로워 그분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전자는 신앙적인 정서와 해석의 문제로 살펴볼 수 있지만, 후자는 주님 자신의 신적 사랑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될 수 있습니다. 다만 이러한 문제는 마리아의 왕권이라는 칭호 자체보다 전구와 중재에 관한 신학적 이해와 더욱 직접적으로 연결되므로, 후속 해설에서 별도로 다루는 것이 적절합니다.

 

마리아라는 인물의 역사적 중요성과 믿음의 모범은 충분히 존중해야 합니다. 눅1:38에서 마리아는 자신을 주의 여종이라고 부르며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고백합니다. 또한 눅1:46–47에서는 자신의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자신의 마음이 하나님 자신의 구주를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마리아는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여왕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인간으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모습은 천국의 참된 질서와도 깊이 연결됩니다. 천국의 천사들은 자신들이 가진 선과 진리를 자기 자신의 것으로 여기지 않으며,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기뻐합니다. 마리아의 복됨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주님의 성육신이라는 특별한 역사에 쓰임을 받았으며, 자신에게 맡겨진 소명을 믿음과 순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를 올바르게 기억하는 길은 그를 하늘의 여왕으로 높이는 표현이 얼마나 장엄한가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하여 인간으로 오신 주님의 신성과 구속의 역사를 더욱 깊이 이해하고, 그가 보여 준 순종을 우리 자신의 삶에서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인간의 참된 영광은 다른 사람보다 높은 지위를 차지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으로 살아가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늘의 여왕’이라는 칭호가 우리에게 던지는 근본적인 질문을 생각해야 합니다. 천국에는 과연 주님과 나란히 영광을 받으며 특별한 왕권을 행사하는 존재가 있을까요? 스베덴보리는 천국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로 이루어진 하나의 영적 질서이며, 그 안의 모든 천사는 오직 주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한다고 가르칩니다. 천국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천사 사회가 존재하며, 각기 서로 다른 선한 쓰임을 감당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다양성의 중심에는 언제나 주님 한 분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를 복된 여인으로 기억하고 그의 믿음과 순종을 존중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에게 천국의 모든 천사와 성인 위에 있는 특별한 왕적 권위를 부여하고 이를 신앙적으로 공경해야 할 지위로 확정하는 일은 별도의 근거를 요구합니다. 특히 그 권위를 주님의 영원한 왕권에 대한 참여라는 말로 설명하더라도, 그러한 참여가 실제로 어떤 영적 의미를 가지며 무엇을 근거로 마리아에게만 특별히 부여되는지 검토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강조하는 것은 천국의 모든 생명과 통치가 오직 주님에게 속한다는 사실입니다. 마리아를 공경하는 마음이 참으로 올바른 방향을 향한다면 그 마음은 마리아에게 머무르지 않고, 마리아가 자신의 하나님이자 구주로 찬양한 주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 역시 어떤 특별한 인간이나 천사의 영광을 바라보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천국의 모든 사랑과 지혜, 모든 선과 진리, 모든 권능과 영광의 근원이신 주님을 바라보고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천국의 참된 왕은 오직 주님 한 분이시며, 그분의 왕권은 다른 어떤 피조물에게서도 비롯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교리를 검토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마리아의 지위를 높이거나 낮추는 데 있지 않고, 천국의 모든 생명과 권능이 오직 주님에게 속한다는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깨닫는 데 있습니다. (SL.RC.035 해설)

 

