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 제목의 SY’는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라는 뜻입니다.

 

 

 

 

이 설교는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 널리 퍼져 있는 ‘축복 중심 신앙’을 비판하면서, 마태복음 16장을 기점으로 신앙의 방향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특히 ‘무병장수’, ‘경제적 번영’, ‘사업 성공’을 신앙의 목표로 삼는 태도를 경계하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중심에 두는 삶이 참된 믿음이라고 역설합니다. 이러한 문제의식 자체는 매우 성경적이며, 신앙이 단순히 현세적 유익을 얻는 수단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는 충분히 귀 기울일 가치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이 부분은 자연적인 복보다 영적인 생명을 먼저 구해야 한다는 일관된 가르침과 상당 부분 맞닿아 있습니다.

 

특히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이루어진 장소인 ‘가이사랴 빌립보’를 로마 황제 숭배와 연결하여 설명하는 부분은 설교적으로도 매우 인상적입니다. 황제를 ‘’으로 떠받드는 도시 한가운데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했다는 점을 부각시키면서, 세상의 권세보다 주님을 참된 왕으로 인정하는 신앙의 의미를 잘 드러냅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설명은 성경 본문을 더욱 입체적으로 이해하도록 돕는 장점이 있습니다.

 

또한 마태복음 16장 이후부터 예수님의 관심이 십자가와 부활에 집중된다는 흐름을 따라가며,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는 질병이나 가난이 아니라 죄와 영원한 생명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부분도 핵심을 잘 짚습니다. 실제로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 이후부터 자신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반복하여 예고하십니다. 설교자는 이 점을 통해 ‘신앙의 중심은 기적이 아니라 구속’이라는 사실을 힘 있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여기에는 중요한 공감점이 있습니다. 사람은 단순히 오래 사는 존재가 아니라 영원히 사는 존재이며, 육체의 건강보다 영혼의 상태가 훨씬 중요합니다. 따라서 병이 낫는 것 자체가 구원의 본질은 아니며, 주님께서 궁극적으로 이루시는 일은 인간의 속 사람을 새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자연계의 복은 일시적이지만, 사랑과 진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거듭남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설교에서 가장 강조되는 표현은 ‘마태복음 16장 이전의 사람’과 ‘마태복음 16장 이후의 사람’이라는 구분입니다. 설교자는 이를 하나의 영적 단계처럼 설명합니다. 전자는 건강과 성공, 형통을 중심으로 예수를 찾는 사람이며, 후자는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부인하며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분은 청중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는 설교적 장치로서는 상당히 효과적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구분을 조금 더 섬세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말씀의 장 구분이 곧 인간의 영적 단계와 일대일로 대응한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역사적 사건 하나하나보다 그 안에 담긴 영적인 진행 과정을 중요하게 봅니다. 따라서 ‘마태복음 16장 이전’과 ‘이후’라는 구분은 문자적인 장 구분이라기보다,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영적 전환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더 적절합니다. 다시 말해, 자연적 인간에서 영적 인간으로 나아가는 변화의 과정으로 읽는다면 더욱 풍성한 의미를 얻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잡아 만류하는 장면에 대한 해석 역시 흥미롭습니다. 입으로는 ‘주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지만, 막상 십자가를 말씀하시자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를 통해 ‘신앙고백은 했지만 아직 자기중심성은 그대로 남아 있는 상태’를 설명합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설명과도 상당히 가까운 면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진리를 먼저 받아들이더라도, 자신의 ‘proprium’, 곧 자기 본성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고 반복해서 말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진리를 이해한 직후에도 여전히 자기애와 세상 사랑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사람에게 단번에 완전한 상태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긴 거듭남의 과정을 통해 조금씩 자기 사랑을 벗겨 가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베드로는 특별히 나쁜 사람이 아니라, 모든 신자가 거쳐 가는 하나의 영적 모습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설교의 핵심 구절인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에 대한 적용도 매우 진지합니다. 특히 ‘육체의 안일만 추구하는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데, 이것은 오늘날 소비주의와 번영주의 신앙을 향한 좋은 경고가 될 수 있습니다. 신앙은 하나님을 이용하여 원하는 것을 얻는 기술이 아니라, 주님을 닮아 가는 변화의 길이라는 점을 분명히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한 가지 중요한 보완점을 제시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신의 인격을 부정하거나 자신을 혐오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자신의 모든 욕구를 무조건 억압하는 것도 아닙니다. 부인해야 하는 것은 ‘자기 자신’ 자체가 아니라, ‘주님 없이 스스로 살려는 자기 본성’, 곧 ‘proprium’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새 생명은 오히려 사람의 참된 자아를 회복시킵니다. 따라서 자기 부인은 인간성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거짓 자아를 내려놓고 주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가는 과정입니다.

 

후반부에서 ‘믿음과 미신의 차이는 자기 변화에 있다’는 설명은 매우 설득력이 있습니다. 신앙을 자신의 욕망을 이루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사람은 사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것이라는 지적은 오늘날에도 깊이 새길 만한 내용입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 역시 사람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실제로는 자기 자신만 사랑하는 상태를 여러 저작에서 매우 엄중하게 경고합니다.

 

다만 ‘무병장수나 경제적 형통을 바라는 사람은 마태복음 16장 이전에 갇힌 사람이며, 그 믿음은 미신’이라고 단정하는 표현은 조금 조심스럽게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많은 사람이 질병과 가난 때문에 교회의 문을 두드립니다. 성경에도 병 낫기를 구한 사람, 먹을 양식을 구한 사람, 도움을 구한 사람이 매우 많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필요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치유하시며 돌보셨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러한 자연적 소망도 주님의 섭리 안에서 매우 중요한 출발점으로 이해합니다. 처음에는 건강 때문에, 가정 문제 때문에,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주님께 나올 수 있습니다. 그것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거기에서 머무르지 않는 것입니다. 자연적인 복을 계기로 주님을 알게 되고, 결국에는 주님 자신을 사랑하게 되는 방향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발전을 ‘외적인 사람, 즉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자기 사랑에서 주님 사랑으로’, ‘세상 중심에서 천국 중심으로’ 옮겨 가는 거듭남의 과정으로 설명합니다.

 

결국 이 설교의 가장 큰 장점은 신앙의 목표를 현세적 성공에서 십자가와 부활로 다시 돌려놓으려는 강한 문제의식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이 놓치기 쉬운 본질을 일깨운다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동시에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가, 십자가는 단순히 고난을 견디는 상징이 아니라, 사람 안에 있는 자기 사랑과 거짓을 주님의 진리로 끊임없이 벗겨 가시는 거듭남의 실제 과정이라고 해설합니다. 그리고 부활은 죽은 뒤의 사건만이 아니라, 그 거듭남을 통해 지금 이 순간에도 속 사람이 살아나는 영적 부활입니다. 이렇게 볼 때 마태복음 16장은 단순히 ‘축복 신앙에서 십자가 신앙으로’ 넘어가는 장이 아니라, 주님께서 한 사람을 자연적 인간에서 영적 인간으로 이끌어 가시는 거대한 전환점으로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SY.37, ‘약속을 지켜야 할 사람들’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이번 설교는 예레미야 34장과 35장을 나란히 놓고 ‘약속을 깨뜨린 유다 백성’과 ‘약속을 지킨 레갑 자손’을 대비시키며, 신앙의 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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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35, ‘요즘 교회가 가장 두려워 하는 6가지 질문’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이 영상은 단순한 ‘교회 비판’이 아니라 ‘교회의 회복’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여러 민감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가능한 한 극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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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제목의 SY’는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라는 뜻입니다.

 

 

 

 

이 영상은 단순한 ‘교회 비판’이 아니라 ‘교회의 회복’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여러 민감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가능한 한 극단을 피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분명히 보입니다. 무엇보다 이 영상의 가장 큰 장점은 문제를 제기하는 태도입니다. 처음부터 ‘교회를 미워해서 던지는 질문이 아니라,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에 던지는 질문’이라고 방향을 분명히 제시하고, 마지막까지 그 기조를 유지합니다. 이는 단순한 비난이나 분노의 언어가 아니라, 회복을 위한 자기 성찰의 언어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참된 체어리티는 악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사람의 구원을 목적으로 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 영상의 기본적인 문제의식은 건강한 방향을 향하고 있습니다.

 

헌금에 관한 부분도 생각보다 훨씬 균형 잡혀 있습니다. 영상은 먼저 헌금을 ‘하나님께 드리는 믿음의 고백’으로 설명하고, 억지로나 체면 때문에 드리는 헌금이 아니라 감사와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헌금이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런 다음에야 교회 역시 하나님께 드린 헌금을 사람 앞에서도 부끄럽지 않게 관리해야 하며, 투명성과 책임성을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즉 ‘헌금의 정신’을 먼저 세우고, 그 정신이 훼손되지 않도록 재정 운영이 뒤따라야 한다는 구조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상당히 공감할 수 있는 접근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라면 여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가, 헌금은 단순히 재정을 드리는 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것을 주님의 것으로 인정하는 사랑의 상응적 표현’이라는 점까지 연결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액수보다 사랑의 질이 중요하며, 투명성 역시 외적인 제도가 아니라 먼저 그 사랑에서 흘러나와야 한다고 설명했을 것입니다.

