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And Lamech took unto him two wives; the name of the one was Adah, and the name of the other Zillah. (4:19)

 

AC.405

가인으로부터 순서상 여섯 번째인 라멕(Lamech) 신앙이 이상 남아 있지 않게 됨으로써 초래된 황폐(vastation) 의미합니다. 그의 아내(two wives) 교회의 출현을 의미합니다. 아다(Adah) 교회의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씰라(Zillah) 교회의 자연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의미합니다. ByLamech,who was the sixth in order from Cain, is signified vastation, in consequence of there being no longer any faith; by histwo wivesis signified the rise of a new church; byAdah,the mother of its celestial and spiritual things; and byZillah,the mother of its natural things.

 

해설

AC.405는 가인에게서 시작된 교리적 분리가 어디에 이르렀으며, 그 이후 어떤 새로운 일이 시작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앞의 AC.399-404에서는 가인이라는 최초의 이단에서 에녹이라는 새로운 이단이 나오고, 그로부터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 전체를 의미하는 성읍이 형성되며, 다시 여러 이단이 계보를 따라 파생된다고 했습니다. 이제 그 계보는 라멕에 이릅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으로부터 순서상 여섯 번째인 라멕이 신앙이 이상 남아 있지 않게 됨으로써 초래된 황폐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처음에는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는 일이었지만, 그 분리가 이어진 끝에는 신앙 자체마저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 이른 것입니다.

 

여기서 황폐(vastation)는 단순히 교회의 외적인 규모가 줄어들거나 제도가 무너지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밝히는 황폐의 원인은 이상 아무런 신앙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라멕은 가인으로 표상되는 교리적 계열이 내적으로 어디까지 쇠퇴했는지를 보여 줍니다. 처음 가인에게서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도 보존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신앙이 훗날 체어리티를 받아들이는 데 쓰일 수 있도록 가인에게 표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라멕에 이르면 그 계열에서 신앙마저 남아 있지 않은 황폐가 나타납니다.

 

이것은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는 일이 왜 심각한지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신앙은 진리를 아는 것만으로 생명을 얻지 않습니다. 진리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에 결합될 때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따라서 체어리티를 신앙에서 계속 밀어내면 처음에는 신앙만이라도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신앙 역시 생명의 근원에서 분리된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라멕의 황폐는 바로 그 분리가 계보를 따라 진행된 결과를 보여 줍니다. 다만 이번 번호는 라멕에게서 신앙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고 말할 뿐, 그 이전의 각 후손에게서 신앙이 어떤 단계로 얼마나 감소했는지까지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스베덴보리는 라멕의 황폐를 말한 직후 그의 아내가 새 교회의 출현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AC.405의 중요한 전환입니다. 가인의 계보에서 신앙이 소멸하는 것과 새 교회가 일어나는 것이 같은 짧은 번호 안에 함께 등장합니다. 따라서 라멕의 두 아내를 단순히 황폐한 교회의 또 다른 특징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들에게서 이전 교회의 쇠퇴와 구별되는 새로운 교회의 시작을 봅니다.

 

두 아내 가운데 아다는 새 교회의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의미합니다. 천적인 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선에, 영적인 것은 그 사랑과 선에 속한 진리와 신앙에 관계됩니다. 그러므로 아다가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의 어머니라는 말은 새 교회 안에서 이러한 내적인 것들이 산출되는 근원적 역할을 표상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어머니는 아다라는 개인에게서 천적이고 영적인 생명이 독립적으로 나온다는 뜻이 아닙니다.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은 주님이시며, 아다는 새 교회의 이러한 것들이 출현하는 과정을 표상하는 이름입니다.