요약

‘마리아는 하늘의 여왕으로 공경받는다’라는 명제에는 마리아가 주님의 성육신을 위하여 선택된 복된 여인이며, 그에게 부여되는 모든 영광과 은총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에게서 비롯된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천주교는 마리아의 왕권을 주님과 동등한 신적 통치권으로 가르치지 않으며, 왕이신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자 구속의 역사에 특별히 협력한 인물에게 주어진 종속적이고 참여적인 권위로 설명합니다. 또한 마리아에 대한 공경과 하나님께 드리는 흠숭을 구별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마리아가 천국에서 모든 천사와 성인 위에 있는 여왕으로 통치한다는 사실을 직접 선언하지 않습니다. 천주교가 제시하는 근거들은 주님의 왕권, 고대 왕실에서 왕의 어머니가 차지한 지위, 마리아의 특별한 소명과 구속에 대한 협력을 연결한 신학적 해석에 해당합니다. 스베덴보리는 HH.2–12에서 천국의 모든 선과 권능이 오직 주님에게서 비롯된다고 가르치며, TCR.94에서는 마리아를 여신이나 성인들의 여왕처럼 높이는 당시의 신심을 직접 비판합니다. 또한 TCR.827에서는 마리아가 주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예배하는 영계의 인간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오류로 검토해야 할 핵심은 마리아를 복된 여인으로 존중하거나 그가 특별한 쓰임을 감당했다고 인정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가 주님의 어머니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천국의 모든 피조물 위에 있는 특별한 왕적 권위를 신적으로 확정하고, 그 권위를 종교적 공경과 전구 요청의 근거로 삼는 데 있습니다. 다만 이는 천주교가 마리아를 여신으로 가르친다는 뜻이 아니며, 마리아의 왕권과 전구의 구체적인 타당성도 각각 구별하여 검토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천국의 모든 천사와 인간은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는 피조물이며, 그들의 참된 위대함은 독립적인 권능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지혜를 받아 이웃을 섬기는 선한 쓰임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여왕’이라는 칭호보다 더욱 중요한 진리는 천국의 유일한 왕이신 주님께 모든 영광과 권능이 속한다는 사실입니다. 참된 신앙은 마리아의 왕권에 머무르지 않고, 마리아 자신이 자신의 하나님이자 구주로 찬양한 주님 한 분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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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천주교 신앙에서 일곱 성사는 교회생활의 중심을 이루는 중요한 제도입니다. 천주교는 세례성사, 견진성사, 성체성사, 고해성사, 병자성사, 성품성사, 혼인성사를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시고 교회에 맡기신 거룩한 성사로 가르칩니다. 신자는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하고, 견진을 통하여 신앙을 굳게 하며, 성체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결합하고, 고해를 통하여 죄의 용서를 받으며, 병자성사를 통하여 고통 가운데 특별한 은총을 구합니다. 성품성사와 혼인성사는 각각 교회의 직무와 부부의 결합을 거룩한 소명으로 이해하도록 합니다. 이러한 성사 체계는 인간의 출생과 성장, 죄와 회개, 질병과 죽음, 결혼과 공동체적 봉사에 이르기까지 삶의 중요한 순간들을 포괄합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신앙이 단순한 생각이나 고백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삶의 모든 영역에서 주님의 은총을 받아야 한다는 귀중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주님의 은총은 일곱 가지 성사라는 특정한 의식들을 통하여 전달되는 것일까요? 그러한 성사를 집전하고 관리하는 교회는 인간의 구원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 성사의 거룩함과 그 성사가 인간 안에서 실제로 이루는 영적인 변화는 어떻게 구별해야 할까요? 이 질문은 천주교의 성사 체계를 단순히 부정하는 문제가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에게 생명을 주시고 그를 거듭나게 하시는 방식이 무엇인지를 다시 살펴보는 문제입니다.

 

