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5:9)

 

AC.503

 

태고교회의 퍼셉션 능력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퍼셉션하는 데에만 있지 않고, 선을 행함으로부터 생겨나는 행복과 기쁨에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선행의 행복과 기쁨이 없이는 퍼셉션 능력은 생명을 가지지 못하며, 이러한 행복과 기쁨에 의해 그것은 생명을 받습니다. 태고교회가 누렸던 사랑의 생명과 그로부터 나온 신앙의 생명은, 쓰임새(use)를 행하는 가운데 있는 생명, 곧 쓰임새의 선과 진리 안에 있는 생명이었습니다. 생명은 쓰임새로부터, 쓰임새에 의해, 그리고 쓰임새에 따라 주님으로부터 주어지며, 무익한 것에는 생명이 있을 수 없는데, 무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버려지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태고의 사람들은 주님을 닮은 사람들이었고, 그러므로 퍼셉션 능력에 있어서 주님의 형상이 되었습니다. 퍼셉션의 능력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아는 데에 있으며, 따라서 무엇이 신앙에 속하는지를 아는 데에 있습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아는 데에서 기쁨을 느끼지 않고, 선과 진리를 행하는 데에서, 곧 유용한 사람, 쓰임새의 사람이 되는 데에서 기쁨을 느낍니다. The perceptive facul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consisted not only in the perception of what is good and true, but also in the happiness and delight arising from well doing; without such happiness and delight in doing what is good the perceptive faculty has no life, but by virtue of such happiness and delight it receives life. The life of love, and of the derivative faith, such as the most ancient church enjoyed, is life while in the performance of use, that is, in the good and truth of use: from use, by use, and according to use, is life given by the Lord; there can be no life in what is useless, for whatever is useless is cast away. In this respect the most ancient people were likenesses of the Lord, and therefore in perceptive powers they became images of him. The perceptive power consists in knowing what is good and true, consequently what is of faith: he who is in love is not delighted in knowing, but in doing what is good and true, that is, in being useful.

 

 

해설

 

이 글은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왜 ‘살아 있는 퍼셉션’이었는지를 가장 분명하게 설명해 주는 핵심 대목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퍼셉션을 단순히 ‘옳고 그름을 아는 능력’으로 정의하지 않습니다. 퍼셉션은 선과 진리를 아는 것과 동시에, ‘그것을 행할 때 자연스럽게 솟아나는 행복과 기쁨을 포함하는 능력’입니다. 이 기쁨이 빠진 퍼셉션은, 겉모습은 남아 있을지라도 생명이 없는 상태가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전환이 하나 일어납니다. 퍼셉션의 생명은 ‘’ 자체에 있지 않고, ‘행함에서 느끼는 기쁨’에 있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선을 행하는 데서 오는 행복과 기쁨이 없으면, 퍼셉션 능력에는 생명이 없다고 말입니다. 이는 지식 중심 신앙에 대한 매우 강한 비판이기도 합니다.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아무리 정확히 알아도, 그것을 행하는 데서 기쁨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 앎은 생명을 잃은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생명을 ‘쓰임새를 행하는 가운데 있는 생명’이라고 정의합니다. 여기서 ‘쓰임새(use)는 단순한 기능 수행이나 사회적 역할을 뜻하지 않습니다. 쓰임새는 ‘사랑에서 비롯되어 타인을 향해 흘러가는 선과 진리의 실제적인 움직임’을 의미합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선을 행하는 것이 의무가 아닌, 자신의 생명이었기 때문에 행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 자체가 쓰임새였고, 그 쓰임새 안에서 생명을 느꼈습니다.

 

이 글은 매우 중요한 원리를 제시합니다. 생명은 쓰임새로부터, 쓰임새에 의해, 그리고 쓰임새에 따라 주님으로부터 주어진다는 원리입니다. 이는 생명이 어떤 정적인 소유물이 아니라, ‘관계와 작용 속에서 주어지는 것’임을 뜻합니다. 생명은 저장해 둘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흘러갈 때 유지됩니다. 그래서 무익한 것에는 생명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무익한 것은 흘러가지 않기 때문에, 결국 버려집니다. 마치 고인 물은 썩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 점에서 태고의 사람들은 주님의 닮음들, 즉 주님을 닮은 사람들이었다고 말합니다. 주님은 사랑 자체이시며, 그 사랑은 끊임없이 쓰임새로 흘러갑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도 사랑 안에서 살며, 그 사랑을 쓰임새로 드러냈기 때문에, 주님의 닮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닮음 때문에, 퍼셉션의 능력에 있어서 주님의 형상이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즉, 퍼셉션은 추상적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 방식에 참여한 결과’였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퍼셉션의 능력을 다시 정의합니다. 퍼셉션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아는 능력이며, 따라서 무엇이 신앙에 속하는지를 아는 능력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안다’는 말은 개념적으로 이해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살아 있는 현실로 분별하고 인식한다는 뜻입니다. 이 분별은 사랑 안에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마지막 문장이 매우 중요합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아는 데에서 기쁨을 느끼지 않고, 선과 진리를 행하는 데에서 기쁨을 느낀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지식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입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에게 앎은 행함을 위해 존재하며, 행함이 곧 기쁨입니다. 그 기쁨이 바로 퍼셉션의 생명입니다.

