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RC.001 | 천주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천주교회만이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참된 교회다’ - 주님의 교회는 역사적 계승에 있는가, 사랑과 신앙의 생명에 있는가?

 

천주교는 자신을 수많은 기독교 교파 가운데 하나로만 이해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맡기신 교회가 역사 속에서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왔으며, 그 교회의 온전한 실재가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과 일치하는 가톨릭교회 안에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여기에는 단순한 교단적 자부심을 넘어서는 신학적 주장이 담겨 있습니다. 곧 교회는 인간들이 신앙생활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 낸 공동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친히 세우신 공동체이며, 사도적 계승과 성사, 교도권과 교회적 일치가 그 본질적인 요소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천주교 신자에게 가톨릭교회에 속한다는 것은 단순히 어느 종교단체에 가입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의 온전한 질서 안에 머물며, 그분께서 맡기신 구원의 수단들에 참여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근본적인 질문이 생깁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참된 교회도 역사적 계승과 제도적 연속성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일까요? 주님께서 어떤 공동체를 당신의 교회로 인정하시는 기준은 사도적 계승과 교회의 외적 일치에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그 공동체 안에서 실제로 살아 있는 사랑과 신앙에 있는 것일까요? 이 질문은 특정 교단의 역사적 정통성을 부정하거나 인정하는 문제를 넘어, 교회의 참된 본질이 무엇인가를 묻는 문제입니다.

 

먼저 천주교의 공식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 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 8항은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유일한 교회가 가톨릭교회 안에 온전히 존속한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사용되는 표현은 ‘존속한다’(subsistit in)라는 말로, 그리스도의 교회가 가톨릭교회 안에 역사적이고 지속적인 실재로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천주교는 이 말이 가톨릭교회 밖에는 아무런 진리나 은총도 없다는 뜻이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른 그리스도교 공동체들 안에도 성화와 진리의 요소들이 존재하며, 세례받은 다른 그리스도인들과도 실제적이지만 불완전한 친교가 존재한다고 인정합니다. 또한 ‘가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836–848항은 모든 인간이 하느님의 구원 계획 안에 있으며, 자기 잘못 없이 그리스도와 교회를 알지 못한 사람에게도 구원의 가능성이 있음을 설명합니다. 따라서 ‘천주교회만이 참된 교회다’라는 명제를 ‘천주교 신자가 아니면 모두 지옥에 간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천주교의 실제 주장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지닌 온전한 신앙과 성사, 교회적 질서가 가톨릭교회 안에 지속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온전한 교회’의 기준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검토해야 합니다.

 

성경은 교회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출발점을 제공합니다. 마태복음 16장 18절에서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천주교는 이 말씀을 베드로에게 주어진 특별한 사도적 직무와 그 후계자의 권위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근거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상응적 해석에서 베드로는 신앙, 특히 주님을 신적 존재로 인정하는 진리를 표상합니다.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AE, 1759) AE.206과 ‘계시록 풀이’(Apocalypse Revealed, AR, 1766) AR.768에서 그는 베드로에게 주어진 열쇠와 반석의 의미를 인간 개인에게 독립적으로 주어진 영적 지배권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앙의 진리와 그 진리를 통하여 주님께서 역사하시는 권능에 연결합니다. 이러한 해석에 따르면 교회의 기초는 베드로라는 한 인간의 지위 자체가 아니라, 베드로가 고백한 주님에 관한 진리에 있습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사도들 가운데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는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 사실을 근거로 주님의 교회 전체에 대한 영적 권위가 특정한 인간 직위에 독점적으로 계승된다고 보는 해석과는 구별됩니다. 교회를 세우시는 분도 주님이시고, 그 교회에 생명을 주시는 분도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 HH.318–328에서 주님의 교회를 훨씬 넓은 시야로 설명합니다. 그는 주님의 자비가 모든 사람에게 미치며, 말씀을 직접 접하거나 주님의 이름을 알지 못한 사람들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특히 HH.328에서는 주님의 교회가 온 지구에 퍼져 있으며, 각자의 종교 안에서 신적인 것, 곧 신성을 인정하고 체어리티(charity)의 선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도 주님의 보편적인 교회에 속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종교가 동일한 진리를 가르치며 모든 종교적 가르침이 똑같이 참되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이 있고 그 말씀을 통하여 주님을 알 수 있는 교회에 특별한 영적 역할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는 그러한 교회를 인체의 심장과 폐에, 다른 종교 안에 있는 사람들을 인체의 여러 기관과 지체에 비유합니다. 심장과 폐가 온몸의 생명 유지에 특별한 쓰임을 담당하듯, 말씀을 가진 교회도 인류 전체의 영적 생명에 특별한 쓰임을 담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비유 때문에 어느 한 기관도 몸 전체를 독점할 수 없습니다. 심장이 중요하다고 해서 손과 발이 몸 밖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며, 폐가 생명 유지에 필수적이라고 해서 다른 모든 기관이 무의미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의 교회는 인간이 설정한 종교적 경계보다 크며, 그 생명은 오직 주님에게서 비롯됩니다.