먼저 천주교의 공식 가르침을 정확히 이해해야 합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1113–1134항은 성사를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시고 교회에 맡기신 은총의 유효한 표지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표현은 단순한 ‘표지’가 아니라 ‘유효한 표지’라는 점입니다. 천주교에 따르면 성사는 보이지 않는 은총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만 하는 의식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성사 안에서 친히 역사하시며, 그 성사가 나타내는 은총을 실제로 베푸십니다. 특히 교리서 1128항은 성사가 ‘행위 자체로’(ex opere operato) 효력을 가진다고 설명합니다. 이 라틴어 표현은 성사적 행위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효력이 발생한다는 뜻이지만, 그 행위 자체에 주님과 독립된 신비한 능력이 들어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천주교는 성사의 효력이 집전자인 사제의 개인적인 거룩함이나 성사를 받는 사람의 공로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 사역과 그분의 능력에 근거한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합당한 조건과 교회의 의도에 따라 성사가 거행될 때 그리스도께서 그 성사 안에서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성사의 객관적인 효력과 그 성사가 인간 안에서 맺는 열매를 구별해야 합니다. 천주교는 성사의 열매가 그것을 받는 사람의 내적인 준비와 태도에도 달려 있다고 분명히 가르칩니다. 성사를 받기만 하면 누구나 자동으로 거룩해지고 구원받는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일곱 성사 모두를 모든 신자가 빠짐없이 받아야 한다고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천주교의 성사론을 단순한 의식주의나 종교적 마술로 규정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성사가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객관적인 은총의 수단이며, 그 성사적 행위 안에서 실제적인 영적 효력이 발생한다고 보는 점은 분명합니다.

 

