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예언을 전하여 말하되 브올의 아들 발람이 말하며 눈을 감았던 자가 말하며(민24:3)
이 ‘그가 예언을 전하여 말하되 브올의 아들 발람이 말하며 눈을 감았던 자가 말하며’(민24:3)라는 구절을AC.212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창3:7의 ‘그들의 눈이 밝아져’라는 표현이 단순히 육체적 시력의 변화가 아니라 내적 이해와 영적 인식의 열림을 의미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발람은 여기서 자신을 ‘눈을 감았던 자’, 영어 표현으로는 ‘man whose eyes are opened’로 묘사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육체의 눈이 갑자기 뜨였다는 뜻이 아닙니다. 발람은 이미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눈이 밝아져’라는 말은 영적 차원의 어떤 것을 보게 되었다는 뜻이며, 더 정확히는 주어진 계시와 환상을 이해하고 지각할 수 있는 상태에 들어갔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점에 주목합니다. 만일 말씀에서 ‘눈이 열렸다’는 표현이 단순히 육체의 눈을 가리킨다면, 발람의 이 표현은 특별한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해와 인식을 가리킨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발람은 환상을 보았고, 그 환상의 의미를 어느 정도 인식하는 상태에 들어갔기 때문에 자신을 ‘눈이 열린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AC.212에서 발람의 사례는 ‘눈=이해’라는 상응을 증명하는 하나의 중요한 예가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창3:7의 ‘눈이 밝아져’도 같은 방식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봅니다. 아담과 하와가 육체적으로 새로운 시력을 얻은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상태를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의 이해가 작동하여 자신들이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순진무구한 상태에 있지 않음을 인식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발람의 경우에도 ‘눈 열림’이 반드시 높은 영적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발람은 계시를 받았지만, 끝내 참된 의미에서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눈이 열렸다’는 표현 자체의 의미이지, 발람의 영적 수준이 아닙니다. 곧 ‘눈 열림’은 어떤 사물을 이해하고 인식하게 되는 내적 작용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결국AC.212에서 민24:3을 인용하는 이유는 매우 분명합니다. 말씀에서 ‘눈이 열렸다’, ‘눈이 밝아졌다’라는 표현은 반복적으로 ‘이해가 열렸다’, ‘내적 인식이 주어졌다’, ‘어떤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는 뜻으로 사용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창3:7의 ‘눈이 밝아져’ 역시 새로운 지혜를 얻었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들의 영적 상태를 보게 된 내적 자각을 의미한다고 스베덴보리는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발람의 ‘눈을 감았던 자’는AC.211의 ‘interior dictate’, 곧 ‘내적 딕테이트’ 또는 ‘내적 자각’을 이해하는 중요한 실례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les. (창3:7)
AC.212
‘눈이 밝아져’(eyes opened)는 내적 딕테이트(interior dictate)를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의 유사한 표현들로부터 분명합니다. 예를 들어, 발람은 환상들을 본 결과, 자신을 가리켜 ‘눈을 감았던 자’(man whose eyes are opened)라고 합니다(민24:3). That by having the “eyes opened” is signified an interior dictate is evident from similar expressions in the Word, as from what Balaam says of himself, who in consequence of having visions calls himself the “man whose eyes are opened.” (Num. 24:3)
그가 예언을 전하여 말하되 브올의 아들 발람이 말하며 눈을 감았던 자가 말하며(민24:3)
또한 요나단은 꿀을 맛본 후, 그것이 악한 일임을 내적으로 깨닫게 되었을 때, 자신의 ‘눈이 밝아졌다’(eyes saw)고 말하는데, 이는 그가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것을 알게 되었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뜻입니다(삼상14:29). And from Jonathan, who when he tasted of the honeycomb and had a dictate from within that it was evil, said that his “eyes saw,” that is, were enlightened, so that he saw what he knew not. (1 Sam. 14:29)
요나단이 이르되 내 아버지께서 이 땅을 곤란하게 하셨도다 보라 내가 이 꿀 조금을 맛보고도 내 눈이 이렇게 밝아졌거든(삼상14:29)
더욱이 말씀에서 ‘눈’(eyes)은 자주 이해(understanding)를 뜻하며, 따라서 거기서 나오는 내적 딕테이트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시편은Moreover in the Word, the “eyes” are often used to denote the understanding, and thus an interior dictate therefrom, as in David: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시13:3) Lighten mine eyes, lest I sleep the sleep of death (Ps. 13:3),
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눈’(eyes)은 이해를 뜻합니다. 에스겔에서도 이해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켜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have eyes to see, and see not) (겔12:2)라고 말합니다. where “eyes” denote the understanding. So in Ezekiel, speaking of those who are not willing to understand, who “have eyes to see, and see not.” (Ezek. 12:2)
인자야 네가 반역하는 족속 중에 거주하는도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아니하나니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임이라(겔12:2)
이사야서의In Isaiah: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사6:10) Shut their eyes ,lest they see with their eyes (Isa. 6:10),
라는 말씀 역시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도록 영적으로 눈멀게 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또한 모세는 백성에게denotes that they should be made blind, lest they should understand. So Moses said to the people,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신29:4) Jehovah hath not given you a heart to know, and eyes to see,and ears to hear (Deut. 29:4),
고 말하는데,여기서 ‘마음’(heart)은 의지를, ‘눈’(eyes)은 이해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사야서에서는 주님께서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실 것’(he should open the blind eyes) (사42:7)이라 하며, where “heart” denotes the will, and “eyes” denote the understanding. In Isaiah it is said of the Lord, that “he should open the blind eyes.” (Isa. 42:7)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사42:7)
또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볼 것이며’(The eyes of the blind shall see out of thick darkness and out of darkness) (사29:18)라고 말합니다. And in the same prophet: “The eyes of the blind shall see out of thick darkness and out of darkness (Isa. 29:18).”
