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265.심화

 

1. ‘AC.158

 

스베덴보리가 AC.265에서 AC.158의 내용을 다시 인용한 이유는, 창3:16에 나오는 ‘남자(man, vir)의 의미를 올바르게 이해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같은 ‘남자’라는 표현이라도 교회의 상태와 문맥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먼저 AC.158에서 확립해 놓았던 기본 원칙을 다시 불러옵니다.

 

AC.158에서 스베덴보리는 ‘남자(vir)가 단순히 남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롭고 총명한 사람’, 곧 내적인 사람(the internal man), 그러니까 속 사람의 상태를 의미한다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래서 사41과 렘5을 인용, ‘남자를 찾지 못한다’는 말씀이 문자 그대로 남성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지혜와 총명을 가진 사람이 없다는 뜻임을 밝혔습니다. 이것은 ‘vir’의 기본적인 상응 의미를 제시한 것입니다.

 

그런데 AC.265에서는 같은 ‘남자(vir)를 스베덴보리는 rational로 해석합니다. 얼핏 보면 AC.158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독자가 혼란을 느끼지 않도록 먼저 AC.158을 상기시키며, 왜 지금은 다른 의미로 설명하는지를 이어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바로 이어지는 문장에 나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음으로써 지혜와 총명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rational만 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본래 ‘vir’가 나타내던 것은 지혜와 총명이었지만, 지금 창3은 이미 타락이 진행된 상태를 다루고 있으므로, 그 지혜와 총명을 대신하여 전면에 나타난 기능이 rational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상응 자체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상응이 교회의 상태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고 설명한다는 점입니다. 건강한 태고교회에서는 ‘남자(vir)가 지혜와 총명을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타락이 진행되면서 퍼셉션과 총명이 약화되자, 같은 ‘vir’가 이제는 rational을 나타내게 됩니다. 즉, 상징은 같지만, 그것이 표현하는 실제 상태가 달라진 것입니다.

 

또한 AC.158의 인용은 rational의 위치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을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AC.265에서 rational을 ‘총명을 모방하는 것(imitative of intelligence)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rational은 총명과 전혀 별개의 기능이 아니라, 원래 총명을 본받아 작용하도록 창조된 기능입니다. 그러므로 AC.158에서 말한 총명과 AC.265에서 말한 rational은 서로 단절된 개념이 아니라, 타락 전과 타락 후의 인간 상태를 보여주는 연속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이 인용은 창3 전체의 흐름도 잘 보여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창2과 초기 태고교회의 상태를 설명할 때에는 퍼셉션, 지혜, 총명을 중심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창3로 들어오면서는 점차 proprium, own, 감각, 그리고 rational이 전면에 등장합니다. AC.158을 다시 인용한 것은 바로 이러한 변화를 독자가 분명히 인식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AC.265에서 AC.158을 인용한 이유는, ‘남자(vir)의 본래 의미가 지혜롭고 총명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먼저 상기시킨 다음, 타락으로 인해 그 지혜와 총명이 손상되면서 이제는 rational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음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이 인용은 두 글의 의미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하며, 창3이 태고교회가 이미 끝난 시대가 아니라, 퍼셉션에서 rational 중심의 상태로 점차 이동해 가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해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265, 창3:16, ‘남편’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창3:16)AC.265‘남편’으로 옮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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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3:16)



