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련과 앞이 캄캄함은 다 내가 자초하는 것 (2025/10/23)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창3:19)
홍수 직전까지 존재했던, 지금 여기 다루고 있는 이 태고교회의 마지막 후손은, 신앙의 진리라는 게 무엇이며, 주님이라는 분은 뉘신지, 그리고 그분이 오셔서 자신들을 구원하신다는 말 같은 거 듣기를 더 이상 내켜 하지 않을 정도로, 감각적인 일과 몸에 관한 일에 너무도 철저히 잃어버린 상태, 잠긴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런 주제들이 언급될 때마다, 그들은 듣기 싫어 외면했습니다.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eating bread in the sweat of the face)는 바로 이런 혐오를 말합니다. 그래서 또한 유대인들은 천적인 것들의 존재를 인정하는 대신 오직 세속적 메시아만을 원하는 그런 캐릭터들이 되어버렸고, 그 결과 그들은 만나를 보고 혐오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만나는 주님의 표상이었는데, 그들은 이것을 ‘하찮은 음식’(vile bread)이라 하였고, 그 결과 그들은 자신들한테 불 뱀(fiery serpents)을 불러들이는 상황을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민21:5, 6)
5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6여호와께서 불 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민21:5, 6)
더욱 놀라운 사실은, 천적인 것들을 가리켜 그들이 울면서, ‘역경의 빵’(bread of adversity), ‘비참의 빵’(bread of misery), ‘눈물의 빵’(bread of tears)이라고 했을 때, 실제로 천적인 것들은 역경과 비참이라는 상태로 그들에게 전달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앞의 구절에서, 혐오하면서 받은 것을 가리켜,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bread of the sweat of the face)이라 하고 있습니다. (AC.276)
다음 말씀,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민14:28)가 생각납니다.
26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7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에게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28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29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중에서 이십 세 이상으로서 계수된 자 곧 나를 원망한 자 전부가 30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민14:26-30)
이런 말씀들도 있습니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사59:2)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창3:8)
주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이신 주님은 그 신적 본성상 누구를 미워하며 벌주고, 원망하고 저주하실 수 없으십니다. 보복하여 죽이고 지옥에 처넣으실 수가 없으신 분입니다. 그럼에도 말씀을 읽는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오해할 수 있게 기록하신 이유는, 선악 간 모든 일에, 그리고 세상만사 길흉화복 모든 일에 오직 주님만이 다스리시는 줄을 사람들로 하여금 알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은 우리가 자초하는 것입니다. 모든 복과 화는 주님의 나라, 이 세상 질서와 법칙에 따라 자동적으로, 그러니까 시스템적으로 작동하는 것일 뿐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여 끝까지, 그러니까 어떠한 상황과 환경 속에서도 주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래야 결국 모든 것이 합력하여 주님의 선을 이루게 됩니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사실은 비록 우리가 자초하는 것이라는 이런 실상에도 불구하고 그런 우리의 실수와 어리석음들을 주님은 우리를 성장, 성숙, 거듭나게 하시는 일련의 재료로, 도구로 삼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너무나 완악하고 완강하여 이마저도 끝까지 거부한다면 뭐 주님도 어쩔 수 없으시지만 말입니다.
'즐겨찾기 > 블로그'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세 종류의 사람들 (0) | 2025.10.27 |
|---|---|
| 인생을 결정짓는 두 가지 태도 (0) | 2025.10.24 |
| 인간은 언제 사람이 되고 언제 들짐승이 되는가 (0) | 2025.10.22 |
| 창2 여자와 창3 여자는 다른 여자 (0) | 2025.10.21 |
| AI와 뱀(창3) (0) | 2025.10.20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