 

목회자의 죄를 다루는 부분 역시 영상은 결코 목회자를 공격하거나 지도자를 무너뜨리자는 입장이 아닙니다. 오히려 ‘목회자도 사람이며 연약할 수 있다’, ‘문제는 죄를 지었느냐가 아니라 그 죄를 어떻게 다루느냐이다’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또 ‘목회자를 사랑하는 길도 무조건 감싸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도록 돕고 필요한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즉 목회자와 목회자의 죄를 구분하려는 균형 감각이 분명히 들어 있습니다. 이 역시 스베덴보리의 관점과 상당 부분 만나는 지점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라면 여기에 ‘악을 미워하되 사람의 구원을 포기하지 말라’는 점을 더욱 강조했을 것입니다. 징계도 궁극적으로는 회복을 위한 것이며, 진리와 자비는 언제나 함께 작용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질문하는 성도’에 대한 부분은 특히 인상적입니다. 영상은 질문 자체를 불신앙으로 몰아서는 안 되며, 베레아 사람들처럼 말씀을 상고하는 자세를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사상과도 잘 어울립니다. 그는 인간의 이성을 주님께서 주신 귀한 능력으로 보았으며, 맹목적인 수용보다 말씀 안에서 분별하는 신앙을 강조했습니다. 물론 스베덴보리는 질문의 출발점도 중요하게 봅니다. 진리를 사랑하여 묻는 질문과 자기 우월감이나 반항심에서 나오는 질문은 영적으로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상이 적어도 ‘질문 자체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방향을 제시한 것은 충분히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청년 문제를 다루는 부분도 상당히 균형 있습니다. 청년들을 단순히 ‘믿음이 약한 세대’로 몰아가지 않고, 교회가 먼저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프로그램보다 진실성과 신뢰가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는데, 이것 역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공감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참된 교회는 외적 형식보다 내적 생명이 우선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이 영상이 아쉬운 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개별 주장들이 아니라, 이 모든 현상의 ‘최종 원인’을 어디에서 찾느냐에 있습니다. 영상은 교회의 생존 본능, 재정의 불투명성, 지도자의 책임 회피, 질문을 막는 문화 등을 주로 외적 구조와 운영 방식의 문제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언제나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갑니다. 왜 그런 구조가 생겼는가? 왜 교회가 조직을 지키려 하는가? 왜 재정을 투명하게 다루지 못하는가? 왜 권위를 지키려 하는가? 그 뿌리를 그는 거의 예외 없이 인간의 ‘proprium’, 곧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찾습니다. 외적 제도는 내적 사랑이 밖으로 드러난 결과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영상은 ‘교회가 생존을 더 걱정하게 되었다’고 진단합니다. 스베덴보리라면 여기에 ‘왜 생존을 더 걱정하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을 한 번 더 던질 것입니다. 그 답은 ‘주님의 교회를 자신의 교회처럼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헌금 문제도 ‘왜 투명하지 못한가?’를 넘어 ‘왜 주님의 것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게 되었는가?’라는 내적 사랑의 문제까지 들어갈 것입니다. 결국 외적 개혁보다 먼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각 사람의 거듭남이며, 교회의 상태는 그 구성원들의 영적 상태가 모여 형성된다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핵심 관점입니다.

 

그래서 이 영상은 ‘교회개혁적 관점’에서는 매우 균형 있고 성숙한 글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헌금의 정신을 먼저 세우고, 목회자와 목회자의 죄를 구분하며, 질문을 허용하고, 청년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자는 내용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모든 외적 문제의 뿌리를 인간 내면의 사랑의 질서와 거듭남의 문제로까지 연결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교회의 개혁은 조직의 개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이 자기 사랑을 버리고 주님께로 돌이키는 영적 개혁에서 시작된다는 점을 덧붙인다면, 이 영상은 스베덴보리의 신학과도 매우 깊이 조화를 이루는 글이 될 것입니다.

 

 

 

SY.36, ‘기도 열심히 했더니 하나님이 복을 주셨다?’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이 설교는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 널리 퍼져 있는 ‘축복 중심 신앙’을 비판하면서, 마태복음 16장을 기점으로 신앙의 방향이 근본적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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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34, ‘시흥영성수련원, 79차 심령부흥대사경회’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모형에서 상응으로긴 강의를 모두 들은 뒤에야 비로소 이 글을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 몇 시간만 듣고 글을 썼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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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제목의 SY’는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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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진리’를 처음 접할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이 책이 일반적인 조직신학 교재와 상당히 다르다는 점입니다. 성경의 여러 구절을 체계적으로 분류하여 교리를 세우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인간은 어디에서 왔으며 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죽음 이후에는 어디로 가며,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어떤 과정을 거쳐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시는지를 하나의 큰 흐름으로 설명하려 합니다. 그래서 이 책의 관심은 처음부터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에만 있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키시는가’, 그리고 ‘그 변화가 죽음 이후의 삶과 어떻게 연결되는가’에 훨씬 큰 무게가 실려 있습니다.

 

이제 이 책의 형성 배경을 알고 다시 읽으면 이러한 특징이 우연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보입니다. ‘핵심진리’를 남긴 공용복 선생님의 신앙은 평탄한 삶의 서재에서 형성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병상의 증거자 공용복’에 나타나는 생애를 보면, 젊은 시절부터 시작된 병은 단순히 하반신의 기능을 잃는 정도에 머물지 않았고, 시간이 흐르면서 몸의 광범위한 기능이 심각하게 제한되는 상태로 진행되었습니다. 육체적으로 자유롭게 움직이고 생활하는 일이 거의 불가능해져 가는 상황에서도 의식과 정신은 살아 있었고, 그 긴 세월 동안 하나님과 자신의 고난, 인간의 생명과 죽음, 육체와 영, 현세와 내세를 끊임없이 마주해야 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나면 ‘핵심진리’에서 유난히 반복되는 ‘’, ‘영계’, ‘연단’, ‘성화’, ‘익은 열매’, ‘완덕’이라는 말들이 조금 다르게 들립니다. 이것들은 단지 흥미로운 신학적 개념으로 선택된 용어들이 아니었습니다. 몸이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 ‘인간의 참 생명은 무엇인가’를 묻고, 극심한 제약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나를 무엇으로 만들어 가시는가’를 물으며 살아간 자리에서 나온 언어였습니다. 따라서 이 가르침을 공정하게 읽으려면 먼저 그 절박함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모른 채 영계론이나 성화론의 문장들만 떼어 읽으면, 한 사람의 생애를 통과하여 나온 신앙을 단순한 독특한 교리 체계로만 보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한 가지 중요한 구별도 필요합니다. 한 사람의 고난이 깊었다는 사실과 그 사람이 그 고난 가운데 얻은 모든 신학적 해석이 반드시 옳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극심한 고난은 그의 말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하지만, 그 고난 자체가 어떤 교리를 자동으로 참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진정한 존중은 무조건 동의하는 데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 사람이 무엇을 경험했는지를 진지하게 듣고, 그 경험을 통해 무엇을 깨달았다고 말하는지를 충분히 이해한 뒤, 그 깨달음이 말씀의 더 큰 질서 안에서 어떻게 보이는지를 함께 살피는 것입니다. 앞으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해야 할 역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핵심진리’의 가장 귀한 출발점 가운데 하나는 ‘구원을 실제적인 인간의 변화와 연결한다’는 데 있습니다. 단지 어떤 교리를 옳다고 인정하거나 입술로 신앙을 고백하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완성되었다고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실제로 다루시고, 연단하시고, 그의 죄성과 자기중심성을 벗겨 내며, 마침내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사람으로 만들어 가신다는 것이 이 가르침의 중심적인 관심입니다. 이것은 한국 개신교 안에서 흔히 나타날 수 있는 ‘구원받았으니 이제 천국은 확보되었다’는 식의 신앙적 안일함에 상당히 강한 질문을 던집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바로 이 지점은 매우 귀하게 보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구원을 단순히 교리적 명제를 믿는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신앙은 삶이 되어야 하며,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악을 죄로 알고 피하면서 실제로 새로운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이 거듭남입니다. 무엇을 알고 무엇을 고백했는가만으로 천국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는가가 중요합니다. 이런 점에서 ‘핵심진리’가 강조하는 ‘익은 열매’라는 표현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와 상당히 깊은 공명을 일으킵니다.

