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212.심화

 

11. ‘29:18

 

그날에 못 듣는 사람이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볼 것이며 (29:18)

 

 

이 구절을 AC.212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듣는다’는 것이 단순히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고, ‘본다’는 것이 단순히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해(understanding)를 통해 진리를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문자 그대로 읽으면, 이 구절은 귀머거리와 맹인이 기적적으로 회복되는 장면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영적인 상태에 관한 예언으로 봅니다. 왜냐하면, 본문은 단순히 육체의 장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책의 말을 듣는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은 말씀을 가리키며, 따라서 듣는다’는 것은 말씀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이해하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마찬가지로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본다’는 표현도 육체적 시력 회복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어둠과 캄캄함은 영적으로는 무지와 거짓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런 상태에 있던 사람이 이제 보게 된다는 것은, 이해가 열려 진리의 빛을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맹인’은 단순히 육체적 장애인이 아니라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던 사람을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점 때문에 이 구절을 AC.212에 인용합니다. 3:7 눈이 밝아져’라는 표현이 단순한 시력의 문제가 아니라 이해의 문제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사야 29장에서도 맹인의 눈이 본다’는 말은 이해가 밝아진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으므로, 3:7 역시 같은 원리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 구절은 AC.211 interior dictate’와도 잘 연결됩니다. 사람은 진리의 빛이 비칠 때, 비로소 자신의 상태와 주님의 뜻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전에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해를 밝히실 때, 이전에는 어둠으로 보이던 것들이 의미를 갖기 시작하고, 이전에는 들리지 않던 말씀의 소리가 마음에 들리기 시작합니다.

 

또한 이 구절은 AC.212 전체의 논증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역할도 합니다. 발람의 눈이 열린 사람’, 요나단의 눈이 밝아졌다’, 다윗의 눈을 밝히소서’, 에스겔의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한다’, 이사야의 눈을 감기게 하라’, 모세의 보는 눈을 주지 아니하셨다’, 그리고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힌다’는 말씀까지 모두 하나의 원리를 증언합니다. 곧 말씀에서 ’은 이해를 뜻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AC.212에서 사29:18을 인용하는 이유는, ‘맹인의 눈이 본다’는 표현이 이해의 계몽과 진리의 인식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창3:7 눈이 밝아져’라는 표현 역시 육체적 변화가 아니라 이해가 열려 자신의 상태를 인식하게 된 것을 뜻한다는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사야가 말하는 맹인의 눈이 본다’는 것은 단순한 기적의 약속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의 이해를 열어 진리의 빛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구원의 약속인 것입니다.

 

 

 

AC.212, 심화 10, ‘사42:7’

AC.212.심화 10. ‘사42:7’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사42:7) 이 구절을 AC.212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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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42:7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42:7)

 

 

이 구절을 AC.212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이 이해(understanding)를 의미하며, ‘눈을 밝힌다’는 것이 단순한 육체적 치유가 아니라 영적 이해를 열어 진리를 보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문자적으로 이 구절은 메시아의 사역을 예언하는 말씀입니다. 물론 주님께서는 지상에 계실 때, 실제 맹인들의 눈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 기적 자체보다 그 안에 담긴 더 깊은 의미에 주목합니다. 왜냐하면 본문이 단지 맹인의 시력 회복만을 말하는 것이라면, 이어지는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는 표현들과 자연스럽게 연결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눈먼 자’는 육체적으로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또한 감옥’과 흑암’은 거짓과 무지 안에 갇혀 있는 영적 상태를 뜻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 전체는 주님께서 인간을 무지와 거짓의 상태에서 건져 내어 진리의 빛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사역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AC.212에서는 이 구절이 매우 중요한 증거가 됩니다. 만일 ’이 단순한 육체의 기관만을 의미한다면,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힌다’는 말씀은 의학적 치유의 의미에 머물게 됩니다. 그러나 ’이 이해를 의미한다면, 이 말씀은 주님께서 인간의 내적 이해를 열어 주시고, 진리를 보게 하신다는 훨씬 깊은 의미를 갖게 됩니다.

 

특히 이 구절은 AC.211 interior dictate’와도 아름답게 연결됩니다. 3:7에서 사람들은 아직 남아 있는 퍼셉션의 흔적에 의해 자신들의 상태를 보게 되었습니다. 여기서는 그보다 더 적극적으로, 주님께서 친히 눈먼 자들의 눈을 열어 주십니다. 즉 이해를 밝히시고, 진리를 보게 하시며, 거짓의 감옥에서 이끌어 내시는 것입니다.

