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4.심화

3. 수송아지의 기름은 제단에서 불사르고 나머지는 진영 밖에서 불살랐을까?’

 

레위기 4장의 속죄제에는 얼핏 보면 매우 이상한 대비가 있습니다. 같은 수송아지인데 일부는 제단으로 올라가고 일부는 진영 밖으로 나갑니다. 내장과 콩팥 주변의 기름은 거룩한 제단 위에서 불사르지만, 가죽과 고기와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과 똥, 곧 나머지 전체는 진영 밖으로 가져가 불사릅니다.

 

왜 같은 제물 안에서 이렇게 정반대의 처리가 이루어질까요?

 

여기에는 매우 분명한 상응이 있습니다. 3에서 살펴본 것처럼 기름은 선을 표상합니다. 그래서 속죄제에서도 기름은 버려지지 않고 제단으로 올라갑니다. 인간이 정결하게 된다는 것은 인간에게 있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과 거짓은 제거되지만 주님에게서 오는 선은 보존되고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갑니다.

 

반면 수송아지의 나머지를 진영 밖에서 불사르는 장면에 대해서는 스베덴보리가 매우 직접적으로 설명합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038(29:14)은 수송아지의 살과 가죽과 똥을 진영 밖에서 불사르는 것이 그것들이 표상하는 악들을 지옥에 내어 맡기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진영은 천국과 교회를 표상하고, 따라서 진영 밖은 천국과 교회가 아닌 곳, 곧 지옥을 표상합니다.

 

이어 AC.10040은 속죄제 수송아지의 살이 여기서는 사랑의 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같은 이라는 상응도 문맥에 따라 정반대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중요한 사례입니다. 속죄제라는 문맥에서는 제거되어야 할 악이 표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상응을 읽을 때 매우 중요한 원칙을 가르쳐 줍니다. ‘살은 언제나 이것’, ‘불은 언제나 이것’, ‘동물은 언제나 이것처럼 기계적으로 대응시키면 안 됩니다. 말씀의 문맥과 계열이 중요합니다. 같은 자연적 대상도 선한 계열에서는 긍정적 의미를, 악한 계열에서는 반대 의미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4의 수송아지는 바로 이 원리를 매우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기름은 제단으로 올라갑니다. 악을 표상하는 것은 진영 밖으로 나갑니다. 이것이 정결입니다.

 

우리의 회개도 이와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인격 전체를 없애 버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개성이나 재능이나 자연적 삶 자체를 파괴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안에 들어 있는 악한 사랑과 거짓을 분리하여 물러나게 하시고, 주님에게서 받은 선한 것들은 보존하고 정결하게 하십니다.

 

예를 들어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의지 자체를 없애는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자기 뜻을 관철하려는 지배욕은 제거되어야 하지만, 정결하게 된 강한 의지는 선한 일을 끝까지 수행하는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지적 능력이 뛰어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지성을 이용하여 다른 사람보다 우월해지려는 교만은 진영 밖으로 나가야 하지만, 정결하게 된 이해는 진리를 보고 다른 사람을 돕는 귀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거듭남은 인간을 무색무취하게 만드는 과정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주신 고유한 능력과 쓰임을 없애지 않으시고 그것을 정결하게 하여 선을 섬기게 하십니다. 버려져야 하는 것은 악이며, 주님에게서 온 선은 주님께 돌려집니다.

 

여기서 진영 이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악은 조금 고쳐서 성소 안에 보관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을 악으로 인정했다면 그것과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미움을 정의감이라고 이름 붙여 보관하고, 지배욕을 책임감이라고 이름 붙여 보관하며, 자기 자랑을 간증이라고 이름 붙여 성소 안에 들여놓아서는 안 됩니다.

 

진리가 그것이 악임을 보여 주었다면 진영 밖으로 내보내야 합니다. 이것이 악을 죄로 여겨 피하는 의 실제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여기서도 자신의 힘으로 악을 지옥에 던질 수 없습니다. 악을 보고 인정하고 피하려는 것은 인간이 해야 하지만, 실제로 악을 물러나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인간이 주님을 바라보며 악을 거부할 때 주님께서 그 악을 인간의 중심에서 밀어내십니다.

 

그래서 레4의 장면은 매우 역동적입니다. 한쪽에서는 기름이 제단의 불꽃 속으로 올라갑니다. 다른 한쪽에서는 악을 표상하는 것들이 진영 밖으로 나갑니다. 선은 주님께 돌려지고 악은 제거됩니다.

