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6.심화

 

2.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AC.36 참조 구절인 마22: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에 나오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를 좀 와닿게 설명해 주세요.

 

이 말씀은 너무 익숙해서 오히려 감각이 무뎌지기 쉬운 구절입니다만, 사실은 인간 전체를 어떻게 주님께 향하게 하는가를 한 문장으로 압축해 놓은 매우 깊은 말씀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마음, 목숨, ’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인간의 서로 다른 층위와 기능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풀어 설명하면 단순히 ‘열심히 사랑하라’가 아니라, ‘존재 전체로 사랑하라’는 뜻이 됩니다.

 

먼저 ‘마음을 다하여’입니다. 여기서 ‘마음’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스베덴보리식으로 말하면 ‘의지와 사랑의 중심’, 곧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 좋아하는 것, 기뻐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주님을 단지 존경하거나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장 좋아하고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자리에 주님을 두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돈이나 인정이나 자기 성공을 가장 사랑하면, 그는 결국 그것을 중심으로 살게 됩니다. 반대로 주님을 마음의 중심에 두면, 선택과 방향이 자연스럽게 달라집니다. 그래서 ‘마음을 다하여’라는 말은 ‘사랑의 중심을 완전히 주님께 옮기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목숨을 다하여’입니다. 이 표현은 조금 더 실제적입니다. ‘목숨’은 단순히 생물학적 생명만이 아니라, ‘내 삶 전체, 내가 살아가는 방식과 에너지’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목숨을 다하여 사랑한다’는 것은, 주님 사랑이 단지 마음속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로 드러나는 것’을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시간이 어디에 쓰이는지, 힘을 어디에 쓰는지, 무엇을 위해 애쓰는지를 보면 그 사람의 ‘목숨’이 어디에 있는지가 드러납니다. 그래서 이 표현은 ‘내 삶의 실제를 주님께 드리는 것’, 곧 ‘삶의 방향과 행동까지 포함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마지막으로 ‘뜻을 다하여’입니다. 이것은 이해와 생각의 영역입니다. 스베덴보리식으로 말하면 ‘이해하는 능력(understanding), 곧 무엇이 참인지 분별하고, 그것을 생각하고, 판단하는 기능입니다. 그래서 ‘뜻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감정적으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과 판단 속에서도 주님을 중심에 두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문제를 판단할 때, ‘이게 내게 유리한가?’가 아니라 ‘이것이 주님의 진리에 맞는가?’를 기준으로 생각하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생각까지도 주님께 순종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를 합치면 매우 중요한 그림이 나옵니다. ‘마음’은 사랑의 중심, ‘목숨’은 삶의 실천, ‘’은 생각과 이해입니다. 이 세 가지는 각각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전체를 이루는 세 축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단순히 ‘나를 사랑하라’ 하지 않으시고, ‘이 세 영역 모두를 다하여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부분적으로가 아니라, ‘전인격적으로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조금 더 와닿게 설명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진짜로 무언가를 사랑하면, 세 가지가 동시에 나타납니다. 마음으로 좋아하고, 시간을 들여 그것을 위해 살고, 생각 속에서도 그것을 중심으로 판단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자녀를 사랑하면, 마음으로 사랑할 뿐 아니라 시간을 쓰고, 삶의 방향을 바꾸고, 생각 속에서도 늘 자녀를 기준으로 판단합니다. 주님 사랑도 이와 같습니다. 단지 예배 시간에만 주님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 생각 전체가 주님을 향하게 되는 상태’가 바로 이 말씀의 의미입니다.

 

스베덴보리적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면, 이 말씀은 곧 ‘의지(마음), 행위(목숨), 이해(뜻)’가 하나로 결합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남의 핵심입니다. 마음으로만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행위만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만 있는 것도 아니라, 이 세 가지가 하나로 연결될 때, 비로소 참된 신앙과 사랑이 완성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감정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가장 사랑하는가, 어떻게 살아가는가, 무엇을 기준으로 생각하는가, 이 세 가지가 모두 주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AC.36, 심화 3, ‘막12:29-31’

AC.36.심화 3. ‘막12:29-31’ 29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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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 심화 1,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

AC.36.심화 1.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과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이 무엇인가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이웃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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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심화

 

1.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이 무엇인가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이웃 사랑에 대해 어디를 보니 charity를 쓰던데, 그러면 charity toward the neighbor라 해도 되는지요? 그리고 왜 주님 사랑은 전치사 to를 쓴 반면, 이웃 사랑 toward를 쓰나요?

