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01.심화

 

2. ‘중세 교회와 오늘날

 

중세 교황들 및 그 계급 구조 아래서 겉과 속이 다르게 산 많은 성직자들, 그리고 오늘날 뉴스에 나오는 많은 목회자들도 어쩌면 저런 경우일 수 있겠네요...

 

 

네, 충분히 그런 가능성은 있습니다. 다만 AC.301의 기준에 따르면, 특정 집단 전체를 그렇게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기준은 직분이나 교단이 아니라 ‘한 사람의 내적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중세의 일부 교황들과 고위 성직자들 가운데는 말씀과 교회의 거룩한 것들을 충분히 알면서도 그것을 권력과 재물, 정치적 지배를 위해 이용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만일 그들이 진리를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그것을 자기애와 세속적 야망의 도구로 사용하였다면, 그것은 AC.301이 말하는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결합시키는 상태’에 가까운 사례가 될 수 있습니다.

 

그 아래에 있던 수많은 사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모두 같은 상태로 볼 수는 없습니다. 어떤 이는 단지 잘못된 교리 속에서 태어나 그것을 진실이라고 믿으며 살았을 수도 있고, 어떤 이는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려 했을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도 여러 곳에서, 잘못된 교리 안에 있어도 선한 삶을 산 사람들은 사후에 진리를 배우고 받아들인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직분만으로 AC.301의 대상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 뉴스에 등장하는 일부 목회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그들이 말씀을 깊이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그것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속이고, 자신의 권력과 명예와 재산을 위해 복음을 수단으로 삼는다면, AC.301의 설명과 상당히 가까운 사례가 될 수 있습니다. 특히 거룩한 말씀을 이용하여 악을 정당화하거나, 자신의 탐욕을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포장하는 일은 스베덴보리가 가장 심각하게 본 ‘profanation’의 방향과 일치합니다.

 

반대로 뉴스에 이름이 오르내린다고 해서 모두 AC.301의 상태라고 판단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 사람의 내면과 그가 알고 있는 진리의 정도, 그리고 얼마나 의식적으로 행했는지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최종적인 영적 상태에 대한 판단은 언제나 주님께 속한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AC.301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남을 판단하는 기준이라기보다 자신을 살피는 기준입니다. ‘나는 말씀을 배우는 만큼 그것에 따라 살려고 하는가?’, ‘혹시 내가 아는 진리를 내 자존심이나 명예, 유익을 위해 이용하고 있지는 않은가?’를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사실 스베덴보리 자신도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무지보다도 ‘알면서 거스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창3:22-24를 설명하면서, 주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더 깊은 진리를 아직 허락하지 않으시는 것조차 심판이 아니라 자비라고 해석한 것입니다. 진리를 더 많이 안다는 것은 그만큼 더 큰 책임도 함께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는 목회자, 신학자, 성직자뿐 아니라 스베덴보리를 연구하는 우리 모두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경고라고 볼 수 있습니다.

 

 

 

AC.301, 심화 3, ‘세속적 배신, 이중 첩자’

AC.301.심화 3. ‘세속적 배신, 이중 첩자’ profanation은 꼭 종교적, 그러니까 주님의 말씀하고만 관련되어야 성립하나요? 세상, 세속 진리, 그러니까 이중 첩자라든지, 이런저런 배신자들의 경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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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1, 심화 1, ‘profanation’

AC.301.심화 1. ‘profanation’ 마침내는 거룩한 것들과 속된 것들을 서로 뒤섞는 일조차 거리낌없이 행하게 됩니다. 사람이 이러한 상태에 이르면, 다른 삶에서는 더 이상 구원의 희망이 남지 않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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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1.심화

 

1. ‘profanation

 

마침내는 거룩한 것들과 속된 것들을 서로 뒤섞는 일조차 거리낌없이 행하게 됩니다. 사람이 이러한 상태에 이르면, 다른 삶에서는 더 이상 구원의 희망이 남지 않을 정도로 정죄됩니다. 이는 profanation으로 인해 한 번 뒤섞인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이 계속 뒤섞인 채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것에 대한 어떤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그것과 결합된 속된 것에 대한 생각도 동시에 떠오르게 됩니다. 그 결과 그는 정죄 받은 자들의 사회 외에는 어느 사회에도 있을 수 없게 됩니다. (AC.301)

 

 AC.301에 나오는 내용이 좀 알쏭달쏭합니다. 그러니까 지상 생활 중 어떤 상황, 어떤 경우가 이런 케이스가 될까요?