 

다만 처음부터 작은 차이 하나를 기억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핵심진리’에서는 인간의 변화가 때때로 ‘어느 단계에 도달해야 다음 단계로 올라가는 과정’처럼 상당히 구조적으로 설명됩니다. 연단의 단계가 있고, 죄성이 처리되며, 익은 열매가 되고, 그 상태에 따라 영계에서의 위치가 정해지는 식입니다. 이런 구조는 신앙생활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게 해 주는 장점이 있지만, 잘못 받아들이면 영적 성장을 일종의 단계별 자격 취득처럼 생각하게 만들 가능성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남 역시 분명 질서와 단계가 있지만, 그 중심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높은 영적 단계에 올라가는 데 있지 않고, 주님께서 사람의 자유와 합리성을 보존하시면서 그의 사랑을 새롭게 질서 지으시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연단’이라는 말을 만날 때마다 한 가지 질문을 함께 품고 읽으면 좋겠습니다. ‘누가 누구를 변화시키는가?’입니다. 인간이 자기 노력으로 자신을 정화하여 천국에 합당한 사람이 되는 것인지, 아니면 인간은 주님의 역사에 자유롭게 협력하면서, 악을 거절하고 선을 행하되 실제로 사람을 변화시키는 생명과 능력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인지의 문제입니다. 이 구별은 겉으로는 작아 보이지만 성화 전체의 방향을 바꿀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후자를 매우 강하게 붙듭니다. 사람은 마치 스스로 하는 것처럼 악과 싸우고 선을 행해야 하지만, 실제 능력은 모두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이 점에서 공용복 선생님의 병상은 역설적으로 매우 중요한 신앙적 질문을 던집니다. 인간이 자기 능력과 활동으로 영적 완성을 이루는 것이 구원이라면, 육체적으로 거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은 가장 불리한 위치에 놓여야 합니다. 그러나 그의 생애가 보여 주는 것은 정반대입니다. 외적인 활동의 폭이 극도로 좁아져도 사람의 내면에서는 하나님을 향하고, 기도하고, 사랑하고, 자기 자신을 살피고, 다른 사람의 영혼을 염려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참된 영적 생명이 육체의 활동량과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을 그의 생애 자체가 강하게 증언하는 셈입니다.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와 또 하나의 깊은 접점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의 육체는 인간 그 자체가 아니라 영이 자연계에서 활동하기 위해 입고 있는 최외곽의 형상이며 기관입니다. 사람이 죽는다고 인간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 육체를 벗은 뒤에도 그는 여전히 생각하고 사랑하고 의지하며 살아 있는 완전한 인간입니다. 그렇다면 육체의 기능이 심각하게 제한되었다고 해서 그 사람의 내적 인간, 즉 속 사람까지 같은 정도로 제한되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공용복 선생님의 병상 생애는 바로 이 사실을 매우 극단적인 자연계의 모습으로 보여 줍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조심해야 합니다. 이러한 생애가 ‘그러므로 공용복 선생님이 보았다고 한 영계의 모든 모습은 객관적으로 그대로 존재한다’는 결론으로 곧장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체험의 진실성과 체험의 해석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실제로 매우 강렬한 영적 체험을 했을 수 있고, 그 체험이 그의 삶을 선하게 변화시켰을 수도 있지만, 그것을 자연계의 언어로 설명하고, 하나의 교리 체계로 정리하는 과정에는 그 사람의 기존 성경 이해와 신학적 개념, 문화적 배경이 함께 작용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공용복 선생님에게만 적용되는 원칙이 아니라 모든 영적 체험을 대할 때 필요한 분별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점에서 특별히 중요한 까닭은 그가 단순히 몇 차례의 임사 체험이나 환상을 기록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의 방대한 저작에서 영계에 관한 관찰은 말씀의 속뜻, 상응, 인간의 마음 구조, 거듭남, 천국과 지옥, 주님의 신적 섭리라는 전체 신학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공용복 선생님의 체험이나 ‘핵심진리’의 영계 설명을 스베덴보리와 비교할 때에는 ‘누가 더 신기한 것을 많이 보았는가’를 비교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 설명이 인간의 자유와 사랑, 거듭남, 신적 질서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핵심진리’라는 책 자체의 형성 과정도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공용복 선생님이 어느 날 책상에 앉아 하나의 조직신학을 집필한 책이라기보다, 오랜 기간 이루어진 강의와 강연을 녹음하고 딕테이션하여 정리하고, 하나의 큰 흐름으로 엮은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실제 사경회에서도 강사 목사님들이 자기 개인의 새로운 견해를 앞세우기보다 이 ‘핵심진리’의 흐름을 충실히 전달하려는 모습이 두드러집니다. 한 사람의 가르침이 그 사람의 사후에도 제자들의 기억 속에서만 남은 것이 아니라 책과 반복적인 강의를 통해 하나의 공동체적 신앙 전통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볼 이유는 없습니다. 오히려 한 세대가 중요하게 여긴 신앙적 유산을 다음 세대가 함부로 변형하지 않고 보존하려는 태도에는 귀한 면이 있습니다. 특히 가르치는 사람이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해 매번 새로운 것을 덧붙이기보다 자신이 받은 것을 충실히 전달하려 한다면, 거기에는 상당한 절제도 필요합니다. 다만 모든 신앙 전통에는 또 하나의 질문이 따라옵니다. ‘받은 것을 충실히 보존하는 것’과 ‘받은 것을 말씀 앞에서 계속 살피는 것’이 함께 이루어지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전승에 대한 충실성과 진리에 대한 열린 태도는 서로 적이 아니라 함께 있어야 할 두 덕목입니다.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이 사경회를 대하는 위치도 분명해집니다. 이 글의 목적은 시흥영성수련원이나 ‘핵심진리’를 판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스베덴보리의 체계를 기준으로 다른 모든 신앙을 줄 세우려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오랜 세월 한 공동체를 이끌어 온 가르침을 충분히 경청하면서, 그 안에서 이미 발견되는 귀한 영적 진리를 확인하고, 동시에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통해 더 넓게 볼 수 있는 지점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서로 같은 곳에서는 ‘같다’고 말하고, 다른 곳에서는 왜 다른지를 설명하며, 독자가 스스로 더 깊이 생각할 수 있도록 하나의 기준점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이 공동체가 거의 40년 가까이 하계와 동계 사경회를 이어 오면서, 많은 참석자가 ‘핵심진리’를 펼쳐 놓고 이미 여러 번 들었던 내용을 다시 듣는다는 사실도 이 가르침의 성격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새로운 정보를 끊임없이 소비하는 방식과는 상당히 다릅니다. 이미 아는 것을 반복하여 듣고 그것을 삶에 새기려는 방식입니다. 반복 자체가 진리를 보증하지는 않지만, 신앙에서 반복에는 분명한 가치가 있습니다. 진리는 한 번 이해했다고 곧 생명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머리로 아는 것이 의지와 삶으로 내려오기까지는 오래 걸릴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아는 것인정하는 것의지하는 것행하는 것’ 사이의 차이를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진리는 먼저 기억에 들어오고 이해 안에서 인식되지만, 그것이 의지와 결합하여 삶으로 나타날 때 비로소 사람의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같은 진리를 거듭 듣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반복이 생명으로 내려가는가, 아니면 익숙한 언어와 체계에 대한 확신만 강화하는가입니다. 이것은 ‘핵심진리’에만 해당하는 질문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를 수십 년 읽는 사람에게도 똑같이 물어야 하는 질문입니다. 그의 대표작,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라틴 Arcana Coelestia, 영어 Secrets of Heaven, 天界秘義, 1749-1756, , 출 속뜻 주석, 10,837개 글)를 아무리 많이 알고, 상응을 아무리 잘 설명해도 그것이 자기 사랑을 누르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내려오지 않는다면, 지식은 아직 천국의 생명이 아닙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핵심진리’와 스베덴보리 사이에는 처음부터 예상보다 깊은 공통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무엇을 아느냐’보다 ‘무엇이 되었느냐’입니다. ‘핵심진리’는 이것을 ‘익은 열매’라는 언어로 강조하고, 스베덴보리는 ‘거듭남’과 ‘지배적인 사랑’, 그리고 ‘신앙과 체어리티의 결합’이라는 언어로 설명합니다. 세부적인 교리 구조에서는 앞으로 상당한 차이가 드러나겠지만, 적어도 신앙을 실제 생명의 변화로 보아야 한다는 출발점은 가볍게 지나칠 수 없는 공통점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공용복 선생님의 병상 생애를 알고 난 뒤, ‘핵심진리’를 다시 읽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그의 몸은 점점 더 자유를 잃어 갔지만, 그가 평생 붙든 질문은 ‘왜 나는 이런 몸이 되었는가’에서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 고난 가운데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는지, 인간이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 죽음 이후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 질문에서 나온 답들 가운데 어떤 것은 스베덴보리의 가르침과 놀라울 정도로 가까울 것이고, 어떤 것은 상당히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 차이를 단순한 교리표의 빨간 줄로 표시하기 전에, 먼저 그 질문이 나온 병상의 무게를 알고 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최종 보정본’의 첫 출발점은 판정이 아니라 경청입니다. 그러나 경청은 분별을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충분히 경청한 뒤에야 제대로 분별할 수 있습니다. 공용복 선생님의 삶과 ‘핵심진리’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먼저 충분히 듣고, 그다음 말씀과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해 그 안에 있는 선한 통찰은 더 선명하게 드러내고, 자연적인 이해에 머문 부분은 보다 영적인 차원으로 열어 보며, 서로 다른 부분은 그 차이가 어디에서 시작되는지를 차분하게 살펴보겠습니다.