그날에 못 듣는 사람이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볼 것이며(사29:18)
해설
이 본문은 AC.211의 ‘interior dictate’를 스베덴보리가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보여 주는 매우 중요한 설명입니다. 그는 자신의 해석을 단순한 추측이나 상상으로 제시하지 않고, 말씀 전체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상응의 법칙에 근거하여 설명합니다. 창3:7의 ‘눈이 밝아져’를 이해하려면 먼저 말씀에서 ‘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은 ‘눈 = 이해(understanding)’라는 상응입니다. 자연계에서 눈이 빛을 받아 사물을 보듯이, 영적 차원에서는 이해가 진리의 빛을 받아 사물을 분별합니다. 그래서 말씀에서 눈이 밝아진다는 것은 단순히 시력이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이해가 밝아지고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발람의 경우가 좋은 예입니다. 그는 자신을 ‘눈을 감았던 자’(man whose eyes are opened)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육체의 눈이 갑자기 좋아졌다는 뜻이 아니라, 영적인 것을 볼 수 있는 상태에 들어갔다는 뜻입니다. 요나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꿀을 먹은 뒤 실제로 눈이 번쩍 뜨인 것이 아니라, 정신이 맑아지고 상황을 분별하게 되었다는 의미에서 ‘눈이 밝아졌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예들을 통해 창3:7의 ‘눈이 밝아져’ 역시 같은 방식으로 읽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어떤 새로운 초능력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또한 뱀이 약속한 것처럼 하나님 같은 지혜를 얻은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의 상태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의 눈이 열린 것은 지혜의 획득이 아니라 자기 상태의 인식입니다.
특히 AC.212에서 중요한 것은 ‘눈이 밝아져’와 ‘interior dictate’가 연결된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내적 딕테이트란 어디선가 음성이 들리는 현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해가 빛을 받아 어떤 사실을 즉시 알게 되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그는 발람, 요나단, 다윗, 모세, 이사야, 에스겔의 본문들을 모두 가져와 ‘눈’이 이해를 뜻한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합니다.
결국 AC.212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창3:7에서 ‘눈이 밝아져’는 새로운 지식을 얻었다는 뜻이 아니라, 이해가 아직 남아 있던 퍼셉션의 흔적에 의해 자신들의 실상을 보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처럼 된 것을 본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이전의 순진무구함 가운데 있지 않음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 눈 밝아짐은 영광의 눈 밝아짐이 아니라 자각의 눈 밝아짐이며, 승리의 눈 밝아짐이 아니라 상실의 눈 밝아짐입니다.
또한 이 본문은 말씀 전체에서 ‘눈’이라는 표현을 읽는 중요한 원리를 제공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눈은 단순한 신체 기관이 아니라 진리를 받아들이는 이해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눈먼 자의 눈을 밝히신다’는 말씀은 단순한 육체적 치유를 넘어, 이해를 열어 진리를 보게 하시는 주님의 사역을 의미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AC.212는 단순한 어휘 해설이 아니라, 말씀 전체를 읽는 상응적 해석의 한 모범을 보여 주는 본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interior dictate’는 직역하면‘내적 지시’, ‘내면의 지시’, ‘내적인 일깨움’정도가 됩니다.여기서‘interior’는 단순히 마음속(inner)이라는 뜻보다 더 깊은 차원의‘속 사람에 속한’, ‘내적인’, ‘영적인’이라는 의미를 가지며, ‘dictate’는 누군가가 말을 받아 적게 하는 받아쓰기(dictation)의 어원이지만,스베덴보리 문맥에서는‘안에서 알려 주는 작용’, ‘내적으로 지시하는 것’, ‘직접 깨닫게 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따라서AC.211에서의‘interior dictate’는 어떤 음성이 귀에 들리는 현상을 뜻하지 않습니다.또한 양심의 가책과도 완전히 동일하지 않습니다.오히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남아 있던 지각(perception)의 흔적이 작용하여,자신들의 상태를 즉각적으로 알게 되는 내적 깨달음에 가깝습니다.
예를 들어,누군가에게‘당신이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해주어서 아는 것이 아니라,설명을 듣기 전부터 이미‘아,내가 잘못했구나’하고 안에서 분명히 아는 상태가 있습니다.스베덴보리가 말하는‘interior dictate’는 이런 종류의 직접적인 내적 인식에 더 가깝습니다.
그래서AC.211에서‘그들의 눈이 밝아져’라는 것은 새로운 지식을 얻었다는 뜻이 아니라, ‘interior dictate’,곧 내적 지시에 의해 자신들이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순진무구한 상태에 있지 않고,악 가운데 있음을 알게 되고 인정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번역으로는‘내적 지시’가 가장 무난하고 정확해 보입니다.다만 해설에서는‘내면의 소리’, ‘내적 일깨움’, ‘마음 깊은 곳에서의 자각’, ‘설명 없이도 즉시 알게 되는 내적 인식’등의 표현을 함께 사용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interior dictate’는 소리라기보다 지각이며,음성이라기보다 직접적인 내적 앎에 가까운 개념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전체 저작을 놓고 보면,이 표현은 특히 태고교회의 특징과 잘 어울립니다.그들은 오늘날 사람들처럼 논증과 추론을 통해 진리를 찾는 사람들이 아니라,사랑 안에서 직접 진리를 지각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따라서 그들에게‘interior dictate’란 누군가의 설명이나 설득이 아니라,주님으로부터 오는 빛 안에서 자신의 상태를 곧바로 알게 되는 내적 작용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그래서AC.211의‘interior dictate’는‘내적 지시’이면서 동시에‘지각의 마지막 흔적’이라고도 이해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