 

이러한 교회 이해는 ‘새 예루살렘과 그 천적 교리’(The New Jerusalem and Its Heavenly Doctrine, NJHD, 1758) NJHD.241–248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신앙에 의하여 성립하며, 말씀에서 비롯된 교리가 필요하지만, 교리만으로 인간 안에 교회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교리에 따른 삶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교리의 정확성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교리는 인간에게 무엇이 선하고 진리인지를 가르치며,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가도록 인도하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정확한 교리를 알고 있더라도 그것이 이해 속의 지식으로만 머물고 의지와 삶으로 내려가지 않는다면, 그 사람 안에 교회의 참된 생명이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님의 사랑에 관한 교리를 정확하게 설명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악을 행한다면, 그의 이해에는 사랑에 관한 지식이 있을지라도 의지에는 아직 그 사랑이 살아 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교리적 이해에 일정한 부족함이 있더라도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를 따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려는 사람에게는 주님의 생명이 실제로 역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의 본질은 외적 교리 체계와 제도적 연속성 자체에 있지 않고, 주님의 선과 진리가 인간 안에서 결합하여 살아 있는 생명이 되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적 계승과 교회의 역사적 연속성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역사 속에서 말씀을 보존하시고, 신앙의 가르침을 다음 세대로 전하며, 예배와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도록 섭리하셨다는 사실은 중요합니다. 교회의 역사 속에는 말씀을 필사하고 보존한 사람들, 신앙을 가르친 사람들, 이웃을 섬기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돌본 사람들의 수많은 헌신이 있습니다. 이러한 활동은 실제적인 선한 쓰임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교회가 공동체적인 예배와 교육과 봉사를 위하여 일정한 질서와 직무를 갖추는 것은 자연계에서 살아가는 인간에게 필요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외적인 질서를 교회의 영적 생명 자체와 동일시할 때 발생합니다. 교회의 제도는 주님과 인간의 결합을 돕는 수단이지, 주님의 자리를 대신하는 목적이 아닙니다. 사제와 주교와 교황이든, 목사와 장로와 교회의 지도자이든, 그들의 직무는 사람들을 자기 권위에 종속시키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진리와 사랑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존재합니다. 외적인 계승이 아무리 분명하더라도 그 안에서 이웃을 향한 사랑이 사라진다면 계승된 것은 교회의 형식일 뿐, 그 생명이 온전히 보존되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교회의 외적인 모습이 보잘것없더라도 주님의 진리와 사랑이 살아 있다면 그곳에 참된 교회의 생명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교회 이해가 천주교 신자들에게만 던지는 질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천주교 신자가 자신이 사도적 계승을 보존한 교회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영적인 우월감의 근거로 삼을 수 있듯이, 개신교 신자도 자신이 성경 중심의 정통교회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도 자신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깊은 진리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영적인 교만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순간 진리는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수단이 아니라 자신을 높이는 수단으로 변합니다. 스베덴보리가 경계하는 ‘프로프리움’(proprium)은 바로 이러한 종교적인 자기 사랑의 형태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참된 교회에 관한 가르침을 배우는 목적은 어느 공동체가 더 우월한지를 결정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교회가 무엇으로 이루어지는지를 깨닫고, 자신이 그 생명 안에 실제로 참여하고 있는지를 돌아보는 데 있습니다.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목적은 인간에게 종교적 정체성을 부여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도록 인도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천주교의 주장에는 인정해야 할 진리와 다시 검토해야 할 부분이 함께 존재합니다. 