 

다른 아내인 씰라는 새 교회의 자연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의미합니다. 자연적인 것은 인간의 겉 사람에 속하는 생각과 지식, 말과 행동, 일상적인 삶의 차원과 관계됩니다. 교회는 내적인 사랑과 신앙만을 추상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자연적인 삶 가운데 표현되고 실현되는 질서도 필요합니다. 따라서 아다와 씰라가 각각 천적·영적인 것들과 자연적인 것들의 어머니로 구별된다는 사실은 새 교회에 내적인 차원과 자연적인 차원이 함께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 구별을 곧바로 아다는 좋은 교회이고 씰라는 나쁜 교회라는 식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는 두 사람 모두 새 교회의 출현과 관련된다고 말합니다. 아다는 그 교회의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의 어머니이며, 씰라는 그 교회의 자연적인 것들의 어머니입니다. 자연적인 것은 그 자체로 악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자연적인 삶에까지 내려와 표현될 때 교회의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함께 질서를 이룰 수 있습니다. 이후 아다와 씰라에게서 태어나는 자녀들의 의미를 살펴보면 이러한 구별이 더 구체적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새 교회의 출현을 말하면서도 그 교회의 구체적인 성격과 형성 과정을 아직 모두 설명하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AC.405는 라멕의 황폐, 두 아내를 통한 새 교회의 출현, 아다와 씰라가 각각 무엇의 어머니인지만 밝힙니다. 따라서 이 번호만으로 새 교회가 어떤 방식으로 조직되었는지, 이전 교회와 정확히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 그 안의 모든 천적·영적·자연적 상태가 어떠했는지까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어지는 번호들에서 자녀들의 의미가 밝혀질 때 그 구체적인 모습도 차례로 드러날 것입니다.

 

그럼에도 AC.405가 보여 주는 큰 흐름은 분명합니다. 가인으로 시작된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는 라멕에게서 신앙마저 남아 있지 않은 황폐에 이릅니다. 그러나 말씀은 그 황폐에서 이야기를 끝내지 않습니다. 라멕의 두 아내를 통하여 새 교회의 출현을 알리고, 그 교회에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과 자연적인 것들이 나타날 것을 예고합니다. 이전 교회의 소멸과 새로운 교회의 시작이 하나의 계보 안에서 맞닿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섭리를 생각하게 합니다. 인간이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 그 분리를 계속 발전시켜 결국 신앙마저 잃는 상태에 이르더라도, 주님의 교회를 위한 역사가 거기에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번 번호가 새 교회의 출현을 알려 준다는 사실과, 그 출현의 구체적인 과정이 무엇인지는 구별해야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께서 교회의 황폐 이후에도 새로운 것을 일으키시는 섭리의 방향을 볼 수 있지만, 아직 설명되지 않은 세부까지 앞질러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결국 AC.405라멕 아내를 함께 읽어야 하는 번호입니다. 라멕만 보면 가인에게서 시작된 분리의 비극적인 끝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아다와 씰라까지 읽으면 그 끝에서 새 교회의 출현이 시작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다는 그 교회의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의 어머니이며, 씰라는 자연적인 것들의 어머니입니다. 이처럼 말씀은 신앙의 황폐를 말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새로운 교회의 내적·외적 형성을 예고합니다. 인간의 실패가 마지막 말이 아니라, 그 이후에도 계속되는 주님의 섭리가 마지막까지 말씀의 흐름을 이끌고 있는 것입니다. (AC.405 해설)

 

 

 

AC.406, 창4:19, ‘라멕은 왜 신앙의 황폐를 의미하는가? - 사람은 신앙을, 어린아이는 체어리티를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06‘라멕’(Lamech)이 황폐(vastation), 곧 신앙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뒤에 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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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4, 창4:18, ‘가인의 계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 최초의 이단에서 파생된 여러 이단들’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창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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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1 심화

1.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결국 선과 진리를 분별하지 못하게 되는가?

 

체어리티 없는 신앙이 결국 선과 진리를 분별하지 못하게 된다는 스베덴보리의 설명은 처음에는 다소 이상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성경을 많이 알고 교리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설령 그의 삶에 사랑이 부족하더라도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지는 더 잘 분별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지적인 차원에서는 많은 진리를 알고 그것들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AC.379-381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은 단순히 교리 내용을 기억하고 설명할 수 있다는 뜻보다 훨씬 깊습니다.

