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And to Seth, to him also there was born a son; and he called his name Enosh: then began they to call upon the name of Jehovah. (4:26)

 

AC.438

 

‘셋’(Seth)은 위에서 말했듯이 체어리티가 나오는 믿음을 상징합니다. 그의 ‘아들’(son)의 이름은 ‘에노스’(Enosh)인데, 체어리티를 믿음의 원리로 여긴 교회를 상징합니다.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beginning then to call on the name of Jehovah)는 체어리티에서 나온 그 교회의 예배를 상징합니다. By “Seth” is signified the faith through which comes charity, as was said above; by his “son,” whose name was “Enosh,” is signified a church which regarded charity as the principal of faith; by beginning then to “call on the name of Jehovah” is signified the worship of that church from charity.

 

해설

 

AC.438은 셋이 표상하는 것이 ‘체어리티를 얻게 하는 신앙’임을 다시 확인한 뒤, 그의 아들 에노스를 통해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셋은 체어리티로 이끄는 수단으로서의 신앙이라면, 에노스는 그 신앙을 통해 실제로 형성된 체어리티를 중심에 둔 교회를 표상합니다. 즉, 셋은 ‘’이고, 에노스는 ‘도착’에 가깝습니다. 이 차이는 미묘하지만 결정적입니다. 신앙이 아무리 바르다 해도 체어리티가 중심이 되지 않으면 교회의 질서는 완성되지 않습니다.

 

에노스가 셋의 ‘아들’로 소개되는 것은, 체어리티가 신앙과 단절되어 생겨난 것이 아니라, 신앙으로부터 합법적으로 태어난 결과임을 뜻합니다. 이는 체어리티가 신앙을 대체하거나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제 자리를 지킬 때 자연스럽게 맺히는 열매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이 구조는 가인의 오류, 즉 신앙이 체어리티를 밀어내는 상태와 정확히 반대입니다.

 

AC.438의 핵심 문구는 에노스로 표상된 교회가 체어리티를 신앙의 주된 것으로 여겼다는 진술입니다. 여기서 ‘주된 것(principal)이란 단순히 중요하다는 뜻이 아니라, 판단의 기준, 삶의 방향, 예배의 중심을 의미합니다. 이 교회에서 신앙은 여전히 필요하지만, 체어리티를 섬기는 위치에 있습니다. 진리는 사랑, 즉 체어리티를 설명하고 보호하는 역할을 하며, 체어리티 없는 진리는 더 이상 신앙으로 인정되지 않습니다.

 

에노스 시대에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는 표현은 단순히 기도의 시작이나 호칭의 변화를 뜻하지 않습니다. 내적 의미, 즉 속뜻으로 ‘이름’은 질과 본질을 뜻하고, ‘부른다’는 건 그 질에 따라 예배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이 교회의 예배가 체어리티에서 흘러나오는 예배가 되었음을 선언합니다. 즉, 의무나 전통이 아니라 체어리티라는 사랑에서 우러난 예배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하나님’이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용례에서 ‘여호와’는 사랑과 자비의 근원을 강조하는 이름입니다. 체어리티를 중심으로 한 교회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예배의 초점이 진리의 정확성보다 사랑의 실천과 자비에 놓였다는 뜻입니다. 이는 예배의 질적 전환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이 변화는 예배의 외형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예배의 생명을 바꾸는 것입니다. 체어리티가 중심이 되면, 말씀은 논쟁의 재료가 아니라 삶의 등불이 되고, 교리는 판단의 무기가 아니라 섬김의 지침이 됩니다. 에노스로 표상된 교회는 바로 이 지점에 도달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때를 예배의 ‘시작’으로 기록합니다. 이전에도 예배는 있었지만, 이제야 비로소 참된 의미의 예배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구조는 개인의 거듭남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처음에는 신앙을 배워야 하고(셋), 그 신앙을 통해 삶이 바뀌며, 마침내 체어리티가 삶의 기준이 될 때(에노스), 예배는 의무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호흡이 됩니다. 그때 사람은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 즉, 사랑의 질에 따라 살고 예배합니다.

 

AC.438은 창세기 4장의 마지막을 이렇게 봉인합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낳기 위해 주어졌고, 체어리티가 중심이 될 때 비로소 예배는 살아난다.