 

그렇게 보면 앞으로 이어질 ‘영계’, ‘중간 영역’, ‘연단’, ‘죄성’, ‘익은 열매’, ‘천국의 단계’ 같은 낯선 표현들도 처음부터 찬반의 대상으로만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들은 거의 온몸이 자유롭지 않은 한 사람이 평생 붙들었던 질문에 대한 답이었고, 이후 여러 제자가 받아 수십 년 동안 삶으로 살아 보려 했던 하나의 신앙 전통이 되었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욱 진지하게 들을 가치가 있으며, 동시에 더욱 신중하게 분별할 가치도 있습니다.

이제 이 바탕 위에서 다음 12부부터는 실제 강의의 논리 속으로 본격적으로 들어가겠습니다. ‘핵심진리’가 인간의 존재 목적과 구원, 성화와 영원한 생명을 어떻게 하나의 큰 구조로 연결하는지 먼저 충분히 따라가고, 그때부터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조심스럽게 겹쳐 보겠습니다. 처음부터 차이를 찾아내기보다 먼저 이분들이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를 충분히 듣는 것, 이번 보정 작업에서는 바로 그것을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삼겠습니다.

 

 

12

1강이 본격적인 교리의 내용으로 들어가면서 가장 먼저 무게 있게 다루는 주제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에 관한 이해입니다. 특히 강의는 기독교 신앙에서 너무나 익숙한 ‘삼위일체’를 당연한 교리로 받아들이는 데서 멈추지 않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말하면서도 우리는 실제로 한 분 하나님을 믿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이것은 얼핏 교리적인 질문처럼 보이지만, 강의의 관심은 단순한 신학 지식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결국 신앙의 방향과 기도, 예배,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방식까지 결정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강의가 특별히 문제 삼는 것은 ‘세 위격이 한 하나님’이라는 전통적인 표현을 사람들이 실제 마음속에서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느냐는 점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라고 고백하면서도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을 각각 독립된 인격처럼 상상하면, 머릿속에는 사실상 세 분의 하나님이 자리 잡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는 ‘삼위일체’라고 말하지만 실제 심상에서는 세 신적 인격이 서로 대화하고, 의논하고, 서로 다른 역할을 수행하는 것처럼 그려질 수 있습니다. 강의가 이 문제를 붙드는 이유는 단순히 용어 하나를 바로잡으려는 데 있지 않고, 신앙의 가장 중심인 ‘하나님은 누구신가’를 분명히 하려는 데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의식 자체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많은 기독교인이 삼위일체를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그러면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것은 정확히 무슨 뜻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으면 설명하기 어려워합니다. ‘세 분인데 한 분이고, 한 분인데 세 분이다’라는 표현을 신비라는 이름 아래 그대로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물론 인간의 유한한 이성으로 하나님의 무한하신 본질을 완전히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신비이므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와 ‘신비이지만 주님께서 밝혀 주신 만큼은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는 전혀 다른 태도입니다. ‘핵심진리’는 후자의 태도를 취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강의가 성경 번역의 문제까지 언급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하나’라는 표현이 어떻게 번역되고 이해되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유일성에 대한 인상이 달라질 수 있다고 보고, 약2장이나 엡4장과 같은 본문들을 통해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성경의 일관된 증언을 강조합니다. 여기에서 강의가 지키려는 중심은 분명합니다. 기독교는 세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가 아니라 오직 한 분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이 유일신 신앙을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번 강의와 놀라울 정도로 가까이 갑니다. 스베덴보리의 기독교 신학 전체에서 가장 중심적인 주제 가운데 하나가 바로 ‘한 분 하나님’이며, 그 한 분 하나님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신다는 가르침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을 영원 전부터 서로 구별된 세 신적 인격으로 생각한 뒤 그 세 분을 하나라고 고백하는 방식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입술로는 한 하나님이라고 말하면서 생각 속에서는 세 신적 존재를 떠올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렇다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삼위는 분명히 있습니다. 다만 그것이 ‘세 분의 하나님 안에 있는 세 인격’이 아니라 ‘한 분 주님 안에 있는 신적 삼위’라는 것입니다. 이를 인간에게 있는 영혼과 몸과 그로부터 나오는 활동에 비유하여 설명합니다. 사람에게 영혼과 몸과 그 사람에게서 나오는 작용이 있다고 해서 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듯, 주님 안에서도 성부는 신성 자체, 성자는 신적 인간, 성령은 그분에게서 나오는 신성으로 이해됩니다. 셋은 구별되지만 한 분 주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이 차이는 단순한 말장난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실제로 어떻게 생각하느냐의 문제입니다. 기도할 때 ‘성부 하나님은 저 높은 곳에 계시고, 그 옆에는 성자 하나님이 계시며, 또 다른 곳에는 성령 하나님이 계신다’는 식의 심상이 생긴다면 아무리 입으로 ‘한 하나님’을 고백해도 마음의 생각은 세 신적 존재로 갈라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그분 안에 보이지 않는 신성 자체이신 아버지가 계시고, 그분으로부터 성령이 나온다고 이해하면 신앙의 시선은 한 분에게 모입니다.

 

그래서 요14:9의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는 말씀이 중요해집니다. 또한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는 말씀도 같은 방향을 가리킵니다. 이것을 단순히 ‘성부와 성자가 서로 매우 친밀하다’는 정도로만 읽으면 주님의 말씀의 강도가 약해집니다. 주님께서는 빌립에게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신적 인격을 찾아보라고 하지 않으시고,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성육신의 의미도 달라집니다. 흔히 삼위일체를 세 인격 중심으로 생각하면, 성부께서 하늘에 계시다가 성자를 세상에 보내셨다는 그림이 매우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그러면 성자는 성부와 별개의 신적 인격으로 세상에 오신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성부가 성자를 보내셨다’는 말씀을 영원 전부터 옆에 계시던 또 한 분의 하나님을 파견하셨다는 뜻으로 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신성 자체가 인간성을 취하여 자연계에 나타나신 것이 성육신입니다.

 

눅1에서 천사가 마리아에게 한 말씀은 이 점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여기에서 예수의 아버지가 누구인가를 문자 그대로 생각해 보면 흥미로운 문제가 생깁니다. 만일 성부와 성령이 영원 전부터 서로 구별된 두 신적 인격이라면, 성령으로 잉태되신 예수의 아버지를 누구라고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성 자체와 그 신성이 작용하는 성령을 한 분 하나님의 신성으로 이해하면 이 문제는 자연스럽게 풀립니다.

 

이런 점에서 ‘핵심진리’가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사실을 강하게 붙드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신론과 매우 중요한 접점을 갖습니다. 특히 삼위일체를 말하면서 결과적으로 세 하나님을 마음속에 그리는 위험을 경계한다면 그 문제의식은 상당히 정확합니다. 이것은 삼위일체를 폐기하자는 주장이 아니라 오히려 ‘삼위일체를 참으로 한 하나님 안에서 이해하자’는 요청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세심하게 살펴볼 지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명제만으로 스베덴보리의 신론과 완전히 같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한 분 하나님이 누구신가’이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서로 협력하여 하나를 이룬다고 말한다면 여전히 세 인격의 연합이라는 틀 안에 머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결정적인 것은 신성의 충만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골2:9의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라는 말씀이 특별히 중요해집니다.

 

이렇게 보면 주님의 지상 생애에서 나타나는 성부와 성자의 대화도 다시 질문하게 됩니다. 예수께서 아버지께 기도하셨고,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말씀하셨으며, 십자가에서도 아버지를 부르셨습니다. 이것을 보면 자연스럽게 두 인격이 서로 이야기하는 장면처럼 보입니다. 전통적인 삼위일체 이해가 강력하게 자리 잡은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 본문 자체에 그런 모습이 실제로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성육신하신 주님 안에서 진행된 ‘영화’의 과정으로 설명합니다. 주님께서 마리아에게서 취하신 인간적인 것은 처음부터 완전히 영화된 신적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지상 생애 동안 시험을 받으시고 승리하시면서 어머니에게서 취한 유한한 인간적인 것을 차례로 벗으시고, 그 자리를 자기 안에 계신 신성으로 채우셨습니다. 따라서 복음서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구별되어 나타나는 것은 영원히 서로 떨어져 있는 두 신적 인격의 대화라기보다, 성육신 과정에서 아직 영화되지 않은 인간적인 것과 그 안에 계신 신성 사이의 관계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부활 후에는 이 과정이 완성됩니다. 주님의 인간성 자체가 완전히 신성이 되며, 그래서 더 이상 ‘신성과 인간성이 두 인격처럼 나뉜 주님’이 아니라 완전한 한 분 주님이십니다.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을 때 주님께서는 그것을 수정하지 않으셨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의 두 번째 인격일 뿐이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마의 고백을 그대로 받으셨습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을 매우 단순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알고 싶으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알고 싶으면 주님께서 죄인과 병든 사람을 어떻게 대하셨는지를 보면 됩니다. 하나님의 진리가 무엇인지 알고 싶으면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 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싶으면 주님께 나아가면 됩니다. 보이지 않는 성부를 주님 뒤에서 따로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안에서 아버지를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한 신학적 정리가 아니라 신앙생활에 매우 큰 영향을 줍니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분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부는 엄격하시고 성자는 자비로우시며 성령은 능력을 주시는 분’이라는 식으로 세 분의 성격을 나누어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한 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친히 인간성을 입고 오셨고, 그 인간성을 영화하신 뒤 지금도 성령으로 우리에게 임하신다고 이해하면 창조와 구속과 거듭남의 모든 역사가 한 분 주님에게서 이어집니다.