교회가 주님의 것이며, 주님께서 역사 속에서 말씀과 예배와 신앙 공동체를 보존하도록 섭리하셨다는 사실은 귀중한 진리입니다. 또한 교회에 질서와 직무가 필요하며, 신앙의 가르침이 세대를 넘어 전해져야 한다는 사실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역사적 계승과 제도적 일치가 그리스도의 교회가 온전히 존재하는 장소를 결정한다는 주장은, 스베덴보리의 영적 교회 이해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참된 교회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인간의 마음과 삶 안에서 실제로 결합하는 곳에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특정 교회가 참된 교리를 많이 보존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 교회의 구성원들이 실제로 참된 신앙의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특정 교회의 제도적 경계 밖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어떤 사람에게 주님의 교회에 속한 영적 생명이 없다고 판단할 수도 없습니다. 교회는 주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사용하시는 거룩한 수단이지만, 주님의 구원하시는 사랑을 독점하는 소유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요한복음 15장 5절에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포도나무로, 제자들을 가지로 말씀하시면서 당신 안에 거하는 사람이 열매를 맺는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여기서 가지의 생명은 어느 가지가 먼저 생겼는지, 어느 가지가 더 높은 위치에 있는지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모든 가지가 동일한 포도나무로부터 생명을 받는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또한 요한복음 13장 35절에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알아보게 하는 표지가 그들 사이의 사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참된 교회가 무엇인지를 판단하는 가장 근본적인 기준을 보여 줍니다. 교회는 주님의 진리를 보존하고 가르쳐야 하지만, 그 진리는 결국 사랑의 생명으로 살아 움직여야 합니다. 교회는 역사를 가지고 있어야 할 뿐 아니라 그 역사 안에서 주님을 증언해야 하며, 질서를 갖추어야 할 뿐 아니라 그 질서를 통하여 이웃을 섬겨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어느 교회가 자신을 참된 교회라고 선언하는가?’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어느 곳에서 주님의 선과 진리가 실제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그 생명이 사람들의 사랑과 삶 속에서 나타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주님의 교회를 이루는 것은 인간이 자랑하는 역사적 이름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 안에 이루어 가시는 살아 있는 사랑과 신앙의 결합이기 때문입니다.

 

‘천주교회만이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참된 교회다’라는 명제에는 교회가 인간이 임의로 만들어 낸 공동체가 아니라 주님께 속하며, 주님께서 역사 속에서 말씀과 예배와 교회 질서를 보존하도록 섭리하신다는 귀중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교회가 지닌 온전한 실재를 사도적 계승과 교황과의 일치라는 특정한 역사적·제도적 구조 안에 독점적으로 위치시키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교회 이해와 일치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을 가진 교회의 특별한 영적 역할을 인정하면서도, 주님의 보편적인 교회가 온 지구에 퍼져 있으며 체어리티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 존재한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오류의 핵심은 교회의 역사와 제도를 존중하는 데 있지 않고, 그 외적인 질서를 참된 교회의 영적 본질과 동일시하거나 그 본질을 특정한 제도의 독점적 소유로 이해하는 데 있습니다. 참된 교회는 주님의 선과 진리가 인간의 의지와 이해 안에 받아들여져 사랑과 신앙의 생명으로 결합하는 곳에 존재합니다. 결국 교회의 참됨은 역사적 계승 자체가 아니라, 그 교회를 통하여 사람들이 주님을 알고 사랑하며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고 있는가에서 드러납니다. (SL.RC.001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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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PR.001 | 개신교인의 무의식 속 오류와 뒤섞인 신앙 100선