 

이 글은 오늘날 신앙의 상태를 매우 정직하게 비추는 거울이 됩니다. 우리는 종종 신앙을 ‘얼마나 많이 아는가’로 평가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전혀 다른 기준을 제시합니다. 진짜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선과 진리를 행하는 데서 기쁨을 느끼는가, 아니면 그저 아는 데서 만족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후자의 경우, 퍼셉션은 이미 생명을 잃은 상태일 수 있습니다.

 

또한 이 말씀은 봉사와 사역에 대한 이해도 바로잡아줍니다. 쓰임새는 억지로 감당해야 할 짐이 아니라, ‘사랑이 살아 있을 때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생명의 표현’입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쓰임새를 통해 지치지 않았고, 오히려 그 안에서 행복과 기쁨을 누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퍼셉션의 교회가 지녔던 독특한 생명력입니다.

 

결국 AC.503은 퍼셉션의 본질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게 합니다. 퍼셉션은 선과 진리를 아는 능력이되, 그 생명은 선과 진리를 행하는 데서 오는 기쁨에 있습니다. 이 기쁨이 살아 있을 때, 퍼셉션은 살아 있고, 교회는 살아 있습니다. 이 기쁨이 사라질 때, 퍼셉션은 점차 어두워지고, 마침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이 통찰은 태고교회의 이해를 넘어, 오늘 우리의 신앙과 사역을 깊이 점검하게 만드는 기준이 됩니다.

 

 

 

AC.504, 창5:10-11, ‘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오 세를 살

10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1그는 구백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Enosh lived after he begat Kenan eight hundred and fifteen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Enosh w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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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02, 창5:9, ‘사람’(아담), ‘셋’, ‘에노스’, 첫 세 교회와 이후 교회들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창5:9) AC.502 ‘사람’(man), ‘셋’(Seth), ‘에노스’(Enosh)라 하는 이 세 교회는 태고교회를 이루지만, 퍼셉션의 완전성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습니다. 첫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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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5:9)

 

AC.502

 

‘사람’(man), ‘셋’(Seth), ‘에노스’(Enosh)라 하는 이 세 교회는 태고교회를 이루지만, 퍼셉션의 완전성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습니다. 첫 번째 교회의 퍼셉션 능력은 뒤이어 나타난 교회들에서 점차 감소하여 더 일반적인 것이 되었는데, 이는 앞서 열매나 그 씨앗에 대해, 또 뇌에 대해 말한 바와 같습니다. 완전성은 분명하게 퍼셉션하는 능력, 곧 또렷함에 있으며, 퍼셉션이 덜 분명하고 더 일반적일수록 그 능력은 감소합니다. 그러면 이전에 더 분명하던 퍼셉션을 대신하여 더 어두운 퍼셉션이 뒤따르게 되고, 이로써 그것은 점차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These three churches, “man,” “Seth,” and “Enosh,” constitute the most ancient church, but still with a difference of perfection as to perceptions: the perceptive faculty of the first church gradually diminished in the succeeding churches, and became more general, as observed concerning fruit or its seed, and concerning the brain. Perfection consists in the faculty of perceiving distinctly, which faculty is diminished when the perception is less distinct and more general; an obscurer perception then succeeds in the place of that which was clearer, and thus it begins to vanish away.

 

 

해설

 

이 글은 태고교회 내부의 구조를 한 문장으로 종합하는 매우 핵심적인 진술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man), ‘(Seth), ‘에노스(Enosh)를 각각 독립된 교회로 부르면서도, 동시에 이 셋이 함께 태고교회를 이룬다고 말합니다. 이는 태고교회가 단일하고 균질한 실체가 아니라, ‘서로 다른 퍼셉션의 완전성을 지닌 여러 상태들의 연합체’였음을 분명히 합니다.