이러한 일곱 성사의 체계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도 중요합니다. 초대 기독교 공동체에는 이미 세례와 성찬, 죄의 고백과 용서, 병자를 위한 기도와 안수, 교회 직무를 위한 안수와 혼인에 관한 여러 신앙적 실천이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실천들이 처음부터 오늘날 천주교가 가르치는 일곱 가지 성사라는 완성된 체계로 정리되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성사에 관한 신학적 이해는 여러 세기에 걸쳐 발전했고, 중세 서방교회에서 일곱 성사의 체계가 정착되었습니다. 특히 12세기 신학자 페트루스 롬바르두스는 일곱 성사를 체계적으로 설명한 중요한 인물이며, 이후 교회의 공의회들을 거쳐 이 체계는 공식적인 교리로 확립되었습니다. 16세기 트리엔트 공의회는 종교개혁의 성례전 이해에 대응하여 신약의 성사가 일곱 가지이며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셨다는 가르침을 확정했습니다. 물론 천주교는 이러한 발전을 인간이 임의로 새로운 성사를 만들어 낸 과정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맡기신 신앙의 유산을 성령의 인도 아래 점차 명확하게 이해하고 정식화한 과정으로 봅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어떤 교리 체계가 발전했다는 사실과, 그 체계의 모든 내용이 주님께서 직접 제정하신 신적인 질서라는 주장은 서로 구별하여 검토해야 합니다. 성경에 어떤 거룩한 행위가 등장한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이 독립적인 은총 전달의 성사로 제정되었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일곱 성사 체계의 신학적 정당성을 판단하려면 그 역사적 형성뿐 아니라 성경의 실제 가르침과 그 의식들의 영적인 의미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성경에서 세례와 성찬이 차지하는 특별한 위치는 분명합니다. 마28:19에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세례를 베풀라고 명령하셨고, 눅22:19에서는 마지막 식사 자리에서 자신을 기념하여 이를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고전11:23-26에서 바울은 주님의 만찬을 교회가 계속 지켜야 할 거룩한 일로 전합니다. 물론 다른 다섯 성사와 관련된 성경적 근거들도 존재합니다. 약5:14-15에는 병든 사람을 위하여 장로들이 기도하고 기름을 바르는 일이 나오고, 요20:23에는 죄의 용서에 관한 사도적 직무가 언급됩니다. 사도행전에는 안수를 통하여 성령의 은사를 받거나 교회의 직무를 맡기는 장면들이 등장하며, 혼인의 거룩함은 창2:24와 마19:4-6에서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이러한 행위들은 모두 중요한 신앙적 의미를 지닙니다. 그러나 각각의 행위가 성경에 나타난다는 사실과 그것들이 모두 동일한 의미에서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일곱 가지 성사라는 결론 사이에는 추가적인 신학적 해석이 필요합니다. 천주교는 교회의 성전과 교도권을 통하여 그 결론을 정당화하지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성경의 영적 의미와 주님께서 세우신 의식의 실제적인 쓰임을 기준으로 다시 살펴보아야 합니다. 특히 성경의 거룩한 행위를 후대의 제도적 질서와 동일시할 때에는, 그 행위가 지닌 본래의 영적인 목적이 제도 자체의 권위에 가려지지 않는지 주의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TCR.667–691에서 세례를, TCR.698–752에서 성찬을 설명합니다. 그는 TCR.667에서 기독교회의 두 성사인 세례와 성찬의 의미와 효력을 이해하려면 말씀의 영적 의미를 알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TCR.669에서는 이 두 성사가 기독교회에서 매우 귀중한 위치를 차지하지만, 그 쓰임을 이해하지 못하면 사람들이 단지 거룩한 의식이라는 이유만으로 그것들을 받아들이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성사를 단순한 인간의 종교적 관습이나 상징적인 기념행위로 축소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세례와 성찬이 주님께서 세우신 거룩한 의식이며, 자연계와 영계의 상응을 통하여 실제적인 영적 쓰임을 가진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천주교의 일곱 성사 체계를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세례는 기독교회로 들어가는 입문과 거듭남의 길에 관계되고, 성찬은 주님의 신적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며 그분과 결합하는 일에 관계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 두 성사는 단지 교회의 의무적인 예식이 아니라 인간의 영적 출생과 성장, 그리고 주님과의 결합을 나타내고 섬기는 특별한 수단입니다. 여기서 천주교와의 중요한 차이가 드러납니다. 천주교는 일곱 성사를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객관적인 은총의 수단으로 이해하지만, 스베덴보리는 두 성사의 특별한 거룩함을 인정하면서도 그 의미와 효력을 말씀의 영적 의미, 상응, 거듭남, 주님과의 결합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성사의 숫자가 일곱인가 둘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은총의 전달과 인간의 영적 변화가 어떤 질서 안에서 이루어지는가에 관한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세례의 경우 스베덴보리는 TCR.677–687항에서 세 가지 쓰임을 설명합니다. 첫 번째는 기독교회로 들어가는 입문이며, 두 번째는 구속자이시며 구원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인정하며 따르게 하는 것이고, 세 번째이자 궁극적인 쓰임은 거듭남입니다. 여기서 첫 번째 쓰임과 세 번째 쓰임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례를 통하여 기독교회 안으로 들어간다는 사실과 그 사람의 내면에서 거듭남이 완성되었다는 사실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세례의 물은 영적으로 진리를 통한 정결을 나타내지만, 자연적인 물이 인간의 머리를 씻는다고 해서 그 사람의 의지와 이해에 자리 잡은 악과 거짓이 모두 제거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주님의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의 빛으로 자신의 악을 발견하며, 주님의 도움을 구하여 그 악을 죄로 여겨 피하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주님께서는 인간의 내면을 점차 변화시키십니다. 그렇다고 세례가 단순한 표지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세례가 사람을 영계의 기독교인들과 연결하는 실제적인 쓰임도 가진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세례의 거룩함을 인정하면서도 그 의식의 시행 자체를 거듭남의 완성과 동일시하지 않는 구별이 필요합니다. 세례는 주님께서 인간을 새로운 삶으로 부르시는 거룩한 시작이며, 그 시작이 가리키는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이 실제로 거듭나는 데 있습니다.

 