 

‘예수님을 영접했으니 나는 구원받았다’ – 영접과 거듭남 사이에서 사라진 것

 

개신교 신앙생활에서 가장 익숙하면서도 가장 강력한 확신 가운데 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으므로 구원받았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처음 나온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때도, 전도집회에서 결신을 요청할 때도,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에게 구원의 확신을 확인할 때도 이 표현은 반복됩니다. 어떤 사람은 수십 년 전 어느 부흥회에서 영접기도를 드렸던 순간을 기억하며 자신의 구원을 확신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날 이후 별다른 내적 변화가 없었더라도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만큼은 의심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주님을 믿고 의지하려는 소중한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영접이라는 한 번의 행위가 그 이후의 삶과 관계없이 영원한 구원을 확정한다는 생각으로 발전할 때,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구원과 거듭남의 관계를 다시 살펴보아야 합니다.

 

먼저 구별해야 할 것은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표현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요1:12는 주님을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문제는 여기서 말하는 ‘영접’을 무엇으로 이해하느냐입니다. 주님을 영접한다는 것이 단지 예수님에 관한 특정한 교리들을 사실로 인정하거나, 정해진 기도문을 따라 말하거나, 어느 순간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는 것만을 의미한다면, 이것은 주님께서 직접 가르치신 영접의 의미를 지나치게 좁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요14:21에서 자신의 계명을 지키는 자가 자신을 사랑하는 자라고 말씀하시고, 23절에서는 자신을 사랑하여 말씀을 지키는 자에게 오셔서 거처를 함께하시겠다고 하십니다. 따라서 주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분을 마음속에 모셔 들였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실제로 그분과 결합해 가는 것을 포함합니다.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는 개신교의 구원 이해에 매우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스베덴보리는 구원하는 신앙이 주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라고 밝히면서, 참된 신앙의 핵심을 올바르게 믿고, 선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주님에 의해 구원받는다는 것으로 설명합니다(TCR.337–342). 또한 신앙은 주님께 나아가 말씀으로부터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갈 때 형성된다고 가르칩니다(TCR.343–348).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님에 의해’라는 표현입니다. 인간이 선하게 살아 자신의 공로로 구원을 획득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을 구원하시는 분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주님이십니다. 다만 인간은 주님의 구원하시는 역사를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그 역사에 협력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사람 안에 들어오시기를 원하시더라도, 사람이 자신의 악을 사랑하고 진리를 거부한다면 주님의 생명이 그 사람 안에서 온전히 활동할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구원은 단순히 인간의 법적 신분이 죄인에서 의인으로 바뀌는 사건이 아닙니다. 구원은 인간의 의지와 이해가 주님에 의해 새로워지고, 사랑의 방향이 바뀌며, 악을 즐거워하던 사람이 점차 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거듭나는 실제적인 변화입니다. 이것은 단번에 완성되지 않습니다. 인간은 처음에는 진리를 배우고 인정하는 단계에 머물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그 진리로 자신의 악을 발견하고, 그것을 죄로 인정하며, 주님께 도움을 구하여 악을 멀리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이 과정에서 주님은 인간에게 새로운 애정과 새로운 생명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확신이 단지 과거에 있었던 영접의 순간에만 의존한다면, 정작 구원의 실질적인 내용인 거듭남은 신앙생활의 주변부로 밀려날 수 있습니다. 이는 ‘새 예루살렘과 그 천적 교리’(New Jerusalem and Its Heavenly Doctrine, NJHD, 1758)에서 교리를 소유하는 것만으로는 교회가 사람 안에 성립하지 않으며, 그 교리에 따른 삶이 있어야 한다고 설명하는 내용과도 연결됩니다(NJHD.243).