 

특히 이것은 속죄를 이해할 때 훗날 매우 중요해질 것입니다. 만일 성부와 성자를 서로 별개의 신적 인격으로 강하게 분리하면, 죄 때문에 분노하신 성부께서 인간을 벌하려 하시는데 자비로운 성자께서 대신 형벌을 받음으로써 성부의 분노를 달래셨다는 그림이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분 하나님 안에서 성육신과 구속을 이해하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분노하여 다른 하나님을 벌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사랑 때문에 인간에게 오셔서 지옥의 권세와 싸우고 인간에게 다시 구원의 길을 여신 것이 됩니다. 이 문제는 뒤의 ‘속죄복음’에서 훨씬 중요하게 다루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아버지’, ‘아들’, ‘성령’이라는 성경의 언어를 없애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언어가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더 깊게 이해해야 합니다. ‘아버지’는 주님 안의 신성 자체를, ‘아들’은 세상에 나타나신 신적 인간을, ‘성령’은 영화되신 주님으로부터 나와 인간에게 역사하는 신성을 가리킵니다. 세 표현에는 분명한 구별이 있지만 그 구별이 세 하나님을 만들지는 않습니다.

 

사람에게 영혼과 몸과 그에게서 나오는 말과 행동이 있다고 해서 세 사람이 아닌 것과 비슷합니다. 물론 인간의 구조를 하나님께 그대로 투사할 수는 없지만, 주님께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으셨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 비유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 안에서도 보이지 않는 영혼은 몸을 통해 자신을 나타내고, 영혼과 몸에서 나온 의도와 생각은 말과 행동으로 다른 사람에게 전달됩니다. 이 모든 것이 한 사람의 생명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성령을 받는다’는 것도 새로운 의미를 갖습니다. 제3의 신적 인격이 우리 몸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상상할 필요가 없습니다. 영화되신 주님으로부터 신적 사랑과 진리, 생명과 능력이 우리에게 흘러들어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자주 말하는 인플럭스의 관점에서는 모든 참된 선과 진리가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하여 인간에게 끊임없이 흘러옵니다. 인간은 그것을 자유롭게 받아들이거나 거절합니다.

 

이 지점에서 ‘핵심진리’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를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도 충분히 존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관한 생각은 모든 신앙의 가장 안쪽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하느냐에 따라 구원도 달리 이해되고, 기도도 달라지며, 인간의 변화와 영계도 달리 이해됩니다. 하나님을 서로 다른 세 신적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과,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신성의 모든 충만이 있으며 그 한 분에게서 모든 구원이 온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앙 전체의 구조를 다르게 만듭니다.

 

그러나 이 문제를 다른 기독교인들을 정죄하는 기준으로 사용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전통적인 삼위일체 교리를 고백하는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실제 기도와 삶에서는 한 분 주님을 진실하게 사랑합니다. 그들의 신학적 표현 속에 철학적 난점이 있다고 해서 그들의 내적 신앙까지 곧바로 ‘세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라고 판정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의 입술에 있는 교리적 공식과 그 사람의 마음이 실제로 향하는 대상은 언제나 완전히 같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이것은 중요합니다. 천국은 교리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의 공동체가 아닙니다. 교리는 사람을 선한 삶으로 인도하기 위해 필요하지만, 천국을 이루는 것은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생명입니다. 어떤 사람이 삼위일체를 완벽하게 설명하지 못하더라도 주님을 사랑하고 양심에 따라 선을 행하며 살아왔다면, 사후에 진리를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아무리 정확한 신론을 말해도 자기 사랑과 지배욕 속에서 살아간다면 정확한 교리 자체가 그 사람을 천국 사람으로 만들어 주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라는 진리는 다른 교파를 공격하기 위한 무기가 아니라 우리의 시선을 한 분 주님께 모으기 위한 빛이어야 합니다. 교리를 바르게 아는 목적은 ‘나는 저 사람보다 정확하게 안다’고 우월감을 갖는 데 있지 않습니다. 더 분명하게 주님을 보고, 더 온전히 주님을 사랑하며, 그분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실제 삶에서 살아내기 위해서입니다. 신론이 삶으로 내려오지 않는다면 가장 높은 진리를 말하면서도 그 진리의 목적을 놓칠 수 있습니다.

 

이 점은 지금 우리가 ‘핵심진리’를 읽는 태도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공용복 선생님과 그 제자들이 하나님을 바로 알고 바로 전하려고 애쓴 마음을 먼저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오랜 세월 같은 가르침을 반복해서 듣고 전한 이유도 단순히 자기 교리를 지키기 위해서만이라고 쉽게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에게는 ‘우리가 받은 이 진리를 흐리지 않고 다음 사람에게 전해야 한다’는 제자적 책임감이 있었을 수 있습니다. 특히 생전 공용복 선생님의 육성을 직접 들었던 원로들에게 이 문장들은 단순한 교리 문장이 아니라 자신들이 직접 들었던 스승의 증언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바로 그 제자적 충실함이 가장 아름다워지는 순간은 스승의 문장을 지키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스승이 바라보았던 주님을 함께 바라볼 때일 것입니다. 인간 스승의 말은 아무리 귀해도 최종 목적지가 될 수 없습니다. 공용복 선생님도, 스베덴보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사람 모두 우리를 자기 자신에게 데려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시선을 돌리게 해야 합니다.

 

따라서 이번 부분에서 ‘핵심진리’가 던지는 ‘하나님은 정말 한 분이신가?’라는 질문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 질문을 한 걸음 더 밀고 갑니다. ‘그 한 분 하나님을 어디에서 만날 것인가?’ 그 대답은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보이는 신적 인간으로 우리에게 오셨고, 그분 안에 아버지가 계시며, 그분으로부터 성령이 나옵니다. 그래서 천국의 모든 시선은 궁극적으로 한 분 주님께 향합니다.

 

그렇게 이해할 때 삼위일체는 풀 수 없는 숫자의 역설에서 벗어나 구원의 이야기로 바뀝니다. ‘어떻게 셋이 하나인가?’만 묻는 대신 ‘한 분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에게 오시고, 자신을 나타내시고, 지금도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가?’를 보게 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세 하나님을 억지로 하나로 묶어 놓은 공식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의 신성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우리를 구원하며 우리 안에 생명으로 역사하는 신적 질서를 보여 주는 이름들이 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1강의 다음 흐름으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한 분으로 바로 이해한다면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은 ‘그 한 분 하나님께서 인간을 왜 창조하셨으며, 인간에게 무엇을 이루려 하시는가’가 됩니다. ‘핵심진리’가 하나님에 관한 교리를 단순한 신론으로 끝내지 않고 인간의 창조 목적과 구원, 성화의 문제로 연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1강 3부에서는 이 연결을 따라가면서 ‘인간은 무엇을 위해 지음받았는가’,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핵심진리’의 흐름과 스베덴보리의 인간론을 함께 놓고 살펴보겠습니다.

 

 

13

1강 3부|‘신인 합일’과 성화된 성도들의 생애-신앙의 목표는 ‘무엇을 아는가’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는가’

1강에서 세 번째로 제시되는 큰 축은 ‘신인 합일의 경지에 들어간 성도들’의 생애와 사상과 체험입니다. 강사 목사님은 이번 사경회에서 단지 교리와 종말의 시간표를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성결과 완덕을 추구하며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살펴보겠다고 예고합니다. 특히 로마서 7장과 8장을 언급하면서, ‘예수님을 믿었으므로 이제 죄에서 자유롭고 예수님의 생명이 내주한다’는 고백만으로 성화가 완성되었다고 말하기보다, 사도 바울처럼 죄와 싸우고 광야의 연단을 거쳐 실제 삶에서 성결의 은총과 완덕을 향해 나아간 사람들의 경험을 살펴보겠다고 합니다. 그 목적은 매우 분명합니다. 그것을 통해 ‘신앙의 목표’, ‘신앙의 방향’, ‘신앙의 가치관’이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이번에 ‘핵심진리’와 공용복 선생님의 생애를 함께 알고 다시 들으면 이전보다 훨씬 무겁게 들립니다. 이 공동체가 말하는 ‘성화’는 설교자가 청중에게만 요구하는 이상적인 덕목이 아니라, 그 가르침을 남긴 사람 자신이 거의 온몸의 기능을 잃어 가는 병상에서 오랜 세월 씨름했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공용복 선생님의 병상생활이 곧 ‘핵심진리’의 모든 성화론을 증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고난과 연단을 통하여 인간의 내면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문장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생각할 때, 그 말의 삶의 무게를 무시해서는 공정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생전 공용복 선생님을 직접 알았던 원로들에게 이런 문장들은 지금도 단순한 활자가 아니라 실제로 들었던 스승의 육성과 함께 되살아날 수 있을 것입니다.