 

 

AC.301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profanation’은 단순히 죄를 짓는 것도 아니고, 교회를 떠나는 것도 아닙니다. ‘거룩한 것을 충분히 알고, 어느 정도 인정하고 경험한 뒤, 그것을 의도적으로 악과 결합시키는 상태’를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 일상에서 어떤 경우를 염두에 둔 것인지 이해하면 AC.301이 훨씬 선명해집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오랫동안 말씀을 배우고, 그것이 참이라는 것도 마음으로 인정하며, 주님의 임재까지 깊이 경험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자기 욕망을 버리지 못해 ‘말씀은 참이지만, 나는 내 욕심대로 살겠다’ 결심합니다. 그리고 그 후에도 말씀을 이용, 자신의 탐욕과 명예욕을 정당화하기 시작합니다. 이 경우에는 거룩한 진리를 단순히 버린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악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profanation’은 바로 이런 상태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목회자가 말씀을 깊이 알고 설교도 합니다. 그는 사랑과 겸손을 설교하지만, 실제로는 교회를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이용합니다. 그는 말씀을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그것을 자신의 야망을 위해 사용합니다. 그러면 그의 마음속에서는 거룩한 말씀과 자기애가 서로 결합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AC.301이 말하는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이 뒤섞이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는 늘 ‘용서하라’, ‘사랑하라’ 가르치면서, 정작 자신은 미움과 복수를 즐기고, 그것을 당연하게 여긴다면, 아이들에게 가르친 거룩한 진리와 자신의 악한 삶이 한 사람 안에서 함께 존재하게 됩니다. 물론 이것만으로 곧바로 AC.301이 말하는 ‘profanation’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 사람이 진리를 충분히 알면서도 의식적으로 계속 그렇게 살아간다면, 점점 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설명입니다.

 

반대로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낙심하여 한동안 교회를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사람, 또는 진리를 잘 이해하지 못해 의심하는 사람은 AC.301의 대상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이런 사람들에게는 회개의 가능성이 남아 있다고 봅니다. 그가 가장 경계하는 것은 ‘진리를 분명히 알면서도 그것을 악을 위해 이용하는 상태’입니다.

 

본문에서 특히 어려운 표현은 ‘거룩한 것을 생각할 때마다 속된 것도 함께 떠오른다’는 부분입니다. 이것은 이런 뜻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말씀을 이용하여 평생 남을 속이고 권력을 얻었다면, 사후에는 ‘말씀’이라는 생각 자체가 곧 자신의 탐욕과 연결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거룩한 진리만 따로 받아들이고 기뻐하는 것이 불가능해집니다. 거룩한 생각이 일어나는 순간, 그것과 결합된 악도 동시에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분리될 수 없다’ 말하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창3:22에서 주님께서 사람이 생명나무에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하신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심판이 아니라 보호로 이해합니다. 이미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사람이 더 깊은 신앙의 신비까지 알게 되면, 그것마저 자신의 악과 결합시켜 훨씬 더 심한 ‘profanation’에 빠질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더 깊은 진리를 아직 허락하지 않으심으로써, 오히려 그들을 더 큰 영적 파멸에서 보호하신다고 설명합니다.

 

결국 AC.301의 핵심은 ‘죄를 많이 지으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거룩한 진리를 충분히 알고도 그것을 자기 악과 의도적으로 결합시키는 것이 가장 위험한 영적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섭리는 사람의 상태에 맞추어 진리를 허락하시며, 때로는 더 깊은 진리를 아직 알지 못하게 하시는 것조차 자비의 한 형태라고 스베덴보리는 설명합니다. 이는 창3:24에서 그룹과 두루 도는 불칼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는 이유와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AC.301, 심화 2, ‘중세 교회와 오늘날’

AC.301.심화 2. ‘중세 교회와 오늘날’ 중세 교황들 및 그 계급 구조 아래서 겉과 속이 다르게 산 많은 성직자들, 그리고 오늘날 뉴스에 나오는 많은 목회자들도 어쩌면 저런 경우일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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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1, 창3:22, 두 번째 아르카나,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3:22) AC.301 또 하나의 아르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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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3:22)

 

AC.301

 