 

그렇다면 엡2:8–9의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라는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 말씀은 구원이 인간의 공로나 자랑에서 비롯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선과 진리의 생명이 인간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10절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존재임을 밝힙니다. 은혜와 선행은 서로 경쟁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는 생명의 근원이고, 믿음은 그 생명을 받아들이는 길이며, 선행은 그 생명이 삶에서 나타나는 열매입니다. 더욱 정확히 말하면, 참된 믿음과 체어리티는 주님 안에서 서로 분리될 수 없는 하나를 이룹니다. 스베덴보리는 믿음 없는 체어리티도, 체어리티 없는 믿음도 참된 생명을 갖지 못한다고 설명합니다(TCR.355–361). 따라서 선하게 사는 것을 구원의 조건으로 이해하여 자기 공로를 주장하는 것도 오류이지만, 선하게 사는 문제를 구원과 분리하여 사실상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만드는 것 역시 오류입니다.

 

여기에는 더욱 깊은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이 ‘나는 이미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한 최종 판결처럼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자기 자신을 살피고 회개하는 일에 무감각해질 위험이 있습니다. 물론 구원의 확신을 가진 모든 사람이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참된 확신이 오히려 감사와 순종의 삶을 북돋우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영접의 사실만을 절대화하면, 자신의 지배적인 사랑이 무엇인지, 이웃을 대하는 태도가 어떠한지, 자신의 욕망과 분노와 교만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에 관한 질문이 약해질 수 있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악을 변명하면서도 ‘그래도 나는 예수님을 믿으니 괜찮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인간의 ‘프로프리움’(proprium), 곧 자신을 모든 것의 중심에 놓으려는 성향이 신앙의 언어를 이용할 가능성이 나타납니다. 본래 주님께 자신을 맡기기 위한 믿음이 어느 순간 자기 상태를 보증하는 수단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신앙이 주님을 향하는 대신, 자신이 확보했다고 생각하는 구원의 지위를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마7:21에서 자신을 향하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특정한 신앙고백이 불필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입술의 고백과 실제 삶이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또한 이 말씀을 이용하여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구원을 인간이 최종적으로 판정해서도 안 됩니다. 주님만이 사람의 내면과 지배적인 사랑을 완전하게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펴야 할 것은 ‘저 사람은 영접기도를 했으니 구원받았다’거나 ‘저 사람은 제대로 된 영접기도를 하지 않았으니 구원받지 못했다’는 판정이 아닙니다. 참된 질문은 그 사람이 주님께로 향하고 있는가,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있는가, 그 진리로 악을 멀리하며,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으로 변화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변화마저 사람의 외적 행위 몇 가지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성경은 구원을 단지 한순간의 종교적 선언으로 축소하지 않습니다.

 

결국 ‘예수님을 영접했으니 나는 구원받았다’는 말에서 우리가 보존해야 할 진리는 구원의 근원이 오직 주님이라는 사실이며, 바로잡아야 할 오류는 그분을 한 번 영접했다고 선언하는 것만으로 거듭남의 모든 문제가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단지 인간을 천국에 들여보내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인간을 죄와 악의 지배에서 건져 내어 천국의 생명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으로 새롭게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에서 더욱 중요한 질문은 ‘나는 언제 예수님을 영접했는가?’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나는 오늘도 주님을 영접하고 있는가? 그분의 진리가 내 생각을 바꾸고, 그분의 사랑이 내 의지를 바꾸며, 그분의 생명이 내 삶에서 이웃을 향한 선으로 나타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은 과거의 영접기도 한 번으로 만족하시는 분이 아니라, 오늘도 우리를 찾아오셔서 함께 거하시며 마침내 우리를 당신의 형상과 모양으로 새롭게 하기를 원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영접은 참된 신앙의 시작이 될 수 있지만, 영접의 선언 자체가 거듭남의 완성을 보증하지는 않습니다. 구원은 오직 주님에게서 오며, 인간은 믿음과 체어리티가 결합되는 삶을 통하여 주님의 구원하시는 역사를 받아들입니다.