성찬은 이러한 거듭남과 주님과의 결합을 더욱 깊이 드러냅니다. TCR.698에서 스베덴보리는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의 상응을 알지 못하면 성찬의 쓰임과 유익을 이해할 수 없다고 설명합니다. 성찬의 빵은 주님의 사랑에서 오는 신적 선을, 포도주는 주님의 지혜에서 오는 신적 진리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주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것은 자연적인 육체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오는 신적 선과 진리를 인간이 자신의 영적 생명 안에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성찬이 단지 신적 선과 진리를 기억하게 하는 상징적인 의식이라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TCR.716에서 스베덴보리는 성찬 안에 주님께서 그분의 모든 구속과 함께 온전히 현존하신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TCR.725에서는 합당하게 성찬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주님 안에 있고 주님께서 그들 안에 계시며, 그 결과 주님과의 결합이 이루어진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성찬은 단순히 외적인 믿음을 표현하는 행위가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과 실제로 결합하시는 특별한 거룩한 수단입니다. 다만 그 결합은 성찬의 자연적인 빵과 포도주가 독립적인 신적 능력을 갖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성찬 안에 현존하시며, 인간이 신앙과 체어리티 안에서 그분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성사 이해를 천주교의 성사적 실재론에 대한 단순한 상징주의적 반박으로 이해한다면 중요한 부분을 놓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성찬의 실제적인 거룩함과 주님의 현존을 인정하지만, 그것을 자연적인 물질의 실체 변화가 아니라 주님의 신적 선과 진리, 그리고 인간과 주님 사이의 실제적인 영적 결합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이 지점에서 천주교의 ‘행위 자체로’라는 성사 효력의 원리와 스베덴보리의 상응론을 비교하면 두 전통의 공통점과 차이점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두 전통 모두 성사의 거룩함이 집전자의 개인적인 능력이나 공로에서 발생한다고 보지 않습니다. 또한 인간이 주님의 은총을 받아들이는 내적인 상태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천주교는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사가 올바르게 거행될 때 그리스도께서 그 성사 안에서 객관적으로 역사하시며, 각 성사에 고유한 은총을 베푸신다고 가르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세례와 성찬의 실제적인 영적 효력을 인정하면서도, 자연적인 표지와 영적인 실재 사이의 상응을 통하여 그 쓰임을 설명합니다. 여기서 상응은 자연적인 물질이 자동으로 영적인 실재로 변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연적인 물과 빵과 포도주는 각각 영적인 진리와 선을 나타내며, 이러한 상응을 통하여 자연계의 예배와 영계의 질서가 연결됩니다. 따라서 성사의 실제적인 영적 효력이 있다는 사실과 성사 자체가 독립적인 은총 전달 능력을 가진다는 주장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천주교 역시 성사가 그리스도와 독립된 능력을 가진다고 가르치지는 않지만, 성사적 행위의 객관적인 효력과 일곱 성사의 신적 제정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스베덴보리와 차이를 보입니다. 결국 핵심 쟁점은 주님께서 성사를 통하여 역사하실 수 있는가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일곱 가지 성사적 행위를 구원에 필요한 객관적인 은총의 수단으로 제정하셨다는 주장을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다섯 성사는 영적인 가치가 없는 것일까요? 그렇게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견진은 신앙을 더욱 깊이 이해하고 주님의 진리에 충실하게 살아가겠다는 결단의 기회가 될 수 있으며, 고해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진심으로 회개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병자성사는 고통 가운데 주님의 자비와 섭리를 신뢰하도록 도울 수 있고, 성품은 말씀을 가르치고 교회를 섬기는 직무의 중요성을 일깨울 수 있으며, 혼인은 부부가 서로 사랑하고 충실하게 살아가야 할 거룩한 책임을 확인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의식들은 실제로 인간의 신앙생활에 유익한 쓰임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유익함을 인정하는 것과, 이 모든 의식이 각각 고유한 성사적 은총을 전달하는 신적으로 제정된 수단이라고 인정하는 것은 다릅니다. 예를 들어 회개는 고해성사의 틀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TCR.509–570항에서 참된 회개가 자신의 악을 살피고 인정하며, 그것을 죄로 여겨 주님의 도움을 받아 실제로 피하는 데 있다고 설명합니다. 어떤 사람이 사제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사죄경을 들었다고 하더라도 그 죄를 여전히 사랑하고 계속 행하려 한다면, 그 사람 안에서 참된 회개가 이루어졌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주님의 진리 앞에서 자신의 악을 발견하고 진심으로 돌아서는 사람에게는 실제적인 회개의 과정이 시작됩니다. 혼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부부의 참된 사랑은 혼인 예식 자체에서 자동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서로를 위하여 살아가는 가운데 깊어집니다. 따라서 종교적인 의식이 영적 성장을 돕는다는 사실과 그 의식 자체가 독립적인 은총의 질서를 이룬다는 주장은 구별해야 합니다.