 

‘핵심진리’의 목차를 보면 이 세 번째 축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성화된 성도들의 생애’라는 독립된 큰 장 아래 썬다 싱, 프랜시스, 요한 웨슬리, 허드슨 테일러를 비롯하여 가톨릭의 여러 성자와 성녀들까지 함께 다룹니다. 이것은 적어도 이 책의 관심이 ‘우리 교파의 사람이냐 아니냐’에만 있지 않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전통에 속했더라도 실제 삶에서 하나님을 향한 깊은 헌신과 자기 부인, 이웃 사랑, 성결의 열매가 나타났다면 그 삶을 배울 대상으로 삼으려는 것입니다. 종말론이 강한 책이라는 첫인상과 달리, 그 내부에는 ‘실제로 하나님을 닮아 산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는가’라는 매우 강한 성화론적 관심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앞으로 ‘핵심진리’를 해설할 때 반드시 기억해야 할 점입니다. 14만 4천, 대환난, 처음 익은 열매, 흰옷, 인침 같은 용어만 떼어 놓으면 이 공동체가 ‘누가 특별한 종말의 선택된 사람이 되는가’에 주로 관심을 두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체 구조를 보면 그런 종말론적 언어 역시 궁극적으로 ‘어떤 성도가 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흘러갑니다. 강의 자체가 그것을 ‘신앙의 목표’, ‘신앙의 방향’, ‘신앙의 가치관’이라고 세 번 반복해서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종말에 관한 지식이 늘어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실제 사람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상당히 깊게 만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앙은 사람이 진리를 많이 아는 상태가 아니라, 그 진리가 선과 결합하여 그의 생명이 된 상태를 향합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이것이 하나님의 계명이므로 해야 한다’는 진리에 따라 자신을 억제하고 순종합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진행될수록 진리는 의지 안으로 들어가고, 나중에는 선 자체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것을 행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화내면 안 된다’고 생각하여 참지만, 점차 이웃을 해치는 것 자체가 싫어져 화를 내지 않는 상태로 옮겨 갑니다. 처음에는 ‘정직해야 한다’는 계명 때문에 손해를 감수하지만, 나중에는 진실 자체를 사랑하여 거짓을 불편하게 느낍니다. 이것이 진리가 생명이 되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이 공동체가 말하는 ‘신인 합일’이라는 표현도 가장 좋은 의미에서 읽으면 스베덴보리의 ‘주님과의 결합’과 상당한 접점을 가질 수 있습니다. 다만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경계가 있습니다. 인간이 거듭나고 성화된다고 해서 인간의 본질이 신성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생명 자체이시고 인간은 그 생명을 받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인간에게 나타나는 참된 사랑과 지혜, 선과 진리는 모두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것을 자기 것으로 받아 자유롭게 살아가지만, 그 생명의 원천이 자기 자신인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신인 합일’을 ‘인간이 신적 존재가 되는 것’보다는 ‘사람의 의지와 이해가 점점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의 질서와 하나가 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주님은 주님이시고 인간은 인간이지만, 사랑으로 결합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주님의 뜻을 단지 명령으로 듣는 데서 벗어나 그것을 자기 기쁨으로 받아들이게 될 때, 그의 삶은 점점 주님과 하나의 방향을 갖게 됩니다. 이것은 본질의 혼합이 아니라 사랑과 의지의 결합입니다.

 

그런데 ‘핵심진리’와 스베덴보리 사이의 중요한 차이는 바로 이 성화의 ‘완성’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서 나타납니다. 강의에서는 광야 연단을 거쳐 성결의 은총을 받고 마침내 ‘완덕의 경지’에 이르는 비교적 선명한 방향을 제시합니다. 앞으로 이어지는 강의들에서는 이 구조가 ‘죄성의 제거’, ‘영혼의 할례’, ‘생명과’, ‘이기는 자’와 연결되면서 더욱 구체적인 단계론으로 발전합니다. 이러한 구조에는 신앙인이 평생 같은 자리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강한 촉구가 있습니다. 실제 변화가 가능하며, 또 그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사람에게 실제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는 점에서는 전혀 물러서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변화를 ‘어느 순간 죄성의 뿌리가 완전히 제거되어 이제 악으로부터 자유로운 완성 상태가 되었다’는 방식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proprium은 지상의 삶에서 존재론적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악을 제어하시고 새로운 의지를 형성하시면서, 악이 더 이상 사람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질서를 바꾸십니다. 그래서 거듭난 사람은 ‘나는 이제 내 안에 악이 없다’고 느끼기보다 오히려 모든 선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더 깊이 인정하게 됩니다.

 

이 차이는 성화된 사람을 바라보는 기준에도 영향을 줍니다. ‘특별한 체험이 많았는가’, ‘기적을 행했는가’, ‘얼마나 극단적인 금욕생활을 했는가’가 최종적인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 체험과 훈련이 어떤 사람에게 중요한 역할을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한 사람의 영적 상태를 결정하는 것은 그의 ‘지배적인 사랑’입니다. 그 사람이 무엇을 가장 사랑했고, 그 사랑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가가 중요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의 선을 기뻐하며 맡겨진 쓰임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것이 천국적 삶의 중심입니다.

 

그러므로 ‘핵심진리’에 소개되는 여러 성자와 성녀들의 삶도 이 기준으로 읽으면 더욱 깊어집니다. 프랜시스가 얼마나 가난했는지를 보는 데서 멈추지 않고 ‘왜 가난을 택했는가’를 보아야 하고, 웨슬리가 얼마나 열심히 활동했는가보다 그 활동을 움직인 사랑을 보아야 하며, 어느 성녀가 얼마나 혹독한 육체적 고난을 견뎠는가보다 그 고난 가운데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고난의 크기가 거룩함의 크기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난 속에서도 자기 사랑이 더 강해질 수 있고, 반대로 평범한 일상 가운데서도 깊은 자기 부인과 이웃 사랑이 자랄 수 있습니다.

 

이 점은 공용복 선생님의 생애를 바라볼 때에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합니다. 거의 전신이 마비되는 엄청난 고난을 겪었다는 사실 자체가 그를 자동적으로 성화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 고난을 단순한 생애의 불행으로만 볼 수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고난 가운데 어떤 사랑이 형성되었고 어떤 삶의 열매가 나타났는가입니다. ‘병상의 증거자 공용복’을 통해 우리가 살펴보게 된 귀한 부분도 바로 그 점입니다. 육체의 자유가 거의 사라지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질문을 멈추지 않고, 자기 생애를 단순한 비극으로만 해석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깨달은 것을 전하려 했다는 사실은 적어도 그의 신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증언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수도적 신앙과 일상생활의 관계도 중요해집니다. 성화된 성도들의 전기를 읽다 보면 자칫 수도원, 병상, 금식, 철야, 극단적인 자기 부인 같은 특별한 삶만이 높은 영성의 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세상에서 맡겨진 평범한 쓰임 역시 천국적 삶의 아주 중요한 자리입니다. 한 사람이 가정을 성실하게 돌보고, 직장에서 정직하게 일하며, 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일을 책임 있게 수행하고, 자기 이익보다 공동의 선을 생각하는 삶 역시 깊은 체어리티의 삶입니다.

 

따라서 수도생활과 세속생활을 ‘높은 길’과 ‘낮은 길’로 단순히 나누어서는 안 됩니다. 수도원에서 생활하면서도 자기 의와 영적 우월감에 빠질 수 있고, 세상 한복판에서 일하면서도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깊은 천국적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장소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이런 점에서 시흥영성수련원이 남녀 수도공동체뿐 아니라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일정 기간 들어와 훈련받는 형태까지 두고 있다는 사실은 흥미롭습니다. 수도적 훈련의 목적이 세상을 버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더 바르게 살기 위한 내적 훈련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강사가 첫 강의에서 성화된 사람들의 삶을 공부하는 목적을 ‘신앙의 목표와 방향과 가치관을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바꾸는 것’이라고 규정한 것은 그래서 매우 중요합니다. 성자들의 전기를 읽는 목적이 ‘저 사람은 몇 단계에 이르렀는가’를 평가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그 사람의 특이한 기적과 체험을 모방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그들의 삶에서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어떻게 실제 삶을 변화시켰는지를 보고, 자기 삶의 중심을 다시 점검하기 위해서여야 합니다.