 

여기서 핵심 개념은 ‘완전성’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교회의 완전성을 외적 거룩함이나 도덕적 무결성으로 정의하지 않습니다. 완전성은 오직 하나, ‘얼마나 분명하게 퍼셉션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퍼셉션이 분명할수록 교회는 더 완전하며, 퍼셉션이 흐려질수록 완전성은 감소합니다. 이 기준은 단순하면서도 매우 급진적입니다.

 

첫 번째 교회, 곧 ‘사람(man, 아담)으로 불리는 교회는 가장 분명한 퍼셉션을 지녔습니다. 이 상태에서는 선과 진리가 주님으로부터 거의 즉각적으로 인식되었고, 혼의 작용과 삶의 행위 사이에 간극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퍼셉션은 뒤이은 교회들에서 점차 약화되었습니다. 셋의 교회에서도 여전히 퍼셉션은 있었지만, 그것은 이미 이전보다 덜 즉각적이었고, 에노스의 교회에서는 더욱 일반적인 형태로 바뀌었습니다. 이 세 교회 중에서 비교하자면 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변화를 ‘일반화’라는 말로 설명합니다. 퍼셉션이 일반화된다는 것은,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분별이 줄어들고, 보다 포괄적이고 흐릿한 인식으로 바뀐다는 뜻입니다. 이는 열매와 씨앗의 비유에서, 중심의 핵이 바깥층으로 갈수록 희석되는 과정과 같습니다. 본질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그 선명도는 점차 낮아집니다.

 

뇌의 비유 역시 이 점을 보강합니다. 혼의 작용이 가장 미묘하게 일어나는 피질 물질에서 멀어질수록, 작용은 점점 더 매개되고 둔해집니다. 이는 기능의 상실이 아니라, ‘작동 방식의 변화’입니다. 그러나 이 변화가 계속될 때, 어느 순간에는 작용 자체가 더 이상 분명히 인식되지 않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지점을 ‘퍼셉션의 소멸이 시작되는 지점’으로 봅니다.

 

중요한 점은, 퍼셉션이 갑자기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 글은 퍼셉션의 소멸이 ‘연속적이고 점진적인 과정’임을 분명히 합니다. 먼저 덜 분명해지고, 그다음에 더 일반적이 되며, 마침내 더 어두운 퍼셉션이 이전의 밝은 퍼셉션을 대신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퍼셉션은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이는 한순간의 붕괴가 아니라, 서서히 진행되는 소멸입니다.

 

※ 퍼셉션이 어두워진다는 건 어떤 상황, 당면한 문제에 관한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래서 그 대안으로 금식기도, 백일, 또는 천일기도, 안수기도, 그리고 기도원을 가거나 수도원을 가거나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정말 어두운 사람들이며, 그런 시대에 사는 것입니다. 우스갯소리이지만, 천사들은 주님의 뜻을 알려고 금식기도 같은 거 안 하거든요...

 

목회적으로 이 문단은 매우 날카로운 자기 성찰의 기준을 제공합니다. 신앙이 여전히 존재하고, 말과 형식이 유지되고 있을지라도, 퍼셉션이 점점 더 일반적이고 흐릿해지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완전성의 감소가 시작되었다는 신호입니다. 문제는 퍼셉션이 ‘있느냐 없느냐’의 이분법이 아니라, ‘얼마나 분명하냐’의 문제입니다.

 

또한 이 글은 태고교회의 쇠퇴를 비극으로만 보지 않게 합니다. 이 변화는 인간 조건 안에서 불가피한 것이었고, 주님께서는 각 단계에 맞는 교회 상태를 허락하셨습니다. 셋과 에노스의 교회는 첫 번째 교회보다 덜 완전했지만, 여전히 태고교회의 일부였고, 그 나름의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완전성의 차이는 가치의 차이가 아니라, ‘상태의 차이’입니다.

 

개인의 신앙 여정에서도 이 원리는 그대로 적용됩니다. 어떤 시기에는 신앙이 매우 분명하고 생생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것이 더 일반적이고 덜 선명해질 수 있습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자책이나 절망이 아니라, 퍼셉션의 흐름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퍼셉션이 흐려질수록, 우리는 더 의식적인 선택과 훈련을 통해 주님과의 연결을 붙들 필요가 있습니다.