 

바로 이것이 속죄제의 정결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단지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이름 아래 그대로 두시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인간 안의 질서를 바꾸어 가십니다. 악은 밖으로, 선은 주님께로 향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레4의 속죄제는 우리에게 아주 실제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지금 안에서 제단으로 올라가야 것은 무엇이며, 진영 밖으로 나가야 것은 무엇인가?입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선은 감사함으로 그분께 돌리고, 말씀의 빛에서 악으로 드러난 것은 붙들거나 변명하지 말고 피해야 합니다. 이 두 움직임이 함께 일어날 때 인간의 자연적 삶은 조금씩 정결하게 되고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갑니다. (SW.6 4 심화 3)

 

 

 

SW.6, 레4, ‘그가 범한 죄를 깨달으면 - 속죄제에 감추어진 악의 인식과 정결의 아르카나’

※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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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6 심화 2, ‘속죄와 사함은 죄의 형벌을 대신 받는 것인가, 악에서 정결하게 되는 것인가?’

SW.6 심화2. ‘속죄와 사함은 죄의 형벌을 대신 받는 것인가, 악에서 정결하게 되는 것인가?’ 레위기 4장의 속죄제를 읽을 때 기독교인은 자연스럽게 십자가를 떠올립니다. 죄를 범한 인간 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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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속죄와 사함은 죄의 형벌을 대신 받는 것인가, 악에서 정결하게 되는 것인가?’

 

레위기 4장의 속죄제를 읽을 때 기독교인은 자연스럽게 십자가를 떠올립니다. 죄를 범한 인간 대신 흠 없는 제물이 죽고 피가 흘려지며, 마지막에는 제사장이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고 선언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속죄제를 죄인이 받아야 형벌을 무죄한 제물이 대신 받는 으로 설명하는 것이 익숙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레4를 읽으면 강조점이 상당히 달라집니다. 제물의 죽음과 피를 단순한 형벌의 이전으로 읽기보다 인간을 악과 거짓에서 정결하게 하시는 주님의 구원 역사로 읽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임의로 속죄제의 뜻을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039(29:14)는 속죄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매우 직접적으로 설명합니다. 그것은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정결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설명에서 레4:3, 8, 14, 20, 21, 24, 25, 29, 33, 34를 직접 근거로 제시합니다.

 

이 한 문장은 레4를 바라보는 시선을 크게 바꿉니다. 속죄의 핵심이 누가 형벌을 받는가?보다 인간에게서 무엇이 제거되는가?로 이동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구원의 근본 문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화가 나셔서 누군가를 처벌해야만 용서하실 수 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문제는 인간 자신이 악과 거짓 안에 있음으로써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을 구원하려면 실제로 악과 거짓이 물러나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님의 십자가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십자가는 주님께서 세상에서 겪으신 모든 시험의 마지막이며, 그 시험들을 통하여 지옥을 이기시고 당신의 인성을 완전히 영화롭게 하신 결정적인 사건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지옥을 정복하시고 당신의 인성을 신적으로 만드셨기 때문에 인간에게 악과 거짓을 이길 능력이 주어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속죄제의 제물은 단순히 하나님이 죄인 대신 벌하신 희생물이라는 그림보다 훨씬 깊게 주님을 가리킵니다. 제사의 가장 높은 의미에는 주님의 영화가 있고, 상대적 의미에는 인간의 거듭남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악과 지옥의 세력을 이기신 그 신적 역사가 인간에게 적용될 때 인간 안에서는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정결과 거듭남으로 나타납니다.

 

피의 의미도 여기에서 달라집니다. 피는 단순히 누군가 죽었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AC.4735는 구약의 성별·속죄·정결 의식에 사용된 피가 주님의 신적 인간에게서 발출하는 거룩한 것, 곧 신적 진리를 의미한다고 설명하며 레4:6-7, 17-18, 25, 30, 34를 직접 열거합니다.

 

왜 진리가 속죄에서 중요할까요? 진리가 인간에게 악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없으면 인간은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진리는 단순히 죄를 폭로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인간을 선으로 인도합니다. 그래서 AC.2832(22:13)는 레4의 제단 뿔에 피를 바르는 규정을 직접 인용하면서 모든 속죄와 정결이 진리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이유는 진리가 선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사함도 단순한 법정 선언으로 축소되지 않습니다. 인간이 악을 계속 사랑하고 붙들면서도 다른 누군가가 형벌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악을 없는 것으로 보아 주신다는 식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주님은 인간을 실제로 구원하기 원하시며, 그것은 인간이 악에서 돌이켜 선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포함합니다.

 

물론 인간은 자기 힘으로 자신을 정결하게 할 수 없습니다. 4의 피를 휘장 앞에 일곱 뿌리는 것은 바로 그것을 보여 줍니다. AC.716(5:24)은 레4:2-3, 6을 직접 인용하면서 일곱이 거룩함을 의미하는 것은 속죄가 오직 주님에게 속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정결의 능력은 인간에게 있지 않고 주님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아무 역할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죄를 깨달아야 하고, 인정해야 하며, 주님께 도움을 구하면서 그것을 죄로 여겨 피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면서 악을 강제로 제거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유롭게 주님의 진리에 응답할 때 악을 물러나게 하십니다.

