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이라는 기간은, 사람의 거듭남 전 과정 가운데 연이어 일어나는 수많은 상태를 말하는데, 보통은 다음과 같습니다.The six days, or periods, which are so many successive states of the regeneration of man, are in general as follows.
해설
이 6번 글은 창1 전체의 ‘제목’과도 같습니다.
6일, 혹은 기간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6일’은 역사적 6일이 아니라, 사람이 거듭나는 과정의 ‘여섯 영적 상태’를 뜻합니다. 즉, 첫째 날은 빛의 상태, 둘째 날은 내적, 외적 진리의 분리, 셋째 날은 선의 첫 발아, 넷째 날은 사랑과 진리의 광명화, 다섯째 날은 진리의 번성, 여섯째 날은 선의 성숙과 주님 형상의 회복, 그리고 일곱째 날은 ‘안식’, 즉 ‘평화의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day’는 ‘state’라는 해석을 성경 전체의 상징 체계에 비추어 고정 원리로 잡습니다. (AC.23, 487 등)
연이어 일어나는 수많은 상태
거듭남은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논리적, 영적 순서에 따라 단계가 차례로 전개되는 것’임을 의미합니다. 기독교 전통에서는 ‘중생’(거듭남)을 단번에 일어나는 사건으로 말하는 경우가 많으나,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영적 영향은 깨달음 → 분별 → 순종 → 체어리티 → 지혜 → 사랑의 실천과 같은 ‘점진적 질서’를 따른다고 말합니다. 즉 거듭남은 ‘과정’(process)이지 ‘순간’(event)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영접기도 한 번으로 사람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사람의 거듭남
여기서 ‘사람’(man)은 단수형이지만, ‘각 개인의 영적 재창조’를 말합니다. 창1은 우주의 물리적 창조가 아니라 ‘사람의 영 안에서 일어나는 내적 생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AC 전체의 대전제인 서문(AC.1–5)에서 이미 선언한 후, 이 글에서 본격적으로 그 구조를 제시합니다.
보통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글은 창1의 모든 단계를 ‘요약’으로 전개하는 ‘목차’ 역할을 하고, AC.7부터 13까지는 각 날(상태)을 다시 자세히 풀어 주는 ‘설명’입니다. 즉 이 AC.6은 ‘지도’, AC.7-13은 ‘현장 설명’입니다.
이 글은 스베덴보리가 ‘아르카나’(arcana)를 열기 시작하는 첫 번째 ‘구조 잡기’ 문장입니다. 그는 AC.1-5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창1은 영적 의미를 담고 있다. 문자 그대로만 읽으면 아무 것도 모른다. 내가 천사들과의 교통 속에서 본 아르카나를 열겠다. 그리고 이 AC.6에서, 그 아르카나의 첫 구조인 ‘6일은 거듭남의 여섯 상태’라는 비의를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6번 글은 창1을 읽는 ‘해석 키’(key)이며, ‘거듭남의 순서’(order of regeneration)라는 스베덴보리 전체 신학의 기초가 됩니다. 창1 해석 전체의 ‘문지방’(parapet)이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이 모든 말이 사실이라는 것은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미리 말씀드릴 것은,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저는 이제 수년 동안 끊임없이, 그리고 중단됨 없이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지내게 되어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또 제가 그들에게 말을 할 수 있는, 그런 은혜를 입었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하여 저는, 지금까지 어떤 인간에게도 알려진 적이 없고, 그의 관념 속에조차 들어온 적이 없는, 다른 삶, 곧 사후세계의 놀라운 것들을 듣고 보게 된 것입니다. 저는 여러 종류의 영들에 관하여, 죽음 이후 영혼의 상태에 관하여, 지옥 곧 불신앙 가운데 있는 자들의 비참한 상태에 관하여, 천국 곧 신앙 안에 있는 자들의 복된 상태에 관하여, 그리고 특히 온 하늘에서 인정되고 있는 신앙의 교리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주제들에 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이어지는 페이지들에서 더 말할 것입니다.That this is really the case no one can possibly know except from the Lord. It may therefore be stated in advance that of the Lord’s Divine mercy it has been granted me now for some years to be constantly and uninterruptedly in company with spirits and angels, hearing them speak and in turn speaking with them. In this way it has been given me to hear and see wonderful things in the other life which have never before come to the knowledge of any man, nor into his idea. I have been instructed in regard to the different kinds of spirits; the state of souls after death; hell, or the lamentable state of the unfaithful; heaven, or the blessed state of the faithful; and especially in regard to the doctrine of faith which is acknowledged in the universal heaven; on which subjects, of the Lord’s Divine mercy, more will be said in the following pages.