 

 

 

SL.PR.002, ‘영접기도를 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

SL.PR.002 | 개신교인의 무의식 속 교리화된 오류 100선 ‘영접기도를 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 ‘영접기도를 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 - 주님께 나아가는 길을 하나의 기도문에 가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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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종을 대적하면 벌받아’

 

‘하나님의 사람을 대적하면 결국 벌받아.’ 교회 안에서 종종 듣는 말입니다. 목회자나 선교사, 영적 지도자에게 심각한 비판을 제기하면 ‘주의 종을 함부로 대하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람에게 대적하다가 잘된 사람이 없다’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성경에도 모세를 대적한 고라 일당이 심판을 받고(민16), 미리암이 모세를 비방한 뒤 나병에 걸리며(민12), 엘리사를 조롱한 아이들이 큰 화를 당하는 장면이 나옵니다(왕하2:23-24). 이런 본문들을 읽으면 ‘하나님의 사람을 건드리면 하나님께서 직접 벌하신다’는 생각이 생기는 것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분명 붙들어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맡기신 선한 일을 악의적으로 방해하고, 거짓으로 사람을 모함하며, 진리를 미워하여 그것을 전하는 사람을 박해하는 것은 가벼운 일이 아닙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호칭 자체에 일종의 영적 면책특권을 부여할 때 생깁니다. ‘저 사람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람이니 그의 말과 행동을 비판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한 인간에게 주님의 권위를 거의 그대로 옮겨 놓게 됩니다.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맡은 사람이라고 해서 그의 모든 판단과 행동이 자동으로 하나님의 뜻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함부로 죽이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였지만(삼상24:6), 그렇다고 사울의 모든 행동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실제로 다윗을 죽이려 했고, 자신의 왕권을 지키기 위해 잘못된 행동을 거듭했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죽여 자신의 손으로 왕위를 차지하지는 않았지만, 사울의 악한 행동에 순종하지도 않았습니다. 존중과 복종은 같은 말이 아니며, 직분을 존중하는 것과 그 직분자의 모든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도 같은 말이 아닙니다. 더 분명한 사례는 바울과 베드로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직접 사도로 세우신 사람이었지만, 안디옥에서 이방인들과 함께 먹다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물러났을 때, 바울은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고 말합니다(갈2:11). 만일 ‘하나님의 사람을 비판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라는 공식이 옳다면 바울은 사도 베드로를 책망해서는 안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오히려 이 사건을 기록하여 하나님의 사람도 잘못할 수 있고, 그 잘못은 진리에 따라 바로잡혀야 함을 보여 줍니다.

 