AC.265

남편으로 옮긴 남자(man, vir)rational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 장 6절에서 분명히 나타납니다. 거기에는 여자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the woman gave to her man with her, and he did eat)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그의 동의를 의미합니다. 또한 이 사실은 AC.158에서 남자에 관하여 말한 내용으로부터도 분명한데, 거기에서는 남자가 지혜롭고 총명한 사람을 의미하였습니다. 그러나 여기 남자rational을 의미합니다. 이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써 지혜와 총명이 파괴된 결과, rational만 남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rational은 본래 총명(intelligence)을 모방하는 것이며, 말하자면 총명의 겉모습, 또는 닮은 형상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That by “man” [vir] is signified the rational appears from verse 6 of this chapter, in that the woman gave to her man with her, and he did eat, by which is meant his consent; and the same is also evident from what was said of the man in n. 158, where by him is meant one who is wise and intelligent. Here however “man” denotes the rational, because in consequence of the destruction of wisdom and intelligence by eating of the tree of knowledge, nothing else was left, for the rational is imitative of intelligence, being as it were its semblance.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창3:16의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라는 말씀에 나오는 ‘남자(vir)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다시 설명합니다. 그는 이미 AC.261에서 ‘남자’를 rational로 해석하였는데, 여기서는 왜 그렇게 해석하는지 그 근거를 제시합니다. 특히 같은 ‘남자’라는 상징도 교회의 상태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창3:6을 근거로 듭니다.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라는 것은 단순히 음식을 함께 먹었다는 기록이 아니라, rational이 감각과 proprium의 제안을 받아들여 그것에 동의하였음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사람의 가장 바깥 차원에서 시작된 유혹이 이제 rational의 승인까지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타락이 더욱 깊어진 결정적인 단계였습니다.

 

그는 이어 AC.158을 상기시킵니다. 거기에서 ‘남자(vir)는 지혜롭고 총명한 사람을 의미하였습니다. 이는 태고교회가 아직 순수한 상태에 있었을 때의 의미입니다. 당시에는 퍼셉션이 살아 있었고, 지혜와 총명이 주님으로부터 직접 흘러 들어왔기 때문에 ‘남자’는 그러한 내적 상태를 나타내는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창3에서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같은 상징이지만, 교회의 상태가 변했기 때문에 그 의미도 달라진 것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가장 중요한 내용은 ‘지혜와 총명이 파괴된 결과 rational만 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표현은 지혜와 총명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뜻이라기보다, 태고교회가 본래 누렸던 직접적인 퍼셉션과 그로부터 나오는 참된 지혜와 총명이 크게 손상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아직 홍수 이전이며, 여전히 태고교회의 시대이지만, 그 내적 상태는 이미 상당히 쇠퇴하였습니다. 그 결과 이전처럼 사랑 안에서 즉시 진리를 보는 능력은 약해지고, rational의 역할이 점차 두드러지기 시작합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rational을 ‘총명을 모방하는 것(imitative of intelligence)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rational은 본래 나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총명을 닮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총명(intelligence)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의 빛 안에서 작용하는 반면, rational은 그것을 받아 표현하는 기능입니다. 따라서 퍼셉션과 총명이 약해져도 rational은 여전히 활동하지만, 더 이상 참된 근원으로부터 충분한 빛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rational을 ‘총명의 겉모습 또는 닮은 형상(semblance)’이라고 말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하지만, 본질은 다릅니다. 마치 거울에 비친 모습이 실제 사람을 닮았지만, 생명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 것처럼, rational도 총명을 닮아 추론하고 판단할 수는 있지만,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과 결합되지 않으면 참된 지혜 자체는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타락 이후 인간 상태의 특징입니다.

 

이 설명은 앞의 AC.261과도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거기서 스베덴보리는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를 rational의 역할이 점차 중요해지는 방향으로 내적 질서가 변화하기 시작한 것으로 해석하였습니다. AC.265는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즉, 퍼셉션과 총명이 약해졌기 때문에 사람은 이제 이전보다 훨씬 rational에 의존하여 진리를 이해하고 판단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아직 고대교회의 상태는 아니지만, 태고교회가 점차 그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AC.265는 ‘남자(vir)rational을 의미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글입니다. 타락 이전에는 ‘남자’가 퍼셉션으로부터 오는 지혜와 총명을 나타냈지만, 타락이 진행되면서 지혜와 총명이 약화되자 rational이 전면에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rational은 총명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닮은 기능입니다. 따라서 rational이 참된 역할을 하려면 언제나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을 받아야 하며, proprium이나 감각을 따라 독립적으로 판단하려 할 때에는 오히려 사람을 진리에서 멀어지게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창3의 ‘남자’를 통해 밝히고자 하는 핵심 가르침입니다.