 

여기에는 ‘모방’과 ‘상응’의 차이와 비슷한 문제도 있습니다. 어떤 성인이 40일 금식을 했다고 해서 나도 40일 금식을 하면 같은 영적 상태에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모든 재산을 버렸다고 해서 나도 재산을 버리면 같은 사랑을 얻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외적 행위는 내적 사랑에서 나와야 합니다. 주님께서 한 사람을 어떤 길로 이끄셨는지를 존중하되, 모든 사람에게 같은 외적 형태를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각 사람을 그의 상태와 쓰임에 따라 다르게 인도하십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성화된 성도들의 생애’를 폭넓게 다루는 ‘핵심진리’의 방식에는 매우 귀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개신교와 가톨릭의 울타리를 넘어 실제 성결의 열매를 찾아보려는 태도는 ‘어느 교파가 맞느냐’보다 ‘어디에서 주님을 향한 사랑의 열매가 나타났느냐’를 볼 수 있게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천국관 역시 바로 이런 면에서 매우 넓습니다. 사람의 교단 명칭이 그의 영원한 상태를 결정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아는 진리를 따라 양심적으로 살며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선을 받아들였는지가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교리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른 교리는 바른 삶으로 인도하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거짓된 하나님 이해와 왜곡된 구원론은 사람의 삶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리는 목적지가 아니라 길입니다. 목적은 주님과의 결합이며, 그 결합은 이웃 사랑과 쓰임의 삶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교리를 잘 알면서 사랑이 없는 사람과 교리의 많은 부분을 모르지만 자신이 아는 선에 따라 겸손하게 사는 사람을 만났을 때, 우리는 전자의 ‘지식’을 후자의 ‘생명’보다 자동적으로 높게 평가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공용복 선생님의 제자들을 이해할 때에도 중요한 균형이 될 것 같습니다. 스승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보존하려는 충실성은 귀합니다. 그러나 스승의 문장 그대로를 보존하는 것보다 더 깊은 제자도는 그 문장이 지향하던 삶을 실제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 그분들을 가까이 만나며 주님과 열두 제자의 관계까지 새롭게 생각하게 되셨다는 점도 바로 여기와 닿아 있을 것입니다. 제자는 스승의 말을 단순히 암기하는 사람이 아니라 스승에게서 본 삶을 자기 삶 안에서 이어 가려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 스승과 주님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공용복 선생님이 아무리 귀한 스승이었다 해도 그는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살아가는 한 사람입니다. 웨슬리도, 프랜시스도, 썬다 싱도 마찬가지입니다. 스베덴보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신앙의 최종 목적지가 될 수 없습니다. 성화된 성도들의 삶이 귀한 이유는 그들이 얼마나 놀라운 사람이 되었는가에 있지 않고, 주님께서 유한한 인간 안에서 무엇을 이루실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하나의 증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인 합일’의 가장 안전하고 아름다운 표지는 ‘나는 하나님과 합일되었다’는 자기 인식이 아니라 오히려 깊어진 겸손일 것입니다. 주님께 가까워질수록 사람은 자기에게서 나오는 선이 없다는 사실을 더 분명히 깨닫습니다. 천사들이 자기 선과 지혜를 자기 것으로 돌리지 않고 모두 주님으로부터 온다고 인정하는 것처럼, 성화된 사람 역시 ‘내가 높은 단계에 이르렀다’기보다 ‘주님께서 나를 붙들어 주셨다’는 감사가 깊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성화를 점검하는 아주 단순한 기준 하나를 세워 볼 수도 있겠습니다. ‘이 길을 오래 걸은 결과 나는 다른 사람을 더 쉽게 사랑하게 되었는가?’입니다. 더 많이 용서하고, 더 적게 자신을 높이고, 다른 사람의 선을 더 기뻐하며, 맡겨진 쓰임을 더 충실하게 수행하고, 자기 공로를 덜 의식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일 신앙생활이 오래될수록 교리에는 더 밝아지는데 사람에게는 더 까다롭고 냉정해진다면, 아무리 높은 영적 용어를 사용해도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반대로 특별한 체험을 거의 말하지 않더라도 주변 사람이 그를 통해 안심하고, 사랑받고, 선을 향할 힘을 얻는다면 그 삶에는 천국의 생명이 상당히 스며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첫 강의가 ‘밝은 빛-모형적 진리-성화된 성도들의 삶-요한계시록’이라는 네 축을 제시한 이유도 조금씩 드러납니다. 빛은 자기 상태를 보게 하고, 모형적 진리는 걸어갈 길을 보여 주며, 성화된 성도들의 생애는 그 길이 사람의 실제 삶에서 어떻게 나타날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마지막 요한계시록은 이 모든 것을 재림과 심판, 영원한 하나님 나라라는 최종 지평 속에 놓습니다. 첫 세 축이 실제 삶의 변화를 향한다는 사실을 놓치면 마지막 종말론만 지나치게 부각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1강 3부에서 가장 귀하게 남길 수 있는 것은 ‘성화의 가능성에 대한 기대’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평생 같은 자기 사랑과 같은 죄의 습관에 붙들린 채 ‘원래 인간은 그런 존재’라고 체념해야 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실제로 사람의 사랑과 성품을 변화시키실 수 있습니다. ‘핵심진리’가 그것을 성결과 완덕, ‘신인 합일’이라는 강한 언어로 표현하고, 스베덴보리가 그것을 거듭남과 주님과의 결합이라는 언어로 설명하는 데에는 차이가 있지만, 주님의 구원이 실제 인간의 생명을 새롭게 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매우 중요한 공통점을 갖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 가능성의 중심을 끝까지 인간의 성취가 아니라 주님의 역사에 둡니다. 완덕이란 내가 나를 완성한 상태가 아니라 주님께서 내 안에서 더 자유롭게 사랑하시고 역사하실 수 있게 된 상태에 가깝습니다. 내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인간성이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중심적인 proprium의 지배가 약해지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면서 비로소 주님께서 창조하신 참된 ‘나’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성화와 거듭남을 가장 천국적으로 이해하는 길일 것입니다.

 

이제 1강의 마지막 4부에서는 강사가 네 번째 축으로 제시한 요한계시록과 재림, 대환난, 천년왕국, 백보좌 심판, 영원한 천국의 ‘구원의 설계도’를 살펴보겠습니다. 강의 자체는 요한계시록을 통해 하나님께서 앞으로 이 시대를 어떻게 이끌어 가실지 명확하게 알 수 있다고 매우 강하게 말합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핵심진리’의 미래적·역사적 종말론과 스베덴보리의 내적 재림 및 최후의 심판 이해 사이의 가장 큰 차이가 처음으로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14

1강의 마지막 축은 요한계시록과 재림입니다. 앞의 세 부분에서 강의는 하나님의 빛, 인간의 변화, 성화된 삶을 차례로 다룬 뒤 마지막에 종말과 재림을 놓습니다. 이것은 순서상 의미가 있습니다. 재림 신앙이 단순한 미래 사건에 대한 호기심이 아니라, 지금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강사 목사님은 대환난, 천년왕국, 백보좌 심판,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을 하나의 큰 구원의 흐름 안에서 설명하면서, 성도가 이 시대를 분별하고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 공동체의 전체 성격을 지금까지 살펴본 뒤 다시 들으면, 이 종말론 역시 단순한 공포 조성이나 날짜 예측과는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핵심진리’에서 종말은 사람을 겁주기 위한 주제가 아니라 ‘깨어 있으라’, ‘정결하게 살라’, ‘익은 열매가 되라’는 촉구를 강화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도 중요하게 다루지만, 더 깊은 목적은 ‘그때 나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에 있습니다. 이 점은 충분히 귀하게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바로 여기에서 큰 방향 전환이 일어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재림은 주님께서 다시 자연적 육체를 입고 지상에 내려오시는 사건으로 이해되지 않습니다. 재림은 말씀의 속뜻이 열리고, 그 안에서 주님의 신적 진리가 새롭게 드러나는 오심과 깊이 연결됩니다. 첫 번째 오심이 육신을 입으신 성육신이었다면, 두 번째 오심은 말씀 안에서 진리가 열리는 방식의 오심입니다. 그러므로 재림은 미래 어느 한 날의 사건이면서 동시에 현재 말씀을 통해 사람 안에 일어나는 영적 사건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관점에서 ‘깨어 있으라’는 말씀도 달라집니다. 외적인 종말론에서는 ‘언제 주님이 오실지 모르니 준비하라’는 긴장이 중심이 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주님의 진리가 지금 내 안에 들어올 때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사람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때문에 진리를 거부하고 있다면 주님이 아무리 가까이 오셔도 그분을 맞을 수 없습니다. 반대로 미래의 시간표를 정확히 알지 못해도 악을 죄로 알고 피하며, 진리를 따라 선을 행하고,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주님의 오심을 자기 삶 안에서 받아들이고 있는 셈입니다.

 

최후의 심판도 마찬가지입니다. ‘핵심진리’의 체계에서는 백보좌 심판이 미래 역사의 실제 종말 과정에 놓인 중요한 사건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최후의 심판을 자연계 지구가 불타 없어지는 사건으로 보지 않습니다. 심판은 영계에서 이루어지며, 선과 악이 겉으로 뒤섞여 있던 상태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을 때 실제 내적 상태에 따라 분리되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이 원리는 개인의 거듭남에도 축소된 형태로 나타납니다. 주님의 진리가 밝아질수록 내 안에서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이 드러나고 분리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1강의 첫 주제가 ‘빛’이었다는 사실과 마지막 주제인 ‘심판’은 의외로 깊이 연결됩니다. 빛이 오면 감추어진 것이 드러납니다. 드러나면 무엇이 주님께 속하고 무엇이 자기 사랑에 속하는지 분별됩니다. 이 분별이 곧 심판의 시작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재림, 심판, 거듭남이 서로 떨어진 주제가 아닙니다. 주님의 진리가 오고, 그 빛이 사람을 비추며, 사람 안의 상태가 드러나고, 선과 악이 분리되고, 새로운 질서가 세워지는 하나의 연속된 과정입니다.