또 하나의 아르카나는, 만일 그들이 신앙의 신비들을 배웠더라면 영원히 멸망하였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now lest he put forth his hand, and take also of the tree of lives, and eat, and live to eternity) 하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그 사정은 이렇습니다. 사람들이 삶의 질서를 거꾸로 뒤집어, 자기 자신과 자기 proprium으로부터가 아니면 살려고도 하지 않고, 지혜로워지려고도 하지 않는 상태가 되면, 그들은 신앙에 관한 모든 것을 들을 때마다 그것이 과연 사실인지 아닌지를 자기 스스로 따져 보려 합니다. 그런데 그 판단을 자기 자신과 자기의 감각 및 기억 지식으로부터 내리기 때문에, 결국은 반드시 부인하기(denial)에 이르게 되고, 이어서 blasphemyprofanation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마침내는 거룩한 것들과 속된 것들을 서로 뒤섞는 일조차 거리낌없이 행하게 됩니다. 사람이 이러한 상태에 이르면, 다른 삶에서는 더 이상 구원의 희망이 남지 않을 정도로 정죄됩니다. 이는 profanation으로 인해 한 번 뒤섞인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이 계속 뒤섞인 채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것에 대한 어떤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그것과 결합된 속된 것에 대한 생각도 동시에 떠오르게 됩니다. 그 결과 그는 정죄 받은 자들의 사회 외에는 어느 사회에도 있을 수 없게 됩니다. 이처럼 결합되어 있는 생각은 다른 생명에서 매우 예민하게 지각됩니다. 중간 영계의 영들조차 그것을 아주 분명히 알아차리며, 천사적 영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그들은 한 사람의 단 하나의 생각만으로도 그 사람의 성품이 어떠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한 번 결합된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다시 분리하는 것은 지옥과도 같은 고통을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만일 사람이 그 고통이 어떠한지를 안다면, 그는 지옥 자체를 피하려는 것과 같은 마음으로 profanation을 피하려 할 것입니다. The other arcanum is that had they been instructed in the mysteries of faith they would have perished eternally, which is signified by the words, “now lest he put forth his hand, and take also of the tree of lives, and eat, and live to eternity.” The case is this: When men have become inverted orders of life, and are unwilling to live, or to become wise, except from themselves and from their own, they reason about everything they hear respecting faith, as to whether it is so, or not; and as they do this from themselves and from their own things of sense and of memory-knowledge, it must needs lead to denial, and consequently to blasphemy and profanation, so that at length they do not scruple to mix up profane things with holy. When a man becomes like this, he is so condemned in the other life that there remains for him no hope of salvation. For things mixed up by profanation remain so mixed up, so that whenever any idea of something holy presents itself, an idea of something profane that is conjoined with it is also there, the consequence of which is that the person cannot be in any society except one of the damned. Whatever is present in any idea of thought in consequence of being conjoined with it, is most exquisitely perceived in the other life, even by spirits in the world of spirits, and much more so by angelic spirits, so exquisitely indeed that from a single idea they know a person’s character. The separation of profane and holy ideas when thus conjoined cannot be effected except by means of such infernal torment that if a man were aware of it he would as carefully avoid profanation as he would avoid hell itself.

 

 

해설

 

AC.301에서 스베덴보리는 본 절인 창3:22의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는 말씀의 참뜻을 설명합니다. 겉으로만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이 영생 얻는 것을 막으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심판이 아니라 자비로운 보호를 의미한다 설명합니다.

 

본문의 첫 번째 핵심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신앙의 가장 깊은 신비를 알려 주지 않는 것이 오히려 주님의 자비라는 점입니다. 이미 삶의 질서가 뒤집혀 자기 자신과 자기 proprium만을 신뢰하는 사람은, 신앙의 진리를 받아들이더라도 그것을 믿음으로 순종하지 않고, 자신의 감각과 memory-knowledge로 판단하려 합니다. 따라서 더 많은 진리를 알게 될수록 더 깊은 부인과 반대에 빠질 위험이 커집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사람이 결국 ‘부인’, ‘blasphemy’, 그리고 ‘profanation’으로 나아간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논리의 흐름은 매우 분명합니다. 자기 지성만을 절대 기준으로 삼으면, 먼저 진리를 의심하게 되고, 계속해서 거절하게 되며, 마침내는 거룩한 것마저 속된 것과 뒤섞어 버리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왜 profanation이 다른 죄보다 특별히 심각한지를 설명합니다. 그 이유는 거룩한 것과 악한 것이 한 사람 안에서 동시에 결합되기 때문입니다. 이 상태에서는 거룩한 것을 생각할 때마다 그것과 결합된 속된 것도 함께 떠오르므로, 두 가지를 다시 분리하기가 극히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창3:24에서 그룹과 두루 도는 불칼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는 것도, 사람이 이런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한 주님의 보호로 연결됩니다.