 

셋은 이 길을 열었고, 에노스는 그 길의 목적을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예배’는, 체어리티가 신앙의 주된 것이 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는 삶의 고백입니다.

 

 

 

AC.439, 창4:26, 에노스는 ‘참된 영적 인간’(human spiritual man)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4:26) AC.439 ‘셋’(Seth)이 체어리티가 오는 신앙을 상징한다는 것은 앞 구절에서 드러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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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7, 창4:25, ‘셋’(Seth)은 체어리티가 말미암는 새로운 신앙을 의미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4:25) AC.437 여기서 ‘셋’(Seth)이 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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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4:25)

 

AC.437

 

여기서 ‘셋’(Seth)이 체어리티가 말미암는 새로운 신앙을 의미한다는 것은 그의 이름이 다음과 같은 이유, 곧 하나님께서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 다른 씨를 주셨다’(appointed another seed instead of Abel, whom Cain slew)는 것 때문에 그에게 주어졌다는 사실로 설명됩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씨를 주셨다’(appointed another seed)는 것은 주님께서 다른 신앙을 주셨음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씨’(another seed)는 체어리티가 말미암는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씨’(seed)가 신앙을 의미한다는 것은 위 AC.255번 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That “Seth” here signifies a new faith, through which comes charity, is explained by his name, which it is said was given him because God “appointed another seed instead of Abel, whom Cain slew.” That God “appointed another seed” means that the Lord gave another faith; for “another seed” is the faith through which comes charity. That “seed” signifies faith may be seen above (n. 255).

 

해설

 

AC.437은 ‘’이라는 이름 자체가 이미 그의 영적 의미를 설명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 다른 씨를 주셨다’에 대한 설명 속에서, 셋은 단순히 잃어버린 아들을 보충하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께서 새로운 질서를 공식적으로 세우셨음을 알리는 표지입니다. 여기서 ‘대신’이라는 말은 동일한 것을 반복한다는 뜻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회복하신다는 뜻입니다. 곧, 주님은 아벨이라는 체어리티를 같은 자리와 같은 방식으로 되돌려놓지 않으시고, 신앙을 통해 다시 심기게 하시는 길을 택하셨습니다.

 

우리 같으면 하나님은 전능하시므로 죽은 아벨을 다시 살리는 것과 같은 어떤 신기한 방식으로 쉽게 이 문제를 해결하실 것 같은데 말입니다.

 

본문은 다른 ‘(seed)가 곧 신앙임을 분명히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선 AC.255번 글을 인용하며, 말씀에서 ‘’는 상응적으로 신앙을 뜻한다고 밝힙니다. 씨는 땅에 심겨 자라 열매를 맺는 시작점이듯, 신앙은 체어리티가 자라나도록 하는 영적 시작점입니다. 중요한 점은, 씨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씨는 열매를 위해 존재합니다. 따라서 ‘씨로서의 신앙’은 체어리티를 낳기 위해 주어진 신앙입니다.

 

셋이 표상하는 신앙은 이전의 신앙, 곧 ‘가인(Cain)으로 표상된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과 질적으로 다릅니다. 가인의 신앙은 스스로 목적이 되었고, 그 결과 체어리티를 제거했습니다. 반면 셋의 신앙은 처음부터 체어리티를 목적으로 갖는 신앙입니다. 그래서 AC.437은 셋을 ‘체어리티를 얻게 하는 신앙’으로 규정합니다. 이 표현은 신앙의 자리, 즉 신앙이 있어야 할 올바른 자리를 정확히 규정하는 결정적 문장입니다.

 

하나님이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 다른 씨를 주셨다’의 ‘주셨다(appointed)라는 표현에는 주님의 주권적 섭리가 담겨 있습니다. 이는 인간이 새 신앙을 발명하거나 선택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교회의 붕괴 속에서도 신앙의 올바른 형태를 지정하고 보존하셨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셋의 신앙은 인간의 사상적 선택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온 질서입니다.

 

아벨은 체어리티 그 자체를 표상했고, 가인에 의해 제거되었습니다. 셋은 아벨의 단순한 복원판이 아닙니다. 아벨은 직접적 사랑의 상태였고, 셋은 사랑으로 이끄는 신앙의 상태입니다. 이 차이는 결정적입니다. 태고교회처럼 사랑이 곧바로 지각되던 시대가 지나간 이후, 주님은 신앙을 매개로 사랑이 형성되는 질서를 허락하셨습니다. 셋은 이 새로운 시대의 표상입니다.