 

AC.379에서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가 사람을 주님과 결합하게 하는 결속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 단순한 지식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핵심은 진리가 그 자체로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교리를 알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사랑과 선으로 이어지지 않을 때, 그 진리는 사람 안에서 생명을 얻지 못하고 기억과 이해성 안에 머물게 됩니다. 다시 말해 진리를 아는 과 진리가 자기 삶에서 참인 것을 보는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스베덴보리에게서 진리의 목적은 선입니다. 진리는 사람이 무엇이 선인지 알게 하고, 그 선으로 인도하기 위해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진리를 배우면서 실제로 선을 행하고 악을 죄로 여겨 피할 때, 그 진리는 점차 그의 의지와 삶에 결합됩니다. 그때 그는 단순히 이것이 옳다고 배웠다고 말하는 데서 더 나아가 왜 그것이 옳은지를 삶을 통해 알게 됩니다. 반대로 진리를 많이 배우면서도 그것을 자기 삶의 선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진리와 그의 실제 애정 사이에 틈이 생깁니다.

 

이것이 AC.380땅이 다시는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라는 말씀과 연결됩니다. 가인은 계속 을 갈 수 있습니다. 곧 신앙에 관한 지식을 계속 연구하고 배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체어리티가 소멸한 상태에서는 그 땅이 더 이상 결실하지 않습니다. 지식은 늘어날 수 있지만 그것이 선한 삶이라는 열매로 이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 결과를 피하며 유리하는 가 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진리를 전혀 모르는 것이 아니라,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들을 하나의 살아 있는 중심에서 보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이 점은 체어리티가 있으면 교리를 몰라도 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과 체어리티는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신앙의 진리는 무엇을 사랑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며, 체어리티는 그 진리를 살아 있게 합니다. 눈이 있어야 길을 볼 수 있지만 실제로 걸어야 목적지에 이르는 것과 비슷합니다. 보는 것과 걷는 것을 서로 경쟁시키는 것이 잘못인 것처럼,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하나를 제거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을 가진 것 자체가 아니라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 마침내 그것이 체어리티를 지배하게 한 데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라는 말은 교리적 정확성을 가볍게 여기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교리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를 묻는 말입니다. 진리를 연구할수록 주님과 이웃을 더 사랑하고, 자기 악을 더 분명히 보고 그것을 버리며, 실제 쓰임의 삶으로 나아간다면 그 진리는 살아 있는 신앙이 되어 갑니다. 그러나 진리를 연구할수록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만 많아지고 자기의 지적 우월성을 확인하는 데 그친다면, 지식은 증가해도 그 지식이 자라야 할 은 점차 효력을 잃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선과 진리에 대한 영적인 분별은 지식의 양만으로 생기지 않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사랑하고 그 선을 행하려는 삶 안에서 진리는 서로 연결되고 질서를 얻습니다. 체어리티는 진리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살아 움직일 수 있게 하는 생명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 안에 있을 때 사람은 진리를 단지 기억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이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를 보게 됩니다. 이것이 체어리티를 잃은 가인이 마침내 피하며 유리하는 가 되는 이유이며, 동시에 신앙이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AC.381 심화 1)

 

 

 

AC.381, 창4:12,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왜 결실이 없는가?’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창4:12) AC.381‘땅을 가는 것’(till the ground)이 이 분열 또는 이단을 배양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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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11 심화

3. 부정한 짐승의 주검은 만지기만 해도 부정해졌을까?’