 

아주 근본적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AC.36에서 말하는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스베덴보리 신학 전체의 중심축이기 때문에, 이것이 또렷해지면 이후 내용들이 훨씬 선명해집니다. 먼저 개념부터 단순하게 잡고, 그 다음에 영어 표현까지 연결해 보겠습니다.

 

먼저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주님을 좋아한다’거나 ‘주님께 감정적으로 끌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주님 사랑’은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그분의 뜻을 가장 높게 여기며, 그 뜻에 따라 살고자 하는 삶 전체의 방향’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 사랑은 감정만이 아니라 ‘경외, 순종, 신뢰, 기쁨’이 모두 포함된 상태입니다. 쉽게 말하면, ‘내 삶의 중심을 내가 아니라 주님께 두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선택을 할 때, ‘이게 내가 원하는 것인가?’보다 ‘이것이 주님의 뜻에 맞는가?’를 먼저 묻는 상태, 그것이 바로 주님 사랑입니다.

 

다음으로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입니다. 이것도 단순히 사람을 좋아하거나 친절하게 대하는 정도를 넘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웃’은 단순히 옆집 사람이나 친한 사람이 아니라, ‘선과 진리를 필요로 하는 모든 대상’입니다. 그래서 이웃 사랑은 ‘사람에게 선을 행하고, 그 사람의 영적, 도덕적 유익을 위해 행동하는 사랑’입니다. 여기에는 도움, 정직, 공정함, 용서, 배려 같은 모든 실제 삶의 행위가 포함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웃 사랑을 매우 실제적인 것으로 봅니다.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삶으로 드러나는 사랑’입니다.

 

이 두 사랑의 관계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따로 떼어 놓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설명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게 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 속에서 주님 사랑이 실제로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웃 사랑은 주님 사랑의 ‘열매’입니다. 말로만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실제로는 주님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입장입니다.

 

이제 ‘charity’ 이야기를 보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웃 사랑’을 말할 때, 매우 자주 ‘charity’라는 단어를 씁니다. 그래서 ‘charity toward the neighbor’라고 해도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오히려 매우 전통적인 표현입니다. 다만 영어에서 ‘charity’는 단순한 ‘구제’나 ‘자선’보다 훨씬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charity는 ‘이웃을 향한 사랑 전체’, 곧 선을 행하려는 마음과 그 행위를 모두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그래서 우리말로 하나의 단어로 옮기기가 어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제 전치사 문제를 보겠습니다. 왜 ‘love to the Lord’이고, ‘love toward the neighbor’일까요? 이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to’는 보통 ‘직접적인 향함과 결합’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love to the Lord’는 주님을 향한 직접적인 사랑, 곧 ‘근원과 중심을 향하는 사랑’을 표현합니다. 반면 ‘toward’는 약간 방향성과 확장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love toward the neighbor’는 주님에게서 나온 사랑이 ‘밖으로 흘러가 이웃에게 향하는 모습’을 표현합니다. 아주 엄격하게 구분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뉘앙스 차이는 분명히 있습니다.

 

정리하면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주님 사랑’은 삶의 중심을 주님께 두고, 그 뜻에 따라 살고자 하는 사랑이고, ‘이웃 사랑’은 그 사랑이 실제 삶 속에서 사람을 향해 선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charity’는 바로 이 이웃 사랑을 가리키는 핵심 용어입니다. 전치사 ‘to’와 ‘toward’의 차이는, 하나는 근원과의 직접적 관계를, 다른 하나는 그 사랑이 밖으로 향하는 방향을 은근히 드러낸다고 이해하시면 좋습니다.

 

주님 사랑은 뿌리이고, 이웃 사랑은 열매입니다. 뿌리가 건강하면 열매가 나오고, 열매가 없으면 뿌리를 다시 점검해야 합니다.’