 

이러한 구별의 바탕에는 인간의 자유와 합리성에 관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 DP, 1764) DP.71–99는 인간이 합리성에 따른 자유 안에서 행동해야 한다는 원리를 설명하며, DP.100–128은 사람이 자신의 악을 마치 스스로 제거하는 것처럼 노력해야 하지만 실제로 그 악을 제거하시는 분은 주님이심을 가르칩니다. 이것은 인간이 자기 능력으로 구원을 획득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는 일이 인간의 자유로운 수용과 협력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모든 인간에게 사랑과 진리의 생명을 주시지만,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면서까지 그 생명을 강제로 받아들이게 하지는 않으십니다. 인간은 자신이 무엇을 사랑하고 어떤 악을 행하고 있는지 살피며, 진리를 받아들여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과정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종교적인 의식도 이러한 내적인 회개와 거듭남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이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교회의 성사적 질서가 얼마나 완전하게 갖추어져 있는가만이 아니라, 그 질서가 사람들을 실제로 주님께 인도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교회는 말씀과 예배와 거룩한 의식을 통하여 주님을 증언하고 인간의 영적 성장을 도울 수 있지만,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는 분은 언제나 주님이십니다. 교회의 직무는 그분의 구원하시는 역사를 섬기는 것이지, 그 역사를 교회의 제도적 권한 안에 가두는 것이 아닙니다.

 

이 문제를 실제 신앙생활에 적용해 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어떤 천주교 신자가 어린 시절 세례를 받고 견진을 받았으며, 평생 미사와 고해성사에 충실하게 참여했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러한 신앙생활은 그가 주님을 기억하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이웃을 사랑하도록 돕는 귀중한 수단이 되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가족을 멸시하고,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거짓을 행하며,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성사생활에 충실하다는 사실만으로 안심한다면 어떻겠습니까? 반대로 같은 성사에 참여하는 다른 신자는 그때마다 자신의 악을 돌아보고 진심으로 회개하며, 가족과 이웃을 대하는 태도를 조금씩 바꾸어 갈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은 외적으로 동일한 성사에 참여하지만, 그 성사가 각자의 실제적인 삶과 맺는 관계는 서로 다릅니다. 물론 우리는 그들의 최종적인 영적 상태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내적인 사랑과 영원한 운명은 오직 주님께서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사생활의 풍부함이 반드시 내적인 거듭남의 정도와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위험은 천주교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개신교 신자 역시 자신이 세례를 받았거나 정기적으로 성찬에 참여한다는 사실을 영적인 안전의 근거로 삼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세례와 성찬을 단순한 기념행위로 축소하여 그 안에 담긴 실제적인 영적 쓰임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은 이 양쪽 모두를 경계하게 합니다. 성사는 인간을 자동으로 구원하는 의식도 아니지만, 단순히 인간의 기억을 돕기 위한 상징적 행위에 불과한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세우신 세례와 성찬은 실제적인 영적 쓰임을 가지며, 그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을 주님과 결합하도록 인도하는 데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은총 자체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은총을 어떤 종교적인 의식에 참여할 때 외부에서 주어지는 특별한 영적 혜택처럼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주님의 은총은 그러한 특정한 순간에만 베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인간에게 당신의 사랑과 지혜를 주시며,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만큼 그분과 결합하고 새로운 생명을 얻습니다. 주님의 신적 선과 진리는 인간의 이해를 밝히고 의지를 변화시키며, 자신만을 사랑하던 마음을 점차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꾸어 갑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따라서 은총의 본질은 종교적인 의식이 완료되었다는 사실보다, 주님께서 베푸시는 생명이 인간 안에 실제로 받아들여져 새로운 사랑과 삶을 형성하는 데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주님께서 세우신 성사의 특별한 쓰임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세례와 성찬의 목적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세례는 인간을 주님께서 이루시는 거듭남의 길로 인도하고, 성찬은 주님의 신적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며 그분과 결합하도록 돕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거룩한 의식은 언제나 그것이 나타내는 영적 실재를 향하여 인간을 인도해야 합니다. 표지가 실재를 대신할 수는 없으며, 외적인 형식이 그 형식의 궁극적인 목적보다 앞설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권위와 질서에도 적용됩니다. 교회의 거룩함은 은총을 소유하고 분배하는 독립적인 권한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베푸시는 생명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그 생명을 받아들이도록 돕는 쓰임에서 드러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요15:4-5에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포도나무로, 제자들을 가지로 말씀하시면서 당신 안에 거하지 않으면 아무도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이 말씀은 구원의 본질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가지가 살아 있는 것은 어떤 외적인 자격을 얻었기 때문이 아니라 포도나무와 실제로 연결되어 생명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영적 생명은 그가 얼마나 많은 종교적인 의식에 참여하였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실제로 결합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물론 주님께서는 인간이 그 결합을 향하여 나아가도록 거룩한 의식을 세우시고 교회를 통하여 가르치십니다. 그러나 그 의식은 언제나 목적이 아니라 수단입니다. 세례는 거듭남을 향한 거룩한 입문이며, 성찬은 거듭나는 인간이 주님의 신적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며 그분과 결합하는 특별한 수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단순히 ‘나는 어떤 성사를 받았는가?’가 아닙니다. ‘그 성사가 나타내는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실제로 내 삶 안에서 작용하고 있는가? 나는 그 진리의 빛으로 자신의 악을 발견하고 피하고 있는가? 주님께서 주시는 선을 받아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려는 구원은 종교적인 의식을 축적하여 얻는 특별한 신분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지혜가 인간 안에 받아들여져 실제적인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생명 안에서 인간은 주님과 결합하며, 그 결합이 점차 깊어지는 가운데 천국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SL.RC.005 해설)