 

신앙을 ‘’로 주신 이유에는 인간의 자유가 존중됩니다. 씨는 강제로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시간이 필요하고, 토양과 돌봄이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셋으로 표상된 신앙은 사람 안에 체어리티가 자발적으로 형성될 수 있는 공간을 만듭니다. 이는 강요된 선이 아니라, 자유 안에서 자라나는 선입니다. 주님은 이 질서를 통해 체어리티를 보다 견고하게 회복하십니다.

 

AC.437의 논지는 교회 역사에만 해당되지 않습니다. 개인의 거듭남에서도 동일합니다. 먼저 왜곡된 신앙(가인)이 드러나고, 사랑이 상실된 아픔(아벨의 죽음)을 겪은 후, 주님은 새 신앙(셋)을 주셔서 다시 사랑이 자라게 하십니다. 이때 신앙은 중심이 아니라 출발점입니다.

 

AC.437은 한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체어리티를 직접 강제로 주시지 않고, 그것을 낳을 수 있는 ‘신앙의 씨’를 다시 주신다.

 

셋은 이 씨의 이름이며, 교회와 인간에게 주어진 희망의 질서입니다. 신앙은 목적이 아니라 길이고, 체어리티는 그 길의 끝에 맺히는 열매입니다.

 

 

 

AC.438, 창4: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AC.438-442)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And to Seth, to him also there was born a son; and he called his name Enosh: then began they to call upon the name of J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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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6, 창4:25, '창4 전체 흐름과 결론'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4:25) AC.436 그녀가 셋이라 이름 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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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4:25)

 

AC.436

 

그녀가 셋이라 이름 지은 ‘아들’(son)이 체어리티를 얻을 수 있는 새로운 신앙을 의미한다는 것은 앞서 언급한 내용과 가인에 대해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mark was set upon him, lest anyone should slay him)는 이야기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이 주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랑과 분리된 신앙을 ‘가인’(Cain)으로, 체어리티는 ‘아벨’(Abel)로 상징하였습니다. 그리고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것을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으로, 그리고 주님께서 체어리티를 심어주시기 위해 신앙을 보존하셨다는 것을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어 아무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신 것으로 상징하고 있습니다. That by her “son,” whom she named Seth, is signified a new faith, by which charity may be attained, is evident from what has been previously stated, as well as from its being related of Cain that a “mark was set upon him, lest anyone should slay him.” For the subject as it stands in a series is as follows: Faith separated from love was signified by “Cain”; charity, by “Abel”; and that faith in its separated state extinguished charity was signified by Cain slaying Abel. The preservation of faith in order that charity might be thereby implanted by the Lord was signified by Jehovah’s setting a mark on Cain lest anyone should slay him.

 

그 후에 주님께서 신앙을 통해 사랑의 거룩함과 그로부터 비롯된 선을 주신 것을 아다가 낳은 야발을 통해 상징하였습니다. 계속해서 신앙의 영적인 것이 주어진 것을 그의 형제 유발을 통해, 그리고 이들로부터 자연적인 선과 진리가 나왔는데, 이것을 실라가 낳은 두발가인을 통해 상징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4장의 이 두 결론 구절에서 우리는 이 모든 사항의 결론, 즉 요약을 볼 수 있는데요, 즉, ‘남자와 그의 아내’(man and his wife)는 이전에 아다와 실라라고 했던 새로운 교회를, ‘셋’(Seth)은 체어리티가 심기는 신앙을, 그리고 이어지는 구절에서 ‘에노스’(Enosh)는 신앙을 통해 심기는 체어리티를 상징합니다. That afterwards the holy of love and the good thence derived were given by the Lord through faith was signified by Jabal whom Adah bare; and that the spiritual of faith was given, was signified by his brother Jubal; and that from these there came natural good and truth was signified by Tubal-Cain whom Zillah bare. In these two concluding verses of Genesis 4 we have the conclusion, and thus the summary, of all these matters, to this effect, that by the “man and his wife” is signified that new church which before was called Adah and Zillah, and that by “Seth” is signified the faith through which charity is implanted; and in the verse which now follows, by “Enosh” is signified the charity that is implanted through faith.