구약의 선지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왕에게 순종만 하지 않았습니다. 나단은 다윗에게 ‘당신이 그 사람이라’고 말하며 그의 죄를 직면하게 했고(삼하12:7), 엘리야는 아합의 악을 책망했습니다. 하나님의 권위 아래 있는 사람일수록 오히려 하나님의 진리 아래 있어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고라가 모세를 대적한 사건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고라 사건의 핵심을 단순히 ‘하나님의 지도자를 비판했다’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고라와 그 무리는 모세의 개인적인 실수를 지적하거나 책임 있는 질문을 제기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세우신 질서에 맞서 자기들의 권력과 지위를 요구하며 반역했습니다. 따라서 이 사건을 오늘날 ‘목회자를 비판하면 고라처럼 심판받는다’는 식으로 곧바로 적용하는 것은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모세의 지위와 현대 교회의 목회자 직분을 아무 설명 없이 동일시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습니다. 민12의 미리암과 아론 사건 역시 단순히 모세와 의견이 달랐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고 하며(민12:2) 모세에게 주어진 고유한 사명을 시기하고 자기들의 위치를 높이려 했습니다. 본문은 이어서 모세가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고 기록합니다(민12:3). 이것은 자기 권위를 지키기 위해 ‘나를 건드리면 하나님께 벌받는다’고 위협하는 지도자의 모습과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람을 대적하는 것’과 ‘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그 사람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과 ‘주님을 대적하는 것’도 같은 일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진리를 미워하기 때문에 선한 사역자를 거짓으로 모함하고 악의적으로 방해한다면 그것은 분명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목회자의 잘못된 가르침을 성경에 비추어 질문하거나, 재정 비리를 지적하거나, 권력 남용과 부당한 행동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까지 ‘하나님의 사람을 대적하는 일’이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특히 ‘나를 대적하면 하나님께서 가만두지 않으신다’, ‘나를 떠난 사람들은 결국 잘되지 않았다’, ‘주의 종에게 손대면 자녀에게까지 화가 간다’는 식의 말을 지도자 자신이 사용한다면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을 자기 권위를 지켜 주는 보복자로 만들고, 사람으로 하여금 주님보다 목회자를 두려워하게 할 위험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문제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모든 참된 권위는 ‘선’(good)과 ‘진리’(truth)를 섬기기 위한 권위입니다. 직분 그 자체가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라는 직함, 안수, 교회의 규모, 오랜 사역 경력, 많은 추종자가 그 사람의 모든 말을 주님의 말씀으로 바꾸어 주지 않습니다. 직분은 선과 진리를 섬기도록 맡겨진 ‘쓰임’(use)이며, 그 권위 역시 그 쓰임을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영적 지도자에게 중요한 질문은 ‘사람들이 나에게 얼마나 순종하는가?’가 아니라 ‘나는 주님의 선과 진리를 얼마나 충실하게 섬기고 있는가?’입니다. 성도에게 중요한 질문도 ‘저 사람은 유명한 하나님의 사람이니까 무조건 따라야 하는가?’가 아니라 ‘그가 말하고 행하는 것이 주님의 선과 진리에 합당한가?’입니다. 사람을 중심에 놓으면 신앙은 인물 숭배로 흐르기 쉽지만, 선과 진리를 중심에 놓으면 지도자와 성도 모두 주님 아래 서게 됩니다.

 

여기에서 ‘프로프리움’(proprium)은 특별히 위험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종교적 권위를 가진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직분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기 쉽습니다. ‘주님께서 이 사역을 맡기셨다’는 고백이 어느 순간 ‘그러므로 나를 반대하는 것은 주님을 반대하는 것이다’로 변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자신의 판단과 주님의 뜻 사이의 경계가 흐려집니다. 종교적 프로프리움은 자신의 욕망과 권위를 ‘하나님의 뜻’이라는 이름으로 보호할 수 있다는 점에서 특히 위험합니다. 그러나 반대편에도 같은 문제가 있습니다. ‘목회자도 사람인데 뭐’라며 하나님께서 맡기신 직분과 선한 사역 자체를 가볍게 여기거나,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선한 사역을 무너뜨리려 하거나, 진리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그것을 전하는 사람을 공격하는 것도 악입니다. 비판하는 사람 역시 ‘나는 정말 진리를 위해 이 말을 하는가, 아니면 그 사람이 싫어서 공격하고 싶은 것인가?’를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지도자도 비판자도 자신의 프로프리움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 양쪽 모두 누가 더 높은 위치에 있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참된가를 기준으로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누군가가 주님의 선한 일을 악의적으로 대적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악에는 결과가 있습니다. 거짓을 사랑하면 거짓이 그 사람의 내면을 형성하고, 미움과 지배욕을 반복해서 선택하면 그것이 점점 그의 ‘지배적 사랑’(ruling love)이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이것이 훨씬 더 깊은 의미의 ‘벌’입니다. 하나님께서 화가 나서 밖에서 보복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유롭게 선택하고 사랑한 악이 결국 그 자신의 생명과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을 대적했으니 하나님께서 사업을 망하게 하셨다’, ‘목회자를 비판했더니 병에 걸렸다’, ‘주의 종을 떠났더니 집안에 문제가 생겼다’는 식으로 사건을 연결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그런 인과관계를 알 수 없습니다. 자연계의 불행을 하나님의 보복으로 해석하는 것은 신적 섭리의 원리와도 맞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오히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5:44). 주님께서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주님의 종을 비판한 사람에게 병과 실패를 보내어 보복하시는 분으로 주님을 이해한다면 주님 자신이 가르치신 사랑과 충돌하게 됩니다.