 

본문의 마지막 부분은 사후 세계의 상태를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영계에서는 사람의 생각 하나에도 그 사람의 전체 상태가 담겨 있으며, 영들은 물론 천사들까지도 그 생각 하나만으로 사람의 성품을 분명히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설명을 덧붙이는 이유는, profanation이 단순히 외적 행동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가장 깊은 내면 상태를 영원히 뒤섞어 버리는 일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결국 AC.301의 중심 메시지는, 주님께서 어떤 사람들에게 신앙의 깊은 신비를 허락하지 않으시는 것은 그들을 버리시기 때문이 아니라, 더 큰 영적 파멸인 profanation으로부터 보호하시기 위한 자비로운 섭리라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창3:22의 말씀은 영생을 막으시는 선언이 아니라, 사람이 영원한 멸망에 빠지지 않도록 생명나무의 길을 잠시 막아 두시는 주님의 사랑과 보호를 나타내는 말씀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심화

 

1. ‘profanation

 

 

AC.301, 심화 1, ‘profanation’

AC.301.심화 1. ‘profanation’ 마침내는 거룩한 것들과 속된 것들을 서로 뒤섞는 일조차 거리낌없이 행하게 됩니다. 사람이 이러한 상태에 이르면, 다른 삶에서는 더 이상 구원의 희망이 남지 않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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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중세 교회와 오늘날

 

 

AC.301, 심화 2, ‘중세 교회와 오늘날’

AC.301.심화 2. ‘중세 교회와 오늘날’ 중세 교황들 및 그 계급 구조 아래서 겉과 속이 다르게 산 많은 성직자들, 그리고 오늘날 뉴스에 나오는 많은 목회자들도 어쩌면 저런 경우일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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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세속적 배신, 이중 첩자

 

 

AC.301, 심화 3, ‘세속적 배신, 이중 첩자’

AC.301.심화 3. ‘세속적 배신, 이중 첩자’ profanation은 꼭 종교적, 그러니까 주님의 말씀하고만 관련되어야 성립하나요? 세상, 세속 진리, 그러니까 이중 첩자라든지, 이런저런 배신자들의 경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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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태고교회 후손들

 

 

AC.301, 심화 4, ‘태고교회 후손들’

AC.301.심화 4. ‘태고교회 후손들’ 태고교회 후손들은 비록 타락은 했어도 종교적이었나 봅니다. 타락 후 바로 profanation 문제가 대두되는 걸 보면 말입니다. 네, 바로 그 점을 보신 것이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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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가룟 유다

 

 

AC.301, 심화 5, ‘가룟 유다’

AC.301.심화 5. ‘가룟 유다’ 가룟 유다의 죄는 profanation으로 보아야 하나요? 스베덴보리의 profanation 개념에 비추어 보면, 가룟 유다의 죄는 단순한 배신을 넘어 profanation의 성격을 매우 강하게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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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자살

 

 

AC.301, 심화 6, ‘자살’

AC.301.심화 6. ‘자살’ ‘자살’의 경우, 사후 ‘이 사람은 참 괜찮은 삶을 살았는데 순간 판단 실수로 자살했으니 정상 참작의 여지가 있다’ 하여 구원받는 경우가 있나요? 네, 있습니다.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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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1.심화 7. ‘결혼애’에 나오는 자살자들 위 ‘자살’에 대한 답변과 달리 스베덴보리의 ‘결혼애’에서는 자살을 매우 어둡게 기술하고 있는 걸로 읽었던 것 같아요... 좋은 질문입니다.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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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1.심화 8. ‘blasphemy와 profanation’ 이 둘은 서로 관련은 있지만 같은 개념은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는 둘을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blasphemy’는 보통 ‘신성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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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1.심화 9. ‘성령 모독’(마12:31, 32) 31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32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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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profanation 관련 대표 구절들

 

 

AC.301, 심화 10, ‘profanation 관련 대표 구절들’

AC.301.심화 10. ‘profanation 관련 대표 구절들’ 스베덴보리의 저작 전체를 하나의 일관된 신학 체계로 읽는 관점에서 보면, 성경에는 profanation을 직접 또는 표상적으로 다루는 본문들이 생각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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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3:22) AC.302 이것이 바로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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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0, 창3:22, 첫 번째 아르카나, ‘여호와 하나님’(Jehovah God)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3:22) AC.300 첫 번째 아르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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