 

이것이 레4의 긴 제사 절차가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죄를 깨닫고, 주님 앞에 가져오고, 진리로 정결하게 되고, 악이 제거되고, 선이 회복되며, 그 결과 사함을 받으리라는 선언에 이릅니다.

 

그러므로 속죄와 사함은 죄의 형벌을 대신 받는 것인가, 악에서 정결하게 되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분명히 후자에 중심을 둡니다. 그러나 그것은 십자가를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십자가의 결과가 인간에게 실제로 무엇을 이루는지를 더 깊이 묻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단지 우리를 죄인인데도 죄인이 아닌 것으로 간주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죄의 지배에서 실제로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속죄제의 마지막에 사함을 받으리라는 말씀이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함은 악을 사랑한 채 형벌만 피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신적 진리와 신적 선을 받아 악의 지배에서 풀려나 주님과 다시 결합되는 구원의 역사입니다. 속죄제는 바로 그 정결과 회복의 아르카나를 외적인 제사의 언어로 보여 줍니다. (SW.6 4 심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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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6 심화 1, ‘부지중에 지은 죄도 왜 속죄가 필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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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지중에 지은 죄도 속죄가 필요할까?’

 

레위기 4장을 읽으면 현대 독자에게 가장 먼저 생기는 질문 가운데 하나가 있습니다. ‘일부러 지은 죄도 아닌데 속죄해야 하는가?입니다. 4는 반복해서 부지중에 범하여라고 말합니다. 제사장도, 온 회중도, 족장도, 평민도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충분히 알지 못한 상태에서 여호와의 계명을 범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먼저 구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부지중에 지은 라는 말은 인간에게 책임이 전혀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 억지로 죄로 계산하신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이 말씀은 인간의 영적 상태에 관한 매우 깊은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인간에게는 아직 자기가 보지 못하는 악과 거짓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생각보다 잘 모릅니다. 어떤 행동을 선한 의도에서 했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 돌아보면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훨씬 컸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바르게 가르친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상대를 지배하고 싶었던 마음이 섞여 있었을 수 있습니다. ‘진리를 지킨다고 생각하면서 자기 의견을 사랑하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때까지 그 사람에게 그 악은 상당 부분 부지중에 있습니다.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 악이 선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미움은 내가 그것을 미움이라고 알아차리지 못한다고 사랑이 되지 않으며, 교만은 내가 교만하다는 사실을 모른다고 겸손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진리를 주십니다. 진리는 단지 교리를 많이 알게 하기 위한 빛이 아니라 인간 자신을 비추는 빛입니다. 그 빛이 삶에 들어오면서 어느 날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4가 반복해서 그가 범한 죄를 깨달으면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죄를 깨닫는 순간은 정죄의 끝이 아니라 회개의 시작입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039(29:14)는 속죄제가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정결을 의미한다고 설명하면서 레4의 속죄제 규정들을 직접 인용합니다. 따라서 속죄제의 목적은 인간을 죄책감 속에 붙잡아 두는 것이 아니라, 발견된 악과 거짓에서 인간을 정결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깨닫기 깨달은 입니다. 아직 보지 못할 때와 주님께서 보여 주신 뒤의 상태는 같지 않습니다. 보지 못했던 악을 보게 된 뒤에도 그것을 붙들고 정당화한다면 이제 문제는 더 깊어집니다. 반대로 그것을 죄라고 인정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피하기 시작하면 거듭남이 진행됩니다.

 

그래서 영적 성장은 나는 이제 죄가 별로 없다는 느낌으로 측정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께 가까이 갈수록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더 미세한 동기와 욕망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퇴보의 표시가 아닙니다. 더 밝은 빛이 들어왔기 때문에 전에는 보이지 않던 먼지가 보이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발견했을 때 낙심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직도 이런 것이 안에 있는가?라는 자기혐오가 아니라 주님께서 이것을 지금 보여 주셨는가?입니다. 보여 주셨다면 피할 수 있도록 보여 주신 것입니다.

 

4의 속죄제는 바로 그 희망을 담고 있습니다. 인간은 먼저 죄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깨닫습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진리를 통하여 정결하게 되고 악이 물러나며, 마침내 사함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부지중에 지은 죄도 속죄가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이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알지 못했던 것 때문에 우리를 함정에 빠뜨리려 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직 알지 못하는 악에서도 우리를 건져 내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죄를 보게 하시는 것은 정죄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결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어둠 속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을 말씀의 빛에서 보게 되는 순간, 거듭남의 새로운 문이 열립니다. (SW.6 4 심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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