 

또한 이사야의 이 예언은 복음서에서 실제로 성취됩니다. 주님께서는 육체의 맹인을 고치셨을 뿐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는 사람들의 이해를 열어 말씀의 의미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기적은 언제나 영적 의미의 표상이기도 합니다. 육체의 눈을 뜨게 하신 것은 이해의 눈을 뜨게 하시는 더 큰 사역을 보여 주는 상응적 행동이었습니다.

 

결국 AC.212에서 사42:7을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 전체에서 ’이 이해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힌다’는 것은 진리를 보지 못하던 사람들의 이해를 열어 주시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창3:7 눈이 밝아져’라는 표현을 이해하는 데에도 직접 연결됩니다. 눈이 열린다는 것은 단순한 시력의 문제가 아니라 이해의 문제이며, 주님께서 주시는 빛 안에서 자신의 상태와 진리를 보게 되는 영적 각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AC.212, 심화 11, ‘사29:18’

AC.212.심화 11. ‘사29:18’ 그날에 못 듣는 사람이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볼 것이며 (사29:18) 이 구절을 AC.212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듣는다’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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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2, 심화 9, ‘신29:4’

AC.212.심화 9. ‘신29:4’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신29:4) Jehovah hath not given you a heart to know, and eyes to see, and ears to hear (Deut. 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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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29:4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29:4) Jehovah hath not given you a heart to know, and eyes to see, and ears to hear (Deut. 29:4),

 

 

이 구절을 AC.212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마음’, ‘’, ‘’가 각각 의지(will), 이해(understanding), 순종과 수용(obedience and reception)에 상응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통해 ’이 단순한 육체 기관이 아니라 이해를 의미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려고 합니다.

 

이 구절의 특징은 세 가지가 나란히 등장한다는 데 있습니다. ‘깨닫는 마음’, ‘보는 눈’, ‘듣는 귀’입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서로 비슷한 말을 반복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는 각각 다른 내적 기능을 가리킵니다. ‘마음(heart)은 사랑하고 원하는 의지를, ‘(eyes)은 진리를 분별하는 이해를, ‘(ears)는 들은 진리를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능력을 뜻합니다.

 

그래서 모세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보는 눈을 주지 아니하셨다’고 말할 때, 그것은 백성들이 시력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은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보았고, 광야의 기적들을 보았으며, 만나와 메추라기를 경험했습니다. 육체의 눈은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보는 눈이 없다’고 말하는 이유는, 그들이 그 사건들의 영적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점이 AC.212의 핵심과 연결됩니다. 3:7에서 눈이 밝아져’는 시력이 생겼다는 뜻이 아니라 이해가 열렸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신29:4에서 보는 눈을 주지 아니하셨다’는 것은 이해가 아직 열리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두 본문은 서로 반대 방향에서 같은 원리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구절은 스베덴보리가 자주 설명하는 의지와 이해’의 구조를 잘 보여 줍니다. 그는 여기서 특별히 마음은 의지, 눈은 이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AC.209에서 본 태고 사람들은 선으로부터 진리를 가졌고, 홍수 이후 사람들은 진리로부터 선을 가졌다’는 설명과도 연결됩니다. 의지와 이해는 인간의 두 중심 기능이며, 말씀은 이를 마음’과 ’이라는 상응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모세가 여기서 여호와께서 주지 아니하셨다’고 말한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이것도 문자적 표현입니다. 주님이 일부러 눈을 주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스스로 닫혀 있었기 때문에 그 빛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입니다. 말씀은 이런 상태를 종종 주님께서 하지 않으셨다’는 형식으로 표현합니다.

 

결국 AC.212에서 신29:4를 인용하는 이유는 매우 분명합니다. ‘보는 눈’이란 육체의 시력이 아니라 이해를 의미하며, ‘깨닫는 마음’은 의지를 의미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창3:7 눈이 열렸다’는 것도 이해가 열려 자신들의 상태를 인식하게 된 것을 뜻합니다. 29:4는 이러한 상응 관계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 주는 구절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이를 AC.212의 중요한 증거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AC.212, 심화 10, ‘사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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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2, 심화 8, ‘마치 주님께서 하시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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