 

해설

 

AC.436은 창세기 4장의 마지막을 결론(conclusio)으로 규정합니다. 이는 단순한 마무리가 아니라, 지금까지 전개된 모든 상응의 사슬을 한 문장으로 압축해 보여 주는 요약입니다. 다시 말해, 가인으로 시작된 분열의 문제, 표를 통한 보존, 아다, 씰라의 회복적 징후, 그 자녀들, 곧 야발, 유발, 두발가인으로 나타난 단계적 회복이 하나의 목적인 체어리티의 회복으로 수렴함을 밝힙니다.

 

먼저 가인과 아벨의 분리와 상실의 핵심 문제입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그러니까 신앙이 자기 목적화된 상태인데요, 이런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표상합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서술은, 신앙이 사랑과 분리될 때 교회 안에서 체어리티가 실제로 소멸되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는 단순한 도덕적 사건이 아니라, 교회의 중심 질서가 붕괴되는 영적 사건입니다.

 

가인의 표’가 의미하는 바는 제거가 아니라 보존의 섭리입니다. 이는 다음과 같습니다. 계속해서 그럼에도 주님은 가인을 제거하지 않으십니다. ‘가인에게 표를 주심’은 분리된 신앙 자체를 보존하신다는 뜻입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신앙은 사랑의 대체물이 아니라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즉, 신앙은 체어리티를 다시 심기 위한 수단으로 남겨져야 하기 때문인데요, 여기서 이미 본문의 목적이 제시됩니다. 보존된 신앙을 통해 체어리티를 다시 심는 것, 바로 이것이 주님의 일관된 섭리입니다.

 

아다, 씰라와 그 자녀들인데요, 회복의 단계화를 말합니다. 이후의 전개는 회복의 질서를 보여 줍니다. 아다에게서 야발, 즉 천적이지요, 사랑의 거룩함과 선이, 그리고 유발, 영적이지요, 신앙의 진리와 선이, 계속해서 씰라에게서 두발가인, 이번에는 자연적인데요, 자연적 선과 진리가 태어났다는 서술은, 체어리티 회복이 천적→영적→자연적으로 단계화되어 진행됨을 뜻합니다. 이는 감정의 폭발이나 단번의 변화가 아니라, 질서 있는 재건입니다.

 

셋의 의미는 ‘체어리티를 얻게 하는 신앙’입니다. 이 모든 흐름의 요지가 셋입니다. 셋은 ‘새 신앙’을 표상하지만, 그 신앙은 가인의 신앙과 다릅니다. 셋은 체어리티를 얻게 하는 신앙, 즉, 사랑을 목적으로 하고 사랑으로 귀결되는 신앙입니다. 여기서 신앙의 자리가 바로잡힙니다. 신앙은 중심이 아니라 길이며, 그 길의 끝에는 체어리티가 있습니다. 즉 체어리티를 위해 신앙을 하는 것입니다.

 

에노스인데요, 이는 목적, 곧 체어리티의 실현을 말합니다. AC.436은 다음 절을 미리 밝혀 줍니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4:26)

 

셋 다음에 에노스가 나오는데, 에노스는 신앙을 통해 실제로 심어진 체어리티를 표상합니다. 곧, 셋이라는 수단을 통해 에노스라는 목적을 달성하는 구조이지요. 이것이 창4의 최종 결론입니다. 신앙은 보존되었고, 그 신앙을 통해 체어리티가 다시 실재화됩니다.

 

이러한 흐름은 교회 역사뿐 아니라 개인 거듭남의 질서를 그대로 비춥니다. 주님은 신앙을 폐기하지 않으시고 정렬하셔서, 마침내 체어리티를 다시 심으십니다.

 

AC.436은 단언합니다. 체어리티는 결코 최종적으로 소멸되지 않는다. 신앙이 왜곡되면 사랑은 가려지지만, 주님은 그 신앙을 보존하여 다시 사랑을 심으십니다. 이것이 창세기 4장의 결론이며, 모든 교회와 모든 신자의 희망입니다.

 

 

 

AC.437, 창4:25, ‘셋’(Seth)은 체어리티가 말미암는 새로운 신앙을 의미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4:25) AC.437 여기서 ‘셋’(Seth)이 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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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5, 창4:25, '사람(아담)과 그의 아내'라는 표현의 반복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4:25) AC.435 여기서 ‘남자’(man)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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