 

결국 AC.502는 태고교회의 구조와 쇠퇴를 하나의 명확한 기준으로 설명합니다. 교회의 완전성은 퍼셉션의 분명함에 있으며, 퍼셉션이 일반화되고 어두워질수록 그 완전성은 감소합니다. 이 감소가 누적될 때, 퍼셉션은 마침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이 통찰은 창세기 5장을 넘어, 모든 시대의 교회와 모든 개인의 신앙을 평가하는 깊은 기준을 제공합니다.

 

 

 

AC.503, 창5:9, ‘태고교회 퍼셉션 능력의 비밀’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창5:9) AC.503 태고교회의 퍼셉션 능력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퍼셉션하는 데에만 있지 않고, 선을 행함으로부터 생겨나는 행복과 기쁨에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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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01, 창5:9, '이어지는 교회들 간의 관계'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창5:9) AC.501 시간의 경과 속에서 서로 이어서 나타난 교회들, 곧 하나가 다른 하나로부터 태어났다고 하는 교회들의 경우는, 비유하자면, 열매나 그 씨앗의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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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5:9)

 

AC.501

 

시간의 경과 속에서 서로 이어서 나타난 교회들, 곧 하나가 다른 하나로부터 태어났다고 하는 교회들의 경우는, 비유하자면, 열매나 그 씨앗의 경우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그 한가운데, 곧 가장 안쪽에는 마치 열매 속의 열매, 씨앗 속의 씨앗과 같은 것이 있어, 거기서부터 연속적인 부분들이 마치 질서 있게 살아 나옵니다. 이 가장 안쪽으로부터 둘레를 향해 멀어질수록, 그 안에는 열매나 씨앗의 본질이 점점 더 적게 남아 있다가, 마침내는 열매나 씨앗이 끝나는 껍질이나 외피만 남게 됩니다. 또한 뇌의 경우와도 같은데, 그 가장 안쪽 부분에는 피질 물질이라 불리는 미묘한 유기적 형태들이 있으며, 혼(soul)의 작용은 거기서부터 그리고 그것들을 통해 나옵니다. 그로부터 질서에 따라 더 순수한 막(coverings)이 차례로 뒤따르고, 그 다음에는 더 치밀한 것들이, 그리고 마침내는 수막이라 불리는 일반적인 막이 나타나며, 이것들은 다시 더 일반적인 막으로 끝나고, 마지막에는 가장 일반적인 것인 두개골로 끝납니다. As regards the churches that in course of time succeeded one another, and of which it is said that one was born from another, the case with them was the same as it is with fruits, or with their seeds. In the midst of these, that is, in their inmosts, there are as it were fruits of the fruits, or seeds of the seeds, from which live as it were in regular order the successive parts. For the more remote these are from the inmost toward the circumference, the less of the essence of the fruit or of the seed is there in them, until finally they are but the cuticles or coverings in which the fruits or seeds terminate. Or as in the case of the brain, in the inmost parts of which are subtle organic forms called the cortical substances, from which and by which the operations of the soul proceed; and from which in regular order the purer coverings follow in succession, then the denser ones, and finally the general coverings called meninges, which are terminated in coverings still more general, and at last in the most general of all, which is the skull.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 이후에 이어진 여러 교회들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두 가지 매우 강력한 비유를 사용합니다. 하나는 열매와 씨앗의 비유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뇌 구조에 대한 비유입니다. 이 두 비유는 서로 다른 영역을 다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동일한 영적 원리를 서로 다른 각도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핵심은, ‘모든 살아 있는 것은 중심에서부터 시작되어 바깥으로 질서 있게 전개된다’는 점입니다.

 

먼저 열매와 씨앗의 비유에서, 스베덴보리는 교회들이 서로에게서 태어난다는 말이 단절이나 복제의 의미가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열매 안에는 다시 씨앗이 있고, 그 씨앗 안에는 또 다른 생명의 원리가 들어 있습니다. 이 ‘씨앗 속의 씨앗’이 바로 가장 안쪽, 곧 본질이 자리한 자리입니다. 교회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가장 안쪽에는 주님으로부터 온 생명의 핵심이 있으며, 그것이 다음 교회들로 전달됩니다.

 

그러나 이 전달은 균등하지 않습니다. 가장 안쪽에서 멀어질수록, 곧 시간이 흐르고 단계가 내려갈수록, 본질은 점점 더 희석됩니다. 이는 타락이나 실패의 언어라기보다, ‘확장과 외화, 즉 겉을 향한, 밖을 향한 결과’입니다. 생명이 바깥으로 퍼질수록, 그것은 더 많은 형식과 외피를 필요로 하게 됩니다. 그래서 마침내는 본질 자체보다 그것을 감싸는 껍질이 더 두드러지게 되는 것이지요.