 

 

심화

 

1. ‘AC.158

 

 

AC.265, 심화 1, ‘AC.158’

AC.264.심화 1. ‘AC.158’ 스베덴보리가 AC.265에서 AC.158의 내용을 다시 인용한 이유는, 창3:16에 나오는 ‘남자’(man, vir)의 의미를 올바르게 이해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같은 ‘남자’라는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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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66, 창3:16, ‘창3:16에 담긴 결혼의 법의 의미’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창3:16)AC.266모든 법과 계명은 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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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64, 창3:16, ‘임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창3:16)AC.264말씀에서 ‘잉태’(co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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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64.심화

 

6. ‘8:39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 (8:39)

 

 

스베덴보리가 AC.264에서 요8:39을 인용한 이유는, 말씀에서 ‘아들’이 단순한 혈통상의 자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에서 태어난 선과 진리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주님 자신의 말씀으로 확증하기 위해서입니다. 지금까지 그는 ‘잉태’, ‘출산’, ‘아들’이라는 표현이 모두 영적인 의미를 가진다고 설명해 왔으며, 이제 그 해석이 구약뿐 아니라 주님의 가르침에도 그대로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 구절에서 유대인들은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라고 대답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어받았다는 사실을 구원의 근거로 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혈통만으로는 참된 아브라함의 자녀가 될 수 없으며, 아브라함의 신앙과 삶을 이어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점에 주목합니다. 말씀에서 ‘아들’은 단순히 육신으로 태어난 자녀가 아니라, 어떤 사람에게서 나오는 성품과 삶, 곧 그의 사랑과 신앙에서 태어난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아들’이란 단지 아브라함의 혈통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같은 신앙과 순종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것이 상응에 따른 ‘아들’의 영적 의미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AC.261에서 설명한 ‘아들은 진리들’이라는 가르침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영적으로는 진리가 사람 안에 태어날 때 비로소 그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믿음도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삶 속에서 실현된 진리가 됩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진리가 자신의 삶 속에 실제로 태어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이 구절은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영적 출생’의 원리를 잘 보여줍니다. 사람은 육체적으로는 부모에게서 태어나지만, 영적으로는 주님에게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그 새로운 출생은 혈통이나 민족, 혹은 전통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 안에 심어 주시는 진리와 선을 받아들이고 살아감으로써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혈통보다 삶을 기준으로 참된 자녀를 구별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서 ‘(seed)는 신앙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씨가 뿌려져 자라 열매를 맺듯이, 주님께서 심으시는 신앙은 사람 안에서 진리와 선을 생겨나게 합니다. 따라서 씨에서 태어난 ‘아들들’은 신앙으로부터 나온 진리와 선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혈연적 계보가 아니라 영적 계보이며, 말씀 전체가 가르치는 거듭남의 원리입니다.

 

이 때문에 주님께서는 자신을 ‘인자(Son of Man)라고 부르십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자는 단순히 인간이 되신 분이라는 의미를 넘어, 말씀 자체이시며, 교회의 모든 진리의 근원이신 주님을 나타내는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참된 신앙과 진리는 주님에게서 씨처럼 심어지고, 사람 안에서 자라나 ‘아들’로 태어나게 됩니다.

 

AC.264에서 요8:39을 인용한 이유는, ‘아들’이 혈통이 아니라 영적 출생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주님의 말씀으로 확증하기 위해서입니다. 참된 ‘아브라함의 아들’은 아브라함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같은 신앙과 순종 속에서 주님으로부터 진리와 선을 받아 삶으로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창3:16의 ‘아들들을 낳는다’라는 말씀 역시 육체적인 자녀의 출생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 안에 신앙의 진리와 선을 태어나게 하시는 거듭남의 과정을 가리키는 말씀인 것입니다.

 

 

 

AC.264, 창3:16, ‘임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창3:16)AC.264말씀에서 ‘잉태’(co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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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64, 심화 5, ‘마13:37-38’

AC.264.심화 5. ‘마13:37-38’ 37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38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마13:37, 38) He that soweth the good seed 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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