해설
이 5번 글은 스베덴보리의 권위, 즉 ‘그가 어떻게 이런 천적, 영적 지식을 얻게 되었는가?’에 관한 자기 증언 부분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모든 신학 저술은 이 선언 없이는 이해 불가능합니다.
이 모든 말이 사실이라는 것은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 그러니까 속뜻은 ‘자기 이성이나 추론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입니다. 내적 의미는 ‘영계의 빛에서만 인식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적 의미는 학문, 추측, 철학의 결과물이 아니라 ‘주님이 직접 열어주신 계시’라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입장입니다.
저는 이제 수년 동안 끊임없이, 그리고 중단됨 없이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지내게 되어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또 제가 그들에게 말을 할 수 있는
이 표현은 매우 중요한데요, 그가 일시적 환상이 아니라 반복적이고 지속적이며, 주님의 허락 아래 ‘일상적 상태로 영계를 보았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단발적 환상이나 신비 체험 수준이 아니라, ‘의식이 두 세계 사이에서 동시에 깨어 있는 상태’(dual consciousness)에 가까운 것으로 설명됩니다. AC와 TCR, HH 등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모든 영계 묘사는 이 ‘일상화된 시야’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지금까지 어떤 인간에게도 알려진 적이 없고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경험한 영계의 내용이 사도 시대 이후, 1700년대까지 어느 누구도 알지 못했던 것들이라고 주장합니다. 그가 본 핵심은 다음과 같습니다. ‘영들의 종류와 특성’, ‘죽음 이후 영혼의 상태’, ‘지옥의 본질과 그 비참함’, ‘천국의 본질과 그 복됨’, 그리고 ‘온 하늘에서 인정되는 신앙의 교리’ 등, 이 중 마지막 항목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가 AC 전체에서 전개하려는 것은 결국 ‘천국 전체가 동일하게 인정하는 참된 신앙의 교리’, 그러니까 ‘영적 의미에 기초한 보편적 교리’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권위가 어디서 오는가?
그의 말은 “나는 천사를 보았다” 수준이 아니라, “나는 수년 동안 영계에서 살았다. 그 경험으로 말씀이 보인 것이다”라는 이 선언입니다. 따라서 AC 전체의 출발점은 “내적 의미는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주님이 영계를 열어 보여 주신 것, 주님이 직접 가르치신 계시이다”라는 이 기초 위에 놓여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영계와의 지속적 교통을 통해 천국과 지옥, 영혼의 상태, 그리고 온 하늘에서 인정되는 신앙의 교리를 직접 배웠다고 말한다. 내적 의미는 이 체험으로부터 드러난 것이다.
마음이 문자적 의미에만 붙어 있는 동안에는, 그 안에 이런 내용들이 들어 있다는 것을 그 어떤 사람도 볼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의 첫 장들에서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해야 세상의 창조, 낙원이라고 하는 에덴동산, 그리고 처음 창조된 사람이라는 아담에 관한 이야기뿐입니다. 누가 그 이상의 무언가를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뒤따르는 페이지들에서 충분히 입증될 텐데요, 곧, 이 내용들 안에는 지금까지 결코 드러난 적이 없는 비밀들(arcana)이 들어 있으며, 실상 창세기 1장은 그 속뜻으로는 일반적으로 사람의 새로운 창조, 즉 그의 거듭남에 관한 것을, 구체적으로는 ‘태고교회’(the Most Ancient Church)에 관한 것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방식은, 그 장의 가장 작은 표현 하나까지도 이런 내용들을 표상하고 의미하며, 그 속에 품고 있을 정도라는 사실입니다.While the mind cleaves to the literal sense alone, no one can possibly see that such things are contained within it. Thus in these first chapters of Genesis, nothing is discoverable from the sense of the letter other than that the creation of the world is treated of, and the garden of Eden which is called paradise, and Adam as the first created man. Who supposes anything else? But it will be sufficiently established in the following pages that these matters contain arcana which have never yet been revealed; and in fact that the first chapter of Genesis in the internal sense treats in general of the new creation of man, or of his regeneration, and specifically of the most ancient church; and this in such a manner that there is not the least expression which does not represent, signify, and enfold within it these things.
해설
이 4번 글은 스베덴보리의 창세기 주석 전체를 여는 ‘정문’(正門)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다음은 그의 성경 해석이 어떤 원리를 기반으로 하는지에 관한 설명입니다.