 

이 비유는 왜 후대의 교회들이 점점 덜 천적으로 보이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그것은 생명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생명이 더 바깥쪽에서 작용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태고교회의 중심적 퍼셉션은 씨앗의 가장 깊은 핵과 같았고, 이후의 교회들은 그 핵에서 나온 층층의 구조들에 해당합니다. 그러므로 바깥층에 있다고 해서 생명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생명의 작동 방식이 다를 뿐입니다.

 

두 번째 비유인 뇌의 구조는 이 점을 더욱 정밀하게 보여 줍니다. 뇌의 가장 안쪽에 있는 피질 물질은 혼의 작용이 직접적으로 이루어지는 자리입니다. 이 부분은 매우 미묘하고 섬세하여, 외부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안쪽에서부터 모든 작용이 시작되어, 점차 더 외적인 피복들, 그러니까 막으로 전달됩니다. 이 막들은 안쪽의 작용을 보호하고 질서 있게 전달하는 역할을 합니다.

 

교회 역시 이와 같습니다. 태고교회의 가장 안쪽 퍼셉션은 혼의 작용에 해당하고, 그로부터 이어진 교회들은 점차 더 많은 외적 구조와 형식을 갖추게 됩니다. 수막과 두개골이 뇌를 보호하듯이, 후대 교회의 교리와 제도, 예식들은 안쪽의 생명을 보호하는 기능을 수행합니다. 문제는 외피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외피만 남고 안쪽의 생명이 끊어질 때입니다.

 

이 비유를 통해 스베덴보리는 교회사의 쇠퇴를 단순한 퇴락으로 보지 않게 합니다. 그는 쇠퇴라는 말을 쓰기보다는, ‘중심에서 주변으로의 이동’이라는 관점으로 설명합니다. 중심에 가까울수록 퍼셉션은 즉각적이고 충만하지만, 바깥으로 갈수록 퍼셉션은 더 매개, 즉 무언가의 설명이 필요하고, 더 형식화됩니다. 그러나 이 모든 단계는 하나의 생명 흐름 안에 있습니다.

 

목회적으로 이 글은 매우 중요한 균형을 제공합니다. 우리는 종종 ‘처음 교회가 가장 좋았다’거나 ‘후대 교회는 본질을 잃었다’는 식으로 단정하려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렇게 단순화하지 않습니다. 그는 각 교회가 ‘그 위치에 맞는 역할과 구조를 지녔다’고 봅니다. 열매의 껍질이 불필요하지 않듯이, 외적 형식의 교회도 필요합니다.

 

동시에 이 비유는 경고를 담고 있습니다. 껍질만 남고 씨앗이 사라질 수 있고, 두개골은 남아 있지만 혼의 작용이 끊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진정한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질문은, 교회가 얼마나 중심에 가깝냐가 아니라, ‘그 중심과 여전히 연결되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개인의 신앙에도 이 원리는 그대로 적용됩니다. 한 사람 안에도 씨앗의 핵심에 해당하는 퍼셉션이 있고, 그 주위로 생각과 말과 행위라는 층들이 형성됩니다. 이 층들이 살아 있으려면, 반드시 안쪽의 생명과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AC.501은 교회와 개인 모두에게, 생명의 방향이 언제나 안쪽에서 바깥으로 흘러야 함을 분명히 가르칩니다.

 

결국 이 글은 태고교회 이후의 교회들을 하나의 유기체로 보게 합니다. 각 교회는 이전 교회의 열매이며, 동시에 다음 교회를 위한 씨앗입니다. 이 연속성의 중심에는 퍼셉션이 있으며, 그 퍼셉션이 유지되는 한, 교회의 생명은 형태를 달리하면서도 계속 이어집니다.

 

 

 

AC.502, 창5:9, ‘사람’(아담), ‘셋’, ‘에노스’, 첫 세 교회와 이후 교회들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창5:9) AC.502 ‘사람’(man), ‘셋’(Seth), ‘에노스’(Enosh)라 하는 이 세 교회는 태고교회를 이루지만, 퍼셉션의 완전성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습니다. 첫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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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00, 창5:9,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AC.500-503)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And Enosh lived ninety years, and begat Kenan. (창5:9) AC.500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에노스’(Enosh)는 ‘셋’(Seth)이라는 교회보다 더 덜 천적(still less celestial)인 세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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