 

11에서는 먹지 말라는 명령만큼이나 만지지 말라는 명령이 반복됩니다. 특히 부정한 짐승의 주검을 만지면 저녁까지 부정해지고, 그것을 옮기는 사람은 옷까지 빨아야 했습니다. 먹지도 않았는데 단지 접촉했다는 이유로 왜 부정해졌을까요?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994(9:3)는 이 문제에 직접적인 단서를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기는 이 좋은 의미에서는 선한 애정 안에 있는 자연적 즐거움을 의미하지만, 반대 의미에서는 proprium과 악한 욕망에서 나오는 더러운 즐거움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레11:27, 29-33의 부정한 기는 것들을 직접 언급하면서, 이런 것들이 악한 욕망에서 나오는 더러운 즐거움을 표상했기 때문에 당시 표상교회에서는 그것을 만지는 것까지 부정하게 여겼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접촉입니다. 인간은 어떤 악을 실제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다고 해서 그 악과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악한 욕망이나 거짓을 마음 가까이에 두고 반복해서 바라보고 즐기다 보면 그것이 점차 우리의 애정과 생각에 영향을 줍니다. 처음에는 단지 접촉하는 것처럼 보여도 계속 가까이하면 어느 순간 그것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특히 AC.994가 강조하는 것은 그 안의 즐거움입니다. 악은 언제나 처음부터 무섭고 혐오스러운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재미있고 달콤하고 만족스럽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험담을 듣는 즐거움, 복수하는 장면을 상상하며 느끼는 만족, 음란한 생각의 쾌감, 다른 사람보다 자신이 낫다는 것을 확인할 때의 기쁨도 처음에는 작은 즐거움처럼 다가옵니다. 그러나 그 즐거움 안에 어떤 애정이 들어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원하지 않는 악한 생각이 순간적으로 떠오르거나 유혹을 받는 것 자체가 곧 그 악을 자기 것으로 삼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유혹은 인간의 의지와 관계없이 다가올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받아들여 즐기고 의도하느냐, 아니면 그것이 악임을 알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며 거절하느냐입니다. 악이 문 앞에 오는 것과 문을 열어 안으로 들이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또한 이 말씀을 사람 자체에 적용해서 부정한 사람과 접촉하면 나도 더러워진다고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영적으로 피해야 할 것은 사람이 아니라 악과 거짓입니다. 오히려 체어리티는 어려움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가까이 가면서도 그 사람을 지배하는 악을 악으로 분별할 수 있게 합니다.

 

11에서 부정해진 사람이 영원히 부정한 채 남는 것도 아닙니다. 그는 옷을 빨고 저녁까지 기다린 뒤 다시 정하게 됩니다. 이것은 악과 거짓의 영향이 인간에게 들어올 수 있지만 주님의 진리를 통해 다시 정결하게 될 수 있다는 큰 원리와 잘 어울립니다. 거듭남은 한 번도 더러워지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더러움을 깨닫고 계속 씻김을 받는 삶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레11의 접촉 규정은 인간의 마음이 무엇과 가까이하고 무엇을 즐기는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줍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많은 생각과 욕망과 정보와 영상과 이야기에 접촉합니다. 그 모든 것을 마음 안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것은 접촉하는 순간부터 그것이 내 애정을 어디로 끌고 가는지 살펴야 합니다.

 

거듭남에는 먹지 않는 뿐 아니라 만지지 않는 도 있습니다. 어떤 악은 충분히 경험해 본 뒤 판단하겠다고 가까이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거리를 두는 것이 지혜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분별은 무엇을 사랑하고 받아들일 것인가뿐 아니라 무엇과 마음의 접촉을 끊을 것인가까지 포함합니다. 11만지지 말라는 말씀은 바로 그 마음의 경계까지 거룩하게 하시는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SWC.11 심화 3)

 

 

 

SWC.레11,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거절할 것인가’

SWC.레11,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거절할 것인가’ 1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육지의 모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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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11 심화2, ‘왜 기어 다니는 곤충 중 메뚜기 종류는 먹을 수 있었을까?’

SWC.레11 심화2. ‘왜 기어 다니는 곤충 중 메뚜기 종류는 먹을 수 있었을까?’레11의 음식법 가운데 상당히 뜻밖의 규정이 하나 있습니다. 날개가 있고 네 발로 기어 다니는 곤충은 일반적으로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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