 

천년왕국에 대해서도 두 관점은 크게 갈라집니다. ‘핵심진리’에서는 장차 이 땅에 실제적인 천년왕국이 이루어진다는 이해가 강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계20장의 ‘천년’을 문자적인 천 년으로 보지 않습니다. 말씀의 수는 영적인 상태와 충만함을 나타내며, ‘천년’ 역시 일정한 영적 기간 또는 상태의 충만함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사탄이 결박되고 성도들이 주님과 함께 왕 노릇한다는 장면을 정치적 지상왕국의 연표로 읽기보다, 악의 지배가 제한되고 주님의 진리가 교회 안에서 자유롭게 받아들여지는 영적 상태로 봅니다.

 

새 예루살렘에서도 차이는 분명합니다. ‘핵심진리’에서는 새 예루살렘을 마지막 구원 역사 뒤에 완성되는 실제 천국의 중심적 영역으로 이해하는 비중이 큽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에게 새 예루살렘은 주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새 교회와 그 교회의 교리를 의미합니다.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 낸 철학이나 신학 체계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신적 진리가 온다는 뜻입니다. 성벽과 문, 기초석과 보석, 길이와 너비와 높이까지도 물질적 도시의 설계도가 아니라 새 교회 안에 있는 선과 진리의 완전한 질서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두 관점은 똑같이 요한계시록을 매우 중요하게 읽으면서도 질문의 방향이 다릅니다. ‘핵심진리’는 ‘이 사건들은 미래 역사에서 언제, 어떤 순서로 일어날 것인가’를 묻는 경향이 강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상징들은 교회와 인간의 영적 상태에서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먼저 묻습니다. 하나는 시간의 진행을 읽고, 다른 하나는 상태의 변화를 읽습니다. 하나는 역사의 마지막을 향한 설계도를 그리고, 다른 하나는 낡은 상태가 심판받고 새로운 상태가 세워지는 내적 과정을 봅니다.

 

이 차이는 14만 4천을 해석할 때 더 분명해집니다. ‘핵심진리’에서는 14만 4천을 실제 특정 수의 ‘이기는 자’들과 연결하고, 이들을 종말의 중요한 구원 집단으로 이해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14만 4천을 실제 인원수가 아니라 주님의 교회 안에 있는 선과 진리의 충만함을 나타내는 수로 봅니다. ‘열둘’이 신앙과 사랑에 속한 모든 것을 나타내고, 그것이 확대되어 ‘일만 이천’과 ‘14만 4천’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숫자가 ‘몇 명인가’를 묻기보다 ‘어떤 상태인가’를 묻게 됩니다.

 

그렇다고 미래를 향한 소망 자체를 가볍게 볼 이유는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실제 사후의 삶이 있고, 교회에도 역사적인 변화가 있으며, 주님의 섭리는 분명 어떤 완성을 향해 갑니다. 문제는 그 완성을 자연적 시간표와 사건에 얼마나 정확하게 대응시킬 수 있느냐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말씀의 예언을 뉴스 기사나 국제정세와 일대일로 맞추기보다, 그 예언이 나타내는 영적 상태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말씀의 영원한 의미가 특정 시대의 사건에만 갇힐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이 사경회의 오랜 반복 훈련이 다시 의미를 얻습니다. 같은 ‘핵심진리’를 수십 번 듣고 또 듣는 목적이 단지 미래 시간표를 더 정확하게 기억하기 위해서라면 반복의 영적 가치는 제한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반복을 통해 ‘나는 지금 주님 앞에서 어떤 상태인가’, ‘어떤 죄를 아직 붙들고 있는가’, ‘말씀과 행실이 일치하고 있는가’를 점검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같은 종말론적 도식이라도 사람을 자기 성찰과 회개로 이끈다면 실제 영성훈련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공용복 선생님의 생애까지 알고 나면, 이 공동체에서 재림과 종말이 왜 그토록 절박하게 다가왔는지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극심한 육체적 제약 속에서 오랜 세월을 살아간 사람에게 죽음 이후의 생명과 하나님의 완성은 단순한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도 우리는 체험의 절박함과 교리의 정확성을 구별해야 합니다. 절박한 질문은 존중하되, 그 질문에 대한 모든 해석적 답변을 자동으로 동일한 무게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핵심진리’의 종말론을 부정하기 위해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그 종말론의 중심을 더 내적으로 돌려놓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대환난이 언제 오는가’보다 ‘내 안에서 무엇이 지금 심판받아야 하는가’를 묻고, ‘천년왕국이 어느 시점에 시작되는가’보다 ‘주님의 질서가 내 삶에서 실제로 다스리고 있는가’를 묻고, ‘새 예루살렘이 어디에 세워지는가’보다 ‘주님의 새 진리가 내 이해와 의지 안에 내려오고 있는가’를 묻게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재림 신앙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현재적으로 만듭니다. 미래의 한 사건만 기다리는 신앙은 기다림이 길어지면 쉽게 무뎌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 가운데 지금 오신다고 믿는다면 매일이 재림을 맞는 날이 됩니다. 오늘 들은 진리를 받아들일 것인가 거절할 것인가, 오늘 드러난 악을 죄로 인정할 것인가 합리화할 것인가, 오늘 내 이웃에게 선을 행할 것인가 자기 사랑을 따를 것인가가 모두 주님의 오심에 대한 응답이 됩니다.

 

이 점에서 ‘건전한 재림대망 신앙’이라는 사경회의 명칭도 새롭게 읽을 수 있습니다. 건전한 재림대망이라면 공포와 계산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삶을 깨어 있게 해야 합니다. 남의 종말을 논하기보다 자기 내면의 어둠을 보게 해야 하고, 세상의 징조를 해석하기보다 주님의 빛을 받아들이게 해야 하며, ‘나는 선택된 자인가’를 묻기보다 ‘나는 오늘 주님의 뜻을 살아내고 있는가’를 묻게 해야 합니다. 이 방향이라면 ‘핵심진리’가 추구하는 실제적 성화와 스베덴보리의 내적 재림 이해가 상당히 아름답게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1강 전체를 다시 묶어 보면 네 축은 서로 흩어진 주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다’는 말씀으로 자기 상태가 드러나고, ‘모형적 진리’를 통해 성경과 자기 삶의 큰 흐름을 보며, ‘성화된 성도들의 생애’를 통해 그 진리가 실제 사람에게서 어떻게 생명이 될 수 있는지를 보고, 마지막으로 재림과 심판을 통해 그 모든 변화가 주님의 영원한 나라와 연결되어 있음을 바라봅니다. 이 구조 자체에는 상당한 일관성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에 한 가지 중심축을 더 분명히 세웁니다. 그 모든 과정의 주체와 중심은 한 분 주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빛도 주님으로부터 오고, 말씀의 속뜻도 주님을 중심으로 열리며, 성화도 주님의 생명이 사람 안에 들어와 이루시는 것이고, 재림 역시 주님께서 신적 진리 가운데 오시는 사건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영적 단계보다 주님의 임재가 먼저이고, 인간의 완성보다 주님과의 결합이 중심이며, 미래의 사건보다 현재의 주님이 중심입니다.

 

이렇게 보면 ‘재림을 준비한다’는 말도 가장 단순하고 깊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오늘 내 안에 오실 수 있도록 길을 여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 때문에 거부했던 진리를 받아들이고, 악을 죄로 알고 피하며, 받은 진리를 선한 행위로 살아내고, 그 모든 선을 자기 공로로 돌리지 않고 주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미래의 재림을 기다리는 가장 실제적인 준비입니다.

 

따라서 1강의 결론은 종말의 공포가 아니라 현재의 빛이어야 하겠습니다. ‘나는 언제 휴거될 것인가’, ‘대환난은 언제 시작되는가’, ‘나는 14만 4천에 들어가는가’보다 먼저 ‘지금 주님의 빛 가운데 살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이 질문은 어느 교파에 속했든, 어느 종말론을 가지고 있든 모든 신앙인에게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그리고 이 질문 앞에서는 공용복 선생님도, 그의 제자들도, 스베덴보리도, 이 글을 읽는 우리도 모두 같은 자리에 섭니다. 누구도 자기 교리와 체험을 최종 빛으로 삼을 수 없습니다. 빛은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인간의 가르침이 귀한 까닭도 그 빛을 더 잘 보게 해 줄 때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경회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최종 목적 역시 공용복 선생님을 높이거나 낮추는 데도, 스베덴보리를 높이는 데도 있지 않습니다. 한 분 주님을 조금 더 분명하게 바라보고 그분의 빛 가운데 자기 삶을 돌아보는 데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시 시작한 1강은 이제 여기서 마무리해도 좋겠습니다. 앞선 초안보다 공용복 선생님의 생애와 이 공동체의 제자적 전승을 더 깊이 품게 되었지만, 그것이 본문의 중심을 빼앗지는 않도록 했습니다. 다음 2강부터도 같은 원칙으로 이어가겠습니다. ‘핵심진리’가 먼저 무엇을 말하는지를 충분히 듣고, 그 안의 귀한 방향을 살린 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더 내적으로 열리는 지점과 분명히 갈라지는 지점을 차분하게 살피겠습니다.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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