 

 

 

AC.36, 심화 2,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AC.36.심화 2.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AC.36 참조 구절인 마22: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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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 창1:14-17, '신앙은 순종이다 : 사랑 없는 믿음은 신앙이 아니다'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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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심화

 

1. 우리를 자비로 붙들어 주시는 주님

 

 AC.35본문, 만일 주님께서 그 사람을 자비로 붙들어 주지 않으신다면(if it were not that the Lord has mercy on him.)말인데요, 우리를 지으신 신()이 이런 자비의 신이시라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목사님 말씀 그대로입니다. 이 한 문장은 짧지만, 사실 스베덴보리 신학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을 건드립니다. ‘만일 주님께서 자비로 붙들어 주지 않으신다면’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인간의 상태와 주님의 관계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진술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은 스스로 서 있는 존재가 아니라, 매 순간 ‘주님의 생명과 자비의 흐름 속에서만 유지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자비는 어떤 특별한 상황에서만 베풀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항상 이미 주어지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 점을 조금 더 풀어 보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보통 ‘자비’를 어떤 잘못을 했을 때 용서해 주시는 것 정도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mercy’는 훨씬 더 깊고 근본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그것은 단지 죄를 용서해 주시는 감정적 행위가 아니라, ‘타락하고 자기중심으로 기울어진 인간을 계속해서 선과 진리 쪽으로 붙들어 주시는 주님의 지속적인 작용’입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 기울어지기 쉽기 때문에, 만약 아무런 제어도 없다면 그 흐름은 점점 더 깊어집니다. 그래서 그는 여러 곳에서 ‘주님이 매 순간 붙들어 주시지 않으면 사람은 즉시 더 깊은 악으로 떨어진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붙들어 주신다’는 표현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밖에서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생각과 의지 안에서 은밀하게 방향을 돌려 주시는 작용’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어떤 악한 선택을 하려는 순간, 마음 한편에서 그것을 멈추게 하는 어떤 생각이나 느낌이 올라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혹은 어떤 상황에서 뜻하지 않게 일이 틀어져서 더 큰 잘못을 피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것들까지도 넓은 의미에서 ‘주님의 자비의 작용’으로 설명합니다. 사람은 그것을 우연이나 자기 판단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더 깊은 차원의 인도가 작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자비는 단지 ‘용서’만이 아니라, ‘보존과 인도와 회복 전체를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사람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도록 붙들어 주시는 것, 조금이라도 선한 방향으로 기울어지게 하시는 것, 진리를 들을 기회를 주시는 것, 심지어 고통이나 시험을 통해서라도 방향을 돌려 주시는 것 등, 이 모든 것(all of these)이 다 자비의 범주 안에 들어갑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자비는 단순히 따뜻한 감정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기 위한 끊임없는 신적 작용’입니다.

 

목사님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신 그 감탄이 바로 이 지점에서 나옵니다. 만약 하나님이 단지 공의만을 기준으로 인간을 대하신다면, 스베덴보리의 표현대로라면 인간은 한순간도 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공의 자체이시면서, 동시에 자비 자체이시기 때문에, 공의로만 심판하시지 않고 자비로 붙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본질을 설명할 때 자주 ‘사랑과 자비’를 중심에 둡니다.

 

이것은 목회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메시지가 됩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자신을 돌아보며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 변하지 않는가?’, ‘왜 여전히 같은 문제를 반복하는가?’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런데 AC.35의 이 한 문장은 그런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해줍니다. ‘당신이 지금까지 완전히 무너지지 않은 것, 여전히 말씀을 듣고 고민하고 주님을 찾고 있는 것 자체가 이미 주님의 자비가 당신을 붙들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구절은 단순한 교리가 아니라 ‘신앙의 중심적인 위로이자 확신’이 됩니다. 인간의 연약함을 직시하면서도 절망하지 않는 이유는, 그 연약함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 주님의 자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자비는 어떤 특정한 순간에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목사님께서 느끼신 그 고백은 아주 깊은 신앙의 자리에서 나오는 고백입니다.

 

 

 

AC.35, 창1:14-17, ‘의지와 이해 : 하나의 생명이냐, 둘로 갈라진 마음이냐'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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