마음이 문자적 의미에만 붙어 있는 동안에는, 그 안에 이런 내용들이 들어 있다는 것을 그 어떤 사람도 볼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아주 현실적인 얘기를 합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은, 성경을 문자 그대로, 혹은 역사, 지리, 윤리적 관점에서만 읽는데, 그러면 당연히 그 속뜻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씀 자체가 감추어져 있어서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 한 층위에만 붙어 있어서 발생하는 제한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고 할까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데, 그러질 못해서라는 것입니다. 말씀은 본래 이중 구조를 갖지만, 사람의 관점이 외적 수준에 고정되어 있으면, 내적 의미, 곧 속뜻은 결코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창세기의 첫 장들에서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해야
창세기 처음 장들에서 문자적으로 보이는 것들, 즉 겉 글자로 읽을 수 있는 것들은 천지창조라든지 에덴동산, 아담과 하와, 뱀의 범죄, 가인과 아벨, 그리고 노아의 홍수 같은 것밖에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누가 문자 이상의 무언가를 상상이라도 하겠는가?” 즉, 겉으로 보이는 내용이 너무 평이하기 때문에, 내적 의미를 떠올리기조차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 내용들 안에는 지금까지 결코 드러난 적이 없는 비밀들이 들어 있으며
스베덴보리는 이 부분에서 대단히 강한 어조를 씁니다. ‘have never yet been revealed’(지금까지 결코 드러난 적이 없는 비밀들)이라고 말이지요. 그가 하려는 말은 거기에는 어떤 단순한 심리적 삶의 교훈 정도가 아닌, 천국의 교회, 인간의 거듭남, 천적 질서에 관한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의미가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은 그 속뜻으로는 일반적으로 사람의 새로운 창조, 즉 그의 거듭남에 관한 것을
성경의 첫 성경, 그 성경의 처음 장인 창세기 1장은 겉으로는 모두가 ‘천지창조’를 다룬 장으로 알고 있지만, 속으로는 한 사람의 영혼이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새 창조’, 곧 ‘거듭남’(regeneration)이라는, 그러니까 아무도 이런 식으로는 꿈에도 생각한 적이 없었던, 그런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AC 전편이 풀어내는 내용입니다. 창세기 1장 전체와 2장 첫 부분에서 처음 6일간의 창조는 거듭남의 여섯 단계를, 그리고 일곱째 날 안식일은 ‘새 사람’, 곧 ‘천적 인간’을 상징합니다.
구체적으로는 ‘태고교회’(the Most Ancient Church)에 관한 것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창1–11장은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문자적으로는 창조의 역사, 족보이지만, 내적 의미로는 태고교회와 그 후손들의 영적 상태이며, 더 깊은 내적 의미로는 인간 영혼의 생성과 타락의 과정입니다. 따라서 창1의 ‘빛이 있으라’는 물리적 빛이 아니라, 주님으로 말미암는 첫 영적 지각의 탄생, 곧 인간의 거듭남 첫 움직임, 더 나아가 태고교회의 첫 형성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방식은, 그 장의 가장 작은 표현 하나까지도
스베덴보리는 아주 과감한 말을 합니다. ‘there is not the least expression 아주 작은 표현 하나도... which does not represent, signify, and enfold 표상하고, 의미하고, 그 안에 품지 않는 것이 없다.’라고 말입니다. 이는 곧, 성경의 모든 단어, 구절, 순서가 신적 질서로 짜여 있다는 선언입니다.
여기서 잠깐, 위 본문에 나오는 ‘arcana’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아 잠시 머물겠습니다.
‘arcana’(아르카나)는 라틴어 복수형이며, 단수형은 ‘arcanum’입니다. 뜻은 ‘비밀’, ‘숨겨진 것’, ‘은밀한 것’, 즉 ‘비의’(秘義)입니다. 영어 성경 번역에서는 종종 ‘mystery’(신비)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스베덴보리 신학에서 이 arcana는 단순한 신비나 비밀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arcana의 특별한 의미
성경(말씀)의 문자 아래 감춰진 ‘내적 의미’, 즉, 말씀의 ‘속뜻’, ‘심중의 뜻’, ‘천국적 의미’입니다. 성경은 문자만 읽으면 이해되지 않지만, 그 이면에는 주님과 천국, 인간의 영적 삶에 관한 ‘엄청난 진리들이 감춰져 있다’고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이 감춰진 진리들이 바로 ‘arcana’입니다.
천사들이 이해하는 방식으로 열린 말씀의 의미
천사들은 성경을 문자로 읽지 않고, ‘상징, 표상’(symbol, representative)으로 된 ‘영적, 천적 의미’로 읽습니다. 스베덴보리가 그들과 직접 교통하며 듣고 본 내용이 바로 ‘천국의 아르카나’, 곧 이 책의 제목인 ‘Arcana Coelestia’(天界秘義)입니다.
주님의 섭리와 인간 내면의 작용에 관한 보이지 않는 질서
예를 들면, 영계의 구조, 악과 거짓이 인간 내면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천사와 영들의 실제 상태, 말씀 구절의 영적 관계, 사람의 거듭남에 일어나는 내적 변화들 같은 이런 모든 ‘눈에 보이지 않는 질서’가 통틀어 ‘arcana’입니다.