 

스데반과 사울의 이야기는 이 점을 아주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참여한 사울은 실제로 주님의 사람을 대적했습니다. 그가 한 일은 분명 악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사울에게 즉시 보복하여 멸망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다메섹 길에서 그를 만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고 물으셨고(행9:4), 그를 돌이켜 훗날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사용하셨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목적이 보복이 아니라 구원임을 보여 줍니다. 여기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네가 어찌하여 내 사람들을 박해하느냐’가 아니라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고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스데반과 성도들을 향한 박해가 주님을 향한 박해가 된 것은 그들이 특별한 신분의 ‘주의 종’이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진리 때문에 박해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심은 사람의 지위가 아니라 그 사람 안에서 역사하는 주님의 선과 진리였습니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부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호칭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실제로 주님의 선과 진리를 섬기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대하는 우리 역시 그 사람의 인격이나 지위보다 그를 통해 나타나는 선과 진리를 존중해야 합니다. 동시에 그가 선과 진리에서 벗어날 때에는 사람을 우상화하지 않고, 그것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사람을 대적하면 결국 벌받는다’는 말은 그대로 공식으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진리를 미워하여 선한 사람을 박해하는 것은 분명 심각한 악이며 그 악은 인간의 내면에 결과를 남깁니다. 그러나 어떤 종교 지도자에게 반대하거나 그의 잘못을 지적했다는 이유만으로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자연적인 불행을 보내신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주님께서 맡기신 선과 진리를 악의적으로 대적하는 것은 영적으로 심각한 일이지만, 어떤 “하나님의 사람”에게 반대했다는 이유만으로 주님께서 보복하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조금 더 깊이 압축하면 이것이겠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사람을 건드려 벌받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보느라 그 사람 안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선과 진리를 거부하거나, 반대로 사람을 주님과 동일시하여 그의 잘못까지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목회자와 영적 지도자에게 가장 안전한 자리는 ‘나를 대적하지 말라’고 말하는 자리가 아니라 자신 역시 언제나 주님의 선과 진리 아래 있음을 기억하는 자리입니다. 성도에게 가장 안전한 자리 역시 지도자를 무조건 따르거나 무조건 의심하는 자리가 아니라, 사람을 존중하되 주님께 속한 선과 진리를 기준으로 분별하는 자리입니다.

 

사람은 틀릴 수 있습니다. 직분자도 틀릴 수 있고, 비판하는 사람도 틀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선과 진리는 사람보다 높습니다. 그래서 결국 질문은 ‘누가 하나님의 사람인가?’에서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지금 나는 사람의 편을 들고 있는가, 아니면 주님의 선과 진리를 따르고 있는가?’ 그 질문 앞에서는 목회자도 성도도 함께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SL.29, ‘하나님께 맡겼으니 이제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거야’

‘하나님께 맡겼으니 이제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거야’ ‘하나님께 맡겼으니 이제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거야.’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참 많이 하는 말입니다. 걱정하던 문제를 놓고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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