 

요약

‘교회의 일곱 성사는 구원에 필요한 은총을 전달한다’는 명제에는 주님께서 인간의 자연적이고 공동체적인 삶을 통하여 영적인 생명을 가르치시며, 거룩한 의식을 인간의 신앙과 거듭남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신다는 귀중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또한 천주교가 성사의 효력을 집전자의 개인적인 거룩함이나 인간의 공로에 의존시키지 않고 그리스도의 역사에 근거한다고 가르치는 점과, 성사의 열매를 얻기 위하여 수령자의 합당한 태도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점도 정확히 평가해야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일곱 가지 의식 모두를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독립적인 성사적 은총의 수단으로 이해하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세례와 성찬이라는 두 성사를 특별히 가르치며, 그 실제적인 영적 효력을 자연계와 영계의 상응, 주님의 신적 선과 진리, 인간의 거듭남과 주님과의 결합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따라서 오류의 핵심은 거룩한 의식이 영적인 유익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 있지 않고, 일곱 성사라는 특정한 제도적 체계에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구원적 은총 전달의 질서라는 지위를 부여하는 데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이 체계를 인간의 구원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제도적 경로로 절대화한다면, 주님의 직접적인 구원 역사와 교회의 봉사적 역할을 혼동하게 됩니다. 다만 천주교가 모든 신자에게 일곱 성사 전부를 요구하거나, 교회가 그리스도와 독립적으로 은총을 소유하고 분배한다고 가르치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결국 구원의 유일한 근원은 주님이시며, 성사의 참된 목적은 인간이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실제로 거듭나고 그분과 결합하도록 인도하는 데 있습니다. 주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려는 가장 귀중한 은총은 단순히 거룩한 의식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이 아니라, 그분의 사랑을 받아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며 천국의 생명으로 살아가게 하시는 거듭남의 은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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